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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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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    난해시와 보들레르 댓글:  조회:4512  추천:0  2016-01-02
알바트로스- 보들레르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삼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바다 위를 지치는 배를 시름없는 항해의 동행자인 양 뒤쫓는 해조를. 바닥 위에 내려놓자, 이 창공의 왕자들 어색하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놋대처럼가소 가련하게도 질질 끄는구나. 이 날개 달린 항해자가 그 어색하고 나약함이여! 한때 그토록 멋지던 그가 얼마나 가소롭고 추악한가! 어떤 이는 담뱃대로 부리를 들볶고, 어떤 이는 절뚝절뚝, 날던 불구자 흉내 낸다! 시인도 폭풍 속을 드나들고 사수를 비웃는 이 구름 위의 왕자 같아라. 야유의 소용돌이 속에 지상에 유배되니 그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방해하네.   Souvent, pour s'amuser, les hommes d'équipage Prennent des albatros, vastes oiseaux des mers, Qui suivent, indolents compagnons de voyage, Le navire glissant sur les gouffres amers. À peine les ont-ils déposés sur les planches, Que ces rois de l'azur, maladroits et honteux, Laissent piteusement leurs grandes ailes blanches Comme des avirons, traîner à côté d'eux. Ce voyageur ailé, comme il est gauche et veule! Lui, naguère si beau, qu'il est comique et laid! L'un agace son bec avec un brûle-gueule, L'autre mime, en boitant, l'infirme qui volait! Le Poète est semblable au prince des nuées Qui hante la tempête et se rit de l'archer; Exilé sur le sol au milieu des huées, Ses ailes de géant l'empêchent de marcher.       “어린 시절부터 고독감./ 가족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특히 친구들 속에 끼어서도―/ 영원히 고독하도록 운명지어진 숙명감.” 1821년 출생한 샤를 보들레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많은 글에서 자신의 내면에 동거하는 두 개의 마음, 이중성에 대해 썼는데 그것을 “생명력, 그리고 쾌락에의 매우 격렬한 기호”라고 칭했다. 보들레르의 비교적 행복했던 초년은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생생한 빛”이었다. 적어도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루이 16세의 고가구, 고미술품, 집정 정부, 파스텔화, 18세기의 사교계”라는 어휘들로 꽉 차 있었으나,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앳된 사랑의 푸른 낙원”의 시간은 종료되었다(보들레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서른다섯 살의 어머니는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자크 오픽과 재혼을 하게 된다.)   라틴어 작시(作詩)에 뛰어나 일찌감치 시를 짓는 재능을 발휘했던 보들레르에게 파란이 일기 시작한 것은 다니던 파리의 명문 루이 르 그랑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수업 시간에 급우가 돌린 쪽지를 제시하라는 선생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쪽지를 찢어 삼킨 반항적 언동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보들레르의 기질은 아주 달라진다. 보들레르는 개인 교사의 지도를 받아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파리 법과대학에 등록했지만 자유분방하고 구속 없는 생활이 본격화되었다. 문학청년들과의 교류, 거리의 여인 사라(Sarah)와의 만남과 성적 쾌락에의 탐닉, 그리고 빚에 쪼들린 생활이 이어졌다. 무절제한 생활을 하다 빚에 몰리게 된 보들레르를 지켜보던 형 알퐁스가 그 사실을 의붓아버지에게 알렸고, 이에 가족회의가 열려 보들레르는 1841년 1월 인도의 캘커타를 향해 떠나는 남해호에 실려 강제로 먼 항해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덥고 푸른 나라의 끔찍한 우울”을 경험하게 했던 이 길고 지루한 바다 항해는 보들레르에게 바다 이미지를 생성시켰고, 열대 풍경에의 매료 등 이국적 취향을 안겨 주어 그의 심성과 시심을 일변하게도 했다. “내 아이, 내 누이여/ 생각해 보렴/ 거기 가서 함께 사는 감미로움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으리/ 그대 닮은 그 고장에서!/ 그곳 흐린 하늘에/ 젖은 태양이/ 내 마음엔 그토록 신비로운/ 매력 지녀/ 눈물 통해 반짝이는/ 변덕스런 그대 눈 같아”라며 다른 나라 땅으로 떠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노래한 시 ‘여행으로의 초대’의 탄생도 이때의 경험이 도왔다.   무엇보다 시 ‘알바트로스’는 이 시기 항해 중에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에 승선해 있던 한 군인의 소총에게 잡힌, 몸통 3미터가 넘는 이 거구의 바닷새 알바트로스가 수부들에 의해 질질 끌려다니는가 하면 온갖 방법에 의해 모진 박해에 시달리는 일이 그의 목전에서 벌어졌다. 보들레르는 이 충격적인 일화를 토대로 알바트로스에 “지상에 유배당한”, ‘저주받은 시인’의 모습을 투영했다.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의 비조(鼻祖)였으며(그의 시 세계는 베를렌, 말라르메, 랭보 등에게로 승계된다), “옛날의 파리는 이제 없네(아! 도시의 형태는/ 인간의 마음보다 더 빨리 변하는군)”라고 노래한 고독한 근대적 만보객이었다. 범박하게 말해 이 지상의 삶을 ‘병원’에 비유하며 현대와 도시의 타락과 부패를 노래한 보들레르의 생애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 몇 가지가 있다. 우선 한 극장 소속 단역배우였던 잔 뒤발(Jeanne Duval)과의 사랑을 들 수 있다. 보들레르가 흑백 혼혈 여성이었던, 질병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리고 있던 그녀를 만난 것은 먼 바다로의 항해를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보들레르에게 죽음과 방탕의 인자를 심어 준 잔 뒤발은 보들레르의 시에서 “신성한 요술쟁이의 막대기 끝에서/ 박자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기다란 뱀”에 비유된다.) 그녀는 보들레르에게 “유일한 오락”이요, “유일한 즐거움”이요, “유일한 친구”였으나, 보들레르를 “쇠사슬에 얽매인 노예처럼/ 노름판을 못 떠나는 노름꾼처럼/ 술병을 못 놓는 주정뱅이처럼” 붙들어 매어 놓았다. 보들레르는 많은 돈을 그녀에게 바쳤고, 결국 1844년 법원으로부터 금치산 선고를 받게 된다. (이후 보들레르는 돈을 보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줄기차게 보낸다.) 보들레르 시에 등장하는 육체에 대한 관능적 탐닉, 악마적 어투, 사디즘의 이상성욕 등은 뒤발로부터 상상적으로 창조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1857년 출간된 시집 [악의 꽃]은 보들레르에게 엄청난 불행과 시련을 안겨 주었다. “납골당과 도살장의 구역질 나고 냉랭한 시, 사상으로 이루어진 한심스러운 빈곤” 등의 혹평이 쏟아졌으며, 외설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시집이 압류당하기도 했다. 여섯 편의 시 삭제, 300프랑의 벌금 처분도 내려졌다(이에 대해 보들레르는 한 편지글에서 “저는 제가 유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오로지 악에 대한 공포와 혐오만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라고 썼다.) 플로베르가 “아! 당신은 존재의 지겨움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격려를, 위고가 “예술이란 창공과 같은 것이어서 무한한 분야입니다. 귀하께서는 최근에 그 점을 증명해 보였습니다.”라는 지지와 신뢰를 보냈으나 세상의 혹독한 평가는 보들레르를 ‘저주받은 시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물론 보들레르는 초판 텍스트에서 삭제된 여섯 편의 시를 대신해 서른다섯 편의 시를 보강해 1861년 [악의 꽃] 재판을 발간한다. 보들레르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이 책(재판본)은 모든 것에 대한 저의 증오심과 혐오감의 증거로 남게 될 것”이라고 썼다. 에드거 앨런 포와 바그너에 대한 애정도 보들레르의 생애에서 중요하게 놓이는 대목이다. 보들레르는 포의 작품을 대면한 후 자신이 꿈꾸던 주제와 문장들이 작품에 구현되어 있음에 놀라움과 황홀감을 느껴 포의 전 작품을 완역하기로 결심했고, 1860년 음악회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 순간 생의 상승감을 느끼며 그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보들레르의 말로는 참담했다. “아무 곳이라도 좋소! 아무 곳이라도 좋소!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이라고 절규하던 그는 두통, 신경쇠약, 숨가쁨, 구토, 신체 마비, 실어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1867년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숙명의 사닥다리 위에서 아래까지 가득한/ 불멸의 죄악의 지겨운 광경”을, “단조롭고 작은 이 세계”를, “우리 감옥의 권태”를 다 벗고 눈을 감고 말았다. 한 역자의 지적처럼 보들레르는 “고뇌와 이상, 악덕, 죄악, 갈증, 찢겨진 영혼의 울부짖음”을 불후의 역작인 한 권의 시집에 불어 넣었다. 그리고 그 시집을 이 요동치는 세계, 이 선상(船上)에, 수부들에게 붙잡힌 알바트로스처럼 남겨 놓고서 떠나갔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4.9~1867.8.31)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에 품행 문제로 학교에서 퇴학당했으나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줄곧 작가가 되고자 했다. 성년이 되어 의붓아버지가 남겨 준 재산을 상속받은 뒤에는 센강의 생루이섬에 거처를 두고 댄디즘의 이상을 추구하며 탐미적 생활을 즐겼다. 흑백 혼혈의 무명 여배우 잔 뒤발을 알게 된 뒤 관능적 시흥을 중요하게 여겼다. 상속받은 유산을 거의 다 낭비한 뒤에는 법정후견인이 딸린 준금치산자가 되었다. 스물네 살에 미술 평론가로 데뷔하였고 문예비평, 시, 단편소설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문단에서 활약하는 한편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랭보 등 상징파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낭만파, 고답파에서 벗어나 인간 심리의 심층을 탐구하고 고도의 비평 정신을 추상적 관능과 음악성 넘치는 시에 결부하였다. 대표작으로 [악의 꽃]이 있다.     글 문태준  1994년 으로 등단.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산문집 [느림보 마음] 등이 있다.   [출처] 보들레르/ 알바트로스|작성자 헌책  
1709    난해시를 읽는법 댓글:  조회:6927  추천:0  2016-01-01
난해한 시를 읽는 법            어려운 시를 읽는 법 / 신준봉       신준봉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문학 위기론’만큼 자주 듣는 말도 없다. 3년 전 일본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떠오른다. 근대문학의 종언을 얘기하며 한국을 사례로 들어 국내 문학판이 시끄러웠다. 1970∼80년대, ‘소심한’ 정치를 대신해 사회현실에 개입하며 번창했던 한국문학이 90년대 들어 정치적 발언권을 내준 뒤 쇠퇴했다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  위기론은 30여 년 전에도 있었다. ‘문학에 대한 경멸과 白手(백수)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 깊어져 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기각성의 몸부림이다.’ 비장한 글이다. 평론가 김윤식과 고(故) 김현이 함께 쓴 『한국문학사』(1973년) 서문의 한 대목이다. 가라타니의 진단대로라면 문학이 가장 잘 되던 시기에 위기론이 일었던 것이다. 어떤 위기론은 과장 혹은 엄살인 것일까.  요즘의 위기론은 문학의 난해함 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난해함은 소설보다 시에서 두드러진다. 가뜩이나 시 독자가 줄어든 판에 문학과지성사·창비·민음사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학출판사에서 나오는 시집들이 점점 읽기 어려워지고 있다. 한 번 뜨거운 맛을 본 독자는 조심하게 마련이다. ‘난해’가 ‘위기’를 재촉하는 일종의 상승작용이다. 오죽하면 서울대(국문과) 명예교수인 오세영 시인은 최근 일부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難解詩)를 “정신분열적”이라고까지 비판했겠는가.  문제는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 선호가 질타로 해결될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에 예민한 젊은 시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스스로 궁핍을 자초하면서까지 난수표 같은 난해시에 매달릴 게 뻔하다. 방법은 하나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야 한다. 난해시는 한편으론 한국 현대시를 풍성하게 하는 귀한 존재 아닌가.  시인 K에게 난해시 감상법을 물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정확하게 보기로 소문난 이다. 그에 따르면 난해 시집은 우선 ‘속독(速讀)의 대상’이다. 그는 실내자전거 위에라도 앉아 시집 전체를 30∼40분간에 걸쳐 빠르게 훑는다. 이때 무언가 마음을 건드리는 게 있으면 계속 읽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둔다. 자기에게 맞지 않는 시집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이 단계를 통과했다면 다음은 각개격파. 시 한 편을 앞에 두고 어느 시간대인지, 장소는 어디인지, 시의 화자가 무언가에 쫓기는 상태는 아닌지 등 구체적인 시의 정황을 그려보려고 노력한다. 이게 잘 안 된다면 단어 하나하나를 소리 내 발음하며 의미가 분명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읽는다. 이렇게 해서 시 한 편을 온전히 이해한 후 다음 시로 넘어간다.  K는 시집 한 권 읽는데 예닐곱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장편소설 한 권 읽는 시간이다. 시집이 어떤 기쁨을 주기에. “세계가 넓어지고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한다. 그의 감상법을 실천해보고 싶어진다.      _중앙일보    곁에     심지아           머리카락은 잠들어 있다 공기 중에서 산호처럼 흔들렸다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쪼개진 석류의 아름다움처럼 꿈의 틈새가 벌어진다 손가락은 꿈에 잠긴다     암실에는 물이 흐른다 네 혈관 속 물고기가 피워 올린 노래들 돌멩이의 형상으로 물속 깊이 가라앉는다 우주의 하얀 잠속에서 부푸는 이야기처럼 돌멩이가 자란다 물결은 돌의 꿈을 방문한다 꿈이 느리게 용해된다 손가락은 물의 뿌리처럼 돌멩이를 감싸 쥔다 네 몸속 심장처럼     내 귓속 초록 밀밭을 불태우며 가꾸는 것들 네 심장 소리는 모스부호처럼 외롭고 단단한 문장으로 도착한다 너는 물기 많은 계절을 부른다 나는 장님처럼 또렷하고 모호한 너의 살갗을 쓰다듬는다                                   —《시산맥》2011년 여름호   ----------------- 심지아 / 1978년 전북 익산 출생. 아주대 경영학부 졸업. 2010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  그게 외로움인 줄 모르고     이규리       시멘트와 물을 비벼 넣으니 단박에 벽이 생기고 벽을 사이로 순식간에 안과 밖이 나왔다   단단하구나 너에게 그게 외로움인 줄 모르고 비벼 넣었으니 어쩌자고 저물녘을 비벼 넣어 백년을 꿈꾸었을까   벽이 없었다면 어떻게 너에게 기댈 수 있었겠니 기대어 꿈꿀 수 있었겠니   벽이 없었다면 날 어디다 감추었겠니 치사한 의문들 어떻게 적었겠니   받아주었으니, 기대었으니 그거 내 안으로 들어온 밖 아니겠니 밖이 되어 준 너 아니겠니                                   —《문학마당》            [평론] 난해 시에 대한 소회    홍형표    그러니까 난해 시를 추구하는 시인들 대단하고 경이롭다. 사실 난해 시만큼 쓰기 쉬운 시도 없다. 자신만 아는 은유로 빤지르르하게 처바르면 그만이다. 아니다. 자신조차 몰라도 된다. 어차피 남들도 모를 테니 상관없다. 문제는 또 있다. 난해 시를 평하는 비평가다. 그들의 비평도 난해하긴 매한가지다. 그 또한 그들만 알 테니 말이다. 평범한 시를 쓰는 사람들은 난해 시를 깔보지 않는다. 반면, 난해 시를 쓰는 사람은 평범한 시는 시도 아니라며 코웃음을 친다. 평범한 시는 평범한 시 끼리 난해 시는 난해 시 끼리 어우러지면 그뿐 진짜, 더 큰 문제는 난해 시가 아니라 쓴 사람의 자세다. 한번은 난해 시를 흉내 내 봤더니 난리다. 그것도 30초 만에 쓴 글이다. 그래서 난, 난해 시를 안 쓴다. 난해 시라는 것이 많이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척 시침을 떼는 것 같아 쓰기 싫다. 솔직히 못쓴다. 재미도 없고...  이거 또 와락 할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火 超 시는 쉬워야합니다  쉬우면서 깊이가 있어야합니다  난해한 시는 혼자만의 은유입니다  시는 혼자 보려는 글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읽어주는 상대가 있습니다  상대를 어렵게 괴롭히며 읽어주길 바랍니다  그런 글 곤란하지요  안 보면 그만입니다.  제멋에 사는 것이니까요  더러는 난해시가 수준작으로도 대접 받지요  추천한 분이 과하게 척 하다가 그러는 건 아닌지 아리송하기도....ㅎㅎ  그럴리는 없겠지만요  모르는 걸 어찌합니까...ㅎ  퇴근해야지요.      낭만사유 글을 쓰다가  蛇足 같은 느낌이 들어서 가지를 잘라 냈더니 줄기만 남더군요 줄기만 있으니 읽을거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족을 붙여 봤더니 그럴싸하게 보였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박커스     난해시 읽는 재미에 푸욱, 빠져보십시요,^^  참 난해하게 재밌습니다.홍시인님.(농담,,지송)^^*  피카소의 그림과,,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은 쟝르는 틀리지만  비슷한 맥락을 지닌 난해한 그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쉬운 그림을 못그리는 분들은 아니구요.^^  애들이 설명좀 해 달라고 하면 참,,,화장실 가고 싶어집니다.  어려워서...ㅎ~ 넘, 조잘 거렸습니다.시인님.  즐거운 한주 보내십시요..건강은 필수과목입니다..^^      꿈속의 꿈   난해 시라는 것이 많이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척 시침을 떼는 것 같아  쓰기 싫다. 솔직히 못쓴다./ 그 반대일 수도 있지요....^^  한국시의 근간은 서정시 라고 합니다.  난해시도 역시 시의 한 쟝르라고 볼 수 있지만 서두,  쉽게 읽혀지고 감동의 여운이 짙게 남는다면.  더 기억에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를 더듬는 다는 것.  골조든 가지든,  시를 쓴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노안이 와서, 쉽게 쓰기도 읽기도 어렵습니다.^^ 난해시든, 서정시든, 역사시든, 철학 시든, 선시든.....  암튼, 좋은 시는 좋은 마음과 생각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우리 홍형표님의 좋은 작품 잘 감상하고 물러갑니다.  암튼..............^^      오영록     참 어려운 화두지요.. 시인님.  난해시를 써야 문학으로 인정받는  구어를 쓴다고 결코 가벼울 수도  깊이나 낮을 수도 없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시는 쉽게 읽혀야 하며  그래야 감동이 생기든 말든 하겠지요  시인도 이해할 수 없는 시를 써 놓고  독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시란 시인이 되서어 자연 발생적 시상을 가지고  기술적 기교로 감을을 돋우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그저  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혼자만의 시라면  공상이나 망상이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성경/불경/시경/3경중 시를 작하는  사람들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는 잘 모르나  정말 공감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존경합니다. 홍형표 시인님...      홍형표   네... 그렇습니다. 평범 속의 비범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동감하는 말씀이지요.  복잡 난해한 시를 쓰는 만큼 조금만 더 깊이 생각을 기울인다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지요.  공감으로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낭만사유 시인님 가지가 무성하 건 잘라 내 건  중요한 건 소통이겠지요. 소통의 부재를 노린다면  구태여 시를 택할 필요가...  차라리 입 꽉 다물고 아무 말 안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저의 짧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빠지고 싶어도 뭘 알아야 빠지고  추상화 것도 뭘 알아야 보겠죠.  그냥 편하게 살겠습니다.  사실 난해의 대표 시인 이상의 시가 누구에게 감동을 줬습니까  누가 이상의 오감도를 보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켰습니까  마찮가지로 피카소의 추상화를 보고 누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누가 흥분으로 몸을 떨었겠습니까.  물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아주 아주 소수의 이방인들 ...  걍, 저의 모자란 생각이니 무지의 소치라 여겨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커스 시인님 언제 쪼~옥 할 날 있겠지요. 좋은 시는 좋은 마음과 생각// 바로 그겁니다.  난해 시든 평범 시든 무에 상관이 있겠습니까.  다만, 인격, 성품을 말함이지요.  물론 저도 한참 못 미칩니다. 그러나 적어도  행동은 미흡할 수 있으나 가슴만이라도 정의로 왔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정의, 별거 아닙니다.  타인을 업신여기지 않은 마음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러한 것도 물론 저만의 생각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말입니다.  여러모로 좋으신 말씀 감사합니다.  깊은 마음을 지니신 우리 꿈속의 꿈 시인님 참, 공감 하신다면서, 감을을//이케 난해한 글을 주시면  저 보고 어쩌라는 말씀이신지^^*  글구, 존경은 제가 진심으로 시인님을 존경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게 그러시면 복수하시는 게지요.  뭐 그런 복수라면야 얼마든지 지요.  하지만, 전 시인님께 그럴만한 인물이 못되옵니다.  담 부턴 그런 말씀일랑 삼가주세요.  그리고 그 말씀은 저만의 특허품이니 사용금집니다. 또 그러시면 놀리는 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옥천 김선근   시인들이 모이면 꼭 약방의 감초처럼 말하는 것이 난해시입니다  저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요  저는 시력이 짧아 쓸 수도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대충 훑어보는 정도지요  제 생각으론 보다 높은 상상력과 독특한 것을 추구하는  신춘문예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정시다 난해시다 무엇이다 하는 것은  시인의 입맛에 따라 꼭 김치가 있는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  당연히 포크질을 해야 식사한 것 같은 사람  취향에 따라 식성이 다르듯 서로 누가 옳다라  이것이 진짜다라 강요하지 말고  공존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걱정되는 것은 시인들도 잘 해석 못하는 시를  스피드 시대에 일반 독자들이 해석하고 공감할 수 있겠느냐  과연 시는 시인들만의 소유물인가  일반대중들이 쉽게 시와 교감하며 가까워 지겠는냐 하는 것이지요  그나저나 저와 같이 쉽고도 단박에 시를 쓰는 사람으로선  난해시를 쓰는 시인님들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제 눈에는 편한 길을 놔두고 암벽을 타며 모험과 도전을 즐기며  협착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쯤 꼭 생각해 보야할 시인들의 화두인 난해시에 대한 글  시인님 덕분에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한드기   요즘 공부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매 댓글에 보면, 저같은 사람이야 어쩌고 저쩌고 하시면서두...  필력이 속일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ㅎㅎ 저는 요즘 시집 한 두어 권 더 보았더니  저 스스로 시쓰기가 그냥 겁납니다. 시 앞에 천만 겹이 있다면 이제 한두 꺼풀 벗겨진 것 같은... 시평은 생략하겠습니다.  시심을 오독할 것도 같고...  아무튼, 관심 항상 가는 우리 홍 시인님. 건안, 건필 하시옵소서.  이만 물러갑니다.      홍형표   네... 김선근 시인님 반갑습니다.  제가 뭘 알아서 난해시 운운하겠습니까.  다만 저의 좁은 생각을 나름 피력한 것 뿐이지요. 전 그렇게 생각 합니다.  특정인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다면  그 시는 시로서의 가치를 상실 했다고 봅니다.  모름지기 시는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는 덕목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순전히 모자란 이 사람의 짧은 견해 일 뿐입니다. 저는 난해 시를 비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진 각자의 몫에 달려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형표   글쎄요...제가 공부를 전혀 안 한다고 하면  믿으시려나. 아님 무장 많이 한다고 하면 믿으시려나.  건, 중요치 않구요.  저두 요즘 한드기 쉰님께서 뭔가 변화를 추구하시는 듯한  느낌을 강렬하게 받고 있습니다. 두어 꺼풀 벗겨 내셨으니 나머진 시간문제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겹의 표지도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웅숭깊은 시를 꺼내실 것 같으신 시인님과는  비교할 바 아니라 생각합니다. 늘 관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한드기 시인님 건강만한 것도 없겠죠.        좋은 시는 쉽게 읽히는 시이고, 더좋은 시는 어려우면서도  잘 이해가 되는 시일것 같습니다. 간혹 요즘 젊은이들의  전매특허처럼 어렵게 갈긴 시들은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다가도 한 번 눈길을 주곤 합니다만 쉽지가 않습니다.  나름 시공부가 덜된것 같기도 합니다.  시는 너무 숨겨서도 안되고 너무 드러내도 안되며  감칠맛나게 적당히 드러내고 숨기면서 독자들의 약을  바짝 바짝 올려야 결국에는 무릎도 치면서 쾌감을 주지  않을까요, 저는 어려운 시보다는 울림이 있는 시를 선호  합니다만 결국은 시도 간을 잘 보아야 맛이 좋을 것 같습니다. 2011-08-01     청둥배락   쨘~~~ 재미있는 토론.....ㅋ 난해시를 잘못 보고 .. 만해시라고 읽었네용. ㅎ  만해시는 쉽게 읽혀지는데 뭔 소린가.... 오해 할뻔.  제 눈이 난독증인 것 같습니다. 난해하면 안 읽으면 되죠.  골 아프게 왜 읽어요? 수능시험에 나오는 것도 아닌뎅.  허기사 수능시험에는 그런 시 안 나오기는 하지만요. 난해한 시도 제대로 된 시가 있긴 있더군요.  느낌으로 딱 오잖아요. 뭔가 말을 하고 있긴 있구나 하고요. 다만 악성버전시라고..... 일부러 뿌옇게 안개 뿌리고 나가는 시...  그건 좀 그래요. 일종의 사기죠. 그렇지만 작가 당사자가 나타내려는 메타포와 내 해석된 메타포가 일치되지 않아서  난해하게 느끼는 경우는 흔한 거 같습니다. 저는 쉽고 깔끔하고 팍팍 그림을 찍어내는 듯한 시가 좋습니다.  사회적 공감대가 넓게 형성될 수 있는 시라고 할까..  그게 좋습니다.^^      오정자   아프리카 사람들 백설공주 이해 못해요. 눈(雪)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들에게 말하려면 곰팡이(그들에게 제일 희다고 각인된 사물)공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나 개인의 취향까지 감안하는 것 중요합니다. 상식에 어느 정도 걸맞으면 통과.  단, 일반인들이 봤을 때 저들만의 리그다 하는 소린 안 들어야 할 것 같네요.^^      홍형표   시에는 핵심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라 할지라도 핵심이 분명하면 잠시 이해를 미루더라도  언젠간 마음을 잡아 당기기 마련이지요.  어렵기만 하고 핵심마저 불분명 하다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디카프리오 시인님께서 바른 정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변태 과정을 거치며 논리가 아닌 체험으로 알아가는 것이겠지요.  시원한 해답을 주신 디카프리오 시인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쨘, 하시며 정의의 망토를 펼치시고 방문해 주신 청둥 어르신  저도 이해하기 쉬우면서 속 깊은 시를 좋아합니다.  제 능력의 한계로 하여 더는 깊은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시인님의 구수한 입담 같으신 시에 마음이 많이 끌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무더위에 강건하시고 평안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청둥      홍형표   이크, 그래요 머...  제 글중에 가장 긴 대끌을 달아 주신 우리 오정자 쉰님  부드러운 깔침을 놓아 주셔서 기분 좋습니다.  눈을 처음 본 아프리카인들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맞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프리카인들의 사고방식을  누가 이해하고 이해 시킬까요. 문화나 개인의 취향까지 감안하는 것 중요합니다. // 물론입니다.  그래서 저를 위시한 많은 분들의 문화나 취향을 이해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제 말에 어폐가 있었다면 용서 하시구요. 우리 흠모하는 오정자 쉰님의 방문에 저는 그저 어깨가 덩실덩실 합니다.  왜 있잖아요 걍, 이유없이 좋은 것  감사합니당.....      최준건   시는 타인에게 읽혀질려는 의도 이외에  자신의 내면을 담아내는그릇으로 쓰여지는  경우도 있답니다  잘보고 갑니다...     이종원   세상은 너무나 많이 빠르게 변화합니다.  그 중에도 진리는 변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요.  화자는 독자에게, 독자는 화자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서로의 마음과 배려가 그 폭을 좁히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 시단의 화두!!!!  난해시에 대하여 깊은 고찰의 울림 또한 깊습니다.  홍형표 시인님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난해시는 가라, 극서정시 들고 나온 60대 시인 셋    [중앙일보] 2011년. 조정권·이하석·최동호씨 새 시집 “언어 최대한 줄이고 행간 넓혀” 나란히 시집을 낸 최동호·이하석·조정권 시인(왼쪽부터).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누군가는 말해야 하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게 됐다.”  예순 줄에 접어든 중진 시인 세 명이 뭉쳤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너무 어려워 독자들이 시에서 멀어지고 있다며 ‘읽기 쉬운’ 시집을 나란히 냈다. 조정권(62)·이하석(63)·최동호(63)씨가 그들이다. 각각 시선집『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상응』『얼음 얼굴』(서정시학)을 ‘서정시학 서정시’라는 이름을 달고 냈다. 지향점을 짧고 알기 쉬운 ‘극(極)서정시’라고 규정했다. ‘서정시’ 앞에 ‘극’이라는 문패를 붙인 것은 언어를 최대한 줄이고 압축하되 행간의 의미가 넓고 깊이 있는 시를 써보겠다는 뜻이다.  2000년대 중반 출현해 ‘미래파’의 기치 아래 결집한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難解詩)에 대한 저항감은 시단에서 그리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동료 시인은 물론 광범위한 시 독자를 상대로 짧은 시 쓰기 운동을 벌이는 ‘작은詩앗·채송화’ 동인들도 난해시에 대한 거부감에서 출발했다. ▶  세 명이 발의한 극서정시 운동은 문학전문 출판사를 거점으로 하고 있어 보다 집중력이 느껴진다. 출발부터 젊은 세대와의 대립각을 명확히 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15일 기자간담회에서 최동호 시인은 “4월 말이나 5월 초 김종길·오세영·유안진씨의 시집 세 권을 나란히 낼 계획”이라고 했다. 중량감 있는 시인들을 자신들의 운동에 계속해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조정권씨는 “반드시 세대간 대립으로 보지는 말아달라. 요즘 시의 언어가 너무 과소비로 치닫고 있어 언어의 경제를 발휘하는 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극서정시의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최동호씨의 ‘얼음 얼굴’ 전문이다.  “거품 향기, 찬 면도날/출근길 얼굴/저미고 가는 바람//실핏줄 얼어, 푸른 턱/이파리 다 떨군/나뭇가지//낙하지점, 찾지 못해/투명한/허공 깊이 박혀//눈 거품 얇게/쓴/홍시 얼굴 하나”. 신준봉 기자              [평론]난해한 작품을 난해하다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지?    난해한 작품을 난해하다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하지?   "난해시는 비평가가 제 안목을 벗어나는 시에 가하는 가장 손쉬운 복수라고. 가장 손쉬운 복수이면서 가장 무책임한 진단이 또한 난해시라는 용어다."(문학동네, 2009 가을호) 한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물론 잘못된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조금은 우스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잘 읽지 않는다. 물론 소설을 포함한 우리 문학작품이 몇몇 성공을 거두는 특정 작가의 작품이 아니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는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중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난해하다라는 이야기를 쉽게 하게 된다. 물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그의 숨은 소통자들을 미리부터 차단하는 효과를, 난해시는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저 시인의 평가는 옳다고 할 수도 있다. 난해하다는 평론가의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하기 싫어하는 독자들에게 "시를 읽지 않는 것에 대한 좋은 핑계"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들의 책임도 없지는 않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노래하는 것이, 개인적인 서정을 노래하는 것이 시라고 하더라도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언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화를 거스르면서 까지 실험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이 있다. 아방가르드 적인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도 좋다. 그리고 실험이라고 말하는 것도,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나는 궁금하다. 평론가들이 난해시라고 말하는 것이 일종의 폭력이라면, 그대들은 실험정신, 도전, 혁명, 아방가르드 따위의 말로 독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문학의 위기는 독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잘난 작가들의 수준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대중을 포용할 줄 모르는 작가들이 초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려운 시, 어려운 소설, 당신의 생각. 물론 다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존중할 수 있다. 그렇지만 평론가의 말 한마디가 없으면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한 시, 소설 따위 대중은 좋아하지 않는다. 난해시라는 폭력이 비평가의 무책임한 폭력만은 아닐것이라고 생각된다.            [문학칼럼] 陽谷 조수형 시인의『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     [문학칼럼] 陽谷 조수형 시인의『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을 읽고                        陽谷 조수형 시인의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 을 읽고                                                       시인 김형출    陽谷 조수형 시인의 첫 시집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이 세상에 태어났다. 시집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그 심정은 책을 출간한 사람 많이 안다. 첫 시집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이며 긴장했을까, 경험에 의하면 책 출간 뒤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시집을 다시 읽어보면 시집 한 권 안에 내 보일만 시 한 편 없다는 느낌이 들 때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만큼 시에 눈 뜬다는 희소식일 수도 있는 것, 그래서 위안이 된다. 그런데 조수형 시인의 첫 시집은 서정을 노래한 정겨운 시어들이 오랜 친구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조수형 시인은 늦깎이에 등단한 열정적인 시인이다. 사관학교 동기요. 문학 카페 회원이며 동료 시인이기도 하다. 군대생활 할 적에 같은 부대에서 몇 개월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당시는 우리가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시 짓는 데는 등단 경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중요하지는 않다고 본다. 등단 경력보단 열정이 더 중요하다. 시단에는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이름 없이 사라져가는 시인이 많다. 그래서 조수형 시인은 훌륭한 시인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조수형 시인의 시 세계는 서정적이면서 난해하고 난해하면서 이해하기 쉽게 압축해서 좋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에 대하여 그 누구도 섣불리 단정 짓지는 못한다. 그만큼 시를 이해하고 시 맛을 알기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요즈음 시도 유행을 타는지 서정적인 짧은 시는 꺼리는 경향이 짙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난해한 시를 써야 만이 좋은 시인지 묻고 싶다. 시인지 산문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이상한 난해한 시들이 활기를 친다. 난해한 시가 다 잘못되었고 나쁜 시란 뜻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특정 ‘낄끼리 문화’를 만들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한국 문단에도 서정적인 시맥을 이어받기 위해 원료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문제는 문학을 하는 사람,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 그리고 독자에게도 해당한다.  조수형 시는 화려하지도, 절대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순박하고 절박한 미를 추구한다. 나는 조수형 시인의 시집 제목 『속주머니 숨겨둔 사랑』에 대해 호기심과 상상력 때문에 며칠 골머리를 않았다. 그래서 우선 목차를 펼쳤다.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이란 시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대부분 시집은 시제 중에서 하나를 골라 시집 제목으로 선정한다. 시를 감상하기 전에는 좀 아쉬워했다. 조수형 시인의 시집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 을 몇 번 읽고는 고개가 끄떡여졌다. “아, 그렇구나!”   속주머니는 옷의 안쪽이나 속옷에 단 주머니를 말한다. 하찮은 물건은 속주머니에 절대로 넣어 두지 않는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속주머니에는 꼬질꼬질한 지전 몇 장을 꼬깃꼬깃 숨겨져 있다가 응석 부리는 손자, 자식에게 꼭 필요할 때 사랑으로 내밀곤 했다. 조수형 시인의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은 할머니 어머니 같은 사랑 외에도 호기심과 상상력을 발동하게 하는 숨겨둔 사랑이 가득할 것이다. 그 사랑은 조수형 시인만이 알고 있다. 독자는 유추나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다. 속주머니에 숨겨둔 사랑은 아마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이 아니까 생각한다. 그 사랑이 압축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 바로 '너희'와 '너'일 것이다.   조수형 시인은 서각이면 서각, 서예면 서예, 전각이면 전각, 한국화면 한국화 등 다재다능하다. 이 모든 것이 시와 연관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조수형 시집에 대한 시평을 해볼까 한다. 조수형 시인의 첫 시집 출간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며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독자에게 사랑받은 시인이기를 여망 한다.            [시창작론]난해시를 위한 변명 입춘 -증상을 앓는 허공 계절은 가장 먼저 허공에 도착한다 허공은 증상을 앓다가 새 떼를 날린다 달을 지나가는 까만 점들의 ㅅ,자 행렬이 잦을 때 계절이 바뀌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욕하는 것은 용기   별로 감수해야 할 위험도 없는데 비장하게 욕하는 것은 버릇 이 말을 트위터에 올렸더니 갑자기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리트윗을 했다(자랑질이다). 덕분에 팔로워가 1700명을 훌쩍 넘었다. 비장할 것도 없는데 비장한 각오를 밝히거나 택도 아닌 일에도 심각해 하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솔직하지 못한 행태를 비판한 것인데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솔직하다면 유머도 감동이고 까부는 것도 보기 좋다. 시의 솔직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솔직한 시는 아무리 어려워도 용서가 된다. 솔직하지 못한 시는 아무리 쉬워도 용서가 안 된다. 심지어 화가 난다. 이것이 단순한 나의 시론이다. 땅이 진동하고 해일이 일 때 그리고 폭풍우가 몰아쳐 인간의 마을을 휩쓸 때, 인류는 그 공포스러운 사태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왔다. 사태 속에서 때로 신의 의지를 읽기도 하고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인류의 정신은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삶의 의미는 깊어졌다. 신(우주, 대자연)은 여러 가지 기호로 자신의 뜻을 끊임없이 인간들에게 알려왔다. 난해한 기호일수록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의미를 파악하고 난 뒤의 인류의 이성은 늘 한 단계씩 고양되었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해석할 필요도, 깊은 의미도 없는 일상적인 중얼거림을 토하고 싶다면 굳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의미를 드러낼 필요는 적다. 시는 신(우주, 대자연)이 쓴 기호처럼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특별한 사태이다. 해독이 어려운 시의 공포 앞에서 정신을 가다듬고 울림을 만져볼 일이다.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기쁜 만큼 세계는 확장되고 이성은 깊어진다. 난해한 시가 늘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난해한 시를 욕하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난해한 시를 생각없이 심각하게 욕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들이 알아듣는 시를 쓴다면 그건 초딩 일기장이 될 확률이 높다.’고 귓속말로 얘기해 주고 싶다. 난해한 시는 현실적 쓸모가 없다고 보는, 실용주의적 관점에 선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마 칼이나 돌이지 시가 아니지 싶다. 그런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쉽사리 파악하기 어려운 시가 그 칼이나 돌보다 더 강력한 칼이나 돌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생각의 범위 안에서만 그렇다. 더 오래 더 강하게 더 깊게 세상을 베어내고 근원적으로 세상을 흔드는 난해한 시가 있다. 시가 중얼거림과 다른 이유는 해석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깊고, 깊기 때문에 오래 간다. 오래 가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의 정신에 광범위한 충격을 줄 수 있고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시를 보여 달라고, 우리는 미래를 살지 않고 현재를 사는 이들이라고. 그 말도 맞다. 그래서 나는 또 그런 이들을 위해 준비해 둔 게 있다. 행사시, 행사시를 준비해 두었다. 조선, 중앙, 동아일보의 창간일에 실리는 창간 축시가 대표적인 행사시다. 당장의 필요에 의해 쓴 시다. 그런데 그게 시냐? (개소리지) 물론 행사시 중에는 감동스럽고 위대한 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극히 드물다는 게 문제다. 나는 아직 감동스러운 행사시를 본 적이 없다. 아기의 몸짓을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거나 울음에 귀 기울이면 말하지 못하는 아기의 말이 들려온다. 그 때 엄마는 젖을 물리거나 기저귀를 갈아준다. 현미경과 씨름하고 밤새워 실험을 하면서 현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과학자에게는 자연의 말이 들려온다. 그 때 과학자는 노트에 새로 발견한 자연의 법칙을 써내려 간다. 사랑하는 이의 말없는 눈을 한없이 깊게 들여다보면 입의 말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말이 눈에서 들려온다. 그 때 연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내밀어 뜨거운 키스를 한다. 아기의 울음, 현미경 속의 움직임, 사랑하는 이의 눈빛. 이것들은 모두 해석을 기다리는 현상이고 무심하면 파악하기 힘든 난해한 기호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진실하게 기울이면 파악되고 해석되는 감동적인 시들인 것이다. 쉽게 파악되는 시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껍질을 벗길수록 새로운 의미들이 솟아나는 어려운 시를 좋아하는 이들의 뜨거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단순한 나의 시론이다.   난해시의 선조(先朝) 김구용 시인의 시 한 편 고봉준령 설산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평지에 앉아 미인과 술과 더불어 노닥거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김구용 시인의 시를 보며, 까마득한 높이에서 비루한 인간을 내려다보는 영혼의 거대한 얼굴을 느낀다. 김구용 선생의 시에 발을 들여놓으려다가 물러나 개새끼처럼 마구 짖어대기를 몇 번, 선생의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기를 몇 번, 더러 욕설을 뱉으며 시의 저수지에 침을 뱉기를 몇 번··· 오늘은 기어코 선생의 표제시 「풍미」를 침범한다. 풍미 / 김구용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거울로 들어간다.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희생자인 향불. 분명치 못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을 아는가. 녹(綠)빛 도피는 아름답다. 그대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1970년)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게다가 “이리하여 돌은 노래한다” 이건 또 뭔 소린가. 그리고 두 문장이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건 또 무슨 이유인가. 심호흡을 하고 다시 들여다 본다. 판단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손가락이 먼저 전화기의 번호판을 누르던 기억이 내겐 있다. 사랑하던 여자가 죽고 술만 취하면 그 여자의 번호를 눌렀다. 그것은 분명히 판단 이전의 행동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미쳐서 세상의 모든 사물들(돌, 풀, 길, 먼지)로부터 죽은 여자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따라 거리를 헤매고 술집에 앉아 열흘씩 술을 들이켰다. 미쳤다. ‘나는 판단 이전에 앉’아서 ‘돌’의 노래를 들었다.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 끝난 속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갈수록 태산이다. 어렵다. 뭔 말인가.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불교의 인연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잎사귀는’ 우리의 불완전한 눈으로 보는 ‘생김-존재,현상’들 이전에 이미 어떤 근원적 힘(태허, 신, 우주의 원리)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 색과 형태를 말하지만 시인은 그 이전의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끝난 것 속에서 시작을 보고 시작 속에서 끝을 보는 윤회’를 말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물음(의문)’ 속에서 썩지 않는 언어의 다이아몬드를 채굴해 내는 것이다. “대답은 반문하고 / 물음은 공간이니 /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 거울로 들어간다. /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낮과 밤, 음과 양의 이치를 터득한 자는 높은 자기성찰의 단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존재를 이해하고 흡수한다. ‘너’인들 내게로 들어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희생자인 향불.” 희생은 아름답다. 고귀하고 향기롭다. 70년대의 암울했던 시기를 올곧게 살다 간 이들의 희생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향불은 죽은 자의 앞에서 기도처럼 타오르고 시인의 마음 속에는 ‘정확’한 이성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자들에 대한 조소가 일렁인다. 그래서 ‘분명치 못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으로 한 시대를 분탕질한 자들에 대한 고요한 분노를 호소한다. 자기의 생각을 ‘정확’하다고 맹신하는 것들의 주둥아리를 쥐어박는다. 또한, 불의의 시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도망이 아니라 당당히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거머리처럼 붙는 간사한 세파를 뚫고 ‘녹빛 도피’를 ‘아름답’게 감행하고 싶었을 것이다. “녹빛 도피는 아름답다. / 그대여 외롭거든 / 각기 인자하시라.” 나는 이 마지막 구절을 읽으며 개처럼 짖던 내 주둥이를 틀어막는다. 독자들이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그대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문학평론가 김동호는 2001출간된 김구용 선생의 시집『풍미』의 해설에서 이런 지적을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시는 술술 잘 넘어가는 술 같은 시만 찬미를 받는 것 같다. 자연 예찬의 낭만시나 바보예찬의 천국적 단순시 아니면 대중 앞에 초경을 치르는 듯한 낮 간지러운 감각시만 찬미를 받는 것 같다. 뼈속의 진액으로 쓴 시, 그 진액이 마르도록 쓴 시는 사면초가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전쟁 같은 큰 비극을 겪은 나라, 30년의 군사독재를 치른 나라의 시가 무정란처럼 아프지도 않게 생겨나와 댕글댕글 때깔만 좋아서야 될까. 시의 자존적 위상을 위해서도 깊은 고뇌의 이런 난해시는 깊이 연구, 재음미가 되어야 한다.” 10년 뒤의 오늘에도 딱 맞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다.         김구용(金丘庸, 1922.2.5.~2001.12.28.) ▶본명은 김영탁이며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4세 때부터 금강산 마하연에서 불교와 한학을 접했으며 19세 되던 해부터 13년 간 동학사에 기거하며 경전 및 수많은 동서 고전을 섭렵한 김구용은 1949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전통 시서화에 조예가 깊고, 특히 추사 김정희의 예술에 대해 독보적인 해석을 지닌 한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유장한 우리말로 다수의 동양 고전들을 번역한 번역 문학가이다. 중국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시인 특유의 문재가 돋보이는 그의 번역물들은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육군사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건국대학교, 숙명여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1956년부터 1987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저서로 시집「시」「구곡」「송 백팔」「구거」와 산문집「인연」「구용 일기」가 있고, 역서로「삼국지연의」「동주 열국지」「충의 수호전」「옥루몽」「노자」「채근담」과 편서「구운몽」이 있다. 2000년 6월에 시 전집 네 권을 비롯한 산문 전집 두 권을 새로이 교정 편집하여,「김구용 문학 전집」(전6권)을 출간했다. ▶원본 「삼국지연의」의 꾸밈없고 쾌활한 서사성과 웅혼한 문학적 스케일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살려낸 국내 유일의 한국어 완역본「삼국지연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 그 자체만을 즐기는 독자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원문을 읽으면서 나름대로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내려보고자 하는 진지한 독자들에게는 명백하게 역효과를 초래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삼국지연의」의 원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김구용의「삼국지연의」가 다시 출간되는 점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이번 김구용의 번역본에는 「삼국지연의」의 원문에 들어 있는 시문詩文이 빠짐없이 유장한 문체로 번역되어 있어서 「삼국지연의」의 본디 모습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인물의 삽화나 부록으로 묶인 전투지의 지형도 등도 독자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다시 한 번 둘러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역사 기록을 토대로 해서 씌어진 소설이지만 김구용 선생은 「삼국지연의」를 마치 역사 기록을 다루는 자세로 번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서경호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추구한 시를 썼다. 본명은 영탁(永卓).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마치고 1955년 〈현대문학〉 기자,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해방직전까지 동학사 등에서 유불선(儒佛仙)의 경전과 동서양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36년〈회고〉를 시작으로 1949년 〈신천지〉에 시〈산중야〉·〈백탑송〉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1940년에는 관념적이고 한자가 많은 난해한 시를 썼는데〈탈출 脫出〉(문예, 1953. 2)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분광(噴光)의 심장〉(신천지, 1953. 6)·〈오늘〉(문예, 1953. 12)·〈슬픈계절〉(현대문학, 1955. 6) 등에서는 전쟁 뒤의 극도로 불안한 현실을 그렸다. 이어〈관조〉(문학예술, 1956. 2) 등을 발표했는데 이 무렵에는 정교하고 섬세한 언어로 행과 연을 무시한 산문시를 주로 많이 썼다.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현실에서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자의식의 세계를 추구했다. 1957년 〈현대문학〉에 〈소인〉·〈심장없는 인형〉 등을 발표했으며 뒤이어 발표한〈불협화음의 꽃〉(현대문학, 1960. 1)·〈육곡〉(현대문학, 1969. 2) 등은 원고 100장이 넘는 장시이다. 그밖에도 〈현대문학〉·〈자유문학〉에 동양의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초현실주의 기법을 실험한 시를 발표해 현대시의 범위를 넓혔다. 1955년 제1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시집 1〉(1969)·〈구곡〉(1978) 등이 있고, 역서로 〈채근담〉(1955)·〈옥루몽〉(1957)·〈열국지〉(1990) 등이 있다.       선비같은 난해시인 김구용     추재욱교수님의 시는 난해시를 썼던 김구용(전 성대교수, 시인, 나의 친구 외숙)의 시와 공통분모가 많아 이를 소개하며, 김구용 선생님의 추모전에 관련된 기사를 옮겼습니다.     김구용은 그의 시에 대한 물음에는 무언으로 일관하며 일체의 해석과 의견을 피력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추교수님도 그러하실는지? (난해시에 훌륭한 능력이 돋보인다고 소견(?)을 피력하고 싶습니다.)    김구용의 시 - 풍미(風味) -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 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 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   대답은 반문하고 물음은 공간이니 말씀은 썩지 않는다.   낮과 밤의 대면은 거울로 들어간다. 너는 내게로 들어온다. 희생자인 향불.   분명치 못한 정확과 정확한 막연을 아는가. 녹(綠)빛 도피는 아름답다.   그대여 외롭거든 각기 인자하시라.   (중앙일보 2002.12.24 자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함.)     - "마지막 선비' 김구용 시인 1주기 추모 글씨전 -    "우리는 동양 정신을 말살하면서까지 감성적 유행에 경도하리만큼 부박(浮薄:천박하고 경솔함)하지 않다. ···(중략)···    우리는 끝까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하며, 투시할 줄 알아야 하며 순수한 정신의 원자(原子)를 추출 폭파하여 인간의 무애자성(無碍自性: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는 인간의 본성)을 대오(大悟:크게 깨닫는 것)해야 할 임무에 있다."    2001년 12월 28일 타계한 김구용 시인이 1963년 밝힌 글이다. 이어지는 이 글에서 그는 "신·인간 또는 긍정·부정뿐만 아니라 정신·물질의 일체 양반(兩反)되는 차이와 상대성을 그대로 두고도 분별이 없어지는 날이 이 지구의 미래"라고 예견했다.    그러면서 김구용은 자신의 시와 글씨와 그림으로 그런 무애자성의 세계를 보여줬다. 김구용 1주기를 맞아 동료 문인, 후학들이 '구용 선생 글씨전'을 마련, 서울 사간동 학고재에서 30일까지 전시를 개최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김구용이 생전에 동료들에게 써 준 글씨나 그림 80점이 전시되었다. 시·서·화에 거침없이 두루 능했던 김구용은 또 김동리 소설집 '무녀도', 천상병 시집 '새'등 문학 단행본 제자(題字)도 가장 많이 부탁 받은 시인으로 기록된다. 해서 문학평론가 고(故) 김현은 "김구용의 모든 작품은 시간과 공간의 올 속에 끼인 표현될 수 없는 근원적인 경험을 언어로 표백하기 위한 오랜 노력의 결정"이라고 평했다.    일제 말기 10여년 간 절에 있으면서 동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하면서 스님들에게 강의했던 김구용. 선(禪)적 직관으로 모든 것을 감싸안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마저도 초월하려했던 그의 시·서·화 세계를 재평가하기 위해 열린 이번 추모전은 그래서 의미를 더하는 듯하다.              詩의 홍수    詩의 홍수     朴民宇 2012년 3월 5일, 하늘에서 홍수 같은 비가 쏟아진다.  어느 날이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매일 이 비를 맞으며 쏟아진 쓰레기 더미에서 아주 가끔은 천재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내심 詩의 의미를 말하고자 하면 주꾸미 드러누운 솥뚜껑 위에도 한바탕 땟국이 쏟아지는데 쓰레기의 홍수는 연탄불 위에서 지글지글 타오르다 곱창, 막창, 똥집, 소주 그리고 친구, 모두가 뒤엉켜 집으로 간다. 아침이라 하기가 무섭게 홍수는 시작되었다.  밤새도록 내린 詩 때문에 지구촌 곳곳이 홍수에 잠기며 그 운명조차도 작가의 손을 떠나고 이제 종말을 준비한다. 내 평생 사막을 걷다가 곰보를 만나든 째보를 만나든 사람만 보면 반가운 것을 매일 보는 마누라 얼굴은 쓰레기 같더라.  시인은 쓰레기 더미에서 천재성을 발견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쓰레기만 보일 뿐이다.              십팔벽      십팔벽   朴民宇   십팔벽  누운 그대 오십 바람에 니기미  오시미. 오시미  가시미에 에라 오시미 왔다리 갔다리.   십팔벽 2 백팔벽  누운 그대 五十 솟아 너의 모습 詩가 되어 돌아가리니 에라 오시미 왔다리 갔다리.      
1708    왕초보 시짓기에서의 비법 댓글:  조회:4838  추천:0  2016-01-01
안녕하세요^^   시는 내마음 내생각을 글로 노래하듯이 표현하면 됩니다.   시를 지을때 필요한 것은'ㅡㅡㅡ   우선 책을 많이 읽어서 다양한 표현 어휘력을 키우는게 좋구요, 다른 분들의 시를 많이 읽어봄으로써 시에 대한 운율이라던가 표현법을 익히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며 생각을 가지는게 좋습니다. 중요한것은 자기 생각에 솔직히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 총 획득 메   답변추천해요1추천자 목록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1) 한 작품에 많은 사연을 담지 말것.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서든 이미지든 하나여야 하고, 다른 모티프들은 그것이 뿜는 자장(磁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때 시는 통일성을 얻는다.   2) 비유와 상징을 아낄 것. 비유는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오롯한 품위를 갖는다. 상징은 시인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숨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긴 시를 경계할 것. 시의 참된 맛은 행간에 있다. 행간에는 침묵의 언어와 정서의 긴장이 깃들여 있다. 긴 시는 행간을 매립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4)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할 것. 불투명한 관념이나 감정을 시 비슷한 문법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5) 정서의 결을 잘 다듬을 것. 몇 번의 침전과정을 거친 그리움이라면 슬픔 따위가 개운하게 세척된 상태라야 한다. 물기가 없이 잘 마른 상태라면 더욱 좋다.   6) 구문이 거추장스러운 것, 관형구나 부사구가 무거운 것은 금기다.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기 어렵다. 관형어나 부사어가 상쾌하게 오려진 문장은 조촐하고 산뜻하다.   7) 시로 삶의 각성이나 잠언적인 의도를 노출시키지 말것. 시는 철학이 아니라 미학이다.   [시안] 2002년 봄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둔다. 시를 쓰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일들을 찬찬하게 지적해주었다. 두고 읽을 만 하다.   다음은
1707    난해시의 현재까지 끝판왕 - 李箱 詩 댓글:  조회:3306  추천:0  2016-01-01
      李箱의 시집 (1932.7)     아래는 시집에 수록된 시 전체의 목록   이상의 시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독자분들의 상상력의 몫에 맡긴다...   그럼 감상해보시길...           1.AU MAGASIN DE NOUVEAUTES   建築無限六面角體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   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   비누가통과하는혈관의비눗내를투시하는사람   지구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의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   거세된양말(그여인의이름은워어즈였다)   빈혈면포,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평행사변형대각선방향을추진하는막대한중량   마르세이유의봄을해람한코티의향수의맞이한동양의가을   쾌청의공중에붕유하는Z백호.회충양약이라고씌어져있다   옥상정원.원후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모아젤   만곡된직선을직선으로질주하는낙체공식   시계문자반에Ⅻ에내리워진일개의침수된황혼   도어-의내부의도어-의내부의조롱의내부의카나리아의내부의감살문호의내부의인사   식당의문깐에방금도달한자웅과같은붕우가헤어진다   파랑잉크가엎질러진각설탕이삼륜차에적하(積荷)된다   명함을짓밟는군용장화.가구를질구하는조화분연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   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저여자의하반은저남자의상반에흡사하다(나는애련한후에애련하는나)   사각이난케이스가걷기시작이다(소름이끼치는일이다)   라지에터의근방에서승천하는굳바이   바깥은우중.발광어류의군집이동               2.열하약도 No.2(미정고)   이 항목부터는 쉽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드므로 주의해라.       1931년의풍운을적적하게말하고있는탱크가이른아침짙은안개에붉게녹슬어있다.   객석의구들의내부.(실험용알콜램프가등불노릇을하고있다)   벨이울린다.   아이가20년전에사망한온천의재분출을알린다.               3.진단 0 : 1   어떤환자의용태에관한문제   1 2 3 4 5 6 7 8 9 0 ●   1 2 3 4 5 6 7 8 9 ● 0   1 2 3 4 5 6 7 8 ● 9 0   1 2 3 4 5 6 7 ● 8 9 0   1 2 3 4 5 6 ● 7 8 9 0   1 2 3 4 5 ● 6 7 8 9 0   1 2 3 4 ● 5 6 7 8 9 0   1 2 3 ● 4 5 6 7 8 9 0   1 2 ● 3 4 5 6 7 8 9 0   1 ● 2 3 4 5 6 7 8 9 0   진단 0 : 1   2 6ㆍ1 0ㆍ1 9 3 1   이상 책임의사 이상           4.22년   전후좌우를제한유일한흔적에있어서   익단불서 목대불도   반왜소형의신의안전에서내가낙상한고사가있다     현재까지 완벽한 해석이 되지 않는 한국 난해시의 끝판왕 | 인스티즈     (장부 그것은침수된축사와다를것인가)           5.출판법   I       허위고발이라는죄목이나에게사형을언도했다. 자태를감춘증기속에서몸을가누고나는아스팔트가마를비예하였다.   ─직에관한전고한구절─   기부양양 기자직지   나는안다는것을알아가고있었던까닭에알수없었던나에대한집행이한창일때나는다시금새로운것을알아야만했다.   나는새하얗게드러난골편을주워모으기시작했다.   '거죽과살은나중에라도붙을것이다'   말라떨어진고혈에대해나는단념하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II 어느경찰탐정의비밀신문실에서       혐의자로검거된남자가지도의인쇄된분뇨를배설하고다시금그걸삼킨것에대해경찰탐정은아는바가하나도있지않다. 발각될리없는급수성소화작용 사람들은이것이야말로요술이라고말할 것이다.   '너는광부에다름이없다'   참고로부언하면남자의근육의단면은흑요석처럼빛나고있었다고한다.   III 호외       자석수축하기시작하다   원인극히불문명하나대외경제파탄으로인한탈옥사건에관련되는바가크다고보임. 사계의요인들이머리를맞대고비밀리에연구조사중.   개방된시험관의열쇠는내손바닥에전등형의운하를굴착하고있다. 곧이어여과된고혈같은강물이왕양하게흘러들어왔다.   IV       낙엽이창호를삼투하여내정장의자개단추를엄호한다.   암살   지형명세작업이아직도완료되지않은이궁벽한땅에불가사의한우체교통이벌써시행되었다. 나는불안을절망했다.   일력의반역적으로나는방향을잃었다. 내눈동자는냉각된액체를잘게잘라내며낙엽의분망을열심히방조하는수밖에없었다.   (나의원후류에의진화)               6.   균열이생긴장가이녕의땅에한대의곤봉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수목이자라남.   -1 이상 꽂는것과자라나는것과의원만한융합을가르침.   사막에성한한대의산호나무곁에서돼지같은사람이생매장당하는일을당하는일은없고쓸쓸하게생매장하는것에의하여자살한다.   만월은비행기보다신선하게공기속을추진하는것의신선이란산호나무의음울함을더이상으로증대하는것의이전의일이다.   윤부전지 -1 전개된지구의를앞에두고서의설문일제.   곤봉은사람에게지면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르치는데사람은해득하는것은불가능인가.   지구를굴착하라.   동시에   생리작용이가져오는상식을포기하라.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고 또 열심으로질주하는 사람 은 열심으로질주하는 일들을정지한다.   사막보다도정밀한절망은사람을불러세우는무표정한표정의 무지한한대의산호나무의사람의발경의배방인전방에상대하는자말적인공구때문이지만사람의절망은정밀한것을유지하는성격이다.   지구를 굴착하라   동시에   사람의숙명적발광은곤봉을내어미는것이어라#   *사실차8씨는자발적으로발광하였다. 그리하여어느덧차8씨의온실에는은화식물이꽃을피우고있었다. 눈물에젖은감광지가태양에마주쳐서는히스므레하게빛을내었다.               7.대낮 ─어떤ESQUISSE─   ELEVATER FOR AMERICA   ○       세마리의닭은사문석의계단이다. 룸펜과모포.   ○       삘딩이토해내는신문배달부의무리. 도시계획의암시.   ○       둘째번의정오싸이렌.   ○       비누거품에씻기우는닭. 개아미집에모여서콘크리트를먹고있다.   ○       남자를반나하는석두.   남자는석두를백정을싫어하듯싫어한다.   ○       얼룩고양이와같은꼴을하고서태양군의틈사구니를쏘다니는시인. 꼭끼요─.   순간 자기와 같은태양이다시또한개솟아올랐다. ====================================   시인·소설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서울 출생.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졸업,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원(技員)이 되었다. 31년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등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 33년 각혈로 기원직을 그만두고 요양을 하면서 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 등과 사귀었고, 34년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였다. 그 뒤 다방·카페 등을 열었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3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나빠져 도쿄대학[東京大學]부속병원에서 죽었다. 한국 자의식문학의 선구자였던 그는 《거울(1933)》 《오감도(烏瞰圖, 1934)》 등의 시를 통해 매우 특이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특히 《오감도》에는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감각의 착란,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작품이 갖는 비상식적 세계는 그의 현실에 대한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주로 기인한다. 말년에 《날개 (1936)》 《종생기(1937)》 《동해(童骸, 1937)》 등 소설을 발표하였다   답변추천해요0 이 상 李箱 (1910-1937) 시인.소설가. 본명 김해경(金海卿). 서울 출생.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1931년 처녀작으로 시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파편의 경치'를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고, 1932년 동지에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를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이상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공사장 인부들이 그의 이름을 잘 모르고 ‘리상(李씨)’이라고 부르니까 그대로 ‘이상’이라고 했다지만 학교 때의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1933년 폐결핵에 의한 각혈로 총독부 기수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요양을 가게 되며 이때부터 그는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이 곳 휴양지에서 그는 기생 금홍을 알게 되고 금홍과 함께 서울로 돌아와 백부가 물려 준 통인동 집을 처분,'제비'라는 다방을 차렸다. 이 무렵부터 격심한 고독과 절망, 그리고 자의식에 침전돼 수염과 머리를 깎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고, 온종일 어둠침침한 방에 박혀 술만 마시기도 하였다.1934년 난해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했다. 잇단 사업의 실패와 병고로 말미암아 그는 이미 정신적 황폐를 겪고 있었고,몸도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아우 운경의 청소부 봉급으로 생활을 지탱해 갔으며 셋방을 전전 방세를 못내 거리로 쫓겨나기도 했다. 1936년 에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함으로써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날개'는 그의 첫사랑 금홍과 2년여에 걸친 무궤도한 생활에서 얻어진 작품으로 그 자신의 자화상이라고도 할수 있는 의 번득임이 나타나 있다. 를 발표할 무렵 같이 폐를 앓고 있던 작가 김유정과 함께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다. 1936년 여름,친구인 화가의 여동생과 돈암동 홍천사에서 결혼했으나 생활은 비참했고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같은 해에 '동해(童骸)', '봉별기(逢別記)' 등을 발표하고 폐결핵과 싸우다가 갱생(更生)할 뜻으로 도쿄행[東京行]을 결행한다. 이듬해 토쿄 거리를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며 백회하다 사상불온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었하였으나, 병보석으로 풀려 났고 자기 생활의 결산과도 같은 장편 '종생기' 1편을 남기고 1937년 4월 17일 도쿄대학 부속병원에서 병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전기 외에 소설 '지주회시(會豕)', '환시기(幻視記)', '실화(失花)' 등이 있고, 시에는 '이런 시(詩)'. '거울', '지비(紙碑)', '정식(正式)', '명경(明鏡)', 수필에는 '산촌여정(山村餘情)', '조춘점묘(早春點描)', '권태(倦怠)' 등이 있다. 1957년 80여 편의 전 작품을 수록한 《이상전집(李箱全業)》 3권이 간행되었다. 이상은 그 당시 유럽(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함)에서 유행했던 초현실주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쓴 거의 최초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 기법을 통해 분열된 자의식 세계의 탐구에 주력했고, 숫자와 기하학적 낱말, 관념적 한자로 구성된 특이한 작품을 주로 썼다. 특히 위의 '거울' 뿐만 아니라, '오감도', '꽃나무' 등 주요 시들에서 볼 수 있듯이 행간의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등 독특한 수법을 많이 썼다. 이러한 시의 구성의 파격과 독특함 때문에 그는 26년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천재'라는 평을 받았으며, 후세의 시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706    난해시의 원조 - 산해경 댓글:  조회:4338  추천:0  2016-01-01
  을 제대로 알아보기ㅡ... ...그 비밀 한 조각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산해경』은 난해시의 원조   이 『산해경』에는 동물과 식물이 얽히고 설킨 형태는 신화神話로만 취급할 것이 아니며, 그 지역의 특징적인 본질을 숨겨서 비유한 은유법‧암유법이 가장 많이 쓰였으며, 가장 축약되고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고, 온갖 상상력으로 꾸며져 있어 특별한 언어로 창조하면서까지 서정과 창의를 함께 끌어오는 예술로서 문학의 진수인 시詩/Poetry의 특성을 가장 많이 담고 있기도 하다. 더구나 압축과 비약이나 이항대립적 세계의 인식 속에서 불가해스러운 현대시학의 특성으로 들고 나온 “이종교배적 상상력의 서정”이라든지, 전혀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새로운 창의적인 것으로 재탄생되는 것으로서 프로 시인과 아마추어 시인으로 구분하는 중요 기준의 절묘한 기법이라 평가되는, “사물의 존재의 현실적인, 합리적인 관계를 박탈해 버리고,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를 맺어주는 것을 데뻬이즈망Dépaysement이라고 한다.”는 초현실주의Surréalism 시의 미학이라는 기법도 이미 『산해경』 자체에 녹아 있다는 사실이다. 즉 『산해경』은 현실적 사물들을 전혀 낮선 사물이나 장소에 조합시킴으로써 그 용도‧기능‧의미를 통하여 초현실적인 환상을 창조하여 세상을 낯설게 새롭게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을 세계적 사조思潮에서 보면, 1917년 이후에나 등장하는 쉬르레알리스트Surréalist들의, 마치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그림처럼, 어쩜 진정한 난해시難解詩를 바로 이 『산해경』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한문의 해독 능력을 뛰어넘어 역사와 지리와 민속적 개념은 물론 상상력이 풍부한 시적 감각이 없으면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 바로 『산해경』이다. 그래서 나는 『산해경』을 가장 오래된 한편의 ‘난해시Difficult Poem’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문학의 어떤 장르를 다루는 사람일지라도 『산해경』을 제대로 읽거나, 개념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문인文人, 특히 진정 시인Poet의 품격을 지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본질을 말하건대, “시는 교묘한 말로 언어를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신명이 하늘 문자로 이미 사물의 만상을 시를 써 놓았으니, 시인은 그 천문을 인간 문자로 해독해 내는 시작 행위를 해야 한다.”고 최근 ‘미학의 시’가 주장됨에 앞서 이미 『산해경』의 이름에서부터 자연 속의 많은 사물의 특성에 관해 유기적으로 문학적 형상화를 잘 소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더구나 신화와 시가 본질적으로 그 고유한 특성 ― 상징·은유 및 인간과 사물 내지 자연과의 공감적 태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산해경』의 저자는 시인의 소양을 갖추었으며, 문장은 특히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언어의 특징 요소로서 운률의 구조는 4자·6자를 기본으로 한 시적 변용變容/Transfiguration이 모색된 기법에 더하여 거의 동일한 문형文型/패턴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는 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해경』은 신화로 빙자되는 난해시인 것이다. 더구나 언어기호의 의미는 무엇보다 하나의 시니피앙[signifiant/name/言表]에 그 하나의 시니피에[signifié/sense/言志]를 넘어, 또 다른 시니피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은 특히 고사故事의 비유에서 많으며, 시의 특성의 하나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시어에도 같은 듯하지만, 다른 차별성의 특성,즉 헥시어티haecceity가 분명 존재하고 있으므로, 조어성造語性/새로 말을 만들어내는 성질이 매우 강하며,시적 언어에는 언제나 2개 이상의 의미言志로 읽힌다. 즉 『산해경』은 창조된 수많은 시어로써 나타낸 휫손리더십의 중요한 소재이다. 이 『산해경』을 읽어보면 분명 그러한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웬만한 사람들은 알아보기 어렵게 『산해경』을 썼을까. 그것은 그 지방과 그 제후들의 특성 습성 관습 개성과 핵심 활동 내용을 파악하여 정치 리더십으로 발휘하기 위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밀을 명확하게 제대로 알아내면 정치는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백성을 마구 부려먹기도 하지만, 정치의 책임에는 어떤 경우에도 임금,즉 국가지도자에게 있기 때문에, 물 흐르듯이 그 백성의 고민을 풀어주고, 행복하게 해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산해경』을 조선의 뿌리와 역사관에 얼룩진 자신감과 자존감을 말끔히 치료하는 시치료Poetherapy의 도구로서 가장 원척적인 텍스트교과서가 될 것으로 믿는다. 전한前漢/西漢의 시중 벼슬이었던 류수劉秀/劉歆가 『산해경』을 통달하고 나서는 이내 민심을 얻어 후한後漢/東漢의 건국자로서 혁명을 일으켜 광무제光武帝/25~57가 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산과 강과 바다에 사는 존재의 특성을 진단하는 능력을! 이제 신선하고 신바람 나는 정치를 하고, 미래의 큰 꿈을 키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산해경』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로마 신화』가 줄거리를 만든 가십Gossip이라면, 『산해경』은 시놉시스Synopsis가 없는 신화가 될지라도 그 내면에는 고급의 역사적 사건과 정치 리더십 문화가 은밀하게 녹아 있으므로, 5000년의 비밀이 숨어있는 이 『산해경』의 숨겨진 속뜻을 새롭게 조명하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이 『산해경』의 지리적 중심에 조선이 있고, 그 문화적 다양성을 공유하기 위하여 접근한 최초의 언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요즘 유명한 배우 최민식이 열연한 김한민 감독의 영화 『명량』(2014.7.30. 개봉)이 흥행기록을 깨며 최고 인기를 얻는 것도 충무공 리순신의 리더십의 뿌리 『난중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의 리더십 부재를 질타하는 성격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전쟁을 이겨낸 지휘관의 솔직한 고민이 담겨있는 한문 일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그 진실의 내막을 알 수 있었기에 크게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산해경』의 번역과 해석도 역사 창조를 위한 휫손리더십으로 다시 태어날 때에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사 창조라는 말은 역사를 통하여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고, 이를 교훈삼아 미래 발전적 도전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산해경』 속에는 수수께끼 같은 숱한 비밀이 담겨져 있다.그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이며, 이 비밀을 알면, 그제야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3조는 도리어 광활한 고대 조선의 강역을 제외시키고, 웅대한 역사관을 왜곡‧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삭제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미국에도 영국에도 일본에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산해경』이 조선 뿌리와 문화의 터전이고, 유럽과 아프리카까지도 조선의 강역에 넣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여기에 등장하는 토산물이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 동국여지승람』과 함께 열대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환단고기』와 『조선왕조실록』 등의 여러 문헌에 실린 일식 현상에서 아프리카를 통과하는 일식대를 조선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이며, 천체관측에서는 극지방에서나 일어나는 오로라Aurora/극광와 백야 및 흑야 현상이 조선 강역에서 숱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료들을 어떤 논문의 논리성을 높이기 위하여 관련 사료의 취사선택 과정에서 스스로 의도적으로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진심으로 반성할 일이다.      
