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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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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윤동주 - 서시 댓글:  조회:3084  추천:0  2015-12-14
  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에 창작되었고,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48)에 수록되어 있다. 윤동주의 「서시(序詩)」는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 중의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를 어렵지 않게 암송할 수 있을 것이고, 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이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이 친숙함이 오히려 시인의 마음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은 아닐까? 잎새, 바람, 별 같은 편안하고 쉬운 단어들이 이 시를 무작정 쉽고 편안하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시인은 고작 잎새에 이는 사소한 바람에도 괴로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서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것들이 아닌, 죽어 가는 나약한 것들을 사랑해야겠다고 말한다. 시를 꼼꼼히 읽고 행간을 음미하다 보면, 세상을 사랑하는 시인의 간곡한 마음이 느껴진다. 제목이 알려 주다시피 이 시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페이지에 놓인다.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서시」가 보여 주는 시 세계를 좀 더 깊고 풍요롭게 만날 수 있다. (이남호/교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윤동주의 시')   * 이 시를 읽으면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순수한 열정과 신념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시적 자아의 치열한 정신을 우리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고백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란 극히 미세한 도덕적 갈등을 가리킨다. 더구나 그것이 절대적 존재인 '하늘'을 기준으로 삼은 '부끄럼'과 연결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그의 고백은 지극히 사소한 도덕적 결점조차 스스로 용납지 않으려는 영혼의 소유자임을 증명해 준다.  그러한 삶의 연장선 위에서 자아는 미래에 대한 삶의 결의를 다진다. 확신과 의도를 나타내는 종결어미를 씀으로써 자아의 의지는 더욱 준열하기만 하다.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것,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자신이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라면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것, 이러한 의지가 미래지향적인 어조 속에서 시적 자아의 적극적인 실천 의지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한 행으로 처리된 제2연에 이르게 되면, 시적 자아의 관심은 다시 현실적 상황으로 돌아온다. 그는 지금 어둠(밤) 속에 서 있으며, 순수함의 표상인 '별'을 지켜나가기란 너무도 힘들어 보인다. 결국 이 작품은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는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백(表白)한 시다. 그래서 더욱 진솔(眞率)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백적인 시가 감상에 흐르거나 관념에 빠지기 쉬운데, 이 시는 적절한 시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서정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현대시목록, 인터넷) ​ * 윤동주의 서시(序詩)​ ​​ 1941년 11월 20일. 그의 나이 24세 때 그날의 일기를 적듯 자아성찰로 쓴 시이다. 한마디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 같은 의문의 명제에 성스럽기까지 하는 텍스트(text)이다. 감상상 확연히 이처럼 세 연으로 나뉜다. 고백(과거) --- 괴로워했다. 맹세(미래) --- 걸어가야겠다. 성찰(현재) --- 스치운다.  인류의 역사는 특정의 그 어떤 빛깔을 거부한다. 그것만을 수용하기 보담 차라리 반사하는 흰 빛이다. 그것은 화합의 이데올로기이요, 또한 거부의 몸짓인 비둘기의 날개짓이다. 비상에는 자기 무게만큼 부담이 따르는 법이다. 권리 이전 개인에게 의무가 있듯이 행위 이전 속일 수 없는 자아(自我)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조상의 얼과 자취를 외면하지 않는 그것이 민족적 양심이라면 그 이전 올바르게 태어나겠다는 자궁 속 태아의 손짓 발짓이 바로 그것이다. 태아의 그 손짓 발짓은 원초적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모체의 유액 속에서 유영이 원초적 우주공간 속 개체적 실존을 잉태했으니, 그는 엄밀한 의미에선 서로가 하등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근본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노아의 방주시에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한 배를 탔듯이 인류의 항해 그 역시 거듭되는 방주인 것이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지성(知性)은 냉철하되 갑속에 든 칼이다"란 말이 있다. 이 말을 경구삼아 일반은 어떻게 풀이하는지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헤아린다면 `지성의 속성` 그 일단의 풍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도 지금 시적 자아인 `나`는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 그 시절 조선의 시인은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동족에게 강요하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사지에다 조선의 젊은이를 몰아넣었으니, 역사의 참괴를 이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참으로 지성이란 동서(東西)가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어야만 하는지.  이광수의 이 차마 부끄러움을 뛰어넘어 `진실`의 실체가 되던 시절, 사르트르와 앙드레 말로는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 프랑스를 위한 필사의 탈옥을 감행했으니 남이라 해서 무조건 깎아내리고 이편이라 하여 덮어버리고 맹신 복종하는 무리적 본성이 우리는 없었던가를 새삼 성찰해야 할 당위성을 지녀야 할 때이다. 그래서도 이 `서시(序詩)`는 앞으로 시인만의 프리루드(prelude: 서문)가 아닌 민족의 `서시(序詩)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어차피 또 한차례 거듭될 수밖에 없는, `노아의 방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환/기자, 오마이뉴스 '민족의 명시 45') ​                                       * 1917년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출생. * 1931년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 1933년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 1935년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 1941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 * 1943년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 1945년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 1948년 그의 자필 유작 시와 수필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집이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 유고집은 31편의 대표시가 3부로 구성되어있으며, 어두운 시대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 * 윤동주는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윤동주는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처녀작은 , 등이다.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 , ,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 , , ,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는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해맑은 시로 평가받고 있다.  1968년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발췌)(두산백과)                     ​ ◇ 순결한 영혼의 시대적 고뇌  윤동주는 자선 원고를 묶은 후 6편의 시를 더 썼다. 「참회록」을 제외하면 도쿄의 릿쿄 대학 영문과를 다니면서 쓴 시들이다. 그는 유학 생활을 하며 퍽 고독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때 씌어진 시편들에는 이국 생활의 쓸쓸함과 함께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한 담담한 신념이 담겨 있다. "남의 나라"에서 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  그러나 이듬해인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떠나기 전 윤동주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 16일 이국의 감옥에서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마쳤다. 죄명은 "사상 불온, 독립운동, 비일본신민(非日本臣民), 온건하나 서구 사상 농후" 등이었다.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그의 내면의 여정은 미완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투명하게 비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사진 속의 온화하고 순한 시인의 얼굴이 그대로 연상된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윤동주의 시들처럼 시인의 내면을 맑고 선명하게 비춰 주는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은 시인이 가혹한 시대를 깊이 있게 고뇌하고 정직하게 살아내려고 했으며, 그로 인한 번민과 갈등을 솔직 담백한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시대의 어둠을 함께 하며 그 어둠 속에 스스로를 묻으려 했다. 생전에 변변히 발표된 적 없던 그의 시들 역시 시대의 어둠에 함께 묻힐 운명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윤동주의 영혼과 그의 시들은 시대의 가혹한 어둠을 함께 함으로써, 더욱 순결하고 밝게 지금까지도 빛나고 있다. (발췌) (이남호/고려대 교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윤동주. 대한민국 시인.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항일운동 혐의로 인한 투옥과 이른 죽음은 그를 영원한 저항시인, 청년시인으로 남게 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4년간 다녔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정과 주변에서 지금도 시인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교정에 남아 있는 시인의 흔적, 윤동주기념관   연세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한창 공사 중인 백양로를 지나면 왼쪽 벤치 옆에 자그마한 시비(詩碑)가 보인다. 거기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짧은 시가 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의 . 시비 뒤로 보이는 핀슨홀(Pinson Hall)은 연희전문 시절 학생 기숙사로 쓰였던 건물이다. 이곳은 학생 윤동주가 1938년에 입학해 2년 동안 머문 공간이기도 하다. 1922년 준공되었다는 아담한 건물 안에는 시인의 그 시절 흔적을 모아놓은 윤동주기념실이 있다. 기념실 입구에서 낡은 사진 몇 장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인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선한 눈매. 그가 남긴 시를 닮은 모습이다. 기념실 내부는 건물만큼이나 아담하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증언을 통해 재현해놓은 시인의 책상이다. 낡은 책상 위에는 당시 시인이 즐겨 읽었다는 책 몇 권, 펜과 잉크, 그리고 시가 담긴 육필 원고가 있다. 그는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문예지 《새명동》을 만들 만큼 일찍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당시 최고의 국어학자였던 최현배와 역사학자 손진태의 강의를 들으며 민족에 눈을 떴다고 한다. 전시실 중앙에는 시인이 태어난 명동촌의 막새기와가 있고, 그 옆에는 최현배의 《우리말본》이 놓여 있다. 연희전문 기숙사에 머물던 시인은 고향과 민족을 생각하며 시를 써나갔을 것이다.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시인의 언덕   시인은 연희전문 입학 2년 만에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경복궁 서쪽 누상동은 지금 서촌이라 불리는 지역에 있다. 서촌에는 윤동주뿐 아니라 시인 이상과 화가 이중섭의 집도 있었다.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곳은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화가 박노수와 이상범의 집도 서촌이었다. 지금 서촌에 문화예술인들이 몰려들고 있는 게 어쩌면 이런 전통을 잇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머물던 시인은 종종 효자동길을 따라 인왕산에 올라 시상을 다듬곤 했다. 눈 아래 펼쳐지는 식민지 경성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와 민족의 앞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시인이 오르던 인왕산 자락에 ‘시인의 언덕’이 있다. 창의문 맞은편 길로 난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서울성곽 앞으로 이곳이 윤동주 시인의 언덕임을 알리는 자그마한 표지석이 있다. 그 옆에는 를 새긴 시비가 있고, 아래로는 옛날 시인이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서울의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바로 아래에는 윤동주문학관이 자리 잡았다. 인왕산 자락에 버려져 있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다. 느린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가압장처럼, 우리 영혼에 아름다운 자극을 주는 시인의 작품을 기념하는 공간을 만들었단다. 그의 시처럼 순백색 외관은 맑은 날이면 더욱 아름답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중앙의 낡은 우물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의 생가에 있던 우물을 옮겨온 것이란다. 이 우물 옆에 서면 그가 다니던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한다. 아마도 에 나오는 우물이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 홀로 찾아가선 /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 가을이 있습니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후략)” 전시실 우물 옆으로 시인의 일생이 담긴 사진 자료들과 친필 원고 영인본이 보인다. 그리고 그가 평소에 즐겨보던 책들의 표지가 한쪽 벽 가득 붙어 있다. 백석 시집과 정지용 시집, 영랑 시집… 이 시집들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갈고 닦았으리라. 시인의 우물은 제2전시실로 이어진다. 용도 폐기된 물탱크의 윗부분을 열어서 중정(中庭)을 만들고 ‘열린 우물’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에 저장되었던 물의 흔적이 벽체에 그대로 남아 있어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느끼도록 했다. 열린 우물은 제3전시실의 ‘닫힌 우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옛날 물탱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침묵하고 사색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시인의 일생과 시세계를 담은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1941년 11월, 졸업을 앞두고 있던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그때까지 써놓은 시 가운데 18편을 뽑고 거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그리고 3부를 필사해서 1부는 자신이 갖고, 다른 1부는 같이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 나머지 1부는 연희전문 은사인 이양하 교수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윤동주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출판 보류를 권했다.  이듬해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시인은 결국 자신의 시집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고 만다.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지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유고시집이 되어 시인 정지용의 발문을 달고 1948년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윤동주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남아 있다. 여행정보   윤동주기념관 주소 :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50 문의 : 02-2123-2253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주소 :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문의 : 02-2148-4175  
1629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李陸史(264) - 청포도 댓글:  조회:5331  추천:0  2015-12-14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나라를 잃고 먼 이역 땅에서 고국을 바라보는 향수와   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고 밝은 내일에의 기다림을   노래한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다.       오늘은 청포도, 절정, 광야 등 어두운 시대상황에서 명징한 언어로   불멸의 독립의지를 노래한 민족시인,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닌 몸을 던져 싸운 실천시인   이육사(이원록)에 대해 살펴본다.                 1.출생과 어린 시절       1904년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난 육사,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항일 투사의 집안인데, 그의 투철한 항일 정신은   이런 가풍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이 아닐지?       한편 어릴 때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그는 17살 때   대구로 가 교남학교(대륜고등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후 일본에 건너가 1년여 간 도쿄 쇼오소쿠 예비학교에서 공부하다    1925년 귀국하는데,       그의 수필이나 평론에 보이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나   서구문학이나 사상에 대한 깊은 조예는   바로 이같은 교육경험 때문으로 봐야겠지...                 2.독립투쟁       귀국 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그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3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는데,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라   호를 육사(陸史)로 정하게 된다.       참고로 그는 처음에는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로    '戮史'란 필명을 썼는데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는   집안 어른의 권고로 다시 바꾼 것이다.                 이육사(李陸史)ㆍ문학로드 안내           시인ㆍ독립운동가(1904.4.4 ~ 1944.1.16)   호 : 육사 본명 : 원록(源祿)   작명 : 활(活) 출생 : 경북 안동        조부 치헌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서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귀국하여 대구에서   조양 회관을 중심으로 문화 활동을 벌였다.   1926년부터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 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호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렸다. 그 때의 수인번호 이육사(二六四)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젓 시「말」을 발표했고 이후 총 39편의   시를 남겼다.   이듬해에 북경과 남경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과정을 마쳤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 1월 16일 마흔의 나이에 북경주재 일본 영ㅇ사곤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서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 도 강인한 필치로 민족의지를 노래했다.     1968년 대통령표장, 1977년 건국포장,1983년 문화훈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등이 수여되었다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옛날 하늘이 처음 열릴떄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지 못하였느리라!   끊임없는 세월 동안 부지런한 계절이 피었다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노라   지금은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리라   그리하여 오랜 세월 뒤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황혼                          이육사     내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 의 반짝이는 별들 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속 그윽한 수녀들 에게도,   시멘트 장판위 수인들 에게도   의지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은 얼마나 떨고 있는가.   ​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 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쏘는 토인들 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 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는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줄 모르나 보다.                이육사 - < 절정 >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시비 위치 :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독립기념관 (겨레의 탑 좌측 숲속)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李陸史 1904∼1944)   시인·독립운동가. 본명은 활(活).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 육사는 호인데 대구형무소 수감번호인 264에서 취음한 것이다. 중국 베이징[北京(북경)] 조선군관학교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고,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대구지점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것을 비롯하여 1929년 광주(光州)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번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43년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송치된 뒤 1944년 베이징감옥에서 죽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잡지를 발간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5년 30살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19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윤곤강(尹崑岡)·김광균(金光均)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하고, 목가풍의 시 《청포도》 《교목(喬木)》 등을 발표, 상징주의적이면서도 호사한 시풍으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였다. 그의 시작세계는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의식과 비애, 《광야》 《꽃》에서 보인 초인의지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저로는 친지들에 의해 발간된 《육사시집(1946)》 《광야(1971)》,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에서 부르리라(1981)》 《이육사전집(1986)》 등이 있다. 1968년 안동에 육사시비가 건립되었다.     이육사 청포도시비   본문 주소 :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234-17 문의 : 054-270-6681(호미곶면주민센터)   상세설명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 '청포도'로 유명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시비(詩碑)가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호미곶에 우뚝 서 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고, 시비 조형물 디자인은 영남대 홍성문 교수, 비문은 아동문학가 손춘익씨, 글씨는 서예가 정현식씨가 각각 맡았다.   이육사는 이 시를 통해서 풍요하고 평화로운 삶에의 소망을 노래했다.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특히 식민지 치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과 대립하면서,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다.   청포도,하늘,푸른바다,청포 등 청색 이미지와 흰 돛단배,은쟁반,하이얀 모시수건 등 흰색 이미지는 이상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상징적인 소재이다.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가 듬뿍 담긴 '청포도'는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된 매체로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담고 있다.   또 '그가 찾아올 그 날'이란 대목은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를 의미하며, '청포입은 손님'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하고 있다. '은쟁반'은 화해로운 미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을 암시하고 있다.     교통안내 대중교통: 시내에서 200번 좌석버스 이용시 구룡포 종점(환승센타) 하차 후 호미곶행 버스 이용 (40분간격) 자가용 이용 : 시내에서 구룡포, 감포 방면 31번 국도 이용하여 구룡포읍내 진입 후 925번 지방도 이용하여 대보방면으로 20분정도 가다보면 우측 해안에 위치.   =============================================================================   이육사 문학관과 이육사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4.3km에 위치함   이육사(李陸史)에 대하여     1904년∼1944년. 시인·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성(眞城).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명은 원록(源綠) 또는 원삼(源三).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한다. 개명은 활(活),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이다. 작품발표시 ‘육사’와 ‘二六四’ 및 활(活)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황(滉)의 13대손인 가호(家鎬)이며, 어머니는 허길(許吉)로, 5형제 중 둘째아들이다.                                                                                    이육사 생가터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천 소재의 옛 백학서원(白鶴書院)인 백학학교(白鶴學校)와 보문의숙(普文義塾)·교남학교(嶠南學校)를 다니고 1926년 북경 조선군관학교, 1930년 북경대학(北京大學)사회학과에 적을 둔 적이 있다 하나, 그 연도나 사실여부가 확인된 것이 아니다. 경력은 항일운동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1925년에 형 원기(源琪),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관헌에게 붙잡혀, 북경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북경감옥에서 죽었다. 문단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 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 春愁三題〉·〈황혼 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청포도 샘   그뒤 《신조선》·《비판 批判》·《풍림 風林》·《조광 朝光》·《문장 文章》·《인문평론 人文評論》·《청색지 靑色紙》·《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수필·문학평론·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원조(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청포도 靑葡萄〉(문장, 1939.8.)·〈절정 絶頂〉(문장, 1940.1.)·〈광야 曠野〉(자유신문,1945.12.17.)·〈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의지(超人意志)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는 “내 골ㅅ방”과 같은 육사의 의식공간은 항시 쫓기고 있는 불안한 마음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빼앗긴 조국에 대한 망국민의 비애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을 그의 시에 새겨놓은 것이다. 1968년 시비가 안동에 건립되었다. 유저로 《육사시집》 외에, 유고(遺稿)재첨가본 《광야》(1971), 그의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曠野)에서 부르리라》(1981)·《이육사전집》(1986) 등이 있다.       이육사의 출생과 고향     육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났다.   육사는 수필 [계절(季節)의 오행(五行)]에서 " 내 동리(洞里) 동편에 왕모산이라고 고려 공민왕이 그 모후(母后)를 뫼시고 몽진(蒙塵)하신 옛 성터로서 아직도 성지(城址)가 있지만 대개 우리 동리(洞里)에 해가 뜰 때는 이 성 위에 뜨는 것"이라고 고향을 이야기한다. 육사가 살던 시절에 이 마을은 백여호가 살아가는 규모였던 모양이다.    육사가 태어난 날은 1904년 5월18일(음력4월4일)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는 힘든 역사 가운데 어린시절을 보낸다.                                                                                             육우당 유허지비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 손이다.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요. 가장 많은 독립유공포상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다. 이렇나 강직한 저항성이 퇴계 학통에서 나왔는데 , 그가 곧 퇴계의 후손이다. 그의 문학적 기질도 역시 퇴계학통의 연장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문학관 가는 길목의 퇴계 종택                                                                               퇴계종택전경   육사의 집안은 저항성이 강한 성격을 보였다. 이곳 원촌은 하계와 함께 항일 투쟁사에 우뚝 선 마을이다. 하계 출신 예안 의병장 이만도는 일제강점에 단식으로 순국항거한다. "친일적인 행위나 태도를 인정하지 않는 적극적인 사고와 생활자세가 돌연변이로 어느날 갑작스럽게 만들어지기 힘든 일이다. 정신적 틀, 전통적 규범이 육사를 길렀다"라고 김희곤 교수는 쓰고 있다.      맏형인 원기는 대구로 이사 후 부모를 모시고 동생을 거느리며 어려운 살림을 도맡았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펼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가난하고 힘든시절이었다. 육사의 형제들은 우애가 대단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한다.    마을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다. 육사는 어린시절 동리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보면서 흰 돗단배에 대한 시상(詩想)을 키웠으리라. 지금도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가로 가서 둑길을 걸으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느껴져 온다.                                                                                       포항 호미곳에 세워진 청포도 시비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이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생가 李陸史 生家 원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현소재지 : 경북 안동시 태화동 672-9번지. 분      류 :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0호.  지  정 일 : 1973. 8. 31.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이며 애국시인 육사 이활李活(1904~1944)의 생가로, 건축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옮겨지기 전의 육사 생가 모습.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다. 대문 맞은편인 서쪽 끝에도 내당과 외당을 잇는 판벽이 있고 일각문이 있었는데, 이렇게 앞뒤 一자집만으로 평행 배치하고 양쪽에 맞뚫리는 문이 있는 집은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된 홑처마 3량가三樑架의 一자 집이며, 안채는 맞배지붕, 사랑채는 팔작지붕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칸수와 칸 사이가 모두 같고, 방과 마루, 부엌 등이 똑같은 공간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대문은 내당과 외당의 동편 끝에 판벽을 늘어세우고 한가운데 문주를 세워 기와를 이었다.   원래 안동군 도산면에 있던 것을 1976년 4월 안동댐 수몰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겼는데, 안동 시내로 옮겨진 후에는 한쪽 일각문 자리에 대문이 서고 원래의 대문 자리는 이웃집 돌담이어서 담장도 대문도 없게 되었다.             후손인 이원종이 관리를 맡고 있다. 옛 집터에는 1993년에 청포도를 새긴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李 陸 史  출전 :《朝鮮日報》(l936·10·23∼29)  노신 약전-부저작 목록-  노신(魯迅)의 본명은 주수인이며 자(字)는 예재(豫才)다. 1881년 중국 점강성 소흥부에서 탄생. 남경에서 광산학교에 입학하야 양학에 흥미를 가지고 자연과학에 몰두하였으며 그후 동경에 건너가서 홍문학원을 마치고 선대 의학전문학교와 동경독일협회학교에서 배운 일이 있다.  1917연에 귀국하야 절강성내의 사범학교와 소흥중학교 등에서 이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오회문학운동후 중국문학사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시대에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耿濟之) 심안영(沈雁永)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고 곽채약(郭採若) 등의 『로맨티시즘』문학에 대하야 자연주의문학운동에 종사하고 잡지 『어사(語絲)』를 주재하는 한편 북경 정부교육부문서 과장 및 국립북경대학 국립북경사범대학 북경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있었으나 학생운동에 관계되어 북경을 탈출하였다.  1926연 도하문 대학교수로서 남하 그 후 광주중산대학 문과주임교수의 직에 있다가 1928년 이것을 사직하고 상해에서 저작에 종사하는 한편 {맹아일간』이란 잡지를 주재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문학태도는 점점 좌익으로 전향하여 1930년 『중국좌익작가련맹』이 결성되자 여기 가맹하여 활동하던 중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1931年 상해에서 체포되었다. 그 뒤 끊임없는 국민정부의 간섭과 남의사(藍衣社)의 박해중에서 꾸준히 문학적 활동을 하고 국민정부의 가용단체인 {중국작가협회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 상해시 고탑 자택에서 제거하였다. 형년 56.  주요한 작품으로는 {아Q정전(阿Q正傳)} {눌함( 喊)}{방황(彷徨)}{화개집(華蓋集)}{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약(藥)}{공자기(孔子己)} 등이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엿다.  우리들은 거리마다 삼엄하게 늘어선 불란서공무국 순경들의 예리한 눈초리를 등으로 하나 가득 느끼면서 여반로(侶伴路)의 서국까지 올 동안은 침점이 계속되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편집원 R씨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중국 좌익작가연맹의 발안에 의하여 전세계에 진보적인 학자와 작가들이 상해에 모여서 중국의 문화를 옹호할 대회를 그해 팔월에 갖게 된다는 것과 이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당 통치자들이 먼저 진보적 작가진영의 중요분자인 반재년(潘梓年)(현재남경유폐)과 인제는 고인이된 여류작가 정령(丁玲)을 체포하여 행방을 불명케한 것이며 여기 동정을 가지는 송경령(宋慶齡)여사를 중심으로한 일련의 자유주의자들과 작가연맹이 맹열한 구명운동을 한 사실이며 그것이 국민당통치자들의 눈에 거슬려서 양행불이 희생된 것과 그외에도 송경령 채원배(蔡元培) 노신 등등 상해안에서만 30명에 가까운 지명지사(知名之士)들이 남의사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뒤 3일이 지난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자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 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 『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중국 문학사상에 남긴 그의 위치 {阿Q의 正傳을 다읽고 났을때 나는 아직까지 阿Q의 운명이 걱정되어 못견디겠다』고 한『로망·로-랑』의 말과 같이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인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阿Q의 정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의 阿Q들은 벌써 『로망·로-랑』으로하여금 그 운명을 걱정할 필요는 없이 되었다. 실로 수 많은 阿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고탑노신촌의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난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阿Q시대를 고찰하여 보는데 따라서 노신정신의 삼단적 변천과 아울러 현대중국문학의 발전과정을 알아보는 것도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그다지 허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중국에는 고래로 소설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완전한 예술적 형태는 존재하지못했다. 