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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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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    중국 몽롱파시인 - 고성 댓글:  조회:4757  추천:0  2015-08-26
   37세에 자살한 시인 꾸청顾城                                                      김금용(시인)         몽롱파 시인 꾸청의 방황과 사랑      ‘우연’ 이라는 말을 극히 싫어하지만, 때론 나도 내 삶 속에서 ‘우연’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연히, 나는 꾸청顾城(1956- 1993)의 일생을 그린 영화 《꾸청의 이별과 사랑 顾城别恋》을 보게 됐다. 그것도 올 6월 초 홍콩에서, 아주 우연히,..!  마치 내가 ‘시와 세계’의 원고청탁을 받고 어떤 시인을 소개해야 할까, 고민하는 걸 알고 계시해 준 것처럼, 밤늦게 혼자 리모콘을 돌리던 내 눈길을 사로잡는 영상이 있었다. 물론 알아들을 수 없는 광동어였지만, 분명 몇 년 전 내가 읽었던 한 시인의 사진 속 얼굴이 똑똑하게 들어왔다. 창백한 피부 아래 눈이 휑할 정도로 동그란, 피리 부는 소년 같은 남자의 영상, 주방장 모자 같은 흰 모자를 높이 쓴 그 모습이 왠지 그를 슬프게 하던, 드라마 속의 주인공은 바로 중국 몽롱시의 대표시인, 꾸청이었다. 뉴질랜드 북쪽의 한 작은 섬을 배경으로 꾸청과 그의 아내 시에예谢烨, 그리고 그를 좋아하며 두 부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내던 한 여인 ‘잉얼英儿’과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던 뉴질랜드 이웃들과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왜 그가 그의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지,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 호 수팅舒婷과 그녀의 시편을 소개할 때 이미 거론한 것처럼, 꾸청은 몽롱시의 대표시인이다. 또한 당대의 낭만주의 시인이기도 하다. 초기의 그의 시는 아이들처럼 천진한 풍격과 몽환의 정서를 갖고 있었다. 직감과 인상적인 어휘를 사용, 영탄 섞인 동화 속 소년생활을 엿보이게 했다. 두 행으로 이뤄진 시《일대인一代人》 “어둠은 나에게 까만 눈동자를 주었다 / 나는 그것을 통해 광명을 찾는다 ”는 지금까지 중국현대시의 경전이 되고 있다.   꾸청은 1956년 9월 24일, 북경에서 태어났다. 문혁이 일어나던 해인 1969년에 비판을 받아 산동성 광베이廣北농장으로 쫓겨간 아버지 꾸공顾工을 따라 그는 12세에 학업을 중퇴하고 돼지를 키웠다. 1973년부터는 그림을 배우다가 1974年 북경으로 돌아와 운반공과 목공일을 하며 가끔 차출되어 편집을 도우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문혁이 끝나면서 1980년 초 직장은 해체되고 한 때 표류생활을 하면서도 21세인 1977年《민들레蒲公英》라는 시를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으며 24세이던 1980년엔 《별들(星星)》이라는 잡지에 이란 시를 발표, 역시 시단의 강렬한 반향과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몽롱시파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베이징문예北京文艺》、《산동문예山东文艺》、《소년문예少年文艺》등에 시를 발표하며 80년대 주류를 이뤘던 파의 아이 칭艾 青, 수 팅舒婷에 이어 3대 대표시인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1985년 그는 중국작가협회에 가입, 87년엔 구미문화교류방문단에 끼어 창작 강의 활동을 하다가 88년엔 뉴질랜드로 가서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쳤으며 오크란 대학의 아시아언어 연구원으로 초빙,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지만 곧 사직하고 섬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한편 1992년, 그는 독일학술교류중심(DAAD) 창작기금을 받으며 잠시 독일에서 시작생활을 시작했으나 현실과 이상사이의 갭을 허물지 못한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결국 그마저 사직하고 뉴질랜드 북방의 한 작은 섬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근 일 년 만에 생활고와 심약한 그의 정신상태 등을 이유로 그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1993年10月8日 급기야 아내를 도끼로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당시 이 사건은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많은 매체에선 “꾸청이 도끼로 부인을 살해하다”라고 보도하면서, 동화시인이었던 그가 악마에 의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살인자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사후 일부 그 누명은 벗겨졌지만 (꾸청의 누나 꾸샹顾鄕은 “꾸청최후의 14일”이라는 기획물에서 말하길, 도끼는 우연히 그 장소에 있었을 뿐이며,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 참혹한 사건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몇 달 전인 1993年 3月 그들 부부는 중국으로 귀국하여 가족과 문인들을 만나고 다시 독일을 거쳐 뉴질랜드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내 시예예와 꾸청은 1979년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4년간 연애를 하다가 1983년 결혼했다. 1987년 같이 조국을 떠나 자살을 할 때까지 그의 아내는 그의 잦은 실직과 이사, 가난, 그리고 꾸청을 쫓아다니며 함께 살기도 했던 여인,‘잉얼’ 등으로 많은 심리적 고초를 견뎌내는 중에도 관용과 미덕을 겸비했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극단의 자기 중심적이었던 꾸청으로서는 그의 어머니이자 누나 노릇을 해오던 그녀를 떠나가게 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내가 보았던 홍콩에서 찍은 《꾸청의 이별과 사랑 顾城别恋》이란 영화는 꾸청 자신이 남긴 《잉얼英儿》라는 소설 내용이 반영된 것이었다. 꾸청이 최후에 보여준 광폭한 모습은 그의시를 좋아해 쫓아다니던 한 여인 때문이라는 항간의 추측도 있었는데, 그 ‘잉얼’이란 여인의 실제 본명은 리잉李英으로 현재《시간诗刊》잡지사의 편집을 맡아보는 마이치麦琪라는 필명의 여인이다. 그러나 마이치는 꾸청이 죽은 후 그녀에게 남겨진 이런 주홍글씨를 명확히 거부하고 있다. 한편 1993년 12월22일 뉴질랜드 경찰국을 통해 중국영사관에 전달된 그의 유서는 모두 네 통이었다. 부모님에게, 엄마에게, 누나에게, 아들 무얼木耳에게,..! 이 유서들은 사건현장에서 경찰이 취합했는데, 통합해서 보면, 그는 길이 끊어진 막다른 곳에 스스로 몰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아들木耳(三木Sam)에게만은 눈물을 보이며 아빠를 이해해달라는 문구가 있었다. 꾸청은 사진과 원고 등을 누이에게 부탁했으며 굳이 보관하지 않아도 되며 집이나 그 밖의 것 역시 아들에게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후 모든 원고나 모든 꾸청의 것들은 자연스레 누나가 보관, 최근 꾸청의 사후 50년에 즈음하여 북방문예출판사에서 4권의 “꾸청문학계열顾城文学系列”을 냈는데 그 첫 권《꾸청문학선: 다른 세계 顾城文选别有天地》은 꾸청이 1987년 5월 독일 밍스터明斯特에서 가진 “국제시축제”에 참가하면서부터 1993년 10월 8일 그의 아내와 한 섬으로 도피했을 때까지 쓴 작품들을  “꾸청의 성顾城之城”이라는 웹싸이트의 장샤오민江晓敏과 함께 편집한 것이다. 총 150만 여개의 문자로 산문 및 시를 실었다.     꾸청은 많은 시와 문장, 서법, 그림 등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저서로는 시집 《검은 눈동자黑眼睛》(1986年 인민문학출판)《한낮의 달빛白昼的月亮》、《수팅, 꾸청서정시선집舒婷、顾城抒情诗选》、《북방의 고독한 노래北方的孤独者之歌》、《쇠방울铁铃》、《베이다오,꾸청시선北岛、顾城诗选》、《꾸청의 시顾城的诗》、《꾸청의 동화우화 시선顾城童话寓言诗选》、《꾸청현대시자선집顾城新诗自选集》과 그의 사후 부친이 편집해서 출판한 《꾸청시전편顾城诗全编》이 있다.。그 밖에 1998년 인민문학출판사에서 낸 《꾸청의 시顾城的诗》와 소설《영자英子》(1994年 1월 북경 화예사출판 그의 아내 시에예 합작)、《성城》등 작품들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그 외 문집《생명이 정지된 곳, 영혼이 나간다 生命停止的地方,灵魂在前进》,조합시집《성城》、《귀신이성으로 들어간다鬼进城》、 《나로부터 자연에 도달하기까지从自我到自然》、《목적이 없는 나 没有目的的我》가 있다。     높고 흰 모자를 쓴 ‘동화시인’     문화혁명 중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낸 그의 작품세계는 자연 반사상反思想이 깃들어 있다. 물론 그런 반항과 부정적 비판의식을 통해서 생명의 고귀함, 인간본연의 영혼 찾기로 그 귀결점을 찾고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몽환의 세계, 동화적인 순수 미의 생명의식을 찾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그만의 독특한 인문주의적 시세계를 보여줘 그를 통칭 ‘동화시인’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시는 수팅의 고상하고 단정하면서도 미려한 우울함을 드러내는 것과는 비교되는 순진무구함, 암수가 구별되지 않는 몽롱함이 있다. 그만큼 그의 시엔 몽환과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는 천진함이 넘친다. 성인의 우울한 상처가 아니어서, 시인 개인의 우울한 상흔이 아니기 때문에, 한 세대가 각성한 상처이기 때문에, 그 각성한 한 세대들이 바라보는 현실로부터 파생된 상처이기 때문에, 그의 시는 담담하며 때론 납처럼 깊고 무겁다. 그의 시《 나는 제멋대로인 아이我是一个任性的孩子》는 자신이 바로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에 버릇없어진 아이 ”임을 선포하고 있다. 자기만의 생각에 맞춰 자기만의 꿈을 고집하는 건 그의 집착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의 매력이기도 하다. 복잡하고 억압된 성인세계 속에서 꾸청의 의식은 “눈을 감으면 세계와 나는 관련이 없어진다 ”고 보았으니 말이다。《我是一个任性的孩子》에서 차용한 아이들의 시각은 아동의 이상 안에서 개조된 성인세계다. 꾸청이 이 시에서 보여준 아이들 형상은 맑은 바람처럼 성인세계의 오염된 땅을 뒤흔들었다. 또 하나 몽롱시의 대표시인 베이다오北岛도 한탄하며 말하길 “비천함은 비천한 이들의 통행증이 되고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이 될 때, 꾸청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서툴지만 ‘자유’를 찾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꾸청의 성顾城之城”의 장샤오민은 저장성浙江省의 한 중학교의 고3 어문교사이다. 그녀는 1993년 시집《海篮바다 광주리》에 실린 꾸청의 시를 처음 읽고 감동을 받아 1994년엔 《시탐색诗探索》에 꾸청의 친구가 쓴 《최후의 꾸청最后的顾城》을 읽으면서 꾸청과 그의 시에 빠져들면서 지금까지 그에 대한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지금까지 꾸청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수집, 관리하고 있다. 초기의 《생명환상곡生命幻想曲》、《구별되는 바다分别的海》와 후기의 《노래는 나무들을 헤엄치게 한다颂歌世界?是树木游泳的力量》를 좋아했다는데 그 이유는 “진실”이 담겨져 있으며 “자연순화”의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만들어진 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레 흘러나온 것들이어서 시를 읽으면 너와 나를 잊게 되고 충돌되는 게 너이기도 하고 네가 흐르는 물인가 하면 돌이기도 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보고 美에 대해 말하라면 그것은 일종의 상태일 뿐, 비현실적인 허황한 세계로 받아들여진다. 왜냐면 미가 그 모습을 드러날 땐 너무 진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 아직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단지 나만 그렇게 바라보는 것에 희열을 맛보는 동시에 일종의 비밀감과 공포도 느낀다.  난 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두렵다. 혹여 그것을 파괴할까봐 두렵다. 그리고 난 또 다른 공포를 갖고 있다. 일종의 미라는 것을 내가 바라볼 때 다른 사람들 역시 그 훼손된 미를 미라고 알까봐 두렵다.                       __꾸청의 에서 _   “몽롱시朦胧诗”를 이끌던 《오늘今天》의 편집진인 쉬샤오徐晓는 자신이 쓴 《반평생半生为人》에서 꾸청에 대해서는 진실로 “자기만의 성안에서 살던 사람”이었다고 토로했다. 꾸청보다 2 년 2 개월 먼저 태어난 누이 꾸샹顾乡 역시 동생에 대해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한 살 되기 전부터 걸었는데, 큰 옷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곤 하던 게 기억이 새롭다, 유치원 다니던 때의 꾸청은 여전히 침착한 아이였으며 다른 아이들과 놀지 않고 누나 꾸샹만 찾곤 했다”고 회상한다. 많은 책 속에 파묻혔던 그는 자신을 따돌리곤 하는 친구들에게 《삼국연의三国演义》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야기꾼”이란 별명을 갖게 되었지만 친구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들 때마다 그는 포위되는 걸 못참았기 때문에 그는 늘 혼자였다. 외부와의 교류를 갈망하면서도 안으로 숨어드는 그는 누나가 유일한 그의 관중이었으며 그녀가 없을 땐 도리 없이 빈 방에 들어가 담장을 마주하고 이야기했다한다. 이처럼 그는 문혁의 거친 풍랑 속에서도 여전히 홀로 햇살 아래 있거나 낙엽 속에 파묻혀 있었으며 찬바람을 맞으며 고성 담장에 붙은 귀뚜라미나 황량한 풀숲 중의 메뚜기를 찾고 있었다. 높은 나팔소리나 인파가 그의 주위를 덮어도 그는 홀로였다. 꾸샹은 또 회상하길 “내가 그런 집단이나 사회 여러 행사 등에 참석하는 것도 반대했으며 안타까워했다. 그런 일들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친구들은 모두 통속적이라고 조롱했다. ” 반면, 사람들은 “스스로 성에 갇힌” 그를 이상하게 보았으며 항상 높은 모자를 씀으로써 색다른 인상을 주었다. 1992년 6월 네덜란드에서 강의를 할 때도 이 모자를 썼으며 1992년 12월 독일에서 강의를 할 때도 변함이 없었는데 외국인들에게도 그는 신비한 ‘동화 시인’이었다. 그들에게 이 높고 높은 모자는 시인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케 했으며 또한 왕관은 아닌가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왜 자신을 “왕”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기실 꾸청은 독일에서 주는 안정적인 직업을 거부했다. 그리곤 그의 아내 시에예谢烨와 뉴질랜드의 한 섬으로 들어가 닭을 키우고 채소를 키우며 살았다. 이는 물론 그의 집은 자신만의 독립왕국이며 자급자족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뉴질랜드 이웃들에겐 이해되지 않는 점이었다. 왜냐면, 여러 마리의 닭을 임의로 키우고 죽여 요리에 쓰곤 하는 행위가 비위생적으로 비춰졌으며 위생국에 당연히 검색을 받아야 하는 불법행위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런 동양과 서양간의 사고 차이에서 오는 마찰 때문에도 그는 더 폐쇄적이고 이상한 사람이 되었으며 부인과의 다툼도 이런 환경에서 더 두드려졌다하겠다.  북경의 영화학원 교수인 추이웨이핑의 눈엔 “꾸청은 담이 적은 사람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뒤로 물러서 있길 좋아해서 뒷줄에 앉는 걸 즐기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꾸청을 몽롱시파 중에 “최대로 공헌한 시인”이라고 말한다, 다만 《한세대 一代人》에서 야기되는 의심은 “암흑이란 환경을 자기 광명으로 표현하는 건 일종의 임의의 표현이다.” “사회를 관조할 때 자신을 거꾸로 돌려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한편 《오늘今天》잡지의 임원인 류즈리刘自立도 꾸청의 시에 대해 혹평을 하면서도 그가 “동화시인”임을 다시 한 번 주지시켰다. “그는 어린아이같이 시를 쓴다, 때론 노숙한 아이의 성숙함도 보이나 어른이 쓴 시는 아니다. ” 그가 인식하는 꾸청의 창작은 문혁에 대한 강경한 사유모색의 반발일 뿐, 단순한 반항 의식으로서 일종의 어린아이식 사고를 완성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왜냐면, ‘개구쟁이’란 통제력을 잃고 있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엔 이런 인격결여와 사회소통의 중단과 관련이 있다.          꾸청 시의 예술적 특징   꾸청의 시에 대한 전반적인 특징이자 우수성은 첫 째,비교적 우화적 의미와 상징성을 신중하게 지니고 있으며 시의 음악성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종의 동화 색채가 엿보이며 그것도 소위 개구쟁이 성격을 띤다는 것이었다. 꾸청 시의 최대 특징은 이미지의 실현이다 그 실현을 위해 제일 많이 사용한 표현은 상징은유법이었다. 이 수사법은 진실 그대로 그리거나 내심을 직접 토로하는 전통 방식을 깼으며, 서정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그의 시 중의 상징은 표면상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심층적으론 무한한 함축을 내포하고 있어서 시의 감염력이 매우 크다. 조기 상징주의의 대가 마라메이가 반복 강조한 대로 “ 시는 단지 암시여야 한다. 직접 그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다. 따라서 4분의 3을 생략하여 느끼도록 해야 즐길 수 있다.” 시의 매력은 직관으로 다 드러내지 않고 마치 그림을 그리듯 해야 하며 무언가 증명할 게 없어야 한다. 즉 시는 총괄적으로 뭔가를 암시만 해야 한다.“ 이같이 상징성의 추구는 현대시의 한 특징이 된다. 상징수법은 중국 고전시의 비흥比兴수법과도 아주 가깝다. 상징은 일종의 비흥이며 비흥은 상징의 일종표현기법으로 비比는 시의 형상화를 구하는 것이며 흥兴은 시의 언어 너머의 의미를 구한다고 보았다. 다른 것이라면 상징수법은 대부분 교묘하게 비교 대상 사물을 감추고 시 주제 역시 다의성多义性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짧은 단시《한세대一代人》에서 “까만 밤黑夜”,“나我”“까만 눈동자黑色的眼睛”등은 감성 형성 구성을 위한 이미지의 조합이다. 이 시어들은 이미 그 단어 자체로 객관적 의의를 갖고 있다. 더불어 제목에서 주는 암시 때문에 더더욱 강렬한 상징성을 가진다.   즉, “까만 밤黑夜”은 한 세대의 정신세계의 암울한 배경을 상징한다. “눈동자眼睛”는 광명을 갈망하는 한 세대의 눈동자를 상징하며 시 중의 “나”는 바로 가장 고통받고 인간의 말로까지 가보았던 문혁세대들, 그 세대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시 상징의 심미적 특성은 실제 이미지의 내재의 미학 특성이기도 하다. 꾸청의 시의 이미지 세계 중에 드러나는 은유법과 상징은 역시 그 암시성을 갖고 있다.  꾸청 시의 두 번째로 많이 사용한 수사법은 추상변형수법이다. 현대생활의 진전으로 사람들의 감상과 기호는 부단히 변화되어왔다. 예술변형도 가면 갈수록 다채로워졌다. 이에 “변형이 없는 건 예술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서구 현대파의 예술강령은 “묘사가 불확실한 것이 진실이다 ”“형태를 벗어날 때 더 진실에 가깝다” 약속이나 한 듯 이미지 창조에 대한 신시의 흐름은 늘 고전주의의 과대수식을  벗어난 “변형”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쓴 《생명환상곡生命幻想曲》중에 이런 글이 있다.   “ 빛의 폭포에/나의 피부를 검게 씻는다 /……/ 태양은 나의 인부/그는 날 잡아당긴다 /강렬한 빛의 밧줄로/……/ 让阳光的瀑布/洗黑我的皮肤/..../ 太阳是我的纤夫/它拉着我/ 用强光的绳索 .....) ”   여기서  “폭포瀑布”는 “햇볕阳光”을 은유한다,또 폭포로 검은 얼굴을 씻어줌으로써 햇볕은 내 피부를 검게 타게 함을 은유한다. 원래 검은 피부는 건강미의 표시이다. 그러나 그 검은 색은 어둠을 뜻하고 절망을 낳는다. 강렬한 생명력이 그를 잡아당기지만, 태양인 인부가 밧줄로 묶어 잡아당기는 데서 그는 오히려 속박으로 받아들여진다. 선택 없는 어둠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까닭에 이들 간의 복잡하고도 교묘한 본질구성은 시인의 주관적 직시와 감각에 의해 단순해지고 ‘변형’된다.  직감과 환각, 착각, 순간감각에 대한 인상은 대상을 쉽게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작가의 주관이 객관적 사실에 대립되면서 교묘히 대상을 변형 “무의식 중의 적절한 이치와 존재이유”를 밝히게 한다. 그의 숨겨진 속내를 드러나게 된다. 이로써 시인 눈앞에서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도 내재한 속내를 드러내게 할 수 있고 시인 안중의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한 줄기 피로 보일 수도 있는 이유이다. 세 번째로 많이 사용한 이미지 표현수법은 감각의 소통이다. 이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통감痛感이라고 하는데, 일찍이 이 통감법은 중국고전시에서도 늘 써왔던 수사법이기도 하다. 즉, 중국의 옛 선조들은 일찍이 “소리유형听声类型”을 숙지하여 예로 들면, ‘수愁’라는 글자 하나에 “물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근심이 만리까지 간다一水牵愁万里长”,고 뜻을 담아 물소리에 그 음감을 넣었으니 현대시의 통감범위 역시 고전시의 범주를 크게 초과하지 못하고 있다. 좋은 시일수록 안색은 온도를, 소리는 형상을, 차갑고 따뜻함은 중량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런 오관의 상호소통은 서로의 공감각을 이끌어 시의 연상공간을 더욱 크게 한다. 또한 통감의 운용은 객관 세계를 풍부하게 변화시켜 준다. 더불어 대상끼리 상통, 각종 오감을 통해 시의 세계를 광활하게 창조하게 한다.  꾸청의 시에 사용한 이미지 표현법에는 이 밖에도 대상끼리 겹치면서 사물을 사람으로 전이시키는 것이나 상상을 통해 대상을 취하는 수법과 생략도약법도 많이 사용되었다. 총정리하면 시의 이미지는 본래 언어라는 기호를 본체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늘 그는 공식화된 언어를 초월하기를 꿈꿨다. 따라서 꾸청 시의 이미지는 그만의 독특한 천진함과 단순하고도 직선적인 표현 아래 자아비판적이고도 풍자성이 농후한 예술풍격을 낳았다고 본다.     꾸청의 대표시 6 편     한 세대   까만 어둠은 내게 까만 눈동자를 주었다 나는 이를 통하지 않고는 빛을 찾아낼 수가 없다   一代人   黑夜给了我黑色的眼睛 / 我却用它寻找光明   문혁“文革”을 거친 한 세대 청년이었던 꾸청은 윗 시 두 행으로 몽롱시의 대표시인(1956年9月∼1993年10月)이 되었다. 20세기 70년대 말에서 80년 대 초의 몽롱시는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해방解放”이라는 중요한 한 문학 조류를 만들었는데 그는 바로 이 당대 현대시의 혁신의 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윗 시에 대해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파란만장한 문혁시대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 역시 이 세대에 속한 자로서 “까만 어둠”은 그 시대를 반영한 것으로 우리의 눈동자가 까만 이유가 역설적으로 표현되었다. 더군다나 광명조차 이 까만 어둠을 건너지 않고는 다가오지 않음을, 그것도 까만 눈동자 아니면 바라볼 수 없음을 극명하게 아이러니컬하게 밝히고 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이 표현 속에 감춰진 당시 중국 정치적 현실에 대한 냉소와 反思想이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을지 짐작이 간다.           눈을 깜박이기만 하면 ____저  착오의 시대에 나는 이런 "착시"를 일으켰다______     나는 굳게 믿는다 내가 눈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기 때문에   무지개, 분수 속에서 아른거리며    부드럽게 행인들 바라보다가도 내가 눈 한 번 깜박이기만 하면 곧 독사의 그림자로 변해버린다   괘종시계, 교회당에 은거하면서 고요한 새벽시간을 갉다가도 내가 눈 한 번 깜박이기만 하면 곧 깊은 우물로 변해버린다   붉은 꽃, 화려한 무대 위에서 봉우리 피우며 흥분 속에 봄바람 맞다가도 내가 눈 한 번 깜박이기만 하면 곧 피비린내로 변해버린다   굳게 믿으려고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80년 4월호 발표     贬 眼      __ 在那错的年代里, 我产生了这样的 "错误"____     我坚信, / 我目不转睛. // 彩虹, / 在喷泉中游动, / 温柔地顾昐行人, / 我一贬眼____ / 就变成了一团蛇影.// 时锺, / 在教堂里棲息, / 浸静地嗌着时辰, / 我一贬眼_____/ 就变成了一口深井.// 红花, / 在银幕上绽开, / 兴奋地迎接春风, / 我___ 贬眼____ / 就变成了一片血腥. // 为了坚信, / 我 目圆 //                             80. 4 发表   위 작품은 80년 꾸청 시인이 24세 때 발표한 것이다. 즉, 문화혁명이 막 끝난 직후 착오의 시대를 살아온 중국인민들의 반역사적인 "착각"과 그 "오류"를 치기 섞인 반어적 역설적 기법으로 표현, 기막힌 냉소를 보여주고 있다. 눈을 깜박거릴 수 없는 한 세대의 긴장감, 그러나 깜박거릴 수밖에 없어 지켜내지 못한 나의 과오이자 인민들의 과오는 ‘무지개’가 독사의 그림자로, ‘교회당 시계’는 시간을 쏠아대는 깊은 침묵의 우물 속으로, ‘붉은 꽃’은 문혁을 질풍노도로 피비린내를 일으켰던 홍위군의 봄바람으로 변하고 말았음을, 폭로하고 있다. 신처럼 받들어졌던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와, 문혁을 주도했던 4인방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이런 천지개벽의 변화를 시인은 과연 어떻게 시로 표현할 수 있으며 이율배반적 현실에 적응할 수 있었겠는가?  반어적 농담으로 내뱉는 아픈 시선이 이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나는 버릇없는 아이   ___ 난 대지에 창문을 가득히 그려놓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가 빛에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싶다._____                                                                                   어쩌면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에 버릇없어진 아이처럼 난 제멋대로인지 모른다   나는 매 시각이 색깔 예쁜 크레용처럼 아름답기를 바란다 나는  내 맘에 드는 흰 종이에 서툴고 거친 자유를 그려내거나 영원히 눈물 흘리지 않는 눈동자를 그려내길 바란다 넓은 하늘 그 하늘의 깃털과 나뭇잎 그리고 엷은 녹색의 어둔 저녁과 사과를 그려내기를 바란다   난 새벽을 그리거나 이슬을 그리거나 눈에 보이는 미소를 그리고 싶다 가장 젊고 가장 고통스러운 사랑을 그리고 싶다 그녀는 검은 구름을 본 적이 없다 그녀의 눈은 하늘빛 그녀는 영원히 나를 바라본다 영원히, 바라본다 절대로 머리 돌려 홀연히 가지 않는다 난 요원한 풍경을 그리고 싶다 또렷한 지평선과 물결을 그리고 싶다 많고 많은 쾌락의 시냇물을 그리고 싶다 구름을 그려본다______ 잔털이 잔잔하게 가득 찬, 난 그들을 아주 가까이 붙게 하고 그들 서로를 사랑하게 한다 모든 묵계와 봄날의 모든 조용한 격동이 한 송이 작은 꽃의 생일이 되게 한다   난 또 미래를 그려보고 싶다 난 그녀를 만난 적이 없고, 또 그럴 리도 없다 그러나 그녀가 아주 아름답다는 건 안다. 난 그녀의 가을코트를 그리고 타오르는 촛불과 단풍잎을 그리고 수없이 그녀를 사랑하기에 재가 돼버린 마음을 그린다 결혼식을 그리고 일찌감치 깨어난 경축일을 그린다 그 위에 유리 빛 사탕종이와 북방동화의 삽화를 붙여 넣는다   난 제멋대로인 아이 모든 불행을 지워버리고 싶다 나는 대지 위에 창문을 가득히 그려놓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들이 빛에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싶다. 난 바람을 그리고 싶다 하나하나 점점 높아지는 산들을 그리고 동방민족의 갈망을 그리고 막힐 것 없는 큰 바다의 유쾌한 소리를 그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종이 한 모퉁이에 나는 또 나 자신을 그리고 싶다 한 마리 코알라를 그린다 빅토리아의 깊은 숲 속에 조용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넋을 놓고 있는, 그는 집이 없고 한 조각 마음은 먼 곳에 나가 있다 그는 단지 수많은 장과(浆果)와 같은 꿈과 아주 아주 큰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나는 바라고 있다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왠지 모르지만 나는 크레용을 받지 못했고 색깔 있는 시각을 얻지 못했다 단지 나 자신만이 있을 뿐 나의 손가락과 상처의 아픔 한 장 한 장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으로 아끼던 백지만 있을 뿐 그들이 나비를 찾아가게 하고 그들이 오늘부터 사라지게 할 뿐이다.   나는 어린 아이 환상 속 엄마로부터 지나친 사랑에 버릇없어진   나는 제멋대로인 아이다   我是一个任性的孩子 ____ 我想在大地上畵满窓子, 让所有习惯黑暗的眼睛都习惯光明                                              也许/我是被妈妈宠坏的孩子/我任性//                     我希望/ 每一个时刻 /都像彩色蜡笔那样美丽/我希望/能在心爱的白纸上畵畵/ 畵出笨拙的自由/畵下一只永远不会/流泪的眼睛/一片天空/一片属于天空的羽毛和树叶/一个淡绿的夜晚和苹果// 我想畵下早晨/畵下露水/所能看见的微笑/畵下所有最年轻的/最有痛苦的爱情/她没有见过阴云/她的眼睛是睛空的颜色/她永远看着我/永远, 看着/绝不会忽然棹过头去/我想畵下遥远的风景/畵下清晳的地平线和水波/畵下许许多多快樂的小河// 畵下丘陵_____ 长满淡淡的耸毛/我让他们挨得很近/让他们相爱/让每一个默许// 每一陈静静的春天激动/都成为一朵小花的生日// 我还想畵下未来/我没见过她,也不可能/但知道她很美/我畵下她秋天的风衣/畵下那訾燃烧的烛火和枫叶/畵下许多因为爱她/而熄灭的心/畵下婚礼/畵下一个个早早醒来的节日______/上面贴着玻璃糖纸/和北方童话的插图// 我是一个任性的孩子/我想涂去一切不幸/我想在大地上/畵满窓子/让所有习惯黑暗的眼睛/都习惯光明/我想畵下风/畵下一架比一架更高大的山岭/畵下东方民族的渴望/畵下大海___/无边无际愉快的声音// 最後, 在纸角上/我还想畵下自己/畵下一只树能/他座在维多利亚深色的丛林里/座在安安静静的树枝上/发愕/他没有家/没有一颗留在远处的心/他只有,许许多多/奖果一样的梦/和很大很大的眼睛// 我在希望/在想/但不知为甚麽/我没有領到蜡笔/没有得到一个彩色的时刻/我只有我/我的手指和创痛/只有撕碎那一张张/心爱的白纸/让它们去寻找胡蝶/让它们从今天消失// 我是一个孩子/一个被幻想妈妈宠坏的孩子/我任性//   이 시는 그야말로 꾸청의 성격과 그만의 색깔이 드러난 시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잉얼英儿≫에서도 나오지만, 그는 안정적인 독일에서의 생활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리곤 누구의 간섭도 필요 없는 섬으로 들어가지만 여전히 사회성이 없는 그를 괴롭힌다. 그는 철없는 아이로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왠지 모르지만 ”나는 크레용을 받지 못했고/ ..생략../ 단지 나 자신만이 있을 뿐/..생략.../마음으로 아끼던 백지만 있을 뿐“이다. 문혁은 끝났으나 뉴질랜드까지 도피해 왔으나 그가 살아남는 길은, 천진한, 개구쟁이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색깔을 찾아 그리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백지’만 있고 ‘크레용’이 없다. ‘손가락도 다쳤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먼 것과 가까운 것                         당신은                                                 , 한 번은 나를 바라보다가                    한 번은 구름을 보고 있어요                     난 이제 느껴져요                               당신이 나를 볼 땐 아주 멀리 느껴지고           당신이 구름을 볼 땐 아주 가깝게 느껴져요        远 和 近   你 / 一会看我 / 一会看云   我觉得, / 看我时很远 / 看云时很近                                                 1980년 발표작   진실이란 무엇인가, 정말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는 것일까, 단절은 지금 이렇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고 말하는 중에도 일어나고 있다. 정작 먼 구름은 가깝게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함께 사랑을 나눈 너와 나 사이에서는 여전히 먼 거리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틈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우린 느낀다, 깨닫는다.     봄날   _나는 손수건을 가볍게 흔든다___     봄날,  너는 손수건을 가볍게 흔드는구나 내게 멀리 가라고 하지만 곧 돌아오라는 건가 아니, 어떤 것도 아니지, 어떤 것도 이유가 아니지, 꼭 물위로 지는 꽃 같구나 꼭 꽃잎 위의 이슬 같구나,.. 그림자만 아는구나  바람만 느끼는구나 채색나비만 놀라 탄식하는구나 여전히 마음 가운데 꽃은 분분히 날아가는데,..     《别》         (在春天,我把手帕轻挥)    在春天,/ 你把手帕轻挥,/ 是让我远去,/ 还是马上返回? / 不,什么也不是,/ 什么也不因为,/ 就象水中的落花,/ 就象花上的露水……/ 只有影子懂得,/ 只有风能体会,/ 只有叹息惊起的彩蝶,/ 还在心花中纷飞……   이별이 이리 가벼울 수 있을까, 단지 손수건 한 장 흔들듯 그대는 가고 어떤 이유도 댈 수 없는 채로 그렇게 봄날 속에 우리들 이별은 바람 한 점 남기며 떠난다. 그것도 봄날에, 아무도 귀 기울여 아는 체도 없는데, 오직 채색나비가 꽃잎 떨어지듯 그림자를 잠시 남기며 바람인듯 날아가는 그 가벼운 탄식 아래 그렇게 우리의 이별은 가볍고 또 가볍게 봄을 풀어내고 있다니,..!      작은 항구     작은 항구 굽이굽이 길구나       문도 없고 창문도 없어   난 오래된 열쇠를 들고 두터운 담장을 두들긴다     小巷                小巷/ 又弯又长 // 没有门 / 没有窗  //  我拿把旧钥匙 /  敲着厚厚的墙  //     아주 작은 항구에 몸을 숨겨도 여전히 창도 없고 문도 없다. 그를 가려줄 현관문 열쇠를 찾아보지만, 너무 녹슬어 쓸모가 없다. 별수 없이 막힌 담장에 가서 두들긴다. 자기 안의 성안에서 그만의 소통을 꿈꾼다. 그의 말을 들어주던 누이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걸어 들어와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꿈꾼다. 마지막으로 찾아든 뉴질랜드의 아주 작은 섬, 그곳에서 그는 숨어 살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과 생활을 맡은 그의 아내의 질책이 뒤따른다. 숨 막히는 그의 막다른 골목을 ‘小巷’ 이 두 글자에서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                                                        [출처] 37세에 자살한 시인 꾸청顾城/ 김금용 |작성자 푸른섬        중국 몽롱파시의 황제-고성 신금철—문학살롱 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네 지난시간에는 3.8절을 맞으면서 여성시인들과 그들의 시들을 감상했는데요 오늘시간에는  중국몽롱시의 황제-고성시인과 그의 일부 대표작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연변시가학회 부회장 림금산시인과 함께 합니다. 안녕하세요? 림금산—네 수고하십니다. 신금철—고성이라고 하면 지난번 북도시인을 얘기할때 북도시인이랑 서정시인이란 함께 중국몽롱시파의 대표적 시인이라고 했죠? 몽롱시의 황제라고 한데는 어떤 리유라도 있나요? 림금산—네 북도는 몽롱시파의 선구자라 할수있고 고성은 시의 량이나 시적인 삶이나. 또 그 작품수로 보나 황제라고 함이 맞먹을 것 같은데요 마지막 생명을 다할때 까지도 계속 시창작상태에 빠져있었고 국내적이나 국제적으로 그 파워가 너무나 컸다. 전문적인 고성카페가 건립되였고 영화, 장편소설, 팬들의 활동. 거기다 왕관같은 높은 모자를 계속 썼고 …물론 황제란 어디까지나 독자들이나 학계에서 그렇게 불러주었기 때문일것이고 아무튼 제일 말밥에 많이 오르고 강렬하게 올라 차츰 몽롱파의 중심으로 솟아올랐다. 처음엔 부차적 인물이였으나 나중에는 중심인물로 서서히 올라오게 되였다. 아미 이런 여러가지 원인으로 그를 몽롱파의 황제라고 일컬은것 같다. 신금철—그럼 37세밖에 못살았다는데 좀 구체적으로 생평에 대해서 소개해주시죠 림금산--고성의 짧은 생애 고성은 1956년 9월 24일, 북경에서 태어났다.  1969년에 비판을 받아 산동성 광북(廣北)농장으로 쫓겨간 아버지 고공(顾工)을 따라 그는 12세에 학업을 중퇴하고 돼지를 키웠다. 1973년부터는 그림을 배우다가 1974年 북경으로 돌아와 운반공과 목수일을 하며 가끔 차출되어 편집을 도우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문혁이 끝나면서 1980년초 직장은 해체되고 한 때 표류생활을 하면서도 21세인 1977年《민들레蒲公英》라는 시를 발표하여 각광을 받았으며 24세이던 1980년엔 《별들(星星)》이라는 잡지에 이란 시를 발표, 역시 시단의 강렬한 반향과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몽롱시파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北京文艺》、《산동문예》、《소년문예》등에 시를 발표하며 80년대 주류를 이뤘던 파의 애청, 북도, 서정에 이어 4대 대표시인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1985년 그는 중국작가협회에 가입, 87년엔 구미문화교류방문단에 끼어 창작강의활동을 하다가 88년엔 뉴질랜드로 가서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쳤으며 오크란대학의 아시아언어연구원으로 초빙,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지만 곧 사직하고 섬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한편 1992년, 그는 독일학술교류중심(DAAD) 창작기금을 받으며 잠시 독일에서 시작생활을 시작했으나 현실과 이상사이의 갭을 허물지 못한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결국 그마저 사직하고 뉴질랜드북방의 한 작은 섬(격류도激流岛)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닭도 키우고... 신금철-안해를 도끼로 죽인 끔직한 일을 벌렸다면서요? 사실입니까? 원인은 무엇입니까? 림금산-네, 생활고로 인한 리혼제기, 시창작고조기, 사회적인 압력, 정신착락,영아와의 리별 등이 주되는 원인인것 같다고 나름대로 생각함. 그러나 근 일년만에 생활고와 섬약한 그의 정신상태 등을 이유로 그의 아내(사엽)가 이혼을 요구하자 1993年10月8日 급기야 아내를 도끼로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서 자살했다. 당시 이 사건은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많은 매체에선 “고성이 도끼로 부인을 살해하다”라고 보도하면서, 동화시인이었던 그가 악마에 의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살인자가 되었다고 했다. 물론 사후 일부 그 누명은 벗겨졌지만 (고성의 누나 고향顾鄕은 “고성최후의 14일”이라는 기획물에서 말하길, 도끼는 우연히 그 장소에 있었을 뿐이며,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그 참혹한 사건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1993年 3月 그들 부부는 중국으로 귀국하여 가족과 문인들을 만나고 다시 독일을 거쳐 뉴질랜드로 돌아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내 사엽과 고성은 1979년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4년간 연애를 하다가 1983년 결혼했다. 1987년 같이 조국을 떠나 자살을 할 때까지 그의 아내는 그의 잦은 실직과 이사, 가난, 그리고 고성을 쫓아다니며 함께 살기도 했던 여인,‘영아’ 등으로 많은 심리적 고초를 견뎌내는 중에도 관용과 미덕을 겸비했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극단의 자기 중심적이었던 고성으로서는 그의 어머니이자 누나 노릇을 해오던 그녀를 떠나가게 할수 없었는지 모른다.  신금철—홍콩에서 고성시인의 이야기로 영화도 찍었다면서요? 림금산—네, 홍콩에서 찍은 《고성의 이별과 사랑 》이란 영화는 고성자신이 남긴 《영아英儿》라는 소설내용이 반영된 것이었다. 고성이 최후에 보여준 광폭한 모습은 그의 시를 좋아해 쫓아다니던 한 여인때문이라는 항간의 추측도 있었는데, 그 ‘영아란 여인의 실제 본명은 리잉李英으로 현재《시간诗刊》잡지사의 편집을 맡아보는 매기麦琪라는 필명의 여인이다. 그러나 매기는 고성이 죽은후 그녀에게 남겨진 이런 주홍글씨를 명확히 거부하고 있다. 신금철—유서도 여러통 남겼다고 들었는데요? 한편 1993년 12월 22일 뉴질랜드 경찰국을 통해 중국영사관에 전달된 그의 유서는 모두 네통이었다. 부모님에게, 엄마에게, 누나에게, 아들 무얼木耳에게,..! 이 유서들은 사건현장에서 경찰이 취합했는데, 통합해서 보면, 그는 길이 끊어진 막다른 곳에 스스로 몰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아들木耳(三木Sam)에게만은 눈물을 보이며 아빠를 이해해달라는 문구가 있었다. 고성은 사진과 원고 등을 누이에게 부탁했으며 굳이 보관하지 않아도 되며 집이나 그밖의 것 역시 아들에게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후 모든 원고나 모든 고성의 것들은 자연스레 누나가 보관, 최근 고성의 탄신 50년에 즈음하여 북방문예출판사에서 4권의 “고성문학계열顾城文学系列”을 냈는데 그 첫 권《고성문학선: 다른 세계 顾城文选别有天地》은 고성이 1987년 5월 독일 밍스터明斯特에서 가진 “국제시가축제”에 참가하면서부터 1993년 10월 8일 그의 아내와 한 섬으로 도피했을 때까지 쓴 작품들을  “고성의 성顾城之城”이라는 웹싸이트의 강소민江晓敏과 함께 편집한 것이다. 총 150만 여개의 문자로 산문 및 시를 실었다.     신금철-고성은 많은 시와 문장, 서법, 그림 등을 남겼다면서요? 어떤 작품들이 있습니까? 림금산—네 방금 우에서 소개한 4권의 고성문학계절작품집이 있는가 하면 고성의 성이란 웹사이트가 있고 …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저서로는 시집 《검은 눈동자》(1986年 인민문학출판)《한낮의 달빛》、《서정, 고성서정시선집》、《북방의 고독한 노래》、《쇠방울》、《북도,고성시선》、《고성의 시》、《고성의 동화우화 시선》、《고성현대시자선집》과 그의 사후 부친 고공이 편집해서 출판한 《고성시전편》이 있다.。그 밖에 1998년 인민문학출판사에서 낸 《고성의 시》와 장편소설《잉얼》(1994年 1월 북경 화예사출판 그의 아내 시에예 합작)、《성城》등 작품들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그외 문집《생명이 정지된 곳, 영혼이 나간다 》,조합시집《성城》、《귀신이 성으로 들어간다》、 《자아로부터 자연》、《목적없는 나》가 있다。 고성시의 예술적 특징 첫 째, 비교적 우화적 의미와 상징성을 신중하게 지니고 있으며 시의 음악성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종의 동화 색채가 엿보이며 그것도 소위 개구쟁이 성격을 띤다는 것이었다. 고성시의 최대 특징은 이미지의 실현이다 그 실현을 위해 제일 많이 사용한 표현은 상징은유법이었다. 이 수사법은 진실 그대로 그리거나 내심을 직접 토로하는 전통 방식을 깼으며, 서정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그의 시중의 상징은 표면상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심층적으론 무한한 함축을 내포하고 있어서 시의 감염력이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짧은 단시《한세대사람》에서 “까만 밤”,“나”“까만 눈동자”등은 감성 형성 구성을 위한 이미지의 조합이다. 이 시어들은 이미 그 단어 자체로 객관적 의의를 갖고 있다. 더불어 제목에서 주는 암시 때문에 더더욱 강렬한 상징성을 가진다.   즉, “까만 밤黑夜”은 한 세대의 정신세계의 암울한 배경을 상징한다. “눈동자”는 광명을 갈망하는 한 세대의 눈동자를 상징하며 시 중의 “나”는 바로 가장 고통받고 인간의 말로까지 가보았던 문혁세대들, 그 세대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시 상징의 심미적 특성은 실제 이미지의 내재의 미학 특성이기도 하다. 총정리하면 시의 이미지는 본래 언어라는 기호를 본체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늘 그는 공식화된 언어를 초월하기를 꿈꿨다. 따라서 고성시의 이미지는 그만의 독특한 천진함과 단순하고도 직선적인 표현 아래 자아비판적이고도 풍자성이 농후한 예술풍격을 낳았다고 본다. 신금철—그럼 고성시인의 대표적 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의 짧은 명시 “한 세대 사람”을 함께 감상하겠습니다. 한 세대 사람                     고성 캄캄한 밤은 나에게 까만 눈동자를 주었지만 허나, 나는 그 눈으로 되려 광명을 찾는다     림금산-이 시는 “시간”에 발표되여 당시 큰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문혁을 거친 한 세대 청년이었던 고성은 웃 시 두 행으로 몽롱시의 대표시인(1956年9月∼1993年10月)이 되었다. 20세기 70년대 말에서 80년 대 초의 몽롱시는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해방”이라는 중요한 한 문학 조류를 만들었는데 그는 바로 이 당대 현대시의 혁신의 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웃 시에 대해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파란만장한 문혁시대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 역시 이 세대에 속한 자로서 “까만 어둠”은 그 시대를 반영한 것으로 우리의 눈동자가 까만 이유가 역설적으로 표현되었다. 더군다나 광명조차 이 까만 어둠을 건너지 않고는 다가오지 않음을, 그것도 까만 눈동자 아니면 바라볼수 없음을 극명하게 아이러니컬하게 밝히고 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이 표현속에 감춰진 당시  현실에 대한 냉소와 反思想이 시인에게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을지 짐작이 간다. 신금철—다음은 역시 대표적 시 “눈을 깜박이기만 하면”을 함께 감상하고 해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깜박이기만 하면 ____저  착오의 시대에 나는 이런 "착시"를 일으켰다______   나는 굳게 믿으련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지켜보련다   고운 무지개는 분수 속에서 아른거리며    부드러이 행인들을 반기다가도 내가 눈 한번 깜박이기만 하면 곧 독사의 그림자로 변해버리겠지   괘종시계도 교회당에 은거하면서 고요한 새벽시간을 갉다가도 내가 눈 한번 깜박이기만 하면 곧 깊은 우물로 변해버릴거야   붉은 꽃은 화려한 무대위에서 봉우리 터치며 흥분속에 봄바람 맞다가도 내가 눈 한번 깜박이기만 하면 곧 피비린내로 변해버릴테지   하지만 굳게 믿으려고 믿어보려고 나는 두 눈을 그냥 부릅뜨고 있다    - 80년 4월호 발표   림금산-이 작품은 80년 4월 “시간” 잡지에 고성시인이 24세 때 발표한 것이다. 즉, 문화혁명이 막 끝난 직후 착오의 시대를 살아온 인민들의 반력사적인 "착각"과 그 "오류"를 치기(유치한 기가)섞인 반어적, 역설적 기법으로 표현, 기막힌 냉소를 보여주고 있다. 눈을 깜박거릴수 없는 한 세대의 긴장감, 그러나 깜박거릴 수밖에 없어 지켜내지 못한 나의 과오이자 인민들의 과오는 ‘무지개’가 독사의 그림자로, ‘교회당 시계’는 시간을 쏠아대는 깊은 침묵의 우물 속으로, ‘붉은 꽃’은 문혁을 질풍노도로 피비린내를 일으켰던 홍위병의 봄바람으로 변하고 말았음을, 폭로하고 있다. 신처럼 받들어졌던 틀린 개념에 대한 숭배와, 문혁을 주도했던 4인방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났을 때, 이런 천지개벽의 변화를 시인은 과연 어떻게 시로 표현할수 있으며 이율배반적 현실에 적응할수 있었겠는가?  반어적 농담으로 내뱉는 아픈 시선이 이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나는 고집센 아이   ___ 난 대지에 창문을 가득히 그려놓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가 빛에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싶다._____                                       어쩌면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에 버릇없어진 아이처럼 난 제멋대로인지 모른다   나는 매 시각이 색깔 예쁜 크레용처럼 아름답기를 바란다 나는  내 맘에 드는 흰 종이에 서툴고 거친 자유를 그려내거나 영원히 눈물 흘리지 않는 눈동자를 그려내길 바란다 넓은 하늘 그 하늘의 깃털과 나뭇잎 그리고 엷은 녹색의 어둔 저녁과 사과를 그려내기를 바란다   난 새벽을 그리거나 이슬을 그리거나 눈에 보이는 미소를 그리고 싶다 가장 젊고 가장 고통스러운 사랑을 그리고 싶다 그녀는 검은 구름을 본적이 없다 그녀의 눈은 하늘빛 그녀는 영원히 나를 바라본다 영원히, 바라본다 절대로 머리 돌려 홀연히 가지 않는다 난 요원한 풍경을 그리고 싶다 또렷한 지평선과 물결을 그리고 싶다 많고 많은 쾌락의 시냇물을 그리고 싶다 구름을 그려본다______ 잔털이 잔잔하게 가득 찬, 난 그들을 아주 가까이 붙게 하고 그들 서로를 사랑하게 한다 모든 묵계와 봄날의 모든 조용한 격동이 한송이 작은 꽃의 생일이 되게 한다   난 또 미래를 그려보고 싶다 난 그녀를 만난 적이 없고, 또 그럴리도 없다 그러나 그녀가 아주 아름답다는건 안다. 난 그녀의 가을코트를 그리고 타오르는 촛불과 단풍잎을 그리고 수없이 그녀를 사랑하기에 재가 돼버린 마음을 그린다 결혼식을 그리고 일찌감치 깨어난 경축일을 그린다 그위에 유리빛 사탕종이와 북방동화의 삽화를 붙여 넣는다 난 제멋대로인 아이 모든 불행을 지워버리고 싶다 나는 대지위에 창문을 가득히 그려놓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들이 빛에도 익숙해지도록 하고 싶다. 난 바람을 그리고 싶다 하나하나 점점 높아지는 산들을 그리고 동방민족의 갈망을 그리고 막힐것 없는 큰 바다의 유쾌한 소리를 그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종이 한 모퉁이에 나는 또 나자신을 그리고 싶다 한마리 코알라를 그린다 빅토리아의 깊은 숲속에 조용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넋을 놓고 있는, 그는 집이 없고 한 조각 마음은 먼곳에 나가 있다 그는 단지 수많은 장과(浆果)와 같은 꿈과 아주 아주 큰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나는 바라고 있다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왠지 모르지만 나는 크레용을 받지 못했고 색깔있는 시각을 얻지 못했다 단지 나 자신만이 있을뿐 나의 손가락과 상처의 아픔 한장 한장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으로 아끼던 백지만 있을뿐 그들이 나비를 찾아가게 하고 그들이 오늘부터 사라지게 할뿐이다.   나는 어린 아이 환상속 엄마로부터 지나친 사랑에 버릇없어진   나는 고집센 아이다 림금산—해설: 시《 나는 고집센 아이》는 자신이 바로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에 버릇없어진 아이 ”임을 선포하고 있다. 자기만의 생각에 맞춰 자기만의 꿈을 고집하는 건 그의 집착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의 매력이기도 하다. 복잡하고 억압된 성인세계 속에서 고성의 의식은 “눈을 감으면 세계와 나는 관련이 없어진다 ”고 보았으니 말이다。. 《나는 고집센 아이》에서 차용한 아이들의 시각은 아동의 이상 안에서 개조된 성인세계다. 고성은 이 시에서 보여준 아이들 형상은 맑은 바람처럼 성인세계의 오염된 땅을 뒤흔들었다. 또 하나 몽롱시의 대표시인 북도北岛도 한탄하며 말하길 “비천함은 비천한 이들의 통행증이 되고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이 될 때, 고성은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서툴지만 ‘자유’를 찾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시는 그야말로 고성의 성격과 그만의 색깔이 드러난 시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영아英儿≫에서도 나오지만, 그는 안정적인 독일에서의 생활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리곤 누구의 간섭도 필요 없는 섬으로 들어가지만 여전히 사회성이 없는 그를 괴롭힌다. 그는 철없는 아이로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왠지 모르지만 ”나는 크레용을 받지 못했고/ ..생략../ 단지 나 자신만이 있을 뿐/..생략.../마음으로 아끼던 백지만 있을 뿐“이다. 문혁은 끝났으나 뉴질랜드까지 도피해 왔으나 그가 살아남는 길은, 천진한, 개구쟁이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색깔을 찾아 그리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백지’만 있고 ‘크레용’이 없다. ‘손가락도 다쳤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신—다음은 고성의 “먼것과 가까운 것”이란 시를 감상하겠습니다. 아주 짦은 시인데요 먼 것과 가까운 것                    당신은                                                 , 나를 한번 바라보다                   또 구름을 한번 쳐다보고                      난 이제 알것같아요                               당신이 나를 볼 땐 아주 멀리 느껴지겠죠           당신이 구름을 볼 땐 아주 가까이 느껴지고       1980년 발표작 림—해설: 진실이란 무엇인가, 정말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는 것일까, 단절은 지금 이렇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고 말하는 중에도 일어나고 있다. 정작 먼 구름은 가깝게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말하면서 함께 사랑을 나눈 너와 나 사이에서는 여전히 먼 거리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틈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우린 느낀다, 깨닫는다. 신금철—다음은 고성의 시 “리별”을 함께 감상하시죠 리별          고성 봄의 한가운데서  너는 손수건을 가볍게 흔드는구나 나더러 멀리 가라는 뜻일가 아니면 곧 돌아오라는 뜻일가 아니, 아무뜻도 아닐거야 별다른 뜻이 없을테지 마치도 물우에 지는 꽃잎과 같고 꽃잎에 떨어지는 이슬과 같을거야 그림자만이 그뜻을 알수 있을가  바람만이 느낄수 있을가 오직 탄식으로 놀란 꽃나비만이 아직도 내 마음의 꽃밭에서 분분히 날고있구나  림금산—해설: 이별이 이리 가벼울 수 있을까, 단지 손수건 한 장 흔들듯 그대는 가고 어떤 이유도 댈 수 없는 채로 그렇게 봄날속에 우리들 이별은 바람 한점 남기며 떠난다. 그것도 봄날에, 아무도 귀 기울여 아는 체도 없는데, 오직 채색나비가 꽃잎 떨어지듯 그림자를 잠시 남기며 바람인듯 날아가는 그 가벼운 탄식아래 그렇게 우리의 이별은 가볍고 또 가볍게 봄을 풀어내고 있다니,..!  신금철—다음은 시 “작은 항구”입니다. 작은 골목 작은 골목 굽이굽이 길구나       문도 없고 창도 없어   난 오래된 열쇠를 들고 두터운 담장을 두들긴다   림금산—해설:   아주 작은 항구에 몸을 숨겨도 여전히 창도 없고 문도 없다. 그를 가려줄 현관문 열쇠를 찾아보지만, 너무 녹슬어 쓸모가 없다. 별수 없이 막힌 담장에 가서 두들긴다. 자기 안의 성안에서 그만의 소통을 꿈꾼다. 그의 말을 들어주던 누이처럼 누군가 자신에게 걸어 들어와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꿈꾼다. 마지막으로 찾아든 뉴질랜드의 아주 작은 섬, 그곳에서 그는 숨어 살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과 생활을 맡은 그의 아내의 질책이 뒤따른다. 숨 막히는 그의 막다른 골목을 “작은 골목”이란 이 두 글자에서 찾는게 그리 어렵지않다.              신금철-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여가는데요 오늘도 림금산선생을 모시고 중국몽롱파 시의 황제 고성시인과 그의 일부 대표적 작품을 감상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중국을 놀래운 시인이면서 또 세계적인 시인인 고성시인에 대해서 어느정도 료해가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림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림금산—네 수고하셨습니다. 신금철—그럼 오늘 문학살롱프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편집에 김철운이였습니다.   림금산약력: 중국조선족시인 . 중국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부주임. 중국연변시가학회 부회장. 현중국조선족소년보사 기자부 주임. 주소:중국길림성연길시광명가 89호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전화 (0433)2518894. 핸폰: 159-4339-8225 메일: ,  
1419    대만 현대시의 흐름 댓글:  조회:4308  추천:0  2015-08-26
대만 현대시의 흐름                    ㅡ田原 시인을 중심으로               _한성례 옮김     1. 대만의 현대시 하면 대학시절에 처음 읽었던『대만현대시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간체자판으로 중국에서 출판된 시 선집이었다. 대만 당국과 중국과의 정치적 대립과 적대 정책이 오랫동안 이어진 탓에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내세우기 전까지 대만의 현대시인과 작가들의 작품은 중국에서 출판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래서인지 대만 현대시를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신선함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같은 중국인이고 같은 중국어로 시를 쓰는데 왜 이리도 대만 시와 중국 시는 다를까. 번체자와 간체자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내용은 전혀 달라서 몹시 놀라웠다. 이때가 내가 대학에 들어가 막 시를 쓰기 시작한 1980년대 초였다. 얼마 후에 중국 시인의 현대시와 대만의 현대시가 왜 다른지 알게 되었다. 그건 중국과 대만은 체제도 다르고 시를 창작하는 인문적·정치적 환경이 상이했기 때문이었다. 대만 현대시인의 작품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만의 현대시는 중국과 달리 건전한 문화 환경과 언론의 자유로 인해 일찍부터 유럽 현대시를 음미할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처럼 대만 현대시는 유럽 현대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한시와 같은 중국의 전통적 고전문학을 중시하고 계승하는 노력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른바 동서고금을 융합하여 그들 나름의 시혼詩魂을 형성한 것이다. 이 점이 대만 현대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렇긴 하지만 대만의 현대시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대만 현대시의 탄생은 일반적으로 1920년대부터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대만에서 현대시라고 하면 1920년부터 1945년까지의 작품을 가리킨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대만은 반세기 동안 일본의 식민지 시대와 장제스蔣介石 정권의 친미노선 시기를 거쳤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통해 대만의 시인을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일본의 식민지 시대 일본어 교육을 받은 시인들’이며, 이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을 당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장제스와 함께 중국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이른바 ‘외성인 시인’이다. 이 외성인 시인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대만에 오기 전부터 이미 중국에서 시를 쓴 경험이 있는 시인’과 ‘대만에 건너온 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이다. 그리고 ‘본성인 시인’이 존재한다. 본성인이란 중국에서 온 외래자가 아니라 대만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을 말한다. 일본 식민지 시대부터 시를 써온 대만 국적의 본성인 시인으로는 초기에 활동한 라이허頼和, 양서우위楊守愚, 양화楊華 등이 있다. 그 후에 등장한 이가 왕바이옌王白淵, 린시우얼林修二, 천챤우陳千武, 잔빙詹氷 등이다. 그밖에 린우푸林巫福, 바이디白萩, 황허성黄荷生, 린헝타이林亨泰, 양무楊牧도 본성인 시인에 속한다. 이 시인들이 식민지 시대에는 어떤 언어로 시를 썼을까. 첫 번째는 백화문이다. 백화문은 그때까지 사용해온 고문을 뒤엎고 탄생한 새로운 중국어다. 이들은 분명 1920년대를 전후해서 베이징北京에서 시작된 백화문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두 번째는 대만어인데, 대만 원주민의 방언을 사용하여 시를 썼다. 세 번째는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인 일본어이다. 이 무렵 대만의 현대시는 비판적 리얼리즘과 전위 모더니즘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와 동시에 반제국주의적인 식민지 통치와 반봉건적 사상, 대만의 풍토와 인정人情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다.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뿐 아니라 일본 현대시의 새로운 관념과 표현법 등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 시대와 관련하여 동인 시문학지〈풍차Le Moulin〉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1933년 10월부터 1934년 9월까지 발간된 이 동인지의 멤버 중 일부는 일본인이었다. 당시의 대만 현대시에서 이들 일본인 시인들은 일본과 대만의 시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자연스럽게 일본의 현대시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패전으로 식민지 시대가 끝난 1945년부터 장제스 정권이 대만에 들어온 1949년까지 대만의 현대시는 고적한 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는 그동안 사용해온 일본어와 대만어를 국어인 ‘중국어’로 교체하는 언어의 과도기 탓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대만의 현대시는 195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대 대만의 시단은 중국에서 건너온 시인들이 주도했다. 이 무렵 대만 현대시는 중국과의 정치적 대립에 따른 반공산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띠는 정치적 서정시가 등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시인들이 순수시와 비슷한 모더니즘 작품을 중심으로 창작했다. 이 무렵 활약한 대표 시인은 지샨紀弦, 종딩원鐘鼎文, 위광종余光中, 러우푸洛夫, 야샨瘂弦, 저우멍뎨周夢蝶, 정처우위鄭愁予 등이 있다. 특히 지샨이 1953년 2월 1일 창간한 동인 시문학지〈현대시〉는 이후 대만의 모더니즘 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대만 시인의 3분의 2에 달하는 103명이 ‘현대파’ 멤버였을 정도로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후 1953년 6월 친찌하오覃子豪, 종딩원, 위광종 등이 동인 시문학지〈남성藍星〉을 창간한다. 1954년에는 국민당의 건국기념일(10월 10일)에 맞춰 러우푸, 야샨을 중심으로 동인 시문학지〈창세기〉를 창간한다. 특히〈창세기〉는 대만 현대시단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초기에 보여준 ‘신민족 시형新民族詩型’에서 전환한 후기의 ‘초현실주의’라는 창작 기법은 당시 시단의 다른 그룹과 존재를 구분 지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지금도 대만의 뛰어난 시인을 거론할 때면 이〈창세기〉에 소속된 시인들이 많다.     2. 일반적으로 전후 대만 현대시의 발자취는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a.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 :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후부터 장제스 정권의 초기까지로, 대만 현대시가 잠시 부활했다가 정치적 속박과 제압으로 침묵한 시기 b. 1950년대 초기~1960년대 중반 : 모더니즘 시운동이 활약했던 시기 c. 1960년대 중반~1970년대 : 현대시의 리얼리즘 사조가 활발해지고 모더니즘 시에 대한 제고와 조정이 이뤄진 시기 d. 1980년대 이후 : 낭만주의, 사실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등 서로 다른 다양한 예술 경향이 다원적으로 불어난 시기.     사실 처음 대만의 현대시를 접했을 때 나는 이런 구분법을 알지 못했다. 시인이 어디 출신인지, 그들이 개인적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지향하고 있는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내 관심은 그들의 시가 얼마나 내 마음을 파고들지, 나를 계발시킬 힘은 있는지, 혹은 공부가 될 만한 수준인지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에서 현대시가 발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대만의 현대시는 내가 일본에 오기 전에 읽었던 그 상황과 그 시대에 머물러 있지 않다. 내가 일본에 유학 온 후, 특히 최근 몇 년간 대만 시인의 작품을 보면 상당히 다원적으로 발전해 왔음을 파악할 수 있다. 유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주로 신문 잡지 등 종이 매체에 실리던 시를 인터넷 세계의 확장에 따라 인터넷과 자신의 블로그 등에 활발하게 발표하여 종이 매체의 시와 인터넷 시가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 시’는 그 질감의 옥석 수준을 가리기 힘들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느 면에서는 현대시가 퍼져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에 태어난 대만의 시인들에게 외성인과 본성인이라는 정체성의 경계는 사라졌다. 중국에서 건너온 부모에게서 태어난 시인도 마찬가지다. 일부 외성인 시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던 지워지지 않는 향수 콤플렉스는 대만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사라지고 없다. 대만 출생의 시인에게는 고향이나 머나먼 방랑, 그리움에 대한 표현보다는 자신의 정신적 고향 또는 진정한 뮤즈를 갈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책무인지도 모른다. 1950년대〈현대시〉라는 시문학지의 창간은 혈기 넘치는 현대시의 한 시기를 이끌었다. 1950년대 말〈창세기〉는 개정판을 내고 ‘세계성과 초현실성, 오리지널과 순수성’을 제창하며 초현실주의시라는 현대시 붐을 일으켰다. 아울러 대만의 현대시사에 두 가지 논쟁도 발자취를 남겼다. 하나는 1957년에 일어난 논쟁으로, ‘횡적 이식移植’을 추진하고 ‘종적 계승’을 반대하는 지샨의 주장에〈남성〉의 멤버가 극렬히 반발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59년부터 1960년까지의 작가 쑤쉐린蘇雪林과 친찌하오가 벌인 ‘전통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3. 1960년에 들어서면 다시 여러 시문학지가 창간된다. 그 중〈포도원葡萄園〉이라는 동인지가 1962년 7월에 시인 원샤오춘文曉村, 천민화陳敏華, 구딩古丁 등에 의해 탄생한다. 그 뒤를 이어 일본의 식민지 시대 리얼리즘 정신의 연장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동인지〈립笠〉도 1964년에 시인 천챤우, 두궈칭杜国清, 리퀘이샨李魁賢 등에 의해 세상에 나온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수많은 현대시집이 출판되었다. 이 무렵 맹활약한 시인과 화제가 된 시집은 야샨의『심연深淵』, 러우푸의『석실지사망石室之死亡』, 상친商禽의『꿈 또는 여명』, 저우멍뎨의『환혼초還魂草』, 러우먼羅門의『아흐레의 저류底流』, 위광종의『고타악敲打楽』등 무수히 많다. 1970년대에 접어들자 향토 상상鄕土想像과 본토 의식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쟝순蒋勲, 샹양向陽, 두예渡也, 리민용李敏勇 등이 대표적 시인이다. 시 평론가 샹양은 1970년대 대만 현대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전통을 바꾸고 민족적 시풍을 재건했다. 2. 사회로 환원하고 현실생활을 배려했다 3. 대지를 수용하고 본토 의식을 수긍했다. 4. 세속을 중시하여 대중의 마음속 목소리를 반영했다. 5. 자유를 존중하여 다원적 사상을 격려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대표적 시인은 샹양, 뤄지청羅智成, 천커화陳克華, 양무, 천리陳黎등이 있다. 1980년대부터 나는 대만의 몇몇 시인과 함께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 현대시 축제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들의 시를 접하고서 작풍의 다원성과 언어의 불확실성이 점점 선명해져간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가장 인상에 남는 시인은 정신과 의사인 징샹하이鯨向海와 안과 전문의 양커화楊克華다. 그밖에 쟌정전簡政珍, 링위零雨, 천리, 샤위夏宇, 러우칭羅青, 린야요더林耀徳, 양쟈샨楊佳嫺, 양쩌楊澤 등이 있다. 실험성 강한 시를 비롯하여 영상과 시를 융합하여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낸 작품들을 처음 접하고서 굉장히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만 한정된 시론이 아니고 현대시의 사명이란 무엇보다도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움과 신비감을 지닌 언어를 창조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현대시라는 장르는 시간과 공간, 시공을 꿰뚫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정치 운동으로 얼룩진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시대, 특히 잔혹했던 10년간의 문화대혁명 시대는 중국에 있어 진정한 현대시의 공백기였다. 그 시기에 대만의 현대시가 건강하게 발전하고 존재했다는 것은 중국어로 쓰인 현대시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2014년 10월 11일 이나게稲毛해안에서         티엔 위안田原 1965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출생. 시인, 번역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허난河南대학교 재학 중에 첫 중국어시집 출간. 대학 졸업 후 1991년에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2003년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 대학원에서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론’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 다니카와 슌타로의 작품에서 감명을 받아『다니카와 슌타로 시선집』4권을 중국어로 편역하여 중국에서 일본 시가와 다니카와 슌타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국어와 일본어로 시 창작을 계속하는 한편으로 일본 현대시인의 작품을 중국어로 다수 번역하였고, 동시에 일본과 중국 시인들의 본격적이고 폭넓은 문학교류에 앞장서 왔다. 중국어 번역서『다니카와 슌타로 시선집』, 편저『다니카와 슌타로 시선집』1~3권, 박사논문집 『다니카와 슌타로 론』등이 있다. 그 외에도 다무라 류이치田村隆一, 쓰지이 다카시辻井喬 등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시인의 작품을 다수 중국에 번역 소개했다. 리쓰메이칸 대학 대학원생이던 2001년 제1회 유학생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어로 시 창작을 시작했으며, 2004년에 첫 일본어시집『그리하여 낭떠러지가 탄생했다』를 출간했고, 2009년에는 중국 스촨四川대지진의 슬픔 등을 쓴 제2시집『돌의 기억』을 출간하여 이 시집으로 2010년도 제60회 ‘H씨 상’을 수상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 상을 외국인이 수상하여 크게 화제를 모았다. 2011년에는『티엔 위안 시집』이 시초샤思潮社의 ‘겐다이시분코現代詩文庫’시리즈 205권 째로서 출간되었는데 이 또한 외국인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 외에도 2005년에 번역한『다니카와 슌타로 시집』으로 중국 북경에서 제2회 ‘21세기 딩준鼎鈞문학상’과 2011년에 여러 권의 중국어시집 번역서로서 제3회 ‘종쿤中坤시가상’을 수상했으며, 중국어, 영어 시집으로 중국, 미국, 대만 등에서 여러 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 일본 도쿄의 조사이城西대학 중문과 교수.       한성례 (번역) 1986년 〈시와 의식〉 등단 한국어 시집 『실험실의 미인』 외 일본어 시집 『감색치마폭의 하늘은』 외 현 세종사이버대 겸임교수    
1418    중국 현대시 여러 류파를 중심으로 댓글:  조회:5080  추천:0  2015-08-26