1705    난해시와 목장의 목동 댓글:  조회:4032  추천:0  2016-01-01
  난해시의 불가사의와 자의적(恣意的)태도                                                                  ///김상현   1. 글에 들어가며      일상의 기쁨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나는 시인들로부터 배달되어 온 시집을 읽는 재미이다. 시집을 읽다보면 수 백리, 수 천리 밖에서 시집을 보내 준 시인의 삶은 물론 따뜻한 숨결까지도 느낄 수가 있어서 좋다. 그것은 소설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소설은 글을 쓴 작가 보다는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떠오르지만 시집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예리한 지각과 삶의 열정이 담겨져 있어서 마치 인격체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것이 독자가 시인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근자에 정독을 거듭해도 시집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조차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난해한 시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암호화된 언어의 퍼즐과도 같아서 어렵게 한 편의 시를 이해하고 나면(물론 나의 자의적인 이해는 작가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지만) 다음 페이지에서 다시 지독하게 어려운 퍼즐이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라서 시집이라기보다는 암호를 해독해야하는 무슨 게임과도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시인의 삶이 독야청청하는 것은 보기가 좋은데 은유와 비유와 상징으로만 표기된 난해한 시로 인해 독자가 없이 고답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모름지기 좋은 시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는 말에서 시인과 독자 간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엿볼 수 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실존의식에서와 같이 시인의 존재를 독자가 인식할 때 비로소 시인은 시인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영향을 받은 김춘수의 '꽃'이 시인과 독자와의 관계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바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시의 내용처럼 독자가 시를 이해했을 때만 시는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라는 실존의식을 갖게 된다. 물론 은유와 상징과 같은 표현상의 기법이 다양한 현대시를 일반대중이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를 써온 시인이 이해할 수 없다면 우선 시의 난해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 난해성에 대한 이해와 몰이해     시의 난해성에 대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제1차 세계대전 후 기성의 전통과 질서를 파괴한 다다이즘1)과 데카탕2)의 예술사조와 함께 초현실주의가 등장한 이래 시의 난해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의 기계문명의 발달과 함께 과학기술의 만능화 의식과 경제발전 제일주의의 의식이 만연되면서 인간이 노동에너지로 계량화 되어지는 현실에서 새롭게 등장한 해체주의의 영향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시의 난해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미래파의 특징은 매우 개인적인 일상을 비트는 것 외에 뚜렷한 의식을 찾을 수가 없다. 원래 미래파라는 용어는 이탈리아 시인이며 잡지의 편집인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가 프랑스의 신문 〈피가로〉에 "박물관과 도서관을 파괴할 것이며 도덕주의, 여성다움, 모든 공리주의적 비겁함에 대항해서 싸울 것"을 선언한 기고에서부터 출발되었는데 1909년에 사용한 '미래파'라는 용어는 미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발상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최근 한국에 나타난 소위 미래파는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의 미래파와 어떤 공통점이나 상이점을 분명히 지니고 있을 것이다. 다만 획일적인 전자정보사회, 경제지상주의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등장하지 않았는가 싶다. 이들은 남과 다르게 쓰면 쾌감을 느낀다며 시인이 얻는 만족도가 중요하지 독자나 평론가는 그 다음이라는 말을 한다. 관심을 끌기 위한 극히 의도적인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독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는 시인이 자기만족을 위한 배설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엽기적, 자극적이고, 환상적이고, 소통되지 않는 의식구조와 낯선 언어들이 난무하는 이들 시는 내가 보기에 시시껄렁한 개인사적인 넋두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현대인의 삶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들 시는 난해하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가 고민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소통이 부재한 다른 쪽의 난해시이다. 현자의 입장에서 계몽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아 시집이라기보다는 지혜서 같기도 하고 절대자를 대변하여 계시를 하는 듯한 시편들을 보면 묵시록 같기도 한, 전체적으로 난해한 시집이 던지는 의미는 내게는 생게망게하여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시는 삶에 대한 진지한 인식인 동시에 언어로 불러지는 노래인데 삶의 현장과는 동떨어진 시편들이 독자에게 따뜻하게 다가설 수 있겠는가. 언어는 예언적, 주사적, 치유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행위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우주의 생명의 숨결이 스며있는 언어, 그것에 대한 통찰이 없이 단순한 언표화의 도구로서만 언어를 대해서는 안 된다.3) 는 말은 언어에 대한 시인의 막중한 책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시에는 시인의 생생한 체험이 담겨져 있어야 함은 시인의 진정성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다. 시 이전에 시인은 기능적, 사회적 책무에 대해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3. 무엇이 문제인가     이 시대 민중이 시와 멀어지는 이유는 소통부재에 있다. 시니피앙이 되었든, 시니피에가 되었든 간에 시가 삶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다. 이런 무의미는 일종의 분열증적 사고를 낳는다. 해체시가 곧 난해시라고 볼 수는 없다. 자칫 시의 경건성을 저해할 수는 있지만 해체시에는 전통서정시가 간과한 해학과 현실에 대한 저항이 들어있다. 난해시의 특징은 독자가 전혀 이해할 수 없도록 이중, 삼중의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작가만의 심오한 뜻은 헤아리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유의 배경에는 시인의 철학적, 심리학적, 종교적, 인류학적 사고가 담겨져 있는데 체계화되지 않은 난해시를 과연 대중이 읽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감동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의구심이 든다. 보다 이해가 되지 않은 점은 평자들이 왜 열광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솔직하게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나에게는 시를 해부하는 기술은 없다. 이 같은 시를 해부하는 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위험성이 있을 뿐 아니라 자칫 얄팍한 지식을 뭉텅 거리로 포장해서 늘어놓는 것처럼 보여 독자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기에 조심스럽기도 하다. 나는 이 난해한 시집들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시인과 독자와의 소통부재이다. 실로 난해함이란 독자가 지각할 수 없음을 말한다. 시가 인식과 표현이라고 볼 때 시인 개인이 지고한 깨달음에 도달했다 하더라고 독자가 지각할 수 없는 표현이라면 이는 보편적 진리를 벗어나 개인적인 상징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독자는 시인에게 잠언이나 묵시를 요구하지 않는다. 삶의 이해와 사랑의 발견, 사람과 사람끼리의 어우러짐과 따뜻함을 요구한다. 시는 예수의 산상보훈처럼 산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이 비록 진리라 할지라도 민중의 삶을 떠난 외침은 한낱 소리에 불과하며 시작의 본류에서의 일탈된 행위이다. 시인은 삶이 똥밭이면 민중과 함께 똥밭을 구르면서 반 발짝씩 앞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를 배태하는 것은 민중에 대한 지적 오만 내지 경멸이 그 밑바탕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난해시는 극소수의 선택된 자들에 의해서만 소유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역사적이며 반민중적 엘리트주의가 깔려있는 이점은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4) 결국 난해한 시는 대중적 바탕을 잃게 되며 종래에는 시의 사막화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둘째로 시인과 시인과의 거리두기이다. 장차 살아남는 시는 이것일 뿐이라는 오만은 경계해야 할 독소이다. 갑작스런 천지개벽은 오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느리게 변한다. 생물의 유전자를 포함해서 진화의 속도는 아주 느리다. 시도 시대적 환경에 따라 아주 완만히 변화한다. 인류역사에 시는 상고시대로부터 존재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난해한 시를 쓰면서 시대가 천재를 요구하는 시대에 천재가 없다고 하는 말 속에는 천재를 몰라본다는 오만이 숨겨져 있다. 이 같은 독선의 뿌리는 모든 시인들은 엇비슷하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듯하다. 하지만 시인이 사유하는 세계는 다양하며 그 다양성은 모두가 길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근원적세계에서 타인을 본다면 모두에게서 낯섦과 경이로움을 갖게 될 것이다.5) 한 권의 시집에는 한 권 분량의 시인의 삶이 녹아져 있다. 고뇌와 희락 그리고 성찰이 종이에서 발원한 강물이 되어 읽은 이의 심금을 적시며 공명(共鳴)하게 한다. 시인이 시집을 펴내는 행위는 배설이 아니라 시인의 가슴을 열어보여 주는 행위예술이다. 시인은 가슴 속에 있는 밀어들을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며 가난을 털어 자비(自費)로 시집을 낸다. 이렇게 출간 된 시집을 두고 이 속에서 나름의 가치를 지닌 시가 없다는 식의 평가절하는 시인에 대한 모독이다.     세 번째로 시적감수성을 간과한 가르침이다. 시는 정서적 함축성과 직관력이 아주 중요하므로 지적학습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시 교육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바 있다. 즉 한 편의 시를 놓고서 학교교육은 살아 숨 쉬는 시의 생명력을 느끼게 하기보다 은유법과 상징법을 찾아 낱낱이 해부해 버리고 만다. 시를 대할 때에는 시인이 언어 속에 숨겨 둔 비밀의 열쇠를 찾아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시는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고 맥박이 뛰고 따듯한 피가 흐르는 언어로 된 생명체다.6) 타고난 감수성과 감각적 지각을 갖춘 좋은 시인으로서 자질을 갖춘 사람에게 환상과 시적상상력을 강요하고 언어의 뒤틀기 기술을 가르침으로서 오히려 생명의 싹을 잘라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시인은 언어를 지키고 키우는 목장의 목동과 같다. 목동이 지켜야 할 가축을 잡아 이 부위는 등심, 저 부위는 목살, 이 편은 등골이라고 해부해버리는 순간 가축은 생명이 없는 한낱 고깃덩이가 되고 만다. 이것은 생명을 지키는 목동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도축업자나 할 일이다. 시를 해부하는 기술만을 가르침으로써 시도 죽고 시인도 죽게 하는 죽음의 학습은 깊은 반성을 요구 한다.     4. 글을 맺으며     문제는 시에 있지 않다. 사람이다. 인식과 표현 모두 시인이 몫이기 때문에 시를 배태한 시인의 책임이 크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난해한 시를 의식적으로 내보이는 행위는 폭력이다. 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는 것인가? 바로 보편적 진리에 대한 경건함이 사라졌다는데 근원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신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사라지자 보편적 진리를 야유하고 조롱하는 부류들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 사회현상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모든 진리를 배척하고 삼라만상을 통틀어 오직 '나'의 주장만이 정당하다는 왜곡된 인간주의, 나는 이것을 '극인간주의(極人間主義)hype humanism'로 이해하고 싶다. 이들 부류들은 시인으로서 겸허함이나 자중함이 없이 '내 자신이 하는 말이 최고다'하는 극단적 개인주의로 '내 시를 모르면 무식하다'는 식의 지적테러를 도처에서 자행하고 있다. 환상과 환청, 그것은 종교적 신비체험이나 정신분열 증세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보편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시가 바로 이것이다'라는 이 떨림은 키에르케고르는 신과의 조우로 보았으며,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넘는 순간으로 생각했다. 바라건대 난해시의 열쇠가 될 수 있는 '작가의 순간(?)'을 제시해 주는 것은 작가를 아끼는 시인이나 독자를 위해 당연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사용이다" 즉 하나의 사물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용 속에 있다고 강조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삶과 괴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특히 시어로서 사용될 때에는 시인의 치열한 삶의 경험적 기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야 한다. 하이데거는 언어의 요소를 네 가지로 구분했는데 언어의 대상(말걸이)과 밖으로 말해진 언어, 전달코자 하는 내용 그리고 화자의 의사표현을 들고 있다8) 시에 있어서 이는 곧 언어의 대상인 독자와 표현수단인 문자와 시인의 인식과 표현으로써 시작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문제이다. 아무튼 난해시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호성과 혼돈 속에 방치된 언어의 실타래를 명징하게 풀어 보이면서 존재의 심연을 진지하게 드러내는 시인이 다시 이 땅의 중심에 서 있게 되는 것을 목도하는 일이다.     1) 사회적, 예술적 전통을 부정하고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표방한 예술운동.   2) 기존사회의 도덕을 무시하고 예술의 목적을 일시적인 육체적 향락추구에 둔 19세기 낭만주의 쇠퇴에 따른 문학사조. 3) 이진엽 「존재의 놀라움」북랜드 2006. 16쪽   4)신경림 "나는 왜 시를 쓰는가"   5) 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테커」동녁 2004. 95쪽   6) 나탈리 골드버그 저, 권진옥 역,「뻣속까지 내려가 써라」한문화 2006, 64쪽   7)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살림 2007. 61쪽   8)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살림 2007. 200쪽    
1704    난해시와 오세영 댓글:  조회:4247  추천:0  2016-01-01
◈ 소금의 말   난해 시에 대한 생각     ■__오세영(시인 ․ 서울대 명예교수)   ■ 오세영 시인                        요즘 우리 문단에는 난해시가 범람하고 있다. 난해시가 아니면 현대시가 아니라는 생각도 만연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시를 난해하게 쓰는 것이 유행인 것 같고 심지어 어떤 시 창작교실에서는 시는 난해하게 써야 한다고 부추긴다고 한다. 시 창작지도서에서 당당히 아예 시란 아무 것이나 쓰면 모두 시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았다. 과연 그런 것일까.        현대에 들어 시가 난해해진 것은 다만 우리나라만의 추세는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범세계적인 트렌드로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 성격이기도 하다. 따라서 난해시를 무작정 배척하거나 폄하해서 될 일은 아니다. 그 장점은 살리되 단점은 배격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나는 왜 현대에 들어 난해시가 이처럼 기승을 부리게 되었을까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한다.        다른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요한 것 가운데는 사회사(역사)의 문제가 가로 놓여 있다. 근대(혹은 현대)의 사회구조라는 특성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구조란 그것을 탄생시킨 사회구조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니까 한 마디로 시(혹은 예술 전반)의 난해성은 근대라는 사회구조의 어떤 특성이 문학적(예술적)으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 사회구조의 어떤 측면이 이처럼 시의 난해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역사가 대개 세 시기 즉 고대(古代), 중세(中世), 근대(近代)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학계의 통설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토대(경제) —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는 사회 역사철학의 관점에서 고대는 경제적으로 노예경제, 정치적으로는 신정정치, 중세는 경제적으로 장원경제, 정치적으로는 봉건주의, 그리고 근대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오늘의 문화예술이란 본질적으로 현대라는 역사성(歷史性) 즉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라는 사회구조적 특성 위에서 피어난 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특성은 시의 난해성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고대나 중세가 이 세계를 수직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데 반하여 — 경제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토대한 — 근대는 그것을 수평적으로 인식하려한다는 명제로 귀납될 수 있다. 이는 달리 세계를 시간의 축으로 보느냐 혹은 공간의 축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세계에 대한 수직적 인식이란 이 세계를 선조적, 시간적(linear form)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며 수평적 인식이란 병렬적, 공간적(spatial form)으로 파악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수직적으로 — 선조적이나 시간적으로 — 인식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이 세계란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예정한 길을 따라, 달리 말해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우리는 그것을 섭리(Providence — 기독교적 세계관의 경우) 혹은 정도(定道 — 동양적 세계관의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계를 이성의 분석적,합리적, 비판적 사고가 아니라 어떤 운명적인 힘이나 절대적 권위 혹은 선악과 같은 가치관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간의 운행이 지닌 필연성은 삶의 중요한 규준이 되며 그에 따라 군주(君主=왕)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 신분계급이 사회 구성의 기본 원리가 되는 봉건 왕정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예컨대 똑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떤 자는 왕이나 귀족이 되고 또 어떤 자는 평민이 되어 전가 후자를 지배하는 사회체제는 과학적, 이성적 사유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 시기는 이를 권위나 어떤 신성성(神聖性Divinity)이나 선악과 같은 가치관으로 합리화 하고자 했다. 가령 ‘내가 왕이 된 것은 신으로부터 그 권위를 위임 받았’기 때문이라거나 심지어는 ‘내 자신이 바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 계몽주의 세계관과 그에 토대한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같은 세계관은 일시에 깨져버렸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시대는 세계를 이제 수직으로서가 아니라, 수평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된다. 이성적, 합리적, 비판적 사유의 관점에서 보니 세계란 그것을 구성하는 각개 기능적인 요소들의 합리적 구조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계는 더 이상 어떤 절대적 힘이나 섭리가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근대는 섭리나 정도 혹은 선악과 같은 가치관이 추방되고 그 대신 이성적 합리주의와 효율성을 전제로 한 과학적 기능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사회구조 역시 왕, 귀족, 평민 농노 등으로 조직된 수직적 신분사회 대신 모든 구성인들의 지위가 동등한 수평적 민주사회로 전도되었다. 예컨대 오늘의 시대가 추구하는 기본적 가치관은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생각 즉 인권이다. 이제 그 누구도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지도자를 왕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든 평등한 인민이 자유롭게 투표하여 자신의 대리자를 선택할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세계를 어떤 절대적인 힘의 구현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구성하는 제 요소들의 구조적 결합체로 보는 관점은 간단히 공간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근대를 수평적,병렬적, 공간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역사주의가 퇴조하고 그 대신 구조주의가 등장하였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그 공간성까지도 파괴하는 해체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수직적, 시간적으로 보지 않고 수평적, 공간적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에서는 왜 시(더 아나가 모든 예술)가 난해해질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문학의 매재라 할 언어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언어 역시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질서 위에서 구현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 문장은 ‘나’,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네게의 어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네 어귀들을 연결시키는 원리즉 어순(語順 order of words)이라고도 하는 통사론적(統辭論的 syntax) 질서는 간단히 말해 시간적이다. 왜냐하면 화자가 ‘학교’를 발음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나는’, ‘오늘’은 이미 발음이 끝나 사라져 버렸음으로 과거에 해당하고(더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은 대과거 ‘오늘’은 소과거), ‘갔습니다’는 아직 발음되지 않은 상태 즉 앞으로 발음해야 될 어휘임으로 미래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 그러니까 선조적 질서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이의 등가적(等價的) 문장을 성립시킴에 있어 ‘나’라는 위치에 올 수 있는 단어는 꼭 ‘나’ 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대신에 ‘너’, ‘당신’, ‘우리’, ‘그’, ‘학생’, ‘선생님’……등과 같은 단어도 올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를 등가성(equivalence)을 갖춘 어휘들이라고 한다. 예컨대 우리는 이 문장에서 ‘너’, ‘당신’, ‘우리’, ‘그’, ‘학생’, ‘선생님’ 과 같은 단어는 사용할 수 있지만 엉뚱하게도 ‘돌멩이’, ‘유리창’, ‘칼‘과 같은 따위의 단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등가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오늘’이나 ‘학교’ ‘갔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 대신에 ‘어제’ , ‘내일’, ‘아침’, ‘저녁’……등이, ‘학교’대신에 ‘공원’, ‘극장’, ‘역전’, ‘백화점’……등이, ‘갔습니다’ 대신에 ‘왔습니다.’ ‘찾았습니다.’…… 따위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이 문장에 동원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 가운데서 그 중 ‘나’,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의 네 단어만을 선택해 문장을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많은 단어들 가운데서 이렇듯 유독 한 특별한 단어들만을 선택해 문장을 만드는 원리는 공간적이다. ‘학교’, ‘공원’, ‘극장’, ‘역전’, ‘백화점’…… 등은 일종의 수평적 배열인데 이 중에서 화자가 ‘학교’를 선택할 경우 — 내가 만일 ‘학교’에 있다면 ‘공원’이나 ‘극장’엔 있을 수 없으므로 — ‘공원’, ‘극장’, ‘역전’, ‘백화점’…… 등은 폐기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공간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 존재는 동시에 여러 공간을 점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 살펴본 언어의 두 가지 질서는 근대에 들어 그 평형이 깨져버렸다. 근대 의식에 민감한, 혹은 근대 의식이라는 강박관념에 편승코자하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기존의 통사론적 논리 즉 선조적, 시간적 원리를 따르지 않고 앞 다투어 수평적, 공간적인 질서의 언어를 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배태한 사회구조를 반영한다는 관점에서 분명 이 세계를 수평적 공간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근대의 세계관이 문학의 언어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전통적으로 시가 산문과 달리 공간적 원리의 언어질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시대가 수직적, 선조적인 세계 인식에서 수평적, 공간적 세계인식으로 전도되니까 시 역시 이 같은 시대의식에 편승하여 기왕에 지녔던 일반적 특성까지도 거부한 채 하나의 극단을 치닫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즉 더 적극적, 더 궁극적으로 아예 시간적, 선조적 질서까지도 폐기시켜 언어라고도 볼 수 없는 어떤 단말마적 기호 차원으로까지 내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소위 현대를 표방한 시들은 통사론적 질서나 등가성 자체를 무시한 단어들의 무작위적 배열을 일삼아 그같은 언어의 아노미적 현상을 서슴없이 시라 부르게까지 되었다.          예컨대 하나의 문장은 그 문장을 구성하는 각개 어휘들이 지닌 통사론적 상호 인접성(contiguity)에 의해서 성립된다. 앞에서 예를 든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진술의 경우 ‘나’,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네게의 어귀는 그들 상호간에 어떤 인접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상호 연결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똑 같은 등가성과 인접성을 지닌 다른 어휘들과 상호 교환이 된다. 그러나 “나는 사슴 강물 갔습니다”라는 진술이 있다 하자. 이는 경우는 다르다. ‘사슴’과 ‘강물’이라는 단어는 ‘나’나 ‘갔습니다’라는 단어와 아무런 인접성을 지니지 못해 상호연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래서 문장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시인이 시를 쓰면서 그 문장의 논리를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와 같은 형식을 취하지 않고 “나는 사슴 강물 갔습니다”와 같은 형식을 취한다면 독자들은 아마 그 의미를 전혀 해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는 언어의 공간적 질서 지향이 그 자신을 지탱해주는 토대 자체를 깨버리고 이제 막다른 곳까지 갔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의 시가 필연적으로 난해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산문: “나는 오늘 학교에 갔습니다”.   전통적인 시: “사슴이 오늘 과수원에 갔습니다” 혹은 “사슴 한 마리가 학교에 갔습니다.” 이 경우 ‘사슴’과 ‘과수원’, ‘나’와‘학교’는 각각 등가성을 가진 단어들로 ‘나’를 ‘사슴’으로, ‘학교’ 를 ‘과수원’으로 환치시킨 것이다. 즉 ‘사슴’은 ‘나', '과수원’은 ‘학교’의 은유가 된다. 이는 공간적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비록 단어들을 등가성을 지닌 다른 단어들 바꾸어 놓긴 했으나 아직 선조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난해시: “사슴, 하늘, 나무, 달린다”. 우리는 이 같은 형식의 문장에서(우리의 상식적인 관점에선 문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 내면화된 의미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등가성과 인접상이 배제된 언어들의 무분별한 공간적 나열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아예 언어의 선조적 질서까지도 폐기시켜버렸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의식이 이 세계를 수평적, 공간적으로 인식한다는 선입관 내지 강박관념에 쫓기어 시 조차 무작정 이를 따라 아예 언어의 통사론적 질서나 등가성을 무시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 필자로서는 승복하기 힘든 명제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어떻든 본질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 사회성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 일찍이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지적한 바와 같이 — 언어라 할 때 그 언어의 기본적 속성에는 분명 그것이 지닌 시간적, 혹은 선조적인 논리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사회성이라는 것은 언어를 지배하는 두 가지 원리 즉 시간적, 선조적 원리와 공간적, 병렬적 원리 중에서도 그 전자가 지닌 기능에 보다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선조적인 질서와 공간적, 병렬적 질서가 등가성에 의해 조화를 이룬 언어에서 일방적으로 전자를 배제한 오늘의 문학은 마치 신을 배제한(혹은 타살한) 오늘의 물질 문명이 결과적으로는 인간 그 자신조차 비인간화시키게 된 결과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비록 근대적 세계관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우리가 비록 난해시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깨버려서는 안 되는 금기와 지켜야 할 금도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수직적, 시간적 질서 대신에 수평적, 공간적 질서의 세계관을 지향하게 된 것은 그 어떤 절대적 당위성 때문이 아니다. 중세라는 인간 억압사회에 대한 근대인들의 각성과 안티테제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같은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정한 삶 혹은 건설해야 할 이상적 세계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수직적인 원리와 수평적 원리의 조화로운 질서를 구현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그 어느 하나를 폐기시키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그것은 신이 없는 인간의 세계나 인간이 없는 신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과 신이 공존과 조화를 이루는 바로 그러한 세계이다. 그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문학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언어의 본질을 훼손한 언어, 소통 불능의 난해한 언어를 지향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703    쉬여가는 페이지 - 월트컵 참가국들의 國歌 댓글:  조회:6261  추천:0  2016-01-01
월드컵 중 가장 재미있게 보았던 부분은 각 나라 국가 가사. 각 민족마다 꿈과 고난이 스민 국가...     [월드컵] 참가국 國歌 음미하며 즐겨보는 '세계사 월드컵'~♬   국가(國歌)는 그 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국가(國家)'의 역사와 탄생 배경을 유추할 수 있다. 왕정 국가는 왕실을 찬양하는 노래를 국가로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맞서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근대 국가의 기틀을 세운 나라는 혁명 당시 부르던 노래를 국가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대자연을 끼고 사는 나라의 일부는 역시 자국의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노래를 애창한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을 계기로 이들 나라의 역사를 유추해보는 건 제법 흥미로운 일이다. 월드컵 시청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가 제공하는 국가별 가사 자막을 보면서 놀라움을 가지기도 했으리라. 한국의 와 다른 나라의 국가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국가에서 발견되는 성격을 따라 남아공 월드컵 참가국들의 국가를 나눠봤다.   ▲프랑스 국가를 들으면 섬찟함마저 느껴진다. 혁명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노래다. 이런 노래를 들으면 선수들도 절로 힘을 낼 것 같은데, 이번 대회 프랑스는 무기력했다. 안드레-피레 지냑(툴루즈)이 남아공에 패해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후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뉴시스   ■ 혁명의 나라들 시민 혁명을 거친 나라들은 국가에도 혁명 정신과 자유, 독재에 대한 싸움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나라가 시민 혁명의 상징적 국가인 프랑스. 프랑스의 국가 는 프랑스 혁명 당시인 1792년에 만들어졌다. 전쟁 때 불렸으니만큼 가사가 사나울 수밖에 없다. 예술로까지 빗대지는 축구의 이미지와는 상반된다. 국가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올 정도다. 제목은 '마르세유 군단의 노래'라는 뜻을 가졌으며, 정식 국가로 채택된 때는 1879년이다.   일어나라 조국의 자녀들아/ 승리의 날이 왔다/ 우리와 맞서는 폭군의 피 묻은 깃발이 일어섰다/ 귀 기울여 들어라/ 들판에서 성난 병사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들이 지척까지 왔도다/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학살하러 온다/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아/ 군대를 형성하라/ 진격하라! 진격하라!/ 그들의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고랑에 흐르게 하자.   식민 모국이었던 영국에 대항한 전쟁으로 나라를 만든 미국 또한 '전쟁'과 '자유'를 국가의 중요한 상징으로 삼았다. 미국의 국가 는 1931년 정식 국가로 채택됐다. 총 네 구절로 구성됐으나 주로 1절이 불린다.   오! 그대여 이른 새벽녘의 저 빛이 보이는가/ 위험한 전쟁 속에서도 광대한 선으로 빛나는 별들과/ 황혼의 마지막 광휘에 환호하는 우리들의 긍지가/ 저 성벽 너머로 찬란히 빛나는 것을/ 창공에서 작렬하는 포탄과 탄환의 붉은 저 섬광들은/ 밤새 우리의 깃발이 휘날린 증거이리라/ 오! 성조기는 지금도 휘날리는가/ 자유와 용맹의 땅에서.   이런 혁명곡들의 정수는 주로 남미 국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륙 전체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왕조들에 약탈당했던지라 하나 같이 압제자에 맞서 끝까지 싸우자는 내용을 담았다. 우리와 조별리그에서 맞붙은 아르헨티나가 대표적이다. 혁명의 역사를 국가 에 새겨놓았다. 아르헨티나는 1810년 5월 25일에 스페인 왕정의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6년이 지나 아르헨티나는 하나의 독립국가로 정식 탄생한다. 올해는 아르헨티나 혁명 200주년이다. 은 1900년 정식 국가로 제정됐다. 매우 긴 노래였으나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지금의 국가로 완성됐다.   시민들이여, 신성한 외침을 들어라/ 자유! 자유! 자유!/ 쇠사슬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어라/ 고귀한 평등의 즉위를 보아라/ 하나 된 남쪽의 주들에 의해서/ 이제 그대들의 명예로운 주권을 이루어냈다/ 세계의 자유민들은 화답할지라/ 오! 위대한 아르헨티나인이여/ 오! 위대한 아르헨티나인이여/ 영광의 월계관이여 영원하라/ 우리는 승리를 알고 있노라/ 영광의 주권이 함께하지 않는 삶이라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맹세하자.   한국이 16강전에서 맞붙을 우루과이 또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을 강조하는 내용의 가사를 담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 참여한 파라과이, 칠레, 멕시코의 국가 역시 비슷한 내용이다. 다음은 우루과이의 국가다.   우루과이인에게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가 아니면 영광스러운 죽음을 택할지니/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바친 중요한 맹세/ 그리고 우리는 깨닫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도다/ 자유, 자유, 우루과이인이여!/ 열정과 정의에 찬 격렬한 전투 속에서/ 이 함성은 용사와 조국을 구해냈도다/ 우리는 이 성스러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 폭군들을 저지하라!/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다/ 죽어가면서도 자유를 외칠 것이다.   ■ 단합을 강조하는 국가들   열강의 압제에 신음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은 독립 후에도 부족 혹은 민족 간 대립으로 홍역을 겪는 나라가 많다. 이 원인의 상당 부분은 아프리카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 멋대로 국가를 나눠버린 서구 열강에 있다.(아프리카 나라 상당 국가가 마치 자로 잰 듯 반듯한 국경선을 유지하고 있는 게 증거다) 이 때문인지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 참여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가 가사는 단결과 통합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다. 한국과 16강전 진출 여부를 놓고 치열하게 다퉜던 나이지리아가 대표적이다. 나이지리아의 국가 는 1978년 채택됐다.   오, 동포들이여 일어나라/ 나이지리아의 부름을 따르라/ 사랑과 용기, 그리고 믿음을 갖고 조국을 섬겨라/ 옛 영웅들의 노고를 결코 헛되게 하지 마라/ 마음과 힘을 다해 자유와 평화, 통일을 위해 결속하라/ 오! 만물의 신이여! 우리의 고귀함을 지켜주소서/ 우리의 지도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진실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사랑과 정직함이 자랄 수 있도록/ 정당하고 옳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고귀한 성취를 이루게 하소서/ 평화와 정의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룰 수 있게 하소서.   월드컵을 유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 문제로 오랜 세월 신음했다. 이 때문인지 국가 는 아예 소절별로 다른 인종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 소절은 지역 원주민의 언어인 줄루어고, 두 번째 소절은 세소토어다. 셋째 소절은 처음 남아공 약탈을 시작한 네덜란드인의 후예들의 언어인 아프리칸스어이며 마지막 구절은 영어다. 는 두 노래가 하나로 합쳐진 곡이다. 앞의 두 소절은 로, 가난에 신음하는 흑인 사회를 구해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 뒤의 두 구절은 남아공의 옛 국가다. 백인 정권이 인종차별 정책을 한창 사용할 때 불리던 노래다. 가사를 보면 당시 국가가 현실과 얼마나 괴리돼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상이한 두 노래를 하나로 합친데서 아직 국가의 단합이 매우 힘든 상황임을 역으로 짐작 가능케 하는 부분이다. 이 노래는 남아공의 최초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집권한 이후 제정됐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줄루어)신이시여,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 영광을 높이 하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주여, 그대의 아들인 우리를 구원하소서/ (세소토어) 신이시여, 우리나라를 지켜주소서/ 모든 분쟁을 끝내주소서/ 지켜주소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소서/ 조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아프리칸스어) 우리의 깊은 바다에서 출렁이는 파도 소리는/ 우리의 푸른 하늘에 울려 퍼지리라/ 높은 산 위에서/ 바위산 끝까지 우리의 메아리가 울리리라/ (영어) 화합의 외침이 울린다/ 그리고 우리는 단결해 일어서리라/ 자유로운 삶을 위해 노력하리라/ 우리의 조국 남아공에서.   ■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나라들   광활한 자연의 축복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국가도 많다. 땅이 주는 은혜를 찬양하거나 역사의 아픔을 딛고 서로 격려하자는 내용이 특징이다. 이들 국가들도 대부분 과거에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대륙의 나라들이 이런 내용의 국가를 많이 채택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가 대표적이다. 호주는 과거 대영제국이 죄수들의 유배지로 삼고 개발한 곳이다. 이 과정에서 토착민들이 숱하게 학살된 슬픈 역사도 갖고 있다. 호주 역시 인종차별주의를 오랜 기간 지속했다. 그러나 가사에서는 이런 역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호주는 독립 후에도 영국 왕실의 찬가인 영국 국가 를 불러왔으나, 1977년의 국민 투표로 현재의 국가 를 채택했다.   호주인들이여, 함께 기뻐하자/ 우리의 젊음과 자유를/ 땀 흘려 일할 황금 토양과 풍부한 자원/ 바다로 에워싸인 우리 조국/ 풍성하고 희귀한 아름다운 천혜의 자원으로 가득찬 우리 조국/ 역사의 책갈피 속에서/ 호주인들이여 굳세게 전진하라/ 황금빛 태양의 적도 남쪽에서/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땀 흘리라/ 온 세계에 빛나는 이 나라, 우리 조국을 위해/ 바다 건너 이 땅을 찾은 우리들/ 함께 하는 끝없는 초원/ 용맹스럽게 모두 모여/ 호주인들이여 굳세게 전진하라/ 기쁨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호주인들이여 굳세게 전진하라.   복병 일본에 패해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카메룬의 국가 도 조상들이 일군 터전에서 단결하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일본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일왕을 찬양하는 와 카메룬의 국가는 내용이 크게 대비됐다.   오, 카메룬이여/ 우리 선조의 탄생지/ 그들이 휴식을 취하는 성스러운 성지여/ 그들의 눈물과 피와 땀이 적셔진 땅이여/ 언덕과 계곡마다 그들이 논밭을 일구던 곳이여/ 사랑하는 조국이여/ 어디에도 당신의 가치를 말할 수 있는 언어는 없으니/ 우리의 고역과 사랑, 평화로 얻어낸 안녕이여/ 그 이름 영원히 진실이 될지어다/ 약속의 땅이여, 영광의 땅이여/ 당신은 우리의 삶과 기쁨의 유일한 창고/ 당신을 향한 존경, 헌신 그리고 깊은 애정은 영원하리.   ▲한국과 8강행을 놓고 격돌할 우루과이는 자유의 소중함을 국가 가사에 담았다. 한국과 16강전에 우루과이 팬들이 "우루과이인에게 8강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지도 모를 일이다. ⓒ뉴시스   ■ 왕에 충성을 맹세하는 국가들   왕정을 유지하는 나라나 과거 왕정 국가였던 나라들은 여전히 '국가=왕족'의 신념을 담은 노래를 국가로 채택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영국마저 이런 내용의 국가를 부른다. 영국의 국가 는 세계 최초의 국가다. 현재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제위 중이라 국가에 '여왕'을 사용하지만 왕이 즉위할 경우 '왕(King)'으로 국가가 바뀐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 상당수가 이 노래를 같이 불렀다. 다만 이 노래는 엄밀히 말해 잉글랜드 왕국의 노래였기 때문에 다른 축구협회를 구성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A매치에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이 노래는 영국 경제 몰락 이후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등 반항적인 펑크 밴드들이 영국의 현실을 비꼬는 내용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펑크 밴드 노 브레인이 데뷔 앨범에 를 비꼬아 청년들의 슬픈 현실을 강조한 노래를 수록했다.   신이시여, 우리들의 자비로우신 여왕 폐하를 지켜주시고/ 고귀하신 우리들의 여왕이 만수무강토록 하소서/ 신이시여, 여왕 폐하를 지켜주소서/ 그분께 승리와 행복과 영광을 주소서/ 오! 신이시여 깨어나시어 그분의 적들을 물리쳐 쓰러지게 하소서/ 그들의 나라를 멸하시고 그들의 간교한 계략을 좌절케 하소서/ 당신만을 믿사오니 저희 모두를 지켜주소서.   왕정을 고수하는 일본도 왕을 찬양하는 를 고수하고 있다. 헤이안 시대의 단가에 가사를 붙인 이 노래는 일본이 최근 급격히 우편향되면서 일선 학교 등지에서도 부르도록 강조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제국주의 시절을 반성하지 못한다는 일본 내 시민단체의 지적이 잇따랐다. 월드컵을 독점 중계하는 는 한국인들의 불편한 감정을 의식한 탓인지, 중계 당시 일본의 국가는 가사를 소개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가 활기찬 선율을 가진데 반해 는 얼핏 들으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대의 시대는/ 천대에서 팔천대까지/ 조약돌이 큰 바위만큼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왕에 대한 충성의 시대를 회고하는 노래말도 가사로 쓰인다. 왕정 독재에 항거해 독립한 네덜란드의 국가 가 그렇다. 이 노래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이끈 오라녜공 빌렘1세의 주장을 그대로 담고 있다. 네덜란드 축구를 두고 흔히 '오렌지 군단'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의 이름을 본딴 것이다. 네덜란드의 북부 17개주는 과도한 세금을 매겼던 에스파냐 왕정에 항거에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했고, 80년에 걸친 독립전쟁 끝에 1648년 독립을 성취했다. 당시 에스파냐 왕정에 충성을 맹세했던 남부 네덜란드는 지금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로 쪼개졌다.   나사우의 백작 빌렘, 나는 게르만의 혈통!/ 조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라녜가의 왕자인 나는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다/ 나는 에스파냐 왕에게 충성을 다해 왔다.   그렇다면 과거 네덜란드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국가는 어떨까? 스페인 국가 은 공식적으로 가사가 없다. 비공식적으로 붙여진 두 개의 가사가 불리긴 한다. 이 노래는 왕실 행진곡으로 쓰였던 화려한 역사와 달리 작곡자도 불명이다. 원래 군악곡으로 쓰이던 노래를 1770년 카를로스 3세가 왕실 행진곡으로 지정해 연주되기 시작했다. 프랑코 독재 정권 때 다른 곡으로 대체됐으나, 왕정복고 후 다시 국가로 제정됐다.   정대세를 울게 한 북한 국가는?   한국에서 2010 남아공 월드컵을 독점 중계하는 는 참가국들의 국가 연주 때마다 충실하게 가사를 번역해 자막으로 송출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의 가사를 볼 수 없는 나라가 딱 네 나라 있다. 한국은 온 국민이 가사를 아니 당연히 나올 필요가 없고, 스페인은 가사가 없어서 표시하지 못한다. 다른 두 나라는? 북한과 일본이다. 일본은 식민 치하의 아픈 기억이 아직 우리 국민들에게 깊숙이 자리한데다, 제국주의 시절을 상징하는 노래를 국가로 사용하기 때문에 국민정서상 수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정대세도 를 듣고 울었다. 우리가 아는 그것과는 다르지만. ⓒ연합뉴스 북한도 마찬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냉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한반도의 특성상 민감한 부분을 애써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수뇌부가 판단한 듯하다. 그렇다면 북한 국가의 내용은 어떨까? 북한은 우리와 제목까지 똑같은 를 국가로 사용한다. '아침이 빛나게 하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진 는 남북이 갈라진 후 북한에서 불리었다. 남쪽에서 북한의 가 연주된 적도 있다. 지난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한이 공식 국가 자격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국기 게양식 때마다 한국인들은 북한의 국가를 들을 수 있었다.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2008년 2월 평양 공연에서 북한 국가를 연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대세가 눈물을 흘린 북한의 애국가 가사는 다음과 같다. 기대만큼(?)의 호전적인 내용은 아니다.   (1절)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력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2절) 백두산 기상을 다 안고/ 근로의 정신은 깃들어/ 진리로 뭉쳐진 억센 뜻/ 온 세계 앞서 나가리/ 솟는 힘 노도도 내밀어/ 인민의 뜻으로 선 나라/ 한없이 부강하는 이 조선/ 길이 빛내세.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 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출처] 각 나라 國歌 가사|작성자 헌책    
1702    난해시와 김수영 댓글:  조회:4738  추천:1  2016-01-01
진정한 난해시를 위하여 ─ 김수영에 관한 몇가지 단상 진이정   1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 부분   김수영이 일찍이 간파했듯이, 시의 대중성 따위는 진정한 시인이 걱정할 바가 아닐지도 모른다. 진정한 시인이었던 그는, 어느새 자신도 주체 못할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비록 사후의 일이지만,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해마다 번창하고 있으며, 문학에 입문하는 청년들의 손에는 으례 그의 두툼한 전집이 들려 있기 일쑤이다. 나는 지금 김수영의 성공을 질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격하고 때로는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어느새 김수영의 시는, 독자들에게 낯익은 그 무엇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그렇다면, 이제 그의 시는 더 이상 난해하지 않단 말인가. 읽기에 편한가. 나는 오래된 그의 시집을 다시 펴본다. 금이 간 노란 꽃이 내 망막 위에 흩날린다. 어렵다. 난해하다. 그의 시를 정독할수록 내 마음의 한구석에선 시끌시끌한 혼돈이 기승을 부린다. 바로 넓어져가는 소란이다.     2 김수영은 아직도 소수의 정예화된 독자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수들 뒤에는 시인의 명성을 쫓는 꽤 많은 수의 부화뇌동 독자들이 포진하고 있기도 하다. 바로 그 부화뇌동 독자들의 수효가 김수영의 시를 예전보다 덜 난해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3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 부분   살아 있는 시인의 좋은 시는, 죽은 시인의 시조차 의미 있게 한다. 그것은 죽은 시인을 찾기 전의 일이기도 하다.   4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은 여자, 無識쟁이, 이 모든 無數한 反動이 좋다 ─ 부분   내가 발견한 김수영의 데페이즈망. 그가 말한 것처럼 ‘이 무수한 반동’은 아직도 안성 유기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배열된 재료들의 성질과는 달리, 그 빛은 의외로 모던하고 난해하기조차 하다. 그의 당대에 신물나도록 볼 수 있었던 가짜 데페이즈망을, 그는 멋지게 뒤엎은 것이다.   5 나는 지금보다 시를 더 어렵게 쓰고 싶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자꾸 눈치가 뵌다. 나의 시는 아직도 ‘문학 이전’에 있는 듯싶다.   6 시집이 너무 많이 팔려서 문제이다. 전문적인 시집조차도 재판 삼판 찍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엘리어트의 우려를 빌리자면, 혹 우리 시인들이 독자들에게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 있기를 포기한 것은 아닌지, 이미 대중들에게 익숙한 것, 그들에게 낯익은 것을 포장만 새롭게 해서 공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라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생전의 김수영은, 자신의 시를 제대로 해독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지금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창조적인 시를 제대로 간파할 능력이 있는 소수의 명민한 독자들이 존재하느냐, 바로 그 점일 터이다.   [출처] 진이정/ 진정한 난해시를 위하여(김수영론)|작성자 헌책  
1701    난해시와 김춘수 댓글:  조회:4814  추천:0  2016-01-01
질문/// 저는 나름 상위권 학생으로 나름 언어영역을 좋아하기도 하는 학생입니다. 논리를 찾아 내는 걸 좋아하고 분석 하는걸 좋아하기 때문이죠. 그런 저를 괴롭히는 최대의 난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시입니다. 저는 독서량도 상당히 많았고 문학을 좋아하며 나름 시도 많이 읽었습니다. 웬만한 시는 얼추 해석할 줄 알며 해석까진 안 돼도 분위기라든지 화자 상황 정서 어조 태도 정도는 느낄 수 있는 수준입니다. 시의 표현 기법과 수사법 등도 익숙한 편이고요. 그런데 정말 짜증나게 만드는 것이 뭐냐면 이른바 힌트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시 있죠? 이른바 진리탐구에 관한 시들. 인생에 관한시보다 어떤면에서 더 어렵더군요.   예를 들어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이 시를 보면... 화자가 나란건 알겠는데 도무지 상황 태도 정서는 알 길이 없군요-_-;;물론 제가 못찾는 건지도 모릅니다만. 선택지를 보니 뜬금없이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나오더군요. 대체 어디서 그런 분위기나 뉘앙스를 찾을 수 있는 것인가요? 존재라는 단어는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라는 부분에서만 한 번 나왔을뿐인데 이게 어떤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 거죠? 저는 정말 미치겠습니다. 언어영역 항상 다른 걸 다 맞추고 시에서만 2~3개씩 틀립니다. 정말 대기권 돌파의 실력인 친구에게 물어봤습니다. 시는 대체 어떻게 공부하느냐고.. 그 친구가 딱 하는 말이 뭐냐면.   "시란 건 원래 젖같은 거야. 솔직히 이런 걸 똑같은 기준을 두고 해석한다는 게 미친짓이지. 사실 시 따위는 수능 같이 공정한 변별력을 가리는데 나와선 안되는 장르야. 그래도 내는 건 교수들 마음이니 어쩔 수 없고 점수는 받아야하기에 난 그냥 시는 보이는대로 닥치는 대로 다 분석해서 외워버리고 있어." 이러더군요.   저는 그말을 듣고 나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단 저는 외우는건 질색이거든요 -_-;정말 시라는걸 해석하는 올바른 논리구조는 없는 것일까요?     답변자///     현대시가 독자들에게 난해성을 안고,  접근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시가 본질상 머리로 이해하는 글이라기보다는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글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오늘의 시가  그 본질에서 멀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를 어떤 수학적 공식과도 같은 등식으로 이해 하려고 한다면, 그 해답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난해성으로 유명한, 이상의 시나, 님이 지적하신 김춘수 시인의 꽃을 위한 서시, 또한 그러합니다. 독자의 가슴에 감동으로 와 닿으려면, 먼저 머리에서부터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시가 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가 난해한 시로 둔갑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부터 입니다. 시는 대중적 비위를 맟추려 아부해서도 아니되고, 독자로부터, 홀로 고립되어서도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춘수 시인 자신은, 자기의 난해시에 대해서 말하기를, 분석하려 들지말고 그냥 그대로 가슴으로 느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가 가슴에 와 닿기 이전에, 머리를 먼저 통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현대시가 지향해 나아가야할 방향이, 보다  더 , 독자의 가슴에 쉬운 이해와 감동의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시로, 변신해 가야할 것입니다. ============================================================================================     난해시란 쉽게 말하자면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시이지요. 예를 들면 이상의 '오감도'와 같은 시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너무나도 난해하고 낯설어서 신문 연재당시 독자들의 항의에 의해 연제가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시인들이 시를 이렇게 난해하게 만드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형식의 타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험정신이 강한 시인들이 기존의 모든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를 원하는 바람에서 이러한 시들이 태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또 한가지 이유는 '낯설게 하기 수법'으로서 사람들이 시의 내용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것이지요... [출처] 난해시|작성자 헌책 ...   [출처] 난해시/ 머리를 먼저 통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작성자 헌책    
1700    난해시와 조영남가수 댓글:  조회:4421  추천:0  2015-12-31
조영남의 이상한(?) 이상 詩독법          전천후 엔터테이너 조영남(가수, 화가)이 시 해석에 도전했다. 그것도 ‘해독불가’로 낙인 찍힌 시인 이상(李箱)이다. 그의 해독은 무슨 이론을 적용해 분석해낸 전문가들의 평과 다르다.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리고 그 특유의 재미가 있다. 가령 이상의 난해시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이상한 가역반응’의 경우 남녀 사이의 관계로 이를 해석한다. 폐결핵에 걸린 시인의 남성이 만들어낸 센티멘탈한 시라는 얘기다. 이상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오감도’를 외국 시인과 비교한 대목은 압권이다. 랭보의 ‘나쁜 혈통’, 보들레르의 ‘축복’, 엘리엇의 ‘죽은 자의 매장’ 등을 하나하나 비교하며 각 시인의 특이점, 장단점을 분석하면서 이상을 노벨문학상감으로 추켜세운다. 이상의 시 100여편을 자유분방하게 상식과 지식, 미학, 감성, 직관을 총동원해 분석한 이 책은 이상이란 시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일반인에게 시를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조영남/한길사 [출처] 조영남/ 조영남의 이상한(?) 이상 詩독법 |작성자 헌책  
1699    난해성과 현대성 댓글:  조회:4533  추천:0  2015-12-31
1, 현대성[現代性] [명사] 현대에 알맞은 특성.  modernity  현대-성 現代性  명사 발음〔현ː대썽〕   예문) 그 화가는 서구 현대 회화의 방법을 빌리면서도 서구의 정서에 빠지지 않고 우리 것을 견지해 한국 회화에 현대성을 구현했다고 평가받았다.   관련서적)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홍신문화사) / 위르겐 하버마스(저자) 이 책은 하버마스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응답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하버마스 철학의 근본성격을 다른 어느 책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하버마스가 옹호하고자 하는 현대의 세가지 성격들, 즉 비판성,합리성, 규범성을 내면적으로 상호 결합시키는 유토피아 정신을 조심스럽게 탐측하고 있다.   2.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1960년에 일어난 문화운동이면서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는 한 시대의 이념.  이 운동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 ·여성운동 ·흑인민권운동 ·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전위예술, 그리고 해체(Deconstruction) 혹은 후기구조주의 사상으로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 점검과 반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대라고 하면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니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거친 후 포스트모던 시대는 J.데리다, M.푸코, J.라캉, J.리오타르에 이르러 시작된다.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해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해왔는지 드러낸다. 데리다는 어떻게 말하기가 글쓰기를 억압했고, 이성이 감성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는지 이분법을 해체시켜 보여주었다. 푸코는 지식이 권력에 저항해왔다는 계몽주의 이후 발전논리의 허상을 보여주고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말하였다. 둘다 인간에 내재된 본능으로 권력은 위에서의 억압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생겨나는 생산이어서 이성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합리적 절대자아에 반기를 들고 프로이트를 귀환시켜 주체를 해체한다.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되어 있고 그 차이 때문에 이성에는 환상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 역시 숭엄(the Sublime)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합리주의의 도그마를 해체한다. 따라서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도그마에 대한 반기였다. 문화예술의 경우는 시기구분이 좀더 세분화된다.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Modernism)이었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실주의는 대상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믿음으로 미술에서는 원근법을 중시하고 어떻게 하면 실물처럼 그릴까 고심했다. 문학에서는 저자가 객관적인 실재를 그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줄거리가 인물을 조정하여 원근법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런 사실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 베르그송의 시간의 철학 ·실존주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 객관진리,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면서 도전받는다.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도 미술에서는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입체파 등 구상보다 추상으로 옮아가고 문학에서는 저자의 서술 대신 인물의 서술인 독백(‘의식의 흐름’이라고도 함)형식이 나온다. 모더니즘은 혁신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에 대한 회의로 개성 대신에 신화와 전통 등 보편성을 중시했고 피카소, 프루스트, 포크너, 조이스 등 거장을 낳았으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대중과 유리되었다. 개인의 음성을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상황이 반발의 측면이 강하지만 예술에서는 연속의 측면도 함께 지닌다. 비록 이성과 보편성에 의지했지만 이미 재현에 대한 회의가 모더니즘(현대성)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각 영역에서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술에서는 추상 대신에 대중성을 띄고 다시 구상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팝아트처럼 같은 대상을 여러 번 찍어 ‘다르게 반복하기’를 선보이는 경우, 모나리자 등 친숙하고 고유한 원본을 패러디하여 ‘다양한 재현들’을 선보이는 경우, 예술가의 권한을 축소한 미니멀 아트(미니아튀르) 등, 단 하나의 절대재현을 거부한다. 문학에서는 인물의 독백이 사라지고 다시 저자가 등장하는데 더이상 19세기 사실주의와 같은 절대재현을 못 한다. 작가가 자신의 서술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자의식적 서술(메타 픽션), 현실과 허구의 경계와해, 인물과 독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열린 소설, 보도가 그대로 허구가 되는 뉴저널리즘, 작가의 권한을 최소화한 미니멀리즘 기법 등이 쓰인다. 영화와 연극 역시 사실주의의 패러디로서 환상적 기법, 자의식적 기법을 사용한다. 무용에서는 토슈즈를 신었던 19세기 발레에서 맨발의 자유로움과 기법을 중시한 모더니즘, 그리고 다시 운동화를 신는 포스트모던 댄스로 대중성과 개성이 중시된다. 서사(narrative), 기호학 등 비평이론의 경계와해는 공연예술에서 탈장르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던 건축은 기능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밋밋한 건축에서 장식과 열린 공간을 중시하고 분산적이며 옛것에 현대를 접합시킨 패러디가 유행한다.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산업사회는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이제 컴퓨터 ·서비스산업 등 정보화시대에 이르면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광고와 패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추겨진다. 빗나간 소비사회는 때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탈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등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정치현상은 한국사회와도 무관하지 않다. 미술 ·건축 ·무용 ·연극에서는 실험과 저항이 맞물려왔고 1980년대 말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과 문민정부의 출현은 한국 문학과 예술에도 포스트모던 바람을 일게 하였다. 근대나 현대는 서유럽에 비하여 짧고 급속히 이루어졌기에 시민의식과 기술산업사회가 균형을 이룰 수 없었다. 서유럽과 한국사회를 똑같이 볼 수 없는 여러 상황에 의해 한국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영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출처]난해성/ 현대성|작성자 헌책  
1698    난해시와 어설픈 평론 / 나와 나도 난해시가 좋다... 댓글:  조회:4503  추천:0  2015-12-31
난해시와 평론에 관한 어설픈 에세이         아래 시를 감상해보자. 어느 유명 일간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나는 독수리를 먹는 인간이다. 내 입에서 독수리가 나온다 독수리 입에서 구렁이가 나온다 구렁이 입에서 개구리가 나온다 개구리 입에서 파리가 나온다 파리 입에서 미생물이 나온다   우주의 유기적 연관관계 나는 감탄한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다못해 수능 시험 선지에 나오는 “통사구조의 반복” 같은 말이나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이 때문에 나름 자신의 예술적 심미안에 자책하실 분도 계실 것 같다. 물론 나름 여기서 철학적 의미를 캐치해 낸 명석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만약 철학적 의미를 캐치하셨다면 낚인 거다. 이 시는 일간신문 신춘문예 당선작도 아닌 내가 10초만에 아무 말이나 써놓은 시이다. 한 마디로 낙서란 얘기다.  그런데 요즘 이와 같이 낙서 같은 시들이 범람한다. 거기엔 평론가들이 온갖 찬사가 덧붙여진다.   지금은 버린 꿈이지만 나는 한 때 문인의 꿈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경기도의 모 예술고등학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문예창작과니깐 당연히 일반 인문계와 다르게 전공수업이 있다. 전공수업은 문학개론, 문장론, 현대문학, 고전문학, 문학사, 시 창작, 소설 창작 등등. 나름 체계적인 커리를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전공 수업의 백미는 시창작과 소설창작이었다. 더욱이 시창작과 소설창작 시간에는 각자가 쓴 시와 소설을 가지고 토론하는 합평시간 있었다. 합평시간은 전공 수업의 백미 중의 백미였다. 내가 2학년 때 시창작 합평 시간마다 포스트모던한 난해시(?)를 써오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애의 시는 자글자글 씹혔다. 비유가 작위적이다. 시어 간에 개연성이 떨어진다. 의미가 불명확하다. 중얼중얼 하여튼 이런 말들이었는데, 나도 이 대열에 끼어들어서 같이 자글자글 씹었다. 나도 언젠가 심심해서 난해시를 써서 제출한 적이 있었다. 제대로 씹혔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난 자글자글 씹으면서도 씹히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요즘 현대시인들 특히 미래파라 일컬어지는 부류들. 그 시인들도 그 애 만큼 난해한 시를 쓴다. 그런 사람들 시집을 놓고 그냥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여기에 시의 기본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은유나 상징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비유는 너무 작위적인 것 같고, 시어 간에 개연성도 찾을 수 없다.  근데 왜 그 시인들은 나름 대학 교수에 문학평론가 명함 단 사람들이 한국문학의 역작이니 가능성이니 어쩌구니 하면서 찬양받고, 그 애는 왜 한낮 고삐리들한테 자글자글 씹혀야할까?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애의 시를 씹은 나를 탓할지도 모르겠다. 치졸한 변명을 하자면 씹지 않으면 수업 시간에 할 말이 없다. 합평시간에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눈초리를 받기에 처지가 곤란해진다. 물론 그 문제에 대해 선생님이나 우연히 만난 시인들에게 질문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으나 답변은 대개 모호하거나 불성실했다. 그냥 뭔가가 있다? 그 수준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사실 시인이란 부류들은 너무 불성실해서 자기 시집에 한 줄 자리 시를 써놓기도 한다. 심지어 모 문예지에서 단어 하나만 써놓고 시라는 시인도 봤다. 거기에 평론가는 뭐가 어쩌구니 해서 온갖 찬사의 코멘트를 붙였다.  만약 내가 그런 시를 써서 합평 시간에 들고 갔으면 이게 무슨 시냐고 자글자글 씹혔을 것이다. 또한 선생님은 나를 불성실하다고 혼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대충 몇 마디 써놓고 유명 시인 이름으로 발표한다면 어떨까? 아마 자크 데리다의 “해체”니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니 온갖 철학적 개념을 가지고 와서 찬사를 할 것이다.   여기에 미술의 사례를 끌어와도 될지 모르겠다. 사실 현대미학에서 이 문제는 골칫거리였다. 전시관에 변기 달랑 놓고 샘이라는 예술가가 있는 반면, 대충 붓으로 낙서만 해놓은 그림도 예술이라는 예술가가 있다. 도대체 그렇다면 예술의 기준은 무엇일까? 무언가를 정의하려면 공동적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예술마다 중구난방이니 도무지 공통적 요소를 뽑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와이츠는 예술은 유사성을 가진 열린 개념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견해는 미국의 분석 미학자 조지 디카의 견해다. 그는 예술이란 “예술계”라는 집단이 자격을 쥐어준 작품이 예술 작품이라고 했다. 이와 다소 관련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미국의 몰래카메라 방송에서 침팬지 두 마리에게 붓으로 그림을 그리게 했다. 침팬지는 신나서 물감을 이용해 붓으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은 “제3세계에서 온 젊은 미개인”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그 작품을 본 평론가들은 온갖 찬사를 내렸다. 어느 유명한 평론가는 지에 “유럽화가 말레비치와 미로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지만 나는 만족과 존경심을 가지고 이 그림을 감생했다”는 평론을 남기기도 했다.   만약 유치원생에게 작문을 하라고 한 뒤, 유명한 시인의 시라고 발표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평론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유년 시기를 추억하는 계보학적 탐색? 알 수 없는 일이다. ============================================================= 난해시 사랑 / 복효근       난 난해시가 좋다 난해시는 쉬워서 좋다 처음만 읽어도 된다 처음은 건너뛰고 중간만 읽어도 한 구절만 읽어도 끝부분만 읽어도 된다 똑같이 난해하니까 느낌도 같으니까   난 난해시가 좋다 난해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람도 나하고 같이 느낄 테니까 인상적인 한 구절만 언급하면 된다 더구나 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니까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은 많이 배웠겠다 싶다 그런 시를 언급할 정도면, 더구나 좋다 말할 정도면 고급독자이겠다 싶다   난 난해시가 좋다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든 독자의 몫이라고 존중해주니까 내 느낌 내 생각 다 옳다잖아 나도 그 정도는 시는 쓰겠다 싶어 나를 턱없이 자신감에 넘치게 하는 시 나도 시인이 될 수 있겠다 하고 용기를 갖게 하는 시 개성 있어 보이잖아 남 눈치 안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지 적당히 상대를 무시해 보이는, 그래서 있어 보이는 시 단숨에 두보도 미당도 뛰어넘어 보이는 시   난 난해시가 난해시인이 좋다 죽었다 깨나도 나는 갖지 못할 보석을 걸친 여인처럼 나는 못 가진 것을, 못하는 것을 갖고 하니까 나도 난해시를 써보고 싶다 그들처럼 주목 받고 싶다 평론가들이, 매우 지적인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그들이 나는 부럽다 그런 것도 못하는 치들을 내려다보며 어깨에 당당히 힘을 모으며 살아가는 그들이 부럽다                                             -『우리詩』2011년 1월호   복효근 /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199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버마재비 사랑』『새에 대한 반성문』『누우 떼가 강를 건너는 법』『목련꽃 브라자』『마늘촛불』.   ----------------------------------------------------------------     나도 난해시가 참 좋다                                  - 복효근 시인의 詩, '난해시 사랑'을 읽고         자꾸, 시를 읽는다. 오래 전 시집을 읽다가, 어떤 시가 너무 좋아서, 그 한 편의 시를 수십 번 이상 읽고 또 읽었던 때가 있었다. 어떤 날은 지나칠 수 없는 시를 만나, 그만 그 시에 걸려 넘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무작정 시인을 꿈꾸던 날들이었다.   그때처럼 또, 시를 읽는다. 어떤 시집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한 번도 눈길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그 흔한 돌부리 하나 없는 것도 있다. 어떤 시집은 시 한 편을 만날 때마다 생각을 하고 또 해 가며 읽어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천재성(?)을 발휘하는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인을 꿈꾸는 날들이다.   시에 호好, 불호不好가 어디 있을까? 평소 가깝게 지내는 어떤 시인이 즐겨하는 말대로, 나 또한 좋은 시와 나쁜 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렵다거나 쉽다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 나 같은 사람이 쓴 시조차도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독자들을 만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다 인정한다고 해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들도 있는 법. 이 시인은 지금까지 꾹 참고 있던 말을, 더는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툭, 꺼내 보이고 만다. 「난해시 사랑」에는 복효근 시인의 목소리뿐 아니라,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말을 꾹 참고 있었던 수많은 시인, 독자들의 목소리가 함께 실려 있다. 나도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밀며 그 자리에 끼어든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도, 이 시인처럼, 난해시가 참 좋다. 나도, 이 시인처럼, 난해시를 쓰는 시인들이 참 부럽다. 하지만 이 시인은 결코 난해시를 쓰는 시인은 못될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박완호 )                                                                         - [주변인과 시]    [출처] 난해시/ 난해시와 평론에 관한 어설픈 에세이 /크누트|작성자 헌책  
1697    난해시와 신경림 댓글:  조회:4930  추천:0  2015-12-31
김예리(문학박사)   1935년 충청북도 충주군(현 청주시) 노은면 연하리에서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난 신경림은 1955년 12월 〈문학예술〉에 「낮달」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1957년에는 돌연 낙향하여 농사를 짓거나 광산, 공사장에서 일하고 방물장수, 아편거간꾼들을 방랑하는데, 이때의 경험이 이후 작품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농무』(1973), 『새재』(1979),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 『길』(1990), 『여름날』(1991),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뿔』(2002)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신경림에 대한 시천기(詩薦記)는 “움직이고 있는 시대를 무시 내지는 한각(閑却)”하고 있으며 “시대정신의 반영은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신경림에게서 ‘민중문학론의 기수’로서의 면모를 찾기는 힘들고, 존재론의 차원을 더듬는 서정시인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때의 평단은 신경림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신경림은 56년부터 근 십 년 동안의 공백 이후 1965년 〈한국일보〉에 「겨울밤」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재개한다. 널리 알려진바, 이 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농촌의 현실을 소재로 삼고 있으며, 초기 시편들과 함께 73년 3월 자비(自費)로『농무』(이후 75년 3월 5일 창작과 비평사에서 증보판이 발행된다)가 출판된다.  당시 문단에서는 이미 리얼리즘 논쟁이 더욱 활성화되고, 71년에는 황석영의 「객지」가 발표되어 리얼리즘 문학론 진영이 더 이상 추상적인 이론이 아닌 구체적인 ‘작품으로서의’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경림은 기존의 모더니즘 시, 난해시를 일거에 물리치면서 민중의 정서와 목소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70년대 리얼리즘 문학의 분출을 여유있게 증명한 기념비적 작업”으로 평가된다. 《문장》  [출처]신경림/ 난해시를 일거에 물리치면서,|작성자 헌책  
1696    <<가는 年... 오는 年... 그 찰나...>> 다시 보는 졸시 두수 댓글:  조회:1408  추천:0  2015-12-31
  무루의 한 극에서                     김승종     ㄱ   그때는, 그때는,   이 마을 저 마을 아이들 모두다 미쳐버렸댔슈   핫, 시골길 허위허위 톺아지나는 트럭 뒤꽁무니 따라가며 그 그을음내 맡고 또 맡으면서   그렇게나마 새하야니, 새하야니 코날개 벌름대던     ㄴ   ……       ㄷ   요즈음, 요즈음,   이 마을 저 마을 아이들 모두다 정말로 미쳐버렸는가보우   시퍼렇게 피멍꽃 옮아가던 18현(鉉)도 시허옇게 소금꽃 돋아나던 사물(四物)도 핫, 어절씨구 팽개치고 재너머로 떠나버린 …     ㄹ   요즈음, 요즈음,   참 24기와 72후도 모두다 미친다 생야단이유 황사바람에 죽림동(竹林洞) 떡갈나무들도 가슴 부여잡고 찬란히 신음하고있는…     ㅁ     성스러운 해빛도 그 그을음내에 지쳐버리고 다정다감했던 해볕도 그 구겨진 령혼에 찌들어버린채 저기 “무릉도원”의 한 극에서 버둥대고있는 이때 -모두들 안녕하시우   --------------------- *조선족고급중학교교과서 조선어문(필수3) 자습독본 사랑과 자유 연변교육출판사, 제4단원 ‘자연과 인류’ 편에 실려 있는 작품임.       찬란한 대화                   김승종     별 하나 박우물에 실린다 보고싶어 한 여름 그리워 한 가을…   황홀한 꿈 두 쪼각 치분히 마음자락에 드리워 바람속의 무게를 달아본다 박우물 속 깊이를 훔친다   박우물 하나 별 하나   -------------------- *「룡정・윤동주연구회」 문화총서(1) 룡두레, 上海遠東出版社, 윤동주 추모시 8편 가운데 1편임.  
1695    난해시와 李箱 댓글:  조회:4870  추천:0  2015-12-31
  이상은 서구 모더니즘을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수학과 건축학에 능통했으므로 기하학적인 시, 숫자시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는 식민사회였기 때문에 자율이 우선시되는 모더니즘이 꽃피기에는 너무 억압이 많았죠.    그리고 이상은 유아기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여성도 믿지 않았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불우한 일생을 보냈죠. 그래서 그는 문학에 의지한 것일 수도 있고요.   이상은 어렸을 적부터 친부모가 아닌 백부의 집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실제로 장손이 아니면서도 그 의무를 지녀야 했고.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 의무감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면, 문벌과 가계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조부와 백부의 억압 때문에 조상에 대한 증오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든 단편적으로든 그의 작품에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 커녕 비난을 받아 결국 도일하고 맙니다.    이상은 이런 독자들에게 서운함까지 느끼는데 그것은 다음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 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결국 그는 일본에서 셋방을 얻어 동경생활을 시작하는데,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결국 귀향할 뜻을 김기림에게 밝힙니다. "동경이란 참 치사스런 도십디다. 예다 대면 경성이란 얼마나 인심 좋고 살기 좋고 '한적한 농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죽고 맙니다. 결핵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나, 매독이었다는 설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19세기와 20세기에 끼어 절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낳은 기교 덕분에 절망하여 서울 생활을 접었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던 선구자였습니다. 이상의 생애에 대한 것은 자료가 흔하니 더 찾아보시면 좋을 자료를 찿을 수 있을 겁니다. ... ... =========================================================================================== 이상   생몰년 : 1910-1937 시대 : 항일기 본명 : 김해경(金海卿) 본관  : 강릉 출생 : 서울 분야 : 문학 > 시/시조인 > 시인, 소설가 이상(李箱)에 대하여   1. 가계와 수학 아버지는 연창이며, 어머니는 박세창으로 2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부터 부모슬하를 떠나 통인동 본가 큰아버지 연필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를 거쳐 1926년 동광학교(뒤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2. 사업과 문학수업 그해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각혈로 기수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온천에 요양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하였다. 이무렵 이곳에 이태준·박태원·김기림·윤태영·조용만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교우가 시작되었고, 1934년에 구인회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학)’, 다방 ‘무기’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그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죽었다.   3. 작품발표 그의 작품활동은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뒤 1931년 일문시(日文詩)〈이상한 가역반응〉·〈파편의 경치〉·〈▽의 유희〉·〈공복〉·〈삼차각설계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꽃나무〉·〈이런 시〉·〈거울〉 등을, 1934년 《월간매신》에 〈보통기념〉·〈지팽이 역사〉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시뿐만 아니라 〈날개〉(1936)·〈지주회시〉(1936)·〈동해〉(1937) 등의 소설도 발표하였다.   4. 문학세계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문학시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문학에 스며 있는 감각의 착란,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비상식적인 세계는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성격짓는 요인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환경, 그리고 자전적인 체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나, 근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그의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반응은 당대의 시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시의 주지적 변화를 대변함과 동시에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러한 지적 태도는 의식의 내면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억압된 의식과 욕구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세계에로의 탈출을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정신을 논리적 사고과정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으로써 그의 문학에서는 무력한 자아가 주요한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시 〈거울〉이나 소설 〈날개〉 등은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시 〈오감도〉는 육체적 정력의 과잉, 말하자면 발산되어야 하면서도 발산되지 못한 채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발작으로 인한 자의식과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대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같은 역설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유희는 그의 인식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독특한 시각방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억압받은 성년의 욕구가 나르시시즘(narcis- sism)의 원고향인 유년시대로 퇴행함으로써 욕구충족을 위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마련하였고, 유희로서의 시작은 그러한 욕구충족의 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인간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구제를 꾀한 시인이었다.   기타 시작품으로 〈소영위제〉(1934)·〈정식〉(1935)·〈명경〉(1936) 등과, 소설 〈봉별기〉(1936)·〈종생기〉(1937), 수필 〈권태〉(1937)·〈산촌여정〉(1935) 등이 있다. 유저로 이상의 시·산문·소설을 총정리한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출처]김해경/ (金海卿)|작성자 헌책   [출처] 난해시/ 다이상   생몰년 : 1910-1937 시대 : 항일기 본명 : 김해경(金海卿) 본관  : 강릉 출생 : 서울 분야 : 문학 > 시/시조인 > 시인, 소설가 이상(李箱)에 대하여   1. 가계와 수학 아버지는 연창이며, 어머니는 박세창으로 2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부터 부모슬하를 떠나 통인동 본가 큰아버지 연필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를 거쳐 1926년 동광학교(뒤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2. 사업과 문학수업 그해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각혈로 기수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온천에 요양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하였다. 이무렵 이곳에 이태준·박태원·김기림·윤태영·조용만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교우가 시작되었고, 1934년에 구인회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학)’, 다방 ‘무기’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그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죽었다.   3. 작품발표 그의 작품활동은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뒤 1931년 일문시(日文詩)〈이상한 가역반응〉·〈파편의 경치〉·〈▽의 유희〉·〈공복〉·〈삼차각설계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꽃나무〉·〈이런 시〉·〈거울〉 등을, 1934년 《월간매신》에 〈보통기념〉·〈지팽이 역사〉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시뿐만 아니라 〈날개〉(1936)·〈지주회시〉(1936)·〈동해〉(1937) 등의 소설도 발표하였다.   4. 문학세계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문학시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문학에 스며 있는 감각의 착란,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비상식적인 세계는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성격짓는 요인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환경, 그리고 자전적인 체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나, 근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그의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반응은 당대의 시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시의 주지적 변화를 대변함과 동시에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러한 지적 태도는 의식의 내면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억압된 의식과 욕구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세계에로의 탈출을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정신을 논리적 사고과정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으로써 그의 문학에서는 무력한 자아가 주요한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시 〈거울〉이나 소설 〈날개〉 등은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시 〈오감도〉는 육체적 정력의 과잉, 말하자면 발산되어야 하면서도 발산되지 못한 채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발작으로 인한 자의식과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대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같은 역설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유희는 그의 인식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독특한 시각방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억압받은 성년의 욕구가 나르시시즘(narcis- sism)의 원고향인 유년시대로 퇴행함으로써 욕구충족을 위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마련하였고, 유희로서의 시작은 그러한 욕구충족의 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인간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구제를 꾀한 시인이었다.   기타 시작품으로 〈소영위제〉(1934)·〈정식〉(1935)·〈명경〉(1936) 등과, 소설 〈봉별기〉(1936)·〈종생기〉(1937), 수필 〈권태〉(1937)·〈산촌여정〉(1935) 등이 있다. 유저로 이상의 시·산문·소설을 총정리한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출처]김해경/ (金海卿)|작성자 헌책   시 이상/ poetic94|작성자 헌책         이상(李箱, 1910년 9월 14일 - 1937년 4월 17일)  한국의 근대 작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이상(작가)   1910년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12년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15회로 중단하였다. 1936년  동인지 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내고 그만두고, 에 ‘지주회시’, 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이해,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종생기' ,'권태', '환시기' 등을 쓰고, '봉별기'가 에 발표되었다.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필명 유래 이상에게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생인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이름은 구본웅(具本雄). 구본웅은 몸이 불구이고 약해서 학교에 꾸준히 나가지 못해 나이는 이상보다 4살이나 위지만 같은 학년 같은 반에 편성되었다. 꼽추이고 4살이나 나이가 많은 구본웅과 아무도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지만 이상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으며 이상은 구본웅을 4년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그렇게 그들은 특별하고도 아주 진지한 우정을 쌓아갔다. 동광학교를 거쳐 1927년 3월에 보성고보를 졸업한 김해경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했다. 그의 졸업과 대학입학의 축하선물로 구본웅은 사생상(寫生箱)을 선물했다. 사생상이란 스케치박스를 말한다. 그간 사생상을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했던 이상이 사생상을 선물 받고 날아갈 듯 기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구본웅에게 고마운 나머지 자신의 필명에 사생상의 '상자'를 의미하는 箱자를 넣겠다고 흥분했다. 김해경은 아호와 필명을 함께 쓸 수 있게 호의 첫 자는 흔한 성씨(姓氏)를 따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고 구본웅도 흔쾌히 동의하자 김해경은 사생상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니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성씨 중에서 그 성씨를 찾기로 했다. 두 사람은 권(權)씨, 박(朴)씨, 송(宋)씨, 양(楊)씨, 양(梁)씨, 유(柳)씨, 이(李)씨, 임(林)씨, 주(朱)씨 등을 검토했다. 김해경은 그 중에서 다양성과 함축성을 지닌 것이 이씨와 상자를 합친 '李箱'이라 생각했고 구본웅도 그 절묘한 배합에 감탄했다. 이상의 연애에 관해 그를 키워준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자 그는 적선동의 가난을 정리한 후 효자동으로 옮겨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그는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한량기질이 가만히 잠들어 있을 리 없었다. 사흘을 못 참고 장고 소리 나는 곳으로 찾아간 그는 바로 이곳에서 운명의 여인인 금홍을 만났다. 그는 금홍에 대해 '보들레르의 흑인 혼혈 정부 잔느 뒤발을 닮은 데다가, 모든 남자들이 한 번 정도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여자'라 찬사를 늘어 놓았다. 여자에 대한 호평에 박한 그가 금홍에 대해 이 정도로 평한 것은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져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천성적으로 예쁜여자를 좋아하던 그는 그녀의 매력에 금새 도취되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금홍을 비롯해 이상은 전생애를 통해 여러 여급과 사랑을 나누었다 .금홍과 헤어진 다음 만났던 권순희 역시 미모를 자랑하는 여급이었고, 또 유일한 정식 아내였던 변동림도 이상의 묵인 하에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간통 사건을 일으켰고, 후에 여급으로 일했다. 이상은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이들은 그에게 잠시 동안 위안을 주는 여급일 뿐, 그를 오랫동안 지탱해주는 반려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여급하고만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또 애인과 다른 남자들과이 관계를 방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대한 답은 그가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다시말해 그는 여자를 가지려고도, 또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보통남자들이 바라는 열녀형의 양처를 가진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그녀들에게 바랬던 것은 생활의 안정이나, 안정된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여자들에게 문학 소재 혹은 아이디어를 원했다 .이들은 실행활에서 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문학적인 면에서는 그가 문학 속으로 침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그녀들과 나누었던 경험은 소설과 시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금홍은 '날개', '봉별기', '지주회시' 등에, 또 마지막 여자였던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비 정상적인 직업의 여성들을 택했고, 또 성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던 그는 그녀들의 외도를 묵인해주어야 했다. 더구나 이상의 여자들은 그의 특이한 습성을 이해할정도로 너그러웠고 그중에서도 금홍은 그와 이러한 성향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그의 사랑을 비교적 오랫동안 독차지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다방 뒷골방에 마련했던 조그만 살림방은 그의 대표작인 '날개'의 무대가 되었다. 한동안 금홍은 마담으로 '제비' 카운터에서 일하고, 이상은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밤에 밖으로 기어나오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그의 제비다방 시대는 1933년 7월 14일 개업으로부터 1935년 9일, 파산하기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가장 격렬한 사랑마저 이렇게 금방 끝나고 만 것은 폐병 때문에 성기능도, 보석을 사줄 만한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여자에게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 했던 그는 1933년 여름부터 1934년 여름까지 이상이외의 남자를 만난 적인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몰입했던 금홍에게조차 불성실하게 행동했다. 같이 산 지 1년이 지나자 금홍은 이상에 대해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이야. 게다가 돈도 벌어올 줄 모르고'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로 그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금홍에게 천대를 받던 1934년 그는 에 발표한 '오감도'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1933년과1934년은 화려한 문단 등단뿐 아니라 파산, 금홍과의 파경으로 가득찬 해였다. 당시 그가 느꼈던 좌절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하루는 나는 이유없이 금홍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금홍이가 너무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금홍과 서먹해질 즈음 그는 동인들과의 만남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금홍이 나간 직후 그는 잠시 카페 '쓰루'에 있었던 여급 권순희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여복 없는 그에게 이도 오래갈 리 없었다. 그녀를 짝사랑 하다 자살소동까지 일으킨 친구 정인택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채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결혼식의 사회까지 맡아주었던 것. 그후 그는 박태원, 김유정과 어울려 다니면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심신을 소모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그가 했던 한마디는 그의 생활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     '제비'다방과 금홍을 잃은 후 그는 아버지의 집을 저당잡혀 인사동에 카페 '쓰루'와 광교 근처에 다방 '69'를 개업했다가 곤 망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명동의 '무기'를 설계해 개업하려했으나 중도금이 없어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빈민촌으로 가족을 이사시킨 이상은 묵묵히 따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력 사이에서 방황했다. 금홍에 이어 권순희와도 실연하고만 그는 패배감에 젖어 잠시 시골로 잠적했다. 그곳에서 그는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듯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어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1936년, 이상은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해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다. 그녀는 단편과 수필을 몇편 발표했던 신인이자, 이상의 지기인 구본웅의 배다른 동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상이 가까이 했었던 여성 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여성인 셈이었지만, 이것도 이상의 운명이었을까? 간단한 결혼식을 거친 후 곧 동거에 들어간 그녀는 이상의 가족과 전혀 교류가 없었던 금홍과는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이상의 여자는 모두 여급이었다는 전설을 다시 확인 시켜주는 셈이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대로 가족과 변동림을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다. 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너무나도 동경하던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자마자 20대였던 조숙한 천재시인 이상은 스믈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종생기'를 끝으로 자신의 생을 마쳤다. 작품 목록 소설 《십이월 십이일》1930.02~12 조선 《지도의 암실》1932.03 조선 《휴업과 사정》1932.04 조선 《지팽이 역사 : 희문》1934.08 월간매신 《지주회시》1936.06 중앙 《날개》1936.09 조광 《봉별기》 1936.12 여성 《동해》1937.02 조광 《황소와 도깨비 : 동화》1937.03 매일신보 《공포의 기록》1937.04~05 매일신보 《종생기》1937.05 조광 《환시기》1938.06 청색지 《실화》1939.03 문장 《단발》1939.04 조선문학 《김유정 : 소설체로 쓴 김유정론》1939.05 청색지 《불행한 계승》1976.07 문학사상 수필 《권태》 시 《오감도》 《건축무한육면각체》 《거울》 《꽃나무》 《실화》 《개미》 《백화(白畵)》 《역단 (易斷)]》 《[위독 (危篤)]》 《[이상한 가역반응 (異常한 可逆反應)]》 《[삼차각설계도 (三次角設計圖) ]》 《이런 시 (이런 詩)》 《1933, 6, 1 (一九三三, 六, 一)》 《보통기념 (普通記念)》 《소영위제 (素榮爲題)》 《정식 (正式)》 《지비 (紙碑)》 《I WED A TOY BRIDE》 《파첩 (破帖)》 《청령》 《한개의 밤 (한個의 밤)》 《척각 (隻脚)》 《거리 (距離)》 《수인이만들은소정원 (囚人이만들은小庭園)》 《육친의장 (肉親의章)》 《내과 (內科)》 《골편에관한무제 (骨片에關한無題)》 《가구의추위 (街衢의추위)》 《아침》 《최후 (最後)》 《유고 (遺稿)》 《1931년 (一九三一年)》 《습작쇼오윈도우수점 (習作쇼오윈도우數點)》 《회한의 장 (悔恨의 章)》 《여전준일 (與田準一)》 《월원등일랑 (月原橙一郞)》     烏瞰圖 詩第一號 / 오감도 시제1호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혓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人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烏瞰圖 詩第二號 / 오감도 시제2호 1934년 7월 25일 조선중앙일보   나의아버지가나의겨테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웨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웨드듸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졸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烏瞰圖 詩第三號 / 오감도 시제3호 1934년 7월 25일 조선중앙일보   싸흠하는사람은즉싸흠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흠하는사람은싸흠하지아니하는사람이엇기도하니까싸흠하는사람이싸흠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흠하지아니하던아니하던사람이싸흠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흠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흠하는구경을하든지싸흠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흠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엇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烏瞰圖 詩第四號 / 오감도 시제4호 1934년 7월 28일 조선중앙일보   患者의容態에관한문제. ㆍ0987654321 0ㆍ987654321 09ㆍ87654321 098ㆍ7654321 0987ㆍ654321 09876ㆍ54321 098765ㆍ4321 0987654ㆍ321 09876543ㆍ21 098765432ㆍ1 0987654321ㆍ 謬斷 0 : 1 26.10.1931 以上 責任醫師 李 箱 환자의용태에관한문제. ㆍ0987654321 0ㆍ987654321 09ㆍ87654321 098ㆍ7654321 0987ㆍ654321 09876ㆍ54321 098765ㆍ4321 0987654ㆍ321 09876543ㆍ21 098765432ㆍ1 0987654321ㆍ 진단 0 : 1 26.10.1931 이상 책임의사 이 상     烏瞰圖 詩第五號 / 오감도 시제5호 1934년 7월 28일 조선중앙일보   某後左右를除하는唯一의痕跡에잇서서 翼殷不逝 目不大覩 반矮小形의神의眼前에我前落傷한故事를有함. 臟腑라는것은浸水된畜舍와區別될수잇슬는가. 모후좌우를 제하는 유일의 흔적에 있어서 익은불서 목불대도 반외소형의 신의 안전에 아전낙상한 고사를 유함. 장부라는것은 침수된 축사와 구별될 수 있을는가.     烏瞰圖 詩第六號 / 오감도 시제6호 1934년 7월 31일 조선중앙일보   鸚鵡 ※ 二匹     二匹 ※ 鸚鵡는포유류에속하느니라. 내가二匹을아아는것은내가二匹을아알지못하는것이니라. 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 앵무   二匹 『이소저는신사이상의부인이냐』 『그러타』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 나는붓그러워서 얼골이붉어젓섯겠느니라. 앵무   二匹     二匹 물론나는追放당하였느니라.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自退하얏느니라.나의체구는중축을상실하고또상당히창랑하여그랫든지나는미미하게체읍하얏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함뿍저저서그래서獸類처럼도망하얏느니라.물론그것을아아는사람은혹은보는사람은업섯지만그러나과연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앵무 ※ 이필     이필 ※ 앵무는포유류에속하느니라. 내가이필을아아는것은내가이필을아알지못하는것이니라. 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 앵무   二匹 『이소저는신사이상의부인이냐』 『그렇다』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 나는부끄러워서 얼골이붉어졌었겠느니라. 앵무   二匹     二匹 물론나는추방당하였느니라.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자퇴하였느니라.나의체구는중축을상실하고또상당히창랑하여그랫든지나는미미하게체읍하였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수류처럼도망하였느니라.물론그것을아아는사람은혹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과연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烏瞰圖 詩第七號 / 오감도 시제7호 1934년 8월 1일 조선중앙일보   久遠謫居의地의一枝·一枝에피는顯化·特異한四月의花草·三十輪·三十輪에前後되는兩側의明鏡·맹芽와갓치戱戱하는地平을向하야금시금시落魄하는 滿月·淸간의氣가운데 滿身瘡痍의滿月이의刑當하야渾淪하는·謫居의地를貫流하는一封家信·나는僅僅히遮戴하얏드라·몽몽한月芽·靜謐을蓋掩하는大氣圈의遙遠·巨大한困憊가운데의一年四月의空洞·槃散顚도하는星座와星座의千裂된死胡同을포逃하는巨大한風雪·降매·血紅으로染色된岩염의粉碎·나의腦를避雷針삼아沈下搬過되는光彩淋리한亡骸·나는塔配하는독사와가치地平에植樹되어다시는起動할수업섯드라·天亮이올때까지 구원적거의지의일지·일지에피는현화·특이한사월의화초·삼십륜·삼십륜에전후되는양측의명경·맹아와같이희희하는지평을향하여금시금시낙백하는 만월·청간의기가운데 만신창이의만월이의형당하여혼륜하는·적거의지를관류하는잉일봉가신·나는근근히차대하였더라·몽몽한월아·정밀을개엄하는대기권의요원·거대한곤비가운데의일년사월의공동·반산전도하는성좌와성좌의천열된사호동을포도하는거대한풍설·강매·혈홍으로염색된암염의분쇄· 나의뇌를피뢰침삼아침하반과되는광채임리한망해·나는탑배하는독사와같이지평에식수되어다시는기동할수없었더라·천량이올때까지     烏瞰圖 詩第八號 解剖 / 오감도 시제8호 해부 1934년 8월 2일 조선중앙일보   第一部試驗 手術臺 一   水銀途沫平面鏡 一   氣壓 二倍의平均氣壓   溫度 皆無 爲先麻醉된正面으로부터立體와立體를위한立體가具備된全部를平面鏡에映像식힘. 平面鏡에水銀을現在와反對側面에途沫移轉함. (光線侵入防止에注意하야)서서히麻醉를解毒함. 一軸鐵筆과一張白紙를支給함.(試驗擔任人은被試驗人과抱擁함을絶對忌避할것) 順次手術室로부터被試驗人을解放함. 翌日. 平面鏡의縱軸을通過하여平面鏡을二片에切斷함. 水銀塗沫二回. ETC 아즉그滿足한結果를收得치못하얏슴. 第二部試驗 直立한平面鏡 一   助手 數名 野外의眞實을選擇함. 爲先麻醉된上肢의尖端을鏡面에附着식힘. 平面鏡의水銀을剝落함. 平面鏡을 後退시킴. (이때映像된上脂는반드시硝子를無事通過하겠다는것으로假設함) 上脂의終端까지. 다음水銀途沫. (在來面에)이瞬間公轉과自轉으로부터그眞空을降車식힘. 완전히二個의上脂를접수하기까지. 翌日. 硝子를前進식힘. 連하여水銀柱를在來面에途沫함(上脂의處分)(혹은滅形)其他. 水銀途沫面의變更과前進後退의重複等. ETC 以下未詳 제1부실험 수술대 일   수은도말평면경 일   기압 이배의평균기압   온도 개무 위선마취된정면으로부터입체와입체를위한입체가구비된전부를평면경에영상시킴. 평면경에수은현재와반대측면에도말이전함. (광선침입방지에주의하여)서서히마취를해독함. 일축철필과일장백지를지급함.(시험담임인은피시험인과포옹함을절대기피할것) 순차수술실로부터피시험인을해방함. 익일. 평면경의종축을통과하여평면경을이편에절단함. 수은도말이회. ETC 아즉그만족한결과를수득치못하였음. 제이부시험 직립한평면경 일   조수 수명 야외의진실을선택함. 위선마취된상지의첨단을경면에부착시킴. 평면경의수은을박락함. 평면경을 후퇴시킴. (이때영상된상지는반드시초자를무사통과하겠다는것으로가설함) 상지의종단까지. 다음수은도말. (재래면에)이순간공전과자전으로부터그진공을강차시킴. 완전히이개의상지를접수하기까지. 익일. 초자를전진시킴. 연하여수은주를재래면에도말함(상지의처분) (혹은멸형)기타. 수은도말면의변경과전진후퇴의중복등. ETC 이하미상     烏瞰圖 詩第九號 銃口 / 오감도 시제9호 총구 1934년 8월 3일 조선중앙일보   每日가치烈風이불드니드듸여내허리에큼직한손이와닷는다. 恍惚한指紋골작이로내땀내가스며드자마자쏘아라.쏘으리로다. 나는내消化器管에묵직한銃身을느끼고내다물은입에맥근맥근환銃口를늣긴다. 그리드니나는銃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銃彈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배앗헛드냐. 매일같이열풍이불더니드디어내허리에큼직한손이와닿는다. 황홀한지문골짜기로내땀내가스며드자마자쏘아라.쏘으리로다. 나는내소화기관에묵직한총신을느끼고내다물은입에매끈매끈환총구를느낀다. 그리더니나는총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총탄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배앗헛드냐.     烏瞰圖 詩第十號 나비 / 오감도 시제10호 나비 1934년 8월 3일 조선중앙일보   찌저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그것은幽界에絡繹되는秘密한通話口다.어느날거울가운데의鬚髥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안젓다일어서듯키나비도날아가리라.이런말이決코밖으로새여나가지는안케한다. 찢어진벽지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그것은유계에낙역되는비밀한통화구다.어느날거울가운데의수염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통화구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앉았다일어서듯키나비도날아가리라.이런말이결코밖으로새어나가지는않게한다.     烏瞰圖 詩第十一號 / 오감도 시제11호 1934년 8월 4일 조선중앙일보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엿슬때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도치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여부딧는다. 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하고잇스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骸骨이다. 가지낫든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前에내팔이或움즉엿든들洪水를막은白紙는찌저젓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그사기컵은내해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 내팔은그사기컵을사수하고있으니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 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전에내팔이혹움직였던들홍수를막은백지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여전히그사기컵을사수한다.     烏瞰圖 詩第十二號 / 오감도 시제12호 1934년 8월 4일 조선중앙일보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空中으로날너떠러진다. 그것은흰비닭이의떼다. 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戰爭이끗나고平和가왓다는宣傳이다. 한무덕이비닭이의떼가깃에무든때를씻는다. 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맹이로흰비닭이의떼를따려죽이는不潔한戰爭이始作된다. 空氣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무드면흰비닭이의떼는또한번이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공중으로날라떨어진다. 그것은흰비둘기의떼다. 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전쟁이끝나고평화가왔다는선전이다. 한무더기비둘기의떼가깃에묻은때를씻는다. 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망이로흰비둘기의떼를때려죽이는불결한전쟁이시작된다. 공기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묻으면흰비둘기의떼는또한번이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烏瞰圖 詩第十三號 / 오감도 시제13호 1934년 8월 7일 조선중앙일보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젓다. 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威脅당하는것처럼샛팔앗타. 이렇게하여일허버린내두개팔을나는燭臺세음으로내방안에裝飾하여노앗다. 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怯을내이는것만갓다. 나는이런얇다란禮儀를花草盆보다도사량스레녁인다.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 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위협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 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촉대세움으로내방안에장식하여놓았다. 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겁을내이는것만같다. 나는이러한얇다란예의를화초분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     烏瞰圖 詩第十四號 / 오감도 시제14호 1934년 8월 7일 조선중앙일보   古城앞에풀밭이있고풀밭위에나는帽子를벗어노앗다. 城위에서나는내記憶에꽤묵어운돌을매어달아서는내힘과距離껏팔매질첫다. 捕物線을역행하는歷史의슬픈울음소리. 문득城밑내帽子겻헤한사람의乞人이장승과가티서잇는것을나려다보앗다. 乞人은성밋헤서오히려내위에잇다. 或은綜合된歷史의亡靈인가. 空中을향하야노힌내帽子의깁히는切迫한하늘을부른다. 별안간乞人은율률한風彩를허리굽혀한개의돌을내帽子속에치뜨러넛는다. 나는벌써氣絶하얏다. 심장이頭蓋骨속으로옴겨가는地圖가보인다. 싸늘한손이내니마에닷는다. 내니마에는싸늘한손자옥이烙印되어언제까지지어지지안앗다. 고성앞에풀밭이있고풀밭위에나는모자를벗어놓았다. 성위에서나는내기억에꽤무거운돌을매어달아서는내힘과거리 껏팔매질쳤다. 포물선을역행하는역사의슬픈울음소리. 문득성밑내모자곁에한사람의걸인이장승과같니서있는것을내려다보았다. 걸인은성밑에서오히려내위에있다. 혹은종합된역사의망령인가. 공중을향하여놓인내모자의깊이는절박한하늘을부른다. 별안간걸인은율률한풍채를허리굽혀한개의돌을내모자속에치뜨려넣는다. 나는벌써기절하였다. 심장이두개골속으로옮겨가는지도가보인다. 싸늘한손이내이마에닿는다. 내이마에는싸늘한손자국이낙인되어언제까지지어지지않았다.     烏瞰圖 詩第十五號 / 오감도 시제15호 1934년 8월 8일 조선중앙일보   1 나는거울업는室內에잇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덜고잇다.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謨를하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잣다. 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얏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노앗다. 3 나는거울속에잇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골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傳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잇드키그도나때문에囹圄되여떨고잇다. 4 내가缺席한나의꿈.내僞造가登場하지않는내거울. 無能이라도조흔나의孤獨의渴望者다. 나는드듸여거울속의나에게自殺을勸誘하기로決心하얏다. 나는그에게視野도업는들窓을가르치엇다. 그들窓은自殺만을爲한들窓이다. 그러나내가自殺하지아니하면그가自殺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不死鳥에갓갑다. 5 내왼편가슴心臟의位置를防彈金屬으로掩蔽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券銃을發射하였다.彈丸은그의왼편가슴을貫通하얏스나그의心臟은바른편에잇다. 6 模型心臟에서붉은잉크가업즐러젓다.내가遲刻한내꿈에서나는極形을바닷다. 내꿈을支配하는者는내가아니다. 握手할수조차업는두사람을封鎖한巨大한罪가잇다. 1 나는거울없는실내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외출중이다. 나는지금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덜고있다.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음모를하는중일까. 2 죄를품고식은침상에서잤다. 확실한내꿈에나는결석하였고의족을담은군용장화가내꿈의백지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속에있는실내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해방하려고,그러나거울속의나는침울한얼굴로동시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미안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영어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영어되어떨고있다. 4 내가결석한나의꿈.내위조가등장하지않는내거울. 무능이라도좋은나의고독의갈망자다. 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자살을권유하기로결심하였다. 나는그에게시야도없는들창을가리키었다. 그들창은자살만을위한들창이다. 그러나내가자살하지아니하면그가자살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불사조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심장의위치를방탄금속으로엄폐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권총을발사하였다. 탄환은그의왼편가슴을통과하였으나그의심장은바른편에있다. 6 모형심장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 내가지각한내꿈에서나는극형을받았다. 내꿈을지배하는자는내가아니다. 악수할수조차없는두사람을봉쇄한거대한죄가있다.     作者의 말 / 작자의 말 미발표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 십 년씩 떨어지고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 빠지게 놀고 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봐야 아니 하느냐. 여남은 개쯤 써 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二千點에서 三十點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를 딱 꺼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 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냥 두니 서운하다. 깜박 신문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 것도 실수지만 李泰俊 朴泰遠 두 형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 준 데는 절한다. 鐵 ― 이것은 내 새길의 암시요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屈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 ― 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 ― 물론 다시는 무슨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고 위선 그만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따는 정신병이나 고치겠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 십 년씩 떨어지고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 빠지게 놀고 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봐야 아니 하느냐. 여남은 개쯤 써 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이천점에서 삼십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를 딱 꺼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 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냥 두니 서운하다. 깜박 신문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 것도 실수지만 이태준 박태원 두 형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 준 데는 절한다. 철 ― 이것은 내 새길의 암시요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굴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 ― 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 ― 물론 다시는 무슨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고 위선 그만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따는 정신병이나 고치겠다 [출처]김해경/ (金海卿) 2|작성자 헌책   ================================================================================== 오감도 - 시제3호  이상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오감도ㅡ시제3호                               이상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하였으면 그만이다 =============================================이상, 이상 시 다시보기==================================== 꽃나무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근처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런흉내를내었소.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최후(最後)       능금한알이墜落하였다.地球는부서질程度만큼傷했다. 最後. 이미如河한情神도發芽하지아니한다.     지비(祗碑) 2         안해는 정말 조류(鳥類)였던가 보다 안해가 그렇게 수척(瘦瘠)하고 가벼워졌는데도 날으지 못한 것은 그 손가락에 낑기웠던 반지 때문이다 오후(午後)에는 늘 분(粉)을 바를 때 벽(壁) 한 겹 걸러서 나는 조롱(鳥籠)을 느낀다 얼마 안가서 없어질 때까지 그 파르스레한 주둥이로 한 번도 쌀알을 쪼으려들지 않았다 또 가끔 미닫이를 열고 창공(蒼空)을 쳐다보면서도 고운목소리로 지저귀려 들지 않았다 안해는 날을 줄과 죽을 줄이나 알았지 지상(地上)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비밀(秘密)한 발을 늘 버선 신고 남에게 안보이다가 어느날 정말 안해는 없어졌다 그제야 처음 방(房)안에 조분(鳥糞)내음새가 풍기고 날개 퍼덕이던 상처(傷處)가 도배위에 은근하다 헤뜨러진 깃부시러기를 쓸어 모으면서 나는 세상(世上)에도 이상스러운 것을 얻었다 산탄(散彈) 아아 안해는 조류(鳥類)이면서 염체 닫과 같은 쇠를 삼켰더라 그리고 주저앉았었더라 산탄(散彈)은 녹슬었고 솜털 내음새도 나고 천근(千斤) 무게더라 아아     * 지비 : 이상(李箱)의 조어(造語)로서, 석비(石碑)의 돌을 '종이'로 환치한 것. 이로써 '기념(紀念)'에 대한 반어적 태도를 보여 준다.     가정(家庭)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운동(運動)         일층(一層)우에있는이층(二層)우에있는삼층(三層)우에있는옥상정원(屋上庭園)에올라서남(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옥상정원(屋上庭園)밑에있는삼층(三層)밑에있는이층(二層)밑에있는일층(一層)으로내려간즉동(東)쪽으로솟아오른태양(太陽)이서(西)쪽에떨어지고동(東)쪽으로솟아올라서(西)쪽에떨어지고동(東)쪽으로솟아올라서(西)쪽에떨어지고동(東)쪽으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시계(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시간(時間)은맞는것이지만시계(時計)는나보담도젋지않으나하는것보담은나는시계(時計)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시계(時計)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명경       여기 한 페─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季節에서는 얹은 머리가 瀑布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薔薇처럼 착착 접힌 귀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조용한 世上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疲勞한 香氣가 오지 않는다. 만적 만적하는대로 愁心이 平行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拒絶 右편으로 옮겨앉은 心臟일망정 고동이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러랴? 어디 觸診…… 하고 손이 갈 때 指紋이 指紋을 가로 막으며 선뜩하는 遮斷 뿐이다. 五月이면 하루 한번이고 열번이고 外出하고 싶어 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던 季節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지 거울은 페─지의 그냥 表紙 ─       자화상(自畵像)             여기는도무지 어느나라인지 분간할수없다. 거기는 태고와 계승하는 판도가있을뿐이다. 여기는 폐허다. 피라밋드와같은 코가있다. 그구녕으로는 「유구한것」이드나들고있다. 공기는 퇴색되지않는다. 그것은선조가或은 내전신이 호흡하던바도그것이다. 동공에는창공이 의고하여있으니 태고의영상의약도다. 여기는아무기억도유언되어있지는않다. 문자가 닳아없어진석비처럼문명의 「잡담한것」이 귀를 그냥지나갈뿐이다. 누구는 이것이 떼드마스크(死面)라고 그랬다. 또누구는 떼드마스크는 도적맞었다고도 그랬다. 주검은서리와같이 내려있다 풀이말러버리듯이 수염은자라지않는채거칠어갈뿐이다. 그리고 천기모양에 따라 서입은 커다란소리로 외우친다----수류처럼       오감도(烏瞰圖)   시 제1호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시 제2호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시 제3호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시 제4호 ㅡ환자의용태(容態)에관한문제 ㆍ1111111111 1ㆍ222222222 22ㆍ33333333 333ㆍ4444444 4444ㆍ555555 55555ㆍ66666 666666ㆍ7777 7777777ㆍ888 88888888ㆍ99 999999999ㆍ0 0000000000ㆍ 진단 0,1 26.10.1931 이상(以上) 책임의사(責任醫師) 이상(李箱)       시 제5호 전후좌우(前後左右)를재(除)하는유일(唯一)의흔적(痕跡)에있어서 익은불서(翼殷不逝)목불대도(目不大覩) 반왜소형(矮小形)의신(神)의안전(眼前)에아전낙상(我前落傷)한고사(故事)를유(有)함. 장부(臟腑)라는것은침수(浸水)된축사(畜舍)와구별(區別)될수있을는가.   시 제6호 앵무(鸚鵡) ※ 2필 2필 ※ 앵무는 포유류에 속하느니라. 내가2필을아아는것은내가2필을아알지못하는것이니라. 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 앵무 2필 "이소저(小姐)는시사이상(李箱)의부인이냐""그렇다"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 나는부끄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앵무 2필 2필 물론나는추방당하였느니라. 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자퇴하였느니라. 나의체구는중추(中軸)를상실하고또상당히창량하여그랬든지나는미미하게체읍(涕泣)하였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너로구나" 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수류(獸類)처럼도망하였느니라. 물론그것을아아는사람혹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과연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시 제7호 구원적거(久遠謫居)의지(地)의일지(一枝)일지(一枝)에피는현화(顯花)특이(特異)한사월(四月)의화초(花草)·삼십륜(三十輪)·삼십륜(三十輪)에전후(前後)되는양측(兩側)의명경(明鏡)·맹아(萌芽)와같이희희(戱戱)하는지평(地平)을향(向)하여금시금시낙백(落魄)하는만월(滿月)·청간(淸澗)의기(氣)가운데만신창이(滿身瘡痍)의만월(滿月)이의형당(刑當)하여혼륜(渾淪)하는·적거(謫居)의지(地)를관류(貫流)하는일봉가신(一封家信)·나는근근(僅僅)히차대(遮戴)하였더라·몽몽 한월아(月芽)·정밀(靜謐)을개엄(蓋掩)하는대기권(大氣圈)의요원(遙遠)·거대(巨大)한곤비(困憊)가운데의일년사월(一年四月)의공동(空洞)·반산전도(槃散顚倒)하는성좌(星座)와성좌(星座)의천열(千裂)된사호동(死胡洞)을포도(逋逃)하는거대(巨大)한풍설(風雪)·강매·혈홍(血紅)으로염색(染色)된암염(岩鹽)의분쇄(粉碎)나의뇌(腦)를피뢰침(避雷針)삼아침하반과(沈下搬過)되는광채(光彩)임리한망해(亡骸)·나는탑배(塔配)하는독사(毒蛇)와같이지평(地平)에식수(植樹)되어다시는기동(起動)할수없었더라·천량(天亮)이올때까지   시 제8호 일해부(ㅡ 解剖) 제일부시험第一部試驗 수술대手術臺 일一 수은도말평면경水銀塗抹平面鏡 일一 기압氣壓 이배二倍의평균기압 온도溫度 개무皆無 위선마취爲先痲醉된정면正面으로부터입체立體와입체立體를위爲한입체立體가구비具備된전부全部를평면경平面鏡에영상映像시킴. 평면경平面鏡에수은水銀을현재現在와반대측면反對側面에도말이전塗沫移轉함. (광선침입방지光線侵入防止에주의注意하여)서서徐徐히마취痲醉를해독解毒함. 일축철필一軸鐵筆과 일장백지一張白紙를지급支給함.(시험담임인試驗擔任人은피시험인被試驗人과포옹抱擁함을절대기피絶對忌避할것)순차수술실順次手術室로부터피시험인被試驗人을해방解放함.익일翌日.평면경平面鏡의종축縱軸을통과通過하여평면경平面鏡을이편二片에절단切斷함. 수은도말이회水銀塗抹二回. ETC 아직그만족滿足한결과結果를수득收得치못하였음. 제이부시험第二部試驗 직립直立한평면경平面鏡 일一 조수助手 수명數名 야외野外의진공眞空을선택選擇함. 위선마취爲先痲醉된상지上肢의첨단尖端을경면鏡面에부착附着시킴. 평면경平面鏡의수은水銀을박락剝落함. 평면경平面鏡을후퇴後退시킴.(이때영상映像된상지上肢는반드시초자硝子를무사통과無事通過하겠다는것으로가설假說함)상지上肢의종단終端까지. 다음수은도말水銀塗抹.(재래면在來面에)이순간공전瞬間公轉과자전自轉으로부터그진공眞空을강차降車시킴. 완전히이개二個의상지上肢를접수接受하기까지.익일翌日.초자硝字를전진前進시킴.연連하여수은주水銀柱를재래면在來面에도말塗抹함.(상지上肢의처분處分)[혹은멸형滅形]기타其他.수은도말면水銀塗抹面의변경變更과전진후퇴前進後退의중복重複등等. ETC 이하以下미상未詳 진단 0,1 26.10.1931 책임의사 이상   시 제9호 ㅡ 총구 매일每日같이열풍烈風이불더니드디어내허리에큼직한손이와닿는다.황홀恍惚한지문指紋골짜기로내땀내가스며드자마자쏘아라.쏘으리로다.나는내소화기관消化器管에묵직한총신銃身을느끼고내다물은입에매끈매끈한총구銃口를느낀다. 그리더니나는총銃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총탄銃彈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배앝었더냐.     시 제10호 ㅡ 나비 찢어진벽지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그것은유계幽界에낙역絡繹되는비밀秘密한통화구通話口다.어느날거울가운데의수염鬚髥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통화구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앉았다일어서드키나비도날아가리라.이런말이결決코밖으로새어나가지는않게한다.   시제11호 그사기컵은내해골(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엿슬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接木)처럼도치더니그팔에달린손은 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여부딧는다. 내팔은그사기컵을사수(死守)하고잇스니산산(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骸骨)이다. 가지낫든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전(前)에내팔이혹(或)움즉엿든들홍수(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찌저젓으리라. 그러나내팔은여전(如前)히그사기컵을사수(死守)한다.   시 제12호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공중空中으로날라떨어진다.그것은흰비둘기의떼다.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전쟁戰爭이끝나고평화平和가왔다는선전宣傳이다.한무더기비둘기의떼가깃에묻은때를씻는다.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망이로흰비둘기의떼를때려죽이는불결不潔한전쟁戰爭이시작始作된다.공기空氣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묻으면흰비둘기의떼는또한번이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시 제13호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위협威脅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촉대燭臺세움으로내방안에장식裝飾하여놓았다.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겁怯을내이는것만같다.나는니러한얇다란예의禮儀를화초분花草盆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     시 제14호 고성앞에풀밭이있고풀밭위에나는모자를벗어놓았다.성위에서나는내기억에꽤무거운돌을매어달아서는내힘과거리껏팔매질쳤다.포물선을역행하는역사의슬픈울음소리.문득성밑내모자곁에한사람의걸인이장승과같니서있는것을내려다보았다.걸인은성밑에서오히려내위에있다.혹은종합된역사의망령인가.공중을향하여놓안모자의깊이는절박한하늘을부른다.별안간걸인은율률한풍채를허리굽혀한개의돌을내모자속에치뜨려넣는다.나는벌써기절하였다.심장이두개골속으로옮겨가는지도가보인다.싸늘한손이내이마에닿는다.내이마에는싸늘한손자국이낙인되어언제까지지어지지않았다.   시 제15호 1 나는거울없는실내室內에있다.거울속의나는역시외출중外出中이다.나는지금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덜고있다.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음모陰謨를하는중中일까.   2 죄罪를품고식은침상寢床에서잤다.확실確實한내꿈에나는결석缺席하였고의족義足을담은군용장화軍用長靴가내꿈의백지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속에있는실내室內로몰래들어간다.나를거울에서해방解放하려고.그러나거울속의나는침울沈鬱한얼굴로동시同時에꼭들어온다.거울속의나는내게미안未安한뜻을전傳한다.내가그때문에영어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영어囹圄되어떨고있다.   4 내가결석缺席한나의꿈.내위조僞造가등장登場하지않는내거울.무능無能이라도좋은나의고독孤獨의갈망자渴望者다.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자살自殺을권유勸誘하기로결심決心하였다.나는그에게시야視野도없는들창窓을가리키었다.그들창窓은자살自殺만을위爲한들창窓이다.그러나내가자살自殺하지아니하면그가자살自殺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거울속의나는불사조不死鳥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심장心臟의위치位置를방탄금속防彈金屬으로엄폐掩蔽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권총券銃을발사發射하였다.탄환彈丸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貫通하였으나그의심장心臟은바른편에있다.   6 모형심장模型心臟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내가지각遲刻한내꿈에서나는극형極形을받았다.내꿈을지배支配하는자者는내가아니다.악수握手할수조차없는두사람을봉쇄封鎖한거대巨大한죄罪가있다.       .  
