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즈(Hughes)가 3남매. 왼쪽부터 장남 제럴드, 올윈, 막내 테드. 올윈은 테드를 위해 자기 삶을 기꺼이 희생했고, 동생의 명예에 걸림돌이 되는 거라면 어떤 일이든 상대가 누구든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의 거울 속에는 언제나, 끊임없이 부활하는 올케 실비아 플라스가 있었다. Ted Hughes Estate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의 생애는 그의 문학보다 유명하다.
그의 삶이, 죽음이 그만큼 극적이었다. 빼어난 문재로 주목 받다가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30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후에야 그의 문학이 인정 받게 된 사연이 그러했다. 그가 숨진 1963년은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가 출간된 해였다.
남편은 당시 이미 영미 문단의 스타였던 테드 휴즈(Ted Hughes, 1930~1998)였다. 플라스는 휴즈의 시를 미국 문단에 알려 첫 시집(‘빗속의 매’)이 나오게 했고, 휴즈는 단숨에 유명해졌다. 남편이 시작(詩作)과 강연 등으로 바쁘게 활동하는 동안 플라스는 모교인 스미스 칼리지에서 강의하며 돈을 벌었고, 두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가사를 도맡았다. 잦은 다툼 끝에 둘은 62년 10월부터 별거했고, 석 달 뒤 플라스는 잠든 두 아이의 간식을 챙겨놓곤 부엌 문을 테이프로 밀봉한 채 오븐 가스밸브를 열었다. 그 시각 정부(情婦)가 아닌 또 다른 여인과 동침하고 있던 휴즈를 플라스의 팬들은, 페미니스트 진영은 ‘살인자’라 불렀다.
휴즈를 역성드는 이들은 물론 달리 말했다. 플라스는 결혼 전 두 차례(41년, 53년)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다. 결혼 전후 그의 글쓰기도 지지부진했다. 기대와 야심이 컸던 만큼 좌절도 자괴도 컸다. 남편에 대한 부정(不貞)망상(물론 휴즈 입장이다)은 병적인 히스테리로 폭발하기 일쑤였다. 그 끝이 별거였다. 56년 결혼한 둘의 관계가 58년 무렵서부터 삐걱거렸으니 휴즈로서도 행복했을 리 없다. 플라스가 그렇게 떠난 뒤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훗날 영국의 계관시인이 됐고, 재혼한 아내 외에도 적잖은 여인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면서도, 그(와 주변)는 플라스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 못지않게, 어쩌면 더 불행하고 공허한 삶을 산 이는 휴즈의 누나이자 플라스의 시누이 올윈 휴즈(Olwyn Hughes)였다. 산 올케와 불화했던 그는 동생의 명예를 지키느라 죽은 올케와 싸우며 한 생을 보냈다. 둘의 저작권 대리인이 된 올윈은 플라스가 동생의 짐이 되지 않도록 인터뷰 등 대외 활동 일체를 통제ㆍ관리했고, 둘의 평전은 물론이고 누가 플라스의 글 일부를 인용하려 할 때도 문맥을 살핀 뒤에야 허락하곤 했다. 그는 사나운 검열자였고, 고집 센 협상가였다. 휴즈의‘케르베루스(Cerberus, 지옥 문을 지키는 개)’라 불리기도 했던 올윈 휴즈가 1월 3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결혼 직후 가족 모임에서 처음 만난 날부터 플라스와 올윈은 서로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품는다. 올윈은 플라스가 “뭔가에 속박된 듯 꽁한”인상이었다고 했고, 플라스는 “(올윈이) 아주 미인이지만(…) 허영기 많고 이기적인 사람 같았다”고 일기에 썼다. 60년 크리스마스 가족모임에서 둘은 격하게 다퉜고, 그게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자넷 말콤이 쓴 실비아 플라스 평전 ‘침묵하는 여인 The Silent Woman’에는 그 다툼 직후 플라스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테드와 올윈의 미심쩍은, 근친상간을 의심케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썼다고 한다.(Telegraph, 2016.01.08) 동생을 향한 올윈의 애정이 그만큼 특별했다.