  격동의 20세기를 이겨낸 중국 현대시         _ 문화혁명 이전의 여러 유파를 중심으로 -                 김 금용 시인    중국은 청나라 말기부터 외세침입에 의한 봉건주의 붕괴와 함께 서구 세계의 문예사조가 일시에 들이닥쳤기 때문에 신시와 근대시, 그리고 현대시의 시대 구분이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중국문단에서는 1917년에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탈바꿈한 白話운동을 포함한 신 문학운동을 기점으로 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인 ‘5.4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를 현대시의 발생기로 본다. 즉, 백화운동으로 중국문자혁명이 일어난 1910년대부터 개인과 문학이 말살된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까지를 통틀어 현대시라고 부르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필자는 중국문단의 통설에 따라 1907년 루쉰魯迅이 서구의 셀리, 바이런, 키이츠, 푸슈킨 등의 시들을 白話로 소개함으로써 시작된 중국의 신시와 문화혁명 이전까지를 ‘현대시’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7,80년대 이후의 시를 중국문단에서는 ‘당대시當代詩’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필자는 중국 당대시를 크게는 현대시의 범주에 넣어서, 각 시대별 유파들의 특성과 그 시정신을 짚어보려 한다   “白話”를 매개로 한 신문학운동   본격적인 신시운동은후스胡適(1891~1962)가 1917년《신청년》 2월호에서 “한정된 형식에는 무한한 내용을 담을 수 없다”며, 시의 형식 타파를 주창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히 전통적 정형시 형식으로부터 이론적 탈바꿈만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현대시의 특징이 되는 낭만성, 상징성, 산문성 및 사회성을 도입함으로써 일약 시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후스胡適가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할 때 접하게 된 서구 문예사조는 후스 뿐만 아니라 중국 신지식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으며 그들은 앞다퉈 전문 시지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시의 유파를 형성하면서 활발한 시 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국,공 내란의 정치적 압박과 항일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20,30년대는 중국 시문학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롭고도 치열한 심도의 시 전성기를 이뤘다고 할 것이다.   까마귀                후스*   나는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사람들 지붕 모서리에 서서 시끄럽게 소리지르네 사람들은 내가 불길하다고 미워하네 나는 그네들 사랑 받자고 재잘거릴 줄 모르네 몹시 춥고 바람센 날에도 돌아가 쉴 곳이 없네 …후략… 『상시집嘗試集』에 수록   老鴉                                  胡適 我大清站在人家屋角上啞啞的啼/人家討嫌我,說我不吉利;--/我不能呢呢喃喃 寒風緊,無枝可棲。/我整日裏飛去飛回,整日裏又寒又飢。---/                                                              윗 시는 후스가 1924년(32세)에 발표한 시이다. 까마귀는 시인 자신을 비유하는 한편, 당시 중국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봉건왕조가 붕괴된 새 체제의 불안 속에서 자신이 품고있는 이상과 현실의 갭을 잘 투사하고 있다. 시인은 항상 군중 " 群" 과 나 자신 "己" 속에서 갈등하면서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하려 한다. 첫 행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홀로 고립된 자신의 모습이며, 또한 깨어나 먼저 나라의 앞날을 짊어진 젊은이의 고뇌의 모습이기도 하다. 4.5행의 "無枝可棲""又寒又飢" 역시 춥고 배고파도 돌아가 쉴, 혹은 머물 나뭇가지 하나 없는 자신의 선구자적 존재의 고뇌와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 완전한 백화문으로 쓰여지고, 격률시의 정형성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20년대 초기 작품이지만, 상징과 은유, 역설적 표현이 잘 드러난 최근 현대시로도 손색이 없는 수작이다.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등과 함께 의 대표적인 시인인 원이둬聞一多는 시“여신의 地方色彩”에서 음악미와 건축미를 내세우며 현대시 리듬을 주창했으며, 리진파李金髮 는 프랑스의 상징시에 영향을 받아 를 이끌었다. 중국인들이 오늘날도 애송하는 국민시인 궈뭐루어郭沫若 역시 이 시인으로 를 통해 유미서정 경향의 시를 다수 발표했다. 또한 , 가 루쉰魯迅과 빙신氷心, 주즈칭朱自淸, 조우줘런周作人 등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을 수용, 비약을 시작했다.   상징파 시의 출현   상징은 현대시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이다. 중국 고대 시에서도 종종 눈에 띄는 창작법이나, 5.4운동 당시 『소년중국』『소년월보』『신청년』『창조주보創造週報』『어사語絲』등을 통해 소개된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상징시가 소개된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어사語絲』에 상징주의 수법의 시를 처음 소개, 가장 왕성한 상징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925년부터 27년까지 3년간 《이슬비微雨》,《행복을 위한 노래爲幸福而歌》, 《식객과 흉년食客與凶年》등 세 권의 시집에 총 450 여편을 발표했다.      버림받은 여인                            李金髮리진파   긴 머리칼이 내 눈앞을 가리자 일체의 부끄러운 질시와 붉은 피의 급류, 앙상한 뼈다귀의 깊은 잠과 단절되었다. 칠흑의 밤이 모기떼를 몰고 천천히 다가와 낮은 담 모서리를 넘어와 결백한 내 귀에 대고 울부짖는다 황야를 휘돌며 노호하는 광풍이 무수한 목자들을 전율케 하듯   棄婦 長髮披遍我眼之前/ 遂隔斷了一切羞惡之疾視/ 與鮮血之急流, 枯骨之沉/黑夜與蚊蟲聯步徐來 /越此短墻之角/ 狂呼在我淸白之耳後,/如荒野狂風怒號./戰慓了無數遊牧   윗 시는 《이슬비微雨》에 수록된 대표시 중 하나로서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거주한 스무 살의 리진파의 문화적 충격과 이방인으로서의 방황을 그리고 있다. ‘棄婦’는 삶의 고달픈 숙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기실 리진파 자신이 유학 중에 겪지 않을 수 없었던 외로움, 조국에 대한 고뇌, 방황, 절망에 이르는 비극성을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당시 프랑스에서 팽배하던 보들레르의 상징주의와 퇴폐성의 영향을 받아 그의 시 전반에는 현실에 대한 허무, 비애, 무능, 권태 등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모기떼를 몰고 오는 칠흑 같은 밤은 무고한 그의 귀에 와서 울부짖으며 그를 괴롭힌다. 외우내환으로 들끓는 조국의 현실 앞에서 미약하기 그지없는 시인의 자화상을 호소력 있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詩怪’라고도 부르는데, 아마도 그가 외교관 등의 직업을 갖고 부유한 생활을 했음에도 시에선 상당한 퇴폐성과 삶의 절망 등을 보여줬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新詩운동을 전개시키며 서구의 문예사조를 재빨리 흡수, 바로 현대시로 발전시킨 당대 시인들에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대부분이 구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라는 점이다. 상징파 대표시인인 리진파는 홍콩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고 프랑스,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후에 외교관이 되어 미국에도 건너갔다가 뉴욕에서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삼대 상징파시인의 하나라고 불리던 왕두칭王獨淸 일본과 프랑스에서, 무무티엔穆木天은 일본 동경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펑나이차오馮乃超 역시 동경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자연스레 외국문물을 접했던 시인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순수시를 표방하고 신비주의, 유미주의 경향을 나타냈는데, 리진파는 베를렌을, 무무티엔穆木天은 라파르그(Lafargue)를, 다이왕수戴望舒는 야메스(Jammes)를, 스민石民은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음을 모두 인정하였다. 이들의 시에선 공통적으로 상징수법의 하나인 강렬한 암시와 음감과 색감을 동시에 결합시킨 기법을 활용하였는데, 특히 왕두칭王獨淸(정+힘) + (음 + 색)=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즉, 라마틴(Lamartin)으로부터 情을, 베를렌에게선 音을, 랭보(Arthur Rlmbaud)에게선 色을, 라파르그(Lafargue)에게선 ‘힘’을 전승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의 대두   중국인민들이 지금까지 애송하는 국민시인,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 리진파李金髮 시인은 모두 신월파 동인들이기도 했다. 그들의 정치색은 대체적으로 마르크스시즘에 대항하며 우파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국민당의 독재와 부정부패에는 저항하였다. 때문에 한때 국민당의 사찰을 받기도 했지만, 중국전국이 공산주의 국가체제로 바뀌자 5,60년대 중국학자들로부터는 ‘매판자본주의 문학단체’ 혹은 ‘반동적집단’이라고 비판을 받다가, 80년대 이후에서야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는 사실 인도의 타고르의 시집『초승달』(중국어로 新月)이란 이름에 매료되어 滿月이 되자고 1923년 북경에서 쉬즈뭐徐志摩가 발기한 사교 모임이었다. 원이둬聞一多와 쉬즈뭐徐志摩는 해외유학파였으므로 여러 계층의 신사들을 모아 자유롭게 연극을 감상하고 문학을 품평하다가 사회개혁을 시도하자는 뜻으로 동인들의 자본을 모아 1924년 12월에 『현대평론』을 창간하였다. 1927년, 북벌군에 쫓겨 상해로 온 시인들과 남경이나 해외에서 들어온 전국시인들이 모여    후스胡適를 세워 도 열고 19세기 말 영국의 문예지 『Yellow Book』을 닮은 정사각형 종합지도 발간했다. 의 공동신념은 자유주의, 인도주의, 개성해방이었으며 격율시를 제창했다. ‘격율시’란 시행의 장단이나 시의 韻의 위치를 조절함으로써 시의 균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전통시가 무너지면서 실험시가 넘쳐 만 여 편 이상이 발표되었으며, 방만한 낭만주의나 산문시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혼란상을 극복하고 전통시의 절구시나 율시의 형식을 일부 이식, 조화롭게 정리, 발전시킨다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시어의 음악화, 방언의 시어화를 시도했다. 원이둬聞一多는 특히 음악미, 회화미, 형식상 균형을 지키자는 건축미를 주창했다. 일부는 를 ‘말린두부시(豆腐乾詩)’‘모꼴시(方塊詩)’ 라고 비아냥을 하기도 하였으나, 인권, 자유, 민주, 법치 등을 강조하는 서구 영향 아래 ‘中體西用’을 실험적으로 응용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혁명문학의 팽배와 항일운동의 봉기, 후에 좌익작가연맹으로 조직화된 사회주의 문학의 등장으로 이들이 이끌던 『현대평론』은 1928년 정간이 되었다. 다시 쉬즈뭐徐志摩가 『詩刊』을 매주 한 번씩 발간하기도 하였으나, 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요절함으로써, 동년 6월, 11호로 정간되고 말아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고요한 밤                             원이둬    이 등불, 등불은 사방의 벽을 하얗게 씻어내고 점잖게 놓인 탁자와 의자는 친구처럼 친밀하다 고서의 종이 향내가 간간이 밀려오는데 소중한 찻잔들은 정숙한 여인처럼 청결하다 젖먹이는 엄마 품에서 홀짝홀짝 젖을 빨고 큰아이는 건강하다고 알리는 듯 코를 곤다   這燈光, 這燈光漂白了的四壁 / 這賢良的卓椅, 朋友似的親密, / 這古書的紙香, 一陣陣的襲來/   要好的茶杯, 貞女一般的潔白,/ 受哺的小兒, 接呷在母親懷裏/鼾聲報導我大兒健康的消息...//                                             聞一多 中 一部   윗 시에선 그의 주장대로 각 행 머리를 ‘這’로 시작하였으며 행의 중간마다 ‘的’을 넣어줌으로써 ‘節의 균형’과 ‘句의 규제’가 반복적으로 쓰여 리듬과 일정한 건축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격율’이란 단순한 음률상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적, 회화적, 건축적인 복합 차원의 형식의 규제이다. 따라서 자연대로의 수용이 아닌, 예술의 구성을 통한 唯美性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와 를 수용한   1930년대 대표적인 유파는 현대파이다. 는 본질적으로 를 계승, 발전했다. 두 파간의 상호 인적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시의 생명을 표현에 두고 시의 궁극목표를 순수시에 두었다는 점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는 1932년 5월, 의 출자와 시저춘施蟄存. 두헝杜衡의 편집으로 간행된 종합문예지 《현대》에서 시작되어 다이왕수戴望舒가 본격적으로 현대주의의 기치를 들고 『新詩』를 창간하면서부터 전 중국시단을 휩쓸게 된다. 와 의 쇠퇴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종전의 인물이었던 다이왕수戴望舒가 를 접수하고 여기저기에서 현대파 경향의 신 잡지들이 탄생하게 된다. 36년부터 37년까지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전 시단이 항전체제로 전환되기까지 는 최고의 성숙기를 맞아 다이왕수戴望舒는 비엔즈린卞之琳, 펑즈馮至, 쑨다이위孫大雨, 등과 공동편집으로 현대시의 조류를 강렬하게 펼침으로써 5.4운동 이래 중국 시 최고의 황금시기를 맞았다. 가 궁극에 둔 것은 순수시였다.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중국전역이 의 낭만과 신비로움, 난해한 시가 넘쳐 난데 대한 반발로 ‘자각적인 상징파’*3로 불리던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즉, 밖으로는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의 암시법과 상징법, 의 낭만성과 격율시 등을 조화시켜 몽롱미와 복합적 이미지의 조합을 이뤘다. 또한 순수시정, 시의 산문미의 특성을 갖춤으로써 를 수정, 계승하고 있다. 이로써 현대파는 상징파보다 훨씬 화해적이고 통일적이며 주지적이고 의 지나친 암시와 상징으로 인한 난해함을 벗어나 좀더 직관적이고도 단순적 이미지로 시의 영역을 훨씬 명랑하고 격율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느끼게 했다. 다만, 당시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비관적 서정풍과 이미지 조합에 실험성을 가미한 심상풍, 직설이나 격정을 유보하면서도 현실비판에 맘을 둔 사실풍, 초현실적인 수법으로 첨예화된 현대의식을 표현하려던 회화풍 등 여러 가지 경향들이 혼재되어 나타났다. "현대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서정적 낭만과 격율적 형식을 배제하지 못했으며 고전적 이성으로 현대적 상징과 심상의 융합을 꾀하는 시인들도 많았다.  이런 의미에선 는 지성과 이성을 강조하는 영미계 현대주의와는 그 특징을 조금 달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비 내리는 골목                                 다이왕수戴望舒   종이우산을 받들고, 혼자 길고 긴, 텅 빈 비 내리는 골목을 방황하면서 나는 희망한다 라일락처럼 근심과 원한을 맺은 소녀와 만나게 되기를   撑着油紙傘, 獨自 / 彷徨在悠長, 悠長 / 叉寂寥的雨巷,我喜望逢着 / 一個丁香一樣地 / 結着愁怨的姑娘//                                               中 一章   윗 시는 다이왕수가1927년 4.12사태에 연루되어 스저춘施蟄存 시인의 집에 숨어 지낼 때, 프랑스 시인 베를렌에 도취되어 쓴 시로 이 시는 1928년 《소설월보》에 발표되면서 일약 유명해진 작품이다. 베르렌의 와 견주어지곤 하는데, 슬픈 리듬이 노래처럼 강물처럼 흐느끼는 걸 느끼게 한다. 종이우산이나 긴 방황이 끝나지 않는 골목, 빗속에 남보라 빛 그늘을 드리우는 라일락, 그 라일락처럼 향과 슬픔을 함께 지닌 소녀와의 마주침 등이 ‘이슬비’ 속에 연결되어 창으로 번지는 빗물같이 물안개같이 읽는 독자들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인식이나 설명이 없이도 응축된 서정이 흐르며 시어가 절제되어 해이하지 않고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현대파의 특성 중, 애원적 정서를 바탕으로 고독과 우울을 서정풍이면서 삽화풍으로 그려낸 초창기 다이왕수의 대표시이다.     단장                                   비엔즈린   그대는 다리에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누각에서 그대를 바라본다 밝은 달은 그대의 창을 장식하고 그대는 다른 사람의 꿈을 장식한다   断章                              卞之琳 你在桥上看风景/看风景的人在樓上看你/ 明月装饰了你的窗子/ 你装饰了别人的梦.   1935년 10월에 발표된 이 시는 장시의 한 부분으로 후에 독립시켜 《断章》 제목을 달았는데, 중국 현대문학사상  짧으면서도 내포한 함의가 풍부한 명시라 할 수 있다. 이 시가 품고 있는 철학은, 사람들은 사물에 대해 자기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시인 스스로도 "나의 의도는 ‘상대적’이라는 개념을 중시하자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시는 응축과 절제가 잘 이뤄진 현대파의 대표적인 시이다.    의 출현   시의 열풍이 강해질수록 독자들과는 소원해지는 당시 중국 상황은 일부 시인들이 복잡다단한 외세와 내부의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개인의 감성과 우울한 정서에만 치중한 데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이러한 괴리가 한창 심각해질 때, 마침 일본의 침략으로 중국 전체가 항일전쟁 수행이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그 바람에 상징파, 신월파, 현대파 시인들도 모두 밖으로 나왔다. 유파와 관계없이 항일을 위한 민족적 위기감으로 그들은 뭉쳐서 시 낭송회와 좌담으로 민심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정권의 "외세를 축출하기 전에 먼저 국내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반공 주장 때문에, 그들은 반공 열기 속에서 항일전쟁보다는 국.공 대립에 밀려 좌.우익으로 갈리고, 갈등과 분쟁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문예를 위한 문예가 아니라’ ‘붓을 무기로 삼아’ ‘거리로, 시골로 뻗치는’ 가두시나 선동적 낭송시를 쓰게 되었다. 따라서 8년간(1937, 7월- 1945.8월)이나 계속된 항전은 급기야 시의 변화를 가져왔다. 낭송시의 단소화, 민족형식의 장편서사화, 정치시의 대중화의 색채가 두드러졌다. 이 때부터 낭송시, 가두시, 전단시라는 단어가 생겼으며 1938년엔 ‘가두시가운동선언’까지 나왔다. 이렇게 왜곡되기 시작한 항전문학도 1942년 공산화가 자리 잡히고, 모택동이 ‘연안 문예좌담회에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문예정책’은 모든 인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시여야 하고 정치노선을 찬양하며 정치보다 더 우위에 설 수는 없다’고 연설하면서는 사실상 모든 예술은 파괴되었다.   시인들은 외국의 침략과 좌파와의 충돌이란 두 가지 짐을 져야 했다. 한창 누렸던 민주화 물결 속의 개인의 사상이나 사고, 자유의지 등은 국민당의 부패로 인해 상대적으로 호응을 받기 시작한 공산주의 운동으로 정치색을 드러내며 대중화되고 통속적, 산문적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항전시기의 시는 20여 년의 신문학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좌익 정치노선의 구호에 내밀리며 대중화 시가 되었으며 민족화의 요구로 인한 개념화, 공식화의 현상을 가져와 예술성의 조잡함과 과도한 사상의 노출 등 결함을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항전초기엔 애국애족의 민족사상과 함께 불붙어 모든 시들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즉,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국민과 위기의 조국을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단합하여 ‘내전을 중단하고 모두 대외투쟁에 나서자’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된 뒤, 시인들 중에는 항일정신으로 민족정기를 일으키는 시를 쓴 아이칭艾靑 같은, 후세까지 존경받는 시인이 있었으며, 다이왕수戴望舒와 비엔즈린卞之琳, 허치방何其芳, 무무티엔,穆木天, 좡커자臧克家, 루이스路易士, 루위엔綠原, 무단穆旦, 신디辛笛, 자오링이趙令儀 시인들도 시의 형상화, 심오한 경지화, 내성적인 시를 씀으로써 끝까지 순수시를 지켜내려 노력했다. 국가의 위기는 시인들을 더 많이 고무시키고 단합하게 만들어 한편에선 항전과 무관한 순수예술이 계속 발표되었다.   나는 이 대지를 사랑한다  아이 칭 내가 만일 한 마리 새라면 나는 응당 목이 쉬도록 노래할 것이다 저 거센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대지, 저 우리들의 비분이 영원히 용솟음치는 강줄기, 저 멈추지 않고 불어대는 격노한 바람, 그리고 숲 사이로 다가오는 더할나위 없이 부드러운 여명,..... _____ 그 후에야 난 죽을 것이다 깃털조차 토지 속으로 썩어 들 것이다   왜 나의 눈엔 항상 눈물이 고이는 걸까 내가 이 대지를 그토록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까,......   我爱这土地                               艾 青 仮如我是一只鸟, / 我也应该用嘶哑的喉咙歌唱:/ 这被暴风雨所打击着的土地 / 这永远汹涌着我们的悲愤的河流 / 这无止息地吹刮着的激怒的风, /和那来自林间的无比温柔的黎明..... /___然後我死了,/ 连羽毛也腐烂在土地里面 // 为什麽我的眼里常含泪水? /因为我对这土地爱得深沈........   아이칭의 이 시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하고, 전국이 항일전쟁의 기치 하에 뭉쳤던 1938년 작으로서 절절히 표현된 조국애로 말미암아 지금까지도 중국인민들이 사랑하는 애송시이기도 하다. 이 시 외에 라는 시에서도 절절하게 애국애민의 순애보를 느낄 수 있다. 아이칭은 원래는 프랑스 미술유학생이었으나 중국좌익미술가연맹에 연루, 좌익으로 몰려 투옥되면서, 이 때부터 시를 전념했다. 그런 만큼 정치적 갈등과 그 사이에서 고통을 받는 중국인민들을 위한 열렬한 시를 발표했다. 아이칭은 국민당이 몰려난 즉 후에 다시 우익으로 몰려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 절필선언을 했다. 장장 10여 년의 문혁이 끝난 뒤에야 신분회복이 이뤄져 북경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생활을 한 민족시인이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정치 대립 사이에서 고통 받으면서도 민족을 위해 한 줄의 시로 목쉬도록 아침을 깨우는 새 한 마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음을 이 시는 절규하고 있다.    시의 암흑기: " 정치는 모든 예술에 앞선다"   일찍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부정부패의 토양 위에서 자라난 중국 공산주의는 한창 서구 문예사조를 일시에 섭렵한 시인들의 자유분방함에 대해 일갈을 가했다. 즉, 시인들에게 정치 노선에 봉사하는 찬양 선동적 역할을 강요한 것이다. 즉, 모택동의 “연안문예강화”(1942년 5월) 발표와 함께 시는 “정치적 표준이 예술적 표준에 앞선다”는 강령 아래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나 의지, 남.녀간의 사랑표현 등, 시인의 개성과 인성을 중시하는 표현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시 정신이나 시인의 지위는 왜곡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1949년 공산주의 신중국이 성립되고 곧 이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정치와 군사가 압도하면서 중국 시단은 함께 선동의 깃발을 들고 전선으로 나가야 했다. 특히 이상적 공산주의의 실현을 내걸고 정권 탈취와 연장을 위해 1966년부터 10여 년간 실시된 문화혁명은 인간성 말살의 극치를 보여줬으며 모든 예술의 암흑시대를 초래하였다.정치선전을 위한 목적시가 우선되면서 진정한 시 정신을 퇴보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현대시의 경계를 다시 문혁 그 이후로 잡아야 하느냐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화남호랑이(华南虎)                           뉴 한牛 汉*⁴ 너의 건장한 다리는 꼿꼿이 서서 사방으로 뻗쳐나가네 내가 보는 너의 발가락은 하나하나가 모두 깨지고 망가져 짙고 짙은 선혈이 응고되어 있네 너의 발가락은 사람들에게 묶여서생으로 잘려나갔는가 아니면 비통한 분노 때문에 그 부숴진 이빨로 뜨거운 피가 나도록 물어뜯은 것인가   나는 철창우리를 바라보네 회색 시멘트 담장 위 한 길 한 길 피 묻힌 도랑이 있어 섬광처럼 현란하게 눈 찌르는 것을   마침내 알았네,..... 부끄러운 마음으로 동물원을 떠날 때 갑자기 외치는 한 소리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외침, 속박할 수 없는 영혼이 내 정수리를 내리치고 허공으로 사라지네 나는 보았네, 불타오를 듯한 무늬와 불 타오르는 눈동자를 1976년 6월, 1982년2월호에 실림    你的健壮的腿/ 直挺挺地向四方伸开 / 我看见 的每 趾瓜 / 全都是破碎的,/ 凝结着浓浓的鲜血! / 你的趾瓜 / 是被人綑綁着 / 活活地鉸掉的 ? /还是由于悲愤/ 用同样破碎的牙齿/ 把他们和着热血咬碎的.....//     我看见铁籠里 / 灰灰的水泥墙壁上/ 有一道一道的血淋淋的溝壑 / 像闪电电那般耀眼刺目! //       我终于明白....../ 我羞愧地離开了动物园, / 恍惚之中听见一声 / 石破天驚的咆哮 /有一不羁的灵魂//      掠过我的斗顶/ 腾空而去, / 我看见了火焰似的斑纹 / 火焰似的眼睛!//               윗 시를 쓴 뉴한牛汉이 를 통해서 밝힌 시정신은 아래와 같다. " 나는 신장이 190센티로 우리 고향의 고량 나무 만큼이나 키가 크다. 그만큼 나의 뼈가 나를 가련히 여기고,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내가 힘들게 살아가는 동안 수 천 개의 크고 작은 뼈마디들이 이를 악 물고 나를 액운으로부터 지켜주는 소리를 들었다.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나의 뼈에 감사하고, 나의 시에 감사할 일이다. 노동을 많이 해서 손바닥에는 딱딱한 못이 적지 않게 박혀 있고, 깊고 가벼운 상처들도 많다. 수십 년 동안 나는 아픈 손으로  시를 써 왔고, 시 한 줄, 글자 하나 쓰는 것이 모두 아픔이었다....나는 다른 사람보다 감각기관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뼈마디, 그리고 외관과 영혼 속의 상흔이다." 윗 시는 물론 汗血马(피땀 흘리는 말), 悼念一棵樹(한 그루 단풍나무를 애도함),半棵树(반쪽나무) 같은 시들은 오랜 전쟁과 공산주의 혁명, 그리고 문화혁명까지 닥치면서 휘돌아 치는 격랑에 지치고 다친 중국인민들의 상흔을 그리고 있다. 이 시도 뉴한이 감옥에서 나와 노동개조소에 오래 노동을 하다가1976년, 문혁이 끝나는 시점에서야 쓰여진 것으로 6년 뒤에야 발표를 했다는 데서도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가 빠지고 발톱이 생으로 빠져나가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구경꾼들의 조롱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외마디 포효를 함으로써 불 타오르는 그의 눈빛과 분노를 통한 그 절절한 삶에의 의지와 지켜내고자 하는 마지막 자존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인성의 말살을 실험하였던 문혁기간 중에도 견뎌낸 그의 시정신도 바로 이 화남호랑이 같았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6,70년대 文革 기간 중 감옥이나 노동개조소로 끌려가면서도 문학은 지하에서도 지속되어, 중국 현대시사는 결코 정치로 인해 중단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냐면, 70년대까지 이어진 정치서정시는 가송시, 생산시를 낳았지만, 예술성의 실험은 버리지 않고 지켜내어 80년 이후 다양한 새 영역으로 중국 현대시의 명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고난과 핍박 속에서 시인의 정신은 더욱 단단히 단련되는 것일까, 노동개조소나 감옥에 수감되었던 시인들에 의해, 문혁 이후에는 새로 탄생된 젊은 시인들에 의해, 고매한 시 정신과 시의 예술성, 순수성이 지켜져 오다가, 개혁개방이 시작된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치 홍보용 꼭두각시가 아닌 ‘현대시’가 새로운 시각으로 발표되었다. 거기에 실험성도 가미되면서 현재 중국시는 보다 자유로운 풍토에서 2,30년대를 방불케하는 시적 열기가 다양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존엄한 인성을 찾는 발걸음도 늦추지 않고 분투하고 있다.                                                     ** 참조, 1) : 후스: 1891년 상해 따칭大清태어나 시인으로 학자로 철학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5.4 운동의 중심인물로서 제일 먼저 백화문으로 신시를 썼으며 모택동에게 제안하여 湖南自修대학을 설립하게 했다. 후엔 《자유중국》잡지의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민주사상을 흠모, 언론의 자유가 있는 대만에서 살다가 1962년 70세 때 세상을 떠났다. 2) 李金髮(1900年11月21日-1976年12月25日) 현대상징주의 시인으로 조각가이며 교수, 외교관 등을 역임했다. 그 역시 1919년에 프랑스에서  조각과 유화를 배웠다. 1920년 프랑스의 상징주의를 받아들여 시를 쓰기 시작, 중국상징주의 대표시인이 되었다. 1925년 귀국, 항주국립미술원, 중산대학미대교수로 있다가 1932년《현대》잡지를 통해 현대파 시인이 되었다. 1941년 항일문예운동에 뛰어들어 《문단文坛》창간을 도왔으나 그 해 이란, 이라크 등의 외교관으로 나가면서 후엔 아예 미국으로 이민, 뉴욕에서 76세에 생을 마감했다. 3) 盧斯飛, 劉會文 《馮至戴望舒的詩歌創作》 廣西敎育出版, 南寧,1989, 6月   이 책에서 인용함. 서구문화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중국 전통에서부터 이어져 온 상징수법을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中.西의 조화를 창안했다는 뜻. 4) 뉴 한 (1923- ) : 원명은 史 成汉 山西省 定襄에서 태어남. 몽고족으로 1980년대 "칠월"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문화혁명이 끝난 뒤 아이 칭(艾 青을 위시한 일련의 시인들이 복귀하자 "귀래(归来"파에 흡수되어 80년대부터 시작된 현대시의 주류가 되었다. 그도 우파로 몰려 1955년에서 57년까지 감옥생활을 했으므로 발표나 시집 출판이 한동안 금지되었다.   ** 참고문헌 :   1, 『中國現代文學史』 上,下 冊 : 朱棟 丁 帆 朱曉進 主編  《高等敎育》出版 2000년 6월 2, 『20世紀 漢語 詩選 』: 康 耕玉 選編  上海敎育出版社 1999. 12월  3.『중국현대시 연구』,허세욱, 1992년 6월 《명문당》 4.『중국 현대문학사_ 혁명과 문학운동_ 』 菊地三郞 저, 정유중, 이유여 옮김, 1986년, 《동녘》출판사  3. 『문혁이 낳은 중국 현대시』 김금용, 2006.4월, 《찾기》츨판사 4. 『中国现代诗歌史』 维基百科 自由的百科全书중에서     ** 필자, 김금용 : 시인.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광화문 쟈콥』『넘치는 그늘』, 번역시집 『문혁이 낳은 중국현대시』,『나의 시에게』로 2008년 펜번역문학상 수상.                                                                 겨울호에 발표        
1417    중국문화 - 중국 詩의 발달 댓글:  조회:5931  추천:0  2015-08-26
  [ 2015년 08월 28일 09시 01분 ]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시즘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대회 중국 시의 발달   중국에서 운문 장르를 대표하는 것은 『시경』에서 연원하여 당·송대에 극치를 이룬 시다. 원래 '시(詩)'라는 말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시경』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그것은 마치 '서(書)'가 『상서(尙書)』를 가리키고 '하(河)'가 황하(黃河)를 가리키며, '강(江)'이 장강(長江)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던 것과 같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시는 『시경』에서 연원한 하나의 운문 장르를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중국 고전시라고 하면 대부분 5언시와 7언시고, 그 가운데서도 5언시가 가장 대표적인 형식이다. 원래 『시경』의 시들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4언이 위주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5언 위주로 변했을까? 그것은 음악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대 이전까지 중국 시의 기본은 4언이었다. 그런데 한대에 들어 국력의 융성에 힘입어 정복 전쟁과 해외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많은 종류의 외래 음악이 중국으로 물밀듯이 수입되었다. 한대에는 음악을 관장하던 악부(樂府)라는 관청이 있어 민간에서 유행하던 다양한 음악들을 수집하여 정리했는데 이를 악부시(樂府詩)라고 한다. 악부시에는 전통적인 4언 리듬과는 다른 들쑥날쑥한 자구에 다양한 리듬의 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자구가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빠르고 경쾌한 5언 리듬의 노래들이 점차 환영을 받으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4언에 비해 5언이 빠르고 경쾌하다고 함은 4언시에서는 두 구가 합쳐서 한 의미 단락이 되는 것에 비해 5언시에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 단락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관저」편을 예를 들면 앞의 구절 '꾸억꾸억 우는 물수리새(關關雎鳩)'가 주어가 되고 '황하의 모래톱에 있네(在河之州)'가 술어가 된다. 5언시는 대체로 두 자, 세 자(○○/○○○)로 나뉘는데 이것만으로 충분히 하나의 문장이 된다. 뒤의 예문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7언시는 5언시의 앞에다 두 글자를 첨가한 형태로 네 자, 세 자(○○○○/○○○)로 나뉜다. 5언시에 비해서 조금 무겁다고 할 수 있다. 5언시의 정확한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이 있는데 대체로 동한 시기에는 확실하게 정착되었다고 본다. 초기의 5언시는 물론 매우 소박한 형태였다. 5언시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지어졌다고 하는 「고시 19수」의 한 작품을 보자. 行行重行行 가고 또 가니 與君生別離 그대와 생이별이네. 相去萬餘里 서로 만여 리나 떨어져서 各在天一涯 각기 하늘가에 있네. 道路阻且長 길은 험하고도 머니 會面安可知 만날 수 있을지 어찌 알까? 胡馬依北風 오랑캐 말은 북풍에 의지하고 越鳥巢南枝 월나라 새는 남쪽 가지에 깃드네. 相去日已遠 서로 떨어진 것이 날로 멀어지고 衣帶日已緩 옷과 허리띠는 날로 느슨해지네. 浮雲蔽白日 뜬 구름이 밝은 해를 가려서 游子不顧反 나그네는 돌아오지 못하네. 思君令人老 그대 생각에 사람은 늙어가는데 歲月忽已晩 세월은 벌써 이미 느즈막하네. 棄捐勿復道 다 버려두고 다시 말하지 않겠으니 努力加餐飯 부디 밥이나 잘 드소서. 멀리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낙의 애절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수사기교가 별로 없는 매우 소박한 시다. 첫 구부터 '행'자가 여러 번 반복되고 전반적으로 구어체에 가깝다. 이 시에서 가장 멋있는 구절은 '오랑캐 말은 북풍에 의지하고 월나라 새는 남쪽 가지에 깃드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 부분이다. '말이나 새 같은 미물들도 고향을 그리워하는데 집 떠난 그대는 고향이 그립지 않느냐'는 뜻이다. 앞 구절과 뒤 구절이 문법적으로 비슷하게 배열되면서 단어들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의미에서 서로 짝을 이루면서 어법으로도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대구(對句)라고 한다. 대구는 중국 시에서 매우 중요한 수사기교 가운데 하나다. 이 시 전체에 대구는 이 구절밖에 없다. 한나라 때의 시는 대부분 이런 수준이었다. 그러나 중국 문예사조에서 기교를 추구하던 위진남북조에 이르면 대구는 극도로 발전한다. 남조 송나라 때의 귀족시인인 사령운(謝靈運)이라는 시인의 시를 한 수 보도록 하자. 사령운은 중국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산수시를 개척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산수를 좋아하여 호화로운 산천유람을 많이 다니면서 귀족적이고 세련된 감각과 언어로 아름다운 산수를 표현하는 시를 많이 지었다. 그의 산수시 가운데 「어남산왕북산경호중첨조(於南山往北山經湖中瞻眺)」라는 시를 보도록 하자. 제목은 '남산에서 북산으로 가다가 호수를 지나면서 바라다보다'는 뜻이다. 朝旦發陽崖 아침 밝아올 때 남쪽 언덕을 출발하여 景落憩陰峰 해질 무렵 북쪽 산봉우리에서 쉰다. 舍舟眺逈渚 배를 버리고 멀리 잔 물섬을 바라보다 停策倚茂松 지팡이 멈추고 우거진 소나무에 기댄다. 側逕旣窈窕 비탈진 길은 이미 그윽한데 環州亦玲瓏 동그란 물섬 또한 영롱하다. 傘視喬木杪 고개 숙여 큰 나무 끝을 바라보다 仰聆大壑淙 고개 들어 큰 골짜기 물소리 듣는다. 石橫水分流 바위 가로 놓여 있어 물은 나뉘어 흐르고 林密磎絶踪 숲은 빽빽하여 길에는 발자취 끊기었네. 解作竟何感 비가 내리면 결국 무엇이 감응하는가? 升長皆丰容 자라나니 모두 무성한 모습들이네. 初篁苞綠籜 갓 자란 대나무는 푸른 죽순 껍질을 감싸고 新蒲含紫茸 새로 자란 부들은 붉은 싹을 머금고 있네. 海鷗戱春岸 바다 갈매기는 봄 언덕에서 장난하고 天鷄弄和風 들꿩은 부드러운 봄바람을 희롱하네. 撫化心無厭 조화를 느끼는데 마음에 실증 없고 覽物眷彌重 경물을 바라보니 사랑이 더욱 두터워지네. 不惜去人遠 떠난 사람 멀다 애석해하지 않지만 但恨莫與同 다만 함께 노닐 벗 없음이 한스럽네. 孤遊非情歎 외로운 유람길 마음으로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네. 賞廢理誰通 감상이 사라지면 깊은 이치를 누가 통하겠는가? 앞의 시와 비교하면 수사기교의 차이가 뚜렷하다. 일단 이 시는 앞의 시보다 훨씬 길지만 중복되는 글자가 한 자도 없다. 게다가 중간중간 평소 잘 쓰지 않는 한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만큼 글자 한 자 한 자에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체가 모두 대구를 이루고 있다. 온갖 종류의 다양한 형식의 대구를 이용하여 산수의 경치와 산수 속에서 노니는 시인의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압운(押韻)에서도 엄청난 진보를 보여준다. 압운이란 시의 운을 맞추는 것으로 중국 시의 가장 기초적인 수사기교다. 한자의 발음은 성모(聲母)와 운모(韻母)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모는 우리말의 초성에 해당하는데 예를 들면 '초'나 '성'에서 'ㅊ'과 'ㅅ'이 바로 성모고 나머지 부분이 운모다. 중국 시에서는 대개 매 연의 끝 글자들은 성모는 다르되 운모는 같은 글자를 써서 발음에서의 조화를 추구한다. 앞의 시에서는 압운이 중간에 변하지만 이 시에는 압운이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다. '봉(蜂)', '송(松)', '농(瓏)', '종(淙)' 등 압운하는 글자들이 모두 같은 운모에 속한다. '용(容)'이나 '용(茸)', '풍(風)', '중(重)' 등은 우리나라 한자음으로는 운모가 다르지만, 고대 중국의 한자음에서는 같은 운모에 속하는 글자들이다. 이 시의 가장 큰 단점은 수사기교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표현은 화려하지만 내용이 부실하다는 것이다. 그저 멋들어진 대구로 이런저런 아름다운 경치를 나열하고만 있지 작자의 진솔한 감정이나 깊은 사상은 전혀 없다. 이 시는 전형적인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시다. 중국 시가사(詩歌史)에서 위진남북조시대는 화려한 형식주의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중국 시의 수사기교의 발전에는 상당한 공헌을 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크게 발전한 시의 수사기교는 대구와 압운 외에 평측(平仄)과 전고(典故)가 있다. 평측이란 중국어의 특징인 사성(四聲)을 이용하여 발음에서의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전고는 시 속에 경전(經典)이나 고사(故事)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평측이다. 평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성을 알아야 한다. 사성이란 성조의 고저장단에 따른 네 가지 유형을 말한다. 사성은 중국어를 중국어답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외국인에게는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의 표준어인 북경어의 사성은 1, 2, 3, 4성을 가리키지만 고대 중국어의 사성은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 네 가지였다. 고대의 사성을 현대의 사성과 비교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자. 평성은 음과 양으로 나누어진다. 음평은 지금의 1성으로 줄곧 높은 소리를 내는 것이고, 양평은 지금의 2성으로 중간쯤 높이에서 아주 높은 소리로 올라가는 것이다. 상성은 지금의 3성으로, 낮은 데서 더 낮은 데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소리로 변화가 가장 심한 성조다. 거성은 4성으로 아주 높은 데서 가장 낮은 데로 소리를 떨어트리는 것이다. 사실 음의 고저장단의 네 가지 종류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다. 입성은 음의 고저장단과 상관없이 발음상 끝을 촉박하게 닫는 받침이 있는 소리를 가리키는데, 현대 북경어의 발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의 방언 가운데는 입성 발음을 보존하고 있는 방언이 많고 우리나라 한자음에도 입성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국(國)'자나 '입(入)'자, '불(不)'자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한자음에서 받침이 'ㄱ, ㅂ, ㄹ'로 끝나는 한자는 모두 입성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중국 고전시의 평측법에서는 평성만 평성에 해당하고 나머지 상성, 거성, 입성은 모두 측성에 해당한다. 평성은 평탄하면서도 유장한 느낌을 주는 반면 측성은 모두 변화가 많고 급격하고 촉박한 느낌을 준다. 평이 양이라면 측은 음에 해당한다. 평측을 잘 배합하면 성조가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청각적으로 매우 아름답게 들린다. 앞에서 말한 수사기교 가운데 중국 시의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만들어주는 것은 대구와 평측이다. 사실 운을 맞추는 것은 중국 시뿐만 아니라 서양 시에서도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시에서는 이를 '라임(rhyme)'이라고 하는데 시라면 반드시 라임을 맞추어야 하고 노래 가사 또한 대부분 라임이 있어야 한다. 시 속에 고전의 구절이나 유명한 고사를 활용하는 전고 기법은 서양 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시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에 비해 대구와 평측은 중국어의 언어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사기교다. 물론 서양 시에서도 대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시만큼 그렇게 중시되지 않고 치밀하지도 않다. 일단 중국 시처럼 그렇게 글자 수가 정제되어 있지 않다. 중국 시의 대구는 일단 글자 수가 완전하게 대칭이어야 하고 또한 문법구조도 비슷해야 한다. 이것은 중국어가 글자 한 자 한 자가 독립된 고립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평측은 사성에서 나온 음양의 조화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중국 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중국 시에서는 평측 또한 대구의 한 수단으로 발전했다. 중국 시의 역사에서 위진남북조시기, 특히 남조시기는 화려한 수사기교에 지나치게 치우쳐 외화내빈의 시기라고 한다. 후대의 많은 시인들은 이 시기의 시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형식미의 추구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중국 시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근체시(近體詩)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했다. 근체시는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초기에 완성되었다. 근체시라는 말은 고체시에 대비되는 말로 중국 고전시의 형식미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근체시에는 여러 가지 까다로운 규칙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대구와 평측이었다. 이제 중국 시의 형식미는 완성되었고 남은 것은 그 속에 진실한 내용을 담는 것이었다. 그 일은 성당(盛唐)시대의 시인들에게 맡겨졌다. 성당시기란 현종 대에서 숙종을 거쳐 대종 초기까지 약 50여 년을 말하는데, 대략 전반 30년은 현종의 훌륭한 정치로 당나라의 번영이 극에 이르렀던 시기고, 다음 10년은 양귀비와 사랑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서서히 내부적 모순이 심해지는 시기며, 마지막 10년은 안록산(安綠山)과 그의 부하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안사(安史)의 난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던 시기다. 짧은 시기에 최고의 번영과 처참한 파국을 모두 체험했기에 시인들의 삶의 폭은 매우 컸고 감정의 변화도 많았다. 이런 풍부한 삶의 체험과 다양한 감정의 색깔들이 시에 담기면서 중국 시는 전례 없이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우게 된다. 흔히들 이 시기를 중국 시가사(詩歌史)에서 최고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먼저 중국 시의 수준을 최고의 정점에 올린 두보(杜甫)의 시를 보도록 하자. 「春望」 봄의 바람 國破山河在 나라는 망가졌어도 산하는 여전한데 城春草木深 성은 봄이 되니 초목이 무성하구나. 感時花濺淚 시절을 느끼니 꽃에도 눈물을 뿌리고 恨別鳥驚心 이별을 서러워하여 새소리에도 마음 놀랜다. 烽火連三月 봉화는 석 달을 이어가는데 家書抵萬金 집의 편지는 만금 값에 달하네. 白頭搔更短 흰머리 긁으니 더욱 짧아져 渾欲不勝簪 비녀도 전혀 지탱하지 못할 듯이 되었네. 이 시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뒤 장안에 잡혀 있던 두보가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쓴 시다. 앞에서 든 사령운의 시에 비해 훨씬 평이한 글자들을 사용하고 있고 문장도 훨씬 평이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치밀하고 정교한 시다. 이 시는 8구 4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대구와 평측의 법칙이 매우 잘 들어맞는 전형적인 근체시다. 이런 시를 5언 율시(律詩)라고 한다. 기는 전란으로 장안은 무너졌지만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해졌다는 말로 시작하고, 이를 이어받은 승에서는 봄이 오니 피어나는 꽃과 찾아드는 새를 이야기하면서 시절에 대한 감상과 이별의 아픔을 말하고 있다. 전에서는 분위기를 약간 바꾸어 전쟁의 상황과 가족들의 소식을 걱정하는 마음을 보이고, 나라에 대한 근심과 가족에 대한 걱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면서 결을 맺고 있다. 이 시는 마지막 연을 제하고는 모두 대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측이 매우 정교하다. 근체시의 기법을 하나하나 다 설명하기는 어렵고 우선 첫째 연만이라도 좀더 심도 있게 분석하여 중국 시의 맛을 한 번 느껴보도록 하자. 첫째 연은 일단 먼저 10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구절 속에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구절이 두 개의 단문이 합쳐진 복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모두 네 개의 문장이 들어 있다. 그만큼 글자 한 자 한 자의 역할이 다 살아 있고 압축된 느낌이 있다. 그리고 첫째 구절과 둘째 구절은 어법이나 의미에서 완벽하게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절묘한 기교로는 평측에서도 대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글자 하나씩 뜯어보도록 하자. 현재 북경 표준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평측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현대 중국어에는 입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 발음에 관련된 운서(韻書)를 보지 않으면 평측을 가릴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한자음에는 입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현대 중국어의 성조만 알고 있으면 평측을 쉽게 가릴 수 있다. 만약 중국어도 알고 우리나라 한자음도 아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중국 시를 읽을 때는 평측을 따져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중국 시의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國破'는 입성과 4성이기 때문에 모두 측성이다. 그러나 다음 글자인 '山河'는 1성과 2성이므로 모두 평성이다. 그리고 '在'는 4성이므로 측성이다. 아래 연에서 '城春'은 2성과 1성이므로 모두 평성이고 매우 울림이 유장한 소리다. '草木'은 3성과 입성이므로 측성이고, '深'은 1성이므로 평성이다. 평성을 ○으로, 측성을 ●으로 표시해서 첫째 연의 평측을 보자. 國破山河在 ●●○○● 城春草木深 ○○●●○ 이렇게 시각적으로 표시하니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평측은 단순히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의(詩意)와도 잘 어우러지고 있다. '國破'는 뜻도 그렇지만 발음에서도 측성이기 때문에 매우 다급하고 촉박한 느낌을 준다. 다음으로 평성인 '山河'로 분위기를 약간 풀어주고, 다시 측성 '在'로 끝을 맺는다. 첫째 구는 전체적으로 측성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 암울한 느낌이다. 둘째 구의 '城春'은 앞 구절의 '國破'와 대조를 이루는 단어다. 일단 뜻에서 강한 대비를 이룬다. 나라는 망가졌지만 그래도 계절의 순환은 어김이 없어 봄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발음에서도 정반대로 평성이다. 게다가 이 발음들은 비음이 있기 때문에 더욱 유장하게 들린다. 다음에는 다시 측성인 '草木'을 배열하고 마지막으로 평성이자 비음이 있는 '深'을 써서 깊고 유장한 느낌을 이어간다. 전란으로 망가진 장안의 황폐함과 세상사와는 무관한 자연의 유장함이 평측의 효과로 인해 더욱 강하게 대비되고 있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실로 심오한 공력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두보는 흔히 시성(詩聖)이라고 일컬어진다. 그의 시 속에 우국충정과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 등 유교적 윤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자 한 자 한 자에 심혈을 기울이는 성실한 태도가 유교적 성인에 가깝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에는 두보의 7언 율시 한 수를 감상하도록 하자. 7언 율시는 5언 율시보다 조금 늦게 발달했는데 두보가 가장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이고 있는 영역이다. 「登高」 높은 데 올라 風急天高猿嘯哀 바람이 빠르고 하늘은 높은데 원숭이 휘파람 슬프고 渚淸沙白鳥飛廻 물가 맑고 모래 흰데 새는 날아 돌아오는구나. 無邊落木蕭蕭下 끝없이 낙엽은 쓸쓸히 떨어지고 不盡長江滾滾來 다함없는 장강은 도도히 흘러오는구나. 萬里悲秋常作客 만 리에 가을을 슬퍼하며 항상 나그네되어 百年多病獨登臺 한평생 병이 많아 홀로 누대에 오르는구나. 艱難苦恨繁霜鬢 가난에 서리 같은 귀밑머리 무성한 것을 슬퍼하는데 潦倒新停濁酒杯 늙고 지쳐 새 탁주잔을 다시 멈추었노라. 이 시는 두보의 만년에 가족들과 헤어져 장강을 정처 없이 떠돌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지은 시다. 이 시 또한 앞의 5언 율시와 마찬가지로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는 풍경을 묘사하고 승에서는 그 풍경 묘사를 심화하고 있다. 사실 기와 승을 풍경 묘사로 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전에서는 풍경 묘사에서 일변하여 작자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고 있고 마지막으로 그 심경을 심화하면서 결을 맺는다. 그러나 기와 승에서 풍경을 묘사했다고 해서 작자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풍경 하나하나에 작자의 감정이 짙게 묻어나고 있다. 원숭이 울음소리에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고 새가 날아 돌아오는 광경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심경이 담겨 있다. 쓸쓸히 떨어지는 낙엽에는 유한한 인생에 대한 비애가 담겨 있고, 도도히 흘러가는 장강에는 자연의 무한함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 시의 마지막 장면은 탁주잔을 잡고 머뭇거리고 있는 시인의 늙고 지친 손이다. 높은 하늘, 광활한 장강에서 시작한 시야는 점차 시인 한 사람에게 집중되더니 결국 술잔을 잡은 시인의 손에서 끝이 난다. 이 시는 전체적인 구도도 정교하고 대구도 기가 막히지만 평측법 또한 절묘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압권은 둘째 연이다. 평측을 따져보면서 감상해보자. 먼저 '無邊'은 2성과 1성이므로 둘 다 평성이다. 다음에 '落木'은 둘 다 입성이므로 측성이다. '蕭蕭'는 평성이고, '下'는 4성이므로 측성이다. '不盡'은 입성과 4성이므로 둘 다 측성이다. '長江'은 2성과 1성이므로 둘 다 평성이다. '滾滾'은 3성이므로 측성이다. '來'는 2성이므로 평성이다. 이것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호로 표시해보자. 無邊落木蕭蕭下 ○○●●○○● 不盡長江滾滾來 ●●○○●●○ 이 연의 문장구조는 앞에서 든 「춘망」의 첫째 연에 비해 단순하다. 한 구에 단문 하나씩밖에 없다. 첫 구에서 '無邊'과 '蕭蕭'는 수식어고, 중심어는 '落木'이라는 주어와 '下'라는 동사다. 이 구절은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장면이다. 이런 시의와 어울리게 이 구절의 중심어는 모두 촉박한 느낌의 측성이다. '낙목'은 입성인 동시에 성조 또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4성이기 때문에 더욱 촉박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동사인 '下' 또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4성이다. 아래 구절은 인생의 유한함과 대비되는 자연의 무한함을 노래하는 것으로 중심어는 '長江'과 '來'다. 첫 구절과는 반대로 편안한 느낌의 평성이다. 특히 '長江'은 둘 다 매우 유장한 느낌을 주는 발음들이고, '來' 또한 상쾌하게 올라가는 소리다. 위아래가 얼마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사실 모든 구절에서 이렇게 다 평측과 시의의 조화를 이루기란 쉽지 않다. 이런 구절들은 완성도가 특히 높은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평측의 배열을 통해 근체시의 구성미를 감상하도록 하자. 원래 근체시에서 평측법을 쓸 때 모든 글자를 다 평측의 틀에 맞출 수가 없기 때문에 5언에서는 둘째와 넷째 글자를 반드시 지키고 나머지는 융통성 있게 했다. 7언에서는 둘째, 넷째, 여섯째 글자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7언의 평측 배열을 보면 5언은 저절로 알 수 있으니, 여기서는 7언의 배열을 보도록 하자. 「등고」의 둘째, 넷째, 여섯째 글자의 평측을 기호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평측의 기본 원칙은 같은 연 안에서는 무조건 서로 엇갈리게 하는 것이다. 측으로 시작했으면 다음은 무조건 평을 써야 하고, 다음은 다시 측, 이런 식이다. 그런데 연을 바꿀 때는 앞 연의 틀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 앞의 연에서 측으로 시작했다면 다음 연에서는 평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 결과 앞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대칭도가 나오게 된다. 평측법에는 「등고」와 같이 측으로 시작하는 것도 있지만 반대로 평으로 시작하는 것도 있다. 그러면 정반대의 구조가 될 것이다. 당대 이후 시인들이 근체시만 썼던 것은 아니다. 고체시도 여전히 유행했는데 고체시는 특히 시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근엄하고 치밀한 성격의 두보가 근체시에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 반면, 같은 시대의 또 한 사람의 천재시인인 이백(李白)은 고체시에 매우 능숙했다. 그의 시를 한 수 보도록 하자. 「月下獨酌二」 달 아래의 독작 2 天若不愛酒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地若不愛酒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 땅에는 마땅히 주천이 없었으리라. 天地旣愛酒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고 있으니 愛酒不愧天 술을 사랑하는 것은 천지에 부끄럽지 않다. 已聞淸比聖 이미 청주를 성인에 비유하고 復道濁如賢 또한 탁주를 현인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하네. 聖賢旣已飮 성인과 현자를 이미 마셨으니 何必求神仙 어찌 구태여 신선이 되기를 구하겠는가? 三盃通大道 석 잔을 마시면 큰 도에 통하게 되고 一斗合自然 한 말을 마시면 자연에 합하게 된다. 但得醉中趣 다만 술 취해 얻은 정취이니 勿謂醒者傳 깨어 있는 사람에게 말하여 전하지 마라. 참으로 호방하다. 이백은 흔히 시선(詩仙)이라고 불리고 주선(酒仙)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신선사상에 심취하여 현실을 초월한 낭만주의를 구가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술에 취해 천자가 불러도 응하지 않을 정도의 호방함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에게도 정치적 야망은 있었고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격분을 노래한 시도 있지만 그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들은 바로 술에 관련된 시다. 주성은 하늘에 있는 별자리 이름이고 주천은 장안에서 서역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에 있는 땅 이름이다. 모두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지만 그것들이 하늘과 땅이 이미 술을 사랑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궤변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청주를 성인에, 탁주를 현인에 비유하는 술꾼들의 이야기를 들어 자신은 이미 성현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굳이 신선을 추구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넉살을 부리고 있다. 가장 정채로운 구절은 그 다음 구절이다. 석 잔을 마시면 큰 도에 통하고 한 말을 마시면 자연에 합한다는 이 구절은 후세 주당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천하의 명구가 되었다. 대도보다는 자연을 더 중시하는 이유는 노자의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구절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한눈에 보아도 앞에서 보았던 근체시와는 전혀 다르게 매우 자유로운 형식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구나 평측에 구애받지 않고 단순 반복도 꺼리지 않으며 거침없이 시상을 펼치고 있다. 두보는 이백에 대해 “술 한 말에 시 백 편”이라고 찬탄했고 “붓을 대면 비바람도 놀라게 하고 시가 완성되면 귀신도 울린다”고 극찬했다. 이백의 호탕한 기상은 다음의 시에 잘 드러나고 있다. 「將進酒」 술 권하는 노래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그대는 보지 않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奔流到海不復廻 바다로 바삐 흘러 들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그대는 보지 않는가? 좋은 집, 밝은 거울 앞에서 백발을 슬퍼하나니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 검은 머리 저녁에 하얗게 세는 것을…….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살이는 모름지기 뜻을 얻었을 때 마음껏 즐겨야 하나니 莫使金樽空對月 금 술동이로 하여금 홀로 달을 보게 하지 마라. 天生我才必有用 하늘이 나 같은 인재를 낳은 것은 반드시 쓸 데가 있어서이니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의 돈도 다 쓰면 다시 돌아오는 것. 烹羊宰牛且爲樂 양을 삶고 소를 잡아 그저 즐겨야 하나니 會須一飮三百杯 한 번 마시면 반드시 삼 백 잔은 마셔야 한다네. 岑夫子, 丹丘生 잠부자, 단구생이여 將進酒, 君莫停 술을 권하노니 멈추지 말고 드시오. 與君歌一曲 그대들과 더불어 노래 한 곡 부를 터이니, 請君爲我側耳聽 그대들은 나에게 귀를 기울여 들어보시오. 鐘鼓饌玉不足貴 화려한 음악에 좋은 음식 귀한 것이 아니고 但願長醉不願醒 다만 오래도록 취해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네. 古來聖賢皆寂寞 고래의 성현들 모두 적막하고 唯有飮者留其名 다만 술꾼들만 그 이름을 남겼네. 陳王昔時宴平樂 진사왕(陳思王)이 옛날 연회를 즐길 때는 斗酒十千恣讙謔 말술에 만금짜리를 마음껏 즐기게 했지. 主人何爲言少錢 주인은 어찌 돈이 적다고 하시오. 徑須沽取對君酌 즉시 술을 사 와서 그대들과 대작하리라. 五花馬, 千金裘 다섯 빛깔 말, 천금의 털옷 呼兒將出換美酒 아이를 불러 빨리 좋은 술로 바꾸어 與爾同銷萬古愁 그대들과 함께 만고의 시름을 풀어보리라. 이 시는 한대 이래로 유행한 악부시로 앞의 고체시보다 더 자유분방한 형식이다. 글자의 자수도 변화가 많지만 압운도 변화무쌍하고 자유롭다. 이 시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호쾌한 기상에 있다. 술에 관한 시 가운데서 이처럼 거침없이 호방한 시는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번 흘러갔다가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황하처럼 인생도 흘러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것, 그래서 시인은 기회가 닿을 때 마음껏 즐기라고 소리친다. 천금도 아까워하지 말고 양도 소도 다 잡아먹고 한 번 마시면 최소 삼백 잔이다. 부귀와 영화도 소용없고 다만 늘 취해 있는 것이 최고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성현도 부질없고 다만 술꾼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이야기다. 호방하다 못해 방자한 느낌을 주는 정도다. 그러나 최고급 명마, 천금의 털옷도 다 팔아서 밤을 새워 술을 마시겠다는 그 호쾌함 속에는 만고의 시름이 숨어 있다. 어찌할 수 없는 비애감이 숨겨져 있다. 다음으로 들 시인은 시불(詩佛)이라고 불리는 왕유(王維)다. 그의 자는 마힐(摩詰)인데 이름과 합치면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유마힐(維摩詰) 거사가 된다. 그는 불교를 사랑하여 평생 수도를 했고 만년에는 장안 근처에 별장을 짓고 산수 속에서 고요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주로 고요하고 관조적인 마음으로 한적한 전원생활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 능했다. 그의 근체시 가운데 5언 절구에서 높은 문학적 성취도를 보이고 있다. 5언 절구는 가장 짧은 형식의 시로 은근한 함축미를 표현하기에 좋은 시형이다. 「鹿柴」 사슴 우리 空山不見人 빈 산 사람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 다만 사람 말소리 울림만 들리네. 返景入深林 저무는 햇빛 깊은 숲으로 들어와 復照靑苔上 다시 파란 이끼 위에 비추네. 빈 산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디선가 사람 말소리의 은은한 울림이 들리기 때문이다. 분명 가까이 사람이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숲이 깊기 때문이다. 깊은 숲은 어찌 보면 참선을 통해 쌓아올린 마음의 보호막인지도 모른다. 그 보호막은 세속의 번거로움도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해질 무렵의 햇살이 살며시 비집고 들어온다. 그리고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파아란 이끼 위를 비춘다. 은은한 저녁 햇살은 참선을 통해 얻은 관조의 힘을 상징하고, 푸른 이끼는 시인의 마음 깊은 곳의 태고의 정적을 비유한다. 짧은 시지만 매우 함축적이고 특히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그의 시를 한 수 더 보도록 하자. 「鳥鳴澗」 시냇물에서 지저귀는 새 人閑桂花落 인적 드문데 계수나무꽃 떨어지니 夜靜春山空 밤은 고요하고 봄 산은 비어 있네. 月出驚山鳥 달이 떠올라 산새를 놀라게 하니 時鳴春澗中 봄 시냇물에서 간간히 지저귀네. 저녁 무렵 사람의 자취는 없다. 계수나무꽃만이 저 홀로 떨어질 따름이다. 밤은 고요하고 봄 산은 텅 비어 있다. 어둠과 적막의 극치다. 그러나 사실 봄이란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 아닌가? 정적의 극치는 달이 솟아오름으로써 깨진다. 어둠 속에 은은한 달빛이 비춤으로써 만물은 감추어진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달빛에 놀란 산새가 잠에서 깨어나 갑자기 지저귄다. 그 전까지 들리던 소리는 오직 졸졸졸 흐르던 봄 시냇물 소리였다. 그러나 이제 산새 소리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생동감이 더해진다. 이 시의 압운은 빌 '공(空)'과 가운데 '중(中)'이다. 그야말로 텅 빈 고요 가운데 움직임의 찰나를 매우 잘 포착한 시로 정중동(靜中動)의 운치가 잘 드러나 있다. 왕유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 속에 회화적인 구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시에서도 깊은 산속에 해질 무렵의 햇살이 비추어 들어오는 것을 잘 묘사하고 있고, 이 시에서도 어둔 밤의 산속에서 달빛이 비춤으로써 나타나는 숲속 풍경의 생동감이 회화적으로 잘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왕유는 산수화가로 흔히 남종화의 시조라고 한다. 그래서 송대의 소동파(蘇東坡)는 왕유의 시를 두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했다. 이상으로 중국 시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성당의 세 대가들의 시를 감상해보았다. 당나라의 시는 화려하고 까다로운 수사기교를 추구하던 위진남북조시대의 시에 비해 전반적으로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앞에서 보았듯이 까다로운 글자나 특이한 문구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기교는 기교대로 최고의 수준에 올라 있었다. 어설프게 기교를 자랑하지 않을 따름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시 속에는 깊고도 다채로운 사상과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전란 중에 우국충정의 마음을, 어떤 사람은 호방하고도 방자한 술기운을, 어떤 사람은 대자연 속에서의 관조의 경지를 담았다. 그리고 시의 내용과 형식이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분명 작은 기교를 넘어서 큰 기교를 이해하게 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시는 위진남북조시대의 시에 비해 확실히 나선형적 발전을 이룬 대교약졸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당의 시를 최고로 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문화사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대교약졸의 미학은 안사의 난이 끝난 중당 이후부터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활짝 피어났다. 시는 다른 분야에 비해 조금 일찍 대교약졸의 아름다움이 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가 다른 문학 장르나 예술 분야에 비해 가장 일찍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시는 당대에 이르러 이미 내용과 형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기 때문에 송대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관점에서 대교약졸의 미학을 추구했다. 그것은 바로 풍격상의 새로운 변화이다. 송시(宋詩)와 당시(唐詩)는 풍격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당대의 시는 전반적으로 감정의 표현이 다채롭고 화사한 맛이 있다. 마치 울긋불긋한 온갖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 찬 봄날의 정원과도 같다. 북송 초만 해도 당대의 시풍을 그대로 따랐고 특히 만당시기의 화려하고 농염한 시가 유행했다. 이런 화려하고 농염한 시풍을 배격하고 송시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은 매요신(梅堯臣)이다. 그는 일찍이 “시를 짓는 데는 고금을 막론하고 평담하게 쓰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해 평담의 시풍을 제창했다. 물론 이 평담이 그냥 무미건조한 평담이 아니라 농염한 맛을 안으로 숙성시킨 평담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송대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제창자로 유명한 구양수(歐陽修)는 그를 감람시인이라고 불렀다. 감람 열매는 처음에는 떨떠름하고 쓴맛이 있지만 씹을수록 나중에는 달콤한 맛이 나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평담이라는 말은 송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용어가 되었다. 송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문인인 소동파 역시 시에서 숙성된 평담미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메마르고 담담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 바깥은 메마르면서도 속은 기름지고,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 만약 안과 겉이 모두 메마르고 담담하다고 하면 또 무슨 말을 할 값어치가 있겠는가? 당시에 대한 송시의 차이를 설명하는 말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당나라 사람은 정(情)으로 시를 썼지만 송나라 사람은 이치로 시를 썼다는 말 따위다. 그러나 가장 적절하고 포괄적인 말이 바로 평담미다. 다음의 평(評)은 당시와 송시의 풍격을 잘 묘사한 유명한 글이다. 당시의 아름다움은 다정한 시어에 있으니 그래서 풍부하고 기름지다. 송시의 아름다움은 기세와 뼈대에 있으니 그래서 메마르면서도 굳세다. 당시는 작약이나 해당처럼 농염하면서도 화려하다. 송시는 겨울 매화나 가을 국화처럼 그윽한 운치와 차분한 향기가 있다. 당시는 여지를 씹는 것처럼 한 알을 입안에 넣으면 단맛과 향기가 양 볼에 가득 찬다. 송시는 감람나무 열매를 씹는 것처럼 처음엔 떨떠름한 맛을 느끼지만 뒷맛이 빼어나고 오래간다. 이밖에 당시는 봄날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정원을 다정한 연인과 함께 거니는 기분으로, 송시는 마치 가을날 국화꽃이 피어 있는 쓸쓸한 들판을 홀로 산책하는 느낌에 비유하는 학자도 있고, 당시는 마시면 사람을 얼큰하게 취하게 하는 술에, 송시는 마시면 사람을 차분하게 하는 차에 비교한 사람도 있다. 당시가 위진남북조시대의 번화한 수사기교를 안으로 머금고 새로운 차원의 대교약졸의 경지를 이루었다면, 송시는 당시의 화사하고 농염한 풍격을 안으로 심화시켜서 새로운 차원의 대교약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와 송시의 차이를 설명할 때 흔히 나오는 시를 예로 둘이 지닌 맛의 차이를 느껴보도록 하자. 「望廬山瀑布」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日照香爐生紫煙 향로봉에 햇빛 비쳐 안개 어리고 遙看瀑布掛長天 멀리 폭포는 하늘에 매달려 있는 듯, 飛流直下三千尺 날라 떨어지는 삼천 척 물줄기 疑是銀河落九天 마치 은하수가 구천에서 떨어지는 듯. 「題西林壁」 서림사 벽에 쓰다 橫看成嶺側成峯 비스듬히 보면 고개요, 옆에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멀리 가까이 높게 낮게 제각기 다르구나!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只緣身在此山中 다만 내가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리라. 앞의 시는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인 이백이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쓴 시고, 뒤의 시는 송대를 대표하는 시인 소동파가 여산의 전체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하나는 부분적인 풍경을 노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 전체의 모습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의 비교는 어렵지만 다 같이 여산이라는 대상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비교는 가능하다. 전자가 호방한 기상으로 여산폭포의 웅장함을 노래한 것이라면, 후자는 보는 관점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여산의 모습을 노래한 것이다. 전자가 과장 기법을 동원하여 여산폭포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발산형이라면, 후자는 이리저리 다양한 각도를 제시하며 여산의 모습이 보는 각도에 따라 바뀐다는 것을 사변적으로 설명하면서 차분하게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수렴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고전시의 발전은 사실 송대가 마지막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그 뒤로도 시는 중국 지식인들의 필수 교양의 하나로서 꾸준히 창작되어졌지만 미학적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지는 못했다. 몽골족이 다스렸던 원대에는 중국 정통문학의 꽃인 시는 크게 쇠퇴했고 명대에는 다시 시를 되살리는 운동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새로운 차원의 발달로 나아간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려는 수준의 복고주의에 머물렀다. 명대 이후 청말에 이르기까지 중국 시는 대부분 당시를 추종하는 종당파(從唐派)와 송시를 추종하는 종송파(從宋派)로 나뉘어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복고주의에 반대하고 개인의 독창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미학적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지는 못했다. 중국 시의 발달 (중국문화 대교약졸)
1416    세계에서 가장 멋진 서점 17곳. 댓글:  조회:5852  추천:0  2015-08-26
언젠가는 소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서점을 생각하는 세대가 나올지도 모른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서점 다수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부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다. 아마존 서점이 판치는 시대에 24시간 운영하면서 또는 디자인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한 오프라인 서점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CNN방송은 여행 시 역사 유적으로 또는 문화공간으로 꼭 방문해야 할 곳으로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서점 17곳을 보도했다.   존 K 킹 중고 희귀책 서점 (미국 디트로이트)   ◆존 K 킹 중고 희귀책 서점 (미국 디트로이트) 1965년 문을 연 이 곳은 디트로이트에서는 곡 한 번 방문해봐야 하는 대형 서점이다. 4층짜리 공장 건물을 서점으로 바꾼 내부는 알파벳순으로 900여개 카테고리로 분류된 서적 100만여권이 가득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책 몇 권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서점 주인은 10만 달러(1억원)에 달하는 모르몬교경전 초판 진본과 1482년 베니스에서 인쇄된 이탈리아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 인쇄본 등을 꼽았다.   엘 아테네오(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엘 아테네오(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29년 공연장으로 운영됐던 건물을 2000년대 초 서점으로 바꾸었다. 지어진 지 100년이 다 됐지만, 아직까지도 깜짝 놀랄 정도로 웅장하고 장엄한 규모에다가 화려하게 장식된 건축양식이 잘 보존돼 있다. 무대와 티켓 판매 박스는 책 읽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뵈칸델 도밍카넨(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   ◆뵈칸델 도밍카넨(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 1294년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1,100㎡ 규모의 도밍카넨 교회를 2006년 서점으로 탈바꿈시킨 곳이다. 돈 하메스 서점 대표는 “디자인을 다시하기 전에는 마스트리히트시 오케스트라 숙소, 어린이 축제 장소, 양도축장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며 “지금도 연간 140여개 이벤트를 개최해 항상 무슨 행사가 열린다”고 말했다.   에슬리트 더난 서점(대만 타이베이) ◆에슬리트 더난 서점(대만 타이베이) 이 서점은 1999년 처음으로 24시간 내내 운영하기 시작해 유명해졌다. 그 보다 여러 가지 언어로 진열된 책과 잡지가 1만7,000㎡를 가득 채워 더욱 이름을 알렸다. 타이베이에만 2개 분점을 더 냈고, 그 중 하나는 대만에서 가장 큰 서점이다.   이 밖에도 한때 방공호로 사용됐다 300명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자와 책상을 설치한 4,000㎡의 대형 지하서점으로 바뀐 중국 난징의 ‘아방가르드’ 서점, 1951년 문을 연 프랑스 파리 ‘셰익스피어 앤 컴패니’ 서점, 4만여 요리책을 보유한 호주의 요리전문서점 ‘북스 포 쿡스’ 서점, 패션 사진 배경으로 사용될 정도로 멋지다는 평가를 받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라스트' 서점, 1906년 신고딕양식으로 지어져 건축솜씨를 뽐낸 포르투갈 포르투의 '리브라리아 렐로' 서점, 명품 서점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베니스의 '아슐린 베네치아', 세계에서 가장 큰 중고책 및 신책 서점 미국 포틀랜드의 '포웰스 시티 오브 북스', 베스트셀러 를 쓴 소설가 앤 패쳇이 우연히 대변인을 맡은 서점 미국 내슈빌 '파르나소스 북스', 라이브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식사도 할 수 있는 멕시코의 '카페브레리아 엘 펜둘로', 영국 런던 중심지 코번트 가든에 자리잡은 '스탠포드' 서점, 24시간 개방에다 사전 이메일 예약시 배낭여행객이 무료로 머물 수 있는 중국 광저우의 '1200' 서점,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영국 런던 '포일레스 플래그쉽' 서점,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서점거리에서 아직 살아남은 서점 '스트랜드'도 포함됐다.