1694    詩의 넋두리 댓글:  조회:4369  추천:1  2015-12-31
                                    전위적인(avantgarde) 시(시론)의 비극적 종말                                                                                                                                                                                             - 최 이 인   * 글 머리   우리 한국의 현대 문학사를 되돌아 보면, 해방후(1950년대) 조 향 시인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 시작품 활동이 있었고, 나중에(1960년대 이르러) 김춘수 시인을 대표로 하는 “무의미 -탈관념” 시 운동이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문덕수 시인이 사물시 이론을 근거로 시작품을 내놓았었는데, 최근에(2000년대) 이르러 월간 “詩文學“지와 ”현대시인협회“의 일부 회원들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 운동에 이어서 ”하이퍼 시“ 운동을 적극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나라 안에서 시작품의 창작활동이 오로지 시문학 본연의 전통에만 매달려서 천편 일률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말이 옳든 그르든 예술활동의 정체성을 느끼게 해줄 것이고, 진부한 일상성에 싫증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탈(脫) 모던이즘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적극적으로 실험적인 시짓기를 통해 시의 소재와 내용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또 한편으로는 이른 바 아방가르드(avantgarde)라고 하는 전위적인 시작활동을 통해 현대적 사고의 흐름에 부응하며 인터넷 정보화시대의 기술과 그것을 이용하는 젊은 세대의 독자 수준에 부응하는 전달 방식을 찾아서 다양한 방향으로 시도해 보는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하고 거침없는 시 창작활동에 비판적인 검토를 수행하여 문학 정신의 적절성을 따져보며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넓은 철학적 식견을 가지고 그 운동 경향에 반성할 여건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언어의 예술인 시문학이 예술창작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실로 겉잡을 수 없이 “무-의-미”한 “말놀이, 언어의 유희”에 그칠 위기에 빠지고, 가뜩이나 독자가 떠나간 시 마당에서 시인이라는 이들만이 더욱 외롭게 웅크리고 서로만 바라보고 살 위험이 도사리게 될 것이란 사실은 많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저들 곧 “초현실주의 시- 무의미(탈관념) 시- 디지털 시- 하이퍼 시” 라는 전위적인, 앞서나가는, 시작(詩作) 운동을 주의깊이 관찰하면, 주장하는 사람이나 시기의 앞뒤 그리고 사용된 소재와 용어만 조금 다를 뿐, 심상운시인의 주장처럼 “탈관념을 지향한다”는*1) 관점에서 한 통속에 넣어놓고 분류를 해도 좋을 만큼, 많은 닮은 꼴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정신병환자들을 많이 상대해본 시인의 체험적 입장에서 냉철하게 분석해 볼 때, 정신병 환자 정확하게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이른 바 자유연상에 의한 환상적 이미지들로 풀어놓는 홀로 떠들음, 중얼거림, 지껄임 짓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아래서 이 논평문은 먼저 이른바 “무의미(탈관념) 시-초현실주의 시- 디지털 시- 하이퍼 시”운동을 주도한 시인들의 주장을 제시해서 그 유사한 점을 드러내어 한 통속에 넣어 분류할 수 있음을 밝힌다. 다음으로 그 주장하는 이론과 견해 그리고 시작품들이 단순한 의구심을 넘어서, 정신분열증 환자의 증상과 표현에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아 쉬 구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시(문학) 일반의 보편적 정신과 이상을 환기하면서 그에 반성의 자리를 마련해본다. 이 때 각 시(詩)운동의 주의나 주장, 발생 연원(淵源)이나 주도하는 시인들의 활동과 추구하는 이념 그리고 작품에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주제의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라 판단하여 최소한의 언급에 그치는 것으로 한계를 설정한다.  1.무 의미(탈 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 디지털 시, 하이퍼 시의 공통점   무 의미(탈 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 디지털 시, 하이퍼 시는 얼핏 그 제명(題名)만으로 보면 어떤 공통점이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국제적으로 출발한 초현실주의부터 최근에 국내에서 대두한 디지털과 하이퍼-라는 IT기술용어의 낯설음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고찰하면 이 모두를 한 영역(통속)안에 분류할 수 있는 공통의 근거를 찾아낼 수 있는 데, 무엇보다 그러한 시운동을 펼치며 적극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시인, 문학평론가들의 입을 통해 직접 그 공통점을 모아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겠다.   하이퍼 시운동을 주도하는 (시인, 문학평론가) 심 상운은 “극소수의 시인들이 관념을 거부하는 시운동을 펼치고 있다”면서 ”관념이 침범할 수 없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 지점영역으로서“, ① 언어유희의 무의미의 시 ②초현실주의 시 ③ 순수이미지의 사물시 ④ 21세기 아방가르드 전면에 선 디지털리즘 시를 들었다. 여기에다가 그이는 ⑤ 하이퍼 시라는 것을 포함시킨다.*2)   덧붙이기를: [...] 일상생활에 밀착된 사실적인 이미지와 환상적이고 초월적인(-초현실적인;글쓴이) 이미지의 뒤섞임을 즐기고자 한다. 이 뒤섞임은 그들에게 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무의미:글쓴이) 비약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환상적인 디지털의 감각을 선호하는(-디지털리즘:글쓴이) 현대시의 변화로 파악된다. 따라서 그들의 경향은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 기존관념에 집착하지 않을 때 더 큰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탈관념의 세계이며, 현실과 상상이 결합된 새로움으로 가득한 하이퍼(hyper)의 세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서 중요한 것은기존관념으로부터 과감한 탈출과 창의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거기에는 우주적인 개안이 들어있다.*3) 곧 하이퍼 시라는 것이 앞의 세가지 유형의 시 경향과 공통하면서도 오히려 모두를 통합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와같은 시각에서 하이퍼 시론을 펼치며 주장을 내세우는 이들의 입장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시인, 문학평론가) 손해일의 주장*4): 하이퍼 시가 음소, 단어, 문장, 의미 단락 간 마디마디에 해체와 단절을 거치고 이를 취사, 선택, 가공해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하이퍼적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상상, 공상, 환상을 망라하고,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현실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 [...]크고 작은 마디인 시어와 행과 연, 의미단락 등 기본 유니트(unit)들이 거미망처럼 하이퍼링크(hyper link)로 연결돼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이룬다. [...]비논리적, 비선조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 [,,,]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선조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 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조 명 제 의 주장*5): [...]우리 현대시가 여전히 ‘2천여 년 전 예수나 석가 시대의 비유, 상징의 기법으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해’ 오고 있는 현실에 일침을 가하며 하이퍼텍스트 시운동에 과감히 뛰어든 김규화 시인은 디지털 시대의 하이퍼적 시쓰기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 가고 있어 주목된다. [...]의식과 무의식,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의 뇌 구조의 복잡한 그물망처럼 하이퍼시는 합리주의의 근본인 인과적 논리성이나 순차적 질서, 혹은 위계적 시스템을 벗어나 탈중심의 리좀(rhizome) 형태를 구축하며, 일방향적 단선구조에서 쌍방향적 혹은 다방향적 다선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관계론적 체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연상과 공상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가상공간을 가릴 것 없이 점핑해 가며 텍스트의 마디들을 연결짓거나 병치, 혹은 나열 등의 방법으로 공존시킴으로써 기계론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4차원적)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를 맛보게 한다.   (시인,목사) 최 진연의 주장*6):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게 하이퍼시의 특징이다.그러나 화자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링크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에 의해 시의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이로써 우리는 위의 시들이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무의미한 탈관념에 의존하여 현실을 떠난 환상적 이미지들의 자동기술적 연결에 의하여 상상, 공상, 환상을 망라하고,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현실도 넘나드는 글쓰기라는 사실에 의해 한 통속에 넣을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짓기가 정신병 환자 정확하게 말하면 정신분열증 환자의 (보통 “넋두리”라고 불리는) 특정 증상과 아주 유사하다고 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2. 정신분열병 증상의 특이성    나는 여러 해 전에 어느 정신병 환자 요양원에서 상당기간 종교활동과 상담 책임자로 근무한 바 있다. 당시 열악한 수용시설에서 300여명에 가까운 천차 만별의 정신병환자들은 상태나 학력과 나이와 남녀의 가정배경에서 각양각색으로 대부분은 우울증 (manic depressive illness, 躁鬱症)을 함께 가지고 있었는데 15% 내외로(30여명) 이른바 조(躁)증 환자가 있었다. ( 내가 여러 정신병 의원과 정신병요양소를 돌아보며 확인한 바로는, 정신병 환자들 대부분은 말이 없이 우울한 상태로 지내나,- 그들 중 심한 중증의 환시 환청 환자들을 빼고- 약 20 % 내외는 홀로 돌아다니며 지껄이고 떠들었다.) 이들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혼자 중얼거리고 지껄였다(떠들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환청(幻聽 Auditory hallucinations,홀로 이상한소리를 듣고 대꾸하며 중얼거림)과 환시(幻視 visual hallucination,홀로 이상한 현상을 보고 대꾸하며 중얼거림)에 고통을 받는 심한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실내에 갇혀 지내야 했으나, 홀로 중얼거리고 지껄여대는 증상만 있지 다른 활동에는 별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는 이들은 밖의 취사장에서 일을 하며 잔 심부름도 맡곤 하였다. 취사장에서 일을 하는 이들 가운데 강씨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온순한 성격으로 말이 거의 없고 어쩌다 물어보는 말에만 간단히 대답을 하는 이였으나(- 꼭 조울증 환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동생은 간 밤 취침전에 모든 수용자들에게 관리실에서 주는 신경안정제의 약기운이 떨어질 무렵인 오전 10경 부터는 저 혼자서 또는 옆에 사람이 있으면 제 말을 들어주건 말건 그 쪽 사람을 향해 (홀로) 말하고 뇌까리기를 계속하는 이였다. 위쪽 병동의 취사장과 아래쪽 병동의 취사장을 오가며 심부름을 해주는 21살의 여성 김귀선은 하루 종일 홀로 중얼거리고 다녔으나 말 소리가 작아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던데 반해, 이 28살 된 강형구의 ‘홀로 중얼거림’은 이른바 “초현실주의(슈르 레알리즘) 시” 라고 할 수 있는 것, 또는 무 의미시라고도 불리우는 것 과 아주 비슷해서 (오늘날의 하이퍼시라는 것과 거의 똑같다) 놀라움을 주었다.   먼저 강 씨의 “지껄임(넋두리)” 을 여기 옮기고 한 마디로 결론을 맺기 이전에*7), 강씨가 지껄인 말씨에서 진단할 수 있었던 정신분열병 환자의 병적증상으로서 일반적으로(사전적으로) 알려진 조증(躁症) 환자의 특이성을 알아보자*8).   정신분열병 환자의 일반적 증상: 정신분열병은 환자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증상을 나타내는 듯하지만 최대공약수로 집약해 보면, 사고과정(思考過程), 즉 연상(聯想)을 하는 데 있어서 정상적인 논리과정이 파탄되어 논리적 연결을 잃거나, 토막토막으로 단절되며, 감정표현의 조화가 안 되고, 기분과 생각 사이가 유리되어 일치되지 않는다. 감정이 둔마되며 양면(兩面)의 극단적인 감정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이런 기본적인 증상의 복합으로 복잡한 증상이 생겨나서, 정상인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한 사고와 행동 등의 증세를 나타내게 된다. *정신분열증 특징:(1) 망상 (2) 환각 (3) 와해된 언어 (예: 대화의 주제에서 빈번한 탈선 또는 지리멸렬한 지껄임) (4) 심하게 와해된 행동이나 긴장증적 행동 (5) 음성증상, 즉 정서적 둔마, 무 논리증 * 정신병중 조(躁)증 환자의 증상:조증 환자는 흥분되어 있고 이야기가 많으며 과잉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말할 때 목소리가 크고 비정상적인 사고의 흐름으로 심한 경우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망상이나 환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1) 팽창된 자존심 또는 심하게 과장된 자신감 (2)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거나 계속 말을 하게 됨 (3) 대화와 사고의 비약 또는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는 의식적 -무의식적(잠재적) 표출  3. 위 두 부류의 동일성 및 유사성    위의 1 (하이퍼 시 짓기를 주창하는 시인들의 요지)과 2 (정신분열증 환자의 일반적증상과 보기로 든 강씨의 특이성)에서 각각 밑줄을 그은 데를 비교하여 보면 핵심적인 상태나 증상에서 양쪽은 대부분 일치함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최대한 간추려 적시한 2항의 정신분열증 환자의 증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좀 더 설명을 붙여서 ( 하이퍼 시적 용어로) 해설해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1항의 증상과 같은 상태를 유추할 수 있다.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의 뒤섞임. 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 비약의 세계, 현실과 상상이 결합된 새로움으로 가득한 세계, 기존관념으로부터 과감한 탈출과 창의적인 상상력의 발현. 음소, 단어, 문장, 의미 단락 간 마디마디에 해체와 단절을 거치고 상상, 공상, 환상을 망라하고,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현실도 넘나드는, 비논리적, 비선조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말하기. *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 의식과 무의식, 시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의 뇌 구조의 복잡한 그물망처럼 합리주의의 근본인 인과적 논리성이나 순차적 질서를 벗어남, *자유연상과 공상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가상공간을 가릴 것 없이 점핑해 가며 마디들을 연결짓거나 병치, 혹은 나열 등의 방법으로 공존시킴으로써 기계론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4차원적)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를 맛보게 함. *초월, 건너뜀의 기법으로 단락과 단락, 또는 한 단락 속의 말과 말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들로 구성 *단락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 거기에 ‘건너 뜀 초월’이 있게 된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특징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 가상현실의 세계로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 이미지들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의학사전에 기술된 정신분열증 환자의 특이성에 이렇게 조금 살을 붙여 놓으면, 우리는 양쪽(위 1과 2)의 차이를 얼른 구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흡사하다거나 형식 및 방법론적 동일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그 정신분열증 환자 강씨와 같은 사람들의 지껄임이 어떠하기에 이들 시인들의 시작품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일까 ? 굳이 앞에서 그이의 뇌까림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다음에서 인용한 시 작품들을 지은 시인들의 이름만 빼고 보면, 그 정신병 환자의 지껄임과 말 그대로 형식에 있어서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정신 분열증 환자의 독백을 옮겨보겠다.     나팔 꽃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오늘은 참 많이 컸다. 시집갈만하다 그쟈? 팔이 아플텐데, 나비를 잡고 싶은가 보다 나팔 소리가 시끄럽다. 조용히 좀 하래이 나비가 기뻐서 하늘로 춤추고 올라간다 그쟈?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끓어오른다. 어디 저 먼 나라로 여행가나 보다. 나도 엄마랑 놀러가고 싶대이. 비행기가 나비를 싣고 서해바다를 지나간다 우리도 신나게 날아간다. 중국 땅에는 짜장면이 덮여있다. 모택동이 좋아해서 맛있게 먹었다. 인도의 갠지스강을 지나갈 때 시체 타는 냄새를 맡는다. 죽으면 지옥불에 왜 심판받는다고 안카나? 히말라야 눈덮힌 산을 넘어서 나비는 추워서 얼어죽고, 온 땅을 하얗게 덮었다. 몬살겠다. 아라비야 사막으로 가자. 덥다 옷벗고 자자. 않좋나? 네 치마속이 더 뜨겁다. 너도 추우면 못살기라. 그쟈? 지중해는 하늘보다 더 푸르다. 푸른 것은 깨끗하다고 안카나? 제우스 신전에는 깨끗한 사람만 들어간다카이. 물속에서 빨가벗고 고래처럼 놀아보자. 너도 몸 좀 깨긋이 씻고 흰 옷만 입어라. 빤스가 되게 더럽다. 네가 신전에 절 할 줄을 모르니 사람들이 미쳤다고 안카나? 이태리 로마에 곧 도착한다. 바티칸 사원에 너도 가고 싶으면 돈 좀 내놔라. 호떡이라도 사먹고 배불러야 걷지 굶고는 거기 못간다. 국수좀 많이 끓이라 내일에는 스페인에 도착한다. 소싸움은 볼 것 이 없다 안카나? 투우사놈들은 나쁜 놈들이데이. 동물 학대하는 것은 동물보호법 3조에 따라 형법으로다가 의법 처치해야 한다. 민법은 구리다. 그쟈? 말을 타고 달려가야 할텐데 ...말 좀 찾아봐라. 힘센 말 저기 온다. 그만 됐다....   위와 같이 “그쟈? ... 안카나?”를 자주 후렴구처럼 넣어서, 운율감 넘치게 이른바 하이퍼 링크로 연결되는 텍스트처럼 끝없이 이미지를 이어서 사람의 잠재의식의 표출이나 자동기술적으로 역동적 상상력의 세계를 아낌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이퍼 싯귀를, 초현실주의 시(싯귀)를, 디지털 시를, 무의미 탈관념 시작품(?)을 만들어 냈다.   다음은 2010년 봄 철 2개월 쯤 서울 남산 도서관 정문 마당앞 벤취옆에 거의 매일 서서 (홀로 중얼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꽤 큰 목소리로 연설하듯이) 홀로 떠들어대던 42살의 서울 대방동에서 산다던 김형문이라고 자신을 밝힌( 겉보기 멀쩡한 회사원 같던 ) 한 사내의 지껄임을 간략히 옮긴다.  내일의 날씨는 전국적으로 맑겠고 곳에 따라 소나기가 내리는 곳도 있겠습니다.   시베리아 대륙의 건조한 대기와 북 태평양 고기압이 부딪쳐서 한반도에는 살벌한 전쟁의 기운이 감돌겠고 봄 기운도 점차 북상하면서 개나리 진달래 철쭉 꽃 소식이 온 땅을 무섭게 수놓겠습니다. 새학기 등교하는 우리 어린이들의 책가방에서 꽃들이 새싹을 피우기 다투는데 새 나라의 어린이는 꽃나무에 앉아서 지저귀는 새들, 트로트로다가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겠습니다. 김일성이 죽은후 북반부에서는 김정일 장군님이 위대한 교시를 받들고 강성대국 건설에 한창인데 옆 벤취의 두 젊은 남녀 대학생은 오늘도 공부를 않하고 연애에 열을 올리며 입술을 새빨갛게 빨아대서 피가 흐르고 사회주의 와 자본주의의 개념조차 모른채 자유민주주의의 통일 정책에 무조건 찬성할 따름임니다. 봄이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내 마음속에도 피었는데 이명박 정권의 친미 정책을 나는 적극적으로 지지한 탓에 일찍이 시들어버리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에 의해 민주투사가 되어 조만간 감방으로 사라지겠습니다. 삼천만이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좃나발 불지마 아버지는 노조운동에 다리 부러져 북해도 탄광에 끌려가고 배가 곺아도 신나게 별보기 운동을 했고, 비가 오고 날 흐리면 동해 바다로 가서 파도와 애기를 나눴습니다. 아 다시 못 올 이 땅의 내 청춘... 다음에는 청춘이 좀먹어서 대머리가 다 된 김형문 기자가 빠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치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처럼 형식은 시사 보도적이었으나, 내용의 갖춤과 마디 마디는 저 1의 주장자들의 바로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여기서 다시 정신분열증 환자의 병 증상과 “하이퍼” 시론을 펴는 위 네 사람들의 주장하는 요지와 방법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다음에 각각의 시론들을 인용된 시작품을 중심으로 논평한다.  4.무 의미(탈 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 디지털 시, 하이퍼 시(시론) 비판  1.무 의미- 탈 관념 시론   도대체 의미가 없는 시와 관념을 벗어난 시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시라는 문학적 활동을 떠나서도, 언어와 사고행위를 통한 정상적인 사람의 의식의 세계에서조차 불가능하고 말이 성립되지 않는(語不成說) 이 무의미와 탈관념이라는 언어행위를 분석해 보는 것이 먼저 터닦아놓을 일이 되겠다.   “의미”가 무엇인가? 언어학적으로 의미론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반 상식에 따른 보편적 통용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의미란 사전적으로 우리말 “뜻”의 한자어이다. 사람이 “말(언어행위)”을 할 때 형식은 소리(발성)와 내용(지시)을 갖는다. 이 경우 내용(지시)이 뜻(의미)이다. 특별한 경우에 소리 자체 만으로도 고저 강약의 발성에 따라 지시기능을 하기 때문에 소리도 뜻을 갖는다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는 반드시 의미를 갖는다. 말(언어)를 문자로 표현할 때 형식은 문자기호와 내용(지시)으로 구성되는데 내용이 바로 뜻이지만, 교통신호처럼 사회적 약속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문자 기호만으로도 뜻이 된다. 따라서 사람이 행하는 모든 표현수단은 뜻(의미)을 갖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의미가 없다(무의미)”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사람이 의식활동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의미의 부여이고 의미의 추구의 행동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이미는 목적을 지향하고 욕구하는 “의도”나 “의지”와는 다른 것이다.   “관념(觀念)”이란 무엇인가? 사전에 따른 일차적인 뜻은 “사고”, 생각(영어 idea, 동사 think, 독일어 denken)“이다. 한자말로도 본것(觀)을 마음속에 담아두기(念)이다.   사람이 대상(객체)을 감각에 의해서 받아들인 것(감각 자료)을 생각(사고)하여 정리 구별해 놓는 것을 말한다. 사고하여 구별하고 정리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언어에 의해서 수행한다. 언어로 수행한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의미있게 분별한다는 것이다. 만일 언어로 감각자료를 구별하고 구분하여 우리 뇌속에서 정리를 하지 않는다면(곧 관념화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막연한 감각(眼耳鼻舌身에 의한 느낌)에 지나지 않으며, 지렁이가 밟으면 꿈틀거리거나 짐승이 본능적으로 먹이를 보면 달라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관념이 없으면 의미가 형성이 않되고, 의미가 없으면 관념이 생성이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탈관념(관념을 벗어나기)”하겠다고 한다면 의식적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곧 죽겠다는 것)이거나 언어를 모르는 짐승이나 하등 동물이 되겠다고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의미가 없고(무의미) 관념을 떠난(탈관념) 시를 쓴다고 하고 그렇게 쓰자는 시인이 있다.  가. 그 주장자와 시작품   김춘수 시인은 「事物詩와 觀念詩의 問題」*9)에서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해서 쓰는 곧 사물의 세계를 아무런 설명이나 哲學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事物詩와 의지적이고 비유적으로 세계를 관념으로 묶어 보는 관념시로 구분하면서, 앞의 것은 탈 관념적으로 서술적(=묘사적-글쓴이) 이고 순수한데 반해 뒤의 것은 도덕적 교훈이나 판단의 목적을 위해 사물을 수단시하고 독자를 강요한다고 지적하면서 보기로서 다음과 같이 든 시 작품(1연)을 김춘수는 탈관념 이고 그래서 무의미한 시라고 하였다:  산은/九江山/보랏빛 石山//山桃花/두어 송이/송이 버는데        이 시가 정말 김춘수의 주장처럼 무의미 하고 탈관념이 된 시란 말인가? 우리는 그렇게 이 작품을 이해해야만 하는가? 새삼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언어로 쓰여진 모든 시가 ”뜻이 없이“( 무 의미) 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념시라고 비판하며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를 한마디로 통일을 할 수가 없는데, 김춘수는 “관념”이란 단어를 앞에서 풀이한 대로 일상적이고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곧 사전적 의미인 “사고”, 생각이라고 이해를 하지 않고, 주체의 ”의도“나 ”일정한 의지“ 또는 ”목적적인 의식“을 일컫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관념이란 것에서 의미가 나오는 것인 데, 의미= 뜻 이란 1차 사전적이고 통념적인 단어풀이에서라면 ”무 의미“라는 용어가 있을 수가 없으나 ”의미“를 ”의도“나 ”일정한 의지“ 또는 ”목적적인 의식“을 일컫는 것으로 김춘수가 바꾸어서 이해하고 사용하는 한, 비 학문적이고 비 상식적이긴 하지만 거기서는 무의미라는 용어를 납득할 수 있다. 의미란 용어를 이렇게 이해하고 사용하는 한에서 관념을 벗어난다는 ”탈 관념“이란 말도 납득될 수가 있다.   아무리 김춘수 방식으로 의미라는 단어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취사선택한 단어에 의미(=의도나 의지)와 관념이 배제될 수가 있단 말인가? 관념에서 벗어나(脫)있으니, 무 의미하다는 이 주장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김춘수는 지은이가 (어떤 의미-의도부여가 없이) 사물에 단순한 이름만 붙여서 단어를 나열한 것처럼 했기 때문에 사물시요 탈관념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인 박목월이 무의미(無意味)한 시를 쓰려고 이 시를 지은 것은 아니라는 추론을 하기에 앞서, 시라는 것과 거기 사용된 시언어라는 것에 대한 김춘수의 혼란된 인식을 엿볼 수가 있다.   이 시는 [구강이란 산이 있는데, 보랏빛을 띈 돌산(석산)이다. 거기에 산복숭아 꽃이 두어 송이 막 꽃 봉우리를 트고 있다]라는 것을 압축한 문장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시는 김춘수의 말처럼 “사물을 감각적으로 그대로 수용해서 쓴 곧 사물의 세계를 아무런 설명이나 哲學 없이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독자는 사물 이름으로서의 단어만 나열한 그것을 그대로 감상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 반대로, 시인은 구강이란 산이 하얀색이나 황토색 돌(석)산이 아니라 보랏색을 띈 돌산이고 그 산에 진달래꽃이 아니라 산복숭아꽃이 피었는데 아직 만발해 있지는 않고 두어송이 막 꽃봉우리를 트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는 무르익은 봄의 시기가 아니라 겨우 겨울 기운이 가신 이른 봄의 시기를 보여준다. 봄눈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2연과 끝 연인 3연을 종합해서 감상하면, 구강산이라는 노장사상의 신선교에서 희구하는 도원경(桃源境)은 속세의 사람들이 더럽히지 않은 이상향으로서 옥같이 순수한 물을 새끼를 거느릴(린) 악의 없는 암사슴이 몸을 더욱 깨끗이 가꾸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표출해 내서, 시 지은이는 그러한 순수 자연관의 철학과 그런 생활을 꿈꾸는 의도를 보여주며 속세의 우리 네 삶의 질곡과는 다른 순수한 자연생활의 모습에 대한 희구라는 의미부여를 산도화의 배경에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럴진대 김춘수가 보기로 거든 사물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관념시인 것이다. 한 마디로 사물 이름만(단어만) 나열한 시라고 해도, 지은 시인이나 독자는 압축된 행간의 단어와 생략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짓기를 하는 것이며, 감상을 해야하는 것이 시에 대한 바른 도리(이해)가 아니던가? 이를 부정하고 의미연결이 않되는 단어들만의 나열이라면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정신분열병 환자의 지껄임이나 보고 읽은 셈이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심상운의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을 들여다 보자. 이 논문은 시인 오남구(옛 이름, 진현)와 심상운의 탈 관념시론에 대한 최진연의 비판에 관해 심상운이 다시 반박하다시피 하면서 “탈관념에 대한 논쟁을 잠재우고 탈-관념의 이론을 새로 정립한 글 [...] 이 글의 논리를 바탕으로해서 아방가르드의 시론이 성립된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였는데*10), 최진연은 자신의 논문에 대한 심상운의 이같은 반박 논문을 읽은 후, 화자의 주관적 생각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에 그치면 탈관념이라고 이해하였음을 밝히면서 “내가 제기한 관념문제에 명료한 답을 제시해주었다.”고 대답하였다. 과연 올바른 말일까?  나 . 그 주장의 오류   김춘수처럼 탈관념을 주장하는 시인 심상운은 그 논문에서 독자적인 많은 연구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이해로써 자신의 주장을 펴내고 있다.   먼저 불교의 인지론을 거론하면서 1.감지(6식의 초기작용) 2.인지(의식의 분별작용) 3. 의미형성(사고와 연관에 의해)의 단계에서, 순수인지는 2항 까지를 일컫고, 이를 직관이라고 정리한다. 그러나 우리 사람이 대상을 인지한다는 것이(의식의 분별작용은) 지렁이처럼 조금만 손(촉각)을 대도 꿈틀거리며 반응하는 것(지각)에서가 아니요, 끈끈이 주걱(잡초 식물)이나 호랑이(동물)처럼 어떤 것을 잡으면 뜯어먹는 욕구충동에 따른 본능적 활동이 아니다. 사람이 대상을 서로 달리 분별하여 인지하고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식상태 또는 기본 욕구적 충동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말(언어)을 갖고 자기를 표현하며 의식활동을 하고 사는 사람(호모 사피엔스)은 이미 언어(말)로 지칭된 사물(사람)이나 사태를 통해서 서로를 지각하고 구분하고 구별하는 것이다. “이미 언어로 지칭된 사물”이라 할 때, 거기에는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애)라는 유의미화가 자동적으로 속성화 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관념화 되어있는 것이다. 이름자유연상은 정신의 본도(本道), 간도(間道)를 통하여, 의식의 제한에 방해 당하는 법 없이 사고(思考)와 인상(印象)을 모아서, 그것을 가지가지로 결합시키면서, 드디어 새로운 관계나 형(型) 이 생겨나도록까지, 심리과정을 자유스럽게 헤메도록하는 것이다.[...]자유연상 상태란 곧 자아(ego) 초자아(super ego)의 간섭이 없거나 극히 약해서 상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 이런 방심상태에서는 무의식(無意識) 혹은 전의식(前意識)의 세계, 곧 심층심리면(深層心理面)에 잠겨 있던 것들이 순서도 없이 곡두(환영幻影)처럼 의식면에 떠올랐다간 가뭇없이 스러지고 스러져버리곤 한다. [...]그것을, 적당한 시기에 바리아송(variation, 變奏)을 주어 가면서 몽따쥬(montage)를 하면 한 편의 시가 되곤 한다.   조향은 자신의 시가 시간성이 산산이 끊어져 버리고, 돌발적인 신기한 이미지들이 단층을 이루고 있는 자유연상에 따라 의식의 제한에 방해 당하는 법 없이 사고(思考)와 인상(印象)을 모아서, 그것을 가지가지로 결합시키면서, 드디어 새로운 관계나 형(型)이 생겨나도록까지, 심리과정을 자유스럽게 헤메도록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조향시인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아래의 시(바다의 층계, 1연)  낡은 아코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 -- 왜 그러십니까  를 읽는다면, 그야말로 어느 정신 분열증 환자의 뇌깔임(넋두리)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떠돌고 다니며 사는  정신병 환자의 지껄임을 옮겨 놓으면,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편 이론을 따르는 이와 똑같은 것을 누구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초현실주의 문제점을 다음에서 자세히 짚어보자.  나. 그 주장의 문제점과 비판   초현실주의에 관하여 또 그 시가 목표(시의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다음의 심상운과 조병무의 시론을 통한 해설에서 간단 명료하게 엿 볼 수가 있으며 동시에 그 안에 담겨진 문제점도 들춰낼 수가 있다.   “시를 교훈이나 쾌락 또는 서정의 표현 정도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초현실의 시들은 난해하기만 하고 존재가치가 없는 무질서한 언어의 집합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고 심상운은 스스로 그 단점을 지적 하고 있다. 나아가 심상운이 중에서 조향시인의 초현실주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기를 든 양준호 시작품을 보자.  꽃잎을 짓밟고 간다. 문득 저승에서 뻐꾸기 세 번 울고/간다.너는 뭐니 너는 뭐니. 노란 파도가 노란 파도를/ 따라간다. 비이슬에 젖은 철조망, 메뚜기의 눈이 등대처/럼 설레고 간다.(양준호 시, 문득. 전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18) 서술 기법은 현대시만의 특별한 기법은 아니다. 고대 소설에서도 꿈을 통한 암시나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상투적이라고 할 만큼 흔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서 보여 주는 시인의 내면의식[잠재의식]이 현대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식의 총체적인 파악을 위해서는 빙산의 일각 같이 겉에 드러난 의식보다는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무의식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하기 때문이다. 양준호 시인의 시편 속에 들어 있는 상식을 뛰어넘는 언어들의 현란함은 단순한 언어유희의 차원이 아닌 의식과 무의식의 교직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무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속에서 심상운은 한국 현대시에서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혀지는 조향(趙鄕)의 시를 무의식 상태에서의 자동기술로 "망각의 강 깊숙한 저변에서 건져 올리는 고향의 언어‘ 라고 했다. 무의식은 의식의 고향이며 가장 본질적이고 원형적인 순수의식의 세계여서 그것은 자연히 탈현실, 탈관념의 세계가 되는 것이라 한다.   같은 시각에서 평론가 조병무도 “양준호의 시세계 ”이라는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기 시작한 초현실주의에 많은 예술이 공감한 바가 있었다.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의 세계를 추구하여 새로운 세계에 정착하고팠던 운동의 하나였다. 양준호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 있었던 문학의 한 명맥을 보는 것 같다. 정신의 바닥에 내재해 있는 수많은 의식의 한 덩어리를 실상의 형태에 몰입시키면서 새로운 해석의 차원을 넘나들려는 의도는 다른 면이 있다. 그에게는 잠재의식이라는 세계를 실제의 실상에서 이를 해체하여 새로운 의식의 면모를 구축하려는 데 있다. 그에게 부딪치는 모든 것은 경이로운 것이며 그 경이가 실상의 합리적인 것에서 비이성적 형태의 상태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양준호의 시를 여기서 어떤 사상적 이즘에 한정시키려는 것은 아니나 몇 가지 그의 시에서 특이한 점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의식의 변화 및 해체, 잠재의식과 실제 실상의 변모에 따른 차이, 강박관념의 몰입 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조병무의 해석은 심상운의 다음의 해명 글에서 크게 부각된다. “ ”간다“라는 동사가 이끄는 네 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네 개의 문장은 논리적(객관적)인 의미의 연결이 안된다 어떤 의미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네 개의 문장이 담고 있는 영상은 그의 무의식의 내면에서 포착된 영상같기도 하다.”   이렇게 논평하는 두 사람이 시인이란 것을 모르는 이라면, 어느 의사가 정신 분열증 환자의 증상을 설명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말 것이다.  여기에 조향의 노트를 참조해서 말하면, 내가 맨 앞에서 정신 분열증 환자의 한 증상으로서의 홀로 중얼거림현상과 거의 일치하는 설명에 해당한다. “현실을 벗어나서, 초월해서” 라는 초- 현실(sur- réal)이란 말은 * “(현실인식의)실재,사실 (réal) 를 벗어나서,넘어서 (sur -)”, 달리 말하면   ”현재의 사실을 그대로 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않아 정신이 -미쳐서, 돌아서“, ”제 정신이- 아니어서“ 라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 시작품 이라는 것도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냥 정신분열증 환자의 떠벌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 점을 프랑스 쉬르레알리즘 문학가들이 미쳐 생각지 못한 것처럼 지금까지 한국의 문학가들도 그 불행한 증상을 아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신경정신과 의학을 공부한 의사들도 시문학의 이런 초현실주의의 현상을 비교적으로 제대로 간파하거나 지적할 줄을 몰랐다.  이제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순수하게 대상의 이미지만을 드러낸다고 보아서 “사물 시”라고 규정이 된 시작품들을 검토해보자.  III . 순수 이미지의 사물시   사물시란 무엇인가? 최진연시인은 [...]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 ‘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라고 정의를 한다. 이러한 사물시 이론은 먼저 무의미 탈관념 시쓰기와 그 이론을 주창한 김춘수에게서 제시되었는데, 그이에게서 무의미(탈관념) 시를 잘 쓰기 위한 한 방법론처럼 모색된 것이 사물시 이론으로 발전된 것이 라고 여겨진다. 이를 나중에 문덕수시인이 뒤따르고 있는데 둘 사이의 차이점을 굳이 들자면 문덕수에게서는 무의미 탈관념이 아니라 사물 대상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현저하게 눈에 띈다.  가. 주장자들과 그 시작품   최진연 시인은 문덕수 시인의 이른바 사물시의 특징을 무의미-탈관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하이퍼시와의 깊은 연관성을 간추려서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19).: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 문덕수 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창하고 그의 시에서 적용해온 시적 방법으로서 “집합적 결합” 이론[...] 예컨대 컴퓨터, 책, 확대경, 볼펜, 찻잔, Secret Card, … 이런 물품들은서로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으나[...] 이와 같이 시에서 행과 행, 연과 연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   위 인용문에서 우리는 사물시의 특징을 탈관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하이퍼시와의 깊은 관련성을 제시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휑하니 열린문으로는/바람처럼 들이닥치듯이 차들이/힐끗힐끗지나간다./ 세 유리 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있었다./ 열린 문으로는/서있는 한 사나이,/ 길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세 유리 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 성냥갑이 앉아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시,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부)    보기로 든 윗 시를 심상운은 사고 이전의 언어들 모음이기에 어떤 의미도 내포하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의도)를 띄지 않고 사물의 놓여있는 상태와 주변 정경만을 객관적인 눈으로 묘사하여 사물성의 존재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시인의 지각작용이 포착한 생동하는 사물성과 한 순간에 집중된 감각적인 순수이미지를 보여줄 뿐이라고 한다. 덧붙여 시도 관념이전의 순수한 사물성만을 제시해주는 기능을 함으로써 창조적인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케 해준다며 이 솔 시인의 시를 지적한다.  욕조가득 비누거품이 부풀고 있다/거품속에 색들이 팔딱거린다/거울속에서 허물이 흘러내린다/구석구석 비누거푸을 벗겨낸다/동그랗게 굴러가는 색깔들//텃밭에서 갓 따온 가지빛깔/ 처음 우러나온 치자빛깔/옥수수 수염색깔/샘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모래빛깔/청심환을 싸고 있는 금박지/씨가 환히 비치는 청포도 빛깔// 바구니 가득한 캔디/ 눈에 담기는 색깔부터 입속에 넣는다/달콤하다가 시다가 씁쓰레하기도/켄디 맛인지,색깔맛인지/욕조가득 넘치는 맛과 색/맛으로 빛으로 춤춘다 (이솔 시, 맛의 빛, 빛의 맛, 전부)   정말 이들 시작품이 관념을 벗어나서(탈-) 사물성만을 제시하고 마는가?  나. 그 주장의 문제점과 비판   시를 지은 문덕수가 의도한 바가 심상운의 주장 그대로 무의미하게 탈관념을 노리고 詩作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독자)는 그 작품속에 든 문덕수의 (비의식층인 잠재적인) 온갖 의도를 케어 볼 수가 있어야 하고 끌어내어 밝혀보아야 한다. 왜냐면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작가가 선택하여 사용한 언어는 그것 자체로 나름의 질서와 의미(관념)을 지니고 예술작품으로서 객체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윗 시에서는 사람이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웃고 떠들며 인정을 나누게 마련 된 의자는 텅 비어있고, 탁자위에는 유리잔과 라이타와 잿털이만 모여있는 사물위주의 퐁경을 우선 보여준다. 대화가 단절된 고독한 도시인의 삶의 울타리 안에 어느덧 저녁 황혼기의 황량한 기운만 기웃거리고 있다. 이를 묘사함으로서 빌딩으로 둘러쌓여 갇힌 현대인의 낭만이나 우정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를 탁자를 주변으로 하는 풍경이 지적하고 있다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때, 이 작품은 그런대로 관념을- 의미를 지닌 값을 다하는 작품이다. 무엇을 쓰고 그리느냐(표현하느냐)? 의 문제 보다 어떻게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감상하느냐?)가 예술의 본래 면목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것이 최종적이고 작가의 손을 떠난 일반대중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도구화된 사물들만의 기하학적 위상을 묘사함으로써 대화의 단절로 인한 도시인의 고독과 상호 이해부족이나 오해 속에 사는 인간성의 소외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물이 주체가 되고 사람이 객체가 된 이 시대의 비극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솔의 시-이를 사물시로 보든, 하이퍼시로 보든 상관없이-에서도 심상운처럼 관념이 없이 사물의 사물성만을 감지하고 비누거품의 빛과 맛의 세계만을 감상하는 소수의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욕조에 비누거품처럼 넘치는 관념과 그것의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김하며 다양한 일상적 활동에 이를 적용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곧 1연의 더러운 욕조(안에서의)와 그것(어떤 것 y)의 비누 세척 하기. 2연의 비누거품들(x)의 갖가지 색깔(빛)의 열거를 통한 그 깨끗한 모습. 3연에서 욕조가 바구니로, 비누거품(x)은 켄디로 지칭 전환되어서 빛(색깔)을 맛으로 치환하여 입에 들어갈 만큼 깨끗하게 씻겨진(정화된) 어떤 것(y)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더럽혀져서 손으로 만진 것이- 눈으로 들어오고 -다시 입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된 어떤 (Y)것의 오염- 세탁-정화의 단계가 1연의 촉각화 2연의 시각화 3연의 미각화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고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철학자 M. 하이데거가 예술이란 것도 철학(존재론)처럼 존재자의 존재 양태를 그대로 밝혀서 보이는(드러내는=현상) 것이라 했는데*20), 만일 문덕수가 이 철학에 근거하여 자신의 “순수이미지-사물시” 이론을 시도하였다면, 심상운이 말하듯이 무의미나 탈관념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내가 바로 위에서 해석한 대로, 존재양태의 의미를 현상시키려 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하이데거는 사물들(존재자들)의 존재상태나 양태에서 도구성과 정황성을 통하여 의미연관성을 드러내주고 실존적인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또 케낸다. 존재하는 사물(대상,객체)의 상태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준다고 할 때, 무의미나 탈관념을 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큰 오류이다. 그것은 본질을 케내는 일이 아니라 현상을 은폐하지 않고 드러내어 존재(있음), 또는 있는데 어떻게 있는가? 를 더 뚜렷하게 보임으로써 그 자체가 가진 의미를 밝혀준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시가 언어로서 존재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하이데거가 규정을 했을 때 거기에는 필연코 존재자와 언어를 선택하고 사용하는 순간에 의미화와 관념이 생기고 짓는 이의 심상이 투영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의미있는 관념화된 시작품이 창작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하이데거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구두”를 해명하듯이, 화가 고흐가 구두를 가장 그럴듯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냈을 때, 그 구두가 어느 농부의 가난과 일상화된 노고와 뼈아픈 가족의 생계부양의 짐이 투영된 것을 보여주고자 화가가 그림을 그렸고, 감상자는 또한 이를 잡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동하는 사물성과 순수 이미지의 시라고 주장하는 심상운의 논평은 시 제명인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이라는 풍경에만 사로잡혔거나 이솔의 “맛의 빛, 빛의 맛”이라는 그 사용된 언어와 관련된 의미의 심층적 맥락과 시인의 창작과정에서 이면에 놓여지는 잠재의식을 간과했거나 무시한데서 발생된 것이라 추측된다. 만일 이를 부정한다면 특히 이솔의 작품에서 드러나듯이 정신분열증환자의 두서없는 말지껄임에 불과할 것이거나, 정상인이 자신도 잘 알아차릴 수가 없는 잠재의식속의 정신병적 징후를 그대로 토로한 것이 될 뿐이다. 이를 변호해서 말한다면, 의학적 식견이나 정신병적 증상을 잘 알지 못하는 이가, 현실을 넘어선 자유로운 의식-잠재의식적 사고를 표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다음으로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시를 주장하는 현대적 시운동의 전위에 서있다고 일컬어지는 오남구시인의 시를 검토해보자.  IV. 디지털 시론    디지털 시란 무엇일까? 디지털리즘 선언이란 글에서 밝히는 오남구의 정의를 직접 들어보자. “지금까지 아날로그 시대의 시가 기술 또는 자동기술하는 것이라면, 미래 디지털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念寫) 또는 접사(接寫) 곧 ‘찍는다’는 행위로 구분짓는다.[...]시인의 생각과 의식을 배재시키는 방법으로 나는 언어 이전의 언어(사물언어)로 사물을 사진찍듯이 찍는다”*21)고 했다.  가. 주장자들과 그 시작품   오남구의 이 디지털 시론을 최진연은 같은 논평에서 오남구의 탈관념시에 관한 설명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즉 오남구가 말하는 디지털시가 탈관념시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덧붙이기를, “전통적인 시가 대체로 연속적인 사유의 산물이란 점에서 아날로그방식이라 한다면, 그의 디지털시는 단속적인 직관에 의해 찍는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 ‘찍는다’는 말은 관념을 배제하고 보이는 현상 그대로를 직관적으로 옮겨놓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최진연은 탈관념시=디지탈 시= 하이퍼 시의 등식을 상정한다. 강조하건대, 그들 시작품이 큰 틀에서 크게 차별이 않되고 같다는 것이다. 다음의 오남구의 시 작품을 보자.   겨울 조소리 천태산 달이 비껴가고/바람 소소히 고라실 억샐 베는 머슴 심심한 머슴이/도리께 명당 솔밭 후미 으슥한 골마릴 풀고/무당네 골방 선반 지른 시렁가레 깊은 어둠을/밤새 봉준이는 과년한 계집을 안고 운다.//(오남구 시, 조소리 구름밭, 전부)   심상운은 이 시를 “어떤 논리적인 설명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가락과 호흡 그리고 토착어에 깃들인 민족 心靈의 흐름은 첫 새벽 淸水를 앞에 놓고 한울님과 接神하는 맑은 영혼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법이다”라고 하였다. 얼핏 피상적으로만 생각하자면 “겨울- 조소리- 천태산- 달이 비껴 감-바람-고라실- 머슴-도리께-골마릴 풀고- 무당네 골방- 시렁가레- 어둠- 봉준이- 과년한 계집” 이런 단어들 만이 두서 없이 늘어놓은 느낌이 든다.   심상운은 또 오남구의 “부드러움의 단상”이란 시에서도 “비- 파란 신호등-부드러운 선- 녹색 빗물-나무들-빨간 신호등-차다 단단하다 날카롭다”에서 어떤 지각의 속도만 있을 뿐 의미가 없다고 논평을 했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 오남구 시, 부드러움의 단상, 전부)  나아가 송시월의 시에서도 비 그친 날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려낸” 이 아닌 “찍어낸” 시라는 것이다.  비 그친후, 물 웅덩이/붉은 하늘 한 조각/하늘 속의 물구나무선 가로수/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육교 한 토막./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언뜻 맷새 한 마리가 획 일렁이며 간다 (송시월 시, 물 웅덩이, 전부)  물웅덩이, 하늘 한조각, 하늘속의 물구나무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 육교 한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조각, 멧새한마리가 동시적으로 눈에 포착되어서, 관념을 벗어났고 직관을 통한 엽사,접사의 기법이 적용된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나. 그 주장의 문제점과 비판   “시인의 ①생각과 의식을 배재시키는 방법으로, ②언어 이전의 언어(사물언어)로 사물을 ③사진찍듯이 찍는다”는 오남구의 주장에는 시문학 일반개념과 언어행위에 관한 오해나 무시에서 오는 억지가 깃들어있고, 시와 그림(사진)간의 예술 분야의 혼동이 내재한다. 시인에게서 생각과 의식을 배재시킨다는 것은 시체나 되라는 말이나 다름없고, 언어이전의 사물언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을뿐더러, 사물을 사진을 찍듯이 한다면 굳이 시란 것이 왜 필요할까? 무용지물이 될 뿐이다. 시는 대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찍는 예술이 되어서도 않되고 될 수도 없다. 시인에게서 재 창조가 되어 나와야하는 창작물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심상운처럼 우리가 오남구의 작품 “조소리 구름밭”의 시적 배경과 쓰인 지명과 인명에 대해 알지 못하고 감상하려 든다면, 어떤 논리적 설명을 할 수가 없고 단어들의 나열속에서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가락과 호흡”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조소리 천태산이 동학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태어난 고향땅 이름이고 그 전봉준이 겨울 긴긴 밤을 단잠 못이루고 과년한 계집을 끌어안고 울음운다는 장면을 이어놓으면, 우리는 “관념을 벗어난 장면만을 다양하게 엮어서 찍은 것”이 아니라, 동학혁명운동에 떨쳐일어선 농민군들과 지도자 전봉준이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의 협공에 시달리며 머슴처럼 노예살이 신세였던 농민들과의 생사를 건 봉기가 일시에 꺾이고 절망적인 형편에 괴로워하는, 구름밭의 새울음(조소리) 소리를 헤아려 감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깊은 민족사적 비애를 품고 종교적 천지개벽을 꿈꾸던 이들의 슬픔이 절망을 감싸서 자아낸다 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송시월도 순간의 물웅덩이를 포착하여 그 상황을 재현했는지 모르겠으나, 감상자는 물웅덩이 같은 세상과 거기에 처박힌 “나”의 몰골을 반사해보면서 멧새 한 마리가 상징하는 자유와 비상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아직은 꿈과 희망을 품을 수가 있는 삶을 보여주었다고 음미할 수가 있는 것이며, 그것은 나쁜지 않은 독법에 해당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송시월이나 오남구 시를 손해일이나 조명제의 주장에 따라서 읽는다면, 우리는 그저 정신병 환자의 뇌깔임이나 다름없는 소리를 보고 들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혀 의미연결이 않되는 단어와 어휘들의 진열과 이미지들을 지껄인 수준이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상운이 “종이(책) 문화의 시대에 본질적이었던 의미의 예술에서 디지털시대에 맞는 영상(이미지)의 예술에로 전환을 주장하고 특정한 경계를 벗어난 상상과 공상(fancy)을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삼고자 했을 때, 언어의 예술인 시문학의 본질적 특성을 망각한데서 이처럼 암초에 좌초하고 말 항해의 운명은 예정된 것이었다. 영상의 예술로 전환 했을 때, 언어예술인 시라는 고유의 영역은 사라지고 디지털시대의 영상속 한 부수적인 설명귀나 장식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마치 신문지 나 TV의 광고판 속에 나오는 설명귀쯤으로 한쪽을 차지하고 말 것이다.  V. 하이퍼 시론   나는 맨 앞에서 전위적인 몇몇 시론들의 시가 하이퍼시에 공속하고 공통적인 요소를 나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심상운,손해일,조명제,최진연의 하이퍼 시론의 핵심을 간추려서 이미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몇몇 하이퍼 시 작품을 읽어가면서 앞의 평론가들의 해설을 곁들여 감상하고, 지금까지 내가 비판하면서 정신병적 증상과 다름없다고 예증한 바를 전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으로 삼고자 한다.  가. 주장자들과 그 시작품   최진연에 의하면, 하이퍼시론을 처음 주창한 이는, 오남구시인과 “탈관념- 디지털 시론”을 함께 전개한 심상운 이다. 심상운은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라는 논문(책)에서 하이퍼 시론을 터닦아 놓았는데,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에 따라서 ‘순수한 영상언어를 지향하고 추상화적 기법과 오남구의 염사와 접사의 사진찍기 기법 그리고 사물성의 강조와 다양한 시점에서의 순간포착에 의한 감각적 이미지의 표현(기법)에 중점을 둔 언어단위들의 집합적 결합방법을 제시하였다’ 고 하였다. 이것이 하이퍼 시론의 출발점이면서 종착점이다. 먼저 심상운이 하이퍼시라고 규정하는 오남구의 시작품을 눈여겨 보자.  싹이 트려나, 배낭을 벗어 놓고 양지 볕에 앉아 몸이 근질근질하다. 긴다리로 떼지어 서있는 계곡의 진달래며 철쭉 싹이 트려나, 아른아른 기척 없이 날아든 작은 새, 까맣게 잠이 든 앙상한 가지 부리를 부비어 흔들다가, 새싹에 대고 내 어머니의 맑은 목소리 깍궁! 소리치고 포르르 다른 가지로 날아간다. 또 한 마리 뒤따라 깍궁! 하고 포르~ 포르~ 포르르 ~ 포르~ 앞을 서거니 뒤를 서거니 두 마리 작은 새 깍궁! 깍 궁! 소리치고 새싹의 잠을 깨우며 날아다닌다. 싹이 트려나, 진달래 철쭉의 앙상한 가지들이 꽃샘바람에 흔들리어 이~잉~잉 울어댄다. 일시에 아가야 깍궁! 깍궁! 계곡에서 일어나는 맑은 목소리 환청이 돈다.   (오남구 시, 깍궁, 전부)    위의 시에 관해 심상운은 “이 시의 화자는 늦겨울 산행중에 대지가 혼곤한 잠속에서 새싹을 피우려 기지개켜는 듯한 초 봄의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다. 소재나 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기법은 매끄러운 언어구사와 하이퍼텍스트적 구성이다. [...]이 시의 연상 고리는 양지에 앉은 화자-계곡의 진달래, 철쭉- 작은 새의 재재거림-어머니의 깍궁! -새싹을 어르는 작은 새들의 깍궁! -이에 화답하는 진달래 철쭉들의 잉잉거림 등 엄마와 새들의 깍궁을 회상하는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이다. 그리고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고 해설한다.   바깥 세계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고,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라고 지적한것을, 우리는 정신분열병 환자의 지껄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고 더구나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고 한데서는 그 환자가 지껄이면서 리드미컬하게 내뱉는 특정한 의성어 “...그쟈?, 안카나? ” 또는 “ 퉤, 씨팔” 같은 테크닉(?)을 생각케 한다. 다만 정신병 환자의 그것에서는 문장?(말)이 세련되게 보이지 않고 다소 투박해서 배움이 많지 않은 티가 나 는 것이 하이퍼 시와 차이점이라고 비판이 될까?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 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학교가 끝 나면 곧바로 동방극장엘 갔지 내친구와 몰래/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 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 김규화 시, 햇빛과 단풍, 전부)   심상운은 “위 인용 시에서는 햇빛과 단풍을 매개로 한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청소년 시절 추억 등이 행간에 배어 있다. 시상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서양과 현재, 과거를 넘나들고 있다. 무색인 햇빛이 단풍잎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노랑 빨강 금빛-갠지스강 나무더미- 빨간 불꽃-금빛 영혼 -타는 시체-단풍무더기 -단풍에 웃는 햇빛으로 확산된다.” [...] 여기서 하이퍼링크적 연결고리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을 통해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이며, 이것이 매끄러운 시읽기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독자로서는 이런 하이퍼시에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파노라마 경관 감상하듯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이퍼 시라는 것의 정신분열병적 증상에 관한 설명을 다시 보게 된다. 곧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 -서양과 현재 와 과거를 넘나들고 있고,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들이 나오니, 거기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그저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검은 철제 의자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 밭의 환한 햇빛속으로 들어 갔을까? 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장수가 떨어 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고 쓴다. 그는 그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 ”라고 또 쓴다. (2연 생략)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시,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1연, 3연 )   최진연에 따르면, 이 시는 “ [...]자유연상과 분방한 의식, 무의식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순조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 라고 하였다.   위에서 김규화 시작품에 관해 심상운이 해설한 것이나, 심상운의 시작품에 관해 최진연이 해설하는 것이나 양쪽에서 동일한 표현기법이나 해설을 다시 읽을 수 있는데, 이는 하이퍼 시 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들에 공통적이라서 새삼스럽지가 않다. 그 때문에 정신분열증 환자의 다양한 병적증상에 관한 임상의학 병실 의사의 일관된 진단 소견서를 읽는 기분이 드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가 않을 노릇이다.   이 때문에 최진연이 인용한 논문에서 “일반 독자입장에서는 난해하고 생경한 이 시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나 순서, 상식적 질서, 교훈을 찾으러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디지털적 하이퍼시의 특성을 따라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지금 이 시공간에도 미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차원적 상황들이 앞뒤 없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천지만물의 존재나 사건, 사물들이 불가측, 불연속적이어서 어찌 보면 뒤죽박죽이지만 나름대로 혼돈 속에 우주순행의 질서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뒷풀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최진연의 해석에서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아온 정신분열병 환자의 조(躁)증 증상을 다시 겹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증 환자는 흥분되어 있고 이야기가 많으며 과잉 행동을 보이기도 하는데, 목소리가 크고 비정상적인 사고의 흐름으로 심한 경우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고, 망상이나 환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팽창된 자존심 또는 심하게 과장된 자신감을 나타내며,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거나 계속 말을 하게 되고, 대화와 사고의 비약 또는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는 의식적 -무의식적(잠재적) 표출이라는 점에서 저 시라는 것의 해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그녀는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타 쌍둥이 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고?)//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 심상운 시, 파란 의자, 전부)   이들 하이퍼 시가 장차 세계무대에서 한국시인들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안된 새로운 시 모형들의 큰 성과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최진연은 위 인용한 논문에서 이 시작품에 관해 “이런 표현은 현실을 벗어난 공상의 산물이다. 그(심상운)는 현실세계뿐 아니라 가상현실에서도 시적 공간을 공상에 의해 확장하고 있다. 문학에서 공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어본 사람이면 실감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상세계를 무대로 전개되는 그 소설뿐 아니라 그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7편이 평균 7억 달러쯤 벌어들였다니 엔터테인먼트 측면에서도 문학에서 공상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심상운이 공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시에 도입하여 시적 공간을 획기적으로 넓힌 최초의 시인이 아닌가 한다.[...] 그가 현실과 가상현실을 아울러 감각적인 시적 공간을 공상세계로 확장하고 있음은 일찍이 우리 시사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공상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종래의 시에서 흔히 말하는 기상(奇想conceit)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 범위에 현실과 가상현실의 제한이 없다“고 논평을 한다.   최진연의 해설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과 공상과 환상의 세계에서 얘기 줄거리를 따라 주인공들의 행동이 묘사되며, 어둠과 밝음- 순수한 어린이 세계와 흉악한 어른들의 세계를 대조하여 수수께끼같은 사람의 삶의 다양성을 제시해서 깨닫게 해주고 한층 성장-성숙케 해주는 소설과 영화와 달리, 저 시는 그저 “현실을 벗어난 공상의 산물로서, 가상현실에서 공상만을 확장하고 있기에“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아닌,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는 이의 시작품으로 보아줄 수가 없다는 진단에서만 그렇다. 불행하게도 위 시를 정신분열병 조울증 증상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어느 시인이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사람이 읽었다면, 결코 시라는 예술 작품이라고 인정해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반문을 할 수 있다:   공상, 망상, 환상의 세계를 시인이 말하면 한편의 시-예술 작품이 되고, 정신이 미쳤다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말하면 “현실과 가상현실을 아울러 감각적인 (시적) 공간을 공상세계로 확장하고 있음은 일찍이 우리 시사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 이 아니되는 것인가? 어떤 이는 이렇게 변명을 할지 모르겠다.: “개 장난같은 모형이라도 피카소가 그리면 수백억원짜리 값나가는 그림이 되지만, 어린애가 그리면 욕먹는 낙서가 된다.” -말되는 소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는대로 느껴서 그리는 그림(畵)과 달리, 시라는 것은 언어로 창작하는 2차적인(철학적인 말로 “메타-”) 예술행위이다. 언어의 취사 선택이라는 고도의 사고작용의 산물이기에 단순한 시각예술과 구별이 되는 것이고 그만큼 지적판단 행위가 따르는 짓인 것이다. 언어의 취사선택이 없이 의미를 저버린 문장 나열하기는 글장난이나 말장난에 다름없는 짓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정신이 건강하냐 병들었느냐의 판가름이 된다.  나. 그 주장에 대한 비판   바로 위에서 하이퍼 시작품을 감상하면서 나는 동시에 그 문제점도 정신분열증환자의 증상과 나란히 비교하여 지적한 바 있는데, 이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할 차례이다.   최진연은 앞에서 언급한 논문에서 디지털 시, 탈관념 시, 사물 시, 하이퍼 시 간의 차별성이 없음을 다음과 같이 짧게 정리한다.: 하이퍼시와 디지털시의 차별성은 없어 보인다. 사이버 공간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현실성을 지적하면서 사이버시대의 시에 있어서 탈관념의 근거를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이미지의 실재성을 가스통 바술라르의 시학에서 찾은 그(심상운)는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해야 함을 강조한다. 디지털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탈관념의 원초적 언어로 쓰는 디지털 시 쓰기에서 상상과 공상을 강조하는데, 이는 오남구의 탈관념시에서 영감(inspiration)과 관찰에 의한 ’직관을 강조한‘ 것과 다른 면이라 하겠다. 상상과 공상(fancy)을 강조하는 점이 심상운의 하이퍼시론의 차별성으로 보인다. 심상운이 사물에 대한 감각과 인지에 그치는 ’관념의 그림자‘ ’지장수 같은 의미‘를 인정하는 감각적 이미지의 표현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물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시화(詩化)하자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언어(의미)창조로서 사물시(physical poetry)에서도 강조하는 바이고, 하이퍼시에도 그대로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최진연의 차별성에 관한 비교 발언에는 디지털 시론을 주창한 오남구와 하이퍼 시론을 주창한 심상운간의 차별성을 중심으로 탈관념시와 사물시론의 불가분리성이 언급되어있을 뿐, 이들 시론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는 데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독자에게 감상의 태도 전환만을 요구하고 일방적인 희망적 예측만을 내놓는다. “[...]의미론적인 소통의 독해보다 읽고 느끼는 감성적 소통에 그쳐야 할 것이다. 읽고 느끼는 재미 이상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상과 공상을 통해서 현실에서 볼 수 없거나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세계를 영상언어의 투명한 이미지로 그려 확장해보이는 것은 시인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세계를 떠난 신선한 해방감을 주므로 환영하리라 생각된다.” 과연 그런 시를 읽는 독자들 중에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세계를 떠난 신선한 해방감을 맛보고 환영하게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이퍼 시쓰기를 적극 옹호하며 지지하는 조명제도 앞서 언급한 자신의 논문에서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는 막연한 기대점에서는 동일하다. “지금까지 하이퍼시 텍스트를 접해 온 시인들 가운데는 이념과 용어, 이론과 작품, 자기 모방과 유행어, 감동 부재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런 문제는 하이퍼 시를 쓰고 있는 당사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논의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난관을 차근차근 극복해 나갈 때 하이퍼 모더니즘의 시대는 보다 빨리 열릴 것이다.”   그에 지지하는 점에서는 뒤쳐져있지 않지만, 문제의 주요한 맥락만은 언급된 논문에서 손해일이 잘 짚어냈다. “하이퍼 시가 비논리적, 비선조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라 해도 이를 어느 정도 조정하는 하이퍼링크적 기능이 없다면 현대시의 ‘낯설게 하기’를 넘어 난삽한 글쓰기나 시인 개인의 극히 편향되고 혼란스런 의식의 나열에 그치고 말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시대라 하더라도 인간의 기본욕구는 혼돈과 무질서보다는 정서적 안정과 예술적 즐거움을 선호할 것이다. 이미 수 십 년 전에 선보인 이상(李箱) 시인의 난해한 문제작들이 호사가들의 지적 호기심과 분석 텍스트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일반 독자대중들의 애송시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독자를 먼저 의식하고 첨단을 리드한다는 하이퍼시가 수위 조절없이 의욕이 지나쳐 난해시로 편향될 경우 오히려 독자들의 외면을 자초할 위험이 크다.”   그러면서도 손해일은 다음과 같이 비상식적인 시 쓰기를 통해서 시작품의 일반적인 고정된 개념과 틀을 허물려고 시도한다.  “셔블 발기다래 빔드리 노니다가” 을지로-충무로통 골뱅이 골목 번개팅, 을지문덕-이순신장군,살수-한산대첩 축하연,생백주에 골뱅이 안주로 우리가 남이가! 나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e-mail을 날린다.클릭! 골뱅이복음@KOREA.COM, 오픈 세사미! 오우,베리 굳! 그란데 억수로 유감인기라,구텐베르그선생! 당신의 튻허 활자체를 1972년 미굴 BBN사 레이텀 린슨이 이메일 발신자 표시 약호로 처음 썼다 카는데...앹 사인(at sign) 앹심볼(at sinbol)이라나 뭐라카나,오우,노우! 바벨탑의 징벌! 나라마다 말쌈이 달라 헷갈리기 짝없으니 X-Y@#&{^6^}-(/+$)%=??? 줄줄이 사탕-링크-링크- 프랑스,이태리는 별미 끝내주는 달팽이- 됙일은 귀바퀴 동그란 오이-네델란드는 앞에 스라지(ape slaggi) 원숭이 꼬리-폴란드,루마니아는 똥구녁 뻘건 원슁이-스웨덴은 두르르말린 코끼리 코 [다음 생략...] *22)   위에 든 글을 나의 체험적인 정신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진단을 내릴 수가 있을까? 정신병 초기에서 최악의 상태까지를 1-10 단계로 구분해본다면, 무의미(탈관념) 시- 1~2단계, 디지털 시– 3~5 단계, 초현실주의 시– 6~8단계, 그리고 위에 인용한 손해일의 하이퍼 시 는 9~10단계 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이러한 단계는 죽음을 최소한 5~6개월을 앞에 둔 환자의 말기상태인데, 극심한 환시(幻視)증 정신분열 환자가 간헐적으로 토해내는 말씨들을 주워 모아 놓으면 저런 글이 나올 수 있다.   저런 상태일 경우 환자는 거의 음식을 먹지를 못하기 때문에 신체는 말라서 뼈만 남아 뵌다. 깍두기가 사람 손톱처럼 보인다거나 얼큰하게 끓인 찌개가 피를 흘린 살점으로 보이고 김치가 돼지 창자처럼 보여서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여자 환자의 경우 치마도 팬티도 다 벗어던지고 펄쩍 펄쩍 날뛰다가 자절하기에 손발을 묶어서 독방에 가두고 안정제를 투여하여야만 어느 정도 주변사람이 여유를 가질 수가 있는 때이다. 사물과 사람이 그 형체나 활동이 혼동되고 혼난스러워서 자신의 감각기관이 주체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쯤 되면 주변의 건강한 사람이 볼 때 하염없이 인간으로서 무력감을 느끼고 전혀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어 절망감과 자괴감을 갖고 괴로워하게 되는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하이퍼 시짓기를 주장하고 고집하는 이유는 “비논리적, 비선조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글쓰기”가 정신분열병 환자의 “비논리적, 비선조직이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첨단 말하기” 나 다름없음을 알지 못한데서 기인하고, “개인의 극히 편향되고 혼란스런 의식의 나열에 그치고 말 것” 이 정신분열병 환자의 증상에서 나오는 지껄임투와 다름없다는 사실에 무지하여 그런 병자와 같은 짓을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날 의(醫)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신 신경계통의 질병치료수단에 관해서는 아직도 커다란 진보를 하지 못하였다. 왜 신체가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정신 이상상태를 보여서 완전히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하고 나중엔 불행한 생애로 마감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이 유전적인 요인인가 아니면 충격받은 환경적 요인인가가 아직도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정신 병의원이 있지만 모든 정신병을 말끔히 완치시키는 곳은 없고 의사도 신경을 안정시키는 선에서 개선을 많이 하느냐 않하느냐에 치료효과를 두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업무를 보던 정신병자 요양원은 이름난 정신병원을 많이 돌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으나 완쾌를 못보고, 많은 치료비로 재산을 거의 바닥을 내서, 지친 가족이나 환자나 이제 마지막으로 신체를 위탁하는 곳이었다. 이 병은 사람의 뇌와 심리상태의 미묘한 시스템에서 기인하기에 의과학을 공부한 의사들도 뇌 신경 조직을 다 뜯어 살펴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두 손을 들고만 있는 지경이다. 그리하여 차라리 종교적인 신비하고 기적적인 카리스마에 의한 치료술을 기대하는 것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무속에 의해서 무당들이 굿으로 악귀를 축출하여 본래의 심리를 되찾으려한 방법과 비슷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말은 달리 신앙지도에 의해서 심신을 추스르고 정신건강을 회복시키는 종교교육자의 능력도 정신과 의사 에 못지않은 치료효과를 거두기도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60년대에 새로운 시적 실험으로서 ”무의미 시“운동을 하게 된 김춘수가 ”무의미 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의미의 시“세계로 돌아와 고백한 말을 경청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나의 무의미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23)    이는 그 시 이론을 다루면서 처음에 내가 지적한  모순성을 늦게야 깨달았다는 자기 고백이요 솔직한 증언이다.  그 러면서 늦게야 철이 든 사람처럼 김춘수는 전위적인 시 쓰기를 하는 시인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우선 내가 봐도 이해 안 되는 시들이 있다. 박상순, 송찬호의 시 같은 시들이다. 이들의 시는 전위적이다. 이들에게는 이미지가 그려내는 환상세계만 있을 뿐이다. 허무적이다. 의식상태가 그런 거 같다. 믿고 기대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철저한 비대상 세계, 말하고 싶은 대상이 없는 거다. 환상세계가 이미지를 통해서만 펼쳐지고 있는데, 아무 의미없는 세계다. 그 허무를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허무는 견뎌내기 어렵다. 뭔가 기대는 게 있어야 된다. 사람이라고 하는 육체를 가진 이상, 허무를 이겨내지 못한다. 허무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자유, 완전히 해방된 상태다.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한다. 내가 무의미시를 견디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계속 이런 시만 못 쓴다. [...]의식이라고 하는 건 언어다. 언어와 의식은 동일한 것이다. 언어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건데 결국 언어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건 시를 못쓴다는 것이다[...]시적 진일보라는 게 어느 한계에 가면 막다른 골목이다. 우리 시도 막다른 골목에 가 있다. 시가 없어지는 단계에까지 와있다.”*24)   여기서 전위적인 실험시, 무의미시에 대한 솔직한 김춘수의 비판은 하이퍼 시 뿐만이 아니라 거기 공속한다고 지적한 다른 전위적인 시-이론들에도 해당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가 없어지는 단계에까지 와 있다.”  * 글 맺음   지금까지 나는 이른 바 무의미(탈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디지털 시, 하이퍼 시라고 또 불리는 것들을 평론하였다. 이들 시론을 펴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으로부터 우리는 그것들이 이름을 달리하고 있음에도 (1) 전위적인 실험적 시, 또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론에 입각한 시류(詩流)에 속한다는 점 (2) 무의미는 탈 관념적이고 그러는 한 현실을 벗어난 가상적인 공간과 이미지를 중시하여 의식과 잠재의식(=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고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있다는 점이며, 바로 그런 수단과 방법들로 인하여 아날로그의 시대를 마감하고 디지털의 기술 시대에 걸맞는 시 운동이고 이 디지털 기술을 응용한 문자, 동영상, 이미지, 시적 상상력 등이 쌍방향 또는 방사형 네트워크로 가지를 치고 얽히고 설켜 복합구성을 이루고, 크고 작은 마디인 시어와 행과 연, 의미단락 등 기본 유니트(unit)들이 거미망처럼 하이퍼링크(hyper link)로 연결돼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이룬다는 점에서 하이퍼 텍스트(링크)적 글 쓰기로 하이퍼 시작법 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다는 방식에서 한 통속에 넣을 수가 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가 있음을 알았다.   뒤돌아보면, 일찍이 프랑스에서 일단의 예술가들이 “쉬르레알리즘(surrealism, 초현실주의)” 운동을 선언한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창조적인 상상력과 자유로운 이미지의 구현이라는 목표에만 이성(理性)이 함몰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와 같은 아류로서 무의미 시니 디지털 시니 하이퍼 시니 하면서 전위적인 시운동과 그런 이론들이 아무런 반성이 없이 마구 내뱉어졌다. 심지어 차 영한 시인처럼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처럼 허무적이거나 파괴적인 격렬한 반응이 아닌 초현실과 정신, 신비한 꿈이 결합한 가장 위대한 정신의 자유”라는 극 찬양까지 서슴없이 하기에 이르렀다*25). 이럴진대 지금까지(나의 이 비판 논평문이 나오기 까지) 아무도 그것의 부정적이고 치유되지 않는 병적인 이면까지 파헤쳐 보는 노력도 없었고 아무도 이를 밝힌 이도 없었다.   어떤 이들은 강 건너편(피안)을 동경하고 그리로 가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며 산다. 지금 이곳(차안)의 일상적 생활이 불편해서이기도 하고, 너무 안락한 나머지 싫증이 나서 모험심을 가지고 여기와는 또 다른 경험을 해보고자 하는 이유도 있다. 온갖 상상과 공상으로 저쪽 강건너 쪽을 묘사하고 꿈을 꾸어 채색하고 황당한 이야기도 해댄다. 그러나 강 저쪽을 건너간 사람들은 다시는 강 이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이 강을 건너간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말하고 행동을 했고 더는 이 쪽 세상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 저쪽의 비참한 생활은 강 이 쪽 사람들도 알 수가 없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강 저쪽의 세상을 가 보았다. 가서 보고 이쪽으로 건너와서 지금 저쪽의 세계의 불행과 슬픔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거나 믿지를 않으려들고 여전히 자신의 상상과 공상과 망상이 만들어 낸 저쪽 세계만을 동경하고 그 쪽을 찬탄하며 계속 글쓰기를 고집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고뇌에 찬 독창적인 시 예술작품을 정신분열증 환자의 넋두리라느니 지껄임이라느니... 하여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고 달라들지도 모른다.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자만행위에 마침내 이 글쓰는 이는 고통스럽게도 침묵하기로 할지 모른다. 그러나 비판의 정당성이 별처럼 밝다면 이를 막으려는 어떤 횡포의 암흑도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란 사실은 이성을 신뢰하는 역사의 징표이다.   상상(imagination)과 공상(fancy)은 예술(문학) 창작의 바탕이 되는 세계이다. 그것이 없이는 예술이 설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치있는) 주제를 표현해내고자 사용하는 수단이 되어야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단지 오락(유희)를 위한 방법이 될 때는 문학이든 예술이든 한갓 만화책같은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결국에 와서 본질적인 질문앞에 당도하였다. 불행한 정신병자들이 지껄이는 짓을 왜 그토록 배운 지식층 시인과 평론한다는 이들이 흉내내려고 안달을 하는가? 애지중지 키워서 많은 돈을 들여 대학교를 보내고 세상에서 출세하기를 바랬는데, 시인인가 평론가인가 되어서 외롭게 글짓기를 하고 함께 모여 연구하고 기를 쓰고 공부하더니, 한다는 소리가 기껏 “ 쯪쯪... 젊은 놈이 사지는 멀쩡해가지고, 정신이 돌아서 미친 넋두리나 지껄이고 다니다니...”하는 탄식의 소리를 듣는 정신분열증환자의 지껄임짓이나 하겠다는 말인가? 도대체 왜 이 지경에 이르고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온갖 미사여귀를 동원한 수식어를 앞세워 시문학의 예술에 전위대요 선구자요 창조적인 활동가라는 허위의식속에 자기를 망각하고 독자를 우롱케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로 사태의 한쪽 면만을 보고 이를 전부로 생각하고 눈딱감고 덤벼들어서 다른 쪽 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탓이고 둘째로는 특수한 개성있는 시작품을 선보여서 남의 이목을 집중해보자는  시선끌기 예술의 의도적 일탈일 수도 있고 셋째로는 창작활동에 나침판 구실을 할 문학의 이념에 대한 정립 곧 문학의 오랜 세월에 걸쳐 확립된 정의에 관한 확고한 인식이 결여된 탓이라고 비판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시(문학)의 이상과 가치관 확립하기가 마지막에 와서도 우리의 제일의 관심사가 되기에 이르렀다.   문학이란, 웰렉과 워렌(R. Wellek & A. Warren)이 그들의 저서 『문학의 이론」*26)에서 주장하듯이, 작가의 체험을 통해 얻은 진실을 함축적·내포적이며 비유·상징 등의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예술로서 인생을 탐구하고, 표현하는 창조의 세계이다. 비록 허구화된 현실일지라도 실제 현실의 모방이며, 현실의 모습중 의미있는 내용을 선택하여 상상력과 작가의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 때 문학은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제시하고 현실의 문제를 바로잡는 힘으로 작용하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사상과 정서의 표현 의식이 생기는데, 미의식이 정서와 관련이 있는 형성적 요소라면, 윤리성이나 이념의 문제는 문학의 내용을 이루는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곧 미적(美的)으로 정화되고 정서화된 사상의 표현만이 문학일 수 있다. 문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로서 미적인 즐거움(오락성)을 주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언제나감동을 주고 삶의 바람직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사상을 상징적으로 그려내어 Paul Ricceur가 말한바 처럼, “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달리는 포착되지 않는 우리의 존재상황에 대한 깨달음을 가능케 하는 힘을 주는 것이” *27)어야 한다.   인류 역사에 불멸의 영원성을 띠고 시대와 장소와 인종을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늘 읽히는 문학서들- 소설이든 시이든 희곡이든 -은 재미(오락성)와 감동(깨달음)을 함깨 지닌 것들이었다. 여기서 재미(오락성)을 단순히 유희나 장난같은 놀이로 착각해서 이해하지 말라. 감동을 주는 웃음 울음이나 감정의 진폭을 다스려서 카타르시스(치유)를 겪게 하는 그런 재미를 말한다. 그러한 카타르시스적 오락성(재미)이 유감스럽게도 하이퍼 시라는 것에는 들어있지도 않고 들어올 수가 없다.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시 짓기의 실험 정신과 다양한 기법에 대한 욕구는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무의미(탈관념) 시, 초현실주의 시, 사물 시, 디지털 시, 하이퍼 시라는 것들은 감동(깨달음)성을 교훈적인 것이거나 의도적인 것이라 하여 문학에서 배제하고, 단순히 사물성이나 오락성만을 강조하여 이를 무의미 또는 유희화 하려는 유혹에 빠져 있다. 시가 꼭 교훈적이거나 교육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 또 모두가 그러한 시만 쓴다면 시는 도덕 과목이거나 윤리과목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시가 단순히 오락성과 유희의 도구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문학 예술이 될 수가 없고, 놀이(게임)의 한 가지로 추락해버릴 것이다.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시문학은 영화(영상)나 그림(회화)이나 건축이나 조형예술을 흉내 낼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을 노린다면 시문학은 다른 영상매체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최진연은 상상력과 환상속에 펼쳐지는 오락성으로 한 시대를 석권한 영국의 환타지 소년소설 해리포터를 보기로 들면서 시짓기도 그에 따라하기를 권고하나 그 환타지 작품의 겉 맛을 파고 들어가 숨겨진 권선징악(또는 어두운 어른들의 세력에 대한 순수한 동심의 세계의 극복)의 측면까지 엿보지 못하여서 유감이다. 소설과 달리 詩가 하이퍼 시인들이 주장하듯이 사이버시대에 걸맞는 현대인들에게 오락성을 주자고 그 쪽으로 경도된다면, 엄청나게 다양한 오락을 주는 기기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외면받고,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자신들의 시와 함께 파묻히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굳이 하이퍼시와 같이 이해가 어렵고 까다롭고 고통스런 글을 읽겠다고 돈을 들여 시집을 사거나 시간을 낼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김춘수가 자기 삶의 말년에 와서 시문학계에 권고하는 다음의 말을 경청해보자.:시에 대한 자의식이 있어야 된다. 자기 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왜 이런 시를 썼는가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냥 충동적으로(전위적인 詩들 처럼-글쓴이) 쓰고 마는 것은 아마추어가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예술가적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시는 자연발생적으로 나올 수가 있지만 그걸 의식하고 제어하는 이성이 있어야 한다. 19세기 시대의 로맨티스트들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부르짓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28) 이같이 김춘수가 시인 자신의 시작활동에 반성과 비판을 요구하는 것은 문학의 본질적인 전통적인 정신을 향해 깨어있으라는 주문이나 다를 게 없다.   시(문학)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를 매겨서 의미있는 세계, 가치있는 세계를 건립하여, 인간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하고 인본주의를 고양시킴으로서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새로울수록 우리의 삶은 건강하고 우리의 내일은 더욱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아니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같은, 중세 암흑기를 거쳐 르네상스운동에 목숨을 바쳐온 인류의 고귀한 재산은 문학을 통한 휴메니즘의 구축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시 창작의 자유에 바로 이 근본 정신은 깃발처럼 늘 펄럭여서 살아있어야만 한다.                                                                                           끝.   ......................................................................................................                                                                                                                           *곁 풀이     1)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월간,시문학 2006.8월호, 시문학사 2)심상운, 위의 논문 , 같은 곳 3)심상운“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젊은 시 운동-‘하이퍼시’-기존관념에서 해방,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 우주적 개안”  4)손해일, “의식- 무의식-언어의 징검다리와 하이퍼 링크” 월간. 시문학 2008.6월호 .시문학사 5)조명제, “하이퍼모더니즘의 시대는 오는가”. 월간.시문학 2008.10월호  6)최진연, “하이퍼시(hyper poetry)의 이해” . 월간. 시문학 2010.10월호 7)당시 글쓴이의 경험에 의하면, 김양이나 강씨는 조증(=기분의 고양상태,흥분)의 상태에 빠져있지 않고 성격적으로도 차분한 편인인데도, 홀로 중얼거리며 돌아다니거나 옆에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지껄여댔는데, 그런 이들이 꽤 있었다. 8)이홍식,정신분열증, 진수출판사,1995, 88쪽,94,  Pychopathology, Milyn R.Zide & Susan W. Gray. (역) 전석균, 권구영, 서미경 , 71,72쪽. 하나 의학사,2003.  학원 세계대백과사전26. 12쪽 정신분열병. 학원사,1993.  그밖에, 포탈- 네이버 관련항 참조 9)심상운: “이 글은 1981년 12월호 월간 에 김춘수 시인의 現代詩의 探究로 발표된 글로서 현대시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는 매우 중요한 논문이다.”라고 하면서 심상운 시인이 옮긴 것이다. 10)심상운: “이 글은 1981년 12월호 월간 에 김춘수 시인의 現代詩의 探究로 발표된 글로서 현대시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는 매우 중요한 논문이다.”라고 하면서 심상운 시인이 옮긴 것이다. 11)M. Heidegger, HU。S。313 12)M. Heidegger,HW。S。310.  13)최이인( 엣이름; 최성도), 시작적 사유(사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1990, 석사학위 논문 참고 14)최진연, 탈관념은 가능한가? 월간,시문학 2006. 7월호 15)M. Heidegger,US. S. 208. 16)심상운.위의 논문, 같은 곳 17)심상운; “이 글은 (신구문화사 1961년11월)의 "시작노트"에 실려 있는 시인 조향의 시작노트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글입니다. 앞서 감상문에서 언급했던, "바다의 층계"에 관한 시인 자신의 해설도 있고 해서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생각되어 옮겨 봅니다”. 18)여기서 無意識 이란 용어 자체가 성립 될 수가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식과 잠재의식 이라고 바꾸어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무의식 이란 의식이 없다는 말인데, 혼절했거나,죽은 상태인데 어떻게 경계를 넘나드나? 19)최진연, 하이퍼시의 이해, 월간, 시문학 2010.9월호 20)마르틴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론의 핵심임 21)최진연, 위 논문, 같은 곳 22) 현대시인협회 발행, 2011년 사화집 23) 김춘수 시전집, 서문, 현대문학사, 2004  24) 김춘수- 이재훈과의 인터뷰, 현대시 2004년 4월호  25) 차영한, 초현실주의 시와 시론, 한국문연, 2011 26) 웰렉과 워렌(R. Wellek & A. Warren), 『문학의 이론』 ,김병철 역, 서울 을유문화사,1993 27) Paul Ricceur, Interpretation Theory, Fort Worth, Texas, 1976, p. 37. 28) 김춘수- 이재훈과의 인터뷰, 현대시 2004년 4월호  
1693    詩는 시인의 눈에 비친 그림 댓글:  조회:3967  추천:0  2015-12-31
  하이퍼시의 항등성 배제 및            전경과 배경의 전환기법 관찰       -김해빈 시 중심으로                          이오장(시인)     1.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가 무엇이냐는 의문은 많은 시인으로부터 듣게 되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만큼 하이퍼시가 시인들의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이며 시문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새로운 시 연구에 있어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에 비하여 요즘 일부 젊은 시인들 주축으로 언어의 형식적인 서술과 비틀린 이미지의 조합으로 독자들이 외면하게 하는 부류가 있는데 바로 난해시파라고 불리는 시인들이다. 하이퍼시는 그러한 난해시 와는 확실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에 비하여 난해시는 관념과 허구를 결합하여 이미지의 이탈을 은연중 유도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미지 이탈이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서 발생한 상상은 독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본질을 이탈해 언어의 폭력으로까지 번지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를 처음 도입하고 하이퍼시의 새로운 연구에 적극적인 문덕수 시인은 하이퍼시를 한마디로 압축하여 설명한다.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룬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결된다." 즉 하이퍼시는 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물만을 가지고 시를 쓴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사물에 대하여 새로운 상상으로 몰입되기에는 자신만이 가진 사물의 본질적 이해가 필요하다.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감정적 변화의 그림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는 사물에서 얻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며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여 독자와 공유한다. 한마디로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고 이미지의 연상을 다른 사물과 대비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 모은다. 그것이 개개인의 능력이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빠트리기 쉬운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어 새롭고 진정한 하이퍼시가 완성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껴야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이퍼시가 되는가, 시인과 독자가 같은 감동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문학의 발전만큼 독자들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를 써도 그 순간은 자신이 감동하게 되고 완성을 이뤘을 때는 독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론에 맞는 하이퍼시를 쓰려면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2. 하이퍼와 항등성에 대하여   어떠한 대상을 보든 인간의 두뇌는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는 자신만이 가진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눈과 대상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00m 앞의 사물의 크기와100m 높이에서의 사물의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 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되지만, 수평으로 볼 때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등성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둥근 접시를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말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의 심리학적 구성 원리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른다면 시의 구성이 되지 않고 사물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시의 목적을 잃게 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모양에서 얻은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소나무를 봤을 때 소나무의 생태와 자연과의 동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눈으로 본 그대로의 모습을 그때의 상황과 연계하여 거기서 파생된 상상을 이어가는 것이 하이퍼시다. 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실제로 우리는 시를 그렇게 써왔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대상의 본질 보다는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멀리 떨어진 큰 고목이 작은 묘목으로 보일 수도 있는 허상도 그릴 수 있고, 위에서 보는 크기와 거리를 두고 보는 크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활은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은 대부분 항등성을 잊고 산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쓸 때 그러한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감동을 앞세워 본능적인 감각으로 씨를 쓰기 때문이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은 양쪽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눈이 하나일 때만 가능했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것은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고 눈을 두뇌로부터 단절시켜 기계적인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시인들에서 먼저 나타났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기 전부터 시에서는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데로 느끼는 데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의 주류는 본질적 세상의 이상을 그려나가 인류는 객관적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기계문명에 완전히 길들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화면 세상에 빠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카메라가 잡은 세상만을 믿고 산다. 본질의 통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르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하이퍼시는 시작됐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림 위에 새로운 상상을 결합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카메라가 잡은 객관적 정확성에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세 번째의 눈, 다시 말해 본능적인 감성이 있어야 이미지의 연속성으로 하이퍼시가 이어지는 것이다.   3.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의 전환   시를 쓴다는 것은 창조적 행위다. 시인은 창조자로서의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 창조적 사고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인 월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시의 대상인 사물을 대했을 때 확연한 이미지가 이어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면 불현듯 어떠한 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상상의 존재란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의 각 부분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 즉 게슈탈트(독일어로써 심리현상은 어떠한 요소의 가산적 총화로는 설명할 수 없고 전체성을 갖는 동시에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성질)로 파악한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인물만 뚜렷하게 나오게 하는 아웃포커싱과 같은 원리다. 시에서 이와 같은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물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이렇게 게슈탈트의 끊임없는 형성과 해소, 이 과정이 사물의 서사 즉 이야기되는 것이고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묘미이며 진정한 하이퍼이다.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못하여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을 바꾸지 못하고 고정된 존재만 바라본다면 하이퍼의 구성이 한정되게 되어 형성이 뒤엉켜버리는 데 있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잃게 되는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 기존의 고정 관념을 확실하게 버리는 것이다. 같은 하이퍼시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중복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다른 관념이 되는 것이므로 유행 같은 언어의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둘째. 사물의 움직임과 동화된 주위 환경을 봐야 한다. 즉 새로운 사물을 찾아내어 그 움직임을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움직여 사물의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 셋째.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게슈탈트 전환이 가능해야 창조적인 발상으로 하이퍼시를 쓸 수 있다.   4. 김해빈 시에서 나타난 하이퍼시의 관찰   하이퍼시가 새로운 시문학으로 자리 잡아 시단의 큰 방향을 일으킨 후로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그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그동안에 익혀왔던 사물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인들을 보면 문덕수 시인을 중심으로 심상운. 김규화. 조명제. 송시월. 안광태. 이춘하. 정연덕. 고종목. 이솔. 위상진. 김기덕. 이선. 김예태. 허순행. 김해빈 등 문단의 활동이 활발한 시인들이다. 나열된 이름에서 빠진 시인들도 상당수가 있어 새로운 시론으로 나타난 하이퍼시 운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이중 김해빈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이퍼시의 이론과 실제의 작품이 하이퍼답게 이해되고 부합되는 것에 대하여 관찰해보기로 한다.   김해빈은 초기 작품부터 전통 서정을 크게 벗어난 상태로 나타났다. 처음 작품집 "새에 갇히다"를 살펴본다면 그 제목부터 하이퍼 유형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 이론을 접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자신의 안목과 상상을 은연중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새에 갇힐 수는 없다. 그러나 김해빈은 스스로 새에 가두어 날개를 빌리고 새를 통하여 본 새로운 세상을 그린 것이다. 그 후의 작품집에서도 하이퍼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는 원래의 시적 감성이 일반 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시문학 5월호에 발표된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비 그친 자운서원 잔디마당 위로 눈알 굴리는 잠자리 떼 뇌관 푼 핵폭탄 물고 몰려간다   유럽을 평정한 히틀러 독일공군이 영국 본토를 향해 도버해협 상공을 날고 있다 우중충한 날씨에 내려다보는 도시는 무표정하고 괴링의 출격명령에 날개를 편 전투기 노선을 이탈해 런던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 *블리츠(Blitz)체험관 상공을 낮게 날고 있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전투기는 급하강한다   빗금으로 치닫는 빗줄기에 야금야금 저려오는 날개 나치는 영국 상륙을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보다 위에 있는 율곡무덤도 오만원권 오천원권 지폐도 아닌, 기념관 빛바랜 초충도에 앉은 고추잠자리   헤드라인 ‘오늘이 우리의 승전일입니다(TODAY IS V.E. DAY!)’     *블리츠Blitz 체험관: 유대인 학살 기록관과 런던 대공습 당시 일반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꾸며 놓은 곳                           이 작품은 하이퍼적인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형적인 하이퍼를 보여주고 있다. 고추잠자리는 평화의 상징이며 한가롭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자연의 개체이다. 누구나 비 그친 뒤에 잔디밭 상공을 바람 없이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대하면 내면에 감춰진 그 어떤 고민과 울화도 잊게 된다. 어린아이가 고추잠자리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모습에 함께 동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평화의 상징이라 아니할 수 없는 곤충이 고추잠자리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겉모양뿐이다. 잠자리의 생태를 보면 곤충 중에서도 상위급인 포식자이다. 잠자리 유충이 물속에서 자랄 때 장구벌레 등 작은 애벌레나 심지어 개구리의 올챙이까지 잡아먹으며 사는데 애벌레의 시기를 보내며 먹는 먹이의 수효가 몇 만 마리가 된다는 학계의 발표도 있다. 또한,땅 위에서 유충으로 지내는 명주잠자리는 일명 개미귀신이라 불리며 함정을 파 수많은 개미를 잡아먹는 포식자이다. 이것이 잠자리의 생태이며 본질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시를 구상하지 않고 사물의 현재 보습을 보고 시를 쓴 것이지만, 전투기와 히틀러를 잠자리에 대입시킨 것을 보면 김해빈은 사물의 본질까지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위패를 봉안한 사원이며 율곡의 가족묘를 조성한 곳이다. 알다시피 율곡 이이는 성리학자로 알려진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또한, 평화를 지키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한다며 10만 군병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힘을 앞세운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잠자리가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는 데는 힘을 기르는 포식자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자운서원과 잠자리를 대비하여 나타낸 것으로 사물의 실체를 연결 인식하는 항등성을 벗어버리고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대비시킨다.   히틀러는 근대의 몇 안 되는 독재자의 대명사이다. 힘을 내세워 유럽과 전 세계를 점령할 목적으로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웃 나라를 폭격한다. 김해빈 시인의 상상은 사물의 현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유럽까지 날아가 히틀러의 폭격기를 불러낸다. 도버해협을 날아가는 폭격기가 자운서원 앞마당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사물에서 파생된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다. 고추잠자리는 전경으로, 자운서원은 배경으로 나타나다가 폭격기의 등장으로 자운서원이 전경이 되고 잠자리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전환의 기교와 이율곡의 사당과 가족이 배경이 되어 그려지다가 다시 고추잠자리가 전경이 되는 하이퍼적인 기법은 게슈탈트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운서원의 유래와 형성. 잠자리의 생태와 실태, 히틀러의 폭격기와 폭탄의 파열음을 하나의 장면에 대비시켜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하이퍼의 퍼즐을 무리 없이 그려냈다. 사물의 과거가 현재의 평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재 보이는 모습의 잠자리가 그대로의 움직임으로 평화를 만들어 모두가 승리한 승전 일을 만든 것으로 복합된 이미지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하이퍼에서 빠지기 쉬운 감동까지 만든 것이다.     웃음보에 헛바람 들었는지 멸치같이 깡마른 남자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시청 앞 건널목 횡간막 사이를 비집고 히죽히죽거리며 다가온다   가을걷이 끝날 무렵 볼썽사납게 조무라든 꽈리를 보았을까 소피 마려운 여자의 뒤태를 보았을까 2시간 전 언양불고기 먹고 ktx 타고 올라온 여자의 하프코트에 묻은 쇠똥 굴러가는 소리를 들은 게야   설익은 시에 짓눌려 내 흉강에 덧쌓인 말씨들이 폐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혹시 눈치챘는지 남자는 이내 뒤따라오던 스키니 차림에 킬힐 신은 여자의 꽁무니에 눈길 꽂힌다   거미줄 같은 거리를 기웃거리며 권력을 찾던 남자는 몇몇 조무래기들의 웃음과 교회 전도사로부터 받은 일회용 휴지를 주머니에 우겨넣고 도마뱀처럼 꼬리 자르고 건물 안 으로 들어 가버린다   성형외과에서 나온 얼굴 퉁퉁 부은 여자, 공터를 지나다 울타리 넘어온 축구공에 뒤 통수 맡고 미간을 찌푸리려 하자 완충지대 튤립나무에 앉았던 까치가 깔깔거리며 날아 간다   주유소 화장실에 뛰어든 여자의 스커트자락 놓지 못한 남자 여자의 핸드백 들고 휘파람 부는 듯 볼을 잔뜩 오므렸다 부풀리며 달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정지신호 무시한 채 응급처치하고 나오는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                                                                                앞의 작품이 사물의 모양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를 엮어낸데 비하여 이 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사물화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적절히 이뤄낸 데 있다. 남녀의 생태적인 일상을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바라보고 남자의 히히낙낙 거리는 실태와 여자의 팽팽해진 감정을 하나의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남자를 전경으로 하고 그 뒤의 배경에는 여자의 감정이 언제나 받혀주는 형태로 사물의 표현보다 사람의 감정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신의 소유라고 믿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후손 번식이라는 지대한 자연의 섭리가 남자들을 착각하게 하였을 것이다. 작품 속의 남자는 여자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을 꽂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여자는 뒤에서 살펴본다. 현시대의 새로운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으로 있는 여자의 감정 기복은 폭발 직전이다. 그런데도 남자의 눈길은 또 다른 여자의 모습에 현혹되어 뒤따라가는 실태를 보인다. 이때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는 남자의 기본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권력과 금전을 얻기도 전에 섭리적 욕망만을 풀어내려는 남자는 여자의 표적이 된다. 대부분 여자는 표적의 남자를 향해 창을 던지는 게 아니라 다른 출구를 찾게 되고 그 출구로 성형외과를 들락거린다. 그것이 실패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남자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푸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해빈 시인의 고민은 시작이다. 남자와 여자의 생태적인 모습을 버리고 현실에 맞는 모습을 그려야 할지. 남자의 비뚤어진 욕망의 발산을 원칙적으로 그려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 결과로 달이라는 위성을 찾았다. 해결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아 원색적인 남자의 욕망을 잡은 것이다.   기흉은 결핵성 파괴 등의 원인으로 폐의 표면에 구멍이 생겨 흉막강 안에 공기 또는 가스가 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자꾸만 헛바람이 빠져나와 남들이 보기에는 실없이 웃는 모습으로 보이는 병이다. 김해빈의 기흉은 그러한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남녀관계에서 시적 모티뷰를 찾아낸 것이지만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에서 이미지를 찾지 않고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사물화하여 원리적인 항등성을 배제하고 전경과 배경을 적절하게 전환하여 한 편의 하이퍼시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사물에서 찾은 이미지보다 쉽게 그려질 것 같아도 사람의 변화가 짐작하지 못할 이변의 연속인 것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다.   마지막 연에서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는 남녀의 생리적인 차이는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남녀관계는 이율배반적으로 동등하다는 항변으로 보인다.     날카롭게 솟은 뿔 동그란 눈 지그시 감은 타르보사우루스 알을 낳는다 간척지 모래 위로 퍼져가는 억새를 스쳐온 바람이 알을 날름 삼켜버린다   화성, 개미섬 기슭 따라 풀잎까지 벌떡 일어서서 조이는 팽팽한 호흡 바위를 핥아대던 기다란 혀들이 용암에 젖은 이빨, 발톱, 눈빛들이 번뜩인다   알을 깨트리며 주먹을 휘두르던 주몽이 활을 만들고 당긴 시위를 놓는다 경주로를 이탈한 말의 울부짖음 벌판을 가르는 선이 무너져 뚜렷하게 찍히는 발자국 부러진 청동검 반쪽을 주몽이 알 속에 감춘다 뺏고 빼앗기는 칼 유리가 알 속에서 청동검을 찾는다 얼었던 송화강이 녹는다   철거덕 철컥 철거덕 철컥 고개 쳐들고 들판을 달리는 점박이 또다시 커다란 알을 쏟아낸다 논바닥에 뒹구는 알 사육장 소가 침 흘리며 되새김질한다   돌알을 품고 있던 메갈로사우루스 시화방조재를 바라보며 푸른 눈 껌벅거리고 삭아버린 티라노의 하얀 숨결 솟아오르는 공단 굴뚝 안킬로사우루스의 잿빛 눈물이 하수구를 따라 흘러내린다 고삐 묶인 폐선 허리께서 삐거덕삐거덕 막대뼈 조이는 소리 몸 사르며 찢어진 풍어 깃발마다 익룡 발가락 펄럭인다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덮인 갯벌 알을 낳은 타르보사우루스 위턱을 치켜들고 슬금슬금 바닷가 암벽 속으로 사라진다 억새의 손짓을 기억하는 코리아케라톱스 알이 입 쫙쫙 벌린다                               첫 번째 작품이 사물의 형태와 움직임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것이라면 두 번째의 작품은 사람의 심리 상태를 사물화하여 사물과 똑같은 상태로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여 하이퍼적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세 번째 작품인 코리아케라톱스는 과거와 현재를 합하여 미래로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김해빈 시인의 시각과 감각이 사물과 사람의 연결된 상상의 고리를 한 차원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코리아케라톱스는 5천만 년 전 이 땅을 지배했던 공룡의 이름이다. 시화간척지가 생긴 후에 드러난 갯벌 개발 중 우연히 발견된 공룡알 화석에서 그 이름을 얻은 우리의 토속 공룡으로 그 흔적을 다 찾지 못하여 아직도 발굴 중이다. 그곳에 가면 금방이라도 공룡들이 포효하며 뛰어나올 것 같은 환상에 쌓이고 알 화석을 마주한 순간은 누구나 과거의 자연 상태를 떠올리며 현실을 잊게 만드는 곳이다. 김해빈이 본 것은 누구나 똑같이 보는 사물이다. 각자의 상상과 현재 보이는 현실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상상으로 몰입되어 각종 공룡을 만난다. 그러나 김해빈이 본 것은 남과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알을 떠올리게 되면 그 크기를 재어보고 부화될 새끼의 크기와 성장한 크기를 상상한다. 김해빈은 초기 삼국시대의 전설인 주몽을 불렀다. 건국에 필요한 힘과 힘을 받쳐줄 각종 무기와 활, 불타는 듯한 눈빛을 공룡의 힘과 대비하여 나라를 세운 주몽의 활약을 그려냈다. 거기에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떠올리고 주몽과 유리와의 관계를 설정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이뤄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돌아와 농기구인 트랙터가 뱉어내는 하얀 덩이(소를 먹이려고 볏짚을 효소와 섞어 단단하게 굴리는 일종의 싸이로 방법)를 알과 전설에 혼합하여 인간이 자연과 싸워 만든 거대한 방조제를 향해 생태파괴의 폭력을 항의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엉켜 펄럭이는 갯벌의 평화에서 쫓겨 가는 공룡의 마지막 장면으로 한 편의 희극과 같은 연출기법을 보여줘 하이퍼적시에서 빠트릴 수 있는 서정의 감동을 이끌어내었다. 항등성을 배제하고 사물의 모양과 움직임만으로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그려낸 것이다.     눈 쌓이는 모스크 앞에서 기도하는 무슬림들, 눈밭에 앉아 있는 낙타, 피라미드 앞 스핑크스는 미소를 잃었다. 사람들 호기심이 파라오의 역사를 뒤집어놓고 말았다   대립이 가득한 지붕을 하얗게 덮은 눈은 주도권 싸움에 뜨겁고 치열했던 여의도 십자가를 잠재울 수 있을까                                       압축된 삶은 의미가 없다며 하루하루를 느슨하게 흘려보내던 여자는 접시에 채소셀러드와 과일을 듬뿍 담아 테 이블 아래 주름진 의자에 앉는다   1월을 지나 2월이 오면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쭉정이도 제 몸 부풀리며 이벤트의 계절을 또 기다리겠지   12월 어느 날 베고니아 뷔페 시인의 접시 위에 퉁퉁 불어 튼 강남콩 한 알 덩그러니 남았다                                           위에 부분적으로 나열한 두 편의 시에서도 김해빈의 시는 시종일관 하이퍼적인 기법을 유지하며 시의 방향을 잡아 나간다. 폭설에서 100년 만에 이집트를 덮은 눈에 사막의 피라미드는 하얗게 덥히고 스핑크스가 미소를 잃은 상황에서 군중은 자유를 외치며 혁명가를 부른다. 개인의 염원이 하나로 뭉쳐 짓눌린 자유를 찾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되찾은 자유는 폭설에 갇혀 다른 고난을 불러내는 피의 역사, 한 송이의 눈이 뭉치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보여주지만 웃음을 잃어버린 승리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시 일으킨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의 의사당인 여의도를 등장시켜 대립과 설전이 난무한 상황을 꼬집고 그 옆에 위치한 높다란 십자가의 건물에서 일어난 분쟁을 종교적인 문제 즉 폭설로 불러낸 전환의 기법이다.   배부른 콩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리낌이 없는 행동을 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대비시켜 인간의 추악함이 얼마나 높아야 무너질 수 있는지를 쭉정이 콩에 비유하였다. 완성된 인간은 없으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려는 과욕에 대한 행동을 꼬집어 통통하게 영걸은 콩과 익지 않아 쭉정이가 된 콩으로 그려낸 기법은 김해빈의 특유한 하이퍼적 시의 기교다. 어느 작품에서든 사물과 사물의 연관을 찾아내고 사물의 움직임과 멈춰진 정서를 끄집어내는 김해빈의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몰두는 앞으로 한 발짝 더 나갈 것이 분명하다. 이는 시의 실제가 이론을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5. 하이퍼시의 방향   시 자체가 원래 하이퍼라고 주장하는 시인도 있다. 일상의 용어에서 벗어나 그 위의 가상 현실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는 언제나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의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가 지금껏 사용한 관념과 묶인 상상을 벗어버리자는 하이퍼시 운동은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하이퍼시는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물에서 나온 가닥의 실을 한곳에 모아 하나의 실타래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결코,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사물을 볼 때 이미 머릿속에 박혀있는 고정된 환경과 형태를 벗어버리고 사물마다 가진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어 하나의 특출한 이미지를 만들자는 것은 난해한 시를 쓰자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발달에 맞춰 자연적인 정서에 기계적인 정서를 도입하고 발달에 따라 변해가는 인간의 정서도 바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옳다. 하지만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의 연결을 위하여 여러 갈래의 사물이 등장하고 조합된 이미지가 매끄럽지 못하여 시적 감동이 적다는 지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개개인이 극복하여 풀어내야 할 숙제다.    