휴즈 남매는 영국 웨스트요크셔 미슬롬로이드에서 목수였던 윌리엄 휴즈와 에디스의 둘째와 셋째로 태어났다.(장남 제럴드는 2차대전 종전 직후 호주로 이민) 두 살 터울인 남매는 어려서부터 단짝처럼 지냈다. 올윈이 10살이던 38년 가족은 사우스요크셔의 탄광마을 멕스버러로 이사했고, 부모는 신문과 담배를 파는 잡화점을 열었다. 올윈은 사춘기의 우울을 독서로 풀곤 했다고 한다. 50년 퀸 메리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비서양성 과정을 이수, 52년 파리 주재 영국대사관에 취직했다. 그 취업은 ‘인디펜던트’가 “요크셔의 서민계층 여성으로선 다소 놀라운 일”이라고 썼을 만큼 성공적인 거였다. 그 무렵에도 그는 동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익스피어와 초서의 책들을 추천하곤 했다. 플라스가 숨질 무렵 올윈은 영화ㆍ연극 대본 에이전시겸 출판사 마톤플레이(Martonplay)의 비서 겸 번역가였다. 그 해 말 올윈은 직장에 사표 내고 데본시 노스토턴(Devon NorthTawton) 휴즈의 집으로 이사해 조카 프리다(당시 3살)와 니콜러스(1살)를 키우며 살림을 챙겼고, 휴즈의 문학 에이전시 역할도 맡는다. 법적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기 전에 유서도 없이 숨진 올케의 시집 ‘거상들(Collosus)’과 죽기 한 달 전 출간한 소설 ‘벨자(The Bell Jar)’, 그리고 유고 시 원고(‘에어리얼 Ariel’, 65년 출간)와 일기(82년 미국서 출간) 저작권도 당연히 테드의 몫이었고, 올윈의 일거리였다. 그 상황을 두고 플라스의 팬들과 페미니스트 진영은 휴즈 남매의 ‘파렴치’를 성토했다. 텔레그래프는 “(올윈과 플라스의 관계 등 제반 상황을 보건대) 휴즈는 플라스의 저작권을 올윈이 아닌 독립적인 제3자에게 위임하는 것이 옳았다”고 썼다.
올윈은 동생에게 비우호적인(실은 중립적인) 비평가가 플라스의 평전을 쓰려 할 경우 취재에 불응했고, 작품 인용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선 천재적 문학 재능을 지닌 착하고 성실하고 잘 생긴 동생이 이상한 여자, 즉 재능보단 질투심이 더 많고 분열증과 우울증을 앓는 여자를 만나 고생만 하다가 욕까지 먹게 된 현실이 못마땅했고, 그 ‘진실’을 외면하는 페미니스트들과 평론가들에겐 화가 나 있었다. 그는 구미에 안 맞는 평전들을 싸잡아 ‘흡혈귀 전기(vampire biographies)’라고 불렀다. 올윈이 호평한 앤 스티븐슨(Anne Stevenson)의 플라스 평전 ‘씁쓸한 명성 Bitter Fame’(1989)에는 ‘극도의 악의(enormous hostility)’‘자기중심적 몽상(egotistic fantasizing)’ ‘정신적 맹목(psychological blindness)’같은 플라스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들이 적지 않았다. 그 책을 두고 어떤 이는 “올윈과의 사실상의 공저”라고도 했고, 혹자는 “테드와 올윈의 (플라스에 대한) 쓰디쓴 복수극”이라 비판하기도 했다. 스티븐슨은 사실과 확정적 근거에 기초해 쓴 책이라고 항변하면서도 휴즈 남매의 간섭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휴즈의 파경 책임을 밝히는 부분은 남매의 요구로 삭제해야 했고, 책의 상당 부분은 다시 써야 했고, 플라스의 시와 일기를 허락 없이 인용할 수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Telegraph, 위 기사) BBC 프로덕션이 2003년 제작한, 귀네스 펠트로 주연 영화 ‘실비아’의 휴즈(대니얼 크레이그 분)가 알던 것보다 훨씬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로 묘사된 데도 저런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56년 파리에서의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 둘은 불 같은 연애 끝에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했다. 스미스대학 도서관 소피아스미스컬렉션.