1415    시론저 소개 - 禪과 아방가르드 댓글:  조회:4544  추천:0  2015-08-26
[이승훈 지음 《선과 아방가르드》 (푸른사상 펴냄) / 이덕주  선(禪)과 현대시의 만남, 그 당위성 1. 선과의 인연 선의 시각으로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이승훈의 시론집 《선과 아방가르드》(푸른사상)가 지난 8월 출간되었다. 이 시론집은 현대 선시의 이론적 토대의 깊이를 더하는 선사상 연구의 결과물이다. 인간 본성으로 회귀하고자 그 대안으로 선을 앞세우는 시기에 시의적절한 이론서라고 할 수 있다.  책을 펼치면 저자가 선을 중시하며 선의 세계관이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사상과 시학을 폭넓게 접목하며 현대 선시의 나아갈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나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지금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은 시대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자성의 성찰’의 지침으로 ‘선적인 삶’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의 사유체계를 부정하고 해체하면서 전혀 새로운 직관을 통한 대상 파악은 선이 목적하는 사유의 혁명이다. 이런 선은 아방가르드 예술 정신을 추종하는 시인들에게 무한한 창조력을 배가시킨다고 할 수 있다.  선의 정신은 창조적 작업의 종사자, 특히 시인들을 높은 깨달음의 정신세계로 인도한다. 때문에 선시는 깨달음의 시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시는 깨달음과 시의 미학이 동시에 존재하는 특별한 문학 장르이다. 그런 면에서 선에 침잠하는 창조적 시인들은 선에 몰입하는 자체로 독창성과 창조성을 생생하게 구현한다고 할 수 있다.  《선과 아방가르드》는 이승훈이 제12시집 《인생》(민음사, 2002) 이후 시도했던 자신의 시 특히 현대 선시에 대한 이론적 배경이다. 그는 《인생》이 발간되기 전 1990년대 말에 자아탐구와 자아소멸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활로를 찾고자 고심했었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를 거쳐 새로운 시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한 기회에 《금강경》 〈대승정종분〉의 “약보살(若菩薩)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즉비보살(卽非菩薩)”이라는 구절을 접하게 된다. 마침 ‘아상(我相)을 버려야만 보살’이라는 그 구절에서 자신이 40여 년간 분별적 자아에 대한 집착에 빠져 있었음을 충격적으로 인식하고, 자아불이(自我不二), 자아불이(自我不異)의 세계로 다가가는 전기로 삼는다.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 분명하게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맺은 《금강경》과 기연을 시작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불교적 사상인 선으로 전환한다. 자신이 그토록 추동했던 아방가르드 정신이 선을 접하면서 선의 정신이 시와 시론의 전형이 된 것이다.  이승훈은 “시론이 없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라는 그의 지론대로 《반인간》(조광출판사, 1975) 이후 《영도의 시쓰기》(푸른사상, 2013)까지 35권의 시론과 이론서를 저술했다. 시집 역시 《사물A》(삼애사, 1969)에서 최근 시집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시와세계, 2014)까지 24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다. 수필과 번역집 등 기타 저술까지 합하면 약 70여 권의 저서이다.  196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그의 필력은 오직 선행적 시인이며 시 이론가로서 행로를 잠시도 멈추지 않고 아방가르드 정신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는 이 책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기호학의 관점에서 선사들의 공안을 해석한 《선과 기호학》(한양대출판부, 2005), 선의 시각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을 해석한 《아방가르드는 없다》(태학사, 2009), 하이데거 철학을 선시를 중심으로 해석한 《선과 하이데거》(황금알, 2011), 선의 시학을 모색한 《영도의 시쓰기》 등 현대적 선학을 시와 접목시키는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진력했다. 《선과 아방가르드》는 그런 면에서 불교와 인연을 맺은 저자가 《인생》 이후 시도한 시 이론서의 연장선에서 필연적으로 쓸 수밖에 없는 종합 시 이론서라고 할 수 있다. 2. 선의 구분을 통한 현대시의 방향 이승훈 시인은 선과 현대시의 만남, 그 당위성을 나름 시학적 체계를 세우며 제1장과 2장에서 밝혀 나간다. 지금까지 시단에서 볼 수 없는 그만의 이론체계다. 선과 시를 모두 잘 이해하고 있으면 《선과 아방가르드》를 읽기가 편해진다.  제1장과 2장에서 송대(宋代) 언어 인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선시의 발전과정을 통해 선시가 돈오(頓悟) 시학의 범주이며 선의 시 쓰기는 점수(漸修) 시학의 범주에 든다고 구분한다. 경계가 해체되는 불립문자, 논리 밖의 선은 선이 강조하는 중도, 불이, 공사상과 통하는 데 기초하여 ‘선의 시학’ 측면에서 현대시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나아가 선을 매개로 현대 선시가 서구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3장에서는 인도불교가 중국에 수용되면서 노장사상, 유학과 결합되어 발전하는 선종을 중심으로 선을 여래선과 조사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6조 혜능 이전(북종 포함)을 여래선으로, 혜능 이후 정립된 남종을 조사선으로 선종의 발전과정과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다. 능가선, 우두선, 유식사상도 다루면서 선이 그만큼 발전하기 위해서는 단계가 있음을 예시한다.  제5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시의 전환이 여래선 시학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힌다. 여래선의 시 쓰기는 달마의 면벽과 혜가의 자연지심을 강조하는 간심간정(看心看靜), 도신의 섭심수심(攝心守心), 홍인의 수본진심(守本眞心) 등(p.138)에 상응하는 시 쓰기가 필요하다는 입장임을 드러낸다. 여래선과 시, 여래선과 동시(童詩)를 예로 들며 자아가 없는 청정심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청정심과 평상심, 무위자재로 서정주의 〈동천〉을 살펴보며 김춘수의 〈깜냥〉 역시 시인이 대상을 소멸시키는 청정심을 지녔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시임을 간파한다. 오규원의 〈봄과 밤〉 또한 청정심과 중도가 시 속에 스며 있음을 내세운다. 이런 것은 결국 무심, 무아, 선적 깨달음, 혹은 자성청정심을 그대로 말하는 ‘보여주기’라고 말한다. 제6장에서 연이어 조사선 시학이 무념식정(無念息情)을 강조하는 데 연관이 된다고 기술한다. 마찬가지로 평상심이 도임이 제7장 마조선 시학이라고 강조한다. 이승훈은 자신의 시 〈속초에서〉 전문을 인용하며 백담사 하안거 해제일에 설악무산 스님에게서 전당게를 받은 인연 때문에 임운자연(任運自然)에 따른 선의 일상화가 이루어졌음을 고백한다. 임제선 시학은 이 책에서 언급한 전통적 인습과 권위, 곧 근대 시학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아방가르드 시학과 밀접하게 연관이 된다. 선의 시각에서는 이름, 형상 등 일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라는 즉 분별과 조작을 버리는 행위와 통한다. 저자는 무위진인, 수처작주, 입처개진이 시인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며 시의 정신임을 계속 강조한다. 3. 현대시와 선의 세계 이승훈은 지금까지 자신이 깨달은 선의 세계가 설악무산 스님의 시집 《절간이야기》(고요아침, 2003)에 그대로 시현됨을 보면서 충격을 받는다(p.293). 〈절간 이야기 2〉의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라는 문면에 무주(無住)의 시학이 녹아 있음을 깊게 인식한다. 선이 강조하는 무분별에 기초하여 무아의 경지에서 나오는 지극한 무위의 미학이 현시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선을 매개로 선과 함께 선을 지향하지만 끝내 선 그 자체도 없다는 설악무산이 자신의 시를 통해 현대 선시의 아방가르드를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한다.  〈신사와 갈매기〉에서 일상어로 쓴 설악무산의 시가 일상어와 시어가 해체되며 아이러니와 함께 선시가 되고 있다고 저자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자갈치 아즈매와 갈매기〉는 역시 설봉 스님과 자갈치 시장의 아주머니가 갖는 지극히 순수한 정경을 통해 일상과 선의 구별이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시라고 말한다. 선의 극한에는 선이 없고 일상 자체가 선임을 그는 덧붙인다.  설악무산의 〈백장과 들오리〉 또한 객관적 인식에 의한 양변을 버리라는 일상어/선어/시어의 경계가 해체되었음을 보여주는 선시라고 강조한다. 〈절간 청개구리〉에서 설악무산이 ‘시를 지으려다가 못 지었다’는 고백 자체가 그대로 언어를 초월하는 선시 그 자체였음을 파악한다. 나아가 〈불국사가 나를 따라와서〉는 두두물물이 화엄법계에 녹아든 정경을 무애의 경지에서 노래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하나와 일체가 융합하여 하나 속에 우주의 모든 활동이 전개되는 융통무애(融通無碍)를 노래했다는 것이다.  이승훈은 설악무산의 시를 현대적 전위시인 동시에 현대 선시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설악무산 스님이 무아와 무애를 자신의 시와 시조 속에 여시하게 녹여냈다고 찬하면서 ‘아방가르드가 선이고 선이 아방가르드’라는 자기 의견을 덧붙인다.  이승훈은 제9장에서 현재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선시에 대해 과거의 고정된 격식과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 때문에 현대 선시의 새로운 출구 즉 현대 선시가 올바르게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선이 보여주는 파격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선과 아방가르드의 회통이 가능함을 역설한다.  선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김수영의 시 〈등나무〉처럼 일체의 시적 규칙이나 표현방법을 부정하는 무위진인의 시가 되어야 한다고 김수영의 시 정신을 높인다(p.330). 시간도 해체되고 공간도 해체된다며 〈등나무〉의 파격이 선과 통한다고 예찬하는 이승훈에게서 그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4. 선과 아방가르드 이승훈은 평생 아방가르드 정신을 앞세웠다. 등단 이후 잠시도 쉬지 않고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골몰했고 새로운 시를 뒷받침하는 시론을 정립하기 위한 연구에 매진해왔다. 자신의 시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향해 독려의 채찍을 가해 왔으며 자기진화를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70여 저서 목록이 그가 평생 기울여온 그간의 열정과 결실을 반증한다. 그는 《선과 아방가르드》를 출간하기 두 달 전 시집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시와 세계)를 발간했다. 이승훈의 《선과 아방가르드》 이론이 유효하게 실증된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무작(無作), 무설(無說), 무학(無學)이 자신의 시작(詩作) 방식이며 그 또한 자신의 시론임을 그는 주장한다. 그 역시 《선과 아방가르드》에서 전개된 시론이다. 시집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를 보며 그의 시론에 동의를 보낸다. 《선과 아방가르드》를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이승훈의 시작 방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하게 될 것이다. 선의 중심사상을 통한 시학에 대한 새로운 선적 접근이 이 책을 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선의 시각으로 현대시가 지닌 문제를 고찰하고 마조, 임제시학 등 선의 다양한 적용과 실증을 통시적으로 예시하며 현대시의 발전 방향을 탐색한 것이다.  이승훈은 시력 50년이 넘는 시인이며 동시에 시 이론가이다. 그를 아는 시단의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오랜 기간 그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우리 시단의 첨병에 서서 전진기지를 구축해왔다. 선과 아방가르드를 접목해서 시단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공로도 그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훈의 역저 《선과 아방가르드》는 앞으로 우리나라 현대시의 발전에 한 획을 그을 것이다. 눈 밝은 독자들의 구전에 의해 이 책의 독자들이 점진적으로 늘어날 것임을 예견해본다. 전위적 사유를 앞세우며 아방가르드 예술정신을 선을 통해 시현하는 저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
1414    아방가르드 시의 실험 댓글:  조회:5801  추천:0  2015-08-26
  일본의 모더니즘 시, 아방가르드 시의 실험                                  / 한성례 한성례의 현대 일본시 탐색             한성례 세종사이버대 겸임교수 일본 미래파·다다이즘 운동  미래파 운동은 1902년 이탈리아 시인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제1선언서’를 발표하고 회화상의 속도의 미를 정리해서 시간 의식 내에서 나타나는 일체의 기억과 연상, 음향까지도 공간화해서 모든 감정, 모든 의식을 동일 화면에 그려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에서는 종래의 민중시파에 대한 반대 운동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1921년 전후의 히라토 렌키치(平戶廉吉, 1893~1922) 등의 일본 미래파 운동은 후에 이어지는 일본 시단의 흐름에서 볼 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 미래파는 서구보다 조금 늦게 도입되었는데, ‘일본 미래파 운동 제1차 선언’은 도회미라든가 기계미를 노래하고, 의성어나 의태어 또는 수학적 기호까지도 채용해서 문체상의 형식 파괴를 꾀했다. 공간적 입체시라고 칭했듯이 시각을 중시해서 글자의 크기를 크고 작게 구분하거나 글자 배열을 다르게 하는 등 표기의 형식이나 소재에 중점을 두고 시각적인 변화를 꾀했는데, 이 또한 마리네티를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히라토 렌키치 겐이치의 시를 살펴보자. 새가 난다  마음도 모습도              검푸르다  검은 새  말라비틀어져서  난다                           만(卍)자로  뒤엉켜서  자기성(磁氣性)의 깊은 못 위                              소용돌이에 삼켜진다  빙빙 돈다                 빙빙 돈다  물레방아의 날개  한 마리의 뒤를                        한 마리                                           한 마리                                      한 마리 ― 히라토 렌키치 〈날고 있는 새〉 전문                               이 같은 표기법의 새로운 운동은 기성의 의식을 파괴하고 종래의 자유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본 미래파 운동이 전개되던 이 무렵부터 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과 대전 직후의 전위(前衛)예술이었던 다다이즘 운동이 서서히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다. 다다이즘은 근대생활의 권태와 무가치에 대한 반발이었고, 니힐리즘과 페시미즘을 보강한 정신이었는데, 세계대전으로 인해 생겨난 정신상 폐허의 산물이었다. 그것이 세계대전 후의 일본사회의 공황이나 불안, 더욱이 관동대지진의 충격과 함께 자연스럽게 일본사회에도 스며들었다.  아나키즘의 시운동  이러한 다다이즘의 시인으로서 가장 먼저 등장한 시인이 다카하시 신키치(高橋新吉, 1901~1987)였고, 자신의 《다다이스트 신키치(新吉)의 시》라는 시집에 실험작들을 소개했다. 그의 시는 권태와 피로, 자포자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노골적인 에로티시즘과 퇴폐적인 감정 속에 적나라한 사랑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진실성의 단면을 예리하게 그려냈다. 히라토 렌키치와도 교류가 있었던 그는 아래와 같은 제목의 시가 있다. 접시접시접시접시접시접시접시접시접시접시  권태  얼굴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정열  흰쌀색의 앞치마를 입고  접시를 닦는 여자  코의 둥지가 검은 여자  모처에도 해학이 연기 나고 있다  인생을 물로 녹여라  차가운 스튜냄비에  따분함이 뜬다  접시를 깨라  접시를 깨면  권태 소리가 난다 ―다카하시 신키치 〈신DA렌키치〉 전문     다카하시 신키치     쓰보이 시게지 이 시는 그가 식당에서 접시닦이를 하고 있던 무렵의 시라고 하는데, 비교적 얌전하게 쓴 작품이었는데도, “광기와 치매, 넌센스와 엑센트릭과의 교향곡” “축농증과 변태성욕과의 디스콜드”라는 평을 받았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근대적 고뇌의 둔화’였다. 자신의 관능적 향락 외에는 가치를 두지 않고, 모든 권위를 부정하며 철저하게 무도덕함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다다이즘 시에서 선두에 선 시인은 하기와라 교지로(萩原恭次郞, 1899~1938)였다. 그는 쓰보이 시게지(壺井繁治, 1897~ 1975) 등과 함께 《적과 흑》을 내고, 제1회 선언에서 “……예술의 우상적(偶像的) 가치를 파괴하라! 그 공허한 ‘언어’의 개념을 방산시켜 버려라! 불을 질러 버려라!”라고 외쳤고, 기존의 존재 일체를 부정하면서 ‘아나키스트적인 파괴를 위한 파괴’를 부르짖었다. 그들은 기호나 부호를 시에 도입하고, 크고 작은 글자를 자유로이 배치하고, 읽어도 들어도 느낌이 이상한 시를 계속해서 발표했다. 그것은 전통 서정과의 철저한 결별이었다. 그러한 시의 한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움푹 패인 배(腹) 속에서 톱니바퀴가 돌고 있다  손도 발도 목도 없는 동체가 신음하고 있다  일체의 존재가 장님이고 귀머거리다  지붕 밑에 갇힌 태양이 연기를 내고 있다 ―쓰보이 시게지 〈지붕 밑의 태양〉 전문 하기와라 쿄지로의 《사형선고》는 크게 주목받은 시집이었다. 그의 시에 관통하고 있는 것은 다카하시 신키치 등에서 보이는 무기력한 데카당스의 정신과는 달리 아나키스트적인 절규이고 단말마적인 도회 문명의 거부와 비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다카하시 신키치 등에서 보이는 향락적 요소가 적고 방향이 불분명한 분노와 절망, 불안과 초조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 시집에서 시 한 편을 감상하자. ――매일 밤  · · · · 폐는 검푸른 출혈을 했다  어둠 속으로!  검 달린 철포를 든 병사가 직립한다  함석 파편의 폐장이 헐떡인다  ―――손을 들었다  남자 위를  자동차는 휙 올라타고 달려갔다  빵! 빠―앙!!!  군집(群集)이  단번에 확  ―――남자를 잡아올렸다!  피투성이 얼굴이  군집과 함께  선로 위를 질질 끌려간다――― ―하기와라 쿄지로 〈어둔 밤의 기록〉 전문       하기와라 쿄지로의 시집 《사형선고》는 장정, 지면 구성, 삽화 등에 구성파, 입체파의 그림을 넣어서 신기함을 더해 놓았다. 이처럼 일본에서 새로운 시운동과 함께 새로운 예술이 발생했던 것이다. 즉, 1922년 전위화가, 입체파, 미래파, 표현파 등의 그룹인 ‘아크시온’이 결성되었다. 그다음 해에는 독일 표현파를 받아들여 조직한 ‘마보(MAVO)’의 신운동이 일어났다. 마보는 다다이즘의 조형예술상의 표현으로서 관동대지진 후의 불안한 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3과 조형예술협회’를 만들어 전람회를 개최했다. 그 ‘의식적 구성주의’의 데몬스트레이션은 짧은 시간에 일본사회의 문화에 대한 눈높이를 크게 높여 놓았다. 이것은 세계대전 후의 세계의 불안과 그에 따라 어지러운 일본사회의 반영이었고, 또한 직접적으로는 개인주의의 사상과 감정이 막다른 길에 이르면서 생겨난 개성 붕괴 현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사회적인 불안과 어려움을 직접 헤치고 나갈 수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는 곳에 무기력한 데카당스가 움트고, 해결할 방향을 찾지 못하는 곳에 아나키스트적인 반항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 시인들의 활동에 대한 그 가치는 별도로 하고, 시대감각을 문자로서 가장 날카롭게 표현한 시인들이었다. 이 시운동이 직접 목표로 한 것은 시단의 중추적인 존재였던 민중파 시인 중심의 ‘시화회’였다. 또한 ‘일본시인’의 흐리멍덩하고 미적지근한 민주주의, 자유주의 정신과 그것을 근저로 한 지루한 표현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었다. 이에 대립은 깊어지고 서로 협조하자는 슬로건은 이미 힘을 잃고만 시대에 민중파 시인의 해체는 시간문제였다. 그들의 사상적 모태가 되었던 《시라카바(白樺)》도 1923년에 폐간되었고, 1926년에는 ‘시화회’도 해체되고, 연간으로 출간하던 《일본시집》은 제8집을 끝으로 발행을 멈춘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모더니즘의 뒤를 이어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시작된다. 조선 시인 이상(李箱)과 일본 시인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 시 제1호  제13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  였소.(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오。)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로 바꿔 썼음 ―필자 주. ―이상(李箱) 〈오감도(烏瞰圖)〉 이상(李箱, 1910~1937)의 문제작 《오감도》는 당초에는 30회 연재 예정이었으나 독자들의 빗발치는 거센 항의 속에 15회로 끝을 맺었다. 이 시의 난해함으로 인해 “〈오(烏)감도〉는 〈조(鳥)감도〉의 오자가 아니냐” “미친놈의 잠꼬대가 아니냐” “이 무슨 개수작이냐”라는 등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사실 당시 우리 시단이나 독자들의 수준에서 볼 때, 이와 같은 항의에도 전혀 이유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인 작품 〈오감도〉는 〈시 제1호〉에서 〈시 제15호〉까지 이상의 나이 25세이던 1934년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게재되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하의 식민지 조선의 젊은 시인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이상 역시 많은 작품들을 일본어로 썼다. 한국 모더니즘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이상의 이 작품은 “무서운 아해는 가해자, 무서워하는 아해는 피해자, 13인의 아해는 불길스럽고 타락한 무리, 막다른 골목은 절망적이고 암담한 현실적 상황, 뚫린 골목은 현대인의 유일한 희망이며, 띄어쓰기를 무시한 까닭은 모든 형식에 대한 부정이나 반발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시 제1호〉 끝줄에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라고 한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동기술법으로 표현한 초현실주의적인 시이다.”라고 《한국의 명시》(김희보 엮음)에 정리되어 있다. 또한 이상에 대한 평가와 견해에서, 조선 모더니즘의 선두 주자인 김기림 시인은 “이상의 죽음은 한국문학을 50년 후퇴시켰다.”고 극찬했고, 최재서는 “이상의 문학은 독자의 곤혹이 있음에도 단연히 환영해야 할 경향이다. 현대의 분열과 모순에 이만큼 고민한 개성도 없다. 그는 풍자, 위트, 야유, 기소(譏笑), 과장, 패러독스, 자조(自嘲), 기타 모든 지적 수단을 가지고 가족생활과 금전과 성(性)과 상식과 안일에 대한 모독을 감행하였다. 이상의 예술은 미완성이다.”라고 이상의 시를 모더니즘의 시각적인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전위성(前衛性)과 한국 주지시의 풍토를 만든 시인으로도 손꼽았다. 〈오감도〉를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시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리듬감이 있어서 재즈 연주나 랩을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도시인의 수줍은 감성이 아른댄다. 어두운 전쟁의 예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젊은 시인들이 새로운 자기표현의 실험을 모색했던 그 시대의 공기가 이 시에 독특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경성(서울)의 골목길을 질주하는 13명의 아해의 이미지와 ‘무섭다, 무서워하다’라는 말의 반복은 왠지 불길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들지만, 마지막 절에서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라고 그때까지 끌고 왔던 이미지를 모두 부정한다. 이는 구성상의 테크닉으로도 보이지만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로운 사고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이상은 〈오감도〉 연재가 중단되고 난 2년 후에 도쿄(東京)로 떠난다. 그리고 ‘사상불온’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건강 악화로 석방되지만 같은 해에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27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유해는 돌아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상     나카하라 츄야 그런데, 이상이 27세로 도쿄에서 세상을 떠난 1937년에 동시대의 일본시인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 1907~1937)가 30세로 요절한다. 일본 모더니스트 시인으로서 나카하라 츄야는 시의 이단아라고 일컬어질 만큼 일본 시단에서 혁명적인 존재이다. 이상과 츄야는 성장 과정이나 처해 있는 상황은 크게 달랐지만 도쿄와 경성이라는 두 도시의 길모퉁이에 선 젊은 두 시인이 길 가는 이들에게 던졌을 시선을 상상해보면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사람을 좋아하고 인생을 사랑하면서도 그 말을 입 밖에 내면 왠지 비틀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꼬여 버리고, 도시의 고독을 섬뜩해 하면서도 결국은 그곳을 가장 편한 장소로 택하고 마는 그런 젊은이의 모습이다. 아아, 12시의 사이렌이다, 사이렌이다 사이렌이다  줄줄줄줄 나오고 있어, 나오고 있어 나오고 있어  월급날 점심시간, 흔들흔들 팔을 흔들면서  뒤를 이어 뒤를 이어 나오고 있어, 나오고 있어 나오고 있어  크고 높은 빌딩의 새까맣고 작디작은 출입문  하늘은 널따랗게 펼쳐져 약간 흐리고, 약간 흐리고, 먼지도 조금 일고 있다  야릇한 눈길로 위를 올려다봐도, 아래로 내려도……  그것은 벚꽃인가, 벚꽃인가 벚꽃인가  아아, 12시의 사이렌이다, 사이렌이다 사이렌이다  줄줄줄줄 나오고 있어, 나오고 있어 나오고 있어  높고 큰 빌딩의 새까맣고 작디작은 출입문  산들바람에 사이렌은 울려 퍼지고 울려 퍼지면서 사라져 갈까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 〈정오, 마루(丸)빌딩 풍경〉 전문 단어의 반복과 거기에서 빚어지는 독특한 리듬, 그리고 거기에 감도는 적요감이 이상과 나카하라 츄야 두 시인의 시에 공통되는 점이다. 도회의 최신 건축에서 일하는 샐러리맨의 느긋하고 건강한 소시민 의식을 자기 밖의 세계로서 객관화하면서, 보이지 않는 유리창 너머 거리의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애정과 눈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일종의 문병 비판이라는 감이 든다. 오히려 시인은 ‘생’에서 멀리 떨어져 ‘생’과 ‘사’의 경계에 서서, 그리운 듯 ‘생’을 뒤돌아보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결코 샐러리맨을 야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눈길은 한없이 슬프면서도 한없이 따스함이 가득 차 있다.”라고 말한 평자도 있다. 나카하라 츄야가 이 시에서 노래한 일본 샐러리맨의 점심시간 풍경은 지금도 거의 변함이 없다. 이 시는 나날의 단조로운 반복을 잘 견디어내는 서민들에 합류할 수도 없고 그 일원이 될 수도 없는 자신의 고독과 허무를 유머로 포장해서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죽음과 파괴가 금방이라도 세상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릴 듯한 불길한 예감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시대, 표면은 모더니즘 문화에 들뜬 도시, 그 도시에서 마지막까지 새로운 자기표현 방식을 추구했던 한일의 두 젊은 시인이 같은 해에 요절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두 사람의 연관성으로 상상이 이어진다. 이상이 세상을 뜨기 전 도쿄에서 지냈던 그 2년 동안, 이 두 시인은 어쩌면 도쿄의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스쳐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시에는 가장 높고 큰 빌딩이었던 도쿄역 앞 ‘마루(丸)빌딩’을 올려다보면서 도회적 사고로 시상을 떠올렸을 것 같다. 이상의 대표적인 소설 《날개》에서는 주인공이 경성의 미쓰코시(三越)백화점 옥상에서 잃었던 날개로 비상하는 꿈을 꾼다. 이상은 빌딩 위에서 비상하는 꿈을 꾸고, 나카하라 츄야는 빌딩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식민지 청년 이상의 비상을 알았다면 나카하라 츄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상과 츄야가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이 두 시인에 대한 열기는 한국 시단이나 일본 시단이나 변함이 없다. 츄야 신화라고 할 만큼 에피소드나 일화가 많고 한국에서도 이상은 독보적인 존재이다. 여전히 젊은 시인들은 그들을 추종하고 있으며, 이 두 시인이 각각의 시단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상의 비상은 정신의 자유이든 육체의 자유이든 자유로움을 위한 비상이었을 것이고, 독자적이고 싶은 비상이었을 것이다. 시공을 초월해서 어떤 시대에도 젊은이들에게 존재할 법한 본질적인 고뇌와 갈등이 이들 두 시인의 시에는 포함되어 있다. 이상과 츄야의 시가 울림을 주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우리 누구나가 젊은 시절에 경험했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밀쳐두었던 뭔가를 독특한 방식으로 되살려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카하라 츄야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감상해보자. 조선여자 저고리의 끈  가을바람에 펄럭이네  거리를 걸어가면서  아이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고  그대는 얼굴을 찡그리고  검게 그을린 피부는 말라서 푸석이고  그 표정, 무엇을 생각했을까  ―――나도 실은 몹시 추레한 몰골이고  멍하니 바라보았을 뿐인데  나를 힐끔 바라보고 괴이한 듯  아이의 걸음을 재촉해서 지나가네……  가볍게 이는 먼지인지도  무엇을 안쓰러워했을까  가볍게 이는 먼지인지도  무엇을 안쓰러워했을까……  ·· · · · · · · · · · · · · ·  ―나카하라 츄야 〈조선여자〉 전문 계절풍에 날리는 흙먼지와 눈송이가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오후의 거리에서 우연히 조우한 조선여자는 야위어 푸석거리는 피부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그리고 마르고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달아나듯이 급히 걸어간다. 자신은 그저 멍하니 공허한 눈으로 가련한 젊은 조선여자를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녀는 자신에 대해 괴이해 하면서 어떤 동정과 불쌍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두 사람에게 공통된 생활의 피로가 서로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묶은 것일까. 먼지 속에서 서둘러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가버렸지만 그녀에게 뭔가 묻고 싶어 한다. 이 시는 다다이즘과 폴 베를렌느의 세계가 혼합된 시이다. 이런 시를 쓸 만큼 당시 츄야의 마음은 추레하고 늘 추웠으며 공허한 절망감이 가득했다. 더러워진 슬픔에  오늘도 눈이 날린다  더러워진 슬픔에  오늘도 바람마저 불어재낀다  더러워진 슬픔은  예를 들어 털옷  더러워진 슬픔은  소설(小雪)에 덮여 움츠러든다  더러워진 슬픔은  뭘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고  더러워진 슬픔은  권태 속에서 죽음을 꿈꾼다  더러워진 슬픔은  애처롭게 겁이 나서  더러워진 슬픔은  되돌릴 곳도 없이 날이 저문다…… ―나카하라 츄야 〈더러워진 슬픔에……〉 전문  《시와 시론(詩と詩論)》과 《아(亞)》의 모더니즘 시인들  《아(亞)》와 단시(短詩)운동 모더니즘은 일본 시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 결과 근대시가 현대시로 바뀐다. 그것은 《시와 시론(시토시론, 詩と詩論)》(이하 《시와 시론》으로 통칭. 이 잡지는 후에 《문학》으로 이름이 바뀜)과 《아(亞)》가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은 당시 일본의 시 풍토와 확연히 구분을 두고, 주지적인 시적 공간에 서정과 자연을 배제한 선명한 이미지의 신시운동의 전개를 꾀했다.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1898~1965)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중국 대련에서 다키구치 다케시(口武士, 1904~1982), 기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1900~1990) 등과 함께 시문학지 《아(亞)》를 창간한 것은 1924년이었다. 이 신시 운동은 이미지즘 시운동과 일맥상통하는 단시(短詩)운동과 산문시의 시도였는데, 당시의 실험적인 여러 동인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개성이 두드러진 시문학지였다. 도쿄(東京)보다는 좀 더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있고 감각성이 살아 있는 중국의 대련에서 발신되던 《아(亞)》는 일본의 젊은 시인들에게 큰 자극이었다.  조선 시인 김기림(金起林)과 일본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てふてふが一匹海峽を渡って行った.  나비 한 마리가 닷탄()해협을 건너갔다.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봄〉 전문 닷탄해협은 사할린 북부와 시베리아 동부 사이에 있는 해협으로, 동해에 접해 있다. 단시 〈봄〉은 하이쿠(俳句)의 5·7·5라는 음수율과 형식을 따르지 않았는데도 원문을 읽으면 독특한 리듬이 있다. 그리고 이 시는 구어체의 새로운 내재율이 있는 데다 큰 스케일의 영상을 보여 주고 있어서 짧은 시임에도 결코 짧아 보이지 않는다. 낱말과 영상이 하나가 되어 한 편의 시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봄이 온 닷탄해협에 얼음이 서로 부딪치고 있고, 바다가 파도치는지 잔잔한지는 알 수 없지만 하얀 바다 위를 한 마리 희고 작은 나비가 팔랑팔랑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조선의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金起林, 1908~?)의 1946년에 간행된 시집의 표제작 〈바다와 나비〉가 오버랩된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전문 모더니스트로서 이상과 함께 한국의 모더니즘 시에 많은 영향을 미친 시인 중 한 사람인 김기림은 일본에서 모더니즘 시인으로서 활동했고, 1930년에 평론가 최재서 등과 함께 주지주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정착시켰으며,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안자이 후유에     김기림 그것은 1920년 전반기 한국시단의 주류였던 낭만주의에 대치하고, 또한 1920년대 후반기 한국 시단의 주류였던 사회주의적 경향에도 대치하는 것이었다. 김기림은 자신의 시집 ‘작가의 말’에서 “이제부터의 시인은 시인들의 노력에 의하여 발견된 새로운 방법들을 종합하여 한 개의 전체로서의 시를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기술에의 새로운 인식은 능동적인 시정신과 그리고 또한 불타는 인간 정신과 함께 있지 아니하면 아니된다.”라고 썼다. 안자이 후유에는 유년기에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중국문학 고전을 탐독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학생 때는 하이쿠에 열중했고, 졸업 후에도 하이쿠 형식에 의한 시의 스케치를 연구한다. 1920년에 교사로 근무하던 부친을 따라 중국의 대련에 건너간다. 하지만 다음 해에 지독한 추위로 인해 오른쪽 무릎 관절염을 앓게 되고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다. 투병 생활 1년 6개월 만에 퇴원한 후로는 〈대련신문〉 〈만주일일신문〉 등에 단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다음은 안자이 후유에와 함께 《아(亞)》를 창간한 기타가와 후유히코와 다키구치 다케시의 시를 감상해보자. 군항(軍港)을 내장하고 있다. ―기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말〉 전문 이 〈말〉은 안자이 후유에의 〈봄〉과 함께 유명한 시이다. 그러나 〈봄〉과는 달리 침울한 공기가 감돌고 있다. ‘말’ ‘군항’ ‘내장’이라는 3개의 단어가 충돌해서 환기하는 영상은 쉬르리얼리즘 화가가 그리는 한 장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그 영상에서 감지되는 것은 전쟁의 섬뜩한 공기이다.     기타가와 후유히코 ‘말’은 군마가 되고, ‘군항’에 군함이 정박해 있는 광경이 떠오른다. 또한 ‘말’이 시대나 세계를 상징하는 비유라고 한다면 이 시는 세계의 위기를 잉태하고 있으며,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자이 후유에의 〈봄〉이 서정적인 영상의 시라면 기타가와 후유히코의 〈말〉은 첨단적인 풍자성이 녹아 있는 리얼리즘의 시이다. 기타가와 후유히코의 시 〈동백꽃〉을 한 편 더 감상해보자. 여자8백미터 릴레이. 그녀는 제3코너에서 톡 하고 넘어졌다.  낙화. ―기타가와 후유히코 〈동백꽃〉 전문 기타가와 후유히코는 초등학교 입학 후에 만주철도로 전근 가는 부친을 따라 중국에 건너가 현지 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마치고, 1919년에는 대학 입학을 위해 일본에 돌아온다. 그 무렵에는 문학에 관심이 없었으나 뤼순중학교의 동급생인 키도코로 에이치(城所英一)의 권유에 의해 번역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대련의 집에 돌아가 있던 중에 안자이 후유에 등과 의기투합해서 《아(亞)》의 창간 멤버에 참가한다. 비 내리는 날     그들은 몰래 첫 잠을 자고, 터진 피부를 바꿨다.  오후의 방에서 잠부(蠶婦)가 병든 누에를 주우면  척추 속의 무늬가 단추처럼 떨어졌다  그 지친 잠부의 어깨 주변에 더러워진 불탄 흔적이 사라져 있었다.  날이 약간 흐린 날 아침  그들은 일찍 눈을 뜨고, 슬픈 식욕을 생각했다.  습기 찬 잠포(蠶布)에 뽕을 뿌려주면  주둥이 끈으로 푸른 목금을 두드려 소나기의 악보를 연주하고 있다  그 습기 찬 소리를 의아하게 여기면서, 당목(撞木)* 같은 금붕어가 잠실(蠶室)의 창에서 하늘의 날씨를 엿보고 있다.  구름이 많은 밤  그것들은 마지막 잠을 끝내고, 거울마냥 새파래져 있다.  램프를 비추이면,  차가운 피부 아래 장미색 혈관과 내장이 멀찍하게 구부러져 있다.  그 너머의 해협을, 등불을 켠 군함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다.  어느 날 밤  그처럼 잠식된 병의 이력을 알고 있다는 듯  죽순이 솟은 농가의 지붕 위에  비 갠 뒤의 초승달이 짝 갈라져 있다.  *당목(撞木) : 종을 치는 T 자형의 막대 ―필자 주. ―다키구치 다케시 〈누에〉 전문       《아(亞)》의 또 한 사람의 창간 멤버 다키구치 다케시의 〈누에〉는 착 가라앉은 맑은 호수처럼 깊은 고요가 가득한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이미지가 명확하고 신선하다. 누에와 군함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이미지를 조합해서 표출시킨 시의 영상은 오히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리얼리티가 있다. 이 시에서는 군함의 실루엣을 배치해서, 안정되고 평온한 일상이 전쟁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비춰준다.  《시와 시론》의 시인들 1928년 9월, 레스플리 누보(신잡지 정신운동)를 표방하여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가 편집인으로 《시와 시론》이 창간되었다. 이 운동은 사회적, 정치적인 것, 그리고 사상이라고 불리는 모든 관념의 속박이나 중압으로부터 순수하게 시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시로서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이 순수한 예술 창작을 모든 지적인 활동에 맡기는 것에 주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 운동은 그 이전의 상징시의 낡은 미학을 부정하고 민중파의 세계관에 절망하며, 시에 과중한 효용을 강요하는 프롤레타리아시파에 이의를 주창한 젊은 시인들에게 새로운 예술성 추구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것은 그보다 5년 앞서 앙드레 브르통이 발표한 ‘쉬르리얼리즘 예술운동 선언’에서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그 후 《시와 시론》은 쉬르리얼리즘 예술운동을 주축으로서 전개해 나간다.     하루야마 유키로     시토시론 창간 동인은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 기타가와 후유히코(北川冬彦),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다키구치 다케시(口武士) 이지마 다다시(飯島正), 우에다 도시오(上田敏雄), 간바라 야스시(神原泰), 곤도 아주마(近藤東), 다케나카 이쿠(竹中郁), 도야마 우사부로(外山卯三郞),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였는데, 1929년 9월의 제5권부터는 기고자 제도로 바뀌어, 차츰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郞), 다키구치 슈조(口修造), 사사자와 요시아키라(笹美明), 요시타 잇스이(吉田一)、기타조노 가쓰에(北園克衛), 호리 타쓰오(堀辰雄), 마루야마 가오루(丸山), 무라노 시로(村野四郞) 등이 참가했다. 이들 모두가 일본 시단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거성들이어서 일부러 모두 열거했다. 그 중에서 《시와 시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하루야마 유키오의 시를 살펴보자.     *  정직한 개는 짖지 않는다  떨기 장미가 피어 있는       마을     사람이 지나가면서  문을 닫거나 열거나 한다     *  흰 유보장(遊步場)입니다  흰 의자입니다  흰 향수입니다  흰 고양이입니다  흰 양말입니다  흰 목덜미입니다  흰 하늘입니다  흰 구름입니다  그리고 물구나무 선  흰 아가씨입니다  나의 Kodak입니다     *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  모든 하늘에서 유쾌해질 수 없다  모든 창에서 슬픔을 센다  수국꽃은 책 위에 그림자를 떨어뜨린다  피아노의 일부분에 햇살이 닿는다  정오가 마차를 나무 그늘로 옮긴다  노란 빵을 먹는 개개비새  포도의 방을 지키는 풀벌  배나무 잎을 먹는 양  붉은 술의 유리병에  소녀를 옮기는 소녀의 흰옷  벽이 연못에 사라지고, 연못이 수련에 사라지고  수련이 물에 사라지고, 물이 안개에 사라진다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 〈ALBUM〉 전문 ‘흰 소녀’라는 단어를 84개나 늘어놓은 연은 ‘어떤 하나의 관념을 전달하거나 묘사한 것이 아니고, 포름이 기술되는 것에 의해 의미의 세계가 나온다’라고 한 포르말리즘(형식주의)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포름만으로 시에 의한 이화(異化) 혹은 비일상화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즉, 여기에는 이화나 비일상의 현실이 없기 때문에 의미 없는 외형적인 포름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현재 일본에서 비주얼 시 혹은 콘크리트 시의 장르에 들어가 있지만 “발표 당시는 ‘포르말리즘의 정신은 여기서 극한까지 도달했다’라는 평을 받았을 만큼 기념비적인 실험작이었다.”라고 안자이 후유에는 말년에 논했다. 안자이 후유에의 말대로 이 시는 당시 시의 혁신 운동에서 거대한 영향력이 있었고, 현대시의 발전 단계에서 기념해야 할 모뉴먼트였다. 그러나 하루야마 유키오의 공적은 그의 시 작품보다는 《시와 시론》의 편집자, 시운동의 주도적 이론가로서 일본 시사(詩史)에서 엄청난 공적을 남겼다. 그리고 하루야마의 시단에서의 활동은 그 후 일본 현대시의 전개에서 큰 획을 그었다. 그것은 《시와 시론》과 병행해서 출간한 《현대예술과 비평총서》 전21권, 계간 《문학》 《신영토》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으며, 그만큼 그는 서구 문화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1930년 3월의 제7권부터는 기타가와 후유히코 등 3인이 하루야마 유키오의 주지주의적 편집 방침이 현실과 동떨어진 프티부르주아(중산계급) 취미라고 비판하고 탈퇴해서 《시현실》을 창간한다. 그러나 하루야마는 그 후로도 신진 외국 문학자를 동원하는 등, 기성 시단에 끊임없이 도전해 나간다. 조직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신(新)산문시, 쉬르리얼리즘, 포르말리즘, 시네(cine)시 등의 시운동을 전개하면서 쇼와(昭和, 1926년에서 1989년까지, 일본 쇼와 천황 때의 연호)시대 시문학지의 골격을 형성해 나간다. 그 활동에서 중심적인 존재였고, 모더니즘 운동을 카리스마적으로 이끌었던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郞, 1894~1982)의 시를 감상해 보자. (엎어진 보석) 같은 아침  몇 사람이 문 앞에서 누군가와 속삭인다  그것은 신의 탄생일 ―니시와키 준자부로 〈날씨〉 전문 고대 그리스 신들의 세계를 상상해 보면 고대 그리스적 풍경이 환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맑은 햇살과 신선한 공기가 충만한 눈부신 아침이 눈앞에 펼쳐진다. ‘(엎어진 보석) 같은 아침’이라는 1행의 비유는 3행의 ‘신의 탄생일’로 이어지고, 그 ‘신의 탄생’을 집 앞에서 신들이 속삭인다. 엎어진 보석처럼 투명하고 맑은 ‘날씨’, 아침은 밤의 (엎어진 보석)에 의해서 빛난다. 이 시에는 일본 근대시에 감도는 일본식 정서나 탐미적, 환상적인 정서가 없고, 드라이하고 지적인 서정이 있다. 니시와키는 청년기부터 그리스 문학이나 로마 문학 등의 고전문학을 애호했고, 또한 프랑스의 보들레르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의 새로운 시인들의 시를 좋아했는데 그러한 문학 서적과 시를 많이 읽으면서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니시와키 자신도 1963년에 나온 시집 말미에 이렇게 썼다.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의 시집 《달에 짖다》를 읽고, 처음으로 일본어로 쓰는 시 창작 충동을 느꼈다. 그전까지는 일본어의 문어체, 우아한 문체에 대한 저항감으로 인해 일본어로 시를 쓰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대부분 영문이나 불문으로 시를 썼다. 그러나 《달에 짖다》의 구어 자유시를 읽고부터는 거기에 전면적으로 찬의(贊意)를 품고, 다시 일본어로 시를 쓰기로 결의 ……  하기와라 사쿠타로가 인간 존재의 그림자 부분을 짙게 반영시킨 시인이라면 니시와키 준자부로는 그 그림자로서 빛을 조형한 시인이다. 니시와키의 시적 출발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한 시기에 플로베르를 탐독하면서부터였다. 30세 전후에는 런던에서 모더니즘 문학예술을 가까이 접하면서 그에 파고들었고, 32세 때에는 영어로 쓴 시집 《SPEOTRNM》(1925년 간행)을, 40세에는 일본어로 쓴 첫 시집 《Ambarvalia》를 출간한다. 〈날씨〉라는 시는 이 《Ambarvalia》에 수록되어 유명해진 단시이다. 니시와키 준자부로를 ‘초현실주의 시론’을 썼다고 해서 쉬르리얼리즘 시인이라고 단정하기 쉽지만 자신은 프랑스적인 쉬르리얼리스트가 아니고 오히려 쉬르내추럴리스트(초자연주의자)이고 싶어 했다.  프랑스의 쉬르리얼리즘은 꿈의 기록이나 형이상학적, 혹은 병적인 현상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이한 감각에 집착했다. 그것을 회화나 조각처럼 조립했지만 그 심리는 일종의 형이상학이었다. 쉬르리얼리스트들은 현실감과 지성을 뛰어넘는 구체적인 요소 속에 초현실적인 관계를 설정했고, 메커니즘은 인스피레이션(영감)이나 직감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리얼리즘이나 심리문학에 비해 자유로운 상상을 중시했다. 일본에서도 꿈속의 잠재의식을 분열적으로 기술한 우에다 도시오(上田敏雄)라든가 심리적 자동성의 순수한 표현을 남긴 다키구치 슈조(口修造) 등이 있다. 그러나 기타가와 후유히코, 하루야마 유키오, 니시와키 준자부로 등은 주지적인 형식의 독립을 주장했고, 대상의 감성적인 세계를 중요시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진정한 쉬르리얼리즘과는 약간 방향이 달랐다. 니시와키 준자부로는 시집 《Ambarvalia》를 내면서부터 전후에는 유럽풍에서 동양풍으로 돌아온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서 일본 시인들이 도전한 모더니즘 문학 운동은 마치 신종 개발의 실험장과 같았고, 어느 면에서는 혼란스럽고 비문학적인 측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시나 시론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시적인 현실성과 현재성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더니즘 시인들의 여러 작품을 감상해보자. ‘의미 없는 시를 쓰는 것에 의해 포에지의 순수는 실천된다’고 했던 기타조노 가쓰에(北園克衛, 1902~1978)는 정서도 의미도 배제하고 감각만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순수한 실험적 모더니즘 시인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 《VOU》를 창간했다. 그의 시 〈기호설〉은 추상화 같은 세계가 펼쳐진다. 이 시는 주지적이고 이미지적인 시의 방법을 확립한 시라고 일컬어진다. 기호설  기타조노 가쓰에  *  흰 식기  꽃  스푼  봄 오후 3시  희다  희다  빨갛다  *  프리즘의 건축  흰 건물  공간  *  푸른 깃발  사과와 귀부인  흰 풍경  (후략) ―시집 《흰 앨범》(1927년 출간)에서   다리  기타조노 가쓰에  조릿대 낙엽이 어깨에 떨어진다  미라보다리의 아폴리네르처럼 지나가는 빈한한 계절의  어느 날은 그 시냇물의 흐름을 따라 뽕밭이 쓰러지고  개도 소년들도 만년필을 먹은 것처럼 푸른 혀를 내민다  이 소년들은 제각각 머위의 잎을 받치고 있지만  그 머위 잎 속에서 뽕나무 열매가 챔피언 잉크처럼 빛난다            ―시집 《불의 뿌리》(1939년 출간)에서   날아들다  무라노 시로(村野四郞, 1901~1975)  나는 흰 구름 속에서 걸어온다  한 장의 거리 끝까지  크게 나는 휜다  시간이 거기서 주름진다  찬다, 나는 찼다  이미 하늘 속이다  하늘이 나를 끌어안는다  하늘에 걸리는 근육  하지만 탈락한다  따라와 들러붙어 찌른다     나는 투명한 촉각 속에서 바둥거린다  머리 위의 거품 밖에서  여자들의 웃음이나 허리가 보인다  나는 붉은 해안 우산의     거대한 줄무늬를 쥐려고 안달한다            ―시집 《체조 시집》(1939년 출간)에서  레다  다키구치 슈조(口修造, 1903~1982)  돌풍은 조개껍질을 컵처럼 공허하게 한다  등불은 꺼졌다!  달 아래는 수렵구역이 흰 부채처럼 누워 있다  그녀의 가봉바늘은 쉬고 있다  혼자서 걸으면 장미향이 난다  레다는 매달려 있다            ―시집 《요정의 거리》(1937년 출간)에서   한성례 | 1955년 전북 정읍 출생. 세종대학교 일어일문과 졸업. 1986년 《시와 의식》 신인상. 시집으로 《실험실의 미인》 《감색치마폭의 하늘은》 (일본어시집)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1리터의 눈물》 등 다수. 허난설헌 문학상 수상. 현재 한일 두 나라의 문학지에 교차해서 시를 번역 소개하며 시인·번역가로 활동 중. 현재 세종사이버대학교 겸임 교수.
