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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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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    하이퍼시 - 새롭게 디자인한 시 댓글:  조회:4557  추천:0  2015-09-09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평론: 이선 시 읽기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 기능으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건너뛰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은 심상운이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디자인의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이론으로 정립한 시인이다.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심상운의 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고대미이라 목관 사진’과 ‘고대숲’에서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새들이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울고 있다.   시인은 그림 한 장을 감상하다가 상상력의 줄기를 우주까지 뻗어서 한편의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1연, 2연, 3연이 각각 다른 그림이다. 1연의 병원 응급실과 2연의 냉장고 밥과 3연의 미이라 목관은 각각 다른 그림이지만 링크되어 연관성을 갖는다. 과거면서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하이퍼시에서 문제로 지적되었던 시의 ‘진정성’을 증명하였다.   이선 약력: 2007년 시문학 등단, 2011년 백인 선정, 2011년 제8회 푸른시학상 수상. 시집: 외 동인지 20여권 논문집: 평론: 심상운 서평, 및 평론 다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국장 좋은시공연문학회 사무차장 한국시문학문인회 이사    
1459    하이퍼시란? 댓글:  조회:4294  추천:1  2015-09-09
    Ⅱ 하이퍼 시의 개념과 정의     1965년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그는 이 조직체들이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는 하이퍼텍스트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문서의 열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을 뜻한다. 문덕수는 넬슨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에 대입하여 새로운 하이퍼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것이 이 시론집에 인용된 문덕수의 의 시론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시론은 이미지의 가지치기를 가능하게 하는 컴퓨터의 링크(link)이론이다. 이 링크(link)시론은 디지털시론에 없는 새로운 시론이다. 심상운은 이런 시론의 개발을 적극수용하고 그 시론을 근간으로 하여 하이퍼시의 시론을 종합하여 구체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론집은 하이퍼 시론 정립의 중요 자료가 된다. Ⅳ.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 시론집에서 주장하는 ‘다선구조론’은 하이퍼시에서 보여주는 ‘다시점’에만 초점을 맞춘 이론은 아니다. 다선구조론은 시창작 과정을 총체적이며 다각적인 복합 텍스트 이론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이 모든 하이퍼시 이론을 수용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로 남을 것 같다. 필자는 시론집에 실린 심상운의 아래 시를 통하여 그의 다선구조의 한 형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   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   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    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       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 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線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   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   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정리하고 있다. 이 9가지 조건은 하이퍼시가 어떤 형태의 시를 지향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하이퍼시의 9가지 조건들은 디지털시의 10가지 조건과 맥락을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1,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와 집합적 결합 2, 인지단계의 관념수용 3, 현실의 샘플링과 가상현실 4,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바탕으로 한 사물 이미지의 충돌과 융합 5, 심리적 현상 속의 관념허용 6, 직관을 통한 염사 접사 7, 순수한 가상현실의 증류수 같은 정서와 순수한 현실감각의 지장수 같은 정서 8, 다시점 다감각의 세계지향 9, 독자 참여의 열린 시 지향 10, 동적인 영상의 시 구현   하이퍼시 성립조건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가상현실의 보여주기, 다시점과 동영상의 이미지, 탈관념 등은 디지털시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와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는 두 가지 조건이 하이퍼텍스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458    <천개의 고원>의 잡담 댓글:  조회:5826  추천:0  2015-09-09
에 대한 잡담을 위하여      예전에 있었던 얘기하나를 해드리죠. 그러니까 독서에 대한 입장을 얘기하던 자리였습니다. 저랑 대화하던 친구는 굉장히 분석적인 친구였는데, 그는 책을 쓴 저자의 의도에 초점을 맞춰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독서스타일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습니다. 사실 이게 지극히 정상적인 독서방법이긴 하죠. 물론, 저도 이 독서법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반감을 가지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것보다는 자신의 시각에 따라 책을 해체해서 재구성하는 독서법을 더욱 강조했죠.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차이였습니다. 친구는 중점을 저자의 이해에 두려고 했고, 저는 중점을 저 자신에게 두려고 했죠. 또 이건 책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작가가 책을 써서 발표하는 순간, 그 책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들의 것이 된다고 봤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버리면 친구는 질서를 원했고, 저는 혼란을 원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뜻은 하나이기 때문에 코스모스적인 질서를 만들 수 있지만, 책의 뜻을 독자로 잡아버리면 독자마다 다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의 책을 두고 수많은 의견들이 치고 박는 거대한 카오스가 생겨나죠. 뭐……어쩌면 이것은 책에 대한 입장을 떠나서 저와 그 친구가 서로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기질적인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창조와 파괴에 대한 얘기죠.    아무튼, 둘 다 딱히 정답이 없는 논쟁이란 건 잘 알았지만, 그래도 어떤 책읽기 방식이 중요한가에 대한 얘기들이 오고갔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니 방식은 지루하다고 말했던 것 같고, 친구는 저에게 그 방식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했죠. 끝에는 제가 책에 대한 오독을 예찬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독이야말로 유쾌하고 창조적이며, 동시에 정답 없는 세상에 정답을 얘기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희극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뭐, 이런 느낌의 논쟁이 다 그러하듯 종국에는 아무런 합의 없이 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채로 논쟁이 끝났고, 중국집에서 볶음밥이나 시켜먹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멋진 마무리였죠.    이 사건 이후 퍽이나 시간이 지난 후에 저는 질 들뢰즈와 펠리스 가타리가 합세하여 지은 책인 을 만나게 됩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ㅡ무려 1,000페이지ㅡ책을 썼을까하고 책장에서 책을 뽑아다가 몇 장 휙휙 넘기면서 내용을 읽는데, 직감적으로 이 책의 저자들이 나랑 생각이 비슷하다는 느낌을ㅡ얘도 난잡하구나ㅡ받았습니다. 제가 가볍게 책장 몇 장 넘겼다고 이 책을 다 이해할리는 없으니, 정말 딱히 근거랄 게 없는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죠. 근데, 처음에는 이 책을 읽진 않았습니다. 느낌이 오긴 했는데, 너무 굵었어요. 굵은 건 들고 다니기 무겁거든요.    뭐, 이 지식의 무거움을 감수하고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책장에서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또 꽤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번년도 1월 즘에 김진석이라는 분의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이 분이 들뢰즈의 철학에 대해서 글을 풀어놓으셨더군요. 여기서 김진석씨는 리좀, 유목민, 전쟁기계 등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얘기들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 철학계가 들뢰즈의 철학을 너무 편중되게 해석하고 있다는 비판을 달아놓으셨더군요. 저야 뭐, 들뢰즈라는 인물도 모르고, 그의 철학은 더더욱 더 모르는 관계로 ‘들뢰즈에 대해서 이런 입장도 있다’하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들뢰즈를 한번 읽어보자’였습니다.    그래서 을 이래저래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제가 처음에 받았던 느낌처럼 저랑 비슷한 책이더군요. 굉장히 혼란합니다. 아, 여기서 확실해야 할 게 있는데, 위에서 제가 혼란함을 선호한다고 해서 제가 혼란함만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위에서 말했듯 이건 어디까지나 강세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굉장히 모순적인 놈인지라, 혼란하면서도 질서 있고 또 질서 있으면서도 혼란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꽤나 난잡한 편이죠. 뭐, 모순적인 게 인간이라고 한다면, 저는 지극히 인간적임에 충실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표현이야 어찌하듯.    아, 음. 다시 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이 책은 혼란합니다. 부제로 ‘자본주의와 분열증2’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이말 인즉 이 책이 ‘자본주의 분열증1’편의 속편이라는 의미이지만, 정작 1편인 와 은 딱히 이어지진 않습니다. 물론 큰 주제들은 공유하는데, 그렇다고 1편을 읽어야만 2편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은 아닙니다. 이 책이 말하는 고원들의 독자성에 충실한 설정인 셈이죠.    머리말을 보면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밝힙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천개의 고원”이죠. ‘천개’는 다양성에 대한 수사어입니다. 목차를 보면 대략 15가지의 주제에 대한 글들을 묶어놨는데, 고원이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하듯, 이 15가지의 다양한 주제들은 각자 독자적인 주제를 형성하면서 묶여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의 완결된 책이라기보다는 에세이집에 가까운 형식을 취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그래서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가는대로, 끌리는 고원에 올라가면 되지요. 책의 형식 자체부터가 이 책의 유일한 통일적인 주제인 해체적인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끌끌, 참 골 때리는 구성이죠. 이 친구들은 유쾌합니다.    기분도 좋은 김에, 오늘부터 시작해서ㅡ딱히 언제 끝날지 모르는ㅡ이 책 의 모든 장에 대한 분석 아닌 분석들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분석이라는 말은 좀 그렇고, 그냥 여기에 대한 ‘잡담’을 떠들어보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제 잡다한 목소리도 소규모 영토에서 울려나오는 가곡이나 새의 노래, 사납게 울부짖고 미친 듯이 노여워하는 대지의 거대한 노래 혹은 대기의 강력한 화음과 우주의 목소리들로 구성된 거대한 리토르넬로의 한 부분을 담당해줄 수 있을지.      이만 마칩니다. 총총.      
1457    글쓰기 0도 댓글:  조회:3913  추천:0  2015-09-09
[ 2015년 09월 14일 10시 05분 ]       글쓰기의 0도                      /롤랑 바르트     영어단어해석-   도그마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데크닉;데크니크, 수법, 기술 아우라;예술작품에서 흉내낼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다른것과 구별되는 개성적분위기. 파롤(빠롤); 소쉬르의 언어, 말, 가변적개인적 랑그;체계속 언어, 구조적 사회적 메커니즘;어떤 대상의 작동원리나 구조 그래픽;그림이나 사진을 위주로 편집한 지면이나 인쇄 물 시퀀즈; 시간,장소, 사건으로 한개의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단위 ----------------------------------------------- @@ 사유는 어떤 무속에서 말을 배경으로 행복하게 솟아오르는것 같았는데, 이런 무로부터 출발한 글쓰기는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했다. 그 다음으로 그 만듬의 대상, 끝으로 파괴의 대상이였던 글쓰기는 오늘날 마지막 변신인 부재에 도달하고 있는것이다. 10   언어체는 한시대의 모든 작가들에게 공통적인 규정들 및 습관들의 조직체이다. .. 언어체가 작가의 파롤에 어떤 형태를 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자양을 주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들의 추상적인 원과 같은것이며, 이원을 벗어날 때 비로소 밀도 있는 고독한 언어가 쌓여지기 때문이다. 15   글쓰기는 언어를 넘어선 지점에서 언제나 뿌리내리고 있으며, 하나의 선이 아니라 싹처럼 전개되고 , 어떤 본질을 나타낸다. 어떤 비밀의 위협인 그것은 반소통이며 위압갑을 준다 23   지식인의 이런 글쓰기들은 불안정하며 여전히 문학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무력하게 참여에 대한 강박에 의해서만 정치적이 기때문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여전히 윤리적 글쓰기들이며, 그속 에서 필자(우리는 더이상 감히 작가라고 말할수 없다)의 의식은 집단적구원의 안심시키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30   중국전통을 보면 예술은 현실의 모방에 있는 완벽에 다름 아니다… 례컨대 나무로 만든 이 호두는 그것을 탄생시킨 예술을 나에게환기시키겠다는 의도를 어떤 호두의 이미지와 함께 전달해서는 안된다. 소설적글쓰기가 수행하는것은 그 반대이다. 35   언어는 당연히 그자체의 파괴를 향하고있기 때문이다. 38   모든 시는 자신을 표현하는 그 방식이 어떠하든지 본질의 상태로 , 힘의 상태로 존재하고있는 잠재적산문의 장식적 암시적 혹은과장된 방정식에 불과하다… 시적언어와 산문적 언어는 그것들의 타자성을 나타내는 기호들자체가 필요없을만큼 충분히 분리되여있다… 고전주의사유는 지속이 없으며 고전주의적시는 자신의 기교적배치에 필요한 사유만을 지닌다. 그 반대로근대적시학에서 낱말들은 일종의 형식적연속체를 생산하며 이 연속체로부터 낱말들 없이는 불가능한 지적 혹은 감정적밀도가 조금씩 비롯된다. 따라서 말은 보다 정신적인 배태의 빽빽한 시간이며, 이 배태속에서 ‘사유’가 준비되고 낱말 들의 우연을 통해서 조금씩 자리잡힌다.따라서 의미작용의 무르익은 열매를 떨어뜨리게 되는 이와같은 언어적기회는 시적시간을 상정하는데, 이 시간은더 이상 제작의 시간이 아니라 어떤 기호와 어떤 의도의 만남이라는 가능한 모험의 시간이다. 근대적시는 언어의 모든 구조를 포착하는 차이를 통해서 고전주의적예술과 대립되며, 이 두시사이에는 동일한 사회학적의도이외에는 다른 공통점을 남기지 않는다.43   고전주의적연속체는 밀도가 동등한 요소들의 연속인데, 이 요소 들은 차안된것같은 개인적의미작용에 대한 모든 성향을 제거하고 동일한 감각적압력을 받지 않을수가 없다. 시적어휘 자체는 창안이 아니라 관례의 어휘이다. 그속에서 이미지들은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습을 통해 고립되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특수하다.… 고전주의적인 기교적수식은 낱말들이 아니라 관계들의 기교적수식이다. 그것은 창작의 기교가 아니라 표현의 기교이다. 44   낱말은 무한한 자유로 빛을 발하며 불확실하고 가능한 수많은 관계를 향하여 빛날준비를 하고있다. 고정된 관게가 무너짐 으로써낱말은 어떤 수직적인 기회만을 지닌다. 그것은 의미들, 반사들, 잔상들로 이루어진 어떤 총체속에 잠기는 덩어리이고 기둥이다. 요컨대 그것은 서있는 기로이다. 여기서 시적인 낱말은 직접적인 과거가 없는 행위이고, 그것에 결부된 모든 기원들의 반사들이 드리우는 두터운 그림자만을 제안하는 주변없는 해위이다… 각각의 시적인 낱말들은 예기치 않은 대상이고 , 언어의 모든 잠재적가능성들이  날아오르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별한 호기심, 일종의 신성한 식도락을 가지고 생산되고 소비된다. 대문자 낱말의 이와같은 절대적갈망은 모든 근대적시에 공통적인데, 시적인 말을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말로 만든다. 그것은 구멍들과 빛들이 가득하고 , 지나치게 풍부함을 주는 기호들과 부재들로 가득한 담화를 확립하지만. 이 담화는 의도의 예상도 연속성도 없으며 따라서 언어의 사회적기능에 매우 대립되기때문에 어떤 불연속적인 말에 단순히 의존하기만 해도 모든고유한 초자연들의 길이 열리게 된다. 46-47   근대적시는 언어의 관게를 파괴했고, 담화를 낱말들의 정거장으 로 규결시켰다. 이런 현상은 대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전복을 함축한다. 새로운 시적언어의 불연속체는 덩어리들로서만 드러나는 어떤 불연속적 대자연을 확립한다. 기능들의 후퇴가 세계의 관계들에 대해 어둠을 드리우는 바로 그 시점에서 대상은 담화에서 높아진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근대적시는 객관적시가 된다. 그속에서 대자연은 고독하고 끔직한 대상들의 불연속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잠재적관게들만 있기때 문이다.아무도 그것들을위해 어떤 특권적의미나 사용 혹은 서비스를 선택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것들에 어떤 계층체계를 감지하지 않고 아무도 그것들을 정신적행동이나 의도의 의미, 작용, 다시말해 요컨대 어떤 애정의 의미작용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언어의 파렬은 절대적대상을 성립시킨다. 대자연은 수직들의 련속이 되고 대상은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로 채워진채 갑자기 일어선다. 그것은 메워지지 않는 따라서 끔직한 하나의 세계를 구획할뿐이다. 낱말들 대상들은 관계가 없으며 그것들이 파렬하는 모든 폭력으로 치장되고이 폭력의 순전히 기계적인 떨림은 다음 낱말에 기이하게 충격을 주지만 곧바로 소멸한다. 이런 시적낱말들은 인간들을 배제시킨다.결국 근대성의 시적인본주의는 없다. 이처럼 수직적으로 서있는 담화는 공포로 가득한 담화이다. 다시말해 그것은 인간을 다른인간들과 연관시키는게 아니라 하늘 지옥 불가침한것, 어린시절, 순수한 질료 등 대자연의 더없이 비 인간적인 이미지들과 련관시킨다. 이 시점에서 시적인 글쓰기에 대해 나갈수 있다는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윤리적중요성을 파괴해버리는 자률의 폭력을 지닌언어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어적몸짓은 대자연을 수정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물주와 같다.그것은 의식의 태도가 아니라 관계의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최소한 근대적시인들,자신들의 의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그 시인들의 언어이다. 그들은 시를 정신적인 실천, 령혼의 상태 혹은 립장의 계시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꿈꾸어진 언어의 찬란함과 신선함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인들에게는 시적감 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것 역시 쓸데 없다. 48-49   고전주의 작가들 역시 형태의 문제를 알고있었겠지만, 론쟁은 글쓰기들의 다양성 및 의미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언어의 구조와는 더욱 관련이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설득목적에 따라 생각된 담화의 질서만이 문제가 되였다. 따라서 부르죠아적 글쓰기의 특이성이 대응하는것은 수사학의 다양성이였다. 54   모파상, 졸라, 도데의 그 글쓰기는 문학의 형식적기호들 (단순 과거 , 간접화법, 씌여지는 리듬)과 사실주의의   역시 형식적인 기호들(민중언어의 덧붙혀진 조각들, 거친 말, 방언 등)의 결합체이다. 62   공산주의작가들은 부르주아작가들이 오래전부터 단죄했던 부르 주아적글쓰기를 요지부동으로 지지하는 유일한자들이 된다.67   언어의 어떤 질서에의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 백색의 글쓰기를 창도하는것이다. 70   의식적인 작가는 이제 조상 전래의 전능한 기호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78   근대적예술전체가 그렇듯이, 문학적글쓰기는 역사의 소외와 역사의 꿈을 동시에 지니고있다. 필연성으로서 그것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여넘고자 하는 노력자체이다. 그것은 그것자체의 고독에 대해 끊임없이 죄의식을 느끼고 있음에도,여전히 낱말들의 행복에 탐식하는 상상력이며, 어떤 꿈꾸어진 언어를 향해 달려간다. 언어가 더이상 소외되지 않는 새로운 아담적인 세계의 완벽함을 일종의 리상적인 예견을 통해서 나타내는 신선함을 지닌 그런 언어를 향해. 글쓰기들의 다양화는 새로운 문학을 확립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문학은 오로지 하나의기획이 되기 위해서만 자신의 언어를 창안한다는 점때문이다. 이 기획은 문학이 언어의 유토피아가 되는것이다.79   작품의 불연속성과 무질서가 낳는 열매자체는 각각의 잠언이 이를테면 모든 잠언들의 원형이라는것이다. 유일하면서도 변주되는하나의 구조가 있다… 성찰들은 담론의 단상들이고 , 구조와 광경이 없는 텍스트들이다. 84   잠언은 개별적인 덩어리들로 구성된 전체적인 불덩어리이다. 뼈대는 뚜렷한 모습이상으로 광경적이며- 그리고 뼈들은 단단한것들이다. 잠언의 모든 구조는 그것이 고정되여 있지 않다는 바로 그점에서 가시적이다. 85   수직성을 통해서만 질서가 잡히는 하나의 세계가 드러난 셈이다. 미덕들, 다시말해 외관들의 유일한 수준에서는 그 어떠한 구조도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구조는 바로 명백한것과 감추어진것 사이의 진실관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97   무질서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98   지극히 뛰여난 명철성에 지극히 대단한 비현실성이 흔히 대응한다.100   이미지들은 텍스트와 분리시킴으로써 는 대상의 하나의 자율적인 도상학에 진입하고 있었다. … 의 도판들은 대상을 제시하고 이 제시는 예시의 교육적목표에 보다 무상한 미학적 혹은 모상적 정당화를 덧붙이고 있다.105   일반적으로 대상의 생산은 이미지를 거의 신성하다할 단순성으로 이끈다… 창조의 간결한 엄겨겅, 거래의 화려함, 이것이 백과전서적 대상의 이중적체제이다. 109   기계의 도판, 곧 이미지는 … 우선 대상 혹은 작업의 분산된 요소들을 분석하고 열거하며, 그것들을 독자의 눈앞에 테이블위에던지듯 던지고, 이어서 마무리하기 위해 생활장면, 다시 말해 삶의 두께를 덧붙이면서 그것들을 재구성한다. 116   당신이 재현하는것은 분석적정신의 여정이다. 세계는  당신에게 통상적인것, 분명한것(이것은 생활의 장면이다)을 제시한다. 백과전서파와 함께 당신은 점진적으로 원인들, 물질들, 원요소들로 내려가며 , 체험적인것으로부터 인과적인것으로 가고 , 대상을 지적으로만든다. 일직선적인 글쓰기와 이 점에서 반대되는 이미지의 특권은 그 어떠한 독서의 미로도 강제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론리적인 백커가 언제나 결핍되여 있기 때문이다.117   특이한 떨림은 무엇보다도 놀라움이다.118   백과전서적인 시적세게는 언제나 어떤 비현실주의로 규정된다. 따라서 객관성(‘현실’)의 엄격한 요구에 토대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 다른 무엇(타자는 모든 신비의 기호이다)이 끊임없이 현실을 넘어서는 시적작품이 되는것이 의 계획 이다. 121   객관적으로 이야기된 단순한 대상의 은유자체는 무한히 떨리는 대상이 된다. 122   이미지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터무니없는 대상을 재구성하지 않을수 없게 만든다. 첫번째 자연이 일단 분해되고 나면 첫번째것처럼 형성된 또 다른 자연이 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를 부순다는것은 불가능하다. 세계가 영원히 차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시선- 우리 시선- 이면 족하다  123   자신(을 쓴 샤토브리앙)의 마지막 그림속에 그 최상의 신비한 불완전성을 담아놓은 푸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불완전성은 완성된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데, 시간의 떨림 이다. 추억은 글쓰기의 시작이고 차례로 글쓰기는 죽음의 시작 인것이다.(그것이 아무리 젊은때 시작된다 하더라도 말이다)128   은유      사실 파격구문은 거리의 시학으로 이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학적노력이 친화성들, 상응들, 유사성들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작가의 기능이 자연과 인간을 단 하나의 세게로 통합하는것이라 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공감각적인 기능이라고 부를 수있는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근본적인 문채인 은유 역시 분리의 강력한 도구로서 리해될수 있다. 특히 은유는 샤토브리앙의 경우 풍부한데 , 두성분뿐 아니라 비소통을 우리에게 표상한다. 마치 하나는 다른 하나에 대한 향수에 불과한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는문자적요소들, 다시 말해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갑자기 덥석 물리고 ,쳐들려지며, 떼어내지고, 분리된 뒤후 일화의 자연스러움에내맡겨지는 문자적요소들을 제공한다. (그것은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준비도 없이 폭력적인파격구문에 따라 억지로 도입된 새로운 말은 환원불가능한 어떤 다른 곳과 갑작스럽게  이 요소들을 대면시킨다. 샤토부리앙은 죽어가는 어떤 젊은 수도사의 미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캐시미르계곡에서 여행자를 위로하는 그 이름모를 새소리를 듣고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대목도 있다.“이곳에서 누가 태여났고, 누가 죽었으며, 누가 울었는가? 저 하늘 높이 있는 새들은 다른 고장들을 향해서 날아간다” 샤토브리앙의 작품에서 은유는 사물들을 접근시키는게 전혀 아니다. 그것은 세계들을 분리시킨다. 기교적으로 말하며 (왜냐하면 기교나 형의상학을 말하는것은 같은것이기때문이다), 오늘날 은유는 (시적자유에서와는 달리)단 하나의 기표에만 관련되는게 아니라, 담화의 커다란 단위들에 확장되여 연사莲词생명력자체에 참여하는것 같다. 언어학자들은 연사가 언제나 말과 가깝다고 말한다.샤토브리앙의 커다란 은유는 사물들을 분활하는 여신인데, 언제나 향수적이다. 그것은반향을 증식시키 는것처럼 나타나면서도 인간을 자연속에 불투명한것처럼 남겨두고있고 그에게 결국 직접적인 진정성의 기만을 면제해 준다. 문학은 분리시키고 일탈시킨다. 133-134   대립들이 엄격하도록하기 위해 그것들을 두개이상의 상이한 풍경이 아래로 쫙 펼쳐지는 산정상의 능선처럼 얇고 날카로우며 결정적인 일회식사건을 통해 분리시켜야 한다.   문학은 우연적인 진실을 영원한 개연성(필연성)으로 대체 한다135   근대의 작가는 아브라함이면서 아브라함이 아니다. 그는 도덕을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언어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환원불가능한것을 가지고 일반적인것을 만들어야 하고 , 언어의 도덕적인 일반성을 통해서 자기존재의 부도덕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문학이라는것은 이와같은 위험을 감수한 통과이다. 138   고유명사는… 보통명사의 모든 특징들을 부여받고 있지만 모든 투사적법칙을 넘어서 존재하고 기능할수 있기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유명사를 근거지로 하는 하이퍼의미성현상의 대가 –혹은 날쁜점-이다. 이 현상이 고유명사를 시적인 낱말과 매우 유사하게만들고 있음은 물론이다.146   사실 고유명사는 촉매작용을 할수있다. 우리는 그것을 채울수 있고, 확장할수 있으며 , 그것의 의소적골격이 지닌 사이들을 무한한 추가물들로 메울수 있다. 고유명사의 이와같은 의소적 확장은 다음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수 있다. 각각의 이름은 우선불연속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출현하는 여러장면들을 포함하지만,이것들은 련합하여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되기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야기하는것은 일정수의 충만한 단위들을 환유적방식을 통해 련결시키는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48   고유명사는 흉내이고, 아니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환영이다. (이것은 의구심이 들지만 맞다)150                         프로베르보다 훨씬 전에 작가는 문체의 혹독한 작업, 끊임없는 수정의 피곤함, 미미한 수확을 얻기위한 과도한 시간의 슬픈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표현했다… 플로베르에게는 문체는 절대적인 아픔이고, 무한한 아픔이며, 불필요한 아픔이다. 집필은 터무니없게 완만하다(‘일주일에 네페지’ ’한페지를 쓰는데 닷새’ ’두줄을 쓰는데 이틀’) 그것은 “삶과의 돌이킬수 없는 고별” 무자비한 자기 감금을 요구 한다.157   수직적축에는 대체 낱말들이(이것들은 정정들이나 낱말들이다) 기입된다. 수평적축에는 통합체들의 삭제들이나 첨가들 (이것 들은 개정들)이 기입된다.
1456    ...계속 댓글:  조회:10221  추천:0  2015-09-09
    백두산 천지 괴물의 실체, 괴생명체 20마리, 세계 4대괴물,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       백두산 천지에 과연 괴물이 살고 있을까? 여러 나라마다 호수에 괴물이 산다고 하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내려오는 데 백두산의 천지에서도 괴물이나 괴생명체가 산다고 해서 큰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의 신화통신에 따르면 백두산 관리사무소 직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이 수면위로 나타났다고 다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했다고 하며 백두산 괴물이 나타났다고 사라질 때마다 엄청나게 큰 굉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중국 길림망 매체에 따르면 백두산 화산관측소 직원 우씨가 백두산 천지 수면위를 빠르게 이동하는 괴물을 포착해서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하며 그 괴물이 다시 물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엄청난 굉음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 괴물은 한번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커다란 굉음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은 굉음소리로 인해서 백두산 천지의 절벽일부가 허물어질 정도라고 한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을 측정하기 위해 천지 부근에 파견나와 온천의 수온을 측정하고 있는 직원 우씨는 그순간 백두산 천지 수면위로 헤엄치는 괴생명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직원 우씨가 목격한 괴생명체의 모습은 머리부분만 수면위로 드러낸 채, 빠르게 헤엄쳐갔다고 하며 머리부분이 연한 녹색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우씨가 찍은 사진을 얼핏 보면 마치 뿔을 단 사슴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그렇지만 너무 멀리고 찍은 사진이고 화질이 선명하지 못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기가 곤란하다.   백두산 천지의 괴생명체 출현 목격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백두산을 관광나온 관광객들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목격담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2000년도부터 2013년도까지 계속해서 백두산 천지괴물 목격담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중국의 신화통신, 길림망 매체 등 중국의 여러매체들은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백두산 천지의 괴물출현이라는 기사와 목격담을 계속해서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2003년도의 백두산 천지괴물 20마리 목격담이다. 2003년 7월 11일에 백두산 천지의 수면위에서 20마리의 괴물이 나타나서 수면위로 빠르게 가로질러 갔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하면서 백두산 천지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불이 붙기 시작했으며  그당시 천지에 20여마리의 괴생명체가 무려 50분동안 수면위를 유유히 헤엄쳐갔다고 하며 백두산에 관광하러온 관광객 10명이 동시에 목격했다고 한다.     중국 길림성의 임업성부청장 장우펑씨도 그당시 20마리의 괴물을 함께 목격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괴생명체들이 5번이나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며 짧게는 2분에서 길게는 30분 이상 계속해서 수면위에 떠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괴생명체들이 나타난 곳은 2~3㎞나 멀리 떨어진 지점으로 50배 망원경으로 봐도 정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곤란하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렇지만 백두산 천지에 이처럼 20마리의 괴물이 동시에 나타난 것은 목격담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1960년도에 길림성 시상국 직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7마리의 괴생명체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나온 이래에 2003년, 2007년, 2009년, 2013년까지 끊임없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백두산 천지괴물 목격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혼과 얼이 새겨진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곳으로 한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명산이다. 백두산의 천지는 둘레가 14km나 되고 20억톤이나 되는 물을 저장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은 칼라라호라고 한다. 백두산 천지의 깊이는 평균 210m이고 최대 깊이는 384m로 왠만한 강보다도 더 깊다.   백두산 산허리에 있는 바위골짜기에서는 곰이나 호랑이, 표범같은 야생 포유류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2,7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자연생태계의 보고 같은 곳이다. 백두산이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고 동북아에서는 각종 시조신화가 탄생한 명산이어서 그런지 이곳을 관광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미스터리하고 신비로운 목격담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으며 한번 목격담이 나오고나면 계속해서 다른 목격담들이 줄을 잇는 도미노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을 보았다고 하는 목격담과 함께 목격자들이 찍은 사진들도 여러 장 존재하고 있는데, 그 촬영된 사진들이 대부분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해상도가 낮아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백두산 천지괴물은 50년에 걸쳐서 목격자들과 소문만 무성하게 나왔지만, 그 명확한 실체는 전혀 감을 잡지못하고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장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2013년도 화산관측소 직원 우씨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치 사슴의 뿔같은 것을 머리에 달고 빠르게 백두산 천지를 헤엄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만주나 연해주에 서식하는 순록이 혹시 백두산천지에 와서 헤엄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판단된다. 만주에 사슴이나 순록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거대한 파충류과 동물들이 백두산 천지에서 번식해서 새끼들을 거느리고 수면위를 헤엄쳐다니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새같은 조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사진으로 보기에는 분명 새는 아니다.   그리고 천지 수면위로 돌출된 부분은 분명 뿔같은 딱딱한 물체를 머리에 달고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 인류가 모르고 있던 제3의 생명체가 백두산 천지 속에서 서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같은 호수괴물의 목격담은 배단 백두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지역에서도 종종 전해지고 있다. 중국 호수괴물, 미국의 호수괴물, 아이슬란드의 호수괴물, 영국 스코틀랜드 네스호의 호수괴물 네시 등 세계의 여러지역에서 호수에 미확인 괴물이 산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전래되고 있다.   물을 마시기 위해 호수로 찾아온 낙타나 말을 한입에 꿀꺽 집어삼킨다고 하는 중국의 카나스호수 괴물 이야기도 횡행하고 있고, 20m가 넘는 거대한 뱀처럼 생긴 괴물이 호수의 꽁꽁 언 얼음위에 자주 출현한다는 아이슬란드의 호수괴물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다.   백두산 천지 괴물목격담은 목격자들에 의해서 구체적인 몽타즈까지 제작되기도 했는데,목격자들은 20m가 넘는 거대한 수장 공룡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가하면 네스호의 네시와도 흡사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이같은 목격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백두산 천지의 괴물은 중생대에 살았던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를 의미하는데, 플레시오 사우루스는 긴목과 긴꼬리를 가지고 네 개의 지느러미로 헤엄쳐다니는 파충류과 속하는 수장공룡이다.  그런데 6천5백만 년전에 이미 멸종한 수장공룡이 아직까지 백두산천지에 살고있다는 것인데, 도무지 말이되지 않는다. 이렇게 오랫동안 백두산일대에 살아왔던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가 왜 이제야 그실체를 나타내는가?     거대한 몸집의 수장공륭 플레시오 사우루스는 물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육지에도 왔다갔다 하는데, 발견되어도 벌써 진작 발견되었어야 하며, 그 기록이 사서에도 여러번 나왔어야 한다. 그리고 목격자들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몸체의 극히 일부분만이 촬영되거나, 매우 멀리서 희미하게 촬영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정확한 실체를 보여준 사진은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무슨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과 길림성측에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홍보의 수단으로 이같은 목격담을 고의적으로 퍼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특히 많은 목격담들이 중국측 관리들이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들이 특히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두산 천지괴물 출현설을 퍼트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서 백두산관광객특수를 누려볼 의도가 아닌가 판단된다.     더욱이 백두산 주변에 있는 ‘장백산 박물관’에는 ‘천지괴물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천지괴물 인형까지 판매하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중국과 길림성당국에서 백두산관광 마케팅의 일환으로 백두산 천지괴물설을 활용한다는 의심을 받고있는 것이다.       백두산 천지괴물 동영상                                    
1455    백두산 천지괴물??? 댓글:  조회:5450  추천:0  2015-09-09
추천자 목록 네시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동안 해발 2,744미터인 백두산 천지에도 길이가 2미터에서 5미터에 이르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풍문이 꾸준히 나돌았다. 백두산은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중국 지린 성 조선족 자치주가 맞닿은 곳에 있는데 정상에 있는 천지에 괴물이 산다는 것이다. 천지의 물은 60퍼센트 이상이 지하수며 나머지는 비나 눈이다. 천지의 평균 수심은 213.3미터, 최대 수심은 384미터며 수온은 0.7도에서 11도 사이다. 정상에 있기 때문에 비교적 차다. 겨울에는 수면이 언다. 1994년 9월 10일 중국 신화통신은 백두산 천지에서 누런 황소 머리를 한 거대한 괴물이 파도를 일으키며 솟구치는 모습이 잇달아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1994년 8월 20일에는 호수에서 유유히 유영하던 괴물이 2미터 높이 물보라를 남기고 사라지는 모습을 한국 관광객이 찍었다고 한다. 게다가 9월 2일에는 천지를 관광하던 중국 지린 성 조선족 자치주 관리들이 황색 머리를 한 괴물을 발견하고 비디오로 찍었는데 괴물 모양이 선명했다고 한다. 천지 북쪽에서 남서쪽으로 헤엄치다가 약 10분 뒤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백두산에 괴물이 출현했다는 소식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백두산에는 괴물이 세 마리 있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하나는 당나라 황제가 가죽을 갖기 원했다는 ‘화서(火鼠)’다. 화산인 백두산에는 불구덩이에 사는 쥐처럼 생긴 괴물이 있는데 그 모피로 옷을 만들면 불 속에서 타지 않고 데지도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괴물은 온몸에 털이 난 사람으로, 짐승처럼 네 발로 나무를 타고 토굴에서 사는 ‘모인(毛人)’이다. 흉년에 함경도에서 산에 들어갔다가 눈에 갇혀 야생화된 모녀(毛女)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백두산에 야생 인간이 살아 있다는 전설은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다. 셋째가 바로 네시와 같은 괴물로,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사냥꾼 넷이 천지에서 괴물이 목을 내미는 것을 봤는데 황금색으로 물동이만 한 모난 머리에 뿔이 돋아 있고 긴 목에 돌기가 나 있었다고 한다. 사냥꾼들은 겁이 나 도망쳤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괴성이 울려 돌아봤더니 괴물은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이다. 괴성은 천지 백 리 밖에서도 자주 들렸으므로 천지 아래 있는 용궁의 북소리로 구전돼왔다. 청나라 때인 1879년에도 유복 등 여섯 명이 수면에서 물소만 한 괴물이 머리를 들고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천지 북쪽 끝에 있는 천활봉 중턱 벼랑에 동굴이 있는데 커다란 이무기처럼 생긴 괴물이 이곳을 드나드는 장면이 목격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 지방 지현(知縣)을 지낸 유건봉이 편찬한 『장백산강지략(長白山崗志略)』을 보면 길 안내인인 서영순이 중국인 여섯 명과 함께 백두산에서 사슴을 사냥하다가 천지에서 어떤 동물을 만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물소처럼 크고 우는 소리가 귀를 울리며 사람들에게 쳐들어오려는 것 같아 여러 사람이 모두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총을 꺼내 쏘려 하니까 발사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육 연발 권총을 꺼내 발사해 괴물의 배에 맞추자 괴물은 크게 울부짖으며 호수 안으로 엎어져 사라졌다.  백두산 괴물이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다. 지린 성 기상 기자재 공장에 근무하는 한 중국인이 천지를 망원경으로 살펴보다 천지 동북쪽 귀퉁이에서 동물 두 마리가 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다투는 장면을 봤다. 동물 머리는 개보다 훨씬 크고 흑갈색이었는데 1시간 뒤에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괴물에 대한 목격담은 더욱 구체적으로 변한다. 1980년 8월 목격자가 1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백두산 괴물 이야기는 점점 더 큰 파문을 일으킨다. 저명한 작가인 뢰가는 『천지 괴수 목격기』에서 백두산의 괴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8월 21일 새벽 4시 나는 기상대 문 앞에서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8시에서 8시 반쯤 되는 시간에 천지에서 거대한 나팔 모양 물갈래를 봤다. 꼭지 부분에서 꺼먼 흑점을 봤는데 머리 같았다. 때로는 북 같은 것이 길게 끌리는 것을 봤는데 아마도 척추 부분일 것이다. 그것은 물속에 비친 장군봉에서부터 나 있는 쪽으로 헤엄쳐 왔다.  이틀 뒤인 8월 23일 새벽, 이번에는 지린 성 기상국에 근무하는 세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서 괴물 다섯 마리를 봤다. 30미터 앞에서 괴물의 머리와 가슴이 4미터나 물 위로 나와 있는 것을 봤는데 머리는 소와 비슷하고 몸은 개, 입은 오리, 등은 검은색으로 기름을 바른 것처럼 미끄러워 보였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종려나무 잎 같은 긴 털이 있었으며 배 부분은 희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 소리 지르며 총을 쐈지만 괴물을 맞히지는 못했다. 괴수는 민첩하게 물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같은 날 다른 사람이 다시 괴물을 봤다. 괴물의 위치는 천지 북쪽 기슭에서 40여 미터로, 두 마리가 앞뒤로 서서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물 위에 나온 부분이 좀 많았고 머리는 뱀 모양, 지름은 약 15센티미터, 눈동자는 밤알만 했고 주둥이가 앞으로 뾰족 튀어나와 있었다. 목 굵기는 10센티미터, 피부는 백색이고 마치 바다표범처럼 몸이 매끄러워 보였지만 무늬는 없었다. 몸을 틀 때 물 자취가 상당히 둥글고 컸다. 1995년 8월 31일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백두산 괴물을 목격해 큰 파문이 일었다. 중국령 백두산의 관광 명소인 천문봉에 올라간 장남철은 천지 한가운데에서 검은 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천문봉 밑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성능 베타 카메라로 촬영했다. 당시 천문봉에는 한국인 관광객 수십 명이 있었는데 일제히 “괴물이다!”라고 소리쳤다. 테이프를 분석한 UFO 연구회 조사부장 서종한은 수장룡과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고 말했다. 입을 크게 벌린 머리와 거북이 앞 지느러미, 불룩하게 튀어나온 등과 허리 등을 근거로 들었다. 경북대학교 교수 양승영은 “꼬리가 물고기 꼬리지느러미와 흡사하고 수중 생활을 하는 수장룡이나 어룡의 일종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다만 꼬리 부분이 뱀처럼 길쭉하면 뒤로 흰 거품이 일 정도로 빠르게 헤엄치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있었다. 2010년 9월에는 좌우 날개가 달린 백두산 괴물 사진이, 2011년 7월 22일에는 뿔이 두 개 달린 머리를 물 위로 드러낸 백두산 괴물 사진이 공개됐다. 백두산 천지 괴물 목격담 중에는 괴물 머리에 뿔이 달려 있다는 증언도 있는데 뿔이 있는 괴물이 사진으로 찍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012년 7월 7일에도 백두산 천지에서 물 위를 이동하는 괴생명체가 포착됐다. 괴생명체는 백두산 천지 화산관측소 직원인 우 아무개가 백두산 남쪽 정상 전망대에서 화산을 관찰하던 중 촬영한 것인데 천지 수면에 크고 긴 물체가 마치 물고기처럼 헤엄치다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사진은 모두 석 장이었다.   
1454    백두산 신비한 동굴 두개 발견!!! 댓글:  조회:7458  추천:0  2015-09-09
장백산에 신비한 두 동굴, 고대인 유적 아니면《야인》동?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신화넷 ] 발표시간: [ 2015-08-28 19:24:10 ]    1호동굴 입구.   1호동굴속.   장백산원시산림속에서 최근 두 신비한 동굴을 발견했다. 장백산 《샤만부락(萨满部落)》풍경구에 초빙된 40세 배회춘이란 종업원이 표류하곡을 탐사하다 장백산아래 《신단산(神坛山)》하곡기슭에서 동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두 동굴을 스쳐 흐르는 신수하(神水河)   일전 배회춘의 향도하에 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부회장, 만족문화전문가 왕송림이 촬영팀과 함께 일행 7명이 처음으로 동굴속에 진입해 고찰, 촬영했다. 왕송림의 소개에 따르면 1호동굴의 깊이는 30메터정도 되고 동굴안에서 보면 통풍구가 있었다. 그리고 샘물이 동굴속에서 밖으로 흘러나오고있는데 동굴내의 부석석회가 보온역할이 좋아 인류가 거주하거나 동물이 서식하기 적합해보였다고 한다. 동굴내에서 목탄을 태운 인위적인 흔적이 보였고 강변에서 원시적 석기 - 돌도끼 한자루를 발견했다고 한다.   2호동굴입구.   2호 동굴은 1호동굴과 약 600여메터 상거했는데  깊이가 40메터정도, 동굴속에는 역시 동굴밖으로 흐르는 샘물줄기가 있었고 동쪽으로 향한 다른 한 통구가 있었다. 이들은 동굴속에서 대량적인 목탄과 석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어떤 석기는 사용 흔적이 보였고 동굴속 웃벽체에서 흰 모발도 발견했다고 한다.  1호동굴은 사람 10명~20명 정도를 용납할수 있고 2호 동굴은 20명~ 30명 정도 용납할수 있을것으로 보인다.두 동굴의 입구 직경은 2메터 되나마나 해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두 동굴은 동물의 서식처였는가 아니면 고대인 혹은 《야인》이 살았던 곳인가 하는것에 대해  해당 구역 책임자로서 왕송림은 아직 더 많은 전문가들의 고증, 탐색이 필요하다고 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을 패러디한 시 모음  꽃의 패러디                           오규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내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치아, 개밥풀, 인동, 황국 등등의 보통명사나 수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주제 : 존재를 왜곡시키는 인식행위 특징 : ①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하여 유사한 형식과 구절을 반복하고 있다.           ② 사물을 인식하는 행위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의식을 보이고 있다.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이름을 붙이는 순간 존재는 왜곡된 모습을 보임을 노래하고 있다. 무의미한 존재였던 대상이 명명과 인식의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존재로 변화하고, 이어 '나'와 '너'의 상호 인식을 통해 관계가 '우리'로 확산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김춘수의 ‘꽃’은 명명행위를 통해 대상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서로 그러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지만, 이 시에서 화자는 명명 행위가 곧 대상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존재의 본질은 인간의 부여에 의해 달라질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것이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존재의 본질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성격 : 패러디, 해체적 어조 : 풍자적, 반어적 특징 :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표현과 구성에 있어서 원작의 틀을 따르고 있음. 구성 : 1연 -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          2연 - 접근이 허락된 존재          3연 - 타인에게 접근의 허락을 받고 싶은 화자의 소망          4연 - 편리한 사랑을 원하는 '우리'의 소망 제재 : 라디오(김춘수의 시 '꽃'), 현대 도시 문명 주제 : 현대인들의 가볍고 경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       이 시는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parody)하여 재창작함으로써 원작과는 다른, 작가의 독특한 관점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원작인 '꽃'의 의미를 뒤집어 현대 사회의 인스턴트 식(式) 사랑을 나타내고 있고,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다른 작품으로 오규원의 '꽃의 패러디'가 있다. 이 시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인 '꽃'의 의미를 작가 특유의 방법으로 뒤집어 현대 사회의 풍속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과의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 메마른 태도로 나타나며, 또한 자신이 내킬 때는 애정을 나누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상대가 곧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태도로 그려져 있다.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함으로써 작가는, '꽃'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진지하고 친밀한 인간 관계가 오늘날에도 감동과 갈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느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1452    ...계속 댓글:  조회:4168  추천:0  2015-09-07
6.역사유로 추출해낸 이미지   시를 쓰자면, 특히 좋은 시를 쓰자면 사유문제와 언어문제를 꼭 해결하여야 한다. 사유를 어떻게 하는가에의하여 시가 어떻게 되는가가 결정된다. 사유는 시를 쓰는 기본 골격이다. 시에서 언어가 홀시할수 없는중요성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사유이다. 골격이 바르지 못하면 좋은 시가 나올수 없다. 어떤 사유가시적사유인가? 공개념, 공감각을 벗어난 사유가 시적사유라고 할수 있다. 시적사유는 또 공리를 추구하는길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공리를 추구하게 되면 시가 공구의 역할을 놀기 위하여 씌여진 시로 된다. 필자가 말하는 공리란 협소한 관념으로 눈앞의 공리을 추구하는것을 말한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가 좋다는것은 그의 사유의 기점이 인류적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하기때문에 그의 사유는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유이다. 우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이미지를 몇가지 방면으로 규납하여보았는데 실질을 따지고 보면 남영전시인의 시적사유를 해부해보았다고 할수 있다. 이번에는 남영전시인이 토템시를 쓰면서 역사유로 이미지를 어떻게 창출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저 한다. 필자가 말하는 역사유란 간단히 말하면 일상적인 사유와는 반대되는 사유를 말한다. 까치 하고 말하면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까치가 울면 좋은 일이 생기오, 까치가 아침에 집앞에 와 울면 손님이 오겠소, 혹은 좋은 소식이 있겠소 하고 말한다. 그런데 남영전시인의 사유는 그렇지 않다. 그는 를 이렇게 쓰고있다.   조상이 남긴 고훈을 날마다 경건히 흞조리는가   들불이 타번질 때 날려온 칼과 창과 화살, 그리고 방울방울 흐르던 피눈물 잊으려 했건만 온역을 쫓아낼 때 들려온 저주와 욕설과 웨침, 그리고 목갈린 부르짖음 잊으려 했건만 어허 잊을수 없다 지울수 없다   까치는 왜 우는가?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우는것이 아니라  알려주노라고 있다. 시적발상이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하고있던 까치에 대한 개념을 짓뭉개버리였다. 는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일이 있어 방울방울 피눈물 울음을 운다. 이 그냥 생각나서 운다. 그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 또 있다. 을 잊을래야 잊을수 없어 운다. 이미 력사가 되여버린 일을 가지고 까치는 왜 우는가? 시인은 이에 이런 대답을 한다.  할말이 없다. 까치가 우는것을 유전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유전자니까 오늘에 울뿐만아니라 머나먼 장래에도 울것이다. 무엇을 그렇게 집요하게 우는가? 조상의 고훈을 운다. 어느때인지도 모르는 옛날에 이 세상이 들불에 타번질 때 날아오던 칼과 창과 화살을 기억시키기 위하여 울고 온역을 몰아낼 때 받은 저주와욕설과 웨침을 기억하라고 운다. 더 해석하자면 할말이 많지만 여기서 우리는 남영전시인의 시적사유가어떤 대세를 따라가거나, 일상적인 사유에서 머무르지 않는 개성적인 사유라는것을 알수 있겠다. 시인은 를 쓰면서 일상적인 사유와는 정반대되는 사유를 하고있다. 항간에서는 까마귀가 울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하면서 집두리에 와서 까마귀가우는것을 제일 꺼린다. 그런데 남영전시인은 를 아주 좋은 새로 이미지화하고있다.   침침한 밤중에 숲이나 들에서 날아올라 수상한 조짐 보고 까욱까욱 짐승의 주검 보고 까욱까욱 재화를 물리치라 까욱까욱 소식을 전하느라 까욱까욱 까욱까욱, 까욱까욱 다급한 우짖음에 숨었던 위협이 가셔지면 한시름 놓인다는듯 나무초리에 되돌아가 앉는다   보는바와 같이 까마귀는 나쁜 새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일을 하는 새이다. 인간과 가축들의 안전을 위하여 이며 를 알려주는, 안전을 책임진 미더운 경찰과 같은 존재다. 전문적으로 위험한 소식만 알려주면서 위협이 가셔지면 한시름 놓고  휴식의 한때를 보내는 까마귀다. 이런 까마귀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것은 남영전시인의역사유에 의하여 탄생한것이다. 역사유는 일종 시인만의 사유이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개성적인 사유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를 탄생시키게 된다. 개성적인 사유가 안받침되지 못한 시는 필연적으로 일반성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시를쓸 때 사유가 개성적이면 개성적일수록 좋다고 하겠다. 사유의 개성화를 실현하자면 일상적인 의식과 관념과 론리를 뒤엎어야 할뿐만아니라 시인자신이 물젖어있는 그런 의식과 관념과 론리를 뒤엎어야 한다.시쓰기가 바쁘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말이 되겠다.   7.의인화의 수법으로 그린이미지     시를 쓸 때 의인화의 수법으로 쓸수있다는것은 초보자도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의인화의 수법으로 새로운이미지를 창출하는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의인화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였는데 그것은 시인의 기량을 보여주는 한방면이라고 해야겠다. 남시인의 토템시에서 의인화이미지가 집중적으로 잘 표현된 시는 과 다.   아득한 수림은 흙의 손가락이요 넓은 초원은 흙의 머리칼이다 출렁이는 호수는 흙의 눈동자요 바다는 흙의 가슴팍에 박힌 거울이다 흙의 신령은 날마다 창천을 우러러 경건한 기도를 드린다 천만년 길이길이 인류의 창성을 빌어 만물의 번영을 빌어   흙의 손가락을 찍지 말자 흙의 머리카락을 헝클지 말자 흙의 눈동자를 더럽히지 말자 영원불멸할 흙의 신령은 모든 생령의 항구한 복음이여라   시는 으로 된 흙에 있는 나무, 풀, 호수, 바다를 의인화적인 이미지로 짜놓음으로써 생신성과 기이성을 기하고있다. 의인화수법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친절하게 다가오며독자들의 리해에도 난해한감을 적게 준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는 의인화적인 시구도 있고 두개련을할당한 도 있지만 시 전체가 의인화로 이미지한 시도 있다 가 그런것이다   하루밤사이에 비는 손가락을 잘리웠네 하루밤사이에 비는 두다리를 끊기였네 하루밤사이에 비는 옷을 홀랑 벗기웠네 하루밤사이에 비는 머리 하나만 달랑 남았네   손가락은 자신이 적셔준 풀잎에 잘리웠고 두다리는 자신이 키워준 수풀에 끊기였고 옷은 자신이 가꾼 초원에 홀딱 벗겨졌네 비는 한바탕 울고싶었지만 눈물이 말라 천둥만 쳤다   비는 급해서 서성거린다 비는 처절하게 부른다 초원에서 수림에서 사막에서 어수선한 세계를 향하여 손가락 찾는다 두다리 찾는다 옷을 찾는다 찾아 부르는 그 부름소리 사람의 마음 잡아비튼다   는 하루밤새에 손가락, 다리를 잘리우고 웃을 벗기운다. 자기가 자래워준 나무와 풀, 초원에게 억울하게 당한다. 그래서 비는 초원에서 수림에서 사막에서 손가락과 다리 그리고 웃을 찾으려고 헤매면서부르짖는다. 그 부르짖음이 . 시인 남영전은 이런 를 보고 가슴이 아파한다. 필자는 묻고싶습니다. 를 보고 당신의 마음도 잡아비트는것처럼 아픕니까? 우리는 남영전시인의 이나 의 의인화된 이미지를 보고 이런 이미지는 새롭고도 신비하다는것을 느끼게 된다. 시의 내함도 깊지만 고로한 의인화수법으로 참신한 이미지를 추출하여낸 시인의 지혜를 느끼게 되며 그의 예술성에 탄복하게 된다. 그것은 새로움과 신비성이 있기때문이다. 한수의 시는 시마다 새로운 창조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창조가 없는 시는 시라는 명칭에 부끄러운 시이며 엄격히 따지고보면 시가 아니다. 새로운 창조란 이제까지 없던것을 시인자신만이 발굴하고 창조한것이다. 의인화의 수법으로 이미지화한 남영전시인의 이나 는 바로 이런 창조에 도착하고있다겠다.   8.형태이미지   형태이미지란 시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고찰하는것으로서 필자가 자의적으로 주장하는것이다. 왜이런 주장을 세우는가? 시는 태여나면 하나의 사물이 된다. 사물은 모양이 있고 특성이 있고 생명이 있기마련이다. 시의 모양이란 시의 생김새이고 시의 특성이란 예술성이고 시의 생명이란 시의 내함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는 우리들이 사고해볼만한 형태이미지가 동안뜨게 나타나고있는데 몇가지만 고찰해보려고 한다. 시 의 첫머리를 남영전시인은 이렇게 시작하고있다.   우람한 산그림자 끄을고 엉기적 엉기적 엉기적   첫줄에 를 쓰고 아래에 을 세번 반복하였다. 첫시구가 뒤에 오는보다 길며 은 우로부터 아래로 반복되여 나타나고있는데 아래로 내려올수록 오른쪽으로 떨어지고있다. 이 형태이미지에는 무거운 내함이 내포되여있다. 첫줄이 길게 을 막은것은 곰의 머리우를 막아놓은것으로써 곰의 전진을 막는 장벽을 의미한다. 장벽우에는 푸른 하늘이 있다.곰은 푸는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을 세번 반복하면서 오른쪽으로 떨어지게 쓴것은 은장벽을 뚫을수 없어 올라가야 할 하늘과 점점 멀어지고있다는 표현으로써 의 추락을 의미한다. 은 앞으로 전진하려 하지만 장벽이 막혀서 전진하지 못하며 은 하늘에 오르려 하지만 오르지 못하고 그냥 뒤걸음질만치는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있다. 이것은 토템의 추락을 의미하며인류가 걸어온 길이 비틀비틀하다는것을 의미하며 시인이 원하는 원융의 세계의 실현이 간고하다는것을이미지와한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비슷한 내함을 가진 형대이미지는 , , 등 여러곳에서 나타나고있다. 에서는 를 한글자씩 수직으로 세우고, 에서는 이라는 언어를한글자씩 수직으로 세우고, 에서는 이라는 소리를 수직으로 세우고있다. 앞에서를 론할 때 의 수직에 대하여 말하였으므로 더 언급하지 않고 구체적인 해석은 관심있는 독자에게 맡긴다. 시인은 을 쓸 때 마지막련을 이렇게 쓰고있다.   산 산 산   우선 우리는 산이라는 석자가 기하학적 삼각형을 이룬것을 볼수 있다. 삼각형은 안정성을 반영한다. 아무리 모진 세월의 풍파가 일어난다 하여도 웅위로운 산은 끄떡하지 않을것이며 산에 슴배인 토템의미는 변하지 않을것이라는 시인의 확신이 침투되여있다. 또한 작자가 산의 깊은 침묵, 산의 넓은 흉금, 산의 고상한 풍격이 영원할것이라는 찬양의 의미가 내포되여있다고 할수 있다 이 시가 처음에는 한어로 씌여졌다는데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한어로 산(山)자에는 내리금이세개가있다. 어찌보면 이것은 세개의 홰불이다. 산자가 세개이니 이 형태이미지에는 홰불이 아홉개가 있다. 불은 태양이다. 그러므로 아홉개의 해가 떠있다. 전설에 의하면 워낙 하늘에는 해가 열개였는데 대지가 너무 무덥고 가물어서 예가 나타나서 활을 쏘아 아홉개의 해를 떨구었다고 한다. 그 아홉개의 해가 지금도 산에서 불타고있는지도 모른다. 시에서 형태이미지는 그 내함이 풍부하여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것만은 확실하다. 시인이 어떤 모양의 형태이미지를 설계할 때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시에 표현된 형태이미지를 결코 가볍게볼일이 아니다. 이외에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를 이미지한것과 같은 이미지들이 많지만 필자는 이것으로 남영전토템시의 이미지에 대한 사고를 마치면서 한가지 할말이 있다. 시는 비유로서 이미지를 유추하게 되는데두 사물의 어떤 상사성만으로 비유를 설정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유의 상사성의 울타리속에서 뛰쳐나와 이질적인 사물의 비교로 이미지화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두 사물의 질이 다르면 다를수록 그 거리가 멀면 멀수록 창출되는 이미지는 더 훌륭한 이미지로 된다. 이런것을 시에서 강압조합이라고 한다. 강압조합은 현대시의 핵심으로서 이미지조합에서뿐만아니라 언어조합에서도 나타난다. 남영전의 토템시에서 강압조합이 많이 나타나고있는데 관심있는 독자라면 한번 천착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된다. 총적으로 남영전의 토템시는 새로운 시의 령역을 독자적으로 개척하였고 시를 예술적으로 다룸에 있어서빼여난 성취를 획득한 시라고 하겠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는것도 아니다. 시들의 구성이 류사성이 있고 이미지화함에 있어서 단일성이 보이고 언어가 세부화되지 못한 흠이 있는것 같다. 이런 흠은 옥에 티와같은것으로서 남영전토템시가 이룩한 성과를 흐리우지는 않는다. 남영전시인은 우리 민족시단의 전위적인 훌륭한 시인이며 개혁개방후 중국시단의 전렬에 서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문화보물고에, 중화민족의 시보물고에 하나의 찬란한 진주를 선사한다. 그의토템시는 세계적이고 인류적인 시점에서 쓴것이다. 그가 조선족이기때문에 조선족한테 전하여 내려오는토템의식이 시에 나타난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쓴 토템시를 조선족이라는 울타리에 국한시키는것은 미상불 리해의 한계를 너무 좁히는것일것 같다. 남영전시인의 새로운 정진을 믿는다.              