2003년 영화 '실비아'의 한 장면. 실비아 플라스 역은 귀네스 펠트로가, 테드 휴즈 역은 대니얼 크레이그가 맡았다.
지난 해 출간된 조너슨 베이트(Jonathan Bate)의 평전 ‘테드 휴즈: 승인되지 않은 삶 Unauthorized Life’은, 올윈에 따르면 “쓰레기더미에 얹힌 또 한 권의 쓰레기”였다. 베이트는 지난 해 4월 자기 책이 휴즈 일가에 의해 어떻게 달라지게 됐는지 밝히는 장문의 글을 가디언에 실었다. 휴즈의 ‘문학적 삶(literary life)’을 쓰기로 하고 휴즈의 아내였던 저작권자 캐롤 휴즈(Carol Hughes)의 승인을 받은 일, 4년여에 걸쳐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해준 일, 막판에 휴즈의 사생활- 주로 여성 편력- 을 수록하는 문제 때문에 협력관계가 어그러진 사연…. 그는 결국 작품 인용구 대부분을 지워야 했다고 썼다. 앞서 98년 캐롤 휴즈는 남편의 자필 원고(일기 제외)등을 미국 에모리 대학에 팔았다. 영국국립도서관은 2010년 50만 파운드에 그 원고를 되 샀고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했다. 베이트는 “하지만 저작권은 여전히 캐롤에게 있고, ‘10% 인용 허용’이라는 저작권법 조항은 너무 모호해서 저작권자가 소송을 걸면 판결로 적법 여부를 가려야 한다”고 썼다. 베이트는 ‘문학적 삶’을 평전이라 여겼고, 캐롤과 올윈은 문학비평으로 이해했던 거였다.
베이트의 원고에는 파경의 주된 원인 중 하나였던 휴즈의 연인 아씨아 베빌(Assia Wewill, 1927~1969)은 물론 그 밖의 여러 가명ㆍ익명의 여인들이 등장했다. 올윈에게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왜곡’이거나 ‘허구’였다. 플라스가 숨질 당시 휴즈의 아이를 임신(유산)하고 있었고, 숨진 뒤 5년간 동거하며 딸을 낳은 베빌을 두고도 올윈은 “테드는 아씨아에게 가려고 집을 나간 게 아니었다. 그는 잠시 혼자 머물기 위해 런던의 친구 집에 있었을 뿐, 결코 아씨아와 함께 지내지 않았다”고 말했다.(가디언, 2013.1.18) 베빌 역시 69년 테드와의 불화 끝에 4살 딸을 수면제로 재운 뒤 나란히 누워 플라스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등졌다.
