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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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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重慶 烏江 - 절벽에 올라 시구를 구상하는 "괴짜시인" 댓글:  조회:4396  추천:0  2015-10-03
    절벽에 매달려야 시가 써진다?   중국의 한 시인이 시구를 떠올리기 위한 자신만의 독특한 습관을 공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썩 지난번 어느 날, 이(李)씨는 오강(烏江)근처를 관광하다 60m 높이의 절벽에 한 남자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씨는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1시간 동안 내려오라고 소리쳤지만 결국 2시간이 지나서야 절벽에서 내려왔다.”며 “절벽을 오르고 있는 남자의 안색이 매우 창백하고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날 절벽을 타고 있던 남자는 충칭(重慶)일대에서 ‘괴짜 시인’으로 유명한 장(張)씨.  장씨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절벽을 탔더니 시구들이 마구 떠올랐다.”며 “그 이후 시를 쓰기 위해 술을 마신 후 절벽을 타는 습관이 생겼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까지 12개의 절벽을 오르내리며 시를 써왔다. 한 절벽은 높이가 70m쯤 됐다.”고 덧붙였다.   장씨는 절벽에 올라 시구를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괴짜 시인’으로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장씨의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창작 활동도 좋지만 생명을 경시하는 잘못된 습관”이라며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장씨는 “시를 쓰는 것은 나의 직업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절벽을 타는 것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라며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1499    김철호 / 김관웅 댓글:  조회:4111  추천:0  2015-10-03
[평론] 한국 동시와 연변 김철호의 동시                                                   /김관웅 성인시에 못지 않게 한국 동시도 중국조선족 동시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최룡관씨는《한국 명동시 감상시리즈》라는 글에서 한국의 김완기, 신현득, 김진태, 최춘애, 허동인, 오순택, 김희정, 리효선, 리건호, 서덕출, 김사림, 강현호, 리국재, 문삼석, 리석장, 김종영, 리동식, 정형택, 정춘자, 서효석, 리화주, 최장길, 김용웅,우두섭, 최계락, 황애경, 정혜진, 김구연, 리은용, 리상문, 황베드로 등 수십명의 한국 동신인들의 명동시들을 중국조선족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리고 한국의 단체나 개인들이 기증한 도서들에도 동시들이 상당수 포함되여있다. 이리하여 한국 동시는 중국조선족의 동시창작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였는데 김철호의 사례 하나만 들기로 한다. 먼저 연변 김철호의 동시집《꽃씨의 이야기》(2002년)에 수록되여있는《시내물》을 보기로 하자.   건너 골짜기에서 흘러온 이야기와 이웃 골짜기에서 흘러온 이야기가 다리목에서 만나 더 큰 이야기 주고받으면서 더 큰 이야기 만들어간다 ㅡ김철호《시내물》전문   (이 례문에서의《더 큰 이야기 만들어간다》는《더 큰 이야기 만들러 간다》이다. ㅡ김철호)   이 시는 김철호의 대표작중의 하나로 절찬을 받은 시였다. 김철호의 동시탐구호에서 많은 시우들이 입을 모아서 칭찬했던 시이다. 김철호의 시는 한국 박두순의《말하는 비와 산과 하늘》의 마지막 련에서 그 어떤 힌트를 받지 않았는가 추측케 한다.   …… 건너 골짜기에서 실려온 이야기와 이웃 골짜기에서 걸어온 이야기가 내 몸의 푸른 대문을 활짝 열고 맑은 음성으로 걸어 들어온다. ㅡ박두순《말하는 비와 산과 하늘》의 일부   이 시련에서의 핵은 바로 “건너 골짜기에서 실려온 이야기와/이웃 골짜기에서 걸어온 이야기”이다. 김철호는 이 핵을 점철성금(点鐵成金)의 수법으로 슬쩍 에돌려서 교묘하게 부연하여 시를 만들어냈지 않았을가. 김철호씨의 동시《메아리》도 한국 동시의 핵을 빼어다가 점철성금의 수법으로 묘하게 에돌린 시가 아니겠는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미워 미워 하니 미워 미워 한다 나빠 나빠 하니 나빠 나빠 한다   한마디도 지려하지 않고 콕콕 쏘아대는 심술꾸러기 내 동생같구나 ㅡ김철호《메아리》전문   이 작품은 한국 박두순의 동시집《누군가 나를 지우개로 지우고있다》에 수록된《메아리》와 아주 류사하다.   산을 향해 사랑한다 소리치면 산의 가슴에 갸웃 귀대여보고 사랑한다! 산의 마음 전하는 메아리 ㅡ박두순《메아리 1》   산을 향해 미워한다 소리치면 산의 가슴에 갸웃 귀대여보고 미워한다! 산의 마음 전하는 메아리 ㅡ박두순《메아리 2》전문   박두순은 아이들에게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이 시적인 주제를 메아리라는 이 청각적이미지에 담아서 표현했다. 김철호는 바로 이 주제에서 어떤 힌트를 받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김철호가 한국동시에서 힌트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실례를 하나 더 보기로 하자.   가지 없어도 노랗게 피고   뿌리 없어도 하얗게 핀다 ㅡ김철호《나비》전문 (이 례문에서의《가지 없어도》와《뿌리 없어도》는《가지 없이도》와《뿌리 없이도》이다. ㅡ김철호)   김철호가 모본(募本)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되는 한국 선용의《동심시집》에 수록된《벚꽃》을 보기로 하자.   가지마다 날개를 파닥이는   나비 나비 흰나비   어제밤 놀러나왔다가 돌아가지 않는   별 별 하얀 별 ㅡ선용《벚꽃》   김철호는 “나비를 가지도 없고 뿌리도 없어도 피는 꽃”이라고 비유를 했다면 선용은 “벚꽃을 공중에서 나는 흰 나비와 하늘에 떠있는 하얀 별”에 비교했는데, 이 두 시에서는 다만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서로 바꾸었을따름이다. 녀자는 꽃이라는것을 꽃은 녀자라고 바꾼것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시적인 주제에서 힌트를 받는것도 문학영향의 중요한 종류의 하나이다. 그 가장 전형적인 실례를 김철호동시집“연필 숨쉬는 소리”에 실려있는 김철호의 련작동시《뿌리.1》과《뿌리.2》에서 찾아볼수 있다.   꽃이 아파하는걸 뿌리는 안다.   줄기가 괴로워하는걸 뿌리는 안다.   이파리가 고뿔에 걸린걸 뿌리는 안다.   열매가 벌레 먹는걸 뿌리는 안다.   깊은 땅속에서도 다 알고 속 태우며 헤매인다. ㅡ김철호《뿌리.1》전문     꽃들이 자기가 젤이라고 우줄렁 거릴 때 뿌리는 눈감아준다   줄기며 열매들이 제노라고 다툴 때에도 뿌리는 못들은체 한다.   씨앗이 떨어져 뿌리내리면 모든 사연 알겟는데 뭐   그래서 뿌리는 금시 모르는체 한다 ㅡ김철호 《뿌리.2》전문   우리는 김철호의 련작동시《뿌리.1》과《뿌리.2》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리해할수 있다. 즉 뿌리는 줄기가 자라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열매가 맺히게 하는 생명의 근본이지만 언제나 숨어서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숨은 영웅”이라는것이다. 이러한 시적인 주제를 우리는 한국시단의 최고어른이였던 구상의 시집《인류의 맹점에서》에 살려있는 련작시《뿌리頌.1》과《뿌리頌.2》에서 발견할수 있다. 아래에 구상으 련작시 원문을 그대로 옮긴다.   《뿌리頌.1》   구상   한겨울 아파트 뜰에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빈 가지를 뻗치고 서있다   말할 나위도 없지만 저 해골처럼 뻣뻣하고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이 오늘의 생명을 유지하는것은 꽁꽁 얼어붙고 굳어버린 땅밑의 뿌리들이 살아있기때문이다.   만일 그 뿌리들이 말라죽고 얼어죽고 썩어버려서는 오는 봄부터의 새순도, 새잎도 새 가지와 새 꽃과 새 열매도 어찌 바랄수 있으랴   그리고 뿌리는 저런 땅위 계절의 조화와 그 번성속에서도 자신의 떡잎새나 마른 나무가지나 빙충이 꽃이나 쭉정이 열매를 탓하거나 아랑곳하지 않으며 락화나 락과나 락엽에도 미련 없이 오직 시간의 흐름을 묵묵히 기다린다.   또한 뿌리는 기둥이나 줄기의 권력과 같은 위력이나 위세, 무성한 잎새의 재물과 같은 풍요, 꽃의 영화나 열매의 공적과 보응에 집착하거나 탐함이 없이 실로 무심히 오직 자기 생명의 영위와 그 확충에 휴식을 모르는 전력을 기울이고있다.   오오, 뿌이릐 더할 나위 없는 숨은 공덕   우리 인간의 마음의 뿌리도 저 나무의 뿌리를 닮을진저 ㅡ구상《뿌리頌.1》전문     나는 아파트 봄 뜨락 등나무 밑 벤치에 앉아 서로가 함성을 지르듯 늘어서있는   느티, 은행, 벚, 매화, 목련, 오동, 포플러, 버들, 플라타너스, 자귀, 온사시, 개나리, 진달래, 철쭉, 라일락 나무들과 앞뒤 잔디밭에 제풀에 돋아있는 민들레, 제비꽃, 씀바귀, 물망초 냉이, 토끼풀, 돗나물, 질경이, 강아지풀들의 새순과 새잎, 새 꽃과 새 가지들을 바라보며   지난 三冬 내내 그 어둡고 차거운 땅밑에서 저 초목들의 목숨을 지탱해온 뿌리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뿌리들으 숨은 인고가 없었던들 저 초목들의 오늘의 소생이 어찌 있으며 그 뿌리들의 줄기찬 활동이 없다며 저초목들의 래일의 결실과 번식을 어찌 이루랴?   저렇듯 뿌리들은 隱者의 헌신과 공덕을 함께 지닌다 이제 나의 상념은 이 나라의 무궁화란 나무를 떠올린다.   이 나라 겨레중에서 그 나무의 줄기나 가지가 되려는 자 잎이나 꽃이나 열매가 도려는 자는 서로 다투어 많고 많으나 이 나무의 생명을 공급하는 땅밑의 뿌리가 도려는 이는 왜 이다지도 적단 말인가?   뿌리가 되자! 우리 나라의 꽃나무 무궁화의 뿌리가 되자!   저 땅위의 모든것은 계절마다 나고 죽고 스러지지만 그 뿌리는 조국의 운명과 더불어 언제나 함께하고 또 영워나리라. ㅡ구상《뿌리頌.1》전문   김철호의 시와 구상의 시는 편폭의 차이가 나고 동시와 성인시라는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시적인 주제는 동일하다. 성인시를 동시로 탈바꿈시키고 큰 편폭을 작게 축약시킨 전자의 노력은 충분히 긍정해주어야 하겠지만 후자의 힌트가 없었더라면 전자는 생겨날수 없었을것이라고 사료된다. 비유를 할것 같으면 품위있는 어른의 두루마기를 가위로 썩뚝썩뚝 베여서 아기의 꼬까옷을 만들어버렸다고나 할가. 그러므로 김철호의《뿌리.1》과《뿌리.2》가 구상의《뿌리송.1》, 《뿌리송.2》를 표절했다고는 못박을수 없으나 창의력이 있는 작품이라고 칭찬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단언하는것은 적어도 김철호가 구상의 련작시《뿌리송》을 보았다는 사실적근거는 있기때문이다. 한국 동시책에서 힌트를 받았음직한 김철호의 동시《이슬.1》을 아래에 옮긴다.   이 나무의 이슬 다ㅡ아 모이면 참외만한 큰 이슬 될거야!   이 산의 이슬을 다ㅡ아 모아보면 집만한 큰 이슬 될거야!   이 세상의 이슬 다ㅡ아 모아보면 호수만한 큰 이슬 될거야! ㅡ김철호《이슬.1》전문   (이 례문에서의 《이 나무의 이슬/다ㅡ아 모이면》은《이 나무의 이슬/다ㅡ아 모아보면》이다. ㅡ김철호.)   김철호《이슬.1》은 유명한 영국 전래동시《만일 온 세계의 바다가…》와 시적인 론리면에서 아주 류사하다.   온 세계의 바다가 하나의 바다라면 얼마나 큰 바다가 될가!   온 세계의 나무가 하나의 나무라면 얼마나 큰 나무가 될가!   온 세계의 도끼가 하나의 도끼라면 얼마나 큰 도끼가 될가!   온 세계의 사람이 하나의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사람이 될가!   그 커다란 사람이 그 커다란 도끼로 그 커다란 나무를 잘라   그 커다란 바다에 던지면 풍덩, 얼마나 큰 소리가 날가! ㅡ영국 전래동요《만일 온 세계의 바다가…》전문   영국 전래동요《만일 온 세계의 바다가…》는 2000년에 한국 청동거울출판사에 의해 출판된《신선득 시력 40년 동시선》에 실려있는데 연변에서 일찍 연길에 전해들어와서 적잖은 사람들의 손에서 옮아다니면서 널리 읽힌 책이다. 그러므로 김철호가 이 시집을 접했을 가능성은 아주 많다. 즉 영향관계의 설정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김철호의《이슬.1》과 영국 전래동요《만일 온 세계의 바다가…》는 그 시적인 착상이 완전히 같다. 즉 “동일한 물건을 한데 모이면 얼마나 커질까!”하는 어린애들의 천진란만한 상상이 착상의 근간으로 된것이다. 때문에 시적구조가 동일하다. 오로지 후자에서의 바다, 나무, 도끼, 사람이란 대상이 단순한 이슬이라는 하나의 대상으로 축약되였을뿐이다. 그리고 점진적인 시의 론리적인 전개도 량자가 완전히 비슷하다. 다르다면 후자에서는 “바다ㅡ나무ㅡ도끼ㅡ사람ㅡ바다ㅡ풍덩ㅡ큰 소리”라는 점진적인 형태를 취한데 반해 전자는 “나무ㅡ산ㅡ온 세상ㅡ호수만한 큰 이슬”이라는 론리적인 형태를 취했다. 이를 도작이나 완전한 표절로 볼 근거는 없지만 적어도 그 어떤 힌트에 의한 모방이거나 개작일 가능성은 충분하게 있는것이다. 김철호의 동시창작에 미친 한국 동시의 영향은 부지중 중국 송나라시기 황정견(黃庭堅)의 “점철성금(点鐵成金)”설을 련상케 한다. 혹자는 김철호의 이런 동시창작법을 모방 흑은 표절이라고 혹평하고있지만 나이가 들어서 동시창작을 시작한지 고작 1ㅡ2년도 안되는 김철호에게 있어서 한국 동시의 구성, 주제, 언어표현수법 등에서 골자만 추려내서 나름대로 새롭게 동시를 만들어내는것은 곤경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책략이였을수도 있다.   (여기에서 김철호가《동시창작을 시작한지 고작 1ㅡ2년도 안되는》는 표현은 잘못된것이다. 나는1987년에《꽃동산》잡지에 첫 동시를 발표했고 동시로써 1996년에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ㅡ김철호.)   《문학과 예술》2007년 제2기《중한수교이후 중국조선족시문학에 끼친 한국시문학의 영향(3)》에서.   
1498    김철호 / 김응룡 댓글:  조회:4908  추천:0  2015-10-01
동심에 푹 젖은 시인                            /김응룡 불혹의 나이에 혜성같이 우리 아동문학 동시단에 나타난 김철호군이 또 한묶음의 콩알같이 동글동글 영근 기름기 짜르르한 동시를 보내왔다. 교원생활도 해본적이 없고 더우기는 아동문학과 접촉해본적도 없는 김철호군이 어찌하여 불현듯 동시를 이처럼 잘 쓸수 있을가? 원천이 없는 강이 없고 뿌리가 없는 나무가 없다.   우연하 기회가 동시인을 만들었다   한시기 나는 김철호군과 연변인민방송국 문학부에서 함께 편집사업을 한적이 있다. 그때 그는 이미 소설, 수필, 실화 등 문학작품을 많이 발표했고 또 연변대학 문학반까지 졸업했기에 높은 문학수양을 갖춘 작가였다. 하지만 아동문학은 그와 십만팔천리나 거리가 있었다. 더우기는 동시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이였다. 운명의 작간이라 할가 그는 돌연히 연변일보사의 가자로 자리를 옮겼다. 기자사업이란 세인들이 다 알다싶이 일년 365일 동분서주하는 직업이다. 그런 연고에서인지 그는 연변일보사에 임직한후 아주 드물게 문학작품을 썼다. 그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동시와 접촉했다고 말했다. 몇년전(1995년), 하루는 중국조선족소년보사의 아동문학편집을 담당하고있는 림금산씨가 갑자기 그한테 동시 몇수 써달라고 청탁했다는것이다. 그는 아이들처럼 약속을 어기면 반역자라는 생각이 들어 일요일의 휴가를 리용해서 어린 시절의 동심을 찾아헤매이면서 동시 3수를 써서 월요일에 바쳤는데 뜻밖에도 아주 훌륭하다는 평판을 받았다고 했다. 그중의 한수인《봄잔치》는 행운스럽게도《백두아동문학상》(1996년)까지 받았다.   이 강산 오실 봄 파란 잎 애처녀   산너머 고개너머 캐득이는 아기웃음   아직은 채 안 영근 애기녀한테   애꿎은 바람총각 잔치하러 오신대   이상은 동시《봄잔치》의 전문이다. 이 동시가 동심이 팔딱팔딱 뛰고 너무너무 생동한것은 그가 아이들의 심령속에 들어가 아이들이 하고싶어하면서도 번질수 없는 언어를 끄집어낸것이다. 이를 테면《파란 앞 애처녀》, 《캐득이는 아기웃음》, 《채 안 영근 애기녀한테》, 《잔치하러 오신대》 등의 이쁜 언어조합은 아이들의 시각으로 보아야만이 아장아장 마음에 다가오는 봄을 비로소 잡아낼수 있는 금싸락같은 시어들이다. 아이들의 세계는 끝없고 엉뚱하고 기발하고 신선하고 참신하며 거짓이 없다. 이런 아이들의 심령속으로 들어가는것은 아주 힘들고 간고한 작업이다. 김철호의 동시재주가 갑자기 빛을 뿜은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의 성격을 보면 아이들처럼 생활속에서 모든것이 그처럼 단순하다. 쉽게 격동되고 쉽게 실망하고 쉽게 즐거워하고 쉽게 비애에 잠기고… 때문에 그는 복잡한것을 싫어하고 활기롭고 유쾌한것을 좋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동심에 묻혀 살아온 사람이다. 그가 어느곳, 어느 주택구역에서 살든지간에 그의 이웃집들의 아이들은 모두 그와 다정한 벗으로 되군 했다. 그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올 때는 마을의 아이들이《우야!》하고 그한테로 달려와 스스럼없이 어깨에 등에 가슴에 매달려 참새들처럼 재잘거렸다. 그는 이런 아이들이 싫을대신 언제나 한없는 즐거움을 느끼였다. 그는 아이들속에 들어가면 하루동안의 온갖 번뇌와 시름을 잊고 활락속에 잠기군 했다. 이런 생활속에서 그는 저도모르게 한발작한발작 아이들의 동심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갔고 따라서 아이들의 언어를 마음속에 차곡차곡 챙겼다고 했다. 전국권선생은《시창작리론연구》라는 저서에서《생활속에서 소재, 주제에서 감정, 형상에서 언어까지 이러루한것은 다 장기적으로 육성하고 축적한것이 우연한 기회에 령감이 돌연히 몰려와 그것의 부추킴을 받아 머리속에 간직했던 재료들이 신속히 기묘하게 예술의 전일체로 된것이다》라고 썼다. 김철호의 경우가 바로 그런것이다. 아마 림금산씨가 그에게 동시를 써달라고 청탁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아무리 많은 동시의 재부를 갖고있다고 해도 그것이 분출되여 해볕을 보기가 어려웠을것이다. 그는 림금산씨의 청탁을 받고 동시를 쓰면서 자기의 천부적재질을 놀랍게 발견한것이다. 특히 동시《봄잔치》가《백두아동문학상》을 받은것은 그에게 있어서 큰 충격으로 되였고 따라서 그것을 계기로 동시창작에 심혈을 몰붓게 되였을것이다.   김철호의 동시 특점   그의 동시의 특점은 강한 형상성에 있다. 어느 비가 오는 날 아침이였다. 그가 창문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는데 갑자기 시야에 갖가지 색갈의 비옷을 입은 아이들, 갖가지 색갈의 우산을 든 아이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희희락락거리며 지나가고있는 모습이 안겨왔다. 그 행복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온몸이 찡해나는 감동의 전률을 받고 기발한 착상이 머리에 떠올라 단숨에 다음과 같은 동시를 썼다.;   노란 비옷 아이는 노란 꽃아이   빨간 우산 아이는 빨간 꽃아이   비오는 날 우리 모두 예쁜 꽃아이   ㅡ《꽃아이》전문   우리는 이 동시를 읊노라면 한폭의 동화가 아름다운 수채화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뿜는 감을 느끼게 된다. 그 수채화속에서 우리는 방글거리는 아이들의 얼굴과 비바람의 세례를 받으며 우썩우썩 커가는 그 애들의 모습 및 그 애들의 찬란한 미래를 보는듯하다. 이 동시에서《노란》, 《빨간》, 《꽃아이》 등 낟말들을 빼면 다른 언어가 극히 적다. 얼핏 보면 매우 따분한것 같지만 우리는 그런 감을 느낄대신 너무 황홀함에 어쩔수 없다… 자꾸 반복되는 낱말들이기는 하지만 마치 아이들이 그림을 그릴 때 자꾸 빨간, 파란색갈의 크레용을 덧칠해서 그 색갈, 그 동심이 뚜렷이 드러나듯이 이런 언어들이 반복도 역겨울대신 너무너무 감미로운것이다. 여기에 또 그의 다른 한수의 동시《도토리》가 있다.   도토리는 별라 갑옷속에 꼭 숨어 눈도 코도 다ㅡ아 감추고 빤질빤질한 엉뎅이만 뽈끈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뎅이 드러낸채 콜콜 늦잠자는 내 동생 같구나   이 동시의 핵이고 형상인것은《갑옷속에 꼭 숨어/눈도 코도/다 감추고/빤질빤질한/엉뎅이만 불끈》하는 시어들에 있다. 시인은 아마도 짜개바지 개구쟁이가 놀음에 지쳐 포동포동한 빨간 엉뎅이를 불끈 드러내놓고 너무 곤해 새우처럼 꼬부리고 자는 모습을 보고 불현듯 터실터실한 껍데기밖으로 불끈 엉뎅이를 내민 도토리를 련상하고 그것과 사랑스런 개구쟁이의 엉뎅이를 련계시켜 이 동시를 썼으리라는것을 어럽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이런 형상창조는 아무나 다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다만 아이들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이 동심에 푹 젖었을 때만이 나타날수 있는것이다. 김철호의 동시의 다른 하나의 특징은 반복인듯하면서도 점층적인 승화에 있다.   ㅡ삐약삐약 병아리 울음소리는 친구 찾는 소리   ㅡ꿀꿀 꿀꿀이 웨침소리는 배고프다는 소리   ㅡ멍멍 강아지 짖는 소리는 심심하다는 소리   ㅡ음매음매 송아지 부름소리는 엄마없다는 소리   ㅡ응아응아 꽃순이 울음소리는 쉬ㅡ했다는 소리   이상은 동시《이기들의 말》이다. 이 동시에서《삐약삐약》, 《꿀꿀》, 《멍멍》, 《음매음매》 등 의성의태어들을 반복하다가 마지막에《응아응아》하는 아기의 의성의태어를 불쑥 끄집어내서 주제를 홀딱 발가놓았다. 뿐만아니라 련마다 두번씩《소리》를 반복해오다가 마지막에《쉬ㅡ했다는 소리》로 승화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김철호의 많은 동시에서 이런 수법을 읽을수 있다. 바로 이런데서 시인의 재질이 돋보인다. 한국의 한 동시인은 성인이 쓴 동시가 아이들이 쓴 동시처럼 엉뚱하고 쉬워야 아이들에게 잘 먹힐수 있다고 말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사실 김철호의 동시가 이런것이다. 그는 머리속의 추상이나 상상으로 동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어떤 경우에 부딪쳐 령감의 불꽃이 반짝 튕기는 순간을 포착하고 아이들 같이 단순한 생각으로 엉뚱한 동시를 써내는것이다.   아들애와 함께 키운 동시   김철호는 남의 집 아이들을 사랑할뿐만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더없이 극진히 사랑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뛰여난 장끼를 보인 그의 아들애는 역시 개구쟁이였고 감정이 풍부한 애였다 장기간 어머니가 외국에 가 있은탓으로 그 애의 그림에는 자주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 고독한 마음이 내비치군 했다. 어느 을씨년스러운 날, 아들애는 창문에 마주서서 유리에 낀 뜬김에 그림을 그리고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시인은 아버지로서 마음이 뭉클해났다. 그래서 인차《비오는 날 창문에 마주서서》란 동시를 눈물을 머금고 썼다. 그의 아들애가 처음 그림을 배울 때 커다란 도화지에 가득 차게 한 머슴애을 대강 그려놓은것이 시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짚이는데가 있어《괴로운 도화지》라는 동시를 써서 아들애를 깨우쳤다. 그뿐이 아니다. 《엄마 때리는 매》, 《친구》, 《그림속에 들어간 아이》, 《강아지》 등 많은 동시가 아들을 모델로 쓴 동시들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이름난 동시인들이 모두  자기 자식을 키우는 과정에서, 소학교 애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유명한 동시를 써냈다. 그들이 그렇게 할수 있은것은 두말할것 없이 아이들의 무궁무진한 동심세계로 깊이 빠져들어가야 한다는것을 말해준다. 김철호는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동시를 발표하기 시작해서 몇년사이에 350여수의 동시를 창작했다. 1999년에는 한해사이에 무려 50여수나 창작, 발표했다. 김철호는 자기 속심을 이렇게 터놓는다. 《나는 기자이다. 때문에 긴 소설을 쓸 시간적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작가인 내가 글을 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것이 아마 작가의 사명감인것 같다. 늦게나마 동시창작에 재미를 붙인것은 나의 마음과 격에 맞는 일이다. 동시는 짧은 글이기에 창작할 때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동시라는 이 쟝르를 뚫고나갈 예산이다.》 참으로 자아를 잘 찾은것 같다. 나는 그가 동시창작에 더욱 정진하여 보다 휘황한 성과를 안아오기를 바라마지않는다. 끝으로 한가지 짚고넘어갈것은 아직도 그의 어떤 동시는 성인의 시각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쓴것이 확연히 알리는것이다. 물론 한국의 많은 동시인들이 지금 아이들을 대상한 동시보다 성인을 대상해서 동시를 쓰고있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동시라 할 때는 어디까지나 아이들에게 읽히고 그들의 사랑을 받아야 한는것이다.
1497    김철호 / 최삼룡 댓글:  조회:4421  추천:0  2015-10-01
평론   김철호, 시의 새 지평에 서다 ㅡ“김철호미시시집”에 붙여                                    /최삼룡   아동문학가인줄로만 알었던 김철호가 성인시의 새 지평선에 우뚝 선것은 참으로 예측밖이다. 근년에 그의 시는 눈부신 빛과 즐거운 소리와 독창적인 발상과 새로운 이미지로 시의 지평선을 달리며 우리 앞으로 떠오르고있으니 놀랍지 않은가. 이것은 “김철호미니시집”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다. 그런데 “김철호미니시집”의 시 6수는 모두 비교적 난해하다고 할수 있다. 필자에게 있어서는 난해하다는것이 결코 부정적인 결론이 아니다. 명확하고 명백하고 명랑한 시로 길들여졌으니까 아직도 우리들중에는 난해한 시를 일률적으로 부정하는 독자가 있을뿐더러 편집인, 시인, 시평가, 교수들도 있다. 그러므로 김철호의 이 6수의 시와 같이 난해한 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오해를 피하고 불의를 덜 일으키기 위해 되도록이면 상세한 해석을 시도했지만 또 편폭이 제한되여있으니 제대로 되겠는지 모르겠다. 1. 시 6수를 차례로 읽어보자. 첫전째 시 “룰”,  “룰”이란 영어에서 “법칙”이란 뜻의 명사다. 이 시의 첫련 “작은 생명이래도/그건 하늘보다 더 큰 숨”은 난해하지 않게 이 시의 주제를 제시하고있다. 그것은 즉 작은 생명이래도 하늘과 평등하다는것이다. 시에서는 작은 생명은 하늘보다 더 큰 숨이라고 과장하였다. 아래에서 시골 어느 이름없는 나무끝에 매달린 재난이라 해도 “스나미”로 일어선다고 한발자국 더 내디디였다. 그런데 제목은 어떻게 되여 “룰”인가? 잘 생각해보면 여기서 말하려는것은 하늘은 작은 생명과 같이 놀아야 하며 일단 같이 놀자면 공정한 유희규칙이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하늘”이란 동양에서는 지고무상의 존재, 세상만물의 창조신인데 서양에서는 “하느님”, “조물주” 상제로 통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시에서는 생명의 절대적가치를 강조하였다. 두번째 시 “희나리”, “희나리”란 “채 마르지 아니한 장작”이라는 뜻의 우리 말이다. 인생의 중년에 들어선 시적화자는 깊은 성적고민에 빠졌다. 즉 마른 장작처럼 활활 타오르던것이 희나리처럼 되여버린것이다. 희한한 놀음에 들떠있던 소년으로부터 어느새 중년이 되여버린것이다. 총적으로 이 시에는 인생의 중대한 고민에 처한 시적화자의 성적고민과 더불어 생명재생의 꿈이 담겨져있다. 세번째 시 “희담(戱談)”, “희담”에서 시인은 감히 생명의 결과이며 생명의 연장인 죽음과 희담을 하고있다. 누군가 스위치를 눌러 빛이 다 꺼져저린 곳이다. 시적화자는 허공을 딛고 허공에 걸리고 우아래가 없는 세상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도 만나고 동네 아이들도 만난다. 이 시에서 흥미로운것은 시적화자가 있는 곳이 구경 천당인지 지옥인지 분명하지 않는것이며 심지어는 이승의 생활인지 저승의 생활인지도 분명하지 않다는것이다. 총적으로 이 시에서 시인은 생명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진행하면서 죽음과 희언(戱言)을 벌리고있다. 네번째 시 “12월 맨 마지막 날 일기”, 제목이 직접 알려주는바 섣달그믐날 밤 송구영신의 심정을 시화하고있다. 세말의 정서를 “생리가 끝났다/붉은 피가 멈췄다”라고 내성적으로 표현하고 그 아래에서 그믐밤의 정경으로 세말의 분위기를 나타낸후 마지막에는 다시 “생리가 시작되였다/붉은 피줄 일어선다”라는 시구로 일출의 새해아침을 그리고있다. 총적으로 이 시에서 송구영신, 신진대사 혹은 광명과 암흑의 교체는 대자연의 법칙임을 확신하면서 광명한 미래에 대한 굳은 믿음을 특색있게 읊조리였다. 다섯번째 시 “개미의 꿈”은 정말 난해한 시이다. 개미들이 감히 인간의 얼굴에 있는 일곱개의 구멍(눈 둘, 귀 둘, 코구멍 둘, 입 하나)을 탐사하고 천착하려는 꿈을 꾸고있으며 그 꿈을 이룩하려는 노력을 하고있다. 1련, 천착을 시작하기 전의 일곱 동굴에 대한 정보분석, 2련, 일곱 동굴을 천착하는 로동현장, 3련, 일곱개의 동굴에 가득 차있는것들, 그 중에는 “꿀”과 “금괴”같은 욕심을 불러일으키는것들도 있으며 “우수((雨水) ”, “바람”, “귀지”같은 장애를 조성하는것도 있다. 나중에 화자는 개미가 “바다를 품었다”, “하늘을 안았다”고 하면서 “개미”의 생각을 직토하는 시구 “씨ㅡ꿈이야 못 꾸겠니”로 시를 끝냈다. 이 시를 접할 때 “개미”를 “인간”으로 바꾸어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보면 이채로운 해독이 나올수도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가질수도 있잖을가 사료된다. 여섯번째 시 “장고지몽(長鼓之夢)”에서 시인은 장고소리를 들으면서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시로 정리하고있다. 처음에는 장고를 치는 녀인의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성스러움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이라고 확인하였으며 그 아래에서는 시원스러운 장고소리를 칼에 비기면서 비단을 베인다고, 간드러진 소리에 맺혔던 매듭이 풀린다고, 말의 효용소리, 소의 영각소리를 낸다고 상상한다. 제5련 “아리아리 아라리요 둥둥둥/아리아리 아라리요 둥둥둥”은 장고소리에서 힘차게 울려오는 백의민족의 심성을 돌출하게 부각하고 마지막 련에서는 첫련과 호응하면서 녀인의 가슴으로부터 울리기 시작한 선률이 아득한 강에 빠져 익사하는것으로 태양을 떠올렸다고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여기에서 태양은 태양계의 알로서의 해가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에 떠오르는 희망과 광명의 상징으로서의 태양이다. 총적으로 이 시에서는 장고의 꿈을 통하여 장고를 대표하는 모든 민족음악, 나아가서 모든 민족문예의 소리와 빛과 향기와 힘, 감화력과 매력을 독창적으로 노래하였다. 2. 시 6수에서 낯설게 하기와 상관물창조. 이상 분석에서 보았지만 김철호의 6수의 시는 주제파악이 쉽지 않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그 해답을 한마디로 말하면 김철호의 시는 방법과 수법 및 기교상에서 모더니즘시와 포스트모더니즘시의 영향을 많이 받고있기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이것들에 대해여 리론적으로 해명할수 없으므로 김철호 시 6수와 련계시켜 몇마디 더 하려고 한다. 서양시학에 데뻬이즈망(Depaysent)이라는 개념이 있다. 전혀 이질적인것들이 모여 새로운 창조적인것으로 재탄생되는것, 혹은 기존의 의미를 버리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어는 변화를 시도하는것을 가리킨다. 시창작에서 낯설게 하기, 소외기법, 몽따쥬, 콜라쥬, 자동기술법, 병치조각내기, 폭력조합 등등 시적기교의 목적 혹은 결과는 결국 모두 시의 데뻬이즈망에 귀속된다고 할수 있다. “김철호미니시집”에서 우리는 데뻬이즈망수법과 기교를 많이 찾아볼수 있는데 여기서는 먼저 낯설게 하기를 보자. 낯설게 하기란 로씨야 형식주의의 핵심개념의 하나인데 스콜로프스키(shklovsky)가 처음으로 제기한 개념이다. 그에 의하면 지각이 인습화된 틀속에서 영위되는 일상의 삶은 본래의 의미를 잃기 쉬운데 예술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인식의 틀을 깨고 낯설게 하는것으로 사물의 본래 모습을 회복심키려는것이다. 스콜로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을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대로 그에 감각을 부여하는것이다. 예술의 여러가지 기교는 사물을 낯설게 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고 이를 지각하는데 시간이 걸리게 한다. 지각과정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리목적으로 가능한 연장시켜야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낯설게 하기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 위하여 일상화되여 친숙하거나 반복되여 참신하지 않는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고 생소하게 하여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 하는 수법이다. 이제 김철호 시 6수에서 낯설게 하기의 례를 몇개 들어본다. 첫번째 시(“룰”) 2련의 “은빛 향기로운 세상”을 보면 시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과 후각으로 감지하는 감각을 련계시킴으로서 공감각에 의한 낯설게 하기를 하였다. 4련의 “넓고 깊은 그물”은 문법을 고의적으로 파괴한 폭력조합으로 낯설게 하기를 하였다. 그물은 넓을수 있어도 깊을수는 없다. 문법적규칙대로 하면 “넓은 그물을 깊이 던져”로 되여야 할것인데 시인은 고의적으로 문법을 파괴하는것이다. 두번째 시(“희나리”) 3련에서 “고독이 떨고있다”는 시구도 “고독”이라는 단어와 “떨고있다”는 단어는 주술관계가 형성될수 없는것인데 폭력조합으로 낯설게 하기를 하고있다. 다섯번째 시(“개미의 꿈”)에서 “개미가 바다를 품었다/개미가 하늘을 안았다” 이것은 수사법으로 과장에 속하지만 바다와 개미의 비교, 하늘과 개미의 비교속에서 보면 이 시구는 절대적인 불가능을 시인의 상상으로 낯설게 하기를 한것이다. 여섯번째 시(“장고지몽”)에서 “살에 배인 색”, “소리보다 더 선들선들한 칼”, “비단 베이는 섹시한 가락”, “음(音)의 향기 깃을 꼬며 눕는다”, “매듭이 스르르 맥을 놓는다”, “아득한 강에 빠진 선률”, “즐거운 익사로 붉은 태양 받쳐든다” 등등 시구는 모두 언어의 폭력조합, 혹은 이미지의 폭력조합을 시도한 낯설게 하기이다. 이밖에도 6수의 시에는 현실과 상상을 뒤집고 시간의 전과 후를 전도시키고 원인과 결과를 혼돈시키고 천당과 지옥, 이승과 저승을 섞어놓는 수법으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 곳이 많다. 다음 6수의 시에서의 상관물창조에 대하여 살펴보자. 객관적상관물창조의 개념은 엘리어트가 제일 처음 제기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정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상관물을 발견하고 창조하는것이다. 문학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낼수 없다. 어떤 사물, 정황 또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그것을 표현하여야 한다. 일상생활중의 개인감정은 시작품에 그대로 로출되는것이 아니라 시문과 관계있는 어떤 심상, 상징, 사건을 통하여 구현된다는것이다. 이제 이 6수의 시를 보면 김철호시인의 상관물창조에서의 뛰여난 시재를 보아낼수 있다. 우선 시의 제목들이 창조주체의 감정이나 가치관을 나타낼수 있는 상관물로 창조되였다. 례를 들면 중년남자의 성고민과 더불어 생명재생의 꿈을 나타내기 위하여 “희나리”라는 객관적상관물을 창조하였으며 소인, 범인, 속인의 소망을 나타내기 위하여 “개미의 꿈”이라는 객관적상관물을 창조하였으며 문학예술작품의 매력과 가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장고지몽”이라는 객관적상관물을 창조하였다. 6수의 시문중에는 객관적상관물이 아주 많다. 례를 들면 “희나리”에서의  “녹쓴 수도꼭지”, “웅크린 힘”, “젖은 팬티속에 무서운 힘”, “자음과 모음이 섞여야 완정한 글자”, “희한한 놀음”, “갑자기 사라지는 우주”, “시작만 있을뿐인 추락”, “개미의 꿈”에서의 “일곱개의 동굴”, “장고지몽”에서의 “높고 가까운 두 언덕” 등등인데 창조된 객관적상관물들의 시적내포에 대하여서는 독자들이 하나하나 음미해보기를 바란다. 3. 시의 새 지평에 선 김철호에게 박수. 낯설게 하기와 상관물창조외에 6수의 시에는 시적인 아이러니와 역설 그리고 해학 등 수법이 필자의 눈길을 끌고 태양, 하늘, 꿈, 바람, 숨 등 반복되는 이미지들이 입맛을 당기지만 편폭관계로 더 펼치지 않기로 한다. 총적으로 이 6수의 시는 난해하지만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은 시에 그래도 선명한 가치추구가 있기때문이다. 난해한것은 시의 창작방법과 기교에서 우리가 습관된 직토, 직설법이 아니라 낯설게 하기와 객관적상관물창조, 아이러니, 역설 등 현대적인 수법과 기교를 많이 쓰기때문이다. 이러한 수법과 기교는 결코 김철호의 발명이 아니며 이러한 수법과 기법에 대한 실험은 우리 시단의 많은 시인들이 견지하고있다. 단지 김철호의 작품활동을 회고해보면 최근의 시창작이 새로운 지평선에로 올라선 느낌을 준다는것이다. 김철호의 생활에 대한 심도파악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신감이 넘치고 자아에 대한 투시는 여유로우면서도 진솔하다. 김철호의 현대시에 대한 공부는 시 “개미의 꿈”의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끈질기다. 이제 김철호의 시도 “장고지몽”의 그 장고소리처럼 사람들의 마음의 하늘에 붉은 태양을 받쳐올리려는지, 기대해본다. 시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시창조의 새로운 지평선에 우뚝 선 김철호에게 박수를 보낸다.   2013넌 6월 10일 대련 소평도 림해원에서 2013년 제4기                          
1496    김철호 근작시 시평 댓글:  조회:4324  추천:0  2015-10-01
평론 기수(旗手)는 바람이 없으면 달려간다           ㅡ2014년 장백산 제2기  김철호시인의 근작시를 읽고                                                                  /허인               머리글   요즘 신문잡지를 펼쳐들면 심상찮게 자주 마주치는것이 아마도 김철호시인님의 주옥같은 시작품들인것 같다. 어찌보면 오늘날 줄거리가 없고 한낱 표백된 아픔마저 버젓이 상품이라는 브랜드 마크를 달고서 콩나물이나 숙취나물처럼 슈퍼에 나란히 진렬되는 그런 무병신음의 가짜시가 아니라 읽을수록 알맹이가 꽉 차서 마침내 읽는 이 혼자서는 그 모든것을 감당하고 만끽하기엔 너무 아름차고 또한 즐겁기도 한 ㅡ 그래서 누구라도 상관없이 독자들과 함께 조금이라도 나누고싶은 심정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알건대 김철호시인님은 저명한 아동문학작가님이시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 이 몇년사이 우리 조선족시단치고는 제일 먼저ㅡ 어쩌면 남들보다는 한발 앞서 파편문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깊이있게 연구를 끝마치고서 마침내 자신의 깔끔한 성미에 알맞게 개성있게 현대시를 쓰고 있는 그런 시인이 아닐가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매번 김시인이 자신있게 내여놓는 한수 또 한수의 무게감이 있고 테마가 굵직한 시작품앞에서는 오래동안 외곬인생을 고집하면서 수십년째 시를 써온 허다한 시인들마저도 손발을 내밀기가 저어되여가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들며 그 신비한 마력은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쭈욱 이어질것만 같다. 그럼 여기서 2014년 잡지 제2기에 실린 김철호시인님의 주옥같은 시 7수를 우리함께 손에 손잡고 잠간 즐거운 려행을 다녀와보자   링크와 네트워크구축으로 스스로 아름답고 좋은 시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조대, 어느 시대에서나ㅡ 시인의 사상의식은 항상 미래 지향적이였으며 또한 드레시(漂亮, 幽雅)하게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들을 창출,  랜덤하고도 더욱 디테일하게 드라이브코스(自驾游线路)를 스스로 구축해왔으며 더우기 새로운 언어조합속에서의 자률, 또한 지극히 러브 시(示好)한 이률배반속에서도 마스터피스(杰作)와 함께 항상 개혁이 동일시되여 왔었다는것을 누구나 쉽게 알수가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미래 지향적인 행보는 오늘도 조심스러울수밖에 없으며 또한 과감한 개혁의 리론과 그 기능을 불러오는 중요한 단서가 곧바로 시인의 더없이 정확한 의사전달로써 길게 설명자면 멘트(话语, 台词)가 필요없는 기획적인 자아도전과 저돌적인 돌파, 즉 새로운 시어창출과 함께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모로 독자들앞에서 검증 받아야 하는 그런 데스트가 아닐가 필자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아직 필자의 좁은 소견일지도 모르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정석으로, 또는 기초로 하여 단단히 밟고 더욱 높이 올라서려고 하는 기획적인 발전이지 결코 지극히 이률배반적이지는 않다는것이다. 그럼 우리 함께 김철호시인은 링크와 네트워크구축으로 어떻게 이미지즘을 완성해 가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건 흠결이 아니였다 이중로출도 아니였다 틀림없는 유령의 그림자였다   물앉는다 요즘 그녀는 자주 물앉는다 복도에서도 거리에서도 벌렁벌렁 물앉는다   회사청사를 어깨에 메였다 19층청사가 어깨를 누른다 벌렁 물앉는다 8촌사진은 하나의 세상이다 그속에 19층청사,그녀의 어깨… 그녀는 어떤 유령에게 업혀있었다 그녀가 어떤 유령을 업고 있었다   이승너머에 숨은 삶이 보였다 그곳으로 가는 문이 보였다   새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죽는다고 했다   전문이다   이 시를 읽고나면 김철호시인님은 남달리 수판알을 튕겨가면서 계산적으로ㅡ 혹은 의도적로 독자들을 위한 배려심이 크다는 것을 인츰 알수가 있다. 란 우리 말로 직역하면 귀혼(鬼魂), 혹은 유령(幽灵)인데 ㅡ 즉 을 읽고나면 마치 산 사람이 허다한 스트레스, 콜플렉스, 혹은 무수한 폴더, 아건강(亚健康)에 짓눌리워 유령처럼 이 세상을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방불히 우리들 눈앞에 보이는듯이 그려놓고 있기때문이다. 첫련에서 과 이라는 단단한 부정뒤에 더욱 단단해져가는 긍정어 즉 /틀림없는 유령의 로출이였다/를 재치있게 등장시킨 이 시에서는 이미 전반 시적 흐름의 또렷한 륜곽을 벌써 독자들에게 명확히 잡아주고 있는 그런 특징이 있다. 그리하여 제 2련에서는 마침내 /물앉는다/요즘 그녀는 자주 물앉는다/복도에서도 거리에서도/벌렁벌렁 물앉는다/로 독자들에게 다시한번 암시의 태도를 슬쩍 더 보태주었으며 여기서부터 가 시적화두로 대두된 이 시의 흐름 즉 그 루트를ㅡ 의식과 무의식의 딸깍거리는 구두소리를 따라서 조심스레 걸어가노라면 더욱 큰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의 이중구조속으로 독자들은 저도모르게 냉큼 빨려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뒤에 더욱 큰 이미지즘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기때문이다. 제3련에서 /회사청사를 어깨에 메였다/19층청사가 어깨를 누른다/에서 볼수 있다싶이 새로운 이미지로 등장한 , 정확히 를 어깨에 메였고ㅡ또한 /어깨를 누르고 있기때문에/그녀는 벌렁 물앉는다/는것을 누구나 쉽게 알수가 있다. 다음 가상현실속(혹은 영정사진과도 같은)의 클로즈업된 또 다른 하나의 색다른 세계ㅡ 즉 /8촌사진은 하나의 세상이다/그속에 19층청사, 그녀의 어깨…/가 있고 여기에서 다시금 첫련에서부터 강한 힌트를 주었던 그 유령을 재치있게 재등장시키면서 /그녀는 어떤 유령에게 업혀있었다/그녀는 어떤 유령을 업고 있었다/면서 어딘가 19층청사를 소유하고 있음직한 정도면 그냥 보통 인물이 아닌듯한 어떤 녀인의 전쟁과도 같은 치렬한 삶의 한장면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본능적인 도전정신, 또는 그러한 삶의 애환을 반복구사법, 겹쳐 그리기기법을 동원하여 시어와 시어사이를 재치있게 링크(련결), 또는 의식과 무의식의 조용한 흐름을 통하여 자의도 타의도 아닌 늘쌍 객관적인 립장에서 시종여일하게 한폭ㅡ 또 한폭의 그림을 완성해왔음을 우리는 비로소 알수가 있다.   특히 제4련과 제5련에서는 한술을 더 떠서/이승너머에 숨은 삶이 보였다/그곳으로 가는 문이 보였다/새들은 보이지 않는곳에 가서 죽는다/고 했다/면서 결국 삶과 죽음의 사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것이며 또한 종이 한장 차이일뿐ㅡ 어쩌면 죽음마저도 삶의 또다른 연장선일수도 있다는것과 현시대 삶의 치렬한 경쟁의식을 시인은 비관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제3자의 립장에 서서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는 그런 양상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특징은 다선이 고리이기때문에 시인의 의식은 그 어떠한 관념에도 묶이지 않고 있으며 또한 시인은 연출자인 동시에 제작자이기때문에 읽을수록 호흡이 자유로운  그런 장점이 있는것 같다. 아무튼 김철호시인님의 은 오랜간만에 읽어볼수 있는 속이 꽉 차고 통통 잘 여문 좋은 시라고 필자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럼 아래에 은유의 상징으로 이미지집성을  완성시킨 이라는 시 한수 더 보고 가자.   벽에 기대앉았는데 벽이 무너진다 벽체에 깔려 납죽해진 그를 잡아당긴다 납죽한 다리가 뽑혀나오고 납죽한 팔이 뽑혀나오고 납죽한 가슴, 배 ,머리는 그냥 벽체밑에 깔려있다 두렵지도 않은가보다 누군가 또 벽에 기대인다 벽이 쿵 무너진다 누가 또 벽에 기대인다 벽이 쿵 무너진다 누가 또 벽에 기대인다 벽이 쿵 무너진다 무너진 벽체에 그가 깔려있다 잊어졌던 그가 있다 나도 있다 납죽 깔려 납죽해져 있다   의 전문이다.   여기서 은 무엇을 의미할가? 필자가 보건대 그건  아마도 어디엔가에 자꾸 기대고싶어하는 인간의 나약한 요행심리와 껌딱지처럼 다닥다닥 심장에 와붙는 상표도 아닌 무정한 들을 은유적으로 상징한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첫련에서 /벽에 기대앉았는데 벽이 무너진다/로부터 시작하여 이 시는 줄곧 /벽이 쿵 무너진다/를 여러차례 반복해가면서 나역시도 피해자가 될수 있임을, 결국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자칫하면 똑같은 피해자가 될수 있음을 깔끔하고 간결하게 표현한것 같다. 조지p 란도의 《하이퍼텍스트3.0>> 말씀중에서의 한마디다. 댓글을 받아본 사람이면 아마 누구라도 쉽게 동감이 가는 그런 좋은시 라는 생각이 저절로 첨부되여가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수단일수록 더욱 아름답다.   너는 왜 하늘 향해 누워있니? 너는 왜 땅을 보며 누워있니?   하늘엔 뭐가 있니? 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별 하나 있다 그럼 땅엔 뭐가 있니? 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은근한 별 하나 있다   하늘의 별과 땅의 별이 만나려고 무지개 통로로 마주 달려간다 너무 빨리 달리다보니 그만 서로 부딪쳐 산산조각난다   별의 파편 수많은 별이 되여 흩날린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은하수가 펼쳐진다 별들의 원무가 시작된다   전문이다. 이 시는 브레인스토밍과도 같은 자문자답과 럭셔리한 역설로써 수많은 새로운 들의 탄생과정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으며 더불어 우주의 진면목 즉 시인의 세계관을 독자들로 하여금 엿볼수 있게끔 하고 있는것 같다. 특히 제1련에서 /너는 왜 하늘을 향해 누워있니?/로부터 시작하여 와 가 서로 만나려고 마주 달려가다가 그만 부딪치면서 산산조각이 나며 드디여 별의 아름다운 원무를 연출자가 아닌 관중이 되여 희망으로 지켜보고 있는 작자의 성숙된 모습을 엿볼수가 있게끔 시야를 넓혀주고 있는상 싶다. 그럼 여기서 은 도대체 무엇일가? 그건 희망이래도 좋고 또한 미래라도 좋고 아무튼 독자가 선정하기 나름이니깐 구태여 더 길게 설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음 (秀吟)과 는 맥락을 같이하는 그런 파워플한 시라고 해도 아마도 무방할것 같다./정글엔 길이 없다/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발을 내디뎠다/로부터 시작하여 제일 마지막 결구에서 볼수 있다싶이 /정글에 그녀의 길이 생겼다/로 마무리되였고 에서는 /이제는 녀자가 없는 그, 바다로 간다/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하여 제1련 4행에서 다시금 자연스럽게 /수평선을 베고 누워있는 붉은 녀인/즉 언덕 ,혹은 사막을 떠올리게 하였으며 /그러나 이제는 녀자보다 높은 바다가 있다/그는, 바다는 실패를 모를것이라고 생각했다/로 인생행로의 이러저러한 고달픔과 또한 각근한 노력은 반드시 리상적인 결실을 맺기 마련이라는 작자의 독특한 진리를 이 두수의 시에서는 펼쳐 보이고 있는듯 싶다   남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 녀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   누에고치가 퍼렇게 익어 헐벗은 떡갈나무 그늘 잃은 큰 나무,뿌리 살아숨쉬는데 태양은 구름우에 숨어 찬 입김 뱉는구나   밤, 그 힘찬 몸부림 새벽, 그 벅찬 울부짖음 한낮, 그 거창한 춤…   파도는 저 거창한 바다를 만난다 파도는 높은 하늘을 만난다   절름발이 양잠인 50원에 황성옛터 잘 팔아먹고 누에고치줏는  계집들의 웃음소리 언덕 허무는데 대석하에 비낀 장수의 그림자파도따라 춤추누나 강물은 날 선 칼이 되여 력사를 두쪽으로 가르누나   태양은 언제나 동쪽에서 뜬것만이 아니다 별은 어두운 하늘에서만 반짝인것이 아니다 하늘 만리서 무지개 나래펴고 바람은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천리땅을 씻는구나   그러니 남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녀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힘과 힘의 만남 숨과 숨의 겨룸   푸른 누에 기여온다   전문이다. 다시 봐도 거대하게 느껴지는 아름찬 몸집, 제1련에서 단단한 부정과 함께ㅡ 정물화기법, 모자이크기법으로 씌여진 이 한수의 시가 갖는 함의는 참으로 방대하다는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럼 우리함께  이 한수의 시에서 링크(련결)와 네트워크(리좀)가 어떻게 이미지즘을 형성하고 있으며 또한 텍스트를 어떻게 조성해가고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첫련에서 이미/ 남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녀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는 단단한 부정으로 시작된 이 시에서는 남자, 녀자, 누에고치, 떡갈나무, 그늘, 나무, 뿌리, 태양, 구름, 입김, 밤, 몸부림, 새벽, 울부짖음, 한낮, 거창한 춤, 파도,바다, 하늘, 절름발이, 양잠인, 황성옛터, 계집, 웃음소리, 대석하, 그림자, 강물, 칼, 력사, 동쪽, 별, 무지개, 바람, 손가락, 천리땅, 힘, 만남, 숨, 푸른 누에 등 40여개의 명사뒤에 접사 혹은 동사를 붙여 력사속의 을 현실속의 과 그 해학적인 50원, 그리고 로 조금은 익살스럽게 완성시킨 그런 느낌이 든다. 앞에서도 이미 말을 했지만 제 1련에서 단단한 부정어/남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녀자라고 생각해도 틀린다/로 시작된 이 시의 제일 마지막 결구에서는 /그러니 남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녀자라고 생각해도 된다/로 다시금 재치있게 부정했던것들을 다시금 재긍정해가면서 /힘과 힘의 만남 숨과 숨의 겨룸/ 을/푸른 누에가 기여온다/는 자연현상으로 아이러니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모두 알수가 있듯이 시제가 이고보니 력사와 현실을 하나 또 하나의 참조물로 관조해가면서 객관적으로 이미지완성을 집대성시킨 한폭의 좋은 그림, 방대한 이미지즘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일 마지막 시인 (冬至)에서 /하늘에 /수만개의 달/뜨는 날/슬픈 이에겐 /너무너무 긴/기쁜이에게는/길어도 짧은/이런 표현은 참으로 특이하고 기발한 착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김철호시인님의 근작시들을 읽노라면 마치 화면이 깨끗한 고화질의 티비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다    마무리하면서   오래동안 우리 시단을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과감히 벗어나 다선구조의 틀로, 어젯날 시인의 독백적인 서술을 객관적인 이미지로, 정적인 이미지를 또한 동적인 이미지로, 시의 주체에서 시인자체를 이미지의 편집자로 바꾸어보려는 김철호시인님의 개혁성(改革性)은 그야말로 놀라울만큼 계획적이고 또한 그 기초가 믿음직하게 단단한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이 시대의 개혁은 누가 뭐라해도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이 앞장서기 마련이다. 그럼으로 하여 기수는 바람이 없으면 앞장서 달려 가야 하는것이 오늘날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그 기치가 더욱 선명하지 않을가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아무튼 이번 2014년 제2기에 실린 김철호시인의 7수의 시작품은 마치 방대한 시리즈가 되여 거대한 이미지즘을 이루고 있는듯한 그런 느낌을 주며 또한 난해한듯하면서도 읽을수록 가슴에 와닿는 그런 공명감이 크고 한수 또 한수의 시가 꼭마치 통통 잘 여문 볍씨와도 같다는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미숙한 점이라면 지나치게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느낌이 들며 또한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데서 부피가 커져가는듯한 그런 양상이 더러 있는것 같다. 아무튼 새로운 한해 새로운 시점에서 김철호시인님이 더욱 좋은 성과를 이룩하여 가시길 심양에서 두손 모아 진심으로 축원해본다    2014년4월5일 심양에서
1495    김철호 / 허인 댓글:  조회:4196  추천:0  2015-10-01
[평론]사상과 령혼의 화려한 불꽃놀이, 그리고 점점 무르익어가는 김철호주의                                                                                     비평/허인   사상과 령혼의 화려한 불꽃놀이, 그리고 점점 무르익어가는 김철호주의   시가 아프다. 우리 시대의 시가 이래저래 여러모로 너무나도 아프다. 그런데 이러한 병페적인 시들의 치유를 목적으로 근근히 짧디짧은 몇년사이 파격적인 화려한 변신을 륙속 꿈꿔왔고 또한 근래에 보기 드문 성과를 이룩한 시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철호시인님이시다. 또한 김철호시인만큼 적극적으로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해왔고 또한 그 거창한 행로에 걸맞게 주렁주렁한 성과를 이룩한 시인은 극히 드문줄로 안다. 시에서의 화려한 변신이나 파격적인 변화를 두고서 평론가들은 한단계 더 높여 흔히 도약, 혹은 비약이 크다거나 의경(意境)이 새롭다고 표현한다. 필자가 보건대 시의 핵심은 이제 더는 조촐한 이미지와 이미지즘의 강박적인 조합, 구조주의적인 서두, 발전, 내용, 결과 등 그 따분한 의경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폭넓게 령혼과 사상, 더 나아가서는 확고한 리념과 개인주의(主義)적인 품격과 풍격, 관용과 포용에 있는듯 하다. 시체에 아무리 좋은 수의를 입혀봐야 결국 시체이듯이 시에서의 시인의 언행은 곧바로 그 시인의 풍격이 되기도 한다. 겉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사상이 없는 시들은 결국 시체에 불과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 김철호시인님의 주옥같은 근작시 8수를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창발적 경향의 한 특징   지금까지 우리의 시들은 단일성, 동일성의 원리에만 의존하여 구성되여 왔다. 현재의 시들도 대부분이 그러하다. 이를테면 꽃이면 꽃, 들이면 들, 별이면 별, 즉 대상, 주제, 내용, 정서 등등 모두가 동일성 원리에 의거하여 발상되여 왔었고 효과면에서도 지나치게 단일성을 강조해온것이다. 헌데 여기서 필자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창발적 경향의 한 특징과 불쑥 맞닥뜨리게 되며 킨넬이 말했듯이 “계속해서 깊이깊이 파고들어가노라면 너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하나의 동물일것이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더욱 깊이있게 파고 들어가노라면 너는 아예 풀잎이거나 한그루의 나무일수도 있을것이다…”와 같이 심상(心相)시에서의 의식과 무의식을 훌쩍 뛰여넘어 너무나도 자연스레 자연과 결부시켜 새롭게 령혼과 사상을 탄생시키려 하는 하나의 개인주의 표현방식을 절감하게 되였다. 그렇다고 인간적인것을 굳이 무너뜨리려는것이 아니다. “해시계의 음특한 그림자가/몸을 뻗어 담장에 기여오른다”에서 쉽게 살펴볼수 있는것이 곧바로 한점의 오차도 용허치 않는 해시계의 작용이다. 시제가 “고궁”이고 보니 눈앞에 자연스레 펼쳐지는 첫번째 그림이 곧바로 이제는 해 질 무렵 높다란 담장을 슬금슬금 기여오르려고 아득바득 몸부림치는, 아직은 가물가물한 어느 조그마한 그늘의 작은 모습이다. 그 그늘이 있었기에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고궁의 모습은 더욱 고색찬연한것이 아닐가싶다. 다음 “굵고 주름 깊은 고목이 나이테에 묶여 숨을 헐떡인다”에서 어느사이 “담장”에서 “고목”으로 모습이 뒤바뀐 고궁의 모습은 이제 아름찬 나이테에 저절로 숨이 차 헐떡이기도 한다. 허나 그 모습은 비참한 결과가 아니라 어딘가 긍지에 찬 모습이기도 하다. 이렇듯 거창하고 주렁진 성과들은 어디에서 오게 됐을가? “개미떼들이 백두봉을 지고왔다/개미떼들이 고비사막 날라왔다”에서와 “붉은 물결/붉은 구호”에서 눈여겨 살펴볼수 있다싶이 이 세상 한낱 미물인 개미떼들마저 어기영차 어김없이 이곳으로 지고온 그 백두봉과 고비사막에서 현란하게 눈이 부신 력사의 한 장면을 백문의 불여일견이라고 피부로 직접 부딪치고 엿볼수 있도록 시인은 배려심으로 설정해놓은듯 싶다. 이러한 배려심이  있었기에 “발자국에 고인 붉은 구토물의 납함/천년을 살아 피를 먹은 거인”에서 발자국에 고인 력사는 구토물마저 결국 붉은색일수밖에 없으며 또한 아우성도 아닌 이 세상의 납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더욱 뚜렷하게 상징시킨듯싶다. 그렇게 오랜 세월 밝고 조금 어눌한 그늘속에서 싱싱한 피를 꿀꺽꿀꺽 삼켜가며 배불리 먹고 천년을 살아온 “거인”이였기에 “쿵쿵쿵/쿵쿵쿵/걷는다//광장엔 황금의 금자탑이 있다//걷는다/쿵쿵쿵/쿵쿵쿵/만년후에도 살질 거인”이며, 또한 여기에서는 다선을 목적으로 단순한 한두개의 이미지나 이미지즘의 라렬이 아니라 특정된 한 사물에 공간과 시공(時空)을 아예 훌쩍 뛰여넘으려는 풍격, 품격, 인격, 그리고 사상, 력사, 언행, 령혼을 시인이 재치있는 솜씨로 아낌없이 투영시켜놓은듯싶다. 이 시는 사상과 령혼의 화려한 불꽃놀이, 그리고 점차 무르익어가는 김철호주의가 뚜렷이 한눈에 잘 엿보여 마치 한편의 방대한 시리즈를 읽는듯하여 저도 몰래 감탄을 련발하게 된다. 포스트모던시 가운데서 가장 많은 론의가 이루어졌던것이 곧바로 고백시이다. 뢰트기, 로월, 프라스, 섹스톤, 베리만 등이 모더니즘의 전통을 무너뜨렸던것은 브레슬린이 지적한대로 “예술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의 상징적, 신화적, 추상적인 질서들을 추구하는 미학을 버려야 했기때문이다.” 김철호시인의 시는 자기 패러디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라는 점에서 상징주의 시와는 확연히 중요한 차이점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 아래에서 감성과 리성, 의식과 무의식중의 발로에서 김철호시인은 어느 곳에 더욱 비중을 두었는지 우리 다 함께 “바다”, “설(雪)”, “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시들의 공통점은 시인 자체의 적극적인 참여의식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더욱 세심한 관찰을 통하여 조준이 된 랭철한 사유 끝에 명중이 된 가장 인간적인 즉 인격적인 근로한 사상을 부여시켜 그 공명감이 더욱 큰듯싶다. “바다”의 경우 “일몰은 죽음이 아니다/서서히 오는 탄생은 어둠/새로운 생명이 숨어있다”에서 시인은 어쩌면 예언에 가까운 미래 지향적이고 긍정적인 인간의 지혜로운 자세로 포용의 자세를 멋진 모습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설”의 경우 “은혜같았던 초설(初雪) /뼈다귀가 생기고/살이 붙고/피가 돌고/하더니”에서도 슬그머니 인격화를 완성시켜 놓았으며 “일기”의 경우 “한자깊이의 땅속에서/녹쓴 철갑모들이/해볕 보기 싫다면서/삽질을 멈추라고 눈짓한다”로 인간 대 인간, 인격 대 인격이라는 사상으로 소통을 시도하려고 하는 지혜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 시들은 한수한수가 모두 걸작이며 또한 이 세상 그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한점의 부끄럼없는 훌륭한 우수작품이 틀림없다.   삶 자체에 대한 우울한 반항과 기술복제적 인간에 대한 자각   이번에 발표된 김철호시인의 대부분 시들은 시에서의 새로운 문법을 라침판처럼 뚜렷하게 보여주는듯싶다. 여기서 필자는 간단히 문법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히 문법의 범주로만 끝나는것이 아니다. 즉 리성보다는 본능, 질서보다는 충동,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찬연한 그 세계,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전통적인 시문법을 사정없이 파괴함으로써 시인이 노리는것은 과연 무엇일가? 시인은 시의 화자의 피줄에 와닿는 초감각적인 리성적인 세계에 의식과 무의식으로 피와 살, 령혼을 불어넣고 지혜롭게 노래하고있는듯싶다. 그러한 시니피앙들은 읽는이들 마음속의 커다란 흔들림과 함께, 어쩌면 뼈속까지 오싹오싹해날 정도의 크나큰 공명감과 함께 공감속의 그 짜릿짜릿한 전률들을 독자들에게 핫이슈로 선물하고있는듯싶다. 시니피앙이란 무엇인가? 소쉬르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언어기호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즉 흔히 말하는 소리심상이나 기표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개념, 혹은 기의)는 마치 동전의 앞뒤 관계처럼 짝을 이루면서 존재하는것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서나 시인의 사상의식은 항상 미래지향적이였으며 드레시(漂亮, 幽雅)한 자신만의 독특한 시어들을 창출, 랜덤하고 더 나아가서는 세부묘사에서 드라이브코스(自駕游線路)를 스스로 구축해왔다. 더우기 새로운 언어조합속에서의 자률은 지극히 러브시(示好)한 이률배반속에서도 걸작(杰作)과 함께 항상 개혁이 동일시되여 왔었다는것을 누구나 쉬베 알수가 있다. 그리하여 그러한 미래지향적인 행보는 오늘도 조심스러울수밖에 없으며 또한 과감한 개혁의 리론과 그 기능을 불러오는 중요한 단서가 곧바로 시인의 더없이 정확한 의사전달로서 맨트(話語, 臺詞)가 필요없는 기획적인 자아도전과 저돌적인 돌파, 즉 새로운 시어창출과 함께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여러모로 독자들앞에서 검증받아야 하는 그런 데스트가 아닐가. 어쩌면 련작시의 서두이고 시작일지도 모르는 “설레임 1, 2”를 읽고나면 하이퍼시의 방향인 현실과 초월을 불쑥 머리속에 떠올리게 되며 데리다의 해체개념 가운데서 “모든 언어기호는 공간적대립과 시간적지연이라는 특성을 나타내기때문에 결국 현존이 아니라 흔적으로만 인식된다”는 그 말이 떠오른다. “설레임 1”의 “18층 빌딩에서/커다란 새 한마리가 뛰여내린다/콩크리트바닥과 만나 춤추는 피아노파편들” 중에서 “새”와 “피아노파편들”은 언어기호학적인 척도에서 살펴보면 마음의 흔적들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18층 빌딩”이라는 특정된 장소와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인격화를 완성하여 “명예란 공중루각이라고 소리친다”로 그 사상을 납함할수 있었던것 같다. 다음 “자판기우에서 혈흔들이 날뛴다/불바람이 어슬렁거린다/스마트폰이 사람들 얼굴을/뭉청뭉청 뜯어먹는다/머리 없는 그림자들이 활처럼 휘여졌다”에서 볼수 있는것은 그 어떤 외계인이나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곧바로 과거와 현실을 외계인이나 괴물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실제 모습들이며 결국 삶의 울타리는 너무 좁아 “검은 새, 흰새들이 서로를 찾아 부르짖고”로 부딪치고 부대끼며 가끔 아우성치더라도 흩어지면 죽고 모여야만 살수 있음을 설파한듯 하다. “설레임 2” 역시 같은 도리로 “찢어진 기와”를 “물구나무 선 미소”로 인격화하면서 진보적인 사상, 즉 “만족한 빛/도망친 숨…”으로부터 민족적인 색채가 다분한 “백두의 큰 잔으로/동해물 푹 떠 음부(音符)에 뿌렸다”를 견인해내였으며 “먼지 낀 먼지가 빛속으로 사라지다/우주를 삼킨 우주가 점속으로 들어가다”로 세상사는 새옹지마와 같은것이며 우주마저도 작다면 결국 한개 점에 불과한것이다는 시인의 높은 경지를 종교도 철학도 아닌 사상과 령혼으로 지혜롭게 드러낸듯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정석으로, 또한 기초로 하여 단단히 밟고 더욱 높이 올라서려고 하는 기획적인 발전이지 결코 지극히 이률배반적이지는 않다는것이다. 그럼 우리 함께 김철호시인은 링크와 내트워크구축으로 어떻게 이미지즘을 완성해 가고있는가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뇌출혈 1”의 경우 “기적소리 들린다”는 환각장애인들의 병적인 심호흡을 간결함의 극치, 즉 기적소리로 표현하여 그 묘미를 더해주고있으며 “환승/탈선한 렬차/시골에서 불던 바람 도시로 왔다”로 더이상 안전지대가 없음을 하이브리드로 집결시킨듯 하다. “눈빛이 깊다/투명한 사유는 더 려과될것 없다”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삶의 우수(優愁)이다. “뇌출현 2” 역시 기적소리가 한수의 시로 바뀌였을뿐 의식과 무의식만이 아닌 감각, 초감각적으로 령혼이 부르는대로 따라 읽노라면 리해하는데 별다른 장애가 없을줄로 알고있다. 한수의 시로부터 시작하여 바람, 바다, 암수, 콩크리트, 피아노, 할망구, “흰머리카락들이 강선이 되여/땡땡 소리친다/음악이 나봐라 얼굴 내밀었다가/너 죽는다 주먹질이다”, “석간신문이 벽돌장이 되여/웃는 얼굴에 가 박힌다” 등은 기막힌 표현들이며 결구에서 “독자는 한명도 없다” 역시 시제 뇌출혈과 미묘한 입맞춤을 하면서 싱싱한 사람이라면 마주서기가 아연해지도록 머쓱하게 하였다. 시행은 박자와 강약의 음절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숨결로 이루어진다. 즉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가 구분이 없는 세계에서 약동하는 생명의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무리하면서   이상으로 살펴본 김철호시인의 근작시 8수에서는 포스트모더니스트다운 시인의 더욱 적극적이고 더욱 화고해진 창작자세와 점점 맑은 령혼속에서 사상으로 무르익어가는 시인의 새로운 풍격, 품격, 그리고 아주 깔끔하게 새롭게 완성이 된 김철호주의의 피와 살, 얼과 넋이 하아얀 뼈짬으로 시퍼런 소금처럼 뚜렷이 보여줘 읽는이들로 하여금 더욱 감탄을 련발켜 하는듯싶다. 포스트모도니즘은 모더니즘을 부정하는것도 그렇다고 계승하는것도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한다는 모순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끝으로 김철호시인은 새로운 한해 더욱 큰 정진이 있으시길 기대해본다.   《도라지》2015년 제4기
1494    토템문화와 조화세계 댓글:  조회:4959  추천:0  2015-09-29
    나사가 공개한 극과 극의 한반도 사진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신두(新都)구 천년구이후(千年桂湖) 공원에는 각각 120년, 400년, 500년 된 세 그루의 자등나무가 있다. 나무넝쿨이 자라 휘감기며 100m 길이의 자등나무 회랑을 만들어 절경을 이루었다. 이중 500년 된 나무는 명나라 시기 장원 양승암(楊升庵)이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토템문화”와 조화세계            남영전 前 길림신문사 사장               前 장백산잡지사 사장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3, 단군신화의 발상지 4, 토템은 씨족의 개념 5, 민족은 문화의 개념 6, 토템관념의 현실의의 7,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필자의 짧은 글 《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게 주는 중요한 계시》가 2004년 10월부터 《문예보》, 《중국민족보》등 10여개 중국주류 간행물과 우리 말 간행물인 《문학과 예술》, 《도라지》와 한국의 문예지인 《문예시대》에 발표된 후 근간 몇 개월동안 우리 문단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 글의 관련 내용에 대해 질의(質疑)가 있었다. 토템문화에 대한 관심과 흥취는 참으로 좋은 일이다. 본고는 상기의 짧은 글의 관련 내용에 대한 다소 상세한 담론이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達爾文)의 진화론이 발표된 후 인류의 기원과 이동에 관한 과제는 줄곧 국제과학연구계의 하나의 열점화제다. 현생 인류의 조상은 누구인가? 중국학계에는 두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아프리카 기원설이고 하나는 본토기원과 아프리카기원의 융합설이다. 융합설을 주장하는 인류학자의 증거는 주로 아래의 몇 가지다. 1929년 북경 주구점에서 발견된 50만년전의 북경원인 두개골은 아세아에서도 인류가 기원했다는 증거다. 1972년부터 하북 니하만(河北泥河灣)에서 구석기시기 인류유적 80여 개가 발굴되었는데 호두량유적(虎頭梁遺跡), 소장량유적(小長梁遺跡)은 몇 십만년, 심지어 200여 만년 전의 문화유적지로서 돌도끼, 돌망치 등 구석기(舊石器)가 출토되었다. 30여년의 연구로 전문가들은 이곳의 인류활동은 260만 년전부터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아프리카 대륙의 인류활동과 동일시기라고 한다. 그리고 역시 하북 울현(蔚縣)에서 300만 년 전의 석기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아프리카에서 260만 년을 한계로 하는것에 대한 초월이라고 보고있다. 20세기 80년대 운남 원모지역에서 170만년 전의 원모인을 발굴할 때 석기도 함께 출토되여 학자들은 원모인을 “동방인”으로 이름을 지어주기에 이르렀다. 또한 중국에서 발견된 제 3빙천세기의 삼림고원(森林古猿), 녹풍고원(綠豊古猿), 상신원(上新猿), 강소성에서 발견된 4000만 년 전후의 고급 영장유화석 등은 아세아에서도 인류가 기원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2007년 4월 2일, 중국신화사통신은 중국과학원고척주동물 및 고인류연구소가 “중국인의 조상은 전부 아프리카에서 온 것만이 아니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이 연구소는 북경 주구점 유적지 서남쪽 6Km 거리의 전원동(田園洞)인류화석의 연구를 완성했는데 전원동인의 특징은 절대다수의 현대형 인류와 일치하다는것이다. 이것은 곧 아프리카현대형인이 중국의 고로형인을 대체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였다.① 현생 인류가 어디에서 왔는가?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곤혹에 빠지게 하는 난제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세계 각국의 과학가들은 여러 가지 추리와 논증을 내놓았다. 1991년 9월, 오스트랄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의 알프스 산맥에서 미이라 한 구가 발견되었다. 방사선 년대측정 결과 약 5천년 전의 시체로 판명됐지만 누군가 남미의 미이라를 옮겨다 알프스의 눈밑에 묻은 것이라는 조작론이 끊이지 않았다. 1995년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이 설인의 미트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유럽인이 분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의 DNA는 현재의 유럽인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연구진은 나아가 영국 남부지방의 경영 컨설틴트인 마리 모슬리라는 녀인이 설인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런 결과들을 통해 DNA가 인류의 계보를 탐구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떠오르자, 20세기 90년대 후로부터 인류학자와 분자생물학자들은 전세계 민족들의 DNA를 수집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보통의 DNA는 세대가 지남에 따라 부모의 것들이 섞여 복잡하게 변하지만, 미토콘드리아와 Y염색체의 일부 유전자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미트콘드리아의 유전자는 어머니로부터, Y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만 물려받아 뒤섞임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어쩌다 돌연변이가 일어나 하나 둘 정도가 변할 뿐이다. 또 여러 민족간의 DNA의 유사성을 살피면, 가까운 친척인지 먼 친척인지 하는 “근연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사촌은 아버지대에서 육촌은 할아버지대에서 갈려나오듯, DNA가 많이 다른 두 민족은 더 먼 옛날에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전체 민족간에 이런 근연관계를 파악하면, 종내에는 현생인류가 언제쯤 공동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는게 진화인류학자들의 생각이다. 인류기원연구프로젝트 총지휘인 미국의 스펜서 월즈의 저서 《인류전사(人類前史)》(동방출판사, 2006년판)는인류의 유전인자 보고서이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하나의 공동한 조상을 갖고 있는데 바로 6만년 전 아프리카에 살던 한 남성이라는 것이다. 5만년 전 장시간에 걸려 가뭄과 기황이 지속되면서 그들 중 한무리가 고향을 떠나 모험적 이동을 시작, 수만년에 걸쳐 사람이 살만한 지구우의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현재 지구상 모든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문화, 체형, 생김새, 피부색이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과학연구결과는 85%의 유전인자변이는 전반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약 8%만이 인종획분의 증거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인종의 차별은 8%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공동한 생물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종에는 우렬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스펜서 월즈는 여러 나라 과학자들과 합동연구를 진행한 결과 화석으로 발견된 2백만년전의 오스트랄로피테구스나, 50만년 전의 북경인, 30만년 전의 네안데르탈인 등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현생 인류가 도착하기전에 멸종됐음을 밝혀냈다. 고고학의 고증으로 보면 조선반도에는 60만년전부터 인류가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생 인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스펜서 월즈는 조선민족은 약 4만년전 중앙 아시아에서 동으로 이동해와 형성된 것으로 최첨단 DNA분석 결과를 통해 밝히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현생 인류가 중앙 아시아 일대에 옮겨와 살다가 3-4만년 전에 갈라진 원주민 가운데 서북쪽으로 이동한 일파가 유라시아인종이 됐고 등으로 몽골을 지나간 일파는 중국 북부, 한국 등에 퍼졌으며 또 한 일파는 남쪽으로 해서 중국 남부와 동남아로 퍼졌다는 것이다. 유전적으로 한국인은 북방한족과 가장 가깝고 다음으로 일본, 몽골, 남방 한족순으로 가깝다는 것이 한국단국대 생물학과 김욱교수의 견해다. 한국 카돌릭대학의 한훈교수가 한국인과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항원을 검사한 결과 한국인들은 일본인, 미르마인, 인도 동북부의 소수민족, 운남성주민, 화북 한족, 동북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실험결과가 확인되었다.(2004년 5월 11일자 한국 연합뉴스)  필자가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을 접하게 된 시기는 1989년 5월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할때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 한인 작가의 수필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여 신선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의도적으로 많은 자료들을 접했는데 한국에서 인류의 본토기원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으며 모두다 아프리카 기원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었다. 중국학계에서는 미국, 영국, 호주, 인도네시아 등 외국 연구기구와 합작연구 결과 본토기원설로부터 아프리카 기원설을 수용하는 현상이 우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일부 본토기원설을 주장했던 학자들도 아프리카 이민설을 배제하지 않고 본토인류기원과의 융합을 주장하는데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기원 연구에서 DNA의 측정방법은 현생인류는 아프리카, 아세아, 유럽, 미주 각 대륙에서 동시에 진화되었다는 상대이론(相對理論)을 흔들어 놓았고 아프리카 기원설을 수용하는것이 세계학계의 보편적인 추세다.     단군신화의 발상지 필자가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돈황부근의 삼위산이란 말을 들게 된것은 지난 세기 90년대 초반 연변대학에서 개최된 한중문학심포지엄 때었다. 이번 심포지엄에 한국학자 10여 명이 참석했는데 한국 월간 문예사조사의 안수길선생이 한국측 주체발표자로 “동이족의 우월성”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내용을 풀이하면서 “동이의 조상은 막고골로 유명한 돈황에 있는 삼위산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지금 막고굴 어구 좌측 ‘막구굴박물관’이 있는 삼위산의 몇 백메터 지하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묻혀 있을 가망성은 있다”고 하였다.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돈황의 삼위산? 나로서는 다소 어리둥절한 문제였다. 나의 상식으로는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줄곧 조선반도였지 중국쪽으로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였다.  1987년부터 1992년 세 번이나 조선을 방문하여 묘향산에 올라 단군굴의 전설을 들었기에 조선의 학자들은 단군신화발상지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3년 2월, 조선과학원 출판사에서 출판 발행한 리지린선생의 저서 《고조선연구》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조선 《고기》에 의하면 단군의 출생지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이다. 이 《삼위태백》은 한 개의 지명이 아니라 삼위와 태백의 두 개의 지명을 결부시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국여지승람》의 저자는 삼위태백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은 후세 사람들의 부회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삼위》라는 지명을 우리 나라 지리 문헌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태백산은 《삼국유사》에서 묘향산이라고 쓰고 있으나 이것은 후세의 부회된 명칭이며 고조선 국가형성시의 명칭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삼위와 태백은 별개의 지명인데 후세의 불도들이 이 양자를 억지로 결부시킨것에 불과하다.  《삼위》란 지명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산이다. 그러면 이 삼위산이 어디 있는 산인가? 고힐강교수는 《우공평》의 삼위산의 위치를 고증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三危山,左傳昭公九年杜預汽說, 이하 략, 필자)이에 의하면 고대의 《삼위산》은 오늘 중국의 서쪽 맨 끝에 있는 산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오늘의 어느 산인가는 불명확하다. 일본의 어떤 사가는 삼위산을 알타이산으로 비정하고있다. 일본 사가의 설은 부정확하기는 하나 삼위산이 대체로 알타이산과 련결되는 현 중국 서북방의 산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 어찌하여 단군신화에 이러한 산이 관계되어 있는가?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군신화의 가장 이른 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위서》에는 이 산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고기》에 이 산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기》의 편찬자들이 《삼위》(三危)를 고대 중국의 유명한 산임을 모르고 썼다고 보기는 곤난하다. 진술한 바와 같이 기원 1세기로 낙랑사람들이 《서경》을 통달했다는것이 확증되니 고조선인들이 《삼위》가 《서경》에 보이는 산명임을 알았을 것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고기》의 편자들이 어찌하여 그 먼곳에 있는 산 이름을 단군신화와 결부시켰는가? 이것은 《고기》편자들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표현이라고 지적할 근거는 없다. 그들은 단군을 고조선의 창건자로 인정한 것이며… 단군이 구체적 인물의 이름이 아닐진대 고조선족의 선조가 《삼위산》과 관련되고있었다는 것을 《고기》편자들이 인정했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단군신화에 《삼위산》이 관련되어 있는 사실은 주목하여야 할 문제로 남는다.② 45년 전에 조선의 학자 리지린선생이 단군신화의 발상지에 대해 이렇게 선명한 견해를 펴냈다는 것은 실로 그는 실사구시적이고 학문연구가 깊으며 양지가 있는 학자임을 말해준다. 돋보이는 학자가 아닐 수 없다.  리지린선생의 말마따나 단군신화에 《삼위산》이 관련되어있는 사실은 주목하여야 할 문제로 남았다. 이 몇 년간 한국의 학자들도 《삼위산》에 대해 관심을 돌리고 있다.  한국 효성여대 박은용교수는 30년전 일본 도꾜대 객원교수 시절 우여곡절 끝에 한자, 만족어, 몽골어, 아라미아어, 타밀어, 장족문자 등으로 된 청나라 건륭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를 입수했는데 이 고서에 “삼위”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면서 “삼위산이 곧 천산이며 이를 백산이라고 한다고”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삼위태백(三危太伯)’이란 글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던게 우리 학계의 실정이다.”면서 “우리 학계가 민족의 기원 신화에 나오는 ‘삼위’란 글자가 태백을 수식하는 관용어인지 별도의 지명인지에 대한 학술적인 규명도 못하고 있다”며 “천산 일대의 위글족 등과 우리 민족은 인종적, 언어풍속학적으로 유사점도 많아 역사, 언어, 문화인류학계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것”이라고 견해를 피력하였다.③  한국상고사학회 회장 율곤 이중재선생은《신시개천경(神市開天經)》(원저 神志赫德)을 입수해 공개했는데 관련 원문에 “下視三危太白,三危山名,非今外興安嶺也,又非今文化九月山也,乃今甘肅界敦煌縣所在地三危山也,本黎苗祖盤古初降之地是也”(아래를 내려다보니 삼위태백이 보였다. 삼위란 산의 이름, 지금의 흥안령이 아니고, 지금의 문화구월산도 아니며 지금의 감숙성 경계이다. 이곳은 돈황현에 있는 삼위산이다. 본려 묘족의 조상 반고가 처음 내려왔던 땅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지적하고 나서 “三苗 三危山의 관계에 대해서는 堯典,山海經,愚責,韓非子,管子,呂氏春秋,呂刑,繆鳳林 등 많은 사서에서 밝히고있다”면서 “삼위산은 동북아 전체를 놓고 중국의 서쪽 감숙성의 삼위산 한 곳 밖에 없”는 이상 “‘삼국유사’의 환웅에 대한 기록에서 삼위산을 언급한 것은 함부로 넘겨 버릴수 없는 앞으로 우리 민족의 근원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삼위산의 서북쪽엔 천산산맥이 있으며 우랄알타이 이족의 근거지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율곤선생은 이 지역을 《삼국유사》에서 말한 태백산 일대라고 보고 있다.  단군신화의 발상지를 놓고 한국 학계는 구월산설, 태백산설(묘향산), 백악산설이 있고 감숙 돈황 삼위산설이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새로 발견된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도 조선반도를 벗어나 중국의 요동, 요서, 산동, 하북, 산서, 섬서 등 지로 부단히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무엇 때문에 단군신화의 발상지가 이렇듯 범위가 넓어지고 복잡해지는가? 그 원인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귀납해보았다. 첫째, 단군신화 발상지에 관심을 가진 연구가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도 점점 더 확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둘째, 단군신화의 유전범위가 넓고 영향력이 크며 그 때의 여타 씨족, 부족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셋째, “삼위태백”이 적혀 있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일연과 동시대인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이해와 해설이 각기 달라졌다.  