1451    남영전 / 최룡관 댓글:  조회:4186  추천:0  2015-09-07
시는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고찰해 보아야 한다. 필자의 일가견으로 남영전 토템시에 대한 고찰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 구조   18년동안에 남영전시인은 처럼 하게 42수의 토템시를 창출하였다. 우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정신ㅡ 원융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였다. 우리는 남영전토템시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가지 각도로 살펴볼수 있겠지만 필자는 제재들의 구조와 토템시에 일관된 정신에 대하여 천착해보려 한다. 제재적인 각도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를 보면 하늘과 대지와 그 사이에서 활동하는 사물들을 취급함으로써 천지인화의 경지를 구축하고있다겠다. 하늘의 제재로서는 해, 달, 별, 구름과 같은것이고 대지의 제재로서는 산, 물, 흙, 바다와 같은것이고 대지와 하늘을 이어주는 작용을 하는 제재들로는 두루미, 백조, 매, 바람 등등이다. 다른 방면으로 보면 전설적인 사물과 현실적인 사물들의 교차이기도 하다. 룡, 봉황, 신단수들은 순 전설적인 사물에 속하고 기타의 사물들은 현실적이면서도 토템적인 사물에 속한다고 할수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토템시의 시간과 공간의 호한성을 감안하게 된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인류력사의 수십만년을 포괄하고있으며 공간적으로 말하면 우주를 포용하고있다. 그러므로 토템시의 구축은 하나의 전례없던 방대한 작업으로서 소설로 쓰자해도 몇십권을 써야 할분량으로 되여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남영전시인이 이런 방대한 작업을 42수의 시로 완성하였다는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남영전토템시의 정신은 세가지로 구축되였다고 볼수 있다. 첫째는 모성사상으로 관통되였고 둘째는 자존자강의 사상으로 관통되였고 셋째는 더불어 살자는 사상으로 관통되였다. 이 세가지는 모두가 원융이라는 핵을 받쳐주는 세개의 기둥이라고 할수 있다. 모성사상은 어머니마음이다. 토템의 뿌리는 모계사회에 있다. 토템자체가 모성이다. 모성은 인간에게서 가장 위대한 도덕이며 륜리이며 기치이며 응집력이다. 자연은 이 세상사물의 어머니이고 이 세상 모든 사물이 자연의 자식들이다. 자연은 자식들을 사랑한다. 불효한 자식이 있을뿐이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자식이 형제들과 싸우면서 어머니한테 많은 상처를 입히고있다. 남영전시인은 이러한 인간들의 불효를 타매하고 바로 잡기 위하여 토템시를 썼다. 토템시 모두가 모성을 위하여, 모성의 복구를 위하여 씌여졌다고 할수 있겠다. , , ,… 등에서 모성이 집중적으로 표현되고있다.   생명을 낳아키우고 중생을 품에 안은 바다는 세상의 무궁변천과 인간의 창상지변을 낱낱이 엿보아왔다 그 가슴 넓고도 깊어 골육상쟁이 피묻은 칼과 세인이 모르는 비밀도 깊숙이 감추고 언제나 하냥 입을 꼬옥 다물고있다   시 에서 절록한것이다. 바다는 중생을 낳아키우면서 세상의 변천과 인간의 창상지변을 본다. 바다의 흉금은 넓고도 넓어 싸움에서 떨어진 피묻은 칼도 품어주고 세인의 비밀도 말하지 않으면서 침묵속에서 묵묵히 지켜본다. 이것이 어머니 품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안아주고 달래주고 가르쳐주는 어머니의 정과 마음이 바다를 통하여 우리의 가슴을 치고있다.   설렁 버림을 당한대도 설사 알몸이 된다 해도 설약 만신창이 된다 해도 설혹 불구의 몸이 된다 해도 굽히지 않는 신념으로 충천하는 기백으로 우뚝 솟으리   자신의 피 자신의 살 자신의 정기 자신의 팔로 날고 기는 생명 품에 안아주고 춤추고 노래하는 령혼 어루만져준다 쓸쓸하고 차가운 세상에 그래서 활기가 넘쳐나고 그래서 화목한 분위기가 돈다   의 이미지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통하여 어머니 품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자신이 아무리 큰 타격과 상처를 입어도 그것을 속으로 묵묵히 새기며 자신의 팔로 자신의 가슴으로 생명을 안아 보듬어주고 이 세상에 활기가 넘치게 하기 위하여, 화목이 무르녹게 하기 위하여 비바람과 눈보라속에서도 우뚝 서있는 산! 그것은 동구밖에 나가서 집 떠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모습을 떠올리고, 때거리가 없어도 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죽이라도 따뜻하게 끓여주는 그런 녀인을 떠올린다.   아득히 먼 해궁전에 조상의 흰 대문이 열려있다   조상의 흰 령광 검은 도깨비와 사악을 붙잡고 조상의 흰 온정 첩첩 설산과 원하를 녹이고 조상의 흰 자애 귀여운 자손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리하여 까무라진 혼백들 어둠에서 깨여나고 상서로운 부락들 어둠속에 태여난다   에서 나오는 이 조상이 누구인가? 인류사회를 탄생시킨 어머니이다. 광의적으로 말하면 세상만물을 낳아준 자연이고, 협의적으로 말하면 모계씨족사회라고도 할수 있다. 모두어 말하면 원초적인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령광은 도깨비와 사악을 물리치고, 어머니의 온정은 이 세상의 차거움을 녹여주고, 원한을 삭여주고, 어머니의 자애는 자손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어머니는 까무라진 흔백을 깨워주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살림을 꾸려가고 가세를 일으켜 세우면서 자신의 모든것을 헌신하고있다. 이 모성은 조상과 자손을 이어주는 로 되여 눈부신 빛을 뿌리면서 언제나 이 열려져있는 원융의 궁전으로 우리를 불러들이고있다. , , 의 너그러움과 포옹, 그리고 헌신정신이 바로 어머니 정신이며 남영전토템시의 골격을 이루는 사상의 하나라겟다. 자존과 자강은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정신이다. 자존과 자강이 없는 사물은 이 세상에서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자존하고 자강하는것은 분발을 의미하며,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행위를 의미한다. 남영전토템시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원융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분발하고있으며 자강하고있다.   신비한 불 신비한 빛 날짐승도 얼씬 못하고 길짐승도 얼씬 못하고 도깨비도 얼씬 못한다 주눅이 든 혼백도 그래서 얼어붙은 날개 퍼덕인다 그래서 악마의 공포를 털어버린다   시 의 제2련이다. 생존도, 풍년도, 정결도, 강녕도 불을 떠나서는 이룩될수 없다. 불은 이렇게 위력이 있고 이렇게 신성하다. 날짐승도 막고 길짐승도 막고 도깨비도 막는 불의 힘은 위대하다. 불은 인류의 문명을 창조해준 천지신명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어두운 밤을 태우고 태양을 불러오는 존재이다. 시 도 자존자강하기 위하여 폭력과 싸우며 따사로움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생령이다. , , , 이 삼대산의 잔혹한 형벌속에서 압제속에서 먹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뛰쳐나온다. 왜 뛰쳐나오는가? 시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다시는 묻히우기 싫어 다시는 어둠이 싫어 다시는 외로움과 굶주림이 싫어 논밭에서 련못에서 나무가지에서 밤낮 울며 노래한다 밤에는 어제날의 운명을 울고 낮에는 영원한 봄과 함께 따사로움이 그리워 기도를 드린다.   자존과 자강을 위하여 하늘에 기도드리는 개구리는 잔혹한 압력에 굽어들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개척해나가는 완강한 의지의 실천자이다. 사실 개구리에게도 찬란한 력사가 있었다. 부어신화를 보면 부여왕 해부루의 뒤를 이은 왕은 금와왕이였다. 금와왕은 추방당한 물의 녀신 류화를 도와 궁에 있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낳게 하였다. 이것을 물의 생명력(류화의 잉태)과 개구리의 보호(금와왕의 행동)에의해 탄생한 영웅(주몽)신화로 본다면, 금와왕의 행위는 산파(产婆)의 기능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였다. 물과 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그가 어찌 력사에 의하여 맥없이 무너지며 매몰될수 있으랴. 시에 등장하는 도 자손자강의 한 전범이라겠다.   망망수해 어디나 명명황야 어디나 날고 날 비범한 담력과 흥분으로 우주의 바람 일으킨다…   한생 변함없는 큰 포부 안고 한생 두려움 모르는 추구로 경계의 노를 천지간에 저어간다 싸우지 않으면 망하고 강하지 못하면 망하거늘 날개 돋쳐 나는것만이 이 세상 살아가는 길이다   매는 수림의 바다와 어슴푸레한 황야를 난다. 그는 평상치 않은 담력과 흥분으로 우주에다 바람을 일으킨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경계의 노를 젓는다. 사냥물을 덮칠 때 그의 눈은 예리하고 그의 속도는 번개속도다. 강하기 위하여 싸운다. 매가 싸운다는것은 나는것이다. 날아야 매는 살고 날지 않으면 매는 죽는다. 매는 난다는 자체가 자기에 대한 존중이고 자기의 의무와 희망에 충성하는 길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것이 아니고 만물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엉키여서 더불어 살아가기마련이다. 더불어 살아간다는것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며 도덕이며 륜리이다. 더불어살아간다는것은 이 세상이 화목해진다는 표징이며 평화로와진다는 표징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때면 토템시대가 다시 오는 때이며 원융의 희망이 실현되는 때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정신이 체현되고있다.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자는 사상이 시인의 시에 체현된주요한 사상의 하나라겠다. 시 는 피타게 웨친다. 이 세상이 어두워간다고 피타게 절규한다. , 은 기에. 이런 절규를 시인은 이렇게 무드화하고있다.   피 터지는 울부짖음 방울방울 빨간 피로 설설 끓는 피눈물로 갈라터진 가슴을 녹여주고 말라죽는 목숨을 살려준다 화창한 봄을 불러오고 아롱진 색채를 입히여 세상이 목마르게 바라는 금빛동산을 일떠세운다.   피! 피를 바치는것은 최고의 헌신이며 충성이다. 피를 바친다는것은 희생을 각오한 일이며 생명의 마지막연소를 의미한다. 뻐꾸기는 그런 마음과 의지와 자세로  주려하고,  주려하고, 봄을 불러다 아름답게 장식하려고 하고, 한다. 더불어 화목하게 살기 위한 뻐꾸기정신은 아름다운 정신이며 비장한 정신이다. 뻐꾸기울음소리는 횡적으로울리는것이 아니라 종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지고있다. 하늘에서 떨어진다는것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것으로써 신성한 하늘의 숙원을 전달하는것이며, 하늘과 땅을 하나로 융합시키려는것이다. 이것이 뻐꾸기의 더불어 화목하게 살려하는 정신이다. 남영전시인의 이고 이라 부르는 에서도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자는 의지가 빛발치고있다.   돌은 가장 거룩한 거인이여라 그의 말은 불과 우뢰, 비와 바람이 엮어주고 그의 마음은 천지간의 차고 더움을 헤아려주노라 그의 손은 해와 달을 받쳐들고 그의 힘은 끝없이 뻗쳐 수없이 많고 많은 령체를 움직이노라 돌은 분신쇄골이 되여도 알알이 모래로 되여 대천세계를 끌어안노라   남영전시인은 하늘과 돌의 신비하면서도 상서로운 만남과 어울림을 격조높이 노래하고있다. 거룩한 거인돌의 말은  돌의 마음은  돌은  불, 우뢰, 바람, 비, 해, 달, 령체와 돌의 조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감싸주고 서로 받들어주고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그 순리가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화목이다. 그래서 돌은 산산이 부서져 알알의 모래로 되여도 대천세계를 달가이 끌어안는다. 생각할수록 그들의 마음의 어울림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토템시를 극성스럽게 쓴 남영전시인의 바람이 바로 이러한것일것이고 이 세상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이런것이리라. 아무 곳에나 똥오줌을 갈기는 개, 애기의 똥도 맛갈스럽게 먹는 개다. 벼슬도, 명성도, 명예도  인 개도 서로 어울려 화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지조 하나만은 잊지 않고있다.   과분한 요구가 없고 주인집 못산다 꺼리지 않는다 예민한 코 밝은 귀 재빠른 네다리 집을 지켜주고 집주인 바래준다 주인의 버림을 당해도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죽어서도 세월의 뒤꼬리에 달려 누울자리 하나면 만족이다   개는 왜 이렇게 바보질하는가?  있으면 되는 개, 애들의 똥이나 맛있게 먹으면 되는 개, 하지만 언제나 주인을 섬기는 개다. 주인이 부자든 빈자던 개는 관계하지 않는다. 주인이기만 하면  함께 더불어 살면 되는것을 개는 영광으로 행복으로 숙명으로 간주하고있기때문이다. 인류의 력사에서 개의 공헌은 컸다. 사냥군을 도와 짐승잡이에 나서서 목숨을 걸고 주인을 도와주다가 죽은 개는 얼마이며 군견이 되여 전쟁에서 희생된 개는 그얼마이랴. 생각해보면 인간중에는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어찌보면 개는 바보 같지만 실제상개는 령물이고 신령한 영웅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원융에 도착하는 날 시인은 고 했으리라. 모성으로, 자존자강으로, 더불어 사는 정신은 에 도달하려는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정신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인간이 이런 정신으로 삶을 대하고 자연을 대하고 인간 서로를 대하면 마음이 편하게 평화의 향연을 누리게 되리라고 필자는 믿고있다. =================   남영전토템시의 이미지성과   남영전시인이 토템시를 쓴것은 하나의 장거이다. 중국현대사에서 토템시를 계통적으로 체계적으로 쓴 시인은 없었다. 일부 시인들이 토템에 관한 시들을 좀 쓰기는 하였으나 토템적자각이 없이 썼던것이다. 그들의 시는 선조를 노래하고 선조의 문화를 노래하는것으로 썼을뿐이였다. 한 시인이 하나의 새로운 시령역을 개척하여 쓴다는것은 그 령역에 대한 심각한 연구와 철학적사고가 안받침되여야 하는것으로서 아무나하는 일이 아니다. 황차 토템령역은 원시사회의 문화로써 아무나 접근할수 있는 령역이 아니다. 사학적연구가 따라서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다. 남영전은 바로 이러한 일을 시적으로 해내였다. 그러하기에 쎄맨이 남영전시인을 이라고 평가한것은 결코 과분한 평가가 아니며 명실에 부합되는 평가이다. 시는 하나의 새로운 령역만 개척하면 다 되는일이 아니다. 시가 시로 되여야 한다. 시가 시로 된다는것은 시적예술이 시에 무르녹아있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미지는 시라는 예술의 근본이며 핵심이라고 하겠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이미지창출에 모를 박고 신선하고 아름답고 충격적인 새로운 이미지를 많이 창출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와 계발을 주었다.   1.신 화 적 이 미 지   신화는 인류의 최초의 문화로서 인류의 뿌리를 증언하는 보물이다. 신화적 이미지를 창출한다는것은 인류의 원초적인 문화의 맥을 잇는 작업이라고 할수 있고, 인류의 뿌리에서 보물을 캐고, 화폭을 창출하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곳곳에서 신화적화폭이 펼쳐지고있으며 신화적향기가 그윽하게 피여오르고있다.   산 넘어 바다 건너 저 멀리 박쥐의 날개죽지에 숨었다가 아장아장 걸어오는가 고운 얼굴 가리운 얇은 베일 너울너울 어깨를 감싸고 머리우에 팔락이는데 정겹게 방긋 웃으며 흐리마리한 마음의 요람 나무추리에서 흐느적거리네   삼라만상 무게를 잃은 이 순간 산그림자 해솜마냥 부풀고 바다물결 실타래 풀리듯 넘실거리네 돌멩이도 불룩한 가슴 헤치고 젖을 빨듯 으스름 달빛 빨아들이는데 둥글넘적 환하게 부드러운 빛살속에 상상의 푸른 날개 펼쳐지네 의 첫두련   달이 떠오르는 경상을 쓴것이다. 우리앞으로 신화같은 아름다운 화폭이 잔잔하고도 부드럽게 흘러지나가고있다. 우리는 이 시구들을 읽으면서 아늑한 환상세계로 빨려들어간다. 달이란 언어 한마디도 없이 달의이미지를 신화적으로 써놓음으로써 우리는 시를 보고있는것이 아니라 신비하고 아름다운 신화를 읽고있게 된다. 달이 뜨고있는것이 아니라  얇은 베일을 날리는 절세의 미인이 우리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오고있다. 박쥐의 날개밑에 숨었던 아가씨가 상상의 푸른 날개를 저으며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는모습은 얼마나 황홀한가!  절세의 미인을 바라보는 향연과 미인의 향기를맡는 모든 사물들이 붕 뜬다. 그 무거운 산도  바다물결도  가볍게 설레이고 돌멩이도 가슴을 헤치고 단젖을 빠느라고 여념이 없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이미지를 남영전은 신화적인 색채로 펼쳐주고있다. 남영전신인은 에서 아늑한 황홀을 펼쳐주었다면 에서는 가을바람과 같은 시원한 전설적인 이미지를 우리앞에 그려보이고있다.   짙은 안개 헤치고 타래치는 먹장구름 꿰뚫고 아득한 창천에서 달려오는가   눈부신 번개불 번쩍이고 류황내 배인 향기를 휘몰아 쏜살같이 달려온다 칡덩쿨 뻗은 숲을 지나 가시덤불 우거진 거친 들판을 지나 한낮의 흑풍백우 몰아내고 오밤의 검은 장막 열어제치며 지동치듯 달려온다 해빛 안고 달빛 안고 발길 닿는 곳마다 흰 빛이 깨여난다   의 신화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녀성의 신화라면 의 신화는 거치르고 날파람이 있는 남성의 신화이다. , , 라고 달려오는 모습을 세층차로 나누어 표현함으로써 저 요원한 곳에서 지척으로 박근하는 천하무적 백마의 무드로 하여 긴박성과 긴장성을 가지게 되며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안개도, 타래치는 먹장구름도, 칡덩굴숲에 깔린 산도, 가시덤불 우거진 들판도 백마의 전진을 막지 못한다. 백마가 번개불을 번쩍이며 령기를 휘몰아오며 흑풍백우를 몰아치고 오밤의 검은 장막을 활활 열어제끼는데 뉘감히 앞길을 막으며 뉘 감히 하늘에 사무치는 그 기세를 당한다던가. 백마의 회오리치는 발자국마다에서 해빛이 깨여나고 달빛이 깨여나고있음에랴. 에서도 신화적인 색채가 추호도 그 기세를 눅잦히지 않는다. 남영전시인은 우뢰를 소나기속에서 묘사하는 일상적인 표현을 떠나서 신화적인 방법으로 다루고있다.   대붕과 룡 하늘을 찢고 땅을 쪼갠다   어둑컴컴한 대지 흐린 하늘에 덩지 큰 대붕은 날개를 퍼덕이며 쇠발톱 번쩍인다   당지 큰 룡은 하늘에 치솟아올라 귀청 째듯 포효한다 우뢰의 화살 우뢰의 도끼 우뢰의 돌멩이 창망한 하늘땅을 짓쪼긴다.   시인은 우뢰를 대붕과 룡이 하늘땅을 갈갈이 찢어버리는것으로 표현하고있다. 대붕과 룡은 모두 신화적인 사물이다. 를 신화적인 사물의 운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의 신화적색채와 의미를 풍만하게한 력작이다. 하늘과 땅을 찢어버리는 대붕과 룡의 힘은 언어로써는 표현하기 어렵다. 시인의 표현은 너무핍진하다. 날개를 퍼덕이며 쇠발톱을 번쩍이는 대붕, 구중천에 솟아올라 귀청이 짜개지는 함성을 지르는룡, 그들의 동작과 웨침은 이고 이고 이다. 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신화적색채로 씌여진 남영전시인의 는 밥인것이아니라 술이다. 술중에서도 독하고도 향기로운 술이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이밖에도 신화적인 이미지를 창출한 시들이 많다. 그의 신화적이미지는왕왕 시의 서두를 차지하고있다. 신화적인 이미지를 배치하는것은 필자가 보기에도 안성맞춤의 자리인것같다. 이렇게 하면 독자에게 돌연적인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되여 독자는 느닷없이 상상의 새로운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가서 시적향수를 누리게 된다.   2.철 리 적 이 미 지   철학은 시의 기초이다. 시는 철학우에 놓여진 건물이다. 때론 시자체가 철학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철학이 없는 시는 기초가 없는 시로서 항구성을 가지지 못한다. 시는 정치에 의하여 지배되는것이 아니라 철학에 의하여 지배된다. 구라파의 현대시들이 이것을 증명하였다. 남영전시인이 토템을 우상으로 이 세상의원융을 부르짖는 자체가 력사유물주의와 변증법적관점에 발을 붙인 일종 찰학이다. 그는 토템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하고 토템으로 인류력사를 해석하려 하고 토템으로 시의 리상국을 주조하고있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철리가 두드러지게 안받침된 시구들을 착중해서 보기로 하자. 의 제4련을 시인은 이렇게 읊조리고있다.   심령의 요람과 날개와 그리고 신전문에 걸린 달은 이지러졌다 둥글어지고 둥글어졌다 이지러지는데 둥글어짐은 이지러지기 위함이요 이지러짐은 둥글어지기 위함이라 둥글고 이지러짐은 영생에로 나아가는 산길이라네   얼핏 보기에는 달이 이지러지고 둥글어지는 현상을 쓴것 같지만 결코 그런것이 아니다. 시인은 를 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있다. 달을 쓰는것 같지만 실제상에서는 심령의 요람과 심령의 날개를 쓰고있다. 심령의 요람이란 마음의 리상이요 심령의 날개란 마음의 요람을 향하여 가는 인간의 움직임을 표현한것이다. 달이 둥글어졌다 이지러졌다 하는것은 그 리상을 향하여가는 로정의 풍파를 암시하며 간고성을 암시하는것이다. 그러기때문에 시인은 이라고 읊조리고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오솔길, 신작로, 대통로, 들길, 산길, 이런 길들중에서 가장 걷기 어려운 길이 산길이다. 산길을 걸어간다는것은 여느 길을 걸어가기 보다 맥이 들고 숨이 차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산길은 령을 넘어가는 길로서 가파롭고 구비가 많을뿐만아니라 위험한 짐승도 있을수 있고, 정글도 있을수 있고, 가시덤불도 있을수 있다. 은 기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훌떡 가는 길이 아니다. 달의 둥글고 이지러짐이말하려는것이 바로 이런 길인것이다. 둥글어지는것과 이지러지는것은 모순되는 대립면으로서 그들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전의한다. 달에 대한 시인이 이런 표현은 현실과 상상과 철리가 혼연일체를 이룬 이미지라고 우리는 명명해주어야 할것으로 알고있다. 시 에서도 남영전시인은 이미지를 직조하는데 철리를 부어넣는 배려를 돌리고있다. 의 제2련의 앞부분이 이렇게 이미지화되고있다.   틈만 있으면 파고들어 어디서나 볼수 있지마 발도 없고 날개도 없고 형색 또한 없어라 없는 발이 가장 큰 발이고 없는 날개 가장 큰 날개란다 없는 형상 가장 큰 형상이고 없는 빛이 가장 현란한 빛이란다 땅우를 흐르고 모래밭에 스며들면 하늘에 날리고 …   이 이미지는 일상적인 사유로 보면 모순투성이고 말도 맞지 않는다. 땅속에 스며든 물이 보인다고하는가하면, 발이 없기때문에 가장 큰 발이라고하는가 하면, 날개가 없는게 가장 큰 날개라고하는가 하면, 형상이 없는게 가장 자유로운 형상이라고 하는가 하면, 빛이 없어야 가장 현란한 빛이 된다고 하는가 하면, 물이 땅에 스며들면 하늘에 날린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황당무계한 소리가 시로 된다면 누구나 다 시인이되겠다고 혹자는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이며 철리가 무르녹은 이미지이다. 없는것에 있고 있는것에 없고, 차가움에 더움이 있고 더움에 차가움이 있고, 땅땅한것에 무름이 있고 무름에 땅땅한것이 있고하늘에 땅이 있고 땅에 하늘이 있고, 물음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속에 물음이 있고 악함속에 착함이 있고착함속에 악함이 있고, 강함속에 연약함이 있고 연약함속에 강함이 있고, 무리속에 흩어짐이 있고 흩어짐속에 무리가 있다 … 이것이 세상이고 이것이 세월이고 이것이 절대적진리이다 이러한것을 감지해내는사람이 현인이다. 이러한것을 이미지화 하는 사람은 시인이다. 랭보도 말했다. 일반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소리를 듣고 보지 못하는것을 보아내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남영전시인의 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한것은 황당한것 같으면서도 철리가 담겨져있고 헛소리 같은데 예술이 꽉 차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철리의 힘이며 시인의 상상의 힘이다. 자아완성을 표현하는 시 도 철리가 용해된 걸작이다. 대는 땅을 비집고 나오는 강자로서 감히 꽃과아름다움을 비기고 휘우둥대는 바람과 맞서서 탄탄함을 비기면서 자신을 갈고 벼린다. 그런 대를 시인은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자루의 칼로 한자루의 검으로 자신의 속살을 베여내고 자신의 염통을 끄집에내여 끊임없이 피를 흘리네 참을수 없는 아픔을 참으며 자신에게 모질어 자신에게 무자비하여 한마디 속이 비면 그만큼 허리가 실해지네 마음도 속이 빌수록 성결해지고 속이 빌수록 더 충실해지네   의 일생은 자학의 일생이다. 로 으로 . 피를 흘리며 언어로서는 표달할수 없는 아픔을 감내하는 독한 놈이다. 왜 참대는 독한 놈으로 되는가? 속이 비여야 키가 커지고 속이 비여야 허리가 실해지기때문이다. 속이 빌수록 마음도 성결해지고 속이 빌수록 마음이 충실해진다. 대는 속을 비우며 자라나서 휘여든 몸뚱이가 아니라 로 을 받치고  받친다. 속을 비워야 함은 그의 운명이고 숙명인지도 모른다. 불교에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비워야 심령이 깨끗해지고 마음을 비워야 심신이 건강해지고마음을 비워야 모든것을 포옹할수 있는것이다. 욕심이 꽉 들어찬 마음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일수 없다. 오직 빈 마음이라야 어디를 가나 어떠한 일을 하나 떳떳하게 된다. 시인은 에서 바로 이런 마음을 추구하지 않았나싶다 는 불교의 성전같은 경지에 도착하기 위하여 모질고 무자비하게 마음을 비우며 자아완성을 하고있다. 비여야 채울수 있는것은 철리이다. 이런 철리로서 남영전시인의 대는 우리들에게  전범을 보여주고있으며 후세사람들도 찾아들어갈 수 있는 대숲을 마련하였다.   3.환 상 적 이 미 지   모든 토템 자체가 환상적이다. 환상은 남영전시인을 토템의 전당으로 부르고 남영전시인은 환상의 전당에 가서 토템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희희닥거리며 롱지거리도 한다. 남영전의 가장 친한 친구는 토템이고토템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남영전이다. 시인은 18년동안 토템들과 막역지우로 보내면서 토템들의 속내를알아보았고 토템들의 소원과 희망을 알아보고 토템시를 썼다. 그 시가 우리가 보는 42수의 토템시다. 시인들은 상상으로 시를 쓴다. 환상은 상상의 최고 류형이다. 시인은 환상의 차를 타고 일초동안에 수억만리 달릴수 있으며, 환상의 나래를 저어 일초동안에 구만리 하늘을 날수 있다. 모종 의미로 말하면 환상이시인을 예술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린다고 할수 있겠다. 필자는 남영전시인이 쓴 환상적이미지에서 , , 의 이미지 일부만을 살펴보고저 한다.   창천을 쪼각쪼각 받쳐들고 대지를 갈래갈래 거머쥐고 씨비리의 돌개바람 안고 회오리쳤네 회오리쳤네 회오리쳤네 장대 같은 사닥다리 받치고 높다란 기둥을 세워 대지의 배꼽과 북국성을 이어 해와 달을 긴 가지에 휘감아 넋새에게 보금자리를 지어주었다   의 제1련이다. 시는 이렇게 쓴다. 빈소리가 한마디도 없다. 하늘과 땅을 이어놓은 신단수가 장쾌하고도 억찬 자신의 모습을 우리들의 눈앞에 그림처럼 낱낱이 보여주고있다.  신단수!  신단수! 에 기둥을 세워 에 닿은기둥,  신단수! 실존적인 언어는 한글자도 없는 환상이 끓어번지는 이미지다. 이런 이미지가 바로 시의 고차원을 이루는 이미지가 아닐가. 신단수가 하늘과 땅을 이어놓고 해와 달을 가지에 걸고 웅장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입을 딱 벌리게 된다. 신단수가 왜 하늘과 땅 사이에 기둥을 세우는가? 왜 사닥다리로 되는가? 신단수가 하늘과 땅을 통하는 다린것이다. 시인은 신단수로써 하늘과 땅의 혼연일체, 아니 우주의 혼연일체를 시도하고있다겠다. 천지인화의 위대한 사상이 신단수를 통하여 우리앞에 흐리마리한것이 아니라 확고하고 확연한 이미지로 떠오르고있다. 시인의 흉금은 무연하다. 시인의 흉금속에서 해 달 별들이 모래알처럼 작은 사물이 되여 빙글빙글돌아가고있다. 환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정서를 쏟아부을수 있으랴.   바람의 날개처럼 형체없이 나비의 날개처럼 화려하게 새의 날개처럼 가볍게 … 바람의 날개 없는 곳에서도 바람의 날개 퍼덕이고 나비의 날개 없는 곳에서도 나비의 날개 퍼덕이고 새의 날개 없는 곳에서도 새의 날개 퍼덕이네   시 에서 절록하여 온 환상적이미지이다. 부드럽고 우아한 언어로 우리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미지를 펼쳐주고있는가! 구름을 바람날개, 나비날개, 새의 날개라고 누가 말한적이있었던가. 날개들이 모여 구름이 되였다는 이 기기묘묘한 이미지야말로 환상이라도 야릇하면서도 우미한 환상이다. 시란 참 이상한 물건이다. 없는것도 있게하고 (바람의 날개) 그렇지 않은것도 그렇다고 (나비날개, 새날개) 해야 수작이 되니 말이다. 시인은 환상에 잠기기만 하면 마치 요술사마냥 언어의 광산에서 언어를 캐여다가 제련하여 아름다운 이미지를 자유롭게 만들어낸다. 그래서 시인은 사치스럽고 신비한 예술인일것이다. 남영전시인이 에서 창출해낸 환상적이미지가 이를 말해주고있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날개들은 날개로 황페한 산천에 단비를 쏟아주며 말한다.  이 말은 구름들의 노란자위이며 날개들의 노란자위이다.  하나를 갖지 못하여 불쌍한 토끼는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뒤다리가 길어지고 두귀가 커진다. 이런토끼는 도망치다가 어디로 갔는가?   도망, 도망치다가 나중엔 월궁에 뛰여들었다 외로운 넋이 월궁에 뛰여들었다 평생 숙원은 귀향 귀향하려는 소망을 돌절구에 넣어 빻고 찧는다   시 에서 나오는 옛말이다. 참 구수하고 감칠맛이 난다. 퍼그나 유모아적이고 해학적인 옛말이다.이런 옛말은 어디에서 나올가? 환상에서 나온다. 환상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구수한 옛말을 만들어낼수있단 말인가. 너무 도망치다보니 뒤다리가 길어진 토끼, 두귀가 길어진 토끼다. 뛰고 뛰다가 어망결에 월궁으로 들어갔다는것이다. 이런것이 환상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환상이라는 존재가 없을지도 모른다. 월궁은 하늘의 궁전이여서 좋으련만 토끼는 뿌리를 잊을수 없어 귀향하려는 평생의 소원을 돌절구에다 넣고  남영전시인도 토끼처럼 돌절구를 차지하고 절구속에다 원융의 숙원을 날마다 빻고 짓찧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환상가이고 환상은 시인을 만든다. 그러기때문에 환상으로 짜놓은 이미지가 신비하고 아름답고리상적이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싶다. 시를 배우려면 환상을 수렴하여야 하고 시간의 검증을 받을수 있는 시를 쓰려면 환상을 날개로 삼아 하늘을 날아보고 땅속을 날아보며 시를 쓰라고   4. 은 유 적 이 미 지   42수의 남영전시인의 토템시가 줄을 지어 검열대앞을 지나간다. 앞장에는 과 이 신단수가지를 다듬어 만든 기대를 들었다. 그뒤로 한줄에 토템물이 열씩 넉줄로 섰다. 발자국소리가 쿵쿵 울린다. 원융의 노래소리 우렁차다. 앞장에 선 룡은 하얀 기발을 들고 봉황은 파란 기발을 들었다. 하얀 기발에는 상징이라는 글발이 눈부시고 파란 기발에는 은유라는 글발이 눈시리다. 검열대우에서는 남영전시인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가슴 벅찬 감동으로 대오을 사열하고있다.그들의 검열을 보는 관중은 독자들이다. 독자들의 얼굴마다에 웃음이 넘친다. 대오는 검열대를 벗어나며 물이 된다. 상징과 은유의 물결이 너울너울 춤추기도 하고 하늘에 솟구쳤다가와르르 무너지며 금보라 은보라를 날린다. 쌍무지개 일기도 하고 외무지개 일기도 하면서 매혹스러운 광경을 펼친다. 그래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가벼운것 같으면서도 무거웁고, 소박한것 같으면서도 화려하고, 확연한것같으면서도 몽롱하고, 얕은것 같으면서도 깊이가 있다. 필자는 상징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고 은유에 대하여서만 살펴보고저 한다.   이 세상 울창한 수림을 드나드는 사슴 수해속에 흔들리는 홍산호런가 설야에 피여난 인삼꽃이런가 ㅡ 에서   하늘에서 춤추면 아롱진 노을 땅에 내리면 아름다운 산꽃 ㅡ 에서   남영전시인은 을 라고 하기도 하고 이라하기도 한다. 이런 은유로 사슴의 귀중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이는 토템의 아름다움과 귀중함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에서는 날아다니는 나비를 이라 하고 풀이나 꽃에 앉은 나비는 이라고 은유하고있다. 에서도 시인은 아름다운 은유의 꽃을 창조하여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게 하고있다. 에서는 백조가 불안한 운명의 길을 떠날 때 이런 은유로 표현하고있다.   바람은 길잡이 별은 길표지 번개는 길동무   명명식으로 제시된 이러한 시구들은 은유의 표현이라겠다. 눈물을 흘리며 백조는 고향을 떠나지만 바람은 길잡이가 되여 그와 함께 가고, 별은 길표지가 되여 그의 길을 안내해주고, 번개는 친구가 되여 그와 함께 간다. 자연이 그를 품어주고 자연이 그를 다독여주는 경상을 그리고있다. 더불어 함께 하는 아름다운모습이다. 상기한 은유들은 아기자기한 점이 있다면 에서의 은유는 돌발적이다. 사자가 질주하는것을 보고 하고 서두를 떼고있다. 이 은유는 우리 눈앞에다 푸른 풀이 무성한 무연한 벌판에서 태양이 달리고있는 정경을 펼쳐주고있다. 달리는 사자의 용맹과 기세 그리고 사자의용왕매진의 눈시린 빛발이 일시에 독자들 충격하고있다. 시적정서 흐름의 분위기에 따라 시인은 은유를 재치스럽게 배렬하고있다. 에서 이 하늘에 올라서 포효하는것을 이렇게 쓰고있다.   우뢰의 화살 우뢰의 도끼 우뢰의 돌멩이 창망한 하늘땅을 짓조긴다   이 은유는 쌍중의 의미를 가진다. 한가지는 우뢰를 화살, 도끼 돌멩이로 은유한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소나기가 내리는것을 화살, 도끼, 돌멩이로 상징하였다. 때문에 은유의 앞에다 쓴 와은유의 마지막에 쓴 는 시구가 은유의 표현과 아주 잘 어울린다. 물샐틈없이 치밀하게 짠 은유조합과 은유마다 행갈이를 하였기에 는격렬한 시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여 쟁쟁한 소리를 낼뿐만아니라 천하무적인 우뢰의 기세와 위력을 확실하게 하여주고있다.   5.사물의 특성을 잡은 이미지   세상의 사물은 특성이 있다. 사물의 특성은 사물존재의 내함으로서 여러가지 방면으로 표현되면서 존재의 가치를 나타낸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시종 사물의 특성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특성을 집요하게 붙잡고 이미지화를 하고있다. 짐승의 류형에 속하는 토템을 쓸 때면 성칼지고 완강하고 거치른 성격을 이미지화하기에 력점을 두는 경향이 다분하고, 조류의 류형에 속하는 토템시를 쓸 때면 날개나 나는것을 틀어쥐고 이미지화하는데 집착하였고, 하늘의 사물을 토템시로 쓸 때에도 그 사물의 특성에 배려를 돌리였다. 아래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신단수초리에서 회오리쳐 해상천하에 신비왕국 이어놓고 짐승이 덮쳐도 보라매 노려도 갈범이 울부짖어도 겁내지 않았다 큰물이 밀려와도 광야가 한적해도 공포가 휩쓸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언제나 머리 번쩍 쳐들고 두 날개 퍼덕이며 하늘을 날았거늘 영원히 안일을 모르는 자유의 넋 백의 혼이여   날아다니는것은 조류의 특성이다. 두루미는 조류에 속하는 사물로서 두루미도 나는 특성이 있겠다. 시인은 두루미가 하늘에 날아올라 대지를 부감하는 장면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대지는 살풍경이다. 짐승들은 덮치며 날치고, 보라매는 먹거리를 찾느라고 예리한 눈길로 노려보고, 갈범은 울부짖는다. 홍수는 대지에 범람하고 광야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공포가 폭풍처럼 대지를 휩쓸고있다.왜 이런 살풍경이 하늘에 뜬 두루미의 눈으로 들어오는가? 그것은 현대문명과 발달이 빚어내는 악과인것이다. 그 악과를 두루미눈을 통하여 시인은 적라라하게 발가놓고있다. 두루미는 시인의 리상의 체현물이다.  나온 두루미는  신령이다. 을 건설하려는 웅심을 품은 두루미기에 살풍경속에서도 머리를 번쩍 쳐들고 훨훨날아예고있다. 살풍경과 대조를 이루는 두루미형상은 우리들에게 원융의 희망의 등불을 밝혀 어두움을가시는 정경을 보여주고있으며 신심을 북돋아주고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시인의 머리에 떠오른 의식을 어떻게 이미지화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인은 자신의 사유를 시로써 표현할 때 개념적인 언어를 사용할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언어, 구상적인언어를 써야 하며 사물들의 운동으로써 표현하여야 한다. 그래야 명확하고 정확하고 확연하고 탄탄한 이미지를 떠올릴수 있다. 남영전신인의 시 에서는 이런 발휘가 잘되고있어 우리앞에 나타난 이미지가 얼빤한 그림인것이 아니라 한폭한폭이 아주 똑똑하게 안겨온다. 시 에 대한 이미지를 살펴보자. 바다에서도 살고 륙지에서도 사는 거북의 눈은 특별하다. 그 눈은 일반적인 눈이 아니라 바다속에서도 볼수 있고 륙지에서도 볼수 있는 특별한 눈이다. 거북의 껍질 또한특별하게 딴딴하다. 시인은 거북을 쓸 때 거북의 이 특점을 노리였다.   수정눈때문에 철갑등때문에 매발톱도 두렵지 않았다 산짐승의 발굽도 두렵지 않았다 칼날도 활촉도 꿰뚫지 못하고 화염불길도 당해내지 못했다 넓은 모래불에서, 수풀속에서 깨뜨릴수도 태울수도 없는 불사불면의 넋이여 해적무리 달려들면 등허리에서 칼날이 수풀처럼 곤두서고 아가리에선 불길을 활활 내뿜었다 해적들은 꼼짝 못하고 바다에 쳐박혔다 바다에 뒤엎였다 바다에 삼키웠다    거북이를 이미지화한 부분이다. 시인은 이 을 시화할 때 거북의 특성인 껍질에서 시를 찾아내고있다. 땅우에서 바다속에서 그 껍질이가지는 의미는 찬하무적이다. 그가 천하무적으로 될수 있는것은 껍질이 딴딴하다는 성질에서 류추해내여이미지화한데 있다. 시인은 륙지에서는 매발톱, 산짐승의 발굽, 칼날, 활촉, 화염불길을 리용하여 껍질의작용을 보여주고 바다에서는  는 이미지로 거북껍질의 위력을 현시하고있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시는 어떤 사물의 특성에 대한 새로운 표현의 발굴이라고 할수 있다. 시인은 에서 바로 이런 시작업을 훌륭하게 하고있다.   사자의 포효소리는 천둥치듯 팔방에 울려퍼졌고 사자의 금빛 눈부신 갈기는 번개불이 번쩍이듯 하늘을 후려쳤다 그바람에 눈사태 와르르 무너지고 둥근해 뱅뱅 돌고 별똥이 쏟아지며 어둠이 멀리로 쫓겨났다 악마는 바다끝에 쳐박히고 요귀는 십팔층지옥에 갇혔다   시 에서 짐승의 왕인 사자를 표현한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사자는 짐승들중에서 가장 힘이 장사이고 가장 날파람이 있고 가장 무서운 짐승이라는 사자의 특성에 착안점을 두고 표현한 이미지다. 천둥 같은 사자의 포효, 번개불처럼 하늘을 후려치는 갈기, 이러한 표현들은 짐승의 대왕인 사자를 표현함에 충분하다. 시인은 이런 사자의 위력을 효시하기 위하여 무너지는 눈사태, 뱅뱅 도는 태양, 쏟아지는 별무리, 바다에 처박히는 악마, 십팔층 지옥에 갇히는 요귀 등을 동원시킨다. 정면과 반면의 동시적인 움직임을 통하여 사자의 위력에 대한 이미지를 강대하게 보여주고있다.   사자의 특성을 틀어쥐고 이미지화한 이 이미지에서 우리는 세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미지를 만들 때 시적대상과 련계시킬수 있는 사물들을 찾아 표현하는 방법이 그 하나요, 관계되지 않는 사물이라도 표현에유조할 때 빌어다 표현하는 방법이 그 둘이고, 이질적인 사물로 변형시켜 표현하는것이 그 셋이다. , , 들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사자와 관계되는 사물이니 하나에 속하고, 와는 관계없는, 허망개입시킨 사물이니 둘에 속하고, 와 불은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사물의 변형으로서 셋에 속한다. ================================
1450    한춘시평 댓글:  조회:4138  추천:0  2015-09-07
[ 2015년 09월 16일 09시 10분 ]     호남평강석우채(湖南平江石牛寨) 국가지질공원내 산봉우리 사이에 걸쳐놓은 길이 300메터, 수직높이 180메터 되는 널판자 줄다리(木板吊桥) ----------------------- 한춘시인의 3년제를 맞으며 고인의 령전에 드리는 시평   한춘시평 한춘시의 사물에 대한 리해 ㅡ의 소평               /최흔   한춘시인은 개혁개방후에 는 기발을 들고 우리 시단의 앞장에서 현대시의 혈로를 줄기차게 달려온 선두주자다. 그는 열렬한 현대시의 창작자였고 열렬한 현장평론 가였다.(아래는 까치둥지로 략함)는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내놓은 시집이다.   . 1.   한춘시의 기둥수법   애기의 첫울음처럼 요란하게 터지던 꽃망울 한로의 음절너머 바줄을 놓쳐버린 코스모스 숨차게 달려온 그 길에 눈부시게 세워놓은 기발 그아래에서 외우던 영어단어 한나절 나비 되였는데 돛배우에 기발이 되였는데 서리우에 달빛이 비끼는 밤 기러기는 남으로 날아간다.   이 시는 세한도(2)에 실린 2010년 9월 16일 작이다.시속에서 사물들이 강렬하게 태여나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다. 애기, 꽃망울, 바줄, 코스모스, 길, 기발, 영어단어, 나비, 돛배, 서리, 달빛, 밤, 기러기 등 시각적인 사물이 있는가 하면, 첫울음,  음절 등 청각적인 사물도 있다. 시는 한행이 길어서344음보로 된 11행이다.(한춘시는 대부분 이런 시행이다) 이 짧은 시에 행마다에 새로운 사물들이 태여나고있으며 태여난 사물들은 변형으로 이루어지고있다. 한춘의 시는 거이다가 이런 시기교로 씌여진 시들이다. 세상은 물질로 구성되고 물질이 없는 세상은 없다. 시속에서의 물질은 바로 이미지인것이다. 시인의 상상속에서는 이 이 되고, 놓친이되고, 이 되고, 길에는  이 세워져있고,    는 >, .  이러한 되기는 한사물이 그와 다른 성질을 가진 사물로의 이동이며 한물질이 그와 성질이 다른 물질로 되기이며,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도주한 행선지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두 사물들은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시의 핵심적인 수법인 변형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라고 하겠다. 엘리어트는 이렇게 짝을 짓는것을 시적상관물이라고 하면서 예술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되기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이라는 저서 112쪽에서 지적한것처럼 한춘시인은 자기의 시를 이라고 하면서 (세한도1)고 하였다. 시인의 는 는 한수의 시에 속하리라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서 해야 할 말이 또 있다. 왜 이렇게 맘대로 변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인의 상상은 자유로운 상상이다. 자유로운 상상은 외계의 그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시인만의 상상인것이다. 기성론리도, 도덕도, 그어떤 진리의 한계와는 관계없이 시인은 생각하고 상상할 권한이 있는것이다. 그 상상은 한계가 없으며 한계를 가질 필요도 없는것이다. 아무리 변형시켜 보았자 지구우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기이며 우주속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기일뿐이다. 지구나 우주가 사물들이 변할수 있는 공분모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렇게 변하는가 하는 물음은 임신한 녀자가 왜 아이를 낳는가고 묻는것처럼 소용없는 일이라겠다. 물질과 물질의 변형은 한춘의 시기법의 기둥수법이라고 할것 같다. 한춘은 이런 기법으로 자신이 개척한 현대시의 길을 총화하고있는 하고있는것 같다. 시인이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변형시키는것은 한사물의 리면에 있는 새로운 사물을 찾아서 보여주는것으로써 원초적인 사물을 들여다 보기라고 할수 있다. 인류는 원초적인것을 숭상한다. 시인도 원초적인것에 접근하려고 시를 쓰는것이다. 때묻지 않는 그 원초적인 순수를 시인이 꿈꾸고있는것은 거기에 유토피아가 있기때문일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시들   에는 좋은 시들이 많은데 필자가 특별히 즐기는 시는 과 이다. 이 두편의 시들은 언어가 새롭고 의미가 깊어 흔상할 가치가 많은 시들이다. 그중 (아래는 3으로 략칭)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은 마른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망가진 용드레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시인은 천둥소리를 기다린다   주추돌에 깨여지는 비방울 두손으로 받아들고 지난겨울 찬 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또다시 꼼꼼히 검색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었다 2010.9.16.   우선 내용이 제목과 이질적이여서 좋다. 세한도란 추운겨울 지도라고 말할수 있는데 시인은 추운 겨울철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물을 긷는것을 말하고 있다. 시는 항상 제목과 내용이 분리되거나 내용이 제목에서 일탈되는것이 좋다. 시는 어디까지나 상징이기에. 물이란 무엇인가? 물이란 시다. 물도 마르고 룡드레도 망가졌으니 물을 길을수 없는것이다. 시인은 시를 떠나면 물을 떠난 물고기 신세가 되는것이다. 달가닥거리는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물은 한방울도 길어올릴수 없는 답답함과 근심걱정이 속을 다 말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소나기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소나기 오면 우물에 물을 길어올릴수 있는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천둥소리는 령혼에 갑자기 솟구치는 령감이며 시인것이다. 는 시를 짓는 시인의 욕망이 좌절되는것을 표현한 언어로서 가히 언어속에 새로운 언어가 있음을 암시하는것이라겠다. 이것이 3의 내용인것 같아서 음미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3의 2련은 가련한 시인이 시를 찾는 과정을 묘사한 단락이다. 고대하던 비는 내리지만 시인한테는 비방울도 차례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부서진 비방울을 손에 받아들었다. 시인은 그 부서진 비방울속에서 지난 겨울에 찬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꼼꼼히 검색한다. 절창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왜냐하면 돌발적이고 기습적인 이미지를 떠올린것이다. 한사물에서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사물을 떠올리는것이 시가 아닌가. 부서진 비방울이 잣나무의 노래로 둔갑된다는것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근본적으로 상상할수 없는것이다. 시는 직선적으로 씌여지는것이 아니라 직선을 떠나서 씌여지는것으로서 탈직선화라고 말할수 있다. 진짜 .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27페지)라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이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창출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련도 이채롭다. 우의 내용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새로운 이미지로 표현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려있다.   물과도,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비와도, 잣나무노래와도 관계없는 하늘로 비껴가는 새, 부리에 화석 한점이 물려있는새, 와>의 출현은 불연속이며 원인과 결과와는 관계없는것이다.  새는 시인이 추구하는 상징물로서 시라고 말해도 되고 희망이라고 말해도 된다. 그런데 은 또 무엇인가? 화석이란 단단한 돌이다. 이 돌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음미의 가치가 있는 사물로서 각자나름의 판단을 허용하는 화석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화석은 의미를 직설적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의미를 감춤이며 에둘러 말하는것으로써 1500년전에 류협이 >에서 말하듯이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사물에 의탁하고있다고 하겠다. 한춘시인의 이 시는 그저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말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기습적으로 돌발적으로 아무런 련계도 없이 집성되고 있다. 이 시의 구성은 재래의 현대시구성을 넘어서는 신선한 구성이다. 이 시는 조지p 란도가 말하는 하이퍼텍스트에 속하는 시라고 할수 있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리좀이며 다양체이다.  련과 련사이의 이미지들은 물론 2련의 과 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상호련결인것이 아니라 분리이며 성질이 다른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되여있다고 하겠다. 이미지들은 서로 인과관계인것이 아니라 대등한 독립성을 갖고있다고 하겠다. 물론 한춘시인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가 있었던 시인이였다고 할수는 없다. 하지만 에는 이런 시들이 여러수 있다.    3.언어의 특성   까치는 나무가지를 물어다 집을 만들고 한춘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를 만들었다. 에는 여러가지 언어표현수법이 있겠으나 필자는 아래와 같은 두가지 방면으로 살펴보고저한다.   1)    낯선 언어 만들기   낯설기란 말은 지난 세기20-30년대에 쏘련의 포르마리즘에서 나온 말이다. 낯설기란 언어자체의 의미 그대로 보지 않았던 생소한, 처음으로 보는 언어를 말하는것이다. 한춘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여 낯설기를 하고있다.  (3쪽), (17쪽), (20쪽),(24쪽) (28쪽)…. 앞머리만 대충 훑어보아도 이렇게 여러가지가 있다. 일상적으로 말하면 모두 말이 되는 말인것이 아니라 말이 안되는 말이다. 이런 언어들의 조합을 폭력적조합 혹은 강압적조합이라고 할수 있다. 시가 이렇게 말을 조작할수 있는것은 시어는 언어의 기능에 기대여 조합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능이란 우리 조선어로 말할 때 자음과 모음이 자유로이 어울려 글자를 만들고 단어를 만드는 일면도 있지만 또 중요한것은 시속의 사물은 상상속의 사물이지 현실속의 사물이 아니기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는 영상을 떠올릴뿐이지 어느한 사물이 되는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사물과 떨어져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사물과 언어는 별개의 존재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실질이며 본능이다. 언어가 일상적인 언어조합의 궤도를 벗어나서 생산될 때야라만이 시적언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작 83쪽)   2)    언어의 몽롱성;   는 몽롱한 언어들이 이곳저곳에 많이도 산재하여 있다. 필자가 좋다고 말한  의 제1련을 아래에 적어본다.   지난 모든 일들을 작두날로 다 잘라버리고 모든 소란스런 말들을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리고 모든  내던진 돌맹이를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이고   3개의 짝이 있는데 현실과 초월이 결합된 시행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에다 이런 의문들을 제기할수 있다. 작두날이란 무엇을 지칭하며 작두날로 잘라버렸다는 일들은 어떤 일들인가?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렸다는 소란스런 말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인 돌맹이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이 돌맹이를 거둬들일수 있기나 하는가…제2련도 1년처럼 모를 말들이다.   그래도 적들은 쳐들어온다 모든 벽을 다 허물고 모든 괴물을 다 격파하고 모든 기관을 다 폭파가하고 손녀가 가지고 놀던 사기인형은 다 깨지고   여기서 말하는 적들이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벽, 괴물, 기관, 사기인형이란 무엇을 표현한것인가… 적들이란 잠이 들지 못하게 하는 엉킨 삼오리뭉치같은 잡념이고, 벽이요 괴물이요 기관이요 사기인형이요 하는것들은 잠을 잘 오게 하는 환경물인것 같다.  필자도 이런 언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는 모른다. 시는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거리는 심리를 쓰고있다. 잠은 밥과 함께 인간의 일상을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욕망이다.시인은 잠이라는 욕망을 달성하지 못하는 애모쁨을 쓰고있는것이다. 최저의 욕망도 실현하기 어렵게 살아가는것이 인간이 아닐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는 리해되지 않아도 통한다는 특성이 있다. 시인의 상상을 밑바닥까지 알이는 아무도 없을것이다. 시인은 왜 맞지도 않는 이런 말,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런 말을 하는가? 바로 여기에 시의 본색이 있는것이다. 시는 몽롱해야 하는것이다. 몽롱한것은 아름다움이며 예술이다. 흘러가는 내물처럼 밑바닥 모래알이 다보이는 시가 아니라 강이깊숙하여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 그래서 시는 음미하게 된다. 시는 의사를 전달하는 산문이 아니라 시인의 창조한 새로운 세계를 물질로 즉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시는 리성을 중시하는것이 아니라 감각을 중시하게 된다. 종래로 리해하기 어려운 시들이 많았다. 밀턴과 단테는 과 을 쓴다음에 자신들의 시는 100년후에야 알아볼것이라고 하였고, 1500년전의 류협은 지인은 천년에 한번 통한다고 하였으리라. 좋은 시는 독해를 요구하지만 독해되기를 거부하는것이다. 그 거부로 인해서 시는  매혹을 잃지 않게 되며 독자나름의 해석을 요청한다. 우리가 지금도 리상의 시를 각자가 나름대로 리해하는것도 이때문이다 .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 이미지가 련속적으로 그것도 아주 빠르게 번쩍번쩍 령혼속으로 온다. 시인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고려할사이가 없이 시를 써내려가게 된다. 한수의 단시를 쓰는 시간은 10분이면 족하다. 쓴 다음 두었다가 언어를 다듬어 놓으면 된다.  1996년의 노벨문학상수상자 비스가와 쉼보르스카는  (450쪽) 라고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개혁개방초기에 한춘시인은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현대시를 위하여 몸을 던진 시인이였다. 는 그의 시창작에서 성과를 올린 작품집이라도 할수 있다. 시행이 344조 한격식이여서 딱딱한 감도 없지 않지만 는 우리 시단에서 현대시의 한 본보기로 되기에는 손색이 없다. 한춘시인이여!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2015.5.15.  
1449    토템시에 한마디 댓글:  조회:4501  추천:0  2015-09-07
  나도 에 한마디        ----김관웅교수님의 을 읽고                                     /허동식  1 도템시 개념존재의 합리성에 대하여        남영전시인의 에 다루어지는 시적대상이 도템의 범주를 초월한듯한 자연물(현상)이 존재한다 .(례를 들면 시  )  도템이란 원시씨족 또는 원시부족들이 동물이라든가 자연물을 씨족과 부족의 혈연과 관련시키고  구체적인 동물과 자연물을 씨족 또는 부족의 표식물로 간주하고 숭배하는 미신을 일컫는다면 남영전시인의 가 분명 도템만을 다룬것이 아니므로 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남영전시인의 를 대하면서 우선 도템시가 임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시인이 자아명명한  개념이 과학적인가 합리한가보다도 의 詩意가 어떠한가에 관심을 두고싶다. 라는 개념은 필경은 학술적인 개념이 아니고 詩적이고 개인적이고 随意적인 개념이므로. 라 해도 좋고 라 해도 좋다.  어떻게 명명한다 하여도, 또  명명하는 목적과도 전혀 련관이 없이 남영전시인의 는 종국에는 詩作으로 될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에 도템이 아닌 자연물이 다루어졌기에  라는 개념이 론쟁을 만들고는 있지만,   개념은 學理와 거리를 둔 詩理상에서의 성립과 존재의 합리성을 보여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작품을 대함에 있어서 학리적인 연구도 있어야 하지만 문학창작의 창조적本性인 文理와 藝理에 대한 수긍도 문학연구의 출발점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산천선생님의 평론에도 비슷한 견해가 있음) 魔幻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등등의 문학사조 개념을 두고 볼때에도 그 명명이 과학적인 학리적인 명명이 아닌 흔적이 보인다. 그 원인은 문학예술창작의 내재본질과 관련이 되며 또 번역과정(서방어로부터 중국어로의 전환)에서의 표현습관과 표현력과도 관련이 된다고 생각된다. 남영전시인의 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이고 학리적인 명명은 아니지만 문리적으로 藝理적으로 시리적으로는 합리성을 보이는 개념이고 또 중국어로부터 조선어로의 語境의 전환에서도 장애를 받은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2 조선족도템과 시집       조선민족의 도템을 해명하려면 시간상에서는 조선민족이 통일민족(나라통일이 아님)으로 완전형성된 시기로부터 그 형성과정을 거슬러올라야한다. 조선민족이 통일민족으로의 완전형성시대가 삼국시대라는 조선시대라는 또는 다른 설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런 설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우리 조선민족도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씨족과 부족들이 부단히 융합된 산물이 아닐수가 없다. 한다면 조선족을 구성해온 여러 씨족들과 부족들의 도템들을 조선족도템의 구성부분에 속한다고도 인정할수 있다.              또 살펴보면 어느 나라도 민족도 통일형성과정에 여러가지 도템에 대한 보존과 舍弃를 과정을 지니게 되여있다. 다시 말하면 민족응집력을 만들고 민족내의 모순을 완화시키는 수단으로서 민족내 어느 강대부족의 도템을 인위적수단으로(행정 문화 등) 전민족도템으로 모셨다던가  혹은  민족내 어느 부족과도 련관이 없는 새로운 도템을 구상해서 전민족적인 도템으로 만듬은 력사진전중에 사용되는 상투수단이다. 중국의 도템史도   바로 수많은 도템들이 龍도템으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단군신화도 통일민족완성이라는 리념을 앞두었다는 흔적이 보인다고 나는 억측해본다.   문헌자료결핍과 도템연구부족 등 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과도 마찬가지로 우리도 조선족도템에 대한 진실한(고증을 거친) 결론을 내리기는 아주 어렵다.  인류에게 있어서 先史시대란 지금도 謎의 존재이고 도템이란 몽롱한 불확정적인 과거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남영전의 를 조선족도템을 다룬 시가 아니다 론함은 남영전시인이 자신의 에 다루어진 들이 조선족도템들이라고 언설함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불확실한 一言일뿐이다. 남영전시인의 로 편성된 시집 은 시적대상의 단조로움과 詩意의 편애성으로 손상을 받았다는 평의(羅侃平 평)를 지닌 시집이다. 만일 남영전시인더러 확정된 조선족도템만 시적대상으로 하라 한다면 (물론 그런 요구는 읽어보지 못했다)  불정당한 요구일것이며 시인의 창작자유와 창작활보를 제한한다는 의심을 받을 언행일지도 모른다. 남영전시인이 조선족을  대표한 시인이라 할지라도 필경은 은 시인 개인의 시집이고 그 다음에야 조선족시인의 시집임을 알아야한다. 3  민족정체성과  민족정체성에 대한 론의가 계속되고 있다.  혈연을 크게 여기는 유학의식이 에 열중하는 주관원인이라고 한다면 조선반도의 장기적인 분렬상태와 우리와 한국과의 거래급증중에 발생하는 충돌과 위기 그리고 중국조선족이 중국에서의 劣勢에로의 전환 등등이 사회객관원인으로 보여진다. 감정적으로는 조선반도인들이 반겨주든 싫어하든 우리는 조선반도와 혈연을 끊어버리는게 싫다 . 또 그들과 對等하게 지내고 싶다.  그리고 세계 어디 있는 배달의 족속과도 마찬가지이다 .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중국에서 버젓하게 살고싶다. 흩어지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인구감소도 없이 나날이 번창하게 살고싶다. 주관원인과 객관원인의 교차작용으로 하여 또  리상과 현실사이의 격차는 조선족사회더러 민족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거듭 진행하게 한다. 언론도 좋고 지성인들도 좋고 민족정체성에 론의를 모음은 민족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자각성을 높이는데 훌륭한 작용을 하여 왔다. 헌데 와 민족정체성이 어떤 련관존재일가? 나는  42수의 가 민족정체성을 혼동하게 한다는 설은 성립불가능이라 생각한다. 민족정체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로서, 우리의 인식수준하에서 불투명한 부분도 존재하지만은 누구의 생각이나 작품에 의하여 변하는 사물은 아니다. 민족정체성이란 기나긴 력사의 흐름으로 형성된 이다. 나는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배달족속들 모두가 우리의 민족정체성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인식수준의 차이를 보일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共認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혈연적인 문화적인 력사적인 정체성).  또한 주위에 사는 다른 민족들도 우리 배달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부인하려는 부인하는 사실은 없는듯하다. 우리의 민족정체성이 자아인지와 타인인지를 받는 객관존재인 사실앞에서  가 어떤 시일지라도 또 그 가 여차여차 할지라도 배달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추호의 영향을 줄수가 없음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의 사회효력에 대한 과대억측은 나로서는 杞人忧天이라 생각된다. 남영전시인의 도템에 대한 연구와 詩作은 조선족정체성의 기나긴 형성과정에 대한  시적인 표현이고  서술이며 그것을 통하여 각 형제민족과 여러 나라의 화목과 공동번영을 기원했다는게 근본특징이다. 김관웅교수의 조선족도템에 대한 주장과 민족정체성에 대한 주장은 조선족공동도템과 민족정체성형성의 종극적인 결과에 착안점을 둔 주장이고 해석이다. 그러므로 두분의 주장은 다만 민족력사과정과 민족력사결과에, 문화진행과정과 문화진행결과에  부동한 착안점을 두었다는 구별점을 지니게 된다.  4  나의 작은 항의  나도 자아비애에 걸린 사람인것 같다. 그래서 현재 나를 포함한 중국조선족들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을 보인다 생각된다. 조금은 먹고 입는 흉내는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현재가 비상시기가 아닐수가 없다. 이런 비상시기에 조성일회장님 김관웅교수님 남영전시인 등 지성인들이 민족을 위한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주 돋보인다. 특별히 문학계 분들은 이 점을 잘 알리라 믿는다. 비상시기에 쟁론은 불가피적이다. 하지만 쟁론방식의 선택이 중요하다.  라든가 는 개인이 운영하는 싸이트이기는 하지만 현재는 거의 공용자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 화합이라는 낱말의 거력을 알고 있는 한 , 나는 누구든지 쟁론을 편격적이고 인격침입적이고 사인적인 면으로 돌리는데 견결한 항의를 표한다. ==========================   詩의 도템化와 도템의 詩化(역고)               罗侃平  남영전의 도템시는 좋은 문학적가치와 문학사적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수민족시단에 아름다운 시작을가첨하였고 중국시단에 하나의 시가형식을 주입하였다. 남씨의 도템시 창작은 민족령혼을 구현하는 개인적인 행위이며 또한 시적 이미지가 넘치는 독창적인 광적인 과감한 행위이다. 하기에 그의 시작들에 대한연구도 여러가지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 우리는 남씨의 도템시를 대함에 있어서 도템과 시라는 명제를 갈라놓아서는 아니된다. 도템시란 시의 도템화이고 도템의 詩化이며 두 명제의 중겹적인 융합물이다. 우선 도템시란 전통적인 철리시(혹은 玄言시)와 詠物시(혹은事物시) 와는 다르다.도템시란 개념의 창출은 시인의 개인적인 命名행위에 속하며 아직은 집체의식에 의한 귀납적인 과학적인 개념에 속하지 않는다. 때문에 도템시는 기존하는 定中구조의 개념이 아니다. 철리시와 詠物시라는 개념은 쉽게 리해할수는 있지만 그 개념에 대한 언어적인 해석은 무의미한 언어함정일수도 있다. 하지만 도템시라는 새로운 개념은 시인본인이 명명한 독특한 조건하에서 도템시라는 개념에 대한 언어적인 해석은 실존의 의미가 있다. 도템시에 있어서 도템이라는 개념이 시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배를 할수는 없다. 도템시라는 개념창조는 도템이라는 개념창조와 마찬가지로 随意적인개념창조이다. 도템이란 개념의 원초적인 내용은 인류의 친속관계 또는 개인과 씨족의 표징이지 인류의보호신이 아닌것처럼.(维 斯特劳斯는 라는 저서에서 도템과 보호신에 대한 오해적인 혼동에 대하여 상세한 분석서술을 하였다.) 도템시도 시인이 命名한 개념으로서 시인의 원초적인 본의가있을것이다. 도템시라 하여도 도템의 문화이미지를 완전 내포한 시라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다. 비록 시인이 도템문화라는 전제하에 시창작을 실천한 주관적인 의도가 분명하지만 배태된 시작품은 시인의 창작목적과 완연일치를 이루었다고는 판단하기도 힘든 일이다. 도템시란 시창작으로부터 출발한 개념이며 종국적인 개념이 아니다. 때문에 시의 도템화와 도템의 詩化라는 개념을 도입하여도 어느 의미에서는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도템시와 史詩는 부동한 개념이다. 사시는 민족과 력사를 대변하는 본질적인 특징을 지니고있으며 시의 형식으로 력사를 서술한다. 사시의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상대분리는 사시를 연구함에 있어서 력사적인 시각에서 연구할수도 있고 詩학의 시각에서도 연구할수 있다. 사시를 연구하는 세번째 방법은 시속의 력사와 력사속의 시를 유기적인 결합시키는 방법이다. 이 세번째 방법이 아주 주요하지만은 필경은 사시를 연구하는 세가지 방법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도템시는 사시와 다르다. 도템시를 연구함에 있어서 도템만을 연구할수도 없고 시만을 연구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도템시는 도템에 대한 기록적인 설명문이 아니며 도템의 력사와 문화특징 등에 대하여 언술할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도템이라는 개념이 학자 朗格으로부터 시작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인 함의가 부단히 가첨되고 있는 전제하에서남영전시인이 도템시에 사용한 도템개념은 원초적인 도템개념과 거리를 둔 몽롱한 개념이며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개념이므로 상술한 분리연구법을 사용할수 없다. 시인은 개인적인 립장에서 도템문화의 의미에대한 추측과 추구를 하였을뿐이다. 이런 주관목적의식을 전제로 도템시에 존재하는 도템의 객곽적인 함의를 연구한다면 오독이 될수도 있다. 그러므로 도템시를 대함에 있어서 도템과 시를 분리하고 단 도템이라는 시각에서 도템의 내용과 민족정신관계를 고안한다든가 단 시의 시각에서 도템시의 예술성과를 고안한는 일은 편면적인 해석로 될수 있다. 도템시를 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시와 도템을 융합시키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도템시더러 민족정신을 완전무결하게 구현하라는것은 도템시에 대한 오독이며 도템과 민족상징을 혼동하는 행위이다. 남씨는 나름대로 도템의 본질을 알고 있으며 친속형제와 보호자의 구별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도템시는 민족성의 일부분을 표현하는 시일뿐 민족의 전부적인 代言일수는 없다. 이러한시적표현은 남영전의 방식이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론리가 아니다. 도템이란 추상적인 개념이고 시란언어의 개념이다. 도템시에 있어서 도템과 시라는 개념은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두가 일종 표현화신호이다. 때문에 도템시를 연구함에 있어서 시의 도템화와 도템의 시화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시의 도템화든지 도템의 시화이든지 모두가 도템시의 표현화신호에 대한두가지 劃정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개념이다. 시의 도템화와 도템의 시화라는 개념이 공구적인 사용적인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생각한다면 도템시에대한 지속된 해석을 할수 있다. 남씨의 도템시는 기묘한 조합물이다. 한방면으로는 자연과 人群과 개인의3조합이다. 도템이란 자연군체와 인간군체가 상호련관된 개념으로서 사람과 자연의 통일이다. 시의 개념은 개인적인 서술특징를 지니고 있지만은 시인이 다루는 문화배경을 초월하지는 못한다. 때문에 도템시는 개인적인 시각에서 자연과 인군을 결합시키는 방법으로서 詩작에는 개인적인 감상과 인群의 객관실존상태와의 모순이 도출된다. 따라서 시인으로서 群적인 민족적인 도템시를 창작한다는 행위가 아주 어렵고 흥미있는 현상으로 된다. 다른 한 방면으로 볼 때 도템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래의 기묘한 3조합이다. 도템은 인류의 요원한 과거에서 내려온 원시야성과 자유성을 지닌 사물로서 현재의 시인에 의하여 시적표현을 이루면서 현실적인 가치와 후세를 격려하는 미래지향성을 표현하는 시의 수단과 내용으로 된다. 그리하여 도템시는 원초적인 문화근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정신세계의 탈출과 령혼의 승화를 노린 시로 전변한다.. 또 한 방면으로부터 보면 도템시는 내용과 형식 그리고 가치의 기묘한 3조합이다. 시와 도템이 유기적인 조합을 이루는 과정에 내용과 형식 그리고 그 시적가치가 3조합을 이루었으며 매 한수의 시마다 새로운 을 구축하였다. 일개인으로서 하나의 민족 지어는 인류의 품위를 표현하려고 할 때, 그 용기와 결심이 크면 클수록 실천중에 만나는 저애력과 장애가 크게 된다. 비록 시인이 자신이 소속된 민족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하여도자신이 소속된 민족문화를 언술하려면 개인적인 시야의 국한성을 받게 된다. 때문에 민족문화성에 대한구현도 주관적인 색채를 다소 지니게 된다. 남영전 시인의 도템시도 표현상에서 일정한 제한을 받고 있으며 민족특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민족특성에만 머무른 제한성이 있다. 이러한 국한성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이며 매력적인 결과이다. 개인적인 시인적인 시각으로 민족과 인류의 과거 현재 그리고 장래를 언술한다는 작업은 상술한 국한성의 조건하에서 여러가지 변증통일의 모순체를 이룬다.         1  시적 이미지가 개인의식과 집체의식의 모순과 통일속에 구현된다. 도템이란 옛날 씨족의 상징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현대인의 리지적인 사유를 도입하여 그 내용과 문화성에 대하여 해석한다는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도템문화에 대한 추측과 해석이 도템문화의 원초적인 내용과 거리를 두었다 하더라도 필경은 공인하는 대체적인통일적인 집체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도템문화에 대한 인지를 집체의식이라 본다면 그 집단적인 지혜가 우리에게 도템시를 연구하는 공중화원식의 문화장소를 마련해준다. 이러한 공중화원식의 집체의식을 전제로 우리는 잠시나마 도템을 민족성격과 관련된 사물로 인정할수도 있다. 남씨의 도템시는집체의식이 공인하는 도템내용과 도템형식을 선택하였다.례를 들면 산왕인 호랑이, 속력의 상징인 백마,백수지왕인 사자, 인내의 상징인 황소, 도고의 상징인 매, 피를 쏟아 진정을 바치는 상징인 뻐꾸기 등이다.남씨가 도템형상을 리용하여 민족품위를 표현하는 중에 부득불 집체의식이 공인하는 시적意象을 선택하였지만 따라서 詩作에 로출될수 있는 詩意의 로쇠와 단조로움을 피면하기 위하여 새로운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돌파의식은 시의 언어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미소하게 나타나는 돌파가 나중에는 시어의생소화가 시적대상과 시意象의 비약을 도래한다.  등 시작에서 볼수 있지만 집체의식이 공인하는 도템형상과 의상을 벗어나 심지어는 역설적인 구축을 통하여 새로운 시적형상과 시적예술성과를 이루었다. 도템시는 민족의 대언이 아니다. 다만 남씨식의 민족정신에 대한 구현이며 민족정신의 化身일뿐이다. 이처럼 도템시는 남씨의 개인적인 창작사유와집체의식이 공인하는 기존도템문화가 이루는 변증통일의 산물이다. 2 시언어가 웅대한 서술형식과 시적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의 변증통일속에 체현된다. 비록 시의상의 새로운 구축이 있기는 하지만 남씨는 보수적인 시인으로서 민족을 다룬 시의 언어와 형식이 거창하고 드넓고 격정적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도템시에 나타나는 언어와 서술이 웅대하고거창하며 일상생활어휘와 거리를 둔 半文半白의 특징을 지닌다. 정교로움을 만드는 기법을 버린 원시적이고 광란적인 현대식 楚辭라고 칭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시는 낭송시가 지닌 부족점을 지니게 된다. 례를 들면 도템시의 흔적을 보이는 곽말약의 도 좋은 시작이지만 詩적 審美성이 허약함을 남씨도 잘 알고 있는줄로 추측된다. 때문에 남씨는 전통적인 시언어와 형식을 많이 더나 새로운 언어풍격을 도입하여 시적 심미성 특징이 뚜렷한 구축을 하게 된다. 전통적인 심미습관으로 볼 때에는 도템시가 시적언어가 평범하고 새로운 기교가 없으며 시적여운이 결여하다는 평판을 받을수도 있겠지만 필경은 새로운 시적구축을 한 시작들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창작과정에서 웅대한 시적서술이가져오는 시적이미지의 결여성을 극복하여야 한다.