올윈은 70년대 말 잘생긴 아일랜드 출신 남자(Richard Thomas)와 연애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베이트에 따르면 그 남자는 알코올 중독자로 병원을 들락거린 난폭하고 변덕스러운 남자였지만 “테드를 쏙 빼닮은”미남이었다. 둘은 79년 6월 결혼한 뒤 1년도 안 돼 이혼했고, 이후 올윈은 독신으로 지냈다. 올윈은 친자식처럼 아끼던 조카 니콜라스가 2009년 알래스카에서 자살로 숨졌을 때에야 플라스가 앓던 우울증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수긍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3년 인터뷰에서도 그는 플라스를 두고 “끔찍한(nasty)” “트라우마 덩어리(whole trauma)”이고, “사악하고(vicious) 살짝 미친(a bit crazy)”같은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테드 휴즈는 98년 1월 플라스와의 만남과 결혼, 여행, 사별의 사연과 기억들을 88편의 시로 엮은 ‘생일편지 Birthday Letters’를 펴냈다. 그 시집의 해설서인 ‘실비아 플라스의 영혼을 찾아서’(박종성 저, 동인출판사)의 저자는 “그(휴즈)는 실비아 플라스의 영혼을 찾아서 35년 동안 내면으로의 긴 여행을 해온 셈이며 그 결과가 시집의 출간”이라고 썼다. 플라스가 숨진 뒤 35년 동안, 휴즈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험담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변호하는 어떠한 말도 글도 세상에 내놓은 적 없었다. 충실한 대변자 올윈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김선형 옮김, 문예출판사) 서문에 썼듯이 “망각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플라스의 일기 상당량을 누락시켰고, 59년 후반부터 자살 3일 전까지의 기록을 아예 폐기해 거센 비난을 샀는데, 그는 “아이들이 읽는 일이 없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시집을 내고 9개월 뒤 휴즈는 별세했고, 시집은 이듬해 휘트브레드 문학상을 탔다. 어쨌건 그는 그 시집으로 플라스를 향한 ‘변함 없는’ 애정과 경의를 표함으로써 자신을 영리하게 변호했다.
반면 독립적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부부의 비극 속 조연으로, 악역으로 살았던 올윈은 숨질 때까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자기 그림자와 싸우듯 그는 평생을 자신의 ‘입’과 싸웠고, 그걸 사랑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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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
출생 |
1932년 10월 27일, 미국 |
사망 |
1963년 2월 11일 |
데뷔 |
1960년 시집 <거대한 조각상> |
학력 |
스미스 여자대학 영문학 |
수상내역 |
1982년 퓰리쳐상 |
가족 |
남편-테드 휴즈 |
작품성향 |
고백시 |
|
|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당대 최고의
페미니즘 작가로 알려진
미국의
작가이다.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가였던 아버지 오토 플라스와 어머니 아우렐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래
영국에서 출생했지만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온다. 7세 때 아버지의 자살로 인해 늘 자살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죽음은 실비아의 삶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당대 최고의 시인인 테드 휴즈와 결혼하였지만 휴즈의 여성편력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휴즈와 이별한 후, 작품에 몰두하다가 결국 31세 나이로 가스 오븐에 머리를 처박은 채 자살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1]
1932 |
1932년 10월 27일 Boston에서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가인 Otto Plath와 Aurelia Schober 사이에서 출생 |
1940 |
아버지 Otto Plath의 사망 |
1953 |
첫 자살시도. 이로 인해 정신병원 입원 |
1955 |
케임브리지 대학 입학 |
1956 |
테드 휴즈(Ted Hughes)와 결혼 |
1957 |
미국으로 이주. 스미스 여자대학에서 영문학 강사로 활동 |
1960 |
생애 첫 시집 <거대한 석상(The Colossus)>를 출판&딸 프리다(Frieda) 출산 |
1961 |
둘째 아이 유산 |
1961 |
아들 니콜라스(Nicholas) 출산&남편의 외도 |
1962 |
자전적 소설를 가명으로 출판 |
1963 |
자살 |
1965 |
유고시집 출판 |
1982 |
퓰리쳐 상 수상 |
실비아 플라스는 1932년 10월 27일 미국
보스턴 대학교의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가였던
독일 그나보프(Grabow) 출신의 아버지 오토 플라스(Otto Plath)와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인 어머니 아우렐리아 쇼보 플라스(Aurelia Schober Plath)의 딸로 태어났다. 1934년 그녀의 동생 워렌 플라스(Warren Plath)가 태어난 뒤 메사추세츠 윈스럽(Winthrop)에서 자랐다.