상기의 현상을 보면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신화는 설화(說話)로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유전되고 또 기록을 통해 문헌에 남긴다.  사람과 더불어 이동하는 신화는 세대의 바뀜, 시대의 변천, 환경의 지배로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신화의 흐름은 역사의 흐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한 신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신화의 탄생과 유전궤적을 통 털어 연구함이 타탕성을 가진다고 생각해 본다. 예를 들어 현존의 연구를 보면 단군굴이 있는 묘향산은 단군신화의 최후 정착지의 한곳일수 있다. 그런데 왜서 이곳을 단군신화의 최초의 발상지로 말하는가? 만약 틀렸다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차분하게 연구하고 논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토템은 씨족의 개념 토템이란 용어가 언제 나왔는가?  현재 학계에서 보편적 인정을 받는 것은 1791년 영국의 상인 요한랑그의 저서 《번역원 겸 상인인 한 인디안인의 항해와 여행》인데 이 저서에서 미주 인디안어의 방언인 totem(토템)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학자 정원자는 1725년에 출판된 이탈리아 학자 비꼬(維柯)의 저서 《신과학》의 내용이 만약 주광잠(朱光潛)선생의 번역오차가 없다면 “토템”용어의 등장시간을 140여년 앞당길 수 있다고 하였다.④  토템의 정의는 무엇인가?  북미 인디안어의 방언 totem의 뜻은 “형제 자매 친척관계”다.  학계에서 토템에 대한 정의는 각이하다.  미국학자 모르간은 토템은 한 개 씨족의 표지 또는 도휘라 하였고 프레이저는 토템은 친척이며 조상이라 하였고 오지리학자 프로이드는 토템은 종족의 조상인 동시에 수호자라고 하였다. 토템의 정의, 혹은 토템의 내함 문제는 문화인류학, 종교학, 민족학, 민속학 등 학계의 뚜렷한 하나의 큰 과제다. 하지만 학자들이 토템에 대한 이해와 해설은 지금까지도 통일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실정이다.  필자가 공부를 하면서 토템은 전사시기 인류최초의 우주관이고 전사시기 인류의 제일 고로한 원시종교형식이란 것을 인식하였다. 원시인들은 자신들과 더불어 사는 동물, 식물과 천체를 영물이고 신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조상의 탄생은 어느 동물이나 식물, 혹은 천체와 관계가 있다고 여겼는데 이 관계가 있는 물체는 곧 그들의 토템물로 숭배를 했다. 이렇듯 원시인들은 지(知)적과 지(智)적이 아닌 영(靈)적인 사유방식이었다. 때문에 원시인들은 조상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물체를 친척으로 생각했고 조상으로 모셨으며, 또한 영물이고 신인 그들(토템)이 후대들인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다. 씨족사회에 와서 이러한 토템은 또 씨족과 씨족을 구분하는 표지 혹은 도휘로 되었다. 이렇게 상기 토템에 관한 각가지 설을 종합해놓으면 상대적으로 완정한 토템의 정의 혹은 내포가 아닐가 싶다. “토템” 두 글자의 본질, 혹은 핵심은 “친척”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하여 “토템”을 “친척”으로 바꾸어 말해도 전혀 문제가 될것이 없으며 더 쉽게 마음에 와 닿을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토템의 산생시기는 언제인가?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의 증거는 토템의 산생시기는 지인(智人)시대인 25-20만년전이란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토템 의식의 발생시기는 이 년대보다 훨씬 더 이른 40만년전일것으로 추정하지만 아직까지 고고학적 발견이 없다는 이유로 이 설을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⑤  이렇듯 까마아득한 옛날에 발생한 토템은 인류의 진화, 발전과정에서 하나의 자연실체였고 또 하나의 문화실체였다. 자연실체로 말하면 토템은 신비로운 영적 힘이고 문화실체로 말하면 토템은 인성을 담은 현실적인 힘이다.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토템의 작용은 무엇인가? 필자는 나름대로 다음 세가지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본다.  첫째, 토템은 인류문화의 시원이다.  원시인들은 토템숭배를 했기에 자신이 살고 있는 동굴이나 암벽에 토템형상을 그리거나 새겼고 자신의 몸에 문신(紋身)을 하였으며 도자기에 토템물을 그려 구웠다. 이것이 곧 인류 최초의 미술의 탄생이다.  원시인들은 또 자신들이 숭배하는 토템동물을 잡아 고기를 먹고 배고픔을 달래면서 그 동물의 가죽과 뼈를 모아 놓고 둘러서서 참회, 혹은 양해를 구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그런 참회의 뜻을 높고 낮은 말의 음조로 표현하다보니 노래가 되었고 토템물의 동작을 모방하다보니 춤(무용)이 되었다. 이것이 곧 인류최초의 노래와 춤의 탄생이다.  토템물의 가죽과 뼈를 놓고 원시인들이 참회의 모임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은 이미 참회를 할 줄 아는 사유를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곧 철학적 사유의 탄생을 의미하며 이런 모임은 곧 하나의 제의(祭儀)로서 원시 종교의 탄생이 아닐 수 없다.  이로 보아 예술, 철학, 종교의 탄생은 토템숭배를 그 기원으로 하는것이다. 그래서 토템숭배는 인류문화의 시원(始原)이라고 한다.  둘째, 토템은 씨족사회의 헌법이다.  씨족사회보다 20만년 좌우 더 일찌기 발생한 토템숭배는 원시공사(原始公社)단계를 거쳐 4만년 전인 씨족사회에 와서는 씨족사회 성원들의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한 토템을 숭배하는 씨족은 가까운 친적관계를 가진 한 집안이기에 서로 서로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 자신들의 토템은 그들의 친척이고 조상이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수호신이기에 살해하지 말고 존경하고 숭배하여야 하며 그들의 거주지에는 어떤 형식으로 표시를 해놓는다. 한 토템씨족은 한집안이기에 통혼은 금기시되었다. 다른 토템씨족과 혼인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규정과 금기는 실상 씨족사회의 헌법으로 그 위력이 대단하여 사회질서의 유지와 인류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셋째, 토템은 성씨의 내원이다.  인류는 태어나자마자 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원시 인류에게는 원래 성이란 부호가 없었다. 원시가족시대에 발생한 토템의 최후형태는 씨족사회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가족토템의 간단없는 확장과 더불어 씨족사회가 형성되었고 나아가 토템의 분화(分化)를 가져왔다. 때문에 동일한 부족내부에 하나의 토템이 아니라 여러 개의 토템을 가지는 현상이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토템이 씨족의 표지가 되면서 씨족성원들은 토템과 관련되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들이 잘 알고있는 동의족의 시조 복희(伏羲)는 성이 풍(風)씨다. 문일다선생의 《복희고(伏羲考)》에 의하면 고대 번자체의 바람“風”자와 벌레 “蟲”자는 원래 한글자였다. 벌레“蟲”자는 뱀을 말하는데 풍씨는 뱀의 소생이라고 한다. 실지로 복희가 풍씨인것은 그의 토템이 뱀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우뢰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우뢰도 그의 토템이 되여 그는 한쌍의 토템을 가진셈이다. ⑥ 부여(夫餘)는 역시 동이족의 한갈래로 소, 말, 돼지, 개, 닭, 양 등 육축을 토템으로 하였고 또한 토템을 관직의 칭호로 하였다. 그리고 흑룡강류역에 소호(少昊, 동이족)의 후예라고 불리우는 한무리는 개를 조상으로 모셔 구국(狗國)이란 나라가 생기기도 하였다.⑦현존사회에서 牛씨, 馬씨, 狗씨가 있고 鷄씨, 羊씨, 豬씨는 찾아볼수 없는데 이 鷄, 羊, 豬와 동일음인 姬, 楊, 朱 세개 성씨와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필자는 《부족문화와 선진문학》의 저자 이병해선생과 담론한적이 있었는데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그와 나의 똑같은 생각이었다. 황제(黃帝)는 토템이 곰이기에 그는 웅(熊)씨라고 불리웠다.  우리 민족성원과 토템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 민족도 씨족사회, 부족사회를 거쳐 지금의 조선민족으로 형성되였다. 토템이 씨족사회이전의 산생물이지만 씨족사회의 표지로 되었고 씨족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작용을 하였기에 우리 선조의 씨족, 부족사회에 토템이 없을수 없다.  문제는 씨족, 부족사회 때 매 개인의 숭배대상물이었던 토템이 민족이 형성되면서, 특히 사람들이 새로운 종교들 받아들이고 공업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토템숭배는 광채를 잃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아리숭한 옛날 이야기로 되었다는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4만년 전부터 흥성했던 토템숭배의 문화를 재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고고학 발견, 고서의 기록, 신화전설은 우리가 선조들이 숭배했던 토템물을 얼마만이라도 찾을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씨족, 부족사회 때 토템숭배가 얼마나 흥성했는가 하는 것은 민속학자 우병안선생의 저서 《중국민속학》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호주에서 700개가 넘는 토템 표기를 발견했다. 한 부족내부의 각 씨족은 각기 부동한 토템표기를 가지고 있었다. 조사에 따르면 호주의 알란트(阿蘭特)부족과 놀리노(露裏惹)부족은 모두 442종의 토템을 가졌다.⑧ 상대적으로 과거가 잘 보존되어 있는 호주에서 한 부족내부에 이렇게 많은 토템물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적지 않다.  2만5천년전부터 현생 인류의 조상들이 조선반도로 이민왔다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또 그 때 사람들은 틀림없이 씨족, 부족들의 성원이었기에 그들 각자의 토템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 때 일연이 쓴 《삼국유사》가 조선민족의 최초의 고서라고 하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선조들이 실제로 숭배했던 토템물은 그들의 몸과 함께 땅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지금 우리가 능히 찾을 수 있는 것은 쌀에 뉘 찾기에 불과하다.  보통 조선민족은 동이족(씨족, 부족)의 후예라고 하는데 조선민족을 형성시킴에 있어서 동이족(씨족, 부족)이 주종을 이루었을수 있지만 여타 여러민족(씨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동이족(씨족, 부족)에 속하는 토템물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병해선생의 저서《부족문화와 선진문학》에 동이족(씨족, 부족)의 토템물이 거론되었다. 태양, 새, 뱀, 용, 여우, 닭, 개, 돼지, 양, 소, 말, 제비, 꿩, 봉황, 비둘기, 소리개, 뻐꾹새, 까치, 물고기, 수달, 사슴, 우뢰, 구름 등이 동이족(씨족, 부족)의 토템물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곰이나 범은 동이족(씨족, 부족)의 토템물이 아니라 황제(黃帝)를 대표로 하는 서북 고대민족의 토템물이었다. 우리 민족의 조상탄생신화로 믿는 《단군신화》에 곰과 범이 등장한 것은 우리 민족의 조상도 황제를 대표로 하는 서북 고대민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병해선생은 황제집단의 토템문화에 대해서는 선배학자들이 일찌기 연구를 시작했고 일정한 진전을 가져 왔지만 이 영역은 진일보 개척할 여지가 있고 허다한 문제는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민족성원의 토템물을 연구할 때 반고(盤古)의 후예는 동이계통, 소호씨의 후예가 부여(夫餘),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으며 은나라의 왕실이 동이족, 진시황도 동이족, 그리고 여진(女眞)족도 후기의 동이계성원임을 념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인류사는 우리 민족도 여타 민족과 같이 여러 부동한 씨족, 부족의 융합체라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수많은 토템물을 가질수밖에 없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에 와서 학자들이 토템문화에 관심을 돌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한국학중앙연구원 허흥식교수는 《단군신화와 동아시아 민족신화의 토템에서 범의 위상》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고대신화의 토템은 범, 곰, 사슴, 고니 등 야생동물 뿐 아니라, 해와 달과 북극성 등 천체를 내포한 천신이 있고, 말과 소, 돼지 등 가축과 산천과 바위와 고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과 무생물이 포함되었다. 이 가운데서 맹수인 곰과 범은 불교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는 대표적인 토템이고, 그 가운데서 범은 곰보다 실제로 우세한 토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⑨  토템을 어떻게 찾는가? 선조들의 탄생신화는 우리가 토템을 찾는 근거로 된다. 토템물은 모체감응(母體感應), 입거(入居), 직접 선조들을 생육, 혹은 변한 동식물과 기타 객체 대상물이다. 그리고 선조들이 탄생할 때 필요한 전제조건, 혹은 도움이 되었던 물체도 토템과 무관하지 않다.  사례의 하나로 고주몽의 탄생신화가 전형적이다. 《위서》(魏書)의 기록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 하백녀를 부여왕이 방안에 가두어 놓았다. 하루는 해빛이 하백녀의 몸을 비추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해빛을 피했지만 해의 그림자는 또 그녀를 따랐다. 그로하여 그녀는 곧 임신이 되었다. 그녀가 낳은 것은 알이었는데 크기가 다섯되나 되였다. 부여왕은 그것을 꺼리어 그 알을 개에게 던졌지만 개는 이 알을 먹지 않았다. 또 돼지에게 주었지만 돼지도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렸지만 소와 말은 이 알을 피했다. 후에는 들판에 버렸는데 여러 새들이 날개로 이 알을 감싸주었다. 부여왕은 이 알을 쪼개려고 했지만 알은 쪼개지지를 않아 할 수 없이 이 알을 하백녀에게 돌려주었다. 하백녀는 이 알을 이불로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다. 한 남자애가 알에서 나왔다. 이 아이가 커서 고주몽으로 불리웠다.  고주몽의 탄생신화에서 보듯이 하백녀 류화는 해빛으로 인해 임신되였고 낳은 것이 알이었다. 여기에서 해빛(태양), 알(새)는 곧 고주몽의 토템이다. 그 시대 태양과 알은 다 둥글었기에 새와 태양을 다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이 신화에서 왜 개, 돼지, 소, 말 등 짐승들은 알을 해치지 않았고 여러 새들은 또 알을 보호해주었는가? 이들은 다 고주몽의 친척, 즉 토템이였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간추려 보자. 환인의 서자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삼위 태백산정 신단수아래에 내렸다. 그는 풍백, 우사, 운사들로 하여금 인간세상의 360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한 동굴에 사는 곰과 범이 환웅이 내린 신단수 아래에 가서 사람되기를 빌었다. 곰은 수련을 거쳐 사람으로 되였지만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했기에 념원을 이루지 못했다. 사람으로 된 웅녀는 또 신단수 아래에서 애기 갖기를 기원했다. 천신 환웅이 사람으로 변신해 웅녀와 혼인을 하였다. 그들이 낳은 아들이 단군 왕검이다. 일연과 동시대인인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단군신화는 환인을 상제(上帝)라 하였고 환웅을 단웅(檀雄) 단수신(檀樹神)이라고 했으나 왕검은 그저 檀君이라고 지칭했다.  학계에서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을 보편적으로 우리 민족의 토템으로 인정한다. 필자는 신단수, 범, 그리고 풍맥, 우사, 운사도 토템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단군 왕검의 탄생은 신단수와 깊은 인연이 있다. 환웅이 신단수 아래에 내렸고 곰이 신단수 아래에서 사람이 되기를 기원했으며 또 아기를 가지려고 빌었다. 그리고 이승휴의《제왕운기》에서 단수신(檀雄)의 아들을 단군(檀君)이라고도 함은 단군신화에서 신단수는 아버지 역할을 한 것이다. 곰과 범이 한 동굴에 살았다는 것은 곰토템씨족과 범토템씨족지간에 혼인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단군 왕검의 할아버지는 상제(上帝)라고 하는 하늘신이다. 하늘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원시인들의 관념으로 하늘신이란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허무한 것이 아니다. 하늘신이란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우뢰 등 천체와 직결된 존재이다. 단군 왕검의 아버지가 천왕(天王)으로 불리우고 그가 풍백, 우사, 운사로 하여금 지상의 일을 주관하게 했다고 하는 것은 풍신, 우신, 운신 이 세 신과도 남이 아닌 한 집안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대원시인들의 관념으로 바람, 비, 구름도 단군 왕검의 친척(토템)으로 보는 것은 부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 왕비 알영의 탄생신화, 신라 석탈해왕의 탄생신화, 미추왕의 조상 김알지의 탄생신화, 고려시조 왕건의 조상에 관한 신화, 작제건의 안해에 관한 신화, 아달라 왕때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에 관한 신화들은 우리가 역사인물들의 토템을 찾는 근거로 된다. 백제왕 견훤의 탄생은 지렁이와 관련이 있는데 지렁이는 곧 견훤의 토템인것이다.  매개 성씨의 시조탄생이나 어떤 특정 인물의 탄생을 두고 왕왕 신화전설이 류전돼 왔는데 이런 신화전설속에 해당 인물의 토템이 내포되어 있는것이다.  중국, 조선, 한국 등 동남아의 여러 민족은 지금도 사람이 태어난 해의 띠(屬)를 가지는 풍속을 유지하는데 12개의 띠(12生肖), 즉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는 모두 토템인 것이다.  중국 광주 해주구 관주가 륜두촌(廣州海珠區官州街侖頭村)에는 중화토템박물관과 중화성명박물관이 서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토템박물관에는 화하토템기원, 성씨토템, 가족토템, 띠(生肖)토템과 상표토템 천여건이 진렬되어 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이 토템박물관에 전시된 토템자료는 우리 민족토템연구에 대해서도 큰 참고가치를 가지고있다.  한개 민족의 토템의 풍부함과 빈약함은 그 민족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풍부한 신화를 보존하고 있는 민족은 토템물도 풍부하지만 신화가 없는 민족은 토템물도 빈약한 것이다.  용과 봉황이 분명 우리민족에게도 속하는 토템물이지만 학자들은 왕왕 이것을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민속전통으로 보면 우리민족은 용과 봉황에 대한 숭배는 대단하다. 남자들의 이름에 용자, 여자들의 이름에 봉자를 쓰는 빈도는 여타민족보다 높다. 주위를 돌아보면 남자는 김용, 박용, 이용, 용남, 성용, 명용, 복용, 억용, 운용, 금용, 용운 허다하며 여자는 봉자, 봉녀, 봉순, 봉선,봉옥, 봉화, 봉련 등 수두룩하다.  현, 당대에 와서 왕왕 한 개 민족에 한 개의 대표적인 토템을 내세우는 것은 토템이 가지고 있는 기발(旗幟)작용과 응집력 때문이다. 모든 국가들에 국기, 국가, 국회가 하나씩 있듯이 토템을 하나의 기치로 하기 위해서이다.  한개 민족의 형성과정을 보면 민족은 부동한 토템물을 가진 씨족, 부족의 집합체이다. 민족을 하나의 그릇으로 비유한다면 이 그릇 안에는 여러 씨족 부족 성원들이 담겨있다. 토템은 매개 씨족의 성원과 관계되는 물체로 개개인의 부호인 것이다. 때문에 토템은 어디까지나 씨족의 개념이지 민족의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민족사회에 와서 우리가 민족토템을 운운하는 것은 민족이 형성된 다음 씨족 부족이 사라졌기에 그 민족에 속하는 각 부족, 씨족들의 토템을 통털어 말하는 것이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 이 세상에는 원래 민족이란 개념과 단어가 없었다.  민족이란 인류발전의 산생물이다.  인류사를 보면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가족사회, 씨족사회와 부족사회가 나타났으며 또 여러 씨족, 부족들의 끊임없는 융합과정에서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심리소질 이 네 가지 요소가 상호 작용하여 하나하나의 민족을 산생시켰다.  민족은 단일혈통의 집합체가 아니라 여러 부동한 혈통의 집합체로서 민족의 본질은 공유한 문화다.  조선민족도 여타 민족과 마찬가지로 단일 혈통의 민족일 수 없다.  한국 건국대학 정치외교학과 신복용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형성되었을가? 정확하게 말한다면 우리 민족은 북방계와 남방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밖의 소수민족으로서는 내침족(來侵族)과 귀화인의 네 종족으로 이뤄지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유전자를 따져보면 적어도 35개이상의 혈통으로 이뤄져 있다. 태초에 아프리카에서 인류가 태여난 이후 그들은 동이 트는 곳을 향해 한없이 이주를 하였다.”⑩  그러면 왜서 우리 민족을 하나의 혈통으로 보는 현상이 나타나는가? 한국 고려대학 정호영교수는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력사적, 이론적 접근》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중요한 것은 민족은 실제로 같은 혈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하였다. ⑪ “그렇다는 ‘믿음’”이란 문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물학적인 근거는 아니라는 뜻이다.  민족을 혈통으로 논의하는 현상에 대해 신복용교수는 이런 비판을 하였다. “현대 민족주의에서 이미 혈통은 대체로 부인되고 있으며 역사적 운명의 공유와 일체감, 그리고 언어의 통질성을 민족의 본질로 삼는 것이 지금의 추세인 점에서 보면 혈통이 같거나 다름은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인순이도 할리도 주현미도 윤수일도 모두 우리가 보듬고 사는 세계화 시대인데 더 이상 내 피줄만을 따져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⑫  민족을 문화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민족개념의 본질, 핵심을 꿰뚫은 논리이지만 만약 민족을 혈통으로 논의한다면 오히려 민족의 정체성확보에 불리한 페단이 생긴다.  필자가 1989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 당시 미국 본토에는 120만이요, 130만이요 하는 한국 이민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국인 이민 3세는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에는 우리 민족 학교가 없다. 이민 3세들이 받은 교육은 미국학교에서 받은 서양교육이고 그들 대부분은 우리 말을 모르는 후대들로 미국문화에 아주 푹 젖어 있다고 하였다. 한국인 이민 3세가 이러할진데 이들의 후대들은 어떠하겠는가? 후에 한국 방문시 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한국인 회사에 갔을 때 전형적인 한국인 생김새의 접대원 아가씨가 커피를 대접하면서 하는 한국말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옆에 있는 친구가 필자를 보고 이 아가씨가 어느 민족이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왔다. 실은 물음과 동시에 답안이 나온 것이다. 이 아가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석사과정까지 마친 한족 처녀였다. 만약 이 아가씨가 계속 한국인 직장에서 일하고 한국청년과 결혼한다면 그들의 후예는 물론, 지금 이 아가씨도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로부터 종종 이런 현상을 목격한다. 우리 민족 후대들이지만 유치원 때부터 한족들의 교육을 받았기에 우리 말을 전혀 모르고 심지어 민족풍속과 예절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 그들 대부분은 한족들과 결혼한다. 그들의 후예를 어느 민족으로 보아야 하는가?  상기의 현상을 놓고 민족을 혈통으로 운운한다는 것은 이미 의의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우리들게 시사해주는 점이 있다. 실상 매개인의 민족신분은 자신이 어느 민족의 문화를 고수하는가 하는 문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후예라 할지라도 우리민족의 말을 못하고 풍속습관과 예의 범절 등 문화를 잃어 버린다면 그는 타민족이 되는것이고 타민족성원이지만 그가 우리민족문화를 받아들이고 고수한다면 그는 우리민족성원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민족성원은 고정불변하는것이 아니다.  글로벌시대라고 하는 현시대, 국제적인 인적교류가 날로 빈번해지는 현시대, 그리고 타민족과의 결혼, 국제 결혼이 점점 늘고있는 현시점, 한개 민족의 흥망성쇄는 혈통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것이다. 우리는 늘상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잘한다. “피”를 말함에 있어서 응당 “문화의 피”가 더 중요시 되어야 한다.  인류의 융합발전과 민족의 형상과정, 민족성원의 전이와 변화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토템문화가 현대인류에 주는 중요한 계시》란 글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다.  네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네가 있는것이 인류사이고 민족사다.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혈통으로 구분되는것이 아니라 문화로 구분된다.  혈통으로 말하면 각 민족은 모두 형제다.     토템관념의 현실의의 토템관념은 인간과 자연지간의 혈연관계, 인간과 인간지간의 혈연관계를 확인하는 관념으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지간의 조화를 이루는 관념이다.  민족전통문화의 정수는 바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천(天), 지(地), 인(人), 신(神) 합일의 사상이다.  하지만 인간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수록 인간은 민족전통문화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인성을 상실하고 자아를 잃고 있다.  현대인류에 있어서 상기의 두 가지 조화를 이룩하느냐 않느냐는 인류의 생사존망과 직결되는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다.  오늘 날, 공업문명과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함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생존환경이 갈수록 렬악해지고 있다. 그에 따른 인간의 도덕성상실은 인간지간의 “랭담”을 초래하여 인간의 삶의 안정성마저 위협하고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인류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놓고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지구도 살아 숨쉬고 희로애락이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다. 지구는 지금 자신의 품속에 살고 있는 60억인구의 온갖 시달림을 받고 있다. 지구는 자신의 몸우에 수풀처럼 일떠선 무수한 콩크리트 건축물과 공장으로 인해 숨쉬기도 가쁘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지하철, 지하축조물과 각종 광산의 개발로 기막힌 상처를 입고 있다. 또한 온몸에 들씌운 오염물로 만신창이 되었다. 지구는 앓고있고 신음하고 있고 몸부림 치고 있다. 그래서 무서운 광풍이 자주 오고 홍수가 자주 오고 지진이 자주 와서 무수한 사람들이 생명을 앗아가고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현상이라고 말할뿐 그 책임을 자신으로부터 찾지 않는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60억 인구는 모두 지구란 이 거대한 어머니가 낳아키운 형제자매다. 하지만 국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름을 이유로 각자의 리익과 목표를 위해 매일매시각 서로 각축전을 벌리고 있다. 현대전쟁에 있어서는 승자도 결국은 패자다. 한순간 승리자이지만 전쟁으로 인한 생태파괴와 패자의 반발과 복수가 가져다주는 악과는 패자의 손실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쌍롱과 팔레스티나의 알라파트는 천년 전에 한 할아버지를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두 개의 국가, 두개의 종교로 나누어지면서 서로 죽기내기로 싸웠다. 결과 그들 둘은 서로 다 크게 다치고 말았다. 만약 그들의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눈을 뜨고 천년후의 두 손자를 굽어본다면 그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인류의 삶의 터전인 이 지구는 무수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생물 고고학가의 화석발견에 의하면 나이가 50억년인 이 지구에는 현생인류이전에도 수차례 인류의 발생과 멸망이 거듭되었다고 한다. 인구의 대폭팔, 생태균형의 파괴, 자원의 고갈, 핵전쟁은 인류멸망의 원인이 될수 있다. 몇백만년 혹은 몇천만년후, 지구상의 생존조건이 회복될 때 인류는 다시 태어나서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등 단계를 거쳐 또 고도의 문명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⑬  현생 인류가 지구에서 생존하려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계선, 인간지간의 관계 계선이 유일한 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자연이 조화적인 관계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조화적 관계를 이루는 길만이 현생 인류의 살 길이다.  현대인들의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서방철학가들은 문제해결의 희망을 토템관념회복에 걸면서 새로운 사회질서구축을 호소하고있다.     나오는 말 세계 최초의 토템문화연구는 1791년에 시작되었고 19세기 하반기부터 20세기 상반기까지 서방학계에서는 토템문화연구 열조가 일어났다. 중국에서 맨처음 토템문화를 연구한 사람은 엄복(厳複)선생이다. 1903년 그가 번역한 《사회통전(社會通詮)》이란 책에서 처음으로 “totem”을 “図騰”으로 번역한 후 “토템”이란 단어가 있게 되었다. 엄복선생 이후 곽말약, 문일다 등 학자들도 토템을 연구하였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토템연구는 그닥 활발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근간에 《용토템》, 《곰토템》 등 연구저서들이 출판되고 신화학학술토론회를 가지는 등 일은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문제점도 없지 않다.  필자는  시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부터 토템문화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찾아 읽으면서 이른 바 “토템문화”의 진수를 터득하기 위해 힘써 왔다.  안타까웠던 것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에게는 우리 민족의 토템문화를 론한 체계적인 전문저서가 없다는 것이다. 몇몇 학자들의 토템관련 론문이 간혹 눈에 띄이지만 체계적이고 계통적인 연구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타민족학자와 국외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흡수하면서 나름대로 진위를 판단하고 우리 민족신화와 토템물에 접근하였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모종 의미에서 말한다면 한 이론의 생명력의 강약은 이 이론이 역사의 약점을 얼마나 극복했는가를 보는 것이고 또 무형중 후세 사람들이 초월하여 재구축할 수 있는 약점을 얼마나 묻어두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약점은 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민족토템문화에 대한 연구는 학계의 중요한 과제가 아닐수 없다. 여러 학자들이 관심을 돌리면 연구는 활성화 될 것이다. 우리 학계에 토템문화연구붐이 일어날것을 희망하면서 졸문에 대한 기탄없는 비평을 기대한다. =============================================================== 1) 《신문화보》2007년 4월 3일.  2) 리지린 저 《고조선연구》조선과학원출판사, 1963년 2월, P119-121. 3) 2002년 3월 21일자 한국 대구 《매일신문》 4) 이원저 저《토템미학과 현대인류》,학림출판사, 1992년 3월 제1판, P27-28, P21-23. 5) 위와 같음.  6) 이병해 저 《부족문화와 선진문학》,고등교육출판사, 1995년 11월, 제1판, P87, P135.  7) 위와 같음.  8) 우병안 저《중국민속학》,료녕대학출판사, 1985년 8월 제1판, P263.  9) 허흥식 “단군신화와 동아시아 민족신화의 토템에서의 범의 위상”《만주 북방 민족의 요람》, 만주학회 제11차 학술대회 발표 논문집, 2005년 9월 2일, P70-76.  10) 신복용《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2001년 5월 8일자 료녕조선문보.  11) 정호영《민족공동체의 형성과 변화: 력사적, 이론적 접근》  12) 신복용《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다》  13) 곽패명 편저《풀리지 않은 인류의 수수께끼》(人類未解之謎), 길림문사출판사, 2004년 12월 P17-24.  --(태평무 주필, 민족출판사, 2008년 9월 출판)에서   
1493    알아보는 만주어 댓글:  조회:5495  추천:0  2015-09-29
                      타언어에 유입된 만주어[편집] 한국어(함경북도 방언)에 차용된 만주어[편집]  ##순대 - 성이두하(senggi duha)  ##사돈 - 사둔(sadun)  ##쌔씨개(욕) - 사스헤이(sashei, 돼지)  ##부스깨(아궁이) - 푸스쿠(fusku)  ##어시(어버이) - 어시(exi)  ##배재(울타리) - 바산(basan)  ##야래(송어) - yaru 중국어(북경어, 동북어)에 차용된 만주어[편집] 청나라 통치기를 거치면서 북경어와 동북 방언에도 만주어 단어가 차용됐다.  ##러러(勒勒) - 공허한 이야기, "러오럼비leolembi"(담론) 유래.  ##모청(磨蹭) - 느려터지다, "모초moco"(느리다) 유래.  ##좡커(撞克) - 귀신, 악령을 만남,"장쿠럼비jangkulembi" 유래.  ##거지(胳肢) - 가려운 곳을 긁다, "거지허섬비gejihesembi" 유래.  ##사오다오(哨叨) - 침착하지 않음,"소돔비sodombi" 유래.  ##가이러우(該漏) - 중간에서 가로채다, "가임비gaimbi"(원하다) 유래.  ##케이(剋) - 비판, "코이카삼비koikasambi"(싸우다) 유래  ##마사(抹擦) - 구겨진 것을 펴다. "마침비macimbi"(몸을 쭉 펴다) 유래.  ##텽(挺) - 아주 훨씬 "턴ten" 유래  ##하라(哈喇) - 기름기 있는 것이 상하다, "하르har"(검은색) 유래. 만주어에서 유래한 지명[편집] 한국 지명[편집]  ##아오지(경흥군) - 불타는 돌  ##나단산(경원군에 있는 살바우산의 별칭) - nadan(일곱), 나단산은 봉우리가 일곱개이다.  ##이판령(마천령의 옛 지명) - 소  ##주을(경성군) - 뜨거운 물  ##보을천(회령군) - 버드나무  ##백안(종성군) - 수소 중국 지명[편집]  ##연길시(延吉市) - '연기가 피어오르다' 만주어의 의역  ##연집(烟集, 연길시의 옛 지명) - durgatu의 의역  ##훈춘시(珲春市) - huncun(눈썰매)  ##목단강(牡丹江) - 구불구불한 강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의 중국식 표기) - golmin šanggyian alin(길고 하얀 뫼)  ##길림(吉林) - "jilin ula"(강가)  ##해란강(海蘭江) - hailan ula(느릅나무 강)  ##송화강(松花江) - sunggari ula (흰 강)  ##하얼빈(哈爾濱) - 어망을 햇볕에 널어 말리는 곳  ##아성(阿城, 금나라의 발상지) - arecuka(상서롭다)의 약칭  ##두만강(豆滿江) - "tumen secin"(만(萬)개의 수원(水原)) 러시아 지명[편집]  ##사할린 섬 - "sahaliyan ula angga hada"(검은 강 어귀 봉우리) 유래  
1492    이육사문학제에 다녀오다 댓글:  조회:2468  추천:0  2015-09-23
                                                                                                                                                                ▲육사 선생 양손자 이승엽군이 술잔을 올리며...                       ▲육사 선생 따님 이옥비 여사가 꽃을 올리며...                            
1491    中國內 유일한 조선족대학생 李陸史문학제 댓글:  조회:7934  추천:0  2015-09-22
9월 18일 오후,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가 주최하고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이육사문학관이 주관한 《제5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안동병원과 안동간고등어회사의 후원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개최되였다. 연변작가협회 당조성원 정봉숙은 개막사에서 문학후비군 양성을 주목표로 하는 유일한 문학제로서의 《중국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제》는 대학생들의 참여의 장으로 조선족대학생들과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고있는 타민족대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형문학행사의 하나로, 명실상부한 대학생문학제로 거듭나고있다고 지적, 기성문인들과 바야흐로 문단에 등단하는 대학생들과의 상호 련대와 협동을 적극 추진하고 상호 교류와 우의를 증진하는 중요한 무대로 되였다고 하면서 이같은 의의있는 행사를 조직하고 후원해준 경상북도 안동시와 이륙사문학관 그리고 후원단체들에 감사를 드렸다. 문학제 제1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세미나에서는 한국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유성호교수가 《저항으로서의 이륙사시와 그 서지적 사항》,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우상렬교수가 《이륙사와 중국 현대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였다. 웃줄 좌로부터 정봉숙, 리봉우, 군부옥, 이옥비, 유성호, 우상렬, 김경훈, 조영일. 제2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교수이며 연변작가협회 겸직부주석인 김경훈이 수상작선정보고와 수상자명단을 발표하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타민족대학생들을 상대로 설치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길림화교대학 장성양, 치치할대학 왕정정 등 5명이 우수상을, 대련민족대학 리로, 정주경공업대학 초근근 등 8명이 동상을, 남경대학 리연, 산동대학 온애륜 등 7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양문연, 손효 등 4명이 금상을, 산동대학 록미교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문학상 시상식에서는 북경화공대학 김지이, 중앙민족대학 최의단 등 15명이 우수상을, 회해공학원 류연정, 연변대학 정희정 등 13명이 동상을, 천진외국어대학 최려영, 화동사범대학 차경나 등 10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김소연, 김은령 등 5명이 금상을, 연변대학 강미홍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상 대상 수상자 연변대학 강미홍(가운데). 시상식에 이어 김경숙, 김희선 등 한국의 시인들과 연변랑송협회 송미자, 박송천 등 랑송인들이 이륙사의 《광야》, 《청포도》, 《노정기》, 《절정》 등 시들을 랑송하였다. 문학제에서 연변대학조선-한국학학원 당위서기 리봉우와 이륙사추모사업위원회 리사장 권부옥이 축사를 하고 이륙사선생의 딸 이옥비녀사가 답사를 하였으며 한국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관장 조영일이 페막사를 하였다. 부분적인 수상자들과 함께. 이번 문학제에는 연변대학과 타지역 20여개 대학들에서 온 수상자 및 연변작가협회,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안동병원, 안동간고등어회사 등 주최측과 후원측의 대표 250여명이 참가하였다. 문학제가 진행되는 동안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중한시인들의 시화전이 있었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 기획ㆍ특집 목놓아 부르던 광복의 노래, 중국 광야에 울려퍼지다 권광순기자  |  gskwon@kbmaeil.com   2015.09.24                 ▲ 중국연변 이육사문학제에 참가한 (사)이육사추모사업회 일행들이 문학강연 등 다채로운 진행을 마친 후 기념사진을 촬영을 하고 있다. 중국 연변대학서 제5회 `이육사 문학제`  시낭송·세미나 등 항일·문학정신 기려  조선족·한족 학생 한글작품 시상식도  상해 임시정부청사 찾아 독립투사 재조명  육사의 딸 이옥비씨·손자 이승엽씨   윤봉길 의사 기념관서 추모제도 지내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이육사의 대표작 `청포도`, `절정`, `광야`가 중국 연변에서 조선족 청년들에게 울려 퍼졌다.  일제강점기 끊임없는 독립투쟁과 함께 문학 활동을 벌이면서 주옥같은 시를 남긴 안동출신 항일 저항시인 이육사.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중국 이육사문학제가 지난 18일 오후 연변대학에서 열렸다. 경북도와 안동시가 주최하고 (사)이육사추모사업회와 중국연변작가협회(회장 최국철)가 주관한 중국연변 이육사문학제는 2011년 9월 첫 번째 개최한 이후 이번이 다섯 번째다.         ▲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육사선생의 딸 이옥비(왼쪽) 여사가 육사의 손자 이승엽씨의 손을 잡고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이날 문학제는 학술대회, 문학강연, 시낭송 등 다채로운 구성으로 진행됐으며 현지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작가협회 회원 등 300여명이 참가했다.   먼저 이육사의 시 세계를 탐구, 분석하고 시인의 문학정신에 대해 토론하는 학술세미나가 마련됐다. 이날 한양대 국문학과 유성호 교수는 `저항으로서의 이육사 시와 그 서지적 사항`을 발표한데 이어 `이육사와 중국 현대문학` 의 내용으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장 우상렬 교수가 각각 발표했다.  우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이육사는 한국문학 가운데에서도 시적 영역의 높은 우월성을 간직하고 있다” 며 “그는 중국 문학계까지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기탄없이 표현했다”고 평가했다.          ▲ 육사의 손자인 이승엽씨가 상해의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 입구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또 `현대시조 어떻게 쓸 것인가`를 주제로 강인순 시인의 강연에 이어 한국과 중국의 문인 27명의 시화전작품 전시회도 열렸다.  중국 조선족과 한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모한 한글작품 시상식에는 수상자와 가족들이 참여해 성황을 이뤘으며 연변일보, 연변방송 등 현지 언론의 취재열기도 뜨거웠다. 시상식에서 강미홍(22·연변대) 씨가 육사문학상 대상을 받는 등 조선족, 비조선족 학생 53명에게 상과 1천200여만원의 장학금도 지급됐다.   (사)이육사 추모사업회 권부옥 이사장은 “시인이며 독립투사인 이육사선생은 여러분의 나라 중국에서 공부하고, 항일 투쟁으로 극악한 일제에 의해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 분이다” 며 “이 행사를 계기로 이육사의 문학을 이해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젊은이들이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상호 이해와 우호의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고 말했다.          ▲ 이육사,윤봉길,윤동주 광복 70돌 맞아 찾은 용정·상해…  항일 시인·독립투사 자취 곳곳  (사)이육사추모사업회는 올해가 광복 70주년 기념해인 만큼 윤동주 시인 등 당대 일제에 저항한 문인들과 항일투쟁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재조명하기로 했다.  이육사추모사업회 일행들은 지난 20~22일까지 길림성 조선족 자치구역인 용정시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찾았다.   용정시의 경우 이곳 간판마다 글씨를 쓸 때에도 한글은 위에다 쓰고 그 아래쪽에 한문으로 써져 있다. 낯선 중국 땅이 아니라 강원도 오지 어느 곳쯤 될 것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중국 속의 한국`이다.  용정시 외곽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는 80년대 말 이 곳 옛터를 대한민국에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이 학교에는 윤동주 시인이 당시 식민지 지식인들의 불안과 절망, 광복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서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날 추모사업단 일행들은 각종 자료를 통해 그의 부드러운 내면에 투철한 항일 민족정신을 차분하게 시로 승화시킨 점을 확인했다.   이육사추모사업회 일행들은 21일 상해 도심 가운데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한데 이어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 입구에서 추모제를 지냈다.   중국 내에서 남아 있는 가장 대표적이며 중요한 역사성을 간직한 상해임시정부청사는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까지 사용됐다. 이후 일본의 감시와 탄압때문에 독립투사들은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청사를 이전하는 곡절을 겪게 된다. 1989년에는 상해가 도시개발계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요청에 의해 1993년에 마침내 복원됐다.        ▲ (사)이육사 추모사업회 권부옥 이사장이 연변대 조선족 학생에게 이육사 문학상을 주고 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에 조직적 항거를 목적으로 건너간 독립투사들이 활동하던 본거지인 만큼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곳이다. 1919년 4월 11일 29명의 민족 지도자 대표들이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를 열었고, 이 때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처음으로 정해짐에 따라 독립투사들의 애환과 비장한 애국정신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때마침 이곳에서 육사의 따님 이옥비(75) 여사는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육사의 손자, 퇴계 이황선생의 16세손인 이승엽(41)씨가 고모인 옥비 여사가 상해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것이다.   이육사추모사업단 일행들은 일정 내내 옥비 여사와 승협씨가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방문해 추모제를 지내는 등 다정다감한 모습에 수시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앞서 LG그룹 비서실에 근무했던 승협씨는 현재 상해시 경영자 교육과정(MBA)을 밟고 있다. 그는 육사의 기일이면 어김없이 제사를 지내는 등 종손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다. LG구릅 측이 경영자 교육과정 대상 나라를 미국, 중국 가운데 선택할 것을 권유할 당시 승협씨가 중국을 선택한 것은 바로 할아버지 육사의 흔적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였다. 한국 측 참가단을 이끈 조영일 이육사문학관장은 “옥비 여사와 이육사 선생 손자의 만남은 이번 행사의 의미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됐다“ 며 “앞으로 문학인, 독립 투사할 것 없이 우리 민족이 중국 곳곳에서 일제에 항거한 흔적을 더욱 고양하고자 활동영역을 넓혀가겠다” 고 말했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상해에서   한국 /권광순기자 gskwon@kbmaeil.com   
1490    다시 보는 조향시인 댓글:  조회:5543  추천:0  2015-09-17
[ 2015년 12월 01일 10시 03분 ]     사천성 몸무게 395kg(부부의 합산한 몸무게) = 임신 못해... ============================================== [ 2015년 11월 30일 08시 50분 ]     =========================================================   조향(趙鄕) 시인의 시,         /에스뀌스   ESQUISSE                                 ―조향(趙鄕)               1 눈을 감으며. SUNA는 내 손을 찾는다. 손을 사뿐 포개어 본다. 따스한 것이. ―――― 그저 그런 거예요! ―――― 뭐가? ―――― 세상이. SUNA의 이마가 하아얗다. 넓다.              2 SUNA의. 눈망울엔. 내 잃어버린 호수가 있다. 백조가 한 마리. 내 그 날의 산맥을 넘는다.              3 가느다랗게. 스물다섯 살이 한숨을 한다. ―――― 또 나일 한 살 더 먹었어요! SUNA는 다시 눈을 감고. ―――― 그저 그런 거예요! 아미에 하얀 수심이 어린다.                 4 ―――― 속치마 바람인데.…… ―――― 돌아서 줄까? ―――― 응! 유리창 너머 찬 하늘이 내 이마에 차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됐어요.                 5 SUNA가 화장을 한다. ―――― 화장도 예술 아녜요? SUNA의 어깨 넘으로 내 얼굴이 쏘옥 돋아난다. 나란히 나와 SUNA의 얼굴이. 거울 안에서. ―――― 꼭 아버지와 딸 같아요.              6 SUNA의 하얀 모가지에 목걸이. 목걸이에 예쁜 노란 열쇠가 달려 있다. ―――― 이걸로 당신의 비밀을 열어 보겠어요.              7 STEFANO의 목청에 취하면서. 눈으로 SUNA를 만져 본다. 오랜 동안. ―――― 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 ―――― 이뻐서. ―――― 그저 그런 거예요!              8 나의 SUNA와 헤어진다. 까아만 밤 ․ 거리 . 택시 프론트 그라스에 마구 달겨드는. 진눈깨비 같은 나비떼 같은. 내 허망의 쪼각 쪼각들. 앙가슴에 마구 받아 안으며. SUNA의 눈망울이. 검은 하늘에 참은 많이 박혀 있다. 깜박인다. 「그저 그런 거예요」                自由文學, 4월호(1960년) *조향(趙鄕)전집 1994년 간행(刊行).          [출처] 시인 조향(趙鄕)의 시 (그의 시는 내게 혁명, 그 이상이었다)|작성자 banyantree 조향 시비 부산 용두산 공원 내에 있는 시인 조향의 시비, 작품 중 "에피소드" 각석되어 있다.     검은 전설   조향     하얀 종이 조각처럼 밝은 너의 오전의 공백(空白)에서 내가 그즘 잠시를 놀았더니라 허겁지겁 하얀 층층계를 올라버린 다음 또아리빛 달을 너와 나는 의좋게 나눠 먹었지 옛날에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고대(古代)의 원주(圓柱)가 늘어선 여기 내 주름 잡힌 반생을 낭독하는 청승맞은 소리 밤이 까아만 비로오드의 기침을 또박또박 흘리면서 내 곁에 서 있고 진흙빛 말갈(靺鞨)의 바람이 설레는 하늘엔 전갈이 따악들 붙여 있다 참새 발자국 모양한 글자들이 마구 찍혀 있는 어느 황토 빛 영토의 변두리에서 검은 나비는 맴을 돌고 아으 다롱디리! 안타까비의 포복(匍匐)이 너의 나의 육체에 의상(衣裳)처럼 화려하구나 나는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에서 마지막 피를 흘린다 나의 손바닥에서 하얀 네가 멸형(滅形)하고 나면 물보라 치는 나의 시커먼 종점에서 앙상하게 걸려 있는 세월의 갈비뼈 사이로 레테의 강물이 흐른다 나는 검은 수선꽃을 건져 든다 쌕스폰처럼 흰 팔을 흔드는 것은 누굴까! 팔목에 까만 시계줄이 감겨 있다 인공위성 이야길 주고 받으면서 으슥한 골목길로 피해 가는 소년들의 뒤를 밟아 가니까 볼이 옴폭 파인 아낙네들이 누더기처럼 웃고 섰다 병든 풍금이 언제나 목쉰 소리로 오후의 교정을 괴롭히던 국민학교가 서 있는 마을에 아침마다 파아란 우유차를 끌고 오던 늙은이는 지금은 없다 바알간 석양 비스듬히 십자가 교회당 하얀 꼬리를 흔들면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항가리아 소녀 탱크에 깔려 간 소녀들의 프란네르 치맛자락이 명멸한다 소롯한 것이 있다 아쉬운 것이 있다 내 어두운 마음의 갤러리에 불을 밝히러 너는 온다 지도를 펴 놓고 이 논샤란스의 지구의 레이아웃(layout)를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일이면 늦으리 눈이 자꾸 쌓인다.       작가 : 조향(1917-1984) 본명 섭제(燮濟). 경남 사천 출생. 일본에 유학, 니혼[日本]대 상경과 수학. 유학중 반일사상의 혐의를 받고 일경에 체포. 194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첫날밤」이 당선되어 등단. 광복 후 마산상고 재직시에 『노만파』를 주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고, 이어 부산에서 『후반기』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한편 『가이거』, 『일요문학』등의 동인지 주재. 동아대 문리대학장 명지대 강사 등을 역임.   그는 시에 외래어를 대담하게 도입하고, 산문적․설명적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상상의 영역에 절대적 자유를 부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의 심상을 발굴한 후 그것들을 비약․충돌하게 하는 초현실주의적 시풍을 우리 현대시에 실험한 대표적 시인이다.   생전에 시집을 남기지 않았다.     < 감상의 길잡이 >   조향은 기성의 문학적 질서와 권위를 철저히 부정하고 새로운 작품의 창작을 선언한 동인의 일원이다. 전후세대 시인들의, 전세대의 암울하고 상투적인 문학에서 벗어나 1950년대 즉 20세기의 후반기 문학을 선도한다는 선언과 함께 시작된 동인의 시에서도 역시 식민지 시대의 암울과 해방공간의 혼란, 전쟁의 참혹한 기억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시는 일몰 시간에 일어나는 사물의 변화와 화자의 심경의 변화가 검은색을 주조로 하여 암울하게 묘사되어 있다. `까아만 비로오드', `진흙빛 말갈', `검은 나비', `시커먼 종점', `검은 수선꽃', `까만 시곗줄', `어두운 마음' 등의 검은색이 당시의 음울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오전의 공백(空白)'이 `바알간 석양'으로 바뀌는 저녁 나절에 깃든 것은 마치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과 같은 스산함이며 `마지막 피'가 연상시키는 절망과 희생뿐이다. 멀리 `항가리아'에서 소녀들이 `탱크에 깔려 간'다는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지는 `지구'와 `내일'에 대한 불길한 상상과 묘사가 이 시의 주제이다.   `내일이면 늦'을듯이 눈이 자꾸 쌓이는 암담한 석양 풍경이 곧 화자의 내면풍경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레테의 강물'로 흐르면서 망각을 일으키고, 이러한 망각의 흐름 속에서 시간과 인생이란 `잠시 놀았'다가 `허겁지겁' 석양이 되는 해의 모습처럼 늘 조급하고 무의미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간에 화자는 `지구의 레이아웃' 즉 `지도'를 펴놓고 우울한 미래와 같은 `검은 전설'을 예감하고 있다.   시인이 검은 색과 우울한 풍경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성과 일상의 평화가 존재 조건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폐허 의식으로 확대되는 도시 풍경일 것이다. 전후의 세상이란 시민들의 합창이 가득한 새로운 도시를 꿈꾸었던 젊은 시인들도 벗어나기 힘든 마치 늪과 같은 침체이며 우울이었음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느껴볼 수 있다.              ///[해설: 이상숙]   [출처]  모더니즘 시인조향에 대하여|작성자 유목의꿈       조향(趙鄕 1917.12.9~1985.7.12) 시인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는 그의 동생이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를 중퇴했다.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했다.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했고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4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첫날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했다.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이다.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냈다.             전후 실험적 글쓰기와 초현실주의 시학                    -조향論 ​       조향 시인은 20세기를 살다간 부산의 문학인으로 초현실주의를 통한 실험적 시세계의 구축에 몰두한 시인이었다. 그는 괴팍하고 유별난 성격으로 인해 문단의 독불장군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50~60년대 한국 초현실주의를 주도해 나갔던 문학인이었다. 그는 부산 문학인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현재까지도 그에 대한 문학사적 연구는 아주 미미한 편이다.     조향은 1917년 경상남도 사천군 곤양면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섭제(燮濟)였고, 그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고 자란 까닭으로 인해 모국어보다 일본어에 능통했으며, 그런 이유로 해방 전부터 시작활동을 한 그는 한국 문단보다는 해방 전부터 이미 「일본 시단」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1년「초야」이라는 시가『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한 조향은 진주고보를 졸업하고 대구사범 강습과를 거쳐, 일본 니혼(日本)대 상경과에 다니던 중 반일(反日)사상의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학을 중퇴한 뒤 귀국했다. 8․15광복 후에는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시동인지 『노만파(魯漫派)』를 주재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고, 전후 부산에서 박인환이 주도하던『후반기』 동인으로도 참가하였다.     조향의 삶은 세 단계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940~1949년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로써, 그는 이 시기에 초등학교 교사와 교감, 그리고 동아대 강사 등으로 활동하였고, 그 후 6년간 도일(渡日)을 하기도 하였고, 잦은 스캔들로 인해 사회적 물의를 빚고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 「초야」를 정점으로 한 이 시기의 시들은 주로 연애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시들은 혼돈과 절망의 내면세계를 표출하고 있으며, 시각적이고 회화적인 이미지를 통한 강렬하고 서정적인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중  기에 해당하는 1950~1965년 사이에, 조향은 부산에 정착하여「後半紀」동인과 전위극단「藝術小劇場」의 대표를 맡아 활동하였고,「gamma」 동인회 대표 등으로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한 부산 문총 지부 대표위원, 한국대학야구연맹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문학 외적인 활동에도 정열을 쏟았다. 특히 이 시기는 그가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론을 열정적으로 탐구한 때였고, 그로 인해 39편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그의 시적 열정이 최고도에 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중기에 쓴 조향의 시들은 6․25 전쟁 영향으로 인한 부조리하고 절망적인 인식과 실존주의적 내면의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쟁으로 인한 실존적 불안의식은 검은 색 이미지로, 인간 구원으로서의 여성성의 추구는 흰색 이미지로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연애 시는 에로티시즘의 세계로 전환되고, 에로스적 행위는 신비주의의 이미지를 띤 구체성으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형상화 속에는 두 가지의 병리적 현상인 사디즘과 마조히즘적 징후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기존의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이었음으로 그의 실험적 의도와는 달리 그의 시는 독자나 문단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후  기에 해당하는 1968~1984년의 시기에, 그는 동아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1966년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 이후부터 그는 MBC 문화부분 해설위원, 명지대 강사, 연구 동인회인 「초현실주의연구회」에서 적극 활동하면서 문학 외적인 삶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 시기 3년간 그는 단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그는 새로운 시세계의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후  기에 해당하는 1968년부터 작고하던 1984년까지의 시기는 그의 시세계의 완숙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약 25편의 시를 썼는데, 이 작품들은 기존의 에로티시즘적 성향을 탈피하여 다소 밀교적 징후를 표출하였다. 더불어 실험적 시도인 ‘CINE POEM’과 ‘Intermedia’라고 명명한 시 작품들은 영화와 시를 접목시키려는 그의 실험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는 그의 정열적인 탐구와 모색의 결정물이며, 끊임없는 실험정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조향은 기성문학의 질서와 권위를 타파며, 20세기의 후반기 문학을 선도한다는 야심찬 신세대 그룹인 『후반기』 동인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후세대 시인들의 한 특질인 허무주주의 시세계에서 탈피하여 외래어의 도입, 산문적․설명적 요소의 철저한 배격, 무의식과 상상 영역의 절대적 자율성 등을 주장하며, 무의식의 세계라는 전후 시문학의 독보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였다. 특히 그는 「장미와 수녀의 오브제」(1958) 「바다의 층계」(1958) 등의 시를 통해 무의식과 상상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초현실주의적이고 실험적 시세계를 표출하였다.     이러한 실험적 글쓰기와 초현실주의의 지향의식은 조향이 44년 동안 줄곧 견지해온 하나의 시적 방법론이었으며, 한국 시단의 초현실주의를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 식민지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의 온갖 수모를 겪은 당시 문학인들의 의식은 한국인으로 태어나서도 모국어를 쓸 줄 모르는 척박한 현실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갈등과 혼란의 상황을 연출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해방 후 모국어보다 일본어에 능통한 현실의 한계 상황을 직시하면서 한글로 글을 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조향의 초현실주의의 창작 기법은 그의 암울한 내면의식을 시 속에 투영시켜 구체화하는 과정의 주요한 방법론이었다. 등단 이후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는 110 여 편의 시를 발표했지만, 단 한 권의 시집이나 평론집도 발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론과 시의 일치를 위해 부단한 노력과 탐구, 그리고 모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발표한 시론인 「시의 감각성」,「10세기 문예사조」(1952), 「현대시론」(1961) 등은 그 자신만의 고유하고 새로운 문학의 추구의 결정물이며, 『가이거(Geiger)』(1956), 『일요문학』(1962) 등의 동인지를 통한 활발한 문단 활동은 그에 대한 문학사적 재조명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중요한 이력이다.     조향의 전기적 고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례는 ‘거침없는 연애론자’, ‘고독한 별’, ‘여교수와 팔짱끼고 광복동 거리 활보하기’, ‘문단에서의 냉대’, ‘쓸쓸한 말년’, ‘장례식 때 젊은 여교사가 관 붙들기도 한 사건’ 등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향의 연애론은 그의 시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초현실주의적인 것이었다. 사랑은 위선을 버리고 투명하고 당당하게 초현실주의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 신념 또한 그의 연애론과 마찬가지로 ‘극우’에 가까울 만큼 정열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열정은 5․16 이후 맡은 민족 계몽위원회장의 일을 하면서, 당시 부산의 저명한 문인 몇몇에게 "육체적,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겨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1966년 그는 서울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조향의 실험적 글쓰기와 초현실주의에 대한 탐구와 모색이 어떻게 그의 시 작품에서 형상화되고 내면화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하얀 종이 조각처럼 밝은 너의 오전의 공백(空白)에서 내가 그 즘 잠시를 놀았더니라 허겁지겁 하얀 층층계를 올라버린 다음 또아리빛 달을 너와 나는 의좋게 나눠 먹었지 옛날에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고대(古代)의 원주(圓柱)가 늘어선 여기 내 주름 잡힌 반생을 낭독하는 청승맞은 소리 밤이 까아만 비로오드의 기침을 또박또박 흘리면서 내 곁에 서 있고 진흙 빛 말갈(靺鞨)의 바람이 설레는 하늘엔 전갈이 따악들 붙여 있다 참새 발자국 모양 한 글자들이 마구 찍혀 있는 어느 황토 빛 영토의 변두리에서 검은 나비는 맴을 돌고 아으 다롱디리! 안타까비의 포복(匍匐)이 너의 나의 육체에 의상(衣裳)처럼 화려하구나 나는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에서 마지막 피를 흘린다 나의 손바닥에서 하얀 네가 멸형(滅形)하고 나면 물보라 치는 나의 시커먼 종점에서 앙상하게 걸려 있는 세월의 갈비뼈 사이로 레테의 강물이 흐른다 나는 검은 수선 꽃을 건져 든다 쌕스폰처럼 흰 팔을 흔드는 것은 누굴까! 팔목에 까만 시계줄이 감겨 있다 인공위성 이야길 주고받으면서 으슥한 골목길로 피해 가는 소년들의 뒤를 밟아 가니까 볼이 옴폭 파인 아낙네들이 누더기처럼 웃고 섰다 병든 풍금이 언제나 목쉰 소리로 오후의 교정을 괴롭히던 국민학교가 서 있는 마을에 아침마다 파아란 우유차를 끌고 오던 늙은이는 지금은 없다 바알간 석양 비스듬히 십자가 교회당 하얀 꼬리를 흔들면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항가리아 소녀 탱크에 깔려 간 소녀들의 프란네르 치맛자락이 명멸한다 소롯한 것이 있다 아쉬운 것이 있다 내 어두운 마음의 갤러리에 불을 밝히러 너는 온다 지도를 펴 놓고 이 논샤란스의 지구의 레이아웃(layout)를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일이면 늦으리 눈이 자꾸 쌓인다. - 조향,「검은 전실」전문,『조향 전집 1』, 열음사, 1994.      이 시는 전후의 일몰 풍경을 검은 색의 이미지에 투영시켜 시인의 암울한 내면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까아만 비로오드”, “검은 나비”, “검은 수선 꽃”, “까만 시곗줄”, “어두운 마음” 등의 검은 색조의 이미지는 전후의 절망적인 분위기를 한층 부각시키는 이미지로 환기되고 있다. 또한 “오전의 공백(空白)”이 “바알간 석양”으로 전환되는 저녁의 풍경은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 “까아만 비로오드의 기침”, “진흙 빛 말갈(靺鞨)의 바람이 설레는 하늘”, “안타까비의 포복(匍匐)”, “레테의 강물”, “으슥한 골목길”, “항가리아 소녀 탱크에 깔려 간 소녀들의 프란네르 치맛자락”, “이 논샤란스의 지구의 레이아웃(layout)” 같은 암울한 죽음을 상징하는 이미지와 심층적 메타포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죽음’의 메타포는 “나는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에서 마지막 피를 흘린다”라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시인은 자신을 ‘예수’로 치환시키며 자신의 “손바닥에서 하얀 네가 멸형(滅形)”하고 있다는 시구를 탄생시킨다. 또한 그의 “마지막 피”는 지옥과 연옥의 사이에 흐르는 “레테의 강물”로 흘러들어, “항가리아 소녀”들이 “탱크에 깔려“가는 절망적인 풍경과 합쳐지면서 불행한 ”지구“'와 불모의 ”내일“로 변주되고 있다.     따라서 첫 행의 “밝은 너의 오전의 공백(空白)”은 죽음의 이미지인 “검은 나비”, “시커먼 종점”, “병든 풍금”, “십자가” 등의 의미의 치환으로 점층적으로 발전하며, 그것은 또 다시 “자꾸 눈이 쌓인다”라는 시구를 통해 참담하고 절망적인 시인의 내면의식의 구체성을 획득하게 해준다. 이 시에 나타나는 “너”는 사랑하는 대상일 수도 있고 어떤 이상적인 존재, 혹은 신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시에 나타나는 죽음의식은 개별자로서의 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민족 공동체로서의 시의식의 표출로서 표상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내일이면 늦으리”라는 전언을 통해 망각의 강인 “레테의 강”이 암시하는 ‘죽음’으로 흐르는 현존재의 시간의식을 망각하지 말자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망각은 검은 색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죽음’을 부르고 “검은 전설”을 각인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망각의 강을 흐르는 현존재에게 주어진 시간과 삶을 “잠시 놀”다가 “허겁지겁” 석양으로 화하는 태양의 모습처럼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말고 “내 어두운 마음의 갤러리에 불을 밝히러” 올 이상적인 ‘너’를 차분히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도시 풍경은 시인의 내면의식을 대표하는 검은 색과 우울의 이미지로 표출되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 된 인간성과 평화에 대한 근원적인 본래성은 검은 색조의 폐허 의식으로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전후 시인들이 모두 겪던 공통된 정서였지만, 조향은 이러한 의식세계를 도시적 풍경과 외래어의 적극 활용, 그리고 초현실주의적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시적 낭만성에도 관심을 지속시켰는데, 다음과 같은 글은 그의 낭만성에 대한 시론을 담지하고 있다.     나는 항상 시에다가 이러한 (bounding) 곧 「-넘실거림」을 끼워 두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로 하고 있다. 나의 밑창에 romanticist가 살고 있다는 증  거다. -조향, 「1959년 시단 총평」(1959) 부분, 『조향전집 2』, 열음사, 1994.     위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조향은 초현실주의의 시세계를 꾸준히 밀고 나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적 낭만성을 굳건하게 견지하였다. 그에게 ‘낭만’은 현실도피적인 것의 추구가 아니라 현실과의 부조화와 갈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하나의 “바운딩”(bounding) 혹은 「-넘실거림」이며, 시적 상상력과 신비감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옥타비오 빠스가 “사회와 시의 부조화에 대한 반응과 인식은 낭만주의 시대 이래 핵심적이면서도 종종 비밀스러운 시의 논지”가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조향 시의 낭만성은 시적 신비화와 초현실주의의 시적 형상화를 위한 밑그림으로써 추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낭만성의 지향은 전쟁체험과 공포체험으로 인한 내적 충격을 초현실주의로 전환함으로써 그러한 의식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시인의 희구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실험적이고 전위(前衛)적인 시 정신은 다음 시에도 나타난다.   저물어 가는 이 아름다운 花園에 하얀 愁心의 騎士들이 따가닥따가닥 달려들 온다. 고대의 병법으로 다가서듯이.   나는 한 개비 담배에 불을 붙인다. 손가락처럼 하이얀 담배 담배는 누군가의 손가락 맛이 난다.   오랜 세월 忘却의 늪에 잠겼던 것이 가슴에 되살아나면서. 추억의 프레스코(壁畵)에 불이 들왔다간 古風으로 스러져 가고 아슴한 푸른 領土에의 電線에 박꽃이 하야하얗게 켜지면서…… ― 조향,「황혼과 담배와」전문,『조향 전집 1』, 열음사, 1994.     이 시는 해질 무렵, 시대의 울분과 고뇌에 찬 한 사내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시의 주된 색채 이미지는 붉은 색으로, 이 색조는 담배와 담배 연기를 배경으로 한 황혼의 다가옴을 묘사하기 위한 중요한 시적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조향이 실험적으로 추구한 초현실주의적 기법 중 하나로써, 이는 이 시에 환상적이고 새로운 미적 모더니티를 발현하도록 추동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 시 첫 행의 “愁心의 병사들이 따가닥따가닥 달려들 온다.”라는 시구는 다소 장식적인 수사임에도 불구하고, “저물어 가는 이 아름다운 花園”에 전쟁이라는 암울한 사태가 다가옴을 암시하는 메타포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병치는 시인이 느끼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표상하는 것으로, 이 시의 제목인 “황혼과 담배와”에서 “황혼”은 전쟁과 공포를, “담배”는 전쟁과 공포에 대한 망각을 상징한다. “황혼”은 시기적으로 음양(陰陽)이 교차하는 시기로써, 음양의 결합은 전쟁과 평화의 시간을 함축한다.     또한 이 시의 주 메시지를 담고 있는 2연에서 “담배는 누군가의 손가락 맛이 난다.”라는 시구는 에로스적 상징성을 드러내며,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오랜 세월 忘却의 늪에 잠겼던” 에로티시즘을 “가슴에 되살아나”게 하는 기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손가락처럼 하이얀 담배”라는 시구는 자신이 언젠가 사랑했던 한 여자의 손가락을 은유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담배의 맛”과 “누군가의 손가락의 맛”은 에로스적 메타포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나는 초현실주의 이미지는 “하얀 愁心의 騎士들”, “忘却의 늪”, “추억의 프레스코(壁畵)”, “아슴한 푸른 領土” 등으로, 이러한 이미지의 병치는 시인이 추구하던 새로운 실험의식의 발현으로부터 표출된 것이며, 이는 미래와 과거, 현재와 과거의 혼융적 이미지로부터 발생하는 충돌적이고 기이한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을 내면화 혹은 구체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하얀 愁心”, “하이얀 담배”, “박꽃이 하야하얗게 켜지면서”와 같은 시구는 담배 연기가 불러일으키는 상승 이미지와 뒤섞이면서 “고대의 병법”, “古風” 등의 시어와 어우러져 순수하고 엄결한 시인의 시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흰색과 붉은 색의 어울림은 시인의 “수심(愁心)”에 잠긴 내면의식을 환상화․신비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3연의 이미지는 황혼이 지난 어둠이 주조를 이루면서, 동시에 “추억의 프레스코(壁畵)에 불이 들왔다간/古風으로 스러져 가고”라는 시구가 암시하듯이 시인의 반추가 담배 연기에 스러져가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반추의 불가능성은 “박꽃이 하야하얗게 켜지면서”라는 시구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것은 ‘하야하얗게’라는 시어가 환기하듯이, 시인의 추억이 반짝 명멸하는 모습으로 은유되면서, 동시에 시인이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에서 추구하는 시인의 시 의식에는 전쟁이 가져다주는 죽음과 공포에 대한 긍정적이고 수용적인 관조를 통해 허무와 갈등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허무주의적 세계의식을 평화와 안정이라는 정서로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내포되어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향은 과거 이상(李箱)이 개척한 초현실주의의 시세계를 자신만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탐구하고 조명하면서, 이러한 시의식을 인간 실존의 문제와 결합하여 새로운 실험으로써의 초현실주의를 강력하게 밀고 나갔던 것이다.     나는 순수시만 쓰지는 않는다. 꼭 같은 방법으로서 현대의 사회나 세계의 상황 악을 그린다. 곧 나의 「검은 DRAMA」, 「검은 날의 지구의 밤」, 「검은 신화」, 「검은 전설」, 「검은 series」등 일련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상황 악이란 곧 「현대의 암흑」(Modern karkness)을 말한다. - 조향, 「데뻬이즈망의 美學」(1958)부분,『한국 전후 문제 시집』, 신구문화사, 1964.     오세영은 “「후반기」동인의 고창한 문학적 이념과 그들 작품에 나타난 여러 특징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더더욱 30년대 모더니즘의 한계성을 극복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문학운동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기」동인의 한 일원이었던 조향의 시는 이러한 관점에선 예외적인 시인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물론 당대의「후반기」동인의 시들이 포즈만 취한 모더니즘으로 일관된 시세계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조향의 초현실주의의 실험적 시세계는 다른 동인들과는 다른 변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후반기」동인이었던 김경린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는「국제 열차는 타자기처럼」에서 김기림의 ‘명랑한 속도’의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근대를 표상하는 열차의 속도감과 암울하게 살아가는 한국의 소시민들의 모습을 병치시킴으로써 문명에 대한 소극적 비판과 실존의 허무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시세계는 이미 과거 김기림이 보여준 근대성의 시의식의 반복에 불과하며, 또한 「후반기」동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차용했던 이미지이기도 하다. 도시성의 추구와 문명비판을 주요 모티프로 삼았던「후반기」동인의 김경린이나 박인환은 당대 모더니즘의 특성인 불안과 허무의식을 문명/자연, 기계/인간의 표피적인 대립의식으로 단순화시켰을 뿐이다.     조향 시의 에너지로서 기능하던 실험정신의 토대인 초현실주의 기법은 후기 시에 이르러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시의 한 특질인 에로티시즘이 좌도 밀교를 배경으로 한 정신적 해방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경사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향은 ‘CINE POEM'이나 ’Intermedia'라는 새로운 계열의 시를 탄생시켰으며, 또한 서구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패러디한 꼴라쥬 기법의 회화적 이미지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과의 변별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는 조향의 시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재평가를 촉발시키고 있다.   조향 시인은 서정주나 김수영, 박인환처럼 시대나 유행에 민감한 대중적 시인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냉혹했고, 그로 인해 그에게는 ‘비주류’ 시인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붙었다. 따라서 그의 말년은 무척 쓸쓸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문단 쪽에서조차 그를 반기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므로, 그는 서울로 생활터전을 옮긴 뒤에도 초현실주의 시학에 동조하는 모임에만 열정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모임이 있던 1984년의 봄, 강릉 해변에서 심장마비로 67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조향은 당대에 걸맞지 않은 비운의 천재로서, 살아생전 오로지 자신의 작품성과 순수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시에 대한 순수성과 초현실주의의 지향만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진지하고 외골수적인 시적 모색은 현재까지 미완성으로 남아 있지만, 그는 온갖 명예를 버리고 홀로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그는 한국 시단에서 초현실주의적으로 고독한 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그의 시 『바다의 층계』의 “나비는/기중기의/허리에 붙어서/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에서와 같이 한 마리 ‘검은 나비’가 되어 ‘죽음’의 공간, ‘바다’에서 한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층계를 헤아리고 또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정원숙  시인       충남 금산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창과와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창과 졸업. 강원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4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바람의 서(書)』(천년의시작, 2008)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강원대학교 국문과 출강.    