삼국연의나 수호지가 아니면 홍루몽(紅樓夢)쯤이 있었고 다소의 전기가 있었을 뿐으로서 일반교양있는 집 자제들은 과거제도에 화를 받아 문어체의 고문만 숭상하고 백화소설같은 것은 속인의 할 일이라 하여나치 않는 한편 소위 문단은 당송팔가와 팔고의 혼합체인 동성파와 사기당과 원수단의 유파를 따라가는 사륙병체문과 황산곡을 본존으로 하는 강서파 등등이 당시 정통파의 문학으로서 과장과 허위와 아유로서 고전문학을 모방한데 지나지 못하였으며 새로운 사회를 창생할 하등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은 미루어알기도 어렵지 않은 분위기속에 중국문학사상에 찬연한 봉화가 일어난 것은 1915년 잡지 {신청년}의 창간이 그것이다.  이것이 처음 발간되자 당시 『아메리카』에 있던 호적지(胡適之)박사는 『문학개량 추의}라는『문학혁명론』을 1917年 신년호에 게재하여 진도수(陳獨秀)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교수들이 합류하게되자 종래의 고문가들은 이운동을 방해코저 가진 야비한 정치적 수단을 써 보았으나 1918년 4월 호에 노신의『광인일기』란 백화소설이 발표되었을 때는 문학 화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것은 그 후 얼마뒤에 노신이 광동에 갔을 때 어떤 흥분한 청년은 그를 맞이하는 문장속에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처음 읽었을 때 문학이란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차차 읽어내려가면서 이상한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동무를 만나기만하면 곳 붙들고 말하기를----- 중국의 문학은 이제 바야흐로 한 시대를 짓고있다. 그대는 『광인일기』를 읽어보았는가 또 거리를 걸어가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내 의견을 발표하리라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魯迅在廣東)  이 문제의 소설 『광인일기』의 내용은 한 개 망상광의 일기체의 소설로서 이 주인공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한다. 자기의 이웃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자기 가정을 격열히 공격하는 것이다. 가정--------가족제도라는 것이 중국봉건사회의 사회적 단위로서 일반에 열마나한 해독을 끼처왔는가. 봉건적 가족제도는 고형화한 유교류의 송법 사회관념 하에 당연히 붕괴되어야할 것이면서 붕괴되지 못하고 근대적 사회의 성장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로 되어있는 낡은 도덕과 인습을 여지없이 통매했다. 이에 『광인일기』중에 한절을 초하면  『나는 역사를 둬적거려 보았다. 역사란건 어느 시대에나 인의도덕이란 몇 줄로 치덕치덕  씨여져 있었다. 나는 밤잠도 안자고 뒹굴뒹굴 굴러가며 생각하여 보았으나 겨우 글자와 글자사이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몇자가 씌여 있었을 뿐이었다.』  이같이 추악한 사회면을 폭로한 다음 오는 시대의 건설은 젊은 사람들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이소설의 일편은『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로서 끝을 맞는다. 실로 이 한말은 당시의 『어린이』인 중국 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작품이 백화로 쓰여지는데따라 문학화명이 완전히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된 공적도 태반은 노신에 돌려야하는 것이다.  『광인일기』의 다음 연속해 나온 작품으로 『공을이(孔乙已)』『藥』『明日』『一個小事件} {두발적고사(頭髮的故事)』『풍파(風波)』{고향(故鄕)』등은 모두 신청년을 통해서 세상에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후 1921년 북경신보문학부간에 그유명한 『阿Q正傳』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1인적 작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작은 모두 신현화명 전후의 봉건사회의 생활을 그린것으로 어떻게 필연적으로 붕괴하지 않으면 안될 특징을 가졌는가를 묘사하고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가를 암시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당시의 혁명과 혁명적인 사조가 민중의 심리에 생활의 『디테일스』에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가장『레알』하게 묘사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농민작가라고 할만큼 농민생활을 그리는데 교묘하다는 것도 한가지 조건이 되겠지만는 그의 소설에는 주장이 개념에 흐른다거나 조금도 무리가 없는 것은 그의 작가적 수완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과 때로는 『인테리』일지라도 예를 들면 『孔乙己』의 공을기나 『阿Q正傳』의 阿Q가 모두 일파이 상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니 孔乙己는 구시대의 지식인으로 시대에 떨어져서 무슨 일에도 쓰여지지 못하고 기품만은 높았으나 생활력은 없고 걸인이 되어 선술집 술상대에 이금십구적 주책가 어느때까지 쓰여져있는데로 언제인지 행방이 부명된 체로 나중에 죽어졌던 것이라던지 『룸펜』농민인 阿 Q가 또한 쑥스러운 녀석으로 혁명혁명 떠들어 놓고는 그것이 몹시 유쾌해서 반취한 기분이 폭동대의 일군에 참가는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허풍만 치고 아무것도 못하다가 때마침 얼어난 폭도의 경탈사건에 도당으로 오해되어 (피의 평소 삼가지 못한 언동에 의하야) 피살되는 阿Q의 성격은 그때 중국의 누구라도가 전부 혹은 일부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阿Q가 공을 이가 모두 사고와 행동이 루-즈하고 확호한 한개의 정신도 없으며 우약하면서도 몹시 건방지고 남에게 한개 쥐여질리면 아무런 반항도 못하면서 남이 자신을 연민하면 제 도량이 커서 남이 못 덤비는 것이라고 제대로 도취하여 남을 되는대로 해치는 무지하고 우수면서도 가엷고 괴팍스러운 것을 노신은 그『레얄 리스틕}한 문장으로 폭로한 것이 특징이 였으니 당시 『阿Q正傳』이 發表될 때 평소 노신과 교분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모델로 고의로 쓴 것이라고들 떠드는 자가 있은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阿Q 時代』이 였으며 노신의 『阿Q正傳』이 발표될 때는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지식군들은 『阿Q相』이라거나 『阿Q時代』라는 말을 평상대화에 사용하기를 항상 다반으로 하게된 것은 중국문학사상에 남겨놓은 노신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개의 재료거니와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통하야 일실하여있는 노신정신을 다시한번 음미해보는데 적지않은 흥미를 갖게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구나 할것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나 하나 문제가 엇지보면 결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한 현상인데 노신같이 자기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이문제는 그의작가로서의 출발점부터 구명해야한다.  노신은 본래 의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할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의 자기의 『할일』이란 것은 민족개량이라는 신념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後年『눌함』서문에 다음 같이 썼다.  『나의 학적은 일본 어느 지방의 의학전문학교에 두었다. 나의 꿈은 이것로으 매우 아름답고 만족했다 졸업만하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같이 치료 못하는 병자을 살리고 전쟁이 나면 출정도하려니와 국인의 유신에 대한 신앙에 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이것은 물론 소년다운 노신의 로맨틱한 인도주의적 흥분 이였겠지만은 이꿈도 결국은 깨여지고 말았다.  ------의학은 결코 긴요하지 않다. 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다고해도 또 아무리강상해도 무의미한 구경거리나 또는 구경꾼이 되는 밖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中略---그럼으로 긴요한 것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잘 개조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때 당연 문예라고생각했다. 그리고 문예운동을 제창하기로 했다 (눌함자문)  이리하여 그가 당시 동경에 망명해 있는 중국사람들의 기관지인 『절강조』『하남』 등에 쓰든 과학사나 진화론의 해설을 집어치우고 문학서적을 번역한 것은 희납의 독립운동을 원조한 『빠이론』과 파란의 복수시인 『아담·미케뷧치』『항가리』의 애국시인『베트피 ·산더--』 『필립핀』의 문인으로 서반아 정부에 사형받은『리샬』등의 작품이였다.  그리고 이것은 노신의 문학행정에 있서서 가장 초기에 속하는 것이지만은 이러한 번역까지라도 그의 일정한 목적 즉 정치적 목적 밑에 수행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위에 말한『광인일기』의 『어린이를 구하자』는 말도 순수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으로써 이 말은 당시 일반 청녀들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깨닭게 한 것은 물론 이래기천년동안의 봉건사회로부터 청년을 해방하라는 슬로-건으로 널리 쓰여졌고 사실 그 뒤의 중국청년학생들은 모든 대중적 사회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발 과감한 지도와 조직을 하였으며 그 유명한 오사운동이나 오주운동이나 국민혁명까지도 늘 최전선에 서서 대중을 지도한 것은 이들 청년학생이였다.  그럼으로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데만 문호 노신의 지위는 높아갔고 阿Q도 여기서 비로서 영생하였스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좋은 예가 있다. 1928년항 무한을 쫓겨와서 상해에서 태양사를 조직한 청년비평가 전부촌이 때마침 프로 문학론이 드셀때인만큼 노신을 대담하게 공격을 시작해보았다. 그소론에 의하면 노신의 작품은 비계급적이다. 阿Q에게 어디 계급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노신의 作品에서 우리는 눈딱고 보아도 푸로레타리아的 특성은 조금도 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사람의 작품을 비평할 때는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것이서 노신이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을 때는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정의를 내릴수 있는 푸로레타리아는 없을 뿐 아니라 그때쯤은 부르조아민 민주주의적인 정치사조조차도 아직 계선이 분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부르조아혁명이라는 소위 국민혁명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오운동을 전반전으로 한 것만큼 여기서 역시 중국의 비평가인 병신(丙申)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그가 현재 중국좌익작가연맹을 지지하고 있다해서 그의『四五』전후의 작품을 프로 문학이라고 지목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우수한 농민작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고---』  그러다.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정당에 가까운 말로서 그를 프로 작가가 아니고 농민작가라고해서 작가 노신의 명의를 더럽힐 조건은 되지못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얼마나 창작에 있서서 진실하게 명확하게 묘사하는 태도를 가지는가 그의 한말을 써보기로 하자.  『--현재 좌익작가는 훌륭한 자신들의 문학을 쓸수있을까? 생각컨대 이것은 매우 곤난하다. 現在의 이런 부류의 작가들은 모두 『인테리』다. 그들은 현실의 진실한 정형은 쓸려고해도 용이치않다. 어떤 사람이 즉 이런 문제를 제출한것이 있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경험한 것이라야만 될 것인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반드시 안그래도 좋다. 왜그러냐면 그들은 잘 추찰할 수가 있으므로 절도하는 양면을 묘사하려면 작가는 반드시 자신이 절도질할 필요도 없고 간통하는 장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낄때 작가 자신이 간통할 필요도 없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구사회 속에서 생장해서 그 사회의 모든 일을 잘 알고 그 사회의 인간들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추찰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 사회의 정형과 인물에 대해서는 작가가 무능하다면 아마 그릇된 묘사를 할 것이다. 그럼으로 프로 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기피 현실의 핏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또 다시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사회를 조그만치 공격하는 작품일지라도 만약 그 결점을 분명히 모르고 그 병근을 투철히 파악치 못하면 그것은 유해할뿐이다. 애석한 일이나마 현재의 프로 작가들은 비평가까지도 왕왕 그것을 못한다. 혹 사회를 정시해서 진상을 알려고도 않고 그 中에는 상대자라고 생각하는 편의 실정도 알려고하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는 얼마전 모지상에 중국문학계를 비평한 문장을 한편 보았는데 중국문학계를 삼파에 나눠서 먼저 창조파를 들어 프로파라 하여 매우 상세하게 논급하고 다음 어사사를 소뿌르파라고 조그만치 말한 후 신월사를 뿌르 문학파라 해서 겨우 붓을 대다가만 젊은비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젊은 기질의 상대자라고 생각는파에 대해서는 무엇 세밀하게 고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서적을 볼 때 상대자의 것을 보는 것은 동派의 것을 보는 안심과 유쾌와 유익한데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일개전투자라면 나는 생각컨대 현실과 상대자를 이해하는 편의상 보담 만은 당면의 상대자에 대한 해부를 필요로 하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료해하야 장래를 추단하는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이 간단한 몇마디 말이 문호 노신의 창작에 대한 『모랄』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의 뼈에 사무치고도 남을만한 시준인고! 이래서 현대중국문단의 父이며 비평가의 비평으로서 자타가 그 지위를 함께 긍정하든 그의 작가로서의 생애는 너무나 짧은 것이었으니 1926년 3월 『이혼』이란 작품을 최후로 남긴 그는 교수로서 작가로서의 화려한 生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느면 안될때가 왔다. 그는 지금부터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려나가기 더 바밨다.}1926년 북양군벌을 배경으로 한 안복파의 수령 단사서의 정부는 급진적인 좌파의 교수와 우수한 지식분자오십여명 체포령을 내렷다. 우리 노신은 이 오십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1924년 국민당의 연아용공책이 결정되어 그 익년 가을 『뽀로듼』等이 고문으로 광동에오고 『전국민적공사전선』이었던 국민혁명의 제 일계단인 광동시기에는 프로레타리아의 동맹자는 농민도시빈민 소프로지식계급 국민적 부르조아지 였다』  그래서 급진교수들은 교육부총장 군벌정부를 육박하였으며 이러한 신흥세력에게 낭패와 공포를 느낀 군벌정부는 이러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학생들의 행렬은 정부위병들의 발포로 인하여 남녀수백여명의 사상자가 낳다. 그때 노신은 북경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의 외국인병원이나 공장안으로 도라단이며 찬물로 기아를 참아가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여 군벌정부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중에도 『국민이래 최암흑일에 지』하였다는 명문은 단사서로 하여금 기자에 내려안게되었다.  ---붓으로 쓴 헛소리는 피로 쓴 사실을 간과하지 못한다--중략--붓으로 쓴 것이 무슨 힘이 있으랴 실탄을 쏘는 것은 오직 청년의 피다(속화개집)  오늘날까지 중국문단의 『막심 콜키-』이든 그는 지금부터는 문화의 전사로서 『양리 ·발뷰스』보다 비장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의 말과 같이 최암흑한 오십일이 지나고 그는 북경을 탈출했다. 하문대학에 초청을 받아갔으나 대학기업가의 음흉수단인 것을 안 그는 광동중산대학으로 갔다. 그러나 1926년 6월 15일 장개석의 쿠-폐타는 광동일성만 노동자 농민급진지식분자 삼천여명을----하였으며 한때는 『혁명의 전사』라고 간판을 지은 노신도 상해로 달아나야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그에게 흥미보다는 최대의 경의를 갖게되는 것은 다음의 일문이다  ----나의 일종 망상은 깨여졌다. 나는 지금까지 때때로 악관을 가졌었다. 청년을 압박하고---하는 것은 대권로인이다 이들 노물들이 다 죽어지면 중국은 보다더 생기있는 것이되리라고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러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청년을----하는 것은 대개는 청년인듯하다 또 달리 재조할 수없는 생명과 청춘에 대해서 한층더 아낌이 없시------(而己集)  이 글은 그가 심묵하고 있는 것을 『공포』때문이라고 조소한 사람에게 답한 통신문의 일절로서 이때까지 진화론자이던 그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양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단계로보인것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  그가 상해에 왔을때는 국민당의 쿠-데타-로 혁명군서 쫓겨온 젊은 프로문학자가 만났다 『혁명문학론』이 불려지고 실제 정치행동의 전선을 떠난 그들은 총칼대신에 펜을 잡았다. 원기왕성하게 실제공작의 경험에서 매우 견실한 것도 있었으나 때로는 자부적인 영웅주의가 화를 끼치고---에 실패한 불만과 극좌적언 기회주의자들은 노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문학이란 어떤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아버지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찰스키--』들의 문학론과 『싸벳트』의 문예정책을 번역소개하여 중국 프로문학을 건설하고 있는 동안에 『노신을 타도치 않으면 중국에 프로문학은 생기지 못한다』던 문학소아병자들은 그 자신들이 먼저 넘어지고 이제 그가 마저가고 말았다. 이 위대한 중국문학가의 영 앞에 고요히 머리를 숙이면서 나의 개인적으로 곤난한 수형에 의하여문호 노신의 윤곽을 뚜렷이 그리지 못함을 점괴히 알며 붓을 놓기로 한다. -了-      이륙사는 노신을 만나 보았을까?    - 이륙사(李陸史) 의 공과(功過)문제                김병활(金秉活)         목차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5) 고쳐 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5. 맺음말 참고문헌     1. 魯迅연구--동아시아 문학 비교연구의 접점     21세기 동아시아 문학의 방향을 탐구함에 있어서 中國, 韓國, 日本 등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공명을 일으키고 상호 이해하고 대화와 담론을 할 수 있으며 공동연구도 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 접점중의 하나가 바로 3국 문단에 모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魯迅연구이다. 중국과 일본이 현대문학 연구 분야에서 한국보다 한발 앞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일부 정치적인 요소도 작용하였겠지만 공동으로 담론할 수 있는 하나의 접점-노신연구를 돌출이 내세운 데 있다고 본다. 근년에 한국에서도 노신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비교문학의 시각으로 중한현대문학을 연구하려는 활발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추세로 발전한다면 중한문화교류는 증일 교류보다 못지않은 수준과 태세를 갖출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취지에서 본 논문은 노신에 대한 한국에서의 수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면서 중점적으로 이륙사의 을 텍스트로 이륙사의 노신관(魯迅觀)을 분석하고 일부 문제점도 제기하려 한다.    2. 이륙사의 의 비교문학적 가치     20세기 20-30년대에 한국에서 노신(魯迅)을 소개한 중요한 논문 중에는 이륙사(李陸史)의 이 있다. 이 문장은 노신이 서거된 지 4일후인 1936년 10월 23일부터 에 5기로 나누어 연재되었다. 이 문장의 집필속도의 빠름과 내용의 광범성은 당시 한국의 노신연구 분야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비교문학의 수용이론에 따르면 똑 같은 작품일지라도 독자들의 이해와 반응은 다종다양하다. 한국에서의 노신수용도 마찬가지로 부동한 문인들과 독자들은 부동한 수용입장에 따라 부동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륙사의 이 발표되기 전에 한국에는 이미 양백화(梁白華)가 번역한 일본학자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의 논문 에서 처음으로 노신을 거론하였고 1931년 1월에는 정래동(丁來東)이 장편논문 을 에 20기로 나누어 연재하였다. 1934년에는 신언준(申彦俊)의 가 한국 지 제4기에 발표되었다. 이밖에 노신의 소설작품이 한국에서 널리 번역된 상황을 감안하면 이 시기에 노신은 한국문단에 광범히 알려진 중국작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에 노신을 부정적 시각으로 본 문인들도 있었다. 이경손(李慶孫)은 1931년 2월에 라는 문장을 에 2기로 나누어 발표하였는데 당시 항간에서 떠돌던 노신의 일상생활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두로 쓰면서 노신에게는 새로운 창작이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고 노신이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담한 것을 시답지 않게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이경손은 후일에 한간(漢奸, 매국적)으로 전락한 장자평(張資平)을 노신보다 더 월등한 것으로 보고 정래동의 노신론에 대해서도 관점 상 다소 별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륙사의 은 일반적인 추도문의 수준을 초월하였고 학술적 연구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정음사의 출판으로 된 에서는 제목을 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이륙사는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주로 노신, 호적, 서지마(徐志摩)에 치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노신을 숭배하였다. 그가 30년대 초반에 이미 좌익 켠에 선 노신을 숭앙하였기 때문인지 그의 조카 이동영(李東英)교수는 지난 세기 70년대에 이륙사의 사상은 어느 정도로 사회주의계통에 속하며 아마 그 자신은 ‘한국의 노신’이 되려고 한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1) 이륙사가 노신에 대해 경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노신연구는 경향성이 선명하다. 때문에 그는 노신을 ‘현대중국문학의 아버지’, ‘중국문단의 막심 고리키’, ‘문화의 전사’라고 높이 찬양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노신의 부보를 듣고 더없이 비통해하였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 시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노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서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2) 노신에 대한 이런 심후한 감정은 그 앞서 노신을 소개하고 평론한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이륙사는 에서 를 분석하는데 각별한 주의를 돌리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노신의 백화소설 가 발표된 후 “문학혁명운동은 실천의 거대보무를 옮기게 되고 벌써 고문가들은 그 추악한 꼬리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였다.”“이 주인공들은 실로 대담하게 또 명확하게 봉건적인 중국 구사회의 악폐를 통매하였다.”“어린이를 구하자”는 말은 “당시 ‘어린이’인 중국청년들에게는 사상적으로는 ‘폭탄선언’ 이상으로 충격을 주었으며”“순결한 청년들에 의하여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그(노신을 가리킴--필자 주)의 이상을 단적으로 고백한 것이였다.” 이런 평가는 그 경향성이 아주 선명하며 노신에 대한 숭배와 노신의 반대편에 섰던 복고(復古)파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륙사는 에서 을 분석하였는데 그 관점은 대체로 정래동, 신언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노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유명한 이 연재되면서부터는 노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문단 제일인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그는 “당시 중국은 시대적으로 아Q시대였으며 노신의 이 발표될 때 비평계를 비롯하여 일반 지식군들은 라거나 라는 말을 평상 대화에 사용하기를 항다반으로 하게 된 것은 중국문학사에 남겨놓은 노신의 위치를 짐작하기에 좋은 한 개의 재료”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해 1월에 이광수는 작가들에게 톨스토이의 와 같은 빛나는 사시적 작품을 창작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서 부정적 예로 노신을 거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신의 나 는 노신의 소설가적 재분의 표현으로는 영광일지는 모르나 그 꽃을 피게한 흙인 중국을 위하여서는 수치요 모욕이다. ... 관우, 장비는 아Q와 공을기로 퇴화해버린 것이다.”3) 여기에서 이광수는 본의가 여하하든지간에 노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오독(誤讀)’하고 있는바 노신의 창작동기와 작품의 사회적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이륙사는 9개월 후에 쓴 에서 의 현실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이광수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실로 수많은 아Q들은 벌써 자신들의 운명을 열어갈 길을 노신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노동 층들은 남경로의 아스팔트가 자신들의 발밑에서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시고탑로 9호로 그들이 가졌던 위대한 문호의 최후를 애도하는 마음들은 황포탄의 붉은 파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4)   정래동, 신언준 등 문인들이 노신의 잡문을 거의 거론하지 않은데 반해 이륙사는 노신잡문의 가치를 인정하고 노신잡문에 대한 해독을 통해 노신의 사상발전을 연구하려고 시도하였다. 노신의 문학관에서 홀시할 수 없는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이륙사는 정래동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래동은 소설작품에 대한 연구에 치우면서 잡문연구를 멀리하였기에 노신 문학관에 대해 일부 편차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는 “노신은 철두철미 문예는 혁명에 인연이 가장 먼 것임으로 암만 문학자가 혁명, 혁명하고 떠들어도 제3선의 전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여 왔었다.”   이런 주장과는 달리 이륙사는 노신이 국민성을 개조하고 봉건제도를 개변하려는 목적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노신에게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이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 작품이 산출하는데서 문호 노신의 위치는 높아갔고 아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5) 뿐더러 이륙사는 노신의 잡문집 에 수록된 잡문들을 인용하면서 노신이 진화론을 포기하고 ‘새로운 성장의 일 단계’에 들어섰다고 찬양하였다.   이 대목은 이륙사가 노신이 중국좌익문단에 합세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는 이륙사가 한 아래의 말에서 진일보 입증할 수 있다. 국민당의 쿠테타로 하여 상해에 모여온 ‘원기 왕성한’ ‘젊은 프로학자’들이 극좌적인 태도로 노신을 공격할 때 노신은 “프로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또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아버지 같은 애무로서 푸레하노프, 루나차르스키들의 문학론과 소비에트의 문예정책을 번역 소개하여 중국프로문학을 건설”하였다.6) 당시에 ‘카프’계통의 작가, 비평가들이 노신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이륙사의 이런 견해는 특별히 주목되는 점이다.   이륙사는 북양군벌정부와 국민당 당국이 노신을 박해한데 대해서도 통분해마지 않았다. 그는 노신의 창작생애가 너무 짧은 것을 애석해하면서 노신이 후기에 “작가로서의 화려한 생애는 종언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원인은 국민당정권의 박해로 하여 “손으로 쓰기보다는 발로 달아나기에 더 바쁘게”한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관점은 이경손처럼 노신에 대해 편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노신의 후기에 창작원천이 고갈되었다고 폄하하는 의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3.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문제      이륙사의 생평에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일부 남아있다. 이것을 구명하는 일은 비교적 어려운 작업이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여러 면에서 자술과 가설을 고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심중히 고증할 필요가 있다. 본 논문은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제기하고 논의하려 하는데 우려심도 없지 않아 있다. 광복 전 많은 한국문인들이 친일경향을 나타낸데 반하여 이륙사는 독립투사, 저항시인으로 추대되어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더없이 귀중한 존재로 나서고 있다. 이런 이륙사에게서 흠집을 찾아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어쩐지 위구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사명이라고 자처해 온 이상 아는 대로 연구 선색을 제공하고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것은 한국에서 이미 정설로 된 듯싶고 무릇 이륙사의 생평을 거론하면 반드시 그와 노신과의 만남이 빠지지 않고 소개된다. 예컨대 김학동(金㶅東) 편저로 된 에서는 이륙사와 노신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은 그 표제와는 달리, 노신문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라 할 수 있다. 육사는 중국에 있을 당시 노신을 직접 만났을 뿐만 아니라, 노신의 소설 을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이때 육사는 호적, 서지마, 노신 등을 포함한 중국근대문학에 경도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소개는 완전히 이륙사의 자술에 근거한 것이다.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노신과 만난 경과에 대해 이륙사는 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 빈의사 앞에 닿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마기에 검은 ‘마괘아’를 입은 중년 늙은이가, 생화에 쌓인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란 것을 말하고 난 10분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소가 처소인 만큼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였다.     이상의 서술에서 우리는 이륙사가 노신을 더없이 존경했다는 것, 노신도 생면부지의 조선청년을 아주 따뜻이 대해주고 초면에도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분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아래에 이 기술을 권위인사와 학자들의 서술과 대조해 보자.    양행불의 장례식 상황에 대해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권위인사인 정사원(程思遠) 주필로 된 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월 20일 오후 2시, 폭우가 쏟아졌다. 양행불 장례식은 만국 빈의관 영당(靈堂)에서 거행되었다. 국민당 특무들은 또 동맹의 기타 지도자들을 암살한다는 소문을 퍼뜨리었다. 송경령, 채원배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만국 빈의관에 가서 의연히 조문을 하였다. 노신도 조문하러갈 때 집을 나서면서 열쇠를 두고 나갔는데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각오를 보여주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노신은 비를 무릅쓰고 귀로에 올랐는데 그 비속에 충만된 피비린내를 감수한 것 같았다.7)    중국의 노신연구 학계에서 권위학자들인 임비(林非), 유재복(劉再復)이 쓴 에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6월 20일, 양전(楊銓,양행불-필자 주)의 장례식이 만국 빈의관에서 거행되였다. 국민당특무들은 채원배와 노신을 암살하련다는 요언을 사처에 퍼뜨리었다. 이 날 오후 노신은 이미 희생될 사상적 준비를 충분히 하고 아주 침착하게 옷을 갈아입고 대문 열쇠를 조용히 허광평에게 넘겨주었다. ... 그리고는 정오에 온 허수상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심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몇 십 명의 조객들은 문어귀에 서서 감시하는 특무들을 멸시하면서 가슴을 뻗치고 회장에 들어섰다. 송경령과 채원배는 이미 양전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8)          이 몇 가지 서술을 대조해 보면 일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1)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륙사는 노신이 송경령과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의 기술에 의하면 양행불의 장례식에 송경령(宋慶齡)과 채원배(蔡元培)가 동행한 것으로 되어 있고 노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 노신의 이 날 일기에도 “점심에 계시(季市, 許壽裳--필자 주)가 왔는데 오후에 둘이 함께 만국 빈의관에 가서 양행불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라고 적혀있다.9) 임비, 유재복의 기술에는 송경령과 채원배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빈의관의 양행불 영구 앞에 서있었고 노신과 동행한 사람은 허수상이라고 하였다. 보다싶이 과 임비, 유재복의 의 기술은 이륙사가 에서 한 기술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노신과 동행하여 만국 빈의관에 들어온 사람은 송경령이 아니라 허수상이며 송경령은 노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채원배와 함께 양행불의 영구 앞에 서있었다는 것이다.      2) 노신의 反滿사상과 ‘마괘아(馬褂兒)’문제     노신의 반만 사상에 대해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의 상호 단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고려한 모양인지 별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노신은 당시 시대적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분명히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노신이 1933년에 만족(滿洲族)의 대표적 의상인‘마괘아’를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그냥 입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마괘아’는 중국어로 ‘馬褂’, ‘馬褂兒’라고 하는데 기마민족인 만주족들이 말 타고 싸우는데 편리하도록 허리까지 짧게 만든 웃옷이다. 명 왕조 이전에 중국의 한족들은 무릎 아래까지 길게 내리 드리운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만족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마괘아’와 같은 만족의상을 입기 시작하였다. 청조말기에 조정이 부패해 지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한족들에게는 반만 사상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구국, 애국을  ‘만청(滿淸)’정부를 반대하는 것과 직결시키기도 하였다. 손중산이 조직한 동맹회의 誓約盟書에도 라고 쓰여 있고10) 노신이 일본에 있을 때 가담한 광복회의 서약서에도 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한다.11)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의 노신도 반만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 간 후 제일 먼저 청 왕조가 한족들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머리태를 베여버리고 “나는 나의 피를 조국에 바치련다(我以我血薦軒轅)”고 선언하였고 또 한족들의 강산을 광복하려는 에 가담하였다. 이런 경향은 그의 문학작품에서도 간간이 노출되고 있는데 에서 丁擧人의 금은보화를 실어간 신해혁명시기의 ‘혁명당’도 바로 명왕조의 말대황제인 숭정(崇禎)황제를 기리고 명 왕조를 ‘광복’하려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노신의 수필 에서도 노신은 한 고향사람인 범애농이 일본에서 무턱대고 자신을 반대할 때의 감수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제일 미운 것이 만주족이라고 생각했댔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버금이고 제일 미운 것은 범애농이였다.” 여기에서 노신은 젊은 시절부터 청조의 만족통치에 대단한 적개심을 가지였고 한족으로서의 민족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처음에는 주변사람들의 풍습에 따라 간혹 ‘마괘아’를 입기는 하였으나 1927년 1월 후부터는 ‘마괘아’와 ‘서양 마괘아’라고 칭하는 양복을 한 번도 입지 않았고 서거할 때까지 줄곧 한족들의 대표적의상인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필자가 노신이 1902년부터 1936년까지 남긴 사진 114점을 조사해 보았는데 1926년까지의 사진 40점 중에 ‘마괘아’를 입은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그것도 대체로 敎師직과 교육부 공무원으로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마괘아’를 입은 장소였다. 1927년 1월부터 서거할 때까지의 74점 사진 중에는 ‘마괘아’를 입은 사진이 한 점도 없다.12) 아마 청조 시기 근 300년 입고 있던 ‘마괘아’를 관습의 힘에 의해 하루아침에 벗어버리지 못하다가 점차 반만 사상이 의상에까지 신경 쓰게 된 것이 아닌가고 추정된다. 혹자는 이륙사가 중국 의상문화를 잘 알지 못해 두루마기를 ‘마괘아’로 잘못 인식하지 않았는가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륙사가 노신이 두루마기 위에 ‘마괘아’를 입었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이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 1991년 7월에 북경 노신박물관에서 일보던 張연구원한테도 이 일을 자문해보았는데 그도 단마디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3) R씨의 신분과 노신을 만난 장소의 분위기가 석연치 않다.     에 따르면 R씨는 상해 불란서 조계지 여반로(侶伴路)의 서국(書局) 편집원이다. 그는 노신과 사전에 아무런 약속이 없는 상황 하에 양행불의 장례식에서 한 무명의 조선청년을 노신에게 스스럼없이 소개할 수 있는 미스터리 식 인물이다. 사실 이날 노신은 국민당 특무들에게 피살될 각오를 하고 집 열쇠마저 두고 나왔으며 추도식은 특무들의 삼엄한 감시 밑에 있었고 일기도 좋지 않아 폭우가 억수로 퍼부었다. 이처럼 열악한 천기와 수시로 총알이 날아올 수 있는 살벌한 분위기속에서 노신이 이륙사와 같은 무명의 조선청년을 만나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있었겠느냐가 의문스럽다.   4) 노신이 양행불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는 문제     노신은 언제나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공적인 장소에서는 냉혹할 정도로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중국문인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찾아볼 수 있는 자료에는 노신이 양행불의 추도식에서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서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륙사의 기술과  임비, 유재복의 다음과 같은 기술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만국 빈의관의 장엄하고 엄숙한 회장에는 심후한 애증의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 처량한 애도곡이 울리는 가운데, 비애에 찬 흐느낌 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묵묵히 선서하는 듯하였다. 영별이외다! 