1692    詩의 징검다리는 어디?... 댓글:  조회:4200  추천:0  2015-12-31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늦겨울 산행중에 대지가 혼곤한 잠속에서 새싹을 피우려 기지개켜는 듯한 초봄의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다. 소재나 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기법은 매끄러운 언어구사와 하이퍼텍스트적 구성이다. 한국인이라면 깍궁놀이 하던 모성에의 추억과 그리움이 애잔할 것이다. 엄마가 사랑스런 갓난애와 눈을 맞추고 깜짝 숨었다 깍궁! 하고 다시 나타나면 까르르르~ 아이의 천진한 웃음이 폭발되는 전통적 사랑놀이요, 육아법이다. 엄마나 아이 둘다 실존재이지만 갓난애 입장에서는 깍궁하는 엄마는 현실이요, 잠시 안보이는 엄마는 부재의 가상현실이기에 느닷없는 재출현에 그토록 자지러질 것이다. 배낭을 벗고 양지에 앉은 화자 자신도 싹이 트려는 듯 몸이 근질근질하고, 산곡을 넘나드는 작은 새와 진달래, 철쭉과의 정겨운 수작이 새싹들의 겨울잠을 일깨우는 깍궁놀이로 들린다. 이 시의 연상 고리는 양지에 앉은 화자--계곡의 진달래, 철쭉-- 작은 새의 재재거림--어머니의 깍궁! ---새싹을 어르는 작은 새들의 깍궁! --이에 화답하는 진달래 철쭉들의 잉잉거림 등 엄마와 새들의 깍궁을 회상하는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이다. 그리고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 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 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 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학교가 끝 나면 곧바로 동방극장엘 갔지 내친구와 몰래/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 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 김규화 < 햇빛과 단풍 > 전문      시문학 발행인이며 왕성한 창작으로 수 십 년의 시력을 지닌 김규화 시인이 뒤늦게 하이퍼시에 경도되면서 시적변신에 나서 주목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시에 대한 김규화 시인의 인식은 시문학 4월호의 심상운-김규화의 대담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외에도 등에서 하이퍼텍스트시의 실험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 시에서는 햇빛과 단풍을 매개로 한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청소년 시절 추억 등이 행간에 배어 있다. 시상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서양과 현재, 과거를 넘나들고 있다. '무색인 햇빛이 단풍잎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노랑 빨강 금빛--갠지스강 나무더미-- 빨간 불꽃--금빛 영혼 --타는 시체--단풍무더기 --단풍에 웃는 햇빛으로 확산된다. 이어서 -- 마릴린 몬로의 금빛 머리칼----영화 포스터 보는 18살소녀--친구와 몰래 간 동방극장으로 증폭되고 --단풍속으로 돌아와 앉는 마릴린 몬로--심지 돋는 햇빛'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여기서 하이퍼링크적 연결고리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을 통해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이며, 이것이 매끄러운 시읽기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독자로서는 이런 하이퍼시에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파노라마 경관 감상하듯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검은 철제 의자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 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 밭의 환한 햇빛속으로 들어 갔을까? 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 영하 10도 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장수가 떨어 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고 쓴다. 그는 그밑에 “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 ”라고 또 쓴다. --2연 생략--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 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 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1연, 3연      심상운 시인은 최근 몇 년 논란의 초점이었던 탈관념시, 디지털시에 대한 명쾌한 해설과 이론적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촉구해 왔다. 그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시문학 4월호에서는 김규화 시인과의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 라는 대담을 통해 하이퍼시론을 피력하고 이를 토대로 창작과 동인활동을 시도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물꼬를 틀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문학 5월호에는 하이퍼시 특집으로 < 북한산의 레몬 향기> < 미완성의 시>도 선보이고 있다. 심시인이 수십년 동안 추구해온 토속적 서정과 이미지 위주의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디지털리즘과 전자미디어의 하이퍼텍스트적 특성에 주목하고 동인 에콜로 변신을 시도하는 노력을 높이 살만하다.  인용한 에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애착과 기법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다. 하이퍼시가 방사성 자유연상, 공상적 의식의 흐름 따라가기이면서 말하기 보다는 보여주기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그림감상하기’라는 부제를 달고, 실험단계라 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추측된다. 일반 독자입장에서는 난해하고 생경한 이 시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나 순서, 상식적 질서, 교훈을 찾으러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디지털적 하이퍼시의 특성을 따라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추상화 감상의 요점이 그림 자체의 감흥을 중시하고 사실에 입각해 무엇을 그렸는지, 무슨 의미인지는 부차적인 사항인 것과 같다. 실제로 지금 이 시공간에도 미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차원적 상황들이 앞뒤 없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천지만물의 존재나 사건, 사물들이 불가측, 불연속적이어서 어찌 보면 뒤죽박죽이지만 나름대로 혼돈 속에 우주순행의 질서가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 시는 그의 방에 걸린 다섯 개의 그림 중 첫 번째 그림 감상을 시작으로 자유연상과 분방한 의식, 무의식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시 첫 연의 골격은 첫 그림: 검은 철제의자위에 불타는 붉은 꽃다발--그 글 밑에 그와 내가 주고받는 컴퓨터 댓글 형식으로 -- “ 꽃밭의 햇빛 속으로 들어 간 죽은 뱀의 영혼” ”영하 10도의 겨울밤 시멘트 도로 위 귤의 꿈“ ”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시인의 여행“ 등 다소 난해한 글귀들이 화답한다.  다섯 개의 그림 감상도 차례대로가 아니라 1.3.5.4.2로 비순서적이며 세 번째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그림으로 가자 네 번째 그림에서 태평양의 물이 흘러내리고 동시 다발적으로 두 번째 그림에서 나온 색색공이 굴러다니다 식탁 , 놀이터, 침대,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아이들이 뛰고,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뜬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순조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이상에서 필자 나름의 독법으로 세시인의 하이퍼시를 읽었지만, 작가의 의도와 달리 추상화감상처럼 개개 독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인 시읽기의 무정부상태가 불가피 한듯하다. 이 점이 하이퍼시의 묘미라 할 수 있고, 살펴본 세 시인의 작품도 각기 개성이 보인다. 아직 실험단계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하이퍼링크에서도 오남구 시인은 매끄러운 언어구사를, 김규화 시인은 의식의 흐름과 링크의 완성도 여부를, 심상운 시인은 이미지 마디간의 집합적 결합을 중시하는 듯하다.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시 텍스트 제공자인 시인과는 별도로 이를 수용하는 독자태도에 따라 한스 야우스의 ‘현실독자’, 리퍼테르의 ‘초독자’, 스탠리  피쉬의 ‘정통독자’, 조나단 컬러의 ‘이상적 독자’, 볼프강 이저의 ‘내포독자’, 움베르트 에코의 ‘모범독자’ 등으로 분류될 만큼 독자의 역할과 중요성이 부각된다. 독자는 작품의 주제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이미지 등에서도 즐거움을 향유한다. 특히 오랫동안 전통을 답습해온 재래시의 진부함에 질린 독자에게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부응하고, 미학적 제약을 벗어난 하이퍼텍스트시의 정서적 해방감과 자유분방함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1691    詩의 생명력 /// 난해시에 대하여 ///난해시 사랑 댓글:  조회:4336  추천:0  2015-12-31
시의 생명력                                         ///유한근     많은 분들이 요즘의 시를 걱정한다. 한국현대시의 향방을 알 수 없다느니 혹은 난해하고 수필인지 시인지 알 수 없다느니 등의 염려를 흔히 듣게 된다. 이런 걱정을 하는 분은 정직한 분이다. 난해시를 보고 이해하는 척하지 않는, 시를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진솔하게 토로하건데, 30년 넘게 시 평론을 해온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시들이 많다. 대충 짐작은 되지만, 그 시의 방향이나 의의(?) 즉 존재 이유를 가늠할 수 없는 시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것들을 과감하게 버린다. 고등학교 학력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는 시라 아니라고 분노(?)하며 버린다. 그들은 눈 깜짝 하지 않겠지만. 과격하게 말하면 그것들은 쓰레기같은 시다. 한 편의 시는 독립된 존재물이다. 그 자체 유기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 인쇄 형태로 존재할 때부터, 독자들에 의해 그 시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 시를 단 한 명의 독자가 향유하더라도 그 시는 생명력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많은 시들은 죽어 있다. 사체가 되어 썩어가고 있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 생명을 담보로 한 치열한 정신으로 써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생명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썼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별하고 그 가능지평을 탐색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시의 하나의 화두는 ‘신서정’ 또는 ‘다른 서정’이다. 그동안 서정담론은 시인의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로부터 일탈한 시의 문법과 발화방식의 다양성에 대하여도 부단히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하나로 요약될 수는 없어도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은, 서정시는 자연 친화적 상상력으로 시작되고 자아 발견이나 일탈로 끝난다는 사실 그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서정시의 개념을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가장 짧게 표출하는 주관시’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상은 시정시는 감정만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까지도 서술되는 것이다는 것과 짧게 표출한다는 것. 여기에서 특히 우리는 ’표출‘이라는 언어에 주의해야 한다. 표출(表出)의 사전적 의미는 ‘겉으로 나타냄’이다. 표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때, 표출은 시인의 내면적 속에 있는 것들이 자연발생적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들어내게 하는 것은 상상력이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혹은 나라는 존재로 부터의 일탈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힘은 상상력이며, 가장 적절한 문학 장르는 서정시이다. 서정민요시집(Lyrical Ballards)》을 펴낸 워즈워드 W. Wordsworth는 서정시를 “시는 강한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다. 시인은 일반적인 열정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시로 정의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상상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정시의 개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주관시”라는 부분이다. 여기에서의 주관시라는 개념은 정서와 운율, 사상 등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시를 의미한다. 일상적인 자아나 경험적 자아가 아닌 서정적 자아(Das Lyriche ich)에 의해서 쓰여진 시를 의미한다. 서정적 자아는 시인의 내밀한 정서와 사상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특별하다 개성적이다. 보편적인 것과는 달리 개별적이며 특수하다. 서정시의 대상은 오직 시인 자신 뿐이다. 주위에 있는 사물이나 사상을 자기화하는 표현 양식이나, 그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을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방법 등도 모두 그 대상은 자신 자신에 있다. 주체적인 대상은 오직 시인 자신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인의 특별한 상상력으로 가능해진다. 흄은 자연을 포함한 사물이 반드시 차이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사물이 변화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을 응시하는 정신 때문이라도 말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나타남을 등록하면서 이를 수축시키거나 중첩시키는 것은 상상력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상상력은 모든 이미지들을 수축이나 반복된 첨가로 의해 하나의 이미지에 담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연물 중 한 사물을 반복적으로 관찰해도 그 차이가 나는 것은 응시된 정신 즉 상상력의 힘이라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존재 인식을 자기화하여 정착하거나 일탈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 자신의 체험, 그 범주를 기조로 하여 상상력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물과의 상응도 꾀한다. 그러다보니 카타르시스적인 쾌감만으로 자신을 위무하기 위해 시를 쓴다. 이러한 현상의 극단화로 인해 서정시의 종말을 보인 시인은 파울 첼란이다. 비의秘義적 서정시(Das hermetische Gedicht)라 통칭되는 첼란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개념에 상당히 부합되는 모티브들을 수용하고 있지만, 새로운 언어 결합에의 부단한 실패로 인해서 난해시로의 전락을 보임으로써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기존의 서정시에 절망한다. 그리고 기존 서정시의 절망은 신서정시의 가능 지평을 만들어냈고, 그 지평의 연상상에 실험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실험은 멈출 수 없다. 어느 국면이나 위상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실험은 끝난다. 그래서 실험은 언제나 날이 서있고 첨단적이다. 그래서 80년대의 한국시는 실패했고 21세기 벽두에 간헐적으로 나타났던 실험시도 그 빛이 지속되지 못하고 있다. 80년대의 실험시는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혹은 내용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야 모자이크 혹은 퍼즐 맞추기 하여 쓰여 졌다. 그러나 21세기 후기 정보화시대 혹은 하이텍스트 시대에 들어 컴퓨터와 인터넷의 정보 속에서 새롭게 실험할 수 있는, 혹은 이 시대를 전면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실험시를 ‘하이퍼시’라고 할 때 이 시는 하이퍼시라 할 수 있을까? 하이퍼시(hyperpoetry)는 하이퍼텍스트적인 시를 의미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비선형, 비인과, 비고정, 탈중심, 탈관념, 다방향 등의 특성을 가진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세계이다. 하이퍼링크(hyper link)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특성을 현대시에 차용한 개념의 시가 하이퍼시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시 문법은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차용하여 기존의 문장 구조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의도적으로 통사적 맥락을 끊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인 이미지와 의미 구조를 공유한다. 그러니까 그 이미지들은 시니피에보다는 시니피앙에 집중되어 언어적 트릭으로 나아간다. ‘하이퍼시’는 21세기의 현대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부담스러운 모더니스트들의 이미지에 대한 압박으로부터의 일탈로 초월하려는 의지의 표상으로 나타난 다층적 의식 구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인터넷을 통한 신유목인적인 의식이 현실과 비현실을 뛰어넘는 이미지 창출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어쩌면 디지털 영상에 대한 반영의식이기도 한다.(졸고 에서) 또 다른 국면에서 현대시는 두 가지 기능이나 역할이 하나로 합치는 하이브리드 (hybrid)시로 까지 전개된다. 디지털과 아나로그적 속성이 합친 시라기 보다는 문학 장르의 해체까지를 실험하는 시로 전개될 전망이다. 이를 전제사항으로 하고, 시의 생명력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의혹을 갖고 그것을 탐색하자. 시가 지녀야 할 기본 요소는 네 가지다. 시어, 운율, 이미지, 구조이다. 이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만 비로소 ‘시’라는 존재물이 된다. 시에 생명력을 가지려면 ‘시어’가 기본 요소로 있어야 한다. 시어는 아어(雅語)일 필요는 없고 일상어로 족하다고 말한 사람은 워즈워드다. 그러나 일상적인 사전적인 의미와 시인의 주관적으로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비유의 언어인 텐션(Tension)언어이어야 한다. 인텐션(intension, 내포)와 익스텐션(extension, 외연)이 합쳐진 긴장된 텐션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어떤 작가보다도 언어에 대한 남 다른 인식이 필요하다. 주관적 감성과 상상을 표출해낼 새로운 인식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 다음의 시의 구성요소는 운율이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고 말한 사람은 쇼펜하우어이다. 또 누군가는 “음악은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인간을 엄습해서 그를 우둔한 일상성으로부터 탈피시켜 생의 원천으로 이끌어주는 그러한 음의 힘은 말로써 재현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모든 시는 음악으로 지향한다는 가설이 옳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다만 문학과 음악은 발라드댄스를 예술의 기원으로 볼 때, 그 명상성에서 기원을 같이 한다. 운율의 ‘숨’의 반복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력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환기하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시는 운율을 띤 언어와 문자로 리듬, 가락, 음성 따위로 이루어진다. 음악도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 그 형성과 그 발전의 과정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역의 독립성까지는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유기적 연관성 또한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재율로 이미지의 반복이나 의미의 반복을 통해서 나타난다. 21세기는 영상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살면서 시인은 영상 언어로 아닌 문자 언어로 대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창작을 할 수 밖에는 없다. 문자 언어가 폐기처분될 수도 있다는 사실 인식을 극복하면서 시를 쓰게 된다. 이에 따라 서정시는 개인의 감정이나 사상에 조응하는 운율양식의 표출에 중요한 가치를 두며 언어의 형상, 그 자체의 음악적 효과를 중시한다. 이는 구태여 몰톤의 견해나 서정시의 원의까지 소급되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개념적 특성 면에서 의혹을 받아왔다, 언어의 형상화로는 감성이나 사상의 표징을 분명하게 할 수 없다는 절망과 지적 갈증을 서정시로는 채울 수 없다는 자괴감이 그것이다. 이런 발생적인 서정시의 개념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한 시인은 말라르메이다. 그를 이어 상징주의자, 초현실주의자로 불리는 발레리, 보들레르, 랭보, 베르렌느 등에 의해서 서정시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서정시 미학은 단적으로 ‘형상성’에 있다. 삶의 공소함, 무기력, 절대고독과 절망, 비인간화와 무신론 등 등의 인간 말세적 체험에서 일탈할 수 있는 초월적인 국면을 그들은 ‘형상성’에서 찾았다. 그것은 주지주의자들처럼 객관적 상관물의 논리에 의해 비유, 반개성을 표방하나 이들의 내면에는 자신의 본체를 구명하려는 탐색의지를 엿보이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의 형상성을 통해서 발현된다. 시인이 차용하고 있는 독자와의 소통 방식은 어떤 표현구조인가? 시인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그린다. 내면에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는 영혼을 언어인식을 통해 탐색한다. 탐색의 도구를 언어로 하지만, 근본적인 그림은 이미지를 통해서 하게 된다. 그래서 시의 표현구조를 은유, 상징, 아이러니, 알레고리라는 방법을 차용한다. 그 방법 중 많이 쓰는 표현구조는 은유와 상징인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독자와의 소통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전에 차용했던 방식이 아닌 직설화법으로 하고 있는 것 그 표현 구조가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이다. 그 이유는 은유나 상징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다. 이미 기존의 선배 시인들이 고차원적인 표현 구조를 실험해고 사용해왔기 때문에 그에 미치기도 어렵다는 절망감 때문이다. 현대의 젊은 시인들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Socratic Irony)방법 보다는 언어적 아이러니 방식을 차용한다. 의도적으로 무지함을 가장하여 상대방을 점차 모순으로 빠져들게 하여 독자 스스로 무지를 깨닫게 하는 표현구조. 자신을 비아냥거리고 자조하여 은폐함으로써 무거움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취한다. 구조적인 아이러니보다는 언어적 아이러니(verbal Irony)로 진의와는 반대되는 언어를 가장하면서 오히려 비난이나 부정적 의미를 신랄하게 나타내려고 언어 트릭을 사용하는 것이 그 특성이다. 또는 간헐적이기 하지만, 기지(機知wit)로 가벼운 풍자와 유머를 차용하기로 한다. 미국의 상당수 신비평가들은 아이러니를 문학적 가치를 판단하는 일반적인 기준척도로 사용했다. 앤드류 말벨은 아이러니를 어떤 한 가지 경험을 다루면서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을 의미하는 ‘내적인 균형’이라고 말하고, I. A. 리처즈는 아이러니를 ‘대립물의 평균’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아이러니 그 자체가 현실적인 시의 특징이 된다고도 말하고 있는 데 그의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다. 시는 엄격한 행(Line)과 연(Stanza)과 유기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이 구조는 산문과는 달리 생리적이다. 생명력을 갖는다. 현대시는 이러한 시 구조의 유기성을 포기한다. 시 구조의 신비와 생명성을 유기하고 나름의 실험을 꾀하기 때문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행과 연의 유기적 구조를 폐기할 때 시의 장르적 특성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간과하지 않을 때, 시는 서정시의 본래의 모습, 원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동어반복적으로 서정시의 핵은 비가(悲歌)라는 사실을 환기해왔다. 그것이 19세기의 ‘슬픈 노래’가 아니라 이 세대에 맞는 현대인들에 맞는 비가여야 함을 역설했다. 비가가 인간을 가장 강하게 전율케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감동 없는 시대에 감동을 되찾아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시대이든 어디에서든 감동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살아있게 하는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  난해시에 대해     난해시가 가진 장점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의미 때문에 평론가는 주로 난해시를 해석하곤 한다 뭘 어떻게 다루든 그건 시보다는 평론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해시는 그 이름처럼 난해하다 난해한 사람이 쓰는 시가 난해 시일까? 하여튼 명료함보다는 그는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은 길을 끌고 간다   처음엔 독자의 손을 잡고 가는 듯 하나 어느 순간 그는 사라져 버리고, 나(독자)는 덜렁 혼자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찾지 못할 길은 아니어서, 그는 한 동안 이상한 세계에서 이상한 감정에 빠져 있다가, 겨우 詩의 밖으로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힘들다. 복잡한 감정에 나는 도대체 뭘 보았단 말인가. 보긴 보았으나 나는 말 더듬으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한 토막을 끌어내어 설명한들, 그것은 토막에 대한 장황한 설명일 뿐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詩의 전제성에서 멀어져버린다.                                         ///전남용 \\\\\\\\\\\\\\\\\\\\\\\\\\\\\\\\\\\\\\\\\\   난해시 사랑                                                              복효근           난 난해시가 좋다   난해시는 쉬워서 좋다   처음만 읽어도 된다   처음은 건너뛰고 중간만 읽어도 한 구절만 읽어도   끝부분만 읽어도 된다   똑같이 난해하니까 느낌도 같으니까     난 난해시가 좋다   난해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람도 나하고 같이 느낄 테니까   인상적인 한 구절만 언급하면 된다   더구나 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니까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은 많이 배웠겠다 싶다   그런 시를 언급할 정도면, 더구나   좋다 말할 정도면 고급독자이겠다 싶다     난 난해시가 좋다   독자가 어떻게 이해하든 독자의 몫이라고  존중해주니까   내 느낌 내 생각 다 옳다잖아   나도 그 정도는 시는 쓰겠다 싶어 나를 턱없이   자신감에 넘치게 하는 시   나도 시인이 될 수 있겠다 하고 용기를 갖게 하는 시   개성 있어 보이잖아   남 눈치 안 보고 얼마나 자유로운지   적당히 상대를 무시해 보이는, 그래서 있어 보이는 시   단숨에 두보도 미당도 뛰어넘어 보이는 시     난 난해시가 난해시인이 좋다   죽었다 깨나도 나는 갖지 못할 보석을 걸친 여인처럼   나는 못 가진 것을, 못하는 것을 갖고 하니까   나도 난해시를 써보고 싶다   그들처럼 주목 받고 싶다   평론가들이, 매우 지적인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그들이 나는 부럽다   그런 것도 못하는 치들을 내려다보며   어깨에 당당히 힘을 모으며 살아가는 그들이 부럽다 ​             [출처] 복효근 - 난해시 사랑 |작성자 goforest   [출처] 난해시에 대해|작성자 시용  
1690    詩에서의 상징주의 댓글:  조회:4749  추천:0  2015-12-31
상징주의 [象徵主義, symbolisme]          "상징주의란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 시인 장 모레아스(1886)    Jean Nicolas Arthur Rimbaud (20 October 1854 – 10 November 1891)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중의 하나인 랭보는 거칠고 의미심장하며 곳곳에 숨겨놓은 상징으로 버무린 은율적이며 실험적인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19세기말 부터 20세기 초반까지 15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활동이 이루어졌던 시인 중심의 이 운동은 1890년에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구가 했습니다.   이성적이며 과학적 분석으로는 포착할수 없는 주관적인 정서를 시로 정착시킴을 목표로 했던 상징주의 詩. 랭보의 대표적 시 하나를 감상해보도록 하죠.               *  Voyelles  *     A noir, E blanc, I rouge, U vert, O bleu : voyelles,  Je dirai quelque jour vos naissances latentes :  A, noir corset velu des mouches clatantes  Qui bombinent autour des puanteurs cruelles,  Golfes d'ombre ; E, candeurs des vapeurs et des tentes,  Lances des glaciers fiers, rois blancs, frissons d'ombelles ;  I, pourpres, sang crach , rire des l vres belles  Dans la col re ou les ivresses p nitentes ;  U, cycles, vibrements divins des mers virides,  Paix des p tis sem s d'animaux, paix des rides  Que l'alchimie imprime aux grands fronts studieux ;  O, supr me Clairon plein des strideurs tranges,  Silences travers s des Mondes et des Anges ;  - O l'Om ga, rayon violet de Ses Yeux !     *  모음  * (Voyelles 해석)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 언젠가는 너희들의 보이지 않는 탄생을 말하리라 A, 지독한 악취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터질 듯한 파리들의 검은 코르셋...     어둠의 만; E, 기선과 천막의 순백, 창 모양의 당당한 빙하들; 하얀 왕들, 산형화들의 살랑거림. I, 자주조개들, 토한 피, 분노나 회개의 도취경 속에서 웃는 아름다운 입술   U, 순환주기들, 초록 바다의 신성한 물결침 동물들이 흩어져 있는 방목장의 평화, 연글술사의 커다란 학구적인 이마에 새겨진 주름살의 평화   O, 이상한 금속성 소리로 가득찬 최후의 나팔, 여러 세계들과 천사들이 가로지는 침묵, 오!! 오메가여, 그녀 눈의 보랏빛 테두리여           19세기 후반 낭만주의 시인들이 주관적 정서를 시어로 표현하는데 애쓰는 가운데 일군의 화가들 역시 당시 대세를 이루고 있던 인상주의 그림들의 과학적이고 분석적이며 명징한 그림들에 대한 반동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 하자면 인상주의의 실증적인 표현에 대한 반항과 저항이었다고도 할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관심은  형상화 할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 그리고 내면에 응축 되어있던 관념과 자아를 상징적이며 우의적인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게 하려 했던 겁니다.   즉 삶과 죽음 불안과 고통, 사랑과 성, 꿈과 환상등이 그들 상징주의 작가들의 주된 주제가 되었으며 주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실재적이지 않은 색채와 묘사적이지 않은 넓은 색면의 사용과 분방한 필법도  상징주의 화가들의 중요한 무기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Paul Gauguin (1848-1903)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1891년 비평가 A.오리에는 회화에 대해 처음 상징주의라는 말을 썼고 고갱 등을 상징파로 보았습니다. 상징주의 작품의 선구적인 대표작으로 꼽히는 고갱의 그림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철학적 실존적인 제목의 이작품은 이후의 많은 상징주의 작가들이 나아갈 길을 예시해 주고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여인들의 군상으로 보이는 이작품은 여인들을 통한 생명의 탄생과 기원 그리고 인간의 생노병사들을 파노라마와 같이 보여 주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작품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징주의자들이 표현 하려 했던 생과 사 불안과 고통, 사랑과 성 그리고 환상과 꿈등이 혼재 되어 있는 고갱의 이 그림을 정작 고갱 자신은 자신의 그림이 상징주의적인 것은 주제 때문이 아니며 화면의 형태와 색채의 음악적인 배치 때문이라고 하였던것은 주지해야 할 일이 분명 합니다.   즉 우리가  상징주의를 접하면서 주의해야할 부분은 작품의 주제에만 좁아 질수 있는 우리의 시선을 이들 작품들의 조형적 구성과 표현법에까지 확대해서 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일 겁니다.        오딜롱 르동 [Odilon Redon, 1840.4.20~1916.7.6] The Crying Spider, 1881.   내면세계를 여행하는 조용한 순례자 -  르동을 떠올릴때 마다 생각 나는 말입니다. 여러 종류의 미술서에서는 르동을 "보이지 않는것을 위한 보이는것의 논리"라는 길고 난해말로 설명 하긴 하지만..   그는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며 병약하고 고독하며 내성적인 소년으로 성장헀습니다. 그러한 그의 성격은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 50세가 될때까지 주로 단색 계열의 판화 작업을 하면서 독자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괴상하다고 할정도로 독특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 하였습니다.   당시 화려한 인상주의 작품이 판을 치던 무렵 이러한 괴기스럽다고 할정도로 독창적인 작품을 한다는것은 평론가들이 그에게 순교자의 길을 걸었다고 할정도로 외롭고 고단한 작업의 길이 였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수가 있을 겁니다.   일상적 현실의 외면과 환각적 시각의 추구는 그의 작업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상징적이며 이교도 적이고 환시적인 작품의 구성은 그를 상징주의 화가중 중요한 작가에 손 꼽히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작품 경향은 동시대의 작가군에게서도 찿아 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고 선구적인 것이어서 이후의 달리를 비롯한 쉬르리얼리즘 작가(초현실주의) 들에게도 분명히 영향을 주었다고 볼수 있을 겁니다.     The Cyclops, 1914,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The Netherlands   르동이 사망하기 2년전인 74세때 그려진 이 그림은 신화를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채색을 보면 인상주의 화가들의 채도보다 높은듯 하고 자유로운 붓질은 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보는듯 합니다.   하지만 르동 자신은 50세가 될때까지 흑백화만을 그렸습니다.  흑백의 화면만 50년간이나 그리던 작가가 채색을 할때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화창한 여름 오후 오랜 시간을 짙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다가 벗었을때 눈에 따갑게 물결치며 쏟아지는 가지각색의 색의 향연을 떠오르면 이해가 쉽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흑백화를 그릴때 컬러라는 중요한 표현 무기를 포기한 대신 르동은 형태에 비중을 둘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르동이 컬러라는 비장의 무기를 획득한 순간 그의 그림에서 형태성은 점점 무너지며 색채의 풍부한 감성을 그의 그림속에 녹여 내고 있습니다.   과연 이작가가 50세까지 무채색만 사용했었던 작가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그림은 50세 이후에 색채의 작렬이 빛을 발합니다. 색채와 함께 여전히 그의 그림에 녹아 들어있는 비현실적인 비유와 상징 또한 더욱 능숙해지고 깊어짐을 알수 잇습니다.          Gustav Klimt (July 14, 1862 – February 6, 1918)  A section of the Beethoven Frieze   클림트는 워낙 유명한 작가이고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볍게 터치만 하고 지나가겟습니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전시가 되었던(물론 해외 전시용 복제품 이었지만) 베토벤 프리즈 입니다. 그의 상징주의적 작품은 물뱀 시리즈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La notte, 1889-1890 (Kunstmuseum Berna) 페르디낭 호들러 [Ferdinand Hodler, 1853.3.14~1918.5.20]      호들러의 작품은 자연주의와 구성이 견고히 조합된 양상을 보입니다. 가로선의 직렬적인 병렬의 반복을 통한 그의 경직된듯한 구도법은 흡사 이집트 미술의 견고성을 닮아 있는듯합니다. '병렬주의'라는 용어로도 불리우는 이러한 기법은 우리가 예전에 공부했었던 비쟌틴시대의 그림과 유사한 점들을 발견할수도 있죠.   그가 이러한 이집트, 비쟌틴적인 견고하고 경직된 병렬주의식 작업을 하는 이유는 아카데믹한 관점에서 결코 세련되지 못한 그의 작업 방식이 대부분의 미술이 지니는 난해함에 혼란스러워 하는 대중들에게 전달 됨으로서 현대사회의 그릇된 가티관에의해 억압된 근본적인 인간성의 회복을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어렵게 보거나 복잡하게 이해 하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작품의 진실성을 차단할 뿐입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느끼는것.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마티스, 뭉크, 몬드리안등의 작품과 독일 표현주의, 소련의 온건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에서 그 영향력을 찿아 볼수 있습니다.       Ferdinand Hodler - Die Lebensmüden 1892   호들러는 스위스 출신의 반인상주의 화가이며 풍부한 독창성으로 많은 화가와 화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신을 '단순한 회화에 저항하는 사상가’로 부르며 기존의 인상주의를 거부하고. 철학적 사상을 담은 작품을 창조하려 애썼습니다.   소목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특별한 미술교육을 받은바 없지만 동시대의 작가 중에서 가장 독창성이 풍부하며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불리어 지기도 합니다.   특히 그의 풍경화는 뛰어난 색조감으로 인상주의의 영향력하에 있지 못했던 중부 유럽의 많은 작가들에게 색채 충격을 전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Lake Geneva as seen from Chexbres, 1905, oil on canvas            La mort du fossoyeur ("The death of the gravedigger") by Carlos Schwabe is a visual compendium of symbolist motifs. Death and angels, pristine snow, and the dramatic poses of the characters all express symbolist longings for transfiguration "anywhere, out of the world."    카를로스 슈바베Carlos Schwabe (1877 - 1927)   그의 작품중 하나인 죽음과 천사 (무덤 파는이의 죽음). 노인은 평생 남의 무덤을 파는 일을 하던 사람 이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그에게도 죽음의 천사가 다가왔고 매혹적인 죽음의 천사는 이제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결국 언젠가는 죽어 땅에 묻혀 마무리가 되고 그 누구도 피해갈수 없다는 상징을 담고 있는 슈바베의 그림입니다.   슈바베의 그림에는 요부들이 많이 등장 합니다. 하지만 평범치 않은 요부들(요부 자체가 평범치는 않겠지만) 즉 악마적이고 괴기 스러운 세기말적인 스타일의 퓨전 요부가 자주 등장 하는 겁니다.   또한 그의 장식성은 아르누보의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Fernand Khnopff's The Caress   벨기에 출신의 페르낭 크노프(1858-1921)는 한마디로 일탈과 갈등 그리고 긴장과 마력의 작가라고 할수 잇습니다. 그에게는 5살 연상의 친누이를 모델로 한 그림들이 많은데 그녀는 크노프의 누이이자 연인이었습니다. 근친상간의 비난받아 마땅한 이러한 일탈은 그에게 평생 신비주의로의 회피와 긴장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합니다.   위에 보이는 그의 작품 '애무' 는 스핑크스를 그린것 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크노프의 스핑크스는 원래 왕의 무덤을 지켜야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19세기형 스핑크스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남자를 유혹 하는듯한 스핑크스는 크노프의 창작이 아니라 당시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였던 죠세핀 파라당의 저서 '스핑크스의 땅'(1900)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파라당은 그의 저서에서 -예술의 시작은 괴물로 부터 시작된다(중략) 그괴물은 사람의 머리, 여인의 유방, 사자의 신체를 지녔다. 즉, 생각하고, 정감 있으며, 본능적인것이 예술의 본질이다- 즉 예술의 개념을 형태화 한것이 스핑크스이다- 라고 예술의 개념을 주장 하였고 사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당시의 여러명의 화가들이 이러한 소재를 작품으로 시도 하기도 했었는데 크노프의 '애무'도 그러한 작품증의 하나라고 할수 있습니다.   위의 슈바베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 요부성 스핑크스는 당시 19세기말의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 지니고 있던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의 도착의 한종류일수도 있을 겁니다.   현재의 관습에서 볼때 당연히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작가의 태도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시대의 예술에 대한 태도를 엿볼수 있는 좋은 예가 되기도 합니다.   예술은 괴물로 부터 시작되고-사람의 머리, 여인의 유방, 사자의 신체와 같은것-사고와 정감,그리고 본능이 그들의 예술이었던 거라는것.       Hugo Simberg's The Wounded Angel. Hugo Simberg (24 June 1873, Hamina - 12 July 1917, htri)   위고 심버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입니다. 부상당한 천사가 상당히 불만 많은듯한 표정의 소년들에 의해 들것에 의지하여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얼핏보면 재미있는 그림이기도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있다보면 소년의 표정 만큼이나 우울해 집니다. 천사는 없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천사나 신을 믿지 않는다는 화가의 주장이 그림 전체에서 베어 나오기 때문 입니다.   과연 이들이 불과 100여년전만 해도 성당과 많은 건축물의 벽들을 천사와 전지전능 하다고 믿었던 예수의 그림으로 도배 하고 찬양하던 그 유럽인들이 맞는지 의아해 질 정도 입니다. 만약 심버그가 중세시대에 이런 그림을 그렸다면 그는 분명히 화형감 이었을 겁니다. 아니면 펄펄 끓는 기름솥에 들어가서 튀김이 되었던지..(제가 써 넣고도 좀 혐오 스럽네요,,죄송..식사는 하셨나요?)   이러한 그림들이 나오는 계기중의 하나는 조금 미안하지만 독일의 대 철학자 니체를 꼽을수 있을 겁니다.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의 실존주의 철학은 19세기 말의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세기말적 사조의 한 부류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세기말사조 [世紀末思潮]는 프랑스에서부터 시작하여 1890년대의 유럽 각국에 퍼진 인간정신의 퇴폐적인 경향을 말합니다. 즉 당시의 회의주의, 유물주의, 염세주의, 찰나적 향락주의가 이러한 사조에 포함된다고 할수 있습니다.   현실세계를 환영으로 보고 진보, 사랑, 신앙등을 모두 허망한것이라고 규정하기도 하며 인간의 야수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염세적이며 무관심적인 면을 보이기도 하고 특히 상징주의자들의 경우 예술 활동에 자신을 몰입 하면서 현실세계를 외면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고의 흐름을 크게 세기말 사조라고 할수 있습니다.       Edvard Munch (12 December 1863 – 23 January 1944) Death of Marat I (1907)   뭉크는 여러명의 애인이 있었는데(절대 부럽지 않습니다)  1900년을 전후하여 툴라 라르센이라는 여성과 깊은 관계였습니다.  그녀는 부잣집 딸에다가 관능적인 '세기말적 여성' 즉 저주 받은 숙명의 여인이자 죄 깊은 여인의 전형이었다고 할수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오히려 그녀가 아깝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만..   1902년 결혼을 원하는 라르센과의 격렬한 말다툼끝에 뭉크는 자신의 왼손을 쏘았고 결국 그는 평생 손가락 하나를 쓰지 못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뭉크는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러한 그의 관념은 그의 그림속에 그대로 스며들어있는것을 많은 작품을 통해 확인 할수 있습니다.   위의 '마라의 죽음'도 그러한 연장성 상에서 볼수 있는 작품 입니다. 뭉크는 이작품을 그리는데 9년이나 걸렸다고 고백한바 있는데 평생을 성과 사랑을 주제로 추구한 뭉크의 최후의 도달점은 바로 사랑과 죽음 또는 여자의 죄와 죽음 이었다고 할수 잇습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뭉크가 성과 사랑 그리고 여자에 대한 생각을 읽어 내릴수가 잇습니다. 그림속의 남자는 살해 당한것이 아니라 격렬한 섹스후의 피로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아마도 피를 토하고 죽은것 같은데(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죽을수가 있는 것인지,,흠) 침대 시트의 선홍색 피보다 더 무서운것은 여인의 표정 입니다.   남자의 시체를 옆에 두고 마치 임무를 완성한듯한 로보트같은 자세로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만족한듯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여인. 그녀의 모델은 바로 툴라 라르센 이었습니다. 물론 죽은이는 뭉크 자신을 그려낸 것입니다.     Tulla larsen & Munch                                 Tulla larsen     Madonna. 1894-95. Oil on canvas. 36 x 28 in. Nasjonalgalleriet, Oslo.   뭉크에게 있어서 여자는 암살자이기도 하고 마리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마리아도 또한 성모가 될수 있고 요부가 될수도 있다는 혐오감을 나타내곤 했지만. 그의 세기말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며 환상적인 격렬한 표현법은 상징주의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1689    극단적 미래파 詩는 사기... 댓글:  조회:4723  추천:0  2015-12-31
  “충분히 쉬운 표현으로 더 깊은 메시지 전달 가능…극단적 미래파 詩는 사기”   오세영 시인 나(오세영 시인)같이 50여 년 시를 쓴 사람조차 이해하기 힘든 극단적 미래파 시는 ‘사기’다. 시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예컨대 마누라가 도망쳤다고 해서 무단히 행인 납치소동을 벌이는 것처럼 난해하다. 그냥 주목을 끌어 자기를 내보이려는 행동이다. ‘사슴이 오늘 과수원에 갔습니다’ 혹은 ‘사슴 한 마리가 학교에 갔습니다’, 이 경우 사슴과 과수원, 나와 학교는 각각 등가성을 가진 단어들로 나를 사슴으로, 학교를 과수원으로 환치시킨 것이다. 이 문장은 비록 단어들을 등가성을 지닌 다른 단어들로 바꾸어 놓긴 했으나 아직 언어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가령 ‘사슴, 하늘, 나무, 달린다’란 문장을 보자. 의미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등가성과 인접상이 배제된 언어들의 무분별한 공간적 나열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파 시는 마치 신을 배제한(혹은 타살한) 오늘의 물질문명이 결과적으로는 인간 그 자신조차 비인간화시키는 결과물로 보인다.  신사조에 사로잡혀 비록 난해시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깨버려서는 안 되는 금기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더 이상 언어의 본질을 훼손한 언어, 소통 불능의 난해한 언어를 지향해선 안 된다. 충분히 쉬운 표현으로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이춘호기자
1688    난해함 대신 일상 파고드는 시쓰기... 댓글:  조회:4270  추천:0  2015-12-31
내년 한국 문단에 새로운 피를 수혈할 2016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심사가 완료됐다. 올해 응모자는 총 1,637명.   예년(1,792명)에 비해 다소 줄어든 수치다. 부문별로는 시 703명, 소설 335명, 희곡 116명, 동화 186명, 동시 297명이 원고를 보내왔다. 시 부문에서는 소위 ‘미래파’ 시가 사라진 것이 특징으로 꼽혔다. 미래파 시는 2000년대 초반 몇몇 젊은 시인들이 선보인 길고 난해한 시에 붙여진 이름으로, 신춘문예에서도 한 동안 이런 시들이 유행처럼 돌았었다. 한 심사위원은 “일상에서 느낀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려는 시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반면 읽는 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시가 확실히 줄어 들었다”며 “미래파 시에 대한 피로도가 커지면서 시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의식적으로 피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등 사회참여적인 시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소설 부문에서는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한 개인의 좌절이 지배적 정서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 심사위원은 “전통적으로 정리해고, 정년퇴직 등 삶의 고달픔을 소재로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 많았는데, 올해는 비판까지 나가지 못하고 개인적 상실감에서 주저 앉아 버리는 경향이 컸다”며 “사회 분위기가 비관적이라 개인이 거기 갇혀 버린 듯한 느낌”이라고 평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노년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이 크게 늘어난 것도 눈에 띈다. 다른 심사위원은 “치매나 50대 이후의 성생활을 다룬 작품이 상당수였다”며 “젊고 발랄한 문체로 쓰인 것도 많아 앞으로 비슷한 작품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희곡 부문에서는 현 대학로 연극 흐름과 비슷하게 일상적 소재, 사소한 갈등에서 비롯된 다툼을 다룬 작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한 심사위원은 “사람에게 석고를 바르거나, 청년이 임신을 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 설정이 많았다”며 “연극 소재로서는 눈에 띄지만 그런 극단적 상황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인물간의 관계나 극적인 상황 전개로 풀어야 하는데 배우들의 대사만으로 풀어냈다는 점은 아쉽다”고 평가했다. 동화 부문 응모작에는 학업 스트레스를 다룬 작품이 많았다. 엄마, 선생님 등의 캐릭터가 상투적이고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게 아쉬운 점으로 꼽혔다. 한 심사위원은 “현실주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회고나 단순한 의인화로 어른 작가의 관념을 계몽하는 작품이 많이 보였다”며 “이는 동화작가로서 경계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작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고 작품 속에 녹여내려고 하는 태도는 비단 어린이들뿐 아니라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동시 부문은 신춘문예의 전형성에서 비껴난 작품이 많았으나 소재를 표현하는 방식에선 관습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심사위원은 “말을 아낄 줄 모르는 시가 많았고 한 사람이 제출한 시라도 작품 간 편차가 큰 경우가 많았다”며 “동시도 엄연한 시라는 점을 잊지 말고 언어를 갈고 닦는 연습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동시를 쓸 때는 아이에게 동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이가 돼서 동심을 담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도 더했다. 황수현기자 
1687    삶속에서 게으름 피우며 詩라는 배에 타보라... 댓글:  조회:4153  추천:0  2015-12-31
황현산 교수는 "게으름도 피우고 사보타주(태업)도 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잘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는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다른 세계를 생각해요. 좋은 시는 이 막막한 삶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해 절망적인 현실 세계와 거룩하고 완결된 어떤 세계를 연결해줍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서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문학평론가 황현산(70) 고려대 명예교수는 서울 동교동 CY시어터에서 열린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 발행) 북콘서트에서 “현실 세계를 다른 세계와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시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선두에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는 황 교수가 지난해 1월부터 올해 2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한 글 27편을 모은 책이다.   시에 관한 평론과 에세이 사이에 있는 이 글에서 황 교수는 이육사, 한용운, 서정주, 유치환, 김수영, 최승자, 보들레르 등의 시를 곱씹으며 현실을 들여다 본다.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시에 친근감을 느끼고 또 어떻게 시를 써먹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이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세상을 바꾸고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드는 데 시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함께 의논하기 위해 쓴 겁니다. 독자 여러분이 갖고 있는 소망을 덧붙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 교수는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차례 좋은 시의 역할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언어가 인간과 사물을 연결해주듯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쉬워 보이는 시도 그 안에 비밀을 감추고 있고 그 비밀 안에 또 비밀이 있다”며 “우리의 삶 속에도 감춰진 비밀이 있고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삶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각’이다. 황 교수는 “한국사람은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불행해진다”며 “일하느라 생각할 틈도 없고 눈 앞의 일만 바라보며 늘 경쟁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난리를 치며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알려면 게으름도 피우고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기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인은 세상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세상에 없는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현실의 언어로 이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의 폭력과 독재의 억압 아래서 시인들은 불가능을 꿈꾼 몽상가였다. 황 교수는 “시는 비루하고 막막한 삶을 견뎌내는 구체적 현실을 직시하면서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이야기한다”며 “비루한 현실 속에서 이상향을 보기 때문에 우리가 시에 감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우리말에서는 “시의 언어가 이상적인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머릿속에서는 한자 단어로 사고하고 입으로는 한글을 사용하며 학문은 영어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같은 괴리가 시적 언어가 자라는 토양”이라며 “세계인이 한국 시를 배우겠다고 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와 친숙해질 수 있는 방법은 뭘까. 황 교수가 제시한 방법은 간단하다. 시라는 사공이 안내하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배에 올라타면 그만이다. “시는 이 세계를 다른 세계로 연결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갖은 실험을 다 해왔습니다. 새로운 미디어를 통한 예술 장르가 새로 나타나고 있지만 시가 해보지 않은 실험이란 없습니다. 거기에 동참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든 다른 세계로 건너가겠다는 소망을 품으면 시가 친숙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고경석기자
1686    동시창작은 다양화되여야 한다 /// 창작은 모방인가? 댓글:  조회:4070  추천:0  2015-12-30
동시창작은 다양화되여야 한다 김만석   들어가는 말   동시는 생활 가운데서 받아 안은 남다른 느낌을 동심에 려과시켜 행과 련을 나누어 쓴 운문을 말한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아가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조선에서는 가사(노래말)앞에 문학이라는 규정어를 덧붙여 이라고 하면서 가사를 아동시가의 한 형태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가사는 동시의 한 형태라고 인정할수없다고 인정하는바이다.   둘째,문학적인 예술동요는 그 예술적 가치에 근거하여 동시에 망라시켜 연구하기로 한다.   셋째, 문학적인 예술동요에 곡을 붙이면 그것을 라고 일컬을수는 있지만 그 본질적인 속성은 문학의 한 형태라는 특징은 변함이 없게 된다 그러나 가사에서 곡을 떼면 그 가사는 문학적인 예술동요가 아니라 말그대로 가사로 될뿐이다 하기에 문학적인 예술동요와 가사는 차원이 다른 형태의 글임을 먼저 리해할 필요가 제기된다. 아동문학은 원래 대상성이 강한 문학이다 그런데 동시는 그 대상성이 더더욱 강한 문학의 한 형태로 된다.   대상에 따라 동시를 크게 나누면 유년동시,동년동시,소년동시로 나눌수가 있다 그것을 더 세분화하면 회화적 동시,화적인 동시,동화적인 상상동시(의인화동시),환상동시,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사색적인 철리동시,은유적인 상징동시 등 여러 가지로 나눌수가 있다 동시는 원래부터 이렇게 대양화된 문학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한국 동시단에서는 포스터모더니즘 표현기법을 동시창작에 받아들여 동시의 대상성을 도외시하고 난해동시경향으로 나간적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 조선족 동시단에서는 은유적인 상징동시만을 동시라고 주장하는 동시 단일화경향이 나타나 동시창작을 오도한적이 있었다.   한국 동시인들은 동시의 본질을 리해하고 동시를 아이들과 접근시키며 난해시 경향을 극복하고 동시다양화를 주장하면서 풍만한성과를 올리였다.   중국 조선족 동시인들도 동시창작의 단일화경향을 배격하고 동시의 대상성에 토대하여 동시다양화를 주장하면서 풍만한 성과를 올리고있다.   다양화된 동시형태   동시는 당양화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   1,회화적인 동시   회화적인 동시란 시적대상을 동심적인 시각에서 회화적인 화폭으로 대상화하면서 짙은 시적인 정서를 안받침해주는 동시를 말한다.   원숭이   한국 문삼석   원숭이는 날 때부터 할아버지래   주름살 오골조골 할아버지래   시인은 원숭이의 주름살 하나를 집중 조명하면서 란 시적발견을 하여 한 주름살을 확대조명하면서 회화적 그림을 그려 해학적인 정서를 유발하여냈다.   병아리   중국 김선파   반짝반짝 금모래 콕 찍어먹고 삐악삐악 병아리 샛노란 금병아리   반짝반짝 은모래 톡 찍어먹고 뾰옥뾰옥 병아리 새하얀 은병아리   시인은 노란 병아리와 하얀 병아리를 동심적인 시각에서 어여쁘게 대상화하면서 아이들 눈앞에 깜찍한 그림을 그려 주어 사랑의 정서를 유발하여 주고있다.   이런 회화적인 동시는 유년기 아이들과 동년기 아이들이 즐기는 형태의 동시들이다.   2,화적인 동시   화적인 동시란 동심에 맞는 재미나는 이야기를 고도로 간추려 정서적으로 표현한 동시를 말한다.   아침밥 한국 정두리   옆집에 사는 내 친구 준이   아침밥 무얼 먹었는지 난 알아   현관 문틈으로 새여 나오는 냄새   너 칼치구이 먹었지!   여기서 시인은 친구 준이가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가를 알아 맞히는 재미나는 이야기를 집약적으로 그리고 도약적으로 펼쳐 보였다.   눈물 한방울   중국 한석윤   으스름 달밤   엄마를 기다리던 아기가 하나   문설주에 기대여 살풋 잠들고   눈귀에 매달린 눈물 한방울   아기를 대신하여 엄마를 기다리고   시인은 아기가 엄마를 기다리다가 문설주에 기대여 잠든 이야기를 집약적으로 대상화하였다 그러면서 아기를 대신하여 엄마를 기다리는 눈물 한방울을 조명하면서 시적인 이미지를 창출하여냈다.   이런 화적인 동시를 쓸 때에는 고 한국 신현득선생은 이야기를 하였다.   하기에 화적인 동시를 쓸 때에는 이야기 전반 과정을 시시콜콜하게 피루면서 쓰면 절대 아니된다 그러면 동시가 지루하게 되고 깜직한 맛이 없어진다 하기에 이야기의 한순간을 집중 조명하면서 도약적인 서술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 그 자체에 동심적인 서정이 어리여 있어야 한다.   이런 화적인 동시는 유년기 아이들과 동년기 아이들이 제일 즐기는 동시형태들이다.   3,동화적인 상상동시(의인화동시)   동화적인 상상 동시란 모든 사물과 동식물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게 하는 물활론적인 사유방식에 토대하여 쓴 동시를 말한다.   해바라기와 채송화   한국 문삼석   담 우에서 해바라기가 올망졸망 놀고있는 채송화 보고 -아유 귀여워라 몇 살이나 먹었을가? 하며 노랗게 웃으니까   담 아래 채송화가 하늘 덮고 있는 해바라기 보고 -와! 크다 백살도 넘었나봐! 하고 눈을 소곳 떴어요.   여기서 시인은 해바라기와 채송화를 인격화하고 그들더러 오묘한 대화를 하게 하였다 그것도 해바라기가 채송화를 보고 업신여기며 하는 오만스러운 태도와 채송화가 해바라기를 보고 놀라하는 채송화의 천진한 태도를 비교적으로 돋보여주어 아이들더러 그 뜻을 더듬어 보도록 꾀하고 있다.   봉투와 풀 한국 문삼석   -난 순이 마음 다 안다 말해 볼가? 봉투가 입을 벌리고 으스댔어요   -안돼 그건 비밀이야 풀이 봉투 입을 꽁 막아버렸어요   여기서 시인은 봉투와 풀을 인격화하여 서로 대화하면서 편지봉투에 풀을 붙이는 현상을 엉뚱한 이야기로 만들어내여 아이들에게 무척 흥미를 돋구어주었다 이런 동화적인 상상 동시는 유년기와 동년기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시형태로 된다.   4,환상동시   환상동시란 아이들의 천성으로 되고있는 엉뚱한 환상을 노래한 동시를 말한다.   하늘   한국 손관세   옹달샘에 가라앉은 가을 하늘   쪽박으로 퍼마시면 쭉 입속으로 들어가는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시인은 현실 생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실을 환상세계에서 다루면서 쪽박으로 마시는 물을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라고 하여 아이들더러 놀랄 정도의 매혹을 자아내고 있다.   양떼와 흰구름   중국 최문섭   푸르른 들판에 흰구름 흐르네 쉼없이 쉼없이 앞으로 흐르네 푸르른 들판이 하늘인줄 알고 흰구름 내려와서 노니는게지   파아란 하늘에 양떼가 떠가네 쉼없이 쉼없이 둥둥 떠가네 파아란 하늘이 풀밭인줄 알고 양들이 풀먹으러 올라간게지   시인은 환상을 도입하여 현실 가운데서의 양떼와 환상 가운데서의 흰구름을 넘나들면서 이른바 혼돈세계에서 양떼의 시적이미지를 발견한 시적주인공의 희열을 노래하고있다.   5,사색적인 철리동시   사색적인 철리동시란 시적대상을 보고 사색을 굴리면서 아이들의 정도에 맞는 그 어떤 철리적인 시적발견을 노래한 동시를 말한다.   먼길   한국 윤석중   아기가 잠드는걸 보고 가자고 아빠는 머리 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걸 보고 가자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자고   시인은 아기와 아빠지간의 애틋한 사랑을 묘사하면서 그 묘사속에 깃들어있는 시적내용을 사색하게 한다 도대체 시인은 무엇을 노래하고 있을가? 도리머리하면서 생각하던 아이들은 아빠와 아기 사이의 따뜻한 정을 노래했구나 하는것을 알아 맞히게 된다.   황소   중국 김수복   암탉은 꼬꼬댁 알 낳았다고 제 자랑   멍멍개도 멍멍멍 집 지킨다고 제 자랑   수레 끄는 황소만은 말없이 뚜벅뚜벅   시인은 제 자랑에 이골이 난 수탉과 멍멍개를 풍자하고 하고 수레 끄는 부지런한 황소의 모습을 독자들 눈앞에 선히 그려놓았다 그러면서 어린 독자들더러 그 뜻을 음미하도록 하고있다 시인은 좋은 일 하면서도 자랑할줄 모르는 황소의 겸손한 성미를 예술적으로 칭찬하고있는것이다.   이런 동시는 동년기와 소년기 아이들의 구미에 맞는 동시형태로 된다.   6,감각적인 이미지동시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는 시적인 대상에 대하여 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적으로 대상화하면서 시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동시를 말한다   시내물   중국 김철호   솔밭을 지날 때면 파랗게 파랗게   진달래산 지날 때면 빨갛게 빨갛게   마을앞 지날 때면 하얗게 하얗게   여기서 시인은 시적대상 시내물을 노래하고있다 그런데 시내물을 직접 노래한것이 아니라 시내물에 비낀 소나무,진달래,마을에 초점을 맞추고 수채화같은 시각적형상을 그려내면서 조선족의 심미특징에 맞게 조선족이 살고있는 생활환경을 미화하여 주고있다.   가을   한국 윤미현   토옥 튕기고 싶은   주욱 그어보고싶은   와와 웨쳐보고싶은   푸웅덩 뛰여보고싶은   머언 먼 가을 하늘   여기서 시인은 맑고 푸른 가을 하늘,투명하고 무형체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감각적인 느낌을 발현한것이 이동시의 성공한 비결로 된다.   형체를 가진 유리알같은 하늘을 토옥 튕겨보고 싶고 종이 같은 하늘에 주욱 금을 그어보고 싶고 끝없는 공간을 향하여 와 소리 쳐보고 싶고 푸른 바다같은 하늘에 풍덩 뛰여들고 싶은 그런 느낌을 하나 하나 정리해 가면서 푸른 하늘의 이미지를 창출하여냈다.   산새 발자국   한국 방원조   얼마나 발이 시렸는지 눈밭을 콩콩 밟고갔구나   눈덮인 이 세상 어디서 얼음 박힌 그 작은 발을 녹이고 있는지   아픔이 아픔을 밟고 작디작은 발자국 산새 발자국     이 동시에서는 작은 산새에 대한 동정의 마음을 시적화폭으로 그려내면서 맨발로 눈밭을 밟고간 산새의 촉각적인 느낌을 최대한으로 확대조명하고 시적정서를 풍만하게 만들었다다.   감각적인 이미지동시는 시적대상에 대한 직서적인 서술이 아니라 형상적인 간추린 묘사를 통하여 감각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는것이 그 특징으로 된다 하기에 이런 동시는 시적언어에서 시적 뜻을 직접 감지하는것이 아니라 그런 느낌을 토대로 한 시적형상에서 시적인 뜻을 사색 끝에 감지하게 되는것이다.   이런 감각적인 이미지 동시는 동년기와 소년기아이들이 다가서는 동시형태로 된다.   7,은유적인 상징동시   은유적인 상징동시는 전통적인 동시의 직서적인 표현방식을 반역하고 원관념 a를 보조관념b 로 표현하는 표현기법으로 쓴 동시를 말한다.   이때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상사성과 류사성이 있어야만 그 은유가 성립된다는 점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런데 그런 상사성과 류사성은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에 의한것이 아니라 사물지간의 표상의 류사성에 의존한다는 점을 명기하여야 한다.   벚꽃   한국 선용   가지마다 날개를 파닥이는   나비 나비 흰나비   놀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는 별 별 하얀 별   여기서 시인은 이라는 원관념을 보조관념 와 로 병치은유를 시도하여 시적이미지를 창출하였다 흔히 이런 은유적인 상징동시를 쓸 때 원관념이 보조관념으로 번져가면서 깡깡 마른 수학적공식으로 대입되기에 시의 서정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이를테면 라고 은유만 시키고 말면 시의 서정성이 나타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시인은 로 썼다 그리고 유충록이이라고 썼는데 최**은 으로 썼다 다음 주소를 모르는 원인을 유충록은 로 비교적적 형상적으로 표현하였다면 최**은 고 간단히 설명하고 말았다 그 다음 편지를 자꾸 쓰는 까닭에 대하여서는 유충록은 고 하였고 최**은 라고 하였다 다른 점은 최**이 유충록의 쓴 의 제 4련을 빼 버린 것이다 유충록은 라고 하였다 작자는 여기에 방점을 찍고 자기의 주제를 심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최**은 에서는 유충록이 노린 점에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편지를 자꾸 쓰는 시적주인공의 내심세계에 방점 찍으면서 유충록의 제4련을 군더더기로 보았던 것이다 최**의 노린 주제에 의하면 이것은 필요가 없는 군더더기로 되는 것이다 이처럼 최**은 시적형상화에서 를 으로 , 을 으로,을 라고 하였다 (2) 과 2010년 4월에 연변 사이트에 누군가가 강순길과 최**의 동시를 비교하면서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아기의 말 강순길 아기는 울음으로 말을 한다 기저귀가 젖어도 -응애 응애 배가 고파도 -응애 응애 몸이 아파도 -응애 응애 아기의 말은 엄마가 알아듣지 (1999) 아기 최** 배고파도 으-앙 오줌 싸도 으-앙 아기 울음소리 듣고 엄마가 달려 온다 아기는 울음으로 말한다 ( 2003) 강순길이 1999년에 쓴 동시과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3년에 최**의 쓴 동시 또한 너무도 닮은 동시이다 두 사람 다 시적대상인 에서 아기들은 울음으로 말한다는 시적발견을 하고 있다 즉 똑 같은 시적 발견이라는 말이다 시적 형상화에서 보면 강순길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라고 하였고 최**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강순길은 아기들이 ,, 운다고 한것을 최**은 아기가 , 운다고 하였다 강순길은 하고 전반 시를 마무리 하였는데 최**은 고 마무리하였다 (3)과 한국 손길봉이 2008년 2월 24일 에 이라는 동시를 발표하였다 호박넝쿨 손길봉 호박넝굴 끝에는 눈이 있지요 울바자를 보고서 찾아 가지요 호박넝굴 끝에는 손이 있지요 울타리를 붙잡고 올라 가지요 그런데 최*이 2010년 겨울호잡지 에 이라는 동시를 발표하였다 박넝쿨 최* 박넝쿨엔 눈이 있어요 울바자를 보면 살금살금 찾아 가지요 박넝쿨엔 손이 있지요 울바자를 찾아서 정답게 감겨 올라요 상기 2수의 동시를 보면 시적대상이 서로 다른 것 같다 손길봉은 로 하고 최*은 로 하였다 그러나 형식상에서 시적대상은 서로 다르지만 시적발견은 둘 다 과 에 이 있고 이 있다고 하였다 즉 시적발견이 완전히 같다는 말이다 시적형상화에서 보면 손길봉이 이라고 한 것을 최*은 로 하였다 그리고 손길봉이 눈이 있는 호박넝굴이 울바자를 보고서 한 것을 최*은 박넝쿨이 라고 하였다 나중에 손길봉이 손이 있는 호박넝굴이 한 것을 최*은 손이 있는 박넝쿨이 라고 하였다 (4) 와 김철호는 2002년 자기의 동시집에 동시를 발표하였다 나비 김철호 가지 없어도 노랗게 핀다 뿌리없어도 하얗게 핀다 황**는 2010년 아동문학학회에서 편집출판한 에 을 발표하였다 초불 황** 가지 잎 없어도 빨갛게 피는 꽃 여기서 김철호는 나비를 꽃으로 은유하여 오묘한 시적형상을 창조하였다 즉 가지 없어도 노랗게 핀 꽃이 노란 나비요 뿌리 없어도 하얗게 핀 꽃이 하얀 나비라는 것이다 그런데 황**는 바로 김철호의 이런 작시법을 그대로 에 대입하여 이른바의 동시을 써서 발표하였다. 창작에는 그 어떤 공식이 따로 없다 창작에 공식이 있으면 그 누구나 그런 공식에 대입하여 동시를 쓸수가 있지 않을가? 문제에 대한 분석 상술한 고찰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종합하여 낼수가 있다 첫째, 인 경우이다 완전모방작품이란 시적 발견이 같고 시적형상화가 같은 작품을 말한다 지어 제목도 같을 수가 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조선족 아동문학문단에 아직 이런 완전모방작품이 나타나지 않은 그것이다 이런 완전모방은 너무나도 우둔한 짓이기에 아직까지 그 누구도 그런 엄두를 내지 못하고있는 것 같다 이런 완전모방작품은 완전히 남의 작품을 자기작품으로 발표하기 때문에 이란 작자는 이라고 방점 찍고 만천하에 공개하고 질타하여 마땅할줄로 알고 있다 둘째, 인 경우이다 준모방작품이란 시적발견이 같고 시적형상화에서 약간한 개조를 진행한 작품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남의 작품에서 단어 몇 개, 토 몇개를 바꾸어 놓고서는 눈감고 하는 식으로 자기의 작품이라고 넌지시 발표한 그런 작품을 말한다 우선 이런 작자들은 남의 시적발견을 자기가 발견한것처럼 들고 나온다 시적발견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모르는 이런 작자들은 남의 성과를 파렴치하게 슬쩍 후무려 가지고는 시뚝해서 으시대고 있다 다음 시적형상화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형상을 약간씩 뜯어 고치는 상투적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남의 작품을 고치기 때문에 원 작품보다 질적으로 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나 토 몇 개, 단어 몇 개를 고치고 어떻게 자기 작품이라고 떠버릴수 있단 말인가! 그 다음 인식론적 견지에서 보면 이런 작자들은 정보화시대라는것을 까맣게 잊고 무지막지한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여 남의 잘된 작품을 자기 홀로만 보았으리라고 오판하고 이런 우둔하고 비렬한 장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작자들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여 보면 발표욕에 미쳐 날뛰면서 자기를 얼리고 독자를 기편하려고 든다 결과 형식적으로는 남의 작품을 모방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남의 작품을 훔친 철두철미 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완전모방보다는 더 교활한 작법이라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셋째,경우이다 .우리는 동시를 학습하면서 수백수의 동시를 머리 속에 저장하고 있다 그런 저장된 동시들이 어떤 시적충동을 받는 경우 새롭게 조합되여 이른바 동시로 둔갑될 수가 있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서 탓할것이 못된다 하지만 그렇게 쓴 동시가 남이 이미 발표한것이라면 작가적 량심으로 자기를 자제하고 발표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넷째, 인 경우이다 이미 성숙된 작가들이 동일한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비슷하거나 서로 같은 작품을 창작할 수가 있다 일찍 프랑스의 모파상과 로시아의 체호브는 같은 시간에 애완견을 둘러싼 비슷한 소설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이런 경우 누가 누구를 모방하였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결론 상기 분석과 종합에 근거하면 우리 동시창작에서 나타난 엄중한 페단은 반드시 엄격히 검토하고 철저히 시정하여야 한다고 본다 우선 상기 거론된 관계 작가들은 자기의 작품이 우에 렬거한 어느 경우에 속하는가를 실사구시적으로 해명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창작실제를 존중하여야 할것이며 또한 가슴 아픈 분석과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된다고 본다 다음 우리 독자들은 무턱대고 상기 관계작가를 비방하거나 모욕할것이 아니라 그들의 해명을 리해하고 존중해 주면서 그들의 창작태도를 바로 잡는데 따뜻한 충고를 주어야 할 것이다 만약 창작이 모방이라고 하면 상기정황은 모두다 아무런 문제로 될 수가 없을것이다 그러나 창작은 절대 모방이 아니라 개성적이고 량심적인 작가들의 심미적인 새로운 위대한 창조이기 때문에 상기문제는 엄중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창작을 이라면서 그런 을 그 어떤 새로운 이요, 그 어떤 새로운 라고 하는 것은 창작을 모독하는 절대 용납할수가 없는 망설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창작은 절대 모방이 아니라는 것을 명기하고 피타는 노력을 다 하여 남이 창작하지 않은 그런 나만의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떨쳐나야 할 것이다.  
1685    윤동주는 우선 동시인 댓글:  조회:4489  추천:1  2015-12-30
윤동주는 우선 동시인                                      ///김선파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에서는 2015년 2월 28일 제2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을 가지였다.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여나서 1945년 2월 16일에 세상을 하직한 윤동주는 우리가 마땅히 기념해야 할 위대한 시인이다. 오늘 진행한 윤동주 문학상 시상은 윤동주를 기념하는 가장 훌륭하고 뜻깊은 기념활동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연구재료에 의하면 윤동주의 첫 작품은 1934년에 쓴 ,,이다. 그 가운데서 동시 는 윤동주의 첫 동시로 지목된다 하여 윤동주는 동시창작으로부터 작품활동을 하였다고 떳떳이 자랑차게 말할 수가 있다. 그의 동시 창작은 다음과 같은 4개 단계로 나누어 고찰할 수가 있다. 첫째단계 1935년 평양숭실하교 3학년에 편입되면서부터 7개월간 윤동주는 활발한 동시창작을 하게 된다 그 사이에 다음과 같은 동시를 창작하였다. ,,,,, 등 6수다. 둘째 단계는 1936년 숭실학교가 페교되자 룡정 광명중학교 4학년에 편입되여 본격적인 동시창작 고봉기에 들어섰다. ,,,,,,,,,,,,,,,,등 17수다. 셋째단계는 1937년부터다 이 시기에 윤동주는 성인시로 과도하는 시기였다. 이때 쓴 동시로는 ,,,,,,,,,,등 11수인데 이 시기 윤동주가 쓴 성인시는 15수나 된다 이것은 이때로부터 윤동주가 성인시 시인으로 과도하고있음을 설명한다. 넷째단계는 1940년으로 윤동주동시창작의 저조기로 된다. 이 시기 창작한 동시는 ,등 2수가 있다. 이렇게 윤동주는 짧디짧은 8년간의 창작생활 가운데서 도합 116수(편)의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동시가 35수로 21.5%를 차지한다. 윤동주는 1930년대 후반기 박영종과 김영일이 주도한 한반도 동시혁신운동시기에 동시창작을 시작한 탐구적인 동시인이다. 그는 1930년대 중국조선족아동문학형성시기에 자유동시 개척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프로경향의 작가들과도 다르고 순수문학작가들과는 달리 현실참여의식이 강한 동시인으로 자기의 반일의식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진정한 동시인이기도 하다. 하기에 윤동주는 우선 동시인이고 그 다음 성인시 시인인것이다. 모두어 보면 윤동주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대표자의 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전반 우리민족 아동문학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며 또한 중국조선족 성인문학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전반 우리민족 성인시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윤동주는 우선 동시인이고 그 다음 성인시 시인이였다. 그런데 윤동주문학상은 우선 성인시이고 다음은 동시로 되고있다. 하여 지금까지 윤동주문학상은 우선 성인문학상이고 그 다음 아동문학상으로 되고있다. 다시말하면 이른바 동시상이라면서 아동문학가를 대접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제1회로부터 제2회까지의 윤동주문학상은 사실상 성인문학에로 일변도 되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유감으로 되지 않을수가 없다. 윤동주는 우선 아동문학 동시인이 아니였던가! 이점을 감안하여 관계부분에서는 앞으로 윤동주 문학상 대상에 우리의 동시인들도 고려안에 넣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는바이다. 우리 중국조선족 아동문학문단에는 한석윤,김득만,강순길,김철호,김학송,김성룡,림금산, 지영호,박송천...등 이름난 동시인들이 아주 많다. 나는 그들이 윤동주문학상 대상을 수상할 그날을 기다린다...  