1448    토템시 - 민족문화브랜드 댓글:  조회:5410  추천:0  2015-09-07
남영전 시 세미나]《시인》《친구》《형님》 [길림신문] 위챗(微信)에 공유 ○신봉철(길림공상학원 당위서기,연구원) 오늘 《인간과 자연의 대화》―남영전 시 세미나에 참가하게 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세미나가 원만하고 성공적으로 개최되기를 충심으로 축원합니다. 남영전선생을 알게 된것은 제가 그의 시를 배독하면서부터입니다.지난세기 80년대 중기,당시 연변에서 사업하던 나는 업여애호로 각종 문예작품을 섭렵하기를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남영전의 작품을 애독하면서 그의 시와 그를 주목하게 되였습니다. 1995년,제가 성으로 전근해 온후 친구의 소개로 남영전선생을 만나게 되였고 후에 그의 초청에 의해 선후로 《길림신문》발전연구회 회장과 《장백산》발전연구회 회장을 맡게 되였습니다.그와의 교제차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의 능력수준과 인품에 대해 더욱 전면적이고 계통적으로 료해할수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의 친구와 형제로서 3가지를 얘기하고저 합니다. 첫째, 남영전선생은 탁월한 성과를 이룬 시인입니다. 그는 지난세기 70년대초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여러 부의 시집과 번역저서들을 출판했는바 여러 차례나 전국소수민족문학 창작상과 연구상을 받았고 2010년에는 중국당대10대걸출민족시인에 입선됐으며 중국당대걸출민족시인시가상을 수여받았습니다.그외에도 그는 국제시인대상을 수여받았고 그의 이름은 미국과 영국의 《국제명인사전》 등 국내외 40여부의 사전에 기입되였습니다. 남영전선생은 시인으로서 개성이 있는 시가창작을 탐색해왔습니다.지난세기 80년대 중기부터 그는 시가를 캐리어로 삼고 토템을 제재로 하여 개인감정과 민족감정을 융합시켜 원시선조의 토템사유와 현대인의 심미문화사유를 융합시켜 자신의 자연과 인성과 세계본질에 대한 사고를 시에 융합시켜 토템시의 선례를 개척했습니다.그는 진정으로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융합시킨 시인이고 현실주의서법을 갖춘 시인이며 소수민족시인중에서 한어습작으로 돌출한 성과를 이룬 시인입니다. 남영전선생은 시인으로서 매력적인 독특한 현상을 갖추었습니다.그의 토템시가 발표된후 국내시단의 주목을 받았는바 그의 토템시를 둘러싸고 여러번의 세미나를 조직했고 연구론문집,토템시흔상분석,전문저서출판이 줄을 이었습니다.《남영전토템시연구》는 이미 모 대학교의 전교 공선과목으로 되여 정식으로 수업하고있으며 열렬한 환영을 받고있습니다.그의 시들은 국외의 시간행물에도 여러건 게재되여 국제시단의 주목을 받고있습니다.보시다싶이 남영전선생의 토템시 및 시학리론은 이미 일종의 문화를 형성하여 국내외 해당 전문가,학자 및 대학교의 주목을 받고 연구를 불러일으키고있습니다. 남영전선생은 시인으로서 창의가 짙은 문화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그는 우리 나라 당대 시가창작을 풍부히 하기 위해 토템시라는 일종의 새로운 시가문본을 건립하였을뿐만아니라 당대인이 인간과 자연,인간과 세계,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인식하며 공동으로 인생생존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문화적가치를 창조하였습니다. 그의 토템시는 우리 성에 하나뿐인 독특한 하나의 부호이고 하나의 상징이며 선명한 하이라이트로서 우리는 충분한 인식과 고도로 되는 중시를 돌려야 합니다. 둘째, 남영전선생은 믿음직한 친구입니다.그의 신변에는 수많은 친구가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한평생을 두고 사귀여도 모자란다는 느낌이 드는데 남영전선생이 바로 그런 친구입니다. 남영전선생은 친구로서 흉금이 넓습니다.해양은 륙지보다 넓고 하늘은 해양보다 넓으며 사람의 마음은 하늘보다 더 넓고 큽니다.남영전선생은 넓은 흉금을 가졌기에 락관적이고 진취적인 인생태도를 형성할수 있었고 시야가 넓고 사로가 넓은 창작특색을 형성할수 있었으며 부단히 탐색발견하고 부단히 사고전진할수 있었습니다.그는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민족은 문화의 구분이지 혈통의 구분이 아니다》는 론술을 제기했는데 이는 민족개념에 대한 심각한 해석이며 민족개념에 대한 표달을 새로운 경지에로 이끌었는바 매우 식견이 있고 가치가 있는것입니다. 남영전선생은 친구로서 매우 풍도가 있습니다.그와 다년간의 교제중에서 리지적이고 침착하며 사업과 생활속의 크고작은 일들을 자연스럽게 대처하는 그를 보면서 심각한 인상을 받았습니다.《길림신문》발전연구회 회장과 《장백산》발전연구회 회장으로서 나는 그와 함께 일련의 문학과 사회공익 활동을 조직하여 신문사와 잡지사를 위해 선후로 100여만원의 자금곤난문제를 해결해주어 경영난관을 넘기게 했습니다. 남영전선생은 친구로서 은혜에 감사히 생각하고 포용할줄 아는 사람입니다.은혜에 감사히 생각하는것은 큰 학문이고 포용은 일종의 큰 지혜입니다.그는 큰 학문을 장악하였고 큰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그는 친구로서 할수 있는 일들을 다 해냈습니다. 셋째, 남영전선생은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형님입니다. 나이로 보면 그는 저보다 8살 년상으로서 나의 형님이고 인생경력으로 봐도 그는 나의 형님입니다. 남영전선생은 형님으로서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학식을 구비하였습니다.그의 토템시 창작과 연구에서의 지명도와 영향력은 조작해낸것이 아니라 20여년간 창작에 몰두하고 연구해낸 진짜 솜씨,진짜 수준,진짜 실력이며 그의 시작품들은 국내외 전문가,학자의 주목과 연구토론을 불러일으켰는바 이는 그의 20여년간의 창작과 연구에 대한 제일 좋은 보답입니다.《글의 풍격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남영전선생과 오래 사귈수록 그의 인격매력과 풍부한 학식을 감수할수 있습니다. 남영전선생은 형님으로서 겸허하고 사람을 정중히 대합니다.미국 세계문화예술원의 영예문학박사이고 국무원의 특수수당금대우를 받고있으며 길림성의 고급전문가로서 일찍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의 사장 겸 총편집을 담임한적 있는 그는 명망높고 지체가 높다고 할수 있습니다.하지만 종래로 떠벌리지 않으며 뽐내지 않고 본색으로 사람을 대하며 시작품으로 이름을 날려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있습니다. 남영전선생은 형님으로서 언제나 진솔하고 성심성의를 다합니다.인지상식은 귀재상지요.인지상지는 귀재지심((人之相识,贵在相知。人之相识,贵在知心。)이라고 했습니다.영전형님과 나는 절친한 지기라고 할수 있습니다.장기간의 교제에서 우정에 대한 리해와 우의에 대해 소중히 여기는 영전형님의 인품을 알고있는 나로서는 영전형님과의 우정과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면서 오래동안 유지해나가고싶습니다. 시인이고 친구이며 형님인 남영전선생이 토템시 창작과 연구에서 더욱 큰 성과를 따내고 문단의 《상록수》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남영전시인이 장춘공업대학에서 자신의 토템시에 대해 소개하고있다 우리 나라 저명한 조선족시인 남영전의 토템시가 대학교정에서 화제로 되여 대학생들의 인기를 끌고있다. 제19번째 《세계독서의 날(4월 23일)》을 맞으면서《명작감상, 명인과의 대화-장춘공업대학남영전작품독서회》가 4월 20일에 길림성전민열독협회, 길림성작가협회의 주최로 장춘공업대학 강당에서 개최되였다. 길림성정협 전임부주석이며 길림성전민열독협회 조가치(趙家治)회장, 길림성작가협회, 장춘공업대학의 해당 지도자들과 대학생 도합 300여명이 독서회에 참가했다. 남영전시인과의 교류는 대학생들의 비전,인생관 등 여러 방면에 큰 계발을 주었다 독서회에서 남영전시인은 토템문화에 대한 감오(感悟)와 토템시의 시학리념, 토템시의 추구에 대해 자신의 문학관을 이야기했다.《 선조들이 자신에 대한 이런 물음은 인간과 동물의 근본구별이기도 하다》며《선조들의 이런 물음이 있었기에 인류사회에 토템숭배가 생겼고 토템숭배가 있기에 노래, 춤, 그림이 나타났고 사람들은 성씨가 있게 되였으며 인류는 문화가 있게 되였다.》 《토템관념의 핵심관념은 천인합일(天人合一), 이 사상은 선조의 세계관이였고 그들의 행위준칙이였다. 중국은 선조들의 이러한 전통문화가 대를 이었기에 조대(朝代)가 어떻게 바뀌여도 세계 고대 4대 문명국중 유독 중국만이 지금까지 세계의 동방에 우뚝 서있다. 이것이 바로 전통문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독서회에서 조가치회장이《남영전토템시의 문화가치》, 길림성당위 선전부 문예처 처장 주강(周剛)이《남영전토템시, 뿌리찾기와 비전에 대한 사고》, 길림성작가협회 부주석 장순부(張順富)가《남영전과 그의 토템시》란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여 대학생들이 남영전토템시를 리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학자와 전문가들은《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원시토템과 현대의식을 창조적으로 결합했고 그속에 자신의 신선한 경험과 깨달음을 부여하여 새로운 시창작으로 문화시야를 넓혔다》, 《그의 토템시집 에서 시인은 자신의 탐색의 길을 대만의 원주민 그리고 북아메리카 인디안인의 토템문화까지 확장하면서 시가로 광활한 인류생존의 문화공간을 만들어갔다》고 평했다. 현장에서 많은 대학생들이 앞다투어 남영전토템시를 읽은 감수, 깨달음 등과 함께 그동안 궁금했던 물음을 제기하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자신이 즐기는 남영전토템시를 랑송하면서 문학적감성을 한껏 북돋았다. 대학생들은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를 통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관계의 깨달음으로 우리들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말했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일찍 국내 기타 대학교에서도 주목받았었다 장춘공업대학에 앞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벌써 국내 대학생, 연구생들의 흥취와 주목을 받았다. 2003년이래 중남민족대학, 수도사범대학, 장춘사범대학 등 8개 고등학교에서 선후로 《남연전토템시세미나》를 개최했고 2009년 절강호주사범학원에서《남영전토템시연구》공동학과를 개설했으며 2011년에는 남영전토템시내용이 대학입시모의작문시험제목으로도 선정되였다. 또한 남영전토템시연구는 국내 부분적 대학의 석사생, 박사생들의 졸업론문 제목으로도 선정, 지금까지 300여편의 토템시 관련 론문이 나왔다. 남영전시인은 1971년 문단에 데뷔한후《원융》등 16여부의 시집을 출판했고 3차례 국가급문학상인《준마상》등 각종 문학상을 50여차 수상했다. 1986년부터 그는 계렬토템시창작으로 《토템시 명명(命名)자, 실천자》,중국문학의 새로운 쟝르를 개척했다는 평판과 함께 목전 국내외문학계에서 큰 관심과 주목을 받고있다. 남영전시인이 독서회에 참석한 해당 지도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 길림시조선족들이 남영전시인을 환영하고있다/신승우  남영전토템시를 둘러싸고 펼쳐진 신선한 토템문화제가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조선족사회문화발전의 화제로 되고있다. 9일,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남영전토템시를 둘러싸고 민족복장 전시, 시랑송, 노래, 무용, 학술세미나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이날 토템문화제 오전행사는 장춘대표팀 한복전시로 막을 펼쳤다. 이어 남영전토템시《희망과 꿈》 등 시를 시랑송으로 무대에 올려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남영전토템시《백마》는 박력감있는 노래로 변신해 관람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남영전토템시 《달》,《학》은 우아한 무용으로 관람자들한테 다가가 보는이들의 눈, 귀, 마음을 잡았다. 또한 남영전토템시는 서예가, 화가 등의 붓끝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면서 문화제에 향연을 더했고 토템시에 대한 참석자들의 리해를 돕기도 했다. 《도라지》잡지사 리상학주필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신봉철회장이 개회사를, 《장백산》잡지사 리여천사장이 행사계기 및 인사말을, 중앙민족대학 오상순교수, 길림시문화국 왕영길부국장, 연변작가협회 우광훈주임이 축사를 했다. 신봉철회장은《남영전토템시는 민족문화브랜드이고 민족문학정품,민족단결의 좋은 처방》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그의 토템시는《심오한 력사성, 선명한 민족성, 깊은 포용성》등 특성을 갖고있다고 소개했다. 토템문화제 남영전토템시세미나 현장/신승우  오후 오상순교수의 사회하에 진행된 남영전토템시세미나에서 연변대학 김관웅교수가 《남영전토템시 을 통해 본 조선민족과 만-퉁구스 제 민족의 곰토템숭배의 련관성》, 길림대학 윤윤진교수가《생태주의시학으로 분석한 남영전시가》, 북경제2외국어대학 김영옥교수가 《남영전시연구-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심으로》, 문학평론가 김룡운이《-재확인과 재증명 그리고 시로 쓰는 론문》등을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했다. 론문발표에 이어 자유토론에서 세미나 참가자들은 중국 주류문단에서의 남영전토템시 위치와 역할, 남영전시인의 인격매력, 조선족문화사회발전에 대한 그의 기여 등을 두고 각자 소감을 밝혔다. 토템문화제에 참가한 북경, 연변, 길림시 등 몇몇 관람자들은《문학과 예술을 결합시킨 아이디어가 참 좋은 행사이다》,《남영전토템시 매력에 푹 빠졌다》,《민족문화를 지키고 조선족들을 한데 묶는 문화잔치이다》라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남영전시인은《토템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한층 높아졌음을 이번 행사에서 느낄수 있었다.》며 큰 감동과 고무를 받게 되였다고 했다.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 전경업관장은 이번 행사를 마감하며《이번 행사는 문학과 군중문화예술의 여러 령역을 접목시킨 시도이다.》며《앞으로도 문학인, 예술인들이 외롭지 않고 조화로운 어울림속에서 우리 문화가 한층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주최로 펼쳐진 이번 토템문화제는《도라지》잡지사,《장백산》잡지사에서 맡아했고 해당 부문 지도자, 대학교 교수, 문학인, 길림시, 장춘시 조선족 사회각계 인사 및《민족화보》, 《연변위성TV》, 《길림신문》 등 12개 북경, 동북3성 조선족 신문사, 잡지사 총 300여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다.
1447    턱수염 예술가 댓글:  조회:2210  추천:0  2015-09-07
미국 포틀랜드에 사는 조나단 달과 브라이언 델루렌티는 ‘턱수염 예술가’로 불린다. 친구 사이인 이들은 턱수염을 예술로 바꾼 사진들을 선보여 지난해부터 SNS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턱수염 예술가들은 길고 무성하게 기른 턱수염을 온갖 종류의 물건들로 장식한다. 촛불, 과일, 과자, 페인트, 꽃, 깃털 등 턱수염 아트의 재료는 너무나 다양하다. 이 남자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장난이 아닌 진짜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는 평가다.  약 35,000명에 달하는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는 조나단 달과 브라이언 델루렌티는 지금도 계속해서 상상을 뛰어 넘는 ‘턱수염 예술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꽃과 깃털 그리고 과자와 촛불 심지어 반짝거리는 작은 전구로 장식된 턱수염에 많은 이들이 매료된 것이 사실이다. 
1446    감자 캐는 즐거운 농부 - 남영전시인 댓글:  조회:4087  추천:0  2015-09-07
남영전의 토템시가 현대인류에게 주는 계시                                                   윤한윤 ...다년간 조선족 시인 남영전의 토템시와 토템문화에 관하여 깊이 연구하고있는 중국작가협회 창작련락부 부주임 윤한윤선생과의 인터뷰---   기자: 이번 “성세민족정 작품공모”에서 유일한 시가형식으로 우수상을 수상한 남영전의 토템시 “중화형제정”에 대해 평가해주세요. 윤한윤: 남영전의 시는 문화의 시각에서 인류관과 민족관을 다시금 해석했는데 작자는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고 민족은 문화의 구별이지 혈통의 구별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우리 모두가 서로 떠날수 없는 중화형제임을 설명했다. 또한 이 시는 “오늘”이라는 개념에 착안한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야와 사색을 원고시대로 뻗쳐 사람들의 그 시대에 대한 단체기억(集体记忆)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어떠한 민족에 속하든 어떠한 나라에 속하든 근본적으로 모두 ‘한가정”이라고 했다. 이는 국내 각 민족이 성심성의로 단결하고 세계 각 민족지간에 서로 단결하며 손을 맞잡고 인류의 생존위기에 대처함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적가치와 현실적의의를 가지고있다. 기자: 남영전시인은 1986년부터 원시토템문화를 고심히 연구해오면서 토템시창작에 전념하여 52수의 토템시를 창출시켰고 국내외의 광범한 각광을 받고있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이미 중국시단에서 독특한 “남영전현상”을 형성했다고 볼수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윤한윤: 토템은 인류가 원시사회에 처해있을 당시의 본 씨족과 혈연관계를 가지고있는 동물 혹은 자연물로서 사람들은 토템을 본 씨족의 표지로 했다. 인류사회의 진화발전에 따라 현대사회에 들어선후 토템은 점차적으로 신비한 색채를 가셨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서 토템은 의연히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진 인장이라고 할수 있다. 토템은 부동한 민족의 마음속에서 원고씨족의 독특한 문화유전자를 지속하고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민족, 력사, 문화, 종교의 한개 상징으로 되고있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 대한 다년간의 전념과 창작은 절대로 기발한 생각과 근거없는 상상에서 온것이 아닌바 토템에 대한 심각한 인식과 해독이라고 볼수 있다. 알다싶이 남영전시인은 십여년간 52수의 토템시를 창작해냈다. 우리가 그의 토템시를 자세히 읽어본다면 그가 토템시에서 찾고있는 핵심은 무엇이고 왜 토템을 자신의 시의 형상으로 선택했는지를 알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의 생존환경에 대한 시인 자신의 초조한 마음과 련민의 정, 기대의 심경이라고 볼수 있다. 기자: 토템문화는 현대인류에 어떤 계시 어떤 영향을 준다고 보는가 윤한윤: 현대사회에 들어선후 과학기술의 신속한 발전으로 하여 현대문명은 근본상에서 인류의 생존환경을 개변시켰고 인류의 끊임없는 탐욕과 횡령은 억만년이 흘러야 형성될수 있는 자연환경과 각종 자원을 소비하고있다. 시인 남영전은 인류토템의 원시적화면인 달, 흙, 물, 불, 룡, 학, 곰, 물고기, 독수리 등을 토템시에 부각시켜 인류원고의 발자취와 안목으로 인류가 생존해온 청순했던 세계를 돌이켜보았고 토템시에서 묘사한 토템세계에서는 인류를 위해 심령을 깨울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과 머나먼 조화사회로 돌아갈수 있는 동경을 제공해줌과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부터 종종의 유감과 “오늘날 우리의 생활은 무엇을 잃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이런 의문은 우리가 현대사회에 들어선후 시종 인류자신의 생존발전을 괴롭히는 “모제(母题)”이다. 시인 남영전은 철학적사상과 우화식 시구로 우리들에게 원고토템의 정경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오늘날 어리석은 사람들을 일깨울수 있는 웨침임이 틀림없다. 그의 토템시에서 우리는 만물생령이 상호 의존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수 있을뿐만아니라 또한 토템 본신의 령혼적인 원 모습을 볼수가 있는바 오래전 인류생명의 “수호신”이였던 토템으로 인류가 생명에 대한 돌이킴과 사색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남영전 략력 남영전 시인 남영전, 조선족, 1948년 출생. 미국 세계문화예술학원 영예문학박사,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원,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부회장, 세계시인대회 종신회원, 영국 국제전기협회 종신회원,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연구원, 길림대학 문학원, 동북사범대학 상학원, 연변대학 사범학원 겸직교수, 중국조선족발전위원회 회장. 1971년부터 시,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평론, 민간문학, 번역 등 작품 발표. 시집 《상사집》,《푸른 꿈》,《산혼》,《신단수》,《뻐꾹새》,《원융》,《꽃이 없는 이 봄날에》 등 15부, 수필집 《잊지 못할 사람들》,《존경스런 사람들》 등 3부, 번역으로 《당송전기전》,《봉신방》,《파금단편소설》 등 3부. 전국 소수민족문학창작상 3차, 전국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 4차,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 3차,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3차, 길림성정부 최고문예상 장백산문예상 2차 등 도합 44차의 문학상 수상. 국무원 특수수당금 향수. 1986년이래 창작한 계렬토템시는 날이 갈수록 국내외 문학예술계와 학술계의 관심을 받아 국내외에서 이미 100여편 론문이 지상에 발표되였음. 국외에서 한국 《세계인교향시》 계관시인작품상 등 4차 문학상과 영국 켐브리지국제명인전기센터, 미국 세계명인전기센터 4매 메달 수상. 영국, 미국의 《세계명시인백과사전》, 《국제명인록》, 《국제명인 500명사전》, 《제일 500인사전》 등 40여부 사전에 등재.     / 인민넷 김홍화기자 ======================================================= 감자 캐는 즐거운 농부 근간에 남영전선생을 만나본이들은 대개 이렇게들 인사말을 한다고 한다. 《얼굴이 참 좋아보입니다.》 버릇처럼 활짝 웃음으로 인사를 받는 남영전선생의 얼굴은 편안하게 피여있고 어린애처럼 해맑다. 《이제는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여 내가 하고싶은 시간에 하고싶은 일을 하는 이 자유가 이렇게 좋은지 진맛을 알게 된거요.》 잔뜩 즐거운 표정이다. 재직시에는 시간에 쫓기고 얽매이고 문득문득 창작사유의 절주가 깨지고… 지금은 책을 아무때건 아무때까지나 읽고 쓰고싶을 때 쓸수 있는 이 자유가 너무너무 좋다고 남영전선생은 말한다. 남영전선생은 신이 난 어린애처럼 단일문으로 줄줄 말타래를 푼다. 퇴직후 3년간에 토템시를 50여수나 썼다. 재직시인 1986년부터 2009년까지 23년간에 쓴 토템시가 도합 52수였다고 한다. 그는 《지금은 너무 쓸것이 많아 매일 책을 보고 사색을 한다. 인류학, 민족학, 민속학, 생태학… 토템문화와 관련된 학문은 깊이 팔수록 모를것이 더 많고 모를수록 더 보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를 깨우치면 시 한수가 나온다.》라고 말한다. 감자를 캐는 농부처럼 캘수록 주렁주렁 달려나오는것이다. 지금의 그의 일상은 매일 바쁘고 충실하고 재미있다. 《내 시간,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한다는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물음 하나》가 준 사명 인생의 목표를 물었더니 남영전선생의 어조는 확고했다. 《나한테는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에 대답하는것이다! 세마디로 되여있지만 결국 하나라 할수 있다.》 바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我们从哪里来)? 우리는 누구인가(我们是谁)?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我们向哪里去)?》이다. 그는 《나는 어쩌면 이 물음에 대답을 주고저 이 세상에 왔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동안 내가 걸어온 지름길이나 풍파, 고난 이 모두가 나더러 이 물음의 답을 찾게 하는 과정이 아닐가? 나는 이 물음에 대답하는 시를 내놓아야 한다!》 남영전선생은 금방 인쇄공장에서 가져온 길림출판사 출판의 시집 양본을 꺼내보였다. 토템도형을 배경으로 시집의 앞표지에는 《남영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南永前 我们从哪里来)》라고 씌여있다. 퇴직후에 새로 쓴 토템시중에서 43수를 골라 이미 발표되였던 52수의 토템시와 함께 총 95수의 시를 이 책에 수록한것이다. 이 시집을 시작으로 《물음》에 대답하는 창작이 본격 가동되였음을 알려준다. 《제1집이 나왔으니 내 인생의 3분의 1의 사명을 완성한셈이다.》 이제 올해부터 3년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답을 주게 된다. 따라서 제2집은 《우리는 누구인가(我们是谁)》가 시집 제목이다. 올해 1월 1일부터 제2집에 대한 창작을 시작했는데 벌써 시 몇수의 창작을 마쳤다. 그다음 3년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我们向哪里去?)》에 대답하는것이다. 《그때면 나는 70이 넘는다. 다 쓰고난후에도 정력이 되는 때까지 그 시들을 조명하고 다시 승화하고 만족될 때가지 소처럼 새김질할것이다. 이 사명을 완성하면 죽는다 해도 내 할 일을 하고 간다는것으로 만족이다. 시인으로서 나의 몫을 하고 가는것이다.》 중국문단에서 남영전의 토템시는 시인, 시평가(诗评家), 전문가, 학자들의 광범한 주목과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할머니와 장닭이 말하려고 한것은 구경… 남영전의 파란만장 인생과 심오한 토템시의 자초지종을 들어보노라니 문득 그의 인생과 시창작에서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이 다름아닌 그의 할머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은 한 조선족가정인 남씨가문을 말 그대로 멸족하다싶이한다. 광복때 투항하던 일본군이 세균쥐를 풀어놓아 동네에 생긴 무서운 온역때문에 남영전의 할아버지와 두 고모가 3일 안으로다 사망한다. 남영전의 아버지와 삼촌은 해방전쟁에 참가했다가 두장의 렬사증으로 돌아오면서 남씨 두 형제가 모두 희생된다. 참으로 남영전의 초년운은 불운의 련속이였다. 아버지가 참군해 전사하면서 남영전은 엄마배속에서 다섯달이 된 유복자로 되였다. 련속되는 타격에 나젊은 어머니까지 한 많은 세상을 떠나면서 남씨가문 외독자인 어린 남영전은 이 세상에서 할머니와 달랑 둘만 남게 된다. 남영전은 특별한 경력을 되새긴다. 가족을 아래우로 잃은 할머니에게서 홀로 남은 손자 남영전은 가문의 유일한 뿌리였고 실날같은 희망이였고 전부였으리라. 그런데 무심한 하늘은 유일한 남씨가문의 그 어린 싹도 뽑으려 했다. 세살쯤 되던 해 남영전은 갑자기 눈을 감은채 물 한모금 못 넘기고 《죽어》갔다. 갖은 방법끝에 할머니는 마지막 희망으로 멀리에 있는 유명한 《도사》라는 사람을 찾아가 살생부를 받아왔다. 마을 길어구에 있는 산신당에 제사상을 차리고 다리를 묶은 건장한 장닭 한마리를 올려놓고는 시켜준대로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도사는 《닭이 가면 애가 살고 닭이 죽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라고 한것이다. 하늘의 별따기지만 지푸래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할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또 외우고... 과학으로는 설명할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펀펀하던 장닭이 갑자기 세마디 꾸욱 꾸욱 꾸욱 하더니 빨갛던 볏이 까맣게 변하면서 숨이 끊어졌다. 또 기적같이 앓던 애는 차차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을 뜨더니 물을 찾고 밥을 찾고, 며칠후에는 거짓말같이 일어났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늘 손자에게 들려주셨단다. 밤이면 할머니는 하늘의 별 같이 많은 옛말들을 어린 손자에게 늘 해주셨고 손님이 오면 식사를 대접하고는 밥값을 받듯이 손자에게 옛말 몇컬레씩 들려주도록 하셨다. 날마다 소학교 교실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쌀을 장만할 큰 나무짐을 메고 학교앞 산길을 내려오는 할머니의 모습은 어린 남영전의 가슴속 제일 깊은 곳에 박힌 영원한 기념비로 자리잡았다. 그런 할머니는 남영전에게 깨달음의 씨앗을 심어준 계몽스승이고 철학적사색의 길을 틔워준 도사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영전의 첫 토템이지 않았을가? 적어도 할머니는 남영전 시 성공의 태모였다. 그 할머니의 모습을 담아 지은 시 《할머니》(1984년)는 남영전의 첫 국가급상으로 1985년 제2차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시가 1등상을 수상하였고 이 시가 수록된 남영전의 첫 시집 《상사집》(相思集)이 1990년 제3차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을 받으면서 남영전은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2011년 《인민일보》, 중국작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성세민족정》공모에서 남영전의 토템시 《중화민족정》은 유일한 시가형식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토템에서 그 답을 찾는 시인 전쟁의 참상은 어릴 때부터 남영전의 세계관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다. 현시대에도 끊기지 않는 종교와 민족의 갈등, 전쟁과 테러 등 심각한 사람간의 갈등 그리고 사람과 자연간의 갈등으로 인간의 생존위기가 그 어느때보다도 심각하다. 남영전은 《이는 오늘을 살고있는 현대인들이 정신의 고향을 잃어버렸기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갈등을 해결하는 대안을 인류 공동문화의 하나인 토템에서 찾게 된다. 그는 토템문화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준다고 생각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물음은 줄곧 이어지며 이 물음에서 예로부터 토템숭배가 생긴것이다. 그때로부터 남영전은 토템 관련 서적과 신화전설을 탐독한다. 그리고 인류와 세계에 대한 사색과 탐색을 시에 담는 시도를 했다. 1986년 겨울의 어느날부터 남영전은 토템물인 달, 곰, 사슴, 백학에 이 사색을 담아 시로 써보았다. 중국시단의 친구들의 높은 찬사를 받고 다시 수정해서 첫 4편의 토템시가 완성되였다. 이 참신한 쟝르의 시 4수가 1987년 9월-10월호 《시인》( 诗人) 잡지의 톱자리에 발표되면서 중국시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온다. 《세상에 둘도 없는》토템시가 이렇게 나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18년의 각고끝에 2003년, 남영전의 42수의 토템시가 완성되여 토템시집 《원융》(圆融)이 세상에 나온다. 이 시집은 2005년 1월 길림성정부 최고상인 장백산문예상을 받은 뒤 7월에는 국가급상인 제8차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받는다. 이어 2009년 추가 완성한 10수까지 넣어 총 52수의 시로 작가출판사에서 《남영전토템시집》이 출판되면서 토템시는 명실공히 중국문단에서 립지를 선언한다. 또 토템시로 남영전은 《중국 10대 걸출 민족시인》칭호를 받으며 중국시단에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토템시는 또 남영전을 세계적인 시인으로 그 명성을 가지게 한다. 1991년 이후 토템시는 미국시인이 영문으로 번역하여 영향력있는 《세계시가》, 《현대시가》, 《대표시인》 등 영문간행물에 발표하면서 1993년 미국세계문화예술원의 문학영예박사 학위도 받았고 그의 이름은 《세계명시인백과사전》에 올랐다. 또한 토템시는 한국에서도 3차 문학상을 받는다. 토템시는 중국 주류문단과 학술계를 통해 그 무게와 함금량이 현시된다. 중국문단에서 《토템시의 명명자, 실천가》로 공인되면서 중국시단의 권위평론가인 오사경으로부터 《토템시는 중국시가발전의 일종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력사적인 평가까지 받는다. 현재까지 국내 대학들에서 토템시 관련 론문 300여편이 나오고 국내외 8개 대학과 학술단체에서 전문세미나 10차가 있었으며 남영전 토템시 연구 저서 13권이 출판되였다. 2009년 절강 호주사범학원은 《남영전토템시연구》를 공공학과로 설치해 교수했고 남영전 토템시 연구는 국내 일부 대학 석,박사 연구생의 졸업론문제목이 되였다. 2011년에는 남영전 토템시내용이 대학입시모의작문시험 제목으로도 선정되였다. 중국시단에서 《남영전현상》으로 불리우고있는 남영전토템시 및 관련 문학작품에 대한 연구와 발전에 중시를 돌려 이를 길림성 문학브랜드로 육성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있다. 나는 어디까지나 시인이다 얼마전 중국 조선족 주요언론들에서 련합으로 사상 처음으로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을 평선, 각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조선족 20명을 선정했다. 남영전은 문학계의 유일한 작가로 선정되였다. 그 선정리유는 《남영전은 시창작에서 세운 기념비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중국조선족문화 발전에 대한 걸출한 기여를 한 문화거장이기때문이다》고 평심원들은 화제를 모았다. 남영전은 개혁개방이후 잡지발행인, 언론인 그리고 조선족사회활동 등 다분야에서 뛰여난 안목과 창신적인 개척능력 그리고 독특한 인격매력으로 조선족문화발전사에 확실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문학지 《장백산》은 남영전의 부호이며 상징이다. 이 잡지는 3차의 위기를 모두 전화위복의 도약판으로 만들며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력, 위기대처능력, 뛰여난 교제능력을 잘 보여준 남영전의 브랜드이다. 1982년 지구재정 압축으로 경비가 없어지는 페간위기를 매년 3만원 운영경비에 독립간행물번호까지 가진 호사로 전환시킨다. 1985년 정책조정으로 귀속단위가 상실되자 잡지를 성작가협회 소속으로 만들면서 성급간행물로 부상시킨다. 1987년 전국간행물정돈 정간명단에 들자 남영전은 《장백산》잡지를 성민위로 귀속되게 하고 성도회지에 옮겨오는 도약을 가져온다. 장백산은《길림성10대 간행물》에 선정된데 이어 2005년 국가신문출판총서에서 선정한 《국가백종중점간행물》행렬에 진입, 조선족문학지가 중국 수만종 간행물업종의 최정상 영예의 전당에 올라선다. 남영전은 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로 인생에 5년이란 언론인경력도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중국조선족언론사에 아주 귀중하고 무게있는 유산을 남긴다. 2005년 6월 길림신문사에 온지 두달만에 당보 책임자로서 정치적수준과 민족언론인으로서 민족적사명감을 시험하는 사건이 터진다. 바로 장춘공항에서 벌어진 한국귀국로무자 벌금사건이다. 장춘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조선족귀국로무자 몇천명이 일부 집법부문의 위법행위로 인당 5000여원씩 벌금당하는 중대한 집법사건이였다. 많은 매체들 그리고 나섰던 변호사들까지 《감히 범의 코수염을 건드리지 못》하고 손을 들고 나앉을 때 남영전은 신문사 취재팀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위협과 공갈에 배짱있게 정면대결로 맞선데서 끝내 해당 기관은 잘못을 승인하고 피해자들에게 벌금을 돌려주었다. 벌금을 돌려받은 피해자만 600여명에 달한다. 이 사건 해결은 장춘공항이 입국써비스를 적극 개선하는 계기가 되였고 주류사회에서 민족신문의 위상 정립, 조선어신문 금후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준 계기가 된다. 그해 11월, 길림성당위 부서기인 전철수는 성당위와 성정부의 해당 책임자들과 함께 길림신문사에서 현장사무를 보면서 신문사의 간고분투하는 정신과 공항벌금사건 해결 등 백성들에게 실제적 봉사를 한 실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력사적으로 남아내려온 길림신문의 체제문제, 재정문제 등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그해 12월 길림성 당위와 정부는 길림신문사를 2006년부터 성재정 전액지불단위로 격상시켜 길림신문사는 중국 조선어신문 4대 신문지에서 유일하게 전액공익성사업단위로 되였다. 그해 10월 성당위와 성정부 판공청은 련합문건을 내려 길림신문을《성급 소수민족언어당보》로 정식 명명해 성급당보로 확정하였다. 《당신이 그때(1995년) 그렇게 오라고 할 때 북경에 왔으면 벌써 부부급(副部级 )이였겠는데…》 지금도 북경의 한 문단 로간부는 남영전만 보면 타령이다. 일찍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 길림성의 중점후비간부로 지정된 남영전, 그의 뒤순위에 있던 다른 2명은 언녕 성부급(省部级)이상 간부로 되였다. 수차 길림성 정계에서 부임요청 담화가 있을 때마다, 북경의 모 잡지사 주필, 중국작가협회 전직간부로 요청이 왔을 때에도 남영전의 거절리유는 똑같았다. 나는 《장백산》을 떠날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템시의 오늘을 말하며 남영전은 《시를 선택한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명함장을 보면 《남영전 시인(南永前诗人)》이라고 큰 활자로 찍혀있다. 남영전은 《나는 어디까지나 시인이다》라고 말한다. 중국 문단이나 정계에서 넓은 인맥으로 소문난 그에게 사교능력의 비결을 물었더니 남영전은 이렇게 대답한다. 《시인은 어디까지나 진정을 추구하고 진심과 관용으로 사람을 대한다. 시인은 선지선각자이며 사유가 트이고 모든것을 포용하는 흉금이 있다. 나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언제나 시인의 신분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인의 품위를 지킨다. 그것이 아주 잘 통했다.》,《나는 시로 세계와 대화한다.》 남영전시인은 문학계의 유일한 작가로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에 평선되였다. 사진은 시상식에서. (/김성걸기자 촬영)  남영전의 한계와 고민은 무엇일가? 기자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남영전선생과 아래의 대담을 주고받았다. 기자: 지금 가장 큰 고민과 한계가 있다면? 남영전: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재간이 못 따라가는것이 고민이다. 책을 많이 보고 사색의 령역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쓸 내용도 많아진다. 지금 어떻게 쓰는가가 가장 큰 고민이다. 표현양식을 두고 이렇게 깊이 고민한적이 없다. 내 토템시를 두고 어떤이는 남영전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상징적표현이 많기에 리해가 힘들다고 한다. 내 목적이 토템문화로 많은 사람과 대화하려는것인데… 어떻게 하면 누구나 쉽게 편히 읽고 받아들이도록 토템시를 쓸것인가 하는것이 내 고민이다. 그래서 퇴직후 새로 쓰는 시들은 토템의 이야기이고 토템문화를 해석하는 시라고 할수 있다. 기자: 토템문화와 관련 남영전의 주장에 대해 여러가지 이의도 제기되고는데… 남영전: 나는 절대 토템학자가 아니다. 나는 토템문화를 시로 리해하고 시로 이야기하는 시인이지 학자가 아니다. 토템문화 학습과 연구는 어디까지나 토템시를 쓰기 위한것이다. 시를 쓰기 위해 학자들보다도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토템 관련 학술연구는 국제적으로 200년, 중국은 100년 정도다. 당대에 와서 관련 서적만 수십종 된다. 모두가 학문이나 리론차원이다. 진정 감오와 깨우침으로 쓴 내용과 실천은 아직 없다. 토템시는 남영전 나름의 감오와 깨우침이라고 생각한다. 시로 그 토템의 정신세계를 파는것이다. 토템시는 인류와 자연,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시로 이야기하는것이다.  길림신문 한정일 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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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거북” 考 남영전 씨의 시「거북」((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29-31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바다를 집으로 륙지를 집으로 한뉘 시원함과 따사로움 꿈꾸어왔건만 탁류의 충격과 모래불 사장속에 날마다 해마다 괴로움도 쓰라림도 답답함도 속시원히 터놓을 곳 없어라 행여나 돛대에 별무리 걸고 행여나 돛폭에 금노을 펼치려니 천만년 바래여 눈동자 수정알로 벼려우고 등허린 철갑으로 굳어졌어라 수정눈 까닭인가 철갑등 까닭인가 매발톱, 짐승발도 어림없어라 칼끝도 활촉도 튕겨나와라 화약의 불길도 어찌지 못해라 모래톱, 수풀속에 깨뜨릴수 없고 태울수 없는 넋 해적들이 침노할제 그대 등에선 무수한 칼날 곤두섰더라 그대 입에선 사나운 불구름 내뿜었어라 쳐오는자 뒤엎어 쳐박아 파묻어버렸더라 바다를 집으로 륙지를 집으로 살고푸지만 구름안개 가시고 물파도 잦아들젠 외로이 흐느껴운다 바다밑이나 모래불에서 운명의 막고비엔 고달픈 몸 끄을고 쓰러지는 성곽 바쳐주누나 우람진 비석 업어주누나 다만 몸으로 무언의 말로 끝없는 명상에 잠겨 깊은 사색 굴리며. 거북은 조선민족의 상징계통 속에서 神의 使者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민족의 신화에서 흔히 神의 使者로서 신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三國遺事』권2, 紀異二 駕洛國記의 기록에 따르면 거북은 신성한 군주의 출현을 촉구하는 백성의 뜻을 신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였다. 『三國史記』권13, 高句麗本紀 東明王에 의하면 주몽이 금와왕 군사들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갈 때에 다리를 놓은 자라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한국의 무속이나 민속에서 거북은 그 등딱지를 태워 앞날의 일을 미리 점쳐 주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바로 龜卜점이다. 거북은 이처럼 신령스러운 동물로 생각해왔으나 조선민족의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문헌적인 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거북」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없다. 13. “白鳥” 考 남영전 씨의 시「백조」((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32-34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식솔 데리고 부락 데리고 어렴풋한 풍경 데리고 평생 불안한 운명 데리고 이사갑니다 이사갑니다 이사갑니다 애오라지 북국의 눈채찍 바람채찍 와락 몰려와 그들의 보금자리 묻어버리고 그들의 식량조차 빼앗아가며 욕질하고 매질하고 내쫓기에 단꿈을 기르던 요람을 떠나 발떼기 서운한 호수를 떠나 고향에 고이는 눈물을 떠나 이사를 갑니다 바람이 길이 되고 별이 리정표 되고 번개가 길동무 되어 끝없는 창망한 밤에 하늘밖에 하늘에 기대를 걸고 애오라지 남국의 불혀바닥 비혀바닥 왈칵 달려와 그들을 태우며 삶으며 그들을 막으며 절구며 집에도 갈수 없게 하거늘 하는수없이 다시금 크나큰 기대 품던 그 땅을 떠나 저으기 기쁨 주던 그 땅을 떠나 또다른 고향 떠나 이사를 갑니다 눈물 머금고 한을 품고 구슬픈 그 몸을 이끌어 끊임없이 이사갑니다 쉬임없이 오고갑니다 끝끝내 몸 붙일 곳 찾지 못했건만 목숨이 붙어있는한 날개를 퍼덕일수 있는한 영원한 온기 찾으려고 따스한 영원 지키려고 이사갑니다 이사갑니다 이사갑니다. 백조는 서양의 신화, 전설, 민담, 동화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중요한 물새이기는 하지만 조선민족의 설화에서는 그리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민족과 혈연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부여라는 부족이 물새를 족명(族名)으로 삼았다고는 하나 그 물새가 백조인지 기러기인지 학인지는 분명히 분별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백조」를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14. “물” 考 남영전 씨의 시「물」((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12-14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보이다가도 안보이고 크다가도 작은 신령 물은 어디라 없이 다 있어도 날개 없고 발이 없고 형색조차 없습니다 없는 날개 가장 큰 날개이고 없는 발이 가장 큰 발입니다 없는 형상 가장 자유로운 형상이고 없는 빛깔 가장 현란한 빛깔입니다 대지우에 모래밭에 크나큰 사막에 하늘우에 산마루에 깊다란 협곡에 안개 되고 구름 되고 비가 되고 눈이 되고 냇물 되고 강이 되고 호수 되고 바다 되고 뿌리에 줄기에 잎속에 꽃과 열매에 파고들어 인간과 자연을 낳아 기르는 인간의 시원입니다 만상의 시원입니다 물은 가장 온화합니다 물은 가장 흉맹합니다 수양버들 봄바람에 흐느적이듯 호수우에 새들이 지저귀듯 물은 마냥 부드러워도 독을 쓰면 사나운 맹수도 당해 못내고 타오르는 령화도 못당합니다. 부드러운 음기로 사나운 양기로 마른 가지 움터나고 여린 가지 억세 지고 벼랑도 무너지고 메부리도 깎입니다 생령의 명멸도 대지의 부침도 손안에 꽈악 거머쥐고 있습니다 물의 신비 물의 신성 눈부시게 무궁무진 퍼져갑다 사람은 물 우에 가고 고기는 물 속에 놀아 물우이나 물밑이나 생명의 락원 하여  물거품도 정액인듯 떠벋들리고 우물속 달조차 룡의 알로 보이고 물할미는 약수의 신으로 불리웁니다 하여 녀인들은 아들 잉태 물에다 빌고 풍요함을 기원하여 물에다 빌고 무병장수 기원하여 물에 빕니다 인류와 더불어 물의 신화 살아있고 하늘과 더불어 물의 위엄 공존합니다 물, 물, 물, 모든 생명 모든 령혼의 온갖 문을 여닫는 신령입니다 1991.6 조선민족의 신화에서 물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고려의 국모(國母)들은 모두 물에서 태여나서 높이 섬겨졌다. 고구려의 국모격인 柳花는 水神 河伯의 딸이요, 신라의 국모는 우물에서 태여나지 않았던가. 天神과 地母神을 겸한 水神의 결합으로 흔히 나라가 형성되는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민족신화의 “天父地母”의 큰 틀이 형성되는 것이다.  산에 산신령이 있어 치성을 받았듯이 물에는 물할미가 있어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졌다. 고구려에서는 “水神祭”라고 일컬어지는 나라의 큰 굿이 있었거니와, 굿을 올릴 때면 온 나라 사람이 어울려 그 水神을 강가에 모셔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해져 있다. 다 같은 물신앙이라고 해도 민속에서는 강물보다 우물이나 샘터를 두고 더 많은, 더 진한 믿음이 바쳐져왔다. 우물신앙의 사례는 신라 국초의 박혁거세왕의 전설에까지 소급된다. 혁거세왕은 나정(羅井)이라는 우물곁에서 태여났지만 그의 왕비는 아예 알영정(閼英井)이란 우물에서 태여났다고 해서 閼英이라고 한다. 알영은 또 鷄龍과 출산한 것으로 되었으니 태양새인 닭과도 혈연적인 관계가 있는 셈이다. 사실 물에 대한 숭배는 전 인류적이고 물과 유명한 녀성의 탄생을 련과짓는 것은 전 인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의 신화중의 중요한 녀신 아프로티테는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했다고 하니 역시 물과 밀접한 련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천고의 영웅 아킬레우슬 낳은 테티스도 바다의 녀신이 아니던가. 이런 의미에서 물은 어쩌면 카를 융이 말한 것처럼 전 인류의 원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전 인류적인 원형이 어는 특정한 씨족이나 부족 혹은 민족의 토템으로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조선민족이 선인들이 물을 자기의 씨족이나 부족 또는 민족적인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는 찾을 수 없다. 물은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자연신으로 숭배되였거나 신앙되여 온것 같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물」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하는데는 무리가 따른다. 15. “山” 考 남영전 씨의 시「산」((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51-52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因愚昧 因混沌 被擠出 被壓出 巨大之筋肉 巨大之肉塊 巨大之血流 卽便被遺棄 卽便赤身裸體 卽便傷痕累累 卽便殘缺不全 却以不屈之信念 却以博大之氣魄 昻 首 挺 立 以自身之血 以自身之血 以自身之精氣 以自身之臂膀 擁抱一切能爬能走能飛之精靈 養育一切能吟能歌能舞之靈魂 冷寞的世界 因之而充滿生機 因之而走進和諧 崇敬山 膜拜山 山之沈黙爲最深沈之沈黙 山之胸襟爲最寬廣之胸襟 山之品格爲最高尙之品格 山爲生靈永恒之歸宿 山 山 山 1994.9 한국의 신화학자이며 민속학자인 김열규 교수는 조선민족의 자연신앙체계속에서의 산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형상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산과 물 그리고 나무와 바위는 이 땅의 겨레들이 만들어온 ‘자연신앙’의 4대 요소이다. 그 넷을 이어서 그려질 사각형 속에 이 땅에 자연신앙의 성역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 사각형 중에서도 다시 산과 물을 으뜸으로 쳐야한다.”(김열규 저『한국 문화와 역사를 위한 신화론- 한그루 우주나무와 신화 』, 한국학술정보, 2003년, 263) 산 많은 지역에서 원시문화와 고대문명을 창조한 고조선과 가락 그리고 신라의 국조가 각기 산에 내렸고, 단군과 탈해왕은 산신이 되여 나라를 지켰다. 산은 신이 하강하는 곳이고 또 산은 민족의 발생과 근거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특히 신이 하강하는 산은 신을 모시는 성역으로서 산악숭배의 바탕이 되며 산신의 존재를 파생시킨다. 서양에서도 산은 신이 내리는 곳으로서 산은 천국을 상징하며, 신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신화에서 올리포스산은 신들이 사는 곳이고,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집이서 있는 산이 모든 묏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만국이 그리로 물밀듯이 밀려 들더라” (구약 성서 이사야 2)고 하였다. 유태인들의 청년수령 모세도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만나서 하나님의 선민이 되지 않았던가. 이런 의미에서 산은 역시 물이나 땅처럼 카를 융이 말한 것처럼 전 인류의 원형이라고 해야 것이다.  물론 이런 전 인류적인 원형이 어는 특정한 씨족이나 부족 혹은 민족의 토템으로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조선민족이 선인들이 산을 자기의 씨족이나 부족 또는 민족적인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는 찾을 수 없다. 물은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자연신으로 숭배되였거나 신앙되여 온 것 같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산」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16. “토끼” 考 남영전 씨의 시「토끼」((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79-80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總想築個溫馨的窩 却總有惡魔襲擊 一個善良溫順的生靈 被迫逃離 逃離逃離 兩條後腿越逃越長 總想睡個安穩的覺 却總被陰謀警醒 一個不願爭鬪的生靈 被迫逃離 逃離逃離 兩只耳朶越竪越長 日日月月逃離 春夏秋冬逃離 逃得妻離子算 逃得沒有寧日 逃離逃離 最終逃進月宮 一個孤獨迷茫的遊魂 將平生的宿願 將歸鄕的企劃盼 置入石臼  搗啊搗 搗得鄕情綿綿 搗得月色朦朧 2000.1 토끼는 조선 전설이나 민담에서 등장하지만 곰이나 범이나 사슴처럼 중요한 위치에 있는 동물은 아니다. 남영전 씨의 해석과는 달리 조선민족 상징계통에서의 토끼는 “속임수의 명수”, “꾀쟁이”이다. 인도불경설화의 영향으로 생긴 삼국시대의 “구토설화”에서 토끼는 꾀쟁이로 등장하여 조선조의 판소리계소설 『토끼전』에 이르기까지 토기형상은 “속임수의 명수”, “꾀쟁이”이로 일관하고 있다. 조선민족의 설화에서의 월궁에서 약방아를 찧는 토끼의 형상은 중국 仙話인 “姮娥奔月”의 양향으로 생겨난 것으로 사료된다.  한마디로 토끼를 조서민족의 토템으로 칠 수 없으므로 남영전 씨의 시 「토끼」는 “조선민족의 토템시”가 될 수 없다. ============ 17. “蟾蜍” 考 남영전 씨의 시「蟾蜍(두꺼비)」(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77-78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所受的蔑視都溶入眼珠 所受的虐待都滲溶進肌膚 千年萬年 被誤解了却沒有怨恨 遭呪罵了却沒有惱怒 以岸的寧靜水的淡漠 品味滄桑 品味滄桑 從不炫耀自己的智慧 從不聲張自己的豫知 育兒女于坎坷鑄煉風骨 敎子孫于逆境獻媚俗 若遇善良可憐的弱者 若遇解救自己的恩人 寧愿犧牲自身 也要鼎力相助 世世代代被扭曲 世世代代却執著 終于在生命的盡頭 馱回了一輪明月 渾濁的月 爲蟾蜍不止的淚 1999.9 두꺼비는 조선민족의 설화에서 은혜를 입으면 꼭 보답하는 의로운 동물형상으로 등장하고, 조선조의 우화소설 『두껍전』같은 데서는 가장 지혜로운 동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조선민족이 두꺼비를 토템으로 신앙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달 속에 두꺼비가 있다는 설은 중국의 대학자 계선림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인도에서 유래되여 중국에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조선에 전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조선민족의 토템신앙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 「蟾蜍」는 “조선민족의 토템시”가 될 수 없다. 18."犬"考 남영전 씨의 시「犬」(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73-74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人從樹上爬下來便與之爲伍 是獵者 是追捕禽獸的好幇手 是衛士 是守護主人的精靈 也曾有過舜位 也曾威風凜凜 有舜位 已成爲斑駁的化石 顯赫與榮耀 只在遺忘的史冊里 唯有褒貶交替的称謂 伴着歲月的尾巴 仍在搖擺 聖潔嗎? 隨地撒尿 隨地撒屎 有時還戱살鷄鴨鵝 餓急了 便將孩童的糞便當作美餐 時而聚群 狂叫亂走 攪得農家小院不寧 醜陋嗎? 從未有過分的奢求 從未嫌主人的貧寒 靈敏的嗅覺 警覺的耳朶 快捷的四肢 爲守家園盡責 爲護主人遠行 卽使主人舍棄了它 它却從不背叛主人 卽使死了 也不求有一塊安身之地 遠處又聞犬吠聲 人與犬又出現在地平線了 2002.7 본인은 한국 전남대에서 객원교수로 근무를 할 때 한국 “義犬설화”의 본고장인 전북 임실군에 가서 관광을 한 적도 있다. 개는 남영전 씨의 우의 시에서처럼 조선민족의 여러 가지 상징적의미를 갖고 있지만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 토템으로 신앙했다는 기록은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 「犬」을 “조선민족의 토템시”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2007년 9월 24일 연길에서 19. “豚” 考 남영전 씨의 시「豚(돼지)」(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75-76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有一双慧眼 哪兒風水好 哪兒是建城的好地方 蹄印停留處爲寶地 有一個善心 爲良緣搭橋 守護被遺棄的生靈 甘愿畿天不吃不睡 有一副雄建的體魄 踏荒山躍雪谷與山同樂 年年豊衣足食 因之也曾得到舜位 也曾名聲遠揚 自從被囚進圍欄 鎖住了智慧 鎖住了勤勞 一個勤勞智慧的精靈 有了醜陋的託號 而風雲沒能抹去 豚之古時的風采 豚之聚財的能力 當今流行的貯蓄箱 仍爲豚的便便大腹 一條剪不斷的臍帶 流溏着遠古洪荒的血液 1999.9 조선반도 북부, 특히는 함경북도 신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지들에서 돼지 陶俑들을 많이 발견하였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신석기시대로부터 돼지가 조선민족 선민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재산으로 되었음을 보여준다. 수렵단계에서 농업단계로 진입한 예족, 맥족과 읍루, 말갈 등 만퉁구스 민족의 선민들이 돼지를 중요시했음은 많은 사료와 고고학적발견에 의해 증명되었다. 조선민족은 지금도 큰 제사에서 돼지머리를 제물로 올리군 한다. 돼지는 조선민족의 신화전설, 민담에서 자주 등장하고 또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동물형상이다. 『三國史記』권13 高句麗本紀 琉璃王 조목에는 하늘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서 명당자리에 가서 누웠는데 그곳에 성을 세운 것이 바로 고구려의 환도산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三國史記』권16 高句麗本紀 山上王 조목에 따르면 돼지가 임금과 시골처녀사이의 좋은 인연을 맺게 하여 산상왕이 태여나게 하였다고 한다. 돼지에 대한 이런 신앙은 고려왕조에까지 이어져서 고려의 도읍지도 돼지가 잡아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남영전 씨는 바로 이런 역사기록에 의해 이 시를 창작한 것 같다. 조선민족의 고대사회에 있어서 돼지는 서양에서의 양과 비슷하게 천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이용되었으며 따라서 돼지는 신통력을 갖고 있는 신의 使者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돼지가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여 조선민족이 토템으로 숭배하였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다. 일반적으로 천신에게 재물로 바치는 犧牲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 까닭에 남영전 씨의 시 「豚」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로 인정하기 어렵다.  =========== 20. “燕子” 考 남영전 씨의 시「燕子(제비)」(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81-82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驚愕- 春風暖暖的麗日 一條貪婪的黑蟒 偸襲鼾睡的小兎 驚愕- 風雪咆哮的冬日 一對란生灰狼 爲爭一只死猫撕咬 撕咬得皮開育綻 撕咬得天昏地暗  驚愕- 春夏秋冬 一股黑潮般的瘟疫 總是悄悄漫延 漫延進山漫延進河 漫延進草原蔓漫進森林 只因驚愕 只栖止于樹梢于房지 只栖止于遠離毒菌的天空 日日啼叫 只因驚愕 從南到北從北到南 爲尋一片淨土 年年遷徙 遷徙 遷徙 遷徙了 幾百年幾千年了 也不愿落地 2002.5 제비는 많은 해충을 잡아먹는 익조이기에 농가에 들어와 둥지를 짓는 것을 말리지 않고, 제비도 그것을 알고 사람가까이 집짓기를 꺼리지 않는다. 이처럼 제비는 농경문화권, 특히는 도작문화권에서 사람들과 친근한 새이다. 중국 은나라의 시조 설의 모친 간적이 목욕을 하다가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그로 임신해서 설을 낳았다는 “玄鳥生商”의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민족의 설화나 소설에서 제비는 사람의 은혜에 보답하는 새로 등장하는데, 조선조 말기의 판소리계소설 『흥보전』에서 보배박씨를 물어왔다는 제비는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그러나 제비가 조선민족의 토템이였다는 증거는 없다.  21. “雄獅” 考 남영전 씨의 시「雄獅(사자)」(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23-24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茫茫草原上壹顆疾馳的太陽 草原暝暝 草原昏暗 草原于暝暝里沈睡 草原于昏暗里沈睡 億萬年往昔 惡魔于草叢里橫行 妖怪于湖泊里作蘖 雄獅之吼 雄獅振顫八方之吼 雄獅之鬣 雄獅鎏金之鬣 爲炸雷爲雪崩 爲旋轉的太陽 爲疾 的流星 令沈沈黑暗遠遁 令惡魔遠逃于海之盡頭 令妖怪難尋蔽身之所 草原明明 雄獅 漫舞于曠曠 漫舞于勃勃生機的草原 因之被尊爲百獸之王 因之被尊爲大德之大聖 因之被尊爲希冀之百使者 立于高高的橋頭 立于威嚴的石塔 守護永恒的光明 茫茫草原壹顆疾馳的太陽 1993.6 사자는 동북아에 없는 동물로서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파되면서 중국과 조선반도에 알려졌다. 주로는 호법 신장, 성전의 수호신으로 등장하였다. 조선민족의 민속예술에 사자춤이 등장한 것도 썩 뒤의 일이었다. 조선민족이 동북아세아의 중국 료동, 료서, 조선반도에서 살았던 원시시대나 노예제시기에 사자는 조선민족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자를 조선민족의 토템이라고 할 수 없다. 조선민족의 조상들이 본적도 없는 사자를 어떻게 토템으로 숭배한단 말인가?  22. “鯨” 考 남영전 씨의 시「鯨(고래)」(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47-48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背負大海 背負無際無涯之沈重 緩行 與人爲伍 與人親近 爲人鼎力相助 却遭人之嫉妬人之唾棄 携壹腔悲哀 隱居于大海 隱居于大海 慢慢타嚼苦澀 嚼億萬年之人情世故 讎恨愚昧 讎恨混沌 實在忍不住了 吐壹口長長之문氣 隱居于大海 不想與世有爭 將壹双靈敏之耳朶 扣進自身之肉里 勃發的四肢 退化爲鰭肢 然而巨大的心房 却鼓張得越來越大 成浮動之山 成飄移之島 時時過濾沈沈之暮色 期待着陽光 期待着光明 背負大海 背負無際無涯之沈重 隱居于大海 最凶恨的鯊魚 最凶猛的海豹 也從它臍下 慌慌張張 逃전 1999.5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고래를 보고 원시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자연신으로 숭배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고래를 조선반도 남해의 해변가 동굴 속의 암벽화에서 발견하기도 했지만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고래를 토템으로 숭배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 「鯨」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로 인정하기 어렵다.  23. "雲 ․ 風 ․ 雷 ․ 雨 ․ 火" 考 1990년대 초반기에 출간된 남영전 씨의 시집『백학』에서는 그래도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민속 등에서 자주 등장하고 또 토템으로 모셨을 가능성이 십분 많은 14개의 자연대상들만을 시적인 소재로 하였다면, 새천년에 들어서서 출간된 남영전 씨의 시집『圓融』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이 42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영전 씨의 시 「火(불)」,「雲(구름)」, 「風(바람)」,「雷(번개)」,「雨(비)」(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등 작품은 적지 않은 자연현상들마저 조선민족의 토템으로 인정하여 시로 창작하였다. 불, 구름, 바람, 번개, 비 같은 자연현상은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를 테면 단군신화에서 천제의 아들 환웅이 천상에서 땅우에 내릴 때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렸다고 한 것을 보면 고조선시대의 사람들은 바람, 비, 구름 같은 자연현상을 신격화하여 자연신으로 숭배하거나 신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 리치로 번개나 불 같은 자연현상도 인간들이 자연신으로 모시고 신앙했을 가능성이 십분 많다. 그러나 상술한 자연현상을 자연신으로 숭배했다는 증거는 있으나 토템신으로 신앙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火(불)」,「雲(구름)」, 「風(바람)」,「雷(번개)」,「雨(비)」를 “조선민족의 토템시”로 인정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24. “太陽” 考 남영전의 토템시 중에는 태양, 달, 별을 조선족의 토템으로 상정하여 창작한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시”들이 있다. 아래에 남영전 씨의 시「太陽」(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55-56쪽)을 옮겨 보기로 하자. 祖先的白色之門鑲在遙遠的太陽上 祖先的白色靈光 正悄悄捕捉黑色的鬼魅黑色的邪惡 祖先的白色溫馨 正緩緩融化重疊的雪山堆積的怨恨 祖先的白色慈祥 正輕輕撫마可愛的子孫寂寞的心靈 于是于曠野于莽林 冥冥里復蘇暈厥的精靈 冥冥里誕生吉祥的部落 祖先的白色靈光 來自祖先神秘的智慧 祖先的白色溫馨 來自祖先灼熱的胸膛 祖先的白色慈祥 來自祖先神聖的博愛 祖先每日勞作之後 傍晩返回家園 總有壹條貪婪的黑影偸偸尾隨 將祖先 白色的靈光 白色的溫馨 白色的慈祥 融進肌膚融進血液 融進精髓融進靈魂 着一身最美的潔白 是對祖先最虔誠的膜拜 盡管有過禁令 盡管有過挫折 連接祖先與子孫的白色之橋 總是熠熠生輝 祖先的白色之門鑲在遙遠的太陽上 那永不鎖閉的祖先之門 是子孫世代享不盡的福之源頭 1994.8 태양은 조선민족의 원시종교신앙계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연신이자 동시에 조상신이였다. 그러므로 태양을 조선민족의 토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민족의 개국신화에서 태양은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불덩이 형태가 아니라 알(卵)이나 일광(日光) 등으로 나타나며, 하느님(天帝) 또는 그 아들(天帝之子)이나 국조(國祖)을 의미한다. 조선민족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한 갈래라고 인정되고 있는 부여족의 해모수신화에서 해모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분명이 태양신의 형상을 갖고 있다, 하기에 해모수는 낮에는 인간 세상에 나와서 살고 저녁에는 천궁으로 돌아갔다. 이는 하루 동안의 태양의 운행을 상징한다.  고구려의 개국주인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로서 해빗의 작용으로 잉태를 하며, 낳았을 때는 태양의 모양을 닮아 알(卵)로 태여나며, 어른이 되어서는 서는 자신을 “태양의 아들(日之子)”라고 자칭하고 있다. 신라의 개국주인 박혁거세도 마찬가지로 태양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그는 하늘에서 전광(電光) 같은 태양빛이 비추는 곳에서 알로 태여나며, 赫居世라는 이름은 “빛과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삼국유사』에 수록된 “延烏郞과 細烏女”는 태양과 달의 精이다. 그리고 그 이름에 나타나는 까마귀 오(烏)는 태양의 사자인 三足烏인것이다. 태양은 조선민족의 원시종교신앙계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연신이자 동시에 조상신이였다. 그러므로 태양을 조선민족의 토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태양신은 조선민족의 왕권신화에서 많이 나타나는바 조선민족의 부족국가들인 부여국이나 고구려나 신라국의 토템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이상의 문헌적인 근거로 태양을 조선민족의 부족국가 창건단계에서의 단계에서의 토템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동시에 태양은 전 인류적인 원시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일본의 국조도 태양신이고 고대애급, 고대 인디안들의 국조도 태양과 깊은 련관을 지니고 있다. 태양숭배는 전 인류적인 원시신앙이었다. 25. “달” 考 남영전의 토템시 중에는 태양, 달, 별을 조선족의 토템으로 상정하여 창작한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시”들이 있다. 아래에 남영전 씨의 시「太陽」(남영전 『白鶴』, 민족출판사, 2003년, 15-17쪽)을 옮겨 보기로 하자. 박쥐의 날개에 은신했다가 바다건너 산넘어 저 멀리서 걸어옵니다 사푼사푼 걸어옵니다 얇은 베일 가리운 어여쁜 얼굴 어깨우에 출렁이는 부드러운 머리채 미소와 더불어 친철함과 더불어 은밀한 아지우에 아련한 마음 흔듭니다 세상만물이 무게를 잃습니다 희붐한 산그림잔 햇솜마냥 부풀고 퍼어런 바닷물결은 은실마냥 날립니다 말없는 울룽바위도 온몸으로 달콤한 달빛젖을 머금습니다. 원활함과 더불어 남몰래 남몰래 상상의 푸른 날개 펼쳐줍니다 살며시 비껴 내리는 달의 이슬 가벼이 떠오르는 달의 향연 보이잖는 이슬 만질수 없는 연기 심산유곡의 신비한 점괘이고 암시입니다 인간세상의 아득한 예시이고 계시입니다 몽롱함과 더불어 아리숭함과 더불어 우렷이 우렷이 심령이 포복하는 성결한 전당 쌓아줍니다 마음의 요람과 성황당의 대문에 달은 기울었다가 둥글고 둥글었다가 이지러져 둥그스름은 기울어지려 기울어짐은 둥글려고 둥글고 기울어짐은 영생에로 통하는 길 하여, 교교한 달밤- 아들낳이 원하는 아낙네들은 수집어도 우물가에 사뿐 사뿐 샘물도 살짝, 보름달도 살짝 고요한 잔디밭- 백의숙녀 둘레둘레 나리꽃 원무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설레이는 원은 하늘에서 내린 달 펄렁이는 사람은 하늘우의 선녀 풍요의 원리는 그래서 밀물이고 녀성의 원리는 그래서 륜회이고 생명의 원리는 그래서 지속됩니다 집요하고 지성어린 그 신앙 그 숙원 은은히 은은히 천지간에 흐릿한 환영으로 빛납니다 달춤판의 나리꽃 억만번 피고 지고 우물속의 보름달 억만번 마셨습니다 긴긴세월 달이되여 긴긴세월 맛보아도 련달린 넝쿨은 상기도 시나브로 달의 사닥다리 줄줄이 자랍니다 생명과 령혼의 문에 혼탁한 비방울 흩날리며 떨어집니다 떨어져 흩날립니다 달  영원한 달 마음의 신비와 환상의 몽롱을 영원히  영원히 길러주는 달입니다 1986.12-1987.5 조선민족의 巫俗에서 달은 천신이고 여성신이고 조상신이기도 하다. 태양과 숭배와 더불어 달숭배도 그 연원이 아주 길다. 그것은 달은 차서 기울고, 기울었다가 다시 차기에 “죽음과 재생”의 원형으로서 영생과 재생의 상징성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전 인류적인 원형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민족의 신화 “연오랑과 세오녀”에서 해와 달은 부부로 되어 있고, 조선민족의 구전동화 “해와 달”에서 해와 달은 오랍, 누이이다. 유교와 불교에서도 달의 이미지는 대단히 고결하다. 유교에서 달은 군자의덕을 상징하고 불교에서 달은 원융(圓融)자재한 불교적인 이념의 구현을 상징하므로 조선민족의 문화가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됨으로써 조선민족의 원초적인 신앙으로서의 달숭배는 더욱 고조되여 왔다. 동시에 달은 전 인류적인 원시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달숭배는 전 인류적인 원시신앙이었다. 이상의 문헌적인 근거로 달을 조선민족의 씨족단계나 부족국가 창건단계에서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 토템으로 숭배했을 가능성도 십분 많다고 사료된다. 그러나 달을 “조선민족의 토템”이라고는 할 수 없다.
