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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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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    일제 강점기 조선족 시문학 댓글:  조회:4479  추천:0  2015-09-17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                                                 /장춘식     들어가기 전에: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의 한 장입니다. 인용문의 글자가 웹문서에 부적격한 것들이 있어 가끔 탈락되는 수가 있습니다. 또 각주로 처리되었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도 큰 유감이지만 현재까지는 무슨 방도가 없네요. 각주까지 꼭 필요한 분들께서는 덧글을 달고 메일 주소를 남겨 주시면 파일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시문학은 항일유격구의 항일시가와 일제강점지 문단시가 두갈래로 뚜렷하게 나뉘여진다. 이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력사적상황에서 특이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항일유격구의 항일시가는 시가창작의 주체와 사회지배층의 정치적인 지향이 동일하였기때문에 당연하게도 일제에 저항하여 광복을 이루겠다는 정치적인 지향성이 작품속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일제강점지역의 문단시가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시가창작의주체와 사회지배층의 정치적인 지향이 동일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지배층의 정치적인 지향과 그에 반항하거나 적어도 동조하지 않으려는 시가창작주체들간의 모순된 환경에서 이루어진것이 일제강점지의 시가문학이다. 물론 시가창작의 주체내부에도 정치적인 지향은 다양하였고 따라서 시가작품에 드러나는 정치적인 지향이나 주제의식의 성향도 다양하다. 그러나 적어도 일제식민통치에 순응하거나 심지어 일제식민통치를 찬양하는 성향을 띤 작품은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동시에 일제에 대한 저항을 로골적으로 드러낸 작품도 매우 적거나 거의 없었던것 같다. 다수의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부적응이나 불만을 즐거움이나 기쁨이 아닌, 분노나 암울함, 슬픔 등 여러가지 부정적인 정서의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있다.   Ⅰ. 항일시가     항일시가는 주로 항일유격투쟁중에 창작된 시가를 말한다. 조선족의 항일투쟁이 동북지역과 관내지역 두 부분으로 나뉘여지기때문에 항일시가 역시 이 두 지역의 항일시가로 나뉘여진다. 그리고 이들 두 지역 항일시가는 장르적으로 항일가요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이 항에서 항일시가로 분류된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항일가요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항일가요의 가사 즉 노래말부분이다.     관내지역 항일시가   조선의용군, 광복군들이 활동했던 관내지역에서 창작된 가요들은 일제의 죄악에 대한 규탄과 항일군민들의 투쟁의지를 고양하는 내용들이 기본적인 주제를 이루고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 혁명가요 《최후결전》(석정), 《의용군행진곡》(리덕산), 《어둠을 뚫고》(김학철), 《광복군항일전투가》(송호성), 《민족해방가》(작자미상), 《자유는 빛난다》(작자미상), 《선봉대가》(이두산) 등을 들수 있다.1)     동아의 노예들 단결하여 일떠나   다같이 쳐부시자 일본군벌   우리는 동아의 참다운 주인공   다 앞으로 동무들아!     조선의 형제 대만의 동포   그 압박 또 어찌 받을소냐   혁명의 기발 높이 추켜들고   다 앞으로 동무들아!         ---《전가》     사회주의 공산주의 리념에 의한 혁명사상과 반침략투쟁의 의지를 동시에 구현하고있다. 계급적자각과 민족의식을 담고있음이다. 당시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의용군이나 광복군들의 사상적리념이 그대로 반영된셈이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나가자   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다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여   원쑤를 소탕해 나가자   [후렴] 총칼을 메고 혁명의 길로          다 앞으로 동무들아          혁명의 기는 우리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무들아!        ---《최후결전가》에서     이 작품은 시적인 가공의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혁명의 의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고있다. 항일혁명의 구호를 그대로 시적인 리듬만 갖추어서 표현하였다 하겠는데, 그러나 그만큼 직접적인 선전선동의 효과를 달성하고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수용자 대중의 수준에 맞춰진것으로 항일가요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전부가 그런것은 아니고 일부 민중적인 수사법과 투사적격정을 두루 갖춘 작품들도 창작되였다. 가령,     사나운 비바람 치는 길에서   다 못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          ---《조선의용군추도가》에서     더럽던 동방하늘 전운을 뚫고   광명은 불꽃같이 굽이쳐 빛나   뛰노는 가슴파도 쇠북 치나니   사무친 원한 풀러 나가자   [후렴] 우리 자유 우리 행복 우리 나라          이 주먹 이 총칼로 빼앗아오자   ……           ---《진군가》에서   등 작품들은 시적인 공명과 력동성이 돋보인다. 주제사상의 표현에 맞는 문체와 수사를 적절히 사용한 외에 력동적인 운률을 조성함으로써 내용과 형식면에서 강한 표현력을 획득하고있는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의용군들의 불굴의 의지와 투쟁정신을 드러내고 선전선동의 목적에 도달할수 있었던것이다.   이밖에도 당시 조선족인민이 처한 망국노의 운명을 통탄하고 고국의 고향산천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망향가》, 《그리운 조선》, 《고향리별가》 등이 부대와 대중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으며 연안의 대생산운동에 참여한 군민들의 정서를 반영한 《호미가》(류동호 작사), 《미나리 타령》(집체 작)과 같은 가요들도 군민의 사랑을 받았던것으로 전해졌다.   관내의 혁명부대내에서는 상기한 가요외에 시집 《자유의 노래》(프린트본, 작품을 찾지 못하고있음)를 인쇄한바 있고 일부 자유시들이 창작발표되기도 하였다. 이중에서 민족부흥에 대한 기원을 표현한 《조국을 부흥의 길로》(려전. 1940), 《너 또 왔는가―3.1절을 기념하여》(리두산, 1940), 《광복》(진구, 1941), 망국노의 삶을 통탄하며 민족의 재생을 위해 헌신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압록강》(백치, 1941), 《어머니를 그리며》(운청, 1940)와 중조 두 민족의 친선을 노래한 《양자강》(김유, 1941) 등이 주목을 받은것으로 알려졌다.     동북지역의 항일시가   관내지역 항일시가와 쌍벽을 이루며 동북지역의 항일시가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관내지역의 항일시가는 량적으로 적다고 보기 어려우나 현재 남아내려오는 자료가 빈약하여 사실상 오늘날 우리 항일시가문학의 주요 업적은 동북지역의 항일시가라 해도 대과는 없을것이다.   그런데 동북지역 항일시가는 관내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항일가요가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만 관내지역의 경우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전문적인 작가들의 창작이 아니라는 뚜렷한 특징을 드러낸다. 무명시인들이나 집단창작에 의해 이러우진것으로 보인다.   주제성향의 측면에서는 일제의 만행과 죄행에 대한 폭로단죄, 나라 잃은 민족의 참상 표현, 그리고 일제타도와 국권회복에 민중을 궐기시키려는 선전선동의 내용들이 중심을 이루고있다.   가령 다음 례문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경우다.     1931년 9월 18일   일제놈이 만주를 강점하였다   대포와 비행기며 기관총으로   넓은 만주 피바다로 물들이였다     압박착취 강탈을 당하다못해   일어나는 3천만의 반일의 고함   만주벌판 몇천리를 진동하면서   거족적인 반일전쟁막은 열렸다     (중략)   일어나라 3천만의 로력대중아   우리앞에 무서운것 그 무엇이랴   굳고굳은 반일전선 힘있게 맺어   자유정권 건립하려 힘껏 싸우자         ―《9.18사변가》에서     일제가 동북땅을 강점한 이른바 《만주사변》이라 불리는 《9.18사변》을 상기시키면서 일제의 만행을 폭로규탄한 동시에 3천만 민족이 일떠나 일제를 몰아낼것을 호소하고있다. 아래의 례문들은 그러한 내용들을 좀더 구체화시키고있다 하겠다.     일제놈들이 말발굽소리 더욱 요란타   만주벌과 넓은 천지 횡행하면서   살인방화 착취략탈 도살의 만행   수천만의 우리 대중 유린하도다     나의 부모 너의 동생 그대의 처자   놈들의 총창끝에 피흘렸고나   나의 집과 너의 집, 놈들의 손에   재더미와 황무지로 변하였고나     (중략)   일어나라 단결하라 로력대중아   굳은 결심 변치 말고 살길을 찾아   붉은기아래 백색공포 뒤엎어놓고   승리의 개가높이 만세 부르자         ―《반일가》에서     1932년 4월 6일에   대감자의 반일전쟁 개막되였다.     (중략)   대두천의 불길은 하늘에 닿고   덕원리의 농촌은 재터뿐이다     무죄량민 주검은 들에 널리고   왕청벌엔 인적이 고요하구나     동북땅에 살고있는 중한대중아   일치단결 일어나서 싸워나가자         ―《인민의 처지》에서     이들 가요의 특징은 앞부분에서 일제의 만행을 렬거하여 민중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동시에 마지막부분에 이르면 그러한 일제의 만행을 그냥 두고볼수만은 없으니 모두모두 일떠나서 목숨 걸고 일제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원리를 직설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하고있다. 다음의 례문들도 별로 큰 차이는 없으나 항일투쟁의 수요와 혁명구호의 변화를 반영한 반일의 통일전선정책을 가요속에 담고있다. 1930년 《붉은 5월투쟁》때에 널리 애창된 《총동원가》 등이 이에 속한다.     누구나 다 나오라   일제와 주구를 미워하는 동포   전 민족 혁명의 반일전선에   모두다 모여오라   내몰자 쳐없애자   일제놈을 우리의 손으로         ꠏꠏꠏ 《누구나 다 나오라》에서     만주의 벌판에 불이 붙는다   만주의 뫼봉우리에 불이 붙는다   시뻘건 화염이 치솟는 그속에서   반일하는 대중의 함성이 인다   나가라 싸우라 항일의 병민들   모두다 전선에 나가 싸우라         ꠏꠏꠏ 《총동원가》에서     이들 작품에는 계급, 계층, 성별, 신앙을 가리지 않고 전 민족적인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전략사상이 반영되여있다. 무산계급만이 아닌 일제의 망국노 되기를 원치 않는 모든 민족구성원이 반일투쟁에 궐기할것을 호소하고있는것이다. 《민족해방가》, 《로동자가》, 《농민혁명가》, 《혁명곡》, 《녀자투사가》, 《소년투사의 노래》 등 작품들도 같은 주제를 표현하고있다.   한편 항일가요의 또 하나 중요한 주제는 항일투쟁에서 굴함없이 싸운 투사들의 헌신성과 고결한 품성을 노래한것이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동시에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투사들의 의지와 긍지감도 표현되고있다. 《혁명군의 노래》, 《혁명군인 되련다》, 《혁명의 길》, 《끓는 피는 더 끓어》, 《혁명조의 노래》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남북만주 설한풍 휩쓰는 산중에   결심 품고 떠다니는 우리 혁명군   천신만고 모두다 달게 여기며   피와 땀을 흘린자 그 얼마더냐     몽골사막 지동치듯 거세찬 바람   사정없이 살점을 떼여갈 때에   산림속에 눈깔고 누워 잘 때면   끓는 피는 더욱더 뜨거워진다     지친 다리 끌고서 보보행진코   주린 배를 졸라매고 힘을 돋군다   무정하다 세월은 흘러가는데   목적하는 혁명사업 언제 이룰가         ꠏꠏꠏ 《혁명조의 노래》에서     비슷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항일전쟁의 가렬한 전투에서, 원쑤들의 철창속에서와 단두대에서 굴함없이 싸워 민족적정기를 떳떳이 떨친 항일투사들의 불굴의 의지와 희생정신을 구가한 작품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연길감옥가》, 《추도가》, 《유격대추도가》 등이 이에 속하는데 특히 《연길감옥가》는 현재까지도 일부 불려지고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바람세찬 남북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기에 폭탄 차고 싸우던 몸이   연길감옥 갇힌 뒤에 몸은 여웨도   혁명으로 끓는 피야 어찌 식으랴     (중략)   너희는 짐승같은 강도놈이다   우리는 평화사회 찾는 혁명군   정의의 총칼은 용서없나니   정당히 판결하라 죄인이 누구냐를     팔다리에 족쇄 차고 자유 잃은 몸   너희놈들 호령에 굴복할소냐   오늘 비록 놈들에게 유린당하나   다음날엔 우리들이 사회의 주인     일제놈과 주구들아 안심말어라   너희 세력 강하다고 뽐내지 말라   70만리 넓은 들에 적기 날리고   열린다 감옥문 자유세계로!     《연길감옥가》의 일부이다. 적의 고문과 박해에 의해 몸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였으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민족해방의 의지는 조금도 굽힘이 없다. 반일민족투사의 정신적인 풍모를 잘 그려낸 작품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10월사회주의혁명과 국제적친선을 노래한 《쏘련혁명가》, 《10월혁명의 노래》, 《메데가》, 《10진가》, 항일투사들의 다양한 감정의 세계를 드러낸 《유희곡》, 《딴스곡》, 《사랑의 축복》 등 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여 항일가요의 내포와 외연을 풍부하게 해준다.   한편 항일무장투쟁시기에는 민중들속에서 《유격대》, 《왜호박》, 《어이어이 앵고댕고》, 《왜놈병정 벼락맞았네》 등 항일민요들이 자생하여 불려졌던것으로 전해진다.     뒤동산의 딱따구리   참나무벌레만 잘 잡고요   동서남북 유격대 번쩍   왜놈의 대가리 잘도 까눕힌다네     앞마당의 함박꽃은   바람만 불어도 방긋 웃고요   언제나 잊지 못할 유격대는   인민에게는 언제나 웃음이라네               ―구전민요 《유격대》     동요의 형식을 리용한 이 민요는 그 특징상 구전민요라 보기보다는 오히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민요라 보는것이 더 나을것 같다. 하지만 작사자를 알길이 없으니 그냥 민요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것이다. 《왜호박》이라는 작품도 비슷한 경우이다.     호박은 가을에야 따는줄 알았더니   겨울에도 호박은 풍년이라네   공산군 《토벌》에 으르렁거리며   거뜰머뜰 떠났던 황군나리들   올적에는 그 위풍 어데로 갔나   수레마다 마대를 싣고 오기에   둥글둥글 무엇이냐 물어봤더니   백두산에 심어놨던 호박이라니   일년사철 잘도 따는 왜호박이라네               ―구전민요 《왜호박》     이는 일제군이 항일유격대《토벌》에 나갔다가 항일유격대에게 저격당해 무리죽음을 내자 급한김에 미처 시체를 운반해올수가 없어 대가리만 잘라 마대에 넣어가지고 오면서도 그것을 호박이라 부르며 민중의 눈을 속여넘기려 했던 랑패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있다. 《어이어이 앵고댕고》라는 작품에서도 왜놈들의 랑패상을 드러냄으로써 일제멸망의 불가피성을 표현했다 하겠다.     형식적측면에서 항일시가들은 직설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했으며 력동성과 랑만성을 상당히 중요시했던것으로 보인다. 이들 작품은 대체로 단순하고 알기 쉬우며 생활적이고 선동적이다. 따라서 대중성과 투쟁성을 동시에 구비하고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런 특징을 예술성의 결여로 보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항일시가는 항일혁명투쟁에 민중을 궐기시킨다는 뚜렷한 목적성을 지니고있기때문이다.   이는 또한 항일시가의 존재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있는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된바 있지만 항일시가중에서는 항일가요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항일가요의 주요 영향대상은 민중이며 민중에게 있어 가장 쉽게 받아들여질수 있는 형태가 바로 노래이며 평이하고 투쟁적인 항일가요였던것이다. 따라서 단순성이나 직설적인 표현은 오히려 작품창작의 목적성에 가장 적절한 형식이였다고 보는것이 옳을것 같다.     주 석 ------------------------------------------ 1) 항일시가작품들 다수는 현재까지 텍스트가 공개되지 않아 여기서는 조성일 권철 주필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1990)의 자료를 참고했다. [출처] 일제강점기 조선족 시문학의 갈래와 특징(1)|작성자 반벽거사  
1469    李陸史 청포도 댓글:  조회:4038  추천:0  2015-09-16
  The Poet And I / Frank Mills       청 포 도     이 육 사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1939년 8 월             이육사 李陸史 , 1904.5.18~1944.1.16 1904년 4월4일(음) 경북 안동의 도산면 원천리 불미골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원록(源綠)이며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하였다. 호인 육사(陸史)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 서 옥고를 치루었는데, 그때의 수인번호 二六四를 따서 지었다. 이육사는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 하는 시를 썼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의 병장 凡山 許衡의 딸인,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에서 6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 어났다. 이육사는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 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에 가입했으며, 그 해 10월경 의 임무를 받 고 북경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 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 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 다. 1933년 귀국해 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다.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 다.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 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북경 감옥에서 죽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 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문학세계는, 1933년〈신조선〉에 발표한 시〈황혼〉이다. 이어 발표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 풍림1936. 12> 〈노정기 - 자오선1937.12> 〈연보 - 시학1939. 3> 〈청포도 - 문장1939. 8>〈 교목 - 인문평론1940.7>〈파초 - 춘추1941.12> 등을 발표했다. 〈청포도〉는 '7월', '은쟁반', '모시수건' 등의 시어를 써서 밝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청포도'라는 한 사물을 통 해 끊임없는 향수와 기다림, 미래를 향한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절정 - 문장1940.1>〈광야 - 자유신문1945.12.17>에서 보이듯이 일제강점기의 민족 적 비극을 소재로 강렬한 저항의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꺼지지 않는 민족적 의지를 장엄하게 노래했다는 점이 특징 이다. 특히 유작으로 발표된〈광야〉는 저항시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1946년 신석초·김광균 등이〈육사시집〉을 펴냈다. 이후 1956년 재간본과 1964년 재중간본이 나왔고, 재중간본을 펴낼 때 시집 이름이〈청포도>로 바뀌었다. 또한 1971년에는 이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와 작품연보가 추가된〈광야〉라 는 시집이 발행되었다.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육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육사문학관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7월에 건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과 관련,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 생활 모습 등도 재현해 놓았으며, 2층은 낙동강 이 굽이쳐 흐르는 원천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기획전시실, 영상실과 세미나실, 탁본체험코너, 시상 전망대 등 이 갖춰져 있다. 그동안에는 안동시에서 관리를 해오다 2008년 12월 1일부터 (사)이육사추모사업회로 위탁되어 운영을 하게 되었다. (사)이육사추모사업회는 선생의 나라사랑과 사상을 기리는 지역 내 순수민간단체로, 대표에 최유근 전 이육사연구회 회장, 초대 이육사관장으로 조영일 한국문협 이사가 내정되었다. 이육사문학관이 전문문학인들이 운영주체가 되어 이 루어짐으로써 문학관 본연의 기능을 되찾아 많은 문학인들이 즐겨찾는 문학관으로 거듭나며, 도산서원과 퇴계종택, 청량산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하여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도 자리매김 하고 있다. 또한 육사선생의 따님인 옥비 여사가 육우당에 기거하면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안동문화원 문예창작반 회원들 이 이육사 문학관 해설사로 봉사를 하고 있다. 육우당-六友堂 원래의 이육사 생가는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자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에 이건 보존되고 있으며, 이집에서 애국지사 이원기 선생을 비롯하여 육사,원일,원조,원창,원홍 6형제분이 태 어나셨다하여 당호를 육우당이라 한다. 이 건물은 생가를 본뜬 모형 집으로 구조는 "二"자 형태이며 앞쪽은 사랑채로 방 두칸, 중간 마루 한 칸이고 뒤쪽 안채 는 반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지어졌다. 사랑채의 오른편은 팔작 지붕인 반면 왼편은 맞배지붕이 특이하나 수리 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사진 오른쪽)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메인가 내가 부르는 노래는 그 밤에 강건너 갔소 - 중 마지막 연 - ■ 내가 바라던 손님, 고달픈 몸으로 모시두루마기 입고 건너 오기를 기다리던 강, 이제는 메말라 개천으로 흐른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작품해설.. ●감 상 :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어 조 : 식민지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은 대립되고 있어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는 어조임 ●표현상의 특징  -시각적 이미지(이상적 세계를 구현하는 소재)  - 청색 : 청포도, 하늘, 푸른 바다, 청포  - 흰색 : 흰 돛 단 배,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구 성 : 6연 각 2행 (내용상 3단락)  제1~2연 :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  - 청포도 :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되어 나오는 매체  제3~5연 :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  - 그가 찾아올 그 날 :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  - 청포 입은 손님 :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  제6연 : 손님을 맞을 마음가짐과 준비 자세  - 은쟁반, 모시 수건 : 화해로운 미래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  ●주 제 :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  ●출 전 : [문장](1939),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  작품감상... 민족적인 바탕이 순수한 시의 바탕이 되고,시의 순수성이 민족의 현실과 결합하여 예술로서 승화되는 것이 육사의 두드러진 장점이다.그러기에 이 작품은 향토색 짙은 시와 순수성과 시적 인식이 뛰어난 육사의 대표적 서정시라는 평가와 함께,민족의 수난을 채색하여 끈질긴 민족의 염원을 시화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따라서 이 시를,청포도라는 사물에 대한 아름답고 신선한 작가의 감각을 표현한 서정시로 보느냐,또는 청포도로서의 어떤 의미를 상징한 시로 해석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육사 시의 거의가 애국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그 특색인 만큼,이 작품처럼 순수한 감각적인 시에도 그의 특징인 애국적인 요소가 배어 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그러나 포도를 따먹는 것까지 조국 광복을 기다리는 사실과 결부시킨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어색한 노릇인 것 같다.따라서 청포도가 익는 7월에 찾아오는 청포 입은 손님을 기다리는 주인의 흐뭇한 정서가 주조로 되어 있고,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청포 입은 손님이 암시하는 조국 광복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공감이 서려 있다고 봄이 타당한 것 같다.       이육사의 詩精神   [빛나는 정신과 서정의 적극성]  암흑 속에서 빛나는 별을 노래하고 “오는 날”의 기쁨을 노래한 이육사는 거짓된 희망이나 자기 위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이육사는 결코 현실의 위압에 압도되지 않았고 오히려 현실의 위압을 넘어서는 빛나는 정신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광야」)을 기다리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의연한 모습이나 “서릿발 칼날 진”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을 보여 주는 비장한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육사의 기다림은 치유된 세계, 해방된 삶을 윤리적으로 강렬히 소망하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는 손님”(「청포도」)이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위해 “하이얀 모시 수건”을 준비하고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은 마땅한 미래를 구성하는 적극적인 행위와 의지이다. 서정성 넘치는 「청포도」는 그러한 적극성이 도달한 세계이다. 여기서는 풍성한 마을의 역사가 복원되고, 무한한 하늘을 인간이 호흡한다. 그것은 황폐화한 현실의 재건이자 자연과 인간이 이룬 조화와 화합이다. 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바라던 사람과 함께 우주의 기운이 충만한 청포도를 함께 먹는 일상의 향유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의 근본 조건이다. 「청포도」는 정치적 해방을 싸안으면서도 뛰어넘는 해방된 세계이자, 그 세계를 향유하는 행복한 삶의 공간이다.[출처]디지털안동문화대전    이육사 생가- 도산면 원천동 소재     [註]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이황의 후예로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활(活), 자는 태경(台卿)이다. 북경조선군관학교와 북경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저항시를 발표하면서 항일 정신과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그 후 계속적인 항일 운동으로 수없이 옥고를 치르다가 북경 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작품에 시집 『청포도』, 유고집 『육사 시집』이 있다 이육사 생가는 원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 있었는데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 위치인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 왔다. 이건 후 한쪽 일각문(一角門) 자리에 대문이 서고, 원래의 대문 자리는 이웃집 석축이어서 담장도 대문도 없다. 옛 집터에는 1993년 「청포도」를 새긴 시비가 건립되었다.   이육사  생가 - 안동시 태화동 소재   [출처] 청포도 -이육사|작성자 솔로  
1468    리육사의 <<로신추도문>> 댓글:  조회:6062  추천:0  2015-09-16
  ...북경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이곳에 있는 감옥에서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육사 순국지'로 알려진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은 관광객도 많이 찾는 베이징의 명소 왕푸징(王府井)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 밖이나 안이나 아무런 표지도 없어 이 건물의 정체를 일반인이 알 길은 없어 보였다. 1925년 21살의 나이로 의열단에 가입해 일생을 오롯이 조국독립에 바친 육사는 1943년 체포돼 베이징으로 이송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광복을 앞둔 1944년 40살의 나이로 이곳에서 옥사했다.   북경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은 지금 일부 공간이 개조돼 주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건물의 상당 부분은 오래전에 폐쇄된 상태였다.   중국에서 해당관리 및 보존조치가 없다면 조만간 철거될 운명을 맞게 될 우려가 크다. 건물 앞에서 마주친 한 중국인 남성은 "이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다. 한국의 리루스(李陸史)가 여기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연히 마주친 중국인의 입에서 이육사라는 이름을 듣게 된 것은 의외였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의 시 '광야' 중에서)라고 노래했던 저항시인 이육사의 자취는 이처럼 미약하게 남아있다... ...보존, 관리 되기만을... 그리고 력사를 잊지말기... 李 陸 史  출전 :《朝鮮日報》(l936·10·23∼29)  노신 약전-부저작 목록-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이며 자(字)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후 동경에 건너가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연에 귀국하야 절강성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회문학운동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문학에 대하야 자연주의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 정부교육부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연 도하문 대학교수로서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주임교수의 직에 있다가 1928년 이것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맹아일간』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련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맹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年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중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가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제거하였다. 형년 56.  주요한 작품으로는 {아Q정전(阿Q正傳)} {눌함( 喊)}{방황(彷徨)}{화개집(華蓋集)}{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약(藥)}{공자기(孔子己)} 등이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엿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불란서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의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팔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과 인제는 고인이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을 불명케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여사를 중심으로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열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뒤 3일이 지난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 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 『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阿Q의 正傳을 다읽고 났을때 나는 아직까지 阿Q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견디겠다』고 한『로망·로-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阿Q의 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阿Q들은 벌써 『로망·로-랑』으로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 많은 阿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난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阿Q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정신의 삼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紅樓夢)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같은 것은 속인의 할 일이라 하여나치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동성파와 사기당과 원수단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지(胡適之)박사는 『문학개량 추의}라는『문학혁명론』을 1917年 신년호에 게재하여 진도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운동을 방해코저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 보았으나 1918년 4월 호에 노신의『광인일기』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 화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것은 그 후 얼마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속에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하면 곳 붙들고 말하기를----- 중국의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개 망상광의 일기체의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열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열마나한 해독을 끼처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송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적 사회의 성장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중에 한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둬적거려 보았다. 역사란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씨여져 있었다. 나는 밤잠도 안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자가 씌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소설의 일편은『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을 맞는다. 실로 이 한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 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데따라 문학화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이(孔乙已)』『藥』『明日』『一個小事件} {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후 1921년 북경신보문학부간에 그유명한 『阿Q正傳』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현화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가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의 심리에 생활의 『디테일스』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가지 조건이 되겠지만는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테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孔乙己』의 공을기나 『阿Q正傳』의 阿Q가 모두 일파이 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孔乙己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여지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이금십구적 주책가 어느때까지 쓰여져있는데로 언제인지 행방이 부명된 체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농민인 阿 Q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혁명 떠들어 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얼어난 폭도의 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 (피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야) 피살되는 阿Q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가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阿Q가 공을 이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개의 정신도 없으며 우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개 쥐여질리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레얄 리스틕}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 였으니 당시 『阿Q正傳』이 發表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阿Q 時代』이 였으며 노신의 『阿Q正傳』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지식군들은 『阿Q相』이라거나 『阿Q時代』라는 말을 평상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개의 재료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야 일실하여있는 노신정신을 다시한번 음미해보는데 적지않은 흥미를 갖게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것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나 하나 문제가 엇지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문제는 그의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後年『눌함』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로으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을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하려니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 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 이였겠지만은 이꿈도 결국은 깨여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해도 또 아무리강상해도 무의미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밖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中略---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하기로 했다 (눌함자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하남』 등에 쓰든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희납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빠이론』과 파란의 복수시인 『아담·미케뷧치』『항가리』의 애국시인『베트피 ·산더--』 『필립핀』의 문인으로 서반아 정부에 사형받은『리샬』등의 작품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서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은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녀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닭게 한 것은 물론 이래기천년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여졌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였다.  그럼으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阿Q도 여기서 비로서 영생하였스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항 무한을 쫓겨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부촌이 때마침 프로 문학론이 드셀때인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보았다. 그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阿Q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作品에서 우리는 눈딱고 보아도 푸로레타리아的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것이서 노신이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수 있는 푸로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민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반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해서 그의『四五』전후의 작품을 프로 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러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 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해서 작가 노신의 명의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서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수있을까? 생각컨대 이것은 매우 곤난하다. 現在의 이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테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해도 용이치않다. 어떤 사람이 즉 이런 문제를 제출한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그래도 좋다. 왜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양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럼으로 프로 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기피 현실의 핏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 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中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전 모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삼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를 소뿌르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를 뿌르 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는파에 대해서는 무엇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전투자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 보담 만은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료해하야 장래를 추단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랄』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 시준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父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든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生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느면 안될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려나가기 더 바밨다.}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 한 안복파의 수령 단사서의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의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오십여명 체포령을 내렷다. 우리 노신은 이 오십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이 결정되어 그 익년 가을 『뽀로듼』等이 고문으로 광동에오고 『전국민적공사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 일계단인 광동시기에는 프로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지 였다』  그래서 급진교수들은 교육부총장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수백여명의 사상자가 낳다. 그때 노신은 북경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병원이나 공장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이래 최암흑일에 지』하였다는 명문은 단사서로 하여금 기자에 내려안게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중략--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속화개집)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콜키-』이든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양리 ·발뷰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오십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단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폐타는 광동일성만 노동자 농민급진지식분자 삼천여명을----하였으며 한때는 『혁명의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여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악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하는 것은 대권로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더 생기있는 것이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더 아낌이 없시------(而己集)  이 글은 그가 심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보인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그가 상해에 왔을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불만과 극좌적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찰스키--』들의 문학론과 『싸벳트』의 문예정책을 번역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던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가 마저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난한 수형에 의하여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점괴히 알며 붓을 놓기로 한다. -了-  ----------------------------------------------------------------   魯迅 1. 생애   1-1. 출생, 일본 유학, 귀국 이후의 활동 노신은 1881년 9월 25일 중국 저장성 소흥에서 태어났다. ‘노신’은 그의 필명이며,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다. 그는 지방에서 위세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노신이 13세 때 할아버지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가 병사함으로써 집안이 몰락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전통 교육을 받고 한 때 과거에도 응시했지만, 가정 형편을 고려해 학비가 무료인 남경의 수사학당(해군학교)에 진학했으며, 곧 광무철로학당(철도학교)로 옮겨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접한다. 기본적인 어학공부를 마친 1904년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강의도중에 중국인 처형장면을 보여주는 영화가 상영되자, 이에 분노해 의학공부를 파기하고 자퇴한다. 공부를 중단한 뒤에도 노신은 한동안 동경에 머물면서 현지의 중국인 유학생등과 교류했다.특히 문학을 통한 민족 계몽을 목표로 삼아 외국 작품을 널리 접하고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가 최초로 유학생 잡지에 투고한 글은 테르모필레 전투에 관한 번역소설 ‘스파르타의 혼’이었으며, 후에 동생 주작인과 함께 번역 단편집 ‘역외소설집’(1909)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악화되어 장남인 노신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을 돌보아야하는 처지가 된다. 1909년 귀국한 노신은 항주에서 교사가 되었지만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직하고, 1919년 우창봉기로 인해 소흥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면서 노신은 사범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지만, 역시 몇 개월 견디지 못하고 고위층과의 갈등으로 사직한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남경 임시정부의 교육부 장관이 된 채원배가 노신을 찾아, 그 때부터 그는 교육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다음해 임시정부를 따라 북경으로 거처를 옮긴다.   1-2 본격적인 문학 활동 노신은 그 당시 허무와 자조 상태에 빠져, 교육부의 업무 외에는 거의 두문불출하며 고전 연구에만 전념했는데 , 이는 유학 시절에 품었던 계몽주의적 포부가 귀국 이후에 현실의 두꺼운 벽 앞에서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노신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문필활동을 하게 한 계기가 있었는데, 이에 관해 그는 첫 번째 작품집 ‘외침’(1923)의 서문에서 밝힌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와서 잡지에 수록할 원고를 청탁하자 노신은 반론을 제기한다. “ 가령 창문이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는데,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이 들어 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 그러자 친구는 반문한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노신은 글을 한 편 기고하게 되는데, 그것이 1918년 5월15일자 ‘신청년’에 실린 첫 단편소설 ‘광인일기’이다. 노신이라는 필명도 이때에 처음 사용한다. ‘문화 혁명’이후에 신문화운동이 한창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노신의 작품은 곧 주목을 받게 된다. 노신의 동생 주작인도 뛰어난 글 솜씨로 명성을 얻지만, 1919년 노신과 주작인 사이에 큰 불화가 생겨 남은 평생 동안 서로 인연을 끊고 지내는 일이 발생했다. 1921년 12월 4일자‘신청년’에는 노신의 소설 ‘아Q정전’의 첫 회가 간행되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아Q의 딱하고 어리석고 불운한 인생은 당신 노신이 절감한 중국과 중국의 현실을 집약한 것으로 평가되며,연재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노신은 소설집 ‘방황’(1926), 산문집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1927), 산문시집 ‘들풀’(1929), 문학론 ‘중국소설사략’(1924)를 간행했으며, 70개가 넘는 수많은 필명으로 여러 잡지에 ‘잡문’ 또는 ‘잡감문’을 기고했다. 현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로 손꼽히지만, 정작 그가 남긴 문학 작품은 중편 1편, 단편 32편으로 상당히 적은 편이며 수준도 들쑥날쑥하다.   1-3. 말년의 본격적인 투쟁 1920년부터 노신은 베이징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그중 한 곳인 베이징 여자사범대학에서의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현실의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1924년 반동 성향의 학교 이사진이 개혁 성향의 학생 상당수를 퇴학시키자, 이에 반발하는 학내 투쟁이 지속되어,결국 교육부에서 폐교 조치를 단행한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학생도 돌아올 수 있었지만 이 사건에서 공개적으로 학생들을 지지했던 노신은 결국 13년간 몸 담았던 교육부에서 파면된다. 그 즈음 노신과 인연을 끊은 동생 주작인과 동료 문인 임어당이 각각 “물에 빠진 개는 때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패배한 자를 더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 페어플레이 정신이 필요하다.”라는 요지로 논쟁의 자제를 요청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에 노신은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람을 무는 개라면 물에 빠졌건 안 빠졌건 간에 무조건 때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페어플레이라는 말조차도 기득권 세력에게 유리하게 사용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27년 노신은 국민당 정권의 4/12대학살에 분노하고, 그해 가을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 창작보다는 강연과 논쟁에 몰두한다. 신문학 운동의 대표자로 자리 잡은 노신을 향한 신세대 작가들의 비판이 거세었으며, 논쟁을 위해 뒤늦게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2년 송경령과 채원배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동지인 양전이 국민당의 테러로 사망하자, 암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문상을 다녀왔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나라 시인 이육사가 노신을 직접 만나고 감동했다는 일화가 있다. 1936년 노신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그해 10월 19일 새벽에 상해의 자택에서 5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사망 한 달 전에 발표한 ‘죽음’이라는 글에서 노신은 평소의 직선적인 성품에 걸맞는 유언을 남긴다. “장례 때 조의금을 받지 마라.”, “가급적 빨리 매장하라.”, “기념행사 치르지 마라.”, “나에 대해서는 얼른 잊고 당신들이나 열심히 살아가라.”, 등등의 내용이었다. 아울러 그는 임종에 직면해서 오랜 원수조차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서양의 관습을 언급한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결코 원수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그들도 얼마든지 증오하게 내버려 두어라. 나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2. 노신의 사상   2-1. 노신과 계몽 노신은 5.4 계몽운동을 깊이 공감하고 진심으로 계몽을 후원했으며, 더 나아가 계몽의 본질을 깊이 통찰하고, 거기에서 인생과 세계의 어두운 심연을 발견한다. 따라서 노신은 계몽을 제창하고 계몽을 초월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계몽의 길로 가라고 권유를 했지만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뇌했다. 왜냐하면 계몽의 길은 멀고도 험한 가시밭길이며, 혁명전쟁에 참여하면 아무런 댓가도 없이 이름 없는 산골에서, 들판에서 죽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계몽의 길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은 이름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권해야 하는가? 노신은 계몽의 어둡고 깊은 심연 앞에서 계몽을 초월한다. 그의 소설 ‘아Q정전’에서 그는 중국의 국민성에 깃든 노예근성을 통렬하게 비난한다.아Q라는 근본 없는 야비한 인간의 ‘정신 승리법’, 그것이 중국인의 노예 근성이라는 것이다.아Q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는 계몽의 길을 그는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5.4운동 무렵 북경 여자사범학교 선생을 하면서 학생들의 데모와 경찰의 총격으로 유화진이 사망하고, 사범학교 교장과 다투고, 교육부 장관과 싸우고, 진원 등과의 설전을 벌이면서 그는 점점 계몽의 심연을 보게 된다. 그는 ‘들풀’이라는 시집에서 계몽의 본성과 계몽의 초월을 말한다.   2-2. 고독과 비애, 흡인력, 초인 사상 중국의 평균적인 국민성을 아Q로 설정해 통렬하게 비난한 노신은 아Q와 반대되는 초인을 설정한다. 계몽은 특별한 길이고, 험난한 가시밭길이며, 자신을 계몽하고 나서 세상을 바꾸려 나서는 길이다. 자신을 바꾸는 것도 힘들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더 힘들다. 이런 힘든 계몽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바로 초인인 것이다. 이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의무이고 당위이기에 계몽의 길로 가는 것이다. 노신의 문학 활동이 바로 그런 초인의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통속을 멸시하고 전통을 공격하며, 용맹하게 세상에 뛰어들어 국민성의 마비를 끊임없이 폭로하고 통렬하게 비판했고, 그에 대한 댓가는 계속되는 싸움, 비난, 멸시, 그리고 탄압이었다. 그가 초인을 외치는 것은 바로 이점, 자신의 계몽된 이성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되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 이 세상의 냉혹한 반격, 차가운 세상, 인생에 대한 당혹스러움에 대한 통찰이 있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성립되는 그의 감수성은 고동과 비애의 감정이며, 생활의 근거이며 그의 작품 활동의 힘이 된다. 초인의 정서는 우울한 허무주의 사상인 것이다. 그가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신랄한 비판과 도독의 비애가 내비치는 현대적 인생의 의미인 것이다.   2-3. 실존의 느낌, 형이상학적 감수성 계몽의 길은 개인의 실존과 직면하는 길이다. 죽음으로 이르는 가시밭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존의 느낌을 노신은 ‘그림자의 작별 인사’에서 말한다. 어떤 그림자가 주인에게 ‘너는 계몽을 따르는 고상한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그림자일 뿐이다. 너를 따라다니다 이제 지쳤다. 네가 천국에 간다 해도, 네가 지옥에 간다 해도 함께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빛과 어둠의 중간에서 서성대다가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조용히 잠겨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림자는 계몽과 혁명의 길로 나서는 지식인들의 자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자가 보았을 때, 너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데 왜 편한 길을 버려두고 계몽의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을 그림자는 묻고 있다. 그림자는 그의 실존의 바닥일 것이다. 이런 일상의 평범함을 떨치고 계몽의 길로 나설 때 사람들은 차가운 현실, 당혹스런 세계와 부딪치게 된다. 이러한 비참한 생에 대한 황당함, 당혹감, 음랭함, 죽음과 삶에 대한 강렬한 감수성은 노신으로 하여금 보통 사람들의 감정을 넘어서 형이상학적 감수성인 비애와 고독으로 빠지게 했을 뿐 아니라, 일생 동안 지속된 노신의 고독과 비애에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의미를 띄게 했다. 노신은 불교 이론을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있으며, 니체로부터 안드레예프에 이르는 현대 서구 문예 속에서 현대 의식을 느꼈으며, 일본 문학이 표방하는 인생의 비애감에도 영향을 받아, 노신의 고독과 비애가 일종의 철학적인 풍취를 갖게 된 것일 것이다. 그는 낡은 문화, 낡은 세력과의 싸움에서 느끼고 짊어지고 인식한 어두운 현실, 무거운 고난,고통스런 전투, 아득한 전망, 머나먼 길, 깨어나지 않는 인민 대중, 악의 세력의 거짓과 잔인성, 아는 사람들의 은밀한 공격 등등 이 모든 것이 그를 고독과 비애로 이끌었으나, 그는 기래도 경박한 ‘인도주의’, ‘집단주의’나 ‘과학주의’, ‘이성주의’에 빠져들지 않고, 개체의 ‘현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했다. 2-4. 귀신과 용사, 죽음과 용기의 변증법 계몽의 제창과 초월 속에서 그가 당면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그를 어둡운 곳으로 끌고 갔으며, 그는 늘 죽음을 생각했다. 이에 그는 결국 귀신과 죽음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른다. 그는 중국에서 대표적인 귀신인 무상(無常)과 여적( 女吊)을 찬양한다. 저승사자에 해당하는 무상과 처녀 귀신인 여적 모두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와 삶의 용기의 변중은 그의 문학의 기본적 분위기이다. 그는 계몽의 제창에서 세상의 차가움 속에 절대 고독과 비애를 맛보고, 초인사상으로 나아간다. 그는 고독과 비애 속에서 형이상학적 감수성으로 이 세상을 통찰한다. 그는 계몽의 끝에 있는 죽음을 보고, 귀신을 본다. 그는 그런 죽음과 귀신까지도 사랑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계몽을 향한 강한 의지를 가졌다.     [출처] 노신|작성자 min  
1467    당신도 디카시 시인 댓글:  조회:4836  추천:0  2015-09-12
   나도 ‘디카시인’이 될 수 있을까. 단골술집 목포집 한 쪽엔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야생초를 키우는 풍경이 있다. 주전자와 식물의 공존 방식이 다가왔다. 그래서 사진을 찍었고 내 삶이 감정이입 되어 ‘권주가’라는 제목을 붙였다.       당신이 디카 시인이다    일간 경제지 머니투데이는 매주 ‘최광임 시인이 읽어주는 디카시’를 연재하고 있다. 시인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이 사진이 불러오는 시상을 짧은 시로 표현한다. 시집 ‘도요새 요리’로 유명한 최광임 시인이 멋진 시 해설을 붙인다. 사진이 앞장서고 시가 뒤따르는 형식이 디카시(디지털카메라+詩)다. 이 디카시 코너가 모바일 세상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독특한 시선의 사진과 군더더기 없는 짧은 시가 결합했고, 이를 시평으로 풀어내는 최 시인의 디카시 칼럼은 네이버 프런트 페이지에 종종 오른다.   작금의 시는 문자성을 꼿꼿이 강조한 채 소수 문학인 집단의 향유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문자성을 본질로 삼고 이미지와 영상을 한 아름 품을 것인지를 결단해야만 한다. 고답적으로 자유시 산문시 정형시 서정시 서사시 등으로 분류되던 현대시는 새롭게 태어나야만 한다. 시 독자가 떠나버린 황량한 시단엔 시인들 푸념만 가득하다. 8000원 짜리 시집은 팔리지 않고 광화문 교보문고 시집 코너는 쓸쓸하기만 하다. 이 땅에 한글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자칭 타칭 2만 명에 이른다. 시 전문 문예지는 수백 종에 다다른다. 하지만 시를 즐기는 독자군은 눈에 띄지 않는다. 시인은 어느 별에서 사라진 시 독자와 재회할 것인가. 가장 오래된 문학의 원조인 시는 어디에다 둥지를 틀 것인가.   바로 스마트폰이다. 모바일 네트워크 시대, 인류는 호모 디지쿠스를 지나 호모 모빌리쿠스로 진화했다. 현대인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현대시가 SNS 소통환경에 최적화되어 다시 시의 깃발을 들어 올린 경우가 바로 디카시(dicapoem)다. ‘디카시’라는 용어는 2004년 이상옥 시인이 최초로 사용했고 공론화시켰다. 이 디카시가 사그라지는 현대시를 되살리고 있다. 멀티 언어예술로서 시의 언어 카테고리를 확장시킨 셈이다. 즉 시의 진화이다. 시는 사진과도 만나고 그림 애니메이션 플래시 동영상과도 만나야 한다. 문학 위기의 시대, 시가 스마트 미디어를 만나 문학의 본류를 부활시킬 수 있는 마지막 싹이 된 것이다.    디카시 칼럼의 한 사례. 냉면 사발에 오롯이 들어앉아 잠을 취하는 강아지의 모습이 애처롭다. 이 풍경에서 날선 이미지와 메시지를 포착해 디카시는 태어난다. ​   삶의 길을 걷던 시인(당신이 시인이다)이 주변 풍경과 사물을 일별하면서 영감을 주는 이미지를 포착한다. 자신의 휴대전화를 열어 찰칵 찍는다. 이때 가슴도 열어 심상의 필름에 새겨둔다. 감흥이 채 식기 전에 서너 줄의 시적 언어로 꿰고 엮어 편집해둔다. 독특한 이미지는 시상(詩想)을 열어주고 시 언어는 이미지의 날개를 달고서 하늘을 난다. 이때 시인은 기성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 아니다. 바로 현대인 우리 자신이다. 저마다 휴대폰엔 수백 수천 장의 사진이 보관되어 있다. 이중에서 타인의 시선과 차별화된 사진 하나를 골라 나만의 서너 줄 문장을 보태보라. 깔끔하고 상징화된 시 제목을 한번 붙여보라. 바로 그것이 당신의 디카시다.   당신이 기르는 애완견 사진 한 장은 그 자체만으론 예술적 아우라를 갖지 못하지만 공감과 감수성을 장착한 시 문장을 갖추면 예술적 오브제로 승화된다. 당신의 '일상 역사' 수천 장을 휴대폰에 켜켜이 쌓아 놓고 사장시키지 말라.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열람하다 보면 수많은 사진과 만난다. 포스팅한 사진에 제 나름 감수성이 묻어나는 문장이 덧붙여진다. 사진에 깜찍한 캡션을 다는 일. 바로 디카시의 출발점이다. 이미지가 문자에 또는 문자가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고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며 시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디카시는 진지함이나 근엄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가벼운 일상에서 이미지를 채취하므로 산책하는 기분처럼 상쾌하다. 관념적 사유가 아니라 일상을 즐기는 낭만정신을 앞세운다.   디카시가 페이스북에서 인기를 끈 요인으로는 ‘열린 참여’라는 전제가 자리 잡고 있다. 디카시는 이미지라는 영상에 시의 압축성을 결합한 것이다. 4~5행 안팎에 시적 메시지를 압축한다. 1분이면 읽어내기에 이미지 전달력이 빠르고 강력하다. 고답적인 고담준론의 관념성은 발붙이지 못한다. 대신 일반인의 참여가 환영받는다. 이 지점에서 디카시의 향유층은 바다처럼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다. 향후 디카시는 소셜 네트워크 콘텐츠로 어떻게 자리매김될까. 인간 고유의 보편적 정서를 기반으로 일상을 스케치하는 이미지와 글월이 밀고 당기므로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나아가서 전 세계인의 보편 정서까지 노크할 수 있다. SNS 상 언어번역기능이 세밀히 작동된다면 한국어의 한계을 뛰어넘어 전 세계를 가로지르는 글로벌 문학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새 문학 장르가 열리는 셈이다. 당신이 ‘디카 시인’이다. [출처] 당신이 디카 시인이다 |작성자 해리슨 김용길  
1466    <사진> 시모음 댓글:  조회:5019  추천:0  2015-09-12
[ 2015년 09월 14일 10시 05분 ]           + 사진사에게  웃으라 하시기에 웃기는 하였으나 울고 싶었던 적이 훨씬 더 많았지요. (유용선·시인, 1967-) + 사진寫眞     꽃도 찍히면  더 이상 시들지 않는다  나무도 찍히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새도 찍히면  더 이상 날지 않는다  사람도 찍히면  더 이상 늙지 않는다  (오정방·미국 거주 시인, 1941-) + 사진  멈추어 선  시간  머물러 있는  모습 속에서  그때  스미어 넣은  마음을 찾는다 (오보영·시인, 충북 옥천 출생) + 사진 삶의 한 순간이 멈추어져 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표정이 머물러 있다 나에겐 멈출 수가 없이 흐르고만 있는 삶의 시간이 인화지에 멈추어져 있다 아주 작은 삶의 한순간의 표정이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오래된 사진기  언제부턴가 렌즈는 흐려있었다  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아도  부옇게 서린 김은 지지 않았다  들여다보면 군데군데  크고 작은 흠집이 나있었다  조리개를 열고  초점을 맞추고  앵글을 바짝 들이대도,                    세상에는  찍히지 않는 것들이  참 많았다  낡은 사진기로,  골목에서 종일  호기심에 걸려 넘어지는  아이를 찍는다  민들레꽃 닮은 노란 옷의 아이는  부지런한 두 발로, 아장아장  렌즈에서 멀어진다  오십 년을 사용한  흐린 두 눈에  찰칵,  아이의 울음이 찍힌다  (마경덕·시인, 1954-) + 사진사  내 사진은 내 삶 속에 있다고 공언했지요  사진 속에 삶을 담지 말고  삶 속에 사진을 담으라 했지요  그래야 좋은 사진이 된다고  좋은 사진사가 된다고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좋은 삶을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그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익어가지 않는 삶  감동 없는 삶  그 삶을 찍으려니  카메라 파인더에  한숨으로 남아  상처로 남아  시간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회한에 서성이고  지나간 시간에 딴지 걸리어  멈춰버린 시간  고독한 남자의 고독한 고백  그것은 패배의 모습인가요  진실의 늪인가요  오늘도 사진은 한 컷도 누르지 못합니다  셔터는 영영 누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그래도 찍어야 한다는 숙명적인 운명  이것은 무슨 지독한 전생의 업보인가요  좋은 삶은 아직도  내 머리 속에서만 잉잉거리는 것을.  (남경식·사진작가 시인, 1958-)  + 사진 예술가  아마 그들은 내리쬐는 햇살만 봐도  가슴이 울렁이겠지  크지 않은 오목 혹은 볼록 조리개 속에  가는 숨 가만히 가만히 멈추어  우주를 담는다  해를 담는다  달과 별을 담는다  고운 풍광을 담는다  몇백만 분의 일초 사이 그 짤막한 순간을 얻기 위해  심장 박동을 정지시킨다  미세한 신경 따라 흐르는 붉은 피마저 정지시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꿈을 꾼다  아마 그들은 하루에도 몇십 번 몇백 번씩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어 수도승보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겠지  (이승익·시인, 1951-) + 사진사의 기도 이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창조하신 하느님, 당신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전하려는 사진사들에게 별처럼 반짝이는 창조력과 당신 은총의 손길을 찾아내는  정성스런 추구의 눈길을 주소서. 빛을 창조하시어 어두움과 밝음을 주시고 계절을 창조하시어 다양한 색깔을 주시고 공간을 창조하시어 삶의 굴곡을 주시고  숨결을 창조하시어 생명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어 생의 흔적들을 주시니 이 모든 것들을 삶의 그릇에 담으려는  사진사들의 정성에 함께 하소서. 사진사들의 노력으로 표현된 하나하나의 손길에서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사진사들에게 생의 존재 가치를 깨달아 생활 속에서 그리고 자연 속에서 당신 창조의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느껴 당신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지나간 삶의 흔적들을 믿음으로 키워내고 하루하루의 삶을 사랑으로 행동하며 더 나은 내일의 꿈을 희망으로 그려내는 그러한 사진사들의 움직임에 함께 하소서. (작자 미상) + 사진 한 장  항상 가지고 다니는 사진 한 장 이제는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되어버린…… 손에 닿을만한 곳에 있으면 자주 보지 않는 이유는 바라만 봐야 좋다는 이야기 지금은 이해가 간다 (원태연·시인, 1971-) + 사진을 박다  내 속은 시커멀까?  구렁이 몇 마리 똬리 틀고 있을까?  욕심을 먹으면 왜 배탈이 날까?  궁금한 마음에 찍은 시티 사진  의사가 느물느물 사진에 담긴 내 뱃속을 헤엄친다  집안 잘 보이는 곳에 사진을 박아놓는다  굼실굼실 살아있는 내 속  그게 구렁이라도 좋다  그 말고 탓할 데 없는 모습  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벽에서 떨어질까 못을 박는다  (최범영·시인, 1958-) + 사진 한 장  너와 찍은 사진을 걸어 둔 날  내 마음도 얹어 걸어 놓았다  활짝 웃는 두 사람으로 인해  금새 벽이 환해졌다  몇 번이고 열어 보이던 네 마음이  내 生으로 걸어 들어오던 날을 생각했다  만발한 벚꽃 뒤로 숨어 버린  서로의 마음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무언의 약속조차 하지 않은 시간이  사진 속에서 탈속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진 한 장  오래도록 내 마음에 걸어 두기로 했다. (이정자·시인, 1964-) + 사진  열 일곱 소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세워 두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진이 넘어졌다  무릎에 바람 날 나이도 아닌데 자꾸만 넘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람에 날리는 소녀들의 머리카락이 너무 가벼운 탓일까  배경으로 찍힌 철쭉이 너무 붉고 비탈은 숨가쁘게 가파르다  무게를 잡아도 옆으로 새는 웃음을 어쩌지 못할 때  넘어진 사진에 숨은 바람이 슬슬 새어 나온다 (강영환·시인, 1951-) + 사진 나이가 한 육십쯤 되고 보니  이래저래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된다.  아름다움에 찍힌 풍경은 물론이려니와  마음 아리게 지켜 온 우리의 살림 얼룩들  그 츱츱함까지도  이제는 추억 삼아 아득해 보이지만  집 머리맡에 국기처럼 걸려있는 사람  아직도 어려 보인다고  쑥스러워 하고 있지만  그리움에 감광된 마음으로  속이란 속은 다 타서  늙지도 못하는 옛날이  천연색으로 보는 꽃 시절 한 폭  제가 죽은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산 사람처럼 웃고 있는 철없는 사진  가훈처럼 적혀있는 그리움으로  나 혼자 늙느라고 이리 바쁜가  (서봉석·시인) + 가족사진  그 사진 속에 나는 없다  나는 사진을 찍었나 보다 (강인호·시인) + 가족사진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는  달랑 둘이 남은 부부  시집간 딸과 군대 간 아들  사랑이란 글자만 남아있는  썰렁한 체온들  자식들이 떠난 식탁에 차려진  찬밥에도 아무 불평이 없다  기어다니는 아기를 바라보며  입이 귀에 걸린 부부  사진만으로도 가득 찬 행복  아기가 흩어놓은  살림살이에 따뜻한 온기들  젖병, 이유식, 우유들이  즐비한 식탁에 차려진  찬밥에도 아무 불평이 없다 (목필균·시인) + 가족 사진 빗소리가 가늘게  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날,  날개 달린 생각들이  밤늦도록 들락거리고  나와 함께, 방안에서  축축하게 눅지는 것들  그 중에서도 유독,  벽에 걸린 식구들 사진 몇 장이  두런두런 깨어나  소복이 모여, 나를 쳐다본다  내가 그들을 깨웠을까  쳐다보는 그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나 (신석종·시인, 1958-)  + 몰래 찍으신 사진 어머닌 웃고 계신다 80년 우시더니 몰래 찍으신 사진에선 웃고 계신다 젊어선 남편이 울리고 늙어선 자식들이 울리고 당신은 정녕 누굴 울려 보셨나 잠결에 가시고픈 어머니 이 세상 이렇게 웃고 간다 하실려고 머리맡 사진에선 웃고 계신다 끝까지 울지 말라고 웃고 계신다. (구광렬·시인, 1956-) + 사진첩  학교 때 앨범을  가만히 펼치면  흑백으로 나오는  앳된 얼굴들  자야, 숙이, 희야, 옥이..  술이, 범이, 식이, 열이..  지금은 어디  무얼 하구 사나,  종교같이 서러운 날도 있었는가,  산수유 꽃처럼 기쁜 날도 있었는가,  구겨진 마음 달구어  옛날을,  옛날을 다림질하면  묻어나는 산바람 향그러운 얼굴들  이별은 들꽃처럼 흔적만 남아  아른한 그리움에 세월만 따라왔다.  학교 때 앨범은  잊었던 젊은 날  꿈 어린 무지개. (차성우·시인, 경남 거창 출생) + 사진 속 어머니  엄마, 제 손으로 사진 한 장 찍을게요  그래 한 장 찍자!?  반가운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어머니  그 때 아무도 모르게 깊은 병 앓으시던 어머니  어떤 예감 같은 게 있었을까요  모처럼 모자 단둘이 집에 있던 날  어쩐지 천지 평화롭고 햇살 그럴 수없이 따사로와  마당의 몇 그루 나무의 숨결까지 선명히 들릴 것 같은 날  우둔한 이 아들도 어떤 예감 같은 게 있었을까요  장롱 속 깊숙이 들었던 한복 꺼내 단정히 입으시고  옷만큼이나 밝은 표정으로 사진 찍기에 응하신 어머니  자식 앞이라도 잠시 쑥스러워 하시며 카메라 바라보시더니  그날 이후 급작스레 기울어져  흙 되신 지도 까마득히 세월 흘렀네요  지금 어머니 사진 앞에서 석양의 이 아들  한숨 짓는 버릇이나 늘었을까요  어머니 생각하면 왜 이리 눈물 흐를까요 (오하룡·시인, 1940-) + 어떤 사진  새로 산 디지털 카메라로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를 배경 삼아  한 10년만일까.  몇 장의 부부 사진을 찍었다.  P.C에 꽂아 확대해보니  배경은 너무 선명하고 멋있는데  내 옆에 선 아내의 얼굴  자잘한 주름살 뚜렷이 드러나  가슴이 짠하다.     나는 주름살 제거를 클릭하고  주름진 부위에 마우스 칼을 움직여  정성스레 시술하는 성형외과 의사가 된다.  사각사각 주름살 갈리는 소리에  어느새 옛날의 고운 모습이 되살아나는 듯싶다.  그런데 완성된 사진 속에서  금방 서 있던 사람은 어디로 가 버리고  나는 딸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었다. (한승수·제주의 서정시인) + 오래된 사진  곱다한 초등학교 시절  달맞이꽃 웃음으로 다가서던  앞가슴 볼록한 여선생님과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을 보면  눈물 뜨거워지는 소중한 추억이 된다  마을이장이 된 영철이,  무거운 가방을 늘 들어주던 갑석이의  딱 벌어진 어깨와,  맨발에 새끼줄을 동여매고 선  굳건한 내 의지의 발가락과,  접시꽃 설렘으로 서 있는  첫사랑 순임이의 윤기 나는 단말머리는  아직도 봄 햇살을 붙들고 있다  가난이 강물처럼 불어나  고향 등지던 어둠의 날,  동구 밖 아버지 헛기침소리는  메아리 되어 가슴 먹먹하게 차올랐고  슬픈 이별 손잡고 방황하던 시절,  밤 새워 퍼마신 복사꽃 그리움은  어디서 찾을까  (박종영·공무원 시인, 목포 거주) + 사진에 관한 보고서  몇 장의 사진을 봅니다  세월이란 점령군은  영웅의 가슴을 식게 만들고  미인의 눈가에 잔주름을 만드나 봅니다  사랑은 흘러가는 강물에 적셔지는  강변의 갈대와 같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요  사랑은 가슴에 상처 입히기  쉬운 면도날이라 누군가가 말하지 않던가요  그대와 한 장의 사진을 찍고 싶지만  그러지 아니하는 깊은 맘을 이해해 주세요  그대가 내 곁에, 내가 그대 곁에  영원히 있다는 확률 1이 아닌 바에야  언젠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인화지 속에서 그대 또는 내 곁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서로를 그리워하며  우울해할 그대와 나의 마음을  가을 햇살 날려보내고 싶기 때문이죠  하지만 강변이 내려다 뵈는  커피숍 유리창에서  내려다보는 노을 속의 강물처럼  우리 인생도 흘러가고  몇 장의 사진만 남아 추억을  반추하는가 봅니다  그대와 나의 그림을 인화지에 남기고 싶지만  그러지 아니하는 깊은 맘을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그대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찍어도 보고 싶습니다  (백운호·시인) + 희망사진관  단지 그렇게 기억되고 있을 뿐  결국 방향이 없는, 그리하여 종말이 없는, 단 한 번도 인화되지 않은 것들이 추억일까  어느 정지된 순간에 대한 덧없는 집착이 희망의 정체였을까  서울 출장길 늦은 귀가의 택시 속에서 만난 신안동 고갯길  희망사진관의 입간판이 낯설다; 아니, 정확히 말해  희망이란 낱말이 왠지 낡고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길거리로 향한 형광 불빛 속에 드러난 사진의 얼굴들은  어찌하여 모두들 오래 행복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 많은 잊고 싶은 것들 속에서도  저처럼 끄떡없이 변치 않은 열망들로 살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 죽도록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마저도 없는 내게 지금 묻는다면,  내가 짓뭉개고 외면해온 시간의 흔적들밖에 더 말할 게 없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 마음속으로  여전히 아니라고 도리질치며 지나가는 매서운 북풍소리  가장 가까운 것들조차 따스하게 대하지 못했던 불구의 시간들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보라, 그러니 저 사진틀 속에 영원히 멈춰 있는 것들조차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건 오히려 미처 드러나지 못한 요청이었을 뿐  여전히 우릴 살아 불타게 하는 것들은  저 스러질 듯 서 있는 현실의 희망사진관 너머  아직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은 낯설음 속에  모든 희망들이 추문이 된 바로 이 세월의 그리움 속에  끝내 지워지지 않을 무모한 절정의 섬광들로 빛날 뿐 (임동확·시인, 1959-)
1465    디카시 모음 댓글:  조회:4377  추천:0  2015-09-12
  섬     마음을 비우고 미움을 버리고   섬으로 가는 배는 무겁지만 돌아오는 배는 가볍다     모두 거울 앞에서 달라진 모습을 비춰본다               섬 2   도심에 있을 땐 섬이 그립더니   망망한 바다에 떠 있으니 육지가 그립구나         섬 3     우리는 섬이었다 수많은 섬들이 떠돌았지만 그대를 놓을 수 없는 건 수면 아래 뿌리가 너무 깊어서이다             별   그 섬에 가면 별들이 내려와 어둠을 씻는다   지친 그들에게   하얀 포말이 몰려와 어루만진다             등대   그는 바위섬에 서서 어두운 항로를 멀리 비추는데 나는 벽 앞에서 앞가림에 급급하구나                                         海女 어머니                출렁이는 물결에 테왁 하나 띄워놓고              깊은 물질에, 길게 내뿜는 숨비소리                     아직도                  꽃무늬 몸뻬에 분홍 내복을 입는                 어머니의 마당은                   언제나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도시의 섬 city island       새 둥지보다 더 높은 그 곳 버튼만 누르면 스르르 사닥다리가 올라가는 곳       하늘과 더욱 가깝지만 밤이면 눈이 부셔 별은 잘 안 보이는 곳       나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고 고기 몇 마리 잡아서 밤이면 노를 저어 그 섬으로 간다  
1464    디카시란? 댓글:  조회:5029  추천:0  2015-09-10