1413    중국 아방가르드 당대미술가 - 종표 작품들 댓글:  조회:2297  추천:0  2015-08-26
                                                                                                         
■ 방송 : CBS   ■ 진행 : 박재홍 앵커  ■ 대담 : 장은수 (문학평론가)  출근길 만원 지하철을 기다리시면서 지금 이 시간에 라디오 들으시는 분들 많으시죠? 지하철을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래주는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지하철 내의 스크린도어에 실린 시 한편인데요. 대부분 읽기도, 이해하기도 쉬운 시들이죠. 보시면서 '덕분에 웃는다, 또 위로를 받는다' 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런데 일각에서는 '그래도 시인데 수준이 좀 떨어지는 건 아닌가?'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화제의 인터뷰에서는 출판사 민음사의 전 대표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은수 씨를 연결해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실린 시에 대해서 말씀 나눠봅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 장은수> 네, 안녕하세요.  ◇ 박재홍> 사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광고를 실으면 굉장히 수익이 남을 텐데요. 대신 시를 실었다는 말이죠? 취지는 참 좋은데 어떻게 보십니까?  ◆ 장은수> 광고 같은 것들을 실으면 수익성에 도움이 되고 그러겠죠. 하지만 시민들이 시를 쉽게 접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생각의 지평이 넓혀지고 그다음에 기쁨도 얻고, 그런 정신적 행복의 공간으로 지하철의 일부가 할애된 건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박재홍> 그런데 최근에 스크린 도어에 실린 시들의 수준이 ‘함량 미달이다' 이런 지적도 나오고 있어요.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적힌 시 (사진=유튜브 영상 캡쳐) ◆ 장은수> 좋은 시들은 약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거든요. 감춰서 어떤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주는데요.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실린 시들은, 생각할 여운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들을 남겨주지 않는 그런 작품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이 실려야 하나’ 이런 의견이 많이 나오고 있는거죠.  ◇ 박재홍> 그런데 사실, 시를 보고 읽을 때 ‘좋다, 나쁘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할 여지라든가, 여운 같은 건 굉장히 주관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객관적 기준으로 재단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 장은수> 시의 평가에는 객관적 평가가 있을 수 없죠.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거니까요 그런데 '어떤 시가 좋은 시냐?' 라고 한다면,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감각을 조금 더 확장시켜주고, 생각을 좀 더 깊게 만들어주고 어떤 대체적인 합의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만한 수준의 작품들도 게재가 되어 있지만, 상당수의 시들이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그런 시들은 교체해야 되는 건 아니냐,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 박재홍> 만약에 이런 시들이 문학상 같은 곳에 투고를 한다면 수상기준으로 봤을 때는 어떤 정도 수준으로 평가하세요?  ◆ 장은수> 어렵죠. (웃음) 문학성을 논의하기에 힘든 수준의 작품들이 굉장히 많고요. 그러니까 평범한 시민들이 써서 실리는 시도 있지만, 일부 기성시인의 작품에서도 상당한 수준미달 작품 같은 게 많이 있는 거죠.  ◇ 박재홍> 기성 시인들의 시와, 시민들의 시민공모전을 통해서 시가 실리고 있는데요. 시민들을 위한 공간이잖아요. 그러면 문학성이 조금 떨어져도, 시민들의 시가 실리는것도 의미있는 일은 아니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장은수> 네. 물론이죠. 그런데 시민들의 공모전으로 실린 시가, 제가 알기로는 많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시민들의 시가 실리는 건 문제없죠. 시민들에게도 어떤 즐거운 어떤 경험인데요. 그런데 시민 공모작도 좀 지나치게 많으면 오히려 조금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이 공적인 공간이잖아요. 조금 더 수준이 높고 사람들한테 좀 더 기쁨을 줄 수 있는 시가 많아지면 훨씬 좋지 않겠나, 그런 생각입니다.  ◇ 박재홍> 그렇다면 어떤 시가 스크린도어에 실려야 한다고 보시는 거죠?  ◆ 장은수> 고전들이 실려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몇천년의 문학사가 있고요. 사람들이 공감하기도 좋고, 사람들한테 기쁨을 줄 수 있는 그런 시들도 많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황진이 작품도 있고 허난설헌의 작품도 있고 다산 선생님 작품도 있고 김소월, 윤동주의 시, 다 좋은 작품들이잖아요. 그런 작품들로 좀 더 개방돼서, 시민들한테 좀 널리 읽히면 스크린도어 공간이 좀 더 공공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박재홍> 그러니까 오랜 시간 동안 고전으로 사랑 받아왔던 우리의 보편적인 시들이 실리면, 더 좋은 문화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인데요. 그러면 지금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실리는 시는 어떤 과정을 통해 실리나요? 논란이 나오는 이유가 있습니까?  ◆ 장은수> 7개의 문학단체에 의뢰를 하고요. 그다음에 시민공모전을 통해서 11명 정도의 심사위원들이 그 작품을 골라서 싣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대부분의 단체들이 활동은 실질적으로 하지 않거나, 한다하더라도 아주 수준 높은 작품을 생산하는 그런 분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라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거든요.  그 단체들의 회원들의 시도 굉장히 많이 올라오고 있는데요. 그중에 일부는 지하철에 실리는 것이 본인 스스로한테 명예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명예가 되는 걸 이용해서, 문단 내부에서 약간 좀 장사를 한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생각 합니다.  자기들이 추천한 시를 자기가 올리는 거잖아요. 자기가 자기를 심사하면 문제가 된다고 생각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자기 작품을 게재했을 때 생기는 폐단 같은 것들은 항상 나올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들의 시, 그리고 문학적으로 검증된 시들이 좀 더 많이 실려주면 시민 공모작하고 서로 어울려서 좋은 문학적 향유 공간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 박재홍> 좀 더 면밀한 기준을 통해서 실어야 된다는 말씀이신 것 같네요.  ◆ 장은수> 네. 너무 주관적으로 자기 단체 회원 중에서 뽑는다? 이런 건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 박재홍> 그렇군요. 그리고 또 시뿐만 아니라 일각에서는, 고전 소설이나 명작 속에 좋은 문장이나 구절을 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장은수> 좋은 의견입니다. 광화문 교보빌딩에 있는 글판은 가끔씩 산문에서 글을 따오기도 합니다. 모든 문학작품에는 시가 들어있거든요. 그런 어떤 아름다운 구절들, 이런 것들이 게재가 되면 어떨까, 만약 시 작품 수가 부족하다면 이 역시 좋은 대안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 박재홍> 많은 시민들이 접하는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실리는 시인 만큼, 좀 더 면밀한 검토를 해서 많은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가 실리면 좋겠습니다. 말씀 여기까지 들을게요. 고맙습니다. 
1411    트로트 100곡 제목 댓글:  조회:7214  추천:1  2015-08-25
  트로트 100곡       01. 이승아 / 뜸북이 사랑  02. 싸 이 / 강남 스타일  03. 오운하 / 간데요 글쎄  04. 장 민 / 스쳐간 이별  05. 똑순이 / 너무 합니다    06. 박진석 / 왜가요 왜가  07. 민 희 / 10 분내로  08. 김인수 / 아미새  09. 홍인숙 / 조약돌 사랑  10. 한지운 / 이슬같은 여인    11. 정선화 / 잠자는 공주  12. 박영구 / 나를 사랑한 여자  13. 고속녀 / 이별의 고속도로  14. 한상훈 / 산까치  15. 주현미 / 추억속에서    16. 오승근 / 여자하나 남자둘  17. 고혜진 / 열두줄  18. 진 성 / 정때문에 울긴 싫어요  19. 최유나 / 단한번 만난 얼굴  20. 이찬이 / 눈물도 없는 여자    21. 배창자 / 수 심  22. 최정표 / 유리벽 사랑  23. 오설화 / 사랑합니다  24. 박영구 / 시계바늘  25. 염수연 / 좋았다 싫어지면    26. 나일강 / 사랑의 철새  27. 똑순이 / 당신쯤이야  28. 김 운 / 질긴 정  29. 권선아 / 눈물로 고하는 이별  30. 진 필 / 내사랑 삼순이    31. 홍인숙 / 천년을 빌려준다면  32. 신 웅 / 어북쟁반  33. 이민숙 / 나를 묶지 말아요  34. 양지원 / 사랑의 도둑  35. 최영애 / 그사람 찾으러 간다    36. 장 민 / 일장춘몽  37. 김미진 / 어쩌나  38. 한동엽 / 검정고무신  39. 홍인숙 / 남자라는 이유로  40. 해태남 / 신비한 사랑    41. 민 희 / 당신 뿐이고  42. 김규학 / 동동구르므  43. 고혜진 / 화려한 싱글  44. 원 준 / 사나이눈물  45. 솔 라 / 너는 내남자    46. 송지호 / 내 청춘의 한페이지  47. 유갑순 / 여인우정  48. 박진석 / 눈을 감고 사랑하리  49. 오설화 / 보고싶은 여인  50. 허풍수 / 꽃잎사랑    51. 민 희 / 빙빙빙  52. 김인수 / 고장난 벽시계  53. 주현미 / 영동은 지금 두시 삼십분  54. 신 웅 / 다시 태어난 남자  55. 이민숙 / 어 이    56. 이희래 / 혼자사는 여자  57. 최유나 / 당신의 눈물  58. 김정명 / 당신은 나의 운명  59. 금희각설이 / 나도 한땐 날린여자  60. 장 민 / 저하늘 별을 찾아    61. 설 화 / 삼백리 한려수도  62. 이철민 / 물새야 왜우느냐  63. 똑순이 / 옛시인의 노래  64. 해태남 / 황진이  65. 차미미 / 단골손님    66. 이호진 / 두견화 사랑  67. 배창자 / 대구 머스마  68. 이철민 / 향수에 젖어  69. 고혜진 / 사랑해  70. 라영수 / 바보같은 사나이  71. 오설화 / 보고싶은 여인    72. 김홍조 / 사랑과 인생  73. 한송이 / 내가 왜 웁니까  74. 김 홍 / 마지막 본 당신  75. 김성숙 / 우지마라    76. 원 준 / 그사람이 그사람  77. 신 웅 / 남남으로 가는 당신  78. 이화정 / 정에울고 님에울고  79. 신 유 / 나좀봐  80. 주현미 / 천호동의 밤    81. 오희라 / 내인생 마지막 여인  82. 양지원 / 당신의 트로트  83. 이민숙 / 빗속의 포장마차  84. 양부길 / 추억의 포장마차  85. 현수연 / 첫 정    86. 김경민 / 인생은 새옹지마  87. 김현분 / 독수공방  88. 이창휘 / 거짓말  89. 권미라 / 한줄기 바람처럼  90. 원 민 / 두여인    91. 영란이 / 유정천리  92. 유성일 / 사랑이 뭐길래  93. 오희라 / 사랑의 굴레  94. 나진아 / 짐이된 사랑  95. 주현미 / 산처녀    96. 장안평 / 옥분이  97. 황은자 / 연변에서  98. 이찬이 / 추풍령  99. 김동아 / 몇미터 앞에두고  100. 남미랑 / 옥이엄마  금메달   답변추천해요0   트로트 100곡 제목     장윤정 40곡 벚꽃길 오! 마이 러브 (Original Ver.) 반창고 초혼II (송인) 사랑해요 바람길 오! 마이 러브 (Acoustic Ver.) 초혼 (2015 Ver.) 사랑아 (2015 Ver.) 반창고 (Inst.) 사랑해요 블란서 영화처럼 목마른 사슴 블란서 영화처럼 (Inst.) 당신이 좋아 안동역에서 왔구나 왔어 내사랑 로미오 제발 부탁이야 케 세라 세라 필연 아모레 미오 준비됐나요 꿈속의 사랑 곡예사의 첫사랑 과거를 묻지 마세요 잊으리 카츄샤의 노래 왔구나 왔어 (Rock Ver.) 네버엔딩 스토리 (부활) 얼쑤 (윙크) 사랑이여 영원히 (김종환) 애월랑 (愛月浪) 올래 불나비 아차차 스타킹 단념 초혼 송인   태진아 50곡 사모곡 전통시장 전통시장 (방송용 MR) 전통시장 (Inst.) 사랑타령 하얀눈 자기야 좋아 옥경이 사모곡 사랑은 아무나 하나 동반자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잘 살꺼야 바보 사랑은 돈보다 좋다 그저 그렇게 아줌마 미안 미안해 거울도 안보는 여자 노란 손수건 잘났어 정말 애인 가버린 사랑 사랑은 눈물이라 말하지 사랑타령 (Inst.) 아름다운 구속 자기야 좋아! LA SONG 이름모를 소녀 하얀눈이 내리네요 (Feat. 김동규) 비켜간 사랑 혼자 눈뜨는 아침 남남 물레타는 여인 아랫마을 이쁜이 포기하지마 자기야 좋아! (Inst.) 하얀눈이 내리네요 (Inst.) 하얀눈 (Feat. 김동규) 당신의 눈물 홀로 된다는것 정 빗속의 여인 돌아보지마라 찻집의 고독 미련 당신은 몰라 사랑은 돈보다 좋다 (Feat. 마야) 내사랑 마리아 후회   송대관 46곡 고향이 남쪽이랬지 아내의 생일 딱 좋아 오빠가왔다 안동역에서 내 나이가 어때서 니 부초같은인생 고장난 벽시계 시계바늘 삼각관계 무슨사랑 사랑찾아 인생찾아 나쁜사람이야 여백 유리벽사랑 미운사랑 이력서 남자의 눈물 정답 꽃물 십분내로 남자의 인생 우지마라 내장산 목계나루 고향가는길 눈에삼삼 귀에맴맴 뽀뽀 천년쯤 오라버니 사랑아 내사랑아 아이좋아라 신미아리고개 춘향아 사랑아 가자 나의 이상형 일편단심 검정고무신 아슬아슬 입술위에 꼭꼭 천년지기 정주고 내가우네 오빠가 왔다 그대만 있으면 초원의 연인들  
1410    전위예술 = 아방가르드 댓글:  조회:6746  추천:0  2015-08-22
두산백과 전위예술 [ 前衛藝術 ]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미국 등에서 일어난 예술운동으로 기존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예술의 개념을 추구하였다. 전위라는 용어는 프랑스어 아방가르드:avant-garde를 번역한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군사용어로, 전쟁에서 본대에 앞서 적진의 선두나가 적의 움직임과 위치를 파악하는 척후병을 뜻한다.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예술에 전용(轉用)되어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예술을 탐색하고 이제까지의 예술개념을 일변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예술경향 또는 그 운동을 뜻한다.  예술이 종교적인 후원과 그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종교적 관점에서 예술이 성립되는 기준에 따라 발전하였다. 종교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예술은 부르조아의 전유물이 되었고 장식적이고 충실한 현상의 재현과 묘사적인 테크닉에 따라 예술의 가치를 평가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진이 등장하고, 녹음이라는 획기적인 기술이 당시 예술가에게는 충격적인 변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예술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아카데믹한 예술에 저항하는 새로운 경향의 예술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종교나 부르조아의 후원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예술가 개인의 개성이 독특하게 표현된 예술품들이 새롭게 인지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예술적 기준을 부정하고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는 예술적 경향을 아방가르드 예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탈리아에서 미래파운동(futurism)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시인 마리네티(Filippo TomasoMarinetti)가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피가로(Figaro)》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미래파를 선언하였고 '새로운 시대에는 그에 맞는 생활양식과 표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을 예술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받아들였으며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념이 철처히 붕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립국인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다다이즘(dadaism)은 기존의 관습적인 예술을 부정하고 이를 타파하는 예술을 추구하였다. 후고 발(HugoBall)이 카바레 볼테르를 열어 이곳을 중심으로 '다다(dada)'라는 의미없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존의 예술적 기준과 상반된 예술행위와 표현을 보여주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예술과 비슷한 것이라면 모두 부정했다. 스위스에는 1차 세계대전을 피해 모여들었던 유럽 각국의 예술가들이 활동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독일과 프랑스, 미국 등에서 활동하며 '다다'라는 전위적 예술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전위예술은 기성예술에의 반항이나 혁명정신 그 자체가 대중사회의 다양한 풍속 속에 확산하여 전위예술은 특정 유파나 운동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경향의 예술을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1409    라틴아메리카 시문학 댓글:  조회:5498  추천:0  2015-08-22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지식리스트는 바로 '이것'  자동완성 켜기   담기수정문의보내기인쇄하기 글꼴설정말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이해 시   호세 마르띠 초상화 호르헤 아르체의 유화 (1) 선구자들 시가 중심이 된 모데르니스모의 선구자로는 마누엘 곤살레스 쁘라다(Manuel González Prada), 호세 마르띠, 마누엘 구띠에레스 나헤라(Manuel Gutiérrez Nájera), 훌리안 델 까살(Julián del Casal), 호세 아순시온 실바(José Asunción Silva) 등을 들 수 있다. 페루의 곤살레스 쁘라다(1848.-1918.)는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사회악, 고통 그리고 존재의 부조리 등을 노래했으며 시형식에 있어서 자유로운 운율과 외국의 시형식을 빌어왔다. 호세 마르띠(1853.-95.)는 독립전쟁에서 전사하여 쿠바 독립의 아버지로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모든 장르의 문학을 썼다. 특히 그가 남긴 편지, 에세이, 연설, 일기, 신문기사 등은 그를 모데르니스모 산문의 진정한 창시자로 간주하게 한다. 그의 시 역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스마엘리요(Ismaelillo)』, 『간결한 시(Versos sencillos)』 그리고 『자유로운 시(Versos libres)』 등 세 권의 시집에 담겨 있다. 구띠에레스 나헤라(1859.-95.)는 멕시코 모데르니스모의 창시자로서 주로 죽음과 같은 철학적인 주제의 시를 썼으며 이미지, 메타포, 비교법 등의 수사법에서 독창성을 보여준다. 훌리안 델 까살(1863.-93.)은 마르띠와 마찬가지로 쿠바의 시인이지만 정치적인 주제도 마다하지 않았던 마르띠와는 정반대로 순수한 '상아탑'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시는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한 이국취향적 시를 즐겨 썼으며 완벽하게 자유로운 시 형식을 택하였다. 아순시온 실바(1865.-96.)는 평생을 죽음의 강박관념 아래 살았던 콜롬비아 시인이다. 때문에 그의 시에는 죽음과 연관된 밤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며 즐겨 회상하는 유년시절은 잃어버린 낙원을 상징한다. 그는 전통적인 시 형식을 거부하고 매력적인 음악성을 추구하였다. 루벤 다리오 초상 (2) 루벤 다리오(1867.-1916.) 니카라과 출신의 루벤 다리오는 진정으로 모데르니스모 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3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15세가 되던 해에 엘살바도르에서 만난 프란시스꼬 가비디아를 통해 프랑스 낭만주의와 고답파 시인들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초기 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인은 깜뽀아모르(Campoamor), 소리야(Zorrilla), 베께르(Béquer) 등 스페인 낭만주의 시인들과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였다. 그는 1898년 아르헨티나의 『라 나시온(La Nación)』의 특파원으로 스페인에 가서 모데르니스모 운동을 출발시키며 가장 널리 알려진 중남미 작가가 되었다. 시와 산문이 실려 있는 『푸름(Azul)』(1888.)은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주면서 모데르니스모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 된다. 1896년에 나온 『세속 산문집과 다른 시 모음(Prosas profanas y otros poemas)』는 이 시운동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시집이다. 그의 시어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섬세하고 관능적인 언어, 귀족주의, 혁신적인 운율, 음악성, 비정치성, 이국정취, 고전 찬양 등을 들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상아탑 속에 갇힌 모데르니스모 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회성과 동떨어진 이러한 시적 성향은 흔히 백조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오 백조여! 오 신성한 새여! 그 옛날 고운 헬레나가 은총을 받아 레다의 푸르름으로부터 나와 아름다움의 불멸의 여왕이 되었다면 너의 하얀 날개 아래 새로운 시가 빛과 조화의 영광 안에 품고 있구나 이상을 구현하는 영원하고 순수한 헬레나를.1) 한편 『삶과 희망의 찬가(Cantos de vida y esperanza)』(1905.)는 이전의 수사적 경향보다는 더 내밀하고 심오한 차원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여기에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강박관념, 종교적인 주제, 형이상학적 고뇌가 드러나 있다. 또한 이전의 코스모폴리턴적 시각에서 벗어나, 「루스벨트에게 보내는 편지」, 「스페인에서의 시라노」, 「돈키호테에 바치는 연도」 등의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스페인어를 쓰는 아메리카 인으로서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시인은 미국의 자유주의 시인이었던 월트 휘트먼의 목소리를 빌어 미국 제국주의를 고발한다. 루스벨트, 당신은 무서운 포수와 사나운 사냥꾼이 되야 하리, 우리를 그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는2) 이러한 의식은 후에 나온 시집, 『아르헨티나 찬가와 다른 시 모음(Canto a la Argentina y otros poemas)』(1914.)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즉 시인은 스스로를 아메리카의 시인이라면서 가우초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을의 시와 다른 시 모음(Poema del otoño y otros poemas)』(1910.)에서 보듯이 후기시에서 사랑과 같은 인간적인 주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루벤 다리오가 이후 스페인어권 문학에 남긴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대하며 특히 20세기 중반의 풍요로운 시 전통과 붐소설의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3) 루벤 다리오 이후 멕시코의 아마도 네르보는 스페인에서 루벤 다리오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시인이다. 특히 그의 동반자였던 아나 마리아 다이예스의 죽음을 노래한 『움직이지 않는 연인(La amada inmvil)』(1912.)은 오늘날 보기에는 다소 센티멘털리즘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시집이다. 이 밖에도 「작은 목소리로(En voz baja)」, 「고즈넉함(Serenidad)」 등의 시는 시인의 정신적인 위기와 종교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우루과이의 훌리오 에레라 이 레이시그(Julio Herrera y Reissig, 1875.-1910.)는 훌리안 델 까살과 마찬가지로 환멸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를 썼다. 특히 비인간적인 도시생활과 대비되는 농촌의 평화로운 삶과 순수했던 과거를 애상적으로 그린다. 『산의 엑스타시스(Los éxtasis de la montaña)』, 『바스크 소네트(Sonetos vascos)』, 『스핑크스의 탑(La torre de las esfinges)』 등의 시집이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레오뽈도 루고네스(Leopoldo Lugones, 1874.-1942.)는 모데르니스모 시운동의 후기에 속하면서 아방가르드 시의 선구자로 꼽히는 시인이다. 독학을 했으나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다양한 사상을 섭취했다. 미학적으로도 서정시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미학적 실험을 하였다. 초기에는 상징주의로 출발해 신고전주의를 받아들였으며 다시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황금 산(Las montañas del oro)』, 『정원의 황혼(Los crepúsculos del jardín)』, 『메마른 강의 로만세(Romances delRío Seco)』 등의 시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이해, 2000. 8. 15., 학문사)  
1408    포스트모더니즘 - 문학비평용어 댓글:  조회:7323  추천:0  2015-08-22
    권택영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더니즘의 반발인가, 연장인가, 모더니즘과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외래용어는 우리 문화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 세기의 마감을 앞에 두고 요즈음 이런 질문들이 오가는 것은 아마도 20세기의 후반부를 지배한 다른 나라의 문화현상을 진단하고 그것이 우리 문화와 갖는 관련성을 되돌아보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시대의 문화현상은 늘 당대의 역사적 현실과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앞서간 시대와 어떤 식으로든지 관련을 맺는다. 그것은 기존의 사고체계나, 미학의 방식이 더 이상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은 경우 실험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아방가드는 일어나는 당시에는 아무리 새롭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전통의 일부로 수렴되고 마는 운명이어서 그것이 반발인가 연장인가의 문제는 그리 단순히 어느 쪽만을 택할 수 없게 한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어느 비평가의 이론도 그것이 발표되던 시기, 그 사람이 처한 환경, 의도 등을 고려하여 평가해야 할 문제이지 그 이론 자체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론만큼 매력적이면서도 자의적이고 손안에 든 미꾸라지처럼 틈새만 있으면 빠져나가려 드는 게 어디 있는가. 가장 명확하게 어떤 현상을 가늠하면서도 제 스스로 무너질 수 있는 맹점을 지닌 것이 이론의 운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반발인가, 연장인가를 따지기 전에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부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고 용어도 미국의 것이지만 그 현상은 영국, 불란서, 남미 등 모더니즘보다 오히려 더 주변국가들과 관계를 맺고 있고 제3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분야에 있어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모습을 드러낸 건축양식으로부터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무용 등 문화 전반에 골고루 퍼진 문화양식이다. 그리고 이런 양식의 저변에 흐르는 철학이나 비평이론들은 당대의 정치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주변적인 것의 귀환, 절대이념의 와해, 개성의 중시, 논리의 다원화, 다국적 기업, 소수민족운동, 여성운동, 소유로부터의 탈출 등, 애초에는 소설양식에서의 새로움을 표현했던 용어는 이제 반세기의 문화 전반을 상징하는 것으로 확대된 느낌이다. 그러나 커다란 흐름에서는 공통점이 있는듯하면서도 분야마다 차이를 갖기 때문에 이 새로움에 대한 접근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80년대 논의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큰 덩어리처럼 놓고 너무 쉽사리 이렇쿵 저렇쿵 요리를 해댄다. 예를 들어 최근의 맑시스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사회의 문화논리로 보고 상품사회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순응함으로써 정치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들의 논의에도 일리는 있으나 이것은 분야별로 시대별로 좀 더 세분되어 따져야 할 문제이다. 인간성의 해방과 열린 공간, 상상력의 확대, 안락과 미의 추구, 원시적인 환경으로의 복귀를 위해 60년대 중반부터 분산화를 시도한 건축운동이 본이 아니게 상업주의를 부추겨 결국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나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또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려는 문화의 대중화가 자본시장의 구매충동과 영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팝아트와 난해함으로 읽히지 않던 메타픽션은 구별되어야 하고 반세기의 흐름 안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개별영역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차이가 무시된 채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학형식의 구체적인 얘기 무시된 채 포스트모더니즘이 옳다 그르다는 이론적인 논쟁은 이해보다는 오해를 낳기 쉽다. 이 글은 문학의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일어난 시기, 변해 오는 과정, 형식상의 특징 들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는 가운데 모더니즘과의 차이점 및 공통점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최근의 논쟁들을 요약하고 그 의미를 간추려 본다. 한 시대의 미학이론은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세워진다. 그것은 이미 정설이 되어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억누르는 기존의 사유체계에 대한 반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에서 출발하기에 마감의 시점에서 보면 기존의 연장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반발인가 연장인가는 경계선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렇듯 얼핏 쉬워 보이는 가름이면서도 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에 유독 논쟁이 야기되는지 둘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내 보고 싶은 게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다.   1. 흐름   약 한 세기 전, 그러니까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있는 사실을 그대로 그리자던 사실주의 문학은 점점 자연주의적 색채를 띠고 세기의 문지방을 넘는다. 다원의 진화론, 부흥하는 상업주의, 게다가 실험대에 올려놓은 듯 인간을 냉정히 관찰하려던 실증주의적 태도는 어느덧 인간을 환경과 유전의 산물로 보게 된다. 인간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렇게 내재된 자유의지도 고상한 상상력도 없다. 바람 속의 지푸라기나 햇빛을 맞는 향일성 식물처럼 본능과 환경을 좇아 움직인다. 이처럼 자연주의 문학은 어두운 인간의 속성을 냉정히 파고들어 설득력 있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계를 맞게 된다. 인간이 언제까지나 동물과 같은 차원에 머무를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더 이상 내려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객체에 대한 냉혹한 시선을 거두고 주체의 진실로 접근해 보자. 진실을 보는 각도를 바꾸는 것이다. 비평가 노드롭 프라이는 19세기 사실주의와 20세기 모더니즘을 객체의 진실과 주체의 진실에 접근하는 두 가지 다른 방향의 미학이론으로 본다(『비평의 해부』). 어떻게 하면 대상을 더 정확히 그리느냐는 객체의 진실이고 그 진실이 얼마나 주관적인가를 그리는 것은 주체의 진실이다. 인간을 객관대상으로 본 자연주의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전환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주는 한층 더 혼동을 향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은 반발이면서도 동시에 연장이었다.   모더니즘 : 그 혁명성과 보수성 20세기초에 일어난 철학, 미학, 언어학의 공통점은 인간을 객관대상이 아닌 구조하는 주체로 보는 거이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상징주의, 후기 인상파, 표현주의 등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대략 1910년대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10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상징주의에 반발하고 작품의 내용보다 형식을 우선시킴으로써 낯익은 것이 내리는 명령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말의 의미, 혹은 내용이라는 이념이 내리는 명령을 벗어나 한 단계씩 형식을 감상하면서 나름대로 의미를 엮는 것이다. 그러므로 낯설게 하기는 객체의 진실보다 인식주체의 경험을 우선시키는 미학이론이다. 191년대 중반 언어학의 소쉬르는 일반 언어코스의 강의노트에서 언어연구를 빠롤과 랑그로 구분한다. 지금까지는 언어의 역사적 측면, 혹은 의미의 측면을 연구해 왔으니 이제 그 언어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의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들추어 보자는 거다. 이것은 언어를 의미 그자체로 본 것에서 자의적인 구조체계로 보는 방향전환이었다. 말하자면 매끄럽게 보이는 온갖 진리와 정설의 겉자락을 들추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봄으로써 진실의 자의성, 혹은 주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언어는 한 언어조직내에서 다름(차이)에 의해의미를 갖는 자의적 구조라는 정의는 온갖 매끄러운 개념이나 논리 속에 내재된 상대적 구조를 암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절대저인 것처럼 보이는 문화현상 뒤의 숨은 보편구조를 밝혔고 토도로프는 개별작품 속에 숨은 보편구조를 찾았다. 이처럼 빠롤이 아닌 랑그 찾기는 진리의 절대성으로부터 주관성으로, 진리의 닫힌 체계로부터 열린 체계로의 전환이었다. 본질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는 실존주의, 주관에 비친 진실을 그리던 입체파, 로고스, 즉 신은 죽었다는 니체, 개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주관적인 경험에 가치를 둔 현상학 등, 20세기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구조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실천이라도 하는 듯 시작된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물리학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인간 인식의 망에 포착되는 진리란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회의론의 출발이었다. 비평가 맬컴 브래드버리 Malcolm Bradbury는 모더니즘을 앞 시대와의 결벌 같은 것으로 본다.1) 파편성, 당혹성, 해석의 주관성, 다양화, 예술지상주의, 구조찾기, 기교중심주의, 회의주의, 불확실성의 논리, 무질서, 절망, 무정부적, 중심와해 등등. 그가 열거하는 모더니즘의 특징들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 서구 전지역을 휩쓸던 거의 혁명적이다시피 하게 일어난 새로움들이다. 그런데 그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성, 주관성, 허구성, 중심와해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과 다를 바 없는 어휘들이 튀어나온다. 말이 갖는 추상성 탓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구별을 위해 실제 작품의 예를 들어 모더니즘의 특징을 살펴보자. 비평가들은 흔히 모더니즘의 최고 절정기간을 191년에서 30년 사이로 꼽는다. 미국에서는 시에서의 이미지즘운동과 파운드, 엘리어트, 그리고 거투르 스타인에게서 기법을 배운 헤밍웨이의  초기소설들로부터 시작되어 스티븐즈와 포크너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영국에서는 조이스와 울프, 불란서에서는 프루스트와  지드가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매끄러움을 와해시킨다. 흔히 모더니즘을 전통에 반기를 든 혁신운동으로 보는 비평가들 가운데는 브래드버리나 제랄드 그라프 Gerald Graff처럼 이를 낭만주의와 쉽사리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미지즘운동이나 엘리어트의 객관상관물이론은 앞시대의 낭만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일어났다. 파운드나 엘리어트가 실어한 것은 무엇보다도 감정이 축축한 직설적 표현, 그리고 개성을 알알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감정의 몰입(롱기네스의 낭만주의 전통인 엑스타시)을 싫어하고 감정의 거리두기(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주의 전통인 카타르시스)를 원했던 것이 모더니즘이고 보면 그것은 묘하게도 진리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혁명성 속에 고전적인 질서찾기를 담고 있는 이중적인 것이다. 엘리어트는 전통 속에 시인의 개성을 용해시켜 보편질서를 찾았고 헤밍웨이는 자신에게 보이는 용기에서 출발하여 사회정의로 나갈 것을 원했으며 스티븐즈는 우주의 무질서 속에서 상상력, 오직 예술만이 지서를 내린다고 믿었다. 이들은 모두 혼돈의 우주, 신의 죽음, 객관진리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논리와 이념 대신 개인이 도덕과 단련을 중시했다. 그들의 역사의식은 직접 사회를 향하지 않고 개인을 통해 나가려는 우회적인 것이었다. 감정몰입이 아닌 거리두기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이다. 개인이 사회를 떠나고 개인의 상상력이 중시되고 예술의 세계로 도피하고 기법에 탐닉하고 게다가 진리의 주관성을 강조하는 게 얼핏 낭만주의의 한 갈래인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단련과 질서찾기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마치 구조주의가 모든 정설이나 매끄러운 논리가 어떻게 구조된 것인가를 들춘 것은 혁명적인 것이었으나 그 속에서 끊임없이 라는 보편구조를 탐색한 것과 비슷하다. 객관진리가 허구이고 진실이 자의적임을 인식했을 때 모더니스트들은 혼동과 무질서의 우주 앞에 직면한다. 그들이 돌아서고 기댈 곳은 개인의 용기, 도덕, 단련, 그리고 상상력의 연습이었다. 이런 혁신과 보수라는 모더니즘의 이중성이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관계를 밝히는데 혼란을 야기시키곤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의 하버마스Jurgen habermas는 모더니즘만이 진정한 혁명이라고 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부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혁신과 보수 둘 다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을 계몽주의와 하비주의 속에서 찾는 그에게 이성을 거부하는 듯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계획을 무산시키려는 음모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포크너의 소설을 예로 들어 모더니즘의 양면성을 논해 본다. 한 사람의 서술자가 소설 전체를 책임지던 사실주의와 달리 포크너의 실험 소설은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에 의해 엮어진다. 등장인문들이 자신의 의식을 오가는 생각들을 서술하는데 이때 형식은 그의 개성이요, 내용은 자의적이다. 예를 들어 조야한 언어가 유난히 많은 서술은 그 인물의 거친 성격을 드러낸다. 일인칭 주어를 소문자로 쓰는 경우는 도피적 성격을 드러낸다. 돈을 좋아하는 인물은 유난히 (현금)란 단어를 들먹인다 등, 저자가 등장인물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성격을 가늠해야 한다. 내용에서도 서술자를 그대로 믿던 사실주의와 달리 등장인물들의 서술을 읽고 우선 한걸음 물러난다. 이 친구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인물들의 얘기와 비교하여 객관성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같은 사건을 어떻게 달리 보는 가를 살펴 그 인물의 성격을 추측하고 그 속에 묻힌 사건의 윤곽도 밝혀야 한다. 입체파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혁신적인 기법의 보수성은 무엇인가. 우선 서술에 직접 몰이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판단을 유보하는 데 독자의 상상력과 자율성이 요구된다. 어떤 진술에 대해 일차적인 의문을 던지고 그 겉자락을 들추어 그 말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를 따지기에 힘들게 얻어지는 과정이 단련을 요구한다. 그리고 독자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여 의미를 합성해 내는 과정을 통해 진실의 상대성, 혹은 자의성을 경험케 된다. 그런데 사실주의에서처럼 매끄러운 서술을 통해 의미가 전달되지는 않아도 모더니즘에서는 여전히 작가가 흩어진 서술을 통해 어떤 내용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를 읽으면서 독자는 네 사람의 서술을 통해 콤슨가의 몰락과정과 그 원인을 감지하게 된다. 여전히 그의 전통적인 도덕률이 반영되어 있고 그리고 사실과 허구의 경계선이 존재하는 것, 이런 점들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비교하여 모더니즘이 갖는 보수성이다.   포스트모더니즘 : 반동과 연장의 이중성 진리의 주관성이라는 회의주의에서 출발한 모더니즘은 그 자체가 지닌 보수적 성향 때문에 예술의 고급화를 초래한다. 의식의 흐름수법, 복수시점, 자동기술, 객관상관물이론 등 기법은 점차 난해지고 개인은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예술지상주의에 몰입하는 인상을 낳게 된다. 게다가 모든 아방가드의 운명이 그렇듯 태어날 때의 혁신적인 요소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현실로 흡수되어 또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지는 경향을 띠게 된다. 위대한 모더니스트들이 죽고 세계대전으로 사회의식이 고조되면서 1930년대 이후 사실주의가 미국과 영국에서 부활되기도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 똑같은 양상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어서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은 1950년대에 가서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50년대 미국에서는 노먼 메일러, 멜라무드, 솔 벨롤우, 랄프 엘리슨 등 유태계와 흑인작가들이 서서히 인간과 사회를 연계시키는 듯한 작품을 쓴다. 이들의 작품에는 모더니스트들과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우선 예술의 세계로 몰두하는 듯한 기법의 난해성, 복수시점 등이 없어진다. 그리고 진지함이 우스꽝스레 회화되고 작가의 도덕적 메시지가 흐려진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져서 사회가 작품 속에 들어오긴 하는데 사실주의와 달리 견고한 조직이 아니고 비현실적이다. 흔들리는 도덕적 모호성, 블랙 유머, 주인공 아닌 주인공 등 이제 소설은 부조리에 관한 게 아니라 부조리 그 자체가 되는 듯 했다. 비평가 어빙 호우 lrving Howe는 이런 현상을 모더니즘으로부터의 이탈현상으로 보아 이라 이름붙인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50년대는 전환기였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기는 하지만 아직도 픽션은 리얼리티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전화기는 시에서도 나타난다. 모더니즘의 도덕적 진지함과 난해한 기법으로부터 벗어나 자서전이나 개인의 감흥이 시 속에 그대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로웰, 로드크를 지나 알렌 긴즈버그에 이르면 엘리어트의 시와는 엄청난 거리를 지니며 시의 대중화가 이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고급화된 예술양식, 개인 감흥의 절제와 달련, 그리고 아직도 소실이 무언가 진지한 도덕을 전달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현학적이고 위엄 있는 예술양식에 대한 반발이었고 급변하는 현실에 그 양식이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당대 상황과의 대응책이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한 우주시대의 열림, 캘리포니아 문화의 다원화현상, 뉴욕을 중심으로 한 불란서 실험문화의 영향, 그리고 민권운동,  여성운동, 반전운동, 케네디와 킹 목사의 암살 등 작자가 현실(혹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때 정치와 초연한 채 기법에 탐닉해 있는 모더니즘은 맞지 않는 이념이요, 양식이 되고 만다. 고백시, 투사시, 즉흥시, 여성시가 쏟아지고 개인의 열정과 욕망을 막는 어떤 기준도 거부된다. 마치 자살하기 위해 태어난 듯싶은 실비아 프랱의 시에서 자신의 욕망을 막는 기준이나 지서는 아버지, 나치 등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인간의 저속하고 추한 모습을 더 이상 감추지 말고 드러내자는 것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메일러는 단련과 고상함 뒤에 숨은 미국의 억눌린 광기를 암으로 상징했다. 긴즈버그와 친구였던 윌리엄 버로우는 『발가벗은 점심 The Naked Lunch』1959에서 섹스와 마약 등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세계를 저속한 어휘로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마치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 긴즈버그는 엘리어트에 도전하는 『신음소리 howl』를 쓰고 버로우는 헤밍웨이와 포크너의 도덕적 진지함을 회화시키는 벗은 작품을 쓴 것이다. 보네겉의 주인공들을 보면 한결같이 어린애 같고 우매하고 교활하다. 저지 코진스키의 주인공들은 의지도 생각하는 힘도 느낌도 없는 無 그 자체이다. 주위 사람들에 의해 성격이 주어지는 완전한 수동형이다.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몸부림, 어떤 기준도 단련도 거부하는 윈시에의 향수, 본능의 향휴 등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다져온 기준 밑에 숨은 광기를 드러내 사회와 인간을 정화시키려는 듯 격렬한 벗어던지기 운동이었다. 혼돈을 직시하고 감정의 거리두기를 통해 질서를 찾으려던 모더니즘이 다분히 고전적이라면 개성을 강좌고 기준을 무너뜨리고 혼돈 그 자체를 인수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다분히 낭만적이다. 이것이 둘 사이의 가장 뚜렷한 차이요,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반발로 볼 수 있는 측면이다. 그런데 반발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은 후일 연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로 출발한 모더니즘은 진리가 주관적이라고 하면서 여러 인물들의 서술을 통해 그것의 상대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조차 거부한다. 현실과 환상이 혼합된 소설을 통해 온갖 진리가 허구임을 드러낸다. 언어는 실체를 지칭하지 못하고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소설이 제 꼴을 돌아다보는 자아반사적 픽션이 나타난다. 데리다가 구조주의의 상대성을 뒤엎고 진리의 허구성을 드러내듯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상대성이라는 열린 체계를 한층 더 밀고 나가 다원성에 이른다. 담론의 자의성 드러내기가 아니라 담론 그 자체를 와해시킨다. 맥혜일 Brian mchale 은 최근에 펴낸 『포스트모더니스트 픽션』(1987)에서 이런 변화를 인식론 epistemology에서 존재론 ontology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이제 질문은 현실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느냐가 아니라 그 현실 자체가 실재냐 아니냐로 바뀐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으로 보는 이유는 이렇듯 진리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한 걸음 더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장인가 반발인가의 문제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또 달라진다. 기준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이에 두 대는 물론 반발이요, 차이다. 그러나 기준을 19세기 리얼리즘과 20세기 모더니즘이라는 한 세기의 변화로 잡을 때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연장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19세기가 객체의 진실에 접근하던 시대라면 20세기는 모더니즘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이건 둘 다 주체의 진실에 접근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맬컴 브래드리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을 연속으로 보고 둘 사이의 공통점이 차이점보다 더 많다고 하는 이유는 예술형식의 변화를 한 세기별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시대정신의 반영이요, 형식은 이념과 손잡고 나타나는 긴 시간의 거대한 변화로 본다. 린다 허천 Linda Hutcheon은 안드레아스 후이센 Andreas Huyssen이 언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발적 요소에 연속적인 요소를 첨가함으로써 어떤 면이 반발이고 어떤 면이 연장인지를 보여준다. 예술의 자율성과 삶에서의 유리, 개인적 주관성의 표현, 대중문화와의 유리 등에 반발했지만 자의식적 실험, 아이러닉한 모호성, 리얼리즘의 모방이론에 대한 반발 등은 모더니즘 전략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연장이며 동시에 반발로 보는 견해 가운데 가장 간단한 표현으로 정수를 포착한 경우는 한스 베르텐스 Hans Bertens 의 다음과 같은 표현일 것이다.2)   포스트모던 예술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고 경험되는 것이다. 모더니즘 예술은 표층 너머에 숨은 어떤 의미를 자칭하고 이해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그 자체를 표층으로 제시하고 모던 예술은 그 표층 뒤에 숨은 깊이를 요구한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모더니즘보다 이라는 베르텐스의 덧붙인 말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다르면서도 한층 더 회의론 쪽으로 나간 것을 잘 요약해준다.   2. 포스트모던 기법3)   패로디 모더니즘이 상황으로부터 기법으로 도피해 버렸다고 생각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소설 속에 다시 상황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제 그 상황이 허구임을 보여주어 아예 현실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 셈이 된다. 아니 현실이 허구라는 식으로 현실에 대해 얘기한다. 그래서 소설은 어떻게 현실이 허구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메타픽션이 된다, 허구가 현실이요, 현실이 허구이니 어찌 현실을 반영하는 허구(픽션)를 쓸 수 있으냐는 것이다. 자의식적인 소설 혹은 반사실주의는 여러 가지 기법으로 현실 그 자체가 이미 허구임을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 두드러진 자이가 패로디이다, 바셀미 Donald Bathelme는 『백설공주』(1967)에서 전통적인 동화를 패로디한다. 배경은 뉴욕이고 등장인물들은 현대 도시인들인데 왕자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어 소설의 끝을 못 맺는다고 엄살을 떤다. 주인공, 시작과 끝, 성격발전이 없는 소설이다. 나보코프의 『세바스천 나일의 참인생』은 전기의 패로디이고 『창백한 불꽃 Pale Fire』(1962)은 비평의 패로디이다. 실제 인생이 어떻게 굴절되어 전기가 되는지, 비평이 어떤 식으로 자의적인지를 통해 실체가 허구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국의 존 파울즈John Fowles는 『불란서 중위의 여자』(1969)에서 사실주의 소설을 패로디한다. 한동안 진지하게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들이 스토리를 엮어 가다가 갑자기 뉴보로망 시대에 살고 있는 작가의 고민이 튀어나온다. 이 소설의 결말을 어찌 낼 것인가, 이 인물들에 관해 내가 아는게 무엇인가. 옛날에는 작가가 진지한 신이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하니 고민스럽다는 것이다. 결말을 열어놓은 채 끝나는 이 소설은 사실주의를 패로디하는 반사실주의 소설이다. 투르먼 카포티의 『냉혈인간 In Cold Blood』처럼 실제 일어난 사건의 보도가 그대로 픽션이 되는 뉴저널리즘 픽션은 보도의 패로디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더듬어 새롭게 다시 쓰는 고어 비달의 『링컨』은 역사의 패로디요, 자신이 2차대전 때 겪은 경험을 그대로 쓴 코진스키의 『색칠해진 새 The Painted Bird』는 자서전의 패로디이다. 패로디란 기존의 개념이나 형식과 같은 꼴을 취하고는 전혀 반대의 얘기를 하는 문학적 장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패로디가 이토록 압도적인 이유는 그것이 지금까지 세워진 진리가 허구임을 보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은 아무리 정확히 기록되어도 기록되는 순간의 산물이고, 보도나 역사는 아무리 정확히 자료를 수집해도 제공자와 기록자의 자의적 산물이며, 전기에서 실체는 몇 겹으로 굴절된다. 그러니 소설이 어떻게 실체를 반영하는가. 실체가 이미 허구인 것을. 그래서 소설가의 임무는 구태여 허구의 세계를 꾸밀 필요없이 기존의 형식이나 장르는 취하면서 전혀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성공한 메타픽션의 경우 이런 패로디 기법은 작의성이 잘 드러나지 않게 묻혀 있기 마련이다.   환상적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 패로디는 초기 약 10년 동안의 메타픽션에서 두드러진 양식이었다. 1975년 이후에는 또  한번의 조그만 변화가 일어난다. 소위 혹은 의 출현이다. 소설이 언제까지나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조명하고 제 모습을 되돌아보는 소설에 관한 소설일 수만은 없다. 미로 속을 맴돌던 언어가 탈출하여 무언가를 지칭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옛 사실주의와는 다르다. 메타픽션에서 한걸음 더 나가 이제는 환상이 이미 현실의 일부가 된 환상적 리얼리즘(혹은 매직 리얼리즘)과 플롯을 거부하는 미니멀리즘이다. 환상적 리얼리즘은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처럼 매끄럽고 풍요한 서사가 계속된 후 마지막에 그것이 지워져 왔음을 암시적으로 밝히는 자의식이 강한 경우도 있지만 75년 이후의 것들은 이와 조금 다르다. 토니 모리슨의 『소중한 사람들』이나 마가렛트 에트우드의 작품들에서 유령이나 환상은 작가가 현실을 그리는 데 어떤 문학적 장치인 듯 쓰인다. 말하자면 환상이 사실주의 소설에 고용되는 셈이다. 애초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게 상황 혹은 역사의식을 문학 속에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고 보면 후반에 와서 사실주의가 환상을 누르고 부각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허구가 현실을 누르던 초기의 메타픽션에서 현실이 허구를 종속시키는 후기의 새 사실주의는 환상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에서는 공통이다. 그러나 전자가 베케트의 침묵의 언어 이후 왜 소설이 아무말도 할 수 없는가를 보여주는 쪽이라면 후자는 그렇다면 못할 말이 뭐가 있느냐는 쪽이다. 표층 너머의 의미를 묻던 모더니즘과 달리 그저 표층에 머무는 것에서는 공통이지만 전자가 표층에 머무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이제 그 표층의 흘러넘침을 축복하는 쪽이다. 미니멀리즘 역시 대략 75년 이후에 나타난 새 사실주의의 한 갈래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권위를 양보해 가던 모더니즘 시대에 윌터 벤야민은 짧은 스토리의 중요성을 통해 저자의 사라짐을 얘기했다. 사실주의 소설은 권위적인 작가가 설명하고, 꽉 짜인 플롯으로 시작과 끝을 내린다. 그것은 닫힌 형식이며 소유이다. 그러나 설명이 없고 압축된 스토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대화이다. 듣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사람은 다시 타인에게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의미가 풍요해진다. 그러므로 스토리는 소유가 아닌 경험의 교환이다. 이 벤야민의 스토리 텔러가 한 세기가 끝날 무렵 미니멀리스트로 부활한다. 미국 픽션의 최근의 동향을 실은 『믿을 이유들 Reasons to Believe』(1988)은 지난 십 년을 라고 언급하고 지난 (1990년) 겨울호는 미니멀리즘을 세기말의 문학으로 꼽는다. 미니멀리즘의 특징은 우선 길이가 짧고 작가의 친절한 설명이 없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지 않는다. 외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주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드러내는 단절과 고립, 인간의 한계를 지극히 암시적인 수법으로 섬뜩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작가의 묘사보다는 독자의 파악하는 힘에 의해 이런 의미가 합성된다. 묘사나 설명을 하지 않고 마치 영화의 장면들처럼 외적인 행위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얼핏 압축된 기법이 헤밍웨이를 연상시키고 실제로 토바이아스 울프나 레이몬드 카버는 그의 영향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차이는 있다. 헤밍웨이가 자기단련의 입장에서 그런 기법을 쓴다면 미니멀리스트들은 독자에게 권한을 넘겨준 열린 소설의 입장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틈새가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메꾸어져서 소유가 아닌 경험의 교환이 되기 때문이다. 단절된 문장, 피상적이고 겉도는 대화를 통해 70년대 도시 중산층의 고립을 그리는 앤 비티, 플롯을 거부하는 열린 소설을 통해 마지막 순간의 거대한 변화를 기대하는 그레이스 페일리, 작가와 독자가 함께 삶의 방식을 그리는 가장 우수한 미니멀리스트, 레이몬드 카버······ 플롯이 없는 것, 작가가 설명을 하지 않는 것, 독자의 참여가 중시되는 것에서 미니멀리즘은 메타픽션과 공통이다. 그러나 언어가 사물을 지칭하고 일상이 묘사된다. 현대 도시인의 대화단절, 자아몰입, 마약과 술로 도피하는 사랑의 부재가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60년대의 자유화 물결이 낳은 고립과 단절을 진단하는 80년대의 미니멀리즘은 이처럼 경험의 교환과 타자의식을 강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가 안드레아스 후이센은 75년 이후의 변화를 언급하면서도 자세히 논의하지 않고 맥헤일이나 린다 허천도 이 부분을 간과한다. 패로디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진단할 경우 미니멀리즘은 예외로 취급되어야 한다.   저자의 죽음과 인식주체의 해체 사실주의에서 저자는 작품 위에 있고 모더니즘에서는 작품 뒤에 숨어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작품 속으로 뛰어든다. 현실이 복잡해짐에 따라 저자는 전능한 신의 위치에서 독자와 동등한 위치로, 그리고는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 전통적인 저자의 죽음을 알린다. 메타픽션에서 저자의 죽음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나보코프의 경우를 보자. 저자는 등장인물을 고용하고 등장인물은 또 다른 인물을 고용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 저자 자신에 관한 얘기가 된다. 픽션이 현실을 반영하는 대신 자기 얘기만 하니 진리의 자의성이요, 결국 현실이란 저자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롤리타』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던 작가 퀼티가 등장인물(훔볼트)에 의해 죽고 남은 작가 훔볼트는 더 이상 견고한 사실주의를 쓸 수 없다고 말놀음으로 돌아서는데 그게 바로 나보코프 자신의 예술관이다. 롤리타라는 실체를 아무리 추적해도 잡을 수 없고 포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사실주의(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이란 의미에서 모더니즘도 포함되는 넓은 의미) 소설을 쓸 수 있느냐는 거다. 마치 『세바스천 나잍의 참인생』에서 화자인 브이는 세바스천을 고용하고 나보코프는 브이를 고용하여 자기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다. 19세기 사실주의에서는 저자가 완벽하게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여 독자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믿는다. 모더니즘에서는 등장인물에게 서술을 맡기고 저자는 음성을 숨기지만 그래도 그 허구의 세계는 현실의 반영이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저자가 작품 안으로 뛰어 들어와 픽션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가정을 무너뜨린다. 작품 위, 혹은 뒤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더니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와 내가 조정자요 하면서 자기모습을 드러내어 개연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커트 보네겉은 『참피온들의 아침식사』(1973)에서 등장인물을 조정하다 풀어 주는 자기모습을 담는다. 존 파울즈는 『불란서 중위의 여자』에서 내가 지금 얘기하는 이 스토리와 등장인물들은 모두 내 머릿속에서 고안된 것이라고 불쑥 나와 말한다. 사실주의에서는 서술자가 제시하는 세계에 독자가 그대로 몰입되어 저자의 의미를 받아들인다. 모더니즘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서술을 들으며 믿음을 일단 정지하고 이 말 저 말을 종합한 뒤 판단을 내린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믿음과 안 믿음, 둘 다를 유보한다. 저자가 소설의 틀을 와해시키고 그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저자이고 이 인물들의 창조자요 하면서 작품 속으로 들어오거나 등장인물들이 모두 저자 얘기를 하게 만들어 전통적인 작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더 이상 현실을 반영할 수 없다는 반영론의 포기이다. 현실이 환상적이고 진리가 허구적이므로 어떤 견고한 논리로 설 수 없다는 미결정성이 픽션을 열어놓는다. 