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발랄한 유머와 역설의 언어로 재미있게 읽히는 시로 써라...
소시민의 일상과 현실 풍자
(김영남 시인 작품론)
고명수(시인, 동원대 교수)
1. 유니크한 시인의 등장 : 새로운 시학과 전향적인 태도
시가 난해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독자로 하여금 시 읽기의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이 때에 발랄한 유머와 역설의 언어를 구사하며 가볍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를 쓰는 한 시인이 등장했다. 시를 마치 대중과의 소통을 배제한 채 자아의 성에 갇혀 암호로 가득한 유아론적 에세이를 양산하면 되는 양 착각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 시단의 풍조를 생각할 때, 즐겁게 읽히면서도 탄탄한 구조를 갖춘 이 시인의 등장은 우리 시단으로 볼 때 분명 새로운 피의 수혈이라 할 것이다. 특히 혼자서만 입안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주관적인 언어가 난무하는 현상이 투명한 보편의 언어에 이르지 못하는 데서 초래된 것이라 본다면, 이 시인의 등장은 우리 시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돌파구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란 새로운 언어의 창조를 통하여 현실을 재구성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일이라 할 때, 이 시인의 미덕은 오랜 기간의 습작으로 인해 기본기가 탄탄한 편이며, 동시에 치열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시적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도인 이 시인은 우선 시를 하나의 상품으로 생각한다. 즉 그의 시 쓰기는 ‘차별화된 인식, 효과적인 표현, 효율적인 구성’이라는 공정을 거쳐 ‘고객감동을 지향’하는 하나의 문화상품의 생산라인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그의 시 생산원칙은 다음의 시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반성하라!
경영, 경제학을 모르는 자.
효율, 효과를 모르는 자.
떠나라!
需要를 무시하는 자.
供給 위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자.
공부도 하지 않고 시위 현장에 따라나온 나는
아예 자폭하라!
그러나 벽, 인식의 벽, 고정관념의 벽……
그 벽들을 올라타는 재미를 아는 또 다른 나는
살아라!
그 모든 학문에서, 아 답답한 이 詩의 현장에서……
―「그 시위 현장이 나를 성토하고 있다」 전문
그는 소통이 안 되는 암호 같은 시를 배제한다. 표현의 효율과 효과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는 정통파 시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공부가 중요하다. 기본기가 중요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의 시단이 ‘답답’하다고 보고 있다. 이 답답한 한국 시의 현장을 벗어나는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인 듯하다. 이러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복의 정신이다. ‘인식의 벽’과 ‘고정관념의 벽들’을 올라타는 재미, 그것은 상상력에서 온다. 전복의 상상력, 이것이 그의 시적 전략인 동시에 우리가 그의 시를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그러면 상상력에 의해 독자들의 인식과 고정관념을 전복시키기 위한 그의 전략계획서를 잠깐 훔쳐보자. 그에게는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몇 개의 ‘스위치’가 있다. 사물에 대한 관점을 역으로 바꾸어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과 다양한 이미지의 열거에 의한 풍요로운 역동적 상상, 고정관념을 지속적으로 전복시키려는 주도적 상상력, 그리고 다양한 이미지의 편린들을 하나의 체계를 이루도록 모으는 조직적 상상력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상의 벡터는 일관되게 일상의 진부한 고정관념들을 부수며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지향한다. 「누워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시는 김영남 시의 상상력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나는 누워만 있는 것을 보면 올라가보고 싶다./ 그 누워 있는 것들에 신나게 올라가서/ 한번 가쁜 숨을 매몰차게 몰아쉬고 싶다.’고 하는 앞부분을 읽으면 독자들은 엉뚱한 상상을 하게 마련이지만, 이 시의 뒷부분에 가면 그러한 상상은 전복되고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라는 새로운 의장에 이르게 된다.
나는 누워 잠자는 걸 보면 꼭 한번 올라타보고 싶다.
누워 있는 상사, 누워 있는 행정, 누워 있는 학문……
이처럼 그의 시법은 매우 기발하고 발랄하며 첨단적이고 현대적인 상상력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주로 쓰는 재료, 즉 내용물은 매우 평범하고 토속적인 다음과 같은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뚱뚱한 여자, 주근깨, 토종개, 달빛, 누룩, 청포도, 홍시, 장작불, 개오동 열매
잠시 경험, 지식, 정보의 작업라인이 분주히 움직이더니
창조적 접근만 허용하는 관리체계의 결재가 떨어졌다.