하지만 당신이 채 걷지 못한 길을 우리 모두가 걸어갈 것입니다.                                                                                       -- 임비, 유재복     이와 달리 이륙사의 기술처럼 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는 것은 노신의 종래의 성격, 이미지 그리고 장소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서 역시 중국인들에게 잘 접수되지 않는 점이다. 낭만주의 시인인 곽말약(郭沫若)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일런지 모르지만 노신의 경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륙사의 에 왜 이런 묘사가 나왔겠는가는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노신은 양행불 추도식이 있은 이틑날에 일본 벗(樋口良平)에게 시 한수를 써서 증송하였는데 이 시는 후에 라는 제목으로 많은 저서에서 수록되고 있다. 시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豈有豪情似舊時,        花開花落兩由之,        何期淚灑江南雨,        又爲斯民哭健兒。13) (대의: 그 옛날 호기와 격정 어디로 갔나        꽃이 피고 지여도 할 말이 없구나        어느새 눈물이 강남의 비 되어 쏟아지는데        여기 백성들 또 건아를 위해 통곡하누나 )      이 시에서 ‘눈물이 강남의 비’로 되었다거나 ‘건아를 위해 통곡’한다는 것은 단지 문학적 표현으로서 이 시를 근거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고는 할수 없다. 아마도 이 시가 항간에서 노신이 추도식 현장에서 통곡했다는 것으로 와전되지 않았는가고 추정된다.   5) 고쳐써야 할 이륙사 연보(年譜)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판된 이륙사 관련저서에는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이 모두 ‘1932년 6월 초’로 되어있다. 김학동 편저로 된 (새문사, 1986)에서 이륙사가 노신을 만난 시일을 1932년 6월 초라고 쓰고 있고 심원섭 편주로 된 (집문당, 1986)의 작가연보에도 “1932년 (29세) 6월 초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나다.”라고 쓰여 있다. 이동영 편으로 된 (문학세계사,1981)의 에는 “1932년 6월 초 어느 날 중국과학원의 부주석이요 국민혁명의 원로이던 양행불의 호상소인 만국 빈의사에서 노신을 만났으며...”라고 적혀있다.   이륙사가 노신을 만났다는 자술의 진실성 여하를 잠시 제쳐놓더라도 이 연보는 틀린 것이다. 양행불의 장례식은 1933년 6월 20일이다. 여기에서 우선 연도가 틀리며 일자도 틀리게 적혀있다. 양행불이 암살된 날은 6월 18일 (일요일)이고 장례식은 6월 20일 (화요일)인데 이륙사는 ‘6월 초’의 어느 ‘토요일’ 아침에 조간신문에서 양행불 피살 기사를 읽었고 그 뒤 3일후에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쓰고 있다. 이는 기억의 오차라고 추정할 수도 있는데 주석을 달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왕의 연보에서 이륙사의 1932년 행적이 잘못 되였으면 1933년의 행적도 따라서 의문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것을 자그마한 기억오차로만 간주하지 말고 보다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심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고 있다.      4. 주석을 달고 시정해야할 일부 문제     이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집필되었기에 오차가 나타난 것은 피면할 수 없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지금 을 출판할 때마다 이런 오차에 대해 주해를 달지 않고 그대로 답습한다면 독자들에게 그냥 ‘오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필자는 여러 개 판본으로 된 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모두 똑 같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문장의 순서에 따라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노신이 1917년에 귀국하여 절강성의 사범학교와 소흥 중학교 등에서 리화학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는 문제 - 노신은 1902년에 일본 유학을 갔고 1909년에 귀국하여 교편을 잡았고 1912년에 교육부에 취직하였다. 그가 작가적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1918년에 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2) 노신이 북경에서 주작인, 경제지, 심안빙 등과 함께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문학연구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지 않았고 회원으로 된 적도 없다. 다만 문학연구회의 결성을 지지, 성원하였을 따름이다.   3) 1928년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상해에서 지를 주재하였다는 문제 -  노신은 1927년 4월에 중산대학 교수직을 사직하였고 동년 9월에 광주를 떠나 10월에 상해에 이주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지가 간행되지 않았고 그 후 1930년 1월에 지가 창간되었는데 노신이 이 간행물의 주필로 되었다.      4) 노신이 1931년에 상해에서 체포되었다는 문제 - 1931년에 ‘좌련 5烈士’중의 유석(柔石)이 체포될 때 노신의 도서출판 계약서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것을 발견한 특무들은 노신의 집 주소를 대라고 핍박하였으나 유석은 시종 불복하였다. 이런 정세에서 노신은 친우들의 서신들을 불살라버리고 일본인 우치야마(內山完造)씨의 도움을 받아 온 가족이 황륙로 화원의 한 일본 여관에 피신하였다. 사람을 질식케하는 작은 방에서 노신 일가는 하나의 침대를 사용하면서 한 달 동안이나 피신생활에 시달리었다. 아마 이 일이 외부에는 노신이 체포되었다고 와전된 듯싶고 이륙사도 그 소문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5) 국민정부의 어용단체인 를 반대하던 중 지난 10월 19일에 서거하였다는 문제 - 현존 자료를 살펴보면 이 시기에 국민당 어용단체인 라는 조직이 없었다. 노신은 임종 전에 트로츠키 파 진중산(陳仲山)과 논쟁을 벌린 일은 있다.   6) “유명한 오사(五四)운동이나 오주(五州)운동”- ‘오주’운동은 ‘오삼십’(五卅)운동의 오기(誤記)이다. ‘5.30’운동은 1925년 상해에서 일본제국주의와 북양군벌정부가 파업에 나선 상해의 방직노동자들을 참살하여 발생한 혁명적운동이다.   7) 1926년 4월 15일 장개석의 쿠데타- 장개석의 쿠데타는 ‘1927년’의 오기이다.                  5. 맺음말     이륙사의 은 학술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를 평론하려한 정래동이나 신문기자 신분으로 노신의 생활을 살펴보려 한 신언준과는 달리  노신 숭배자이며 저항시인으로서의 이륙사의 숭배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노신의 문학세계에 접근하고 높은 평가를 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갖고 있다. 때문에 일부 에서 을 으로 고친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이 문장은 노신서거 후 4일 만에 발표된 장편추도문이기에 일부 문제점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필자는 이 논문을 집필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다. 독립투사이고 저항시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이륙사의 자술에서 흠집을 찾아내고 문제점을 제기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할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는데 동료들의 권고로 포기하였었다. 필자는 종래로 이륙사를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이륙사의 독립투사로서의 공적과 저항시인으로서의 위상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진실을 구명하여야한다는 학자의 사명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비근한 예로 일본 학자 와타나베 죠우(渡邊 襄)씨는 노신을 숭배하는 입장이면서도 노신의 자술에서 ‘환등(幻燈)사건’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많은 정력을 투입하여 조사, 연구하였다. 그리고 논문 를 발표하였다.14) 이처럼 자신이 숭배하는 문인일지라도 진실은 구명되어야 한다는 태도는 아마 모든 학자들의 공동한 인식일 것이다. 거기에 또 돋보이는 것은 중국학자들이 이 논문을 중요시하고 학술논문집에 실어준 것이다.   이륙사의 자술에 나타난 문제점을 해외의 한 俗人이 거론한다는 것이 실로 외람되고 죄송스러운 줄은 알고 있는 바이지만 순전히 학술적 입장에서 출발한 본문의 취지를 넓은 아량으로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김학동 편저: , 새문사, 1986 심원섭 편주: , 집문당, 1986 이동영 편: , 문학세계사, 1981 《魯迅日記》:《魯迅全集》15捲, 人民文學齣版社,1981 林非、劉在復:《魯迅傳》, 中國社會科學齣版社,1981 程思遠 主編:《中國國民黨百秊風雲》,延邊大學齣版社,1998 《魯迅》(影集):北京魯迅博物館 編輯,文物齣版社,1976    주: 1) , 제290페이지  2) , 정음사, 1980, 제76페이지    3) , 1936년 1월 6일 4) , 정음사, 1980, 제77페이지  5) 동상서, 제83페이지  6) 동상서, 제88-89페이지  7)  《中国国民党百年风云》, 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 1998, 第424-425页  8) 《魯迅傳》: 林非、劉再復,中國社會科學出版社,1981年,第312-313頁  9) 《魯迅日記》:《魯迅全集》第十五卷,第85頁,人民文學出版社,1981  10) 《中国国民党百年风云》,程思远主编,延边大学出版社,1998, 第44页  11) 동상서,第37页  12) 《魯迅》:北京魯迅博物館編輯,文物出版社,1976  13) 《魯迅全集》15卷, ,第85頁, 人民文學出版社, 1981  14) 《日本學者中國文學硏究譯叢》(第三輯),吉林敎育出版社, 1990, 第154頁     《朝鲜-韩国学语言文学研究(3)》(民族出版社‘北京’2006.2)           이육사시인의 따님 이옥비여사님 /     이육사선생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여사님(70)과 함께          벚꽃 아래서      해 지는 모습이 너무 신비해서...          명자나무꽃 옆에서          안동댐에 있는 이육사시비 '광야' 앞에서     광야[曠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옥비여사님은 아버님의 유업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8년부터 서울에서 안동에 내려와서 살고 계십니다. 육사선생님께서 돌아가실 때 만 3살이었기 때문에 아버님에 대한 것은 글과 어머님을 통해 들었지만 살아있는 동안 아버님의 유업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자그마한 체구로 오늘은 윷판대(광야 시 무대)를 오르시고 내일은 왕모산 칼선대(절정 시 무대)를 오르시며 하루해가 짧은 듯이 동분서주하고 계십니다. 여사님은 궁중요리를 비롯하여 각종 음식도 잘 하시고 꽃꽂이 또한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을 갖고 계셔서 지금은 안동에서 꽃꽂이도 가르치고 계십니다... ====================================================================== 육사 시비 이건 후 안동댐으로 이건 후의 육사 시비(광야) 앞에서. 아랫줄 좌로 부터 신동집 시인, 신석초 시인, 이효상 국회의장, 육사의 장조카 이동영 교수, ?, 김대진 국회의원 뒷줄 좌로 부터 이승희 안동군수, 서기원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장, ?, 양태식 경북도지사,맨 뒤 육사의 양자 이동박. |2011.04.02. | 중국 연변작가協 올해 만주서 '이육사 문학제' 개최  자정순국 안동 선비 渡滿 100주년 기념          나라 빼앗긴 경술국치의 분노를 자정순국으로 보여주었던 안동지역 선비들이 ‘왜(倭)의 땅에서 하루라도 살 수 없다’며 엄동설한 칼바람 추위 속에 만주로 향했던 ‘도만(渡滿) 100주년’을 맞아 중국 연변 조선족 작가들이 안동을 찾았다.    도만 100주년을 맞아 올해 만주지역에서 ‘제1회 이육사 문학제’를 마련할 계획으로 안동 이육사문학관과의 업무 협의와 매일신문사 및 의성군이 함께 마련하는 ‘의성 산수유 꽃바람 국제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안동간고등어생산자협회 측의 안내로 안동을 찾은 중국 길림성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회장 등 조선족 문인들은 31일 일제의 저항시인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온 향토출신 이육사 시인의 도산면 생가와 이육사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이날 연변 조선족 작가들은 이육사문학관에서 육사의 딸 옥비 여사와 이영일 관장, 이위발 사무국장 등 문학관 관계자들과 만나 도만 100주년 기념행사로 만주지역에서 마련할 계획인 ‘제1회 이육사 문학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이육사 선생의 나라사랑과 항일 저항운동이 스며있는 문학세계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으며 만주지역 문학제에 서로 긴밀한 협의를 가지기로 했다. 이들은 한국국학진흥원과 도산서원, 의성국제연날리기대회장과 지역 특산품인 안동간고등어 공장을 차례로 방문하고 하회별신굿탈놀이 관람과 1일 안동문화원, 2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100년 전 만주 항일투쟁 당시를 회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향산 이만도 선생을 비롯해 숱한 선비들이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자정순국으로 보여주면서 일제에 항거했으며 이듬해인 1911년 석주 이상룡, 백산 김대락 등 지역 선비들이 문중 식구들과 함께 만주로 향해 한국독립운동사 50년사에 길이 남는 해외 항일운동이 시작된 해였다.    조선족 시인 김승종(48) 씨는 “만주지역 항일투쟁이 시작된 지 100년째인 올해 이육사 문학제를 만주에서 열 수 있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며 “안동지역의 많은 문인들도 이육사 문학제에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매일신문)   2011-04-01  AM  09:00:00 【안동】만주항일투쟁 개시, '도만 100주년'기념 조선족 문인 내한      중국 길림성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회장 등 조선족 문인들이 만주 항일투쟁이 시작된 지 100주년째(도만 백주년)인 올해를 맞아 독립운동의 성지인 안동을 찾아 왔다. 시인과 소설가인 이들은 31일 오전 일제의 저항시인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온 향토출신 이육사 시인의 도산면 생가와 이육사문학관을 둘러보았고, 1일 안동문화원과 4월 2일 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100년 전 만주 항일투쟁 당시를 회고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들은 이어 한국국학진흥원과 도산서원, 의성국제연날리기대회장과 지역 특산품인 안동간고등어 공장을 차례로 방문하게 되며 하회마을 전수관에 들러 하회별신굿탈놀이도 관람한다.   이들은 도만 100주년 기념행사로 올해 중에 만주지역에서 제1회 이육사문학제를 열기로 하고,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조영일 관장, 이옥비 여사를 비롯한 관계자를 만나 행사개최에 대한 논의를 했다.   1910년은 향산 이만도 선생 등 많은 지역 애국지사들이 나라 잃음을 애통해 하며 목숨을 버리고 순국한 했다.   바로 그 이듬해인 1911년은 안동지역에서 많은 독립지사들이 고향을 버리고 떨쳐 일어나 일제히 만주로 나가서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기 시작한 해로, 올해가 바로 그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1910년이 정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듬해인 1911년은 역동적인 투쟁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직접 초청한 조선족 시인 김승종(48)씨는 "항일투쟁이 시작된지 100년째인 올해 이육사문학제를 만주에서 열 수 있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면서 "안동지역의 많은 문인들도 이육사문학제에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1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 연변대학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1-09-23 10:43:49 ]  학술세미나에서 우상렬교수가 론문을 발표했다. 9월 22일,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량심을 지키고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한국 안동이 낳은 저명한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중국조선족대학생들의 반일 력사의식을 고양하는것을 취지로 한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이육사시인의 외동딸 이옥비 녀사가 참석한 가운데 연변대학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는 범사회적인 문학외면에 직면하여 문학후보군체들의 참여를 주도하고저 진행하는 문학제로서 대학캠퍼스로부터 문학인재를 양성하자는 취지로 진행되는 유일한 대학생문학축제로 연변작가협회와 한국안동시이육사문학관 주최, (주)안동간고등어 협찬으로 이루어졌다. 《청포도》, 《광야》, 《절정》 등 시작품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육사시인의 문학제는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항일운동을 하고 북경감옥에서 옥사한 등 시인의 활동범위와 중국조선족대학생들이 참여한다는것이 계기가 되였다. 연변작가협회 당조서기 안국현이 대상 수상자 리영 학생에게 시상했다. 금상 수상자들 은상 수상자들 동상 수상자들 이번 문학제 학술세미나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우상렬 교수가 《저항시인의 독립정신과 문학적 성과》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고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김호웅 교수가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어 진행된 문학상시상식에서 최경위, 민봉화 등 6명 학생이 동상을, 한지영, 유린식, 조소연 등 5명 학생이 은상을, 허미령, 리위 등 4명 학생이 금상을 수상하고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08급 리영학생이 《필름사진기》(외 3편)로 대상을 수상했다.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제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연변작가협회 리사인 김승종시인이 연변작가협회의 앞으로 유치한, 중국내 유일한 조선족(한글문장을 쓰고 응모에 참가하는 기타 민족 대학생도 포함.)대학생문학제이다. 연변대학을 출발점으로 조선어(한국어)학과가 설치된 중국의 대학들에서 륜번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제2회 문학제는 2012년에 북경에서 진행된다. ============================================================= 제2회 《이육사문학제 및 학술세미나》 연변과기대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09-10 16:52:38 ]  9월 10일 오후, 연변작가협회와 한국 안동 이육사문학관 공동 주최,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의 후원으로 제2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 및 학술세미나》가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이하 과기대)에서 개최되였다. 지난해 한국안동간고등어회사와 연변작가협회가 손잡고 제1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 및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었다.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량심을 지키고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한국 안동이 낳은 저명한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조선족대학생들의 반일 력사의식을 고양하는것을 취지로 한 이 문학제는 항일투사이며 시인인 이육사선생의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기리고 중국에 이육사선생을 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도 있다. 문학제는 조선족대학생을 상대로 펼쳐지는 문학제로서 대학생들의 작품을 선정하여 문학상을 시상하는 동시에 우리의 말과 글을 사랑하고 배우는 재학중인 기타 민족학생들의 한국어(조선어)작품을 선정하여 한국어문학상을 시상한다. 이육사문학관 조영일 관장이 한국어문학상 금상 수상자 유혜영에게 시상했다. 과기대 김진경총장이 이육사문학상 대상 수상자 량옥화에게 시상했다. 이육사문학상 금상 수상자들. 문학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한국어과 09급 유혜영, 장연 등 4명 학생(한족)이 동상을, 과기대 한국어과 09급 범길평(만족), 장총(한족) 등 3명 학생이 은상을, 과기대 한국어과 09급 양결(한족)학생이 금상을 수상했다. 이육사문학상 시상식에서는 연변대학 사범분원 10급 최역문, 과기대 상경학부 11급 양기원 등 4명 학생이 동상을, 과기대 상경학부 09급 박예령, 연변대학 사범분원 11급 림해연 등 3명 학생이 은상을, 과기대 컴전통 08급 리상우, 연변대학 사범분원 11급 김향매 등 3명 학생이 금상을, 과기대 국제무역 10급 량옥화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시상식에 이어 이육사시인의 《청포도》, 《광야》, 《절정》, 《꽃》 등 시작품들이 중·한 시인들에 의하여 랑송되였다. 학술세미나에서 론문을 발표하는 연변대학 김경훈(오른쪽)교수. 문학제 학술세미나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교수인 김경훈박사가 《이육사 시의 구조 연구》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고 한국의성문인협회 회장 장효식시인이 토론을 진행하였다. 문학제에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최국철이 개회사를 하고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김진경총장과 안동문인협회 장은주회장이 축사를, 이육사문학관 조영일 관장이 페회사를 했다. 주최측과 수상자 일동이 합영을 남겼다.       ================================================== 제3회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제》 연변대학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12 17:14:12 ]  연변대학사범분원 정철(가운데)학생이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 경상북도와 안동시청이 주최하고 안동이육사문학관과 연변작가협회가 주관하는 제3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안동간고등어회사와 안동병원, 연변대학의 후원으로 9월 12일 오후 연변대학 예술학원 극장에서 개최되였다.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최국철이 개회사를 하고있다.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최국철은 개회사에서 문학후비군 양성을 주목표로 하는 유일한 문학제로서의 《이육사문학제》는 대학생들의 참여의 장으로 조선족대학생들과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고있는 타민족대학생들의 대형문학행사의 하나로, 명실상부한 대학생문학제로 거듭나고있다고 지적, 기성문인들과 바야흐로 문단에 등단하는 대학생들과의 상호 련대와 협동을 적극 추진하고 상호 교류와 우의를 증진하는 중요한 무대로 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제1부로 진행된 이육사문학세미나에서는 북경제2외국어대학 김영옥교수가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에서 나타난 랑만성 고찰》이란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고 중앙민족대학 어문학부 오상순교수가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육사문학세미나에서의 오상순(왼쪽)교수와 김영옥교수. 제2부 이육사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우상렬교수의 수상작선정보고에 이어 시상식이 진행되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설치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절강월수외국어대학의 능적, 려양과 산동공상학원의 오소진 등 3명 학생이 동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번역석사연구생 왕연, 산동공상학원의 수취홍 등 2명 학생이 은상을, 산동공상학원의 원시가학생이 금상을 수상했다.   산동공상학원의 원시가학생이 한국어문학상 금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문학상 시상식에서는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2년급 박복금, 연변대학사범분원 2009년급 리미란 등 10명 학생이 우수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0년급 조문학부 민해인, 연변대학사범분원 2011년급 유홍 등 8명 학생이 동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0년급 신문학부 리나, 연변대학사범분원 2009년급 최려나 등 5명 학생이 은상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1년급 석사연구생 김단, 심양리공과대학 유위, 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원 2011년급 조문학부 류서연 등 3명 학생이 금상을, 연변대학사범분원 2012년급 정철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금상수상자들인 김단(왼쪽 두번째), 류서연 학생 시상식에서 연변대학당위 부서기 량인철, 안동이육사추모사업회 권부옥리사장,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문학연구소 오상순부소장이 축사를 하였다. 시상식에 이어 김경숙, 여환숙, 강수완 등 한국의 시인들과 연변랑송협회 송미자회장이 이육사의 《광야》, 《청포도》, 《꽃》, 《황혼》 등 시를 랑송하였다.   이날 문학제에는 연변대학, 산동공상학원, 절강월수외국어대학, 심양리공대학 등 10여개 대학에서 온 학생들과 연변대학, 연변작가협회, 한국 경상북도, 한국안동시청, 안동이육사문학관, 안동병원, 안동간고등어회사 등 주최측의 대표 250여명이 참가하였다.       ====================================================================== 제4회 중국조선족대학생이육사문학제...                                           2015년 제5회 연변이육사문학제(9월 18일~21일) 제5회 이육사문학제 연변대학서 편집/기자: [ 김태국 ]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9-18 17:55:21 ]  9월 18일 오후,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가 주최하고 중국 연변작가협회와 이육사문학관이 주관한 《제5회 중국조선족대학생 이육사문학제》가 안동병원과 안동간고등어회사의 후원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홀에서 개최되였다. 연변작가협회 당조성원 정봉숙은 개막사에서 문학후비군 양성을 주목표로 하는 유일한 문학제로서의 《중국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제》는 대학생들의 참여의 장으로 조선족대학생들과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고있는 타민족대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형문학행사의 하나로, 명실상부한 대학생문학제로 거듭나고있다고 지적, 기성문인들과 바야흐로 문단에 등단하는 대학생들과의 상호 련대와 협동을 적극 추진하고 상호 교류와 우의를 증진하는 중요한 무대로 되였다고 하면서 이같은 의의있는 행사를 조직하고 후원해준 경상북도 안동시와 이륙사문학관 그리고 후원단체들에 감사를 드렸다. 문학제 제1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세미나에서는 한국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유성호교수가 《저항으로서의 이륙사시와 그 서지적 사항》,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우상렬교수가 《이륙사와 중국 현대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하였다. 웃줄 좌로부터 정봉숙, 리봉우, 군부옥, 이옥비, 유성호, 우상렬, 김경훈, 조영일. 제2부로 진행된 이륙사문학상 시상식에서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 교수이며 연변작가협회 겸직부주석인 김경훈이 수상작선정보고와 수상자명단을 발표하였다. 한국어를 배우는 타민족대학생들을 상대로 설치한 한국어문학상 시상식에서 길림화교대학 장성양, 치치할대학 왕정정 등 5명이 우수상을, 대련민족대학 리로, 정주경공업대학 초근근 등 8명이 동상을, 남경대학 리연, 산동대학 온애륜 등 7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양문연, 손효 등 4명이 금상을, 산동대학 록미교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문학상 시상식에서는 북경화공대학 김지이, 중앙민족대학 최의단 등 15명이 우수상을, 회해공학원 류연정, 연변대학 정희정 등 13명이 동상을, 천진외국어대학 최려영, 화동사범대학 차경나 등 10명이 은상을, 연변대학 김소연, 김은령 등 5명이 금상을, 연변대학 강미홍학생이 대상을 수상하였다. 조선족대학생 이륙사문학상 대상 수상자 연변대학 강미홍(가운데). 시상식에 이어 김경숙, 김희선 등 한국의 시인들과 연변랑송협회 송미자, 박송천 등 랑송인들이 이륙사의 《광야》, 《청포도》, 《노정기》, 《절정》 등 시들을 랑송하였다. 문학제에서 연변대학조선-한국학학원 당위서기 리봉우와 이륙사추모사업위원회 리사장 권부옥이 축사를 하고 이륙사선생의 딸 이옥비녀사가 답사를 하였으며 한국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관장 조영일이 페막사를 하였다. 부분적인 수상자들과 함께. 이번 문학제에는 연변대학과 타지역 20여개 대학들에서 온 수상자 및 연변작가협회, 한국 경상북도 안동시, 이륙사문학관, 안동병원, 안동간고등어회사 등 주최측과 후원측의 대표 250여명이 참가하였다. 문학제가 진행되는 동안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중한시인들의 시화전이 있었다.                     ▲이육사 선생 따님 이옥비 여사가 꽃을 올리며...   상해 로신공원 內 윤봉길의사 기념비앞에서... =========================== 안동문화원 원장님과 함께... /////////////////////////////////////////////////////////////////////////////////////================ 상해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에서(2015년 9월 20일) =================================================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두 달 동안 기거했다는 초가집   무너져 내리는 역사의 현장...안타까웠다...    이육사문학관측에서 처음으로 찾아 가는 이육사 순국감옥  감옥이었던 건물 입구에서 제를 올리는 따님 이옥비여사 손병희 교수, 이옥비여사, 권부옥이사장, 조영일관장  이육사 순국감옥- 영세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잡초와 쓰레기로 폐허처럼 어지러웠다.  그날의 아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인이 이곳에 갇혀있었다는 예기를 들었다는 거주 주민  고문을 당했다는 지하감옥 이육사 순국한 일본령사관 북경감옥을 가르키는 여행 가이드    
1628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심훈 - 그날이 오면 댓글:  조회:3522  추천:0  2015-12-12
  그 날이 오면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 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그날이 와서 육조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구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필경사의 심훈선생 문학관   기념관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임.        ▲ 원형대로 복원된 심훈의 집        ▲ 상록수 상징의 무쇠 조각품      ▲ "그날, 쇠가 흙으로 돌아가기전에 오라" 2001년 심 훈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당진군 출신의 조각가가  사철 푸른 상록수를 상징해 무쇠로 만든 조각품.         그날이 오면 심훈선생 당진필경사          심훈 선생의 얼굴이 새겨진 조각의 뒷면에 새겨진 글    "내가 화가가 된다면... 반 고흐의 필력을 빌어 뭉툭하고 굵다란 선이 살아서 용같이 꿈틀거리는...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가 새겨져 있음.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초가흙집으로 남아있는 필경사, 농촌 한가운데 이 조그만 초막에서 가 쓰여졌다고.            ▲ 필경사 옆의 독립유공자 표지석 심훈 선생은 1901년 9월 12일 서울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출생. 1915년 경성제일고보(후의 경기중)에 입학 3·1운동 때(제일고보 4학년, 19세 때)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체포 나중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름 그 곳 지강대학 국문학과에 입학.   심훈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로도 재직          ▲ 기념관 내 선생의 초상화      ▲ 약력(연보) 그리고 선생은 1932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곳 당진으로 내려와 한동안 아버지와 한집에 살던중  1934년에 독립하여 살집을 직접 설계하여 짓게 되는데 그 집이 바로 필경사랍니다.   필경사는 심훈문학의 산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선생은 필경사에서 창작에 전념하게 되는데 여기서 농촌계몽소설로 유명한 대표작인  ‘상록수’를 비롯해 ‘영원의 미소’ ‘직녀성’등을 집필하였으니까요.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에 당선되었죠.   1930년대 일제 강점기 하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청년들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장편소설 ‘상록수’. 잠깐 내용을 볼까요.   상록수는 다 알다시피 샘골강습소에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다가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여성독립운동가 최용신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죠.   상록수 주인공인 채영신은 신문사 주최 학생 계몽 운동에 참가한 이후 동혁과 동지로서의 애정을 느끼게 되고 농촌운동에 앞장설 것을 약속합니다. 채영신은 예배당을 빌려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일본 경찰의 저지를 받자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모금운동을 펼쳐 학교를 세우지만 준공식날 축사를 하던 영신은  과로로 쓰러지고 동혁은 동지의 배신을 경험하고 울분을 참지 못해 농우회관에 불을 지릅니다. 목숨을 걸고 농촌 계몽 운동에 앞장서는 채영신. 이를 이어가려는 박동혁 등  당시 젊은 지식인들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굳건한 의지가 잘 묘사되어 있는 작품이죠. 이렇듯 가난한 농촌의 현실을 배경으로 한 선생의 작품들은 대부분 민족 의식과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계몽주의 문학의 전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 훗날 '그날이 오면'의 초고가 된 선생의 옥중 편지(왼쪽 맨 아래)등을 기록한 활동상황판. 이 편지는 그의 어머니께 쓴 것입니다.      ▲ 어머니께 쓴 편니 확대본      ▲ 상록수 등 선생의 작품집 모음    ▲ 중국 유학 등 선생의 활동상 개요도      ▲ 문예활동      ▲ 영화활동에도 활발했던 선생의 열정      ▲ 조카들과 다정한 한때(왼쪽 아래)      ▲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들이자 작품의 배경이었던 지인들과 함께...     ▲ 상록문화제 행사 앞서 소개한 심훈의 시중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그날이 오면’은 1919년 심훈이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어머님께 보낸 편지글중 일부라고 합니다. 그동안 발표된 심훈의 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생은 1936년 9월6일, 너무 이른 나이에 급서하여 그의 문학 새계는 더 펼쳐지지 못했습니다.   또한 선생은 상록수를 직접 각색하고 감독을 맡아 영화로도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서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 옹이  다시 구입해서 관리하다가 당진시에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251-12 041-360-6883       ***           심훈 시인의 시비 동작구 흑석동에 있음.   심훈기념관  
1627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박목월 - 청노루 댓글:  조회:4715  추천:0  2015-12-12