실비아 플라스는 8살 때 처음 Boston Herald에 시를 발표하였고, The Scholastic Art & Writing Awards에서 상을 받으면서 뛰어난 문학·예술적 재능으로 주목 받았다. 1940년에 아버지가
당뇨와
합병증으로 사망했으며, 1942년
보스턴 서쪽 교외의 메사추세츠 웰즐리(
Wellesley)로 이사했다. 당시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에게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주었고, 이는 그녀의 삶과 예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플라스는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인 9살 때 첫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1950년 장학금을 받으며 스미스 여자대학(
Smith College)에 입학한 실비아는 이미 400편이 넘는 시를 썼으며, 1952년 8월 마드모아젤(Madmoiselle) 공모전에 단편 「민튼 씨네 집에서 보낸 일요일」이 입상하면서 마드모아젤의 인턴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녀는 하버드 여름학교의 프랭크 오코너 창작수업을 신청했으나 입교를 거절당하고, 학위 논문에서의 부진은 물론 학업에서의 연이은 실패가 계속된다. 이는 그녀를 극단적인 초조함과 불안으로 몰고가 결국 1953년 8월 대학 3학년 때 지하실에 들어가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이틀 뒤 의식을 회복한 직후에 가족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1963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The Bell Jar(『종 항아리』)에 묘사되어 있다. 가까스로 살아난 후, 끊임없는 노력으로 다음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 후 1955년부터 2년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대학의 뉸햄 칼리지(Newnham College)에서 공부했다.
1.4. 테드 휴즈와의 결혼과 작품 활동[편집]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실비아휴즈.jpg' width='200' data-filesize='44310' src='//cdn.namuwikiusercontent.com/98/9893b01a0fde73458510b9257adb9af03fd53ea0057129451c33687aa5a0df48.jpg?e=1482808680&k=zLzWj6Jnd3dRwmqlckYuPw'>
1956년 영국 시인
테드 휴즈(Ted Hughes)를 만나게 되는데,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그해 6월에 결혼했다. 플라스가 유학과정을 마친 뒤 두 사람은 미국으로 갔으며, 모교인 스미스 여대에서 1957년 9월부터 이듬해 5월 말까지 강의를 하였다. 남편 휴즈는 인근
매사추세츠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교수직업이 창작 생활에 부담이 된다 느끼고 보스톤으로 옮겨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플라스는 보스톤에서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이 시기에
보스턴 대학교에서 시인
로버트 로월(Robert Lowell)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의 기간은 플라스가 가장 활성하게 시를 썼던 시기이며, 두 자녀도 이때 낳았다. 1960년 영국으로 돌아가, 첫딸 프리다(Frieda)를 출산하였으며,
임신 중 출판계약을 체결하고 1960년 10월 자신의 첫 번째 시집 <거상(The Colossus and other poems)>를 출판한다. 1962년 아들 니콜라스(Nicholas)가 출생하지만, 그 해 7월 휴즈가 애시어 웨빌(Assia Wevill)과 내연의 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실비아와 휴즈는 이혼하게 된다. 아이들을 데리고 런
던에 돌아온 플라스는 그해 말까지 잘 알려진 시 <아빠(Daddy)>와 <레이디 라자러스(Lady Lazarus)>등 많은 시를 썼다. 1963년 1월 14일, 빅토리아 루카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 <벨 자(The Bell Jar)>는 호평을 받았다.
1963년 2월에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혹독하게 추운 날씨가 닥쳐왔다. 별거로 인한 스트레스에 추위, 독감과 생계 문제까지 겹쳐 실비아 플라스는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혼의 후유증과 사랑의 실패에 대한 좌절로 끊임없는 괴로움에 1963년 2월 11일 자살을 결심하고, 가스 오븐에 머리를 집어넣고 자살했다. 이 때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는 가스가 스며들지 않도록 테이프로 치밀하게 막아두었고, 집주인에겐 의사를 불러달라는 노트를 남겨두었으며, 자살 시각을 오 페어(Au Pair)가 오기로 한 시각에 맞춘 것으로 보아 정말로 목숨을 끊을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가스가 새어나가는 바람에 아래층의 집주인은 의식을 잃어버렸고, 집 밖에서 기다리던 오 페어가 뒤늦게야 집으로 들어갔을 때 실비아 플라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녀는 영국 웨스트 요크셔에 묻혔다.