그리고 품질 좋은 사고가 제조되었다.
< 토종개 한 마리, 검정깨 네 홉, 청포도 3kg, 누룩 두 되 가웃, 대추 한 사발을 달빛에 발효시켜 家釀酒를 양조하겠다>는 개오동 열매 같은 詩,
허약체질과 발기부전에 특효인.
―「변환 스위치가 필요하다」 부분
전라도 장흥, 바다가 가까운 시골에서 자라 서울로 올라온 촌놈인 탓인지 그의 시적 소재는 대체적으로 일상적·서민적이면서도 소박하고 향토적인 건강성을 지닌 것들이 많다. 그리하여 그는 ‘허약체질과 발기부전에 특효인’ 건강한 시, “<토종개 한 마리, 검정깨 네 홉, 청포도 3kg, 누룩 두 되 가웃, 대추 한 사발을/ 달빛에 발효시켜” 만든 ‘개오동 열매 같은 詩’를 지향한다. 인스턴트 시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에서 대중들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시의 식단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하여튼 이 시인은 고객감동을 지향하면서 좋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대단히 치밀한 계획을 세워두고 작품생산에 임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는 그가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에 임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요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객 중심의 개념’을 도입하려는 김영남의 시적 태도는 경제나 행정, 나아가서는 예술이나 교육 분야에까지도 요청되고 있는 마케팅 전략과도 두루 통하는 매우 현실적인 태도이다. 이는 단순히 그가 경제학도 출신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비좁은 실내공간/ 함부로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문/ 늘 우울을 드리우고 있는 커튼과 날카로운 모서리/ 밑이 훤히 드러난 바닥과 낮은 천장/ 아무 데나 걸린 싸구려 장신구/ 그리고 항상 여유가 없는 짜증스런 수납장들……”로 암시되고 있는 한국 시단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 자각에서 오는 공격적이고도 전진적인 자세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 이러한 전략을 가지고 추구하는 김영남의 시 세계로 들어가 보자.
2. 소시민의 일상과 참된 삶에 대한 각성
시인 김영남은 전복의 소망을 지닌 사내이다. 그는 그를 가두고 있는 여러 가지 벽들을 부수고 싶어한다. 그러나 김영남 시의 화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 소시민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아내와의 잠자리를 기피하고 두려워하며 술을 좋아하고 삶의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꿈꾸며 여행과 여자와 사우나를 좋아하는, 아주 평범하지만 재치 있고 활기차며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한 사내다. 그는 일상의 고정관념을 부수고 현상의 이면에 숨은 사물의 진실을, 새로운 인식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점에서 김영남의 시의 화자는 김수영과 오규원, 혹은 황동규 시의 화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고것이 형편없다며, 아니 너무 작다며 내 고충을 제일 잘 알고 있는 마누라가 밤마다 괴롭혀오면 난 정말 죽을 지경이 됩니다.
형편없는 게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만 마누라가 베개맡에서 나의 제일 민감한 포인트를 아예 노골적으로 불평해 오면 나는 결혼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습니다. 더욱이 이를 개선할 돈도 없으니… 밤이 되는 것이 무서워집니다.
그러나 고렇게밖에 물려받지 못한 걸 어떡합니까? 그렇다고 옆집 아저씨에 견주고, 대학 동창들한테까지 비교하면 내 얼굴이 뭐가 됩니까? 난 또 어떻게 고개를 들고 거리를 다닙니까?
말이 났으니 터놓고 한번 얘기해 봅시다. 그것이 큰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으리으리한 기둥과 튼튼한 지붕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부드러운 손, 따뜻한 가슴이 없으면 그건 말짱 헛것이에요. 그건 따뜻한 아랫목과 향기로운 이야기가 존재해야 진정한 의미의 그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당신, 너무 큰 것만 좋아하지 마세요. 침실이란 작은 것이 더 따뜻하고 아늑해요.
안 그래요, 침실이란?