[ 2015년 09월 11일 08시 53분 ]     @@ "전쟁이 없었다면 난민도 없었을 것이다."  ------------------------------------------------------------------------------------------- ====================================================== 1. 시의 뜻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운율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글 2. 시의 3대 요소 ⑴  음악적 요소 : 시에 깃들어 있는 소리에 의해 나타나는 요소. 운율을 말한다. ⑵ 회화적 요소 : 시에 나타나는 형상에 의해 나타나는  요소. 심상을 말한다. ⑶ 의미적 요소 : 시에 담겨져 있는 뜻에 의해 나타나는 요소. 정서와 사상을 말한다. 3. 시의 형식적 요소 ⑴  시어 : 시에 쓰인 말. 운율, 심상,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⑵ 시행 : 시의 한 줄 한 줄 ⑶ 연 : 시에서 한 줄 띄어 쓴 한  덩어리 - : :시어  : :시행  : :연  : :시 ⑷  운율 : 시어들의 소리가 만들어 내는 가락  : : : : : 4. 시의 내용적  요소 ⑴ 주제 : 시에 담긴 지은이의 느낌이나 중심되는 생각. 주로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⑵ 소재 : 주제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글감 ⑶ 심상(image) : 사람의 여러 감각을 자극하여 마음 속에 감각했던 것을 다시 기억하여 재생시키는 것 5. 시의 운율 시에  있어서 음악성을 나타나 해 주는 것으로 자음과 모음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韻과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律格으로  나뉜다. ⑴ 운율의 갈래 ① 외형률 : 시어의 일정한 규칙에 따라 생기는 운율로 시의 겉모습에 드러난다. 정형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음수율 : 시어의 글자수나 행의 수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는 데에서 오는 운율 - 음위율 : 시의 일정한 위치에 일정한  음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만드는 운율.  :일정한 음이 시행의 앞부분에 있는 것을 두운, 가운데 있는 것을 요운, 끝 부분에 있는 것을  각운이라고 한다. - 음성률 : 음의 길고 짧음이나, 높고 낮음, 또는 강하고 약함 등을 규칙적으로 배치하여 만드는  운율 - :음보(音步) : 우리 나라의 전통시에서 발음 시간의 길이가 같은 말의 단위가 반복됨으로써 생기는 음의 질서. 보통 띄어  읽는 단위가 되는데 일반적으로 평시조는 4음보격, 민요시는 3음보격으로 되어 있다. (즉, 3.4조니, 4.4조니 할 때의 시는 3 4음절이  하나의 음보를 이루고, 이것들이 3번 내지 4번 반복되어 하나의 큰 休止를 가져 온다는 뜻이다) ② 내재율 : 일정한 규칙이 없이 각각의  시에 따라 자유롭게 생기는 운율로 시의 내면에 흐르므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자유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⑵ 운율을 이루는  요소 ① 동음 반복 : 특정한 음운을 반복하여 사용 ② 음수 반복 : 일정한 음절 수를 반복하여 사용 ③ 의성어, 의태어 사용  : 감각적 반응을 일으킨다. ④ 통사적 구조 : 같거나 비슷한 문장의 짜임을 반복하여 사용 6. 심상의  갈래 ⑴ 시각적 심상 : 색깔, 모양, 명암, 동작 등의 눈을 통한 감각 : 알락달락 알록진 산새알 ⑵  청각적 심상 : 귀를 통한 소리의 감각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⑶ 후각적 심상 : 코를 통한 냄새의  감각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⑷ 미각적 심상 : 혀를 통한 맛의 감각 :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도 구수하고  ⑸ 촉각적 심상 : 살갗을 통한 감촉의 감각 :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⑹ 공감각적 심상 : 동시에 두 감각을 느끼는 것 : 분수처럼 쏟아지는 푸른 종소리 7. 심상의 시적 기능   : : : ⑴ 구체성 : 단순한 서술에 비해 대상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 ⑵  함축성 : 시어의 의미와 느낌을 한층 함축성 있게 나타낼 수 있다. ⑶ 직접성 : 감각을 직접적으로 뚜렷이 전달할 수 있다.   : : : : : : : 8. 시의 갈래 ⑴  형식상 갈래 ① 정형시 : 형식이 일정하게 굳어진 시 - 음수적 정형시 : 글자의 수가 일정한 시. 7·5조, 4·4조, 오언시  등 - 시행적 정형시 : 시행의 수가 일정한 시. 향가, 소네트(sonnet) 등 ② 자유시 :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은 시 ③ 산문시 : 행의 구분이 없이 산문처럼 쓰여진 시. 운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산문과 구분된다. ⑵ 내용상  갈래 ① 서정시 : 개인적인 정서를 읊은 시 - : :서경시 : 자연 풍경을 주로 읊은 시로 서정시에  속한다. ② 서사시 : 신화나 역사, 영웅들의 이야기를 길게 읊은 시 ③ 극시 : 사건의 전개를 대화 형식으로 쓴 시. 운문으로 된  희곡 ⑶ 성격상 갈래  ① 순수시 : 개인의 순수한 서정을 중시한 시 ② 사회시(참여시) : 사회의 현실에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시 9. 서정적  자아 지은이와는 별도로 시 속에서 말을 하는 사람으로 1인칭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에서는 어떤 남자  어린이가 서정적 자아가 될 것이고, 이육사의 [광야]에서는 지사적이고 예언자적인 남성이 서정적 자아가 될 것이며, 우리 민요 [아리랑]의 서정적  자아는 임과 이별하는 애달픈 여인이 될 것이다. 10. 어조 어조를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라고 한다면 그 목소리는 강하거나 약하거나,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거나 하는 어떤 가락을 지닌다. 이  때의 시의 서정적 목소리를 어조(Tone)라고 한다. 따라서 어조는 시인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시가 어떤 어조를 갖는냐에 따라  독자는 남성적 여성적, 또는 강건 온화 우아 비장 등의 다양한 목소리를 체험하게 된다. 11. 시의 상징 ⑴ 관습적 상징 : 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쓰여져서 널리 인정되는 상징 : 비둘기 → 평화, 십자가 →  기독교, 월계관 → 승리 등 ⑵ 창조적 상징 : 개인에 의해 만들어져서 문학적 효과를 발휘하는 상징.  :작품이나 작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12. 시적 허용 시에서 구사되는 어휘는 함축적이고 암시적일 뿐만 아니라, 문법적 측면에서 허용되지 않는 표현도 자유로이  사용된다.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그리움과 아쉬움에 ) 13. 시어의 모호성(다의성) 한 개의 시어, 또는 문장 구조 속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시어가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되지 않고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므로 오히려 시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한다. ========================================================= '디카시'는 휴대전화나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거기서 얻은 영감들을 나열해 놓은 시로 보면 된다. 다시 말해 디카로 시적 형상을 찍어 문자로 재현한 새로운 장르의 시다.   곧, 사진매체와 시적 문자의 혼합이라 볼 수 있다. 이때 양자는 결코 다른 주와 부의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것, 곧, 양자가 모두 주인 체로 연관성을 지니는 매체이다.   흔히, 사진을 찍고, 그 사진에 대한 시적 화자의 독백이 주를 이룬다. 현대세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신 장르라 할 수 있다. -----------------------------------------------------                                  SNS와 디카시(詩)                                                                                                                             이상옥         1. 들어가는 말   지난 8월말 현재 스마트폰 가입자가 3000만명 시대가 열린 가운데 한국에서는 12월 19일 대선을 앞두고 SNS를 활용한 온라인 표심몰이가 한창이다. SNS는 특히 2008년 미국의 대통령선거 때부터 이슈가 되었다. 당시 오바마 후보는 경쟁상대에 비해 조직이나 자금력에서 열세였지만 트위터를 이용, 13만 명 이상의 친구를 맺고 빠른 시간 내에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선도하는 SNS 시대에 정치를 비롯한 경제, 사회,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엄청남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SNS 시대가 되면서 문학작품도 한국에서는 이미,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의 메일링 서비스, 가령 ‘안도현의 시 배달’, ‘성석제의 소설 배달’ 등처럼 그림과 사진, 플래시, 애니메이션 등을 활용하여 영상과 문자가 결합되는 새로운 멀티미디어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가령, 카카오스토리(카톡)이나 트위트,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할 때 문자만으로 하는 것보다 영상+문자로 하는 것이 더욱 실감나는 SNS 시대에 새로운 시운동인 디카시에 대해서 논의해보기로 한다.   2. ‘디카시’의 공론화와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 街道)』   디카시라는 용어는, 2004년 4월에 인터넷 한국문학도서관 개인서재(필자) 연재코너에 서 최초로 ‘디카시’라는 이름으로 2달간 연재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필자는 동년 4월 2일부터 6월 19일까지 약 2달간 50편의 디카시를 발표했다. 이때는 스마트폰 같은 것이 나오지 않던 때라 디지털카메라로 찍고 문자로 옮겨서 그것을 컴퓨터로 서재에 올렸던 것이다.   얇은 속옷 같은                                                                                                                                             어둠이 은은히 드리워진 봄밤의 캠퍼스 늦은 강의동 몇몇 창들만 빤히 눈을 뜨고 -이상옥,   이 당시 필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고성에서 마산으로 출퇴근하던 시절이었다. 디지털카메라를 하나 사서 출퇴근하면서 특별한 느낌의 풍경을 디카로 찍고 그 느낌을 문자로 옮겨서 컴퓨터를 통해 인터넷 서재에 탑재했다. 인용 작품이 디카시로서는 첫 작품이다. 왜 이런 작업을 했느냐 하면, 전부터 자연이나 사물 속에서 문득, 저건 문자의 옷을 입지 않아서 그렇지, 온전한 시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저걸 그대로 옮기면 시인데, 내가 화가라면 그대로 옮길 수 있을 텐데,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있었다. 그러는 중에 마침 디지털카메라가 일상화되면서 디카로 저걸 포착하면 되겠다싶어서 자연이나 사물에서 문득 시적 감흥이 떠오르면 그것을 디카로 찍고, 문자로 재현해내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작업이 2달 남짓 50편의 디카시를 쓰게 되고 그것을 2004년 9월에 문학의 전당에서 최초로 디카시집 『고성 가도(固城 街道)』를 출간하게 되었습다.           이 디카시집을 출간하면서 시집 후기에 나름대로 디카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소박하지만 역시 최초로 디카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처음으로 밝혔니다. 좀 길지만 첫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인용하겠다.   문덕수 시인이 "시는 언어예술이면서도 언어를 넘어선다"고 지적한 바 있듯이, 오늘의 시는 기존의 시론이나 틀 속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다. 시는 언어를 넘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디카시는 '언어 너머 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한 시다. 따라서 '디카시'는 단순한 시와 사진이 조합된 시사진(시화)이 아니다. 디카로 찍은 사진은 '언어 너머 시'다. 다시 말해 시의 노다지다. 금은 금광 깊이 파고 들어가서 채취하기도 하지만 사금 같은 경우에는 금덩어리로서 산출되기도 한다. 문자시가 전자의 경우라고 하면, 디카시는 후자처럼 시의 노다지를 언어 너머에서 발견한 것이다. 시는 '언어 너머'에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출근하는 길 차창에 비치는 자연의 풍경이 어떤 때는 완연한 시의 형상인 것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언어 너머 존재하는 시의 형상, 저걸 어떻게든 담아야 할 텐데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러다 디지털카메라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지난 4월초부터 디지털카메라로 '언어 너머 시'를 찍고 문자로 재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디카로 '언어 너머 시'를 포착하고 나면 그 다음날 학교에서 문자로 재현하여 「한국문학도서관 이상옥 서재」에 올리는 작업을 신바람 나게 하면서, 그것을 '디카시'라고 명명하고 마치 '디카시'의 전도자라도 된 양 학생들에게나 일반인들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디카시의 개념과 매혹을 선전·선동(?)했다. '디카'로 찍은 언어 밖의 시를 문자로 재현하는 작업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디카에 찍힌 시를 불러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문자시를 쓸 때의 상상력과는 다른 국면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신의 말씀을 듣는 예언자처럼 그대로 기록하고 전파하면 되는 일이다.   3. 개인 실험에서 장르개념으로 확대   2004년 9월 15일 디카시집『고성 가도(固城 街道)』를 출간하고 이어서 9월 17일 포털 다음에 ‘디카시 마니아’라는 카페를 개설하면서 개인의 실험을 넘어 디카시는 하나의 시문학 운동성을 띠게 되었다. 카페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고, 디카시에 대한 공론화가 온라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디카시의 시론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2004년 10월 16일 목원대학교에서 열린 국제어문학회 가을 학술대회에서 「디카詩의 가능성과 창작방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디카시집 후기에서 소략하게 밝힌 디카시론을 좀더 진전시켰다. 작금의 문학의 위기가 문자문화에서 디지털 문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발생한 것이라고 보고, 이에 문학은 변화된 환경에서 스스로 '몸 바꾸기'를 해야 한다면, 여기서 영상과 문자 결합의 디카시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그리고 디카시의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디카시는 관념이나 언어 이전의 '날시(raw poem)'를 순수직관의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그대로 문자로 재현하는 것, 즉 날시(raw poem)'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문자시와는 달리 짧고 압축된 문자로 드러내어 시사진(포토포엠)과는 달리, 날시성(feature of raw poem)을 띠면서 '극순간성', '극사실성', '극현장성', '극서정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었다. 디카시집에 대한 서평도 게재되었다. 2004년 《다층》겨울호에 김정희 시인이 「고성가도, 극순간을 달리다」를 발표했고, 2004년 《시와 상상》하반기호에 박서영 시인이 「직관이 불러온 詩를 받아쓰다」를 발표했다. 디카시가 문예지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공론화된 것은 2005년 《월간문학》2월호에서다.   범박하게 말해서 한 편의 시를 다양한 매체, 그러니까 음악이나 영화, 무용, 만화 등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일종의 종합적인 소통 방식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방식과 경로를 통해 시를 전달한다는 것은 단순히 활자 매체의 전달 방식을 벗어났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방식에 맞춘다는 의미도 될 것이고요, 시 쓰기의 과정이 지닌 가치를 정당하게 경제적 이익으로 환치시키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경기 시인이 ‘마고 신화’를 무대에 올린다거나 고창수 시인이 ‘시네 포엠’을 시도하는 것, 이상옥 시인이 ‘디카 시’라는 개념을 적극 차용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시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1)     문예지 권두좌담에서 디카시가 공론화된 이후 디카시론 정립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다른 이론가들도 디카시 담론을 펼침으로써 디카시가 최근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점차 정착된 것이다. 주2) 이와 같은 디카시의 진전은 그동안 디카시 운동에 기인한 바 크다. 가령 디카시전문 잡지의 창간과 디카시페스티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디카시를 하나의 장르개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시인들이 디카시를 써서 발표할 지면이 필요했다. 그래서 디카시 전문 무크지 《디카詩 마니아》를 2006년 6월 1일 창간하여 필자 편집인을 맡아 창간기념 대담으로 김열규 교수와 디카시 대담을 나누었고, 디카시 필진으로 시론 교수인 강희근, 양왕용, 윤석산, 박명용, 신진, 이승하, 박주택, 김완하, 오정국 교수와 문학잡지 편집인인 김규화, 정한용, 정일근, 변종태, 권갑하, 배한봉, 박강우 시인과 그리고 유안진, 박노정, 홍성란, 최춘희, 유성식 등 화제의 시인들을 선정했다. 이런 방식으로 무크지 2호를 한 번 더 내고는 또 한편 디카시 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 것은 도서출판 ‘디카시’라는 출판사 등록을 하고 2007년 12월 31일에 도서출판 디카시에서 기존의 무크지 《디카시 마니아》를 반년간 《디카詩》로 바꾸어 디카시 정기간행물 시대를 열어 2012년 현재 통권 10호를 발행했다. 디카시 전문지에 참여한 유수의 시인들이 200명은 된다. 2008년 9월 27일에는 제1회 경남 고성 디카시페스티벌 개최를 개최하여 디카시 대중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디카시는 지역문화운동으로 경남 고성을 발상지로 내세운 것이다. 고성군의 지원을 받아 디카시전, 디카시 백일장, 디카시의 밤 등을 콘텐츠로 하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디카시 백일장이다. 종이와 펜 대신 디카 내장의 휴대폰으로 지정된 메일에 전송하는 방식이었는데, 디지털이 백일장 문화까지 바꾼다고 해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상용화되면서 디카시 백일장은 더욱 활성화될 수 있는 환경을 맞았다.       가을바람이 살근살근 발바닥을 간질이나보다 푸하핫! -이은호, 「웃음」   2010년 경남 고성 디카시 페스티벌 초등부 최우수작이다. 순간 포착의 디카시의 특성이 잘 드러난 수작이다. 이렇듯 디카시 백일장은 기존의 아날로그에 의존한 문자시와는 달리 디지털 시대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한편 디카시 페스티벌 중에 강연회, 세미나 등도 개최하여 디카시 이론 정립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2008년 처음 시작한 디카시 페스티벌은 해마다 개최되면서 더욱 다양한 콘텐츠로 발전되었다. 디카시는 2009년, 2010년, 2011년에 걸쳐 서울시 주최의 ‘시가 흐르는 서울’에도 초정 받았고, 또한 농어촌희망재단의 지원을 받아 고성생명환경농업 디카시체험한마당, 2012 디카시-함안 등의 행사를 가졌다. 2012 경남 고성 공룡세계엑스포에서는 처음으로 디카시공모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너, 찾아오는데 수억 년의 시간 그림자 건너왔기에 너, 만나고 돌아가는데 다시 수억 년의 빛살 지나가야 하리 처음 만난 그 호숫가 떠나 자드락길 따라 백악기에 발자국 남기고 육탈골립(肉脫骨立)하여 당도한 초식 공룡의 오래된 사랑, 미래에서 찾아온 따뜻한 발 -김경식, 「따뜻한 발」   공모전 최우수작이다. 삼금이 500만원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작품은 뭉퉁하고 흰 공룡의 발을 통해서 “따뜻함”을 읽어내고, “오래된 사랑”을 읽어낸 후 그것을 “미래에서 온 따뜻한 발로”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무튼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디카시 이론도 차츰 정립이 되고, 또한 디카시가 유수의 시인들에서부터 애호가들에게 확산되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온라인상에 디카시 동호인 모임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대학의 문학개론 등의 강좌에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한 장르로 소개되면서 대학생들이 디카시 관련 리포트도 쓰게 되고, 또한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학생들이 디카시를 활용한 시창작 지도방법론을 모색해보는 등도 그 일례가 된다. 디카시는 필자 개인 실험을 넘어서 이제는 SNS 시대의 새로운 시의 한 장르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4. SNS와 시의 진화   우선 디카시는 포토포엠과 구별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온라인상에 유명 시인들이 쓴 시에다 그것과 어울리는 사진을 덧붙여 시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양식이 이른바 포토포엠이다. 많은 사람들이 디카시를 포토포엠과 혼동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포토포엠은 문자시와 사진의 단순 조합이기 때문에 시는 시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독립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시는 시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고 사진은 사진대로 완결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디카시는 사진과 문자의 결합으로 완결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디카시에서 사진과 문자(시)는 각각 독립성을 지니지 못한다. 디카시는 SNS 시대의 시의 새로운 진화이다. 인간은 언어나 몸짓, 그림, 기호 따위로 서로의 의사나 감정, 생각을 주고받는 일, 즉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미디어를 사용해왔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미디어 기술의 진화사라고 말하는데, 멀리 고대의 그림문양에서부터 최근의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미디어 기술은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 가장 영향력을 떨친 것은 역시 문자 미디어였으나 최근 스마트폰이 환기하듯이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새로운 소셜네트워크로 쌍방향 실시간 소통이 두드러지는, 단순 문자 미디어보다는 문자+영상을 기초로 멀티미디어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주3)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맥루언의 말처럼 SNS로 표상되는 뉴미디어 시대에는 시도 몸 바꾸기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면, 디카시는 SNS 시대의 새로운 시의 한 모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0월 8일(월) 창신대학교 채플 시간에, 전 세계 82개국 빈곤지역에 해외구호개발 봉사단인 기아봉사단을 파견하여 굶주린 이들에게 식량과 사랑을 전하고 생존과 자립을 돕는 국제구호개발NGO 기아대책을 소개하는 소울 싱어즈 공연이 있었다. 위 파일은 공연장소인 강당 앞에 전시한 액자를 찍은 사진이다. 이 액자는 사진과 짤막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른쪽 사진 밑에는 “필리핀 빠야따스 지역의 쓰레기 마을입니다./학교에 가고 싶지만 생계를 위해 오늘도 쓰레기를 주어야 합니다.”라는 글귀가 달려 있다. 이렇듯 근자에는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영상 글쓰기가 대세다. 디카시는 일상적인 영상 글쓰기를 예술 글쓰기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런 점에서 최근 문덕수는 스마트폰을 활용한 디카시 쓰기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지적을 했다. 주4)  디카시에서 디카가 시쓰기의 주체인가, 아니면 단지 보조기구인가요? 정답은 주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조기구(원고지나 펜 같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TV나 컴퓨터가 안방에 들어와 있는 판에 과학기기가 시 쓰기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문덕수는 디카시는 기호시라고 본다. 디카시에서 사진도 기호이고 언어로 표현된 문자도 기호라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것이다. 기호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소쉬르와 미국의 퍼스를 든다만, 퍼스는 기호의 세계를 더욱 폭넓게 보았는데, 퍼스는 언어뿐만 아니라 사진을 포함한 영상이나 도상, 길바닥이나 눈 위의 발자국 같은 것을 모두 기호로 보았다는 점에서, 퍼스는 이 세계는 기호로 충반한 세계라고 인식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다 기호인바, 퍼스는 “기호 처리의 프로세스로서 인간”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문덕수는 퍼스가 시인도 기호체계의 한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자로 이해하지 않았는지 생각된다고 지적했다. 주지하다시피 기존의 시는 언어예술로서 언어기호만을 주된 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카테고리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없지 않았다. 구체시(concrete poetry)처럼 쇠를 비롯한 자연 재료를 이용해 시적 표현을 시도한 것 같은 과격한 시도도 있었다. 한국에도 80년대 황지우에 의해 실험되었던 형태시 같은 경우 독일의 구체시 운동에 뿌리를 두고 전통적인 시형식의 해체와 전복을 양식화함으로써 내용과 형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전위적 성격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탈언어적 상상력은 디지털 환경과 만나면서 사진, 그림, 만화, 플래시, 동영상 등이 결합된 상호텍스트적 양상으로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는 황지우 이후 지난 90년대 초반 대중문화 또는 하위문화의 시적 수용에 있어서 단순한 제재로서의 수용에 머물렀던 것과는 달리,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한 현대시의 상화 텍스트성은 디지털 환경 자체를 시 쓰기의 도구로 활용하는 적극적인 교섭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바, 그 대표적인 양상이 디카시와 포토포엠이다. 주5) 문덕수와 하상일의 논의에서도 드러나듯이 SNS 소통환경에서 디카시는 언어예술을 넘어 멀티언어예술로서 시의 언어 카테고리를 확장한 분명한 시의 진화라 할 수 있다.   5. 맺는 말   디카시는 구체시 같은 서양적 전통 속에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동양적 시학에서도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최근 홍용희도 지적한 대로 디카시는 회화와 시가 어우러진 시화본일률(詩畵本一律)에 바탕한 문인화의 전통을 환기한다. 문인화의 ‘시는 말하는 회화이고 그림은 말하지 않는 시’라는 미의식에서 그림의 자리에 디카 사진을 대체한 것으로 디카시를 이해할 수 있다. 주6) 김열규는 《디카시 마니아》 창간호 기념 대담에서 디카시에서 ‘즉흥(卽興)’을 주목했다. 김열규는 시에도 즉흥이 있고, 음악에도 즉흥이 있는데,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이 즉흥곡(卽興曲)으로, 인류예술사에 늘 즉흥이 존재되어 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즉흥의 발언권이 디카詩를 통해서 문득 더 커진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 디카시가 기존의 문자시와 달리 시인이 머리 싸매고 상상해서 쓰는 게 아니라 자연이나 사물이 던지는 말을 그냥 순간 받아적듯 쓴 것으로, 디카시는 문자시에서 말하는 착상이 곧 완성이 되는 것이다. 문자시는 착상하고 그걸 묵혀서 상상하고 또 상상해서 빚어내면 그걸 다시 퇴고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만, 디카시는 사물과 만난 순간의 감흥을 순간 포착하여 곧바로 SNS로 실시간 순간 소통하는 것이 이상이다. 이런 점에서 박찬일은 “시적 장면”(혹은 시적 형상)의 “포착”은 전통적인 창작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시적 충동’과, 혹은 ‘詩魔’와, 다를 바가 없다고도 했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충동으로 시적 충동을 불러일으킨 자연이나 사물에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게 하고, 시인은 그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문자(시)로 짧게 재현한다는 관점이다. 여기서 ‘시적 충동’이나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에 대한 충동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로 신의 영역으로 보는 것이다. 주7) 한편 디카시가 사물에서 촉발되는 감흥을 시적 언어로 재현해 이미지와의 의미 결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디지털카메라를 활용한 전통시론에서 말하는 ‘정경교융’의 새로운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주8) 결론적으로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디지털카메라로 포착하고, 다시 문자로 재현하여 ‘영상+문자’로 표현하는 SNS 시대의 새로운 시이다. 따라서 디카시는 단순히 사진과 시의 접목으로 구현되는 기존의 포토포엠과 뚜렷이 구분되는 새로운 예술 갈래이다. 문자시가 활자라는 하나의 대상에 의존하고 포토포엠이 이미지와 활자의 단순한 형태적 결합에 주력하는 것이라면 디카시는 활자와 이미지라는 두 개의 대상을 하나의 의미적 텍스트로 완성하는 표현 양식이다. 디카시는 이미지를 통해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와 활자로 재현된 의미망 사이에 폭넓은 행간을 지니는 것이다. 그 행간의 의미를 정서적으로 창조해내는 것이 디카시가 추구하는 예술성이다. 앞으로 디카시가 SNS를 통해 예술의 일상화, 일상의 예술화를 주도하는 갈래로 자리잡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각주)     1)《월간문학》(2005년 2월호) 권두좌담 「21세기 우리 시, 다시 언어를 생각한다」 2)이후 나는 《시문학》(2005년 4월호)에 「디카詩의 쟁점과 정체성」 등의 디카시 담론을 여러 지면 펼쳐서 디카시론집 『디카詩를 말한다』(詩와 에세이, 2007), 『앙코르 디카詩』(국학자료원, 2010)을 펴냈다. 또한 문덕수의 「무사상시 이야기-이상옥의 디카詩를 중심으로」를 비롯하여 송용구, 강희근, 박찬일, 김종회, 김석준, 차민기, 홍용희 제씨들이 디카시에 대한 메타비평을 하여 디카시 담론이 확장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논의들의 결과 현대문학사로는 채호석의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두리미디어, 2009)가, 시론으로는 김혜니의 『현대시론 다시읽기』(푸른사상, 2012)가 각각 디카시를 새로운 장르로 다루었다. 3)이상옥, 「다문화 시대 대중문화 미디어로서 디카시」, 계간《시산맥 》2011년 여름호, 참조. 4)문덕수,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월간《시문학》2012년 10월호 5)하상일, 「현대시의 디지털화와 소통양식의 변화」, 남송우 외, 『문학과 문화, 디지털을 만나다』(산지니, 2008),pp.134-135. 6)홍용희, 「네오휴머니즘의 생태 시학과 디카시의 가능성」, 2012 디카시(詩) 함안 세미나 자료집 참조. 7)박찬일, 「시와 소통」(창신대학 주관 디카시 세미나 발제문, 2007. 10. 26) 8)차민기, 「전통 시론詩論으로 풀어본 ‘디카시’」, 계간《시와 경계》2012. 가을호.         참고문헌   《월간문학》, 2005, 2. 문덕수,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월간《시문학》,2012. 10. 박찬일, 「시와 소통」, 창신대학 주관 디카시 세미나 발제문, 2007. 10. 26. 차민기, 「전통 시론詩論으로 풀어본 ‘디카시’」, 계간《시와 경계》,2012. 가을. 이상옥, 「다문화 시대 대중문화 미디어로서 디카시」, 계간《시산맥 》, 2011년 여름. 하상일, 「현대시의 디지털화와 소통양식의 변화」, 남송우 외, 『문학과 문화, 디지털을 만나다』, 산지니, 2008. 홍용희, 「네오휴머니즘의 생태 시학과 디카시의 가능성」, 2012 디카시(詩) 함안 세미나 발제문.  
1463    하이퍼시 - 역설의 시 댓글:  조회:4362  추천:0  2015-09-10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문덕수     [1] ‘디카詩’의 창시자는 누구일까. 신(神)의 유무보다는 디카시의 창시자의 누구냐의 물음엔 한 가지 대답밖에 없으니 더 쉽습니다. 디카시의 창시자라는 말에 “창시자” 그 동격어 “이상옥”이라고 하면 대답하면 되겠습니다만 말하자면 디카시의 창업자는 이상옥입니다.   [2] 디카는 “디지털 카메라‘의 준말입니다. 우니라에도 생산되고 있고, 이제는 스마트폰에도 장착되어 있으므로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과학기기인 이 디카가 시쓰기의 주체인가, 아니며 단지 보조기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주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조기구(원고지나 펜같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TV나 컴퓨터가 안방에 들어와 있는 판에 과학기기가 시쓰기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버스, 지하철, 비행기, 승용차 등 인간은 과학기기의 사용이 없으면 생활이 안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디지털 카메라가 시와 결부될 수 있음도 불가피한 시대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에 등 돌려서 현대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3] 가만히 들여다보면 디카시는 기호시임을 깨닫게 됩니다. 『디카시마니아 24인사화집』(2012, 도서출판 디카시)에는 이상옥의 디카시 「숙명」(The Fare)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는 망가지고 있는 나무 뿌리 등의 사진 옆 페이지에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Breaking down mybody now I go to you)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내 몸 부수어” “너” 가 가장 요점이 되는 어구인 것 같습니다. “내 몸 부수어”는 많은 함축(含蓄)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랑의 주체인 “나”, 가장(家長)으로서의 나, 제자들의 스승으로서의 나, 역사(歷史) 속의 한 주체로서의 나, 주인이 아닌 봉사자로서의 나 등이 그러한 연상의 목록입니다. 이렇게 제시해 내놓고 보니 그 나열이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호화해 가는 목적적 존재를 “너”라고 했습니다. “너”는 분명히 남(他者)입니다만,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수한 “남”으로 둘러싸여 공생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의지를 내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존적 삶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의 의지에 의해 사는 존재입니다. 어쨌든 이 “나”는 앞에서 “나”의 경우에 열거한 그러한 나와 대등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너”의 대응 관계로 수용할 때 이상옥의 디카시는 1차시입니다만, 그 함축과 내포는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카시가 언어로 기록되건 사진영상으로 촬영되건 그것의 1차적, 기본적으로 사물시와 동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디카는 하이퍼 시와 첫걸음을 함께 내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이퍼와 디카는 같은 스타트라인에서 같은 신호로 함께 출발합니다. 여기서 사물시와 디카시는 일치합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제시된 ‘사진’도 기호(記號)이고, 언어로 표현된 디카시 문자도 “기호”라는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기호라고 하면 프랑스의 소쉬르(1857~1913)와 미국인 퍼스(1839~1914)의 두 사람을 듭니다만 기호의 세계를 더욱 폭넓게 본 사람은 퍼스인 것 같습니다. 퍼스는 언어 뿐만 아니라 “사진”을 포함한 영상이나 도상, 길바닥이나 눈 위의 발자국 같은 것을 모두 기호로 보았습니다. 퍼스는 이 세계는 기호로 충만한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다 기호이지요. 퍼스는 다만 “기호 처리의 프로세스로서 인간”을 이해했습니다. 아마 시인도 기호체계의 한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자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반사된 빛이 눈의 망막에 도달하는 순간, 일련의 감각이나 인지적(認知的) 기능이 마치 연못의 둑을 끊은 것처럼 흐르는 것— 이것이 경험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사진의 어떤 부분에 집중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어지럽게 이동하는 색이나 윤곽이나 형태를 즉시 감각신호로 변환시켜 후두부에 있는 시각야(視覺野)라고 불리는 뇌의 영역에 보내집니다. 거기서 특징들이 분석되어 그 결과가 대뇌피질(大腦皮質)의 많은 영역을 이동시킵니다. 그러한 활동분야의 하나가 피질의 중앙에 위치하고 근운동(筋運動)의 중추 역할을 맡은 운동야(運動野)입니다. 여기서 눈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근육을 움직이는 지령이 나와, 눈은 사진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눈이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향하게 하는 과정이 몇 백 번 되풀이됩니다. 한 번 얻은 상(像)은 피질의 뉴런 네트워크로 보여지며, 그때까지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연결되고, 사진에 대한 해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뇌가 행하는 사진(그림 포함) 이해의 프로세스를 인지 과학자 R L. 소쉬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이라는 물리 현상에서 시작하는 ‘그것이 감각 신호로 바뀌는 그 처리를 거친 특징이 추출되어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 지식도 참조하면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상옥의 디카시가 망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디키시는 많은 내포가 다양하게 응축된 디카시의 전형인 것 같습니다. 사화집 『너머』(Beyond Over)는 대분분 이와 같은 보편적 레벨에 도달한 디카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5] 그런데 이상옥의 「숙명」을 잘 들여다보면, 그 해석은 단지 나무 밑둥이 부서지고 있는 붕괴현상만이 아니라 현상이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와 형이상의 세계(形而上世界)를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이해는 디카시의 형이하적 특징과 형이상적 특징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여 무척 흥미롭습니다. 나무 밑둥의 붕괴는 풍화작용인지, 세균의 잠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시간의 먼 지평 속에서 변호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인도인(특히 힌두교도)은 모든 만물은 시간상에서 변화하며 여러 가지 존재의 직접적, 간접적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서 변화한다라고 한, 그 위대한 사상체계의 “연기설”(緣起說, Pratitiya-samurāda)을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한(漢)나라를 세운 유비도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상옥의 디카 사진을 잘 봅시다. 산에서나 길가에서, 나무 밑둥지가 부서져가는 현상을 흔히 발견할 수 있고, 이 현상에서 흙구덩이 속의 인체도 결국 이런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체의 경유, 균이나 박테리아가 흙 속에서 겨드랑이나 허벅지 등을 먼저 먹게 되겠지요. 사물인식은 가정,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나무밑둥이라는 물체의 내면의식세계가 형성됩니다. 사물은 감각성, 시각성, 외부성 등의 욉줙 존재입니다만, 동시에 내면의 영혼적 무의식적 무한성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있음 esse)는 있는 것(ens, 개별 사물 존재)의 시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물을 외면이나 내면의 한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외부적 존재로 보고 동시에 내면세계를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지닌 α위상과 β위상의 이중을 본다는 뜻이 되고, 또 이렇게 보아야만 사물 전체를 본다는 것이 됩니다. 이상옥이 있는 것(ens), 즉 「숙명」을 통해서, 우리가 가정→역사의 영역에서 가지고 있는 정보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사물의 내면성도 동시에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옥의 「숙명」의 밑둥은 흙 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꽤 깊이 박힌 듯합니다. 지표에서의 윗부분이 갈라져 부서지고 있으나, 아마 그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꿈쩍 않고 대지(大地)를 물고 호흡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숙명」이 지닌 형이하적(形而下的) 특질인 것입니다만, 한편 부서짐의 과정을 통하여 껍질이 벗겨지고 나무의 육질이 파삭파삭해지면서 그 영혼이라고 할까 정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형이상적(形而上的) 세계로 차원이 다른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역사 너머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즉「숙명」이라는 디카 영상은 형이하와 형이상에서 초월을 동시에 공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디카시는 이러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고, 여기서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짙은 공통 관련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라는 일행시에서도 형이하와 더불어 여기서 초월하려고 하는 형이상의 몸짓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서진다”(망가지다, 붕괴핟, 변화한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6] 마지막으로 두 장르의 통합단계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즉 디카 영상과 언어예술의 두 단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디카시는 디카 영상과 언어시와의 두 존재를 포함하고 있고 두 단계가 통합해서 다르나 같은 의식적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합니다. 통합 단계는 두 장르가 “서로 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세계(시 세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두 장르의 관계는 접근, 영향, 융합 등의 상생(相生) 공발(共發)의 관계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먹어버리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디까지 상생공존의 발전 관계를 맺고 더 높은 하나의 통합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형이하적 관계와 형이상적 관계가 엄존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먼저 형이하적 관계부터 보겠습니다. 형이하적 관계는 사물의 감각적, 가시적, 외부적 관계에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한 외부적 배치에 의하여 하나의 가시적 이미지(즉 사물존재로서의 이미지, 그러니까 β위상의 관계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이루게 되면, 그러한 가시적인 두 이미지가 융합되어서 서로 보완하여 하나의 더 높은, 더 완성된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형이하적 세계, 즉 물질세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은 형이상적 단계로 상승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디카시라고 하는 통합적 장르가 비로소 “의의”(意義: 의미보다는 높은 의미의 세계로 연결된다는 뜻)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의의주제에 접근한 가장 높은 뜻으로 뭉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형이상적 통합의 의의는 첫째 형이상적(신적) 뜻을 이루고, 둘째 그 뜻은 형이하적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어떤 미세하거나 광대한 움직임에 의해 영향력을 공급하는 에너지 역할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방향과 방법을 정립시켜 주기도 합니다. 흔히 ‘섭리’라고도 하고, ‘천명’(天命)이라고도 하는 그런 차원의 뜻입니다. 모든 디카시는 여상과 언어의 두 단계가 통합된 형이하적, 형이상적인 미학적 뜻으로 통합, 형성되어 완료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적 통합을 거쳐, 두 장르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이미지 세계를 이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하이퍼적이라고 하고, 이 점에서 디카시가 하이퍼시의 또 한번의 강력한 유대와 그 관련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7] 여기서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그칠까 합니다. 디카시가 가진 기호성, 디카시의 이중성(형이하와 형이상) 등을 토대로 디카시와 하이퍼시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 디카시의 사진과 언어는 사진과 언어라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면서 디카시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하이퍼적 패러독스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퍼시에서는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가 비유의 본의(本義)와 유의(喩義)의 양 항에 관련되어 있고, 그 관련에서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를 역설적으로 사사해 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런 점에서 디카시나 하이퍼시는 파라독스의 언어로 된 역설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62    하이퍼시 창작기법 댓글:  조회:4723  추천:1  2015-09-09
하이퍼시 창작기법 연구 -회화적 요소를 중심으로   이선     Ⅰ. 서론     1. 하이퍼시의 정의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거부와 부정을 하면서도 하이퍼시는 시인들의 관심을 집중하게 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기존의 시와 어떤 변별력을 갖는지 아날로그 시인들은 증명해보이라고 한다. 새로운 실험시의 존재증명을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하이퍼시의 창작기법을 논의하고자 한다. 논문에서 소개하는 하이퍼시 창작 기법은 미술의 회화적 요소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문학(Hypertext literature)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넬슨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의 link(연결)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킨다. 링크하기 위해서는 컴퓨터에서 ‘연결 편집기’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가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하이퍼 시인은 머릿속에서‘연결 편집기’기능을 하여 결합과 삭제, 교환, 편집을 자유자재로 하여야 한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문덕수는 하이퍼시를‘탈관념’과‘무의미’로 정의하였다. 문덕수의 시「탁자가 있는 풍경」은 냉정한 관찰자의 시점으로 ‘사물’을 풍경화 기법으로 그리고 있다. 철저하게 내용과 의미를 배제하고 ‘무의미’한 상황만 제시하여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심상운은 컴퓨터의 최소단위(unit)들의‘합성’과‘분리’인‘모듈’이론을 하이퍼 시론에 도입하였다. 인터넷의 ‘링크’의 기능과 ‘리좀’을 하이퍼 시론에 도입하여‘양방향성’의 ‘교환’ 이론을 정립하였다. 심상운은 문덕수가 주장한 하이퍼 텍스트 시론을 객관적 정의를 내려 구체성을 부여하였다. 심상운은 그의 논문 에서 하이퍼시의 요소를 9가지로 정의하였다. 그는 옴니버스 형식의 사물 실험시를 여러 편 창작하였다. 자신의 실험시를 통하여‘다초점’과‘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심상운과 김규화, 작고시인 오남구는 ‘하이퍼시 동인’을 결성하여 한국에 하이퍼시를 처음 보급시켰다. 또한 지금은 시문학 시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하이퍼시 확산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이퍼시에 대한 여러 정의를 위에서 살펴보았다. 문예사조는 작품이 선행하고, 작품에 이름이 붙여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하이퍼시는 시론이 먼저 주장되고 시가 후속으로 창작되었다. 하이퍼시는 새로운 구조를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본 논문에서 주장하는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 방법론도 그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앞으로 실험시가 계속 생산되어 하이퍼 시론이 정립될 때까지 후속적인 많은 연구가 있길 바란다. 본 논문에서 주장하는 하이퍼 시 창작 기법은 미술의 회화적 요소를 차용하였음을 밝혀둔다.        2. 하이퍼시 창작기법     하이퍼시의 정의는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의 시론을 토대로 간략하게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나‘하이퍼시는 어떻게 쓰는가?’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본 논문은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조건을 밝혀 새로운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정립하고자 한다. 아날로그 시와 하이퍼시의 차별화된 분류의 기점을 세우려는 것이다. “도대체 하이퍼시가 뭐냐?”라는 질문에 대한 객관성을 가진 구체적인 답변자료가 되길 바란다. 본 논문은 미술의 회화 기법을 차용하여 새로운 시창작 기법7가지를 소개한다.     정보화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매일 새로운 전자제품들이 사람들의 구매욕을 충동하고 있다. 디지털시계, 디지털 계산기, 디지털 사진, 디지털이란 말이 들어간 전자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디지털은 컴퓨터 시스템을 적용하여 연속적이며 분절적인 오차가 없는 정확한 시스템이다. 디지털은 무한 반복적이며 합성과 재결합이 가능하다. 자기의 기본적인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 다른 시스템과 만나 새로운 합성구성,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화할 수 있다. 반면 아날로그는 연속적이지만 조금씩 오차가 난다. 아날로그가 직선이라면 디지털은 점선이다. 또한 모자이크다.   디지털 그림은 점묘화 기법으로 여러 스타일로 합성되기도 하고 형태를 아주 바꾸기도 하고, 다른 이질적인 그림이 들어와 덮어버리기도 하면서 ‘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 네모 박스 안에서 물고기가 모였다가 흩어지고, 물풀이 돋아나 바람에 흔들린다. 그 물풀 사이로 무수히 많은 고기떼가 지나간다. 빠르게 화면이 바뀌면서 새로운 그림들이 나타난다. 디지털 그림의 중요한 포인트는 화면이 빠르고 운동감 있게 움직이며, 장면이 계속 전환되며, 사물도 임의로 바꿀 수 있는 편집기능이 있다. 즉 고정적 정물화가 아니다. 움직이며 변화하는 그림을 무한정 반복 감상할 수 있는 ‘움직이는 그림’이다.       아날로그 시를 지향하여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 곧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의 감각도 디지털 그림과 다르지 않다. 그 화면이 빠르게 전개되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 아날로그 시가 검정과 흰색. 빨강, 파랑색으로 구성된 ‘보여주기’ 위주의 정지된 단일구성의 시라면 하이퍼시는‘다초점’‘다시점’의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여러 방향의 상상력에 움직임을 가미하여 ‘상상력의 이동’을 한다. 하이퍼시는 한 마디로 ‘움직이는 그림’, 또는 ‘움직이는 영상’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이나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시인의 ‘상상력의 이동’이 생각지도 않았던 기하학 무늬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무의미한 ‘단어던지기’나 ‘언어충돌‘로 미술기법처럼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단어’의 ‘결합’과 ‘분리’가 만든 ‘모자이크 이미지’가 시에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또한 사물을 각각 다른 독립된 연에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병렬배치’된 사물들이 서로 다른 질서와 의미로 재탄생한다. 한 폭의 ‘추상화’가 그려진다. 의도성을 가지고 쓴 의미추구의 ‘아날로그 시’보다 새로운 감각의 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디지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다. 새로운 감각의 시는 ’시스템의 혁명’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기법의 실험을 하여 보다 새로운 ‘무엇’을 추구한다.   아날로그 시가 ‘보여주기’ 의 평면적인 그림이라면 디지털 시는 ‘움직이는 그림’으로 입체적이며 운동감이 있는 그림이다. ‘움직이는 그림’은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시간 이동’과 ‘공간 이동을 한다. 또한 ‘상상력의 이동’을 하여 새로운 공감각적 시로 탄생한다.   공간이동은 그림의 내용물인 화면이 변화한다. 합성사진처럼 합성과 분리, 삽입이 가능하다. 즉 ‘시간, 공간, 상상력의 이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디자인은 새로운 시스템이다. 시스템의 변화가 새로운 시창작 기법의 주요 이슈다. 새로운 구조, 새로운 의미, 새로운 상상력, 즉 시에서의 새로움은 새로운 철학이다.    본 논문에서는 하이퍼시의 새로운 시 창작 기법 7가지를 소개한다. 이 기법은 하이퍼시의 성립요건을 함의하고 있다.   첫째, 정물화 기법- ‘탈관념’   둘째, 겹쳐 그리기 기법- ‘다시점’‘다초점’   셋째,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넷째, 옴니버스 기법- ‘낯설게하기’   다섯째, 기호시 기법- ‘무의미’   여섯째, 모자이크 기법- ‘이미지 결합’   일곱째,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디자인) 바꾸기’     본 논문은 위의 7가지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예시된 하이퍼시 작품을 통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미술의 회화적 기법을 중심으로 하이퍼시의 요소를 분석하여 형식과 내용, 디자인과 구성에서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찾아보고 하이퍼시의 창작기법을 조명하고자 한다.   ∏. 정물화 기법-‘탈관념’     문덕수가 하이퍼시에서 강조하는 것은
1461    하이퍼시의 목표 - 고정틀 벗어나기 댓글:  조회:4708  추천:0  2015-09-09
    심상운 시론집 서평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이   선 (시인)       Ⅰ. 서론   심상운의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2006년부터『시문학』에 실렸던 그의 시론과 대담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놓은 것이다. 이 시론집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이론서로서 앞으로 한국현대시에서 의미 있는 준거의 역할을 할 것 같다. ‘디지털시’는 지금까지의 ‘아날로그 시’를 거부하고 차별화된 새로운 감각의 ‘탈관념 시’를 제시하는 시론이다. 이 시론집의 중심이 되는 는 오남구의 염사 접사의 디지털리즘의 시론에 과학적인 디지털의 기능을 도입하여 보완하고, 디지털시의 개념을 정립하여 한국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론집의 표제가 된 는 디지털시의 시론과 하이퍼시의 시론을 결합시키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시의 모듈(module) 이론과 하이퍼시의 리좀(rhizome)을 같은 맥락으로 인식하게 한다. 또한 하이퍼시의 핵심이론인 ‘다선구조’, ‘상상적 기능의 확대’를 이론만이 아닌 실제의 창작된 작품으로 제시함으로써 하이퍼시의 시론이 성립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무의미와 사물성 이미지의 사물시(事物詩)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하이퍼시의 이론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객관화하여 정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이론의 전개에 문덕수의 시론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하이브리드(잡종결합)가 들어간 ‘다선구조론’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는 시론에서 불교 교리를 응용하고 있다. 그 예로 불교의 기본사상 ‘제법무아(諸法無我)' ’는 디지털시의 언어를 설명하는데 중심개념으로 활용된다. 이는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를 언어의 기호성으로 해석하는 핵심이론이 되고 있다. 불교의 ‘다르게 생각하기’와 ‘회의하기’는 사물의 본질적이며 확정적이지 않은 기표의 ‘무의미’성과 사물의 ‘불고정성’을 사유의 기초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21세기의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디지털시론’과 ‘하이퍼시론’을 생산하여 보여주는 ‘새로운 시론의 묶음’이다. 이 시론집은 저자의 독창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문덕수의 시론, 김규화와의 대담 등은『시문학』을 중심축으로 한 집단적 사고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심도 있는 토의과정과 여러 편의 예시된 시 작품들 (오남구, 김규화, 신규호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문덕수의 장시『우체부』에 대한 평설은 하이퍼시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평설로 평가 된다. 에서부터 까지 읽으면 현대시의 역동적이며 다각적인 모습을 조망하게 된다. 이는 심상운의 탐구력과 열정과 열린 사유의 결과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시인으로서 경이감을 느끼게 한다.   Ⅱ 하이퍼 시의 개념과 정의     1965년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그는 이 조직체들이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는 하이퍼텍스트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문서의 열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을 뜻한다. 문덕수는 넬슨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에 대입하여 새로운 하이퍼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것이 이 시론집에 인용된 문덕수의 의 시론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시론은 이미지의 가지치기를 가능하게 하는 컴퓨터의 링크(link)이론이다. 이 링크(link)시론은 디지털시론에 없는 새로운 시론이다. 심상운은 이런 시론의 개발을 적극수용하고 그 시론을 근간으로 하여 하이퍼시의 시론을 종합하여 구체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론집은 하이퍼 시론 정립의 중요 자료가 된다. 그는 하이퍼시는 가장 발전된 상태의 디지털시라고 정의한다.(217쪽) 그 이유는 디지털시의 모듈(module)과 하이퍼시의 리좀(rhizome)이 서로 결합할 수 있는 공통점을 통찰하였기 때문이다. 모듈은 컴퓨터의 최소 단위(unit)의 결합과 단절로 이루어진다. 모듈이론은 시에서의 단어와 단어의 결합과 분리, 연과 연에서의 단절과 분리를 의미한다. 어떤 단어로 대체되어도 의미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다른 단어로 교환 가능한 시의 구성 기법이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최소 단위(unit)가 결합과 분리를 자유자재로 하여 새로운 모듈 체계로 합성된다. 이 합성된 단어나 이미지들은 분리와 결합, 교환, 삭제가 자유롭다. ‘하이퍼 시’의 링크 기능은 ‘연결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서 자유로운 편집기능을 갖는다. 리좀은 사방으로의 링크의 기능을 의미한다. 병렬 배치하여 평면상에서 교체 가능한 이미지들의 연결을 의미한다.       Ⅲ. 하이퍼 시의 성립 조건   심상운은 에서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형태인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아래와 같이 9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이 9가지 조건은 하이퍼시가 어떤 형태의 시를 지향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하이퍼시의 9가지 조건들은 디지털시의 10가지 조건과 맥락을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1,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와 집합적 결합 2, 인지단계의 관념수용 3, 현실의 샘플링과 가상현실 4,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바탕으로 한 사물 이미지의 충돌과 융합 5, 심리적 현상 속의 관념허용 6, 직관을 통한 염사 접사 7,순수한 가상현실의 증류수 같은 정서와 순수한 현실감각의 지장수 같은 정서 8,다시점 다감각의 세계지향 9, 독자 참여의 열린 시 지향 10, 동적인 영상의 시 구현   하이퍼시 성립조건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가상현실의 보여주기, 다시점과 동영상의 이미지, 탈관념 등은 디지털시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와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는 두 가지 조건이 하이퍼텍스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에 맞는 하이퍼시를 창작하여 시론의 중간에 인용 형식으로 발표함으로써 실험시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모듈과 리좀의 옴니버스적 구성형식은 기존의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시와 비교할 때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논리적인 인과의 틀을 벗어난 연과 연의 불연속적인 관계가 열어주는 가상현실이 영화적인 공간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심상운의 하이퍼시론의 성립조건을 수렴하고 필자가 하이퍼시를 쓰면서 현장에서 느낀 개인 경험을 토대로 다음의 5가지를 하이퍼시 성립조건으로 추가 제안해본다.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은 하이퍼시의 창작 기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 새로운 감각의 설명적이지 않은 제목과 내용 둘째,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 셋째, 추상화 기법의 디자인과 구성 넷째, 환타지성 다섯째, 실험성   필자도 2004년「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라는 시를 썼는데, 그 시속에 ‘환타지성’과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도입하였다. 환타지성은 분리와 결합, 디자인에서 새로운 감각의 추상화기법으로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이퍼시는 제목과 내용이 설명적이지 않아야 하며 새로운 감각의 구성과 디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써 먹었던 방법이 아닌 새로운 실험성이 하이퍼적 요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은 새롭고 감각적이며 실험적이어야 하지만, 무목적성의 단어 던지기 식으로 양산된 ‘무의미’와 구별된다. 그것은 치열한 작가정신에 의한 새로운 디자인과 구성의 신선함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는 고정적인 시의 성립조건을 제시하여 창의성에 제한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새롭고 감각적으로 바뀌어 가는 ‘창조성’이 하이퍼시의 기본조건이기 때문이다.       Ⅳ.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 시론집에서 주장하는 ‘다선구조론’은 하이퍼시에서 보여주는 ‘다시점’에만 초점을 맞춘 이론은 아니다. 다선구조론은 시창작 과정을 총체적이며 다각적인 복합 텍스트 이론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이 모든 하이퍼시 이론을 수용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로 남을 것 같다. 필자는 시론집에 실린 심상운의 아래 시를 통하여 그의 다선구조의 한 형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 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 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 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 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위의 시는 ‘먹는다’는 동사를 중심어로 하고 있다. 하이퍼시의 링크의 기능을 살려 1연은 3연을 링크하고, 4연을 계속 링크한다. ‘먹는다’는 중심어는 1연의 ‘나뭇가지를 먹고 있는 새벽안개’에서 3연의 ‘야채를 먹는다’를 링크하고, 4연의 ‘은빛 갈치의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여자 리포터’를 링크한다. 각각 다른 사물과 사건을 링크하면서 ‘다시점’ 구조를 형성한다. 2연은 전혀 낯선 ‘행진하는 시위대’를 등장시켰다. 복합적 구조를 가지고 다른 연과 독립적이다. 그러나 ‘먹는다’는 행위를 직접 행동으로 취하지는 않지만, ‘행진하는 시위대의 구호’는 ‘먹고 살게 해 달라’는 1차적인 생존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먹는다’와 포괄적으로 통합된다. 작가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무의식의 자동기술 기법으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의도성’을 가지고 디자인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아날로그 시와 차별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4연은 각각 독립된 내용으로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상현실의 사건과 소설적인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각 연들이 결합하여 삶의 생생한 ‘현장성’을 부각시킨다. 특히 무생물과 사물에 ‘인식’과 ‘의식화’를 시켜 ‘행동성’과 ‘운동성’을 갖게 하였다. 1연의 ‘새벽안개’가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고 3연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리고’ 4연의 ‘여자 리포트의 붉은 입’은 ‘확대’ 된다. 사물에 ‘움직임’이라는 동작을 줌으로써 무생물에 생기와 운동감을 주어 시를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위의 시는 작가의 주제를 부각시키려는 목적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과 상황만을 그대로 ‘보여주기’하고 있다. 왜? 무엇을? 이라는 질문을 할 수가 없다. 작가의 주관과 주제의식이 배제되었다. 아니 혹은 숨겼을지도 모르지만 현장을 객관적 ‘리포터’의 입장으로 전달할 뿐이다. 이 시는 4연의 시를 독립적으로 분리하여도 한 편의 시가 될 정도로 복합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뉴스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현장성’이 있다. 이 시는 ‘먹는다’와 ‘뻗는다’의 중심어가 여러 상황을 ‘파생적’으로 ‘보여주기’하고 있다. 상상력과 연상작용을 하여 공상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의 새로운 감각의 ‘보여주기‘ 하이퍼시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는 그가 주장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요건인 9가지 다선구조론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새로운 시가 먼저 탄생하고 후세에 비평가들이 ‘문예사조’와 '이즘(-주의)을 붙이는 것이 순서인데, 심상운은 자신이 쓴 시를 자신이 직접 분석하여 자신이 창안한 시창작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기법의 더 많은 하이퍼시들이 창작될 것이고, 그 시들은 또 새로운 ‘-이즘’으로 이름이 붙여질 것이 때문에 하이퍼시의 창작 기법은 ‘과정 중’에 있고 말할 수 있다.   Ⅴ. 이슈-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   은 ‘경계 허물기’와 ‘통합하기’를 통해 시를 언어(문자)에서 해방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시는 문자(문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연극과 무용, 음악과 통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현상들은 형식이 내용을 만들고 변화시킨다고 한다.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전문가적인 정신과 열정으로 온몸으로 공연하여 ‘열린 시 운동’을 펴서 시를 표현예술로 승화시켜 종이에서 해방된 시는 뜨겁고 빛나는 행위예술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가 창안한 각색시(脚色詩)는 하이퍼시와는 다른 관점에서 시와 연극을 결합한 독창적인 시 형태라는 점에서 평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의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은 현실 속에서 구현되고 있다. 신규호가 에서 라는 타이틀을 걸고 시와 무용, 연극, 음악, 퍼포먼스와 결합시켜 통합예술로 승격시켜 선각자로 공연시 보급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으며, 종각역 전시실에서는 시와 사진의 만남인 의 전시회를 세 번째 개최하고 있다. 앞으로 이와 같은 통합예술의 기회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필자도 회원으로 를 발표하며 시의 공연화에 고심하고 있다.   시의 낭송도 이제는 목소리만으로 전달하던 아날로그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연기와 무용, 서화, 미술, 노래, 퍼포먼스 등 자신의 끼와 재능을 하이퍼적으로 발휘하여 통합예술로 승격시켜야할 것이다. 가수의 무대공연처럼 조명과 무대장치, 백댄서까지 동원하여 버라이어티 쇼를 꾸밀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시인들도 펜을 몰고 다니며 공연할 날을 꿈꿔본다. 은 시의 사회적 영역을 확대하는데 큰 에너지를 주고 있다.   Ⅵ. 결론   심상운의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는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 1960년대의 조향의 시와 문덕수의『선· 공간』의 시편들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초현실적인 모더니즘의 시론이다. 2000년대 오남구와 심상운의 대화는 디지털시론을 생산하는 원천이 되었으며, 문덕수의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하이퍼시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시문학 」출신 시인들의 집중적인 토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 시론집에 실린 , , 등은 하이퍼시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과 논의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심상운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직접 실험시를 창작하여 새로운 하이퍼시의 성립조건 9가지를 제시하여 하이퍼시의 구조를 정리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는 디지털시와 하이퍼시를 말하기 전에 를 통해서 관념(의미)과 탈관념(무의미)의 경계선을 분명히그었으며, 에서는 하이퍼시의 바탕이 상상과 공상이라는 것과 정서의 표현 방법을 예시하고 있다. 앞으로 이 하이퍼시의 영역이 한국현대시에 머물지 않고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것을 상상해본다. 그 근거는 하이퍼시가 새로운 감각과 자극을 주는 앞서가는 시 창작 기법이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를 생산하기 위한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심상운의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시론집은 한국시사에서 ‘하이퍼시의 공간’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도전을 받을 것이다. 고정된 시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하이퍼시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1460    하이퍼시 - 새롭게 디자인한 시 댓글:  조회:4627  추천:0  2015-09-09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평론: 이선 시 읽기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 기능으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건너뛰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은 심상운이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디자인의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이론으로 정립한 시인이다.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심상운의 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고대미이라 목관 사진’과 ‘고대숲’에서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새들이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울고 있다.   시인은 그림 한 장을 감상하다가 상상력의 줄기를 우주까지 뻗어서 한편의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1연, 2연, 3연이 각각 다른 그림이다. 1연의 병원 응급실과 2연의 냉장고 밥과 3연의 미이라 목관은 각각 다른 그림이지만 링크되어 연관성을 갖는다. 과거면서 현재를 조명하고 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하이퍼시에서 문제로 지적되었던 시의 ‘진정성’을 증명하였다.   이선 약력: 2007년 시문학 등단, 2011년 백인 선정, 2011년 제8회 푸른시학상 수상. 시집: 외 동인지 20여권 논문집: 평론: 심상운 서평, 및 평론 다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국장 좋은시공연문학회 사무차장 한국시문학문인회 이사    
1459    하이퍼시란? 댓글:  조회:4361  추천:1  2015-09-09
    Ⅱ 하이퍼 시의 개념과 정의     1965년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그는 이 조직체들이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는 하이퍼텍스트이론을 발표함으로써 문서의 열람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을 뜻한다. 문덕수는 넬슨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에 대입하여 새로운 하이퍼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것이 이 시론집에 인용된 문덕수의 의 시론이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시론은 이미지의 가지치기를 가능하게 하는 컴퓨터의 링크(link)이론이다. 이 링크(link)시론은 디지털시론에 없는 새로운 시론이다. 심상운은 이런 시론의 개발을 적극수용하고 그 시론을 근간으로 하여 하이퍼시의 시론을 종합하여 구체화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론집은 하이퍼 시론 정립의 중요 자료가 된다. Ⅳ.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 시론집에서 주장하는 ‘다선구조론’은 하이퍼시에서 보여주는 ‘다시점’에만 초점을 맞춘 이론은 아니다. 다선구조론은 시창작 과정을 총체적이며 다각적인 복합 텍스트 이론으로 확장시킨다. 그러나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이 모든 하이퍼시 이론을 수용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로 남을 것 같다. 필자는 시론집에 실린 심상운의 아래 시를 통하여 그의 다선구조의 한 형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   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   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    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       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 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線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   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   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정리하고 있다. 이 9가지 조건은 하이퍼시가 어떤 형태의 시를 지향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하이퍼시의 9가지 조건들은 디지털시의 10가지 조건과 맥락을 같이 함을 알 수 있다.   1,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와 집합적 결합 2, 인지단계의 관념수용 3, 현실의 샘플링과 가상현실 4,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바탕으로 한 사물 이미지의 충돌과 융합 5, 심리적 현상 속의 관념허용 6, 직관을 통한 염사 접사 7, 순수한 가상현실의 증류수 같은 정서와 순수한 현실감각의 지장수 같은 정서 8, 다시점 다감각의 세계지향 9, 독자 참여의 열린 시 지향 10, 동적인 영상의 시 구현   하이퍼시 성립조건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가상현실의 보여주기, 다시점과 동영상의 이미지, 탈관념 등은 디지털시 조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와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는 두 가지 조건이 하이퍼텍스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458    <천개의 고원>의 잡담 댓글:  조회:6025  추천:0  2015-09-09
에 대한 잡담을 위하여      예전에 있었던 얘기하나를 해드리죠. 그러니까 독서에 대한 입장을 얘기하던 자리였습니다. 저랑 대화하던 친구는 굉장히 분석적인 친구였는데, 그는 책을 쓴 저자의 의도에 초점을 맞춰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독서스타일을 가지고 있던 친구였습니다. 사실 이게 지극히 정상적인 독서방법이긴 하죠. 물론, 저도 이 독서법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반감을 가지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것보다는 자신의 시각에 따라 책을 해체해서 재구성하는 독서법을 더욱 강조했죠.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중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차이였습니다. 친구는 중점을 저자의 이해에 두려고 했고, 저는 중점을 저 자신에게 두려고 했죠. 또 이건 책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작가가 책을 써서 발표하는 순간, 그 책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들의 것이 된다고 봤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버리면 친구는 질서를 원했고, 저는 혼란을 원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뜻은 하나이기 때문에 코스모스적인 질서를 만들 수 있지만, 책의 뜻을 독자로 잡아버리면 독자마다 다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의 책을 두고 수많은 의견들이 치고 박는 거대한 카오스가 생겨나죠. 뭐……어쩌면 이것은 책에 대한 입장을 떠나서 저와 그 친구가 서로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기질적인 차이인지도 모릅니다. 창조와 파괴에 대한 얘기죠.    아무튼, 둘 다 딱히 정답이 없는 논쟁이란 건 잘 알았지만, 그래도 어떤 책읽기 방식이 중요한가에 대한 얘기들이 오고갔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니 방식은 지루하다고 말했던 것 같고, 친구는 저에게 그 방식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했죠. 끝에는 제가 책에 대한 오독을 예찬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독이야말로 유쾌하고 창조적이며, 동시에 정답 없는 세상에 정답을 얘기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희극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뭐, 이런 느낌의 논쟁이 다 그러하듯 종국에는 아무런 합의 없이 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채로 논쟁이 끝났고, 중국집에서 볶음밥이나 시켜먹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멋진 마무리였죠.    이 사건 이후 퍽이나 시간이 지난 후에 저는 질 들뢰즈와 펠리스 가타리가 합세하여 지은 책인 을 만나게 됩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ㅡ무려 1,000페이지ㅡ책을 썼을까하고 책장에서 책을 뽑아다가 몇 장 휙휙 넘기면서 내용을 읽는데, 직감적으로 이 책의 저자들이 나랑 생각이 비슷하다는 느낌을ㅡ얘도 난잡하구나ㅡ받았습니다. 제가 가볍게 책장 몇 장 넘겼다고 이 책을 다 이해할리는 없으니, 정말 딱히 근거랄 게 없는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죠. 근데, 처음에는 이 책을 읽진 않았습니다. 느낌이 오긴 했는데, 너무 굵었어요. 굵은 건 들고 다니기 무겁거든요.    뭐, 이 지식의 무거움을 감수하고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책장에서의 운명적인 만남 이후 또 꽤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번년도 1월 즘에 김진석이라는 분의 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이 분이 들뢰즈의 철학에 대해서 글을 풀어놓으셨더군요. 여기서 김진석씨는 리좀, 유목민, 전쟁기계 등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얘기들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 철학계가 들뢰즈의 철학을 너무 편중되게 해석하고 있다는 비판을 달아놓으셨더군요. 저야 뭐, 들뢰즈라는 인물도 모르고, 그의 철학은 더더욱 더 모르는 관계로 ‘들뢰즈에 대해서 이런 입장도 있다’하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아무튼, 이 책을 덮으면서 든 생각은 ‘들뢰즈를 한번 읽어보자’였습니다.    그래서 을 이래저래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제가 처음에 받았던 느낌처럼 저랑 비슷한 책이더군요. 굉장히 혼란합니다. 아, 여기서 확실해야 할 게 있는데, 위에서 제가 혼란함을 선호한다고 해서 제가 혼란함만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위에서 말했듯 이건 어디까지나 강세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굉장히 모순적인 놈인지라, 혼란하면서도 질서 있고 또 질서 있으면서도 혼란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꽤나 난잡한 편이죠. 뭐, 모순적인 게 인간이라고 한다면, 저는 지극히 인간적임에 충실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표현이야 어찌하듯.    아, 음. 다시 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이 책은 혼란합니다. 부제로 ‘자본주의와 분열증2’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이말 인즉 이 책이 ‘자본주의 분열증1’편의 속편이라는 의미이지만, 정작 1편인 와 은 딱히 이어지진 않습니다. 물론 큰 주제들은 공유하는데, 그렇다고 1편을 읽어야만 2편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은 아닙니다. 이 책이 말하는 고원들의 독자성에 충실한 설정인 셈이죠.    머리말을 보면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밝힙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천개의 고원”이죠. ‘천개’는 다양성에 대한 수사어입니다. 목차를 보면 대략 15가지의 주제에 대한 글들을 묶어놨는데, 고원이 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하듯, 이 15가지의 다양한 주제들은 각자 독자적인 주제를 형성하면서 묶여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의 완결된 책이라기보다는 에세이집에 가까운 형식을 취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그래서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가는대로, 끌리는 고원에 올라가면 되지요. 책의 형식 자체부터가 이 책의 유일한 통일적인 주제인 해체적인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끌끌, 참 골 때리는 구성이죠. 이 친구들은 유쾌합니다.    기분도 좋은 김에, 오늘부터 시작해서ㅡ딱히 언제 끝날지 모르는ㅡ이 책 의 모든 장에 대한 분석 아닌 분석들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분석이라는 말은 좀 그렇고, 그냥 여기에 대한 ‘잡담’을 떠들어보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제 잡다한 목소리도 소규모 영토에서 울려나오는 가곡이나 새의 노래, 사납게 울부짖고 미친 듯이 노여워하는 대지의 거대한 노래 혹은 대기의 강력한 화음과 우주의 목소리들로 구성된 거대한 리토르넬로의 한 부분을 담당해줄 수 있을지.      이만 마칩니다. 총총.      