1444    남영전 / 김관웅 댓글:  조회:4563  추천:1  2015-09-07
남영전 씨의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시”에 대한 문헌 및 고고학적 고증         /김관웅 1. 들어가는 말 “조선민족의 토템물”을 소재를 하여 쓴 시라야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민족의 토템”이 아닌 자연대상물을 소재로 하여 쓴 시는 토템시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42수의 이른바 “토템시”들에서 소재로 이용한 자연대상물이 “조선민족의 토템”이였는가를 문헌 및 고고학적으로 고증하여 그 진위를 밝혀내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다. 이는 남영전 씨의 토템시 연구에서 반드시 선행시켜야 할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조선민족의 선인(先人)들도 원시시대에 자연숭배, 자연신앙 그리고 그것과 련관되어 있는 많은 자연신을 신앙하여 왔으며 따라서 이런 자연신들속에는 많은 토템숭배나 토템신앙의 대상들인 토템신들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자연신들 속에서 토템신들을 가려낸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의 민간문학연구가이며 신화학자인 김렬규(金烈圭)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바 있다. “… 달리 또 계산(鷄神) ․ 웅신(熊神) ․ 용신(龍神) 등 동물신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신이 동물자체의 신격화인지 안면 동물의 수호령(守護靈)인지를 엄격히 가리기 힘들다. 혁거세신화의 천마(天馬) ․ 동명왕신화의 비둘기들은 이를 동물신에 준한 존재로 이해하여야 할 것 같다. 다만, 이들과 관련되여 많은 토테미즘의 논의가 있기는 하나, 워낙 토테미즘 개념이 환상적인 만큼 다양하다는 장벽이 있는 데다 그 가운데 어느 기준을 채용한다고 해도 연역의 필연성이나 귀납의 개연성이 인정될 만큼 주어진 기록들의 기술(記述)이 분명치 못하다는 장벽이 있어 토테미즘 논의는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 김열규 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위한 신화론-한 그루 우주나무와 신화』, 한국학술정보, 2003년, 135쪽) 한국 상고시대나 고대 사회에 있어서의 동물신을 위수로 한 수많은 자연신들 속에서 토템신만을 골라낸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명확한 기록이 있는 것들만을 먼저 골라내고 토템신이라는 명확한 기록이 없는 것들은 따로 분류함으로써 남영전 씨의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시”의 진면목을 밝혀보려고 한다.  남영전 씨의 42수의 “조선민족의 토템시”들에 대한 문헌 및 고고학적인 고증은 본인의 시야에 들어올 수 있는 문헌이나 고고학적인 재료에만 의존했음을 먼저 성명하며 남영전 씨, 박문희 씨, 한춘 씨를 포함한 많은 석학들의 기탄없는 반박, 비판, 지적과 보완을 모두 진심으로 환영한다.  2. 곰에 대한 고증 남영전 씨의 “조선민족의 토템시”에서 흔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곰」이다. 산악 같은 그림자를 끄을고 엉기정 엉기정 엉기정 가시넝쿨 우거진 심산밀림 지나 갈대버들 음침한 벌방늪을 지나 긴긴 세월 엉기정기 걸어오다가 컴컴하고 적막한 동굴 속엔 왜 들었수? 쓰고 떫은 약쑥 신물 나게 맛보고 맵고 알알한 마늘 몸서리나게 씹을제 별을 눈으로 달을 볼로 이슬을 피로 받아 아리땁고 날씬한 웅녀로 변해 이 세상 인간들의 시조모 되었니라 도도한 물줄기 현금삼아 틍기고 망망한 태백산 신방 삼아서 신단수 그늘 밑에 천신 모셔 합환하여 수림속, 들판, 해변가에서 오롱이 조롱이 아들딸 길렀네 사냥질, 고기잡이, 길쌈하면서 춤 절로 노래 절로 웃음도 절로 그때부터 세상은 일월처럼 환하고 금수강산 어디나 흥성했어라 끓는 피와 답즘을 젖으로 무던한 성미와 도량을 풍채로 끈질긴 의지와 강기를 뼈대로 날카론 발톱마다 도끼와 활촉 삼아 인간의 초행길 떳떳이 헤쳤나니 한숨도 구걸도 없이 길 아닌 길을 찾아 첩첩 천험도 꿰뚫어 나갔더라 해와 달을 휘여잡는 자유혼으로 신단수 아래서 장고소리 울리던 시조모 시조모여 엉기정 엉기정 엉기정 산악은 그림자 끄을고 태고의 전설 백의의 영혼을 더듬어 오늘도 내일도 엉기정 엉기정 엉기정 1987.4-5(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9-11쪽) 이 시에서 등장하는 “곰”이란 이 동물형상은 조선민족의 고전인 일연의 『삼국유사』중의 단군신화를 소재로 하여 창작했으며 ,곰은 분명히 고조선의 건국주인 단군의 생모로 등장하는바 고조선 부족과 혈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기록되였다. 고조선만이 아니라 고조선 문화의 창조주체로 추정되는 예족, 맥족과 친근한 관계를 갖고 있는 동북아세아 만퉁구스와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에서도 곰이 녀신으로, 조상신으로 신앙되였던 토테미즘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곰」을 토템시라고 하는 것은 증거가 있는 것이다. 다만 곰은 고조선 시대의 토템이었지만 그것이 민족토템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4340년 전의 고조선 시대에 조선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삼국시대 초까지 곰토템 숭배의 유풍(遺風)이 널리 이어지고 있었음은 백제초기의 상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금 충청남도에 있는 금강(錦江)과 공주(公州)는 각각 백제시대의 곰강(즉 熊川)과 곰나루(熊津)에서 유래했다. 곰나루은 지금도 지명이 남아있는데, “곰나루전설”에는 인간세상의 총각과 암콤과의 결혼이 그 기본 이야기줄거리로 되었으며, 이와 거의 같은 전설은 오른촌족 같은 만퉁구스 제민족의 민간문학에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충남부여 구아리에서 출토된 토제 곰도 역시 백제시대에 곰토템 숭배의 유풍이 잔존해 있었을 증명해준다. 이로부터 곰은 조선민족의 씨족, 부족, 부족국가 시대에서의 일부 씨족이나 부족들의 토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 「곰」은 토템을 소재로 한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민족의 문화에서 곰은 중국 한족의 문화에서 룡처럼 민족적인 토템으로 승화되어 지금까지 전해 전해지지는 못했다. 3. “神檀樹: 考 남영전 씨의 시 「신단수」((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6-8쪽)는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신단수를 소재로 하여 쓴 시다. 시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파아란 하늘 조각조각 받쳐들고 무연한 땅 갈래갈래 갈마쥐고 시베리아 마파람 휘감아 회오리칩니다. 회오리칩니다. 회오리칩니다.  천국의 사닥다리 지상의 푸른 기둥 대지의 배꼽과 북두성 이어놓고 해와 달을 간 아지에 꿰여 광막한 우주에서 지성을 깨칩니다 지혜를 부릅니다 먹장구름 몰아내고 덧쌓인 세상 먼지 가시며 땅속의 정기 하늘로 올려 회오리칩니다. 회오리칩니다 회오리칩니다 잎새마다 넓은 지역 가지마다 높은 공간 무연한 록음 뭉게뭉게 펼치면서 환생의 힘을 부릅니다 부활의 넋을 부릅니다 만물의 령험과 정수를 모아 세상의 패기와 의지를 모아 의젓하게 영준한 신으로 화해 아릿다운 웅녀와 인연 맺었습니다. 하여 무인지경에 밥 짓는 연기 오르고 명산대천에 노래가락 울렸습니다. 수렵하는 사나이들 직포하는 아기씨들 정 좋고 힘 좋고 섭리도 깨쳐 아늑한 인간 낙원 펼치였습니다. 신비론 신단수 천년간들 만년간들 칼바람에 찍히랴 불갈기에 먹히우랴 물사태에 쓰러지랴 눈보라에서 죽으랴 그 언제나 언제나 창천을 떠이고 대지를 거머쥐고 떳떳이  떳떳이 솟았습니다 1988.1 신단수는 기능주의 神話學의 리론으로 분석을 한다면 단군신화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천제(天梯) 구실을 하는데 신화학에서는 이를 우주나무(宇宙木)이라고 한다. 우주나무로서의 신단수는 솟아있는 상태는 형태상 지상에서 천성을 향해 높이 솟았기 때문에 지상의 온갖 소원을 천상의 신들에게 전하는 매개채로서 상징성을 지닌다. 단군신화에서 천제의 아들인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태백산 꼭대기의 신령스러운 박달나무 - 신단수를 타고 내린다. 여기서 신단수는 하늘신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리용하는 사닥다리나 통로(通路)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후세의 조선민속에서의 솟대나 만주족의 신간(神竿) 같은 것도 이러한 우주나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기에 신앙의 대상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토템으로 신앙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토템으로 숭배하지 않았다. 고조선인들이 곰도 토템으로 신단수도 토템으로 신앙했다는 증거는 더욱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단수를 자연신으로서의 수목신(樹木神)으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고조선의 토템신으로 인정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 4. “白鶴” 考  남영전 씨의 시 「백학」((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6-8쪽)은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부터도 작자의 중시정도를 알 수 있다. 시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얀 학의 깨끗한 얼이 백의넋입니다 백의넋 루루천만년 깊이 묻힌 피비림에 젖었습니다. 숨 막히는 질식속에 몸부림쳤습니다. 묵중한 층암밑에서 터져나왔습니다. 검은 삿갓 흰 두르마기 하야얀 명주  몽땅 태워 재로 남은 천지간의 희고 흰 결정체입니다. 백의넋 신단수 끝초리에서 너울거립니다. 신비로운 천국을 이어놓습니다. 야수가 덮쳐도 보라매 노려도 갈범이 포효해도 겁낼것 없어 너울너울합니다  깊은 골에 홍수 넘치고 적막한 광야에 가물이 타번져도 두렵지 않아 너울너울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오연히 고개를 들고 날아옙니다 영원히 구걸을 모르는 자유의 얼입니다 백학의 결백한 깃을 명주치마로 백학의 사품 치는 날음을 춤으로 백학의 굳센 날개를 뼈와 힘줄로 백학의 맑은 눈을 해와 달로 하늘 땅 사이 그 어디나 백의넋이 너울너울합니다.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지고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갑니다 백의넋 눈보라 몰아치는 허허벌판 꿰지릅니다 소나기 쏟아지는 만경창파 헤가릅니다 쇠붙이에 부싯돌 불꽃 일구고 관솔불에 그물질 별무리결던 시절 동족상쟁 죄과를 가시고 독수리발톱을 경계합니다 결백속에 붉은피 방울방울 백두의 빙설속에 스며도 목 놓아 울지 않습니다 돌틈에서 숲속에서 더더욱 많고 많은 백의 넋을 기르웁니다 백의넋 언제나 언제나 강자를 약자로 보고 약자를 강자로 봅니다 세월의 눈비에 덤불길 험하다한들 아슬한 산발 바다속에 잠긴다 한들 한번 메운 화살 또다시 살통에 걷어 넣지 않습니다. 창천이 부릅니다 강산이 부릅니 백의넋 백의넋 백의넋이여! 1987.4-5 백학은 승화, 초월, 창수의 상징으로서 조선민족을 비롯한 동양의 각 민족들 속에서 신성시되여 왔다. 흔히 백학을 호의현상(縞衣玄裳,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이라고 일컬으면서 흰색과 검은 색의 배합이 신선함과 고고(孤高)함을 상징하며 백의민족의 상징적 형상으로 내세우기에 아주 적합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민족의 선민들은 신라 국초에 신령스러운 닭을 신앙했듯이 각종 새를 좋아하여 새를 토템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십분 많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모인 류화 부인의 부리가 너무 길어서 세 번 칼로 잘라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전설로 보아서 류화 부인이 바로 학이나 두루미 같은 새가 아니였을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문헌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백학을 조선민족의 선인들이 토템으로 삼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의 시 「백학」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5. “사슴” 考  남영전 씨의 시「사슴」((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18-19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실안개 감도는 신비로운 천국에 울울창창한 인간세상 밀림에 오르내리고 넘나들어 첩첩림해속에 숨을 젠 빨간 산호 망망백설우에 달리젠 타는 인삼꽃 천국과 항간사이 림해와 백설 속에서 온순한 천사로 지치도록 지치도록 경건한 소망 기도 드리며 풍요한 푸르름 찾기도 하고 각축하는 신으로 날쌔게 달리여 사악한 도깨비 쫓아버리고 아늑한 락토도 이룩해간다 홍산호, 인삼꽃 추락하면 령험한 푸른 넋 받쳐올리고 재생하여 서리치는 위험을 떨친다 생명은 엉키여 가루가 되고 몸체가 찢기면 선혈로 적신다 때문에  그 발굽은 장업한 신당에서 춤추고 두 뿔은 호신칼로 억세게 솟고 울음은 축전의 창구소리 울린다 때문에 대붕의 날개, 신단수 가지와 함께 숭엄한 왕관에도 우거지고 장려한 전당에도 솟아오른다 때문에 움직이는 교량으로 신성한 비석으로 언제나 언제나 림해에 구름에 어둠속에 치솟고 신앙에 소망에 마음속에 깃든다 발자욱소리 오늘도 퐁퐁 뛰는 발자욱소리 깊이 잠든 심금을 울려주고 백두의 뭇별들을 밝힌다 하늘 가득 뭇별을 1987.4-5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이나 민속 등에서 사슴은 아주 중요한 상징적의미를 갖고 있는 동물형상으로서 증장한다. 이를테면 동명황 전설에서 흰 사슴은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우주동물로 상징되여 있다. 동명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나서 이웃나라인 비류국을 합병하려고 할 때 흰 사슴을 해원의 큰 나무에 거꾸로 달아매고 주문을 외우자, 사슴의 울음소리는 밤낮 길게 하늘에 메아리쳤고 결국은 하늘에서 큰비가 쏟아져 비류국이 삽시에 물바다가 되여 비류국은 동명왕에게 투항하게 된다. 오른촌전설에서 대흥안령 제일 높은 정상에서 사는 신령스러운 사슴의 뿔은 하늘까지 뻗어 올라가서 우주나무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데 천신들은 사슴의 뿔을 타고 지상에 내린다고 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신라의 왕관은 사슴의 뿔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이는 록각숭배와 더불어 왕권의 신성함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를 할 수 있다.  조선민족과 만-퉁구스 제민족의 문화상징 체계 속에서 사슴은 영생과 재생의 상징이기도 한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사슴을 대지의 동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사슴뿔은 나뭇가지의 모양을 하고 있고, 봄에 돋아나 자라면서 딱딱한 각질로 되었다가 이듬해 봄이면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뿔이 돋는다. 이러한 순환기능과 나뭇가지 같은 뿔을 머리에 돋게하여 카울수있는 능력을 지닌 동물은 사슴뿐이다. 따라서, 사슴은 대지의 동물로 여겼다고 할 수 있다.”(『한국문화상징사전』, 동서출판사, 1992년, 393쪽) 동서양의 신화를 막론하고 신화중의 가장 중요한 원형 중의 하나는 바로 “죽음과 재생(death and rebirth)"의 원형인데, 서양의 게르만인들이 이 원형을 토끼에게 기탁했다면 조선민족과 만 -퉁구스 여러 민족은 대지의 짐승인 사슴뿔에 부쳤던 것이다. 조선민족이 만-퉁구스 여러 민족과 깊은 문화적련관성이 있음을 감안할 때 사슴은 조선민족의 형성과정에서 어떤 씨족이나 부족의 토템이였을 가능성은 십분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존의 문헌으로는 사슴이 조선민족의 선인들의 토템이었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6. “白馬” 考 남영전 씨의 시「백마」((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18-19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뭉게뭉게 타래치는 매지구름 헤치며 아득한 창천에서 줄달음쳐 내린다 지축을 울리며 살같이 달려 눈부신 번개불 일으키고 황홀한 서기를 실어온다 칡넝쿨 엉킨 수림을 꿰질러 더물 우거진 들판을 달려 한낮의 불 먼지 털고 오밤의 흑장막 찢어 헤빛을 안고 달빛을 안고 발자욱 닿는 곳에 하얀빛 뿌려준 살같이 달려온다 하연 보슴털은 부드런 탄자 넓직한 등허린 편안한 안장 갈망과 숙원 싣고 지성과 신념 싣고 자유의 령지 향해 아름다운 산천과 리상의 언덕 향해 살같이 달려간다 끝없이 씽씽 네 먼저 내 먼저 나래쳐 가는 피로를 모르는 개척자 끓는 피 멎더라도 날개와 발굽 접을줄 모르고 비장한 운명의 호용소린 광막한 우주에 망망한 광야에 메아리친다 메아리친다 메아리친다 1980.1 조선민족의 신화나 전설에서 말은 제왕의 출현의 징표로서 신성시한 동물신으로서 숭배되였다. 이를테면 부여의 금와왕의 탄생담에서 해부루가 탄말이 곤연(鯤淵)에서 큰 돌을 보고 마주서서 눈물을 흘리므로 이상하게 생각한 해부루가 신하를 시켜서 그 돌을 굴리게 했다. 거기서 금와를 발견했다는 기록 역시 초자연적인 세계와 감응하여 제왕의 탄생을 알리는 말의 신성성을 말해 준다. 그리고 신라 벽화중의 천마는 하늘과 교통하는 신성한 령물이고 박혁세의 탄생담에도 나타나는데, 신라의 첫임금 박혁거세는 말이 전해준 알에서 태여난다. 하지만 한국 김렬규 교수의 말처럼 “혁거세신화의 천마(天馬) ․ 동명왕신화의 비둘기들은 이를 동물신에 준한 존재로 이해하여야 할 것 같으며”( 김열규 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위한 신화론-한 그루 우주나무와 신화』, 한국학술정보, 2003년, 135쪽) 신라인들의 토템이었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백마」역시 “조선민족의 토템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 7. “까마귀” 考 남영전 씨의 시「까마귀」((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37-38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날씬한 몸맵시 밤에다 맡겼습니다 어예쁜 옷차림 밤에다 맡겼습니다 구성진 목소리 밤에다 맡겼습니다 세인들의 경모와 찬탄을 죄다 밤에다 맡겼습니다 가장 잔혹하고 가장 무자비한 밤에다 맡겼습니다 하건만 눈물 없이 락심 없이 실망도 없이 밤을 꾸짖지 않습니다 가슴 아픈 시연과 문득 깨달음은 다만 반짝이는 눈동자가 되었습니다 경계하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침침한 밤 림해와 황야에 날아올라 사람 사는 마을가를 날아예며 이상스러운 징조를 우짖습니다 야수들의 주검을 우짖습니다 재앙을 물리치자 우짖습니다 소식을 전하느라 우짖습니다 숨은 사정 사라지면 곧 시름없이 나무우에 되돌아갑니다 욕하지 마시라 죽이지 마시라 그에게 높다란 막대기 세워주고 그에게 쌀알을 뿌려주고 그에게 마실 술 주고 그에게 고기를 주고 그에게 향불 올려 숭경하시라 그는 인축 위해 순시하는 신령입니다 그는 밤에 경보를 알려주는 신령입니다 1991.10 까마귀는 조선민족과 만 - 퉁구스 제민족의 민간문학이나 민속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령스러운 새이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해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삼족오(三足烏)가 아주 유명하다. 『삼국사기』에는 까마귀가 국가를 상징하는 대목이 있는데,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북부여와 한창 전쟁을 벌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날 북부여의 대소왕이 머리하나에 몸이 둘이 달린 붉은 까마귀를 얻었다. 이것은 본 북부여의 신하가 “까마뀌가 검은 색인데, 붉은 색으로 변하였고,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아것은 두 나라가 합병될 징조이므로 왕께서 고구려를 정복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이를 받아본 고구려왕은 오히려 기뻐했다. “검정색은 북방의 빛인데, 남방의 빛인 붉은색으로 되었다.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다”(『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여기사 붉은 까마귀는 곧 고구려를 상징한다.『삼국유사』에는 그 이름이 까마귀를 뜻하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부부의 신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까마귀와 태양숭배와 달숭배 사이의 깊은 련관성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신라의 사금갑(射琴匣)의 전설도 신(神)의 사자로서의 까마귀의 신령성 및 까마귀숭배의 신라민속을 잘 보여준다. 까마귀는 하늘과 땅, 땅과 저승 사이를 이어주는 사자의 역할을 하고 있고 우주조(宇宙鳥)라고 할 수 있다. 조선민족과 만족을 비롯한 만-퉁구스 제 민족들이 까마귀를 아주 중요한 자연신으로 숭배하거나 신앙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설사 이렇다고 하더라도 까마귀가 조선민족의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나 부락련맹의 토템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리고 더구나 까마귀가 “조선민족의 토템”으로 된 적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8. “범” 考 남영전 씨의 시「범」((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20-21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독버섯의 향취 매콤한 수림속 수리개의 피발톱 비릿한 청바위굽에 시퍼런 두 눈알 불여우 간교한 얼림수도 승냥이 어리석은 둔갑질도 속속히 조명하는 환한 대낮 캄캄한 오밤 속세의 음향 뚫어지게 통찰하고 불의와 사악을 원쑤로 분노하노라 고함치노라 너절하고 어리석음이 꼴사나와 뒤쫓노라 덮치노라 물어뜯노라 잔뼈 하나 남기잖고…… 선량한 은총을 베풀려 숲속에 숨고 동굴에 들기도 한다 탐욕스런 무리 쫓아버리고 경사로운 인연 맺어주고도 자취없이 소리도 없이 고요속에 묵묵히 산중으로 돌아간다 산속에서 산 지키고 산을 아끼는 산중지왕 산중신령 피와 살 풍우에 썩더라도 골격은 하냥 꿋꿋해 그 위풍 름름하고 그 기세 도도하다 독버섯의 향취 매콤한 수림속 수리개의 피발톱 비릿한 청바위굽에 범 범 범 새파란 한 쌍의 눈길이여. 범은 단군신화에서부터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등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형상이다. 단군신화의 범은 곰과 함께 사람이 되고자 원했으나 조급하여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를 부족 토템으로 보아 범 부족이 곰 부족에게 패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중국의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족은 범의 사당을 지어 범을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토템숭배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토템일 가능성은 십분 있다. 조선조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시기에 조선반도의 일부 지역들에서는 범을 산군(山君)이라고 하여 무당들이 도당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범숭배 신앙은 산악숭배사상과 융합되여 山神 또는 山神의 死者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반도 지방 도처에서 신봉하는 山神을 모신 산신당의 산신도(山神圖)에 나타나 있다. 한국의 여러 지방들에서 필자는 이런 산신도를 직접 산신당에서 본적 있다. 이와 같이 범은 조선민족의 신수(神獸)로 받들어진 것은 오래며 이런 범 신앙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를테면 1988년 24차 서울 올림픽 때 한국에서 상징물로 호돌이, 즉 새끼 범을 정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범은 조선민족의 선사시대에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 토템으로 숭배했을 가능성이 십분 많으나 후에 와서는 오래 동안 자연신, 즉 산신 혹의 산신의 사자로 신앙되었으나 결코 “조선민족의 토템”으로 승화된 적은 없다. 9. “장닭” 考 남영전 씨의 시「장닭」((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35-36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어미 품속 받아안은 소망에 스스로의 생의 목마름에 꽈악 닫힌 요람을 흐리터분 숨막힘을 단단하게 갇힘을 쪼아냅니다 자유의 꿈을 솟는 해 떠올리며 온세상을 흔들며 홰를 칩니다 귀신이 물러가는 때 밤의 장막을 제치는 때 부드러운 털 강포를 비웃고 눈부신 날개 몽매를 가시고 사나이 성미 나약함을 다잡아 볏의 불길 얼음도 녹이고 볏의 빛발 어둠도 밝히여 광막한 우주 소생합니다 왕성한 생명이 태여납니다 홰를 칩니다 힘찬 목으로 뜨거운 피로 우렁찬 목청으로 날마다 날마다 세세대대로 머얼리 아스라한 바다가에서 으슥하니 우거진 수림속에서 사람이 사는 곳 어디라없이 지지 않는 태양을 붉게 타는 태양을 머리 우에 떠이고 홰를 칩니다 어둠 빛이 가시지 않는 한 혼돈이 가시지 않는 한 쪼애냅시다 홰를 칩시다 1991.5 닭은 울음으로 새벽을 알리는 태양빛의 도래를 예고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닭은 태양의 새이다. 태양을 숭배하는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태양의 새 닭을 아주 중요한 자연신으로 숭배하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닭은 태양관련 상징성은 그 자체 속에 신성성을 함축시키고 있다. 그,리하야 닭은 신성한 새로 구체화 된다. 신리의 심알지도 닭이우는 수풀속에서 태여났다고 하닌 달과 련관되고 신라의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계룡(鷄龍) 낳았다고 하니 닭과 사람사이에는 혈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고대 신라인들의 원시적 신앙의 일단을 보아낼 수 있다. 그래서 신라는 숫제 계림(鷄林)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닭은 조선민족의 상고시대나 고대에 조선민족의 어느 씨족이나 부족의 토템이었을 가능성이 십분 많으나 민족적인 토템으로는 승화되지 못했다. 10. “황소” 考 남영전 씨의 시「황소」((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24-26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묵묵히, 묵묵히 걸어갑니다 솔 내음이 흐르는 공간에서 도두룩한 언덕뿐인 고장에서 그 맑은 눈동자 번쩍 뜬 순간부터 사색이 없어서랴 기개가 없어서랴 커다란 위속에다 온갖 어둠 삭이며 아스라이 머나먼 길 떠났습니다 하늘은 창창하고 물은 망망한데 그는 자그마한 섬의 밑받침 그는 이 땅이 뻗어가는 시조입니다 그의 흔들림은 땅의 진동이고 그의 숨결은 땅의 호흡입니다 그는 꿈에도 한사코 땅을 그립니다 물은 망망하고 땅은 광막한데 그는 쓸쓸한 황야의 희망이고 그는 희망이 무르익을 징조입니다 돌밭과 더불어 눈얼음과 더불어 가시밭과 더불어 진흙탕과 더불어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면서 움직이는 골짜기를 싣습니다 눈부신 빛발을 싣습니다 밤낮없이 언제나 가고갑니다 춘하추동 언제나 가고갑니다 가시길, 벼랑길도 아랑곳없이 운명의 파란곡절 탓함이 없이 풀포기만 있으면 씹어삼키며 그보다 더 큰 욕망 없답니다 하건만 겨레붙이 살해된 곳이면 피자국이 진작 들풀에 잠겼어도 눈에는 대뜸 피발이 서고 굽을 차며 사납게 영각합니다 분노한 웨침 격노한 웨침 구슬픈 심혼을 불쌍한 령혼을 다시금 불러 깨웁니다 묵묵히 묵묵히 걸어갑니다 넘어지지 않는한 숨이 붙어있는한 아스라이 머나먼 길 가고갑니다. “아버지 없어서는 살아도 소 없어서는 못 산다”는 속담처럼 농경사회에 일찍 진입했고 또 그것도 도작문화권에 속한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소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였다. 육축가운데서도 소는 조선족에게 있어서는 으뜸 가는 존재였다. 그래서 조선민족은 소를 생구(生口)라고 불렀고 실제로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소를 생구라 함은 그만큼 소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농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자, 재산의 중요한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가 조선민족의 생활에서 지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소를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문헌적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황소」를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없다. 11. “羊” 考 남영전 씨의 시「양」((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27-28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피여오른 향불연기 흰 구름의 정갈함 그리고 경건한 기도가 하아얗게 새하얗게 차림새와 마음으로 엉켰습니다 잡초가 광야에 우거직 돌부리 황산에 웅크려도 아득히 머나먼 하늘밖의 하늘에서 큼직한 곡식이삭 물어와 마른 땅에 싹이 터 푸르른 강이 되고 굶주린자 푸짐하게 밥사발을 들었건만 제만은 낟알과 인연이 없어 저물녘 풀들이 서식하는 그 곳에 저홀로 바장입니다 풍설은 드러난 등어리 후려치고 얼음은 떨리는 몸뚱이 묻으려는데 따스한 제몸의 털옷으로 차디찬 세상에다 봉헌해 헐벗은자 몸을 감쌀 옷이 생기고 체류자는 먼길 떠날 노래 생겨도 제만은 몸 둘 곳 찾지도 않고 차디찬 밤 별들이 사학하는 그 곳에 저홀로 사색합니다 줄 정은 죄다 주었건만 봉헌할건 죄다 바쳤건만 마감에는  사람들의 혼암한 죄 대신해 사람들의 불선한 악 대신해 쫓겨갑니다 황막한 들판으로 눈 쌓인 골짜기로 더더욱 위엄스런 제단 앞에 죽음을 당합니다 기도하는 아침녘에 죽음을 당합니다 양, 양, 양 하아얀 차림새와 마음으로 구슬프게 웁니다. 양은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에 별로 등장하지 않는 형상이다. 그것은 아마도 조선민족의 문화가 양을 치는 유목문화와는 별로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는 유목문화와 많은 련관성을 가진 서양문화권의 상징계통에서 양이 차지하는 비중과는 아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기독교문화에서 그리스도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이 목자가 돌보는 양떼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양」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없다.
1443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댓글:  조회:4059  추천:0  2015-09-07
―토템시 창작을 시도한 동기            /남영전 1. 토템은 우리 민족 영혼의 뿌리 1971년 23세 때, 한문시로 중국문단에 데뷔한 후 지방지로부터 중앙지에 이르기까지의 청탁원고를 부지런히 써내는 행운이 있었으나 8년이란 이 시기의 글들은 뿌리없이 허공에 떠도는 구름이란것을 후에 깨달았다. 80년대를 한 해 앞두고 꿈에서 깨여난 나는 진정한 시의 의미를 찾는 탐구의 길에 올랐다. 한수의 시를 위해 늘 비지땀을 흘린 보상인지 나의 시「할머니」와 첫시집 『상사집』은 선후로 전국문학상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에 대한 탐구는 이것으로 만족할수는 없었다. 80년대 중반 내가 또 새로운 출발을 시도할 무렵, 중국시단으로부터 나의 부러움을 자아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뿌리를 찾는 열, 그중 토템신화를 문화적으로 다룬 시가 밤하늘의 왕별마냥 나의 이목을 끌었다. 따져보면, 민족은 사실상 문화로 구별된다. 민족문화심리를 깊이 파고들면 토템신화를 론의하지 않을수 없다. 토템신화는 여러 가지 소박한 원시적 관념이 침전되고 응결된 민족문화심리의 심층구성의 원시적 축적층이다. 여기서 민족령혼의 본원이 있으며 근원이 있으며 인간성의 본연이 있다는것은 학자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때문에 20세기는 다른 위대한 발견과 함께 신화의 의미를 발견한 시대로 주목되기도 한다. 형제민족 시인들의 선지선각이 나에게 준 큰 충격이였다. 우리도 뒤떨어져서는 안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나를 신비의 세계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2. 우리 민족도 토템들이 적지 않다 예전에 나는 줄곧 한개 민족은 하나의 토템만 가진것으로 여겼다. 염황후손으로 자칭하는 한족은 룡을 토템으로, 단군을 모시는 우리 민족은 곰할머니를 토템으로 숭배한다는것만 알고있었다. 토템에 대한 나의 천박한 지식은 학문에 대한 나의 수양도 문제가 되지만 실상 이 면에 관심을 갖고 유관자료를 찾을래야 찾을 길이 없었던것이 국한성이기도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이 개방정책을 실행하면서 서방철학가 사르트르, 레위스트로스, 프로이드, 도그라스, 풀레이세 등의 토템연구성과가 중국학자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였던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80년대 심지어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중국학자들이 펴낸 토템연구 저서들은 퍽이나 어설프고 미숙하였지만 그래도 그들의 연구성과를 참조하여 우리 민족의 토템물을 찾는데는 큰 도움이 되였다. 안타까웠던것은 그때도 그랬거니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토템저서는 공백이란 점이다. 어쨌든 우리 민족의 토템을 찾는것은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는 중요한 일이였기에 나는 소수민족의 토템, 그리고 세계 여러 민족의 토템물을 돌아보면서 우리 민족 시조탄생신화에서 우리 민족의 토템을 하나하나 찾아내였다. 지금에 와서 중국 권위학자들의 심도있는 토템연구저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찾아낸 우리 민족의 토템이 틀리지 않았다는것이 립증되여 마음이 놓인다. 1996년에 발행된 중국의 권위학자 리병해박사의 고대부족문화연구 저서에서는 부여족의 후예인 고구려 시조 주몽의 탄생 신화를 론하면서 고구려는 태초에 새토템, 태양토템으로부터 후에 또 닭, 양, 소, 말 등 육축토템까지 분화되였다고 자상하게 서술하였다. 오직 원시인들의 원초적인 사유방식에 준하여 조상들의 탄생이 천체, 동물, 식물과의 혈연관계, 친족관계가 밝혀진다면 우리는 곧 토템을 찾은것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하늘신을 상징, 아름다운 녀인이 된 웅녀, 단군왕검의 출생과 관계가 있는 신단수, 신라시조신화에서 박혁거세를 탄생시킨 백마, 왕비 알영을 낳은 계룡 또한 사소왕녀가 박혁거세와 알영을 탄생할 때 큰 도움을 주었던 솔개, 신라 석탈해와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까치, 미추왕의 조상 김알지의 탄생과 관계가 있는 닭, 고려시조전설에서 왕건의 조상 호경을 구해준 호랑이, 호경산신의 아들 강충, 강충의 증손자 작제건의 안해는 룡왕의 딸 룡녀, 아달라왕 때 영호랑과 오세녀부부는 해와 달의 정(精)인 일월신…. 신비한 신화의 표현을 보면 우리의 조상은 하늘이 내려주었고 생명, 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연과의 조화로 탄생하였으며 형형색색의 다종다양한 생명형식을 소통하여 모든 생명형식이 서로 친족관계가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우리 민족도 족조발상신화가 풍부한 민족이며 씨족이나 부족의 토템 또한 다종다양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3. 토템은 과거뿐이 아닌 오늘과 미래 현대에 와서 많은 철학대가들이 토템에 관심을 돌리는것은 토템이 현실사회와 미래지향성에 자못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있기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정신분석을 통해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지울수 없는 옛날 토템의 력사흔적이 남아있다고 하였고, 레위스트로스는 가장 현대적인 과학정신조차 토템식 원시적 사유원칙을 “합법화하고 또 그 권력을 회복”하는데 유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 4월 15일에 세상을 고별한 사르트르는 림종 직전에 이란 문장으로 상고시대의 토템관념을 극찬하면서 토템식 형제관계의 관념으로 현실을 재조명하여 현대인의 생활의 새로운 질서를 재건함으로써 “매개인이 모두 사람이 되게”하는 목표에 이르기를 갈망하였다. 대가들의 연구성과는 나로 하여금 토템신화는 그저 꾸며낸 허황한 이야기라는 무지몽매에서 뛰쳐나오게 하였으며 이것이야말로 과학이나 력사가 제시 못하는 사실 즉 가장 근원적인 진실이라는것을 알았으며 토템숭배가 형성한 민족문화원형이 민족문화의 력사적 발전에서 일으키는 영구한 의의를 보았고 민족문화심리의 심층구조로서의 원시적 침적층이 현대문명건설에서 일으키는 활성과 자양분 역할을 보았다. 그래서 내가 토템신화를 시에 도입한것은 토템의 영원한 가치원소를 환기하여 초기 인간의 아름다움과 착함에 대한 관념을 현실에 융합시키며 토템숭배의 풍만한 생명력이 현실적의의를 가지게 함으로써 잃어버린것을 다시 회복시키고 다시 주조하여 민족문화정신의 성장과 발전을 추진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토템시를 통해 우선 내가 찬미하고 싶었던것은 천인합일체(天人合一體)인 우리 조상의 숭고한 품성과 정신이다. 긴긴 세월 엉기엉기 걸어오다가 / 컴컴하고 적막한 동굴 속엔 왜 들었누? / 쓰고 떫은 약쑥 신물나게 맛보고 / 맵고 알알한 마늘 몸서리나게 씹을제 / 별을 눈으로 / 달을 불로 / 이슬을 피로 받아 / 아릿답고 날씬한 웅녀로 변해 / 이 세상인간들의 시조모 되였느니라 …… 끓는 피와 담즙을 젖으로 / 무던한 성미와 도량을 풍채로 / 끈질긴 의지와 강기를 뼈대로 / 날카론 발톱마저 도끼와 활촉 삼아 / 한숨도 구걸도 없이 / 길 아닌 길을 찾아 / 첩첩 천험도 꿰뚫고 나갔더라 「곰」에서 의식적인 생명진화과정, 민족의 영광스런 생명의 해돋이 그리고 그 심리, 성격, 령혼의 발생을 통해 우리 민족은 덕성과 심신의 수련을 거쳐 순결하고 선량하고 수양 있는 민족, 하늘의 뭇별을 한눈에 받아들이고 마음에 우주를 품어 안는 흉금이 드넓은 민족, 천성적으로 진보와 정복을 추구할 뿐더러 완강하고 견인하고 백절불굴의 의지를 지닌 민족이라는 것을 현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민족토템관념의 원천에서 현실과 연결고리를 찾아 옛날, 오늘, 미래를 다채로운 인생화폭에 조화롭게 응결시켜 인간의 본성이란 높이에서 민족의 넋을 다시 주조하고 새 우주를 이룩하는데 모를 박았다. 첫째, 도덕가치에 대한 토템묘사에서 착함을 구가하여 순결하고 선량한 인간성의 본연을 환기. 지금의 인류사회는 과학기술이 날로 발전하지만 사람들의 도덕은 날로 쇠퇴하여 사람들이 갈수록 자아를 상실하고있는 현실이 심각하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가치 있는 전통적 도덕관념을 제창하지 않을수 없다. 한 것은 이런 전통관념은 자체의 영구한 생명력으로 자연스럽게 현대화 미래에로 진입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있기때문이다. 바로 이런 리해에 근거하여 나는 토템숭배에서 인성의 본연을 끄집어내여 도덕적 진리에로 나아가는 언어로 승화시켰다. 침묵해야 할데는 침묵하고 참고 견디여야 할데는 참고 견디는〈흙〉, 화를 받고 오해를 받으면서도 선행에 집착하는 〈까마귀〉, 인간의 평화와 복지를 영위하기 위한 존재인 〈범〉, 집안 사람까지 다투지 말라는〈뻐꾹새〉 등은 모두 깨우침의 상징이다. 둘째, 륜리환경에 대한 조명으로 토템묘사에서 생명의 경난과 고통을 묘사하여 정의와 동정과 우애와 호조의 정신을 환기. 오늘날 사람들에게 결여한 것은 바로 민족 유년기시기의 박애와 정과 호조정신이다. 우리는 물론 인간세상에는 아직도 진정이 있다고 말할수 있으나 민족의 유년기에 비하면 그 말은 반디불을 밝은 달에 비기는데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토템묘사로 심령의 량지(良知)를 부르고 정의와 동정을 부르고 화목과 온기를 불렀다. 〈인간〉에 대한 〈힘껏 도움〉이 오히려 〈인간〉의 질투와 배척을 당하고 인애(仁愛)와 선량은 도리어 랭혹과 증오를 초래한 〈고래〉, 괴로움도 쓰라림도 답답함도 속시원히 터놓을 곳 없는 〈거북〉, 인간세상의 〈가장 잔혹한 무게〉,〈가장 잔인한 질식〉에 매몰되여 눈과 입이 봉해진 〈개구리〉는 우리에게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상징물이고 〈산〉은 인간세상에서 소외되고 배척받았으나 자신의 힘으로 환경을 개변하고 화목과 온기를 창조하는 덕행 높은 형상이다. 셋째, 인생의 의의에 대한 사고로 토템묘사에서 사심 없는 헌신정신을 찬송하여 인간활동의 진실한 가치를 환기. 도덕관념의 위기는 필연코 가치판단과 가치선택의 오류를 가져오게 되여 인간의 정신적 결함과 실책을 조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이화〉하는 환경을 창조해 낼수 있다면 이런 환경을 성공적으로 개조할수도 있어 이화현상을 제지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관념과 신념으로 나는 인생의 가치방향과 가치원칙을 내세워 인간의 진실한 가치를 가송하고 인생의 진정한 의의를 웨쳤다. 꾸준하게 일하고 사심 없이 봉헌하는 〈황소〉, 생명이 훼멸될 위험이 기다려도 격정 가득히 정의를 위해 주저 없이 앞으로 달리는〈사슴〉, 굶주림과 추위는 자기에게 남겨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는〈양〉은 봉헌정신의 상징이다. 넷째, 민족과 인류의 희망에 대한 열렬한 추구로 토템묘사에서 원시적 력도감을 전시하여 창업의 원대한 포부, 격정, 힘을 환기. 토템숭배의 중요한 가치의 하나가 바로 작렬하는 격정, 놀라운 용감성, 무비의 견인성, 두려움 없는 모험성, 빼여난 상상력과 암흑을 물리치는 광명의 수호신이자 희망의 사신인 〈사자〉, 리상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백마〉, 목표를 향해 번개나 우뢰와 같이 돌진하는〈솔개〉등은 모두 미래를 향한 상징물이다. 둔재인 내가 분에 넘치는 일을 시도한 탓으로 12, 3년이란 시간을 거쳐서야 비로소 31수의 토템시를 세상에 내놓았다. 문단의 인정으로 수확의 기쁨도 있지만 채 못 완성한 토템시 때문에 줄곧 골머리를 짜고있는것이 또한 나의 사정이기도 하다. 1999년 4월 18일 장춘에서
1442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위상(자료) 댓글:  조회:5071  추천:0  2015-09-07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위상         /들우물  ◈ 이 글은 2000년 5월 26일, 중국 연길시 대우호텔에서 가졌던 문학세미나  주제 발표문이다.   1. 들어가는 말  솔직히 말해, 나는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위상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한국 문단사회에서야 문단데뷰 이래 현재까지 15년 동안 시 창작과 문학평론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그동안 중국 조선족 시문학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거나 어떤 구체적인 연구 노력을 기울여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찌기, 한국의 여러 문학 단체에서 주관하는 문학행사를 통해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여러 차례 주어졌었지만 그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격을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해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난 1998년 2월부로 격월간 문학 종합지 「동방문학」을 창간, 발행해 오면서 중국 조선족 문학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던 중 한춘․장지민․장정일․정세봉․석화 씨 등 몇몇 문학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허련순․류순호 씨 외 몇몇 시인․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작은 만남이 계기가 되어 문학 세미나를 함께 하는, 적극적인 문학 교류 차원의 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또 동족의 일원으로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동시에 동포로서의 이해와 사랑을 전제로 하는 화합과 대동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희망도 갖게 되었다.  특히, 중국 조선족 시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약 3개월 동안에 걸쳐 월간 「연변문학」 11권(1999년 1월호부터 11월호까지)과 대표시인선집인 듯한 합동시집의 일부(21명의 110편), 그리고 격월간 「장백산」 1권(1999년 2월호)과 개인 시집 등을 통하여 전체 73명의 시인 작품 580여 편1) 정도를 정독했다는 사실이 그나마 이 글을 쓰는 데에 용기가 되어 주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 조국광복(1945. 8. 15) 전에 태어난 시인군  우리 한민족(韓民族)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곧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기(1910~1945)일 것이다. 이 시기를 청․장년기로 살던 우리 선대(先代)가 가장 고생을 많이 했을 터이고, 그 다음이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슴 속에 ꡐ바위ꡑ(리 욱, 1935년 작) 같은 응어리를 품고 살았으며, 동시에 새로운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을 안고 조국을 떠나 멀리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로 유랑하여 정착하기까지 갖은 고초를 겪었으리라.  굶주린 창자  헐벗은 알몸들  지금 엄동설한 이 삼경에  누구의 집 모퉁이에서 지낼가  없나?  누가 그들에게  따스한 물 한모금  김나는 밥 한숟갈  그들에게 줄 사람  없는가, 없는가……  모대기다 못해  급기야 기한에 지는  한 맺힌 이슬  누구 탓일가?  누구 탓일가?  이 밤이  왜 이다지 찰고?  아,  왜 이다지 찰고……  ■ 설인의 작품 「한야에」 전문, 1940년 작  오늘도 끝없이  울부짖는 소리 들었나니  언제나  가시 덤불속에서  아득한 지평선 너머의  아름다운 신화를 찾는  순례자의 발끝에  피방울이 맺힌  서글픈 소식  ■ 설인의 작품 「소식」 전문, 1942년 작  먼 지평선에 가뭇없이 사라진  두가닥 수레길은  벌겋게 입을 벌린  황야의 어두운 추억  젊음이 주름살에 옥매인  홀로 난 어머니의  기박한 운명을 끌고 가던  달구지의 그 삐걱소리  울어서 실성하던 산  얼어서 그만 굳어진 하늘  내 더벅머리우에 떨어지던  오, 불쌍한 어머니의 눈물……  세월은 가고  겨울뒤끝에 봄은 오고  벌판 저 끝 어딘가서  생명의 파란 곡선이  수레길을 지우며 조용히 오건만  내 서러운 가슴속에  멀리 뻗어간 두가닥 수레길엔  달구지의 그 삐걱소리  오늘도 깊이깊이 패여온다.  ■ 임효원의 작품 「황야의 추억」 전문  앞의 두 편은 1940년과 1942년에 창작된 설인의 작품이다. 일본인들의 칼날(가시덤불)과 가난을 피해 살고 싶어도(아름다운 신화를 찾는) 살 수 없었던 절망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시적화자(話者)는 같은 상황에 있지는 않지만 당시 우리 선대(先代)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비유적인 표현으로 고발하고 있다.  뒤의 작품은 임효원의 「황야의 추억」 전문으로 시적화자인 ꡐ내ꡑ가 어머니와 함께 꿈(봄)을 찾아 달구지를 끌고 어디론가 가야했던, 어린 시절의 눈물어린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나보다도 어머니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는데, ꡐ어머니의 기구한 운명ꡑ이란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는 역시 배고픔과 추위이지만 그 진실은 ꡐ황야의 어두움ꡑ과 ꡐ내 서러운 가슴 속ꡑ에 숨어 있다.  위에 거명한 시인들은 1907년으로부터 1944년도 사이에 중국․한국․일본․러시아 등에서 태어나 중국 대륙에 정착한 세대로, 일제 강점기를 유아기로만, 혹은 아동기까지, 혹은 청소년기까지, 혹은 청년기까지 보내야 했던 세대다. 따라서 이들의 부모세대보다는 고생을 덜했다고 판단되지만 역시 당대의 가난과 문화 풍속이 다른 중국이라는 나라의 낯선 사회제도에 의해 양육되고, 적응해야 했던 시련과 고통을 감당해내야만 했으리라.  그러나, 조국이 해방되고 나서 50년이란 긴 세월이 이미 흘렀고, 중국을 구성하는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아 오면서 이들은 과거의 아픈 역사에 집착할 수만도 없었다. 가난과 적응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고, 미래 사회에 대한 꿈을 또한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ꡐ새 화원ꡑ(리 욱, 1940년 작)에 꽃씨를 뿌려야 했고, 땅속 깊이 뿌리박은 ꡐ질경이ꡑ(임효원, 1956년 작)처럼 억세게, 그리고 무성하게 자라나야 했다. 그러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는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이 터지고, 자의든 타의든 전쟁터에 나아가 싸워야 했다.(김철의 「통행금지」, 「생의 노래」 등) 그리고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그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죽어야 했던가를 뼈 아프게 반성하면서(임효원의 「아, 민들레……」, 1979년 작) 남북이 분단된 채 오늘날까지도 적대시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김철의 「동강난 지도 앞에서」 1989년 작) 또 그러면서 역사의식이 싹트게 되었으리라.(설인의 「호태왕비」 1995년 작)  이들은, 줄곧 80년대 중후반까지 북한과 교류하면서 우리 말과 우리 글로 문학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한족(漢族)의 문화로 흡수되지 않고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정체성이 강한 자치주를 형성해 올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중국과 한국의 수교로 오늘날은 남한의 문학인들과 교류를 보다 왕성히 하면서 어느 정도는 남과 북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 자신의 뿌리도 의식하게 되면서 비로소 마음 속의 고향인 조국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한민족의 대동단결과 화합을,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고 모색하는 새로운 바람이 일기도 했다.  오, 고향의 언덕 마음의 탑아  너는 말없이 내 가슴에 솟아있고  나는 네 혈관을 흐르는 한방울 피  너로 하여 내 가슴은 언제나 끓고 있다.  ■ 김성휘의 작품 「고향의 언덕 마음의 탑」 제11연  고향이 고향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그런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하고 나의 어머니를 있게 했던 우리의 뿌리로서의 고향이다.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선대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살던 곳, 바로 내 마음 속에나 있는 고향이고, 내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은 생명 그 자체로서의 고향이다.  병든 마음  무서운 설음  바람에 덜라  들국화 곱게 웃는  저 벌로 산으로  해의 문안을 가자  남에서 북으로  서에서 동으로  거침없이 부는 바람  가시를 뽑으며  가슴을 헤치고  바람타고 가자  바람타고 오자  동서남북 하나로 일어나  백두의 존엄을 안고  동해의 기량을 보이며  갈매기도 가자  수리개도 가자  두 날개 한 몸뚱이  흰옷 입은 사람아  떳떳이 떳떳이  하나로 가자.  ■ 김성휘의 작품 「하나로 가자」 전문  우리는 비록 남북이 갈라져 있고, 또 중국에, 일본에, 러시아에, 저 남미에,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지만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서 똘똘 뭉쳐 하나로, 당당하게 살자는 것이다.  조국이란  내 잠들었을 때에도  후둑후둑 뛰는 내 심방 가까이에 앉아  맥박을 세여보는 보모입니다.  ■ 김성휘의 작품 「조국, 나의 영원한 보모」 제1연  이처럼 ꡐ고향ꡑ에 대해 눈을 뜸으로써, 바꿔 말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 의식하면서 ꡐ조국ꡑ이 나를 키워주고, 지켜주는 보모로서 다가오는 것이리라. 허룡구의 「먼동」, 리임원의 「동해바다」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물론, 같은 세대라 해서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주의․주장이 다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이들 가운데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느끼는 생활정서를 중심으로 노래하는 시인들(강효삼․김문회․한춘)도 있고, 자연적 요소나 현상을 통해서 인간 삶의 지혜나 진리 혹은 아름다움을 유추해 내는 시인들(김응준․리삼월․리상각)도 있다. 또한 인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노래하는 시인(김태갑)도 있고, ꡐ대중적 정서ꡑ 읽기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시인(석화)도 있고, 대자연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김경석)도 있고, 인간 존재나 현실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보이되 사유세계 속의 주관적 언어표현을 즐기는(?) 시인(박화․한춘)들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3. 조국광복 후에 태어난 시인군  1945년 이후에 출생한 세대는 그 앞 세대보다는 고생을 덜했음에 틀림없다.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크게 방황하지도 않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직접적인 압제와 수탈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생이 있었다면, 5, 6, 70년대의 가난과 중국내 정치 사상적 변화와 함께 ꡐ적응ꡑ해야 했던 시행착오와 그 시련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80년대 전까지 비교적 제한된 국가들과만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과 허탈감을 크게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환경상의 여건 때문인지 조선족 시인들은 자국내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을 소재로 취하여 시를 쓰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앞 세대들이 가졌던 역사나 뿌리 의식이 또한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일상 생활속에서 부딪치고 경험해야 하는 데에서 갖게 되는 개인의 솔직한 느낌이나 감정, 생각이나 사상 등을 드러내는 시들이 흔치 않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 문제를 비판하거나 간접적으로 풍자하는 작품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한소리의 「고무풍선」 「자멸」 「방황」이라든가, 리송주의 「멀고도 가까운 별」이라든가, 전홍일의 「온실효과」 「참새들」 「시골의 설」 등은 그 내용과 표현 방법면에서 미숙하긴 하나 사회비판의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개는 천편 일률적으로 자연현상이나 그 구성물에 대한 외양묘사나 감정이법으로 사회적 목적성을 띠는 객관화된 인간 삶의 유형을 환기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시인들이 점점 솔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를 쓰는 근본 목적과 관련된 문제인데, 이해하기 쉽게 빗대어 말하면, 지금 붓나무를 소재로 시를 쓴다 할 때 붓나무의 모양새나 빛깔 그 밖에 생태학적 특징 등을 중심으로 묘사하기 마련인데, 이 때 붓나무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어떤 특성 자체를 들어낼 목적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라면 ꡐ식물학ꡑ이라는 과학에서나 해야 할 일이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시를 쓰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끌어들여진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 시들이 대체로 어떤 대상 자체를 표현 목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면 오늘날의 시들은 그 대상들을 통해서 다름아닌 시인 자신의 주관적 정서를 드러내고, 또 그럼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적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속으로 끌어들여지는 다양한 대상들은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잠시 빌려 쓰이는 것인데, 이런 현상이 ­바꿔 말해, 시를 쓰는 근본 목적이 어떤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위한다는 시각과 태도 변화가­ 6, 70년대 출생한 김경희․허련화․리해룡․김충 등 적지 아니한 젊은 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일광산 봄 푸를 때  강건너 높은 산 불타오르데  두만강 물에 나래 적셔  저 불 사그릴  큰 새는 없는가?  내 사랑 토끼와 사슴들이여  내 마음 무성한 숲에 몸을 숨겨라  아, 진달래 스러진 산  산은 타도 여름은 오려나  끌 수 없다면  차라리 불산이 되거라  저 불길 어느새 옮았는가  나도 뜨겁게 불타고 있네  ■ 허련화의 작품 「산불」 전문  위 작품에서, 강건너 높은 산이 불타오른다는 말이 진달래 꽃이 만발하여 이루어진 붉은 물결을 빗댄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봄에 산불이 난 것인지 모호하게 표현되고 있다. 물론, 시제와 앞뒤 문맥상으로는 후자일 것이라는 판단이 앞서지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산불을 소재로 하여 시를 썼지만 결국은 시적 화자인 시인 자신의 몸속에서 일고 있는 불, 곧 넓은 의미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체내의 생화학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애욕인지 아니면 어떤 목표 달성에 대한 의욕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이처럼, 산불이라는 자연현상이 시적 표현의 대상이 되더라도 그것은 결국 시인 자신을 드러내는 종속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시작(詩作)에 있어 그만큼 시인 자신 곧 인간을 우선시 여긴다는 증거다. 바꿔 말해, 대상을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시인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을 위해 쓴다는 사실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시인들의 시적 관심이 인간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겠다. 또 그것은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적 여건의 변화, 곧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환경의 변화와 함께 시인의 관심․미의식․언어 등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 다른 하나의 희망은, 다양한 형식 실험과 함께 다양한 주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시가 꼭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묘사하고, 또 그것과 관련해서 시인이 갖는 감정과 사상을 정서적이고 음악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다양하게 바뀔 뿐 아니라 그것을 담아내는 방식 또한 여러가지 형태로 시도되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해, 달, 흙, 곰 등과 같이 대자연을 구성하는 대상들이 저마다 정령을 가지고 있고, 그들간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호흡함으로써 생명현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물활론적(物活論的) 사고를 바탕으로 해서 시를 쓰고 있는 남영전의 ꡐ토템ꡑ시라든가, 다양한 꽃들의 모양과 빛깔과 생태학적 특징들과 관련하여 인간의 삶이나 존재를 유추해 내는 리해룡의 꽃 연작시라든가,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특정 이야기를 구성해 냄으로써 시에 재미라는 기능을 배가시키고 있는 김성우의 산문시라든가, 일상생활 속에서 직간접으로 경험하는, 또는 의식되는 사유세계의 단편들을 그대로 진술하는 박화의 모더니티 등이 그것이다.  물론, 세계의 시가 실험, 실습되고 있는 한국 현대시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고려한다면 미미하기 짝이 없지만 이런 실험적인 노력이 진지하게 지속되는 과정에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이 좀더 다양하고 좀더 풍성하게 발전해 나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4. 나오는 말  90여 명 내외가 되는 중국 조선족 시인들 가운데에서 일부 시인의 일부 작품을 읽고 시문학의 위상이나 그 성격을 운운하는 것은 극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인이란 개인의 사사로운 느낌이나 감정, 생각이나 사상 등을 정서적이고 함축적이고 음악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한다 해서 모두가 시인인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그저 시 몇 편, 시 비슷한 글 몇 십 편 썼다해서 시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적어도 시인이란, 인간의 본질과 그 인간들이 엮어가는 사회와, 그리고 인간의 삶(생명)과 그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과, 그것들이 어우러진 세계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그 눈에 비쳐진 진실을 자신의 감정이 배인 정서적이고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표현해 내는 일과 관련하여 일정한 질서와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바로 그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 시인의 탄생과 그 존재를 기억하고, 그를 우러러 보는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인이란 그리 많을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73명의 작품 580여 편을 읽으면서 이들이 공유하는 정신적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소재이자 제재가 되기도 하는 단어(key word)를 10개 정도로 정리한다면 이렇다. 곧, ①그리움 ②고향 ③조국 ④별 ⑤달 ⑥산 ⑦강 ⑧나무 ⑨바람 ⑩바위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요 단어들로 시를 짓고 있는 시인들의 정서를 색깔로 친다면 두루미나 백학으로 대표되는 흰색일 것이고, 계절로 친다면 생명력이 약동하기 시작하는 봄일 것이다.  표현 수단은 한글이지만 조국이 해방되면서 중국내 조선족으로서 정착, 30여 년 동안 줄곧 북한과 교류해 왔기 때문에 북한의 언어와 가깝다. 그리고 80년대 개방화 물결에 따라 그 후 15여 년 동안은 남한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해오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런 탓인지 그들은 남한이나 북한의 시문학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시문학을 다듬어 가고 있다 할 것이다. 인구 200만 가운데 시인 90여 명이 중국 조선족 시문학이란 나무를 가꾸어 오고 있는 셈인데2), 50년이란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중국의 정치 체제와 관련, 극히 제한적인 교류와 감시의 눈 탓으로 흐른 세월에 비하면 그 나무가지와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나진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동안의 중국만의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한다면 그 시문학이라는 나무를 키워올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시인들의 각고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시문학은 인간의 주관적인 정서를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예술형태이므로 대사회적 대인간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뿌리 깊고, 잎 무성하고, 열매 또한 상큼한 우람한 나무로 키워 나가아야 할 것이다.  이 일을 돕기 위해 굳이 한 가지만 조언한다면, 모방이나 흉내내기가 시문학에서의 능력이고 진실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방은 어디까지나 습작기에 있을 수 있는 과정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표이어서는 안 된다.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과 향기와 열매를 위해 충분히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하면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영양분도 공급해 주어야 함에 틀림없지만, 철저하게 내가 서 있는 토양과 그 기후에 잘 자랄 수 있는 수종(樹種)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  1) 필자가 읽은 중국 조선족 시인 명단---  리 욱․임효원․설 인․김 철․김성휘․리삼월․리상각․김경석  김응준․김태갑․허룡구․박 화․김문회․김동진․남영전․리성비  석 화․리임원․주성화․신현철․박설매․김응룡․리근영․리해룡  마송학․최진성․리 중․박성훈․김 충․남철심․김 욱․허련화  전홍일․강효삼․윤청남․김경희․남상수․허창열․김창영․리 복  박천교․박은호․정 철․김동석․한 춘․채택룡․황장석․전경업  최정수․김기덕․리범수․김철호․한소리․김영수․김해룡․신창수  현규동․전광훈․황춘옥․김승종․양용철․리동권․리송주․한수봉  한동해․한석윤․김성우․류전영․황령향․장련춘․림 철․심정호  송정환 외(이상 73명의 580편)  2) 월간 「연변문학」 1999년 1월호에 실린 중국 조선족 문학인 주소록에 의하면 전체 문학인 375명 가운데 시인이 약 90명 내외가 되지 않을까 추산된다. 그 근거로는 연변지구에만 268명의 문학인 가운데 24%인 64명이 시인임을 감안한다면 나머지 북경․흑룡강․료녕․길림․장춘․통화 지구도 같거나 비슷하다고 전제,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26명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명단에는 작고한 문인도 몇 분 포함되어 있고, 필자가 이미 읽었지만 현재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은 흑룡강 신문 지상에 발표된 상당수의 시작품 등은 포함시키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하면 73명 580편이란 숫자는 편의상의 숫자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연변작가협회는, 金浩根씨에 의하면 2000년 4월 현재, 505명의 회원에 87명의 이사, 주석 1명, 상무 부주석 1명, 겸직 부주석 11명으로 구성되었다 함. 