1489    조향시인님을 그리며(꼭 찾아 뵙고저 했건만...)... 댓글:  조회:4273  추천:0  2015-09-17
  EPISODE 외 2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구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리를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     - 개정증보판 現代國文學粹, 자유장 (1952)             ✽1연 1행과 3연 2행을 필자가 행 가름했음.       바다의 層階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 디이젤 ―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 개정증보판 現代國文學粹, 자유장 (1952)       砂丘의 古典           木版 古書를 넘기는 孔子 蒼然한 시간의 上流에서 침침한 咿 唔     伽藍 병머리에 석양이 퇴색하고 외로운 文王鼎     東坡冠 고쳐 쓰고 때묻은 보선 銀長竹 빼어 물고 모두 양반이었다.     Magi는 西쪽으로만……     砂丘를 靑午 타고 「아라비아」로 가는 老子 달이 파아란 구역질을 한다.     캐라방은 희미한 童話를 싣고 가고 오고,     새지 않는 밤 東洋, 밤 다음 페에지에서 낭랑한 지각생 點呼 소리     - 韓國戰後問題詩集, 新丘文化社(1961)       아버님 영전에                                              조유정(조향 시인 장녀)          코스모스 핀 언덕길.    아버지가 가신다. 담배를 피워 무신다.    돌아다보신다. 유체幽體 자락에 바람이 감긴다.        가슴 한 부분 어두운 모서리에 접혀 오래 지우고 싶었던 아버지의 죽음, 그러나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나의 아버지, 모두들 두고 가시지 못하리라는 어떤 강박증이 사슴처럼 나를 묶고 있었고 그 사슬이 어쩜 아버지 가시는 길을 막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눈을 감으면 언제나 까만 어둠에 싸여 약간 처진 어른 쪽 어깨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혼자 걸어가시던 모습.       ―아버지 글을 쓰고 싶어요. 단어를 잃어버린 일상의 벽 속에 전 갇혀 있어요. 언제나처럼 용 기를 주시고 잘리운 감각이 새 순 돋게 해 주세요. 우리에게 방종이 아닌 자유를 주셨고 어 디에서건 비굴하지 않고 당당함과 자신감을 심어 주시던 아버지. 돌아봐도 다만 빈자리뿐.       아버진 무거운 돌을 가슴에 안은 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봄이 오던 푸른 능선 들풀 사이로 키 작은 민들레.       ―나의 무덤은 공원처럼 만들고 싶어. 넓은 뜰엔 잔디와 꽃나무를 심고 너희들이 날 보러 오 면 공원에 소풍 와서 쉬었다 가는 마음이 들 수 있게 말이야.        죽음을 말씀하시던 말년에 들꽃처럼 쓸쓸하시던 나의 아버지. 이름 모를 들꽃과 바람과 그리고 별과 노래하며 누워 계실 아버지. 이제 까만 어둠을 버리고 빛이 되십시오. 빛의 천사를 따라 하얀 무지개를 타세요.    아버지를 기억하고 사랑하시는 분들 잊지않고 아버지 곁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모든 미련 훌훌 벗어 던지고 참 빛이 되시어 하늘을 길어 올리십시오. 남은 저희 모두가 작은 두레박이 되어 드릴 테니.    그 푸르른 날들 말없이 지나고 내 안의 아버진 예전의 그대로인데 어느 새 그 연륜 내게로 와 아버지 돌아가실 즈음 연배가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아끼고 기억해 주신 남강문학회 후배님들 정성에 감사드리며 새삼 아버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1488    잊혀진 시조시인 - 조운 댓글:  조회:4859  추천:0  2015-09-17
봄볕이 호도독호독 내려쬐는 담머리에 한올기 채송화 발돋움하고 서서 드높은 하늘을 우러러 빨가장히 피었다 조운이 쓴 < 채송화 > 라는 시조이다. '채송화'는 시조거리가 아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읊조렸던 시조는 거지반 매화·난초·국화 같은 폼나는 꽃 아니면 소나무·대나무같이 끼끗한 나무들이었다. 채송화 따위는 하찮은 들꽃 나부랭이였던 것이다. 조운(曹雲)은 1900년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났다. 본이름은 주현(柱絃)이고 자는 중빈(重彬)이다. 1940년 필명이었던 '운(雲)'을 본이름으로 고쳤다. 조운 아버지는 아전이었고 어머니는 해어화(解語花), 곧 '말을 알아듣는 꽃'인 기생이었다.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가 고마(소실)로 들어와 낳은 칠남매 가운데 외아들이었으니, 그때 형편으로 보자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천출(賤出)'이었다. 문학동아리 만들어 시조부흥운동 3·1운동에 들었다가 만주로 도망갔는데, 만주벌판 어디서 떠돌뱅이 문학청년 최서해(崔曙海, 1901~1932)를 만난다. 자치동갑으로 뜻이 맞은 두 문학청년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갈팡질팡하다가 국내로 들어와 금강산과 해주와 개성에 있는 옛자취들을 돌아본다. 1922년 지방문예운동에 앞장이었던 < 자유예원(自由藝苑) > 을 등사판으로 박아내며, < 추인회(秋蚓會) > 라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시조부흥운동을 벌인다. 조운이 했던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崔南善) 같은 이들이 했던 시조부흥운동과는 그 본바탕이 다르다. 그들이 했던 것은 관념적 복고주의로 민족을 초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중에 가장 먼저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 그것을 웅변하여 준다. 조운이 벌였던 운동은 일제를 통하여 밀려들어 우리의 전통적인 것을 짓밟는 서구제국주의 물결에 대한 앙버팀이었다. 무엇보다도 작품 자체가 그것을 말해준다. 24년 < 조선문단 > 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를 넣은 자유시 세닢을 선보이며 문학동네에 나왔고, '영광체육단사건'으로 1년 7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광 부위원장을 하였다. 47년 식구들과 함께 서울로 옮겨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인민의 행복에 복무하는 문학'을 힘주어 말하다가, 49년 식구들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조운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잊혀진 사람이 된다. 이른바 '치안'을 맡았다는 관공리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를 입에 올릴 수 없었으며, 그가 남긴 시조를 읊는 사람은 이른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감옥살이를 하여야만 되었다. 그는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시인이던 이은상(李殷相)과는 여러 가지로 두드러지게 다른 사람이었다. 이은상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 '성공한 시조시인'으로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으며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면, 조운은 월북과 함께 가뭇없이 잊혀지고 말았다.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만 변(암호)처럼 떠돌았을 뿐이다. '인민의 나라'로 올라간 남조선 출신 문학인들 거의 모두가 그렇지만 조운 경우는 더구나 그러하니, 그가 택한 문학 갈래가 시조였던 까닭에서였다. '반동지배계급인 량반놈들이 근로하는 인민대중의 구체적 삶과는 관계없이 음풍농월하던 것'을 '시조'로 보는 사회주의 문학관 탓이었다. 사회주의 문학 갈래에는 아예 시조라는 것이 없다. 조운이 '공화국 문학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갈래 자체를 바꿔야 한다. 49년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 듯 그러나 천운순환(天運循環)이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고 하였다. < 대학장구(大學章句) > 서(序)에 나오는 말이니, '하늘 운수는 돌고 돌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주희(朱熹)가 < 예기(禮記) > 라는 책에서 뽑아 쓴 것이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 밀려 장강 밑 남송(南宋)으로 오그라든 한족 지배이데올로기인 유학(儒學)을 되살려 여진족을 몰아내 보자는 슬픈 바람에서였다. 이런 문자가 생겨나게 된 뒷그림과는 상관없이 '무왕불복'이 주는 울림은 아주 애젖하다. 이제 곧바로는 이긴 것 같지만 참으로는 이긴 것이 아니고, 진 것 같아도 길게 보면 진 것이 아니다. 하늘 밑에 벌레들이 아귀다툼하는 곳에서 가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 또한 '패자의 넋두리'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갈피가 그렇다는 말이다. 전라도 출신으로는 맨처음 중앙문단에 이름을 올린 문인이었고, 영광중학원 작문선생으로 있으며 동료 교사였던 박화성(朴花城, 1904~1988)이 지닌 소설 솜씨를 보고 < 추석전야 > 를 춘원 이광수에게 보여 < 조선문단 > 에 실리게 하였다. < 석류 > 라는 시조 네 번째 수이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님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 한국문학통사 > 라는 책에서 지은이 조동일(趙東一)은 이렇게 말한다. "조운은 이은상이나 이병기보다도 더 시조를 알뜰하게 가꾸려고 했다. 이은상처럼 감각이 예민해 말을 잘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는 듯하지만 기교에 빠지지 않았다. 애틋한 인정을 감명 깊게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는 이병기와 비슷하면서 미묘한 느낌을 또렷하게 하는데 남다른 장기가 있었다. (…) 다음에 드는 < 어느 밤 > 은 < 신가정 > 1934년 3월호에 낸 대수롭지 않은 작품 같지만, 읽을수록 산뜻하다." 눈우에 달이 밝다 가는대로 가고 싶다 이 길로 가고 가면 어데까지 가지는고 먼 말에 개 컹컹 짖고 밤은 도로 깊어져. 28살 때 3살 밑인 누이 분려(芬麗)를 최서해한테 시집보냈는데, 1살 밑인 매제 서해가 죽자 < 서해야 분려야 > 라는 시조를 썼다. 조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1900년 전남 영광군 영광읍에서 출생했다. ○상업학교를 나와 영광읍 사립학교 교사로 복무했다. ○1926년 청년운동에 가담했고 청년동맹 조직부장으로 일했다. ○문학활동을 하면서 자기 작품에 청년동맹 좌익파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반일운동 때문에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조직에 적극 참여했고 영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초대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1948년 7월 31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및 최고인민회의의장단 소속 주요 인사 평정서'에 나오는 대문이다.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은 모두 20명인데, 이 가운데 남조선 출신은 모두 11명이다.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金枓奉), 부위원장 홍남표(洪南杓), 상임위원 장권(張權)·이기영(李箕永)·김창준(金昌俊)·이능종·유영준·조운·라승규·성주식·구재수. 최고인민회의는 남조선으로 치면 국회이고 상임위원이면 장관급이다. 문학인으로는 < 고향 > 작가 이기영과 조운 두 사람뿐이다. 내각 쪽에 < 임꺽정 > 작가 홍명희(洪命熹)가 제2부수상이다. 2000년 복간된 < 조운 시조집 > 에 나오는 연보에 따르면 49년 식구와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다. 47년 식구와 함께 서울로 이주, 5월 5일 < 조운 시조집 > 을 < 조선사 > 에서 간행. 동국대학 출강, 시조론과 시조사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평정서'에 따르면 늦어도 48년 5?10단선이 끝난 다음 월북한 홍명희 일행과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 남녘에서도 그랬지만 조운 삶은 북녘에서도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관급 우러름을 받았다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무엇보다도 작품이 없다. 남로당 숙청 피바람에서 살아 남았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쓸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알몸뚱이 삶일 뿐이다. 김재용 교수가 보는 시조시인 조운이다. "짐작컨대 그는 우리의 것을 무조건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구미의 것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가 병이 들어도 뼛속 깊이 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시조를 택했다. 거기에는 자신의 무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식민지성을 목도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이 뒤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시조를 깔보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시조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근본적 성찰이 없었다면 당대의 지적 유행의 흐름을 거스르는 형식실험은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식민지적 무의식으로부터 해방된 몇 안되는 지식인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조운 마지막 작품이다. < 문학평론 > 1947년 4월호. < 얼굴의 바다 > (어느 대회장에서) 얼굴 얼굴의 바다 늠실거리는 이 얼굴들 모도 몰으는 얼굴 허나 모도 미쁜얼굴 시선이 마조칠 때 그만 끼어안고 싶고나. 전에 보든 얼굴 오 너도 동지더냐 쪼차가 손을 잡어 꽉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눈으로 눈으로만 하던 말을 다 했다. 김성동|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본지를 통해 님 웨일즈의 '아리랑'보다 훨씬 감동적인 필체로 현대사에서 사라진 인물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1487    김혁 / 김룡운 댓글:  조회:4273  추천:0  2015-09-17
 [ 2015년 09월 25일 08시 42분 ]     길이 300메터 수직 높이 180메터 되는 고공 유리 줄다리(玻璃吊桥) ㅡ 호남성 평강현 석우채(湖南平江县石牛寨) 국가지질공원內, 이 줄다리는 중국 첫 고공유리줄다리. ====================================================== . 평론 .   괴재(怪才) 이재(異才) 기재(奇才) - 김혁과 그의 문학   /김룡운     김혁 그는 누구인가?   김혁은 문학에 대한 끈질긴 투혼(投魂)으로 이미 중국조선족문단에서 모두가 공인하는 중견작가로서의 작가적 위상을 튼튼히 굳혔다. 그는 우선 다산작가로서 우리 문단에서 글을 가장 많이 발표한 사람중의 하나다. 19세에 처녀작 "피그미의 후손들"을 들고 문단에 데뷔한 이래 천부적인 기량으로 지금까지 "적", "천재 죽이기", "조모의 전설" "타인의 시간"등 중편소설 40여 편과 "겨울유흥장", "어떤 개의 순애보", "마담의 전성시대" 등 단편소설 30여 편과 300여수의 시 그리고 200여 편의 수필, 칼럼을 세상에 내 놓았다. 게다가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 르포집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등 단행본들을 합치면 그 량은 엄청나다. 30대 작가로서 이만큼 한 량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2003년에는 한해만도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2부를 발표 한외에 중편4편과 단편 2편을 발표했다. 한해에 이런 엄청난 수확을 거둔 것은 우리 문단에서 전례 없던 일이다. 그는 다산 작가일 뿐더러 다 쟝르 작가이기도 하다. 소설을 주로 하면서 시 수필 칼럼 아동문학 등 각 령역에도 족적을 남기며 골고루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여년의 기자 생활중에서 1000여편에 달하는 기사도 발표했다. 창작기법의 창신에서도 언제나 맨 앞장에서 달려 쉐르알리즘 소설도 썼고 황당파 소설도 썼고 환상적 리얼리즘소설도 썼고 력사소설도 썼고 과학환상 소설도 썼고 추리소설도 썼다. 풍성한 창작은 찬란한 계관들을 안아 왔는바 해란강 수필문학상 아리랑 시문학상 장백산 시문학상 도라지 소설문학상 흑룡강신문 실화상 흑룡강출판사 동심컴 아동문학상. 라지오문학상, 연변작가협회문학상 한민족청년상 문단의 주요 상들을 거의 모조리 휩쓸이 하기도 했다. 김혁은 이미 문단이 주목할만한 탑을 쌓아 왔다. 그 탑의 진모를 살펴보는 것은 본인의 금후의 창작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문단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결코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김혁은 창작에서는 누구보다 집요하고 창작욕구는 누구보다 강렬하고 창작에너지는 누구보다 풍부하다. 그의 가슴에는 이 세상에 대해 할말이 너무나 많다. 그것들은 뜨거운 암장으로 작가의 가슴속에서 굼실이다가 종당에는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변모하여 뿜겨져 나온다. 그 들끓어 번지는 암장은 어떻게 생기는 것 일가? 암장이 이루는 엘리멘트(요소) 내지 모체는 어디에 있는 것 일가 ?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그의 인생프로필에서 찾는다.지금까지 밟아온 그의 삶의 그라프는 한마디로 아픔이요 상처다. 불운한 출생과 학구적인 대학을 나오지 못한 음영에 짓눌려 남보다 큰 성적가리를 쌓아올렸음에도 소외된 삶을 내내 살아 온 사람.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가치는 하나의 커다란 물음표였다. 그는 존재에 대한 확인과 가치에 대한 확인 그리고 그로부터 자아실현을 완성하고저 글 속에 파묻혀 인생을 탐구하고 문학을 탐구한다. 그 와중에 그가 벗으로 사귄 것이 삶과 문학의 우상이였던 리상(李箱)이였고 번뇌와 고통을 힘과 용기와 신심으로 변화 시켜주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였다. 상처와 아픔은 김혁 문학의 뿌리다. 누군가는 상처는 무궁한 문학적 자산이라고 하였다. 삶의 길우에는 복병(伏兵)같은 상처의 돌부리가 무수히 있어 우리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린다. 우리는 그 덫을 무사히 넘어갈 수 없다.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풍경을 상처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혁은 자기의 인생 궤적우에 무수히 쓰러져 잇는 고통스런 시간의 쪼각들을 보면서 그 부서진 시간마다에 정성들이여 묘비를 세우고 묘비마다에 자기 나름대로의 비문을 써넣고 있다. 그 비문에서 이 구슬프고 고매한 가락을 뽑고 가 붉은 피를 토하고 가 네온사인이 드리운 거리를 방황하고 이 한 마리의 인어로 변하여 망망한 인간세상에서 헤염치고 이 오욕의 껍질을 벗고 승천하고, 불협화음에 질식하여 의 비극이 펼쳐진다. 그러나 김혁은 결코 주어진 삶 앞에 꿇어앉지는 앉는다. 그는 가치의 혼돈에 방황하고 도전하고 대전하고 잇으며 그 와중에 진정한 생명가치를 찾고 참다운 인성의 탑을 세우려 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은 리얼리즘문학만으로는 체현할수 없는바 그의 문학은 포스터모더니즘 내지 쉐르알리즘 쪽으로 경로 하게 된다. 포스터모더니즘의 리론가 모르스 페캄은 에서 이라고 말하며 고 주장한다. 모르스 페캄의 이 말은 김혁의 작품을 리해 하는 고리가 된다. 혼돈과 질서를 바로잡는데 엤어서 파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파괴가 거대한 파워를 발산하고 일반에게 잘 리해되지 않을 때 괴재(怪才), 이재(異才) 라는 말을 듣게 되며 그 파괴가 문학 예술적으로 승화했을 때 기재(奇才)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한편 또 해당시대로부터 이단으로 몰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문학예술에서의 괴재 이재 기재란 해당시대의 사유와는 벗어나가면서 엉뚱한 사유로 엉뚱한 작품을 쓰는 사람이라 하겠다. 조선문학사에 나오는 김시습과 허균, 김립이 그렇지 않았던가. 중국문학사에서는 또 리백이 그렇지 않았던가. 오늘 이 짧은 글에서 김혁의 모든 작품들에 대해 일일이 살펴볼 수는 없는바 몇편의 대표작들을 골라 례문에 올려 보기로 한다. 여기에는 사뮬레이션(모의실험)이라고 볼 수있는 , , , , , , 등이 속한다.   새로운 창작기법의 부단한 추구   1,력사 소설- “적”(도라지 94년 5호)은 력사제재로 현실제재를 체현하고 있다는데서 기법 상에서 새로우며 력사이야기로 오늘의 구겨진 삶을 매질하고 있다는데서 현실적 의의를 가진다. 금전과 권력의 소외를 받아 온 작자의 작품에는 누구보다도 금전욕과 권세욕에 대한 비판이 짙게 깔려 있다. “적”은 시종 아련하고 연연한 언어외피로 먼 력사이야기를 기술하다가 급기야는 하나의 고결한 인덕의 인간을 우뚝 세워놓고 오늘의 비뚤어진 삶에 강타를 안긴다. 금전만능과 권세지상이라는 거창한 괴물이 소설 앞에서는 한 낱 하잘것없는 존재로 무릎을 꿇고 만다. “적”에서 작자는 옛 악공(樂工)의 예술에 대한 구도(求道)의 길을 펼쳐 보이는 작업을 통해 현실 속의 금전과 권세와 명예를 위해서는 추구도 버리고 그 어떤 비렬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구질구질한 인간들과 그들을 배태 한 세태에 대해 성찰, 질타하고 있다.   2,황당파 소설- 표현주의에 뿌리를 둔 황당파는 그 력사가 거의 80년이 됨으로 황당파소설이란 개념이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세상과 늦게 대화를 나눈 중국조선족문단으로 볼때는 낯선 개념이 아닐수 없다. 김혁은 90년대 중기에“바다에서 건진 바이올린”(도라지 95년 4호)을 내놓아 우리의 소설문학에 신선한 활력소를 주입해 주었다. 카프카에 의해 고봉에 이른 황당파소설의 특징은 인간의 의화와 소인물의 고통, 공포의 정서를 다루며 황당한 정절과 진실한 세절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에 굳이 황당파소설이라고 이름 붙힐 수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이러한 특징을 너무나 잘 체현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주인공 방황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전도유망한 음악의 길을 걷다가 황금전이라는 녀자의 재부에 환혹되여 예술의 길을 떠나 속세의 길을 걷게 된다. 세상을 음악의 곡조처럼 아름답게만 보아왔던 주인공에게 있어서 갑작스레 들이닥친 상품경제시대는 물욕 명예욕 도전과 암투로 득실이는 가혹한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극도로 절망하고 방황하던 끝에 마침내 바다를 영원한 안식처로 정하고 몸을 던져 한 마리의 인어로 변한다. 작중인물들의 이름은 모두가 뚜렷한 상징성을 띄고 있다. 방황하는 예술가와 금전만능의 대표인물과 사회의 병페를 보아내는 대변인으로 나선 사색 깊은 기자를 방황(彷徨), 황금전(黃金錢), 철인(哲人) 등 이름으로 상징화 했다. 이야기는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황당한 이야기 속에 물질만능시대에서 생성된 갖가지 의식형태에 대한 고찰과 분석이 엄숙하게 깔려 있다.   3,초현실주의 소설- “천재죽이기”(도라지 95년 5호)는 우리 문단에서 보기 드문 쉐르알리즘소설이며 김혁의 대표작의 하나이다.소설에는 리상의 소설과 시가 여러 곳에서 얼굴을 내민다. 김혁은 리상을 문학에서의 우상으로 모신다. 리상은 전통문학에 대한 요 요 이다. 그처럼 김혁도 소설에서 우선 파괴와 반역을 앞세운다. 이 작품에서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 난다. 소설 소제목달기에서 처음으로 9자로부터 거꾸로 마지막 -1에 까지 이른다. 정상적 법규를 파괴함으로써 첫 시작부터 자기 소설이 쉐르알리즘 소설임을 선포한다. 후기 구조주의 대가 츠베탕 토도로프는 구조주의적 연구의 자기 파괴적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 김혁은 토도로프와 포옹한다. 주인공의 이름도 이왕과는 달리 영어로 되어있다. 남자라는 man. 필자의 독단인지 몰라도 주인공 man에 대하여 지식과 덕성으로서 골똑 찬 으로서의 인간이 아닐가고 생각해 본다. 이는 아이니 컬하게 붙인 이름일 것이다.소설은 환몽과 현실사이를 넘나드는 정절로 한 공무원이 겪고있는 불행한 삶을 남다르게 보여 준다. 사업에서도 실력가, 지식소유에서도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천재. 그러한 인간이 회사의 버림을 받고 녀편네의 버림을 받고 사회의 버림을 받는다. 천재로서의 응분의 대우를 받을 대신 모든 것을 다 잃고 이 시대 순결무구한 지식인의 비극적 운명을 작품은 무게있게 뼈아프게 펼쳐 보이고 있다. 그러면 김혁은 쉐르알리즘 소설을 쓰고싶어 썼을가? 아니다. 천재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천재를 살리기 위하여 이 작품을 썻던 것이다. 를 읽은 사람들은 작품에는 작자의 자화상 성분이 다분히 들어있지 않았나 느껴본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고 이 소설에서 김혁이 가장 빼여지게 완성하고있는 것은 정신적 가치에 가해오는 물질적 가치의 횡포를 질식과 단절을 상징하는 으로 예술적처리를 한데 있다. 작품을 읽은 이들이라며 누구나 하는 리상의 시구가 나오는 장절에서 주인공이 장면에서 숨막히는 무가내를 느꼈을 것이다. 주인공은 세상의 몰리해 속에서 천재로부터 정신질환자로 추락해 간다. 작자는 인간가치의 훼멸을 붓끝에 꿰 달고 세상에 흔들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비관적인 호소가 아니다. 비극을 통해 비극을 극복하고 지식본위시대를 찾으려는 적극적인 삶의 제스처가 작품의 맥락 속에 보인다.초현실주의에서 현실의 맛을 진하게 씹어보는 멋, 이것 역시 그만의 독특한 심미향연이 아닐가!   4,사이버 소설- “병독”은 우리문단에서 맨 처음으로 선을 보인 사이버소설이다. 언제나 새것에 민감한 김혁은 을 들고나와 사회의 을 없애려 시도한다. 은 불확실성, 몬따쥬수법,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불명확한 경계, 놀이성, 무작위성, 탈경전(脫經典) 등에서 추구를 보였기에 포스터모더니즘 계렬에 놓고 살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시종 꾀한 것은 사이버문학의 특징으로 되고있는 놀이성이고 무작위성이다. 그리고 몬따쥬수법이다. 하나 하나의 장면이 몬따쥬이며 놀이이며 작위가 없는 이 작품에서 모든 것이 바이러스에 걸려 추락한다. 작품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채팅 하면서 남긴 아이디고 되어있다. 애인 격이던 , 마음으로 추구하던 , 청매죽마, 딱친구 이들은 모두 주인공 의 곁을 떠나버린다. 돈 많은 남자와 붙어먹고 남의 컴을 어거지로 가져가고 일본남자에게 시집간다. 지어 애인의 애완견조차 죽어 버린다. 한마디로 떠오르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허무 속으로 추락해 버린다. 이들의 추락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병독은 표면으로는 컴퓨터에 있는 것 같으나 실질 상에서는 작품중의 매 인간의 머리에 잠복해 있다고 짚어 낸다. 신 세대들의 무작위한 놀이를 통해 기성세대들의 부박한 엄숙주의, 기성세대들이 세운 기존질서를 충격하고 풍자하고 있다. 이러한 배격과 풍자는 기성세대는 병들어 있다. 그 병은 배고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배픔은 식욕, 성욕, 물욕으로부터 오는 욕구불만일뿐더러 주요하게는 에서 비롯된 것이다. 은 신세대들의 질서없고 자유자재적인 생활상, 그 놀이성 속에 큰 상징적 의미를 띄고 있다. 작자는 사이버소설의 특징을 능란하게 살려 작품사이에 류행가요를 끼워 이야기의 맥락을 이어나가는가 하면 소제목 짜기에서도 컴퓨터 키보드의 모든 영어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에서 간과할수 없는 것은 신세대들만의 조야한 언어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언어관습으로만 볼 것 아니라 비뚤어진 기성질서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스트레스의 해소와 반발의 표현을 위한 재치 있는 구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사이버제재 소설에 무감각하다 할 수 있는 우리 문단에서 맨 처음 나온 사이버제재소설로서 은 이례적인 매력을 뿜고 있다.   5,공포 소설- 새로운 추구에서 지칠줄 모르는 김혁은 이번에는 또 조선족문단에서 맨 처음으로 되는 공포설 “산장” (도라지 2003년 1호)을 내놓았다. 공포계렬소설의 제1탄인 소설에 대한 창작담에서 김혁은 “우화적인 이야기를 공포라는 액자속에 담는 이러한 작업들에서 단 개인취미에서 발설된 렵기위주의 흥감질이 아니라 산업화에 동조한 피페해진 우리의 농촌풍경. 리흔붐이 사회에 끼치는 심각성, 문화대혁명이 남긴 원자병 같은 후유증, 경쟁사회에 일그러진 고단한 자아와의 만남, 불신 시대의 너나의 일그러진 심태 등 심각한 주제의 숨은 메시지를 작품의 분위기에 아우르는 군형적인 감각으로 도출해내 자칫하면 싸구려로 읽혀질 작품에 깊이 있는 울림을 부여하고자 한다.”고 피력했다. 소설가란 이야기 군이다. 이야기를 통해 비희고락을 발설하는 인간이다. 그 이야기가 구수하면 진짜 이야기 군이고 미미하면 엉터리라고 힐난을 받는다. 필자는 “산장을” 읽으며 김혁은 진짜 이야기 군이라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공포에 대한 탐구는 필요 적실하다. 사실 인간은 공포 속에서 사는 동물에 다름이 아니다. 공포 속에서 인간은 본질적 내함을 파헤치고 그로부터 현실 삶의 무게를 가늠해 보려는 작자의 의도는 기발하고 좋은 것이다. 그 시도가 창작개성이 무마되고 있는 우리 문학에 새로운 충격과 신선도를 알게 모르게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필자는 작품의 작은 허점을 아량하며 작품과 악수하고 싶다.   6, 대화체 소설- 마냥 열광적으로 생신 한 제재를 새로운 그릇에 담으려 꿈꾸기에 김혁의 작품에는 맨 처음이란 말이 많이 붙는다. 맨 처음으로 사이버소설을 썼는가 하면 맨 처음으로 공포소설을 썼고 이번에는 맨 처음으로 대화체 소설을 썼다. 중편소설 “화두”(장백산 2003년 3호)로 새로운 창작의 화두를 던졌다. 김혁은 담이 크다. 언감생심 서술이라고는 없이 순 말로만 된 대화소설을 썼다. 장난인가? 결코 아니다. 그는 문체의 이러한 창신을 통해 우리의 현실에 대한 우환의식이 담긴 대화를 끊임없이 펼친다. 그리고 그 대화 밖에서 각 인물 저 저마다가 겪는 각 류형의 이야기들을 만난다. 작품에서 김혁은 포스터모더니스가 아니라 알짜배기 리얼리스트로 주제를 밀어 나간다. 하지만 기법의 생신함은 작품 전체에 시종 관통된다. 기법의 생신함으로 무거운 주제를 깊이있게 갈파한 것이다.    상술한 작품 외에도 생태환경에 대해 환기시킨 “라이프 스페이스” , 의인화적 색채를 보인 “어떤 개의 순애보”,시나리오 특성을 채용한 “원죄”, 추리기법으로 이채를 보인 “요청”등등으로 좋은 작품들이 많으나 이미 임범송교수 전국권교수 윤윤진교수 김병활교수 등 분들이 세세한 평론을 가했음으로 이 작품들에 대한 평은 본문에 넣지 않았다. =========================================================== 김룡운 평론가  
1486    詩碑에 是非를 걸다... 댓글:  조회:4554  추천:0  2015-09-17
김소월, 이상화, 이육사, 한용운, 윤동주, 정지용, 이상, 백석, 김수영, 박인환, 서정주, 조지훈, 유치환, 박목월, 박두진, 신동집, 구상, 김춘수…. 대시인(大詩人)은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선 ‘국부(國父)적 존재’로 추앙받았다. 국어수업시간에 배웠던 국민적 애송시는 시인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나름의 위상을 가진 시인은 자기 고향을 대표하는 존재로 대접받았다. 전국적 인지도를 갖게 되면 ‘계관시인’으로 인정돼 예술원 종신회원이 되는 등 초특급 예우도 받았다.  사후에는 작고시인 시비건립추진위를 결성, 죽은 시인을 기렸다. 이후 문학관 건립은 물론 문학상도 제정했다. 이걸 본 시민은 시인을 한없이 부러워했다. 시인은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되는 줄로만 알았다. 시인이 시민을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해서 1948년 국내 최초의 근대 시비가 죽순문학회 주도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다. 바로 민족시인 이상화를 위한 시비였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시비 건립에 엄격한 잣대와 기준이 있었다. ‘아무리 유명해도 살아 있을 때는 시비를 세워선 안 된다’ ‘작고시인 시비도 일정한 세월이 지난 뒤 정말 세울 만한 가치가 있고 지역민과의 공감이 되는 시인으로만 국한해야 한다’는 불문율이었다. 그토록 엄격하게 세워지는 시비는 결코 졸속일 수 없었다. 대표시와 그 시를 적을 서예가, 시를 돌에 새길 조각가가 삼위일체가 돼 돌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시도 감동이지만 시비도 감동이었다.  그 시절 시인에겐 최소한의 지조와 염치 같은 게 있었다. 시인이 되기도 힘들었다. 아무나 될 수도 없었다. 검증된 자질이 요구됐다. 신춘문예와 추천 등을 통하지 않으면 시인이 되기 힘들었다. 일제강점기~광복~6·25전쟁~3·15부정선거~군부독재 치하, 시인은 시대정신과 동고동락했다. 시집에 만족하지, 감히 생전에 시비를 세운다는 발상을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선비들은 생전의 비석을 하나의 ‘수치’로 여겼다.  74년 5월19일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국내 생존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미당 서정주 시비가 전남 고창 선운사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선운사 동구’란 시를 새긴 것인데, 고창 라이온스클럽이 주도했다. 조금의 시비가 일었지만 미당이었기에 가능했다. 그 시비는 본격적 시비라기보다 선운사 분위기와 어울리는 조형물로 간주됐다. 하지만 생존 시인도 시비를 세울 수 있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0여년 우리 문단은 작고 문인 시비 세우기에 주력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세상은 달라졌다.  시비는 만인의 몫이 아니라 ‘누구의 몫’으로 권위가 추락했다. 예전에는 지사적 시인의 시대였지만 이젠 유명한 시인의 세상이 도래했다. 신문과 방송을 타고 굵직한 문학상을 받으면 단번에 1급시인이 된다. 김용택·안도현·정호승 같은 시인은 시단의 ‘특급엔터테이너’로 등극했다. 곧 문단파워를 누리고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도 받는다. 지자체도 유명 시인이 필요했다. 시를 관광상품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정표 같은 시비를 곳곳에 세운 것이다.  스토리텔링거리가 있는 유명 산·강·바다, 심지어 간이역까지 시비가 전주처럼 세워졌다. 전남 해남 땅끝마을 같은 데는 상징성 때문에 여러 유명 시인이 시비를 경쟁적으로 세워댔다. 심지어 시비 건립으로 사업을 하는 단체도 생겨났다. 김천시는 미당문학상을 받아 일약 스타가 된 문태준 시인을 위해 시인의 ‘생가 가는 길’이란 교통표지판까지 설치했다. 생존 시인의 시비 건립 문제 이상으로 고민해야 될 사안도 있다. ‘무조건 세워주자’ 식으로 치닫고 있는 작고문인 시비 건립 건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기준과 원칙 없이 진행되고 있다. 시집을 여러 권 내고 이런저런 문학상을 받거나 문학단체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작고하자마자 서둘러 추모비를 세워준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유족과 문인단체 관계자가 간청하면 지자체는 시비 건립용 공공부지를 슬그머니 내놓는다. 시인들 사이에 유명하면 그만이지 시민과의 공감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시인공화국’. 시인 수가 1만3천명에 육박했다. 대구시에만 1천여명의 시인이 북적대고 있다. 시인 되는 길도 어렵지 않다. 상당수 문예지는 시인을 상품처럼 찍어내기도 한다. 시비가 워낙 흔해지다 보니 유명 트로트 가수들도 앞다퉈 노래비를 세우고 있다. 우리 강산이 ‘비공화국(碑共和國)’으로 변하고 있다.  유명한 시는 돌에 새기고 위대한 시는 인간의 맘에 새겨야 한다. 돌은 1천년 가지만 인간의 맘은 영원한 탓이다. 퇴계 이황은 별세하기 나흘 전인 1570년 음력 12월4일,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카 영(寗)을 불러서 이같이 당부한다.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사양하라.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앞면에는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 晩隱 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향리(鄕里)와 세계(世系), 지행(志行), 출처(出處)를 간단히 쓰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銘)을 쓰도록 하라.” 당시 퇴계는 종1품 정승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사후에는 예조에서 도감을 설치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데도 퇴계는 유언으로 이를 굳이 사양했다. 그리고 단지 4언(言) 24구(句)의 자명(自銘)으로 자신의 일생을 정리했다. 퇴계가 특별히 스스로 묘비명을 쓴 것은 제자나 다른 사람이 쓸 경우엔 실상을 지나치게 미화한 나머지 장황하게 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춘호
1485    은둔속에서 핀 예술의 魂 ㅡ 에밀리 디킨슨 - 1775편 詩 댓글:  조회:2820  추천:0  2015-09-17
바람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에밀리 디킨슨(1830~1886)-     바람이 피곤한 나그네처럼 문을 똑똑 두드렸다. 주인처럼 나는 근엄하게 대답했다. “들어오시오.”  그러자 발 없는 손님이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에게 의자를 내주려 했으나 그것은 공기에게 소파를 내주는 것처럼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손님은 몸을 지탱시켜 줄 뼈가 없었다. 그가 말을 꺼내면 우거진 수풀에서 수많은 벌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지나갈 때는 소용돌이치는 얼굴과 손가락이 유리컵 안에서 떨며 도는 바람의 곡조처럼 음악소리를 냈다. 우리 집에 와서 경쾌하게 날아다니다가 소심한 사람처럼 그는  당황스러워하며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나는 홀로 남겨졌다.          바람에게서 뼈 없는 몸과 빠른 걸음을 보는 시인. 바람의 한 동작 한 동작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듣는 시인. 앉을 수만있다면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고 마실 수만 있다면 바람에게 차를 대접하고 싶어 하는 시인. 사소한 사물의 작은 움직임에도 온몸의 호기심이 일어나 자세히 관찰하는 모습이 개구쟁이 같으면서도 귀엽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사물에게 생동감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섬세한 감각이 놀랍다.     바람조차도 찾아오면 반갑고 함께 놀고 싶어 보내기 싫어하는 장면에서 깊은 외로움이 느껴진다. 마음으로는 친하고 싶어 하면서도 몸은 금방 숨어버리고 마는 바람의 모습이 시인을 꼭 닮은 것 같다.  시인으로 활동하지도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골방에서 시를 썼지만, 모든 사물과 자연이 친구였기에 마음은 풍요로웠으리라. 사후에 제목 없는 시 원고 이천편가량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제목은 임의로 첫 행에서 따왔다. -김기택(시인)               은둔 속에 핀 예술혼,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1886년) 그리고 1775편의 시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1800여 편에 달하는 시는 그저 혼자 내뱉은 독백 같았습니다. 사랑, 이별, 죽음, 영혼, 천국, 자연 등을 다룬 시는,  은둔생활 속에서 핀 꽃이었나 봐요. 그는 내내 고독했지만,  그 고독은 그의 모든 것이었던 시를 잉태한 동력이었습니다. 시와 고독을 평생 친구로 곁에 두고 지냈던 이 사람, 영문학사상 최고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입니다. 이상하고 의외의 일이죠? 그가 살아서는 별 볼 일 없는 시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에요. 하긴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그의 시를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겠지요. 에밀리를 얘기할 때, 가장 흔히 따르는 것은, 평생 독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독신으로 살았다는 것이 그닥 부각돼야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을 인류보편의 것으로 인식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독신생활하면서 시 짓기에만 몰두하다시피 한 그의 행보는, 호사가가 아니더라도 입방아에 올릴 수 있는 호기심거리가 될 수 있었겠죠. 마치 시와 결혼한 듯,  자신만의 공간에서 치열한 문학적 열정을 불태운 그였기에, 보통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의 궤적은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에밀리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엠허스트에서, 변호사 아버지 에드워드 디킨슨과 에밀리 노크로스의 둘째 딸로 세상과 접촉했습니다. 잘 보시면, 그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하나씩 딴 것이죠.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신학교에도 진학했지만,  그는 보수적인 청교도 신앙에 그닥 흥미를 느낀 것 같진 않습니다. 청교도 정신부활을 위한 '영적대각성운동'이 있었을 때도, 그는 되레 청교도 신앙과 종교적 구원에 대한 회의를 숨기지 않았으니까요. 에밀리를 에워싸고 있던 종교가 시작(詩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 반면, 한 만남이 그를, 그의 시상(詩想)을 일깨웠습니다. 설핏 짐작 가시죠?  맞아요. 역시나 사랑. 독신이었다지만, 설마 그가 사랑 한번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진 않으셨죠? 아버지가 하원으로 당선돼,  그의 가족은 1854년부터 이듬해까지 워싱턴에서 살았는데,  필라델피아의 한 장로교회에서 만난 찰스 워즈워스 목사를 만났습니다. 찰스 목사는 스승과도 같았습니다. 문학적인 설교와 칼뱅주의에 입각한 그의 웅변이,  에밀리의 머리와 마음을 흔들었던 거죠. 그것은 하나의 지적도전과도 같았고, 시작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받았고,  워싱턴을 떠나 다시 엠허스트로 돌아간 에밀리를 찰스 목사가 찾기도 했습니다. 에밀리는 여러 글에서 그를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적기도 했어요. 그러나 역시나 장벽은 존재했죠. 찰스 목사는 기혼자였고, 그가 1861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로 옮기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났어요. 에밀리는 그를 정녕, 사랑했나봅니다. 친구부부와 동생에게 실연의 아픔을 토로했고, 더더욱 시에 매달렸습니다. 사랑의 아픔 때문인지 시는 봇물처럼 흘러넘쳤고, 좌절된 사랑으로 둘 곳 없는 마음은 작품 속에서 영적인 결합을 이뤘습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였을까요. 실연을 겪고 난 뒤, 그러니까 30세 이후 은둔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흰 옷만 입고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뉴잉글랜드의 수녀'라는 별명도 그래서 지어졌습니다. 시작도 계속했으나, 그는 출판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생전에 불과 7편의 시만 발표했을 정도로,  그는 철저히 고립된 속에서 시와 함께 했어요. 물론, 에밀리에게 사랑이 한번만 거쳐 간 것은 아니지만, 그는 독신생활을 청산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아내를 잃고 홀로 된 로드 판사와도,  사랑을 나눴습니다. 두 사람의 서신에서도 서로 사랑했음이 충분히 드러나 있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독신생활을 버리지 못해,  그의 청혼을 거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그러나 1884년 로드 판사가 죽자, 실의에 빠져 있던 에밀리는,  결국 건강 악화로 2년 뒤인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겪은 사랑의 아픔, 그의 전부였던 시도,  그를 더 이상 지탱시켜주지 못했나 봅니다.     에밀리가 죽은 뒤, 그의 동생이 1775편에 달하는 시를 묶어 발표했습니다. 그의 시는 1890~1945년 동안 8권의 시집으로 묶여 출판됐고,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시들은 20세기에 와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어요. 그는 겉으로 보기엔 은둔자였지요. 가사 일을 끝내고 이층 방안에서 시작에만 몰두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시피 했으니.  그러나 시와 편지를 보자면 열정적이고 재치있는 예술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엔 친밀한 언어로 생과 죽음, 영원과 자연 등에 대해 무한한 상상과 사색, 사랑과 이별을 담았습니다. 그의 예술혼은 그래서 아직도 후세인들에게 전파되고 입에 오르내리는 것 아니겠어요?!
1484    조선족문학의 개념에 대하여 댓글:  조회:4819  추천:0  2015-09-17
  조선족문학의 개념에 대하여 /장춘식   1. 문제의 제기   조선족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개념과 범위는 어떻게 확정할것인가? 얼핏 생각하면 너무도 상식적인 질문이 될지도 모른다. 조선족이 만들어낸 문학적 생산물이라고 간단히 대답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족문학의 개념과 범위를 확정하고자 하면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중국조선족문학, 조선족문학, 조선민족문학, 간도문학, 만주문학, 재만문학, 이민문학, 망명문학, 대륙문학, 동포문학 등이 있는가 하면 지역 명칭에 “조선인”, “한인”, “동포”, “교포” 등의 개념이 첨부되여 또 수많은 개념을 파생시키고있다. 앞의 세 개념은 주로 중국에서, 특히 조선족학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고 그 외의 것은 주로 해외에서 많이 사용되는 개념인데, 여기서는 국내 조선족학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념, 즉 “중국조선족문학”, “조선족문학”, “조선민족문학” 등을 중심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2. 조선족문학과 관련된 개념들   윤윤진은 조성일․권철 주편으로 된 ꡔ중국조선족문학사ꡕ 등에서 사용된 “중국조선족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 리유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까지는 “조선족”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건국 전후의 중국내 조선인문학은 《작품의 제재, 주제 나아가서는 거기에 반영된 의식 등 면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있다》는 점을 들고있다. 그러면서 《광복전 문학을 조선족문학이라고 호칭하기보다 조선인문학이라고 하는것이 더 적절할뿐만아니라 사실에 접근된다고 생각한다. 더우기 조선족이란 호칭이 한반도에 거주하지 않은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인을 호칭하는 대명사로서 그 전시기와는 좀 다른 성격을 갖고있다는 여건을 파악할 경우 사정은 더 자명해지는것이다.》1) 고 지적한다. 이런 견해는 윤윤진 한사람의 견해만은 아닌것 같다. 안수길이나 현경준, 김조규 등 건국전 이주민 문단에서 상당히 활약하다가 광복을 맞으며 한국이나 조선에 ぐ?작가들의 문학적 업적을 조선족문학사에서 다루기를 꺼려하는 학계의 상황을 감안하면 윤윤진의 이러한 견해는 상당히 대표성을 띤다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앞에서 든 건국이전의 우리 문학을 조선족문학의 개념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윤윤진의 견해에서 요점은 두가지다. 즉 “조선족”이라는 개념의 내외연과 건국전후 우리 문학의 차이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분명한 시기는 나와있지 않으나 “조선족”이라는 민족명칭이 정식 붙여진것은 건국직후인것으로 알려져있다. 지금은 공식적인 혹은 법적인 명칭으로 굳어졌고 조선이나 한국에서도 이 명칭은 중국에 거주하는 단군의 후예를 지칭하는 기호로 통용되고있기도 하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있기전까지는 “조선인”, “선계만주인”, “만주조선인” 등으로 불려져왔다. 그때문에 현재도 한국에서는 이런 명칭들이 자주 쓰이고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조선족에 대해 “조선족”이라는 명칭 외에도 “재중동포”, “중국동포”, “중국교포” 2)등의 명칭을 사용하고있다. 이는 한국인의 립장에서 우리 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는 “단군의 후예”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경우 윤윤진이 건국이전의 우리 문학의 개념을 “조선족문학”이 아닌, “조선인문학”으로 정립하여야 한다는 견해는 중국적립장에서 력사를 파악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가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같은 차원에서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법적인 개념이 아닌, 중국에 거주하는 “단군의 후예”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사실을 확인할수가 있다. 그렇다면 윤윤진의 지적과는 달리 “조선인문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족문학”이라 개념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건국전이나 건국후를 아울러서 사용했을 경우 하나의 관통된 전통을 가진 민족공동체로 인식할수 있다는 리점이 있다. 특히 민족정체성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민족공동체적 인식은 우리의 전통성 확인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큰 력사적흐름에서 보았을 때 건국전이나 건국후를 구분하는것은 별로 의미가 없기도 하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요인이 작용하고있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전과 건국후의 문학이 그 특징상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것은 사실이다. 이점은 전반 중국문학의 경우와 별 다르지 않으며 우리의 경우 1949년이 계기가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1945년 8.15해방이 뚜렷한 분기점이 된다고 보는것이 나을것이다. 그렇다면 1949년을 분기점으로 한 중국문학은 건국전과 건국후의 문학이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고 하여 건국전의것은 중국문학이 아니고 건국후의 문학만이 중국문학이라 할수 있을까? 그럴수는 없을것이다. 건국전후 문학의 차이는 이데올로기의 변화에서 기인된 문학의 변모를 말해줄뿐이다. 조선족문학 역시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또 창작주체의 물갈이를 리유로 건국전후 문학의 차이를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1945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우리 문단의 창작주체는 완전히 새사람으로 바뀌였다. 김창걸과 리욱 외에 소수 무명작가만이 례외가 될뿐 건국전 조선족문단에서 활약하던 창작주체는 거의 전부가 반도의 남과 북 내지는 다른 나라로 이주해갔다. 그 빈 자리를 차지한 창작주체는 주로 공산당 계렬의 지식인들과 건국후 문단에 진출한 신인들로 채워졌다. 이점은 전반 중국문단의 경우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문학의 전통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수가 있을까? 우리는 건국후 우리 작가들의 구성으로부터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있을것 같다. 건국후 우리문단의 창작주체인 작가들은 크게 두가지 류형으로 분류할수 있다. 첫째는 공산당 부대나 항일군에서 문예활동을 하던 문예전사들이고 둘째는 이주민의 후예들이다. 이주민의 후예로서 건국전 우리 문학의 영향으로 문학적 수양을 닦았으리라는 사실은 별로 이의가 없을줄 안다. 당시에는 조선문학의 영향도 상당 정도 있었을것으로 보이므로 이들이 작가로 성장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문학적전통은 조선문학과 우리 이주민의 문학이였음은 당연한 사실이라 하겠다. 문제는 건국초기 작가 대부분이 이러한 이주민의 후예가 아니였다는데 있을것인데, 가령 의용군 문예전사라 할수 있는 김학철의 경우 그의 문학적 수양은 주로 조선에서 형성되였고 의용군에서 활동하면서 점차 성숙되였다고 할수 있다. 다른 작가들의 경우도 대체로 상황은 비슷하다. 그렇다고 이들을 조선족문학에 편입시키지 않을수는 없을것이다. 한 지역문학, 혹은 민족문학의 성격을 이루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다. 창작주체, 소재원, 창작객체(즉 독자그룹) 등이 그 중심이 된다 하겠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것은 창작주체와 창작객체 두 요인이 될것이다. 앞에서 창작주체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해명이 되였으리라 믿고 다시 창작의 객체 즉 독자그룹의 경우, 이 또한 수용미학적 견지에서 보면 중요한 요인이 아닐수 없다. 독자의 수용자세와 반응이 창작주체의 창작적 개성과 경향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결정적영향을 미친다고 보아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그런데 의심의 여지도 없이 우리 문학의 독자들은 그 다수가 건국전이나 건국후를 막론하고 이주민의 후예로 이루어진것 같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 “조선인”이라는 개념과 “조선족”이라는 개념의 련관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가령 “조선”이라는 국명, “한국”이라는 국명과 우리 민족 명칭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두 국명은 주지하는바와 같이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의해 한 겨레가 두 국가를 설립한 경우다. 그런데 우리 겨레를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보는데는 양국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명칭은 다르다. 조선에서는 “조선민족”으로 부르고 한국에서는 “한민족”으로 통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부르는 “조선민족”은 북쪽의 국민만을 지칭하고 “한민족”은 남쪽의 국민만을 가리키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서로가 반도의 민족을 아울러서 지칭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들이 부르는 “조선민족”이나 “한민족”은 현재 반도 남북에 거주하는 민족만을 지칭하는것이 아니라 남북 모두의 선조들까지를 아울러서 지칭한다. 물론 광복전 “만주”땅에 거주한 우리 민족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명칭을 사용한다. 조선에서는 “조선인”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재만한인” 혹은 “재만조선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이는 이북의 국명인 “조선”이라는 개념을 피하려는 의도와 “한국”이라는 이남의 국명 개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동시에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은연중에 일제하의 “조선총독부”라는 개념을 피하려는 의도마저 포함하고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광복전 “만주”에 거주한 우리 민족을 “조선민족”이나 “한민족”으로 호칭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냐하면, “조선민족”이나 “한민족”이라는 명칭은 력사적으로 정통성을 부여한 개념이고 “재만조선인”이나 “재만한인”이라는 명칭은 특정한 경우에만 사용되는 특수한 개념임을 말해주는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족”이라는 명칭과 “재만조선인” 혹은 “조선인”의 경우, 위“만주국” 당대에 우리 민족이 “재만조선인”, “선계만주인”으로 불렸던 력사적개념을 사용한다(경우에 따라서는 당연히 사용할수 있다)고 하여 정통성을 부여한 개념인 “조선족”의 개념을 사용하여서는 안된다는 리유는 없는것이다.   3. 건국전 우리 작가들의 주장   확장된 조선족문학 개념의 타당성 여부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건국전, 그러니까 윤윤진이 “조선인문학”으로 분류하고자 했던 그 당대 우리 작가들의 견해를 살펴보는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것 같다. 이러한 당대 문인들의 인식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례가 바로 당시 조선족문학의 거의 유일한 발표지면이였던 《만선일보(滿鮮日報)》에서 행해진 “만주조선문학건설신제의(滿洲朝鮮文學建設新提議)”라는 주제의 지상토론이라 하겠다. 이 지상토론에서는 1940년 1월 12일자에 먼저 《기자서문》이라는 것을 발표하고있는데 그 서문에서 기자는 《이곳에 사는 우리 수효가 百萬을 넘으며 우리에게는 말이 잇고, 글이 잇스니 거기에 따라서 文學이 업슬 수 업다.》고 하고는 《滿洲에 朝鮮文學을 建設하랴면 어떤 方面, 어떤 角度에서 어떤 形式 어떤 手法 等等으로 着手하며 開拓해나가야 될까. 여기에 對하야 滿洲안에 게신 여러분의 意見을 綜合하여 文學人의 參考에 이바지하며 우리 文壇의 向할바 길을 檢討해볼까 한다.》고 그 취지를 밝히고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당시 만주조선인문학이 하나의 독자적인 문학임을 전제로 하고있다. 그번 토론에는 당시 문단의 다수 문인들이 참여했는데 그 첫 토론으로 게재된 《滿洲朝鮮人文學의 特殊性》에서 황건(黃健)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있다. 《滿洲朝鮮人文學이란 끗까지 ‘朝鮮文學’이며 滿洲에 와잇는 滿洲國鮮系國民, 卽 滿洲朝鮮文學人만이 이룰수 잇는 文學이다. 다시 말하면 滿洲라는 國家와 그 歷史와 特異한 性格만이 가질수 잇는 獨自的文學, 卽 滿洲文學이여야 할것이며 그러기 爲하여서는 朝鮮文學의 傳統을 가장 잘 消化攝取하여야만 될것이다. 이로써만 비로서 그의 圓滿한 成就가 期待될것이다.》3) 그 구체적 추진의 방법으로 황건은 《1. 當面問題로 滿鮮日報를 通하여 有機的 文壇聯結을 圖謀할것》, 《2. 協和會文化部文藝班에 加入活動할것》, 《3. 同人誌의 出現을 企圖할것》, 《4. 作品集의 出版을 劃策할것》, 《5. 先輩大家들의 後輩를 爲한 參加와 引導를 바랄것》 등을 제안하고있다. 그는 만주조선인문학이 조선문학의 전통을 계승하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조선내 조선문학과는 구별되는 독자적문학 즉 만주문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으로 독자적문단의 결성 혹은 형성을 제안하고있는것이다. 윤도혁(尹道赫)은 《滿洲內에서 制作된 幾篇의 作品을 檢討해볼 때 朝鮮內에서의 文學形式, 거긔다가 若干의 滿洲的色彩를 糊塗하엿고 鄕愁的인 情緖를 加味하여노흔 作品이 大部分인것이다.》 라고 하여 아직은 독자적문학 형성이 미비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數年前의 移民文學이 現在는 開拓文學이 될수 잇》다고 하여 전자를 소위 “이민문학”으로 보고있는것 같다. 《昔日의 移民이 現在 開拓民으로 變遷을 보게된것이 時代의 要請》이라고 한것을 보면 또한 앞으로의 문학이 “개척문학”으로 되여야 한다는 의미인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독자적문학을 제창한데서는 황건과 별 차이가 없다. 《文學에 잇서서도 우리의 三十年間 傳統을 無視하야서는 안될것은 煩說을 要치 안흠으로 이것을 母體로 하기는 하되 더 廣汎한 世界觀이 잇서야 하고 좀더 스케-일이 큰 主觀을 가저야 할것이며 滿洲라는 特異性을 뚜렷하게 나타내지 안흐면 안될것이다.》4) 라고 하여 《滿洲라는 特異性》을 강조하고있다. 그런데 이 만주의 특이성이라는것을 그는 만주땅의 광활함과 수많은 민족의 잡거로 인한 생활의 특이미묘(特異微妙)함으로 파악하고있다. 《他民族과 協助生活을 하게 되는 運命에 잇게 됨으로 그만치 우리의 主觀이나 世界觀이 커》진다는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신서야(申曙野)는 《各民族이 제각금 所有하고잇는 固有의 傳統과 自主性을 尊敬하며 서로 理解하며 서로 民族的 苦痛을 除去하며 無差別하여 바야흐로 民族間의 紐帶를 結聯식혀 同化하며 때로 和하여 分化連綿하여 繼續하는데서만 비로소 民族間의 眞實한 協和는 永續性을 가질것이다.》5) 라고 하여 민족협화의 문제로 해석하고있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협화의 사상이 《滿洲國은 王道政治를 基礎로 한 民族協和의 國家인만큼 이곳에는 一强力民族의 獨斷이 存在할수 업스며 또한 過去의 米國의 建國當時와 갓치 宗敎的 信念下에 母國을 버리고 自由의 종소리에 憧憬하여 달여온 民族도, 더욱 母國延長을 賦與하는 殖民地도 안》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있다. 어쩌면 현실인식의 자세가 체제영합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없지 않으나 시각을 바꿔 살피면 오히려 리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즉 비록 만주국이라는것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정부이긴 했으나 형식적으로는 하나의 독립국가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의 문화인으로서는 주어진 환경에서 이주민의 생존문제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을것이다. 일제의 감시밑에서 오족협화라는 국책을 최대한 리용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획득해야 했던것이 당시 지성인들의 립장이 아니였을까 한다. 김귀(金貴) 역시 《諸民族協和의 精神을 根幹으로 하여 超民族的인 特異의 滿洲國民文學의 樹立에 究極目的이 잇슬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滿洲朝鮮人의 文學은 朝鮮內地文學의 延長도 되지 못하며 模倣도 아님을 말하고십다.》6) 고 하여 역시 독자성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좀더 大陸農民의 創造的精神, 말하자면 深刻한 人間的精神의 모든面을 分析하고 綜合하여 그것으로서 農民文學의 世界를 만드러야 할것을 밋는바이다.》고 하면서 그 창작방법에서는 《어떠한 架空的 妖術도 물리치며 어떠한 虛構도 드려놋치 말고 生新한 寫實主義方法으로 典型的인 滿洲農民의 性格을 創造》할것을 주장하며 《보담 더 長江流水와 갓흔 自由奔放한 飛躍으로써 가장 眞實하게 그 文學建設을 꾀하여야 할것》7) 이라 하여 진실성과 자유분방성을 강조하고있다. 박영준(朴榮濬)은 구체적인 지적은 하지 않고있으나 만주가 조선인의 일시적 거주지가 아니고 뼈를 묻고 살 영주지가 되였기때문에 만주조선인문학의 필요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가튼 民族이 가튼 言語를 使用하며 두가지 文學을 가질수 잇느냐가 問題일것이나 이것은 滿洲朝鮮人文學의 槪念을 밝힐 때 自然 解決될것》8) 이라 하여 역시 독자적 문학이라는데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볼수가 있다. 이상 제씨들의 주장을 우리는 조선문학의 전통과 “만주”현실이라는 이중성을 띤 독자적문학(黃健), 다민족의 협조공존과 오족협화라는 건국정신(윤도혁, 신서야); 대륙적 농민문학과 자유분방한 풍격(金貴) 등으로 귀납할수 있을것 같다. 만주조선인문학을 하나의 독자성을 가진 문학임을 강조한것이 이들의 공통된 견해인데 그렇다면 그 독자성이라는것이 무엇일까? 신서야의 다음 기술이 이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는 《우리는 이에서 우리 文學이 後天的으로 가지고 잇는 性格―自主性을 固執發揚하며 아울너 先天的 性格―朝鮮의 文學傳統을 批判的으로 繼承하여 兩者를 有機的으로 結合抑揚식혀 渾然一體의 完全한 一個의 性格을 形成》하여야 한다고 보았고 《今後 우리의 文學의 形態는 如上의 根本的 性格을 基準으로 할 때 大陸文學, 建設文學 及 移民文學 其外 엇던 形態를 가출지는 現階段의 文學人의 眞摯한 檢討와 氣焰의 輩出로써 決定된 問題》라고 하여 구체적인 성격 규명은 피하고있다. 그는 특히 만주조선인의 생활적근거가 태반수 개척민에 관한것이라고 하여 만주조선문학이 곧 농민문학이라야 한다는것은 너무 협애하고 근시안적편견이라고 비평하면서 이는 《어듸 까지던지 文學人 自體의 敎養形態와 性格, 素質 如何에 依하여》《滿洲文學으로써의 獨自的 性格을 體得創造할수》 있는것이라 보고있다.9) 그러니까 이들 건국전의 우리 작가들은 자신의 문학을 후천적성격으로서의 자주성과 선천적성격으로서의 조선문학의 전통이 비판적으로 계승된, 량자가 유기적으로 결합억양(結合抑揚)되여 혼연일체를 이룬 《完全한 一個의 性格》을 가진 문학으로 인식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 당시 조선내 기성문인들의 견해도 대동소이하였다. 《만선일보》에서 조선내 기성문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 이점을 잘 알수 있다. 설문조사는 다음과 같은 3개의 질문으로 진행되었다.   一. 滿洲內에서 朝鮮文으로 發表된 作品을 읽어보신 일이 게십니까 一. 貴下께서 滿洲에 對한 作品을 쓰신다면 어느 方面에서 取材하시겟습니까 一. 將來 할 滿洲朝鮮文壇에 對한 希望을 말슴해주십시오.   여기에서 두번째와 세번째 질문이 이들의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견해와 관련이 될것인데 《滿洲朝鮮文學을 말함》이라는 표제로 1940년 1월 16일부터 2월 2일까지 5회에 걸쳐 도착순으로 발표된 유진오, 리기영, 안석영, 박영희, 최정희, 리찬, 방인근, 채만식, 로자영 등의 회답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이민생활과 거치른 만주땅을 배경으로 한 이주민생활, 그중에서도 이주농민의 생활을 그리고싶다고 대답한 작가가 다수이고 두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대부분 작가들이 역시 이주민의 생활반영과 스케일이 큰 대륙적인 문학을 희망한다고 대답하고있다. 그중에서도 채만식은 “朝鮮的인 滿洲性”을 가진 문학을 주장하여 만주조선인작가들의 주장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니까 전래의 민족적인 전통을 토대로 새로운 생활환경에 적응될수 있는 새로운 문학을 개척해야 한다는것이 만주조선인작가들이나 조선작가들의 공통된 인식이 되는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당시 조선본토의 문학과는 어느모로든 구별된다고 생각했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러한 인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있는것이 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대지》에 쓴 렴상섭(廉想涉)의 서문이다. 《여긔에 나타난 作家 全部가 반드시 父祖代부터 이따에 뿌리박은 所謂 二世 三世가 아닌것이며, 個中에는 어제 越江하엿다가 來日이면 도라갈 사람도 잇슬것이나, 이 作品들만은 亦是 호미와 박아지와 피땀 以外에 아모것도 가진것 업는 “墾民”속에서 자라난것이다. 그속에서 呼吸하고 그속에서 살찌고 기름진 詩魂이 나흘수 잇는 滿洲朝鮮人의 文學이다. 一望無涯의 荒漠한 高梁바테서 진흙구덩이를 후벼파고 도다나온 開拓民의 文學이다. 開拓의 文學이라 하야 自卑하거나 侮蔑을 느끼지는 안흘것이다. 物質로 그리함과 가티 文化의 遺産을 분명히 지니지 못하고 現代의 文明文化에서 떠러저와서도, 오늘날 朝鮮 本土의 그것에 遜色업는 文藝의 싹시 도다낫다는데에 도리혀 커다란 矜持가 잇는것이다.》10) 그리고 신형철(申瑩澈)은 이 작품집의 편찬과 관련하여 《 뒤에》에서 《現地居住人의 現地取材의 現地作品으로서 現地發表를 中心 삼고 原稿를 모으기로 햇습니다.》고 하여 현지성을 특별히 강조하고있다. 물론 작품집에 수록한 작품도 모두 그런 원칙에 의해 편집되였다. 역시 조선본토의 문학과는 구별되는 문학으로 생각했다는것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당대 문인들이 자신의 문학의 독자성을 특별히 강조한 리면에는 정체성인식 즉 일정한 공동체에의 소속감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다고 하겠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조선족문학을 조선문학이나 한국문학과 구별하여 인식하고있는것과 같은 차원이다. 이는 1930-40년대에 우리 문단에서 활약하다가 건국직전에 조선이나 한국에 돌아간 작가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주민작가들의 문학은 우리 문학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광복후 조선이나 한국에 나가 그곳에서 다시 문학활동을 계속하여 한국문학사나 조선문학사에서 다루어진(그들의 광복전 문학활동을 포함하여) 작가들의 문학을 “조선족문학사”에서 제외시키거나 “조선족문학”이 아닌 “재만조선문학”이나 한국작가(혹은 조선작가)들의 “재만시기의 문학”으로 보는 견해는 합리성이 없다 하겠다.   4. 결 론   이제 지금까지 론의된 내용을 총정리해야 할 때가 된것 같다. 이상에서 필자는 “조선족문학”이라는 개념의 합리성을 실증하기 위하여 우리의 건국전문학과 건국후문학의 명칭을 따로따로 구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윤윤진과 그 류사 주장들을 론박했다. 이상의 론의를 종합해보면 중국조선족문학, 조선족문학, 조선민족문학과 윤윤진이 주장한 조선인문학 등 여러 개념중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은 “조선족문학”으로 대체하는것이 좋을것 같다. 왜냐하면 “조선족”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우리 민족 공동체는 중국에밖에 없기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고려인”,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 미국에서는 “재미한인” 하는식으로 불려 조선족과는 구별되는것이다. “조선민족문학”이라는 말은 상당 정도 불확실성을 띠고있기때문에 우리의 문학을 아울러 표현하는데는 편하지만 조선에서 사용하고있는 “조선민족”이라는 개념과도 관련되고 또 “한민족문학”이라는 말과 더불어 한반도를 포함한 전세계 우리 겨레의 문학을 지칭하는 말로 인식되기가 십상이기때문에 역시 적당치는 않은것 같다. 따라서 우리의 립장에서 볼 때 “조선족문학”을 건국전이나 건국후 할것없이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문학의 개념으로 사용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겠다. 그러면 조선족문학의 범위는 자연히 건국전문학과 건국후 현재까지의 우리 문학, 즉 중국땅에서 이루어진 모든 우리 문학을 포함하게 되는것이다. 이를 뒤받침해주는것은 바로 정체성의 원리이다.   주 석 -------------------- 1) 윤윤진, 「중국조선인문학연구에 나서는 몇가지 문제」, 《문학과 예술》, 1993년 6호. 2) “중국교포”라는 말은 분명 잘못된 호칭이다. “교포”라는 명칭으로 불릴수 있는 “조교”들이 얼마간 있으나 현재 사용되고있는 “중국교포”라는 명칭은 이들 “조교”들만을 지칭하는것이 아니기때문에 오류가 분명하다. 3) 黃健, 「滿洲朝鮮人文學의 特殊性(中)」, 1940.1.13. 4) 尹道赫, 滿洲朝鮮文學의 傳統性과 特異性(上), 1940.1.17. 5) 申曙野, 「滿洲朝鮮文學의 性格과 特異性(上)」, 1940.1.30. 6) 金貴, 「農民文學의 方向으로(上)」, 1940.1.20. 7) 金貴, 「國民文學으로부터 世界에 進出토록(下)」, 1940.1.22. 8) 朴榮濬, 「作家의 輩出과 讀者의 向上을 緊急動議(上)」, 1940.1.23. 9) 申曙野, 「滿洲朝鮮文學의 性格과 特異性(下)」, 1940.1.31. 10) 廉想涉: 申瑩澈 編, 《싹트는 大地》, 新京, 滿鮮日報社, 1942.   [출처] 조선족문학의 개념에 대하여|작성자 반벽거사
1483    김철 / 장춘식 댓글:  조회:5150  추천:0  2015-09-17