1457    글쓰기 0도 댓글:  조회:3970  추천:0  2015-09-09
[ 2015년 09월 14일 10시 05분 ]       글쓰기의 0도                      /롤랑 바르트     영어단어해석-   도그마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데크닉;데크니크, 수법, 기술 아우라;예술작품에서 흉내낼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다른것과 구별되는 개성적분위기. 파롤(빠롤); 소쉬르의 언어, 말, 가변적개인적 랑그;체계속 언어, 구조적 사회적 메커니즘;어떤 대상의 작동원리나 구조 그래픽;그림이나 사진을 위주로 편집한 지면이나 인쇄 물 시퀀즈; 시간,장소, 사건으로 한개의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단위 ----------------------------------------------- @@ 사유는 어떤 무속에서 말을 배경으로 행복하게 솟아오르는것 같았는데, 이런 무로부터 출발한 글쓰기는 점진적인 응결의 모든 상태들을 통과했다. 그 다음으로 그 만듬의 대상, 끝으로 파괴의 대상이였던 글쓰기는 오늘날 마지막 변신인 부재에 도달하고 있는것이다. 10   언어체는 한시대의 모든 작가들에게 공통적인 규정들 및 습관들의 조직체이다. .. 언어체가 작가의 파롤에 어떤 형태를 주는것은 결코 아니며 자양을 주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들의 추상적인 원과 같은것이며, 이원을 벗어날 때 비로소 밀도 있는 고독한 언어가 쌓여지기 때문이다. 15   글쓰기는 언어를 넘어선 지점에서 언제나 뿌리내리고 있으며, 하나의 선이 아니라 싹처럼 전개되고 , 어떤 본질을 나타낸다. 어떤 비밀의 위협인 그것은 반소통이며 위압갑을 준다 23   지식인의 이런 글쓰기들은 불안정하며 여전히 문학적이다. 왜냐 하면 그것들은 무력하게 참여에 대한 강박에 의해서만 정치적이 기때문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여전히 윤리적 글쓰기들이며, 그속 에서 필자(우리는 더이상 감히 작가라고 말할수 없다)의 의식은 집단적구원의 안심시키는 이미지를 찾아낸다. 30   중국전통을 보면 예술은 현실의 모방에 있는 완벽에 다름 아니다… 례컨대 나무로 만든 이 호두는 그것을 탄생시킨 예술을 나에게환기시키겠다는 의도를 어떤 호두의 이미지와 함께 전달해서는 안된다. 소설적글쓰기가 수행하는것은 그 반대이다. 35   언어는 당연히 그자체의 파괴를 향하고있기 때문이다. 38   모든 시는 자신을 표현하는 그 방식이 어떠하든지 본질의 상태로 , 힘의 상태로 존재하고있는 잠재적산문의 장식적 암시적 혹은과장된 방정식에 불과하다… 시적언어와 산문적 언어는 그것들의 타자성을 나타내는 기호들자체가 필요없을만큼 충분히 분리되여있다… 고전주의사유는 지속이 없으며 고전주의적시는 자신의 기교적배치에 필요한 사유만을 지닌다. 그 반대로근대적시학에서 낱말들은 일종의 형식적연속체를 생산하며 이 연속체로부터 낱말들 없이는 불가능한 지적 혹은 감정적밀도가 조금씩 비롯된다. 따라서 말은 보다 정신적인 배태의 빽빽한 시간이며, 이 배태속에서 ‘사유’가 준비되고 낱말 들의 우연을 통해서 조금씩 자리잡힌다.따라서 의미작용의 무르익은 열매를 떨어뜨리게 되는 이와같은 언어적기회는 시적시간을 상정하는데, 이 시간은더 이상 제작의 시간이 아니라 어떤 기호와 어떤 의도의 만남이라는 가능한 모험의 시간이다. 근대적시는 언어의 모든 구조를 포착하는 차이를 통해서 고전주의적예술과 대립되며, 이 두시사이에는 동일한 사회학적의도이외에는 다른 공통점을 남기지 않는다.43   고전주의적연속체는 밀도가 동등한 요소들의 연속인데, 이 요소 들은 차안된것같은 개인적의미작용에 대한 모든 성향을 제거하고 동일한 감각적압력을 받지 않을수가 없다. 시적어휘 자체는 창안이 아니라 관례의 어휘이다. 그속에서 이미지들은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습을 통해 고립되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특수하다.… 고전주의적인 기교적수식은 낱말들이 아니라 관계들의 기교적수식이다. 그것은 창작의 기교가 아니라 표현의 기교이다. 44   낱말은 무한한 자유로 빛을 발하며 불확실하고 가능한 수많은 관계를 향하여 빛날준비를 하고있다. 고정된 관게가 무너짐 으로써낱말은 어떤 수직적인 기회만을 지닌다. 그것은 의미들, 반사들, 잔상들로 이루어진 어떤 총체속에 잠기는 덩어리이고 기둥이다. 요컨대 그것은 서있는 기로이다. 여기서 시적인 낱말은 직접적인 과거가 없는 행위이고, 그것에 결부된 모든 기원들의 반사들이 드리우는 두터운 그림자만을 제안하는 주변없는 해위이다… 각각의 시적인 낱말들은 예기치 않은 대상이고 , 언어의 모든 잠재적가능성들이  날아오르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별한 호기심, 일종의 신성한 식도락을 가지고 생산되고 소비된다. 대문자 낱말의 이와같은 절대적갈망은 모든 근대적시에 공통적인데, 시적인 말을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말로 만든다. 그것은 구멍들과 빛들이 가득하고 , 지나치게 풍부함을 주는 기호들과 부재들로 가득한 담화를 확립하지만. 이 담화는 의도의 예상도 연속성도 없으며 따라서 언어의 사회적기능에 매우 대립되기때문에 어떤 불연속적인 말에 단순히 의존하기만 해도 모든고유한 초자연들의 길이 열리게 된다. 46-47   근대적시는 언어의 관게를 파괴했고, 담화를 낱말들의 정거장으 로 규결시켰다. 이런 현상은 대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전복을 함축한다. 새로운 시적언어의 불연속체는 덩어리들로서만 드러나는 어떤 불연속적 대자연을 확립한다. 기능들의 후퇴가 세계의 관계들에 대해 어둠을 드리우는 바로 그 시점에서 대상은 담화에서 높아진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근대적시는 객관적시가 된다. 그속에서 대자연은 고독하고 끔직한 대상들의 불연속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잠재적관게들만 있기때 문이다.아무도 그것들을위해 어떤 특권적의미나 사용 혹은 서비스를 선택하지 않으며 아무도 그것들에 어떤 계층체계를 감지하지 않고 아무도 그것들을 정신적행동이나 의도의 의미, 작용, 다시말해 요컨대 어떤 애정의 의미작용으로 환원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언어의 파렬은 절대적대상을 성립시킨다. 대자연은 수직들의 련속이 되고 대상은 그것의 모든 가능성들로 채워진채 갑자기 일어선다. 그것은 메워지지 않는 따라서 끔직한 하나의 세계를 구획할뿐이다. 낱말들 대상들은 관계가 없으며 그것들이 파렬하는 모든 폭력으로 치장되고이 폭력의 순전히 기계적인 떨림은 다음 낱말에 기이하게 충격을 주지만 곧바로 소멸한다. 이런 시적낱말들은 인간들을 배제시킨다.결국 근대성의 시적인본주의는 없다. 이처럼 수직적으로 서있는 담화는 공포로 가득한 담화이다. 다시말해 그것은 인간을 다른인간들과 연관시키는게 아니라 하늘 지옥 불가침한것, 어린시절, 순수한 질료 등 대자연의 더없이 비 인간적인 이미지들과 련관시킨다. 이 시점에서 시적인 글쓰기에 대해 나갈수 있다는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윤리적중요성을 파괴해버리는 자률의 폭력을 지닌언어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어적몸짓은 대자연을 수정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물주와 같다.그것은 의식의 태도가 아니라 관계의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최소한 근대적시인들,자신들의 의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그 시인들의 언어이다. 그들은 시를 정신적인 실천, 령혼의 상태 혹은 립장의 계시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꿈꾸어진 언어의 찬란함과 신선함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시인들에게는 시적감 정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것 역시 쓸데 없다. 48-49   고전주의 작가들 역시 형태의 문제를 알고있었겠지만, 론쟁은 글쓰기들의 다양성 및 의미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언어의 구조와는 더욱 관련이 없었다. 다시 말해 어떤 설득목적에 따라 생각된 담화의 질서만이 문제가 되였다. 따라서 부르죠아적 글쓰기의 특이성이 대응하는것은 수사학의 다양성이였다. 54   모파상, 졸라, 도데의 그 글쓰기는 문학의 형식적기호들 (단순 과거 , 간접화법, 씌여지는 리듬)과 사실주의의   역시 형식적인 기호들(민중언어의 덧붙혀진 조각들, 거친 말, 방언 등)의 결합체이다. 62   공산주의작가들은 부르주아작가들이 오래전부터 단죄했던 부르 주아적글쓰기를 요지부동으로 지지하는 유일한자들이 된다.67   언어의 어떤 질서에의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 백색의 글쓰기를 창도하는것이다. 70   의식적인 작가는 이제 조상 전래의 전능한 기호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78   근대적예술전체가 그렇듯이, 문학적글쓰기는 역사의 소외와 역사의 꿈을 동시에 지니고있다. 필연성으로서 그것은 언어들의 찢김, 계급들의 찢김과 분리할수 없는 찢김을 증언한다, 자유로서 그것은 이런 찢김의 의식이고 그것을 뛰여넘고자 하는 노력자체이다. 그것은 그것자체의 고독에 대해 끊임없이 죄의식을 느끼고 있음에도,여전히 낱말들의 행복에 탐식하는 상상력이며, 어떤 꿈꾸어진 언어를 향해 달려간다. 언어가 더이상 소외되지 않는 새로운 아담적인 세계의 완벽함을 일종의 리상적인 예견을 통해서 나타내는 신선함을 지닌 그런 언어를 향해. 글쓰기들의 다양화는 새로운 문학을 확립한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문학은 오로지 하나의기획이 되기 위해서만 자신의 언어를 창안한다는 점때문이다. 이 기획은 문학이 언어의 유토피아가 되는것이다.79   작품의 불연속성과 무질서가 낳는 열매자체는 각각의 잠언이 이를테면 모든 잠언들의 원형이라는것이다. 유일하면서도 변주되는하나의 구조가 있다… 성찰들은 담론의 단상들이고 , 구조와 광경이 없는 텍스트들이다. 84   잠언은 개별적인 덩어리들로 구성된 전체적인 불덩어리이다. 뼈대는 뚜렷한 모습이상으로 광경적이며- 그리고 뼈들은 단단한것들이다. 잠언의 모든 구조는 그것이 고정되여 있지 않다는 바로 그점에서 가시적이다. 85   수직성을 통해서만 질서가 잡히는 하나의 세계가 드러난 셈이다. 미덕들, 다시말해 외관들의 유일한 수준에서는 그 어떠한 구조도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구조는 바로 명백한것과 감추어진것 사이의 진실관계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97   무질서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98   지극히 뛰여난 명철성에 지극히 대단한 비현실성이 흔히 대응한다.100   이미지들은 텍스트와 분리시킴으로써 는 대상의 하나의 자율적인 도상학에 진입하고 있었다. … 의 도판들은 대상을 제시하고 이 제시는 예시의 교육적목표에 보다 무상한 미학적 혹은 모상적 정당화를 덧붙이고 있다.105   일반적으로 대상의 생산은 이미지를 거의 신성하다할 단순성으로 이끈다… 창조의 간결한 엄겨겅, 거래의 화려함, 이것이 백과전서적 대상의 이중적체제이다. 109   기계의 도판, 곧 이미지는 … 우선 대상 혹은 작업의 분산된 요소들을 분석하고 열거하며, 그것들을 독자의 눈앞에 테이블위에던지듯 던지고, 이어서 마무리하기 위해 생활장면, 다시 말해 삶의 두께를 덧붙이면서 그것들을 재구성한다. 116   당신이 재현하는것은 분석적정신의 여정이다. 세계는  당신에게 통상적인것, 분명한것(이것은 생활의 장면이다)을 제시한다. 백과전서파와 함께 당신은 점진적으로 원인들, 물질들, 원요소들로 내려가며 , 체험적인것으로부터 인과적인것으로 가고 , 대상을 지적으로만든다. 일직선적인 글쓰기와 이 점에서 반대되는 이미지의 특권은 그 어떠한 독서의 미로도 강제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론리적인 백커가 언제나 결핍되여 있기 때문이다.117   특이한 떨림은 무엇보다도 놀라움이다.118   백과전서적인 시적세게는 언제나 어떤 비현실주의로 규정된다. 따라서 객관성(‘현실’)의 엄격한 요구에 토대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 다른 무엇(타자는 모든 신비의 기호이다)이 끊임없이 현실을 넘어서는 시적작품이 되는것이 의 계획 이다. 121   객관적으로 이야기된 단순한 대상의 은유자체는 무한히 떨리는 대상이 된다. 122   이미지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으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터무니없는 대상을 재구성하지 않을수 없게 만든다. 첫번째 자연이 일단 분해되고 나면 첫번째것처럼 형성된 또 다른 자연이 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를 부순다는것은 불가능하다. 세계가 영원히 차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시선- 우리 시선- 이면 족하다  123   자신(을 쓴 샤토브리앙)의 마지막 그림속에 그 최상의 신비한 불완전성을 담아놓은 푸생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불완전성은 완성된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데, 시간의 떨림 이다. 추억은 글쓰기의 시작이고 차례로 글쓰기는 죽음의 시작 인것이다.(그것이 아무리 젊은때 시작된다 하더라도 말이다)128   은유      사실 파격구문은 거리의 시학으로 이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학적노력이 친화성들, 상응들, 유사성들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작가의 기능이 자연과 인간을 단 하나의 세게로 통합하는것이라 고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공감각적인 기능이라고 부를 수있는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근본적인 문채인 은유 역시 분리의 강력한 도구로서 리해될수 있다. 특히 은유는 샤토브리앙의 경우 풍부한데 , 두성분뿐 아니라 비소통을 우리에게 표상한다. 마치 하나는 다른 하나에 대한 향수에 불과한것처럼 말이다. 이야기는문자적요소들, 다시 말해 은유적인 방법을 통해 갑자기 덥석 물리고 ,쳐들려지며, 떼어내지고, 분리된 뒤후 일화의 자연스러움에내맡겨지는 문자적요소들을 제공한다. (그것은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준비도 없이 폭력적인파격구문에 따라 억지로 도입된 새로운 말은 환원불가능한 어떤 다른 곳과 갑작스럽게  이 요소들을 대면시킨다. 샤토부리앙은 죽어가는 어떤 젊은 수도사의 미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캐시미르계곡에서 여행자를 위로하는 그 이름모를 새소리를 듣고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대목도 있다.“이곳에서 누가 태여났고, 누가 죽었으며, 누가 울었는가? 저 하늘 높이 있는 새들은 다른 고장들을 향해서 날아간다” 샤토브리앙의 작품에서 은유는 사물들을 접근시키는게 전혀 아니다. 그것은 세계들을 분리시킨다. 기교적으로 말하며 (왜냐하면 기교나 형의상학을 말하는것은 같은것이기때문이다), 오늘날 은유는 (시적자유에서와는 달리)단 하나의 기표에만 관련되는게 아니라, 담화의 커다란 단위들에 확장되여 연사莲词생명력자체에 참여하는것 같다. 언어학자들은 연사가 언제나 말과 가깝다고 말한다.샤토브리앙의 커다란 은유는 사물들을 분활하는 여신인데, 언제나 향수적이다. 그것은반향을 증식시키 는것처럼 나타나면서도 인간을 자연속에 불투명한것처럼 남겨두고있고 그에게 결국 직접적인 진정성의 기만을 면제해 준다. 문학은 분리시키고 일탈시킨다. 133-134   대립들이 엄격하도록하기 위해 그것들을 두개이상의 상이한 풍경이 아래로 쫙 펼쳐지는 산정상의 능선처럼 얇고 날카로우며 결정적인 일회식사건을 통해 분리시켜야 한다.   문학은 우연적인 진실을 영원한 개연성(필연성)으로 대체 한다135   근대의 작가는 아브라함이면서 아브라함이 아니다. 그는 도덕을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언어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환원불가능한것을 가지고 일반적인것을 만들어야 하고 , 언어의 도덕적인 일반성을 통해서 자기존재의 부도덕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문학이라는것은 이와같은 위험을 감수한 통과이다. 138   고유명사는… 보통명사의 모든 특징들을 부여받고 있지만 모든 투사적법칙을 넘어서 존재하고 기능할수 있기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유명사를 근거지로 하는 하이퍼의미성현상의 대가 –혹은 날쁜점-이다. 이 현상이 고유명사를 시적인 낱말과 매우 유사하게만들고 있음은 물론이다.146   사실 고유명사는 촉매작용을 할수있다. 우리는 그것을 채울수 있고, 확장할수 있으며 , 그것의 의소적골격이 지닌 사이들을 무한한 추가물들로 메울수 있다. 고유명사의 이와같은 의소적 확장은 다음과 같이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수 있다. 각각의 이름은 우선불연속적이고 고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출현하는 여러장면들을 포함하지만,이것들은 련합하여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되기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야기하는것은 일정수의 충만한 단위들을 환유적방식을 통해 련결시키는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48   고유명사는 흉내이고, 아니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환영이다. (이것은 의구심이 들지만 맞다)150                         프로베르보다 훨씬 전에 작가는 문체의 혹독한 작업, 끊임없는 수정의 피곤함, 미미한 수확을 얻기위한 과도한 시간의 슬픈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표현했다… 플로베르에게는 문체는 절대적인 아픔이고, 무한한 아픔이며, 불필요한 아픔이다. 집필은 터무니없게 완만하다(‘일주일에 네페지’ ’한페지를 쓰는데 닷새’ ’두줄을 쓰는데 이틀’) 그것은 “삶과의 돌이킬수 없는 고별” 무자비한 자기 감금을 요구 한다.157   수직적축에는 대체 낱말들이(이것들은 정정들이나 낱말들이다) 기입된다. 수평적축에는 통합체들의 삭제들이나 첨가들 (이것 들은 개정들)이 기입된다.
1456    ...계속 댓글:  조회:10442  추천:0  2015-09-09
    백두산 천지 괴물의 실체, 괴생명체 20마리, 세계 4대괴물,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       백두산 천지에 과연 괴물이 살고 있을까? 여러 나라마다 호수에 괴물이 산다고 하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내려오는 데 백두산의 천지에서도 괴물이나 괴생명체가 산다고 해서 큰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중국의 신화통신에 따르면 백두산 관리사무소 직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이 수면위로 나타났다고 다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했다고 하며 백두산 괴물이 나타났다고 사라질 때마다 엄청나게 큰 굉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중국 길림망 매체에 따르면 백두산 화산관측소 직원 우씨가 백두산 천지 수면위를 빠르게 이동하는 괴물을 포착해서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하며 그 괴물이 다시 물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엄청난 굉음소리가 울려퍼졌다고 한다. 백두산 천지 괴물은 한번 나타났다가 사라질 때마다 커다란 굉음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은 굉음소리로 인해서 백두산 천지의 절벽일부가 허물어질 정도라고 한다.     백두산의 화산활동을 측정하기 위해 천지 부근에 파견나와 온천의 수온을 측정하고 있는 직원 우씨는 그순간 백두산 천지 수면위로 헤엄치는 괴생명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직원 우씨가 목격한 괴생명체의 모습은 머리부분만 수면위로 드러낸 채, 빠르게 헤엄쳐갔다고 하며 머리부분이 연한 녹색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우씨가 찍은 사진을 얼핏 보면 마치 뿔을 단 사슴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그렇지만 너무 멀리고 찍은 사진이고 화질이 선명하지 못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기가 곤란하다.   백두산 천지의 괴생명체 출현 목격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백두산을 관광나온 관광객들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목격담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2000년도부터 2013년도까지 계속해서 백두산 천지괴물 목격담이 흘러나오고 있는데 중국의 신화통신, 길림망 매체 등 중국의 여러매체들은 여름만 되면 어김없이 백두산 천지의 괴물출현이라는 기사와 목격담을 계속해서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2003년도의 백두산 천지괴물 20마리 목격담이다. 2003년 7월 11일에 백두산 천지의 수면위에서 20마리의 괴물이 나타나서 수면위로 빠르게 가로질러 갔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하면서 백두산 천지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불이 붙기 시작했으며  그당시 천지에 20여마리의 괴생명체가 무려 50분동안 수면위를 유유히 헤엄쳐갔다고 하며 백두산에 관광하러온 관광객 10명이 동시에 목격했다고 한다.     중국 길림성의 임업성부청장 장우펑씨도 그당시 20마리의 괴물을 함께 목격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괴생명체들이 5번이나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며 짧게는 2분에서 길게는 30분 이상 계속해서 수면위에 떠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괴생명체들이 나타난 곳은 2~3㎞나 멀리 떨어진 지점으로 50배 망원경으로 봐도 정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곤란하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렇지만 백두산 천지에 이처럼 20마리의 괴물이 동시에 나타난 것은 목격담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1960년도에 길림성 시상국 직원이 백두산 천지에서 7마리의 괴생명체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나온 이래에 2003년, 2007년, 2009년, 2013년까지 끊임없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백두산 천지괴물 목격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혼과 얼이 새겨진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곳으로 한민족의 상징과도 같은 명산이다. 백두산의 천지는 둘레가 14km나 되고 20억톤이나 되는 물을 저장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은 칼라라호라고 한다. 백두산 천지의 깊이는 평균 210m이고 최대 깊이는 384m로 왠만한 강보다도 더 깊다.   백두산 산허리에 있는 바위골짜기에서는 곰이나 호랑이, 표범같은 야생 포유류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2,7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자연생태계의 보고 같은 곳이다. 백두산이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고 동북아에서는 각종 시조신화가 탄생한 명산이어서 그런지 이곳을 관광나온 사람들에 의해서 미스터리하고 신비로운 목격담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으며 한번 목격담이 나오고나면 계속해서 다른 목격담들이 줄을 잇는 도미노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괴물을 보았다고 하는 목격담과 함께 목격자들이 찍은 사진들도 여러 장 존재하고 있는데, 그 촬영된 사진들이 대부분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해상도가 낮아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백두산 천지괴물은 50년에 걸쳐서 목격자들과 소문만 무성하게 나왔지만, 그 명확한 실체는 전혀 감을 잡지못하고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장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2013년도 화산관측소 직원 우씨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치 사슴의 뿔같은 것을 머리에 달고 빠르게 백두산 천지를 헤엄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만주나 연해주에 서식하는 순록이 혹시 백두산천지에 와서 헤엄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판단된다. 만주에 사슴이나 순록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거대한 파충류과 동물들이 백두산 천지에서 번식해서 새끼들을 거느리고 수면위를 헤엄쳐다니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새같은 조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사진으로 보기에는 분명 새는 아니다.   그리고 천지 수면위로 돌출된 부분은 분명 뿔같은 딱딱한 물체를 머리에 달고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 인류가 모르고 있던 제3의 생명체가 백두산 천지 속에서 서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같은 호수괴물의 목격담은 배단 백두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지역에서도 종종 전해지고 있다. 중국 호수괴물, 미국의 호수괴물, 아이슬란드의 호수괴물, 영국 스코틀랜드 네스호의 호수괴물 네시 등 세계의 여러지역에서 호수에 미확인 괴물이 산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전래되고 있다.   물을 마시기 위해 호수로 찾아온 낙타나 말을 한입에 꿀꺽 집어삼킨다고 하는 중국의 카나스호수 괴물 이야기도 횡행하고 있고, 20m가 넘는 거대한 뱀처럼 생긴 괴물이 호수의 꽁꽁 언 얼음위에 자주 출현한다는 아이슬란드의 호수괴물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다.   백두산 천지 괴물목격담은 목격자들에 의해서 구체적인 몽타즈까지 제작되기도 했는데,목격자들은 20m가 넘는 거대한 수장 공룡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가하면 네스호의 네시와도 흡사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이같은 목격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백두산 천지의 괴물은 중생대에 살았던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를 의미하는데, 플레시오 사우루스는 긴목과 긴꼬리를 가지고 네 개의 지느러미로 헤엄쳐다니는 파충류과 속하는 수장공룡이다.  그런데 6천5백만 년전에 이미 멸종한 수장공룡이 아직까지 백두산천지에 살고있다는 것인데, 도무지 말이되지 않는다. 이렇게 오랫동안 백두산일대에 살아왔던 수장공룡 플레시오 사우루스가 왜 이제야 그실체를 나타내는가?     거대한 몸집의 수장공륭 플레시오 사우루스는 물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육지에도 왔다갔다 하는데, 발견되어도 벌써 진작 발견되었어야 하며, 그 기록이 사서에도 여러번 나왔어야 한다. 그리고 목격자들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몸체의 극히 일부분만이 촬영되거나, 매우 멀리서 희미하게 촬영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정확한 실체를 보여준 사진은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무슨 다른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중국과 길림성측에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홍보의 수단으로 이같은 목격담을 고의적으로 퍼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특히 많은 목격담들이 중국측 관리들이 직접 목격했다는 내용들이 특히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두산 천지괴물 출현설을 퍼트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서 백두산관광객특수를 누려볼 의도가 아닌가 판단된다.     더욱이 백두산 주변에 있는 ‘장백산 박물관’에는 ‘천지괴물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천지괴물 인형까지 판매하고 있다는 점을 보더라도 중국과 길림성당국에서 백두산관광 마케팅의 일환으로 백두산 천지괴물설을 활용한다는 의심을 받고있는 것이다.       백두산 천지괴물 동영상                                    
1455    백두산 천지괴물??? 댓글:  조회:5646  추천:0  2015-09-09
추천자 목록 네시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동안 해발 2,744미터인 백두산 천지에도 길이가 2미터에서 5미터에 이르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풍문이 꾸준히 나돌았다. 백두산은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중국 지린 성 조선족 자치주가 맞닿은 곳에 있는데 정상에 있는 천지에 괴물이 산다는 것이다. 천지의 물은 60퍼센트 이상이 지하수며 나머지는 비나 눈이다. 천지의 평균 수심은 213.3미터, 최대 수심은 384미터며 수온은 0.7도에서 11도 사이다. 정상에 있기 때문에 비교적 차다. 겨울에는 수면이 언다. 1994년 9월 10일 중국 신화통신은 백두산 천지에서 누런 황소 머리를 한 거대한 괴물이 파도를 일으키며 솟구치는 모습이 잇달아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1994년 8월 20일에는 호수에서 유유히 유영하던 괴물이 2미터 높이 물보라를 남기고 사라지는 모습을 한국 관광객이 찍었다고 한다. 게다가 9월 2일에는 천지를 관광하던 중국 지린 성 조선족 자치주 관리들이 황색 머리를 한 괴물을 발견하고 비디오로 찍었는데 괴물 모양이 선명했다고 한다. 천지 북쪽에서 남서쪽으로 헤엄치다가 약 10분 뒤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백두산에 괴물이 출현했다는 소식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백두산에는 괴물이 세 마리 있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하나는 당나라 황제가 가죽을 갖기 원했다는 ‘화서(火鼠)’다. 화산인 백두산에는 불구덩이에 사는 쥐처럼 생긴 괴물이 있는데 그 모피로 옷을 만들면 불 속에서 타지 않고 데지도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다른 괴물은 온몸에 털이 난 사람으로, 짐승처럼 네 발로 나무를 타고 토굴에서 사는 ‘모인(毛人)’이다. 흉년에 함경도에서 산에 들어갔다가 눈에 갇혀 야생화된 모녀(毛女)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뤄 백두산에 야생 인간이 살아 있다는 전설은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다. 셋째가 바로 네시와 같은 괴물로,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사냥꾼 넷이 천지에서 괴물이 목을 내미는 것을 봤는데 황금색으로 물동이만 한 모난 머리에 뿔이 돋아 있고 긴 목에 돌기가 나 있었다고 한다. 사냥꾼들은 겁이 나 도망쳤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괴성이 울려 돌아봤더니 괴물은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이다. 괴성은 천지 백 리 밖에서도 자주 들렸으므로 천지 아래 있는 용궁의 북소리로 구전돼왔다. 청나라 때인 1879년에도 유복 등 여섯 명이 수면에서 물소만 한 괴물이 머리를 들고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천지 북쪽 끝에 있는 천활봉 중턱 벼랑에 동굴이 있는데 커다란 이무기처럼 생긴 괴물이 이곳을 드나드는 장면이 목격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 지방 지현(知縣)을 지낸 유건봉이 편찬한 『장백산강지략(長白山崗志略)』을 보면 길 안내인인 서영순이 중국인 여섯 명과 함께 백두산에서 사슴을 사냥하다가 천지에서 어떤 동물을 만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물소처럼 크고 우는 소리가 귀를 울리며 사람들에게 쳐들어오려는 것 같아 여러 사람이 모두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총을 꺼내 쏘려 하니까 발사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육 연발 권총을 꺼내 발사해 괴물의 배에 맞추자 괴물은 크게 울부짖으며 호수 안으로 엎어져 사라졌다.  백두산 괴물이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다. 지린 성 기상 기자재 공장에 근무하는 한 중국인이 천지를 망원경으로 살펴보다 천지 동북쪽 귀퉁이에서 동물 두 마리가 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다투는 장면을 봤다. 동물 머리는 개보다 훨씬 크고 흑갈색이었는데 1시간 뒤에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괴물에 대한 목격담은 더욱 구체적으로 변한다. 1980년 8월 목격자가 1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백두산 괴물 이야기는 점점 더 큰 파문을 일으킨다. 저명한 작가인 뢰가는 『천지 괴수 목격기』에서 백두산의 괴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8월 21일 새벽 4시 나는 기상대 문 앞에서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8시에서 8시 반쯤 되는 시간에 천지에서 거대한 나팔 모양 물갈래를 봤다. 꼭지 부분에서 꺼먼 흑점을 봤는데 머리 같았다. 때로는 북 같은 것이 길게 끌리는 것을 봤는데 아마도 척추 부분일 것이다. 그것은 물속에 비친 장군봉에서부터 나 있는 쪽으로 헤엄쳐 왔다.  이틀 뒤인 8월 23일 새벽, 이번에는 지린 성 기상국에 근무하는 세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서 괴물 다섯 마리를 봤다. 30미터 앞에서 괴물의 머리와 가슴이 4미터나 물 위로 나와 있는 것을 봤는데 머리는 소와 비슷하고 몸은 개, 입은 오리, 등은 검은색으로 기름을 바른 것처럼 미끄러워 보였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종려나무 잎 같은 긴 털이 있었으며 배 부분은 희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 소리 지르며 총을 쐈지만 괴물을 맞히지는 못했다. 괴수는 민첩하게 물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같은 날 다른 사람이 다시 괴물을 봤다. 괴물의 위치는 천지 북쪽 기슭에서 40여 미터로, 두 마리가 앞뒤로 서서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물 위에 나온 부분이 좀 많았고 머리는 뱀 모양, 지름은 약 15센티미터, 눈동자는 밤알만 했고 주둥이가 앞으로 뾰족 튀어나와 있었다. 목 굵기는 10센티미터, 피부는 백색이고 마치 바다표범처럼 몸이 매끄러워 보였지만 무늬는 없었다. 몸을 틀 때 물 자취가 상당히 둥글고 컸다. 1995년 8월 31일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백두산 괴물을 목격해 큰 파문이 일었다. 중국령 백두산의 관광 명소인 천문봉에 올라간 장남철은 천지 한가운데에서 검은 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천문봉 밑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성능 베타 카메라로 촬영했다. 당시 천문봉에는 한국인 관광객 수십 명이 있었는데 일제히 “괴물이다!”라고 소리쳤다. 테이프를 분석한 UFO 연구회 조사부장 서종한은 수장룡과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고 말했다. 입을 크게 벌린 머리와 거북이 앞 지느러미, 불룩하게 튀어나온 등과 허리 등을 근거로 들었다. 경북대학교 교수 양승영은 “꼬리가 물고기 꼬리지느러미와 흡사하고 수중 생활을 하는 수장룡이나 어룡의 일종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다만 꼬리 부분이 뱀처럼 길쭉하면 뒤로 흰 거품이 일 정도로 빠르게 헤엄치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있었다. 2010년 9월에는 좌우 날개가 달린 백두산 괴물 사진이, 2011년 7월 22일에는 뿔이 두 개 달린 머리를 물 위로 드러낸 백두산 괴물 사진이 공개됐다. 백두산 천지 괴물 목격담 중에는 괴물 머리에 뿔이 달려 있다는 증언도 있는데 뿔이 있는 괴물이 사진으로 찍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012년 7월 7일에도 백두산 천지에서 물 위를 이동하는 괴생명체가 포착됐다. 괴생명체는 백두산 천지 화산관측소 직원인 우 아무개가 백두산 남쪽 정상 전망대에서 화산을 관찰하던 중 촬영한 것인데 천지 수면에 크고 긴 물체가 마치 물고기처럼 헤엄치다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사진은 모두 석 장이었다.   
1454    백두산 신비한 동굴 두개 발견!!! 댓글:  조회:7611  추천:0  2015-09-09
장백산에 신비한 두 동굴, 고대인 유적 아니면《야인》동?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신화넷 ] 발표시간: [ 2015-08-28 19:24:10 ]    1호동굴 입구.   1호동굴속.   장백산원시산림속에서 최근 두 신비한 동굴을 발견했다. 장백산 《샤만부락(萨满部落)》풍경구에 초빙된 40세 배회춘이란 종업원이 표류하곡을 탐사하다 장백산아래 《신단산(神坛山)》하곡기슭에서 동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두 동굴을 스쳐 흐르는 신수하(神水河)   일전 배회춘의 향도하에 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부회장, 만족문화전문가 왕송림이 촬영팀과 함께 일행 7명이 처음으로 동굴속에 진입해 고찰, 촬영했다. 왕송림의 소개에 따르면 1호동굴의 깊이는 30메터정도 되고 동굴안에서 보면 통풍구가 있었다. 그리고 샘물이 동굴속에서 밖으로 흘러나오고있는데 동굴내의 부석석회가 보온역할이 좋아 인류가 거주하거나 동물이 서식하기 적합해보였다고 한다. 동굴내에서 목탄을 태운 인위적인 흔적이 보였고 강변에서 원시적 석기 - 돌도끼 한자루를 발견했다고 한다.   2호동굴입구.   2호 동굴은 1호동굴과 약 600여메터 상거했는데  깊이가 40메터정도, 동굴속에는 역시 동굴밖으로 흐르는 샘물줄기가 있었고 동쪽으로 향한 다른 한 통구가 있었다. 이들은 동굴속에서 대량적인 목탄과 석기를 발견했다고 한다. 어떤 석기는 사용 흔적이 보였고 동굴속 웃벽체에서 흰 모발도 발견했다고 한다.  1호동굴은 사람 10명~20명 정도를 용납할수 있고 2호 동굴은 20명~ 30명 정도 용납할수 있을것으로 보인다.두 동굴의 입구 직경은 2메터 되나마나 해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두 동굴은 동물의 서식처였는가 아니면 고대인 혹은 《야인》이 살았던 곳인가 하는것에 대해  해당 구역 책임자로서 왕송림은 아직 더 많은 전문가들의 고증, 탐색이 필요하다고 했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을 패러디한 시 모음  꽃의 패러디                           오규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내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금잔화, 작약, 포인세치아, 개밥풀, 인동, 황국 등등의 보통명사나 수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 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주제 : 존재를 왜곡시키는 인식행위 특징 : ①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하여 유사한 형식과 구절을 반복하고 있다.           ② 사물을 인식하는 행위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의식을 보이고 있다.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이름을 붙이는 순간 존재는 왜곡된 모습을 보임을 노래하고 있다. 무의미한 존재였던 대상이 명명과 인식의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존재로 변화하고, 이어 '나'와 '너'의 상호 인식을 통해 관계가 '우리'로 확산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김춘수의 ‘꽃’은 명명행위를 통해 대상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서로 그러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지만, 이 시에서 화자는 명명 행위가 곧 대상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존재의 본질은 인간의 부여에 의해 달라질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것이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존재의 본질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성격 : 패러디, 해체적 어조 : 풍자적, 반어적 특징 :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표현과 구성에 있어서 원작의 틀을 따르고 있음. 구성 : 1연 -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          2연 - 접근이 허락된 존재          3연 - 타인에게 접근의 허락을 받고 싶은 화자의 소망          4연 - 편리한 사랑을 원하는 '우리'의 소망 제재 : 라디오(김춘수의 시 '꽃'), 현대 도시 문명 주제 : 현대인들의 가볍고 경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       이 시는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parody)하여 재창작함으로써 원작과는 다른, 작가의 독특한 관점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원작인 '꽃'의 의미를 뒤집어 현대 사회의 인스턴트 식(式) 사랑을 나타내고 있고,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다른 작품으로 오규원의 '꽃의 패러디'가 있다. 이 시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인 '꽃'의 의미를 작가 특유의 방법으로 뒤집어 현대 사회의 풍속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과의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 메마른 태도로 나타나며, 또한 자신이 내킬 때는 애정을 나누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상대가 곧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태도로 그려져 있다.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함으로써 작가는, '꽃'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진지하고 친밀한 인간 관계가 오늘날에도 감동과 갈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느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1452    ...계속 댓글:  조회:4215  추천:0  2015-09-07
6.역사유로 추출해낸 이미지   시를 쓰자면, 특히 좋은 시를 쓰자면 사유문제와 언어문제를 꼭 해결하여야 한다. 사유를 어떻게 하는가에의하여 시가 어떻게 되는가가 결정된다. 사유는 시를 쓰는 기본 골격이다. 시에서 언어가 홀시할수 없는중요성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사유이다. 골격이 바르지 못하면 좋은 시가 나올수 없다. 어떤 사유가시적사유인가? 공개념, 공감각을 벗어난 사유가 시적사유라고 할수 있다. 시적사유는 또 공리를 추구하는길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공리를 추구하게 되면 시가 공구의 역할을 놀기 위하여 씌여진 시로 된다. 필자가 말하는 공리란 협소한 관념으로 눈앞의 공리을 추구하는것을 말한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가 좋다는것은 그의 사유의 기점이 인류적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하기때문에 그의 사유는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유이다. 우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이미지를 몇가지 방면으로 규납하여보았는데 실질을 따지고 보면 남영전시인의 시적사유를 해부해보았다고 할수 있다. 이번에는 남영전시인이 토템시를 쓰면서 역사유로 이미지를 어떻게 창출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저 한다. 필자가 말하는 역사유란 간단히 말하면 일상적인 사유와는 반대되는 사유를 말한다. 까치 하고 말하면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까치가 울면 좋은 일이 생기오, 까치가 아침에 집앞에 와 울면 손님이 오겠소, 혹은 좋은 소식이 있겠소 하고 말한다. 그런데 남영전시인의 사유는 그렇지 않다. 그는 를 이렇게 쓰고있다.   조상이 남긴 고훈을 날마다 경건히 흞조리는가   들불이 타번질 때 날려온 칼과 창과 화살, 그리고 방울방울 흐르던 피눈물 잊으려 했건만 온역을 쫓아낼 때 들려온 저주와 욕설과 웨침, 그리고 목갈린 부르짖음 잊으려 했건만 어허 잊을수 없다 지울수 없다   까치는 왜 우는가?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우는것이 아니라  알려주노라고 있다. 시적발상이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하고있던 까치에 대한 개념을 짓뭉개버리였다. 는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일이 있어 방울방울 피눈물 울음을 운다. 이 그냥 생각나서 운다. 그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 또 있다. 을 잊을래야 잊을수 없어 운다. 이미 력사가 되여버린 일을 가지고 까치는 왜 우는가? 시인은 이에 이런 대답을 한다.  할말이 없다. 까치가 우는것을 유전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유전자니까 오늘에 울뿐만아니라 머나먼 장래에도 울것이다. 무엇을 그렇게 집요하게 우는가? 조상의 고훈을 운다. 어느때인지도 모르는 옛날에 이 세상이 들불에 타번질 때 날아오던 칼과 창과 화살을 기억시키기 위하여 울고 온역을 몰아낼 때 받은 저주와욕설과 웨침을 기억하라고 운다. 더 해석하자면 할말이 많지만 여기서 우리는 남영전시인의 시적사유가어떤 대세를 따라가거나, 일상적인 사유에서 머무르지 않는 개성적인 사유라는것을 알수 있겠다. 시인은 를 쓰면서 일상적인 사유와는 정반대되는 사유를 하고있다. 항간에서는 까마귀가 울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하면서 집두리에 와서 까마귀가우는것을 제일 꺼린다. 그런데 남영전시인은 를 아주 좋은 새로 이미지화하고있다.   침침한 밤중에 숲이나 들에서 날아올라 수상한 조짐 보고 까욱까욱 짐승의 주검 보고 까욱까욱 재화를 물리치라 까욱까욱 소식을 전하느라 까욱까욱 까욱까욱, 까욱까욱 다급한 우짖음에 숨었던 위협이 가셔지면 한시름 놓인다는듯 나무초리에 되돌아가 앉는다   보는바와 같이 까마귀는 나쁜 새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일을 하는 새이다. 인간과 가축들의 안전을 위하여 이며 를 알려주는, 안전을 책임진 미더운 경찰과 같은 존재다. 전문적으로 위험한 소식만 알려주면서 위협이 가셔지면 한시름 놓고  휴식의 한때를 보내는 까마귀다. 이런 까마귀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것은 남영전시인의역사유에 의하여 탄생한것이다. 역사유는 일종 시인만의 사유이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개성적인 사유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를 탄생시키게 된다. 개성적인 사유가 안받침되지 못한 시는 필연적으로 일반성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시를쓸 때 사유가 개성적이면 개성적일수록 좋다고 하겠다. 사유의 개성화를 실현하자면 일상적인 의식과 관념과 론리를 뒤엎어야 할뿐만아니라 시인자신이 물젖어있는 그런 의식과 관념과 론리를 뒤엎어야 한다.시쓰기가 바쁘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말이 되겠다.   7.의인화의 수법으로 그린이미지     시를 쓸 때 의인화의 수법으로 쓸수있다는것은 초보자도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의인화의 수법으로 새로운이미지를 창출하는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의인화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였는데 그것은 시인의 기량을 보여주는 한방면이라고 해야겠다. 남시인의 토템시에서 의인화이미지가 집중적으로 잘 표현된 시는 과 다.   아득한 수림은 흙의 손가락이요 넓은 초원은 흙의 머리칼이다 출렁이는 호수는 흙의 눈동자요 바다는 흙의 가슴팍에 박힌 거울이다 흙의 신령은 날마다 창천을 우러러 경건한 기도를 드린다 천만년 길이길이 인류의 창성을 빌어 만물의 번영을 빌어   흙의 손가락을 찍지 말자 흙의 머리카락을 헝클지 말자 흙의 눈동자를 더럽히지 말자 영원불멸할 흙의 신령은 모든 생령의 항구한 복음이여라   시는 으로 된 흙에 있는 나무, 풀, 호수, 바다를 의인화적인 이미지로 짜놓음으로써 생신성과 기이성을 기하고있다. 의인화수법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친절하게 다가오며독자들의 리해에도 난해한감을 적게 준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는 의인화적인 시구도 있고 두개련을할당한 도 있지만 시 전체가 의인화로 이미지한 시도 있다 가 그런것이다   하루밤사이에 비는 손가락을 잘리웠네 하루밤사이에 비는 두다리를 끊기였네 하루밤사이에 비는 옷을 홀랑 벗기웠네 하루밤사이에 비는 머리 하나만 달랑 남았네   손가락은 자신이 적셔준 풀잎에 잘리웠고 두다리는 자신이 키워준 수풀에 끊기였고 옷은 자신이 가꾼 초원에 홀딱 벗겨졌네 비는 한바탕 울고싶었지만 눈물이 말라 천둥만 쳤다   비는 급해서 서성거린다 비는 처절하게 부른다 초원에서 수림에서 사막에서 어수선한 세계를 향하여 손가락 찾는다 두다리 찾는다 옷을 찾는다 찾아 부르는 그 부름소리 사람의 마음 잡아비튼다   는 하루밤새에 손가락, 다리를 잘리우고 웃을 벗기운다. 자기가 자래워준 나무와 풀, 초원에게 억울하게 당한다. 그래서 비는 초원에서 수림에서 사막에서 손가락과 다리 그리고 웃을 찾으려고 헤매면서부르짖는다. 그 부르짖음이 . 시인 남영전은 이런 를 보고 가슴이 아파한다. 필자는 묻고싶습니다. 를 보고 당신의 마음도 잡아비트는것처럼 아픕니까? 우리는 남영전시인의 이나 의 의인화된 이미지를 보고 이런 이미지는 새롭고도 신비하다는것을 느끼게 된다. 시의 내함도 깊지만 고로한 의인화수법으로 참신한 이미지를 추출하여낸 시인의 지혜를 느끼게 되며 그의 예술성에 탄복하게 된다. 그것은 새로움과 신비성이 있기때문이다. 한수의 시는 시마다 새로운 창조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창조가 없는 시는 시라는 명칭에 부끄러운 시이며 엄격히 따지고보면 시가 아니다. 새로운 창조란 이제까지 없던것을 시인자신만이 발굴하고 창조한것이다. 의인화의 수법으로 이미지화한 남영전시인의 이나 는 바로 이런 창조에 도착하고있다겠다.   8.형태이미지   형태이미지란 시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고찰하는것으로서 필자가 자의적으로 주장하는것이다. 왜이런 주장을 세우는가? 시는 태여나면 하나의 사물이 된다. 사물은 모양이 있고 특성이 있고 생명이 있기마련이다. 시의 모양이란 시의 생김새이고 시의 특성이란 예술성이고 시의 생명이란 시의 내함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는 우리들이 사고해볼만한 형태이미지가 동안뜨게 나타나고있는데 몇가지만 고찰해보려고 한다. 시 의 첫머리를 남영전시인은 이렇게 시작하고있다.   우람한 산그림자 끄을고 엉기적 엉기적 엉기적   첫줄에 를 쓰고 아래에 을 세번 반복하였다. 첫시구가 뒤에 오는보다 길며 은 우로부터 아래로 반복되여 나타나고있는데 아래로 내려올수록 오른쪽으로 떨어지고있다. 이 형태이미지에는 무거운 내함이 내포되여있다. 첫줄이 길게 을 막은것은 곰의 머리우를 막아놓은것으로써 곰의 전진을 막는 장벽을 의미한다. 장벽우에는 푸른 하늘이 있다.곰은 푸는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을 세번 반복하면서 오른쪽으로 떨어지게 쓴것은 은장벽을 뚫을수 없어 올라가야 할 하늘과 점점 멀어지고있다는 표현으로써 의 추락을 의미한다. 은 앞으로 전진하려 하지만 장벽이 막혀서 전진하지 못하며 은 하늘에 오르려 하지만 오르지 못하고 그냥 뒤걸음질만치는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있다. 이것은 토템의 추락을 의미하며인류가 걸어온 길이 비틀비틀하다는것을 의미하며 시인이 원하는 원융의 세계의 실현이 간고하다는것을이미지와한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비슷한 내함을 가진 형대이미지는 , , 등 여러곳에서 나타나고있다. 에서는 를 한글자씩 수직으로 세우고, 에서는 이라는 언어를한글자씩 수직으로 세우고, 에서는 이라는 소리를 수직으로 세우고있다. 앞에서를 론할 때 의 수직에 대하여 말하였으므로 더 언급하지 않고 구체적인 해석은 관심있는 독자에게 맡긴다. 시인은 을 쓸 때 마지막련을 이렇게 쓰고있다.   산 산 산   우선 우리는 산이라는 석자가 기하학적 삼각형을 이룬것을 볼수 있다. 삼각형은 안정성을 반영한다. 아무리 모진 세월의 풍파가 일어난다 하여도 웅위로운 산은 끄떡하지 않을것이며 산에 슴배인 토템의미는 변하지 않을것이라는 시인의 확신이 침투되여있다. 또한 작자가 산의 깊은 침묵, 산의 넓은 흉금, 산의 고상한 풍격이 영원할것이라는 찬양의 의미가 내포되여있다고 할수 있다 이 시가 처음에는 한어로 씌여졌다는데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한어로 산(山)자에는 내리금이세개가있다. 어찌보면 이것은 세개의 홰불이다. 산자가 세개이니 이 형태이미지에는 홰불이 아홉개가 있다. 불은 태양이다. 그러므로 아홉개의 해가 떠있다. 전설에 의하면 워낙 하늘에는 해가 열개였는데 대지가 너무 무덥고 가물어서 예가 나타나서 활을 쏘아 아홉개의 해를 떨구었다고 한다. 그 아홉개의 해가 지금도 산에서 불타고있는지도 모른다. 시에서 형태이미지는 그 내함이 풍부하여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것만은 확실하다. 시인이 어떤 모양의 형태이미지를 설계할 때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시에 표현된 형태이미지를 결코 가볍게볼일이 아니다. 이외에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를 이미지한것과 같은 이미지들이 많지만 필자는 이것으로 남영전토템시의 이미지에 대한 사고를 마치면서 한가지 할말이 있다. 시는 비유로서 이미지를 유추하게 되는데두 사물의 어떤 상사성만으로 비유를 설정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유의 상사성의 울타리속에서 뛰쳐나와 이질적인 사물의 비교로 이미지화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두 사물의 질이 다르면 다를수록 그 거리가 멀면 멀수록 창출되는 이미지는 더 훌륭한 이미지로 된다. 이런것을 시에서 강압조합이라고 한다. 강압조합은 현대시의 핵심으로서 이미지조합에서뿐만아니라 언어조합에서도 나타난다. 남영전의 토템시에서 강압조합이 많이 나타나고있는데 관심있는 독자라면 한번 천착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된다. 총적으로 남영전의 토템시는 새로운 시의 령역을 독자적으로 개척하였고 시를 예술적으로 다룸에 있어서빼여난 성취를 획득한 시라고 하겠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는것도 아니다. 시들의 구성이 류사성이 있고 이미지화함에 있어서 단일성이 보이고 언어가 세부화되지 못한 흠이 있는것 같다. 이런 흠은 옥에 티와같은것으로서 남영전토템시가 이룩한 성과를 흐리우지는 않는다. 남영전시인은 우리 민족시단의 전위적인 훌륭한 시인이며 개혁개방후 중국시단의 전렬에 서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문화보물고에, 중화민족의 시보물고에 하나의 찬란한 진주를 선사한다. 그의토템시는 세계적이고 인류적인 시점에서 쓴것이다. 그가 조선족이기때문에 조선족한테 전하여 내려오는토템의식이 시에 나타난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쓴 토템시를 조선족이라는 울타리에 국한시키는것은 미상불 리해의 한계를 너무 좁히는것일것 같다. 남영전시인의 새로운 정진을 믿는다.              
1451    남영전 / 최룡관 댓글:  조회:4214  추천:0  2015-09-07
시는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고찰해 보아야 한다. 필자의 일가견으로 남영전 토템시에 대한 고찰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 구조   18년동안에 남영전시인은 처럼 하게 42수의 토템시를 창출하였다. 우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정신ㅡ 원융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였다. 우리는 남영전토템시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가지 각도로 살펴볼수 있겠지만 필자는 제재들의 구조와 토템시에 일관된 정신에 대하여 천착해보려 한다. 제재적인 각도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를 보면 하늘과 대지와 그 사이에서 활동하는 사물들을 취급함으로써 천지인화의 경지를 구축하고있다겠다. 하늘의 제재로서는 해, 달, 별, 구름과 같은것이고 대지의 제재로서는 산, 물, 흙, 바다와 같은것이고 대지와 하늘을 이어주는 작용을 하는 제재들로는 두루미, 백조, 매, 바람 등등이다. 다른 방면으로 보면 전설적인 사물과 현실적인 사물들의 교차이기도 하다. 룡, 봉황, 신단수들은 순 전설적인 사물에 속하고 기타의 사물들은 현실적이면서도 토템적인 사물에 속한다고 할수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토템시의 시간과 공간의 호한성을 감안하게 된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인류력사의 수십만년을 포괄하고있으며 공간적으로 말하면 우주를 포용하고있다. 그러므로 토템시의 구축은 하나의 전례없던 방대한 작업으로서 소설로 쓰자해도 몇십권을 써야 할분량으로 되여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남영전시인이 이런 방대한 작업을 42수의 시로 완성하였다는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남영전토템시의 정신은 세가지로 구축되였다고 볼수 있다. 첫째는 모성사상으로 관통되였고 둘째는 자존자강의 사상으로 관통되였고 셋째는 더불어 살자는 사상으로 관통되였다. 이 세가지는 모두가 원융이라는 핵을 받쳐주는 세개의 기둥이라고 할수 있다. 모성사상은 어머니마음이다. 토템의 뿌리는 모계사회에 있다. 토템자체가 모성이다. 모성은 인간에게서 가장 위대한 도덕이며 륜리이며 기치이며 응집력이다. 자연은 이 세상사물의 어머니이고 이 세상 모든 사물이 자연의 자식들이다. 자연은 자식들을 사랑한다. 불효한 자식이 있을뿐이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자식이 형제들과 싸우면서 어머니한테 많은 상처를 입히고있다. 남영전시인은 이러한 인간들의 불효를 타매하고 바로 잡기 위하여 토템시를 썼다. 토템시 모두가 모성을 위하여, 모성의 복구를 위하여 씌여졌다고 할수 있겠다. , , ,… 등에서 모성이 집중적으로 표현되고있다.   생명을 낳아키우고 중생을 품에 안은 바다는 세상의 무궁변천과 인간의 창상지변을 낱낱이 엿보아왔다 그 가슴 넓고도 깊어 골육상쟁이 피묻은 칼과 세인이 모르는 비밀도 깊숙이 감추고 언제나 하냥 입을 꼬옥 다물고있다   시 에서 절록한것이다. 바다는 중생을 낳아키우면서 세상의 변천과 인간의 창상지변을 본다. 바다의 흉금은 넓고도 넓어 싸움에서 떨어진 피묻은 칼도 품어주고 세인의 비밀도 말하지 않으면서 침묵속에서 묵묵히 지켜본다. 이것이 어머니 품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안아주고 달래주고 가르쳐주는 어머니의 정과 마음이 바다를 통하여 우리의 가슴을 치고있다.   설렁 버림을 당한대도 설사 알몸이 된다 해도 설약 만신창이 된다 해도 설혹 불구의 몸이 된다 해도 굽히지 않는 신념으로 충천하는 기백으로 우뚝 솟으리   자신의 피 자신의 살 자신의 정기 자신의 팔로 날고 기는 생명 품에 안아주고 춤추고 노래하는 령혼 어루만져준다 쓸쓸하고 차가운 세상에 그래서 활기가 넘쳐나고 그래서 화목한 분위기가 돈다   의 이미지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통하여 어머니 품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자신이 아무리 큰 타격과 상처를 입어도 그것을 속으로 묵묵히 새기며 자신의 팔로 자신의 가슴으로 생명을 안아 보듬어주고 이 세상에 활기가 넘치게 하기 위하여, 화목이 무르녹게 하기 위하여 비바람과 눈보라속에서도 우뚝 서있는 산! 그것은 동구밖에 나가서 집 떠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모습을 떠올리고, 때거리가 없어도 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죽이라도 따뜻하게 끓여주는 그런 녀인을 떠올린다.   아득히 먼 해궁전에 조상의 흰 대문이 열려있다   조상의 흰 령광 검은 도깨비와 사악을 붙잡고 조상의 흰 온정 첩첩 설산과 원하를 녹이고 조상의 흰 자애 귀여운 자손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리하여 까무라진 혼백들 어둠에서 깨여나고 상서로운 부락들 어둠속에 태여난다   에서 나오는 이 조상이 누구인가? 인류사회를 탄생시킨 어머니이다. 광의적으로 말하면 세상만물을 낳아준 자연이고, 협의적으로 말하면 모계씨족사회라고도 할수 있다. 모두어 말하면 원초적인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령광은 도깨비와 사악을 물리치고, 어머니의 온정은 이 세상의 차거움을 녹여주고, 원한을 삭여주고, 어머니의 자애는 자손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어머니는 까무라진 흔백을 깨워주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살림을 꾸려가고 가세를 일으켜 세우면서 자신의 모든것을 헌신하고있다. 이 모성은 조상과 자손을 이어주는 로 되여 눈부신 빛을 뿌리면서 언제나 이 열려져있는 원융의 궁전으로 우리를 불러들이고있다. , , 의 너그러움과 포옹, 그리고 헌신정신이 바로 어머니 정신이며 남영전토템시의 골격을 이루는 사상의 하나라겟다. 자존과 자강은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정신이다. 자존과 자강이 없는 사물은 이 세상에서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자존하고 자강하는것은 분발을 의미하며,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행위를 의미한다. 남영전토템시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원융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분발하고있으며 자강하고있다.   신비한 불 신비한 빛 날짐승도 얼씬 못하고 길짐승도 얼씬 못하고 도깨비도 얼씬 못한다 주눅이 든 혼백도 그래서 얼어붙은 날개 퍼덕인다 그래서 악마의 공포를 털어버린다   시 의 제2련이다. 생존도, 풍년도, 정결도, 강녕도 불을 떠나서는 이룩될수 없다. 불은 이렇게 위력이 있고 이렇게 신성하다. 날짐승도 막고 길짐승도 막고 도깨비도 막는 불의 힘은 위대하다. 불은 인류의 문명을 창조해준 천지신명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어두운 밤을 태우고 태양을 불러오는 존재이다. 시 도 자존자강하기 위하여 폭력과 싸우며 따사로움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생령이다. , , , 이 삼대산의 잔혹한 형벌속에서 압제속에서 먹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뛰쳐나온다. 왜 뛰쳐나오는가? 시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다시는 묻히우기 싫어 다시는 어둠이 싫어 다시는 외로움과 굶주림이 싫어 논밭에서 련못에서 나무가지에서 밤낮 울며 노래한다 밤에는 어제날의 운명을 울고 낮에는 영원한 봄과 함께 따사로움이 그리워 기도를 드린다.   자존과 자강을 위하여 하늘에 기도드리는 개구리는 잔혹한 압력에 굽어들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개척해나가는 완강한 의지의 실천자이다. 사실 개구리에게도 찬란한 력사가 있었다. 부어신화를 보면 부여왕 해부루의 뒤를 이은 왕은 금와왕이였다. 금와왕은 추방당한 물의 녀신 류화를 도와 궁에 있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낳게 하였다. 이것을 물의 생명력(류화의 잉태)과 개구리의 보호(금와왕의 행동)에의해 탄생한 영웅(주몽)신화로 본다면, 금와왕의 행위는 산파(产婆)의 기능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였다. 물과 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그가 어찌 력사에 의하여 맥없이 무너지며 매몰될수 있으랴. 시에 등장하는 도 자손자강의 한 전범이라겠다.   망망수해 어디나 명명황야 어디나 날고 날 비범한 담력과 흥분으로 우주의 바람 일으킨다…   한생 변함없는 큰 포부 안고 한생 두려움 모르는 추구로 경계의 노를 천지간에 저어간다 싸우지 않으면 망하고 강하지 못하면 망하거늘 날개 돋쳐 나는것만이 이 세상 살아가는 길이다   매는 수림의 바다와 어슴푸레한 황야를 난다. 그는 평상치 않은 담력과 흥분으로 우주에다 바람을 일으킨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경계의 노를 젓는다. 사냥물을 덮칠 때 그의 눈은 예리하고 그의 속도는 번개속도다. 강하기 위하여 싸운다. 매가 싸운다는것은 나는것이다. 날아야 매는 살고 날지 않으면 매는 죽는다. 매는 난다는 자체가 자기에 대한 존중이고 자기의 의무와 희망에 충성하는 길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것이 아니고 만물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엉키여서 더불어 살아가기마련이다. 더불어 살아간다는것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며 도덕이며 륜리이다. 더불어살아간다는것은 이 세상이 화목해진다는 표징이며 평화로와진다는 표징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때면 토템시대가 다시 오는 때이며 원융의 희망이 실현되는 때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정신이 체현되고있다.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자는 사상이 시인의 시에 체현된주요한 사상의 하나라겠다. 시 는 피타게 웨친다. 이 세상이 어두워간다고 피타게 절규한다. , 은 기에. 이런 절규를 시인은 이렇게 무드화하고있다.   피 터지는 울부짖음 방울방울 빨간 피로 설설 끓는 피눈물로 갈라터진 가슴을 녹여주고 말라죽는 목숨을 살려준다 화창한 봄을 불러오고 아롱진 색채를 입히여 세상이 목마르게 바라는 금빛동산을 일떠세운다.   피! 피를 바치는것은 최고의 헌신이며 충성이다. 피를 바친다는것은 희생을 각오한 일이며 생명의 마지막연소를 의미한다. 뻐꾸기는 그런 마음과 의지와 자세로  주려하고,  주려하고, 봄을 불러다 아름답게 장식하려고 하고, 한다. 더불어 화목하게 살기 위한 뻐꾸기정신은 아름다운 정신이며 비장한 정신이다. 뻐꾸기울음소리는 횡적으로울리는것이 아니라 종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지고있다. 하늘에서 떨어진다는것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것으로써 신성한 하늘의 숙원을 전달하는것이며, 하늘과 땅을 하나로 융합시키려는것이다. 이것이 뻐꾸기의 더불어 화목하게 살려하는 정신이다. 남영전시인의 이고 이라 부르는 에서도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자는 의지가 빛발치고있다.   돌은 가장 거룩한 거인이여라 그의 말은 불과 우뢰, 비와 바람이 엮어주고 그의 마음은 천지간의 차고 더움을 헤아려주노라 그의 손은 해와 달을 받쳐들고 그의 힘은 끝없이 뻗쳐 수없이 많고 많은 령체를 움직이노라 돌은 분신쇄골이 되여도 알알이 모래로 되여 대천세계를 끌어안노라   남영전시인은 하늘과 돌의 신비하면서도 상서로운 만남과 어울림을 격조높이 노래하고있다. 거룩한 거인돌의 말은  돌의 마음은  돌은  불, 우뢰, 바람, 비, 해, 달, 령체와 돌의 조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감싸주고 서로 받들어주고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그 순리가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화목이다. 그래서 돌은 산산이 부서져 알알의 모래로 되여도 대천세계를 달가이 끌어안는다. 생각할수록 그들의 마음의 어울림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토템시를 극성스럽게 쓴 남영전시인의 바람이 바로 이러한것일것이고 이 세상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이런것이리라. 아무 곳에나 똥오줌을 갈기는 개, 애기의 똥도 맛갈스럽게 먹는 개다. 벼슬도, 명성도, 명예도  인 개도 서로 어울려 화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지조 하나만은 잊지 않고있다.   과분한 요구가 없고 주인집 못산다 꺼리지 않는다 예민한 코 밝은 귀 재빠른 네다리 집을 지켜주고 집주인 바래준다 주인의 버림을 당해도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죽어서도 세월의 뒤꼬리에 달려 누울자리 하나면 만족이다   개는 왜 이렇게 바보질하는가?  있으면 되는 개, 애들의 똥이나 맛있게 먹으면 되는 개, 하지만 언제나 주인을 섬기는 개다. 주인이 부자든 빈자던 개는 관계하지 않는다. 주인이기만 하면  함께 더불어 살면 되는것을 개는 영광으로 행복으로 숙명으로 간주하고있기때문이다. 인류의 력사에서 개의 공헌은 컸다. 사냥군을 도와 짐승잡이에 나서서 목숨을 걸고 주인을 도와주다가 죽은 개는 얼마이며 군견이 되여 전쟁에서 희생된 개는 그얼마이랴. 생각해보면 인간중에는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어찌보면 개는 바보 같지만 실제상개는 령물이고 신령한 영웅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원융에 도착하는 날 시인은 고 했으리라. 모성으로, 자존자강으로, 더불어 사는 정신은 에 도달하려는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정신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인간이 이런 정신으로 삶을 대하고 자연을 대하고 인간 서로를 대하면 마음이 편하게 평화의 향연을 누리게 되리라고 필자는 믿고있다. =================   남영전토템시의 이미지성과   남영전시인이 토템시를 쓴것은 하나의 장거이다. 중국현대사에서 토템시를 계통적으로 체계적으로 쓴 시인은 없었다. 일부 시인들이 토템에 관한 시들을 좀 쓰기는 하였으나 토템적자각이 없이 썼던것이다. 그들의 시는 선조를 노래하고 선조의 문화를 노래하는것으로 썼을뿐이였다. 한 시인이 하나의 새로운 시령역을 개척하여 쓴다는것은 그 령역에 대한 심각한 연구와 철학적사고가 안받침되여야 하는것으로서 아무나하는 일이 아니다. 황차 토템령역은 원시사회의 문화로써 아무나 접근할수 있는 령역이 아니다. 사학적연구가 따라서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다. 남영전은 바로 이러한 일을 시적으로 해내였다. 그러하기에 쎄맨이 남영전시인을 이라고 평가한것은 결코 과분한 평가가 아니며 명실에 부합되는 평가이다. 시는 하나의 새로운 령역만 개척하면 다 되는일이 아니다. 시가 시로 되여야 한다. 시가 시로 된다는것은 시적예술이 시에 무르녹아있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미지는 시라는 예술의 근본이며 핵심이라고 하겠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이미지창출에 모를 박고 신선하고 아름답고 충격적인 새로운 이미지를 많이 창출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와 계발을 주었다.   1.신 화 적 이 미 지   신화는 인류의 최초의 문화로서 인류의 뿌리를 증언하는 보물이다. 신화적 이미지를 창출한다는것은 인류의 원초적인 문화의 맥을 잇는 작업이라고 할수 있고, 인류의 뿌리에서 보물을 캐고, 화폭을 창출하는 그 자체가 예술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곳곳에서 신화적화폭이 펼쳐지고있으며 신화적향기가 그윽하게 피여오르고있다.   산 넘어 바다 건너 저 멀리 박쥐의 날개죽지에 숨었다가 아장아장 걸어오는가 고운 얼굴 가리운 얇은 베일 너울너울 어깨를 감싸고 머리우에 팔락이는데 정겹게 방긋 웃으며 흐리마리한 마음의 요람 나무추리에서 흐느적거리네   삼라만상 무게를 잃은 이 순간 산그림자 해솜마냥 부풀고 바다물결 실타래 풀리듯 넘실거리네 돌멩이도 불룩한 가슴 헤치고 젖을 빨듯 으스름 달빛 빨아들이는데 둥글넘적 환하게 부드러운 빛살속에 상상의 푸른 날개 펼쳐지네 의 첫두련   달이 떠오르는 경상을 쓴것이다. 