1441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 - 리욱 댓글:  조회:4960  추천:0  2015-09-07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 리욱   시인 리욱(1907-1984)은 중국 조선족문학 정초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 조선족문학의 첫 페지를 열어 중국 조선족문학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한 저명한 시인이다.   생애: 리욱 (李旭 원명; 리장원 李章源)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일찍 중국 길림성 화룡현 강장동 일대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생활난으로 이리저리 떠돌며 러시아 원동지역에 까지 흘러갔다가 리욱이 3 살 나던 해인 1910년 봄,다시 중국 길림성 화룡현 로과향 서호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리욱의 할아버지는 원근에 이름이 높은 한학자로서 마을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꾸렸는데 리욱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천자문》과 《소학》 및 한시를 공부하였다.   리욱은 1923년 4월 룡정 동흥중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훈춘 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농촌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처녀작 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또 지역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시 《눈》, 《봄비》, 《죄수》, 《분노의 노래》, 소설《파경(破鏡)》을 쓰고 일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서호촌 마을에 돌아와 1935년까지 농사도 짓고 서당도 꾸리고 마을의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문학공부에 정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시 창작도 일약 전성기에 진입하였는데 초기 시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완성되였다.   이 시기 그는 시《님 찾는 마음》(1930), 《송년사》(1935), 《북두성》(1937), 《금붕어》(1939), 《모아산》(1939), 《새 화원》(1940)등을 창작하여 신문 《만선일보》, 잡지《조광》, 《조선지광》등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학성(鶴城), 월촌(月村), 홍엽(紅葉), 단림(丹林),산금(汕琴), 월파(月波)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리욱은 1936년 《조선일보》 간도특파기자가 되였고 일제에 의해 1940년 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폐간되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1942년 그는 리학성(李鶴城)이라는 이름으로 연길에서 간도와 만주지역 시인들의 합동시집 《재만시인선》을 편찬하여 발간하였으며 김조규가 편집한 종합시집《재만조선인시집》에 리학성의 이름으로 시 《나의 노래》, 《철쭉화》, 《오월》,《락엽》, 《별》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고향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자기의 필명을 다시 “해 뜨는 모양”, “득의(得意)한 모양”의 “아침 해 욱(旭)”으로 바꾸고 새로운 시대의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銅喇)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연길중소한문회협회》 문화국장 등 직을 맡으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동북군정대학에 다녔고 1947년 첫 서정시집《북두성》 간행하였다. 1948년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길 《대중》잡지 주필 겸 연변도서관 관장을 맡았으며1949년 두 번째 서정시집 《북륜의 서정》을 간행하였다.   리욱은 1951년부터 연변대학에서 《세계문학사》를 강의하면서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문학의 후대양성에 일생을 다하였다.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57년 시집 《고향사람들》(북경 민족출판사), 장시《연변의 노래(한문)》(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고 1959년 시집《장백산하》(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중국에서의 “10년 대 동란”으로 일컫는 문화대혁명 기간 시인 리욱은 《반동문인》, 《반동학술권위》등으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80년 칠십 고령에 이른 시인은 자신이 일생동안 진행해온 시창작의 정수를 모아《리욱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엮었다.   1982년 장편서사시《풍운기(1부)》 발표하였고 이 작품 제2부의 집필 중 1984년 2월 26일 뇌익혈이 발생하여 향년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추도식은 전례 없이 장중한 규모로 연변대학 대강당에서 진행되었으며 1988년 7월 25일 시인의 탄신 81돐을 기념하여 시인이 세 살 때 강보에 쌓여 두만강을 넘어온 화룡 로과 호곡령 산상에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리욱시문학의 작품세계: 시인 리욱은 1924년에 처녀작인 서정시《생명의 례물》을 내놓은 때로부터 시가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기, 특히 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태를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가 내놓은 주요 작품으로는 《금붕어》(1936년), 《철촉화》(1942년), 《새 화원》(1942년), 《모아산》(1944년), 《오월의 붉은 맘씨》(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서정시가 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시편에서는 질곡적인 암흑사회를 혐오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진리를 추구하여 마지않는 시인의 미학적 열망을 구김 없이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시 《금붕어》에서 리욱은 일제 통치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의 의지와 리상을 간곡히 표출하고 있다. 이 시편에서의 금붕어는 시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닫혀있음과 열려있음의 이항대립구조를 설정하여 어항에 갇힌 금붕어의 이미지와 무한한 자유를 표상하는 넓은 바다의 이미지의 대립으로 식민지치하의 젊은 지식인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있다. 금붕어는 항시 자유 없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달가워하지 않고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붉은 산호림”을 “까만 안공에 불을 켜고” 애타게 찾고 있다. 대해 속에서의 “붉은 산호림” 그것은 시인이 못내 동경하던 자유로운 리상의 동산을 상징한 것이다.   1940년대에 들어선 후 그같이 암흑한 현실 하에서도 줄곧 시 창작에 힘써 서정시 《철촉화》와 《새 화원》 등을 창작한데 이어 또한 《모아산》과 같은 역작을 내놓았다. 1944년 이른 봄에 쓴 서정시 《모아산》에서 시인은 모아산을 “대지의 정열을 안은” 창세기의 “위대한 거인”으로 형상화하면서 격정에 넘쳐 “네 머리 위에 해와 달이 흘러흘러/ 쌓은 정 녹아 터지는 날은/ 자유의 깃발이 날리리니”하고 사무치게 고대하였다. 이렇게 미래의 밝은 전망을 펼쳐 보이고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모아산을 종래로 “굴한 일 없”는 조선족반일투사의 강인한 투쟁정신의 상징으로 승리의 깃발로 찬송하고 있다. 그의 이런 시적 사상과 미학적 추구는 항일전쟁승리전야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지고 명랑하여졌다. 시《북두성》은 광복 바로전야인 1944년에 쓴 작품으로서 시인의 이 시기 창작풍모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시《북두성》에서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길로 멀리 하늘에서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암울한 시대는 조만간에 지나가고 대지에 새봄이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위와 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이 시는 다소 표현에 있어 모호하고 추상적인 부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호방한 낭만시로서 시인의 신념을 충실하게 드러낸 시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매로 멀리 하늘가에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정겹게 헤아리며 새봄은 꼭 오리라는 굳은 신념에 잠기며 다가올 승리에 무한히 고무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이 서정시의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유의 려명이 곧 돌아오며 그 미래는 우리의 것이란것을 확신하고 있는것이다.시인은 일찍 이 시에 담은 시적경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머나먼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 별들을 헤아리고 있노라니 나도 그 별들과 함께 빛나며 별무리들이 북두성을 향해 반짝이듯이 느껴졌다. 이 경상은 나에게 피눈물 겨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누렇게 말라빠진 대지에는 봄이 올 날이 있음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새벽이 올 것이다’, ‘내일은 우리 것이다’라고 소리 높이 외쳤다”   이와 같이 이 시기 리욱의 시작품은 호방하고 우미한 랑만적 색채를 보이며 주로 은유적 수법을 애용하면서 잠재의식에 의한 형상적 표현들을 많이 보이고있다. 또한 그의 서정시들은 광명한 미래를 동경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직도 몽롱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흐르고 있는 약점도 발로 시켰다.   1945년 “8․15”광복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등 력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리욱의 시세계도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민족의 일제에 의한 압제와 굴욕에서부터의 해방을 그는 중국공산당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특히 백여년간 이 땅을 개척하고 가꾸어 온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새 생활의 희망을 열어준 새로운 중국과 중국공산당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1949년 1월에 간행한 그의 두 번째 시집《북륜의 서정》 서문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시대의 행정에 력사의 지표가 뚜렷이 서서 나의 전진을 재촉하매 나는 고스란히 이 땅의 선구자의 발자국을 더듬어 나가며 인민과 조국에의 충성을 피로써 다할 것을 진정으로 고백한다.”   따라서 이 시기 시인의 작품주제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찬미에 바쳐지게 되었다. 1956년에 쓴 서정시《해란강의 봄철》, 1963년에 쓴 《사랑하는 고향으로 오라!》, 《정월담》 등 작품은 모두 상기 주제를 담고 있다.   시인 리욱은 또한 이와 같은 민족적 해방과 인민들의 새 생활은 모두가 수십년간 백두밀림에서 모든 것 다 바쳐 일제와 싸운 항일투사들의 생명으로 바꿔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찬양을 아낌없이 토로하였다. 산문시《연변찬사》(1954년), 서정시 《유격대를 회억하며》(1959년), 《홍군전사의 묘》(1961년) 등 작품들이 바로 이 주제에 바쳐진 것들이다.   시인은 1957년에 창작한 시 《장백산》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성성한 백발을 날리면서도/ 가슴은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불길에 타서/ 항시 두 어깨에 칠색무지개를 걸고/ 목청을 돋구어 꽝꽝 대택을 울리”는 장백산의 거인적 형상을 빌어 자손만대의 행복을 위해 산을 주름잡아 달리며 싸워온 반일투사들의 빛나는 력사를 노래하면서 그들의 반일혁명전통이 어떻게 우리시대인민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원동력이 되는 가를 밝힌다.   그 천년수림 속에서 타오르던 화톳불이/ 오늘 우리의 힘으로 뻗히고/ 그 동서 봉우리에서 반짝이던 초병의 눈이/ 오늘 우리의 정신으로 빛난다네 ― 시 《장백산》 부분   이와 같이 거대한 상상의 힘과 웅건한 감정의 폭을 가지고 펼친 이 서정시의 심상은 력사와 반일혁명전통의 소재를 다룬 다른 시들에서도 감동적으로 표출되었다.   시인 리욱은 이외 다양한 시 형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작품의 내용과 예술성에서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어 내었는바 특히 율시, 절구, 사(詞) 등 한시(漢詩)는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시 《노시인》(1959년), 《독수리》(1960년), 《랑도사 도문강(浪淘沙 圖門江)》(1978년)와 1964년 훈춘에세 창작한 한시 작품 《고성(古城)》 등이 그의 한시대표작들이다. 이 시에서 묘사된 고성은 훈춘 중쏘국경에 있는데 해방전후 토비와 싸움이 여러차레 있었다.   고성의 절반 하늘 둘러 옛 풍진은 아득하구나   다섯번 진공한 요새요 세번 전승한 진지라네   천추에 밝은 달 창공에 걸렸고 만고에 의론 배 큰 강에 비꼈네   영웅 달리던 곳 물으니 멀리 큰 산봉을 가리키네   시인은 유고로 한시 108수가 수록된 한시집《협중시사(篋中詩詞)》를 남기였다. 그의 한시에 대해 연변대학 교수 김동훈은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라고 말하였고 한국 숭실대학 교수 조규익은 “리욱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 현대 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 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 재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시인 리욱은 또한 서사시, 서정서사시의 창작에서도 큰 업적을 남기었다.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1957년), 《고향사람들》(1957년), 서사시《풍운기(제1부)》(1982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그중 서정서사시 《고향사람들》은 바로 “간도” 의 조선족들이 일제와 맞받아 싸운 빛나는 력사를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삼득이”와 “정숙이”를 주인공으로 19세기말 이조 말 조정의 폭정과 자연재해로 수많은 이재민들이 북간도로 이주하고 이곳 청국 지주의 압박과 착취와 왜놈의 탄압과 만행으로 고역과 학대에 시달리게 되고 민족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르게 되자 각성한 인민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렇게 작품은 만강의 열정으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대를 노래하면서 민족전설을 빌어 반일유격대의 형상창조를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력사의 거시적 개괄과 항일유격대 형상 창조 그리고 기백 있고 세련된 시적 표현 및 생략과 함축, 비약의 수법 등 다양한 시적 표현방법을 동원하였고 민간전설의 생동한 도입과 호기로운 서정성의 발로 등으로 높은 사상, 예술적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리욱시문학의 예술특징 1) 그의 작품에서 력사제재에 대한 흥취가 각별하고 거인적 형상창조에 유능하며 격조가 높고 뜻이 깊고 서정이 짙고 낭만적 색채와 민족적 특색이 강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력사의식에 기초하여 조선족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돌리면서 일생동안 조선족인민들의 생활과 투쟁의 력사라는 기본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작품목록에서 우리는 민족의 력사에 바쳐진 작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서정시《옛말》은 기사년 흉년에 남녀로소가 쪽박차고 샛섬에 건너와 진대나무 속에 구틀막집 짓고 부대를 일구어 감자씨를 박던 개척초기생활을 쓰고 있으며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은 샛노랗게 익은 벼이삭이 소작인들의 눈물에 젖던 가을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서정시《장백산》, 《유격대를 회억하여》등은 반일투쟁과 유격대의 영웅적 모습을 담고 있으며 서정시《젊은 내외》,《석양의 농촌》, 《황소야》 등에서는 세기적 소원을 이뤄 토지 얻은 조선족농민들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서정시《배나무를 심으며》, 《배낭》, 《봄은 어디에 먼저 왔느냐》등 작품에서는 조선족인민들이 신근한 노동으로 새로운 생활을 건설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2) 리욱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심오한 사상과 낭만에 바탕을 둔 거인적 형상의 창조에 큰 성취를 이룩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시인은 예민한 감수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생활의 본질과 특징을 발견하고 심오한 철학적 진리와 숭고한 인민적 지향을 포착하여 거인적 형상을 창조하였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거인의 영웅적 형상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현상도 노상 거인적 형상으로 노래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반일투사의 형상창조에서도 장백산의 웅장한 자연을 배경으로 초인간적인 영웅성을 훌륭하게 부여하였다. 다음과 같은 작품 속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나래 돋힌 용마를 타고/ 고산대하를 주름잡아 넘나들며/ 머리위에/ 하늘이 쪼각쪼각 갈라지고/ 발밑에/ 구름이 실실 흩어지는” ―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에서   “변강의 천봉만학을 거느리고/ 창공에 우뚝 솟은 장백산” ― 서정시《장백산》에서   “천험의 골짜기/ 만고의 숲을 뚫고/ 몇 천만년을” ― 서정시《두만강》에서   시인의 이러한 “거인의 영웅적 형상창조”의 예술추구는 일찍 《모아산》(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초기작품에서부터 나타난다.   3) 선명한 민족적 색채가 작품에 두드러지게 표현됨을 지적할 수 있다. 리욱시인은 조선족인민들의 구전문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계승하고 발양하여 생동한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였다.   서정시《장백산》에서는 “달밤에 백호가 바위 위에서 울면 동해의 룡왕도 소스라쳐 깨여서는 거센 물결을 타고 헤매었다”는 구전설화를 작품 속에 이용하였고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는 “죽은 누나를 불러도 아니 오는 누나는 옛 둥지에 제비를 보냈다”는 전설을 인용하였다. 서정시《황소야》는 “별을 이고 나가고 달을 밟고 들어온다.”는 우리 민족의 속담과 숙어를 도입하여 조선족농민들의 근면한 노동생활을 형상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시어의 선택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어에 바탕을 둔 언어구사를 주로 택하였고 과정법과 비유법, 생략과 함축 등 다양한 표현수법의 사용하였으며 이로써 간결성을 이뤄내었다. 그의 시어는 또 대담한 함축과 생략이 특징적이며 조선족민요에 많이 사용되는 음조, 조흥구 등을 창조적으로 도입하여 시의 운치를 돋웠고 민족적 생활의 체취가 풍기는 고유어의 선택과 생활화된 민중언어의 사용에도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결론: 시인 리욱은 1924년 처녀작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여1984년 장편서사시《풍운기》 제2부의 집필 중 뇌익혈로 돌아가셨다. 향년77세였다. 이와 같이 시인은 70여년의 인생에서 옹근 60년간 진행한 시창작활동 전부를 중국 조선족시문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로서 시인 리욱의 작품은 우리문학연구의 소중한 텍스트가 되며 이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확하고 진실한 텍스트를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를 올바로 기록하는것과 함께 미래에 책임지는 과제와 겹쳐있다. 따라서 리욱시문학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우선 이와 같은 문제의 제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시사(示唆)한다.       리욱대표시 6수   척촉화(躑躅花)   봄은 파일고개를 넘어 탐탁한 척촉(躑躅)꽃이 하염없이 지길래 시드는 꽃송이에 내 진정한 이야기를 부치오   꽃보라속에 나비가 놀라오 나도 늙소   그래도 내 마음 장미(薔薇)에는 푸른 꿈이 깃들어 슬프지 않소   오! 전설의 나라 척촉(躑躅)아 이제 성장(盛裝)을 버린 너는 여름철에 백합(百合)꽃을 부러워할테냐? 산국화(山菊花)도 부러워할테냐? -아니오 -아니오 그렇길래 나는 너의 짧은 청춘을 사랑했다 나는 너의 타는 정열을 사랑했다   1935년 시집《재만조선인시집》     금붕어   백공작이 날개 펴는 바다가 그립고 그리워 항시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련꽃항아리에서 까무러진 상념에 툭―툭― 꼬리를 친다   안타까운 운명에 애가 타고나서 까만 안공에 자주 황금갑옷을 떨치나니   붉은 산호림 속에서 맘대로 진주를 굴리고 싶어 줄곧 창 너머로 푸른 남천에 희망의 기폭을 날린다   1938년 연길에서     새 화원   북천의 오로라 드리우면 싱싱한 광야를 헤치며 섬어하던 미친동무 있었다   애꿎이 의도를 등지고 상화에 사는 동안 비는 말라 화석된 동무 있었다   몇번 쇠그물을 뛰쳐나 지상 제하에서 싸우던 구사일생의 정한한 동무 있었다   그는 노도였고 그는 제전이였고 그는 표범이였고   때는 회한의 그림자를 감추고 력사는 옛 위치를 바꾸어도 잃어진 생리를 찾아 빼앗긴 청춘을 찾아 인생의 대하에 나리거니 생활에 밀림에 들거니   오오! 새 화원에 나가 씨를 뿌리자 그리고 봄을 불러 꽃을 피우자 붉은 꽃을 피우자   1940. 시집 《북륜의 서정》 룡정에서           북두성   백웅(白熊)이 우는 북방하늘에 경경(耿耿)한 일곱 성진 무연한 항구에 기발을 저으며저으며 슬픈 계절― 이 거리와 저― 먼 광야에 —불멸의 빛을 드리우다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우주의 한복판에 홀로 선 나도 한 개의 작은 별이런가?   네 이름 부르노니 괴(魁) 요광(搖光)아 대답하여라   그윽이 피어오르는 자연(紫煙)속에 천문(天文)이 움직이다 신화가 바서지다   보아 천년 생각해 만년 줄기줄기 흐른 꿈은 지금 내 맘속에 장미원(薔薇園)을 이룩하고   구름을 밟고 기러기 나간 뒤 은하는 지고 달도 기울어 오오, 밤은 상아(象牙)처럼 고요한데 우러러 두병(斗柄)을 재촉해 아세아산맥 너머서 이 강산 새벽을 소리쳐 일으킨다   1945년 봄 시집《북두성》     황소야   오늘 석양도 공원삼각정에 들렸다가 홍조속에 넘어간다   야학실 가는 길 문을 나서면서 말아문 엽초담배 아직도 반대나 남기까지 령이어 들어오는 공량차 서른대는 되나부다   황소야 너 제법 뽐내는판에 두 뿔에 빨간 술을 달아주고싶구나 바로 공량은 만재란다   황소야 너 별을 이고나가면 달을 밟고 돌아오는 습성을 즐기더라 황소야 너 계명성이 들리자 느슨히 일어서나니 진정 외양간을 나고고 싶었지   황소야 너 뻐꾸기 울어 밭갈이 재촉하면 서리 내려 가을걷이 생활을 배웠나니 지금 공량을 가득 싣고 너는 기뻐서 영각도 하는구나   1949년 시집《북륜의 서정》 룡정에서     할아버지의 마음   칠순 할아버지 나무를 심으며 어린 손자를 보고 싱그레 웃는 그 마음, 그 마음…   1957. 1 시집《고향사람들》 연길에서   (화룡시 로과향{현재 남평진} 호곡령에 세워진 시비의 새겨진 시)   ===============================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 리욱   석화 1. 서론   시인 리욱(1907-1984)은 중국 조선족문학 정초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설가 김창걸 등과 함께 중국 조선족문학의 첫 페지를 열어 중국 조선족문학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한 저명한 시인1)이다. 중국 조선족은 19세기 후반, 특히는 일제강점기 한반도내에서 대량의 “류이민”2)이 발생하여 조선반도 각지 수많은 파산농민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오면서 형성되였다. 지난 세기 초, “간도”로 불린 길림성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 조선족은 이주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개척과 정착의 력사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고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또한 동시에 중국 내 한족, 만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과 공동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뤄왔다. 중국 조선족문학은 바로 이와 같은 조선민족이 중국에 이주하여 새롭게 이뤄낸 삶과 정서를 우리의 언어로 담은 문학이다. 현재 중국 조선족문학에 대하여 그 성격과 특징을 규명하면서 국내외 학계에서는 “중국 조선족문학”3), “중국 조선인문학”4), “조선족이민문학”5), “만주 조선어문학”6), “재중 조선족문학”7), “간도문학”8)  등 여러 가지로 지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담론은 중국 조선족이 월경이민민족으로서 민족과 국가가 불일치되는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특수한 현상이 그 원인으로 된다. 중국 조선족문학이“중국 조선족과 조선반도의 인민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동족으로” 여러 “사회력사발전단계를 함께 경유하면서 민족문학을 찬란하게 꽃피워 왔”9)으며 또한 19세기 후반기 특히 일제에 의한 국권찬탈이 사실화 되던 1910년대를 기점으로 차츰 중국대륙의 여러 민족인민들과 삶이 밀착되면서 상호간의 수용과 변화의 독특한 발전일로를 걷게 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특수성은 중국 조선족문학사를 서술할 때 그 시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1990년 조성일, 권철 주편으로 발간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를 비롯하여 최근에 출간된 문학사10)들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선족문학의 시작을 19세기 초, 조선민족이 중국에로의 이주초기로부터 보면서 김택영, 신정, 신채호의 한시작품들을 제시하고있다. 김택영은 1850년 조선개성에서 태여나 1905년 중국에 왔으며 1927년 아편자살로 생을 마감하였고 남통시 랑산에 그의 묘소가 있다. 신정은 1879년 조선 충북에서 태여나 1911년 봄, 중국에 왔다가 1922년 돌아가셨는데 당시 상해홍교만국 공동묘지에 묻혔다. 신채호는 1880년 조선 충남에서 태여나 1910년 중국에 왔으며 그후 일제에게 체포되여 려순감옥에 갇혔다가 1936년 옥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원인이 여하하든 그 족적이 중국에서의 조선민족이주사와 맥을 같이 하였으며 중국에 와서도 끝임없는 민족광복운동과 더불어 활발한 문학활동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김택영의 시에 대하여 당시 양계초선생도 탄복하였으며 엄복은 그에 대하여 “시재는 리백, 두보와 흠사하며 사부는 추앙, 매승을 따른다.”고 격찬하였고 신정도 사후 지인들이 그의 탄신 60세를 기념하여 시집 《아목루(我目淚)》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대부분의 작품이 우리글이 아닌 한문으로 즉 한시(漢詩)로  창작되였다는데 있다. 물론 고려, 조선조 시기부터 창작된 한시도 우리문학의 소중한 유산의 한부분이 되고있다. 그러나 우리 시문학의 흐름은 그래도 신라향가와 고려가요 및 조선조에 와서 시조와 가사로 이어지는 우리말, 우리글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시작도 현재 우리문학의 전통이 될수 있는 우리글로 창작된 시작품과 그 작품을 창작한 시인에게서 찾아야할 것이다. 즉 처음부터 한문으로 창작된 이들 김택영, 신정, 신채호의 시작품을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시작으로 보기에는 의론의 소지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혹자는 중국의 소수민족문학을 거론하면서 해당 민족구성원 시인, 작가가 창작한 작품은 비록 본 민족언어가 아닌 한문으로 씌여졌다하더라도 그 시인, 작가가 속한 민족의 민족문학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기법에는 상당하게 론의되여야할 문제들이 내포된다. 그 실례를 우리는 로사와 그의 소설 《락타샹즈》, 희곡《차집》등에서 찾아볼수 있다. 로사는 분명히 민족적으로는 만족작가이지만 상기 한문으로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중국 한문문학으로서 중국 한문문학의 수작으로 인정하지 이미 자신의 언어문자를 상실한 만족민족의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언어, 문자에는 그 민족의 문화, 력사, 관습 등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다는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5천년 중화민족의 력사에서 위대한 한족문화의 흐름을 이어온 힘이 바로 위대한 한자문화(漢字文化)에 있음을 똑똑히 보게 된다. 당나라와 송나라 다음 중원대륙에 펼쳐진 료, 금, 원 및 청에 이르는 천년세월의 이민족문화속에서 바로 한자문화가 한족문화를 견실하게 지켜 내였던 것이다.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이민족의 사나운 말발굽과 서리발치는 칼날, 그 거세찬 폭풍취우의 충격속에서 바로 이 위대한 한자문화가 중원의 광활한 땅에 한족(漢族)문화를 지켜내고 끝끝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게 하였던것이다. 현재 우리 조선족시인, 작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구성원으로 물론 한문(漢文)문학으로 대표되는 중국 주류문학에 기여하여야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우리 조선족시인, 작가들이 우리말, 우리글로 창작되는 민족문학의 번영과 발전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중국 조선족시문학은 반드시 우리글로 창작된 작품과 시인에서 그 시작을 찾아야할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문학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우선 텍스트(Text, 原文, 本文)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리유가 있다. 리욱시문학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 제기로부터 시작되여야할 것이다. 일제가 전체 조선반도 내에서 조선의 기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의 질서를 모조리 뒤엎어 버리고 조선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민족의식을 뿌리째 뽑아버리며 전체 조선민족을 일거에 말살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우리말교육을 철폐하고 악명 높은 창씨개명을 진행하며 우리글 신문, 잡지를 폐간시키던 1930년대 중반에서 4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 조선반도에서 흘러온 류이민들의 집거지역인 중국 동북삼성에서는 오히려 우리글 문학지와 작품집들이 륙속 발간되었고 따라서 이곳은 우리 민족문학이 맥을 이어가는 장소가 되였다. 당시 “간도”와 “만주”지역은 “거대한 허상 속에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 공간”11)으로 우리 민족문학이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숨통이었고 최후의 근거지였던 것이다.1930년대에 걸쳐서 일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우리민족의 동북삼성에로의 류입은 조선반도에서 활동하던 시인, 작가 등 문학인들의 대거 류입을 불러왔다. 당시 “만주”에 체류하였던 문인들 속에는 김조규, 류치환, 박팔양 등 시인과 안수길, 강경애, 최서해와 같은 많은 소설가들이 있었다. 이 시기 형성된 우리민족시인, 작가들의 문단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이어지는 중국 조선족문학의 형성에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 사실이며 이들의 음으로 양으로 되는 영향이 건국 후 중국 조선족문학의 형성에 큰 기여가 되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찍 조성일선생이 서술한바와 같이 중국 조선족문학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 남아 이 땅에서 삶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이 땅의 시인, 작가들에 의하여 이뤄진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가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날로 우리민족의 현대사에 있어서의 ‘창상지변(滄桑之變)’이라고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방을 맞은 ‘간도’를 비롯한 ‘만주’전역의 우리민족 이주민 210만명중 절반에 이르는 다시 말하면 100여만에 달하는 이주민들이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직전까지 기간내에 조선반도로 돌아갔다. 조선반도로 돌아간 100만중에는 해방전 특히 30년대에 ‘간도’지역에서 창작활동을 벌렸던 ‘문화부대’의 많은 성원도 망라되여있다. 이 ‘문화부대’의 조선반도에로의 대이동으로 말미암아 해방전 ‘간도’를 중심으로한 우리민족의 이민문단은 거의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정세하에서 치렬한 민족의식을 갖고있는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작가들은 조선족문학의 번영와 창창한 앞날을 위하여 건국전야와 직후 당시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연변의 연길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12) 바로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문학은 1945년 “8․15”광복 이후의 기간에 력사적인 재정비를 거치며 성장하여 왔고 그 중심에 리욱시인과 그의 시작품이 있었다. 리욱시문학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확하고 진실한 텍스트를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를 올바로 기록하는것과 함께 미래에 책임지는 과제와 겹쳐있다.   2. 리욱의 생애와 문학 활동   리욱 (李旭 원명; 리장원 李章源)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일찍 중국 길림성 화룡현 강장동 일대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생활난으로 이리저리 떠돌며 러시아 원동지역에 까지 흘러갔다가 리욱이 3 살 나던 해인 1910년 봄, 다시 중국 길림성 화룡현 로과향 서호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리욱의 할아버지는 원근에 이름이 높은 한학자로서 마을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꾸렸는데 리욱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천자문》과 《소학》 및 한시를 공부하였다. 리욱은 1923년 4월 룡정 동흥중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훈춘 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농촌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처녀작 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또 지역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시 《눈》, 《봄비》, 《죄수》, 《분노의 노래》, 소설《파경(破鏡)》을 쓰고 일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서호촌 마을에 돌아와 1935년까지 농사도 짓고 서당도 꾸리고 마을의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문학공부에 정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시 창작도 일약 전성기에 진입하였는데 초기 시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완성되였다. 이 시기 그는 시《님 찾는 마음》(1930), 《송년사》(1935), 《북두성》(1937), 《금붕어》(1939), 《모아산》(1939), 《새 화원》(1940)등을 창작하여 신문 《만선일보》, 잡지《조광》, 《조선지광》등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학성(鶴城), 월촌(月村), 홍엽(紅葉), 단림(丹林), 산금(汕琴), 월파(月波)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그의 작품에 대하여 당시 평단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그 지향! 그것만으로 신진시인의 명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 케케묵은 감각의 울타리 안에서 시를 창조하는 대신 시를 복제(모방)하는 이미 퇴색한 청년시인들에 비해 볼 때 아직 체내에 미숙한 오관을 가지고 떨리는 두 손과 두 팔을 한껏 벌리어 새로운 “포에지”의 세계로! 항시 비상을 익망하는 젊은 시인― 신세대 시인들의 활기를 나는 높이 사고 싶다. 그러나 지나친 비상은 오히려 허망과 “넌센스”를 동반하는 수가 있지 않을까? 무의미의 탐미성을 강조하는 슐레알리스트들의 시로에는 경복할 수 없으므로 의미의 혼란으로 충만되어 그것이 반대로 무의미한 시작품으로 화해버리는 이런 유의 시를 쓰는 무의미를 월촌씨에게 삼가 경고하고 싶다. 의미의 남용으로 시인자신이 나중에 판타지병에 걸려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푸념과 넉두리와 언어의 유희로 충만된 시를 쓰는 수가 많고 이런 시를 우리는 재능 있는 신인들에게서 간혹 볼 수 있다. 그러나 월촌씨는 아직 그런 환상병에 걸리지 않을 만한 자성과 건강을 가지고 있다.13)   리욱은 1936년 《조선일보》 간도특파기자가 되였고 일제에 의해 1940년 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폐간되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1942년 그는 리학성(李鶴城)이라는 이름으로 연길에서 간도와 만주지역 시인들의 합동시집 《재만시인선》을 편찬하여 발간하였으며 김조규가 편집한 종합시집《재만조선인시집》에 리학성의 이름으로 시 《나의 노래》, 《철쭉화》, 《오월》, 《락엽》, 《별》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고향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자기의 필명을 다시 “해 뜨는 모양”, “득의(得意)한 모양”의 “아침 해 욱(旭)”으로 바꾸고 새로운 시대의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銅喇)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연길중소한문회협회》 문화국장 등 직을 맡으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동북군정대학에 다녔고 1947년 첫 서정시집《북두성》 간행하였다. 1948년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길 《대중》잡지 주필 겸 연변도서관 관장을 맡았으며 1949년 두 번째 서정시집 《북륜의 서정》을 간행하였다. 리욱은 1951년부터 연변대학에서 《세계문학사》를 강의하면서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문학의 후대양성에 일생을 다하였다.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57년 시집 《고향사람들》(북경 민족출판사), 장시《연변의 노래(한문)》(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고 1959년 시집《장백산하》(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중국에서의 “10년 대 동란”으로 일컫는 문화대혁명 기간 시인 리욱은 《반동문인》, 《반동학술권위》등으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80년 칠십 고령에 이른 시인은 자신이 일생동안 진행해온 시창작의 정수를 모아《리욱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엮었다. 1982년 장편서사시《풍운기(1부)》 발표하였고 이 작품 제2부의 집필 중 1984년 2월 26일 뇌익혈이 발생하여 향년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추도식은 전례 없이 장중한 규모로 연변대학 대강당에서 진행되었으며 1988년 7월 25일 시인의 탄신 81돐을 기념하여 시인이 세 살 때 강보에 쌓여 두만강을 넘어온 화룡 로과 호곡령 산상에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3. 리욱의 작품세계와 예술특징   시인 리욱은 1924년에 처녀작인 서정시《생명의 례물》을 내놓은 때로부터 시가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기, 특히 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태를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가 내놓은 주요 작품으로는 《금붕어》(1936년), 《철쭉화》(1942년), 《새 화원》(1942년), 《모아산》(1944년), 《오월의 붉은 맘씨》(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서정시가 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시편에서는 질곡적인 암흑사회를 혐오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진리를 추구하여 마지않는 시인의 미학적 열망을 구김 없이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시 《금붕어》에서 리욱은 일제 통치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의 의지와 리상을 간곡히 표출하고 있다.   백공작이 날개 펴는 바다가 그립고 그리워 항시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련꽃항아리에서 까무러진 상념에 툭―툭― 꼬리를 친다   안타까운 운명에 애가 타고나서 까만 안공에 자주 황금갑옷을 떨치나니   붉은 산호림 속에서 맘대로 진주를 굴리고 싶어 줄곧 창 너머로 푸른 남천에 희망의 기폭을 날린다   ― 시《금붕어》 전문   이 시편에서의 금붕어는 시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닫혀있음과 열려있음의 이항대립구조를 설정하여 어항에 갇힌 금붕어의 이미지와 무한한 자유를 표상하는 넓은 바다의 이미지의 대립으로 식민지치하의 젊은 지식인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있다. 금붕어는 항시 자유 없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달가워하지 않고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붉은 산호림”을 “까만 안공에 불을 켜고” 애타게 찾고 있다. 대해 속에서의 “붉은 산호림” 그것은 시인이 못내 동경하던 자유로운 리상의 동산을 상징한 것이다. 1940년대에 들어선 후 그같이 암흑한 현실 하에서도 줄곧 시 창작에 힘써 서정시 《철쭉화》와 《새 화원》등 을 창작한 데 이어 또한 《모아산》과 같은 역작을 내놓았다. 1944년 이른 봄에 쓴 서정시 《모아산》에서 시인은 모아산을 “대지의 정열을 안은” 창세기의 “위대한 거인”으로 형상화하면서 격정에 넘쳐 “네 머리 위에 해와 달이 흘러흘러/ 쌓은 정 녹아 터지는 날은/ 자유의 깃발이 날리리니”하고 사무치게 고대한다. 이렇게 미래의 밝은 전망을 펼쳐 보이고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모아산을 종래로 “굴한 일 없”는 조선족반일투사의 강인한 투쟁정신의 상징으로 승리의 깃발로 찬송하고 있다. 그의 이런 시적 사상과 미학적 추구는 항일전쟁승리전야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지고 명랑하여졌다. 시《북두성》은 광복 바로전야인 1944년에 쓴 작품으로서 시인의 이시기 창작풍모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백웅(白熊)이 우는 북방하늘에  경경(耿耿)한 일곱 성진 무연한 항구에 기발을 저으며저으며 슬픈 계절― 이 거리와 저― 먼 광야에 ―불멸의 빛을 드리우다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우주의 한복판에 홀로 선 나도 한 개의 작은 별님이런가?   네 이름 부르노니 괴(魁)  요광(搖光)이 먼저 대답하여라   그윽이 피어오르는 자연(紫煙)속에 천문(天文)이 움직이다 신화가 바서지다   ― 시《북두성》 제1련-제4련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으로 멀리 하늘에서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암울한 시대는 조만간에 지나가고 대지에 새봄이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위와 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다소 표현에 있어 모호하고 추상적인 부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호방한 낭만 시로서 시인의 신념을 충실하게 드러낸 시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매로 멀리 하늘가에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정겹게 헤아리며 새봄은 꼭 오리라는 굳은 신념에 잠기며 다가올 승리에 무한히 고무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이 서정시의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보아 천년 생각해 만년 줄기줄기 흐른 꿈은 지금 내 맘속에 장미원을 이룩하고   구름을 밟고 기러기 나간 뒤 은하는 지고 달도 기울어   오오, 밤은 상아(象牙)처럼 고요한데 우러러 두병(斗柄)을 재촉해 아세아산맥 너머서 이 강산 새벽을 소리쳐 일으킨다   ― 《북두성》 제5련-제7련   이 시에서 시인은 자유의 려명이 곧 돌아오며 그 미래는 우리의 것이란것을 확신하고 있는것이다. 시인은 일찍 이 시에 담은 사상경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머나먼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 별들을 헤아리고 있노라니 나도 그 별들과 함께 빛나며 별무리들이 북두성을 향해 반짝이듯이 느껴졌다. 이 경상은 나에게 피눈물 겨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누렇게 말라빠진 대지에는 봄이 올 날이 있음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새벽이 올 것이다’, ‘내일은 우리 것이다’라고 소리 높이 외쳤다”14)   상술한 인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 시기 리욱의 시작품은 호방하고 우미한 랑만적 색채를 보이며 주로 은유적 수법을 애용하면서 잠재의식에 의한 형상적 표현들을 많이 보이고있다. 또한 그의 서정시들은 광명한 미래를 동경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직도 몽롱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흐르고 있는 약점도 발로 시켰다. 1945년 “8․15”광복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등 력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리욱의 시세계도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민족의 일제에 의한 압제와 굴욕에서부터의 해방을 그는 중국공산당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특히 백여 년 간 이 땅을 개척하고 가꾸어 온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새 생활의 희망을 열어준 새로운 중국과 중국공산당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1949년 1월에 간행한 그의 두 번째 시집《북륜의 서정》 서문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시대의 행정에 력사의 지표가 뚜렷이 서서 나의 전진을 재촉하매 나는 고스란히 이 땅의 선구자의 발자국을 더듬어 나가며 인민과 조국에의 충성을 피로써 다할 것을 진정으로 고백한다.”   따라서 이 시기 시인의 작품주제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찬미에 바쳐지게 되었다. 1956년에 쓴 서정시《해란강의 봄철》,  1963년에 쓴 《사랑하는 고향으로 오라!》, 《정월담》 등 작품은 모두 상기 주제를 담고 있다. 시인 리욱은 또한 이와 같은 민족적 해방과 인민들의 새 생활은 모두가 수  십년간 백두밀림에서 모든 것 다 바쳐 일제와 싸운 항일투사들의 생명으로 바꿔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찬양을 아낌없이 토로하였다. 산문시《연변찬사》(1954년), 서정시 《유격대를 회억하며》(1959년), 《홍군전사의 묘》(1961년) 등 작품들이 바로 이 주제에 바쳐진 것들이다. 시인은 1957년에 창작한 시 《장백산》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성성한 백발을 날리면서도/ 가슴은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불길에 타서/ 항시 두 어깨에 칠색무지개를 걸고/ 목청을 돋구어 꽝꽝 대택을 울리”는 장백산의 거인적 형상을 빌어 자손만대의 행복을 위해 산을 주름잡아 달리며 싸워온 반일투사들의 빛나는 력사를 노래하면서 그들의 반일혁명전통이 어떻게 우리시대인민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원동력이 되는 가를 밝힌다.   그 천년수림 속에서 타오르던 화톳불이 오늘 우리의 힘으로 뻗히고 그 동서 봉우리에서 반짝이던 초병의 눈이 오늘 우리의 정신으로 빛난다네.   이제 천지의 젖줄이 흘러 기름진 전야마다 오곡의 백과가 탐스럽게 무르익고 장백산 기슭에 늘어선 웅장한 공장마다 기계와 비단이 수두룩이 쌓이거니   백옥으로 쌓아올린 장백의 상상봉이여 백발을 구름높이 날리고 웃음을 폭포소리에 터치며 이 나라 아들딸~ 영웅호걸들을 굽어보라   ― 시 《장백산》 부분   이와 같이 거대한 상상의 힘과 웅건한 감정의 폭을 가지고 펼친 이 서정시의 심상은 력사와 반일혁명전통의 소재를 다룬 다른 시들에서도 감동적으로 표출되었다. 시인 리욱은 이외 다양한 시 형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작품의 내용과 예술성에서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어 내었는바 특히 율시, 절구, 사(詞) 등 한시(漢詩)는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시 《노시인》(1959년), 《독수리》(1960년), 《랑도사 도문강(浪淘沙 圖門江)》(1978년) 등이 그의 한시대표작들인데 그중 1964년에 창작한 한시 작품 《옛 성(古城)》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멀리 보니 옛 성은 절반하늘 둘러싸 그제 날의 풍진은 저으기 아득하네.   녹수의 고기비누 세 번 전승한 진지요, 청산의 호랑날개 아홉 번 진공한 창이라네   창공을 우러러 달은 천추에 걸렸고 물결을 헤치며 배는 대강에 비꼈네.   영웅 달리던 곳 어딘가 물으니 늙은이 저 멀리 큰 물기슭 가리키네.   遙看古城半分天  昔日風塵已渺然  綠水魚鱗三捷陳  靑山虎翼九攻鞭  霜天寥廊千秋月  秋水波潤一葉船  借問英雄馳騁地  笑指融融大江邊    ―  시《옛 성(古城)》 전문   시인은 유고로 한시 108수가 수록된 한시집《협중시사(篋中詩詞)》를 남기였다. 그의 한시에 대해 연변대학 교수 김동훈은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라고 말하였고 한국 숭실대학 교수 조규익은 “리욱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 현대 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 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 재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시인 리욱은 또한 서사시, 서정서사시의 창작에서도 큰 업적을 남기었다.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1957년), 《고향사람들》(1957년), 서사시《풍운기(제1부)》(1982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서정서사시 《고향사람들》은 바로 “간도” 의 조선족들이 일제와 맞받아 싸운 빛나는 력사를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삼득이”와 “정숙이”를 주인공으로 19세기말 이조 말 조정의 폭정과 자연재해로 수많은 이재민들이 북간도로 이주하고 이곳 청국 지주의 압박과 착취와 왜놈의 탄압과 만행으로 고역과 학대에 시달리게 되고 민족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르게 되자 각성한 인민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렇게 작품은 만강의 열정으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대를 노래하면서 민족전설을 빌어 반일유격대의 형상창조를 완성하였다.   아!  백성들이  천만대에 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유격대에는  나는 장수와 뛰는 장수가 있어 장백산 대택속 해와 달이 질줄 모르는 별천지에서  천하 력사들을 모아 보검을 치고 대포를 만들면서 때로는  해왕국 공주들이 여름마다  목욕하러   동새에서   천지로 다니는 무지개 다리를 더듬어 봉래  방장  영루에 노릴고   제틀로  수림속에 나오면 천리 련봉~ 나뭇가지를 더우잡고 나래 돋친 룡마인양 일행 천리 청운장을 휘둘러 산삼과  사항과  지초가 녹아내리는 압록간  두만강  송화강을 넘나들며 마음대로  풍운조화를 부려 불시에   놈들을  마른 날에 번개치듯 쳐엎는다 하나니   이렇듯  유격대들이  때로는  침실에서   잠든놈들을  꿈속에 잡아가고 대낮에  길가는 놈들도 무망중에 쓸어눕힌다   ― 서정서사시 《고향사람들》 부분   이 작품은 력사의 거시적 개괄과 항일유격대 형상 창조 그리고 기백 있고 세련된 시적 표현 및 생략과 함축, 비약의 수법 등 다양한 시적 표현방법을 동원하였고 민간전설의 생동한 도입과 호기로운 서정성의 발로 등으로 높은 사상, 예술적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리욱시문학의 예술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그의 작품에서 력사제재에 대한 흥취가 각별하고 거인적 형상창조에 유능하며 격조가 높고 뜻이 깊고 서정이 짙고 낭만적 색채와 민족적 특생이 강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력사의식에 기초하여 조선족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돌리면서 일생동안 조선족인민들의 생활과 투쟁의 력사라는 기본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작품목록에서 우리는 민족의 력사에 바쳐진 작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서정시《옛말》은 기사년 흉년에 남녀로소가 쪽박차고 샛섬에 건너와 진대나무 속에 구틀막집 짓고 부대를 일구어 감자씨를 박던 개척초기생활을 쓰고 있으며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은 샛노랗게 익은 벼이삭이 소작인들의 눈물에 젖던 가을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서정시《장백산》, 《유격대를 회억하여》등은 반일투쟁과 유격대의 영웅적 모습을 담고 있으며 서정시《젊은 내외》, 《석양의 농촌》, 《황소야》 등에서는 세기적 소원을 이뤄 토지 얻은 조선족농민들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서정시《배나무를 심으며》, 《배낭》, 《봄은 어디에 먼저 왔느냐》등 작품에서는 조선족인민들이 신근한 노동으로 새로운 생활을 건설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다음, 리욱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심오한 사상과 낭만에 바탕을 둔 거인적 형상의 창조에 큰 성취를 이룩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시인은 예민한 감수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생활의 본질과 특징을 발견하고 심오한 철학적 진리와 숭고한 인민적 지향을 포착하여 거인적 형상을 창조하였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거인의 영웅적 형상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현상도 노상 거인적 형상으로 노래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반일투사의 형상창조에서도 장백산의 웅장한 자연을 배경으로 초인간적인 영웅성을 훌륭하게 부여하였다. 다음과 같은 작품 속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나래 돋힌 용마를 타고/ 고산대하를 주름잡아 넘나들며/ 머리위에/ 하늘이 쪼각쪼각 갈라지고/ 발밑에/ 구름이 실실 흩어지는” ―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에서   “변강의 천봉만학을 거느리고/ 창공에 우뚝 솟은 장백산” ― 서정시《장백산》에서   “천험의 골짜기/ 만고의 숲을 뚫고/ 몇 천만년을” ― 서정시《두만강》에서   시인의 이러한 “거인의 영웅적 형상창조”의 예술추구는 일찍 《모아산》(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초기작품에서부터 나타난다. 리욱시문학의 또 다른 예술적 특징으로 선명한 민족적 색채가 작품에 두드러지게 표현됨을 지적할 수 있다. 리욱시인은 조선족인민들의 구전문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계승하고 발양하여 생동한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였다. 서정시《장백산》에서는 “달밤에 백호가 바위 위에서 울면 동해의 룡왕도 소스라쳐 깨여서는 거센 물결을 타고 헤매었다”는 구전설화를 작품 속에 이용하였고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는 “죽은 누나를 불러도 아니 오는 누나는 옛 둥지에 제비를 보냈다”는 전설을 인용하였다. 서정시《황소야》는 “별을 이고 나가고 달을 밟고 들어온다.”는 우리 민족의 속담과 숙어를 도입하여 조선족농민들의 근면한 노동생활을 형상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시어의 선택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어에 바탕을 둔 언어구사를 주로 택하였고 과정법과 비유법, 생략과 함축 등 다양한 표현수법의 사용하였으며 이로써 간결성을 이뤄내었다. 그의 시어는 또 대담한 함축과 생략이 특징적이며 조선족민요에 많이 사용되는 음조, 조흥구 등을 창조적으로 도입하여 시의 운치를 돋웠고 민족적 생활의 체취가 풍기는 고유어의 선택과 생활화된 민중언어의 사용에도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4. 결어   본문은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인 시인 리욱(1907~1984)의 생애와 문학 활동 및 그의 작품세계와 예술특징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리욱시문학의 의의와 예술적 가치를 진일보 확인하였다. 시인 리욱은 1924년 처녀작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여 1984년 장편서사시《풍운기》 제2부의 집필 중 뇌익혈로 돌아가셨다. 향년77세였다. 이와 같이 시인은 70여년의 인생에서 옹근 60년간 진행한 시창작활동 전부를 중국 조선족시문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로서 시인 리욱의 작품은 우리문학연구의 소중한 텍스트가 되며 이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확하고 진실한 텍스트를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를 올바로 기록하는것과 함께 미래에 책임지는 과제와 겹쳐있다. 따라서 리욱시문학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우선 이와 같은 문제의 제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시사(示唆)한다.   2011년 6월 2일  
1440    시의 가치란? 댓글:  조회:4841  추천:0  2015-09-06
  (조병화, )   이 짧은 글에는 논증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은 논증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그 생각 혹은 느낌이 무엇인가? 나에게 해당되는 이 생각을 더 일반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진짜 시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유종호의 (민음사, 1994)는 그의 말처럼 을 의도하고 쓴 책이다. 그는 피터 버거의 (문예출판사, 1995)에서 느낀 매력, 즉 되어, 문학을 그런 방식으로 소개하고자 한 책이다. 이 책의 한 장이 이다.   플라톤은 그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이나 화가를 추방하고자 한다. 왜 추방하고자 하는가? 잘 알려진 논거가 예술가들이 진리로부터 두 단계 떨어진 모방의 모방을 모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예술가에게 진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시는 우리에게 그렇게 대단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예술가에 대한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그의 이데아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실재와 현상, 이데아와 경험적 현상의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공박은 약화될 것이다.   예술가, 시인을 공박하는 플라톤의 다른 논거는 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은 이성보다 열등한 영혼의 부위이며, 우리 감각처럼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비극 시인들은 과도한 감정을 억제하기 커녕 부추기고 있다. 따라서 무대 주인공의 기쁨이나 슬픔에 몰입하는 사이 우리의 이성은 정지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감정이 이성보다 열등한가? 그것들은 어떤 위계질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기능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닌가? 분명히 지나친 감정이 부작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지나친 이성의 작용도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   유종호는 플라톤에 대한 몇 가지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그의 예술관이 소박한 사실주의나 모사주의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에 대한 그의 비판이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낭만주의에게 제기하는 비판이기도 하다. 둘째, 오히려 플라톤이 진정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참다운 예술은 이데아를 직접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플라톤의 생각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플라톤이 했던 것은 당대의 잘못된 예술에 대한 비판일 뿐이다. 셋째, 해블락크라는 고전학자의 재해석이다. 플라톤이 비판했던 것은 구두(口頭)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새롭게 문자적 기록이 가능한 시대에 플라톤은 를 강조하는 의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시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지 구두로 전승해 되어온 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유종호가 소개하는 둘째, 셋째 비판은 시나 예술이 갖는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플라톤을 해석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은 시나 예술이 충분히 이성적인 것과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의 앞 부분에 나온 비판을 본다면 플라톤의 생각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처럼 보인다.     유명한 영웅들의 통곡과 애도가 바로 문학 작품, 에 나온다. 플라톤은 이런 것들을 젊은이들이 읽으면 해롭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나중에, 스스로 성숙하게 된 나중에 읽어야 하는가? 그러나 성숙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영웅들조차 보여주는 통곡과 애도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가 생각하고 있듯이 비천한 사내들이나 여자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싸움터에서 용기 있게 죽을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용기와 함께 나약함, 죽음과 함께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 더욱 성숙하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왜 시나 문학 작품은 중요한가? 바로 이런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출처] 시의 가치|작성자 풍경  
1439    이승훈 시론 댓글:  조회:4276  추천:0  2015-09-06
    이승훈 - 시론 Ⅰ. 에이브럼스의 (Oriental of critical theories)  예술작품의 총체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네 요소를 분별한다. 첫째로 사물 그 자체인 work 가 있다. 둘째로 work를 생산하는 artficer, 곧 artist이 있다. 셋째로 work는 직접적이든 우회적이든 존재하는 사물의 세계로부터 어떤 subject를 취한다. 곧 객관적 사태에 관하여 말하든, 그 사태를 의미있게 만들든, 혹은 그 사태를 반영하든, 아무튼 그 사태와 어떤 관계를 맺는다. 이 셋째 요소는 인간과 인간의 행동, 관념과 감정, 물질과 사건, 혹은 초감각적 실체들로 구성되며 nature로 통칭되지만, universe라는 중립적이고 함축적인 용어를 사용함이 좋다. 넷째로 work는 audience를 갖는다. 곧 work는 청자, 관객, 혹은 독자에게 알려지며, audience가 주시함으로써 가치있는 것이 된다.  work와 univers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을 mimetic theories, work와 audienc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을 pragmatic theories, work와 artist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을 expressive theories, work rm 자체만이 논의되는 것을 objective theories라 부른다. Ⅱ. 모방론  1. 플라톤의 대화편 「공화국」10권(시인추방론)  ① 침대라는 본질(idea) → 인공적 세계의 침대란 실체 → 감각세계를 반영한 허상이란 작품(예술작품: 그림, 음악, 시)  ② 진리로부터 2단계 멀어짐 → 시인추방론  2. 아리스토텔레스  ① 시학을 기예, 만듦의 세계에 대한 탐구로 봄 → 모방 예술의 세계를 심미적 기예의 세계(fine art)로 봄  ② 그 모방의 대상이 행동의 세계에 있는 인물들이며, 그 인물들을 다시 고상한 인물(비극)과 비천한 인물로 양분함.(인물 또는 인간 행위의 모방)  ③ 모방의 양식을 문제삼음. 모방의 양식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혼합적 양식(서사시-설화성, 서정성, 극성이 혼합), 설화-서정적 양식, 극적 양식으로 나눔.  ④ 모방의 목적을 문제삼음. 모방의 기원 혹은 기능: 본능과 쾌락 → 모방의 대상은 통일성의 세계, 개연성의 세계, 특수성의 세계, 보편성의 세계  ⑤ 시인은 통일성이 있는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며 그것은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작품의 유기적 구조에 의해 제시되어지므로 시가 진리로부터 두 단계 멀어짐으로 인간을 사악하게 만든다는 플라톤적 개념을 불식시킨다.(플라톤적 딜레마 극복)  ⑥ 정화(catharsis)의 이론: 비극은 인간정서의 두 기본인 연민과 공포를 환기함으로써 정서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환기된 정서에 의해 감정의 평형을 이루게 되므로 마침내 순화된 정서의 체험을 맛보게 된다.  3. 르네상스 시대  ① 카스텔베트로: 모방을 이야기거리를 꾸며내는 것보다는 주워 듣는 것으로 인식.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정립)  ② 마조니: 모방은 실존하는 현실을 충실히 보여주는 것(icatic)과 예술가가 마음대로 꾸며 보여주는 것(phantastic)으로 양분.(낭만주의적 관점으로 정립)  4. 18세기 이태리 신플라톤주의자: 시가 단순한 현상의 세계를 모방하지 않고, 영원한 형식(eternal form)을 모방한다고 주장.  5. 쉘리의 「시의 변호」(1821)  ① 시인은 비이성적인 상상력을 사용하지만, 그 상상력으로 인해 플라톤적 절대 관념의 세계와 직접 접촉함으로써 플라톤이 상정했던 실재(reality)의 세계 그 자체를 경험함.  ② 일상적 경험의 세계 배후에 있는 절대 관념의 세계와 접촉할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의 작용을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음.  ③ 시인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며, 시인은 존재와 지각, 지각과 표현 사이에 관계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진선미를 이해하는 자이다.  ④ 입법자이며 동시에 예언자적 기능을 지님.  ⑤ 시는 그 자체의 영원한 진리 속에 표현된 인생의 이미지 바로 그것이 된다.  ⑥ 시인은 상상력을 강화함으로써 선의 윤리를 마련한다.  6. 비판: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모방할 것(대상)과 모방된 것(작품) 사이의 관계이며, 이 때 시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대상에 대한 진실성이다.  Ⅲ. 효용론  1. 호라티우스의 「시의 기술」(ars poetica)  ① 시인의 목적은 독자에게 이익을 주거나, 독자를 즐겁게 하거나, 혹은 유용성과 쾌락성을 동시에 줌에 있다.  ② 교훈, 쾌락, 정서의 세 명제를 중심으로 다룸.  2. 르네상스 시대  ① 카스텔베트로: 시의 목적이 교훈임을 부정. 극단적인 쾌락론자.  ② 마조니: 시의 사회적 효용성을 강조하지만, 효용이란 바로 교육적 오락적 기능을 뜻함.  3. 필립 시드니의 「시의 옹호」(1595)  ① 고대의 시와, 그 시가 지녔던 문화적 기능을 강조. 그는 시의 우수성을 전달방법에서 찾는데, 그것은 윤리적 내용을 우화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시는 결국 살아 있는 허구가 되며 또한 인간의 정서와 결합된다.  ② 시의 보편성을 논의. 생생한 허구성의 세계임을 강조(진리가 될 수 없는 세계 혹은 진리가 축어적으로 해석될 수 없음)  ③ 시인은 만드는 자(maker)이다. 시인은 허구적 상상력의 고양을 통해 현실보다 아름다운 시인의 이상적 비전을 제시한다. 결국 상상력은 현실의 통찰이 아니라 현실의 전환을 꾀한다. / 시는 역사, 철학과 다르다. 시는 추상적 명제(철학)가 아니면서도 구체적 실제(역사)의 세계를 취급함.  ④ 시의 교훈성과 정서에 대해서 논의하며, 그는 시의 교훈성을 시의 가장 애매한 정서와 결합시킨다./ 정서는 덕성을 도야하는 도구이며 그것은 시인의 이상의 세계가 환기하는 윤리적 선 때문이다.  ⑤ 시가 윤리적으로 보다 나은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독자를 윤리적으로 교화한다고 생각함.  4. 드라이든의 「극시론」  ① 극이란 인간 본질의 정당하고 생생한 이미지로서, 인간본질의 정서와 기질들을 재현하며, 인류에게 기쁨과 교훈적 내용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다.  ② 교훈과 확인의 명제가 제시됨/ 극의 교훈서이란 인간 본질의 심리학적 사실들 속에 내포된 지식을 알려줌에서 찾을 수 있다/ 교훈성 강조  ③ 극에 있어서의 표현이 문제됨/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고, 내용이 형식에 우선함을 강조/내용 - 포우프의 "자주 사유되나 결코 잘 표현할 수 없는 것"(wit)  5. 비판  18세기에 이르러 시인의 허구성과 상상력은 주로 시인의 관념이나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나 이러한 주장은 차츰 시인의 자연스러운 본질, 그 개성이나 천분, 창조적 상상력, 정서적 자발성은 예술적 절제나 지성들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드러나며, 시인 개인으로의 논의의 대상이 옮겨져야 할 필요가 생김.  Ⅳ. 표현론  1. 정서의 표현  1) 자발성의 시론 (워즈워드의 「서정민요집」 재판 서문)  ① 고요 속에 회상되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유로(흘러넘침, overflow)/ 시의 근원은 시인 자신 속에 있음이 표명됨/ 시의 제재는 곧 시인의 감정임이 명시/ 시적 과정은 자발적인 것(자발성, spontaneity)  ② 외부적 사실과의 관련성이 배제되는 대신 이 세계에는 정서가 넘치며, 이 정서가 독자의 흉금 속으로 어떤 진리를 운반한다.  ③ 인간의 심리구조는 전체로서의 우주의 활동과 조화된다. (보편적 인간)  ④ 시는 모든 자연현상 속에 나타나는 격정을 표현.  ⑤ 시인은 또한 모든 감각, 감수성, 이면에 있는 공통적인 심리법칙을 노정함으로써 인간사회의 광활한 여러 영역들을 통합한다. ("시는 정서의 타락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2) 독백의 시론(밀의 「시란 무엇인가」, 「시의 두 종류」)  ① 시의 유형 가운데 서정시가 대표적인 유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비극, 신고전주의자-서사시와 비극을 최고로 간주)  ② 시의 평가 기준은 자발성이다/ 자발성 - 인간의 정서적 감수성이 내재적이 현상임을 의미/ 시란 감정 그 자체를 지향  ③ 시와 외부세계와의 관련성은 소멸된다.  ④ 서정시의 독자는 단일 인물로 축소되며, 이 단일 인물은 바로 시인 자신이 된다. 시는 감정의 세계로, 고독한 순간 속에서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3) 자기 표현의 시론(쉴라이어마허)  ① 그의 미학적 체계는 예술이란 자기표현의 세계라는 관점에 서 있다.  ② 예술은 자기 각성의 세계라는 명제가 드러난다./ 예술은 자기각성, 감정 혹은 정조(mood)의 세계이다.  ③ 시는 언어에 의해 창조되는 자유로운 산물로 정의된다. (시적 진리, 내적인 정조의 순수한 주관성을 표현)  2. 상상력의 표현: 코울릿지의 시론 (코울릿지의 「문학평전」) - 상상력과 시의 형식의 관계를 논의  ① 시의 개별적 특성과 이 특성들의 존재이유를 탐구  ② 시가 다른 형식인 산문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 시는 음악성을 지향하며, 결과적으로 시인이 가정한 어떤 객관적 존재를 구성.  ③ 시의 직접적 목적은 진리의 전달, 혹은 쾌락의 전달이다./ 시에서 언어형식의 조직적 유기성(압운, 율격)이 쾌락을 전달함.(유기체설)  ④ 시작품(poem)과 시(poetry)를 구별.  ⑤ 상상력은 위대한 질서의 원리이며, 제재들을 분별하고 질서화하고 분리하고 통합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제1상상력-근본적으로 창조적인 능력, 제2상상력-전자의 의식적이며 인간적인 사용을 의미)  ⑥ 시작품은 언어를 특수하게 사용한 것, 곧 특수한 예술작품이다.  ⑦ 이상적으로 훌륭한 시작품은 언어를 적절히 사용해 특수한 쾌락을 성취하며, 그 쾌락은 전체로부터 나오며, 이것은 부분들의 상호조화의 세계이며, 이 조화의 세계는 시인의 종합적이고 마술적인 힘, 곧 제2상상력의 산물이다.  3. 강렬미의 표현  1) 롱기누스의 「숭고함에 대하여」  ① 숭고성은 우수한 표현 속에 나타난다.  ② 그러나 시인은 과장적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③ 위대한 관념을 지니기 위하여 시인은 반드시 위대해야 한다.  2) 포우의 「작시철학」(1846), 「시의 원리」(1850)  ①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을 심화. (예술의 교훈성 거부)  ② 시는 영혼의 격앙이 아니라, 영혼의 고양, 평온의 세계이다.  ③ 시를 단순히 정서, 상상력, 강렬미의 표현이 아닌 시적 언어의 특수성, 그 특수성이 야기하는 시의 자율적 특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봄.  4. 표현론의 통일적 관점  ① 예술작품이란 근본적으로 내면세계의 구현이다.  ② 시의 가장 중요한 근원과 제재는 따라서 시인의 고유한 정신적 행동이나 그 속성들이다.  ③ 시의 위대한 존재이유는 시인의 감정과 욕망을 내포하는 충돌의 세계를 표현함에 있다.  ④ 예술은 예술가의 정신력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정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상징으로  드러나는 정신상태 혹은 정신적 특성에 의하여 평가되고 유형화되는 경향이 있다.  ⑤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언어적 요소, 특히 비유어가 가장 중요하다.  ⑥ 시를 평가하는 기준은 시를 쓰는 동안 시인이 체험한 실제적인 정신상태, 감정, 의도를 시가 얼마나 진실하게 표현했는가 라는 명제가 중요하다.  Ⅴ. 형식론(존재론)  1. 크로체: 예술 작품의 통일성, 곧 형식과 내용의 동일성 강조.  2. 발레리: 시 속에서 소리와 의미가 협동으로 존재함을 인식한다. 시는 그 두 요소의 일종의 화해이다.  3. 엘리어트: 형식과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은 항상 진실이며, 또한 그들이 상이하다는 것도 항상 진실이다.  4. 신비평  1) 버크, (블랙머):맑시즘과 정신분석학, 인류학을 의미론과 결합하여 이제까지 문학의 출발점으로만 생각했던 동기의 체계를 고찰.  2) 랜섬, (윈터스, 테이트): 조직(texture)과 구조(structure)를 구분.  ① 조직: 해설 불가능한 비논리적 요소 - sound, 음향, 음운, 비상관적 세부  ② 구조: 해설 가능한 논리적 요소 - meaning, 사상  3) 브룩스, (윔샡): 시에 대한 유기적 관점을 강조  4) 신비평의 비평 논리  ① 랜섬: 시란 특수한 가치를 지닌 특수한 존재로써 담화 형식과 제재의 유형을 기준으로 각각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 시의 세 가지 기법 제시: 율격(metre), 허구성(fiction), 언어의 비유적 사용(tropes)  ㉠ 사물시(physical poetry) - 이미지스트 시인들의 시. 포괄적으로 물질현상을 노래하는 시, 순수시 등을 포함  ㉡ 관념시(platonic poetry) - 관념을 노래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사물의 세계를 파고 듦(관념의 전달이 목적)  * 형이상시(metaphysical)-관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인간의 몸짓  ② 언어에의 관심(언어의 잠재력을 계발함으로써 리얼리티를 폭로)  ㉠ 시적 언어는 반어적인 암시와 역설적인 암시를 기초로 한다. 따라서 시적 상황은 이중적인 의미로 표현된다.  ㉡ 시가 시인의 정서적 확인이 아니라 그러한 확신을 위협하는 모든 반대개념들과 충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시는 상반적인 관계, 곧 구조에 의존한다. 이 구조 속에 인간적 경험의 총체성이 드러난다.(워렌)  ㉢ 시의 언어는 역설적 언어이다.(세속적이고 견고하고 명석하고 재치에 넘치는 지성적 언어, 유추와 은유의 중첩, 분열, 모순의 개념으로 시 속에 나타남)  ㉣ 오직 시인의 언어적 기교와 구조적 기교만을 탐구하며, 어떤 눈부신 통찰을 위한 시인의 언어 조작과 시에 대하 인식론을 결합/ 시를 하나의 특수한 지식의 세계로 봄(브룩스)  ㉤ 시의 중심 요소로 은유, 상징, 신화를 듦/ 시적 대상의 구성 양식과 동일성(identity)을 중시(신화 비평)  5. 러시아 형식주의  1) 형식이란 예술 작품을 형성하는 일체의 것이라는 포괄적 개념  2) 형식과 내용의 불가 분리성을 주장/ 내용이란 형식의 한 요소.  3) 쉬클로프스키: 내용을 형식적 양상의 일부로 봄.  4) 쮜르민스키: 모든 내용적인 사실들을 예술 속에서 형식적 현상이 된다고 함.  5) 야콥슨: 예술적 총체성 속에서 기능을 나타내면 그것이 바로 형식이 된다.  6) 러시아 형식주의의 원리  ① 쏘쉬르가 언어학에서 한 것처럼 시의 내재적인 요소를 분리한다.  ② 최초의 운동은 문학 외적인 체계로부터 문학적 체계를 분리했기 때문에 부정적.  ③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zation, ostranenie)" 이론: 인식의 갱신/ 행위의 기계적인 습관을 파괴하여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인식케 하는 것/ 인식의 갱신이란 현대의 추상적 삶이 사물과 세계에 대한 순수하고 실존적인 접촉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데 대한 일종의 도전을 의미  ④ 서정시의 기교로써 낯설게 하기란 대상을 그 이름으로부터 해방시켜, 순수한 자체의 경험적 차원에서 묘사하는 것, 대상을 어떤 비일상적인 시각으로 제시하며, 대상과 주체의 거리를 극대화하여 바라보는 것, 스위프트처럼 현미경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 매우 완만한 행위의 체계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 한 대상을 매우 낯설은 다른 대상과 병치함으로써, 주의하지 못했던 대상의 특성들을 날카롭게 부각시키는 것, 원인과 결과라는 인습적 기대를 역전시키는 아이러니의 기법 등을 들 수 있다.      