추억과 사랑 그리고 허무의 미 -2000년대 김철의 시 장춘식   1. 시작하면서   김철은 해방후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시인중의 한사람이다. 1955년 서정시 《지경돌》로 문명(文名)을 세상에 알린 이래 수많은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시창작을 멈추지 않고있다. “기발한 착상,강렬한 시대정신, 풋풋한 시형상 그리고 세련된 언어”라는 평가는 김철의 출세작인 《지경돌》에 대한 평가인 동시에 그의 초기작품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시집 《산향길》에 수록된 서정시들은 1979년이전시기의 김철의 시풍격을 보여주고있는바 명쾌한 격조, 랑만적인 색채, 풍부한 상상력, 다정다감한 언어, 류창한 운률이 그대로 보존되고있다”는 개혁개방 이전시기 시에 대한 평가는 사실상 《지경돌》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물론 개혁개방후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시는 여러모로 변모를 시도하고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1980년대 김철의 시는 점차 싸구려랑만주의 시풍에서 해탈되여 참사실주의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생활의 표층에 대한 기계적인 모방이 없어지고 인생과 시대에 대한 심층사고가 많아졌다. 시표현수법이 보다 개방적이고 다양해졌으며 시인의 직관적인 통찰력에 기초한 간결하고 생동하고 개성적인 시형상을 창조하였다.”는 평가에서 그러한 변화의 모습을 감지할수 있다. 여기서 “싸구려랑만주의 시풍”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해방후 개혁개방이전까지 우리 문학의식의 미숙상태에서 비롯된 리상주의적인 시풍을 지적하였을것인데 이는 김철시인 한사람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전반 조선족문학의 문제였다고 해야 옳을것이다. 그렇다면 로년기에 들어선후 씌여진 2000년대 김철의 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이고있을까? 본고에서는2003년부터 2007년까지 문예지들에 게재된 김철의 시작품을 통해 김철시인의 새로운 시적시도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삶의 허무와 그 겸허한 수용   허무는 인간의 영원한 과제중의 하나이다. 이는 생명의 한계성과도 관련되거니와 문학작품으로서도 피할수 없는 주제분야가 된다. 특히 중로년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삶에 대한 허무의식은 점차 강해지며 그래서인지 2000년대 김철의 시작품중에는 삶의 허무를 주제로 다룬 작품이 많다. 간접적으로 다뤄진것까지 하면 본고에서 론의대상으로 삼은 작품 다수가 이러한 허무의식을 다소간 내포하고있을 정도이다. 아무래도 시인이 이제 여든살에 가까운 로인이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은것 같다. 어떤 측면에서 허무에 대한 서글픈 표현은 인간의 마음이 약해졌다는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렇기때문에 일부 소극적인 정서를 띤다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 공동의 과제라는 측면에서 시문학이라고 이를 외면할수가 없다. 문제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허무의 상황에 한탄하고 거기에 그냥 젖어버리고마느냐 아니면 이를 겸허히 수용하고 적극적인 극복의 의지를 보이느냐에 있을것이다. 김철의 2000년대 시작품들은 이 량자를 동시에 드러내고있다. 먼저 《리발소에서》라는 작품을 보자.   리발소 땅바닥에 내 하-얀 머리칼이 떨어진다 소리없이 쌓이는 서글픔 내 생이 잘린다 리발소에 드나드는 동안 이렇게 내 소년이 잘리고 청춘도 잘리고 지금은 가을, 늦가을 퇴색한 황혼이 싹둑싹둑 잘려나간다   내 생명을 잘라먹는 시간의 가위는 멈출줄을 모르는데 비상과 추락의 틈서리에서 만신창이 된 나의 꿈은 세월의 아쉬움 한자락 붙잡고 운다, 내- 삶이 먹혀가는 잔인한 리발소에서…   세월의 무정함과 삶의 무상함을 리발소에서 잘려나가는 머리칼에 비유하고있다. 여기서 특히 “리발소 땅바닥에”떨어지는 “내 하-얀 머리칼”은 “내 생이 잘린다”는 표현에 의해 잘리는 머리칼과 줄어드는 삶이 등치되였다. 소년과 청년, 중년, 로년이 머리칼을 자르는 가위에 의해 잘려나갔다고 믿는것이다.이는 일반인이 다 리해할수 있는 생명의 허무감이라 하겠다. 시인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비상과 추락의 틈서리에서/만신창이가 된 나의 꿈은/세월의 아쉬움 한자락 붙잡고”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꿈꾸었던 꿈을 다 이루고 복된 삶을 누리며 인생의 황혼에 이르렀다면 삶은 조금 덜 허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삶은 그 시대 다수인, 적어도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혹은 조선족인들이 겪었던것과 마찬가지로 “비상과 추락”을 거듭하며 젊은날 꾸었던 꿈은 “만신창이가”되였다.그래서 삶이 더욱 허무하다고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송화강변》이라는 작품에서는 그러한 력사의 기억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면서 좀더 서글픈 느낌을 준다.   송화강변 눈덮인 허허벌판 옛날, 만주 올 때 아버님 지게우에 달랑 앉아있던 깨진 밥솥 하나, 그리고 울보 내 녀동생, 지금은 모두 다 가버렸다   홀로 남은 내 가슴의 허허벌판 얼어붙은 추억은 녹을줄을 모른다…   여기서 화자는 이주민이다.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난을 겪고나서야 오늘의 조선족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안다. 렬악한 동북땅의 자연환경은 “눈덮인 허허벌판”으로 묘사되였다. 그렇게 춥고 견디기 힘든 땅이 이민지요 이주민은 그러한 불모의 땅에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가꿔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함께 왔던 녀동생도 가버렸으니 아버지, 어머니도 벌써 다 가버렸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화자는 이제 홀로 남았고 그러기에 가슴이 옛날 만주땅처럼 “허허벌판”이 되고 추억이 “얼어붙”었다고 했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과 얼어붙은 추억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수가 없는것. 그래서 인간은 허무할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깨진 사랑은》이라는 제하에 발표된 이 작품외에도 《북국설》(외10수)이라는 제하에 발표된 작품들 대부분은 사라지는것에 대한 허무의식을 담고있다. 이상 두편을 포함하여 허무의식이 표현된 김철의 근작시 작품은 어느 정도 허무에 젖어들거나 심지어 탐닉한듯한 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이대로만 계속 나간다면 삶의 허무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이 될수도 있다. 그러나 로시인은 여기에 머물지만은 않는다. 《겨울나무》에서 화자는 “흘러간 아쉬움을/갈기갈기 찢고있다”면서 삶의 허무에 반항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지만 결국 아무리 험한 삶이고 허무한 세월이라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마지막련의 “아무렴,/기억은/상록수가 아니지!…”라는 표현에서는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의 운명을 그대로 겸허히 혹은 성실히 받아들인다. 여기서 겨울나무는 화자의 삶을 의미할것이다. 《내 인생 그대로가》에 오면 그러한 달관과 겸허가 삶자체의 궁극적인 모습에 대한 인식으로 심화된다.   거치른 바다 험한 파도를 헤치다보면 나, 소금물 많이도 먹었네   오장륙부가 다 절어 이제는 토해내도 쓴물밖에 없는 신세   바람부는 세월에 인생을 걸궈내면 짜고 쓴 소금 인생 그대로가 소금이 아니겠나   《내 인생 그대로가》의 전문이다. 여기서 화자는, 삶은 거치른 바다, 험한 파도를 헤치는것이라 전제하고나서 그런 과정에서 소금물을 많이 먹어 오장륙부가 다 절었다고 했다.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험했으면 바다물처럼 짜고 쓸까. 그러나 “인생 그대로가/소금이 아니겠나”에 오면 그러한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삶자체가 쓰고 짜다는 인식에 이른다. 삶자체가 쓰고 짤진대 이를 거부하고 분노할 리유가 있을수 없다. 허무에 직면해 교만하지 않고 당황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겸허히 수용하는 자세는 일종의 달관의 경지라 할수 있다. 허무가 피할수 없는것일진대 이에 분노하고 이를 거부하려는것은 옳바른 삶의 자세가 아닐것이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는것은 삶의 중요한 지혜가 되기도 한다.   3. 고향과 추억과 사랑, 그 애틋함   시인의 로년기 작품이여서 그렇겠지만 2000년대 김철의 시작품들은 기본적인 소재 혹은 주제의식면에서 추억에 많이 의존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억에는 고향과 사랑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등장한다.앞에서 이미 살펴본 《송화강변》에도 이민으로부터 시작된 화자 가족의 삶 전반이 슴배여있거니와《별》에서는 기억속의 잊지 못할 사람을 이제는 “저 멀리 날아”가버린 “별”에 비유한다. 그리고 《북국설》이라는 제하에 발표된 11편의 작품중 다수가 추억에서 취재하고있다. 특히 《해질무렵》이라는 작품에서는 어린날의 기억들이 세월의 무상함과 련관되여 알찐한 마음의 공감을 부른다.   옛날, 서산마루에 해가 지면은 엄마 곱돌장싸개에 장 지져놓고 돌쇠야 말순아 불러들였지   그것들 지금은 뿔뿔이 다 가고 해져도 불러들일놈 없는 쓸쓸한 저녁 부르면 바람만 우여-찬서리 몰고오네   토속적인 이미지들속에 묻어나는 아득한 옛날 삶의 모습은 그것이 우리의 고향이고 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속에서 잊혀져가는 상황이여서 더구나 가슴아픈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래서 《고향길》이라는 작품에서 타향살이하다가 고향길에 나선 화자의 “나그네”처지에서 허무의식이 좀더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고향의 추억은 《고향집》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절실하게 표현된다. 이 작품에서는 고향의 기억과 고향을 떠난 화자의 삶의 기억이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고향의 기억은 따스함과 행복함과 사랑 등으로 밝게 인식되는 반면 고향을 떠난 화자의 삶의 기억은 차가움과 서글픔과 패배감으로 어둡게 그려진다. 그리고 “아리숭한 기억속으로/증발해버린 고향의 정/그래도 고향엔 예와 다름없이/철이 되면 봄꽃이 물들고있다네요”라는 마지막련에서 알수 있는것처럼 고향은 어떤 신앙처럼 절대적인 선이 되기도 한다. 《달빛》이라는 작품에서도 이점은 다시 확인된다.   달이 우물에 잠겼습니다 퍼내도 퍼내도 천년을 퍼내도 달은 그냥 웃고만 있습니다   달처럼 이쁜것이 고향의 마음 천리를 가도 만리를 가도 갈증을 달래주는 샘물입니다   《달빛》의 전문이다. 여기서 달빛은 절대적 아름다움 혹은 진리로 표현되는데 이 달빛과 등치될만한것이 바로 “고향의 마음”이라 했다. 그만큼 시인에게 있어 고향은 삶의 중요한 내용이 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 시인에게 있어 추억과 늘 함께 따라다니는 또다른 이미지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의 이미지는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지만 특히 《깨진 사랑은》과 《보리밥》에서 절실하게 표현된다. 먼저 《깨진 사랑은》에서는 사랑을 쉽게 깨지는 유리에 비유하고 “사랑도 깨지면/저렇게 아픔인것을”이라 하여 사랑의 깨짐을 뒤늦게야 후회하는 화자의 깨달음을 표현하고있다. 그리고 결국 “아물지 못한 어린 상처 하나가/세월의 물살우에/눈물처럼 떠있다”는 표현에서 느낄수 있는것처럼 사랑을 옛날의 추억과 련관시키고있다. 《보리밥》에서 사랑은 달콤함 혹은 행복함을 나타내는 이미지가 아니라 “깔깔한 보리밥”과 등치된다. “세상살이 마치도 보리끄스름같아”서이다. “깔깔한 그것을 삼켜야만 했었지/고운 정 미운 정/사랑은 덫…”이라는 마지막련의 표현은 긴 세파속을 헤쳐나온 사람만이 느끼는 사랑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세집사랑》도 시인의 사랑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사랑은 나의 세집, 정들어 사는동안 부엌에서 타버린 장작개비마냥 내 심장은 타고타서 재가 되였다   어느날 돈없어 쫓긴다 해도 네집의 삐뚤어진 문패만은 내 마음에 항시 걸어두리라!   시인은 남녀 두사람의 사랑을 세집살이로 표현한다음 사랑하는동안 “내 심장은 타고타서 재가 되였다”고 할 정도로 사랑을 아픈 과정으로 절실히 느끼면서도 그 사랑이 깨지면 오히려 항상 마음에 새겨두겠다고 한다. 김철의 시에서 사랑은 이처럼 세파속을 헤쳐나온후의 어떤 깨달음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다수의 경우《깨진 사랑은》에서처럼 지난 삶의 한 기억으로 인식된다. 가령 “봄 여름 끓던 시절도 다 보내고/잎보다 더 많은 가을의 애수/가랑잎을 밟지 마세요/단풍은 나의/멍든 사랑입니다”에서 사랑은 험한 세상을 지나온 삶의 한 기억이기에 더 소중한것으로 인식된다. 요컨대 김철은 세월의 덧없음과 삶의 허무를 서글퍼하면서 때로는 거부하고 분노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고희를 훨씬 넘긴 원로시인이 긴 세월 삶의 바다를 헤여오면서 건져낸 인생의 지혜라 할수 있다. 그리고 늙어서도 뗄수 없는 사랑에 대한 집착은 고향에 대한 드팀없는 사랑과 더불어 삶의 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몸부림으로 리해된다. 그러한 사랑과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애잔한 추억,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삶의 허무를 극복하려 했다는 말이다. 세월의 덧없음과 삶의 허무를 겸허히 수용하기 위해 필요했던 시인의 인생모색이 낳은 결과가 아닐까 한다. 이를 우리는 달관의 경지라 부를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4. 민족분단의 아픔에 대한 사명의식   2000년대 발표된 김철의 시작품중에는 특별한 주제의 작품 한편이 있다. 이 시기 김철의 대부분의 작품이 10행 내외의 단시인데 비해 이 작품은 20련 110행에 달하여 서정시로서는 장시라 할수 있다.《휴전선은 말이 없다》가 그것이다. 전성기 김철의 시중에는 장시가 더러 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고 오랜 사색끝에 내놓은 력작인데 그 주제 또한 심상치가 않다. 여기서 휴전선은 당연히 조선반도 남북을 가로자른 이른바 “38선”을 말한다. 화자는 백발이 되여 휴전선 근처 어느 옛날의 전적지인 무명고지에 서있다. 시적표현도 원색적이고 강렬하다.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마음에 걸려서/석양도 벌겋게/피를 끓인다” 라는 표현이 그렇다. 그만큼 화자의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될것이다. 그리고 휴전선이다.   바라보면 머얼리 휴전선은 여전하고 녹쓴 철조망을 넘어 새들만이 오가는데 피없이 터치지 못할 울분이 내 한가슴 가득 차있다.   꼭같은 배달민족이건만 휴전선 하나로 남북이 갈려 수십년을 혈맥이 끊겨 살아온다는것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고 분노할 일인가. 게다가 화자는 남과 북 어느쪽에도 편을 들수 없는 처지다. 다음의 례문에는 그러한 중간자적 립장이 잘 드러나있다.   높은 령마루에 올라 남북을 바라보는 내 마음 긁힌데없이 저리고 한점도 떼낼수 없는 아픈 살점들을 어루만지는 내 손길 천추의 한이 맺혀 서로의 아픔을 싣고 저기, 흰 구름만 조용히 흘러간다   그러나 그 중간자적 립장은 그냥 방관자로 지켜볼수만은 없는 립장이다. 화자역시 꼭같은 단군의 후예이기때문이다. 남북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긁힌데없이 저리고” 그래서 화자의 손은 저도모르게“한점도 떼낼수 없는/아픈 살점들을 어루만”진다. 이때 화자에게 있어 오늘까지 수십년간 이어져온 분단의 아픔을 만든 장본인인 이데올로기는 이제 먼 옛날의 얘기일뿐이다. 그러나 휴전선 이남과 이북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긴긴 불장마에 시달리는 이 나라 생각하면 진짜 환장하겠다 습관된 그 애환은 언제 끝나련? 어둡고 질긴 밤이 장장 반세기를 울부짖는 귀먹은 이 시대 절망하는 별들은 폭포로 무너져내리고   남과 북은 아직도 “긴긴 불장마에 시달”리고 이때문에 화자는 “환장하겠다”고 애탄 심정을 뱉어낸다.여기서 “귀먹은 이 시대”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장 반세기의 울부짖음에도 “귀먹은 이 시대”는 아마도 겨레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주지 못하는 혹은 치유해주려 하지 않는 모든것을 의미할것이다. “몸살난 절규를 넉두리하며/가도가도 끝없는 통일의 미로”는 그래서 현실이다. 책임이야 누구에게 있던지 “아무도 드틸수 없는/그 하나의 진실때문에/멍든 가슴들을 화독으로 달굴 때/숨기지 못하는 하나의 갈망이/온 강토에 메아리로 여울져간다” 그래서 화자는 그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기로 한다.   찬바람속에서도 뜨거운 입김이 흐르는 하늘이여 땅이여 기어이 오고야말 해동의 계절 어수선한 강토를 설걷이하고 내 여기 사랑을 심으리라 자유를 키우리라   겨레의 비극은 결국 사랑의 결핍으로 이루어졌다고 본셈이다. 그래서 “어수선한 강토를 설걷이하고”거기에 다시는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랑을 심고 자유를 키우겠다고 한다. 시인의 가슴에 쌓이고 쌓인 서러움이 그러한 결단을 가능케 한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러한 자신의 결단에 자신감을 가진다. “나의 호소는 비수처럼/태양을 찔러 피흐르게 하였고/나의 념원은 천둥이 되여/잠든 우주를 흔들어 깨우리”라는 화자의 의지는 그러한 자신감의 표현일것이다. 그리고 다시 화자가 선 산정에 되돌아온다.   아, 분단의 절규가 피멍든 창공에 메아리로 솟고 삭이지 못하는 겨레의 한이 여기, 산정의 노을을 피로 끓인다.   이 마지막련은 앞의 시련들에 비해 직설적이다. 시인의 격한 가슴이 터쳐나올 출구를 찾은것이라 하겠는데 상당히 세련된 상징과 비유로 흐르던 정서가 결구부분에 와서 직설로 표현됨으로써 얼마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시의 흐름에는 큰 영향이 없는것 같다. 이 작품은 해외에 사는 단군의 후예라는 립장에서 민족분단의 상황을 아파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세련되고 때로는 원색적이고 충격적이기도 한 비유와 상징들은 시의 기품을 한결 돋워준다. 김철시인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단의 한 력작임에 틀림없다.   5. 시적 의미의 다중성   형식적측면에서 2000년대 김철의 시는 상당정도 전날의 특징들을 이어오고있으나 갈고 닦은 흔적들이 사라지고 좀더 솔직담백하며 성숙되고 달관한 모습을 보이고있다. 특히 시적상관물의 의미층이 보다 두텁고 다중성을 띠고있다는 점은 신중국 1세대 시인으로서 특기할만한 변화라 하겠다. 먼저 《깨진 사랑은》의 경우 사랑을 유리에 비유해 깨지면 아프고 다시 맞출수 없다는 리치를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과거 김철시인의 일관된 시작특징을 거의 그대로 이었다고 할수 있다. 《아기는》이라는 작품도 같은 경우가 된다. 아기의 웃음과 울음은 진실한데 “돈에 곯아빠진 순정때문에” 세상은 진짜로 울고 웃지 못한다고 하고는 진실한 아기의 웃음과 울음으로 때묻은 세상을 깨우친다고 했다. 하나의 속성으로 다른 하나의 속성을 비춰서 드러낸것이라 할수 있다. 이런 작품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앞항에서 론의한바 있는 《휴전선은 말이 없다》에서 다음의 표현들은 분단의 아픔과 그 해소 혹은 극복의 의지라는 주제의식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일뿐만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의미의 두께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많은 추억들이 덕지덕지 쌓여서 봉우리를 이루고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마음에 걸려서 석양도 벌겋게 피를 끓인다   이 6행의 시구에서 표현의 대상은 “봉우리”와 “석양”이다. “하많은 추억들이 덕지덕지 쌓여서 봉우리를 이루”었다함은 저 봉우리에 오랜 력사의 기억이 쌓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동시에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의식속에 수많은 력사의 기억이 쌓였다는 사실을 표현한것이 되기도 한다. 석양이 벌겋게 피를 끓인다는것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붉은빛의 석양을 보며 피로 얼룩진 력사의 흔적이 화자의 마음속에 떠올라 격한 감정을 유발했음을 의미하는데 이를 유발시킨 장본인은 바로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다. 이는 물론 6.25전쟁으로 비롯된 민족분단의 력사를 두고 말할것이다. 그런데 전반작품의 주제를 떠나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시적표현 혹은 상관물은 좀더 많은 련상을 가능케 한다. 이를 우리는 시적의미의 다중성이라 볼수가 있을것이다. 《뿌리》라는 작품은 좀더 복잡한 의미망을 형성하고있다. 일차적으로 “뿌리”는 나무의 뿌리를 지칭한것 같다. 땅에 살면서도 땅위의 가지와 잎과 열매를 사랑하는 마음은 계절도 없고 야심도 사욕도 없다고 했다. 나무뿌리의 속성이다. 2차적으로 뿌리는 자식을 키우는 부모를 상징한것처럼 보인다. “거치른 광야에 자식을 세워놓고”나 “실성한 바람같은 무심한 세월/빨강꽃 노랑꽃 사랑이 주렁질 때”라는 표현들에서 우리는 상관물의 등가관계를 짐작할수 있다. 즉 나무뿌리의 가지와 잎, 열매에 대한 사심없는 사랑과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련관시켜 표현하고있는데 이때 생기는 의미는 당연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초월한다. 상징과 비유의 속성에 의해 의미의 다중성이 만들어지기때문이다. 《락수물》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다중성이 좀더 확대된다. 시적상관물의 불확실성때문이다.   한밤중, 나는 락수물소리 들으며, 저 사나운 바다를 생각한다 한사람 한사람이 모여서 이루는 데모의 바다, 그 엄청난 함성을 듣는다   강자를 만드는 락수물 짙푸른 바다의 효용 죽음에 도전하는 그 무서운 밤!   하-얗게 표백된 나의 꿈이 바다가 백사장에 슬픔으로 깔리고 자유를 갈망하는 저 몸부림 벌겋게 달아오른 갈증이 지구의 여윈 몸을 달군다   락수물은 그리움의 변주곡인지도 몰라 퍼렇게 멍든 내 가슴에 쬐고만 구멍 하나를 판다   이 작품에서는 시적상관물이 락수물과 물의 최후의 귀속처인 바다로 이루어졌다. 같은 물이면서도 그 속성이 뚜렷한 차이를 가지는것이 락수물과 바다이다. 문제는 이 두 시적상관물이 각각 나름대로의 의미층을 이룬다는데 있다. 그래서 시는 난해해진다. 첫련에서 화자는 락수물을 보며 바다를 생각하며 바다는 또 “데모의 바다”와 등치된다. 그리고 제 2련에 오면 락수물과 바다물 각각의 속성이 다른 힘이 부각되며 거기에 세상사의 흐름이라는 의미가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제 3련에서는 바다라는 시적상관물이 화자 개인의 삶에 련관된다. 그런데 그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화자의 바래진 꿈과 강력한 욕구가 겹쳐지면서 제3의 의미층을 이룬다. 다시 마지막련에 이르면 락수물에 되돌아와 연약하지만 끈질긴 힘을 가진 락수물의 속성이 화자개인의 운명에 관련되면서 또다른 의미층을 만들어낸다. 비록 락수물과 바다물이라는 관련성을 가지면서도 속성이 판이한 두 시적상관물이 화자의 삶에 비유되면서도 결과적으로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있기때문에 미완의 작품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지만 바로 그렇기때문에 열려진 공간이 형성되여 독자의 상상이 개입될 여지가 생성되며 이때문에 오히려 의미의 다중성을 확대하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산사》라는 작품은 시적상관물이 단순하다.   오늘은 장날인가봐 개미들이 줄지어 장보러 가는 구멍빠진 퇴마루에서 봄볕이 잠간 놀다간 뒤 잠을 깬 풍경이 뫼바람에 왈랑절랑 수선을 피우면 면벽한 스님은 깜빡 졸다가 나무아미타불 헛갈린 념불에 다람쥐 깜짝 놀라 정적 하나 물고 달아나는 산사의 하오   보는바와 같이 별로 새로울것도 놀랄것도 없는 어느 산사 하오의 풍경이 엷은 수사적인 옷을 입고 담백하게 그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으며 의미의 다중성을 느낄수 있는것은 상관되는 주제의식이 분명하지 않기때문이다. 즉 여기에 그려진 이미지들과 이런 이미지들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어떤 경지 모두가 열려있다는 말이 된다. 이제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질수밖에 없다. 의미의 다중성이 가능한 리유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2000년대 김철의 시는 시인이 일관되게 추구해왔던, 기발한 착상과 세련된 언어를 통한 철학적 의미의 창출이라는 시작특성을 이어오면서도 젊은 시절의 시작품들에서 흔히 볼수 있었던 조각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좀더 솔직담백하며 때로는 원색적이기까지한 모습을 보이고있다. 게다가 시적상관물의 불확실성을 통해 의미의 다중성도 획득하고있어 로시인의 달관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5. 끝내면서   2000년대 김철시인의 작품들은 주제의식의 측면에서 삶의 허무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허무에 직면하여 때로 거부하고 분노하기도 하지만 결국 겸허히 수용하며 고향과 추억과 사랑, 즉 추억속의 아름다운 고향과 아직도 끈질기게 지켜가는 사랑의 의지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것처럼 보인다. 이는 로시인의 삶의 지혜인 동시에 달관의 경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 특히 민족분단의 비극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를 타개하고자 하는 사명의식 또한 삶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한 노력이라 볼수도 있을것이다. 주제의식의 측면에서뿐만아니라 시작의 형식적측면에서도 로년기의 김철시인은 전날의 일관된 풍격을 이어오면서 동시에 그에 만족하지 않고 시적상관물의 불확실성을 통해 의미의 다중성을 꾀하기도 했다.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 하지 않을수 없다.     * 에 게재한 글입니다. [출처] 추억과 사랑 그리고 허무의 미-2000년대 김철의 시|작성자 반벽거사  
1482    김창영 / 장춘식 댓글:  조회:4654  추천:0  2015-09-17
서탑의 력사적의미와 시적인 상징성 ―김창영의 련작시 《서탑》 장춘식   1. 시작하면서   김창영의 시는 우리가 늘 먹는 된장이나 김치와도 같이 소박하면서 깊은 맛이 있다. 화려한 수사도 별로 없고 모더니즘의 특징이라 할수 있는 난해함도 없다. 그러나 술술 읽히면서 읽고나면 거기에서 뭔가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깊은 의미, 깊은 맛이 느껴진다. 이번에 묶은 시집 《서탑》 련작시 99편은 그의 이러한 소박하면서 깊은 맛을 집대성한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100편이 아닌 99편, 많다는 의미가 될것 같기도 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리해해도 될것이다. 하긴 저 서탑아래 도라지꽃이 피는 한, 즉 조선족의 흔적이 존재하는 한 김창영시인의 시상도 끝나지 않을것이다. 련작시는 우리 시단에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김창영의 《서탑》 련작시처럼 방대한 규모의 련작시는 흔치 않다. 석화시인의 련작시 《연변》이 31편으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김창영의《서탑》의 3분의 1밖에 안된다. 의미있는것은 두 련작시 모두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장르적으로 두 련작시는 전례가 없는것이여서 1980년대 리욱, 김철, 김성휘 등의 장편서사시가 하나의 붐을 이루었던것처럼 장르적혁신의 붐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다. 시인이 관심을 두고있는 주제의식을 중심으로 시집의 의미와 가치를 살펴본다.   2. 공동체의 정체성 확인 욕구   련작시의 최초발상은 아무래도 조선족의 상징, 이주민의 상징으로서 비롯된것처럼 보인다. 서탑과 서탑거리는 료녕성 특히 심양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고 이는 사실상 연변과 마찬가지로 중국내 전반 조선족의 상징이기도 하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99편에 달하는 련작시의 거의 반 이상이 민족 정체성의 리해와 확인의 경향을 드러낸다.   1) 기억속의 력사와 그 상징성 시집의 작품에는 기억속의 력사적 흔적들이 많이 나온다. 10여편이 이런 소재를 다루고있다. 가령 3번 작품의 량세봉장군에 대한 기억, 4번과 64번 작품의 조선족의 이민과 벼농사를 통한 정착의 력사적기억, 5번 작품의 새끼골목의 유래, 15번 작품의 백석시인의 기억, 16번 작품의 “봉천국밥집”의 유래 등이 이에 속한다. 15번 작품은 “시인 백석을 그리며”라는 부제를 달고 작품 전체적으로 북관 즉 우리의 이민지인 동북땅에 대한 백석시인의 인상과 느낌을 재현해내는데, 수십년이라는 시간적차이를 두고 하나의 같은 공간속에서 벌어졌던 두 시인의 느낌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력사와 현재의 시간을 하나의 공간속에서 통합시켰다고 보아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그러한 시인의 상상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 력사와 오늘의 삶을 동시에 느낄수 있기때문이다. “류치환의 ‘절도(絶島)’에 답하여”라는 부제목이 붙은 32번 작품에서는 일제강점기 이민시인 류치환의 이민지에 대한 느낌 혹은 정서와 김창영시인의 오늘의 이민지의 느낌을 대조시키고있다. “외로운 絶島”라는 류치환의 만주국치하 동북땅의 쓸쓸하고 고독한 느낌에 대해 시인은 “해빛 찬란한 광야의 하루”라는 표현으로 대조시킨다.력사와 오늘 현실의 시간적거리감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수십년이라는 시간이 지난후 바뀌여진 정착지의 삶의 양상이 체험적으로 다가온다. 《봉천국밥집》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16번 작품과 “화평구중흥가31번지”라는 부제목이 붙은 39번 작품에서는 조선족이 현재 살고있는 정착지의 력사적인 기억과 상징성이 보다 무게감있게 다가온다. 남편을 항일투쟁에서 잃은 8명의 독립군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개장했다는 “봉천국밥집”의 유래를 특별히 제시한 16번 작품에서는 오늘날 우리 조선족의 정착이 얼마나 뼈아픈 대가를 치렀는지를 기억하게 하며 39번 작품에서는 다시 옛 봉천의 조선인 부호 김창호가 살던 주택을 들어 그러한 력사적기억을 립체적으로 확산시킨다. 이런 기억이 시인의 상상력을 자극한것은 그것이 우리의 기억, 선조들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속에까지 침투된, 수많은 상징과 암시를 동반한 기억이기때문이 아닐까 한다. “논밭을 바라보며”라는 부제목이 달린 4번 작품과 “새끼골목”이라는 부제목의 5번 작품, “북운하 서정”이라는 부제목의 64번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인의 그러한 인식을 확인할수 있다. 맨주먹으로 강을 넘어 남의 나라 땅에 몸을 맡긴 우리의 부조들은 거의 벼농사기술 한가지로 이땅에 정착할 밑천을 마련했고 그렇게 수많은 피와 땀을 이땅에 뿌리는 동안 몇세대를 걸쳐 오늘에 이르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력사적기억을 끊임없이 더듬어보고 감개무량해한것은 력사적기억 그 자체만에 대한 관심때문은 아닌것 같다. 그러한 력사적기억의 재생에는 항상 오늘의 우리가 엮여지기때문이다.   2) “나”와 “우리” 확인의 콤플렉스 사실 시집 전체적으로 시인 김창영이 서탑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것은 오늘의 우리, 우리라고 표현되는 조선족의 존재감에 대한 확인 콤플렉스라 할수 있을 정도로 이 부분에 해당되는 작품이 량적으로도 많고(20편이 넘는다) 정서적으로도 가장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앞항에서 살펴본 력사적기억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우리” 확인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되였다고 볼수도 있을것이다. 련작의 첫편에서 이점은 벌써 확인된다. “어제밤 꿈속에서 부르던/할아버지가 그리워/이른 새벽 서탑을 찾는다”는 표현은 련작시 전체의 창작동기를 제시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태여나 얼굴조차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너 이놈, 서탑을 가슴에 심거라!”가 “탑아래서 탑의 언어에 귀 기울이다”는 표현과 겹쳐지면서 “나”와 “우리”의 정체성 확인의 욕구를 충분히 드러내고있기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서탑은 이민민족인 “우리”의 상징으로서 시인의 의식과 정서를 자극하고있다는 말이 되겠다. “묘향산 모란봉”(이북땅을 상징)을 거쳐 “한라산”(이남땅을 상징)에 이른다고 한것은 앞의 “현풍할매곰탕집”이라는 식당 이름과 련관시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상호(商號) 명칭이 분명하지만 이를 통해 고국의 산천, 고국땅을 표현하고자 한 시인의 의도 또한 뚜렷하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에서는 “나” 혹은“우리”를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서탑으로 상징되는 중국땅의 정착지에 정착해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고 이를 스스로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다가온다. 이점은 2번 작품에서 “우리”를 가슴에 “하얀 도라지꽃”을 피운 공동체, 즉 고국의 동포와는 구별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점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이 작품에서는 또한 서탑이 “행인들의 가슴속에 탑으로 우뚝 솟았다가” “거리로 드러누웠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탑이 “드러누웠다”는 표현은 련작시 전체적으로 5-6곳에 등장하는데, 이는 시인의 기교적인 기호와도 관련되겠지만 그 “드러누웠다”는 표현이 “우리”의 정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할 때 거기에는 뜻깊은 상징성이 동반된다. 그리고 이 상징은 련작시 전체적인 상징―서탑=조선족=자랑스런 정착민공동체의 의미를 띠게 된다. 왜 서탑이 시인의 의식속에서 그토록 절실한 의미를 가지고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로서의 정체성 확인의 욕구는 다각적으로 이루어진다. 27번 작품에서 시인은 서탑이 “여기에 이렇게 서있음은/서러움인가 자랑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해놓고는 “쪽박차고 압록강 건너야 했던 비운”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서러움이 되겠지만 “다시금 엮어가는 우리네 삶”은 오히려 자랑이 된다고 말한다. 정체성 확인의 한 방법이 될것이다. 그리고 다시 “조선문서점”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28번 작품에 오면 고국과의 관련, 혹은 민족적인 정체성을 인정한다. “서탑대랭면점”이라는 부제가 붙은 31번 작품에서는 랭면사랑을 통해 또다시 민족적정체성을 확인한다. “북릉공원놀이”라는 부제목의 42번 작품은 심양의 조선족들이 왜서 북릉공원놀이에 그처럼 애착을 가지는지를 통해 공동체의 자기확인의 욕구를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43번 작품에서 “백두에 이르는 진달래 꽃길과/한라에 이어지는 무궁화 꽃길이 보인다”는 표현은 우리 공동체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시인의 독특한 감수성의 소산이라 하겠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로서 조선족공동체의 자기확인을 통해 우리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있는바 여기에서 서탑은 항상 그 상징 혹은 가치의 중요한 이미지로서 독자의 정서를 자극한다.   3) 위기 맞아 다지는 마음 그러나 공동체로서의 자부심과 가치의식은 시인에게 있어서도 항상 자신감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도시화를 맞아 분해되는 우리 공동체의 현실앞에서 이런 문제성은 자연스럽게 도출되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러한 위기상황을 맞아 좌절하고 한탄만 하지는 않는다. 서탑의 이미지 혹은 상징에는 그러한 위기를 해소하고자 하는 의욕, 혹은 자기다짐의 의식들이 다수 드러난다. 그런데 시인의 위기의식은 련작시의 초반에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다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도시화시대를 맞아 민족공동체가 맞은 위기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있음을 말해준다. 가령 34번 작품에서 시인은 위기의식과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처음으로 드러내고있다. 그것도 “오랜세월 삼복 폭염아래/탑이 열병을 앓는다”는 표현에서 볼수 있듯이 최근의 위기만이 아닌, 조선족이 겪어온 시련과 고난의 전 과정을 포함하고있는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오늘의 위기도 물론 포함될것이지만.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시련, 위기의 극복을 “흐린날 뼈속에 스며든 랭기를 삭히는 일”로 보고 “가린것 하나 없이 온몸 내맡기고/열받아 깡그리 녹아내렸다가/이 땅에 다시 일어서는것”이라 락관한다. 이런 시인의 락관에는 이민과 정착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우리의 력사적저정이 바탕이 되였을것이다. 37번 작품에서도 시인의 락관적인 정서에는 과거 백수십년의 력사적경력이 바탕에 깔려있지만 미래의 불투명성에 대한 시인의 걱정은 조금 깊어진것처럼 보인다. “시작이 보이지 않는것처럼/끝도 없을거야”라는 첫 2행이 은유하는것은 과거의 시련보다는 현재의 위기의식이다. 그러나 시인이 다지는 마음은 여전히 락관적이다. “보이지 않는 끝은/더 높이 솟아/보일 때까지 더 솟는것이야”라는 마지막 련의 표현이 그렇다. 물론 이런 시인의 락관은 “뒤돌아보면/지금 뒤돌아보이는것까지가/참으로 소중한거야” 라는 표현에서 볼수 있는것처럼 상당히 철학적인 자신감, 혹은 강력한 문화적능력이 뒤받침해주고있다. 그리고 40번 작품에서 그러한 위기극복의 다짐과 락관적인 정서는 고조를 이룬다. 비록 “떠나야 했던 걸음에/서러움 있었을망정” 즉 이민의 출발과 과정에는 고난과 시련, 그리고 그로 인한 서러움이 있었지만 “저 끝간데 없는 벌판에 피여난/복된 벼꽃파도”처럼 “저 서탑가에 정다운/‘나의 살던 고향’가락”처럼 이제 서러움은, 적어도 과거의 서러움은 아니며 “해빛고운 날 날마다/해빛처럼 살 일이다/여기서 고향처럼 살 일이다” 라는 표현에서 보는것처럼 우리의 삶, 공동체의 삶은 궁극적으로 락관적이라는 시인의 정서, 의식에는 변함이 없다. 50번 작품도 비슷한 정서를 드러낸다. “따스한 봄바람뿐이였다면 오늘의 이 모습/하늘아래 당당히 자랑할수 있었을가”는 오늘날 시인의 락관주의의 원인이 될것이고 “인제 또 언제까지 오늘까지 온것처럼/그냥 이대로 이럴수밖에 없을지 모르는거야”에서는 미래 공동체 운명의 불투명성에 대한 걱정과 반드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나고있다. 그리고 67번 작품에서는 다시 한번 “꽃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일이다” 라는 마지막 시행이 의미하는것처럼 서러움 딛고 굳건히, 끈질기게 그리고 락관적으로 살아가려는 공동체의 의지가 시인의 정서에 녹아있다. 김창영에게 있어 서탑은 시련을 이겨낸 “우리”이고 “드러누운” 서탑은 이민지에 정착하고 뿌리내려 해빛처럼 밝게, 꽃처럼 웃으며 살아가는 조선족공동체의 다른 표현이다. 비록 도시화시대를 맞아 공동체의 분해라는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있는 서탑처럼 조선족공동체 또한 끝까지 버티고 살아갈것이라는것, 그리고 이런 끈기와 힘은 백수십년 시련과 고난의 력사적과정을 거쳐 형성된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결성시킨 문화적, 생활적 능력이라는 점, 이것이 김창영시인이 축조한 서탑의 상징성 혹은 이미지의 내포가 될것이다.   3. 돌아갈길 없는자의 서러움―향수   다시 돌아갈수 없는 혹은 돌아갈길 없는 고향, 이는 이민기 우리 시인들의 중요한 정서적표현이였다.이제 이민의 제3, 제4 심지어 제5 세가 우리 민족공동체의 주류가 된 상황에서도 이러한 고향상실의 서러움 혹은 향수는 여전히 무거운 삶의 짐이 되고있다. 디아스포라의 공통된 체험이요 정서라 하겠다.   1) 망향과 향수의 처절함 “바다물이 마를가/그리움은 끝없어라”로 시작되는 20번 작품은 그리움을 그냥 추상적으로 표현하고있다. 그러나 간절한 소망이 탑으로 굳어졌다는 표현은 그 상징적인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 개인적인 소망을 공동체의 소망으로 승화시키고있기때문이다. 특히 “내 간절한 소망은 탑으로 굳어지고”에서 굳어졌다는 표현은 소망의 간절함을 충분히 드러냈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처럼 간절한 소망은 무엇이며 또 왜 그토록 간절할까? 상기 작품의 마지막 련에 나오는 “아득한 수평선 우러러/눈 먼 마음 어찌할거나?”에서도 대개는 그 소망이 고국에 대한, 혹은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너무 추상적이여서 그냥“짐작”할수 있을뿐이다. 그러나 21번 작품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고국에 대한, 고향에 대한 망향 혹은 향수의 정서가 구체화되고있을뿐만아니라 대를 이어 유전되는 그리움을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가고프다”와 “보고싶다”에서 화자 세대의 “그립다”로, 다시 “예서 태여나 자란 내 아들은/말없는 탑과 탑너머 저쪽산을/아버지처럼 나처럼 기억이나 할까?”라는 걱정까지를 포함한 그리움의 궁극으로 드러내고있다. 그러한 그리움, 향수는 22번과 44번 작품에 이르러 고조를 이룬다. 그리고 왜서 그러한 그리움이 그토록 절실한지를 확인시켜준다. “해와 달이 엇갈아 뜨고 져도/받아주지 않는 야속함에/돌아갈수 없는 아쉬움이 겹쳐” 가슴에 응어리지고 가시마저 끼여있다는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서러움은 력사적으로 응어리진것이다. 44번 작품에서 “서러움 하나는 하찮은것 같아도/내 가슴속 깊은 곳에 종기로 곪고 곪아 터져/닦아도 닦아도 아물길 없”다. 여기서 서러움은 바로 “아직도 남아있다 돌아갈길 없는 서러움이”라는 마지막 행에서 표현된 망향과 향수의 서러움이다. 결국 이것이다. “돌아갈수 없는 아쉬움”, 고국, 고향은 거기 그대로 있지만 세대가 바뀌고 강산마저 바뀌여 돌아갈수 없는 상황, 그것이 이민초기의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돌아갈수 없는 아쉬움”과는 또다른 “돌아갈수 없”음인것이다. 거기에서 서러움을 동반한 절실한 망향과 향수의 정서가 자라고 솟아나는것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서러움은 지금까지도 유전되여내려오고있는것이다.   2) 분단의 아픔을 앓는 디아스포라 돌아갈수 없는 고국에 대한, 고향에 대한 정서는 이제 고국과 고향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된다. 24번 작품에서 “탑 이쪽을 저쪽처럼 보고/탑 저쪽을 이쪽처럼 보리”라는 마지막 2행의 표현은 탑의 이쪽과 저쪽을 넌지시 고국땅의 남과 북으로 은유하고 그에 대한 화자의 관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48번 작품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고국의 아픈 현실에 대한 가슴앓이를 드러낸다. “탑이 소근대는 소리를 들으면/온통 겨울이야기 차가움이다”라는 첫 2행의 표현에서 “겨울이야기”는 고국땅의 안타까운 현실, 가령 분단의 현실이나 분단으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가지 안타까운 사건, 사실들을 은유할것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그리운 고향소식 듣는것조차 죄되여”라는 중간 2행과 마지막 3행 “고향의 봄바람이 아직도/여기에 불어오지 못하기때문/아득한 기다림이여라!”에서 이를 확인할수 있다. 여기서 특히 “아득한 기다림이여라!”는 마지막 시행은 시작자아가 얼마나 고국의 “봄바람” 혹은 그리운 소식을 기다리고있는지, 말을 바꾸면 얼마나 고국의 통일이나 눈부신 발전을 기대하고있는지를 드러내고있다. 시인의 향수속에 남북분단의 현실이 얼마나 가슴아프게 인각되여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51번 작품이다. 서탑아래서 귀를 기울이면 정답게 속삭이는 조선팔도 말씨, 사투리의 말잔치를 즐겁게 들을수 있고 친구하며 다정하게 지내지만 고국에 가면 서울과 평양, 각각 저들끼리 논다는것이다. 그 안타까운 마음은 “서울 평양 두분 특별 손님 모셔와/함께 더불어 사는 모습 보여주면 좋을까 몰라”라는 마지막 2행에서 잘 드러난다. 62번 작품에 가면 이런 분단의 아픔에 대한 가슴앓이는 남북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승격된다. “한라에서 백두 가는 길/언제면 열릴까나?”라는 첫 2행의 상징적의미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거니와 시적자아는 남북통일의 위업을 그냥 열망에 그친것이 아니라 “꽃피는 탑의 고향에/한라 백두의 얼” 심고 “금강 설악의 혼 살리자”고 호소한다. “버려진 신세여도/버릴수 없는 그곳”이기때문이며 또 상기51번 작품에서 확인된 “탑이 낸 길”, “탑의 마음따라”, 즉 남북에 고향을 둔 조선족들이 “친구하며 다정하게 지”내는 공동체의 지혜를 모아 고국의 통일에 힘을 보태겠다는것이다. 물론 조선족공동체가 생존하며 쌓은 지혜가 남북통일에 충분히 귀감이 될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수십년간 얽히고설킨, 얼음처럼 얼고 돌처럼 굳어진 남북의 마음을 깨치고 녹여낼 힘이 우리에게 과연 있는지는 더러 의심되기도 하지만 시적자아의 소원과 열망, 그 소원과 열망의 간절함은 인정하지 않을수 없겠다. 고국과 고향에 대한 사랑, 그리움의 처절함은 49번 작품에서 다시 확인할수 있다. “아득한 외로움이여/아리랑 열두고개 불러 부르다/목까지 쉬여” 노래가락마저 쉴 정도로 시적자아는 그리움에 몸을 태운다. 그리고 “아지랑이 춤추는 봄날/봄의 노래는/가슴속에 묻어두었다”고 절규한다. 디아스포라의 슬픔이요 한맺힌 외로움이 여기에 있을것이다.   정확한 통계는 내기 어렵겠지만 보수적으로 짐작해도 조선족의 반수 정도가 한국에 다녀왔다고 볼수 있다. 그렇다면 고향에 “돌아갈길 없는 서러움” 혹은 최초의 이민으로 유발된 향수병은 기본적으로 해소되였다고 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것은 큰 착각이다. 미처 조상의 고향에 가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백년이상 유전되면서 오늘까지 내려온 “향수병”을 해소하기 위해 다녀온 고향이 사실상 상상속의 고향이 아니기때문이다. 고국도 변했지만 우리도 변했고 따라서 유전적으로 내려온 “향수병”은 어쩌면 영원히 치유될수 없는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되고말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측면에서 망향과 향수, 고국의 분단을 아픔으로 앓는 마음은 사실상 조선족의 정체성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항의 상징성 혹은 이미지 또한 앞항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공동체의 정체성 확인, 혹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기확인의 의미가 될것이기때문이다.   4. 탑의 또 다른 이미지―삶의 진리의 상징   지금까지 우리는 서탑의 민족적상징의 문제에 대해 론의해왔다. 비록 련작시의 중심의제 혹은 핵심적인 주제가 공동체의 삶에 대한 관심인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한정된것은 아니다. 시집에서 서탑은 민족적상징의 문제외에도 일부 인류공동의 삶의 문제를 상징하기도 한다. 시인이 비록 서탑을 주로 조선족공동체의 상징체계로 인식하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시인은 조선족공동체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한 인간, 즉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 의식을 가진 개체이기도 하기때문이다.   1) 력사의 무게감과 삶의 허무 그리고 달관 시인의 이러한 개체적인식 혹은 보편적인 가치는 력사의 무게감과 삶의 허무에 대한 정서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11번 작품에서 화자는 “스님들 떠나고/탑은 말이 없다”고 하고는 “내 눈에 보이는건/빈 하늘뿐”이라 하여 력사의 무게와 삶의 허무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허무는 공허나 상실감은 아닌것 같다. “내 마음 하늘처럼 비여/바람 한점 일지 않는/호수인양 고요하느니”에서는 삶의 공허나 역사의 허무함이 상실감으로가 아니라 달관적인 세계인식에 이르고자 하는 의식의 방향이 엿보인다. 그러나 첫 련을 거의 그대로 중복한듯한 마지막 련의 “이제 더는/탑도 없고/스님도 없어라” 라는 표현은 허무의식이 또다시 강화되면서 이른바 우주적인 괴로움을 드러내고있다. 이러한 허무의식이 불교적세계관과 닿게된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14번 작품에서 이점은 잘 드러난다. “비우고서 있는듯 없는듯/서있는 일/누운듯이 서있는 일”이라는 마지막 3행의 표현은“심즉공”이나 “시즉공”처럼 비움과 무위를 추구하는 불교적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것이“탑에서 눈길 거두고/마음에서 탑을 비우는 일이란/탑의 그 공간에/나를 세우는 것이다”라는 첫 4행의 의미와 서로 호응하여 집착을 버려야 무위정적(無爲靜寂)에 이를수 있다는 불교적가치, 어쩌면 달관의 경지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보여준것이라 할수도 있다. 25번 작품에서는 그러한 시인의 인식이 인간의 인식의 한계, 인간관계의 측면에까지 확대된다. 마음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읽지 않는다면 대상을 보지도, 읽지도 못할것이거니와 대상의 뒤켠에서 대상의 마음을 읽는 다른 마음이 있다는것은 더구나 알지 못한다는것, 그 마음의 눈이란 바로 무위나 달관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시인의 달관에 대한 인식, 삶에 대한 가치추구는 33번과 35번 작품에서도 불교적인 가치관과 겹쳐지면서 어떤 깨달음, “돈오(頓悟)”의 경지를 드러낸다. 33번 작품의 “미미한것 하나 하나도/해빛같은 귀중한 존재임을/조용히 일깨운다” 라는 표현에서 읽을수 있고 35번 작품에서는 “내 생각의 천만갈래 길들이 알고보니/내가 걸은 그 단 한갈래로 이어진것을”이라는 다분히 철학적인 상징으로 표현된다. 물론 이런 시인의 인식은 “탑”과 항상 련관성을 가진다. “그곳 내 생각의 끝마다에/탑 하나씩 서있을까?”가 그렇다. 달관에 이르고자 하는 시인의 집착 혹은 명상은 38번 작품에 이르러 다시 그 경지가 무엇인지를 확인해준다. “눈뜨고 하늘 올려다보면/참으로 높아보이나/눈감고 느끼면 내 손/하늘에 닿아있는것처럼”에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마음의 눈”의 법칙을 재확인하고있고 “탑도 없고 하늘도 없고/나도 없어라” 라는 마지막 2행의 표현은 인간이 무에서 왔다가 무에로 되돌아가는 세상의 섭리를 상징할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내 서탑가를 거닐다가 잠간 멈춰서서/그대 우러러 생각한것은/그대 딛고 선 이 땅의 기운과 하나되여/머리우 하늘에 닿아 마침내” 라는 불교적 명상을 통해 얻어진것처럼 보인다. 56번 작품에서 “언제 또 허물어지는 일 있더라도/리유도 묻지 말고 서러워도 말자/눈감고 생각마저 비우고/나마저 있는듯 없는듯, 또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첫 련의 상징성은 여전히 “공(空)”이라는 불교적세계관과 닿아있다. 결국 시인은 비움, 무위 등 불교적인 가치를 통해 달관의 경지를 실현할수 있다고 인식하고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탑의 묵묵부동에서, 탑의 불교적의미에서 명상을 통해 얻어진것처럼 보인다.   2) 일상탈출의 욕구 “공”이나 “무위”에 대한 가치인식에도 불구하고 현대문명의 끊임없는 유혹은 쉽사리 떨쳐버릴수 없는 모양이다. 물론 현대인의 삶은 문명의 추구와 탈출의 욕구라는 두가지 서로 모순된 정서를 배태하고있다는 사실을 상기살 때 이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17번 작품에서 밤과 낮이 바뀐 현대인의 삶은 상당정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표현되고있다. “낮달이 눈물을 떨군다” 라는 표현이 그러한 시적자아의 정서를 대변해준다. 그리고 19번 작품에서는 그러한 문명비판의 정서가 일상탈출의 욕구와 비움과 무위에의 추구로 비약한다. 여기서 “가끔은 이사하는 생각을 가져본다”는것은 일상탈출 즉 현대문명에 대한 피로감을 드러낸것이 분명하다. 흔히 이런 류형의 일상탈출의 욕구는 그냥 욕구에 그치거나 잠시적인 일탈의 욕구로 변질하기도 하지만 김창영시인의 일상탈출은 “빈 공간 빈 터 찾아” “이사길에 버리고 버려/말끔히 비여서 마침내 가벼워진 마음”이라는 표현에서 확인할수 있는것처럼 “자기비움” 혹은 “무위”의 경지를 가상목표로 한다. “내 터는 따로 없다”는것은 속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경지가 되기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애초에 정해놓은듯한 경지와는 달리 현대의 문명은 끊임없이 시인을 유혹한다. 46번 작품에서 “과욕이 한껏 부풀은 내 마음”이나 88번 작품에서 “무엇엔가 자주 흔들리는 내”가 그렇다. 그러나 화자의 이러한 세속적인 욕구, 현대문명의 대표적인 욕구인 물질에 대한 유혹은 동시에 탑의 “주어진 고만한것에 참으로 만족하는” “당당한 너의 모습”에 의해 제어되고 억제된다. “이제라도 값 따지지 말고 저당잡혀야 겠다”는 마음다짐이나 “더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흔들릴 때까지 흔들리기로 한다” 라는 자기 검증은 그러한 시인의 의지를 대변할것이다. 그러니까 김창영시인에게 있어 서탑은 공동체의 상징으로서만이 아니라, 탑이라는 보편적인 이미지로서도 중요한 시적인 상관물이 된다는 말이 되겠는데, 여기서 비움이나 무위라는 불교적인 가치관은 시인이 달관에 대한 인식을 대표하는 경지가 될것이다.   6. 마무리   전체적으로 김창영의 《서탑》 련작시에서 서탑은 우리의 선조들과 우리 자신들마저 포함한 이주민을 상징한다. 이주민의 력사적기억, 돌아갈수 없는 고향에 대한 향수, 심지어 일상의 탈출욕구와 우주적외로움마저 탑은 받아준다. 서탑의 상징적인 의미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도 하고 자랑스럽게도 하며 때로는 슬프게도 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99편의 시작품을 여러해를 두고 쓰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인의 립장이나 주제의식은 거의 변화가 없다. 이 시들을 쓰기 시작한 동기가 오랜 세월 시인의 의식속에서 발효되다가 련작시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수가 있다. 하지만 무르익은 주제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하겠지만, 시를 쓰면서 더러 의식의 변화가 있음직하기도 한데 너무 변화가 없다는것은 오히려 약점이 될수도 있다. 혹 력사의 무게를 담아내겠다는 시인의 강박의식이 주제의식의 변화를 제약한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더러 여유를 가지고 좀더 가벼워진 마음, 열린 마음으로 서탑의 새 력사를 쓸수는 없을까 기대해본다. 본고의 서두에서 김창영의 시는 된장이나 김치처럼 소박하면서 깊은 맛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소박하다는것은 다른 말로 하면 단순하다는 표현도 가능하여 약점이 될수도 있다. 화려함에 흔히 동반되는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를 제거했다는 측면에서는 장점이 되지만 현대시의 많은 표현기교들이 결여되여있다는 측면에서는 약점이 될수도 있는것이다. 현대시의 핵심적인 특징은 이미지의 전략적인 사용이다. 리성적인 주제발굴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창조적의미들이 시인의 감성을 통해 시인자신마저 감지하지 못하는 중에 드러날수 있는것이 바로 이미지즘의 장점이 아닐까 한다. 물론 기교라는것은 필수라기보다 선택의 문제가 되지만 오늘의 수준을 넘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다는 의미에서는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출처] 서탑의 력사적의미와 시적인 상징성-김창영의 련작시 |작성자 반벽거사  
1481    윤동주 시의 이민문학적 성격 댓글:  조회:6779  추천:0  2015-09-17
  윤동주시의 이민문학적 성격 장춘식     1. 들어가면서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후 현재까지 윤동주와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참으로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300편을 넘는 윤동주 관련 론저1)들중에서도 이민문학적 시각에서 그의 문학을 조명한 론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조선족의 현대문학이 이민문학에서 출발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민문학의 시각에서 윤동주의 문학을 재조명하는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서사문학과는 달리 시문학은 이민문학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윤동주의 경우는 물론 이민지인 룡정의 명동 출생으로 이민 2세가 되기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고 할수도 있다. 그의 작가적립장이 이민자인것은 물론이려니와 대부분의 인생체험 역시 이민지에서의 삶이 되기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그의 다수 작품은 이민체험에서 비롯되였고 이민자의 정서를 담고있거나 인류 공동의 정서를 담고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1917년 12월 30일 명동출생, 1931년 명동소학을 졸업, 달라자의 현립1교에서 6학년 공부를 1년 수학, 1932년 은진중학 입학, 1935년 3학년을 마칠즈음 평양 숭실중학 1년 재학, 1938-1942년 연희전문 4년, 1942-1943년 일본 닛교대학, 동지사대 영문과, 1943-1945년 후꼬오까 형무소, 옥사. 이런 리력을 년도순에 따라 계산해보면 이민지에서 출생했으나 평양과 서울에서 5년, 일본에서 3년 하여 고국과 일본에서의 체류시간이 모두 8년간2)이나 된다. 그것도 윤동주의 짧은 생애에서 사춘기와 성숙기의 대부분 시간을 한국이나 외국에서 보낸셈이다. 게다가 그의 다수 시들은 이 시기에 씌여졌다. 원래 이민자의 정체성은 이중성을 가지기 마련인데다 이처럼 고국과 일본에서의 체류시간이 길기때문에 아무리 이민지 출생자라 해도 작품의 이민문학여부를 가리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본고는 윤동주의 개별적 시작품의 이민문학여부를 확인하기 위한데 목적을 둔것이 아니라 이민작가로서 윤동주가 자신의 정체성인식을 어떻게 표현하였느냐를 밝히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최문식, 김동훈 편, 《윤동주유고집》(연변대학출판사, 1996)을 기본 텍스트로 하고 다른 판본들도 참고하였다.     2.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확인     필자가 골라낸 관련 시작품들을 창작년대순으로 읽다보니 가장 만저 눈에 뜨인것이 《고향집-만주에서 부른》이라는 작품이다.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1936.1.6)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윤동주는 중국 룡정 명동에서 출생하였다. 이민 2세가 될것인데, 따라서 그의 고향은 룡정 명동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화자는 고향이 《남쪽 하늘 저 밑》에 있는 따뜻한 곳이다. 내 어머니가 계신 곳이다. 그리고 《나》는 《헌 짚신짝 끄을고》 여기에 왔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라고 하는 화자는 시인 윤동주 자신은 아니며 어머니가 계신 남쪽 하늘 저 따뜻한 고향집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온 이주민이다.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는것은 현재 살고있는 곳이 북간도쯤이 된다는 말이다. 즉 시인은 이주민이라는 공동체의 립장에서 향수를 토로하고있다. 그것도 《왜 여기 왔노》라는 넋두리를 섞으면서 말이다.   윤동주의 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인 자신의 립장이 아닌 화자를 등장시키고있다. 이는 객관적 혹은 공동체적화자를 리용한 공동체적정서의 표출을 념두에 둔 시작행위라 하겠다. 즉 이주민의 한 성원으로서 화자는 불특정개인이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이 시를 쓸즈음 개인적인 감수성을 이주민이라는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립장에까지 확장시켜 우리의 력사와 불행한 운명을 하소연하고 드러내고있는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주민 2세로서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보면서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고있는것으로 사회적사명감을 드러낸것이 되기때문이다.   이는 결국 이민자의 정체성확인이 시적으로 표현된 형태이다. 두개의 차원에서 설명할수 있는데, 먼저 화자의 차원에서 보면 이민은 고통스러운 경력이다. 그래서 화자는 고향인 모국땅의 고향집을 그리워한다. 모국땅과 고향집을 그리워한다는것 자체가 이민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정체성을 보전하지 못하고 생존을 위한 이주를 단행하였고 현재는 이민지에서 또다른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살려니 과거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고국땅의 고향집이 그리운것이다. 다음, 시인 윤동주는 룡정 명동이 고향이다. 그럼에도 남쪽 따뜻한 곳이 고향인 작중의 화자를 등장시켜 고향을 그리게 하고 그의 그리움을 동정한것은 무엇때문일까? 두말할것도 없이 동류의식때문일것이다. 여기에는 이민 1세인 부모와 친지들, 이웃들에게서 전수받은 고향의 기억들도 당연히 작용하였을것이나 그보다도 시인 자신이 이민자의 삶을 살아오면서 키워온 이민자의 동류의식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려는 욕구를 자극했을것이다.   동심이 짙게 드러난 《오줌싸개지도》 역시 그러한 정체성 확인의 욕구를 잘 보여준다.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1936. 초)     이 작품 역시 앞의 《고향집》과 비슷한 정서를 드러내고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적화자가 그 반대편인 고국의 고향땅에서 이민지인 만주땅을 떠올린다. 첫련은 동요나 동시의 립장에서 볼 때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 될만한 소재를 다루고있다. 동생이 지난밤에 오줌을 싸놓은 요가 빨래줄에 걸려있는데 그것이 지도와도 같다고 했다. 그런다음 2련에 가서는 그에서 비롯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있다. 즉 그것이 엄마 계신 별나라의 지도일지도 모르며 아빠가 계신 만주땅 지도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계시고 아빠는 돈을 벌어 자식 먹여살리기 위해 만주땅이라는 곳에 이민을 간것이다.   여기서 윤동주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첫 상상은 쉽게 리해할수가 있다. 그러나 윤동주가 만주땅 출생인데 화자는 고국땅에서 만주땅에 돈벌러 간 아빠를 그리워한다. 화자의 공간적위치만 바뀌였을뿐 《고향집》과 같은 맥락이다. 민족공동체의 립장에서 만주이민의 문제를 인식하고있다 하겠다. 《고향집》의 정서와 맞물려 만주이민의 문제에 대한 시적상상력과 작가적 사명감 혹은 책임감이 동시에 발동한것이다.     3. 이민자의 현재 삶에 대한 관조     앞의 두 작품에서 정체성의 확인 욕구는 일종의 의식적인 행위로서 거기에는 력사적인 상상력이 많이 개입되여있다. 그에 비해 아래의 두 작품은 이민자의 현실적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먼저 《슬픈 족속》이라는 작품을 보도록 하자.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9)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흰 띠》는 모두가 조선민족을 상징하는 복식들이다. 특히 《흰 수건》과 《흰 고무신》은 남성들도 사용했던것이나 그것들을 포함하여 《흰 저고리》와 《흰 띠》는 대체로 여성들이 많이 사용했었다. 조선족으로서 자기 민족의 특징을 시에 담은것은 당연히 정체성의 확인차원에서 리해할수 있다. 이국땅에서 사는 립장에서 민족동질성의 상실을 항상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그것은 시인의 정서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왜 이런 차림의 사람을 시인은 《슬픈 족속》이라 했을까? 첫행은 그냥 현상의 진술이라 하겠지만 제2행에서 《흰 고무신》은 《거친 발에 걸리》웠다고 했다. 《거친 발》은 일차적으로 항상 맨발바람에 전야작업을 해야 하는 농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것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이 시어로 정제되였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 농민의 고단한 삶을 느낄수가 있다. 다음은 《슬픈 몸집》이다. 인간의 몸 자체가 슬플수는 없다. 그러니 그 몸집, 즉 《흰 저고리 치마》를 입은 인간의 몸집이 시인에게 슬픈 모습으로 보였다는 말이 된다. 다시 《가는 허리》 역시 슬픔의 한 이미지가 되겠고 동시에 동정을 유발하는 불쌍한 모습의 이미지라 하겠다. 그러니까 《거친 발》과 《슬픈 몸집》, 그리고 《가는 허리》는 제목에 나타난 《슬픈 족속》의 재해석 혹은 심화가 되겠다. 다시 말하면 이국땅에 사는 우리 민족은 슬픈 족속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그러한 슬픔이 쌓이게 된것은 더 말할것도 없이 이주민으로서의 고난과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의 암흑에 의해 비롯된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그냥 우리 민족의 모습, 삶의 현실을 슬프게만 보고 손을 놓고있은것은 아니다. 마지막 행에서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고있다고 했다. 허리를 질끈 동인다는것은 상식적으로 일종의 자각이나 행동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이 험악하고 삶이 고달프다고 해도 악착스레 생존해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것일수도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현실과 투쟁하며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것일수도 있다.   《양지쪽》은 《슬픈 족속》보다는 2년 먼저 씌여진 작품으로 어쩌면 아직도 동심이 짙게 묻어나고있다 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 리면의 사상이나 정서는 오히려 섬찍할 정도로 강하고 깊다.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   호인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   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6.26)     첫련 두행은 중국땅 북방의 봄풍경을 그리고있다. 한시에서의 《비흥(比興)》이라는 표현기교중 《비》에 해당하는것으로 여기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과 《호인의 물레바퀴》는 화자가 체험하고있는 지역, 즉 간도땅 봄의 이미지가 될것이다. 다음 두번째련의 두행도 봄의 풍경묘사에 속하지만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는 표현은 《흥(興)》에 해당되는것으로 이른바 《7.7사변》이라 불리는 중일전쟁 1년전 식민지 백성, 그것도 이주민 백성의 어두운 심리적상황을 은근히 내비친것이라 하겠다.   세번째련과 네번째련 역시 《비흥》의 관계로 해석할수 있지만 앞의 상징적 혹은 암시적표현을 보다 강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표현하고있다. 즉 지도째기놀음이라고 하는 애들의 일상적유희의 특징, 즉 땅따먹기의 확장지향적성향과 일본의 령토야심과 그에 저항하고있는 중국의 대결을 은유적으로 련관시키고있는것이다. 마지막련의 《가뜩이나 엷은 평화》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점을 확인할수가 있다. 표면적으로 《아서라!》라는 표현은 지도째기놀음을 하고있는 두 아이의 《령토야심》을 저지하는 말이지만 사실상 그 표현의 대상은 평화를 깨뜨리려는 제국주의자들이 된다 하겠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어떤 측면에서는 윤동주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강한 저항성을 보여준다고 볼수도 있다. 다만 당시 시대적상황과 시적인 표현을 련관시켰을뿐 윤동주가 당시의 시대적상황에 대해, 특히 중국 전국토를 삼키고자 호시탐탐 노리며 준비하고있던 일제의 야심에 대해 어떻게 리해하고있었는지를 확인할수 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그러한 작품의 성향을 자신있게 말할수 없을뿐이다.   《슬픈 족속》에서는 민족의 슬픈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러한 렬악하고 슬픈 현실에서도 악착스레 생존하려는 이주민의 의지를 보여주고있다. 이것도 정체성 확인의 한 방식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그에 비에 《양지쪽》에서는 스스로가 중국땅에서 사는 조선인 이민자임을 전제하여 위기의식을 표출하고있다. 이민 2세의 정체성인식을 드러낸 경우다. 그러니까 이 두 작품은 조선인 이주민의 이중적정체성을 드러내고있다 하겠다.     상기 네 작품중 세편은 1936년의 작품이고 한편은 1938년의 작품이다. 그러니까 각각 19세때와 21세때에 쓴것이 된다. 약관의 나이에 개인적인 관심을 넘어 민족공동체, 이민자의 공동체적 문제에 주목하였다는것은 시적인 감성을 말하기전에 우선 시인의 의식이 얼마나 조숙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그리고 이주민의 정체성인식을 보여준 시작품이 지극히 적은 상황에서 이 네 작품은 매우 가치있는것이라 생각된다.     4. 향수와 그 승화     향수는 시작품에서 흔히 볼수 있는 소재이다. 고향이 인간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하며 따라서 고향을 떠났을 때의 감수가 그만큼 절실하고 강렬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이주민 시인에게 있어, 특히 윤동주에게 있어 향수는 일반적인 향수의 의미를 초월하여 이주민의 신분확인을 드러내는 소재이고 감수가 된다. 먼저 윤동주가 처음 평양 숭실중학에 류학을 갔을 때 쓴 작품 《황혼》을 보자. 1936년 3월말에 귀국했다고 하니 아마 이제 막 귀국하게 될즈음 쓴것으로 보인다.     해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쭉한 일자를 쓰고…  지우고…     까마귀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싶다.   (1936.3.25. 평양에서)     첫련 《해살은 미닫이 틈으로/길쭉한 일자를 쓰고… 지우고…》는 그냥 방안에 비쳐들어온 저녁해살의 모습을 그린것처럼 보이지만 꼼꼼히 따지고보면 이제 하루해가 서산에 기우는 시각 어떤 마음의 움직임을 암시한것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다음련에서 까마귀떼가 지붕우으로 날아지나간다고 했다. 왜 이런 그림이 화자의 관심을 끌었을까? 두말할것도 없이 까마귀가 날아간 북쪽에 고향이 있기때문이다. 여기서 이미지의 핵심은 《둘, 둘, 셋, 네, 자꾸 날아 지난다》라는 구절이다. 까마귀 하나쯤 날아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그냥 덤덤히 지나치고말았을지도 모른다. 여럿이 자꾸 날아지나가기때문에 도무지 마음을 걷잡을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행의 《쑥쑥, 꿈틀꿈틀》이라는 강조된 표현이 튀여나온것이다. 향수의 마음을 끊임없이 자극하고있음을 화자는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고있다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련 《내사…/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싶다》는 표현으로 참을길 없는 향수의 심정을 폭발시키고만다. 간절한 고향생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인간은 고향에서 향수를 느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타향이나, 특히 이국땅에 몸담고있을 때면 고향의 모든것이 아름다워보이고 그리워진다. 그래서 윤동주는 룡정의 아들임을 확인하게 되는것이다. 이 시의 가치는 타향에서 느끼는 간절한 향수를 해저물녘의 자연이미지에 기탁하여 점층적으로 드러내고있다는데 있을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까마귀의 이미지는 까마귀가 상징하는 흉조로 제시된것 같지는 않으나 그러한 까마귀의 이미지때문에 좀더 암울해지고 간절해짐은 부정할수 없을것 같다.   이 시는 그냥 순수한 향수시일뿐이다. 그러나 《별세는 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전문 인용하고싶지만 너무 길어서 인용은 피한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졸업을 몇달 앞둔 시기에 쓴것이다.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는 표현에서 볼 때 이 시의 화자는 북간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타향에 있다는 말이 된다. 년표를 살펴보면 이때 윤동주는 서울에 있었던것으로 되여있다. 그리고 가을이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가 이 작품의 첫련이다. 그리고 별 하나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그리고 《어머니》를 그리며 헤인다. 여기서 《사랑》과 《동경》 그리고 《시》는 화자의 미래에 대한 기대나 동경을 표현한 이미지들이 되겠지만 《추억》과 《쓸쓸함》 그리고 《어머니》는 향수를 드러낸것임에 분명하다. 시인의 고향은 서울이 아니라 룡정이기때문에 류학을 위해 서울에 체류중인 시인에게 있어서 서울은 타향이다. 이것을 향수의 정서라 표현할수 있겠다.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 불러봅니다.》라고 한다음 화자가 불러본 말들은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시인들을 빼고는 전부가 고향의 이미지들이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 《벌써 애기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등이 이에 속한다. 이는 앞의 《추억》이라는 표현과도 관련되는 이미지들로서 고향의 경험에서 비롯된것들이다. 비둘기 등 동물의 이름도 여기서는 고향에서 보았던, 혹은 경험했던 동물들로 보아야 할것이다. 그리고 《별이 아슬히 멀듯이》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고 북받치는 향수를 털어놓는다.   이주민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고향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이제 이민 3세, 4세가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현재까지도 우리가 고향을 말할 때 항상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의 고향이 어디냐를 따지고있는것도 그러한 복잡한 고향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것이다. 고향에 대한 인식이 복잡한만큼 향수의 정서나 감정도 복잡하지 않을수 없다. 이 작품의 경우 비록 향수의 정서는 여느 향수시와 별 다름이 없어보이지만 중국땅 자신이 태여난 곳을 고향이라 인식하고 짙은 향수의 정서를 드러낸것 자체가 이민시인의 이중적정체성을 보여준것이 된다. 현재 몸담고있는 서울은 모국이고 부조의 고향이지만 그것을 고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국땅을 고향으로 인식할수밖에 없는것이 이주민의 처지이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국땅 일본에서 느낀 향수는 어떤것일까?   《흐르는 거리》, 《사랑스런 추억》, 《쉽게 씌여진 시》 등 세 작품은 모두 윤동주가 일본 동경에서 류학을 시작한 첫해의 작품이다. 1942년 5월 12일, 13일과 6월 3일에 각각 쓴것으로, 윤동주가 그해 봄(날자미상)에 일본에 건너가 4월 2일 동경 립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고 하니 이제 막 일본땅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류학공부를 시작한후에 씌여진 시라 하겠다.   세 작품은 기본적으로 비슷한 정서를 드러내고있다. 고향을 떠나 타향이나 타국에서 사는 외로움, 울적함, 향수가 기본적인 정서이다.   먼저 《사랑스런 추억》에서는 일본에 체류중인 화자가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의 추억을 되살려낸다. 고향을 떠나 오랜 시간 타향을 전전하는 류학생의 허전한 마음과 외로움이 잘 그려지고있다. 특히 담배연기라는 이미지가 그러한 정서를 절실하게 다가오게 한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담배연기처럼 표류하는 마음을 달래야 했던 서울의 삶이였으나 《동경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생각할 때는 오히려 그것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리워한다》는 점이다. 서울류학도 타향살이이지만 동경은 더구나 이국땅이여서 화자가 느끼는 외로움이나 허전함의 정도가 훨씬 강함을 알수 있게 해준다. 즉, 오늘 화자가 처한 이국땅에서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서성거릴 게다.》라는 지난 서울류학때 겪었던 타향의 설움이 희망과 사랑처럼 기리워진다고 표현함으로써 오늘 삶의 허전함과 외로움, 서러움을 보다 절실하게 드러낸것이다.   《흐르는 거리》는 그러한 이국땅에서 겪는 향수를 옛날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표현한다. 보다 직설적인 표현이 되겠으나 《괴롭다, 슬프다, 외롭다》 라는 표현을 《그리움》이라는 표현 뒤에 숨겨두고있다. 시적인 절제의 미학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시인은 그러한 타향살이의 슬픔을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등의 이미지를 통하여 암시하고있을뿐이다.   이제 그러한 이국땅에서의 감정을 시인은 《쉽게 씌어진 시》에서 터쳐낸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륙첩방은 남의 나라,》 이 련을 시인은 행을 뒤바꾸어 다시 반복한다. 그만큼 강조하고있다는 얘기가 될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중심이미지는 《밤비》와 《눈물》이다. 그만큼 외로움의 정도가 강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허전함이나 외로움을 사탕처럼 입속에서 녹이며 《침전》해버리지는 않는다.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는 외로움에, 슬픔에 빠져버리는 자신에 대한 발견이다. 발견만 하고 그만둔다면 그것은 역시 《침전》이 될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륙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작품 후반부의 4련이다. 여기서 시인은 그렇게 《침전》하려는 자신을 반성한다. 부끄러움은 윤동주 특유의 자성방식이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자성만이 능사는 아닐것이다. 뭔가 앞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이나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겠단다. 여기서 《시대처럼 올 아침》이라는 표현은 여느 비유와는 조금 다르다. 《아침》이라는 시간개념을 《시대》라는 좀더 큰 시간개념 즉 사회적시간개념에 등치시키고있다. 새로운 시대를 기다린다는 말이 되겠다. 윤동주의 시에서 자신의 신념과 리상을 가장 명징히 밝혀놓은 시구라 여겨진다. 그러니까 이 3편의 시를 통하여 우리는 윤동주가 허전하고 외롭고 슬픈 타향살이, 이국살이를 하는것은 위기에 처한 민족을 위해, 암흑의 시대에 《등불을 밝》히기 위한데 목적이 있음을 고백하고있는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라 부르는것이다. 직설적으로 현실을 비판한것도 아니고 현실에 대한 불만을 력설한것도 아니지만 그를 저항시인이라고 하는것은 바로 이처럼 지극히 시적인 방법으로 흙탕물로 범벅이 된 현실사회에서 항상 부끄럼을 느끼며 자성할뿐만아니라 그 어두운 시대에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면서 아침처럼 올 시대를 기다린것이다.   그러니까 윤동주의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에 한정된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자신이 이주민이라는 점,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향수를 달래면서 참고 견뎌여야만 한것은 한 개인을 위한것만이 아닌, 사회에 《등불을 밝》히려는데 목적이 있음을 향수라는 애절한 표현속에 드러내고있는것이다.     5. 결 론     윤동주는 우리 시인이지만 한국에서 먼저 발견되여 각광을 받아왔다. 범민족적인 문학의 차원에서 이는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때문에 윤동주시의 이민문학적 성격은 여태까지 론의되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아쉬운 일이다.   상기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윤동주가 간도이주민의 후예라는 신분인식, 즉 정체성인식을 분명히 드러내고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이점은 이민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보여준 시에서도 드러나지만 룡정 명동을 자신의 고향으로 인식하고 그 고향에 대한 향수를 애절하게 표현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더구나 그는 그러한 향수의 정서에다가 《등불을 밝》혀 시대의 어둠을 내몰려는 의지와 리상을 담음으로써 단순한 자연인의 립장에서만이 아니라 시대의 사명을 지닌 지성인으로서 소명을 다하고자 했다. 윤동주가 우리 조선족시인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주 석 ------------------------------ 1) 金毅洙, 尹東柱 詩의 解體論的 硏究,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1쪽. 2) 물론 연희전문 4년동안 여름과 겨울 두 방학에는 고향에 돌아왔다고 하고, 일본류학기간에도 고향에 다녀갔다고 하니 이 8년중 시간적으로 대략 1년반 정도는 고향에서 보냈다고 해야 할것이다. [출처] 윤동주시의 이민문학적 성격|작성자 반벽거사  