우리앞으로 신화같은 아름다운 화폭이 잔잔하고도 부드럽게 흘러지나가고있다. 우리는 이 시구들을 읽으면서 아늑한 환상세계로 빨려들어간다. 달이란 언어 한마디도 없이 달의이미지를 신화적으로 써놓음으로써 우리는 시를 보고있는것이 아니라 신비하고 아름다운 신화를 읽고있게 된다. 달이 뜨고있는것이 아니라  얇은 베일을 날리는 절세의 미인이 우리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오고있다. 박쥐의 날개밑에 숨었던 아가씨가 상상의 푸른 날개를 저으며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는모습은 얼마나 황홀한가!  절세의 미인을 바라보는 향연과 미인의 향기를맡는 모든 사물들이 붕 뜬다. 그 무거운 산도  바다물결도  가볍게 설레이고 돌멩이도 가슴을 헤치고 단젖을 빠느라고 여념이 없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이미지를 남영전은 신화적인 색채로 펼쳐주고있다. 남영전신인은 에서 아늑한 황홀을 펼쳐주었다면 에서는 가을바람과 같은 시원한 전설적인 이미지를 우리앞에 그려보이고있다.   짙은 안개 헤치고 타래치는 먹장구름 꿰뚫고 아득한 창천에서 달려오는가   눈부신 번개불 번쩍이고 류황내 배인 향기를 휘몰아 쏜살같이 달려온다 칡덩쿨 뻗은 숲을 지나 가시덤불 우거진 거친 들판을 지나 한낮의 흑풍백우 몰아내고 오밤의 검은 장막 열어제치며 지동치듯 달려온다 해빛 안고 달빛 안고 발길 닿는 곳마다 흰 빛이 깨여난다   의 신화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녀성의 신화라면 의 신화는 거치르고 날파람이 있는 남성의 신화이다. , , 라고 달려오는 모습을 세층차로 나누어 표현함으로써 저 요원한 곳에서 지척으로 박근하는 천하무적 백마의 무드로 하여 긴박성과 긴장성을 가지게 되며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안개도, 타래치는 먹장구름도, 칡덩굴숲에 깔린 산도, 가시덤불 우거진 들판도 백마의 전진을 막지 못한다. 백마가 번개불을 번쩍이며 령기를 휘몰아오며 흑풍백우를 몰아치고 오밤의 검은 장막을 활활 열어제끼는데 뉘감히 앞길을 막으며 뉘 감히 하늘에 사무치는 그 기세를 당한다던가. 백마의 회오리치는 발자국마다에서 해빛이 깨여나고 달빛이 깨여나고있음에랴. 에서도 신화적인 색채가 추호도 그 기세를 눅잦히지 않는다. 남영전시인은 우뢰를 소나기속에서 묘사하는 일상적인 표현을 떠나서 신화적인 방법으로 다루고있다.   대붕과 룡 하늘을 찢고 땅을 쪼갠다   어둑컴컴한 대지 흐린 하늘에 덩지 큰 대붕은 날개를 퍼덕이며 쇠발톱 번쩍인다   당지 큰 룡은 하늘에 치솟아올라 귀청 째듯 포효한다 우뢰의 화살 우뢰의 도끼 우뢰의 돌멩이 창망한 하늘땅을 짓쪼긴다.   시인은 우뢰를 대붕과 룡이 하늘땅을 갈갈이 찢어버리는것으로 표현하고있다. 대붕과 룡은 모두 신화적인 사물이다. 를 신화적인 사물의 운동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의 신화적색채와 의미를 풍만하게한 력작이다. 하늘과 땅을 찢어버리는 대붕과 룡의 힘은 언어로써는 표현하기 어렵다. 시인의 표현은 너무핍진하다. 날개를 퍼덕이며 쇠발톱을 번쩍이는 대붕, 구중천에 솟아올라 귀청이 짜개지는 함성을 지르는룡, 그들의 동작과 웨침은 이고 이고 이다. 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신화적색채로 씌여진 남영전시인의 는 밥인것이아니라 술이다. 술중에서도 독하고도 향기로운 술이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이밖에도 신화적인 이미지를 창출한 시들이 많다. 그의 신화적이미지는왕왕 시의 서두를 차지하고있다. 신화적인 이미지를 배치하는것은 필자가 보기에도 안성맞춤의 자리인것같다. 이렇게 하면 독자에게 돌연적인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되여 독자는 느닷없이 상상의 새로운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가서 시적향수를 누리게 된다.   2.철 리 적 이 미 지   철학은 시의 기초이다. 시는 철학우에 놓여진 건물이다. 때론 시자체가 철학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철학이 없는 시는 기초가 없는 시로서 항구성을 가지지 못한다. 시는 정치에 의하여 지배되는것이 아니라 철학에 의하여 지배된다. 구라파의 현대시들이 이것을 증명하였다. 남영전시인이 토템을 우상으로 이 세상의원융을 부르짖는 자체가 력사유물주의와 변증법적관점에 발을 붙인 일종 찰학이다. 그는 토템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하고 토템으로 인류력사를 해석하려 하고 토템으로 시의 리상국을 주조하고있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철리가 두드러지게 안받침된 시구들을 착중해서 보기로 하자. 의 제4련을 시인은 이렇게 읊조리고있다.   심령의 요람과 날개와 그리고 신전문에 걸린 달은 이지러졌다 둥글어지고 둥글어졌다 이지러지는데 둥글어짐은 이지러지기 위함이요 이지러짐은 둥글어지기 위함이라 둥글고 이지러짐은 영생에로 나아가는 산길이라네   얼핏 보기에는 달이 이지러지고 둥글어지는 현상을 쓴것 같지만 결코 그런것이 아니다. 시인은 를 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있다. 달을 쓰는것 같지만 실제상에서는 심령의 요람과 심령의 날개를 쓰고있다. 심령의 요람이란 마음의 리상이요 심령의 날개란 마음의 요람을 향하여 가는 인간의 움직임을 표현한것이다. 달이 둥글어졌다 이지러졌다 하는것은 그 리상을 향하여가는 로정의 풍파를 암시하며 간고성을 암시하는것이다. 그러기때문에 시인은 이라고 읊조리고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오솔길, 신작로, 대통로, 들길, 산길, 이런 길들중에서 가장 걷기 어려운 길이 산길이다. 산길을 걸어간다는것은 여느 길을 걸어가기 보다 맥이 들고 숨이 차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산길은 령을 넘어가는 길로서 가파롭고 구비가 많을뿐만아니라 위험한 짐승도 있을수 있고, 정글도 있을수 있고, 가시덤불도 있을수 있다. 은 기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훌떡 가는 길이 아니다. 달의 둥글고 이지러짐이말하려는것이 바로 이런 길인것이다. 둥글어지는것과 이지러지는것은 모순되는 대립면으로서 그들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전의한다. 달에 대한 시인이 이런 표현은 현실과 상상과 철리가 혼연일체를 이룬 이미지라고 우리는 명명해주어야 할것으로 알고있다. 시 에서도 남영전시인은 이미지를 직조하는데 철리를 부어넣는 배려를 돌리고있다. 의 제2련의 앞부분이 이렇게 이미지화되고있다.   틈만 있으면 파고들어 어디서나 볼수 있지마 발도 없고 날개도 없고 형색 또한 없어라 없는 발이 가장 큰 발이고 없는 날개 가장 큰 날개란다 없는 형상 가장 큰 형상이고 없는 빛이 가장 현란한 빛이란다 땅우를 흐르고 모래밭에 스며들면 하늘에 날리고 …   이 이미지는 일상적인 사유로 보면 모순투성이고 말도 맞지 않는다. 땅속에 스며든 물이 보인다고하는가하면, 발이 없기때문에 가장 큰 발이라고하는가 하면, 날개가 없는게 가장 큰 날개라고하는가 하면, 형상이 없는게 가장 자유로운 형상이라고 하는가 하면, 빛이 없어야 가장 현란한 빛이 된다고 하는가 하면, 물이 땅에 스며들면 하늘에 날린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 황당무계한 소리가 시로 된다면 누구나 다 시인이되겠다고 혹자는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이며 철리가 무르녹은 이미지이다. 없는것에 있고 있는것에 없고, 차가움에 더움이 있고 더움에 차가움이 있고, 땅땅한것에 무름이 있고 무름에 땅땅한것이 있고하늘에 땅이 있고 땅에 하늘이 있고, 물음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속에 물음이 있고 악함속에 착함이 있고착함속에 악함이 있고, 강함속에 연약함이 있고 연약함속에 강함이 있고, 무리속에 흩어짐이 있고 흩어짐속에 무리가 있다 … 이것이 세상이고 이것이 세월이고 이것이 절대적진리이다 이러한것을 감지해내는사람이 현인이다. 이러한것을 이미지화 하는 사람은 시인이다. 랭보도 말했다. 일반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소리를 듣고 보지 못하는것을 보아내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남영전시인의 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한것은 황당한것 같으면서도 철리가 담겨져있고 헛소리 같은데 예술이 꽉 차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철리의 힘이며 시인의 상상의 힘이다. 자아완성을 표현하는 시 도 철리가 용해된 걸작이다. 대는 땅을 비집고 나오는 강자로서 감히 꽃과아름다움을 비기고 휘우둥대는 바람과 맞서서 탄탄함을 비기면서 자신을 갈고 벼린다. 그런 대를 시인은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자루의 칼로 한자루의 검으로 자신의 속살을 베여내고 자신의 염통을 끄집에내여 끊임없이 피를 흘리네 참을수 없는 아픔을 참으며 자신에게 모질어 자신에게 무자비하여 한마디 속이 비면 그만큼 허리가 실해지네 마음도 속이 빌수록 성결해지고 속이 빌수록 더 충실해지네   의 일생은 자학의 일생이다. 로 으로 . 피를 흘리며 언어로서는 표달할수 없는 아픔을 감내하는 독한 놈이다. 왜 참대는 독한 놈으로 되는가? 속이 비여야 키가 커지고 속이 비여야 허리가 실해지기때문이다. 속이 빌수록 마음도 성결해지고 속이 빌수록 마음이 충실해진다. 대는 속을 비우며 자라나서 휘여든 몸뚱이가 아니라 로 을 받치고  받친다. 속을 비워야 함은 그의 운명이고 숙명인지도 모른다. 불교에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비워야 심령이 깨끗해지고 마음을 비워야 심신이 건강해지고마음을 비워야 모든것을 포옹할수 있는것이다. 욕심이 꽉 들어찬 마음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일수 없다. 오직 빈 마음이라야 어디를 가나 어떠한 일을 하나 떳떳하게 된다. 시인은 에서 바로 이런 마음을 추구하지 않았나싶다 는 불교의 성전같은 경지에 도착하기 위하여 모질고 무자비하게 마음을 비우며 자아완성을 하고있다. 비여야 채울수 있는것은 철리이다. 이런 철리로서 남영전시인의 대는 우리들에게  전범을 보여주고있으며 후세사람들도 찾아들어갈 수 있는 대숲을 마련하였다.   3.환 상 적 이 미 지   모든 토템 자체가 환상적이다. 환상은 남영전시인을 토템의 전당으로 부르고 남영전시인은 환상의 전당에 가서 토템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희희닥거리며 롱지거리도 한다. 남영전의 가장 친한 친구는 토템이고토템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남영전이다. 시인은 18년동안 토템들과 막역지우로 보내면서 토템들의 속내를알아보았고 토템들의 소원과 희망을 알아보고 토템시를 썼다. 그 시가 우리가 보는 42수의 토템시다. 시인들은 상상으로 시를 쓴다. 환상은 상상의 최고 류형이다. 시인은 환상의 차를 타고 일초동안에 수억만리 달릴수 있으며, 환상의 나래를 저어 일초동안에 구만리 하늘을 날수 있다. 모종 의미로 말하면 환상이시인을 예술의 최고봉으로 끌어올린다고 할수 있겠다. 필자는 남영전시인이 쓴 환상적이미지에서 , , 의 이미지 일부만을 살펴보고저 한다.   창천을 쪼각쪼각 받쳐들고 대지를 갈래갈래 거머쥐고 씨비리의 돌개바람 안고 회오리쳤네 회오리쳤네 회오리쳤네 장대 같은 사닥다리 받치고 높다란 기둥을 세워 대지의 배꼽과 북국성을 이어 해와 달을 긴 가지에 휘감아 넋새에게 보금자리를 지어주었다   의 제1련이다. 시는 이렇게 쓴다. 빈소리가 한마디도 없다. 하늘과 땅을 이어놓은 신단수가 장쾌하고도 억찬 자신의 모습을 우리들의 눈앞에 그림처럼 낱낱이 보여주고있다.  신단수!  신단수! 에 기둥을 세워 에 닿은기둥,  신단수! 실존적인 언어는 한글자도 없는 환상이 끓어번지는 이미지다. 이런 이미지가 바로 시의 고차원을 이루는 이미지가 아닐가. 신단수가 하늘과 땅을 이어놓고 해와 달을 가지에 걸고 웅장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입을 딱 벌리게 된다. 신단수가 왜 하늘과 땅 사이에 기둥을 세우는가? 왜 사닥다리로 되는가? 신단수가 하늘과 땅을 통하는 다린것이다. 시인은 신단수로써 하늘과 땅의 혼연일체, 아니 우주의 혼연일체를 시도하고있다겠다. 천지인화의 위대한 사상이 신단수를 통하여 우리앞에 흐리마리한것이 아니라 확고하고 확연한 이미지로 떠오르고있다. 시인의 흉금은 무연하다. 시인의 흉금속에서 해 달 별들이 모래알처럼 작은 사물이 되여 빙글빙글돌아가고있다. 환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정서를 쏟아부을수 있으랴.   바람의 날개처럼 형체없이 나비의 날개처럼 화려하게 새의 날개처럼 가볍게 … 바람의 날개 없는 곳에서도 바람의 날개 퍼덕이고 나비의 날개 없는 곳에서도 나비의 날개 퍼덕이고 새의 날개 없는 곳에서도 새의 날개 퍼덕이네   시 에서 절록하여 온 환상적이미지이다. 부드럽고 우아한 언어로 우리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미지를 펼쳐주고있는가! 구름을 바람날개, 나비날개, 새의 날개라고 누가 말한적이있었던가. 날개들이 모여 구름이 되였다는 이 기기묘묘한 이미지야말로 환상이라도 야릇하면서도 우미한 환상이다. 시란 참 이상한 물건이다. 없는것도 있게하고 (바람의 날개) 그렇지 않은것도 그렇다고 (나비날개, 새날개) 해야 수작이 되니 말이다. 시인은 환상에 잠기기만 하면 마치 요술사마냥 언어의 광산에서 언어를 캐여다가 제련하여 아름다운 이미지를 자유롭게 만들어낸다. 그래서 시인은 사치스럽고 신비한 예술인일것이다. 남영전시인이 에서 창출해낸 환상적이미지가 이를 말해주고있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날개들은 날개로 황페한 산천에 단비를 쏟아주며 말한다.  이 말은 구름들의 노란자위이며 날개들의 노란자위이다.  하나를 갖지 못하여 불쌍한 토끼는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뒤다리가 길어지고 두귀가 커진다. 이런토끼는 도망치다가 어디로 갔는가?   도망, 도망치다가 나중엔 월궁에 뛰여들었다 외로운 넋이 월궁에 뛰여들었다 평생 숙원은 귀향 귀향하려는 소망을 돌절구에 넣어 빻고 찧는다   시 에서 나오는 옛말이다. 참 구수하고 감칠맛이 난다. 퍼그나 유모아적이고 해학적인 옛말이다.이런 옛말은 어디에서 나올가? 환상에서 나온다. 환상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구수한 옛말을 만들어낼수있단 말인가. 너무 도망치다보니 뒤다리가 길어진 토끼, 두귀가 길어진 토끼다. 뛰고 뛰다가 어망결에 월궁으로 들어갔다는것이다. 이런것이 환상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환상이라는 존재가 없을지도 모른다. 월궁은 하늘의 궁전이여서 좋으련만 토끼는 뿌리를 잊을수 없어 귀향하려는 평생의 소원을 돌절구에다 넣고  남영전시인도 토끼처럼 돌절구를 차지하고 절구속에다 원융의 숙원을 날마다 빻고 짓찧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환상가이고 환상은 시인을 만든다. 그러기때문에 환상으로 짜놓은 이미지가 신비하고 아름답고리상적이다.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싶다. 시를 배우려면 환상을 수렴하여야 하고 시간의 검증을 받을수 있는 시를 쓰려면 환상을 날개로 삼아 하늘을 날아보고 땅속을 날아보며 시를 쓰라고   4. 은 유 적 이 미 지   42수의 남영전시인의 토템시가 줄을 지어 검열대앞을 지나간다. 앞장에는 과 이 신단수가지를 다듬어 만든 기대를 들었다. 그뒤로 한줄에 토템물이 열씩 넉줄로 섰다. 발자국소리가 쿵쿵 울린다. 원융의 노래소리 우렁차다. 앞장에 선 룡은 하얀 기발을 들고 봉황은 파란 기발을 들었다. 하얀 기발에는 상징이라는 글발이 눈부시고 파란 기발에는 은유라는 글발이 눈시리다. 검열대우에서는 남영전시인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가슴 벅찬 감동으로 대오을 사열하고있다.그들의 검열을 보는 관중은 독자들이다. 독자들의 얼굴마다에 웃음이 넘친다. 대오는 검열대를 벗어나며 물이 된다. 상징과 은유의 물결이 너울너울 춤추기도 하고 하늘에 솟구쳤다가와르르 무너지며 금보라 은보라를 날린다. 쌍무지개 일기도 하고 외무지개 일기도 하면서 매혹스러운 광경을 펼친다. 그래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가벼운것 같으면서도 무거웁고, 소박한것 같으면서도 화려하고, 확연한것같으면서도 몽롱하고, 얕은것 같으면서도 깊이가 있다. 필자는 상징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고 은유에 대하여서만 살펴보고저 한다.   이 세상 울창한 수림을 드나드는 사슴 수해속에 흔들리는 홍산호런가 설야에 피여난 인삼꽃이런가 ㅡ 에서   하늘에서 춤추면 아롱진 노을 땅에 내리면 아름다운 산꽃 ㅡ 에서   남영전시인은 을 라고 하기도 하고 이라하기도 한다. 이런 은유로 사슴의 귀중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이는 토템의 아름다움과 귀중함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에서는 날아다니는 나비를 이라 하고 풀이나 꽃에 앉은 나비는 이라고 은유하고있다. 에서도 시인은 아름다운 은유의 꽃을 창조하여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게 하고있다. 에서는 백조가 불안한 운명의 길을 떠날 때 이런 은유로 표현하고있다.   바람은 길잡이 별은 길표지 번개는 길동무   명명식으로 제시된 이러한 시구들은 은유의 표현이라겠다. 눈물을 흘리며 백조는 고향을 떠나지만 바람은 길잡이가 되여 그와 함께 가고, 별은 길표지가 되여 그의 길을 안내해주고, 번개는 친구가 되여 그와 함께 간다. 자연이 그를 품어주고 자연이 그를 다독여주는 경상을 그리고있다. 더불어 함께 하는 아름다운모습이다. 상기한 은유들은 아기자기한 점이 있다면 에서의 은유는 돌발적이다. 사자가 질주하는것을 보고 하고 서두를 떼고있다. 이 은유는 우리 눈앞에다 푸른 풀이 무성한 무연한 벌판에서 태양이 달리고있는 정경을 펼쳐주고있다. 달리는 사자의 용맹과 기세 그리고 사자의용왕매진의 눈시린 빛발이 일시에 독자들 충격하고있다. 시적정서 흐름의 분위기에 따라 시인은 은유를 재치스럽게 배렬하고있다. 에서 이 하늘에 올라서 포효하는것을 이렇게 쓰고있다.   우뢰의 화살 우뢰의 도끼 우뢰의 돌멩이 창망한 하늘땅을 짓조긴다   이 은유는 쌍중의 의미를 가진다. 한가지는 우뢰를 화살, 도끼 돌멩이로 은유한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소나기가 내리는것을 화살, 도끼, 돌멩이로 상징하였다. 때문에 은유의 앞에다 쓴 와은유의 마지막에 쓴 는 시구가 은유의 표현과 아주 잘 어울린다. 물샐틈없이 치밀하게 짠 은유조합과 은유마다 행갈이를 하였기에 는격렬한 시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여 쟁쟁한 소리를 낼뿐만아니라 천하무적인 우뢰의 기세와 위력을 확실하게 하여주고있다.   5.사물의 특성을 잡은 이미지   세상의 사물은 특성이 있다. 사물의 특성은 사물존재의 내함으로서 여러가지 방면으로 표현되면서 존재의 가치를 나타낸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시종 사물의 특성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특성을 집요하게 붙잡고 이미지화를 하고있다. 짐승의 류형에 속하는 토템을 쓸 때면 성칼지고 완강하고 거치른 성격을 이미지화하기에 력점을 두는 경향이 다분하고, 조류의 류형에 속하는 토템시를 쓸 때면 날개나 나는것을 틀어쥐고 이미지화하는데 집착하였고, 하늘의 사물을 토템시로 쓸 때에도 그 사물의 특성에 배려를 돌리였다. 아래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신단수초리에서 회오리쳐 해상천하에 신비왕국 이어놓고 짐승이 덮쳐도 보라매 노려도 갈범이 울부짖어도 겁내지 않았다 큰물이 밀려와도 광야가 한적해도 공포가 휩쓸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언제나 머리 번쩍 쳐들고 두 날개 퍼덕이며 하늘을 날았거늘 영원히 안일을 모르는 자유의 넋 백의 혼이여   날아다니는것은 조류의 특성이다. 두루미는 조류에 속하는 사물로서 두루미도 나는 특성이 있겠다. 시인은 두루미가 하늘에 날아올라 대지를 부감하는 장면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대지는 살풍경이다. 짐승들은 덮치며 날치고, 보라매는 먹거리를 찾느라고 예리한 눈길로 노려보고, 갈범은 울부짖는다. 홍수는 대지에 범람하고 광야는 쓸쓸하고 적막하다. 공포가 폭풍처럼 대지를 휩쓸고있다.왜 이런 살풍경이 하늘에 뜬 두루미의 눈으로 들어오는가? 그것은 현대문명과 발달이 빚어내는 악과인것이다. 그 악과를 두루미눈을 통하여 시인은 적라라하게 발가놓고있다. 두루미는 시인의 리상의 체현물이다.  나온 두루미는  신령이다. 을 건설하려는 웅심을 품은 두루미기에 살풍경속에서도 머리를 번쩍 쳐들고 훨훨날아예고있다. 살풍경과 대조를 이루는 두루미형상은 우리들에게 원융의 희망의 등불을 밝혀 어두움을가시는 정경을 보여주고있으며 신심을 북돋아주고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시인의 머리에 떠오른 의식을 어떻게 이미지화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인은 자신의 사유를 시로써 표현할 때 개념적인 언어를 사용할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언어, 구상적인언어를 써야 하며 사물들의 운동으로써 표현하여야 한다. 그래야 명확하고 정확하고 확연하고 탄탄한 이미지를 떠올릴수 있다. 남영전신인의 시 에서는 이런 발휘가 잘되고있어 우리앞에 나타난 이미지가 얼빤한 그림인것이 아니라 한폭한폭이 아주 똑똑하게 안겨온다. 시 에 대한 이미지를 살펴보자. 바다에서도 살고 륙지에서도 사는 거북의 눈은 특별하다. 그 눈은 일반적인 눈이 아니라 바다속에서도 볼수 있고 륙지에서도 볼수 있는 특별한 눈이다. 거북의 껍질 또한특별하게 딴딴하다. 시인은 거북을 쓸 때 거북의 이 특점을 노리였다.   수정눈때문에 철갑등때문에 매발톱도 두렵지 않았다 산짐승의 발굽도 두렵지 않았다 칼날도 활촉도 꿰뚫지 못하고 화염불길도 당해내지 못했다 넓은 모래불에서, 수풀속에서 깨뜨릴수도 태울수도 없는 불사불면의 넋이여 해적무리 달려들면 등허리에서 칼날이 수풀처럼 곤두서고 아가리에선 불길을 활활 내뿜었다 해적들은 꼼짝 못하고 바다에 쳐박혔다 바다에 뒤엎였다 바다에 삼키웠다    거북이를 이미지화한 부분이다. 시인은 이 을 시화할 때 거북의 특성인 껍질에서 시를 찾아내고있다. 땅우에서 바다속에서 그 껍질이가지는 의미는 찬하무적이다. 그가 천하무적으로 될수 있는것은 껍질이 딴딴하다는 성질에서 류추해내여이미지화한데 있다. 시인은 륙지에서는 매발톱, 산짐승의 발굽, 칼날, 활촉, 화염불길을 리용하여 껍질의작용을 보여주고 바다에서는  는 이미지로 거북껍질의 위력을 현시하고있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시는 어떤 사물의 특성에 대한 새로운 표현의 발굴이라고 할수 있다. 시인은 에서 바로 이런 시작업을 훌륭하게 하고있다.   사자의 포효소리는 천둥치듯 팔방에 울려퍼졌고 사자의 금빛 눈부신 갈기는 번개불이 번쩍이듯 하늘을 후려쳤다 그바람에 눈사태 와르르 무너지고 둥근해 뱅뱅 돌고 별똥이 쏟아지며 어둠이 멀리로 쫓겨났다 악마는 바다끝에 쳐박히고 요귀는 십팔층지옥에 갇혔다   시 에서 짐승의 왕인 사자를 표현한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사자는 짐승들중에서 가장 힘이 장사이고 가장 날파람이 있고 가장 무서운 짐승이라는 사자의 특성에 착안점을 두고 표현한 이미지다. 천둥 같은 사자의 포효, 번개불처럼 하늘을 후려치는 갈기, 이러한 표현들은 짐승의 대왕인 사자를 표현함에 충분하다. 시인은 이런 사자의 위력을 효시하기 위하여 무너지는 눈사태, 뱅뱅 도는 태양, 쏟아지는 별무리, 바다에 처박히는 악마, 십팔층 지옥에 갇히는 요귀 등을 동원시킨다. 정면과 반면의 동시적인 움직임을 통하여 사자의 위력에 대한 이미지를 강대하게 보여주고있다.   사자의 특성을 틀어쥐고 이미지화한 이 이미지에서 우리는 세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미지를 만들 때 시적대상과 련계시킬수 있는 사물들을 찾아 표현하는 방법이 그 하나요, 관계되지 않는 사물이라도 표현에유조할 때 빌어다 표현하는 방법이 그 둘이고, 이질적인 사물로 변형시켜 표현하는것이 그 셋이다. , , 들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사자와 관계되는 사물이니 하나에 속하고, 와는 관계없는, 허망개입시킨 사물이니 둘에 속하고, 와 불은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사물의 변형으로서 셋에 속한다. ================================
1450    한춘시평 댓글:  조회:4187  추천:0  2015-09-07
[ 2015년 09월 16일 09시 10분 ]     호남평강석우채(湖南平江石牛寨) 국가지질공원내 산봉우리 사이에 걸쳐놓은 길이 300메터, 수직높이 180메터 되는 널판자 줄다리(木板吊桥) ----------------------- 한춘시인의 3년제를 맞으며 고인의 령전에 드리는 시평   한춘시평 한춘시의 사물에 대한 리해 ㅡ의 소평               /최흔   한춘시인은 개혁개방후에 는 기발을 들고 우리 시단의 앞장에서 현대시의 혈로를 줄기차게 달려온 선두주자다. 그는 열렬한 현대시의 창작자였고 열렬한 현장평론 가였다.(아래는 까치둥지로 략함)는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내놓은 시집이다.   . 1.   한춘시의 기둥수법   애기의 첫울음처럼 요란하게 터지던 꽃망울 한로의 음절너머 바줄을 놓쳐버린 코스모스 숨차게 달려온 그 길에 눈부시게 세워놓은 기발 그아래에서 외우던 영어단어 한나절 나비 되였는데 돛배우에 기발이 되였는데 서리우에 달빛이 비끼는 밤 기러기는 남으로 날아간다.   이 시는 세한도(2)에 실린 2010년 9월 16일 작이다.시속에서 사물들이 강렬하게 태여나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다. 애기, 꽃망울, 바줄, 코스모스, 길, 기발, 영어단어, 나비, 돛배, 서리, 달빛, 밤, 기러기 등 시각적인 사물이 있는가 하면, 첫울음,  음절 등 청각적인 사물도 있다. 시는 한행이 길어서344음보로 된 11행이다.(한춘시는 대부분 이런 시행이다) 이 짧은 시에 행마다에 새로운 사물들이 태여나고있으며 태여난 사물들은 변형으로 이루어지고있다. 한춘의 시는 거이다가 이런 시기교로 씌여진 시들이다. 세상은 물질로 구성되고 물질이 없는 세상은 없다. 시속에서의 물질은 바로 이미지인것이다. 시인의 상상속에서는 이 이 되고, 놓친이되고, 이 되고, 길에는  이 세워져있고,    는 >, .  이러한 되기는 한사물이 그와 다른 성질을 가진 사물로의 이동이며 한물질이 그와 성질이 다른 물질로 되기이며,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도주한 행선지이기도 하다. 이질적인 두 사물들은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시의 핵심적인 수법인 변형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라고 하겠다. 엘리어트는 이렇게 짝을 짓는것을 시적상관물이라고 하면서 예술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되기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이라는 저서 112쪽에서 지적한것처럼 한춘시인은 자기의 시를 이라고 하면서 (세한도1)고 하였다. 시인의 는 는 한수의 시에 속하리라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서 해야 할 말이 또 있다. 왜 이렇게 맘대로 변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인의 상상은 자유로운 상상이다. 자유로운 상상은 외계의 그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시인만의 상상인것이다. 기성론리도, 도덕도, 그어떤 진리의 한계와는 관계없이 시인은 생각하고 상상할 권한이 있는것이다. 그 상상은 한계가 없으며 한계를 가질 필요도 없는것이다. 아무리 변형시켜 보았자 지구우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기이며 우주속의 한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기일뿐이다. 지구나 우주가 사물들이 변할수 있는 공분모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이렇게 변하는가 하는 물음은 임신한 녀자가 왜 아이를 낳는가고 묻는것처럼 소용없는 일이라겠다. 물질과 물질의 변형은 한춘의 시기법의 기둥수법이라고 할것 같다. 한춘은 이런 기법으로 자신이 개척한 현대시의 길을 총화하고있는 하고있는것 같다. 시인이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 변형시키는것은 한사물의 리면에 있는 새로운 사물을 찾아서 보여주는것으로써 원초적인 사물을 들여다 보기라고 할수 있다. 인류는 원초적인것을 숭상한다. 시인도 원초적인것에 접근하려고 시를 쓰는것이다. 때묻지 않는 그 원초적인 순수를 시인이 꿈꾸고있는것은 거기에 유토피아가 있기때문일것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시들   에는 좋은 시들이 많은데 필자가 특별히 즐기는 시는 과 이다. 이 두편의 시들은 언어가 새롭고 의미가 깊어 흔상할 가치가 많은 시들이다. 그중 (아래는 3으로 략칭)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은 마른 우물에서 물을 긷는다 망가진 용드레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시인은 천둥소리를 기다린다   주추돌에 깨여지는 비방울 두손으로 받아들고 지난겨울 찬 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또다시 꼼꼼히 검색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었다 2010.9.16.   우선 내용이 제목과 이질적이여서 좋다. 세한도란 추운겨울 지도라고 말할수 있는데 시인은 추운 겨울철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물을 긷는것을 말하고 있다. 시는 항상 제목과 내용이 분리되거나 내용이 제목에서 일탈되는것이 좋다. 시는 어디까지나 상징이기에. 물이란 무엇인가? 물이란 시다. 물도 마르고 룡드레도 망가졌으니 물을 길을수 없는것이다. 시인은 시를 떠나면 물을 떠난 물고기 신세가 되는것이다. 달가닥거리는 용드레소리는 들려도 물은 한방울도 길어올릴수 없는 답답함과 근심걱정이 속을 다 말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소나기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소나기 오면 우물에 물을 길어올릴수 있는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천둥소리는 령혼에 갑자기 솟구치는 령감이며 시인것이다. 는 시를 짓는 시인의 욕망이 좌절되는것을 표현한 언어로서 가히 언어속에 새로운 언어가 있음을 암시하는것이라겠다. 이것이 3의 내용인것 같아서 음미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3의 2련은 가련한 시인이 시를 찾는 과정을 묘사한 단락이다. 고대하던 비는 내리지만 시인한테는 비방울도 차례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부서진 비방울을 손에 받아들었다. 시인은 그 부서진 비방울속에서 지난 겨울에 찬바람에 씻기던 잣나무의 노래소리를 꼼꼼히 검색한다. 절창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왜냐하면 돌발적이고 기습적인 이미지를 떠올린것이다. 한사물에서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사물을 떠올리는것이 시가 아닌가. 부서진 비방울이 잣나무의 노래로 둔갑된다는것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근본적으로 상상할수 없는것이다. 시는 직선적으로 씌여지는것이 아니라 직선을 떠나서 씌여지는것으로서 탈직선화라고 말할수 있다. 진짜 . (아리스토 텔레스 [시학] 127페지)라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말이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창출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련도 이채롭다. 우의 내용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새로운 이미지로 표현된다.   하늘가로 비껴가는 새 그 부리에 화석 한점 물려있다.   물과도, 주추돌에서 깨여지는 비와도, 잣나무노래와도 관계없는 하늘로 비껴가는 새, 부리에 화석 한점이 물려있는새, 와>의 출현은 불연속이며 원인과 결과와는 관계없는것이다.  새는 시인이 추구하는 상징물로서 시라고 말해도 되고 희망이라고 말해도 된다. 그런데 은 또 무엇인가? 화석이란 단단한 돌이다. 이 돌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음미의 가치가 있는 사물로서 각자나름의 판단을 허용하는 화석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화석은 의미를 직설적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의미를 감춤이며 에둘러 말하는것으로써 1500년전에 류협이 >에서 말하듯이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사물에 의탁하고있다고 하겠다. 한춘시인의 이 시는 그저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말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기습적으로 돌발적으로 아무런 련계도 없이 집성되고 있다. 이 시의 구성은 재래의 현대시구성을 넘어서는 신선한 구성이다. 이 시는 조지p 란도가 말하는 하이퍼텍스트에 속하는 시라고 할수 있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리좀이며 다양체이다.  련과 련사이의 이미지들은 물론 2련의 과 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상호련결인것이 아니라 분리이며 성질이 다른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되여있다고 하겠다. 이미지들은 서로 인과관계인것이 아니라 대등한 독립성을 갖고있다고 하겠다. 물론 한춘시인은 하이퍼시에 대한 리해가 있었던 시인이였다고 할수는 없다. 하지만 에는 이런 시들이 여러수 있다.    3.언어의 특성   까치는 나무가지를 물어다 집을 만들고 한춘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서 를 만들었다. 에는 여러가지 언어표현수법이 있겠으나 필자는 아래와 같은 두가지 방면으로 살펴보고저한다.   1)    낯선 언어 만들기   낯설기란 말은 지난 세기20-30년대에 쏘련의 포르마리즘에서 나온 말이다. 낯설기란 언어자체의 의미 그대로 보지 않았던 생소한, 처음으로 보는 언어를 말하는것이다. 한춘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여 낯설기를 하고있다.  (3쪽), (17쪽), (20쪽),(24쪽) (28쪽)…. 앞머리만 대충 훑어보아도 이렇게 여러가지가 있다. 일상적으로 말하면 모두 말이 되는 말인것이 아니라 말이 안되는 말이다. 이런 언어들의 조합을 폭력적조합 혹은 강압적조합이라고 할수 있다. 시가 이렇게 말을 조작할수 있는것은 시어는 언어의 기능에 기대여 조합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기능이란 우리 조선어로 말할 때 자음과 모음이 자유로이 어울려 글자를 만들고 단어를 만드는 일면도 있지만 또 중요한것은 시속의 사물은 상상속의 사물이지 현실속의 사물이 아니기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어는 영상을 떠올릴뿐이지 어느한 사물이 되는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사물과 떨어져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사물과 언어는 별개의 존재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언어의 실질이며 본능이다. 언어가 일상적인 언어조합의 궤도를 벗어나서 생산될 때야라만이 시적언어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작 83쪽)   2)    언어의 몽롱성;   는 몽롱한 언어들이 이곳저곳에 많이도 산재하여 있다. 필자가 좋다고 말한  의 제1련을 아래에 적어본다.   지난 모든 일들을 작두날로 다 잘라버리고 모든 소란스런 말들을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리고 모든  내던진 돌맹이를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이고   3개의 짝이 있는데 현실과 초월이 결합된 시행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에다 이런 의문들을 제기할수 있다. 작두날이란 무엇을 지칭하며 작두날로 잘라버렸다는 일들은 어떤 일들인가? 만뢰구적으로 다 밀어버렸다는 소란스런 말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흡수기로 다 거둬들인 돌맹이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디지털이 돌맹이를 거둬들일수 있기나 하는가…제2련도 1년처럼 모를 말들이다.   그래도 적들은 쳐들어온다 모든 벽을 다 허물고 모든 괴물을 다 격파하고 모든 기관을 다 폭파가하고 손녀가 가지고 놀던 사기인형은 다 깨지고   여기서 말하는 적들이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벽, 괴물, 기관, 사기인형이란 무엇을 표현한것인가… 적들이란 잠이 들지 못하게 하는 엉킨 삼오리뭉치같은 잡념이고, 벽이요 괴물이요 기관이요 사기인형이요 하는것들은 잠을 잘 오게 하는 환경물인것 같다.  필자도 이런 언어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는 모른다. 시는 잠이 오지 않아서 뒤척거리는 심리를 쓰고있다. 잠은 밥과 함께 인간의 일상을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욕망이다.시인은 잠이라는 욕망을 달성하지 못하는 애모쁨을 쓰고있는것이다. 최저의 욕망도 실현하기 어렵게 살아가는것이 인간이 아닐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는 리해되지 않아도 통한다는 특성이 있다. 시인의 상상을 밑바닥까지 알이는 아무도 없을것이다. 시인은 왜 맞지도 않는 이런 말,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런 말을 하는가? 바로 여기에 시의 본색이 있는것이다. 시는 몽롱해야 하는것이다. 몽롱한것은 아름다움이며 예술이다. 흘러가는 내물처럼 밑바닥 모래알이 다보이는 시가 아니라 강이깊숙하여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 그래서 시는 음미하게 된다. 시는 의사를 전달하는 산문이 아니라 시인의 창조한 새로운 세계를 물질로 즉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하는것이다. 그래서 시는 리성을 중시하는것이 아니라 감각을 중시하게 된다. 종래로 리해하기 어려운 시들이 많았다. 밀턴과 단테는 과 을 쓴다음에 자신들의 시는 100년후에야 알아볼것이라고 하였고, 1500년전의 류협은 지인은 천년에 한번 통한다고 하였으리라. 좋은 시는 독해를 요구하지만 독해되기를 거부하는것이다. 그 거부로 인해서 시는  매혹을 잃지 않게 되며 독자나름의 해석을 요청한다. 우리가 지금도 리상의 시를 각자가 나름대로 리해하는것도 이때문이다 .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 이미지가 련속적으로 그것도 아주 빠르게 번쩍번쩍 령혼속으로 온다. 시인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고려할사이가 없이 시를 써내려가게 된다. 한수의 단시를 쓰는 시간은 10분이면 족하다. 쓴 다음 두었다가 언어를 다듬어 놓으면 된다.  1996년의 노벨문학상수상자 비스가와 쉼보르스카는  (450쪽) 라고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개혁개방초기에 한춘시인은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현대시를 위하여 몸을 던진 시인이였다. 는 그의 시창작에서 성과를 올린 작품집이라도 할수 있다. 시행이 344조 한격식이여서 딱딱한 감도 없지 않지만 는 우리 시단에서 현대시의 한 본보기로 되기에는 손색이 없다. 한춘시인이여!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2015.5.15.  
1449    토템시에 한마디 댓글:  조회:4575  추천:0  2015-09-07
  나도 에 한마디        ----김관웅교수님의 을 읽고                                     /허동식  1 도템시 개념존재의 합리성에 대하여        남영전시인의 에 다루어지는 시적대상이 도템의 범주를 초월한듯한 자연물(현상)이 존재한다 .(례를 들면 시  )  도템이란 원시씨족 또는 원시부족들이 동물이라든가 자연물을 씨족과 부족의 혈연과 관련시키고  구체적인 동물과 자연물을 씨족 또는 부족의 표식물로 간주하고 숭배하는 미신을 일컫는다면 남영전시인의 가 분명 도템만을 다룬것이 아니므로 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남영전시인의 를 대하면서 우선 도템시가 임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시인이 자아명명한  개념이 과학적인가 합리한가보다도 의 詩意가 어떠한가에 관심을 두고싶다. 라는 개념은 필경은 학술적인 개념이 아니고 詩적이고 개인적이고 随意적인 개념이므로. 라 해도 좋고 라 해도 좋다.  어떻게 명명한다 하여도, 또  명명하는 목적과도 전혀 련관이 없이 남영전시인의 는 종국에는 詩作으로 될뿐이다. 따라서 오늘날 에 도템이 아닌 자연물이 다루어졌기에  라는 개념이 론쟁을 만들고는 있지만,   개념은 學理와 거리를 둔 詩理상에서의 성립과 존재의 합리성을 보여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작품을 대함에 있어서 학리적인 연구도 있어야 하지만 문학창작의 창조적本性인 文理와 藝理에 대한 수긍도 문학연구의 출발점이 아닐가는 생각을 해본다.(산천선생님의 평론에도 비슷한 견해가 있음) 魔幻주의, 표현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등등의 문학사조 개념을 두고 볼때에도 그 명명이 과학적인 학리적인 명명이 아닌 흔적이 보인다. 그 원인은 문학예술창작의 내재본질과 관련이 되며 또 번역과정(서방어로부터 중국어로의 전환)에서의 표현습관과 표현력과도 관련이 된다고 생각된다. 남영전시인의 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적이고 학리적인 명명은 아니지만 문리적으로 藝理적으로 시리적으로는 합리성을 보이는 개념이고 또 중국어로부터 조선어로의 語境의 전환에서도 장애를 받은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2 조선족도템과 시집       조선민족의 도템을 해명하려면 시간상에서는 조선민족이 통일민족(나라통일이 아님)으로 완전형성된 시기로부터 그 형성과정을 거슬러올라야한다. 조선민족이 통일민족으로의 완전형성시대가 삼국시대라는 조선시대라는 또는 다른 설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런 설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우리 조선민족도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씨족과 부족들이 부단히 융합된 산물이 아닐수가 없다. 한다면 조선족을 구성해온 여러 씨족들과 부족들의 도템들을 조선족도템의 구성부분에 속한다고도 인정할수 있다.              또 살펴보면 어느 나라도 민족도 통일형성과정에 여러가지 도템에 대한 보존과 舍弃를 과정을 지니게 되여있다. 다시 말하면 민족응집력을 만들고 민족내의 모순을 완화시키는 수단으로서 민족내 어느 강대부족의 도템을 인위적수단으로(행정 문화 등) 전민족도템으로 모셨다던가  혹은  민족내 어느 부족과도 련관이 없는 새로운 도템을 구상해서 전민족적인 도템으로 만듬은 력사진전중에 사용되는 상투수단이다. 중국의 도템史도   바로 수많은 도템들이 龍도템으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단군신화도 통일민족완성이라는 리념을 앞두었다는 흔적이 보인다고 나는 억측해본다.   문헌자료결핍과 도템연구부족 등 원인으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과도 마찬가지로 우리도 조선족도템에 대한 진실한(고증을 거친) 결론을 내리기는 아주 어렵다.  인류에게 있어서 先史시대란 지금도 謎의 존재이고 도템이란 몽롱한 불확정적인 과거이다. 이런 조건하에서 남영전의 를 조선족도템을 다룬 시가 아니다 론함은 남영전시인이 자신의 에 다루어진 들이 조선족도템들이라고 언설함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불확실한 一言일뿐이다. 남영전시인의 로 편성된 시집 은 시적대상의 단조로움과 詩意의 편애성으로 손상을 받았다는 평의(羅侃平 평)를 지닌 시집이다. 만일 남영전시인더러 확정된 조선족도템만 시적대상으로 하라 한다면 (물론 그런 요구는 읽어보지 못했다)  불정당한 요구일것이며 시인의 창작자유와 창작활보를 제한한다는 의심을 받을 언행일지도 모른다. 남영전시인이 조선족을  대표한 시인이라 할지라도 필경은 은 시인 개인의 시집이고 그 다음에야 조선족시인의 시집임을 알아야한다. 3  민족정체성과  민족정체성에 대한 론의가 계속되고 있다.  혈연을 크게 여기는 유학의식이 에 열중하는 주관원인이라고 한다면 조선반도의 장기적인 분렬상태와 우리와 한국과의 거래급증중에 발생하는 충돌과 위기 그리고 중국조선족이 중국에서의 劣勢에로의 전환 등등이 사회객관원인으로 보여진다. 감정적으로는 조선반도인들이 반겨주든 싫어하든 우리는 조선반도와 혈연을 끊어버리는게 싫다 . 또 그들과 對等하게 지내고 싶다.  그리고 세계 어디 있는 배달의 족속과도 마찬가지이다 .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중국에서 버젓하게 살고싶다. 흩어지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인구감소도 없이 나날이 번창하게 살고싶다. 주관원인과 객관원인의 교차작용으로 하여 또  리상과 현실사이의 격차는 조선족사회더러 민족정체성에 대한 반성을 거듭 진행하게 한다. 언론도 좋고 지성인들도 좋고 민족정체성에 론의를 모음은 민족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자각성을 높이는데 훌륭한 작용을 하여 왔다. 헌데 와 민족정체성이 어떤 련관존재일가? 나는  42수의 가 민족정체성을 혼동하게 한다는 설은 성립불가능이라 생각한다. 민족정체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로서, 우리의 인식수준하에서 불투명한 부분도 존재하지만은 누구의 생각이나 작품에 의하여 변하는 사물은 아니다. 민족정체성이란 기나긴 력사의 흐름으로 형성된 이다. 나는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배달족속들 모두가 우리의 민족정체성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인식수준의 차이를 보일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共認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혈연적인 문화적인 력사적인 정체성).  또한 주위에 사는 다른 민족들도 우리 배달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부인하려는 부인하는 사실은 없는듯하다. 우리의 민족정체성이 자아인지와 타인인지를 받는 객관존재인 사실앞에서  가 어떤 시일지라도 또 그 가 여차여차 할지라도 배달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추호의 영향을 줄수가 없음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의 사회효력에 대한 과대억측은 나로서는 杞人忧天이라 생각된다. 남영전시인의 도템에 대한 연구와 詩作은 조선족정체성의 기나긴 형성과정에 대한  시적인 표현이고  서술이며 그것을 통하여 각 형제민족과 여러 나라의 화목과 공동번영을 기원했다는게 근본특징이다. 김관웅교수의 조선족도템에 대한 주장과 민족정체성에 대한 주장은 조선족공동도템과 민족정체성형성의 종극적인 결과에 착안점을 둔 주장이고 해석이다. 그러므로 두분의 주장은 다만 민족력사과정과 민족력사결과에, 문화진행과정과 문화진행결과에  부동한 착안점을 두었다는 구별점을 지니게 된다.  4  나의 작은 항의  나도 자아비애에 걸린 사람인것 같다. 그래서 현재 나를 포함한 중국조선족들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하여 을 보인다 생각된다. 조금은 먹고 입는 흉내는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현재가 비상시기가 아닐수가 없다. 이런 비상시기에 조성일회장님 김관웅교수님 남영전시인 등 지성인들이 민족을 위한 몸부림치는 모습이 아주 돋보인다. 특별히 문학계 분들은 이 점을 잘 알리라 믿는다. 비상시기에 쟁론은 불가피적이다. 하지만 쟁론방식의 선택이 중요하다.  라든가 는 개인이 운영하는 싸이트이기는 하지만 현재는 거의 공용자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 화합이라는 낱말의 거력을 알고 있는 한 , 나는 누구든지 쟁론을 편격적이고 인격침입적이고 사인적인 면으로 돌리는데 견결한 항의를 표한다. ==========================   詩의 도템化와 도템의 詩化(역고)               罗侃平  남영전의 도템시는 좋은 문학적가치와 문학사적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수민족시단에 아름다운 시작을가첨하였고 중국시단에 하나의 시가형식을 주입하였다. 남씨의 도템시 창작은 민족령혼을 구현하는 개인적인 행위이며 또한 시적 이미지가 넘치는 독창적인 광적인 과감한 행위이다. 하기에 그의 시작들에 대한연구도 여러가지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 우리는 남씨의 도템시를 대함에 있어서 도템과 시라는 명제를 갈라놓아서는 아니된다. 도템시란 시의 도템화이고 도템의 詩化이며 두 명제의 중겹적인 융합물이다. 우선 도템시란 전통적인 철리시(혹은 玄言시)와 詠物시(혹은事物시) 와는 다르다.도템시란 개념의 창출은 시인의 개인적인 命名행위에 속하며 아직은 집체의식에 의한 귀납적인 과학적인 개념에 속하지 않는다. 때문에 도템시는 기존하는 定中구조의 개념이 아니다. 철리시와 詠物시라는 개념은 쉽게 리해할수는 있지만 그 개념에 대한 언어적인 해석은 무의미한 언어함정일수도 있다. 하지만 도템시라는 새로운 개념은 시인본인이 명명한 독특한 조건하에서 도템시라는 개념에 대한 언어적인 해석은 실존의 의미가 있다. 도템시에 있어서 도템이라는 개념이 시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배를 할수는 없다. 도템시라는 개념창조는 도템이라는 개념창조와 마찬가지로 随意적인개념창조이다. 도템이란 개념의 원초적인 내용은 인류의 친속관계 또는 개인과 씨족의 표징이지 인류의보호신이 아닌것처럼.(维 斯特劳斯는 라는 저서에서 도템과 보호신에 대한 오해적인 혼동에 대하여 상세한 분석서술을 하였다.) 도템시도 시인이 命名한 개념으로서 시인의 원초적인 본의가있을것이다. 도템시라 하여도 도템의 문화이미지를 완전 내포한 시라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다. 비록 시인이 도템문화라는 전제하에 시창작을 실천한 주관적인 의도가 분명하지만 배태된 시작품은 시인의 창작목적과 완연일치를 이루었다고는 판단하기도 힘든 일이다. 도템시란 시창작으로부터 출발한 개념이며 종국적인 개념이 아니다. 때문에 시의 도템화와 도템의 詩化라는 개념을 도입하여도 어느 의미에서는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도템시와 史詩는 부동한 개념이다. 사시는 민족과 력사를 대변하는 본질적인 특징을 지니고있으며 시의 형식으로 력사를 서술한다. 사시의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상대분리는 사시를 연구함에 있어서 력사적인 시각에서 연구할수도 있고 詩학의 시각에서도 연구할수 있다. 사시를 연구하는 세번째 방법은 시속의 력사와 력사속의 시를 유기적인 결합시키는 방법이다. 이 세번째 방법이 아주 주요하지만은 필경은 사시를 연구하는 세가지 방법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도템시는 사시와 다르다. 도템시를 연구함에 있어서 도템만을 연구할수도 없고 시만을 연구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도템시는 도템에 대한 기록적인 설명문이 아니며 도템의 력사와 문화특징 등에 대하여 언술할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도템이라는 개념이 학자 朗格으로부터 시작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인 함의가 부단히 가첨되고 있는 전제하에서남영전시인이 도템시에 사용한 도템개념은 원초적인 도템개념과 거리를 둔 몽롱한 개념이며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개념이므로 상술한 분리연구법을 사용할수 없다. 시인은 개인적인 립장에서 도템문화의 의미에대한 추측과 추구를 하였을뿐이다. 이런 주관목적의식을 전제로 도템시에 존재하는 도템의 객곽적인 함의를 연구한다면 오독이 될수도 있다. 그러므로 도템시를 대함에 있어서 도템과 시를 분리하고 단 도템이라는 시각에서 도템의 내용과 민족정신관계를 고안한다든가 단 시의 시각에서 도템시의 예술성과를 고안한는 일은 편면적인 해석로 될수 있다. 도템시를 대함에 있어서 반드시 시와 도템을 융합시키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도템시더러 민족정신을 완전무결하게 구현하라는것은 도템시에 대한 오독이며 도템과 민족상징을 혼동하는 행위이다. 남씨는 나름대로 도템의 본질을 알고 있으며 친속형제와 보호자의 구별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도템시는 민족성의 일부분을 표현하는 시일뿐 민족의 전부적인 代言일수는 없다. 이러한시적표현은 남영전의 방식이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론리가 아니다. 도템이란 추상적인 개념이고 시란언어의 개념이다. 도템시에 있어서 도템과 시라는 개념은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두가 일종 표현화신호이다. 때문에 도템시를 연구함에 있어서 시의 도템화와 도템의 시화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시의 도템화든지 도템의 시화이든지 모두가 도템시의 표현화신호에 대한두가지 劃정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개념이다. 시의 도템화와 도템의 시화라는 개념이 공구적인 사용적인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생각한다면 도템시에대한 지속된 해석을 할수 있다. 남씨의 도템시는 기묘한 조합물이다. 한방면으로는 자연과 人群과 개인의3조합이다. 도템이란 자연군체와 인간군체가 상호련관된 개념으로서 사람과 자연의 통일이다. 시의 개념은 개인적인 서술특징를 지니고 있지만은 시인이 다루는 문화배경을 초월하지는 못한다. 때문에 도템시는 개인적인 시각에서 자연과 인군을 결합시키는 방법으로서 詩작에는 개인적인 감상과 인群의 객관실존상태와의 모순이 도출된다. 따라서 시인으로서 群적인 민족적인 도템시를 창작한다는 행위가 아주 어렵고 흥미있는 현상으로 된다. 다른 한 방면으로 볼 때 도템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래의 기묘한 3조합이다. 도템은 인류의 요원한 과거에서 내려온 원시야성과 자유성을 지닌 사물로서 현재의 시인에 의하여 시적표현을 이루면서 현실적인 가치와 후세를 격려하는 미래지향성을 표현하는 시의 수단과 내용으로 된다. 그리하여 도템시는 원초적인 문화근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정신세계의 탈출과 령혼의 승화를 노린 시로 전변한다.. 또 한 방면으로부터 보면 도템시는 내용과 형식 그리고 가치의 기묘한 3조합이다. 시와 도템이 유기적인 조합을 이루는 과정에 내용과 형식 그리고 그 시적가치가 3조합을 이루었으며 매 한수의 시마다 새로운 을 구축하였다. 일개인으로서 하나의 민족 지어는 인류의 품위를 표현하려고 할 때, 그 용기와 결심이 크면 클수록 실천중에 만나는 저애력과 장애가 크게 된다. 비록 시인이 자신이 소속된 민족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하여도자신이 소속된 민족문화를 언술하려면 개인적인 시야의 국한성을 받게 된다. 때문에 민족문화성에 대한구현도 주관적인 색채를 다소 지니게 된다. 남영전 시인의 도템시도 표현상에서 일정한 제한을 받고 있으며 민족특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민족특성에만 머무른 제한성이 있다. 이러한 국한성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이며 매력적인 결과이다. 개인적인 시인적인 시각으로 민족과 인류의 과거 현재 그리고 장래를 언술한다는 작업은 상술한 국한성의 조건하에서 여러가지 변증통일의 모순체를 이룬다.         1  시적 이미지가 개인의식과 집체의식의 모순과 통일속에 구현된다. 도템이란 옛날 씨족의 상징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현대인의 리지적인 사유를 도입하여 그 내용과 문화성에 대하여 해석한다는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도템문화에 대한 추측과 해석이 도템문화의 원초적인 내용과 거리를 두었다 하더라도 필경은 공인하는 대체적인통일적인 집체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도템문화에 대한 인지를 집체의식이라 본다면 그 집단적인 지혜가 우리에게 도템시를 연구하는 공중화원식의 문화장소를 마련해준다. 이러한 공중화원식의 집체의식을 전제로 우리는 잠시나마 도템을 민족성격과 관련된 사물로 인정할수도 있다. 남씨의 도템시는집체의식이 공인하는 도템내용과 도템형식을 선택하였다.례를 들면 산왕인 호랑이, 속력의 상징인 백마,백수지왕인 사자, 인내의 상징인 황소, 도고의 상징인 매, 피를 쏟아 진정을 바치는 상징인 뻐꾸기 등이다.남씨가 도템형상을 리용하여 민족품위를 표현하는 중에 부득불 집체의식이 공인하는 시적意象을 선택하였지만 따라서 詩作에 로출될수 있는 詩意의 로쇠와 단조로움을 피면하기 위하여 새로운 돌파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돌파의식은 시의 언어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미소하게 나타나는 돌파가 나중에는 시어의생소화가 시적대상과 시意象의 비약을 도래한다.  등 시작에서 볼수 있지만 집체의식이 공인하는 도템형상과 의상을 벗어나 심지어는 역설적인 구축을 통하여 새로운 시적형상과 시적예술성과를 이루었다. 도템시는 민족의 대언이 아니다. 다만 남씨식의 민족정신에 대한 구현이며 민족정신의 化身일뿐이다. 이처럼 도템시는 남씨의 개인적인 창작사유와집체의식이 공인하는 기존도템문화가 이루는 변증통일의 산물이다. 2 시언어가 웅대한 서술형식과 시적아름다움에 대한 추구의 변증통일속에 체현된다. 비록 시의상의 새로운 구축이 있기는 하지만 남씨는 보수적인 시인으로서 민족을 다룬 시의 언어와 형식이 거창하고 드넓고 격정적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도템시에 나타나는 언어와 서술이 웅대하고거창하며 일상생활어휘와 거리를 둔 半文半白의 특징을 지닌다. 정교로움을 만드는 기법을 버린 원시적이고 광란적인 현대식 楚辭라고 칭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시는 낭송시가 지닌 부족점을 지니게 된다. 례를 들면 도템시의 흔적을 보이는 곽말약의 도 좋은 시작이지만 詩적 審美성이 허약함을 남씨도 잘 알고 있는줄로 추측된다. 때문에 남씨는 전통적인 시언어와 형식을 많이 더나 새로운 언어풍격을 도입하여 시적 심미성 특징이 뚜렷한 구축을 하게 된다. 전통적인 심미습관으로 볼 때에는 도템시가 시적언어가 평범하고 새로운 기교가 없으며 시적여운이 결여하다는 평판을 받을수도 있겠지만 필경은 새로운 시적구축을 한 시작들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창작과정에서 웅대한 시적서술이가져오는 시적이미지의 결여성을 극복하여야 한다.
1448    토템시 - 민족문화브랜드 댓글:  조회:5463  추천:0  2015-09-07
남영전 시 세미나]《시인》《친구》《형님》 [길림신문] 위챗(微信)에 공유 ○신봉철(길림공상학원 당위서기,연구원) 오늘 《인간과 자연의 대화》―남영전 시 세미나에 참가하게 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세미나가 원만하고 성공적으로 개최되기를 충심으로 축원합니다. 남영전선생을 알게 된것은 제가 그의 시를 배독하면서부터입니다.지난세기 80년대 중기,당시 연변에서 사업하던 나는 업여애호로 각종 문예작품을 섭렵하기를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남영전의 작품을 애독하면서 그의 시와 그를 주목하게 되였습니다. 1995년,제가 성으로 전근해 온후 친구의 소개로 남영전선생을 만나게 되였고 후에 그의 초청에 의해 선후로 《길림신문》발전연구회 회장과 《장백산》발전연구회 회장을 맡게 되였습니다.그와의 교제차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의 능력수준과 인품에 대해 더욱 전면적이고 계통적으로 료해할수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의 친구와 형제로서 3가지를 얘기하고저 합니다. 첫째, 남영전선생은 탁월한 성과를 이룬 시인입니다. 그는 지난세기 70년대초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여러 부의 시집과 번역저서들을 출판했는바 여러 차례나 전국소수민족문학 창작상과 연구상을 받았고 2010년에는 중국당대10대걸출민족시인에 입선됐으며 중국당대걸출민족시인시가상을 수여받았습니다.그외에도 그는 국제시인대상을 수여받았고 그의 이름은 미국과 영국의 《국제명인사전》 등 국내외 40여부의 사전에 기입되였습니다. 남영전선생은 시인으로서 개성이 있는 시가창작을 탐색해왔습니다.지난세기 80년대 중기부터 그는 시가를 캐리어로 삼고 토템을 제재로 하여 개인감정과 민족감정을 융합시켜 원시선조의 토템사유와 현대인의 심미문화사유를 융합시켜 자신의 자연과 인성과 세계본질에 대한 사고를 시에 융합시켜 토템시의 선례를 개척했습니다.그는 진정으로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융합시킨 시인이고 현실주의서법을 갖춘 시인이며 소수민족시인중에서 한어습작으로 돌출한 성과를 이룬 시인입니다. 남영전선생은 시인으로서 매력적인 독특한 현상을 갖추었습니다.그의 토템시가 발표된후 국내시단의 주목을 받았는바 그의 토템시를 둘러싸고 여러번의 세미나를 조직했고 연구론문집,토템시흔상분석,전문저서출판이 줄을 이었습니다.《남영전토템시연구》는 이미 모 대학교의 전교 공선과목으로 되여 정식으로 수업하고있으며 열렬한 환영을 받고있습니다.그의 시들은 국외의 시간행물에도 여러건 게재되여 국제시단의 주목을 받고있습니다.보시다싶이 남영전선생의 토템시 및 시학리론은 이미 일종의 문화를 형성하여 국내외 해당 전문가,학자 및 대학교의 주목을 받고 연구를 불러일으키고있습니다. 남영전선생은 시인으로서 창의가 짙은 문화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그는 우리 나라 당대 시가창작을 풍부히 하기 위해 토템시라는 일종의 새로운 시가문본을 건립하였을뿐만아니라 당대인이 인간과 자연,인간과 세계,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인식하며 공동으로 인생생존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문화적가치를 창조하였습니다. 그의 토템시는 우리 성에 하나뿐인 독특한 하나의 부호이고 하나의 상징이며 선명한 하이라이트로서 우리는 충분한 인식과 고도로 되는 중시를 돌려야 합니다. 둘째, 남영전선생은 믿음직한 친구입니다.그의 신변에는 수많은 친구가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한평생을 두고 사귀여도 모자란다는 느낌이 드는데 남영전선생이 바로 그런 친구입니다. 남영전선생은 친구로서 흉금이 넓습니다.해양은 륙지보다 넓고 하늘은 해양보다 넓으며 사람의 마음은 하늘보다 더 넓고 큽니다.남영전선생은 넓은 흉금을 가졌기에 락관적이고 진취적인 인생태도를 형성할수 있었고 시야가 넓고 사로가 넓은 창작특색을 형성할수 있었으며 부단히 탐색발견하고 부단히 사고전진할수 있었습니다.그는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다.민족은 문화의 구분이지 혈통의 구분이 아니다》는 론술을 제기했는데 이는 민족개념에 대한 심각한 해석이며 민족개념에 대한 표달을 새로운 경지에로 이끌었는바 매우 식견이 있고 가치가 있는것입니다. 남영전선생은 친구로서 매우 풍도가 있습니다.그와 다년간의 교제중에서 리지적이고 침착하며 사업과 생활속의 크고작은 일들을 자연스럽게 대처하는 그를 보면서 심각한 인상을 받았습니다.《길림신문》발전연구회 회장과 《장백산》발전연구회 회장으로서 나는 그와 함께 일련의 문학과 사회공익 활동을 조직하여 신문사와 잡지사를 위해 선후로 100여만원의 자금곤난문제를 해결해주어 경영난관을 넘기게 했습니다. 남영전선생은 친구로서 은혜에 감사히 생각하고 포용할줄 아는 사람입니다.은혜에 감사히 생각하는것은 큰 학문이고 포용은 일종의 큰 지혜입니다.그는 큰 학문을 장악하였고 큰 지혜를 갖춘 사람입니다.그는 친구로서 할수 있는 일들을 다 해냈습니다. 셋째, 남영전선생은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형님입니다. 나이로 보면 그는 저보다 8살 년상으로서 나의 형님이고 인생경력으로 봐도 그는 나의 형님입니다. 남영전선생은 형님으로서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학식을 구비하였습니다.그의 토템시 창작과 연구에서의 지명도와 영향력은 조작해낸것이 아니라 20여년간 창작에 몰두하고 연구해낸 진짜 솜씨,진짜 수준,진짜 실력이며 그의 시작품들은 국내외 전문가,학자의 주목과 연구토론을 불러일으켰는바 이는 그의 20여년간의 창작과 연구에 대한 제일 좋은 보답입니다.《글의 풍격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남영전선생과 오래 사귈수록 그의 인격매력과 풍부한 학식을 감수할수 있습니다. 남영전선생은 형님으로서 겸허하고 사람을 정중히 대합니다.미국 세계문화예술원의 영예문학박사이고 국무원의 특수수당금대우를 받고있으며 길림성의 고급전문가로서 일찍 길림신문사와 장백산잡지사의 사장 겸 총편집을 담임한적 있는 그는 명망높고 지체가 높다고 할수 있습니다.하지만 종래로 떠벌리지 않으며 뽐내지 않고 본색으로 사람을 대하며 시작품으로 이름을 날려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있습니다. 남영전선생은 형님으로서 언제나 진솔하고 성심성의를 다합니다.인지상식은 귀재상지요.인지상지는 귀재지심((人之相识,贵在相知。人之相识,贵在知心。)이라고 했습니다.영전형님과 나는 절친한 지기라고 할수 있습니다.장기간의 교제에서 우정에 대한 리해와 우의에 대해 소중히 여기는 영전형님의 인품을 알고있는 나로서는 영전형님과의 우정과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면서 오래동안 유지해나가고싶습니다. 시인이고 친구이며 형님인 남영전선생이 토템시 창작과 연구에서 더욱 큰 성과를 따내고 문단의 《상록수》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남영전시인이 장춘공업대학에서 자신의 토템시에 대해 소개하고있다 우리 나라 저명한 조선족시인 남영전의 토템시가 대학교정에서 화제로 되여 대학생들의 인기를 끌고있다. 제19번째 《세계독서의 날(4월 23일)》을 맞으면서《명작감상, 명인과의 대화-장춘공업대학남영전작품독서회》가 4월 20일에 길림성전민열독협회, 길림성작가협회의 주최로 장춘공업대학 강당에서 개최되였다. 길림성정협 전임부주석이며 길림성전민열독협회 조가치(趙家治)회장, 길림성작가협회, 장춘공업대학의 해당 지도자들과 대학생 도합 300여명이 독서회에 참가했다. 남영전시인과의 교류는 대학생들의 비전,인생관 등 여러 방면에 큰 계발을 주었다 독서회에서 남영전시인은 토템문화에 대한 감오(感悟)와 토템시의 시학리념, 토템시의 추구에 대해 자신의 문학관을 이야기했다.《 선조들이 자신에 대한 이런 물음은 인간과 동물의 근본구별이기도 하다》며《선조들의 이런 물음이 있었기에 인류사회에 토템숭배가 생겼고 토템숭배가 있기에 노래, 춤, 그림이 나타났고 사람들은 성씨가 있게 되였으며 인류는 문화가 있게 되였다.》 《토템관념의 핵심관념은 천인합일(天人合一), 이 사상은 선조의 세계관이였고 그들의 행위준칙이였다. 중국은 선조들의 이러한 전통문화가 대를 이었기에 조대(朝代)가 어떻게 바뀌여도 세계 고대 4대 문명국중 유독 중국만이 지금까지 세계의 동방에 우뚝 서있다. 이것이 바로 전통문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독서회에서 조가치회장이《남영전토템시의 문화가치》, 길림성당위 선전부 문예처 처장 주강(周剛)이《남영전토템시, 뿌리찾기와 비전에 대한 사고》, 길림성작가협회 부주석 장순부(張順富)가《남영전과 그의 토템시》란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여 대학생들이 남영전토템시를 리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학자와 전문가들은《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원시토템과 현대의식을 창조적으로 결합했고 그속에 자신의 신선한 경험과 깨달음을 부여하여 새로운 시창작으로 문화시야를 넓혔다》, 《그의 토템시집 에서 시인은 자신의 탐색의 길을 대만의 원주민 그리고 북아메리카 인디안인의 토템문화까지 확장하면서 시가로 광활한 인류생존의 문화공간을 만들어갔다》고 평했다. 현장에서 많은 대학생들이 앞다투어 남영전토템시를 읽은 감수, 깨달음 등과 함께 그동안 궁금했던 물음을 제기하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자신이 즐기는 남영전토템시를 랑송하면서 문학적감성을 한껏 북돋았다. 대학생들은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를 통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관계의 깨달음으로 우리들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말했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일찍 국내 기타 대학교에서도 주목받았었다 장춘공업대학에 앞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는 벌써 국내 대학생, 연구생들의 흥취와 주목을 받았다. 2003년이래 중남민족대학, 수도사범대학, 장춘사범대학 등 8개 고등학교에서 선후로 《남연전토템시세미나》를 개최했고 2009년 절강호주사범학원에서《남영전토템시연구》공동학과를 개설했으며 2011년에는 남영전토템시내용이 대학입시모의작문시험제목으로도 선정되였다. 또한 남영전토템시연구는 국내 부분적 대학의 석사생, 박사생들의 졸업론문 제목으로도 선정, 지금까지 300여편의 토템시 관련 론문이 나왔다. 남영전시인은 1971년 문단에 데뷔한후《원융》등 16여부의 시집을 출판했고 3차례 국가급문학상인《준마상》등 각종 문학상을 50여차 수상했다. 1986년부터 그는 계렬토템시창작으로 《토템시 명명(命名)자, 실천자》,중국문학의 새로운 쟝르를 개척했다는 평판과 함께 목전 국내외문학계에서 큰 관심과 주목을 받고있다. 남영전시인이 독서회에 참석한 해당 지도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 길림시조선족들이 남영전시인을 환영하고있다/신승우  남영전토템시를 둘러싸고 펼쳐진 신선한 토템문화제가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조선족사회문화발전의 화제로 되고있다. 9일,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남영전토템시를 둘러싸고 민족복장 전시, 시랑송, 노래, 무용, 학술세미나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이날 토템문화제 오전행사는 장춘대표팀 한복전시로 막을 펼쳤다. 이어 남영전토템시《희망과 꿈》 등 시를 시랑송으로 무대에 올려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남영전토템시《백마》는 박력감있는 노래로 변신해 관람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남영전토템시 《달》,《학》은 우아한 무용으로 관람자들한테 다가가 보는이들의 눈, 귀, 마음을 잡았다. 또한 남영전토템시는 서예가, 화가 등의 붓끝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면서 문화제에 향연을 더했고 토템시에 대한 참석자들의 리해를 돕기도 했다. 《도라지》잡지사 리상학주필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서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신봉철회장이 개회사를, 《장백산》잡지사 리여천사장이 행사계기 및 인사말을, 중앙민족대학 오상순교수, 길림시문화국 왕영길부국장, 연변작가협회 우광훈주임이 축사를 했다. 신봉철회장은《남영전토템시는 민족문화브랜드이고 민족문학정품,민족단결의 좋은 처방》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그의 토템시는《심오한 력사성, 선명한 민족성, 깊은 포용성》등 특성을 갖고있다고 소개했다. 토템문화제 남영전토템시세미나 현장/신승우  오후 오상순교수의 사회하에 진행된 남영전토템시세미나에서 연변대학 김관웅교수가 《남영전토템시 을 통해 본 조선민족과 만-퉁구스 제 민족의 곰토템숭배의 련관성》, 길림대학 윤윤진교수가《생태주의시학으로 분석한 남영전시가》, 북경제2외국어대학 김영옥교수가 《남영전시연구-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심으로》, 문학평론가 김룡운이《-재확인과 재증명 그리고 시로 쓰는 론문》등을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했다. 론문발표에 이어 자유토론에서 세미나 참가자들은 중국 주류문단에서의 남영전토템시 위치와 역할, 남영전시인의 인격매력, 조선족문화사회발전에 대한 그의 기여 등을 두고 각자 소감을 밝혔다. 토템문화제에 참가한 북경, 연변, 길림시 등 몇몇 관람자들은《문학과 예술을 결합시킨 아이디어가 참 좋은 행사이다》,《남영전토템시 매력에 푹 빠졌다》,《민족문화를 지키고 조선족들을 한데 묶는 문화잔치이다》라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남영전시인은《토템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한층 높아졌음을 이번 행사에서 느낄수 있었다.》며 큰 감동과 고무를 받게 되였다고 했다.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 전경업관장은 이번 행사를 마감하며《이번 행사는 문학과 군중문화예술의 여러 령역을 접목시킨 시도이다.》며《앞으로도 문학인, 예술인들이 외롭지 않고 조화로운 어울림속에서 우리 문화가 한층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주최로 펼쳐진 이번 토템문화제는《도라지》잡지사,《장백산》잡지사에서 맡아했고 해당 부문 지도자, 대학교 교수, 문학인, 길림시, 장춘시 조선족 사회각계 인사 및《민족화보》, 《연변위성TV》, 《길림신문》 등 12개 북경, 동북3성 조선족 신문사, 잡지사 총 300여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다.
1447    턱수염 예술가 댓글:  조회:2273  추천:0  2015-09-07
미국 포틀랜드에 사는 조나단 달과 브라이언 델루렌티는 ‘턱수염 예술가’로 불린다. 친구 사이인 이들은 턱수염을 예술로 바꾼 사진들을 선보여 지난해부터 SNS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턱수염 예술가들은 길고 무성하게 기른 턱수염을 온갖 종류의 물건들로 장식한다. 촛불, 과일, 과자, 페인트, 꽃, 깃털 등 턱수염 아트의 재료는 너무나 다양하다. 이 남자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장난이 아닌 진짜 예술을 하고 있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는 평가다.  약 35,000명에 달하는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는 조나단 달과 브라이언 델루렌티는 지금도 계속해서 상상을 뛰어 넘는 ‘턱수염 예술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꽃과 깃털 그리고 과자와 촛불 심지어 반짝거리는 작은 전구로 장식된 턱수염에 많은 이들이 매료된 것이 사실이다. 