과정이요 현재진행형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리오따르 Jean-Francois Lyotard는 이라는 단어로 표시하며 에 이즘(-ism)을 붙이기 싫어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  혹은 의미의 잠정성은 인식주체의 해체를 뜻한다, 코진스키는 『그냥 있기 Being There』(1971)의 주인공에 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정원사라는 직업 외에 과거도 현재도 없는 텅 빈 존재 nonentity 이다. 그런데 일단 그가 사람들 속에 던져지자 그에게는 갖가지 의미들이 달라붙는다. 의미는 그 자체가 고유하게 소유한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고유의미가 없는 그는 일 따름이다. 이것은 바셀미가 목적지가 있는 배 한 척보다 바위조각 하나가 더 흥미롭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간이 흐르면 바위조각에는 갖가지 동식물이 달라붙어 서식한다. 어느 틈엔가 바위조각에는 풍성한 의미가 흘러넘친다. 의미란 이미 존재하는 게 아니고 달라붙어 의미를 만든다. 그래서 꼴라쥬 등 온갖 파편화된 예술형식을 가지고 유희를 벌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반영론이 아닌 창조론이다.   3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들   50년대의 부조리소설, 60대의 파편화된 메타픽션, 그리고는 점차 사실주의의 옷을 입은 메타픽션과 미니멀리즘 등, 픽션이 변모를 겪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이론도 변모한다. 이론의 변모가 소설형식의 변모를 반영할 정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미국의 용어이고 미국 픽션들이 가장 요란스러웠지만 이런 현상을 불란서, 영국, 독일, 남미에까지 퍼졌고 물처럼 새어들어 각 나라의 건축이 미술, 그리고 철학과 정치이념에까지도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늘 보수성을 지키는 영국의 60년대 문학에 대한 글이 현실의 허구성을 강조하는 품은 마치 같은 시대 미국의 현상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4) 같은 맥락에서 논쟁들도 처음에는 미국적이더니 점차 국제적인 것으로 확산된다. 이들 가운데 주목을 받는 몇 개의 쟁점들을 살펴보자. 60년대에 나온 레슬리 피들러의 「경계를 넘어서고 간극을 매우며」나수잔 손탁, 이합 핫산의 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발과 혁신으로 본다. 모더니즘의 귀족성과 계급성에 대한 반발로서 온갖 경계의 무너짐과 원시적인 생명력의 찬양, 그리고 거의 무정부적인 낭만성과 다양성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는 모든 아방가드의 논리가 그렇듯 새로움은 늘 일어나던 당시에는 기존의 전복이었음이 고려되고 읽혀야 한다. 예를 들어 핫산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를 전통과 급진으로 비교한 것은 분명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더니즘에도 분명히 급진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핫산의 견해가 60년대의 것이고 상대적인 개념밖에 담을 수 없는 언어를 절대용어로 사용한 가 갖는 위험성도 고려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제랄드 그라프의 『그 자체에 반항하는 문학 Literature Against Itself』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기존을 극복하는 척했지만 결국은 낭만적 무정부주의와 모더니즘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더 밀고 나감으로써 전통 속의 일부가 됐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이 글이 나온 것은73년, 즉 메타픽션의 방자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다. 75년경부터 새로운 사실주의가 시도된 것을 보면 그라프의 글은 시기를 잘 탄 셈이다. 그러나 그는 모더니즘의 혁신 뒤에 숨은 고전적 질서찾기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낭만적 개성표출이었다는 차이를 간과해 버린다. 일어나던 당시의 차이를 무시해 버린다면 연속의 범주로 휩쓸리지 않을 아방가드가 어디 있겠는가. 이번에는 독일의 하버마스와 블란서의 리오따르의 논쟁을 본다. 1981년 하버마스는 「모더니티 對  포스트모더니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을 무산시키려 든다고 비난한다. 판단의 유보와 자기부정적 혁신, 그러면서도 계몽주의적인 합리성을 가진 모더니즘은 문화와 사회를 접목 시킬 안정된 근거를 가진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나친 회의주의와 무정부적인 분열성으로 이 기반을 위협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혁신을 막는 신보수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데리다를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보수적이라고 비난한 것도 같은 논리에 근거한다. 물론 데리다는 당신이 더 보수적이라고 했고 안드레아스 후이센은 이들의 싸움을 가르켜 라고 빗대어 논의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의 비난에 대해 리오따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1982) 로 답한다. 사실주의는 비판적 거리를 지키지 못하고 모더니즘은 거리는 있는데 사회를 외면하고 예술로 도피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둘의 결함을 보충하여 모더니즘이 못다한 혁신을 이루려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은 쾌감과 고통을 동시에 지닌 장엄하고 모호한 정서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유일한 기능이다. 그것은 모든 논리를 열어놓아 끊임없이 흐르게 하는 진짜 혁신이다․․․․․. 하버마스는 모더니즘의 장점을, 리오따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점을 잘 본다. 자신의 것을 잘 보기에 상대방의 것을 간과하는 모든 논쟁의 묘미이다. 1960년대 이후 독일에서는 아도르노나 브레히트 등 흘러간 모더니스트들의 복구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하버마스는 그런 분위기에서 모더니즘 미학과 사회를 연결시키려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방해처럼 여겨진다. 리오따르는 니체적 입장에서 불란서의 해체적인 안목으로 모더니즘을 본다. 그래서 그것이 보수적이고 진짜 혁신이 아닌것 같다. 어쨌든 이 논쟁이 주는 공통된 인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성에 대해서는 둘 다 잘 모르거나 명쾌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리챠드 로티 Richard Rorty 는 를 가지고 이 논쟁에 뛰어든다. 어떤 논리로 세울 수 없는 미결정성으로 해체론이 비난을 받자 로티는 미결정성에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를 접목시켜 사회성을 부여한다. 어떤 이론에도 회의적이고 어떤 위치도 갖기 않음으로써 그것이 진리냐 아니냐를 묻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해체론적 입장이다. 어떻게 이 아포리아로부터 벗어나는가. 다만 그것이 필요하냐 아니냐라는 만을 묻자. 그러나 로티의 이런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그보다 더 정치성을 요구하는 여성운동가들이나 사회개혁자들에게 그리 안정된 근거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편에 선 사람들은 로티를 비난한다. 언어의 유희와 침묵으로부터 탈출하자던 핫산이 1987년에 발표한 글 “the Postmodern Turn”도 제임스의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보는 것이다. 핫산은 이보다 조금 먼저(1983)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발과 연장의 이중성으로 보는 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의 글을 시대순으로 읽으면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시각의 변모를 볼 수 있어 흥미롭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은 최근에 한층 더 사회와 역사의식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제임슨, 이글턴, 뉴먼 등 맑시스트들의 비난을 살펴보고 이런 공격에 대한 린다 허천의 방어를 들어보자. 맑시스트들의 비난은 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후기자본사회에 순응하면서 애초에 의도했던 극복의 의지를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깊이가 없고 역사성의 희박하고 고통이 없고 비판적 거리가 없다고 말한다. 테리 이글턴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저항했으나 사회의식이 약하고 문화를 탈정치화시켰다고 말한다. 챨스 뉴먼 Charles Newman 은 성역으로서의 예술이 모더니즘의 마지막 환상이었듯이 자율성으로서의 예술은 자본사회 개인주의의 마지막 숨소리라고 비난한다(the post-modern Aura, 1985). 이 둘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으로 본다. 체제에 순응한 모더니즘의 결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층 더 비정치적 이론으로 그 체제를 연장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맑시스트들의 비난에 대한 최근의 방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반정치적 정치성)을 갖는다는 쪽이다. 현실이 허구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거리두기로서 어떤 논리에도 몰입하지 않는 비판의식을 기른다.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자율성을 기르는 틈새의 축복이다. 폴 드 만은 언어의 유희와 오독의 찬양이 언어에 대한 성찰과 동시에 역사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린다 허천이 역사편찬적 메타픽션 historiographic metafiction이란 용어로 포스트모더니즘 시학을 보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주로 사실주의를 패로디한 작품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녀는 , 이념의 허구성이 갖는 이념성을 강조한다.(180,194-196면). 비록 특정 작품들에만 초점을 맞춘 결함은 있지만 후기구조주의를 배경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그녀의 경우가 구조주의와 억지로 연결시키려든 후이센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이론상의 타당성 때문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이념은 미학형식과 손을 잡는다는 아방가드의 논리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는 도전과 반발이었던 실험정신이 시간이 흘러 또 하나의 정설이 되고 체제의 순응이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는 아방가드의 운명. 역사로부터 뒷걸음친다고 모더니즘을 나무라며 상황과 역사의식을 불어넣었지만 차마 19세기 사실주의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단순한 반영이론에도 반기를 들다 보니 반역사적 역사성이라는 역설을 낳는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시 이 역설의 시대는 한 세기의 변화를 가늠할 때 모더니즘에서 다시 리얼리즘으로 넘어가는 전환기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1407    자동기술법 - 문학비평용어 댓글:  조회:6218  추천:0  2015-08-21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기법으로서  어떤 의식이나 의도 없이 무의식의 세계를 무의식적 상태로 대할 때 거기서 솟구쳐 오르는 이미지의 흐름을 그대로 기록하는 방법 원래 의사였던 브레똥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원용하여 임상심리학에서 정신병자가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내면의 소리를 시에 응용하여,  가능한 빠른 속도로 지껄이는 독백이나 사고를 비판이나 수정 없이 그대로 기록한 수법  이러한 수법을 사용한 한국 시인으로는 1930년대 이상이 대표적  "나의아버지가나의아버지의나의아버지가되고…"식의 음송은  어떠한 논리적 질서나 인과관계를 살필 수 없다.  서로 무관한 이미지들과 단상들이 무의식적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자동기술법은 무의식의 자유로운 분출을 통해 의식과 일상의 미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참된 자아의식에 도달코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현실은 일상의조작된 사실이나 과거의 낡은 관념 체계에 의해서 왜곡도어 있고 논리와 합리,  이성 등 인위적인 요소로 구속되어 있다.  이것을 초월하여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서 리얼리티를 찾고자 하는 것이 초현실주의 이념이었고,  이를 구현한 실천방안이 바로 자동기술법이었던 것이다. 자동기술법은 현대시의 흐름에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 1930년대 의 이시우, 신백수, 이상,  그리고 해방 후의 조향, 김구용 등의 시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예>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近處에는 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爲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이상 '꽃나무' : 일부러 띄어쓰기도 하지 않고 연과 행의 구분이 없으며 내용의 일관성을 찾기 참 힘들다) '발췌: 해우소
1406    아방가르드 - 문학비평용어 댓글:  조회:9000  추천:0  2015-08-21
문학비평용어사전 아방가르드 [ Avant-Garde ]   아방가르드란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自然主義)와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에 맞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써, 기성의 예술 형식과 관념, 유파(流波)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이룩하려 했던 입체파(立體派), 표현주의(表現主義), 다다이즘(dadaism),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등의 혁신 예술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아방가르드의 원뜻은 먼저 앞에 나서서 호위한다는 의미를 지닌 전위(前衛)로 본래 전투 당시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돌진하는 부대라는 뜻을 가진 군대 용어이다. 이것은 이후 러시아 혁명 당시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서 목적의식적(目的意識的)으로 뭉친 정당과 그에 속해 있는 당원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고, 이것이 19세기 프랑스에서 혁신과 실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기류를 반영하여 예술 운동에 적용되면서부터 예술 용어로 사용되게 되었다. 아방가르드의 이념은 자체가 지지하고 있는 예술적이거나 문화적인 선언들의 반사회적인, 혹은 비사회적인 특징에 의존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종래의 관념과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려는 예술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랭보(J. Rimbaud), 위스망스(J. Huysmans), 말라르메(S. Mallarme) 등을 꼽아볼 수 있는데, 이들의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현실에서의 소외감을 확산시킨 절대적인 자유에 대한 동경과 환상의 세계에 대한 열망을 실험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아폴리네르(G. Apollinaire)는 기계 문명의 발달 위에 찾아온 허무 의식을 발견하고 입체파의 이론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다다이즘은 전쟁의 잔인성에 대한 증오와 합리적인 기술 문명의 부정, 일체의 억압과 제약을 거부하는 경향을 띠면서 예술에 존재하고 있는 전통과 가치 기준의 파괴를 지향하여 문학사에서 새로운 갈래를 이룩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아방가르드의 경향은 1930년대 이상(李箱)에게서 발견된다. 이상은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의 전위적(前衛的)인 이론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하여 「오감도」를 발표하였다. 이후로는 신백수(申白秀)나 이시우(李時雨) 등의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의 경향인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강진호)   참고문헌 신희천, 조성준 편저, 『문학용어 사전』, 청어, 2001년 조셉 칠더즈·게리 헨치 편저, 『현대문학·문화 비평용어사전』, 황종연 역, 문학동네, 1999년 레나토포지올리, 『아방가르드예술론』, 박상진 역, 문예출판사, 1996년 ============================================= 지식백과를 알차게 쓰고 싶다면 지식리스트!  자동완성 켜기   담기수정문의보내기인쇄하기 글꼴설말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이해 아방가르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세계적 위기상황에서 비롯된 20세기 초의 혁신적인 예술경향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아방가르드 혹은 전위주의이다. 이러한 경향은 근대성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되어 비이성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회화, 음악, 문학 분야에서 다양한 예술운동으로 나타났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였다. 공통적인 미적 특징은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거부,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의 옹호 등이다. 한편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중남미에도 전파되었고 많은 중남미 시인들이 직접 유럽을 왕래하며 독자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전위주의 시운동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칠레의 비센떼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creacionismo), 호르헤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울트라이즘(ultraísmo), 푸에르토리코 출신인 루이스 요렌스 또레스(Luis Lloréns Torres)의 빵깔리스모(pancalismo), 도미니카의 도밍고 모레노 히메네스(Domingo MorenoJiménez)의 뽀스뚜미스모(postumismo), 콜롬비아의 레온 데 그레이프(León de Greiff)가 주도한 '로스 누에보스(LosNuevos)' 그룹, 쿠바 시인인 마리아노 브룰(Mariano Brull)의 순수시, 페루의 알베르또 이달고(Alberto Hidalgo)의 단순주의(simplismo), 멕시코 시인 마누엘 마쁠레스 아르쎄(Manuel Maples Arce)의 에스뜨리 덴띠스모(estridentismo) 등이 있다. 중요한 아방가르드 시인들은 다음과 같다. (1) 비센떼 우이도브로(1893.-1948.) 칠레의 유복한 가정 출신으로서 1916년에 파리로 가서 아폴리네르, 피에르 르베르디, 트리스탄 차라, 막스 야콥 등 유럽의 아방가르드 시인들과 교유하였고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918년에는 마드리드로 가서 스페인어권 최초의 아방가르드 시운동이라 할 수 있는 창조주의를 주창하였고 많은 스페인 시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대표작은 1931년에 쓰여진 『알따소르(Altazor)』이다. 창조주의는 자유로운 형식의 측면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언어의 일관성을 무시한다는 면에서는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순수한 은유로써 경이롭고 환상적인 그의 시 세계를 창조했다. 내가 한 개의 명멸하는 별 또는 반딧불이라면. 가슴엔 나비들이 머물고 상승하는 노래를 타고 한 줄기의 빛은 사막을 식민지로 삼고 이 눈 빛 종달새는 나로부터 사라져만 간다.1) 우이도브로는 특히 "장미를 노래하지 말고 시 속에서 꽃피게 하라. 시인은 작은 신이다" 라고 외치며,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케 하는 자족적인 시를 주장했다. 우이도브로의 원고 (2)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 1892.-1938.) 20세기 중남미 시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간주된다. 젊은 시절에 혁명적 사상가들과 교류를 통해 시적 안목을 다졌다. 1918년 모데르니스모의 영향이 엿보이는 『검은 전령들(Los heraldos negros)』이란 시집을 내며 1922년에는 『뜨릴세(Trilce)』를 발표한다. 『뜨릴세』는 표현법, 이미지, 구어체 언어, 연금술적 언어기법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밖에도 고어, 교양어, 속어, 기교, 토착어 등을 사용하면서 시적 가치률 창조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기교에 그치질 않고 현실을 조각 내어 조망함으로써 각 시행마다 끊임없이 사상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세사르 바예호 초상 나 지금에야 점심을 먹었고 가진 게 없네 어머니도, 소원도, 음식을 권하는 말도, 물도 혼혈인이 달변으로 봉헌 기도할 때, 심상의 늦음과 소리의 커다란 이음매 단추들에 관해 질문하실 아버지조차도 없네.2) 『뜨릴세』는 전통과 결별한 아방가르드 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후 유작들이 『인간적인 시(Poemas humanos)』와 『스페인, 이 잔을 내게서 치워다오(España, aparta de mi este cáliz)』에 편집되었다. 마지막 시집은 스페인 내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시들이다. 바예호는 창조주의를 주창했던 비센떼 우이도브로와는 반대로 현실참여적인 문학을 지향하였다. 실제 삶에서도 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여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소련 여행을 하기도 했으며 투옥된 경험도 있다.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보르헤스는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작품활동은 시를 통해 시작하였다. 1918년 제네바에서 마드리드로 온 뒤 울트라이즘 시인들과 접촉하였고 1921년 아르헨티나로 귀국하여 이 아방가르드 시운동을 전파하였다. 하지만 곧 아방가르드 운동과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지와 메타포의 중시, 간결한 표현 등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정(Fervor de Buenos Aires)』(1923.)에 남아 있다. 이후 소설만큼 주목받지 못하지만 작가는 『정면의 달(Luna deenfrente)』, 『산 마르띤 노트(Cuaderno San Martín)』, 『그늘 예찬(Elogio de la sombra)』, 『심오한 종족(La razaprofunda)』, 『기호(La cifra)』 등 적지않은 시를 썼다. 「은총의 시(Poema de los dones)」라는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그의 시는,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간결함과 힘 그리고 관념성을 본질적인 요소로 가지고 있다. 아무도 값싼 감상주의로 호도하거나 질책하지 마시라 이렇게 찬양하여도, 신이 주신 그 솜씨를, 기막힌 아이러니로 내게 책과 어둔 밤을 함께 주신 솜씨라. 그 분은 거대한 이 책의 도시를 빛 잃은 두 눈동자에게 주셨다. 이들은 단지 꿈속의 도서관에서만 읽을 수 있으니 내게 베풀어진 무심한 문장들을.3) 빠블로 네루다 (4) 빠블로 네루다(Pable Neruda, 1904.-73.) 15세 때 『셀바 오스뜨랄』이란 잡지에 한 묶음의 시를 투고하였고 1921년 봄에는 산띠아고에서 매년 열리는 백일장에 「황혼일기」로 당선되었다. 1923년의 「황혼일기」와 그 이듬해의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de amor y una canción desesperada)』를 시작으로 그의 시집이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 두 권의 시집은 작가의 청년기적 작품으로 후기 모데르니스모 단계에 속한다. 특히 1924년 발표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는 진부한 사랑의 테마를 참신하고 독창적인 기법으로 다루어 새로운 시풍으로서 네루다주의의 시작을 예고했다. 네루다이즘은 한마디로 19세기말 모데르니스모 시인인 니카라과의 루벤 다리오의 달콤한 멜로디 경향에서 탈피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시집은 오늘날까지도 스페인어로 쓰여진 가장 아름다운 시집으로 인정되고 있다. 네루다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은 바로 전통과의 투쟁의 산물이며, 각각의 시집은 바로 새로운 표현체계를 발견하고자 하는 끝없는 탐색의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인간과 역사를 떠나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라 바로 개개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견디기 힘든 아픔과 함께 납득할 수 없는 동시대의 구체적인 사회 모순 현상들의 원인까지도 깊이 있게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지상의 거처(Residencia en la tierra)』는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시집으로서 이성을 배제하고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을 도입했다. 세계를 해체해 보는 시각을 견지했으며 외부적인 현실을 답습하는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했다. 자유시는 연금술의 언어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비교법, 이미지, 수사법, 그림자와 공간 사이에 위치한 '하나의 심장'의 시각에서 사물을 투영하는 몽상적인 상징법이 특징이다. 스페인내전은 네루다를 신비주의적 시인에서 정치적 시인으로 변모시켰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대찬가(Canto General)』(1950.)는 열다섯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아득한 신세계의 신화적 기원으로부터 최근의 각 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변천사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대서사시이다. 이 시는 후반부의 「마추삐추의 정상(Altus de Machu-Picchu)」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칠레에 대한 찬양,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칭송, 그리고 무력과 돈으로 억압하고 군림하는 자들에 대한 거부를 읽을 수 있다. 아메리카에 대한 네루다의 사랑은 『일상의 것들에 바치는 송가(Odas elementales)』(1954.)와 『일상의 것들에 바치는 새로운 송가(Nuevas odas elementales)』(1956.)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다음시는 『대찬가』중에서 「아메리카, 나는 네 이름을 그냥 불러보는 것이 아니다(América, no invoco tu nombre en vano)」의 일부분이다. 아메리카, 나는 네 이름을 그냥 불러보는 것이 아니다. 내 심장에 칼을 붙잡아 맬 때, 내 영혼에 비가 새는 것을 참고 견딜 때, 창문을 통해 너의 새로운 하루가 나를 투과할 때, 나는 나를 만들어낸 빛이면서 그 안에 있고, 내 운명을 정하는 그늘에 살고 있고, 너의 본질적인 여명 안에서 잠들고 깨어난다.4) 네루다는 또한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상원의원을 지냈고 1970년 공산당 대표로서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사회주의 연합세력의 단일 후보직을 양보했다. 이후 프랑스 주재 대사를 지내던중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한림원에서는 "근원적인 기운의 약동으로 대륙의 운명과 꿈에 생기를 주는 시"라고 수상동기를 밝혔다. 네루다는 1973년 삐노체 장군의 쿠데타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권이었던 아옌데 대통령이 실각한 후 곧 암으로 타계한다. 유고집으로는 『회고록 : 나의 삶을 고백한다(Memorias : Confieso que he vivido)』 있다. (5) 호세 후안 따불라다(José Juan Tablada, 1871.-1945.) 모데르니스모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으나 곧 그것을 유치하다고 간주하고 결별하였다. 정련된 기법으로 울트라이즘 시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뭐니뭐니해도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일본의 시형식인 하이쿠를 중남미 문학에 도입한 것이다. 그는 하이쿠를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 형식의 시를 쓰기도 했다. 「수박(Sandía)」이라는 다음 시는 유연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그의 대표적인 시이다. 빨갛고 시원한 여름의 너털웃음, 수박의 길쭉한 한 조각.5) (6) 검은 시 20세기 예술의 새로운 경향은 원초적인 문화의 재평가였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시를 '검은 시(poesía negra)'라고 명명했다. 중남미에서 검은 시는 스페인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결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시를 낳았다. 1930년경 쿠바,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도미니카는 흑인들의 검은 혼을 그들의 리듬, 춤, 음악, 역사, 미신을 통해 표출하는 중심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검은 시가 출현하였다. 대표적인 시인과 작품으로는 루이스 빨레스 마또스(Luis Palés Matos)의 『검은 춤(La danza negra)』, 쿠바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시에 담은 니꼴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의 『군인들을 위한 노래와 관광객을 위한 소리(Cantos para soldados y sones para turistas)』, 『송고로 꼬숭고와 다른 시들(Sóngoro cosongo y otros poemas)』, 『완벽한 소리(El son entero)』, 흑인적인 요소와 정치적 요소 그리고 사회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맵시있게 나는 비둘기(La paloma de vuelo popular)』가 있다.  
1405    칠월칠석 시모음 댓글:  조회:5444  추천:0  2015-08-20
칠석요(七夕謠) · 칠월칠석 오늘밤은 은 하 수 오작교에 견우직녀 일년만에 서로반겨 만날세라 애야애야 애야좋네 칠석놀이 좀더좋네 · 은하수의 잔별들은 종알종알 속삭이며 무슨말을 속삭이나 반작반작 웃는구나 애야애야 애야좋네 칠석놀이 좀더좋네 · 까치까치 까막까치 어서빨리 날러와서 은하수에 다리놓아 견우직녀 상봉시켜 일년동안 맛본서름 만단설화 하게하소 애야애야 애야좋네 칠석놀이 좀더좋네 · 은 하 수 한허리에 채색다리 놓으렬제 까막까막 까치들이 오작교를 놓았구나 애야애야 애야좋네 칠석놀이 좀더좋네 · ……(중략)…… · 은하수를 못메워주나 우리서로 사랑타가 옥황님께 죄를지어 님은강건너 서쪽마을 이내몸은 동쪽에서 일년한번 만날날이 오날밖에 없었구나 전생차생 무슨죄로 각분동서 헤어져서 일년일도 상봉인가 · ……(중략)…… · 닭아닭아 우지말아 네가울면 날이새고 날이새면 임은간다 이제다시 이별하고 일년삼백 육십일에 임그리워 어이살지 우지말아 우지말아 무정하게 우지말아 원수로다 원수로다 은하수가 원수로다. · · 『한국민요집』1에 전하는 칠석요 자료 일부 · · · · 칠월칠석(七夕) 시 모음 · · · * 칠석에 비를 읊다 - 이규보(李奎報)   칠석날에 비 안 오는 일이 적은데 나는 그 까닭을 모르네. 신령한 배필이 기쁨 이루려 하니 비의 신이 응당 질투할 것이로다 * · · · * 칠석우서(七夕偶書) - 권벽(權擘)[조선 중기 문신] 浮世紛紛樂與悲 -부세분분락여비 人生聚散動相隨 -인생취산동상수 莫言天上渾無事 -막언천상혼무사 會合俄時又別離 -회합아시우별리 -칠석 날에 우연히 적다 기쁘다, 슬프다로 허망한 세상살이 분분하고 인생살이 모이고 흩어짐이 일마다 서로 따르는구나 하늘나라에는 이별이 전혀 없다 말하지 말게나 만남은 잠시일 뿐 또다시 서로 이별하려하는구나 · · · * 七夕 - 양박(楊璞)[宋] 未會牽牛意若何 - 미회견우의약하 須邀織女弄金梭 - 수요직녀롱금사 年年乞與人間巧 - 연년걸여인간교 不道人間巧已多 - 부도인간교이다 - 칠석 견우의 뜻이 어떠한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마땅히 직녀로 하여금 금으로 만든 북을 다루게 하여야 하리 해마다 사람들은 길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비는데 인간세상의 교예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알지 못하는구나 · · · * 七夕 - 이응희(李應禧)[조선 중기 문신] 天中七月七 織女會牽牛 歲歲橋頭別 年年河上遊 悲歡同一夕 離合幾千秋 此恨何時歇 天崩地拆休 -칠석 하늘에서는 칠월 칠석에만, 직녀가 견우와 만난다 하지. 해마다 오작교에서 이별하고, 해마다 은하수 가를 노니는구나, 슬픔과 기쁨이 하룻밤에 교차하니, 이별과 만남이 몇 천 년 있어 왔던가, 이 한(恨)은 어느 때나 끝날거나, 하늘 무너지고 땅 갈라져야 끝나리. * · · · * 칠석소작(七夕小酌) - 이곡(李穀)[고려말 문신] 平生蹤迹等雲浮 - 평생종적등운부 萬里相逢信有由 - 만리상봉신유유 天上風流牛女夕 - 천상풍류우여석 人間佳麗帝王州 - 인간가려제왕주 笑談款款罇如海 - 소담관관준여해 簾幕深深雨送秋 - 렴막심심우송추 乞巧曝衣非我事 - 걸교폭의비아사 且憑詩句遣閒愁 - 차빙시구견한수 -칠석에 조금 술을 마시며 한평생 발자취가 구름처럼 떠도는데 만리 밖에서 서로 만남 진실로 까닭 있으리. 저 천상의 풍류는 이 저녁의 견우 직녀 인간의 아름다움 제왕의 나라이다. 정성스런 담소에 술그릇은 바다 같고 깊속한 염막에는 비가 가을 보낸다. 솜씨 빌고 옷쬐이기 원래 내 일 아니니 또 시구로써 한가한 시름 보낸다. * · · * 한국한시-김달진역-민음사 · · · · * 七夕 - 이곡(李穀) 이 명절에 누가 내 집을 찾아오려고나 할까 - 佳節無人肯見過 인간 세상에 세월만 북처럼 빨리도 내달리네 - 人間歲月逐飛梭 아득히 하늘의 신선들 합환하는 짧은 시간에 - 神仙杳杳合歡少 아녀자들은 분분하게 걸교하기에 바빠라 - 兒女紛紛乞巧多 맑기가 물과 같은 객사의 가을빛이라면 - 客舍秋光淸似水 물결 없이 고요한 은하의 밤 색깔이로다 - 天河夜色淨無波 일어나서 시구 찾다 괜히 머리만 긁적긁적 - 起來覓句空搔首 풍로 어린 뜨락의 이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 奈此一庭風露何 · ~> 걸교(乞巧) -칠월 칠석날 밤에 부녀자들이 과일과 떡을 차려 놓고 직녀와 견우에게 길쌈과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게 해 달라고 빌던 풍속이다. · · · * 七夕 - 李玉峯 無窮會合豈愁思 - 무궁회합기수사 不比浮生有別離 - 불비부생유별리 天上却成朝暮會 - 천상각성조모회 人間謾作一年期 - 인간만작일년기 -칠월칠석 만나고 또 만나고 수없이 만나는데 걱정은 무슨 걱정 뜬구름 같은 우리 삶에 이별 있음과는 견줄 것도 아니라네 하늘 위에서는 아침저녁 만나는 것을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이라고 호들갑을 떠네 * · · ·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남긴 명작 '모나리자'의 비밀을 파헤친 연구결과가 또 나왔다. 최근 영국 셰필드할람 대학등 공동연구팀은 다빈치가 눈의 착각을 '의도적'으로 이용해 신비한 모나리자 미소를 만들었으며 또 다른 작품에서도 이같은 특징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세계적인 명작으로 꼽히는 모나리자는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신비한 미소로도 유명하다. 특히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데 정면에서 봤을 때는 입가에 미소가 드러나지 않으나 측면에서는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같은 눈의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다빈치는 그림에 여러 겹의 물감을 덧칠해 사물의 윤곽선을 안개에 싸인 것처럼 흐릿하게 처리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했다. 특히 이 사실은 지난 2010년 프랑스 박물관 연구 복원센터 전문가들이 X선 형광분광기를 동원해 모나리자 물감층과 화학성분을 분석한 결과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당시 연구에 따르면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눈가와 입가 등에 산화망간 성분의 얇은 막을 최대 30겹까지 입혔다. 이번 연구에 대상이 된 작품은 세계적으로 큰 화제와 논란을 일으킨 다빈치의 또다른 걸작 '아름다운 왕녀'(La Bella Principessa)다. 연구팀은 피실험자들을 대상으로 이 그림을 여러 방식으로 보여주는 시각적인 실험을 실시했다. 예를들어 멀리 떨어져서, 흐릿한 그림으로, 입과 눈 등 특정 부위를 가리고 보여주는 등의 실험을 실시한 것. 그 결과 그림의 표정 변화는 입가에 의해 야기된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며 연구팀은 이를 '붙잡을 수 없는 미소'(uncatchable smile)라 불렀다. 연구를 이끈 알렉산드로 소란조 박사는 "이 그림의 미소를 느끼게 되는 순간 사라져 붙잡을 수 없는 미소라 부르는 것" 이라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시각적 기법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사람이 바로 다빈치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빈치는 눈의 착각을 일으키는 이같은 기술을 의도적으로 여러 작품에 넣었다" 고 덧붙였다. 한편 '아름다운 왕녀'는 지난 199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 이 그림은 19세기 초 독일 미술학도가 다빈치를 흉내낸 작품으로 오인돼 경매에 올랐고 이 때문에 판매 가격은 불과 1만 2039파운드로 당시 환율로 채 2000만원이 안됐다. 그러나 10년 뒤 이 그림에서 다빈치의 지문과 탄소연대 측정 결과 1440~1650년에 제작된 것이 확인되면서 세계 미술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또한 영국 옥스퍼드 대학 석좌교수 마틴 캠프는 이 그림의 인물이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자(1452~1508년)의 딸인 비앙카 스포르자라고 주장하면서 '아름다운 왕녀'라는 작품명을 갖게됐다.
1403    七月七夕 /중국 조선말세계 댓글:  조회:6677  추천:0  2015-08-20
  칠월칠석이란? 칠월칠석일이란? 七月七夕. 전설 속의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죠~   우리나라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음력 7월7일(일본은 양력 7월 7일)에 각 나라의 전통적인 행사를 지내는 날입니다.   칠석의 유래하면 역시 칠월 칠석 견우와 직녀 이야기, 오작교를~  칠석날 저녁에 은하수의 양쪽 둑에 있는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1년에 1번 만난다는 전설에 의해 별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사도.. 옛날에 견우와 직녀의 두 별이 사랑을 속삭이다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노여움을 사서 일년에 한번씩  칠석 전날 밤에 은하수를 건너 만났다는 전설이 내려오죠~ 이때 까치와 까마귀가 날개를 펴서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가 건너는데요. 이 다리를 오작교(烏鵲橋)라고 부르고요~~     칠석 관련 속담?   까마귀도 칠월 칠석은 안 잊어버린다! 중요한 사실이나 날짜는 명심하여 잊지 말자는 뜻의 속담이랍니다~     칠석날 까치 대가리 같다! 칠석날 까치 대머리 같다! 칠석날 까치의 머리가 벗겨진 것과 같이  머리털이 빠져 성긴 모양을 의미하는 속담이랍니다~ 까치들이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위하여 오작교를 놓기 위해 돌을 머리에 이고 하늘나라로 올라가기 때문에  머리의 털이 다 빠진다는 것^^       ​ 칠석 때는 더위도 약간 줄어들고  장마도 대부분 거친 시기이지만, 이때 내리는 비를 '칠석물'이라고 한답니다!   오늘 소나기..  비소식이 들리는데 이 칠석물을 보는 건가요? ㅎㅎ   칠월 칠석에 장마로 인한 습기 찬 장롱과 서적들을 햇볕에 쪼이며 바람을 쐬어 말리는 것을  포쇄(曝曬)라고 한답니다. 특히 이때 말려 두면 옷과 책이  좀 먹지 않고 습한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칠석날 음식? 칠석기도? 칠월칠석축제?   이 시기엔 호박이 탐스럽고~ 오이와 참외가 많이 나오는 시기이므로  민간에서는 호박부침을 만들어 칠성님께 칠월칠석기도를 올렸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왜 백주부의 백선생의 호박전이 생각이 나는 걸까요.. ㅎㅎ 최근엔 칠월칠석떡 나누기 행사도 종종 보이네요.,   칠월칠석날엔 여타의 다른 세시풍속과는 달리  줄다리기와 같은 놀이를 하지는 않았답니다.   대신 별이 뜨는 쪽을 향하여 칠성제를 지냈는데요.   칠석날 처녀들은 직녀성에게 바느질 솜씨가 늘길 빌기도 했다는 군요~~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올리는데,  칠성제를 지내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온답니다~~~ 남자 아이들은 견우와 직녀를 주제로 글짓기도 했다고 하네요.   또한 칠석날의 날씨를 보고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점쳐 보기도 하였답니다~ 칠석일 저녁에 비가 내리면 만나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라 하였고요. 칠석 다음날 비가 오면 이제 헤어지면 1년 후에나 보게 될 두 별이 헤어짐을 슬퍼하여 흘리는 눈물이라고 점쳤다는 군요..   그리고.. 칠석날엔 까마귀와 까치를 볼 수가 없다는? 이는 까치와 까마귀들이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 주러 갔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외 까치밥주기 풍속. 풍습도 있었는데요.. 칠석날과 까치에 그치지 않고, 굶주린 새들을 위해 과실나무에 마지막 결실을 서너 개쯤 남겨두는 까치밥의 정신으로 이어졌답니다~~ ㅎㅎ   ​ ​ 칠월칠석은사랑의날~   칠석을 언제부터 사람들이 기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주 오래 전부터 견우와 직녀는  동양적인 사랑의 상징으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견우와 직녀의 사랑이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 날을 기리고 있고요.   칠월칠석일 아침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하는 기쁨에 흘리는 눈물이라고 했으니.. 오늘은 사랑고백하기에 최적인 날입니다~!   오늘은 칠월칠석 별자리, 여름철의 별자리에 대한 관심도 모아지고 있네요?! =======================================================   답변 골라보기 선택됨선택옵션 답변 정렬순서선택됨선택옵션 답변 목록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1추천자 목록 중국조선말(中國朝鮮—)은 중화인민공화국에 거주하는 재중동포 사이에서 사용되는 한국어를 가리킵니다. 지린 성, 헤이룽장 성, 랴오닝 성의 이른바 ‘동북 3성’에서 주로 사용됩니다. 다음의 내용을 참조하세요. 개요 - 언어 규범  중국조선말에 관한 망라적인 언어 규범은 동북3성조선어문사업협의소조(중국어 간체: 东北三省朝鲜语文工作协作小组)가 1977년에 작성한 ‘조선말규범집’이 처음이다. 이 규범집에는 표준발음법,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부호에 관한 규범이 수록되었다. ‘조선말규범집’은 어휘에 관한 규범을 덧붙이고, 일부를 가필 수정한 개정판이 1984년에 만들어졌다. 중국조선말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의 언어에 규범의 토대를 두어 왔다. 그러한 경위가 있어 중국조선말의 언어 규범은 모두 북한의 규범(조선말규범집 등)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만약에 이 규범을 가지고 중국조선말의 ‘표준어’를 규정할 수 있다면 그 ‘표준어’는 북한의 문화어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중수교 이후에는 대한민국으로부터 진출한 기업이나 한국어 교육 기관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남한식 한국어의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 - 지역 차이  현실적으로 조선족 사이에서 사용되는 조선어는 균질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다양하다. 조선족은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에 걸쳐 조선반도북부를 중심으로 조선반도각지에서 만주지역으로 이주했다. 일반적으로 함경도 출신자들은 두만강 건너편인 길림성으로 가고, 평안도 출신자들은 압록강 건너편인 료녕성으로 가는 경우 많았기 때문에 길림성에서는 함경도의 방언적 특징이 강하게 남아 있고 료녕성에서는 평안도의 방언적 특징이 강하게 남아 있다. 한국어의 방언과 각 지역의 관계는 대략 아래와 같다. 동북(함경도) 방언 :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흑룡강성 목단강 시 등. 연변의 두만강 연안 동부 지역은 육진 방언이다.  서북(평안도) 방언 : 료녕성 중부,동부;길림성 남부.  동남(경상도) 방언 :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제외한 길림성 기타 지방, 흑룡강성 서북부와 서남부,료녕성 일부.  중부 방언과 서남(전라도) 방언은 큰 사용 지역이 없고 동북 각성에 산재하고 있다. 중부 방언 지역으로서 길림성 유하현 강가점향 경기둔(吉林省 柳河県 姜家店郷 京畿屯)을 들며, 서남 방언 지역으로서 길림성 교하현 천북향 영진촌(吉林省 蛟河県 天北郷 永進村)을 들 수 있다.[2]제주방언등 다른 방언의지역은 형성되지 않았으나 중국이주1세중에서 가끔 포함되여 있다. 특징  음운, 문법, 어휘 각 분야에 있어서 바탕에 깔린 한국어방언에 따라 지역마다 방언적특징을 가진다. 음운  서남 방언 지역에서는 단모음 [ø](ㅚ)와 [y](ㅟ)를 가지며 동남 방언 지역에서는 [ɛ](ㅐ)와 [e](ㅔ)가 구별되지 않는다. 중국조선말은 일반적으로 한반도북부 방언의 영향력이 강하여 일부의 /ㅈ/, /ㅊ/, /ㅉ/이 /ㄷ/, /ㅌ/, /ㄸ/으로 나타나거나 모음 /i/, 반모음 /j/에 앞선 /ㄴ/이 어두에 올 수 있는 등 북부 방언의 특징들을 잘 간직한다. 또 동북 방언, 동남 방언 지역에서는 변별적인 고저 악센트(이른바 ‘성조’)를 가지며 소리의 높낮이로 단어의 뜻을 구별한다. 문법  표준어의 ‘-ㅂ니까/-습니까’가 길림성 화룡시, 훈춘시(둘다 동북 방언 지역)에서 ‘-ㅁ둥/-슴둥’으로 나타나고 흑룡강성 태래현(동남 방언 지역)에서는 ‘-ㅁ니꺼/-심니꺼’로 나타나는 등 지역적특징이 있다. 또 통사론 차원에서 중국어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있다. 전화를 치다 (전화를 걸다) < 중국어 간체: 打电话   어휘  어휘는 중국어의 영향이 아주 크며 적지 않은 어휘가 현대 중국어로부터 차용된다. 중국어 어휘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는 차용 어휘. 판공실 < 중국어 간체: 办公室 (사무실)  그외의 차음현상: 중국어 발음을 따른 차용어. 성조의 탈락 등 조선어의 음운 체계에 맞춰 중국어 원음이 약간 변형된다. 땐노 < 중국어 간체: 电脑, 병음: diànnăo (컴퓨터)   토픽전문가총 획득메달 전문|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1추천자 목록 한국어의 방언인 중국조선말에 대한 모든 것 -중국에 살고 있는 재중동포들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한국어 방언의 일종으로, 만주 연변지역과 흑룡강성 남부에서 가장 가까운 방언은 동북 방언이다. 이유는 이 지역 연변 조선족동포 대부분이 함경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기 때문. 다른 길림성이나 랴오닝성에서는 서북 방언계의 언어를 쓴다. 그리고 원래 조선에서 이주할 때 마을이나 친족 단위로 만주의 시골로 한꺼번에 이주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마을중엔 동네 전체가 서남 방언, 경기 방언, 동남 방언 등 특정지역 사투리를 쓰는 마을이 꽤 많다. 역사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연변에 조선족 자치구가 설치 되었고, 주은래가 총리로 재직 당시 "중국의 조선어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문화어를 표준어로 한다"는 조치로 북한의 문화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문화대혁명 당시에 중국 전역에서 수많은 문헌자료들과 문화유산들이 사라졌는데 연변지역이라고해서 예외는 아니라서 많은 조선어 서적과 사진, 문화자료들이 대거 소실되거나 사라졌다. 당시 조선어로 된 책들 중 마오주의에 관련이 없거나, 한복 사진이 나오거나, 한글로 적은 편지가 나오기만 해도 조선 특무(간첩), 남조선 특무, 지방민족주의자로 몰려서 처벌받거나 조리돌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출처: 연변 문화대혁명, 10년의 약속.)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에는 이전에 사라졌던 책들이 다시 발간되는 등 조선어 서적의 발행량이 크게 늘기도 했다. 한 편으로 북한의 경제가 막장화되어가고,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남한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문법  어휘에선 북한의 문화어에 영향을 받아서 두음법칙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문법적인 면에선 중국어의 영향을 받기도 하다. 예를 들면, '전화를 걸다'를 중국어 打电话에서 유래된 '전화를 치다'하는 형태로 쓴다 하지만 90년대부터 남한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남한 표준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특히 연변쪽 조선어 티비와 라디어 방송의 아나운서의 발음과 표현이 상당히 한국화 되었다. 사실 그럴수밖에 없는게 90년대 이후 한국문화를 접할수있게 되면서 어휘면에서 영향이 많이 받고, 한국에 많이 취업을 하게되면서 자연스레 많은 조선족동포들이 표준어를 접하게 되었고, 조선문책의 발행량도 수익성문제로 적어지는 바람에 한국서적에 많이 의존 할수밖에 없었다. ... ...    
1402    단편 시모음 댓글:  조회:4773  추천:0  2015-08-16
    착하게  살았는데  우리가  왜 이곳에  - 하상욱 단편시집 '지옥철' 중에서 -  니가  문제일까  내가  문제일까  - 하상욱 단편시집 '신용카드' 중에서 -  끝이  어딜까  너의  잠재력  - 하상욱 단편시집 '다 쓴 치약' 중에서-  너인줄  알았는데  너라면 좋았을걸  - 하상욱 단편시집 '금요일 같은데 목요일' 중에서-  내가 다른걸까  내가 속은걸까  - 하상욱 단편시집 '맛집' 중에서 -  꼭 온다더니  또 속인거니  - 하상욱 단편시집 '지구종말' 중에서 -  두근  두근  두근  두근  - 하상욱 단편시집 '빈속에 커피' 중에서 -  나한테  니가 해준게 뭔데  - 하상욱 단편시집 '수수료' 중에서 -  알콩달콩  좋아보여  재밌게도  사는구나  - 하상욱 단편시집 '옆 사람 카톡' 중에서 -  너의 진짜 모습  나의 진짜 모습  사라졌어  - 하상욱 단편시집 '포토샵' 중에서 -  가끔씩  깨닫는  너라는  고마움  - 하상욱 단편시집 '재부팅' 중에서 -  생각의  차이일까  오해의  문제일까  - 하상욱 단편시집 '미용실' 중에서 -  걱정  접어둬  내가  있잖아  - 하상욱 단편시집 '무이자할부' 중에서 -  뭐가  뭔지  - 하상욱 단편시집 '연말정산' 중에서 -  인기는  영원히 머물지 않아요  - 하상욱 단편시집 '인기 가요' 중에서 -  어디갔어 - 하상욱 단편시집 '월급' 중에서 -  정해진  이별  새로운  시작  - 하상욱 단편시집 '2년 약정' 중에서 -  다  잊고 싶은데  더  또렷해지네  - 하상욱 단편시집 '스포일러' 중에서 -  서로가  소홀했는데  덕분에  소식듣게돼  -하상욱 단편시집 '애니팡' 중에서 -  잘못된 선택  뒤늦은 후회  - 하상욱 단편시집 '내 앞자리만 안내림' 중에서 -  고민하게 돼  우리둘사이  - 하상욱 단편시집 '축의금' 중에서 -  늘 고마운 당신인데  바보처럼 짜증내요  - 하상욱 단편시집 '알람' 중에서- 나는 했는데 너는 몰랐네 - 하상욱 단편시집 '밀당' 중에서- 안 좋은 척 안 기쁜 척 - 하상욱 단편시집 '택배 받을 때' 중에서-  
1401    연변작가협회 그 발자취 댓글:  조회:6040  추천:1  2015-08-16
      건국후 중국에 조성된 새로운 사회력사적환경과 조건,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생활의 제반 분야에서 거대한 변혁이 이룩된 거창한 현실은 조선족작가들로 하여금 감격과 새로운 지향으로 흥분되게 하였으며 또 그들에게 문학활동의 사회적기반 확립을 위한 문단의 새로운 정비작업과 새 시대의 조명을 받는 새로운 민족문학건설에 떨쳐나설것을 절박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시대적요청에 부응한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해방후  해방전 이민문단의 중견작가들이 거의 다가 조선반도에로 대이동함에 따라 이민문단은 해체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중국에 남은 해방전 작가로는 리욱과 김창걸뿐이였으므로 조선족문단은 백지상턔와 다름없게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족문인과 관계인사들이 해방과 함께 문학단체의 결성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 단체들로는 간도문예협회(연길), 동라문인동맹(연길), 동북신흥예술협회(목단강), 중쏘한문화협회(연길), 로농예술동맹(도문) 등을 들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단체들은 단명(短命)이였다.  작가들은 자기의 조직적인 문학단체도 없이 분산적으로 창작활동을 벌려야 했음으로 이런 상황은 조선족문학발전을 엄중히 위협하고있었다.    변화된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치열한 민족의식과 조선족문학건설의 사명감을 가진, 전국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적지 않은 작가들 이를테면 흑룡강성 목단강, 할빈지역에서 문학활동에 종사하고있던 김례삼, 김태희, 최수봉, 김동구, 리홍규, 임효원 황봉룡, 최현숙, 길림성 통화, 매화구지역에서 문학적기량을 과시하고있던 최정연, 주선우, 백남표 그리고 관내의 중국 항일 근거지 태항산에서 문학활동에 종사하였던 최채, 김학철, 정길운, 고철 등 작가들이 조선족문단의 새로운 정비작업과 새로운 조선족문학건설을 위해 건국 전야와 직후 당시 조선족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인 연변의 연길에 이주함과 아울러 연길시와 연변의 기타 지역에서 문학창작에 정진하고있던 작가들 이를테면 리욱, 김창걸, 현남극, 채택룡, 마상욱, 설인, 김순기, 홍성도, 김창석, 서헌 등과 대회합하여 새로운 “문화부대”를 이루게 되였다.   조선족문단의 새로운 정비작업과 문학활동에는 곤난이 첩첩하였고 단체결성, 잡지창간, 인사배치 등에서 미처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무시로 나타나서 당시의 작가들로 하여금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문화부대”의 문인들은  만난을 박차고 문단의 사회적기반 구축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50년 1월 15일, 제1차중화전국문학예술일군대표대회(1949년 7월 2일-1949년 7월 19일)의 정신을 받들고 최채, 현남극, 김동구, 임효원 등의 발기하에 연변문예연구회를 성립하였다. 성립대회는 연변일보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 대회당에서 열렸다. 주임에 최채, 부주임에 리욱, 김동구, 상무위원에 전춘봉, 김태희, 고철, 채택룡, 백남표 등 9명으로 상무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그 산하에 문학,연극, 음악, 무용, 미술 등 5개 부를 두고 문예창작활동을 여러모로 조직하였다. 당시 회원은 26명이였다. 이 연구회는 건국후 조선족문단의 기반을 닦기 위한 첫 조직적거동이였다.     하지만 이 연구회는 조선족문예사업의 급속한 발전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1951년 4월 23일에 연변문예연구회를 해소하고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주비위원회를 결성(주임 김동구)하여 그 산하에 문학, 연극, 무용, 미술, 음악 등 5개부를 두었다. 기관지로 《연변문예》를 6호까지 발간하고 페간되였다. 이 시기의 주필은 김동구, 편집위원은 김동구, 김순기, 리홍규, 채택룡이였다.   그 해 8월, “3반5반(三反五反)”운동중에서 정치형세의 변화에 따라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주비위원회 지도부를 다시 정돈하였는데 주임에 최채, 김학철, 부주임에 서령, 비서장에 임효원이였다. 그해 12월에 이르러 중공연변지위에서는 또 이른바 “인사변동”을 단행하여 김학철을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복잡다단한 주비작업을 거쳐 1953년 7월 10일, 드디여 연변문학예술계련합회 제1차대표대회! (대표 56명, 회원 75명)를 열고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예술일군련합회(략칭 연변문련)를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연변문련은 1954년 1월 《연변문예》지를 복간(1956년 12월까지 총35호를 내고 페간)발행함으로써 조선족작가 예술인들에게 활무대를 마련해 주었고 그들의 창작활동을 추진하였다. 연변문련 창립 당시의 주임에 배극, 리홍규, 부주임에 정길운, 김학철,, 위원들로는 리홍규, 주선우, 임효원, 김태희, 조득현, 조무, 김순기, 김창걸, 배극, 정길운, 김학철, 정명석, 조창선, 정진옥 등 13명이였고 《연변문예》주필은 리홍규, 부주필로는 정길운, 김순기였다. 1956년 3월, 중공연변주위선전부에서는 《연변문예》편집위원회를 개선하였는데 주필로는 리홍규, 부주필로는 정길운, 편집위원들로 김순기, 최현숙, 홍성도, 임효원, 주선우, 리근전, 김학철, 황봉룡 등이였다.    제1차연변조선족자치주문예일군대표대회와 연변문련의 성립은 조선족문예사업이 조직적인 궤도에 들어섰다는것을 표징하는바  이것은 조선족의 당대문학발전사에 있어 일대전환을 표시하는 리정표적인 의의를 띠고있다.     연변문련의 성립 및 활동은 연변문학발전에 추진적역할을 하였지만 날로 확대되여가고있는 작가군체의 요구를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따라서  그 당시 작가들은 자기들을 대변할수 있는 독립된 작가협회의 탄생을 갈구하였다.   바로 이런 시각에 리홍규와 황봉룡이 연변지역의 문인들을 대표하여 1956년 1월 중국작가협회 주최로 된 소수민족작자좌담회에 참석하게 되였는데 그 좌담회에서 그들은 연변문단 상황회보와 더불어 연변에 작가 자체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중국작가협회 지도부를 감동시켰다. 중국작가협회는 북경에서 열린 제2기 제2차리사회(1956.2.27)에서 신강위글자치구, 내몽골자치구 및 연변조선족자치주 등에 중국작가협회 분회를 성립할것을 결정하였다. 중국작가협회 동북분회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의 성립을 위해 리욱 등 연변작가 10여명을 회원으로 발전시켰다. 연변에서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설립준비위원회(주임:배극, 위원:리홍규, 김순기, 주선우, 비서장:임효원)를 구성하고 복잡다단한 준비작업을 거쳐 1956년 8월 15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소에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연변작가협회 전신) 제1차회원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의 탄생을 선언하는 이 대회는 중국작가협회 지도부와 연변주위 지도부의 각별한 배려를 받아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당시 중국작가협회 서기처 강탁서기, 동북작가협회(심양분회)사전수부주석, 길림성문련 마염부주임, 당시 중공연변주위 서기 주덕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 부주장 교수기, 리호원 등이 대회에 참석하여 대회를 빛내주었다.  대회에서 강탁서기가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설립에 관한 중국작가협회의 결의를 선포하였다.   결의문은  이 단체가 연변 각 민족 작가들 및 기타 지구 조선족작가들이 자원적으로 결성한 인민단체로서 중국작가협회 분회에 속하며 당지 당위의 령도를 받는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준비위원회 주임 배극이 《연변문학의 몇년래 창작상황과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임무》라는 제목으로 사업보고를 하였고 강탁서기, 사전수부주석, 마염부주임이 축사를 드렸다. 강탁서기는 축사에서 “소수민족지구에서 작가의 조직 즉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를 성립한것은 우리 나라 력사상 종래로 없었던 일이며 천지개벽이래 첫 일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축하가 얼마나 충분한 리유가 있는가를 설명한다”라고 했다.   8월 15일 대회에서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초대 회원39명(그중 한족회원 2명, 회족회원 1명) 명단을 공포하였다. 초대 회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리욱, 임호(임효원), 김철, 리행복, 최정연, 황봉룡, 김례삼, 란수봉(한족), 조룡남, 정국초(한족), 리근희, 윤정석, 최수봉, 서헌, 최형동, 김인준, 홍성도, 황옥금, 김순기, 차창준, 김창석, 주홍성, 채택룡, 배극, 리홍규, 최현숙, 주선우, 정명석, 마상욱, 김동구, 리근전, 김창걸, 리희일, 정길운 왕유(회족), 마상욱, 최채, 홍춘식, 김태희(총 39명).   8월 16일에는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제1기 제1차 리사회의를 개최하여 주석단을 선거하고 리사회를 구성하고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규약(수정초안)》을 채택하였다.   초대 주석에 최채, 부주석에 배극, 김순기, 정길운, 최정연, 리사(12명)에 최채, 배극, 최정연, 정길운, 김순기, 주선우, 임효원, 최현숙, 리홍규, 김창걸, 황봉룡, 리근전 등이였다.   이 대회에서는 건국후 조선족의 문학건설과 창작실천의 경험을 총화하고 분회의 중심과업을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 . “작가들로 하여금 우리 문학의 주인공들의 생활실제에 깊이 침투하도록 조직하고 도와주며 작가들을 사상상과 예술상에서 성숙하도록 하는 방면에서 가능한 일체의 방조를 아끼지 않으며 문학방면에서의 일체의 잠재력량을 발견하고 조직하여 작품을 쓰도록 하며 적극적으로 청년작자를 배양하며 창작경쟁과 자유토론을 전개하면서 당의 의 방침을 잘 관철시켜야 한다.”(배극의《몇년래 연변의 문학창작정황과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임무》에서. 《연변문예》1956년9호)   이 대회에서는 작가들이 거창한 사회주의현실속에 들어가며 문학신인들을 배양하며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을 관철하여 제재, 쟝르, 형식, 풍격의 다양화를 제창하고 예술상에서 부동한 류파의 자유로운 경쟁을 제창하며 “시대의 영웅적인민의 찬란한 사시로 되는 작품을 창작”하며 조선족의 문학유산을 발굴,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문제 등을 보다 똑똑히 밝히였다.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가 성립된 후 그 산하에 창작위원회, 민간문학위원회, 번역위원회, 간행물위원회를 설치하고 그를 통해 자기의 활동을 힘있게 추진시켰으며 또한 1957년 1월에 문학월간지 《아리랑》 (그의 전신은 《연변문예》.1958년 12월까지 발간하고 1959년 1월부터《연변문학》으로 개칭)을 발간함으로써 작가들에게 문학광장을 마련해주었다. 《아리랑》의 발간으로 하여 조선족문단의 문학창작이 더욱 생기를 띠게 되였고 사회주의적내용과 민족형식을 갖춘 새로운 민족문학을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가 한결 더 똑똑하게 되였다. 《아리랑》창간사가 그 좋은 실례로 되는데 그 몇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랑》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민족정책과 ‘로농병을 위해 복무’하며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위대한 문예방침아래 탄생하였으며 독자 여러 동무들의 뜨거운 관심과 적극적인 협조 지지에 의하여 자기의 첫걸음을 떼였다.”   “《아리랑》은 창작상 가장 좋은 방법의 일종인 사회주의사실주의창작원칙에 립각하여 연변 및 국내 각지의 조선족인민들이 전국 각 형제민족인민들과 함께 진행하는 조국 사회주의건설의 줄기찬 로력적생활모습들을 반영하며 그들을 교육하여 사회주의건설의 더 큰 위훈에로 불러일으킨다.”   “《아리랑》은 당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방침을 관철집행하기 위하여 제재와 쟝르 범위를 확대하면서 각종 류파, 각종 형식, 각종 풍격의 예술작품을 대담히 선택 게재하며 간행물의 독특한 풍격과 특색을 수립하기 위해 정상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아리랑》은 적극적으로 고전작품을 정리소개하며 민간문예를 발굴, 정리, 소개하는 사업을 집행하며 한족을 비롯한 국내 각 형제민족의 문학성취 및 세계문학의 정화들을 적극 소개함으로써 연변문학으로 하여금 민족문학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 발양하며 민족풍격이 농후한 우수한 사회주의문학으로 되게 하며 조국의 사회주의문학건설의 위대한 사업에 이바지한다.”   이상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성립과 월간지 의 탄생은 조선족당대문학사상의 획기적인 사변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실로 조선족작가들은 이때로부터 자기의 전문적인 문학단체와 문학지에 기대어  자기의 창작활동을 폭넓게 벌릴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좋은 형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반우파투쟁” 및 그 후의 지속적인 비판운동과 문예계의 계급투쟁확대화와 절대화 등은 조선족작가로 하여금 “좌”경적로선과 사조의 속박속에서 모대기게 하였고 문단을 위축시키고 작가협회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문화대혁명”시기에 이르러서는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등 문학예술단체에 “뻬떼피구락부”라는 죄목을 들씌워 강박적으로 해산시켰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1978년 10월 연변조선족자치주문학예술계련합회 제2기 제3차전체위원(확대)회의를 거쳐 연변문련의 회복과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도 회복되였다. 이 회의에서 연변분회지도부를 새로 선거하고 연변분회산하에 소설문학, 시문학, 평론문학, 아동문학, 번역문학 등 창작위원회를 설치하고 할빈, 길림, 통화, 장춘, 심양, 북경 등 지역에 작가소조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는 이때로부터 1985년 4월까지 연변문련산하의 한개 협회로 있었다. 1985년 4월에 연변문련에서 정식으로 분립한 독립한 작가들의 전문단체로 된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는 1996년 8월에 다른 기타 성, 직할시 분회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새로운 사단법인등록법에 의해 지방작가협회로 즉 연변작가협회로 개칭하고 중국작가협회 단체회원의 일원으로 되였다.   문학지의 운명도 기구하였다. 지방민족주의를 반대하는 투쟁가운데서 “아리랑”이란 제목은 협애한 민족주의 색채가 짙다고 하여 1959년 1월 《아리랑》을 《연변문학》으로 개칭하였다. 《연변문학》은 1961년2월호까지 발간하고 페간되였다가 1974년 4월에 복간되였다. 《송화강》지는 할빈에서 1960년에 창간되여 총권 36호를 발간하고 페간되였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넘어가야 할 점은 지난날 우리 문학지들은 “구사일생(九死一生)”, “비명횡사(非命橫死)”의 운명이란 멍에를 지고 숨가쁘게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좌”경적로선의 충격, 경제적곤궁, 문학시장의 한계 등으로 하여 어떤 문학지는 “비명횡사”하였고 어떤 문학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지어 지난날에 우리 문학지들은 자기 이름도 타의나 자의에 따라 수시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족의 문학단체와 문학지의 생존과정은 처절했으며 지어 한때는 죽음의 심연속에 추락되기도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 성과적으로 페막 최국철 주석으로, 우요동 상무부주석으로, 김영건, 채운산, 전화민, 김경훈, 김혁, 황령향, 정호원, 최동일 부주석에 당선. 좌로부터 황령향, 김영건, 정호원, 우요동, 최국철, 채운산, 김혁, 최동일, 전화민. 2015년 8월 11일에 소집된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가 각항 의정을 원만히 완수하고 이날 오후 연길 백사호텔 국제회의청에서 성과적으로 페막. 이번 대회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제8기 리사회 사업보고에 대한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 결의》, 《〈연변작가협회 장정〉에 수개에 대한 연변작가협회 제9차 회원대표대회 결의》, 《연변작가협회 제9기 리사회 리사 선거방법》을 심의 통과하고 제9기 리사회 리사를 선거하였으며 제9기 제1차 리사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리사회 주석, 부주석을 선거하였다. 리사들이 주석, 부주석 선거를 하고있다. 연변주당위 선전부 부부장 리호남의 사회하에 진행된 연변작가협회 제9기 1차리사회에는 113명의 리사가운데서 사유로 17명이 결석, 96명 리사가 선거에 참가하였는데 제9기 리사회 주석에 최국철이, 상무부주석에 우요동(만족)이, 겸직 부주석에 김영건, 채운산, 전화민, 김경훈, 김혁, 황령향, 정호원, 최동일이 당선.    이번 대회 제9기 리사회 중 시가창작위원회 리사들로는 김영건, 리순옥, 윤청남, 주룡, 김영춘, 김현순, 리임원, 림금산, 박장길, 김승종, 박문파, 김일량, 석문주, 김창희, 허옥진, 김경희, 심예란, 석화 등이 선거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400    혼상제례용어해설 댓글:  조회:7255  추천:0  2015-08-15