1480    리옥금 / 장춘식 댓글:  조회:5082  추천:0  2015-09-17
민족과 전통과 삶, 그리고 시 ―리옥금 시집 《별 줏는 녀인》 장춘식     문학작품창작에서 기교는 중요하다. 소재가 작품이 되기까지는 반드시 기교를 통한 가공을 거쳐야 하기때문이다. 시창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시창작에 좀더 많은 기교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것을 우리는 《시적표현》이라 일컫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기교 혹은 표현에 집착하면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날수도 있다. 집착하다보면 의미가 기교에 덮여버릴 우려가 있기때문이다. 그렇다면 기교가 더 중요하냐 의미가 더 중요하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는 참 난감하다. 둘 다 중요하니까. 혹 이렇게 대답하면 어떨까? 기교를 사용했으나 그 흔적이 보이지 않을 때 좋은 작품이 완성된다고. 기교는 있으되 기교가 보이지 않는 작품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기교에 대한 얘기로 글을 시작한것은 당연히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 리옥금의 시집을 읽고 첫 인상으로 기교라는 개념이 떠올랐기때문이다. 그렇다면 리옥금의 시작품들은 기교를 적절히 잘 리용하였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것도 있다. 아래에 작품을 분석하면서 이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도록 한다.     1. 전통적인 삶에의 지향, 그리고 정체성 확인     작품집에 수록된 리옥금의 시작품에서 《단오》《한복》《색동저고리》《북소리》《동지팥죽》과 같이 민족적전통 혹은 이주민과 그 후예의 정체성 확인에 관련된 시작품 제목만 하여도 20여개가 된다. 그외에도 제목은 그렇게 보이지 않으나 시행들에 류사 표현이 들어간것까지를 포함시키면 이 류형의 시들은 더 많다. 전체적으로 가장 많은 량을 차지하며 따라서 리옥금시의 다수가 하나의 큰 주제를 지향하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만큼 전통과 민족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크다는 말이 될것이다. 이는 동시에 시인의 삶에서 전통과 민족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말해주는것이 되기도 한다.   《마을앞 개울가에/맑은 물 돌돌돌/흘러 흐르네》로 시작되는 《과거2》에서 시인의 의식은 시골 개울가 아낙네들의 빨래터와 그 빨래터에서 벌어진 시골인의 삶에 닿아있다. 《무서운 시어머니 효도하는 며느리》라는 표현에서 알수 있듯이 시골의 삶이라고 행복만 있는것은 아니지만 첫련의 밝고 즐거운 표현에서 보여지듯 시인은 전체적으로 그러한 소박한 삶에 애정을 드러낸다. 이런 삶은 결국 오늘날 도시화, 세계화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전통적인 삶이다. 그러한 삶은 《색동저고리》에서 《평생 씻지 않아도/언제나 깨끗하도록/순수한/동년》으로 묘사됨으로써 한결 순수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 다시 《옛말》이라는 작품에 련관시켜보면 시인이 지향하는 전통적인 삶의 모습은 대개가 과거의 추억에서 비롯됨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한여름/모기쑥을 태우며/어머님의 무릎을 베고/앞뜰 버들나무아래/누우면》이라는 첫련의 표현에서 이점은 곧 확인된다. 여기에 모기쑥, 어머니, 외뿔도깨비, 비자루귀신 등의 이미지가 더해지면 그 옛날 어린시절 우리의 삶이 생생히 되살아나기도 한다.   상기 작품들의 이미지가 일상사의 기억에서 비롯되였다면 《동지팥죽》이나 《세배》 등 작품의 분위기는 전통적인 명절을 통해 되살려낸 어린시절의 삶의 모습 혹은 느낌이다. 시인에게 있어 먼 옛날 어린시절의 《세배》는 《아빠의/뒷모습》이였고 《이웃집 할아바지의/담배쌈지에서 나오는/꼬깃꼬깃한 20전짜리/종이돈》이였으며 《앞집 할머님의 혼담》이였으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세배는 《아버지, 어머님 고향으로/날려 보내는/한자락 한숨에 담긴/눈물방울》이 된다. 전통적인 삶에의 지향과 그것에 되돌아갈수 없는 허전함이 은연중에 표현된 경우이다.(이상 시 《세배》) 《동지팥죽》 역시 전통적인 명절의 추억에서 취재한것인데 여기서 동지팥죽에 관련된 추억은 《강원도 고향마을에서/만주 오동성까지/동지팥죽의 김은/식을줄 모르고/모락모락 피여올랐어요》라는 제2련에서 보여지는바와 같이 민족적정체성과 부모세대의 이민추억에까지 연장된다. 제3련에 그려진 어머니의 꿈속에는 그러한 이민과 정착의 고난사가 응축되여있는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전통적인 삶을 지향하며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삶에 되돌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저 슬퍼만 하고 추억에만 젖어있는것은 아닌것 같다. 《장단을 배우며》에는 조금이라도 전통과 민족성에 접근하려는 실천의 의지가 담겨있다. 굿거리장단, 휘모리장단을 통해 《먼 옛날을 당겨다/내 손에 담아본다》는것은 그냥 추억에 만족하지 않음을 의미하는것이다. 《수천년 흘러온 소리는/잠잘 곳을 찾는/내 마음을 깨운다》는 마지막 3행의 표현은 우리 민족의 음악적특징으로 상징되는 장단을 통해 의식속에서나마 전통과 민족의 삶에 접근했음을 보여준것이다. 특히 마지막 2행은 이제 인생의 로년기에 접어드는 길목에서 얻어낸 깨달음임을 시사하고있어 어딘가 무거운 감상(感傷)을 자극하고있기도 하다.   이 류형의 시들은 시인의 추억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이는 시인의 현재 삶이 전통이 색바래져가는 도시에서 영위되고있는데서 비롯되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현대인의 공통된 삶의 양상이여서 더구나 공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앞의 《동지팥죽》이라는 작품에서 우리는 시인의 전통지향성이 민족과 부모세대의 이민경력과도 맥이 닿아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시 《송화강》에서 《머리와 사슬이 이어지는/흐느낌》이요 《머나먼 고향의 부름이였》다는 표현은 부조(父祖)의 이주와 먼 조상의 땅(즉 고구려, 발해의 땅)간의 관계를 암시하고있고 《아버지》에서는 독립을 찾기 위해 만주땅에 이주해살던 아버지가 《오매불망/고향 그려》 결국 《한줌의 향연마저/동해로 떠나셨》다고 했다. 이주민의 후예임을 확인하고자 한 시인의 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목단강》에서 그러한 시인의 의식은 좀더 절실한 형태로 표현된다. 《아버지가 두둥실/물결을 타시고/머나먼 동해바다/고향 찾아 떠나가신/길》은 이미 상기 《아버지》에서 제시된 상황이다. 이것을 우리는 아버지의 유골이 강을 따라 동해로 흘러갔다는 의미로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잎이 떨어져 뿌리에 되돌아간다(落葉歸根)는 중국의 성구를 떠올리는 상황이다. 아버지가 독립을 위해 중국 만주땅에 이주를 했고 이제 한줌의 재가 되여 동해를 거쳐 고국의 땅에 되돌아갔다는것.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련의 표현은 의미심장한데가 있다. 《멀리 에돌아도/막힘이 없이/가깝게 가는/머나먼 고향 길》은 《목단강》이라는 표제와 련결시켜 생각해볼 때 고국과 이민지 삶은 동떨어진것이 아님을 시사한것으로 볼수 있는것이다. 이주민의 후예로서 고국과의 끈끈한 관계, 겨레의 동질성과 이를 통한 이주민의 정체성 확인을 엿볼수 있는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의 의식은 항상 추억속의 삶을 더듬고있고 그러한 전통지향의 삶은 아버지의 과거와 죽은후의 《귀소(歸巢)》 상황을 계기로 아버지의 고향 즉 고국과 련결됨으로써 이주민의 후예로서 정체성의 확인의 차원에 이르고있는것이다. 이주민으로서 우리 조선족의 삶이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처해있고 그로 하여 정체성 상실의 위기의식이 팽배해있는 오늘의 우리 상황에서 이런 인식은 당연히 큰 의미를 지닌다.     2. 삶의 깨달음과 허무     앞에서 론의된 주제의 시작품을 빼고 완성도가 높은 시들을 이 항에서 다루고자 한다. 사실 리옥금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에서 이 부분의 주제를 다룬 시들이 가장 완성도가 높다는 판단이다. 하긴 더러 필자의 개인적인 기호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고자 해도 이런 판단은 변함이 없다.   《함박눈2》라는 작품은 시행들이 조금은 어수룩한 면이 없지 않다. 호흡이 부자연스러운것이다. 그러나 느낌이 생생하고 새롭다. 우선 안개속을 눈이 내리다가 다시 안개사이로 피여오른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눈은 하늘에서 지면이나 수면우에 내려오게 되여있다. 혹 바람이 불면 하늘로 되올라가는 착시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피여오르네》라는 표현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시인은 함박눈이 피여오른다고 느끼고있다. 왜냐? 시인의 눈앞에 떠오른건 그 함박눈과 안개속에 피여오를 진달래였기때문이다. 그것도 《붉디붉은 꽃잎의/애절한 소원한마디》로 피여오를 진달였기때문이다. 흰눈과 역시 흰색계렬이라 할수 있는 자욱한 안개와 《붉게 타며》 피여오르는 진달래의 선명한 대조, 그 강렬한 색조의 충돌속에서 독자는 수많은 련상과 정서의 파동을 체험하게 되는것이다. 더구나 진달래가 우리 민족의 의식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할 때 이러한 정서의 파장은 지대하다. 이미지를 통한 생명의 상상을 동반함으로써 철학적인 의미는 제시하지 않고도 감흥을 준 경우가 된다. 《단풍1》 역시 색상의 대조에서 시적감흥이 이루어진 작품이다. 해빛에 영글은 빨간 단풍과 해빛을 쫓는 노란병아리의 대조, 그리고 푸른 하늘, 흰 구름과 빨간 단풍잎의 대조, 또 제3련에 숨겨둔, 얼핏 보면 시의 흐름과는 무관해보이는 《그리움 한송이》라는 표현이 마지막련의 《새빨간 추억으로》와 조응되면서 그리움과 추억과 이를 뒤받침해주는 사라져가는 혹은 스러져가는 이미지로서의 단풍잎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서글픈 인생의 감흥을 생성하고있는것이다. 두 작품은 본질적인 련관성은 없지만 색조의 대조를 통한 생명의 느낌 혹은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성을 지니고있다.   《첫사랑》, 《다향(茶香)》 등 작품에서는 사랑의 아픔과 허무적인 느낌을 표현하고있다. 《첫사랑》에서는 《그 모습/다시 찾을길 없어라》라는 첫사랑의 아련한 아픔을 반복되는 《옛날》, 《옛적》의 이미지에 련결시킴으로써 삶의 허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있다. 그에 반해 《다향(茶香)》에서는 사랑을 다향에 비유하고는 《다향의 애절한/가슴 찢어 잊을수 없는/연록색 심장의 고동소리》로 표현함으로써 앞의 《첫사랑》과도 련관되는 먼 옛날의 사랑을 되살려낸다. 그리고나서 마지막에 《노을은 불타는 다향이라네》라 함으로써 이제 나이가 든 현재 추억속 그 옛날 사랑의 느낌을 표현하고있는것이다.   《다향》에서의 노을은 인생의 로년기를 암시하고있음이 분명한데 《가을1》에서는 그러한 인생말년의 인식을 좀더 진일보한 허무의식으로 환원시킨다. 여기서 락엽은 곧 인생의 말년을 의미할것인데 그에 더하여 푸른 하늘은 화자에게 청량함이나 밝음이 아니라 아픈 《멍》으로 표현된다. 다시 밤이슬에 젖은 잠자리의 무거운 날개와 창공을 가르는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대조되여 마음과 현실의 불일치, 즉 인생말년의 육체적인 한계와 정신적인 피곤을 드러낸것이다. 마지막 행의 《풀잎소리도 가냘프다》는 그러한 나약함을 강조한것이다. 어쩌면 소극적인 삶의 인식이 로출된것으로 볼수 있는데 사실 이것 또한 인간의 일상적인 느낌임에는 틀림이 없다.   《립춘1》, 《어느날 오후》 등은 녀자시인의 시적구성력과 표현의 섬세함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그래서 필자 개인적으로 점수를 많이 주고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립춘1》의 첫련에는 립춘을 맞은 자연의 풍경이 묘사되여있다. 마른나무가지에 하얀 꽃이 피여있다는것, 누구나 눈길을 빼앗길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제3련에서는 그 아름답고 도고한 꽃이 추녀끝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하나의 물방울이 되여 《시린 마음을 녹여줍니다》고 했다. 차분하고 섬세하지만 별로 대단할것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제2련 제1행의 《무서운 겨울의 이야기》와 련결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어두웠던 삶의 기억이 봄의 따뜻한 기운에 의해 해동되고 풀렸다는것. 조금은 빛바랜 소재이기는 하지만 깔끔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어느날 오후》는 좀더 녀성적인 섬세함과 시적발견의 개성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가 된 사실은 녀성들이 일상 하는 청소 즉 뭔가를 닦아내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 행위가 서투르다고 했다. 비록 숨어버린 시간들을 찾아내는 손이 서툴다고 표현했으나 여기서의 서툴음은 닦는 행위의 서툴음과도 련관될것인데 그 련관속에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겹쳐서 느끼게 된다. 즉 가정주부로서의 일의 서툴음과 《마음속에 앉은 때》 즉 삶의 세월속에 쌓인 불결함 혹은 불순함에 대한 반성의 서툴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련의 《온 오후 하는일 없이/구석구석 먼지 오른 일상들을/흩어진 시간조각으로 닦아본다》는 화자의 행위 표현은 쏜살같이 내달리는 현대인의 빡빡한 삶의 시간과 그 시간속에서 마음속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반성의 어려움을 시사해준다 하겠다.   《등산》은 그러한 반성과 삶의 반추를 등산이라는 행위에 담아 잘 표현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시인데 시인 리옥금의 시적능력이 최대한 발휘된 작품이라 할수 있다. 특히 제1련의 《주말이 되면/일상들이/더덕더덕 매달려/무거워진 몸》이라는 표현에 공감이 간다. 제2련에서는 힘겹게 산을 오르는 화자의 모습이 《더위 먹은 소》에 비유되였는데 나이 든 몸으로 산에 오르는 등산인의 이미지가 잘 각인되였다. 그러나 력점은 마지막 련에 있다. 《인생의 어려웠던 고비들을》《발걸음으로 재여보고》《희로애락을》《산마루로 헤여보며》《아팠던 마음들은/산골짜기에 던져본다》는 표현은 삶에 대한 상당한 경력이 쌓이지 않고는 깨달을수 없는것이다. 그러나 등산이라는 스포츠의 특성상 느끼는 성취감이나 상쾌함이 작품에서 간과되였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좀더 성숙된 삶의 깨달음과 시적인 심화가 가능했었는데 말이다.   《꿈》과 《당신》이라는 작품은 사랑의 느낌 혹은 인식을 표현하고있는데 《이 모습 이대로/당신의 눈동자에/사진으로 남길래요》라는 《꿈》의 제1련은 이 시인의 시적인 구성력을 보여준 경우가 된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질수 있다는/희망 하나로》라는 제4련과 《존재의 리유는/항상 있는거래요》라는 마지막 련의 표현은 천박함을 로출시키고있다. 《당신》 역시 비슷한 경우이다. 삶의 느낌이나 인식을 좀더 시적인 형상의 승화를 통해 표현해야만 이런 태작을 피할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기는 해도 리옥금의 시작활동에서 일상적인 삶의 깨달음과 감흥을 다룬 작품이 완성도가 가장 높다는 사실은 부인할수 없다.     3. 기교와 무기교 사이     이 글의 시작에서 기교문제에 대해 언급한바 있지만 리옥금의 시작품에는 아직도 기교를 채 소화시키지 못한 흔적이 상당수 보인다. 특히 상기 《꿈》과 《당신》 류의 작품들은 재치는 인정되지만 시적감흥은 미미하다. 지나치게 기교에 기대여 덜익은 시적인 감수를 작품화한 결과라 하겠다. 《코스모스》나 《조롱박》 역시 비슷한 경우에 속하는데 대상의 특징을 공교한 비유로 표현한 점에서는 시인의 재기가 엿보이지만 현상자체의 묘사에 그쳐 좀더 깊은 의미의 창출에는 실패하고있다.   그러나 이 정도라면 그냥 넘어갈수도 있다. 이에 비해 《잠자리》나 《락엽의 소리》 같은 경우는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될것 같다. 유월 염천 논두렁아래 개울물에서 잠자리가 날아예고있는데 그 표현을 《한순간의 꿈에/연하게 익어/풋풋한 몸으로/하늘을 날아예다》고 했다. 꿈때문에 익는다는 표현도 적절하다 할수 없지만 《풋풋한 몸》이라는 표현은 아리숭함을 떠나 의미의 전달이 왜곡되기까지 한다. 《풋풋하다》는 사전적으로 《풋것처럼 싱싱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시적인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아무리 너그럽게 봐주더라도 식물에나 사용하는 표현을 잠자리에게 비유한것은 적절하다 할수 없다.   《락엽의 소리》 역시 비슷한 우를 범한 경우이다. 《단풍이 불을 지르는》이라고 한 제1련의 첫행에서 혹 단풍에 대한 불탄다는 표현을 좀더 강하게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단풍의 의인화는 어색함을 넘어 무모하다고 볼수밖에 없다. 다음 제3련의 《저벅저벅/락엽이 가는 소리》에서 락엽이 간다는것은 적절한 표현이 될수가 없다. 《저벅저벅》이라고 하는 락엽 밟는 소리의 의성화는 락엽이라고 하는 대상이 걸어가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이나 동물이 걸어가면서 락엽을 밟는 소리에 해당되기때문이다. 표현의 교묘함에 집착하다보니 상식을 망각한 경우가 된다.   이밖에도 상당수의 작품에서 이와 같은 기교집착에서 비롯된 의미의 왜곡이나 부적절한 비유들이 보인다. 기교는 있으되 없는것처럼 작품속에 잘 삭혀서 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할것 같다. 청년시대의 시는 대체로 젊음의 감성에 의지하게 되지만 중로년의 시는 대체로 달관의 경지에서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시적기교의 소화 문제를 특별히 강조한것은 바로 이제 중로년기에 접어든 시인으로서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모색해주십사 하는 주문때문이였다.     4. 마무리     주제적측면에서 리옥금은 민족과 전통, 이주민의 후예로서의 정체성 확인이라는 미리 설정된 주제와 일상적 삶속에서의 깨달음이나 삶의 느낌, 허무 등 체험적주제라는 두 방향에서 시를 쓰고있는것처럼 보인다. 상기의 분석에서 우리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 좀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제작되였음을 알수 있었다. 이는 미리 설정된 주제방향에서 시작활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좀더 체험적인 느낌에 주목해야 함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 시인이 앞으로 명심해야 할 부분인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교 리용에서의 인위성 극복이다. 기교를 기교처럼 보이지 않게 리용했을 때 그 기교가 기교로서의 역할이나 효과를 최대한 발휘할수 있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그러나 사실 시인이라면 항상 시시각각의 느낌을 시로써 표현하고싶은 충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태작도 나오게 되는데 그것을 뭐라고 나무랄수는 없는것이다. 우리가 흔히 위대한 시인이라고 하는 시인에게도 태작은 존재하며 특히 잘된 시작품, 특히 위대한 작품은 어차피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부 평범한 작품이나 태작이 나왔다고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닐것이다. 다만 이것저것 흠집을 지적한것은 좀더 태작을 줄이고 수작을 많이 써달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랄뿐이다.   한편 시집에 수록한 시인의 언니 이점수의 시작품들은 순수성 그 자체를 표현하고있다. 《성인동요》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동요와도 같은 순수함으로 시골의 풍경과 농부의 삶과 넋두리를 소박하게 표현했다고 평가하고싶다. [출처] 민족과 전통과 삶, 그리고 시-리옥금시집 |작성자 반벽거사  
1479    고 송정환 / 장춘식 댓글:  조회:4755  추천:0  2015-09-17
  송정환의 창작과 연구 다시 보기 장춘식     우리 시인이자 사학자인 송정환선생이 작고한지도 벌써 16년 세월이 흘렀다. 선생은 54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풀피리》(연변인민출판사, 1982), 《사랑의 페허위에》(도서출판 高句麗, 2001) 등 시집 2권과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사 개요》(료녕인민출판사, 1982; 한국 범우사, 1990년 개정재판), 《조선사화총서》(전4권, 료녕인민출판사, 1983~1985), 《안중근전》(료녕민족출판사, 1985), 《조선갑오농민전쟁》(상무인서관, 1987) 등 7권의 력사서, 그리고 소설, 수필, 문학평론 등 기타 문학작품 및 사학론문 다수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21세기라는 시점에서 선생의 문학적성과와 학문적업적을 되돌아보는것은 우리 민족성 보전과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시문학창작의 특징과 전개     송정환의 문학창작은 시를 중심으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이루어졌다. 시기별로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치는데 첫째시기는 청년시절인 1950년대말~1960년대 초반이고 둘째시기는 개혁개방초기 즉 1970년대말 1980년대초반이며 세번째시기는 그후 작고하기전까지의 시기이다.   첫째시기의 시들은 청춘의 정열과 감성이 넘쳐나고 거기에 신중국 건국후 격정적이고 조금은 유아적인 정치적담론이 호응되여 표현되였다.   처녀작으로 알려진 시 《춘희의 초상》(1956)은 시인이 19세 되던 해에 발표한 작품인데 이 시에는 새시대 고향건설에 나선 춘희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희망에 가득찬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그려보이고있다.   제1련에서는 화가의 시각으로 춘희라는 새내기 농사군의 외적인 모습을 그리고나서 제2련에서는 행동하는 춘희의 정열적인 모습을 그린다. 상당히 서사적인 묘사속에 드러난 춘희의 이미지는 미래에 대해 희망과 기대로 충만되여있고 따라서 전반적인 시의 분위기는 밝다. 정열과 감성이 뚜렷하며 현실에 대한 인식은 매우 긍정적이다. 여기서 춘희의 초상은 동시대 청년들의 초상이라 할수가 있어 다분히 전형성을 지녔다 하겠다. 작품의 마지막 4행만 보더라도 이점은 잘 드러난다.     그렇습니다. 화가들은 못그릴것입니다   처녀의 새별눈동자에 담긴 모든것,   두드러진 앞가슴에 품은 모든것,   정녕 이것만은 그려내지 못할것입니다…     삶에 대한 기대감, 흥분 같은 정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에 대한 찬미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장지구의 높은 굴뚝과 건물우로   동녘하늘은 구름과 연기로 자욱한데   구름새로 황금의 부채살 활짝 펼치며   타끓는 아침해 우렷이 솟아오르네     《장춘교외의 아침》의 첫 련인데 굴뚝과 연기는 력동적인 우리 사회의 상징이 될것이고 거기에 아침, 아침해는 생기에 넘치는 청춘의 정열을 상징한것이다. 이 작품뿐만아니라 《안강의 이른아침에》를 비롯하여 이 시기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장춘교외의 아침》의 마지막 련에서 그러한 시인의 기대와 희망은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생활이 바로 시며 노래인 여기   약동하는 교외의 대지 광활한 무대우에서   아침, 그것은 영예론 하루의 서막이여라   태양, 그것은 시대의 찬란한 조명이여라!     새사회, 새생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그것을 가능케 해준 조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조국》, 《조국의 수도에서》, 《영광이 있으라, 조국이여!》 이때 시인의 정체성은 민족성보다는 국민성에 맞추어져있다. 50-60년대 우리 시단에 조국에 대한 찬가가 류행했던 사실을 돌이켜볼 때 송정환의 작품들이 그러한 류행을 한층 고조시켰다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20대의 젊은 시인답게 이 시기 송정환의 시에는 사랑에 대한 어렴풋한 감정이 표현되기도 한다. 《무지개》, 《실련자에게》, 《사랑의 그림자》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런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밑바탕에 깔린 시에서마저 새사회에 대한 기대감이 강한 정서로 표현된다. 그만큼 당, 조국과 희망에 넘치는 새사회의 삶에 대한 시인의 감정은 진실했고 소박했다는 말이 될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열과 기대에 부풀었던 시인의 정서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한결 성숙해진다. 물론 제2단계 시창작도 문화대혁명이라는 암흑을 뚫고나온 해방감에서 시작된다. 첫번째 시집 《풀피리》중 《원혼이 된 시인에게》항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이 류형에 속한다.   우선 《좋다!》에서는 봄을 맞은 자연의 풍경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이 봄은 그냥 자연의 봄이여서 좋다고 한것만은 아니다. 첫 두 련을 인용해보이면 이점은 금방 알수 있다.     이른봄, 해빙기   집채같은 성에장 떠이고   봄물결 도도히 흘러가는데   들려와라 시성의 목소리   ―좋다!     겨우내 짓밟힌 강기슭   짐승들 쏘다니던 발자국은   아직도 저렇게 어지럽다만   산간을 울리며 굽이치는 봄물결   이 봄이 나는 좋다!     특히 제2련에서 어지러워진 강기슭에 대한 묘사는 4인무리에 의해 어지러워진 이 땅 겨울의 흔적이 분명하다. 그래서 더구나 시인은 이 봄이 좋다고 큰소리로 웨친것이다. 그러나 기쁨이나 즐거움만 있는것은 아니다. 《원혼이 된 시엔에게》라는 시에는 그 매서운 겨울이 우리 사회에 남겨준 뼈아픈 상처를 상기시키고있다. 《풀피리》의 《잊을수 없는 어제날의 생각》항에 수록된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상처의 흔적을 원천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문화대혁명속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들, 비정상적인 현상들을 재현하여 검토하고 비판하고있는것이다. 심지어 몇편 안되는 단편소설중 《정인군자》라는 작품에서도 이러한 문화대혁명의 상처 혹은 그속에 로출된 인간성의 문제를 다루고있다. 이른바 혁명위원회 주임이라는 자의 마음속에 도사리고있는 《악마》를 끄집어내여 비판하고있는것이다.   이런 반성과 비판을 통한 력사인식을 표현하고나서야 비로소 시인은 이제 불혹의 나이에 느끼는 삶의 긍지감과 행복감을 드러낸다. 《사랑시를 두고》를 비롯하여 《풀피리》의 《사랑의 그림자》항에 수록된 작품들에는 이러한 시인의 삶에 대한 애착과 긍지감이 표현되여있다.   그러나 이때쯤에 와서 송정환의 시들은 왕년의 정열과 생기를 잃기 시작한다. 형식적인 모색의 기회를 놓친것이다. 이 시기에는 우리 문단에서도 모더니즘시운동이 확산되면서 시적인 지형의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송정환은 거기에 합류하지 못하였다. 아쉽다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송정환은 또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한다. 력사에 대한 재음미가 이에 속한다. 사학자라는 송정환의 또다른 신분과도 관련되는 이 모색은 송정환의 시창작에서 셋째 단계가 되는데, 이 시기에 오면 그의 작품들에는 지천명의 깨달음과 인생의 무게감에 대한 인식, 그리고 조선족으로서 정체성 확인의 욕구들이 끊임없이 표현된다.   《사랑의 페허위에》는 1988년에 쓴 사랑시이다. 그러나 제목에서도 시사해주는 바와 같이 꿈같은 환상적인 사랑의 애탄 그리움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그를 통해 깨달은 삶의 무게감이다. 그런 무게감은 마지막 련에서 잘 드러난다.     꿈나라 무너진 돌각담위에   달빛은 이 밤도 춤추며 내리는데   이끼 돋은 사랑의 페허위에   추억은 다시 안개되어 꿈틀거린다     《용수평 작은 골목길》이나 《달처럼 별처럼》, 《가을밤에》와 같은 다른 사랑시들도 옛날의 사랑시와는 의미가 다르다. 오히려 인생의 무게감이 사랑시로 표현되였다고 하는것이 나을것이다.   사랑시에서뿐만이 아니다. 《이름 석자 아끼여》는 명예에 대한 시인의 깨달음을 시화한것인데 여기서도 삶의 무게감은 뚜렷하다. 《구름처럼 덧없는 일생에/강물처럼 부지런히 옥토를 적시며/짧은 생을 보람있게 살아가리라/이름 석자 때가 묻지 않게 하리라!》 짧은 삶을 값지게 보내려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있다. 《나 흙으로 돌아간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은 삶의 끝을 예감하기라도 한듯 1989년에 쓴 이 시에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고백하고있다.   삶의 무게감은 정체성 확인의 욕구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욕구는 우선 시인이 사학자인 관계도 있겠으나 고구려와 발해국에 대한 남다른 감정으로 드러난다. 《고구려 옛터에서 읊은 시》라는 시묶음에 묶인 3편의 시에서는 집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구려의 옛 흔적들을 이곳에 정착한 이주민의 후예의 시점에서 되새기고있다. 이보다 작품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바로 《발해국 옛터에서》라 하겠는데, 발해국 옛터의 폐허를 보며 망국의 설음과 인생의 무상함, 정체성의 문제를 두루 내포시키면서 담담한 어조로 시적인 감흥을 유발하고있다.   우리 조선족이 살고있는 땅에서 벌어진 우리 조상의 력사에 대한 되새김, 그것 자체가 조선족시인으로서는 하나의 정체성 확인 과정이다. 《할빈 역두의 아침》, 《역사는 울고있었네-안중근의사가 수감돼있던 여순감옥에서-》, 《장고봉 기슭을 지나면서》 등 우리의 현대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소재를 시속에 용해시킨것도 같은 리치라 하겠는데, 그러나 송정환은 자신의 정체성 확인 욕구를 력사 되새김이라는 의미에서만 드러낸것은 아니다. 이민의 이미지를 표현한 시작품에서는 좀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추억따라 세월따라-수필가 이계향여사 이게-》라는 작품은 일면 재미동포 수필가 리계향의 중국행을 그린것처럼 보인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지만 작품의 초점은 다른데 있다. 《고국을 등지고 쫓겨와 살던/저 먼 옛날 옛적엔/산설고 물설은 타향이었건만/오늘은 사무차게 정다운/사무차게 정다운 두번째고향…》 리계향의 운명이 우리 이주민의 운명과 같은 지평을 가졌다는 사실에 시인의 의식은 맞춰져있는것이다. 남을 통하여 자기를 드러낸셈이다. 《두만강의 여울소리》에서는 다시 그 매개체가 두만강이 되고있다. 《그것이 살길찾아 눈물의 강 건너/쪽박차고 쫓겨오던 그 시절/북간도 서간도 저 먼 북만벌/그리곤 바람세찬 시베리아에서/그것은 진정 겨레의 곡성이였다/두만강 철썩이는 여울소리…》 상기 《추억따라 세월따라》에서와 비슷한 시의식이지만 표현은 훨씬 직접적이다. 그만큼 시인 로년에 정체성 확인의 욕구가 강했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송정환 시창작의 전개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제1단계의 시들은 청춘의 정열과 감성속에 당대의 정치적인 담론들을 담아내고있고 제2단계의 시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과 비판, 그리고 이를 탈출한 해방감을 표현하고있으며 제3단계에서는 인생의 무게감과 정체성 확인의 욕구들을 표현하고있다. 그런데 이러한 3단계의 문학적 전개과정과는 무관하게 송정환의 문학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시적인 맥락이 있다. 그것이 뭐냐면 바로 고향의식이다. 이러한 고향의식은 앞에서 론의된 정체성 확인의 욕구와도 관련되는바, 이중적 정체성을 소유한 조선족시인으로서 고향은 그러한 이중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한 모티브가 되기까지 한다. 송정환뿐만 아니라 우리 시인이나 문학인들이 항상 고향을 중요한 이미지로 문학작품에 표현하고있다는 점도 이런 측면에서 리해가 된다.   송정환은 시인이지만 단편소설도 3편 발표하였다. 뛰여난 성과작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시작활동의 한 보완의 형태로서 의미가 있다. 1986년 전반기부터 1987년 전반기까지 일년여 기간에 《주택문제》(《북두성》, 1986.2), 《정인군자》(《장백산》, 1986.5), 《빼앗긴 첫사랑》(《장백산》, 1987.3) 등 3편의 단편을 발표하는데 주제적측면에서는 기본적으로 시작활동에서 다룬것들과 다르지 않다. 《주택문제》에서는 제목에서 시사하는바와 같이 개혁개방초기 심각한 주택난의 문제를 바탕에 두고 개혁과 개방의 바람과 더불어 점차 바로잡혀가는 우리 사회 시비곡직의 문제를 재현하였다. 그리고 《정인군자》에서는 문화대혁명기간 한 5.7간부학교 혁명위원회 주임 오운룡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정인군자》의 이미지를 잘 그려냈다. 문화대혁명기간 존재했던 림시정권의 부당성과 부패상을 드러낸것이다. 또다른 소설 《빼앗긴 첫사랑》은 좀더 복잡한 소설적인 장치들을 동원하고있다. 출신제일주의 사회의식때문에 빼앗긴 사랑을 그리면서 첫 련인의 딸을 등장시킴으로써 현실과 과거의 삶이 얽혀지면서 소설적인 긴장감을 조성한것이다. 소설에서는 특히 두 련인이 모두 딸 이름을 《아려》 즉 하르빈 역두에서 이등방문을 쏜 독립투사 안중근 부인의 이름을 따옴으로써 안중근 투사에 대한 작가의 강한 존경심을 엿볼수가 있다.   그러니까 송정환은 잠간의 《외도》를 통해 시작활동으로 이어온 주제들을 소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작활동에서 남겨진 아쉬움을 보완하고자 했던것으로 보인다.     력사연구와 정체성 확인     송정환은 시인이면서 동시에 사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직업도 사실은 사학도로서의 연구에 관련되는것이였다. 그만큼 그의 사학연구의 업적은 눈부시다.   송정환은 일생동안 7권의 사학 관련 저서를 출간하였다. 가장 먼저 출간한 저서는 오늘까지도 학계에서 중요 참고자료가 되는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사개요》이다. 한국 범우사에서 재판까지 한것을 보면 이 연구서의 가치가 상당수준임을 짐작할수가 있다.   이 저서는 책 서언을 쓴 박문일도 지적하고있는바와 같이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오늘 이때까지도 기본상 처녀지로 남아있다고 말할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송정환동지의 이 저작은 …(중략)…하계의 공백을 미봉함에 있어서 초보적이나마 반가운 성과를 올렸다고 믿어진다.》 그렇다면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 력사에 대한 연구는 왜 공백을 이루었을까? 저자 자신은 이러한 연구의 부진상태를 우선 짜리로씨야의 침략방식에서 찾고있다. 《조선에 대한 짜리로씨야의 침략과 팽창은 다른 렬강들이 조선에 대한 침략이나 또 짜리로씨야자신이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적라라한 무력적침공정책과는 달리 대체로 하고 인 방식으로 진행되였다.》이처럼 조금은 《온화》하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기때문에 그 침략력사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절실하지 않았다는것이다. 그러나 사실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은 중국이나 일제와의 각축을 동반하였던바 조선근대사의 진행과정에 짜리로씨야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런 시각에서 송정환은 200쪽 남짓한 짧은 저서에서 짜리로씨야와 조선반도 및 주변국들간의 관계사를 추적하면서 일제의 조선 식민화 추진과정에서 짜리로씨야의 점진적인 침략이 미친 영향을 개괄적으로 제시하고있다. 우리의 근대사를 리해하는데, 특히 뼈아픈 망국사를 리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사개요》가 순수 력사연구서라면 또다른 저서인 《조선사화총서》(전4권)는 문학자요 사학자인 저자의 신분에 걸맞는 작업이라 할수 있다. 우리 민족의 반만년 력사를 다분히 문학적인 표현방식으로 제시하고있기때문이다.   총서의 제1권은 제목을 《해동의 세나라》라 하고 고조선에서부터 삼국에 이르는 고대사를 문헌자료에 근거한 사화로써 풀어나가고있다. 제2권은 제목을 《송악산 줄기줄기》라 하고 통일신라에서 고려조에 이르는 시기의 력사를 기록한 사화를 제시하고 제3권은 《한양성의 종소리》라 하여 리조초기부터 리조중기에 이르는 력사를 펼쳐보이고있다. 제4권은 《피바다 삼천리》라 하고 리조후기부터 시작된 피비린 근대사, 봉건왕조의 종말과 근대식민지시대의 력사를 제시하고있다.   일부에서는 이 저서를 저평가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본격적인 력사연구서가 아니라 이야기 위주의 사화집으로 되여있다는 리유에서일것이다. 그러나 력사서가 꼭 딱딱해야 한다는 도리는 없다. 오히려 쉽게 읽으면서 력사를 알아가는것이 일반독자에게는 더 유익하다 해야 할것이다.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를 지나 통일신라, 고려, 조선왕조를 거쳐 근대에 이르는 반만년 조선사를 대표적인 사화이야기를 통하여 재미있게 보여준것, 아직 우리 이민사마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통속적인 력사교양의 방법은 어쩌면 딱딱한 력사서보다 더 유익할지도 모른다. 또 비록 비슷한 사화들이 여기저기에 수록되여있지만 그것을 송정환의 력사인식에 따라 배렬하고 엮어놓음으로써 력사저서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여기에는 문학에 깊은 조예를 갖춘 송정환의 독자적인 연구스타일이 반영되기도 하여 남다른 교양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안중근전》과 《조선갑오농민전쟁》은 자료를 구하지 못해 좀더 자세한 론의는 접을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안중근에 관련된 자료는 력사실화 《할빈역두의 총소리》(《장백산》, 1982.4)가 있어 얼마간의 발언권을 얻었다.   사실 송정환의 안중근에 대한 관심은 남다른데가 있다. 단편소설 《빼앗긴 첫사랑》에서 주인공의 첫사랑 과정에는 안중근 관련 연극이 중요한 매개가 되여있다. 심지어 안중근 부인의 이름을 따서 자기들 딸의 이름을 《아려》라 짓기로 약속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실제로 두 련인은 결혼을 못하지만 각자의 딸들 이름을 《아려》로 짓기도 한다. 안중근에 대한 송정환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뿐이 아니다. 송정환의 시작품에도 안중근을 기념한 작품이 2편이나 있다. 《역사는 울고있었네-안중근의사가 수감돼있던 려순감옥에서》와 《할빈역두의 아침》이 그것이다. 전자는 안중근의사가 의거를 단행한후 수감됐던 감옥을 돌아보며 의사의 업적을 기린 작품이고 후자는 안중근의사의 의거의 자리였던 하르빈 역두에서 의사의 장거를 노래한 작품이다. 그리고 력사실화의 형식으로 쓴 《할빈역두의 총소리》에서는 식민지 백성의 원한을 담아 원쑤의 가슴에 총탄을 안긴 안중근의사의 의거 과정을 거의 소설적인 구조를 통해 그려내고있다. 인물의 담대하고 의로운 성격과 장엄한 분위기를 잘 그려낸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안중근전》의 모습을 짐작할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까 송정환의 력사연구는 력사연구의 가치로서뿐이 아니라 문학자로서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조선사화총서》는 당연히 력사적 사실이나 야사의 사실들을 거의 문학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고 볼수 있거니와 안중근의 사적을 다룬 실화 《할빈역두의 총소리》, 그리고 그것을 좀더 심도있게 다룬 《안중근전》 역시 송정환의 문학적인 공력에 힘입은바 적지 않다.     문학과 력사학사이에서의 고민     송정환은 문학과 사학사이에서 항상 갈등을 겪어왔다. 그러한 갈등은 소년시대에 벌써 씨가 뿌려졌던것 같다. 소학교 5-6학년때부터 력사와 어문에 특별한 흥미를 가졌던것이다. 이런 그의 갈등과 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송정환 평생을 두고 이루어졌다. 《문학과 력사학의 갈림길에서》(《갈매기》, 1988.1)라는 글에는 그러한 송정환의 고민이 잘 드러나고있다.   비록 전통적으로 문학과 사학은 서로 얽혀있으나 학문이 세분된 현대사회에서 그러한 관련성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결국 송정환은 이 문학과 사학의 갈등을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실천을 통해 극복했다. 시문학창작에서 정체성 확인은 이땅에 남겨진 고구려, 발해 등 조상의 력사 흔적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여 이민의 력사에 대한 관심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사학분야에서의 정체성 확인은 《조선사화총서》에서 민족력사지식이 전무한 우리의 신세대에게 민족사의 전통을 알기 쉽게 제시하고 《짜리로씨야의 조선침략사개요》에서 우리 삶의 현장과 관련된 현대사의 한 단면을 제시한데서, 그리고 《안중근전》을 통하여 이땅에서 이루어진 독립투사의 위업을 그려냄으로써 이루어진다. 혹 어느 한 분야에서 정진했더라면 보다 나은 업적을 쌓았을것이라 볼 사람도 있으나 두 분야의 관련성속에서 이민민족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을 통하여 겨레에게 삶의 한 좌표를 제시해주었다는것은 큰 기여가 아닐수 없다. 송정환의 창작과 연구를 되돌아보며 이점을 다시금 상기시키고싶다.   송정환 자신은 이점을 사학과 문학의 불가분리의 관계에서 찾고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 어느때보다도 더욱 민족의 얼, 민족의식, 민족전통 등 민족적인것을 고창하고있는데 민족의 력사를 모르고 어찌 민족적인것을 써낼수 있겠는가!》《우리 중국조선족문학도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국가적 내지는 국제적인 공인을 받자면 반드시 자민족의 력사에 대한 투철한 리해가 있어야 할것이라고 생각된다.》(이상 《문학과 력사학의 갈림길에서》, 《갈매기》, 1988년 1기에서)   어떻든 송정환은 창작과 연구의 병행을 통하여 우리의 민족성 보전과 정체성의 확인에 초점을 맞춰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상의 론의를 통해 확인할수가 있다. 후학들이 본받을바라 하지 않을수 없다.          * 에 게재한 글입니다. [출처] 송정환의 창작과 연구 다시 보기-장춘식|작성자 반벽거사  
1478    연변지역 시문학 뿌리 및 그 현황 댓글:  조회:4722  추천:0  2015-09-17
  연변지역 시문학의 뿌리와 그 현황 장춘식   연변지역의 문학이란 사실상 조선족의 문학이다. 이민시기 “간도”로 불렸던 연변을 중심으로 만주지역에서 이루어진 이주민 문학 전부를 흔히 “연변문학”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본고에서도 이런 범주에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1. 연변지역 시문학의 뿌리   연변지역 시문학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한민족의 문화 전통과 문학유산, 특히 근, 현대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민지에서 새로운 문학 전통을 쌓으며 상당 정도 변모를 보이기도 한다. 연변지역 시문학의 효시는 아무래도 창가와 항일가요라 할 수 있는데 창가는 주로 개화기 이후 이주민들이 설립한 학교들에서 불린 노래이고 항일가요는 일제강점기 동안 항일유격대와 유격구 항일민중들 속에서 불린 노래들이다. 창가는 주로 문명개화와 관련된 주제가 다수이고 항일가요에는 일제에 대한 투쟁의지를 고양시키려는 의도가 뚜렷이 표현되어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 이 두 유형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시의 형태를 띠지만 민요적인 요소도 일부 보인다. 이들 작품은 당대에는 상당히 많이 창작되었겠지만 현재 남아 내려온 텍스트는 별로 많지 않다. 그 밖에도 전통적인 장르인 한시도 상당 정도 창작되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문단에서 떨어진 이들 시가작품 보다는 이민지 문단에서 창작된 시작품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문단을 통한 연변지역의 시문학은 당시 발행되던 , , , , , , 등 신문, 잡지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이 1940년대 초반에 ,  등 시집으로 집대성되기도 하였다. 이를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시기의 시문학 먼저 시기의 시문학은 의 성격과도 관련되겠지만 계급문학적인 성격이 강하다. 에 게재되었던 시작품으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겨우 9편이다. 3년여에 걸쳐 발행되었던 신문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작품들이 게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겨우 9편의 작품으로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들은 를 통해 활동했던 우리 시작품의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백악산인(白岳山人)의 「朝鮮心」이 민족주의적인 이념이나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외에 다수의 작품은 계급적 이념이 짙게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가령 초래생(初來生)의 「단오(端午)」나 김근타(金根朵)의「밤」, C.S.C의 「언니를 그리며」, 남문룡(南文龍)의 「백색테로」 등 작품이 그렇다. 초래생의 《단오(端午)》에서는 단오명절을 맞아서도 아이에게 새 옷은 물론 과자마저 사 먹이지 못하는 병든 어머니의 애탄 사정을 그리면서 “차라리 생명을 땅에 두며/인간의 모든날을 전취하야/우리의 명일(名日)을 만들 때까지” 투쟁하여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계급혁명의 이념과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김근타의 「밤」에서도 사회적약자인 어린애를 빈곤상징의 형상으로 이용하고 있고 또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좀 더 구체적이고 상황이 절실하다.   밤은 깊어 집집에 등불은 켜지고 하늘우에 별들도 반짝거리건만 맥없이 늘어진 그는 별조차 보지 못하였다 배고파 잉-잉 밥달라 우는 어린애 세네때 굶주린 어머님에게 어찌 젖이 있으랴 오! 우는 그 애를 어찌 달랠것인가?   곁집에선 저녁연기 끊은지 오라고 뒷산에 부엉새는 깊은밤을 노래하는데 때지난 이때 누구의 집에서 한술밥 얻어오랴 여전히 울고있는 어린애는 말끝마다 밥주-- 한숨짓는 부모의 간장 다 녹여내리나니 긴긴 여름밤 또 어찌나 새워보내랴 1930년 5월 7일 밤에   「밤」의 전문이다. 어린애는 배고파 밥 달라 하는데 어머니는 굶주려 맥없이 늘어져 있다. 게다가 밥 한술 얻어 올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들 두 작품은 못가진자의 빈곤한 삶의 양상을 계급적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하겠다. 빈곤상황의 제시는 계급의식의 표현이나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념의 구현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못사는 민중을 의식화시킴으로써 계급혁명을 이루려 하였던 것이 이때 사회주의운동의 기본적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료적인 한계 때문에 이 시기 시문학의 전모를 평가할 수는 없으나 현재 남아있는 작품으로만 보면 시기의 시문학은 예술적인 성취도가 높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의식과잉,이념과잉의 문제점들도 노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시기 열악했던 문화 환경에서 이 정도의 시문학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특히 일제가 “9.18사변”을 도발하여 중국의 동북 땅을 강점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문학이여서 그 이후의 문학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측면에서 문학사적으로 충분히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시기의 시문학: 다음, 1930년대 초반에는 주로 를 중심으로 문학작품들이 발표되었는데 현재 자료 유실로 하여 전해진 작품은 단 한편도 없다. 그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로 1930년대 중반 용정지역에서 발행된 지의 작품이 있다. 4호까지 낸 지에는 상당수의 시작품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다수의 작품들은 “학생시단”의 형태로 발표되었고 강경애, 박계주 등 기성문인들의 시작품도 더러 있지만 전반적으로 작품 수준은 낮은 편이다.   (3) 시기의 시문학: 이민지에서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를 통해 이루어졌다. 시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김조규, 함형수, 박팔양 등 당시 한국문단에서 두각을 드러낸 시인들이 이민해 오면서 이민지에서 성장한 신인들과 더불어 지방색과 이민문학적인 성격이 뚜렷한 시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것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과 이다. 은 1943년(康德九年) 9월에 당시 신경(현재의 장춘)의 제일협화구락부 문화부에서 간행했고 편집인은 박팔양(朴八陽)이다. 그리고 은 그 한 달 후인1943년 10월에 당시 간도 연길에 있던 예문당(藝文堂)에서 간행했고 편집인은 김조규(金朝奎)였다.두 편집인의 권위성으로 보나 간행 시간으로 보나 이 두 시집은 현존하는 의 자료보다 훨씬 대표성을 지닌다 하겠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두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주요 텍스트로 하면서 에 게재된 여타 작품들도 참고하여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a. 이민지의 서정 조선족의 문학은 이민문학으로 출발하였다. 조선족의 역사가 이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민의 정서가 이민시인들의 시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시작품에는 이민의 정서를 표현한 것들이 많이 있다. 가령 김조규(金朝奎)의 「胡弓」의 경우 이국적인 정서와 이민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일차적으로 호궁이라는 중국인을 상징하는 악기를 등장시킴으로써 동북지역 중국인 이주민의 삶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주민인 조선족 이주민의 삶을 호궁이라는 이미지로써 표현한 것이라 해야 맞다. “어머니의 자장노래란다” “일어버린 南方에의鄕愁란다”라는 두 행의 의미는 오히려 조선인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새 늣길려느뇨?胡弓”과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라는 마지막 행의 표현은 이주민들이 공유하는 암울한 삶과 슬픈 운명의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김달진(金達鎭)의 「룡정(龍井)」 또한 이민지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략) 黃昏 길거리로 허렁허렁 헤매이는 흰옷자락 그림자는 서른 내가슴에 허렁허렁 떠오르는 조상네의 그림자.   나는 江南 제비새끼처럼 새론 옛故鄕을 찾어 왔거니. 난생 처음으로 馬車도 타 보았다. 胡弓 소리도 들어 보았다. 어디 가서 나혼자라도 빼酒 한잔 마시고 싶고나   작품의 마지막 2연인데 여기서 “새론 옛故鄕”은 아마도 여기가 고구려의 옛 땅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점은 3연의 내용과 맞물려 있다. 소위 “호인(胡人)”들 속에서 발견한 “흰옷자락 그림자”를 보며 “조상네의 그림자”를 떠올린 것은 이주해온 이 땅이 전혀 낯설지만은 않으며 따라서 여기가 이주민이 뿌리를 내릴 새로운 고향이 될 수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이민자의 처지는 “서른 내가슴”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불행하고 서럽지만 그 서러움을 “나혼자라도 빼酒 한잔” 마시면서라도 달래면서 살아야 한다는 강한 생존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시인들의 정서 속에는 이국땅과 이국인에 대한 편견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정서나 편견은 시작품에도 표현된다. 가령 상기 작품의 제2연에서 “한(하얀) 粉이 고루 먹히지않은 살찐 얼굴/당신은 저 넓은 들이 슬프지 않습니가/저 하늘바람이 슬프지 않습니다(가)” 라는 시구에는 이민지 원주민과 이민지의 자연과 기후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표현되고 있는데 비록 이민자로서 그러한 사람과 자연에 적응하기 이전의 주관적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일종의 선입견, 즉 “거치른 만주땅” “미련한 만주인”이라는 선입견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다. 유치환(柳致環)의 「哈爾濱道裡公園」도 비슷한 정서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느낌과 정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김북원(金北原)의 「봄을 기다린다」에서 답을 찾을 수가 있다.   (전략) 꼬지깨의 草原이 故鄕의 平原이 되고 高梁의 平原이 벼이삭의 바다가 되는동안 내사 수염과 靑春을 바꾸었고 안해는 새아이의 어머니가 되였다.   잔뼈가 굵어진 故鄕말이뇨 洛東江물을 에워 젖처럼 마시며 아매사 할배사 살엇드란들 그것이야 아스런 옛이약이지.   오붓이 點點한 우중충한 집옹이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이 봄을 기다린다.   비록 오색기가 만주국의 국기였으니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이/봄을 기다린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 땅에서의 삶이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을 기다”리는 희망찬 삶이 되였다고 하였으니 어느 정도 체제 협력적이라는 혐의가 있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고 제2의 고향을 건설하여 대를 이어 살아가려는 민족생존의 의지도 담겨있다. 그러니까 이민지의 자연환경과 기후에 대한 불쾌한 느낌은 다분히 적응의 문제였음을 확인시켜주는 셈이다. 따라서 이제 고향땅에서 쫓겨난 서러움이 조금씩 잊혀져감에 따라 그러한 불쾌감도 조금씩 색이 바래지며 심지어 이민지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정체성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잔뼈가 굵어진 故鄕”은 “아스런 옛이약이”가 되었고 화자는“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에서 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할 운명이요 처지임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숙명론적인 체념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을 확인하는 생존의 의지이다. 윤해영(尹海榮)이「海蘭江」에서 이민지의 대표적인 강인 해란강을 “寂寞한 江이로다./거룩한 江이로다.” 라고 하면서 자신의 강으로 인식하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차원이다. 이민지의 자연과 좀 더 가까워지고 이제 곧 하나가 되어 감을 뜻하는 것이다. 윤해영은 특별히 그러한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에 시적인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다. 앞의 「해란강」에서 화자자신의 현재 삶의 현장을 노래하고 있다면 「오랑캐고개」라는 작품에서는 오랑캐고개를 3단계 역사의 상징적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二十年前”에 오랑캐고개는 “豆滿江 건너 北間島 이도군 들의/아담찬 한숨의 關門이엇다.”고 했다. 간도이주민들은 대개 두만강을 건넌 후 이 오랑캐고개를 넘어 북간도 땅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十年前”, 이 고개는 “밀수군 절믄이들의/恐怖의 關門”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이주민의 삶이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오날 이고개엔/五色旗 날부”낀다고 했다. 한숨도 공포도 다 흘러가고 희망의 기쁜 노래만이 넘치는 고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어용적인 작품의 혐의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냥 현실에 순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괴뢰 만주국의 현재 삶을 어느 정도 찬미하는 의미가 드러난다. 그만큼 만주국의 정치 문화적 담론의 영향이 심각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정체성 확인의 욕구는 천청송(千靑松)의 「先驅民」에서 선구민을 통한 역사의 회고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좀 더 궁극적인 확인의 방식이라 할 수가 있다. 특히 5장으로 된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인 “墓地”는 너무나도 슬픈 이주민의 운명을 제시하고 있다.   靜穩의 집 무덤은 너무나 寂廖하다 하도 故鄕을 그렷기 넉시나마 南을 向했도다 외로운 밤엔 별빗치 慰撫의 손을 나린다는데 墓標업는 무덤들이 옹기 옹기 정잡(답)계(게) 둘너안젓구나! 눈보라 사나웁든 매듭만흔 歷史를 이얘기 하는거냐.   죽어서 마저 고향이, 고국 땅이 그리워 “넉시나마 남을 향”했다는 표현이야말로 이주민의 슬픈 운명의 상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墓標업는 무덤들이/옹기 옹기 정답게 둘너안젓구나!”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화자는 묘지를 또 다른 이주민의 삶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렇게 보았을 때 이는 곧 이주민의 제2의 고향이 바로 여기, 북간도 땅임을 확인시켜주고 있기도 하다. 함형수의 「歸國」만큼 이주민의 이중적 정체성을 뼈아프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귀국은 조선 땅에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화자는 고국의 사람들이 자신이 갔던 곳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상념은 오히려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것은 한개 덧업는 그림자”이라는 데에 미친다. 이처럼 이제 자신은 더 이상 고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은 정체성의 분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먼- 하늘 테서/총과 칼의 수풀을 헤염처/이 손과 이 다리로 모-든 무리를 뭇럿스나/그것은 참으로  하나의 肉體엿도다”라는 표현은 정체성의 분열을 야기시킨 일종의 연옥(煉獄)행과도 같은 체험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갔었던 그곳에서의 체험에 대한 개괄이 되겠는데, 그러나 그러한 살벌한 체험은 이제 삶 자체가 되어버렸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言語를 배웟고 새로운 行動을 배웟고 새로운 나라(國)와 새로운 世界와 새로운 肉體와를 어덧나니 여기 도라온것은 實로 그의 그림자이로다   “여기 도라온것은 實로 그의 그림자”이라는 표현은 앞의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것은 한개 덧업는 그림자”이라는 표현을 좀 더 강하게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그만큼 화자의 삶은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었음을 강조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제 화자는 고국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삶의 현장에 적응된 새로운 정체성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주민으로서의 조선족이 될 것이다. 이민시인들은 이민지의 서정을 통해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 확인은 향수의 표현에까지 연장되어 이주민의 이중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족 문학이 이민문학으로 출발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동시에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 성격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b. 암울한 현실에의 대응 일제강점기 괴뢰 만주국에서 생활했던 조선 이주민에게 있어 현실은 암울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암울한 현실을 느끼고 인식한 대로 표현할 수 없는 일제 괴뢰정부치하라는 정치적 환경이다. 즉 당대의 문학풍토가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느낌이나 인식을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시인들은 그러한 모순된 현실을 어떤 시적인 수단 혹은 방법으로 대응했을까? 먼저 함형수(咸亨洙)의 《비애(悲哀)》라는 작품을 보자.   나는 이 괴로운 地上에서 살기만은 조곰도 希望치는 안는다 어한 달가운 幸福과 快樂이 나를 부고 노치안는다 해도 그러나 나는 저 아득한 한눌을 치어다 볼 마음은 슬퍼지고 외로움으로 눈물이 작고 난다 저 나라에서도 나는  여기서처럼 이러케 孤獨할바   여기서 화자는 천상과 지상을 두개의 세계로 갈라놓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첫 두 행에서 지상의 괴로운 삶을 조금도 희망치 않는다고 하면서도 천상의 세계에 가기를 두려워한다. 천상의 세계 또한 지상의 세계처럼 고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 때문이다. 또한 지상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달가운 행복이나 쾌락이 잡고 놓지 않는다 해도 미련은 조금도 없다고 했다. 왜서 그런지를 확대 해석하지 않더라도 이는 현실에 대한 분명한 부정이다. 채정린(蔡禎麟)의 「밤」이나 손소희(孫素熙)의 「어둠속에서」 등 작품은 현실을 암흑으로 인식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한다. 그러한 현실의 삶에 대한 분노는 동시에 저항의 심리를 동반한다. 그래서 분노는 어둠이나 차가움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한 차원 높다고 할 수 있다. 유치환의 「怒한 山」은 그러한 분노를 울분으로 풀어낸다. 물론 유치환에게 있어 그러한 울분이나 분노는 메아리도 없이 사라지는 부질없는 외침만은 아니다. 강한 생명의 욕구가 내재해있다. 「生命의 書」에서 유치환은 그러한 생명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리고 왜 분노하는지를 은근히 내비친다. 현실 부정은 현실 비판과 차이가 있지만 정상적인 언로가 막혀있던 일제강점기에 있어서는 같은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 시인들은 용인할 수 없는 현실의 암흑을 부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징적인 현실 비판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현실 비판의 또 다른 장치로 작용하였다. 초현실주의로 대표되는 “시현실” 동인의 시가 이에 속한다. “시현실” 동인의 작품 1은 이수형(李琇馨)과 신동철(申東哲)의 공동작인 「生活의 市街」이다.   밤의 피부 속에는 夜光筮의 神話가 피어난다 밤의 피부속에서 銀河가 發狂한다 發狂하는 銀河엔 白裝甲의 아츰의 呼吸이 亂舞한다 時間업는 時計는 모-든 現象의 生殖術을 구경한다 그럼으로 白裝甲의 이마에는 毒나븨가 안자 永遠한 午前을 遊戱한다 遊戱의 遊戱는 花粉의 倫理도 아닌 白晝의 太陽도 아닌 시커먼 새하얀 그것도 아닌 眞空의 液體 엿으나 液體도 아니엿다 자- 그러면 出發하자 許可된 現實의 眞空의 內臟에서 시커먼 그리고 새하얀 그것도아닌 聖母마리아의 微笑의 市場으로 가자 聖母마리아의 市場엔 白裝甲의 秩序가 市街에서 퍼덕일뿐이엿다   「생활의 시가」의 전문인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작품이 당시 조선족문단에서 일반적으로 대할 수 있던 여타의 시작품과는 뚜렷한 구별을 보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구별을 일단 (1) 현실적인 논리성의 파괴, (2) 사유의 순수한 자동기술성, (3) 이미지의 격리성과 기이성, (4) 신비적, 광란적 수법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보여주는 시작품의 경향을 우리는 초현실주의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현실”동인의 초현실주의 작품들로는 이수형(李琇馨)·신동철(申東哲)의 「生活의 市街」, 김북원(金北原)의 「椅子」, 강욱(姜旭)의 「樂譜를 가젓다」, 이수형의 「娼婦의 運命的海洋圖」, 김북원의 「비들기 날으다」, 신동철의 「능금과 飛行機」 등 6편으로 6회에 걸쳐 지에 발표되었고, 동인으로는 이수형, 신동철, 김북원, 강욱 등 4명이 여기에 묶여있다. 물론 유사경향을 보인 S. S. Y, 송석영, 천청송(千靑松), 정야야(鄭野野), 함형수(咸亨洙) 등 5명을 포함해 보아야 총 9명 시인에 12편의 작품이 전부여서, 양적으로는 빈약하다 할 수 있고, 그 중 다수는 조선본토 문단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문학에 관한한 문제는 달라진다.순수문학 중에서도 “정신의 폭발”로 압축되는 이 문예사조가 조선시가에서 하나의 성과로 평가되는 것은 이상 정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1940년 8월의 만주는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의 일차적 후방이었고,따라서 상당수의 문인들이 일제의 강압적, 혹은 포용적 책략에 시달리다 못해 변절하고 투항했던 당시 조선족문단에서 “시현실”동인들이 이런 시대적 상황, 달라진 천지, 대동아공영의 신 풍토에서 눈을 딱 거두고 있는 것은 이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詩現實” 同人集에 묶여 발표된 작품은 아니지만 이수형의 「白卵의 水仙花」, 金北原의 「胎動」, S. S. Y의 「氣焰」, 송석영의 「詩人」, 千靑松의 「愚感錄」, 鄭野野의 「거리의 碑文」, 咸亨洙의 「正午의 모-랄」등 에 발표된 다른 작품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동인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성격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그 주변에 유사한 문학적 경향을 가진 시인들이 비슷한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것은 초현실주의 실험이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하나 흥미있는 것은 이와 같은 초현실주의 성격의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하여 3개월여 만에 “시현실” 동인이라는 그룹이 출현하여 동인특집을 연재한 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를 통한 초현실주의 시작실험이 일정기간 진행되어 오다가 그것이 무르익으면서 동인그룹이 형성되었고 본격적인 동인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다른 측면에서 초현실주의 문학유파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셈이 된다. 그만큼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띤다 하겠다. “시현실”동인들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시의 실험운동은 그 기법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1940년 일제의 발악적인 식민통치라는 최악의 환경에서 우리 이민시인들이 자신의 정서를 문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치로서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따라서 긍정적이었다 하겠다.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의 암울함을 표현하기 위한 시인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으나 일부 시인들은 결국 현실에 머리를 숙이고 지극히 소수이기는 하나 심지어 체제협력적인 작품도 일부 발표하였다. 이를 인정해야만 조선족 문학의 뿌리를 제대로 파악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4) 사후에야 알려진 시인과 시작품: 광복 이전 연변지역 시문학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시인 생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광복 후에야 그 진가를 드러낸 경우가 있다. 윤동주(尹東柱)와 심연수(沈連洙)가 바로 그 대표적인 시인이다. 윤동주는 널리 알려진 연변 출신 시인이다. 그러나 심연수는 최근에야 발굴되어 아직은 연구가 미진한 편이다. 그러나 두 시인 모두 이민지인 연변에서 성장하면서 감성을 키우고 그러한 체험을 시적 언어로 표현한 시인들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벌써부터 널리 알려진 시인이고 심연수 또한 최근에 많이 소개된 시인이어서 여기서는 분량 관계로 더 전개하지 않기로 한다.   2. 연변지역 시문학의 현황 1945년 이후의 문학은 사실상 광복 후의 문학이라야 맞다. 현재와 조금 가까운 시기의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현황” 항에서 논의할 뿐이다. 이 시기의 시문학을 정치공명의 시문학과 다원화 시대의 시문학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1) 정치공명의 시문학 오늘의 시문학, 다시 말하면 개혁개방 후 연변의 시문학이 있기까지 광복 후 30여 년간의 과정을 거쳐 왔다. 특이한 것은 이 30년의 문학이 오늘날의 시문학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30년의 문학을 문학사가들은 흔히 “정치 공명의 문학”이라 부른다. 문학 창작 전반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사건들과 공산당의 정책에 공명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가령 해방이 되자 해방의 환희를 노래하고 토지개혁 시대에는 땅을 나눠가진 기쁨과 이를 가능케 해준 공산당과 정부를 노래하며 사회주의개조를 실시하자 사회주의 제도를 노래했다. 특히 문화대혁명 동안에는 계급투쟁과 개인우상화에 우리 시가 한 몫을 톡톡히 했다.   (2) 다원화 시대의 시문학 a. 개혁개방의 시문학: 1970년대 말, 중국 땅에 개혁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연변지역의 시문학은 점차 정치공명의 시대를 탈출하기 시작한다. 상처문학, 반성문학을 거치면서 점차 외래 사조들을 받아들이고 다원화 시대의 시문학을 위한 준비를 서두른다. 이 시기 시문학에서 주목할 부분은 장편서사시 창작의 성행이다. 그 대표시인은 김성휘시인... ... ... 