실비아 플라스의 사후, 그녀의 글을 모아 출판하는 일은 테드 휴스에게 맡겨졌다.
천하의 개쌍놈이자 인간말종 테드 휴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긴 실비아 플라스가 결혼생활 마지막 몇달동안 쓴 일기를 없앴다. 시집 《아리엘(Ariel)》를 편집하면서, 순서를 밝고 경쾌한 내용의 시로 시작하여 점차 우울하고 어두운 내용의 시로 가도록 고의적으로 배열해 비판을 받았다. 실비아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 휴스(Olwyn Hughes)가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 테드 휴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글의 출판을 결사적으로 막기도 했다. 테드 휴스에 대한 반감이 늘어갔고, 밤 사이 사람들이 실비아 플라스의 묘비에 새겨진 정식 이름, “실비아 플라스 휴스”에서 “휴스”를 지워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69년, 테드 휴스는 다시 외도를 시작했고, 아씨아 웨빌은 테드 휴스와 사이에 태어난 딸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동반자살했다. 6년 전 실비아 플라스가 자살했을 때 썼던 방법이었다.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거상.jpg' data-filesize='8267' src='//cdn.namuwikiusercontent.com/e8/e8edf7f5d1634e3c865502a4a363555c17064d43c805d2212c4c90509dd01e5e.jpg?e=1483568018&k=NyGt_Wlf_6ee0VfdeDvZJg'> <
거상(The Colossus)>-생애 첫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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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The Bell Jar)>-플라스가 남긴 유일한 소설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아리엘.jpg' data-filesize='9714' src='//cdn.namuwikiusercontent.com/1c/1cc59ceea42bf5227f75f22e1e1114e2cb6f6f421f33c2ca71267168ca6ac168.jpg?e=1485607448&k=-0-jjlN8cya7J6lO5LdpmQ'> <
에어리엘(Ariel)>-유고시집이 담긴 책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일기.jpg' data-filesize='7234' src='//cdn.namuwikiusercontent.com/21/2146e8f66edab8084d69c7dc050c04cd233831590ca4bae19e37edf1b7d2805b.jpg?e=1486384449&k=hjqoJ2snXCs3arAMMW1ktQ'> <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Journals of Sylvia Plath)>
<거상(The colosuus)>,<아빠(Daddy)>등의 시편들을 통하여 당대의 여성 시인이 직면해야만 했던 자아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아버지로 나타나는 거대한 힘으로부터 소외와 억압을 느끼고 분노하면서도 그 힘에 대한 경외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여성들이다. 플라스는 이 화자들을 통해 남성 중심의 문화에 갇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의 상실, 자기 분열적인 분로를 표현했다.
가부장저 질서가 지배하는 문화에서 한편으로는 사회가 요구하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가로서 성을 초월하여 창조력을 표출해야 하는 여성 시인의 이중성을 보여주었다. 남성 중심의 문화에 대한 시인의 이중적 태도는 그녀에게 혼란을 안겨 주었고, 이러한 혼란과 갈등의 양상은 <
세 여인(Three Women)>,<
교란시키는 뮤즈들(The Disquieting Muses)>,<
아침의 노래(Morning Song)>등을 통해 여성적 특성을 드러낸 여성적 글쓰기로 나타나고 있다.예술가로서의 이상과 전형적인 여성 역할로서의 현실 사이에서 곡예를 벌이던 팔라스의 내부는 마침내 자기 분열 상태에 이르게 된다.
