詩는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생명력 있는 시를 쓰려면 (신경림 ,문학 회고록)
3. 시는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주어야
사실 시라는 건 뭡니까? 예술 아닙니까? 말이라는 것을 소재로 한 것, 그림이라는 것이 색하고 선을 제재로 한다면 음악이라는 것이 음하고 리듬이라는 것을 율하고 격을 제재로 한다면, 문학이라는 건 말을 제재로 하고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일단 첫번째로 읽는 사람들한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읽는 재미가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뜻을 담고 있어도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괜찮다는 얘기지요. 다른 말로 하면 독자들한테 즐거움을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에 걸쳐 풍미한 프롤레타리아 시가 있지 않습니까. 프로문학파 시인들이 가졌던 생각은 참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시인들처럼 민족 해방에 대해서 그렇게 치열하고 또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들 가운데서 많지 않습니다. 당시 일제 시대에 민족주의에 앞서서 독립을 쟁취하고 평등을 이룩할 수 있는 수단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프롤레타리아 시, 즉 카프 시들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가 읽을 만한 게 몇 편이나 됩니까. 실제로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마 「현해탄」「3월이 온다」를 쓴 임화, 권환, 월북하여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사한 이찬, 김상훈, 박세영 등 몇몇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시는 말로 된 예술이라는 인식이 모자라지 않았던가 생각합니다.
시는 예술이니까 예술이 갖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이 있어야지, 그것이 없으면,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옳은 것, 이것을 나만 열심히 하면 훌륭한 시가 되고, 누군가 언젠가는 다 읽어줄 것이다.'
따위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말에 대한 인식이 좀 모자랐다는 거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사람에 대한 시가 기억되지 않는 대신, 오늘날까지 그 행적을 두고 말이 많은 서정주의 시는 여러분들이 좋아하지 않습니까.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의 「문둥이」 전문
이 시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 시를 읽으면 뭔가 와 닿는 것이 있고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그맨이 떠들어서 주는 즐거움하고 예술로서의 시가 주는 즐거움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탓으로 카프 시 가운데 오늘날 지금 문학사에 남은 시가 많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7, 80년대에는 적지 않았습니다.
7, 80년대 민중시 중에는 좋은 시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예술 인식, 말에 대한 인식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코 좋은 시로 남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고 싶은 말을 시로써 잘하는 사람이 좋은 시인이라고 했던 워드워즈의 말처럼, 말을 잘하는가 못하는가가 시를 판가름한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말을 잘 다루는 사람입니다. 렝보, 말라르메와 함께 20세기 초에 프랑스 상징주의를 주도한 바 있는 드가의 에피소드를 빌리죠.
"내 머리 속에는 시가 가득한데 왜 시가 안 써지는지 모르겠어?" 하고 드가가 묻자, 말라르메가 말하기를 "시는 언어를 가지고 쓰는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시는 성적순이 아니며,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이 잘 쓰는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말에 대한 인식이 모자라서, 이삼십 년대 프로문학이 우리 문학사에서 보잘것없는 대접을 받게 되었고, 7, 80년대의 민중시에도 일부 그런 경향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저도 민중시 계열 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좋은 내용의 시를 썼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로써 좋은 시가 되지 않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이상 힘있고 좋은 살아 있는 말을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죽 시를 써왔습니다. 제가 시를 쓰는 신조 중의 으뜸은 '말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바로 시의 생명력이 되는 것이므로, 생명력 있는 말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어 쓰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생활 체험도 말에 의해서 다시 체험될 때에만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원칙하에서 시를 써왔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사유가 아니라 직관에서 쓴다고 합니다. 체 게바라 전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칸트의 얘기를 빌어 '개념은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고 되어 있더군요. 이것은 칸트가 예술 이야기를 하면서 한 얘기죠. 예술이라는 것은 사유나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직관에 의해서 더 많이 좌우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념 즉, 이데올로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지요.