1477    한영남 / 장춘식 댓글:  조회:4343  추천:0  2015-09-17
  한영남의 시에 대한 단평 장춘식       「그날의 커피향은 오늘도 입가에 머물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아름답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왜 “비도 없이 축축한 날” 따뜻한 커피를 함께 마셨음에도 그대로 헤여지고 말았을까? 서로의 마음을 드러낼 용기 부족 때문에? 혹시나 당할 거절에 자존심이 상할까봐?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냥 현대인의 무심함 때문에? 하여간 헤여진 지금은 따뜻한 커피향기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되여있다.     「오늘은 왜 그 아픈 사람이 떠오르나」: 「커피향」의 이미지와 연관된 감수이다. 헤여진 사랑의 아름다움을 되뇌인다. 인생은 어쩌면 그러한 아쉬움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완성이 아닌,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항상 그 부족함을 채워넣기 위해서 말이다.     「어떤 저녁」: 중년남녀의 맛이 간 사랑에 대해 자조하고 있는 것 같다. 꽤 시일이 지난 부부의 사랑은 이제 격정과 애절함이 사라진 관습적인 사랑이 되여 버린다. 그러나 일부일처제를 거부하지 않는 한 그러한 관습에서 탈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격정이 사라진 부부의 사랑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제공해준다. 귀속감과 안전감이다. 그래도 그것에만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어찌하랴. 이쯤에서 앞 두 편의 시에 표현된 아쉬움의 미학이 연유된 것은 아닐까?     「당신은 늘 비와 함께 온다」: 그래서 화자는 일상의 따분함과 사랑에 대한 상실감을 추적거리는 비와 함께 떠오르는 사랑에 기탁한다. “아무나를 향한 나의 사랑”이다. “세상이 보다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화자의 희망사항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세상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예 어떤 구체적인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언제나 그렇게 보다 아름다운 세상, 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원하는 것이니까.     상재한 한영남 시인의 시작품 4편 중 압권은 첫편 「그날의 커피향은 오늘도 입가에 머물고」이다. 여러가지 상상의 여백을 제공하면서 화자의 정서속에 독자의 정서를 이입시키는 매력이 돋보인다. 산문시로서의 장르적인 특성도 독자의 정서를 끌어들이는데 한몫 하고 있다. 그런데 나머지 3편은 주제의식에 비해 시적인 정서화가 미흡한 것 같다. 기우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어의 지나친 통속화 또한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시어가 너무 어려워도 문제이지만 너무 쉬워도 문제이다. 너무 쉬우면 의미의 단순화가 걱정이고 너무 어려우면 의미 파악의 어려움이 걱정이다. 이른바 통속성과 난해성의 문제가 되겠다.     우리 시는 80년대 이전까지 의미의 단순화가 문제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그 반동인 듯 80년대 이후에는 난해시가 점차 주류를 이루어 온 것 같다. 이런 문학사적인 흐름에서 볼 때는 통속성이 오히려 미덕이 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도를 넘어서 요즘 유행하는 가요의 가사처럼 되어 버린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상대적으로 통속적인 시작품에서는 의미의 단순화를 극복해야 할 것이고 난해시의 경우에는 독자의 이해를 위한 배려 장치가 시인의 과제가 되지 않을까 한다.     한편 시 쓰기에서는 비유와 상징, 이미지 등의 여러 기법을 통하여 시인과 독자 사이의 정서적 공명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를 쓰는 시인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창조적 의미의 창출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론적으로 도출해내기 어려운 삶의 이치를 시인의 감성을 통해 창출해내는 것, 거기에 시라는 문학장르의 또다른 생명력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출처] 한영남의 시에 대한 단평|작성자 반벽거사
1476    전춘매 / 장춘식 댓글:  조회:4383  추천:0  2015-09-17
  일상과 꿈, 그 사이를 방황하는 시혼 ―전춘매의 시집 《느끼며 살아가며》―   장 춘 식     남성이 문단을 지배하던 시대는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여가는것 같다. 격세지감이다. 시단 역시 마찬가지다. 정확한 통계는 내보지 않았지만 신인중 거의 반은 녀류시인인것 같다. 수적으로만 그런것이 아니다. 녀류시인들은 당당한 력량과 기량을 자랑한다. 전춘매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첫 시집으로 펴낸 《느끼며 살아가며》(민족출판사, 2003년 5월)에도 그런 력량이 느껴진다. 전체 5부에 모두 101편의 시를 수록하고있는데 신인으로서는 소재별로 보나 주제별로 보나 또 량적으로 보나 상당히 풍성한편이다. 치렬한 시인의 삶의 궤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시집의 시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크게 동(상대적 움직임)과 정(상대적 정지)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낸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제3부 《등대지기》와 제4부 《장독》의 시들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시상이 주체를 이루는 반면에 제2부 《도시비둘기》와 제5부 《리향(離鄕)》의 시들은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시상이 주체를 이룬다. 그리고 제1부 《무상》의 시들은 그러한 동과 정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있으면서 한차원 높은 경지를 개척하고있다. 이른바 도시적상상력의 소산이라 할수 있는데, 본고에서 주로 관심을 가진 부분은 바로 시인이 새로운 비상의 꿈을 펼치고있는 이 도시적상상력의 시들이다.   물론 인생의 철학적원리를 담고있는 《등대지기》의 시들과 민족적인 정체성이나 공동체의식을 담고있는 《장독》의 시들은 시어가 정제되고 상당 정도의 원숙미를 보이고있는게 사실이지만 동시에 참신성과 력동성이 떨어지는 약점을 드러내고있다. 어떻게 보면 습작기의 형식미집착에서 비롯된것이라 할수도 있다. 시인의 성장단계로 보면 산업화시대 도시인의 일상적삶을 약간은 자조적 혹은 비판적 시각으로 그리고있는 《도시비둘기》나 그러한 산업화의 부산물로서 빚어지고있는 농촌사회의 공동화(空洞化)를 문제삼고있는 《리향(離鄕)》의 시들은 제2단계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제 이런 단계를 뛰여넘으려는 시도가 바로 이 제1부 《무상》의 작품이 되는것이다.     《무상》의 시들에서 일차적으로 발견되는것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즉 시적화자는 또다른 하나의 의식적존재와 대화하면서 삶의 의미와 무의미를 모색한다. 그러나 언제나 똑부러지는 답은 없다. 다만 존재한다는 자체가 진리일뿐이며 따라서 화자는 일상에 묻혀살다가 그 일상에 의하여 실존이 잊혀져가는것에 대해 몸부림치며 저항하기도 하고 때로는 체념하는듯이 보이기도 한다.   먼저 시집의 첫 작품으로 수록된 《무제》를 보자.   내 생에 십자가가 있어 내 삶이 죄 되였을가   나는 나를 마주하기 부끄러워 거울 하나 영원히 사이두는수밖에   시간으로 재일수 없고 공간으로 볼수 없었던 고집스런 옛 도로표식 마음에서 색바랜다   무너지는 울바자사이로 꿈틀대는 야망이 주렁지고 탐스러운 유혹에 나는 그만 나를 잃어버렸다   마지막 초불이 꺼지기전에 나는 나를 나같이 찾아야겠는데   그저 마음밖에서 서성일뿐이다.     《무제》의 전문이다. 이 시에서는 꿈과 삶의 신조로 삼았던것이 어느 순간 완전히 무의미해진다.(《고집스런 옛 도로표식/마음에서 색바랜다》) 이는 다시 말하면 과거의 도덕 혹은 가치기준이 무너졌다는 말이 되겠는데, 그러한 《무너지는 울바자사이로》 야망 혹은 유혹이 자라나고 그러한 야망과 유혹을 피하지 못해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즉 과거의 가치기준을 상실한채 새로운 가치기준은 확립하지 못하고있다. 그래서 추구의 동력이 사라지기전에(《초불이 꺼지기전에》) 나다운 나를 찾아야 하는데, 즉 스스로의 가치기준을 확립해야 할텐데 그러한 마음과는 달리 가치지향은 쉽사리 확립되지 않고있다. 그래서 방황한다. 시인의 표현을 원용하면 마냥 《그저 마음밖에서 서성일뿐이다.》 시인은 이 한행을 특별히 떼내여 하나의 련을 만들고있다. 주제도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것이라 판단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그만큼 방황의 정도가 절실함을 강조한것이기도 하겠다. 2천년대 벽두 우리의 자화상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지난날 우리가 지향했던 혹은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기준이나 인생의 목표는 분명 해체되였거나 해체되고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가치기준이나 삶의 목적이 확립돼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고 과거의 가치기준을 일부나마 대체하고있는 새로운 《가치기준》은 이른바 실용주의라는것인데, 사실 실용주의라고 하는 가치지향은 국가적인 개발제일주의에 의해 물신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내고있다. 이에서 비롯된것이 시인이 말하는 이른바 《꿈틀대는 야망》이고 《탐스러운 유혹》이라 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에서 화자의 고민이나 방황이 곧 현대인의 자화상이라는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고민이나 방황을 또다른 형태로 드러낸것이 《역설》이다. 일상적인 모색이나 탐구의 방법을 뒤집어 생각해본것이라 하겠다. 하늘과 땅, 아침과 저녁, 자유와 속박, 생과 사 등 상반되는 개념들을 한번 거꾸로 생각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시인의 이러한 역설은 그냥 이상한 생각 혹은 엉뚱한 설정이 아니다. 거기에는 진리를 보고자 하는 또다른 시각이 숨어있다. 즉 《한번쯤/옳은것을 그르다고 생각해본다면/거기에 진리가 잠들지도 모른다.》는 판단은 이러한 역설적인 발상을 가능케 해준다. 다시 말하면 생각을 뒤집으면, 혹은 고정관념을 깨뜨리면 또다른 세계가 보인다는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볼 때 생명 자체의 위대함을 제외하면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특히 오늘과 같이 진리 여부의 판단이 지난한 전환기 우리 사회의 가치의식에서 이러한 역설은 우리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수도 있을것이다.   《걸인》에서 도시인의 걸인에 대한 구제가 동시에 자신에 대한 구제의 심리적 욕구를 동반한다는 발상 또한 이러한 역설적인 생각의 다른 한 측면이 될것이다. 사물 혹은 현상의 상대성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죄인과 천당》의 발상도 같은 차원이라 하겠다. 기독교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죄인은 지옥에 가까운 존재이기때문에 천당과는 너무나 아득히 떨어져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죄를 말끔히 씻었을 때 과연 천당에 도달할수 있을까? 아니다. 《죄인이 더는 죄인이 아닐 때/천당도 다시는 천당이 아니다.》 즉 지옥과 천당은 사람의 마음일뿐이라는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발상은 《리유가 없다》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남들이 특히 녀자들이 다 이쁘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즐기고 감동하는 꽃에 대해 화자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감동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처럼 특별한 생각을 가지면서도 거기에는 리유가 없다고 한다. 고정관념에 대해 부정하지만 무슨 리유가 있어서 그러는것이 아니라는 사상은 어떤 가치기준에 대한 부정일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현실에 대한, 혹은 현실의 가치기준에 대한 무감각의 의미가 더 짙게 표현된것 같다. 어떤 가치에 대해 부정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지도 않고 그냥 그 부정이 아무런 리유가 없다고 하는것은 현실의 타락, 인간성의 변이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는 실용주의적인 사상의 치명적인 약점이라 하겠다.   그래서 시인은 무상을 느낀다. 《하늘밖은/하늘이지만/더는 어제의 하늘이 아니다》(《무상》의 일부). 즉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며 그 흐르는 시간속에 모든것은 변화한다. 세월의 무상함이다. 세월의 무상함은 곧 인생의 무상함을 의미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변화하는 과거나 미래를 현재의 립장에서 알수는 없다. 알수 있는것은 현재의 변화, 현재의 상황, 현재의 삶의 양상일뿐이다. 그래서 화자는 《마음이 흐린 날에는 기도보다/생각으로 죄를 범하여보자》고 자위한다. 하느님은 언제나 침묵하고 있고 마음속의 범죄는 스스로 용서하거나 합리화시키면 해소되기때문이다. 세월은 무상하며 인생 또한 무상하다. 그러므로 오늘 현재의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것이 이 시의 의미가 되겠다. 생명의 매 순간에 대한 애착이 있을 때 마음의 평온을 얻을수 있고 또 그러한 매 순간이 모여서 인생이 된다. 그렇게 인생을 파악했을 때 무상한 인생은 더이상 무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흐르는 강물》의 의미 또한 《무상》과 같은 발상이다. 오늘, 현재, 지금의 삶, 생명이 소중하다. 즉 살아있다는 자체가 소중하다는것이 시인의 현재 시점에서의 인생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생명 존재의 귀중함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새로이 부상하고있는 생태미학의 시각에서도 바람직한 발상이라 할수 있다.   다른 한 측면에서 실존, 생명 자체에 대한 존중만으로 삶을 만족할수 없는것이 또한 인간의 심리이다. 생명에는 자아가 존재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명상해야만 한다.(《명상》) 꽃이 피는 원리는 우주의 원리다. 꽃씨를 마음의 터밭에 뿌렸을 때 피려는 꽃망울에는 욕망, 사랑, 죄와 벌이 모여든다. 그러나 그러한 강요된 리상때문에 노예가 된 나는 마음밖에 버려진다. 서성이다가 마음안으로 불러들였을 때 다시 우주적원리에 의해 꽃과 함께 원색으로 핀다. 시적인 상상속에서나마 삶의 본질에 도달한것이다. 가장 자연적인 삶에 대한 깨우침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깨우침은 집념의 무의미함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그리고 자기 마음속에서마저 잊혀지려는 자신을 구해냈을 때 가능한것이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시인이 무상한 삶, 새로운 가치기준에 대한 미망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한것이 정적인것에 대한 애착이다. 《다도》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지는것은 이때문이 아닐까 한다.   진실된 나를 조용히 부른다   바람 한점 없는 호수우에 하늘빛은 겸허히 잠들고 하나로 되는 사이 일상의 나는 사라진다   머문듯 부은 물에 사랑이 생명처럼 숨을 쉬면 소망이 없을만큼 빈 차잔에/ 마침내 피여오르는 마음의 향.     《다도》의 전문이다. 화자는 다도라는 거의 정지에 가까운 상황, 분위기를 지켜보며 그것과 하나가 된 분위기 즉 정적인 삶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여기서 주목되는것은 《머문듯》, 《빈 차잔》은 《정》과 《공》의 이미지다. 행위자를 제외시키면 다도의 도구는 《물》과 《차잔》, 《차》이며 그것이 어울려서 《향》을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정》과 《공》이다. 정적인 환경속에서 마음을 비운자만이 다도의 진수를 체험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시상의 핵심이미지는 《소망이 없을만큼 빈 차잔》이다. 이는 《일상의 나는 사라진다》는 그 앞의 이미지와 호응하면서 《공》의 경지 즉 한시학에서 말하는 시의 의경(意境)을 형성하는 모티프가 된다. 다도라는 행위와 그에 의해 만들어진 분위기를 잘 그렸다고 할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이처럼 다도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묘사하고있는 시인이 지향하는 삶은 그러한 정적인 삶의 모습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러한 분위기는 지선(至善)의 삶의 모습으로 환원된것이리라. 그런데 이러한 지선의 삶의 모습은 《일상의 나》가 사라진 상태에서만이 느낄수 있다고 시인은 본다. 구도자의 목욕재계의 통과의례와도 같다. 《진실된 나를/조용히 부》르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일상을 탈피한 진실된 나는 소망마저 비워버린채 숨쉬는 사랑속에 《마침내 피여오르는 마음의 향》을 만끽한다. 다도의 진수인 동시에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지선의 경지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지선의 삶은 시인의 과거적삶 혹은 소년기의 체험에 깊이 뿌리내려있다. 모두(冒頭)에서 시집의 제4부인 《등대지기》와 제5부인《장독》은 정적인 삶의 양상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수록된 시들 특히 《장독》에 묶여진 시들은 정적인 삶의 양상들인 동시에 민족적, 전통적 혹은 과거지향적인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이미지가 고향, 시골, 할머니, 외할머니가 되겠는데 그것들은 민족성 혹은 조선족성을 가장 보편적으로 상징하고있는 《장독》으로 집약된다. 특히 할머니, 외할머니의 이미지는 그 빈도가 상당히 높다. 그러니까 동적인 현재적삶에서의 무상과 방황의 상대적위치에 정적인 과거적삶의 애틋한 추억과 따스한 느낌이 놓인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말을 바꾸면 현실적삶의 일상과 염원하는 혹은 꿈꾸는 삶의 모습은 항상 괴리 혹은 유리되여있다는 말이 된다. 그 꿈과 일상 사이에는 너무나도 힘겨운, 넘기 어려운 벽이 가로놓여있기때문이다.   사회가 너무 많이 변해서 그런것일까? 전춘매의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야는 추억속의 세계가 될것 같다. 시집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좋은 시라고 느낀 작품도 이 《장독》이라는 표제의 제4부에 묶여진것이 가장 많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도 슬프고 고국에 대한 추억도 측은하다. 민족을 추억처럼 느끼는 시인의 자세는 어딘가 조금은 감상적인데가 있어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현실은 너무 많은 추억속의 아름다움을 색바래게 한다. 그래서 그 추억속의 상상력을 더듬어보면 시인이 왜 오늘의 삶을 《무상》으로 인식하는지를 더러 알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옛9월》의 경우 추억의 세계속에 아로새겨진 민족적이미지를 아련한 정서속에 그려놓고있다.   젊은 엄마 머리우의 빨래함지에 삐죽이 고개 내민 빨래방치   달달달 어린아이 고무신 끌면 수레길에 제멋대로 뒹구는 락역   저녁연기 피는 굴뚝 사립문에선 외할머니 기다림이 석양에 물들었다.     《옛9월》의 전문인데 여기서 특히 빨래함지, 빨래방치, 저녁연기, 외할머니의 기다림 등의 이미지들은 농경시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할수 있는것들이여서 잊혀져가는 우리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장독》에서는 장독과 할머니를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시키고있다. 《한생을/속 썩이는/할머니//그 마음/누가 엿볼라/꽁꽁 동이신다//안으로만/삭이는 심사는/궂은날 마른날이 따로없고//처마밑/외로운 마음은/헤아려주는이 없지만//언제나/정성에 뜨거운/우리 집 식탁//삭을수록/맛이 깊은/할머니의 향이여.》(《장독》 전문) 여기서 시인은 《속 썩이는》, 《안으로만/삭이는 심사는》, 《삭을수록/맛이 깊은》 등 된장의 일반적인 속성을 《한생을/속 썩이는/할머니》라는 우리 민족 전통적여성의 미덕과 일체화시킴으로써 시상의 시너지적 효과를 이끌어내고있으며 그것을 추억하며 상상하는 시인과 독자의 의식 또한 일체가 됨으로써 진한 감동을 유발시킨다.   이 두 편의 시에서 시인 혹은 화자의 시점은 오늘에 있지 않고 추억속에 들어가있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시적화자는 오늘의 시점에서 추억속의 세계를 지켜보며 그리고있는것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 추억속의 그때 그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독자를 그 세계에 끌어들인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추석날의 애수》, 《산에서 자란 아이는》, 《두만강》, 《먼 고향은》 등 작품에서는 그러한 중간절차 없이 시인 혹은 화자 자신이 오늘의 시점에서 직접 추억속의 이미지를 그려내고있다. 따라서 이런 시들은 추억의 세계속 이미지를 그리는 동시에 화자의 감수와 정서도 더불어 드러난다.   가령 《추석날의 애수》의 경우 추억속에 들어가고자 하지만 세월에 바래진 기억때문에 더이상 들어갈수 없는 슬픔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그 잊혀진 기억만큼이나 외로움도 크다고 하면서 애수의 원인을 설파한다. 《산에서 자란 아이는》도 비슷한 경우이다. 화자는 자신은 산에서 자란 아이이기때문에 산을 《바라만 보아도 감격에 마음이 무저》진다고 했다. 그리고 산에 가면 《이미 흙이 되였을/그 누구의 부름소리 들리는듯하고/돌아가신지 오랜/외할머니의 하얀 치마자락이/기발처럼 날리는듯합니다》고 하여 산을 보며 감격하지 않을수 없는 원인을 드러낸다. 그리고 끝련에서 화자는 《산에서/자란 아이는/산을 못잊어/꿈에나마 가끔씩/산을 찾습니다.》고 추억과의 교감을 보여준다. 그러한 추억속 세계에 대한 동경의 의미를 가장 잘 형상화한 작품이 아마도 《먼 고향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먼 고향은/봄, 여름, 가을, 겨울 아닌/그 계절이다》.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4계절 이외의 어떤 계절이다. 상상속의 세계이기때문에 가능한 이 제5의 계절, 그 계절은 4계절이 서로 뒤엉킨 애잔한 아름다움만이 남아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속에는 장국냄새 풍기는 어머니의 기다림이 있고 별같이 총총한 할머니의 옛말이 있다. 그리고 산처럼 무겁던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그 고향은 이제 《먼 고향》이며 《내 꿈》일뿐이다. 이 《먼 고향》과 《내 꿈》의 이미지는 그래서 이제 가상의 시간과 공간속에 상대적으로 정지된 존재이다. 즉 시인이 《다도》에서 이미지화시킨 정적인 존재가 될것이다.     결국 시인은 일상을, 현대인의 삶을 살면서 항상 또다른 세계―순수의 세계를 꿈꾼다. 그 순수의 세계가 바로 추억속의 정적인 삶이 되겠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대의 일상을 살아야 한다는데 시인의 고민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시인이 념원하는 순수의 세계는 공업문명, 현대문명, 물욕이 란무하는 물신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현실사회와는 상반되는 위치에 있고 가끔 지난날의 기억들이 그런 순수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다. 궁극적인 순수는 원시상태임을 암시한셈이다. 그리고 그 원시상태의 이미지로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있는데, 특히 외할머니의 이미지에는 고향, 때묻지 않음, 전통, 평화와 동경 등 모든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시인이 역설과도 같은 현실, 부대끼고 체념하며 회의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현실의 세계에서 항상 그리워하는 세계가 바로 앞에서 살펴본바 있는 가상의 시간과 공간속에 상대적으로 정지된채 존재하는 추억속의 세계가 되는셈이다.   그러나 시인이 간과하고있는것이 있는것 같다. 실존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을뿐이며 거기에서 생명존재의 의미를 구할수는 없다. 실존 자체만이 진리다 라는 답안은 정해진것이다. 동물이나 미물이 존재하는것과 같은 리치다. 다만 인간은 의식과 생각을 가지고있다는것이 다를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삶의 의미를 마냥 추억속의 세계에서 찾는것은 바람직하지만은 않을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수밖에 없기때문이다. 즉 삶의 가치는 자기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사회와의 관계속에서 찾는것이 바람직할것이라는 말이 된다. 삶은 원래 의미가 없고, 그래서 개개인이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싶다. 이와 동시에 인간이 그런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나》를 대상화시킬 때 이루어진다는 이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시적화자와 시인이 지나치게 근접하게 되면 주관적인 사상이 시의 형상성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대상화되지 않은 시에는 넉두리 이상의 가치가 없다고 할수도 있다. 《나》를 최대한 대상화시켰을 때, 즉 사물이나 현상을 조금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묘사할 때 거기에서 새로운 시적인 의미가 창출될수 있다. 이는 의식의 차원을 넘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이 가능하기때문이다. 전혀 해명이 불가능할것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순간적인 떠오름》의 묘사에서 독자가 감동될수 있는것은 시인의 정서가 그러한 대상을 통하여 정서화되면서 보다 생신한 이미지나 사상, 의식, 감정이 생성될수 있기때문이 아닐까 한다.   끝으로 일상과 현실을 하나로 본것 또한 이 시인의 한계다. 현실의 삶에서도 지양해야 할것과 추구해야 할것들이 따로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더러 언급되였지만 《무상》에 묶여진 시작품들은 열린 사고와 치열한 주제의식, 현실적삶에 대한 인식의 절실함 등이 돋보이지만 시어의 정제나 비유의 치밀함 등 면에서는 《등대지기》나 《장독》에 못미치고있음이 아쉽다. 그밖에도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전체적으로 주제나 감정을 직접 나타내는 추상적인 어휘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시인이 하나씩 극복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된다 하겠다.   [출처] 일상과 꿈, 그 사이를 방황하는 시혼-전춘매의 시집 |작성자 반벽거사
1475    ...끝 댓글:  조회:5794  추천:0  2015-09-17
    4) 전원시와 현실도피 그리고 현실순응     조선족 이주민의 다수가 농민이였으면서도 불구하고 이 시기 시작품에는 농민이 화자로 등장하는 경우가 별로 많지 않다. 이는 아마도 시인들 다수가 도시에 사는 직장인들이였고 또 중국땅에 이주해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때문에 사실상 농촌이나 전원의 체험이 절실하지 않았던것과 관련이 있을것으로 보인다. 이들 시속에 등장하는 농촌이나 전원의 풍경이 대개 조선땅의 고향이 되고있는 점은 이런 사실을 반증한다고 할수 있다. 앞의 항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는 천청송의 《드메》나 《書堂》 등이 이런 류형에 속하는 전형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그렇기는 해도 가끔 화자가 농민으로 되여있는 이주민 작품들이 가끔 눈에 뜨인다. 신상보(申尙寶)의 《흑과 갓치 살갯소》가 그런 작품에 속한다.   화자는 흙은 나의 모든것, 내 뼈요, 재산이요 즐거움이라고 한다. 그래서 흙과 더불어 살고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이땅 이민지에 흙을 찾아왔다고 한다.   내 발에 미트리를 신고 내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한 박아지에 목슴만 가지고 흘글 차저 여기 왓소 흘글 파러 여기 왓소   언제나 난 해와 함 일하기 즐거울 파기 즐거울 千萬年이 흘너도 흘너도 흑과 갓치 살갯소 흑과 갓치 죽갯소     《흑과 갓치 살갯소》의 후반 2련이다. 여기서 《한 박아지에 목숨만 가지고/흘글 차저 여기 왓소》라는 이미지는 앞의 항에서 언급한바 있는 윤해영의 《아리랑고개》에 나오는 《二十年前!/아버지 등뒤에 봇다리뒤에/박아지 두 은 방울이 커서》 류의 이미지와 동일하다. 이주농민의 이주의 모습인것이다. 이어서 화자는 그냥 일하기가 즐거워서, 땅 파기가 즐거워서 흙과 같이 살고 흙과 같이 죽겠다고 한다. 여기에는 당시 일제의 식민지 개발과 더불어 형성된 도시문명의 발전과 그러한 도시문명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으려는, 혹은 도시문명에서 소외된 농민의 의식이 반영되여있을수도 있고 지식인으로서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의미도 없지 않은것 같다. 즉 이 시에서 시인은 도시문명의 반대편에 서있는 농민의 근원적인 이미지로서의 땅에의 귀속감을 드러내고있다는 말이 된다.   리학성(李鶴城)의 《五月》에서 그려진 전원풍경이나 전원 지향의 의지도 같은 차원에서 리해할수 있지 않을가 한다. 물론 이 작품의 기본적인 정서는 자연의 생명력과 그러한 생명력에 감동한 화자의 감흥이 된다. 자연에 대한 찬송가라 할 정도로 화자의 정서는 흥분되여있다.   五月은 초록물결이 넘치는 한낮 牧場을 꾸몃다. 들薔薇도 香氣 품은 넓은 둔덕위 염소등에 휘파람이 구운다. 연분홍빛 구름도 뭉기뭉기 피는데 종다리 그린 譜表를 처다보며 풀잎피리라도 불리라. 이 法悅- 이 멜로듸- 우리는 豊饒한 自然을 呼吸하는 太陽의 아들, 五月의 푸른 한울을 風俗하고. 五月의 푸른 大地를 習性한다.     《五月》의 전문이다. 5월 봄빛속에 생기활발한 자연의 모습을 초록의 물결속에 생동하는 하늘과 들과 들속의 생명들을 통해 표현하고있다. 암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이한게 아니냐는 혐의가 있지만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강한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큰 흠은 되지 않는다 하겠다.   《五月》이라는 같은 표제의 송철리의 시작품은 그 시풍이 리학성의 그것과는 전혀 판이하다. 송철리는 소설문단의 안수길에 비견될 정도로 철저히 이주민문단에서 등단하여 성장한 향토시인이다. 그만치 그의 시에서 이민지 향토에 대한 애착은 특별한것이다. 시골 5월의 정취를 이 시만큼 부드럽고 아름다운 이미지로써 펼쳐놓은 작품도 별로 많지 않은것 같다.   새하-얀 비둘기 두어마리 은빛 금을 그으며 미끄러지는 하늘아래 마슬은 호졸곤-이 파-란 아즘에 쩌저 누었는데, 초록물결 부서지는 포푸라 가지에서는 채르렁 채르렁 가벼운 금방울 소리, 맑은 숨소리, 바람은 물고기 보다도 젊어 나물보구니 노래 부르는 두던위에 눈빛 고름끈을 춤추이고, 문둘레꽃 밟으며 흘러가는 염소귀에다 가마-ㄴ 가만 옥색 휘파람을 호이 호이 이 모다 五月의 아름다움이어니, 그곳 五月의 꼬임이어니, 나는 가고십노라 어데던지 풀잎 피리라도 하나 사-ㄹ작 따물고 호돌대는 어린 사슴처럼.1)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그리고 감각적으로 맑고 부드럽고 상큼한 이미지들만을 골라서 시골의 모습을 그린 이 시에서는 시인의 향토에 대한 애정이 절실하게 묻어나고있다. 송철리의 다른 작품인 《落鄕》2)에서 풍기는 분위기 혹은 정서 또한 《五月》에서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五月》에서는 화자의 립장이 객관적인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화자 자신이 직접 그러한 환경 혹은 분위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있다는 점이 조금 다를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도 뚜렷한것은 아니다.   이상 살펴본 작품외에도 자연이나 향토, 전원에 대한 관심을 시화한 작품들은 많이 있다. 여기서 제시한 작품들이 좀더 전형적이고 순수하다고 할수 있을뿐이다. 그렇다면 일제식민지하 이민지의 현실에서 전원이나 향토에의 집착이 혹 현실도피의 성향을 보여준것은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지만 이미 살펴본 작품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의식적인 도피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김조규(金朝奎)의 《室內》3)와 같은 작품에서 그러한 도피의 혐의가 더 두드러져보인다.   파아란 煙環속엔 天使가 산다 天使는 憂愁를 宿命 진엿다 오늘밤도 말업시 나의 室內로 天使를 조용이 불너들이다 天井으로 올으는 煙氣는 외로운 憂愁의 舞라한다 회오리 落葉도 안인 휘파람도 안인 天井과 벗하는 쓸쓸한 思想이라 한다 가슴을 콕 쑤신다 오란다 卓上時計 손을 드니 오오 열손가락이 透明코나 고양이도 안산다 花盆도 업다 울지도 안흘련다 외롭지도 안흘련다 室-內 우리 슬픈 天使는 숨소리 하나 업는 房속만이 좃탄다     이 작품에서 외로움 혹은 상실감이나 슬픔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지며 그것마저도 폐쇄된 공간속에 갇혀버린다. 이 정도가 되면 일종의 도피라 볼수도 있겠는데, 《고양이도 안산다 花盆도 업다/울지도 안흘련다 외롭지도 안흘련다》라는 표현에서 그것은 반전된다. 즉 숙명이나 체념은 일종의 아이러니적인 표현이 되는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도피하려는 주체는 화자가 아닌, 《天使》이기때문이다. 결국 화자와 천사의 두 얼굴의 주체가 시속에서 충돌하고있는셈이다. 즉 암울하고 무정한 현실에서 폐쇄된 공간으로 도피하려는 의식과 그러한 타락에 반항하려는 의식의 충돌이 이 시의 기본적인 정서가 된다는 말이다. 시인의 모순된 사상 혹은 의식을 드러낸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모순이나 의식의 충돌은 김조규 한 시인에 한한것만은 아니였던것 같다. 이른바 친일시라고 불리는 현실순응의 작품들의 출현은 그러한 의식출돌의 결과로 비롯된 한 양상이라 하겠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할수 없던 시인들에게 있어 현실에 순응하고 괴뢰만주국이라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방식을 인정하며 심지어 그들 통치에의 동조를 강요받던 시대적 환경에서 시인들이 선택할 길은 그리 많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나 《친일시》라는 개념은 이민시의 경우에 적절한 표현은 아닌것 같다. 비록 만주국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정부이고 그 정책이나 정치적인 담론 모두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것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국체이고 또 받아들이는 이주민들의 립장에서 보면 일제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고있던 조선의 경우와 꼭 같지만은 않았던것이다. 남의 나라 땅에 정착해사는 이민의 립장이기때문에 원주민인 현지 중국인들과 어울려야 하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며 하였던것이다. 따라서 만주국이라는 정치체제는 그들에게 있어서 일제의 꼭두각시로서 저항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받아들여져 그러한 국체의 강역내에서 생존해야 하는 이중적인 립장이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친일시라는 개념보다는 현실순응의 시라는 개념이 좀더 적절하지 않을가 한다.   이 류형에 속하는 작품들로 흔히 지적되는 작품들은 별로 많지 않다. 흔히 전형적인 친일시라고 지적되는 윤해영(尹海榮)의 《樂土滿洲》4)와 작자미상의 민요인 《滿洲아리랑》, 그리고 최수복의 《滿洲메나리》를 보자.   五色旗 너울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백성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사르리.     《樂土滿洲》의 제1련이다. 滿洲건국10주년기념문집 《半島史話와 樂土滿洲》에 처음 발표된 이 시에서 화자는 백만의 재만조선인을 《福을 받은 백성》, 《흙을 맡은 일군》, 《터를 닦는 선구자》라고 자랑스럽게 읊고있다. 특히 《五色旗 너울너울 樂土滿洲》나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사르리》라는 표현은 괴뢰만주국을 미화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것이다. 만주국 건국리념이 오족협화와 락토만주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제를 직접 미화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를 미화한것이나 일제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미화한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다. 만주국이 백만 척사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뜻도 되겠지만 만주국 강역이라는 이 땅이 희망을 주었다는, 이주민의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이 보다 중요한 시적인 정서로 드러나기때문이다.   작자미상의 민요 《滿洲아리랑》이나 최수복의 《滿洲메나리》도 비슷한 상황이다. 《滿洲아리랑》의 경우 《젖꿀이 흐른 기름진 땅에/五族의 새 살림 평화롭네》는 만주국을 미화한듯하고 《비였던 곡간에 五穀이 차고/잎담배 주머니에 쇠소리 나네》라는 표현은 아마도 만주국의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주민의 풍족한 모습을 보여준것이여서 현실을 왜곡하고 분식한것이라 할수 있다. 최수복의 《滿洲메나리》의 경우에도 《비개인 하늘에 오색이 영농/거츠른 이 강산에 새봄이 왔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봄마지 나서는 滿洲라네》 등의 표현들이 만주국 치하 이주민의 삶을 분식 미화한것이 분명해보인다.   이런 류형의 시들은 그외에도 더 있다. 기본적으로 만주국의 국체를 옹호하거나 만주국의 현실을 분식, 미화한것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들, 이를테면 현실순응 혹은 비민족적인 시작품들이 출현할수 있었던것일가? 적어도 두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할것이라 여겨진다.   첫째는 장기간에 걸친 일제의 식민주의담론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다. 우리의 시들이 제작되였던 194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거슬러올라가면 1910년 한일합방까지 계산해도 벌써 30년의 세월, 일제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한 19세기말까지 계산하면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일제의 식민주의담론이 우리 민족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할수 있다. 그때까지도 항일투쟁이 계속되였으므로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민족의 상당수가 2세대에 걸치는 일제 식민주의담론의 영향을 입으면서 점차 일제의 공모자가 되여갔던것이다. 즉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제의 식민주의담론이 몸에 배이게 되였다는 말이 된다.   둘째는 정체성의 변화이다. 우리 이주민들은 만주국 강역내에 생존하면서 점차 조선본토의 조선인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였던것이다. 조선본토의 조선인과 스스로를 구분하고자 하는 정체성 확인의 욕구가 이들 시인들로 하여금 만주국의 현실을 분식하고 미화하는 우를 범하게 하였던것은 아닐가 한다.   4. 주제의식과 형식적 특징     이민지의 서정과 고국에 대한 향수, 암울한 현실에의 대응, 그리고 그러한 대응의 또다른 방식이라 할수 있는 초현실주의의 실험, 현실도피와 현실순응의 문제 등의 측면에서 《만선일보》시기 즉 해방전 우리 시의 전성기 시문학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우리 시인들은 이주민의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상당히 주목했던것으로 보여진다. 이민지의 현실과 이주 및 정착과정의 고난, 정착하고난후의 고향상실감과 짙은 향수 등이 시작품에 자주 등장하는것은 바로 이주민으로서, 이민시인으로서 정체성 확인의 한 징표로 리해된다. 단군의 후예로서의 민족적 정체성과 만주국 국민이라는 국민적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이주민들은 항상 그러한 이중적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시달려야 했던것이다.   한편 해방전 우리 시는 일제말의 암흑기라고 하는 암담한 사회적 현실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뢰만주국의 정치적인 지향성때문에 그러한 암담한 현실을 그대로 표현할수 있는것도 아니였다. 그래서 우리 시인들은 현실의 모순에 직설적으로 저항할수 없는 상황에서 어두움, 차가움, 서러움, 괴로움 등의 이미지와 여러가지 상징적인 기법들을 동원하여 현실에 대한 부정을 나타냈고 그런 방식으로 소극적으로나마 현실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것도 어렵게 되자 초현실주의라는 서방의 문예사조를 받아들여 파괴적인 이미지들을 난해한 결합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표현하고자 했다. 조선문단에서는 20년대말에 등장하여 30년초반에 큰 성과없이 흐지부지해진 초현실주의의 실험이 40년대초반의 중국의 조선족문단에서 부활하고 한때 강한 세를 이룰수 있었던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현실적 상황과 그에 대한 지성인들의 시적인 대응의 결과였다고 할수 있다.   물론 현실에 대한 저항적대응을 삼가고 사회정치적인 문제와는 무관한 전원에의 지향성을 보여준 작품들도 일부 존재한다. 이들 작품은 상당정도 현실도피의 성격을 띠며 정신적인 타락의 정서마저 로출시키고있다. 이에서 더 진일보하여 심지어 현실을 미화하고 괴뢰만주국의 리념에 동조하는 작품마저 가끔 눈에 뜨인다. 그렇다고 이런 작품들을 친일작품이라고 보는것은 적절하지 않은것 같다. 만주국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정부인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이주민시인들이 만주국의 리념에 순응 혹은 동조한것은 일제에 대한 용납과는 차이가 나기때문이다. 물론 이런 현실미화나 만주국리념에의 동조가 야기된것은 장기간에 걸친 일제의 식민주의담론의 영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것 또한 사실이다. 한편, 이주민시인들이 일부 현실미화나 만주국리념에 동조하는 작품들을 제작한데는 정체성의 변화와도 깊은 련관성을 가진다. 이주민들의 이중적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앞부분에서 루루히 지적한바 있거니와 좋든 궂든 이제 우리 이주민은 만주국의 국민이 되였으며 따라서 이민지에서 끝까지 생존해가기 위해서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고초가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력사적인 불가피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항일유격군들이 눈보라치는 장백의 밀림속에서 피를 흘리며 일제 및 괴뢰군들과 저항하고있던 현실에서 이러한 순응이나 동조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장르적측면에서 이 시기 시문학유산들을 살펴보면 신시운동이래 점차 형성된 자유시 전통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러나 전통지향적성향이나 실험적성향을 무시할 수는 절대 없다. 이국타향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이주민들의 생존환경을 감안하면 전통지향적성향이 끈질기게 이어져온 원인을 짐작할수가 있고 본토에서 여러 민족매체가 강제폐간되던 시기에 건너간 문인들의 경우 탈이념화의 순수서정을 표방한채 형태마저 비교적 짙은 실험성을 드러내였던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통지향적성향을 드러내는 부류의 작품들은 시조와 민요를 들수 있다. 이런 부류의 작품들로부터 조선족 이민시인들이 보여준 전통시가 수용의 시각이 명백히 드러난다. 즉 조선본토에서는 전통지향적성향과 실험적성향이 대립되고, 김동환의 경우 민요시형을 7·5조나 4·4조 같은 평이한것을 답습하는것이 좋다5)고 하여 전통에 대한 복귀의 의지를 강하게 지니고있었던데 비해 비록 그보다는 썩 나중의 일이긴 하나 조선족 이민시인들은 민요조의 시가 아니라 아예 민요자체의 창작을 특별히 중요시했던것 같다. 신춘문예모집요강에 민요가 한 장르로 나와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을 뒤받침해준다.   실험적성향을 보여준 작품들은 여러 형태가 발견되지만 가장 전형적인것은 기법상의 실험이다. 《시현실》동인들을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 기법에 대한 실험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수 있다.   주제의식의 측면에서나 장르적측면 혹은 형식적측면에서나 우리 시인들이 지향했던것은 민족성의 보존이였다고 할수 있다. 여기에는 남의 나라 땅에 정착해산다는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자각이 한몫을 한것이지만 렬악한 문화환경에서지만 오히려 조선 본토의 시인들보다도 민족성 보존을 위해 더 많은 고민을 했던 조선족시인들의 노력은 반드시 인정해야 할것이다. 그러한 전통이 오늘날까지 연장되여 우리 조선족문학의 민족적개성이 존재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자긍심마저 든다.     덧붙이는 글:     을 6회에 걸쳐 연재하였습니다. 긴 논문을 읽어주신 분들께 경의를 드립니다. 그리고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좋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분의 성원에 보답하고자 다음에는 이라는 논문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역시 긴 논문이어서 5-6회 정도에 걸쳐 연재할 생각이오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기대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좋은 지적도 미리 부탁합니다.                                                                              장춘식 [출처]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6)|작성자 반벽거사
1474    ...이어서 댓글:  조회:4659  추천:0  2015-09-17
    3) 초현실주의와 《시현실》동인의 시     모더니즘시의 의미   현실대응의 한 방법론적인 모색으로 모더니즘시 창작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모더니즘시의 특징들은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으나 가장 쉽게 다가오는 특징은 아무래도 난해성이라 해야 할것이다. 전통적인 시의 감상방법으로는 도저히 리해가 불가능하기때문에 흔히 《몽롱시》라 불리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상 앞항에서 살펴본 작품들도 일부 난해성을 동반하고있다. 난해성은 결국 전통적인 시작방법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쉽게 받아들일수 있는 시의 개념을 깨뜨림으로써 느껴지는 낯설음이다. 그러한 깨뜨림의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다. 상징주의나 인상주의, 이미지즘, 그리고 초현실주의 등이 그것인데 초현실주의 시작품에 이르면 전통적인 감상방법으로는 거의 의미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가 난해하다. 이에 비하면 앞항에서 살펴본 시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시작방법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있다 하겠다.   이번항에서는 그에서 좀더 진일보한, 모더니즘적인 요소들이 좀더 많이 가미된 작품들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먼저 함형수(咸亨洙)의 《家族》1)의 경우 어머니와 누이, 동생의 각이한 모습들, 그들의 관심과 희노애락을 그리고있음은 분명한데 도대체가 상호간의 련관성은 찾아낼수가 없다. 그리고 특히 《휘황한 電燈밑에서 누이는 밤마다/붉은알 푸른알 힌알 노-란알을 굴리느라고 눈길이 異常하여졌다/오늘 누이는 大理石 돌층계에서/競走練習을 한다/돌층계 밑에 떠러저있는/찢어진 찬송가와 때묻은 항케치》라는 누이의 행위와 련관되는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치 않다. 전체가 은유로 되여있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품의 의미를 우리는 대개 짐작은 한다. 《가족》이라는 표제가 그런 짐작을 가능케 한다. 어머니와 누이와 동생과 나로 구성된 한 가족의 삶의 양상이 이 《가족》이라는 하나의 키워드에 얽혀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기때문이다. 이 시인의 또다른 작품인 《개아미와 같이》2)도 비슷한 경우지만 그 의미는 더욱 아리숭하다.   개아미들이 몬지길을 기어가는 것처럼 뜨거운 거리의 애스팔트우에 사람은 넘처났으나 白紙의 한울에 太陽은 한개의 붉은 쇳덩어리처럼 空然하다. 악착한 市場과 大學室의 試驗管에 어두운 밤은 찾어와 제各各의 內部에서 理論과 苦痛이 달렀다. 개꼬리와 쥐꼬리의 差異만치 一定한 法律과 一定한 流行은 一定한 生活에 象徵되고, 사람은 사람이오 憂鬱은 憂鬱에 不過한것이냐? 나무 풀은 쓸데없이 자라고, 시럽시 아이들은 울고, 女子는 帽子를 男子는 신짝을 찾고, 두터운 傳統의 眼鏡속으로 아버지는 조으럼오는 忠告를 느러놓을게다.     이 시에서 현실은, 혹은 현실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냥 하나 혹은 여러 개의 현상에 불과하다. 화자의 시선도 무덤덤하며 거의 정감이 배제된것처럼 보인다. 《뜨거운 거리의 애스팔트우에 사람은 넘처났으나/白紙의 한울에 太陽은 한개의 붉은 쇳덩어리처럼 空然하다.》 하늘은 백지같고 태양은 붉은 쇠덩이같으니 공연(空然)할수밖에 없다. 꽉 차있으면서도 텅 비여있다는 표현이 되겠는데 이것 자체가 곧 역설이 된다. 악착같이 푼전을 다투는 시장의 흥정이나 대학교 실험실의 시험관이나 인간사회의 구석구석에는 각자 나름대로의 이치와 고통과 같은 삶이 진행되고있으나 그들 각자 사이에는 무슨 련관이 없는듯이 보인다. 《사람은 사람이오 憂鬱은 憂鬱에 不過한것이냐?》 라는 회의의 질문은 바로 그래서 강한 울림을 동반할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무나 풀과 같은 미물의 생장도 그냥 무의미하며 아이나 어른, 아버지의 충고마저도 부질없는 일이라고 했다. 인생무위의 인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제 다시 이 시의 첫행에 돌아가보면 작품에서 렬거한 현실이나 현실의 삶 모두가 《개아미들이 몬지길을 기어가는 것처럼》 무의미하다는 화자의 인식을 리해할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정말 현실이나 현실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한것은 아닌것 같다. 《사람은 사람이오 憂鬱은 憂鬱에 不過한것이냐?》라는 반문때문이다. 즉 화자는 현실을 무의미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달갑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것이다. 그래서 현실이 무의미하다고 한 표현들은 역설이 된다. 현실이나 현실의 삶이 원래 무의미한것은 아니며 그것이 무의미해진데는 뭔가 원인이 있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있는것이다. 그 원인에 대한 불만의 정서가 이 작품에는 흐르고있다 하겠다.   상기 함형수의 시들도 난해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해석은 가능하다. 그에 비하면 김조규(金朝奎)의 《少年一代記》3)는 거의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 작품은 《墓碑銘의 一節》과 《少年의 遺稿日記의 一節》 두 소제목으로 나뉘어졌는데 긴 시여서 두번째 장이라 할수 있는 《少年의 遺稿日記의 一節》 부분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少年의 遺稿日記의 一節    悔恨의 倫理는 必要업다. 나는 나의 房과 나의 壁과 나의 空氣가 무섭다   내가 엇지 못하는것은 花辨의 빗갈과 林檎의 味覺이다 少年의 喪輿는 늣가을 찬바람에 饌送되어 黃昏속에 잠기엇고 少年의 무덤압헤는 女人의 恥毛로 包裝한 林檎 한알을 고여노앗다. 女人은  한포기 고이지 안헛고 뭇俗物들의 무덤과 무덤새에 홀로 하이얀 墓碑만이 지터가는 黃昏 黃昏을 지키고잇섯다.    高邁한 精神少年의 殉死之地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럴 때 요긴하게 리용할수 있는 리해의 방법이 있다. 이미지의 분석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되는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것이 되겠다. 《무섭다》《喪輿》《늣가을 찬바람》《黃昏》《무덤》《女人의 恥毛》《林檎》《墓碑》《殉死》…모두가 죽음과 어둠, 성(性)과 관련되는 이미지들이다. 여기에 인용하지 않은 첫번째 장의 이미지들, 가령 《로-마 廢墟의 風化헌 記憶》《가마귀의 豫告》《氷雨가 車窓을 두드리든 黃昏》《쥐새기의 搖籃인 女人의 불근 寢室》《가마귀의 華麗한 分列》《도마도와 갓튼 불근 피덩이를 吐하면서 운명할 》《허이연 한울이 문허지고》《地下室의 饗宴》《점잔은 殺戮》 등을 련결시켜보면 그러한 암울함의 정서는 보다 강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모더니즘시운동을 감정 및 의식의 퇴폐화와 관련시키는 주장은 일부 합리적인 면을 가지기도 한다 하겠다.     《시현실(詩現實)》동인과 그 주변   상기 김조규의 작품에서도 더러 초현실주의적인 요소들이 엿보이지만 아직은 상징과 은유, 이미지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시현실》동인들의 초현실주의 실험은 그래서 한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시대적으로 이 시기는 조선 본토에서 민족문학이 거의 완전히 말살되면서 황민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발동하고 대동아 공영을 부르짖던 이른바 암흑기에 속한다. 따라서 조선족 이주민들의 문화환경도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나마 남아 있은 《만선일보》라는 발표 지면에서마저도 일제에의 동조를 강요받았고, 이제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나 표현마저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모더니즘의 표방은 어쩌면 암묵적인 저항의지의 표현으로 볼수도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다음으로 민족 시사적인 맥락에서 30년대 리상(李箱)에서 중단되였던 모더니즘의 실험이 40년대 초반에 다시 맥을 이었다는 의미에서 그 중요성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시현실》 동인의 작품 1은 리수형(李琇馨)과 신동철(申東哲)의 공동작인 《생활의 시가(市街)》4)이다.     밤의 피부 속에는 夜光筮의 神話가 피어난다   밤의 피부속에서 銀河가 發狂한다   發狂하는 銀河엔 白裝甲의 아츰의 呼吸이 亂舞한다   時間업는 時計는 모-든 現象의 生殖術을 구경한다   그럼으로   白裝甲의 이마에는 毒나븨가 안자   永遠한 午前을 遊戱한다   遊戱의 遊戱는   花粉의 倫理도 아닌   白晝의 太陽도 아닌   시커먼 새하얀 그것도 아닌   眞空의 液體 엿으나 液體도 아니엿다   자- 그러면 出發하자   許可된 現實의 眞空의 內臟에서   시커먼 그리고 새하얀 그것도아닌   聖母마리아의 微笑의 市場으로 가자   聖母마리아의 市場엔   白裝甲의 秩序가 市街에서 퍼덕일뿐이엿다     《생활의 시가》의 전문인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이 작품이 당시 조선족문단에서 일반적으로 대할수 있었던 여타의 시작품과는 뚜렷한 구별을 보이고있음을 발견할수 있을것이다. 그 구별을 일단 (1) 현실적인 론리성의 파괴, (2) 사유의 순수한 자동기술성, (3) 이미지의 격리성과 기이성, (4) 신비적, 광란적 수법 등으로 나눠볼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보여주는 시작품의 경향을 우리는 초현실주의라 볼수 있지 않을가 한다.   조선현대문학사에서 초현실주의의 수용양상은 1920년대 말부터 나타나며 초기에는 프랑스문단에서의 초현실주의 류파에 대한 소개로부터 시작되였다가 30년대에 들어서면서 리상(李箱),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장서언, 그리고 《삼사문학(三四文學)》의 동인인 리시우(李時雨), 신백수(申白秀), 한천(韓泉) 등의 작품으로 실천되며, 결국 리상의 작품을 정점으로 문단에서 사라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5) 그러나 1940년대에 동북지역 조선이주민 문단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 순수시파가 일어나고있었음은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정작 이 시기 조선문단에는 보국주의라고 불린 친일문학만이 존재하던 시기에 말이다.   한편, 극언(克彦)이라는 필명을 쓴 사람은 《熾烈한 精神의 燃燒》라는 평문 5회 련재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있다.     現代性이란 現代의 文化創造力이 傳統과 蓄積에서 한 그것에 重壓當할 에 비로소 나타나는것이다. 그러타고 곳 모-든 詩人들이 푸-쉬킨의 詩精神을 體得하라는 注文은 아니다. 한 時代의 過渡되는 苦惱와 混亂에 否定이면 否定, 肯定이면 肯定의 深化된 意(識?)을 불태우라는것이다. 한 時代가 絶望할제 다음 時代는 삿삿치 헷처진 絶望의 深淵에서 建設과 前進의 烽火를 들고 뒤이어 올것을 우리가 밋을  모름직이 불길을 우리는 남겨야 할것이다. 그러기엔 詩人은 熾烈한 精神을 燃燒해야 하는것이다.   그러치 못한    諸君들은 稅關의 눈을 속이는 文化的密輸入者의 工人이 되고말 危險性을 가지는것이다.   自重합시다. 나도 自重하기 爲해 이 學說을 깊이 謝過하니 容恕하시요.6)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극언이라는 이름으로 《만선일보》에 발표된 작품은 2편인데, 상기 인용문의 글 외에 《돌》7)이라는 시 한편이 있을뿐이다. 그러나 이런 훈계조로 한 그룹 동인들의 시작활동을 평가한것으로 보아 신인은 아닌듯하며 그렇다면 당시 소위 《문화부대》로 들어온 조선의 어떤 기성문인의 필명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평문 전편을 보면 다분히 체제영합적인 태도를 보이고있다. 비록 《부정이면 부정 긍정이면 긍정의 심화된 의식을 불태우라》고 표현하였지만 오족협화(五族協和)에 대등아공영을 웨치며 전시체제에 막 돌입하려고 하였던 당시 만주의 환경에서 현실을 부정한다는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였으므로 사실상 긍정의 의식을 불태우라는것이나 다를바 없는것이다. 그러니까 극언의 훈계는 《시현실》동인들의 작품이 당대의 현실을 너무 의식하지 않은데 대한 경고로 보인다. 1940년의 8월이 어떠한 시대인데 서양 나라 문학의 흉내나 내고있느냐는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이들 《시현실》동인들의 시작실험이 현실에 대한 불협화음을 동반하고있으며 심지어 저항적인 의미마저 내포하고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시현실》동인의 초현실주의 작품들로는 리수형(李琇馨)·신동철(申東哲)의 《生活의 市街》, 김북원(金北原)의 《椅子》8), 강욱(姜旭)의 《樂譜를 가젓다》9), 리수형의 《娼婦의 運命的海洋圖》10), 김북원의 《비들기 날으다》11), 신동철의 《능금과 飛行機》12) 등 6편으로 6회에 걸쳐 《만선일보》지에 발표되였고, 동인으로는 리수형, 신동철, 김북원, 강욱 등 4명이 여기에 묶여있다.   물론 류사경향을 보인 S. S. Y13), 송석영, 천청송(千靑松), 정야야(鄭野野), 함형수(咸亨洙) 등 5명을 포함해보아야 총 9명 시인에 12편의 작품이 전부여서, 량적으로는 빈약하다 할수 있고, 그중 다수는 조선본토문단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문학에 관한한 문제는 달라진다. 순수문학중에서도 《정신의 폭발》로 압축되는 이 문예사조가 조선시가에서 하나의 성과로 평가되는것은 리상 정도이기때문이다. 더구나 1940년 8월의 만주는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의 일차적 후방이였고, 따라서 상당수의 문인들이 일제의 강압적, 혹은 포용적 책략에 시달리다못해 변절하고 투항했던 당시 조선족문단에서14) 《시현실》동인들이 이런 시대적상황, 달라진 천지, 대동아공영의 신풍토에서 눈을 딱 거두고있는것은 이변이 아닐수가 없는것이다.   이수형의 《娼婦의 運命的 海洋圖》를 보자.     一萬系列의 齒科術時代는 밤의 海洋에서 섬의 하-모니카를 분다   一萬系列의 化粧術時代는 空港의 層階에서 근 추-립푸 저녁을 심포니한다 記念日 記念日의 추립푸는 送葬曲에 핀 紙花엿다   明日의 손락을 算術하는 츈-립푸는 머-ㄴ 푸디스코 압페   오르는 오르는 비누방울의 夜會服 記念日記念日의 幸福을 約束한 肉體의 女人이 雙頭의 假面을장식하는 날 七色의 슈미-즈가 孔雀의 미소를 워 나의 海洋의 蜃氣樓를 러 왓다   記念日 記念日 너의 장식에   너의 그 洋초와 갓튼 蒼白한 얼골에 너의 그 바다와 가튼 神話를 들여주는 눈동자에   나의 椅子는 溺流되엿다   나의 椅子는 溺流되엿다   그러나 娼婦는 울고만 잇엇다   肉體의 女人은 장식의 歷史가 슬펏다   假面의 女史는 살아잇는것이 슬펏다 雙頭의 怪物은 왜 울엇을?   明日을  장식하여야 할 運命을   明日도 그 다음날도 살아야 할것을   女人아 假面아 深夜의 어린애야   現實에 規約된 誠實보담도 阿片보담도 술보담도 밤의 秘密보담도 외健康術을 사랑한다     이 시는 서정시의 일반적 독법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문맥이 비론리적이고 내포가 복잡하기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막연하기만 한것도 아니다. 우선 제목에서 무엇인가 시사되고있다. 《娼婦의 運命的海洋圖》. 다시 말하면 창부의 운명과 해양도가 관련이 되고있다는 얘기인데, 전체적으로 이 작품의 분위기는 암울하고 절망적이다. 그 절망감과 암울한 분위기를 형성한 이미지들을 추출해보면, 《밤의 海洋》《送葬曲에 핀 紙花》《海洋의 蜃氣樓를 러 왓다》《洋초와 갓튼 蒼白한 얼골》《나의 椅子는 溺流되엿다》《娼婦는 울고만 잇엇다》《장식의 歷史가 슬펏다》《살아잇는것이 슬펏다》《雙頭의 怪物》《現實에 規約된 誠實》《阿片》《술》《밤의 秘密》 등으로 되는데, 대체로 암흑과 타락과 슬픔으로 요약할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 자체도 암울하고 절망적이지만 이러한 이미지들을 《娼婦의 運命》과 련계시킬 때 그 암울함과 절망감은 배가된다. 이 작품의 시적 자아는 창부라 볼수 있는데, 창부란 말은 그 생존양태상 밤의 이미지와 련결되며 시인은 이런 이미지를 다시 죽음, 소멸, 사라짐의 이미지와 련결시키고있다. 그리고 시의 후반부는 《溺流되엿다》《울고만 잇엇다》《슬펏다》와 같은 소멸적 혹은 절망적내포의 서술어로 끝나고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사실상 형식에만 집착한 무의미의 시는 아닌셈이다. 상식적인 론리를 초월한 자동기술에 의하여 기존의 시적흐름을 파괴시키고있고 그래서 기존의 시읽기 방법으로 해석이 어려워졌을뿐이다.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 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법중의 하나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상태에서의 자유련상을 시작과정에 리용하고있다고 보면 된다. 《발광하는 은하엔 백장갑의 아츰의 호흡이 난무한다》(《生活의 市街》)나 《포푸라 가지에 가벼웁게 바다가 넘친다》(《樂譜를 가젓다》), 《푸른 口腔속에 여러 비행기들이 몰려든다》(《능금과 飛行機》), 《안즈면 그대요 나인/굼실거리는 바다》(《椅子》) 등의 표현은 그 개념들사이에 필연적인 련계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만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가 병치되여 그 상호 충돌에 의해 돌발적인 의미의 충격이 일어나고 동시에 낯선 긴장감을 동반한 매력이 있을뿐이다. 이 충격, 이 매력이 바로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노리는 인간 감성의 발굴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문학의 진정한 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러한 인간 감성의 발굴에서 기인된다. 비록 이런 이미지들의 다발에서 우리는 실리적인 의미를 추출해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시인이란 현실을 살아가는 력사적인 인간이므로 시인이 가지고있던 감정과 정서, 념원과 리상, 사랑과 증오 등의 감정은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도 드러나게 마련이며 어쩌면 이러한 무의식 상태에서 보다 진실하고 적라라하게 드러날지도 모른다. 이점은 인간의 사상의 진실이 꿈속에서 가장 확실하게 표현된다는 정신분석학의 리론으로도 해석이 가능한것이다. 우리가 이들 《시현실》동인들의 초현실주의 시작품에서 비록 론리적으로는 분명한 의미를 추출해낼 수 없으나 《어둠》이라든가, 《파멸》, 《상실》, 《복수》 따위 불만의 정서를 읽을수, 혹은 느낄수 있는것은 바로 이런 원인에서가 아닐가 한다.   《 同人集》에 묶여 발표된 작품은 아니지만 이수형의 《白卵의 水仙花》15), 金北原의 《胎動》16), S. S. Y의 《氣焰》17), 송석영의 《詩人》18), 千靑松의 《愚感錄》19), 鄭野野의 《거리의 碑文》20), 咸亨洙의 《正午의 모-랄》21) 등 《滿鮮日報》에 발표된 다른 작품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있다. 동인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성격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그 주변에 류사한 문학적경향을 가진 시인들이 비슷한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다는것은 초현실주의 실험이 하나의 류파를 형성하고있음을 의미한다. 또 하나 흥미있는것은 이와 같은 초현실주의 성격의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하여 3개월여만에 《시현실》동인이라는 그룹이 출현하여 동인특집을 련재한 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만선일보》를 통한 초현실주의 시작실험이 일정기간 진행되여오다가 그것이 무르익으면서 동인그룹이 형성되였고 본격적인 동인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다른 측면에서 초현실주의 문학류파의 존재를 확인시키는셈이 된다. 그만큼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띤다 하겠다.   이런 사실을 진일보 확인하기 위하여 정야야(鄭野野)의 《거리의 碑文》를 더 제시한다.     大理石 딍에   神話가 油液처럼 흐르는 밤.   女人은 二十世紀의 傳說을   聖母처럼 受精한다.   明體의 彈力의 플니는 花房   閱華의 燭臺압헤는   獨生子의 來世를 비는 一族의   白金義齒로 별을 는 饗宴을 연다.   秘閱의 振律하는 한나지면   獨生子는 呪文을 流行歌처럼 부른다.   交叉點에는 礫死의 事故가 이럿다.   《靑進赤地(止)》 信號는 번가러 든다.   昇天하는 獨生子는 二萬七千群이 氣流를 헤간다   花房의 女人은 傳說을 다시 受精한다.     전형적인 초현실주의 시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초현실주의 실험시들이 추구하는 요소들은 두루 갖추고있다. 이미지들사이의 론리적인 련결성의 부재, 자유련상으로만 가능한 《정신의 폭발》 등이 그것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암울한 분위기 역시 초현실주의 시들과 류사하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파악은 불가능할뿐만아니라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다만 《거리의 碑文》이라는 표제를 키워드로 하여 시 전체적으로 풍기는 정서 혹은 분위기를 느낄수 있을따름이다. 여타의 류사 작품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작품의 경우와 비슷하다. 1940년 당시 조선족문단에서 초현실주의 실험이 차지하는 문단적 영향력을 짐작할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시현실》동인들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시의 실험운동은 그 기법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뿐만이 아니라 1940년 일제의 발악적인 식민통치라는 최악의 환경에서 조선족 이민시인들이 민족의 지성인들로서 자신의 정서를 문학적으로 표현할수 있는 장치로서 상당히 효과적이였고 따라서 긍정적이였다 하겠다. 앞에서 제시한 극언의 평문은 오히려 반면적으로 이들 《시현실》동인들의 시작품의 적극적인 의의를 파악하게 하는 글이 될수도 있다.   [출처]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5)|작성자 반벽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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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암울한 현실에의 대응     일제강점기 괴뢰만주국이라는 강역(疆域)내에서 생활해야 했던 우리 이주민에게 있어 현실은 암울했다. 이런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줄 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암울한 현실을 느끼고 인식한대로 표현할수 없는 일제 괴뢰정부치하라는 정치적환경이다. 즉 우리의 문학풍토가 현실에 대한 시인들의 느낌이나 인식을 직설적으로 표현할수 있는 자유를 박탈했던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인들은 그러한 모순된 현실을 어떤 시적인 수단 혹은 방법으로 대응했을가?   먼저 함형수(咸亨洙)의 《비애(悲哀)》1)라는 작품을 보자.   나는 이 괴로운 地上에서 살기만은 조곰도 希望치는 안는다 어한 달가운 幸福과 快樂이 나를 부고 노치안는다 해도 그러나 나는 저 아득한 한눌을 치어다 볼 마음은 슬퍼지고 외로움으로 눈물이 작고 난다 저 나라에서도 나는  여기서처럼 이러케 孤獨할바     여기서 화자는 천상과 지상을 두개의 세계로 갈라놓고있다. 그런데 화자는 첫 두행에서 지상의 괴로운 삶을 조금도 희망치 않는다고 하면서도 천상의 세계에 가기를 두려워한다. 천상의 세계 또한 지상의 세계처럼 고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때문이다. 또한 지상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달가운 행복이나 쾌락이 붓잡고 놓지 않는다 해도 미련은 조금도 없다고 했다. 왜서 그런지를 확대해석하지 않더라도 이는 현실에 대한 분명한 부정이다.   채정린(蔡禎麟)의 《밤》2)에서도 현실은 밤과 같은 두려움의 이미지이다. 특히 《나도 내가 업시 낫선 곳에/어디서 흉한 우슴이 히히 우슴인가.》라는 표현은 소름이 끼치는 섬찟한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마지막 행의 《허이연 이마는 별처럼 추웁다》는 밤이라는 어두움과 두려움의 이미지에 대응되여 차가움의 이미지를 드러냄으로써 역시 현실을 어둠과 두려움, 그리고 차가움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써 인식한다.   손소희(孫素熙)의 《어둠속에서》3)를 보면 제목부터 암울한 이미지이다. 그리고 《맥진한듯이 식컴언 밤 석냥 좀 주어라고 불숙 내미는 손/그 검은 얼골에 힌 잇발이 河馬와 같고》라는 싯구로 시작된다. 《식컴언 밤》, 《검은 얼골》 등 표현들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기본적인 이미지 또한 《암흑》이다. 석냥을 구걸하는 손은 물론 빛에 대한 갈구를 암시하겠지만 그렇게 빛을 갈구하는 손은 기진맥진한 걸인의 손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단순한 걸인이 아니라 귀기(鬼氣)가 음산한 광인의 이미지에 가깝다. 다음의 시구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蒼空을 向해/별빛의 우름을 엿듯는 눈물의 女人아/내가 怪物이면 너는 妖魔와 같다.》에서 이점은 쉽게 확인할수가 있다. 거기다가 《우슴 이리 흉측한 눈쌀》, 《깊은 골에서 키- 키- 하는 우슴소리》도 이점을 확인시켜준다. 그런데 화자에 의해 그려진 녀인과 화자 자신은 요마(妖魔) 대 괴물(怪物)로 광인중에서도 광인이다. 그리고 마지막 3행의 《主여 이건 당신의 音聲임니가 그 무서운 魔像의 嘲弄입니가?/아모튼 中毒이 너무 甚하외다./노래를 잊었구 우슴을 잃은지 벌서 오랜데!》 라는 표현은 암흑속에서 분출해낸 절규요 분노라 할수 있다. 전편이 암울한 이미지들로 넘쳐나지만 요마, 괴물 등의 표현들에서, 그리고 광기어린 웃음의 표현에서 아직은 그러한 암울함에 완전히 추락하지는 않은, 어떤 분노를 보여줌으로써 생명의 존재를 확인시키고있다.   그러한 현실의 삶에 대한 분노는 동시에 저항의 심리를 동반한다. 그래서 분노는 어둠이나 차가움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한차원 높다고 할수 있다. 류치환의 《怒한 山》4)은 그러한 분노를 울분으로 풀어낸다.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저항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지는 않고있으나 이 작품의 화자는 어딘가에 울분을 토한다. 어쩌면 하늘과 산의 대결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그 하늘(寒天)과 그 산은 그냥 하늘과 산이 아니라 화자의 심상이 부여된 하늘이요 산이다. 그것을 우리는 《사람들은 다투어 貪람하기에 餘念없고》라는 표현에서 조금은 감을 잡을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늘도 노한 모습이다. 《陰寒히 雪意를 품》었다고 한것은 그런 하늘을 우러러 증오하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잉태한것이라 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화자는 산더러 더 높이 노하여 그러한 한천에 굽어들지 말라고 호소한다. 결국 화자 자신이 음한히 설의를 품은 하늘보다도, 그에 굽어들지 않고 분노하는 산보다도 더 울분에 차있음을 드러낸것이 아닐가 한다. 《神도 怒하시기를 그만두섰나니》나 《地獄의 惡靈같은 주린 그림자를 끌고/因果인양 피의 復讐를 헤이는/아아 너 이 슬픈 陰樹.》라는 류치환의 또다른 시 《陰獸》5)의 표현에서 이점은 좀더 뚜렷해지는것이다.   그러나 류치환에게 있어 그러한 울분이나 분노는 메아리도 없이 사라지는 부질없는 웨침만은 아니다. 강한 생명의 욕구가 내재해있다. 《生命의 書》6)에서 류치환은 그러한 생명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리고 왜 분노하는지를 은근히 내비친다.   뻐치뻐치 亞細亞의 巨大한 地檗 알타이의 氣脈이 드디어 나의 故鄕의 조고마한 고흔 丘陵에 다었음과 같이 내 오늘 나의 핏대속에 脈脈히 줄기 흐른 저- 未開쩍 種族의 鬱蒼한 性格을 깨닷노니 人語鳥 우는 原始林의 안개 깊은 雄渾한 아침을 헤치고 털 깊은 나의 祖上이 그 廣漠한 鬪爭의 生活을 草創한 以來 敗殘은 오직 罪惡이었도다-. 내 오늘 人智의 蓄積한 文明의 어지러운 康昧에 서건대 오히려 未開人의 朦衡(?)와도 같은 勃勃한 生命의 몸부림이여 머리를 들어 우르르면 光明에 漂渺한 樹木우엔 한點 白雲! 내 절로 삶의 喜悅에 가만히 휘파람 불며 다음의 滿滿한 鬪志를 준비하여섰나니 행여 어느때 悔恨없는 나의 精悍한 피가 그 옛날 果敢한 種族의 野性을 본받어서 屍體로 업드린 나의 尺土를 새밝앟게 물드릴지라도 아아 해바라기같은 太陽이여 나의 좋은 怨讐와 大地우에 더 한층 强烈히 빛날지니라.     《生命의 書》 전문이다. 울분에 넘치는 생명의 원천을 화자는 알타이산맥과 닿아있는 종족의 피줄에서 찾는다. 《저- 未開쩍 種族의 鬱蒼한 性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말이 알타이어계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개 알고있는데, 그렇다면 인종도 알타이산에 뿌리를 두고있다고 볼수 있는것이다. 미개적 종족의 생명력은 패배를 모르며 오히려 패잔은 죄악이였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내 오늘 人智의 蓄積한 文明의 어지러운 康昧에 서건대/오히려 未開人의 朦衡(?)와도 같은 勃勃한 生命의 몸부림이여》 라는 두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인간의 지혜에 의해 축적된 현대의 문명은 《어지러운 康昧》인 반면에 미개인의 생명력은 발발하며 몸부림친다. 원시와 현대를 대결시키고있는 형국인데, 여기서 현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고 해도 문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문명비판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수 있는데, 일제하의 현대 도시문명이라는 현실적인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문명비판의 의미는 그리 단순치가 않을것이다. 그것을 뒤에 나오는 悔恨없는 자신의 精悍의 피가 그 옛날 종족의 과감한 야성을 본받아서 죽으면서 자신이 없드린 작은 땅을 새빨갛게 물들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와 련관시켜보면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는 더욱 강해진다. 물론 그러한 저항을 일제의 식민지통치나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만주국의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비약하여 인식하기는 어려울것이지만 현실에 대한 부정인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마지막 행인 《나의 좋은 怨讐와 大地우에 더 한층 强烈히 빛날지니라.》에서 그러한 생명욕구와 과감한 야성의 죽음에 대한 환희는 절정을 이룬다. 다시 말하면 암울한 현실에서 시인 류치환이 추구했던것은 미개적 종족의 과감한 야성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본연적인 생명력이였다고 할수 있다.   류치환의 상기 작품에서 문명비판은 인간 지혜의 축적에 의해 이루어진 현대문명과 종족의 과감한 야성 사이의 대결을 통해 이루어짐으로써 작품의 중심은 오히려 미개인의 야성에 대한 지향성에 놓여지지만 조학래의 《街燈》7)에서 현대문명은 현실 부정의 한 상징물로 등장한다.   이 시에서 가등은 일종의 문명의 상징 내지는 징표로 설정된것 같다. 화자는 열두층계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러한 가등을 내려다본다. 이때 가등은 《까놓은 병아리색기들처럼 조잘》댄다고 했다. 그리고 《…위선 무수한 불빛들이요/그다음에는 사랑이요 춤이요 울음이요 싸흠질이요/하루사리와 모기떼와 빈대와 파리와 심지어 이슬먹음은 뚝거비 노래까지/그 모-든것들이 한시도 쉴새없이 들복는판이다.》 즉 가등이라는 인공의 빛속에서 벌어지고있는 인간들의 행위는 모두 부정적이다. 하루살이나 모기떼, 빈대와 파리 그리고 뚝거비까지 비문명사회에서도 존재하는 부정적인 존재들이 이른바 문명사회의 인간의 행위들과 거의 등가를 이룰 정도로 화자에게 있어 문명인의 행위는 부정적이다. 《내 하는데 네 못하겟니 네가 하는데 내 못하겟니 하면서 들석들석 나는것처럼-.》이라는 표현은 그러한 부정적인 행위들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되였음을 암시한다. 한마디로 조학래에게 있어 문명의 이기에 속하는 가등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적인 행위를 대신할 어떤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인의 이런 부정은 문명비판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심지어 분노의 표현이라 보는것이 나을것 같다.   이 시인의 다른 작품 《心紋》8)에서는 그러한 불만이나 분노를 역설적인 방법으로 드러낸다. 이 작품의 화자는 심문(心紋) 즉 마음의 무늬 혹은 주름살이다. 확대해석하면 인간의 마음, 의식, 령혼 등이 될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의 무늬가 바람에 불려서 어느 나무가지에 앉고싶다고 했다. 나무가지에 앉아서 비를 맞은 까마귀같이 떨지라도 단지 《落葉만 지지 말었으면 좃켓다》고 한다. 즉 춥고 외롭더라도 락엽만 지지 않으면 된다고 했으니 여기서 락엽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락엽은 나무의 한 주기 생명의 끝을 의미한다. 가을이 되면 다수의 나무는 락엽이 지면서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가 겨울을 지나 다음해 봄이 되면 다시 새잎이 돋아나오고 새움이 트며 여름이 되면 록음이 우거지게 된다. 나무의 무성한 잎이 이루는 록음은 나무에게 있어서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락엽이 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는것은 강한 생명력의 보존을 의미할것이다.   이어서 화자는 락엽만 지지 않는다면, 즉 생명력만 보존한다면 《이 季節으(의) 勝利를 되는대로 宣傳하며/입이 아푸도록 휘파람이라도 불겠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역설보다도 은유에 가깝다. 그러나 다음 시행에서 그것을 부정한다. 승리한 기사의 과장한 심리가 아니여도 좋고 무지한 물체라도 좋다고 한다. 심지어 《光明이 머러지면 그저 검은 存在요/光明이 밀려들면 스산하계 을쓰녕한 動物이라도 무관하다.》고 한다. 그것으로 만족한다는것이다. 이쯤 되면 더러 체념한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결코 그게 아니다. 다음의 례문은 이 작품의 주제를 도출한 부분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岩石갓튼 運命에 살어왓길내 오늘은 北西風이 불어서 눈보라 처도 來日은 東南風이 불어서 草花가 滿發한대도 나는 놀래지 안흐리라. 놀래지 안흐리라.     이 부분을 읽으면 앞에서 투정같이도, 체념같이도 내뱉은 넋두리가 일종의 역설적인 표현임을 금방 알수가 있다. 좀더 나은것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부정하고 다만 락엽만 지지 않으면 만족한다고 한것은 그만큼 현실의 암담함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의 무늬 즉 의식을 소유하고있다는, 혹은 지키겠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부정적인 현실에 저항할 힘은 없지만 그것을 감내할 인내력은 가지고있으며 그렇게 인내할 생명력도 가지고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생명력과 인내의 바탕에는 당연히 현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저항의 의지가 깔려있을것이다.   현실 부정은 현실 비판과 차이가 있지만 정상적인 언로가 막혀있던 일제강점기에 있어서는 같은 의미로 리해해도 무방할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 시인들은 용인할수 없는 현실의 암흑을 부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것이라 하겠다.   이 시기 시인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또다른 방법으로 과거에 대한 추억을 즐겨 시화시킨다. 송철리(宋鐵利)의 시적상상력은 그러한 추억에 상당히 익숙해있다. 《追憶》9)이라는 표제의 작품이 대표적인 례가 될것이다.   새하-얀 눈위로 외사슴 울고간 자욱마다 언 달빗치 파라케 멍든다는 밤이면 닥도 업시 나의 추억은 슬픈 부헝새 슬픈 부헝새.     모두 6행으로 된 이 단시의 기본적인 정서는 차가움, 고독, 슬픔이다. 흰눈, 언 달빛, 파랗게 멍든 밤 등의 이미지는 차가움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차가움은 밤이라는 어둠의 이미지와 련결되여있다. 그러니까 차갑고 암울한 밤에 부엉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떠오른것이 추억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그 추억은 행복할수가 없다. 슬픈 추억이다. 그런데 추억 자체가 슬픈것은 결코 아닌것 같다. 시인의 또다른 시작품인 련작시 《爐邊吟》10)의 세번째 작품인 《反芻》에서 그것을 확인할수가 있다. 과거는 석류알같이 붉고 빛난다고 했다. 씹으면 씹을수록 향기롭다고 했다. 그래서 마구에 누워 청초를 모리는 황소처럼 《나는 過去의 反芻로 現在를 享樂》한다고 했다. 과거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것은 현재가 불행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면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현재에 대한 부정 내지는 현실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다분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 시인의 다른 시작품인 《북하늘엔 별도나 서글퍼》11)에서는 그러한 부정이 내면으로 침잠하여버린다.   (전략)   옛날은 부서진 기둥인데 추억은 깨여진 란간(欄干)이여서 피무든 손으로 노아도 노아도 오작(烏鵲)의 다리는 허무러만지고   (중략)   북하늘엔 별도나 서글퍼   외로운 이 오들오들 는밤이다.     이 작품의 기본적인 정서는 차가움과 상실감이다. 앞의 《追憶》에서도 이점은 확인되고있다. 단 여기서는 보다 분명하게 드러날뿐이다. 이제 추억은 부서진 옛날이라는 기둥에 붙은 깨여진 란간에 불과하다. 과거의 삶은 그것이 슬픈것이였든 즐거운것이였든 이제 부서지고 해체되여 폐허가 되여버렸다. 따라서 외롭게 꿈꾸고 있는 꿈은 오들오들 떨수밖에 없다. 상실감을 넘어 거의 절망에 가까운 신음소리라 할수 있다.     문학인의 립장에서 보았을 때 일제의 중국 동북강점기간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나 비판의 자유를 빼앗긴 시간이였다. 따라서 우리 시인들은 여러가지 시적인 장치를 리용하여 우회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이나 인식을 표현할수밖에 없었다. 현대문명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한편 그것을 원시적인 삶의 야성과 대립시킴으로써 일종의 울분과 비분강개의 정서를 드러내고있다. 따라서 이 시기 시작품중에서 원시적인 야성을 생명력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환희로 표현한것은 저항적인 의미마저 지닌다고 할수 있다. 현실대응의 또다른 방법은 현실에 대한 암울한 느낌을 시화하는것이였다. 현실적인 삶의 고통을 어두움, 차가움, 외로움, 슬픔 등의 내적인 정서에 담아냄으로써 현실을 부정한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는 전체적으로 어두움이라는 공간 환경속에서 드러냄으로써 현실 부정의 의미를 극대화하고있다.   그러나 어두움, 외로움, 슬픔 등 소극적인 정서는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정신활동의 한 부분이기때문에 그것이 지나치게 반복되고 내면화되면 자페적인 성향을 동반하게 되며 그러한 자페적인 정서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될뿐만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심지어 삶 자체에 대한 부정에 빠질 위험을 안고있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정서적인 부정은 이제 뒤에서 론의하게 될 현실도피라는 부정적인 시작현상을 유발하기도 한다. 꼭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 하겠다.   [출처]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4)|작성자 반벽거사  
1472    ...이어서 댓글:  조회:4505  추천:0  2015-09-17