1438    세상은 좋아보이는것뿐, 나쁘게 보이는것뿐... 댓글:  조회:3977  추천:1  2015-09-06
시인이란 이름으로                                             심정자 시인      詩를 쓴다는 것은 내게 더없는 행복이다. 혹여 왜 행복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말할 것이다. 생각을 문장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시인이란 이름에는 흙냄새와 들꽃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시는 닫힌 마음을 열고 멀어졌던 것들 불러들여 가슴으로 품을 힘이 생기게 한다. 시는 마술처럼 황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에게 시란 지지리 가난해서 애처로운 애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들꽃에서 이는 작은 바람 한 점에서도 사랑을 노래하며 자연의 평화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들꽃의 향기로 글을 쓰고 한 점 바람에 사랑과 평화를 띄우는 것이 시인이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도 보석 같은 희망을 건져내는 것이 시인이다. 마음의 때를 씻어 내리는 언어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냄새가 나는 시가 좋다. 나는 내 자신에게 ‘백치 아다다’ 임을 고백한다.     새벽 산책하는 수봉산공원에는 기막히게 예쁜 정신이상인 여자 거지가 살고 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어김없이 이불 보따리를 옆구리에 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자주 만나는 얼굴에 대고 한마디 한다. “언니 나 김치 부침 좀 해줘! 먹고 싶어 죽겠다.” 어느 해는 “언니 나 감자 좀 쪄다 줘!” 한다. 사람 좋은 이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쟤 또 임신했나 보다” 하면서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면서 해마다 임신하는 그녀를 위해 다음 날 음식을 해다가 먹이는 모습을 여러 해 보았다.   나 역시 잉태하고 있는 詩語들, 달이 차도 나오지 않고 일년 삼백육십오일 품고 있는 것들만 있다. 마음이 급해질 때면 울컥울컥 곧 쏟아 낼 듯 하다가 죽고 마는 것들, 그러나 또 품을 수 있는 가슴이 있으니 행복하다.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이러저러한 종자들은 나를 늘 메슥거리게 한다. 건강한 놈으로 빨리 낳기를 바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늘 멀미를 지병으로 달고 산다.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백치 아다다”임이 확인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시집 에 실은 시 한편을 본다.   밤과 낮이 없다 아무데서나 부스럭거린다 허름한 담 모퉁이 으슥한 골목 아무 데서나 긁적인다 정적이든 동적이든 놓치지 않으려 받아 적는다 간첩으로 신고 당할지도 모른다 좋다 다 좋다 간첩이란 누명 써도 좋다 시 한 줄 누명처럼 남기고 싶 다   -「누명을 써도」전문   속이 메슥거리면 어떻고 늘 멀미를 하면 어떤가. 품고만 있어도 행복한 것을, 더구나 겨울을 건너 봄의 들녘에 닿아 시어를 잉태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회춘으로 수태할 수 있음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이 감사한 마음은 늘 다홍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고 있다. 찰랑찰랑한 다홍치마 길이만큼 긴 새하얀 앞치마를 지어 입을 것이다. 바쁜 살림살이에 밥을 짓듯이 시어를 짓기 위한 앞치마, 햇살 좋은 날에는 앞치마에 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련다. 하얗게 빛을 낸 앞치마를 내 생애가 다하는 날까지 입을 것이다. 하늘에서 우리 인간에게 내려준 정을, 그 정이란 것을 실어 나르고 싶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이 세상은 그렇게 좋은 일도 그렇게 궂은일도 없다. 다만, 좋아 보이는 것뿐이고 나쁘게 보이는 것뿐이다. 얼마나 여유로운 세상의 이치인가. 감사한 일이다.    
1437    詩人이란??? 댓글:  조회:4787  추천:0  2015-09-06
시인이란 무엇인가 - 신경림 시인이란 무엇인가 신경림 집으로 배달돼오는 시집이 하루에 꼭 한두 권은 된다. 계간지 등 시 전문지에 실린 시와 동인지까지 포함하면 내가 하루에 읽을 시는 백 편을 넘는다. 부담되는 분량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읽는다. 물론 전부를 읽으 수는 없다. 시집의 경우 대표작으로 보이는 몇편을 뽑아 읽고 전문지 등 잡지에 실린 시는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시인의 작품을 주 로 읽는다. 몇편 뽑아 읽는 것으로 치우고 마는 시집도 적지 않다. 생동 감도 활기도 없는 시집을 끝까지 읽을 인내심은 내게도 없다. 그러나 시 를 읽는 즐거움을 어느정도 맛보게 해주는 시집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 도 정말 괜찮다.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 시집이면 따로 빼두었다가 뒷날 다시 읽는다. 일년이면 이런 시집이 적어도 열댓권은 된다. 전문지, 잡 지, 동인지에 서도 이런 시는 종종 발견된다. 한데 그 다음이 문제다. 가령 일주일이나 한달 뒤 그 시집을 다시 읽으면 괜찮기는 한데 무언가 울림을 주지 못한다. 최근에 읽은 시집이 거의 그렇다. 왜 그럴까. 생각 해보니 우선 시를 너무 '만들어서' 그런 것 같다.  .  지금 '시란 씌어지는 것이고 시인이란 태어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가 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 시란 만드는 것. 이것이 오늘의 시인 누 구나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이고, 시인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고 시인이 될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재능을 의심하면서도 시를 공부하거나 계속 시를 쓰 는 많은 사람들의 위안이 되는 소리요, 또 부분적으로는 맞는 소리이기도 하다. 조금 양보하여,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벤 존슨 (Ben Jonson)의 말을 인용, "시인이란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 어 지기도 한다"라고 말을 해도 구닥다리 소리를 면하기 어렵다.  .  '왜 시인은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쌓는 훈련을 안 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 ' 라고 한 어떤 시인의 질 문이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쪽으로 편리하게 인용되기도 한다 . 하지만 문제는, 만들어도 억지로 만든다는 데 있다. 하지만 문제는, 만들어도 억지로 만든다는데 있다. 자연스러운 데가 없다는 뜻이다. 처음 읽을 때 는 눈에 쉽게 띄지 않다가도 다시 읽으면 억지가 확연히 눈에 드러나고 또다시 읽으면 바느질자국까지 보인다. 나 자신 높이 평가한 바 있는 꽤 반응이 좋았던 어떤 시집은 처음 읽을 때는 참 근사하다는 느낌을 받았 지만 다시 읽으니 실증이 나고 또다시 읽으니 지겨워졌던 근래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 이것은 오늘의 우리 시에 거의 공통되는 것 같다. 젊은시인이나 중견이나 마찬가지로, 세상의 흐 름이 튀는 쪽으로 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겠으나, 이는 요즈음 시인들이 정말 좋은 우리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결과라는 한 평자의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한편 요즈음의 시에서 리듬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말도 하지만, 이 또한 시가 자연스럽지 못한 데 연유하는 것임은 더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  시를 억지로 만들다보니까 오늘의 우리 시중 많은 것들이 말장난으로 시종하고 있다. 물론 시에는 말장난이 라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말을 가지고 하는 예술에서 말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싶은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을것이다. 또 그것은 그 나름으로 매우 의미있고 재미있는 시적 동력 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말장난이라는 것이 "이걸 몰랐지 " 식의 천박한 발상에 그치거나 질 낮은 개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말장나이라고 할 수 없다. 말장난 자체가 적어도 시에서라면 읽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하며 그 즐거움은 분명 천박한 발상이나 질 낮은 개그에서 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은 경험의 축적이요 그 구체화로, 말장난에도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 한대 요즈음 시들의 말장난에서는 그것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삶과는 아무 관계 없는 말들을 이리저리 뒤바꾸고 돌리고 비틀고 해서 말의 난 장판을 만들어놓을 뿐이다. 젊은 시인이라면 모험심도 있고 감각에 의존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또 이해가 될 법도 한 일이다. 한데 나이 많은 시인들이 젊은이 흉내르 내며 경박한 말장난에 동참하는 것은 정말 역겹다. 이는 새로우 것을 향한 탐구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문학저널리즘에의 영합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  .  잇대어 생각나는 것은 가벼움이다. 가벼움이 우리 민족성과 맞는다는, 그래서 인터넷 시대는 바로 우리 시대이기도 하다는 우스개도 있지만, 요즈음의 우리 시 (시뿐 아니라 문학 전반에 걸친 현상이지만)는 너무 가볍다. 또 너무 쉽게, 너무 함부로들 시를 쓴다. 설명할 것도 없이 이는 7,80년대의 이른바 민중시의 무거움에 대한 반동의 결과라는 측면 이 강하다. 민중시인이란 시 한면 얼굴부터 근엄하고 엄숙해지는 웃음이 없는 시인 이라는 야유도 받은 바 있지마, 사실 7,80년대의 민중시 또는 사회시로 불리는 시들은 쓸떼없이 무거웠다. 분단 현실을 다루지 않은 시가, 혹은 노동문제를 다루지 않은 시가, 또는 권위주의에 저항하지 않는 시가 어찌 이시대의 시일 수 있겠는가라는 문학 안팎의 채찍질과 서슬퍼런 눈초리 앞에서 시인들의 상상력이 한껏 위축되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 통에 마치 앞서 말한 것들만 다루면 다 시가 된다는 잘못된 잣대에 따라 불량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기도 했다. 80년대말, 안으로 권위주의가 패퇴하고 밖으로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이 잣대는 아루아침에 폐기되고 그 자리에 , 앞서의 내용을 다루지 않아야 새로운 시대의 시가 된다는 통념이 들어서게 된 것이 말하자면 가벼움의 시의 출발점이 된다. 7,80년대의 민중시는 실제로 반성할 대목이 많다 . 과연 그 시들 가운데서 좋은 시로 우리 문학사에 남아 독자의 사랑을 받을 시 가 몇편이나 될까. 첫번째로 반성할 것은 일제시대의 가프 시를 거울로 삼지 못했다는 점이다. 카프 시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한 역할이 과소평 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많은 카프 시 가운데 오늘 우리에게 기억되는 시는 폋편이나 되는다. 임화의 시를 제하면 박세영이나 이찬 그리고 권환의 시가 있을 정도다. 물론 임화는 말할 것도 없고 박세영 이나 이찬, 권환 다 뛰어난 시인들이다 . 예컨대 북쪽으로 올라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를 쓴 이찬의 "오오, 북만의 15도구 말없는 산천이여/ 어서 크낙한 네 비밀의 문을 열어라// 여기 오다가다 깃들인 설움 많은 한 사나이 / 들어 목메던 그 빛, 그 소리로 한껏 즐거워 보려 노니" 로 끝나는 -눈내리는 보성의 밤- (1938) 같은 시는, 모든 사람 들이 김일서으이 보천보전투의 실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을 때 그 역사 적 사실을 입증하려는 노력의 시적 형상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 오늘 의 감각으로 보아도 결코 처지는 시라고 말하기느 어렵다. 그러나 이만한 시는 그 에게서조차 몇편 되지 않는다. 사회성에 치중한 나머지 시가 갖는 말의 예술이라는 점으 소홀히 생각했던 탓이 아닌가 여겨진 다. 7,80년대의 민중시 또는 사회시 쪽의 일부 시도 잩은 잘못을 저질 렀다 . 시는 말로 하는 예술로써 사회성 자ㅔ도 명확한 말에 의해 경험 된 것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터이다.  . 이들 시들을 '사회성은 강하지만'으로 인정하면서 '예술성이 약하다' 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떠한 사회성도 시에 관한 한 명확한 말에 의해 경험된다는 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 명확한 말에 의해 경된다는 것이 예술성을 뜻한다면 그것은 시의 필요조건으로, 예술성이 약하다는 것은 말에 의해 경험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요, 아무리 사회 성이 강해도 좋은 시로 인정 될수는 없다는 것이다. 90년대의 시가 7,80 년대의 이러한 점을 반성하고 옳은 길로 나아갔다면 탓할 일이 못 된다. 예술성의 회복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7,80년대의 시에 대해서 올바른 진단이 따르지 못했고 그 처방도 바르지 못했으니, 시인 은 본질적으로 정확한 말을 가지고 하는 존재라는 점을 이들 또한 중시하 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90년대 시의 가벼움은 똑같은 잘못의 반복 으로써, 예술성의 상실과 시정신의 결여로 이어질밖에 다른 길이 없었지 않나 여겨진다.  .  나는 요즈음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케케묵은 화두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다 알다시피 이것은 워즈워스(W . Word sworth)와 코울리지 ( S. T. Coleridge)가 공동으로 낸 [성정담시집] (Lyrical Ballads)의 제2판 서문에서 제기했던 질문이다. 이 서문에서 워즈워스와 코울리지는 대답했다, "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나는 이말을 시인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한 살아있는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이 과연 무엇인가. 시인의 특성으로 튀어난 감수성과 상상력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철학자 나 과학자에게도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비상히 발달한 언어능력이라는 점에 있어 시인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가령 앞의 정의에서 "쉽게" 라는 말 속에 정확하게 , 분명하가게 라는 뉘앙스가 있다고 읽을 때 뜻은 더 명료해진다. 시인이란 결국 남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결국 남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이다 . 시도 일종의 대화라는 뜻이다 . 설명이 아니라 표현을 가지고 하는 대화니까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 한데 요즘 읽는 시들 중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고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이하고 탄력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되는 컴퓨터 탓이 없지 않을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말이 어찌 힘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 "힘있게" 가 "감동적으로" 를 뜻한다면 이런 유의 시가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은 너무 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유의 시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으로 시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흠잡을 수 없는, 그래서 정말 그럴듯하다고 느껴지 는 시도 대부분 울림을 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성이 제거된, 거의 개인적인 문제로 시종하고 있는 시들이 두고 하는 말이다 .  . 이 부류의 시에 대한 평자나 독자의 관심의 정도 역시 7,80년대의 사회 성의 강조에 대한 반발로 여겨지는데. 과연 사회성이 사상된 시를 통한 삶의 추구가 가능할까라는 점도 생각해볼 대목이다. 물론 사적인 삶은 중요한 것이고, 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가 개인적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이요 내면의 추구라는 사실을 굳이 경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혼자 사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가 사는 삶인만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남과 더불어 살게 마련인 것이 세상이다. 더욱이 말이란 사색이나 자아추구의 방법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삶의 소산이다. 말에는 원천적으로 사회성이나 역사성이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시를 가지고 개인적 문제 에만 집착한다면 시는 한없이 왜소해져 있다. 이런 시들이 몸을 던져 시 를 쓰는 것과 거리가 있음은 말할것도 없다. 치열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독자에의 영합이 더 문제다. 시가 경박해지는 것도, 시를 너무 쉽게 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도 남에게 하는 말인만큼 듣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 독자가 없는 시처럼 비참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 하지만 의식 한다는 것과 영합은 전혀 다르다. 의식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마음 을 열어놓고 있다는 뉘앙스를 가진 반면 , 영합은 독자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한다는 뜻이 강하다. 7,80년대의 사회성의 시들은 어쩌면 또다른 형태의 독자와의 영합이었다는 혐의를 둘 수도 있으므로, 사회성 의 시 자체에 독자와의 영합 내지 세속주의적 요소가 있는가의 여부는 한번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  1998년 10월 일본의 카나가와 대학에서 동북아시아 문학에 대한 세미나 가 있었다. 중국 일본 한국 에서 평론가 , 소설가 ,시인이 각각 한 명씩 발표자로 나선 이 세미나에서 나는 '오늘의 한국시'를 주제로 애기를 했는데 , 청중의 하나가 한국시에 있어서의 절규성이란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다. 나는 그 개념이 분명치 않아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 일본에서 나온 '현대시의 전망' 이라는 책을 그뒤에 보니 이 문제가 주요한 화두였다. 일본시가 전체적을 동인들끼리 즐기는 수공업예술의 수준으로 전락 왜소한한 가장 큰 원인은 시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절 규성의 상실에 있다는 지적이 있고, 한국시에는 아직 그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활기찬 문학이 되고 있다는 진단도 있었다. 최근에 나온 진보적 문학지 '신일본문학'에서도 눈에 띄는 시에 있어 절규성이란, 여러 사람 의 말을 종합해보건대 문자 그대로 시는 본질적으로 부르짖음, 외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 같았다. 가령 우리가 살수 없는 환경에 봉착했을 때 못 견디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더없는 기쁨에 처했을 때 환호하는 그런 기능과 성격이 시에는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에 게 위험을 알리기도 하고 기쁨을 즐기게도 하는 것이 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 특유의 탐미주의와 사소한 것에 대한 편집광적 집착으로 사회성이 사상되면서 일본시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시 쪽의 이 진단은 일본시에 관한 한 옳은 것이겠으나 한국시에 대해서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90년대 들어 우리 시에서도 그러한 절규적인 성격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실제로 이 절규성이라는 문제는 우리 시에서도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 시가 억지에 의해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말장난 에 시종하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 시 자체를 왜소하게 만들고 하는 것이 모두 절규성의 상실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시가 안이하고 느슨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 물론 우리가 막 들어선 싸이버 디지털 시대에 시가 옛날과 같은 형태로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체로 활자매체에 의존해온 시에게 탈활자 매체시대의 도래는 분명히 새로운 위기이다. 하지만 기계화와 대량생산 이라는 산업혁명의 폭풍 속에서 시는 왕자의 자리를 산문에 넘겨주기는 했지만, 민중언어의 발견에 의해서 오히려 그 영역을 확대하지 않았던 가. 사람을 극단적으로 개인화하고 파편화하리라 예상했던 인터넷이 오히려 전지구화하면서 국가간 계급간의 빈부격차를 확대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연결망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암시하는 바 크다.  .  시는 어차피 이상주의자의 길에 피는 꽃이다. 억지로 만드는 데서 벗어나 좀더 자연스러워지면서, 잃어버린 절규성을 회복하고, 왜소 해짐으로써 놓친 큰 울림을 되 찾는다는 일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우리 시가 한번 시도 해볼 일이다.  [출처] [펌] 시인이란 무엇인가/신경림(펌자료)|작성자 자오지천  
1436    <퇴직하는 벗들에게> 시모음 댓글:  조회:4356  추천:0  2015-09-06
+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 - 교사 퇴임 축시 세상 풍경도 바꾸어 놓는다는 십 년의 세월 그런 십 년을  세 번이나 지나고서도 두 해를 더 보탠 그 오랜 시간 속에   말없이 당신께서 흘리셨을 수많은 땀방울을 생각합니다. 세상 명예를 탐하지 않고 묵묵히 교직의 한 길을 걸어오신  당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고스란히 사랑의 역사입니다.  동심(童心)의 아이들과 함께 나눈 숱한 기쁨과 아픔 속에     어쩌면 당신께선 삶의 진실에 가 닿았을 테지요. 당신과 인연 맺었던 코흘리개 아이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선생님'으로 살아 있을  참 아름답고 복된 당신, 그런 당신이 곁에 있어 우리의 삶도 사랑도 한 치는 키가 자랄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 + 별 - 전역 축시 만 삼십 육 년 백 마흔 네 번의 계절이 바뀌는 긴 세월 동안 오직 한길 군인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참 자랑스러운 그대 햇살같이 따스한 부하 사랑 달빛 예지를 겸비한 너는 덕장(德將)이며 또 지장(智將)이었지. 그 동안 갈고닦은 인품 강인한 정신, 강철 체력으로 이제 새롭게 펼쳐지는 생 거침없이 내달려  견장에서 반짝이던 그 별 너머 더욱 빛나는 별이 되리라. 네가 있어  세상의 한 구석이 밝아지는 말없이 아름다운   별이 되리라. + 아름다운 사람 - 전역 축시 꽃같이 피어나는 스물 한 살 청춘의 날부터 나이 육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만 삼십 칠 년  기나긴 세월 동안 투박한 푸른 제복 입고 세상 부귀영화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빛도 없이 자랑도 없이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한 길  묵묵히 걸어온 그대, 아름다운 사람아. 그대는 윗사람의 신뢰를 받는  실력 있고 유능한 군인이었으되 한순간도 자만에 빠지지 않았다 그대는 절도 있는 군인이었으되 비바람 눈보라 속 생사고락 같이하는  부하들에게 엄마같이 자애로웠다 그대는 박봉의 살림살이에도 기죽거나 흔한 불평 한마디 없이 가족사랑 또한 끔찍하여 1남2녀 자녀들을 훌륭히 길렀다. 계절이 수없이 바뀌어도 군문(軍門)에 들어설 때의 그 순결했던 첫 마음 변치 않고 우직한 황소걸음으로 달려갈 길 다 달려 오늘 전역을 맞이하는 그대 그 동안 남몰래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결실 맺어 이제 우리의 마음속 영원히 빛날 별 하나로 뜬다. + 퇴직하는 벗에게  대학 졸업이 코앞이던 어느 날 술집에서 은행에 취직했다며 장난 삼아 어설피  배춧잎 돈다발 세는 모습 보여주던 때가 바로 엊그제 일만 같은데 어느새 만 스물 아홉 해가 지나 자네가 퇴직을 했다니 꿈만 같아 백 열 여섯 번의 계절이 바뀌는 긴 세월 동안 근무지 따라  가족들 데리고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힘든 일도 적지 않았을 텐데 '직장은 내게 밥을 주는 곳'이라며 늘 진심으로 고마워했지. 복스럽던 머리숱에 흰 서리 내린 지 오래지만 슬퍼하거나 기죽지 말게 자네의 반백(半白) 은빛 머리카락은 세월의 훈장처럼 오히려 참 보기 좋지  가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던 말처럼 자네는 백 살을 너끈히 살고도 남을 것 같애   그렇다면 이제 인생의 전반전이 끝났을 뿐 앞으로 남은 날들 창창(蒼蒼)하니 이름 없는 섬 마을 선생이 되고 싶다던 갓 스무 살 무렵의 소박했던 꿈 어쩌면 자네가 능히 이루었을 듯도 싶은 그 추억 속의 꿈에 모닥불 지펴 이제 급할 것 전혀 없는 황소걸음에 동심(童心)의 눈으로   세상 풍경 차근차근 구경하며 하루하루가 소풍놀이같이 흥분되고 하는 일마다 창의(創意)와 재미와 보람 넘치는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맘껏 펼치게나. 지금껏 채송화처럼 겸손히 살아온  자네에게 아무래도 신께선 민들레 홀씨의  자유로운 영혼 하나 선물하실 것이니 남은 세월엔 자네가 되고 싶은  뭐든 되어 보게나.  + 퇴직하는 벗에게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30년 2개월 동안 그야말로 성실히 한 우물을 파고 이윽고 퇴직하는 친구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눈 팔거나 괜한 욕심 부린 적 한번도 없이 씨 뿌린 만큼 거두는 그저 우직한 농부의 마음으로 강산도 바뀐다는 십 년 그 긴 세월이 세 번이나 흐르도록 맡은 일을 빈틈없이 해내며 숱한 인내의 땀방울 흘렸을 테지만 윗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유능하고 꼭 필요한 사람, 또 아랫사람들을 따뜻이 보살피는 자상하고 참 인간적인 상사였을 너는 아마 직장의 보물이었을 게다.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생활의 거처였던 정든 직장을 떠나 이제 새롭게 펼쳐지는 삶이 조금은 낯설고 어색할지 몰라도 틀림없이 너는 뭐든 잘해낼 거다 통트는 햇살 더불어 선물로 주어지는 하루 스물 네 시간의 조각조각  알뜰살뜰 엮어 사랑하는 아내와 더욱 가까워지고    아들딸이랑 미주알고주알 얘기를 나누는  소박한 행복 맘껏 누리렴   산과 들과 바다로 여행을 떠나 자연을 벗삼는 그윽한 기쁨도 맛보고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색의 여유도 네 것으로 하렴.     인생 전반전을 잘 마무리했으니 너의 후반전은 더욱 기대되는구나 지상의 길벗으로 만난 참 믿음직스럽고 소중한 사람 오! 사랑하는 나의 친구여.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
      1. 50분 작업 10분 휴식   1시간정도 모니터를 봤다면 반드시 10분은 눈의 휴식을 취해줘야합니다. 또한 조명도 적당히 조절해서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해야 눈의 피로를 줄여줄 수 있습니다.   2. 먼 곳 보기    가능하면 자주 먼 곳 보기, 항상 가까운 곳만 보면 눈이 쉽게 피로해집니다. 먼 곳과 가까운곳을 주기적으로 봐주면 눈이 자동으로 초첨을 맞추려고 눈 근육 운동을하게되죠    3. 목이 편한 옷입기    안구의 압력이 높아지지 않게 목이 조이는 옷보다는 가급적이면 편한옷을 입어주면 좋습니다. 넥타이의경우 너무 강하게 매지말고 가능하면 틈틈히 풀어주는게 좋습니다. 4. 스트레스 안받기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죠  우리몸이 견딜 수 없는 정도의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는다면 안압이 알라갈 수 있습니다.  이는 눈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죠,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5. 눈 스트레칭 눈을 감고 상하좌우, x자, 8자 등으로 시선을 돌려가며 눈을 스트레칭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6. 주기적인 안과 방문   주기적으로 안과를 방문해서 검사를 해보는게 좋습니다.  모든 병은 조기발견이 중요하죠    7. 눈에 좋은 음식   브로콜리, 시금치, 당근, 샐러리와 같은 비타민 A가 풍부한 식품 결명자를 차로 끓여서 물대신 마시면 좋습니다. 블루베리, 연어, 고등어, 참치, 장어도 눈에 상당히 좋다고하네요   
1434    詩란 눔은... 댓글:  조회:8081  추천:0  2015-09-05
詩 시 시  1. 시 2. 시경(詩經) 3. (시를)읊다, 짓다 4. 기록하다(記錄--) 5. 받들다   [부수]言(말씀언) [총획]13획   [난이도]중학용, 읽기 4급II, 쓰기 3급II   詩經 시경 중국(中國) 최고(最高)의 시집(詩集)으로, 주(周)나라 초부터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初期)까지의 시 305편 모은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의 하나 詩人 시인 시(詩)를 짓는 사람. 시(詩)를 잘 짓는 사람. 詩文 시문 시가(詩歌)와 산문(散文)  사(詞). 漢詩外傳 한시외전 전한(前漢)의 경학자(經學者) 한영(韓孀)이 지은 『 시경(詩經)』의 해설서(解說書)   詩禮之訓 시례지훈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자식(子息)이 아버지에게서 받는 교훈(敎訓) 刻燭爲詩 각촉위시 촛불이 한 치 타는 동안에 詩(시)를 지음 七步成詩 칠보성시 일곱 걸음에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는 뜻으로, 시를 빨리 잘 짓는 재주를 이르는 말. 萬卷詩書 만권시서 아주 많은 책,  썩 많은 책(冊). =====================================   ... ... 늙은 사람 한 가지 즐거운 것은  붓가는 대로 마음껏 써 버리는 일.  어려운 韻字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늙지도 않네.  흥이 나면 당장에 글로 옮긴다.  나는 본래 조선사람  즐겨 조선의 詩를 지으리.  그대들은 그대들 법 따르면 되지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자 누구인가.  까다롭고 번거로운 그대들의 格과 律을  먼 곳의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나.  ―정약용 「老人一快事」 붓놓자 풍우가 놀라고  시편이 완성되자 귀신이 우는구나  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杜甫 시 3백수에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악함이 없다.  ―공자 『논어』 爲政篇 그대들은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사람에게 감흥을 돋우게 하고 모든 사물을 보게 하며, 대중과 더불어 어울리고 화락하게 하며, 또 은근한 정치를 비판하게 하는 것이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시에서 배울 수 있으며, 또한 시로써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공자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공자 고시(古詩)는 충후(忠厚)를 주로 했다. 시라는 것은 언어만 가지고 구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깊이 그 의도를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기평(譏評)할 때에는 그 소위(所爲)의 악을 얘기하지 아니하고 그 벼슬의 존비와 차안의 미려를 들어 백성의 반응을 주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소식 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 ―白居易 시란 말의 뜻을 나타내고 노래란 말을 가락에 맞춘 것이다. 소리는 길게 억양을 붙이는 것이고 가락은 소리가 고르게 된 것이다.―유협 『문심조룡』 시는 의(意)가 주가 되므로 의를 잡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 것은 그 음이다. 의도 또한 기(氣)를 위주로 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의의 깊고 옅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天性)에 딸린 것이어서 배워서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떨어지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의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句)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 없다. 하나 거기에 심후한 의가 함축되어 있지 아니하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다시 씹어보면 맛이 없어져 버린다. ―이규보 시에는 마땅치 못한 아홉 가지 체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하여 체득한 것이다. 시 한 편 속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한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 실은 것, 옛사람의 뜻을 몰래 취해 쓰는 것은 도둑질을 잘한다고 해도 옳지 않은데 도둑질이 서투르면 이것은 서툰 도둑질이 잘 잡히는 것, 강운으로 압운하여 근거가 없으며 이것은 쇠를 당기나 이기지 못하는 것, 재주는 헤아리지 않고 지나치게 압운하면 이것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험벽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하게 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것, 말이 순편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사람에게 쓰기를 강요하는 것은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 일상용어를 많이 쓰는 것은 촌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공자나 맹자를 범하기 좋아하는 것은 존귀함을 함부로 범하는 것, 글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잡초가 밭에 가득한 것이다. 이 마땅하지 못한 체격을 면할 수 있게 되면 함께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규보 시문은 기를 위주로 삼는다. 기는 성(性)에서 발하고 의(意)는 기에 의지하며,말은 정(情)에서 나오므로 정이 곧 의이다. 그러나 신기한 뜻은 말을 만들기 어려우므로, 서두르면 더욱 생소하고 조잡해지는 것이다. ―최자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이인로 『破閑集』 시는 함축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희미한 글,  숨은 말로서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은 것은 또한 시의 큰 병통이다.  ―서거정 『東人詩話』 시가 교화를 위한 것이라는 뜻은 본래 온유 돈후한 시정신으로써  성정을 다스려서 풍화(風化)를 이루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여  세상의 도리를 평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남구만 시는 성정의 허령(虛靈)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유몽인 시는 성정을 나타내는 것이다.―이의현 시는 원리와는 관계 없는 별종의 취향을 갖고 있다. 오직 천기(天機)를 농(弄)하여서 심원한 조화 속을 파악하여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시가 된다. ―허균 시란 사람의 천성과 정서를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심덕잠 지금 우리 나라의 시와 문장은 고유의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워서 쓴 것이다. 가령 아주 흡사해진다 해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김만중 무릇 시에 있어서는 자득(自得)이 귀하다.―이수광 시란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 속에 있으면 지(志)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정(情)이 마음 속에 움직일 때,  시인은 그것을 말로써 표현한다. ―신위 시는 교화(敎化)하는 것이니 힘써 그 뜻을 전달해야 한다. ―이익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단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정약용 『목민심서』 시는 대개 정신과 기백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정약용 시에는 신비한 정신의 경지가 있는데 이것은 무형 중에 우거(寓居)하면서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에, 우연히 만나면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는 찾아보려고 해도 얻을 수 없다. ―신광수 보기 좋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모아놓고 시라고 하는 것이야 비천한  잡배의 장난에 불과하다. 시는 선언이다. 만천하의 현재 뿐 아니라  진미래제(盡未來際)까지의 중생에게 보내는 편지요, 선언이요,  유언이다. ―李光洙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李光洙 시인이 창작한 제2의 자연이 시다.―조지훈 시는 신(神)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韻文)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充溢)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  시가 있다. ―I.S.투르게네프 『루진』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F.Q.호라티우스  『詩法』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보들레르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쫓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보들레르 시는 진리가 그 목적이 아니다. 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보들레르 시를 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건 낚시질하고 똑 같네. 아무 소용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 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좋은 수확이 되는 법이거든. ―E.크라이더 『지붕밑의 무리들』 시는 넘쳐 흐르는 정감의 힘찬 발로이다.―워즈워드 시는 체험이다.―R.M.릴케 시는 악마의 술이다.―A.아우구스티누스 시란 것은 걸작이든가, 아니면 전연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J.W.괴에테 위대한 시는 가장 귀중한 국가의 보석이다.―L.베에토벤 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프리뉴스2世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한다. ―머클리쉬 시는 단지 그 자체를 위해 쓰여진다.―E.A.포우 시는 예술 속의 여왕이다. ―스프랏트 시는 마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 ―R.M.릴케 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은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나이 젊어서 이미 남아 돌아갈 만큼 가지고 있지 않아서는 안된다.  시는 정말로 경험인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에머슨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P.B.셸리』 감옥에서는 시는 폭동이 된다. 병원의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다. 시는 단순히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건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보들레르 『로만파 藝術』 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선 안된다.……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에로 통해야 한다. ―F.실러 시란 가장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M.아놀드 시적(詩的)이 아닌 한,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A.지이드 『私錢쟁이』 시는 모든 예술의 장녀(長女)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양친이다.  ―콩그레브 만약 사람이 마력적인 시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대는  아름다운 생(生)을 알게 된다.―J.아이헨돌프 도덕적인 시라든가 부도덕적인 시라든가에 대해서 말할 것은 아니다.  시는 잘 씌어져 있는가 아니면 시원찮게 씌어져 있는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시는 힘찬 감정의, 위세 좋은 충일(充溢)이다. 그 원천은 조용히  회상된 감동이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별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써질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근본적인 언어 방법이다. 그것에 의해 시인은 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그의 직각적 매카니즘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다. ―M.무어 시는 오직 인간의 능력을 발양(發揚)하기 위해서 우주를 비감성화시킨  것이다. ―T.S.엘리어트 『超現實主義 簡略事典』 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고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T.S.엘리어트 『傳統과 個人의 才能』 시의 세계로 들어 온 철학 이론은 붕괴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진리이건 우리가 오류를 범했건 그런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의미하는 그 진리가 영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T.S.엘리어트 『評論選集』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데 있다.  ―T.S.엘리어트 『詩의 효용과 批評의 효용』 시란 무엇은 사실이다 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해 주는 것이다. ―T.S.엘리어트 시는 미에 있어서의 참된 집이다. ―킬피란 우리의 일상 생활의 정서 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만이 단지 근본적인 차이일 뿐이다. ―I.A.리차아드 시는 우리들이 익숙해서 믿어버리고 있고 손쉽게 가깝고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뒤바뀌어진 것으로서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이렇다고 긍정한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M.하인거 『횔더린과 詩의 本質』 시는 법칙이나 교훈에 의해 완성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감각과  신중함에 의해 완성될 수 있다. ―J.키이츠 아무리 시시한 시인이 쓴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로 그를 이해한다면 좋은 시를 얼핏 읽어버림으로써 받은 인상보다야 훨씬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나. 내가 시를 읽고 싶지 않을 때, 시에 지쳤을 때, 나는 항상 자신에게다 그 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타이르는 바일세. 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단히 아름다운 감정이 내 마음 속에서 진행 중일 것이라고 타이르기도 하네. 그래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내가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 그 훌륭한 감정을 꺼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네. ―J.러셀 『사랑이 있는 기나긴 對話』 시는 보통의 이성의 한계를 지닌 신성한 본능이며 비범한 영감이다.  ―스펜서 시는 시인의 노고와 연구의 결과이며 열매이다.―B.존슨 시의 으뜸가는 목적은 즐거움이다. ―J.드라이든 한 편의 시는 그 자체의 전제(前提)를 훌륭하게 증명해 놓은 것이다. ―S.H.스펜더 『시를 위한 시』 18살 때 나는 시라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환희를 전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살 때, 시는 연극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나는 가끔 시를 갱도(坑道)속 함정에 빠져서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출해 줄 다른 갱부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성자여야 합니다. ―P.토인비 『J.콕토와의 인터뷰』 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리고 나서 매장시키는 지상의 역설이다.  ―K.샌드버그 시의 본질은 동작이다. 이 동작은 내적 완전을 나타내고 이 내적  완전이 참으로 인간적이고 또 진실이기 때문에 참으로 시적인  성격은 위대한 격정의 자유로운 움직임 가운데 나타난다. ―네싱 시적 형식은 본질이 무엇이든 시가 문학의 특수한 형식으로서  쾌락을 주는 근원은 변화에 의한 반복성에 있다. ―R.E.앨링턴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싯귀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 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 ―클로델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있다.  ―스카르보로 『중국격언집』 만약 시가, 위대한 그 무엇이 아니면 안된다면,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현대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간에, 작자의 정신의 내부에 있는 산 그 무엇과, 그것이  전달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시로써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신체는 어디 있든간에, 그 혼은, 이곳에, 그리고 현재 있어야  하는 것이다. ―A.C.브래드레 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라면 우리들은 간단히 가질 수가 있다) 시는 경험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많은 도시를, 많은 사람들을, 많은 사물들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동물, 새의 날으는 모습, 아침에 피는  꽃의 상태 등을, 알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지의 토지에 있는 도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애당초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이별, 기억도 확실치 않은 먼 어린 시절, 자기도 알지 못하였던 즐거움이며, 마음먹고  아버지 어머니가 주는 것을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들에 공상의  힘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람 각자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던 밤의 일, 분만하는 부인의 애끊는 절규. 어린애 침대에서 잠도 자질 못하고 창백하게, 그리고 잠들어버리는 부인들의 추억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땐, 들창을 열어 놓은 채, 계속적인 시끄러움이 들리는 방에서,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있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이 있을 땐 잊어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기억이 또 한번 떠 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피가 되어 명확히 이름지울 수도 없게끔 되어버리든가, 이미 우리들 자신과 구별할 수도 없게끔  되어버릴 때 ―그야말로 어느 순간 시의 최초의 한마디가, 기억의  한가운데 나타나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시의 기능은 세계의 슬픔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A.E.하우스만 시적 진실 ―‘개인적,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며, 기능적인 것’ ―워즈워드 시는, ……인간의 마음의 제일 먼저의 활동이다. 인간은 일반적인  개념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기 전에 상상상의 관념을 만든다. 명증한  마음으로 생각하기 전에 혼란한 머리로 파악한다. 명확하게 발음하기  전에 노래부른다. 산문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운문으로 이야기한다.  전문어를 쓰기 전에 은유를 쓴다. 말을 은유풍으로 쓴다는 것은  우리들이 ‘자연발생적’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그에 있어서  자연인 것이다. ―G.B.비코 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T.E.흄 시의 중요한 목적은 정밀하고 명확한 표현에 있다. ―T.E.흄 사랑받지 못한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빛나고  씨를 가진 꽃만이 불꽃으로 반사한다. ―A.L.테니슨 시는 상징주의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감동시킨다는 이론을 만약  사람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현대시의 양식 속에 어떠한  변화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선조들의 방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을 위하여 자연묘사를, 도덕을  위하여 도덕율을, 그리고 테니슨의 경우 시의 중심이 되는 불꽃을  거의 다 깨버린 일화나, 과학적 의견에의 고려 등을 버리는 것이다.  ―오든 시란 현존시에 붙어다니는 한낱 장식물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일시적인 감격이나 감동에 그치는 바도 아니다. 더구나  한낱 열중에 빠지는 바도 아니며 오락물로 떨어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시는 역사를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하이데거 산문시란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음악적이고 영혼의 서정적 동요,  환상의 파동, 의식의 경련에 응답하기 위해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칠은 시적 산문이다.  ―C.보들레르 ―『파리의 우울』(Spleen de Paris) ‘시―인스피레이션’의 공식을 믿는 시적 사고는 허망한 하나의  옛이야기가 되어도 좋다. 지적(知的)으로 확신되는 사상에만  정적(情的) 신앙을 주려는 폐습이 일부 사람들에게 굳게 뿌리  박혀 있다. 과학이 증대하여 힘과 그것은 장차 일반화하여 갈 것이다.  ―L.A.리처즈 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P.B.셀리 『詩歌擁護論』 시란 진리며 단순성이다. 그것은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  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J.콕토 『暗殺로서의 美術』 시란 그 시를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상의  심볼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 ―W.C.브라이언트』 즉흥시는 진정 재지(才知)의 시금석(試金石)이다. ―J.B.P.몰리에르 서정시는 감정이 흘러 넘치는 청춘의 생명의 표현.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 없는 힘이며 열렬한 신앙의 발로다.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연과 사랑과 신 등으로 작자의 모양이 십분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제1인칭의 시라고 해도 좋다. ―에론네스트보배 서사시의 흥미는 작자가 아니고 그 시 속의 사건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르스는 개인적으로는 실제인물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을 만큼 아무래도 좋은 인물이다. 다만 호메르스의  시 속 영웅들에 흥미를 느낄 따름이다. 이에 비하여 같은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만나의 시를 읽을 때는 시 속의 영웅들은 무엇이던가  관계할 바 없고 다만 시인 그 자신에 일체의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서정시의 주관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테 시는 음악과 맞추어 만든 수사적인 작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단테 뮤직과 포에지의 길은 서로 교차한다. ―뽈 발레리 포에지는 말의 전능으로 베일을 벗긴다. 포에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문제는 날마다 그의 마음과 눈에 부딪치는 것을 그가 보고  느끼는 것처럼 그가 생각하도록 각도와 속도를 맞추어 그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쟝.꼭또 시는 우주에 담긴 비밀의 광선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잊어버린 천국을  소생케 한다. ―D.E.시트웰 시는 애련 속에서만 존재한다. ―W.H.오든 진실로 시라고 할만한 것은 서정시를 제쳐놓고는 없다.  ―E.A.포우 의식의 사고와 시적 표현의 기초는 구체적 직관 그 자체이다.  ―S.길버트 시의 안에 사상은 과실의 영양가와 같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뽈 발레리  시는 운문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  ―필립 시드니 현대시는 하나의 신앙 위에 서 있다. 곧 숨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되려면 믿어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R.M.알베레스 산문;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시;최상의 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워즈워드 시는 본질적으로 무슨 악마적인 것이 있다. ―괴테 시는 시 이외의 무슨 목적을 가질 수 없다. 도덕이라든지 과학과  결부시킬 수 없다. 시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문학적 특질, 즉 초자연과  아이러니 속에 있다. ―보들레르 시는 말의 의미를 이마쥬들의 분위기로 둘러싸이게 하면서 그 의미의  가지를 치게 한다. ―바슐라르 시는 진정한 의지의 범미주의적(汎美主義的) 활동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의지를 표현한다. ―바슐라르 서정적인 시는 돌진한다. 그러나 유연하고 물결치는 움직임으로이다.  모든 갑작스럽거나 끊어지는 것은 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는 그런 움직임을 비극이나 관습적인 성격의 소설 쪽으로 돌린다.  ―보들레르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도 벌써 흐를 정도로 시를 갖게 될 게 아닌가. 시는  정말로는 체험인 것이다. ―R.M릴케 시란 꿈과 같은 것이기는 하나 현실은 아니다. 말장난이기는 하나  진지한 행위는 아니다. 시란 해로운 까닭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힘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말보다 해롭지 않은 것이 어디  또 있으랴. ―하이데거 온갖 예술은 감각적 매개물에 의한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하나  시의 매개물인 말은 사실 관념이다. ―R.S.브리제스 다정한 시여! 예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여! 우리 안에  창조의 힘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신성(神性)으로 접근시키는  그대여! 어릴때 내가 그대에게 바치던 사랑은 수많은 환멸도 꺾질  못했다! 전쟁까지도 시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커지게 하였으니, 이제부터 별 박힌 내 머리와 하늘이 서로 혼동되기에 이른 것은 전쟁과 시의 덕분이다. ―아뽈리네르 우리는 남들과 논쟁할 때는 수사학으로써 논쟁하지만 스스로 논쟁할  때는 시로써 한다. 자기를 지지한 혹은 지지할 거라는 군중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자신만만한 음성을 지닌 웅변가들과는 달리  우리는 불확실성 가운데서 노래한다. 따라서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의  존재 가운데서도 우리가 고독하다는 인식때문에 우리의 리듬은 떨린다. ―에이츠 시의 의미란 그 텐션, 즉 시에서 발견되는 모든 외연(外延)extension)  과 내포(內包)intension를 완전히 조직한 총체이다. ―알렌 테이트 시가란 마치 화가가 색채로 하는 것을 언어로 하는 예술로서 상상력에  의하여 환상을 분출하는 방법에 의하여 산출하는 예술이다.  ―토마스 머코올리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을 발견이다. 예기치 않는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S.존슨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준다. ―W.세익스피어 시는 생의 진술이며 표출이다. 그것은 체험을 표시하고 생의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제2의 세계, 꿈은 최고의 시인이다.  ―워즈워드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따라서, 형식적이고 의식적 성격을 갖춘다. 시가 가지는 언어의 용법은 회화의 용어와는 달리 의식적이며 화려한 꾸밈새가 있다. 시가 회화의 용어나 리듬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마련인 규범을 미리 전제하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W.A.오오든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M.하이데거 『詩論』 시의 용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W.B.예이츠 시는 언어를 향한 일제사격이다.―앙리 미쇼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M.하이데거 시는 언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행위와 시는 언제나  인간보다 크다. ―T.E.흄 시는 극점에 달한 언어다. ―말라르메 시는 절조 있는 언어로서 절규․눈물․애무․입맞춤․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현하려는 것이다. ―뽈 발레리 시인에게 있어서 낱낱의 단어가 그 원료다. 단어는 극히 여러가지  모양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것들의 뜻은 시의 구성에 따라 처음으로  똑똑해진다. 이와같이 단어가 콤포지션의 가능성에 따라서 변모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형성된 예술 형태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는 어세(語勢)도 그 효과도 다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프도프킨 시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사막의 생활이다. ―메르디트 시란 우리에게 다소 정서적 반응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는 언어이다. ―E.A.로빈슨 시에선 해조(諧調)가 미리 공허한 형식을 결정하고 말이 위로 와서  위치를 잡는다. 말과 경험 사이의 응화(應和)와 불응화 그리고 결국에  응화가 해조를 확보하여 주의력을 거기에 모은다. 물러섬이 없는  움직임이 듣는 사람과 시인을 함께 끌고 간다. ―알랭 시는 미의 음악적 창조다.―E.A.포우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에르 정서가 있고 운율이 있는 언어로 인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또 예술적  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오든 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체계화시켜 반복한다. 이것이  운율이다. ―r.브리지스 시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구성체다.―브룩스 시는 우연을 기피한다. 시에 나타나는 클라스․성격․직분 등의 개성은 반드시 어떠한 클라스를 대표한다. ―코울리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이다.―웰렉․워렌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엘리어트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W.H.허드슨 예술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작게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확대 시킨다. ―E.M.포스터 아직 탄생하지 않은  어느 특별한 일절 또는 일련의 배후에서, 하나의 힘과 같이 집중되어,  넓게 전개되는 의식의 총체. ―보트킨 열정적인 시란 것은, 우리들의 본성의 도덕적 지적 부분과 동시에  감각적 부분―지식에의 욕망, 행위의 의지, 감각의 힘을 방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완전한 것이 되려면, 우리들의 신체의 다른 여러 부분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즈리트 시는 조잡한 요소로(물을 타고 섞어서) 연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엑기스(精)이며,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이미지의 시는 수정 조각과 같은 것이어서―우리들의 동물감각엔 너무나도 차고 투명한 것이다. ―허버트 리드 가장 위험한 것은, 순수한 물의 성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이, 정말로의 순수한 시라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하여서도 강연을  할 수 없는 것이다.―불순하며, 메칠알콜이 들어간 거칠은 시에 대해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월터 로리 시적 논리가 시의 결말을 맺는 것은, 일반적으론, 기분의 변화라든가,  위상의 전환을 통하여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그것이 시적 논리이다. 즉 논술이나 명증에 의하여 위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단계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는 그러한 위상의 변화이며,  이해할 수 있는 추이인 동시에 그 진행은 앞의 단계를 무효로 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W.P.카 오로지 이미지는 시의 극치이며 생명이다. ―드라이든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평생에 한번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진실한 이미지 뿐이다. ―W.블레이크 만약 지각(知覺)의 문을 맑게 한다면 모든 것은 그대로 즉 무한감(無限感)을 가진 것같이 보일 것이다. ―W.블레이크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그것은 어느 경험을 생각케 하며 그 문체에 의하여 그러한 경험에의 어느 종류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은 어느 하나를 배우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희열이든가 절망이든가 어떠한 감정이든간에 그것을 아는 것이 강한 만족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챨스 윌리암즈 이미지의 생산은 무의식의 어두침침한 속에서의 정신의 일반적 행위에  속한다. ―E.S.달라스 나에게 있어서 지각은 처음에 명료한 일정한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어느 음악적인 무우드(기분)가 우선한 다음에 시적 사상이 나에게 다가온다. ―쉴러 이미지의 발생, 진전, 설정은, 예를 들면 태양의 광선이 자연히  그에게 도달하여 ―그의 위에 빛나고 다음엔 냉정히 더구나 장려하게  기울어 가라앉아가며 그를 호화스러운 황혼 속에 혼자 남기는  현상에 흡사하다. ―J.키츠 우리들은 정신의 영역을 3중의 층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러한 경우 지질학의 ‘단층’에 비교할 수 있는 어느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지층은 비연속적이며 서로 불규칙한  단층을 나타나게 된다. 그와 매한가지로 자아의 감각적 의식은 본능적  충동과 직접 교섭을 갖게 되며, 그 ‘끓는 가마솥’에서 어떠한  원형적 형태 즉 예술작업의 기초가 되는 말, 이미지, 음 등의 본능적  짜임을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다. ―H.리드 나의 경우 시에 있어서는 많은 이미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의 중심이 많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만든다’라는 말은 적당치 않은 말이지만, 나는 나의 이미지에  내 내부에서 정서의 여러 가지 배색을 물들여 놓고 그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적 비평적인 힘을 적용하여 그것이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한다. 그리곤 그 제2의 이미지를 제1의 그것과 모순시켜, 그 둘에서 난  제3의 이미지에서 제4의 모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어진 형식적인 제한의 범위 내에서 서로 모순시킨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속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종자를 가지고 있다. 즉 나의 변증적 방법(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은 중심의 종자에서 성장하는 많은 이미지의 끊임없는 건설과 파괴며, 그 중심의 종자도 그 자신으로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나의 시의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나와,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이미지의 건설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어쩔 수 없는 충돌에서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충돌에서)―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극을 주는 중심 즉, 충돌의 모태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나는 시라는 순간적 평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딜런 토마스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자신으론 시인의 특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독자적인 본능의 증거가 되는 것은 훌륭한 정열,  또는 그 정열로 잠깨워진 일련의 사상 혹은 이미지 여하에 따라 시  그 자체가 변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때 뿐이다.  ―코울리지 추상적 관념에 대립하는 감각적 이미지를 너무나 주장하는 나머지……  결과는 회화에 의한 시로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때로는 그림이  전부가 되어버려, 일반적 경험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존재와 의미와를 분리시키는 잘못의 제일보였던 것이다.  ―로버트 히리아 상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시적 몽상이라는 몽상의 절대를 인식한다. ―바슐라르 실제로 물질적 상상력은 문화적 이미지와 실체를 합체시키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삶을 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상상력 그 자신은 기억의 작용이므로 기억이 시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진실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어느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스펜서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를 추구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내 방법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감동 ―감각적으로 생생한, 사랑스러운,  다채로운 여러가지의 감동 ―을 기민한 상상력의 에너지로서  받았던 것이다. ―괴테 이성이라는 것은, 기지(旣知)의 사물을 질서있게 정리하는 작용이며  상상력이라는 것은 사물의 개개, 혹은 전체로서의 가치를 지각하는  작용이다. ―C.V코노리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善)의 훌륭한 방편이다. ―셸리 상상력이라는 것은 죽어 가는 정열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 두는 불사의 신을 말하는 것이다. ―J.키츠 모든 것에 앞서서 훨씬 중요한 것은 은유를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천부의  은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러면 자연 은유가 될 것이다. ―J.M.머리 은유는 현실을 살피며 경험을 질서짓게 하는 정신의 본질적이며 또한  필요한 행위와 같이 생각된다. ―J.M.머리 어떠한 번역이나, 은유나, 우의라도 극단적인 비유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은유를 바다나 파도에서  시작하여 불꽃이나 재로 끝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모순이기 때문에. ―벤 존슨 은유를 깊이 추구하려면 건전한 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J.M.머리 상징파의 상징은 언제나 자기만이 아는, 특별한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인이 독단적으로 쓰고 있는 ―즉, 그러한 관념의 일종의  투영인 것이다. ―에드문드 윌슨 상징주의의 상징의 실체는 제재에서 분리한 은유였었다.―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어느 한 점을 넘으면 색채와 음은 그 자신을 위하여  즐거워할 수가 없을 뿐더러 이미지의 내용을 억측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에드몬드 윌슨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랜 대형 메달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매자락에 닳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 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A.맥클리쉬 『詩法』 나의 시의 장부(帳簿)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의…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시도 없이 나는 무(無)앞에 있다. ―R.끄노오 『詩法을 위하여』 샤프란 |2005.05.01 수정됨|의견 쓰기|신고   답변추천해요0 영혼의 노래입니다  시는 우리들 영혼의 울림,스치듯 살아가는 삶의  파편 안타까운..... =======================     현대시어록               최룡관 편저   서언     현대시어록은 현대시를 리해하는 열쇠이며, 그 주옥같은 언어들은 시인이나 학자들이 일생을 분투하면서 건져올린 영원한 야광주이다. 그것은 시인들이나 평론가들의 교침이며, 자대이며, 지남침이다.       시인에 대하여   시인은 공포나 사랑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보여준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동상 113페지 관습이나 , 복종이나, 법률의 평평한 바닥에서 썩는것이 무엇이든 그는 결코 썩지 않게 한다. 복종이 그를 지배하지 않고 그가 복종을 지배한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동상 12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하찮음을 좀처럼 알지 못한다. 전에는 조그맣다고 생각되던였던것이 그가 입김을 불어넣어주면 그것은 우주의 웅장함과 활력을 가지고 팽창한다. 그는 예언자요 개인이요 완전자다. 동상동명 121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미래의것의 일관성을 과거의것과 현재의것으로 형성한다. 그는 죽은자들을 관에서 끌어내여 다시 세워놓는다. 그는 과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를 표현할수 있도록 일어서서 걸어가라. 그는 교훈을 배운다. 미래가 현재가 되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인격과 장면들과 정열에 눈부시게 빛을 던질뿐만 아니라 마침내 올라가 모든것을 끝마친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위한것인지 그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할수도 없는 철탑들을 보여준다. 제일 끝에서 잠시 빛을 발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도덕의 의의를 덧붙이거나 도의를 직용하지 않는다. 그는 령혼을 알고있다. 령혼은 그자체의 교훈이외에는 어떤 교훈도 인정하지 않는데에 있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있다. 동명동상 124페지 작가, 학자, 음악가, 발명가, 미술가들의 특성중에서 새로운 자유형식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말 없는 도전보다 더 멋진것은 없다. 동명동상 125페지 시인들은 자유의 목소리이며 해설자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은 웅대한 생각을 가질만 하다. 도명동상 127페지 위대한 작가, 특히 위대한 시인을 내고있지 않는한 그들의 언어는 퇴화할것이며 그들의 문화도 퇴화하고, 그리고 보다 강대한 문화에 흡수당하는 일도 있을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있는것이다. 토마스 스턴즈 엘이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5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는 빛을 발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수세기뒤의 시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은 계속해서 산언어에 영향을 끼치고있는것이다... 그자신이 처해있던 시기에 있어서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들을 잘 연구하여야 할것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시인은 매우 정당하게 추측의 매혹적인 미로에 자신의 사고를 방황하게 한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1페지 있는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시인은 스스로를 타락하여 교사의 수준으로 내려간다. 동상동명 223페지 한편의 좋은 쏘네트를 완성하고 난후 작가는 10년의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록] [시의 리해] 245페지 시인에게는 특별한 자질, 일종의 고유한 개인적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순간에 불과할뿐, 이 상위의 (다시 말해서 인간, 인간의 다른 모든 에너지를 합해도 그것을 구성할수 없고 대체할수도 없을 정도의) 에너지는 짧고 우발적인 발현에 의해서만 존재하거나 작용할수도 있습니다. 그것(에너지)이 우리의 령혼의 눈에 조명시켜주는 보물들,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개념이나 형태들을 외부적시선에 대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을 덧붙혀야 하겠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이 순간들, 자신이 만들어내는 관계들과 직관에 보편적품위를 부여해주는 이 순간들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전달할수 없는 가치를 역시 풍부하게 지니고있습니다. 우리에게만 가치가 있는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입니다.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 그대로의 경의들이 그안에서 서로 해후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의들은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것들입니다. 천박하거나 쓸데 없는것들, 무의미하거나 외부의 빛에 저항할 힘이 없는것들, 열광의 섬광속에서 번쩍이는것이 모두 금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순간들은 우리가 최상의 상태로 존재하는 심원함으로서가 아니라 형상 없는 질료와 뒤죽박죽이 된 파편들, 이상하고 조야한 단편적인 형상으로 우리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쓰레기더미에서 귀금속 성분을 분리해내고 , 그것들을 함께 용해시켜 어떤 보석을 만들어 내는데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론] [시의 리해] 246-247페지 [시인이란 아는자, 즉 초월하는자, 그리고 그가 아는것을 증명하는자이다] 그리고 마침내... [절대적인 창조가 없다면 시가 없는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몽상의 시학]선언 [시의 리해] 293-294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우리 시대의 어떤 위대한 서정시인도 6편에서 8편이상의 완성된 시작품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이 여섯편의 시를 위해서 30년내지 50년을 고행과 고통, 싸움을 벌이는것입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34페지 시인은 미지의것에 도달한다. 비록 자기자신의 환영들을 끝내 리해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시인은 그것들을 지관하였다.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을 붙일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군들이 나타나서 그자신이 좌초해 버린 저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랭보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87-88페지 전언되는바에 의하면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라고 말한다. 랑만주의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96페지 현대시인의 탈 형상화의지는 추를 무연관의 세계로 내려보낸다. 동상108 페지 만질수 없는것을 포착할줄 모르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고 그(애드거 앨런포)는 단언하곤 했다. 자기 또한 기억의 주인이며 언어의 지배자인 사람만이, 그리고 언제나 훑어볼수 있는 자신의 감정들이 기록된 등록대장을 가진 사람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곤 했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98페지 하찮은 것으로 치장할줄 아는 이 경의로운 특권을, 파리와 스페인의 녀인에게 주어진 이 특권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있다. 동상 99페지 전에도 그랫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겠지만, 참된 시인이란 기이하게 치장을 한 진실이며 겉보기에는 모순되게 보이는 존재이다... 석양의 불꽃놀이가 끝날무렵에는 아주 먼 동방의 나라로 달려가는 자이다. 동상 100페지 시인이 도덕목적을 추구했다면, 그는 자기의 시적력량을 감소시켰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의 작품이 형편 없을것이라고 내기를 걸어도 경솔한 짓이 아니다. 동상 102페지 비규범적인 언어로써 진술하기 위해 미지를 추구하는 시인은, 그러나 비웃음을 사거나 아니면 배척을 받아 고독속에 떨어지게 된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96페지 모든 작가는 그 이름에 값하는자라면, 여태까지 씌여졌던 모든것을 대항해서 써야 한다. -fr 퐁주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20페지 시적 엄밀성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언어관용, 새로운 낱말들, 비정상적인 은유들을 추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몽롱하게 되는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35페지 시인이란 ㆍ뚜렷하게 심미지향적인 발화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21페지 만일 시인이 감동효과의 범위를 거부한다면 배타적인 시(상징주의 시와 같은) 시를 초래하게 된다. 시인의 영속성을 거부한다면 , 의도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작품 (예컨대 정치적인 시)을 낳게 된다. 동상동명 29페지 우리가 개괄해온 시인에 대한 개념은 ,,, 모든 방면에서 압력을 가하면서 서로 대립되여가는 힘들의 변화가능한 교차점으로 다루고있는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주도권은 이들 수많은 대립들을 독자적인 배렬(이는 조화롭다는것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로 조직한다는 사실에 있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 시론] 40페지 시인은 의미상으로 분명하게 경계를 정하는 단어들을 피하고 이미지면에서 정서적으로 련상작용이 풍부한 표현을 택한다. 동상도명 55페지 시인은 불가시물의 설교자이다. w. 스티븐즈 [후기 작품집] [세계명언대사전] 752페지 시인의 과제는 참으로 막중하고 위대하다! 모든 것을 파괴로부터 구해내며, 죽어야만 하는 인생들에게 영생을 부여한다. 루카누스 [시민전쟁]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이제까지 읽혀지지 아니하였다. 위대한 시인들만 그것들을 읽을수 있기 때문이다. H.D 도로우 [국가론] [세계명언 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자신도 리해하지 못하는 위대하고 현명한것들을 지껄인다. 플라톤 [국가론]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모든 감각을 막대히, 오래, 신중하게 대폭교란시킴으로써 자신을 환상가로 만든다. A. 랭보 [P. 데메니에게 보낸 편지]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아무도, 정신에 어떤 이상이 없으면 시인이 될수도 , 시를 즐길수도 없을것이다. T.B 머콜리 [수필집]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그(시인)가 한번 붓을 대면 그가 하는 말은 움직인다. 자기가 데리고 가는 사람을 꽉 붙잡고 전에 가보지 못한 생생한 지역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서부터 휴식이 없다. 