1684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 - 채택룡 댓글:  조회:4428  추천:0  2015-12-30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 -채택룡     지난 2004년 6월 1일 연길공원에서 《채택룡시비》 제막식이 있었다. 그날 제막식에서 중국조선족아동문학평론가 김만석선생은 《채택룡은 우리 아동문학에서 동요, 동시, 동화, 아동소설을 제일 처음 개척한 에누리없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창시자이며 자격이 당당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선구자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일찍 1920년대말부터 조선문단에 얼굴을 보이고 해방후와 건국후에는 로작가로 대두해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성장과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한 채택룡선생, 생전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레브 똘스또이의 명언을 즐겨 인용했던 그는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선구자의 한사람으로 되기에 정녕 손색이 없었다.   아동문학에 몸을 바쳐 70여성상   채택룡선생은 1913년 2월 6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의 한 빈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1929년 회령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1년 도꾜 일본대학 예술과에서 고학하다가 경제난으로 중퇴했다. 1938년 12월 중국 동북으로 건너와 연길현 명륜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5년 연변고중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때의 채택룡선생. 해방전에 동요동시를 위주로 100여편(수)의 아동문학작품을 발표했던 선생은 1932년 《3인동요집》을 출판하며 이름을 날렸다. 1945년 10월 혁명사업에 참가하여 1950년까지 《한민일보》, 《길림일보》, 《인민일보》, 《연변민보》, 《동북조선인민보》, 《연변일보》사에서 편집, 기자로 활약하면서 문학창작에 정진했다. 초창기(1951년) 《연변문예》( 전신) 편집으로, 연변고중(1952년) 교원으로 열심히 사업한 선생은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면서 꾸준히 작가적 기량을 다져나갔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창작위원회 주임, 《아리랑》( 전신)잡지 편집비서를 력임하면서도 시종 붓끝을 쉬지 않았다. 1945년부터 1956년사이 종합집 《어깨동무》, 동요동시집 《나팔꽃》을 출판했고 이 시기에 창작한 가사 《베짜기노래》(1947년 창작. 허세록 작곡 방초선 노래)는 당시 중국조선족이 수상한 국가급상으로는 최고상이자 또한 최초로 전국군중가요 2등상(1954년)을 수상했다. 동요 《병아리》, 《나팔꽃》, 《사탕비 와요》, 《개구리》 등은 작곡가들에 의해 노래로 창작되여 어린이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졌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 2, 3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도 활약하며 자치주건설에 지혜를 모았던 그는 1959년 억울하게도 우파모자를 쓰고 로동개조를 강요당했고 1964년에는 핍박에 의해 해외망명의 길에 올라야만 했다. 장장 19년이나 가족과 떨어져있던 선생은 1983년에야 정치명예를 회복받고 귀국했다. 이듬해(1984년) 동요동시집 《병아리》를 출간한데 이어 100여편(수)의 아동문학작품을 정력적으로 창작하며 새시대 중국조선족 어린이들의 생활을 생동하게 보여주던 선생은 애석하게도 1998년 10월 26일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28년 처녀작 발표 카프문학에 동조   선생은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더듬어보며》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1920년대말 30년대초에 나는 문학창작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서 산생 발전한 신경향파문학과 카프문학은 소위 문학을 지향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 먼바다 모진 풍랑속에서 헤매다가 발견한 등대마냥 진보적인 작가, 시인들이 추켜든 신경향파, 카프의 홰불을 따르던 애어린 문학애호가들속에 먼발치에서나마 나 자신도 고스란히 끼여든 셈이랄까…》 채택룡선생은 14세때인 1926년 6월부터 카프아동문학간행물인 《별나라》 잡지를 읽으면서 프로아동문학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1927년 동요 《어린동생》을 창작하여 1928년 신춘호 《별나라》에 발표한데 이어 그해 《별나라》에 또 동요 《개미》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신경향파문학과 카프문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선생은 1938년 북간도로 이주하면서 리호남, 김조규, 천청송, 현경준, 리학성(리욱) 등 작가, 시인들과 접촉, 진일보 문학탐구활동을 전개했다. 해방후에는 김례삼, 윤정석 등 아동문학작가들과 손잡고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화원을 꽃피우는데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선생이 중국조선족의 제1대 작가로, 조선족아동문학의 정초자로 존경받는 리유이기도 하다.   중국조선족아동문학 대부분 쟝르의 개척자   김만석선생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은 1930년대에야 자기의 작가군체가 형성되였고 작품토대가 마련되였으며 발표원지가 해결되였다. 작가들로는 최서해, 윤극영, 리호남, 천청송, 안수길, 그리고 채택룡, 김례삼, 함형수, 리규화, 렴호렬 등이였고 1936년 연길교구장(敎区长) 백화동이 룡정에서 《카톨릭소년지》를 출간함으로써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은 자기의 발표원지도 갖게 되였다. 이런 조건에 의해 형성된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초창기에 채택룡선생은 동요, 동시, 동화, 아동소설 쟝르 개척자로 나섰다.   당시 간도에 살고있던 우리글 아동문학작가들 중 제일 먼저 동요를 개척한 작가는 윤극영(1924)과 채택룡(1927년)선생이였다. 하지만 윤극영은 1947년에 조선으로 귀국했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중국조선족동요의 개척자는 채택룡선생이였다. 동시도 마찬가지였다. 1924년 최서해가 중국 간도에서 쓴 《시골소년이 부른 노래》가 첫작품으로 되지만 그는 그해 12월 서울로 들어갔다. 뒤를 이어 나온 동시가 바로 채택룡선생이 쓴 《사랑하는 누나여!》(1932년)라는 동시였다. 동화를 일찍 쓴 작가는 채택룡, 리호남 두분이였으나 리호남이 1938년에 동화 《딱소리》를 발표했다면 채택룡선생은 그보다 6년전인 1932년에 동화 《딱따구리》를 발표했었다. 아동소설을 쓴 작가들로는 채택룡, 리규화, 안수길, 렴호렬이였는데 리규화의 《가짜증서》와 안수길이 쓴 아동소설 《떡보》는 1940년대에 씌여졌고 렴호렬이 쓴 아동소설 《아름다운 미소》는 1940년 5월 26일까지 만선일보에 련재되였다. 반면에 채택룡선생이 《소년세계》에 발표한 아동소설 《삶의 빛》은 1932년부터 1934년 사이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아동소설 역시 채택룡선생이 개척한 것으로 볼수 있다고 김만석선생은 말한다.   가족과 생리별 장장 19년간 해외 망명   채택룡선생에게 있어서 해외 망명생활은 그의 인생과 가족에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이기도 했다.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쓰고(1959년) 모든 정치권리까지 박탈당하며(1962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로부터 권고퇴직까지 당한(1963년) 선생은 부득불 해외 망명의 길에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1964년). 채택룡선생의 아들 채영춘씨는 《아버님의 귀환》이란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점차 셈이 들면서 나는 아버님의 해외망명은 침묵을 위한 막부득이한 선택이였고 끈질기게 참고 견디기 위한 존엄의 표현이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현실은 그 어떤 설전(舌战)으로 해명할 여건이 아니라 인내로써 극복해야 할 무거운 인생의 시련임을 깊이 감수하면서 내린 아버님의 선택이였음을 나는 뒤늦게 느끼게 된것이다. 아버님께서 이 같은 광란의 세월을 라는 신분으로 버텨낼수 있었겠는지가 의문이고 그러면 우리 이 가정은 어떤 참상을 당할지도 모를 끔찍한 일이 아닐수 없다… 》 한창 정열에 끓어넘칠 40대 중반, 창작의 권리도 생활의 권리도 모두 박탈당한 선생이 선택한 길은 망명이였다. 정치적 핍박으로 1964년 합법적 수속을 밟아 조선으로 출국했던 선생은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가족과 생리별해야만 했다.   《카프》시기의 작가, 중국조선족 제1대 작가로서의 신분과 돈독한 인맥관계는 이국의 작가동맹, 신문사와 같은 문화기관에 들어갈수 있는 기회가 여러차례 주어졌지만 그때마다 단연히 사절했다. 신상을 걱정해 주변에서 관심어린 뜻도 보내왔지만 《홀아비》의 적막한 생을 끄덕없이 영위해나갔다. 그러던 1983년 선생은 드디여 정치명예를 회복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자식들과 지인들의 노력으로 중조 두나라 출입국관계부문의 허가절차를 밟아 드디여 정식으로 귀국의 길에 올랐다. 장장 19년만에 이루어진 중국조선족아동문학 선구자의 귀환이였다!   연길공원 동시동네에 세운 채택룡시비.   참고도서 및 자료:   1)채택룡문집-연변인민출판사 2)김만석-《채택룡선생의 아동문학활동과 그 문학사적의의에 대하여[1999년 《문학과 예술》 제2기])》 3)채영춘-《아버지의 귀환》[연변문학 2011년 제8기]   "길림신문" ==================================================================================== 동요 동시인 채택룡선생의 예술적공로  /// 김만석   2015년 12월 21일 08시 22분   채택룡선생의 전반 아동문학창작을 투시하여 보면 그래도 동요동시인이라고 자리매김하는 편이 더 과학적일것 같다. 채택룡선생은 1913년 2월 6일에 태여나서 1998년 10월 26일까지 85년간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만 71년간 창작활동을 하신 우리조선족의 자랑찬 아동문학작가이다. 채택룡선생은 생전에 필자와 많은 접촉이 있었다 필자는 북대신촌에서 산적이 있었댔는데 그때 채택룡선생은 농약공장 앞에서 사시였다. 필자는 일요일이면 채택룡선생을 찾아가서 우리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이 걸어온 력사를 담론하고 나중에 어설프지만 아동문학사를 출판하여냈다. 그리고 채택룡선생의 창작활동을 정리하면서 채택룡선생의 분실한 원고들을 어떻게 복원할수없겠는가 토론도 하였다. 그리하여 동화 를 살려서 로 발표하였다 아동소설 은 필자한테 경개를 소개하여 주어 필자는 그것을 정리하여 필자의 에 인용하였다 하지만 채택룡선생은 그 보귀한 소설을 끝내는 복원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채택룡선생에 대하여 필자는 일찍 론문 와 에서 라고 평가한적이 있다 이런 평가는 과학적인 평가이며 또한 마땅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는 1927년에 처녀작 동요 을 써서 그누구보다 먼저 1928년신춘호에 발표하였고 1932년동시 를 그누구보다 먼저 동시를 발표하였으며 1932년 동화를 그누구보다 먼저 동화를 발표하였고 1932년부터 1935년사이에 아동소설을 그누구보다 먼저 아동소설을 발표한것을 고증하고 내린 결론이였다. 오늘 필자는 주로 채택룡선생의 동요창작에서의 숨은 예술적 공로를 따져 보면서 채택룡선생에 대한 평가를 심화하려고 한다. 첫째,우리 조선말에서는 2음절 3음절의 규칙적인 반복에 의하여 운률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주로는 3.3조 ,4.4조.7.5조를 기본으로 하는 정형률이 있게 되었다. 그후 수많은 시인들의 창조적인 실천을 통하여 여러 가지 정형률을 창조하여냈다. 일찍 1920년대 이른바 7.5조라는 정형률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일본의 정형률을 본딴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때 한반도에서는 7.5조 운률조성으로 동요창작에서 황금시기를 맞이하였다. 그 실례로 한정동의 와 리원수의 등이 있다 과 같은것이다. 그뒤를 이어 1930년대 조선의 박세영이 2음절과 3음절을 조립하여 이른바 6.6조 정형률을 개척하였다. 그 례로는 동요 이다 ,과 같은것이다. 1950년대 김례삼은 3음절과 4음절을 조합하여 이른바 7.7조 정형률을 창조하였다 그 실례로 인데 같은것이였다. 1927년 처녀작 을 창작한 우리의 채택룡선생은 1950년대 초기에 2음절과 3음절을 오묘하게 조합하여 이른바 우리 민족문단에서 처음으로 되는 4.5조 정형률을 창조하였다 그 례가 바로 이다. 삐악삐악 갓난병아리 아장아장 걸음익히나 요리조리 조약돌 넘어 깡충깡충 재주 피우나 이 동요는 명동요로 우리민족 동요에서 특이한 형식인 4.5조로 씌여졌다. 4.5조 정형률은 우리말의 아름다운 본딴말 가운데서 2음절로 된 본딴말을 두 번 반복하여 4음절군을 만들고 그다음 2음절과 3음절을 조합하여 5음절군을 만들어 통합한 형식이다. 이런 4.5조 정형률은 앞에 력동적인 본딴말로 도약적인 감을 자아내고 뒤에 예술적인 설명을 가하여 아이들의 리해를 도와주어 깜찍하면서도 률동감을 안겨준다. 이것은 채택룡선생이 창조한 정형률인바 그것은 채택룡선생에게 그 특허권이 있게 된다. 력사적으로 보면 1950년대 김례삼의 ,채택룡의 ,리행복의 ,조룡남의 과 같은 황금동요의 출현, 1980년대 최문섭선생이 동시창작에서 주장,1990년대 한석윤이 정형동시에서 자유동시로 이행한것.2000년대 김철호가 동심의 예술적 이미지화 등과 같은 시대적이고 돌파적인 성과작들의 출현은 우리의 동요동시창작을 도약적인 발전을 가져 오게 하였다. 1950년대 채택룡선생의 4.5조 정형률은 우리 민족 동요동시창작에서 새로운 개척이고 창조로 아동문학발전에서 획기적인 공로를 세운것으로 취급되여야 한다. 사실 우리 문학의 흐름 가운데서 이런 한가지 공헌을 한다는것이 얼마나 어려웁고 또 그런 공로를 세우는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는 력사가 평가하게 된다. 채택룡선생은 우리 민족 동요동시 운률조성에서 4.5조라는 특정된 정형률을 창조한 동시인으로 영원히 기록될것이다. 둘째,동요창작에서 상징동요를 개발한것은 채택룡선생의 공로라고 본다. 1920년대 말에 순수문학에서 주장하던 방영종의 자연송가동요, 현실의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한 방정환의 애상주의 동요, 계급의식을 직접 고취하던 박세영의 계급주의동요 등 3개 류파의 동요들이 류행되였다 이런 동요들은 작자의 리념이 기본상 표출화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이럴때 1928년 그런 동요와 질적으로 다른 동요가 나타났는바 그것이 바로 채택룡의 동요 였다. 장다리밭 꿀돼지 놀고먹는 놈 개미집에 뛰여 들어 쌀을 뺏다가 모여든 개미들게 물어뜯기여 뚱뚱배가 터지여 죽어버렸네 이 동요는 프로동요에 속하지만 상징적수법으로 썼다 그것은 당시 일본놈들의 삼엄한 검열제도가 있었기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런 검열에 통과하자는 그런 의도에서 출발한것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것은 예술작품인 동요에 어떻게 상징성을 부여할것인가에 대한 채택룡선생의 예술적 추구에서 비롯된것이라고 하여야 하겠다. 이런 상징동요가 일제 김열에 걸리지 않은 원인이 바로 그 예술적인 상징수법에 있었다 채택룡선생은 지주를 꿀돼지로 비겨 가면서 그자들의 만행을 폭로하고 백성들의 뭉친힘에 의하여 그자들이 망하고 마는 통쾌한 결말을 예술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을 투쟁에로 불러 일으키는 전투적인 효과를 보았다 이 동요가 1920년대에 창작되였다는 그 시대적 배경이 이 동요의 가치를 한결 값지게 하고있다 셋째,채택룡선생은 주로 동요를 쓰면서 동요를 어떻게 혁신하여 볼것인가에 대하여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정형동시도 쓰면서도 동시창작을 혁신히여 보려고 한것도 그의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엿보인다. 그리하여 채택룡선생은 7.5조 운률조성을 기본으로 하면서 동요와 정형동시를 창작할 때 7.5조 2행 1련,7.5조 3행 1련 ...지어는7.5조 8행 1련.7.5조 10행 1련,7.5조 12행 1련동요 동시를 써보았다 이것은 동요동시창작을 혁신하여 보려는 그의 노력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된다. 그러나 채택룡선생은 현대동시표현수법과 기교를 터득하지 못하고 일생동안 갖은 실험과 피타는 노력을 하다가 돌아가시였다 그러나 채택룡선생께서 우리 동요의 페단을 인식하고 자기동요에 대하여 불만족을 느끼고 어떻게하나 혁신하여 보려한 그 애타는 심정을 우리후대들은 오늘 충분히 리해하여야 하겠다. 우리의 동요동시는 1980년대까지 7.5조 4행1련의 정형동시가 판을 치면서 내려왔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석윤이 7.5조의 각을 뜯다가 점차 자유동시로 전이하여 우리동시는 자유동시 시대로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말로부터 김현순 강효삼 림금산 김학송 김철호 등이 현대동시표현기법을 받아들여 우리동시는 질적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1980년대까지 우리동시는 작자의 리념이 로골적으로 표출화되여 작품에서 작자의 주장을 두눈으로 뚜렷이 볼수가 있었다. 하여 작자의 정치적리념의 표출을 동시의 사회적 효과로 리해하였던것이다. 동시는 작자의 리념의 적라라한 표출을 용허하지않는다 작자의 리념은 우리의 두눈으로 볼수 없어야 한다. 동시는 아름다운 시적 형상속에 무르녹아 있는 시적이미지는 눈으로는 볼수있는것이 아니라 아리숭한 상상속에 꽃피게 하여야 한다 하여 작자의 리념은 사색과 음미속에서 저마끔 터득할수있게 하여야 만 한다. 동시의 서정성은 감탄사의 련발로 실현되여서는 아니된다 동시의 서정성은 시적이미지가 발산하는 자연스러운 정감의 분출로 되어야 한다. 2000년대 우리의 동시는 선배작가들의 창작경험과 창작교훈을 받아들이며 지금 바야흐로 변화 발전하는 단계에 있다. 우리는 채택룡선생을 기념하면서 일생동안 아이들을 사랑하고 일생동안 아동문학창작을 견지하는 그런 분투정신을 따라배워야 한다. 체호브의 단편소설에서 주인공 완까는 고 하였다 우리는 살아있는 순간까지 다시 말하면 죽는 그날까지 아동문학창작을 견지하여야 한다. 우리는 채택룡선생을 기념하면서 작가로서 자기에 대한 요구를 높이 제기하고 자기 창작에서 부족점을 느끼고 자기 창작에 불만을 품고 자기 창작을 부단히 혁신하려는 그런 혁신정신을 따라배워야 한다 그것은 오직 혁신만이 성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그 많은 작품을 창작하시고도 상장 한번 타보지 못한 채택룡선생에게 우리는 몇 년전에 조선민족아동문학작가들의 이름으로 , 우리조선민족 아이들의 이름으로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 중국조선족 전체의 이름으로 채택룡선생에게 시비를 공원동시동네에 높이 경립하여 주었다. 그 병아리는 영원히 삐약삐약 노래할것이고 그 병아리는 영원히 깡충깡충 춤출것이다. 채택룡선생은 저 세상에서 지금도 그런 병아리를 바라보시며 습관대로 허허허 즐거이 웃으실것이다. 2015.12.19. ========================================================== 채택룡선생의 처녀작 2015년 12월 28일 11시 17분   채택룡선생은 1927년에 처녀작 동요 을 창작하여 1928년 신춘호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그 원문을 모르고있다.   채택룡선생의 생전에 필자는 선생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문자로 써줄것을 부탁드리였다. 채택룡 선생은 친필로 그것도 정자로 또박또박 나한테 a4 용지로 11페지나 써주시였다 최근에 필자는 그 자료를 찾아 다시 보면서 선생의 처녀작 의 내용에 대하여 초보적으로 알수있게 되었다.   채택룡선생은 자기의 친필재료 제 6페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동요   1928년 월간잡지 에는 나의 처녀작 이 게재발표되였다. 당시 나로서는 자기 이름 석자가 활자화되여 새상에 알려진데 대하여 무한한 긍지와 더 없는 자랑으로 여겼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기도 하였다.   동요 은 당시 땅마지기나 소작을 주고 농민들의 피땀을 여지없이 빨아먹고 배를 불리는 지주놈에 대하여 증오감을 그린것이 그 주요 주제사상이다.   땅은 매우 중요하며 땅을 다루는 농민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것이다. 이에 소작인들은 땅을 떼울가 두려워 심지어는 지주집에서 온통 빨래감까지 갖다가 빨아주고 그를 말리워 두 어깨가 물러나도록 다듬이질 해준다. 이런 가지가지의 어머니의 고통, 이 곤경을 다듬이돌 옆에서 쏘아보던 어린 동생은 대뜸 어머니의 손에서 다듬이질 방망이를 빠앗아 들었다. 마치도 그 방망이로 지주놈의 대갈통이라도 내리 까듯 힘껏 내리쳤다. 그런데 소리와 함께 그 다듬이 방망이가 다듬이돌에 맞아 튕겨올라 어린동생의 이마를 때렸다. 이에 방망이에 맞은 아픔보다도 격분에 더는 참을수 없어 어린동생은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분이 머리끝까지 치민 어린동생은 다듬이돌 우에서 어머니의 책망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온통 옷견지들을 냉큼 방바닥에 끌어내려놓고 맨발로 마구 짓밟아 놓는것이 그 내용의 전부인것이다.    동요 의 내용은 보는바와 같이 서사적 이야기로 되어있다. 지주네 빨래를 하여 다듬이질 하는 어머니,그런 고생을 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방망이를 뺏는 어린동생, 그리고 방망이로 다듬이돌을 내리치다가 자기가 되려 방망이에 얻어맞는 어린동생, 지주네 빨래를 팽개치고 마구 짓밟는 어린동생...이런 서사적내용을 동요로 썼다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썼을가 궁금하기만 하다,   그런 분노의 정서를 어떻게 썼을가? 정형률로 썼을가? 아니면 자유률로 썼을가? 력사적으로 고찰하여 보면 아마 정형률로 쓴것 같다. 그것은 작품의 장르를 동요로 빩혀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요 내용을 보면 화적동요형식(이야기식동요)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정형률로 어떻게 화적동요( 이야기식동요)를 썼을가?   추측은 언제나 과학연구에서 금물이다. 우리는 력사를 존중하여야 한다. 작자 본신이 복원 못한 그런 작품을 우리가 함부로 대하여서는 절대 아니된다.   이 동요는 채택룡선생이 14살 때 쓴것이다. 우리는 이 동요의 내용에서 채택룡선생이 나어린 14살 때의 계급적 의식수준을 능히 가늠해 볼수가 있다. 그것도 시적주인공을 어린애로 삼은 작자의 창작의도가 너무나도 돋보인다.   어른도 아닌 아이들까지 지주들의 착취에 분노를 느끼게 한 작자의 착안점이 기발하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마저 계급적으로 각성한 그런 시대에 대한 파악은 창작 초기로부터 프로문학경향을 지향하였다는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채택룡선생이 어떤 형식에 그런 값진 내용을 담았는가는 아직 알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그 원문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택룡선생이 필자에게 남긴 그 친필재료에 의하여 우리가 그 동요의 내용을 오늘 처음 알게 된것은 한낱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 동요는 채택룡선생의 처녀작이자 우리 중국조선족아동문학에서의 첫 동요로 되며 더 나아가서 우리 조선족아동문학의 첫 작품으로 되는 그런 력사적 의의를 가지는 작품이다. 하기에 채택룡선생의 처녀작 동요 은 반드시 찾아내야 할 과제로 우리 앞에 제기되고있다.   앞으로 관계나라와 문학적인 련계를 강화하여 잡지를 구하여 가지고 우리의 채택룡선생의 처녀작 을 원문 그대로를 찾아내야만 한다.   이 과업은 오로지 우리 아동문학후계자들에게 의탁할수 밖에 없는 력사적 과업으로 남게 되었다.   /// 김만석 (아동문학가)              2015.12.28.
《단군문학상》민족문학 부흥의 청신호인가   편집/기자: [ 안상근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5-23 15:15:46 ]  《단군문학상》설립 가동식에서 남긴 문인, 지성인들의 소감 2015년 5월 23일 오전, 연길에서 소집된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가동식에 따르면 《단군문학상》은 중국소수민족문학사업을 번영발전시키고 중국 각 민족과의 문학교류를 강화하고 조선족문학의 발전과 창작을 추동하기 위해 설립된 중국조선족문단의 최고 문학상이다. 이날 회의에 참가한 허다한 문인들과 지성인들은《단군문학상》의 설립에 대해 《중국조선족 문학사상 일대 경사이고 조선족 민족문학발전과 부흥에 대한 청신호》라면서《단군문학상》이 민족문학발전에 적극적인 추진작용과 리정비적인 역할을 놀게 될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소설가 림원춘 소설가 림원춘선생은 《조선족작가들한테 영광과 자랑으로 되는 을 마련해준 신봉철회장과 단군문학상관계자들한테 보통작가의 이름으로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연변작가협회는 건국후 가장 일찍 작가협회를 세우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지나오면서 수백명의 작가들을 키워냈다》고 지적, 《전국 40여개 작가협회들에 자기의 기관지가 다 있지만 연변작가협회의 기관지라고 하는 은 문화개혁과정에서 인사권, 경제권, 편집권이 없는 유명무실한 기관지로 되였다》면서《지도일군들과 보도매체 그리고 량심있는 작가, 지성인들이 함께 힘을 모아 작가협회 기관지를 되찾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변대학 교수 평론가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이며 평론가인 김호웅선생은《은 조선민족의 최고 조상인 단군할아버지를 담았고 아울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뜻의 리념도 담고있어 문학상 이름자체가 참 멋지다》고 말했다. 김호웅은《단군문학상》이 최고 15만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상금액수를 내걸고있어 《상금이 톡톡하다》면서 문인들도 《이슬먹고 사는 매미》나 《쪼들린 라면생활을 하는 구차한 이미지》가 돼서는 안될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정시 한수 써도 랭면한그릇 먹을 돈이 안되고 소설 한편 써도 몇사람이 술 한잔 변변히 나누기도 어려운 우리 문학의 현실에 소수민족 문학발전을 위한 국가적인 지원도 주장하고 호소한바있다》고 말했다. 김호웅은《은 우리 민족의 유지인사들이 많은 기업들을 동원해 만들어낸 상으로서 우리는 비로서 우리 민족의 힘으로 큰 상을 마련했다》면서 《경제적으로 발달한 한국의 국가적인 여러가지 상도상금과 비슷한 액수임을 비교할때 우리가 내건의 15만원 상금은 우리에게 바람직한 문학상이지 않겠는가》고 격찬했다. 그는 《단군문학상》의 시상폭이 넓은데 대한 긍정도 했다.《단군문학상》이 소설, 시, 수필, 보고문학, 아동문학, 신인상은 물론 항상《개밥에 도토리신세》격인 번역과 평론부문상까지 외면하지 않고 설치해 문학령역에 종사하는 그 누구나 모두 공평하고 공정한 수상기회가 주어질것 같다고 말했다. 김호웅은 《 을 계기로 우리 문학이 전방위적으로 활짝 날개를 펴고 애국주의주제의 좋은 작품들은 물론 우리 민족의 찬란한 력사와 멋진 현실을 구가한 세상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멋진 작품들이 대거 쏟아져나올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기대했다. 소설가 최홍일 소설가 최홍일은 《정부적차원에서 내놓은 상들은 많은걸로 알고있지만 민간차원에서 이처럼 큰 상을 내온것은 처음》이라면서 《특히 은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해외 교포사회에서도 영향력이 클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단군문학상》설립에 로고를 아끼지 않은 길림성조서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신봉철회장과의 개인적인 교분을 언급하면서 신봉철회장이 젊은 시절에도 독서를 즐기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였는데 그의 이러한 문학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필연적으로《단군문학상》이라는 우리 민족 문단의 최고상을 설립하게 되였을것이라고 말했다. 최홍일은 《단군문학상》은 문인들에게는 하나의 채찍질로 될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현재 중국조선족문학의 현주소는 문인수와 문학작품은 많지만 문학수준이 높지 못하고 국내 주류문학에도 진출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한국 등 국외 문단의 승인도 받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라고 랭정히 돌아보았다. 그는《단군문학상》을 계기로 정품창작을 위한 문학의 불씨를 다시 지피겠다고 다졌다. 료녕신문사 사장 최호 료녕신문사 사장 최호는 《단군문학상》은 문학상 이름자체부터 우리 민족의 시조, 토템, 력사, 문화, 중국조선족의 정체성 등 많은 부분들을 련상시키고있다면서 《단군문학상》은 문학상 설립의 의미가 크고 깊기때문에 문학상이 1회에 그치지 않고 《단군》이라는 이름처럼 영원히 길히 빛나길 기원했다. 그는 또 많은 작가들은 단지 수상보다는 사명감으로 글을 쓰는데 《단군문학상》을 계기로 더욱 많은 작가들이 신들메를 조이고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창작했으면 좋겠다고 기원했다.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은 《중국조선족문학이 어느때부터인가 불가항력적인 객관조건의 영향으로 쇠퇴일로에 들어서면서 존립위기를 맞았고 잇따라 문학위상이 사양되고 민족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 《이런 적기에 고고성을 울린은 그 출범부터 세인의 주목을 끌고있으며 이는 우리의 민족문학과 제반 분야가 새로운 부흥을 맞고있다는 청신호》라고 갈파했다. 최국철은 《새로운 부흥을 맞고있는 현시점에서 우리 민족문학이 단순한 민족문학의 한계를 벗어나 우리 민족 우수한 전통과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및 지역특성을 홍보하는 특수한 사명을 지녀야 한다》고 부언했다. /사진 김태국기자 조선족문단 최고상 “단군문학상” 탄생 “단군문학상” 제막식 및 문학사업좌담회 개최 2015-5-25    2015년 5월 23일, 중국조선족문단의 최고상으로 되는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의 제막식 및 문학사업좌담회가 연길 백산호텔에서 있었다.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작가학회와 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리사회가 손잡고 주최하고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잡지사와 “단군문학상”비공모기금회 및 연변작가협회에서 주관하는 “단군문학상”의 제막식에 주당위 선전부 부장 윤성룡,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작가학회 상무부회장 엽매,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작가협회 부회장이며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잡지사 부주필인 조안표가 행사에 참가해 길림공상학원당위 서기이며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회장이며 “단군문학상”비공모기금회 리사장인 신봉철 등과 함께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가동 터치볼을 작동했다. 의식에서 엽매, 신봉철이 각기 중국작가협회와 “단군문학상”리사회를 대표하여 합작협의서에 조인했다. 신봉철회장은 이날 제막식에서 “조선족은 유구한 문화전통을 지닌 민족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조선족문단에 전국적으로 통일되고 권위있는 최고문학상이 설치되여있지 못한 현실에 무척 안타까왔다”면서 “단군문학상을 통해 우리의 작가들이 자신의 힘을 마음껏 과시해 우리의 힘으로 우수한 문학작품을 널리 알릴뿐만아니라 또 민족문학이라는 단순한 한계를 벗어나 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기를 바란다”라고 “단군문학상”설치 취지를 밝혔다. 엽매는 “문학예술인들의 문예창작에서 애국주의가 주선률로 되여야 한다”면서 개혁개방 30년간 중국조선족문학은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는바 이는 중국조선족문인을 포함한 조선족사회 각 계층의 막강한 단결력을 보여준다. 오늘 ‘단군문학상’의 설치로 중국조선족문학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될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날 의식에서 공개한데 의하면 제1회 “단군문학상”은 조선족작가들이 지난 2000년 1월 1일부터 2014년 12월 30일까지 발표한(출판일자를 기준) 조선어와 한어로 창작한 각 쟝르별 작품집(장편소설, 소설집, 시집, 수필집, 장편보고문학, 아동문학, 평론)을 대상한다. 조선문과 한문으로 출판하는 각 출판사, 문학지, 신문사 문예부간, 연변작가협회 각 창작위원회에서는 모두 작품을 추천할수 있으며 작가 개인도 자기의 작품을 추천(응모시간: 2015년 5월 24일부터 7월 30일까지, 보낼 곳: 연길시 공원로 653호 연변작가협회 창작연구실, 우편번호:133001 련계전화:0433-2733347 핸드폰:18643325289 이메일:sunwh3367@hanmail.net 업무주관:손문혁)할수 있다. 제1회 “단군문학상” 시상식은 올 9월,10월 사이에 연길에서 펼칠 예정이다. 또한 2015년을 기점으로 2년에 한번씩 시상식을 가지게 되는데 대상, 소설상, 시가상, 수필상, 보고문학상, 아동문학상, 평론상, 번역상, 해외작품상 및 신인상이 설치된다. 대상은 1명인데 상금은 15만원이며 기타 쟝르는 각기 5만원, 신인상은 3만원이다. 글·사진 신연희 기자 ============================================================= [공시]제1회 《단군문학상》추천작품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8-14 11:12:55 ]      장편소설집   (작품명칭/작자/출판단위/출간일시) 1.《북두성》 김춘자 료녕민족출판사(2013.1) 2.《관동의 밤》 김송죽 북경민족출판사(2008.12) 3.《재해》 박선석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7.10) 4.《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 허련순 연변인민출판사(2005.12) 5.《히든카드》 정용호 료녕민족출판사(2012.9) 6.《족보》 림원춘 료녕민족출판사(2004.12) 7.《산너머 강》 강효근 연변인민출판사(2011.4) 8.《흔적》 우광훈 연변인민출판사(2005.12) 중단편소설집 (작품명칭/작자/출판단위/출간일시) 1.《장손》 박옥남 연변인민출판사(2011.7) 2. 구촌조카》홍천룡 연변인민출판사(2010.12) 아동문학집 (작품명칭/작자/출판단위/출간일시) 1.《열매를 단 경아라는 나무》 한석윤 연변인민출판사(2003.6) 2.《아기가 쓴 편지》 전춘식 연변인민출판사(2013.12) 3.《눈아이》 강길 연변인민출판사(2011.5)4. 4.《개구리 셈셰기 한다》 신금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9.5) 5.《새빨간 거짓말》 김만석 연변인민출판사(2010.4) 6.《가시돋는 뽈》 주덕진 연변인민출판사(2009.5) 7.《작은 하늘》 김철호 연변인민출판사(2013.8) 8.《용이와 그의 벗들》 리영철 연변인민출판사(2009.5) 9.《고드름》 김득만 연변인민출판사(2004.2) 10.《천사는 웃는다》 최동일 연변교육출판사(2007.12) 11.《살구꽃 복사꽃》 림금산 연변교육출판사(2013.7) 산문집 (작품명칭/작자/출판단위/출간일시) 1.《흰눈이 내리면 그리움도 내린다》 서정순 료녕민족출판사(2010.12) 2.《역마가 끌어낸 별들의 이야기》 리호원 흑룡강민족출판사(2012.7) 3.《세모의 설레임》 장정일 연변인민출판사(2011.10) 4.《하느님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가》 리홍규 흑룡강민족출판사(2000.11) 5.《녀불법체류자의 일기》 림덕실 연변인민출판사(2000.11) 실화문학 (작품명칭/작자/출판단위/출간일시) 1.《홍만호실화문학작품선》 홍만호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9.11) 2.《빛나는 탐구의 길 》 김영금 료녕민족출판사(2003.7) 3.《정률성평전》 리혜선 북경민족출판사(2013.10) 4.《겨레항일지사들》 리광인 북경민족출판사(2007.10) 5.《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 김수영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7.7) 문학평론집 (작품명칭/작자/출판단위/출간일시) 1.《식민담론과 문학의 서사구조》 방룡남 북경민족출판사(2013.10) 2.《조선족시문학연구》 김경훈 연변인민출판사(2012) 3.《이미지시 창작론》 최룡관 연변인민출판사(2009.10) 4. 《조선족이민작가연구》 장춘식 북경민족출판사(2010.7) 5. 《중국 제재 근대 조선이민소설의 서사 주제론》 남춘애 북경민족출판사(2014.7) 6.《중국조선족문학》(12) 김관웅 연변인민출판사(2014.12) 7.《해방전후중국조선민족문학연구학연구》 박충록 북경민족출판사(2003.10) 시집 (작품명칭/작자/출판단위/출간일시) 1.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김영건 연변인민출판사(2010.3) 2. 《고향엔 고향이 없다》 김학송 연변인민출판사(2013.7) 3. 《당신의 이름으로》 송미자 연변인민출판사(2010.4) 4. 《나, 진짜 바보이고싶다》 김철 북경민족출판사(2000.6) 5.《흙묻은 이름》 심정호 연변인민출판사(2012.11) 6. 《먼 후날 저 하늘너머》 강효삼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2000.1) 7. 《십자거리에 물처럼 고인 차량들》 심예란 연변인민출판사(2011.7) 8. 《사람아,사람아》 조룡남 연변인민출판사(2010.7) 9. 《눈을 뜨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리성비 연변인민출판사(2011.3) 10. 《짧은 시, 긴탄식》 박장길 연변인민출판사(2010.6) 11. 《잔설서곡》 리태학 연변인민출판사(2008.3) 12. 《바다가 륙지로 되지 않는 까닭은》 리임원 북경민족출판사(2014.12) 13. 《서탑》 김창영 료녕민족출판사(2011.8) 14. 《태양의 종소리》 김파 연변인민출판사(2005.12) 신인상 (작품명/편(부)/작자/발표,출판단위/발표일자) 1.《전지》 1편 최춘화 료동문학(2011) 2. 《파리한 파리》 1부 박동철 연변인민출판사(2009.1) 3. 《섬의 녀인》 1편 김옥결 《시간》(2014.7) 4. 《령혼이 숨쉬는 정원》1편 주매화 《연변문학》(2014.10) 5. 《또르르 뱅뱅》 1부 강려 연변인민출판사(2011.8) 6. 《장률과 그의 영화》 1편 김미란 《연변문학》(2011.11) 7. 《모기》 1편 한설매 《아동세계》(2009.1) 8. 《사랑의 류통기간》 1부 구호준 료녕민족출판사(2011.8) 9. 《노란 해바라기꽃》 1편 김금희 《연변문학》(2014.2) 10. 《절골이 어딘지 아시나요?》1편 박초란 《연변문학》(2014.3) 11. 《귀향》(외3수) 1편 전춘매 《연변문학》(2010.3) 12. 《내가 내곁에》 1편 주향숙 《연변문학》(2009.10) 13. 《우주와 우주와 인간의 경계에서 태동하는 》 1편 리광원 《연변문학》(2014.12) 14. 《나에게로 돌아오는 너》 1부 허옥진 연변인민출판사 15. 《거꾸로 흐르라, 두만강아!》(외1수) 1편 김호 《연변문학》(2006.8) 16. 《바람의 딸》 1편 박은희 《도라지》(2013.6) 17. 《바다와 중년의 녀인 그리고 친구》 1편 전향미 《연변문학》(2013.12) =========================================================== 제1회 “단군문학상”평의회에 참석한 평심위원들 2015년 12월 10일 첫기 “단군문학상” 평의회가 연길에서 있었다. “단군문학상”은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와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리사회가 공동 주최한 문학상이다. 소수민족 문학 내실을 풍부히 하고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추진하는 한편 조선족 문화를 계승발양하려는데 취지를 둔 “단군문학상”은 2015년에 가동되여 2년에 한차례씩 심사평의 한다. 심사위원들은 평의 취지를 토대로 전문적 학술정신과 개인적 재능을 평가 기준으로 삼고 신중하고도 세밀하며 구체적인 심사와 토론을 거친 뒤 실명투표를 통해 9편의 수상작을 선정했다. 그중 단군문학상 대상은 결원 처리되고 소설과 산문, 시가, 보고문학, 론평, 아동문학 부문 각기 1편, 한문창작상 2편, 문학신인상 1편이 수상작 명단에 올랐다. 중국조선족 첫기 “단군문학상” 시상식은 2015년 12월 26일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에서 열린다. 수상작: 奖项수상종목 作者 작가 作品 작품 大 奖 대상 空缺 결원 小说奖 소설상 허련순 许莲顺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谁见过蝴蝶的巢 散文奖 산문상 장정일 张正一 세모의 설레임 岁暮随想 诗歌奖 시가상 김영건 金荣健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晨山问候 报告文学奖 보고문학상 리혜선 李惠善 정률성평전 郑律成评传 评论奖 론평상 장춘식 张春植 일제시기조선족이민작가연구 日据时期朝鲜族移民作家研究 儿童文学奖 아동문학상 김철호 金哲镐 작은 하늘 小小天空 汉文创作奖 한문창작상 南永前 남영전 我们从哪里来?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전용선 全勇先 소화18년 昭和18年 新人奖 신인상 구호준 具豪俊 사랑의 류통기간 爱的流通期         第一届中国朝鲜族“檀君文学奖”评委会   组 长: 崔国哲 延边作家协会主席(主持) 副组长:禹尚烈 延边大学教授、文学评论家 评 委: 崔红一  原延边作家协会副主席、小说家 崔三龙  原延边文学与艺术研究所所长 权赫律  吉林大学外国语学院副院长、文学评论家 李太福  黑龙江大学教授、文学评论家 金京勋  延边大学教授、文学评论家 金 革  延边作家协会副主席、小说家 徐振清  原延边作家协会副主席、小说家 韩锡润  原延边作家协会副主席、作家 吴相顺  中央民族大学教授、文学评论家   首届檀君文学奖评委会 2015年12月10日 ========================================= ---------- [길림신문] 2015-12-17  중국조선족문학의 최고수준을 대표하는 우수문학작품들을 엄선해 평의하는 “단군문학상(檀君文学奖)”수상자 결과가 12월 10일 평심회를 거쳐 밝혀졌다. “단군문학상”은 통일적이고 권위있고 력사에 남을 최고의 조선족문학상을 만들어 우리 작가들이 명작을 창작하도록 격려하며 조선족문학의 번영발전을 추동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학작품을 전국과 세계에 널리 알리는것을 취지로 했다. 조선민족의 시조인“단군”(檀君)으로 명명한 이 문학상은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와 단군문학상리사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중국작가협회“민족문학”잡지사, “단군문학상”기금회, 연변작가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하고있다. 단군문학상리사회는 “단군문학상” 제1회 평심범위를 새 세기가 시작된 2000년부터 2014년말까지 15년간 조선어와 한어로 창작한 우리 민족 작가들의 각 장르별 작품집을 대상했다. “단군문학상”평심조직위원회 오장권부회장에따르면 “단군문학상”은 문학상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특별히“단군문학상”리사회를 설립하고 “단군문학상조례”를 통과했으며 단군문학상 평심위원회 및 평심전문가데이터베스를 만들었다. 12월 10일 연길시에서 있은 “단군문학상”평심모임에서는 “단군문학상평심조례”의 기초우에서 “단군문학상” 평심방법을 작성하고 평심전문가데이터베스에서 선정된 11명의 평심권위들로 참다운 평심을 진행, 무기명투표가 아닌 실명제투표의 방식으로사상 가장 엄밀하고 규범적이며 공정한 문학상평선결과를 산생시켰다. 료해에 따르면 제1회 “단군문학상”은 대다수 평심위원들이 대상으로 선정할만한 평심작품범위내 작품이 없다는데 의견을 모으면서 공백으로 남겨졌다. 대망의 제1회 “단군문학상”시상식은 오는2015년 12월 26일 룡정시 해란강극장에서 펼쳐진다. 부록: 제1회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 평심위원 명단 조장-  최국철: 연변작가협회 주석, 소설가  부조장-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 평론가 위원- 최홍일 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최삼룡: 원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 권혁률: 길림대학 외국어학원 부원장 리태복: 흑룡강대학 교수 김경훈: 연변대학 교수, 박사생도사, 교수, 평론가 김혁: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가 한석윤: 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아동문학가 오상순: 중앙민족대학 박사생도사, 교수, 평론가 서진청(한족): 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 [연변일보] 2015-12-17 제1회 “단군문학상”시상식 26일 개최 예정 제1회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 시상식이 오는 26일, 룡정시 해란강대극장에서 펼쳐지게 된다.  이에 앞서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리사회에서 주최한 평심회의가 지난 10일, 연길시 백산호텔에서 진행됐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주석이 조장을 맡고 연변대학 박사지도교수 우상렬이 부조장을 맡았으며 연변작가협회 최홍일 부주석을 비롯한 9명이 평심위원을 맡아 공평, 공정의 원칙하에 제1회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을 선정했다. 평의 결과 소설상에 허련순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시가상에 김영건의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산문상에 장정일의 《세모의 설레임》, 보고문학상에 리혜선의 《정률성평전》, 평론상에 장춘식의 《일제시기조선족이민작가연구》, 아동문학상에 김철호의 《작은 하늘》, 한문상(汉文奖)에 남영전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我们从哪里来?)》와 전용선의 《소화18년(昭和18年)》, 신인상에 구호준의 《사랑의 류통기간》이 선정됐다. 이상 쟝르별상은 5만원의 상금이, 신인상은 3만원의 상금이 차례질 예정이다. 대상은 공백으로 남겨두었다.  이번 단군문학상은 평심회의기간 철저한 보안과 더불어 평심위원 실명추천을 실시하는 등 공평, 공정한 평의를 진행했다. 단군문학상은 앞으로 2년에 1회 개최될 예정이다.  리련화 기자 ----------------------------------------------------------------   중국조선족 문학 별들의 대잔치- '제1회 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시상식' 룡정서    2015-12-28 10:02:05               중국조선족문단의 최고상으로 부상   민족문학의 새 지평선을 여는 계기   (흑룡강신문=하얼빈)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리광평 특약기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와 중국 조선족 단군문학상리사회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중국조선족 문학 별들의 대잔치인 '제1회 중국 조선족 단군문학상시상식'이 길림성 조선족경제과학기술총회,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룡정시정부,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중공연변주위선전부,연변작가협회,연변신문출판국 관계자들 그리고 작가,시인, 룡정시 시민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26일 룡정시해란강극장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윤한윤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부회장은 축하연설에서 "중국조선족은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갖고 있는 민족으로서 세월의 세파속에서 세계적으로도 알려지고 있는 문학예술을 자랑하고있다"며 "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판도에서 아주 튼튼한 립지를 굳히고 있는데 특히 조선족 로일대 작가인 김학철 선생은 불굴의 문학정신과 민첩하고 예리한 필치로 대량의 작품들을 펴내 조선족사회의 사랑을 받았을 뿐만아니라 기타 민족사회에서도 아주 존중하는 작가로 부상했다"고 하고나서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백성들이 존중하는 작가,시인은 항상 력사시대의 앞에서 어두운 풍운을 맞받아 헤쳐가고 시종 민족의 리익을 위해 작품을 써 내려가고 있기에 진실하면서도 선량하고 아름다움으로 가짜와 추악 그리고 더러운 사회에 호된 질타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에 대상이 공석으로 되여 아쉬움이 있지만 조선글로 된 소설,시,산문,보고문학,평론,아동문학,신인상 7부와 한문상 2부는 '단군문학상'의 력사적인 서막을 열어놓아 앞으로 더욱 훌륭한 작품이 고고성을 울리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우상렬 연변대학교 교수는 이번 단군문학상의 심사위원회 책임자로서 "심봉철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총회 회장의 창의하에 출범된 단군문학상은 중국조선족문단의 최고 영예상으로서 아주 엄격하게 심사했다"했다고 말했다.   중국 조선족 제1회 '단군문학상' 수상작품으로는 소설상에 허련순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시가상에 김영건의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산문상에 장정일의 '세모의 설레임',보고문학상에 리혜선의 '정률성평전',평론상에 장춘식의 '일제시기 조선족이민작가연구',아동문학상에 김철호의 '작은 하늘', 한문상에 남영전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와 전용선의 '소화18년',신인상에 구호준의 '사랑의 류통기간'이다   이번에 당선된 신인상은 상금 3만원이고 기타 각 상은 상금 5만원이다. 허련순   허련순 소설가는 수상소감에서 "나비가 집이 없듯이 우리민족의 삶과 애환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펴 나가겠다"고 했다. 김영건   김영건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우리민족의 시조 단군의 이름으로 된 문학상에 선정되여 너무나도 흥분된다"며 "앞으로 단군의 정신을 본받아 따뜻한 마음으로 이 세상 모든것을 포옹하는 시,우주속의 묻혀가는 삶의 공간을 확대하여 더 좋은 시를 창작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장정일   장정일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오랜 세월 생각,사색,음미라는 단어를 사랑해 왔다."며 "수필과 평론 집필을 통해 동년의 감성을 불러왔고 사색의 가파른 연기를 오르게 해서 좋았고 이따끔 정신의 시냇물을 만나게 해서 좋았다"고 했다. 리혜선   리혜선 소설가는 수상소감에서 "단군문학상의 취지가 민족문학의 꿈이 있다"며 "앞으로 민족부흥의 뜻을 깊이 아로 새기고 백성들에게 성큼 다가갈수 있는 문학을 창작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장춘식   장춘식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문학의 길은 어렵지만 민족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고 좋은 작품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있다"며 "새로 설립한 단군문학상은 바로 노력의 결실일것이다"라고 했다. 김철호   김철호 작가는 "작품은 간고한 탐구속에서 탄생하므로 앞으로 이런 탐구속에서 더 좋은 아동문학을 창작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남영전  남영전 시인은 "단군문학상은 저의 창작을 격려하는 상인 동시에 저의 창작 방향을 제시한 상이다"며 "단군은 천인합일 사상의 상징이고 심신수련의 상징이며 건전한 사회를 이끄는 선지선각자이므로 단군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창작하는것은 저의 사명과 책임이므로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했다. 전용선    그리고 장춘식 작가,전용선 작가,구호준 작가들은 "단군문학상은 문학정상을 향해가는 상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펴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구호준   심봉철 회장은 "민족문학창작의 새 기원을 열어가자"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연설에서 "오늘 (12월 26일)은 모택동동지 탄신 122주년 기념일로서 이런 특수한 날을 선택하여 '단군문학상'시상식을 거행하는것은 심각한 기념의의가 있다.모택동동지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부터 습근평총서기의 지난해 '문예사업좌담회의 연설'까지 한갈래 주선이 시종 관통되여있는바 이는 곧 문학창작의 인민성이다. '단군문학상'을 설립한 중요한 의의는 두 위인의 중요한 연설의 정신을 깊이 리해하고 우리민족의 작가,시인들로 하여금 시대에 부끄럽지 않고 민족에 부끄럽지 않는 불후의 명작들을 창작하도록 고무격려하려는데 있다"며 "우리모두 '단군문학상'을 가꾸고 '단군문학상을 아끼며 '단군문학상'을 발전시키자"고 하고나서 '단군문학상'은 갓 땅을 뚫고나온 새싹으로서 하늘을 꿰지르는 큰 나무로 자라날수 있는가 없는가는 전적으로 우리 모두의 사랑과 보살핌이 수요되며 '단군문학상'은 마치 갓 발굴한 문학화원의 광석으로서 정밀한 조각을 통하여 보석마냥 빛나는 아름다운 예술품,불후의 작품이 되여야 하며 민족문학창작의 새 장은 반드시 문화의 '고원'으로부터 문학의 '고봉을 톱아올라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수한 력사경험이 증명하는것처럼 그 어떤 신생사물의 성장은 순풍에 돛단듯이 순조롭지 않으므로 당의 민족정책,문예정책의 인도하에 오직 이 세상에 정의가 존재한다면 '단군문학상'은 반드시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온 누리에 빛을 뿌릴것이다"라고 했다.   이번 '단군문학상' 시상식은 우리민족의 전통예술인 사물놀이를 시작으로, 우리민족의 애환을 담은 '아리랑'의 음률속에서 치러짐과 아울러 축하공연이 있어 장내는 시종 뜨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제1회 “단군문학상” 시상식 룡정서 중국조선족문단 최고의 상  2015-12-28    중국조선족문단의 최고의 상으로 불리우며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단군문학상”이 26일 룡정시 해란강대극장에서 제1회 시상식을 가졌다. 중국조선족문학사상 최초로 선보이는 단군문학상은 대상 15만원, 각 쟝르별상 5만원, 신인상 3만원이라는 거액의 상금을 자랑하는 문학상으로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와 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리사회가 공동 설치했다. 새 세기가 시작된 2000년부터 2014년말까지 15년 동안 조선족문단을 수놓은 작품중 76편의 작품이 “단군문학상” 심사행렬에 오른 가운데 최종 9편이 각 쟝르별 단군문학상의 월계관을 받았다. 이 상은 중국조선족문학사상 최대의 규모와 최고의 상금을 걸고 설치한 문학상인만큼 그 심사에 서도 실명제 투표방식으로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졌다. 소설상에 허련순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시가상에 김영건의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산문상에 장정일의 《세모의 설레임》, 보고문학상에 리혜선의 《정률성 평전》, 평론상에 장춘식의 《일제시기 조선족이민작가연구》, 아동문학상에 김철호의 《작은 하늘》, 한문상에 남영전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我们从哪里来?)》와 전용선의 《소화 18년(昭和18年)》, 신인상에 구호준의 《사랑의 류통기간》이 선정됐으며 대상은 공석으로 남겼다.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윤한윤부주석은 조선족은 유구한 력사문화전통을 자랑하는 민족이며 찬란한 문화예술사를 가지고있는 민족으로서 개혁개방이후 조선족문학은 활발한 성장세를 보이며 시대성과 민족특색을 고루 갖춘 수작들로 중국문단에서의 소수민족문학 립지를 튼튼히 굳혀갔다고 말했다. 그는 “단군문학상”이 향후 더욱 훌륭한 조선족문학작품이 창작될수 있는 활무대를 만들어주며 조선족문학발전을 추진하고 이끌어가는 새 장을 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윤한윤부주석과 함께 길림공상학원당위 서기이며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회장, 단군문학상비공모기금회 리사장 신봉철, 부주장 조룡호가 시상식에 참가하여 수상자들한테 상을 발급했다. 향후 2년에 한번씩 진행될 예정인 “단군문학상”은 메말라있던 중국조선족문단에 꽃비로 뿌려져 더욱 아름다운 문학의 꽃들을 피워 중국조선족문단에 아름다운 풍경선을 만들어갈 전망이다.  박진화 기자   중국조선족문단의 “별”들 영광의 무대 밝혔다 편집/기자: [ 안상근 김성걸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12-27 12:31:45 ]  “중국조선족제1회단군문학상”시상야회 룡정해란강극장에서 성황리에 개최 “중국조선족문학의 전당, 별들의 축제” “중국조선족문학의 최고의 노벨상”이라고 불리우는 “중국조선족제1회단군문학상”시상야회가 2015년 12월26일 오후 4시,룡정시해란강극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2000년부터 2014년말까지 15년간 우리 민족 작가들이 조선어와 한어로 창작한 각 장르별 최고의 작품을 엄선해 포상하는 우리민족 문학사상 최고의 문학상인 “단군문학상”은 중국조선족문단에서 가장 빛나는“문학의 별”들을 영광의 전당에 오르게 했다. 조선민족의 시조인 “단군”(檀君)의 이름으로 명명한 이 문학상은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와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연변작가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이날 시상식야회에 앞서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부회장 윤한윤과 연변주당위선전부 부부장 리호남이 열정에 넘치는 축사를 했다. 윤한윤은 축사에서 “조선민족은 유구한 력사와 문화전통을 갖고있는 민족”이라고 지적, “기나긴 민족발전력사과정에서 휘황찬란하고 영향력있는 문학예술작품들을 창작하였다”고 말했다. 특히 개혁개방이래 조선족문학은 륭성발전하는 력사시기에 들어섰으며 시대적맥박과 분위기가 짙고 민속특색이 있으며 민족생활을 반영한 많은 조선족작가들과 작품들이 용솟음쳐나왔다고 긍정했다. 윤한윤은 “이러한 성과들은 중국문학가운데 중국조선족문학의 견실한 지위를 확고히 자리매김하고있다”고 말했다. 축사를 하고있는 중국소수민족작가협회 부회장 윤한윤 윤한윤은 특히 “단군상의 설립은 조선족문학의 발전을 추진하고 전시하는 좋은 창구로 될것”이라면서 “이 창구를 리용하여 더욱 많은 우수한 조선족작가들과 작품들이 용솟음쳐나올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리호남은 축사에서 “단군문학상은 중국조선족문학사에 기재될만한 뜻깊은 대사”라고 강조, “제1회 단군문학상은 새로운 시기에 진입한 이래 10여년동안의 중국조선족문단력사를 돌이켜보고 풍성한 수확을 견증하는 영광의 자리, 축제의 자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축사를 하고있는 연변주당위선전부 부부장 리호남 특히 리호남은 “지난 5월23일 모택동동지의 연안문예좌담회연설발표 73돐에 즈음해 발족된 ‘단군문학상’은 당면 중국조선족문학의 격변기에 문학대오와 독자군체가 위축되면서 새로운 형세와 도전에 직면해있는 배경하에서 문학실천의 새로운 발전을 추진하고 문학창작의 비약을 추진하는 새로운 생명활력소로 될것”이라고 전망, “단군문학상은 그 규모와 차원으로 볼때 민족문학의 튼튼한 버팀목으로 될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리호남은 “습근평총서기의 문예좌담회 중요연설은 당면과 금후 한시기 우리나라 문예사업의 전진방향을 제시해주고있다”면서 “작가여러분들이 반드시 습근평총서기 중요연설을 참답게 학습관철시달하면서 인민대중을 위해 봉사하고 사회주의를 위해 봉사하는 문예사업의 방향과 백화제방, 백화만발의 문예사업방침을 확고히 견지하고 사회주선률을 놀해하며 위대한 시대와 위대한 인민에 부끄럽지 않은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함으로써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실현을 위해 새로운 기여를 할것”을 바랐다. 알아본데 의하면 “단군문학상”은 문학상의 권위와 공평, 공정, 공개적인 평심을 보장하기 위해 특별히“단군문학상”리사회를 설립하고 “단군문학상조례”를 통과했으며 단군문학상 평심위원회 및 평심전문가데이터베스를 만들었다. 시상식에서 제1차 단군문학상 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인 연변대학교 우상렬교수가 심사위원들을 대표하여 심사평을 발표, “단군문학상”이 중국조선족문학에 있어서 력사적의 의의가 있는 뜻깊은 최고 문학상이고 많은 사람들이 오매에도 단군문학상 심사결과를 기대하는 심정을 헤아려 공정하고 공평하며 공개적인 원칙과 투철한 사명감, 책임감을 가지고 력사에 책임지는 자세로 열심히 심사에 임했음을 밝혔다. 우상렬교수는 대상은 거듭되는 공정한 투표와 충분한 론의를 거쳐 유감스럽게도 공석으로 처리했음을 밝혔다. 소설상 수상자 허련순 제1회 “단군문학상”의 소설상에는 허련순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시가상에는 김영건의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산문상에는 장정일의 “세모의 설레임”, 보고문학상에는 리혜선의 “정률성평전”, 평론상에는 장춘식의 “일제시기 조선족이민작가연구”, 아동문학상에는 김철호의 “작은 하늘”, 한문상(汉文奖)에는 남영전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전용선의 “소화18년”,신인상에는 구호준의 “사랑의 류통기간” 등이 입선돼 대망의 영예전당에 올랐으며 각각 5만원의 상금(신인상은 3만원)을 받아 안았다. 이날 시상식야회에서 “제1회단군문학상” 발족을 제안하고 적극적으로 추진시킨 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리사회 신봉철리사장이 “민족문학창작의 새기원을 열어가자”는 제목으로 된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했다. 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리사회 신봉철리사장 신봉철리사장은 “모택동동지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부터 습근평총서기의 지난해 문예사업좌담회의 연설까지 한갈래 주선이 시종 관통되여있는바 이는 곧 문학창작의 인민성”이라고 강조, “우리가 단군문학상을 설립한 중요한 의의는 두 위인의 중요한 연설의 정신을 깊이 리해하고 우리 민족의 작가, 시인들로 하여금 시대에 부끄럽지 않고 력사에 부끄럽지 않으며 민족에 부끄럽지 않는 불후의 명작들을 창작하도록 고무격려하려는데 있다”고 밝혔다. 연설에서 신봉철리사장은 “특히 우리 모두가 함께 단군문학상을 가꾸어나가고 모두가 단군문학상을 아끼며 모두가 단군문학상을 발전시켜나갈것을 마음속으로부터 호소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신봉철회장은 “민족문학창작의 새장은 반드시 ‘문학의 고원’으로부터 ‘문학의 고봉’으로 톺아올라가야 하는것”이라면서 “이것이 바로 단군문학상 리사회의 의무이며 책임”이라고 말했다. 신봉철회장은 “위대한 민족은 반드시 위대한 문학작품이 있어야 한다”면서 “단군문학상의 설립이 우수한 우리 민족의 문학창작발전을 도울수있다면 우리는 죽어도 한이 없을것”이라고 주장했다. 신봉철리사장은 “단군문학상을 가꾸고 아끼고 발전시키는 길에서 험난한 앞길을 예감하고있지만 당의 옳바른 민족정책과 문예정책의 인도하에 오직 이 세상에 정의가 존재한다면 단군문학상은 반드시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마냥 온 누리에 빛뿌릴것이며 불후의 명작으로 중화대가정의 문학백화원에 어엿이 자리매김할것”이라고 말했다. 영광의 무대에 오른 “단군문학상”수상자들과 관계자들 이날 단군문학상시상식야회는 수상자들에 대한 품격있는 수상절차와 함께 사이사이 다양한 문예종목들로 알차게 꾸며져 중국조선족문학사상 잊지못할 아름다운 문화향연의 밤을 수놓았다. ======================================================================                통합검색열린강좌 오늘의 사진 자유갤러리 사진이야기 황사모 전시관 두사동                    국내] “중국조선족제1회단군문학상”시상야회                                       “중국조선족문학의 전당, 별들의 축제” “중국조선족문학의 최고의 노벨상”이라고 불리우는 “중국조선족제1회단군문학상”시상야회가 12월26일 오후 4시,룡정시해란강극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2000년부터 2014년말까지 15년간 우리 민족 작가들이 조선어와 한어로 창작한 각 장르별 최고의 작품을 엄선해 포상하는 우리민족 문학사상 최고의 문학상인 “단군문학상”은 중국조선족문단에서 가장 빛나는“문학의 별”들을 영광의 전당에 오르게 했다.    제1회 “단군문학상”의 소설상에는 허련순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시가상에는 김영건의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산문상에는 장정일의 “세모의 설레임”, 보고문학상에는 리혜선의 “정률성평전”, 평론상에는 장춘식의 “일제시기 조선족이민작가연구”, 아동문학상에는 김철호의 “작은 하늘”, 한문상(汉文奖)에는 남영전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전용선의 “소화 1 8 년”,신인상에는 구호준의 “사랑의 류통기간” 등이 입선돼 대망의 영예전당에 올랐으며 각각 5만원의 상금(신인상은 3만원)을 받아 안았다. / 길림신문               [단군문학상]그대들이 있어 우리 문학이 빛난다 편집/기자: [ 안상근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12-27 13:23:52 ]  -제1차 "단군문학상" 수상작 심사평 제1차 "단군문학상" 심사위원회 부위원장 우상렬 심사평을 하고있는 제1차 "단군문학상" 심사위원회 부위원장 우상렬교수 “단군문학상”은 우리 조선족문학에 있어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뜻깊은 최고 문학상인 줄로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매에도 제1차 “단군문학상” 심사결과를 기대한 줄로 안다. 이런 막중한 문학상인만큼 심사위원들은 공정하고도 공평하며 공개적인 원칙 및 투철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역사에 책임지는 자세로 열심히 심사에 림했다. 이에 본인은 제1차 “단군문학상” 심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심사위원들을 대표하여 아래와 같이 정중히 심사평을 발표한다. 대상은 거듭되는 공정한 투표와 충분한 론의를 거쳐 공석으로 처리했다. 중국소수민족문학상 가운데서도 최고 레벨을 자랑하는 “단군문학상”의 위상과 무게를 놓고 볼 때 우리 조선족문학이 아직은 좀 미흡하다는 관점이 심사위원들 절대 다수의 관점이였다. 심사위원들의 실사구시적인 평가자세를 볼수있어서 좋았다. 그럼 아래에 부문 별 수상작에 대해 시, 산문, 보고문학, 소설, 평론, 아동문학, 한어작품, 신인 순으로 심사평을 발표하도록 한다. 1.시:김영건의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심사평, 김경훈) 김영건의 시는 대체로 무에서 유의 가치를 발견하고 유를 부정함으로써 무의 경지를 창출(“서시”)한다. 바람에 쉽게 설레이는 숲의 주절거림과 흔들림을 생략하고,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린 이슬방울 속에서 아침해와 걸어가야 할 길과 마을과 새와 벌레와 구름과 너나가 있다고 함으로써 가장 청결하고 령롱한 이슬에 미래의 모든 것을 담아냄으로써 크기와 색갈과 모양과 성질에 관계없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관조를 시도하고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끈질긴 집착을 시화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적인 관조에의 노력은 자연합일이나 천지인의 사상(“합일” “천지인”)과 일부 불교적인 발상같은 오래된 사고방식에 기초했으면서도, 그만의 개성적인 방식에 의해 재구성됨으로써 더욱 독창적인 빛갈을 내뿜는다 하겠다. 이는 구체적으로 시적인 공간과 색채미학, 남성적인 톤 등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 우선 시적인 공간에서 “숲”과 같은 작품에서는 숲-길-새-하늘-구름-바람의 순으로 초점화가 이루어지면서 하늘과 땅에 거쳐 공간 활용을 극대화하고 있는데, 이처럼 시적 상상의 극치를 추구하는 자세는 어딘가 공격적이기도 한 남성적인 자세라고도 할수있다. 바로 이번에 수상한 시집에는 전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다 분명한 남성적인 톤과 의미의 급속한 확산(“바다사나이” “호랑이 하산”)이 보여졌는데 이것들은 야성적인 목소리나, 호랑이, 근육질 등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 리얼하면서도 강렬하게 어필되여왔다. 또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을 대조시키면서도 색채에 대한 나름대로의 시적인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주제를 보다 풍성하고 오묘하게 조각(“계의 영토” “나무 그리기”)해 내여 시적인 분위기를 보다 다채롭고도 신비하게 조명시켰다는데 그 특색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2.산문:장정일의 "세모의 설레임"(심사평, 최삼룡) 장정일은 수필가이며 평론가로서 우리 문단에서 수필문학의 쟝르적 고착에서 한마지로(汗馬之勞)를 세운 공로자이다. 2011년 10월 료녕민족출판사에서 간행한 수필집 “세모의 설레임”은 선생이 신세기에 진입한 이래 창작발표한 100여편의 수필작품을 묶은 책으로서 책에 수록된 100여편의 작품은 일매지게 언어가 세련되고 내용이 풍부하고 심각하며 형식이 다양하고 깔끔한바 가히 작은 그릇에 자양분이 풍부한 음식을 담았다고 비유할수있다. 특히 이 책에 수록된 적지 않은 수작들은 주관문학이라고 불리우는 수필문학의 생명이라고 하는 작자-창조주체의 삶과 마음과 넋의 진솔한 표현에 공을 들이였으며 아울러 사회와 문화 그리고 민족의 생활현장에 대한 재현과 고발과 비판에 성공적이였으며 읽는이들에게 많은 깨달음과 느낌을 주고있다. 그리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독서취미를 충분히 배려하여 작품을 되도록 짧게 쓰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문풍을 높이 사고 싶다. 총적으로 장정일의 수필집 “세모의 설레임”은 없던 데로부터 있게 되고 미미한 존재로부터 당당한 존재로 성장, 성숙, 흥성하는 와중에 창출된 수많은 수필집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돋보이는 성과의 하나로 평가할수있다. 3.보고문학: 리혜선의 “정률성 평전”(심사평, 김혁) “정률성평전”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자이고 섭이, 선성해와 나란히 중국 3대음악가로 추앙받는 중국 군가의 대부, 인민음악가-정률성의 인생력정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저자는 전국 각지와 한국을 답사하고 가족과 지인들을 만나 정률성의 삶을 밀도있게 취재했다.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인생의 고비마다 인간 정률성의 성격이 발전, 승화할 수 있었던 계기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정률성의 추구와 고뇌와 슬픔과 부끄러움과 기쁨을 파헤침으로써 사회가 이미 규정한 정률성의 “영웅성”에 도식화되지 않고 보통 인간으로의 정률성의 풍부한 내면을 잘 그려냈다. 또한 이를 통해 식민지시대와 그 후 사회주의 시기 전 생애에 걸친 한 생명존재의 치렬한 몸부림과 가치관, 사상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민족해방투쟁과 반파쑈투쟁에 투신해 인민을 고무하는 불후의 음악을 창작할수있었던 인민음악가 정률성의 성격을 합리하고 조리있게 부각했다. 풍부한 언어, 현장감이 넘치는 서술에 상상을 자극하는 론평을 곁들여 반전이 심한 정률성의 격동적인 인생드라마를 박진감이 넘치게 완성했다. 4.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심사평, 리태복) 소설 부문 심사에서 끝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은 수상작과 박선석의 “재회”였다. 개연성과 유머적 감각을 높이 산 심사위원들은 “재회”를, 완성도와 총체적 플롯, 그리고 언어의 세련됨에 방점을 찍은 심사위원들은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를 선택했다. 결국 근소한 차이로 허련순 작가가 제1회 소설부문 본상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되였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우선 밀입국 배(선창)라는 지극히 제한된 공간과 나흘이라는 짧은 시간에, 극한적 상황에서의 인간의 선택과 수십년에 걸친 주인공들의 운명적인 삶을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지은이의 력량이 돋보였다. 그리고 남주인공의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고난의 심적·육체적 려정과 녀주인공의 한없이 슬픈 령혼을 랭정하고 담담한 어조로, 서두르지 않고 유유히 엮어나갈 수 있었던 것 역시 소설과 그 창작방법에 대한 깊은 리해, 그리고 그것을 지면에 옮기는 완숙한 기량에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밀입국 배의 선창이라는 특수한 상황의 설정,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교차적 시점의 원용 등으로 독자들이 기시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 역시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물론 허점이나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 자리에서 그 부분에 관한 론의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제1회 “단군문학상” 소설 부문의 심사는 한편의 수상작과 그 수상작에 버금가는 여러 추천작의 중후한 하모니로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수상작 외의 모든 추천작에게도 박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5.평론(1): 장춘식의 “일제강점기 조선족 이민작가 연구”(심사평, 우상렬) 장춘식은 중국조선족 문학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둔 중진연구가로 꼽힌다. 본 저서는 그 연구성과의 하나로 볼수있겠다. 본 저서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1998년부터 현재까지 필자가 여러 학술회의에서 발표했거나 학회지에 게재한 론문들이다. 그리고 본 저서를 정리하면서 처음 작성한 론문들도 있다. 장춘식의 끊임없는 학술탐구정신을 높이 살만하다. 본 저서는 김창걸, 김조규, 안수길 등 거의 대부분의 중요한 조선족 이민작가를 연구한 대표성과 포괄성을 띠고 있다. 그의 자료검토가 꼼꼼하고 분석이 투철하며 결론이 타당하다. 일부 새로운 자료도 발굴하고 새로운 견해도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예전에 발표할 때의 관점에 일부 수정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큰 변화를 일으킨 관점에 대해서는 많은 새로운 론술을 가했다. 현경준의 “유맹”에 관한 연구는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본 저서는 기존의 조선족 이민작가 연구에서 미비했던 부분을 어는 정도 보완했고 후학들에게 이 분야 연구의 길잡이 역할을 한 점이 높게 평가된다. 6.아동문학:김철호의 “작은 하늘”(심사평, 한석윤) 좋은 동시작품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좋은 동시작품에는 동심과 시심이 고루 담겨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동심이 찰랑거려도 시심이 담겨있지 못하면 시가 되지 못하고 아무리 시적 향기가 차넘쳐도 동심을 떠나면 동시로 될수 없다 김철호의 “작은 하늘”은 이 면에서 성공을 거둔 동시집으로, 당전 조선족 동시단의 수준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있다. 그의 동시들은 우선 시적 소재나 시각이 동심적이다. 동시적 시각에서 사물을 관찰하기에 그의 시적 소재는 항상 엉뚱하고 앙증맞고 천진하고 순수한것들이여서 부담없이 따스하게 독자들한데 다가선다. 다음으로 그의 동시들은 시적 발상이 단순하고 시적 구성이 간결하고 시적 정서가 명쾌하다. 단순성, 간결성, 명쾌성은 성인시와는 다른 동시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의 동시들은 이런 특점을 구비하고있기에 어린 독자들한테 빨리 다가갈 수있다. 그 다음으로 그의 동시들은 시적인 상징과 비유가 신선하고 앙증맞다. 시인은 어린이들의 리해능력과 류추능력을 떠나지 않는 전제하에 현대시의 유용한 수법들을 대담하게 도입하므로써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까지 공감할 수있는 새로운 시적 이미지를 창조해는데 성공하고있다. 7.한어작품:(1)남영전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我们从哪里来)”[심사평, 서진청(徐振清)] 남영전은 토템시의 명명자이고 창작자이며 탐색자이다. 남영전은 현대의식으로 원시토템을 관조하여 스스로의 토템시에 새로운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남영전은 민족문화의 원류를 되돌아보는 시점에서 서방사상자원을 응용하여 원시토템으로 하여금 새로운 현대적 의의를 띠게 하였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민족친화라는 대주제와 인류는 하나의 운명공통체라는 리념을 표달하였다. 생명에 관하여, 존재에 관하여, 시공간에 관하여 남영전은 자신만의 심오하고 지구적인 철학적 사고를 견지하여 왔다. 시인으로서의 남영전은 깊이가 있는 분이다. 한 민족 군체의 문화는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있다. 저 멀리 머나먼 곳의 수많은 이들은 바로 이 민족 군체의 문화와 관계를 갖고있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우리에게 문화수호와 문화개척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그의 심미관은 중국 고대의 천인합일, 자연순응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것으로 균형과 중용을 주장하고 세계대동을 추구한다. 문화는 한 민족의 생활방식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남영전은 토템문화의 정신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이것은 중국조선족 시인의 천하를 한품에 안는 넓은 흉금과 조화로움을 추구하며 세계를 구하려는 아름다운 념원에 다름 아니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오늘날 중국 시가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한어작품(2):전영선의 “소화십팔년”[심사평, 서진청(徐振清)] 우리는 전용선을 “발견”하였다. “발견”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정말 오래 동안 이러한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용선의 소설은 문학의 가치와 개인서사의 의의를 새롭게 드러내였다. 전용선의 소설은 창의적 창작의 존엄을 회복하였다. 문학의 표준은 어렴풋하고 애매모호한 듯 하지만 사실 시종일관하고 드팀없는 표준이 있다. ‘한스러운 일’, ‘녀동생’ 등 소설에서 전용선은 우리에게 극히 잔혹하면서도 진실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보기에 실로 안스럽지만 또한 절대 거절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전용선의 소설구상은 특이하고 그 언어표현에는 힘이 충만되여 있다. 그의 소설을 읽노라면 고달프고 비장하고 굴욕적이고 파란만장함이 확 안겨온다. 그의 붓끝에서 숨 쉬는 인물들은 굴욕적이든 단호함을 나타내든 모두 조선민족의 넋 속에 숨겨진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전용선은 마치 그 시대로부터 요행 도망쳐 나온 사람 같다. 그는 자기만의 언어로 세계를 향해 자기 민족의 가장 비참하고 가장 감동적이며 가장 귀중한 감정과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극히 랭정한 창작자세와 태연자약한 서술스찔은 그가 하는 이야기와 아주 큰 락차를 이루며 독자들에게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전용선의 력사서술은 예전의 력사학자나 문학가가 쓰는 력사와는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그는 모든 경박하고 오락적이고 마구잡이로 놀아나는, 이른바 항일문학을 수치로 여긴다. 그는 항상 도고하고 독립적인 품격을 견지하였는바 용속하고 저렬하며 사리사욕에 눈먼 현 단계 문단을 하찮게 여기였다. 전용선의 소설은 독창성이 뛰어나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 그는 창작의 거대한 어려움 앞에서 력사에 대해 새로운 해명을 하였다. 그의 창작은 예전의 력사서술의 틀을 깼으며 력사의 변두리를 묘사하는 틀을 타파하여 력사적 기억에 대한 한 차례 민간적 환원과 개인서사를 진행했다. 전용선은 조선족문화과 한족문화라는 이중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농후한 민족적 감정, 민족적 지조, 민족적 정감은 그의 소설에서 극에 달하고 있다. 오직 고난이 막심한 민족만이 이러한 소설을 산생할 수 있고 오직 재앙이 깊은 민족만이 이러한 작가를 산생할 수 있는 것이다. 8.신인:구호준의 “사랑의 류통기간”의 선정 리유(심사평, 최홍일) 중편소설 “사랑의 류통기간”은 사랑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 ‘너’는 평범한 신문기자로서 여러 녀성과 사랑의 갈등을 겪게 되고 나중엔 사랑의 류통기간을 찾으려고 깊은 산골의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그 오두막에서 사랑의 류통기간이 얼마냐는 물음을 갖고 해답을 찾으려고 사색에 사색을 거듭한다. 그러나 해답은 끝내 찾지 못한다. 작품에는 주인공 외에 다섯 녀성이 등장하는데 다가 그와 사랑으로 련계된다. 그러나 사랑의 완성은 하나도 없다. 마지막에 얼굴이 박색인 삼장의 녀인과 성적 관계를 갖지만 그것도 단순한 몸섞음였지 사랑은 아니었다. 작품은 사랑의 류통기간이란 물음을 내걸고 사랑의 본질에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어 독자들의 사색을 자아낸다. 작품은 구상이 신선하고 현대소설 기법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이상 각 부문 별 심사를 마감한다. 어느덧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이다. 되돌아보면서 총화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제1차 “단군문학상” 심사를 계기로 우리 조선족문학을 되돌아보며 총화하여 보았다. 주옥같은 작품들이 반짝였다. 그래서 우리 조선족문학은 희망적이다. 이제 제2차, 제3차... 무궁무진하게 이어질 우리 조선족문학의 노벨상-“단군문학상”이 있기에 우리 문학은 거듭 새롭게 태여나며 문학의 최고봉으로 거침없이 매진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 [단군문학상]민족문학창작의 새 기원을 열어가자 편집/기자: [ 안상근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12-27 13:39:03 ]  제1회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 시상식에서 한 연설 신봉철(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리사회 리사장) 수상자 여러분, 래빈 여러분, 동지들, 벗들: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여 성대하고도 소박하게 제1회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 시상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우선 저는 “단군문학상” 리사회를 대표하여 제1기 “단군문학상” 수상자들에게 열렬한 축하를 드립니다. 아울러 래빈 여러분, 동지들, 벗들에게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모택동동지 탄신 122주년 기념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특수한 날을 선택하여 “단군문학상” 시상식을 거행한것은 심각한 기념의의가 있습니다, 모택동동지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부터 습근평총서기의 지난해 “문예사업좌담회의 연설”까지 한갈래 주선이 시종 관통되여있는바 이는 곧 문학창작의 인민성입니다. 우리가 “단군문학상”을 설립한 중요한 의의는 두 위인의 중요한 연설의 정신을 깊이 리해하고 우리 민족의 작가, 시인들로 하여금 시대에 부끄럽지 않고 력사에 부끄럽지 않으며 민족에 부끄럽지 않는 불후의 명작들을 창작하도록 고무격려하려는데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마음속으로부터 호소하고 싶습니다. 첫째, 우리 모두가 “단군문학상”을 가꿉시다. “단군문학상”은 갓 땅을 뚫고 나온 새싹같은것으로서 하늘을 꿰지르는 큰 나무로 자라날수 있는가 없는가는 전적으로 우리 모두의 사랑과 보살핌이 수요됩니다. 자신의 눈동자를 아끼듯이 “단군문학상”을 아끼여 건강하게 성장할수있도록 조건을 마련합시다. 둘째 우리 모두가 “단군문학상”을 아낍시다. “단군문학상”은 마치 갓 발굴한 문학화원의 광석같은것으로서 정밀한 조각을 통하여 보석마냥 빛나는 아름다운 예술품, 불후의 작품이 되여야 합니다. 우리 작가, 시인들의 노력을 통하여 주선률을 선양하고 인민성을 강화하여 더욱 많은 보석과 같이 빛나는 명편거작들을 창작합시다. 셋째, 우리 모두가 “단군문학상”을 발전시킵시다. “단군문학상”은 동풍을 향해 나붓시는 기발로서 휘황찬란한 민족문학창작의 미래를 가리키고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중화대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나가고있습니다. 당의 민족정책, 문예정책은 우리 문예사업자들은 물론, 많은 지성인들을 동원하여 민족문학창작의 새장을 펼쳤습니다. 민족문학창작의 새장은 반드시 문학의 “고원”으로부터 문학의 “고봉”으로 톺아올라야 합니다. 이는 바로 우리 “단군문학상”리사회의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위대한 민족은 반드시 위대한 문학작품이 있어야 합니다. “단군문학상”의 설립이 우리 이 우수한 민족의 문학창작발전을 도울수있다면 우리는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동지들, 벗들: 무수한 력사경험이 증명하는것처럼 그 어떤 신생사물의 성장은 순풍에 돛단듯이 순조롭지 않을것입니다. “단군문학상”을 가꾸고 아끼고 발전시키는 길에서 우리는 이미 험난한 앞날을 예감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의 민족정책, 문예정책의 인도하에 오직 이세상에 정의(正义)가 존재한다면 “단군문학상”은 반드시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마냥 온 누리에 빛발뿌릴것이며 불후의 명작으로 중화대가정의 문학백화원에 어엿이 자리매김할것입니다. 우리 모두 두팔 벌려 이 아름다운 미래를 맞이합시다. ============================================================== [단군문학상]제1회 단군문학상 수상소감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12-28 09:56:49 ]  소설부문 허련순: 민족의 집을 찾는 일을 계속 할것이다   2015년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조선족문학사상 가장 큰 상인 단군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여 너무 감사합니다.   단군문학상설립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신 운영위원회 신봉철 회장님과 오장권 부회장님, 최국철 주석님 그리고 심사위원 전체 선생님들에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는 우리 민족의 집 찾기입니다. 물론 민족의 “집”을 찾는 일은 모험이 되겠지만 저는 시대의 상황에 영합하지 않고 현실에 고뇌하며 실존하는 인간을 정직하고 치렬하게 써갈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중죽조선족 문학공간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설자리도 갈수록 위축되고있습니다. 단군만학상이 조선족문학의 공간 확장에 활력소가 되고 중국 소수민족문학사에서 가장 권위적인 문학상으로 부상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신 모든 분들께서 새해에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프로필: 1955년 1월 16일 연길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한국광운대학 국어문석사, 중국작가협회 회원, 1급작가, 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11기 연변주정협위원. 장편소설 《바람꽃》, 《뻐꾸기는 울어도》, 《잃어버린 밤》, 《중국색시》, 《사랑주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등과 소설집《사내 많은 녀인》, 《유혹》, 《우주의 자궁》, 《바람을 몰고 온 녀자》 등 다수를 출간했으며 소설《가출풍파》, 《하수구에 돌을 던져라》 등 작품들이 초중교과서에 실렸다. 드라마《녀자란 무엇입니까》, 《갈꽃》, 《떠나는 사람들》 등과 장편화극《둥지》, 《과부골목》, 《별의 시인 윤동주》 등 다수 발표. 제6회소수민족문학준마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동북3성금호상, 윤동주문학상, 민족문학문학상, 연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제18회 해외한국문학상 등 30여차 수상. 시부문 김영건: 보다 따뜻한 사랑으로 세상 모든것을 포옹하겠다   연변인민출판사 《문화시대》잡지 주필을 맡고있는 김영건입니다.   단군문학상, 우리민족의 시조 단군의 이름으로 명명된 제1회 단군문학상에 저의 시집《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가 당선되여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흥분되고 너무나 떨립니다. 제1회 단군문학상은 그사이 우리문학의 15년을 총화한다는데서 그 의미가 더욱 깊고 어깨도 무겁습니다. 앞으로 저는 단군정신을 본받아 우리민족의 혼을 살리고 보다 따뜻한 사랑으로 세상 모든것을 포옹하기에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자연의 합일과 우주적인 사유의 공간을 확장하여 저의 시를 보다 풍성하게 하고 보다 좋은 시를 창작하기에 최선을 다할것입니다. 오늘 우리민족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단군문학상을 창설한 여러분과 심사위원 여러분, 그리고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이 영광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프로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중국작가협회 회원, 국가1급 감독, 연변시가학회 회장, 《문화시대》주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부 주임, 감독. 소품원지《주말극장》 총연출, 제작인,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음력설야회》(5회) 총연출, 제작인 등 력임. 중국 100대 방송인, 길림성10대 방송인, 전국소수민족준마상, 중국조선족출판문화대상《우수편집인상》, 길림성두루미상, 연변조선족자치주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제5회 정지용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수상. 시집《사랑은 전개가 없다》, 《빈자리로 남은 이유》,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 시화선집《중국조선족시화선집》(주필), 대형문화화책《숨시는 두만강》, 《연변조선족비물질문화유산화책》 등 펴냄. 산문부문 장정일: 생각하고 사색하고 음미했다   오랜 세월 저는 생각, 사색, 음미라는 단어를 사랑해왔습니다.   수필 평론과 집필은 동년의 감성을 불러오고 사색의 가파른 령길을 오르게 해 좋았고 이따금 정신의 신대륙을 만나게 해주어 유익했습니다. 깊어가는 겨울 문화성지 룡정에서 갖는 이 뜻깊은 자리가 부족한 저의 자성과 령혼의 자유로운 비상을 위한 분발의 계기임을 자각합니다. 통큰 사유로 문화건설력사에 큰 획을 그은 단군문학상리사회에 삼가 경의를 표하며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프로필: 길림성룡정시 태생. 1967년 연변대학 중문계 졸업. 연변일보 부총편, 중국소수민족신문연구원 부회장,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등 력임. 연변작가협회, 중국작가협회 회원. 칼럼집 《사색의 즐거움》, 문학평론집 《변방-또하나의 시작》, 미니소설수필 수상작품집 《겨절앞에 머리숙이게 하소서》(공저, 수필부분), 수필집 《세모의 설레임》 등 출간.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장백산》모두모아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외문학사 해외문학대상, 연변주정부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등 수상. 보고문학부문 리혜선: 기쁨을 나누고 싶다 오늘 저는 우리 민족의 시조님의 이름으로 명명된 단군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여 너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큰 영예를 안겨주신 “단군문학상”리사회를 비롯한 여러 관계단위와 평심위원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단군문학상의 취지는 중국조선족문학의 부흥에 있습니다. 이 수상의 기회를 더 큰 채찍으로 생각하고 문학에 더 정진해야겠다, 그리고 대중한테 성큼 다가갈수 있는, 삶의 진실로 다가가는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률성평전》이 세상에 나올수 있도록 물심량면으로 지원해준 중국작가협회, 성정부,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그리고 연변작가협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큰 상의 기쁨을 항상 저를 관심하고 격려해준 사랑하는 문단 동인들과 친구들, 그리고 소중한 가족과 형제들과 나누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프로필: 1956년 길림성 연길시 출생, 1981년 12월 연변대학중문계 한어전업 졸업. 1989년 로신문학원 졸업, 연변일보, 길림신문 기자, 편집, 연변작가협회 창작실 주임, 중국작가협회 제6, 7기 전국위원회 위원 력임. 1급작가. 장편소설 《붉은 그림자》(《红影》중문) , 《붉은 나비》, 《생명》, 인물평전《정률성평전》, 장편보고문학 《방황과 희망의 보고서》, 《충청도아리랑》, 《두만강반충청도촌》, 장편아동소설《김학철이야기》, 《사과배아이》 등 다수 출간. 제5회 제7회 전국소수민족문학상, 연변조선족자치주 제5, 6회 진달래문학상, 제4회 연변작가협회문학상 등 다수 수상. 평론부문 장춘식: 문학이 살아야 민족도 삽니다   먼저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상을 받게 되여 대단히 영광스럽습니다.   우리의 문학환경이 좀 어렵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문학을 사랑하고 민족문화를 관심하는 분들은 여전히 꾸준히 노력하고있고 좀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설립한 “단군문학상” 역시 그런 노력의 한 결실이 될것입니다. 문학은 정신적량식입니다. 문학이 살아야 민족도 삽니다. 다시 한번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프로필: 길림성 룡정시 개산툰진 선구촌 출생. 중앙민족대학 조문과 졸업.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민족문학연구소 연구원, 박사. 중단편소설 30여 편, 문학평론 50여 편, 시 50여 수를 발표. 문학평론집 《시대와 우리 문학》, 소설집《음성양쇠》, 《파멸에로의 욕망》, 《해방전 조선족이민소설연구》, 《일제강점기 조선족 이민문학》 등 출간. 광선컵문학상 평론상, 《흑룡강신문》시문학상, 《장백산》소설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조선족문학비평상 등 다수 수상. 아동문학부문 김철호: 동시창작은 숭고한 예술활동   15년의 연변문학총결산에 저의 동시집이 뽑힌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느낌니다. 평심위원들과 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리사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동시집에 예쁜 그림을 그려준 아들 김휘에게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싶습니다. 동시인은 아이들의 유치한 마음을 고스란히 그리는 글쟁이가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상상력을 아이들 마음에 맞게 표현하는 예술가입니다. 동시창작은 숭고한 예술활동입니다. 때문에 간고한 탐구가 따르게 됩니다. 더 좋은 동시를 창작하는것으로 이번 영광에 보답하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프로필: 1951년 룡정시 개산툰 출생. 연변대학 졸업. 연변인민방송국 문학편집. 연변일보 론설부, 문화부 주임 력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제1회 연변작가협회YUST문학상(아동문학부문. 2002년) 한국《아동문예상》본상(200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제5회《진달래》문예상 작품상(2005년) 제1회 윤정석아동문학상본상(2007년), 제16회 정지용문학상(2012년) 등 수상. 동시집《연필 숨 쉬는 소리》(2002년 민족출판사), 시집 《우리는 다 한올 바람일지도 모른다》(2012년 연변인민출판사) 등 출간. 한문창작부문 남영전: 단군사상을 터득하는것이 목표   단군문학상은 우리 작가들이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을 모시는 상이기에 저는 큰 고무를 받았습니다.   단군은 천일합일의 상징이고 자아수련의 상징이며 건전한 사회를 창도하는 선지선작자입니다. 때문에 단군은 우리 민족과 영원합니다. 저는 항상 단군사상을 터득하는것을 창작의 방향과 목표로 하고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심혈을 다하여 단군이름에 부끄럼지 않는 작품을 창작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프로필: 1948년 3월 3일 길림성 휘남현 출생. 길림성작가진수학원 졸업. 《장백산》잡지사, 《길림신문사》 사장 력임. 시집 《록색의 꿈》, 《상사집》, 《신단수》 등 16부, 수필집 《잊을수 없는 사람들》 등 3부, 번역집 《당송전기집》, 《봉신연의》, 《파금단편소설집》 등 3부 출간.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전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 중국작가협회민족문학상, 길림성장백산문예상,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당대 걸출한 민족시인시가상 등 다수 수상. 1995년 국무원특수수당금 향수자. 한문창작부문 전용선: 어머니가 보았으면 얼마나 기뻐했을가   오늘은 저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날이고 단군문학상은 매우 무게가 있는 상입니다. 동포들의 후더운 사랑과 긍정이 담긴 이상을 받아 더없이 영광스럽습니다.   오늘은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어머니께서 제가 조선족복장을 입고 시상식무대에 오른것을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단군문학상리사회와 여러 평심위원들과 친구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프로필: 1966년 1월 11일 흑룡강성 가목사시 출생. 가목사제2중학 졸업, 북대황문공단 창작원, 《3강만보》 기자부주임 등 력임. 흑룡강성작가협회주석단성원, 중국작가협회 회원, 현재 북경 거주 드라마창작에 종사. 대표작 《현애》(드라마), 장편소설 《독신자》, 《소화18년》, 《설흔》, 《세월》 등 다수. 흑룡강성제2회 문예정품공정상, 북경건국55주년 우수작품상, 흑룡강성제1회소수민족문학상, 2012년 제18회 상해 텔레비죤절 최우수극본상 등 다수 수상. 신인상 구호준: 한계는 있어도 정상은 없다   우선 오늘 저에게 이렇듯 큰 영예를 주신 단군문학상리사회와 평심위원님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문학이란 어떤 정상을 향해 가는 즐거운 려행이 아니였습니다. 저에게 문학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고 몸부림이였습니다. 오늘의 이 영예도 저의 문학에 대한 어떤 긍정이 아닌 선배님들의 저에 대한 기대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영예란 저에게 또 다른 한계가 되겠지요. 항상 자신을 극복하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한계에 도전하는것으로 문학선배님들에 대한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프로필: 1972년 화룡현 출생. 연변대학조문학부, 로신문학원 8기 졸업, 한국부산영상작가원 수료. 화룡시문화관, 연변인민방송국 문학편집 등 력임. 연변작가협회 회원, 재한동포문인회 부회장. 연변일보 해란강문학 신인상, 한국월간아동문학상, 연변일보 CJ문학상, 연변작가협회 김학철문학상 등 다수 수상. 수필집 《당신의 그늘》, 중편소설집《사랑의 유통기간》 출간.   “단군된장술” 세상에 고고성 편집/기자: [ 안상근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12-27 14:21:05 ]  “단군된장술” 개봉식 장면  2015년 12월26일, 중국조선족 제1회“단군문학상”시상식과 겹경사로 연변오덕된장술유한회사가 야심차게 준비한 “단군된장술” 개봉식이 연길해란강민속식당에서 있었다. 조선민족 시조인 단군의 이름으로 명명한 “단군된장술”은 우리민족 옛조상의 전통음식공예로 빚어낸 술이라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단군된장술”을 개발,출시한 연변오덕된장술유한회사 리동춘사장은 현재 중국은 물론 조선과 한국을 비롯해 우리민족의 당당히 내놓을만한 명주가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하면서 향후“단군된장술”을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민족의 으뜸가는 명주로 육성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연변오덕된장술유한회사에서는 조선의 라진에 술공장을 세우고 된장술의 해외진출에도 앞장서고있는데 명년 1월중 정식생산에 투입할 예정이다.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댓글 수0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역설 모든 건 덧없이 녹아내리니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다 (원문 The only emperor is the emperor of ice-cream) - 월리스 스티븐스(1879~1955), ‘아이스크림 황제’ 중에서 이 한 줄은 시 ‘아이스크림 황제(The Emperor of Ice-cream)’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필자가 오랫동안 매료됐던 구절이다. 미국 시를 한 차원 올려놨다는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도 자신의 시 중에서 이 시를 가장 선호했다고 한다.      이 시의 정황, 부엌에선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고, 침실엔 시체가 누워 있다. 죽은 여자는 자신이 화려하게 수놓았던 시트로 얼굴이 덮여 있으나 딱딱한 발이 시트 밖으로 삐져나온다. 그것이 얼마나 차갑고 무감각한지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우리 앞에 놓인 죽음은 그 무엇으로 가릴 수도, 장식될 수도 없다는 뜻일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하나 순간 녹아버린다는 점에서 우리 삶과 닮아 있다. 얼음 디저트라는 점에서는 시체의 차가움을 은유한다. 시인은 달콤한 기쁨을 주다 덧없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야말로 절대적인 황제라 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다. 그중 최고로 덧없는 모습은 아이스크림의 거품이다. 뭉게구름 같은 그것이 덧없음의 황제 아이스크림 황제다. 이 허무주의적 진실을 이렇게 한 줄로 꿰뚫어 요약하다니, 이 구절이야말로 시의 엑스터시로서 우리를 녹아내리게 하는 아름다움 아닌가.    최정례 시인 DA 300   [전문] 아이스크림 황제                                  월리스 스티븐스                                         /최정례 졸역 여송연 굵게 마는 자를 불러라 근육질의 사내로, 그리고 그로 하여금 부엌의 컵에 욕정적인 응유를 휘젓게 하라 계집들은 늘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빈둥거리게 하라 그리고 남자애들은 달지난 신문에 꽃을 싸서 가져오게 하라 실재로 하여금 최후의 모습이 되게 하라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다 유리 손잡이가 세 개나 떨어져 나간 전나무 경대에서 그녀가 한때 부채꼬리딱새를 수놓았던 그 시트를 꺼내라 그녀의 얼굴이 잘 덮이도록 펼쳐라 만약 굳어버린 발이 삐져나온다면, 그건 그녀가 얼마나 차가운지 얼마나 무감각한지 보이기 위한 거다 램프로 하여금 빛줄기를 첨부하게 하라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 황제다 ==========================================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댓글 수0 경청        - 김정수(1963~ )   누군가에 더러운 것 누군가에겐 일용할 양식 구르는 재주 없어도 굴리는 재주 있다고 DA 300   쇠똥구리 지나간 자리 길 하나 보인다 더러운 배설물이 쇠똥구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다. 내게 없는 재주를 다른 사람이 갖고 있다. 세계는 이렇듯 배리(背理)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압이 새를 공중에 뜨게 하고, 무거운 물체가 물 위에서 더 큰 부력을 얻는다. 그러니 큰 배가 덜 흔들리는 것이다. 가로막는 산이 있으니 산을 넘는다. 끝장났다고 생각할 때 새 날이 가깝다. 반대 극을 가진 자석이 쇠를 끌어당긴다. (어려운 말이지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바울). 배리의 담론을 경청할 때, “길 하나/ 보인다”.   [출처: 중앙일보] [나를 흔들 시 한 줄] 최정례 시인
 “요즘 詩는 난해하다 못해 어불성설… 기부입학하듯 등단하는 세태 우려” ‘문학과 지성’‘창작과 비평’ 지방작가 결코 기억하지 않아 코드 맞는 자기네끼리 연대 무상의 사회기여가 詩정신 원로끼리 賞나눠먹기 안돼 “가장 쉬운 단어로 가장 깊고 오묘한 세계를 그려낸게 좋은 시”라며 요즘 난해시에 중독된 젊은 시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도광의 시인.  도광의 시인(71). 광기와 열정의 접점에 서 있다. 196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가작으로 당선됐으며, 74~78년 김춘수·신동집·박양균 시인으로부터 ‘갑골길’이 3회 추천되면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다. 지금까지 딱 2권의 시집만 냈다. 괴팍한 성정의 그로부터 대구 시단의 발전을 위한 독설을 듣고 싶어서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서재가 없다. 그냥 안방 침대가 그의 책상이다. 창턱에 몸을 기대듯 침대에 앞가슴을 갖다대고 만년필을 굴린다. 좋은 시를 낚기 위한 배수진같다. 시상(詩想) 자국이 흐르는 500자 원고지 수백장이 침대 한 귀퉁이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보내온 각종 문예지와 시집이 돌담처럼 침대를 감싸고 있다.  경남 마산고를 거쳐 71~96년 대구 대건고, 99년 효성여고에서 교직을 은퇴했다. 시인 서정윤, 이정하, 안도현, 소설가 박덕규, 문학평론가 하응백,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시인 겸 소설가인 김완준 등이 모두 그의 제자다. 제자 덕을 봤다면 지금쯤 중앙 문단에서 큰 기침도 할 수 있었겠지만…. 가끔 속상하다. 서울 굵직한 문예지는 물론, 자신이 등단한 현대문학도 그를 외면한다. ‘지방 시인’이라서 그런가 싶어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도광의 시인의 퇴고 흔적 ▨ 도광의 시인 일문일답 -황병승 시인 등 요즘 리딩그룹의 젊은 시인들의 시는 참 어렵다. 자기는 물론 독자도, 평론가조차 무슨 말인지 모른다.  “김소월의 ‘진달래꽃’부터 박목월과 서정주를 거쳐 김춘수까지 지난 세월 우리 시는 많은 변모와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런데 요즘 너무 난해하다 못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되고마는 시가 많다. 시가 의미있는 것이 되려면 난해할지언정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된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보자. 흰 돛단배들이 떠 있는 지중해를 비둘기들이 거닐고 있는 기와 지붕에 비유한 첫 행의 이미지는 얼마나 눈부실 만큼 정치한가. ‘저 오수(午睡)에 빛나는 수많은 기왓장들, 돛단배들이 먹을 것을 찾고 있는 조용한 지붕 밑을…’이와 같이 시가 난해해도 그 의미가 시의 보편성의 어느 언저리라도 닿아 있어야만 시의 보편성의 테두리를 넓혀준다. 시는 보편성이 희박하고 지나치게 특수성에만 치우치면 난해해지고 논리의 비약을 일으키기 쉽다. 시가 시다워야 하는데 시는 없고 언어의 특유한 옷자락만 현란하게 펄럭이고 있다. 순진한 아포리즘(Aphorism)이 화장을 하고 그럴듯한 시로 진열되고 있는 이 시대에 시다운 모습을 갖고 있는 시가 차츰 드물어져 가고 있는데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대구는 ‘대한민국 시 1번지’다. 이상화, 이장희, 김춘수, 신동집, 박목월, 유치환, 구상 등 한국 근대시의 출발은 물론, 70~80년대 한국 현대시의 골격을 이룬 유명 시인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구에서 나왔다. 국내 시집 출판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홀로서기’의 서정윤 시인도 대구가 고향이며, 이성복~이하석~문인수는 현재 한국 시의 블랙홀 구실을 한다. 이밖에 젊은 나이에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장정일, 안도현도 대구를 모태로 시정신을 엮었다. 그런데도 대구의 시인은 대구발 시적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하고 자꾸 서울의 아우라를 역이용하려는 것 같다. 서울 문단에 결재를 받아야 자기 문학이 완성되는 것처럼 부단히 서울을 오가는 지역 문인들이 자기만 유명해지고 후배들은 방치하고 있다. 대구시문학 발전에 걸림돌인 것 같다.  “한국 최고의 문예지로 불리는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은 결코 지방 작가를 기억하지 않는다. 자기들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연대, 폐쇄적으로 운영을 한다. 특별한 몇몇을 빼고 일반 지방시인들은 죽어도 명함을 못 내민다. 세상 일이 원래 그런 것이지만 그럴수록 지방의 좋은 시인들은 간접적으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자. 그 소외감이 이를 더 악 물게 만들고 오히려 좋은 시를 낳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유명 문예지도 필요없다. 종국에는 좋은 시를 쓰는 사람만이 빛을 보게 된다. 시만 좋으면 중앙과 지방의 문턱이 없다.” -시인이 너무 많다. 덤핑시인이 양산되는 것 같다. “요즘 주변에 이런저런 문학잡지가 우후죽순 돋아나고 있다. 그 잡지를 통해 문학하는 건 좋지만 몇 가지가 염려스럽다. 한꺼번에 책을 많이 사주면 기부입학하듯 등단시켜준다. 나도 솔직히 얼마전까지 그런 흐름에 휩쓸린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젠 거리를 둔다. 심사평 등을 부탁해도 제대로 된 시가 아니면 거절한다. 등단이 목적인 사람들은 문협에 가입하고 나면 단번에 문인행세부터 하려고 거드름을 피운다. 특히 살만한 중년 여성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멋진 모자를 쓰고, 좋은 차를 타고 폼을 잡는다. 사람이니 그럴 수 있는 거지만 알만한 시인들이 이를 따끔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동조하며 오히려 그들에게 휘둘린다.” -문학상이 너무 많고 권위도 추락했다. 목숨걸고 시를 쓰는 전업시인에게 문학적인 배려가 없는 것 같다. “나이 많은 원로끼리 돌아가면서 문학상을 나눠먹어선 안된다. 상금도 제대로 안 주고 무늬만 문학상인 게 많은데 그건 주는 기관의 권위를 시인의 권위보다 더 앞세우려는 얄팍한 처사다. 그런 상은 수상자가 과감하게 거부해야 된다. 상도 상다워야 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상금도 줘야 한다.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은 좋은 시인에게 돌아가야만 상이 권위를 갖게 된다.” -시정신을 정의하자면.  “시문학은 노력한 만큼 보상이 안 온다. 교사는 평생하면 연금도 나오고 나름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을 갖게 해준다. 나도 교사로 정년을 맞아 편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시는 교직보다 몇 배나 더 공을 들이고 피땀을 흘려도 현실적 보답은 없다. 그게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시인을 대우해주며, 죽으면 시비도 세워주는 것 아닌가. 시창작은 무상의 사회기여이며. 그게 시의 진정한 가치인지도 모른다.” 이춘호기자 
1680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현대시>>의 詩의 계보를 끝내고... 댓글:  조회:1550  추천:0  2015-12-28
야광액으로 빛나는 순록의 왕관... ================================================== 록색평화를 위하는 모든 분들께,ㅡ 시지기 - 竹林이꾸매... 록색평화를 위하는 모든 뭇벗들께;ㅡ 꾹뻑 오랜만에 인사를 보내꾸매... 무사함둥? 깻까잠둥?... 이번 대형 시리즈 를 통하여, 첫째, 시지기가 詩作 방향을 옳바르게 찾았다는것,           (시 등단 30여년래, 천만 불행중 다행인줄로 안다...)   둘째, 난해시, 디질털시, 하이퍼시, 아방가르드시, ... 등은           그 시의 길이 점점 좁아질 뿐만아니라 그 길이 끊난다는것,           (즉, 시의 생명력에 한계가 있다는 얘기...) 셋째, 시는 는것,           (肉化된 순수한 아름다운 우리말, 우리 글 찾아 쓰기) 넷째, 시를 천편을 쓴들, 만편을 쓴들 어떠하리오...           라는것, 다섯째, 우리 조선족 시단에서도 시공부를 좀 하고나서            시에 대하여 말하고 옳바른 시를 쓰자는것...등 등... 이번 대형 시리즈는 를 모티부로 하였는데 일제강점기부터 90년대까지 현대시 100년속에서 주요 대표시작품 151편과 그외 시모음, 시론, 일화, 시비탐방, 문학관탐 등을 곁들었는바,ㅡ 시공부 하는 중 내내 참 너무나도 즐거웠음을 이실직고하꾸매... 그리고 대표 시인, 대표작 시 외에도 수많은 유명한 시인, 명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실지못했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문학상을 받지 못했지만 참다운 문학상을 받을만한 시인도 시도 있었고, 詩碑답지않은 시비도 있었다는것을 부언하고싶으매... 아ㅠ, 참, 깜박,ㅡ 이번 대형 시리즈에 와 여러 인터넷 각 의 크나큰 도움을 준데 대하여 두 무릎을 끓고 고맙다는 인사를 천번만번 보내는바이꾸매... 근데ㅠ,ㅡ 이 시지기한테 라는 반기를 들고 나오면 하는수없이 저는 흰기를 들고 투항하는수밖에... 시지기가 시공부를 하겠다는데는 를 제발 묻지말기만을,ㅡ 제발... 그리고 특히,ㅡ 이 지구 땅덩어리 위의 한글권 詩壇의 과 을 위하여 시와 관련된  들과 많이 공유섭뢰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저 간곡히 호소하매... @@ 블랙박스 = 어영부영... 대충대충... 빈둥빈둥... 꾸물꾸물... 얼렁뚱땅... 허둥지둥... 투덜투덜... 갈팡질팡... 혹시,ㅡ 詩지기의 모습이 아닌지ㅠ? 그리고,ㅡ 인제부터 詩지기는 詩와 재다시 통간한다하잼둥!!!...  