    3. 《만선일보》시기의 시작품     《북향》시기가 막을 내려서부터 몇년후인 《만선일보》시기에 오면 우리 시의 수준은 질적인 변모를 보여준다. 따라서 광복전 우리 시문학의 전성기는 《만선일보》시기라 할수 있다.   《만선일보(滿鮮日報)》시기에는 당연히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과 《재만조선시인집(在滿朝鮮詩人集)》에 수록된 시작품들이 포함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시선집이 중심이 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현재 발굴된 《만선일보》의 자료가 실제 발행되었던 전체량의 절반도 채 되지 않기때문에 선집의 대표성이 특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선일보》는 1937년 10월 21일 기존의 우리글신문이였던 《간도일보(間島日報)》(1920년대 창간)와 《만몽일보(滿蒙日報)》(1933년 창간)를 통합하여 창간한 신문으로 당시에는 유일하게 존재했던 우리글 신문이였다. 그러나 《일본의 국책적 견지에서 만주국에 있는 조선인의 지도기관》1)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 전부가 일본의 국책에 따른것은 물론 아니였다. 현존하는 자료는 1939년 12월 1일부터 1942년 10월분까지인데 그중에서도 1939년 12월 1일부터 1940년 9월 30일까지만 영인본으로 간행되여있고 나머지는 결호가 많은데다가 마이크로필림형태로 소수의 도서관에 소장되여있다. 따라서 이 신문만을 가지고 이 시기 조선족의 시가문학을 검토한다면 전반적인 고찰이라 보기 어렵다. 다행히도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우리 시문학작품을 모아놓은 시선집 2권이 있어 그러한 결함을 다소나마 극복할수 있지 않을가 한다.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은 1943년(康德九年) 9월에 당시 신경(현재의 장춘)의 제일협화구락부문화부에서 간행했고 편집자는 박팔양(朴八陽)이다. 그리고 《재만조선시인집(在滿朝鮮詩人集)》은 그 한달후인 1943년 10월에 당시 간도 연길에 있던 예문당(藝文堂)에서 간행했고 편집자는 김조규(金朝奎)였다. 두 편집자의 권위성으로 보나 간행된 시간으로 보나 이 두 시선집은 현존하는 《만선일보》의 자료보다 훨씬 대표성을 지닌다 하겠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두 시선집에 수록된 시작품을 주요 텍스트로 하면서 《만선일보》에 게재된 여타 작품들도 참고하여 론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론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같은 시기 평자들의 재만조선인시인과 시작품에 대한 평가를 짚고넘어가는것도 의미가 있을듯하다. 가장 전형적인 것이 김우철(金友哲)의 《만주 조선어시단과 시인》2)이다.   이 글에서 김우철은 《今日 우리가 作爲하고잇는 詩는 本能陶醉의 山새 울음도 안이오, 哀傷에 함초롬히 저저 時世를 詠嘆하는 風月調의 그것도 안이오ꠏꠏ 單純한 感情의 素朴한 表白도 안이다. 今日의 詩人은 自己가 營爲하고잇는 時代에 對하야 無意識일수 업스며 以後의 에 對해서 無關心일수 업스며 文字의 機能과 表現方法(形式)이며 그박게도 새로운 言語의 採擇 밋 創造에 骨머리를 알어야 한다.》고 전제하고나서 1939년과 1940년년초 사이에 《滿鮮日報》를 통해 발표된 재만조선인 시인과 시작품에 대해 일일이 평을 달고있다.   그는 1년간 약 40명에 가까운 시인들의 시작품 70여편이 선을 보였다고 하면서 그중에서 특히 咸永基, 李達根, 韓竹松, 鳴泉, 姜海心(姜彬) 등 5명 시인의 시작품이 그 량이나 질로 보아 《殊釉甲》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咸永基의 《養蜂》, 《안테나》, 《風景》, 《生活》, 《春雪》, 《肖像》 등 6편을 《회심의 가작》으로 보고 그중에서도 《養蜂》과 《風景》에 대해서는 《한 戱畵詩를 보는양십다. 哲學하는 詩人ꠏꠏ그의 詩는 쓰여진 部分보다 쓰여지지 안흔 部分에서 더 만히 讀者의 心絃을 울린다. 를 만히 가진 이 詩는 을 슬퍼하지 안흐매로 不幸한 詩人일다. 누구는 말하리라. 그의 詩에는 詩的音律이 업다고. 그러나 그의 詩엔 散文에서 區別할수 잇는 獨自의 內在的 音律이 潛流하고잇슴을 본다.》며 극찬하고있다. 여기에 그가 인용한 咸永基의 《肖像》 일부를 보면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다.     스물한해가 沙漠風가티 -야니 나려간 草原에 낫서른 女人 하나 玉指環을 내여 내 가슴에 뭇기로 情火는 보채여 貴한 선물을 태우는 季節을 宣하다.                                       -《肖像》의 일부     이어 리달근(李達根)의 작품에 대해서는 《코리탑은한 書齋의 詩帖이 안이라 健康한 生活의 詩》라 하면서 《健康한 生活이 잇고 素朴한, 그러나 剛直한 表現이 잇고 젊은이의 脈을 두다리는 感情의 山脈이 줄기차게 덧다》고 평가하고 “아프로 詩學에 對한 探究와 技法의 鍊磨를 企待려 조흔 結實을 하리라 밋는다.”고 희망사항도 놓치지 않고있다. 이런 평가와 더불어 인용한 《저물무렵》이라는 이달근의 작품은 역시 당시 재만조선인 시인들의 현실인식의 자세와 생활태도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저녁 煙香 妖女마냥 村落에 머리 불(풀)무렵 버섯가티 도다난 草舍는 夕映에 올라 손風琴 하나 펼 자리도 업는 좁은 欄干엔 潮水마냥 한 가난이 밀려오고 映窓을 고 흘러간 하늘가에는 鄕愁가 물새 되여 靜寂을 고 가난에 저리운 고닯은 얼골은 새로운 太陽을 마즈러 항아리에 빠진다. 思念의 馬車를 《오-로라-》로 몰고십허도 굴레를 쓴 가난한 말(馬)이 疲勞하다 아하 希望하는 思念아 툭 터져다오 저 山밋 옹달샘 솟듯이도 말발굽 달리는 七百里 遼東벌가티도!     이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달픈 삶의 모습들-《潮水마냥 한 가난》, 《鄕愁》, 《굴레를 쓴 가난한 말(馬)》과도 같은 억눌린 의식, 그런속에서도 《希望하는 思念을 툭 터》쳐보려는 강한 욕구 등이 이 시작품에는 잘 형상화되여있다.   한죽송(韓竹松)의 요절에 대해 김우철은 《悲哀를 悲哀로박게 그러케박게 더 表白할줄을 모르는 이 歌人은 리마냥 울다가 울다가 제풀에 짓쳐 죽어갓다.》고 보면서 《詩人이 凡俗한 感傷에서 自己의 魂을 건지지 못하고 自己의 才致에 自己陶醉되여잇스면 平生 自己의 價値를 發見하야 向上시키지 못하고 安價한 詩的法悅에 生理되고마는게 일상》이라고 비판하고있다.3) 문학의 사회성 내지는 사회적가치를 강조하고있는셈이다.   그러니까 김우철은 시작품의 사회적 혹은 현실적인 의미를 강조한 동시에 미학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상당히 의미를 두고있다는 얘기가 된다. 오늘에 보아도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그러나 아직 이민시인으로서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소흘히 다룬 한계를 보여주고있다. 사실 오늘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족시인들의 시작행위에 있어서 문학적인 공통성보다는 오히려 지역적, 민족적 특수성이 강조되여야 하였고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도 김우철의 한계성과는 관계없이 시인들의 시작행위에서는 이러한 경향들이 뚜렷이 드러나고있다.   따라서 《이민족의 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이어가려는 노력은 그들(조선족-필자)로 하여금 문화적유산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한것은 물론 외부의 변화로부터 비교적초연할수 있게 하였으며 그 결과 문화적유산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할수 있었던것이다. 정작 본토인 한반도에서는 밀려드는 외래사조에 의해 원래의 문화가 상당부분 변질되고있었지만 만주에서는 그런 외풍으로부터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을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4)라는 조규익의 분석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고 보여진다.     1) 이민지의 서정     조선족의 문학은 이민문학으로 출발하였다. 우리의 력사가 이민의 력사이기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민의 정서가 이민시인들의 시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쉽게 짐작할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시작품에는 이민의 정서를 표현한것들이 많이 있다.   가령 김조규(金朝奎)의 《胡弓》5)의 경우 이국적인 정서와 이민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내고있다.   胡弓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山 하나 없다 둘러보아야 기인 地平線 슬픈 葬列처럼 黃昏이 흐느낀다. 저녁이 되여도 눈을 못뜨는 이마을의 들窓과 胡弓의 줄만 골으는 瞑目한 이 마을의 思想과 胡弓 아픈 傳說의 마디 마디 불상한 曲調 기집애야 웨 燈盞을 고일줄 몰으느뇨? 늬 노래 듯고 어둠이 점점 걸어오는 데 오호 胡弓 어두운 들窓을 그리는 記憶보다도 저녁이면 燈불을 받드는 風俗을 배워야 한다. 어머니의 자장노래란다 일어버린 南方에의 鄕愁란다 밤새 늣길려느뇨? 胡弓 (자기 山으로 가거라 바다로 黃河로 나리라)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胡弓》의 전문이다. 이 작품의 키워드는 당연히 《胡弓》이다. 화자의 정감을 호궁에 기탁하여 토로하고있다 하겠는데 그 의미는 전통적인 시작품처럼 그렇게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거의 전부가 상징과 은유로 되여있기때문이다. 그런데 그 의미를 암시하는 시행이 있다. 둘째행과 마지막행이다. 둘째행에서 화자는 호궁을 보며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山 하나 없다》고 했다. 이민지의 삶에서 느끼는 정서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행에서는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까지를 반복한다. 이 시의 기본적인 정서요 느낌이라 하겠다. 이 두행의 기본적인 정서는 어둠과 슬픔이다. 그리고 이질감이다. 제3행의 이미지 또한 그러한 이질감과 슬픔의 반복이다. 그리고 《胡弓/아픈 傳說의 마디 마디 불상한 曲調》라는 두행을 통하여 슬픔의 강도를 높여놓고 이번에는 호궁을 《기집애》로 바꿔 부른다. 호궁이라는 사물을 의인화시킴으로써 등잔을 고르는 일과 호궁이라는 사물의 련관성을 돌출해내는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호궁이 울므로써 어둠을 끌어오는 행위는 고향의 추억이 되겠고 등잔을 골라 어둠을 밀어내는 행위는 반대로 《들窓》속에서의 삶이 될것이다. 이어지는 《胡弓 어두운 들窓을 그리는 記憶보다도/저녁이면 燈불을 받드는 風俗을 배워야 한다.》는 표현은 고향의 추억과 현재의 삶에 대한 적응이라는 의미를 대조시킴으로써 사실상 앞의 두행에 대한 반복이 된다.   아래의 《(자기 山으로 가거라 바다로 黃河로 나리라)》라는 표현에서 볼수 있듯이 결국 호궁의 고향은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황하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시인은 일차적으로 호궁이라는 중국인을 상징하는 악기를 등장시킴으로써 동북지역 중국인 이주민의 삶을 념두에 두고있는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주민인 조선족 이주민의 삶을 호궁이라는 이미지로써 표현한것이라 해야 맞다. 《어머니의 자장노래란다》《일어버린 南方에의 鄕愁란다》라는 두행의 의미는 오히려 조선인 이미지에 가깝기때문이다. 그래서 《밤새 늣길려느뇨? 胡弓》과 《어두운 늬의 들窓과 함께 영 슬프다.》 라는 마지막행의 표현은 이주민들이 공유하는 암울한 삶과 슬픈 운명의 이미지가 되는것이다.   김달진(金達鎭)의 《룡정(龍井)》6) 또한 이민지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車窓밖 豆滿江이 너무 빨러 섭섭했다 흐린 하늘 落葉이 날리는 늦가을 오후 馬車바퀴가 길을 내는 찔걱찔걱한 검은 진흙길 힌 조히쪽으로 네귀에 어찔러 발라놓은 창경 창경 알수 없는 말소리가 귀가로 지나가고 때묻은 검은 다부산즈자락이 나부끼고 어디서 호떡굽는 냄새가 난다.   시악시요 아 異國의 젊은 시악시요 아장아장 걸어오는 쪼막발 시악시요 한(하얀) 粉이 고루 먹히지않은 살찐 얼굴 당신은 저 넓은 들이 슬프지 않습니가 저 하늘바람이 슬프지 않습니다(가)   黃昏 길거리로 허렁허렁 헤매이는 흰옷자락 그림자는 서른 내가슴에 허렁허렁 떠오르는 조상네의 그림자.   나는 江南 제비새끼처럼 새론 옛故鄕을 찾어 왔거니. 난생 처음으로 馬車도 타 보았다. 胡弓 소리도 들어 보았다. 어디 가서 나혼자라도 빼酒 한잔 마시고 싶고나     1련과 2련에서는 이국적인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는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첫행 《車窓밖 豆滿江이 너무 빨러 섭섭했다》의 이미지이다. 현실적으로 룡정에서는 두만강을 볼수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만강은 두만강을 건너온 이주민의 심경을 드러낸것이 된다. 그런데 《나는 江南 제비새끼처럼/새론 옛故鄕을 찾어 왔거니.》에서 《새론 옛故鄕》은 아마도 여기가 고구려의 옛땅이였다는 사실을 념두에 두었을것이다. 이점은 3련의 내용과 맞물려있다. 소위 《호인(胡人)》들속에서 발견한 《흰옷자락 그림자》를 보며 《조상네의 그림자》를 떠올린것은 이주해온 이땅이 전혀 낮설지만은 않으며 따라서 여기가 이주민이 뿌리를 내릴 새로운 고향이 될수가 있음을 암시하고있는것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이민자의 처지는 《서른 내가슴》이라는 표현에서 볼수 있는것처럼 불행하고 서럽지만 그 서러움을 《나혼자라도 빼酒 한잔》 마시면서라도 달래면서 살아야 한다는 강한 생존의 의지가 담겨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시인들의 정서속에는 이국땅과 이국인에 대한 편견도 동시에 존재하고있으며 그런 정서나 편견은 시작품에도 표현된다. 가령 상기 작품의 제2련에서 《한(하얀) 粉이 고루 먹히지않은 살찐 얼굴/당신은 저 넓은 들이 슬프지 않습니가/저 하늘바람이 슬프지 않습니다(가)》라는 시구에는 이민지 원주민과 이민지의 자연과 기후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표현되고있는데 비록 이민자로서 그러한 사람과 자연에 적응하기 이전의 주관적인 느낌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일종의 선입견, 즉 《거치른 만주땅》《미련한 만주인》이라는 선입견이 은연중에 드러난것이다.   유치환(柳致環)의 《합이빈도리공원(哈爾濱道裡公園)》7)에서는 그러한 이미지가 보다 뚜렷하게 표현된다. 《五月도 섯달갓치 흐리고 슬푼 季候/사람의 솜씨로 며진 밧 하나 업시/크나큰 느름나무만 하늘도 어두이 들어서서/머리우에 가마귀 終日을 바람에 우짓는》 등의 표현은 거치른 땅의 이미지다. 그만큼 이주민에게 있어 《만주》라고 하는 이민지는 춥고 거칠고 음산한 땅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록 자연현상 자체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래서 상대적으로 따뜻한 조선땅에서 이주해온 이들에게 있어 그러한 자연은 불모의 땅이고 차가운 기후가 되였겠지만 그보다도 중요한것은 이들이 이러한 춥고 거친 땅에 이주해올수밖에 없는 현실과 운명이 한결 더 춥고 외로웠을것이다.   그러한 느낌과 정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김북원(金北原)의 《봄을 기다린다》8)에서 답을 찾을수가 있다.   바라다 보아야 끝없는 地平이 끝없는 地平이 하이얀 눈속에 가로누어 봄을 기다린다. 도로기 쥐어매고 마음 거든이 벌판에 서면 눈부신 索漠이 視野에 서린다. 호졸하니 마을의 面貌가 그러나 덤직한 이야기가 마을의 斑史가 한줄기 香煙속에 풀린다.   꼬지깨의 草原이 故鄕의 平原이 되고 高梁의 平原이 벼이삭의 바다가 되는동안 내사 수염과 靑春을 바꾸었고 안해는 새아이의 어머니가 되였다.   잔뼈가 굵어진 故鄕말이뇨 洛東江물을 에워 젖처럼 마시며 아매사 할배사 살엇드란들 그것이야 아스런 옛이약이지.   오붓이 點點한 우중충한 집옹이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이 봄을 기다린다.     비록 오색기가 만주국의 국기였으니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이/봄을 기다린다》는 표현에서 알수 있듯이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땅에서의 삶이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을 기다》리는 희망찬 삶이 되였다고 하였으니 조금은 현실순응적이라는 혐의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친일시라고 보면 안될것이다. 오히려 여기에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고 제2의 고향을 건설하여 대를 이어 살아가려는 민족생존의 의지가 담겨있다 해야 할것이다. 그러니까 이민지의 자연환경과 기후에 대한 불쾌한 느낌은 다분히 적응의 문제였음을 확인시켜주는셈이다. 따라서 이제 고향땅에서 쫓겨난 서러움이 조금씩 잊혀져감에 따라 그러한 불쾌감도 조금씩 색이 바래지며 심지어 이민지에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낼수가 있었던것이다.   이는 곧 정체성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잔뼈가 굵어진 故鄕》은 《아스런 옛이약이》가 되였고 화자는 《五色旗 揭揚臺아래 마을》에서 봄을 기다리며 살아야 할 운명이요 처지임을 자인하고있는것이다. 이것은 숙명적론인 체념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을 확인하는 생존의 의지이다. 윤해영(尹海榮)이 《해란강(海蘭江)》9)에서 이민지의 대표적인 강인 해란강을 《寂寞한 江이로다./거룩한 江이로다.》고 하면서 자신의 강으로 인식하고 노래하고있는것도 이와 같은 차원이라 하겠다. 이민지의 자연과 좀더 가까워지고 이제 곧 하나가 되여감을 뜻하는것이다.   윤해영은 특별히 그러한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에 시적인 관심을 많이 보이고있다. 앞의 《해란강》에서 화자는 자신의 현재 삶의 현장을 찬미하고있다면 《오랑캐고개》라는 작품에서는 오랑캐고개를 3단계 력사의 상징적이미지로 그리고있다. 《二十年前》에 오랑캐고개는 《豆滿江 건너 北間島 이도군 들의/아담찬 한숨의 關門이엇다.》고 했다. 간도이주민들은 대개 두만강을 건넌후 이 오랑캐고개를 넘어 북간도땅에 들어섰던것이다. 그리고 《十年前》, 이 고개는 《밀수군 절믄이들의/恐怖의 關門》이였다고 했다. 그만큼 이주민의 삶이 어려웠다는것을 의미할것이다. 그리고, 《오날 이고개엔/五色旗 날부》낀다고 했다. 한숨도 공포도 다 흘러가고 희망의 기쁜 노래만이 넘치는 고개가 되였다는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어용적인 작품의 혐의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냥 현실에 순응하는 정도가 아니라 괴뢰만주국의 현재 삶을 어느 정도 찬미하는 의미가 드러난다. 그만큼 만주국의 정치문화적담론의 영향이 심각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1938년10)에 쓴 작품임을 전제하면 그 심각성이 짐작될것이다.   윤해영의 정체성 확인은 력사에 대한 감개 토로에서도 드러난다. 《발해고지(渤海古址)》11)라는 작품이 이에 속한다. 자신이 현재 영위하고있는 삶의 현장이 바로 옛날옛적 조상의 땅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과정은 곧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것이다. 특히 《기와 片片 어루만저/懷古에 잠기우면/저 언덕 밧가는 農夫/그 時節 百姓인듯!》라는 표현은 시인의 정체성 확인의 욕구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체성 확인의 욕구는 천청송(千靑松)의 《先驅民》12)에서 선구민을 통한 력사의 회고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좀더 궁극적인 확인의 방식이라 할수가 있다. 작품에서는 《移住民》《酒幕》《雪夜》《江東》《墓地》 등 5장에 걸쳐 이주민의 고난사를 회고제시하고있다. 《移住民》과 《酒幕》에서는 이주민이 오랑캐령을 넘어 북간도에 들어와 불모의 땅을 개간하는 모습과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의 서러움을 표현하고있다. 특히 《낫선 첫이 서글푸기에/닭이 홰를 처도 날이 새어도/흑탕갓치 취할 胡酒가 되게 그리웟겟다.》는 표현에서 이주민의 외로움과 서러움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어 《雪夜》에서는 불모의 땅에 정착한 이주민의 단조롭고 고적한 삶의 양상들이 한 가정의 지극히 민족적인 표상들을 통해 드러난다. 사실 이 장에 나오는 가족의 삶은 조선의 어느 화전민가족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작연에도 그럭계도 이런날 밤/호우적이 마을에 들어 섯드라오.》라는 표현은 이들이 호우적이 득실거리는 불모지의 이주민 가족임을 금방 확인시켜준다. 그에 이은 《江東》이라는 장에서는 그러한 불모의 땅에서마저 삶을 보존하기 어려워 강동의 아라사(러시아)에 나간 랑군을 시름겹게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을 표현하고있다. 물론 화자의 랑군이 강동에 간것은 단순히 돈 벌기 위해 갔을수도 있지만 력사적으로 강동땅 즉 쏘련 원동지역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랑군이 독립운동가 혹은 반일투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장인 《墓地》는 너무나도 슬픈 이주민의 운명을 제시하고있다.   靜穩의 집 무덤은 너무나 寂廖하다 하도 故鄕을 그렷기 넉시나마 南을 向했도다 외로운 밤엔 별빗치 慰撫의 손을 나린다는데 墓標업는 무덤들이 옹기 옹기 정잡(답)계(게) 둘너안젓구나! 눈보라 사나웁든 매듭만흔 歷史를 이얘기 하는거냐.13)     죽어서마저 고향이, 고국땅이 그리워 《넉시나마 남을 향》했다는 표현이야말로 이주민의 슬픈 운명의 상징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또한 《墓標업는 무덤들이/옹기 옹기 정답게 둘너안젓구나!》는 표현에서 알수 있듯 화자는 묘지를 또다른 이주민의 삶으로 인식하고있으며 그렇게 보았을 때 이는 곧 이주민의 제2의 고향이 바로 여기, 북간도땅임을 확인시켜주고있기도 하다.   함형수의 《歸國》14)만큼 이주민의 이중적 정체성을 뼈아프게 표현하고있는 작품도 그리 흔치 않을것이다. 여기서 귀국은 조선땅에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화자는 고국의 사람들이 자신이 갔던 곳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상념은 오히려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것은 한개 덧업는 그림자》이라는데에 미친다. 이처럼 이제 자신은 더이상 고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은 정체성의 분렬에서 비롯되는것이다. 《먼- 하늘 테서/총과 칼의 수풀을 헤염처/이 손과 이 다리로 모-든 무리를 뭇럿스나/그것은 참으로  하나의 肉體엿도다》라는 표현은 정체성의 분렬을 야기시킨 일종의 련옥(煉獄)행과도 같은 체험을 보여준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갔었던 그곳에서의 체험에 대한 개괄이 되겠는데, 그러나 그러한 살벌한 체험은 이제 삶 자체가 되여버렸다.   나는 거기서 새로운 言語를 배웟고 새로운 行動을 배웟고 새로운 나라(國)와 새로운 世界와 새로운 肉體와를 어덧나니 여기 도라온것은 實로 그의 그림자이로다     《여기 도라온것은 實로 그의 그림자》이라는 표현은 앞의 《누가 알랴 여기 돌아온것은 한개 덧업는 그림자》이라는 표현을 좀더 강하게 드러낸것이라 볼수 있는데 그만큼 화자의 삶은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었음을 강조한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제 화자는 고국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삶의 현장에 적응된 새로운 정체성의 소유자가 되였다는 의미로 파악되는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주민으로서의 조선족이 될것이다.   중국인 원주민과의 조화로운 상생은 이주민 생존의 중요한 요인이라 할수 있다. 조학래(趙鶴來)의 《滿洲에서》(獻詩)15)는 그러한 이주민의 지혜와 생존욕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여기서 괄호안에 표기된 (獻詩)라는 메시지는 이 작품을 수록한 시집이 1943년에 간행된 것이고 또 기본적으로 만주국 건국 10돐을 기념하면서 편집된 시집이여서 괴뢰만주국 건국에 바치는 시라는 혐의가 있으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작품에는 만주국이라는 국체에 대해서보다는 만주국내 중국인 원주민에 대한 감사의 메세지가 더 뚜렷하다.   가슴은 샛발간 장미로 얼켜 닙히 질가 두려워 대견히도 간직함니다 언덕은 숨고 작나무 바람잔 벌판 난대서 손수건 흔드는 당신들이어 고향도 집도 모두 버리엇슴니다. 언제든지 고웁고 아름다운 장미 송이를 안고 먼 동산으로 시들지 안는 세월을 차저왓슴니다. 당신들이 항용 조와하고 그리워 하시든……     이주민에게 있어 현재 삶의 현장은 사실 남의 나라 땅이다. 그리고 그 땅의 주인이 바로 중국인 원주민이다. 따라서 이주민의 립장에서 중국인 원주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인지상정임에 틀림이 없다. 다만 이 땅을 통치하는 정부가 고국의 땅을 강점한 일제에 의해 조작된 괴뢰정부라는데 문제가 있겠는데, 그러나 일제에 대해 추호의 불만이나 저항의 감정을 드러낼수 없던 당시의 상황에서, 오히려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라고 강요받는 상황에서 정부에게가 아닌 이땅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러낸것은 오히려 정직한 자세였다고 할수도 있을것이다.     한편 향수, 혹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이민지의 서정중에 빠뜨릴수 없는 내용이 된다. 또한 고국에 대한 향수는 정체성 확인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사상이요 정서이기도 하다. 이주민은 언제나 민족적정체성과 국민적정체성이라고 하는 2중의 정체성을 소유할수밖에 없기때문이다. 즉 우리 조선족이주민은 단군의 후예라는 민족적정체성을 타고났으면서 동시에 만주국이라고 하는 하나의 새로운 강역(疆域)내에 몸담고살면서 만주땅의 자연지리적환경과 만주국이 추구하는 정치와 문화적인 담론이라고 하는 인문적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따라서 향수, 혹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의 자연적인 로출이면서 동시에 정체성 확인의 한 형태가 되는것이다.   한편 향수는 인간에게 있어, 특히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보편적이라 할수 있는 정서이다. 누구나 고향을 떠나 오래 있게 되면 고향이 그리워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그리움은 강해지며 또 고향의 이미지는 오랜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음속에 부각되는것이 자연스럽다. 이때의 고향은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현실생활의 활력소로 작용할수도 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온 원인이 고향을 잃었기때문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과거의 고향에 대비되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은 부정적일수밖에 없다. 조선족 이주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있던것은 실향의식이였다. 타의나 혹은 자의라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타의에 의해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한 안타까움으로 시화되고있는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애절함은 당연히 일종의 저항이나 적어도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 볼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비록 이런 시작품속에서 드러난 저항의식은 발견되지 않더라도, 진한 향수 그 자체가 고향을 등지고 고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일제와 그 친일 특권계층에 대한 무언의 항거이고 분노의 표현이라는 말이 되겠다.   이 류형에 속하는 시들로서 제목이 고향이나 고국과 관련된 시작품만 해도 김병기(金炳基)의 《그리운 故鄕》16), 최봉록(崔奉錄)의 《思鄕》17), 조학래의 《鄕愁》18), 송철이(宋鐵伊)의 《故鄕》19), 박상훈(朴相勳)의 《離鄕》20), 유치환(柳致環)의 《歸故》21), 함형수(咸亨洙)의 《歸國》22), 김달진의 《鄕愁》23)를 비롯해 다수 있거니와 고향이나 고국의 이미지, 향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다루고있는 시작품은 더구나 무수히 많다.   천청송의 《드메》와 《書堂》24)의 경우 고향의 이미지, 그리고 고향에서의 삶의 기억이 처절히도 아름답게 그려지고있다. 《드메》는 벽지에 있었던 화자 고향의 이미지가 되겠고 《書堂》은 그러한 춥지만 정다운 고향의 이미지와 어린시절 서당에서 경험한 아름다운 추억이 뻐꾸기의 울음소리와 더불어 재생된것이다. 《드메》의 《내 鄕愁도/차거운데//이런밤엔 으례 뻐꾸기가 울었다.》는 표현에 담겨진 차거움과 서러움의 이미지, 《書堂》의 《이런날밤엔 으례 마을처녀들이/서당방 사잇문에 옥수수처럼 열린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운 추억의 편린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만큼 이주민의 향수가 절박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류치환의 《편지》25)는 편지라고 하는 고향 혹은 고국과의 통신수단을 매개체로 하여 향수의 정서를 표현하고있다.   (전략)   한나절 가도 드날이 업서 마을엔 그뉘나 사는지 마는지   개도 안짓고 닥도 안울고   앗든 消息 이봄 들어 두장이나 편지 왓단다     《편지》의 후반부이다. 앞부분의 정답던 추억에 이어지는 이 례문은 고향의 피폐상을 암시한것이라 할수 있다. 《개도 안짓고/닥도 안울고》라는 표현에는 영락한 고향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하겠는데, 마지막 련의 《앗든 消息/이봄 들어 두장이나 편지 왓단다》는 고향의 불길한 소식을 전해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걱정이 암시된다. 그리고 편지라는 표제가 이 마지막 행에서 제시되고있기때문에 그러한 예측은 한결 신빙성이 있어보인다. 흔히 말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과는 전혀 반대의 암시이고 또 그러한 암시를 제시하기 이전의 표현들이 영락한 고향의 이미지이기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주민 시인의 시상속에는 이주민 자신들의 현재 삶의 환경, 생존의 문제와 고국에 두고온 고향땅과 고국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공존한다는 말이 된다. 그것이 이주민의 정체성이기때문이다.   송철리(宋鐵利)의 《도라지》는 고향과 고국에 대한 관심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표현된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수 있다.   도라지 피면 八月도 피고 八月이 피면 향수도 피드라     산,   물,   길,   돌쇠,   갓난이,   삽살개,     하염업시 쓰러보는 파-란 송이에   무지개마냥 아롱지는 흘러간 옛마슬.   그러나  도라지 지면 八月도 지고 八月이 지면 향수도 지드라.     《도라지》의 전문이다. 이 작품의 화자에게 있어 팔월과 팔월에 피는 도라지꽃은 향수이다. 팔월의 도라지꽃에 무지개마냥 《흘러간 옛마슬(을)》이 아롱지기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팔월과 팔월에 피는 도라지꽃은 시인의 내면에 각인되여있던 옛날의 고향을 떠올리며 따라서 팔월과 팔월의 도라지꽃은 옛날의 고향으로 치환되면서 향수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그 옛날 고향의 모습은 다름아닌 《산,/물,/길,/돌쇠,/갓난이,/삽살개》인데 이는 고향을 떠난 사람에게 있어서는, 특히 고향을 떠난 이주농민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는 이미지들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정서가 담겨진듯싶은 이 작품이 보다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할수 있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한결 더 절박감과 근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수 있는 원인은 그 마지막 련의 의미때문이 아닌가 한다. 도라지 지고 팔월이 짐과 아울러 향수도 진다 함은 이제 고향은 단순히 떠나온 고향이 아니라 다시는 갈수 없는 상실한 고향이 되고말았음을 의미하기때문이다. 이것을 좀더 확장해석하면 이와 같은 고향상실의 의미는 곧 고향을 상실하게 만든 일제와 친일지배층에 대한 일종의 불만 내지는 분노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우리 시인들은 이민지의 서정을 통해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 확인은 향수의 표현에까지 연장되여 이주민의 이중적정체성을 드러내고있다. 우리 문학이 이민문학으로 출발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대목이다.   [출처]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3)|작성자 반벽거사  
1471    ...계속 댓글:  조회:4952  추천:0  2015-09-17
  Ⅱ. 문단시가     현재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우리의 문단시가는 1920년대의 《민성보(民聲報)》1) 등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것으로 알려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간도일보(間島日報)》 등에서 그 맥이 이어지지만 남아서 전해지고있는 작품은 극히 드물다. 따라서 본격적인 검토는 아무래도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북향(北鄕)》지와 《만선일보(滿鮮日報)》 등 신문 잡지와 1940년대 초반에 간행된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과 《재만조선시인집(在滿朝鮮詩人集)》 등 2권의 시선집에 근거하여 하는수밖에 없을것 같다. 그러다보니 당대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작품도 몇편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들 사후에 주옥같은 시편들이 발견되여 세상에 나온 시인들의 작품은 논외로 할수밖에 없었다. 윤동주와 심련수의 시가 이에 속하는데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약속할수밖에 없을것 같다.     1. 《민성보》시기의 시작품     《민성보》에 게재되였던 시작품으로 현재 전해지고있는것은 겨우 9편이다. 3년여에 걸쳐 발행되였던 신문에는 이보다 훨씬 많은 작품들이 게재되였을것으로 짐작되는데, 겨우 9편의 작품으로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들은 민성보를 통해 활동했던 우리 시작품의 한 단면을 보여줄뿐이다.   백악산인(白岳山人)의 《朝鮮心》에서는 이주민의 고국이 조선에 대한 절절한 애국심을 표현하고있다. 4련으로 된 이 작품의 3련과 4련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동무야 아느냐 조선의 마음은--- 겨레의 피를 한데 빚어서 곱곱이 옥맺힌 원한의 가슴에 신(新)의 꽃을 피우게 하려니 「님」의 빛갈이 아무리 고와도 온누리 사람이 죄다--따러도 님의 마음은 변할길 없노니 설음을 걸고 안위를 감(간)직해 조선의 「미(美)」를 깊이 맛보라   동무야 아느냐 조선의 마음은--- 겨레의 혼을 한데 뭉쳐서 나날이 빛나는 진역(震域)의 터전에 새로운 성탑(聖塔)을 높이 쌓려니 악마의 벽력이 되거퍼 내려쳐 희생의 선풍이 이땅을 삼키어도 님의 정화(精華)는 꺼질길 없노니 락망을 버리고 용기를 내여 한토(韓土)에 「한빛」(韓光)을 길이 밝히라2)     여기서 조선의 마음은 만고불변의 존재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조선의 마음이 변화의 위기를 맞고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악마의 벽력이 되거퍼 내려쳐/희생의 선풍이 이땅을 삼키어도》라는 표현에서 그점은 충분히 감지된다. 나라의 근본, 겨레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민족주의적인 의지가 잘 반영되였다 하겠다.   그러나 민족주의적인 사상리념이나 의식이 드러난 작품은 이 한편밖에 없다. 가령 초래생(初來生)의 《단오(端午)》나 김근타(金根朵)의 《밤》, C.S.C의 《언니를 그리며》, 남문룡(南文龍)의 《백색테로》 등 작품은 계급적리념이 짙게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초래생의 《단오(端午)》3)에서는 단오명절을 맞아서도 아이에게 새옷은 물론 과자마저 사먹이지 못하는 병든 어머니의 애탄 사정을 그리면서 《차라리 생명을 땅에 두며/인간의 모든날을 전취하야/우리의 명일(名日)을 만들 때까지》 투쟁하여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계급혁명의 리념과 의지를 표현하고있다. 김근타의 《밤》에서도 사회적약자인 어린애를 빈곤상징의 형상으로 리용하고있고 또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있으나 좀더 구체적이고 상황이 절실하다.   밤은 깊어 집집에 등불은 켜지고 하늘우에 별들도 반짝거리건만 맥없이 늘어진 그는 별조차 보지 못하였다 배고파 잉-잉 밥달라 우는 어린애 세네때 굶주린 어머님에게 어찌 젖이 있으랴 오! 우는 그 애를 어찌 달랠것인가?   곁집에선 저녁연기 끊은지 오라고 뒷산에 부엉새는 깊은밤을 노래하는데 때지난 이때 누구의 집에서 한술밥 얻어오랴 여전히 울고있는 어린애는 말끝마다 밥주-- 한숨짓는 부모의 간장 다 녹여내리나니 긴긴 여름밤 또 어찌나 새워보내랴   1930년 5월 7일 밤에4)     《밤》의 전문이다. 어린애는 배고파 밥달라 하는데 어머니는 굶주려 맥없이 늘어져있다. 게다가 밥 한술 얻어올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들 두 작품은 못가진자의 빈곤한 삶의 양상을 계급적시각에서 그리고있다 하겠다. 빈곤상황의 제시는 계급의식의 표현이나 공산주의, 사회주의리념의 구현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못사는 민중을 의식화시킴으로써 계급혁명을 이루려 하였던것이 이때 사회주의운동의 기본적인 목적이였기때문이다. 그것이 확장된 형태가 바로 녀성해방과 피압박민중의 국제적인 련대가 될것이다.   C.S.C의 《언니를 그리며》는 작품말미에 《이 글을 삼가 P.A.S.I.께 드립니다》《-1928.5.1 룡정을 떠나며》라는 부연설명을 붙일 정도로 사적인 정서를 나타내면서도 주제의식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녀성해방이라는 공적인 리념을 표현하고있다.   (전략)   언니는 멀리가서 돌아올길 없아오매 녀성층(女性層)--매인줄이 그나마 풀어질듯 내가슴에 피는 꽃도 웃음이 간곳없고 뭇아가씨 뛰는 그네줄 한가닭 또 처지네   선구의 저 멍에를 누가 바로 멜손고 해방의 질(길)삼을 누가 다시 짤런고 찬서리 어린몸을 둘곳조차 바이없어 악마의 푸른매를 내 홀로 맞으려니 철없은 뭇아가씨 내팔잡고 울고있네   동무야 우지마라 언니뜻을 지켜서도 녀성들아 무서워말라 언니용맹 간직해서 힘차게 뛰여올라 처진줄 다시잡고 한달음에--올라서리-녀권(女權)의 무대우로 (이 글을 삼가 P. A. S. I.께 드립니다) ---1928.5.1룡정을 떠나며5)     여기서 《언니는 멀리가서 돌아올길 없아오매/녀성층(女性層)-매인줄이 그나마 풀어질듯》이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니가 멀리 가서 돌아올길이 없다는것은 언니가 죽었다는 의미가 되겠고 녀성층에게 매인 줄이 그나마 풀어질듯하다는것은 언니가 그러한 녀성층에게 매인 줄을 풀어내기 위해 투쟁하다가 저세상 사람이 되였다는 말로 리해할수가 있다. 《선구의 저 멍에를 누가 바로 멜손고》라는 표현은 이런 사실을 뒤받침해준다. 또한 마지막련에서 언니의 뜻을 지키고 언니의 용맹을 간직하여 녀권의 무대우로 한달음에 올라서자는 다짐은 이런 추측을 또다시 확인해준다. 작품에 나오는 《줄》은 두가지 의미를 지니는것 같다. 《녀성층-매인줄》에서의 줄은 녀성의 정신과 행동을 졸라매고있는 봉건적인 질곡이나 억압을 의미할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풀어야 할 줄로 표현되고있는것이다. 줄의 또다른 의미는 《뭇아가씨 뛰는 그네줄 한가닭 또 처지네》에서의 줄이 되겠는데 《힘차게 뛰여올라 처진줄 다시잡고》라는 표현에서 알수 있는바와 같이 이때의 줄은 혁명의 의지와 용기, 신념 등을 상징하고있는것 같다. 그 줄을 잡고 녀권의 무대우로 한달음에 올라서자는 다짐이 그것을 반증해준다.    C.S.C의 《언니를 그리며》가 사회주의운동이 지향하는 녀성해방 혹은 녀권신장의 주제를 표현했다면 남문룡(南文龍)의 《백색테로》는 세계 피압박민중의 공동전선과 반파쑈투쟁의 주제를 다루고있다 하겠다.   지구의 우현(右弦)은 백색의 가을--- 반동의 불길이 탄다.   (중략)   《부르쥬아가 망하나 피압박민중이 망하나》 결전의 날은 갓까왔다. 인류의 최후의 스테로멘트 동경의 지옥!! 반도의 ○○!! 4억의 ○○!! 혁명의 전야는 왔다.6)     총 8련으로 되여있는 《백색테로》의 제1련과 제8련이다. 파쑈의 전쟁광적악행을 백색테로로 규정하고 피압박민중의 반전쟁, 반테러 혁명으로써 이에 대응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표현하고있다. 이는 항일구역에서의 항일가요의 주제의식과 맥이 통하는것이다. 이 작품에서 근본적인 대결은 부르죠아와 피압박민중이다. 《인류의 최후의 스테로멘트》라는 표현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이 작품에서 부르죠아와 피압박민중의 대결은 어느 한 지역,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파쑈의 세계적련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피압박민중의 전세계적 련합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사상이 바탕에 깔려있다 하겠다. 사회주의리념의 확장인셈이다.   이 작품에서 다시 주목되는 부분은 《반도의 ○○!!/4억의 ○○!!》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로 표시된 부분은 해독불가부분인데 아무래도 《동경의 지옥》이라는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개념일것으로 짐작된다. 더 중요한것은 여기서 《반도》와 《4억》의 의미다. 반도는 아무래도 조선반도를 가리킬것이니 한민족을 지칭할것이다. 그리고 4억은 중국인을 가리킬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 인식이 은연중에 드러난것이 된다. P.A.S의 《流浪人》7)에 나오는 《하발령》, 《호인옷》 등도 그러한 정체성의 인식을 드러낸것이라 할수 있다. 이 경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근파(根坡)의 《님을 찾으며》8)가 될것 같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님을 찾아 《이땅》을 찾아왔다고 했다. 여기서 《이땅》은 조선족의 이민지인 중국 동북땅임에 틀림없다. 《북관--천리길》, 《봄들은 여진땅》, 《동솟은 모아산》 등의 이미지가 이점을 확인시켜준다. 비록 화자는 님을 찾아 이민지에 왔다고 했지만 《불원천리 이 내마음 불현듯 꺼져질듯/되돌아가랴하니 눈물 먼저 앞을 서오》라는 마지막 두행의 하소연을 읽고나면 독자의 립장에서 느끼는것은 시적화자의 사적인 정감만이 아니라 이주민의 고난이라는 공적인 정서가 되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님을 그리는 애절한 마음과 이민의 설움을 하나의 정서속에 담고있다 하겠다.   작자미상의 《燕歌解》는 병상에 누운 화자의 향수를 제비의 노래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고있다. 향수라는것은 고향 혹은 고국을 떠나온 이주민의 이중적정체성을 보여주는 한 현상이다. 즉 이주민에게 있어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자 곧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된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이 작품도 이주민의 정체성 인식을 보여준 작품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보다 주목되는 점은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실험이 아닐가 한다. 형식적실험의 흔적은 제비의 노래를 해석한 작품의 후반부에서 찾아볼수 있다.   (전략) 《배달의 청년아 청년아(솔솔솔 미미레 미미레) 우리는 옛집을 찾는데(미레도 솔솔솔 미레도) 너는 누워서 앓기만 하느냐(미레도 미레솔 미레미레도) 풍만루(風滿樓)하고 우장래(雨將來)한다(라라라 솔솔솔솔솔솔) 너는 장차 어디로 가려나(라라 솔솔 미레도 미레도) 너도 어서 집을 찾어라》(라라 솔솔 미레도 미레도)9)     그러니까 화자는 제비의 노래속에서 고향과 고국땅을 떠나 이민지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운명을 엿듣고있는셈이다. 《녕고탑동경성련화포 병상에서》라는 말미의 설명으로 보면 병상에서 쓴 작품이 되는데, 아마도 그러한 병상생활이 시인에게 이러한 기발한 실험의 계기를 마련해준것이 아닌가 한다. 그 실험의 의의가 얼마나 큰것인지를 떠나서 이런 실험 자체가 우리 시의 발전사에서는 의미가 있는것이다.   비록 자료적인 한계때문에 이 시기 시문학의 전모를 평가할수는 없으나 현재 남아있는 작품으로만 보면 《민성보》시기의 시문학은 예술적인 성취도가 높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의식과잉, 리념과잉의 문제점들도 로출되고있다 하겠다. 그러나 그 시기 렬악했던 문화환경에서 이 정도의 시문학이 이루어졌다는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특히 일제가 《9.18사변》을 도발하여 중국의 동북땅을 강점하기 직전에 이루어진 문학이여서 그 이후의 문학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측면에서 문학사적으로 충분히 의미를 지닌다 할수 있을것이다.     2. 《북향》시기의 시작품     《민성보》이후 한동안은 당시 발행되였다고 하는 《간도일보(間島日報)》, 《만몽일보(滿蒙日報》 등 발표지면들이 산실되고 현재까지 발굴된것이 없으므로 시문학의 립장에서 보았을 때 《민성보》시기를 이어주는것은 1935년에 창간된 문예동인지 《북향(北鄕)》시기의 작품들이다.   룡정지역에서 발행된 문예동인지 《북향》은 1935년에 1호를 내고 1936년에 2-4호를 냈다고 하는데 현재 전해지고있는것은 1936년의 2호부터 4호까지 모두 3권이다. 문예종합지로서 시, 수필, 소설, 희곡, 비평 등 여러 쟝르의 작품들이 두루 게재되여있으나 편수를 따지면 역시 시작품이 가장 많다. 동요와 번역시까지 포함하여 모두 43편의 시작품이 게재되였다. 30쪽안팎의 문예지 3권에 43편의 시가 게재되였으니 시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할수 있다. 그러나 거의 반 정도가 학생들 작품이고 성인의 작품이라 해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강경애, 박계주, 천청송, 신상보 정도가 되는데, 강경애는 작가생애의 출발을 시로 시작했으나 소설로 성공한 경우이고 박계주 또한 소설로 성공한 작가이다. 그러면 천청송과 신상보가 시인으로는 알려진편이지만 이 시기에는 별로 좋은 작품이 없다. 이점은 《민성보》의 경우와 차이가 난다. 《민성보》의 시들도 시적인 세련미는 미흡하지만 주제의식의 측면에서는 현실성과 사회성이 뚜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향》시기의 시작품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것은 《학생시단》 코너에서 볼수 있는바처럼 시단의 예비시인층의 형성때문이 아닐가 한다. 나중에 《만선일보》시기에 들어서면서 시단이 활기를 띠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주민시문단을 형성할수 있었던것은 이른바 《문화부대(文化部隊)》로서 이주해온 기성문인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이와 같은 예비력량의 존재에도 크게 의존하고있는것이다.   먼저 강경애(姜敬愛)의 《斷章》10)을 보자. 화자는 함박눈이 내리는 밤에 님이 떠날 때 하던 말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래서 한밤중에 깨여나 뜨락을 헤매며 서성거렸다고 하고는 님께서 그토록 차고 매웠기에 눈길을 떠나신가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님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고 하면서 님이 그리운 마음을 소리없이 내리는 눈발속에 기탁하고있다. 어느 정도 감흥도 있고 시어들도 정제된편이지만 성숙된 주제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박계주(朴啓周)의 《엿장사》11)는 그와는 달리 주제의식이 매우 뚜렷하다. 차가운 눈보라치는 한밤중에 엿장수의 엿사구려소리가 울린다고 분위기를 잡아놓고는 다음과 같이 화자의 감흥을 표현한다.   (전략)   엿사구려 가위에 달빛이 절커ㄱ-절커ㄱ- 힘없이 떨리는 그소리 九天에 사모침이여 來日의 죽 한그릇도 이 밤의 勞苦에 잇것만.   차듸찬 달을 우러러 焦燥히 섯던 그의 눈瞳子에 妻子의 우름소리 기여들제 그 刹那의 한숨은 地心을 푸ㄱ- 푸ㄱ- 찌른다.     엿장수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동정하는 화자의 의식을 쉽게 엿볼수 있다. 이런 의식은 《민성보》시기 시가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사회주의리념에 근거한 계급의식과 맥이 닿아있는것처럼 보인다. 일제강점이라고 하는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그런 리념의 표현이 숨어버리고 소외자에 대한 동정이라는 형태로 재현된것이라 할수 있다.   나중에 《만선일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렸던 시인 천청송(千靑松)은 이 시기에 《꿈 아닌 꿈》을, 신상보(申尙寶)는 《短詩三章》12)과 동요 《눈》13), 등 작품을 《북향》에 발표하고있다. 신상보의 작품은 미숙성이 뚜렷하므로 언급을 피하고 천청송의 《꿈 아닌 꿈》을 들어보이면 다음과 같다.   고요한 밤 날러드는 시산한 꿈길- 하-얀 이 손으로 흙무든 그 손길을 잡고 안놓기를 맹서하였드니만…… 때아닌 모진 추위에 그 손길을 놓시(치)리라고야! 차라리 그 손을 잡은채 이 손길이 얼엇든들 차디찬 이 손 그 손 찾어 헤매는 이 손길엔 빈 허공만이 만저질뿐…… 덧없는 꿈 아닌 꿈 이같은 꿈이 우리에겐 그 얼마나 많든가?                 一九三六. 二14)     박계주의 《엿장사》와는 주제적으로 같은 경향을 보이지만 좀더 은유적이고 세련된 시적언어로 표현되고있다. 이 시에서 키워드는 《손》과 《꿈》이다. 《하-얀 이 손》은 아무래도 지식인을 상징할것이고 《흙무든 그 손길》은 농민을 상징할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손의 맞잡음은 지식인과 농민의 결합을 의미할것인데 《때아닌 모진 추위》때문에 그 손을 놓치고말았다고 했다. 이때 《때아닌 모진 추위》는 이들의 결합을 방해한 어떤 힘이나 세력이 될것인데 1936년이라는 시대적상황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일제의 폭압에 의해 그러한 지식인과 농민의 련대가 파괴되였음을 의미할것이다. 그래서 이제 련대를 잃은 지식인의 고립된 처지를 한탄하고있는것이다. 상당히 혁명적이고 저항적인 주제의식을 드러냈다고 할수 있지만 여러가지 복잡한 시적인 장치를 동원한까닭에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검열이 없다고 해도 이러한 시적인 장치는 시가작품의 함축성과 표현력, 그리고 미학적인 효과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는것 같다.   《북향》지의 시작품중에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생시》는 기본적으로 습작품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치기와 감정과잉, 표현의 단순화 등이 이들 학생시의 기본적인 특징이라 하겠는데 그중에서 시적인 표현을 시도하고 또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보여준 작품이라 할수 있는 대성중학교 최봉록(崔奉錄)의 《思鄕》을 들어보이면 다음과 같다.   故鄕!   나의 故鄕은!     나는 이같이 목메어 부른다오       그러나 故鄕은 對答좃차 없구려   ×  ×  × 이때나 저때나   故鄕消息 있을까 기달여도     기럭이 소래좃차       안들이나니 오! 우리는 永遠히 故鄕을 등저야 하는가!!15)     과잉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 학생시중에서는 그나마 시적인 표현이 얼마간 엿보인다 하겠다. 즉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소식을 들을길 없다는 의미를 기러기소리조차 안들린다는 비유로 표현함으로써 주제의식이 좀더 시화되였다 할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우리는 永遠히 故鄕을 등저야 하는가!!》라는 격한 부르짖음은 이주민의 서러운 정서를 표현한것이여서 문제의식을 띠고있다 하겠다.   그러나 다수의 학생시 작품들은 이 정도의 표현이나 문제의식도 갖추지 못하고있다.   [출처]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2)|작성자 반벽거사  
1470    일제 강점기 조선족 시문학 댓글:  조회:4417  추천:0  2015-09-17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                                                 /장춘식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의 한 장입니다. 인용문의 글자가 웹문서에 부적격한 것들이 있어 가끔 탈락되는 수가 있습니다. 또 각주로 처리되었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도 큰 유감이지만 현재까지는 무슨 방도가 없네요. 각주까지 꼭 필요한 분들께서는 덧글을 달고 메일 주소를 남겨 주시면 파일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시문학은 항일유격구의 항일시가와 일제강점지 문단시가 두갈래로 뚜렷하게 나뉘여진다. 이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력사적상황에서 특이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항일유격구의 항일시가는 시가창작의 주체와 사회지배층의 정치적인 지향이 동일하였기때문에 당연하게도 일제에 저항하여 광복을 이루겠다는 정치적인 지향성이 작품속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일제강점지역의 문단시가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시가창작의주체와 사회지배층의 정치적인 지향이 동일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지배층의 정치적인 지향과 그에 반항하거나 적어도 동조하지 않으려는 시가창작주체들간의 모순된 환경에서 이루어진것이 일제강점지의 시가문학이다. 물론 시가창작의 주체내부에도 정치적인 지향은 다양하였고 따라서 시가작품에 드러나는 정치적인 지향이나 주제의식의 성향도 다양하다. 그러나 적어도 일제식민통치에 순응하거나 심지어 일제식민통치를 찬양하는 성향을 띤 작품은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동시에 일제에 대한 저항을 로골적으로 드러낸 작품도 매우 적거나 거의 없었던것 같다. 다수의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부적응이나 불만을 즐거움이나 기쁨이 아닌, 분노나 암울함, 슬픔 등 여러가지 부정적인 정서의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있다.   Ⅰ. 항일시가     항일시가는 주로 항일유격투쟁중에 창작된 시가를 말한다. 조선족의 항일투쟁이 동북지역과 관내지역 두 부분으로 나뉘여지기때문에 항일시가 역시 이 두 지역의 항일시가로 나뉘여진다. 그리고 이들 두 지역 항일시가는 장르적으로 항일가요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이 항에서 항일시가로 분류된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항일가요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항일가요의 가사 즉 노래말부분이다.     관내지역 항일시가   조선의용군, 광복군들이 활동했던 관내지역에서 창작된 가요들은 일제의 죄악에 대한 규탄과 항일군민들의 투쟁의지를 고양하는 내용들이 기본적인 주제를 이루고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 혁명가요 《최후결전》(석정), 《의용군행진곡》(리덕산), 《어둠을 뚫고》(김학철), 《광복군항일전투가》(송호성), 《민족해방가》(작자미상), 《자유는 빛난다》(작자미상), 《선봉대가》(이두산) 등을 들수 있다.1)     동아의 노예들 단결하여 일떠나   다같이 쳐부시자 일본군벌   우리는 동아의 참다운 주인공   다 앞으로 동무들아!     조선의 형제 대만의 동포   그 압박 또 어찌 받을소냐   혁명의 기발 높이 추켜들고   다 앞으로 동무들아!         ---《전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리념에 의한 혁명사상과 반침략투쟁의 의지를 동시에 구현하고있다. 계급적자각과 민족의식을 담고있음이다. 당시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의용군이나 광복군들의 사상적리념이 그대로 반영된셈이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나가자   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다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여   원쑤를 소탕해 나가자   [후렴] 총칼을 메고 혁명의 길로          다 앞으로 동무들아          혁명의 기는 우리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무들아!        ---《최후결전가》에서     이 작품은 시적인 가공의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혁명의 의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있다. 항일혁명의 구호를 그대로 시적인 리듬만 갖추어서 표현하였다 하겠는데, 그러나 그만큼 직접적인 선전선동의 효과를 달성하고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수용자 대중의 수준에 맞춰진것으로 항일가요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전부가 그런것은 아니고 일부 민중적인 수사법과 투사적격정을 두루 갖춘 작품들도 창작되였다. 가령,     사나운 비바람 치는 길에서   다 못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          ---《조선의용군추도가》에서     더럽던 동방하늘 전운을 뚫고   광명은 불꽃같이 굽이쳐 빛나   뛰노는 가슴파도 쇠북 치나니   사무친 원한 풀러 나가자   [후렴] 우리 자유 우리 행복 우리 나라          이 주먹 이 총칼로 빼앗아오자   ……           ---《진군가》에서   등 작품들은 시적인 공명과 력동성이 돋보인다. 주제사상의 표현에 맞는 문체와 수사를 적절히 사용한 외에 력동적인 운률을 조성함으로써 내용과 형식면에서 강한 표현력을 획득하고있는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의용군들의 불굴의 의지와 투쟁정신을 드러내고 선전선동의 목적에 도달할수 있었던것이다.   이밖에도 당시 조선족인민이 처한 망국노의 운명을 통탄하고 고국의 고향산천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망향가》, 《그리운 조선》, 《고향리별가》 등이 부대와 대중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으며 연안의 대생산운동에 참여한 군민들의 정서를 반영한 《호미가》(류동호 작사), 《미나리 타령》(집체 작)과 같은 가요들도 군민의 사랑을 받았던것으로 전해졌다.   관내의 혁명부대내에서는 상기한 가요외에 시집 《자유의 노래》(프린트본, 작품을 찾지 못하고있음)를 인쇄한바 있고 일부 자유시들이 창작발표되기도 하였다. 이중에서 민족부흥에 대한 기원을 표현한 《조국을 부흥의 길로》(려전. 1940), 《너 또 왔는가―3.1절을 기념하여》(리두산, 1940), 《광복》(진구, 1941), 망국노의 삶을 통탄하며 민족의 재생을 위해 헌신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압록강》(백치, 1941), 《어머니를 그리며》(운청, 1940)와 중조 두 민족의 친선을 노래한 《양자강》(김유, 1941) 등이 주목을 받은것으로 알려졌다.     동북지역의 항일시가   관내지역 항일시가와 쌍벽을 이루며 동북지역의 항일시가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관내지역의 항일시가는 량적으로 적다고 보기 어려우나 현재 남아내려오는 자료가 빈약하여 사실상 오늘날 우리 항일시가문학의 주요 업적은 동북지역의 항일시가라 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그런데 동북지역 항일시가는 관내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항일가요가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만 관내지역의 경우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전문적인 작가들의 창작이 아니라는 뚜렷한 특징을 드러낸다. 무명시인들이나 집단창작에 의해 이러우진것으로 보인다.   주제성향의 측면에서는 일제의 만행과 죄행에 대한 폭로단죄, 나라 잃은 민족의 참상 표현, 그리고 일제타도와 국권회복에 민중을 궐기시키려는 선전선동의 내용들이 중심을 이루고있다.   가령 다음 례문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경우다.     1931년 9월 18일   일제놈이 만주를 강점하였다   대포와 비행기며 기관총으로   넓은 만주 피바다로 물들이였다     압박착취 강탈을 당하다못해   일어나는 3천만의 반일의 고함   만주벌판 몇천리를 진동하면서   거족적인 반일전쟁막은 열렸다     (중략)   일어나라 3천만의 로력대중아   우리앞에 무서운것 그 무엇이랴   굳고굳은 반일전선 힘있게 맺어   자유정권 건립하려 힘껏 싸우자         ―《9.18사변가》에서     일제가 동북땅을 강점한 이른바 《만주사변》이라 불리는 《9.18사변》을 상기시키면서 일제의 만행을 폭로규탄한 동시에 3천만 민족이 일떠나 일제를 몰아낼것을 호소하고있다. 아래의 례문들은 그러한 내용들을 좀더 구체화시키고있다 하겠다.     일제놈들이 말발굽소리 더욱 요란타   만주벌과 넓은 천지 횡행하면서   살인방화 착취략탈 도살의 만행   수천만의 우리 대중 유린하도다     나의 부모 너의 동생 그대의 처자   놈들의 총창끝에 피흘렸고나   나의 집과 너의 집, 놈들의 손에   재더미와 황무지로 변하였고나     (중략)   일어나라 단결하라 로력대중아   굳은 결심 변치 말고 살길을 찾아   붉은기아래 백색공포 뒤엎어놓고   승리의 개가높이 만세 부르자         ―《반일가》에서     1932년 4월 6일에   대감자의 반일전쟁 개막되였다.     (중략)   대두천의 불길은 하늘에 닿고   덕원리의 농촌은 재터뿐이다     무죄량민 주검은 들에 널리고   왕청벌엔 인적이 고요하구나     동북땅에 살고있는 중한대중아   일치단결 일어나서 싸워나가자         ―《인민의 처지》에서     이들 가요의 특징은 앞부분에서 일제의 만행을 렬거하여 민중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동시에 마지막부분에 이르면 그러한 일제의 만행을 그냥 두고볼수만은 없으니 모두모두 일떠나서 목숨 걸고 일제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원리를 직설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하고있다. 다음의 례문들도 별로 큰 차이는 없으나 항일투쟁의 수요와 혁명구호의 변화를 반영한 반일의 통일전선정책을 가요속에 담고있다. 1930년 《붉은 5월투쟁》때에 널리 애창된 《총동원가》 등이 이에 속한다.     누구나 다 나오라   일제와 주구를 미워하는 동포   전 민족 혁명의 반일전선에   모두다 모여오라   내몰자 쳐없애자   일제놈을 우리의 손으로         ꠏꠏꠏ 《누구나 다 나오라》에서     만주의 벌판에 불이 붙는다   만주의 뫼봉우리에 불이 붙는다   시뻘건 화염이 치솟는 그속에서   반일하는 대중의 함성이 인다   나가라 싸우라 항일의 병민들   모두다 전선에 나가 싸우라         ꠏꠏꠏ 《총동원가》에서     이들 작품에는 계급, 계층, 성별, 신앙을 가리지 않고 전 민족적인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전략사상이 반영되여있다. 무산계급만이 아닌 일제의 망국노 되기를 원치 않는 모든 민족구성원이 반일투쟁에 궐기할것을 호소하고있는것이다. 《민족해방가》, 《로동자가》, 《농민혁명가》, 《혁명곡》, 《녀자투사가》, 《소년투사의 노래》 등 작품들도 같은 주제를 표현하고있다.   한편 항일가요의 또 하나 중요한 주제는 항일투쟁에서 굴함없이 싸운 투사들의 헌신성과 고결한 품성을 노래한것이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동시에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투사들의 의지와 긍지감도 표현되고있다. 《혁명군의 노래》, 《혁명군인 되련다》, 《혁명의 길》, 《끓는 피는 더 끓어》, 《혁명조의 노래》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남북만주 설한풍 휩쓰는 산중에   결심 품고 떠다니는 우리 혁명군   천신만고 모두다 달게 여기며   피와 땀을 흘린자 그 얼마더냐     몽골사막 지동치듯 거세찬 바람   사정없이 살점을 떼여갈 때에   산림속에 눈깔고 누워 잘 때면   끓는 피는 더욱더 뜨거워진다     지친 다리 끌고서 보보행진코   주린 배를 졸라매고 힘을 돋군다   무정하다 세월은 흘러가는데   목적하는 혁명사업 언제 이룰가         ꠏꠏꠏ 《혁명조의 노래》에서     비슷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항일전쟁의 가렬한 전투에서, 원쑤들의 철창속에서와 단두대에서 굴함없이 싸워 민족적정기를 떳떳이 떨친 항일투사들의 불굴의 의지와 희생정신을 구가한 작품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연길감옥가》, 《추도가》, 《유격대추도가》 등이 이에 속하는데 특히 《연길감옥가》는 현재까지도 일부 불려지고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바람세찬 남북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기에 폭탄 차고 싸우던 몸이   연길감옥 갇힌 뒤에 몸은 여웨도   혁명으로 끓는 피야 어찌 식으랴     (중략)   너희는 짐승같은 강도놈이다   우리는 평화사회 찾는 혁명군   정의의 총칼은 용서없나니   정당히 판결하라 죄인이 누구냐를     팔다리에 족쇄 차고 자유 잃은 몸   너희놈들 호령에 굴복할소냐   오늘 비록 놈들에게 유린당하나   다음날엔 우리들이 사회의 주인     일제놈과 주구들아 안심말어라   너희 세력 강하다고 뽐내지 말라   70만리 넓은 들에 적기 날리고   열린다 감옥문 자유세계로!     《연길감옥가》의 일부이다. 적의 고문과 박해에 의해 몸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였으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민족해방의 의지는 조금도 굽힘이 없다. 반일민족투사의 정신적인 풍모를 잘 그려낸 작품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10월사회주의혁명과 국제적친선을 노래한 《쏘련혁명가》, 《10월혁명의 노래》, 《메데가》, 《10진가》, 항일투사들의 다양한 감정의 세계를 드러낸 《유희곡》, 《딴스곡》, 《사랑의 축복》 등 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여 항일가요의 내포와 외연을 풍부하게 해준다.   한편 항일무장투쟁시기에는 민중들속에서 《유격대》, 《왜호박》, 《어이어이 앵고댕고》, 《왜놈병정 벼락맞았네》 등 항일민요들이 자생하여 불려졌던것으로 전해진다.     뒤동산의 딱따구리   참나무벌레만 잘 잡고요   동서남북 유격대 번쩍   왜놈의 대가리 잘도 까눕힌다네     앞마당의 함박꽃은   바람만 불어도 방긋 웃고요   언제나 잊지 못할 유격대는   인민에게는 언제나 웃음이라네               ―구전민요 《유격대》     동요의 형식을 리용한 이 민요는 그 특징상 구전민요라 보기보다는 오히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민요라 보는것이 더 나을것 같다. 하지만 작사자를 알길이 없으니 그냥 민요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것이다. 《왜호박》이라는 작품도 비슷한 경우이다.     호박은 가을에야 따는줄 알았더니   겨울에도 호박은 풍년이라네   공산군 《토벌》에 으르렁거리며   거뜰머뜰 떠났던 황군나리들   올적에는 그 위풍 어데로 갔나   수레마다 마대를 싣고 오기에   둥글둥글 무엇이냐 물어봤더니   백두산에 심어놨던 호박이라니   일년사철 잘도 따는 왜호박이라네               ―구전민요 《왜호박》     이는 일제군이 항일유격대《토벌》에 나갔다가 항일유격대에게 저격당해 무리죽음을 내자 급한김에 미처 시체를 운반해올수가 없어 대가리만 잘라 마대에 넣어가지고 오면서도 그것을 호박이라 부르며 민중의 눈을 속여넘기려 했던 랑패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있다. 《어이어이 앵고댕고》라는 작품에서도 왜놈들의 랑패상을 드러냄으로써 일제멸망의 불가피성을 표현했다 하겠다.     형식적측면에서 항일시가들은 직설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했으며 력동성과 랑만성을 상당히 중요시했던것으로 보인다. 이들 작품은 대체로 단순하고 알기 쉬우며 생활적이고 선동적이다. 따라서 대중성과 투쟁성을 동시에 구비하고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런 특징을 예술성의 결여로 보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항일시가는 항일혁명투쟁에 민중을 궐기시킨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있기때문이다.   이는 또한 항일시가의 존재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있는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된바 있지만 항일시가중에서는 항일가요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항일가요의 주요 영향대상은 민중이며 민중에게 있어 가장 쉽게 받아들여질수 있는 형태가 바로 노래이며 평이하고 투쟁적인 항일가요였던것이다. 따라서 단순성이나 직설적인 표현은 오히려 작품창작의 목적성에 가장 적절한 형식이였다고 보는것이 옳을것 같다.     주 석 ------------------------------------------ 1) 항일시가작품들 다수는 현재까지 텍스트가 공개되지 않아 여기서는 조성일 권철 주필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1990)의 자료를 참고했다. [출처]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1)|작성자 반벽거사  
1469    李陸史 청포도 댓글:  조회:3955  추천:0  2015-09-16
  The Poet And I / Frank Mills       청 포 도     이 육 사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1939년 8 월             이육사 李陸史 , 1904.5.18~1944.1.16 1904년 4월4일(음) 경북 안동의 도산면 원천리 불미골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원록(源綠)이며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하였다. 호인 육사(陸史)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 서 옥고를 치루었는데, 그때의 수인번호 二六四를 따서 지었다. 이육사는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 하는 시를 썼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의 병장 凡山 許衡의 딸인,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에서 6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 어났다. 이육사는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 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에 가입했으며, 그 해 10월경 의 임무를 받 고 북경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 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 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 다. 1933년 귀국해 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다.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 다.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 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북경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 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문학세계는, 1933년〈신조선〉에 발표한 시〈황혼〉이다. 이어 발표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 풍림1936. 12> 〈노정기 - 자오선1937.12> 〈연보 - 시학1939. 3> 〈청포도 - 문장1939. 8>〈 교목 - 인문평론1940.7>〈파초 - 춘추1941.12> 등을 발표했다. 〈청포도〉는 '7월', '은쟁반', '모시수건' 등의 시어를 써서 밝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청포도'라는 한 사물을 통 해 끊임없는 향수와 기다림, 미래를 향한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절정 - 문장1940.1>〈광야 - 자유신문1945.12.17>에서 보이듯이 일제강점기의 민족 적 비극을 소재로 강렬한 저항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꺼지지 않는 민족적 의지를 장엄하게 노래했다는 점이 특징 이다. 특히 유작으로 발표된〈광야〉는 저항시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1946년 신석초·김광균 등이〈육사시집〉을 펴냈다. 이후 1956년 재간본과 1964년 재중간본이 나왔고, 재중간본을 펴낼 때 시집 이름이〈청포도>로 바뀌었다. 또한 1971년에는 이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와 작품연보가 추가된〈광야〉라 는 시집이 발행되었다.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육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육사문학관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7월에 건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과 관련,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 생활 모습 등도 재현해 놓았으며, 2층은 낙동강 이 굽이쳐 흐르는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탁본체험코너, 시상 전망대 등 이 갖춰져 있다. 그동안에는 안동시에서 관리를 해오다 2008년 12월 1일부터 (사)이육사추모사업회로 위탁되어 운영을 하게 되었다. (사)이육사추모사업회는 선생의 나라사랑과 사상을 기리는 지역 내 순수민간단체로, 대표에 최유근 전 이육사연구회 회장, 초대 이육사관장으로 조영일 한국문협 이사가 내정되었다. 이육사문학관이 전문문학인들이 운영주체가 되어 이 루어짐으로써 문학관 본연의 기능을 되찾아 많은 문학인들이 즐겨찾는 문학관으로 거듭나며,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청량산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하여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도 자리매김 하고 있다. 또한 육사선생의 따님인 옥비 여사가 육우당에 기거하면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안동문화원 문예창작반 회원들 이 이육사 문학관 해설사로 봉사를 하고 있다. 육우당-六友堂 원래의 이육사 생가는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자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에 이건 보존되고 있으며, 이집에서 애국지사 이원기 선생을 비롯하여 육사,원일,원조,원창,원홍 6형제분이 태 어나셨다하여 당호를 육우당이라 한다. 이 건물은 생가를 본뜬 모형 집으로 구조는 "二"자 형태이며 앞쪽은 사랑채로 방 두칸, 중간 마루 한 칸이고 뒤쪽 안채 는 반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지어졌다. 사랑채의 오른편은 팔작 지붕인 반면 왼편은 맞배지붕이 특이하나 수리 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사진 오른쪽)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메인가 내가 부르는 노래는 그 밤에 강건너 갔소 - 중 마지막 연 - ■ 내가 바라던 손님, 고달픈 몸으로 모시두루마기 입고 건너 오기를 기다리던 강, 이제는 메말라 개천으로 흐른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작품해설.. ●감 상 :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어 조 : 식민지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은 대립되고 있어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는 어조임 ●표현상의 특징  -시각적 이미지(이상적 세계를 구현하는 소재)  - 청색 : 청포도, 하늘, 푸른 바다, 청포  - 흰색 : 흰 돛 단 배,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구 성 : 6연 각 2행 (내용상 3단락)  제1~2연 :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  - 청포도 :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되어 나오는 매체  제3~5연 :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  - 그가 찾아올 그 날 :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  - 청포 입은 손님 :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  제6연 : 손님을 맞을 마음가짐과 준비 자세  - 은쟁반, 모시 수건 : 화해로운 미래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  ●주 제 :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  ●출 전 : [문장](1939),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  작품감상... 민족적인 바탕이 순수한 시의 바탕이 되고,시의 순수성이 민족의 현실과 결합하여 예술로서 승화되는 것이 육사의 두드러진 장점이다.그러기에 이 작품은 향토색 짙은 시와 순수성과 시적 인식이 뛰어난 육사의 대표적 서정시라는 평가와 함께,민족의 수난을 채색하여 끈질긴 민족의 염원을 시화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따라서 이 시를,청포도라는 사물에 대한 아름답고 신선한 작가의 감각을 표현한 서정시로 보느냐,또는 청포도로서의 어떤 의미를 상징한 시로 해석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육사 시의 거의가 애국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그 특색인 만큼,이 작품처럼 순수한 감각적인 시에도 그의 특징인 애국적인 요소가 배어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그러나 포도를 따먹는 것까지 조국 광복을 기다리는 사실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어색한 노릇인 것 같다.따라서 청포도가 익는 7월에 찾아오는 청포 입은 손님을 기다리는 주인의 흐뭇한 정서가 주조로 되어 있고,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청포 입은 손님이 암시하는 조국 광복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공감이 서려 있다고 봄이 타당한 것 같다.       이육사의 詩精神   [빛나는 정신과 서정의 적극성]  암흑 속에서 빛나는 별을 노래하고 “오는 날”의 기쁨을 노래한 이육사는 거짓된 희망이나 자기 위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이육사는 결코 현실의 위압에 압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현실의 위압을 넘어서는 빛나는 정신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을 기다리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의연한 모습이나 “서릿발 칼날 진”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을 보여 주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육사의 기다림은 치유된 세계, 해방된 삶을 윤리적으로 강렬히 소망하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는 손님”(「청포도」)이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위해 “하이얀 모시 수건”을 준비하고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은 마땅한 미래를 구성하는 적극적인 행위와 의지이다. 서정성 넘치는 「청포도」는 그러한 적극성이 도달한 세계이다. 여기서는 풍성한 마을의 역사가 복원되고, 무한한 하늘을 인간이 호흡한다. 그것은 황폐화한 현실의 재건이자 자연과 인간이 이룬 조화와 화합이다. 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바라던 사람과 함께 우주의 기운이 충만한 청포도를 함께 먹는 일상의 향유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의 근본 조건이다. 「청포도」는 정치적 해방을 싸안으면서도 뛰어넘는 해방된 세계이자, 그 세계를 향유하는 행복한 삶의 공간이다.[출처]디지털안동문화대전    이육사 생가- 도산면 원천동 소재     [註]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이황의 후예로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활(活), 자는 태경(台卿)이다. 북경조선군관학교와 북경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저항시를 발표하면서 항일 정신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그 후 계속적인 항일 운동으로 수없이 옥고를 치르다가 북경 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작품에 시집 『청포도』, 유고집 『육사 시집』이 있다 이육사 생가는 원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 있었는데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 위치인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 왔다. 이건 후 한쪽 일각문(一角門) 자리에 대문이 서고, 원래의 대문 자리는 이웃집 석축이어서 담장도 대문도 없다. 옛 집터에는 1993년 「청포도」를 새긴 시비가 건립되었다.   이육사  생가 - 안동시 태화동 소재   [출처] 청포도 -이육사|작성자 솔로  
1468    리육사의 <<로신추도문>> 댓글:  조회:5970  추천:0  2015-09-16
  ...북경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이곳에 있는 감옥에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육사 순국지'로 알려진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은 관광객도 많이 찾는 베이징의 명소 왕푸징(王府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 밖이나 안이나 아무런 표지도 없어 이 건물의 정체를 일반인이 알 길은 없어 보였다. 1925년 21살의 나이로 의열단에 가입해 일생을 오롯이 조국독립에 바친 육사는 1943년 체포돼 베이징으로 이송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광복을 앞둔 1944년 40살의 나이로 이곳에서 옥사했다.   북경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은 지금 일부 공간이 개조돼 주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건물의 상당 부분은 오래전에 폐쇄된 상태였다.   중국에서 해당관리 및 보존조치가 없다면 조만간 철거될 운명을 맞게 될 우려가 크다. 건물 앞에서 마주친 한 중국인 남성은 "이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다. 한국의 리루스(李陸史)가 여기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연히 마주친 중국인의 입에서 이육사라는 이름을 듣게 된 것은 의외였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의 시 '광야' 중에서)라고 노래했던 저항시인 이육사의 자취는 이처럼 미약하게 남아있다... ...보존, 관리 되기만을... 그리고 력사를 잊지말기... 李 陸 史  출전 :《朝鮮日報》(l936·10·23∼29)  노신 약전-부저작 목록-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이며 자(字)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후 동경에 건너가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연에 귀국하야 절강성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회문학운동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문학에 대하야 자연주의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 정부교육부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연 도하문 대학교수로서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주임교수의 직에 있다가 1928년 이것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맹아일간』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련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맹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年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중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가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제거하였다. 형년 56.  주요한 작품으로는 {아Q정전(阿Q正傳)} {눌함( 喊)}{방황(彷徨)}{화개집(華蓋集)}{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약(藥)}{공자기(孔子己)} 등이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엿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불란서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의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팔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과 인제는 고인이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을 불명케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여사를 중심으로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열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뒤 3일이 지난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 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 『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阿Q의 正傳을 다읽고 났을때 나는 아직까지 阿Q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견디겠다』고 한『로망·로-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阿Q의 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阿Q들은 벌써 『로망·로-랑』으로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 많은 阿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난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阿Q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정신의 삼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紅樓夢)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같은 것은 속인의 할 일이라 하여나치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동성파와 사기당과 원수단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지(胡適之)박사는 『문학개량 추의}라는『문학혁명론』을 1917年 신년호에 게재하여 진도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운동을 방해코저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 보았으나 1918년 4월 호에 노신의『광인일기』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 화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것은 그 후 얼마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속에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하면 곳 붙들고 말하기를----- 중국의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개 망상광의 일기체의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열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열마나한 해독을 끼처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송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적 사회의 성장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중에 한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둬적거려 보았다. 역사란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씨여져 있었다. 나는 밤잠도 안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자가 씌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소설의 일편은『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을 맞는다. 실로 이 한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 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데따라 문학화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이(孔乙已)』『藥』『明日』『一個小事件} {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후 1921년 북경신보문학부간에 그유명한 『阿Q正傳』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현화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가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의 심리에 생활의 『디테일스』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가지 조건이 되겠지만는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테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孔乙己』의 공을기나 『阿Q正傳』의 阿Q가 모두 일파이 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孔乙己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여지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이금십구적 주책가 어느때까지 쓰여져있는데로 언제인지 행방이 부명된 체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농민인 阿 Q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혁명 떠들어 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얼어난 폭도의 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 (피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야) 피살되는 阿Q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가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阿Q가 공을 이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개의 정신도 없으며 우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개 쥐여질리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레얄 리스틕}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 였으니 당시 『阿Q正傳』이 發表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阿Q 時代』이 였으며 노신의 『阿Q正傳』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지식군들은 『阿Q相』이라거나 『阿Q時代』라는 말을 평상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개의 재료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야 일실하여있는 노신정신을 다시한번 음미해보는데 적지않은 흥미를 갖게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것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나 하나 문제가 엇지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문제는 그의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後年『눌함』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로으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을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하려니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 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 이였겠지만은 이꿈도 결국은 깨여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해도 또 아무리강상해도 무의미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밖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中略---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하기로 했다 (눌함자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하남』 등에 쓰든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희납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빠이론』과 파란의 복수시인 『아담·미케뷧치』『항가리』의 애국시인『베트피 ·산더--』 『필립핀』의 문인으로 서반아 정부에 사형받은『리샬』등의 작품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서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은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녀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닭게 한 것은 물론 이래기천년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여졌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였다.  그럼으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阿Q도 여기서 비로서 영생하였스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항 무한을 쫓겨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부촌이 때마침 프로 문학론이 드셀때인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보았다. 그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阿Q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作品에서 우리는 눈딱고 보아도 푸로레타리아的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것이서 노신이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수 있는 푸로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민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반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해서 그의『四五』전후의 작품을 프로 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러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 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해서 작가 노신의 명의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서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수있을까? 생각컨대 이것은 매우 곤난하다. 現在의 이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테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해도 용이치않다. 어떤 사람이 즉 이런 문제를 제출한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그래도 좋다. 왜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양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럼으로 프로 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기피 현실의 핏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 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中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전 모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삼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를 소뿌르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를 뿌르 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는파에 대해서는 무엇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전투자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 보담 만은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료해하야 장래를 추단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랄』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 시준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父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든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生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느면 안될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려나가기 더 바밨다.}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 한 안복파의 수령 단사서의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의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오십여명 체포령을 내렷다. 우리 노신은 이 오십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이 결정되어 그 익년 가을 『뽀로듼』等이 고문으로 광동에오고 『전국민적공사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 일계단인 광동시기에는 프로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지 였다』  그래서 급진교수들은 교육부총장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수백여명의 사상자가 낳다. 그때 노신은 북경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병원이나 공장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이래 최암흑일에 지』하였다는 명문은 단사서로 하여금 기자에 내려안게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중략--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속화개집)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콜키-』이든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양리 ·발뷰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오십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단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폐타는 광동일성만 노동자 농민급진지식분자 삼천여명을----하였으며 한때는 『혁명의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여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악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하는 것은 대권로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더 생기있는 것이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더 아낌이 없시------(而己集)  이 글은 그가 심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보인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그가 상해에 왔을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불만과 극좌적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찰스키--』들의 문학론과 『싸벳트』의 문예정책을 번역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던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가 마저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난한 수형에 의하여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점괴히 알며 붓을 놓기로 한다. -了-  ----------------------------------------------------------------   魯迅 1. 생애   1-1. 출생, 일본 유학, 귀국 이후의 활동 노신은 1881년 9월 25일 중국 저장성 소흥에서 태어났다. ‘노신’은 그의 필명이며,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다. 그는 지방에서 위세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노신이 13세 때 할아버지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가 병사함으로써 집안이 몰락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전통 교육을 받고 한 때 과거에도 응시했지만, 가정 형편을 고려해 학비가 무료인 남경의 수사학당(해군학교)에 진학했으며, 곧 광무철로학당(철도학교)로 옮겨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접한다. 기본적인 어학공부를 마친 1904년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강의도중에 중국인 처형장면을 보여주는 영화가 상영되자, 이에 분노해 의학공부를 파기하고 자퇴한다. 공부를 중단한 뒤에도 노신은 한동안 동경에 머물면서 현지의 중국인 유학생등과 교류했다.특히 문학을 통한 민족 계몽을 목표로 삼아 외국 작품을 널리 접하고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가 최초로 유학생 잡지에 투고한 글은 테르모필레 전투에 관한 번역소설 ‘스파르타의 혼’이었으며, 후에 동생 주작인과 함께 번역 단편집 ‘역외소설집’(1909)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악화되어 장남인 노신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돌보아야하는 처지가 된다. 1909년 귀국한 노신은 항주에서 교사가 되었지만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직하고, 1919년 우창봉기로 인해 소흥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면서 노신은 사범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지만, 역시 몇 개월 견디지 못하고 고위층과의 갈등으로 사직한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남경 임시정부의 교육부 장관이 된 채원배가 노신을 찾아, 그 때부터 그는 교육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다음해 임시정부를 따라 북경으로 거처를 옮긴다.   1-2 본격적인 문학 활동 노신은 그 당시 허무와 자조 상태에 빠져, 교육부의 업무 외에는 거의 두문불출하며 고전 연구에만 전념했는데 , 이는 유학 시절에 품었던 계몽주의적 포부가 귀국 이후에 현실의 두꺼운 벽 앞에서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노신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문필활동을 하게 한 계기가 있었는데, 이에 관해 그는 첫 번째 작품집 ‘외침’(1923)의 서문에서 밝힌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와서 잡지에 수록할 원고를 청탁하자 노신은 반론을 제기한다. “ 가령 창문이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는데,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이 들어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 그러자 친구는 반문한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노신은 글을 한 편 기고하게 되는데, 그것이 1918년 5월15일자 ‘신청년’에 실린 첫 단편소설 ‘광인일기’이다. 노신이라는 필명도 이때에 처음 사용한다. ‘문화 혁명’이후에 신문화운동이 한창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노신의 작품은 곧 주목을 받게 된다. 노신의 동생 주작인도 뛰어난 글 솜씨로 명성을 얻지만, 1919년 노신과 주작인 사이에 큰 불화가 생겨 남은 평생 동안 서로 인연을 끊고 지내는 일이 발생했다. 1921년 12월 4일자‘신청년’에는 노신의 소설 ‘아Q정전’의 첫 회가 간행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Q의 딱하고 어리석고 불운한 인생은 당신 노신이 절감한 중국과 중국의 현실을 집약한 것으로 평가되며,연재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노신은 소설집 ‘방황’(1926), 산문집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1927), 산문시집 ‘들풀’(1929), 문학론 ‘중국소설사략’(1924)를 간행했으며, 70개가 넘는 수많은 필명으로 여러 잡지에 ‘잡문’ 또는 ‘잡감문’을 기고했다. 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로 손꼽히지만, 정작 그가 남긴 문학 작품은 중편 1편, 단편 32편으로 상당히 적은 편이며 수준도 들쑥날쑥하다.   1-3. 말년의 본격적인 투쟁 1920년부터 노신은 베이징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그중 한 곳인 베이징 여자사범대학에서의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현실의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1924년 반동 성향의 학교 이사진이 개혁 성향의 학생 상당수를 퇴학시키자, 이에 반발하는 학내 투쟁이 지속되어,결국 교육부에서 폐교 조치를 단행한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학생도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 사건에서 공개적으로 학생들을 지지했던 노신은 결국 13년간 몸 담았던 교육부에서 파면된다. 그 즈음 노신과 인연을 끊은 동생 주작인과 동료 문인 임어당이 각각 “물에 빠진 개는 때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패배한 자를 더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 페어플레이 정신이 필요하다.”라는 요지로 논쟁의 자제를 요청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에 노신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람을 무는 개라면 물에 빠졌건 안 빠졌건 간에 무조건 때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페어플레이라는 말조차도 기득권 세력에게 유리하게 사용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27년 노신은 국민당 정권의 4/12대학살에 분노하고, 그해 가을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 창작보다는 강연과 논쟁에 몰두한다. 신문학 운동의 대표자로 자리 잡은 노신을 향한 신세대 작가들의 비판이 거세었으며, 논쟁을 위해 뒤늦게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2년 송경령과 채원배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동지인 양전이 국민당의 테러로 사망하자, 암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문상을 다녀왔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나라 시인 이육사가 노신을 직접 만나고 감동했다는 일화가 있다. 1936년 노신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그해 10월 19일 새벽에 상해의 자택에서 5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사망 한 달 전에 발표한 ‘죽음’이라는 글에서 노신은 평소의 직선적인 성품에 걸맞는 유언을 남긴다. “장례 때 조의금을 받지 마라.”, “가급적 빨리 매장하라.”, “기념행사 치르지 마라.”, “나에 대해서는 얼른 잊고 당신들이나 열심히 살아가라.”, 등등의 내용이었다. 아울러 그는 임종에 직면해서 오랜 원수조차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서양의 관습을 언급한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결코 원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들도 얼마든지 증오하게 내버려 두어라. 나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2. 노신의 사상   2-1. 노신과 계몽 노신은 5.4 계몽운동을 깊이 공감하고 진심으로 계몽을 후원했으며, 더 나아가 계몽의 본질을 깊이 통찰하고, 거기에서 인생과 세계의 어두운 심연을 발견한다. 따라서 노신은 계몽을 제창하고 계몽을 초월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계몽의 길로 가라고 권유를 했지만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뇌했다. 왜냐하면 계몽의 길은 멀고도 험한 가시밭길이며, 혁명전쟁에 참여하면 아무런 댓가도 없이 이름 없는 산골에서, 들판에서 죽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계몽의 길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은 이름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권해야 하는가? 노신은 계몽의 어둡고 깊은 심연 앞에서 계몽을 초월한다. 그의 소설 ‘아Q정전’에서 그는 중국의 국민성에 깃든 노예근성을 통렬하게 비난한다.아Q라는 근본 없는 야비한 인간의 ‘정신 승리법’, 그것이 중국인의 노예 근성이라는 것이다.아Q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는 계몽의 길을 그는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5.4운동 무렵 북경 여자사범학교 선생을 하면서 학생들의 데모와 경찰의 총격으로 유화진이 사망하고, 사범학교 교장과 다투고, 교육부 장관과 싸우고, 진원 등과의 설전을 벌이면서 그는 점점 계몽의 심연을 보게 된다. 그는 ‘들풀’이라는 시집에서 계몽의 본성과 계몽의 초월을 말한다.   2-2. 고독과 비애, 흡인력, 초인 사상 중국의 평균적인 국민성을 아Q로 설정해 통렬하게 비난한 노신은 아Q와 반대되는 초인을 설정한다. 계몽은 특별한 길이고, 험난한 가시밭길이며, 자신을 계몽하고 나서 세상을 바꾸려 나서는 길이다. 자신을 바꾸는 것도 힘들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더 힘들다. 이런 힘든 계몽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바로 초인인 것이다. 이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의무이고 당위이기에 계몽의 길로 가는 것이다. 노신의 문학 활동이 바로 그런 초인의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통속을 멸시하고 전통을 공격하며, 용맹하게 세상에 뛰어들어 국민성의 마비를 끊임없이 폭로하고 통렬하게 비판했고, 그에 대한 댓가는 계속되는 싸움, 비난, 멸시, 그리고 탄압이었다. 그가 초인을 외치는 것은 바로 이점, 자신의 계몽된 이성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되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이 세상의 냉혹한 반격, 차가운 세상, 인생에 대한 당혹스러움에 대한 통찰이 있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성립되는 그의 감수성은 고동과 비애의 감정이며, 생활의 근거이며 그의 작품 활동의 힘이 된다. 초인의 정서는 우울한 허무주의 사상인 것이다. 그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신랄한 비판과 도독의 비애가 내비치는 현대적 인생의 의미인 것이다.   2-3. 실존의 느낌, 형이상학적 감수성 계몽의 길은 개인의 실존과 직면하는 길이다. 죽음으로 이르는 가시밭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존의 느낌을 노신은 ‘그림자의 작별 인사’에서 말한다. 어떤 그림자가 주인에게 ‘너는 계몽을 따르는 고상한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그림자일 뿐이다. 너를 따라다니다 이제 지쳤다. 네가 천국에 간다 해도, 네가 지옥에 간다 해도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빛과 어둠의 중간에서 서성대다가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조용히 잠겨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림자는 계몽과 혁명의 길로 나서는 지식인들의 자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자가 보았을 때, 너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데 왜 편한 길을 버려두고 계몽의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을 그림자는 묻고 있다. 그림자는 그의 실존의 바닥일 것이다. 이런 일상의 평범함을 떨치고 계몽의 길로 나설 때 사람들은 차가운 현실, 당혹스런 세계와 부딪치게 된다. 이러한 비참한 생에 대한 황당함, 당혹감, 음랭함, 죽음과 삶에 대한 강렬한 감수성은 노신으로 하여금 보통 사람들의 감정을 넘어서 형이상학적 감수성인 비애와 고독으로 빠지게 했을 뿐 아니라, 일생 동안 지속된 노신의 고독과 비애에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의미를 띄게 했다. 노신은 불교 이론을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있으며, 니체로부터 안드레예프에 이르는 현대 서구 문예 속에서 현대 의식을 느꼈으며, 일본 문학이 표방하는 인생의 비애감에도 영향을 받아, 노신의 고독과 비애가 일종의 철학적인 풍취를 갖게 된 것일 것이다. 그는 낡은 문화, 낡은 세력과의 싸움에서 느끼고 짊어지고 인식한 어두운 현실, 무거운 고난,고통스런 전투, 아득한 전망, 머나먼 길, 깨어나지 않는 인민 대중, 악의 세력의 거짓과 잔인성, 아는 사람들의 은밀한 공격 등등 이 모든 것이 그를 고독과 비애로 이끌었으나, 그는 기래도 경박한 ‘인도주의’, ‘집단주의’나 ‘과학주의’, ‘이성주의’에 빠져들지 않고, 개체의 ‘현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했다. 2-4. 귀신과 용사, 죽음과 용기의 변증법 계몽의 제창과 초월 속에서 그가 당면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를 어둡운 곳으로 끌고 갔으며, 그는 늘 죽음을 생각했다. 이에 그는 결국 귀신과 죽음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는 중국에서 대표적인 귀신인 무상(無常)과 여적( 女吊)을 찬양한다. 저승사자에 해당하는 무상과 처녀 귀신인 여적 모두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삶의 용기의 변중은 그의 문학의 기본적 분위기이다. 그는 계몽의 제창에서 세상의 차가움 속에 절대 고독과 비애를 맛보고, 초인사상으로 나아간다. 그는 고독과 비애 속에서 형이상학적 감수성으로 이 세상을 통찰한다. 그는 계몽의 끝에 있는 죽음을 보고, 귀신을 본다. 그는 그런 죽음과 귀신까지도 사랑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계몽을 향한 강한 의지를 가졌다.     [출처] 노신|작성자 min  