―「나의 위크 포인트」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익살스럽기까지 한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독자로 하여금 빙그레 웃음을 자아내게 하며 엉뚱한 상상의 길로 유도하는 초반 도입부는 뒤로 오면서 독자의 기대를 전복하며 많은 이야기 거리와 의미를 함축한다. 김영남의 시가 대개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많다. 그래서 독자들은 가볍고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뭔가를 생각하게 된다. 「빨래」에서도 이러한 소시민의 모습은 더욱 유머러스하게 나타난다. 속악한 현실에서 살다 보면 더러 거짓말도 하게 되고 객기도 부려보지만 어떻게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백기’를 드는 수많은 소시민 가장들은 이 시를 읽으면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 보편적인 이 시대의 가정의 초상을 보게 된다.
틀에 박힌 일상 속에서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아득바득 살아가는 소시민 가장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돈이다.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생겨나고 있으며 또 몇푼 돈에 얼마나 희희낙락 하는가. 실로 사람들이 한없이 숭배해 마지않는 돈이야말로 현대사회의 신(神)이다. 자본의 위력이 날로 기승을 부리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돈이야말로 모든 꿈의 열쇠이기에 누구나 한번쯤은 다음과 같은 복권 당첨의 상상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1억 5천과 1억 3천 사이를 좋아한다. 그 사이에는 나의 꿈과 희망이 존재한다. 거기에서 나는 땅을 마련해 집을 짓는다. 정원을 만들어 가꾸고, 귀중한 손님을 초대한다. 손님이 없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산책을 하고, 마누라에게는 비싼 선물을 약속한다. 따라서 1억 5천과 1억 3천 사이에는 나뿐만 아니라, 내 마누라의 꿈과 희망도 존재하는 셈이다.
―「나는 그 꿈을 구매한다」 부분
사실 우리는 누구나 돈에 의해 억압을 당하고 있지만, 또한 돈이 있다면 해 보고 싶은 꿈과 희망들이 많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이다. 집을 짓고 정원을 만들어 가꾸고 손님들을 초대하거나 가족들과 단란하게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싶은 건전한 꿈은 물론, 룸살롱에 가서 술도 마시고 호텔에서 외박도 하는 다소 퇴폐적인 꿈도 있지만, 또 ‘하루하루 심장이 꺼져가고 있는 은진이’와 같은 불우한 이웃들에게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좋은 일도 해 보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소시민들의 보편적인 꿈이다. 분명 이 시대의 우리의 삶의 모습은 온전한 삶은 아닌 것이다. 억압되고 비틀려진 삶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돈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위선과 허화(虛華)로 가득한 겉으로 보이는 삶의 외피 속에 감추어진 보다 참된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나서야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다는 걸 알았네.
江물에 떠밀리지 않고 건너 목적지에
예정대로 닿을 수 있다는 걸 알았네.
그 동안 가벼운 짐을 지고서
바퀴처럼 미끄러지고 헛돈 삶
오직 나를 위한 제자리이었음을
뼈아프게 깨닫네.
이제 나는
등위에 큰짐을 지고서
남을 사랑한다네.
그 무거움으로 남을 용서한다네.
―「짐에 관하여」
삶의 본질은 괴로움이다. 그 괴로움을 껴안고 진지하게 앞으로 나아갈 때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보왕삼매론」에 보면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 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는 말씀이 나온다. 위의 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힌다. ‘가벼운 짐을 지고서’는 ‘바퀴처럼 미끄러지고 헛’도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을 통해서 위와 같은 자각에 이를 때 비로소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며 ‘생의 앞모습만 보면서 가꾸어’가는 삶이 아니라 ‘뒷모습이 아름다운’(「뒤란을 가꿉시다」) 참된 영혼의 높이와 깊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 우리는 보다 향기로운 삶, 나의 울타리를 벗어난 보편적인 삶의 자각에 이르게 되고, 서로에게 ‘아름다운 손을 남기’는 삶, ‘산길을 밝히는 도라지꽃’이 되는 삶, 젖은 몸의 안식처가 되는 바위와 같은 삶(「同行」)에 이르게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의 이상은 ‘가시나무가 엉클어진 깊은 산 속 돌밭길’과 같은 험난한 삶의 길을 인고하며 묵묵히 걸어갈 때, 아름다운 뒷모습은 나타날 것이며, 좀더 삶의 ‘뒤란’을 가꾸는 일에 주력할 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뒤란’을 가꾼다는 것은 또 다른 말로 한다면 바다를 배경으로 거느리는 일이 된다. 바다를 배경으로 거느린다는 것은 ‘절벽과 싸우는 하얀 파도’의 투쟁과 끊임없이 자기를 안으로 추스리는 ‘외로운 등대’(「거진항에서」)의 인고를 지닌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바다와 같은 지혜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지혜, 노자가 말한 上善若水의 심오한 깨달음과도 상통하는 함의를 지닌다.