옛지점과 빛을 죽은 진공상태로 변화시키는 공간과 말로 표현할수 없는 광채가 보인다. 그와 동행하는 자는 별들의 탄생과 전진을 바라보고 하나의 의미를 배운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언] [시의 리해] 131페지 ============================   시에 대하여   모든 시는 잔치이며 순수한 시간의 응결이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시의 리해] 112페지 시는 또 하나의 이미지이며, 또는 분활할수 없는 이미지의 성좌이다. 동명동상 114페지 시는 모르는 곳으로 뛰여들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가 만약 잔치라면 그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때에, 사람이 발길이 드문 곳에서 행해진 잔치 - 지하축제이다. 동명동상 115 아름다움의 결실은 우연히 되는것이 아니다. 생명처럼 필연적인것이다. 중력처럼 정확하고 똑 바르다. 시각에서 또 하나의 시각이 생기고 청각에서 또 하나의 청각이 생기며 목소리에서 사물과 인간의 조화를 영원히 알고싶어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태여난다... 시의 즐거움이 멋진 운률과 직유와 소리를 지니고있는 시들에 있는것은 아니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시의 리해] 123페지 위대한 시는 아주 오래동안 공동의것이고, 모든 계급과 얼굴색을, 모든 부문과 종파를, 남자만큼이나 여자를, 여자만큼이나 남자를 위한것이다. 동상동명 131페지   시적창조는 해득할수 없는 신비지요. 사람이 태여나는 신비와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 오는지 모를 소리를 듣습니다. 그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숙고하는건 쓸데 없는 일이지요. 내가 태여난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듯이, 죽는것에 대하여서도 근심하지 않아요. 옥타비오빠스 [바가리아와의 대화] [시의 리해]108-109 페지 시는 어둠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인간의 심장을 만나야 하고, 여자의 눈, 거리의 나그네들, 황혼녘이나 별이 빛나는 한밤에 적어도 한수의 시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예기치 않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일은 가본일이 있는 먼곳, 잃은 모든것, 배운 모든것 전부에 값한다. 파블로 네루다 [시에서] 동상111페지 시는 이 주요목적 -즉, 해방-에 있어서 다른 예술들과 같다. 에즈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3페지 교훈시는 점차 도덕적인 훈계시, 그렇지 않으면 독자에게 어떠한것에 대해 시인의 견해에 설복시키기 위한 시로 국한되여 버렸다. 토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5페지 그것은 맑게 개인 하늘을 날고있는 새나 비행기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바라보는것과 같은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주 가까이에 나타났을 때 보기 시작해서 그것이 점점 멀리 가는대로 계속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굉장히 멀리 갈 때까지 그것을 볼수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우리가 그 위치를 가르쳐 주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것이다. 동명동상 152페지 시는 다만 한 언어로써만 표현할수 있고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언제나 상기시키는것이다. 동명동상 153페지 참다운 시는 개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월리스 스티븐스 [가치로서의 상상력] [시의 리해] 156페지 시는 신앙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동상동명 163페지 시는 그러나 그러한 문맥속에서의 느낌과 태도에 특히 초점을 모으는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행동이나 관념에 초점을 모으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클리언스 부르크스 [말하는 한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7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시란 실존의 모습뒤에 숨겨진 신비한 뜻을 자신의 본질된 음률을 되찾은 언어로써 표현한것이다. 시는 그래서 현세의 우리 머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하나뿐인 령적업무의 근본을 이룬다. 스테판 말라르메 [서한] [시의 리해] 223페지 시는 자신의 형식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령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라고 부추긴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 243페지 시가 금전의 종말을 포고하고, 혼자서 하늘의 빵을 이 지상을 위하여 쪼개여 나누어주는 때가 오리라.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3페지 화가는 의미를 그리는것이 아니다. 작곡가는 음악에 의미를 붙혀주는것도 아니다...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지배적인 힘을 누리는 령역-그것이 산문이다. 그러나 시는 차라리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편이다. 장 폴 싸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리해] 266페지 시라는것은 인간의 [신화]를 창조한다. 그런데 산문은 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시의 리해] 272페지 주해에서 시란 하나의 형태를 락서하는 령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4페지 시는 끊임없이 그의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속에서 더 멀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되는것이다... 시는 자유롭게 있는 법이다. 그의 운명을 우리는 결코 우리자신의 운명속에 가두어두지 못할것이다... 자기의 창조적인 령감이 자기의 욕망보다 더 멀리 자기를 이끌고 가리라. 피에르 장 주브 [대지와 시] [시의 리해] 293페지 시는 몽상가와 그의 세계를 동시에 구축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서문 [시의 리해] 303페지 한편의 시는 시를 꾸며진 대상과 시를 쓰고있는 자아와의 맞섬이며, 말하자면 외면의 풍경과 내면의 련관성인것입니다. 시의 모호함이 독자를 혼란시킴만큼이나 매혹시키며, 갈피를 못잡긴 하지만 그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든다. 그러므로 엘리엇이 한 평론에서 [시는 리해되지 않고도 전달될수 있다] 라고 말한것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8페지 시의 본질이 리해시키는데 있다면 그 누구도 시를 쓸수 없으니라. 동상 현대시는 그것들을 익숙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켜버린다... 시창작의 세가지 방식- 느낌, 관찰, 변형-중에서 현대에는 마지막것이 지배적이며, 그것은 객관세계에서뿐 아니라 언어와의 련관에서도 그러하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9페지 현대시는 종래의 의미를 인간성, 체험감상, 그리고 심지어 개인적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 동상 30페지 사물적인 소재 정신적인 소재 할것 없이 시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혼합시키며, 변의의 인광을 발하도록 한다. 동상 43페지   시는 일상적 삶에 대한 방벽이며, 그 상상력은 모든 현상을 뒤섞어놓는 자유를 누린다. 시는 예감과 마술을 본질로 하는 시적인간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습의 세계에 맞서는 노래하는 저항이다. 공허한 리상속에 토대를 둔 시는 불가사이한 신비성을 창조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리탈하게 되며, 그런만큼 언어마술에 의해 보상될수 있다. 동상 73-74 문제는 력사속에서 지닐수 있는 시적인것을 빼내는 일이다. 즉 일시적인것에서 영원한것을 끌어내는 일이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49페지 모든 건강한 인간은 이틀동안 먹지 않고 지낼수 있지만 시 없이는 결코 지낼수 없다. 동상 97페지 시는 가장 큰 수확을 가져다주는 예술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시는 나중에야 리익금을 만지는 그런 종류의 투자다. 하지만 그 리익금은 두두룩하다. 동상 동쪽 서정시는 도약한다. 하지만 늘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 물결의 너울과 같은 움직임으로 도약한다. 동상 102페지 시는 사장(死葬)되거나 몰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과학이나 도덕과 하나가 될수 없다. 시의 대상은 진리가 아니다. 시는 자기자신밖에 가지지 않는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101페지   현대시의 근본특성의 하나는 그것이 자연적인 삶과 점점 더 분리된다는데 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47페지 시는 은자의 예술이다. 코트 프리트 벤 [현대시구조] 195페지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 동상 259페지 참된 시란 그세계가 독창적이고 생동할수록, 은밀한 류사관계가 이루어지고있는 대립이 더욱더 상반적으로 된다. 체코의 랑만주의자 마챠 [현대시리론] 5페지 시전체는 하나의 큰 거짓말이여서, 처음부터 넉살좋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시인은 가치가 없다. 로만 야콥슨 [현대시 리론] 8페지 어떻게 시성이 시를 표현하는가? 시성은 언어가 언어로 느껴지고 이름 불리여진 대상이나 분출되는 정서의 단순한 표현이 아닌 경우에 존재하게 되며, 또한 언어들과 그 구성법, 언어의 의미, 언어의 외적형식과 내적형식등이 무심하게 현실을 가리키는 대신에 그것들 나름의 무게와 가치를 획득할 경우에는 존재한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 리론] 18페지 세계의 수많은 시에서 가장 뛰여난것은 대부분 자유률로 창조된것이다. 현대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련의 운동은 엄격한 률격 없이는 최악의것이였거나 최상의것이였다. 벤야민 흐루쇼브스키 [현대시의 자유률] [현대시 리론 ] 117페지 화려한 행위는 고도의 황홀경을 불어넣고, 모든 정복자는 시신을 창조한다. E.월터 [나의 보호자에게 보내는 송시]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시는 인류의 모국어이다. J.G.하만[투케이 아네스테티카] [세계명언사전] 746페지 시는 인간이 자기자신의 경의를 탐구하는 언어이다. C. 프라이 [타임]지에서 [세계명언대사전 ] 746페지 시는 그 주제가 진실이 아니라 진실과 같은 사물들의 시 G.채프맨 [부쉬당부와의 복수] [세계명언대사전] 746페지   시는 정서의 느슨한 변환이 아니라 ,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 엘리어트 [전통과 개인의 재능]                                                                                                                                                                                         [세계명언 대사전 ] 747페지 시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의 립법자이다. M.W. 셀리 [시의 번호] 동상 시는 단순히 사물을 말하는 가장 아름답고 인상깊고, 광범한 효력을 가진 양식이요, 여기 그 중요성이 있다. M. 아롤드 [비평론]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소네트(14행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곤거리는 먼 바다를 말해주는 진주조개요, 신비롭고 갈고 닦은 보석이며, 또한 잘 그린 예쁜 그림이다. R.W.길더 [소네트]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참된 시는 리해하기전에 통할수 있다. T.S. 엘리어트[단테론] [세계명언사전] 750페지 시는 의미해서도 안되며, 있어야 한다. A. 머쿨리시 [달나라의 거리] [세계명언 대사전] 751페지 왜 이 모든 것이 필요한가? 왜 기호가 대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특별한 관심을 두는것이 필요한가?왜냐하면 기호와 대상의 일치(A는 A1이라는)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것 말고도, 그러한 일체의 불직설성(A는 A1이 아니다)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8페지 ====================   기능(목적)에 대하여   시인이 그 시기의 한 대중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나쁜 시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시는 대중적인 생각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시인이 열정적으로 관여했던 문제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잔존하게 되는것이다. 호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6페지 첫째 우리들이 확언할수 있는것은 시는 즐거움을 주는것이여야 한다는것이다. 동상동명 147페지 우리는 시를 대중적인 시에만 국한해서는 안될것이다... 시인의 직접적인 임무는 그의 국어에 대한것이다. 즉 첫째로는 그의 국어를 보존하고 , 둘째로는그것을 혹대, 향상시키는 일이다. 동상동명 149페지 시인이 매우 급속히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있지 않고, 또 대중들이 벌써 알고있는것, 따라서 그들이 벌써 전시대의 시인들에게서 받은것을 다만 주고있는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올바른 소수의 독자를 가져야 한다는것은 중요한 일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문학은 철학이나 신학이나 종교의 애용물이 아니다. 문학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임무는 사변적인것이 아니고 감정적인것이기 때문에 문학은 사변적으로 결정될수는 없다. 엘리어트 [1927년 한 론문에서] [시의 리해] 376페지 문학의 기능의 하나는 바로 그 과학적언어를 정복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공격하는 바로 그 언어의 도움으로 문학을 완전히 읽어낼수 있다고 주장하는것은 지극히 모험스러운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한다는것은 문학의 실패를 전제하는것과도 같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 비평론] 247페지 작품제작에 재주 없는것을 , 이목을 끌게 마련인 정치적암시로 벌충하는것이 특히 열등한 문인들이 버릇으로 점점 굳어졌다. 시, 소설, 평론, 희곡, 모든 문학생산품이 이른바 [경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엥겔스 1851년 10월 MEL.P.119) ...재주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려 극단적으로 경향성 쓰레기를 보여주는 하찮은 친구가 있는데 사실은 독자를 얻기위해 그러는것이다. (엥겔스 1881년 8월 MEL 123) 레이몬드 월리엄즈 [제휴와 참여] [현대문학 비평론] 569페지 경향문학은 ... 정치적제휴로서의 참여였다. 인간을 위해서로부터 인민을 위해서로, 다시 혁명을 위해서로, 당을 위해서, 그리고 (변화하는) 당로선을 위해 서로 협소해져간것이다. 동상동명 571페지 참여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것이다. 동상 573페지 시의 리해는 소수의 대가에게만 속하는 령역이다... 시는 아름다운 소리만 내며, 어떤 의미도 련관도 갖지 않는다. 기껏해야 각양각색의 사물들의 순전한 파편들인양 몇구절 정도 리해나 될뿐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4페지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저항에의 열정적인 욕구, 그리고 증오의 산물로 칭하면서 시가 [신경쇼크]를 유발시키도록 권장하고 독자를 자극시켜 더 이상 리해하지 못한것을 자랑한다. 한때 기쁨의 무한한 샘이였던 시적인 의식을 이제 무진장한 고문도구들의 병기창이 되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64페지 [일루미네이션]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시이다. 이 시는 리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환각적인 자기방출의 뢰우이며, 기껏해야 위험에 대한 사랑의 전원적인 위험에 대한 저 두려움을 일깨운것으로 만족한다... 어느 문장이 말하듯 [다른 모든 선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업적을 남긴 창시자]임을 확인시켜준다. 이 시는 절대화한 현대적상상력의 최초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동상 113페지 나는 언제나 문학과 예술은 도덕과는 무관한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자신은 사상과 문체가 아름다운 것으로 충분하니다.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51페지 그리고 끝으로 몽상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전혀 리해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을 나는 결코 참아낼수 없었습니다. 동상 58페지 (1857년) 많은 사람들이 시의 목적은 어떤 교육적인것에 있고, 시는 때로는 의식을 강화시켜야 하고, 때로는 풍습을 향상시켜야 하고, 또 때로는 어떤 유용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는 자기자신 밖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시는 다른 목적을 가질수가 없다. 단지 한편의 시를 쓰는 즐거움을 위해 씌여진 시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하며 진실로 시라는 이름에 값하는 시는 없을것이다 동상 102페지 언어행위의 시성은 의사소통이 제일 중요한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때문에 여기 ‘검열’은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질수 있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3페지 시적표현의 목적은 미적효과에 있다. 그러나 시적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기능언어에서는 부수적현상에 불과할뿐) 미적기능은 언어기호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따라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실제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 얀 무카로부스키 [시적언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46페지 한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리해하는 지음을 만날 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음은 확실하게 리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지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리해력을 갖춘 사람인 지음을 만난다는것은 천년에 한번 있을가말가한 일이다. 류협 [문심조룡] 685페지 지나치게 심오하다고 탓을 하랴! 문제는 식견과 감별력이 차한데 있다... 마음의 눈으로 작품의 사상과 감정을 관찰하는 일은 육안으로 사물의 형체를 관찰하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아주 밝은 눈으로 보면 분간할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오직 심원한 인식능력과 감별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작품의 심오함을 포착해 낼수 있고 그로인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동상 695페지 작품의 예술성여부는 , 훨씬 높은 차원의 진동도에 기인하는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07페지 그가 사용했던 유사한 테마 주제들이 빅토르유고가 아닌 다른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너무 쉽게 교육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진정한 시의 가장 큰 적이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2페지 사람들은 공리 뻔한 사실의 방아를 찧고 또 찧는다. 그속에 들어갔던것밖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사상을 위해 그 전통을 벗어나는 순간, 시, 지혜, 희망, 미덕, 학식, 일화 그 모든 것이 몰려와서 도와준다. R.W.에머슨 [문학적윤리학] [세계명인 대사전] 743페지    
1433    캐나다 의사 - 노먼 베쭌 (베순) 白求恩 댓글:  조회:7618  추천:0  2015-09-02
  중국은 1949년 10월1일 첫 열병식 뒤 지금까지 모두 14번의 열병식을 거행했다. 마오쩌둥은 집권 이후 1959년까지 매년 국경절(10월1일)을 맞아 열병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첫 열병식에서는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군에서 노획한 무기가 대거 등장하면서 내전 승리를 과시했다. 1950년의 열병식에는 사상 최대인 2만4000여명의 병력이 참가했다. 열병식은 한국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았고, 1954년엔 김일성 당시 북한 수상이 참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혼란기였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전후로는 열병식이 열리지 않았다.   열병식은 1984년 덩샤오핑이 “열병식을 군 사기 고취와 군민 유대 강화의 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25년 만에 부활했다.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 때는 건국 50주년과 60주년 등 10년 주기로 거행됐다. 이번 열병식은 국경절이 아닌 전승기념일에 맞춰 열리는 첫번째 열병식이다. 중국은 열병식 당일 베이징 공항을 일시 폐쇄하고, 행사장인 천안문 광장 주변은 사실상 계엄 상태에 들어간다. 베이징 주변 수도권 지역 공장 1만2255개는 28일부터 가동 중지에 들어가 이미 베이징 하늘은 오염물질이 사라지고 파랗게 변했다. 이른바 ‘열병식 블루(Blue)’다.   중국은 이번 기념행사가 중국만의 전승행사가 아닌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기념행사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몇몇 눈에 띄는 외국 인사들도 초청했다. 중국의 항일, 반파시스트 전쟁이 스페인 내전 당시처럼 세계 양심세력이 함께 싸운 항쟁이었다는 것을 부각하려는 포석이다. 대표적인 초청 인사가 캐나다인 의사로서 항일 전쟁에서 부상한 중국 홍군들을 치료한 노먼 베순의 유가족들이다. 전도유망한 흉부외과 의사의 일상을 던지고 중국 전장에 뛰어든 베순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홍군을 치료하다 수술 도중 베인 상처로 인한 패혈증 탓에 1939년 49살의 나이로 숨졌다. 중국은 그를 ‘중국 인민의 동지’라고 칭한다.   중국은 2차대전 당시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운 퇴역 미군 공군 부대인 ‘비호대’(플라잉 타이거스) 노병들도 초청했다. 1941년 8월 중국 서남부 윈난성 쿤밍시에서 미군 비행 교관 클레어 리 셔놀트가 주도해 창설한 비호대는 폭격기 68대와 조종사 110명, 정비사 등 지상근무요원 150명으로 구성돼 일본기 300여대를 격추했다.   1984년 열병식에서 덩샤오핑이 군대를 사열하고 있다. =========================================================== 노먼 베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노먼 베순 박사, 1922년 헨리 노먼 베순(Dr. Henry Norman Bethune, 중국어: 亨利·诺尔曼·白求恩, 1890년 3월 3일 ~ 1939년 11월 19일)은 캐나다 출신의 외과 의사이자 의료개혁가이다. 스페인 및 중국의 전장을 누비며 인도주의적인 의료활동을 펼쳤다. 그의 중국식 이름은 "바이츄언"(白求恩)(흰 머리의 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중국에서는 그를 "바이츄언 의사"(白求恩大夫)로 칭송하여 "중국 인민의 영원한 친구"로 기념한다.     목차    1 초기의 생애 2 흉부외과의·의료개혁가로의 활동 3 스페인 내전 4 중국에서의 활동과 죽음 5 기념   초기의 생애 노먼 베순은 1890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그레이븐허스트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콤 베순,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앤 굿윈이다. 할아버지의 이름도 노먼 베순인데 할아버지 또한 유명한 외과 의사로, 나중에 토론토 대학 의대로 흡수되는 어퍼 캐나다 의학 학교를 세운 인물이다. 어린 시절 베순은 호기심 많고 모험심이 강한 아이였고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으로 여기저기 자주 이사를 했다. 1909년 그는 토론토 대학에 입학했고 가정형편이 넉넉치 않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비를 벌어 공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15년 캐나다가 참전을 선언한 바로 그날, 베순도 캐나다 육군에 입대하여 제1사단 야전병원에서 복무하였고 바로 프랑스의 전장으로 파병되었다. 그는 부상병 운반병으로 복무하다가 이프레스에서 독일군의 포탄에 부상당하고 영국군 병원에서 치료받고 부상병으로 본국 캐나다로 송환되었다. 캐나다로 돌아온 그는 다시 토론토 대학에 복학하였고 학업에 몰두하여 1916년 12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취득한 후, 영국 해군에 입대하였고 함정 군의관으로, 나중에는 캐나다 비행단의 의무장교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런던의 병원에서 일했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1923년 가을 에딘버러 명문가의 딸인 프란시스 캠벨 패니를 만났고 사랑에 빠져 이듬해 런던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미국과 캐나다를 전전하다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최초의 개인병원을 개업했다. 디트로이트에서 그는 뛰어난 수술실력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 돈을 가지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는 데 썼다. 그는 열정적으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만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폐결핵 치료수준은 형편없었다. 베순도 그 자신이 의사이면서 그저 요양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우연히 요양소에서 새로 고안된 급진적인 폐결핵 치료법인 '기흉치료법'을 알게 되었고 그 치료법에 의한 시술을 요구하여 다시 건강이 회복되었다. 흉부외과의·의료개혁가로의 활동 건강을 회복한 후 그는 일반 외과 일을 그만두고 흉부외과, 특히 폐결핵에 집중하게 되었다. 뉴욕 주의 레이 브룩의 결핵병원에서 2년동안 수술의로 있다가 몬트리올 맥길 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왕립 빅토리아 병원으로 옮겨 이 대학병원의 교수가 되었다. 몬트리올에서 그는 수술용 도구를 개량하고 새로운 폐결핵 수술 치료법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 하였고 캐나다에서 가장 뛰어난 흉부외과 의사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는 몬트리올의 성심병원 흉부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곳에서 폐결핵 치료에 몰두하던 중 그는 점차 가난이 바로 폐결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적인 의료보건활동을 지지하였고 가난한 노동자와 빈곤층의 치료에 앞장섰다. 1935년 그는 처음으로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했는데 소련의 의료보장에 감명을 받고 캐나다에 돌아와 비밀리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캐나다 의료체계에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려는 운동에 앞장섰으며 특히 아동의 보건상태 개선활동 및 미술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일했다. 당시 대공황의 여파로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많았으며 극빈층이 늘어났는데 베순은 이 가난한 환자도 마다하지 않고 받았고 그로 인해 가난한 환자들의 영웅이 되었다.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 당시 닥터 노먼 베순이 운영한 이동수혈부대 (1936년경) 1936년 11월 3일 노먼 베순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전 세계에서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들이 프랑코의 파쇼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는데 베순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던 것이다 . 그는 공화군 제5연대의 의무대에서 복무했는데 이동야전병원을 개설하고 전장에서 부상병을 치료하였다. 특히 그는 전장에서 직접 수혈하는 방식을 개발하여 자동차에 이동수혈대를 장착하고 전장을 누볐다. 당시는 아직 수혈의 시술이 활성화되지 않았는데 베순의 이동수혈부대는 전쟁터에서 부상병의 사망률을 75%까지 낮추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37년 6월 그는 스페인의 경험을 고국에 알리기 위해 몬트리올로 돌아왔고 이후 북미 여러 곳을 다니면서 스페인 내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이때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떳떳이 밝혔다. 중국에서의 활동과 죽음   네룽전장군과 대담하는 노먼 베순 (1938년) 1938년 1월 노먼 베순은 홍콩에 도착했다. 베순은 쑹칭링이 대표로 있는 중국원조협의회의 요청으로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행을 결심한 것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항일전의 근거지를 삼고 있는 옌안으로 들어가 마오쩌둥을 만나 부상병 치료를 위한 지원을 약속받고 의무대를 꾸려 전선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일본군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진찰기 지구였다. 그 곳에서 그는 네룽전의 팔로군 부대에 배속되어 부상병 치료에 나섰다. 중국에서 부상병 치료중 수혈할 혈액이 모자라면 그는 'O형'인 자신의 혈액형은 아무에게나 수혈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피를 뽑았다. 그는 부상병 치료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중 보건과 의료시설 개선에도 힘썼고 자신의 의술을 많은 중국인에게 가르치고 베풀었다. 또한 그는 중국의 실상을 미국에 알리고 외국에 의약품등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장제스 정부는 공산당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원금과 의약품원조를 차단하고 공산군은 점점 의약품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9년 가을 그는 수술중 실수로 손가락을 베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간단한 의약품(설파제)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감염이었는데 그것이 패혈증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노먼 베순은 패혈증으로 1939년 11월 13일 49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다. 기념   중국 허베이성에 세워진 베순의 기념상. 노먼 베순은 그의 생전 본국 캐나다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하였다. 1939년 12월 그가 사망한 직후 마오쩌둥은 〈베순을 기념하며...(紀念白求恩)〉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그를 기렸고 그의 유해는 허베이 성 스좌장 혁명열사능에 묻혔다. 吉林省에는 그의 이름을 딴 白求恩의과대학이 세워졌고 스좌장에는 그의 이름을 딴 3개의 병원이 있다. 캐나다에서도 요크 대학에 그의 이름을 딴 의과대학이 있고 그레이븐허스트의 그의 생가는 캐나다 정부에서 매입하여 노먼 베순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몬트리올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중국과 캐나다에서 공동으로 그를 기념하는 같은 디자인의 우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노먼 베순  
1432    숫자로 보는 열병식 댓글:  조회:5585  추천:0  2015-09-02
[ 2015년 09월 04일 10시 40분 ]   ====== 숫자로 보는 중국 열병식 첫번째 숫자 보겠습니다. 바로 1인데요. 어떤 의미가 있나 살펴보니까 시진핑 정부 첫 열병식이고, 중국 최초로 여군 의장대와 여군 군악대가 등장하고요. 외국군대도 처음으로 참가한다고 합니다. 이번 열병식에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중국 열병식에는 중국과 관계가 밀집했던 국가의 외빈들을 초대한 경우는 있었지만 국제 행사로 치르는 것도 처음인데요... ... 최초로 중국 여군 의장대도 참가합니다. 뛰어난 미모와 스펙으로 중국 내에서도 화제 만발인데요. 열병식에 여군 의장대 참석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선채로 3시간 움직이지 않기 40초 이상 눈 깜빡이지 않기 등의 훈련도 받는다고 하던데요? ... ...중국 지도자 옆자리에 서는 첫 여성지도자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총 49나라 국가원수 또는 정부대표가 참여하는데요. 관전포인트의 하나로 예상되는 것이 자리인데요... ... 중국은 열병식에 총 51나라를 초대했는데 두 나라 일본과 필리핀이 거절했습니다... ... 중국 열병식 관련한 다음 숫자 보여주시죠. 121입니다. 도통 감이 오지 않는 숫자인데요. 보니까 국기 게양식 과정에서의 호위부대 걸음수와 중국 인민이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난관을 극복해온 해의 수를 뜻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121걸음이 일본과의 첫 전쟁인 1894년 청일전쟁 이후 121년이 흘렀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인데요. 호위부대의 121걸음 수 어떤 메시지 담고 있나요? 일본을 넘어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봐야할까요? 다음 숫자 보겠습니다. 500인데요. 열병식에 동원되는 무기수를 뜻한다고 해요. 무기장비가 40여종 500개가 동원이 되는데 열병식 공개 미사일 수량은 100, 참가 군용기 수는 200개라고 합니다... ... 열병식 참가 병력이 12000명 이게 외국군 병력을 제외한 중국군 병력 수 라고 하는데 1만 2000명의 병력 이 가지는 의미도 남다를 것 같아요? 이번 열병식을 앞두고 특수부대원으로 원숭이 부대가 편성이 됐다고 합니다. 매도 동원됐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마지막 숫자 볼까요? 2400입니다. 어떤 숫자인가 보니 군악대 병사 수만 2400명이군요. 열병식에서 군악대의 등장과 숫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군악대가 연주하는 곡들도 다 의미가 담겨져 있죠?
1431    재미로 보기 - 열병식 최초, 최대... 댓글:  조회:5177  추천:0  2015-09-02
전승절 행사의 절정이 될 국기게양식. 톈안먼 광장 인민영웅기념비에서 게양대까지 국기 호위부대의 걸음 수가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번 행사에선 121걸음을 걷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부터 올해까지의 햇수를 의미합니다. 2009년 건국 60주년 국경절의 169걸음은 1840년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했습니다. 이번 열병식이 국경절이 아닌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에 최초로 열린다는 점에서,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뺏겼던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분석입니다. 최대 최초 기록도 많은데, 열병식 사상 최대 규모인 200대 정도의 군용기가 선보입니다. 또 현역 장성으로 구성된 장군부대와 여군 의장대도 최초로 참가합니다.  외국 군대와 군 대표단 그리고 참관단이 대거 참가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특히, 미국 미사일방어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최신 다탄두 핵미사일 '둥펑-41'이 처음으로 공개될지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습니다.
1430    재미로 보기 - <<원숭이, 독수리 특수부대>> 댓글:  조회:5201  추천:0  2015-09-02
중국 공군 소속 조련사가 ‘원숭이 특수부대’를 훈련시키고 있다. 호루라기를 불면 원숭이들이 나무에 올라 새 둥지를 땅으로 떨어뜨린다. 새떼를 내쫓기 위해 독수리를 활용하기도 한다. [사진 중국 인민해방군] 중국의 주력 전투기 200여 대가 동원되는 ‘초호화 에어쇼’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중국 열병식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중국은 ‘젠(殲)-10’과 전략폭격기인 ‘훙(轟)-6K’ 등 주력 전투기 200여 대를 동원해 하늘을 휘젓는 에어쇼를 선보일 계획이다. 전 세계가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인공위성을 이용해 오와 열을 조정하는 등 만전을 기하고 있다.  최근엔 에어쇼 도중 전투기와 새가 충돌하는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를 방지하기 위해 원숭이와 독수리까지 동원했다. 시속 700㎞로 날고 있는 전투기에 비둘기 한 마리가 부닥칠 경우 방탄 처리된 앞 유리가 깨질 정도의 충격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그 충격으로 인해 전투기가 추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새를 내쫓기 위한 고심 끝에 생각해낸 방법은 원숭이를 활용한 새 둥지 철거다. 원숭이를 활용하면 물을 뿌려 둥지를 땅으로 떨어뜨리거나 둥지가 지어진 나무 자체를 불태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중국 공군이 새 둥지 철거를 위해 투입한 원숭이는 모두 5마리로, 하루 평균 60개 이상의 새 둥지를 없애고 있다. 원숭이 특수부대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훈련과 한 손으로 둥지를 밀어내는 훈련을 거친 뒤 지난달부터 새 둥지 철거 작업에 본격 투입됐다.  원숭이 특수부대는 지난해 한 공군기지 관계자에 의해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새떼가 전투기와 충돌하며 이착륙 사고가 잇따르자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부대 내에서 기르 던 원숭이를 장난 삼아 나무에 오르게 했는데, 새 둥지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고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켜 ‘원숭이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조련사가 호루라기를 불면 원숭이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새를 쫓아낸 뒤 둥지를 땅으로 밀어낸다. 그렇게 둥지 하나를 없앨 때마다 조련사는 원숭이에게 사과 한 알과 땅콩을 주며 임무 수행을 독려한다.  ‘버드 스트라이크’를 막기 위해 중국 공군은 원숭이뿐 아니라 독수리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에어쇼가 열리는 구역 곳곳에서 원을 그리는 형태로 비행하며 다른 새의 접근을 막는 것이 ‘독수리 특수부대’의 임무다.
1429    력사자료 - 정률성 댓글:  조회:10774  추천:0  2015-09-01
즐겨찾기 정률성(郑律成,1914년 7월 7일 - 1976년 12월 7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곡가, 본명은 정부은(郑富恩)이다. 그는 위대한 작곡가인가 아니면 한명의 공산주의 음악가인가?   정율성 음악가(1914~1976)는 62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5년 정도를 북한에서 생활했다. 북한에 있을 동안 정율성은 ‘인민군행진곡’ 등 북한 군가와 한민족의 가락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들을 많이 창작했다. 정율성은 해방뒤 역사의 격동기에서 고향인 전라남도 광주로 갈 수 없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팔로군 소속이었던 정율성은 당의 명령에 따라 북쪽의 조선땅을 밟게 된다. 정율성 음악가의 중국에서의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생활은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정율성 음악가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정리한다. 이것이 정율성 음악가의 음악 인생속에서 그를 폭넓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정율성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속에서도 매순간 작곡가로서 열정을 다해 선율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자료는 (부인 딩쉐쑹 등 지음), (왕허핑 지음)등을 참고했다.   정율성은 해방 후 1945년에 북한 김일성에게 보내져 그곳에서 조선노동국가보안대 구락부, 조선노동당황해도선전부 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음악대학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한다. 이 시기에 정율성은 지금도 북한에서 불러지고 있는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하여 김일성에게 바쳤으며 그 노래는 지난 2000년 6월15일 김대중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웅장하게 연주됐다고 한다. 그는 음악으로 공산당을 선전하는 鬼才였다. 정율성 그는 북한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하고 다시 모택동에게 몸을 의지한다. 그는 중국에서도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혼란기인 1966년부터 1976년까지에는 모든 공식적 음악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비교적 젊은 52살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중국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를 “인민해방군의 가슴을 음악으로 격동시켜 일본을 물리친 혁명가”라고 떠드는 KBS는 정율성을 공산당 혁명가로 극구 칭송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그런 정율성을 기리는 영화 “음악가 정율성”을 1992년에 제작하였고,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는 2005년에 공산주의 혁명열사로 39년을 중국과 북한에서 살다간 정율성을 음악가라는 이름으로 “정율성 국제음악회”를 개최하였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광주 MBC측에서는 홍콩의 칸 인터내셔날과 합작으로 정율성을 영화화하겠다고 한다. 광주 저곳에서는 정율성을 마치 항일운동에 몸 바친 영웅으로 떠받들기에 한창이다.                 정율성과 부인 딩쉐쑹 부부 정율성 음악가의 모친 최영온(崔泳溫)씨와 친손녀 정샤오티(鄭小提)의 청소년기때 모습.     정율성은 효자였다. 북한에서 그의 생활이 약간 안정이 된 1948년 여름 모친 최영온(崔泳溫, 당시 75세)씨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모셔왔다. 모친이 도착한 날 정율성은 감격해서 어머니를 피아노 옆에 앉히고 “어머니, 어릴 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가르쳐준 노래를 부를게요”라며 피아노를 치면서 소리높여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이후 정율성을 떠난 적이 없다. 평양에서 베이징에 와서 줄곧 정율성 부부와 함께 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근면성실했다. 1963년 낙상을 당해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골절은 피했지만 외출이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정율성은 중의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를 원했는데 항상 어머니를 부축해 모시고 다녔다. 회의가 있을 때도 어머니의 녹창을 막기위해 몸을 돌려 눕혀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머니는 1964년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중에 정율성의 조카 정상훈(鄭祥勛)이 유골을 전라남도 광주에 안장했다.   1950년 10월 평양을 떠날 때 정율성은 당시 성냥, 소금과 마른 식량을 준비해서 77살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평양을 떠나게 된다. 이때 중국대사관의 정무참사관인 차이청원은 특별히 지프차를 보내 정율성의 철수를 도왔다. 중국정부는 당시 정율성 모자외에 다른 한명과 함께 지프차로 신의주까지 모시도록 특별 지시를 내려보냈다칠흑같이 깜깜한 밤에 운전기사석 바로 옆 앞자리에 앉아서 운전기사에게 길을 알려주며 철수를 도왔다. 당시 저공비행하는 전투기 소리와 멀리 번쩍이는 조명탄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고 운전기사는 회고했다. 낮에는 전투기 공격 때문에 차를 위장한 채 세워두고 저녁에 출발해 한밤중을 달려서 갔는데 길가에 민가들이 불타고 있는 곳도 있었다. 이렇게 이틀밤을 꼬박 달려서 신의주에 도착했다. 정율성은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 베이징인민예술극원(藝術劇園)에 배치를 받게된다. 이때부터 정율성은 국적이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인이 된다.   초등학교 시절 신현 중학교 시절 팔로군 행진곡 실제 작사자인 궁무       1946년 2월에 정율성과 딩쉐쑹은 처음으로 김일성 주석(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당시 30대 중반의 김일성 위원장(1912~1994)은 각 방면의 역량을 모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이 중국공산당의 많은 고위층 지도자들과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중요한 임무를 부여한다. 그것은 바로 중국 북만주에서 식량을 빌려오는 일이었다. 북한은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고 남한은 식량 기지였는데 당시 남북이 막힌 상태에서 북한의 식량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   딩쉐쑹은 하얼빈(哈爾賓)으로 가서 서북지역의 지도자들을 만났는데 당시 임시로 동북국(東北局) 부서기를 맡은 가오강(高崗)과 서만분국(西滿分局) 서기 리부춘(李富春)을 만나 식량지원을 약속받게 된다. 동북국 평양사무실의 책임자인 주리즈(朱理治)가 1947년 6월 27일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중국은 당시 3만톤의 양식을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돼 있다. 딩쉐쑹이 식량특사로 일을 할 때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을 극진히 대접하는데 딩쉐쑹은 출국할 때나 귀국할 때 김 위원장의 집에서 묵게 된다. 김일성 위원장은 딩쉐쑹이 임무를 완수하자 큰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일본군에게서 거둔 흰색 비단낙하산을 기념선물로 선사한다. 이 낙하산은 비단실로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졌는데 딩쉐쑹은 이 낙하산으로 정율성에게 한벌의 와이셔츠를 만들고 자신과 딸용으로 치마를 만들어 기념으로 간직한다.   정율성은 부인이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자 김일성 위원장을 접견한 뒤 옌안시절 지도자였던 김두봉(金枓奉)과 대동강변에서 샴페인으로 경축파티를 열었다. 당시 동북지역의 전쟁 상황은 소련과 국민당이 을 맺어 일본에게서 뺏은 철도와 성시(城市)를 국민당에게 넘겨주기로 한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국민당은 동북지역으로 대병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쓰핑(四平)전쟁뒤 국민당에 창춘(長春), 지린(吉林) 등을 내주고 쑹화장(松花江) 북쪽까지 전세가 밀리고 있었으며 북한을 은폐된 후방으로 삼아 남만작전(南滿作戰)을 펼 때 지원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북국은 1946년 6월 북만분국(北滿分局) 비서장인 주리즈(朱理治)를 동북국 주평양 전권대사로 부임시켰으며 소련과 미국의 이목을 피해서 대동강 서안 채관리(釵貫里) 104번지에 “평양이민회사’(平壤利民公司)란 이름으로 간판을 걸었다.   주리즈는 옌안의 오랜 혁명동지로 정율성의 곡을 아주 좋아할 정도로 친한 관계였다. 주리즈가 책임자로 있을 때 딩쉐쑹은 평양이민회사에 소속돼 2년동안 물자와 부상병 운반 등 업무에서 많은 일을 했다. 당시 딩쉐쑹과 동북국 평양사무소가 돌본 부상병과 가족 등을 합한 수가 1만8천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북한의 도로를 이용해서 북만주의 곡물, 면화, 석탄 등 물자를 다롄(大連)으로 옮겨갔으며 동북지역의 부대가 긴급히 요구해 보낸 식염(食鹽), 포목과 약품, 의료기계, 공업연료 등은 1947년 21만톤, 1948년에 30만톤에 달했다.   북한은 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으며 일본군이 남긴 전략물자중 2000여 차량분을 중국에 무상 혹은 교환방식을 통해 지원했다.   북한은 당시 남북만(南北滿)과 해상을 통해 베이징으로 가는 인력들의 중간 통과지였으며 통과인원은 1946년 3천명, 1947년과 1948년은 각각 1만명에 가까웠다. 딩쉐쑹의 탁월한 업무성과에 따라 조선노동당중앙은 1946년 가을 딩쉐쑹을 조선노동당중앙교무(僑務, 화교업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당시 한반도에는 5~6만명의 중국 화교가 있었고 북쪽에만 2만여명이 있었다. 딩쉐쑹은 1949년초 화교업무가 중국상업대표단으로 넘어갈 때까지 이 일을 맡는다. 딩쉐쑹은 1949년 신화사(新華社)주평양분사 사장에 임명된다.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 간부와 함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 후 옌안(延安) 팔로군본부는 무정(武亭) 사령관의 인솔하에 조선의용군 전체 인원에 대해 조선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한다. 이에 따라 정율성 음악가와 부인 딩쉐쑹과 2살난 딸 샤오티(小提) 등 가족들도 같이 조선으로 향한다.   부인 딩쉐쑹은 당시 중국 공산당내에서 여전사로 이름을 떨쳐 발전가능성이 높았지만 남편 정율성의 뜻에 따라 조선행을 흔쾌히 승락한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옌안(延安)은 기쁨에 겨워 사흘동안 대축제 분위기였다. 폭죽과 함께 나팔소리와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고 남은 음식을 서로 나누는 축제가 계속됐다. 정율성을 포함해 수백명의 조선인 혁명가들도 “조선독립만세!” “조선민족해방만세!” “위대한 항일전쟁만세!”라는 구호를 연이어 외치면서 서로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중국은 8년동안의 항일전쟁이 마감되었고 조선은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약 400명이었는데 떠나는 날 모두 정율성이 작곡한 ‘연안송’(延安頌)을 부르고 옌안에 우뚝 솟은 바오타산(寶塔山)을 바라보면서 서운해했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의 주머니에 대추와 사과를 넣어주며 이별을 고했다. 정율성은 당시 귀국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조국을 향하여 전진’(向祖國前進)이란 노래를 작곡했는데 의용군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옌안을 떠났다.   “건장하고 용감한 조선의 용사들이여, 오늘 화북지역을 넘어서 내일은 만주를 지나서 길위의 장애물을 뚫고, 조국을 향해 전진한다. 우리는 용감하게 투쟁해갈 것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대열은 며칠 걸려 황허(黃河)에 도착해서 거친 물살의 위험속에 강을 건넌뒤 산시(山西)지역의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추운 날씨속에 높은 산을 넘었다. 일행중 나이 어린 아이가 추위에 얼어 숨지기도 했다.   정율성과 딩쉐쑹은 모든 옷을 딸 샤오티에게 입히고 당나귀의 등에 얹은 나무상자에 샤오티를 담아서 어렵게 전진을 했다. 갑자기 앞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고 폭 50㎝ 정도의 꼬불꼬불한 길 밖에 없었다. 이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는데 나무상자를 얹은 당나귀가 지나가기는 더욱 힘든 길이었다.   한번 실족을 하게 되면 샤오티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정율성은 신체 건장한 젊은이들이 앞에서 당나귀의 고삐를 잡도록하고 뒤쪽에는 전우(戰友)이자 시인인 곽소천(郭小川)에게 나무 상자와 당나귀의 꼬리를 잡게 해 간신히 이 길을 벗어났다.   일행은 장자커우(張家口), 화이더(懷德), 청더(承德), 진저우(錦州) 등을 거쳐 당시 동북공업중심지인 선양(審陽)에 도착했다. 3개월여 걸린 고난의 행군끝에 1945년 12월 안둥(安東, 현재의 단둥으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음)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이 기간동안에도 정율성은 ‘3.1행진곡’(3.1독립운동을 기리는 노래), ‘조선해방진행곡’ 등 2곡을 지었다   옌안에서 북한으로 복귀한 공산당원들은 초기에는 김일성 주석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직무에 편성이 되었다. 정율성과 딩쉐쑹의 당적도 조선노동당으로 옮겨졌다. 정율성은 조선노동당 황해도위 선전부장에 임명되었으나 딩쉐쑹은 조선말을 몰라서 아무런 일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남편을 도와 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정율성이 해주(海州)에서 토지개혁후 선거업무를 할 때 딩쉐쑹은 옌안에서의 경험을 살려 연설문을 작성해 내용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딩쉐쑹은 당시 김밥, 된장찌개, 김치 등 한국음식에 익숙해지며 한명의 일본인 보모를 둘 정도로 모처럼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휴일에는 정율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족을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놀기도 했으며 사냥감을 모닥불에 구워먹기도 했다.   샤오티는 당시 3살이었는데 보모에게서 일본어, 러시아에서 항일운동한 이웃에게서 러시아어와 딩쉐쑹의 중국어와 정율성의 조선어 등 간단한 4개 국어를 한 두마디씩 하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율성은 황해도위 선전부장뒤 1946년 평양의 조선보안대(조선인민군의 전신) 클럽 부장(중국군의 문화 부장에 해당)으로 명령이 내려져 바쁘게 활동을 하게 된다. 정율성은 당시 본인이 원하던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인민군협주단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종사한다.   그래서 단원들을 선택하고 악곡을 창작하고 지휘업무를 하게되며 평양이민회사를 통해 다롄에 가서 교향악기를 구입했다. 협주단을 만든 뒤에는 전국각지의 순회연주를 해서 김일성 주석의 깊은 관심을 받았다 김일성 주석은 100여명의 전문협주단과 같이 기념촬영을 하기도 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정율성은 음악창작의 두번째 수확기에 접어들었다. 정율성은 1947년과 1948년에는 집에 별로 없을 정도로 바빴는데 1950년까지 30여곡을 만들었다.   당시의 음악은 북조선의 군민(軍民)을 위한 곡으로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대합창과 ‘동해어부’ 대합창 등 10여편의 작품을 지었다. 또 옌안시절 연출하지 못한 ‘항일기병대’ 대합창을 다시 작곡하고 평양과 각지에서 200여 차례 공연과 방송을 했다. ‘조선인민군행진곡’은 이후 북한의 군가가 된다. 중국음악평론가와 작곡가들이 “두 국가의 군가를 작곡한 예는 세계음악사상 유례가 없다”고 평가하게 된 이유다.   이 당시의 곡들은 옌안 당시의 창작 기풍을 답습했고 한민족 음악의 새로운 품격을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정율성은 조선인민회의, 인민위원회, 문예학술총동맹 등으로부터 4차례 상장과 상금을받게 된다. 1948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모범노동자’의  칭호를 얻는다.   정율성은 그뒤 평양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에 임명되었다. 정율성은 총성과 포성중에 미군기가 공습하는 위험한 시각에도 창작활동을 계속했고 음악에만 매달렸다. 그는 당시 ‘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흩날리네’(共和國旗幟迎風飄揚), ‘조선인민유격대전가’(朝鮮人民遊擊隊戰歌), ‘우리는 탱크부대’(我們是坦克部隊), ‘전사의 맹세’(戰士的誓言) 등 다수의 가곡을 남겼다.   중국이 1949년 10월 1일 신중국 탄생을 선포한 지 1주일뒤 중조 양국은 외교관계를 선포했다. 이에 따라 정율성은 ‘조중우의’(朝中友誼)라는 곡을 만든데 이어 ‘신중국을 찬양하는 노래’(歌頌新中國)를 작곡했다 맨오른쪽이 연안파의 사령관 무정(武亭)이고 맨 왼쪽이 정율성. 연안파는 해방뒤 북한으로 들어간뒤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게 된다 당시 연안파인 무정(武亭, 1905~1952년) 장군도 힘을 잃은 상황에서 연안파 출신들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부인 딩쉐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내가 신화사분사 사장을 계속하고 중국 대사관의 외교관으로 평양에 계속 남았다면 정율성에게 더욱 곤란했을 것으로 본다. 정율성은 북한의 주류사회에 융합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비록 내가 조선사람이 될 것을 결심하고 조선 국적을 가지고 노동당원으로서 모든 일을 새로 시작했더라도 그 뒤에 전개된 상황을 볼 때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남편과 각자가 갈라서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 부부사이는 관계가 너무 깊었다.”   정율성이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정율성은 중국 생활을 10여년 동안 했고 중국어로 대화가 가능했으며 쓰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는 중국에서 공산당에 참가했고 많은 친구들이 있으며 중국의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즉 해방전쟁 시기에 ‘연안송’,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썼으며 중국으로 가더라도 조선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딩쉐쑹은 당시 자신들의 생각이 매우 천진했다고 회고한다.   정율성은 당시 “나는 한명의 공산당원이며 국제주의자이다. 조선이든 중국이든 모두 같은 사회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북한내 현실은 정치적인 집권을 놓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딩쉐쑹은 주평양 중국대사관이 설치된 뒤 대사관을 통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부부의 중국귀국과 정율성 음악가의 중국국적 취득을 요구하게 된다. 저우언라이는 즉시 붓으로 쓴 친필 서신을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며 김일성의 허락하에 딩쉐쑹은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김 주석은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간부들을 배양해 줬는데 정율성 한명을 데려간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라며 호방하게 승낙했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승리후 조선의용군 전체인원이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기념촬영한 모습. 맨앞줄 가운데에 정율성과 딸 샤오티의  모습이 보인다 1950년 12월 중국인민지원군창작팀으로 다시 북한에 도착한 정율성과 작사자들 모습   정율성은 그러나 2개월뒤인 1950년 12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에 소속돼 조선땅을 다시 밟게 된다.   정율성은 중국인민지원군창작조의 성원으로 류바이위(劉白羽) 등 작가 4명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가 1951년 4월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이들은 중국에서 온 손님으로 조선노동당 중앙의 열렬한 접대를 받았다. 비록 바깥은 연일 포성이 울리고 평양은 이미 포화로 폐허가 되었지만 지하실은 안전했고 창에 커튼이 처져있었으며 작은 원탁테이블에는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정율성 일행은 이곳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점심과 저녁때마다 조선노동당 중앙영도들이 오찬과 만찬을 제공했고 김일성 주석과 정율성은 조선어로 이야기를 주고 받기도 했다.   1951년 1월 초순에 중국지원군은 제3차 작전에 들어갔는데 9일동안의 연속작전에 의해 37도선 이남으로 내려갔고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인천항까지 들어갔다. 이때 정율성은 지원군을 따라서 서울까지 내려와 기와조각과 벽돌조각을 헤집고 조선궁정음악의 악보중에서 모두 2부 18집의 고전악보를 찾아냈다. 부인 딩쉐쑹은 1996년 방한해서 이 악보를 기증해 한국음악사상 진귀한 문헌으로 보존되고 있다.   정율성은 한강 남단의 백운산에서 류바이위와 함께 ‘백운산을 노래한다’(唱歌白雲山), 웨이웨이(魏巍)와는 당시 ‘사랑하는 군대, 사랑하는 사람’(親愛的軍隊親愛的人)을 지었다. 또 어우양산쭌(歐陽山尊)과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과 ‘지원군 십대 찬가(志願軍十贊)를 썼고, 링쯔펑(凌子風)과는 빠른 선율의 ‘한강소창’(漢江小唱) 등을 작곡했다. 이 곡들은 모두 정율성이 중국 국적의 인민지원군 신분으로 창작한 곡들이다. 이 곡들은 현재 단둥(丹東)에 있는 항미원조기념관(抗美援朝記念館)에 전시되어 있다.                               병환으로 사망하기 직전     정율성의 딸 정샤오티는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직접 배웠으며 현재 베이징 실내합창단 단장을 맡고 있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생가를 남창시장이 방문하는 장면     광주에서 매년 열리는 정률성음악회 ===============================       중국의 간거했던 항일전쟁 승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첨단 무기를 통해 중국의 군사굴기를 과시하면서 주요 2개국(G-2)으로 올라선 중국의 “글로벌 파워”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자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한국 박근혜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 등 정상급 외빈 50여명과 각국 외교사절, 중국의 전현직 지도부 등이 톈안먼 성루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인 음악가가 작곡한 음악이 톈안먼 광장의 상공에 울려퍼졌다. 작곡자는 바로 중국의 군가 “태양따라 앞으로”의 작곡가 정율성이다. 정율성은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하이를 거쳐 중국 난징에 이르렀다. 난징에서 “의열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크리노와교수는 그의 음악천부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동방의 카루소”라고 격찬하였다. 1937년 정율성은 상하이 부녀구국회 지도자이며 조선혁명가 김성숙의 안해인 두군혜의 도움으로 “중국혁명의 성지” 옌안으로 떠나게 된다. 열아홉 살의 정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옌안에 도착하였다. 옌안에서 루쉰예술학원을 나왔고 “팔로군 행진곡”, “연수요”, “항전돌격운동가”등 50여 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팔로군(八路軍)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후에 설립 된 공산당의 주력부대로서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다. 당시 팔로군과 손잡고 조선의용대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팔로군의 통일전선 파트너였던 조선의용대는 대일 전선에서 스파이와 배후교란 등 매우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맡았다. 정율성은 연안에서 탁월한 작사자 두 명을 만나는데 “팔로군 행진곡”의 작사자인 궁무(公木)와 “연안송(延安頌)”의 작사자인 여전사 모예(莫耶)이다.     ↑옌안시절의 정율성 1939년 정율성은 시인 궁무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팔로군 행진곡”의 노랫말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전선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았던 공무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녹인 노랫말을 정율성에게 건네주었고 정율성은 같은해 8월에 곡을 완성한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우리의 대오/ 조국의 대지 위에 섰다/ 민족의 희망을 안은/ 우리의 힘 막을자 누구냐/ 우리는 싸움의 전위/ 우리는 민중의 무장/ 두려움없이 굴함 없이 용감하게 싸워/ 왜놈들을 국경밖으로 몰아내자/아,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1939년 겨울, “팔로군 행진곡”은 루쉰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소책자로 책으로 엮어져 연안 전체와 전군, 전후방(前後方) 할 것 없이 배포되었다. 이듬해 정율성의 지휘 아래 “팔로군 행진곡”의 첫 공연이 옌안에서 열렸다. “팔로군 행진곡”은 건조한 황토고원에서 불붙듯 삽시간에 퍼지면서 모든 항일전사들의 가슴에 깊이 아로 새겨졌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팔로군 행진곡”은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재빨리 널리 유전되었다. 그후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였다. 1990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 역시 정율성 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연안 시절 정율성은 그 훗날 중국 최초의 여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열아홉 살 나는 중국 쓰촨의 처녀 정설송은 뛰어난 사업 능력과 미모로 연안에서 소문높은 인기 인물이었다. 그녀는 “연안송”의 작곡자인 정율성을 몹시 숭배하였다. 하지만 정율성의 외국인 신분에 걸려 둘의 사랑은 곤경에 처하였다. 이때 마침 팔로군 포병퇀 퇀장 조선인 무정장군이 마침 연안에 도착하여 정율성에 대해 담보하고 나섰다.   이국적 청춘남녀는 시련을 거쳐 드디어 1941년 말 혁명성지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듬해 딸 정소제(郑小提)가 태어났다.   결혼 후 정율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에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하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율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다.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고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도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 그리고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김일성 주석은 1948년 그 공로를 인정해 정율성 선생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조선인민군군가”는 지난 2006년과 2007년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해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하기도 했다.   중국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탕허(唐河)는 “전 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동시에 작곡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일 것”이라고 극찬했다. 이로서 정율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1952년 정율성은 중국에 돌아와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윈남, 따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중국국가주석 모택동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율성은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사후 정율성은 중국의 공신들만을 대우하는 “팔보산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비문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민은 영원하며, 율성동지의 노래도 영원하다. 중국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1978년 베이징 음악출판사에서 “정율성가곡선”이 출판되었고 2009년에는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율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 ↑정율성의 음악에 맞추어 진행 된 중국 전승절 열병식 지난해 7월 방한한 시진핑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율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율성의 위상은 높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정율성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왔다. 그가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전쟁과 깊은 관계를 맺은 탓이다. 지난 세월 이념과 냉전(冷戰)의 장벽 속에 갇혀서 정율성 선생의 실체(實體)는 한국인들에게는 오랫동안 베일 속에 가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최근 정율성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중한 양국에서는 기념음악회, 일대기 영화화 등 관련 행사들이 잇달아 열리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정율성의 일대기는 일찍 중국의 조선족 영화인들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여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2002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중국인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율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옌안에서 뿐만 아니라 베이징, 톈진, 창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정율성의 음악에 맞추어 진행 된 중국 전승절 열병식     영화는 만들어진 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율성에 대해 이념의 색안경을 건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심한 이데올로기의 질곡이 여전히 한 천재음악가의 명성과 자유를 옥죄고 있다. 때문에 정율성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항일독립투쟁 포상은 물론 공적조차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의 살벌하고 등등한 치하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 애국투사들이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들의 치열한 반일의식에 대해서도 세상이 다 아는 일임에도 말이다.   정율성선생이 한국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민족의 대음악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진귀한 기록을 세워 놓은 인물로서 선생은 일제치하 중국대륙을 무대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 하면서 국가의 자존과 민족의 얼을 잊지않았고 몸과 혼을 불살랐다. 음악가로서나 혁명가로서나 그이는 온 민족의 추앙을 받을 만한 선각자임이 분명하다.   총 100분 가량 진행된 전승절 열병식 전 과정은 관영 중국중앙 CCTV를 통해 생중계되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전송됐다.  따라서 정율성이 남긴 장쾌한 선율은 온 누리에 메아리쳤다. 이를 계기로 그이의 생애 그리고 음악이 하루 빨리 이념의 구름장을 넘어 만방에 알려지고 더 높이 울려 퍼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1428    중국 몽롱시 창시자의 대표 시인 - 北島 댓글:  조회:5136  추천:0  2015-08-31
아물지 않은 상흔을 노래하는 시인 베이다오 모더니즘 시라는 건 서방의 시각일 뿐                   지난 ... ... 소공동 롯데호텔에서는 한국디지털문학가협의회와 한국언어문화원이 공동 주최한 중국의 망명시인 베이다오(北島.56)의 초청강연회가 열렸다. ... ...세종문회회관에서 열린 제 2회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방한한 베이다오는 중국 몽롱시의 대표 작가로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현대 중국문학에 위대한 변화를 가져다준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197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직후, 오늘이란 잡지에 실린 그의 시는 집단 실어증 상태로 억눌려 있던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들을 고무시켰고 89년 6.4민주화운동 당시에는 톈안먼 광장에 그의 시 이 대자보 형식으로 곳곳에 나붙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1989년 유럽으로 망명한 이후 7개국을 돌아다니다 현재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조국의 전체주의적 현실, 팔레스타인의 학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서명에 참여하면서 독자적이고 진보적인 지식인의 길을 걸어왔다. 이번 초청강연회에서 그는 국내 문인들의 관심 속에 출간된 ‘한밤의 가수’(1972년부터 1998년까지 창작한 시를 수록한 시집) 사인회를 가졌다. 시집에 수록된 여러 편의 시와 미 발표작 5편을 직접 낭송하기도 하였다. 이날 그는 필명인 北島(북쪽지방 바다에 있는 침묵의 섬)처럼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는 “1990년 여름 고은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한국에도 군사독재시절 옥중시인이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지금 보니 한국은 크게 변화한 것 같다. 한국에 와서 서대문 형무소, 5.18 기념관 등을 둘러보았다. 민주와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은 한 세기의 대가를 치러 이루어졌다. 오늘은 중국에서 6.4가 일어난 지 16주년이 되는 날이다. 언젠가 중국에도 그 간의 세월에 쌓인 먼지를 씻어줄 수 있는 공동묘역이 생기길 희망한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는“20세기는 인류의 황금기이다. 공업혁명과 각종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류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의 어둠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면서 동시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밝음과 어둠의 양면성이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중국의 솔제니친이라고 불린다. 그의 시는 혁명 시로 간주되기도 하고, 모더니즘적 요소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런 시각에 대해 그는 “나의 시는 모더니즘 개념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다만 서방언론의 시각일 뿐이다. 위대한 시는 거대한 메아리를 낳는다. 시는 세월의 안개를 뚫고 다가와야 한다. 언어는 시의 현실이며, 시는 바뀐 현실을 보여준다. 지금의 우리 언어는 무거운 이데올로기에 의해 공통된 운명의 짐을 지고 있다.”면서 저항적인 이미지에 국한된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자신의 의도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그의 시에 날짜와 시간이 없는 것도 시를 시대적인 배경에서 해석하기보다는 시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망명 이후 시와 세계관의 변화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 크게 변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고려대 허세욱 교수는 “베이다오의 시는 회의와 불신, 부정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시대에 대한 개인의 저항과 분노가 시를 만들어냈고, 사물을 직접 투시 하는듯한 그의 작풍은 많은 젊은이들을 격동시켰다. 중국에는 베이다오 말고도 많은 저항 작가들이 있었고, 수많은 지하 간행물도 있었지만, 베이다오가 주목받는 이유는 저항적이고 혁명적인 내용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고도의 승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며 그의 시가 보여주는 예술적 감각을 높이 평가했다. 작가는 책벌레처럼 어둠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라고 베이다오는 말한다. 많은 이들은 그를 저항시인으로, 노벨상 후보로  기억하지만 그는 다만 시인의 길을 갈 뿐이다. 뭐라 이름 할 수 없는 세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어둠과 고독, 미처 아물지 않은 상흔들을 그는 기억하고 회상한다. 그리고 끝없는 메아리로 어둠과 안개를 뚫고 빛을 밝힌다. 마치 '한밤의 가수'처럼. 조윤덕 기자    베이다오 시인 약력 △ 1949년 중국 베이징 출생(본명은 자오전카이[趙振開])  △ 1960년대 후반 베이징의 명문 제4중학 재학 중 문화대혁명을 만나 잠시 홍위병 활동. 1968년 졸업  △ 1969년 허베이의 한 농촌에서 의무 노동.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건설노동자로 11년간 복무  △ 1970년부터 시 창작 활동. 중국 현대시의 흐름을 바꾼 몽롱(朦朧)시의 주요 창시자.  △ 1976년 저우언라이 총리 사망을 계기로 촉발된 4.5 청명절 시위 주도.  △ 1978년 중국 최초의 민간 문학잡지인 『오늘(今天)』창간. 문혁이후 새로운 문학운동 주도. 단편소설 『파동』발표  △ 1986년 중국에서 『베이다오 시선』, 『6인 시선』출판  △ 1989년 중국의 유명한 민주인사 웨이징성(魏京生) 구명운동 전개. 천안문 사건 직전에 유럽으로 망명. 이후 유럽 6개국과 미국 각지를 방랑하며 강연. 199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정착. 89년 6.4천안문 민주화운동 당시 그의 시 『대답(回答)』이 대자보 형식으로 광장 곳곳에 부착됨.  △ 1992년 노벨 문학상 후보  △ 1995년, 1996년, 1999년에 각각 시집 『한밤의 가수』, 『영도 이상의 풍경』, 『자물쇠 열기』를 대만에서 출판.  △ 2002년 모로코 국제시가상, 2005년 독일 지네트 쇼큰 문학상 수상 .  △ 2004년 산문집『실패한 책』중국에서 출판.   대 답  비겁은 비겁한 자들의 통행증이고 고상함은 고상한 자들의 묘비이다 보라 저 금도금한 하늘에 죽은 자의 일그러져 거꾸로 선 그림자들이 가득 나부끼는 것을. 빙하기는 진즉 지났건만 왜 도처에 얼음뿐인가 희망봉도 발견되었건만 왜 죽음의 바다에는 온갖 배들이 앞을 다투는가   내가 이 세상에 올 때는 다만 종이와 새끼줄 나의 그림자 그리고 심판에 앞서 판결문을 읽기 위한 목소리를 가져왔을 뿐이다.   너에게 고하노니, 세계여! 나는 믿-지-않는다 네 발 아래 천 명의 도전자가 있다면 나를 천한 번째로 생각하라   하늘이 파랗다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 천둥의 메아리를 나는 믿지 않는다 꿈이 거짓임을 나는 믿지 않는다 죽으면 보답이 없다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   바다가 제방을 무너뜨리고 끝내 터지고 말 것이라면 그 모든 쓴 물들을 내 가슴으로 받아내리라 육지가 솟아오르고 말 것이라면 인류가 생존을 위한 봉우리를 다시금 선택하게 하여라   새로운 조짐과 반짝이는 별들이 훤히 트인 하늘을 수놓고 있다 그것은 오천 년의 상형문자이고 그것은 미래인들의 응시하는 눈동자다. ※1989년 톈안먼 광장에 게시되어 중국 젊은이들을 고무시켰던 베이다오의 대표작 [출처] 아물지 않은 상흔을 노래하는 시인 베이다오 모더니즘 시라는 건 |작성자 난공산당이싫어요  
1427    중국 현대 최고 10대 시인 댓글:  조회:4920  추천:0  2015-08-31
ㆍ문학지 ‘종산’ ㅡㅡㅡ10대 시인 선정 발표 ‘중국의 솔제니친’으로 불리는 베이다오(北島·61)가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선정됐다.  중국 장쑤성 작가협회가 발간하는 중국문학지 ‘종산(鍾山)’ 최근호는 1979~2009년 작품을 발표한 시인들을 대상으로 ‘중국 10대 시인’을 선정한 결과 베이다오가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교수·시인·평론가 등 12명으로 구성된 중국 10대 시인 선정위원회는 베이다오를 만장일치로 현존 중국 최고시인으로 추천했다. 2~10위에 오른 시인은 시촨(西川), 위젠(于堅), 자이융밍(翟永明), 창야오(昌耀), 하이쯔(海子), 어우양장허(歐陽江河), 양롄(楊煉), 왕샤오니 등이다.   베이다오는 사회주의 선전문학에 반대하며 개인의 서정과 감정을 중시하는 현대 중국 ‘몽롱파’ 문학의 대표자로 꼽힌다. 베이징 출신인 그는 1978년 시인 망커(芒克) 등과 함께 시전문지 ‘오늘(今天)’을 창간하며 중국 내 시 창작운동을 이끌었다. 인권운동에도 참여한 베이다오는 89년 톈안먼 사태에 연루돼 90년대에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2008년 이후 홍콩 중문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나 아직도 중국 본토 방문은 금지당하고 있다. 자오전카이(趙振開)가 본명인 베이다오는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 깃든 서정시를 발표해 92년을 비롯해 몇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베이다오의 작품은 낭송하기가 쉬워 독자층이 많다. 그가 30여년 전에 쓴 정치서정시 ‘대답(回答)’의 첫대목 ‘비루는 비루한 자의 통행증이고, 고상은 고상한 자의 묘지명이다’는 구절은 지금도 중국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또 본문이 ‘망’(網)이라는 한 글자로 이뤄진 ‘생활’이란 제목의 시는 독특한 발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한 평론가는 이 시에 대해 “생활의 그물은 속박에서 나오고, 속박은 희망의 그물 구멍을 만들어 낸다”며 “시인은 묶인 그물 안에서 그물 구멍을 통해 희망을 찾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베이다오의 시집 등이 국내에 번역돼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편이다. 그는 창원시가 제정한 ‘창원 KC 국제시문학상’의 수상자 자격으로 한국을 다녀간적이 있다.