<에어리얼(Ariel)>,<끝 모서리(Edge)> 등의 작품들을 통해 남성 중심적 사회 속에서 생성된 거짓된 자아를 버리고 새롭게 정화된 여성 시인으로서의 창조력을 되찾기 위해 능동적 죽음을 선택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자로 부인(Lady Lazarus)>에서 플라스는 반복되는 자살의 시도와 부활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에 저하하는 한편 스스로 정화되어 새롭게 탄생된 자아와 자신만의 언어를 찾고자하는 갈망을 표출한다. 그녀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한 육체적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찾아 시작된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시적 과정이다.
2.2.4. 고백시(confessional poet) 형식[편집]
고백시는 시인 자신의 내밀한 사적 경험을 소재로 하는 서술적인
서정시로,시인이 자기 자신에 관한 충격적이거나 임상적인 세부사항들을 부끄러움 없이 솔직 담백하게 드러내보인다는 점에서
낭만시와 구분된다.
[6]
고백시는
로벗 로웰의 시에서 나온 용어임에 틀림 없지만 플라스의 시와 그의 시는 차이를 보인다. 로웰은 역사와 사회속에서 시적 자아를 보이지만 플라스의 자아는 역사적, 사회적이기 보다는 개인적 성향을 보이면서 자신의 삶과 정서에 더 많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플라스의 고백시는 개인적인 경험을 다룸과 동시에 위협받는 한 자아가 자신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탐색하면서 스스로를 재현하는 극적 접근 때문에 의의를 갖게 된다.
,동아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학위 논문,2005,p1">[7]
3.1. 영화 <실비아(Sylvia)>[편집]
<img class='wiki-image' alt='파일:attachment/실비아 플라스/영화.jpg' width='200' data-filesize='18186' src='//cdn.namuwikiusercontent.com/57/576193313acd27041b69874bcae152ca028358a3a75eb22a07ddb4d50cffc312.jpg?e=1480718359&k=tTdnuGTljLevJoZvjKKnmg'>
2005.04.15
크리스틴 제프스
기네스 펠트로(실비아),
대니얼 크레이그(테드)
사랑, 그 하나만 간직했던 찬란한 생애 | 불꽃 같은 시(詩)를 닮은 그녀
1956년 이른 봄 영국. 한 파티장에서 케임브리지로 유학을 온 미국 학생 실비아는 장래가 촉망되는 문인이자 평론가로 활동 중이던 테드 휴즈를 만나게 되고 첫눈에 사랑을 느낀다. 테드 역시 실비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끌림을 느끼고 결국 둘은 결혼까지 이르게 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행복은 시간이 지날수록 실비아의 병적일 정도로 집요한 사랑에 대한 집착과 테드의 자유분방한 생활 방식 때문에 점점 어긋난다.
결국 둘은 자꾸만 빗나가는 사랑으로 갈등을 반복하면서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관계를 유지해 간다. 실비아는 대학 강의와 작품 활동을 병행하며 역량 있는 여류 시인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고, 테드 또한 시인으로서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만큼 불안하기만 했던 그들의 결혼 생활은 테드의 외도로 결국 파경에 이르게 된다.
이혼 후,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과 이별의 아픔으로 힘겨워 하던 실비아는 마치 광기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듯 더욱 창작 활동에 매진하여 다작의 시와 소설을 완성하지만 결국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데...
[8]
[1] "실비아 플라스",『해외저자사전』
[2] 김선형,『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문예출판사, 2004, p707-709
[3] "실비아 플래스",『위키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Sylvia Plath",『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4] 권태기,"실비아…’ ‘치사한 욕망’과 ‘불멸의 문학’ 사이",『동아일보,2004.03.20
[5] 송순임,「실비아 플라스: 여성 정체성 추구의 시 = Sylvia Plath: Poetry for the Pursuit of Female Identity」,전남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학위 논문,2010.2,PP.1-2
[6] "고백시",『두산백과』
[7] 곽미경,「실비아 플라스의 시에 나타난 가족과 자아」>,동아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학위 논문,2005,p1
[8] "실비아",『네이버 영화매거진』,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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