가가례(家家禮) : 집집마다 달리 하는 예법  가례(家禮) : 한 집안에서 쓰는 예(禮). 대부(大夫)의 집에서 쓰는 예절  가매장(假埋葬) : 임시로 시체를 묻는 것  가모(嫁母) : 시집간 어머니  가신(家神) : 집을 지킨다는 신  가토(加土) : 무덤에 흙을 더 끼얹거나 잔디를 더 입히는 것  갈(碣) : 가첨석(加檐石)을 얹지 앓고 머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  갈장(渴葬) : 예월을 기다리지 않고 급히 지내는 장례  감실(龕室) : 祖上(조상)의 位牌(위패)를 넣어 祠堂(사당)에 두는 상자 를 감실이라 하는데 이것은 여덟 짝의 문으로 4代(대)를 따 로 모시도록 만들어졌다.  강복(降服) : 부재모상(父在母喪)에 복을 강쇄(등급을 낮춤) 하는 것  강선(剛先) : 혼인 때 남자가 먼저 여자 쪽에 사성을 드리는 것  강신(降神) : 제사 지낼 때에 신이 내리게 하는 뜻으로 향을 피우고 술 을 잔에 따라 모사(茅沙)에 붓는 것을 말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위에 계신 신을 모시고자 함이고, 술을 따르는 것은 아 래에 계신 신을 모시고자 함이다.  강유(剛柔) : 음과 양. 낮과 밤  강일(剛日) : 10간(干)의 홀수 날로 굳센 날의 뜻. 일진(日辰)의 천간(天干) 이 양(陽)에 해당하는 날  개문(開門) : 닫았던 문을 여는 것  개자(介子) : 맏아들(宗子) 이외의 모든 아들  개장(改葬) : 장례한 묘지에서 시신을 발굴하여 다른 장소로 옮겨 안장 하는 것  개제(改題) : 신주에 봉사자 중심으로 글자를 새로 고쳐 쓴 것. 주면의 글씨를 모두 지우고, 새로 분(粉) 칠을 하여 씀  개좌(開座) : 어떤 일을 논의하여 처리하려고 벌인 자리  갱(羹) : 국  견전(遣奠) : 영구가 집을 떠날 때 지내는 의식  경상(輕喪) : 상복을 석 달 동안 입는 상  계문(啓門) : 합문 뒤에 문을 여는 제사의 의식이다. 이 때 문을 열기 전에 제주는 기침을 세 번 한다.  계반개(啓飯蓋) : 밥뚜껑을 여는 것  계반갱개(啓飯羹開) : 밥그릇 뚜껑인 반개와 국그릇 뚜껑인 갱개를 여 는 것  계부(繼父) : 의붓아버지  계빈(啓殯) : 빈소를 열다.  계상(稽喪) : 거상(居喪) 중에 조객(弔客)에게 절하는 예. 이마를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릴 뿐 예의를 갖추는 모양이 없는 것  계절(階節) : 묘소의 마당. 곧 무덤 앞에 평정하게 만들어 놓은 땅  고리성(告利成) : 제사를 마쳤다고 고하는 말  고복(皐復) : 초혼하고 발상하는 의식  고부(告訃) :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것  고비(考妣) : 돌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고손(孤孫) :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다음에 할머니는 살아계시고 할아 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주상인 손자 즉 장손  고애손(孤哀孫)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모 두 돌아가셨을 때의 주상인 손자  고애자(孤哀子) : 외롭고 애달픈 아들이란 뜻으로 양친이 작고하였을 때 씀  고위(考位) :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그 이상 각 대(代)의 할아버지 위 (位)를 말한다.  고자(孤子) : 외로운 자식이란 뜻으로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의 자칭  고종명(考終命) :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음  곡(哭) : 상례에서는 상제들이 소리 내어 우는 일. 읍(泣)은 소리 없이 우는 것  곡비(哭婢) : 예전에는 장례 때 곡성이 끊이지 않도록 상복한 계집종을 애곡하게 하였는데 이 계집종을 곡비라 함  공포(公布) : 관(棺)을 묻을 때 관을 닦는 삼베 헝겊. 발인할 때 명정과 함께 세워서 들고 감  과채탕적(果菜湯炙) : 맨앞줄부터 과채탕적 순으로 진설한다.  관(棺) : 시신을 담은 궤로 천판(天板) 하나, 지판(地板) 하나, 사방판(四 方板) 넷으로 이루어 짐  관건(冠巾) : 굴건과 두건  관세(盥洗) : 손을 물로 씻고 수건으로 닦음  관수(盥手) : 세수 대야 물로 손을 씻음  관수세수(盥水洗水) : 대야 물에 손을 씻는것  괄발(括髮) : 풀었던 머리를 다시 묶는 것  광중(壙中) : 시체를 묻는 구덩이  교배(交拜) : 서로 절하는 것. 혼인 때 신랑신부가 서로 절하는 것  교배례(交拜禮) : 혼인할 때 신랑신부가 맞절하는 일  교의(交椅) : 신주나 혼백상자를 놓아두는 긴 의자  교자상(交子床) : 네모로 된 큰 음식상  구반경(九飯頃) : 밥을 아홉 숟가락 뜨는 시간. =구식경(九食頃)  구천(九泉) : 저승  국궁(鞠躬) : 읍하는 자세로 허리를 굽히는 것  굴건(屈巾) : 상주가 두건 위에 덧쓰는 건  궐명(厥明) :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때. 미명(未明). 그 다음 날  궤(簋) : 종묘, 문묘 등 나라 제사에 쓰는 기장이나 피를 담는 제기  궤연(几筵) : 영궤(靈几)나 혼백(魂魄), 신주(神主)를 모셔 두는 곳  궤전(饋奠) : 빈소에 제수를 차려 놓은 것  궤좌(几坐) : 무릎 꿇고 앉음  금(衾) : 소렴금으로 명주로 만든 속 이불  금정기(金井機) : 묏 구덩이를 팔 때 구덩이의 길이와 넓이를 정하는 정 (井)자 모양의 기구  기년(期年) : 만 1년  기신제(忌神祭) : 사람이 죽은 날 지내는 제사  기일(忌日) 사람이 죽은 날. 제삿날  기제사(忌祭祀) : 해마다 죽은 날에 지내는 제사  길례(吉禮) : 제사. 길사(吉祀)  길복(吉服) : 평상시의 정복  길제(吉祭) : 삼년상이 끝난 뒤에 주사자가 바뀐다는 것을 아뢰고, 5 대조는 체천(遞遷)을 다음번에 하거나 이제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주사자 위주로 신주에 제사 대상과 봉사자를 고쳐 쓰는 등에 관한 제사  납골(納骨) : 죽은 사람의 유골을 절에 가져다 두거나 무덤에 묻음  납길(納吉) : 혼인절차 중 육례의 하나로 여자 집에 알려 혼인을 결정 하는 일  납주(納主) : 신주 들여 모시기  납징(納徵) : 납길한 후 정혼한 표시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예물 을 보내는 일  납채(納采) : 신랑 집에서 신부집 으로 혼인을 청하여 보내는 예물(禮物)  내간(內艱) : 모친상. 승중의 할아버지의 상사  노제(路祭) : 발인할 때 밖에서 지내는 제사  뇌주(酹酒) : 술을 조금 따라 삼제주(三祭酒) 하  단자(單子) : 부조나 선사 등 남에게 보내는 물품의 이름과 수량 또는 보내 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받을 사람에게 알리는 종이  단헌(單獻) : 제사에 삼헌하는 술을 단 한 번만 올리는 술  담제(禫祭) : 대상을 지낸 그 다음, 다음달에 지내는 제사. 상복을 벗 는 제사  답소(答疏) : 답장  당내(堂內) : 8촌 이내  대곡(大哭) : 큰소리로 슬프게 우는 것  대공(大功) : 대공친의 상사에 9개월 간 입는 굵은 베로 지은 상복  대기(大期) : 대상의 기간  대기(大忌) : 부모 기일  대대(大帶) : 도포의 끈  대렴(大殮) : 소렴한 다음 날 시신에게 옷을 거듭 입히고 이불로 싸서 베로 묶는 일  대렴금(大殮衾) : 시신을 싸는 큰 이불  대상(大祥) : 사망 후 만 2년 만에 지내는 제사로서 소상을 지낸 지 1 년이 되는 날에 지내는 제사로 상례의 마지막에 해당함  대여(大輿) : 나라에서 쓰던 큰 상여  대제(大祭) : 종묘와 사직에 지내는 제사  대축(大祝) : 제향(祭享)에 축문을 읽는 자  도복(道服) : 도포(道袍). 도사가 입는 옷. 선비의 통상예복인 겉옷. 고대 에 집안에서 입던 평상복  도유사(都有司) : 향교, 서원, 중중, 계중 등에서 필요한 사무를 맡는 우두 머리  독개(櫝蓋) : 위패함 덮개  독축(讀祝) : 축을 읽는 것  독흘(讀訖) : 독축이 끝나는 것  돈장(敦匠) : 관곽(棺槨)에 대한 직책을 담당하는 사람  동심결(同心結) : 두 고를 내고 맞 죄어서 매는 매듭으로 염습의 띠를 매는 매듭  두(豆) : 김치 젖갈을 담는 제기. 뚜껑이 달린 제기(祭器), 나무로 만들 며 굽이 높고 받침대와 뚜껑이 있다.  두건(頭巾) : 머리에 쓰는 관  두동미서(頭東尾西) :생선을 제사상에 놓을 때에도 격식이 있는데, 머 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을 향하도록 하여 놓는 것을 말한다.  둔석(窀穸) : 무덤구덩이  만가(輓歌) : 상여를 메고 묘지로 가기까지 상여꾼이 부르는 가사  만사(輓詞) :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  만장(輓章) :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에 써서 만든 것으로 부조(扶助) 중 만장 부조를 으뜸으로 쳤으며 만장이란 영 구를 끌고 간다는 뜻  망극(罔極) : 다 함이 없음  망료위(望燎位) : 축문을 불사르는 곳  망실(亡室) : 죽은 아내  망요예(望燎禮) : 축문지방을 불 사르는것  매안(埋安) : 신주를 무덤 앞에 파묻음  매혼(埋魂) : 종상(終喪) 후 혼백을 묘 옆에 묻는 것  멱목(幎目) : 염습할 때 얼굴을 가리는 것  명기(明器) : 사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묻는 식기, 악기, 집기, 무기 따위로 실물보다 작게 만드는 상징물  명정(銘旌) :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기  모사기(茅沙器) : 강신할 때 쓰는 띠의 묶음과 모래를 담는 그릇  모상삼경지진(茅上三傾至盡) : 강신술을 묘 앞에 세 번 기울여 따름  모선망(母先亡) : 어머니 먼저 죽음  묘갈(墓碣) :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하고 작은 돌비석  묘도수갈(墓道豎碣) : 묘 근처에 비석을 세우는 것  묘지(墓誌) : 묘지는 죽은 이의 성명.경력(經歷).공덕(功德).생사장(生死 葬)의 연월일등을 기록한 글로 사기판(砂器板)이나 돌 등에 새 겨 무덤 옆에 묻는 것을 말한다. 뒷날 무덤이 유실(流失)되었 을 경우 자손들이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서이다.  묘표(墓表) : 무덤 앞에 세우는 돌을 표석 또는 묘표라고 한다.  무시곡(無時哭) : 정한 때가 없이 아무 때나 곡을 하는 것  무축단잔(無祝單盞) : 제사를 지낼 때 축문을 읽지 않고 술잔도 한번만 올리는 것  미망인(未亡人) : 아직 죽지 않은 사람  미명(未明) : 날이 채 밝기 전. 날이 셀 무렵.  반(飯) : 메, 밥  반함(飯含) : 염습할 때 시선의 입에 쌀과 구슬을 물리는 일  반혼(返魂) : 장사 지낸 뒤에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 반우(返 虞)  발상(發喪) : 상제가 머리를 풀고 곡을 하여 초상난 것을 알림  발인(發靷) : 상여가 상가에서 떠남  방상씨(方相氏) : 상여 앞에 가면서 잡귀를 물리치고 광중의 악귀를 쫓 는 탈을 쓴 사람  방손(傍孫) : 자차손. 방계(傍系) 혈족의 자손  방조(傍祖) : 오대조 이상의 직계가 아닌 방계의 조상  배흥배흥(拜興拜興) : 절을 두 번함  백(魄) : 넋  벽감(壁龕) : 사당을 따로 두지 못하는 집에서는 대청 뒷벽이나 마루 끝에 감실(龕室)을 달아 위패(位牌)를 모시기도 한다.  변(籩) : 실과와 건육을 담는 제기  변두(籩豆) : 변(籩)은 대나무 제기, 두(豆)는 나무 제기.  변복(變服) : 소복에서 제복으로 갈아입음  별묘(別廟) : 가묘(家廟)에서 받들 수 없는 신주를 따로 모시던 사당  별세(別世) : 이 세상을 떠남. 곧 죽음  병대(餠臺) : 떡을 담는 제기  보(簠) : 제향(祭享)에 기장과 피를 담는 그릇  보공(補空) : 빈곳을 메꾸어 채움  복(服) 치마 : 거상(居喪)하는 여자가 복으로 입는 치마  복위(復位) : 있던 곳에 가져다 놓음  복위궤(復位跪) : 다시 끓어 앉음  복인(服人) : 기년(朞年) 이하의 상복(喪服)을 입는 사람  본생(本生) : 생가  봉로(奉爐) : 향로를 받드는 사람  봉분(封墳) : 흙을 쌓아 올려서 무덤을 만드는 것  봉분제(封墳祭) : 장사지낼 때 무덤을 만든 뒤 지내는 제사. 평토제(平 土祭)  봉사(奉祀) :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  봉사손(奉祀孫) :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자손  봉영(封塋) : 무덤  봉작(奉爵) : 봉작은 사준이 준소에서 술을 따라준 술잔을 헌관에게 가 져다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봉작수잔반헌관(奉爵授盞盤獻官) : 봉작이 술잔을 헌관에게 줌  봉제사(奉祭祀) : 제사를 받들어 모심  봉향(奉香) : 향을 받드는 제관  부고(訃告) : 사람이 사망한 직후 그 사실을 친척이나 지우(知友) 들에 게 알리는 서신  부당(夫黨) : 시집 가족  부복(俯伏) :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는 것  부복곡(俯伏哭) : 엎드려 곡하는 것  부복궤(腑伏跪) : 끓어 앉음  부상(父喪) : 아버지의 상사(喪事)  부음(訃音) : 부고(訃告)  부의(賻儀) : 초상난 집에 부조로 보내는 돈이나 물건  부장(附葬) : 합장(合葬)  부장기(不杖朞) : 재최만 입고 상장을 집지 않는 1년 동안 입는 복  부장품(副葬品) : 예전에 장사 지낼 때 시신과 함께 묻던, 죽은 이가 생전에 쓰던 소지품  부제(祔祭) : 망인의 신주를 사당에 입적시키는 제사  부조기(扶助記) : 답지한 부의와 물품 등을 기록하는 대장. 부의록(賻 儀錄)  부좌(祔左) : 부부(夫婦)를 합장(合葬)하는데 아내를 남편의 왼편에 묻 는 것  부판(負版) : 등에 붙이는 베  북망산천(北邙山川) : 무덤이 많은 곳  북수(北首) : 머리를 북쪽으로 둠. 사자(死者)의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한데서 죽은 사람의 상  분묘(墳墓) : 시체를 묻은 곳  분상(奔喪) : 객지에 나가 있는 자손들이 부모 사망 소식을 접하고 곡 을 하고 환가(還家)하는 것  분지위 및 분축(焚紙位, 焚祝) : 지위 축을 불사르는것  분축(焚祝) : 축(祝)을 불사르는 일  분향(焚香) : 향을 피우는 것  불삽(黻霎) : 불( )자 모양을 그린 널조각에 자루를 달아서 발인 때 상 여 앞뒤에 세우고 가는 제구  불천위(不遷位) : 집안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으로서 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이 신위를 불천 위.  비위(妣位) :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그 이상의 각 대 할머니의 위(位)를 말함  비자(卑者) : 항렬이나 나이가 낮은 사람  비조(鼻祖) : 사람이 배속에서 생길 때 코가 가장 먼저 형상(形狀)을 이 룬다 하여 시조(始祖) 이전의 조상  빈관(殯棺) : 염습(殮襲)만 하고 아직 장사 지내지 않는 영구(靈柩)  빈소(殯所) : 상중에 영위(靈位)를 모셔 두는 곳  사갑제(死甲祭) : 죽은 이의 회갑을 제사하는 것  사고(四孤) : 홀아비 환(鰥), 과부 과(寡), 부모가 없는 고(孤), 자식이 없는 독(獨)  사당(祠堂) : 조상의 혼백을 모셔 두는 곳으로 신주, 향로, 제상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 신주를 상청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다가 상기(喪) 끝난 후 신위를 모신 곳  사서(司書) : 상례의 전 과정에서 소요되는 문서를 작성하고 필사하는 소임  사신(辭神) : 신주를 사당으로 모시고 지방일 경우에는 축문과 함께 불 사르는 것을 말한다.  사십구제(四十九祭) : 사람이 죽어 49일 되는 날. 칠칠일(七七日)  사자(嗣子) : 맏아들  사준(司樽=罇) : 술을 따르는 직책  사초(莎草) : 산소에 띠를 입히고 손질을 새로 하는 것  사화(司貨) : 부의 접수 등 상가의 제반 경리의 출납을 담당하는 직책  삭망(朔望) : 초하루와 보름  삭일(朔日) : 음력의 매달 초하룻날  삭전(朔奠) : 상가(喪家)에서 음력 초하룻날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산신제(山神祭) : 산신에게 지내는 제사  산재(散齋) : 제사전에 목욕재계하는 일  삼년상(三年喪) : 세 해 동안의 거상(居喪)을 말하는 것으로 자식이 태어 난 지 3년(만2년)이 된 뒤에라야 부모의 품을 떠나기 때문에 적어도 젖을 먹이며 키워 주셨던 3년 동안 입는 상  삼상(三殤) : 미성년자가 죽었을 때 분류하는 것으로 하상, 중상, 장상 을 통틀어 이르는 말. 하상은 8세에서 11세 사이에 사망한 것, 중 상은 12세에서 15세 사이에 사망한 것, 장상은 16세에서 19세에 사망한 것.  삼상향(三上香) : 분향(焚香)할 때 향을 세 번 집어 불에 사르는 일  삼시점수(三匙点水) : 밥을 갱물에 세 번 떠서 마름  삼우(三虞) :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  삼일장(三日葬) : 죽 은지 3일 만에 지내는 장사  삼제반(三除飯) : 밥을 세 번 떠서 숙냉 하는 것  삼헌(三獻) : 제사지낼 때 술잔을 세 번 올리는데 가정의 기제사의 경 우에 처음 올리는 잔을 초헌(初獻)이라 하며 제자가 함.  두 번째 올리는 것을 아헌이라 하며 반드시 주부가 함.  세 번째 올리는 것을 종헌이라 하며 참사한 사람 중에서 항렬 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 함.  종헌은 빈이 있으면 빈이 함  삼헌관(三獻官) :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세 헌관  삼희흠(三噫歆) : 기침을 세 번함  삽(翣) : 발인 때 들고 가는 구름 형상을 그린 제구  삽시(揷匙=扱匙) : 제사 때 숟가락을 밥그릇에 꽂는 일  삽시반중(揷匙飯中) : 숟갈을 밥에 꽂음  상(殤) : 20세 전에 죽음(未滿二十而死). 일찍 죽을 상  상(喪) : 부모, 승중의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와 맏아 들에 대한 의례  상(祥) : 조상과 대상의 총칭  상가(喪家) : 초상난 집  상관(喪冠) : 상주의 관  상구(喪具) : 장사 지낼 때 쓰는 기구  상기(喪期) : 상복을 입는 기간  상례(喪禮) : 상제(喪制)로 있는 동안에 행하는 모든 예절  상례(相禮) : 집례를 도와 진행을 알리는 제원  상배(喪配) : 홀아비가 됨. =상처(喪妻)  상복(喪服) : 상주의 옷. 성긴 베로 지으며 바느질을 곱게 하지 않는다.  상부(喪夫) : 남편의 상고(喪故)를 말함  상석(床石) :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는 돌상(石床)  상식(上食) : 상가(喪家)에서 아침저녁으로 궤연 앞에 올리는 음식  상여(喪輿) : 시체를 묘지까지 나르는 제구  상장(喪章) : 거상이나 조상(弔喪)의 뜻으로 웃옷의 가슴부분에 나타내는 표시  상장(喪杖) : 상제가 짚는 지팡이. 부상(父喪)에는 대나무, 모상에는 오 동나무를 씀  상제(喪制) : 부모 또는 승중 조부모의 거상 중에 있는 이. 극인(棘人). 상인(喪人).  상제(喪祭) : 장사 뒤에 지내는 제사  상좌(尙左) : 왼쪽을 위로 숭상함  상주(喪主) : 상사의 중심이 되는 상인(喪人). 망자의 장자가 되는 것이 원칙  상포(喪布) : 초상(初喪) 때 쓰는 포목  상행(喪行) : 장사지내려고 묘지로 가는 행렬  상향곡(相向哭) : 서로 마주보고 곡하는 일  생단(牲壇) : 초헌관이 제사에 쓸 소, 양, 돼지를 성찰하는 곳  생동숙서(生東熟西) : 제사상에 생채(生菜)는 동쪽, 나물은 서쪽에 놓는 것을 말한다.  석전(釋典) : 공자를 제사 지내는 큰 제사. 2월과 8월의 상정일 (上丁日)에 짐승의 희생과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제사함  선부군(先父君) : 돌아가신 아버지  설단(設壇) : 시신이 없는 묘소를 만드는 일  섭사(攝祀) : 남의 제사를 대신하여 지냄  성복(成服) : 초상이 났을 때 상복을 처음 입는 일  성분(成墳) : 봉분  세찬(歲饌) : 설에 차리는 음식. 또는 연말에 보내는 물품으로 세의(歲 儀)라고도 함  소공(小功) : 소공친의 상사에 다섯 달 동안 입는 상복  소렴(小殮) : 시신의 옷과 이불로 싸는 일  소렴금(小殮衾) : 시신을 싸는 이불  소렴포(小殮布) : 시신을 싸는 베  소퇴립(小退立) : 일어나서 뒤로 조금 물러섬  속광(屬纊) : 사람이 숨을 거둘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사람의 입 위에 고 운 솜을 올려놓고 완전히 숨을 거두었는지 지켜보는 것  수시(收屍) : 고복(皐復)이 끝난 뒤 시신이 굳기 전에 시신의 손발을 펴 서 시신을 끈으로 묶는 것  수의(壽衣=襚衣) :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  수작(酬酌) : 서로 응대하고 보답함  수조(受胙) : 예전에, 나라의 제사를 마치고 나서 제사상에 올린 고기 를 제관(祭官)들이 나누어 받는 일을 이르던 말.  수질(首絰) : 상제가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짚과 삼으로 만든 테  숙사소경(肅사小頃) : 잠시 기다림  숙수(熟水) : 끓인 물. 숭늉  순장(殉葬) : 죽은 사람 매장시 산 사람을 함께 매장하던 일  승중(承重) : 장자가 없을 때 장손(長孫)이 아버지를 대신 하여 상주가 되는 것  시마(緦麻) : 종증조, 삼종형제, 종증손, 종현손의 상사에 석 달 입는 상복  시저(匙箸) : 숟가락과 젓가락  시제(時祭) : 4대 봉사가 끝나면 시제로 모시는데 다른 말로 묘사, 시향 이라고도 하며 5대조 이상은 대개 10월 상달에 시제 지냄  시조(始祖) : 한 족속의 맨 위의 조상  신주(神主) : 죽은 조상들의 위를 베푼 나무 패이다. 대게 밥나무를 쓰 며 길이는 8치, 폭은 2치 정도이고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지게 만든다.  심상(心喪) : 복(服)을 입지 않고 마음으로 근신하는 것  아헌(亞獻) : 아헌이란 둘째 번 잔을 올리는 것으로 주부(主婦)는 이때 4번 절한다.  아헌관(亞獻官) : 제사를 지낼 때 두 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제관  악수(幄手) : 소렴할 때 시신의 손을 가리는 헝겊  알묘(謁廟) : 사당을 배알하는 것  알자(謁者) : 큰 제사시 행사자인 초헌관을 인도하는 사람  앙장(仰帳) : 천장이나 상여 위에 치는 휘장  앙재(盎齋) : 제사에 쓰는 흰 술(백주)  애곡(哀哭) : 슬퍼하여 흐느껴 울다. 부모의 상(喪)에 우는 울음  애자(哀子) : 애달픈 아들이란 뜻으로 어머니가 돌아갔으면 애자라 지 칭함  어동육서(魚東肉西) : 제사상에 생선은 동쪽, 육은 서쪽, 적(炙)은 어와 육의 중간에 놓는 것을 말한다.  여묘(廬墓) : 상제가 무덤 가까이에 여막을 짓고 살며 무덤을 지키는 일  역복(易服) : 거상 동안이나 탈상 때 옷을 바꿔 입는 일  연길(涓吉) : 길일을 택하는 것  영구(靈柩) : 시체를 넣는 관  영역(塋域) : 무덤 구역  영위(靈位) : 신위(神位)  영정(影幀) : 족자에 그린 화상. 현대는 사진  영좌(靈座) : 빈소 영위를 모셔 놓은 자리  예관세위(詣盥洗位) : 대야 앞으로 나아감  예제(醴齊) : 제사에 쓰는 술의 일종  오낭(五囊) : 염습할 때 죽은 이의 머리털과 좌우의 손톱, 발톱을 깎 아서 각각 담는 다섯 개의 작은 주머니  오적(五炙) : 삼적( 三炙) 육적(肉炙) 소적(素炙두부적) 어적(魚) 닭, 채 소적을 추가한다.  외간(外艱) : 아버지의 상사. 아버지가 없을 때 할아버지 상사  외생(外甥) : 사위  요대(腰帶) : 허리띠  요여(腰輿) : 장사 지낸 뒤에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소여  요질(腰絰) : 상복을 입을 때 허리에 두르는 띠. 띠에 삼을 섞어 동아 줄 같이 만듦  우제(虞祭) : 우(虞)는 염려한다는 뜻으로 혼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 의 제례. 우제는 초우, 재우, 삼우를 총칭하며 초우는 장사를 치른 당일, 재우는 초우제를 지낸 다음 첫 유일(柔日)에 지내는 제사, 삼우제는 재우제를 지낸 다음 날에 지내는 제사  우집사(右執事) : 제상 우측에 술잔을 얼리고 내리는 사람  운구(運柩) : 관을 옮기는 것  운명(殞命) : 죽음. 명이 끊어지는 것  운삽(雲翣) : 발인 때 상여 앞뒤에 들고 가는 구름 형상을 그린 부채 모양의 제구  원삼(圓衫) : 부녀자의 예복의 한가지로 비단이나 명주를 사용하여 연 두 빛 깃에 자줏빛 깃과 색동소매를 달아 지은 옷  위패(位牌) : 죽은 사람의 계명(戒命) 기신(忌辰)을 써서 적은 나무 패  유(侑) : 배식하다. 존장을 모시고 음식을 먹는 것  유건(儒巾) : 조선시대 유생들이 쓰던 검은 베로 만든 예관(禮冠)  유식(侑食) : 종헌이 끝난 후 신위에게 음식을 권하는 절차  유언(遺言) : 임종 때 자손들에게 부탁하는 말  유인(孺人) : 벼슬 없는 사람의 아내의 총칭. 구품 문무관의 아내의 품계  유일(柔日) : 부드러운 날의 뜻이므로 음수(陰數)의 날. 10간(干)의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에서 순서로 홀수 날 즉 갑, 병, 무, 경, 임이 들어간 날이 강일(剛日)이고 음인 짝수에 해당하 는 을, 정, 기, 신, 계가 들어가는 날은 유일  유학(儒學) : 유교의 경전을 통하여 수신과 경세의 도를 학습 연구하는 생도  육례(六禮) : 혼례의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  윤(閏)달 : 윤년에 드는 달. 태양력에서는 2월이 평년보다 하루 더 많 은 29일로 하고 태음력에서는 평년보다 한 달을 하여 윤달을 만 들었다. 태음력에는 19년에 7번의 윤달을 두었음.  은전(恩典) : 나라에서 내리는 혜택에 관한 특전  은전(殷奠) : 큰 제사. 제수를 다 갖춘 제사. 넉넉한 제물(祭物)  음복(飮福) : 조상께서 내려 주신 복된 음식이란 뜻으로 제사가 끝나면 제관이 제사에 쓴 술이나 다른 제물을 먹는 것을 말한다.  이성(利成) : 제사를 마쳤다고 고하는 말  익사(溺死) : 물에 빠져 죽음  인원물제(人原物際) : 사람 이름을 쓸 때는 끝에 원(原), 물품일 때는 제(際) 라고 씀  인제(姻弟) : 처남과 매부간에 자기를 낮추어 쓰는 편지 말  인형(姻兄) : 처남과 매부사이에 서로 높여 부르는 말  임종(臨終) : 숨을 거두는 순간. 부모가 돌아갈 때 모시고 있는 것  입관(入棺) : 시체를 관(棺) 속에 넣는 일  작(爵) : 제사에 쓰이는 잔  장(杖) : 지팡이  장군석(將軍石) : 무덤 앞에 세우는 돌 사람  장기(杖朞) : 지팡이를 짚고 재최로 1년 동안 입는 상복  장례(葬禮) : 장사지내는 예절  장례식(葬禮式) : 장사지내는 의식  장사(葬事) : 시체를 묻거나 화장하는 일  장상(長殤) : 16세에서 19세 사이에 미성년의 죽음  재계(齋戒) : 제를 행하는 사람이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음식과 행 동을 삼가며 부정을 피하는 것  적(炙) : 제상에 올리는 대 꼬챙이에 꿰어서 불에 구운 어육  적대(炙臺) : 적을 올리는 제기  적모(嫡母) : 서자의 본실 어머니. 본부인  적손(嫡孫) : 서출이 아닌 적출의 손자  전(奠) : 영상(靈床)에 조석으로 주과포(酒果脯)를 올리는 것. (발상 뒤부 터 발인 전(前)까지 전을 올림). 생자에게 행하는 것과 같은 예  전안(奠雁) : 혼인의 친영 때 신랑이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안고 전안 청으로 가서 북쪽을 향하여 상위에 놓고 두 번 절한 다음 기 러기를 신부에게 건네는 일  전인부고(專人訃告) : 부고를 사람이 직접 전하는 것  전작(奠爵) : 헌관으로부터 술잔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리는 사람.  전폐(奠幣) : 나라에 큰제사 때 폐백을 드리는 일  절관(節棺) : 관을 백지로 감은 새끼로 한 가닥을 만들어 세로로 한 번 묶고 가로로 일곱 개를 묶는 것을 말함  점다(點茶) : 제사 때 밥을 조금씩 떠서 물에 세 번 말고 숟가락을 숙 수에 담그는 것  점시흘(点視訖) : 제물을 진설 한것을 살펴 봄  정저(正箸) : 젓가락을 바르게 고르는 일  정침(正寢) : 제사나 일을 잡아 하는 몸체의 방으로 집 안체의 큰방(제사를 지내는 몸체의 방)  제관(祭官) : 제사를 맡는 소임  제구(祭具) : 제사에 쓰는 모든 기구  제기(祭器) : 제사 때 쓰는 그릇  제단(祭壇) : 제사를 지내는 단  제례(祭禮) : 제사의 예절  제명정(題銘旌) : 제사 때 쓰는 명정  제사(祭祀) : 신령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표하는 의식  제석(祭席) : 제사 때 까는 돗자리  제수(祭需) : 제사에 쓰는 여러 가지 물건이나 음식  제주(題主) : 신주(神主)에 글씨를 쓰는 직임  제향(祭享) : 제사  조(胙) : 고기를 담는 제기 조  조객록(弔客錄) : 부상(父喪) 시 조문 온 빈객들의 이름을 적은 대장  조계(阼階) : 동쪽 계단. =東階  조곡(弔哭) : 상제가 소상까지 날마다 아침에 하는 곡  조도(祖道) : 먼 길을 떠날 때 도중의 무사함을 노신(路神)에게 비는 것  조문록 (弔問錄) : 부고를 받으면, 조문하기 위해 날짜를 적어서 방문 밖에 걸어 두던 책  조상(弔喪) : 죽음에 대하여 애도의 뜻을 표함  조석곡(朝夕哭) : 소상 전에 조석으로 궤연(几筵) 앞에 하는 곡  조위록(弔慰錄) : 모상(母喪) 시 조문 온 빈객들의 이름을 적은 대장  조장(弔狀) : 간찰의 일종으로 부고를 받은 사람이 사정이 있어 직접 조문하지 못할 경우 보내는 조상하는 글  조전(祖奠) : 발인 전에 영결을 고하는 전(奠)  조전(朝奠) : 장사 지내기 전에 아침마다 영위 앞에 간단히 음식을 올 리는 것  존항(尊行) : 항렬이 높음  졸(卒) : 마침  졸곡(卒哭) : 삼우제를 지낸 뒤에 지내는 제사로 사람이 죽은 지 석달만에 지내는 제사로 고하고 우는 것을 마친다는 뜻  졸작(卒酌) : 술을 마시는 것  종상(終喪) : 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침  종손(宗孫) : 일문(一門) 또는 동족(同族)의 최고 조상의 직계 손. 불천위(不 遷位)를 모신 직계 장손. 대종(大宗)의 적장자 손  종중산(宗中山) : 한 문중의 조상을 모신 산  종헌(終獻) : 제사 지낼 때에 초헌과 아헌 다음, 셋째 번으로 잔을 올 리는 것을 말한다.  종헌관(終獻官) : 제사를 지낼 때 세 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제관  좌곡(坐哭) : 약간 엎드린 자세로 꿇어앉아 곡함  좌집사(左執事) : 제상 좌측에 술잔을 얼리고 내리는 사람  좌포우혜(左脯右醯) :포는 왼쪽에 놓고 식혜는 오른쪽에 놓는 것을 말 한다.  주과포혜(酒果脯醯) : 술, 과실, 포, 식혜로 간단하게 차린 제물  주손(冑孫) : 대(代)를 잇는 직계 장손  주자(注子) : 목이 작은 술병  준소(罇所) : 술잔에 술을 따르는 자리.  증직(贈職) : 사후에 추증 한 벼슬  지곡(止哭) : 곡을 그침  지석(誌石) :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지를 기록하여 땅에 묻는 것을 말하며 재료로 돌, 백지를 사용하는데 지석에 기록되는 내용은 망자의 본관, 이름, 무덤의 소재와 좌향, 가족관계, 출생 일과 사망일을 적음  지요(地-, 地褥) : 시신을 관에 넣을 때 밑에 까는 겹이불  지자(支子) : 장자가 아닌 아들  지천(祗薦) : 정성껏 올림  직일(直日) : 묘제 제반적 일을 관장하는 제원  진다(進茶) : 숭늉 올리기  진설(陳設) : 제기들을 설치한 후 제수를 제상에 진설 하는 것  진숙수(進熟水) : 숭늉을 올려놓음  진찬(進饌) : 제사 지낼 때 어(魚), 육(肉) 등 주식을 제상에 진설  진홀(搢笏) : 홀(笏)을 꽂음  질명(質明) : 동이 틀 무렵. 날이 샐 무렵  짐작(斟爵) : 술을 따르는 제원  집례(執禮) : 제향 때 예식을 집행하던 임시 소임  집사(執事) : 집안 일을 맡아보는 사람  집사분정기(執事分定記) : 상장례의 일을 담당할 사람들의 임무를 분장 하는 명단  찬인(贊引) : 헌관을 도와 인도하는 사람  찬자(贊者) : 제향 때 홀기를 맡아보는 사람  참신(參神) : 신주에게 절하여 뵙는 것을 뜻하는데 제주 이하 모든 참 사자가 두 번 절한다.  참신례(參神禮) : 신에게 두 번 절하는 것  참제원(參祭員) : 제사에 참여 하는 사람  참최(斬衰) : 외간상에 입는 오복의 하나. 거친 베로 직소 아랫단을 꿰 매지 않음  창홀(唱笏) : 홀기를 외치는 사람  척기(滌器) : 그릇을 씻는 것  천광(穿壙) : 구덩이를 파는 일  천구(遷柩) : 장례 전일 영구를 빈소에서 청사로, 또는 상여로 옮기는 일  천금(天衾) : 시신을 덮는 이불  천신(薦新) : 새로운 음식을 만들거나 사왔을 때 빈소에 올려놓았다가 물리는 것  철상(撤床) : 모든 제수를 물리는 것을 철상이라 하는데 철상할 때는 제수를 뒤에서 물린다.  철시복반(撤匙復飯) : 숭늉 그릇에 놓인 수저를 匙?에 거두고 메 그릇 에 뚜껑을 덮고 「이성」을 고하는 것을 철시 복반이라고 한 다.  철주타기(撤酒他器) : 술을 퇴주그릇에 따름  철찬(撤饌) : 제수를 물림  첨소(瞻掃) : 우러러 쓸어내리는 것  첨작(添酌) : 종헌관(終獻官)이 올린 잔에 다시 술을 가득 채우는 것  첨친(忝親) : 상대를 지극히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말로 비천한 자기와 혼 인관계를 가짐으로써 욕되게 하였다는 뜻  청장(淸醬) : 간장  청주(淸酒) : 맑은 술  체백(體魄) : 땅속에 묻는 송장  초례(醮禮) : 관례 및 혼례 때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  초상(初喪) : 사람이 죽어서 장사지낼 때까지의 기간  초종(初終) : 초상이 난 뒤부터 졸곡(卒哭)까지의 과정을 일컬음  초헌(初獻) : 제사 지낼 때에 첫 번으로 술을 신위(神位)에 드리는 것 을 말한다.  초헌관(初獻官) : 제사 때 첫 번째로 술을 신위에게 올리는 제관  초혼(招魂) : 죽은 사람의 흐트러진 혼을 부르는 것  추모(追慕) : 죽은 사람을 사모함  추원(追遠) : 지나간 먼일을 그리워함  축관(祝官) : 축(祝)을 쓰고 읽는 직책  축문(祝文) : 제사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  출계(出系) : 양자로 들어간 것  출관(出棺) : 출상하기 위하여 관을 집밖으로 내감  출주(出主) : 사당이나 궤연에서 신주를 모셔냄  충이(充耳) : 솜으로 만든 귀막이로 시신의 귀에 솜을 메움  취토(取土) : 장사지낼 때 광중(壙中)의 네 귀에 놓은 길방(吉方)에서 떠온 흙  치관(治棺) : 관을 만드는 일  치사(致仕) : 관직을 내 놓고 물러남  치산(治山) : 산소를 매만져서 다듬음  치장(治葬) : 장지로 가서 매장하는 절차  치전(致奠) : 죽은 이에게 제물과 제문을 가지고 조의를 표하는 일  치제(致祭) : 윗사람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아랫사람을 조상(弔喪)하 는 일  친기(親忌) : 부모의 제사  친상(親喪) : 어버이의 상사  칠성판(七星板) : 염습할 때 시신 밑에 까는 널빤지로 북두칠성 모양을 본 따 서 일곱 구멍을 뚫음  침주(斟酒) : 구기로 술을 떠서 술잔에 붓는 것  침채(沈菜) : 동치미  탈복(脫服) : 복을 벗다  탈상(脫喪) : 어버이의 삼년상을 마치다. 종상(終喪)  택일(擇日) : 날을 잡다  택조(宅兆) : 묘지(墓地)  택호(宅號) : 주부의 친정 고장 이름을 가정이름으로 지어 부름  파록(爬錄) : 소임이나 직책을 나누어 맡은 사람 등의 이름을 벌려 적은 기록  팔고조(八高祖) : 조(祖)의 조(祖), 조의 외조(外祖), 조모의 조, 조모의 외조, 외조(外祖)의 조(祖). 외조의 외조(外祖), 외조 모의 조, 외조모의 외조  포해(脯醢) : 말린 고기와 젓갈  피발(被髮) : 머리를 풀다  하관(下棺) : 관을 광(壙) 안에 내리다.  하시저(下匙箸) : 수저를 제자리에 내려놓는 것  합문(闔門) : 유식하는 차례에서 문을 닫거나 병풍으로 가리는 것을 말 하는데 참사자 모두가 방을 나와 바깥에서 삼사 분 정도 기다 린다.  합반개(闔飯蓋) : 밥뚜껑을 덮는 것  합사(合祀) : 둘 이상의 죽은 사람의 넋을 한 곳에 모아 제사함  합장(合葬) : 부부(혹은 여러 사람) 주검을 한 무덤 속에 묻음  합제(合祭) : 선조 대대의 신위를 한데 모시어 제사 지냄  합폄(合窆) : 함께 묻는 것  항려(伉儷) : 배필  행전(行纏) : 다리를 싸매는 베  향로(香爐) : 향을 피우는 조그만 그릇  향사(享祀) : 제사  향상(香床) : 향로나 향합을 올려놓는 상  향촉(香燭) : 제사에 쓰이는 향과 촉  향축(香祝) :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祝)  향탕수(香湯水) : 염습할 때 시신을 씻기 위해 향을 넣어 달인 물  향함(香函) : 향을 담는데 쓰는 함. 향합  헌관(獻官) : 제사 때 임시로 임명하는 제관  헌다(獻茶) : 갱을 내리고 대신 숭늉을 바꾸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헌작(獻爵) : 제사(祭祀) 때 술잔을 올리는 것  현주(玄酒) : 제사에 쓰는 맑은 물 또는 明水라고도 함.  현훈(玄纁) : 검은색과 분홍색의 비단  협사(祫事) : 처음 제사로서 조상께 올리는 것과 같은 제사  호곡(號哭) : 소리내어 곡하는 것  호상(護喪) : 상(喪)의 전반을 진행하는 사람  혼백(魂魄) : 사람의 넋. 정신과 육체를 주관하는 것을 각각‘혼’,‘백’이라 함  혼백(魂帛) : 신주를 만들기 전에 모시는 생명주조각을 접어서 만드는 임시 의 신위. 혼백(魂魄)  혼백함(魂魄函) : 혼백을 담아두는 함  혼유석(魂遊石) : 상석의 뒤와 무덤의 앞에 놓는 장방형의 돌  혼천백지(魂天魄地) : 혼은 승천하고 넋은 땅속으로 스미는 것  홀기(笏記) : 혼례나 제례의 의식(儀式) 때 순서를 적은 판(板)  홍동백서(紅東白西) : 제수 진설 때에 생과(生果)나 숙과(熟果)의 붉은 것은 동쪽, 흰 것 은 서쪽에 놓는 것을 말한다.  회춘(回春) : 중한 병에서 건강을 회복함  효건(孝巾) : 상중에 쓰는 건(巾)  후토(后土) : 토지 신  휘일(諱日) : 제삿날  흔작(炘爵) : 술잔을 들어 향의 연기를 쐬다.  흠향(歆饗) : 음식을 잡수시는 것  희준(犧罇) : 제사에 쓸 술항아리.
1399    <국수> 시모음 댓글:  조회:4379  추천:0  2015-08-15
[ 2015년 08월 14일 09시 51분 ]         +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싶다 (이상국·시인, 1946-) + 봉평에서 국수를 먹다      봉평에서 국수를 먹는다  삐걱이는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그릇에 천원 짜리 국수를 먹는다  올챙이처럼 꼬물거리는 면발에  우리나라 가을 햇살처럼 매운 고추  숭숭 썰어 넣은 간장 한 숟가락 넣고  오가는 이들과 눈을 맞추며 국수를 먹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들  또 어디선가 살아본 듯한 세상의  장바닥에 앉아 올챙이국수*를 먹는다  국수 마는 아주머니의 가락지처럼 터진 손가락과  헐렁한 티셔츠 안에서 출렁이는 젖통을 보며  먹어도 배고픈 국수를 먹는다  왁자지껄 만났다 흩어지는 바람과  흙 묻은 안부를 말아 국수를 먹는다  (이상국·시인, 1946-) * 옥수수로 만든 국수 + 황홀한 국수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에 얌전히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의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고영민·시인, 1968-) + 향연, 잔치국수  어수룩하게 넓은 국사발에 물에 삶아 찬물에 헹궈 소반에 건져놓은 하이얗게 사리 지은 국수를 양껏 담고 그 위에 금빛 해 같은 노오란 달걀 지단 채 썰어 놓고 하이얀 달걀 지단 따로 채 썰어 올려놓고 파아란 애호박, 주황빛 당근도 채 썰어 볶아 올려놓고 빠알간 실고추도 몇개 올려드릴 때 무럭무럭 김나는 양은 국자로 잘 우려낸 따스한 멸치장국을 양껏 부어 양념장을 곁들여내면 헤어진 것들이 국물 안에서 만나는 그리운 환호성 반갑고 반갑다는 축하의 아우성 금방 어우러지는 사랑의 놀라움 노오란 지단은 더 노랗고 새파란 애호박은 더 새파랗고 빠알간 실고추는 더 빠알갛고 따스한 멸치장국  아픈 자. 배고픈 자. 추운 자. 지친 자 찬란한 채색고명과 어울려 한 사발 기쁘게 모든 모두 잔치국수 한 사발 두 손으로 들어올릴 때 무럭무럭 김나는 사랑 가운데 화려한 한 그릇의 사랑 그 가운데로 오시는 분.... 마침내 우리 앞에도 놓이는 잔치 국수 한 사발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오천 명을 그렇게 먹이셨다) (오늘도 그렇게 하셨다) (김승희·시인, 1952-) + 그 날의 국수     아침, 점심,  두끼 굶던 날  벽에 걸린 괘종시계 떼어내어  보자기에 싸던 아버지  말없이 손을 잡고  길을 나섰네  전당포도 문 닫은  일요일  한참을 걸어가  시계 잡히고 받은 돈 이천 원  시장에 들러  국수를 샀네  길다란 막대에 걸려  말려지던 국수  고추장 푼 냄비 안에서  끓고 있었네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나누어 먹던  뜨거운 국수  곯은 배를 훈훈하게 채우고  기분 좋게 드러누웠던 저녁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떠 있는  그 날, 그 국수   (이창윤·시인, 경북 대구 출생) + 종로 2가 막국수 지성을 파고 있는 종로 2가 뒷골목에서 300원짜리 막국수를 먹어본 사람들 중에는 보기보다 험난한 회사라는 보험회사를 다니며 점심값을 아끼던 사람도 있었고 남들은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할 때에 사랑을 위하여 함께하는 가난한 연인들도 있었다 허기진 창자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낮추려는 남루한 옷차림의 인생 나그네도 있었고 무얼 먹어도 맛있기만 한 시골에서 올라온 자취하는 학생이 한 끼를 때우고 있었고 이런 것도 먹어 두어야 기억에 남는다고 킥킥거리며 한 사발 후딱 먹어 치우던 낭만파도 있었고 웬 사내가 마른 눈물 훔치며 속앓이를 하며 내일을 기약하며 하루를 넘기려 후루룩 소리도 죽여가며 먹기도 하였는데 종로 2가 뒷골목 뜨거운 김 힘차게 오르던 300원짜리 막국수가 지금은 세상 인심에 밀려 사라졌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콧등치기국수  깊은 산골의 춘궁기엔  밀가루도 귀하였네  시래기를 보태 삶은 칼국수를  쇠죽과 다름없는 칼국수를  가물가물 호롱불 아래 콧물 훌쩍이는  노오랗게 부황 든 아이들이  후루룩 쪽쪽 빨아들이면  태어난 죄 밖에 없는 여린 콧등  냅다 한번 후려치고  입 속으로 빨려들던  뭉툭한 면발  콧등에 흐르는 국물과 콧물  어머니 손가락으로 훑어 먹이던  짭짤하고 따끈한 그 맛  정신없이 먹다보면  뱃가죽이 벌떡 솟아  올챙이배가 되나  참으라던 오줌을 누고 나니  도로 푹 꺼지더라  동지섣달 기나긴 밤  자다가도 배고파  '어~메 밥 주게' 하고 조를 때  이웃집 외양간 송아지도  '움~메'하고 길게  따라 울었지 (김내식·시인, 경북 영주 출생) + 비빔국수를 먹으며  동대문 시장  옷가게와 꽃가게 사이  비좁은 분식집에서  비빔국수를 먹는다  혼자 먹는 것이 쑥스러워  비빔국수만 쳐다보고 먹는데  푸른빛 상추, 채질된 당근  시큼한 김치와 고추장에 버물려진  국수가 맛깔스럽다  버스, 자가용,  퀵서비스 오토바이가 뒤엉킨 거리  옷감 파는 사람과 박음질하는 사람  단추, 고무줄, 장식품을 파는  크고 작은 상점이 빼곡한 곳  가난과 부유가 버물려져 사는  동대문 시장  가족과 동료, 시댁과 친정  세월의 수레바퀴 속에  나와 버물려져 사는 사람들  새콤하고 달콤하고 맵고  눈물 나고 웃음 나고  화나고 삐지고 아프고  그렇게 버물려진 시간들  울컥 목구멍에 걸린다 (목필균·시인) + 여름 시편·9 -콩국수  맷돌에서 나오는 母乳같은 콩국을 찬 우물물에 타서  삶아 건진 칼국수를 메운 위에 오이채를 얹어 먹는  구수하고 서늘함이 흐르는 땀을 빨아들이고. 말랑거리는 가슴의 어머니 냄새 할머니 어머니 아내의 손과 가슴으로 이어지는  혈맥 같은 그 맛 하얀 오존이 하늘을 뒤덮는 이 도시의 여름을 나자면  어머니를 느끼며 콩국을 먹어야 하고. 궂은 날 어머니를 졸라 솥뚜껑 지짐질로 빚으시던  밀전병 생각이 간절하면 먼 하늘이나 바라보고. (최진연·시인, 경북 예천 출생) + 칼국수  불같이 화가 나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는데  칼국수만한 게 어디 있을까  밀가루를 얇게 반죽을 해서  칼로 죽죽 찢어 한 냄비 끓이면서  굵은 바지락 몇 개 집어넣고  파 숭숭 잘라넣고  잘게 썰은 매운 고추에  붉은 고춧가루를  한 숟가락 풍덩 빠뜨린 다음에  흐물흐물해진 칼을 후후 불면서  방금 버무린 김치와 엮어  입안으로 넘기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인데  굳었던 혀가 얼얼해지고  뻣뻣한 뒷목이 허물어지면서  얼굴에 땀방울이 돋아나기 시작하는데  그릇을 통째 들고  뜨겁게 달아오른 저 붉고 푸른 국물을  목구멍으로 한 모금 넘기면  눈앞이 환해지면서  온몸에 칭칭 감긴 쇠사슬이 풀어지는데  뼈가 나긋나긋해지고  눈물이 절로 나는 것인데  칼국수 다 비우고  뜨거워진 마음을  빈 그릇에 떡 하니 올려놓는 것이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1398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댓글:  조회:5004  추천:0  2015-08-15
[ 2015년 08월 16일 09시 56분 ]     천진항 폭발중심현장.   이상국 약력   1946년 강원 양양군 출생 1976년 심상지 시 '겨울추상화' 발표 데뮈   경력 유심지 주간. 백담사만해마을 운영위원장. 한국작가회의 자문위원. 한국작가회의 강원지회장. 민예총 강원지회장.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설악신문 대표이사   수상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강원민족예술상.   시집 동해별곡.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집은 아직 따뜻하다     흐르는 물이 무얼 알랴 어성천이 큰 산 그림자 싣고 제 목소리 따라 양양 가는 길 부소치 다리 건너 함석집 기둥에 흰 문패 하나 눈물처럼 매달렸다   나무 이파리 같은 그리움을 덮고 입동 하늘의 별이 묵어갔을까 방구들마다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어둠을 입은 사람들 어른거리고 이 집 어른 세상 출입하던 갓이 비료포대 속에 들어 바람벽 높이 걸렸다   저 만리 물길 따라 해마다 연어들 돌아오는데 흐르는 물에 혼은 실어보내고 몸만 남아 사진액자 속 일가붙이들 데리고 아직 따뜻한 집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먄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1998    ~~~~~~~~~~~~~~   산속에서의 하룻밤  해지고 어두워지자  산도 그만 문을 닫는다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큰 바위들도 팔베개를 하고  물소리 듣다 잠이 든다  어디선가 작은 버러지들 끝없이 바스락거리고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새들은 몇번씩 꿈을 고쳐 꾼다  커다란 어둠의 이불로 봉우리들을 덮어주고  숲에 들어가 쉬는 산을  별이 내려다보고 있다  저 별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저항령 어둠속에서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별을 쳐다본다  시집 ;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 비평사    ~~~~~~~~~~~~~~~~~   달동네  사람이 사는 동네에  달이 와 사는 건  울타리가 없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지붕 꼭대기에  달의 문패를 달아주었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작과비평사, 2005    ~~~~~~~~~~~~~~~~~~    별     큰 산이 작은 산을 업고 놀빛 속을 걸어 미시령을 넘어간 뒤 별은 얼마나 먼 곳에서 오는지   처음엔 옛사랑처럼 희미하게 보이다가 울산바위가 푸른 어둠에 잠기고 나면 너는 수줍은 듯 반짝이기 시작한다   별에서는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별을 닦으면 캄캄함 그리움이 묻어난다 별을 쳐다보면 눈물이 떨어진다   세상의 모든 어두움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1998   ~~~~~~~~~~~~~~~~~~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감자를 묻고 나서  삽등으로 구덩이를 다지면  뒷산이 꽝꽝 울리던 별  겨울은 해마다 닥나무 글거리에 몸을 다치며  짐승처럼 와서는  헛간이나 덕석가리 아래 자리를 잡았는데  천방 너머 개울은 물고기들 다친다고  두터운 얼음옷을 꺼내 입히고는  달빛 아래 먼길을 떠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잠이 안 와  입김으로 봉창 유리를 닦고 내다보면  별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봄을 기다리던 마을의 어른들이  별똥이 되어 더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하늘에서는 다른 별도 반짝였지만  우리 별처럼 부지런한 별도 없었다  그래도 소한만 지나면 벌써 거름지게 세워놓고  아버지는 별이 빨리 돌지 않는다며  가래를 돋워대고는 했는데  그런 날 새벽 여물 끓이는 아랫목에서  지게 작대기처럼 빳빳한 자지를 주물럭거리다 나가보면  마당에 눈이 가득했다  나는 그 별에서 소년으로 살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2005 창비    ~~~~~~~~~~~~~~~~~~~~~   이 별에서 내리면  이 별에서 내리면  다른 별에 가 살 수는 없을까  이렇게 푸른별이  하늘에 단 하나뿐이고  때가 되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 별에서 내려야 한다면  우리가 술도 못 먹고  시 같은 건 안 써도 좋으니  또 다른 별에서 만날 수는 없는지  사람이 너무 많아 불편하다면  이 보다는 좀 못하더라도  내리는 사람끼리 만나 사는 별은 없는지    계간 포에지 2000 겨울호, 나남출판, 2000. 11   ~~~~~~~~~~~~~~~   별에게로 가는 길  별 보면 섧다  첫새벽 볏바리 가는 소 눈빛에 어리고  저물어 돌아오는 어머니  호미날에도 비치던 그 별  어둠의 거울이었던  고향집 우물은 메워지고  이제 내 사는 곳에서는  별에게로 가는 길이 없어  오래 전부터  내가 소를 잊고 살듯  별쯤 잊고 살아도  밤마다 별은  머나먼 마음의 어둠 지고 떠올라  기우는 집들의 굴뚝과  속삭이는 개울을 지나와  아직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   에프킬라를 뿌라며     자다 일어나 에프킬라를 뿌린다   향긋한 안개가 퍼지고 나를 공격하던 모기들은 입이 무너지고 날개가 녹아내리고 죽었다.   싸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수십만이 하루살이처럼 죽었다   그들은 다시 베트남에 고엽제를 살포하여 초목의 씨가 마르고 수백만의 인민들이 죽거나 천천히 썩었다   나는 모기에게 이긴 게 아니라 그가 공격하면 나도 맨손으로 싸워야 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   어느 미친 여인에게   지난 가을  우체국 돌계단에  은행나무 이파리 모아놓고  히죽히죽 살림살 때 벌써 허리가 절구통 같더니  모진 겨울 어디 가 몸풀고  거뜬하게 나왔느냐  어느 천벌을 받을 놈이 몹쓸 짓 했느냐며  눈발 날리고 얼음 어는데  저 간나 어쩌겠냐며  온 시민이 걱정했는데  이 봄  햇살 수북하게 쌓인  전매서 울타리 아래 앉아  머리 풀어헤치고 빗질하는 네가 고마워서  사람들은 가다가 보고  또 돌아보는 구나  ~~~~~~~~~~~~~~~~~~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   있는 힘을 다해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마리  물속을 들여다 보고 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   희망에 대하여  사북에 가서  그렇게 많이 캐냈는데도  우리나라 땅속에 아직 무진장 묻혀 있는 석탄처럼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을 다 써버린 때는 없었다  그 불이  아주 오랫동안 세상의 밤을 밝히고  나라의 등을 따뜻하게 해주었는데  이제 사는 게 좀 번지르르해졌다고  아무도 불 캐던 사람들의 어둠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섭섭해서  우리는 폐석더미에 모여 앉아  머리를 깎았다  한번 깎인 머리털이 그렇듯  더 숱 많고 억세게 자라라고  실은 서로의 희망을 깎아주었다  우리가 아무리 퍼 써도  희망이 모자란 세상은 없었다    ~~~~~~~~~~~~~~~~~~~~~~~~~   연민   흐르는 강이 나이를 자시면  무엇이 되는지  양양 남대천 물너름에 와서 보아라  한때는 살을 내줄 것 같던 사랑이나  몸을 내던지며 울던 슬픔도  생의 굽이굽이를 돌며 치이고 닳아  이제는 모래처럼 순해졌으니  산그림자 속으로 새들 돌아가고  저무는 강둑에서 제 몸 비춰보는 저것,  자식낳이 다한 어머니처럼  거대한 자궁을 열어놓고  혼잣노래 하는  저 오래된 연민을 보아라"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2005 창비  ~~~~~~~~~~~~~~~~~~~~~~~   백담 가는 길 / 이상국  1  물은 산을 내려가기 싫어서  못마다 들러 쉬고  쉬었다가 가는데  나는 낫살이나 먹고  이미 깎을 머리도 없는데  어디서 본 듯한 면상(面相)을 자꾸 물에 비춰보며  산으로 들어가네  어디 짓다 만 절이 없을까  아버지처럼 한번 산에 들어가면 나오지 말자  다시는 오지 말자  나무들처럼  중처럼  슬퍼도 나오지 말자  2  만해(萬海)도 이 길을 갔겠지  어린 님을 보내고 울면서 갔겠지  인제 원통쯤의 노래방에서  땡초들과 폭탄주를 마시며  조선의 노래란 노래는 다 불러버리고  이 길 갔겠지  그렇게 님은 언제나 간다  그러나 이 좋은 시절에  누가 그깟 님 때문에 몸을 망치겠는가  내 오늘 세상이 같잖다며  누더기 같은 마음을 감추고 백담(百潭) 들어서는데  늙은 고로쇠나무가 속을 들여다보며  빙긋이 웃는다  나도 님이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3  백담을 다 돌아 한 절이 있다 하나  개울바닥에서 성불한 듯 이미  몸이 흰 돌멩이들아  물이 절이겠네  그러나 이 추운 날  종아리 높게 걷고  그 물 건너는 나무들,  평생 땅에 등 한번 못 대보고  마음을 세웠으면서도  흐르는 물살로 몸을 망친 다음에야  겨우 저를 비춰보는데  나 그 나무의 몸에 슬쩍 기대 서니  물 아래 웬 등신 하나 보이네  4  그러나 산은 산끼리 서로 측은하고  물은 제 몸을 씻고 또 씻을 뿐이니  저 산 저 물 밖  누명이 아름다운 나의 세속  살아 못 지고 일어날 부채(負債)와  치정 같은 사랑으로 눈물나는 그곳  나는 누군가가 벌써 그립구나  절집도 짐승처럼 엎드려 먼산 바라보고 선  서기 이천년 첫 정월 설악  눈이 오려나  나무들이 어둠처럼 산의 품을 파고드는데  여기서 더 들어간들  물은 이미 더할 것도 낼 것도 없으니  기왕 왔으면 마음이나 비춰보고 가라고  백담은 가다가 멈추고 멈추었다 또 가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 2005   ~~~~~~~~~~~~~~~~~~~   미시령 편지  -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백담사 큰 스님이 그러는데  설악산 꼭대기에서도 샘이 나는 건  지구가 도니까  가장 높은 데가  가장 낮기 때문이란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시안 / 2005, 겨울호   ~~~~~~~~~~~~~~~~   국수가 먹고 싶다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1998   ~~~~~~~~~~~~~~~~~   하늘의 집  전깃줄에 닿는다고  인부들이 느티나무를 베던 날  아파트가 있기 전부터 동네를 지키던 나무는  전기톱이 돌아가자 순식간에 쓰러졌다  옛날 사람들은 가지 하나를 꺾어도 미안하다고  나무 밑동에 돌멩이를 던져주었고  뒤란 밤나무를 베던 날  아버지는 연신 헛기침하며  흙으로 그 몸을 덮어주는 걸 보았는데  느티나무의 숨이 끊어지자 인부들은  그 커다란 몸을 생선처럼 토막내어 싣고 갔다  이파리들의 그늘에 와 쉬어가던 무성한 여름과  동네 새들이 깃들이던 하늘의 집을  그렇게 어디론가 싣고 가버렸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 2005   ~~~~~~~~~~~~~~~~~~~~   혜화역 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大地)의 소작(小作)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월간『문학사상』(2010, 5월호)   ~~~~~~~~~~~~~~~~   그곳   나무들도 엉덩이가 있다  새벽 숲에 가면 군데군데 쭈그리고 앉아  볼일 보는 나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날 아침은 산이 향기로 가득하다  내 사는 설악산의 엉덩이는 얼마나 깊고 털이 무성한지  내 그것과는 감히 견줄 수가 없다  또 어떤 날은 미시령을 넘어가며  달도 엉덩이를 보일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고 섹시해서  나는 어둠 속에서 용두질을 할 때도 있다  모든 것들은 엉덩이가 있고  우리는 모두 그곳에서 왔는데  하늘은 발 딛을 데가 없으므로  더러 구름이나 물새들을 보내거나  오줌 소나기로 강을 닦아놓고는  자신의 엉덩이를 비춰보고는 한다  문학사상 / 2002.12    ~~~~~~~~~~~~~~~   싸 움  여러 해 전이다.  내설악 영시암에서 봉정 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와 등칡넝쿨이  엉켜 붙어 싸우고 있는 걸 보고는  귀가 먹먹하도록 조용한 산중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한판 싸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싸움은 저쯤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산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듯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다만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저들은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거나  밤낮없이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인데  올 여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누군가 넝쿨의 아랫도리를 잘라  전나무에 업힌 채 죽어 있었다  나는 등찱넝쿨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   ~~~~~~~~~~~~~~~~~~~~   그늘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강가에서 새들은 날아가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악착같고 또 쪼잔하다  그걸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누가 뭐라던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다     시와시학 / 2010, 봄   ~~~~~~~~~~~~~~~ 리필   나는 나의 생을,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 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 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 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 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 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달자 편저/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 입으리 / 문학의문학, 2011   ~~~~~~~~~~~~   달려라 도둑   도둑이 뛰어내렸다 추석 전날 밤 앞집을 털려다가 퉁기자 높다란 담벼락에서 우리 차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집집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이웃들은 골목에 모였다. ―글세 서울 작은 집, 강릉 큰애네랑 거실에서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데 거길 어디라고 들어오냔 말야. 앞집 아저씨는 아직 제 정신이 아니다. ―그러게, 그리고 요즘 현금 가지고 있는 집이 어딨어, 다 카드 쓰지. 거 돌대가리 아냐?라고 거드는 피아노집 주인 말끝에 명절내가 난다.  한참 있다가 누군가 이랬다. ―여북 딱했으면 그랬을라고……, 이웃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밤이슬 내린 차 지붕에 화석처럼 찍혀있는 도둑의 족적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허름한 추리닝 바람에 낭떠러지 같은 세상에서 뛰어내린 한 사내가 열나흘 달빛 아래 골목길을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는 걸 언뜻 본 것 같았다.     내일을 여는 작가 / 2008년 여름호   ~~~~~~~~~~~~~~~~~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그전에 몸이 많이 아픈 사람이 꼭 새벽으로 전화했다 너무 아파서 시인과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다 한두 해 지나자 전화가 끊겼다 늘 죽고 싶다던 그 사람 죽었을까 털고 일어났을까   몇 년째 감옥에 있는 사람이 꽤 오래 동안 시를 써 보내왔다 시가 늘 부끄럽다고 했는데 마음의 알몸 같은 거 눈물 같은 거였다   사람이 살다가 누구에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몇 사람이라도 꼭 들어줬으면 하는 말이 시라면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계간 / 문학의 문학 / 2009년 여름호   ~~~~~~~~~~~~~~~~   꽃     노래하면 몸이 아파  그러한 그리움으로 한 서른 해 앓다 일어  피는 꽃을 보면 눈물 나네  노래로는 노래에 이르지 못해  먼 강 푸른 기슭에서 만났다 헤어지던 바람은  흐린 날 서쪽으로만 가고  작고 작은 말을 타고 삶의 거리를 가며  아름다운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걸 알기까진  나는 너무 많이 울었네  한 서른 해 아픔으로도  사랑 하나 깨우지 못하여  그러한 그리움으로  마당귀 피는 꽃을 보면 눈물나네   ~~~~~~~~~~~~~~~~~   남대천으로 가는 길 1      물소리가  이집 저집 문을 닫아주며 가는데  텃밭에서 고구마가 붉게 여물고  물새들은 알을 품고 누웠다  연어처럼 등때기 푸른 아이들이  물가에 나와  엉덩짝에 풀물을 들이거나  물수제비를 띄우며  그립다고 떠드는 소리를  물소리가 얼른 들쳐업고 간다  집 떠나 오래 된 이들도  물소리 들으면  새처럼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저녁  풀이파리 끝 이슬등마다  환하게 불이 켜지고  어디서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들린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1998   ~~~~~~~~~~~~~~~~~~~~~   한  로(寒 露)     가을 비 끝에 몸이 피라미처럼 투명해진다   한 보름 앓고 나서 마당가 물수국 보니 꽃잎들이 눈물 자국 같다   날마다 자고 나면 어떻게 사나 걱정했는데 아프니까 좋다 헐렁한 옷을 입고   나뭇잎이 쇠는 세상에서 술을 마신다     마른 잎 서걱이는 바람소리 스산하다. 언뜻 비 한 번에도 기온은 쑥쑥 떨어질 게다. 이슬도 엷은 얼음물 밑 피라미처럼 투명하고 차갑다는 한로. 여름내 물가에 방울방울 꽃 피워 시원함 탐스럽게 자랑하던 수국도 이제 오들오들 춥고 가난하다. 이 가난한 계절 어찌 날까 염려 걱정 차라리 병들어 털어버리니 홀가분하다. 투명한 조락(凋落)의 계절 마음 또한 투명하게 비워 음미하시길.     중앙일보  / 시가 있는 아침   ~~~~~~~~~~~~~~~~   있는 힘을 다해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 마리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2005   ~~~~~~~~~~~~~~~~~~   실내 포장마차     마차는 달린다 흙먼지 속에 채찍을 휘두르며 밤새 달린다 누우런 알전구에 제 그림자를 비추며 덜컹덜컹 역전 같은 데를 달리는데 울퉁불퉁 변두리만 달리는데 말이 쓰러졌는데 마차만 남아서 계속 달리다가 배고파서 우동이나 말아 먹이며 달리다가 주꾸미에 소주나 마시며 달리다가 아무리 달려 봤자 개척할 땅도 없고 네비게이션도 없고 딱지만 떼이니까 마침내 우리 동네 아파트 앞 가게 한 칸을 얻어들고는 대머리 인디언 같은 주인은 그래도 갈 길이 멀다고 제 몸에다 밤새 채찍질을 해대는데……   문학 ·선 /  가을호 ~~~~~~~~~~~~~~~   저녁의 집      해 떨어지면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먼 개울물 흐르는 소리  울타리 너머 밥 잦는 냄새 속으로  꼴짐 높게 진 사람들 두런두런 혼잣말하며  배가 장구통 같은 소 앞세우고 돌아오네  제 새끼 안 보인다고 아갈질해대는 소울음 사이로  박쥐떼들 아무렇게나 날아간다  고등빼기 우리집에서는  어여 와 저녁 먹으라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어머니도 딱하다  나도 이젠 자식을 둘이나 두었는데  아직 내 이름을 알몸뚱이로 동네방네 불러대다니  하늘 뒤에서 별이 어둠을 씻고 나온다  키 큰 밤나무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어둠속에서  새는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리고  변소 지붕 위의 박이 엉덩이처럼 희게 떠오른다  부엌문 여닫힐 때마다 불빛에 어리는 마당 식구들  어둠에 잠겨 찰랑거리는 마을에서  이파리들의 소곤거림  쇠똥 냄새  먼데 집 펌프대 삐걱거리며 물 올리는 소리  멍석가로 펄쩍펄쩍 개구리들 덤벼드는  그 머나먼 집 마당에서  나는 아직 저녁을 먹고 있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   기러기 가족     - 아버지 송지호에서 좀 쉬었다 가요 - 시베리아는 멀다 -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백담사 만해마을엔 내로라하는 시들이 돌로 세워져, 혹은 동판에 새겨져 심혼 그윽하게 울리는데. 이 마을 토박이 촌장 시인의 이 시 한소식 읽히 면서 씁쓸한 웃음 자아내니. 코스모폴리턴 자식 키우려 이역만리 떨어져 사는 기러기 아빠 눈물 보이나니. 날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날고 또 날아 야 되는 이승의 삶 돌아보려 십이선녀 멱 감는 심산유곡 찾아도 세파의 홍진(紅塵) 씻기지 않으니.     중앙일보 / 시가 있는 아침   ~~~~~~~~~~~~~~~~~~   봄날 옛집에 가서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고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디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계간 / 유심 / 2004년 봄호 ~~~~~~~~~~~~~~~~~   *가라피의 밤  가라피의 어둠은 짐승 같아서  외딴 곳에서 마주치면 서로 놀라기도 하고  서늘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난다  나는 그 옆구리에 누워 털을 뽑아보기도 하고  목덜미에 올라타보기도 하는데  이 산속에서는 그가 제왕이고  상당한 세월과 재산을 불야성에 바치고  어느날 앞이 캄캄해서야 나는  겨우 그의 버러지 같은 신하가 되었다  날마다 저녁 밥숟갈을 빼기 무섭게  산을 내려오는 시커먼 밤에게  구렁이처럼 친친 감겨 숨이 막히거나  커다란 젖통에 눌린 남자처럼 허우적거리면서도  나는 전깃불에 겁먹은 어둠들이 모여 사는  산 너머 후레자식 같은 세상을 생각하고는 했다  또 어떤 날은 산이 노루새끼처럼 낑낑거리는 바람에 나가보면  늙은 어둠이 수천 길 제 몸속의 벼랑에서 몸을 던지거나  햇어둠이 옻처럼 검은 피칠을 하고 태어나는 걸 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들과 냇가에서 서로 몸을 씻어주기도 했다  나는 너무 밝은 세상에서 눈을 버렸고  생각과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둠을 옷처럼 입고 다녔으므로  나도 나를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밤마다 어둠이 더운 고기를 삼키듯 나를 삼키면  그 큰 짐승 안에서 캄캄한 무지를 꿈꾸거나  내 속에 차오르는 어둠으로  나는 때로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며  가라피를 날아다니고는 했다  * 양양 오색에 있는 산골마을.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 창비   ~~~~~~~~~~~~~~~~~~~~~~   나는 왼손이 조금 길다      나는 왼손잡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오른손잡이고  대부분의 길조차 좌회전이 금지되어 있어  왼손잡이는 불편하다  그래서 감옥에는 왼손잡이가 많다  세상의 시계는 오른쪽으로 돌고  모든 문도 오른쪽으로 열리지만  왼손으로 거수하고  왼쪽으로 생각하다보니  나의 왼손은 조금씩 길어진다  경제적으로는 물론  유전적으로 보더라도  오른손은 대세다  그런데도 왼손잡이를 조심하라고  왼손잡이들이 온다고  밤낮없이 소리지르는 오른손잡이들은  왼손의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그 모든 오른손과의 형평을 위하여  나의 왼손은 조금 길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   샛령을 넘으며      영을 넘는다  동해 어염 지고  인제 원통 바꿈이 다니던 사람들의  길은 지워지고  고래등처럼 푸른 영만 남았는데  이렇게 험한 곳에서도  나무들은 문중을 이뤘구나  북설악 한여름에 무슨 잔치가 있었는지  골짝 물마다 얼굴이 벌건 가재들이 어슬렁거리고  벙치매미도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비탈이 험한 곳일수록 꼿꼿한 나무들이  그들 말로  오늘은 꽤 지저분한 짐승 하나가  지나간다고 하는 것 같은데  물소리가 얼른 지우며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 비평사   ~~~~~~~~~~~~~~~   내원암 가는 길      산수유 숨어 피는  돌부리 산길  사다리만한 구름다리 건너  전경초소 같은 새시 집에서  구리 기와 시주 받는 파마머리 보살아  내 그것으로  암병 든 우리 형님 일으킬 수 있다면  니네 절지붕을 모두 내가 이겠다  이런 마음이 흙탕물 같았는지  울산바위 쪽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에라 이 되다 만 눔아" 소리치며  소나무 가지 눈을 털어  목덜미를 후려치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비평사 ~~~~~~~~~~~~~~~~~~~~~~~~   산속에서의 하룻밤  해지고 어두워지자  산도 그만 문을 닫는다  나무들은 이파리 속의 집으로 들어가고  큰 바위들도 팔베개를 하고  물소리 듣다 잠이 든다  어디선가 작은 버러지들 끝없이 바스락거리고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새들은 몇번씩 꿈을 고쳐 꾼다  커다란 어둠의 이불로 봉우리들을 덮어주고  숲에 들어가 쉬는 산을  별이 내려다보고 있다  저 별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저항령 어둠속에서  나는 가슴이 시리도록 별을 쳐다본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 비평사 ~~~~~~~~~~~~~~~~~~ 봄 밤  진전사지 가는 길  산죽숲 댓이파리처럼  새파랗던 겨울이 가고  봄이 되자  나뭇가지들도 눈을 털고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항암제를 맞고  머리가 다 빠져버린 형님네 마당에서  별 쳐다보다가  울었네    ~~~~~~~~~~~~~~~~~~~~   대결   큰눈 온 날 아침  부러져 나간 소나무들 보면 눈부시다  그들은 밤새 뭔가와 맞서다가  무참하게 꺾였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공손하게 몸을 내맡겼던 게 아닐까  조금씩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받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빛나는 自害  혹은 아름다운 마감  나도 때로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     