  박목월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나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록집](1946)     이 시는 이상향에 가고 싶어 하는 청노루의 소망을 담은 시이다. 또는 봄날에 이상향에 대한 상상의 한 장면이다.   화자는 이상향을 그린 한 폭의 동양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림의 시간적 배경은 ‘봄눈’ 놓는 봄이다. 공간적 배경은 ‘자하산’이다. 화자는 멀리서 ‘자하산’을 보고 있다. ‘머언 산 청운사’의 ‘머언’이 이를 알려준다. ‘청운사’는 오래된 절이다. 그러므로 ‘낡은 기와집’이라 말하고 있다.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에서 ‘자하산’이 공간적 배경임을 알 수 있고 ‘봄눈’에서 시간적 배경을 알 수 있다. ‘산은’의 ‘은’은 ‘자하산’이 실제의 산이 아니라 화자의 상상 속의 산임을 암시한다. ‘은’의 용법에는 ‘상상’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자기의 상상의 세계를 알려줄 때 ‘--은 --라 하고 하자’를 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하산’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산이고 ‘자하’는 ‘전설에서, 신선이 사는 곳에 서리는 노을이라는 뜻으로, 신선이 사는 궁전을 이르는 말’이므로 ‘자하산’은 세외도원 내지는 신선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하산’에 봄이 오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나’ ‘열 두 구비’가 모두 푸르러 진다. 이 때 이곳에 있는 ‘청노루/ 맑은 눈’을 보면 ‘도는/ 구름’이 비춘다. ‘청노루’ 또한 세상에는 없는 짐승이다. 이를 볼 때 ‘자하산’은 세외 도원, 이상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화자는 한 폭의 동양화를 큰 틀에서 세심한 곳까지 보는 것 같다. 큰 산에서 사슴의 눈동자에 비치는 구름까지.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면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의 의미가 불확실해진다. 왜 세외 도원에 있는 ‘청노루’가 ‘도는/ 구름’을 보는 것인가? 세외 도원에 있다면 바랄 것이 없는 이상향인데 ‘구름’을 보는 것인가? 이러한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약간 관점을 바꾸어 시를 보도록 하겠다. 물론 전개될 시해석은 필자의 상상에 의하여 왜곡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시를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필자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묵인하고 갈 수가 없다. 읽으시는 분들은 이렇게 보니 재미 있다 정도로 읽어주시기 바란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을 바라보는 인물은 화자가 아니라 ‘청노루’이다. 화자는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을 바라보는 ‘청노루’를 관찰하고 있다. ‘청운사/ 낡은 기와집’이 있는 ‘산은 자하산’이다.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청노루’는 과거에 이곳에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머언’ 곳에 있다. ‘청노루’는 회상한다.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나는’ ‘자하산’의 ‘열 두 구비를’ 마음껏 뛰놀았다. 그러나 지금은 선계에서 나와 멀리서 ‘자하산’ ‘청운사’를 바라보고 있다.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은 ‘청노루’가 ‘청운사’를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청운’은 ‘푸른 구름’이다. 그러므로 ‘구름’은 ‘청운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무슨 이유인지 낙원에서 나와 낙원을 그리워 하는 내용을 담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청노루’는 화자가 객관화된 사물이라 할 수 있고 ‘자하산’의 ‘청운사’는 화자가 꿈꾸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20060929금후0621   참고 자작시 해설   이 작품을 쓸 무렵에 내가 희구한 것은 '핏발 한 가락 서리지 않은 맑은 눈'이었다. 나이 50이 가까운 지금에는 나의 안정(眼睛)에도 안개가 서리고, 흐릿한 핏발이 물들어 있지만 젊을 때는 그래도 '핏발 한 가락 서리지 않은 눈으로 님을 그리워하고 자연을 사모했던 것이다.   또한 그런 심정으로 젊음을 깨끗이 불사른 것인지 모르겠다. 어떻든 그 심정이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을 그리게 하였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청노루'가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는 분이 있었다. 물론 푸른빛 노루는 없다. 노루라면 누르스름하고 꺼뭇한 털빛을 가진 동물이지만, 나는 그 누르스름하고 꺼뭇한, 다시 말하자면 동물적인 빛깔에 푸른빛을 주어서 정신화된 노루를 상상했던 것이다. 참으로 오리목 속잎이 피는 계절이 되면 노루도 '서정적인 동물'이 될 것만 같았다.   또 청운사나 자하산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어느 해설서에 '경주 지방에 있는 산 이름'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 것을 보았지만 이것은 해설자가 어림잡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기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내가 창작한 산명이다. 나는 그 무렵에 나대로의 지도를 가졌다. 그 어둡고 불안한 일제 말기에 나는 푸근히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가 그리웠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은 어디나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바라진 땅뿐이었다. 강원도를 혹은 태백산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내가 은신할 수 있는 한 치의 땅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의 깊숙한 산과 냇물과 호수와 봉우리와 절이 있는 마음의 자연 지도를 그려보게 되었다. 마음의 지도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태모산(胎母山), 태웅산(太熊山), 그 줄기를 받아 구강산(九江山), 자하산(紫霞山)이 있고, 자하산 골짜기를 흘러 잔잔한 호수를 이룬 것이 낙산호(洛山湖), 영랑호(永郞湖), 영랑호 맑은 물에 그림자를 잠근 봉우리가 방초봉(芳草峰), 그 곳에서 아득히 바라보이는 자하산의 보랏빛 아지랑이 속에 아른거리는 낡은 기와집이 청운사(靑雲寺)이다.   - 박목월, 『보랏빛 소묘』중에서 =================================================================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 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1946)      (1) 주제 : 봄의 정취. 아름다운 이상향의 봄 정경   (2) 박목월(1916-1978) 본명 박영종(朴泳鍾). 경북경주 출생.‘청록파’ 한국적인 자연과 전통 정서/민요조 율격이 주를 이루며/향토성 짙은 시/가족적 유대/로 체온을 나누는 시를 썼다. 만년에는 신앙심 깊은 시. 시집 , 등   (3) 정중동(靜中動): 정적 (청운사, 기와집, 산) 동적(녹는 봄눈, 피어나는 속잎, 내려오는 청노루, 흐르는 구름) (4) 색채 이미지(푸른색, 보라색, 초록색, 하얀색)- 한 편의 담채화같은(5) 'ㄴ'음(비음)을 반복 사용함으로써 아늑하고 은은한 분위기를 돋움. (6) 시상 전개 : 원경 ---> 근경 (7) 표현 : 묘사적 심상, 율격의 변조(2·3조의 변조와 4음보) (8) 화자의 목소리 : 절제된 목소리 (9) ㉠청노루 - 중심소재, 깨끗한 이미지. 푸른빛 (10) 청초한 푸른빛을 주로 구사한 이유는 ? 암담한 상황을 벗어난 이상적 생명의 고향을 노래하기 위해   (11)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이라기보다는 시인의 내면 속에서 이상화된 자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2) 박목월의 해설 : 그 어둡고 불안한 일제 말기에 나는 푸근히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가 그리웠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은 어디나 일본 치하의 불안하고 바라진 땅뿐이었다. 그래서 나 혼자의 깊숙한 산과 냇물과 호수와 봉우리와 절이 있는 마음의 자연 지도를 그려보게 되었다. 마음의 지도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 태모산(胎母山), 웅산(太熊山), 그 줄기를 받아 구강산(九江山), 자하산(紫霞山)이 있고, 자하산 골짜기를 흘러 잔잔한 호수를 이룬 것이 낙산호(洛山湖), 영랑호(永郞湖), 영랑호 맑은 물에 그림자를 잠근 봉우리가 방초봉(芳草峰), 그 곳에서 아득히 바라보이는 자하산의 보랏빛 아지랑이 속에 아른거리는 낡은 기와집이 청운사(靑雲寺)이다.   하관     ①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②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③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④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⑤㉡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박목월(1959)   (1) 주제 : 죽은 아우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2) 평범하고 쉬운 일상적 시어 속에 중의적 표현 (3) 하강(下降)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시어들 ① ~내렸다 ② ~내리듯 ③ ~하직했다 ④ ~눈과 비가 오는 ⑤ ~떨어지면 (4)  ㉠ 좌르르 - 의성어가 주는 효과 :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간접적으로 제시, 감정의 절제 ③ 하직(下直)했다 - 중의적표현, 흙을 떨어뜨리다/작별하다 ④⑤ - 이승 ㉡ 열매 - 익으면, 떨어지는 현세의 삶의 질서, 보편적인 인간의 죽음 삶과 죽음에 대한 화자의 달관의 태도가 집약된 시어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 박목월1946       (1) 주제 : 체념과 달관의 경지 (2)  표현상 특색과 효과 ㉠간결한 형식미-감정의 절제와 압축된 시어 ㉡짙은 향토적 색채-'강나루', '밀밭', '술 익는 마을' -향토성. ㉢민요조의 율조-3·4·5조 율조의 3음보격 ㉣시각적 이미지 효과-'구름에 달 가듯이', '타는 저녁 놀' ㉤색채의 대비적 표현-'강', '밀밭', '하늘'은 푸른 색, '구름'은 흰 색,'저녁 놀'은 붉은 색 ㉥후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의 조화(4연) - 술 익는 → 저녁 놀 ㉦주제연의 반복-구성의 안정감, 주제의 강조 효과   (3)‘구름에 달 가듯이'의 의미와 통하는 한자 성어 - 행운유수(行雲流水), 유유자적(悠悠自適) (4) '나그네'의 성격 - 속세를 벗어나 유유자적하고자 하는 마음의 상징으로 현실에 대한 체념적 자세이자 생에 대한 달관의 경지로 이해할 수 있다. 억압에 대항하는 저항적 의지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5) '길은 외줄기'  - 홀로 걸어가는 나그네의 고독감을 표현 (6)'남도 삼백 리'의 거리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자. - 시인의 서러운 정서를 담은 시어로 정감의 추상적 거리 (7) 각 연의 끝맺음을 대체로 명사 - 정서와 의미의 응축, 간결미와 함축미의 강조, 여백과 여운의 효과 (8) 그림에 비유할 때, 연상되는 그림 - 청(靑), 백(白), 홍(紅)의 색채감을 통해 볼 때, 담채화(淡彩畵)가 연상 (9)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보낸 시 ‘완화삼’에 대한 화답 시이다.     이별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별리(제1-4연)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끊어질 수 없는 인연(제5-7연)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순응과 초극(제8,9연) 박목월(1968)   (1) 주제 :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인연과 그리움. (2) 박목월(1916∼1978) 본명은 영종. 경북 월성군 출생. 1939년 에 추천되어 등단.1946 (3) 성격 : 인간적, 전통적/ 어조 : 소박하고 친근한 어조 (4) 표현 : ①방언-소박한 정감 ②반복과 점층-그리움과 안타까움 심화            ③되풀이되는 질문('뭐락카노') 속에 이별의 정한을 드러냄. (5) ㉠ 강 -  이별의 공간, 삶과 죽음의 간격     ㉡ 밧줄 - 결합, 인연/ 삭아 내림 - 이별, 시간과 인연의 소멸     ㉢ 나도 곧 따라갈 터이니 이별인사를 하지 말자.     ㉣ 재회의 약속 (6) 제2연의‘목소리’는 운명적 상황의 비극적 인식에서 오는 '물음'     ‘뭐락카노.뭐락카노.뭐락카노...’     제9연의‘목소리’는 운명적 순응에서 오는 초극의 '대답'     ‘오냐,오냐,오냐....’ 이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7) 이별에 대한 화자의 자세는? 순응, 초극       부산 지하철 1호선 부전역 2번 출구 앞 박목월 시비                                 문학계 거장들의 육필원고   한국현대문학관 1997년 11월 8일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에 위치한 계원조형예술대학 내에 설립됐는데 원래 명칭은 ‘동서문학관’이었다. 2000년 7월 1일 서울시 중구 장충동 파라다이스 빌딩 별관으로 옮기면서 ‘한국 현대 문학관’으로 개칭됐다. 구하기 힘든 주요 문학작품의 초판본 2000여 권, 육필원고 1000여 점, 사진자료 1500여 점, 영상자료 4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청준, 박경리, 전숙희, 피천득, 김남조 선생 등  박종화,  이태준, 유진오, 이효석, 김동인, 심훈 선생 등 최정희, 한무숙, 손소희, 하근찬, 이청준, 박경리, 황순원, 김동리 선생 등 ​ ​ 이상의 『애야(哀夜)』 ​ ​ 김소월의 『기분전환』                                                          김억의 『님의 마음』 ​ ​ 서정주, 박재삼, 피천득, 허영자 선생 등 ​ ​   한용운, 박목월, 윤동주, 조지훈, 김광림, 신석정 선생 등         4월의 노래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그것은 연륜이다                                         어릴적 하찮은 사랑이나 가슴에 백여서 자랐다.  질 곱은 나무에는 자주 빛 연륜이 몇 차례나 몇 차례나 감기었다.  새벽 꿈이나 달 그림자처럼 젊음과 보람이 멀리 간 뒤 ...... 나는 자라서 늙었다.  마치 세월도 사랑도 그것은 애달픈 연륜이다.         길처럼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산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 뵈일 듯 말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 길은 실낱 같다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무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 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난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윤사월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산이 날 에워싸고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하관(下棺)                                        관(棺)을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알아보고 형(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가정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산도화 1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랏빛 석산(石山).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사는것이 온통 어려움 인데 세상에 괴로움이 좀 많으랴 사는 것이 온통 괴로움인데 그럴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면 착한 일을 해야지 마음속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서로 서로가 돕고 산다면 보살피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산다면 오늘 하루가 왜 괴로우랴 웃는 얼굴이 웃는 얼굴과 정다운 눈이 정다운 눈과 건너보고 마주보고 바로보고 산다면 아침마다 동트는 새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아침마다 눈을 뜨면 환한 얼굴로 어려운 일 돕고 살자 마음으로  다짐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적막(寂寞)한 식욕(食慾)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素朴)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床)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者)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渴求)하는 쓸쓸한 식성(食性)         달                                                          桃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慶州郡 內東面) 혹은 외동면(外東面)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挑花 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이 후끈한 세상에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그 너르고도 후끈한  '우리'들의 생활 속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인간'이 빚어지고  남과 더불어 짜는  그 오묘한 생활의  그물코에  오늘의 보람찬 삶  세상에는  완전타인이란 있을 수 없다.  눈에 보이는,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든든한 밧줄로 서로 맺어져  우리는 서로 돕게 된다.  다만 에고의 색맹자만이   나와 남사이에 얽혀진  그 든든하고 따뜻하고  신비스러운 밧줄을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이  저를 위하는  이 후끈한 세상에  오늘의 찬란한 아침이 열린다.         뷸국사                                                       흰 달빛 자하문   달 안개 물 소리   대웅전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우회로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凝結)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昏睡)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螺旋通路)를 내가 내려간다.         이별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어머니의 언더라인                                       유품으로는  그것 뿐이다.  붉은 언더라인이 그어진  우리 어머니의 성경책.  가난과  인내와  기도로 일생을 보내신 어머니는  파주의 잔디를 덮고  잠드셨다.  오늘은 가배절  흐르는 달빛에 산천이 젖었는데.  이 세상에 남기신  어머님의 유품은  그것 뿐이다.  가죽으로 장정된  모서리가 헐어 버린  말씀의 책  어머니가 그으신  붉은 언더라인은  당신의 신앙을 위한 것이지만  오늘은 이순의 아들을 깨우치고  당신을 통하여  지고 하신 분을 뵙게 한다.  동양의 깊은 달밤에  더듬거리며 읽는  어머니의 붉은 언더라인  당신의 신앙이  지팡이가 되어 더듬거리며  따라가는 길에  내 안에 울리는  어머니의 기도소리        빈 컵                                                       빈 것은 빈 것으로 정결한 컵. 세계는 고드름 막대기로 꽂혀 있는 겨울 아침에 세계를 마른 가지로 타오르는 겨울 아침에. 하지만 세상에서 빈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서늘한 체념으로 채우지 않으면 신앙의 샘물로 채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나의 창조의 손이 장미를 꽂는다. 로오즈 리스트에서 가장 매혹적인 죠세피느 불르느스를. 투명한 유리컵의 중심에.         심야의 커피                                                1  이슥토록  글을 썼다  새벽 세 時  시장기가 든다  연필을 깎아 낸 마른 향나무  고독한 향기,  불을 끄니  아아  높이 靑과일 같은 달.      2  겨우 끝맺음.  넘버를 매긴다.  마흔 다섯 장의  散文(흩날리는 글발)  이천 원에 이백원이 부족한  초췌한 나의 분신들.  아내는 앓고……  지쳐 쓰러진 萬年筆의  너무나 엄숙한  臥身.      3.  사륵사륵  설탕이 녹는다.  그 정결한 投身  그 고독한 溶解  아아  深夜의 커피  暗褐色 深淵을  혼자  마신다.         이런 詩                                                    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치며 아는 체 하는 그런 詩, 대수롭지 않게 스쳐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詩, 읽고 나면 아,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詩,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詩 슬며시 하늘 한자락이 바다에 적셔지 듯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詩,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詩.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카드에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ㅡ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ㅡ 네 개의 샛파란 눈동자.    참말로 눈이 왔다.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러 놓고 오누이가 기다린다, 누굴 기다릴까.   ㅡ 네 개의 까만 눈동자.   ㅡ 네 개의 까만 눈동자.    그런 날에 외딴집 굴뚝에는 감실감실 금빛 연기, 감실감실 보랏빛 연기,   ㅡ 메리 크리스마스   ㅡ 메리 크리스마스           박목월 朴木月 (1916. 1. 6 ∼ 1978. 3. 24)             
1626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조지훈 - 승무(僧舞) 댓글:  조회:5261  추천:0  2015-12-12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 생애 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 출생 경상북도 영양 분야 문학 작가 시인, 국문학자. 경북 영양 출생. 본명 동탁(東卓). 1939년 “문장”지를 통하여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 등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하였다. 동양의 회고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통에의 향수, 민족의 한(恨)을 고전적 운율로 노래하였으며, 박두진, 박목월 등과 “청록집”(1946)을 간행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공저), “풀잎 단장”(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1964) 등이 있다. 작품 낙화(落花) 이 시는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살아가는 화자가 떨어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꽃이 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대자연의 섭리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동틀 무렵, 별이 하나 둘 사라지고 귀촉도의 서러운 울음소리도 사라진 후에, 화자는 미닫이창에 은은히 붉게 비치는 꽃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꽃이 떨어지면서 드러내는 은은한 붉은빛은, 세상을 피해 꽃과 함께 살아가는 화자의 서글픔이 담겨 있는 빛깔이라고 할 수 있다. 낙화를 본 화자는 자신의 내면 상태로 시선을 돌린다. 세상을 피해 은둔자적 삶을 살아가는 화자는 꽃이 지는 광경을 통해 삶의 무상감과 절망감을 토로하는 것으로 시상을 마무리한다. *수록교과서 : (문학) 지학 완화삼(琓花衫) - 목월(木月)에게 이 시의 제목 ‘완화삼’은 ‘꽃을 완상하는 선비의 적삼’이라는 뜻으로 ‘꽃을 즐겨 구경하는 선비’를 말한다. 이 시는 제목에서도 드러났듯이 ‘완화삼’, 즉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데, 그 선비는 구름과 물길처럼 흘러가는 유랑의 삶을 사는 나그네이다. 차가운 산길을 오르내리며 마을을 옮겨 다니는 나그네는 구슬픈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다가 들른 강 마을에서 술 익는 냄새가 가득하고 저녁 노을빛이 눈에 어리는 가운데 ‘꽃잎에 젖어’ 잠시나마 무념무상의 경지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 시간은 순간일 뿐이고, 이 밤이 지나고 나면 꽃은 질 것이라는 점을 나그네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 이라고 말하며 애상감에 젖어든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나그네의 한과 애상감은 시각, 후각, 청각 등의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독문) 창비 고풍 의상 이 시는 전통 의상을 입고서 춤을 추는 여인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예스러운 어투로써 고전적 미감을 추구하는 시적 화자의 풍류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봄밤이고, 공간적 배경은 풍경 소리가 울리는 전통적인 기와집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런 은은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여인은 회장 저고리와 치마, 그리고 운혜와 당혜와 같은 전통적인 의상을 하고 있다. 이런 의상으로 추는 춤 사위는 저고리의 정적인 우아함과 치마의 동적인 아름다움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섬세하게 춤 사위를 묘사하면서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밝도소이다, 골라 보리니, 흔들어지이다’와 같은 예스러운 어투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분위기를 한층 돋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와 같은 표현을 통해 고전미에 흠뻑 도취된 화자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배경이나 인물, 그리고 동작 등은 모두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시인은 고전적인 우아미를 형상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봉황수 이 시는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산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한시의 시상 전개 방식인 기승전결과 선경 후정(先景後情)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시는 앞부분에서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제시하고, 뒷부분에 가서 비애감에 젖어 있는 화자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있다. 첫째 문장에서는 벌레 먹은 기둥과 빛 낡은 단청, 새들이 둥우리를 친 추녀의 모습을 통해 무기력하게 망해 버린 왕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문장에서는 큰 나라(중국)를 섬기다 왕조가 거미줄을 쳤다(패망)는 진술을 통해 중국을 섬기던 과거 우리 나라의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 셋째~다 섯째 문장에서는 몰락한 왕궁에 서서 느끼는 화자의 정서가 심화되고 있다. 봉황이 울어 본 적이 없다는 표현을 통해 조선 왕조의 무기력함을 한탄하면서, 이제는 나라의 주권마저 없는 현실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살아갈 위치를 상실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여섯째 문장에서 화자는 망국의 현실에서 느끼는 자신의 슬픔을 봉황새에 감정 이입시켜 표현하고 있다. 망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비애감을 봉황새라는 간접적인 대상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슬픔을 내면화하는 지사적인 품격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승무 이 시는 ‘승무(僧舞)’라는 춤을 통해 세속적인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4음보의 율격이나 소재면에서 전통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체 9연의 이 시는 춤을 추는 동작의 순서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1~3연은 여승이 춤을 추기 직전의 모습을 ‘고깔 → 머리 → 볼’로 시선을 이동(위 → 아래)시키면서 묘사하고 있다. 4연은 춤의 시 · 공간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밤의 정적미를 드러내고 있다. 전체 구성면에서 볼 때, 가장 앞에 올 부분이다. 5~8연은 승무의 춤사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5연은 급박한 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6~7연은 춤사위 중 별을 바라보는 여승의 모습을 통해 세속적 번뇌의 종교적 승화를 기원하는 여승의 내면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8연에서는 유장한 춤의 모습을 합장에 비유함으로써 승무에서 느껴지는 경건성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9연은 1연과의 수미 상관의 구조를 통해 시상을 마무리함으로써 정적미와 함께 승무의 계속되는 여운을 전해 주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하이얀, 감추오고, 모두오고, 감기우고’ 등의 시적 허용과 ‘이 밤사, 삼경’과 같은 예스러운 표현, 그리고 수미 상관의 구조 등은 이 작품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세속적 번뇌의 승화라는 주제 의식에 기여하고 있다. 다부원에서 이 시는 6·25 전쟁 당시의 다부원 전투 현장을 보고 느낀 시인의 감회를 적은 작품이다. 종군 작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창작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실적이고도 강렬한 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전쟁사에서 볼 수 있는 전쟁이 주는 참혹함이 나타나 있지만 전장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시인의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역을 휴머니즘의 시선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1~3연은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고 한달 동안 치열하게 싸웠던 참혹한 전쟁의 현장이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는 표현을 통해 전쟁의 상처가 우리 삶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음을 제기하고 있다. 4, 5연에서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시적 화자는 6, 7연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군마와 적군의 시체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고발하고 있다. 8, 9연에서는 '한 하늘 아래 목숨받아' 태어난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싸워 이제는 시체가 되어 썩고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간고등어 냄새'를 통해 강렬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10, 11연에서는 죽은 자도 산 자도 인식이 없고 바람만 부는 모습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황폐함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전쟁사와의 차별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산상의 노래 이 시는 광복을 맞이한 시적 화자의 기쁨을 비유적 표현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하지만 시인은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민족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이상을 염원하고 있다. 광복 전의 화자의 모습을 '시들은 핏줄', '메마른 술' 등으로 표현하여 생명력을 상실한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러한 모습에 '종소리'와 '피'가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러한 광복을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또 다시 '높으디높은 산마루'에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고 있다. 과거처럼 울고 있지는 않지만 민족의 미래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는 선구자로서의 화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조론 중수필.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태를, 간접적 체험을 사례로 들어 비판하고 있는 수필이다. 또한 민영환,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에는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비난받는 자들이라도 열심히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박혀 있는 지조의 개념을 다양한 일화와 속담을 통해 적절하게 설명하고, 단정적인 어투와 힘이 넘치는 문체로 변절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한편 지조 있는 삶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수록교과서 : (문학) 비상(우한용) 시의 비밀 수필. 이 글은 저명한 시인인 글쓴이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해 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소재의 선정, 시상의 구상, 구상의 언어적 구현, 원하는 표현을 얻기 위한 노력, 창작의 고통, 개요 짜기, 퇴고 등 시 ‘승무’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순서에 따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글 전반에 걸쳐 예술에 대한 글쓴이의 해박한 지식과 섬세하고 치밀한 미적 감각, 표현 하나하나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작가 정신 등이 잘 나타나 있어 글쓴이가 왜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받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멋 설 수필. 이 글은 ‘멋’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가을 달밤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글쓴이는 삶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펼친다. ‘멋’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소개하며 삶에 힘겨워 하는 이들과 복을 찾아다니느라 애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멋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현재 자신의 처지에 만족해하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를 멋으로 규정하고 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의 삶 속에 있으며, 이러한 삶이야말로 멋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고풍스러운 말투와 다양한 수사법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승무   ■ 조지훈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군말】 이 시는 민족적 정서, 전통의 아름다움, 불교적 선미(禪美)라는 조지훈의 초기 시 세계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소재가 되고 있는 승무란 승려가 붉은 가사에 장삼을 걸치고 고깔을 쓰고 장단의 변화에 따라 추는 춤[독무(獨舞)]을 말한다. 1~3연에서는 승무의 모습―그중에서도 머리 부분을 묘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 정작으로 고와서’나 뒤에 보이는 ‘외씨보선’, ‘복사꽃 고운 뺨’ 등으로 미루어 승무를 추는 사람은 젊은 여승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 여승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로 감추고 있다. 그 고깔의 날아갈 듯 가벼운 움직임을 화자는 한 마리 나비와 같다고 말한다. 언뜻 보이는 여인의 볼에 흐르는 빛은 고와서 서럽고,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 무대에서 여인은 춤을 시작한다. 길고 넓은 소매를 휘어 감으며 돌아설 듯 날아가는 여인의 들린 발에 사뿐히 신겨진 외씨버선을 느꼈을 순간 화면은 정지되고,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아진 여인의 까만 눈동자와 복사꽃 고운 뺨에 흐르는 두 방울이 클로즈업된다. 여인의 그 눈물로 인해 이 번뇌는 춤과 함께 밤하늘의 별빛으로 멀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여인의 춤이 세사(世事)에 시달리며 겪은 번뇌를 이기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임을 알게 된다. 다시 춤이 이어진다.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은 거룩한 합장(合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번뇌를 떨쳐 버리려는 혼신의 몸짓이다. 밤은 깊어져 삼경(三更, 밤 12시 전후)인데 여인의 하얀 고깔은 나비처럼 날아갈 듯하다. 아니, 나비가 되어 번뇌와 함께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시는 승무를 추고 있는 여인의 외적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여인이 마음속의 번뇌를 춤으로 흩어 버리고자 하는 내면의 소망까지 그려 내고 있다.       「승무」의 창작 과정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 묘사를 뒤로 미루고 직입적으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 그다음, 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곡절(曲折)로 들어갈 것, 그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靜止)하는 찰나의 명상(冥想)의 정서를 그릴 것, 관능(官能)의 샘솟는 노출(복사꽃 고운 뺨)을 정화(淨化)(별빛)시킬 것, 그다음 유장한 취타(吹打)에 따르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翹翹)한 달빛과 동터 오는 빛으로써 끝맺을 것. 이것이 그때의 플랜(계획)이었으니, 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 동안 퇴고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된 한 편의 시를 겨우 만들게 되었다.퇴고하는 데에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장삼(長衫)의 미묘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마침내 여덟 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 버리고 나서 단 두 줄로 요약하고 말았다.     서울 남산 꽃동산 건너편에는 조지훈 시비가 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불린 조지훈선생이다.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인으로  한학을 공부했던 조지훈이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나와 한학과 불교, 현대문학을  어우르는 전통과 선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시인이다.  '   파초우'는 조지훈이 스스로 '방랑시편'이라고 했던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화자는 자연을 떠돌면서 자연과 교감하는 자로, 저녁에도 소리를 매개로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신을 성찰한다.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초잎에 후드기는 저녁 어스름 창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조지훈선생은 자연과 벗한다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 시비-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앞, 문과대학 뒤)       [조지훈(趙芝薰) 시비 -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 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는 한 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합장(合掌)인양 하고   이 밤사 뀌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선생의 삶]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선생은 1920년 12월 3일(음)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에서 조헌영(趙憲泳) 공과 유노미(柳魯尾) 여사의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전통적인 유학 집안에서 성장한 선생은 「고풍의상」(1939. 4), 「승무」(1939.12), 봉황수」(1940.12)가 「문장」지에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3월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낙향하여 향리에서 은거하였다. 1946년 박목월, 박두진 시인과 함께 「청록집」을 출간하여 광복이후 한국 현대시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1947년 10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풀잎단장」「조지훈시선」「역사 앞에서」「여운」등의 시집과 「시의 원리」「한국문화사 서설」「한국민족 운동사」등의 논저를 간행하였다. 시인이자 논객으로 폭넓은 사회활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1968년 5월 17일 숙환으로 타계하였다. 2006년 9월 29일 조지훈시비건립추진위원회 시비 제호와 전면의 시 글씨 이 동 익, 조각 전 항 섭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義憤)이 터져 노도(怒濤)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 때 나는 그런 줄 모르고 연구실(硏究室) 창턱에 기대앉아 먼 산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午後) 2시(二時)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議事堂)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쩐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무거웠다. 나의 두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늬들 가슴속에 그렇게 뜨거운 불덩이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氣槪)가 없다고 병든 선배(先輩)의 썩은 풍습(風習)을 배워 불의(不義)에 팔린다고 사람이란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을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 자라 악을 쓰며 지켜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너희 그 청명(淸明)한 하늘같은 머리를 나무램 했더란 말이다. 나라를 찾고 침략(侵略)을 막아내고 그러한 자주(自主)의 피가 흘러서 젖은 땅에서 자란 늬들이 아니냐 그 우로(雨露)에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늬들이 어찌 민족만대(民族萬代)의 맥맥(脈脈)한 바른 핏줄을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희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현실(現實)에 눈감은 학문(學問)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실 너희 선배(先輩)가 약했던 것이다. 기개(氣槪)가 없었던 것이다. 매사(每事)에 쉬쉬하며 바른 말 한마디 못한 것. 그 늙은 탓, 순수(純粹)의 탓, 어찌 가책(苛責)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한 사람은 늬들뿐이라고. . . . .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행(行)하기는 옳게 행(行)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 떼에게 정치를 맡겨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 중 알았더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르칠게 없는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나마 깨우쳐주겠다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쑥스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하늘도 경건(敬虔)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자유(自由)를, 정의(正義)를, 진리(眞理)를 염원(念願)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永遠)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1960. 4. 20.         [건립 취지문]   조지훈 선생 시비 건립은 고대인의 오랜 소망이었다. 