절실한 한마디                     김기택 시인       “요즘 ○○○씨는 왜 수업에 안 나오시나요?”  “모르셨어요? 그분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일반인을 위한 시창작 교실에서 강의할 때 있었던 일이다. 열심히 나와 공부하던 수강생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칠순에 가까웠지만 그는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시도 자주 써냈다. 시를 잘 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즐긴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강의실에 앉아 있을 때 심각한 병을 앓았을지 모른다. 이미 죽음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가 무엇이기에 죽음이 강제로 중단시킬 때까지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쓰려고 했을까?  시를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한 어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선배들이다. 자기 분야에서 만만치 않은 업적을 쌓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운 사람들이다. 한때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가족과 일을 위해서 부득이 꿈을 접은 과거도 있다. 그러나 걸음마를 하듯이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 위해 젊은 선생에게 무안한 지적을 받는 것을 즐겁게 감수하고 있다. 시를 쓰기에는 머리도 굳어버리고 언어를 다루는 순발력도 떨어졌지만 새로운 꿈을 위해 사소한 창피함을 무릅쓰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배움을 통해 삶의 활력을 찾으려는 노년 인구는 많아졌다.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어른들도 꽤 있다. 한 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에는 일흔 살 안팎의 학생 몇 명이 입학했는데,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을 작품으로 남기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삶을 자서전으로 남기기 위해서 등 입학 동기가 다양했다고 한다. 노년의 문예창작 공부는 여가 선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찾으려는 절박한 선택일 수도 있다.  시 쓰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진정한 말을 찾는 일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은 대부분 헛말이다. 웃자고 하는 말,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말,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 쓸모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말이다. 꼭 필요한 한마디 말을 위해 열 마디, 백 마디의 윤활유를 쳐야 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사회와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수단이지 개인이 내면에 지닌 간절한 욕망과는 별 관계가 없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말은 단어와 단어가 이어진 소리의 연속일 뿐이며 내면의 진정한 욕망과는 거의 닿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진실은 말에 닿을 듯하면서도 미끄러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시는 내면의 갈구를 충족시켜줄 것 같은 한마디를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시가 언어의 의미보다는 몸의 감각과 기억과 정서 같은 울림을 살리려고 애쓰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노년의 학생은 좋은 시를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해 애쓴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진정성만 있다면 시를 쓰는 과정의 즐거움은 결과의 실패를 충분히 보상할 수 있다. 꼭 하고 싶은 절실한 한마디의 말을 끝내 찾지 못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찾는 일의 흥분과 긴장은 삶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상쇄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택 시인
바퀴벌레는 진화 중                         김기택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려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엔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고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에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고가지고 있었을까.     로보트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 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둔 채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        바퀴는 3억 년 전에 이 지구상에 출현하여 지금은 4만 종이 넘을 정도로 다양하게 진화해 왔다. 그 중에서 해충으로 분류된 것은 20종 정도인데, 그들은 언제부턴가 인간의 거주지로 몰려와 서로 친구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바퀴에 대한 인간의 적대는 다른 어느 생물종보다혹독하다. 말 그대로 바퀴와의 전쟁(컴배트)이다. '컴배트'가 드디어 바퀴를 몰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3억 년간 진화해 온 바퀴의 생명력과 적응력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그들의 몸은 핵폭발에서도 살아남는다고 한다. 강한 약을 쓰면 바퀴는 더 강한 내성으로 대응한다.인간은 도리어 바퀴가 더욱 강하고 단단하게 진화하는데 한 몫을 하고 있다.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지금 바퀴는 인간을 노려보며 콘크리트 속에서 강철 같은 무장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끔찍하다.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가 이렇게 암담하다면 인간은 바퀴에게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 당할지도 모른다.   김기택(金基澤, 1957 ~ ) 생애 1957년 11월 6일 ~ 출생 경기도 안양 분야 문학 작가 시인. 경기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가뭄’과 ‘꼽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상과 사물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특유의 묘사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집으로 “태아의 잠”(1991), “사무원”(1999), “껌”(2009) 등이 있다. 작품 바퀴벌레는 진화 중 이 시는 환경 오염 문제가 미래에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바퀴벌레’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1연에서는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 인간이 싫어하는 ‘바퀴벌레’가 비대하게 증식하는 현실을 통해 현대 문명으로 인한 환경 오염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2연에서는 비정상적인 ‘바퀴벌레’가 등장한 이유가 인간이 오랫동안 환경을 파괴해 왔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현대 문명의 발달로 환경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환경 오염에 적응을 잘하는 바퀴벌레의 놀라운 생명력을 설명해 주고 있다. 3연에서는 현대 문명이 발달할수록 환경이 더 파괴될 것이라는 우려를 ‘신형 바퀴벌레’의 등장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 과정을 거쳐 결국 이 시는 현대 문명이 초래한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고 있다. 즉, 현대 문명이 발달할수록 환경은 파괴된다는 점과 ‘바퀴벌레’는 오염된 환경에서 더욱 비대해지고 증식하는 생물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바퀴벌레’는 미래에 ‘신형 바퀴벌레’로 진화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금과 같이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개발이 계속된다면 인간 문명이 환경과 생태계를 지금보다 더 파괴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문학) 지학 멸치 이 시는 반찬으로 접시에 담긴 멸치의 작은 무늬에서 바다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 헤엄쳤던 멸치의 역동적 생명력을 발견하고 있다. 바다의 물결과 분리되지 않고 한 몸처럼 움직이던 멸치는 인간이 던진 그물에 잡혀 점차 생명력을 잃고 결국 반찬이 되어 접시에 담기게 된다. 그러나 화자는 이미 딱딱해져 접시에 담긴 멸치에 아직 ‘바다’가 있고 ‘물결’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화자는 생명력의 상실이라는 부정적 인식에 머무르지 않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으며 저항하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아직 멸치에 있음을 인식하며 생명력 회복의 가능성을 노래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두산, 상문 사무원 이 시는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는 사무원의 모습을 불교 수행자의 고행에 빗대어 표현으로써 주체성을 상실하고 사물화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풍자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 사람 다리와 의자의 다리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는 것은 사무원의 삶의 모습이 사물과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자기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가 결여된 채 현상 유지에 급급해하며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수동적인 사무원의 모습은 인간 본연의 가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시인은 이러한 사무원의 모습을 풍자하면서 현대인의 삶에 대한 강한 비판과 반성을 시에 담아내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천재(정재찬) 다리 저는 사람 이 시는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지하철 역사 안에 장애인 한 사람이 걸어가는 풍경을 묘사한다. 그 풍경 묘사에서 시인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시인의 묘사에서 한쪽은 움직이고 있고, 한쪽은 정지되어있다. 움직이는 쪽은 오히려 장애인이다. '춤추는 사람처럼',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는 표현들은 장애인의 움직임이 보여 주는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전해 준다. 그 아름다운 생동은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 주고 있었다.' 라는 표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시인은 아주 차분하게 사람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장애인을 새롭게 보게 되고, 우리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소 이 시는 소의 크고 촉촉한 눈망울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했을 법한 생각을 담고 있다. 소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친구이자, 가족이었고, 농가에 없어서는 안될 일꾼이었다. 천성이 순한 초식동물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난동을 부리는 일이 거의 없는 소는, 유순한 성격 때문에 또한 안타가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화자는 가만히 소의 눈을 들여다본다. 크고 맑은 눈망울은 분명 화자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것 같은데 동물인 소는 그럴 수가 없다. 2연에서는 말하고 싶은 마음을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있다'라는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표현하였다. 3연에서 화자는 소의 눈을 '순하고 동그란 감옥'으로 비유하였으며 4연에서는 소의 소화계 특성인 '되새김질'을 소가 말하고 싶은 마음에 빗대어 소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었다. ==================================================              괄호의 미학   뒤샹의 과 김기택 시집『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    지배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강조해 보여줄 미디오만을 '괄호'에 넣는다. 어떤 판단이든 '괄호'에 넣어진 것은 '괄호'에 안 넣은 것을 무시한다. 우상의 실체를 보려면 내부로부터 '괄호 벗기기'(unbracketing)를 해야 한다.    알랭 바디우가 『비미학(非美學)』이라는 책을 낸 것은, 미학을 부정하고 제거하자는 말이 아니라, 본래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미학의 ‘괄호’를 벗기고 재구성 하자는 것이다. 새로 ‘괄호’ 안에 넣고, 또 ‘괄호’를 벗겨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자는 것이다.  1.       1917년에 있었던 뉴욕 앵데팡당(inde'pendant)전 출품작으로 R.MUTT란 가명의 인물이 출품한 작품은 남성용 변기였다. 변기회사 이름인 Mott Works라는 단어를 살짝 바꾼 이름의 제출자 R.MUTT라는 자가 내놓은 작품 ‘변기’의 작품제목은 이었다. 당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뒤샹은 그해 앵데팡당전의 운영위원이었다. 뒤샹 이외의 운영위원들과 설치위원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황당했다.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품을 내걸수 있는 특별전시회였지만, 결국 운영위들은 이 작품을 전시장 칸막이 뒤에 놓기로 했다.    뒤샹은 전시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에게 반격했다. 을 왜 전시하지 않았는지 주장하며 뒤샹은 미술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은 ‘예술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전복시킨 사건이었다. 뒤샹은  그후 이 외에 자전거 바퀴나 옷걸이 등 원래 있는 사물을 전시했고, 이런 사물들에 대해 그는 '레디 메이드(ready made, 기성품)라는 이름을 붙였다.    뒤샹이 미술전에 변기를 전시한 것은 새로운 예술을 “괄호에 넣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괄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선언이다. 만약 뛰어난 예술이라면 ‘괄호’ 안에 넣고 벗겨도 다른 해석을 허락할 것이다.     벤야민은 복제시대에는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실은 그 반대로 복제시대에 그때까지의 예술작품에 아우라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앤디 워홀 같은 이의 복제품이 ‘괄호’에 넣어진 것이다. 2.     ...김기택 시인이 신간『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을 내셔서, 선배님의 밥을 얻어 먹었다. 내가 모셔야 하는데 얻어 먹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코코브루니에 가서 차를 대접했다. 내가 방금 ‘대접’이라고 썼는데, 나에게 김기택 시인은 그런 존재다.     다른 장르에 한눈 팔지 않고 시집만 여섯 권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여섯 권이라는 숫자는 그의 집중력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숫자다. 노동자 시인 최종천 형님과 더불어 내가 이 시대의 시인으로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숙명여대에서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 중 시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꼭 김기택 시인의 시창작론을 들으라고 권해 왔다. 그날 선배와 대화하다가 얻은 두 가지 말을 기록해두고 일해야겠다.     “김 선생님이 일본에서 있는 동안 시 쓰기 어려웠을 꺼예요. 아무래도 외국에 있으면 좋은 시를 읽고 시에 질투를 느끼는 기회가 적지 않을까요?"    나는 ‘시의 질투를 느낀다’는 문장에서 멈칫 했다. 바꾸어 말하면 김기택 시인은 좋은 시에 질투를 느끼며 더 탁월한 시를 쓰려고 집중해 왔다는 고백일 것이다. 그가 미학적 질투를 느낀 결과, 그가 즐겨 쓰는 수법은 ‘괄호의 미학’이 아닌가 싶다. 나는 김기택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뒤샹의 이 생각나곤 했다. 김 시인의 시 중 비교적 짧은 시를 읽어보자.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      부딪쳐 멈춰버린 순간에도 바퀴를 다해 달리며      온몸으로 트럭에 붙은 차체를 밀고 있다.      찌그러진 속도를 주름으로 밀며 달리고 있다.      찢어지고 뭉개진 철판을 밀며      모래알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유리창을 밀며      튕겨나가는 타이어를 밀며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고 있다.      겹겹이 우그러진 철판을 더 우그러뜨리며 달리고 있다.      아직 다 달리지 못한 속도가      쪼그라든 차체를 더 납작하게 압축시키며 달리고 있다.      다 짓이겨졌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속도가      거의 없어진 차의 형체를 마저 지우며 달리고 있다.      철판 덩어리만 남았는데도      차체가 오그라들며 쥐어짠 검붉은 즙이 뚝뚝      바닥에 떨어져 흥건하게 흐르는데도      속도는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ㅡ김기택,「고속도로・4」전문(밑줄은 인용자)    김기택 시인의 특장을 잘 드러내 주는 시다.     시의 첫행은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다. 이 시에 나오는 ‘속도’라는 단어를 ‘사람’ 혹은 ‘운전자’로 대체하면 어떨까. 그렇지만 시인은 끝까지 ‘속도’로 명기한다. 인간은 오직 속도와 다름없다. 시인이 주목하는 ‘괄호’ 안에는 오직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속도’만이 존재한다.     김기택 시인은 한 장면을 ‘괄호’에 넣는다. 그리고 ‘괄호’ 안에 돋보기를 들이민다. ‘괄호’ 안을 치밀하고 끈질기게 투시하고 묵상하고 미시(微示)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괄호’를 벗겨내고, ‘괄호’ 안에 들어가지 못한 ‘무관심’의 입장에서도 ‘괄호’ 안을 판단한다. 그는 늘 ‘괄호’ 안의 비극적인 사건을 무관심의 거리에서 바라보아, 전혀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 급한 낭만주의자라면 ‘괄호’ 안에서만 평가하려 할 것이다. 저 자동차에 탄 인간의 죽음을 비극적으로 묘사할 것이다. 김기택 시인은 ‘괄호’ 밖에서 ‘괄호’ 안을 무관심하게 전복시킨다. 시인의 ‘괄호’ 안에는 이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한다. 인간의 대체물이 된 ‘속도’는 처절하게 붕괴되어도,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3.     “선배님 시 중에 지하철에 관한 시가 있어요. 그쵸?”    “맞아요. 나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시를 쓰곤 해요. 골방에서 쓰면 시가 잘 안 돼요.”    여기서도 멈칫 했다. 작가들 대부분은 골방에서 글을 써야 한다고 한다. 송경동은 거리나 광장에서 시를 쓴다. 나는 거리/연구실, 학교 교실/대중강의, 고급문체/홈리스 문체의 ‘사이’에서 글을 쓰려 했다.     김기택 선배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시를 쓰고, 컴퓨터로 교정 보기보다는 프린트 해서, 원고 교정 보듯이 본다고 한다.    김기택 시인은 철저하게 대상에 거리를 두며 시를 쓰는 성실한 문사다. 그의 창작 미학 중의 한 방법은 괄호에 넣고 빼기다. 위에 인용한 시에서 ‘속도’를 비판했듯이, 그는 느린 삶을 살고 있나보다.     지배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강조해 보여줄 미디오만을 ‘괄호’에 넣는다. 어떤 판단이든 ‘괄호’에 넣어진 것은 ‘괄호’에 안 넣은 것을 무시한다. 그렇지만 뒤샹과 김기택 시인은 ‘괄호’ 안을 의심하고, ‘괄호’에 들어가지 않아 주목되지 않는 ‘비인간화’를 오히려 괄호에 넣는다. 그래서 우상의 실체를 보려고 내부로부터 고정관념을 ‘괄호 벗기기’(unbracketing) 한다.    김 선배 시집을 연구실에 들어와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첫페이지에 써있는 을 읽어 본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부럽다. 저 ‘괄호의 미학’에 질투해야겠다.        "죄송하지만 또 시집을 낸다. 시 쓰는 일 말고는      달리 취미도 재주도 할 일도 없는 내 뛰어난      무능력과 활발한 지루함과 앞뒤 못 가리는       성실함 탓이다."           ㅡ2012년 10월 김기택 시 창작이란 무엇인가 김기택 (시인) 시는 일상적인 언어의 말하기와는 달리 ‘창작’이라고 말한다. 창작이란 이전에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든다는 의미이다. 왜 일상적인 언어는 창작이라고 하지 않으면서 시는 창작이라고 하는가. 시를 쓰면 이전에 없던 무엇이 새로 있게 되는 것인가? 즉 무의 상태에서 유의 상태로 바뀌는 그것은 무엇일까? 시가 일상적인 어법, 산문적인 문장과 다르기는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거기에 창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가? 행갈이나 연 구분, 리듬이나 비유, 상징, 반어, 역설 등을 사용하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언어나 문장이 생기는 것인가? 요즘 텔레비전에서 음식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방영한다. 거기 보면 어느 유명한 식당의 요리라든가 또는 어느 지방의 특별한 재료를 사용했다는 음식들이 소개되기도 하고, 어느 음식이 맛이 있는지 경쟁하기도 한다. 공중파라는 매체의 특성상 시청자는 시각과 청각으로만 그 음식을 대하면서 상상할 수 잇을 뿐, 그것을 먹어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청자들에게 일일이 맛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니 음식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나서 출연자가 대표로 맛을 본다. 맛을 봤으면 시청자들에게 그 맛이 어떤지 말로 설명을 한다. 그 설명이란 것이 고작 ‘담백하다’, ‘깔끔하다’, ‘쫄깃쫄깃하다’, ‘고소하다’ 이런 정도인데,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출연자가 직접 먹어본 맛의 경험 그대로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즉 맛에 대한 감각 체험을 시청자가 비슷하게라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이 턱없이 빈약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출연자가 하는 말은 ’직접 먹어봐야 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시청자는 출연자의 그 빈약한 말보다는 영상을 통해 상상하는 것이 맛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데 훨씬 유리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의 맛을 체험적으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수천 년간 말을 써왔고, 단어나 표현법이 계속 생겨서 말이 계속 발전을 해왔는데도 말이다. 맛 뿐만 아니라, 소리는 어떤가? 처음 듣는 새 소리,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노래나 연주, 말로 그 느낌이나 감동을 실제 체험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있을까? 냄새, 향기는 어떻고, 몰래 좋아하던 애인의 손을 처음 만졌을 때의 촉감은 또 어떤가? 또 감정이나 정서는 어떤가? 내가 이성에게 반해서 온몸이 그 사람에게 강력하게 끌리는 것을 느낄 때, 그 생생한 느낌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체험한 그대로 말로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말이 그 체험의 실감과 질감을 그대로 나타내줄 수 있을까?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 그 느낌을 ’슬픔‘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실제의 느낌과 얼마나 가까울까? 어렸을 때의 기억,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떠오르는, 다시 체험하고 싶은 추억들은 또 어떤가? 이것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여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우리 몸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하듯 생생하게 표현해 줄 마땅한 단어나 문장은 의외로 찾기 힘들다. 우리 몸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 실체가 느껴지는 생명체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하루 종일, 일생 내내 나와 함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체를 체험한 그대로 표현해 줄 단어나 문장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내면에서 꺼내어 언어에 옮기고자 하는 순간, 그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은 개념으로 변하고 만다. 짜다, 달다, 아름답다, 곱다, 사랑, 슬픔, 괴로움 따위의 말이 그것이다. 개념은 의미를 압축시켜 놓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가 체험한 것에서 몸의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빼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만 남겨놓은 것이다. 그것은 몸의 생생한 체험을 머리가 처리할 수 있는 의미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슬프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이 체험한 그대로 느끼는 대신에 머리로 이해하고 만다. 그때 그 의미는 머리로 처리하는 정보라는 점에서 교통 상황이나 뉴스 같은 정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현대는 정보의 시대이고 개념화는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여 세상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게 됩니다. 정보는 곧 권력이며, 인간은 이미 오래 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동물이 되어 세계를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 지배력은 날로 강화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감이나 감정, 정서 등으로 체험한 살아있는 느낌, 보이지는 않지만, 이름도 없지만, 분명히 실체가 느껴지는 그 생명체(이것을 편의상 ‘이름 없는 생명체’라고 부르자)는 언어에 담는 순간 죽어버리게 된다. 체험이 개념으로 바뀌는 순간 의미라는 뼈다귀는 남고 체온과 떨림과 호흡이 있는 피와 살은 거의 다 제거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관습은 대부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하거나 정보를 전달할 때 대개 머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개념화한다. 그래서 머리로는 많은 것을 알게 되지만, 살아있는 느낌은 모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우리가 체험한 것들은 어떻게 되는가? 언어에서 주로 개념만 남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거의 제거되고 나면, 그 사라진 것들은 어디로 갈까? 아마도 그 대부분은 언어를 통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몸에 기억으로 무의식으로 축적될 것이다. 저장되었다가 어느 순간 잠깐씩 단편적으로 환기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슬픔, 분노, 괴로움 등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는 숙변처럼 몸에 쌓여 무의식의 정신 작용으로 몸에 잠재하면서 왜곡된 형태로 행동이나 말이나 꿈에 나타나고 종종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심한 경우, 눈에 드러나는 정신 장애를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으나 보이지 않는 이 생명체를 몸 밖으로 꺼내고 싶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카타르시스 작용과 같이 그것들을 연민이나 공포를 통해 배설시키기고 싶을 것이다. 몸에서 꺼내는 방법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그것을 말에 실어 내보내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감이나 감정, 정서와 같이 그 살아있는 체험은 개념화된 언어에 잘 담겨지지 않는다. 언어에 담는 순간, 살과 피와 체온인 체험, 감정, 정서 따위는 새어버리고 뼈다귀인 개념만 언어의 그물에 걸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면 언어에 담겨지지 않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어떻게 산 채로 언어에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언어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등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치환의 「깃발」의 첫 행,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자.  여기서 “이것”은 깃발을 지시하는 대명사다. 즉 “깃발”이 “아우성”이라는 말이다. 왜 깃발이 아우성일까? 깃발은 긴 막대기 위에 매단 사각형의 천 조각인데 왜 이 시각적인 사물이 청각적 이미지인 아우성이 되었을까?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깃대에 매달린 깃발을 상상해 보자. 깃발은 사각형의 천조각이다. 그 천조각은 얇고 가벼워서 바람이 세차게 불면 쉽게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깃발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천조각의 두 모서리는 깃대에 단단하게 메어있다. 바람의 힘에 의해 날아가려는 힘과 말아가지 못하게 꽉 붙들고 있는 힘 사이에서 그 연약한 깃발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나? 물론 펄럭이는 것이지만, 그 펄럭임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떨기도 하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뒤틀리기도 하고 천조각의 물질성 때문에 물결무늬가 생기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몸짓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의 난폭한 힘과 깃대의 고집불통의 힘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천조각의 모습은 마치 무엇인가를 애타게 호소하기도 하고 견딜 수 없이 괴로워 떨기도 하고 대단히 절박하게 용을 쓰고 있는 “아우성”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우성은 소리가 없다. 마치 벙어리의 몸부림처럼 그 아우성은 소리 대신 온몸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속에서는 울음 같은 격렬한 외침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소리는 나오지 않는 이 답답한 상황이 깃발의 격렬한 뒤틀림을 더욱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치환이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깃발의 몸짓이 무엇인가는 비교적 쉽게 환기된다. 현실의 제약을 뚫고 광대한 세계와 우주를 향해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억누르는 현실의 여러 가지 고집 붙통의 여건들 사이에서 유치환의 내면에 있는 깃발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미친 듯이 허공을 향해 격렬하게 떨고 뒤틀며 움직이는 깃발의 몸짓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시의 후반부에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그런 내면의 모습을 ‘깃발’이라는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깃발이 환기하는 ‘체험’과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 의미하는 바를 비교해 보라. 시인이 그것을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고만 표현한다면 그것은 시인의 몸속에 있는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개념적인 언어가 된다. 슬픔, 애달픔, 마음 따위와 같은 개념만 남고 시인의 몸속에 있는 생명체는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의 ‘개념’ 대신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제시한 것이다. 깃발의 격렬한 떨림과 뒤틀림, 날아갈듯 날개처럼 넓고 가볍지만 하늘을 앞에 두고 날아가지 못하게 두 모서리가 단단하게 묶여있는 모습, 그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온몸으로 외치는 연약한 천조각의 몸짓, 그러나 아우성을 들리지 않고 벙어리처럼 온몸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습, 바로 그것이 시인의 몸속에 있는 살아있는 감정이나 정서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 깃발이 독자에게 주어지는 순간, 독자는 깃발의 움직임 속에서 시인이 갖고 있었음직한 마음을 즉각적으로 환기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개념적인 언어에 담아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 개념 대신에 사물을 빌린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깃발의 저 움직임과 유사한 마음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깃발이라는 사물을 통해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깃발’은 바로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에 해당하는 ‘객관적상관물’이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엇은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찾는 것이다. 즉, 개인의 정서의 외형이 되는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의 감각경험과 관련 있는 외부 경험이 주어졌을 때,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감정이나 정서는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언어에 잘 담기지 않으니까, 그것과 외부적으로 유사한 상관물(사물, 사건, 장면)을 찾아서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의 감각 경험과 유사한 사물을 통해서 감정이나 정서를 일시에 환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 언어 관습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버리고 그 개념 대신 사물이나 사건, 장면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상관물이란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와 등가를 이루는 사물을 제시하고 그 사물을 통해 감정이나 정서가 환기되도록 고안된 일종의 폭발장치 같은 것이다.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에 뇌관을 만들어 놓고 그 뇌관을 건드려 그것들과 등가를 이루는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는 순간 그 폭발물이 폭발하도록 하는 장치인 것이다. 객관적상관물을 통해 표현된 시적 언어는 두 가지 면에서 일상 언어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첫째는 몸속의 감정이나 정서 따위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머리로 알게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객관적상관물은 개념의 뼈다귀만 남은 언어에 살과 피와 체온이 있는 살아있는 몸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형체 업  소리 없고 만질 수 없는 감정이나 정서를 마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변형시키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아는 것으로 끝나지만, 체험은 몸이 떨리거나 호흡이 가빠지거나 오싹해지거나 후련해지거나 흥분되는 것과 같이 구체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둘째로 객관적상관물은 시인 자신의 체험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의 경험,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통해 체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는 단지 독자가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 감정이나 정서를 환기하도록 사물이나 장면이나 사건만 제시하는 것이고, 독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 속에서, 자기 몸의 감정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체험은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 된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깨워 만들어낸 체험이기 때문에 그만큼 강렬한 것이 된다. 시인의 창작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독자의 몸속에서 독자의 경험과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재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상관물은 시라는 장르가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상 언어의 관습으로는 생명체를 언어에 담아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시적 언어는 일상 언어의 관습을 고의적으로 비틀어 사용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유치환의 시 구절은, 시인의 내면의 이름 없는 생명체를 깃발로, 깃발이라는 시각적인 사물을 청각적인 아우성으로, 그 아우성이은 소리가 없다는 모순 어법으로, 세 번이나 뒤튼 문장을 사용했다. 살아있는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언어를 이렇게 뒤튼 것이다. 그래서 박이문은 시를 “언어를 통해서 언어에서 해방되려는, 언어를 씀으로써 언어를 쓰지 않는 언어가 되려는 불가능하고 모순된 노력”이라고 했으며,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꾀하지 않는 언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가장 원시적인 감각을 언어로써 표현하고자 하지 않는 언어”는 시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시는, 일상 언어 문법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전달하려는 특별한 언어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상 언어 관습은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름 없는 생명체를 죽이기 때문에, 그것을 산 채로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특별한 언어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창작이라고 할 때, 시가 만드는 것은 일상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 형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언어 관습에는 없는 새로운 언어관습이기 때문에 많이 경험해온 소재나 이야기라도 세상에 나와서 처음 보고 경험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따라서 시를 창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없는 언어 관습, 처음 보는 언어 형식을 만들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존의 형식을 답습한다면 거기에 ‘창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라는 새로운 언어 관습은 앞에서 언급한 난해해질 수밖에 없는 특성 외에 몇 가지 슬픈 운명을 더 타고 났다. 그 하나는 일상 언어와는 달리 오나성된 형태의 문장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과 공간을 만들어 불완전하게 끝낸다는 것이다. 즉 완성품이 아니라 반제품으로 독자에게 내놓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시인이 제시한 사물이나 사건, 장면 들을 통해 자신의 감각이나 감정, 정서, 경험 등을 깨워 환기하여, 시가 설치해 놓은 ‘체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시는 독자가 참여하여 어떤 환기 작용을 통해서 체험을 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훈련된 독자가 아니면, 이 환기 장치는 무용지물이 된다. 일상 언어관습에만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외국어 같은 모국어이다. 따라서 시는 그것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시적 언어에 훈련된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폐쇄적인 말하기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해서 생계에 지장을 받거나 생활에 그다지 불편을 얻는 일이 없으므로 안 읽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시라는 말하기의 관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다수가 쓰지 않는, 마치 사멸되어 가는 소수 민족의 언어처럼 슬픈 소통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시가 가지고 있는 슬픈 운명은 창작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상 언어처럼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호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쓰면 그것은 더 이상 창작이 아닌, 모방이나 복제가 된다. 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어 사용하는 말하기이다. 그리고 한 번 사용된 말은 다시 만들어서 쓸 수 없다. 많은 시가 창작되어 읽히면 더 소통이 풍요로워야 하는데, 시인은 고의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말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유치환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은 단 한 번만 창작될 수 있으며, 같은 문장은 물론 비슷한 문장도 피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 써야 한다. 의사소통이 주용 목적인 말의 특성상 이러한 소통 방법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말을 쓴다면 대단히 생산적이고 효율적일 것이다. 시는 아무리 불편하더라도(실제로 시 읽기의 괴로운 경험을 상기해 보라)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쓰지 않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 쓰는 대단히 이상하고 특별한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난해성과 소수만이 소통하는 폐쇄성과 기존에 있는 말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 말을 만들어 쓰는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3천년 이상 시를 쓰고 즐겨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詩學’(the Poetics)은 기원전 330년 전에 씌어졌다. 시학에는 이미 호머(Homer, 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드(Ilias)'와 '오디세이(Odysseia)'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 작품들은 기원전 800년 전에 씌어진 것입니다. 중국의 공자가 엮은 ‘詩經’에는 305편의 작품이 있는데, 가장 늦은 것이 기원전 600년의 작품이고, 가장 이른 것이 기원전 1115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시가 3000년 이상 생명력을 유지해온 것은 그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특별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시를 쓰고 읽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 즐거움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시는 사라져도 벌써 옛날에 사라졌을 것이다.  언어에 담겨지지 않은 이름 없는 생명체를 산 채로 언어의 그물로 잡을 때, 우리는 그 생명체를 밖으로 꺼내낼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이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과 정서는 씻겨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언가가 충족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삽날이 목에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 이윤학, 「이미지」 전문 농촌에서 삽을 들고 밭일을 하다가 뱀이 나타나면 일어날 법한 장면이다. 이 시는 삽날에 목이 잘린 뱀이 도망하는 사건을 객관적상관물로 제시하였다. 이 시는 독자에게 목이 잘린 뱀이 되어 그 상황을 체험하게 한다. 1연은 그런 상황의 제시이다. 이 시의 백미는 2연이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는 것은 뱀이 머리가 없어 세상이 캄캄한데, 몸속의 살아있는 본능은 강렬하게 움직이는 상황의 묘사이다. 세차게 물이 나오는 호스로 물을 뿌리거나 세차를 하다가 놓친 상황을 상상해 보자. 호스에서 분출하는 물의 압력은 큰데, 물이 나아갈 방향을 굳게 잡아줄 손이 없으면 호스는 요동친다. 몸에서 삶의 본능은 세차게 밀고 올라오는데 세상은 캄캄하고 가야할 방향이 없는 뱀의 모습이 ‘목이 잘린 뱀’과 ‘호스’라는 확장은유를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묘사는 머리가 없는 몸이 살아서 어딘가로 간다는,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체험적으로 상상하게 한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그 고통이 근원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누구도 그것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절망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는 삶의 어느 국면에서 몸과 마음으로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의 한계를 넘어서는 큰 고통을 경험했을 때의 화자의 심리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마음으로 크게 의지하는 부모나 배우자나 자식의 죽음이나 이별을 경험했다거나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큰 사고가 났다거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병의 진단을 받았거나 등등 자신의 의지를 결정적으로 꺾는 좌절을 겪었을 때의 심리상태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이 겪는 고통을 일상 언어로 표현한다면 아무리 잘 표현한다 해도 이름 없는 생명체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시는 이런 부정적인 경험을 꺼내는 과정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 즐거움은 이미지를 통해 부정적인 정서의 찌꺼기들이 씻겨나가는 경험이다.  끝으로 객관적상관물이 보여 주는 다른 효과는 그것이 시작과정에서 분출하는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데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읽어 본 이윤학의 시는 감정을 격정적으로 드러내기가 쉬운 시이다. 그러나 목이 잘린 뱀의 비유는 그런 감정의 분출을 적절하게 차단하고 있다. 시에서 극적인 체험을 하려면 감정이 한껏 분출되어야 하는데 왜 그것을 억제해야 할까? 감정은 시 쓰기에 있어서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시작 과정에서는 감정이 마음껏 분출되어야 시작 과정의 체험도 강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타서 없어지는 것이다. 즉 감정은 시작 과정에서는 극적인 체험을 하도록 마음껏 분출되지만 정작 시에서는 모두 연소되어 없어지게 되는데, 객관적상관물이 바로 그런 역할을 돕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가 겪었음직한 극도의 절망감은 목 잘린 뱀의 체험으로만 제시되어 있다. 그 외의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객관적상관물은 폭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자가 감춰진 감정이나 정서를 사물이나 사건을 통해 환기했을 때 폭발할 수 있도록 하는 뇌관을 장치하는 것이다. 그때 시의 겉모양은 모양은 차갑고 단단하고 표면이 매끄럽고 광채가 나는 유선형의 쇳덩어리뿐이다. 어디에도 물기가 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강력한 폭발물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것은 오로지 뇌관을 건드린 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시에 감정이 노출된다는 것은 정작 폭발해야 할 폭발물이 겉으로 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경우에 결국 속이 텅 비게 되므로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억제한 시에서는 독자가 시인의 목소리를 느낄 수 없다. 오직 폭발작용만 일어난다. 그 폭발은 독자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에너지가 폭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시인은 오로지 뇌관만 제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난 시는 시인이 독자의 시 읽기에 계속 참견을 한다. ‘나는 이렇게 슬프니까, 너도 같이 슬퍼해 줘.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너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거야. 당연히 내가 우는 목소리만큼 너도 고통스러워야지.“ 라고 독자에게 감정을 구걸하거나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독자의 몸속에 있는 감정이나 경험이나 정서를 깨워 그것으로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인 자신의 감정, 정서, 체험을 독자가 수용하고 거기서 체험을 하도록 강요하게 된다. 이 경우 자발적이고 강력한 폭발작용은 없고, 억지 체험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해 정도에서 그치기 십상이다.    ==================================================================   시 창작에 대하여 1. 시 쓰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언어이다. 언어는 시의 재료이면서도 시 쓰기를 방해한다. 언어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다양한 정서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에는 언어는 너무 상투적이고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더구나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는다. 시의 원료는 기억과 경험과 오감과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는 혼돈 상태인데, 이것을 슬픔이나 사랑 따위의 두루뭉실한 언어로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슬픔’이라는 단어는 시인의 마음 속에 있는 정서를 얼마나 표현해줄 수 있을까. 그것이 읽는 이에게 전달되었을 때에는,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죽고, 공허한 언어의 외피만 남게 된다. 읽는 이의 몸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몸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감동은 없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없다. 머리로 감동하는가? 정보만 얻으면 감동하는가? 감동이라는 말은 느낄 감, 움직일 동, 즉 몸에 무엇인가가 들어와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떨림, 미열, 숨가쁨, 기분 좋음, 기운이 생김, 눈물이 나옴, 소리가 들림, 냄새가 남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몸이 변화하는 것이다. 2002 월드컵 경기를 떠올려 보자. 16강전에서 이탈리아에 내내 끌려 다니며 지고 있다가 동점골, 역전골이 터졌을 때 몸은 이겼다는 정보를 얻는 것으로 그쳤는가? 사전을 통해 입수한 정보와는 무언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골이 터질 때 몸은 구체적으로 반응했다. 떨림, 눈물, 소리가 터져 나옴 같은 구체적인 몸의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슬픔, 사랑, 기쁨 따위의 말을 하면 몸이 움직이는가? 그런 말들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말들을 반에 반만이라도, 옮겨줄 수 있을까? 개인이 갖고 있는 정서는 대단히 개인적인 것이며, 복잡다단하고 미묘하다. 그것을 어떤 단어로 옮긴다는 것은 정서의 팔과 다리, 이목구비 따위를 모두 제거하는 것처럼 폭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말들은 개인적인 정서가 갖는 몸통의 일부 조차도 산 채로 전달할 수 없다. 몸과 마음 속에 있는,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는 분명히, 눈과 코, 입, 귀, 팔다리가 달린,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언어는 뼈다귀와 같은 개념 덩어리이기 때문에, 산 것을 그대로 담아서 전달할 수가 없다. 일단 개인의 고유하고 다층적이며 미세하고 미묘하고 예민한 뿌리들이 가득 달린 무수히 많은 정서의 세목들을 언어에 담자면 우선 그 정서들을 죽여서 몸통에 달라붙은 이목구비며, 팔다리며, 머리카락 따위 자잘한 것들을 모두 발라내야 한다. 그런 후라야 앙상한 의미나 감정 따위가 겨우 전달될지 모르겠다.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비하면 언어는 개념의 뼈다귀로 이루어진 너무 폭력적인 도구이다. 실제로 언어의 생명은 딱딱한 개념의 외피 속, 보이지 않는 곳에 깊이 감춰져 있다. 2. 왜 시 쓰기를 창작이라고 하는가? 창작이란 창조와 같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다. 시는 없는 언어를 만들어 내는가? 시어란 이전에는 세상에 없었는데 시인에 의해 새로 생겨난 언어인가? 시인은 시어를 창조하는가?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도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상어임이 분명하다. 간혹 조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어가 시의 창조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조어는 시가 아니더라도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생겨난다. 그렇다면 왜 시 쓰기가 창작인가? 시는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개인적인 정서,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정서를 죽이는 언어를 숙명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 언어들은 정서를 시로 표현하고자 할 때 끊임없이 시 쓰기를 방해하며 시의 도구로서 사용된다.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시 쓰기를 방해하는 폭력적인 언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죽이고자 하는 언어를 통해서 정서를 죽이지 않고, 가능하면 덜 다치게 하고, 산 채로 전달하는 것이다. 언어 안에 시인의 정서가 산 채로 담겨 있어야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되지 않고 읽는 이의 몸에 들어가 몸을 움직이게 하는 변화로서의 감동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시가 주는 감동이 스포츠에서 얻는 감동이나 즐거움, 쾌감 따위처럼 직접적이고 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스포츠나 오락 등에서 얻는 감동은 시에 비해서 보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표피적이다. 시의 감동은 약해보이고, 때로는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늦게 나타날 수도 있다. 대신 그것은 보다 심층적이고 지속적이다. 3. 어떻게 고유하고 복잡 미묘한 개인의 정서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언어에 담는가? 그것은 실체가 분명해 보이지 않는 감정, 정서, 고통, 생각 등 온갖 추상적인 것들을 사물로 표현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즉, 개념덩어리인 언어를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맛볼 수 있는 것, 손으로 만져서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실체가 없는 말에 육체를 입히는 것이다. 육화하는 것이다. 허공과 같은 말, 개념의 뼈다귀만 있는 말에게 살과 피를 입히는 것이다. 정서가 말의 살과 피와 체온에 스며들어 함께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이미지, 객관적상관물, 직유, 은유, 병치, 아이러니 따위와 같이 시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교는 바로 사물을 통해 개인의 복합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도구들이다. 예를 들면 을 보자. 엘리어트는 “예술의 형식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客觀的相關物)을 발견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특유한 정서의 일정한 외형이 될 일조(一組)의 사물이나 장면이나 일련의 사건들을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감가경험으로 낙착되는 외부적 사실들이 주어졌을 때에, 정서가 즉각적으로 환기되도록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즉, 객관적상관물은 사물을 통해 정서를 환기시키는 장치이다. 사물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객관적상관물은 이 사물에다가 시인의 정서를 심어놓는 것이다. 이때 객관적상관물로 표현된 사물은 시인의 정서와 등가물(等價物)이 된다. 사람의 몸에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겪은 여러 경험과 수억 년 몸의 유전자에 새겨진 진화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 이 기억들은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있다. 객관적상관물은 개인적인 기억과 정서를 사물에 심어 읽는 이로 하여금 사물을 통해 그것들을 환기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통해 감지한 것이므로 환기되는 순간 육체성을 갖게 된다. 즉 개인의 고유한 몸의 기억은 환기 작용을 통해 보편적인 정서, 살아있는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다. 이미지(심상)도 언어를 육화시키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이미지스트들은 이미지를 라고 하였다. 이미지로 표현된 것은 사물의 육체를 갖고 있지만, 그 육체에는 시인이 투사시킨 지식과 정서가 복합적으로 들어있다. 개념적, 추상적인 말로는 획득하기 어려운 육체성을 통해 시인의 정서는 읽는 이에게 선명하게 제시된다.  4. 시는 사물과의 대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물은 생김새, 물성, 운동, 크기, 무게, 냄새 등과 그것이 있는 위치와 장소,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 특성과 인상을 가지고 있다. 개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육체성은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정서와 감정과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거나 사물을 의인화시켜 그것들로 하여금 사람의 말을 대신하게 하거나 그것들과 이야기하기를 즐겨 하였으며, 많은 문학 작품이 직접적으로 이런 내용을 다루거나 이런 방법을 사용해 왔다. 5. 시인들은 이와 같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정서, 감정, 의미 등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교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시인의 본능이 찾아낸 방법이지 시를 창작하는데 고정된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정된 방법은 오히려 시 정신을 죽인다. 좋은 시는 과거의 시인들이 기울인 노력에 더하여 살아있는 언어를 만들어 내려는 노력에 의하여 얻어질 것이다. 좋은 시는 과거에 사용했던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계속 바뀌게 될 것이다. 스포츠나 만화, 영화, 모험 등 모든 육체적인 감동과 변화를 주는 것은 시 창작 방법에 응용될 수 있다. 문제는 살아있는 생생한 언어, 시인의 의식과 정서를 극적,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지, 정해진 시작 방법에 교과서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아니다. 만 명의 시인이 있다면, 만 가지의 시작 방법이 있는 것이다. 각자의 얼굴 생김새, 마음 생김새가 다르듯이 시작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김기택             크고 작은, 굵고 가는, 뒤얽히고 헝클어진, 단순하거나 배배꼬인, 쩍 벌어져 다물 수 없는, 가당찮은, 기가 막힌, 눈물에 녹아 나오는, 한숨 에서 진액이 추출되는, 웃음이 뱃살을 잡아당기는,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 같지 않은, 한쪽에서는 계속 사라지고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이야기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표정을 하고 흔해빠진 옷을 걸치고 전동차에 앉아 있다. 하품을 하고 코 후비고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 두리번거리거나 하릴 없이 전동차 광고판이나 쳐다보고 있다. 너무 많은 자잘한 삶 속에 아무 것도 아닌 척 들어가 있다. 오랫동안   컴컴한 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창자를 다 훑어낼 듯 독하지만 아직은 몇 개의 귀에만 겨우 들어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구덩이에 수백 번 소리쳐도 더 나올 말들이 남아 있는, 기억은 지금 막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크고 생생해도 말은 늘 어눌하고 답답한, 말이 나올 때마다 살점이 우두둑 뽑혀 나오는, 위장병이 되고 탈모가 되고 틀니가 되고 우울증이 되고 치매가 되는   이야기들이       아무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그 말이 그 말 같은, 여러 번 들어 짜증나고 귀찮은,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잔뜩 튀겨지고 부풀려진, 술 취해 말의 앞뒤나 문장의 구조가 꼬부라지거나 뒤죽박죽된, 시비 붙어 욱 하고 나오는, 욕지 거리에 뚝뚝 끊어지며 나오는, 중얼거림 속에 숨어 있다가 가끔씩 소심하게 나오는   이야기들이       줄 달린 전화로 걸지 말고 핸드폰으로 걸란 말이야, 핸드폰. 똥 싸면서도 걸 수 있잖아 핸드폰은. 보험 든 게 벌써 세 개나 있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거야 영업이라는 거는. 어머머 얘 좀 봐! 호기심 좀 있으면 안 되냐고? 뭐? 알고 싶은 거 좀 있으면 안 되냐고? 야! 그 까짓것 알고 싶다고 꼭 남자랑 자고 들어와야 되겠어? 그게 어떤 건지 알 권리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이거 왜 이래. 나 운전면허 한 번에 딴 여자야. 시끌벅적 야단법석 노발대발 횡설수설 웅성웅성 쑥덕쑥덕 수근수근 속닥속닥   이야기들이       입을 꾹 다문 채 전동차 안에 서거나 앉아 있다. 백발에 UCLA 모자를 쓰고 앉아 있다. 고개를 힘차게 흔들며 졸고 있다. 심각하게 문자를 치고 있다. 지루한 얼굴로 신문을 보고 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머리를 흔들고 있다. 핸드폰과 다정하게 조잘대고 있다. 아직도 서로의 허리를 꽉 껴안고 있다. 동전이 든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지나가고 있다. 전동차가 서고 한 무리의 이야기들이 나가고 한 무리의   이야기들이     들어온다. 길고 복잡하고 구불구불하고 누덕누덕 기워진 이야기들이 들어 온다. 터져 나오지 못하고 내장을 들들 볶아대기만 하는   이야기들이                                     김기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 , , , ,껌>,
1677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신동집 - 오렌지 댓글:  조회:4697  추천:0  2015-12-27
  오렌지                    /신동집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포들한 : 부드럽고 도톰한 찹잘한 : 차갑고 달착지근한​​    1989년 시집 [누가 묻거든]에 수록된 시이다. 전 6연으로 된 주지시이다. 제 1연에서는 오렌지라는 의미 이전의 사물 그 자체로서의 오렌지가 묘사된다. 제 2∼3연은 '나'가 인식하는 단순한 외형적 사물로서의 오렌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렌지의 껍질을 벗길 수도 속살을 깔 수도 있다. 제 4∼5연은 존재의 본질로서의 오렌지이다. '나'가 그를 파악했다고 느끼는 순간, 오렌지는 '손을 댈 수 없는' 주체적 존재로 마주한다. 그러므로 '나'와 오렌지는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상대적 존재로 대립해 있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 제 6연은 오렌지와 '나'의 긴장이 계속된 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진 그림자'의 존재를 막연히 감지함으로써 긴장 해소의 예감을 느낀다. 이 시는 존재의 본질 자체에 대한 물음을 오렌지라는 소재를 통해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혹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회의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그 회의을 깨끗이 없애지 못했지만 '한없이 어진 그림자' 같은 구원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데서 끝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에 관심을 둘 때는 그것의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벗길 수 있는 때, 즉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때인데, 그러나 거기서 나아가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려 할 때는 존재의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존재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회의로 시작된 이 작품은 한 가닥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사물의 생명 본질에 닿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시이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이 시는 '오렌지'라는 소재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근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 준다. 오렌지의 외면만 보고는 그 본질적 의미를 알 수 없고, 껍질을 벗긴다 해도 본질에 도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 이미 오렌지의 본질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낀 화자는 안타까워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존재의 본질에 다다갈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대구 시인 신동집 " 그는 대구의 성주(城主)였다. 이 땅 내륙의 중심부, 덥고 추운 땅 대구를 지키며 살아온 시인이다. 해방 전 대구에 이상화, 이육사가 있었다면, 해방 후에는 김춘수와 신동집이 있었다. 그러나 세인들은 신동집을 ‘기억되지 않는 천재 시인’으로 곧잘 얘기한다. 그가 태어나 평생을 산 곳은 바닷물이 출렁거리거나, 문명이 채색된 출세의 땅이 아니었다. 분지 대구에서 둔중하게 살며, 깊은 생각들을 시로 갈고 깎아냈다. 그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육중한 몸을 가졌다. 얼굴에 살도 많았다. 빨리 걷지도 않고, 늘 사색하며 무겁게 움직였다. 그에겐 드러내고 싶지 않은 외면적 상처가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문우들과 향촌동에서 술을 마시고 남산동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비탈길에서 넘어졌다. 그런데 한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음악을 좋아하던 그가 이 날도 레코더판을 구입해 들고 가던 길이었다. 넘어지면서도 레코드판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짚지 않는 바람에 어처구니없게도 그만 깨어진 레코드판이 눈을 찌르고 만 것이다. 그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탐구를 집요하게 추구한 시인이었다. 6·25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의 존재론적 갈등을 형상화한 초기 작품 ‘목숨’(1954)을 비롯해 ‘송신’(1973), ‘오렌지’(1989) 등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주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계열의 시를 주로 발표했다. 중기 이후에는 삶에 대한 뜨거운 서정과 철학적 사유가 바탕을 이루는 시와 서구적인 감각과 동양적 예지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 세계를 추구했다. 1983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의 시처럼 ‘바이없는 종국의/잠이 내릴 때까지’ 시에 매달렸다. 진지한 자기 성찰과 존재 탐구에 매달리며 고뇌한 것이 그의 초상이다. 그러나 이 한 장의 사진(아래)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1968년 6월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누가 찍은 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검은 뿔테 안경에 골초였던 그가 담배를 물고 ‘씩~’ 웃고 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워낙 과묵해 잘 웃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웃을 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 초상은 시인의 존재감이 잘 드러난다. 어두운 밤, 별을 쫓아 살아온 외골수의 눈동자 속에 웃음이 퍼진다. ‘풍화(風化)하지 않는/어느 얼굴의 가능을 믿으며/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나도 임의의 표정을 짓는다.’(시 ‘표정’ 중에서) 임의의 표정일까, 아니면 그가 그토록 가꾸고자 했던 슬픔 속의 꽃을 본 것일까. " (김중기/기자, 매일신문 '초상')                                         * 1924년 대구 출생. 본명은 동집(東集). 호는 현당(玄堂).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하고, 경북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54년 시집 [서정의 유형]으로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1955년 영남대 강사를 시작으로 영남대 교수, 계명대 교수, 계명대 외국학대학장,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 2002년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및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 시집으로 처녀시집인 [대낮](1948)을 시작으로, [서정의 유형(流刑)](1954), [모순의 물](1963), [빈 콜라병](1968), [귀환](1971), [송신](1973), [해뜨는 법](1977), [암호](1983), [여로](1986), [누가 묻거든](1989), [오렌지](1989) 등 다수의 시집을 남겼다. [신동집 시선집](1974), [신동집 시연구](1987), [신동집과 영미시](1989), [휘트먼 역시집](1981) 등의 저서가 있다. 아시아자유문학상(1955), 현대시문학상(1975),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81), 옥관문화훈장(1987), 대한민국예술원상(1982) 등을 수상했다.   ◈ 빈 콜라병/신동집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빈 콜라 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 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 병은  빈 자기를 생각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기를 생각고 있듯이.   불고 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 콜라 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音樂)이 빈 콜라 병을 다스리고 있다. ​   ​ 1968년 「동아시단(東亞詩壇)」에 발표한 시(詩). 시집 《빈 콜라병》(68)에 수록되었다. 빈 콜라병은 마치 한송이 들국화가 옆에 피어 있듯이 스스로 존재한다. 자연물이나 인공물의 구별을 초월해 스스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인 작품(作品)이다. 산이나 들에 가면 흔히들 풀섶 같은 데서 빈 사이다 병이나 콜라병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본다. 그러한 데서 이런 물건을 대하면 종종 일종의 야릇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넘어져 뒹구는 그 병이, 쓸모 없는 그 빈 병이 너무나 당당하게도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본다. 사이다나 콜라를 넣기 위한 방편 도구로서 병이 존재한다면, 내용물을 다 마신뒤에는 병도 소용없는 물건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속이 텅 비었을 때, 버려져 뒹군 이 빈병은 더욱 자율적으로 자기를 주장하고 있다.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빈 콜라가 들어 있다/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빈 콜라가 들어있다(제1련)」 빈 콜라 병에는 콜라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빈 콜라」가 가득히 들어 있을 것이다. 「없는 것」도 분명히 하나의 「있는 것」이 된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 송신(送信)/신동집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 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 1973년 시집 [송신]에 수록된 시이다. 가을날 돌담 아래서 우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통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애와 숙명을 담담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는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전달의 양자관계를 바탕에 두고 이루어진 시이다. 제1연에서 발신자(송신자)는 바로 가을이 깊었음을 알려주는 귀뚜라미이다. 한로(깊은 가을)임을 알려주는 바람, 계절을 알려주는 귀뚜리, 그 귀뚜리는 사람의 인기척만 들어도 소리를 그치게 마련인데, 그런 귀뚜리가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슨 신호인가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한로에 의해서 드러나는 시간적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깊은 가을은 마지막, 죽음, 조락의 이미지를 갖는다. 이 시는 생명의 시효가 끝나는, 죽음이 임박해 있는 시간이다. 그러니 귀뚜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슨 신호란, 죽음이나 종말을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제2연에서 이런 귀뚜리의 신호를 받고 있는 사람 역시 가을의 사람이다. 특히, 인생의 황혼 단계에 있는 노인일 것이다. 이런 노경에 이른 그는 귀뚜리의 죽음의 신호를 들으면서 일손을 놓고 망연해 한다. 귀뚜리의 송신을 매개로 멀잖은 삶의 종말을 예감했기 때문에 일손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이윽고 귀뚜리의 울음이 끝나고 나면 세상에는 적막만이 남는다는 것을 '하늘은 바이 없는 / 청자의 심연이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귀뚜라미의 애절한 울음소리, 또는 그가 겪어야만 하는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늘은 그 청자의 오묘한 색감같이 더욱 푸르러질 뿐이라는 자연의 영원함과 신비로움을 강조함으로써 유한자적 존재의 무상감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나타나고 있다. (현대시 목록) ==========================================================================================   신동집의 시는 전체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휴머니즘의 강렬한 옹호와 서구적인 주지시의 경향을 보였으나, 중기에 접어들면서 인생론적 존재의 탐구에 천착하면서 노장을 비롯한 동양사상에 회귀적 궤적을 확충해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주로 인간·존재·자연·자유였다. 또한 그는 일상생활에서 얻은 시어를 새롭게 조탁해가면서 유연하고 인상적인 특유의 가락으로 시적 리듬을 살리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초기에는 휴머니즘적 입장을 바탕으로 한 인간 존재의 근원 탐구에 주력하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내면 의식의 추구와 함께 사물과 언어의 즉물적 발현이라는 과제를 실행하려 노력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참고 : ,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생애     경북 대구에서 출생한 신동집은 1951년 서울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 1959년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1년간 수학했다. 1948년 서울대학 재학 당시 습작집 을 간행한 이래 1952년 시집 으로 문단의 각광을 받았다. 영남대학 영문과에 교편을 잡으면서 시집 , , , 등을 내놓았으며, 1969년 계명대학 영문과로 직을 옮긴 이후 시집 , , 등을 간행하였다. 초기에 보인 형이상학적 시에서 흄 · 파운드를 거쳐 엘리어트에 이른 모더니즘적 경향이, 서정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물의 내용적 의미의 탐구에로 경주, 후기에는 동양적 관조의 철학시를 시도하였다.      약력   1924년 경북 대구 출생 1938년 일본 산구현 방부시 다다량 중학에 입학 1945년 광복 후 경성대학교 예문과 갑류에 편입, 양주동과 방종현에게 배우며 향가문학을 처음 접함 1950년 6·25 당시 통역장교로 입대, 진해의 육군사관학교 · 정훈감실 · 고급부관학교에서 복무 1951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과 졸업 1955년 영남대학교 교수 역임 1960년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 수학 1961년 효성여자대학교 강사 1970년 계명대학교 교수 1980년 경주 동국대학분교 강사 / 현대시인협회 명예회장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1985년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수여      상훈   1955년 아세아자유문학상 - / 국방장관표창장 1961년 경북문화상 1980년 한국현대시인상 198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87년 대한민국옥관문화훈장 1989년 세계시인상 199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4년 순수문학상         저서       • 시집 (1948) (1954) (1958) (1963) (1965)  (1968) (1970) (1971) (1973) (1974)  (1975) (1975) (1976) (1977)  (1979) (1979) (1981) (1983) (1986)  (1987) (1988) (1989) (1990)   [귀환(문원사,1971)]   [암호(학문사,1983)]         작품세계        작가의 말   내가 걸어온 시의 도정을 살펴볼 때 나의 시가 현재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또한 어느 지점으로 이동해 갈는지 아무래도 잘은 알 수 없다는 것이 옳은 말일 것이다. 아마도 내가 시필을 끊는 날이 오면 그때는 대충 그 전말을 알게 될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날이 언제 올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일이며 당장 내일에라도 올는지, 또는 조금은 뒷날에 올는지 아무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작이란 끊임없이 무(無)에 직면하는 일이며 한 언어운술가(言語芸術家)의 눈 앞에는 언제나 희멀건 무의 들판이 가로놓여 있는 일뿐이다. 안이한 예측이나 짐작은 아예 거부하면서 한 발자국 말을 찾아 놓아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는 일이다. (……) 그동안의 작품들을 훑어보니 여러 가지 부끄러운 시행착오의 흔적도 보인다. 실은 한 편의 쓸만한 작품이 나오기엔 적어도 열 편, 스무 편의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인가보다. 시란 수많은 시행착오 사이로 은총과도 같이 내다보이는 한 조각 하늘의 푸름이나 아닐까. (……) - ‘후기’, 신동집, , 학문사, 1974     시작(詩作)은 응집된 밤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눈이 캄캄해지는 일이다. 혹은 시작은 응집된 대낮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그리하여 눈이 캄캄해지는 일이다. 혹은 시작은 응집된 낮과 밤을 풀어 섞는 일이다. 낮과 밤을 풀어 섞으면 백야가 된다. 시는 백야의 체험이다. 그리하여 시작은 백야 속에 홀로 남는 일이다. 배경도 전경도 구별 없는 백야 속에 무(無)의 광원(光源)으로 눈떠 있는 일이다. (……) 침묵에서 우러난 언어는 항상 침묵의 상태를 동경한다. 시는 침묵에서 날아오른 언어의 비상이며 그 비상의 궤도이다. 시는 침묵의 상형문자이다. 언어의 파장이 그린 언어의 궤도이다. 침묵을 상실한 언어는 수직으로 일어설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시에서는 언어가 언어로 직접 연결되어서는 안된다. 침묵이 언어와 언어를 연결해주어야 한다. 훌륭한 시는 언제나 침묵의 빛깔로 빛이 나고 있다. (……) 시에서 무슨 해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가령 해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해답이다. 시는 미지속에 막막히 서는 일이며 간단없이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이 물음은 답변을 요하지 않는다. 이 물음이 바로 해박(解博)이 되는 일도 있다. 부단히 물음을 던지는 자문 속에 시는 절로 얼굴을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꽃봉이 열리듯이. 시는 변모다. (……) 작품은 오직 한 번의 행위이다. 그러나 시인의 자기증명은 결코 한 번만이어서는 안된다. 필생을 통해서 그는 자기 증명을 되풀이 계속해야 한다. 골백 번이라도. 시인이 작품 이외 무엇으로 자기 증명을 할 수 있겠는가. 시인이란 집요하게도 끝까지 노래하는 시인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에겐 노래가 존재이니까. 만약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비록 그의 시가 점점 너절해지고 마침내 자기의 무참을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여전히 노래할 것이다. 심지어 자기의 비참을 노래로 퉁겨낼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다만 특수한 예외로 랭보와 같은 이상변이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그는 이미 살았어도 죽어 있었으니까. 시인의 정신은 부토(腐土)다. 시의 궁극적인 패턴은 재생이며 회귀다. (……) - ‘나의 시론, 나의 팡세’, 신동집, , 혜화당, 1993      평론   (……) 신동집 시인에 있어서 시의 본령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시인의 본분은 무엇이며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들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가다듬어 보는 일에 직결된다.  ‘시인의 요건’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그의 시론이 대변해 주듯이 신동집에 있어 시인이란, 즉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란 시작의 기법 문제라든가 시 작품의 내부구조 문제 등 시학적인 문제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시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요건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인은 언어-문체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언어-에 대한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 언어란 모국어를 말하는 것이며 한국시인에게는 한국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국말에 대한 남다른 자각을 가지고 모국어를 영생시키는 일과 그 모국어로 지상의 존재를 노래로 지켜주고 찬양해주는 일이 시인의 사명 중 으뜸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인은 모국어를 캐는 구현자에 다름아닌 것이다. 둘째, 시인이 갖추어야 할 요건은 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견자란 ‘사물의 본질과 핵심을 강력한 비전으로서, 강력한 상상력과 직관으로써 투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견자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의 눈은 곧 우리의 일상생활의 주변에 깔려 있는 수많은 소재를 자기 정신의 자장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견자의 눈, 즉 강력히 펼쳐진 레이더와 같은 정신을 말한다. 즉 시인은 언제나 눈떠 있는 레이더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생에 대한 예지, 즉 생에 대한 총체적 진리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 신동집, 영학출판사, 1984 , 신동집, 혜화당, 1993 , 이영걸, 문학과비평사, 1989 , 김용직 외, 민음사, 1989 , 신동집, 학문사, 1974 詩人 신동집(申瞳集) ▣   본명 : 신동집(申東集) 호 : 현당(玄堂) 1924년 대구 출생 1948년 대학 재학 중 습작 시집 의 간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첫 시집 대낮으로 등단 1951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 1955∼1969 영남대 교수 1959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 수학 1954년 시집 『서정의 유형』발표,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0년 아시아 자유문학상 1970∼1986 계명대 교수 1980년 한국현대시인상 수상 198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1982∼1985 계명대 외국어대학장 신동집시인은 주로 인간, 자연, 존재 등을 추구하였으며, 특히 형이상학적 시에서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였다. 그 뒤 서저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물의 내용적 의미의 탐구에도 노력하였으며, 동양적 관조의 철학도 시도했다. 또한 시인은 구문법이나 호흡을 파괴하고, 그 특이한 구술체(口述體 ; 시의 종결형의 처리가 거의 현재 진행형을 쓰고 있는 점이나 구문상의 도치가 선용되고 있는 것 등)에 의거 고도 지식인 사회로 진입해 들어간 시인이다. 그의 시는 존재(存在)와 무(無) 등 인간의 근원적 자각에 집요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깊이와 풋풋한 감동을 잃지 않는다. 평이하면서도 철학적 바탕이 다원적(多元的) 은유를 살리고 있다. 그는 이라는 글에서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하여 예지로 끝난다'는 프로스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의 시세계에 매우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즐거움과 예지는 그의 미학이 떠받치고 있는 두 날개이다. ■시집 ■ 대낮(1948), 서정(抒情)의 유형(流刑)(1954), 제이(第二)의 서시(序詩)(1958), 모순(矛盾)의 물(1963), 들끓는 모음(母音)(1965), 빈 콜라병(1968), 새벽녘의 사람들(1970), 귀환(1971), 송신(送信)(1973), 신동집 시선(1974), 미완(未完)의 밤(1976), 장기판(1979), 진혼(鎭魂)·반격(反擊)(1981), 암호』(1983), 신동집 시전집(1985), 송별(1986), 여로(旅路)(1987), 누가 묻거든(1989) 등 번역시집 : 휘트먼 譯시집(1981) 저서 : 신동집 詩연구(1987) 신동집 시가 있는 명상노우트(1987) 신동집과 영미시(1989) ■시 감상하기 ■ ※ 목차 ※ 1. 목숨 2. 송신(送信) 3. 오렌지 4. 어떤 사람 5. 표정 6. 한로(寒露) 7. 변신(變身) 8. 빈 콜라병 9. 좋았던 날 10. 한알의 씨앗 11. 노을 12. 소년 13. 동행 14. 추일별곡 15. 조국으로 가는 길 16. 진혼 17. 평범한 가을밤 18. 봄비 19.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20.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 어느 대학촌에서 21. 눈 22. 행인 -1- 23. 항아리 24. 한 사람의 슬픔 25. 하일명상(夏日瞑想) 26. 편지 27. 추일유정(秋日有情) 28. 잠들기 전 29. 이사 30. 오, 하나씩의 이름들 31. 여로 -1- 32. 싸리나무 33. 비가(悲歌) 34. 바다 35. 모과나무 36. 끝나는 계절 37. 금조비가(金鳥悲歌) 38. 가을 햇살 39. 마음 이 한 때 40. 나의 손 ☞ 목숨 ☜ 목숨은 때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 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 송신(送信) ☜ 바람은 한로(寒露)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送信)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없는 청자(靑瓷)의 심연이다. ☞ 오렌지 ☜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 어떤 사람 ☜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나는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 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없이 나의 밤을 헤메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묵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없이 내가 헤메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 표정 ☜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일종의 표정을 지운다 네가 좋아하던 나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내가 좋아하던 너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다 잊어버렸다고 하자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고백만은 영원히 아름다운 약속 안에 살아 있다 풍화(風化)하지 않은 어느 얼굴의 가능을 믿으며 참으로 많은 표정들 가운데서 나도 임의의 표정을 지운다 표정이 끝난 시간을랑 묻지를 말라 창살 속에서 갇히운 나의 노래를 위하여 ☞ 한로(寒露) ☜ * 1 * 허수아비의 헐어빠진 옷자락이나 되어 남는 일이다. 허수아비의 어깨 위 길 잃은 한 마리 새나 되어 남는 일이다.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비록 넥타이를 맨다 해도 으스스 바람 도는 한로의 무늬를 어찌할까. 그런 마음의 들판을 어찌할까. 남은 일은 미치는 일이요. 그지없던 날의 옥빛은 갔으니 그런 날의 보람은 갔으니. ☞ 변신(變身) ☜ 잎을 벗어 버린 나뭇가지는 어찌 보면 땅에서 하늘로 뻗은 나무 뿌리라 할까 뒤엎어 놓은 밤이 내낮이라면 뿌리는 가지로 변해도 될 일 간절한 꿈에서 열매가 맺고 영근 방울에서 보람이 터질 때 세계는 얼마나 아리게 도치(倒置)했을까 뒤엎어 놓은 내낮이 우리의 밤이라면 백야(白夜)여 주어(主語)없는 강물을 덮어 달라 생자(生者)를 뒤엎어 죽은 자라면 푸른 하늘은 무덤 속을 날아야 할 일 말씀은 안테나 끝으로 푸라티나의 빛을 퉁기고 저기 급하게 피안(彼岸)으로 달리는 짙은 구름群 가지로 변해 선 나무 뿌리에 흔들이며 달려 오는 풍경(風景)은 밀착(密着)한다. 꿈을 배우는 제비야 옳은 신화(神話)를 알려주마 나래 설익은 제비야. ☞ 빈 콜라병 ☜ 빈 콜라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 있다. 넘어진 빈 콜라 병에는 가득히 빈 콜라가 들어있다. 빈 콜라 병에는 한 자락 밝은 흰 구름이 비치고 이 병을 마신 사람의 흔적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빈 콜라병은 빈 자기를 생각고 있다. 그 옆에 피어난 들국 한 송이 피어난 자기를 생각고 있듯이. 불고 가는 가을 바람이 넘어진 빈 콜라 병을 달래는가. 스스로 풀어내는 음악이 빈 콜라병을 다스리고 있다. ☞ 좋았던 날 ☜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다. 두서없이 보내온 지난날의 일들. 그 사이도 하염없이 귀한 것은 새어내리고 오늘은 벌써 찬바람이 돌고 있다. 어디로 갔는가 제비는 이미 보이지 않고 귀뚜리도 바이없이 죽을 자리를 더듬고 있다. 보라 스민 노을은 하르라니 서산마루에 떨고 더없이 귀한 날은 저문다. 예저기 불이 돋은 창문들의 마음 아이를 찾는 아낙네 목소리는 저문다. 나도 밤이 되어갈 때다 별이 되어 갈 때다 ☞ 한알의 씨앗 ☜ 한알의 씨앗에도 움은 돋는가 가지에 피어날 꽃잎은 지레 보이고 두 알의 씨앗에도 움은 돋는가 가지에 맺을 열매는 지레 보이고 애달파라, 트지 않는 나의 씨앗 기다려도 기별은 없고 보듬어도 보람은 없고 봄이 와 무릇 씨앗들은 돋아도 소망은 바이 없이 흙의 잠을 자리라 ☞ 노을 ☜ 더없이 날은 가고 없다 잔잔히 번지는 수먹물의 노을 좋았던 날은 이리저리 가고 어디로 제비는 날아갔는가 날은 어둑하여라 하르라니 떠는 비늘구름 하나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고 지나고야 비로소 그지없는 노을 파르라니 떨며 날은 저문다. ☞ 소년 ☜ 아득한 옛날 호젓한 네거리에는 붉은 우체통이 고즈너기 서 있었다 서투른 휘파람을 불면서 소년은 우체통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지나간다. 한손엔 잠자리 채를 들고서. 무심코 잠자리가 한 마리 앉다 말다 지나간다. 보릿집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엿장수 가위소리는 고달피 지나간다. 내 어느날 다시 이 길을 간다 해도 여전 그렇게 지날 것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이없이 변해도 홍안은 찌들어 어깨처진 남루의 막대는 지나가도. ☞ 동행 ☜ 길을 가는 우리는 서로 만나 인연껏 함께 가는 同行이다. 同行이란 무엇일까 속속들이 상대를 아는 것도 아니리라. 서로는 그런 요구를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저마다 혼자 가는 우리는 언제나 더듬거리는 목숨이요 다다라 쉴 잠이 어디에 있는지, 되도록이면 이마 위에 별을 이고 저마다의 밤을 헤어갈 뿐 가다가 琴線에 와 닿는 그런 것이 있다면 고마웁게 받아들이며 또한 소중히 나누어 가지며 우리는 함께 가는 同行이다. 인연껏 가다 마칠 그런 同行이다. ☞ 추일별곡 ☜ 하마트면 일 뻔도 한 위험한 관계를 미안히 생각하며 오늘은 내가 떠날 차례 그러면 둘이는 다 추일풍경이 되어보는 날이다. 채칼에 뚝뚝 떨어지는 물배 이슬을 거두며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한자리에 앉고 보면 우리네 생활사는 그래도 숨어 드나부다. 작별의 술잔에 남빛 고름은 비친다. 허리춤에 찬 향주머니 인형의 실눈썹은 비친다. 가을이 너의 소매끝에 닿아도 함부로 설레이진 말일 가지에 앉은 새가 엿보고 있으니, 아리는 미소를 한 군데 가릴 토끼풀 하나 노랗게 익은 탱자알 하나 너의 손에 들어 있어 더욱 좋은 일. 추일은 마침 별곡이 던다. 가다가 잘못 산신령을 만나면 꼰바둑이나 한 판 둘 여유는 있어야지 이마 푸른 고려선비는. ☞ 조국으로 가는 길 ☜ 솜구름 말가히 나르고 푸른 들 기름진 땅 불꽃이 마구 올라 붙는 하늘이 서러웁거든 우리 눈알을 한데 모아 조국으로 가자 노래를 한데 엮어 조국으로 가자 그대는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운명 속일 수 없는 우리의 혈맥 보다 아름다이 꾸민 땅도 있으리 복되게 사람 사는 부러운 나라도 있으리 이득한 한숨 가슴을 덮드래도 조국은 지울 수 없는 우리의 발자욱임을 어찌하느냐 조국은 자랑스런 우리의 깃발이다 조국은 자랑스런 우리의 훈장이다 우리 눈알을 한 데 모아 조국으로 가자 노래를 한 데 엮어 조국으로 가자 그대는 자랑스런 우리의 꿈이 아니냐 그리하여 조국으로 가는 길은 항쟁의 길이다 자유로 가는 길은 진격의 길이다 조국은 한양 고난속에 부활하는 것인가 넘어져도 열 번 일어나는 용기를 배우자 하나로 가는 길은 영광의 길이다 양편바다 함박꽃이 피는 길이다 ☞ 진혼 ☜ 가장 미더웁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미더웁던 나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일은 정처없이 펄럭이는 일이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러나 되도록이면 탁하지 않게. 약간은 흙바람에 눈이 시려도 그럴 수 있는 일, 아침 노을의 무슨 약속이 한 그루 나무로 자라던가. 가장 바라던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바라던 나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일은 갈피 없이 펄럭이는 일이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추하지 않게. 그러면 이 펄럭임도 약간은 진혼의 노래가 될는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 돌아오지 않은 나 자신을 위하여. 언덕마루에 상기 비가는 바람불고 있다. ☞ 평범한 가을밤 ☜ 평범한 가을밤엔 평범한 과일이 낫다. 단 미를 걸러낸 평범한 말이 나에게 더 어울릴 때도 있다. 떠나는 막차 소리를 기억 속에 들으며 한 장의 엷은 잠의 막을 넘어서면 꿈 속을 한 개 커다란 과일이 떨어진다. 어느 깊이로 떨어져 갔는지 내일 아침 출발하는 바람에게 물어 보리라. ☞ 봄비 ☜ 전에는 잘 다닌 길인데 그 사이 왠지 시들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찾는 이 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낯익은 가게들이 몽땅 헐리고 있다. 약방이며 과일점 이런 저런 식당들. 변했구나. 얼마 후 다시 이 길을 지나자 불도저가 요란하다. 얼마 후 다시 지나자 철골(鐵骨)이 마구 치솟고 있다. 얼마 후 다시 지나자 마친 단장에 미끈한 허우대. 지극히 당연한 듯 빌딩이 서 있다. 유수한 모 기업체 사옥. 어리둥절 들어서 본 나는 열없이 도로 나온다. 수상히 훑어보는 사원도 있다. 사원이여 그럴 필요는 없는데. 이제야 나도 알아지는 것이 있구나 변한 거리에 변한 이 사람 때마침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다. ☞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 누가 누구를 닮았다는 건 참 재미 있는 일이다. 가령 길에서나 어디에서 문득 만난 사람이라도 꼭히 누구를 닮았다고 짚는 순간에 기어코 그는 소를 닮고 말 여우 토끼 고양이 거북이도 닮는다. 꼭히 누구를 닮았다고 짚는 순간에 과연 그는 아보가도로 빠스깔을 닮고 또는 바세도오, 쥐포수를 닮고 시골 정미소 주인을 닮는다. 짖궂은 생각은 다시 얼굴에 턱수염을 달아 붙이고 갓을 씌우면 아 정말 그렇다 李朝 때 아무개 참판을 닮는구나 참 신나는 일이다 동그랑땡. ☞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 어느 대학촌에서 ☜ 저마다의 진한 겨울을 안고 처녀(處女)들은 한 아름씩 소포(小包)를 띄우고 있던데,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다. 한산해진 우체국에 들어서면 갑자기 들어온 이유(理由)를 잊고 나는 몇 장의 우표(郵票) 밖에 살 것이 없다. 말하자면 그들로 볼 때 시(詩)는 편리한 날개의 대용일 수도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할 때 계원(係員)은 나에게 우표(郵票)를 내어주며 잠시 나의 속으로 들어가 본다. 밖을 나오면 동한(凍寒)의 젖빛 거리 어쩌면 띄우고 말 한 장의 편지 그 웃머리를 생각하며 참으로 거짖 없는 한 줄의 육성(肉聲)을 생각하며 며칠 못 본 주인(主人) 눅은 악기점(樂器店)으로 그 옆의 낯익은 주점(酒店) 주점(酒店) 속의 바다로 뛰어든다. ☞ 눈 ☜ 아주 너를 떠나 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펑펑 눈이 오는 밤이었다. 돌아서는 모퉁이 마다 내자욱 소리는 나를 따라오고 너를 내 중심에서 눈의 것으로 환원하고 있었다. 너는 아주 떠나버렸기에 그러기에 고이 들을 수 있는 내 스스로의 자욱 소리였지만 내가 남기고 온 발자욱은 이내 묻혀 갔으리라. 펑펑 내리는 눈이 감정 속에 묻혀 갔으리라. 너는 이미 나의 지평(地平)가로 떠나갔기에 그만이지만 그러나 너대신 내가 떠나 갔더래도 좋았을 게다. 우리는 누가 먼저 떠나든, 황막히 내리는 감정속에 살아가는 것이냐. ☞ 행인 -1- ☜ 길을 가다 발이 무거워 한동안 나무 그늘 돌 위에 쉬어 본다. 이마에 밴 땀을 씻으며 아래켠으로 눈을 돌리면 들판을 건너가는 사람의 흰 옷이 간혹 조만하게 아른거리고 있다. 이웃 마을이나 읍내로 잠시 나들이나 가는 길인지, 그런데 이들은 왜 하나같이 가면은 다시 안 올 행인으로만 보일까. 길은 분명 같은 길이요 내키면 언제라도 올 수 있는 길인데. 한동안 나는 생각해 본다. 지난 날 인연 있던 사람들의 일을. 바람이나 잠시 쏘이러 또는 장에나 가듯이 가벼운 인사말로 떠난 사람도 알고 보면 다시 못 올 헤어짐이 될 줄이야. 내일 또 만나자던 웃음 먹은 얼굴이 지금은 해밝은 하늘에만 걸려있는 사람도 았다. 쉬었던 몸을 일으켜 발을 다시 옮기면, 아른거리며 가는 저 들판의 사람 눈에 나도 또한 가면은 아니 올 행인으로나 보일까. 기우는 해그늘에 제비는 돌아가고 철교에 느릿이 화물차는 지난다. 오는지 가는지 구별도 없이. ☞ 항아리 ☜ 떠나온 사람의 눈에 유현(幽玄)한 항아리는 비친다. 항아리의 겉면을 한 자락 구름이 돈다 한 마리 학이 날은다. 바람을 따라가는 구름의 마음을 아는가 구름을 따라가는 학의 마음을 아는가. 알려면 한평생 걸려도 볼 일 걸려서 마침내 학의 부리를 또 한 번 이승으로 돌려볼 일이다. 어쩌면 길이 굽은 하늘에 시방도 하염없이 학은 날고 있으니. ☞ 한 사람의 슬픔 ☜ 쓰지 않았다면 좋았을 그런 것만 써 왔구나 여태. 버릴 데도 없는 이 역겨운 말 누더기. 그러나 여전 나는 쓸 것이다 모래 위에, 물 위에 종이 위에, 허공에. 결코 쓰지 못할 그런 꿈을 위하여 나는 쓰고 또 쓸 것이다. 종국의 수락이 부슬비처럼 내릴 때까지. 나를 늙었다고 하라 마음대로 젊었다고 하라. 기약 없는 이 붓끝에서 끝내 터지는 말은 무엇일까. 울분도 실의도 아니다 깊이 엉긴 한 사람의 슬픔이다. ☞ 하일명상(夏日瞑想) ☜ 노년은 하잘없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이런 말을 하던가 손뼉 치며 소리 높이 허리 굽은 남루를 찬양하라. 격조 높은 정밀(靜謐)의 이마 푸른 현자도 때로는 느닷없는 광기에 사로잡히며 스스로의 운명을 이룩하는 수가 있다. 묵묵히 돌아도 안 보고. 명심하라. 헤매이며 떠돌던 노한 노년도 비로소 냉엄히 끓는 눈을 부릅뜬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더위도 바야흐로 막바지 8월 귀뚜리도 엊그제 울기 시작했다. 꿀벌이여, 제비 나는 빈 집에 와 집을 지어라 황망히 살다 갈 집을 지어라. ☞ 편지 ☜ 거리에도 여저기 군밤이 나돌고 가랑잎도 이리저리 굴러다니면 다 쓴 편지에도 마지막 우표를 단다. 그러면 나름으로 길을 떠나리라. 떠나는 후조에 길이 있듯이 띄우는 편지에도 길은 있으니 시월 상달 높은 하늘에 눈을 풀어 적시면 사람도 한동안 무늬 이는 옥빛이다. ☞ 추일유정(秋日有情) ☜ * 1. 한로(寒露) * 진보라 가지나무에 물을 주는 사람의 흰 발도 사라지면 어언 소매 끝에 와 닿는 한로의 바람 무늬. 그러면 나의 노래도 청자의 하늘빛을 닮을 때가 되었는가. 노래는 상기 맑아 오르지 못하고 부질없이 고이는 한로의 이 냉기. 나의 의지도 한 마리 후조의 나래깃을 닮을 때 청자의 심연에서 일어서는 나는 고려 선비다. * 2. 가을의 얼굴 * 줄기에도 주룽히 보석의 열매가 맺는 날이다. 이마 푸른 선비의 마음은 한로에 젖어 잘 굽은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옥빛 하늘. 그러나 아른대이는 보살님 머리에 가리워 서역(西域)은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상관은 없는 일, 오늘은 돌 속에 보살님을 캐는 날이니, 제일 맑은 가을의 얼굴을 캐는 날이니. * 3. 송신(送信) * 바람은 한로의 음절을 밟고 지나간다. 귀뚜리는 나를 보아도 이젠 두려워하지 않는다. 차운 돌에 수염을 착 붙이고 멀리 무슨 신호를 보내고 있나. 어디선가 받아 읽는 가을의 사람은 일손을 놓고 한동안을 멍하니 잠기고 있다. 귀뚜리의 송신도 이내 끝나면 하늘은 바이 없는 청자의 심연이다 ☞ 잠들기 전 ☜ 거리의 가게도 뚜르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의 수지도 이리저리 맞추어 보는 시간이다. 또한 텔레비전 화면 앞에 모여 오늘의 마무리 뉴스를 지켜보는 가족도 있다. 무언가 석간을 더듬는 가장의 그늘진 이마 주름도 보이고 또는 잠자리 세수도 대강 마치고 잠시 거울 앞에 앉는 아낙네 그 옆에 고사리 손을 불끈 쥐고서 새근거리는 아기의 잠도 보인다. 고요히 깊어가는 이 밤 나의 안에도 나직이 밤 노래는 흐르고 스르르 잠들기도 전에 꼬리 달린 이삭 별이 하나 동녘 하늘로 떨어지고 있다. ☞ 이사 ☜ 늘은 건 세월의 누더기라 하자, 그런대로 불에 사른 것도 많다. 밥을 메겨 시계룰 걸어 놓고 문패도 달아 붙이면 이 집도 당분은 나의 거처가 된다. 잊은 물건도 더러 생각이 나나 묻지 말라 잊기 위한 이사도 있는 법이니. 이 빠진 고흐의 걸상이 여까지 따라오고 보면 질긴 건 인연이다. 수상히 짖던 개도 알아보는지 이내 조용해지면 머리 위에 째잭 인사를 떨구는 새도 두엇 보인다. 일손을 놓고 우러다 보면 앞산 마루 여저기 눈은 아직 남아 있다. 언제면 이 집도 다시 옮길지 기약은 없지만 한 번은 혼자 떠날 그런 이사도 문득 생각이 난다. 어느 날 발에 맞는 새 신을 신고 아득히 먼 가믈 현(玄)으로 나서면 그 때는 무어라 새들은 인사를 할까 알아도 보았으면. ☞ 오, 하나씩의 이름들 ☜ 오, 하나씩의 이름들 무시로 떠오르는 하나씩의 이름들 돌이며 길, 들이며 강 풀이며 나무, 별이며 무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이름들. 이들은 결국 하나씩의 암호였던가. 우리들의 삶의 융단천 그 둘레 안으로 누구인가 짜 넣은 암호였던가. 우리는 저마다의 암호를 안고 이 지상을 살다 가는 것이리라. 조금씩은 나름으로 풀다 말다 하면서 그러나 결코 풀지 못하며, 그리곤 다시 한 번 풀기 위하여 깨어나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리라. ☞ 여로 -1- ☜ 사람은 문득 원경(遠景)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볼 때가 있다. 어릴 때 흔히 그린 크레용 그림 그 속의 조그만 인물을 닮은 자기의 모습을. 그리곤 잠시 지나온 여로를 생각해 본다. 산과 들이 처음 놓이고 한두 채 집이랑 나무, 길이 놓이고 여저기 구름이 놓인 크레용 그림. 그림 속의 인물은 지금도 걸어가고 있다. 불러도 이쪽을 돌아보는 일 없이 한 손엔 무언가 일호 봉투를 들고. 그렇다, 돌아올 리 없는 나요 지금도 원경 속을 가는 사람은. ☞ 싸리나무 ☜ 잠자리는 살아 있는 싸리나무엔 앉지 않는 법이다. 언제나 죽은 싸리나무 그 꼭대기에 가 앉는다. 몸에 비해 유달리 눈이 큰 잠자리는 언제나 죽음의 정상에 가 앉는다. 엷은 나래에 모시 하늘은 비치고…… 바람이 살짝 싸리잎을 흔들면 꿈에서나 깨어난 듯 잠자리는 떠난다 어느 또한 싸리 마른 가지를 찾아서. 오늘은 또 오늘의 묘비명이다. 바람에 휘적이는 묘비명이다. ☞ 비가(悲歌) ☜ * 1 *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삐에로여 작별의 인사말을 아는가. 너의 눈 속에 한 자락 노을 구름은 돈다. 길 잃은 잠자리의 그리매도 저물면 대지의 노래 속에 떨어지는 나뭇잎들, 늦도라지 보라 속에 꿈을 헤맨 사람은 귀뚜라미 울음에도 마음이 설레이고 삐에로여 잠잠히 춤을 거두어라. 사람의 손에 인형은 때묻고 술잔에 남은 머루씨 댓 톨 바람에 희끗이 머리카락은 날린다. * 2 * 계절 사이로 간간이 웃음 소리는 밝게 들린다. 여름을 살아 남아 여까지 온 사람은 비탈에 그늘 여문 가을꽃을 바라본다. 이것도 그래 다행한 일이다 늦도라지 보라 속에 비치며 사라지는 행인의 그림자. 익어 여문 과일의 무게가 문득 손에 무거울 때 굴러가는 가랑잎은 누구의 것일까. 귀뚜리여 아직은 죽을 자리를 더듬지 말라. 시월 상달 해 짧은 날에 옥빛 바람은 풀어 섞이고 이러할 때 상머리 생명은 유정(有情)이다. * 3 * 기적 소리도 울고 가면 그만, 누가 오래 견딜까 이 멀건 들판을. 한 줄기 걸인의 모닥불이 피어 오른다. 간간이 풍기는 고무 타는 내. 이러할 때 날카로이 새는 노을에 빛나고…… 저녁 새여 아직은 더 울어라. 나락 말던 사람의 그리매는 사라지고 굽어 도는 강나루 모서리도 저물면 남은 건 한 가지 최후의 기슭에 별이 뜬다. * 4 * 사람이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내가 두 발로 일어서 걸어 온 시간이 아득히 보인다. 무엇을 위한 여로인가. 엿장수의 가위 소리는 일찍 해진 길로 발을 돌리고 우수수 달력 속에 날은 어둡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삐에로여 잔을 들어라 바람이 너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바람이 방금 너의 이름을 지우고 있다. 삐에로여 잔을 놓아라 ☞ 바다 ☜ 바다여, 옷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살에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진한 잉크 물이다. 수면으로 내려앉는 돌층계도 뱃전에 날아 뜨는 갈매기떼도 떠나는 고동 소리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해만의 끝머리 흰 등대도 등대 위에 조으는 구름 자락도 흩어진 섬들의 밝은 무덤도 지우려면 다 지울 수 있지만 바다여, 한 번 묻으면 잘 안 지는 너는 푸른 잉크 물이다. 찍어서 내가 쓰는 가슴의 잉크 물이다. ☞ 모과나무 ☜ 유난히도 포근한 초동 날씨 더없이 옥빛 귀한 하늘빛이다. 고마와라, 이런 날도 있었던가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는데. 하늘거리며 그리 춥지도 않은 바람이 시름없이 건너가고 있다. 뜰의 모과나무엔 예저기 아직도 매달린 가랑잎새들 하르라니 살랑이며 맑게 떨고 있다. 그때는 구슬프기 짝이 없던 나문데 그 사이 어언 자라 실하고 당당한 나무가 되었다. 여름이면 보기에도 시원히 잎새를 살랑이며 호젓한 저녁 한때를 심심히도 반겨 주더니 그 사이도 식구들은 하나 둘 줄고 뜻밖에도 이 몸은 망가져 삽시에 많은 것이 변하고 말았다.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햇살에 살랑이는 모과나무의 향내라 할까. 햇살 바른 뜰에는 향기 드높이 코에 스미던 모과 열매도 지금은 거진 다 따고 말았다. 몇 개만 가지 끝에 지금도 남아 있을 뿐. 바람이 하늘거릴 때마다 지금도 향내는 코에 스미듯 감돌고 있다. 드디어 나뭇잎도 다 떨어지면 사람들은 영하 깊이 문을 닫아 걸리라. 원컨대 해가 바뀌면 또 가지 추운 나무도 다시 살아나 향내 그윽한 열매를 달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 또 무엇이랴, 유난히도 포근한 초동(初冬) 날씨에 더없이 옥빛 귀한 이 하늘 고마와라, 이런 날도 있었던가 좋았던 날은 하마 가고 없는데. 경건히 고개 숙여 지팡이를 다시 짚는다. ☞ 끝나는 계절 ☜ 쌀을 안치는 소리가 부엌에 들린다. 짧은 해는 빨리도 기울고 밖에 놀던 아이도 집으로 돌아온다. 들어서며 부르는 갓 배운 콧노래 저무는 날은 오히려 밝기도 하다. 나에게도 한 계절은 끝나고 있다 기울기엔 상기 이른 한 계절이. 아침에 갈아입은 와이셔츠도 후줄히 때가 묻었다. 청마루 한 모서리 어느 날의 잊었던 단추를 주우면 멀리 울리는 열차의 기적 소리. 부엌에 끓는 찌개 소리가 노을에 한창 풀어 섞이고 있다. ☞ 금조비가(金鳥悲歌) ☜ * 1 * 어느 고도(古都)의 박물관에서 마침내 너를 보았다, 황금(黃金)의 새여 혹은 보았다고 여전 지금도 생각고 있다. 그리는 크지 않는 순금(純金)의 몸매 접동이나 방울새 크기만 할까. 허공에 고개를 치껴 들고 방금도 울 듯이 머문 너의 부리, 너의 눈은 뜨고 있는 잠인가 자고 있는 생시인가. 그 사이도 수없이 꽃잎은 피고 지고 맺어서 떨어진 열매들의 행방. 그 사이도 허다히 왕조는 바뀌고 발굽 소리는 요란히 지나간 뒤에도 여전 울 듯이 부리는 허공에 머물고 있다. 간혹은 내 하염없는 생각에 잠길 때면 무시로 나의 눈에 너는 어리고 울 듯이 굳어 버린 너의 울음에 쭝긋이 나귀의 귀를 나는 모아 본다. * 2 * 오늘도 생각 속에 너를 대하여 무엇을 나는 바랄 것인가 황금의 새여, 그렇다, 죽기 위해 태어난 그런 몸은 아니라 너는 말하리라.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선 그 말이 옳을는지 모른다. 자고로 시인은 무어라 이르던가, 너는 죽지 않는 새 남들은 다 가도 너는 가지 않는 새 그런 새라 시인의 한 사람은 말하더라. * 3 * 이승에 태어나 누가 한두 번 살고 싶은 저 영생을 바라지 않았던가. 보라, 망가지듯 두드리는 건반의 두 손을, 미친 듯 휘두르는 백발의 지휘봉을, 쫓기듯 또한 쫓듯 줏어 넘기는 책장을 핏발 선 독서의 눈을. 보라, 신들려 떠는 굿소리 구슬픈 저 염불 소리를 목메인 기도의 탄식을, 보라, 우수수 가랑잎에 남은 잔을 비우고 나룻배를 부르는 행인의 목소리를. 누가 한두 번 살고 싶은 저 영생을 바라지 않았던가. * 7 * 한 번의 봄을 살은 사람은 한 번의 가을이면 되는 일 무엇을 또 바라랴. 한 번의 꽃을 피운 사람은 한 번의 가는 길이면 되는 일 무엇을 또 바라랴. 해 져도 해 떠도 그저 멍멍할 따름. 눈이 탄 사람은 탄 채 멀건 들판을 헤매이고 아니면 웅크려 식은 간(肝)이나 쪼으며 기억의 아침 노을 그런 저녁 노을을 시리게 다시 또 맞이할 뿐이다. * 8 * 황금의 새여, 이젠 눈을 열어라 열어서 마침내 울어 보아라 소리없는 울음에 나의 귀는 열려 있으니 살아보고 사라질 목숨의 향기로 울어서 참다운 너의 네가 되어라. 그런 뒤면 또 한번 천 년을 잠들면 어떠랴 만 년을 잠들면 어떠랴. 뜻 있는 사람이 그 때도 살아 있다면 그들은 그들의 슬픔 속에서 간절히 또한 너의 울음을 원할 것이니 황금의 새여 오늘은 오늘의 눈을 열어 울어라 황망히 살다 가는 이 행인을 위하여 다하지 못한 그의 꿈을 위하여 슬퍼하지도 안하지도 말고서. ☞ 가을 햇살 ☜ 우리들이 둘러 앉은 이 언저리 나무잎은 물들어 더러는 떨어지고 더러는 남아 가지에 무늬 맑게 설렁이고 있다. 보아라, 천지에 부드러운 이 햇살을 인제는 한이 없는 가을 이 햇살을. 이런 날의 한 때를 위해 사람은 여태 살아 왔던가. 해는 짧아라, 가을날의 오후 서너 시 혹은 반 이런 볕이 너무도 아까워 사람은 쉬이 자리를 뜰 수 없구나. 왕릉(王陵)이 보이는 풀밭에 상기도 무늬 맑은 웃음은 감돌고 한동안 그지없이 목숨은 기쁘다 기뻐서 도리 없이 목숨은 슬프다. ☞ 마음 이 한 때 ☜ 피며는 그저 피는 줄만 알았던 꽃잎들 여물면 그저 여문 줄로만 알았던 열매들, 이들은 왜 하나같이 더없는 귀한 걸로 보이는 것일까. 피며는 그저 피는 줄로만 알았던 노을의 분홍빛 변하면 그저 변한 줄만 알았던 보라며 수묵 어린 빛, 고목(古木)은 한 그루 노을 다한 하늘에 우뚝 서 있고 두어 채 방금 불이 돋은 창문들, 이들은 왜 하나같이 더없는 의미로만 보이는 것일까 기쁘고도 서러운 마음 이 한때. ☞ 나의 손 ☜ 나의 손은 크도 작도 않은 손 알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손 큰 일은 못해도 작은 일은 더욱 못하는 손. 착한 일은 못해도 악한 일은 더욱 못하는 손. 이런 손에 죄가 있다면 분수대로 산 죄밖에. 넘보지도 얕보지도 않고 나름으로 산 죄밖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프나 고프나 나름으로 산 죄밖에. 어느 정도 쥐어도 보고 털털 털어도 본 손 털어도 별 먼지는 안 나는 손 무엇인가 만들고는 부수고 부수고는 다시 만들고 흩어진 장기알도 챙겨서는 다시 두고 모기 파리는 그 자리에 때려 잡아도 함부로 살생은 안한 손 약손은 못되어도 독손은 더욱 못되는 손 어쩌다 꽃을 꺾어도 병에 담기 위한 것. 담아서 짧은 이승 마음 주기 위한 것. 나의 손은 크도 작도 않은 손 알맞게 하나님이 만드신 손. 오늘도 이 손으로 시를 씁니다. 나의 시를 말이지요, 오늘도 이 손으로 코를 풉니다. 오늘도 이 손으로 도장을 찍습니다. 어떠캅니까. 하나님은 아시리라 믿고 손톱을 깎습니다. ================================================== 목          숨                                                          - 신동집 -     목숨은 때 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광년(億萬光年)의 현암(玄暗)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追憶)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 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者)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者)는 살은 자(者)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 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 (1954) -   해        설     [ 개관정리 ] ◆ 성격 : 존재론적, 의지적, 주지적, 형이상학적, 명상적 ◆ 표현 : 명령형 종결어미를 통한 선언적인 표현(화자의 반성에의 의지를 강화하는데 기여)              형이상학적인 계열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발상이나 언어구사에 있어 생경함이나 난해함이 없음 ◆ 중요 시어 및 시구   * 1연 → '목숨이 때묻었다'는 '흙이 된 빛깔'과 '황폐한 얼굴' 등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표현임.                전쟁으로 인한 목숨과 생명에 대한 회의로부터 비롯됨.   * 산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 살아 남아 있는 자는 허무하고 처절하게 죽어간 생명에 대한 증언을 하라.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다.   * 죽은 자는 산 자를 고발하라 → 죽은 자들이 고발할 내용(온갖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했던 구차한 모습)에            대해 반성하라.  살아 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나타남.    *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 → 살아 남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바로 죽은 자에 대한 죄의식이기에, 목숨         의 조건은 고독한 것이다.(삶의 의미는 죽음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통해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음)    * 백조 → 반성적 삶에 투철함으로써 성취된 삶. '순수한 생명'의 심상 ◆ 주제 ⇒ 생명의 고귀함과 순수한 삶에 대한 동경     [ 시상의 흐름(짜임) ] ◆ 1연 : 목숨의 황폐함(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죽음보다 못한 삶) ◆ 2연 : 삶에 대한 소망(생명에의 질긴 의욕) ◆ 3연 : 목숨의 소중함 ◆ 4연 : 죽은 목숨에 대한 애틋함. ◆ 5연 : 목숨의 조건(살아남은 것에 대한 치열한 반성적 자세) ◆ 6연 : 미래의 삶에 대한 낙관적 전망 ◆ 7연 : 순수한 삶의 구현 소망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시 은 1950년대 한국의 특수상황에서 거둔 수확의 하나로, 전쟁시, 참여시 또는 순수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가 범람하는 분위기에서 원격조정된 '신동집 스타일'의 한 표본을 보게 되는 작품이다.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의 존재론적 갈등이 형상화된 작품인데, 시적 화자는 전쟁이라는 민족적 수난과 폐허 속에서도 삶의 의욕과 목숨의 영원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존재론적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1연에서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얼굴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의 황폐함 곧, 절망과 죽음의 상황을 발견해 내고 있다. 2연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목숨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3연에서는 존재론적 한계에서 맞이하게 되는 인간 존재의 구원의 빛을 발견하고 있다.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거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의 뿌리를 내리며 빛을 발하는 소중한 개인의 생명의 불빛을 보는 것이다. 4연에서는 전쟁을 치르면서 육체는 사라지고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죽은 자들의 흔적이 제시되고 있다. 5연은 시대를 꿰뚫어 보는 자의 예지가 응결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진정한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선언적 어투를 사용한다. 인간다운 삶이란 육체적인 생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죽어간 자들의 처절한 삶을 증언하고 온갖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했던 구차한 모습들을 반성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는 단언적 표현은 이러한 치열한 반성적 자세를 갖출 때 필연적으로 찾아들 수밖에 없는 존재의 고독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6연과 7연에서는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전쟁의 포화로 점철된 시대와는 또다른 시대가 올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이 제시된다. 자신의 목숨이 빚어낼 한많은 생애가 모양도 없이 지워지는 죽음의 순간에 '나의 백조'로 표상되는 자신의 진정한 삶이 소생하기를 기원한다.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라는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 김윤식 교수의 시 특강에서 전쟁은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 간다. 그들의 죽음은 필연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이다.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는다. 삶과 죽음은 순식간에 한치의 차이로 결정된다.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누가 총을 맞을런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목숨의 필연성과 소중함을 믿었던 사람들은 여기서 실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삶과 죽음의 차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광포한 속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 간 자를 위해 산 자가 할 일이란 그 죽음의 우연성과 전쟁의 비극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죽은 자에 대해 부끄럽고 죄가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결코 만나지 못한다. 산 자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목숨은 고귀하고 존엄하다. 그러나 산 자는 그 목숨 때문에 죽은 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살아 있음이라는 삶의 조건 자체가 부끄러움의 원천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고귀한 목숨을 전쟁은 한순간에 제거해 버린다. 산 자의 고독은 목숨을 지닌 것의 부끄러움과 인간의 삶의 조건의 허망함 때문에 생겨난다.       [출처] 신동집(申瞳集)|작성자 나무  