1397    력사를 잊지말기... 댓글:  조회:2541  추천:0  2015-08-15
        8.15해방  사진 모음   위 사진은 59년전 8월 15일 조국이 일제로 부터 해방돼 서울 시민들이 남산 국기게양대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장면. 이 사진은 촬영한 사람이 누구인지,  태극기를 게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은 정부 자료 사진입니다. 또한 사진에 대한 해설도 불충분 합니다. 해방 한달쯤 뒤 국민학교가 개교해 첫수업을 하는 장면,  우리나라 최초의 천연색 사진으로 알려진 해방 1주년 기념행사 사진 등 귀중한 사료도 포함돼 있습니다.   1945 년 8 월 6 일 이 히로시마에 최초로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고  그로 인하여 일본은 무장 해제되었다 .  그러나 그로 인하여 핵무기 경쟁은 시작되었고 드디어 밥은 굶더라도  핵무기보유가 생겨나게 되었다 .              1945 년 폭격으로 페허가 된 오사까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일본인들이 직접 촬영한 사진들이다.  기록을 위해서도 찍었고 , 격려차 찍은 사진들 ,  선전에 사용할 목적이 다분히 있는 사진들이다 .         일본의 전통 스포츠 ' 수모 ' 씨름 꾼들이 훈련을 받고있다 합니다.         1945 년 주부들을 모아 놓고 죽창으로 대항하는 훈련을시키고있다 .  미군이 침공해 들어 왔을 때를 대비하는 훈련이다 .        스님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어깨에 총을 메고  정규군 장교로부터 제식 훈련을 받고있다 .  사찰 앞마당에서 .         도꾜의 대학생들이 치치 부 근교에서 의료 봉사를하고있다 .  할머니 , 아이들이 진료를 받았다 .         ' 애국 부녀회 ' 회원들이 시가 행진을하고있다 .  군인들이 시가 행진을하는 중에 맨 마지막으로  애국 부녀회가 따라가는 것이다 .      도꾜의 국민학교 학생들이 목총을 들고 황제와 황후의 사진을  모신 ' 고시에 이사 ' 에다 맹세하고있다 .  이러한 행사는 아이들에게 황제에 대한 복종 심을 심어주는 교육의 일환이다 .       어린이날 해군 대장 복장을 한 아이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경례하고있다 .       전국적으로 우량아 대회를하고있다 .  살찐 아이는 우량아로 선정되고 엄마가 부상을 받느다 .  아이를 많이 낳아야한다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치루는 행사이다 .      도꾜 극장 전면에 전쟁을 독려하는 광고가 걸려있다 .  그림 밑에 " 우리는 공격을 중지하지 않을 것이다 . " 라고 쓰여있다 .       도꾜 거리 인도교에 거대한 미국 성조기를 그려 놓고  행인들에게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서 저주 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심리전의 일환이다 .       이즈 반도의 주민들이 매일 아침 일본의 상징 후지산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아침 체조를하면서  황국의 영광을 다짐한다 . 반상회에서 결의한 사항을 실천하는 중이다 .      부자가 같이 도시락을 먹는다 .  흰밥 가운데 붉은 자두 짱아 치로 일장기를 만든 도시락이다 .  매일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국가에 목숨을 바친다는  다짐을하는 것이다 .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을 그려 놓고 일본 군인이 죽창으로 찌르고있다 .  옆에있는 팻말이 가 에는  " 통행인은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가라 " 라고 쓰여있다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위한 공출은 끝이없이 이어 ?  사찰에서 중들이 철이나 놋쇠를 공출하고있다 .  징들 , 유골 단지 , 주전자 , 촛대들 , 꽃병 , 화로등 여러가지이다 .        도꾜에서 아이들이 고철을 손수레에 싣고왔다 .        중학생들이 알루 미니움 동전을 모아왔다 .  비행기를 만들기위한 공출이다 .         학생들과 어린이들이 프라스틱 장난감이나  금속 장난감을 제출하고있다 .         자전거 상회에서는 오래된 자전거이거나  못쓰는 부속품들을 제공하고있다 .          히로시마에있는 한 가정집에서는 가재 도구와 부엌 용기들을 바첬다 .        사찰 종들도 모두 공출 대상이다 .         심지어 스팀 히터까지 걷어 갔다 .       도꾜 군수 공장에서 기관포 탄약 불량품을 골라내고있다 .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에 비해서 인건비가 반 밖에 안된다 .         공장에서 발생된 아주 작은 금속 부스러기들 중에서 ,  반상회에 모인 아주머니들이 쓸만한 금속만 골라 내고있다 .         여학생 세명이 교관의 지시대로 기계 다루는 일을 배우고있다 .  남자들이하던 일을 여학생들이 대신 이어가는 중이다 .         푸대 자루를 접착시키는 단순 노동 공장이다 .  지루한 일을하는 노동자들은 한달에 두번 쉬는날을  주기로되어 있는데 그마저 제공되지 않는다 .         여학생들이 기모노에 달려있는 금실이나 은실까지도 뜯어내고있다 .         여자 용접공이 비행기 제조 공장에서 일하고있다 .  1944 년 현재 는 4 백만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근무 중이다 .         학생이 포함된 여성 근로자 팀이 명예의  ' 생산량초과달성반 '는 선정되었다 가 에.  작은 비행기 부품을 생산하고있다 .         여학생들이 병원에서 사용하던 환자복을  군인 부상자들이 입을수있게 고치고있다 .  중고 환자복을 수리 하다보니 병균이 묻어 있을지도 모르기에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있다 .  수업은 하루에 2 시간으로 줄이고 재봉 일로 봉사하고있다 .       사하 린에있는 가라후토항 .  남자들이 부족해서 여성들이 부두 노동을 대신하고있다 .  여성 노동자들이 많아 지자 법으로  여성은 격렬한 노동이나 장시간 노동을 금지했다 .      나이든 여성 나무꾼들이 숯가마를 시내로 나르고있다 .  주로 돈 많은 치치부 기생들이 쓸 숯이다 .      남자들은 군에가고 여자들은 공장에 일하러 갔다 .  어린 학생들이 논일을하고있다 .      사찰에서 살고있는 중들이 식량난으로 뒷산에 밭을 일구 고있다 .       1945 년 2 월 이 도꾜의 우에노 공원을 논으로  전환 시켜놓고 벼를 심고있다 .  중학생들이 일하고있는 모습니다 .  전국적으로 3 백만 중학생들이 노동력을 보태고있다 .         시골 농부들은 짜투라기 땅에도 벼를 심는다 .  심지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조그마한 땅에도 벼를 심는다 .      만주에 주둔하고있는 군인 아내들이 호스를 메고  신부 수업을 받으러 가고있다 .  아이를 많이 낳아야한다는 교육을 받는다 .         1945 년 7 월 10 일 사까이시 상공에 나타난 B29 폭격기에  써치 라이트를 비추며 공격하고있다 .       1945 년 3 월 10 일 은 단 하루 동안 폭격으로 도꾜는  잿더미가되었고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  살아 남은 사람들이 송장을 치우는데 25 일이 걸렸다 .      제복을 입은 군인이 폭격으로 불이 났을 때를  대비한 방화 훈련을시키고있다 .       ' 애국 부인회 ' 회원들이 주먹밥을 만들고있다 .  방공 훈련받는 사람들에게 먹일 점심이다 .        중학생들이 방공호를 파고있는 중이다 .  학생들이 이마에 띠를 두른 것은 군인들과 같은  애국심에 불탄다는 것을 상징한다 .         1945 년 봄 , 도꾜 시민이 다 허물어진 집  지하에서 밥 해 먹을 준비를하고있다 .       1945 년 5 월 29 일 폭격으로 페허가 된  요꼬 하마 시민들이 시골로 피난 가고있다 .  1945 년 한해에만 1 백만명이 폭격에 희생되었다 .        도꾜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버려진  막사에서 살림을 꾸리 고있다 .         못쓰게 된 뻐스들을 도꾜 교외에 세워 놓고  폭격으로 집을 잃은 피난민들을 수용하고있다 .         1945 년 5 월 이 고베에서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짐을 챙겨 피난길에 나섰다 .  곳 연합군이 상륙하는 줄로 알았 었 단다 .       국민학교 학생들이 방공호 안에서 수업을 받고있다 .       ' 육탄 삼 용사 '  청소년 학생들이 ' 육탄 삼 용사 ' 탑에 묵년하고있다 .  1932 년 상하이에서 중국군 방어망을 뚫는데 인간 돌피토 역활을 자청한 년이  삼용사를 기리는 기념탑이다 .자청한 삼용 사를 기리는 기념탑이다 .    사무라이 정신을 근대 전에 접목시키려는 것은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  가미가제나 육탄이나 모두 병력 손실로 이어지고 공격을  지시한 자나 지켜보는 병사 들이나 사기가 저하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  잠시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 패전으로 방향 전환되고 만다 광복절 노래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1396    <어머니>시모음 3 댓글:  조회:4717  추천:0  2015-08-15
        어머니와 관련된 시모음     이 시 영 / 어머니     어머니 이 높고 높은 아파트 꼭대기에서 조심조심 살아가시는 당신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죽어도 이곳으론 이사 오지 않겠다고 봉천동 산마루에서 버티시던게 벌써 삼년 전인가요? 덜컥거리며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에 아직도 더럭 겁이 나지만 안경 쓴 아들 내외가 다급히 출근하고 나면 아침마다 손주년 유치원 길을 손목 잡고 바래다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하루 일거리 파출부가 와서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가고 요쿠르트 아줌마가 외치고 가고 계단 청소하는 아줌마가 탁탁 쓸고 가버리면 무덤처럼 고요한 14층 7호 당신은 창을 열고 숨을 쉬어보지만 저 낯선 하늘 구름조각 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허리 펴고 일을 해보려 해도 먹던 밥 치우는 것 말고는 없어 어디 나가 걸어보려 해도 깨끗한 낭하 아래론 까마득한 낭떠러지 발 붙일 사람도  걸어볼 사람도 아예 없는 격절의 숨 막힌 공간 철컥거리다간 꽝 하고 닫히는 철문소리 어머니 차라리 창문을 닫으세요 그리고 눈을 감고 당신이 지나쳐온 수많은 자죽 그 갈림길마다 흘린 피눈물들을 기억하세요 없는 집 농사꾼의 맏달로 태어나 광주 종방의 방직여공이 되었던 게 추운 열여덟 살 겨울이었지요? 이 틀 저 틀을 옮겨 다니며 먼지구덕에서 전쟁 물자를 짜다 해방이 되어 돌아와 보니 시집이라 보내준 것이 마름 집 병신아들 그 길로 내차고 타향을 떠돌다 손 귀한 어느 양반집 후살이로 들어가 다 잃고 서른이 되어서야 저를 낳아다지요 인공 때는 밤짐을 이고 끌려갔다 하마터면 영 돌아오지 못했을 어머니 죽창으로 당하고 양총으로 당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요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에게 밥해주고 밤 사람이 들어오면 밤 사람에게 밥해주고 이리 뺏기고 저리 뜯기고 쑥국새 울음 들으며 송피를 벗겨 저를 키우셨다지요 모진 세월도 가고 들판에 벼이삭이 자라 오르면 처녀 적 공장노래 흥얼거리며 이 논 저 논에 파묻혀 초벌만벌 상일꾼처럼 일하다 끙 달을 이고 돌아오셨지요 비가 오면 덕석 걷이, 타작 때면 홀태앗이 누에 처엔 뽕 걷이, 풀진 철엔 먼 산 가기 여름 내내 삼 삼기, 겨우 내내 무명 잣기 씨 뿌릴 땐 망태메기, 땅 고를 땐 가래잡기 억세고 거칠다고 아버지에게 야단도 맞았지만 머슴들 속에 서면 머슴 벝고랑에 엎드리면 여름 흙내음 물씬 나던 아 좋았던 어머니 그 너른 들 다 팔고 고향을 아주 떠나올 땐 몇 번씩이나 뒤돌아보며 눈물 훔치시며 나 죽으면 저 일하던 진새미 밭가에 묻어 달라고 다짐 다짐하시더니 오늘은 이 도시 고층 아파트의 꼭대기가 당신을 새처럼 가둘 줄이야 어찌 아셨겠습니까 엘리베이터가 무겁게 열리고 닫히고 어두운 복도 끝에 아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면 오늘도 구석방 조그만 창을 닫고 조심조심 참았던 숨을 몰아내쉬는 흰머리 파뿌리 같은 늙으신 어머니         김규동/ 어머님전 상서   솔개 한 마리 나지막히 상공을 돌거든 어린 날의 모습같이 그가 지금 조그맣게 어딘가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움직이는 그림자는 영원에 가려 돌아오지 않지만 달빛에 묻어서라도 그 목소리는 돌아오는 것이라 여겨주세요   이제 생각하면 운명이라고 잊혀도 지건만 겨레의 허리에 잠긴 사슬 너무나 무거우니 아직도 우리들은 조그맣게 조그맣게 걸어가고만 있나 봐요   아무리 애써도 닿지 못하는 서투른 이 발 걸음 죽은 자와 더불어 헤매어 봅니다   솔개 한마리 빈 하늘을 돌거든 차가운 흙 속에서라도 어여삐 웃어주세요         이 정/ 어머니   어머니 몸에선 언제나 생선 비린내가 났다 등록금 봉투에서도 났다 포마드 향내를 풍기는선생님 책상 위에 어머니의 눅눅한 돈이 든 봉투를 올려놓고 얼굴이 빨개져서 돌아왔다 밤늦게 녹초가 된 어머니 곁에 누우면 살아서 튀어오르는 싱싱한 갯비린내가 우리 육남매 홑이불이 되어 덮였다         기형도/ 엄마 걱정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이성복/ 어머니 1            가건물 신축 공사장 한편에 쌓인 각목 더미에서 상체보다 긴 장도리로 각목에 붙은 못을 빼는 여 인은 남성, 여성 구분으로서의 여인이다  시커멓게 탄 광대뼈에 퍼질러 앉은 엉덩이는 언제 처녀였을까 싶 다  아직 바랜 핏자국이 꽃더미로 피어오르는 오월, 나는 스물해 전 고향 뒷산의 키 큰 소나무 너머, 구 름 너머로 차올라가는 그녀를 다시 본다  내가 그네를 높이 차 올려 그녀를 따라잡으려 하면 그녀는 벌써 풀밭위에 내려앉고 아직도 점심시간이 멀어 힘겹게 정도리로 못을 빼는여인.       어머니       촛불과 안개 꽁 사이로 올라오는 온갖 하소연을 한쪽 귀로 흘리시면서, 오늘도 화장지 행상에 지친 아들의 손발에, 가슴에 깊이 못을 뽑으시는 어머니....    
1395    전쟁은 가라... 그리고, 평화는 오라... 댓글:  조회:3010  추천:0  2015-08-15
      美軍 앵글에 잡힌 6.25 戰爭          6·25전쟁 당시 미군 사진사들과 카메라맨들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됐다.     바로 역사적 정보의 "보고(寶庫)"       1.  men of the 24th Inf. Regt. move up to the firing line in Korea. July 18, 1950. Breeding. (Army)   24 보병연대가 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2.  Railroad cars loaded with barbed wire at Taegu  RTO (Railway Transportation Office), Korea.  July 24, 1950. Sgt. Riley. (Army)   철조망을 싣고 대구역을 출발하는 화물 열차.      3.  Wounded American soldiers are given medical treatment at a first aid station, somewhere in Korea. July 25, 1950. Pfc. Tom Nebbia. (Army)   부상병이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4.  Pfc. Orvin L. Morris, 27th Regiment, takes a much deserved rest during his evacuation to Pusan, Korea, on a hospital train. He was wounded by enemy mortar fire on front lines. July 29, 1950. Sgt. Dunlap. (Army)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부상 당한 병사가 부산으로 이동하는 열차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5.  United Nations flag waves over crowd waiting to hear Dr. Syngman Rhee speak to the United Nations Council in Taegu, Korea. July 30, 1950. Sgt. Girard. (ARmy)   대구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듣기 위해 군중이 모여 있다     6.  U.S. Marines stand along the rail and watch the ocean aboard the USS Clymer. To the aft a Marine is washing his dungarees by dragging them along behind the ship. July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해군 병사들이  배  난간에 기대어 쉬고 있다     7.   Three BD-110A switchboards on left and one BD-96 on extreme right being operated by Pfc. James Grahn of Co. B, 71st Sig. Svc. Bn., Pusan, Korea. August 1, 1950. Cpl. Crowe. (Army)   3개의 BD-100A와 BD-96을 제임스가 조작하고 있다     8.   U.S. troops are pictured on pier after debarking from ship, somewhere in Korea. August 6, 1950. Sgt. Dunlap. (Army)   상륙후 부두에서 쉬고 있는 미군 병사들     9.   Pfc. Clarence Whitmore, voice radio operator, 24th Infantry Regiment, reads the latest news while enjoying chow during lull in battle, near Sangju, Korea. August 9, 1950. Pfc. Charles Fabiszak, Army. (USIA)   전투가 소강 상태일 때 무전병이 신문을 보며 음식을 먹고 있다     10.  Fresh and eager U.S. Marine troops, newly-arrived at the vital southern supply port of Pusan, are shown prior to moving up to the front lines. August 1950. INP. (USIA)   새로 도착한 미 해병 대원들이 전선으로 이동하기 전의 모습     11.  How a man died on the way to Maeson Dong. September 2, 1950. Sgt. Turnbull. (Army)   전사자 모습      12.   Men of the 9th Inf. Regt. man an M-26 tank to await an enemy attempt to cross the Naktong River September 3, 1950. Cpl. Thomas Marotta. (Army)   9보병연대 병사들과 M26 탱크가 북한군의 낙동강 도강에 대비히고 있다     13.  North Korean prisoner of Marines who rolled enemy back in Naktong River fighting. He wear a "Prisoner of War" tag and was treated in accordance with United Nations' rules of international warfare. September 4, 1950. S. Sgt. Walter W. Frank. (Marine Corps)   북한군포로의 모습, 그는 전쟁 포로라는 판을 목에 걸고  유엔법에 따라 관리되었다    14.   Landing craft loaded with Marines head for the smoking beach in invasion of Inchon, September 15,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해병대를 태운 상륙정이 인천 해변으로 향하고 있다     15.   Invasion of Ichon, Korea. Four LST's unload men and equipment on beach. Three of the LST's shown are LST-611, LST-745, and LST-715. September 15, 1950. C.K. Rose. (Navy)   4척의 상륙정으로부터 병력과 장비가 내려지고 있다     16.   Carrying scaling ladders, U.S. Marines in landing crafts head for the seawall at Inchon. September 15, 1950. S.Sgt. W. W. Frank. (Marine Corps)   사다리를 싣고 인천 상륙을 위해 상륙정에 승선한 해병들     17.   Leathernecks lead patrol between destroyed buildings in "mop-up" of Wolmi Island, gateway to Inchon. September 15,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인천의 관문인 을미도에서 북한군을 소탕 중인 해병대     18.   As against "The Shores of Tripoli" in the Marine Hymn, Leathernecks use scaling ladders to storm ashore at Inchon in amphibious invasion September 15, 1950. The attack was so swift that casualties were surprisingly low. S.Sgt. W.W. Frank. (Marine Corps)   해병들이 사다리를 이용해 인천 해안에 상륙하고 있다. 이 공격은 신속했으며 부상자는 놀랄 정도로 적었다     19.  Brig. Gen. Courtney Whitney; Gen. Douglas MacArthur, Commander in Chief of U.N. Forces; and Maj. Gen. Edward M. Almond observe the shelling of Inchon from the U.S.S. Mt. McKinley, September 15, 1950. Nutter (Army)   상륙 작전중 인천 해안을 살피는 맥아더 사령관     20.  A small South Korean child sits alone in the street, after elements of the 1st Marine Div. and South Korean Marines invaded the city of Inchon, in an offensive launched against the North Korean forces in that area. September 16, 1950. Pfc. Ronald L. Hancock. (Army)   어린 소녀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다. 미해병과 한국 해병이 인천에 상륙한 직후     21.   Al Jolson entertains U.S. troops at Pusan Stadium during his visit to the fighting front. He died shortly after his return from Koera where he gave of his talent untirigly and unceasingly. He made the trip at his own expense. September 17, 1950. Kondreck. (Army)    al jolson이 부산 운동장에서 공연을 하고있다  그는 자비로 공연을 했으며 한국에서 돌아간 직후 사망했다      22.  Wreckage of big transport which North Koreans hit while it was on Kimpo Airfield, is again in friendly hands, upon recapture of field. September 18,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북한군의 공격으로 김포 공항에서 파괴된 비행기가 1950년 9월18일 다시 미군의 손에 들어왔다.     23.   Troops of the 31st Inf. Regt. land at Inchon Harbor, Korea, aboard LST's. September 18, 1950. Hunkins. (Army)   31연대 병력이 인천에 상륙하고 있다     24.  Two North Korean boys, serving in the North Korean Army, taken prisoner in the Sindang-dong area by elements of the 389th Inf. Regt., are interrogated by a U.S. soldier shortly after their capture. September 18, 1950. Pfc. Francis Mullin. (Army)   신당동에서 미군에 잡힌 북한 소년병이 신문을 받고 있다     25.   Pfc. Thomas Conlon, 21st Inf. Regt., lies on a stretcher at a medical aid station, after being wonunded while crossing the Naktong River in Korea. September 19, 1950. Cpl. Dennis P. Buckley. (Army)   낙동강을 건너다 부상 당한 병사가 들것에 누워 있다     26.   United Nations troops fighting in the streets of Seoul, Korea. September 20, 1950. Lt. Robert L. Strickland and Cpl. John Romanowski. (Army)   시가전 중인 유엔군     27.  A U.S. Marine tank follows a line of prisoners of war down a village street. September 26, 1950. S. Sgt. John Babyak, Jr. (Marine Corps)                탱크가 포로 행렬을 따르고 있다     28.  55arine Pvt. 1st Class Luther Leguire raises U.S. Flag at American consulate in Seoul, while fighting for the city raged around the compound. September 27, 1950. Sgt. John Babyak, Jr. (Marine Corps)   미영사관에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다     29.  A Korean family mourns their murdered father, victim of the wholesale murder at Chonju by North Koreans. September 27, 1950. M. Sgt. E. T. Tarr. (Army)   북한군에 의해 대량 학살된 시신 옆에서 오열하고 있는 한국인     30.  The wreckage of a bridge and North Korean Communist tank south of Suwon, Korea. The tank was caught on a bridge and put out of action by the Air Force. October 7, 1950. Marks. (Army)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다리 위의 탱크     31.  ROK military police pose before the ruins of a devastated building in Pohang. Most buildings that housed red troops were destroyed. October 17, 1950. (Navy)   한국군 헌병이 무너진 건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32.  Scene of war damage in residential section of Seoul, Korea. The capitol building can be seen in the background (right). October 18, 1950. Sfc. Cecil Riley. (Army)    서울의 주거지의 파괴된 모습. 멀리 중앙청이 보인다.     33.  Officers and men of the 62nd Engineers stand in front of the first train to cross the new railroad bridge which they built across the Han River at Seoul, Korea. October 19, 1950. Sfc. Albert Guyette. (Army)   한강에 새로 건설된 철교에 처음으로 지나가는 기차 앞에서 62공병대 병사들과 사병들     34.  A 16-inche salvo from the USS Missouri at Chong Jin, Korea, in effort to cut Northern Korean communications. Chong Jin is only 39 miles from the border of China. October 21, 1950. (Navy)   북한군의 통신 단절을 위한 청진에서 16인치포 일제사격,  청진은 중국에서 39마일 떨어져 있다     35.  Audience reaction to the Bob Hope show at Seoul, Korea. October 23, 1950. Capt. Bloomquist. (Army)   밥 호프의 공연을 보며 웃고 있는 병사들.     36.  Navy Sky Raiders from the USS Valley Forge fire 5-inch wing rockets at North Korean communist field positions. October 24, 1950. PhoM3c. Burke. (Navy)   북한군을 향해 로켓을 발사하는 미해군 전투기     37.   The Hon. S.Y. Lee, Vice President of South Korea, leads cheers at the close of the UN Day ceremony at Seoul. October 24, 1950. Sgt. Ray Turnbull. (Army)   유엔의 날에 마지막에  한국의 부통령(이시영)이 만세를 선창하고 있다      38.  Bob Hope, radio and screen star, sits with men of X Corps, as members of his troupe enterain at Womsan, Korea. October 26, 1950. Cpl. Alex Klein. (Army)   위문 공연을 온 밥 호프와 함께 포즈를 취한 병사들     39.   A refugee family from Ching Pung Men near Masan, now living in a refugee camp at Changseung-po, Korea. October 1950. United Nations. (USIA)   마산 근처의 ching pung면에서 피난 온 가족. 지금은 장생포에 있다     40.  An aged Korean woman pauses in her search for salvageable materials among the ruins of Seoul, Korea. November 1, 1950. Capt. C. W. Huff. (Army)   폐허가된 서울에서 할머니가 쓸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41.  Korean women and children search the rubble of Seoul for anything that can be used or burned as fuel. November 1, 1950. Capt. F. L. Scheiber. (Army)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땔감을 찾고 있다     42.   Miss Mo Yun Sook, famed Korean poetess, is telling how she escaped the Communist-led North Koreans when they captured Seoul, by hiding in the mountains until the U.N. forces liberated the city. November 8, 1950. Cpl. Robert Dangel. (Army)   한국의 여류시인 모윤숙이 어떻게 북한군 치하의 서울에서 탈출했는지 말하고 있다 유엔군이 올때까지 산에 숨어 지냈다     43.   Navy AD-3 dive bomber pulls out of dive after dropping a 2000 lb. bomb on Korean side of a bridge crossing the Yalu River at Sinuiju, into Manchuria. Note: anti-aircraft gun emplacement on both sides of the river. November 15, 1950. (Navy)   미해군 폭격기가 신의주 압록강 다리를 폭격하고 있다   44.  Homeless, this brother and sister search empty cans for morsels of food, and try to keep warm beside a small fire in the Seoul, Korea, railroad yards. November 17, 1950. Pfc. Fulton. (Army)   아이들이 먹을 것을 찾고 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작은불 옆에 있다.     45.  Fighting with the 2nd Inf. Div. north of the Chongchon River, Sfc. Major Cleveland, weapons squad leader, points out communist-led North Korean position to his machine gun crew. November 20, 1950. Pfc. James Cox. (Army)   청천강에서 북한군 진지를 겨냥하고 있는 병사들     46.   M/Sgt. George Miller selects human blood for patient at the 8076th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at Kunr-ri, Korea. November 27, 1950. Cpl.Fred Rice. (Army)    환자들을 위해서 조지 밀러가 피를  모으고 있다     47.  A wounded chaplain reads a memorial service over the snow-covered bodies of dead Marines. Koto-ri, Korea. December 3, 1950. Cpl. W. T. Wolfe. (Marine Corps)   부상당한 목사님이 전사한 해병들을 위해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     48.  These men of the Heavy Mortar Co., 7th Inf. Regt., go native, cooking rice in their foxhole in the Kagae-dong area, Korea. December 7, 1950. Pfc. Donald Dunbar. (Army)   밥을 짖고 있는 세 병사     49.   Wounded soldiers use wheelchairs and crutches until they learn how to walk with a synthetic limb. Pfc. Charles Woody, injured near Taegu, walks on crutches. Walter Reed Mil. Hosp. Washington, DC. December 8, 1950. T. Sgt. Trehearne, USAF; PhoM2c. Knudsen, USN. (USIA)   부상 당한 병사들은 의족 의수를 어떻게 쓰는지 익숙해 질 때 까지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했다     50.  Supplies and equipment are also evacuated from the onslaught of the Communist Forces bearing down on Hungnam, Korea. December 11, 1950. Pfc. Emerich M. Christ. (Army)    공산군의 맹공으로 흥남에서 철수하는 보급품과 장비들     51.  A U.N. LST slips into the harbor at Inchon prior to invasion by U.S. Marines. December 13, 1950. (Navy)   UN군의 LST가 인천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52.  Marines of the First Marine Division pay their respects to fallen buddies during memorial services at the division's cemetery at Hamhung, Korea, following the break-out from Chosin Reservoir, December 13, 1950. Cpl. Uthe. (Marine Corps)   전사한 미해병들의 무덤에서 추도 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53.  Marines of the First Marine Division pay their respects to fallen buddies during memorial services at the division's cemetery at Hamhung, Korea, following the break-out from Chosin Reservoir, December 13, 1950. Cpl. Uthe. (Marine Corps)    전사한 미해병들의 무덤에서 추도 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54.   President Harry S. Truman is shown at his desk at the White House signing a proclamation declaring a national emergency. December 16, 1950. Acme. (USIA)   투루먼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 선언문에 서명하고 있다     55.  North Korean refugees use anything that will float to evacuate Hungnam. Here they jam the decks of a South Korean LST and many fishing boats. December 19, 1950. (Navy)   북한의 피난민들이 흥남을 떠나고 있다.     56.  Korean natives prepare to board an LST during the evacuation of Hungnam, while other refugees unload some of their meager belongings from an ox-cart and load them on a fishing boat. December 19, 1950. (Navy)   피난민들이 LST에 승선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피난민들은 우마차에서 짐을 내려 어선에 옮기고 있다.     57.  The USS Missouri fires 16-inch shell into enemy lines at Hungnam. A 16-inch 3-gun salvo is on its way to commies. December 26, 1950. (Navy)   흥남으로 함폭 사격 중인 미해군     58.   U.S. Marines move forward after effective close-air support flushes out the enemy from their hillside entrenchments. Billows of smoke rise skyward from the target area. Hagaru-ri. December 26, 1950. Cpl. McDonald. (Marine Corps)   전투기의 근접 지원 후 전진 중인 미해병     59.   Astonished Marines of the 5th and 7th Regiments, who hurled back a surprise onslaught by three Chinese communist divisions, hear that they are to withdraw! Ca. December 1950. Sgt. Frank C. Kerr. (Marine Corps)   중공군의 맹공에 후퇴하는 미군     60.    Jacob A. Malik, Soviet representative on the U.N. Security Council, raises his hand to cast the only dissenting vote to the resolution calling on the Chinese Communists to withdraw troops from Korea. Lake Success, NY. December 1950. INP. (USIA)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서 중공군의 철수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소련 대표     61.  North Korean prisoners, taken by the Marines in a foothills fight, march single file across a rice paddy. 1950 (Marine Corps)   논을 따라 이동중인 북한군 포로들     62.   U.S. Marines guarding three captured North Koreans, ca. 1950. Sgt. W. M. Compton. (Marine Corps)    미해병이 지키고 있는 북한군 포로     63.   Crossing the 38th parallel. United Nations forces withdraw from Pyongyang, the North Korean capital. They recrossed the 38th parallel. 1950. (USIA)   평양으로부터 철수하여 38선을 건너는 유엔군     64.  Leatherneck machine gun crew dug in for the night in Korea. Ca. 1950. (Marine Corps)   참호에 있는 미해병     65.   Marine Corps tanks - ready for the front lines - are swung aboard a barge at the Naval Supply Center by crane, for transhipment to our forces in the Pacific Far Eastern Command. Oakland, CA, 1950. Acme. (USIA)   극동태평양사령부로부터 보급된 탱크가 항구로 내려지고 있다     66.   During South Korean evacuation of Suwon Airfield, a 37-mm anti-tank gun is hauled out of the area for repairs, by a weapons carrier. 1950. INP. (USIA)   수원비행장의 한국인들이 철수하는 동안 대전차포가 수리를 위해 트럭에 의해 이동되고 있다     67.  San Diego, Calif. A young officer and his wife sitting in their car at the dock and staring quietly at the waiting aircraft carrier before he leaves for Korea. 1950. Black Star. (USIA)   한 장교의 그의 아내가 자동차에 조용히 앉아서 장교가 한국으로 타고 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68.   Cpl. John W. Simms of Bradbury Heights, MD, is shown bidding his wife, Ann, and their 8-month-old son, John Jr., goodbye as he leaves for Korea, 1950. Washington Post. (USIA)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미군 병사        
1394    그리고 또 李箱 댓글:  조회:5029  추천:1  2015-08-15
''''나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좋다. 남성도 중년 신사보다는 청년이 좋다.   가다가 낯선 다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기 하나 가득 청년 장정들이 어깨를 버티고 앉아 담소하고 있은 것을 볼 때,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후끈해지고 미소가 절로 부풀어 오르며 무엇인지 나도 모르게 자신이 만만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설혹 그들의 담소가 유치하고 가다가는 지나치게 건방진 때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탓할 바 없는 무관한 일이다. 정의와 용맹과 이상에 불타는 그들의 젊음은 오늘날 그들의 조국이 낡고 병들었어도 내일 다시 그 위에 새로운 조국을 세울 수 있는 건전한 반석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김향안 수필집, 에서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의 전시회에서 김환기의 27-11-70 작품을 보며 오래전 그의 부인인 김향안여사가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열었고 2004년에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가 생각이 났다. 그 당시에도 참 대단한 여성이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일연수요문화데이 회원들에게 김향안에 대해서 정리해 보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며... 김향안(본명은 변동림)을 알아 보려면 그녀의 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서양화가 구본웅(1906~1953)은 한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판사인 창문사(彰文社)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기업인 구자혁이고, 숙부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기독교 계열의 유력 인사 구자옥이다. 어머니가 구본웅(발레리나 강수진의 외조부)을 낳고 일찍 사망한 뒤 어릴때 돌보는 사람의 실수로 척추를 다쳐서 불구(곱추)가 되었다. 구본웅은 계모 변동숙의 손에 자라게 되는데,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를 들어 낳은, 언니와 26살 차이나는 이복 여동생이 변동림이다. 구본웅은 장애 때문에 소학교에 제 때 들어가지 못했고 몇 년 늦깎이로 입학하고 반 친구들이 곱추 구본웅을 멸시하였지만 김해경(필명 이상)만은 구본웅에게 예의를 잃지 않았고 이후 둘은 학교를 함께 다니며 더욱 친해졌다.   2. 이상(李箱)은 한일합방이 되던 해 가을 서울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일자무학의 고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 생가의 위치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 없으나 궁내부 활판소에 근무하다 활판 기계에 손가락을 잘린 뒤 차렸다는 아버지의 이발소는 운영이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은 두 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큰아버지에게 대이을 아들이 없어 통인동 154번지의 큰아버지 집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다. 총독부의 기술 관리였던 큰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은 윤택했지만 고종 때 증조부가 정3품 벼슬을 지낸 강릉 김씨 문중의 증손이 된 사실은 이상에게 적잖은 갈등을 안겨 준 듯하다. "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와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제2호) 이상이 스물세 살 때까지 살았던 통인동 본가는 그가 에서 "10대조의 고성"이라고 한 것처럼 꽤나 큰 한옥이었던 모양이다. 본채에 행랑채와 사랑채까지 딸린 300여 평의 넓은 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의 옛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광화문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꺾어 300미터쯤 가다 보면 길 왼편에 상업은행 지점이 있다. 은행 왼편 골목길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의 오른편이 바로 이상이 이십일 년 간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다. 이 집은 현재 십여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여러 채의 한옥들이 들어서 있고 길가 쪽으로는 인쇄소, 책 대여방, 열쇠 가게 등이 영업중이다. 이들 가게는 물론이고 골목안 복덕방에서도 이 일대가 일세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 이상의 옛 집터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각혈을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이상은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이 곳 술집에서 기생 금홍을 만난 이상은 청진동 조선광무소 1층을 사글세로 얻어 '제비'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다방 뒷골목에 금홍과 살림까지 차려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된 의 무대를 만들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는 이상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의 혹평과 비난 때문에 연재는 중단되었지만 열화 같은 찬반 양론이 일었고 '구인회' 가입 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제비' 다방은 경영난으로 폐업하여야 했고 인사동의 카페 '쓰루(학)' 광교다리 근처의 다방 '69'와 명동의 '무기(맥)'를 잇달아 개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때 나이 많은 조카 구본웅의 소개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중퇴한 변동림은 이상을 만나게 되고 둘은 1936년 6월 결혼하기에 이른다. 신혼을 즐기기에는 이상은 너무 피폐해 있었고, 햇볕 하나 안 들어오는 셋방에서 이상은 내내 누워 있었고 변동림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바에 나갈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 보다못한 구본웅이 이상(이모부)에게 일본에 가서 요양이라도 좀 하고 오라고 경제적 도움을 준다. 결혼 석달만에 이상은 일본으로 혼자 떠나게 된다 이듬해 2월 죽음 직전의 혼곤한 상태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경에 체포된 이상은 신병 악화로 한 달여 만에 석방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했고 일본으로 달려간 변동림 앞에서 이상은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김향안(변동림)의 회고를 보면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멜론을 사러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멜론을 들고 와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 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중)   “그(이상)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김향안(변동림)은 회고했다.   그녀가 새로이 찾은 사랑은 서양화가 김환기. 육척 장신에 악기도 잘 다루고 글도 잘 쓰고, 서울대 미대, 홍익대 미대교수였는데, 문제는 그는 유부남에 세 딸까지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녀의 스물 여섯 연상 언니, 엄마같은 언니 변동숙은 결혼을 엄청 반대하게 된다. 변동림은 결혼 반대에 부딫이자, 이름을 바꾸게 된다. 변씨에서 김씨가 된다. 그리고 김환기에게 말한다. “당신의 아호 향안(鄕岸)을 나한테 줘요 그러면 평생 그 이름으로 살겠어요.” 그래서 ‘김향안’으로 김환기와 재혼(1944년)하게 된다.   한국 근대 회화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 화백이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받기까지에는 부인 김향안(1916∼2004)여사의 물심양면 내조가 있었다.   두사람은 55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다 63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74년 김 화백이 세상을 떠나자 김향안 여사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78년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92년 서울 부암동에 사재를 털어 건립한 환기미술관은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예술과 열정으로 부부애를 과시한 두 사람의 유해가 김 화백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 안치된다. 김 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36년 만이다. 고인의 아들 화영(54·환기재단 이사장)씨는 11월 2일 부모의 유해를 안좌면으로 이장하는 협약을 신안군과 체결할 예정이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김 화백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뒤 뉴욕 시립공동묘지에 안장됐으며 부인은 2004년 타계해 남편 곁에 묻혔다.   3. 김환기(1913~1974)전남 신안 안좌도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수화(樹話). 추상적 조형언어로 한국적 정서를 양식화한 대표적 서양화가이다. 도쿄에서 중학교를 졸업했고 일본대학 미술부에 재학중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에서 미술수업을 하는가 하면 자유미술협회에 참가했다. 이과회전(二科會展)에 〈종달새가 울 때〉·〈25호실의 기념〉을 출품해 입선했으며, 1936년 11월 도쿄 천성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일본의 자유미술협회전 회원으로 추천되어 적극적으로 출품하면서 193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큐비즘적 시각을 받아들이면서 순수조형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더욱 기울었고 1930년대 고전적인 화풍이 자리잡고 있었던 우리나라 화단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추상미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유영국·이규상 등과 함께 1948년 신사실파라는 그룹을 조직하였고, 한국 현대미술의 초기 시절을 장식했다. 1952년 피난시절에 부산 뉴서울다방에서 〈달밤〉·〈산〉 등으로 개인전을 열고 이어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1956~59년까지는 프랑스에서 체류하면서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1962년에는 홍익대 학장에 취임하고 1963년에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에 피선되어 미술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해에 뉴욕으로 간 그는 이때부터 종전의 향토적인 서정성이 더해진 추상에서 오로지 선과 점의 질서와 균형을 표현하는 작업으로 화풍을 바꾸었다. 이때의 대표작이 한국일보사 주최의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서, 화면 가득히 점을 찍어나간 작품이다. 뉴욕에서 뇌일혈로 죽은 다음해인 1975년 뉴욕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며,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는 50점의 작품으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1393    다시 보는 李箱 댓글:  조회:5761  추천:0  2015-08-15
김해경은 이상인데, 여기서 '이상'은 지정된 한자가 있지만 쓰지 않기로 하자. 그는 1910년, 대동아 공영이라는 예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일본이 조선을 정식으로 식민통치하겠다고 계약을 한 그 해에 태어나, 고작 스물 일곱해를 살고 뭔가 있을 줄 알고 갔지만 서구 흉내나 내는 비속한 물건이라고 했던 그 일본땅에서 햇볕없는 싸구려 셋방과 감옥과 병원을 전전하다 폐결핵으로 세상을 뜬 남자다. 작가로는 이상한 시와 소설를 써서 독자들의 항의와 협박으로 연재를 할 수 없었고 화가로는 꼬맹이 때부터 그림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고 잡지 표지를 '근대적인' 그렸으나 따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식민지 열등 민족의 족속인 그가 일본 사람들에게도 선망이었던 공업학교를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식민을 총괄하는 총독부에 엘리트 건축기사로 직행한 것은 건축가였던 그의 재능이 빛나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았다. (못했다라고 나는 쓰고 싶지만, 니 주제를 알아라, 하고는 않았다라고만 쓴다.)   오늘 저녁에 할 강연에 몇 컷을 넣기로 하고 이상의 시집을 빌려 일부만 보았다. 오늘도 비가 추적추적 오니, 감상을 섞어 말하면 20년만의 짧은 만남이랄까, 그렇다.      이런저런 연구자들이 모여서 엮은 전집 중에서 시집을 빌려 왔으나 읽기는 어려워서 그냥 보았다. '읽을' 수 없어서 못 읽었다.   예를들면, 이런 거.     왼쪽은 연작시 중 2이다. 이걸 어떻게 '읽느냐' 말이다. 어떤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일이삼사오륙칠팔구음 일이삼사오륙칠팔음구 일이삼사오륙칠음팔구 .... 이렇게 읽을까, 아니면 그가 처음에 썼던 일본어로 읽을까. 게다가 오른쪽은 몇 년 뒤 연작시 중 4이다. 이미 썼던 것을 나중에 '뒤집어' 다시 썼다.  이것은 더 '읽기' 어렵다.   그래서 봤다.   이상이 나온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지금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이다. 이상이 식민지 열등인으로 거기를 뚫고 들어가 최우수로 졸업한 데에는 수학적인 재능이 별났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이상이 수학 기호들을 시의 용어로 채용한 것은 어찌보면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래도 수학 기호를 시 기호로 적용한 것은 매우 특별하다. 시를 좋아하고 시를 썼던 유명한 수학자 중에 수학 기호를 시 기호로 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매우 드물다.     아무튼, 위에 나온 저런 이상의 이싱한 시는 당연히 무수한 해석들의 표적이 되었다. 70년대 초 수학교수 한 분은, 수학 천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상, 이라고 짠한 얼굴로 보태서 해석하고 칭송하였고 90년대 말 수학 교수 한분은 수학을 합리주의의 총아로 삼아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장관직을 지낸 문학 교수는 그러지 말고 순수하게 기호로 보자고 하였고 내가 읽지 못한 다른 글들에는 저자마다 그들이 삶의 무기로 삼고 있는 것으로 cut하여 단면을 보여준다.   김해경이자 이상인 이 남자는 여자들을 전전하였다. 실제 생활이 그랬다고 보이지는 않으나 그가 지은 소설로만 보면 얻어 맞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혹시 모르지만, 나는, 안 그랬겠지 한다. 방구석을 뒹굴뒹굴 장말 그랬을까.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에 재능이란 오히려 독이었을까, 이런 실험 저런 실험... 삶은 잘 모르겠지만 생활은 얻지 못했다,아닐까.   지금도 있나, 몇십년 전에 프랑스에서 똑똑한(?) 젊은이들이 모여 문학실험 집단을 만들어 헤집고 다녔던 적이 있다. 그들은 주로 수학자나 물리학자들이었는데, 이상처럼 이상한 시를 쓰거나 기계가 시를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 (기계가 쓴 시라면 앨런 튜링이 그들의 의젓한 선배이시다. 먼 훗날 인조인간의 시대가 오면 '그들'은 이들을 아브라함으로 드높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상의 이상한 시와 이들의 이상한 시는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할 것 같다. 그 선이 무엇인지, 무슨 색깔과 형태로 얼마나 선명하게 그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고 양쪽을 다 모르니 근거도 희박하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다. 그래야 할 것  같다.     흠. 이상한 글을 썼군. 컴퓨터를 켤 때만 해도... 이 글을 쓸 참이 아니었는데... 입만 아프고 머리만 멍해지는 말을 왜 할까 도대체?   어느새 비가 제법 온다. 오늘 강연장은 대중 교통수단이 안 좋았는데. 흠.   이제 강연 준비 몇 시간 해야겠다. 같은 내용으로 세번째 하는 것인데, 할 때마다 바뀌었다. 두번째 할 때보다 프레젠테이션 40페이지를 덜어냈는데 60페이지가 늘었다. 지금부터 두시간 동안 50페이지 줄이기를 목표로 한다. 절대, 한 페이지도 늘리지 않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과연 될까? 일부러 강연 준비를 구석으로 몰아서 최대한 적게 하도록 했다. 내 생활의 기본 선을 지키도록. 그러나 그렇게 몰아세웠는데도, 컴퓨터 조작 시간만 최소 10시간은 되었다. 이제 이제는 그만.     ====   이상 김해경은 좀 특별해 보이는 저 남자고, 옆?뒤?는 문학과 예술의 동지 박태원    
1392    시간 차이 알기 댓글:  조회:5361  추천:0  2015-08-14
조선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오는 15일부터 표준시간을 30분 늦춘다고 조선중앙통신이 7일 보도. 이는 지난 5일 조선 최고인민회 상임위원회의 정령. 통신은 "동경 127°30’을 기준으로 하는 시간(현재의 시간보다 30분 늦은 시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표준시간으로 정하고 평양시간으로 명명한다"며 "평양시간은 주체104(2015년) 8월 15일부터 적용한다"고 밝혔다.