평소 선생을 존경하던 제자들은 30여년 전부터 안암의 언덕에 선생의 시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한국 인문학의 요람이요, 지성의 산실인 고려대학교 문과대학과 국어국문학과 설립 60주년을 계기로 마침내 이를 실현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남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교우회,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우회, 민족문화연구원, 고대신문 동인회 그리고 고려대학교 재직 국어국문학 전공 교수 등을 비롯하여 여러 문인 및 독지가들의 정성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제 선생의 초기 대표작 「僧舞」(「조지훈시선」수록본)와 제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긴 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를 돌에 새겨 비를 세우니 고대인은 물론 고려대학교 교정을 찾는 젊은 세대에게 선생의 섬세한 서정과 개결한 정신이 생생하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조지훈문학관으로 가다...   어떤 이 있어 나에게 묻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사느뇨?”하면 나는 진실로 대답할 말이 없다. 곰곰이 생각노니 살기 위해서 산다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산다는 그것밖에 또 다른 삶의 목적을 찾으면 그것은 사는 목적이 아니고 도리어 사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에서 부질없이 허다한 목적을 찾아낸들 무슨 신통이 있겠는가. 도시, 산다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판이니 어째 살고 왜 사는 것을 모르고 산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 조지훈, 1958년 에 발표한 ‘멋 설(說)’ 중에서          누군가 내게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묻는다면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입을 다물 것 같다. 삶의 목적을 찾으려 했지만 아직 헤매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그 답을 찾기 위해 공부하고, 그림 그리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리라.    소란스러운 여름. 하필이면 떠나기로 마음먹은 날이 비 오는 날이었다. 하는 수 없이 며칠 미루었더니 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은 몸이 간지러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괜스레 방을 뒤집고, 소설책을 넘겼다. 장마가 어느 정도 지나간 무렵 영양으로 향했다. 아직 가는 비가 내렸지만, 촉촉한 비 냄새와 회색의 하늘은 낭만적이기만 했다.        많이 아는 사실이지만, 영양의 고추 사랑은 엄청났다. 네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영양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로등에 달린 앙증맞은 빨간 고추는 흐린 하늘 덕분인지 유독 두드러져 보였다.    영양군은 경상북도 내에서도 해발이 가장 높은 곳으로, 경북 북부의 3대 오지 (봉화, 영양, 청송) 중 한 곳이다. 영양은 문학의 고향으로 불리는데, 조지훈 시인뿐 아니라, 시 「내 소녀」를 남긴 오일도(1901~1946) 시인과 소설가 이문열이 영양 출신이기 때문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약 20분을 달려 선바위에 도착했다. 문학관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선바위에 관한 설화를 읽었기에 그 정경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운룡지에 지룡의 아들인 ‘아룡’과 ‘자룡’형제가 있었다. 그들이   역모를 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남이장군이 물리쳤다. 그는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아서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고, 반란을 잠재웠다. 남이장군이 물길을 돌린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다.    선바위를 한참 바라보던 때, 엄마와 함께 온 듯한 여자아이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바위에 선이 많아서 선바위에요?” 엄마는 저 멀리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신선 바위라서 선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말했더니 곧 엄마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선바위로 향하며 생각 없이 내디딘 길은 ‘외씨버선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 조지훈, 「승무」 중에서   길 이름은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에서 땄다. 전체 구간이 나와 있는 지도를 보면 언뜻 버선의 선 모양을 닮기도 했다. 외씨버선길은 청송에서 영양까지 약 170km 정도이고, 총 13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선바위 관광지가 속해 있는 구간은 오일도 시인의 길이었고, 그 이후로 조지훈 문학길이 이어진다. 조지훈 문학길은 영양 전통시장에서 조지훈 문학관까지 총 13.7km다.      ▲ 영양 서석지. 중요 민속문화재 제108호    지도를 따라 꽤 오랜 시간 걷다 보니 서석지에 도착했다. 서석지는 광해군 5년에 정영방 선생이 만든 연못으로, 담양의 소쇄원, 완도 세연정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민간 연못 정원으로 선정되었다. 서석지 입구에는 400년 된 은행나무가 손님을 맞고 있었다. 기와집 한 채와 연못, 돌담이 전부였다. 사진으로 미처 담지 못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연못을 가득 덮고 있는 커다란 연잎과 분홍의 연꽃 위에는 빗방울이 자리하고 있었다.    택시에 올랐다. 서울로 가는 막차가 네 시쯤 있었기 때문에 주실 마을까지 서둘러 가야 했다. 삼십 분가량 달렸더니 조지훈 문학관과 주실 마을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왔다. 주실 마을 입구에 있는 ‘주실쑤’에서 내렸다. 마을은 ‘시인의 숲’, 일명 ‘주실쑤’라 불리는 보호 숲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마을 길을 따라 주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유롭다’는 말이 어울리는 동네였다.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고추밭은 넓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풍수지리에 대한 주실 마을 사람들의 믿음은 이전부터 남달랐다 한다. 마을엔 예로부터 마을 전체를 통틀어 우물이 하나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주실이 배 모양의 지형이라 우물을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구멍이 뚫리면 배가 침몰할 것이며, 우물을 파면 동네에 인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도 주실에는 우물이 없고, 50리나 떨어진 곳에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한다.        ▲ 지훈문학관의 현판은 그의 아내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썼다.     주실 마을에 있는 가장 큰 기와집으로 향했다.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인 조지훈 시인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문학관이었다. 문학관 내에 그의 대표 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지훈의 학창 시절 모습과 장남 광렬이 그린 지훈의 모습(20대, 30대, 40대 초반, 40대 후반)     조지훈 시인의 본명은 조동탁으로, 1920년 주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창작해보기도 하고, 당시의 소년들로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피터팬』,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서구의 문화를 접했다. 지훈은 열한 살에 형 세림과 함께 를 조직, 마을 소년의 중심이 되어 문집 『꽃탑』을 펴냈다. 는 가난과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북간도로 이주하는 우리 민족의 처참하고 애절한 모습을 소인극으로 공연하는 등 항일의식을 나타냈다. 이 때문에 지훈 형제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졌는데, 시인은 당시를 ‘열여섯 살짜리와 열세 살짜리 어린 형제가 외가에 다니러 가도 경찰의 내방을 받던 웃지 못할 감시의 세월’이라고 기억하였다.     일제강점기, 지훈은 현실을 비통해하다가 병을 얻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라갔고,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을 도왔다. 같은 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전원이 검거되는 바람에 지훈은 또다시 시골로 피신해야 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문인은 라는 친일문학 단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지훈도 의 입회를 강요받았으나 추천 시 몇 편 발표한 것이 무슨 시인이겠느냐는 태도로 입회를 피해 스스로 붓을 꺾었다.    ▲ 지훈문학관 정경   그는 광복 이후에 시 창작과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고, 교육자로 사는 삶도 시작했다. 그러나 곧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났고, 그의 가족사에 시련이 닥쳤다. 할아버지는 마을이 공산화되자 자결하였고, 어머니는 전쟁 때 얻은 병으로 돌아가셨으며, 아버지와 매부는 납북되고, 하나뿐인 남동생은 익사하는 커다란 수난을 겪은 것이다. 이러한 참변은 그에게 시에 대한 열망을 앗아갔다. 그는 새로운 시를 창작하는 작업보다는 이미 발표된 자신의 시들을 펜으로 정서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그 이후, 지훈의 육필시집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지훈은 지사로서도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시인이면서도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돕는 등 민족문화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훈은 고전적인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했고, 대표작으로 「승무」, 「낙화」, 「고사」 등이 있다. 그의 시에는 한국의 고전적인 미의식과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동양적인 자연관, 그리고 불교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현대시의 주류를 잇는 역할을 했다.   지훈은 고전적인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 정서를 노래했고, 대표작으로 「승무」, 「낙화」, 「고사」 등이 있다. 그의 시에는 한국의 고전적인 미의식과 잊혀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동양적인 자연관, 그리고 불교적인 특성이 잘 드러난다.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현대시의 주류를 잇는 역할을 했다.        “『문장』지 추천시 모집에 응모하여 그 제1회로 「고풍의상」이 당선된 것은 1939년 봄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고풍의상」은 서구시를 모방하던 그 때까지의 나의 습작을 탈각하고 자신의 시를 정립하려고 한 첫 작품이었으나 실상은 강의시간에 낙서 삼아 쓴 것을 그대로 우체통에 넣은 것이 뽑힌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민족문화에 대한 나의 애착, 그중에서도 민속학 공부에 대한 나의 관심이 감성 안에서 절로 돌아 나온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나의 역정」(『고대문화』)중에서    조지훈 시인은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 삼 회 추천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는 「고풍의상」 이후, 열한 달에 걸쳐 「승무」와 「봉황수」를 지었고,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 자주빛 호장을 받친 회장저고리 / 회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 살살이 퍼져 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 곡선을 이루는 곳 /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 조지훈 「고풍의상」 중에서     ▲왼쪽 사진, 왼쪽부터)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 오른쪽 사진) 청록집과 청록시선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하여 등단한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은 광복 후 1946년, 합동 시집인 『청록집』을 냈다. 이를 계기로 이들 세 사람을 ‘청록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록집』은 현대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자연을 노래한 시집으로, 당시 유행하던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을 담은 시가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전 정신의 부활과 순수 서정시를 담고 있다.     조지훈과 박목월, 박두진은 매우 달랐다. 청록파 시인 셋이 걸어갈 때면 항상 지훈이 가운데서 걷고 두진과 목월이 양옆에서 걷곤 했는데, 지훈은 성큼성큼 걸어 앞섰으며, 두진은 매번 뒤처졌고 그 둘 사이엔 목월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걸을 때 모습을 보면, 지훈은 항상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걷고, 두진은 직선적인 자세로 정면을 응시한 채 걸었으며, 목월은 고개를 숙이고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고 한다. 이렇듯 걷는 모습이 다르듯이 이들의 성격이나 시 세계 또한 달랐다. 지훈은 고전미와 선미를 드러냈고, 두진은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읊었으며, 목월은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의식을 민요풍으로 노래하였다.      ▲ 『풀잎단장』 / 『창에 기대어』 / 『조지훈 시선』       『풀잎단장』은 조지훈 시인의 첫 개인 시집이다. 삐뚤빼뚤 쓰인 표지 글씨 ‘풀잎단장’은 당시 만 7세인 맏아들 광열이 크레용을 사용하여 쓴 것이다. 『창에 기대어』는 그의 첫 수상집으로, 신문, 잡지 등에 발표한 수필, 감상문 등을 한자리에 모아서 펴낸 책이다. 『조지훈 시선』으로 지훈은 1956년에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조지훈 시선』이후 그의 시집에는 역사의식이 담겼다. 1959년 발간된 『역사 앞에서』는 광복 직전∙직후의 시편들이 함께 실려 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던 지훈이었지만,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역사의 증언자나 저항시인이 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의 시편은 『여운』(1964년)에도 계속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정리하는 뜻에서, 그동안 빠졌던 시편을 함께 간추려 출판한 시집 『여운』은 지훈의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 지훈은 긴 여운을 남긴 채 50도 안 된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지훈이 생전에 사용했던 여러 유품도 볼 수 있었다. 그가 30대 중반에 착용한 검은색 모자와 가죽 장갑, 40대에 사용했던 부채, 행사 때 주로 사용하던 넥타이와 안경 등을 보니, 그가 생전에 꽤 멋쟁이였을 것 같다. 한쪽 벽면에는 부인 김난희 여사가 서예와 회화로 남편의 시를 표현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힘찬 붓의 놀림과 섬세한 색감이 조지훈 시인의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오른쪽 그림) 지훈의 막내아들(조태열)이 고등학생 때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     조지훈이 서재에서 집필할 때 쓰던 문갑과 서예도구 문학관에는 유독 지훈의 초상화가 많았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그린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감수성과 어머니의 그림 실력을 물려받아서였는지, 그 그림들은 하나같이 감각적이었다.           문학관의 끝, 한쪽 벽면에는 조지훈 시인 삶의 단상을 보여주는 백 개의 사진이 걸려 있다. 맞은편에는 투병 중에 여동생과 함께 낭송했다는 시 「낙화」가 흘러나와,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볼 수 있다.         ▲ 호은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밖으로 나오니 멈췄던 비가 다시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에는 애매한, 간지러운 빗방울이었다. 가방으로 머리를 감싸고 조지훈 시인이 태어난 호은종택으로 향했다. 호은공 조전이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앉은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그 집은 주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일부 불탄 것을 1967년 복구하였으며, 경북 북부 지방의 일반적인 반가 형식인 ‘ㅁ자형’ 몸채에 ‘ㅡ자형’ 대문채가 결합한 형태다.       어디선가 빗방울 튀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물이 고인 석조가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개구리가 생물인지 조형물인지 결국 확인하지 못했다. 혹시나 내게 뛰어오를까 봐 발걸음 하나 뗄 때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호은종택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삼불차’가 있다. 이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첫째는 재불차(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빌리지 않는다), 둘째는 인불차(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셋째는 문불차(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다. 이러한 삼불의 정신은 수백 년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주실 조 씨들로 하여금 언제나 당당하게 인생을 살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 지훈시공원   호은종택과 문학관 뒤편에 지훈시공원이 있다. 산골짜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조성한 공원에는 지훈의 동상과 함께 시비 27편이 세워져 있다. 한 작품씩 감상하며 나무계단을 따라가다 보니 쉴 수 있는 쉼터와 자그마한 공연장이 있었다.      ▲ 정자에서 바라본 조지훈 시인의 동상과 승무 시비   얇은 紗(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빈 臺(대)에 황촉 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 梧桐(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방울이야 /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번뇌)는 별빛이라 //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합장)인양 하고 //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삼경)인데 / 얇은 紗(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 조지훈, 「승무」     ▲ 월록서당. 경북유형문화재 제172호  (현판의 글씨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 선생이 직접 쓴 것)     주실 마을을 뒤로하니 입구였던 마을 길이 출구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월록서당이었다. 지훈은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영양보통학교에 몇 년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이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가 일제의 교육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지훈이 선대의 가학을 이어받아 가문을 지키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학∙조선어∙수신∙역사 등의 과목을 공부하였다. 월록서당은 늘 머릿속으로 생각해오던 서당의 모습이었다. 계단과 대청마루 사이에 턱이 높아, 올라가려면 다리에 힘을 많이 주고 펄쩍 뛰어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   민들레 꽃 - 조지훈(趙芝薰)   까닭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 꽃 한송이도 애처럽게 그리워 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인가 소리쳐 부를수는 없는 아득한 거리에서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 오리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세상 온전히 뒤에 남을것   잊어버린다. 못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조지훈(趙芝薰) / 1920∼1968 시인. 본명은 동탁(東卓). 지훈은 호. 경북 영양에서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독학으로 검정 고시에 합격한 후 혜화 전문 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 전문 강원의 강사를 지냈으며, 광복 후 조선 문화 건설 협회 회원 및 명륜 전문 강사를 거쳐 사망 때까지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1939년에 지에 [고풍 의상] [승무] [봉황수]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에 동기생인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을 간행하여 이후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초기 시는 민족적 정서와 자연 등을 소재로 삼았고, 후기에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1957년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 고려대 민족 문화 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를 기획, 등의 논조를 남겼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시집으로 등과 수필, 평론집으로 , 역서로 이 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가 건립되었다.   조지훈시인의 주도 18 단계를 아시나요? 조지훈 선생님은 '신출 귀몰의 주선' 혹은 '행동형의 주걸'이라고 불리셨다고 합니다. 밤새 눈 한번 붙이지 않고 통음을 하셔도 절대 자세를 흐트리는 법이 없으셨다고해요.   이런 선생님께서 술을 마시는 격조, 품격, 스타일 그리고 주량 등을 따져 만드신 선생님만의 주도 18 단계중에 여러분은 어떤 단계이신가요? - 1. 부주(不酒): 술을 아주 못 마시지는 않으나 안 마시는 사람 (9급) 2. 외주(畏酒):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8급) 3. 민주(憫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겁내는 사람 (7급) 4. 은주(隱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며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까워서 홀로 숨어 마시는 사람 (6급) 5. 상주(商酒): 술을 마실 줄도 알고 좋아도 하지만 무슨 잇속이 있어야만 술값을 내는 사람 (5급) 6. 색주(色酒): 성생활을 위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 (4급) 7. 수주(睡酒):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3급) 8. 반주(飯酒): 밥맛을 돋구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2급) 9. 학주(學酒): 술의 진경(珍景)을 배우면서 마시는 사람. 주졸(酒卒) (1급) 10. 애주(愛酒):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도(酒徒) ≪1단≫ 11. 기주(嗜酒): 술의 참맛에 반한 사람. 주객(酒喀) ≪2단≫ 12. 탐주(耽酒): 술의 진경을 터득한 사람. 주호(酒豪) ≪3단≫ 13. 폭주(暴酒):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4단≫ 14. 장주(長酒): 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 주선(酒仙) ≪5단≫ 15. 석주(惜酒):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6단≫ 16. 낙주(樂酒):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함께 유유자적 하는 사람. 주성(酒聖) ≪7단≫ 17. 관주(關酒):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게 된 사람. 주종(酒宗) ≪8단≫ 18. 폐주(廢酒): 술로 인해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열반주(涅槃酒) ≪9단≫ =======================================================================    조지훈 시인을 찾아가다                     法門 박태원 시인      북한강문학비 건립과 북한강문학제 추진계획의 일환으로 남양주시의 문화유산을 탐방하기로 하였다.  남양주시는 중앙에 솟아있는 천마산(해발 810m)을 축으로 하여 시청사가 위치하는 금곡동과 평내동,호평동,오남읍,화도읍,조안면,와부읍,양정동,진접읍이 빙둘러 안주하고 있다. 외곽으로는 축령산(879m),서리산,주금산,불암산(508m),수락산(638m),예봉산(683m),운길산(610m),문안산이 병풍처럼 둘러 서고, 남쪽으로는 북한강이 산과 산사이의 협곡을 도도히 흐르고 있어서 산과 계곡, 강의 풍광을 즐기며 살 수 있는 전원도시이다.  현재 남양주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문화축제로는 세계야외공연축제, 다산문화제, 퇴계원산대놀이, 남양주청소년백일장, 도곡도예전, 남양주합창제, 실학축전(경기도), 몽골문화촌, 국악공연, 무용공연 등이 있다.  북한강문학제가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남양주시의 대표적인 문학축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문학창작과 감상의 즐거움을 작가와 독자가 서로 향수(香受)하며 올바른 비평으로 문학적 심미안을 열어주고 한국문학사상과 정서의 지평을 넓혀야 하겠다.  창작 능력의 고양을 위해서는 문학 이론과 문학 예술의 전형성을 습득하고 세계 속에서 한국의 정서와 사상을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문화의 세기인 디지털시대를 맞이하여 사이버문학이 작가와 독자를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연결하는 문학의 마당이 되어 있으므로 전체 사이버 문학클럽이 하나로서 네트워크될 수 있도록 조치하면 각 클럽의 개성을 발전시키면서 전체인 한국문학의 발전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야외문학제에서는 시, 수필, 단편소설을 낭송하거나 시화전, 시사전을 열어 발표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현장에서 여러 가지 테마의 문학투어를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강 야외예술공연장 인근에 있는 금남산 등산코스, 두물머리 다산기념관, 모란미술관, 금남유원지 나루터, 남양주 영화촬영소, 운길산 수종사 등이 문학예술기행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세미나를 개최하여 강연과 토론을 통하여 문학사상의 비젼을 넓혀야 하겠다.  남양주시에 연고가 있는 문인, 지사, 선비들의 유적과 작품을 발굴하고 정리 연구하여 발표하는 일도 앞으로의 과제이다.     우선 남양주시 화도읍에 있는 조지훈 시인의 묘소(위치:마석우리 심석고등학교.마석교회 뒤)를 탐방하고 선생의 삶과 사상,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감상하기로 한다.    조지훈 시인의 묘소는 천마산 봉화산 송라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양지바른 기슭에 있는데, 특이하게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모친(全州 柳씨)의 분묘 앞에 나란히 누워있다. 1920년 경북 영양군에서 출생한 조지훈 시인은 지병으로 인하여 48세인 1968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귀천하셨다. 형은 젊은 나이에 돌아 가시고, 어린 자신에게 한학을 가르쳐 주시고 사랑해 주시던 할아버지(趙寅錫:구한말 서헌부 대간)는 1950년 7월에 자결하셨다. 아버지(趙憲永 :한의사,초대.2대 국회의원)도 6.25전쟁의 와중에 납북되셨으니 육친을 別離한 고통이 심하셨을 것이다.   절망의 일기 어디로 가야하나 배수의 거리에서/문득 이마에 땀이 흐른다//아침밥이 모래같다/국물을 마셔도 냉수를 마셔도/밥알은 영 넘어가지 않는다//마음이 이렇게도/육체를 규정하는 힘이 있는가//마포에서 인도교 다시 서빙고 광나루로/몰려나온 사람들 몇 십만이냐//붉은 깃발과 붉은 노래와 탱크와/그리고 사면초가 이 속에 앉아//넋없이 피우는 담배도 떨어졌는데/나룻배는 다섯척 바랄 수도 없다//아 나의 가족과 벗들도 이 속에 있으련만/어디로 가야하나 배수의 거리에서//마침내 숨어 앉은 절벽에서/한 척의 배를 향해 뛰어내린다//헤엄도 칠 줄 모르는/이 절대의 투신//비오던 날은 개고 하늘이 너무 밝아 차라리/한강의 저 언덕에서 절망이 떠오른다 처참한데//아 죽음의 한순간 延期    선생은 20세 되던 해에 김난희씨와 결혼하여 3남1여를 슬하에 두었으며, 묘비명은 청록파 시우인 박두진 시인이 쓰셨다. 선생은 19세의 약관(若冠)의 나이에 “고풍의상”,“승무”,“봉황수”로 시단에 나왔고, 일제 강점하의 이차대전말기의 암울과 강개를 오직 시와 학문과 참선으로 오대산 깊숙이 숨어서 달래었다. 선생은 학문과 詩, 志氣가 鼎足의 균형을 이루어 당대에 크게 명성을 떨쳤다. 순수한 良心의 문사이며 대쪽같은 선비셨다. 시집으로 “풀잎단장”(1952), “조지훈 시선”(1956), “역사앞에서”(1959), “여운”(1964)을 발간 하였고, “한국민족문화사 서설”,“한국민족운동사”를 저술하였다. 조지훈 시인은 21세에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방한암(초대 종정)선사께서 주석하시는 오대산 월정사에 가서 불교외전 강사를 하였다. 이곳에서 詩禪一如를 모색했으며 시어의 압축과 상징을 얻었다.   화체개현(花體開顯)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 자루도 못다 녹인 채 사라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적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해방 후에는 문화전선의 전위가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산상(山上)의 노래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굽이굽이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6.25 골육상쟁의 비통함을 목도하고 “다부원에서“를, 4.19혁명의 파도치는 감격을 노래하는 ”혁명“을 남겼다.   다부원에서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묻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혁명 아 그것은 洪水였다./골목마다 거리마다 터져나오는 喊聲/백성을 暗默 속으로 몰아넣는//양심과 純情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른/푸른 샘물이 넘쳐 흐르는/쓰레기를 걸레 쪽을 구더기를 그/罪惡의 구덩이를 씻어내리는/아 그것은 波濤였다./東大門에서 鐘路로 世宗路로 西大門으로/逆流하는 激情은 바른 民心의 새로운 물길,/피와 눈물의 꽃波濤/東大門에서 大韓門으로 世宗路로 景武臺로/넘쳐흐르는/이것은 義擧 이것은 革命 이것은/안으로 안으로만 닫혔던 憤怒//온 長安이 출렁이는 이 激流 앞에/웃다가 외치다가 울다가 쓰러지다가/끝내 흩어지지 않는 피로 물들인/온 民族의 이름이여/일어선 자여//그것은 海溢이었다./바위를 물어뜯고 왈칼 넘치는/不退轉의 意志였다. 고귀한 피값이었다.//正義가 이기는 것을 눈 앞에 본 것은/우리 평생 처음이 아니냐/아 눈물겨운 것/그것은 天理였다./그저 터졌을 뿐 터지지 않을수 /없었을 뿐/愛國이란 이름조차 차라리/붙이기 송구스러운/이 빛나는 波濤여/海溢이여!   조지훈 시인의 시의 편력은 심미주의, 禪의 미학, 방랑시, 생명에의 향수, 애정, 사회시로 변천하는데, 이는 묘사시에서 상징시, 실제시(實際詩)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고전적 우아미를 무용(승무), 의상(고풍의상), 건축(봉황수), 도자기(향문)에서 발견하였고, 감정과 생각을 초탈하여 자연을 직관으로 관조하는 선의 적적한 美(마을,고사,산방)를 구현하고, 나아가 格外의 본성은 생명에의 경외심으로 발현되어 자연의 생명과 동화되어(흙을 만지며,화체개현,밤,창) 역사의 질곡에서 고통받는 동포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됐다.(패강무정,다부원에서,혁명) 1948년부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민족의 사상과 정서의 미학을 연구하여 정리하였다. 한국민족의 사상의 뿌리를 하,은,주 이전의 東夷文化圈인 고대국가 배달국,단군조선에서 찾았다. 천인합일의 샤머니즘적인 사상과 정서가 한국민족의 마음 근저에 은근히 흐르고 외래의 사상,종교,문화의 알맹이를 융섭하여 한국전통의 문화를 이어왔다고 밝혔다.단군시대의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三一철학과 天地人합일사상은 원효,의상,퇴계,이이,정약용,최제우로 이어져 내려 왔으며, 원융무애한 격외의 멋이 한국민족정서의 미학적인 특징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지조론을 저술하여 일관되게 순수한 一心을 지키는 것이 선비의 지조이며, 역사는 혼탁한 세사의 와류에 흔들리지 않는 지사에 의하여 관조된다고 하여 문인의 道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조지훈 지조론 *【해설】 조지훈의 교훈적 중수필. 1960년 3월 [새벽]지에 발표. 1962년 같은 표제의 수필집이 발행되었다. 은 1950년대 자유당 말기의 극도로 혼란하고 부패한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이 과거에 대한 뉘우침 없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 지도자들 마저 어떤 신념이나 지조도 없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는 세태를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한 글이다.  이 작품에서는 한국인의 정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지조를 적절한 예시와 속담, 일화 등을 통해 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1950년대의 부정과 부패로 일관한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 정권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는 이들을 단죄함으로써 민족사의 새로운 자각과 지평을 열어 나가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개관】 ▶작자 : 조지훈 ▶갈래 : 중수필, 교훈적 수필 ▶성격 : 논리적, 사회적, 공적(公的), 경세적(警世的), 교훈적, 설득적 ▶문체 : 한문투의 강건체, 의고체(擬古體) ▶특징 : 비교와 대조 등의 표현 기법과 적절한 인용 및 예시 사용 ▶구성 : 서론 본론 결론의 3단 구성 ▶제재 : 지조(志操) ▶주제 :  -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지조 강조  - 지조를 지키는 삶의 중요성 ▶출전 : [새벽](1960. 3) *【표현상 특징】 다양한 일화를 제시하여 지조와 변절의 의미를 이해시킴. 정치인의 옳지 못한 행태를 준열하게 비판함. 변절을 고정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범한 범절이나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는 그 변절이 용서될 수 있다는 열린 시각을 취함. 비교와 대조 등의 표현 기교와 적절한 인용 및 예시 사용했고, 단정적인 어투와 힘이 넘치는 문체로 독자의 공감을 유도하고 있다. *【어휘·어구 풀이】 :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지켜 나감 : 위엄이 있는 엄숙한 차림새 : 곤란하고 고통스러움 : 타일러 깨우침 : 정권을 이용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는 무리들 : 권모와 술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인정이나 도덕도 없이 권세와 중상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쓰는 술책. : 청렴하고 결백하며 공평하고 정대함 : 청렴하고 결백하며 강직하고 씩씩함. : 침을 뱉고 욕을 마구 퍼부음 : 음탕한 여인과 같은 : 홀아비 : 아내를 여읜 뒤 아내를 다시 맞음 : 본능적 욕구에 의해 발생되는 고통 : 웃음을 참을 수가 없음 : 무슨 일이 그러려니 하고 저 혼자 속으로 믿고 겉에 드러냄 : 간사한 재주와 지혜 : 남을 욕함. :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 : 부부가 아닌 남녀가 합의하여 육체적으로 관계함 : 몇 해 전으로부터 지금까지. 근래 : 같은 궤도. 같은 선상에 있음 : 다스리지 : 현철하고 정조가 곧은 아내. : 지사인 시인 : 임금의 재결. 옳고 그름을 가리어 결정함 : 매천의 붓 아래에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 : 배고픔을 좀 참으라 : 어지러운 정치 : 가난하기가 마치 물로 씻은 듯 심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음. : 지조를 지닌 분들은 생활의 모습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말하여, 지조를 지키는 일이 범상(凡常)치 않음을 강조한 표현. : 이 글을 쓰는 이유, 즉 정치가들이 지조를 지키며 올바른 정치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러난 부분이다. : 변절자들은 나름대로의 핑계거리를 돌려대지만, 그 결과는 오욕(汚辱)을 자취(自取)하는 것이다. : '국민 총력 연맹 조선어 학회 지부'라는 어용 단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지킨다는 민족적인 일을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비난받지 않는 것과는 달리, 민족을 위한 아무런 업적이 없이 변신(變身)만을 한 이들은 변절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 매천의 붓에 한 번 오르면, 이에 완전한 사람이 없다. 평생 의를 위해 지조를 지킨 황매천 시인의 모습이 잘 나타난 표현으로, 그의 필봉 또한 매우 날카롭고 비판적이어서 당시의 인물들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현 세태의 보편적 분위기를 일러주고 있다. 지조를 지키기 어려운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전문】  조지훈 지조론 『- 변절자를 위하여 -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확고한 집념)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엄숙한 차림새)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깨우침의 각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정치가와 경제활동하는 상인의 결합)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떠다님)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전체의 충정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廉潔,청렴과 결백), 공정(公正), 청백(淸白), 강의(剛毅,굳고 의연함)한 지사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침뱉고 꾸짖음)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 환락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極言)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홀아비)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아내를 여읜 뒤 새 아내를 얻음)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와 고위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떡거리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뿌린다고 굶주리고 얻어 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이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 놓는 것은 분반(噴飯,웃음이 터져 나옴)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 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자시(自尊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기이한 성벽)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 단재(신채호)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들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이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교활한 슬기)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綻露)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에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變節)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의 변절자로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전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침을 뱉음)되기는 했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 , 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愚), 육당, 춘원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말의 대일 협력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벋겨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숙제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 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만근(輓近) 30년래에 우리 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 남로당의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년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착 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이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 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늦게 배운 잘못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 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 깨달음이 갑작스러움)히 깨우치라. 