3. 타락한 현실에 대한 풍자와 평화로운 세상에의 꿈
김영남에게 있어 현실은 전복의 대상이다. 집단의 시대에서 개인의 시대로 넘어온 이후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가짜 보편’인 상품들로 가득하고 대중문화가 판을 친다. 거리엔 온통 거짓된 것들과 추한 것들로 가득하며 앞을 가로막는 벽이나 문이 너무 많다. 현실은 너무 삭막하고 비대하고 차갑다.
참 이상한 세상이다 부풀린 가슴, 위장한 가슴, 순 껍데기뿐인 가슴들이 저렇게 거리를 당당하게 활보하는 것이.
저런 가슴들이 가짜라면 그것과 한 핏줄을 나누고 있는 입도 가짜이고, 여기에서 나오는 고매한 말도 전부 가짜임이 틀림없을 텐데, 우리는 왜 이렇게 가짜에 속고 살아야 하나? 더욱이 가짜를 만지면서? 가짜 선행도 따지고 보면 축 처진 가슴이거나, 모두 말라빠진 가슴으로 귀착할 텐데…
그의 삶.
가짜 가슴을 달고 다니는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한 사람이 큰 가슴을 덜렁거리며 걸어나오고 있다.
갑자기 세상도 덜렁거리고 있다.
―「요즈음 가슴들에는 가짜가 많다」 부분
화자는 여자들이 가슴을 예쁘게 보이려고 가슴에다 실리콘을 넣고 마사지를 하고 성형 수술하는 풍조를 말하면서 그 의미를 증폭시켜서 우리 사회 전반에 미만해 있는 거짓된 풍조를 풍자·고발하고 있다. 시인이란 언제나 진실을 추구하고 실상을 보고자 하는 자들이다. ‘말라빠진 가슴’을 숨기기 위해 ‘가짜 가슴을 달고 다니는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시인은 언제나 진실로 ‘큰 가슴’을 덜렁거리며 걸어나오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세상은 온통 ‘날카롭게 세운 손톱들’과 ‘뾰족한 손톱’들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 깎지 않은 손톱, 뾰족한 손톱은 손톱 이상의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아침 신문을 펼치고 나서 또 알았습니다. 날카롭게 세운 손톱들이 신문에 가득 들어 있었고, 그 손톱들이 나의 출근길까지 불안하게 했습니다. 상대방의 허점을 겨냥하고 있는 정치면의 손톱. 자신의 볼록한 배만 한없이 긁고 있는 경제면의 손톱. 세상의 상처를 다시 헤집고 있는 사회면의 굶주린 손톱. 그리고 직장에 얼굴 없이 존재하는 교활한 손톱들… 사실은 우리 집 그녀의 아픈 가슴도 언젠가 내가 그녀를 날카롭게 할켰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손톱을 깎기로 합니다, 부드럽고 예쁜 악수를 건네기 위해. 거울을 보고 한번 깎고, 책상 위에 꽂힌 꽃을 보고 한번 더 깎기로 합니다. 몹시 화가 났을 땐 조용히 성경을 한번 읽고 나서 깎기로 합니다.