이 말처럼 시에서는 직관이 아주 중요하지만, 직관의 배경에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와 다름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다른 말로 옮기면 '시적 지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어느 길이 옳은 길인가 생각하는 태도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적 지향이 없을 때에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유치환의 '낮달'이 있습니다. 유치환은 여느 시인들과는 달리 위선이 없는 연애시를 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숨어 있는 낮달을 애인과 헤어진 뒤에 가슴 속에 남은 상처에 견주어 쓴 시입니다.
'쉬 잊으리라 그러나 잊히지 않으리라/가다 오다 돌아보는 어깨 너머로/그날 밤 보다 남은 연민의 조각/지워도 지지 않는 마음의 여로'
아주 짧지만 감동적인 연애시입니다. 여기에 무슨 이데올로기는 없습니다. 이런 시도 좋지만, 이데올로기가 있는 시가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시란 메타포 즉 은유(隱喩)입니다. 좋은 시라는 건 결국 비유를 잘한 시입니다. 네루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젊은 우체부가 찾아와 '시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네루다는 '시란 메타포다.'라고 대답하지요.
두 사람이 바닷가를 걷는데, 파도가 밀려오는 걸 보고 젊은 우체부가 '파도가 걸어옵니다'하고 말하자, 네루다는 '이 순간부터 너는 시인이다. 바로 비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다'라고 말하지요.
한 가지 사물을 다른 사물을 들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라는 거죠. 제 생각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좋은 시인은 비유를 잘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비유를 썩 잘 할수록 좋은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병철의 시에 이런 게 있습니다.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삽살개 앞세운 정 좀 쓸쓸하다만/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나는 가련다'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잘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나막신'이라는 제목의 짧은 시이지만 사람살이가 은유로 잘 배어 있습니다. 이 시에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은유가 있다고 느꼈고, 아직도 독자들에게 읽히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메타포가 있기 때문에 읽히는 겁니다.
시는 교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기 때문에 읽히는 겁니다. 그 '존재'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시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깨닫게 해주는 메타포를 가졌을 때, 뛰어난 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이병철의 시는 우리 문학사에서 기억되지 않으면 안될 훌륭한 시인 것입니다
==================================================================================
소스라치다 ― 함민복(1962∼ )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도시에 살면, 살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사람들인 것만 같다. 물론 살아 있고 움직이는 존재 중에는 반려동물도, 비둘기도, 곤충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도시의 주인은 딱 셋이다. 사람, 영상, 자동차. 이 상태는 편리하지만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그 이유가 함민복 시인의 시에 잘 나와 있다.
시인은 단순하고 소박한 시를 쓴다. 어렵게 말하지도, 멋지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시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즉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힘을 쏟지 않아도 되기에 깊게 읽힐 수 있고, 오래 기억될 수도 있다. 이런 시는 참 좋다.
어느 날 시인은 뱀을 보았고 그 뱀을 죽였다고 한다. 뱀은 무섭고 싫으니까 얼른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뱀을 죽이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뱀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더 생각해보니, 내가 뱀을 무서워했던 것보다 뱀이 훨씬 더 많이 나를 무서워했을 것 같다. 결국 무서운 데다가 나쁜 존재는, 뱀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 생각이 확장되니 시인은 몹시 미안해졌다. 뱀만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사람을 무서워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지구의 생명체, 그뿐만 아니라 살아 있지 않은 것들도 사람이 무섭다. 손만 대면 캐가고, 쓰고, 없애고, 먹는 사람들이 참 많이 무섭다.
예전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서양 사람들이 와서 땅을 팔라고 했을 때 인디언들은 그 제안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공기와 대지와 시냇물과 햇빛을 우리가 소유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라고 대답했다. 함민복 시인의 시는 인디언의 지혜가 먼 나라 역사나 영화 속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누가 누구의 주인이고, 누구 하나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서로,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너무 함부로 하지 말 일이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