1676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문정희 - 겨울 일기 댓글:  조회:6925  추천:0  2015-12-26
겨울 일기 - 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  [작품 해설] ㅁ주제 : 임을 읽어버린 슬픔  ㅁ시적화자의 정서 : 슬픔, 고통, 괴로움  ㅁ시적화자의 태도 : 절망적이며, 극복할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고 체념적  ㅁ표현 특징 : 1연과 3연의 반어법과 2연의 자연물과의 대조 [감상]  ㅁ1연 : 나는 이겨울을 누워지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시적화자는 임과의 이별로 인해 절망적이며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게 누워만 지냈다는걸 알 수 있다.             이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는데 편히 지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반어법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ㅁ2연 : 저 들에서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 자연물과 시적화자의 대조적인 모습. 자연물인 나무는 추운겨울에도 서로 기대면서.. 위로하면서 더불어 지내는데..시적화자는 혼자이기 때문에.. 그게 자기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ㅁ3연 :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 현실세계와의 통로인 문을 열지 않고, 고립된 방안에서 슬픔으로 인해 반추동물처럼 죽은 것같이 움직이지 않고 지낸다는걸 알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보아, 이 시에 나타난 겨울은 추운 시련의 계절인데다가, 임과의 이별까지 겹쳐 좀더 부정적인 시어라고 볼수 있습니다. ==========================   이혼 앞둔 시인 / 문정희         이혼 앞둔 여시인은 말하네 고통, 네 덕에 여태 살았다 고통? 네 덕에라니....눈물나게 화려한 수사를 따라가다 다시 아침 신문을 자세히 보니 아흔 앞둔 여시인은 말하네* 고통, 네 덕에 여태 살았다 아슬한 벼랑 끝자락에서 펼쳐 본 그녀의 식민지 시로 새긴 혼란과 전쟁, 궁핍과 수탈의 소용돌이 아흔 앞둔 여시인의 시집은 이것이 연단과 장화와 성숙이었다고 말하네 아직은 아흔보다 이혼이 더 절박한 아침 유효 기간이 끝난 찰떡 같은 결혼을 노래하고 싶네 이불 꿰매는 독바늘을 꺼내어 결혼의 정수리에 꽂고 길게 뻗어 가는 철로와 레일을 푸른 불꽃 망치로 찍어 보고 싶네 물귀신 같은 시집을 펼치어 위선과 성모욕 없이는 유지 안 되는 녹슨 쇠사슬을 이혼 앞둔 아니, 아흔 앞둔 여시인은 노래하고 싶네 고통, 네 덕에 여태 살았다       *『조선일보』2012. 6. 8일자, 홍윤숙 시집 소개「그 소식」.       -《시작》(2012년 가을호) ========================================                       문정희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봐.  민중 시인 K는 유럽을 돌며  분수와 조각과 성벽 앞에서  귀족에게 착취당한 노동을 생각하며  피 끓는 분노를 느꼈다고 하는데  고백컨대  나는 유럽을 돌며  내내 사랑만을 생각했어  목숨의 아름다움과 허무  시간 속의 모든 사랑의 가변에  목이 메었어.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며  눈물을 흘렸지.  아름다운 조각과 분수와 성벽을 바라보며  오래 그 속에 빠지고만 싶었지.  나는 아무래도 나쁜 시인인가봐.  곤돌라를 젓는 사내에게 홀딱 빠져  밤새도록 그를 조각 속에 가두려고  몸을 떨었어.  중세의 부패한 귀족이 남긴 유적에 숨이 막혔어.  그 아름다움 속에 죽고 싶었어.      ============================================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남편 / 문정희       문정희 시인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중임     칠순 바라보는 '소녀 시인'                    야성으로 詩 토해내다     시집 '응' 펴낸 문정희 시인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 문정희(67) 시인이 열두 번째 시집 '응'(민음사)을 냈다. 2010년 '다산의 처녀'를 내놓은 지 4년 만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인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꿈틀대는 생명력을 뿜어낸다.    "시가 차오를 때면 응! 야성의 호흡으로 대답했다. 어느 땅, 어느 년대에도 없는 뜨겁고 새로운 생명이기를."   이 시집에는 그렇게 깊은 곳에서 시가 차오를 때마다 '응!'하고 야성의 호흡으로 내지른 78편의 시가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 "목숨을 걸었다"는 시인은  연합뉴스에 "시집을 낼 때마다 그 시집만이 가지는 '등뼈'를 세우는데 이번 시집의 등뼈는 야성의 호흡"이라면서 "다른 말로 하면 늑대의 호흡 같은 생생한 생명의 소리"라고 말했다.   또 "그동안 피지배자로서 억압받은 여성의 삶을 많이 노래했는데 여성성이라는 문제에 너무 오래 집착하는 것도 굴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번 시집에서는 여성이라는 대지가 갖고 있는 생명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야성의 목소리로 생명을 품고 키우는 대지로서의 여성성을 노래했다"고 했다.    '자유'와 '고독'을 화두 삼아 시를 지어온 지 벌써 45년째. 시인의 열정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활화산처럼 타오른다.    "늑대를 숲 속의 빈터라고 생각해 보자/사랑 때문에 심장을 도려낸 여자라고 생각해 보자/가보(家寶)로 내려오는 북을 찢고/적국의 밀림 속에 신방을 차린/번개나 태풍!/울부짖는 달그림자라고 생각해 보자"('늑대 여자' 중 )    "여자가 시를 쓰는 것은/불을 만지고 노는 것과 같다/몸속에 키운 천둥을 홀로 캐내는 일과 같다/소리 없이 비명처럼 내리는 비로/땅 위에 푸른 계절을 만드는/여자가 시를 쓰는 것은/비상벨을 눌러/감히 신과 키스를 하려는 것과 같다/이것은 죄는 아니지만 위험한 일이므로/문학사는 오랫동안/여자의 시를 역사 밖으로 던져 버렸다"('불을 만지고 노는 여자' 중)   문학평론가 이숭원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는 "문정희 시인은 독자적 개성으로 무장한 시의 화신"이라면서 "늑대 여인의 열정과 가을 폭설의 정밀을 두루 화해시킬 수 있는 동력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데서 온다"고 풀이했다.   여성의 삶을 보듬는 시인의 시선은 사실적이면서도 따뜻하다.    "일찍이 농촌을 떠나와/그때 막 시작된 산업화 시대의 여직공이 되어/밤낮으로 수출 공장에서 일을 했던/우리 순임이(중략)/초로의 할머니가 되어 마을 회관에서/동네 노인들과 복분자 술을 나눠 마시고 있었다/동남아 며느리가 낳은/눈이 약간 검은 손자를 자애로이 품에 안고"('우리 순임이' 중)   시인은 "순임이는 찬밥댕이처럼 가장 그늘에 서 있지만 식구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몸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을 내뿜으면서 세상을 고쳐나가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한국 여성시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 시인은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힘 있는 '여성적 생명주의'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동국대 석좌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 시인 포럼 '올해의 시인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받으며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 시인이자 평론가인 미셸 메나셰는 "문정희는 국경을 초월한다. 그녀는 세계적인 반항아"라면서 "그녀의 시는 범속한 묘사, 즉각적인 감각으로 우주적 메타포와 결합한다"고 평했다. ================================================================== "치명적 연애 못해봐 열등감… 이젠 치사해‘에이 관둬라’"         “이번에 플라멩코를 보니 목이 꺽꺽 메었어요. 어린 시절 듣던 남도의 판소리와 육자배기, 미친 여자들의 춤, 장돌뱅이의 몸부림이 다 들어있더라고.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 오만불손한 아름다움에 매료됐지요.”   ...스페인 ‘책의 밤’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온 문정희(68) 시인은 마드리드에서 본 플라멩코를 이렇게 말했다. 그가 몇 년 전 멕시코에서 본 플라멩코는 관능적이었다. ‘햇살 가득한 대낮/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꽃처럼 피어난/나의 문자/“응”’(‘응’ 일부)이라는 시가 그때 나왔었다. 여전히 ‘문학의 도끼’를 들고 자신의 삶을 깨우고 있는 문 시인에게 어떤 깊이가 더해진 걸까. 여성의 대지적 생명력을 꿈틀대는 관능의 언어로, 활달한 사유로 망설임 없이 노래해 온 문 시인은 한국시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열어왔다. 그의 시들이 국내·외에서 계속 애송되는 건 시들지 않는 이런 싱싱함 때문이다. 가부장적 폭력성에 맞선 시로 그를 평단 일각에선 페미니즘 문학의 선두로 꼽기도 한다. 한국시인협회장을 맡은 그는 이전부터 외국문학계의 초청으로 해외 나들이가 잦았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부근 호텔의 커피숍에서 문 시인을 만났다. 세르반테스 기일에 맞춰 열리는 스페인 ‘책의 밤’ 행사에 그는 소설가 공지영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가했었다. ―스페인어권에서 한국 시에 대한 반응이 궁금한데. “내 시집 ‘나는 문이다’(2007)가 스페인어 ‘요 소이 문’(Yo soy moon)으로 지난해 가을 번역됐어요. 그 덕분에 지난 2월 쿠바 아바나도서전에 한국 최초로 참가했고 이번에도 초청을 받았죠. ‘나는 문이다’의 전체적인 주제는 생명, 여성, 사랑이거든요. 우리로 치면 홍대 앞 같은 문화의 거리에 설치된 부스에서 그것을 주제로 한 짧은 강연과 스페인 여성작가 3명하고 대담을 했어요. 열띤 분위기였고, 생각지도 못한 호응이었어요. 세르반테스를 낳은 ‘문학 종주국’에서 시가 살아있구나, 존중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문 시인의 시는 10여 개 언어권에서 출간됐고, 2010년엔 스웨덴의 ‘시카다상’을 받았다. 그의 시는 외국어로 번역했을 때 오차가 아주 적다는 평을 듣는다. 주제의 보편성도 있지만, 비비 꼬지 않고 탁 터지는 직선적 시어가 언어 장벽을 넘어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 시가 정열적인 스페인어권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데. “스페인이 주는 열기는 제국주의적인 권위와 전통에 대한 자부가 있으면서도 플라멩코나 투우로 표현되는 어떤 천부의 광기, 피, 햇살…, 그런 거죠. 스페인 청중들도 내 시에 쉽게 빨려드는 느낌을 받았어요. 당신은 굉장히 스페인권에 어울린다는 청중도 있었고. 내가 그쪽 문화권인 파블로 네루다 등의 시에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내 피 속에는 아마 스페인의 햇살과 피가 DNA처럼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그런 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본 플라멩코는 달랐나요. “저는 여성시인이지만 감상을 혐오해요. 하지만 이번에 본 플라멩코는 내가 호남의, 남도의 딸로서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 들었던 판소리, 육자배기, 미친 여자들의 춤, 장돌뱅이의 몸부림이 다 있더라고요.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어요. 내게 문학적 재능이 있다면,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모어(母語)가 굉장히 영향을 미쳤죠. 호남의 판소리적 과장 어법이랄까, 그런 것이 내 뇌파 속에 심어졌고. 열한 살 때 혼자 광주로 유학을 가, 엄청난 외로움이 밀려왔던 것도 좋은 문학의 모태를 이루지 않았나 싶어요. 6·25전쟁 후 열한 살까지 뛰놀던 황폐한 남도의 자연도 있을 테고.” 그에 따르면 자신을 시인으로 키운 두어 가지 중 어머니와 남도의 소리와 들판이 그 첫 번째다. 이번에 플라멩코는 그것을 건드려 공명시킨 것 같다. “마드리드 명품거리엘 갔더니 서점이 있고 가장 좋은 테이블에 시집이 있었어요. 스페인의 국력은 쇠락했다지만, 문학의 일등국으로서 충분히 고개가 숙어지더군요. 돌아와 우리 주변에 횡행하는 최하류의 언어들…, 그것들이 흙탕물처럼 느껴졌어요. 정치적 언어들도 좀 세련되고 멋있을 수 있잖아요. 어떻게 입에 그런 언어를 품고 다니는지.” ‘광기와 예술’의 나라에서 돌아와 문 시인은 곧바로 “답답하다”고 했다. 보궐선거와 연금개혁 등으로 정치판의 주판알을 굴리는 뉴스가 온통 시끌시끌하던 때였다.  ―우리 사회가 나이 든 사람이든, 젊은이든 기댈 곳 없이 어렵습니다. 시가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 까요. “저도 너무 절실하고 평생 해온 질문인데…. 그런데 사회에 이익이 돼야 하고,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런 시도 있겠으나 저는 실제로 그걸 좋은 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는 존재함으로써 그 자체가 위로를 줄 때가 있고, 자극을 줄 때도 있는 거지. 꽃이 피었다 해서 그것이 위로를 주려 한 건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고. 시인이 헤쳐오고 가꾸어온 삶과 언어가 그냥 위로가 된다면 그것이 다라고 봐야죠.” ―시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말인지. “사람들이 시를 갈증 하는 데 그걸 덜어주지 못한다면, 시인들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봐요. 시가 어렵고 제대로 닦이지 않은 엉성한 채로 발표되는 게 많아요. 과잉이 더 나빠요. 쉬운 시가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암실에서 혼자 지껄이던 암호문 같은, 무당의 주문 같은, 제대로 발효되지 않은 미성숙 작품을 쏟아내면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키겠냐는 거죠. 나에게 어떻게 쑥쑥 시를 쓰느냐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정말 수천 번 고쳐요. 최근에 내 시를 좋아하는 분이 계시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때, 그것은 어렵고 복잡한 시에 대한 실망의 상대적인 효과라고 봅니다.” 그는 지난해 말 발표한 시에서 ‘속도와 물신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시간의 검푸른 이끼 속으로 빨려들어 갔어요/이윽고 내 안의 늙은 독재자가 나를 덮쳤어요’(‘독재자에 대하여’ 중)라고 시인으로서의 쉽지 않은 삶을 고백했다. “제가 성인으로 살아온 50년이 한국사회로서는 속도와 경제가치가 극대화된 시기예요. 이런 사회는 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죠. 이 말도 안 되는 시를 가지고, 이 미약한 향기로 생을 유지한다는 것은 엄청난 기적이고, 무모한 모험이에요. 그런데 이런 것을 견디고, 견디고, 거기까지 언어로 투시하는 힘을 가져간다면 흔들리지 않는 자기 것을 성취하겠지요. 제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려고 노력하기는 합니다.” ―어려서부터 ‘문학 천재’로 이름을 날렸는데, 문학적 재능은 어떤 건가요. 문학의 경락(經絡)이 뚫린 분들이 시인이 되는가요. “중등학교 시절 전국 백일장을 제패하고 막상 대학에 가 전공을 할 때 ‘과연 내게 재능이 있나’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백일장엔 자신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문학과 부딪히니 재능이란 하찮은 거더군요. 결국 삶과생활에서 시가 나오는 거죠. 타고난 재능은 어머니와 남도의 자연과 소리, 어려서의 고독에서 나왔다면, 서울로 와서 공부하고 결혼해 뉴욕 유학까지 공간이 확장되면서 사고도 같이 넓어지며 변모했던 것 같아요. 내 시가 나이가 들수록 힘이 세진다는 것도, 지난한 삶 속에서 단련된 때문이죠.”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결혼이 들어온다/추위와 무더위 속에서도 굳건한 고려와 조선과/일렬횡대의 전주 이씨 족보가/든든한 서방님이 들어오신다/신사임당이 어우동에게/시(詩)를 숨기고 나가 있으라 눈짓한다’(‘퇴근시간’ 중 일부) 그는 여성들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시들을 여럿 발표했다. 이로 인해 페미니즘 시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에 대해서는 불편한 기색이다. “내 시를 페미니즘 시로 묶으려는 건 음모예요. 여성시로, 페미니즘 시로 묶어 문학사에 정식 인양을 안 하려는 것이에요. 내 시가 궁극적으로 노래하려고 하는 게 생명이요 사랑이지, 단순히 남녀의 문제가 아니에요. 페미니즘 시라는 하나의 굴레를 씌워 나를 배제하려는 문학의 기술방식을 단호히 거부해요. 자궁이라는 것이 여성의 몸에 있지만, 인류의 몸에 있는 것이듯 말이죠.” 문 시인의 ‘남편’이란 시는 중년 이상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 사이에서도 자주 읊어진다.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돌아누워 버리는/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남편’ 중 일부) “내 시에서 늘 남편은 악역의 모델이죠. 미안하고 고맙죠. 그 사람도 재미있어하고. 그 사람한테 시 ‘남편’에 대해 질문이 많은 모양이에요. 그러면 ‘아내’라는 제목으로 이름만 바꾸면 자기 심정이라고 얘기했다고 하더라고요.” 문 시인의 작품에서 사랑과 욕망은 빼놓을 수 없다.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싱싱하게 몸부림치는/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오는/거대한 파도를…’(‘다시 남자를 위하여’ 일부)도 인기 목록에 오른 시다. ―사랑과 욕망이 여전히 성성하신가요. “그야말로 치명적인 연애를 못 해본 것, 이것이 늘 시인으로서 열등감이었어요. 몰락, 파멸, 벼랑, 이렇게 치명적인 연애를 한 번 못해 본 시인이 창피하고 그랬었어요. 너무 뻔뻔하게 가정을 유지하는 것 같고, 애들 잘 키우고, 제사도 지내고, 학교 교수도 하고, 그러면서 시 속에서는 온갖 엄살을 떨고. 그런데 최근에는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연애, 이미 한 것 같아요. 충분히 탐미나 관능시를 쓰기에 어렵지 않으니, 구체적 사건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어요. 욕망도 여전하지만, 요새 내가 나를 연애하는 여자로 설득하기가 어려워요. 가장 화가 나는 칭찬이 뭐냐면 ‘아직도 너무 고우세요’하는 거예요. 곱다는 것은 노인을 묘사하는 단어니까. 너무 매력 있어요. 이게 좋아요. 치사해서 에이, 관둬라. 연애 따위 차버리기로 했어요. 그런데 지뢰를 사방에 깔아 놓았으니 누가 밟으면 막지는 않겠어요, 하하하.” 그는 이미 시로 답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되고 말았다//(…)사랑하는 사람아/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비망록’ 중)       ==================================   문정희(文貞姬, 1947 ~ ) 생애 1947년 5월 25일 ~ 출생 전라남도 보성 분야 문학 작가 시인.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 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주로 삶의 생명력과 의미에 대한 관찰 및 통찰을 시로 나타냈으며, 최근에는 여성성과 일상성을 기초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을 담은 시를 많이 썼다.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1973), “아우내의 새”(1986), “그리운 나의 집”(1987), “제 몸 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 주세요”(1990), “찔레”(2008) 등이 있다. 작품 작은 부엌 노래 이 시는 여성이 불평등한 결혼 제도와 가부장적 억압의 현실에서 벗어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여 주체적인 삶을 영위해야 함을 시사해 주는 작품이다. 이 시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부엌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엌은 여성들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고, 집안일 역시 여성들의 몫이라는 불평등한 고정 관념이 이어져 왔다. 화자는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모습과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을 후각적 심상, 청각적 심상, 촉각적 심상 등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해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단순히 여성의 억압적 현실을 나타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여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천형의 덜미를 푸는’과 ‘허물 벗는 소리’ 등을 통해 여성이 불평등한 현실을 극복하고 하나의 주체로서 당당히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수록교과서 : (국어) 천재(정재찬), 상문 비망록 이 시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남보다 나를 더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된 화자의 고백과 자기반성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심지어 화자는 '별'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에 그로 인한 후회가 '돌'처럼 가슴에 아프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화자가 그러한 삶을 살아왔기에 '허둥거리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비망록'인 것도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기록하며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화자의 다짐을 반영한 것이라 볼수 있다. 찬밥 이 시의 화자는 아픈 몸을 일으켜 '찬밥'을 먹고 있다. '찬밥'은 어머니의 사랑을 일깨워 주는 소재이면서, 항상 가족들에게 따스한 밥을 먹이고 정작 자신은 '찬밥'을 드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화자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부러 '찬밥'을 먹으면서 몸에서 제일 따스한 사랑을 품던, 신(神)을 대신하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러한 '어머니'라는 위치는 현재 화자의 위치와 같다. 자신의 처지가 곧 한 가정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어머니'라는 시어를 한번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는 '사람', '그녀'로 대신 한다. 그것은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대상이 화자의 어머니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시를 읽는모든 이의 어머니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 또한 '찬밥'을 먹으면서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스스로 어머니로서의 삶에 대한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화자가 '세상의 찬밥'이 되었다는 의미는 세상에서 '어머니'에 대한 평가가 '찬밥'과 같지만 그 안에는 '희생과 사랑'이 가득하다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이다. 흙 이 시의 화자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흙의 이름이라고 드러내며 흙에 대한 예찬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흙 흙 흙'하고 흙을 부르면 '심장 저 깊은 곳으로 부터 /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 부터 /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오며,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하며 흙에 대한 감흥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화자는 도공이 흙으로 달덩이를 낳고 농부가 흙에 씨앗을 뿌려 한 가마의 곡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바탕으로 '생명의 태반'이며 '귀의처'인 흙의 속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모성성' 역시 시인이 여성의 삶에 대한 통찰을 주로 작품화시켰다는 점에 주목하여 해석할 수 있다. 퇴근 시간 이 시는 남편이 퇴근하는 것과 동시에 어우동과 같은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신사임당과 같은 현모양처로 바뀌어야 하는 가부장제 속의 여성에 대한 담론을 드러내고 있다. 시의 표면에 그려진 가정의 모습은 '종요로운 가화만사성'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곳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는 억압적인 모순을 드러내기 위한 반어일 뿐이다. '굳건한 고려와 조선', '일렬횡대의 전주 이씨 족보', '우리의 든든한 서방님'은 면면히 이어온 가부장제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그러한 가부장제의 현실 속에서 여성은 시를 쓰고자 하는 꿈틀거리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든든한 서방님'이 퇴근한 이후로는 그러한 욕망을 감출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러한 욕망이 완전히 숨겨지질 않아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풋고추는 '난도질' 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상징하는 찌개는 끓어 넘치기까지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억압적인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겨울 일기 이 시는 사랑하는 임과 이별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이별의 계절은 하필이면 차갑고 추운 겨울이다. 임과 이별하게 된 시적 화자는 그저누워서 죽을 것 같은 고통만 반추 동물처럼 반복해서 씹으면서 무기력하게 겨울을 보내고 있다. '누워서 편히 지냈다.'라는 것은 반어법으로, 실제로 편하게 지내서가 아니라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로 겨울을 보냈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어떻게든 되돌려 보려고 내뱉었던 수많은 말들도 아무 소용없이 지나가고, 이젠 마음 속에 어떤 분노나 열정도 남아 있지 않은 채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죽음만을 생각하며 누워 있는 것 뿐이다. 모든 것에 관심을 끊고 체념한 화자의 모습은 이별을 겪어 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           안녕하세요~ 가족·꿈·사랑 가족 여러분! 프론티어 기자단 6기 임윤경입니다. ^^ 광화문글판 25년을 맞아 지난 시간에는 광화문글판을 빛낸 시인, 정호승 시인과의 만남을 가졌는데요, 이번에는 문정희 시인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여러분께 소개해드리려 해요.   교과서에서나 만나 뵙던 분들을 직접 만나 무척 설레고 긴장한 나머지 프론티어 기자단이 던진 우문에 문정희 시인께서는 너무도 멋진 현답을 해주셨는데요, 문정희 시인이 말하는 광화문글판, 그리고 시인의 문학관, 문정희 시인이 우리 청춘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지금부터 그 모든 것을 펼쳐보도록 할게요!           문정희 시인은 진명여고 재학 중 첫 시집 『꽃숨』(1965)을 발간했고,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불면」과 「하늘」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답니다. 이후 『문정희 시집』(1973),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아우내의 새』(1986), 『그리운 나의 집』(1987),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어 주세요』(1990) 등 수많은 시집을 냈으며 1975년 시극집 『새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답니다. 문정희 시인은 국내의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요, 2012년 프랑스 퀼트르(France Culture)의 인기 프로그램에 번역 시선집 『찬밥을 먹던 사람』이 소개되었고, 최근에는 프랑스의 예술전문방송 아르테 텔레비전이 이라는 5부작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문정희 시인을 취재하기도 했다고 해요. 문정희 시인은 자유와 고독을 화두로 삼아 시를 지어온 작가로 평가 받고 있는데요, 여기에 다양한 각도에서 여성의 존재를 고찰해오면서 '여성적 생명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도 손꼽히고 있답니다.       ==================================================================   나는 많은 곳을 여행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올 때면, 그만큼 나의 영혼도 더 넓어졌기를, 그리고 책은 언제나 나와 가장 내밀한 혈연을 유지하기를 기도했다. 가을은, 빛나는 시어, 알알이 여문 지혜로 내 안에 숨은 아름다움을 깨우는 계절이다. 한 권의 책으로,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책 없는 행복은 없다.  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첫 시집『꽃숨』을 발간했다. 미당 서정주의 문하에서 시를 배웠으며, 동국대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69년『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일찍이 을 수상했고 과 ,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 문학 포럼에서 작품「분수」로 을 받았다. 2010년 스웨덴의 노벨문학상 수상시인 헨리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남자를 위하여』『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나는 문이다』『다산의 처녀』 외에 시선십『지금 장미를 따라』 등이 있다. 영어 번역시집『Woman on the terrace』외 다수의 시집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세계 10여 개 언어권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춘에 대한 당부를 끝으로, 지금까지 광화문글판을 빛내주신 문정희 시인과의 만남을 가져보았는데 어떠셨나요? 프론티어 기자가 실제로 만나본 문정희 시인은 변함 없는 삶의 열정으로 가득 찬 매우 멋진 분이셨답니다. 가꿈사 가족 여러분도 문정의 시인의 열정을 가득 느껴보셨기를 바라요. 마지막으로 2009년 광화문글판 겨울편을 빛내주었던 문정희 시인의 을 소개해드리며 마치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0^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문정희, ====================================================       한국시인협회(회장 문정희)가 반년간(半年刊) 시 전문 웹진 『시인불멸』을 창간, 공개. 시인협회가 창설된 이래로 58년만에 오프(Off Line) 문예지가 아닌 웹진으로 공개해서 시단 에서 크게 주목하고 있다. 사실 『시인불멸』의 창간은 지난해 타계한 故 김종철 전 한국시인협 회장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김 전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국시인협회의 새로운 도약과 한국 시단의 발전을 을 위해 협회에서 주관하는 시전문지가 절실하다고 판단해서 실무팀을 꾸 리고 전폭적인 헌신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지금의 문정희 회장이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시전문 웹진(Webzine)을 한국시인협회 홈 페이지와 연계하여 한국토지주택공사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김 전 회장은 생전에 쓴 창간사에서 "외부의 불필요한 말들이 섞이지 않은, 오직 시와 시인만을 위한 잡지가 창간된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라며 "의미 있는 혁신을 담는 시 전문지로 이어지 기를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 ​   ​ 웹진 『시인불멸』 편집위원:   김요일 시인, 박정대 시인, 박상순 시인, 박후기 시인, 김이듬 시인, 황병승 시인, 김도언 시인, 이해존 시인​ ​ ​   김요일, 박정대, 박상순, 박후기, 김이듬, 황병승, 김도언, 이해존 시인 등이 편집위원으로 위촉 되어 1년 가까운 준비기간을 거쳐 공개된 '시인불멸'이라는 제호는 시인은 언제든지 소멸할 수 도 있지만, 소멸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과 각오의 표현이다.     이번 창간호에는 강은교, 김영승, 함성호, 허연, 함기석, 김중식, 조말선, 조동범, 이준규, 김산, 최창균, 류근, 고영민, 김지율, 이제니, 신동옥, 박장호, 리산 등의 18명의 의 다양한 신작시를 비 롯하여 기획특집으로 한국시인협회 58년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성찰과 ‘시대 정신과 시’라는 주제의 대담이 실렸으며 평론을 겸하고 있는 이재훈 시인의 ‘우리 시사의 대표 시론-허 만하 편’, 시단의 어른 정진규 선생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렸으며 또한 박은정 시인 이 장석주 시인과 대화를 나눈 '시인 선배를 만나다', 편집위원인 황병승이 싱어송라이터 요조 를 만나 대화를 나눈 '예술가의 초상', 김경주 시인의 24시간을 밀착 취재해 선보이는 '시인의 2 4시' 등이 담겨 있다. ​ 한국시인협회에 의해 새로이 창간된 웹진 『시인불멸』은 한국시인협회 홈페이지(http://www.koreapoet.org)에 접속하면 무료로 연중 24시간 무료로 구독할 수 있다.             @@ 독거의 꽃으로서의 자유와 고독을 노래하던 제가 한국시인협회의 깃발 아래 섰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시인협회라는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속도와 물질 가치로 혼탁한 이 시대, 시인은 심해 잠수부와 같이 침몰한 세상을 인양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시인들이 모인 한국시인협회는 여러 의미에서 지금 더욱 특별하고 절박한 의미를 갖습니다.   좋은 시는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며,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불확   실한 것들에 의미와 형태를 부여합니다.   좋은 시인은 삶과 세계를 통찰하고 그것을 선험과 직관의 언어로 세상에 돌려주는 비둘기들입니다.   그런 시인들이 있음으로 세상은 보다 밝아지고, 우리 삶의 안과 밖은 풍요해집니다.   시인협회는 진정 살아 있는 문학을 지향해야 합니다.   문학은 늘 젊습니다.   새로운 숲을 탐험하는 것은 가슴 뛰는 일입니다.   문명과 네트워크가 시대를 점령한다 해도 세계를 언어로 호명하여 정화시키는 시의 감동은 영원합니다.   세련되고 격조 있는 한국의 시에 세계의 눈들이 쏠릴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임기 동안 고 김종철 회장이 꿈꾸었던 열정적인 계획들을 잇고 가다듬어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시의 달 제정, 시 잡지 발간들에 더 보태 한국 프랑스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프랑스 시낭송,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수의 대학과 문화원 등을 통한 번역 소개 및 시낭송 등을 추진하여 세계를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자 합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있을 때만이 시인입니다.   회원 여러분의 진정한 시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2014년 9월   한국시인협회 제40대 회장 문 정 희 =============================================       사단법인 한국시인협회에서는 제39대 故 김종철 회장의 별세에 따라 2014년 8월 26일(화) 평의원회의(김남조 시인 외 11인)를 열고 협회 現심의위원장이면서 동국대 석좌교수인 문정희 시인을 제40대 회장으로 추천, 9월 4일(목) 등기이사회의 인준을 마침. 신임 문정희 회장은 전임자의 잔여 임기 2016년 3월까지 임기를 수행.           .                               미당 서정주시인과 함께      목숨의 노래 문정희    당신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습니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두고 목숨을 내걸었습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습니다   맨발로 당신과 함께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타오르다 죽고 싶었습니다       물 만드는 여자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 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손톱                                                        지는 저녁해를 마주하고 앉아 팔순 어머니의 손톱을 자른다 벌써 하얀 반달이 떠오르는 어머니의 손톱을 자르면 세상의 바람 소리도 모두 잘리어나간다 어쩌면 이쯤에서 한쪽 반달은 이승으로 떨어지고 또 한쪽은 어머니 따라 하늘로 가리 시시각각으로 강물은 깊어가는데 이제 작은 짐승처럼 외로운 어머니의 등 은비늘처럼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톱이 피울 저 먼나라의 꽃은 무슨 색일까? 무슨 꽃이 어머니의 꽃밭에 피어나 날마다 그녀가 주는 물에 나처럼 가슴이 젖을까. 흔들리며 흔들리며 팔순 어머니의 손톱을 자른다.       순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시간 2                                                      갈수록 갈수록 멀기만 하다.    너는 내게 있어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소용돌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았다.    위로 치솟을 땐 어지러웠고    부서져내릴 때는 신이 났다.    그 몰락조차도 재미있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속에 빠져 부드러이 죽어갔다.        알몸노래                                                 - 나의 육체의 꿈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였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 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       우리들 마음속에                                         빛은 해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그대 손을 잡으면 거기 따뜻한 체온이 있듯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의 빛을 나는 안다.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마음속에 해보다 더 눈부시고 따스한 사랑이 있어   어둡고 추운 골목에는 밤마다 어김없이 등불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세상은 추운 곳이라고 말하지만 또 누군가는 세상은 사막처럼 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하지만   무거운 바위 틈에서도 풀꽃이 피고 얼음장을 뚫고도 맑은 물이 흐르듯 그늘진 거리에 피어나는 사랑의 빛을 보라 거치른 산등성이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을 보라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늘 해보다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아니면 어두운 밤에 누가 저 등불을 켜는 것이며 세상에 봄을 가져다주리.       유리창을 닦으며                                         누군가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유쾌한 사랑의 노래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삶은 순전히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시가 어렵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시인이 있고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 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 시는 언제나 천 도의 불에 연도된 칼이어야 할까? 사랑도 그렇게 깊은 것일까? 손톱이 빠지도록 파보았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수심을 보지 못했다 시 속에는 꽝꽝한 상처뿐이었고 사랑에도 독이 있어 한철 후면 어김없이 까맣게 시든 꽃만 거기 있었다 나도 이제 농담처럼 가볍게 사랑을 보내고싶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 칼이 아니라 불꽃이다       율포의 기억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때문이었다 뻘 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 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별 이후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알 떠넣는 일이다. 옛날 옛날에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전보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어느 일몰의 시간이거나 창백한 달이 떠 있는 신새벽이어도 좋으리라   눈부신 화살처럼 날아가 지극히 짧은 일격으로   네 모든 생애를 바꾸어 버리는 축전이 되고 싶다   가만히 바라보면 아이들의 놀이처럼 싱거운 화면, 그 위에 꽂히는 한 장의 햇살이고 싶다   사랑이라든가 심지어 깊은 슬픔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전보가 되고 싶다       젊은 날                                                    새벽별처럼 아름다웠던 젊은 날에도 내 어깨 위엔 언제나 조그만 황혼이 걸려 있었다 향기로운 독버섯 냄새를 풍기며 손으로 나를 흔드는 바람이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무수히 빠져 나가는 은비늘 같은 시간들 모든 이름이 덧없음을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아! 젊음은 그 지느러미 속을 헤엄치는 짧은 감탄사였다 온 몸에 감탄사가 붙어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잎사귀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광풍의 거리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는 젊음은 한 장의 플래카드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서 너와 함께 낡은 어둠이 되고 싶었다 촛불밖에 스러지는 하얀 적막이 되고 싶었다       젊은 사랑                                             - 아들에게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 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나는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탕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제비를 기다리며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씨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조등이 있는 풍경    이내 조등이 걸리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80세까지 장수했으니까 우는 척만 했다 오랜 병석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죽었다 내 엄마, 그 눈물이 그 사람이 죽었다 저녁이 되자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내가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내 위장이 밥을 부르고 있었다 누군가 갖다준 슬픈 밥을 못 이긴 척 먹고 있을 때 고향에서 친척들이 들이닥쳤다 영정 앞에 그들은 잠시 고개를 숙인 뒤 몇 십 년만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니, 이 사람이 막내 아닌가? 폭 늙었구려." 주저없이 나를 구덩이 속에 처박았다. 이어 더 정확한 조준으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했다 "못 알아보겠어. 꼭 돌아가신 어머니인 줄 알았네"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횐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 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뽀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 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찬밥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1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럭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키 큰 남자를 보면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축복의 노래 - 문 정 희   사랑의 이름으로 반지 만들고 영혼의 향기로 촛불 밝혔네   저 멀리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 하나 둘이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리라   오늘은 새 길을 떠나는 축복의 날 내딛는 발자국마다 햇살이 내리어 그대의 맑은 눈 빛 이슬 매쳤네   둘이서 하나되어 행복의 문을 열면 비바람인들 어이 눈부시지 않으리 추위인들 어이 따스하지 않으리   아아 오늘은 아름다운 약속의 날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리라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첼로처럼 살고싶다   - 문정희   하룻밤 쯤 첼로처럼 살고싶다 매캐한 담배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싶다   기껏해야 줄 몇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 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사랑 신고    -문정희   사랑은 자주 불법 위에 터를 닦고 행복은 무허가 주택이기 쉽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철거반이 오기 전에 마치 유목민의 천막처럼 이내 빈 터만 남으니까   가끔 불법 유턴을 하여 위반과 비밀 위에 터를 닦지만 사랑을 신고할 서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를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밤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은 진실로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문득 이 도시의 모든 평화가 위조 같다 어떤 사랑으로 한번 장렬하게 추락할 수 있을까 맹목의 힘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볼까 사람들이 가끔 목젖을 떨며 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한 사랑, 진정한 고통, 진정한 희망은 어떤 서류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오늘 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수목사이로   - 문정희 시인   왜 나는 저 쭉 쭉 뻗은 수목들을 서방삼을 생각을 못 했을까   손가락을 쫙 펴고 뜻도 없이 어깨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아이들 그림만 쳐다보았을까   시간은 레먼 같은 것 처음엔 향긋한 냄새도 풍기지만 찔금찔금 눈물도 나게 하지만 그러나 벗기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느니,   하늘을 찌를 듯한 검초록을 두르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수목이나 서방삼아 크낙새 같은 새끼들이나 주르르 낳았어도 좋았을 것을 크낙새 같이 귀한 자식들 퍼덕퍼덕 길러 봐도 좋았을 것을   사람의 가을-문정희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물새   - 문정희   저물녘 석모도 앞바다에 떠 있는 저 물새는 한채의 암자 같다 깊고 푸른 멍 같은 바다를 깔고 앉아 가파른 물살을 잠재우는 것을 보라   쉴새없이 기우뚱거리는 마음 차가운 심연에 담그고 부르튼 발로 자맥질하여 물 위에 암자를 세운 저 새는 누구일까   나인지도 모른다 산허리를 돌아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내려오는 시간 날개로 허공을 밀며 천리를 달려온 저 새는   지금 움직이지 않고 홀로 또 천리를 가고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생이란 물 위에 뜬 하루라 바람의 발목을 잡고 출렁이는 생이란 끝없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고달픈 아랫도리 물에 담그고 문득 좌선에 든 저물녘 물 위에 뜬 암자를 향해 나는 조바심처럼 돌을 들어 힘껏 화두 하나를 던진다 바다의 살점이 불끈 고통처럼 치솟는다 날개를 펼치고 암자는 불현듯 먼 하늘로 사라진다   연인에게 --문정희   연인아, 여름이 오면 손잡이가 빨간 가위 하나 들고 와 함부로 뻗친 가지 척척 잘라다오 부질없는 내 열망을 잘라다오 수북이 땅 위에 나뭇가지 쌓이면 그 가지로 허공에다 새집 한 채를 지어다오 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며 노래를 알처럼 까는 새 한 마리 키우리라   한밤중에 ―문정희  한밤중에 번개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단숨에 내 심장에서  붉은 루비 같은 죄들을 꺼내  검은 하늘에 대고 펄럭이었다  낮 시간 동안 그토록 맑은 햇살을 풀어  푸른 숲과 새들을 키우던  저 산이 보낸 거라고는 믿기 어려운  번개가 한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부들부들 떨고 잇는 내 심장에서  붉고 선명한 루비들을 꺼내  검은 하늘에 뿌렸다  내일 아침 나의 침대에는  한 사람의 죄수가 밤새  깊고 슬픈 자술서를 쓰다  쓰러져 있으리라  문정희 시인의 시는 술술 잘 읽혀 내려간다. 관념적인 상징이나 작위적인 기교 없이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게 씌어진 솔직하고 건강한 시를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인용시 「한밤중에」서도 ‘한밤중에 번개가 나를 찾아왔다’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번개와 천둥의 원인을 밝히는 과학적인 설명에 상관없이 번개 치는 밤이면 누구나 죄의식에 한 번쯤 사로잡혀 보았을 것이다. 번갯불이 번쩍하고 공포의 순간인 몇 초가 지나면 벼락 떨어지는 소리, 천둥소리가 한바탕 나고 누군가 나대신 죄값을 치르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몸을 낮추거나 눈을 감고서라도 공포의 순간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문정희 시인은 한밤중 찾아온 번개를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한다. 번개의 칼로 심장에서 죄들을 끄집어내도 피하지 않는다. 두렵고 끔찍한 장면이 ‘붉은 루비 같은 죄들’이라는 환상적인 표현으로 보상을 받는다. 그의 죄의 모습은 투명하고 빛이 아름다운 일급 보석인 루비인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짓는 죄가 무슨 죄가 될 수 있느냐는 신에 대한 항변의 대가물이기 때문이다. 신이나 초인(超人)이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은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숱한 죄의 덩어리로 보이겠지만,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만들어 낸 조물주에게 따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낮에는 맑은 햇살을 풀어내고 푸른 숲과 새들을 키우며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랑하던 신(산으로 상징된)이 한밤중에 어떻게 그 죄값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인지, 시인은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신이 각인시킨 원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시인의 심장에서 신은 죄를 끄집어내 검은 하늘에 뿌린다. 검은 하늘에 던져진 붉은 루비는, 즉 죄의 실체는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한 사람의 ‘죄수’가 되어 밤새도록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깊고 슬픈 자술서를 쓰’며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번개나 천둥이 요란하게 치는 밤이면 누구나 원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너의 죄를 고백하라고 하늘에서 호통을 치는 것 같은 소리로 들릴 때도 있었을 것이다. 문정희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원죄의식을 자연현상을 통해 명료하게 그려내, 벗어날 수 없는 원죄의식에 대한 절망감과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사랑만을 위해 꿈꾸는 완전한 고립  ―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이 시는 5개의 연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노래, 사랑을 위한 노래이다. 흔히 사춘기(思春期)에 들어선 젊은이들이 부르는, 사랑을 위한 '소망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쉽고 평이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화자는 줄거리를 어렵게 이끌어가려고 애쓰지 않는다. 자신의 일기장 한켠에 적어두고 싶은 비망록(備忘錄)처럼 화자는 숨김없이 솔직한 감정들을 쏟아놓고 있다.  화자는 시라는 구조나 틀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대신에 감정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맡긴다. 화자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얗게 눈이 덮인 겨울, 사람들의 감탄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변해갈 때에도 화자는 자신이 설정한 고립의 자리, 즉 '동화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을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러나, 화자는 현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도 않은 상태이고, 화자가 눈부신 고립을 꿈꾸며 한겨울 한계령을 넘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미완성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못 잊을 사랑을 생각하며 미완성이나마 한바탕 사랑의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이제 다섯 개의 연을 따라 화자가 부르는 연가(戀歌)를 살펴보기로 하자. 화자가 그리고 있는 동화의 나라에서 함께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아도 좋으리라.  먼저, 첫째 연에서 화자는 하나의 꿈을 꾼다. 화자에게 있어서 그 꿈은 장난삼아 꾸어보는 꿈일 수도 있고, 현실의 외로움을 타개할 운명의 사람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볼 때, 진지하고 절박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 절박함은 화자의 톡톡 튀는 '끼'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화자는 대뜸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어한다. 화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삶에 확실한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특별한 사건을 꿈꾸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뜻밖의 폭설이다. 화자는 구차하게 계획된 삶보다는 운명처럼 묶여 돌아가는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뜻밖의 폭설이라는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 묶여들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뜻밖의 폭설을 기대하고 있지만, 화자가 설정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미루어 볼 때, 화자에게 있어서 폭설은 결코 '뜻밖의' 것이 될 수가 없다. 화자가 못 잊을 사람과 함께 한계령을 넘는 시간적인 배경이 한겨울이고, 공간적인 배경으로 설정된 한계령은 겨울철에 가장 많은 눈이 내리는 곳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화자에게 못 잊을 사람이 있어서 함께 고개를 넘는다면, '뜻밖의 폭설'이 아닌, 처음부터 화자가 의도하고 있는 일상적인 폭설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화자는 능청스럽게도 '뜻밖의 폭설'을 운운하며 자신이 꿈꾸는 사랑을 색다르고 운명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4행 이하에서 화자는 폭설을 만나 벌어질 제반 상황들을 소개한다. 가장 객관적인 보도 역할을 하는 뉴스들은 앞다투어 기록적인 폭설을 알리고, 쌓인 눈 때문에 자동차들은 제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야단법석을 피운다. 그러나, 7행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자는 그 무질서한 현장 속에서도 은근히 자신의 꿈을 꾸고 있다. 그 상황이 좀더 악화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 인간의 힘으로는 얼마간 극복할 수 없는 그 자연이 주는 한계를 못 이긴 척 받아들이며 묶이고 싶어 안달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화자는 다른 사람들의 불편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만을 위한 짜릿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2연은 화자의 작은 소망이 좀더 구체화되고 있다. 그(혹은 '그녀', 이하 '그'로만 표기)에게 고립은 오히려 눈부신 것이다. 그가 꿈꾸던 대로, 모든 것들이 눈 속에서 단절되어 오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있어서 그 나라는 동화의 나라이다. 그가 꿈꾸었던 대로 모든 일들이 척척 풀려나가는 행복한 나라이다. 이제 화자가 꿈꾸는 것은 물리적으로 그의 발이 묶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운명이 묶이는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소망은 못 잊을 사람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상황이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악한 상황을 빗대어 창조적으로 사랑을 만들어나가려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오직 사랑만을 꿈꾸고 사랑만을 생각하는 화자의 지고한 사랑에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3연에 들어서 화자는 날이 어두워지자 하얗게 쌓인 눈에 취해 감탄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공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본다. 사람들은 이제 저마다 두려움의 모습들을 드러내기 시작하지만, 그럴수록 화자는 그 시간이 신나기만 하다. 그가 꿈꾸던 완전한 고립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현실 속에서도 도리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못 잊을 사람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헬리콥터가 출동한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을 구조하기 위해 하늘을 선회하는 헬리콥터를 향해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눈 속에 꼭꼭 숨어 그 고립의 순간을 즐기겠다는 것이다. 헬리콥터가 인명 구조를 마치고, 눈 속에서 먹이를 찾지 못한 야생의 새들과 짐승들을 위해 먹이를 뿌릴 때에도 구조 요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화자에게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4연은 3연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으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고립의 상황 속에 남아 있을 것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 산은 폭설 속에서도 살아 있다. 나무들은 폭설 속에서도 살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화자 역시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고 생명의 힘이다.  전쟁터에서 젊은 군인들의 심장을 향해 포탄을 퍼부어 대던, 무섭고 무자비하던 헬리콥터들이 이제는 역할을 바꾸어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사람만이 아닌 야생의 동물들에게까지 자비롭게 일용할 양식을 뿌려줄 때에도 화자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주는 인위적인 혜택을 거부하고, 화자는 자연이 가져다 준 운명, 즉 폭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자신에게 닥쳐온 폭설이 결코 시련이나 아픔이 아니라, 도리어 축복의 순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축복의 순간을 즐기면서 흥분된 마음으로 몸둘 바를 몰라하는 화자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진정 그 사람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 사람은 흔치 않으니, 우리의 삶 속에서 뜻밖에 찾아오는 아픔과 시련은 우리가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시험하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될 것이다.               [출처] [스크랩] 문정희 시 모음|작성자 한동안            
1675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최두석 - 성에꽃 댓글:  조회:4272  추천:0  2015-12-26
성에꽃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깁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  *성에꽃 : 민중의 애환과 열정이 서려 있는 삶의 결정체로, 민중의 삶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반영되어 있는 이미지이다.  *정열의 숨결 :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나누는 연대의식이나 애정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민중의 삶을 억압하는 현실 상황 속에서 그에 대항하다 굴레를 쓰고 있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나타나 있다. ●핵심정리 ▶갈래: 자유시, 서정시  ▶성격: 상징법, 비유적(객관적 상관물), 역설법, 사회 비판적  ▶제재: 버스 창문에 핀 성에꽃  ▶주제: 서민들의 애환에 대한 애정  ▶표현상 특징  -경험에서 연상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일상의 사물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형상으로 창조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겨울 새벽녁 차창에 서리는 뿌연 성에에 꽃이라는 이름을 달아주면서 그 속에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성에꽃으로 아름답게 형상화된 작품으로, 80년대 아픈 역사의 상흔을 "친구"를 통해 드러냄으로서, 시대적인 아픔을 공감하게 한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은 지워져도 그 차가운 아름다움은 희망처럼 존재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에꽃에서는 가슴 저리고, 눈물나도록 아름답고 또 행복을 거부하지 않는 그런 삶이 떠오릅니다. 시인은 이렇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통찰하였습니다.    이 시에서 성에꽃은 그것이 지워지고 난 자리에 비치는 시적 화자의 얼굴로, 다시 자신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친구로 이미지가 전이되는 객관적 상관물로서, '엄동 혹한일수록 / 선연히 피는 성에꽃'의 구절과 '다시 꽃 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에서 역설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에서는 그 의미가 친구에서 서민들로까지 확장된다.    친구에 대한 의미는 마지막 구절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에서 친구가 같은 삶(민주화 운동)의 여정을 걸어 왔으나 암담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하여 현재 옥살이를 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한겨울의 새벽녘에 시내 버스를 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차창에 낀 성에를 손으로 문지르거나 입김으로 불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엄동설한의 새벽 버스 차장에 낀 성에를 보며 80년대의 우울한 시대상, 또는 사람들의 남루하고 고달픈 생활의 초상들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성에가 아닌, 성에꽃을 보며 지난 밤에 이 버스를 탔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들은 신경림의 시에 나타나는 '못생긴 얼굴'같이 초라하면서도 남루한 삶의 길을 걷는 서민들이다. 흔히 민중 또는 소외계층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팍팍하고 고단한 삶에 의해 선연하게 아름다운 성에꽃이 피어났다. 어찌 보면 가장 미미한 존재들에 의해 가장 황홀한 아름다움이 탄생한 것이다.  화자는 유리창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우리 사회의 우울한 표정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삶의 풍경들을 들여다 본 것이다. 화자는 '차거운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기 위해 이리저리 자리를 오가고 성에꽃을 지우기도 한다. 순간 장면이 바뀌면서 차창에는 푸석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친구는 아마도 뒤틀리고 얼룩진 우리 사회를 고쳐가기 위해 올곧은 길을 걸었던 친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시대의 암담함과 어두움에 맞서다 지금은 면회까지 금지되고 말았다. 이렇듯 은 서정적인 소재를 통해 민중들의 고단한 삶과 무겁고 어두운 사회 현실을 지성과 감성의 조화로 노래한 작품이다. *'창'의 의미  시에서 이른 새벽 성에가 낀 버스의 '차창'은 세상을 바라보는 통로가 된다. 그 창에 비친 세상의 풍경은 얼룩져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막막하다. 그러나 그 막막하고 팍팍함에 오는 슬픔을 '성에'를 통해 잊게 된다. 왜냐하면 '성에꽃'은 동시대인들의 숨결과 입김으로서 공동체 의식 그 자체의 의미를 띠기 때문이다. ========================================   최두석 시인 소개   1956(11, 23)년 전남 나주 출생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80 '심상'에 시 '김통정'을 발표하여 등단 시집으로 대꽃(문학과 지성사 1984) 임진강(청사 1986)   ~~~~~~~~~~~~~~~~~~~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며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   찔레를 보면   찔레열매 보면 찔레꽃 떠오르네  절로자라 피우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생생하며  얼마나 그윽한 향내 풍기는지 보이네  꽃향기의 축제가 열린  무르익은 봄날의  잉잉대는 음악소리가 들리고  너울거리는 춤사위가 보이네  찔레꽃 보면 찔레열매 떠오르네  서리 맞고 눈 맞으며  추위와 허기를 견디는 새들에게  기꺼이 양식이 되는  열매가 품고 있는 여문 씨앗이 보이고  까치 뱃속을 통과한 씨앗이  볕바란 언덕에서 움트는  찔레의 일생이 보이네    ~~~~~~~~~~~~~~~~~~~~~   느티나무와 민들레   간혹부러 찾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  민들레 꽃씨가  앙증맞게 낙하산을 펼치고  바람타고 나는걸 보며  나는 얼마나 느티나무를 열망하고  민들레에 소홀하였나 생각한다.  꿀벌의 겨울잠 깨우던 꽃이  연둣빛 느티나무 잎새 아래  어느새 꽃씨로 변해 날으는  민들레의 일생을 조망하며  사람이 사는데 과연  크고 우람한 일은 무엇이며  작고 가벼운 일은 무엇인가 찾아본다.  느티나무 그늘이 짙어지기 전에  재빨리 꽃 피우고 떠나는  민들레 꽃씨의 비상과  민들레 꽃 필때  짙은 그늘 드리우지 않는 느티나무를 보며  가벼운 미소가 무거운 고뇌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떠올린다.  꽃에게 길을 묻는다 / 문학과 지성사    ~~~~~~~~~~~~~~~~~   노래와 이야기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는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대꽃 / 문학과지성사, 1984   ~~~~~~~~~~~~~   타잔  내 빈약한 힘살을 비웃듯이  너는 빤스만 걸친 몸으로  총을 든 악한들과 싸운다  토요일 밤이면  사자와 표범과 악어들이 출몰하는  식민지 자손들의 안방 한구석에서  결국 이기는 싸움만 한다  원숭이 치이타와 코끼리 록키  소년 자이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너는 잽싸게 줄을 탄다  그리하여 정글이 없는 한반도의 아이들도  너를 따르고 싶고  빨래줄로 흉내를 내다  목졸려 죽은 아이도 있었다  둥둥 북치는 아프리카  근대화를 통해 빚수렁에 빠진 한국  창조도 진보도 있을 수 없는  아프리카 토인들의 역사  일제의 식민사관  타잔 너는 미국의 차관과 결부되어  수입되고 상연되고  밀림의 평화를 위한다지만  밀림의 법칙은 약육강식  국제 간 불변의 공식인 것을  이 땅의 아이들은 알 수 없지, 그러므로  너는 너를 출생시킨 나라  미국의 이미지를 위해 싸우는 줄을  아이들은 통 알 수가 없지.  ~~~~~~~~~~~~~   미소  쓸쓸한 이에게는  밝고 따스하게  울적한 이에게는  맑고 평온하게 웃는다는  서산 마애불을 보며  새삼 생각한다  속 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그냥 절로 생성되지 않는다고  생애를 걸고  암벽을 쪼아  미소를 새긴  백제 석공의  지극한 정성과 공력을 보며  되짚어 생각한다  속 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생애를 두고 가꾸어가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미소가  세상을 구하리라 믿은  천사백 년 전 웃음의 신도여  그대의 신앙이  내 마음의 진창에  연꽃 한 송이 피우누나.    꽃에게 길을 묻는다 / 문학과지성사   ~~~~~~~~~~~~~~   마라도 바다국화  뿌리로 검은 바위 끌어안고  난바다 거센 파도 소리 삼키며  모진 바람에 고개 숙여  잔디처럼 바닥을 기다가도  꽃만은 그윽이 푸른 가을 하늘  마주 보며 피우누나  내가 아는 눈빛 맑은 여인  세상살이 온통 허무해져  바다에 몸을 던지러 왔다가  바다국화 꽃 피우는 모습 보고는  마음 다잡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게 됐다는구나.  꽃에게 길을 묻는다 / 문학과지성사    ~~~~~~~~~~~~~~~~~~~   마애관음보살을 보며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의 눈길과 손길을 거쳤던가 하지만 각별하게 따스했던 눈길과 손길마저 얼마나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가 경주 남산 바위에 새긴 수더분한 모습의 관음보살을 보며 든 생각이다   우람하거나 정교한 조각이 아니라서 더욱 정겨운 보살이 쥐고 있는 정병은 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수한 이들이 어루만진 손길로 반질거린다 그 정병을 기울여 약물을 마시면 어떤 마음의 병도 나을 것 같다.     투구꽃 / 창비, 2009.   ~~~~~~~~~~~~~~~~~   투구꽃     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 애증이 엇갈릴 때 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 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투구꽃의 도발적인 자태를 떠올린다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머리가 아파올 때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 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   조금식 먹으면 보약이지만 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되는 예전에 임금이 신하를 죽일 때 썼다는 투구꽃 뿌리를 잘게 잘라 씹으며 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한다   진보라의 진수라 할 아찔하게 아리따운 꽃빛을 내기 위해 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 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 뜨거워지는 배를 움켜쥐기도 한다.     투구꽃 / 창비, 2009.   ~~~~~~~~~~~~~~   만남에 대하여  만나고 싶다  다혈질 인정 많은 친구여  그대의 눈물에 흥건히 젖어  나는 변하고 싶다  만나고 싶다  치밀하고 열심인 친구여  사실은 멱살이라도 잡고  땀방울의 진가를 확인하고 싶지만  끝내 별일 없이 헤어질지라도  나를 아는 모든 이여  내가 아는 모든 이여  혹은 미지의 사람이여  만나고 싶다  온갖 허위의 허물 벗어버리고  그대의 속내에  보름밤 쥐불처럼 호기심 불타는 것은  이 폭력과 정신병의 세상에  희망을 잃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     나비와 개구리  주룩주룩 장대비 내리는 날  산길 걷다가  나비를 만나면 슬프다  비 피할 집 없이  어디론가 날아갈 기척도 없이  흠씬 젖어 있는 제비나비를 보면  내 숨겨둔 날개가 젖은 듯  후줄근해진다  주룩주룩 장대비 내리는 날  산길 걷다가  개구리를 만나면 기쁘다  좋아라고 만세 부르듯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무당개구리  번들거리는 초록 피부를 보면  내 살갗도 촉촉이 젖어  생생해진다.  꽃에게 길을 묻는다 / 문학과지성사 / 2003. 6  ~~~~~~~~~~~~~~~~       나비와 개구리  콩꽃 떨기마다 이상한 나방이 射精을 하고 다녔다. 그때  나는 국어 선생이었다. 깊이 사랑했던 이념의 말이 교과서  구석에 씌어 있었다. 지면을 응시하자 낱말은 괴성을 지르  며 교실을 울리고 멀리 운동장 미루나무 이파리에 머물렀  다. 구름은 정말 한가롭게 지나가고 학생들의 한 떼는 교  련 시간이었다. 엎드려 쏴! 찔러, 길게 찔러. 이파리는 사  살되어 무참히 찢기우고, 고개를 돌렸을 때 교과서의 활자  는 뻔뻔하게 그대로 박힌 채였다. 그 해 농부들이 수확한  콩은, 껍질은 탱탱하고 의연했지만 모두 가투였다. 나는 가  투의 의미를 가르칠 뿐이었다.      ~~~~~~~~~~~~~~~~~     구절초  계절이 바뀌는 산등성이에서  단풍잎 응시하며 피는 꽃이 있다  지상의 마지막 시간 앞두고  청을 높여 우는 풀벌레 소리 따라  아련히 맑은 향내 풍기다가  낙엽과 함께 사라지는 꽃이 있다.  시와시학 / 2000 가을호   ~~~~~~~~~~~~~~   다시 경포에서  안개비 속에  뿌옇게 흐린  경포 호수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고여 거울이 되지 못하는 물은  썩게 마련이라고  출렁이는 마음속  뿌연 거울을 들여다보며  새삼 생각한다  불혹이란  자기 몫의 외로움을 겸허하게  견디는 일이라고  무리를 잃고  뻘흙 위 갈숲에서  병을 다스리는 새여  네가 물을 차고 솟구치는 날  숭어가 고니로 변해 날아올랐다는  전설이 완성되리라.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때 / 문학과지성사 1997    ~~~~~~~~~~~~~~~   아우라지에서  진달래 꽃잎 띄우고  그리움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겨울 골짜기에 얼어붙었던  슬픔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리움은 슬픔을 만나  깊어지고 넓어지고  슬픔은 그리움을 껴안아  강이 된다고 넌지시 일러주며 하염없이 일렁이는 물살은  어디로 아득히 흘러가는가  여울을 지나 소를 지나  다시 오지 않을 생애의 한 굽이를  소용돌이치며 돌아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문학과지성사.1997.  ~~~~~~~~~~~~   겨울 폭포  겨울 폭포가 흘리는  눈물 머금어보았는가  얼어붙은 마음에  어설픈 햇살 받으며  벙어리 눈물 흘리다가  다시 얼어붙고 마는  고드름으로 빼곡한 가슴 보았는가  함성으로 세차게 흘러  거침없이 융융한 강이 되고 싶은데  키 넘게 눈 덮인 첩첩산중에  굳센 얼음기둥 세우고서  숨죽인 채  겨울 폭포가 흘리는  눈물 삼켜보았는가.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문학과지성사.1997.    ~~~~~~~~~~~~~~ 최두석 시            노래와 이야기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걱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지은이 : 최두석  갈래 : 서정시, 자유시  성격 : 인용적, 당부적  제재 : 노래와 이야기  주제 : 시의 본질, 노래와 이야기의 결합으로서의 시  출전 : (문학과 지성사, 1990)  내용 연구  뇌수 : 뇌를 말하고, 신경 세포가 모여 신경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부분.  척수와 함께 중추 신경계를 이루어 온몸의 신경을 지배하며, 대뇌·간뇌·소뇌·중뇌  ·뇌교·연수로 나눈다.  처용(處容) : 설화에 나오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의 기인(奇人).  879년에 왕이 동부를 순행할 때 기이한 생김새와 옷차림으로 나타나 가무를 하며  궁궐에 따라 들어와 급간(級干)의 벼슬을 받았는데, 어느 날 아내가 역신과 동침  하는 것을 보고 향가 〈처용가〉를 지어 불러 역신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전한다.  정간보 : 조선 시대 세종이 창안한 악보.  오선지(五線紙) : 악보를 그릴 수 있도록 오선을 그은 종이.  유전(流轉) : 이리저리 떠돌아 다님.  덧나다 : 병이나 상처 따위를 잘못 다루어 상태가 더 나빠지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시의 본질을 시로 표현한 작품으로, 이 시는 언어를 통하여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시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는 구절은 시인의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시인은 시에 자신의 감성(노래)을 그대로 담아내려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잊혀지고 사실(지성, 이야기)만 남는다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시인은 자신의 격정(노래)을 다스리기 위해 이야기를 시로 쓴다.  그리고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고 표현하여 '시란 무엇이  어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담아 내고 있다.  자료  최두석(催斗錫)  1955년 전남 담양 출생으로 서울대 사대 국어과와 서울대학원 국문과를 나왔다.  1980년 '심상'에 등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장한 그는 1982년부터 '오월시'  동인에 참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첫 시집인'대꽃'은 그의 感性과 知性의 어려운 통합을 이뤄내고 있는 시인  임을 넉넉히 보여 준다. 그는 단단한 현실 인식과 섬세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양식을 창출하여 참담한 현실을 놀라울 만큼 차분하게 이야기하는데  그 차분함 속에는 짙은 슬픔과 분노와 사랑이 은밀히 충만(充滿)되어 있고, 그 속에  서 감성과 지성의 어려운 통합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집에 , (서사시), 등이 있다.  '노래와 이야기' 시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시어의 특성을 말해 보자.  이 시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담아 내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들이‘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지식에 기대어 이 시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노래' 와 '이야기', '심장' 과 '뇌수, 라는 서로 대비되는 시어의 의미를 파악  하고, 특히 '노래'가 의미하는 바에 주목하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시인은 시에서 '뇌수와 심장', 즉 이성과 감성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그런 시인에게 노래는 쉽게 덧나는 '격정의 상처' 이면서 '악보' 이고, 이야기는  노래의 빈틈(뇌수)을 메울 수 있는 형식적 장치이다.  따라서 시어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느낌 그 자체(심장, 격정의 상처)를 골라 넣고  (11행) 다스린(13행) 결과물이다. 또한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지만,  여전히 시어는 심장이 일정한 리듬감을 타고 뛰듯이 보이지 않는 은밀한 리듬을  갖는다(10~11행 참조). 즉 시어는 시인의 감성(노래)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정제  된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확연하게 드러나거나 은밀하게 감춰진 리듬을 갖는다.      =================================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시 성에꽃의 앞 구절이다. 고등학교 문학시간동안 수없이 읊조리던 시를 쓴 시인이 우리학교(한신대) 교수님이라는 것을 아는 학생은 몇이나 될까.‘ 성에꽃’의 시인인 문예창작학과 최두석 교수는「성에꽃」을 비롯하여 많은 시에서 꽃과 나무, 자연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썼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인이 없다했던가. 우리 주변의 들과 산에 피고 지는 꽃들과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나무들을 소재로 시를 쓰는 우리 학교(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최두석 교수를 만나면 그것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     출생 1956년 11월 23일, 전남 담양군 직업 대학교수 성별 남성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프로필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경력 2003 한신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1 ~ 2003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원장 1997 한신대학교 인문대학 한국문화학부 문예창작전공 부교수 6년만의 시집, 시적 자아가 살아있는 자기 확인 오랜만에시집을낸최교수의소감이궁금했다. 언제나시 집을 내는 일은 설레는 일일 것이다“. 문학 판에 나온 지가 벌 써 30년이 되었지요「. 투구꽃」이 여섯 번째 낸 개인 시집인데 시집을 낸다는 건 시인으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는, 다른말로시적자아가아직은살아있다는자기확인이되 는 것 같아요. 시적자아가 살아있어야 시를 쓸 수 있는데 말 이죠.”최교수는이어6년간의정황에대해서말했다“. 이시 집에 실린 시가 예순 세편인데, 6년 동안 쓴 거죠. 이전에 낸 시집들도 대체로 6년 터울로 시집을 냈어요. 왕성하게 쓰는 다른 시인들은3,4년 터울로시집을내기도하지만난 6년 정 도가 내 시 쓰는 속도나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나름의 최선 을 다하는 게 중요하니까. 신통치 않은 시 100편보다야 신동 엽의「껍데기는 가라」같은 시 한 편이 낫죠. 서둘러서 안 되는 시까지포함해내고싶진않았어요. 버리는시도많았죠.” 자기를 지켜내는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꽃을 피울수 없다 시집「투구꽃」안에는 총 예순 세편의 시가 있다. 그중에 서도 굳이「투구꽃」을 시집의 제목으로 정한 데에는 어떤 이 유가 있었을까.“ 시집 전체의 주제를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 바로「투구꽃」이었기 때문이에요. 투구꽃의 뿌리가 한약재 로 부자인데, 조금씩 쓰면 사람들의 원기를 왕성하게 해주는 약인데 많이 쓰면 그것이 독이 되어 사약으로 쓰여요. 사물 을 볼 때 양면성을 보는 거지. 약인 동시에 독이 되니까요. 모 든 약이 그렇지. 세상을 표면만 보고 살아서는 곤란해요. 또 다른 이유는 꽃모양이 투구 모양인데 투구는 싸울 때 쓰는 거죠. 투구꽃은 가을꽃인데 굉장히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면 생존경쟁,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 한 싸움을 거쳐야죠. 그래야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이게 시집 전체 주제와 통해요.” 생태적 상상력으로 가꿔낸 꽃과 나무 「투구꽃」을 보면 유독 꽃, 나무, 자연들을 벗 삼아 노래한 시들이 많다. 그 전의 시집에 수록된 시들도 그러하다. 자연 을 노래하는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일까.“ 처음부터는 아니 고, 1990년대 중반이후에 꽃과 나무를 소재로 시를 많이 썼 지요. 생태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나니 자연스레 그리되더라 고. 사실 요즘 사람들은 쓸데없는 운동선수 이름은 잘 알면 서 자기가 늘 보는 나무 이름도 잘 모르니까. 삶이 참 답답한 거지. 공자는 시경(詩經)에 있는 시들을 이야기하면서 동식 물 이름을 잘 알려주니 시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 땅에서 살고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시로 쓰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사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결국 사회속의 인간과 자연속의 인간이 어떻게 조화로운 상태에 이를까가 내게 중요한 화두에요. 휴머니즘이 인간중심주의로 기울면 곤란하고 그것이 자연생태 차원으로 폭넓게 열리기를 기원 하는데 그러한 차원에서 생태적 상상력에 비중을 두고 시를 썼어요.” 이야기 같은 시는 나의 브랜드,「 투구꽃」은 예외 우리가 문학시간마다 소리 내어 읽던 유명한 시「성에꽃」 과 같은 시들은 대개 서사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투구 꽃」만은 좀 더 음악성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 첫 시집 「대꽃」의 맨 앞에 수록된 시가‘노래와 이야기’라는 시에요. 노래와 이야기 사이의 긴장은 내가 시를 쓰는 가장 중요한 창작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술성과 현실성 사이의 긴장이죠. 이야기 시는 내 시의 브랜드라고나 할까. 예전엔 한창 민주화가 중요한 과제여서 사람살이의 문 제에 몰두했죠. 그땐 이야기 중심의 시를 써야했으니 사회역 사적 상상력을 중요시했고 지금은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으 로 하니 노래중심이 됐어요. 여전히 노래와 이야기 사이의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요. 두 가지를 통합시 키는 게시 쓰기에요.” 시라는 것은 의사소통의 한 양식 쉽게 읽히는 시는 쓰기가 더 어렵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시 를 쓰라는 것이 최 교수의 가르침이었다「. 투구꽃」의 시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그 내용은 깊었다. 최 교수 는 기자의 말에 그렇게 읽어주어 고맙다며 답을 이었다.“ 시 라는 것은 하나의 의사소통이에요. 그런데 의사소통을 거부 하는 시를 쓴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모순이죠. 그러면서도 시라는 것이 응축적인 양식이기 때문에 한번 읽고 버리는 것 이 아니라 여러 번 읽어도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가 솟아나는 시를 쓰고 싶어 하죠. 소재를 잡으면 마음속에 두고 계속 생 각해서 의미가 제대로 맺힐 때까지 기다려요.” 시를 쓰는 일은 삶의 의미 찾기 과정 국어교육과를 나온 걸로 아는데 교육자의 진로를 가다가 시인의 길을 택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다른 것은 별로 내키지가 않고 시 쓰는 것이 끌려서 시를 쓰게 된 것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라고나 할까 요. 뭔가 의미를 찾으며 살고 싶어서, 나에게는 시를 쓰는 것 이 가장 좋았으니까. 그런데 준비가 필요해요. 시를 쓰면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했죠. 그러다보니 국 어교사를 하면서 시를 쓰면 좋겠다 싶어서 국어교육과에 간 거죠. 지금 문예창작과 시 창작 교수로 있는 것도 그거죠. 시 쓰는 것과 이게 어울리겠구나 싶어서. 시 쓰기에 안 맞는 직 업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돈벌이에 눈이 멀어서는 시를 쓰기 어렵죠. 시를 쓰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일자체도 의 미가 있었으면 싶었지요.” 그럼 시인이면서 교수직을 병행하면서 힘든 점이나 좋은 점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최 교수는 말을 이었다.“ 시만 써서 는 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전업시인은 경제적으로는 실업자 이지요. 그러니까 시를 쓰려면 다른 일을 해야 했죠. 그래서 적절한 게 뭘까 고민을 해서 국어교사를 조금 했죠. 그랬더 니 표현의 자유가 제한 되요. 예전엔 어디에 글 하나만 발표 해도 내용을 문제 삼고 그랬어요. 교사가 아니라면 별 상관 도 없는 일을 갖고 귀찮게 구니까 더 자유로운 대학교수를 하자 생각했죠. 시창작전공이다 보니 늘 시를 생각해야 하잖 아요? 시를 쓰면서 법열감이라고 할까 희열을 느껴서 좋지 만, 대학이라는 곳이 생활체험으로부터는 격리되기 쉽죠. 생 생한 생활체험이 문학의 원천인데 말이죠. 그래서 될 수 있 으면 연구실에 붙어있지 않고 삶의 체험을 접할 수 있는 곳 으로 답사를 많이 가죠. 그런 식으로 극복하려고 하죠.” 한 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며 최두석 교수는 젊은 문학도 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맹자에 나오는 말인데‘항심 (恒心)’이라는 말이 있어요.‘ 한번 뜻을 세우면 변하지 않는 마음’이 항심이에요. 다른 일도 그렇고 문학이라는 게 짧은 시간에 승부를 낼 수 없단 말이지. 마라톤선수처럼 글쓰기에 정진해야 꿈을 이룰 수가 있겠죠.”미리 읽어간 시집에 싸인 을 청하자 최 교수는 한참을 고민하고 만년필로 한마디씩을 적어주었다. 주문처럼 시집 안으로 꿈이새겨졌다.     글꼴조정 공유하기 북마크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    * 느낌: 안도현 시인은 2010학년도 1학년 교과서에   많은 작품이 실린 시인 중에 한 명입니다. 이 시외에도 , , , 등이 실려 있으니까요.   그 중에서 내게 가장 친근감이 느껴지는 시가 이 시 입니다. 2001년에 개정된 7차교육과정에서도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10년간 보았기 때문이지요 *^^*   그런 인연과 관계 없이 이 시가 좋았습니다.   진눈깨비는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존재이고, 함박눈은 그들을 따듯하게 보듬는 존재겠지요. 시인은 진눈깨비가 아닌 함박눈이 되어서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 못 드는 이의 창문을 통해 편지가 되어 위로하고 새살이 되어 상처를 치료하자고 했습니다.   이 시를 가르치면서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는 그 마음이 눈물겹도록 고마웠지요. 지금의 세상이 너무도 살벌하니 이 시의 삶이 더욱 그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우리는 따뜻한 세상에서 살게 될까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강부자 고소영이 아닌 서민을 위하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바라면서 이 시를 다시 읽었습니다.     * 안도현(1961~ )  : 시인.  경북 예천에서 태어남.     원광대 국문학과 졸업.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음. 시집 , , , , , 등과 동시집 을 펴냄.   * 자료 출처 : 2010학년도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국어교과서와   에 실려 있음. ===================================================     예천(醴泉) /안도현     있잖니껴, 우리나라에서 제일 물이 맑은 곳이 어덴지 아니껴? 바로 여기 예천잇시더. 물이 글쿠로 맑다는 거를 어예 아는지 아니껴? 저러쿠러 순한 예천 사람들 눈 좀 들이다보소. 사람도 짐승도 벌개이도 땅도 나무도 풀도 허공도 마카 맑은 까닭이 다 물이 맑아서 그렇니더. 어매가 나물 씻고 아부지가 삽을 씻는 저녁이면 별들이 예천의 우물 속에서 헤엄을 친다 카대요. 우물이 뭐이껴? 대지의 눈동자 아이껴? 예천이 이 나라 땅의 눈동자 같은 우물 아이껴?               -안도현 시집 중에서 ========================================= //     안도현 시인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바닷가 우체국』『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등을 냈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분홍지우개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사랑은 싸우는 것   내가 이 밤에 강물처럼 몸을 뒤척이는 것은  그대도 괴로워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창 밖에는 윙윙 바람이 울고  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와 같이 후회하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런 밤 어디쯤 어두운 골짜기에는  첫사랑 같은 눈도  한 겹 한 겹 내려 쌓이리라 믿으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누우면  그대의 말씀 하나하나가 내 비어 있는 가슴속에  서늘한 눈이 되어 쌓입니다  그대  사랑은 이렇게  싸우면서 시작되는 것인지요  싸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벅찬 감동을 그 사람 말고는 나누어 줄 길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인 것을  사랑은 이렇게  두 몸을 눈물 나도록 하나로 칭칭 묶어 세우기 위한  끝도 모를 싸움인 것을  이 밤에 깨우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 것을                    사랑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죄 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로 하여 그이가 눈물 짓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못 견딜 두려움으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뜯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하여 내가 쓰러져 죽는 날에도  그이를 진정 사랑했었노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내 무덤에는 그리움만  소금처럼 하얗게 남게 하소서                   그대에게 가는 길     그대가 한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랍니다                        간격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그대에게 가고싶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으로 하나로 무잔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강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요점 정리 -- ㅁ 지은이 : 안도현  ㅁ 갈래 : 서정시, 자유시  ㅁ 제재 : 연탄  ㅁ 성격 : 희생적, 헌신적, 성찰적(반성적)  ㅁ 표현 : '-네'의 반복을 통한 운율 형성(각운)  ㅁ 어조 : 반성적·성찰적 어조  ㅁ 특징 : ① 청각적 심상과 촉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감각적으로 표현함.               ② 일상의 사물을 통해 삶의 자세를 가다듬음.               ③ 지난 날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반성함.  ㅁ 주제 : 아낌없이 헌신하는 삶(사랑)에 대한 희구(希求), '연탄 한 장'같은 삶을 살려는 소망,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애 ㅁ 출전 : (1994) -- 내용 연구 --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아낌 없이 헌신하는 것,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 '자신을 잊고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것'정도의 의미가 있다.) - 삶의 의미 방구들(밑으로 고래를 켜서 방을 덥히게 만든 방바닥. 온돌) 선득선득(살갗이나 몸에 갑자기 서느런 느낌이 드는 모양)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연탄차'에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시인은 이를 재해석해서 그것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연탄의 속성으로 자신을 태워서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줌)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자신의 따뜻한 삶을 있게 한 존재를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자신을 불살라 방구들과 밥과 국물을 덥히는 헌신적(희생적)인 존재]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의 '나무'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한 시적 자아의 반성. 시적 화자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 연탄의 의미와 사랑의 실천에 소극적인 '나'의 태도에 대한 자책 생각하면 / 삶이란 /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자신을 부수어서 빙판 위에 사람들이 디딜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고통스러운 세상, 험한 세상)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자신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일) -- 이해와 감상 -- 시인은 연탄 한 장을 바라보다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연탄의 속성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까지 자신은 타고남은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것이 두려워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던 삶을 살아왔구나 하고 반성한다. 이 세상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타고남은 재처럼 쓸쓸한 결말로 내게 온다 할지라도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몸을 태우는 일,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일' 그 자체로서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시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허무한 한 덩이 재마저 산산이 으깨어 미끄러운 세상에 마음놓고 걸어갈 길을 만드는 일에 바치는 삶이 있다는 걸 생각한다.   쉘 실버스타인의 를 연상하게 하는 시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잊어서는 안 될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나눔과 헌신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그 어디서나 누구에게 건 불변의 가치가 아닐까? 아낌없이 나눈 후에 찾아오는 행복은 아마도 법정 스님이 에서 말씀하고 계신 "다 비우고 나야 비로소 채워진다"는 불교적 깨달음과도 통한다. -- 자료 -- 안도현(1961∼  )    : 시인.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 신춘 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신춘 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에 , , , , , 등이 있고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관계', '사진첩' 그리고 산문집 등이 있다. (1) 이 시에서 '연탄'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고, 그것과 바꾸어 볼 수 있는 사물과 그 이유를 말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특히 2연에서 '연탄'의 의미를 파악해 보도록 하고, 이 시의 '연탄'처럼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하여 마지막까지 헌신하는 사물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사랑이란 누군가의 배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 시에서의 연탄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을 태워서 다른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고,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부수어서 빙판 위에 사람들이 디딜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그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살 수 있는 삶을 시인은 연탄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                          - 안도현   연탄재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자신의 몸뚱아리를   다 태우며  뜨끈뜨끈한   아랫목을 만들었던   저 연탄재를   누가 발로 함부로 찰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다버리고   이제 하얀 껍데기만 남아 있는   저 연탄재를   누가 함부로 발길질 할 수 있는가? ==================================================     안도현 ㅡ "시는 열이 나고,  동시는 흥이 나" ㅡ"내 글은 갖가지 즐거움 뒤섞인                        '비빔밥'이고파"      동시집 '냠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안도현 시인 ⓒ 뉴데일리       "시는 머릿속으로 열을 내면서 써야 하는데, 동시는 쓰는 순간이 신나고 흥이 납니다." 6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벨라지오에서 안도현 시인의 동시집 '냠냠'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 참석을 위해 이날 새벽부터 전주에서 올라온 그는 "안도현 입니다. 출판사의 강요에 못 이겨 나왔습니다."라며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말 문을 열었다.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우리 시대 대표 시인 안도현의 '냠냠'은 그의 두 번째 동시집이다. 안도현 시인은 이번 작품을 통해 순수하고 장난기 가득한 동심의 세계를 마음껏 담아냈다. 섬세한 시선과 능청스러운 입담을 통해 삶의 이치와 깨달음을 전해 준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동시집에서도 그만의 엉뚱함과 발랄함 속에 음식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를 녹여 담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안도현 시인의 동시집 '냠냠' ⓒ 뉴데일리       "동시가 변방문화로 밀려난 현실 안타까워"  안도현 시인이 동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동시가 문학의 변방으로 밀려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는 "동시가 어린이가 읽는 중요한 장르에도 불구하고 아동문학 판에서도 변방으로(동화가 중심이고) 밀려나있는데 화가 났습니다."라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학교에서 문학교육에도 문제가 있겠고, 동시 쓰는 분도 스스로 변방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하거든요. 내가 문학의 중심이 아니고 변방에 있다는 의식이죠."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동시는 신문학 초기부터 굉장히 중요한 장르로 손꼽히며 윤동주, 정지용, 박목월 시인 등 유명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100년 전 동시가 정점으로 100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안도현 시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다 동시를 써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에게 밥 한 숟가락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싶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냠냠'은 영양가 높은 먹을거리들이 가득하다. 가지가지 밥과 누룽누룽 누룽지, 파마한 라면, 동글동글 보름달 같은 단무지, 퀴퀴한 김치 악당, 아파트 닮은 깻잎장아찌, 빗줄기로 만든 국수, 불자동차 떡볶이 등 재미난 음식 이야기들이 신선하고 기발한 시적 상상력 속에 가득 담겨 있다.     안도현 시인의 동시집 '냠냠' ⓒ 뉴데일리       음식의 맛과 모양, 색, 냄새, 재료, 영양, 조리 방법, 도구 등 음식에 관한 다양한 소재들로 풀어낸 동시들이 오감을 자극하고,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며 입맛을 돋운다. 노래처럼 흘러가는 동시들을 읽다 보면 입안에 침이 고이고, 고소한 냄새가 나고, 뚝딱뚝딱 요리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안도현 시인은 이 동시집을 쓰면서 밥이 하늘처럼 귀하고, 밥 한 숟가락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또 음식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빛깔, 냄새도 음미하며 밝고 건강한 아이들로 자라라는 마음을 듬뿍 담았다. 그는 음식을 소재로 한 이유에 대해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인데, 요즘은 먹는 게 넘쳐나서 고민이 되는 때를 살고 있죠. 먹는 것의 중요성을 동시라는 형태로 아이들한테 말을 건네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라고 설명했다. 고기만 좋아하고 야채 안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야채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같은 민족이지만 세끼 밥을 못 먹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 먹는 게 투정부리고 욕심 부리는 대상이 아니라 살과 피를 만드는 대상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안도현 시인은 "음식이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으로써의 기능보다는 우리 아이들이 엄마가 음식을 만들 때 음식 만드는 것을 유심히 봤으면 좋겠다 생각했죠."라며 "밀가루 반죽할 때 만져봐야 그 감각을 제대로 채득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음식 만드는 일에도 참여하는 것. 그게 창의성 교육에도 중요하겠다 싶어요. 단순히 먹는 것에만 아니고 만들어보고 참여함으로 먹는 것이 중요하구나 느낄 수 있게 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실제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식단을 점검하고, 음식 관련 논물들을 통해 아이들의 식생활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봤다는 그는 "어떤 광고에 보면 부모인가 학부모인가 하는 광고가 있더라고요. 아이들한테 먹거리 주는 엄마들의 과잉공급과 과보호로 아토피, 유아비만이 생긴다고 해요"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부모와 아이들을 향한 조언을 동시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밥 한 숟가락' 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숟가락도/남기지 마라/한 숟가락 남기면/밥이 울지/밥 한 숟가락도/못 먹어 배고픈/아이들이 울지'.  안도현 시인은 "저는 어릴 적에 저는 집에서 밥을 먹으면 미역국이든 된장국이든 한 숟가락도 남기면 안 된다고 엄하게 가르침 받으며 성장했어요."라며 "요즘 아이들은 먹고 싶으면 먹고, 남기고 싶으면 남기지요."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동어반복과 천사주의 '동시' 탈피해야"  일반적으로 시는 행복과 영광스러운 것의 편이 아닌 불행과 상처의 편이라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만큼은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고, 고민 역시 즐겁게 표현하는 것이라 말한다.    동시집 '냠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안도현 시인 ⓒ 뉴데일리      실제 스스로를 철이 없다고 말하는 안도현 시인은 동시를 쓰며 자신을 유치원생으로 생각하고 작품에 임했다. 아이들의 눈높이가 어딘지, 어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엉뚱함의 힘에 기대려고 했다.  원고를 탈고한 뒤에는 직접 주변 아이들에게 감수를 받았다. 