1426    詩공부를 하며지고... 댓글:  조회:4163  추천:0  2015-08-31
[ 2015년 08월 31일 08시 23분 ]   제15호 태풍 ‘고니’의 위력... 현대주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중국의 문학사조를 가리키는데, 서구의 모더니즘과 다른 중국적 특색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다르게 부르고자 하는 의도에서 도입된 문학사조의 명칭   모더니즘   민주주의와 소비문화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지속적으로 왜소화되는 개인의 무기력과 허무함을 특유의 스타일로 표현한 20세기 초에 대두한 문학사조     몽롱시 개인성과 자의식을 비일상적인 언어와 상징적인 기호체계를 통해 표현하는 특유의 스타일로 인해 젊은 시인들이 발표한 현대주의 계열의 시는 기성 문인과 평론가들에게는 매우 난해하게 느껴졌는데, 이런 난해성에 착안하여 현대주의 시에 대해 기성문인들이 붙인 희화적인 이름    
1425    중국 몽롱파시인 - 수팅 댓글:  조회:5050  추천:0  2015-08-31
충북 영동에서 마주친 수팅과 그녀의 몽롱시편들                                                                                                      김 금용(시인)         수팅은 80년대 중국시단의 대표시인으로 배이다오北岛、꾸청顾城、량샤오빈梁小斌 등과 함께 '몽롱시'파의 중심시인이다. 그녀는 1952년, 복건성 용해시에서 태어나 현재는 복건성 사먼廈門에서 문학평론가이자 교수인 남편과 살고 있다. 10년간 지속되던 문화혁명 당시 지식인들의 정신개조를 위한 농촌지원 학생대대에 배속, 1969 년부터 1972년까지 전구공, 미장공 등을 하다가 1979 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80 년부터는 복건성 문학인연합회에서 근무하면서 전업시인이 되었다. 주요시집으로 《쌍돛단배双桅船》、《노래하는 자주붓꽃会唱歌的鸢尾花》、《시조새始祖鸟》,산문집으로《심연心烟》이 있다. 또한 1980년 시《조국아, 내사랑하는 조국아 祖国呵,我亲爱的祖国》로 전국청년우수시작품상을 받았으며 1993년《쌍돛단배双桅船》로 전국신시우수시집상을 받았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2005년 여름, 계간지 ≪시평≫의 주관으로 8월, 충북 영동에서 가진 “아시아시인대회” 때였다. 당시 나는 중국 칭다오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과 함께 초청을 받아 서울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갑작스런 이 소식에 주관사인 ≪시평≫이나 수팅에게도 사전 연락 없이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작정, 훌쩍 겁 없이 길을 나섰다. 마침 중국 산동성 일조시에서 평택간 항로가 개항되었던 때라 나는 지도상의 빠른 직선코스이기도 한 이 항로를 선택, 혼자  칭다오에서 변방 일조시까지 두 시간 넘게 차로 간 뒤 평택항으로 건너가 다시 충북 영동까지 들어갔다.  평택 가는 배는 보따리 장사꾼들이 많아서인지 배 복도에까지 짐을 부려놓아 어수선했고 나 같이 혼자 여행하는 여자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하루 밤을 배에서 혼자 자는 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한 5 년간 수팅과 숨바꼭질을 했던 참이라 한껏 들떴다. 내가 그녀를 찾는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이미 내가 서울로 떠난 일 년 뒤, 중국대사관을 통해 다시 날 찾았다는 걸 들었기 때문에 더욱 설레였다.    처음 수팅의 시를 접한 것은 2001년, 북경 중앙민족대학원에서 중국 현대시를 공부할 때였다. 그 때 처음으로 그녀의 대표적인 시《노래하는 자주붓꽃会唱歌的鸢尾花》를 읽었다. 아주 긴 시였지만, 아름다워서 겁도 없이 며칠을 파고들어 번역했다. 그리곤 전구공이었던 그녀를 세상에 시인으로 처음 알리게 해준, 시 《상수리나무에 부쳐致橡树》를 연이어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때서야 비로소  “몽롱시”파가 1976년 文革이 끝나면서 80년대를 휩쓴 중국시단의 한 중심 시 경향이었음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졸업논문을 그녀의 시와 한국 80년대 한국여류시인의 시를 비교하는 것으로 잡았다. 그러나 80년대 중국시나 한국시 모두 그 배경엔 정치적 배경을 간과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학측으로부터 그 논문을 거부당했고, 따라서 더 이상 그녀와의 연락 시도를 하지않은 채 2004년 칭다오로 갈 때까지 묻어두었던 것이다.  영동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많은 시인과 독자들 앞에서 그녀가 한 말이 지금도 떠오른다. “한국의 첫인상은 참 푸르다”  “가는 곳곳 숲이 우거져서, 한국이란? 하고 묻는다면, 참 푸른 나라다” 라는 것이다. 그녀와 짧으나마 이 박 삼 일의 만남 동안 나라는 다르지만, 언어도 다르지만, 같은 연대를 살아온 시인의 시선은 같다는 걸 깨달았다. 고단한 역사가 지문으로 새겨진 그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그 애틋함을 그녀의 시 속에서 발견하면서 한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그녀의 ‘시힘’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비록 내가 그녀의 시와 그녀의 시세계로 졸업논문을 써내지 못했지만, 그녀의 시집을 첫 번째로 번역, 출판도 못했지만, 나는 그녀와 그녀의 시를 아직도 사랑한다.      상수리나무에 부쳐                                             舒  婷     내가 정말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절대 높은 가지에 기대어 현란하게 피는 능소화처럼 그대만 의지하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절대 녹음아래 단순한 음색으로 노래하는 새처럼 정을 말하지는 않을 거예요 차라리 그치지 않는 샘물처럼 매년 맑고 시원한 위로를 전하겠어요 차라리 멈추지 않는 산봉우리처럼 그대의 고도와 위엄을 받쳐주겠어요 태양조차도 봄비조차도, 아니, 이 모든 수식으로도 부족해요 나는 한 그루 목면나무처럼 분명 그대 곁에 나란히 서 있을 거예요 뿌리는, 땅 밑 깊숙이 박고 잎새는, 구름 위까지 닿은 채로 매번 한 줄기 바람에도 서로 인사 나누며 어떤 누구도 우리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할 거예요 그대는 구리같이 단단한 가지와 철같이 튼튼한 줄기가 있어요 칼 같이, 검 같이, 또한 창 같이: 나에겐 크고 붉은 꽃잎이 있어요 깊은 찬미 같은, 또 영롱한 횃불 같은. 우리는 한파와 폭풍, 번개와 천둥을 서로 나눠요 우리는 이슬과 흐르는 안개, 무지개를 서로 즐겨요 영원히 분리된 것 같이 보이지만 죽을 때까지 서로 의지할 거예요 이것이 위대한 사랑, 확고함, 바로 이것이죠: 사랑______ 그대의 위엄 있는 겉모습 뿐 아니라 그대가 단단히 머무르고 있는 그 자리, 발밑의 대지를 사랑할 거예요.                                               1977 년 3 월 27 일 발표                               후에 1979 년 4 월호에 실림      致  橡  树                                           舒 婷    我如果爱你 / 绝不像攀援的凌소花,/ 借你的高枝炫耀自己;/我如果爱你 ― /绝不学痴情的鸟儿,/为綠荫重复单纯的歌曲;/也不止像泉源,/常年送来清량的慰籍;/增加니的高度,촌托你 的威仪./甚至日光/ 甚至春雨./不,这些都还不구 !/我必须是你近旁的一株木棉,/做为树的形象和你站在一起./根,紧握在地下,/葉,相触在云里./每一阵风过,/我们都互相致意,/但没有人 /听동我们的言语/你有你的铜枝铁干/ 像刀,像剑,/ 也像戟;/我有我红硕的花두/像천重的叹息 /又像英勇的火炬./我们分担寒潮,风雷,霹雳;/我们共享雾霭,流嵐,虹霓 /방佛永远分离 /却又终生相依/ 这才是伟大的爱情/ 坚贞就在这里:爱 ― /不仅爱니伟岸的身躯 /也爱你坚持的位置,足下的土地!                             이 시는 당시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 덕분에 그녀는 공장의 전구공 작업을 그만 두고 복건성 문학인연합회에 근무하게 되었다. 전업시인이 된 것이다. 왜? 이 시가 호평을 받고 지금까지 주목하는 것일까. 문혁이 막 끝나던 76 년으로부터 일 년 뒤에 발표된 이 시는 바로 남녀 개인의 사랑을 노래한 최초의 시였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더군다나 1966 년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지식인들과 자본주의적 발상이 되는 것들은 다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시의 역할은 자기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찬양 일색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극좌 공산주의 선두주자로서 시인의 역할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십 년이나 계속 되었다. 그러므로 76년 문혁이 끝났다고 해도 감히 개인의 감정, 특히 남녀간의 사랑을 감히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윗 시가 이런 의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남녀간의 보편적인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높은 가지에 기대어 현란하게 피는 능소화처럼” 남자 등에 기대어 살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단순한 음색으로 노래하는 새처럼/정만을 말하지는 않을 거” 라고 강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왜냐면 진정한 사랑은  “ 한파와 폭풍, 번개와 천둥을 서로 나눠” “이슬과 흐르는 안개, 무지개를 서로 즐”기는 사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 그대가 단단히 머무르고 있는 그 자리, 발밑의 대지를 사랑할”줄 알 때 위대한 사랑은 이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그간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터득, 성취한 평등한 남녀 간의 관계이자 사랑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눈치 보지 않고 맘껏 동감하고 감동했던 것이다.               노래하는 자주붓꽃                          나의 애상은 그대의 비침으로 하여 옅은 광한을 떠올린다                                                          ___ 제목에 부쳐__     1.   그대 가슴 앞에서  나는 이미 노래하는 자주붓꽃이에요  그대 호흡의 가벼운 바람소리는  한 줄기 딩동댕 울리는 달빛 아래서 나를 흔들어요   그대의 그 너른 손바닥으로 잠시 나를 덮어 주세요   2 지금 나는 꿈을 꾸어도 될까요 눈 덮인 대지, 대 삼림 오래된 풍경과 기울어진 탑 난 정말 한 그루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게 될까요 스케트화, 그리고 마술 피리와 동화를 꼭대기에 가득 달고 폭죽, 그리고 분수처럼 현란한 환희 속에  큰 소리로 웃으며 거리를 내달려도 될까요   3 나의 저 작은 바구니여 나의 비옥한 밭에서 풀을 키우는 추수여 나의 저 오랜 물 항아리여 나의 팔다리 걸이 아래서 말라버린 한낮의 휴식이여 나의 아직 매지 못한 나비 댕기여 나의 영어 연습: I love you, love you 나의 길가 가로등 아래 접혔다 다시 펴지는 내 그림자여 나의 그 수없이 흐르고 또 삼키는 눈물이여   그리고, 그리고 더 묻지 말아요 왜 꿈속에서 조용히 뒤척이는지 지난 일들이여, 담 모퉁이에 숨은 귀뚜라미처럼 작지만 고집스럽게 울고 있어요       ------- 중략------------------     13. 나는 붓처럼 곧게 두려움 없이, 자랑스럽게, 분에 넘치는 젊음으로 서있어요 가슴 저린 폭풍은 내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요 태양은 내 이마 앞에서 작렬해요 나의 누런 피부는 투명하게 빛나고 나의 검은머리는 깔끔하고도 풍요롭게 흘러요   중국의 어머니여 그대에게 다가오는 그대 딸아이에게 새 이름을 지어 주세요   14. 나를 그대의 "자작나무 싹"이라고 불러주세요 나를 그대의 " 쪽빛 작은 별"이라고 불러주세요, 어머니 만일 총탄이 날아오면 먼저 내가 맞을 거예요 나는 미소지으며, 맑고 투명한 눈빛으로 어머니의 어깨로부터 천천히 흘러 떨어질 거예요 울지 말아요, 붉은 꽃잎이여 붉은 피, 피는 그대의 뾰족한 파도 끝에서부터 타올라요   ----- 중략---------------   16. 그대의 위치는 저 깃발 아래 있어요 고통스럽게 빛나는 이상, 이것은 감람나무에 부쳐 그대에게 남기는 마지막 한 마디 말이에요 비둘기와 함께 나를 찾아오세요 이른 아침에 나를 찾으세요 그대는 사람들의 애정으로부터 나를 찾을 수 있어요 그대의 것을 찾을 수 있어요 노래하는 자주 붓꽃을                                               1981년 10월 28일 발표                         강소(江苏)문예출판사 1997년 간행한 에 수록 됨   윗 시는 모두 16 편의 연으로 꾸며진 장시이다. 여기선 지면상 6 편만 옮겨놓았다. 이 시는 80년대의 의 대표적인 시답게 현실의 방황과 불안을 몽롱한 꿈 속 이미지와 정치적 현실을 점층적 수사법으로 대비시키면서 다양한 이미지를 통한 입체적 정서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는 방황하는 나, 깊이 사색하는 나, 들끓는 나, 그런 "나"가 곳곳에서 보인다. “ 지금 나는 꿈을 꾸어도 될까요” “정말 한 그루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게 될까요” 를 정치인들에게, 사회에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비인간화 시키던 문혁은 끝났지만, 정말 내 자신의 꿈을 꿔도 좋은지를 묻는다. 정말 “폭죽, 그리고 분수처럼 현란한 환희 속에/ 큰 소리로 웃으며 거리를 내달려도” 되는지 물어본다. 모든 개인의 일상적 삶의 하나하나를 극우로 몰았던 *¹ 4인방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자유로운 개인 간의 소통, 자유로운 꿈, 표현이 다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다.  한편 이 시를 통해 그녀는 개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히려 방향을 잃은 중국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로만 끝날 것인지도 의심한다. 그래서 “지난 일들이여, 담 모퉁이에 숨은 귀뚜라미처럼/ 작지만 고집스럽게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9 부에서 그녀는 곧 자신의 의지를 밝힌다.    “ 내 정감의 삼각매화여 그대는 차라리 근근히 살다 죽어 바람 불고 비 내리는 산비탈로 돌아갈지언정 화병에 꽂히는 삶은 되지 말아요   내 천성 가운데의 백조여 그대는 총상을 안고 막힘없는 겨울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갈지라도 난간으로 막힌 봄날엔 미련 두지 말아요   나의 이름과 신념은 이미 동시에 달리기 경주에 들어서서 민족을 대표하는 모종의 신기록을 세우려 해요 나는 쉴 권리가 없어요 생명에의 마지막 분발은 끝이 없어요, 오직 속도만 있을 뿐   그녀는  "자작나무 싹"으로, " 쪽빛 작은 별" 로 불러지길 새 중국의 어머니에게 요구한다. “만일 총탄이 날아오면” 맞을 거라고 의기 있게 말한다. 비록 상처 입은 노루처럼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시 안에서 툭툭 튀어나오지만, 이런 자신내부의 모순과 현실의 이상적 꿈을 상충시키면서 대립적 이미지를 통해 중국의 앞날을 모색하는 시로 업그레이드 시킨 점이 당시 시단이나 중국인민들로부터 감동을 준 큰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중국의 앞날은, 중국인민의 앞날은 “바람 불고 비 내리는 산비탈”일지라도 이러한  “몽롱”한 미래 앞에서도 빛을 찾아 피 흘리면서도 날아가겠다는 의지가 잘 드러난 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총상을 안고/막힘없는 겨울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갈“ 때조차 ” 나는 쉴 권리가 없어요/ 생명에의 마지막 분발은/끝이 없어요, 오직 속도만 있을 뿐“을 외치는 인민들의 소리가 쟁쟁하게 한 시이다.       또 하나의 모든 것(这也是一切)      __ 한 청년 시인의 시에 답하여(答一位*² 青年朋友的)__                                                       수팅(舒 婷)           모든 거목들이 다           폭풍에 쓰러진 것은 아니다        모든 씨앗들이 다             뿌리내릴 땅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니다        모든 참사랑이 다           인심의 사막에서 유실된 것은 아니다        모든 꿈들이 다            자청하여 날개를 꺾은 것은 아니다          아니다, 모든 것이        그대가 말한 대로는 아니다          모든 화염이 다             스스로를 태워 버리기만 하고             남을 비춰주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모든 별이 다              단지 어둠만을 가리키며             새벽을 알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노래가 다             귓가에 스쳐 지나가             마음에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다, 모든 것이       그대가 말한 대로는 아니다         모든 호소가 다 반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손실에 다 보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심연이 다 멸망만은 아니다       모든 멸망이 다 약한 자의 머리에만 내리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심령이 다            발에 짓밟혀 진탕 밭에 짓이겨 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결과가 다            눈물과 피에 얼룩져 밝은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게 아니다        모든 현재는 미래를 잉태하며         미래의 모든 것은 어제로부터 자라난 것이다.      희망을 갖고, 그것을 위해 투쟁할 일이다      이 모든 것을 그대의 어깨에 짊어질 일이다.                                                            不是一切大树/都被暴风折断:/不是一切种子,都不到生根的土壤:/不是一切真情              都流失在人心的沙漠里:/不是一切梦想/都甘愿被折掉翅膀./不,不是一切/都像 说的那样!/不是一切火焰,/都只燃烧自己/而不把别人照亮 /不是一切星星,/都仅指示黑夜/而不报告曙光/不是一切歌声,/都掠过耳旁/而不留在心上/不,不是一切/都像 说的那样!/不是一切呼 都没有回响:/不是一切损失都无法补偿:/不是一切深渊都是灭亡/不是一切灭亡都覆盖在弱者头上/不是一切心灵都可以 在脚下,烂在泥里:/不是一切後果/都是眼泪血印, 而不展现欢容/一切的现在都孕育着未来,/未来的一切都生长于 的昨天/希望, 而且为 斗争/请把这一切放在 的肩上/                                                    이 시는 주에서도 밝히듯이 몽롱시파의 한 시인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베이다오北岛가 발표한 시«일체 一切» 에 대한 답시이다. 베이다오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그의 시집을 번역, 출판하여 비교적 잘 알려진 시인으로 개방 이후 중국정부에 대한 비판의 글을 발표,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80년대의 *³ ‘천안문 사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까지 고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가 쓴 시«일체 一切» 의 내용은 중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정치적 비판이 많이 드러난 시여서 당시 중국에 남아있는 시인들에게는 상당한 정신적 혼란을 야기했다. 그러나 수팅처럼 직접 대놓고 반박하거나 혹은 찬성하는 시인들은 없었기에 이 시를 발표함으로써 당시 상당한 충격과 한편 지지를 많이 받은 시이다.  즉, “ 모든 거목들이 다 / 폭풍에 쓰러진 것은 아니다” “ 모든 씨앗들이 다/ ..중략,../     모든 꿈들이 다/ 자청하여 날개를 꺾은 것은 아니”므로 조국 중국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내용이다. 마치 상처받은 아이를 더 껴안아주는 어머니처럼 , 그녀는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점철되었던 문혁기간을 거치면서 절망적이고도 부정적인 조국이지만 그런 조국이어서 더 보듬어줘야 하는 한 시인의 애틋한 모성애적인 사랑을 당시 중국인민들도 동감하고 환영하였을 터, 그녀를 끝내 국민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수팅의 시는 이상과 같이 절망하지 않으며 비관하지 않으며 어려운 현실이나 환경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인간적 가치에 대한 갈망과 이상주의적 정념을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녀의 시는 “몽롱”하지 않다. 다만 많은 시의 수법에서 드러나는 은유나 부분적인 상징주의적 수법이 직접 고백하는 방식 보다는 이미지를 통한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데서 더 연유됨을 알 수 있겠다.                                                          * 주¹ : 4인방: 문화혁명을 극좌주의로 몰아가 원로정치인들을 경험주의로 내몰아 노동개조소나 죽임을 당하게 했던, 네 명의 정치인들을 일컬음. 모택동의 처 강청과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 1976년 9월 모택동의 사망 한 달 뒤, 모두 체포됨으로써 문혁은 막을 내렸다.   * 주² : 한 青年시인은 바로 베이다오北岛를 가리킨다.   *주³ : 천안문 사건: 1989년 4월 15일 급진개혁주의자 후야오방[胡耀邦] 전 당총서기가 심장마비로 죽으면서 불이 붙었던 중국의 민주화 시위. 베이징·상하이[上海]에서 다시 이를 기폭제로 베이징대학교의 학생 수천 명은 톈안먼 광장에 집결, 후야오방의 재평가를 요구하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6월 4일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군의 무차별 살해로 북경은 물론, 상하이, 선양[瀋陽]·창춘[長春]·창사[長沙] 등 전국적인 시위를 종식시켰다. 결국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중국사태는 강경보수파의 승리로 끝났으며 정치국원 겸 상하이의 당서기 장쩌민[江澤民]이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신임 총서기에 선출되었다.     [출처] 영동에서 마주친 수팅과 그녀의 몽롱시편들 /김금용|작성자 푸른섬    
1424    력사... 추억... 70... 댓글:  조회:2370  추천:0  2015-08-31
[ 2015년 09월 07일 09시 11분 ]     1969년 ~1973년 -
1423    재미가 있는 한국 방언세계 댓글:  조회:7171  추천:1  2015-08-27
[ 2015년 08월 27일 10시 23분 ]   한국에서 크게는 중부방언과 남부방언, 제주방언으로 나뉘고요, 각각의 방언이 억양은 다르지만 방언권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매우 비슷합니다. 중부방언에는 경기도 방언, 강원도 방언, 충청도 방언이 있습니다.  경기도 방언은 서울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로 나뉩니다. 하지만 억양은 거의 비슷하고요, 쓰이는 말도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서울 위쪽은 많아(표준어와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반해 서울 아래는 많어라고 하죠. 표준어는 서울말이라기보다는 서울 위쪽 말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겁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이니까를 ~이니깐으로 발음하는 거죠. 강원도 방언은 크게 영서 방언과 영동 방언이 있습니다. 북한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영서 방언은 경기와 충청 방언의 영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모음조화도 비교적 잘 지켜지고요, 댕기다(다니다) 안직(아직) 이런 어휘 이외에는 억양이 표준어에 비해 훨씬 빠르고 청명하다는 것 말고는 없네요. 영동 방언은 강릉을 중심으로 강릉 북부와 강릉 남부가 있습니다. 강릉 북부는 함경도의 영향을 받아 ~해서를 ~하야로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표준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죠. ex>질가 댕기는데 갈구쳐서마엥이 미안하우야 길가 다니는데 공사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강릉 남부는 경상도 방언의 영향을 받아 ~했나 로 끝나는 경우가 강합니다. 그리고 충청도... 충청도 방언은 크게 경기 방언과 비슷한 충북 지방과 전라 방언과 비슷한 충남 지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천안 같은 곳은 경기방언, 옥천같은 곳은 전라 방언에 더 가깝겠지만요. 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생긴 영동군 황간면과 단양군(어디인지는 잘 모릅니다만) 은 경상도 방언의 구획입니다. 충청 이남 지방은 모두 떼다, 펴다, 베다를 띠다, 피다, 비다로 발음합니다.  ex>(전라, 충청, 경기 일부) 띠기(달고나 아시죠, 떼기로 하다가 내려와서 띠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비게... 전라도 방언입니다만 베게입니다. 또한 인나(일어나) 둔너(드러누워) 데꼬(데리고) 같은 축약 현상도 나타납니다. 충북 지방은 크게 ~겨, ~랴로 나눌 수 잇습니다. 요즘도 표준어를 쓰는 곳은 경기도 말고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청주 다모임에 가봤는데,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ex(청주)> 생일 추카햐(다모임에서 퍼옴) 생일 축하해 입니다. 끝의 ㅐ를 ㅑ로 바꾸는 경향이 있습니다. ex>(충주) 너 밥 먹구 뭐할꺼? 충주는 경기도 방언(특히 남부)의 영향으로 충청도 방언의 보편적인 어미린 ~껴를 쓰지 않고 ~꺼를 사용합니다. 아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는 ~여(~야)를 공유합니다. 뭐여?(뭐야) 그리고 충남 지방... 충남 지방은 조금 더 사투리와 억양이 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 충청도가 말이 느리다고 하는데 충북은 그렇지 않고요, 충남이 느립니다-_-;;; ~것다(~겠다) 기여(맞아) 봉다리(봉지) 근디(그런데) 등등이 있습니다. 또한 동물의 방언 뒤에 ~락지를 붙이는 것도 하나의 현상입니다.(개고락지) 아참, ~이니까를 ~이니께로 발음합니다. 그리고 충북지방과 다른 것은 ㅐ가 ㅑ로 변하지 않고 ㅕ로 변한다는 점입니다. 전라도 방언(특히 전북) 과 비슷하죠. 그려(그래) 같은 거요. 아, 하다는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방에서 "허다" 라고 소리납니다. ex(옥천)> 김치부침개 먹으루 갈려 그려, 잘가라 이정도로 중부는 끝난 것 같고요, 남부로 가겠습니다. 남부는 중부와 달리 매우 복잡한 방언권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바로 옆동네만 가도 말이 다르죠. 먼저 전라도를 보겠습니다. 충청도가 청주방언권, 충주방언권, 충남방언권, 서해안방언권으로 크게 나뉘는 것과 달리 전라도는 군산,익산방언, 전주방언, 진안,무주방언, 정읍방언, 남원방언으로 나뉩니다(북도만 먼저 할게요) 군산, 익산은 충청도 방언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아, 그리고 전라북도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너그 입니다. 너희들, 너네죠. 이와 같이 저그(제네)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버리다는 ~블다 이렇게 하고요,  또한 발음상의 변화로, ㅢ를 ㅡ로 발음합니다. 으식주(의식주) 으사(의사) 그리고 흙이[흙이]=>흙이[흑이] 시작했다[시자캐따]=>시작했다[시자갰다] 처럼 연음 현상이 없습니다. 또한 받침의 ㅊ,ㅈ을 ㅅ으로 발음합니다(연음시)(빛이[비시]) 직접 전라도 가서 들어 보시면 됩니다. 애들이든 어른이든 한결같습니다. 전주방언 볼게요. 전주방언은 ~것지(충남)을 ~것제 까지 나갑니다.  ex>(전주) 내가 안한다글믄 안해야제 니가 뭔상관이여. 내가 하지 않는다고 하면 말아야지 너가 무슨 상관이니. 그리고 정읍으로 내려오면 ~면서가 ~ㅁ서로 변화합니다.  ex>(정읍) 니 어제 피자 먹으러 갔담서 왜 나는 안델꼬갔냐 너 어제 피자 먹으러 갔다면서 왜 나는 데리고 가지 않았니? 그리고 또 하나. 전라북도 방언은 충청도에서 ~이니께로 발음했던 ~이니까를  ~잉게로 발음합니다 ex>(전주) 내가 그랬응게 니는 상관 말어. 내가 그랬으니까 너는 상관 말아라. 북도도 사투리가 많지만 대략적인 것은 이정도고요. 다음으로 전라남도를 보겠습니다. 전라남도는 북도보다 더욱 화려한(?) 문체를 자랑합니다.  광주 방언, 영광 방언, 목포 방언, 순천및 여수 방언, 구례 방언정도로 나누고 섬은 더 독특합니다. 먼저 씻어를 씿어로 발음합니다. 해남쪽으로 내려가면 씨꺼로 발음하고요. ~잉게인 전북 방언이 여기서는 ~인께가 됩니다. ex>(광주) 나는 안그랬당께!!! ~그려나 ~혀, 이런 것은 옛날에는 많이 썼습니다만 요즘 세대(10대)에 와서 흔히 나타난 새로운 전남 방언으로 ~그랬시야, ~그래야, ~해야 등등 끝에 ~야를 붙입니다. 특히 광주 지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주 목포쪽으로 가면 배워를 배와라고 합니다. 고어의 현상이 두드러지죠. 가을은 원래 세모모양 반시옷이 을의 이응자리에 있었습니다만 전라도에서는 이게 이응이 아니라 시옷으로 변해 가슬이라고 합니다. 영광에서는 새우도 옛날같이 새비라고 합니다. 다만 이 현상은 요즘은 많이 사라져서 할머니분들께서만 쓰십니다. 그리고 북도나 충청도에서 허다라는 말을 ㅓ=>ㅡ나 ㅜ의 변화에 따라 흐다 라고 합니다.  아, ~뜨리다, ~트리다를 ~치다로 발음합니다. 떨어트리다=> 떨치다 흐트리다=> 흐치다 이게 대표적인 예죠. 아까는 아까침에 라고 하고요, 그외에 애들이 잘쓰는 사투리로 찌클다(뿌리다, 액체의 경우만 찌클다라 하고 가루는 뿌리다라고 합니다) 쨈매다(묶다) 끌르다(풀다) 등등이 있습니다. 단어도 다른게 매우 많습니다만 찾아보시고요(여기서는 너무 많아서...) ~담서가 ~함씨롱, ~함시로,정도로 더 변화합니다. 광주지방에서는 ~함씨롱, 그 밑은 ~함시로로 하더군요. 그리고 느그(너네) 가 남도에서는 니기가 됩니다. 니기 엄니 저그 계신다(너희 어머님 저기 계신다) 더 자세한 예를 드리기는 힘들 것 같네요. 또한 구례 쪽은 경상도와 가깝기 때문에 경상도 방언과 전라도 방언이 섞여 있습니다 ex>(구례) 내는 그리안혔다 니기덜이 한 거 아니가? 하나 둘 셋 넷은 한나 줄 싯 닛이라고 하고요(전라도) 요즘은 싯이나 닛은 쓰지 않고 한나는 여전히 많이 씁니다. 그리고 말끝에 ~ㄴ가 가 많이 붙습니다. ~한당가, ~인가 등등이 대표적입니다.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10추천자 목록 크게는 중부방언과 남부방언, 제주방언으로 나뉘고요, 각각의 방언이 억양은 다르지만 방언권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 매우 비슷합니다. 중부방언에는 경기도 방언, 강원도 방언, 충청도 방언이 있습니다.  경기도 방언은 서울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로 나뉩니다. 하지만 억양은 거의 비슷하고요, 쓰이는 말도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서울 위쪽은 많아(표준어와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반해 서울 아래는 많어라고 하죠. 표준어는 서울말이라기보다는 서울 위쪽 말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겁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이니까를 ~이니깐으로 발음하는 거죠. 강원도 방언은 크게 영서 방언과 영동 방언이 있습니다. 북한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영서 방언은 경기와 충청 방언의 영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모음조화도 비교적 잘 지켜지고요, 댕기다(다니다) 안직(아직) 이런 어휘 이외에는 억양이 표준어에 비해 훨씬 빠르고 청명하다는 것 말고는 없네요. 영동 방언은 강릉을 중심으로 강릉 북부와 강릉 남부가 있습니다. 강릉 북부는 함경도의 영향을 받아 ~해서를 ~하야로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표준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죠. ex>질가 댕기는데 갈구쳐서마엥이 미안하우야 길가 다니는데 공사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강릉 남부는 경상도 방언의 영향을 받아 ~했나 로 끝나는 경우가 강합니다. 그리고 충청도... 충청도 방언은 크게 경기 방언과 비슷한 충북 지방과 전라 방언과 비슷한 충남 지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천안 같은 곳은 경기방언, 옥천같은 곳은 전라 방언에 더 가깝겠지만요. 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생긴 영동군 황간면과 단양군(어디인지는 잘 모릅니다만) 은 경상도 방언의 구획입니다. 충청 이남 지방은 모두 떼다, 펴다, 베다를 띠다, 피다, 비다로 발음합니다.  ex>(전라, 충청, 경기 일부) 띠기(달고나 아시죠, 떼기로 하다가 내려와서 띠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비게... 전라도 방언입니다만 베게입니다. 또한 인나(일어나) 둔너(드러누워) 데꼬(데리고) 같은 축약 현상도 나타납니다. 충북 지방은 크게 ~겨, ~랴로 나눌 수 잇습니다. 요즘도 표준어를 쓰는 곳은 경기도 말고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청주 다모임에 가봤는데,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ex(청주)> 생일 추카햐(다모임에서 퍼옴) 생일 축하해 입니다. 끝의 ㅐ를 ㅑ로 바꾸는 경향이 있습니다. ex>(충주) 너 밥 먹구 뭐할꺼? 충주는 경기도 방언(특히 남부)의 영향으로 충청도 방언의 보편적인 어미린 ~껴를 쓰지 않고 ~꺼를 사용합니다. 아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는 ~여(~야)를 공유합니다. 뭐여?(뭐야) 그리고 충남 지방... 충남 지방은 조금 더 사투리와 억양이 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 충청도가 말이 느리다고 하는데 충북은 그렇지 않고요, 충남이 느립니다-_-;;; ~것다(~겠다) 기여(맞아) 봉다리(봉지) 근디(그런데) 등등이 있습니다. 또한 동물의 방언 뒤에 ~락지를 붙이는 것도 하나의 현상입니다.(개고락지) 아참, ~이니까를 ~이니께로 발음합니다. 그리고 충북지방과 다른 것은 ㅐ가 ㅑ로 변하지 않고 ㅕ로 변한다는 점입니다. 전라도 방언(특히 전북) 과 비슷하죠. 그려(그래) 같은 거요. 아, 하다는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방에서 "허다" 라고 소리납니다. ex(옥천)> 김치부침개 먹으루 갈려 그려, 잘가라 이정도로 중부는 끝난 것 같고요, 남부로 가겠습니다. 남부는 중부와 달리 매우 복잡한 방언권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바로 옆동네만 가도 말이 다르죠. 먼저 전라도를 보겠습니다. 충청도가 청주방언권, 충주방언권, 충남방언권, 서해안방언권으로 크게 나뉘는 것과 달리 전라도는 군산,익산방언, 전주방언, 진안,무주방언, 정읍방언, 남원방언으로 나뉩니다(북도만 먼저 할게요) 군산, 익산은 충청도 방언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아, 그리고 전라북도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너그 입니다. 너희들, 너네죠. 이와 같이 저그(제네)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버리다는 ~블다 이렇게 하고요,  또한 발음상의 변화로, ㅢ를 ㅡ로 발음합니다. 으식주(의식주) 으사(의사) 그리고 흙이[흙이]=>흙이[흑이] 시작했다[시자캐따]=>시작했다[시자갰다] 처럼 연음 현상이 없습니다. 또한 받침의 ㅊ,ㅈ을 ㅅ으로 발음합니다(연음시)(빛이[비시]) 직접 전라도 가서 들어 보시면 됩니다. 애들이든 어른이든 한결같습니다. 전주방언 볼게요. 전주방언은 ~것지(충남)을 ~것제 까지 나갑니다.  ex>(전주) 내가 안한다글믄 안해야제 니가 뭔상관이여. 내가 하지 않는다고 하면 말아야지 너가 무슨 상관이니. 그리고 정읍으로 내려오면 ~면서가 ~ㅁ서로 변화합니다.  ex>(정읍) 니 어제 피자 먹으러 갔담서 왜 나는 안델꼬갔냐 너 어제 피자 먹으러 갔다면서 왜 나는 데리고 가지 않았니? 그리고 또 하나. 전라북도 방언은 충청도에서 ~이니께로 발음했던 ~이니까를  ~잉게로 발음합니다 ex>(전주) 내가 그랬응게 니는 상관 말어. 내가 그랬으니까 너는 상관 말아라. 북도도 사투리가 많지만 대략적인 것은 이정도고요. 다음으로 전라남도를 보겠습니다. 전라남도는 북도보다 더욱 화려한(?) 문체를 자랑합니다.  광주 방언, 영광 방언, 목포 방언, 순천및 여수 방언, 구례 방언정도로 나누고 섬은 더 독특합니다. 먼저 씻어를 씿어로 발음합니다. 해남쪽으로 내려가면 씨꺼로 발음하고요. ~잉게인 전북 방언이 여기서는 ~인께가 됩니다. ex>(광주) 나는 안그랬당께!!! ~그려나 ~혀, 이런 것은 옛날에는 많이 썼습니다만 요즘 세대(10대)에 와서 흔히 나타난 새로운 전남 방언으로 ~그랬시야, ~그래야, ~해야 등등 끝에 ~야를 붙입니다. 특히 광주 지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주 목포쪽으로 가면 배워를 배와라고 합니다. 고어의 현상이 두드러지죠. 가을은 원래 세모모양 반시옷이 을의 이응자리에 있었습니다만 전라도에서는 이게 이응이 아니라 시옷으로 변해 가슬이라고 합니다. 영광에서는 새우도 옛날같이 새비라고 합니다. 다만 이 현상은 요즘은 많이 사라져서 할머니분들께서만 쓰십니다. 그리고 북도나 충청도에서 허다라는 말을 ㅓ=>ㅡ나 ㅜ의 변화에 따라 흐다 라고 합니다.  아, ~뜨리다, ~트리다를 ~치다로 발음합니다. 떨어트리다=> 떨치다 흐트리다=> 흐치다 이게 대표적인 예죠. 아까는 아까침에 라고 하고요, 그외에 애들이 잘쓰는 사투리로 찌클다(뿌리다, 액체의 경우만 찌클다라 하고 가루는 뿌리다라고 합니다) 쨈매다(묶다) 끌르다(풀다) 등등이 있습니다. 단어도 다른게 매우 많습니다만 찾아보시고요(여기서는 너무 많아서...) ~담서가 ~함씨롱, ~함시로,정도로 더 변화합니다. 광주지방에서는 ~함씨롱, 그 밑은 ~함시로로 하더군요. 그리고 느그(너네) 가 남도에서는 니기가 됩니다. 니기 엄니 저그 계신다(너희 어머님 저기 계신다) 더 자세한 예를 드리기는 힘들 것 같네요. 또한 구례 쪽은 경상도와 가깝기 때문에 경상도 방언과 전라도 방언이 섞여 있습니다 ex>(구례) 내는 그리안혔다 니기덜이 한 거 아니가? 하나 둘 셋 넷은 한나 줄 싯 닛이라고 하고요(전라도) 요즘은 싯이나 닛은 쓰지 않고 한나는 여전히 많이 씁니다. 그리고 말끝에 ~ㄴ가 가 많이 붙습니다. ~한당가, ~인가 등등이 대표적입니다. 경상도로 가볼게요. 경상도도 충청 방언의 영향이 있고, 북도와 남도로 나뉘지만 전라도보다 넓기 때문에 더 다양합니다.  강릉 방언(영동) 지방과 함께 중세 지방의 특징인 억양(성조라고 하죠.) 가 남아 있고요, 그마저도 북도와 남도, 작게는 안동, 울진, 대구, 포항, 울산, 부산, 마산, 진주가 다 다릅니다. 여기서는 설명하기 힘드네요... 북도부터 살필게요. 북도는 안동 방언,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영주 방언, 안동 방언과 비슷하지만 충청도 방언(특히 제천)과 비슷한 상주,예천 방언, 구미,대구 방언(특수하죠. 대구만 다른 사투리가 많아요.) 포항 방언(남도와 비슷하죠.) 로 나뉩니다. ex>(안동) 내 그런다 안캅니껴.(제가 그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니까를 ~니껴로 발음합니다. 안녕하세요를 가세 평안하시껴라고 하는 것도 그 일종입니다. 영주 방언은 안동과 비슷하니까 생략할게요. 다만 높임법이 더 구체적이라고 들었어요. 상주 방언은 ~교(~겨형 어미를 가진 충청도와 비슷하죠) 를 씁니다.  ex>(상주) 느 아까 뭔 행동을 그리 한교? 대충 알아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할머니들의 사투리는 아니거든요. 대구는 다른 경상 지방의 아(애) 라는 말을 얼라라고 합니다.  ex>(대구) 내가 그리 하믄 늬는 뭐라칼낀데? ~건데는 ~긴데라고 합니다.   이정도면...?    답변추천해요5추천자 목록 .제주도 사투리의 특징  제주도 방언의 공시적 음운 구획선 설정은 현 재로 보아 어려운 일로 보겠고 어휘나 어법의 분포 양상에 있어서도 제주도 방언의 방언 구획을 몇 개로 잡느냐 하는 문제도 현단계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공통어계 어휘의 음운이 제주시:한림, 한림:서귀포, 서귀포:제주시, 한림:성산포 사이에서 어떤 특수한 언어지리학적 이질 음운을 찾아 보기 힘들고 가령 /A/ 계에 속하는 공통어계 어휘의 음운이 제주시 - 한림 - 서귀포 - 성산포 - 제주시에 공존하는 실정이고 제주도 중심부로 들어가도 색다른 음운 변동이 일어남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실정을 참작하여 필자는 본고에서 앞으로 설정하여야 할 음운 구획선의 한계를 잡는 하나의 예비적 시도로서 우선 공통어계 어휘의 음운이 제주도 방언 내에서 어떠한 공식적 음운 양상을 보여 주는가를 세별하여 보려 한 것으로 이러한 세별은 필자가 현지에서 입수한 약 1,350 어휘에 의거하였다.  방언 어휘의 음운 표기는 별계 표기법에 의거하며, 모음 자음의 각각에 따른 방법으로 방언 어휘의 음운 양상을 설정하였다.  제주도 방언의 명령법 어미 체계는 표준어와 매우 다르다.  표준어에 쓰이는 대표적 어미 형태인 `-아라~어라`가 사용되지만 의의와 기능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제주도 방언의 명령법 어미는 하대,평대, 존대의 세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구체적인 형태는 `-라`와 `-아~-어`, `-밑서`,`-십서`이다.  `-라`는 하대의 어말어미이다. 어간에 직접 연결되기도 하고 `-어시라/아시라`,`엄시라/암시라`처럼 선어말 어미와 결합된 형으로도 쓰인다.  `-어시-~/-아시-`와 `-엄시-~/-암시-`는 동작상을 표현한다.  이들은 상호 대립되는 의미 자질을 갖는다.  앞 것은 `완료 종속상`이고 뒷 것은 `미완료 존속상`이다.  동작상이 체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제주도 방언에서만 보이는 어미활용의 특징이다.  이건지ㅠ... ========================== 나도궁금답변하 기 글꼴조정 공유하기 친구에게 배달     답변 골라보기선택됨선택옵션 답변 정렬순서선택됨선택옵션 답변 목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1추천자  총 획득메달 전문 분   채택된 답변답변추    
1422    중국 현대시 류파 댓글:  조회:4655  추천:0  2015-08-26
중국에서 현대시라고 하면 주로 1919년의 5.4운동 전후부터 시작해서 개혁개방시기까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류파는 주로ㅡㅡㅡ   상식파: 현대시를 시험삼아 했던 사람들의 무리, 호적, 류반농, 류평백 등을 대표로   문학연구회 파:  빙심, 로신, 주작인, 주자청 등을 대표로,   창조사: 곽말약과 성방오를 대표로,   호반파: 왕정지, 응수인, 풍설봉을 대표로,   신월파: 서지마, 문일다를 대표로,   상징파: 리금발, 풍내초를 대표로,   현대파: 대망서, 변지림, 하기방, 서지, 풍지 등을 대표로,   7월파: 애청, 우한, 전간, 호풍을 대표로,   중국신시파: 목단, 정민을 대표로,   사회주의 현실주의: 공목, 하경지, 곽소천 등을 대표로,   현대파: 기현, 양환을 대표로,   남성사: 여광중, 하청 등을 대표로,   창세기: 낙부, 양목을 대표로,   몽롱파: 북도, 서정, 고성, 망극 등을 대표로(개혁개방초기부터, 즉 1970년대 중/후반부터)   신현실주의: 엽연빈, 리소우를 대표로,   신변새시파: 창요, 양목을 대표로,   신성사작: 해자, 낙일화 등을 대표로(1970년대 중/ 후반부터)    등 이 외에도 원명원, 그들, 망한주의, 비비주의, 지식분자사작, 신 향토주의 등 많습니다.    
1421    중국 몽롱파시인 - 우한 댓글:  조회:4420  추천:0  2015-08-26
                                                                                                                                      뉴 한牛 汉의 시 읽기     작자소개 : 뉴 한(牛 汉(1923- )     본명은 스청한(史成汉). 중국 산동성(山西省) 정양(定襄)에서 태어났지만 원래 몽고족이다. 뉴 한은 젊어서는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인 서안(西安)의 『류화流火』잡지사에서 편집을 맡아보았었다. 그러나 항일전(抗日戰) 초기에 만들어진 문학 단체 “칠월파(七月派)”에 가입, 아이 칭(艾靑)을 위시한 소군(蕭軍)·호풍(胡風)·소홍(蕭紅)·동평(東平)·전한(田漢) 등과 함께 『칠월문예(七月文藝)』, 『희망 월간(希望月刊)』등을 편집하면서 우파로 몰려 1955년에서 57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그러다 문화혁명을 맞아 노동개조소로 쫓겨갔다가 1976년 문혁이 끝난 뒤 돌아와 "귀래파(归来派)"에 가입, 본격적인 시단 활동을 시작했다.   "귀래파(归来派)"는 서구주의적 사상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을 받아 문혁 당시에 절필을 선언했던 아이 칭(艾 青)을 위시한 일련의 시인들이 만주와 신장(新藏)서장(西藏) 등 변방의 노동개조소로부터 풀려나와 반쓰(反思)운동에 참여, 정치로부터 독립된 예술의 개성화와 80년대 新诗모색을 시도한 당시 문단의 중심단체였다.  이 “귀래파归来派”엔 뉴 한(牛 汉)을 위시한 7명의 “칠월파”시인들과 50년대 시단을 이끌던 9명의 “구엽시인九叶诗人”들이 포함된다. 이들은 개개인의 굴절 깊은 삶의 경륜과 그 고통스런 체험 속에서 터득한 역사와 개인과의 충돌 및 관계를 시로 표현하려 했다. 이에 정치 찬양 선도적 위치에서 개인의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면서 자유로운 개인의 사고를 표현함으로써 불안한 내일과 오늘의 방황을, 심지어 남녀 간의 사랑까지 표면으로 드러내며  노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미래는 방향을 잃은 배와 같아서 신과 같던 모택동이 비판을 받고 경제개방을 위해 개체호를 인정하는 등, 중국의 모호하고 안개 속 같은 내일에 대한 불안과 시인의 새로운 위상과 선도자적 책임이 다 모호해졌음을 자각, 귀래파에 이어 몽롱파(朦朧派)가 출현하기 시작,  80년대의 문단을 이끌어 나갔다. 이에 뉴 한은 이런 물결에 적극적으로 합세, 1978년에 제작에 참여했으며, 후에 주필이 되었고 몽롱시파에서도 그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시집으로는 ,,, , 등이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이 시편들은 대부분 문혁 당시의 시편들로 발표 연대는 10년 뒤 문혁이 끝나면 서부터로 되어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우파로 몰려 감옥생활을 했던 뉴 한 시인은 문화혁명이 끝날 때까지 작품 발표는커녕 시집 출판은 엄두도 못 냈기 때문이다.   류 한이 를 통해서 직접 밝힌 자작시에 대한 소감을 여기에 소개한다. 이를 통해 그를 이해하며 그의 시를 받아들이는 데에 좀 더 접근이 용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 나는 신장이 190센티로서 우리 고향의 高粱(수수) 만큼이나 키가 크다. 나는 또 뼈다귀가 앙상한 편이지만, 나의 뼈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고상하기까지 하다....나의 뼈가 나를 가련히 여기고, 나를 보호해 주고 있어서.... 내가 인생의 기나긴 역정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수천 개의 크고 작은 뼈마디들이 부득부득 이를 악 물고 나를 액운으로부터 지켜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나의 뼈에 감사하고, 나의 시에 감사할 일이다. 힘든 일을 많이 해서 나의 손바닥에는 딱딱한 못이 적지 않게 박혀 있고, 깊고 가벼운 상흔들도 많다. 수십 년 동안 나는 시시각각으로 은근히 통증이 오는 이 손으로 시를 써 왔고, 시 한 줄, 글자 하나 쓰는 것이 모두 아픔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감각기관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뼈마디, 그리고 피부와 영혼 속에 깃들인 상흔이다. 이 상흔들은 조금씩 융기한 무덤더미들처럼 그 속에 내가 환멸 할 수 없는 시와 꿈을 묻고 있다."                                          피땀 흘리는 말                                       뉴 한     고비사막은 천리를 달려야 강물이 나오고    황막(荒漠)도 천리를 달려야 초원이 보이네   바람 한 점 없는 칠, 팔월 하늘 고비사막은 이제 불의 땅 오직 날쌔게 달릴 뿐이네 네 다리로 허공을 날아오르며 내달릴 뿐이네 그래야 가슴에 바람기를 느끼고 수 백 리 뜨거운 흙먼지를 빠져나올 수 있네   땀은 갈증 난 모래먼지가 모두 핥아 먹어버렸고  땀은 결정체로 말에게 흰색 무늬를 만들어주네   땀은 흐를 만큼 흘러나왔네 담즙도 흐를 만큼 모두 흘러나왔네 허공을 쏘아보는 눈빛  경련 일으키며 실룩이는 너른 앞가슴 근육 침묵으로 자기생명의 내부를 향해 구원을 청하네 어깨와 엉덩이 넓적다리로부터 한 땀, 한 땀 핏방울이 돋네 세계에서  오직 한혈마(汗血馬)만 혈관과 땀 선이 서로 통하네 어깨 위에 날개를 단 적 없지만 네 말발굽 역시 바람을 만들지 못하지만 한혈마가 인간의 아름다운 신화를 알 리 없네 그는 오직 앞으로 내달리며 온 몸으로 먹구름 같은 혈기를 뿜어낼 뿐이네 흰 눈에 갇힌 거대한 산언덕과 꽁꽁 얼어붙은 구름을 뛰어 넘네 생명이 멈추지 않는 자연을 뛰어넘기 위해 땀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았지만 근육과 뼈만으로 천리는 더 달릴 수 있네   한혈마(汗血馬)  너는 생명의 절정에서 고꾸라져 불사르며 피어나는 한 떨기   흰 눈송이 꽃,                                       *주: 전설에 의하면, 피땀 흘리는 한혈마는 체구가 나날이 작아지고 또 나날이 가벼워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그 때서야 기수는 그 말을 고향으로 데려가 매장한다고 한다.                                                  1986년 8월 발표                                                   汗血馬                                                        跑过一千里戈壁才有河流  跑过一千里荒漠才有草原    无风的七月八月天 戈壁是火的领地  只有飞奔  四脚腾空的飞奔 胸前才感觉有风     才能穿过几白里闷热的浮尘   汗水全被焦渴的尘砂舐光 汗水结晶成马的白色的斑纹    汗水流盡了 胆汁流盡了  向空旷衝刺的目光  宽阔的抽축的胸肌            沈默地向自己生命的内部求援 丛肩胛和臀股  沁出一粒一粒的血珠 世界上 只有汗血马 血管与汗腺相通 肩胛上倂没有翅翼  四蹄也不会生风 汗血马不知道人间美妙的神话 它只向前飞奔 浑身蒸腾出彤云似的血气 为了翻越雪封的大坂 和凝冻的云天 生命不停地自然  流盡了最後一滴血  用筋骨还能飞奔一千里   汗血马 扑倒在生命的顶点  焚化成了一朵 雪白的花                附注: 传说汗血马飞跑到最後,体躯变得很小很轻,骑士把它背回家乡埋葬                          ** 작품 감상   얼마나 기막힌 착취인지, 피를 말리고 땀이 피가 되어 온 몸의 수분이 마를 때까지, 드디어 온 몸이 바싹 줄어들 때까지 달려야 하는 한혈마의 운명,..! 그것은 문화혁명 당시의 인민들의 모습이기도 했음을 이 시인은 한혈마를 통하여 역설하고 있다. 우 한의 라는 글을 참고하면 이 시의 깊은 의도가, 상징성이 살아날 것이다. “나와 나의 시는 한 필의 말이다, 원래 이 땅이 아름다운 목초가 가득하지만 불행히도 난 몇 년간 살아있는 풀을 먹지 못했다. 단지 운명 속에서 살길을 찾을 뿐이다. 뼈가 시리는 통증 속에서 생명 체험을 하며 나를 끌어들이는 환상과 악몽 속에서 난 이미 건전한 인간이 되지 못함을 알 뿐이다. 그저 온 몸의 통증을 몽롱한 꿈속으로 끌고 다닐 뿐이다. 내 예민한 감각이 피폐해질 대로 끌고 다니며 조상 대대로 멀리 돌아다니던 유목민의 습성으로, 일종의 무법자로, 나를 탈속시켜 내 생명을 이어가는 방식을 즐길 뿐이다."   이 시는 원래 1976년에 썼다. 문화혁명이 끝나던 시점이다. 그러나 이 시는 계속 지하에 묻혀 있다가 등소평의 경제개방에 힘입어 文革에 대한 자유비판이 가능해지던 80년 이후에야 비로소 문학지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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