―「틈만 나면 그것은 누군가를 노린다」 부분
우리 사회가 거짓으로 가득하다 보니 거기에는 온통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려는 인간들로 자욱하다. 그들은 ‘손톱’을 잘 깎지 않으며 뾰족하고도 날카로운 손톱으로 곳곳에서 마음이 여리고 착한 이들의 가슴을 할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너무나 부끄러움을 모르고 교활하며 윤리의식이 마비되어 있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부터라도 손톱 밑에 때가 끼지 않도록 손톱을 “바싹 깎”는다. 시인은 “부드럽고 예쁜 악수”를 건네고 싶어한다. “조용히 성경을 한번 읽고 나서” 손톱을 깎는다. 이러한 손톱을 깎는 행위는 양심에 거리낌없는 도덕적 삶을 추구하려는 화자 자신의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세상도 그렇게 순화되기를 갈망하는 소망의 표현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삶의 현실은 여전히 부패하여 생기가 없으며 지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비대하기까지 하다. 「아름다운 섬이 없다」라는 시를 보면 아주 적나라하게 그러한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카페의 여자들은 현실의 부조리와 비리에 대해서 버팅기고 반항하는 ‘지느러미’가 없으며, 부끄럼의 상징으로 돋아나야 할 ‘비늘’이 없다. 그러한 부정의 의식이 없으므로 만져도 파닥거리지 않으며, 그냥 얼빠진 모습으로 입만 뻐끔거린다. 그렇게 분별력이나 지조가 없다 보니 “탁한 물 속에서/ 아무 낚시나 덥석 물기나 하”는 것이다. 어디 카페 여자만 그렇겠는가?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 그 어느 분야에서도 이러한 인간 군상은 쉽게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 사회의 ‘內部’를 크게 열리게 하는 “몸통을 뒤트는 신선함, 그 파닥거림”의 부정의 몸짓이 못내 그리운 것이다. 이 시에서 ‘청정 바다의 徵表’인, 그 ‘비린내’란 바로 우리 사회가 되찾아야 할 참된 사회 분위기, 스스로 지조와 줏대를 지키며 부정하고 비판할 것은 올바른 목소리를 내어 지적할 줄 아는, 즉 사람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냄새, 생동하는 사회분위기와 사람다운 냄새를 의미하는 기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사회에 미만해 있는 거품을 제거하여 “날씬한 행정, 날씬한 사고, 날씬한 말…”이 자립하고 유통하는(「군살을 유의하자」) 그러한 세상을 향해 가도록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을 더럽힌 자들”은 “피박”을 씌우고 청산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설사를 하게 하자」) 그렇게 되지 않고서는 “이 땅 칠싸리” 인생들은 영영 희망이 없을 것이다. 김영남의 시에 나타나는 민중의 모습은 「이 땅 장흥 아저씨들 나라에서는」에 단편적으로 드러나 있다. 빈부간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날이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IMF 사태로 인한 경제의 악화는 우리네 삶을 더욱 궁핍한 지경으로 몰아넣었으며 하층민들의 삶의 기반을 해체하기도 했다. 이 시에서 보듯이 그들의 삶은 “익사 직전”의 상태에 있다. 이들에게 삶은 질곡 그 자체다. 아버지들은 공사판에 나가서 “어둠만 저 나르다 쓰러”졌으며, 어머니들은 “구멍난 살림 기우다” 파출부로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도시 빈민들의 비참한 현실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허덕이는 농민들의 고충도 시인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래서 시인은 이들이 장말 평화롭고 아름답던 본래의 농민의 모습을 되찾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모두가 들국화 詩人이 되게 하라」에서 시인은 농정의 실패로 인해 구조적 모순을 안고 신음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농민들에게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제대로 들리게 하고, 가을의 충만한 수확을 기약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농민들이 “더 이상 지는 잎에까지 상처받지 않”고 본래 상태로 돌아가서 자연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빚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기를 시인은 기원한다. 이러한 소망과 기원이 이루어지려면 물론 당국자들이 제대로 된 합리적 농정을 펴야 할 것이다. 시인은 궁극적으로 농부들이 자연을 일부로 돌아가서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한 아름다운 풍경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 시인에게는 유년 시절 농촌의 아름다웠던 기억이 남아 있기에 더욱 지금의 농촌의 부조리한 현실이 안타까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시인 자신도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평화롭게 살고픈 낭만적 귀농(歸農)에의 꿈을 안고 있다. 그에게는 “어둔 싹들을 이 세상으로 업어 낸” “아름다운 등”「땅 위를 기어가는 것들에는」)에 대한 추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소시민들의 꿈을 아주 낭만적이고도 목가적인 시풍으로 노래하고 있는 「草鄕」에서 화자는 각박한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내다버렸던 생각들을 다시 챙겨”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과 화해로운 조화를 이루는 행복한 삶의 이상을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 외에도 그의 시에는 잃어버린 고향에의 귀환, 즉 낭만적 귀향에의 꿈을 노래하는 시들이 많다. 그것들은 대개 여행시의 외피를 입고 나타나는데, 최근 시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목가적 귀향의 꿈을 담은 시편들과 추억을 향해 나아가는 낭만적인 여행시편들은 고를 달리 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아서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4.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다시 절망한다