1446    감자 캐는 즐거운 농부 - 남영전시인 댓글:  조회:4139  추천:0  2015-09-07
남영전의 토템시가 현대인류에게 주는 계시                                                   윤한윤 ...다년간 조선족 시인 남영전의 토템시와 토템문화에 관하여 깊이 연구하고있는 중국작가협회 창작련락부 부주임 윤한윤선생과의 인터뷰---   기자: 이번 “성세민족정 작품공모”에서 유일한 시가형식으로 우수상을 수상한 남영전의 토템시 “중화형제정”에 대해 평가해주세요. 윤한윤: 남영전의 시는 문화의 시각에서 인류관과 민족관을 다시금 해석했는데 작자는 민족은 문화의 개념이지 혈통의 개념이 아니고 민족은 문화의 구별이지 혈통의 구별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우리 모두가 서로 떠날수 없는 중화형제임을 설명했다. 또한 이 시는 “오늘”이라는 개념에 착안한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야와 사색을 원고시대로 뻗쳐 사람들의 그 시대에 대한 단체기억(集体记忆)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어떠한 민족에 속하든 어떠한 나라에 속하든 근본적으로 모두 ‘한가정”이라고 했다. 이는 국내 각 민족이 성심성의로 단결하고 세계 각 민족지간에 서로 단결하며 손을 맞잡고 인류의 생존위기에 대처함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적가치와 현실적의의를 가지고있다. 기자: 남영전시인은 1986년부터 원시토템문화를 고심히 연구해오면서 토템시창작에 전념하여 52수의 토템시를 창출시켰고 국내외의 광범한 각광을 받고있다. 남영전의 토템시는 이미 중국시단에서 독특한 “남영전현상”을 형성했다고 볼수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윤한윤: 토템은 인류가 원시사회에 처해있을 당시의 본 씨족과 혈연관계를 가지고있는 동물 혹은 자연물로서 사람들은 토템을 본 씨족의 표지로 했다. 인류사회의 진화발전에 따라 현대사회에 들어선후 토템은 점차적으로 신비한 색채를 가셨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서 토템은 의연히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진 인장이라고 할수 있다. 토템은 부동한 민족의 마음속에서 원고씨족의 독특한 문화유전자를 지속하고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민족, 력사, 문화, 종교의 한개 상징으로 되고있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 대한 다년간의 전념과 창작은 절대로 기발한 생각과 근거없는 상상에서 온것이 아닌바 토템에 대한 심각한 인식과 해독이라고 볼수 있다. 알다싶이 남영전시인은 십여년간 52수의 토템시를 창작해냈다. 우리가 그의 토템시를 자세히 읽어본다면 그가 토템시에서 찾고있는 핵심은 무엇이고 왜 토템을 자신의 시의 형상으로 선택했는지를 알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의 생존환경에 대한 시인 자신의 초조한 마음과 련민의 정, 기대의 심경이라고 볼수 있다. 기자: 토템문화는 현대인류에 어떤 계시 어떤 영향을 준다고 보는가 윤한윤: 현대사회에 들어선후 과학기술의 신속한 발전으로 하여 현대문명은 근본상에서 인류의 생존환경을 개변시켰고 인류의 끊임없는 탐욕과 횡령은 억만년이 흘러야 형성될수 있는 자연환경과 각종 자원을 소비하고있다. 시인 남영전은 인류토템의 원시적화면인 달, 흙, 물, 불, 룡, 학, 곰, 물고기, 독수리 등을 토템시에 부각시켜 인류원고의 발자취와 안목으로 인류가 생존해온 청순했던 세계를 돌이켜보았고 토템시에서 묘사한 토템세계에서는 인류를 위해 심령을 깨울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과 머나먼 조화사회로 돌아갈수 있는 동경을 제공해줌과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부터 종종의 유감과 “오늘날 우리의 생활은 무엇을 잃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이런 의문은 우리가 현대사회에 들어선후 시종 인류자신의 생존발전을 괴롭히는 “모제(母题)”이다. 시인 남영전은 철학적사상과 우화식 시구로 우리들에게 원고토템의 정경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오늘날 어리석은 사람들을 일깨울수 있는 웨침임이 틀림없다. 그의 토템시에서 우리는 만물생령이 상호 의존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수 있을뿐만아니라 또한 토템 본신의 령혼적인 원 모습을 볼수가 있는바 오래전 인류생명의 “수호신”이였던 토템으로 인류가 생명에 대한 돌이킴과 사색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남영전 략력 남영전 시인 남영전, 조선족, 1948년 출생. 미국 세계문화예술학원 영예문학박사,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위원회 위원, 중국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회 부회장, 세계시인대회 종신회원, 영국 국제전기협회 종신회원,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연구원, 길림대학 문학원, 동북사범대학 상학원, 연변대학 사범학원 겸직교수, 중국조선족발전위원회 회장. 1971년부터 시,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평론, 민간문학, 번역 등 작품 발표. 시집 《상사집》,《푸른 꿈》,《산혼》,《신단수》,《뻐꾹새》,《원융》,《꽃이 없는 이 봄날에》 등 15부, 수필집 《잊지 못할 사람들》,《존경스런 사람들》 등 3부, 번역으로 《당송전기전》,《봉신방》,《파금단편소설》 등 3부. 전국 소수민족문학창작상 3차, 전국 당대소수민족문학연구상 4차,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상 3차, 길림성소수민족문학상 3차, 길림성정부 최고문예상 장백산문예상 2차 등 도합 44차의 문학상 수상. 국무원 특수수당금 향수. 1986년이래 창작한 계렬토템시는 날이 갈수록 국내외 문학예술계와 학술계의 관심을 받아 국내외에서 이미 100여편 론문이 지상에 발표되였음. 국외에서 한국 《세계인교향시》 계관시인작품상 등 4차 문학상과 영국 켐브리지국제명인전기센터, 미국 세계명인전기센터 4매 메달 수상. 영국, 미국의 《세계명시인백과사전》, 《국제명인록》, 《국제명인 500명사전》, 《제일 500인사전》 등 40여부 사전에 등재.     / 인민넷 김홍화기자 ======================================================= 감자 캐는 즐거운 농부 근간에 남영전선생을 만나본이들은 대개 이렇게들 인사말을 한다고 한다. 《얼굴이 참 좋아보입니다.》 버릇처럼 활짝 웃음으로 인사를 받는 남영전선생의 얼굴은 편안하게 피여있고 어린애처럼 해맑다. 《이제는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여 내가 하고싶은 시간에 하고싶은 일을 하는 이 자유가 이렇게 좋은지 진맛을 알게 된거요.》 잔뜩 즐거운 표정이다. 재직시에는 시간에 쫓기고 얽매이고 문득문득 창작사유의 절주가 깨지고… 지금은 책을 아무때건 아무때까지나 읽고 쓰고싶을 때 쓸수 있는 이 자유가 너무너무 좋다고 남영전선생은 말한다. 남영전선생은 신이 난 어린애처럼 단일문으로 줄줄 말타래를 푼다. 퇴직후 3년간에 토템시를 50여수나 썼다. 재직시인 1986년부터 2009년까지 23년간에 쓴 토템시가 도합 52수였다고 한다. 그는 《지금은 너무 쓸것이 많아 매일 책을 보고 사색을 한다. 인류학, 민족학, 민속학, 생태학… 토템문화와 관련된 학문은 깊이 팔수록 모를것이 더 많고 모를수록 더 보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를 깨우치면 시 한수가 나온다.》라고 말한다. 감자를 캐는 농부처럼 캘수록 주렁주렁 달려나오는것이다. 지금의 그의 일상은 매일 바쁘고 충실하고 재미있다. 《내 시간,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한다는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물음 하나》가 준 사명 인생의 목표를 물었더니 남영전선생의 어조는 확고했다. 《나한테는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에 대답하는것이다! 세마디로 되여있지만 결국 하나라 할수 있다.》 바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我们从哪里来)? 우리는 누구인가(我们是谁)?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我们向哪里去)?》이다. 그는 《나는 어쩌면 이 물음에 대답을 주고저 이 세상에 왔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동안 내가 걸어온 지름길이나 풍파, 고난 이 모두가 나더러 이 물음의 답을 찾게 하는 과정이 아닐가? 나는 이 물음에 대답하는 시를 내놓아야 한다!》 남영전선생은 금방 인쇄공장에서 가져온 길림출판사 출판의 시집 양본을 꺼내보였다. 토템도형을 배경으로 시집의 앞표지에는 《남영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南永前 我们从哪里来)》라고 씌여있다. 퇴직후에 새로 쓴 토템시중에서 43수를 골라 이미 발표되였던 52수의 토템시와 함께 총 95수의 시를 이 책에 수록한것이다. 이 시집을 시작으로 《물음》에 대답하는 창작이 본격 가동되였음을 알려준다. 《제1집이 나왔으니 내 인생의 3분의 1의 사명을 완성한셈이다.》 이제 올해부터 3년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답을 주게 된다. 따라서 제2집은 《우리는 누구인가(我们是谁)》가 시집 제목이다. 올해 1월 1일부터 제2집에 대한 창작을 시작했는데 벌써 시 몇수의 창작을 마쳤다. 그다음 3년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我们向哪里去?)》에 대답하는것이다. 《그때면 나는 70이 넘는다. 다 쓰고난후에도 정력이 되는 때까지 그 시들을 조명하고 다시 승화하고 만족될 때가지 소처럼 새김질할것이다. 이 사명을 완성하면 죽는다 해도 내 할 일을 하고 간다는것으로 만족이다. 시인으로서 나의 몫을 하고 가는것이다.》 중국문단에서 남영전의 토템시는 시인, 시평가(诗评家), 전문가, 학자들의 광범한 주목과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할머니와 장닭이 말하려고 한것은 구경… 남영전의 파란만장 인생과 심오한 토템시의 자초지종을 들어보노라니 문득 그의 인생과 시창작에서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이 다름아닌 그의 할머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은 한 조선족가정인 남씨가문을 말 그대로 멸족하다싶이한다. 광복때 투항하던 일본군이 세균쥐를 풀어놓아 동네에 생긴 무서운 온역때문에 남영전의 할아버지와 두 고모가 3일 안으로다 사망한다. 남영전의 아버지와 삼촌은 해방전쟁에 참가했다가 두장의 렬사증으로 돌아오면서 남씨 두 형제가 모두 희생된다. 참으로 남영전의 초년운은 불운의 련속이였다. 아버지가 참군해 전사하면서 남영전은 엄마배속에서 다섯달이 된 유복자로 되였다. 련속되는 타격에 나젊은 어머니까지 한 많은 세상을 떠나면서 남씨가문 외독자인 어린 남영전은 이 세상에서 할머니와 달랑 둘만 남게 된다. 남영전은 특별한 경력을 되새긴다. 가족을 아래우로 잃은 할머니에게서 홀로 남은 손자 남영전은 가문의 유일한 뿌리였고 실날같은 희망이였고 전부였으리라. 그런데 무심한 하늘은 유일한 남씨가문의 그 어린 싹도 뽑으려 했다. 세살쯤 되던 해 남영전은 갑자기 눈을 감은채 물 한모금 못 넘기고 《죽어》갔다. 갖은 방법끝에 할머니는 마지막 희망으로 멀리에 있는 유명한 《도사》라는 사람을 찾아가 살생부를 받아왔다. 마을 길어구에 있는 산신당에 제사상을 차리고 다리를 묶은 건장한 장닭 한마리를 올려놓고는 시켜준대로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도사는 《닭이 가면 애가 살고 닭이 죽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라고 한것이다. 하늘의 별따기지만 지푸래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할머니는 주문을 외우고 또 외우고... 과학으로는 설명할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펀펀하던 장닭이 갑자기 세마디 꾸욱 꾸욱 꾸욱 하더니 빨갛던 볏이 까맣게 변하면서 숨이 끊어졌다. 또 기적같이 앓던 애는 차차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을 뜨더니 물을 찾고 밥을 찾고, 며칠후에는 거짓말같이 일어났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늘 손자에게 들려주셨단다. 밤이면 할머니는 하늘의 별 같이 많은 옛말들을 어린 손자에게 늘 해주셨고 손님이 오면 식사를 대접하고는 밥값을 받듯이 손자에게 옛말 몇컬레씩 들려주도록 하셨다. 날마다 소학교 교실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쌀을 장만할 큰 나무짐을 메고 학교앞 산길을 내려오는 할머니의 모습은 어린 남영전의 가슴속 제일 깊은 곳에 박힌 영원한 기념비로 자리잡았다. 그런 할머니는 남영전에게 깨달음의 씨앗을 심어준 계몽스승이고 철학적사색의 길을 틔워준 도사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영전의 첫 토템이지 않았을가? 적어도 할머니는 남영전 시 성공의 태모였다. 그 할머니의 모습을 담아 지은 시 《할머니》(1984년)는 남영전의 첫 국가급상으로 1985년 제2차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시가 1등상을 수상하였고 이 시가 수록된 남영전의 첫 시집 《상사집》(相思集)이 1990년 제3차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상을 받으면서 남영전은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2011년 《인민일보》, 중국작가협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성세민족정》공모에서 남영전의 토템시 《중화민족정》은 유일한 시가형식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토템에서 그 답을 찾는 시인 전쟁의 참상은 어릴 때부터 남영전의 세계관 형성에 깊은 영향을 준다. 현시대에도 끊기지 않는 종교와 민족의 갈등, 전쟁과 테러 등 심각한 사람간의 갈등 그리고 사람과 자연간의 갈등으로 인간의 생존위기가 그 어느때보다도 심각하다. 남영전은 《이는 오늘을 살고있는 현대인들이 정신의 고향을 잃어버렸기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갈등을 해결하는 대안을 인류 공동문화의 하나인 토템에서 찾게 된다. 그는 토템문화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준다고 생각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물음은 줄곧 이어지며 이 물음에서 예로부터 토템숭배가 생긴것이다. 그때로부터 남영전은 토템 관련 서적과 신화전설을 탐독한다. 그리고 인류와 세계에 대한 사색과 탐색을 시에 담는 시도를 했다. 1986년 겨울의 어느날부터 남영전은 토템물인 달, 곰, 사슴, 백학에 이 사색을 담아 시로 써보았다. 중국시단의 친구들의 높은 찬사를 받고 다시 수정해서 첫 4편의 토템시가 완성되였다. 이 참신한 쟝르의 시 4수가 1987년 9월-10월호 《시인》( 诗人) 잡지의 톱자리에 발표되면서 중국시단에서 큰 반향을 불러온다. 《세상에 둘도 없는》토템시가 이렇게 나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18년의 각고끝에 2003년, 남영전의 42수의 토템시가 완성되여 토템시집 《원융》(圆融)이 세상에 나온다. 이 시집은 2005년 1월 길림성정부 최고상인 장백산문예상을 받은 뒤 7월에는 국가급상인 제8차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받는다. 이어 2009년 추가 완성한 10수까지 넣어 총 52수의 시로 작가출판사에서 《남영전토템시집》이 출판되면서 토템시는 명실공히 중국문단에서 립지를 선언한다. 또 토템시로 남영전은 《중국 10대 걸출 민족시인》칭호를 받으며 중국시단에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토템시는 또 남영전을 세계적인 시인으로 그 명성을 가지게 한다. 1991년 이후 토템시는 미국시인이 영문으로 번역하여 영향력있는 《세계시가》, 《현대시가》, 《대표시인》 등 영문간행물에 발표하면서 1993년 미국세계문화예술원의 문학영예박사 학위도 받았고 그의 이름은 《세계명시인백과사전》에 올랐다. 또한 토템시는 한국에서도 3차 문학상을 받는다. 토템시는 중국 주류문단과 학술계를 통해 그 무게와 함금량이 현시된다. 중국문단에서 《토템시의 명명자, 실천가》로 공인되면서 중국시단의 권위평론가인 오사경으로부터 《토템시는 중국시가발전의 일종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력사적인 평가까지 받는다. 현재까지 국내 대학들에서 토템시 관련 론문 300여편이 나오고 국내외 8개 대학과 학술단체에서 전문세미나 10차가 있었으며 남영전 토템시 연구 저서 13권이 출판되였다. 2009년 절강 호주사범학원은 《남영전토템시연구》를 공공학과로 설치해 교수했고 남영전 토템시 연구는 국내 일부 대학 석,박사 연구생의 졸업론문제목이 되였다. 2011년에는 남영전 토템시내용이 대학입시모의작문시험 제목으로도 선정되였다. 중국시단에서 《남영전현상》으로 불리우고있는 남영전토템시 및 관련 문학작품에 대한 연구와 발전에 중시를 돌려 이를 길림성 문학브랜드로 육성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있다. 나는 어디까지나 시인이다 얼마전 중국 조선족 주요언론들에서 련합으로 사상 처음으로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을 평선, 각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조선족 20명을 선정했다. 남영전은 문학계의 유일한 작가로 선정되였다. 그 선정리유는 《남영전은 시창작에서 세운 기념비적인 성과만이 아니라 중국조선족문화 발전에 대한 걸출한 기여를 한 문화거장이기때문이다》고 평심원들은 화제를 모았다. 남영전은 개혁개방이후 잡지발행인, 언론인 그리고 조선족사회활동 등 다분야에서 뛰여난 안목과 창신적인 개척능력 그리고 독특한 인격매력으로 조선족문화발전사에 확실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문학지 《장백산》은 남영전의 부호이며 상징이다. 이 잡지는 3차의 위기를 모두 전화위복의 도약판으로 만들며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력, 위기대처능력, 뛰여난 교제능력을 잘 보여준 남영전의 브랜드이다. 1982년 지구재정 압축으로 경비가 없어지는 페간위기를 매년 3만원 운영경비에 독립간행물번호까지 가진 호사로 전환시킨다. 1985년 정책조정으로 귀속단위가 상실되자 잡지를 성작가협회 소속으로 만들면서 성급간행물로 부상시킨다. 1987년 전국간행물정돈 정간명단에 들자 남영전은 《장백산》잡지를 성민위로 귀속되게 하고 성도회지에 옮겨오는 도약을 가져온다. 장백산은《길림성10대 간행물》에 선정된데 이어 2005년 국가신문출판총서에서 선정한 《국가백종중점간행물》행렬에 진입, 조선족문학지가 중국 수만종 간행물업종의 최정상 영예의 전당에 올라선다. 남영전은 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로 인생에 5년이란 언론인경력도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중국조선족언론사에 아주 귀중하고 무게있는 유산을 남긴다. 2005년 6월 길림신문사에 온지 두달만에 당보 책임자로서 정치적수준과 민족언론인으로서 민족적사명감을 시험하는 사건이 터진다. 바로 장춘공항에서 벌어진 한국귀국로무자 벌금사건이다. 장춘공항을 통해 입국하는 조선족귀국로무자 몇천명이 일부 집법부문의 위법행위로 인당 5000여원씩 벌금당하는 중대한 집법사건이였다. 많은 매체들 그리고 나섰던 변호사들까지 《감히 범의 코수염을 건드리지 못》하고 손을 들고 나앉을 때 남영전은 신문사 취재팀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위협과 공갈에 배짱있게 정면대결로 맞선데서 끝내 해당 기관은 잘못을 승인하고 피해자들에게 벌금을 돌려주었다. 벌금을 돌려받은 피해자만 600여명에 달한다. 이 사건 해결은 장춘공항이 입국써비스를 적극 개선하는 계기가 되였고 주류사회에서 민족신문의 위상 정립, 조선어신문 금후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준 계기가 된다. 그해 11월, 길림성당위 부서기인 전철수는 성당위와 성정부의 해당 책임자들과 함께 길림신문사에서 현장사무를 보면서 신문사의 간고분투하는 정신과 공항벌금사건 해결 등 백성들에게 실제적 봉사를 한 실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력사적으로 남아내려온 길림신문의 체제문제, 재정문제 등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그해 12월 길림성 당위와 정부는 길림신문사를 2006년부터 성재정 전액지불단위로 격상시켜 길림신문사는 중국 조선어신문 4대 신문지에서 유일하게 전액공익성사업단위로 되였다. 그해 10월 성당위와 성정부 판공청은 련합문건을 내려 길림신문을《성급 소수민족언어당보》로 정식 명명해 성급당보로 확정하였다. 《당신이 그때(1995년) 그렇게 오라고 할 때 북경에 왔으면 벌써 부부급(副部级 )이였겠는데…》 지금도 북경의 한 문단 로간부는 남영전만 보면 타령이다. 일찍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 길림성의 중점후비간부로 지정된 남영전, 그의 뒤순위에 있던 다른 2명은 언녕 성부급(省部级)이상 간부로 되였다. 수차 길림성 정계에서 부임요청 담화가 있을 때마다, 북경의 모 잡지사 주필, 중국작가협회 전직간부로 요청이 왔을 때에도 남영전의 거절리유는 똑같았다. 나는 《장백산》을 떠날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템시의 오늘을 말하며 남영전은 《시를 선택한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명함장을 보면 《남영전 시인(南永前诗人)》이라고 큰 활자로 찍혀있다. 남영전은 《나는 어디까지나 시인이다》라고 말한다. 중국 문단이나 정계에서 넓은 인맥으로 소문난 그에게 사교능력의 비결을 물었더니 남영전은 이렇게 대답한다. 《시인은 어디까지나 진정을 추구하고 진심과 관용으로 사람을 대한다. 시인은 선지선각자이며 사유가 트이고 모든것을 포용하는 흉금이 있다. 나는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언제나 시인의 신분으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인의 품위를 지킨다. 그것이 아주 잘 통했다.》,《나는 시로 세계와 대화한다.》 남영전시인은 문학계의 유일한 작가로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에 평선되였다. 사진은 시상식에서. (/김성걸기자 촬영)  남영전의 한계와 고민은 무엇일가? 기자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남영전선생과 아래의 대담을 주고받았다. 기자: 지금 가장 큰 고민과 한계가 있다면? 남영전: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재간이 못 따라가는것이 고민이다. 책을 많이 보고 사색의 령역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쓸 내용도 많아진다. 지금 어떻게 쓰는가가 가장 큰 고민이다. 표현양식을 두고 이렇게 깊이 고민한적이 없다. 내 토템시를 두고 어떤이는 남영전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상징적표현이 많기에 리해가 힘들다고 한다. 내 목적이 토템문화로 많은 사람과 대화하려는것인데… 어떻게 하면 누구나 쉽게 편히 읽고 받아들이도록 토템시를 쓸것인가 하는것이 내 고민이다. 그래서 퇴직후 새로 쓰는 시들은 토템의 이야기이고 토템문화를 해석하는 시라고 할수 있다. 기자: 토템문화와 관련 남영전의 주장에 대해 여러가지 이의도 제기되고는데… 남영전: 나는 절대 토템학자가 아니다. 나는 토템문화를 시로 리해하고 시로 이야기하는 시인이지 학자가 아니다. 토템문화 학습과 연구는 어디까지나 토템시를 쓰기 위한것이다. 시를 쓰기 위해 학자들보다도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토템 관련 학술연구는 국제적으로 200년, 중국은 100년 정도다. 당대에 와서 관련 서적만 수십종 된다. 모두가 학문이나 리론차원이다. 진정 감오와 깨우침으로 쓴 내용과 실천은 아직 없다. 토템시는 남영전 나름의 감오와 깨우침이라고 생각한다. 시로 그 토템의 정신세계를 파는것이다. 토템시는 인류와 자연,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시로 이야기하는것이다.  길림신문 한정일 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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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거북” 考 남영전 씨의 시「거북」((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29-31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바다를 집으로 륙지를 집으로 한뉘 시원함과 따사로움 꿈꾸어왔건만 탁류의 충격과 모래불 사장속에 날마다 해마다 괴로움도 쓰라림도 답답함도 속시원히 터놓을 곳 없어라 행여나 돛대에 별무리 걸고 행여나 돛폭에 금노을 펼치려니 천만년 바래여 눈동자 수정알로 벼려우고 등허린 철갑으로 굳어졌어라 수정눈 까닭인가 철갑등 까닭인가 매발톱, 짐승발도 어림없어라 칼끝도 활촉도 튕겨나와라 화약의 불길도 어찌지 못해라 모래톱, 수풀속에 깨뜨릴수 없고 태울수 없는 넋 해적들이 침노할제 그대 등에선 무수한 칼날 곤두섰더라 그대 입에선 사나운 불구름 내뿜었어라 쳐오는자 뒤엎어 쳐박아 파묻어버렸더라 바다를 집으로 륙지를 집으로 살고푸지만 구름안개 가시고 물파도 잦아들젠 외로이 흐느껴운다 바다밑이나 모래불에서 운명의 막고비엔 고달픈 몸 끄을고 쓰러지는 성곽 바쳐주누나 우람진 비석 업어주누나 다만 몸으로 무언의 말로 끝없는 명상에 잠겨 깊은 사색 굴리며. 거북은 조선민족의 상징계통 속에서 神의 使者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민족의 신화에서 흔히 神의 使者로서 신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三國遺事』권2, 紀異二 駕洛國記의 기록에 따르면 거북은 신성한 군주의 출현을 촉구하는 백성의 뜻을 신에게 전달하는 매개자였다. 『三國史記』권13, 高句麗本紀 東明王에 의하면 주몽이 금와왕 군사들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갈 때에 다리를 놓은 자라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한국의 무속이나 민속에서 거북은 그 등딱지를 태워 앞날의 일을 미리 점쳐 주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바로 龜卜점이다. 거북은 이처럼 신령스러운 동물로 생각해왔으나 조선민족의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문헌적인 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거북」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없다. 13. “白鳥” 考 남영전 씨의 시「백조」((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32-34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식솔 데리고 부락 데리고 어렴풋한 풍경 데리고 평생 불안한 운명 데리고 이사갑니다 이사갑니다 이사갑니다 애오라지 북국의 눈채찍 바람채찍 와락 몰려와 그들의 보금자리 묻어버리고 그들의 식량조차 빼앗아가며 욕질하고 매질하고 내쫓기에 단꿈을 기르던 요람을 떠나 발떼기 서운한 호수를 떠나 고향에 고이는 눈물을 떠나 이사를 갑니다 바람이 길이 되고 별이 리정표 되고 번개가 길동무 되어 끝없는 창망한 밤에 하늘밖에 하늘에 기대를 걸고 애오라지 남국의 불혀바닥 비혀바닥 왈칵 달려와 그들을 태우며 삶으며 그들을 막으며 절구며 집에도 갈수 없게 하거늘 하는수없이 다시금 크나큰 기대 품던 그 땅을 떠나 저으기 기쁨 주던 그 땅을 떠나 또다른 고향 떠나 이사를 갑니다 눈물 머금고 한을 품고 구슬픈 그 몸을 이끌어 끊임없이 이사갑니다 쉬임없이 오고갑니다 끝끝내 몸 붙일 곳 찾지 못했건만 목숨이 붙어있는한 날개를 퍼덕일수 있는한 영원한 온기 찾으려고 따스한 영원 지키려고 이사갑니다 이사갑니다 이사갑니다. 백조는 서양의 신화, 전설, 민담, 동화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중요한 물새이기는 하지만 조선민족의 설화에서는 그리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민족과 혈연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부여라는 부족이 물새를 족명(族名)으로 삼았다고는 하나 그 물새가 백조인지 기러기인지 학인지는 분명히 분별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백조」를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14. “물” 考 남영전 씨의 시「물」((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12-14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보이다가도 안보이고 크다가도 작은 신령 물은 어디라 없이 다 있어도 날개 없고 발이 없고 형색조차 없습니다 없는 날개 가장 큰 날개이고 없는 발이 가장 큰 발입니다 없는 형상 가장 자유로운 형상이고 없는 빛깔 가장 현란한 빛깔입니다 대지우에 모래밭에 크나큰 사막에 하늘우에 산마루에 깊다란 협곡에 안개 되고 구름 되고 비가 되고 눈이 되고 냇물 되고 강이 되고 호수 되고 바다 되고 뿌리에 줄기에 잎속에 꽃과 열매에 파고들어 인간과 자연을 낳아 기르는 인간의 시원입니다 만상의 시원입니다 물은 가장 온화합니다 물은 가장 흉맹합니다 수양버들 봄바람에 흐느적이듯 호수우에 새들이 지저귀듯 물은 마냥 부드러워도 독을 쓰면 사나운 맹수도 당해 못내고 타오르는 령화도 못당합니다. 부드러운 음기로 사나운 양기로 마른 가지 움터나고 여린 가지 억세 지고 벼랑도 무너지고 메부리도 깎입니다 생령의 명멸도 대지의 부침도 손안에 꽈악 거머쥐고 있습니다 물의 신비 물의 신성 눈부시게 무궁무진 퍼져갑다 사람은 물 우에 가고 고기는 물 속에 놀아 물우이나 물밑이나 생명의 락원 하여  물거품도 정액인듯 떠벋들리고 우물속 달조차 룡의 알로 보이고 물할미는 약수의 신으로 불리웁니다 하여 녀인들은 아들 잉태 물에다 빌고 풍요함을 기원하여 물에다 빌고 무병장수 기원하여 물에 빕니다 인류와 더불어 물의 신화 살아있고 하늘과 더불어 물의 위엄 공존합니다 물, 물, 물, 모든 생명 모든 령혼의 온갖 문을 여닫는 신령입니다 1991.6 조선민족의 신화에서 물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고려의 국모(國母)들은 모두 물에서 태여나서 높이 섬겨졌다. 고구려의 국모격인 柳花는 水神 河伯의 딸이요, 신라의 국모는 우물에서 태여나지 않았던가. 天神과 地母神을 겸한 水神의 결합으로 흔히 나라가 형성되는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민족신화의 “天父地母”의 큰 틀이 형성되는 것이다.  산에 산신령이 있어 치성을 받았듯이 물에는 물할미가 있어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졌다. 고구려에서는 “水神祭”라고 일컬어지는 나라의 큰 굿이 있었거니와, 굿을 올릴 때면 온 나라 사람이 어울려 그 水神을 강가에 모셔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해져 있다. 다 같은 물신앙이라고 해도 민속에서는 강물보다 우물이나 샘터를 두고 더 많은, 더 진한 믿음이 바쳐져왔다. 우물신앙의 사례는 신라 국초의 박혁거세왕의 전설에까지 소급된다. 혁거세왕은 나정(羅井)이라는 우물곁에서 태여났지만 그의 왕비는 아예 알영정(閼英井)이란 우물에서 태여났다고 해서 閼英이라고 한다. 알영은 또 鷄龍과 출산한 것으로 되었으니 태양새인 닭과도 혈연적인 관계가 있는 셈이다. 사실 물에 대한 숭배는 전 인류적이고 물과 유명한 녀성의 탄생을 련과짓는 것은 전 인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의 신화중의 중요한 녀신 아프로티테는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했다고 하니 역시 물과 밀접한 련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천고의 영웅 아킬레우슬 낳은 테티스도 바다의 녀신이 아니던가. 이런 의미에서 물은 어쩌면 카를 융이 말한 것처럼 전 인류의 원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전 인류적인 원형이 어는 특정한 씨족이나 부족 혹은 민족의 토템으로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조선민족이 선인들이 물을 자기의 씨족이나 부족 또는 민족적인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는 찾을 수 없다. 물은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자연신으로 숭배되였거나 신앙되여 온것 같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물」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하는데는 무리가 따른다. 15. “山” 考 남영전 씨의 시「산」((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51-52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因愚昧 因混沌 被擠出 被壓出 巨大之筋肉 巨大之肉塊 巨大之血流 卽便被遺棄 卽便赤身裸體 卽便傷痕累累 卽便殘缺不全 却以不屈之信念 却以博大之氣魄 昻 首 挺 立 以自身之血 以自身之血 以自身之精氣 以自身之臂膀 擁抱一切能爬能走能飛之精靈 養育一切能吟能歌能舞之靈魂 冷寞的世界 因之而充滿生機 因之而走進和諧 崇敬山 膜拜山 山之沈黙爲最深沈之沈黙 山之胸襟爲最寬廣之胸襟 山之品格爲最高尙之品格 山爲生靈永恒之歸宿 山 山 山 1994.9 한국의 신화학자이며 민속학자인 김열규 교수는 조선민족의 자연신앙체계속에서의 산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형상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산과 물 그리고 나무와 바위는 이 땅의 겨레들이 만들어온 ‘자연신앙’의 4대 요소이다. 그 넷을 이어서 그려질 사각형 속에 이 땅에 자연신앙의 성역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 사각형 중에서도 다시 산과 물을 으뜸으로 쳐야한다.”(김열규 저『한국 문화와 역사를 위한 신화론- 한그루 우주나무와 신화 』, 한국학술정보, 2003년, 263) 산 많은 지역에서 원시문화와 고대문명을 창조한 고조선과 가락 그리고 신라의 국조가 각기 산에 내렸고, 단군과 탈해왕은 산신이 되여 나라를 지켰다. 산은 신이 하강하는 곳이고 또 산은 민족의 발생과 근거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특히 신이 하강하는 산은 신을 모시는 성역으로서 산악숭배의 바탕이 되며 산신의 존재를 파생시킨다. 서양에서도 산은 신이 내리는 곳으로서 산은 천국을 상징하며, 신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신화에서 올리포스산은 신들이 사는 곳이고,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집이서 있는 산이 모든 묏부리 위에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만국이 그리로 물밀듯이 밀려 들더라” (구약 성서 이사야 2)고 하였다. 유태인들의 청년수령 모세도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만나서 하나님의 선민이 되지 않았던가. 이런 의미에서 산은 역시 물이나 땅처럼 카를 융이 말한 것처럼 전 인류의 원형이라고 해야 것이다.  물론 이런 전 인류적인 원형이 어는 특정한 씨족이나 부족 혹은 민족의 토템으로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조선민족이 선인들이 산을 자기의 씨족이나 부족 또는 민족적인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는 찾을 수 없다. 물은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자연신으로 숭배되였거나 신앙되여 온 것 같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산」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16. “토끼” 考 남영전 씨의 시「토끼」((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79-80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總想築個溫馨的窩 却總有惡魔襲擊 一個善良溫順的生靈 被迫逃離 逃離逃離 兩條後腿越逃越長 總想睡個安穩的覺 却總被陰謀警醒 一個不願爭鬪的生靈 被迫逃離 逃離逃離 兩只耳朶越竪越長 日日月月逃離 春夏秋冬逃離 逃得妻離子算 逃得沒有寧日 逃離逃離 最終逃進月宮 一個孤獨迷茫的遊魂 將平生的宿願 將歸鄕的企劃盼 置入石臼  搗啊搗 搗得鄕情綿綿 搗得月色朦朧 2000.1 토끼는 조선 전설이나 민담에서 등장하지만 곰이나 범이나 사슴처럼 중요한 위치에 있는 동물은 아니다. 남영전 씨의 해석과는 달리 조선민족 상징계통에서의 토끼는 “속임수의 명수”, “꾀쟁이”이다. 인도불경설화의 영향으로 생긴 삼국시대의 “구토설화”에서 토끼는 꾀쟁이로 등장하여 조선조의 판소리계소설 『토끼전』에 이르기까지 토기형상은 “속임수의 명수”, “꾀쟁이”이로 일관하고 있다. 조선민족의 설화에서의 월궁에서 약방아를 찧는 토끼의 형상은 중국 仙話인 “姮娥奔月”의 양향으로 생겨난 것으로 사료된다.  한마디로 토끼를 조서민족의 토템으로 칠 수 없으므로 남영전 씨의 시 「토끼」는 “조선민족의 토템시”가 될 수 없다. ============ 17. “蟾蜍” 考 남영전 씨의 시「蟾蜍(두꺼비)」(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77-78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所受的蔑視都溶入眼珠 所受的虐待都滲溶進肌膚 千年萬年 被誤解了却沒有怨恨 遭呪罵了却沒有惱怒 以岸的寧靜水的淡漠 品味滄桑 品味滄桑 從不炫耀自己的智慧 從不聲張自己的豫知 育兒女于坎坷鑄煉風骨 敎子孫于逆境獻媚俗 若遇善良可憐的弱者 若遇解救自己的恩人 寧愿犧牲自身 也要鼎力相助 世世代代被扭曲 世世代代却執著 終于在生命的盡頭 馱回了一輪明月 渾濁的月 爲蟾蜍不止的淚 1999.9 두꺼비는 조선민족의 설화에서 은혜를 입으면 꼭 보답하는 의로운 동물형상으로 등장하고, 조선조의 우화소설 『두껍전』같은 데서는 가장 지혜로운 동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조선민족이 두꺼비를 토템으로 신앙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달 속에 두꺼비가 있다는 설은 중국의 대학자 계선림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인도에서 유래되여 중국에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조선에 전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조선민족의 토템신앙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 「蟾蜍」는 “조선민족의 토템시”가 될 수 없다. 18."犬"考 남영전 씨의 시「犬」(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73-74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人從樹上爬下來便與之爲伍 是獵者 是追捕禽獸的好幇手 是衛士 是守護主人的精靈 也曾有過舜位 也曾威風凜凜 有舜位 已成爲斑駁的化石 顯赫與榮耀 只在遺忘的史冊里 唯有褒貶交替的称謂 伴着歲月的尾巴 仍在搖擺 聖潔嗎? 隨地撒尿 隨地撒屎 有時還戱살鷄鴨鵝 餓急了 便將孩童的糞便當作美餐 時而聚群 狂叫亂走 攪得農家小院不寧 醜陋嗎? 從未有過分的奢求 從未嫌主人的貧寒 靈敏的嗅覺 警覺的耳朶 快捷的四肢 爲守家園盡責 爲護主人遠行 卽使主人舍棄了它 它却從不背叛主人 卽使死了 也不求有一塊安身之地 遠處又聞犬吠聲 人與犬又出現在地平線了 2002.7 본인은 한국 전남대에서 객원교수로 근무를 할 때 한국 “義犬설화”의 본고장인 전북 임실군에 가서 관광을 한 적도 있다. 개는 남영전 씨의 우의 시에서처럼 조선민족의 여러 가지 상징적의미를 갖고 있지만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 토템으로 신앙했다는 기록은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 「犬」을 “조선민족의 토템시”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2007년 9월 24일 연길에서 19. “豚” 考 남영전 씨의 시「豚(돼지)」(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75-76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有一双慧眼 哪兒風水好 哪兒是建城的好地方 蹄印停留處爲寶地 有一個善心 爲良緣搭橋 守護被遺棄的生靈 甘愿畿天不吃不睡 有一副雄建的體魄 踏荒山躍雪谷與山同樂 年年豊衣足食 因之也曾得到舜位 也曾名聲遠揚 自從被囚進圍欄 鎖住了智慧 鎖住了勤勞 一個勤勞智慧的精靈 有了醜陋的託號 而風雲沒能抹去 豚之古時的風采 豚之聚財的能力 當今流行的貯蓄箱 仍爲豚的便便大腹 一條剪不斷的臍帶 流溏着遠古洪荒的血液 1999.9 조선반도 북부, 특히는 함경북도 신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지들에서 돼지 陶俑들을 많이 발견하였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신석기시대로부터 돼지가 조선민족 선민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재산으로 되었음을 보여준다. 수렵단계에서 농업단계로 진입한 예족, 맥족과 읍루, 말갈 등 만퉁구스 민족의 선민들이 돼지를 중요시했음은 많은 사료와 고고학적발견에 의해 증명되었다. 조선민족은 지금도 큰 제사에서 돼지머리를 제물로 올리군 한다. 돼지는 조선민족의 신화전설, 민담에서 자주 등장하고 또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동물형상이다. 『三國史記』권13 高句麗本紀 琉璃王 조목에는 하늘에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서 명당자리에 가서 누웠는데 그곳에 성을 세운 것이 바로 고구려의 환도산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三國史記』권16 高句麗本紀 山上王 조목에 따르면 돼지가 임금과 시골처녀사이의 좋은 인연을 맺게 하여 산상왕이 태여나게 하였다고 한다. 돼지에 대한 이런 신앙은 고려왕조에까지 이어져서 고려의 도읍지도 돼지가 잡아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남영전 씨는 바로 이런 역사기록에 의해 이 시를 창작한 것 같다. 조선민족의 고대사회에 있어서 돼지는 서양에서의 양과 비슷하게 천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이용되었으며 따라서 돼지는 신통력을 갖고 있는 신의 使者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돼지가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여 조선민족이 토템으로 숭배하였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다. 일반적으로 천신에게 재물로 바치는 犧牲을 토템으로 숭배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 까닭에 남영전 씨의 시 「豚」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로 인정하기 어렵다.  =========== 20. “燕子” 考 남영전 씨의 시「燕子(제비)」(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81-82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驚愕- 春風暖暖的麗日 一條貪婪的黑蟒 偸襲鼾睡的小兎 驚愕- 風雪咆哮的冬日 一對란生灰狼 爲爭一只死猫撕咬 撕咬得皮開育綻 撕咬得天昏地暗  驚愕- 春夏秋冬 一股黑潮般的瘟疫 總是悄悄漫延 漫延進山漫延進河 漫延進草原蔓漫進森林 只因驚愕 只栖止于樹梢于房지 只栖止于遠離毒菌的天空 日日啼叫 只因驚愕 從南到北從北到南 爲尋一片淨土 年年遷徙 遷徙 遷徙 遷徙了 幾百年幾千年了 也不愿落地 2002.5 제비는 많은 해충을 잡아먹는 익조이기에 농가에 들어와 둥지를 짓는 것을 말리지 않고, 제비도 그것을 알고 사람가까이 집짓기를 꺼리지 않는다. 이처럼 제비는 농경문화권, 특히는 도작문화권에서 사람들과 친근한 새이다. 중국 은나라의 시조 설의 모친 간적이 목욕을 하다가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그로 임신해서 설을 낳았다는 “玄鳥生商”의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민족의 설화나 소설에서 제비는 사람의 은혜에 보답하는 새로 등장하는데, 조선조 말기의 판소리계소설 『흥보전』에서 보배박씨를 물어왔다는 제비는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그러나 제비가 조선민족의 토템이였다는 증거는 없다.  21. “雄獅” 考 남영전 씨의 시「雄獅(사자)」(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23-24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茫茫草原上壹顆疾馳的太陽 草原暝暝 草原昏暗 草原于暝暝里沈睡 草原于昏暗里沈睡 億萬年往昔 惡魔于草叢里橫行 妖怪于湖泊里作蘖 雄獅之吼 雄獅振顫八方之吼 雄獅之鬣 雄獅鎏金之鬣 爲炸雷爲雪崩 爲旋轉的太陽 爲疾 的流星 令沈沈黑暗遠遁 令惡魔遠逃于海之盡頭 令妖怪難尋蔽身之所 草原明明 雄獅 漫舞于曠曠 漫舞于勃勃生機的草原 因之被尊爲百獸之王 因之被尊爲大德之大聖 因之被尊爲希冀之百使者 立于高高的橋頭 立于威嚴的石塔 守護永恒的光明 茫茫草原壹顆疾馳的太陽 1993.6 사자는 동북아에 없는 동물로서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파되면서 중국과 조선반도에 알려졌다. 주로는 호법 신장, 성전의 수호신으로 등장하였다. 조선민족의 민속예술에 사자춤이 등장한 것도 썩 뒤의 일이었다. 조선민족이 동북아세아의 중국 료동, 료서, 조선반도에서 살았던 원시시대나 노예제시기에 사자는 조선민족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자를 조선민족의 토템이라고 할 수 없다. 조선민족의 조상들이 본적도 없는 사자를 어떻게 토템으로 숭배한단 말인가?  22. “鯨” 考 남영전 씨의 시「鯨(고래)」(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47-48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背負大海 背負無際無涯之沈重 緩行 與人爲伍 與人親近 爲人鼎力相助 却遭人之嫉妬人之唾棄 携壹腔悲哀 隱居于大海 隱居于大海 慢慢타嚼苦澀 嚼億萬年之人情世故 讎恨愚昧 讎恨混沌 實在忍不住了 吐壹口長長之문氣 隱居于大海 不想與世有爭 將壹双靈敏之耳朶 扣進自身之肉里 勃發的四肢 退化爲鰭肢 然而巨大的心房 却鼓張得越來越大 成浮動之山 成飄移之島 時時過濾沈沈之暮色 期待着陽光 期待着光明 背負大海 背負無際無涯之沈重 隱居于大海 最凶恨的鯊魚 最凶猛的海豹 也從它臍下 慌慌張張 逃전 1999.5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고래를 보고 원시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자연신으로 숭배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고래를 조선반도 남해의 해변가 동굴 속의 암벽화에서 발견하기도 했지만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고래를 토템으로 숭배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 「鯨」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로 인정하기 어렵다.  23. "雲 ․ 風 ․ 雷 ․ 雨 ․ 火" 考 1990년대 초반기에 출간된 남영전 씨의 시집『백학』에서는 그래도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민속 등에서 자주 등장하고 또 토템으로 모셨을 가능성이 십분 많은 14개의 자연대상들만을 시적인 소재로 하였다면, 새천년에 들어서서 출간된 남영전 씨의 시집『圓融』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이 42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남영전 씨의 시 「火(불)」,「雲(구름)」, 「風(바람)」,「雷(번개)」,「雨(비)」(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등 작품은 적지 않은 자연현상들마저 조선민족의 토템으로 인정하여 시로 창작하였다. 불, 구름, 바람, 번개, 비 같은 자연현상은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이를 테면 단군신화에서 천제의 아들 환웅이 천상에서 땅우에 내릴 때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렸다고 한 것을 보면 고조선시대의 사람들은 바람, 비, 구름 같은 자연현상을 신격화하여 자연신으로 숭배하거나 신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 리치로 번개나 불 같은 자연현상도 인간들이 자연신으로 모시고 신앙했을 가능성이 십분 많다. 그러나 상술한 자연현상을 자연신으로 숭배했다는 증거는 있으나 토템신으로 신앙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火(불)」,「雲(구름)」, 「風(바람)」,「雷(번개)」,「雨(비)」를 “조선민족의 토템시”로 인정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24. “太陽” 考 남영전의 토템시 중에는 태양, 달, 별을 조선족의 토템으로 상정하여 창작한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시”들이 있다. 아래에 남영전 씨의 시「太陽」(남영전 『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55-56쪽)을 옮겨 보기로 하자. 祖先的白色之門鑲在遙遠的太陽上 祖先的白色靈光 正悄悄捕捉黑色的鬼魅黑色的邪惡 祖先的白色溫馨 正緩緩融化重疊的雪山堆積的怨恨 祖先的白色慈祥 正輕輕撫마可愛的子孫寂寞的心靈 于是于曠野于莽林 冥冥里復蘇暈厥的精靈 冥冥里誕生吉祥的部落 祖先的白色靈光 來自祖先神秘的智慧 祖先的白色溫馨 來自祖先灼熱的胸膛 祖先的白色慈祥 來自祖先神聖的博愛 祖先每日勞作之後 傍晩返回家園 總有壹條貪婪的黑影偸偸尾隨 將祖先 白色的靈光 白色的溫馨 白色的慈祥 融進肌膚融進血液 融進精髓融進靈魂 着一身最美的潔白 是對祖先最虔誠的膜拜 盡管有過禁令 盡管有過挫折 連接祖先與子孫的白色之橋 總是熠熠生輝 祖先的白色之門鑲在遙遠的太陽上 那永不鎖閉的祖先之門 是子孫世代享不盡的福之源頭 1994.8 태양은 조선민족의 원시종교신앙계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연신이자 동시에 조상신이였다. 그러므로 태양을 조선민족의 토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민족의 개국신화에서 태양은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불덩이 형태가 아니라 알(卵)이나 일광(日光) 등으로 나타나며, 하느님(天帝) 또는 그 아들(天帝之子)이나 국조(國祖)을 의미한다. 조선민족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한 갈래라고 인정되고 있는 부여족의 해모수신화에서 해모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분명이 태양신의 형상을 갖고 있다, 하기에 해모수는 낮에는 인간 세상에 나와서 살고 저녁에는 천궁으로 돌아갔다. 이는 하루 동안의 태양의 운행을 상징한다.  고구려의 개국주인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로서 해빗의 작용으로 잉태를 하며, 낳았을 때는 태양의 모양을 닮아 알(卵)로 태여나며, 어른이 되어서는 서는 자신을 “태양의 아들(日之子)”라고 자칭하고 있다. 신라의 개국주인 박혁거세도 마찬가지로 태양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그는 하늘에서 전광(電光) 같은 태양빛이 비추는 곳에서 알로 태여나며, 赫居世라는 이름은 “빛과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삼국유사』에 수록된 “延烏郞과 細烏女”는 태양과 달의 精이다. 그리고 그 이름에 나타나는 까마귀 오(烏)는 태양의 사자인 三足烏인것이다. 태양은 조선민족의 원시종교신앙계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연신이자 동시에 조상신이였다. 그러므로 태양을 조선민족의 토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태양신은 조선민족의 왕권신화에서 많이 나타나는바 조선민족의 부족국가들인 부여국이나 고구려나 신라국의 토템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이상의 문헌적인 근거로 태양을 조선민족의 부족국가 창건단계에서의 단계에서의 토템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동시에 태양은 전 인류적인 원시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일본의 국조도 태양신이고 고대애급, 고대 인디안들의 국조도 태양과 깊은 련관을 지니고 있다. 태양숭배는 전 인류적인 원시신앙이었다. 25. “달” 考 남영전의 토템시 중에는 태양, 달, 별을 조선족의 토템으로 상정하여 창작한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시”들이 있다. 아래에 남영전 씨의 시「太陽」(남영전 『白鶴』, 민족출판사, 2003년, 15-17쪽)을 옮겨 보기로 하자. 박쥐의 날개에 은신했다가 바다건너 산넘어 저 멀리서 걸어옵니다 사푼사푼 걸어옵니다 얇은 베일 가리운 어여쁜 얼굴 어깨우에 출렁이는 부드러운 머리채 미소와 더불어 친철함과 더불어 은밀한 아지우에 아련한 마음 흔듭니다 세상만물이 무게를 잃습니다 희붐한 산그림잔 햇솜마냥 부풀고 퍼어런 바닷물결은 은실마냥 날립니다 말없는 울룽바위도 온몸으로 달콤한 달빛젖을 머금습니다. 원활함과 더불어 남몰래 남몰래 상상의 푸른 날개 펼쳐줍니다 살며시 비껴 내리는 달의 이슬 가벼이 떠오르는 달의 향연 보이잖는 이슬 만질수 없는 연기 심산유곡의 신비한 점괘이고 암시입니다 인간세상의 아득한 예시이고 계시입니다 몽롱함과 더불어 아리숭함과 더불어 우렷이 우렷이 심령이 포복하는 성결한 전당 쌓아줍니다 마음의 요람과 성황당의 대문에 달은 기울었다가 둥글고 둥글었다가 이지러져 둥그스름은 기울어지려 기울어짐은 둥글려고 둥글고 기울어짐은 영생에로 통하는 길 하여, 교교한 달밤- 아들낳이 원하는 아낙네들은 수집어도 우물가에 사뿐 사뿐 샘물도 살짝, 보름달도 살짝 고요한 잔디밭- 백의숙녀 둘레둘레 나리꽃 원무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설레이는 원은 하늘에서 내린 달 펄렁이는 사람은 하늘우의 선녀 풍요의 원리는 그래서 밀물이고 녀성의 원리는 그래서 륜회이고 생명의 원리는 그래서 지속됩니다 집요하고 지성어린 그 신앙 그 숙원 은은히 은은히 천지간에 흐릿한 환영으로 빛납니다 달춤판의 나리꽃 억만번 피고 지고 우물속의 보름달 억만번 마셨습니다 긴긴세월 달이되여 긴긴세월 맛보아도 련달린 넝쿨은 상기도 시나브로 달의 사닥다리 줄줄이 자랍니다 생명과 령혼의 문에 혼탁한 비방울 흩날리며 떨어집니다 떨어져 흩날립니다 달  영원한 달 마음의 신비와 환상의 몽롱을 영원히  영원히 길러주는 달입니다 1986.12-1987.5 조선민족의 巫俗에서 달은 천신이고 여성신이고 조상신이기도 하다. 태양과 숭배와 더불어 달숭배도 그 연원이 아주 길다. 그것은 달은 차서 기울고, 기울었다가 다시 차기에 “죽음과 재생”의 원형으로서 영생과 재생의 상징성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전 인류적인 원형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민족의 신화 “연오랑과 세오녀”에서 해와 달은 부부로 되어 있고, 조선민족의 구전동화 “해와 달”에서 해와 달은 오랍, 누이이다. 유교와 불교에서도 달의 이미지는 대단히 고결하다. 유교에서 달은 군자의덕을 상징하고 불교에서 달은 원융(圓融)자재한 불교적인 이념의 구현을 상징하므로 조선민족의 문화가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됨으로써 조선민족의 원초적인 신앙으로서의 달숭배는 더욱 고조되여 왔다. 동시에 달은 전 인류적인 원시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달숭배는 전 인류적인 원시신앙이었다. 이상의 문헌적인 근거로 달을 조선민족의 씨족단계나 부족국가 창건단계에서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 토템으로 숭배했을 가능성도 십분 많다고 사료된다. 그러나 달을 “조선민족의 토템”이라고는 할 수 없다.
1444    남영전 / 김관웅 댓글:  조회:4613  추천:1  2015-09-07
남영전 씨의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시”에 대한 문헌 및 고고학적 고증         /김관웅 1. 들어가는 말 “조선민족의 토템물”을 소재를 하여 쓴 시라야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민족의 토템”이 아닌 자연대상물을 소재로 하여 쓴 시는 토템시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42수의 이른바 “토템시”들에서 소재로 이용한 자연대상물이 “조선민족의 토템”이였는가를 문헌 및 고고학적으로 고증하여 그 진위를 밝혀내는 것은 필수적인 작업이다. 이는 남영전 씨의 토템시 연구에서 반드시 선행시켜야 할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조선민족의 선인(先人)들도 원시시대에 자연숭배, 자연신앙 그리고 그것과 련관되어 있는 많은 자연신을 신앙하여 왔으며 따라서 이런 자연신들속에는 많은 토템숭배나 토템신앙의 대상들인 토템신들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자연신들 속에서 토템신들을 가려낸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의 민간문학연구가이며 신화학자인 김렬규(金烈圭)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바 있다. “… 달리 또 계산(鷄神) ․ 웅신(熊神) ․ 용신(龍神) 등 동물신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신이 동물자체의 신격화인지 안면 동물의 수호령(守護靈)인지를 엄격히 가리기 힘들다. 혁거세신화의 천마(天馬) ․ 동명왕신화의 비둘기들은 이를 동물신에 준한 존재로 이해하여야 할 것 같다. 다만, 이들과 관련되여 많은 토테미즘의 논의가 있기는 하나, 워낙 토테미즘 개념이 환상적인 만큼 다양하다는 장벽이 있는 데다 그 가운데 어느 기준을 채용한다고 해도 연역의 필연성이나 귀납의 개연성이 인정될 만큼 주어진 기록들의 기술(記述)이 분명치 못하다는 장벽이 있어 토테미즘 논의는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 김열규 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위한 신화론-한 그루 우주나무와 신화』, 한국학술정보, 2003년, 135쪽) 한국 상고시대나 고대 사회에 있어서의 동물신을 위수로 한 수많은 자연신들 속에서 토템신만을 골라낸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지만 명확한 기록이 있는 것들만을 먼저 골라내고 토템신이라는 명확한 기록이 없는 것들은 따로 분류함으로써 남영전 씨의 이른바 “조선민족의 토템시”의 진면목을 밝혀보려고 한다.  남영전 씨의 42수의 “조선민족의 토템시”들에 대한 문헌 및 고고학적인 고증은 본인의 시야에 들어올 수 있는 문헌이나 고고학적인 재료에만 의존했음을 먼저 성명하며 남영전 씨, 박문희 씨, 한춘 씨를 포함한 많은 석학들의 기탄없는 반박, 비판, 지적과 보완을 모두 진심으로 환영한다.  2. 곰에 대한 고증 남영전 씨의 “조선민족의 토템시”에서 흔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곰」이다. 산악 같은 그림자를 끄을고 엉기정 엉기정 엉기정 가시넝쿨 우거진 심산밀림 지나 갈대버들 음침한 벌방늪을 지나 긴긴 세월 엉기정기 걸어오다가 컴컴하고 적막한 동굴 속엔 왜 들었수? 쓰고 떫은 약쑥 신물 나게 맛보고 맵고 알알한 마늘 몸서리나게 씹을제 별을 눈으로 달을 볼로 이슬을 피로 받아 아리땁고 날씬한 웅녀로 변해 이 세상 인간들의 시조모 되었니라 도도한 물줄기 현금삼아 틍기고 망망한 태백산 신방 삼아서 신단수 그늘 밑에 천신 모셔 합환하여 수림속, 들판, 해변가에서 오롱이 조롱이 아들딸 길렀네 사냥질, 고기잡이, 길쌈하면서 춤 절로 노래 절로 웃음도 절로 그때부터 세상은 일월처럼 환하고 금수강산 어디나 흥성했어라 끓는 피와 답즘을 젖으로 무던한 성미와 도량을 풍채로 끈질긴 의지와 강기를 뼈대로 날카론 발톱마다 도끼와 활촉 삼아 인간의 초행길 떳떳이 헤쳤나니 한숨도 구걸도 없이 길 아닌 길을 찾아 첩첩 천험도 꿰뚫어 나갔더라 해와 달을 휘여잡는 자유혼으로 신단수 아래서 장고소리 울리던 시조모 시조모여 엉기정 엉기정 엉기정 산악은 그림자 끄을고 태고의 전설 백의의 영혼을 더듬어 오늘도 내일도 엉기정 엉기정 엉기정 1987.4-5(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9-11쪽) 이 시에서 등장하는 “곰”이란 이 동물형상은 조선민족의 고전인 일연의 『삼국유사』중의 단군신화를 소재로 하여 창작했으며 ,곰은 분명히 고조선의 건국주인 단군의 생모로 등장하는바 고조선 부족과 혈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기록되였다. 고조선만이 아니라 고조선 문화의 창조주체로 추정되는 예족, 맥족과 친근한 관계를 갖고 있는 동북아세아 만퉁구스와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에서도 곰이 녀신으로, 조상신으로 신앙되였던 토테미즘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곰」을 토템시라고 하는 것은 증거가 있는 것이다. 다만 곰은 고조선 시대의 토템이었지만 그것이 민족토템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4340년 전의 고조선 시대에 조선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삼국시대 초까지 곰토템 숭배의 유풍(遺風)이 널리 이어지고 있었음은 백제초기의 상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금 충청남도에 있는 금강(錦江)과 공주(公州)는 각각 백제시대의 곰강(즉 熊川)과 곰나루(熊津)에서 유래했다. 곰나루은 지금도 지명이 남아있는데, “곰나루전설”에는 인간세상의 총각과 암콤과의 결혼이 그 기본 이야기줄거리로 되었으며, 이와 거의 같은 전설은 오른촌족 같은 만퉁구스 제민족의 민간문학에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충남부여 구아리에서 출토된 토제 곰도 역시 백제시대에 곰토템 숭배의 유풍이 잔존해 있었을 증명해준다. 이로부터 곰은 조선민족의 씨족, 부족, 부족국가 시대에서의 일부 씨족이나 부족들의 토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 「곰」은 토템을 소재로 한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민족의 문화에서 곰은 중국 한족의 문화에서 룡처럼 민족적인 토템으로 승화되어 지금까지 전해 전해지지는 못했다. 3. “神檀樹: 考 남영전 씨의 시 「신단수」((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6-8쪽)는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신단수를 소재로 하여 쓴 시다. 시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파아란 하늘 조각조각 받쳐들고 무연한 땅 갈래갈래 갈마쥐고 시베리아 마파람 휘감아 회오리칩니다. 회오리칩니다. 회오리칩니다.  천국의 사닥다리 지상의 푸른 기둥 대지의 배꼽과 북두성 이어놓고 해와 달을 간 아지에 꿰여 광막한 우주에서 지성을 깨칩니다 지혜를 부릅니다 먹장구름 몰아내고 덧쌓인 세상 먼지 가시며 땅속의 정기 하늘로 올려 회오리칩니다. 회오리칩니다 회오리칩니다 잎새마다 넓은 지역 가지마다 높은 공간 무연한 록음 뭉게뭉게 펼치면서 환생의 힘을 부릅니다 부활의 넋을 부릅니다 만물의 령험과 정수를 모아 세상의 패기와 의지를 모아 의젓하게 영준한 신으로 화해 아릿다운 웅녀와 인연 맺었습니다. 하여 무인지경에 밥 짓는 연기 오르고 명산대천에 노래가락 울렸습니다. 수렵하는 사나이들 직포하는 아기씨들 정 좋고 힘 좋고 섭리도 깨쳐 아늑한 인간 낙원 펼치였습니다. 신비론 신단수 천년간들 만년간들 칼바람에 찍히랴 불갈기에 먹히우랴 물사태에 쓰러지랴 눈보라에서 죽으랴 그 언제나 언제나 창천을 떠이고 대지를 거머쥐고 떳떳이  떳떳이 솟았습니다 1988.1 신단수는 기능주의 神話學의 리론으로 분석을 한다면 단군신화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천제(天梯) 구실을 하는데 신화학에서는 이를 우주나무(宇宙木)이라고 한다. 우주나무로서의 신단수는 솟아있는 상태는 형태상 지상에서 천성을 향해 높이 솟았기 때문에 지상의 온갖 소원을 천상의 신들에게 전하는 매개채로서 상징성을 지닌다. 단군신화에서 천제의 아들인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태백산 꼭대기의 신령스러운 박달나무 - 신단수를 타고 내린다. 여기서 신단수는 하늘신이 지상으로 내려올 때 리용하는 사닥다리나 통로(通路)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후세의 조선민속에서의 솟대나 만주족의 신간(神竿) 같은 것도 이러한 우주나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기에 신앙의 대상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토템으로 신앙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토템으로 숭배하지 않았다. 고조선인들이 곰도 토템으로 신단수도 토템으로 신앙했다는 증거는 더욱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단수를 자연신으로서의 수목신(樹木神)으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고조선의 토템신으로 인정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 4. “白鶴” 考  남영전 씨의 시 「백학」((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6-8쪽)은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부터도 작자의 중시정도를 알 수 있다. 시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얀 학의 깨끗한 얼이 백의넋입니다 백의넋 루루천만년 깊이 묻힌 피비림에 젖었습니다. 숨 막히는 질식속에 몸부림쳤습니다. 묵중한 층암밑에서 터져나왔습니다. 검은 삿갓 흰 두르마기 하야얀 명주  몽땅 태워 재로 남은 천지간의 희고 흰 결정체입니다. 백의넋 신단수 끝초리에서 너울거립니다. 신비로운 천국을 이어놓습니다. 야수가 덮쳐도 보라매 노려도 갈범이 포효해도 겁낼것 없어 너울너울합니다  깊은 골에 홍수 넘치고 적막한 광야에 가물이 타번져도 두렵지 않아 너울너울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오연히 고개를 들고 날아옙니다 영원히 구걸을 모르는 자유의 얼입니다 백학의 결백한 깃을 명주치마로 백학의 사품 치는 날음을 춤으로 백학의 굳센 날개를 뼈와 힘줄로 백학의 맑은 눈을 해와 달로 하늘 땅 사이 그 어디나 백의넋이 너울너울합니다. 구름처럼 모였다가 흩어지고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갑니다 백의넋 눈보라 몰아치는 허허벌판 꿰지릅니다 소나기 쏟아지는 만경창파 헤가릅니다 쇠붙이에 부싯돌 불꽃 일구고 관솔불에 그물질 별무리결던 시절 동족상쟁 죄과를 가시고 독수리발톱을 경계합니다 결백속에 붉은피 방울방울 백두의 빙설속에 스며도 목 놓아 울지 않습니다 돌틈에서 숲속에서 더더욱 많고 많은 백의 넋을 기르웁니다 백의넋 언제나 언제나 강자를 약자로 보고 약자를 강자로 봅니다 세월의 눈비에 덤불길 험하다한들 아슬한 산발 바다속에 잠긴다 한들 한번 메운 화살 또다시 살통에 걷어 넣지 않습니다. 창천이 부릅니다 강산이 부릅니 백의넋 백의넋 백의넋이여! 1987.4-5 백학은 승화, 초월, 창수의 상징으로서 조선민족을 비롯한 동양의 각 민족들 속에서 신성시되여 왔다. 흔히 백학을 호의현상(縞衣玄裳,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이라고 일컬으면서 흰색과 검은 색의 배합이 신선함과 고고(孤高)함을 상징하며 백의민족의 상징적 형상으로 내세우기에 아주 적합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민족의 선민들은 신라 국초에 신령스러운 닭을 신앙했듯이 각종 새를 좋아하여 새를 토템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십분 많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모인 류화 부인의 부리가 너무 길어서 세 번 칼로 잘라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전설로 보아서 류화 부인이 바로 학이나 두루미 같은 새가 아니였을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문헌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백학을 조선민족의 선인들이 토템으로 삼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의 시 「백학」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5. “사슴” 考  남영전 씨의 시「사슴」((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18-19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실안개 감도는 신비로운 천국에 울울창창한 인간세상 밀림에 오르내리고 넘나들어 첩첩림해속에 숨을 젠 빨간 산호 망망백설우에 달리젠 타는 인삼꽃 천국과 항간사이 림해와 백설 속에서 온순한 천사로 지치도록 지치도록 경건한 소망 기도 드리며 풍요한 푸르름 찾기도 하고 각축하는 신으로 날쌔게 달리여 사악한 도깨비 쫓아버리고 아늑한 락토도 이룩해간다 홍산호, 인삼꽃 추락하면 령험한 푸른 넋 받쳐올리고 재생하여 서리치는 위험을 떨친다 생명은 엉키여 가루가 되고 몸체가 찢기면 선혈로 적신다 때문에  그 발굽은 장업한 신당에서 춤추고 두 뿔은 호신칼로 억세게 솟고 울음은 축전의 창구소리 울린다 때문에 대붕의 날개, 신단수 가지와 함께 숭엄한 왕관에도 우거지고 장려한 전당에도 솟아오른다 때문에 움직이는 교량으로 신성한 비석으로 언제나 언제나 림해에 구름에 어둠속에 치솟고 신앙에 소망에 마음속에 깃든다 발자욱소리 오늘도 퐁퐁 뛰는 발자욱소리 깊이 잠든 심금을 울려주고 백두의 뭇별들을 밝힌다 하늘 가득 뭇별을 1987.4-5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이나 민속 등에서 사슴은 아주 중요한 상징적의미를 갖고 있는 동물형상으로서 증장한다. 이를테면 동명황 전설에서 흰 사슴은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우주동물로 상징되여 있다. 동명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나서 이웃나라인 비류국을 합병하려고 할 때 흰 사슴을 해원의 큰 나무에 거꾸로 달아매고 주문을 외우자, 사슴의 울음소리는 밤낮 길게 하늘에 메아리쳤고 결국은 하늘에서 큰비가 쏟아져 비류국이 삽시에 물바다가 되여 비류국은 동명왕에게 투항하게 된다. 오른촌전설에서 대흥안령 제일 높은 정상에서 사는 신령스러운 사슴의 뿔은 하늘까지 뻗어 올라가서 우주나무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데 천신들은 사슴의 뿔을 타고 지상에 내린다고 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신라의 왕관은 사슴의 뿔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이는 록각숭배와 더불어 왕권의 신성함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를 할 수 있다.  조선민족과 만-퉁구스 제민족의 문화상징 체계 속에서 사슴은 영생과 재생의 상징이기도 한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사슴을 대지의 동물로 믿었기 때문이다. 사슴뿔은 나뭇가지의 모양을 하고 있고, 봄에 돋아나 자라면서 딱딱한 각질로 되었다가 이듬해 봄이면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뿔이 돋는다. 이러한 순환기능과 나뭇가지 같은 뿔을 머리에 돋게하여 카울수있는 능력을 지닌 동물은 사슴뿐이다. 따라서, 사슴은 대지의 동물로 여겼다고 할 수 있다.”(『한국문화상징사전』, 동서출판사, 1992년, 393쪽) 동서양의 신화를 막론하고 신화중의 가장 중요한 원형 중의 하나는 바로 “죽음과 재생(death and rebirth)"의 원형인데, 서양의 게르만인들이 이 원형을 토끼에게 기탁했다면 조선민족과 만 -퉁구스 여러 민족은 대지의 짐승인 사슴뿔에 부쳤던 것이다. 조선민족이 만-퉁구스 여러 민족과 깊은 문화적련관성이 있음을 감안할 때 사슴은 조선민족의 형성과정에서 어떤 씨족이나 부족의 토템이였을 가능성은 십분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존의 문헌으로는 사슴이 조선민족의 선인들의 토템이었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6. “白馬” 考 남영전 씨의 시「백마」((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18-19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뭉게뭉게 타래치는 매지구름 헤치며 아득한 창천에서 줄달음쳐 내린다 지축을 울리며 살같이 달려 눈부신 번개불 일으키고 황홀한 서기를 실어온다 칡넝쿨 엉킨 수림을 꿰질러 더물 우거진 들판을 달려 한낮의 불 먼지 털고 오밤의 흑장막 찢어 헤빛을 안고 달빛을 안고 발자욱 닿는 곳에 하얀빛 뿌려준 살같이 달려온다 하연 보슴털은 부드런 탄자 넓직한 등허린 편안한 안장 갈망과 숙원 싣고 지성과 신념 싣고 자유의 령지 향해 아름다운 산천과 리상의 언덕 향해 살같이 달려간다 끝없이 씽씽 네 먼저 내 먼저 나래쳐 가는 피로를 모르는 개척자 끓는 피 멎더라도 날개와 발굽 접을줄 모르고 비장한 운명의 호용소린 광막한 우주에 망망한 광야에 메아리친다 메아리친다 메아리친다 1980.1 조선민족의 신화나 전설에서 말은 제왕의 출현의 징표로서 신성시한 동물신으로서 숭배되였다. 이를테면 부여의 금와왕의 탄생담에서 해부루가 탄말이 곤연(鯤淵)에서 큰 돌을 보고 마주서서 눈물을 흘리므로 이상하게 생각한 해부루가 신하를 시켜서 그 돌을 굴리게 했다. 거기서 금와를 발견했다는 기록 역시 초자연적인 세계와 감응하여 제왕의 탄생을 알리는 말의 신성성을 말해 준다. 그리고 신라 벽화중의 천마는 하늘과 교통하는 신성한 령물이고 박혁세의 탄생담에도 나타나는데, 신라의 첫임금 박혁거세는 말이 전해준 알에서 태여난다. 하지만 한국 김렬규 교수의 말처럼 “혁거세신화의 천마(天馬) ․ 동명왕신화의 비둘기들은 이를 동물신에 준한 존재로 이해하여야 할 것 같으며”( 김열규 저 『한국 문화와 역사를 위한 신화론-한 그루 우주나무와 신화』, 한국학술정보, 2003년, 135쪽) 신라인들의 토템이었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백마」역시 “조선민족의 토템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 7. “까마귀” 考 남영전 씨의 시「까마귀」((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37-38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날씬한 몸맵시 밤에다 맡겼습니다 어예쁜 옷차림 밤에다 맡겼습니다 구성진 목소리 밤에다 맡겼습니다 세인들의 경모와 찬탄을 죄다 밤에다 맡겼습니다 가장 잔혹하고 가장 무자비한 밤에다 맡겼습니다 하건만 눈물 없이 락심 없이 실망도 없이 밤을 꾸짖지 않습니다 가슴 아픈 시연과 문득 깨달음은 다만 반짝이는 눈동자가 되었습니다 경계하는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침침한 밤 림해와 황야에 날아올라 사람 사는 마을가를 날아예며 이상스러운 징조를 우짖습니다 야수들의 주검을 우짖습니다 재앙을 물리치자 우짖습니다 소식을 전하느라 우짖습니다 숨은 사정 사라지면 곧 시름없이 나무우에 되돌아갑니다 욕하지 마시라 죽이지 마시라 그에게 높다란 막대기 세워주고 그에게 쌀알을 뿌려주고 그에게 마실 술 주고 그에게 고기를 주고 그에게 향불 올려 숭경하시라 그는 인축 위해 순시하는 신령입니다 그는 밤에 경보를 알려주는 신령입니다 1991.10 까마귀는 조선민족과 만 - 퉁구스 제민족의 민간문학이나 민속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령스러운 새이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해속에 세발 달린 까마귀-삼족오(三足烏)가 아주 유명하다. 『삼국사기』에는 까마귀가 국가를 상징하는 대목이 있는데,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북부여와 한창 전쟁을 벌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날 북부여의 대소왕이 머리하나에 몸이 둘이 달린 붉은 까마귀를 얻었다. 이것은 본 북부여의 신하가 “까마뀌가 검은 색인데, 붉은 색으로 변하였고,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아것은 두 나라가 합병될 징조이므로 왕께서 고구려를 정복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이를 받아본 고구려왕은 오히려 기뻐했다. “검정색은 북방의 빛인데, 남방의 빛인 붉은색으로 되었다.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다”(『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여기사 붉은 까마귀는 곧 고구려를 상징한다.『삼국유사』에는 그 이름이 까마귀를 뜻하는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부부의 신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까마귀와 태양숭배와 달숭배 사이의 깊은 련관성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신라의 사금갑(射琴匣)의 전설도 신(神)의 사자로서의 까마귀의 신령성 및 까마귀숭배의 신라민속을 잘 보여준다. 까마귀는 하늘과 땅, 땅과 저승 사이를 이어주는 사자의 역할을 하고 있고 우주조(宇宙鳥)라고 할 수 있다. 조선민족과 만족을 비롯한 만-퉁구스 제 민족들이 까마귀를 아주 중요한 자연신으로 숭배하거나 신앙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설사 이렇다고 하더라도 까마귀가 조선민족의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나 부락련맹의 토템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리고 더구나 까마귀가 “조선민족의 토템”으로 된 적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8. “범” 考 남영전 씨의 시「범」((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20-21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독버섯의 향취 매콤한 수림속 수리개의 피발톱 비릿한 청바위굽에 시퍼런 두 눈알 불여우 간교한 얼림수도 승냥이 어리석은 둔갑질도 속속히 조명하는 환한 대낮 캄캄한 오밤 속세의 음향 뚫어지게 통찰하고 불의와 사악을 원쑤로 분노하노라 고함치노라 너절하고 어리석음이 꼴사나와 뒤쫓노라 덮치노라 물어뜯노라 잔뼈 하나 남기잖고…… 선량한 은총을 베풀려 숲속에 숨고 동굴에 들기도 한다 탐욕스런 무리 쫓아버리고 경사로운 인연 맺어주고도 자취없이 소리도 없이 고요속에 묵묵히 산중으로 돌아간다 산속에서 산 지키고 산을 아끼는 산중지왕 산중신령 피와 살 풍우에 썩더라도 골격은 하냥 꿋꿋해 그 위풍 름름하고 그 기세 도도하다 독버섯의 향취 매콤한 수림속 수리개의 피발톱 비릿한 청바위굽에 범 범 범 새파란 한 쌍의 눈길이여. 범은 단군신화에서부터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등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형상이다. 단군신화의 범은 곰과 함께 사람이 되고자 원했으나 조급하여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를 부족 토템으로 보아 범 부족이 곰 부족에게 패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중국의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족은 범의 사당을 지어 범을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토템숭배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토템일 가능성은 십분 있다. 조선조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시기에 조선반도의 일부 지역들에서는 범을 산군(山君)이라고 하여 무당들이 도당제를 올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범숭배 신앙은 산악숭배사상과 융합되여 山神 또는 山神의 死者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반도 지방 도처에서 신봉하는 山神을 모신 산신당의 산신도(山神圖)에 나타나 있다. 한국의 여러 지방들에서 필자는 이런 산신도를 직접 산신당에서 본적 있다. 이와 같이 범은 조선민족의 신수(神獸)로 받들어진 것은 오래며 이런 범 신앙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를테면 1988년 24차 서울 올림픽 때 한국에서 상징물로 호돌이, 즉 새끼 범을 정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범은 조선민족의 선사시대에 어느 씨족이나 부족이 토템으로 숭배했을 가능성이 십분 많으나 후에 와서는 오래 동안 자연신, 즉 산신 혹의 산신의 사자로 신앙되었으나 결코 “조선민족의 토템”으로 승화된 적은 없다. 9. “장닭” 考 남영전 씨의 시「장닭」((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35-36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어미 품속 받아안은 소망에 스스로의 생의 목마름에 꽈악 닫힌 요람을 흐리터분 숨막힘을 단단하게 갇힘을 쪼아냅니다 자유의 꿈을 솟는 해 떠올리며 온세상을 흔들며 홰를 칩니다 귀신이 물러가는 때 밤의 장막을 제치는 때 부드러운 털 강포를 비웃고 눈부신 날개 몽매를 가시고 사나이 성미 나약함을 다잡아 볏의 불길 얼음도 녹이고 볏의 빛발 어둠도 밝히여 광막한 우주 소생합니다 왕성한 생명이 태여납니다 홰를 칩니다 힘찬 목으로 뜨거운 피로 우렁찬 목청으로 날마다 날마다 세세대대로 머얼리 아스라한 바다가에서 으슥하니 우거진 수림속에서 사람이 사는 곳 어디라없이 지지 않는 태양을 붉게 타는 태양을 머리 우에 떠이고 홰를 칩니다 어둠 빛이 가시지 않는 한 혼돈이 가시지 않는 한 쪼애냅시다 홰를 칩시다 1991.5 닭은 울음으로 새벽을 알리는 태양빛의 도래를 예고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닭은 태양의 새이다. 태양을 숭배하는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태양의 새 닭을 아주 중요한 자연신으로 숭배하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닭은 태양관련 상징성은 그 자체 속에 신성성을 함축시키고 있다. 그,리하야 닭은 신성한 새로 구체화 된다. 신리의 심알지도 닭이우는 수풀속에서 태여났다고 하닌 달과 련관되고 신라의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계룡(鷄龍) 낳았다고 하니 닭과 사람사이에는 혈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고대 신라인들의 원시적 신앙의 일단을 보아낼 수 있다. 그래서 신라는 숫제 계림(鷄林)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닭은 조선민족의 상고시대나 고대에 조선민족의 어느 씨족이나 부족의 토템이었을 가능성이 십분 많으나 민족적인 토템으로는 승화되지 못했다. 10. “황소” 考 남영전 씨의 시「황소」((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24-26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묵묵히, 묵묵히 걸어갑니다 솔 내음이 흐르는 공간에서 도두룩한 언덕뿐인 고장에서 그 맑은 눈동자 번쩍 뜬 순간부터 사색이 없어서랴 기개가 없어서랴 커다란 위속에다 온갖 어둠 삭이며 아스라이 머나먼 길 떠났습니다 하늘은 창창하고 물은 망망한데 그는 자그마한 섬의 밑받침 그는 이 땅이 뻗어가는 시조입니다 그의 흔들림은 땅의 진동이고 그의 숨결은 땅의 호흡입니다 그는 꿈에도 한사코 땅을 그립니다 물은 망망하고 땅은 광막한데 그는 쓸쓸한 황야의 희망이고 그는 희망이 무르익을 징조입니다 돌밭과 더불어 눈얼음과 더불어 가시밭과 더불어 진흙탕과 더불어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면서 움직이는 골짜기를 싣습니다 눈부신 빛발을 싣습니다 밤낮없이 언제나 가고갑니다 춘하추동 언제나 가고갑니다 가시길, 벼랑길도 아랑곳없이 운명의 파란곡절 탓함이 없이 풀포기만 있으면 씹어삼키며 그보다 더 큰 욕망 없답니다 하건만 겨레붙이 살해된 곳이면 피자국이 진작 들풀에 잠겼어도 눈에는 대뜸 피발이 서고 굽을 차며 사납게 영각합니다 분노한 웨침 격노한 웨침 구슬픈 심혼을 불쌍한 령혼을 다시금 불러 깨웁니다 묵묵히 묵묵히 걸어갑니다 넘어지지 않는한 숨이 붙어있는한 아스라이 머나먼 길 가고갑니다. “아버지 없어서는 살아도 소 없어서는 못 산다”는 속담처럼 농경사회에 일찍 진입했고 또 그것도 도작문화권에 속한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소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였다. 육축가운데서도 소는 조선족에게 있어서는 으뜸 가는 존재였다. 그래서 조선민족은 소를 생구(生口)라고 불렀고 실제로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소를 생구라 함은 그만큼 소를 소중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농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자, 재산의 중요한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가 조선민족의 생활에서 지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소를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문헌적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황소」를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없다. 11. “羊” 考 남영전 씨의 시「양」((남영전 『백학』, 민족출판사, 1992년, 27-28쪽)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피여오른 향불연기 흰 구름의 정갈함 그리고 경건한 기도가 하아얗게 새하얗게 차림새와 마음으로 엉켰습니다 잡초가 광야에 우거직 돌부리 황산에 웅크려도 아득히 머나먼 하늘밖의 하늘에서 큼직한 곡식이삭 물어와 마른 땅에 싹이 터 푸르른 강이 되고 굶주린자 푸짐하게 밥사발을 들었건만 제만은 낟알과 인연이 없어 저물녘 풀들이 서식하는 그 곳에 저홀로 바장입니다 풍설은 드러난 등어리 후려치고 얼음은 떨리는 몸뚱이 묻으려는데 따스한 제몸의 털옷으로 차디찬 세상에다 봉헌해 헐벗은자 몸을 감쌀 옷이 생기고 체류자는 먼길 떠날 노래 생겨도 제만은 몸 둘 곳 찾지도 않고 차디찬 밤 별들이 사학하는 그 곳에 저홀로 사색합니다 줄 정은 죄다 주었건만 봉헌할건 죄다 바쳤건만 마감에는  사람들의 혼암한 죄 대신해 사람들의 불선한 악 대신해 쫓겨갑니다 황막한 들판으로 눈 쌓인 골짜기로 더더욱 위엄스런 제단 앞에 죽음을 당합니다 기도하는 아침녘에 죽음을 당합니다 양, 양, 양 하아얀 차림새와 마음으로 구슬프게 웁니다. 양은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에 별로 등장하지 않는 형상이다. 그것은 아마도 조선민족의 문화가 양을 치는 유목문화와는 별로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는 유목문화와 많은 련관성을 가진 서양문화권의 상징계통에서 양이 차지하는 비중과는 아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기독교문화에서 그리스도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이 목자가 돌보는 양떼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므로 남영전 씨의 시「양」을 “조선민족의 토템시”라고 할 수 없다.