한일합방 때 자결한 지사시인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을 보면 민충정공, 이용익 두 분의 초년 행적을 헐떧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의 탁류 - 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형색은 딱하기 짝이 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小忍飢.배고픔을 조금 참다)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아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으로 소일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씻은 듯하다)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초연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고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병을 내 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 밥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쏠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小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이 있다. 야당에서 권력으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중요한 요직)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 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良心)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개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는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全文)   *【감상】 이 글은 1960년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상 모습을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지조란 역사의 개관적 상황을 냉철히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올바른 길을 판단하고 그것을 초지일관(初志一貫) 밀고 나가는 것이다. 또한 세태에 따라 다소 태도를 바꾸더라도 개과천선(改過遷善)으로서의 변절(變節)일 때는 도리어 지조를 찾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변절은 단순하게 '절개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옳은 신념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를 하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태를, 간접적 체험을 사례로 들어가며,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한 민충정공,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에는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비난받는 자들이라도 열심히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의 전반부에서는 지조의 정의와 가치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이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개진하고 지조에 관한 자신의 신조를 펼쳐 보인다. 아울러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개진하고 지조에 관한 자신의 신조를 펼쳐 보인다. 아울러 지사와 정치가는 다른 것임을 유연하게 인정하면서도 난국의 지도자는 직업 정치인보다도 지사적 품격을 갖춰야 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이 수필은 정치적 혼란기에, 권력에 야합하면서 스스로 신의를 저버린 정치 지도자에 대한 준열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변절자를 겨냥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하다. 자기 생활의 기록으로서의 수필은 이처럼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과 관련되어 있다. 작가는 정치 지도자를 일반 민중과 구별한다. 일반 민중은 지조를 꺾고 살아도 되지만, 정치 지도자만큼은 변절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작가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위해 이 글을 썼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만큼, 그만한 책임도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에게 지조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지조는 우국지사의 충성심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정직성, 신의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일반 민중에게는 지조를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 말은 일반 민중의 인격을 무시해서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정치 지도자에게 지조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생각을 바꾸면                          /박 완 서---  그들은 그런 대로 재미가 있을지 몰라도 당하는 쪽에선 고문과 같았다. 나중에는 참다못해 느네들한테 노래할 자유가 있는데 나한테는 왜 안 할 자유가 없냐?고 외치고 말았다. 너무 진지하게 외쳤던지 나름대로 흥청거리던 분위기 일순 서먹해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지만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아지는 게 아니었다.  (중략 : 유신 시절 남들이 자유를 외칠 때 이를 남의 일인 듯이 외면하고 있었다는 고백이 이어져 나온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데서 자유를 찾는 자신의 모습이 더 부끄럽다는 진술이 담겨 있다.)  나는 나의 유치함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 그 고약한 기분은 다음날까지 계속됐다. 7,80년대를 끽소리 한 마디 못 하고 살아남은 주제에 고작 노래방에서 웬 자유씩이나, 그 생각만 하면 창피하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그런 자기 혐오는 나는 왜 노래도 못할까? 하는 열등감으로 이어져 온종일 우울했다. 그러고 있는데 고등 학교 동창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왜 목소리가 그 모양이냐고 먼저 이쪽의 우울증을 짚어 내기에 나는 왜 노래도 못 할까? 하면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친구는 딱하다는 듯이 네가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허게, 라고 말하는 게 하닌가. 나는 그 한 마디를 뛸 듯이 반기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확인까지 했다. 기분이 담박 맑아졌다. 노래도 못 한다고 생각할 적엔 나 같은 건 이 세상에서 무용지물(無用之物)과 다름없더니,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느냐는 소리를 들으니까, 노래만 빼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줄줄이 떠올랐다.  10년 전 참척(慘慽)을 당하고 가장 힘들었던 일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하는 원망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는 거였다. 원망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부끄러움까지 겹쳤다. 저 여자는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저런 일을 당했을까? 수군거리면서 손가락질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이 나만 보고 흉보는 것 같아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어도 하늘이 부끄럽고 땅이 부끄러웠다. 슬픔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게 원망과 치욕감이었다. 하늘도 부끄럽고 땅도 부끄러웠고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피할 곳이 없으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때 만난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한 마디 말이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을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       ▲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조지훈 묘역          풀잎 단장(斷章)                                          - 조지훈 -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히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히 피어오르는 한 떨기 영혼이여.                                        -(1952)-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사색적, 선(禪)적, 산문적 ◆ 표현 : 그윽한 어조와 서술적 이미지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단장 → '짧은 시가나 문장'이란 의미로, 완전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글을 가리킨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겸손의 표현    * 무너진 성터 ~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가는 언덕        → 화자가 현재 서 있는 시적 공간으로, 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 떠가는 구름이 있는 언덕에 화자는 서 있다. 바람은 강한 성도 무너뜨리고, 단단한 바위도 깎아 버리는 큰 힘을 지닌 것으로, 화자가 현재 있는 언덕은 이 같은 바람이 지금도 불고 있음을 떠가는 구름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        → '조찰히'는 '깨끗하다'의 의미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풀잎을 표현한 것이다. 이 부분만 볼 때 바람은 풀잎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긍정적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다르게 접근해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풀잎은 현재 성과 바위에 비해 연약한 존재이면서 그것들과는 달리 시련(=바람)을 참고 견디며 시간의 흐름에 그 영혼을 내맡기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 풀잎과 화자가 서로 동화(同化)되는 모습을 형상화함.    * 우리들 →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되는 부분이다. '우리'는 풀잎과 화자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공동체 의식이나 동질감을 드러낼 때 쓰이는 표현이다. 전반부에서 화자와 풀잎은 서로 구분된 관계였지만, 3행과 4행을 거치며 화자는 풀잎과 동화됨을 느끼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해 너와 나는 '우리'로 보다 가까워지게 됨.    * 아름다운 분신        → '우리'와 의미상 유사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분신이란 풀잎에 대한 화자의 동질감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 '고달픈 얼굴'은 화자와 풀잎을 아우르는 표현으로 화자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보고 고달픈 얼굴이라는 주관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고, 동시에 이 표현을 통해 화자의 처지 또한 추측해 볼 수 있다. 화자 또한 풀잎처럼 세상의 힘겨움으로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모진 바람을 묵묵히 견뎌내는 풀잎을 보며 '웃으며 얘기하노니'라 하여 교감(=동병상련)과 함께 풀잎으로부터 삶의 위안을 받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        → 시적 공간인 언덕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때의 흐름'은 의미상 바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 한 떨기 영혼 → 연약한 존재이면서도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묵묵히 바람을 견디며 서 있는 풀잎의 강인한 생명력을 비유를 통해 화자의 경회감을 드러내고 있다.     ◆ 제재 : 풀잎 ◆ 주제 : 고달픈 삶의 체험과 생명에의 외경감            운명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삶 [시상의 흐름(짜임)] ◆ 1~2행 : 화자가 서 있는 언덕의 풍경(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 떠가는 구름) ◆ 3~4행 : 풀잎을 바라보는 화자의, 자연에 동화된 감정 ◆ 5~6행 :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옹호 ◆     7행 : 화자의 풀잎에 대한 경외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고 있으며, 와 같은 총체적인 상황 인식의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시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또는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키며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풀잎 단장』의 표제시로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잎을 새롭게 조명하여 생명의 신비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풀잎이란 단순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적 존재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과도 같이 조그만 고통에도 동요하고 번뇌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시인은 풀잎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자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의 반성적 타자(他者)로 설정한 풀잎을 통해 주어진 운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는 여유로움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지친 영혼을 내맡기는 삶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이 시의 시상 전개를 살펴보자.   → 1행에서는 풀잎이 피어 있는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고 있다. '무너진 성터, 풍설에 깎여 온 바위'는 풀잎의 생명력이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2~4행에서는 허무하고 뜬구름 같은 인생을 관조하면서 한 줄기 바람에 산뜻하고 깨끗하게 온갖 고뇌를 씻어 버리는 것 같은 풀잎을 바라보는 시인의 자연에 동화된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5~6행에서는 영탄적 어조로 바뀌면서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된다. 작자의 인간관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옹호의 시선으로 변주되어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 행에서는 시적 자아의 풀잎에 대한 경외감이 드러난다. 풀잎을 통해서 대자연의 질서를 느끼고 있다.   2. 이 시의 시상 전개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이 작품은 우주의 조화와 생명 감각을 형상화한 시로, 자연의 위대성에 대한 자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3. 이 시에서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행을 찾아보자.   → 5행 : '나'에서 '우리'로 시상이 전환된다.   4. 시적 화자가 생명 현상에 대해 경건한 동화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자.   →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5. 이 작품에 드러난 '풀잎'의 자세를 생각해보자.   → 풀잎은 주어진 숙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혀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그 영혼을 내맡기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6. 이 시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심리적 태도를 살펴보자.   → 의연함, 담담함, 고고함, 경건함   7. 이 시에서 '풀잎'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자.   → 이 시의 '풀잎'은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자재(自在)하는 존재로, 이 시에서 '풀잎'은 단순한 자연물도 아니고 어떤 사회 정치적 함의를 지닌 상징물도 아닌, 생명의 무한한 신비를 담고 있는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것은 무한한 우주와 자연에 비해 볼 때 아주 미미하고 연약하고 유한하지만, 그와 같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겸허하게 수용할 줄 아는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풀잎'은 지고지순한 존재로 고양된다. 이때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자신을 둘러싼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풀잎'이 인간의 가장 본래적인 모습(혹은 조지훈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임은 말할 것도 없다.   8. 이 시에서 자연의 원리가 지속과 변화라는 두 가지 법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시어를 찾아보자.   → 바위, 구름 : 풍설에 깎여 왔지만 한 곳을 지키고 있는 '바위'는 변하지 않는 자연이며, 아득히 손짓하며 더가는 '구름'은 늘상 변화하는 자연이다. 이 둘의 대조는 자연의 원리가 지속과 변화라는 두 가지 법칙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9. '고달픈 얼굴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에 나타난 화자의 심리적 태도를 생각해 보자.   → 세속적 삶의 어려움을 자연 친화와 교감을 통해서 화해하고 극복하려고 한다. :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풀잎을 바라보며 '나'는 어느 새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작은 존재로 축소된다. 즉 '나'는 '풀잎'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대자연의 일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자연)'과 고달픈 삶을 사는 '나(인간)'는 친화와 교감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세속적 삶의 어려움을 자연과의 친화와 교감을 통해서 화해하고 극복하고자 한다. \\\\\\\\\\\\\\\\\\\\\\\\\\\\\\\\\\\  '이상 연구'로 사학도 소리를 듣다  종국이 의 ‘이상편’에서 쓴 바에 따르면, 이상은 생전에 단편 9편, 수필 약 20편, 그리고 시 99편을 남겼다고 돼 있다. 제2권(시집)에 실린 작품을 일별해보자. 먼저 ‘척각(隻脚)’ 등 미발표 유고 9편, 오감도(烏瞰圖) ‘시(詩) 제1호’부터 ‘시(詩) 제15호’까지 15편, 다시 ‘오감도’ 편의 8편, ‘무제’ 편의 13편, ‘이상한 가역반응’ 편의 7편, ‘이단(易斷)’ 편의 5편, ‘3차각설계도’ 편의 7편, ‘위독(危篤)’ 편의 12편, ‘건축무한육면각체’ 편의 7편 등 모두 83편이 실려 있다. 말미의 부록편에는 일어로 쓰여진 미발표 유고 9편 등의 일어 원문을 실었다.  본문에 앞서 일문 시 역자인 유정씨의 한 마디에 이어 ‘미발표 유고’ 9편을 직접 번역한 종국의 한 마디도 언급돼 있다. 이어진 ‘소개의 말’에서는 그가 미발표 유고 9편을 입수한 경위를 언급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상이 도쿄에서 작고했을 때 그의 미망인이 도쿄에서 가지고 나온 고인(이상)의 사진첩 속에 밀봉돼 있던 것을 그 후 20년간 유족(부인)-모친-누이동생 손을 거치면서도 사진첩으로 여기고 보관해 오다가 이번 간행을 계기로 우연히 발견해 입수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제작연도는 알 수 없으나 지질 등을 미루어 볼 때 이상이 도쿄 시절에 쓴 것이라는 것이 종국의 평가다. 종국은 자신의 눈앞에서 그 밀봉된 것을 뜯고 작품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고인의 많은 말인 양 감개무량했다”고 적었다.  마지막 제3권은 수필 18편을 싣고 있다. 부록으로 이상 연구, 이상 약력, 작품연보, 관계문헌일람 등을 실었다. 이 책에서 주목할 대목은 부록편이다. ‘이상 연구’는 앞서 밝혔듯이 1년 전(1955년) 12월에 에 ‘이상론 1’로 발표한 글을 독립된 형식으로 수정, 개작한 것이다. 그의 첫 ‘이상 작품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지는 “스스로 ‘최후의 모더니스트’가 되어버린 이 ‘비극의 담당자’는, 절대자의 폐허에서 발생하는 모든 속도적 사건-절망, 부정, 불안, 허무, 자의식 과잉, 데카단, 항거 등 일체의 정신상의 경향-을 그의 문학에다 반영함으로서, 실로 보기 드문 혼돈, 무질서상(相)을 일신에 구현하고 만 것이었다”에 압축돼 있다고 본다. ‘이상 약력’ 항목의 끝에서 ‘본 약력은 의 기록을 실지조사에 의하여 정정보필(訂正補筆)한 것임’이라고 밝힌 걸로 봐 ‘선집’에서 오류가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작품연보’ 항목에서도 ‘본 연보는 실지조사로서 확인함 것임’이라고 밝혀 편찬 과정에서 꼼꼼한 현장조사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3권 말미에 ‘발(跋)’, 즉 발문이 실려 있는데 본문만큼이나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아직 그는 문단에 얼굴조차 제대로 내밀지 못한 형편인데 문인을 거쳐 벌써 ‘사학도’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R형(兄)’이라는 사람한테서 ‘형! 형은 그만 사학도가 되셨구먼요’라는 얘길 들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는 그간 ‘사이비 사학도’가 겪은 고통, 어려움 등을 마치 작심했다는 듯이 털어놓고 있다.  “단 한 항(項)의 약력을 확인하고저 어떤 경우에는 5, 6개소(個所)를 찾고, 7, 8종-20여 권-의 문헌을 뒤적였으니 그런 나를 ‘사학도’라 한 R형(兄)의 말에 조금도 과장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도 일자 미상(未詳)이 태반인 ‘약전(略傳)’ 밖에 쓸 수 없을 때, 참 20년이라는 세월의 무서움이 통감되었다. 출판을 위해서만 그 막대한 원고를 10독(讀)했음을 고백하며, 그 외의 일은 속상하던 말과 고심담(苦心談)은 차라리 잠잫고(잠자코) 말기로 한다...”  그가 발문 첫 줄에서 “이 전집은 ‘젊은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드리는 정성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앞의 ‘젊은 세대’는 누구이며, 또 뒤의 ‘젊은 세대’는 누구인가? 나는 앞의 ‘젊은 세대’는 종국 자신과 같은 또래의 세대이며, 뒤의 ‘젊은 세대’는 그보다는 조금 어린 세대를 지칭한 것이라고 본다. 을 엮어낼 당시 종국은 27세였다. 그러니 아직은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러나 그보다 너댓 살만 어려도 상당한 세대차이가 있다. 즉 1945년 해방 당시 종국은 16세로, 경성농업학교 3학년을 마칠 때였다. 일반학교로 치면 중학교 3학년 졸업반이다. 종국의 경우 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너댓 살 아래인 아우뻘들은 일어가 자유롭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일제시대의 사안을 일제시대를 경험한 선배 세대들이 후배들에게 ‘서비스’하겠다는 그런 의미로 봐야할 것이다. ‘선물’이라는 용어가 바로 그 증좌인 셈이다.  이런 나 나름의 해석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문학평론가 방민호도 얼핏 그런, 즉 나와 비슷한 생각(?)을 암시하고 있어 반가웠다. 그는 (향연, 2003)에서 “1929년생 임종국, 1932년생 고석규, 1934년생 이어령, 1936년생 김윤식 가운데 이렇게 언어를 넘어 현실과 역사로 직접 육박해 들어간 것은 ‘친일문학론’(평화출판사, 1956)을 쓴 임종국 뿐이었다”고 썼다.  김윤식은 8월 초 전화인터뷰에서 “임 선생 세대가 일본말을 배운 마지막 세대다. 임 선생은 일본책을 볼 줄 알고, 또 일본말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1936년생인 나는 일본말을 배워서 공부했다. 이상 연구나 친일문학 연구는 그들 세대가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마지막 5년’을 시봉(侍奉)한 김대기(1955년생, 전 ‘지평서원’ 대표, 경북 포항 거주)에게 “언어란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변하는 것이어서 옛날 용어를 지금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힘들다”며 자신이 생전에 직접 그런 것들을 처리(연구)하려 했다고 김대기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지만 짚고 넘어 갈 게 하나 있다. 은 실질적인 편자가 임종국이라는 사실은 만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판권란의 ‘편자’ 항목에는 엄연히 ‘임종국’ 석 자가 박혀있다. 그런데 스파인(책등)이나 판권란 박스 하단에는 이와는 별도로 ‘고대문학회 편’이라고 박혀 있다. 그러면 대체 고대문학회의 실체는 무엇이며, 또 출간과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당시 고대문학회 회원이자 종국과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몇 들어보자.   고대문학회 주최 '문학의 오후' 행사에서 특강을 하는 조지훈(사진-박노준 제공) 시인 인태성에 따르면, 고대문학회는 조지훈을 따르는 고려대 내의 문학도 모임이었다고 한다. 회원은 10여 명 정도. 여기서 를 발행했는데 이 매체는 고대 출신 문학도들의 창작활동을 독려하는 터전이 되었다. 종국이 ‘이상론’을 여기에 발표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박희진(1931년생, 서울 수유리 거주)에 따르면, 당시 조지훈은 고대출신 모든 문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종국이 이상 연구를 시작한 것도 조지훈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당시 조지훈은 국문과 교수였는데, 이들은 국문과 학생들은 아니었지만 (종국-정치학과, 인태성․박희진-영문과) 조지훈을 따랐다. 이들은 나중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대개 문단에 데뷔했다. 종국이 나중에 신구문화사에 취직할 때도 조지훈의 추천으로 들어갔을 정도로 조지훈은 이들의 ‘후견인’ 같은 존재였다. 을 ‘고대문학회 편’으로 한 것은 이런 전후 사정 속에서 하나의 ‘공동작업’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 같다. 앞서 언급한대로 인태성은 실지로 종국의 작업을 도와주기도 했다.  (* 이들보다는 후배이자 역시 고대문학회 회원 출신인 박노준(1938년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전 한양대 인문대 교수)은 1956년 4월에 입학했는데 신입생들에게 제1집을 무료로 나눠주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제2집을 내지 못하자 고대문학회는 동호인 모임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이들은 출판활동 대신 1년에 두 세 차례 문학발표회를 가졌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 서울은 제대로 복구되지 않아 종로의 YMCA 건물도 파괴된 채 그대로였다. 이들은 일부 성한 YMCA 건물을 빌려 행사를 갖기도 하고 더러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3층 꼭대기에 있던 ‘음악궁전’을 빌려 ‘문학의 오후’ 행사를 갖곤 했다. 조지훈이 연사로 나와 특강을 하기도 했는데 전후 폐허에서 문화에 굶주린 청년들에겐 단비 같은 행사였고, 그래서 인기도 대단했다. 한동안 후속호를 못내던 는 1960년 2학기 초 무렵 학교측의 제작비 지원(절반)으로 제2집을 발행하게 됐다)  - 조지훈과 고대문학회  한편 당시 조지훈은 의 ‘주간교수’를 맡고 있으면서 이곳에 이들이 글을 쓸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종국도 에도 더러 글을 기고했었다. 인태성은 종국이 에 ‘이상시론’을 쓴 걸 보고 찾아가서 만났다고 했다. 또 법학과 학생으로 당시 의 기자(나중에 편집국장 역임)로 활동하고 있던 신근재(1929년생, 서울 수유리 거주, 전 동국대 일문과 교수)는 “임종국이 에 투고할 글을 가지고 자주 신문사 출입을 해서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나중에 종국의 첫 부인이 된 이선숙도 이곳에 소설을 연재했다.(신근재 증언) (* 은 국내 대학신문의 효시로, 초창기에는 부정기적으로 간행됐다. 창간초기 편집, 광고를 모두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했었다. 서울대의 의 경우 전시연합대학 시절 창간된 것으로, ‘범(汎)대학신문’ 성격을 띄고 있다. 제호에 ‘서울대’라는 특정학교 교명을 못박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지훈의 화신’(신근재 증언)이라고 불린 박희진은 조지훈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종국, 인태성(이상 모두 52년 입학)보다 2년 앞서 1950년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한 박희진은 피난 시절인 1952년 대구 임시교사에서 조지훈을 처음 만났다. (* 종국은 박희진이 두 살 아래였지만 대학 입학이 2년 빨라서 선배 대접을 했었다)  당시 조지훈은 ‘공초 오상순’을 강의하고 있었다. 조지훈의 첫 인상은 큰 키에 머리는 장발이었고 얼굴은 하얗고 수즙은 표정이었다고 박희진은 기억하고 있다. 박희진은 그간 써놓은 시 몇 편을 조지훈 앞에 꺼내놓으며, 작품평을 감히 부탁했다. 시를 훑어본 조지훈은 “이만하면 수준작이다. 신문에 발표해도 되겠다. 내가 알선해 주겠다”며 적극적으로 호의를 보였다. 이후 박희진은 조지훈을 따르게 됐고, 그런 인연으로 성북동 조지훈의 댁으로 자주 놀러가기도 했었다.    종국을 아끼고 물심양면으로 지도해줬던 조지훈 선생 종국과 조지훈가(家)와의 인연을 한 줄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이번 일로 지훈의 부인 김난희(1922년생, 서울 미아리 거주) 여사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아직도 전화 속에서 들려온 김 여사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마치 옛 연인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종국에 대해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김 여사의 회고담.  “지훈 선생님은 종국씨의 정신 사상, 즉 반일사상 같은 것을 좋아해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셨다.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이 성북동 집으로 자주 놀러오곤 했는데 종국씨도 더러 왔었다. 언젠가(그가 타계하던 1989년 가을임) 선생님 생각이 나서 왔다며 밤을 한 자루를 가지고 집(성북동에서 압구정동으로 이사함)으로 찾아왔었다. 동행이 한 명 있었는데 그때 호흡하는 게 안좋아 보였다. 들어오시라고 해서 겨우 차 한 잔 대접했는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식사도 한 끼 차려드리지 못하고 그렇게 가시게 한 게 못내 마음이 아프다. 참으로 순박하고 좋은 분이셨는데 너무 일찍 가셔서 안타깝다. 내 마음에 가장 잊지 못하고 기억에 남는 분이 바로 그 분이다”  (* 김 여사는 전화통화 내내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스승 지훈 만큼이나 스승의 아내도 그를 아꼈던 것 같다. 1989년 종국이 타계하자 김 여사는 그의 빈소를 찾아가 유가족들을 위로했다.(박노준 ․ 김대기 증언) 그러나 이번 전화통화에서 김 여사는 자신이 문상을 갔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올해 연세가 82세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면서도 종국의 아내 근황을 물으며 만나보고 싶다고 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김 여사는 미아리 원룸에서 둘째아들의 손녀와 같이 살고 있는데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했더니 늙은이 사는 집에 보여줄게 없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종국의 이상(李箱) 관련 대목은 이 정도에서 서서히 마무리를 해야겠다. 다만 두 가지만 짚어보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그의 이상 연구에 대한 총평, 그리고 그가 엮어낸 에 오류는 없는가 하는 점이다. 간행사에서 그는 “종래의 전재된 작품- 등 기타-에서 허다한 미스가 발견될 때 편자는 극히 불쾌하였다. 이 점 ‘미스의 전무(全無)’를 위하여 주의를 특히 거듭했으니 대과(大過)는 없으리라 자부 하겠다”고 쓴 바 있다. 상당히 자신 있어 하는 인상을 풍긴다. 물론 ‘10독(讀)’을 했다고 하니 그럴만도 하다.  그러나 모름지기 완벽이란 없다. 그런 전제에서 보면 그의 작업 성과에도 무지에서 비롯됐든, 아니면 자료의 한계에서 비롯됐든 오류는 필시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위 두 가지 사항을 동시에 짚어주는, 똑떨어지는 연구논문이 한 편 있다. ‘오류’를 지적한 대목에서는 예시도 많고, 아주 꼼꼼하게 지적해 놓았다. 조해옥씨(한남대 강사)가 쓴 ( 제2호, 2003. 1, 이상문학회)가 그것이다. 아마 종국이 생존해 이 논문을 보았다면 필시 조해옥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먼저 총평부터 보자.  조해옥은 종국의 이상 문학 연구가 갖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이후로 이상 문학에서 논의될 수 있는 영역들을 골고루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꼽았다. 요약하면 이상 연구의 선구자이자, 기초를 닦았다는 얘기다. 특히 종국이 이상의 개인 이력이나 개인적 편견으로 이상의 작품들을 재단하지 않고 객관적 시각으로 작품 자체를 해석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이상연구’는 작품분석에서 충분한 근거를 통해 이상 문학의 특질을 찾아내는 데는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즉 “그는 이상문학적 특질로 ‘절망’을 제시하고, 그 부산물로 부정과 허무와 불안을 들고 있지만 외부적 정치현실과 내부적 의식으로만 절망의 원인을 밝히고 있을 뿐 좀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표피적인 원인 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점이다.  - 의 오류들  다음은 의 오류 부분. 먼저 조해옥은 “이상의 작품집을 처음 집대성한 임종국의 작업은 이상 문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상 문학 연구를 활발하게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상 문학작품 원전을 임종국이 수정하고 정리하면서 원전의 의미가 명확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집대성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발행하였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가 에서 범한 오류는 후대에서 제대로 바로잡히지 않은 모양이다. 그가 “원전을 확인하는 노력 없이 임종국의 이상전집을 그대로 텍스트로 삼는 연구행태와 전집 발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덧붙인 걸 보면 그렇다. 그에 따르면, 종국의 이후 발간된 이어령판(, 갑인출판사, 1978), 이승훈판(, 문학사상사, 1989)에서도 원전의 원전을 오기한 부분은 수정되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임종국판보다 원전에서 더 멀어진 경우도 있단다.  그러면 조해옥 등이 찾아낸 구체적인 오류 실태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우선 과 임종국의 에서 동일하게 범한 오류로, ‘시(詩)제8호 해부(解剖)’의 “진실(眞實)”이 “진공(眞空)”으로 바뀐 것, ‘정식(正式)III’의 “시간을”의 “을”이 빠진 것, ‘소영위제(素榮爲題)’의 “네거짓말네농담(弄談)”에서 “말”이 빠진 것 등이 발표 당시의 이상의 시 원문과 다르게 표기된 부분들이다. 이어 ‘시(詩)제5호’에서 “모후(某後)”의 “모(某)가 임종국 전집과 이어령 전집, 이승훈 전집에서 “전(前)”으로 바뀌어 표기돼 있다. 또 ‘아츰’의 “유췌(惟悴)한”이 그간의 이상전집들(김승희판 전집을 제외한 임종국, 이어령, 이승훈판 전집)은 모두 “초췌(焦悴)한”으로 바뀌었다.  놀랄 만한 사실도 있다. 역시 조해옥의 논문에 나오는 얘기다. 종국이 이상의 일문시를 번역하면서 외래어에는 음절마다 모두 방점을 찍어 놓았는데 후대의 연구자들은 이런 방점이 찍힌 상태를 그대로 이상의 시 텍스트로 삼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는 후학들이 원전을 전혀 안찾아 봤다는 얘기다. 하나 더. 조선건축회가 펴낸 의 1931 8월호에는 하는 큰 제목 아래 ‘2인(二人)....1....’, ‘2인(二人....2....’ 등을 시작으로 총 8편의 일문시가 실려 있다.  그런데 임종국 전집에서 대신 라는 큰 제목이 붙어 있다. 이상이 라는 큰 제목을 붙인 것은 에 1934년 7월 24일부터 그해 8월 8일까지 게재했던 국문시 ‘시(詩) 제1호’부터 ‘시(詩) 제15호’를 실으면서 붙였던 큰 제목인 것이다. 임종국 전집 이후에 간행된 이상전집류에서 이것이 수정된 적은 없다. (* 종국은 1966년에 간행한 개정판에서는 이를 바로 잡았다)  한편 종국은 1956년 (전 3권) 출간(태성사)한 지 10년 뒤인 1966년 출판사를 바꿔 문성사에서 단행본 한 권으로 개정판을 냈다. 조용만의 서문은 그대로 실렸으나(제목은 ‘初版 序’), 달라진 것은 종국의 초판의 간행사 대신 ‘개정판 서(序)’와 ‘범례’가 별도로 추가된 점이다. 그런데 추가된 두 곳에 참고할 점이 적지 않아 보인다. 초판 간행 이후 10년간에 벌어진 일들이 더러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초판은 반년이 안 돼 매진됐으나, 1959년 12월, 즉 초판이 3년 뒤 3판 발행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절판됐다고 한다. 그러나 첫 출판사와의 신의 때문에 그 사이 추가 출판 수요가 있었음에도 출판사를 옮기지 못하다가 최종적으로 태성사에서 더 이상 출판을 할 수 없게 되자 출판사를 옮겨 개정판을 내게 됐다는 것.  눈여겨 볼 대목은 간행 후 문학계와 출판계의 변화상이다. 초판 발행 후 이를 바탕으로 이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재검토가 이상 문학의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자평했다. 또 하나는 출판계에 전집물 발행이 유행처럼 번져갔다는 것. 이를 두고 종국은 “4×6판 전 3권, 총 2천여 면(쪽)의 이상전집이 반년 미만에 매진되자 출판계에 전집 붐이 일어나면서 무슨 전집, 무슨 전집… 형형색색의 기획 출판물이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실 그 초판이 발간될 당시만 해도 많은 출판사들은 그 계획을 냉소했으며, 덕분에 편자가 원고 보따리를 싸들고 우왕좌왕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리하여 편자는 감히-자화자찬이라고 냉소할 분도 없잖겠지만-이상전집의 간행은 문학사상 또는 출판사상 아울러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범례’는 전반부는 초판의 간행사와 유사하다. 다만 초판의 부록은 그대로 살리되 ‘이상 문학의 난해성에 비추어, 또 대중의 이해에 자(資)하기 위해서’ 부록을 대폭 보강했다. ‘제5부 해성과 감상’이 그것이다. 이밖에 일문 작품은 원문과 역문 2종을 같이 수록하면서 역자 및 작품명도 공개했다.  즉 유정(柳呈)은 일문시 ‘오감도’의 8편과 ‘이상한가역반응’의 6편, 김수영(金洙暎)은 유고집 중 ‘유고(遺稿)1’ 이하의 전부(단 ‘유고4’ 및 ‘회한의 장(章)’은 제외), 김윤성(金潤成)은 ‘유고4’, 그리고 편자 임종국은 ‘3차각설계도’의 7편, ‘건축무한육면각체’의 7편, 유고집 중 ‘집각(集脚)’~‘최후(最後)’의 9편과 ‘청령’(蜻蛉), ‘한개(個)의밤’ 및 ‘회한의 장’ 등이다. ...      