1391    잠시 쉬여가기... 댓글:  조회:2749  추천:0  2015-08-12
1390    잡지는 잡지다워야 잡지 댓글:  조회:5337  추천:0  2015-08-11
-《장백산》잡지 창간 35돐에 즈음하여 《장백산》잡지사 리여천 사장 겸 주필 우리 말 대형문학지《장백산》잡지는 1980년 5월 1일에 유서 깊은 황성옛터 통화시에서 창간하여 지금까지 장장 35년이란 긴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첫 창간호가 고고성을 울리면서 올해 2호까지면 총 200호가 됩니다. 초창기에는 사무실도 없고 전문편집도 없고 재정보장도 없는 상황이였기에 장백산은 《들가방편집부》로 첫 걸음마를 떼고 모든 간난고초를 겪으면서 오랜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지금도 걸어온 35년을 돌이키면 가슴이 벅차납니다. 장백산의 35년은 창업의 35년이였고 고난의 35년이였으며 또한 성과가 빛나는 휘황찬란한 35년이였습니다. 처음에는 통화시문련의 한어잡지인 《장백산》의 이름을 빌어서 내부 계도간행물로부터 1983년에는 정식공개간행물로, 지금은 길림성 10대 우수간행물, 북방지역우수간행물, 국가출판총서에서 인정한 쌍효간행물로 성장했으며  2005년에는 전국 3만개 간행물가운데서 평심한 백종중점간행물의 하나로 되였으며 우리 말 간행물뿐만아니라 소수민족문자로 출판하는 간행물중 제일 인기 있는 잡지로 평가받으면서 국가 핵심간행물로 되였습니다. 처음에는 통화시문련 소속의 내부간행물로부터 1990년 4월에 장춘으로 들어오면서 선후로 성작가협회, 성민족사무위원회에 소속이 되였다가 2004년에는 길림일보그룹에 소속이 되였습니다. 류하현의 선전부 간부과장으로 있던 남영전선생은 한어로 시를 창작하는분이였지만 조선족문인들의 고초를 헤아리고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고저 선뜻 발벗고 나서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장백산》을 창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로심초사하셨습니다. 그이는 여러번 승진할 기회가 있었고 북경으로 전근할수 있는 기회가 차례졌지만 한번도 동요가 없이 김택원선생님과 같이 《장백산》을 창간하고 예순이 넘어서도 2년이나 더 현직에 있으면서 장장 30년 동안 《장백산》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셨습니다. 창시자중의 한분인 김택원선생은 남사장의 든든한 조수가 되여서 밤낮이 없이 일하시다가 아쉽게도 1995년 어느날 오전까지 출근을 하셨다가 피로로 하여 오후 다섯시즈음에 저세상 사람이 되였습니다. 그이는 잡지사에서 장장 20여년 동안 심혈을 몰부은분입니다. 초창기에 우리는 통화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주는 보조금 2000원을 가지고 잡지를 만들어야 했기에 김택원선생은 자기의 장끼를 발휘하여 번역을 해서 탄 원고료를 잡지사에 들여놓고 행정비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984년 정식으로 편제를 가지면서 리여천선생과 김수영선생이 선후로 잡지사로 전근이 되였고 김수영선생은 퇴직한 후에도 칠순이 되도록 10년이나 더 출근을 하셨으며 역시 일생을 다 잡지사사업에 바친 분입니다. 리여천선생은 28 세 호시절에 잡지사에 들어와서 인생의 제일 좋은 황금시기를 잡지사사업에 이바지하였으며 지금까지 여전히 32년이란 긴 세월을 잡지를 위해 분투하고있습니다. 초창기에 잡지사는 사무실이 없었기에 항상 애로가 많았습니다. 남의 사무실을 빌려쓰든가 아니면 코구멍만한 세집을 잡고 넷이 들어앉아서 편집을 해야 했으며 2000년에야 116평방으로 된 주택을 하나 사서 사무실로 사용할수가 있었습니다. 창간호 발행이 2000여부로부터 번영시에는  3만부까지 달했으며 현재 조선족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3000여부를 오르내리면서 문학지로서는 상당한 발행부수를 보존하고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사무실이 없는 서러운 나날을 돌이키면 가슴이 설레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가면서 사는 그 고통은 당사자 아니고서는 리해할수가 없습니다. 특히 발행 때마다 그 애로가 더 컸습니다. 한때는 발행료의 40프로를 우전국에 줘야 하기에 우리는 자체발행을 시도하였는데 3만부 되는 잡지를 뜨락에 부려놓으면 산더미가 되였습니다. 그러면 그걸 뜨락에 늘여놓고 잡지사의 가족들마저 모두 동원하여 며칠씩 잡지를 봉투에 넣고 주소를 적으면서 발행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잡지사에게 《광장편집부》란 미칭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비오는 날이면 잡지를 6층 사무실까지 메올려야 하는데 지쳐 쓰러지는 직원이 한둘이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불만없이 수걱수걱 일을 하군 하였습니다. 잡지사는 그냥 차량이 없었기에 발행시에는 자전거로 운반을 해야 하는데 남직원들은 열몇번씩 봉투에 담은 잡지를 실어날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우리 잡지사를 《자전거잡지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잡지사직원들은 더 좋은 작품을 모집하기 위하여 넓은 통화벌을 누비며 다녔고 발행부수를 늘이기 위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니군 하였습니다. 재정상황이 어려웠기에 항상 출장보조도 받지 못하면서 되려 월급을 탈탈 털어서 발행에 보태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월급이 마이나스가 될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잡지사의 간거한 력사를 아는 사람은 이를 두고 《장백산정신》이라고 합니다. 장백산은 문학지로서 초창기부터 그 종지가 명확했습니다. 문학의 쟝르라면 다 취급대상이 되였습니다. 소설문학을 위주로 하면서 시, 수필, 실화문학, 평론, 잡문, 등 란을 설치했고 대형문학지란 그 우세로 장편을 많이 취급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장편만 해도 거의 50여편이나 되며 취급한 원고가 거의 6천만자에 달합니다. 와중에 박선석의 대하소설 《쓴웃음》은 장장 7년 반 동안 우리 잡지에 련재하면서 국내외 독자들의 감탄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장백산은 항상 《최선》이 우리의 표준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고인이 되신 항일투사 김학철선생의 만년의 많은 주옥같은 작품이 거의 우리 잡지에 실렸으며 김학철선생 본인도 우리 잡지에 글을 내는것을 원했습니다. 역시 이미 고인이 되신 연변대학 부학장 정판룡교수는 생전에 《고향 떠나 50년》이란 력작을 쓰셔서 우리 잡지에 련재를 했으며 이 작품은 지금 봐도 우리 조선족문학에 있어서 길이 남길 력작이 아닐수가 없으며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의 재부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몽당치마》를 쓰셔서 1983년 전국우수단편소설상을 탄 원로작가 림원춘선생님은 《우산은 비에 운다》란 장편을 우리 잡지에 련재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장편소설 《산귀신》을 련재하고있습니다. 연변대학 교장으로 계시던 김병민교수는 연변대학 60돐을 맞으면서 《와룡산일지》를 우리 잡지에 련재했으며 이 글은 연변대학의 빛나는 력사가 담겨있을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창업사가 그려졌기에 많은 국내외 교육자,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연변과기대 김진경총장님의 사적을 다룬 허련순선생의 장편다큐 《사랑주의》, 김혁의 장편인물전기 《윤동주평전》이 지금 련재되고있습니다. 그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우리 《장백산》의 이 진지에서 자기 문학의 꿈을 키워가고있습니다. 우리 조선족문학은 중국 문학의 일부분으로서 우리 《장백산》은 우수한 중국문학을 조선족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명한 시인 하경지, 애청 등의 주옥같은 시를 소개했을뿐아니라 중국문단흐름을 알리고저 《형제》, 《청자기》 같은 당년 판매량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작품들을 련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시종 중국문학란을 설치하여 좋은 작품들을 실으면서 조선족문학이 중국문학과 더 빨리 더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여 정성을 다해왔습니다. 《장백산》은 초학자를 키우는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십여년동안 줄곧 대학생코너를 설치하여 대학생들의 작품특집을 꾸리는것으로 조선족문학의 대를 잇는데도 홀시하지 않았습니다. 장백산은 줄곧 세계적인 범위에서 우리 민족문학의 만남의 장, 교류의 장을 만드는데 힘써왔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좋은 정세를 세계에 알리고 장길도 건설에 의바지하고저 우리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6년부터 우리는 한국, 조선, 일본, 미국, 카나다, 브라질, 독일 등 각 나라의 우리 글 작가들의 글을 실어왔습니다. 《장백산》은 중국생활체험기와 한국생활체험기란을 설치하여 한국에서의 중국인들의 어려움과 중국에서의 한국인들의 성장과정을 글로 담아 중한문화교류와 경제발전에 가교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본분들은 한국에서 살고있는 우리 조선족들의 어려움을 페부로 느끼면서 한국문화를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중국시장으로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인들에게는 반드시 장백산의 중국생활체험기를 읽으면 그만큼 도움이 컸기에 우리 나라 대외개방의 좋은 창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1987년에는 조선의 《조선문학》잡지사와 《천리마》잡지사의 초청으로 성 해당 부문의 책임자들로 조성된 《장백산》잡지사 대표단이 조선을 방문하여 당시 장철부총리의 접견을 받는 그런 영예를 지니기도 했으며 한국의 많은 문학지와 자매지를 맺고 교류를 활발히 진행해왔습니다. 장백산은 한국을 비롯한 국외 많은 나라로 잡지가 나가고있으며 2002년에는 한국 번역원에서 《장백산》잡지 200부를 구매하여 한국의 각 대학도서관에 발행하여 연구, 저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제일 큰 책시장인 교보문고에 가면 장백산잡지가 판매되고있습니다. 한국의 서울출판사에서는 무료로 장백산의 초창기부터 2004년까지의 모든 작품을 종합본 68개로 출판하여 한국의 각 도서관으로 발행하고있습니다. 《장백산》은 많은 작가들을 키워왔습니다. 통화시 매하구시 농민작가 박선석은 대하소설 《쓴웃음》을 제외하고도 《재해》, 《압록강》등 많은 장, 중, 단편소설을 장백산에서 독점련재하는 식이였으며 지금은 당당한 작가로 성장하여 박선석팬이 이루어질 정도로 많은 독자들의 애대를 받고있습니다. 문학의 황무지였던 통화시 조선족문학은 장백산이 있음으로 하여 마송학, 리승호, 김남현 등 많은 작가들이 배출하였습니다. 남영전사장은 창작도 잡지사건설에 도움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잡지사를 운영하면서도 시창작에 게을리 하지를 않았습니다. 근간에 그이가 쓴 토템시는 새로운 쟝르로서 중국문단에서 당당하게 한자리를 매김하게 되였습니다. 그이의 토템시는 북경을 비롯한 많은 대학교 연구생들의 론문테마로 되였으며 북경, 무한, 장춘 등지의 일부 대학교에서는 남영전토템시세미나를 갖고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으며 올해는 중국작가협회에서 조직한 당대 중국소수민족시인 10대 《걸출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선되여 커다란 영예를 안게 되였습니다. 사장의 이런 시재와 그의 인격매력은 잡지사를 꾸려나가는데 더없는 재부가 되였으며 《장백산》은 길림성에서뿐아니라 중국작가협회, 국가출판총서의 중시를 받고 많은 지지를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장백산》은 30년 동안 많은 작가들을 키웠고 많은 글들을 실었을뿐 아니라 많은 문학상을 설치하여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2001년에는 한국 한 지명인사의 후원으로 전국정치협상회의 회의실에서 《장백산》문학상 시상식을 가졌으며 당시 조남기부주석께서 친히 시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수상자로서는 덕고망중한 김학철선생님과 정판룡교수님이였으며 상금도 2만원의 거액으로서 국내외 커다란 반향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장백산모드모아문학상은 광주 모드모아그룹의 리성일리사장의 후원하에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장장 8년 동안 진행해왔습니다. 모드모아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 달리 수상자에게 수장작가작품집을 출판해주기에 많은 작가들의 인기를 가져왔습니다. 지금까지 50여명이 수상을 했으며 단행본만 해도 52개를 출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잡지사를 작은 출판사라고도 합니다. 또한 모드모아문학상은 세계문학상을 설치하였기에 많은 국외작가들이 참여하여 명실한 문학상브랜드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중국조선족문학비평상》은 한국의 한림대학 정덕준교수가 발기하고 후원해온 상입니다. 《장백산》잡지에만 그친것이 아니라 조선족문학의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평선을 하기에 어느모로 보면 우리 조선족문단을 리드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상이기도 합니다. 올해까지 5회에 달하는 이 상은 상금이 많을뿐 아니라 비평계에서는 권위적이기에 론문지가 아닌 문학지 《장백산》에서 주최한다는것은 우리 문단에서의 커다란 기여가 아닐수가 없습니다. 《장백산》은 항상 진선미를 추구하면서 민족적이면서도 원고의 《최고》를 만들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장백산》에서 나간 작품들이 많은 국내외 문학상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제일 큰 상이라고 할수 있는 김학철문학상이 첫 2회의 수상작품이 다 우리 잡지에 련재한 글입니다. 1회에서는 허련순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가 대상을 수여받고 2회에서는 박선석의 《쓴웃음》이 대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어느해 연변주에서 가진 《진달래문학상》에서 문학부분 7개 상가운데 4개가 우리 잡지의 작품입니다. 《장백산》은 잡지를 잘 꾸리는데서 그친것이 아니라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몇년전만 해도 중앙민족대학과 같이 《박선석작품연구 및 조선족문학의 현황과 전망》이란 세미나를 가졌으며 연변대학과 같이 《불멸의 영령-최채》출간기념식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불멸의 영령-최채》는 민족의 력사가 담겨있을뿐 아니라 항일투쟁사와 민족정책의 우월성이 담겨있는 력작이기에 우리 잡지에 련재했을뿐 아니라 한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으며 중국의 각 명문대학 도서관에 책을 증증하여 저장하도록 했으며 출간기념식을 성황리에 치르기도 했습니다. 출간기념식에 주정부의 지도간부들의 참여와 지지를 받았을뿐아니라 전국정치협상회의 조남기전임부주석께서 축사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명문대학과 손잡고 학술세미나를 가지는것은 문학지로서는 아름찬 일이지만 그 사회효과는 적극적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조선족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이런 노력을 계속 도모해나갈것입니다. 《장백산》은 중한문화교류를 위하여 노력해왔습니다. 2004년에는 한국 10대 시인의 시집을 한어로 번역하여 북경의 문예출판사에서 출판하였으며 이 계기로 중한문화교류의 장을 펼쳤습니다. 중국 작가협회에서는 중한문화교류에서 우리 잡지사의 가교역할을 바랐습니다. 우리 잡지사에서는 중, 한 시의 번역으로부터 출판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지고 고품위가 있는 《중한시집》, 《한중시집》을 두개 언어로 출판하였을뿐 아니라 두나라 작가, 시인들이 한자리에 만나 《중한문화연구세미나》를 가지게끔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학회에서는 장백산의 공적을 기리고저 우리에게 《원정상》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2011년부터 장백산은 작가들의 시야를 높이고 소수민족간의 문화교류를 위하여 해마다 20여명의 작가들을 조직하여 문학답사에 나섰으며 지금까지 거의 60여명의 작가들이 선후로 운남, 내몽골, 서장, 연안 등지를 다녀오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기행문을 잡지에 싣기도 했습니다. 《장백산》잡지사의 휘황찬란한 35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감개무량합니다. 당의 좋은 민족정책이 없었다면 장백산의 오늘이 있을수 없으며 개혁개방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성과를 거둘수가 없었을것입니다. 우리가 애로에 빠질 때마다 당의 따뜻한 손길이 우리를 고무해주고 밀어주군 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성정치협상회의 전임주석이였던 류희림동지는 장백산 초창기에 통화시 서기로 있으면서 줄곧 장백산을 관심해오신 분입니다. 성인민대표대회 리정문전임부주임은 항상 장백산의 행사에 꼭꼭 오셔서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 분입니다. 성민족사무위원회 전임 주임이였던 김영준동지는 지금까지도 고령이심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장백산에 와보시지 않으면 마음이 안 놓인다고 찾아주시는 잡지사발전에 공로가 큰 분입니다. 현직에 있는 성민족사무위원회 강광자주임은 장백산을 밀어주는것은 소수민족정책의 락착이라고 떳떳이 말합니다. 항상 재정난으로 시련을 겪을 때마다 성재정청의 지도자들과 성신문출판국의 지도자들은 소수민족문화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의 민족정책에 대한 옳바른 인식으로 많은 관심을 가져다주군 하였습니다.그리고 많은 경제인, 지성인들한테도 고마움을 표하고싶습니다. 장백산은 물론 35년 동안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지만 아직도 걸어가야 할 길이 멉니다. 당의 요구에 아직 먼 거리가 있으며 많은 분들의 베풀어준것보다는 거둔 성과가 작으며 아직 해결해야 할 애로가 많습니다. 아직까지 작은 116평방의 주택을 사무실로 사용하고있습니다. 국가 핵심간행물로서는 너무 격에 맞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의 옳바른 민족정책이 있고 든든한 길림일보그룹의 지도자들의 관심이 있고 많은 기업인, 지성인들의 지지가 있고 많은 작가 시인들의 참여가 있는 이상 장백산의 래일은 더욱 찬란할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당의 문예방침에 따라 《인민을 위하고 사회주의를 위하는》 방향과 《백가쟁명 백화제방》의 방침아래 력사의 사명감을 안고 어떤 곤난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뚫고 나가는 《장백산정신》을 이어받아 당이 믿어주고 길림일보그룹에서 믿어줄수 있고 독자들이 즐기는 좋은 잡지로 꾸려나갈것입니다.
1389    음악분수 댓글:  조회:5887  추천:0  2015-08-11
분수속에 융합된 예술적 감화력, 경관설계 및 과학기술의 독특한 매력으로 연길 부르하통하 분수는 일전에 2015 10개 곳《가장 아름다운 음악분수》에 들었다. 부르하통하 음악분수군의 길이는 158메터, 분수 주심 높이는 108메터, 분수구가 2000여개, 채색조명등이 8000여개가 장치되였다고 한다. 소리, 빛, 전기기술을 종합적으로 리용하고 시각과 청각을 유기적으로 융합해 《경천옥기둥》,《천녀 꽃보라 날리기》,《향심비무》등 다양한 분수조형을 시사하고있으며 음악의 동감을 결부하여 물의 매력을 잘 보여주고있다.    2015 10개 곳《가장 아름다운 음악분수》에는 상해인민광장의 분수, 서안 기러기탑 음악분수, 청도 세계원예박람회 음악분수, 심수 해상세계 음악분수, 소주 김계호 음악분수, 광동성 갈양 용강 대형음악분수, 락양 호심 대형음악분수, 광동 하원 신풍강 음악분수, 절강 악청줌심공원 대형음악분수가 들었다.     광동성 갈양시정부 사무청사앞 용강(揭阳榕江)북하강심에 있는 용강 대형음악분수는 당면 에서 중국가장 높고 긴 강심음악분수이다. 분수 주심 높이는 188메터, 아시아에서도 가장 높은 분수로 꼽히고있다. 분수대 길이는 290메터, 너비는 45메로 목하 세계적으로 가장 큰 면적의 부체분수대(浮体平台)로 꼽히고있다.  길림신문
1388    詩는 農村을 對相하라... 댓글:  조회:4340  추천:0  2015-08-07
[ 2015년 08월 04일 08시 36분 ]     음력 6월 15일, 조선족의 전통 명절인 ‘류터우제(流頭節)’.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의 많은 조선족은 이날 장시(江西)촌에 모여 전통 풍습대로 제사, 머리 감기, ‘류터우옌(流頭宴)’ 연회 등 행사에 참가했으며, 가무 공연과 스포츠 시합을 열어 조선족의 명절을 축하했다. ‘류터우제’는 고대 농경사회에서 기원한 명절로서 ‘류터우’라는 단어는 ‘둥류수이터우무위(東流水頭沐浴,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를 줄인 말이다. 매년 음력 6월 15일마다 조선족 부녀자들은 동쪽으로 흐르는 하류에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며, 농경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몸을 정갈하게 하여 잡귀를 쫓고, 풍년과 건강을 기원한다. =========================================================== 신경림의 시는 농촌을 배경으로 한 것이 대부분으로 1960년대 중반에 들어 신경림(申庚林)  예술가명 : 신경림(申庚林)    생몰년도 : 1935년~    전공 : 시 신경림의 시는 농촌을 배경으로 한 것이 대부분으로 1960년대 중반에 들어 , , , , 등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초기의 등에서 보인 인간존재를 다룬 관념적인 세계를 말끔히 씻고 주관적인 표현에서 객관적인 표현법을 사용함으로써 단편소설적인 이야기시의 성격을 진하게 풍긴다. 그의 시 는 그의 작품 경향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죽음의 현장인 도수장 앞에 와서야 겨우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고 고갯짓을 하며 어깨를 흔드는 농민들의 발버둥을 통해서 인간의 숙명적 정한의 새로운 질서와 조화를 형성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시적 대상은 막연하고 평면적인 농촌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정서, 한, 울분, 고뇌 등이 끈질기게 깔려 있는 장소로서의 농촌현실이며, 때문에 생명력이 넘치는 농촌의 제현상이 구체적으로 파헤쳐진다. 원시적인 리듬의 무리없는 구사에 있어서도 평범한 토속어를 기반으로 현재의 경험에 의해 재생시킨 밀도있는 시어로 표현함으로써 토속어의 새로운 감각을 창출시킨다. 이는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가는 사실들을 재발견하여 현재의 특성을 점검하는 데 매우 긴요한 요소가 되며, 객관적 세계로 시를 끌어감으로써 한국의 시를 민중현실 및 민중감정과 격리시켜 온 과거의 여러 불투명한 형태들을 청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장시집인 은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시도로서, 서사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방대한 작품이다. 그는 이것을 기초로 민중현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계속하고 있다.  - 참고: ,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생애     충북 중원에서 출생한 신경림은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1956년 에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건강상 낙향해 초등학교 교사, 요양생활 등을 하다가 상경, 한때 붓을 꺾기도 했다가 1965년에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첫 시집 를 간행하였고, 이어 여러 시집과 평론집 등을 펴냈다. 1974년 시집 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했고,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4년 현재 민족예술인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약력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1955년 동국대학교 영문과 입학 1956년 지에 이한식의 추천으로 ·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1965년 한국일보에 을 발표함으로써 작품활동 재개 1967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75년 고은, 백낙청, 이문구 등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수감 1984년 정희성 등과 민요연구회 결성 · 1989년까지 의장으로 활동 /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1988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에 참여 1989년 김윤수, 황석영 등과 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 사무총장 취임 19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 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대표 1993년 출국금지가 풀려 연변, 백두산 등 중국 동북지방 여행 1995년 파리에서 열린 한국문학의 해 행사에 박완서, 고은, 조세희 등과 참석 1997년 동국대학교 석좌교수에 위촉 1998년 콜롬비아 세계시인대회 참석 1999년 독일 함부르크 한국문학의 날 행사에 이문열, 김원일 등과 참석 200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상훈   1974년 만해문학상(창작과비평사 제정) 1982년 한국문학작가상(한국문학사 제정) 1988년 동국문학상(동국문인회 제정) 1990년 이산문학상(문학과지성사 제정) 1994년 단재문학상(한길사 제정) 1998년 공초문학상(서울신문사 제정) / 대산문학상(대산문화재단 제정) 2001년 현대불교문학상 2002년 만해시문학상         저서       • 시집  (1973) (1979) (1985) (1987) (1987) (1988)  (1990) (1991) (1993) (1996) (1998)  (2002)  • 평론집  (1977) (1981) (1982) (1986)  • 수필집 (1985) (1985) (1986) (1989) (1998) (2000) (2002)   [새재 (창작과비평사,1979)]   [가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1988)]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1993)]         작품세계        작가의 말   (……) 우선 급한 것은 시를 통해서, 소설을 통해서 발언하고 운동을 하고 그 시와 소설이 운동성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그 다음의 것이 그 시나 소설에 걸맞는 행동으로서의 운동입니다. 다시 말해, 문학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운동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 운동성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가령 시낭송회와 같은 데서 얻은 운동성, 즉 현장에서의 운동성이요, 또 하나는 현장성을 떠났을 때의 독립적으로 갖는 운동성입니다. 그렇다면 독립적으로 갖는 운동성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문학작품이 예술적으로 뛰어날 때 가능해집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운동성이 획득되는 것이지요. 톨스토이의 소설이 바로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제 얘기는, 시인의 운동이란 ‘운동, 운동’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또 그것만 너무 강조하지 말고 무엇보다 뛰어난 시를 쓰는 것이 운동에 큰 보탬이 된다는 것입니다. (……) 첫째로, 우리 시가 좋은 시가 되려면 서정성이란 걸 다시 해석을 해서 그 참된 서정성을 우리 시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시는 재미있고 올바른 서정시가 되어 갈 것입니다.  둘째로, 민중언어를 찾아내어 올바른 민중시가 되는 한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예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민족적 동질성과 순수성을 회복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지향의 문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구체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지요.  제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바로 이러한 몇 가지 측면에서 반성을 하고 극복해나갈 때 우리 시가 다시 참다운 재미를 회복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 역사의 나아가는 길에서 시가 시답게 한몫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 ‘우리 시의 올바른 길’, 신경림, , 문학세계사 1988      평론   [농무 (창작과비평사,1975)] 처녀시집 이후 신경림은 적지 않은 수효의 시편과 시집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일관되게 에서 보여준 시적 특징을 유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고향노래만을 부르고 있는 고향의 터주노래꾼이다. 고향을 노래하지 않는 시인이 어디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노래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상소리와 독설과 재담의 시는 재미있고 실감나지만 벌써 노래는 아니다. 오늘의 도시적인 삶이 제기하는 여러 상황에 괴로워하고 속상해하고 그 아픔과 극복에 관해서 생각하는 시도 많고 그러한 시가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도 크다. 그러나 그것은 노래라기보다 토막생각이나 사고의 비명인 경우가 많다. 외마디 아픔의 비명은 노래로 이어지지 않는 법이다. (……) 그의 고향노래는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늘 서사적 충동을 가지고 있다. (……) 신경림 시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우리는 진한 서정성을 들 수 있다. 서사적 충동도 이 진한 서정 속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초기작품에서 후기작품까지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서정성은 쓸쓸하다든가 슬프다든가 하는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개체적인 삶에 대한 충실에서 나온 것이지만, 울분과 노여움의 시에서마저 우리는 서정이 울분과 노여움을 감싸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그를 고향의 터주노래꾼이라 부르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날 우리 고향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지극한 가난이었다. 오늘에 있어서도 가난이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 긍정적인 방향에서건, 부정적인 방향에서건, 신경림의 시는 많은 비평가, 시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관심의 깊이와 넓이에 반하여, 그의 시세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유종호의 매우 뛰어난 한 편의 글에서밖에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그의 시는 대개 농민문학론의 수일한 예로 제시되거나,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농촌 묘사의 한 예로 제시되어, 문학이론의 시녀노릇만을 해왔다. 그것은 시인 신경림에서는 득이 될 수도 있었고, 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여하튼, 농민문학론의 기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그것은 득이다. 그것 때문에 그의 시적 움직임의 폭은 크게 줄어들었다-그것은 실이다. (……) 초기 신경림에게 있어, 삶이란 내면화된 정적 울음이다. 그 인식론적 각성 때문에 신경림이 수동적, 체념적 세계관을 수락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삶이란 내면화된 정적 울음이지만, 그 울음들이 같이 울릴 때 그것을 통곡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나의 울음이 개별적이고 단독적일 때 그것은 울음으로 끝나지만, 그것이 집단적이고 집합적일 때 그것은 통곡이 되어 큰 외침이 된다. 그러나 신경림의 특이한 점은-이것이 시인으로서의 그의 성공을 보장해준 것이라 나는 생각하는데-그것이 울음이든, 통곡이든, 신경림까지도 울고 통곡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울음, 통곡의 현장에 우는 사람, 통곡하는 사람과 같이 있지만, 같이 울지는 않는다. 그는 같이 울고 통곡하는 대신에, 울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노래한다.         연계정보        관련도서   , 창작과비평사, 2004 , 신경림 외, 웅진닷컴, 2002 , 구중서·백낙청·염무웅 편, 창작과비평사, 1995 , 신경림 외, 웅진출판, 1992 , 신경림 외, 문학세계사 1988 , 강정구, 경희대 박사논문, 2003 , 성기각, 경남대 박사논문, 1999
1387    영국 명시인 - 테드 휴즈 댓글:  조회:2881  추천:0  2015-08-03
여우                                 테드 휴즈[영국]             테드 휴즈[(Ted Hughes(1930-1998)]       나는 상상한다, 이 한밤 순간의 숲을. 다른 무엇인가가 살아있다. 시계의 고독 곁에 그리고 내 손가락들이 움직이는 이 백지 곁에.   창문을 통해 나는 아무 별도 볼 수 없다. 어둠 속에서 비록 더 깊지만 더욱 가까운 무엇인가가 고독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어둠 속에 내리는 눈처럼 차가이, 살포시, 여우의 코가 건드린다 잔가지를, 잎사귀를. 두 눈이 도와준다, 이제 막 그리고 또 이제 막, 막, 막   나뭇사이 눈 속에 산뜻한 자국들을 남기는 하나의 움직임을, 그리고 개간지를 대담히 가로질러 온.................... 몸뚱이의 절름거리는 그림자가 그루터기를 지나 움푹 팬 곳에서   꾸물거리고, 눈 하나가 푸른 빛이 퍼지고 짙어지면서, 찬란히, 집중적으로, 제 임무를 다하여   마침내, 여우의 날카롭고 갑작스런 진한 악취를 풍기며 머리의 어두운 구멍으로 들어온다. 창문에는 여전히 별이 없고, 시계는 똑딱거리며, 백지에는 글자가 박힌다.   "The Thought-Fox" by Ted Hughes(1930-1998)       I imagine this midnight moment's forest: Something else is alive Beside the clock's loneliness And this blank page where my fingers move. Through the window I see no star: Something more near Though deeper within darkness Is entering the loneliness:   Cold, delicately as the dark snow, A fox's nose touches twig, leaf; Two eyes serve a movement, that now And again now, and now, and now   Sets neat prints into the snow Between trees, and warily a lame Shadow lags by stump and in hollow Of a body that is bold to come   Across clearings, an eye, A widening deepening greenness, Brilliantly, concentratedly, Coming about its own business   Till, with a sudden sharp hot stink of fox It enters the dark hole of the head. The window is starless still; the clock ticks, The page is printed.           테드 휴즈; 실비아 플라츠에게 자살의 고통을 주고  또 실비아가 죽은 후 그녀의 시집을 내주었던 영국의 유명시인 . 그의 시강의는 매력적이었고 동물처럼 살아있었다. 여우를 보면 그가  언어에 생명성을 불어넣는 방법의 사례시로  떠오른다.  죽은 생각들을 살려내는 언어의 소생술을 가진 시인. 그러나 그는 아내를 죽게 했다.   테트 휴즈가 자신의 부인이었던 실비아 플라스를 회상하며 쓴 88편의 시를 모은 것이 「생일 편지」(Birthday Letters)인데, 1998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테드 휴즈는 이 시집을 낼 당시 암에 걸려 있었는데 9개월 후에 타계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테드 휴즈가 고른 산스크리스트어에서 번역된 문구가 써있다고 한다.                         Sylvia Plath Hughes                        1932 - 1963                  Even among fierce flames            The Golden lotus can be planted.             (격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이라 해도             황금빛 연꽃은 심겨질 수 있다)        
1386    詩作을 위한 10가지 방법 댓글:  조회:4936  추천:0  2015-08-03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테즈 휴즈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비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인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터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1385    詩人을 만드는 9가지 댓글:  조회:4676  추천:0  2015-08-03
    시인을 만드는 9가지   정 일 근 슬픔이 시인을 만든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슬픔’이었다. 그 슬픔에 힘입어 처음 “시인이 돼야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전 해 4월, 벚꽃의 도시 진해에서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다.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에 제일 먼저 슬픔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생몰 연대는 길 위에서 끝이 났다. 그 날 아버지는 당신의 오토바이에 어머니를 태워 마산에 있는 친척 댁에 다녀오시는 길이었는데, 길 위에서 택시가 아버지의 생을 덮치고 뺑소니쳐 버렸다.  의식불명이 되어 안방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숨을 쉬고 계셨지만, 군의관이었던 아버지 친구는 단호하게 사망진단을 내렸다. 사인은 뇌진탕. 마산에서 진해로 출발하며 아버지는 자신의 헬멧을 어머니에게 씌어주셨다. 그 헬멧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운명은 바뀌었다. 두 분 다 허공으로 솟구쳤다 도로 위로 내동댕이쳐졌지만 아버지의 헬멧이 어머니를 구했다. 그것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베푼 마지막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만이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가난도 찾아왔다. '돈 갚으러 오는 사람 보다 빚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아’ 아버지의 재산은 소위 ‘빚잔치’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TV도 사라지고 집도 사라지고 할아버지의 논과 밭도 사라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모는 남루한 일곱 평 반 홉의 양철지붕 아래로 숨어들었고, 어머니는 연탄 부뚜막에 나와 여동생을 재우며 밤늦게까지 술을 팔았다. 친구들이 TV를 보는 시간 나는 술을 날랐다. 친구들이 고급 양장의 동화책을 읽던 시간 나는 안주를 날랐다. 우리 반 고 계집애가 피아노를 치던 시간 나는 손님들이 술자리에서 부르던 이미자, 배 호, 나훈아의 슬픈 유행가나 군인들의 군가를 배웠다.  아버지가 없다는 슬픔이 나를 눈물 많은 아이로 만들었고, 그 눈물이 나를 세상에 대해 조숙하게 처신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 내가 친구들보다 뛰어난 것은 도박과 교과서에 나오는 시나 시조 외우기였다. 두 장의 화투 ‘끗발’로 승자로 가리는 도박으로 친구들의 돈을 따면 만화방에 하루종일 처박혀 있거나 중국집에서 자장면이나 군만두를 사먹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시나 시조를 잘 외운다는 이유 하나로 담임 선생님에 의해 문예반으로 보내졌다. 문예반 지도 선생님은 나에게 시조를 가르쳤다.  뜻밖에도 경남도 대회에 참가할 진해시 대표를 뽑는 백일장에서 나는 장원을 했다. ‘산’이란 제목이었다. 고백하자면,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개근상 외에 처음 “상”이라는 것을 받은 것이다. 어려운 형편에 월부로 안데르센 동화전집까지 사주시며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인이 되어 서른 초반에 홀로 되어 남매를 키우는 슬픈 어머니의 삶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우리 가족이 해체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내 시 속에 등장하는 것을 금기했다. 아버지는 그 때 내 손등에 났던 사마귀처럼 감추고 싶은 상처였다. 시인이 되어서도 그 상처가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 내 시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미워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너무 일찍 길 위에서 끝나버린 아버지의 생이었다. 나는 시로써 아버지와 화해를 시도하며 “아버지의 달걀 속에서 내가 태어나고/내 달걀 속에서 아버지가 태어난다”고 썼다. 아버지란 큰 슬픔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사랑도 시인을 만든다 그대, 4월의 진해를 기억하는가. 눈이 귀한 남쪽의 부동항 진해는 4월이면 눈이 내렸다. 그 작은 도시의 인구수와 비슷한 벚나무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4월이 오면 일시에 꽃을 피우고 바람이 불면 꽃잎을 눈처럼 뿌려주었다.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그 기간 동안 ‘군항제’란 잔치가 열렸다. 그랬다. 그것은 축제라는 현대성을 띤 이름보다 잔치였다.  내가 5학년 1학기까지 다녔던 도천초등학교 주변에 만들어 진 벚나무 숲. 어른들이 ‘사쿠라 마찌’라 부르던 그 곳이 벚꽃 잔치의 장이었다.  잔치의 하객은 후줄근한 양복에 중절모를 쓴 남자들과 한복과 고무신을 신은 여자들. 그들은 장구와 꽹과리로도 최신 유행가의 가락을 맞추고 잔치의 끝은 언제나 술과 노래였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면 그 파장 위로 자주 봄비가 내렸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새로운 봄이 찾아올 때마다 도시의 증가하는 인구처럼 늘어나는 벚나무들은 더욱 화사한 설국을 만들고 잔치는 축제로 변했다. 분수탑 로터리에서 해군 군악대 연주와 의장대의 시범이 열리고 그 모습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축제의 밤이 찾아와 도심의 벚나무에 걸린 축등에 불이 켜지고, 밤하늘에는 현란한 폭죽이 터졌다.  흑백TV도 귀했던 시절, 4월이면 밤하늘에 상영되는 총천연색의 불꽃놀이를 보면서 유년을 보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생의 축복. 그 4월에 나는 첫사랑을 했다.  중3이 되었다. 나는 ‘눈물이 많던 아이’에서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사람들이 꽃이 피는 축제의 기쁨만 알 뿐, 꽃이 지는 축제 뒤의 슬픔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축제의 즐거움 보다 축제가 끝난 뒤의 비 내리는 파장을 좋아했다.  축제의 항구도시를 찾아 밀물처럼 몰려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만들어 놓는 또 다른 바다에서 나는 작고 외로운 섬이 되어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에, 혹은 비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슬픔의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버려, 문예반 선생님은 나이보다 조숙한 눈물의 시를 쓰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시곤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 진해남중은 바다가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한 하얀 건물이었다. 나는 교실에서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남쪽으로 열린 창문을 통해 빛나던 푸른 바다와 작은 섬들. 무시로 찾아오던 건강한 소금 바람. 봄이면 운동장 아래 보리가 누렇게 익고, 가을이면 등교길이 되던 코스모스 꽃길. 그 시절 내가 한 첫사랑은 나에게 기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S.영문 이니셜로 호명할 수밖에 없는 그녀. 그 때까지 내 감정의 전부였던 슬픔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기쁨을 채워주었던 소녀.  우리는 4월, 벚나무 아래에서 처음 만났다. 진해역 옆 청산학원 앞에 서있던 벚나무였다.(불행하게도 그 나무는 지금은 베어지고 없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나는 시를 쓰듯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그 동안 내가 썼던 어느 글보다 아름다운 글을 소녀의 주소로 보냈다. 그 편지들은 내 최초의 사랑시편들이었고 소녀는 최초며, 유일한 독자였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져 있었던 우리는 그 때 아름다운 약속 하나를 했다.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알리는 7시 시보 소리에 맞춰 서로를 그리워하는 성냥불을 켜기로 했다. 성냥불을 밝히며 나는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 나의 첫사랑도 이별로 끝나버렸다. 기쁨이 자리했던 가슴에 다시 슬픔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슬픔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의 슬픔처럼 나를 눈물 많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눈물대신 나는 시를 택했다. 사랑이, 첫사랑이 내 시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펜혹이 시인을 만든다 펜혹이란 말이 있다. 컴퓨터 세대에게는 생소한 말일 것이다.  펜이나 연필로 글을 쓰는 사람의 손에는 반듯이 펜혹이 남아 있다. 오래 글을 쓰다보면 펜을 받치는 가운데 손가락에 혹 같은 굳은 살이 박힌다. 그것이 펜혹이다. 펜혹은 글쓰기의 상처다. 그러나 그 상처는 시인을 만들어 주는 통과의례와 같다. 나는 펜혹이 없는 시인의 손은 신뢰하지 않는다. 펜혹은 시인에게만 남는 상처가 아니다. 무릇 필업을 사는 사람들은 펜혹의 두께가 문학과 정신의 두께를 말해 준다.  대학시절 나는 내 손에 생기는 그 굳은 살의 이름을 몰랐다. 단지 보기 싫고, 불편했을 뿐이다. 어느 날 스승을 뵈러갔다 놀라운 모습과 조우하고 말았다. 스승은 칼로 펜혹을 깎아내고 계셨다.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스승의 방에는 작은 판 하나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 2백자 원고지가 펼쳐져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스승은 그 때 ‘한국문학사’를 집필하고 계셨다.  푸른 칼날을 가진 연필깎이 칼로 가운데 손가락의 굳은 살을 베어내며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생 펜으로 글을 쓰다보니 장지에 펜혹이 생겼어. 자주 깎아내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어.”  스승의 글쓰기는 그 펜혹이 대변해주었으며 스승은 펜혹으로 글쓰기가 불편해지면 칼로 굳은살을 깎아내고 다시 글을 쓰셨다. 한 편의 논문이 완성되기까지,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스승은 얼마나 많은 당신의 살을 깎아내셨을까. 나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느꼈다. 스승의 펜혹은 산과 같은 모습이었고, 내 펜혹은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스승의 펜혹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글쓰기는 자신의 살을 깎아내는 고통이며, 그 고통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그 이후 펜혹은 내 습작시대의 화두였다. 나도 펜혹이 생기도록 시를 썼고, 펜혹을 깎아내며 시를 썼다.  진해시 여좌동 3가 844번지. ‘옛집 진해’에서 습작시대를 보냈다. 나는 대학생이었으며, 아내와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다. 시대는 질곡의 80년대 초였다. 역사는 표류하고 있었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불안했다. 취하지 않는 밤이면 연습장 위에, 노트 위에 시를 적었다. 모나미 볼펜을 꼭 잡은 손가락에 펜혹이 자라고 새벽이면 머리 위에 파지가 무더기로 쌓였다. 그 시절 모든 문학도의 꿈이 그러했듯이 나도 신문사로부터 노란색 신춘문예 당선전보를 받고 싶었다. 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고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글쓰기가 내 삶의 전부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학년말 시험을 포기하고 원고지 위에 피 같은 시를 써 투고를 했다. 그리고 오래 동안 집에서 당선 전보를 배달해 줄 우체부의 오토바이 소리를 기다렸다. 우체부는 찾아오지 않았다. 새해 첫날이면 진해의 6개 중앙일간지 신문지국을 돌며 1월1일자 신문을 빠짐없이 구해 당선자 명단을 확인하며 절망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대학생 현상문예에서 함께 활동했던 하재봉 안재찬(류시화) 안도현 등이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시를 쓰는 일이 나에게는 전부였다. 습작시대였던 대학시절, 나는 시만 썼다. 강의실에서도 고개 숙여 시를 썼으며 자면서도 시를 생각했다. 펜혹은 점점 커졌으며 그 상처를 자주 깎아냈다. 그리고 펜혹 덕분에 대학 4학년 겨울, 나는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다.  문예창작과 첫 강의에서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책을 손으로 읽어라’고 가르친다. 펜으로 문학작품을 옮겨 적으며 손가락에 펜혹이 생기도록 문학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컴퓨터 시대라해도 누구도 펜혹이라는 상처가 없이 시인을 꿈꿀 수 없기에. 분노도 시인을 만든다 지난 91년 도서출판 빛남에서 묶은 내 두 번째 시집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에 수록된 시편들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숨막히는 더위 고물 선풍기가 뿜어주는 더운 바람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적의로 괴로워했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미성숙의 벽에는 우울한 시대의 푸른 곰팡이가 피고 숨어서 김지하의 시들을 몰래 읽으며 늘 혁명 전야처럼 살고 싶었다  적의, 우울한 시대, 김지하, 혁명 전야,.그런 말들과 함께 나의 성년식이 시작됐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담임선생님이 권유하셨던 K은행 입행 대신 대학진학을 선택했다. 가장인 어머니의 가계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셨는지 대학진학을 허락하셨다.  대학에 입학하고 내가 맨 처음 눈을 뜬 것은 시와 역사의 현주소였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만이 시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문예부장까지 지냈던 상고시절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 통학길이 지루해 가끔 박인환의 시들을 외웠고, 내가 가지고 있던 시집은 김소월 시집과 백일장에서 부상으로 받은 윤동주 시집, 단 두 권뿐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오던 시집들을 읽고 쇠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같은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시도 있으며, 시는 이렇게도 쓰는구나. 나는 비로소 작은 우물 밖을 나온 개구리였다. 그 개구리에게 시의 세상은 참으로 넓고 험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 내가 받은 문학교육이 편협됐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런 현실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판금된 김지하 시집 필사본을 숨어서 읽으며 내가 살고 있던 시대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눈을 떠보니 교과서의 문학교육만 편협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는 왜곡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시월의 유신은 김유신과 같아서 삼국통일 되듯이 남북통일 되지요 라고 신나게 불렀던 유신의 실체는 남북통일을 막는 최대 장애였으며, 유신 시대는 그 때도 계속되고 있었다.  진해에 있던 대통령 별장 덕에 어린 시절 대통령 행차 길에 나가 고사리 같은 환영의 손을 흔들며 좋아했던, 중절모를 쓴 박정희는 일본 육사출신의 독재자였다. 절망은 분노를 낳는다.그 분노 앞에서 나는 시와 역사에 복무할 것을 선서했다.  대학 1학년 나는 야학 선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과정이었다.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대부분 현장 노동자였던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대학 강의실보다 야학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야학의 동료교사들 중에는 해군에 근무하는 학․석사장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서도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문학평론가 정과리 형도 야학에서 만났다. 그는 대학원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군복무를 했는데 야학에 동참했다. 마산 양덕에 있던 그의 아파트 서재는 내 문학수업의 바다였다. 사면을 빼곡이 채운 그의 이론서들이 나를 가르쳤으며 그와 밤을 새워 마시던 술이 나를 성숙시켰다.  그 시절 나는 자주 분노했다. 그리고 분노는 혁명의 꿈으로 이어졌다.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 내가 택할 수 있는 혁명의 방법은 시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보면 뒤틀린 현실과 바르게 흘러가지 않는 역사에 대한 분노가 시를 쓰게 만들었다. 시로써 현실에, 역사에 대해 혁명하고 싶었다. 야학 7년을 보내고 나는 야학일기 란 연작시로 당시 무크지였던 을 통해 분노의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분노도 없는 법.조국과 역사에 대한 사랑이 분노를 낳고 그 분노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그대, 분노가 일면 터트려라. 분노도 시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 시인을 만든다 습작시절 누구에게나 병이 생긴다. 이름하여 ‘신춘문예 병’.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손에 아름다운 상처 ‘펜혹’이 생기듯, 이 병도 아름다운 병이다.  신춘문예. 굳이 말뜻을 풀이하자면 ‘새봄의 문학예술’이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풀이하는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뜻을 갖는 말이다.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습작시절이라는 통과의례가 있고, 신춘문예는 그 통과의례 중 가장 치열한 과정의 다름 아니다. 그 치열함의 끝에 당도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영광의 다름 아니다.  신춘문예 병은 신문사마다 1면에 신춘문예 현상공모 사고를 내는 11월초쯤 발병한다. 신춘문예라는 활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뛴다. 혈관 속에서 문학의 피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문제는 그런 흥분된 상태가 응모 마감일 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 끝나가고 겨울이 서서히 찾아오는 때쯤이다. 심장과 피는 더워지지만 몸은 추워지고 등은 불안감으로 굽어진다. 말수도 줄어들고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가끔씩 왜 그렇게 긴 한숨이 터져 나오던지.  그 시절을 겪은 나의 대학성적표는 감추고 싶은 흉터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신춘문예 병이 준 후유증이었다. 고백하자면 아슬아슬하게 낙제를 면한 점수다. 졸업학점이 1백60학점이었던 시절, 신춘문예 병 때문에 펑크난 학점을 맞춘다고 4학년 2학기에도 21학점을 신청해야만 했었다.  신춘문예의 마감과 학년말 시험기간은 늘 일치했다. 나는 그 두 길 앞에서 늘 미련도 없이 신춘문예의 길을 택했다. 친구들이 도서관에서 학년말 시험준비로 밤을 새울 때 나는 신춘문예 응모작품을 준비한다고 밤을 새웠다. 유신 시대, 군사독재 시대에서 학점을 얻기보다 신춘문예 당선시인 이란 이름을 얻고 싶었다. 언젠가 가지게 될 내 첫 시집의 약력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빛나는 한 줄을 남기고 싶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누구에게나 나오는 2급 정교사 자격증보다 먼저 시인이 되고 싶었다. 아직 그 시험답안지들이 남아있을까. 시험문제와는 무관한 글들만 써놓거나 백지로 제출했던 답안지들. 월영동 449번지, 나의 사랑 나의 대학. 사범대학으로 오르던 돌계단, 지칠 때마다 바라보던 푸른 합포만. 내 기억 속의 풍경들의 계절은 언제나 그 겨울이다. 사범대학 빈 강의실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시를 쓰던 동면 직전의 곰 같았던 내 모습. 오지 않는 편지를 기다리며 우편함을 찾아가면 복도 쪽으로 눕던 긴 그림자. 환청처럼 갈가마귀 울음소리 들리던 시절.  더워졌던 피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는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오는 것도 신춘문예 병 후유증이다. 마감도 끝나고 시험도 끝나면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에는 당선통지를 기다리는 일과 밤이면 술을 마시는 일 뿐이었다. 우체국에서 작품을 보내고 돌아와서부터 당선연락이 올 때까지의 그 막연한 기다림. 폭음과 함께 했던 확신과 장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고 마침내 허탈해진다.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당선 연락이 오지 않으면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는 동병상련 하는 도반들의 충고에도 혹시, 혹시 하며 기다리다 절망하다 받아보는 1월 1일자 신문. 그 신문에 실린 그 해 당선자들의 얼굴사진과 빛나는 작품들. 당선 시들을 읽은 뒤에는 지금까지의 기다림 보다 더 큰 부끄러움이 엄습했다.  그렇다. 그 부끄러움이 나를 성숙시켰다. 현재의 내 시가 어떤 자리쯤에 서있는지를 확인시켜주었던 부끄러움이 내 시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혹독한 추위의 겨울이 시작되고 뛰어난 그해 당선 시들을 읽으며 언젠가는 찾아올 내 문학의 봄인 신춘 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대, 그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문학을 꿈꾼다면 그 꿈은 욕심에 불과한 것이니, 다시는 신춘을 기다리지 마라.  바람도 시인을 만든다 왜 그렇게 바람이 좋았는지 몰라.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학교 가는 길이다.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오월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소년의 이마를 짚는다. 바람의 손은 언제나 서늘하다. 소년은 멈추어 선다.  그 때 소년은 보았다, 바람의 몸을. 무형인줄로만 알았던 바람이 보리밭 위로 달아나며 드러내는 몸의 흔적을. “저게 바람의 몸이구나”라는 깨달음. 그것은 세상의 비밀 하나에 눈 뜬 기쁨이었다. 그러한 세상의 비밀을 찾는 것이 시고,그 일은 내가 해야하는 일이다고 생각했다. 열네 살 중학생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시 오 리쯤 되는 길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는 오월이다. 다시 바람이 분다. 함께 돌아가는 친구들은 보지 못하는 바람의 몸을 나 혼자 지켜보며 소년은 바람이 되고 싶었다. 온 몸으로 부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이 나에게 절망이었던 시간이 있었다.  열네 살 중학생은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되어 백일장에 참석한다. 백일장의 시제가 ‘바람’이다. 열일곱 살은 자신에 차 있다. 일찍 바람의 몸을 보았기에. 이윽고 심사가 끝나고 입상자 명단이 방으로 붙는다. 열일곱 살은 실망한다. 자신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장원자가 호명되어 단상으로 나간다. 뜻밖에도 기라성 같은 상급생들을 모두 제치고 동급생 여학생이 장원이다. 단발머리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서서 자신의 바람을 노래한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첫줄에 나는 몸이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동급생 계집아이가 어떻게 저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충격은 부끄러움으로 이어졌다. 부끄러움은 또 절망을 낳았다.  내가 바람의 몸을 보았을 때 바람의 존재를 생각하는, 같은 나이의 여학생의 정신세계와 언어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백일장이 끝나고 열일곱 살은 호수 곁에 앉아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동급생 계집아이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을까.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열일곱 살은 자신에게 결여돼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 표정이다.  열네 살과 열일곱 살에 만난 바람은 분명 다른 바람이었다. 나는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다시 분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바람은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새로 태어나는 바람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그것이 오늘의 시다. 그리고 나는 오늘 부는 바람이 내일도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 그것이 내일의 시다.  처음 만난 시의 화두가 바람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일찍부터 풍병이 들었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바람 같은, 바람병이 들었다. 나는 내 사주팔자를 보지 않았지만 내 사주와 팔자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 평생을 떠돌게 하는 역마살이 끼어 있을 것이다. 그런 바람들이 나를 시인으로 키웠다.  머무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 바람은 부는 것이다. 분다는 것은 움직임, 시는 그런 움직임이다. 시인은 바람이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 고여있는 것들은 시인을 만들지 못한다. 바람이 불기에 살아야 한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다. 나는 바람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오는 동안 많은 사랑도 있었고 눈물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부는 바람의 길을 따라 바람처럼 불어갈 것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시인의 운명이다. 언제나 나는 바람이고 싶다. 그대에게로만 부는 뜨거운 바람이고 싶은 것이다, 그대 나의 시여. 길이 시인을 만든다  중학교 2학년 때 부산에서 진해까지 걸어온 적이 있다. 악동 친구들과 해운대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차비마저 다 유흥비(?)로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여름이었고, 우기였다. 우리는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엄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엄궁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명지로 가, 명지에서 다시 걸어 진해까지 갈 계획이었다.  친구 3명의 무사귀환을 책임져야 하는 내 주머니에는 1백20원이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진해 인근인 웅천에서 버스를 탈 계획이었다. 다들 부모님에게 선생님과 함께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떠난 여행이었기에 우리는 어디에도 구원을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걸어가자. 무슨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리듯 친구들에게 그렇게 선언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염소란 별명을 가진 친구도 찔끔거렸다. 그 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붉은 완행버스를 타고 떠나왔던 길. 그 먼길을 과연 걸어갈 수 있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다른 길은 없었다. 믿는 것은 우리가 가진 A자형 군용 텐트, 알코올 버너, 라면 몇 봉지, 쌀 등과 열 다섯 살의 두 다리 뿐 이었다. 그래, 한 이틀 걸어가면 진해까지 갈 수 있을 거야. 가다가 어두워지면 길 위에서 자고 가지. 내가 앞장섰다. 결국 우리는 1박2일을 걸어서 진해로 돌아왔다. 내가 걸어본 최초의 장도였다.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의 길에 대해 자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 길을 걷고 난 후 내가 많이 성숙해졌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진해에서 자전거를 타고 진주까지 갔다왔다. 그 높은 마진고개를 넘고, 더 높은 진동고개를 넘어 진주로 갔다. 친구의 친척집 작은 골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내리는 비를 피해 다리 밑에서 밥을 먹었다. 역시 집으로 돌아오니 나는 성숙해져 있었다.  진해에서 마산까지 버스통학을 하던 고등학교 3년. 하교 길 자주 마진터널 검문소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왔다. 어둠의 산길,홀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내 몸으로 스며든 길의 향기가 좋았다.  그 시절 우연히 목월 선생이 쓴 젊은 날의 비망록에서, 청년 박목월이 군용 모포 한 장만 들고 강원도에서 부산까지 걸어왔다는 글을 읽었다. 낮에는 해변에서 자고 밤에는 걸어서 동해의 길을 밟았다는 글을 읽고 전율했다. 나는 책을 읽다 일어서서 외쳤다. 떠나자. 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길을 따라 떠나자. 그대, 길은 사람에게 사유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라도 해도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걸어주지 않는다. 결국 길은 혼자 가는 길뿐이다. 혼자 가는 길이 사람을 성숙시켜 주고, 시를 깊어지게 만들어 준다. 길은 무엇보다도 그리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가보지 않은 저쪽에 대한 그리움이 길을 만들었으니, 그리움이 없다면 길도 없었다. 길 위에서 혼자임을 아는 사람은 언제나 그리움의 따뜻함을 꿈꾼다. 그 따뜻함을 나는 서정이라 말하고 싶다. 홀로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길 위에서 그리움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서정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의 가장 큰 가르침은 고통이다. 그대, 길 위에서 혼자 맞는 저물 무렵과 일몰의 고통을 아는가. 타관을 지날 때 하나 둘씩 돋아나는 집들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떠나온 곳으로 등이 굽는 쓸쓸함.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저녁이 찾아올 때 비로소 그리운 사람과 이름들. 저무는 길 위에서 고통을 느껴보지 않고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없다. 등 배기는 길 위에서 고통의 칼날에 싹둑싹둑 잘리는 마디잠을 자보지 않은 사람 또한 시인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니, 그대 오늘 그 길 위에 서라.  유행가도 시인을 만든다 내가 제일 처음 배운 유행가는 배호의 노래였다. 제목은 ‘누가 울어’. 그 때 나는 아버지가 없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어느 비오는 오후, 어머니가 흥얼거리는 그 슬픈 노래가 어린 나를 울렸다. 어머니 몰래 연습장에 노래가사를 적었다. 지금도 생생한 그 노래 1절은 다음과 같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 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 가버린 내 사랑은 돌아올 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 검은 눈을 적시나.’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조용조용 불러보았다. 그리고 정말 ‘피가 맺히게’ 울었다. 어렸지만 노래에 담긴 홀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어린 시절 배호의 노래가 슬픔이 어떤 가락이며 어떤 색깔인지를 가르친 것이다.  어머니의 술집에는 유행가가 끊이지 않았다. 내 유행가 교실은 그 술자리였다. 막걸리 술 주전자를 나르며 나는 손님들의 유행가를 배웠다. 가게에서 일하던 형들의 유행가 책을 훔쳐 가사를 외웠고 장난감 아코디언으로 서툴게 멜로디를 쳐보기도 했다. 영화관에서 ‘미워도 다시 한 번’ ‘가슴 아프게’ 같은 영화를 보며 주제가를 배웠고, 쇼 공연에서 늘 제일 마지막에 출연하는 이미자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나는 세상의 슬픈 유행가가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유행가 가사 같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를 흉내낸 시를 적어 담임 선생님을 걱정시켜 드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은 가난뿐이었지만 나는 뜻밖에도 아버지가 남기신 글을 읽었다.  아버지는 달필이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고급노트에 아버지는 당신이 좋아하셨던 유행가 가사를 볼펜 글씨로 빽빽이 적어 놓으셨다. 나는 유품과 같은 아버지의 유행가 가사를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지우지 않았다.  30대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노래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좋아하신 노래는 가곡이나 명곡이 아니라 유행가였다. 아버지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축음기를 통해 노래를 듣기도 했고, 진공관 전축을 사서 노래를 자주 들으셨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몇 십분 전에도 잠시 들른 아버지 친척 댁에서 전축을 틀어 놓고 누군가의 유행가를 열심히 들으셨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유행가는 ‘갈대의 순정’뿐이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은 아버지의 지독한 애창곡이었다고 한다. 그런 유행가 만들어주는 60년대식 슬픔이 나에게 서정시를 쓰게 만들었고, 유행가는 내 서정의 자양분이 되었다.  나는 어느 자리에서 배호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시인과 부르지 못하는 시인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행가를 딴따라라 한다. 나는 그 딴따라가 좋다. 흔히 대중적, 통속적이라는 감상이 시인에게는 따뜻한 자양분이 된다.  한국 시단에는 3배호가 있다. 대구의 서지월 시인이 서배호, 부산의 최영철 시인이 최배호, 울산의 나는 정배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최배호는 배호와 똑같은 모습으로 노래를 한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현재 우리 시단의 좋은 시인인 그들의 시가 유행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음치고 박치인 나는 폼만 배호다. 서배호, 최배호의 노래 뒤에는 앙코르가 있지만 내 노래는 앙코르가 없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유행가를 부르고 듣는다. 유행가에서 시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엔 시만이 시인을 만든다 신문사는 새로 입사하는 수습기자에게 기사 작성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종이밥을 먹던 신문기자 시절, 어느 누구도 나에게 기사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이 들어 입사한 신문사라 후배를 선배로 모시고 경찰기자 생활이 시작됐다.1진은 서울 중부경찰서 기자실 소파에 앉아있고, 나는 남대문, 용산경찰서를 들개처럼 싸돌아다녔다.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가 석간신문을 제작하고 있어 새벽같이 종합병원 영안실과 경찰서 형사계, 유치장을 돌고 1진에게 간밤의 사건과 사고를 전화로 보고한다. 그러면 1진은 뉴스가 될만한 것을 기사로 만들어 즉시 전화로 부르라고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6하원칙을 적용하여 기사를 작성해 전화송고를 하면 욕설이 쏟아진다. 새벽부터 나이 어린 신문사 선배에게 듣는 욕은 사람을 참담하게 만들어준다. 남쪽에 두고 온 가족생각이 나고, 같이 욕설을 퍼붓고 때려치워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1진의 지적은 정확했다. 내가 놓친 부분을 보지도 않고서 정확하게 찾아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다. 1진은 그렇게 욕설로 지적을 할 뿐 3개월의 그 지독한 수습기간에 신문기사를 어떻게 쓰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강원도 백담사에 유배돼 있던 전두환 전대통령이 법회를 연다고 해서 취재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다. 경쟁사의 기자들과 함께 취재를 하고 나는 끙끙대며 2백자 원고지 5장 정도 분량의 스케치 기사를 작성해 팩스로 보냈다.  그런데 경쟁사 모 선배기자는 기사를 작성하지도 않고 메모만 보고, 그것도 전화기를 들고 짧은 시간에 25장 분량의 기사를 송고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과연 나는 신문기자의 자질이 있는 가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내 그런 좌절을 안 한 선배가 ‘신문기자의 교과서는 신문이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 때서야 나는 신문을 통해 신문기사 쓰는 법을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신문을 펴놓고 좋은 기사는 옮겨 적어보고, 사건과 사고의 유형별로 좋은 기사들을 스크랩해 참고서를 만들었다. 신문 속에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이 숨어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시 창작의 최고의 교과서는 시고, 시집이다. 그것도 좋은 시고 시집이어야 한다.  앞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좋은 시집을 권하고 무조건 필사할 것을 숙제로 내준다. 눈으로 읽는 리듬과 손으로 쓰며 배우는 리듬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도 신춘문예 당선 전까지 참으로 많은 선배시인들의 시를 옮겨 쓰며 시 쓰는 법을 배웠다. 시인이 되려는 제일 마지막 관문은 선배들의 좋은 시와 시집이 나에게 시가 무엇이며, 시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내 친구 최영철 시인은 내 시집 발문에 나를 ‘타고난 시인’이라고 쓴 적이 있다. 너무 일찍 배운 슬픔으로 감성은 타고 났을지 몰라도 나 역시 ‘만들어진 시인’임을 고백한다. 손에 펜혹이 생기도록 좋은 시를 옮겨 적는 연습을 통해 시를 배웠다.  시인이 되는 교과서는 시인들의 시에 있고, 시집에 모여 있다. 시인은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선배 시인들의 인정을 통해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멀리서 혹은 엉뚱한 곳에서 시인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이다.  나는 앞에서 많은 것들이 시인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그런 것들 중 제일 마지막에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시다. 시인이 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라 할지라도 좋은 시를 발표하면 한 번 옮겨 적어보며 그 시의 비밀을 찾으려고 한다.  시인을 꿈꾸거나, 시인인 그대여. 시를 읽자. 시집을 읽자. 그것이 시인을 만들고, 시인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어준다.   
1384    池龍과 芝溶 댓글:  조회:3770  추천:0  2015-08-03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 5. 15 충북 옥천~?/ 아명은 지용(池龍).     생애와 활동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문학세계 그의 문학세계는 대략 3가지로 구분될 수 있으며, 섬세한 이미지 구사와 언어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보여준 것이 특징이다.   첫째는 1926~33년으로,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보인 모더니즘 계열의 시이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23년경이었다고 하나, 발표되기는 1926년
1383    향수 原本 詩 댓글:  조회:2249  추천:0  2015-07-31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1382    마음 열기 댓글:  조회:4223  추천:0  2015-07-30
올 여름도 그냥 가지는 않는구나  - 조정권(1949~ ) 눈 어두운 사람 귀밖에 없어 비야 부탁한다 라디오 좀 틀어보렴 전국에서 목숨의 대행진이 벌어지고 있다 부탁한다 저 저수지같이 어두운 텔레비전도 켜보렴 필요하다면 네 이빨을 써서라도 여름이 깊어간다. 가리왕산 자연휴양림에도, 해운대에도 피서 인파들로 북적인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탓에 도심은 한적해진다. 공중엔 해, 땅엔 붉고 둥근 토마토! 토마토는 대지의 작은 태양들이다. 토마토를 깨물어 먹는 것,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것들은 여름의 보람 중 하나다. 땡볕 더위, 성가신 물것들, 잠 못 드는 열대야는 여름의 불청객들이다. 여름이 무사태평하게 조용히 지나가는 법은 없다. 태풍이 가로수를 뿌리째 뽑고, 강물을 범람시키며, 산사태를 일으키고, 풍랑으로 작은 배들을 뒤집어놓는다. 올해만은 제발 착한 사람들이 ‘목숨의 대행진’을 벌이는 일 따위는 없었으면! [ 2015년 07월 30일 08시 04분]    영국 '도시기획설계전문가 JT 싱(JT Singh)과 모션비디오 예술가 롭 윗워스(Rob Whitworth)는 두사람이 제작한  '평양에 들아가다(Enter Pyongyang)란 제목의 영상 임.
1381    백자 항아리 댓글:  조회:4904  추천:0  2015-07-28
백자 항아리    - 허윤정(1939~ ) 너는 조선의 눈빛 거문고 소리로만 눈을 뜬다 어찌 보면 얼굴이 곱고 어찌 보면 무릎이 곱고 오백년 마음을 비워도 다 못 비운 달 항아리 백자 항아리는 비례와 대칭이 완벽하지 않다. 이 부정형의 백자 항아리는 크고 풍성한 보름달을 닮아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함으로 이끈다.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84)는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으로 이루어진 달항아리를 한국 미의 원형으로 꼽고 그 소박미를 찬미했다. 김환기(1913~74) 화백도 “내 예술의 모든 것은 달항아리에서 나왔다”고 말할 정도로 일그러진 백자 항아리를 사랑하고 즐겨 그렸다. “조선의 눈빛”이고 “거문고 소리”에만 반응하며 눈을 뜨는 이것! 이 달항아리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마음 비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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