1443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댓글:  조회:4139  추천:0  2015-09-07
―토템시 창작을 시도한 동기            /남영전 1. 토템은 우리 민족 영혼의 뿌리 1971년 23세 때, 한문시로 중국문단에 데뷔한 후 지방지로부터 중앙지에 이르기까지의 청탁원고를 부지런히 써내는 행운이 있었으나 8년이란 이 시기의 글들은 뿌리없이 허공에 떠도는 구름이란것을 후에 깨달았다. 80년대를 한 해 앞두고 꿈에서 깨여난 나는 진정한 시의 의미를 찾는 탐구의 길에 올랐다. 한수의 시를 위해 늘 비지땀을 흘린 보상인지 나의 시「할머니」와 첫시집 『상사집』은 선후로 전국문학상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에 대한 탐구는 이것으로 만족할수는 없었다. 80년대 중반 내가 또 새로운 출발을 시도할 무렵, 중국시단으로부터 나의 부러움을 자아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뿌리를 찾는 열, 그중 토템신화를 문화적으로 다룬 시가 밤하늘의 왕별마냥 나의 이목을 끌었다. 따져보면, 민족은 사실상 문화로 구별된다. 민족문화심리를 깊이 파고들면 토템신화를 론의하지 않을수 없다. 토템신화는 여러 가지 소박한 원시적 관념이 침전되고 응결된 민족문화심리의 심층구성의 원시적 축적층이다. 여기서 민족령혼의 본원이 있으며 근원이 있으며 인간성의 본연이 있다는것은 학자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때문에 20세기는 다른 위대한 발견과 함께 신화의 의미를 발견한 시대로 주목되기도 한다. 형제민족 시인들의 선지선각이 나에게 준 큰 충격이였다. 우리도 뒤떨어져서는 안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나를 신비의 세계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2. 우리 민족도 토템들이 적지 않다 예전에 나는 줄곧 한개 민족은 하나의 토템만 가진것으로 여겼다. 염황후손으로 자칭하는 한족은 룡을 토템으로, 단군을 모시는 우리 민족은 곰할머니를 토템으로 숭배한다는것만 알고있었다. 토템에 대한 나의 천박한 지식은 학문에 대한 나의 수양도 문제가 되지만 실상 이 면에 관심을 갖고 유관자료를 찾을래야 찾을 길이 없었던것이 국한성이기도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이 개방정책을 실행하면서 서방철학가 사르트르, 레위스트로스, 프로이드, 도그라스, 풀레이세 등의 토템연구성과가 중국학자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였던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80년대 심지어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중국학자들이 펴낸 토템연구 저서들은 퍽이나 어설프고 미숙하였지만 그래도 그들의 연구성과를 참조하여 우리 민족의 토템물을 찾는데는 큰 도움이 되였다. 안타까웠던것은 그때도 그랬거니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토템저서는 공백이란 점이다. 어쨌든 우리 민족의 토템을 찾는것은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는 중요한 일이였기에 나는 소수민족의 토템, 그리고 세계 여러 민족의 토템물을 돌아보면서 우리 민족 시조탄생신화에서 우리 민족의 토템을 하나하나 찾아내였다. 지금에 와서 중국 권위학자들의 심도있는 토템연구저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찾아낸 우리 민족의 토템이 틀리지 않았다는것이 립증되여 마음이 놓인다. 1996년에 발행된 중국의 권위학자 리병해박사의 고대부족문화연구 저서에서는 부여족의 후예인 고구려 시조 주몽의 탄생 신화를 론하면서 고구려는 태초에 새토템, 태양토템으로부터 후에 또 닭, 양, 소, 말 등 육축토템까지 분화되였다고 자상하게 서술하였다. 오직 원시인들의 원초적인 사유방식에 준하여 조상들의 탄생이 천체, 동물, 식물과의 혈연관계, 친족관계가 밝혀진다면 우리는 곧 토템을 찾은것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하늘신을 상징, 아름다운 녀인이 된 웅녀, 단군왕검의 출생과 관계가 있는 신단수, 신라시조신화에서 박혁거세를 탄생시킨 백마, 왕비 알영을 낳은 계룡 또한 사소왕녀가 박혁거세와 알영을 탄생할 때 큰 도움을 주었던 솔개, 신라 석탈해와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까치, 미추왕의 조상 김알지의 탄생과 관계가 있는 닭, 고려시조전설에서 왕건의 조상 호경을 구해준 호랑이, 호경산신의 아들 강충, 강충의 증손자 작제건의 안해는 룡왕의 딸 룡녀, 아달라왕 때 영호랑과 오세녀부부는 해와 달의 정(精)인 일월신…. 신비한 신화의 표현을 보면 우리의 조상은 하늘이 내려주었고 생명, 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연과의 조화로 탄생하였으며 형형색색의 다종다양한 생명형식을 소통하여 모든 생명형식이 서로 친족관계가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우리 민족도 족조발상신화가 풍부한 민족이며 씨족이나 부족의 토템 또한 다종다양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3. 토템은 과거뿐이 아닌 오늘과 미래 현대에 와서 많은 철학대가들이 토템에 관심을 돌리는것은 토템이 현실사회와 미래지향성에 자못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있기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정신분석을 통해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지울수 없는 옛날 토템의 력사흔적이 남아있다고 하였고, 레위스트로스는 가장 현대적인 과학정신조차 토템식 원시적 사유원칙을 “합법화하고 또 그 권력을 회복”하는데 유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 4월 15일에 세상을 고별한 사르트르는 림종 직전에 이란 문장으로 상고시대의 토템관념을 극찬하면서 토템식 형제관계의 관념으로 현실을 재조명하여 현대인의 생활의 새로운 질서를 재건함으로써 “매개인이 모두 사람이 되게”하는 목표에 이르기를 갈망하였다. 대가들의 연구성과는 나로 하여금 토템신화는 그저 꾸며낸 허황한 이야기라는 무지몽매에서 뛰쳐나오게 하였으며 이것이야말로 과학이나 력사가 제시 못하는 사실 즉 가장 근원적인 진실이라는것을 알았으며 토템숭배가 형성한 민족문화원형이 민족문화의 력사적 발전에서 일으키는 영구한 의의를 보았고 민족문화심리의 심층구조로서의 원시적 침적층이 현대문명건설에서 일으키는 활성과 자양분 역할을 보았다. 그래서 내가 토템신화를 시에 도입한것은 토템의 영원한 가치원소를 환기하여 초기 인간의 아름다움과 착함에 대한 관념을 현실에 융합시키며 토템숭배의 풍만한 생명력이 현실적의의를 가지게 함으로써 잃어버린것을 다시 회복시키고 다시 주조하여 민족문화정신의 성장과 발전을 추진시키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토템시를 통해 우선 내가 찬미하고 싶었던것은 천인합일체(天人合一體)인 우리 조상의 숭고한 품성과 정신이다. 긴긴 세월 엉기엉기 걸어오다가 / 컴컴하고 적막한 동굴 속엔 왜 들었누? / 쓰고 떫은 약쑥 신물나게 맛보고 / 맵고 알알한 마늘 몸서리나게 씹을제 / 별을 눈으로 / 달을 불로 / 이슬을 피로 받아 / 아릿답고 날씬한 웅녀로 변해 / 이 세상인간들의 시조모 되였느니라 …… 끓는 피와 담즙을 젖으로 / 무던한 성미와 도량을 풍채로 / 끈질긴 의지와 강기를 뼈대로 / 날카론 발톱마저 도끼와 활촉 삼아 / 한숨도 구걸도 없이 / 길 아닌 길을 찾아 / 첩첩 천험도 꿰뚫고 나갔더라 「곰」에서 의식적인 생명진화과정, 민족의 영광스런 생명의 해돋이 그리고 그 심리, 성격, 령혼의 발생을 통해 우리 민족은 덕성과 심신의 수련을 거쳐 순결하고 선량하고 수양 있는 민족, 하늘의 뭇별을 한눈에 받아들이고 마음에 우주를 품어 안는 흉금이 드넓은 민족, 천성적으로 진보와 정복을 추구할 뿐더러 완강하고 견인하고 백절불굴의 의지를 지닌 민족이라는 것을 현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민족토템관념의 원천에서 현실과 연결고리를 찾아 옛날, 오늘, 미래를 다채로운 인생화폭에 조화롭게 응결시켜 인간의 본성이란 높이에서 민족의 넋을 다시 주조하고 새 우주를 이룩하는데 모를 박았다. 첫째, 도덕가치에 대한 토템묘사에서 착함을 구가하여 순결하고 선량한 인간성의 본연을 환기. 지금의 인류사회는 과학기술이 날로 발전하지만 사람들의 도덕은 날로 쇠퇴하여 사람들이 갈수록 자아를 상실하고있는 현실이 심각하다. 이런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가치 있는 전통적 도덕관념을 제창하지 않을수 없다. 한 것은 이런 전통관념은 자체의 영구한 생명력으로 자연스럽게 현대화 미래에로 진입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있기때문이다. 바로 이런 리해에 근거하여 나는 토템숭배에서 인성의 본연을 끄집어내여 도덕적 진리에로 나아가는 언어로 승화시켰다. 침묵해야 할데는 침묵하고 참고 견디여야 할데는 참고 견디는〈흙〉, 화를 받고 오해를 받으면서도 선행에 집착하는 〈까마귀〉, 인간의 평화와 복지를 영위하기 위한 존재인 〈범〉, 집안 사람까지 다투지 말라는〈뻐꾹새〉 등은 모두 깨우침의 상징이다. 둘째, 륜리환경에 대한 조명으로 토템묘사에서 생명의 경난과 고통을 묘사하여 정의와 동정과 우애와 호조의 정신을 환기. 오늘날 사람들에게 결여한 것은 바로 민족 유년기시기의 박애와 정과 호조정신이다. 우리는 물론 인간세상에는 아직도 진정이 있다고 말할수 있으나 민족의 유년기에 비하면 그 말은 반디불을 밝은 달에 비기는데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토템묘사로 심령의 량지(良知)를 부르고 정의와 동정을 부르고 화목과 온기를 불렀다. 〈인간〉에 대한 〈힘껏 도움〉이 오히려 〈인간〉의 질투와 배척을 당하고 인애(仁愛)와 선량은 도리어 랭혹과 증오를 초래한 〈고래〉, 괴로움도 쓰라림도 답답함도 속시원히 터놓을 곳 없는 〈거북〉, 인간세상의 〈가장 잔혹한 무게〉,〈가장 잔인한 질식〉에 매몰되여 눈과 입이 봉해진 〈개구리〉는 우리에게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상징물이고 〈산〉은 인간세상에서 소외되고 배척받았으나 자신의 힘으로 환경을 개변하고 화목과 온기를 창조하는 덕행 높은 형상이다. 셋째, 인생의 의의에 대한 사고로 토템묘사에서 사심 없는 헌신정신을 찬송하여 인간활동의 진실한 가치를 환기. 도덕관념의 위기는 필연코 가치판단과 가치선택의 오류를 가져오게 되여 인간의 정신적 결함과 실책을 조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이화〉하는 환경을 창조해 낼수 있다면 이런 환경을 성공적으로 개조할수도 있어 이화현상을 제지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관념과 신념으로 나는 인생의 가치방향과 가치원칙을 내세워 인간의 진실한 가치를 가송하고 인생의 진정한 의의를 웨쳤다. 꾸준하게 일하고 사심 없이 봉헌하는 〈황소〉, 생명이 훼멸될 위험이 기다려도 격정 가득히 정의를 위해 주저 없이 앞으로 달리는〈사슴〉, 굶주림과 추위는 자기에게 남겨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는〈양〉은 봉헌정신의 상징이다. 넷째, 민족과 인류의 희망에 대한 열렬한 추구로 토템묘사에서 원시적 력도감을 전시하여 창업의 원대한 포부, 격정, 힘을 환기. 토템숭배의 중요한 가치의 하나가 바로 작렬하는 격정, 놀라운 용감성, 무비의 견인성, 두려움 없는 모험성, 빼여난 상상력과 암흑을 물리치는 광명의 수호신이자 희망의 사신인 〈사자〉, 리상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백마〉, 목표를 향해 번개나 우뢰와 같이 돌진하는〈솔개〉등은 모두 미래를 향한 상징물이다. 둔재인 내가 분에 넘치는 일을 시도한 탓으로 12, 3년이란 시간을 거쳐서야 비로소 31수의 토템시를 세상에 내놓았다. 문단의 인정으로 수확의 기쁨도 있지만 채 못 완성한 토템시 때문에 줄곧 골머리를 짜고있는것이 또한 나의 사정이기도 하다. 1999년 4월 18일 장춘에서
1442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위상(자료) 댓글:  조회:5128  추천:0  2015-09-07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위상         /들우물  ◈ 이 글은 2000년 5월 26일, 중국 연길시 대우호텔에서 가졌던 문학세미나  주제 발표문이다.   1. 들어가는 말  솔직히 말해, 나는 중국 조선족 시문학의 위상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한국 문단사회에서야 문단데뷰 이래 현재까지 15년 동안 시 창작과 문학평론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그동안 중국 조선족 시문학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거나 어떤 구체적인 연구 노력을 기울여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찌기, 한국의 여러 문학 단체에서 주관하는 문학행사를 통해 중국을 방문할 기회가 여러 차례 주어졌었지만 그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격을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해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난 1998년 2월부로 격월간 문학 종합지 「동방문학」을 창간, 발행해 오면서 중국 조선족 문학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던 중 한춘․장지민․장정일․정세봉․석화 씨 등 몇몇 문학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허련순․류순호 씨 외 몇몇 시인․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작은 만남이 계기가 되어 문학 세미나를 함께 하는, 적극적인 문학 교류 차원의 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또 동족의 일원으로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동시에 동포로서의 이해와 사랑을 전제로 하는 화합과 대동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희망도 갖게 되었다.  특히, 중국 조선족 시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약 3개월 동안에 걸쳐 월간 「연변문학」 11권(1999년 1월호부터 11월호까지)과 대표시인선집인 듯한 합동시집의 일부(21명의 110편), 그리고 격월간 「장백산」 1권(1999년 2월호)과 개인 시집 등을 통하여 전체 73명의 시인 작품 580여 편1) 정도를 정독했다는 사실이 그나마 이 글을 쓰는 데에 용기가 되어 주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 조국광복(1945. 8. 15) 전에 태어난 시인군  우리 한민족(韓民族)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곧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기(1910~1945)일 것이다. 이 시기를 청․장년기로 살던 우리 선대(先代)가 가장 고생을 많이 했을 터이고, 그 다음이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슴 속에 ꡐ바위ꡑ(리 욱, 1935년 작) 같은 응어리를 품고 살았으며, 동시에 새로운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을 안고 조국을 떠나 멀리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로 유랑하여 정착하기까지 갖은 고초를 겪었으리라.  굶주린 창자  헐벗은 알몸들  지금 엄동설한 이 삼경에  누구의 집 모퉁이에서 지낼가  없나?  누가 그들에게  따스한 물 한모금  김나는 밥 한숟갈  그들에게 줄 사람  없는가, 없는가……  모대기다 못해  급기야 기한에 지는  한 맺힌 이슬  누구 탓일가?  누구 탓일가?  이 밤이  왜 이다지 찰고?  아,  왜 이다지 찰고……  ■ 설인의 작품 「한야에」 전문, 1940년 작  오늘도 끝없이  울부짖는 소리 들었나니  언제나  가시 덤불속에서  아득한 지평선 너머의  아름다운 신화를 찾는  순례자의 발끝에  피방울이 맺힌  서글픈 소식  ■ 설인의 작품 「소식」 전문, 1942년 작  먼 지평선에 가뭇없이 사라진  두가닥 수레길은  벌겋게 입을 벌린  황야의 어두운 추억  젊음이 주름살에 옥매인  홀로 난 어머니의  기박한 운명을 끌고 가던  달구지의 그 삐걱소리  울어서 실성하던 산  얼어서 그만 굳어진 하늘  내 더벅머리우에 떨어지던  오, 불쌍한 어머니의 눈물……  세월은 가고  겨울뒤끝에 봄은 오고  벌판 저 끝 어딘가서  생명의 파란 곡선이  수레길을 지우며 조용히 오건만  내 서러운 가슴속에  멀리 뻗어간 두가닥 수레길엔  달구지의 그 삐걱소리  오늘도 깊이깊이 패여온다.  ■ 임효원의 작품 「황야의 추억」 전문  앞의 두 편은 1940년과 1942년에 창작된 설인의 작품이다. 일본인들의 칼날(가시덤불)과 가난을 피해 살고 싶어도(아름다운 신화를 찾는) 살 수 없었던 절망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시적화자(話者)는 같은 상황에 있지는 않지만 당시 우리 선대(先代)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비유적인 표현으로 고발하고 있다.  뒤의 작품은 임효원의 「황야의 추억」 전문으로 시적화자인 ꡐ내ꡑ가 어머니와 함께 꿈(봄)을 찾아 달구지를 끌고 어디론가 가야했던, 어린 시절의 눈물어린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나보다도 어머니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는데, ꡐ어머니의 기구한 운명ꡑ이란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는 역시 배고픔과 추위이지만 그 진실은 ꡐ황야의 어두움ꡑ과 ꡐ내 서러운 가슴 속ꡑ에 숨어 있다.  위에 거명한 시인들은 1907년으로부터 1944년도 사이에 중국․한국․일본․러시아 등에서 태어나 중국 대륙에 정착한 세대로, 일제 강점기를 유아기로만, 혹은 아동기까지, 혹은 청소년기까지, 혹은 청년기까지 보내야 했던 세대다. 따라서 이들의 부모세대보다는 고생을 덜했다고 판단되지만 역시 당대의 가난과 문화 풍속이 다른 중국이라는 나라의 낯선 사회제도에 의해 양육되고, 적응해야 했던 시련과 고통을 감당해내야만 했으리라.  그러나, 조국이 해방되고 나서 50년이란 긴 세월이 이미 흘렀고, 중국을 구성하는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아 오면서 이들은 과거의 아픈 역사에 집착할 수만도 없었다. 가난과 적응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고, 미래 사회에 대한 꿈을 또한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ꡐ새 화원ꡑ(리 욱, 1940년 작)에 꽃씨를 뿌려야 했고, 땅속 깊이 뿌리박은 ꡐ질경이ꡑ(임효원, 1956년 작)처럼 억세게, 그리고 무성하게 자라나야 했다. 그러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는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이 터지고, 자의든 타의든 전쟁터에 나아가 싸워야 했다.(김철의 「통행금지」, 「생의 노래」 등) 그리고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그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죽어야 했던가를 뼈 아프게 반성하면서(임효원의 「아, 민들레……」, 1979년 작) 남북이 분단된 채 오늘날까지도 적대시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김철의 「동강난 지도 앞에서」 1989년 작) 또 그러면서 역사의식이 싹트게 되었으리라.(설인의 「호태왕비」 1995년 작)  이들은, 줄곧 80년대 중후반까지 북한과 교류하면서 우리 말과 우리 글로 문학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한족(漢族)의 문화로 흡수되지 않고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정체성이 강한 자치주를 형성해 올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중국과 한국의 수교로 오늘날은 남한의 문학인들과 교류를 보다 왕성히 하면서 어느 정도는 남과 북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 자신의 뿌리도 의식하게 되면서 비로소 마음 속의 고향인 조국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한민족의 대동단결과 화합을,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고 모색하는 새로운 바람이 일기도 했다.  오, 고향의 언덕 마음의 탑아  너는 말없이 내 가슴에 솟아있고  나는 네 혈관을 흐르는 한방울 피  너로 하여 내 가슴은 언제나 끓고 있다.  ■ 김성휘의 작품 「고향의 언덕 마음의 탑」 제11연  고향이 고향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그런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하고 나의 어머니를 있게 했던 우리의 뿌리로서의 고향이다.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선대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살던 곳, 바로 내 마음 속에나 있는 고향이고, 내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은 생명 그 자체로서의 고향이다.  병든 마음  무서운 설음  바람에 덜라  들국화 곱게 웃는  저 벌로 산으로  해의 문안을 가자  남에서 북으로  서에서 동으로  거침없이 부는 바람  가시를 뽑으며  가슴을 헤치고  바람타고 가자  바람타고 오자  동서남북 하나로 일어나  백두의 존엄을 안고  동해의 기량을 보이며  갈매기도 가자  수리개도 가자  두 날개 한 몸뚱이  흰옷 입은 사람아  떳떳이 떳떳이  하나로 가자.  ■ 김성휘의 작품 「하나로 가자」 전문  우리는 비록 남북이 갈라져 있고, 또 중국에, 일본에, 러시아에, 저 남미에,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지만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서 똘똘 뭉쳐 하나로, 당당하게 살자는 것이다.  조국이란  내 잠들었을 때에도  후둑후둑 뛰는 내 심방 가까이에 앉아  맥박을 세여보는 보모입니다.  ■ 김성휘의 작품 「조국, 나의 영원한 보모」 제1연  이처럼 ꡐ고향ꡑ에 대해 눈을 뜸으로써, 바꿔 말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 의식하면서 ꡐ조국ꡑ이 나를 키워주고, 지켜주는 보모로서 다가오는 것이리라. 허룡구의 「먼동」, 리임원의 「동해바다」 등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물론, 같은 세대라 해서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니다. 주의․주장이 다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이들 가운데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느끼는 생활정서를 중심으로 노래하는 시인들(강효삼․김문회․한춘)도 있고, 자연적 요소나 현상을 통해서 인간 삶의 지혜나 진리 혹은 아름다움을 유추해 내는 시인들(김응준․리삼월․리상각)도 있다. 또한 인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노래하는 시인(김태갑)도 있고, ꡐ대중적 정서ꡑ 읽기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시인(석화)도 있고, 대자연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김경석)도 있고, 인간 존재나 현실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보이되 사유세계 속의 주관적 언어표현을 즐기는(?) 시인(박화․한춘)들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3. 조국광복 후에 태어난 시인군  1945년 이후에 출생한 세대는 그 앞 세대보다는 고생을 덜했음에 틀림없다.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크게 방황하지도 않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직접적인 압제와 수탈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생이 있었다면, 5, 6, 70년대의 가난과 중국내 정치 사상적 변화와 함께 ꡐ적응ꡑ해야 했던 시행착오와 그 시련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80년대 전까지 비교적 제한된 국가들과만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과 허탈감을 크게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환경상의 여건 때문인지 조선족 시인들은 자국내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을 소재로 취하여 시를 쓰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앞 세대들이 가졌던 역사나 뿌리 의식이 또한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일상 생활속에서 부딪치고 경험해야 하는 데에서 갖게 되는 개인의 솔직한 느낌이나 감정, 생각이나 사상 등을 드러내는 시들이 흔치 않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 문제를 비판하거나 간접적으로 풍자하는 작품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한소리의 「고무풍선」 「자멸」 「방황」이라든가, 리송주의 「멀고도 가까운 별」이라든가, 전홍일의 「온실효과」 「참새들」 「시골의 설」 등은 그 내용과 표현 방법면에서 미숙하긴 하나 사회비판의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개는 천편 일률적으로 자연현상이나 그 구성물에 대한 외양묘사나 감정이법으로 사회적 목적성을 띠는 객관화된 인간 삶의 유형을 환기시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시인들이 점점 솔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를 쓰는 근본 목적과 관련된 문제인데, 이해하기 쉽게 빗대어 말하면, 지금 붓나무를 소재로 시를 쓴다 할 때 붓나무의 모양새나 빛깔 그 밖에 생태학적 특징 등을 중심으로 묘사하기 마련인데, 이 때 붓나무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어떤 특성 자체를 들어낼 목적은 결코 아닐 것이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라면 ꡐ식물학ꡑ이라는 과학에서나 해야 할 일이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시를 쓰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끌어들여진 대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 시들이 대체로 어떤 대상 자체를 표현 목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다면 오늘날의 시들은 그 대상들을 통해서 다름아닌 시인 자신의 주관적 정서를 드러내고, 또 그럼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적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속으로 끌어들여지는 다양한 대상들은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잠시 빌려 쓰이는 것인데, 이런 현상이 ­바꿔 말해, 시를 쓰는 근본 목적이 어떤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위한다는 시각과 태도 변화가­ 6, 70년대 출생한 김경희․허련화․리해룡․김충 등 적지 아니한 젊은 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일광산 봄 푸를 때  강건너 높은 산 불타오르데  두만강 물에 나래 적셔  저 불 사그릴  큰 새는 없는가?  내 사랑 토끼와 사슴들이여  내 마음 무성한 숲에 몸을 숨겨라  아, 진달래 스러진 산  산은 타도 여름은 오려나  끌 수 없다면  차라리 불산이 되거라  저 불길 어느새 옮았는가  나도 뜨겁게 불타고 있네  ■ 허련화의 작품 「산불」 전문  위 작품에서, 강건너 높은 산이 불타오른다는 말이 진달래 꽃이 만발하여 이루어진 붉은 물결을 빗댄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봄에 산불이 난 것인지 모호하게 표현되고 있다. 물론, 시제와 앞뒤 문맥상으로는 후자일 것이라는 판단이 앞서지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산불을 소재로 하여 시를 썼지만 결국은 시적 화자인 시인 자신의 몸속에서 일고 있는 불, 곧 넓은 의미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체내의 생화학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애욕인지 아니면 어떤 목표 달성에 대한 의욕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이처럼, 산불이라는 자연현상이 시적 표현의 대상이 되더라도 그것은 결국 시인 자신을 드러내는 종속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시작(詩作)에 있어 그만큼 시인 자신 곧 인간을 우선시 여긴다는 증거다. 바꿔 말해, 대상을 위해 시를 쓰는 것이 아니고 시인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을 위해 쓴다는 사실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시인들의 시적 관심이 인간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겠다. 또 그것은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적 여건의 변화, 곧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환경의 변화와 함께 시인의 관심․미의식․언어 등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 다른 하나의 희망은, 다양한 형식 실험과 함께 다양한 주제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시가 꼭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묘사하고, 또 그것과 관련해서 시인이 갖는 감정과 사상을 정서적이고 음악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다양하게 바뀔 뿐 아니라 그것을 담아내는 방식 또한 여러가지 형태로 시도되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해, 달, 흙, 곰 등과 같이 대자연을 구성하는 대상들이 저마다 정령을 가지고 있고, 그들간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호흡함으로써 생명현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물활론적(物活論的) 사고를 바탕으로 해서 시를 쓰고 있는 남영전의 ꡐ토템ꡑ시라든가, 다양한 꽃들의 모양과 빛깔과 생태학적 특징들과 관련하여 인간의 삶이나 존재를 유추해 내는 리해룡의 꽃 연작시라든가,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특정 이야기를 구성해 냄으로써 시에 재미라는 기능을 배가시키고 있는 김성우의 산문시라든가, 일상생활 속에서 직간접으로 경험하는, 또는 의식되는 사유세계의 단편들을 그대로 진술하는 박화의 모더니티 등이 그것이다.  물론, 세계의 시가 실험, 실습되고 있는 한국 현대시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고려한다면 미미하기 짝이 없지만 이런 실험적인 노력이 진지하게 지속되는 과정에서 중국 조선족 시문학이 좀더 다양하고 좀더 풍성하게 발전해 나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4. 나오는 말  90여 명 내외가 되는 중국 조선족 시인들 가운데에서 일부 시인의 일부 작품을 읽고 시문학의 위상이나 그 성격을 운운하는 것은 극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인이란 개인의 사사로운 느낌이나 감정, 생각이나 사상 등을 정서적이고 함축적이고 음악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한다 해서 모두가 시인인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그저 시 몇 편, 시 비슷한 글 몇 십 편 썼다해서 시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적어도 시인이란, 인간의 본질과 그 인간들이 엮어가는 사회와, 그리고 인간의 삶(생명)과 그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과, 그것들이 어우러진 세계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그 눈에 비쳐진 진실을 자신의 감정이 배인 정서적이고 함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표현해 내는 일과 관련하여 일정한 질서와 수준을 갖추어야 한다. 바로 그랬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한 시인의 탄생과 그 존재를 기억하고, 그를 우러러 보는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시인이란 그리 많을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73명의 작품 580여 편을 읽으면서 이들이 공유하는 정신적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소재이자 제재가 되기도 하는 단어(key word)를 10개 정도로 정리한다면 이렇다. 곧, ①그리움 ②고향 ③조국 ④별 ⑤달 ⑥산 ⑦강 ⑧나무 ⑨바람 ⑩바위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요 단어들로 시를 짓고 있는 시인들의 정서를 색깔로 친다면 두루미나 백학으로 대표되는 흰색일 것이고, 계절로 친다면 생명력이 약동하기 시작하는 봄일 것이다.  표현 수단은 한글이지만 조국이 해방되면서 중국내 조선족으로서 정착, 30여 년 동안 줄곧 북한과 교류해 왔기 때문에 북한의 언어와 가깝다. 그리고 80년대 개방화 물결에 따라 그 후 15여 년 동안은 남한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해오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런 탓인지 그들은 남한이나 북한의 시문학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시문학을 다듬어 가고 있다 할 것이다. 인구 200만 가운데 시인 90여 명이 중국 조선족 시문학이란 나무를 가꾸어 오고 있는 셈인데2), 50년이란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중국의 정치 체제와 관련, 극히 제한적인 교류와 감시의 눈 탓으로 흐른 세월에 비하면 그 나무가지와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나진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동안의 중국만의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한다면 그 시문학이라는 나무를 키워올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시인들의 각고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시문학은 인간의 주관적인 정서를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예술형태이므로 대사회적 대인간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또한 적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뿌리 깊고, 잎 무성하고, 열매 또한 상큼한 우람한 나무로 키워 나가아야 할 것이다.  이 일을 돕기 위해 굳이 한 가지만 조언한다면, 모방이나 흉내내기가 시문학에서의 능력이고 진실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모방은 어디까지나 습작기에 있을 수 있는 과정일 뿐이지 그 자체가 목표이어서는 안 된다.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과 향기와 열매를 위해 충분히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하면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영양분도 공급해 주어야 함에 틀림없지만, 철저하게 내가 서 있는 토양과 그 기후에 잘 자랄 수 있는 수종(樹種)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  1) 필자가 읽은 중국 조선족 시인 명단---  리 욱․임효원․설 인․김 철․김성휘․리삼월․리상각․김경석  김응준․김태갑․허룡구․박 화․김문회․김동진․남영전․리성비  석 화․리임원․주성화․신현철․박설매․김응룡․리근영․리해룡  마송학․최진성․리 중․박성훈․김 충․남철심․김 욱․허련화  전홍일․강효삼․윤청남․김경희․남상수․허창열․김창영․리 복  박천교․박은호․정 철․김동석․한 춘․채택룡․황장석․전경업  최정수․김기덕․리범수․김철호․한소리․김영수․김해룡․신창수  현규동․전광훈․황춘옥․김승종․양용철․리동권․리송주․한수봉  한동해․한석윤․김성우․류전영․황령향․장련춘․림 철․심정호  송정환 외(이상 73명의 580편)  2) 월간 「연변문학」 1999년 1월호에 실린 중국 조선족 문학인 주소록에 의하면 전체 문학인 375명 가운데 시인이 약 90명 내외가 되지 않을까 추산된다. 그 근거로는 연변지구에만 268명의 문학인 가운데 24%인 64명이 시인임을 감안한다면 나머지 북경․흑룡강․료녕․길림․장춘․통화 지구도 같거나 비슷하다고 전제,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26명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 명단에는 작고한 문인도 몇 분 포함되어 있고, 필자가 이미 읽었지만 현재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은 흑룡강 신문 지상에 발표된 상당수의 시작품 등은 포함시키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하면 73명 580편이란 숫자는 편의상의 숫자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연변작가협회는, 金浩根씨에 의하면 2000년 4월 현재, 505명의 회원에 87명의 이사, 주석 1명, 상무 부주석 1명, 겸직 부주석 11명으로 구성되었다 함. 
1441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 - 리욱 댓글:  조회:5004  추천:0  2015-09-07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 리욱   시인 리욱(1907-1984)은 중국 조선족문학 정초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 조선족문학의 첫 페지를 열어 중국 조선족문학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한 저명한 시인이다.   생애: 리욱 (李旭 원명; 리장원 李章源)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일찍 중국 길림성 화룡현 강장동 일대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생활난으로 이리저리 떠돌며 러시아 원동지역에 까지 흘러갔다가 리욱이 3 살 나던 해인 1910년 봄,다시 중국 길림성 화룡현 로과향 서호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리욱의 할아버지는 원근에 이름이 높은 한학자로서 마을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꾸렸는데 리욱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천자문》과 《소학》 및 한시를 공부하였다.   리욱은 1923년 4월 룡정 동흥중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훈춘 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농촌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처녀작 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또 지역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시 《눈》, 《봄비》, 《죄수》, 《분노의 노래》, 소설《파경(破鏡)》을 쓰고 일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서호촌 마을에 돌아와 1935년까지 농사도 짓고 서당도 꾸리고 마을의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문학공부에 정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시 창작도 일약 전성기에 진입하였는데 초기 시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완성되였다.   이 시기 그는 시《님 찾는 마음》(1930), 《송년사》(1935), 《북두성》(1937), 《금붕어》(1939), 《모아산》(1939), 《새 화원》(1940)등을 창작하여 신문 《만선일보》, 잡지《조광》, 《조선지광》등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학성(鶴城), 월촌(月村), 홍엽(紅葉), 단림(丹林),산금(汕琴), 월파(月波)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리욱은 1936년 《조선일보》 간도특파기자가 되였고 일제에 의해 1940년 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폐간되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1942년 그는 리학성(李鶴城)이라는 이름으로 연길에서 간도와 만주지역 시인들의 합동시집 《재만시인선》을 편찬하여 발간하였으며 김조규가 편집한 종합시집《재만조선인시집》에 리학성의 이름으로 시 《나의 노래》, 《철쭉화》, 《오월》,《락엽》, 《별》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고향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자기의 필명을 다시 “해 뜨는 모양”, “득의(得意)한 모양”의 “아침 해 욱(旭)”으로 바꾸고 새로운 시대의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銅喇)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연길중소한문회협회》 문화국장 등 직을 맡으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동북군정대학에 다녔고 1947년 첫 서정시집《북두성》 간행하였다. 1948년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길 《대중》잡지 주필 겸 연변도서관 관장을 맡았으며1949년 두 번째 서정시집 《북륜의 서정》을 간행하였다.   리욱은 1951년부터 연변대학에서 《세계문학사》를 강의하면서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문학의 후대양성에 일생을 다하였다.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57년 시집 《고향사람들》(북경 민족출판사), 장시《연변의 노래(한문)》(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고 1959년 시집《장백산하》(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중국에서의 “10년 대 동란”으로 일컫는 문화대혁명 기간 시인 리욱은 《반동문인》, 《반동학술권위》등으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80년 칠십 고령에 이른 시인은 자신이 일생동안 진행해온 시창작의 정수를 모아《리욱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엮었다.   1982년 장편서사시《풍운기(1부)》 발표하였고 이 작품 제2부의 집필 중 1984년 2월 26일 뇌익혈이 발생하여 향년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추도식은 전례 없이 장중한 규모로 연변대학 대강당에서 진행되었으며 1988년 7월 25일 시인의 탄신 81돐을 기념하여 시인이 세 살 때 강보에 쌓여 두만강을 넘어온 화룡 로과 호곡령 산상에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리욱시문학의 작품세계: 시인 리욱은 1924년에 처녀작인 서정시《생명의 례물》을 내놓은 때로부터 시가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기, 특히 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태를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가 내놓은 주요 작품으로는 《금붕어》(1936년), 《철촉화》(1942년), 《새 화원》(1942년), 《모아산》(1944년), 《오월의 붉은 맘씨》(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서정시가 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시편에서는 질곡적인 암흑사회를 혐오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진리를 추구하여 마지않는 시인의 미학적 열망을 구김 없이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시 《금붕어》에서 리욱은 일제 통치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의 의지와 리상을 간곡히 표출하고 있다. 이 시편에서의 금붕어는 시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닫혀있음과 열려있음의 이항대립구조를 설정하여 어항에 갇힌 금붕어의 이미지와 무한한 자유를 표상하는 넓은 바다의 이미지의 대립으로 식민지치하의 젊은 지식인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있다. 금붕어는 항시 자유 없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달가워하지 않고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붉은 산호림”을 “까만 안공에 불을 켜고” 애타게 찾고 있다. 대해 속에서의 “붉은 산호림” 그것은 시인이 못내 동경하던 자유로운 리상의 동산을 상징한 것이다.   1940년대에 들어선 후 그같이 암흑한 현실 하에서도 줄곧 시 창작에 힘써 서정시 《철촉화》와 《새 화원》 등을 창작한데 이어 또한 《모아산》과 같은 역작을 내놓았다. 1944년 이른 봄에 쓴 서정시 《모아산》에서 시인은 모아산을 “대지의 정열을 안은” 창세기의 “위대한 거인”으로 형상화하면서 격정에 넘쳐 “네 머리 위에 해와 달이 흘러흘러/ 쌓은 정 녹아 터지는 날은/ 자유의 깃발이 날리리니”하고 사무치게 고대하였다. 이렇게 미래의 밝은 전망을 펼쳐 보이고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모아산을 종래로 “굴한 일 없”는 조선족반일투사의 강인한 투쟁정신의 상징으로 승리의 깃발로 찬송하고 있다. 그의 이런 시적 사상과 미학적 추구는 항일전쟁승리전야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지고 명랑하여졌다. 시《북두성》은 광복 바로전야인 1944년에 쓴 작품으로서 시인의 이 시기 창작풍모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시《북두성》에서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길로 멀리 하늘에서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암울한 시대는 조만간에 지나가고 대지에 새봄이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위와 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이 시는 다소 표현에 있어 모호하고 추상적인 부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호방한 낭만시로서 시인의 신념을 충실하게 드러낸 시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매로 멀리 하늘가에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정겹게 헤아리며 새봄은 꼭 오리라는 굳은 신념에 잠기며 다가올 승리에 무한히 고무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이 서정시의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유의 려명이 곧 돌아오며 그 미래는 우리의 것이란것을 확신하고 있는것이다.시인은 일찍 이 시에 담은 시적경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머나먼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 별들을 헤아리고 있노라니 나도 그 별들과 함께 빛나며 별무리들이 북두성을 향해 반짝이듯이 느껴졌다. 이 경상은 나에게 피눈물 겨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누렇게 말라빠진 대지에는 봄이 올 날이 있음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새벽이 올 것이다’, ‘내일은 우리 것이다’라고 소리 높이 외쳤다”   이와 같이 이 시기 리욱의 시작품은 호방하고 우미한 랑만적 색채를 보이며 주로 은유적 수법을 애용하면서 잠재의식에 의한 형상적 표현들을 많이 보이고있다. 또한 그의 서정시들은 광명한 미래를 동경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직도 몽롱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흐르고 있는 약점도 발로 시켰다.   1945년 “8․15”광복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등 력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리욱의 시세계도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민족의 일제에 의한 압제와 굴욕에서부터의 해방을 그는 중국공산당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특히 백여년간 이 땅을 개척하고 가꾸어 온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새 생활의 희망을 열어준 새로운 중국과 중국공산당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1949년 1월에 간행한 그의 두 번째 시집《북륜의 서정》 서문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시대의 행정에 력사의 지표가 뚜렷이 서서 나의 전진을 재촉하매 나는 고스란히 이 땅의 선구자의 발자국을 더듬어 나가며 인민과 조국에의 충성을 피로써 다할 것을 진정으로 고백한다.”   따라서 이 시기 시인의 작품주제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찬미에 바쳐지게 되었다. 1956년에 쓴 서정시《해란강의 봄철》, 1963년에 쓴 《사랑하는 고향으로 오라!》, 《정월담》 등 작품은 모두 상기 주제를 담고 있다.   시인 리욱은 또한 이와 같은 민족적 해방과 인민들의 새 생활은 모두가 수십년간 백두밀림에서 모든 것 다 바쳐 일제와 싸운 항일투사들의 생명으로 바꿔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찬양을 아낌없이 토로하였다. 산문시《연변찬사》(1954년), 서정시 《유격대를 회억하며》(1959년), 《홍군전사의 묘》(1961년) 등 작품들이 바로 이 주제에 바쳐진 것들이다.   시인은 1957년에 창작한 시 《장백산》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성성한 백발을 날리면서도/ 가슴은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불길에 타서/ 항시 두 어깨에 칠색무지개를 걸고/ 목청을 돋구어 꽝꽝 대택을 울리”는 장백산의 거인적 형상을 빌어 자손만대의 행복을 위해 산을 주름잡아 달리며 싸워온 반일투사들의 빛나는 력사를 노래하면서 그들의 반일혁명전통이 어떻게 우리시대인민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원동력이 되는 가를 밝힌다.   그 천년수림 속에서 타오르던 화톳불이/ 오늘 우리의 힘으로 뻗히고/ 그 동서 봉우리에서 반짝이던 초병의 눈이/ 오늘 우리의 정신으로 빛난다네 ― 시 《장백산》 부분   이와 같이 거대한 상상의 힘과 웅건한 감정의 폭을 가지고 펼친 이 서정시의 심상은 력사와 반일혁명전통의 소재를 다룬 다른 시들에서도 감동적으로 표출되었다.   시인 리욱은 이외 다양한 시 형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작품의 내용과 예술성에서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어 내었는바 특히 율시, 절구, 사(詞) 등 한시(漢詩)는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시 《노시인》(1959년), 《독수리》(1960년), 《랑도사 도문강(浪淘沙 圖門江)》(1978년)와 1964년 훈춘에세 창작한 한시 작품 《고성(古城)》 등이 그의 한시대표작들이다. 이 시에서 묘사된 고성은 훈춘 중쏘국경에 있는데 해방전후 토비와 싸움이 여러차레 있었다.   고성의 절반 하늘 둘러 옛 풍진은 아득하구나   다섯번 진공한 요새요 세번 전승한 진지라네   천추에 밝은 달 창공에 걸렸고 만고에 의론 배 큰 강에 비꼈네   영웅 달리던 곳 물으니 멀리 큰 산봉을 가리키네   시인은 유고로 한시 108수가 수록된 한시집《협중시사(篋中詩詞)》를 남기였다. 그의 한시에 대해 연변대학 교수 김동훈은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라고 말하였고 한국 숭실대학 교수 조규익은 “리욱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 현대 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 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 재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시인 리욱은 또한 서사시, 서정서사시의 창작에서도 큰 업적을 남기었다.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1957년), 《고향사람들》(1957년), 서사시《풍운기(제1부)》(1982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그중 서정서사시 《고향사람들》은 바로 “간도” 의 조선족들이 일제와 맞받아 싸운 빛나는 력사를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삼득이”와 “정숙이”를 주인공으로 19세기말 이조 말 조정의 폭정과 자연재해로 수많은 이재민들이 북간도로 이주하고 이곳 청국 지주의 압박과 착취와 왜놈의 탄압과 만행으로 고역과 학대에 시달리게 되고 민족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르게 되자 각성한 인민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렇게 작품은 만강의 열정으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대를 노래하면서 민족전설을 빌어 반일유격대의 형상창조를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력사의 거시적 개괄과 항일유격대 형상 창조 그리고 기백 있고 세련된 시적 표현 및 생략과 함축, 비약의 수법 등 다양한 시적 표현방법을 동원하였고 민간전설의 생동한 도입과 호기로운 서정성의 발로 등으로 높은 사상, 예술적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리욱시문학의 예술특징 1) 그의 작품에서 력사제재에 대한 흥취가 각별하고 거인적 형상창조에 유능하며 격조가 높고 뜻이 깊고 서정이 짙고 낭만적 색채와 민족적 특색이 강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력사의식에 기초하여 조선족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돌리면서 일생동안 조선족인민들의 생활과 투쟁의 력사라는 기본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작품목록에서 우리는 민족의 력사에 바쳐진 작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서정시《옛말》은 기사년 흉년에 남녀로소가 쪽박차고 샛섬에 건너와 진대나무 속에 구틀막집 짓고 부대를 일구어 감자씨를 박던 개척초기생활을 쓰고 있으며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은 샛노랗게 익은 벼이삭이 소작인들의 눈물에 젖던 가을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서정시《장백산》, 《유격대를 회억하여》등은 반일투쟁과 유격대의 영웅적 모습을 담고 있으며 서정시《젊은 내외》,《석양의 농촌》, 《황소야》 등에서는 세기적 소원을 이뤄 토지 얻은 조선족농민들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서정시《배나무를 심으며》, 《배낭》, 《봄은 어디에 먼저 왔느냐》등 작품에서는 조선족인민들이 신근한 노동으로 새로운 생활을 건설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2) 리욱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심오한 사상과 낭만에 바탕을 둔 거인적 형상의 창조에 큰 성취를 이룩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시인은 예민한 감수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생활의 본질과 특징을 발견하고 심오한 철학적 진리와 숭고한 인민적 지향을 포착하여 거인적 형상을 창조하였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거인의 영웅적 형상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현상도 노상 거인적 형상으로 노래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반일투사의 형상창조에서도 장백산의 웅장한 자연을 배경으로 초인간적인 영웅성을 훌륭하게 부여하였다. 다음과 같은 작품 속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나래 돋힌 용마를 타고/ 고산대하를 주름잡아 넘나들며/ 머리위에/ 하늘이 쪼각쪼각 갈라지고/ 발밑에/ 구름이 실실 흩어지는” ―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에서   “변강의 천봉만학을 거느리고/ 창공에 우뚝 솟은 장백산” ― 서정시《장백산》에서   “천험의 골짜기/ 만고의 숲을 뚫고/ 몇 천만년을” ― 서정시《두만강》에서   시인의 이러한 “거인의 영웅적 형상창조”의 예술추구는 일찍 《모아산》(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초기작품에서부터 나타난다.   3) 선명한 민족적 색채가 작품에 두드러지게 표현됨을 지적할 수 있다. 리욱시인은 조선족인민들의 구전문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계승하고 발양하여 생동한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였다.   서정시《장백산》에서는 “달밤에 백호가 바위 위에서 울면 동해의 룡왕도 소스라쳐 깨여서는 거센 물결을 타고 헤매었다”는 구전설화를 작품 속에 이용하였고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는 “죽은 누나를 불러도 아니 오는 누나는 옛 둥지에 제비를 보냈다”는 전설을 인용하였다. 서정시《황소야》는 “별을 이고 나가고 달을 밟고 들어온다.”는 우리 민족의 속담과 숙어를 도입하여 조선족농민들의 근면한 노동생활을 형상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시어의 선택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어에 바탕을 둔 언어구사를 주로 택하였고 과정법과 비유법, 생략과 함축 등 다양한 표현수법의 사용하였으며 이로써 간결성을 이뤄내었다. 그의 시어는 또 대담한 함축과 생략이 특징적이며 조선족민요에 많이 사용되는 음조, 조흥구 등을 창조적으로 도입하여 시의 운치를 돋웠고 민족적 생활의 체취가 풍기는 고유어의 선택과 생활화된 민중언어의 사용에도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결론: 시인 리욱은 1924년 처녀작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여1984년 장편서사시《풍운기》 제2부의 집필 중 뇌익혈로 돌아가셨다. 향년77세였다. 이와 같이 시인은 70여년의 인생에서 옹근 60년간 진행한 시창작활동 전부를 중국 조선족시문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로서 시인 리욱의 작품은 우리문학연구의 소중한 텍스트가 되며 이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확하고 진실한 텍스트를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를 올바로 기록하는것과 함께 미래에 책임지는 과제와 겹쳐있다. 따라서 리욱시문학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우선 이와 같은 문제의 제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시사(示唆)한다.       리욱대표시 6수   척촉화(躑躅花)   봄은 파일고개를 넘어 탐탁한 척촉(躑躅)꽃이 하염없이 지길래 시드는 꽃송이에 내 진정한 이야기를 부치오   꽃보라속에 나비가 놀라오 나도 늙소   그래도 내 마음 장미(薔薇)에는 푸른 꿈이 깃들어 슬프지 않소   오! 전설의 나라 척촉(躑躅)아 이제 성장(盛裝)을 버린 너는 여름철에 백합(百合)꽃을 부러워할테냐? 산국화(山菊花)도 부러워할테냐? -아니오 -아니오 그렇길래 나는 너의 짧은 청춘을 사랑했다 나는 너의 타는 정열을 사랑했다   1935년 시집《재만조선인시집》     금붕어   백공작이 날개 펴는 바다가 그립고 그리워 항시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련꽃항아리에서 까무러진 상념에 툭―툭― 꼬리를 친다   안타까운 운명에 애가 타고나서 까만 안공에 자주 황금갑옷을 떨치나니   붉은 산호림 속에서 맘대로 진주를 굴리고 싶어 줄곧 창 너머로 푸른 남천에 희망의 기폭을 날린다   1938년 연길에서     새 화원   북천의 오로라 드리우면 싱싱한 광야를 헤치며 섬어하던 미친동무 있었다   애꿎이 의도를 등지고 상화에 사는 동안 비는 말라 화석된 동무 있었다   몇번 쇠그물을 뛰쳐나 지상 제하에서 싸우던 구사일생의 정한한 동무 있었다   그는 노도였고 그는 제전이였고 그는 표범이였고   때는 회한의 그림자를 감추고 력사는 옛 위치를 바꾸어도 잃어진 생리를 찾아 빼앗긴 청춘을 찾아 인생의 대하에 나리거니 생활에 밀림에 들거니   오오! 새 화원에 나가 씨를 뿌리자 그리고 봄을 불러 꽃을 피우자 붉은 꽃을 피우자   1940. 시집 《북륜의 서정》 룡정에서           북두성   백웅(白熊)이 우는 북방하늘에 경경(耿耿)한 일곱 성진 무연한 항구에 기발을 저으며저으며 슬픈 계절― 이 거리와 저― 먼 광야에 —불멸의 빛을 드리우다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우주의 한복판에 홀로 선 나도 한 개의 작은 별이런가?   네 이름 부르노니 괴(魁) 요광(搖光)아 대답하여라   그윽이 피어오르는 자연(紫煙)속에 천문(天文)이 움직이다 신화가 바서지다   보아 천년 생각해 만년 줄기줄기 흐른 꿈은 지금 내 맘속에 장미원(薔薇園)을 이룩하고   구름을 밟고 기러기 나간 뒤 은하는 지고 달도 기울어 오오, 밤은 상아(象牙)처럼 고요한데 우러러 두병(斗柄)을 재촉해 아세아산맥 너머서 이 강산 새벽을 소리쳐 일으킨다   1945년 봄 시집《북두성》     황소야   오늘 석양도 공원삼각정에 들렸다가 홍조속에 넘어간다   야학실 가는 길 문을 나서면서 말아문 엽초담배 아직도 반대나 남기까지 령이어 들어오는 공량차 서른대는 되나부다   황소야 너 제법 뽐내는판에 두 뿔에 빨간 술을 달아주고싶구나 바로 공량은 만재란다   황소야 너 별을 이고나가면 달을 밟고 돌아오는 습성을 즐기더라 황소야 너 계명성이 들리자 느슨히 일어서나니 진정 외양간을 나고고 싶었지   황소야 너 뻐꾸기 울어 밭갈이 재촉하면 서리 내려 가을걷이 생활을 배웠나니 지금 공량을 가득 싣고 너는 기뻐서 영각도 하는구나   1949년 시집《북륜의 서정》 룡정에서     할아버지의 마음   칠순 할아버지 나무를 심으며 어린 손자를 보고 싱그레 웃는 그 마음, 그 마음…   1957. 1 시집《고향사람들》 연길에서   (화룡시 로과향{현재 남평진} 호곡령에 세워진 시비의 새겨진 시)   ===============================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 리욱   석화 1. 서론   시인 리욱(1907-1984)은 중국 조선족문학 정초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설가 김창걸 등과 함께 중국 조선족문학의 첫 페지를 열어 중국 조선족문학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한 저명한 시인1)이다. 중국 조선족은 19세기 후반, 특히는 일제강점기 한반도내에서 대량의 “류이민”2)이 발생하여 조선반도 각지 수많은 파산농민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오면서 형성되였다. 지난 세기 초, “간도”로 불린 길림성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 조선족은 이주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개척과 정착의 력사를 기록하면서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고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또한 동시에 중국 내 한족, 만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과 공동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뤄왔다. 중국 조선족문학은 바로 이와 같은 조선민족이 중국에 이주하여 새롭게 이뤄낸 삶과 정서를 우리의 언어로 담은 문학이다. 현재 중국 조선족문학에 대하여 그 성격과 특징을 규명하면서 국내외 학계에서는 “중국 조선족문학”3), “중국 조선인문학”4), “조선족이민문학”5), “만주 조선어문학”6), “재중 조선족문학”7), “간도문학”8)  등 여러 가지로 지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담론은 중국 조선족이 월경이민민족으로서 민족과 국가가 불일치되는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특수한 현상이 그 원인으로 된다. 중국 조선족문학이“중국 조선족과 조선반도의 인민들은 한 핏줄을 타고난 동족으로” 여러 “사회력사발전단계를 함께 경유하면서 민족문학을 찬란하게 꽃피워 왔”9)으며 또한 19세기 후반기 특히 일제에 의한 국권찬탈이 사실화 되던 1910년대를 기점으로 차츰 중국대륙의 여러 민족인민들과 삶이 밀착되면서 상호간의 수용과 변화의 독특한 발전일로를 걷게 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특수성은 중국 조선족문학사를 서술할 때 그 시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1990년 조성일, 권철 주편으로 발간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를 비롯하여 최근에 출간된 문학사10)들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선족문학의 시작을 19세기 초, 조선민족이 중국에로의 이주초기로부터 보면서 김택영, 신정, 신채호의 한시작품들을 제시하고있다. 김택영은 1850년 조선개성에서 태여나 1905년 중국에 왔으며 1927년 아편자살로 생을 마감하였고 남통시 랑산에 그의 묘소가 있다. 신정은 1879년 조선 충북에서 태여나 1911년 봄, 중국에 왔다가 1922년 돌아가셨는데 당시 상해홍교만국 공동묘지에 묻혔다. 신채호는 1880년 조선 충남에서 태여나 1910년 중국에 왔으며 그후 일제에게 체포되여 려순감옥에 갇혔다가 1936년 옥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원인이 여하하든 그 족적이 중국에서의 조선민족이주사와 맥을 같이 하였으며 중국에 와서도 끝임없는 민족광복운동과 더불어 활발한 문학활동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김택영의 시에 대하여 당시 양계초선생도 탄복하였으며 엄복은 그에 대하여 “시재는 리백, 두보와 흠사하며 사부는 추앙, 매승을 따른다.”고 격찬하였고 신정도 사후 지인들이 그의 탄신 60세를 기념하여 시집 《아목루(我目淚)》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대부분의 작품이 우리글이 아닌 한문으로 즉 한시(漢詩)로  창작되였다는데 있다. 물론 고려, 조선조 시기부터 창작된 한시도 우리문학의 소중한 유산의 한부분이 되고있다. 그러나 우리 시문학의 흐름은 그래도 신라향가와 고려가요 및 조선조에 와서 시조와 가사로 이어지는 우리말, 우리글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시작도 현재 우리문학의 전통이 될수 있는 우리글로 창작된 시작품과 그 작품을 창작한 시인에게서 찾아야할 것이다. 즉 처음부터 한문으로 창작된 이들 김택영, 신정, 신채호의 시작품을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시작으로 보기에는 의론의 소지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혹자는 중국의 소수민족문학을 거론하면서 해당 민족구성원 시인, 작가가 창작한 작품은 비록 본 민족언어가 아닌 한문으로 씌여졌다하더라도 그 시인, 작가가 속한 민족의 민족문학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기법에는 상당하게 론의되여야할 문제들이 내포된다. 그 실례를 우리는 로사와 그의 소설 《락타샹즈》, 희곡《차집》등에서 찾아볼수 있다. 로사는 분명히 민족적으로는 만족작가이지만 상기 한문으로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중국 한문문학으로서 중국 한문문학의 수작으로 인정하지 이미 자신의 언어문자를 상실한 만족민족의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언어, 문자에는 그 민족의 문화, 력사, 관습 등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다는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5천년 중화민족의 력사에서 위대한 한족문화의 흐름을 이어온 힘이 바로 위대한 한자문화(漢字文化)에 있음을 똑똑히 보게 된다. 당나라와 송나라 다음 중원대륙에 펼쳐진 료, 금, 원 및 청에 이르는 천년세월의 이민족문화속에서 바로 한자문화가 한족문화를 견실하게 지켜 내였던 것이다.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이민족의 사나운 말발굽과 서리발치는 칼날, 그 거세찬 폭풍취우의 충격속에서 바로 이 위대한 한자문화가 중원의 광활한 땅에 한족(漢族)문화를 지켜내고 끝끝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게 하였던것이다. 현재 우리 조선족시인, 작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한 구성원으로 물론 한문(漢文)문학으로 대표되는 중국 주류문학에 기여하여야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우리 조선족시인, 작가들이 우리말, 우리글로 창작되는 민족문학의 번영과 발전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에서 중국 조선족시문학은 반드시 우리글로 창작된 작품과 시인에서 그 시작을 찾아야할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문학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우선 텍스트(Text, 原文, 本文)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리유가 있다. 리욱시문학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 제기로부터 시작되여야할 것이다. 일제가 전체 조선반도 내에서 조선의 기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의 질서를 모조리 뒤엎어 버리고 조선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민족의식을 뿌리째 뽑아버리며 전체 조선민족을 일거에 말살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우리말교육을 철폐하고 악명 높은 창씨개명을 진행하며 우리글 신문, 잡지를 폐간시키던 1930년대 중반에서 4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 조선반도에서 흘러온 류이민들의 집거지역인 중국 동북삼성에서는 오히려 우리글 문학지와 작품집들이 륙속 발간되었고 따라서 이곳은 우리 민족문학이 맥을 이어가는 장소가 되였다. 당시 “간도”와 “만주”지역은 “거대한 허상 속에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 공간”11)으로 우리 민족문학이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숨통이었고 최후의 근거지였던 것이다.1930년대에 걸쳐서 일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우리민족의 동북삼성에로의 류입은 조선반도에서 활동하던 시인, 작가 등 문학인들의 대거 류입을 불러왔다. 당시 “만주”에 체류하였던 문인들 속에는 김조규, 류치환, 박팔양 등 시인과 안수길, 강경애, 최서해와 같은 많은 소설가들이 있었다. 이 시기 형성된 우리민족시인, 작가들의 문단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이어지는 중국 조선족문학의 형성에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 사실이며 이들의 음으로 양으로 되는 영향이 건국 후 중국 조선족문학의 형성에 큰 기여가 되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찍 조성일선생이 서술한바와 같이 중국 조선족문학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 남아 이 땅에서 삶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이 땅의 시인, 작가들에 의하여 이뤄진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가 일제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날로 우리민족의 현대사에 있어서의 ‘창상지변(滄桑之變)’이라고할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방을 맞은 ‘간도’를 비롯한 ‘만주’전역의 우리민족 이주민 210만명중 절반에 이르는 다시 말하면 100여만에 달하는 이주민들이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직전까지 기간내에 조선반도로 돌아갔다. 조선반도로 돌아간 100만중에는 해방전 특히 30년대에 ‘간도’지역에서 창작활동을 벌렸던 ‘문화부대’의 많은 성원도 망라되여있다. 이 ‘문화부대’의 조선반도에로의 대이동으로 말미암아 해방전 ‘간도’를 중심으로한 우리민족의 이민문단은 거의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정세하에서 치렬한 민족의식을 갖고있는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작가들은 조선족문학의 번영와 창창한 앞날을 위하여 건국전야와 직후 당시 조선족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였던 연변의 연길시에 집결하기 시작하였다.”12) 바로 이와 같이 중국 조선족문학은 1945년 “8․15”광복 이후의 기간에 력사적인 재정비를 거치며 성장하여 왔고 그 중심에 리욱시인과 그의 시작품이 있었다. 리욱시문학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확하고 진실한 텍스트를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를 올바로 기록하는것과 함께 미래에 책임지는 과제와 겹쳐있다.   2. 리욱의 생애와 문학 활동   리욱 (李旭 원명; 리장원 李章源)은 1907년 7월 1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와 가족들은 일찍 중국 길림성 화룡현 강장동 일대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생활난으로 이리저리 떠돌며 러시아 원동지역에 까지 흘러갔다가 리욱이 3 살 나던 해인 1910년 봄, 다시 중국 길림성 화룡현 로과향 서호촌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리욱의 할아버지는 원근에 이름이 높은 한학자로서 마을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꾸렸는데 리욱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천자문》과 《소학》 및 한시를 공부하였다. 