1625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김기림 - 바다와 나비 댓글:  조회:3466  추천:0  2015-12-11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이 시 또한 李箱이상을 기리며 쓴 시로 이해된다. 하얀 피부에 나비수염 백구두를 신고 주피터가 된 이상, 까마귀가 된 이상, 산 오뚝이가 된 이상, 나비가 된 이상 이상은 흰나비가 되여 쫒기 듯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다. 이상의 작품 속에는 여러 번 나비 이야기가 나온다.   나비가 의미하는 바는 烏瞰圖 詩第十號 오감도시제10호 "나비"에서 보면 “나비”의 상징은 “조국의 독립 의지를 펼치는 임시정부 레지스탕스”를 이르는 말로 그려지고 있다. “나비”의 상징은 이상과 김기림, 이태준, 박태원 등이 공유한 Allegory알레고리이다.   김기림은 이상과 가장 절친한 사이였으며 이상의 멘토Mentor이기도 했다. 이상의 재능을 보고 프랑스로 같이 유학을 가자고 권유하기도 했고 이상 사후 가장 애석해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독립투쟁, 레지스탕스 활동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상이 일본에 건너간 이유는 행동파 독립군이 되어 윤봉길처럼 의거를 하려 했던 것이다. 그 활동 내용은 그의 작품 “종생기” “파첩” “봉별기” “날개” “실화” “황소와 도깨비”등등의 작품 속에 우거지 쓰레기처럼 기록해놓았다. 소설 "날개"속에는 그 계획을 알리는 통지문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 간 후 독립군 본진에서 작전취소를 통보한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그의 계획은 누설되어 실패하고 만다. 배신자가 있었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1939년 4월 -   그의 작전 개시일은 1937년 3월 3일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 1937년 2월 12일 사상불온자로 경찰에 구속된다. 일경이 어떤 제보도 없이 무작위 불심검문을 한 것은 아니었다. 누가 이 비밀을 제보한 것일까? 꿈도 펼치지 못 한 체 3월 16일 죽음 일보직전에 새파란 초생달이 되어 풀려나왔다. 3월 새파란 초생달 병상의 이상을 마지막 방문한 친구도 김기림이었다. 혹? 이상의 허리에 새파란 고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이상의 애처로운 사연을 김기림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글로 남겼다... 李箱 관하여- ...             작가명 김기림 영문/한자명 金起林 이메일 홈페이지 소개 허윤회(문학박사)   시인?평론가. 호는 片石村. 함북 성진 출생. 김기림은 1930년대 시와 시론 분야에서 동시에 두각을 나타낸 문인이다. 그는 주로 모더니즘에 입각하여 시를 제작하고 시론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더니즘이란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최재서는 「주지주의 문학이론」을 통하여 T. E 흄, 올더스 헉슬리, 허버트 리드, T. S. 엘리엇 등의 생각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있다. 흄을 통하여 전파된 모더니즘이란 가치관의 혼란으로 야기된 현실의 새로운 질서를 요망한다는 의미에서 ‘고전주의적’ 이다. 김기림의 문학관 역시 최재서의 그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고전주의적인 의미에서 모더니즘의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이다. 김기림은 ‘9인회’ 회원으로서 정지용?박태원?이태준?이상 등과 교류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여러 후배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에서 모더니즘 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정지용이나 이상처럼 시의 질적인 성취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측면을 김기림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김기림은 『바다와 나비』(1946)에서 이미지즘의 경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 「새노래」에서 보여주는 그의 목소리는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전언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기림이 1940년 무렵 낙향하여 그의 고향에서 교사직을 맡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의 제자로서 시인 김규동의 전언에 의하면 김기림은 문학도 문학이지만 물리라던가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 자신 『과학개론』등의 번역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는데, 근대문명이 안겨준 과학과 이성에 대한 확신은 그의 문학관 여기저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해방이후에 「시론」, 「시의 이해」, 「문학개론」, 「문장론신강」 등의 여러 괄목할 만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해방이전의 이론적 탐색이 봇물을 이루고 있는 형편인데 애석하게도 이에 대한 전반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없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그의 이름이 복자로 가려진 상태에서, 여러 비판의 화살을 받고 있었지만, 외국의 여러 시에 대한 소개와 이론이 범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기림의 『시론』이라는 조그마한 책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시에 대하여 공부하려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시론』이라는 책에서 위안과 불만과 고통의 편린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김기림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처음으로 뚜렷한 시론을 가진 시인이었다.《문장》   출생일 1908년 출생지 함북 성진 주요 장르 시 ○시비 있는 곳 : 서울 송파구 보성고등학교 ○글쓴이 태어난 곳 : 함북 학성군 학중 (1908. 5. 11. - ?(납북))                                                      김기림(金起林.1908.5.11∼?) 시인                                                      1. 생애와 활동.   시인, 문학평론가. 본명 인손(仁孫), 필명 편석촌(片石村), 함북 학성군 학중(鶴中) 출생. 1921년 서울 보성고보(普成高普) 중퇴, 1930년 일본 니혼(日本)대학 문학예술과 졸업, 이후 도호쿠(東北)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고향인 함경도의 경성중학에서 영어 교사를 하다가 1930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 활약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특히 시 창작과 비평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문학 활동은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한 33년경부터 본격화되어, I.A.리처즈의 주지주의(主知主義) 문학론에 근거한 모더니즘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고, 그러한 경향에 맞추어 창작에 임하기도 하였다. 1935년 장시 를 발표하고 이어서 발간된 첫 시집 (1936)는 현대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주지적인 성격, 회화적 이미지, 문명 비판적 의식 등을 포함한 장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시집 (39)에서는 이미지즘이 더욱 분명한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8ㆍ15광복 후 월남하였으며 [조선 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정치주의적인 시를 주장하였고, 서울대학ㆍ연세대학ㆍ중앙대학 등에서 문학을 강의하다가 6ㆍ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월북 작가로 분류되었다가 1988년 3월 해금 되었다.   1990년 6월 9일 서울 보성고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다. 김광균, 구상, 조병화, 김규동, 박태진 등 김기림의 동료와 그로부터 시를 배웠던 원로시인들에 의해 세워진 이 시비에는 그의 대표 시 가 새겨 있다.  2. 시인과 지식인   시인은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마음이 청정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면 그 청정이란 무엇일까? 첫째는 어린아이 와 같이 천진난만한 마음이요. 둘째는 선정(禪定)이다. 속정(俗情)을 끊고 마음을 가라앉힌 상태를 말한다. 김기림이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은 후자다. 김기림은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여러 가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지성을 갖춘 인간의 사유와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학을 하려거든, 시인이 되려거든 우선 물리, 화학, 수학, 역사, 영어 이것 모두를 착실히 잘하는 것이 급선무다.” “누구든지 서정시 한두 편은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시인이 되기 어렵고 논문 한두 편 썼다고 비평가가 되게 아니다.”라는 김기림의 주장을 음미하면서, 나는 그가 문인이기보다는 지식인으로서 살고자 하였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3. 김기림의 문학세계.    김기림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적 모더니즘 문학 운동을 선언하고, 자연발생적 시를 배격하고 주지성을 강조하였으며, 감상성을 거부하면서 문명 비평의 정신을 앙양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론과 창작을 겸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하였다. 김기림은 30년대 모더니스트 시인으로서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그는 이전의 한국시에 대해 두 가지의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1920년대 전반기 시단의 주류를 이룬 낭만주의 시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20년대 후반기 시단의 주류를 이룬 사회주의 시에 대한 것이다. 그는 과거의 낭만주의 시가 감수성의 분열 상태를 일으켰다고 보고 그 극복책으로서 형이상학적인 시의 이념을 제시한 바 있다. 이것은 물론 외국문학이론에 힘입은 것이지만 어떻든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이바지한 셈이 된다.    한편, 김기림은 사회주의 문학에 대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이 부분은 임화(林和)와의 기술주의 논쟁 속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김기림은 이미지스트[Imagist] 시인들처럼 단순한 감각적 이미지들을 의미와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시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고자 했는데 그의 이러한 시적 인식 태도는 이데올로기의 경직화 현상을 빚은 프로 파 시인들과는 판이한 양상을 보여 주었다.  *‘김시태 한양대 교수, 동아일보(1988. 1. 19)’에서 인용.  4. 김기림의 대표작.     김기림은 절반의 성공을 이룬 시인으로 평가된다. 김기림의 시론보다 시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점, ‘감상적인 로맨티시즘 부정’이라는 시론의 주장과는 달리 시에서의 농후한 감상성, 문명 비판의 차원이 피상적인 점 등 때문이다. 특히 ‘모더니즘론’은 김기림을 평가하는 데 핵심적인 사항이 된다. 평가의 핵심은, 일제 말기 김기림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 모더니스트’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초기부터 가졌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냐에 있다.     김기림의 작품은 시적 공감과 심정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를 그린 김기림다운 일련의 작품인 ‘공동묘지’ ‘못’ 등으로 평가해야만 하며 해방공간에서의 김기림의 좌파 활동 역시 1930년대 초기부터 김기림이 지향했던 ‘지성’과 ‘현실 간여’의 인식론적 지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일제 말기 ‘모더니즘론’ 또한 1930년대 초기 모더니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제목 : 바다와 나비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는 1920년대 낭만주의 병적 감상성과 경향 파의 정치적 관념을 부정한 이른바 모더니즘 운동의 대표작이다. 초기 시 에서 자주 보이던 낯선 외래어의 사용이나 경박함이 배제되고,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연약한 나비와 광활한 바다와의 대비를 통해 `근대`라는 엄청난 위력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1930년대 후반 한국 모더니스트의 자화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 시는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S. 스펜더`의 시 제3연과 유사성을 지닌 것으로, 그의 시에서는 두 마리의 나비가 익사하는데, 김기림의 시에서는 나비가 바다로 내려갔다가 지쳐서 되돌아온다. `나비`는 생명체 곧 인간을, `바다`는 죽음 또는 영원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제목 : 공동묘지.  일요일 아침마다 양지 바닥에는  무덤들이 버섯처럼 일제히 돋아난다  상여는 늘 거리를 돌아다 보면서  언덕으로 끌려 올라가곤 하였다  아무 무덤도 입을 벌리지 않도록 봉해 버렸건만  묵시록의 나팔 소리를 기다리는가 보아서  바람소리에조차 모두들 귀를 쭝그린다  호수가 우는 달밤에는  등을 일으키고 넋없이 바다를 굽어본다.   `공동묘지`에 나타나는 무덤의 이미지는 묵시론 적인 예언자의 목소리를 깔고 있을 뿐 아니라 역동적인 생명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늘 돌아다보면서 끌려 올라가는 상여’의 이미지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힘으로 끌리어가는 피동성과 죽음의 이미지를 거느린다. 입을 벌리지 못하도록 강제 당한 무덤의 이미지에는 강제성과 굴욕 성이 있다. 그러나 그 무덤은 ‘묵시론 적인 나팔 소리’에 귀를 쫑긋하는 내적 에너지와 생명력을 가진 것이다. 호수가 우는 달밤에 등을 일으키는 무덤은 신비적이고 미묘한 분위기를 아우른다. ‘넋 없이 바다를 굽어보는’ 무덤 이미지에는 예언자의 시선이 깔렸다. 이 같은 예언자적이고 엄숙한 ‘죽음’의 이미지는 일제 말기를 살면서 시의 장래를 예견하고 우리말의 운명을 조심스럽게 낙관했던 지식인 김기림 목소리의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김기림의 예언자적 인식과 침묵의 수사(조영복/광운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에서 인용.  5. 시인의 임무.   사람들은 내게 “당신은 왜 일상을 그리지 못하는가?” “당신은 왜 김소월처럼 아름다운 서정시를 창작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이 땅에 시인들은 일상을 김소월같이 노래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기림은 집안에서 ‘감상적인 로맨티시즘’에 젖어서 일상을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집 밖으로 뛰쳐나가 일터에서, 거리에서 현실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집안에서 창작을 하는 시인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집 밖에서 현실에 비판적으로 간여하는 시인(詩人)은 ‘무엇을 쓸 것인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다는 무엇을 그려야 하느냐에 일생을 바친 김기림 같은 시인을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을까?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온몸과 마음으로 고민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임을 생각하면, 죽어가는 인간성과 파괴되고 있는 자연을 외면하는 것은 시인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기림은 `시의 장래`에서 시인의 임무를 ‘내일의 발견’이며 ‘생존의 신념’이라고 정의 했다. 나는 그의 절박한 물음을 외면할 수가 없다. “내일을 예감하고 생존의 신념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당신은 무었을 쓰고 있는가?” 
1624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오장환 - 고향 앞에서 댓글:  조회:4970  추천:0  2015-12-11
▣ 오장환(吳章煥) 문학관   ▶주      소 : 충북 보은군 회인면 회인로5길 12 (도로명)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 (지번) ▶전      화 : 043-540-3776   ▶관람시간 : 오전 9:00 ~ 오후 5:00 (휴관 :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포함) ▶문의 : 보은군청 : 충북 보은군 보은읍 군청길 38(이평리 40-2)                                    보은군청 문화관광과                                    Tel. 043)540-3731~3735    Fax. 043)540-3379 시외버스터미널- 삼산로(서쪽) - 삼산교 - 속리산(상주)방면 우측도로 - 후평사거리에서 회인(청주)방향 - 동정삼거리에서 회인(청주)방향 - 차정삼거리에서 회인(청주)방향 - 송평삼거리에서 회인(청주)방향 - 회인로(서쪽) - 회인5길에서 좌회전 - 오장환문학관 자동차 이용 경부고속도로 방면 경부고속도로 → 당진상주고속도로 → 회인IC 송평사거리에서 청주 /회인 방면으로 우회전 → 회인5길에서 좌회전 → 오장환문학관 보은방면 보은군 → 보은제일로 우편사거리에서 청주/회인방면으로 우회전 → 회인5길에서 좌회전 → 오장환문학관    ▶주변관광: 속리산, 법주사, 만수계곡, 삼년산성, 서원계곡, 선병국 가옥, 하얀민들레생태마을 ▶오장환 문학관 오장환 시인은 1918년 충북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4남 4녀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회인공립 보통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 경기도 안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습니다.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오장환은 정지용 시인을 만나 시를 배우게 됩니다. 문예반 활동을 하며 이라는 교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고, 1933년 2월 22일에 발간  된 임시호에 오장환의 첫 작품인 [아침]과 [화염]이라는 두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이후 [시인부락],[낭만],[자오선] 등의 동인으로 참가하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였으 며 이 시기에 발표한 시집 [성벽]과 [헌사]를 통하여 '시단의 새로운 왕이 나왔다'는  찬사를 듣게 됩니다. 상에서 해방을 맞이한 오장환은 [병든 서울]을 통해 해방의 기쁨을  감격적으로 노래했습니다.   [병든 서울]은 '해방기념조선문학상' 최종후보에 오르는 등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 으며 또한 詩 [석탑의 노래]는 1947년 중학교 5,6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오장환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던 시기에 전국을 돌며 몸을 아끼지 않는 활발한  문화활동을 벌렸습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테러가 자행되면 서 몸을 심하게 다치고 북으로 가게 됩니다. 이후 오장환은 북한과 소련에서 지병 신장병을 치료하면서 소련기행시집 [붉은기]를 마지막 으로 발표하고 한국전쟁 중 34세의 젊은 나이에 신장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1988년, 광복 후 40여 년간 논의조차 불가능했더너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이루어져  이후 오장환 문학계에 대한 연구논문을 비롯 전집, 평론,시집 등이 발간되었으며, 초창기의 시와 동시, 장편시 등의 자료들이 속속들이 발견되었습니다. 1996년에 제1회 '오장환문학제'가 개최되어 현재까지 매년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2005년 오장환의 생가복원 및 문학관 건립을 위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보은군은 2006년 총사업지 8억 3000만원을 투입해 전시관 299.2㎡와 생가 73.52㎡로 구성된 '오장환 문학관'을 건립했습니다.  ▶대중교통 : 버스  216 (오동육교방향), 216 (회인방향),                    버스  216-1 (오동육교방향), 216-1 (회남방향) 도보 이용                     오장환 문학관 모습       오장환 문학관 전시관     제일먼저 영상실에서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스승 정지용 시인과의 만남과 남포 적십자병원에서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 오장환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단막극 형식의 영상과 오장환 시인의 대표시 12편을 해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오장환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오장환 문학관' 안에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오장환 모습   오장환 시인은 정지용,이육사,서정주 시인과 함께 시를 쓰며 우리나라 역사의 격동기에 가장 활발한  문학 작품 활동을 한 시인으로 ' 서정주,이용악과 함께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운 시인이랍니다.                     오장환 詩集 -「성벽」,「병든서울」,「헌사」,「나 사는곳」,「에세닌 시집」,「붉은기」등    일제 강점기에 많은 인사들이 친일파로 일본 앞잡이 노릇을 했지만 신장병을 앓으며 궁핍하게 해방을 맞이하지만 오장환은 단 한편의 친일시를 쓰지 않았다. 詩 '절정의 노래'는 당시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오장환  詩 세계는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 [성벽, 헌사] : 모더니즘 지향,                                 * [나 사는곳] : 향토적 삶을 배겨으로 하는 서정의 세계                                * 이후 [병든 서울] : 사회 변혁을 열망하는 프로레탈리아 문학을 지향     오장환의 대표적인 詩-고향 앞에서, 나의 노래     고향 앞에서                      - 오장환   흙이 풀리는 내음새 강바람은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다 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 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양귀비 끓여다 놓고 주인 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 지운다. 간간이 잣나비 우는 산기슭에는 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 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 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 상고하며 오가는 길에 혹여나 보셨나이까. 전나무 우거진 마을 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 ……   -이 작품에는 시인의 고향에 대한 인간적 애정이 담겨 있다. 고향의 정겨운 모습과 아늑하고 따뜻한 품이 그리운 화자가 봄 기운을 느껴 고향을 찾아간다. 그러나 아직 '다 녹지 않은 얼음장'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화자는 한기를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상황을 '진종일/나룻가에 서성거리다/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라는 2연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결국 화자는 고향 가까운 주막에서 하루를 묵게 되는데 고향에 얽힌 추억을 주인집 늙은이와 이야기하면서 장꾼들에게 고향 소식을 물어 본다. 4연과 6연에는 화자가 살았던 고향의 모습이 그려진다. 산기슭에 있는 선산 무덤 속에는 조상이 잠들어 있고, 전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집집마다 누룩을 띄워 술을 빚던 정겨운 마을. 그 마을을 그리워하며 그 마을에 가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오장환 또한 여러 동인지에 참여하면서  박두진, 이중섭, 정지용, 이육사, 서정주, 김광윤 여러 친구들을   두었어며, 정지용 시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중섭 시인은 그의 詩集 표지 그림을 그려 주었습니다.   오장환의 사망소식을 듣고 이중섭은 '추모'라는 그림을 그려 그의 죽음을 추도했다고 합니다.                     오장환 문학관 외부모습   오장환 문학관과 생가 사잇길       시비 -'나의 노래' ▼     오장환 문학관 우측으로 가을 국화꽃이 반겨줍니다               '오장환 생가'를 문학관에서 유리창으로 바라보고 찍음       오장환 생가-1918년 5월 15일 이곳에서 탄생   오장환 생가 마당에 들어서서   1996년 '제1회 오장환 문학제'가 개최되어 매년 열리는데 문학제에는 백일장, 시그림, 그리기대회, 시낭송 대회, 문학 강연 등이 열려 보은을 비롯하여 오장환을 사랑하는 전국의 문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1623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류치환 - 깃발 댓글:  조회:2626  추천:1  2015-12-11
  깃발/ 류(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向)하여 흔드는 영원(永遠)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1936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유치환의 시 작품이다.  이 시의 원제는 「기빨」이며, 1934년 가을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표 당시 제7, 8행은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삼가한”이었으나, 1939년 시집 [청마시초]에 수록하면서 “아아 / 애닯은”으로 고쳐 연민과 애수의 분위기를 강화하였다. 9행 단연의 이 시는 진술에 의거한 관념적 표현을 위주로 하는 다른 시들과 달리, 주도적 모티프인 깃발을 다양하게 표상했다.  여기의 깃발은 이상향을 동경하는 순정을 뜻한다. 깃발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려 이상이나 이념을 실현하려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며 펄럭이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즉 ‘해원’이란 표현과 연결되는 이상향에 대해 끝없이 동경하나 끝내 이상향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순정과 애수의 깃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에 대해 갖는 존재의 허무와 고뇌, 그리고 비원을 연민과 애수의 정서로 제시함으로써 삶에서 비롯되는 애환의 배후를 탐구하려는 초기의 시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 은 1939년에 나온 『청마시초』에 수록된 작품으로, 시적 배경이 바닷가임을 볼 때 어린 시절부터 자란 시인의 고향 체험이 이 시를 쓰게된 계기가 된 듯하다.  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과 인간의 존재 양식이 띤 모순과 부조리를 재발견할 수 있다. 이상향(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시지프스 신처럼 무모하게 이상향에 도달하려는 모순과 부조리를 은 인간 존재의 양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지닌 인간은 힘차게 나부끼며 그곳에 도달하고자 내적 몸부림을 쳐보지만, 이념의 푯대 끝에서만 나부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어찌할 수 없는 비극적 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가고자 하나 갈 수 없음을 인식한 후에는 그 마음이 '애수'가 되고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 되어, "하강"의 이미지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마음 상태는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대립적 갈등 그 자체로 머물러 있게 된다. 더구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의지로까지 발전하면서도 결국 좌절의 비애로 귀결지어지게 된다.  한편으로 이 시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오늘날 일상적인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구속은 견디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세계, 죽음이 없는 세계, 제약받지 않는 평화의 세계, 갈등이 없는 세계 등을 그리워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한 조건이 해결될 수 없기에 인간의 존재는 비극적이지만, 그러한 조건으로부터 탈피할 수 없는 것 또한 인간의 비극이다. 이 시는 시인이 지니고 사는 높고 그윽한 이념이 한없이 외롭고 애달픈 것임을 형상화해 놓은 작품인지도 모른다. (현대시 해설, 인터넷) ​​ * 정지용의 '향수'와 유치환의 '깃발'​  그리움, 향수를 다룬 시일지라도 정지용의 '향수'와 유치환의 '깃발' 사이에는 확연히 다른 바가 있다. 정지용의 '향수'는 철저히 향토적이며 가족의 체취가 물씬 배어나는, 알뜰한 흙에 묻힌 그리움 그래서 필자는 이를 백(魄)적 넋의 향수라 한 바 있고, 유치환의 '깃발'은 그와 너무나 대조적인 시의 맛을 보여주는 것으로 불안, 허무적이며 정착의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 것, 가볍게 어딘지 모르게 한없이 떠나가야 할 것 같은 표류의 정서, 이를 일러 필자는 혼(魂)적 넋의 향수라 말하고 싶다.  백(魄)은 무겁고 깊이 가라앉는 성격이 있고, 혼(魂)은 가볍고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기 어려운 철저히 나그네의 나부끼는 옷자락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수행하지 못한 사람이 죽어 혼과 백이 날아가고 땅으로 묻혀 헤어지게 되면 다시 고향 찾기 어렵게 된다. 그러기에 혼과 백이 헤어지기 전에 사람은 알뜰히 수행하여 원래의 고향, 일러 피안(彼岸) 또는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찾아가야 한다. (국제신문 '능지스님의 자유')​                                                         * 1908년 경남 통영 출생. 호 청마(靑馬). 유치진의 동생으로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보(東萊高普)를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 1931년 [문예월간]지에 시 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데뷔, 그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을 계속, * 1939년 제1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간행하였다.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을 비롯한 초기의 시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 그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읊은 시 , 등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들을 수록한 것이 제2시집 이다. * 1945년 광복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교편을 잡는 한편 시작을 계속, * 1948년 제3시집 [울릉도], 1949년 제4시집 [청령일기]를 간행하였고, * 1950년 한국동란 때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여 라는 종군시집을 펴냈다. 그후에도 계속 교육과 시작을 병행,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 예술원공로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1967년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 오랜 세월 동안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있다.                           * 석굴암대불/유치환   목 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 천년(千年)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목숨이란! 목숨이란 ㅡ 억 만년을 원(願) 두어도 다시는 못 갖는 것이며 이대로는 못 버릴 것이매       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 연 잎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 없이 지새는 흰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寂寂)히 눈 감고 가부좌하였노니.           ◇ ​ ​유치환은 4264년(서기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靜寂'으로 등단했다. 시 '깃발'은 그 5년 뒤 '조선문단'에 발표되었다 했으니 시인의 나이 28세 때 일로 작시 경력 길지 않은 시기에 그의 대표적 시를 출산시켰다고 볼 일이다.  유치환의 청년 시대는 일제의 침탈 잔학성이 더 심해지고 그의 가세는 기울어 불안한 생활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시 '정적'이 발표된 다음 해 평양까지 올라가 사진관을 열어보기도 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화신연쇄점에 근무하기도 하는 등 삶에 안정을 찾지 못하고 고난의 질곡을 끌고 다녔다. 20대 중반 가난과 고난에 그렇게 이끌려 다니면서도 타오르는 시심을 끊임없이 가꾸어 올렸기에 '깃발'과 같은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아우성은 외침과는 다르다. 외침은 오로지 개인적이고 작은 소리에 지나지 않지만, 외침과 외침들이 많이 모여 동시에 한마음으로 소리 낼 때 아우성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전달되는 메시지와 의미가 더 크고 진폭도 큰 것이 아우성이다. 그 아우성이 귀에 소리로 전달될 수 없다면 때로 얼마나 답답하고 기막힌 일이 될 것인가. '소리 없는 아우성' 그것은 그렇게 기막히고 말로 못할 사연을 깃발에 전가하여 표출한 것이다. '노스탈쟈' 곧 그리움이나 향수는 그리는 대상을 만나거나 거기에 도달하게 될 때 해소되기 마련이다. '영원한 노스탈쟈'는 그 해소의 길이 없다는 말이 된다. '해원'은 평원(平原)에 대치되는 말이다. 풀 푸른 평원이 눈앞에 전개되었을 때 맨발로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내달릴 수 있다면 행복한 순간이 되지 않을까? '해원'은 마음껏 내달려 밟아 달라는 듯 풀 푸른 지평이 아닌, 거부와 경고의 몸짓을 끝없이 내 펼친 물결 푸른 바다 위엔 안타까운 상상만 내달릴 수 있을 뿐 아니겠는가.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그것은 주체할 수 없이 밀어닥치는 유치환의 애상과 그리움의 표상이다. '바람' 그것은 유치환의 시에 단골 격으로 등장하는 허무, 불안정의 대명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치환은 올곧은 선비, 소박하면서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의 시인이었다. 소년 같은 순수한 정의 소유자 유치환이 허무의 심회를 벗지 못하고 많은 시간 거기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었다고 보인다. 지사다운 품격의 소유자 유치환이 언제나 내세웠을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의 시심이 백로처럼 날개 펴고 비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1622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이용악 - 전라도 가시내 댓글:  조회:4236  추천:1  2015-12-11