김영남의 시에 취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앞에서 그의 시가 가볍고 재미있게 읽힌다고 했다. 그것은 장점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단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틀에 박힌 기교를 남발하여 형식에 있어서 타성에 젖은 느낌이 들게 하는 점이나, 심각한 고뇌의 깊이를 결여한 채 시가 너무 안이하게 전개되는 것은 문제라 할 수 있다. 그의 시 구절에도 나오는 것처럼 “눈물이 많은 영혼 속에서만 무지개는 뜨는”(「모든 고향에는 무지개가 뜬다」)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좋은 시에는 삶을 깊이 통찰할 때 얻게 되는 ‘비극적 장엄미’가 있는 것이다. 「슬픔도 가꾸면 재산이 된다」에서처럼 잘 승화된 슬픔의 정서, ‘옹이가 곱게 앉은 슬픔’은 언제 어디서나 ‘값비싼 蘭처럼’ 삶에 향기를 감돌게 하고 또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나아가 ‘주변을 깊고 넓게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위대한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즐거운 유희에 취하여 ‘슬픔을 방치’하지 말고 슬픔의 무게, 슬픔의 승화에 더욱 신경을 써야 더 좋은 시인으로 발전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간혹 언어의 긴장이 떨어지거나 시적 의장이 노출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그의 시 제목처럼 ‘입구가 숨겨져 있을수록’ 그것은 아름다울 것이며, 시인의 ‘연출은 눈에 띄지 않아야’ 효과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필자로서는 이 시인의 재능과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보다 진지한 자세를 견지하고 전진해주길 기대한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뼈저린 상처와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간다. 이러한 존재의 보편적인 아픔을 객관화하여 보여 주되, 「나무 밑동을 싸며」에서처럼 그것을 사랑의 ‘붕대’로 감아 감싸고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아갈 때 더욱 깊고 진한 시의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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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살아남기 ― 최금진(1970∼ )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통성명을 할 때
돌아와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일단 무조건 거만해야 한다
엔젤이라고 발음하는 너의 콩글리시에는 천사가 살지 않는다
(…)
젊어 고생은 사서 하는 것인가, 그렇다
고생은 너의 출세를 위해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니다
항복, 할복, 항복, 할복, 어떤 것이 행복을 위해 더 명예롭고 윤리적인가
학교를 그만둔다 해도 나무랄 사람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뿐이고
잉여인간, 너 같은 애들은 값싼 정부미처럼 창고에 넘친다
(…)
항복, 할복, 항복, 할복, 모든 선택은 성적순이며
지하철역에서 무장공비처럼 누워 자는 사내들도 한때는
전투적으로 국가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들
황달이 든 너의 얼굴과
고향에 지천으로 피던 민들레꽃이 심리적으로 일치할 때
결핍을 상징하는 그 노란색이 아지랑이처럼 자꾸 어른거릴 때
게임 오버, 넌 끝난 거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부모를 떠나 대도시로 유학 온다. 젊음과 희망을 무기 삼아 뿌리 내리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참 힘들다. 노력이 부족한 걸까. 그렇다면 더 힘을 내봐야지 생각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린다. 언제까지 전력질주해야 할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지쳐 간다. 이 시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여기 등장하는 젊은이는 대학 새내기이다. 대학에 낭만이 사라진 지 오래. 그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혼자 자취방에 들어가 잠을 잔다. 공부하고 돈 벌고 희망하고 절망하는 등 그의 24시간은 불이 꺼지지 않는 편의점만큼이나 바쁘다. 그런데 열심히 해도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너무 힘들어 학교를 그만둘까 생각해 보지만 딱히 대안이 없다. 누렇게 뜬 거울 속 얼굴을 보니 고향 마을의 민들레꽃이 그립다. 어린 시절 고향의 삶은 더 행복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 생각하니 사람들은 말한다. 패배자, 넌 이제 끝난 거야, 라고.
‘게임 오버’ 되었으니 이제 삶은 끝장난 것일까. 우리는 민들레한테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절망도 슬픔도 이 시의 목적은 아니다. 이 시는 슬픈 시가 아니라 화가 난 시다. 그리고 화를 현명하게 내려면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다. 시에 의하면 눈을 크게 뜨고 직시해야 한다. 나, 너, 우리, 사회, 시대에 대해 눈을 감지 말자, 마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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