리욱은 1923년 4월 룡정 동흥중학교에 편입하여 공부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 훈춘 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농촌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해 처녀작 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 그는 또 지역신문 《민성보》의 기자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시 《눈》, 《봄비》, 《죄수》, 《분노의 노래》, 소설《파경(破鏡)》을 쓰고 일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서호촌 마을에 돌아와 1935년까지 농사도 짓고 서당도 꾸리고 마을의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문학공부에 정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며 그의 시 창작도 일약 전성기에 진입하였는데 초기 시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완성되였다. 이 시기 그는 시《님 찾는 마음》(1930), 《송년사》(1935), 《북두성》(1937), 《금붕어》(1939), 《모아산》(1939), 《새 화원》(1940)등을 창작하여 신문 《만선일보》, 잡지《조광》, 《조선지광》등에 발표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학성(鶴城), 월촌(月村), 홍엽(紅葉), 단림(丹林), 산금(汕琴), 월파(月波) 등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그의 작품에 대하여 당시 평단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그 지향! 그것만으로 신진시인의 명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 케케묵은 감각의 울타리 안에서 시를 창조하는 대신 시를 복제(모방)하는 이미 퇴색한 청년시인들에 비해 볼 때 아직 체내에 미숙한 오관을 가지고 떨리는 두 손과 두 팔을 한껏 벌리어 새로운 “포에지”의 세계로! 항시 비상을 익망하는 젊은 시인― 신세대 시인들의 활기를 나는 높이 사고 싶다. 그러나 지나친 비상은 오히려 허망과 “넌센스”를 동반하는 수가 있지 않을까? 무의미의 탐미성을 강조하는 슐레알리스트들의 시로에는 경복할 수 없으므로 의미의 혼란으로 충만되어 그것이 반대로 무의미한 시작품으로 화해버리는 이런 유의 시를 쓰는 무의미를 월촌씨에게 삼가 경고하고 싶다. 의미의 남용으로 시인자신이 나중에 판타지병에 걸려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푸념과 넉두리와 언어의 유희로 충만된 시를 쓰는 수가 많고 이런 시를 우리는 재능 있는 신인들에게서 간혹 볼 수 있다. 그러나 월촌씨는 아직 그런 환상병에 걸리지 않을 만한 자성과 건강을 가지고 있다.13)   리욱은 1936년 《조선일보》 간도특파기자가 되였고 일제에 의해 1940년 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폐간되자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1942년 그는 리학성(李鶴城)이라는 이름으로 연길에서 간도와 만주지역 시인들의 합동시집 《재만시인선》을 편찬하여 발간하였으며 김조규가 편집한 종합시집《재만조선인시집》에 리학성의 이름으로 시 《나의 노래》, 《철쭉화》, 《오월》, 《락엽》, 《별》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고향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자기의 필명을 다시 “해 뜨는 모양”, “득의(得意)한 모양”의 “아침 해 욱(旭)”으로 바꾸고 새로운 시대의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간도예문협회》 문학부장, 《동라(銅喇)문인동맹》 시문학분과 책임자, 《연길중소한문회협회》 문화국장 등 직을 맡으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동북군정대학에 다녔고 1947년 첫 서정시집《북두성》 간행하였다. 1948년 동북군정대학을 졸업한 그는 연길 《대중》잡지 주필 겸 연변도서관 관장을 맡았으며 1949년 두 번째 서정시집 《북륜의 서정》을 간행하였다. 리욱은 1951년부터 연변대학에서 《세계문학사》를 강의하면서 시인과 교육자의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문학의 후대양성에 일생을 다하였다. 1956년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1957년 시집 《고향사람들》(북경 민족출판사), 장시《연변의 노래(한문)》(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고 1959년 시집《장백산하》(북경 작가출판사)를  간행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중국에서의 “10년 대 동란”으로 일컫는 문화대혁명 기간 시인 리욱은 《반동문인》, 《반동학술권위》등으로 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1980년 칠십 고령에 이른 시인은 자신이 일생동안 진행해온 시창작의 정수를 모아《리욱시선집》(연변인민출판사)을 엮었다. 1982년 장편서사시《풍운기(1부)》 발표하였고 이 작품 제2부의 집필 중 1984년 2월 26일 뇌익혈이 발생하여 향년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의  추도식은 전례 없이 장중한 규모로 연변대학 대강당에서 진행되었으며 1988년 7월 25일 시인의 탄신 81돐을 기념하여 시인이 세 살 때 강보에 쌓여 두만강을 넘어온 화룡 로과 호곡령 산상에 시인의 시비가 세워졌다.   3. 리욱의 작품세계와 예술특징   시인 리욱은 1924년에 처녀작인 서정시《생명의 례물》을 내놓은 때로부터 시가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기, 특히 40년대 전반기에 이르러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태를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가 내놓은 주요 작품으로는 《금붕어》(1936년), 《철쭉화》(1942년), 《새 화원》(1942년), 《모아산》(1944년), 《오월의 붉은 맘씨》(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서정시가 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시편에서는 질곡적인 암흑사회를 혐오하고 자유를 갈망하며 진리를 추구하여 마지않는 시인의 미학적 열망을 구김 없이 펼쳐 보여주고 있다. 시 《금붕어》에서 리욱은 일제 통치하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의 의지와 리상을 간곡히 표출하고 있다.   백공작이 날개 펴는 바다가 그립고 그리워 항시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련꽃항아리에서 까무러진 상념에 툭―툭― 꼬리를 친다   안타까운 운명에 애가 타고나서 까만 안공에 자주 황금갑옷을 떨치나니   붉은 산호림 속에서 맘대로 진주를 굴리고 싶어 줄곧 창 너머로 푸른 남천에 희망의 기폭을 날린다   ― 시《금붕어》 전문   이 시편에서의 금붕어는 시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닫혀있음과 열려있음의 이항대립구조를 설정하여 어항에 갇힌 금붕어의 이미지와 무한한 자유를 표상하는 넓은 바다의 이미지의 대립으로 식민지치하의 젊은 지식인의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있다. 금붕어는 항시 자유 없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달가워하지 않고 “칠색무지개를 그리며”, “붉은 산호림”을 “까만 안공에 불을 켜고” 애타게 찾고 있다. 대해 속에서의 “붉은 산호림” 그것은 시인이 못내 동경하던 자유로운 리상의 동산을 상징한 것이다. 1940년대에 들어선 후 그같이 암흑한 현실 하에서도 줄곧 시 창작에 힘써 서정시 《철쭉화》와 《새 화원》등 을 창작한 데 이어 또한 《모아산》과 같은 역작을 내놓았다. 1944년 이른 봄에 쓴 서정시 《모아산》에서 시인은 모아산을 “대지의 정열을 안은” 창세기의 “위대한 거인”으로 형상화하면서 격정에 넘쳐 “네 머리 위에 해와 달이 흘러흘러/ 쌓은 정 녹아 터지는 날은/ 자유의 깃발이 날리리니”하고 사무치게 고대한다. 이렇게 미래의 밝은 전망을 펼쳐 보이고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인은 모아산을 종래로 “굴한 일 없”는 조선족반일투사의 강인한 투쟁정신의 상징으로 승리의 깃발로 찬송하고 있다. 그의 이런 시적 사상과 미학적 추구는 항일전쟁승리전야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지고 명랑하여졌다. 시《북두성》은 광복 바로전야인 1944년에 쓴 작품으로서 시인의 이시기 창작풍모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백웅(白熊)이 우는 북방하늘에  경경(耿耿)한 일곱 성진 무연한 항구에 기발을 저으며저으며 슬픈 계절― 이 거리와 저― 먼 광야에 ―불멸의 빛을 드리우다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우주의 한복판에 홀로 선 나도 한 개의 작은 별님이런가?   네 이름 부르노니 괴(魁)  요광(搖光)이 먼저 대답하여라   그윽이 피어오르는 자연(紫煙)속에 천문(天文)이 움직이다 신화가 바서지다   ― 시《북두성》 제1련-제4련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으로 멀리 하늘에서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어둠의 홍수가 범람하는” 암울한 시대는 조만간에 지나가고 대지에 새봄이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위와 같이 노래하는 것이다. 다소 표현에 있어 모호하고 추상적인 부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호방한 낭만 시로서 시인의 신념을 충실하게 드러낸 시라 할 수 있다. 시인은 끝없는 동경심에 찬 눈매로 멀리 하늘가에 반짝이는 밝은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하나하나 정겹게 헤아리며 새봄은 꼭 오리라는 굳은 신념에 잠기며 다가올 승리에 무한히 고무된다. 이에 시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을 두고 그려온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숙원을 《장미원》으로 상징하고 이 서정시의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보아 천년 생각해 만년 줄기줄기 흐른 꿈은 지금 내 맘속에 장미원을 이룩하고   구름을 밟고 기러기 나간 뒤 은하는 지고 달도 기울어   오오, 밤은 상아(象牙)처럼 고요한데 우러러 두병(斗柄)을 재촉해 아세아산맥 너머서 이 강산 새벽을 소리쳐 일으킨다   ― 《북두성》 제5련-제7련   이 시에서 시인은 자유의 려명이 곧 돌아오며 그 미래는 우리의 것이란것을 확신하고 있는것이다. 시인은 일찍 이 시에 담은 사상경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머나먼 북두성을 바라보면서 상념에 잠겨 별들을 헤아리고 있노라니 나도 그 별들과 함께 빛나며 별무리들이 북두성을 향해 반짝이듯이 느껴졌다. 이 경상은 나에게 피눈물 겨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누렇게 말라빠진 대지에는 봄이 올 날이 있음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새벽이 올 것이다’, ‘내일은 우리 것이다’라고 소리 높이 외쳤다”14)   상술한 인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이 시기 리욱의 시작품은 호방하고 우미한 랑만적 색채를 보이며 주로 은유적 수법을 애용하면서 잠재의식에 의한 형상적 표현들을 많이 보이고있다. 또한 그의 서정시들은 광명한 미래를 동경하고 있으나 그것이 아직도 몽롱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흐르고 있는 약점도 발로 시켰다. 1945년 “8․15”광복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등 력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리욱의 시세계도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민족의 일제에 의한 압제와 굴욕에서부터의 해방을 그는 중국공산당이 가져다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특히 백여 년 간 이 땅을 개척하고 가꾸어 온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새 생활의 희망을 열어준 새로운 중국과 중국공산당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1949년 1월에 간행한 그의 두 번째 시집《북륜의 서정》 서문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시대의 행정에 력사의 지표가 뚜렷이 서서 나의 전진을 재촉하매 나는 고스란히 이 땅의 선구자의 발자국을 더듬어 나가며 인민과 조국에의 충성을 피로써 다할 것을 진정으로 고백한다.”   따라서 이 시기 시인의 작품주제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찬미에 바쳐지게 되었다. 1956년에 쓴 서정시《해란강의 봄철》,  1963년에 쓴 《사랑하는 고향으로 오라!》, 《정월담》 등 작품은 모두 상기 주제를 담고 있다. 시인 리욱은 또한 이와 같은 민족적 해방과 인민들의 새 생활은 모두가 수  십년간 백두밀림에서 모든 것 다 바쳐 일제와 싸운 항일투사들의 생명으로 바꿔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찬양을 아낌없이 토로하였다. 산문시《연변찬사》(1954년), 서정시 《유격대를 회억하며》(1959년), 《홍군전사의 묘》(1961년) 등 작품들이 바로 이 주제에 바쳐진 것들이다. 시인은 1957년에 창작한 시 《장백산》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성성한 백발을 날리면서도/ 가슴은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불길에 타서/ 항시 두 어깨에 칠색무지개를 걸고/ 목청을 돋구어 꽝꽝 대택을 울리”는 장백산의 거인적 형상을 빌어 자손만대의 행복을 위해 산을 주름잡아 달리며 싸워온 반일투사들의 빛나는 력사를 노래하면서 그들의 반일혁명전통이 어떻게 우리시대인민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원동력이 되는 가를 밝힌다.   그 천년수림 속에서 타오르던 화톳불이 오늘 우리의 힘으로 뻗히고 그 동서 봉우리에서 반짝이던 초병의 눈이 오늘 우리의 정신으로 빛난다네.   이제 천지의 젖줄이 흘러 기름진 전야마다 오곡의 백과가 탐스럽게 무르익고 장백산 기슭에 늘어선 웅장한 공장마다 기계와 비단이 수두룩이 쌓이거니   백옥으로 쌓아올린 장백의 상상봉이여 백발을 구름높이 날리고 웃음을 폭포소리에 터치며 이 나라 아들딸~ 영웅호걸들을 굽어보라   ― 시 《장백산》 부분   이와 같이 거대한 상상의 힘과 웅건한 감정의 폭을 가지고 펼친 이 서정시의 심상은 력사와 반일혁명전통의 소재를 다룬 다른 시들에서도 감동적으로 표출되었다. 시인 리욱은 이외 다양한 시 형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작품의 내용과 예술성에서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어 내었는바 특히 율시, 절구, 사(詞) 등 한시(漢詩)는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시 《노시인》(1959년), 《독수리》(1960년), 《랑도사 도문강(浪淘沙 圖門江)》(1978년) 등이 그의 한시대표작들인데 그중 1964년에 창작한 한시 작품 《옛 성(古城)》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멀리 보니 옛 성은 절반하늘 둘러싸 그제 날의 풍진은 저으기 아득하네.   녹수의 고기비누 세 번 전승한 진지요, 청산의 호랑날개 아홉 번 진공한 창이라네   창공을 우러러 달은 천추에 걸렸고 물결을 헤치며 배는 대강에 비꼈네.   영웅 달리던 곳 어딘가 물으니 늙은이 저 멀리 큰 물기슭 가리키네.   遙看古城半分天  昔日風塵已渺然  綠水魚鱗三捷陳  靑山虎翼九攻鞭  霜天寥廊千秋月  秋水波潤一葉船  借問英雄馳騁地  笑指融融大江邊    ―  시《옛 성(古城)》 전문   시인은 유고로 한시 108수가 수록된 한시집《협중시사(篋中詩詞)》를 남기였다. 그의 한시에 대해 연변대학 교수 김동훈은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라고 말하였고 한국 숭실대학 교수 조규익은 “리욱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 현대 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 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 재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시인 리욱은 또한 서사시, 서정서사시의 창작에서도 큰 업적을 남기었다.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1957년), 《고향사람들》(1957년), 서사시《풍운기(제1부)》(1982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서정서사시 《고향사람들》은 바로 “간도” 의 조선족들이 일제와 맞받아 싸운 빛나는 력사를 그려내고 있다. 작품은 “삼득이”와 “정숙이”를 주인공으로 19세기말 이조 말 조정의 폭정과 자연재해로 수많은 이재민들이 북간도로 이주하고 이곳 청국 지주의 압박과 착취와 왜놈의 탄압과 만행으로 고역과 학대에 시달리게 되고 민족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르게 되자 각성한 인민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렇게 작품은 만강의 열정으로 항일무장투쟁과 유격대를 노래하면서 민족전설을 빌어 반일유격대의 형상창조를 완성하였다.   아!  백성들이  천만대에 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   유격대에는  나는 장수와 뛰는 장수가 있어 장백산 대택속 해와 달이 질줄 모르는 별천지에서  천하 력사들을 모아 보검을 치고 대포를 만들면서 때로는  해왕국 공주들이 여름마다  목욕하러   동새에서   천지로 다니는 무지개 다리를 더듬어 봉래  방장  영루에 노릴고   제틀로  수림속에 나오면 천리 련봉~ 나뭇가지를 더우잡고 나래 돋친 룡마인양 일행 천리 청운장을 휘둘러 산삼과  사항과  지초가 녹아내리는 압록간  두만강  송화강을 넘나들며 마음대로  풍운조화를 부려 불시에   놈들을  마른 날에 번개치듯 쳐엎는다 하나니   이렇듯  유격대들이  때로는  침실에서   잠든놈들을  꿈속에 잡아가고 대낮에  길가는 놈들도 무망중에 쓸어눕힌다   ― 서정서사시 《고향사람들》 부분   이 작품은 력사의 거시적 개괄과 항일유격대 형상 창조 그리고 기백 있고 세련된 시적 표현 및 생략과 함축, 비약의 수법 등 다양한 시적 표현방법을 동원하였고 민간전설의 생동한 도입과 호기로운 서정성의 발로 등으로 높은 사상, 예술적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리욱시문학의 예술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그의 작품에서 력사제재에 대한 흥취가 각별하고 거인적 형상창조에 유능하며 격조가 높고 뜻이 깊고 서정이 짙고 낭만적 색채와 민족적 특생이 강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력사의식에 기초하여 조선족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돌리면서 일생동안 조선족인민들의 생활과 투쟁의 력사라는 기본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작품목록에서 우리는 민족의 력사에 바쳐진 작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서정시《옛말》은 기사년 흉년에 남녀로소가 쪽박차고 샛섬에 건너와 진대나무 속에 구틀막집 짓고 부대를 일구어 감자씨를 박던 개척초기생활을 쓰고 있으며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은 샛노랗게 익은 벼이삭이 소작인들의 눈물에 젖던 가을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서정시《장백산》, 《유격대를 회억하여》등은 반일투쟁과 유격대의 영웅적 모습을 담고 있으며 서정시《젊은 내외》, 《석양의 농촌》, 《황소야》 등에서는 세기적 소원을 이뤄 토지 얻은 조선족농민들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서정시《배나무를 심으며》, 《배낭》, 《봄은 어디에 먼저 왔느냐》등 작품에서는 조선족인민들이 신근한 노동으로 새로운 생활을 건설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다음, 리욱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심오한 사상과 낭만에 바탕을 둔 거인적 형상의 창조에 큰 성취를 이룩하였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시인은 예민한 감수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생활의 본질과 특징을 발견하고 심오한 철학적 진리와 숭고한 인민적 지향을 포착하여 거인적 형상을 창조하였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거인의 영웅적 형상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현상도 노상 거인적 형상으로 노래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반일투사의 형상창조에서도 장백산의 웅장한 자연을 배경으로 초인간적인 영웅성을 훌륭하게 부여하였다. 다음과 같은 작품 속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나래 돋힌 용마를 타고/ 고산대하를 주름잡아 넘나들며/ 머리위에/ 하늘이 쪼각쪼각 갈라지고/ 발밑에/ 구름이 실실 흩어지는” ― 서정서사시《장백산의 전설》에서   “변강의 천봉만학을 거느리고/ 창공에 우뚝 솟은 장백산” ― 서정시《장백산》에서   “천험의 골짜기/ 만고의 숲을 뚫고/ 몇 천만년을” ― 서정시《두만강》에서   시인의 이러한 “거인의 영웅적 형상창조”의 예술추구는 일찍 《모아산》(1944년), 《북두성》(1944년)과 같은 초기작품에서부터 나타난다. 리욱시문학의 또 다른 예술적 특징으로 선명한 민족적 색채가 작품에 두드러지게 표현됨을 지적할 수 있다. 리욱시인은 조선족인민들의 구전문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계승하고 발양하여 생동한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였다. 서정시《장백산》에서는 “달밤에 백호가 바위 위에서 울면 동해의 룡왕도 소스라쳐 깨여서는 거센 물결을 타고 헤매었다”는 구전설화를 작품 속에 이용하였고 서정시《오월의 붉은 맘씨》는 “죽은 누나를 불러도 아니 오는 누나는 옛 둥지에 제비를 보냈다”는 전설을 인용하였다. 서정시《황소야》는 “별을 이고 나가고 달을 밟고 들어온다.”는 우리 민족의 속담과 숙어를 도입하여 조선족농민들의 근면한 노동생활을 형상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시어의 선택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어에 바탕을 둔 언어구사를 주로 택하였고 과정법과 비유법, 생략과 함축 등 다양한 표현수법의 사용하였으며 이로써 간결성을 이뤄내었다. 그의 시어는 또 대담한 함축과 생략이 특징적이며 조선족민요에 많이 사용되는 음조, 조흥구 등을 창조적으로 도입하여 시의 운치를 돋웠고 민족적 생활의 체취가 풍기는 고유어의 선택과 생활화된 민중언어의 사용에도 각별한 주의를 돌렸다.   4. 결어   본문은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인 시인 리욱(1907~1984)의 생애와 문학 활동 및 그의 작품세계와 예술특징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리욱시문학의 의의와 예술적 가치를 진일보 확인하였다. 시인 리욱은 1924년 처녀작 서정시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시작하여 1984년 장편서사시《풍운기》 제2부의 집필 중 뇌익혈로 돌아가셨다. 향년77세였다. 이와 같이 시인은 70여년의 인생에서 옹근 60년간 진행한 시창작활동 전부를 중국 조선족시문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중국 조선족시문학 정초자로서 시인 리욱의 작품은 우리문학연구의 소중한 텍스트가 되며 이에 대한 진일보의 연구는 중국 조선족시문학의 정확하고 진실한 텍스트를 확인하고 과거와 현재를 올바로 기록하는것과 함께 미래에 책임지는 과제와 겹쳐있다. 따라서 리욱시문학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우선 이와 같은 문제의 제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시사(示唆)한다.   2011년 6월 2일  
1440    시의 가치란? 댓글:  조회:4893  추천:0  2015-09-06
  (조병화, )   이 짧은 글에는 논증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은 논증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그 생각 혹은 느낌이 무엇인가? 나에게 해당되는 이 생각을 더 일반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진짜 시는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유종호의 (민음사, 1994)는 그의 말처럼 을 의도하고 쓴 책이다. 그는 피터 버거의 (문예출판사, 1995)에서 느낀 매력, 즉 되어, 문학을 그런 방식으로 소개하고자 한 책이다. 이 책의 한 장이 이다.   플라톤은 그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이나 화가를 추방하고자 한다. 왜 추방하고자 하는가? 잘 알려진 논거가 예술가들이 진리로부터 두 단계 떨어진 모방의 모방을 모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예술가에게 진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시는 우리에게 그렇게 대단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예술가에 대한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그의 이데아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실재와 현상, 이데아와 경험적 현상의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공박은 약화될 것이다.   예술가, 시인을 공박하는 플라톤의 다른 논거는 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은 이성보다 열등한 영혼의 부위이며, 우리 감각처럼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비극 시인들은 과도한 감정을 억제하기 커녕 부추기고 있다. 따라서 무대 주인공의 기쁨이나 슬픔에 몰입하는 사이 우리의 이성은 정지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감정이 이성보다 열등한가? 그것들은 어떤 위계질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기능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닌가? 분명히 지나친 감정이 부작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지나친 이성의 작용도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   유종호는 플라톤에 대한 몇 가지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그의 예술관이 소박한 사실주의나 모사주의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에 대한 그의 비판이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낭만주의에게 제기하는 비판이기도 하다. 둘째, 오히려 플라톤이 진정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참다운 예술은 이데아를 직접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플라톤의 생각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플라톤이 했던 것은 당대의 잘못된 예술에 대한 비판일 뿐이다. 셋째, 해블락크라는 고전학자의 재해석이다. 플라톤이 비판했던 것은 구두(口頭)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새롭게 문자적 기록이 가능한 시대에 플라톤은 를 강조하는 의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시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지 구두로 전승해 되어온 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유종호가 소개하는 둘째, 셋째 비판은 시나 예술이 갖는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플라톤을 해석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은 시나 예술이 충분히 이성적인 것과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의 앞 부분에 나온 비판을 본다면 플라톤의 생각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처럼 보인다.     유명한 영웅들의 통곡과 애도가 바로 문학 작품, 에 나온다. 플라톤은 이런 것들을 젊은이들이 읽으면 해롭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나중에, 스스로 성숙하게 된 나중에 읽어야 하는가? 그러나 성숙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영웅들조차 보여주는 통곡과 애도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가 생각하고 있듯이 비천한 사내들이나 여자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싸움터에서 용기 있게 죽을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용기와 함께 나약함, 죽음과 함께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 더욱 성숙하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왜 시나 문학 작품은 중요한가? 바로 이런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출처] 시의 가치|작성자 풍경  
1439    이승훈 시론 댓글:  조회:4337  추천:0  2015-09-06
    이승훈 - 시론 Ⅰ. 에이브럼스의 (Oriental of critical theories)  예술작품의 총체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네 요소를 분별한다. 첫째로 사물 그 자체인 work 가 있다. 둘째로 work를 생산하는 artficer, 곧 artist이 있다. 셋째로 work는 직접적이든 우회적이든 존재하는 사물의 세계로부터 어떤 subject를 취한다. 곧 객관적 사태에 관하여 말하든, 그 사태를 의미있게 만들든, 혹은 그 사태를 반영하든, 아무튼 그 사태와 어떤 관계를 맺는다. 이 셋째 요소는 인간과 인간의 행동, 관념과 감정, 물질과 사건, 혹은 초감각적 실체들로 구성되며 nature로 통칭되지만, universe라는 중립적이고 함축적인 용어를 사용함이 좋다. 넷째로 work는 audience를 갖는다. 곧 work는 청자, 관객, 혹은 독자에게 알려지며, audience가 주시함으로써 가치있는 것이 된다.  work와 univers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을 mimetic theories, work와 audience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을 pragmatic theories, work와 artist의 관계가 논의되는 것을 expressive theories, work rm 자체만이 논의되는 것을 objective theories라 부른다. Ⅱ. 모방론  1. 플라톤의 대화편 「공화국」10권(시인추방론)  ① 침대라는 본질(idea) → 인공적 세계의 침대란 실체 → 감각세계를 반영한 허상이란 작품(예술작품: 그림, 음악, 시)  ② 진리로부터 2단계 멀어짐 → 시인추방론  2. 아리스토텔레스  ① 시학을 기예, 만듦의 세계에 대한 탐구로 봄 → 모방 예술의 세계를 심미적 기예의 세계(fine art)로 봄  ② 그 모방의 대상이 행동의 세계에 있는 인물들이며, 그 인물들을 다시 고상한 인물(비극)과 비천한 인물로 양분함.(인물 또는 인간 행위의 모방)  ③ 모방의 양식을 문제삼음. 모방의 양식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혼합적 양식(서사시-설화성, 서정성, 극성이 혼합), 설화-서정적 양식, 극적 양식으로 나눔.  ④ 모방의 목적을 문제삼음. 모방의 기원 혹은 기능: 본능과 쾌락 → 모방의 대상은 통일성의 세계, 개연성의 세계, 특수성의 세계, 보편성의 세계  ⑤ 시인은 통일성이 있는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며 그것은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보편적 진리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작품의 유기적 구조에 의해 제시되어지므로 시가 진리로부터 두 단계 멀어짐으로 인간을 사악하게 만든다는 플라톤적 개념을 불식시킨다.(플라톤적 딜레마 극복)  ⑥ 정화(catharsis)의 이론: 비극은 인간정서의 두 기본인 연민과 공포를 환기함으로써 정서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환기된 정서에 의해 감정의 평형을 이루게 되므로 마침내 순화된 정서의 체험을 맛보게 된다.  3. 르네상스 시대  ① 카스텔베트로: 모방을 이야기거리를 꾸며내는 것보다는 주워 듣는 것으로 인식.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정립)  ② 마조니: 모방은 실존하는 현실을 충실히 보여주는 것(icatic)과 예술가가 마음대로 꾸며 보여주는 것(phantastic)으로 양분.(낭만주의적 관점으로 정립)  4. 18세기 이태리 신플라톤주의자: 시가 단순한 현상의 세계를 모방하지 않고, 영원한 형식(eternal form)을 모방한다고 주장.  5. 쉘리의 「시의 변호」(1821)  ① 시인은 비이성적인 상상력을 사용하지만, 그 상상력으로 인해 플라톤적 절대 관념의 세계와 직접 접촉함으로써 플라톤이 상정했던 실재(reality)의 세계 그 자체를 경험함.  ② 일상적 경험의 세계 배후에 있는 절대 관념의 세계와 접촉할 수 있게 하는 상상력의 작용을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음.  ③ 시인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며, 시인은 존재와 지각, 지각과 표현 사이에 관계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진선미를 이해하는 자이다.  ④ 입법자이며 동시에 예언자적 기능을 지님.  ⑤ 시는 그 자체의 영원한 진리 속에 표현된 인생의 이미지 바로 그것이 된다.  ⑥ 시인은 상상력을 강화함으로써 선의 윤리를 마련한다.  6. 비판: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모방할 것(대상)과 모방된 것(작품) 사이의 관계이며, 이 때 시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대상에 대한 진실성이다.  Ⅲ. 효용론  1. 호라티우스의 「시의 기술」(ars poetica)  ① 시인의 목적은 독자에게 이익을 주거나, 독자를 즐겁게 하거나, 혹은 유용성과 쾌락성을 동시에 줌에 있다.  ② 교훈, 쾌락, 정서의 세 명제를 중심으로 다룸.  2. 르네상스 시대  ① 카스텔베트로: 시의 목적이 교훈임을 부정. 극단적인 쾌락론자.  ② 마조니: 시의 사회적 효용성을 강조하지만, 효용이란 바로 교육적 오락적 기능을 뜻함.  3. 필립 시드니의 「시의 옹호」(1595)  ① 고대의 시와, 그 시가 지녔던 문화적 기능을 강조. 그는 시의 우수성을 전달방법에서 찾는데, 그것은 윤리적 내용을 우화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시는 결국 살아 있는 허구가 되며 또한 인간의 정서와 결합된다.  ② 시의 보편성을 논의. 생생한 허구성의 세계임을 강조(진리가 될 수 없는 세계 혹은 진리가 축어적으로 해석될 수 없음)  ③ 시인은 만드는 자(maker)이다. 시인은 허구적 상상력의 고양을 통해 현실보다 아름다운 시인의 이상적 비전을 제시한다. 결국 상상력은 현실의 통찰이 아니라 현실의 전환을 꾀한다. / 시는 역사, 철학과 다르다. 시는 추상적 명제(철학)가 아니면서도 구체적 실제(역사)의 세계를 취급함.  ④ 시의 교훈성과 정서에 대해서 논의하며, 그는 시의 교훈성을 시의 가장 애매한 정서와 결합시킨다./ 정서는 덕성을 도야하는 도구이며 그것은 시인의 이상의 세계가 환기하는 윤리적 선 때문이다.  ⑤ 시가 윤리적으로 보다 나은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독자를 윤리적으로 교화한다고 생각함.  4. 드라이든의 「극시론」  ① 극이란 인간 본질의 정당하고 생생한 이미지로서, 인간본질의 정서와 기질들을 재현하며, 인류에게 기쁨과 교훈적 내용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다.  ② 교훈과 확인의 명제가 제시됨/ 극의 교훈서이란 인간 본질의 심리학적 사실들 속에 내포된 지식을 알려줌에서 찾을 수 있다/ 교훈성 강조  ③ 극에 있어서의 표현이 문제됨/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고, 내용이 형식에 우선함을 강조/내용 - 포우프의 "자주 사유되나 결코 잘 표현할 수 없는 것"(wit)  5. 비판  18세기에 이르러 시인의 허구성과 상상력은 주로 시인의 관념이나 이미지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나 이러한 주장은 차츰 시인의 자연스러운 본질, 그 개성이나 천분, 창조적 상상력, 정서적 자발성은 예술적 절제나 지성들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드러나며, 시인 개인으로의 논의의 대상이 옮겨져야 할 필요가 생김.  Ⅳ. 표현론  1. 정서의 표현  1) 자발성의 시론 (워즈워드의 「서정민요집」 재판 서문)  ① 고요 속에 회상되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유로(흘러넘침, overflow)/ 시의 근원은 시인 자신 속에 있음이 표명됨/ 시의 제재는 곧 시인의 감정임이 명시/ 시적 과정은 자발적인 것(자발성, spontaneity)  ② 외부적 사실과의 관련성이 배제되는 대신 이 세계에는 정서가 넘치며, 이 정서가 독자의 흉금 속으로 어떤 진리를 운반한다.  ③ 인간의 심리구조는 전체로서의 우주의 활동과 조화된다. (보편적 인간)  ④ 시는 모든 자연현상 속에 나타나는 격정을 표현.  ⑤ 시인은 또한 모든 감각, 감수성, 이면에 있는 공통적인 심리법칙을 노정함으로써 인간사회의 광활한 여러 영역들을 통합한다. ("시는 정서의 타락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2) 독백의 시론(밀의 「시란 무엇인가」, 「시의 두 종류」)  ① 시의 유형 가운데 서정시가 대표적인 유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비극, 신고전주의자-서사시와 비극을 최고로 간주)  ② 시의 평가 기준은 자발성이다/ 자발성 - 인간의 정서적 감수성이 내재적이 현상임을 의미/ 시란 감정 그 자체를 지향  ③ 시와 외부세계와의 관련성은 소멸된다.  ④ 서정시의 독자는 단일 인물로 축소되며, 이 단일 인물은 바로 시인 자신이 된다. 시는 감정의 세계로, 고독한 순간 속에서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3) 자기 표현의 시론(쉴라이어마허)  ① 그의 미학적 체계는 예술이란 자기표현의 세계라는 관점에 서 있다.  ② 예술은 자기 각성의 세계라는 명제가 드러난다./ 예술은 자기각성, 감정 혹은 정조(mood)의 세계이다.  ③ 시는 언어에 의해 창조되는 자유로운 산물로 정의된다. (시적 진리, 내적인 정조의 순수한 주관성을 표현)  2. 상상력의 표현: 코울릿지의 시론 (코울릿지의 「문학평전」) - 상상력과 시의 형식의 관계를 논의  ① 시의 개별적 특성과 이 특성들의 존재이유를 탐구  ② 시가 다른 형식인 산문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 시는 음악성을 지향하며, 결과적으로 시인이 가정한 어떤 객관적 존재를 구성.  ③ 시의 직접적 목적은 진리의 전달, 혹은 쾌락의 전달이다./ 시에서 언어형식의 조직적 유기성(압운, 율격)이 쾌락을 전달함.(유기체설)  ④ 시작품(poem)과 시(poetry)를 구별.  ⑤ 상상력은 위대한 질서의 원리이며, 제재들을 분별하고 질서화하고 분리하고 통합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제1상상력-근본적으로 창조적인 능력, 제2상상력-전자의 의식적이며 인간적인 사용을 의미)  ⑥ 시작품은 언어를 특수하게 사용한 것, 곧 특수한 예술작품이다.  ⑦ 이상적으로 훌륭한 시작품은 언어를 적절히 사용해 특수한 쾌락을 성취하며, 그 쾌락은 전체로부터 나오며, 이것은 부분들의 상호조화의 세계이며, 이 조화의 세계는 시인의 종합적이고 마술적인 힘, 곧 제2상상력의 산물이다.  3. 강렬미의 표현  1) 롱기누스의 「숭고함에 대하여」  ① 숭고성은 우수한 표현 속에 나타난다.  ② 그러나 시인은 과장적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③ 위대한 관념을 지니기 위하여 시인은 반드시 위대해야 한다.  2) 포우의 「작시철학」(1846), 「시의 원리」(1850)  ①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을 심화. (예술의 교훈성 거부)  ② 시는 영혼의 격앙이 아니라, 영혼의 고양, 평온의 세계이다.  ③ 시를 단순히 정서, 상상력, 강렬미의 표현이 아닌 시적 언어의 특수성, 그 특수성이 야기하는 시의 자율적 특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봄.  4. 표현론의 통일적 관점  ① 예술작품이란 근본적으로 내면세계의 구현이다.  ② 시의 가장 중요한 근원과 제재는 따라서 시인의 고유한 정신적 행동이나 그 속성들이다.  ③ 시의 위대한 존재이유는 시인의 감정과 욕망을 내포하는 충돌의 세계를 표현함에 있다.  ④ 예술은 예술가의 정신력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정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상징으로  드러나는 정신상태 혹은 정신적 특성에 의하여 평가되고 유형화되는 경향이 있다.  ⑤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언어적 요소, 특히 비유어가 가장 중요하다.  ⑥ 시를 평가하는 기준은 시를 쓰는 동안 시인이 체험한 실제적인 정신상태, 감정, 의도를 시가 얼마나 진실하게 표현했는가 라는 명제가 중요하다.  Ⅴ. 형식론(존재론)  1. 크로체: 예술 작품의 통일성, 곧 형식과 내용의 동일성 강조.  2. 발레리: 시 속에서 소리와 의미가 협동으로 존재함을 인식한다. 시는 그 두 요소의 일종의 화해이다.  3. 엘리어트: 형식과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은 항상 진실이며, 또한 그들이 상이하다는 것도 항상 진실이다.  4. 신비평  1) 버크, (블랙머):맑시즘과 정신분석학, 인류학을 의미론과 결합하여 이제까지 문학의 출발점으로만 생각했던 동기의 체계를 고찰.  2) 랜섬, (윈터스, 테이트): 조직(texture)과 구조(structure)를 구분.  ① 조직: 해설 불가능한 비논리적 요소 - sound, 음향, 음운, 비상관적 세부  ② 구조: 해설 가능한 논리적 요소 - meaning, 사상  3) 브룩스, (윔샡): 시에 대한 유기적 관점을 강조  4) 신비평의 비평 논리  ① 랜섬: 시란 특수한 가치를 지닌 특수한 존재로써 담화 형식과 제재의 유형을 기준으로 각각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 시의 세 가지 기법 제시: 율격(metre), 허구성(fiction), 언어의 비유적 사용(tropes)  ㉠ 사물시(physical poetry) - 이미지스트 시인들의 시. 포괄적으로 물질현상을 노래하는 시, 순수시 등을 포함  ㉡ 관념시(platonic poetry) - 관념을 노래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사물의 세계를 파고 듦(관념의 전달이 목적)  * 형이상시(metaphysical)-관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인간의 몸짓  ② 언어에의 관심(언어의 잠재력을 계발함으로써 리얼리티를 폭로)  ㉠ 시적 언어는 반어적인 암시와 역설적인 암시를 기초로 한다. 따라서 시적 상황은 이중적인 의미로 표현된다.  ㉡ 시가 시인의 정서적 확인이 아니라 그러한 확신을 위협하는 모든 반대개념들과 충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시는 상반적인 관계, 곧 구조에 의존한다. 이 구조 속에 인간적 경험의 총체성이 드러난다.(워렌)  ㉢ 시의 언어는 역설적 언어이다.(세속적이고 견고하고 명석하고 재치에 넘치는 지성적 언어, 유추와 은유의 중첩, 분열, 모순의 개념으로 시 속에 나타남)  ㉣ 오직 시인의 언어적 기교와 구조적 기교만을 탐구하며, 어떤 눈부신 통찰을 위한 시인의 언어 조작과 시에 대하 인식론을 결합/ 시를 하나의 특수한 지식의 세계로 봄(브룩스)  ㉤ 시의 중심 요소로 은유, 상징, 신화를 듦/ 시적 대상의 구성 양식과 동일성(identity)을 중시(신화 비평)  5. 러시아 형식주의  1) 형식이란 예술 작품을 형성하는 일체의 것이라는 포괄적 개념  2) 형식과 내용의 불가 분리성을 주장/ 내용이란 형식의 한 요소.  3) 쉬클로프스키: 내용을 형식적 양상의 일부로 봄.  4) 쮜르민스키: 모든 내용적인 사실들을 예술 속에서 형식적 현상이 된다고 함.  5) 야콥슨: 예술적 총체성 속에서 기능을 나타내면 그것이 바로 형식이 된다.  6) 러시아 형식주의의 원리  ① 쏘쉬르가 언어학에서 한 것처럼 시의 내재적인 요소를 분리한다.  ② 최초의 운동은 문학 외적인 체계로부터 문학적 체계를 분리했기 때문에 부정적.  ③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zation, ostranenie)" 이론: 인식의 갱신/ 행위의 기계적인 습관을 파괴하여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인식케 하는 것/ 인식의 갱신이란 현대의 추상적 삶이 사물과 세계에 대한 순수하고 실존적인 접촉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데 대한 일종의 도전을 의미  ④ 서정시의 기교로써 낯설게 하기란 대상을 그 이름으로부터 해방시켜, 순수한 자체의 경험적 차원에서 묘사하는 것, 대상을 어떤 비일상적인 시각으로 제시하며, 대상과 주체의 거리를 극대화하여 바라보는 것, 스위프트처럼 현미경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 매우 완만한 행위의 체계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 한 대상을 매우 낯설은 다른 대상과 병치함으로써, 주의하지 못했던 대상의 특성들을 날카롭게 부각시키는 것, 원인과 결과라는 인습적 기대를 역전시키는 아이러니의 기법 등을 들 수 있다.      
1438    세상은 좋아보이는것뿐, 나쁘게 보이는것뿐... 댓글:  조회:4018  추천:1  2015-09-06
시인이란 이름으로                                             심정자 시인      詩를 쓴다는 것은 내게 더없는 행복이다. 혹여 왜 행복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말할 것이다. 생각을 문장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시인이란 이름에는 흙냄새와 들꽃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시는 닫힌 마음을 열고 멀어졌던 것들 불러들여 가슴으로 품을 힘이 생기게 한다. 시는 마술처럼 황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에게 시란 지지리 가난해서 애처로운 애인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들꽃에서 이는 작은 바람 한 점에서도 사랑을 노래하며 자연의 평화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들꽃의 향기로 글을 쓰고 한 점 바람에 사랑과 평화를 띄우는 것이 시인이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도 보석 같은 희망을 건져내는 것이 시인이다. 마음의 때를 씻어 내리는 언어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냄새가 나는 시가 좋다. 나는 내 자신에게 ‘백치 아다다’ 임을 고백한다.     새벽 산책하는 수봉산공원에는 기막히게 예쁜 정신이상인 여자 거지가 살고 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어김없이 이불 보따리를 옆구리에 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자주 만나는 얼굴에 대고 한마디 한다. “언니 나 김치 부침 좀 해줘! 먹고 싶어 죽겠다.” 어느 해는 “언니 나 감자 좀 쪄다 줘!” 한다. 사람 좋은 이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쟤 또 임신했나 보다” 하면서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면서 해마다 임신하는 그녀를 위해 다음 날 음식을 해다가 먹이는 모습을 여러 해 보았다.   나 역시 잉태하고 있는 詩語들, 달이 차도 나오지 않고 일년 삼백육십오일 품고 있는 것들만 있다. 마음이 급해질 때면 울컥울컥 곧 쏟아 낼 듯 하다가 죽고 마는 것들, 그러나 또 품을 수 있는 가슴이 있으니 행복하다.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이러저러한 종자들은 나를 늘 메슥거리게 한다. 건강한 놈으로 빨리 낳기를 바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늘 멀미를 지병으로 달고 산다. 그래도 행복하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백치 아다다”임이 확인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시집 에 실은 시 한편을 본다.   밤과 낮이 없다 아무데서나 부스럭거린다 허름한 담 모퉁이 으슥한 골목 아무 데서나 긁적인다 정적이든 동적이든 놓치지 않으려 받아 적는다 간첩으로 신고 당할지도 모른다 좋다 다 좋다 간첩이란 누명 써도 좋다 시 한 줄 누명처럼 남기고 싶 다   -「누명을 써도」전문   속이 메슥거리면 어떻고 늘 멀미를 하면 어떤가. 품고만 있어도 행복한 것을, 더구나 겨울을 건너 봄의 들녘에 닿아 시어를 잉태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회춘으로 수태할 수 있음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이 감사한 마음은 늘 다홍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고 있다. 찰랑찰랑한 다홍치마 길이만큼 긴 새하얀 앞치마를 지어 입을 것이다. 바쁜 살림살이에 밥을 짓듯이 시어를 짓기 위한 앞치마, 햇살 좋은 날에는 앞치마에 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련다. 하얗게 빛을 낸 앞치마를 내 생애가 다하는 날까지 입을 것이다. 하늘에서 우리 인간에게 내려준 정을, 그 정이란 것을 실어 나르고 싶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이 세상은 그렇게 좋은 일도 그렇게 궂은일도 없다. 다만, 좋아 보이는 것뿐이고 나쁘게 보이는 것뿐이다. 얼마나 여유로운 세상의 이치인가. 감사한 일이다.    
1437    詩人이란??? 댓글:  조회:4909  추천:0  2015-09-06
시인이란 무엇인가 - 신경림 시인이란 무엇인가 신경림 집으로 배달돼오는 시집이 하루에 꼭 한두 권은 된다. 계간지 등 시 전문지에 실린 시와 동인지까지 포함하면 내가 하루에 읽을 시는 백 편을 넘는다. 부담되는 분량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읽는다. 물론 전부를 읽으 수는 없다. 시집의 경우 대표작으로 보이는 몇편을 뽑아 읽고 전문지 등 잡지에 실린 시는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시인의 작품을 주 로 읽는다. 몇편 뽑아 읽는 것으로 치우고 마는 시집도 적지 않다. 생동 감도 활기도 없는 시집을 끝까지 읽을 인내심은 내게도 없다. 그러나 시 를 읽는 즐거움을 어느정도 맛보게 해주는 시집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 도 정말 괜찮다.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 시집이면 따로 빼두었다가 뒷날 다시 읽는다. 일년이면 이런 시집이 적어도 열댓권은 된다. 전문지, 잡 지, 동인지에 서도 이런 시는 종종 발견된다. 한데 그 다음이 문제다. 가령 일주일이나 한달 뒤 그 시집을 다시 읽으면 괜찮기는 한데 무언가 울림을 주지 못한다. 최근에 읽은 시집이 거의 그렇다. 왜 그럴까. 생각 해보니 우선 시를 너무 '만들어서' 그런 것 같다.  .  지금 '시란 씌어지는 것이고 시인이란 태어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가 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 시란 만드는 것. 이것이 오늘의 시인 누 구나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이고, 시인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고 시인이 될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재능을 의심하면서도 시를 공부하거나 계속 시를 쓰 는 많은 사람들의 위안이 되는 소리요, 또 부분적으로는 맞는 소리이기도 하다. 조금 양보하여,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벤 존슨 (Ben Jonson)의 말을 인용, "시인이란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 어 지기도 한다"라고 말을 해도 구닥다리 소리를 면하기 어렵다.  .  '왜 시인은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쌓는 훈련을 안 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 ' 라고 한 어떤 시인의 질 문이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쪽으로 편리하게 인용되기도 한다 . 하지만 문제는, 만들어도 억지로 만든다는 데 있다. 하지만 문제는, 만들어도 억지로 만든다는데 있다. 자연스러운 데가 없다는 뜻이다. 처음 읽을 때 는 눈에 쉽게 띄지 않다가도 다시 읽으면 억지가 확연히 눈에 드러나고 또다시 읽으면 바느질자국까지 보인다. 나 자신 높이 평가한 바 있는 꽤 반응이 좋았던 어떤 시집은 처음 읽을 때는 참 근사하다는 느낌을 받았 지만 다시 읽으니 실증이 나고 또다시 읽으니 지겨워졌던 근래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 이것은 오늘의 우리 시에 거의 공통되는 것 같다. 젊은시인이나 중견이나 마찬가지로, 세상의 흐 름이 튀는 쪽으로 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겠으나, 이는 요즈음 시인들이 정말 좋은 우리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결과라는 한 평자의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한편 요즈음의 시에서 리듬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말도 하지만, 이 또한 시가 자연스럽지 못한 데 연유하는 것임은 더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  시를 억지로 만들다보니까 오늘의 우리 시중 많은 것들이 말장난으로 시종하고 있다. 물론 시에는 말장난이 라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말을 가지고 하는 예술에서 말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싶은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을것이다. 또 그것은 그 나름으로 매우 의미있고 재미있는 시적 동력 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말장난이라는 것이 "이걸 몰랐지 " 식의 천박한 발상에 그치거나 질 낮은 개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말장나이라고 할 수 없다. 말장난 자체가 적어도 시에서라면 읽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하며 그 즐거움은 분명 천박한 발상이나 질 낮은 개그에서 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은 경험의 축적이요 그 구체화로, 말장난에도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 한대 요즈음 시들의 말장난에서는 그것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삶과는 아무 관계 없는 말들을 이리저리 뒤바꾸고 돌리고 비틀고 해서 말의 난 장판을 만들어놓을 뿐이다. 젊은 시인이라면 모험심도 있고 감각에 의존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또 이해가 될 법도 한 일이다. 한데 나이 많은 시인들이 젊은이 흉내르 내며 경박한 말장난에 동참하는 것은 정말 역겹다. 이는 새로우 것을 향한 탐구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문학저널리즘에의 영합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  .  잇대어 생각나는 것은 가벼움이다. 가벼움이 우리 민족성과 맞는다는, 그래서 인터넷 시대는 바로 우리 시대이기도 하다는 우스개도 있지만, 요즈음의 우리 시 (시뿐 아니라 문학 전반에 걸친 현상이지만)는 너무 가볍다. 또 너무 쉽게, 너무 함부로들 시를 쓴다. 설명할 것도 없이 이는 7,80년대의 이른바 민중시의 무거움에 대한 반동의 결과라는 측면 이 강하다. 민중시인이란 시 한면 얼굴부터 근엄하고 엄숙해지는 웃음이 없는 시인 이라는 야유도 받은 바 있지마, 사실 7,80년대의 민중시 또는 사회시로 불리는 시들은 쓸떼없이 무거웠다. 분단 현실을 다루지 않은 시가, 혹은 노동문제를 다루지 않은 시가, 또는 권위주의에 저항하지 않는 시가 어찌 이시대의 시일 수 있겠는가라는 문학 안팎의 채찍질과 서슬퍼런 눈초리 앞에서 시인들의 상상력이 한껏 위축되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 통에 마치 앞서 말한 것들만 다루면 다 시가 된다는 잘못된 잣대에 따라 불량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기도 했다. 80년대말, 안으로 권위주의가 패퇴하고 밖으로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이 잣대는 아루아침에 폐기되고 그 자리에 , 앞서의 내용을 다루지 않아야 새로운 시대의 시가 된다는 통념이 들어서게 된 것이 말하자면 가벼움의 시의 출발점이 된다. 7,80년대의 민중시는 실제로 반성할 대목이 많다 . 과연 그 시들 가운데서 좋은 시로 우리 문학사에 남아 독자의 사랑을 받을 시 가 몇편이나 될까. 첫번째로 반성할 것은 일제시대의 가프 시를 거울로 삼지 못했다는 점이다. 카프 시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한 역할이 과소평 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 많은 카프 시 가운데 오늘 우리에게 기억되는 시는 폋편이나 되는다. 임화의 시를 제하면 박세영이나 이찬 그리고 권환의 시가 있을 정도다. 물론 임화는 말할 것도 없고 박세영 이나 이찬, 권환 다 뛰어난 시인들이다 . 예컨대 북쪽으로 올라가 "김일성 장군의 노래" 를 쓴 이찬의 "오오, 북만의 15도구 말없는 산천이여/ 어서 크낙한 네 비밀의 문을 열어라// 여기 오다가다 깃들인 설움 많은 한 사나이 / 들어 목메던 그 빛, 그 소리로 한껏 즐거워 보려 노니" 로 끝나는 -눈내리는 보성의 밤- (1938) 같은 시는, 모든 사람 들이 김일서으이 보천보전투의 실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을 때 그 역사 적 사실을 입증하려는 노력의 시적 형상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 오늘 의 감각으로 보아도 결코 처지는 시라고 말하기느 어렵다. 그러나 이만한 시는 그 에게서조차 몇편 되지 않는다. 사회성에 치중한 나머지 시가 갖는 말의 예술이라는 점으 소홀히 생각했던 탓이 아닌가 여겨진 다. 7,80년대의 민중시 또는 사회시 쪽의 일부 시도 잩은 잘못을 저질 렀다 . 시는 말로 하는 예술로써 사회성 자ㅔ도 명확한 말에 의해 경험 된 것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터이다.  . 이들 시들을 '사회성은 강하지만'으로 인정하면서 '예술성이 약하다' 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떠한 사회성도 시에 관한 한 명확한 말에 의해 경험된다는 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 명확한 말에 의해 경된다는 것이 예술성을 뜻한다면 그것은 시의 필요조건으로, 예술성이 약하다는 것은 말에 의해 경험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요, 아무리 사회 성이 강해도 좋은 시로 인정 될수는 없다는 것이다. 90년대의 시가 7,80 년대의 이러한 점을 반성하고 옳은 길로 나아갔다면 탓할 일이 못 된다. 예술성의 회복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7,80년대의 시에 대해서 올바른 진단이 따르지 못했고 그 처방도 바르지 못했으니, 시인 은 본질적으로 정확한 말을 가지고 하는 존재라는 점을 이들 또한 중시하 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90년대 시의 가벼움은 똑같은 잘못의 반복 으로써, 예술성의 상실과 시정신의 결여로 이어질밖에 다른 길이 없었지 않나 여겨진다.  .  나는 요즈음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케케묵은 화두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다 알다시피 이것은 워즈워스(W . Word sworth)와 코울리지 ( S. T. Coleridge)가 공동으로 낸 [성정담시집] (Lyrical Ballads)의 제2판 서문에서 제기했던 질문이다. 이 서문에서 워즈워스와 코울리지는 대답했다, "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나는 이말을 시인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한 살아있는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이 과연 무엇인가. 시인의 특성으로 튀어난 감수성과 상상력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철학자 나 과학자에게도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비상히 발달한 언어능력이라는 점에 있어 시인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가령 앞의 정의에서 "쉽게" 라는 말 속에 정확하게 , 분명하가게 라는 뉘앙스가 있다고 읽을 때 뜻은 더 명료해진다. 시인이란 결국 남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결국 남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이다 . 시도 일종의 대화라는 뜻이다 . 설명이 아니라 표현을 가지고 하는 대화니까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 한데 요즘 읽는 시들 중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고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이하고 탄력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되는 컴퓨터 탓이 없지 않을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말이 어찌 힘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 "힘있게" 가 "감동적으로" 를 뜻한다면 이런 유의 시가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은 너무 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유의 시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으로 시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흠잡을 수 없는, 그래서 정말 그럴듯하다고 느껴지 는 시도 대부분 울림을 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성이 제거된, 거의 개인적인 문제로 시종하고 있는 시들이 두고 하는 말이다 .  . 이 부류의 시에 대한 평자나 독자의 관심의 정도 역시 7,80년대의 사회 성의 강조에 대한 반발로 여겨지는데. 과연 사회성이 사상된 시를 통한 삶의 추구가 가능할까라는 점도 생각해볼 대목이다. 물론 사적인 삶은 중요한 것이고, 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가 개인적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이요 내면의 추구라는 사실을 굳이 경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혼자 사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가 사는 삶인만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남과 더불어 살게 마련인 것이 세상이다. 더욱이 말이란 사색이나 자아추구의 방법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삶의 소산이다. 말에는 원천적으로 사회성이나 역사성이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시를 가지고 개인적 문제 에만 집착한다면 시는 한없이 왜소해져 있다. 이런 시들이 몸을 던져 시 를 쓰는 것과 거리가 있음은 말할것도 없다. 치열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독자에의 영합이 더 문제다. 시가 경박해지는 것도, 시를 너무 쉽게 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도 남에게 하는 말인만큼 듣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 독자가 없는 시처럼 비참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 하지만 의식 한다는 것과 영합은 전혀 다르다. 의식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마음 을 열어놓고 있다는 뉘앙스를 가진 반면 , 영합은 독자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한다는 뜻이 강하다. 7,80년대의 사회성의 시들은 어쩌면 또다른 형태의 독자와의 영합이었다는 혐의를 둘 수도 있으므로, 사회성 의 시 자체에 독자와의 영합 내지 세속주의적 요소가 있는가의 여부는 한번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  1998년 10월 일본의 카나가와 대학에서 동북아시아 문학에 대한 세미나 가 있었다. 중국 일본 한국 에서 평론가 , 소설가 ,시인이 각각 한 명씩 발표자로 나선 이 세미나에서 나는 '오늘의 한국시'를 주제로 애기를 했는데 , 청중의 하나가 한국시에 있어서의 절규성이란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다. 나는 그 개념이 분명치 않아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 일본에서 나온 '현대시의 전망' 이라는 책을 그뒤에 보니 이 문제가 주요한 화두였다. 일본시가 전체적을 동인들끼리 즐기는 수공업예술의 수준으로 전락 왜소한한 가장 큰 원인은 시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절 규성의 상실에 있다는 지적이 있고, 한국시에는 아직 그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활기찬 문학이 되고 있다는 진단도 있었다. 최근에 나온 진보적 문학지 '신일본문학'에서도 눈에 띄는 시에 있어 절규성이란, 여러 사람 의 말을 종합해보건대 문자 그대로 시는 본질적으로 부르짖음, 외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 같았다. 가령 우리가 살수 없는 환경에 봉착했을 때 못 견디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더없는 기쁨에 처했을 때 환호하는 그런 기능과 성격이 시에는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에 게 위험을 알리기도 하고 기쁨을 즐기게도 하는 것이 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 특유의 탐미주의와 사소한 것에 대한 편집광적 집착으로 사회성이 사상되면서 일본시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시 쪽의 이 진단은 일본시에 관한 한 옳은 것이겠으나 한국시에 대해서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90년대 들어 우리 시에서도 그러한 절규적인 성격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실제로 이 절규성이라는 문제는 우리 시에서도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 시가 억지에 의해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말장난 에 시종하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 시 자체를 왜소하게 만들고 하는 것이 모두 절규성의 상실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시가 안이하고 느슨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 물론 우리가 막 들어선 싸이버 디지털 시대에 시가 옛날과 같은 형태로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체로 활자매체에 의존해온 시에게 탈활자 매체시대의 도래는 분명히 새로운 위기이다. 하지만 기계화와 대량생산 이라는 산업혁명의 폭풍 속에서 시는 왕자의 자리를 산문에 넘겨주기는 했지만, 민중언어의 발견에 의해서 오히려 그 영역을 확대하지 않았던 가. 사람을 극단적으로 개인화하고 파편화하리라 예상했던 인터넷이 오히려 전지구화하면서 국가간 계급간의 빈부격차를 확대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연결망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암시하는 바 크다.  .  시는 어차피 이상주의자의 길에 피는 꽃이다. 억지로 만드는 데서 벗어나 좀더 자연스러워지면서, 잃어버린 절규성을 회복하고, 왜소 해짐으로써 놓친 큰 울림을 되 찾는다는 일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우리 시가 한번 시도 해볼 일이다.  [출처] [펌] 시인이란 무엇인가/신경림(펌자료)|작성자 자오지천  
1436    <퇴직하는 벗들에게> 시모음 댓글:  조회:4440  추천:0  2015-09-06
+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 - 교사 퇴임 축시 세상 풍경도 바꾸어 놓는다는 십 년의 세월 그런 십 년을  세 번이나 지나고서도 두 해를 더 보탠 그 오랜 시간 속에   말없이 당신께서 흘리셨을 수많은 땀방울을 생각합니다. 세상 명예를 탐하지 않고 묵묵히 교직의 한 길을 걸어오신  당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은 고스란히 사랑의 역사입니다.  동심(童心)의 아이들과 함께 나눈 숱한 기쁨과 아픔 속에     어쩌면 당신께선 삶의 진실에 가 닿았을 테지요. 당신과 인연 맺었던 코흘리개 아이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선생님'으로 살아 있을  참 아름답고 복된 당신, 그런 당신이 곁에 있어 우리의 삶도 사랑도 한 치는 키가 자랄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 + 별 - 전역 축시 만 삼십 육 년 백 마흔 네 번의 계절이 바뀌는 긴 세월 동안 오직 한길 군인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참 자랑스러운 그대 햇살같이 따스한 부하 사랑 달빛 예지를 겸비한 너는 덕장(德將)이며 또 지장(智將)이었지. 그 동안 갈고닦은 인품 강인한 정신, 강철 체력으로 이제 새롭게 펼쳐지는 생 거침없이 내달려  견장에서 반짝이던 그 별 너머 더욱 빛나는 별이 되리라. 네가 있어  세상의 한 구석이 밝아지는 말없이 아름다운   별이 되리라. + 아름다운 사람 - 전역 축시 꽃같이 피어나는 스물 한 살 청춘의 날부터 나이 육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만 삼십 칠 년  기나긴 세월 동안 투박한 푸른 제복 입고 세상 부귀영화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빛도 없이 자랑도 없이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한 길  묵묵히 걸어온 그대, 아름다운 사람아. 그대는 윗사람의 신뢰를 받는  실력 있고 유능한 군인이었으되 한순간도 자만에 빠지지 않았다 그대는 절도 있는 군인이었으되 비바람 눈보라 속 생사고락 같이하는  부하들에게 엄마같이 자애로웠다 그대는 박봉의 살림살이에도 기죽거나 흔한 불평 한마디 없이 가족사랑 또한 끔찍하여 1남2녀 자녀들을 훌륭히 길렀다. 계절이 수없이 바뀌어도 군문(軍門)에 들어설 때의 그 순결했던 첫 마음 변치 않고 우직한 황소걸음으로 달려갈 길 다 달려 오늘 전역을 맞이하는 그대 그 동안 남몰래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결실 맺어 이제 우리의 마음속 영원히 빛날 별 하나로 뜬다. + 퇴직하는 벗에게  대학 졸업이 코앞이던 어느 날 술집에서 은행에 취직했다며 장난 삼아 어설피  배춧잎 돈다발 세는 모습 보여주던 때가 바로 엊그제 일만 같은데 어느새 만 스물 아홉 해가 지나 자네가 퇴직을 했다니 꿈만 같아 백 열 여섯 번의 계절이 바뀌는 긴 세월 동안 근무지 따라  가족들 데리고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힘든 일도 적지 않았을 텐데 '직장은 내게 밥을 주는 곳'이라며 늘 진심으로 고마워했지. 복스럽던 머리숱에 흰 서리 내린 지 오래지만 슬퍼하거나 기죽지 말게 자네의 반백(半白) 은빛 머리카락은 세월의 훈장처럼 오히려 참 보기 좋지  가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던 말처럼 자네는 백 살을 너끈히 살고도 남을 것 같애   그렇다면 이제 인생의 전반전이 끝났을 뿐 앞으로 남은 날들 창창(蒼蒼)하니 이름 없는 섬 마을 선생이 되고 싶다던 갓 스무 살 무렵의 소박했던 꿈 어쩌면 자네가 능히 이루었을 듯도 싶은 그 추억 속의 꿈에 모닥불 지펴 이제 급할 것 전혀 없는 황소걸음에 동심(童心)의 눈으로   세상 풍경 차근차근 구경하며 하루하루가 소풍놀이같이 흥분되고 하는 일마다 창의(創意)와 재미와 보람 넘치는 행복한 인생 후반전을 맘껏 펼치게나. 지금껏 채송화처럼 겸손히 살아온  자네에게 아무래도 신께선 민들레 홀씨의  자유로운 영혼 하나 선물하실 것이니 남은 세월엔 자네가 되고 싶은  뭐든 되어 보게나.  + 퇴직하는 벗에게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30년 2개월 동안 그야말로 성실히 한 우물을 파고 이윽고 퇴직하는 친구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눈 팔거나 괜한 욕심 부린 적 한번도 없이 씨 뿌린 만큼 거두는 그저 우직한 농부의 마음으로 강산도 바뀐다는 십 년 그 긴 세월이 세 번이나 흐르도록 맡은 일을 빈틈없이 해내며 숱한 인내의 땀방울 흘렸을 테지만 윗사람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유능하고 꼭 필요한 사람, 또 아랫사람들을 따뜻이 보살피는 자상하고 참 인간적인 상사였을 너는 아마 직장의 보물이었을 게다.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생활의 거처였던 정든 직장을 떠나 이제 새롭게 펼쳐지는 삶이 조금은 낯설고 어색할지 몰라도 틀림없이 너는 뭐든 잘해낼 거다 통트는 햇살 더불어 선물로 주어지는 하루 스물 네 시간의 조각조각  알뜰살뜰 엮어 사랑하는 아내와 더욱 가까워지고    아들딸이랑 미주알고주알 얘기를 나누는  소박한 행복 맘껏 누리렴   산과 들과 바다로 여행을 떠나 자연을 벗삼는 그윽한 기쁨도 맛보고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색의 여유도 네 것으로 하렴.     인생 전반전을 잘 마무리했으니 너의 후반전은 더욱 기대되는구나 지상의 길벗으로 만난 참 믿음직스럽고 소중한 사람 오! 사랑하는 나의 친구여.   * 정연복(鄭然福): 1957년 서울 출생.