1467    당신도 디카시 시인 댓글:  조회:4772  추천:0  2015-09-12
   나도 ‘디카시인’이 될 수 있을까. 단골술집 목포집 한 쪽엔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야생초를 키우는 풍경이 있다. 주전자와 식물의 공존 방식이 다가왔다. 그래서 사진을 찍었고 내 삶이 감정이입 되어 ‘권주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당신이 디카 시인이다    일간 경제지 머니투데이는 매주 ‘최광임 시인이 읽어주는 디카시’를 연재하고 있다. 시인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이 사진이 불러오는 시상을 짧은 시로 표현한다. 시집 ‘도요새 요리’로 유명한 최광임 시인이 멋진 시 해설을 붙인다. 사진이 앞장서고 시가 뒤따르는 형식이 디카시(디지털카메라+詩)다. 이 디카시 코너가 모바일 세상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독특한 시선의 사진과 군더더기 없는 짧은 시가 결합했고, 이를 시평으로 풀어내는 최 시인의 디카시 칼럼은 네이버 프런트 페이지에 종종 오른다.   작금의 시는 문자성을 꼿꼿이 강조한 채 소수 문학인 집단의 향유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문자성을 본질로 삼고 이미지와 영상을 한 아름 품을 것인지를 결단해야만 한다. 고답적으로 자유시 산문시 정형시 서정시 서사시 등으로 분류되던 현대시는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시 독자가 떠나버린 황량한 시단엔 시인들 푸념만 가득하다. 8000원 짜리 시집은 팔리지 않고 광화문 교보문고 시집 코너는 쓸쓸하기만 하다. 이 땅에 한글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자칭 타칭 2만 명에 이른다. 시 전문 문예지는 수백 종에 다다른다. 하지만 시를 즐기는 독자군은 눈에 띄지 않는다. 시인은 어느 별에서 사라진 시 독자와 재회할 것인가. 가장 오래된 문학의 원조인 시는 어디에다 둥지를 틀 것인가.   바로 스마트폰이다. 모바일 네트워크 시대, 인류는 호모 디지쿠스를 지나 호모 모빌리쿠스로 진화했다. 현대인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현대시가 SNS 소통환경에 최적화되어 다시 시의 깃발을 들어 올린 경우가 바로 디카시(dicapoem)다. ‘디카시’라는 용어는 2004년 이상옥 시인이 최초로 사용했고 공론화시켰다. 이 디카시가 사그라지는 현대시를 되살리고 있다. 멀티 언어예술로서 시의 언어 카테고리를 확장시킨 셈이다. 즉 시의 진화이다. 시는 사진과도 만나고 그림 애니메이션 플래시 동영상과도 만나야 한다. 문학 위기의 시대, 시가 스마트 미디어를 만나 문학의 본류를 부활시킬 수 있는 마지막 싹이 된 것이다.    디카시 칼럼의 한 사례. 냉면 사발에 오롯이 들어앉아 잠을 취하는 강아지의 모습이 애처롭다. 이 풍경에서 날선 이미지와 메시지를 포착해 디카시는 태어난다. ​   삶의 길을 걷던 시인(당신이 시인이다)이 주변 풍경과 사물을 일별하면서 영감을 주는 이미지를 포착한다. 자신의 휴대전화를 열어 찰칵 찍는다. 이때 가슴도 열어 심상의 필름에 새겨둔다. 감흥이 채 식기 전에 서너 줄의 시적 언어로 꿰고 엮어 편집해둔다. 독특한 이미지는 시상(詩想)을 열어주고 시 언어는 이미지의 날개를 달고서 하늘을 난다. 이때 시인은 기성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 아니다. 바로 현대인 우리 자신이다. 저마다 휴대폰엔 수백 수천 장의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이중에서 타인의 시선과 차별화된 사진 하나를 골라 나만의 서너 줄 문장을 보태보라. 깔끔하고 상징화된 시 제목을 한번 붙여보라. 바로 그것이 당신의 디카시다.   당신이 기르는 애완견 사진 한 장은 그 자체만으론 예술적 아우라를 갖지 못하지만 공감과 감수성을 장착한 시 문장을 갖추면 예술적 오브제로 승화된다. 당신의 '일상 역사' 수천 장을 휴대폰에 켜켜이 쌓아 놓고 사장시키지 말라.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열람하다 보면 수많은 사진과 만난다. 포스팅한 사진에 제 나름 감수성이 묻어나는 문장이 덧붙여진다. 사진에 깜찍한 캡션을 다는 일. 바로 디카시의 출발점이다. 이미지가 문자에 또는 문자가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고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며 시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디카시는 진지함이나 근엄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가벼운 일상에서 이미지를 채취하므로 산책하는 기분처럼 상쾌하다. 관념적 사유가 아니라 일상을 즐기는 낭만정신을 앞세운다.   디카시가 페이스북에서 인기를 끈 요인으로는 ‘열린 참여’라는 전제가 자리 잡고 있다. 디카시는 이미지라는 영상에 시의 압축성을 결합한 것이다. 4~5행 안팎에 시적 메시지를 압축한다. 1분이면 읽어내기에 이미지 전달력이 빠르고 강력하다. 고답적인 고담준론의 관념성은 발붙이지 못한다. 대신 일반인의 참여가 환영받는다. 이 지점에서 디카시의 향유층은 바다처럼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 향후 디카시는 소셜 네트워크 콘텐츠로 어떻게 자리매김될까. 인간 고유의 보편적 정서를 기반으로 일상을 스케치하는 이미지와 글월이 밀고 당기므로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나아가서 전 세계인의 보편 정서까지 노크할 수 있다. SNS 상 언어번역기능이 세밀히 작동된다면 한국어의 한계을 뛰어넘어 전 세계를 가로지르는 글로벌 문학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새 문학 장르가 열리는 셈이다. 당신이 ‘디카 시인’이다. [출처] 당신이 디카 시인이다 |작성자 해리슨 김용길  
1466    <사진> 시모음 댓글:  조회:4949  추천:0  2015-09-12
[ 2015년 09월 14일 10시 05분 ]           + 사진사에게  웃으라 하시기에 웃기는 하였으나 울고 싶었던 적이 훨씬 더 많았지요. (유용선·시인, 1967-) + 사진寫眞     꽃도 찍히면  더 이상 시들지 않는다  나무도 찍히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새도 찍히면  더 이상 날지 않는다  사람도 찍히면  더 이상 늙지 않는다  (오정방·미국 거주 시인, 1941-) + 사진  멈추어 선  시간  머물러 있는  모습 속에서  그때  스미어 넣은  마음을 찾는다 (오보영·시인, 충북 옥천 출생) + 사진 삶의 한 순간이 멈추어져 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표정이 머물러 있다 나에겐 멈출 수가 없이 흐르고만 있는 삶의 시간이 인화지에 멈추어져 있다 아주 작은 삶의 한순간의 표정이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오래된 사진기  언제부턴가 렌즈는 흐려있었다  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아도  부옇게 서린 김은 지지 않았다  들여다보면 군데군데  크고 작은 흠집이 나있었다  조리개를 열고  초점을 맞추고  앵글을 바짝 들이대도,                    세상에는  찍히지 않는 것들이  참 많았다  낡은 사진기로,  골목에서 종일  호기심에 걸려 넘어지는  아이를 찍는다  민들레꽃 닮은 노란 옷의 아이는  부지런한 두 발로, 아장아장  렌즈에서 멀어진다  오십 년을 사용한  흐린 두 눈에  찰칵,  아이의 울음이 찍힌다  (마경덕·시인, 1954-) + 사진사  내 사진은 내 삶 속에 있다고 공언했지요  사진 속에 삶을 담지 말고  삶 속에 사진을 담으라 했지요  그래야 좋은 사진이 된다고  좋은 사진사가 된다고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좋은 삶을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그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익어가지 않는 삶  감동 없는 삶  그 삶을 찍으려니  카메라 파인더에  한숨으로 남아  상처로 남아  시간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회한에 서성이고  지나간 시간에 딴지 걸리어  멈춰버린 시간  고독한 남자의 고독한 고백  그것은 패배의 모습인가요  진실의 늪인가요  오늘도 사진은 한 컷도 누르지 못합니다  셔터는 영영 누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그래도 찍어야 한다는 숙명적인 운명  이것은 무슨 지독한 전생의 업보인가요  좋은 삶은 아직도  내 머리 속에서만 잉잉거리는 것을.  (남경식·사진작가 시인, 1958-)  + 사진 예술가  아마 그들은 내리쬐는 햇살만 봐도  가슴이 울렁이겠지  크지 않은 오목 혹은 볼록 조리개 속에  가는 숨 가만히 가만히 멈추어  우주를 담는다  해를 담는다  달과 별을 담는다  고운 풍광을 담는다  몇백만 분의 일초 사이 그 짤막한 순간을 얻기 위해  심장 박동을 정지시킨다  미세한 신경 따라 흐르는 붉은 피마저 정지시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꿈을 꾼다  아마 그들은 하루에도 몇십 번 몇백 번씩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어 수도승보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겠지  (이승익·시인, 1951-) + 사진사의 기도 이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창조하신 하느님, 당신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전하려는 사진사들에게 별처럼 반짝이는 창조력과 당신 은총의 손길을 찾아내는  정성스런 추구의 눈길을 주소서. 빛을 창조하시어 어두움과 밝음을 주시고 계절을 창조하시어 다양한 색깔을 주시고 공간을 창조하시어 삶의 굴곡을 주시고  숨결을 창조하시어 생명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어 생의 흔적들을 주시니 이 모든 것들을 삶의 그릇에 담으려는  사진사들의 정성에 함께 하소서. 사진사들의 노력으로 표현된 하나하나의 손길에서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사진사들에게 생의 존재 가치를 깨달아 생활 속에서 그리고 자연 속에서 당신 창조의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느껴 당신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지나간 삶의 흔적들을 믿음으로 키워내고 하루하루의 삶을 사랑으로 행동하며 더 나은 내일의 꿈을 희망으로 그려내는 그러한 사진사들의 움직임에 함께 하소서. (작자 미상) + 사진 한 장  항상 가지고 다니는 사진 한 장 이제는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되어버린…… 손에 닿을만한 곳에 있으면 자주 보지 않는 이유는 바라만 봐야 좋다는 이야기 지금은 이해가 간다 (원태연·시인, 1971-) + 사진을 박다  내 속은 시커멀까?  구렁이 몇 마리 똬리 틀고 있을까?  욕심을 먹으면 왜 배탈이 날까?  궁금한 마음에 찍은 시티 사진  의사가 느물느물 사진에 담긴 내 뱃속을 헤엄친다  집안 잘 보이는 곳에 사진을 박아놓는다  굼실굼실 살아있는 내 속  그게 구렁이라도 좋다  그 말고 탓할 데 없는 모습  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벽에서 떨어질까 못을 박는다  (최범영·시인, 1958-) + 사진 한 장  너와 찍은 사진을 걸어 둔 날  내 마음도 얹어 걸어 놓았다  활짝 웃는 두 사람으로 인해  금새 벽이 환해졌다  몇 번이고 열어 보이던 네 마음이  내 生으로 걸어 들어오던 날을 생각했다  만발한 벚꽃 뒤로 숨어 버린  서로의 마음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무언의 약속조차 하지 않은 시간이  사진 속에서 탈속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진 한 장  오래도록 내 마음에 걸어 두기로 했다. (이정자·시인, 1964-) + 사진  열 일곱 소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세워 두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진이 넘어졌다  무릎에 바람 날 나이도 아닌데 자꾸만 넘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람에 날리는 소녀들의 머리카락이 너무 가벼운 탓일까  배경으로 찍힌 철쭉이 너무 붉고 비탈은 숨가쁘게 가파르다  무게를 잡아도 옆으로 새는 웃음을 어쩌지 못할 때  넘어진 사진에 숨은 바람이 슬슬 새어 나온다 (강영환·시인, 1951-) + 사진 나이가 한 육십쯤 되고 보니  이래저래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된다.  아름다움에 찍힌 풍경은 물론이려니와  마음 아리게 지켜 온 우리의 살림 얼룩들  그 츱츱함까지도  이제는 추억 삼아 아득해 보이지만  집 머리맡에 국기처럼 걸려있는 사람  아직도 어려 보인다고  쑥스러워 하고 있지만  그리움에 감광된 마음으로  속이란 속은 다 타서  늙지도 못하는 옛날이  천연색으로 보는 꽃 시절 한 폭  제가 죽은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산 사람처럼 웃고 있는 철없는 사진  가훈처럼 적혀있는 그리움으로  나 혼자 늙느라고 이리 바쁜가  (서봉석·시인) + 가족사진  그 사진 속에 나는 없다  나는 사진을 찍었나 보다 (강인호·시인) + 가족사진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는  달랑 둘이 남은 부부  시집간 딸과 군대 간 아들  사랑이란 글자만 남아있는  썰렁한 체온들  자식들이 떠난 식탁에 차려진  찬밥에도 아무 불평이 없다  기어다니는 아기를 바라보며  입이 귀에 걸린 부부  사진만으로도 가득 찬 행복  아기가 흩어놓은  살림살이에 따뜻한 온기들  젖병, 이유식, 우유들이  즐비한 식탁에 차려진  찬밥에도 아무 불평이 없다 (목필균·시인) + 가족 사진 빗소리가 가늘게  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날,  날개 달린 생각들이  밤늦도록 들락거리고  나와 함께, 방안에서  축축하게 눅지는 것들  그 중에서도 유독,  벽에 걸린 식구들 사진 몇 장이  두런두런 깨어나  소복이 모여, 나를 쳐다본다  내가 그들을 깨웠을까  쳐다보는 그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나 (신석종·시인, 1958-)  + 몰래 찍으신 사진 어머닌 웃고 계신다 80년 우시더니 몰래 찍으신 사진에선 웃고 계신다 젊어선 남편이 울리고 늙어선 자식들이 울리고 당신은 정녕 누굴 울려 보셨나 잠결에 가시고픈 어머니 이 세상 이렇게 웃고 간다 하실려고 머리맡 사진에선 웃고 계신다 끝까지 울지 말라고 웃고 계신다. (구광렬·시인, 1956-) + 사진첩  학교 때 앨범을  가만히 펼치면  흑백으로 나오는  앳된 얼굴들  자야, 숙이, 희야, 옥이..  술이, 범이, 식이, 열이..  지금은 어디  무얼 하구 사나,  종교같이 서러운 날도 있었는가,  산수유 꽃처럼 기쁜 날도 있었는가,  구겨진 마음 달구어  옛날을,  옛날을 다림질하면  묻어나는 산바람 향그러운 얼굴들  이별은 들꽃처럼 흔적만 남아  아른한 그리움에 세월만 따라왔다.  학교 때 앨범은  잊었던 젊은 날  꿈 어린 무지개. (차성우·시인, 경남 거창 출생) + 사진 속 어머니  엄마, 제 손으로 사진 한 장 찍을게요  그래 한 장 찍자!?  반가운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어머니  그 때 아무도 모르게 깊은 병 앓으시던 어머니  어떤 예감 같은 게 있었을까요  모처럼 모자 단둘이 집에 있던 날  어쩐지 천지 평화롭고 햇살 그럴 수없이 따사로와  마당의 몇 그루 나무의 숨결까지 선명히 들릴 것 같은 날  우둔한 이 아들도 어떤 예감 같은 게 있었을까요  장롱 속 깊숙이 들었던 한복 꺼내 단정히 입으시고  옷만큼이나 밝은 표정으로 사진 찍기에 응하신 어머니  자식 앞이라도 잠시 쑥스러워 하시며 카메라 바라보시더니  그날 이후 급작스레 기울어져  흙 되신 지도 까마득히 세월 흘렀네요  지금 어머니 사진 앞에서 석양의 이 아들  한숨 짓는 버릇이나 늘었을까요  어머니 생각하면 왜 이리 눈물 흐를까요 (오하룡·시인, 1940-) + 어떤 사진  새로 산 디지털 카메라로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를 배경 삼아  한 10년만일까.  몇 장의 부부 사진을 찍었다.  P.C에 꽂아 확대해보니  배경은 너무 선명하고 멋있는데  내 옆에 선 아내의 얼굴  자잘한 주름살 뚜렷이 드러나  가슴이 짠하다.     나는 주름살 제거를 클릭하고  주름진 부위에 마우스 칼을 움직여  정성스레 시술하는 성형외과 의사가 된다.  사각사각 주름살 갈리는 소리에  어느새 옛날의 고운 모습이 되살아나는 듯싶다.  그런데 완성된 사진 속에서  금방 서 있던 사람은 어디로 가 버리고  나는 딸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었다. (한승수·제주의 서정시인) + 오래된 사진  곱다한 초등학교 시절  달맞이꽃 웃음으로 다가서던  앞가슴 볼록한 여선생님과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을 보면  눈물 뜨거워지는 소중한 추억이 된다  마을이장이 된 영철이,  무거운 가방을 늘 들어주던 갑석이의  딱 벌어진 어깨와,  맨발에 새끼줄을 동여매고 선  굳건한 내 의지의 발가락과,  접시꽃 설렘으로 서 있는  첫사랑 순임이의 윤기 나는 단말머리는  아직도 봄 햇살을 붙들고 있다  가난이 강물처럼 불어나  고향 등지던 어둠의 날,  동구 밖 아버지 헛기침소리는  메아리 되어 가슴 먹먹하게 차올랐고  슬픈 이별 손잡고 방황하던 시절,  밤 새워 퍼마신 복사꽃 그리움은  어디서 찾을까  (박종영·공무원 시인, 목포 거주) + 사진에 관한 보고서  몇 장의 사진을 봅니다  세월이란 점령군은  영웅의 가슴을 식게 만들고  미인의 눈가에 잔주름을 만드나 봅니다  사랑은 흘러가는 강물에 적셔지는  강변의 갈대와 같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요  사랑은 가슴에 상처 입히기  쉬운 면도날이라 누군가가 말하지 않던가요  그대와 한 장의 사진을 찍고 싶지만  그러지 아니하는 깊은 맘을 이해해 주세요  그대가 내 곁에, 내가 그대 곁에  영원히 있다는 확률 1이 아닌 바에야  언젠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인화지 속에서 그대 또는 내 곁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서로를 그리워하며  우울해할 그대와 나의 마음을  가을 햇살 날려보내고 싶기 때문이죠  하지만 강변이 내려다 뵈는  커피숍 유리창에서  내려다보는 노을 속의 강물처럼  우리 인생도 흘러가고  몇 장의 사진만 남아 추억을  반추하는가 봅니다  그대와 나의 그림을 인화지에 남기고 싶지만  그러지 아니하는 깊은 맘을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그대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찍어도 보고 싶습니다  (백운호·시인) + 희망사진관  단지 그렇게 기억되고 있을 뿐  결국 방향이 없는, 그리하여 종말이 없는, 단 한 번도 인화되지 않은 것들이 추억일까  어느 정지된 순간에 대한 덧없는 집착이 희망의 정체였을까  서울 출장길 늦은 귀가의 택시 속에서 만난 신안동 고갯길  희망사진관의 입간판이 낯설다; 아니, 정확히 말해  희망이란 낱말이 왠지 낡고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길거리로 향한 형광 불빛 속에 드러난 사진의 얼굴들은  어찌하여 모두들 오래 행복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 많은 잊고 싶은 것들 속에서도  저처럼 끄떡없이 변치 않은 열망들로 살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 죽도록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마저도 없는 내게 지금 묻는다면,  내가 짓뭉개고 외면해온 시간의 흔적들밖에 더 말할 게 없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 마음속으로  여전히 아니라고 도리질치며 지나가는 매서운 북풍소리  가장 가까운 것들조차 따스하게 대하지 못했던 불구의 시간들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보라, 그러니 저 사진틀 속에 영원히 멈춰 있는 것들조차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건 오히려 미처 드러나지 못한 요청이었을 뿐  여전히 우릴 살아 불타게 하는 것들은  저 스러질 듯 서 있는 현실의 희망사진관 너머  아직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은 낯설음 속에  모든 희망들이 추문이 된 바로 이 세월의 그리움 속에  끝내 지워지지 않을 무모한 절정의 섬광들로 빛날 뿐 (임동확·시인, 1959-)
1465    디카시 모음 댓글:  조회:4280  추천:0  2015-09-12
  섬     마음을 비우고 미움을 버리고   섬으로 가는 배는 무겁지만 돌아오는 배는 가볍다     모두 거울 앞에서 달라진 모습을 비춰본다               섬 2   도심에 있을 땐 섬이 그립더니   망망한 바다에 떠 있으니 육지가 그립구나         섬 3     우리는 섬이었다 수많은 섬들이 떠돌았지만 그대를 놓을 수 없는 건 수면 아래 뿌리가 너무 깊어서이다             별   그 섬에 가면 별들이 내려와 어둠을 씻는다   지친 그들에게   하얀 포말이 몰려와 어루만진다             등대   그는 바위섬에 서서 어두운 항로를 멀리 비추는데 나는 벽 앞에서 앞가림에 급급하구나                                         海女 어머니                출렁이는 물결에 테왁 하나 띄워놓고              깊은 물질에, 길게 내뿜는 숨비소리                     아직도                  꽃무늬 몸뻬에 분홍 내복을 입는                 어머니의 마당은                   언제나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도시의 섬 city island       새 둥지보다 더 높은 그 곳 버튼만 누르면 스르르 사닥다리가 올라가는 곳       하늘과 더욱 가깝지만 밤이면 눈이 부셔 별은 잘 안 보이는 곳       나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고 고기 몇 마리 잡아서 밤이면 노를 저어 그 섬으로 간다  
1464    디카시란? 댓글:  조회:4801  추천:0  2015-09-10
[ 2015년 09월 11일 08시 53분 ]     @@ "전쟁이 없었다면 난민도 없었을 것이다."  ------------------------------------------------------------------------------------------- ====================================================== 1. 시의 뜻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운율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 2. 시의 3대 요소 ⑴  음악적 요소 : 시에 깃들어 있는 소리에 의해 나타나는 요소. 운율을 말한다. ⑵ 회화적 요소 : 시에 나타나는 형상에 의해 나타나는  요소. 심상을 말한다. ⑶ 의미적 요소 : 시에 담겨져 있는 뜻에 의해 나타나는 요소. 정서와 사상을 말한다. 3. 시의 형식적 요소 ⑴  시어 : 시에 쓰인 말. 운율, 심상,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⑵ 시행 : 시의 한 줄 한 줄 ⑶ 연 : 시에서 한 줄 띄어 쓴 한  덩어리 - : :시어  : :시행  : :연  : :시 ⑷  운율 : 시어들의 소리가 만들어 내는 가락  : : : : : 4. 시의 내용적  요소 ⑴ 주제 : 시에 담긴 지은이의 느낌이나 중심되는 생각. 주로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⑵ 소재 : 주제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글감 ⑶ 심상(image) : 사람의 여러 감각을 자극하여 마음 속에 감각했던 것을 다시 기억하여 재생시키는 것 5. 시의 운율 시에  있어서 음악성을 나타나 해 주는 것으로 자음과 모음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韻과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律格으로  나뉜다. ⑴ 운율의 갈래 ① 외형률 : 시어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생기는 운율로 시의 겉모습에 드러난다. 정형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음수율 : 시어의 글자수나 행의 수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는 데에서 오는 운율 - 음위율 : 시의 일정한 위치에 일정한  음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만드는 운율.  :일정한 음이 시행의 앞부분에 있는 것을 두운, 가운데 있는 것을 요운, 끝 부분에 있는 것을  각운이라고 한다. - 음성률 : 음의 길고 짧음이나, 높고 낮음, 또는 강하고 약함 등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만드는  운율 - :음보(音步) : 우리 나라의 전통시에서 발음 시간의 길이가 같은 말의 단위가 반복됨으로써 생기는 음의 질서. 보통 띄어  읽는 단위가 되는데 일반적으로 평시조는 4음보격, 민요시는 3음보격으로 되어 있다. (즉, 3.4조니, 4.4조니 할 때의 시는 3 4음절이  하나의 음보를 이루고, 이것들이 3번 내지 4번 반복되어 하나의 큰 休止를 가져 온다는 뜻이다) ② 내재율 : 일정한 규칙이 없이 각각의  시에 따라 자유롭게 생기는 운율로 시의 내면에 흐르므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자유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⑵ 운율을 이루는  요소 ① 동음 반복 : 특정한 음운을 반복하여 사용 ② 음수 반복 : 일정한 음절 수를 반복하여 사용 ③ 의성어, 의태어 사용  : 감각적 반응을 일으킨다. ④ 통사적 구조 : 같거나 비슷한 문장의 짜임을 반복하여 사용 6. 심상의  갈래 ⑴ 시각적 심상 : 색깔, 모양, 명암, 동작 등의 눈을 통한 감각 : 알락달락 알록진 산새알 ⑵  청각적 심상 : 귀를 통한 소리의 감각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⑶ 후각적 심상 : 코를 통한 냄새의  감각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⑷ 미각적 심상 : 혀를 통한 맛의 감각 :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도 구수하고  ⑸ 촉각적 심상 : 살갗을 통한 감촉의 감각 :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⑹ 공감각적 심상 : 동시에 두 감각을 느끼는 것 : 분수처럼 쏟아지는 푸른 종소리 7. 심상의 시적 기능   : : : ⑴ 구체성 : 단순한 서술에 비해 대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⑵  함축성 : 시어의 의미와 느낌을 한층 함축성 있게 나타낼 수 있다. ⑶ 직접성 : 감각을 직접적으로 뚜렷이 전달할 수 있다.   : : : : : : : 8. 시의 갈래 ⑴  형식상 갈래 ① 정형시 : 형식이 일정하게 굳어진 시 - 음수적 정형시 : 글자의 수가 일정한 시. 7·5조, 4·4조, 오언시  등 - 시행적 정형시 : 시행의 수가 일정한 시. 향가, 소네트(sonnet) 등 ② 자유시 :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은 시 ③ 산문시 : 행의 구분이 없이 산문처럼 쓰여진 시. 운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산문과 구분된다. ⑵ 내용상  갈래 ① 서정시 : 개인적인 정서를 읊은 시 - : :서경시 : 자연 풍경을 주로 읊은 시로 서정시에  속한다. ② 서사시 : 신화나 역사, 영웅들의 이야기를 길게 읊은 시 ③ 극시 : 사건의 전개를 대화 형식으로 쓴 시. 운문으로 된  희곡 ⑶ 성격상 갈래  ① 순수시 : 개인의 순수한 서정을 중시한 시 ② 사회시(참여시) : 사회의 현실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시 9. 서정적  자아 지은이와는 별도로 시 속에서 말을 하는 사람으로 1인칭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에서는 어떤 남자  어린이가 서정적 자아가 될 것이고, 이육사의 [광야]에서는 지사적이고 예언자적인 남성이 서정적 자아가 될 것이며, 우리 민요 [아리랑]의 서정적  자아는 임과 이별하는 애달픈 여인이 될 것이다. 10. 어조 어조를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라고 한다면 그 목소리는 강하거나 약하거나,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거나 하는 어떤 가락을 지닌다. 이  때의 시의 서정적 목소리를 어조(Tone)라고 한다. 따라서 어조는 시인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시가 어떤 어조를 갖는냐에 따라  독자는 남성적 여성적, 또는 강건 온화 우아 비장 등의 다양한 목소리를 체험하게 된다. 11. 시의 상징 ⑴ 관습적 상징 : 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쓰여져서 널리 인정되는 상징 : 비둘기 → 평화, 십자가 →  기독교, 월계관 → 승리 등 ⑵ 창조적 상징 : 개인에 의해 만들어져서 문학적 효과를 발휘하는 상징.  :작품이나 작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12. 시적 허용 시에서 구사되는 어휘는 함축적이고 암시적일 뿐만 아니라, 문법적 측면에서 허용되지 않는 표현도 자유로이  사용된다.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그리움과 아쉬움에 ) 13. 시어의 모호성(다의성) 한 개의 시어, 또는 문장 구조 속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시어가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므로 오히려 시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한다. ========================================================= '디카시'는 휴대전화나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거기서 얻은 영감들을 나열해 놓은 시로 보면 된다. 다시 말해 디카로 시적 형상을 찍어 문자로 재현한 새로운 장르의 시다.   곧, 사진매체와 시적 문자의 혼합이라 볼 수 있다. 이때 양자는 결코 다른 주와 부의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것, 곧, 양자가 모두 주인 체로 연관성을 지니는 매체이다.   흔히,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대한 시적 화자의 독백이 주를 이룬다. 현대세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신 장르라 할 수 있다. -----------------------------------------------------                                  SNS와 디카시(詩)                                                                                                                             이상옥         1. 들어가는 말   지난 8월말 현재 스마트폰 가입자가 3000만명 시대가 열린 가운데 한국에서는 12월 19일 대선을 앞두고 SNS를 활용한 온라인 표심몰이가 한창이다. SNS는 특히 2008년 미국의 대통령선거 때부터 이슈가 되었다. 당시 오바마 후보는 경쟁상대에 비해 조직이나 자금력에서 열세였지만 트위터를 이용, 13만 명 이상의 친구를 맺고 빠른 시간 내에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선도하는 SNS 시대에 정치를 비롯한 경제, 사회,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엄청남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SNS 시대가 되면서 문학작품도 한국에서는 이미,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의 메일링 서비스, 가령 ‘안도현의 시 배달’, ‘성석제의 소설 배달’ 등처럼 그림과 사진, 플래시, 애니메이션 등을 활용하여 영상과 문자가 결합되는 새로운 멀티미디어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가령, 카카오스토리(카톡)이나 트위트,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할 때 문자만으로 하는 것보다 영상+문자로 하는 것이 더욱 실감나는 SNS 시대에 새로운 시운동인 디카시에 대해서 논의해보기로 한다.   2. ‘디카시’의 공론화와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 街道)』   디카시라는 용어는, 2004년 4월에 인터넷 한국문학도서관 개인서재(필자) 연재코너에 서 최초로 ‘디카시’라는 이름으로 2달간 연재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필자는 동년 4월 2일부터 6월 19일까지 약 2달간 50편의 디카시를 발표했다. 이때는 스마트폰 같은 것이 나오지 않던 때라 디지털카메라로 찍고 문자로 옮겨서 그것을 컴퓨터로 서재에 올렸던 것이다.   얇은 속옷 같은                                                                                                                                             어둠이 은은히 드리워진 봄밤의 캠퍼스 늦은 강의동 몇몇 창들만 빤히 눈을 뜨고 -이상옥,   이 당시 필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고성에서 마산으로 출퇴근하던 시절이었다. 디지털카메라를 하나 사서 출퇴근하면서 특별한 느낌의 풍경을 디카로 찍고 그 느낌을 문자로 옮겨서 컴퓨터를 통해 인터넷 서재에 탑재했다. 인용 작품이 디카시로서는 첫 작품이다. 왜 이런 작업을 했느냐 하면, 전부터 자연이나 사물 속에서 문득, 저건 문자의 옷을 입지 않아서 그렇지, 온전한 시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저걸 그대로 옮기면 시인데, 내가 화가라면 그대로 옮길 수 있을 텐데,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있었다. 그러는 중에 마침 디지털카메라가 일상화되면서 디카로 저걸 포착하면 되겠다싶어서 자연이나 사물에서 문득 시적 감흥이 떠오르면 그것을 디카로 찍고, 문자로 재현해내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작업이 2달 남짓 50편의 디카시를 쓰게 되고 그것을 2004년 9월에 문학의 전당에서 최초로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 街道)』를 출간하게 되었습다.           이 디카시집을 출간하면서 시집 후기에 나름대로 디카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소박하지만 역시 최초로 디카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처음으로 밝혔니다. 좀 길지만 첫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인용하겠다.   문덕수 시인이 "시는 언어예술이면서도 언어를 넘어선다"고 지적한 바 있듯이, 오늘의 시는 기존의 시론이나 틀 속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다. 시는 언어를 넘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디카시는 '언어 너머 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한 시다. 따라서 '디카시'는 단순한 시와 사진이 조합된 시사진(시화)이 아니다. 디카로 찍은 사진은 '언어 너머 시'다. 다시 말해 시의 노다지다. 금은 금광 깊이 파고 들어가서 채취하기도 하지만 사금 같은 경우에는 금덩어리로서 산출되기도 한다. 문자시가 전자의 경우라고 하면, 디카시는 후자처럼 시의 노다지를 언어 너머에서 발견한 것이다. 시는 '언어 너머'에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출근하는 길 차창에 비치는 자연의 풍경이 어떤 때는 완연한 시의 형상인 것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언어 너머 존재하는 시의 형상, 저걸 어떻게든 담아야 할 텐데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다 디지털카메라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지난 4월초부터 디지털카메라로 '언어 너머 시'를 찍고 문자로 재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디카로 '언어 너머 시'를 포착하고 나면 그 다음날 학교에서 문자로 재현하여 「한국문학도서관 이상옥 서재」에 올리는 작업을 신바람 나게 하면서, 그것을 '디카시'라고 명명하고 마치 '디카시'의 전도자라도 된 양 학생들에게나 일반인들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디카시의 개념과 매혹을 선전·선동(?)했다. '디카'로 찍은 언어 밖의 시를 문자로 재현하는 작업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디카에 찍힌 시를 불러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문자시를 쓸 때의 상상력과는 다른 국면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신의 말씀을 듣는 예언자처럼 그대로 기록하고 전파하면 되는 일이다.   3. 개인 실험에서 장르개념으로 확대   2004년 9월 15일 디카시집『고성 가도(固城 街道)』를 출간하고 이어서 9월 17일 포털 다음에 ‘디카시 마니아’라는 카페를 개설하면서 개인의 실험을 넘어 디카시는 하나의 시문학 운동성을 띠게 되었다. 카페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고, 디카시에 대한 공론화가 온라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디카시의 시론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2004년 10월 16일 목원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어문학회 가을 학술대회에서 「디카詩의 가능성과 창작방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디카시집 후기에서 소략하게 밝힌 디카시론을 좀더 진전시켰다. 작금의 문학의 위기가 문자문화에서 디지털 문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고, 이에 문학은 변화된 환경에서 스스로 '몸 바꾸기'를 해야 한다면, 여기서 영상과 문자 결합의 디카시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그리고 디카시의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디카시는 관념이나 언어 이전의 '날시(raw poem)'를 순수직관의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그대로 문자로 재현하는 것, 즉 날시(raw poem)'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문자시와는 달리 짧고 압축된 문자로 드러내어 시사진(포토포엠)과는 달리, 날시성(feature of raw poem)을 띠면서 '극순간성', '극사실성', '극현장성', '극서정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었다. 디카시집에 대한 서평도 게재되었다. 2004년 《다층》겨울호에 김정희 시인이 「고성가도, 극순간을 달리다」를 발표했고, 2004년 《시와 상상》하반기호에 박서영 시인이 「직관이 불러온 詩를 받아쓰다」를 발표했다. 디카시가 문예지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공론화된 것은 2005년 《월간문학》2월호에서다.   범박하게 말해서 한 편의 시를 다양한 매체, 그러니까 음악이나 영화, 무용, 만화 등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일종의 종합적인 소통 방식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방식과 경로를 통해 시를 전달한다는 것은 단순히 활자 매체의 전달 방식을 벗어났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방식에 맞춘다는 의미도 될 것이고요, 시 쓰기의 과정이 지닌 가치를 정당하게 경제적 이익으로 환치시키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경기 시인이 ‘마고 신화’를 무대에 올린다거나 고창수 시인이 ‘시네 포엠’을 시도하는 것, 이상옥 시인이 ‘디카 시’라는 개념을 적극 차용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시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1)     문예지 권두좌담에서 디카시가 공론화된 이후 디카시론 정립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다른 이론가들도 디카시 담론을 펼침으로써 디카시가 최근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점차 정착된 것이다. 주2) 이와 같은 디카시의 진전은 그동안 디카시 운동에 기인한 바 크다. 가령 디카시전문 잡지의 창간과 디카시페스티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디카시를 하나의 장르개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시인들이 디카시를 써서 발표할 지면이 필요했다. 그래서 디카시 전문 무크지 《디카詩 마니아》를 2006년 6월 1일 창간하여 필자 편집인을 맡아 창간기념 대담으로 김열규 교수와 디카시 대담을 나누었고, 디카시 필진으로 시론 교수인 강희근, 양왕용, 윤석산, 박명용, 신진, 이승하, 박주택, 김완하, 오정국 교수와 문학잡지 편집인인 김규화, 정한용, 정일근, 변종태, 권갑하, 배한봉, 박강우 시인과 그리고 유안진, 박노정, 홍성란, 최춘희, 유성식 등 화제의 시인들을 선정했다. 이런 방식으로 무크지 2호를 한 번 더 내고는 또 한편 디카시 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 것은 도서출판 ‘디카시’라는 출판사 등록을 하고 2007년 12월 31일에 도서출판 디카시에서 기존의 무크지 《디카시 마니아》를 반년간 《디카詩》로 바꾸어 디카시 정기간행물 시대를 열어 2012년 현재 통권 10호를 발행했다. 디카시 전문지에 참여한 유수의 시인들이 200명은 된다. 2008년 9월 27일에는 제1회 경남 고성 디카시페스티벌 개최를 개최하여 디카시 대중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디카시는 지역문화운동으로 경남 고성을 발상지로 내세운 것이다. 고성군의 지원을 받아 디카시전, 디카시 백일장, 디카시의 밤 등을 콘텐츠로 하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디카시 백일장이다. 종이와 펜 대신 디카 내장의 휴대폰으로 지정된 메일에 전송하는 방식이었는데, 디지털이 백일장 문화까지 바꾼다고 해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디카시 백일장은 더욱 활성화될 수 있는 환경을 맞았다.       가을바람이 살근살근 발바닥을 간질이나보다 푸하핫! -이은호, 「웃음」   2010년 경남 고성 디카시 페스티벌 초등부 최우수작이다. 순간 포착의 디카시의 특성이 잘 드러난 수작이다. 이렇듯 디카시 백일장은 기존의 아날로그에 의존한 문자시와는 달리 디지털 시대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한편 디카시 페스티벌 중에 강연회, 세미나 등도 개최하여 디카시 이론 정립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2008년 처음 시작한 디카시 페스티벌은 해마다 개최되면서 더욱 다양한 콘텐츠로 발전되었다. 디카시는 2009년, 2010년, 2011년에 걸쳐 서울시 주최의 ‘시가 흐르는 서울’에도 초정 받았고, 또한 농어촌희망재단의 지원을 받아 고성생명환경농업 디카시체험한마당, 2012 디카시-함안 등의 행사를 가졌다. 2012 경남 고성 공룡세계엑스포에서는 처음으로 디카시공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너, 찾아오는데 수억 년의 시간 그림자 건너왔기에 너, 만나고 돌아가는데 다시 수억 년의 빛살 지나가야 하리 처음 만난 그 호숫가 떠나 자드락길 따라 백악기에 발자국 남기고 육탈골립(肉脫骨立)하여 당도한 초식 공룡의 오래된 사랑, 미래에서 찾아온 따뜻한 발 -김경식, 「따뜻한 발」   공모전 최우수작이다. 삼금이 500만원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작품은 뭉퉁하고 흰 공룡의 발을 통해서 “따뜻함”을 읽어내고, “오래된 사랑”을 읽어낸 후 그것을 “미래에서 온 따뜻한 발로”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무튼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디카시 이론도 차츰 정립이 되고, 또한 디카시가 유수의 시인들에서부터 애호가들에게 확산되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온라인상에 디카시 동호인 모임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대학의 문학개론 등의 강좌에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한 장르로 소개되면서 대학생들이 디카시 관련 리포트도 쓰게 되고, 또한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학생들이 디카시를 활용한 시창작 지도방법론을 모색해보는 등도 그 일례가 된다. 디카시는 필자 개인 실험을 넘어서 이제는 SNS 시대의 새로운 시의 한 장르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4. SNS와 시의 진화   우선 디카시는 포토포엠과 구별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온라인상에 유명 시인들이 쓴 시에다 그것과 어울리는 사진을 덧붙여 시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양식이 이른바 포토포엠이다. 많은 사람들이 디카시를 포토포엠과 혼동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포토포엠은 문자시와 사진의 단순 조합이기 때문에 시는 시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독립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시는 시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고 사진은 사진대로 완결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디카시는 사진과 문자의 결합으로 완결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디카시에서 사진과 문자(시)는 각각 독립성을 지니지 못한다. 디카시는 SNS 시대의 시의 새로운 진화이다. 인간은 언어나 몸짓, 그림, 기호 따위로 서로의 의사나 감정, 생각을 주고받는 일, 즉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미디어를 사용해왔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미디어 기술의 진화사라고 말하는데, 멀리 고대의 그림문양에서부터 최근의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미디어 기술은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 가장 영향력을 떨친 것은 역시 문자 미디어였으나 최근 스마트폰이 환기하듯이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새로운 소셜네트워크로 쌍방향 실시간 소통이 두드러지는, 단순 문자 미디어보다는 문자+영상을 기초로 멀티미디어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주3)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맥루언의 말처럼 SNS로 표상되는 뉴미디어 시대에는 시도 몸 바꾸기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면, 디카시는 SNS 시대의 새로운 시의 한 모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월 8일(월) 창신대학교 채플 시간에, 전 세계 82개국 빈곤지역에 해외구호개발 봉사단인 기아봉사단을 파견하여 굶주린 이들에게 식량과 사랑을 전하고 생존과 자립을 돕는 국제구호개발NGO 기아대책을 소개하는 소울 싱어즈 공연이 있었다. 위 파일은 공연장소인 강당 앞에 전시한 액자를 찍은 사진이다. 이 액자는 사진과 짤막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 사진 밑에는 “필리핀 빠야따스 지역의 쓰레기 마을입니다./학교에 가고 싶지만 생계를 위해 오늘도 쓰레기를 주어야 합니다.”라는 글귀가 달려 있다. 이렇듯 근자에는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영상 글쓰기가 대세다. 디카시는 일상적인 영상 글쓰기를 예술 글쓰기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점에서 최근 문덕수는 스마트폰을 활용한 디카시 쓰기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지적을 했다. 주4)  디카시에서 디카가 시쓰기의 주체인가, 아니면 단지 보조기구인가요? 정답은 주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조기구(원고지나 펜 같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TV나 컴퓨터가 안방에 들어와 있는 판에 과학기기가 시 쓰기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문덕수는 디카시는 기호시라고 본다. 디카시에서 사진도 기호이고 언어로 표현된 문자도 기호라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기호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소쉬르와 미국의 퍼스를 든다만, 퍼스는 기호의 세계를 더욱 폭넓게 보았는데, 퍼스는 언어뿐만 아니라 사진을 포함한 영상이나 도상, 길바닥이나 눈 위의 발자국 같은 것을 모두 기호로 보았다는 점에서, 퍼스는 이 세계는 기호로 충반한 세계라고 인식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다 기호인바, 퍼스는 “기호 처리의 프로세스로서 인간”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문덕수는 퍼스가 시인도 기호체계의 한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자로 이해하지 않았는지 생각된다고 지적했다. 주지하다시피 기존의 시는 언어예술로서 언어기호만을 주된 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카테고리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없지 않았다. 구체시(concrete poetry)처럼 쇠를 비롯한 자연 재료를 이용해 시적 표현을 시도한 것 같은 과격한 시도도 있었다. 한국에도 80년대 황지우에 의해 실험되었던 형태시 같은 경우 독일의 구체시 운동에 뿌리를 두고 전통적인 시형식의 해체와 전복을 양식화함으로써 내용과 형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전위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탈언어적 상상력은 디지털 환경과 만나면서 사진, 그림, 만화, 플래시, 동영상 등이 결합된 상호텍스트적 양상으로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는 황지우 이후 지난 90년대 초반 대중문화 또는 하위문화의 시적 수용에 있어서 단순한 제재로서의 수용에 머물렀던 것과는 달리,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한 현대시의 상화 텍스트성은 디지털 환경 자체를 시 쓰기의 도구로 활용하는 적극적인 교섭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바, 그 대표적인 양상이 디카시와 포토포엠이다. 주5) 문덕수와 하상일의 논의에서도 드러나듯이 SNS 소통환경에서 디카시는 언어예술을 넘어 멀티언어예술로서 시의 언어 카테고리를 확장한 분명한 시의 진화라 할 수 있다.   5. 맺는 말   디카시는 구체시 같은 서양적 전통 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동양적 시학에서도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최근 홍용희도 지적한 대로 디카시는 회화와 시가 어우러진 시화본일률(詩畵本一律)에 바탕한 문인화의 전통을 환기한다. 문인화의 ‘시는 말하는 회화이고 그림은 말하지 않는 시’라는 미의식에서 그림의 자리에 디카 사진을 대체한 것으로 디카시를 이해할 수 있다. 주6) 김열규는 《디카시 마니아》 창간호 기념 대담에서 디카시에서 ‘즉흥(卽興)’을 주목했다. 김열규는 시에도 즉흥이 있고, 음악에도 즉흥이 있는데,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이 즉흥곡(卽興曲)으로, 인류예술사에 늘 즉흥이 존재되어 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즉흥의 발언권이 디카詩를 통해서 문득 더 커진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디카시가 기존의 문자시와 달리 시인이 머리 싸매고 상상해서 쓰는 게 아니라 자연이나 사물이 던지는 말을 그냥 순간 받아적듯 쓴 것으로, 디카시는 문자시에서 말하는 착상이 곧 완성이 되는 것이다. 문자시는 착상하고 그걸 묵혀서 상상하고 또 상상해서 빚어내면 그걸 다시 퇴고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만, 디카시는 사물과 만난 순간의 감흥을 순간 포착하여 곧바로 SNS로 실시간 순간 소통하는 것이 이상이다. 이런 점에서 박찬일은 “시적 장면”(혹은 시적 형상)의 “포착”은 전통적인 창작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시적 충동’과, 혹은 ‘詩魔’와, 다를 바가 없다고도 했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충동으로 시적 충동을 불러일으킨 자연이나 사물에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게 하고, 시인은 그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문자(시)로 짧게 재현한다는 관점이다. 여기서 ‘시적 충동’이나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에 대한 충동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로 신의 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주7) 한편 디카시가 사물에서 촉발되는 감흥을 시적 언어로 재현해 이미지와의 의미 결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디지털카메라를 활용한 전통시론에서 말하는 ‘정경교융’의 새로운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주8) 결론적으로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디지털카메라로 포착하고, 다시 문자로 재현하여 ‘영상+문자’로 표현하는 SNS 시대의 새로운 시이다. 따라서 디카시는 단순히 사진과 시의 접목으로 구현되는 기존의 포토포엠과 뚜렷이 구분되는 새로운 예술 갈래이다. 문자시가 활자라는 하나의 대상에 의존하고 포토포엠이 이미지와 활자의 단순한 형태적 결합에 주력하는 것이라면 디카시는 활자와 이미지라는 두 개의 대상을 하나의 의미적 텍스트로 완성하는 표현 양식이다. 디카시는 이미지를 통해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와 활자로 재현된 의미망 사이에 폭넓은 행간을 지니는 것이다. 그 행간의 의미를 정서적으로 창조해내는 것이 디카시가 추구하는 예술성이다. 앞으로 디카시가 SNS를 통해 예술의 일상화, 일상의 예술화를 주도하는 갈래로 자리잡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각주)     1)《월간문학》(2005년 2월호) 권두좌담 「21세기 우리 시, 다시 언어를 생각한다」 2)이후 나는 《시문학》(2005년 4월호)에 「디카詩의 쟁점과 정체성」 등의 디카시 담론을 여러 지면 펼쳐서 디카시론집 『디카詩를 말한다』(詩와 에세이, 2007), 『앙코르 디카詩』(국학자료원, 2010)을 펴냈다. 또한 문덕수의 「무사상시 이야기-이상옥의 디카詩를 중심으로」를 비롯하여 송용구, 강희근, 박찬일, 김종회, 김석준, 차민기, 홍용희 제씨들이 디카시에 대한 메타비평을 하여 디카시 담론이 확장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논의들의 결과 현대문학사로는 채호석의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두리미디어, 2009)가, 시론으로는 김혜니의 『현대시론 다시읽기』(푸른사상, 2012)가 각각 디카시를 새로운 장르로 다루었다. 3)이상옥, 「다문화 시대 대중문화 미디어로서 디카시」, 계간《시산맥 》2011년 여름호, 참조. 4)문덕수,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월간《시문학》2012년 10월호 5)하상일, 「현대시의 디지털화와 소통양식의 변화」, 남송우 외, 『문학과 문화, 디지털을 만나다』(산지니, 2008),pp.134-135. 6)홍용희, 「네오휴머니즘의 생태 시학과 디카시의 가능성」, 2012 디카시(詩) 함안 세미나 자료집 참조. 7)박찬일, 「시와 소통」(창신대학 주관 디카시 세미나 발제문, 2007. 10. 26) 8)차민기, 「전통 시론詩論으로 풀어본 ‘디카시’」, 계간《시와 경계》2012. 가을호.         참고문헌   《월간문학》, 2005, 2. 문덕수,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월간《시문학》,2012. 10. 박찬일, 「시와 소통」, 창신대학 주관 디카시 세미나 발제문, 2007. 10. 26. 차민기, 「전통 시론詩論으로 풀어본 ‘디카시’」, 계간《시와 경계》,2012. 가을. 이상옥, 「다문화 시대 대중문화 미디어로서 디카시」, 계간《시산맥 》, 2011년 여름. 하상일, 「현대시의 디지털화와 소통양식의 변화」, 남송우 외, 『문학과 문화, 디지털을 만나다』, 산지니, 2008. 홍용희, 「네오휴머니즘의 생태 시학과 디카시의 가능성」, 2012 디카시(詩) 함안 세미나 발제문.  
1463    하이퍼시 - 역설의 시 댓글:  조회:4300  추천:0  2015-09-10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문덕수     [1] ‘디카詩’의 창시자는 누구일까. 신(神)의 유무보다는 디카시의 창시자의 누구냐의 물음엔 한 가지 대답밖에 없으니 더 쉽습니다. 디카시의 창시자라는 말에 “창시자” 그 동격어 “이상옥”이라고 하면 대답하면 되겠습니다만 말하자면 디카시의 창업자는 이상옥입니다.   [2] 디카는 “디지털 카메라‘의 준말입니다. 우니라에도 생산되고 있고, 이제는 스마트폰에도 장착되어 있으므로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과학기기인 이 디카가 시쓰기의 주체인가, 아니며 단지 보조기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주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조기구(원고지나 펜같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TV나 컴퓨터가 안방에 들어와 있는 판에 과학기기가 시쓰기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버스, 지하철, 비행기, 승용차 등 인간은 과학기기의 사용이 없으면 생활이 안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디지털 카메라가 시와 결부될 수 있음도 불가피한 시대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에 등 돌려서 현대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3] 가만히 들여다보면 디카시는 기호시임을 깨닫게 됩니다. 『디카시마니아 24인사화집』(2012, 도서출판 디카시)에는 이상옥의 디카시 「숙명」(The Fare)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는 망가지고 있는 나무 뿌리 등의 사진 옆 페이지에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Breaking down mybody now I go to you)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내 몸 부수어” “너” 가 가장 요점이 되는 어구인 것 같습니다. “내 몸 부수어”는 많은 함축(含蓄)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랑의 주체인 “나”, 가장(家長)으로서의 나, 제자들의 스승으로서의 나, 역사(歷史) 속의 한 주체로서의 나, 주인이 아닌 봉사자로서의 나 등이 그러한 연상의 목록입니다. 이렇게 제시해 내놓고 보니 그 나열이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호화해 가는 목적적 존재를 “너”라고 했습니다. “너”는 분명히 남(他者)입니다만,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수한 “남”으로 둘러싸여 공생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의지를 내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존적 삶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의 의지에 의해 사는 존재입니다. 어쨌든 이 “나”는 앞에서 “나”의 경우에 열거한 그러한 나와 대등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너”의 대응 관계로 수용할 때 이상옥의 디카시는 1차시입니다만, 그 함축과 내포는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카시가 언어로 기록되건 사진영상으로 촬영되건 그것의 1차적, 기본적으로 사물시와 동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디카는 하이퍼 시와 첫걸음을 함께 내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이퍼와 디카는 같은 스타트라인에서 같은 신호로 함께 출발합니다. 여기서 사물시와 디카시는 일치합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제시된 ‘사진’도 기호(記號)이고, 언어로 표현된 디카시 문자도 “기호”라는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기호라고 하면 프랑스의 소쉬르(1857~1913)와 미국인 퍼스(1839~1914)의 두 사람을 듭니다만 기호의 세계를 더욱 폭넓게 본 사람은 퍼스인 것 같습니다. 퍼스는 언어 뿐만 아니라 “사진”을 포함한 영상이나 도상, 길바닥이나 눈 위의 발자국 같은 것을 모두 기호로 보았습니다. 퍼스는 이 세계는 기호로 충만한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다 기호이지요. 퍼스는 다만 “기호 처리의 프로세스로서 인간”을 이해했습니다. 아마 시인도 기호체계의 한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자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반사된 빛이 눈의 망막에 도달하는 순간, 일련의 감각이나 인지적(認知的) 기능이 마치 연못의 둑을 끊은 것처럼 흐르는 것— 이것이 경험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사진의 어떤 부분에 집중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어지럽게 이동하는 색이나 윤곽이나 형태를 즉시 감각신호로 변환시켜 후두부에 있는 시각야(視覺野)라고 불리는 뇌의 영역에 보내집니다. 거기서 특징들이 분석되어 그 결과가 대뇌피질(大腦皮質)의 많은 영역을 이동시킵니다. 그러한 활동분야의 하나가 피질의 중앙에 위치하고 근운동(筋運動)의 중추 역할을 맡은 운동야(運動野)입니다. 여기서 눈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근육을 움직이는 지령이 나와, 눈은 사진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눈이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향하게 하는 과정이 몇 백 번 되풀이됩니다. 한 번 얻은 상(像)은 피질의 뉴런 네트워크로 보여지며, 그때까지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연결되고, 사진에 대한 해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뇌가 행하는 사진(그림 포함) 이해의 프로세스를 인지 과학자 R L. 소쉬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이라는 물리 현상에서 시작하는 ‘그것이 감각 신호로 바뀌는 그 처리를 거친 특징이 추출되어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 지식도 참조하면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상옥의 디카시가 망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디키시는 많은 내포가 다양하게 응축된 디카시의 전형인 것 같습니다. 사화집 『너머』(Beyond Over)는 대분분 이와 같은 보편적 레벨에 도달한 디카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5] 그런데 이상옥의 「숙명」을 잘 들여다보면, 그 해석은 단지 나무 밑둥이 부서지고 있는 붕괴현상만이 아니라 현상이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와 형이상의 세계(形而上世界)를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이해는 디카시의 형이하적 특징과 형이상적 특징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여 무척 흥미롭습니다. 나무 밑둥의 붕괴는 풍화작용인지, 세균의 잠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시간의 먼 지평 속에서 변호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인도인(특히 힌두교도)은 모든 만물은 시간상에서 변화하며 여러 가지 존재의 직접적, 간접적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서 변화한다라고 한, 그 위대한 사상체계의 “연기설”(緣起說, Pratitiya-samurāda)을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한(漢)나라를 세운 유비도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상옥의 디카 사진을 잘 봅시다. 산에서나 길가에서, 나무 밑둥지가 부서져가는 현상을 흔히 발견할 수 있고, 이 현상에서 흙구덩이 속의 인체도 결국 이런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체의 경유, 균이나 박테리아가 흙 속에서 겨드랑이나 허벅지 등을 먼저 먹게 되겠지요. 사물인식은 가정,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나무밑둥이라는 물체의 내면의식세계가 형성됩니다. 사물은 감각성, 시각성, 외부성 등의 욉줙 존재입니다만, 동시에 내면의 영혼적 무의식적 무한성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있음 esse)는 있는 것(ens, 개별 사물 존재)의 시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물을 외면이나 내면의 한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외부적 존재로 보고 동시에 내면세계를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지닌 α위상과 β위상의 이중을 본다는 뜻이 되고, 또 이렇게 보아야만 사물 전체를 본다는 것이 됩니다. 이상옥이 있는 것(ens), 즉 「숙명」을 통해서, 우리가 가정→역사의 영역에서 가지고 있는 정보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사물의 내면성도 동시에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옥의 「숙명」의 밑둥은 흙 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꽤 깊이 박힌 듯합니다. 지표에서의 윗부분이 갈라져 부서지고 있으나, 아마 그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꿈쩍 않고 대지(大地)를 물고 호흡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숙명」이 지닌 형이하적(形而下的) 특질인 것입니다만, 한편 부서짐의 과정을 통하여 껍질이 벗겨지고 나무의 육질이 파삭파삭해지면서 그 영혼이라고 할까 정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형이상적(形而上的) 세계로 차원이 다른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역사 너머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즉「숙명」이라는 디카 영상은 형이하와 형이상에서 초월을 동시에 공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디카시는 이러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고, 여기서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짙은 공통 관련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라는 일행시에서도 형이하와 더불어 여기서 초월하려고 하는 형이상의 몸짓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서진다”(망가지다, 붕괴핟, 변화한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6] 마지막으로 두 장르의 통합단계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즉 디카 영상과 언어예술의 두 단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디카시는 디카 영상과 언어시와의 두 존재를 포함하고 있고 두 단계가 통합해서 다르나 같은 의식적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합니다. 통합 단계는 두 장르가 “서로 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세계(시 세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두 장르의 관계는 접근, 영향, 융합 등의 상생(相生) 공발(共發)의 관계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먹어버리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디까지 상생공존의 발전 관계를 맺고 더 높은 하나의 통합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형이하적 관계와 형이상적 관계가 엄존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먼저 형이하적 관계부터 보겠습니다. 형이하적 관계는 사물의 감각적, 가시적, 외부적 관계에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한 외부적 배치에 의하여 하나의 가시적 이미지(즉 사물존재로서의 이미지, 그러니까 β위상의 관계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이루게 되면, 그러한 가시적인 두 이미지가 융합되어서 서로 보완하여 하나의 더 높은, 더 완성된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형이하적 세계, 즉 물질세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은 형이상적 단계로 상승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디카시라고 하는 통합적 장르가 비로소 “의의”(意義: 의미보다는 높은 의미의 세계로 연결된다는 뜻)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의의주제에 접근한 가장 높은 뜻으로 뭉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형이상적 통합의 의의는 첫째 형이상적(신적) 뜻을 이루고, 둘째 그 뜻은 형이하적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어떤 미세하거나 광대한 움직임에 의해 영향력을 공급하는 에너지 역할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방향과 방법을 정립시켜 주기도 합니다. 흔히 ‘섭리’라고도 하고, ‘천명’(天命)이라고도 하는 그런 차원의 뜻입니다. 모든 디카시는 여상과 언어의 두 단계가 통합된 형이하적, 형이상적인 미학적 뜻으로 통합, 형성되어 완료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적 통합을 거쳐, 두 장르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이미지 세계를 이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하이퍼적이라고 하고, 이 점에서 디카시가 하이퍼시의 또 한번의 강력한 유대와 그 관련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7] 여기서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그칠까 합니다. 디카시가 가진 기호성, 디카시의 이중성(형이하와 형이상) 등을 토대로 디카시와 하이퍼시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 디카시의 사진과 언어는 사진과 언어라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면서 디카시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하이퍼적 패러독스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퍼시에서는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가 비유의 본의(本義)와 유의(喩義)의 양 항에 관련되어 있고, 그 관련에서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를 역설적으로 사사해 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런 점에서 디카시나 하이퍼시는 파라독스의 언어로 된 역설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62    하이퍼시 창작기법 댓글:  조회:4635  추천:1  2015-09-09
하이퍼시 창작기법 연구 -회화적 요소를 중심으로   이선     Ⅰ. 서론     1. 하이퍼시의 정의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거부와 부정을 하면서도 하이퍼시는 시인들의 관심을 집중하게 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기존의 시와 어떤 변별력을 갖는지 아날로그 시인들은 증명해보이라고 한다. 새로운 실험시의 존재증명을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하이퍼시의 창작기법을 논의하고자 한다. 논문에서 소개하는 하이퍼시 창작 기법은 미술의 회화적 요소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문학(Hypertext literature)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넬슨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의 link(연결)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링크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에서 ‘연결 편집기’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가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하이퍼 시인은 머릿속에서‘연결 편집기’기능을 하여 결합과 삭제, 교환, 편집을 자유자재로 하여야 한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문덕수는 하이퍼시를‘탈관념’과‘무의미’로 정의하였다. 문덕수의 시「탁자가 있는 풍경」은 냉정한 관찰자의 시점으로 ‘사물’을 풍경화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철저하게 내용과 의미를 배제하고 ‘무의미’한 상황만 제시하여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심상운은 컴퓨터의 최소단위(unit)들의‘합성’과‘분리’인‘모듈’이론을 하이퍼 시론에 도입하였다. 인터넷의 ‘링크’의 기능과 ‘리좀’을 하이퍼 시론에 도입하여‘양방향성’의 ‘교환’ 이론을 정립하였다. 심상운은 문덕수가 주장한 하이퍼 텍스트 시론을 객관적 정의를 내려 구체성을 부여하였다. 심상운은 그의 논문 에서 하이퍼시의 요소를 9가지로 정의하였다. 그는 옴니버스 형식의 사물 실험시를 여러 편 창작하였다. 자신의 실험시를 통하여‘다초점’과‘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심상운과 김규화, 작고시인 오남구는 ‘하이퍼시 동인’을 결성하여 한국에 하이퍼시를 처음 보급시켰다. 또한 지금은 시문학 시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하이퍼시 확산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이퍼시에 대한 여러 정의를 위에서 살펴보았다. 문예사조는 작품이 선행하고, 작품에 이름이 붙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하이퍼시는 시론이 먼저 주장되고 시가 후속으로 창작되었다. 하이퍼시는 새로운 구조를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본 논문에서 주장하는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 방법론도 그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앞으로 실험시가 계속 생산되어 하이퍼 시론이 정립될 때까지 후속적인 많은 연구가 있길 바란다. 본 논문에서 주장하는 하이퍼 시 창작 기법은 미술의 회화적 요소를 차용하였음을 밝혀둔다.        2. 하이퍼시 창작기법     하이퍼시의 정의는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의 시론을 토대로 간략하게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나‘하이퍼시는 어떻게 쓰는가?’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본 논문은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조건을 밝혀 새로운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정립하고자 한다. 아날로그 시와 하이퍼시의 차별화된 분류의 기점을 세우려는 것이다. “도대체 하이퍼시가 뭐냐?”라는 질문에 대한 객관성을 가진 구체적인 답변자료가 되길 바란다. 본 논문은 미술의 회화 기법을 차용하여 새로운 시창작 기법7가지를 소개한다.     정보화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매일 새로운 전자제품들이 사람들의 구매욕을 충동하고 있다. 디지털시계, 디지털 계산기, 디지털 사진, 디지털이란 말이 들어간 전자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디지털은 컴퓨터 시스템을 적용하여 연속적이며 분절적인 오차가 없는 정확한 시스템이다. 디지털은 무한 반복적이며 합성과 재결합이 가능하다. 자기의 기본적인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 다른 시스템과 만나 새로운 합성구성,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화할 수 있다. 반면 아날로그는 연속적이지만 조금씩 오차가 난다. 아날로그가 직선이라면 디지털은 점선이다. 또한 모자이크다.   디지털 그림은 점묘화 기법으로 여러 스타일로 합성되기도 하고 형태를 아주 바꾸기도 하고, 다른 이질적인 그림이 들어와 덮어버리기도 하면서 ‘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 네모 박스 안에서 물고기가 모였다가 흩어지고, 물풀이 돋아나 바람에 흔들린다. 그 물풀 사이로 무수히 많은 고기떼가 지나간다. 빠르게 화면이 바뀌면서 새로운 그림들이 나타난다. 디지털 그림의 중요한 포인트는 화면이 빠르고 운동감 있게 움직이며, 장면이 계속 전환되며, 사물도 임의로 바꿀 수 있는 편집기능이 있다. 즉 고정적 정물화가 아니다. 움직이며 변화하는 그림을 무한정 반복 감상할 수 있는 ‘움직이는 그림’이다.       아날로그 시를 지향하여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 곧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의 감각도 디지털 그림과 다르지 않다. 그 화면이 빠르게 전개되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 아날로그 시가 검정과 흰색. 빨강, 파랑색으로 구성된 ‘보여주기’ 위주의 정지된 단일구성의 시라면 하이퍼시는‘다초점’‘다시점’의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여러 방향의 상상력에 움직임을 가미하여 ‘상상력의 이동’을 한다. 하이퍼시는 한 마디로 ‘움직이는 그림’, 또는 ‘움직이는 영상’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이나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시인의 ‘상상력의 이동’이 생각지도 않았던 기하학 무늬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무의미한 ‘단어던지기’나 ‘언어충돌‘로 미술기법처럼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단어’의 ‘결합’과 ‘분리’가 만든 ‘모자이크 이미지’가 시에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또한 사물을 각각 다른 독립된 연에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병렬배치’된 사물들이 서로 다른 질서와 의미로 재탄생한다. 한 폭의 ‘추상화’가 그려진다. 의도성을 가지고 쓴 의미추구의 ‘아날로그 시’보다 새로운 감각의 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디지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다. 새로운 감각의 시는 ’시스템의 혁명’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기법의 실험을 하여 보다 새로운 ‘무엇’을 추구한다.   아날로그 시가 ‘보여주기’ 의 평면적인 그림이라면 디지털 시는 ‘움직이는 그림’으로 입체적이며 운동감이 있는 그림이다. ‘움직이는 그림’은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시간 이동’과 ‘공간 이동을 한다. 또한 ‘상상력의 이동’을 하여 새로운 공감각적 시로 탄생한다.   공간이동은 그림의 내용물인 화면이 변화한다. 합성사진처럼 합성과 분리, 삽입이 가능하다. 즉 ‘시간, 공간, 상상력의 이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디자인은 새로운 시스템이다. 시스템의 변화가 새로운 시창작 기법의 주요 이슈다. 새로운 구조, 새로운 의미, 새로운 상상력, 즉 시에서의 새로움은 새로운 철학이다.    본 논문에서는 하이퍼시의 새로운 시 창작 기법 7가지를 소개한다. 이 기법은 하이퍼시의 성립요건을 함의하고 있다.   첫째, 정물화 기법- ‘탈관념’   둘째, 겹쳐 그리기 기법- ‘다시점’‘다초점’   셋째,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넷째, 옴니버스 기법- ‘낯설게하기’   다섯째, 기호시 기법- ‘무의미’   여섯째, 모자이크 기법- ‘이미지 결합’   일곱째,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디자인) 바꾸기’     본 논문은 위의 7가지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예시된 하이퍼시 작품을 통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미술의 회화적 기법을 중심으로 하이퍼시의 요소를 분석하여 형식과 내용, 디자인과 구성에서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찾아보고 하이퍼시의 창작기법을 조명하고자 한다.   ∏. 정물화 기법-‘탈관념’     문덕수가 하이퍼시에서 강조하는 것은
1461    하이퍼시의 목표 - 고정틀 벗어나기 댓글:  조회:4653  추천:0  2015-09-09
    심상운 시론집 서평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이   선 (시인)       Ⅰ. 서론   심상운의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2006년부터『시문학』에 실렸던 그의 시론과 대담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놓은 것이다. 이 시론집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이론서로서 앞으로 한국현대시에서 의미 있는 준거의 역할을 할 것 같다. ‘디지털시’는 지금까지의 ‘아날로그 시’를 거부하고 차별화된 새로운 감각의 ‘탈관념 시’를 제시하는 시론이다. 이 시론집의 중심이 되는 는 오남구의 염사 접사의 디지털리즘의 시론에 과학적인 디지털의 기능을 도입하여 보완하고, 디지털시의 개념을 정립하여 한국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론집의 표제가 된 는 디지털시의 시론과 하이퍼시의 시론을 결합시키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시의 모듈(module) 이론과 하이퍼시의 리좀(rhizome)을 같은 맥락으로 인식하게 한다. 또한 하이퍼시의 핵심이론인 ‘다선구조’, ‘상상적 기능의 확대’를 이론만이 아닌 실제의 창작된 작품으로 제시함으로써 하이퍼시의 시론이 성립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무의미와 사물성 이미지의 사물시(事物詩)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하이퍼시의 이론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객관화하여 정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이론의 전개에 문덕수의 시론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하이브리드(잡종결합)가 들어간 ‘다선구조론’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는 시론에서 불교 교리를 응용하고 있다. 그 예로 불교의 기본사상 ‘제법무아(諸法無我)' ’는 디지털시의 언어를 설명하는데 중심개념으로 활용된다. 이는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를 언어의 기호성으로 해석하는 핵심이론이 되고 있다. 불교의 ‘다르게 생각하기’와 ‘회의하기’는 사물의 본질적이며 확정적이지 않은 기표의 ‘무의미’성과 사물의 ‘불고정성’을 사유의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21세기의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디지털시론’과 ‘하이퍼시론’을 생산하여 보여주는 ‘새로운 시론의 묶음’이다. 이 시론집은 저자의 독창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문덕수의 시론, 김규화와의 대담 등은『시문학』을 중심축으로 한 집단적 사고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심도 있는 토의과정과 여러 편의 예시된 시 작품들 (오남구, 김규화, 신규호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문덕수의 장시『우체부』에 대한 평설은 하이퍼시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평설로 평가 된다. 에서부터 까지 읽으면 현대시의 역동적이며 다각적인 모습을 조망하게 된다. 이는 심상운의 탐구력과 열정과 열린 사유의 결과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시인으로서 경이감을 느끼게 한다.   Ⅱ 하이퍼 시의 개념과 정의     1965년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그는 이 조직체들이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는 하이퍼텍스트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문서의 열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을 뜻한다. 문덕수는 넬슨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에 대입하여 새로운 하이퍼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것이 이 시론집에 인용된 문덕수의 의 시론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시론은 이미지의 가지치기를 가능하게 하는 컴퓨터의 링크(link)이론이다. 이 링크(link)시론은 디지털시론에 없는 새로운 시론이다. 심상운은 이런 시론의 개발을 적극수용하고 그 시론을 근간으로 하여 하이퍼시의 시론을 종합하여 구체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론집은 하이퍼 시론 정립의 중요 자료가 된다. 그는 하이퍼시는 가장 발전된 상태의 디지털시라고 정의한다.(217쪽) 그 이유는 디지털시의 모듈(module)과 하이퍼시의 리좀(rhizome)이 서로 결합할 수 있는 공통점을 통찰하였기 때문이다. 모듈은 컴퓨터의 최소 단위(unit)의 결합과 단절로 이루어진다. 모듈이론은 시에서의 단어와 단어의 결합과 분리, 연과 연에서의 단절과 분리를 의미한다. 어떤 단어로 대체되어도 의미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다른 단어로 교환 가능한 시의 구성 기법이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최소 단위(unit)가 결합과 분리를 자유자재로 하여 새로운 모듈 체계로 합성된다. 이 합성된 단어나 이미지들은 분리와 결합, 교환, 삭제가 자유롭다. ‘하이퍼 시’의 링크 기능은 ‘연결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서 자유로운 편집기능을 갖는다. 리좀은 사방으로의 링크의 기능을 의미한다. 병렬 배치하여 평면상에서 교체 가능한 이미지들의 연결을 의미한다.       Ⅲ. 하이퍼 시의 성립 조건   심상운은 에서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형태인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아래와 같이 9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이 9가지 조건은 하이퍼시가 어떤 형태의 시를 지향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하이퍼시의 9가지 조건들은 디지털시의 10가지 조건과 맥락을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1,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와 집합적 결합 2, 인지단계의 관념수용 3, 현실의 샘플링과 가상현실 4,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바탕으로 한 사물 이미지의 충돌과 융합 5, 심리적 현상 속의 관념허용 6, 직관을 통한 염사 접사 7,순수한 가상현실의 증류수 같은 정서와 순수한 현실감각의 지장수 같은 정서 8,다시점 다감각의 세계지향 9, 독자 참여의 열린 시 지향 10, 동적인 영상의 시 구현   하이퍼시 성립조건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가상현실의 보여주기, 다시점과 동영상의 이미지, 탈관념 등은 디지털시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와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는 두 가지 조건이 하이퍼텍스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에 맞는 하이퍼시를 창작하여 시론의 중간에 인용 형식으로 발표함으로써 실험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모듈과 리좀의 옴니버스적 구성형식은 기존의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시와 비교할 때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논리적인 인과의 틀을 벗어난 연과 연의 불연속적인 관계가 열어주는 가상현실이 영화적인 공간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심상운의 하이퍼시론의 성립조건을 수렴하고 필자가 하이퍼시를 쓰면서 현장에서 느낀 개인 경험을 토대로 다음의 5가지를 하이퍼시 성립조건으로 추가 제안해본다.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은 하이퍼시의 창작 기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 새로운 감각의 설명적이지 않은 제목과 내용 둘째,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 셋째, 추상화 기법의 디자인과 구성 넷째, 환타지성 다섯째, 실험성   필자도 2004년「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속에 ‘환타지성’과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도입하였다. 환타지성은 분리와 결합, 디자인에서 새로운 감각의 추상화기법으로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이퍼시는 제목과 내용이 설명적이지 않아야 하며 새로운 감각의 구성과 디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써 먹었던 방법이 아닌 새로운 실험성이 하이퍼적 요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은 새롭고 감각적이며 실험적이어야 하지만, 무목적성의 단어 던지기 식으로 양산된 ‘무의미’와 구별된다. 그것은 치열한 작가정신에 의한 새로운 디자인과 구성의 신선함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는 고정적인 시의 성립조건을 제시하여 창의성에 제한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새롭고 감각적으로 바뀌어 가는 ‘창조성’이 하이퍼시의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Ⅳ.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 시론집에서 주장하는 ‘다선구조론’은 하이퍼시에서 보여주는 ‘다시점’에만 초점을 맞춘 이론은 아니다. 다선구조론은 시창작 과정을 총체적이며 다각적인 복합 텍스트 이론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이 모든 하이퍼시 이론을 수용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로 남을 것 같다. 필자는 시론집에 실린 심상운의 아래 시를 통하여 그의 다선구조의 한 형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 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 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 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 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위의 시는 ‘먹는다’는 동사를 중심어로 하고 있다. 하이퍼시의 링크의 기능을 살려 1연은 3연을 링크하고, 4연을 계속 링크한다. ‘먹는다’는 중심어는 1연의 ‘나뭇가지를 먹고 있는 새벽안개’에서 3연의 ‘야채를 먹는다’를 링크하고, 4연의 ‘은빛 갈치의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여자 리포터’를 링크한다. 각각 다른 사물과 사건을 링크하면서 ‘다시점’ 구조를 형성한다. 2연은 전혀 낯선 ‘행진하는 시위대’를 등장시켰다. 복합적 구조를 가지고 다른 연과 독립적이다. 그러나 ‘먹는다’는 행위를 직접 행동으로 취하지는 않지만, ‘행진하는 시위대의 구호’는 ‘먹고 살게 해 달라’는 1차적인 생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먹는다’와 포괄적으로 통합된다. 작가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무의식의 자동기술 기법으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의도성’을 가지고 디자인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아날로그 시와 차별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4연은 각각 독립된 내용으로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상현실의 사건과 소설적인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각 연들이 결합하여 삶의 생생한 ‘현장성’을 부각시킨다. 특히 무생물과 사물에 ‘인식’과 ‘의식화’를 시켜 ‘행동성’과 ‘운동성’을 갖게 하였다. 1연의 ‘새벽안개’가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고 3연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리고’ 4연의 ‘여자 리포트의 붉은 입’은 ‘확대’ 된다. 사물에 ‘움직임’이라는 동작을 줌으로써 무생물에 생기와 운동감을 주어 시를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위의 시는 작가의 주제를 부각시키려는 목적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과 상황만을 그대로 ‘보여주기’하고 있다. 왜? 무엇을? 이라는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작가의 주관과 주제의식이 배제되었다. 아니 혹은 숨겼을지도 모르지만 현장을 객관적 ‘리포터’의 입장으로 전달할 뿐이다. 이 시는 4연의 시를 독립적으로 분리하여도 한 편의 시가 될 정도로 복합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뉴스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성’이 있다. 이 시는 ‘먹는다’와 ‘뻗는다’의 중심어가 여러 상황을 ‘파생적’으로 ‘보여주기’하고 있다. 상상력과 연상작용을 하여 공상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의 새로운 감각의 ‘보여주기‘ 하이퍼시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는 그가 주장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요건인 9가지 다선구조론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새로운 시가 먼저 탄생하고 후세에 비평가들이 ‘문예사조’와 '이즘(-주의)을 붙이는 것이 순서인데, 심상운은 자신이 쓴 시를 자신이 직접 분석하여 자신이 창안한 시창작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기법의 더 많은 하이퍼시들이 창작될 것이고, 그 시들은 또 새로운 ‘-이즘’으로 이름이 붙여질 것이 때문에 하이퍼시의 창작 기법은 ‘과정 중’에 있고 말할 수 있다.   Ⅴ. 이슈-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   은 ‘경계 허물기’와 ‘통합하기’를 통해 시를 언어(문자)에서 해방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시는 문자(문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연극과 무용, 음악과 통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현상들은 형식이 내용을 만들고 변화시킨다고 한다.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문가적인 정신과 열정으로 온몸으로 공연하여 ‘열린 시 운동’을 펴서 시를 표현예술로 승화시켜 종이에서 해방된 시는 뜨겁고 빛나는 행위예술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가 창안한 각색시(脚色詩)는 하이퍼시와는 다른 관점에서 시와 연극을 결합한 독창적인 시 형태라는 점에서 평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의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은 현실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신규호가 에서 라는 타이틀을 걸고 시와 무용, 연극, 음악, 퍼포먼스와 결합시켜 통합예술로 승격시켜 선각자로 공연시 보급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종각역 전시실에서는 시와 사진의 만남인 의 전시회를 세 번째 개최하고 있다. 앞으로 이와 같은 통합예술의 기회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필자도 회원으로 를 발표하며 시의 공연화에 고심하고 있다.   시의 낭송도 이제는 목소리만으로 전달하던 아날로그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연기와 무용, 서화, 미술, 노래, 퍼포먼스 등 자신의 끼와 재능을 하이퍼적으로 발휘하여 통합예술로 승격시켜야할 것이다. 가수의 무대공연처럼 조명과 무대장치, 백댄서까지 동원하여 버라이어티 쇼를 꾸밀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시인들도 펜을 몰고 다니며 공연할 날을 꿈꿔본다. 은 시의 사회적 영역을 확대하는데 큰 에너지를 주고 있다.   Ⅵ. 결론   심상운의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 1960년대의 조향의 시와 문덕수의『선· 공간』의 시편들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초현실적인 모더니즘의 시론이다. 2000년대 오남구와 심상운의 대화는 디지털시론을 생산하는 원천이 되었으며, 문덕수의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하이퍼시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시문학 」출신 시인들의 집중적인 토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 시론집에 실린 , , 등은 하이퍼시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과 논의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심상운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직접 실험시를 창작하여 새로운 하이퍼시의 성립조건 9가지를 제시하여 하이퍼시의 구조를 정리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는 디지털시와 하이퍼시를 말하기 전에 를 통해서 관념(의미)과 탈관념(무의미)의 경계선을 분명히그었으며, 에서는 하이퍼시의 바탕이 상상과 공상이라는 것과 정서의 표현 방법을 예시하고 있다. 앞으로 이 하이퍼시의 영역이 한국현대시에 머물지 않고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것을 상상해본다. 그 근거는 하이퍼시가 새로운 감각과 자극을 주는 앞서가는 시 창작 기법이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를 생산하기 위한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심상운의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시론집은 한국시사에서 ‘하이퍼시의 공간’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도전을 받을 것이다. 고정된 시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하이퍼시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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