동그라미표와 가위표로 냉정한 평가를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를 통해 안도현 시인이 느낀것은 예상 밖으로 아이들의 눈이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랑같이 들리겠지만 동그라미를 골고루 받았습니다"라고 웃어보였다.  안도현 시인이 생각하는 우리 동시의 문제점은 천사주의표라는 것이다. 즉, 아이들의 마음에 천사가 있다고 여기고 무조건 귀엽고 예쁜 동시를 써서 가르친 것을 지적했다. 그는 "이 천사주의 동시가 우리 동시의 문학을 변방으로 몰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시인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와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옛날식 방식대로 써서 아이들의 심장을 따라가지 못하지요. 지금 이 시기 아이들이 생각하고 머릿속에 뭐가 있는지 검토하지 않으면 동시를 쓰기 어려워요."라고 조언했다. 또한, 그는 "우리 동시는 그동안 동어반복으로 일관해 왔다"고 비판했다. 실제 학교 교육에서 동시를 가르칠 때 ‘토끼는 ****’라고 묻는다. 답은 깡충깡충이다. 아이들 모두가 같은 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안도현 시인은 토끼가 깡충깡충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토끼장안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 만을 봤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동시를 '비빔밥'이 말한다. 먼저, 눈이 즐겁고 갖가지 채소가 들어서 맛이 즐겁고, 또 골고루 영양분이 들어서 즐거운 비빔밥 처럼 다양한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고 싶다는 소망이다.  끝으로 안도현 시인은 "시를 써야만 고매하게 평가해 주는 경향이 있다"며 "동시도 쓰면 집 나가서 바람 피우는 것처럼 오해하죠. 동시도 시이기 때문에 쓰고, 동화도 시인이기 때문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시는 조강지처, 나머지는 첩?"이라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편, '냠냠'은 비룡소의 '동시야 놀자'의 열번째 작품으로, 이는 한국 현대 시문학을 대표하는 시인들이 각각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시 세계와 개성을 특색 있게 선보인 국내 최초의 동시집 시리즈다. 지난 2007년 신현림 시인의 '초코파이 자전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자와 생리 현상 등 다양한 소재로 출간돼 10만부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이번 안도현 시인의 '냠냠' 다음으로는 함기석 시인이 수학을 소재로 11번째 동시집을 준비 중이다.  시인 안도현은 어떤 사람?  1962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국문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전북 이리중학교에 국어 교사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첫 번째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출간했다. 1998년 소월시문학상, 2005년 이수문학상, 2007년 윤동주문학상, 2009년 백석문학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작품으로는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ㅓㄹ없이' 등이 있고,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 '관계', '짜장면', '나비', '연어 이야기' 등이 있다. 뉴데일리 김은주 기자  ========================================================================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좋아서 나는 시를 쓰지 않아도 시인이다!” 독자들을 위해 인사 글을 좀 써줄 수 있겠냐는 부탁에 그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했다. 하얀 종이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그는 한참을 고심했다. “시 아주 어렵게 쓴다니까요. 시 안 써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시를 쓰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인터뷰 내내 그는 ‘시의 매력’을 이야기했고 그가 트위터에 올린 글은 한 편의 시와 다름없었다. 2012년 ... 이후, 검찰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 시인은 ‘...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는 쓰지 않지만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은 욕망’에 트위터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은 그가 3년 동안 트위터에 올린 글들을 모은 책이다. 말 걸고 싶은 시인의 ‘잡념과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여 본다.   트위터는 가장 예민한 안테나 Q ...이후에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웃음) 밀린 시집들 많이 읽었어요. 처음에 시를 당분간 쓰지 않겠다고 한 것이 모든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말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절필선언’이라고 언론사에서 말하고 나니까 심각한 느낌을 주잖아요. 밥 먹던 사람이 곡기 끊은 것처럼 비장해지고. 그동안 시를 붙잡고 있었어요. 소리도 치고 대항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해봤는데, 그런데 이게 참, ... 세상에선 부질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 쓴 거예요. 처음엔 불안했어요. 이러다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진짜 행복해요. Q 트위터는 어떻게 시작하셨는지 궁금해요. 휴대폰이 없다 보니 SNS하고 멀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전후에 트위터 한 번 해볼까 싶었어요. 2012년 초에 트위터를 시작했는데 ...시작할 때 나도 시작한 것 같아. (웃음) 저는 뜬금없이 ...위반으로 기소되고 아직도 재판 중이죠. 그런 일을 겪고… 트위터를 해보니까 몇 가지 장점이 있어요. 하나는 세상 흐름을 빨리 알 수 있다는 것, 가장 예민한 안테나 같은 생각이 들고요. 트위터에 조성됐던 이야기들이 2-3일 뒤에 방송에 나오고 또 하루 이틀 지나면 신문에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또 140자 라는 게 나한테 너무 딱 맞는 거예요. 140자면 무슨 이야기든 다 할 수 있거든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연결되기도 하니까 아주 짧은 것 같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처음에는 시간을 꽤 많이 뺏겼어요. 신문보다 먼저 보고 쉬는 시간에도 보고, 자기 전에도 확인하게 되고. Q 국가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자주 표현하셨는데, 요즘은 어떠세요? 똑같죠, 뭐. 세월호 관련된 발언을 몇 번 했었고, 최근에는 ..과 관련해서 쓴 것 같고. 시인이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시에 현실을 발언하는 일이 없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7, 8년 전부터 시인을 다시 광장으로 부르고 있어요. 시인을 한가하고 게으르게 만드는 게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인한테 어떤 역할이 자꾸 주어진다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죠. Q 정치현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하고 바라세요? 크게 보면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 피와 땀으로 일궈낸 민주주의 가치가 정상화돼야겠고 또 하나는 아직도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잖아요.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는 한, 휴전선 이남은 섬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이상한 섬이죠. 휴전선이라는 벽이 있는 섬.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해야만 거대하게 변화하는 세계사 물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다, 생각하죠. 모든 게 정치권력의 판단미스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돌려놓는 것이 필요하죠. 개인적으로 평양에 사과나무 심는 일 하고 있거든요. 지금 완전히 중단됐는데 2008년에 평양 근교에 심어놓은 사과나무가 크고 있는지 빨리 보러 가고 싶어요. 사과나무 심는 일은 2002년부터 4, 5년 했죠. 한겨레 신문하고 08년 봄에 전라북도 장수에 있는 묘목 12000주를 인천에서 남포항으로 실어가서 심었어요. 그 이후에 5.24조치(천안함 사건 이후 남북 간 교역을 전면 중단하는 대북 제재 조치)로 모든 게 중단이 됐죠. Q 시인이 왜 정치에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도 종종 받으시잖아요. 시인이기 때문에 발언하는 것도 있지만,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정치적 발언은 그런 사람들을 대신하는 것도 있고요. 문학을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세상의 일에 대해서 시인이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정치가 잘 되고 국민들이 잘 먹고 잘 산다고 생각하면 굳이 간섭할 필요가 없죠.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을 정상적으로 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좀 말해야겠다는 것이지 정치에 관심을 갖고 발언을 해서 정치인이 되겠다, 이런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너 장관 되려고 그러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전혀!     혼자 있는 시간은 시인에 가까워지는 시간 Q 안도현 시인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범생이죠. 면소재지에서 우리 집은 가게, 점방을 했고요. 외갓집과 큰집이 거기서 멀지 않은 시골에 있었어요. 방학 때는 늘 외갓집이나 큰집에 가 있었어요. 농사짓는 집이었는데 옛날에 놀잇감도 별로 없고, 혼자 있는 걸 잘 버티고 좋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비 오는 날 낙숫물 떨어지는 걸 오래 봤고, 또 외갓집 뒷산에 야생 버섯이 장마철에 났는데 그런 거 따러 가는 것 좋아했고 혼자 잘 놀았던 것 같아요. 뭐 감수성 이런 게 아니라 혼자 잘 노는 시간들이 개인적으로 잘 쌓였다고 생각해요. 시를 쓰다 보면 어릴 때 순간순간 만났던 풍경들이 어느 틈에 시에 들어와 있을 때가 있어요. Q 자연이 내는 소리나 생명의 움직임에 예민하신데요, 어린 시절의 경험한 자연이 영향을 주었을 것 같아요. 빗소리라든지 나뭇잎이 물드는 것이랄지 이런 게 나랑 별개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시골 출신이잖아요. 그런 삶이 시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말을 조금 바꾸면 낡아빠지고 촌스러운 태도가 될 수 있지만, 자연이라는 게 도시가 있고, 도시 바깥에 있는 게 아니에요. 문명과 자연을 떼놓고 생각하는 방식도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아파트 안에도 꽃과 나무들이 있죠. 앞으로 태어나고 자라나는 아이들도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병원에서 태어나지만 전세대가 누렸던 만큼 자연과 가까워져야 할 의무가 있고, 기성세대들은 제공을 해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Q 자연적인 삶이 시에 가깝다고 느낄 때는 언제예요? 혼자 있을 시간이 별로 없어요. 혼자 있는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면 누구나 시인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혼자 있지를 못해요. 다른 말로 하면 외로워할 줄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고 그걸 즐길 줄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행복할 거라는 생각을 하죠. 세상이 혼자 두게 만들지 않잖아요. Q 꽃 이야기가 많아요. 따로 꽃에 대한 공부를 하시나요? 식물을 안다는 건 식물이라는 타자를 이해한다는 거거든요. 식물들은 다양하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 다르고 그래서 자꾸 관심을 가지다 보니까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거죠. 잘난 척 하는 거예요. (웃음)     “...끝나는 날부터 시 발표할 것” Q 시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하는 글들이 군데군데 나와요. 시인은 사람을 아프게 하려고 태어났다고도 하셨고, 시는 감성으로만 쓰는 게 아니라 지식과 지혜, 열정과 기술로도 쓴다고도 하셨어요. 시란 무엇인가요? 시를 읽지 않아도 돈 잘 벌 수 있고 시간도 잘 가고, 뭐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시를 읽고 그 시간에 빠져 본 사람은 그걸 읽지 않은 사람과는 다른 삶을, 빛나는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해요. 저도 고등학교 때 시를 읽는 재미에 빠져서 쓰게 됐는데 소설처럼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지 펼쳐보면 되고, 또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도 아무 문제없고. 그러다 진짜 좋은 시를 만나게 되면 구름처럼 붕 뜨는 기분이 들어요. 저한테는 백석이 그랬어요. 한 편에 시를 구성하는 게 굉장히 많아요. 언어. 시인의 감성, 소재, 분위기 등등 총체적인 게 모여서 시가 되는데 백석 시는 ‘시는 이래야 한다’고 꿈꾸던 모든 게 거의 모든 시마다 들어있어요. 80년대 해직교사 시절에 외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지나치게 외치는 것은 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준 것도 백석인 것 같고. 광장에서 지쳐서 시를 때려치울까 할 때도 시는 오래 쓰는 것이라고 알려줬죠. 백석을 가장 좋아했고,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좋아했어요. 거의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은, 신경림, 황동규, 정현종 같은 어른들부터 최근 젊은 시인들까지 시를 많이 읽었어요. 제가 시를 제일 잘 쓰지는 못하지만 나만큼 읽은 시인은 별로 없을 거예요. 재미있으니까 읽는 거예요. 시를 읽으면 시간이 잘 가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상력을 만나면 놀라는 재미. 시를 자꾸 읽다 보면 나 스스로 고여 있게 만들지 않고 변화해야겠다는 생각을 시가 가르쳐주죠. Q 그래서 시는 도대체 뭔가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걸.(웃음) 굳이 말하라면, 여기가 아닌 여기 너머에 있는 걸 꿈꾸게 해주는 양식인 것 같아요. 늘 여기 갇혀 있잖아요. 이 안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빠져있지만, 여기가 아닌 더 멋진 세상을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것 같아요. 때로는 사람들이 기대고 싶은 언덕 같은 구실을 하고, 떠 마시는 냉수 같은 구실을 하잖아요. 또 어떤 사람은 시를 읽고 위안 받기도 하고. 시의 역할은 다양한 것 같아요. Q 시를 쓸 때 타자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시는 아주 내밀하고 개인적인 문학이라 타자가 낄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시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시에 등장하는 나를 시인과 일치하는 것이에요.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시에 나오는 ‘나’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내 이야기만 하려면 일기에 쓰면 되죠. 시를 쓰지 않아도 되요. 내가 아닌 주변 사람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느끼는 것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Q 시라면 무조건 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있어요. 시의 매력에 빠지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 모든 노래를 다 좋아하고 다 외울 필요가 없듯이 시도 그 때 그 때 자기가 좋은 것 몇 편만 취하면 돼요. 노래를 누가 공부하듯이 하나요.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즐기는 것처럼 시를 즐겨야지. 학교 다니면서 시로 공부만 해가지고... 시를 보면 함축적 의미를 찾고 그러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Q 그런데 정말 이해 안 되는 시들이 있어요. 그럴 때는 그냥 넘어가면 되죠. 왜 붙잡고 있어야 돼요? 코스 음식 나오는데 계속 먹기 싫은 거 나오면 그거 왜 먹어야 돼요? 그냥 나가서 자장면 한 그릇 먹든지. 그것도 음식이잖아요. 싫은 건 안 읽으면 돼요. 머리 짤 필요가 없어요. Q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별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하셨는데 어떤 어른, 어떤 시인이 되길 바라시나요? 아이고, 나 아직 어른 되려면 멀었어요. 아직도 철이 없는데. 진짜 마음은 아직 30대 같아요. 아직까지도 담배 끊으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술도 마찬가지고. 50대가 넘으면 친구들이 전부 몸이 어디가 안 좋네, 거기에 무슨 약이 좋네 뭐 이런 얘기하는데... 그런 거 싫어요. 시는 좋은 시를 쓰고 싶죠. ...끝나는 날부터 좋은 시를 쓰고 싶어요. 어떤 친구는 꼬불쳐 둔 거 아니냐고 하는데 실제 시를 쓰고 있지는 않아요. 그런데 쉬었다 쓰면 겁나게 잘 써야 되겠다, 이 생각은 좀 있어요. 그 동안도 열심히 썼지만, 좀 쉬더니 잘 쉬었구나, 이런 말 듣고 싶죠. 문학을 했기 때문에 삶이 아름다웠다는 말을 듣는 사람으로 늙어가야겠죠.  Q ...끝났는데, 더 한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요? (웃음) 그 때부터는 다시 무기를 갖추고 싸움의 시를 써야죠. 그런 일은 오지 않을 거예요. 나는 낙관론자예요.  Q 마지막으로 독자들께 하고픈 말이 있다면요? 이 책 홍보를 하겠습니다.(웃음) 이 책은 순서대로 안 읽었으면 좋겠어요.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어요. 하루에 많이 읽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야금야금 씹어 먹듯이 아무데나 펼쳐서 읽으면 좋겠어요.         [출처] 안도현의 '예천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요점 정리 -- ㅁ 지은이 : 안도현  ㅁ 갈래 : 서정시, 자유시  ㅁ 제재 : 연탄  ㅁ 성격 : 희생적, 헌신적, 성찰적(반성적)  ㅁ 표현 : '-네'의 반복을 통한 운율 형성(각운)  ㅁ 어조 : 반성적·성찰적 어조  ㅁ 특징 : ① 청각적 심상과 촉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감각적으로 표현함.               ② 일상의 사물을 통해 삶의 자세를 가다듬음.               ③ 지난 날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반성함.  ㅁ 주제 : 아낌없이 헌신하는 삶(사랑)에 대한 희구(希求), '연탄 한 장'같은 삶을 살려는 소망,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애 ㅁ 출전 : (1994) -- 내용 연구 --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아낌 없이 헌신하는 것,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 '자신을 잊고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것'정도의 의미가 있다.) - 삶의 의미 방구들(밑으로 고래를 켜서 방을 덥히게 만든 방바닥. 온돌) 선득선득(살갗이나 몸에 갑자기 서느런 느낌이 드는 모양)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연탄차'에서 아름다운 이미지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시인은 이를 재해석해서 그것에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연탄의 속성으로 자신을 태워서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줌)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자신의 따뜻한 삶을 있게 한 존재를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자신을 불살라 방구들과 밥과 국물을 덥히는 헌신적(희생적)인 존재]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의 '나무'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한 시적 자아의 반성. 시적 화자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보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 연탄의 의미와 사랑의 실천에 소극적인 '나'의 태도에 대한 자책 생각하면 / 삶이란 /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자신을 부수어서 빙판 위에 사람들이 디딜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고통스러운 세상, 험한 세상)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자신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일) -- 이해와 감상 -- 시인은 연탄 한 장을 바라보다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연탄의 속성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까지 자신은 타고남은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것이 두려워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 되지 못하였'던 삶을 살아왔구나 하고 반성한다. 이 세상사는 동안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타고남은 재처럼 쓸쓸한 결말로 내게 온다 할지라도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몸을 태우는 일,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일' 그 자체로서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시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허무한 한 덩이 재마저 산산이 으깨어 미끄러운 세상에 마음놓고 걸어갈 길을 만드는 일에 바치는 삶이 있다는 걸 생각한다.   쉘 실버스타인의 를 연상하게 하는 시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잊어서는 안 될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나눔과 헌신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그 어디서나 누구에게 건 불변의 가치가 아닐까? 아낌없이 나눈 후에 찾아오는 행복은 아마도 법정 스님이 에서 말씀하고 계신 "다 비우고 나야 비로소 채워진다"는 불교적 깨달음과도 통한다. -- 심화 자료 -- 안도현(1961∼  )    : 시인.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대구 신춘 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신춘 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에 , , , , , 등이 있고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관계', '사진첩' 그리고 산문집 등이 있다. (1) 이 시에서 '연탄'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고, 그것과 바꾸어 볼 수 있는 사물과 그 이유를 말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특히 2연에서 '연탄'의 의미를 파악해 보도록 하고, 이 시의 '연탄'처럼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하여 마지막까지 헌신하는 사물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사랑이란 누군가의 배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 시에서의 연탄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을 태워서 다른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고,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부수어서 빙판 위에 사람들이 디딜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그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살 수 있는 삶을 시인은 연탄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醴泉)'|작성자 허산재  
1673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나희덕 - 못 위의 잠 댓글:  조회:8039  추천:0  2015-12-25
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도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1~8행 : 현재 - 아비제비를 바라봄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 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 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 9~25행 : 과거 회상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마중 나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26~27행 : 현재 - 아버지의 꾸벅거림을 기억하게 하는 못 위의 잠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회상적,  ◈ 특징  ① 못 위에 앉아 잠을 자는 제비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했던 아버지의 처지를 중첩시켜 표현하였다.  ② 과거의 사건과 경험을 떠올리는 회상적인 어조로 시상을 전개하였다.  ③ 경어체의 표현을 사용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④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등 대상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며 시각적인 심상을 환기하고 있다.  ◈ 제재 :  ◈ 주제 : 남루했던 아버지의 삶에 대한 연민의 정  [시의 짜임] 1~8행 : 현재 - 아비제비를 바라봄  9~25행 : 과거 회상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마중 나감  26~27행 : 현재 - 아버지의 꾸벅거림을 기억하게 하는 못 위의 잠  [감상과 이해] 이 시의 전체 시상은 병렬적으로 제시되는 두 개이 장면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둥지가 비좁아 못 위에 겨우 앉아서 밤을 지새는 아비제비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기억 속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실직자의 신세를 면치 못한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 가야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시적 화자는 비애와 아픔, 좌절감을 느꼈을 과거의 아버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작품의 말미에서 시적 화자는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애틋한 그림자를 떠올리는데, 아버지의 꾸벅거림과 못 위에서 자는 제비의 꾸벅거리는 모습이 겹쳐지고 있다.  이 시는 경어체의 표현을 사용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회상하는 작품의 성격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 즉,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과  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경어체의 어법을 통해 대상을 서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시각적인 심상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등은 대상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며 시각적인 심상을 환기하고 있다.  [해설] 이 작품은 27행의 전연시이다. 연 구별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작품이다. 제비집 옆의 못 위에서 잠을 자는 제비 아비의 모습과 종암동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한 사내의 모습이 병치되고 있다. 작품의 행간의 의미를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1-3행 : 너무도 작은 제비집에 새끼들을 재우고 어미는 둥지 위에 간신히 잠들었다. 4행 : 그 옆에 못 하나가 있는데 5-6행 : 제비 새끼들의 아비는 그 못에서 밤을 보냈다. 7-8행 : 그런 제비 아비의 모습을 화자는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본다. 여기까지를 내용상 하나의 연으로 묶는 것이 좋다.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아빠를 보면서 왜 화자는 눈이 뜨거워진 것일까? 왜 눈물을 흘린 것일까? 감동의 눈물인가? 연민의 감정인가? 9-10행 : 장면이 바뀐다. 너무도 작은 제비집은 흙바람 부는 버스 정류장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너무도 작은' 것이나 '흙바람 불어오'는 것이나 그 환기되는 분위기는 동일하다. 그러한 정류장에 아이 셋과 함께 누군가를 마중 나온 사내에게 시인은 시선을 멈춘다. 11-13행 : 그 사내는 아내를 기다렸다. 그 여자는 오랜 노동을 끝내고 온 모양인지 몇 번의 버스 뒤에서야 비로소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여자의 얼굴이 시인에겐 매우 창백하게 보였고 그래서인지 반쪽의 달조차 매우 창백하게 보인다. 14-16행 : 아이들은 엄마에게 달려가고, 물끄러미 달빛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내'의 모습이 시인에게 각인된다. 창백한 달빛을 바라보며 사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일까? 무력한 자신에 대한 자책일까? 17-20행 : 이 부분은 시인의 논평에 해당한다. 정류장에서 만난 그 '사내'가 실업자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는 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오랜 실업 속에서 마땅한 직장도 쉽게 나타나지 않아 변변한 집 한 채 갖지 못하고 단칸 셋방에 세들어 사는 사내. 아랫목에 아이들을 재우고 자신은 결국 '못' 위에서 잠을 자며 힘든 삶을 견딘 사내. 21행 : 정류장에서 그 사내의 가족들이 좁은 거리로 이동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흙바람은 불어오고 22-25행 : 비록 달빛이 식구들이 손잡고 걸어가는 그림자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그렇게 위안하기엔 그들이 헤쳐나아가야 할 삶은 너무도 힘들고 언제나 한 걸음 쯤 뒤쪽에서 걸어갈 수밖에없는 아버지 26-27행 : 그런 아버지의 삶이 바로 '못 위의 잠'이다. 이 정도 독해를 하였으면 이제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과거에 시인은 못 위에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제비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종암동 버스 정류장에서 한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사내의 모습에서 제비 아비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다. 남편은 실직자이고 아내가 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인물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이 사내와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많지 않은가? IMF 실업대란 이후 우리 사회에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졌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옷깃을 세우며 당당히 서 있으려 했지만 자꾸만 움츠려는 어깨를 가진 아버지만 남아있을 뿐이다. 못 위에서 꾸벅 꾸벅 잠들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아버지. 비록 자신은 구조 조정의 시퍼런 칼바람이 삶이 지치고 힘들어도 가족만큼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쉬게 하고 싶은 이 시대의 슬프고 위대한 아버지. 겉으로는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외면한 채 차가운 못 위에서 꾸벅이며 안식을 취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뜨거운 눈물과 연민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어쨌거나 이러한 아버지 모습에 대해 시인은 연민과 안타까움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관련작품]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의 정을 노래한 시  김종길 성탄제 / 고은 성묘 / 박재삼 ‘추억에서’ / 기형도 ‘엄마 걱정’ / 이성복 ‘또 비가 오면’ / 이용악 ‘달있는 제사’ , ‘플벌레 소리 가득차 있었다’ / 강우식 ‘어머니의 물감상자’ / 정한모 어머니 / 정인보 자모사 / 김상훈 아버지의 창 앞에서  꾸벅거리는 아비제비⇒경제적으로 무능력했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함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아비제비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보며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시적 화자  제비집→정류장 : 과거 회상의 시작됨  흙바람 : 삶의 고단함과 세파  시적 화자에게 비친 삶에 지치고 고단한 어머지의 삶을 상징 / 감정이입  창백한 표정의 어머니를 바라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리 /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경제적으로 무력한 자신에 자책의 심리 - 화자의 추측  달빛 :  잠시나마 단란하고 정겨운 식구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소재  과거에서 현재로 되돌아 오는 부분으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드러나 있다.     아버지의 삶 =못 위의 잠          【나희덕 시인】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 *연세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 *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반 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시론집으로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등. =================================   1. 나희덕의 시와 삶 - 역사주의 비평으로 분석하기  나희덕은 첫 시집《뿌리에게》후기에서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시인과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시를 통한 '사회·역사적인 문제들을 구체적인 체험과 융화'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이 드러나고 있다. 결국 그녀에게 있어 시란 삶이고, 삶이 곧 시인 것이다.  1.1. 창비시선 95『뿌리에게』중「우리는 들에서 떠났네」- 원본확정  나희덕의 시「우리는 들에서 떠났네」는 1991년 발행된 그녀의 첫 시집『뿌리에게』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나희덕이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지 2년 만에 출간된 것으로 창작과 비평사 출판사에서 창비시선 95로 나왔고 이 시는 시집 제 1부에 게재되어 있다.  1.2. '우리'의 역사성 - 언어의 역사성  제목과 시 본문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우리'라는 말은 유독 우리 민족이 즐겨 쓰는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라는 단어는 말하는 이가 자기와 자기 동아리를 일컬을 때, 말하는 이와 제 삼자만을 일컬을 때, 말하는 이와 말 듣는 이만을 일컬을 때, 일부 명사 앞에 쓰이면서 '나의'의 뜻으로 쓰일 때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나', '너', '그들'도 아닌 '우리'라 함은 이 시를 통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우리'라는 말은 나와 너,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말로 동질감을 나타내고자 할 때 자주 쓰인다. 본문에서의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시속에서의 '우리'는 '뿌리내리지 못한,' '들에서 떠난' 자들이다. 중심부에서 이탈한 자들, 혹은 버려진 자들,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의 동질감이라는 것에는 절박함이 들어있다.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부에서 하나가 되는 '우리'에게는 들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자리잡고 있으며 '꿈자리마처 덮치는' 냉혹한 현실이 있다. 결국 '우리'는 그 상황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디론가 밀려갈' 수밖에 없는 절박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박함에서 오는 동질감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힘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1.3. 교사로서, 여성으로서의 나희덕 - 작가의 전기  나희덕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하기 전인 1988년부터 수원의 창현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또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소속이었던 시인인만큼 교직원 노동자로서의 생활이 시속에 담겨 있으며 특히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 할 수 있다.「우리는 들에서 떠났네」에는 직접적인 제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아니나, '우리'의 자식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 아이들은 '흔들리는 불빛 아래 쪼그리고 앉아 숙제하고' 있으며,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뿌리'로 불안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작은 불씨 마냥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치고 있는 '가난한 양떼'들이며 정체성을 상실하여 '들에서 떠나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나희덕은 90년대 초에 등단한 여류시인이다. 90년대에 문단에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과 관련하여 시문학에서도 나희덕의 등장은 이것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여류 시인의 시가 갖고 있는 개성이란 어떤 것일까. 나희덕의 시에서는 여타 다른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성이 흐르고 있다. 소소한 일상 - 대학시절의 흔적들, 교사 노릇을 하며 겪은 일들, 가정생활의 느낌들 그리고 기타 사회·경제적인 문제들 - 이 시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일상이 시속에 묻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따뜻하게 감싸안으려 하는 모성적 따뜻함이 느껴진다. '철없던 시절의 단꿈'을 꾸고 있을 때, 어디선가 다가오는 '포크레인'은 '우리의 꿈자리마저 덮'쳐버리고 말지만 이내 '식은땀을 씻어내리다 보면'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인은 삶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 끝 어딘가에 삶의 희망이라는 작은 불씨를 발견하고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4. 들에서 떠나 어디론가 밀려가다 - 역사적 전후관계 속에서의 의미  이 시에서는 동작이 이어지고 있다. 어딘가에서 떠났고 떠남 혹은 밀려감이라는 다음 행위가 이어지고 결국 '어둠도 가시고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2연과 4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연에서는 '우리는 들에서 떠나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방향을 상실한 '우리'의 고민의 흔적이며 앞으로 이러한 삶이 쉽게 끝나지 않고 고난이 계속 될 것이라는 아픈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3연에서의 '논밭이 쩍쩍 갈라지고,' '천정에 우르릉 금이' 가고, '포크레인이 걸어들어와 우리의 꿈자리마저 덮치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삶이란 떠난 자들이 겪게 되는 고통인 것이다. 결국 이런 말은 지난한 삶에 대한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폴 고갱(Paul Gaugin)의 작품을 비교함으로써 더 선명하게 그 내용의 의미가 전달이 된다. 고갱의 1897년 작품인『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는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의 삶을 화폭 하나에 담아내고 있으며 인생의 단면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그려내어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낙원의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타히티의 이브에서부터 흐느끼는 표정의 인물들, 그리고 페루 미이라의 자세로 쪼그리고 앉아 점쟁이 같은 노파에 이르기까지 상징성으로 충만해 있다. 또한 고갱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성경에 비교될 정도의 주제를 가진 철학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다분히 철학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고갱의 작품과 나희덕의 시「우리는 들에서 떠났네」는 '통시적 관계를 벗어나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사용된 동일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1.5. 상실감의 시대 - 문화적 배경  이 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91년 발행된 나희덕의 첫 시집『뿌리에게』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다. 나희덕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기는 80년대 말이었고 첫 시집이 간행된 시기는 91년으로 90년대 초의 일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냉전시대의 종식에서 소련의 붕괴와 함께 이어진 이념의 붕괴, 탈정치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또한 크게 보면 이 시기는 세기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시를 통해서 갑작스런 이념의 붕괴와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구 국가의 해체로 혼란스러웠던 그 시대의 '우리'들을 보여준다. '개구리 울음소리로 가득'한 공간, '포크레인이 걸어들어와' 꿈자리 마저 뒤숭숭하게 만드는 공간은 시대적으로 이념을 상실해버린 '우리'가 처한 위치이다. 이념이 전부라 믿었던 80년대, 그 믿음이 깨어진 90년대. 그 10년만큼의 거리감은 '우리'를 주변부로 내쫓아냈고 우리는 그저 다시 '어디론가 밀려가는' 것이다. 세기말적 분위기로 진행된 이 시기는 연도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해당하는 시기이며 이 문화적 배경은 시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1.6. 기승전결의 스토리 - 전통적 관례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기승전결의 형식은 원래 한시(漢詩)의 절구체(絶句體)에 있어서의 구성법을 그 유래로 하고 있다. 제 1구를 기구(起句), 제2구를 승구(承句), 제3구를 전구(轉句), 제4구를 결구(結句)라 하며, 이 네 구의 교묘한 구성으로 한 편의 절구를 만드는 방법이 기승전결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구에서 시상을 일으키고, 승구에서 그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며, 전구에서는 장면과 사상을 새롭게 전환시키고, 결구는 전체를 묶어서 여운과 여정이 깃들도록 끝맺는 것이다. 또한 시작품 외에도 소설이나 희곡에서 줄거리나 구성을 고안하는 데도 사용되는 형식 중 하나가 바로 기승전결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희덕의 이 시는 이러한 전통적 관례를 아주 모범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연으로 이루어진 시를 들여다보면 1연에서는 들에서 떠나는 모습, 2연에서는 떠나는 우리의 자식들의 모습, 3연에서는 꿈자리마저 덮치는 외부로부터의 공격, 4연에서는 어둠이 가신 세상에서 어디론가 다시 밀려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스토리로 이어지고 있으며 또한 한시의 절구체 형식을 통해서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갈등이 생기는 3연과 갈등이 해소되고 또 다른 현실이 펼쳐지는 4연은 독자에게 긴장감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부패의 힘 /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풀포기의 노래 / 나희덕      네 물줄기 마르는 날까지  폭포여, 나를 내리쳐라  너의 매를 종일 맞겠다  일어설 여유도 없이  아프다 말할 겨를도 없이  내려꽂혀라, 거기에 짓눌리는  울음으로 울음으로만 대답하겠다  이 바위틈에 뿌리 내려  너를 본 것이  나를 영영 눈뜰 수 없게 하여도  그대로 푸른 멍이 되어도 좋다  네 몸은 얼마나 또 아플 것이냐                     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 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못 위의 잠 /나희덕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못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제비,  거리에선 아직 흙 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하는 못하나,  그 위의 잠     뜨거운 돌 /나희덕     움켜쥐고 살아온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놓고 펴 보는 날 있네  지나온 강물처럼 손금을 들여다보는  그런 날이 있네  그러면 내 스무 살 때 쥐어진 돌 하나  어디로도 굴러가지 못하고  아직 그 안에 남아 있는 걸 보네  가투 장소가 적힌 쪽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그건 종이가 아니라 뜨거운 돌이었네  누구에게도 그 돌 끝내 던지지 못했네  한 번도 뜨겁게 끌어안지 못한 이십대  火傷마저 늙어가기 시작한 삼십대  던지지 못한 그 돌  오래된 질문처럼 내 손에 박혀 있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세상과 손잡고 살았네  그 돌을 손에 쥔 채 글을 쓰기도 했네  문장은 자꾸 걸려 넘어졌지만  그 뜨거움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던 밤 있었네  만일 그 돌을 던졌다면,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삶이 좀더 가벼울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 뜨거움이 온기가 되어  나를 품어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하네  오래된 질문처럼 남아 있는 돌 하나  대답도 할 수 없는데 그 돌 식어 가네  단 한 번도 흘러 넘치지 못한 화산의 용암처럼  식어 가는 돌 아직 내 손에 있네                      삼베 두 조각 / 나희덕       눈 내리는 아침     할머니는 손수 지어놓으신 수의로 갈아입으셨다 수의는 1978년 7월 15일자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수의를 지어놓고도 이십년을 더 사신 할머니는 백살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이 되어서야 연듯빛을 군데군데 넣어 만든 그 수의를 벽장 속에 숨겨둔 날개옷처럼 차려 입으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버선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도 허지, 그것을 안 맨들 양반이 아닌디 아닌디...... 어리등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할머니의 두 입술은 설핏 웃는 듯도 하였다 상자 속에는 버선 대신 삼베 두 조각이 들어 있어서 그걸로 잘 마른 장작 같은 두 발을 싸드렸다 삼베 두 조각을 두고 할머니는 왜 끝내 버선을 만들지 않으셨을까 1978년 7월 15일자 신문지 에 싸여 있던 수의 한벌과 삼베 두 조각으로 따뜻하게 여며 입고 할머니는 1998년 1월 19일 아침 횐눈이 내리는 새로운 집으로 걸어들어 가셨다                             보리수 밑을 그냥 지나치다 / 나희덕        가로등 너는 아득한 전생에  보리수나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뜨거운 발등 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석가를 물끄러미 굽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고요히 흘러 넘치는 그의 뇌수를  딱 한 방울 맛본 힘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모를 일이다  가로등 황금열매가 실하게 익어 가는 밤  설령 네가 그 날의 보리수였다고 해도  기대하지는 마라  이 시대에 누가 네 앞에 가부좌를 틀고  부처가 되려고 하겠느냐?  너를 붙들고 오열하다가 발등  왈칵 더럽히는 석가들이 있을 뿐  어쩌다 심각한 표정으로 혼자 가는 중생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전생에 너를 몰라보고 끄덕끄덕  보리수 밑을 찾아가는 중일 것이다                           와온臥溫에서 / 나희덕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 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헷,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외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옥수수밭이 있던 자리 / 나희덕       텅 비어 있다 어제까지 열려있던 문이 닫혀있다 바람에 소리를 내던 옥수수밭이 사라져버렸다  옥수수가 사라지면서  흔들림도, 허공도 함께 베어졌다 허공은 달빛을 안을 수 있는 팔들을 잃었다 소리내어 울 수 있는 입술들을 잃었다 갑옷과 투구 부딪치는 소리, 석탄을 지닌 산줄기가 먼저 폐허가 되듯이 열매가 실한 순서대로 베어져 나갔다 밑둥에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옥수숫대, 형기가 유예된 수인처럼 한 종족이 거기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 밭은 더 어두워질 것이고 성근 열매들은 여분의 삶을 익혀 갈 것이다 희고 붉고 검은 옥수수알들이 익어갈 것이다 수확한 옥수수를 자루에 넣는 손들. 피 흘리는 허공도 함께 푸른 자루를 실은 트럭이 산모퉁이를 돌아간다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 나희덕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힌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없이 앉아 나뭇잎을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나오며 단 한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 나희덕                  어느 부끄러운 영혼이            절간 옆 톱밥더미를 쪼고 있다.            마치 다음 생의 나를 보듯이 정답다.            왜 하필이면 까마귀냐고             묻지는 않기로 한다.             새도 짐승도 될 수 없어             퍼드득 낮은 날개의 길을 내며             종종걸음 치는 한 生의 지나감이여             톱밥가루는 생목의 슬픔으로 젖어 있고             그것을 울며 가는 나여             짙은 그늘 속             떠나지 않는 너를 들여다보며            나는 이 생의 나와 화해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면서             불쌍히 여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까욱까욱 울음소리를 한번 내보기도 한다.                       칸나의 시절 / 나희덕      난롯가에 둘러앉아 우리는  빨간 엑스란 내복을 뒤집어 이를 잡았었지.  솔기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이들은 난로 위에 던져졌지.  타닥타닥 튀어 오르던 이들, 우리의 생은  그보다도 높이 튀어오르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지.  황사가 오면 난로의 불도 꺼지고  볕이 드는 담장 아래 앉아 눈을 비볐지.  슬픔 대신 모래알이 눈 속에서 서걱거렸지.  봄이 와도 칸나가 필 때까지는 겨울이었지.  빨간 내복을 벗어던지면 그 자리에 칸나가 피어났지.  고아원 뜰에 칸나는 붉고  우리 마음은 붉음도 없이 푸석거렸지.  이 몇 마리 말고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게 있었을까.  칸나보다도 작았던 우리들, 질긴  나일론 양말들은 쉽게 작아지지 않았지.  황사의 나날들을 지나 열일곱 혹은 열여덟.  세상의 구석진 솔기 사이로 숨기 위해 흩어졌지.  솔기는 깊어 우리 만날 수도 없었지.  마주친다 해도 길을 잃었을 때뿐이었지.  이 한 마리마저 키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일론 양말들,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런 저녁을 밝혀줄 희미한 불빛에게  나는 묻지. 네 가슴에도 칸나는 피어 있는가, 라고.                           별 / 나희덕      모질고 모질어라  아직 생명을 달지 못한 별들  어두운 무한천공을 한없이 떠돌다가  가슴에 한 점 내리박히는 일  그리하여 생명의 입김을 가지게 되는 일  가슴에 곰팡이로나 피어나는 일  그 눈부심을 어찌 볼까  눈물 없이 그 앞을 질러 어떻게 달아날까  밤하늘 아래 얼마나 숨죽여 지나왔는데  얻어온 별빛 하나 어디에 둘까  어느 집 나무 아래 묻어놓을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나희덕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땅 끝 / 나희덕     산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렸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속리산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가자,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 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 가만히 들었습니다  흰 실과 검은 실을 더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길 위에서 / 나희덕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닳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 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 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상현上弦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신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어떤 出土 / 나희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춧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다 불꽃도 흑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어두워진다는 것 /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한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섶섬이 보이는 방 / 나희덕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이중섭과 아내 그리고 두 아들이 6.25 전쟁 중 살던 방, 초가집의 오른 쪽 끝에 있다                      벗어 놓은 스타킹 / 나희덕       지치도록 달려온 갈색 암말이 여기 쓰러져 있다 더 이상 흘러가지 않을 것처럼   생의 얼굴은 촘촘한 그물 같아서 조그만 까그라기에도 올이 주르르 풀려나가고 무릎과 엉덩이 부분은 이미 늘어져 있다 몸이 끌고 다니다가 벗어 놓은 욕망의 껍데기는 아직 몸의 굴곡을 기억하고 있다 의상을 벗은 광대처럼 맨발이 낯설다 얼른 집어들고 일어나 물 속에 던져 넣으면 달려온 하루가 현상되어 나오고 물을 머금은 암말은 갈색빛이 짙어지면서 다시 일어난다 또 다른 의상이 되기 위하여   밤새 갈기는 잠자리 날개처럼 잘 마를 것이다               *******************************************************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8년 연세대 국문과 졸업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 당선 김수영문학상 (1999)   현대문학상 (2003) 수상 시집 < 뿌리에게 >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 그 곳이 멀지 않다 > < 어두워진다는 것 > 산문집 등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생에 대한 반성으로 여성으로서 자기 정체성 찾아가는 과정 표현    “이전에 삶이란 과거가 만들어낸, 견뎌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기억의 되새김질보다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싶다. 오늘도 봄 그늘에 앉아 기다린다, 또 다른 나를.(‘시인의 말’ 중에서)” 생에 대한 단단한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내는 시인, 나희덕의 시집 ‘야생사과’(창비)가 5년 만에 나왔다.   그가 ‘시인의 말’을 통해 밝힌 대로 상처와 고통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왔던 그의 시선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야생사과’를 통해 자신에게 야생사과를 건네준 사람들이 사라진 수평선에서 등 뒤에 서있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대화’를 통 해 자기 속의 자벌레는 타인 속의 무당벌레에게  말을 건네 대화를 시도한다. 무엇보다 시인은 이번 시들을 두고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제가 페미니즘적인 기조를 밖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많은 시들이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경계를 넘는 여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죠.” 이는 “내 안의 물기가 거의 말라갈 무렵 낯선 땅에서 물의 출구를 발견한 셈이다. 무수한 나를 흘려보내는 것이 첫 물줄기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었다”는 작가의 말과도 연관된다. ‘누가 내 이름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에서는 가부 장적인 세계로부터 독립해 경계 너머의 삶을 지향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아냈다. 특히 ‘분홍신 을 신고’에서 시인은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시간을 벗어나 어디론가 갈 수 있다고 노래한다. 오랫동안 자신을 붙잡아두었던 분홍신을 벗고 경계를 넘어서 나아가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강물이 둑을 넘어 흘러내리듯/ 내 속의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 나와요/ 실들이 뒤엉키고 길들이 뒤엉키고/ 이 도시가 나를 잡으려고 도끼를 달려와도/ 이제 춤을 멈출 수가 없어요/ 내 발에 신겨진, 그러나 잠들어있던/ 분홍신 때문에/ 그 잠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분홍신을 신고’ 부분)” 두 남매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의 일부를 인용한 ‘우리는 낙엽처럼’에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근원,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나희덕 시인은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 여정은 암담해 보이지만 그럴 때조차 시에서는 아버지란 존재를 빼고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마치 현대사에서 좋은 지도자를 찾고자 하지만 가도 가도 안개가 걷히지 않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스스로 강을 건너야 함을 알려주듯이 말이다. “이제 우리는 강을 건너요/ 한 조각 배를 타고/ 그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인 줄도 모른 채/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 왔어요.(‘우리는 낙엽처럼’ 부분)” 나희덕 시인은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 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착학과 교수로 8년째 재직 중이다.        
1672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1960년대 이후 시: 기형도 - 빈집 댓글:  조회:4203  추천:0  2015-12-25
기형도의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작가 소개   기형도 (1960~1989). 경기도 연평 출생.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1984년 중앙일보사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 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으며, 구체적 이미지들을 통해 우울한 자신의 과거 체험과 추상적 관념들을 독특하게 표현하는 시를 썼다. 유고 시집으로는 『입 속의 검은 잎』(1989),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1990), 『기형도 전집』(1999) 등이 있다.    ▰ 기형도 작품경향 : 그의 작품은 주로 유년기에 경험했던 일들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나 회상, 그리고 현대의 도시인들의 살아가는 생활을 독창적이면서도 강한 개성이 묻어 나오는 시어와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 불안과 허무 그리고 불행의 이미지가 환상적이고 일면 초현실적이며 공격적인 시인 특유의 개성적 문체와 결합하여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평가받는 독특한 느낌의 시를 이루어 내고 있다. 동일 이미지의 반복이 중첩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든지 돌연한 이미지와 갑작스런 이질적 문장의 삽입, 도치, 콤마에 의한 분리, 감정의 고조(그는 감탄사를 연발한 드문 경우의 시인이었다)등 시어 구성과 문체가 일관되게 지속된 그의 암울한 세계관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유년시절 불우한 가족사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체험과 이에 대한 강렬한 심미적 각인이 시 전체에 가득한 삶에 대한 부정적 영상을 이끈 원인이자 그의 시적 모티브를 유발하고 있는 동인이며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닫고 비관적 세계로 침잔케 한 주된 이유로 이해되고 있다. 그의 시에는 현실에 대한 역사, 즉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 말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초현실적 이미지를 추구하면서도 일상의 현실을 비판한 독특한 시세계는 주목할 만 하다 하겠다         ■ 핵심정리   ․ 성격 : 애상적, 서정적   ․ 제재 : 빈집에 갇힌 사랑   ․ 주제 : 사랑의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사랑을 잃은 후의 슬픔과 폐쇄된 마음   ․ 특징 :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영탄적 표현을 활용하여 내적 고뇌를 드러내고 있다.           。관념을 사물의 이미지로 환치하고 있다.     ■ 이해와 감상 1  과거의 슬픈 사랑에서 벗어나려는 한 남자의 눈물겨운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사랑을 잃고 편지를 쓰고 있다. 그 편지의 수신자는 화자 자신이며, ‘잘 있거라’의 대상 또한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다. 화자는 사랑의 열망에 사로잡혔던 가슴 아픈 추억과의 단절을 통해 사랑의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과거의 구체적인 모습은 2~3연에 묘사되어 있다. 시적 화자는 겨울 안개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긴 겨울밤, 촛불을 환하게 켜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흰 종이에 무언가를 쓰려고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이윽고, ‘짧은’ 겨울밤은 다 지나고 날은 밝아 온다. 화자는 지난밤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이것들과의 이별을 시도한다. 그 방법은 추억이라는 관념적인 것을 넣고 잠글 수 있는 사물의 이미지로 바꾸고, 이것을 ‘빈집’에 가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기에 화자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는 표현에서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연민을 보임으로써 고통스런 추억과의 결별에 실패하고 있다.       ■ 이해와 감상 2 화자는 이별을 겪은 이후 편지를 쓰고 있다. 그 편지의 수신인은 과거의, 이별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들이다. 그 과거의 모습은 ‘짧았던 밤’,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 ‘촛불’, ‘종이들’, ‘눈물들’과 같은 시어들로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이 시어들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장면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촛불이 켜져 있는 밤이다. 그때 창밖에는 겨울 안개가 떠돌고 있다. 화자는 촛불이 켜진 방에서 흰 종이를 펼쳐 놓고 무언가를 쓴다. 그러나 그는 흰 종이를 보며 공포를 느낀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쓰고 싶지만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내 망설인다. 망설이는 자신이 안타깝고 답답해서 급기야는 서글픈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 문득 밤은 다 지나가고 날이 밝아온다. 화자는 이런 자기 자신의 모습들에 하나하나 인사를 한다. 3연에서는 안녕을 고한 과거의 자신에게서 떠나면서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공간을 폐쇄시킨다. 그 ‘폐쇄’작업은 그것들이 있는 공간 바깥에서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다는 설정으로 표현된다. 나의 그 모든 ‘열망’(가엾은 내 사랑)들은 빈집에 갇히고, 나는 그 빈집을 떠나가는 것이다.     ■ 이해와 감상 3 시적 자아는 아마 어떤 대상을 짝사랑한 모양이다. 밤새도록 그 사람만 생각하며 간절히 그리워했기에 긴긴 겨울밤도 '짧'아 보이고 그 사람 생각에 못 이겨 캄캄한 밤 창문을 열었기에 '하얀 겨울 안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리움을 못이긴 시적 자아는 촛불을 켜고 사랑 고백이라는 조마조마하고 무섭기까지 한 편지('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를 쓰려고 했을 것이고 그러나 차마 사랑한다는 표현은 하지 못하고 망설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런 일이 늘 반복되어 이제 그 사물들이 친구처럼 사람처럼 친근하게 다가올 정도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시적 자아가 사랑하면서 간절히 그리워했지만 표현 한 번 못해 보았던 그 사랑을 그만 잃어 버렸다. 의미를 가졌던 모든 사물들은 이별을 고해야 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밤도 안개도 촛불도 흰 종이도 눈물도 열망도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을 결별하고 시적 자아는 돌아서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다. 사랑하는 마음은 끝까지 버릴 수 없다. 그 모든 것에 결별을 고하면서도 결별을 고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서러운 사랑, 그래서 결별의 인사는 사랑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사랑이 갇히는 일'이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과 함께 의미를 가졌던 것들을 모두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대상에 대한 간절한 짝사랑의 기억까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억을 버릴 수 없다. '사랑을 잃고', '나'라는 시적 자아는 그 사랑과 함께 의미를 가졌던 모든 것들을 결별하고 사랑의 기억마저 결별하려고 시를 '쓰'고 '문'까지 잠그지만 결국은 '빈집에 갇혀 버려', 아무런 주체적 결별도 이루어 낼 수 없는, '가엾은 내 사랑'이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아무리 '잘 있거라'라고 목청껏 결별을 선언해도 잊혀지지 않은 사랑, 어떤 탈출도 이룰 수 없는 짝사랑에 대한 처절한 미련이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라는 구절로 형상화되어 있다. 고백 한 번 못해 본 외로운 짝사랑, 더구나 그 짝사랑과의 결별을 확인하는 순간의 고독은 얼마나 더 큰가? 잊어버리자고 시를 썼지만 잊어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미련, 그래서 시적 자아는 통곡한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이 시는 짝사랑하는 대상, 그러나 고백한 번 못해보고 잃어버린 짝사랑에 대한 처절할 정도의 미련이 잘 형상화되어 있는 짝사랑 이별가, 짝사랑 사랑가의 절창이다.     ■ 수능형 문제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는 것이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런 빛은 장마에 황야처럼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1. 위 시의 화자(‘생의 감각’의 화자)가 ‘빈집’의 화자에게 할 수 있는 말로 적절한 것은? ① 당신은 스스로를 절망에 가두고 있군요. 저도 한때는 당신처럼 절망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희망을 바라보고 살아요. ② 당신은 의지가 너무 약하군요. 강인하고 굳센 의지가 있어야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어요. 빨리 마음을 고쳐먹도록 해요. ③ 나는 절망의 끝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해요. 나도 당신처럼 용기를 갖고 어려움을 이겨 나가야겠어요. ④ 저도 당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리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요? 저도 가끔씩 다른 세계로 달아나고 싶은 때가 있어요. ⑤ 자신의 아픔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요. 너무 당신의 고통에만 묶여 있지 말고 타인의 아픔에도 관심을 갖도록 해요.   : 1번 [시평]  젊은 날의 사랑은 순수하다. 그러므로 더욱 열정적이다. 길지 않았던 사랑에의 기억은 그 열정으로 인하여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사랑을 잃고, 사랑을 하던, 그 짧았던 밤들에게,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에게, 아무 것도 모르며 타오르던 촛불에게, 눈물에게, 열망에게 아픈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이내 그 사랑의 열정으로 인하여 ‘장님처럼 더듬거리던 그 사랑의 문을 잠그고’ 그리고는 이내 그 사랑, 빈집에 가두어 버리고 만다. 사랑은, 젊은 시절, 그 사랑에의 열망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혹독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아, 아 진실한 것이다. =====================================      기형도 시인(奇亨度 1960.2.16-1987.3.7) 1.프로필 1960. 2.16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4녀중 막내로 출생                부친 기우민(황해도에서 피난온후 교사와 공무원 제직)과 모친 장옥순 1965.         5세때 광명시 소하동(경기도 시흥군 소하리)에 정착                 6세무렵에는 신문에 나온 한자를 읽어 주위에서 '신동'소리를 들음 1967.        부친이 농사로 전업하였으며 시흥국민학교에 입학 1969.        부친이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모친이 가계를 꾸려감 1973.        시흥국민학교 졸업                성적이 우수하고 노래와 그림에 재주를 보임 1975.        불의의 사고로 셋째 누이가 사망 1976.        신림중학교 수석 졸업(1회)                교내 중창단에서 바리톤으로 활동                백일장 시화전에서 두각을 나타냄 1979.        중앙고등학교 수석 졸업.                연세대학교 입학                교내 문학동아리에서 본격적인 문학수업 시작 1980.        교내 신문인{연세춘추}에서 소설 [영하의 바람]으로 '박영준문학상'가작 입선                교지 [연세]지에서 시 [가을에]로 '백양문학상' 가작 입선 1981.7.      방위병으로 안양에서 군복무                안양 문학동인지에 [사강리(沙江里)]발표 1982.6.      전역후 복학                [겨울판화(版畵)] [포도밭 묘지] [폭풍의 언덕]등 작품 발표                교내 신문[연세춘추]에서 [식목제(植木祭)]로 '윤동주 문학상'수상 1984.10.    중앙일보사에 입사 198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로 수상                [전문가(專門家)].[먼지투성이의 푸른종이].[늙은 사람].[白夜(백야)]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밤눈].[오래된 서적(書籍)].[어느 푸른 저녁]                등의 시 발표                2월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과 졸업.                수습기간거쳐 중앙일보 정치부에 배속 1986.        중앙일보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김.                [위험한 가계(家系)].조치원[鳥致院)].[집시의 시집(詩集)].[숲으로된 성벽]                [바람으니 그대쪽으로].[포도밭 묘지1.2]등 작품 발표 1987.        여름 휴가로 유럽 여행                [나리나리 개나리].[식목일(植木日)].[오후 4시의 희망].[여행자]                [장미빛 인생]발표 1988.        중앙일보 편집부로 옮김                [짧은 여행의 기록].[진눌깨비].[죽은 구름].[추억에 대한 경멸].                [흔해빠진 독서].[노인들].[길위에서 중얼거리다].[물속의 사막].                [바람의 집].[겨울판화].[삼촌의 죽음].[너무 큰 등반이 의자]                [정거장에서의 충고].[가는비 온다].[기억할만한 지나침]등 발표 1989.        [성탄목(聖誕木)-겨울판화3].[그집앞].[빈 집].[가수는 입을 다무네].                [질투는 나의 힘].[대학시절].[나쁘게 말한다].등 발표 1989.3.7.   새벽3시 종로2가 한 극장안에서 숨진채 발견(사인은 뇌졸증)                경기도 안성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                5월 유고시집[입속의 검은잎]-'문학과 지성사'발간                유작으로 [잎속의 검은 잎].[그날].[흘린 사람]발표 1990.3.     산문집[잛은 여행의 기록]-'살림출판사'출간 1994.2.     추모문집[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출판사'출판 1999.3.     전집[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출판          2.출생및 성장   1960.2.16(음력) 경기도 옹지군 연평도 출생 3남 4녀중 막내로 당시 부친은 황해도에서 피난온 후 교사를 거쳐 공무원으로 재직하였다. 부친은 간척사업에 손을 댓으나 실패한후 유랑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 (지금의 광면시 소하동)에 정착하였다. 당시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해 이재민이 정착촌을 이루었던곳으로 전형적인 도시의 그늘에 가린 모습이었다. 1985년 신춘문예에 시 부문으로 당선작인 [안개]가 바로 이런 모습의 배경이 되었다 시흥국민학교,신림중학교,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연세대학교 법정대학에 입학하여 정치외교과 를 종업하였고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문화부,편집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89년3월7일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어 생을 마감하고 지금은 경기고 안성소재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3.활동및 작품 경향   대학 입학 후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시작한 이후 대학 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영하의 바람]이 가작으로 입선.[식목제]가 대학문학 상인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당선되었다. 안양 근교에서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안양의 문학동인인'수리'에 참여하고 동인지에[사강리] 등을 발표,시작에 몰두하였다 다수의 작품을 쓰며.신춘문예에 응모하기 시작하여,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었다.이후 문예지에 [전문가].[먼지추성이의 푸른 종이].[늙은 사람].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백야].[밤차].[오래된 서적].[어느 푸른 저녁].등의 시를 발표. 중앙일보에 근무하며[위험한 가계][조치원][집시의 시집][바람은 그대쪽으로][포도밭 묘지1.2][숲으로 된 성벽]등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며 문인 및 출판관련 인사들과도 활발히 교류하였다. 1989년5월 유고시집[입속의 검은 잎]-(제목은 평론가 김힌이 정하였음)이 발간되었고 유작으로 산문집[짧은 여행의 기록1990][기형도 전집/1999과 시 [입속의 검은 잎], [그 날],[흘린 사람]이 발표되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유년기에 경험했던 일들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나 회상,그리고 현대의 도시인들의 살아가는 생활을 독창적이면서도 강한 개성이 묻어 나오는 시어와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시에는 죽음과 절망,불안과 허무 그리고 불행의 이미지가 환성적이고 일면 초현실적 이며 공격적인 시인 특유의 개성적 문체와 결합하여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평가받는 독특한 느낌의 시를 이루어 내고있다. 동일 이미지의 반복이 중첩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든지 돌영한 이미지와 갑작스런 이질적 문장의 삽입,도치,콤마에 으한 문리,감정의 고조(그는 감탄사를 연발한 드문 경우위 시인) 등 시어 구성과 문치가 일관되게 지속된 그의 암울한 세계관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있으며 유년시절 불우한 가족사와 경제적 궁핍,그리고 즉음에 대한 체험과 이에대한 강렬한 심미적 각인이 시 전체에 가득한 삶에 다한 부정적 영상을 이끈 원인이자 그의 시적 모티브를 유발하고있는 동인이면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을 닫고 비관적 세계로 침잔케 한 주된 이유로 이해되고있다. 그의 시에는 현실에 대한 역사,즉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따라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 말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초현실적 이미지를 추구하면서도 일상의 현실을 비판한 독특한 시세계는 주목할만 하다 하겠다.              시인 기형도에 대한 평가의 시간, 그속에서 우리는 시인 기형도를 만난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돋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안개-   시비는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중심인 기형도기념사업회가 제안하고 광명시가 1천만 원을 들여 건립한 것이다. 시비 제막식 이전 행사였던 '시인 기형도'의 세미나의 촛점은 지역문화인물로서의 기형도를 검증하는 자리로 현대 시인으로서의 지역문화인물 탐구,시 속 비유를 통해 시인의 삶과 지역성을 모색하는 광명시의 인물로 그를 꼽은것이다   안개시인'기형도' 는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태어나 다섯살 되던 해 현 광명시 소하동으로 이주해 유년시절을 보냈다. 기형도 시인은 1983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84년 중앙일보 정치부기자로 입사,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안개'라는 시로 당선 등단한다.   ▲ 기형도 시인   84년 신문기자로 활동 ,그는 특유의 섬세함과 꼼꼼함으로  채워진 취재노트와 스크랩북은 단순 취재기록뿐만 아니라 관련전문 자료를 첨부해 자신의 의견을 기록하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70~80년대 서민들의 가난한 삶과 시대적 아픔은 기형도의 시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된다.   시인 기형도는 22세 되던해 82년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한다. 기형도는 문학이외에 음악에도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중앙고 재학시절 교내 중창단 '목동'에서  바리톤으로 활동을 한 바 있으며 그 음악적 재능을 발산 할 수 있도록 누님이 대학시절 사준 기타가 조율해둔 채로 보관되어져 있다. ▲ 기형도의 누님 기애도씨가 사준 조율 된 채 보관되어 있는 기타   ▲ '빈집' 소재가 된 기형도의 생가 ▲ 기형도의 육필원고 그는 매일 시를 한편씩 썼다고 한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안개,물속의사막,빈집,388종점의 지역을 배경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기형도 시인은 89년 3월 29세의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기형도의 시비제막식에는 광명시장을 비롯한 지역인사들과 그의 유족인 누님 '기애도'여사가 참여하여 건립기념식과 추모식의 행사가 치루어졌다. 광명시장은 "우리 고장의 시를 마음의 꽃으로 향기로 꿈으로 키워낼 수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인사말을 통해 전했다.   기형도 시인의 누나인 기애도 여사는 '시비에 적힌 있는 어느 푸른 저녁에 우리가 서 있다"라며 "푸른 저녁을 맞이하는 날들이 많았으면 한다"는 짧은 인사말을 통해 기형도를 기리는 시비를 세우는데 있어 노력해 주신 모든분께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  시비 '어느푸른저녁에'라는 시가 두귀절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기념사업회 이정남 대표는 "기형도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노력의 결실로 올해 축제의 기간에 기형도를 기리는 시비식을 갖게 되어 너무나 뜻 깊은 일이다"라며 "시민들이 약수터를 지나는 길목에 시비를 세워 지역에서 명실상부한 문화인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며 시비 건립의 취지를 밝혔다.     ===================================================================   기형도 시 모음 시인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 빈집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靈 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 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 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 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 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 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 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 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그 입 속에 악착 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소리의 뼈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이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를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가수는 입을 다무네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 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 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 보면 축축한 등 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그  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김(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소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 된다.   모든 의심을 짐을 꾸리면서 김은 거둔다. 어둑어둑한 여름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 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 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그곳에서 계집아이 같은 가늘은 울음 소리가 터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빗방울은 은퇴한 노인의 백발 위로 들이친다.     그 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 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늙은 사람   그는 쉽게 들켜 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 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 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왔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물 속의 사막   밤 세 시, 길 밖에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 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 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 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 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바람의 집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숲으로 된 성벽     저녁 노을이 지면 신(神)들의 상점(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성(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사원(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성(城)   어느 골동품 상인(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식목제 (植木祭)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 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도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 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안 개   □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겁탈당하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어느 푸른 저녁   □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행자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 던진다 그의 마음 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는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오래된 서적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이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위험한 가계(家系) 1969   □  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 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큰누이가 소리질렀다. 그런데 올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매셨다.   □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줌 집어 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 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 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  3   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깎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 보면 무엇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얼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들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세,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가계(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저 동지(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장미빛 인생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그는 건장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 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 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 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 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 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 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 속에 옮겨 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죽은 구름   구름으로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 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 온 것처럼 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 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는 힘과 털이 빠진 개 한 마리가 접시를 노린다 죽은 사내가 살았을 때, 나는 그를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를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술과 침이 가득 묻은 저 엎어진 망토를 향해, 백동전을 던진 적도 있다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신만이 홀로 즐겼을 생각 끝끝내 들키지 않았을 은밀한 성욕과 슬픔 어느 한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 미치광이, 이젠 빗방울조차 두려워 않을 죽은 사내 자신감을 얻은 늙은 개는 접시를 엎지르고 마루 위엔 사람의 손을 닮은 흉칙한 얼룩이 생기는 동안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 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 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에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집시의 시집     □  1   우리는 너무 어렸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를 그냥 일꾼이라 불렀다.   □  2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가리켜 신(神)의 공장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무엇엔가 굶주려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만들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어떤 아이는 실제로 그가 토마토를 가지고 둥근 금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가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어른들도 몰랐다. 우리는 그가 트럭의 고장 고등어의 고장 아니, 포도의 고장에서 왔을 거라고 서로 심하게 다툰 적도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 때마다 그는 농장의 검은 목책에 기대 앉아 이상한 노래들을 불렀다.   모든 풍요의 아버지인 구름 모든 질서의 아버지인 햇빛 숲에서 날 찾으려거든 장화를 벗어 주어요 나는 나무들의 가신(家臣), 짐승들의 다정한 맏형   그의 말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우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우리의 튼튼한 발을 칭찬했다. 어른들은 참된 즐거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세상을 자물통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은 신기한 폭탄, 꿈꾸는 부족(部族)에겐 발견의 도화선. 우리는 그를 믿었다. 어느 날은 비에 젖은 빵, 어떤 날은 작은 홍당무를 먹으며 그는 부드럽게 노래불렀다. 우리는 그때마다 놀라움에 떨며 그를 읽었다.   나는 즐거운 노동자, 항상 조용히 취해 있네 술집에서 나를 만나려거든 신성한 저녁에 오게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를 찾아주오 사냥해온 별 모든 사물들의 도장(圖章) 모든 정신들의 장식 랄라라, 기쁨들이여! 과오(過誤)들이여! 겸손한 친화력이여!   추수가 끝나고 여름 옷차림 그대로 그는 읍내 쪽으로 흘러 갔다. 어른들은 안심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병정놀이들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코밑에 수염이 돋기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동안 그 사내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오랜 뒤에 누군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우리는 이미 그의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들었다. 상급반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혈통과 교육에 대해 배웠다. 오래지 않아   □  3   우리는 완전히 그를 잊었다. 그는 그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저녁마다 연필을 깎다가 잠드는 버릇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했다.     추억에 대한 경멸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 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 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 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포도밭 묘지 1    주인은 떠나 없고 여름이 가기도 전에 황폐해버린 그해 가을, 포도밭 등성이로 저녁마다 한 사내의 그림자가 거대한 조명 속에서 잠깐씩 떠오르다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내 약시(弱視)의 산책은 비롯되었네. 친구여, 그해 가을 내내 나는 적막과 함께 살았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헛된 믿음들과 그 뒤에서 부르던 작은 충격들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네. 나는 그때 왜 그것을 몰랐을까. 희망도 아니었고 죽음도 아니었어야 할 그 어둡고 가벼웠던 종교들을 나는 왜 그토록 무서워 했을까. 목마른 내 발자국마다 검은 포도알들은 목적도 없이 떨어지고 그때마다 고개를 들면 어느 틈엔가 낯선 풀잎의 자손들이 날아와 벌판 가득 흰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네. 어둠은 언제든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만 골라 디디며 포도밭 목책으로 걸어왔고 나는 내 정신의 모두를 폐허로 만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도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 하는 수 없이 내 지친 발을 타일러 몇 개의 움직임을 만들다 보면 버릇처럼 이상한 무질서도 만나곤 했지만 친구여, 그때 이미 나에게는 흘릴 눈물이 남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 정든 포도밭에서 어느 하루 한 알 새파란 소스라침으로 떨어져 촛농처럼 누운 밤이면 어둠도, 숨죽인 희망도 내게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네. 기억한다. 그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공중(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기척 없이 새끼줄을 들치고 들어선 한 사내의 두려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가 나를 주인이라 부를 때마다 아, 나는 황망히 고개 돌려 캄캄한 눈을 감았네. 여름이 가기도 전에 모든 이파리 땅으로 돌아간 포도밭, 참담했던 그해 가을, 그 빈 기쁨들을 지금 쓴다 친구여.       포도밭 묘지 2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 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리.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공중(空中)들. 기억하느냐, 그 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종자(從者)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둠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신(神)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듯이 믿음은 부재(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쉴 것이니, 골짜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정적을 사모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무리가 많지 않으랴.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불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정신의 헛된 식욕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네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 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 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종자(從者)여,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흔해빠진 독서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 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나를 빌려 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 달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 도 종 환            견우직녀도 이 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 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 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 일러스트=이상진   영원한 사랑을 믿는가?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좀 촌스럽다. 만남도 헤어짐도 '쿨해져 버린' 시대니까. 사랑에 빠진 직후라면 영원한 사랑 운운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런데 도종환(54) 시인은 사랑에 막 빠졌을 때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사랑의 영원을 노래한다. 이런 사랑법, 예컨대 '사랑의 뒷심'이 세상의 나지막하고 소소한 뒷마당을 지켜가는 소중한 힘이 되기도 한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질 그날을 예비하며 헐벗은 벌판을 경작하는 시인의 어깨는 고단하다. 하지만 현실의 고단함을 기꺼이 짐 지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을 만나는 길임을 믿기에 시인은 '밭 갈고 땀 흘리며' 묵묵히 당신을 그리워한다. 도종환은 이별과 그리움과 눈물의 시인. 1986년 출간 이후 당대의 밀리언셀러였던 시집 《접시꽃 당신》이 시인을 세상에 알렸지만, 이 시집의 놀라운 판매량은 비극적인 개인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80년 광주의 상처로부터 출발한 암울한 시대의 중반에 인간의 근원적 상처인 삶과 죽음을 진정성 가득한 서정시로 빚어 올린 이 시집은 개인의 비극과 시대의 비극이 긴밀히 연결된 지점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사람들은 시집을 보며 눈물 흘렸고 눈물은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실제로 도종환 시인을 만나면 많이 울었던 사람의 눈빛과 마주친다. 그는 잘 웃는 편인데 그 웃음이 세상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느낌일 때가 많다. 왜 아니랴. 당신이 사랑한 세상은 여전히 문제투성이고,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오늘의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옥수수밭 옆에 묻은 당신을 끝내 붙잡아두고 싶었던 세상이므로, 이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질 수 있게 나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므로. '(…)/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접시꽃 당신〉) 쓸쓸하게 버려진 세상의 뒷마당들에 씨앗을 심고 가꾸는 시인은 '공공 선(善)'이랄지 '희망' 같은 구닥다리 말들이 여전히 사랑을 지키는 근원 힘임을 알고 있다. 변방의 사람들을 향해 그가 내미는 노래들은 따뜻하고 순연하다. 그 노래들 속에 사랑의 푸른 빛들이 반짝인다. 영원한 사랑을 믿느냐고? 영원한 사랑은 있다. 내 안에 당신이 있는 방식으로, 혹은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만나는 방식으로. 아무리 세상이 낡고 슬픔이 많다 해도 사랑은 앞으로 나아간다. 【 김선우·시인 】       흔들리며 피는 꽃/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인의 시집 [사랑의 마음에 꽃이 진다]에 실린 글이다.  이 시는 평범한 자연 현상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는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이런 삶의 진실을 평이한 언어로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어 독자의 공감을 자아낸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은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 더 많은 것이 인생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방황, 고뇌, 고통, 슬픔 등은 우리가 부정하고,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성숙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이므로 긍정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 이 시에 담겨 있는 뜻이다.  이 시는 반복과 변조를 통해 시적 의미를 강조하는 동시에 운율감을 조성하여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심어 주는 작품이다. 1연에서의 '흔들림'과 '사랑'이 2연에서 '젖음'과 '삶'으로 변조되어 있는데 각 시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동일하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 * 도종환 시인 "나는 들국화 같은 사람" ​  도 시인은 목원대 교양교육원이 명사들을 초청해 진행하는 '르네상스 교양특강'의 첫 강사로 목원대를 방문해 자신을 '들국화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도 시인은 지난 2011년 출간한 열 번째 시집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와 같은 제목의 시를 직접 낭송하며 "인생을 시간에 비유한다면 뜨겁게 살아온 30대인 낮 12시에서 1시 사이를 지나 지금 내 인생은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9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군인 신분으로 언덕에서 총을 겨누며 시민군이 다가오기를 기다린 경험 이후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며 뜨거운 30~40대를 보냈다. ‘분단시대' 동인 결성과 민족문학운동, 부인의 죽음, 해직 교사와 구속, 복직 등을 겪으며 심신의 피로로 쓰러진 뒤 교직을 그만두고 속리산에서 칩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굴곡진 시간들을 견뎌낸 도 시인은 "나를 일으켜 세운 힘은 좌절"이라며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인생은 이제 막 오전 9시를 지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때이니 소중한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아라"고 당부했다. (중략)  그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로 시작하는 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를 인용해 꽃과 인생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꽃은 누가 먼저 피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늦게 피더라도 얼마나 아름답게 피었는지, 얼마나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려는 노력을 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한 도 시인은 "인생도 꽃과 같아 늦게 피어난다고 절망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고 노력해야한다"고 당부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을 ‘들국화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도 시인은 "이름 없는 산과 들 어디든 보는 사람 없어도 묵묵히 꽃을 피우는 게 들국화인데 이처럼 산비탈에 핀 꽃도 황량한 비탈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바꾼다는 데서 절대 그냥 피어나는 꽃은 없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디트 news 24. 목원대 '르네상스 '교양특강') ​ *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남해 유자의 향은 유난히 짙으면서도 은은합니다. 척박한 땅에서 세찬 해풍을 견디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아프면서 크는 나무,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에게도 특별한 향기가 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도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우고 가장 애틋한 사랑도 위태롭게 흔들리면서 깊어졌으니, 어디 빛나는 꽃과 사랑만 그런가요. 아주 작은 이슬에도 젖고 빗줄기에도 휘청거리는 우리 역시 비바람 속에서 더 따뜻한 잎을 피워올릴 수 있습니다. 고난을 딛고 재기한 사람도, 평생 외길을 걷는 장인도, 불모지에서 신산업을 일으킨 기업가도, 실패를 거듭하며 우주의 비밀을 발견해낸 과학자도 우리보다 더 흔들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고두현/문화부장·시인, 한국경제) ======================================================= 도종환 시비 위치 : 충남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 26 시와 숲길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 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육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도종환 1954. 9. 27 충북 청주~. 시인·작가. 도종환은 청주 중앙초등학교를 거쳐 청주중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3년 동안 원주고등학교에서 유학한 뒤 바로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1985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강중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에 발간한 그의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는 이미 이때부터 깊숙한 자기 울림의 세계를 그려낸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또한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에게 바친 시집 〈접시꽃 당신〉과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1988)이라는 2권의 시집은 그가 얼마나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도종환은 교사가 된 후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수인의 몸으로 교육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을 발간했다. 그후 도종환은 전교조 충북지부장으로서, 또한 충북문화운동연합의장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청주와 대구를 넘나들며 '분단시대'라는 동인 모임을 결성, 군부독재의 탄압에 맞서 동인지 간행을 주도했고(1984년 1집을 발간한 이후 5집까지 발간함) 그 문학적 열정과 업적을 인정받아 1990년 '신동엽 창작 기금'에 이어 제7회 민족예술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0년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과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 배〉, 그리고 1998년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를 발간했다. 또한 1993년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와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1994), 그리고 〈부드러운 직선〉(1998) 등을 연달아 발표했다.   도종환은 1998년 9월 충청북도의 작은 시골 학교인 진천 덕산중학교로 복직되었다. 그는 2004년 건강 문제로 교직을 떠났다. 그밖의 저서로는 시집 〈슬픔의 뿌리〉(2002)·〈해인으로 가는 길〉(2006), 산문집 〈모과〉(2000)·〈사람은 누구나 꽃이다〉(2004)·〈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2000), 동화 〈바다유리〉(2002)·〈나무야 안녕〉(2007) 등이 있다. 민족예술상(1997), 거창평화인권문학상(200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부문 예술상(2006) 등을 수상했다.           접시꽃 당신/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촟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읍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읍니다               시인 도종환의 제2시집 [접시꽃 당신]은 실천문학사에서 1985년 발간되었다.  표제작인 은 암으로 사별한 아내에 대한 사랑을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시어를 통해 절실하게 노래한 시이다. 이 시에서 아내는 질병으로 인하여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급속하게 생명력을 잃고 있는 존재이다. 작가는 이러한 아내의 모습에 대한 자신의 커다른 슬픔을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오고”와 같은 표현을 통해 숨기지 않고 표현하면서, “남은 하루 하루의 앞날은/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와 같이 아내를 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격정을 토로한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보잘 것 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내 마음의 모두를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아파해야 합니다”라는 깨달음을 통하여 이러한 슬픔을 극복하고,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난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겠다는 아내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고백한다. 이처럼 이 시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서정적으로 진솔하게 표현하면서도,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러한 슬픔을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킴으로써 시적 감동을 자아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시집 가운데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시인 도종환과 '접시꽃 당신'  마흔 넘은 대한민국 사람으로 1986년에 출간된 도종환 시인의 시집과 시 《접시꽃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시인은 ‘애절한 사랑’이라는 접시꽃의 꽃말답게 그 시집에서 아내와의 지순한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암에 걸려 시한부 생을 살아가는 아내를 간호하며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이 “우수수” 빠져나가는 아내의 여위어 가는 몸을 보며 아려 오는 가슴을 노래했다.  그는 “먹장구름”처럼 시시각각 아내를 덮쳐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던 아내를 왜 데려가려느냐고 절규한다.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도 아내와 함께 베어 내야 하고, 남아 있는 “묵정밭”도 아내와 함께 갈아엎어야 한다고 애원한다. 한때 그 시집은 전 국민의 심금을 울리며 초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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