      1. 50분 작업 10분 휴식   1시간정도 모니터를 봤다면 반드시 10분은 눈의 휴식을 취해줘야합니다. 또한 조명도 적당히 조절해서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게해야 눈의 피로를 줄여줄 수 있습니다.   2. 먼 곳 보기    가능하면 자주 먼 곳 보기, 항상 가까운 곳만 보면 눈이 쉽게 피로해집니다. 먼 곳과 가까운곳을 주기적으로 봐주면 눈이 자동으로 초첨을 맞추려고 눈 근육 운동을하게되죠    3. 목이 편한 옷입기    안구의 압력이 높아지지 않게 목이 조이는 옷보다는 가급적이면 편한옷을 입어주면 좋습니다. 넥타이의경우 너무 강하게 매지말고 가능하면 틈틈히 풀어주는게 좋습니다. 4. 스트레스 안받기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죠  우리몸이 견딜 수 없는 정도의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는다면 안압이 알라갈 수 있습니다.  이는 눈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죠,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5. 눈 스트레칭 눈을 감고 상하좌우, x자, 8자 등으로 시선을 돌려가며 눈을 스트레칭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6. 주기적인 안과 방문   주기적으로 안과를 방문해서 검사를 해보는게 좋습니다.  모든 병은 조기발견이 중요하죠    7. 눈에 좋은 음식   브로콜리, 시금치, 당근, 샐러리와 같은 비타민 A가 풍부한 식품 결명자를 차로 끓여서 물대신 마시면 좋습니다. 블루베리, 연어, 고등어, 참치, 장어도 눈에 상당히 좋다고하네요   
1434    詩란 눔은... 댓글:  조회:8238  추천:0  2015-09-05
詩 시 시  1. 시 2. 시경(詩經) 3. (시를)읊다, 짓다 4. 기록하다(記錄--) 5. 받들다   [부수]言(말씀언) [총획]13획   [난이도]중학용, 읽기 4급II, 쓰기 3급II   詩經 시경 중국(中國) 최고(最高)의 시집(詩集)으로, 주(周)나라 초부터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初期)까지의 시 305편 모은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의 하나 詩人 시인 시(詩)를 짓는 사람. 시(詩)를 잘 짓는 사람. 詩文 시문 시가(詩歌)와 산문(散文)  사(詞). 漢詩外傳 한시외전 전한(前漢)의 경학자(經學者) 한영(韓孀)이 지은 『 시경(詩經)』의 해설서(解說書)   詩禮之訓 시례지훈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자식(子息)이 아버지에게서 받는 교훈(敎訓) 刻燭爲詩 각촉위시 촛불이 한 치 타는 동안에 詩(시)를 지음 七步成詩 칠보성시 일곱 걸음에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는 뜻으로, 시를 빨리 잘 짓는 재주를 이르는 말. 萬卷詩書 만권시서 아주 많은 책,  썩 많은 책(冊). =====================================   ... ... 늙은 사람 한 가지 즐거운 것은  붓가는 대로 마음껏 써 버리는 일.  어려운 韻字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늙지도 않네.  흥이 나면 당장에 글로 옮긴다.  나는 본래 조선사람  즐겨 조선의 詩를 지으리.  그대들은 그대들 법 따르면 되지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자 누구인가.  까다롭고 번거로운 그대들의 格과 律을  먼 곳의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나.  ―정약용 「老人一快事」 붓놓자 풍우가 놀라고  시편이 완성되자 귀신이 우는구나  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杜甫 시 3백수에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악함이 없다.  ―공자 『논어』 爲政篇 그대들은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사람에게 감흥을 돋우게 하고 모든 사물을 보게 하며, 대중과 더불어 어울리고 화락하게 하며, 또 은근한 정치를 비판하게 하는 것이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시에서 배울 수 있으며, 또한 시로써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공자 시란 뜻(志)이 향해 가는 바라, 마음 안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공자 고시(古詩)는 충후(忠厚)를 주로 했다. 시라는 것은 언어만 가지고 구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깊이 그 의도를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기평(譏評)할 때에는 그 소위(所爲)의 악을 얘기하지 아니하고 그 벼슬의 존비와 차안의 미려를 들어 백성의 반응을 주시하여야 하는 것이다. ―소식 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 ―白居易 시란 말의 뜻을 나타내고 노래란 말을 가락에 맞춘 것이다. 소리는 길게 억양을 붙이는 것이고 가락은 소리가 고르게 된 것이다.―유협 『문심조룡』 시는 의(意)가 주가 되므로 의를 잡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 것은 그 음이다. 의도 또한 기(氣)를 위주로 한다. 기의 우열에 따라 의의 깊고 옅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天性)에 딸린 것이어서 배워서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떨어지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의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句)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 없다. 하나 거기에 심후한 의가 함축되어 있지 아니하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다시 씹어보면 맛이 없어져 버린다. ―이규보 시에는 마땅치 못한 아홉 가지 체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하여 체득한 것이다. 시 한 편 속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한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 실은 것, 옛사람의 뜻을 몰래 취해 쓰는 것은 도둑질을 잘한다고 해도 옳지 않은데 도둑질이 서투르면 이것은 서툰 도둑질이 잘 잡히는 것, 강운으로 압운하여 근거가 없으며 이것은 쇠를 당기나 이기지 못하는 것, 재주는 헤아리지 않고 지나치게 압운하면 이것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험벽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하게 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것, 말이 순편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사람에게 쓰기를 강요하는 것은 억지로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 일상용어를 많이 쓰는 것은 촌사람이 이야기하는 것, 공자나 맹자를 범하기 좋아하는 것은 존귀함을 함부로 범하는 것, 글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잡초가 밭에 가득한 것이다. 이 마땅하지 못한 체격을 면할 수 있게 되면 함께 시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이규보 시문은 기를 위주로 삼는다. 기는 성(性)에서 발하고 의(意)는 기에 의지하며,말은 정(情)에서 나오므로 정이 곧 의이다. 그러나 신기한 뜻은 말을 만들기 어려우므로, 서두르면 더욱 생소하고 조잡해지는 것이다. ―최자 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이인로 『破閑集』 시는 함축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희미한 글,  숨은 말로서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은 것은 또한 시의 큰 병통이다.  ―서거정 『東人詩話』 시가 교화를 위한 것이라는 뜻은 본래 온유 돈후한 시정신으로써  성정을 다스려서 풍화(風化)를 이루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여  세상의 도리를 평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남구만 시는 성정의 허령(虛靈)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유몽인 시는 성정을 나타내는 것이다.―이의현 시는 원리와는 관계 없는 별종의 취향을 갖고 있다. 오직 천기(天機)를 농(弄)하여서 심원한 조화 속을 파악하여 정신이 빼어나고 음향이 밝으며 격이 높고 생각함이 깊으면 가장 좋은 시가 된다. ―허균 시란 사람의 천성과 정서를 조정하고 인간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심덕잠 지금 우리 나라의 시와 문장은 고유의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워서 쓴 것이다. 가령 아주 흡사해진다 해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김만중 무릇 시에 있어서는 자득(自得)이 귀하다.―이수광 시란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 속에 있으면 지(志)라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정(情)이 마음 속에 움직일 때,  시인은 그것을 말로써 표현한다. ―신위 시는 교화(敎化)하는 것이니 힘써 그 뜻을 전달해야 한다. ―이익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어지러운 시국을 아파하지 않고 퇴폐적 습속을 통분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단 진실을 찬미하고 거짓을 풍자하거나 선을 전하고 악을 징계하는 사상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정약용 『목민심서』 시는 대개 정신과 기백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정약용 시에는 신비한 정신의 경지가 있는데 이것은 무형 중에 우거(寓居)하면서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에, 우연히 만나면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는 찾아보려고 해도 얻을 수 없다. ―신광수 보기 좋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모아놓고 시라고 하는 것이야 비천한  잡배의 장난에 불과하다. 시는 선언이다. 만천하의 현재 뿐 아니라  진미래제(盡未來際)까지의 중생에게 보내는 편지요, 선언이요,  유언이다. ―李光洙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李光洙 시인이 창작한 제2의 자연이 시다.―조지훈 시는 신(神)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韻文)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充溢)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  시가 있다. ―I.S.투르게네프 『루진』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F.Q.호라티우스  『詩法』 시의 목적은 진리나 도덕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보들레르 기쁨이든 슬픔이든 시는 항상 그 자체 속에 이상을 쫓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보들레르 시는 진리가 그 목적이 아니다. 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보들레르 시를 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그건 낚시질하고 똑 같네. 아무 소용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 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좋은 수확이 되는 법이거든. ―E.크라이더 『지붕밑의 무리들』 시는 넘쳐 흐르는 정감의 힘찬 발로이다.―워즈워드 시는 체험이다.―R.M.릴케 시는 악마의 술이다.―A.아우구스티누스 시란 것은 걸작이든가, 아니면 전연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J.W.괴에테 위대한 시는 가장 귀중한 국가의 보석이다.―L.베에토벤 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프리뉴스2世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한다. ―머클리쉬 시는 단지 그 자체를 위해 쓰여진다.―E.A.포우 시는 예술 속의 여왕이다. ―스프랏트 시는 마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 ―R.M.릴케 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은 아니다. 시가 만일 감정이라면  나이 젊어서 이미 남아 돌아갈 만큼 가지고 있지 않아서는 안된다.  시는 정말로 경험인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에머슨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P.B.셸리』 감옥에서는 시는 폭동이 된다. 병원의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다. 시는 단순히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건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보들레르 『로만파 藝術』 시란 냉랭한 지식의 영역을 통과해선 안된다.……시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곧바로 마음에로 통해야 한다. ―F.실러 시란 가장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M.아놀드 시적(詩的)이 아닌 한,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A.지이드 『私錢쟁이』 시는 모든 예술의 장녀(長女)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양친이다.  ―콩그레브 만약 사람이 마력적인 시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대는  아름다운 생(生)을 알게 된다.―J.아이헨돌프 도덕적인 시라든가 부도덕적인 시라든가에 대해서 말할 것은 아니다.  시는 잘 씌어져 있는가 아니면 시원찮게 씌어져 있는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시는 힘찬 감정의, 위세 좋은 충일(充溢)이다. 그 원천은 조용히  회상된 감동이다. ―O.와일드 『英國의 르네상스』 나이 어려서 시(詩)를 쓴다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은 일생을 두고 그것도 될 수만 있으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별처럼 꿀과 의미(意味)를 모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 가서 서너 줄의 훌륭한 시가 써질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手記』 시는 근본적인 언어 방법이다. 그것에 의해 시인은 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그의 직각적 매카니즘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다. ―M.무어 시는 오직 인간의 능력을 발양(發揚)하기 위해서 우주를 비감성화시킨  것이다. ―T.S.엘리어트 『超現實主義 簡略事典』 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고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T.S.엘리어트 『傳統과 個人의 才能』 시의 세계로 들어 온 철학 이론은 붕괴되는 법이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이 진리이건 우리가 오류를 범했건 그런  것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의미하는 그 진리가 영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T.S.엘리어트 『評論選集』 시의 의미의 주된 효용은 독자의 습성을 만족시키고 시가 그의  마음에 작용하는 동안 정신에 대해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데 있다.  ―T.S.엘리어트 『詩의 효용과 批評의 효용』 시란 무엇은 사실이다 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해 주는 것이다. ―T.S.엘리어트 시는 미에 있어서의 참된 집이다. ―킬피란 우리의 일상 생활의 정서 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게끔 되어 있다.  이것만이 단지 근본적인 차이일 뿐이다. ―I.A.리차아드 시는 우리들이 익숙해서 믿어버리고 있고 손쉽게 가깝고 명백한  현실에 비해서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꿈 같은 느낌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뒤바뀌어진 것으로서 시인이 말하고 시인이  이렇다고 긍정한 것 그것이야말로 현실인 것이다.  ―M.하인거 『횔더린과 詩의 本質』 시는 법칙이나 교훈에 의해 완성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감각과  신중함에 의해 완성될 수 있다. ―J.키이츠 아무리 시시한 시인이 쓴 글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정말로 그를 이해한다면 좋은 시를 얼핏 읽어버림으로써 받은 인상보다야 훨씬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나. 내가 시를 읽고 싶지 않을 때, 시에 지쳤을 때, 나는 항상 자신에게다 그 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타이르는 바일세. 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단히 아름다운 감정이 내 마음 속에서 진행 중일 것이라고 타이르기도 하네. 그래서 언젠가 어느 순간에 내가 내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있어 그 훌륭한 감정을 꺼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네. ―J.러셀 『사랑이 있는 기나긴 對話』 시는 보통의 이성의 한계를 지닌 신성한 본능이며 비범한 영감이다.  ―스펜서 시는 시인의 노고와 연구의 결과이며 열매이다.―B.존슨 시의 으뜸가는 목적은 즐거움이다. ―J.드라이든 한 편의 시는 그 자체의 전제(前提)를 훌륭하게 증명해 놓은 것이다. ―S.H.스펜더 『시를 위한 시』 18살 때 나는 시라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환희를 전달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살 때, 시는 연극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나는 가끔 시를 갱도(坑道)속 함정에 빠져서 미칠 것 같은 불안  속에서 자기를 구출해 줄 다른 갱부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성자여야 합니다. ―P.토인비 『J.콕토와의 인터뷰』 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리고 나서 매장시키는 지상의 역설이다.  ―K.샌드버그 시의 본질은 동작이다. 이 동작은 내적 완전을 나타내고 이 내적  완전이 참으로 인간적이고 또 진실이기 때문에 참으로 시적인  성격은 위대한 격정의 자유로운 움직임 가운데 나타난다. ―네싱 시적 형식은 본질이 무엇이든 시가 문학의 특수한 형식으로서  쾌락을 주는 근원은 변화에 의한 반복성에 있다. ―R.E.앨링턴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싯귀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 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 ―클로델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있다.  ―스카르보로 『중국격언집』 만약 시가, 위대한 그 무엇이 아니면 안된다면, 어느 의미에서  그것은 현대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간에, 작자의 정신의 내부에 있는 산 그 무엇과, 그것이  전달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시로써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신체는 어디 있든간에, 그 혼은, 이곳에, 그리고 현재 있어야  하는 것이다. ―A.C.브래드레 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라면 우리들은 간단히 가질 수가 있다) 시는 경험이다.  한 편의 시를 쓰려면, 많은 도시를, 많은 사람들을, 많은 사물들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동물, 새의 날으는 모습, 아침에 피는  꽃의 상태 등을, 알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지의 토지에 있는 도로,  우연히 만난 사람들, 애당초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이별, 기억도 확실치 않은 먼 어린 시절, 자기도 알지 못하였던 즐거움이며, 마음먹고  아버지 어머니가 주는 것을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들에 공상의  힘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람 각자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사랑하던 밤의 일, 분만하는 부인의 애끊는 절규. 어린애 침대에서 잠도 자질 못하고 창백하게, 그리고 잠들어버리는 부인들의 추억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땐, 들창을 열어 놓은 채, 계속적인 시끄러움이 들리는 방에서, 죽은 사람 곁에 앉아 있었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이 있을 땐 잊어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하여 기억이 또 한번 떠 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이 우리들의 내부에서 피가 되어 명확히 이름지울 수도 없게끔 되어버리든가, 이미 우리들 자신과 구별할 수도 없게끔  되어버릴 때 ―그야말로 어느 순간 시의 최초의 한마디가, 기억의  한가운데 나타나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R.M.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시의 기능은 세계의 슬픔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A.E.하우스만 시적 진실 ―‘개인적,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며, 기능적인 것’ ―워즈워드 시는, ……인간의 마음의 제일 먼저의 활동이다. 인간은 일반적인  개념을 만드는 단계에 이르기 전에 상상상의 관념을 만든다. 명증한  마음으로 생각하기 전에 혼란한 머리로 파악한다. 명확하게 발음하기  전에 노래부른다. 산문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운문으로 이야기한다.  전문어를 쓰기 전에 은유를 쓴다. 말을 은유풍으로 쓴다는 것은  우리들이 ‘자연발생적’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그에 있어서  자연인 것이다. ―G.B.비코 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T.E.흄 시의 중요한 목적은 정밀하고 명확한 표현에 있다. ―T.E.흄 사랑받지 못한 해바라기가 아름답게 빛나고  씨를 가진 꽃만이 불꽃으로 반사한다. ―A.L.테니슨 시는 상징주의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감동시킨다는 이론을 만약  사람들이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현대시의 양식 속에 어떠한  변화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선조들의 방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즉, 자연을 위하여 자연묘사를, 도덕을  위하여 도덕율을, 그리고 테니슨의 경우 시의 중심이 되는 불꽃을  거의 다 깨버린 일화나, 과학적 의견에의 고려 등을 버리는 것이다.  ―오든 시란 현존시에 붙어다니는 한낱 장식물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일시적인 감격이나 감동에 그치는 바도 아니다. 더구나  한낱 열중에 빠지는 바도 아니며 오락물로 떨어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시는 역사를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하이데거 산문시란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음악적이고 영혼의 서정적 동요,  환상의 파동, 의식의 경련에 응답하기 위해 충분히 유연하고 충분히  거칠은 시적 산문이다.  ―C.보들레르 ―『파리의 우울』(Spleen de Paris) ‘시―인스피레이션’의 공식을 믿는 시적 사고는 허망한 하나의  옛이야기가 되어도 좋다. 지적(知的)으로 확신되는 사상에만  정적(情的) 신앙을 주려는 폐습이 일부 사람들에게 굳게 뿌리  박혀 있다. 과학이 증대하여 힘과 그것은 장차 일반화하여 갈 것이다.  ―L.A.리처즈 시는 최상의 행복, 최선의 정신, 최량이고 최고의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P.B.셀리 『詩歌擁護論』 시란 진리며 단순성이다. 그것은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  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J.콕토 『暗殺로서의 美術』 시란 그 시를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상의  심볼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 ―W.C.브라이언트』 즉흥시는 진정 재지(才知)의 시금석(試金石)이다. ―J.B.P.몰리에르 서정시는 감정이 흘러 넘치는 청춘의 생명의 표현.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 없는 힘이며 열렬한 신앙의 발로다.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자연과 사랑과 신 등으로 작자의 모양이 십분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제1인칭의 시라고 해도 좋다. ―에론네스트보배 서사시의 흥미는 작자가 아니고 그 시 속의 사건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르스는 개인적으로는 실제인물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을 만큼 아무래도 좋은 인물이다. 다만 호메르스의  시 속 영웅들에 흥미를 느낄 따름이다. 이에 비하여 같은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만나의 시를 읽을 때는 시 속의 영웅들은 무엇이던가  관계할 바 없고 다만 시인 그 자신에 일체의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서정시의 주관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테 시는 음악과 맞추어 만든 수사적인 작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단테 뮤직과 포에지의 길은 서로 교차한다. ―뽈 발레리 포에지는 말의 전능으로 베일을 벗긴다. 포에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문제는 날마다 그의 마음과 눈에 부딪치는 것을 그가 보고  느끼는 것처럼 그가 생각하도록 각도와 속도를 맞추어 그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쟝.꼭또 시는 우주에 담긴 비밀의 광선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잊어버린 천국을  소생케 한다. ―D.E.시트웰 시는 애련 속에서만 존재한다. ―W.H.오든 진실로 시라고 할만한 것은 서정시를 제쳐놓고는 없다.  ―E.A.포우 의식의 사고와 시적 표현의 기초는 구체적 직관 그 자체이다.  ―S.길버트 시의 안에 사상은 과실의 영양가와 같이 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뽈 발레리  시는 운문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다.  ―필립 시드니 현대시는 하나의 신앙 위에 서 있다. 곧 숨은 진실이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되려면 믿어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믿어야 한다. ―R.M.알베레스 산문;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시;최상의 말을 최상의 순서로  놓은 것. ―워즈워드 시는 본질적으로 무슨 악마적인 것이 있다. ―괴테 시는 시 이외의 무슨 목적을 가질 수 없다. 도덕이라든지 과학과  결부시킬 수 없다. 시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문학적 특질, 즉 초자연과  아이러니 속에 있다. ―보들레르 시는 말의 의미를 이마쥬들의 분위기로 둘러싸이게 하면서 그 의미의  가지를 치게 한다. ―바슐라르 시는 진정한 의지의 범미주의적(汎美主義的) 활동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의지를 표현한다. ―바슐라르 서정적인 시는 돌진한다. 그러나 유연하고 물결치는 움직임으로이다.  모든 갑작스럽거나 끊어지는 것은 시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는 그런 움직임을 비극이나 관습적인 성격의 소설 쪽으로 돌린다.  ―보들레르 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다. 시가 감정이라면  젊은 나이에도 벌써 흐를 정도로 시를 갖게 될 게 아닌가. 시는  정말로는 체험인 것이다. ―R.M릴케 시란 꿈과 같은 것이기는 하나 현실은 아니다. 말장난이기는 하나  진지한 행위는 아니다. 시란 해로운 까닭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힘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말보다 해롭지 않은 것이 어디  또 있으랴. ―하이데거 온갖 예술은 감각적 매개물에 의한 관념의 표현이라고 말하나  시의 매개물인 말은 사실 관념이다. ―R.S.브리제스 다정한 시여! 예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여! 우리 안에  창조의 힘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신성(神性)으로 접근시키는  그대여! 어릴때 내가 그대에게 바치던 사랑은 수많은 환멸도 꺾질  못했다! 전쟁까지도 시가 내게 미치는 영향력을 더욱 커지게 하였으니, 이제부터 별 박힌 내 머리와 하늘이 서로 혼동되기에 이른 것은 전쟁과 시의 덕분이다. ―아뽈리네르 우리는 남들과 논쟁할 때는 수사학으로써 논쟁하지만 스스로 논쟁할  때는 시로써 한다. 자기를 지지한 혹은 지지할 거라는 군중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자신만만한 음성을 지닌 웅변가들과는 달리  우리는 불확실성 가운데서 노래한다. 따라서 가장 고상한 아름다움의  존재 가운데서도 우리가 고독하다는 인식때문에 우리의 리듬은 떨린다. ―에이츠 시의 의미란 그 텐션, 즉 시에서 발견되는 모든 외연(外延)extension)  과 내포(內包)intension를 완전히 조직한 총체이다. ―알렌 테이트 시가란 마치 화가가 색채로 하는 것을 언어로 하는 예술로서 상상력에  의하여 환상을 분출하는 방법에 의하여 산출하는 예술이다.  ―토마스 머코올리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다. 시의 본질을 발견이다. 예기치 않는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S.존슨 시인은 그의 예민한 흥분된 눈망울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굴리며 상상은 모르는 사물의 형체를 구체화시켜 시인의  펜은 그것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며 형상 없는 것에 장소와 명칭을  부여해 준다. ―W.세익스피어 시는 생의 진술이며 표출이다. 그것은 체험을 표시하고 생의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는 것이다. 제2의 세계, 꿈은 최고의 시인이다.  ―워즈워드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따라서, 형식적이고 의식적 성격을 갖춘다. 시가 가지는 언어의 용법은 회화의 용어와는 달리 의식적이며 화려한 꾸밈새가 있다. 시가 회화의 용어나 리듬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것과 대조를 이루게 마련인 규범을 미리 전제하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 ―W.A.오오든 시는 몸을 언어의 세계에 두고, 언어를 소재로 하여 창조된다.  ―M.하이데거 『詩論』 시의 용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W.B.예이츠 시는 언어를 향한 일제사격이다.―앙리 미쇼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M.하이데거 시는 언어의 모자이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행위와 시는 언제나  인간보다 크다. ―T.E.흄 시는 극점에 달한 언어다. ―말라르메 시는 절조 있는 언어로서 절규․눈물․애무․입맞춤․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현하려는 것이다. ―뽈 발레리 시인에게 있어서 낱낱의 단어가 그 원료다. 단어는 극히 여러가지  모양의 뜻을 가진 것으로 이것들의 뜻은 시의 구성에 따라 처음으로  똑똑해진다. 이와같이 단어가 콤포지션의 가능성에 따라서 변모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형성된 예술 형태의 한 부분이 될 때까지는 어세(語勢)도 그 효과도 다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프도프킨 시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사막의 생활이다. ―메르디트 시란 우리에게 다소 정서적 반응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는 언어이다. ―E.A.로빈슨 시에선 해조(諧調)가 미리 공허한 형식을 결정하고 말이 위로 와서  위치를 잡는다. 말과 경험 사이의 응화(應和)와 불응화 그리고 결국에  응화가 해조를 확보하여 주의력을 거기에 모은다. 물러섬이 없는  움직임이 듣는 사람과 시인을 함께 끌고 간다. ―알랭 시는 미의 음악적 창조다.―E.A.포우 시란 영혼의 음악이다. 보다 더욱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다. ―볼테에르 정서가 있고 운율이 있는 언어로 인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또 예술적  으로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오든 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하여 그것들을 체계화시켜 반복한다. 이것이  운율이다. ―r.브리지스 시는 역설과 아이러니의 구성체다.―브룩스 시는 우연을 기피한다. 시에 나타나는 클라스․성격․직분 등의 개성은 반드시 어떠한 클라스를 대표한다. ―코울리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격조와 은유이다.―웰렉․워렌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엘리어트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 ―W.H.허드슨 예술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작게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확대 시킨다. ―E.M.포스터 아직 탄생하지 않은  어느 특별한 일절 또는 일련의 배후에서, 하나의 힘과 같이 집중되어,  넓게 전개되는 의식의 총체. ―보트킨 열정적인 시란 것은, 우리들의 본성의 도덕적 지적 부분과 동시에  감각적 부분―지식에의 욕망, 행위의 의지, 감각의 힘을 방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가 완전한 것이 되려면, 우리들의 신체의 다른 여러 부분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즈리트 시는 조잡한 요소로(물을 타고 섞어서) 연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엑기스(精)이며, 그것을 키울 수 있는 것, 쓸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순수한 이미지의 시는 수정 조각과 같은 것이어서―우리들의 동물감각엔 너무나도 차고 투명한 것이다. ―허버트 리드 가장 위험한 것은, 순수한 물의 성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이, 정말로의 순수한 시라는 것은 그 무엇에 대하여서도 강연을  할 수 없는 것이다.―불순하며, 메칠알콜이 들어간 거칠은 시에 대해선,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월터 로리 시적 논리가 시의 결말을 맺는 것은, 일반적으론, 기분의 변화라든가,  위상의 전환을 통하여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그것이 시적 논리이다. 즉 논술이나 명증에 의하여 위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단계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주는 그러한 위상의 변화이며,  이해할 수 있는 추이인 동시에 그 진행은 앞의 단계를 무효로 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W.P.카 오로지 이미지는 시의 극치이며 생명이다. ―드라이든 방대한 저작을 남기는 것보다 한평생에 한번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낫다. ―에즈라 파운드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진실한 이미지 뿐이다. ―W.블레이크 만약 지각(知覺)의 문을 맑게 한다면 모든 것은 그대로 즉 무한감(無限感)을 가진 것같이 보일 것이다. ―W.블레이크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그것은 어느 경험을 생각케 하며 그 문체에 의하여 그러한 경험에의 어느 종류의 능력을 각성시킨다. 우리들은 어느 하나를 배우게 된다. 즉 그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희열이든가 절망이든가 어떠한 감정이든간에 그것을 아는 것이 강한 만족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챨스 윌리암즈 이미지의 생산은 무의식의 어두침침한 속에서의 정신의 일반적 행위에  속한다. ―E.S.달라스 나에게 있어서 지각은 처음에 명료한 일정한 목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어느 음악적인 무우드(기분)가 우선한 다음에 시적 사상이 나에게 다가온다. ―쉴러 이미지의 발생, 진전, 설정은, 예를 들면 태양의 광선이 자연히  그에게 도달하여 ―그의 위에 빛나고 다음엔 냉정히 더구나 장려하게  기울어 가라앉아가며 그를 호화스러운 황혼 속에 혼자 남기는  현상에 흡사하다. ―J.키츠 우리들은 정신의 영역을 3중의 층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러한 경우 지질학의 ‘단층’에 비교할 수 있는 어느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지층은 비연속적이며 서로 불규칙한  단층을 나타나게 된다. 그와 매한가지로 자아의 감각적 의식은 본능적  충동과 직접 교섭을 갖게 되며, 그 ‘끓는 가마솥’에서 어떠한  원형적 형태 즉 예술작업의 기초가 되는 말, 이미지, 음 등의 본능적  짜임을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다. ―H.리드 나의 경우 시에 있어서는 많은 이미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시의 중심이 많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만든다’라는 말은 적당치 않은 말이지만, 나는 나의 이미지에  내 내부에서 정서의 여러 가지 배색을 물들여 놓고 그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적 비평적인 힘을 적용하여 그것이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한다. 그리곤 그 제2의 이미지를 제1의 그것과 모순시켜, 그 둘에서 난  제3의 이미지에서 제4의 모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그것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어진 형식적인 제한의 범위 내에서 서로 모순시킨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속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종자를 가지고 있다. 즉 나의 변증적 방법(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은 중심의 종자에서 성장하는 많은 이미지의 끊임없는 건설과 파괴며, 그 중심의 종자도 그 자신으로 파괴적인 동시에 건설적인 것이다.……나의 시의 생명은 중심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나와, 그리고  죽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이미지의 건설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 ……이미지의 어쩔 수 없는 충돌에서  (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는 충돌에서)―아무리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극을 주는 중심 즉, 충돌의 모태가 창조와, 재창조와, 파괴와,  모순의 성질을 갖기 때문에―나는 시라는 순간적 평화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딜런 토마스 이미지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자신으론 시인의 특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독자적인 본능의 증거가 되는 것은 훌륭한 정열,  또는 그 정열로 잠깨워진 일련의 사상 혹은 이미지 여하에 따라 시  그 자체가 변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때 뿐이다.  ―코울리지 추상적 관념에 대립하는 감각적 이미지를 너무나 주장하는 나머지……  결과는 회화에 의한 시로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때로는 그림이  전부가 되어버려, 일반적 경험에 아무런 관계가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존재와 의미와를 분리시키는 잘못의 제일보였던 것이다.  ―로버트 히리아 상상된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시적 몽상이라는 몽상의 절대를 인식한다. ―바슐라르 실제로 물질적 상상력은 문화적 이미지와 실체를 합체시키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삶을 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슐라르 상상력 그 자신은 기억의 작용이므로 기억이 시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진실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한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어느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스펜서 추상적인 것의 구체화를 추구하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내 방법은  아니다. 나는 내 자신 속에 감동 ―감각적으로 생생한, 사랑스러운,  다채로운 여러가지의 감동 ―을 기민한 상상력의 에너지로서  받았던 것이다. ―괴테 이성이라는 것은, 기지(旣知)의 사물을 질서있게 정리하는 작용이며  상상력이라는 것은 사물의 개개, 혹은 전체로서의 가치를 지각하는  작용이다. ―C.V코노리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善)의 훌륭한 방편이다. ―셸리 상상력이라는 것은 죽어 가는 정열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 두는 불사의 신을 말하는 것이다. ―J.키츠 모든 것에 앞서서 훨씬 중요한 것은 은유를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천부의  은총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러면 자연 은유가 될 것이다. ―J.M.머리 은유는 현실을 살피며 경험을 질서짓게 하는 정신의 본질적이며 또한  필요한 행위와 같이 생각된다. ―J.M.머리 어떠한 번역이나, 은유나, 우의라도 극단적인 비유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은유를 바다나 파도에서  시작하여 불꽃이나 재로 끝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단히 나쁜  모순이기 때문에. ―벤 존슨 은유를 깊이 추구하려면 건전한 의식의 세계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 ―J.M.머리 상징파의 상징은 언제나 자기만이 아는, 특별한 관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시인이 독단적으로 쓰고 있는 ―즉, 그러한 관념의 일종의  투영인 것이다. ―에드문드 윌슨 상징주의의 상징의 실체는 제재에서 분리한 은유였었다.―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어느 한 점을 넘으면 색채와 음은 그 자신을 위하여  즐거워할 수가 없을 뿐더러 이미지의 내용을 억측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에드몬드 윌슨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오랜 대형 메달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매자락에 닳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상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 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A.맥클리쉬 『詩法』 나의 시의 장부(帳簿)는 어디에 있는가 이 나의…  종이도 없고 펜도 없고  시도 없이 나는 무(無)앞에 있다. ―R.끄노오 『詩法을 위하여』 샤프란 |2005.05.01 수정됨|의견 쓰기|신고   답변추천해요0 영혼의 노래입니다  시는 우리들 영혼의 울림,스치듯 살아가는 삶의  파편 안타까운..... =======================     현대시어록               최룡관 편저   서언     현대시어록은 현대시를 리해하는 열쇠이며, 그 주옥같은 언어들은 시인이나 학자들이 일생을 분투하면서 건져올린 영원한 야광주이다. 그것은 시인들이나 평론가들의 교침이며, 자대이며, 지남침이다.       시인에 대하여   시인은 공포나 사랑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보여준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동상 113페지 관습이나 , 복종이나, 법률의 평평한 바닥에서 썩는것이 무엇이든 그는 결코 썩지 않게 한다. 복종이 그를 지배하지 않고 그가 복종을 지배한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동상 12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하찮음을 좀처럼 알지 못한다. 전에는 조그맣다고 생각되던였던것이 그가 입김을 불어넣어주면 그것은 우주의 웅장함과 활력을 가지고 팽창한다. 그는 예언자요 개인이요 완전자다. 동상동명 121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미래의것의 일관성을 과거의것과 현재의것으로 형성한다. 그는 죽은자들을 관에서 끌어내여 다시 세워놓는다. 그는 과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를 표현할수 있도록 일어서서 걸어가라. 그는 교훈을 배운다. 미래가 현재가 되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인격과 장면들과 정열에 눈부시게 빛을 던질뿐만 아니라 마침내 올라가 모든것을 끝마친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위한것인지 그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할수도 없는 철탑들을 보여준다. 제일 끝에서 잠시 빛을 발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도덕의 의의를 덧붙이거나 도의를 직용하지 않는다. 그는 령혼을 알고있다. 령혼은 그자체의 교훈이외에는 어떤 교훈도 인정하지 않는데에 있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있다. 동명동상 124페지 작가, 학자, 음악가, 발명가, 미술가들의 특성중에서 새로운 자유형식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말 없는 도전보다 더 멋진것은 없다. 동명동상 125페지 시인들은 자유의 목소리이며 해설자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은 웅대한 생각을 가질만 하다. 도명동상 127페지 위대한 작가, 특히 위대한 시인을 내고있지 않는한 그들의 언어는 퇴화할것이며 그들의 문화도 퇴화하고, 그리고 보다 강대한 문화에 흡수당하는 일도 있을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있는것이다. 토마스 스턴즈 엘이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5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는 빛을 발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수세기뒤의 시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은 계속해서 산언어에 영향을 끼치고있는것이다... 그자신이 처해있던 시기에 있어서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들을 잘 연구하여야 할것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시인은 매우 정당하게 추측의 매혹적인 미로에 자신의 사고를 방황하게 한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1페지 있는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시인은 스스로를 타락하여 교사의 수준으로 내려간다. 동상동명 223페지 한편의 좋은 쏘네트를 완성하고 난후 작가는 10년의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록] [시의 리해] 245페지 시인에게는 특별한 자질, 일종의 고유한 개인적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순간에 불과할뿐, 이 상위의 (다시 말해서 인간, 인간의 다른 모든 에너지를 합해도 그것을 구성할수 없고 대체할수도 없을 정도의) 에너지는 짧고 우발적인 발현에 의해서만 존재하거나 작용할수도 있습니다. 그것(에너지)이 우리의 령혼의 눈에 조명시켜주는 보물들,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개념이나 형태들을 외부적시선에 대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을 덧붙혀야 하겠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이 순간들, 자신이 만들어내는 관계들과 직관에 보편적품위를 부여해주는 이 순간들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전달할수 없는 가치를 역시 풍부하게 지니고있습니다. 우리에게만 가치가 있는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입니다.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 그대로의 경의들이 그안에서 서로 해후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의들은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것들입니다. 천박하거나 쓸데 없는것들, 무의미하거나 외부의 빛에 저항할 힘이 없는것들, 열광의 섬광속에서 번쩍이는것이 모두 금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순간들은 우리가 최상의 상태로 존재하는 심원함으로서가 아니라 형상 없는 질료와 뒤죽박죽이 된 파편들, 이상하고 조야한 단편적인 형상으로 우리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쓰레기더미에서 귀금속 성분을 분리해내고 , 그것들을 함께 용해시켜 어떤 보석을 만들어 내는데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론] [시의 리해] 246-247페지 [시인이란 아는자, 즉 초월하는자, 그리고 그가 아는것을 증명하는자이다] 그리고 마침내... [절대적인 창조가 없다면 시가 없는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몽상의 시학]선언 [시의 리해] 293-294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우리 시대의 어떤 위대한 서정시인도 6편에서 8편이상의 완성된 시작품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이 여섯편의 시를 위해서 30년내지 50년을 고행과 고통, 싸움을 벌이는것입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34페지 시인은 미지의것에 도달한다. 비록 자기자신의 환영들을 끝내 리해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시인은 그것들을 지관하였다.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을 붙일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군들이 나타나서 그자신이 좌초해 버린 저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랭보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87-88페지 전언되는바에 의하면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라고 말한다. 랑만주의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96페지 현대시인의 탈 형상화의지는 추를 무연관의 세계로 내려보낸다. 동상108 페지 만질수 없는것을 포착할줄 모르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고 그(애드거 앨런포)는 단언하곤 했다. 자기 또한 기억의 주인이며 언어의 지배자인 사람만이, 그리고 언제나 훑어볼수 있는 자신의 감정들이 기록된 등록대장을 가진 사람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곤 했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98페지 하찮은 것으로 치장할줄 아는 이 경의로운 특권을, 파리와 스페인의 녀인에게 주어진 이 특권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있다. 동상 99페지 전에도 그랫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겠지만, 참된 시인이란 기이하게 치장을 한 진실이며 겉보기에는 모순되게 보이는 존재이다... 석양의 불꽃놀이가 끝날무렵에는 아주 먼 동방의 나라로 달려가는 자이다. 동상 100페지 시인이 도덕목적을 추구했다면, 그는 자기의 시적력량을 감소시켰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의 작품이 형편 없을것이라고 내기를 걸어도 경솔한 짓이 아니다. 동상 102페지 비규범적인 언어로써 진술하기 위해 미지를 추구하는 시인은, 그러나 비웃음을 사거나 아니면 배척을 받아 고독속에 떨어지게 된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96페지 모든 작가는 그 이름에 값하는자라면, 여태까지 씌여졌던 모든것을 대항해서 써야 한다. -fr 퐁주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20페지 시적 엄밀성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언어관용, 새로운 낱말들, 비정상적인 은유들을 추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몽롱하게 되는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35페지 시인이란 ㆍ뚜렷하게 심미지향적인 발화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21페지 만일 시인이 감동효과의 범위를 거부한다면 배타적인 시(상징주의 시와 같은) 시를 초래하게 된다. 시인의 영속성을 거부한다면 , 의도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작품 (예컨대 정치적인 시)을 낳게 된다. 동상동명 29페지 우리가 개괄해온 시인에 대한 개념은 ,,, 모든 방면에서 압력을 가하면서 서로 대립되여가는 힘들의 변화가능한 교차점으로 다루고있는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주도권은 이들 수많은 대립들을 독자적인 배렬(이는 조화롭다는것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로 조직한다는 사실에 있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 시론] 40페지 시인은 의미상으로 분명하게 경계를 정하는 단어들을 피하고 이미지면에서 정서적으로 련상작용이 풍부한 표현을 택한다. 동상도명 55페지 시인은 불가시물의 설교자이다. w. 스티븐즈 [후기 작품집] [세계명언대사전] 752페지 시인의 과제는 참으로 막중하고 위대하다! 모든 것을 파괴로부터 구해내며, 죽어야만 하는 인생들에게 영생을 부여한다. 루카누스 [시민전쟁]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이제까지 읽혀지지 아니하였다. 위대한 시인들만 그것들을 읽을수 있기 때문이다. H.D 도로우 [국가론] [세계명언 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자신도 리해하지 못하는 위대하고 현명한것들을 지껄인다. 플라톤 [국가론]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모든 감각을 막대히, 오래, 신중하게 대폭교란시킴으로써 자신을 환상가로 만든다. A. 랭보 [P. 데메니에게 보낸 편지]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아무도, 정신에 어떤 이상이 없으면 시인이 될수도 , 시를 즐길수도 없을것이다. T.B 머콜리 [수필집]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그(시인)가 한번 붓을 대면 그가 하는 말은 움직인다. 자기가 데리고 가는 사람을 꽉 붙잡고 전에 가보지 못한 생생한 지역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서부터 휴식이 없다. 옛지점과 빛을 죽은 진공상태로 변화시키는 공간과 말로 표현할수 없는 광채가 보인다. 그와 동행하는 자는 별들의 탄생과 전진을 바라보고 하나의 의미를 배운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언] [시의 리해] 131페지 ============================   시에 대하여   모든 시는 잔치이며 순수한 시간의 응결이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시의 리해] 112페지 시는 또 하나의 이미지이며, 또는 분활할수 없는 이미지의 성좌이다. 동명동상 114페지 시는 모르는 곳으로 뛰여들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가 만약 잔치라면 그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때에, 사람이 발길이 드문 곳에서 행해진 잔치 - 지하축제이다. 동명동상 115 아름다움의 결실은 우연히 되는것이 아니다. 생명처럼 필연적인것이다. 중력처럼 정확하고 똑 바르다. 시각에서 또 하나의 시각이 생기고 청각에서 또 하나의 청각이 생기며 목소리에서 사물과 인간의 조화를 영원히 알고싶어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태여난다... 시의 즐거움이 멋진 운률과 직유와 소리를 지니고있는 시들에 있는것은 아니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시의 리해] 123페지 위대한 시는 아주 오래동안 공동의것이고, 모든 계급과 얼굴색을, 모든 부문과 종파를, 남자만큼이나 여자를, 여자만큼이나 남자를 위한것이다. 동상동명 131페지   시적창조는 해득할수 없는 신비지요. 사람이 태여나는 신비와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 오는지 모를 소리를 듣습니다. 그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숙고하는건 쓸데 없는 일이지요. 내가 태여난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듯이, 죽는것에 대하여서도 근심하지 않아요. 옥타비오빠스 [바가리아와의 대화] [시의 리해]108-109 페지 시는 어둠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인간의 심장을 만나야 하고, 여자의 눈, 거리의 나그네들, 황혼녘이나 별이 빛나는 한밤에 적어도 한수의 시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예기치 않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일은 가본일이 있는 먼곳, 잃은 모든것, 배운 모든것 전부에 값한다. 파블로 네루다 [시에서] 동상111페지 시는 이 주요목적 -즉, 해방-에 있어서 다른 예술들과 같다. 에즈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3페지 교훈시는 점차 도덕적인 훈계시, 그렇지 않으면 독자에게 어떠한것에 대해 시인의 견해에 설복시키기 위한 시로 국한되여 버렸다. 토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5페지 그것은 맑게 개인 하늘을 날고있는 새나 비행기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바라보는것과 같은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주 가까이에 나타났을 때 보기 시작해서 그것이 점점 멀리 가는대로 계속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굉장히 멀리 갈 때까지 그것을 볼수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우리가 그 위치를 가르쳐 주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것이다. 동명동상 152페지 시는 다만 한 언어로써만 표현할수 있고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언제나 상기시키는것이다. 동명동상 153페지 참다운 시는 개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월리스 스티븐스 [가치로서의 상상력] [시의 리해] 156페지 시는 신앙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동상동명 163페지 시는 그러나 그러한 문맥속에서의 느낌과 태도에 특히 초점을 모으는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행동이나 관념에 초점을 모으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클리언스 부르크스 [말하는 한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7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시란 실존의 모습뒤에 숨겨진 신비한 뜻을 자신의 본질된 음률을 되찾은 언어로써 표현한것이다. 시는 그래서 현세의 우리 머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하나뿐인 령적업무의 근본을 이룬다. 스테판 말라르메 [서한] [시의 리해] 223페지 시는 자신의 형식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령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라고 부추긴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 243페지 시가 금전의 종말을 포고하고, 혼자서 하늘의 빵을 이 지상을 위하여 쪼개여 나누어주는 때가 오리라.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3페지 화가는 의미를 그리는것이 아니다. 작곡가는 음악에 의미를 붙혀주는것도 아니다...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지배적인 힘을 누리는 령역-그것이 산문이다. 그러나 시는 차라리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편이다. 장 폴 싸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리해] 266페지 시라는것은 인간의 [신화]를 창조한다. 그런데 산문은 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시의 리해] 272페지 주해에서 시란 하나의 형태를 락서하는 령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4페지 시는 끊임없이 그의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속에서 더 멀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되는것이다... 시는 자유롭게 있는 법이다. 그의 운명을 우리는 결코 우리자신의 운명속에 가두어두지 못할것이다... 자기의 창조적인 령감이 자기의 욕망보다 더 멀리 자기를 이끌고 가리라. 피에르 장 주브 [대지와 시] [시의 리해] 293페지 시는 몽상가와 그의 세계를 동시에 구축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서문 [시의 리해] 303페지 한편의 시는 시를 꾸며진 대상과 시를 쓰고있는 자아와의 맞섬이며, 말하자면 외면의 풍경과 내면의 련관성인것입니다. 시의 모호함이 독자를 혼란시킴만큼이나 매혹시키며, 갈피를 못잡긴 하지만 그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든다. 그러므로 엘리엇이 한 평론에서 [시는 리해되지 않고도 전달될수 있다] 라고 말한것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8페지 시의 본질이 리해시키는데 있다면 그 누구도 시를 쓸수 없으니라. 동상 현대시는 그것들을 익숙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켜버린다... 시창작의 세가지 방식- 느낌, 관찰, 변형-중에서 현대에는 마지막것이 지배적이며, 그것은 객관세계에서뿐 아니라 언어와의 련관에서도 그러하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9페지 현대시는 종래의 의미를 인간성, 체험감상, 그리고 심지어 개인적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 동상 30페지 사물적인 소재 정신적인 소재 할것 없이 시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혼합시키며, 변의의 인광을 발하도록 한다. 동상 43페지   시는 일상적 삶에 대한 방벽이며, 그 상상력은 모든 현상을 뒤섞어놓는 자유를 누린다. 시는 예감과 마술을 본질로 하는 시적인간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습의 세계에 맞서는 노래하는 저항이다. 공허한 리상속에 토대를 둔 시는 불가사이한 신비성을 창조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리탈하게 되며, 그런만큼 언어마술에 의해 보상될수 있다. 동상 73-74 문제는 력사속에서 지닐수 있는 시적인것을 빼내는 일이다. 즉 일시적인것에서 영원한것을 끌어내는 일이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49페지 모든 건강한 인간은 이틀동안 먹지 않고 지낼수 있지만 시 없이는 결코 지낼수 없다. 동상 97페지 시는 가장 큰 수확을 가져다주는 예술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시는 나중에야 리익금을 만지는 그런 종류의 투자다. 하지만 그 리익금은 두두룩하다. 동상 동쪽 서정시는 도약한다. 하지만 늘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 물결의 너울과 같은 움직임으로 도약한다. 동상 102페지 시는 사장(死葬)되거나 몰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과학이나 도덕과 하나가 될수 없다. 시의 대상은 진리가 아니다. 시는 자기자신밖에 가지지 않는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101페지   현대시의 근본특성의 하나는 그것이 자연적인 삶과 점점 더 분리된다는데 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47페지 시는 은자의 예술이다. 코트 프리트 벤 [현대시구조] 195페지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 동상 259페지 참된 시란 그세계가 독창적이고 생동할수록, 은밀한 류사관계가 이루어지고있는 대립이 더욱더 상반적으로 된다. 체코의 랑만주의자 마챠 [현대시리론] 5페지 시전체는 하나의 큰 거짓말이여서, 처음부터 넉살좋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시인은 가치가 없다. 로만 야콥슨 [현대시 리론] 8페지 어떻게 시성이 시를 표현하는가? 시성은 언어가 언어로 느껴지고 이름 불리여진 대상이나 분출되는 정서의 단순한 표현이 아닌 경우에 존재하게 되며, 또한 언어들과 그 구성법, 언어의 의미, 언어의 외적형식과 내적형식등이 무심하게 현실을 가리키는 대신에 그것들 나름의 무게와 가치를 획득할 경우에는 존재한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 리론] 18페지 세계의 수많은 시에서 가장 뛰여난것은 대부분 자유률로 창조된것이다. 현대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련의 운동은 엄격한 률격 없이는 최악의것이였거나 최상의것이였다. 벤야민 흐루쇼브스키 [현대시의 자유률] [현대시 리론 ] 117페지 화려한 행위는 고도의 황홀경을 불어넣고, 모든 정복자는 시신을 창조한다. E.월터 [나의 보호자에게 보내는 송시]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시는 인류의 모국어이다. J.G.하만[투케이 아네스테티카] [세계명언사전] 746페지 시는 인간이 자기자신의 경의를 탐구하는 언어이다. C. 프라이 [타임]지에서 [세계명언대사전 ] 746페지 시는 그 주제가 진실이 아니라 진실과 같은 사물들의 시 G.채프맨 [부쉬당부와의 복수] [세계명언대사전] 746페지   시는 정서의 느슨한 변환이 아니라 ,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 엘리어트 [전통과 개인의 재능]                                                                                                                                                                                         [세계명언 대사전 ] 747페지 시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의 립법자이다. M.W. 셀리 [시의 번호] 동상 시는 단순히 사물을 말하는 가장 아름답고 인상깊고, 광범한 효력을 가진 양식이요, 여기 그 중요성이 있다. M. 아롤드 [비평론]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소네트(14행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곤거리는 먼 바다를 말해주는 진주조개요, 신비롭고 갈고 닦은 보석이며, 또한 잘 그린 예쁜 그림이다. R.W.길더 [소네트]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참된 시는 리해하기전에 통할수 있다. T.S. 엘리어트[단테론] [세계명언사전] 750페지 시는 의미해서도 안되며, 있어야 한다. A. 머쿨리시 [달나라의 거리] [세계명언 대사전] 751페지 왜 이 모든 것이 필요한가? 왜 기호가 대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특별한 관심을 두는것이 필요한가?왜냐하면 기호와 대상의 일치(A는 A1이라는)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것 말고도, 그러한 일체의 불직설성(A는 A1이 아니다)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8페지 ====================   기능(목적)에 대하여   시인이 그 시기의 한 대중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나쁜 시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시는 대중적인 생각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시인이 열정적으로 관여했던 문제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잔존하게 되는것이다. 호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6페지 첫째 우리들이 확언할수 있는것은 시는 즐거움을 주는것이여야 한다는것이다. 동상동명 147페지 우리는 시를 대중적인 시에만 국한해서는 안될것이다... 시인의 직접적인 임무는 그의 국어에 대한것이다. 즉 첫째로는 그의 국어를 보존하고 , 둘째로는그것을 혹대, 향상시키는 일이다. 동상동명 149페지 시인이 매우 급속히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있지 않고, 또 대중들이 벌써 알고있는것, 따라서 그들이 벌써 전시대의 시인들에게서 받은것을 다만 주고있는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올바른 소수의 독자를 가져야 한다는것은 중요한 일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문학은 철학이나 신학이나 종교의 애용물이 아니다. 문학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임무는 사변적인것이 아니고 감정적인것이기 때문에 문학은 사변적으로 결정될수는 없다. 엘리어트 [1927년 한 론문에서] [시의 리해] 376페지 문학의 기능의 하나는 바로 그 과학적언어를 정복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공격하는 바로 그 언어의 도움으로 문학을 완전히 읽어낼수 있다고 주장하는것은 지극히 모험스러운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한다는것은 문학의 실패를 전제하는것과도 같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 비평론] 247페지 작품제작에 재주 없는것을 , 이목을 끌게 마련인 정치적암시로 벌충하는것이 특히 열등한 문인들이 버릇으로 점점 굳어졌다. 시, 소설, 평론, 희곡, 모든 문학생산품이 이른바 [경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엥겔스 1851년 10월 MEL.P.119) ...재주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려 극단적으로 경향성 쓰레기를 보여주는 하찮은 친구가 있는데 사실은 독자를 얻기위해 그러는것이다. (엥겔스 1881년 8월 MEL 123) 레이몬드 월리엄즈 [제휴와 참여] [현대문학 비평론] 569페지 경향문학은 ... 정치적제휴로서의 참여였다. 인간을 위해서로부터 인민을 위해서로, 다시 혁명을 위해서로, 당을 위해서, 그리고 (변화하는) 당로선을 위해 서로 협소해져간것이다. 동상동명 571페지 참여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것이다. 동상 573페지 시의 리해는 소수의 대가에게만 속하는 령역이다... 시는 아름다운 소리만 내며, 어떤 의미도 련관도 갖지 않는다. 기껏해야 각양각색의 사물들의 순전한 파편들인양 몇구절 정도 리해나 될뿐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4페지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저항에의 열정적인 욕구, 그리고 증오의 산물로 칭하면서 시가 [신경쇼크]를 유발시키도록 권장하고 독자를 자극시켜 더 이상 리해하지 못한것을 자랑한다. 한때 기쁨의 무한한 샘이였던 시적인 의식을 이제 무진장한 고문도구들의 병기창이 되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64페지 [일루미네이션]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시이다. 이 시는 리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환각적인 자기방출의 뢰우이며, 기껏해야 위험에 대한 사랑의 전원적인 위험에 대한 저 두려움을 일깨운것으로 만족한다... 어느 문장이 말하듯 [다른 모든 선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업적을 남긴 창시자]임을 확인시켜준다. 이 시는 절대화한 현대적상상력의 최초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동상 113페지 나는 언제나 문학과 예술은 도덕과는 무관한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자신은 사상과 문체가 아름다운 것으로 충분하니다.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51페지 그리고 끝으로 몽상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전혀 리해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을 나는 결코 참아낼수 없었습니다. 동상 58페지 (1857년) 많은 사람들이 시의 목적은 어떤 교육적인것에 있고, 시는 때로는 의식을 강화시켜야 하고, 때로는 풍습을 향상시켜야 하고, 또 때로는 어떤 유용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는 자기자신 밖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시는 다른 목적을 가질수가 없다. 단지 한편의 시를 쓰는 즐거움을 위해 씌여진 시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하며 진실로 시라는 이름에 값하는 시는 없을것이다 동상 102페지 언어행위의 시성은 의사소통이 제일 중요한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때문에 여기 ‘검열’은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질수 있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3페지 시적표현의 목적은 미적효과에 있다. 그러나 시적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기능언어에서는 부수적현상에 불과할뿐) 미적기능은 언어기호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따라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실제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 얀 무카로부스키 [시적언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46페지 한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리해하는 지음을 만날 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음은 확실하게 리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지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리해력을 갖춘 사람인 지음을 만난다는것은 천년에 한번 있을가말가한 일이다. 류협 [문심조룡] 685페지 지나치게 심오하다고 탓을 하랴! 문제는 식견과 감별력이 차한데 있다... 마음의 눈으로 작품의 사상과 감정을 관찰하는 일은 육안으로 사물의 형체를 관찰하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아주 밝은 눈으로 보면 분간할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오직 심원한 인식능력과 감별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작품의 심오함을 포착해 낼수 있고 그로인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동상 695페지 작품의 예술성여부는 , 훨씬 높은 차원의 진동도에 기인하는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07페지 그가 사용했던 유사한 테마 주제들이 빅토르유고가 아닌 다른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너무 쉽게 교육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진정한 시의 가장 큰 적이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2페지 사람들은 공리 뻔한 사실의 방아를 찧고 또 찧는다. 그속에 들어갔던것밖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사상을 위해 그 전통을 벗어나는 순간, 시, 지혜, 희망, 미덕, 학식, 일화 그 모든 것이 몰려와서 도와준다. R.W.에머슨 [문학적윤리학] [세계명인 대사전] 743페지    
1433    캐나다 의사 - 노먼 베쭌 (베순) 白求恩 댓글:  조회:7773  추천:0  2015-09-02
  중국은 1949년 10월1일 첫 열병식 뒤 지금까지 모두 14번의 열병식을 거행했다. 마오쩌둥은 집권 이후 1959년까지 매년 국경절(10월1일)을 맞아 열병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첫 열병식에서는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군에서 노획한 무기가 대거 등장하면서 내전 승리를 과시했다. 1950년의 열병식에는 사상 최대인 2만4000여명의 병력이 참가했다. 열병식은 한국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았고, 1954년엔 김일성 당시 북한 수상이 참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혼란기였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전후로는 열병식이 열리지 않았다.   열병식은 1984년 덩샤오핑이 “열병식을 군 사기 고취와 군민 유대 강화의 장으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25년 만에 부활했다.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 때는 건국 50주년과 60주년 등 10년 주기로 거행됐다. 이번 열병식은 국경절이 아닌 전승기념일에 맞춰 열리는 첫번째 열병식이다. 중국은 열병식 당일 베이징 공항을 일시 폐쇄하고, 행사장인 천안문 광장 주변은 사실상 계엄 상태에 들어간다. 베이징 주변 수도권 지역 공장 1만2255개는 28일부터 가동 중지에 들어가 이미 베이징 하늘은 오염물질이 사라지고 파랗게 변했다. 이른바 ‘열병식 블루(Blue)’다.   중국은 이번 기념행사가 중국만의 전승행사가 아닌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기념행사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몇몇 눈에 띄는 외국 인사들도 초청했다. 중국의 항일, 반파시스트 전쟁이 스페인 내전 당시처럼 세계 양심세력이 함께 싸운 항쟁이었다는 것을 부각하려는 포석이다. 대표적인 초청 인사가 캐나다인 의사로서 항일 전쟁에서 부상한 중국 홍군들을 치료한 노먼 베순의 유가족들이다. 전도유망한 흉부외과 의사의 일상을 던지고 중국 전장에 뛰어든 베순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홍군을 치료하다 수술 도중 베인 상처로 인한 패혈증 탓에 1939년 49살의 나이로 숨졌다. 중국은 그를 ‘중국 인민의 동지’라고 칭한다.   중국은 2차대전 당시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운 퇴역 미군 공군 부대인 ‘비호대’(플라잉 타이거스) 노병들도 초청했다. 1941년 8월 중국 서남부 윈난성 쿤밍시에서 미군 비행 교관 클레어 리 셔놀트가 주도해 창설한 비호대는 폭격기 68대와 조종사 110명, 정비사 등 지상근무요원 150명으로 구성돼 일본기 300여대를 격추했다.   1984년 열병식에서 덩샤오핑이 군대를 사열하고 있다. =========================================================== 노먼 베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노먼 베순 박사, 1922년 헨리 노먼 베순(Dr. Henry Norman Bethune, 중국어: 亨利·诺尔曼·白求恩, 1890년 3월 3일 ~ 1939년 11월 19일)은 캐나다 출신의 외과 의사이자 의료개혁가이다. 스페인 및 중국의 전장을 누비며 인도주의적인 의료활동을 펼쳤다. 그의 중국식 이름은 "바이츄언"(白求恩)(흰 머리의 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중국에서는 그를 "바이츄언 의사"(白求恩大夫)로 칭송하여 "중국 인민의 영원한 친구"로 기념한다.     목차    1 초기의 생애 2 흉부외과의·의료개혁가로의 활동 3 스페인 내전 4 중국에서의 활동과 죽음 5 기념   초기의 생애 노먼 베순은 1890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그레이븐허스트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콤 베순,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앤 굿윈이다. 할아버지의 이름도 노먼 베순인데 할아버지 또한 유명한 외과 의사로, 나중에 토론토 대학 의대로 흡수되는 어퍼 캐나다 의학 학교를 세운 인물이다. 어린 시절 베순은 호기심 많고 모험심이 강한 아이였고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으로 여기저기 자주 이사를 했다. 1909년 그는 토론토 대학에 입학했고 가정형편이 넉넉치 않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비를 벌어 공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15년 캐나다가 참전을 선언한 바로 그날, 베순도 캐나다 육군에 입대하여 제1사단 야전병원에서 복무하였고 바로 프랑스의 전장으로 파병되었다. 그는 부상병 운반병으로 복무하다가 이프레스에서 독일군의 포탄에 부상당하고 영국군 병원에서 치료받고 부상병으로 본국 캐나다로 송환되었다. 캐나다로 돌아온 그는 다시 토론토 대학에 복학하였고 학업에 몰두하여 1916년 12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취득한 후, 영국 해군에 입대하였고 함정 군의관으로, 나중에는 캐나다 비행단의 의무장교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런던의 병원에서 일했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1923년 가을 에딘버러 명문가의 딸인 프란시스 캠벨 패니를 만났고 사랑에 빠져 이듬해 런던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미국과 캐나다를 전전하다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최초의 개인병원을 개업했다. 디트로이트에서 그는 뛰어난 수술실력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 돈을 가지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는 데 썼다. 그는 열정적으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그만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폐결핵 치료수준은 형편없었다. 베순도 그 자신이 의사이면서 그저 요양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우연히 요양소에서 새로 고안된 급진적인 폐결핵 치료법인 '기흉치료법'을 알게 되었고 그 치료법에 의한 시술을 요구하여 다시 건강이 회복되었다. 흉부외과의·의료개혁가로의 활동 건강을 회복한 후 그는 일반 외과 일을 그만두고 흉부외과, 특히 폐결핵에 집중하게 되었다. 뉴욕 주의 레이 브룩의 결핵병원에서 2년동안 수술의로 있다가 몬트리올 맥길 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왕립 빅토리아 병원으로 옮겨 이 대학병원의 교수가 되었다. 몬트리올에서 그는 수술용 도구를 개량하고 새로운 폐결핵 수술 치료법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 하였고 캐나다에서 가장 뛰어난 흉부외과 의사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는 몬트리올의 성심병원 흉부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곳에서 폐결핵 치료에 몰두하던 중 그는 점차 가난이 바로 폐결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적인 의료보건활동을 지지하였고 가난한 노동자와 빈곤층의 치료에 앞장섰다. 1935년 그는 처음으로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했는데 소련의 의료보장에 감명을 받고 캐나다에 돌아와 비밀리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캐나다 의료체계에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려는 운동에 앞장섰으며 특히 아동의 보건상태 개선활동 및 미술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일했다. 당시 대공황의 여파로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많았으며 극빈층이 늘어났는데 베순은 이 가난한 환자도 마다하지 않고 받았고 그로 인해 가난한 환자들의 영웅이 되었다.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 당시 닥터 노먼 베순이 운영한 이동수혈부대 (1936년경) 1936년 11월 3일 노먼 베순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전 세계에서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들이 프랑코의 파쇼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는데 베순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던 것이다 . 그는 공화군 제5연대의 의무대에서 복무했는데 이동야전병원을 개설하고 전장에서 부상병을 치료하였다. 특히 그는 전장에서 직접 수혈하는 방식을 개발하여 자동차에 이동수혈대를 장착하고 전장을 누볐다. 당시는 아직 수혈의 시술이 활성화되지 않았는데 베순의 이동수혈부대는 전쟁터에서 부상병의 사망률을 75%까지 낮추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37년 6월 그는 스페인의 경험을 고국에 알리기 위해 몬트리올로 돌아왔고 이후 북미 여러 곳을 다니면서 스페인 내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이때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떳떳이 밝혔다. 중국에서의 활동과 죽음   네룽전장군과 대담하는 노먼 베순 (1938년) 1938년 1월 노먼 베순은 홍콩에 도착했다. 베순은 쑹칭링이 대표로 있는 중국원조협의회의 요청으로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행을 결심한 것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항일전의 근거지를 삼고 있는 옌안으로 들어가 마오쩌둥을 만나 부상병 치료를 위한 지원을 약속받고 의무대를 꾸려 전선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곳은 일본군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던 진찰기 지구였다. 그 곳에서 그는 네룽전의 팔로군 부대에 배속되어 부상병 치료에 나섰다. 중국에서 부상병 치료중 수혈할 혈액이 모자라면 그는 'O형'인 자신의 혈액형은 아무에게나 수혈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피를 뽑았다. 그는 부상병 치료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공중 보건과 의료시설 개선에도 힘썼고 자신의 의술을 많은 중국인에게 가르치고 베풀었다. 또한 그는 중국의 실상을 미국에 알리고 외국에 의약품등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장제스 정부는 공산당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원금과 의약품원조를 차단하고 공산군은 점점 의약품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9년 가을 그는 수술중 실수로 손가락을 베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간단한 의약품(설파제)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감염이었는데 그것이 패혈증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노먼 베순은 패혈증으로 1939년 11월 13일 49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다. 기념   중국 허베이성에 세워진 베순의 기념상. 노먼 베순은 그의 생전 본국 캐나다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하였다. 1939년 12월 그가 사망한 직후 마오쩌둥은 〈베순을 기념하며...(紀念白求恩)〉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그를 기렸고 그의 유해는 허베이 성 스좌장 혁명열사능에 묻혔다. 吉林省에는 그의 이름을 딴 白求恩의과대학이 세워졌고 스좌장에는 그의 이름을 딴 3개의 병원이 있다. 캐나다에서도 요크 대학에 그의 이름을 딴 의과대학이 있고 그레이븐허스트의 그의 생가는 캐나다 정부에서 매입하여 노먼 베순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몬트리올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중국과 캐나다에서 공동으로 그를 기념하는 같은 디자인의 우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노먼 베순  
1432    숫자로 보는 열병식 댓글:  조회:5707  추천:0  2015-09-02
[ 2015년 09월 04일 10시 40분 ]   ====== 숫자로 보는 중국 열병식 첫번째 숫자 보겠습니다. 바로 1인데요. 어떤 의미가 있나 살펴보니까 시진핑 정부 첫 열병식이고, 중국 최초로 여군 의장대와 여군 군악대가 등장하고요. 외국군대도 처음으로 참가한다고 합니다. 이번 열병식에 처음으로 시도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중국 열병식에는 중국과 관계가 밀집했던 국가의 외빈들을 초대한 경우는 있었지만 국제 행사로 치르는 것도 처음인데요... ... 최초로 중국 여군 의장대도 참가합니다. 뛰어난 미모와 스펙으로 중국 내에서도 화제 만발인데요. 열병식에 여군 의장대 참석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선채로 3시간 움직이지 않기 40초 이상 눈 깜빡이지 않기 등의 훈련도 받는다고 하던데요? ... ...중국 지도자 옆자리에 서는 첫 여성지도자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총 49나라 국가원수 또는 정부대표가 참여하는데요. 관전포인트의 하나로 예상되는 것이 자리인데요... ... 중국은 열병식에 총 51나라를 초대했는데 두 나라 일본과 필리핀이 거절했습니다... ... 중국 열병식 관련한 다음 숫자 보여주시죠. 121입니다. 도통 감이 오지 않는 숫자인데요. 보니까 국기 게양식 과정에서의 호위부대 걸음수와 중국 인민이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난관을 극복해온 해의 수를 뜻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121걸음이 일본과의 첫 전쟁인 1894년 청일전쟁 이후 121년이 흘렀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인데요. 호위부대의 121걸음 수 어떤 메시지 담고 있나요? 일본을 넘어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봐야할까요? 다음 숫자 보겠습니다. 500인데요. 열병식에 동원되는 무기수를 뜻한다고 해요. 무기장비가 40여종 500개가 동원이 되는데 열병식 공개 미사일 수량은 100, 참가 군용기 수는 200개라고 합니다... ... 열병식 참가 병력이 12000명 이게 외국군 병력을 제외한 중국군 병력 수 라고 하는데 1만 2000명의 병력 이 가지는 의미도 남다를 것 같아요? 이번 열병식을 앞두고 특수부대원으로 원숭이 부대가 편성이 됐다고 합니다. 매도 동원됐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마지막 숫자 볼까요? 2400입니다. 어떤 숫자인가 보니 군악대 병사 수만 2400명이군요. 열병식에서 군악대의 등장과 숫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군악대가 연주하는 곡들도 다 의미가 담겨져 있죠?
1431    재미로 보기 - 열병식 최초, 최대... 댓글:  조회:5317  추천:0  2015-09-02
전승절 행사의 절정이 될 국기게양식. 톈안먼 광장 인민영웅기념비에서 게양대까지 국기 호위부대의 걸음 수가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번 행사에선 121걸음을 걷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부터 올해까지의 햇수를 의미합니다. 2009년 건국 60주년 국경절의 169걸음은 1840년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했습니다. 이번 열병식이 국경절이 아닌 항일전쟁 승리 기념일에 최초로 열린다는 점에서,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뺏겼던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분석입니다. 최대 최초 기록도 많은데, 열병식 사상 최대 규모인 200대 정도의 군용기가 선보입니다. 또 현역 장성으로 구성된 장군부대와 여군 의장대도 최초로 참가합니다.  외국 군대와 군 대표단 그리고 참관단이 대거 참가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특히, 미국 미사일방어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최신 다탄두 핵미사일 '둥펑-41'이 처음으로 공개될지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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