‘북방의 시인’ 이용악(1914~1971) 전집이 출간됐다. 곽효환, 이경수, 이현승 등 중견 이용악 연구자 3인이 이용악 탄생 100주년(2014년)을 기념해 2년 간 작업한 결과물로, 시인이 남쪽에서 발표한 시뿐 아니라 월북 후 낸 시 전편, 북에서 발표한 유일한 산문집 ‘보람찬 청춘’과 좌담회 자료까지 이용악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른 것이 특징이다.   이용악은 1914년 11월 23일 함북 경성에서 태어났다. 극심한 가난 속에 성장한 그는 1935년 시인문학 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으로 등단한 뒤 시집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등을 발표했다. 일제 식민치하의 비참한 삶과 간도 유이민들의 슬픔을 시로 승화한 이용악은 1930년대 후반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불렸다. 해방 후 좌파 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의 회원으로 활동한 시인은 한국전쟁 중 월북했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이용악의 시 세계는 여기까지다. 1988년 월북문인 해금 후 윤영천 인하대 교수가 펴낸 ‘이용악 시전집’에는 월북 전 그가 낸 네 권의 시집만이 담겼으며 그마저도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이번 전집의 저자들은 “같은 월북 문인인 백석의 시 연구가 북에서의 시적 여정까지 포괄하는 쪽으로 발전하는 데 반해, 이용악의 시는 월북 전에 국한돼 기존 전집으로는 확대된 연구 지평을 감당할 수 없다”는 발간 의의를 밝혔다.   한국전쟁 때 월북한 이용악 시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조명한 이용악 전집이 출간됐다. 1957년 북에서 출간된 리용악 시선집(위쪽)을 비롯해 등단부터 타계까지 시인의 모든 작품을 집대성했다. 소명출판 제공   전집은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에는 연구자들을 위해 이용악의 모든 시를 발표 순서대로 원문 그대로 실었고 2부에는 독자들을 위해 같은 시를 현대어로 풀어 썼다. 시집에 미수록된 시는 월북 이전과 월북 이후로 나누어 실었다. 3부에는 산문과 좌담 및 설문 자료를 발표 순으로 배열했다. 눈에 띄는 것은 시인이 월북 이후 발표한 이른바 북한시들이다. 해방 이전 민중의 고달픈 삶을 서정적 시어로 품었던 시인은 해방 이후 미국에 대한 증오와 좌편향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월북 이후 쓴 작품에는 이 같은 방향성이 더욱 고착화하는 한편 체제선전적인 경향을 강하게 띤 것을 볼 수 있다. “어질고 근면한 이 사람들 앞에 / 약속된 풍년을 무엇이 막으랴 / 쌀은 사회주의라고 굵직하게 써 붙인 / 붉은 글자들에 모든 시선이 즐겁게 쏠리고 // 허연 구레나룻을 쓰다듬다가 / 무릎을 탁 치며 껄껄 웃던 칠보 영감/ ‘산 없는 벌판에 쌀산이 생기겠군’”[‘덕치마을에서(1)’ 일부?리용악 시선집(1957)] 이용악의 작품 세계가 변화한 계기는, 그가 월북 후 북한 시단에서 주류로 활동한 보기 드문 시인이라는 점과 1953년 당의 숙청을 받아 6개월 간 집필 금지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는 점에서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 중 한 명인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이자 시인은 1955년에 발표된 이용악의 유일한 산문집 ‘보람찬 청춘’이 시인의 부활에 한 몫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번 전집에서 최초로 전문이 공개된 ‘보람찬 청춘’은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아이가 영웅적 노력을 통해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로, 산문이지만 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곽 시인은 “1950년대 북한에서 유행한 오체르크(실화 문학)의 일종”이라며 “2만부를 인쇄했다는 데서 판매용이 아닌 체제선전용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시인이 주류 문단에 복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 밖에 새로 발굴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용악 생애 연보와 작품 연보, 연구 서지 등도 알차다. 저자들은 “이용악은 일제에 의해 절멸한 현실주의와 서정성을 한데 아우른 시적 성취로서 돌올한 시인”이라며 “이번 전집은 시인의 재북 시기까지 포괄함으로써 시인의 문학 세계뿐 아니라 북한의 누락된 문학사를 복원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황수현기자  ========================================================== “최상의 덕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여 다투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거처로는 땅을 좋다고 하고, 마음은 깊은 것을 좋다고 하고, 사귀는 데는 어진 것을 좋다고 하고, 말은 진실한 것을 좋다고 하고, 정치와 법률은 다스려짐을 좋다고 하고, 일에는 능숙한 것을 좋다고 하고, 움직임에는 때에 맞음이 좋다고 한다. 오직 싸우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알록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  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노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줍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이용악(李庸岳, 1914~1971)은 한국의 시인이다. 함경북도 경성 출신으로 일본 도쿄에 있는 조치대학(上智大學)을 졸업했고 1939년 귀국하여 주로 잡지사 기자로 일했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5년, 신인문학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광복 후 서울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소속으로 〈노한 눈들〉,〈짓밟히는 거리에서〉,〈빛발 속에서〉등의 시를 발표하며 ‘미제와 이승만을 괴뢰도당으로 반대하는 문화인’ 모임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인민군의 서울 점령 때 출옥하여 자진 월북했다. 한국 전쟁 중에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등의 시를 발표했으며 월북한 지 21년이 지난 1971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는 《북국의 가을》,《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낡은 집》,《슬픈 사람끼리》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분수령》,《오랑캐 꽃》등이 있다. ............................................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먹었느냐고 묻지 말라/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라"(시 '나를 만나거든')던 시인 이용악(1914~1971)! 그는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두만강 건너 우리의 강'을 건너 할아버지는 소금을 밀수입했고 친척들은 그 강을 건너 아라사(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두만강을 건너 밀무역 행상 중 아버지는 객사하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는 국숫집을 하며 어린 자식들을 키웠다. 시인 또한 서울에서 동경에서 품팔이 노동을 하며 고학했다. 이야기성과 체험의 구체성이 두드러진 그의 시들을 읽는 일은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개인사, 가족사,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읽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북간도 어느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가 만났다. 사내는 언 발로 눈보라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며 날이 밝으면 다시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한다. 가시내는 석 달 전에 북으로 달리는 '불술기(기차)' 속에서 치마를 뒤집어쓴 채 이틀을 울며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팔려왔다. 그런 두 남녀가 국경 너머에서 만나 겨울밤 내 지나온 내력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다.    그 밤 내 사내가 '가시내야'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것도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 전라도 가시내는 한없이 차고 한없이 차진 느낌이다. 고향을 떠나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고 울었던 가시내, 지금은 남실남실 술을 치는 가시내. 때로 싸늘한 웃음을 보조개를 소리 없이 새기는 가시내, 까무스레한 얼굴에 눈이 바다처럼 푸른 가시내, 간간이 전라도 사투리가 섞이는 가시내…. 이 함경도 사내처럼 나는, 그 전라도 가시내를 만난 것만 같다. 전라도 개펄의 바지락 조개 같고 세발낙지 같고 때로 꿈꿈한 홍어 같기도 했으리라.    그 밤 내내 함경도 사내가 피워 올리는 북쪽 눈포래 냄새와, 전라도 가시내가 피워 올리는 남쪽 바다 냄새에 북간도 술막이 흥성했겠다. 그 술막의 술독 바닥났겠다. 눈에 선한, '흉참한' 시대를 살았던 그 전라도 가시내. "너의 노래가 어부의 자장가처럼 애조롭다/너는 어느 흉작촌(凶作村)이 보낸 어린 희생자냐"(제비 같은 소녀야-강 건너 주막에서)!     시인 정끝별   ================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낭만적. 비극적  표현 : 서사 지향적  구성 :     1연  두 주인공 제시     2연  두 사람의 해후     3연  두 사람의 동화(同化)의 시작     4연  가시내의 비극적 삶     5연  두 사람의 동화의 절정     6연  사내의 떠남  제재 : 전라도 가시내  주제 : 만주 유이민들의 생활과 애환  출전 : (1939) 이해와 감상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규모로 발생했던 유이민 중 이른바 '팔려 간 여인'을 시적 소재로 다룬 작품으로 서사성이 강화된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서사성이라는 것은 시 속에 인물들 또는 한 집단이 겪은 이야기가 녹아 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두 주인공의 범상치 않은 삶이 그 서사성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1연에서는 이 작품을 구성하는 두 주인공이 제시된다. 여인은 얼굴이 검고 눈이 푸른 '전라도 가시내'이고 화자인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이다. 두 주인공의 출신 지역을 '전라도'와 '함경도'로 시인이 배치한 까닭은 둘 사이의 지리적 거리와 관계 없이 온 민족의 처지가 두 주인공과 같았음을 암시하고 위해서이다. 2연에서 이들은 일제의 경계가 삼엄하고 인심이 흉흉했던 국경 지방의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에서 해후한다.  3연부터 5연까지는 '나'와 '전라도 가시내'가 만난 짧은 하룻밤의 정황이 형상화되어 있다.  3연에서 '나'는 이 술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련을 거친 인물로 제시되는데 그것은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점이나 '눈포래'를 뚫고 온 점에서 나타난다. 나와 여인은 술을 마주하며 기나긴 이야기에 빠지고 자신들이 같은 운명에 있음을 깨달아 간다. 여인의 그늘진 가슴 속에 있는 사연을 들으며 동화되어 가는 것이다.  4연에서는 여인이 북간도로 팔려 오던 때의 심리적 정황이 제시되고 있다. '천리 천리 또 천리'는 모두 삼천리, 곧 여인의 고향인 전라도와 지금 북간도 땅과의 거리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정신적 거리이기도 하다. 여인은 석 달 전에 곧 단풍잎 붉은 늦가을에 이 곳으로 팔려 왔던 것이다. 그는 북간도로 팔려 오는 기차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온 것이다. '불술기'는 '불수레'의 함경도 방언인데 의미상으로는 '기차'를 비유하고 있다.  5연에서 화자의 여인은 드디어 취흥 속에 동일화된다. 그것은 이 둘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공속감에서 우러나온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동질감을 확인하였고 여인은 오랜만에 정신적 벗을 만나, 잊었던 자신의 고향 생각에 하룻밤을 지샌다. 여기서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사투리로 봄 노래를 부르는 것은 여인에 대한 지극한 연민의 표현이다.  6연에서는 화자의 처지가 한 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못 내리고 또 날이 밝으면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하는 신세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부분은 이 화자 역시 유이민이거나 민족을 위해 싸우는 투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수난사라는 기본 서사를 축으로 하여 한 여인과 사나이의 만남을 형상화한 작품으로서, 화자가 여인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불안하고 냉혹한 현실 속에서 한 여인에게 느끼는 연민과 고향 정서를 형상화하였다. 따라서 이 작품은 화자의 담담한 어조 속에 한 시대의 역사가 농밀하게 펼쳐져 있는 식민지 시대 유이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 작가 소개 이용악(1914 - 1971) : 시인. 함북 경성 출생. 1935년 시 ‘패배자의 소원’을 [신인문학]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6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담한 다음, 6.25 때 월북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현실 속에서 만주 등지로 떠돌며 살아야 했던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시로 형상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시집으로 [분수령](1937), [낡은집](1938), [오랑캐꽃](1947) 등이 있다.   ◈ 시 전문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 그믐 눈보라→힘든 환경.      시간적 배경 밤이 시간적 배경, 힘든 현실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시간상으로 밤이 깊어감의 표현. 관념의 시각화.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                                     ▲1연 : 고향에 대한 향수(현재)   걸어온 길가에 찔레꽃 한 송이 없었대도           위안이 될 만한 소박하고 조그마한 행복 나의 아롱범은 아롱무늬의 범=표범(=시적화자),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당당하게 헤쳐 온 자기 자신에 대한 비유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후회 없음, 당당함의 표현(서정주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 자옥 : 발자국, 자신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의미. 어깨에 쌓여도 햐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2연 : 살아온 삶에 대한 당당함(현재)   철없는 누나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곱슬머리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어린 시절 고향에서 말로만 들었던 우라지오. 어린 시절 화자의 동경의 대상 울 어머닌                                                                                   ▲3연 : 과거의 추억 회상→어머니, 누나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주셨지.            러시아 사람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졸듯졸듯 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밤이 깊어질 때까지(늦은 밤까지)                                     ▲4연 : 과거의 추억 회상→마우재 말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헤치고 들어오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아름답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   ↘어머니의 다정함과 따스함.                                     ▲5연 : 과거의 추억 회상→어머니의 입김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새→어린 시절 우라지오를 동경하던 화자의 기억들. ● 귀성스럽다 : 수수하면서도 마음을 끄는 맛이 있다. 제법 구수한 맛이 있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7연고 연결해서 해석할 것→가만히 있지 말고 어린 시절 우라지오에 대한 상상의 날개를 펴던 것처럼 고향으로 날아갈 수 있게 날개를 펼쳐라. 감각적(시각적)인 표현.                                     ▲6연 : 어린 시절에 대한 적극적 회상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 서 있는 현재의 상황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자유롭게 고향으로 가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담아낸 객관적 상관물 날고 싶어 날고 싶어. →고향에 돌아가어 싶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강조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 곳 기억 속에서 조차 가물가물한 고향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껍다.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상황 인식→절망.                                     ▲7연 : 귀향에 대한 소망과 절망   등대와 나와 고향을 그리지만 갈 수 없는 화자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존재. 객관적 상관물.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화자의 꿈과 소망 ※ 여기서 ‘밤’의 기능 :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더욱 떠올라게 하는 시간 가도오도 못할 우라지오.                                     화자가 고향에 가지도 고향에서 누가 오지도 못하는 절망적이고 폐쇄된 공간.                                     ▲8연 : 고향에 그리움과 갈 수 없다는 절망감   ◈ 시 구조화   과거의 삶 → ← 현재의 삶 고향 우라지오 꿈 많고 행복했던 유년시절 우라지오를 동경함 고향을 떠나 절망감을 체험하는 성인 고향을 그리워함       ◈ 내용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감상적, 회고적, 애상적 ● 어조 :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목소리 ● 제재 : 어린 시절과 현재의 삶 ● 특징   ① 과거의 우라지오와 현재의 우라지오를 대비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   ② 향토색 짙은 시어의 사용   ③ 현재 - 회상 - 현재의 순서로 시상이 전개 ● 주제 : 고향과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고향에 갈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 ● 출전 : (1937)   ◈ 이해하기 먼 이국을 떠돌던 시적 화자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때문에 우라지오에 가까운 항구를 찾는다. 우라지오는 시적 화자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로만 듣고 동경하던 항구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그 곳은 어린 시절 그가 동경하던 세계가 아니다. 오직 추위와 외로움이 있을 뿐이다. 시적 화자는 그 곳에서 과거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고향을 그리워하나, 고향으로 갈 길이 전혀 없다. ‘우라지오의 바다는 두껍다’는 말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음을 암시한 말이다. 시적 화자는 이런 속에서 공중을 나는 멧비둘기처럼 날아서 고향의 가족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 시가 창작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이 시는 일제에 의해 가족 공동체가 해체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의 작가 이용악은 일제 치하의 혹독한 현실에 의해 만주, 간도, 시베리아 땅을 떠돌아야 했던 조선인들의 삶을 시로써 묘사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러한 계열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다.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화자를 통해 작가는 일제 강점기하의 가족 해체 현상을 고발하고 있다.   ◈ 심화 학습 1. 시적 화자에게 ‘우라지오’의 의미 시적 화자는 지금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 서서 고향을 그리고 있다. 고향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그에게 ‘우라지오’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고향에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우라지오’ 가까운 곳에 와 있는 지금의 그에게 ‘우라지오’는 춥고 외로운 타향일 뿐이다.   2. ‘멧비둘기’의 기능 이 시에서 화자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멧비둘기가 되어 자신이 그리워하는 고향으로 날아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여기서 멧비둘기는 화자에게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자 고향으로 가고 싶어하는 화자의 심정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보여 주는 사물이라 할 수 있다. ===================================================================     ▶李庸岳 (1914~1971) ▶ 이용악 일대기 낡은 집  현실인식의 심화과정(현실성과 민중성) 거주공간 (父․家)의 상실(가족주의의 해체와 개인주의의 대두) 개인사적 운명의 측면에서 오랑캐꽃  상징적 현실인식 - 유이민적 세계의 반영 시적 화자의 탈락 - 「오랑캐꽃」의 대상화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개인적인 정서를 뛰어넘어 민족 공동체의 정서로... 현실의 모순에 대한 시인의 대응 방식 비교    이용악, 그의 시 속으로 ▶李庸岳 (1914~1971) 1914년 11월 23일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에서 이석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일본 상지대학교 신문학과에 입학, 이 무렵 김동환의 시를 숙독하고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창작활동은 1935년 《신인문학》에 시 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39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인문평론》의 편집기자로 근무하였다. 1946년 2월 8일 서울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 1차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시부위원으로 임화, 정지용, 김광균, 오장환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전국문학가동맹 주최 ‘해방기념조선문학상’에 가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과 함께 최종심까지 올랐다. 1947년 8월 오장환의 권유로 남로당에 입당하여 남로당 서울시 문련 예술 과원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8월 ‘남로당 서울시 문련 예술과 사건’이로 구속,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1950년 6.25 전쟁중 출감하였다. 이용악의 시는 민족의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한 ‘투박한 생활의 시’에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암울한 세계인식의 시’로, 그리고 행방 후에는 ‘이념지향적인 시’로 변모하였다.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에서는 피폐한 농촌현실과 이농, 유랑과 국외이민, 그리고 도처에 진행되던 굶주림과 죽음의 비참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노래했고, 시집 《오랑캐꽃》에서는 유랑민의 아픔을 서정적인 언어로 노래했다. ∙작 품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현대시인전집 1, 1949) * 권영진, 『한국 현대시 해석』, 숭실대학교 출판부 ▶ 이용악 일대기 이용악은 함경북도 경성읍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했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금을 얻기 위해 일찍부터 달구지에 소금을 싣고 러시아 국경을 넘나들었고, 아버지도 이런 국경 무역의 과정에서 객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객사한 뒤 어머니는 국수 장사, 떡 장사, 계란장사 등으로 생계를 꾸려 세아들을 모두 고급 학교에 진학시키는 억척스러움을 보였다. 이처럼 이용악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이 몸에 배어 있다. 고향에서 경성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와서 고등보통학교를 마친 그는 1934년 일본 유학을 떠나, 동경에 있는 상지 대학 신문학과에 입학한다. 유학 기간에 신인 문학(1935. 3)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동경에서 김종한과 함께 동인지「 2인」을 간행했다. 그는 유학 시절에 품팔이, 노동꾼으로 학비를 조달하면 최하층민의 생활을 경험한다. 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찌꺼기 등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동인지를 발간하는 문학적 열정을 보였다. 또 그는 방학이 되면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는 간도 등을 다니면서 그들의 처참한 삶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용악의 이런 삶은 시집 분수령(1937). 낡은 집(1938)을 통해 결실을 보게 된다. 또 이 시기에 그는 민족 해방 운동에 가담하여 여덟 번이나 일본 경찰에 붙들려서 무서운 고문을 받았다. 1939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최재서가 주관하는 인문 평론 편집부 기자로 있으면서, 시 , 1, 2등을 발표했다. 친일 색채가 짙은 이 잡지에 시를 발표한 것 때문에 훗날 친일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   [출처] 이용악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작성자 쩡으니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五月)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三百)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934년 [문학(文學)]에 발표하였으며, 1935년 간행된 [영랑시집(永郞詩集)]에 수록되었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기다리는 정서’와 ‘잃어버린 설움’을 대응시키고 있다. ‘모란’은 그의 정신적 거처로서 이상(理想)의 실현에 강한 집념을 보여주는 대상이다. 그가 참고 기다리고 또 우는 것도 모란이 피고지는 까닭이다. ‘삼백 예순 날’은 모란이 피는 날과 그것이 피기를 기다리는 시간의 연속으로 보람있는 날이지만, 그 감정의 밑바닥에는 무엇을 잃은 상실감과 허무의식이 깔려있다. 향제(鄕第: 고향집)의 뜰에 정성들여 가꾼 수많은 모란과 그것들이 피기를 기다리는 ‘오월’, 시인이 기다리고 또 보내기를 꺼려하는 ‘봄’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모란이 피는 오월이 가면, 또 다시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봄’은 시인이 살던 시대상황으로 식민치하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실의와 좌절감에서 벗어나 그들의 보람과 이상이 꽃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봄’의 상징적 의미는 어느 하나로만 한정할 수는 없다.  보다 더 큰 이상과 가치의 세계로까지 확대되는 보람과 목적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시는 ‘슬픔’이나 ‘눈물’이 겉으로 노정되어 있지 않고, 그것들을 곱고 아름다운 율조에 의해 순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랑은 여기서 우리 말이 갖는 율조를 다듬고 깎은 시행의 정돈으로 서정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 이 시의 화자는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그가 기다리는 것은 모란이 만발하는 순간, 즉 봄이 절정에 이르는 때이다. 그러나 이 순간이 지나면 봄은 끝이 나고 모란의 지극한 아름다움 역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데, 화자의 슬픔이 여기에 자라잡고 있다. '모란'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모란이 개화하여 절정에 이르는 시간은 설렘과 기대를 동반하지만, 절정의 아름다움은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이후는 하강과 소멸의 과정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 지상의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속성인 것이다. 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화자에게 봄의 찬란한 순간은 기쁨의 순간인 동시에 슬픔의 순간이기도 하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 ​김영랑의 시세계 ​ 영랑의 시는 순수 서정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많은 시가 의미를 크게 강조하거나 관념에 비중을 두기보다는 언어의 미적 구조와 음악성에 치중한다는 점에서는 순수시라고 볼 수 있으며, '내 마음'이라는 주관적 감정의 표출에 몰두한다는 점에서는 서정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순수 서정의 세계에만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상징시로서의 면모와 이미지즘의 측면이 드러나기도 하며, 또한 존재론적인 생의 인식이 발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에 비관적인 현실 인식과 부정적인 세계관이 일관되게 흐른다는 것은 중요한 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러한 것들이 보다 적극적, 투쟁적으로 강조되어 나타나지 않을 뿐이며, 이것조차 언어 미학적인 섬세한 배려가 시의 표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시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시야말로 시의 의미와 가락, 그리고 형식이 유기적으로 잘 통합됨으로써 현실 인식이 미의식으로 탁월하게 상승된 예술시의 한 모델이 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가 당대 현실의 참상과 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영랑이 시종일관 언어 미학에 끈질긴 집념을 가진 것은 당대 일제의 포악한 파시즘에 시인이 대처할 수 있는 예술적 응전 방식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로 판단된다. 그가 보여 준 한국의 정통적 서정과 가락에 대한 뜨거운 애정, 향토적 정감의 소중함에 대한 재발견의 노력, 그리고 그에 따른 한국어의 시적 가치와 그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깊이 있는 신뢰와 실천적 탐구야말로 바람직한 시인의 사명 완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재홍, 한국현대시인연구)​​           *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 본명은 윤식(允植). 영랑은 아호. *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 *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 1919년 휘문의숙 재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 1945년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 1950년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自選)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과 고향 강진에 세워졌다.                             ​ * 김영랑 생가 방문기 '북은 소월, 남은 영랑'이라 하여 '진달래꽃'을 쓴 김소월(1902.8.6~1934.12.24) 시인과 더불어 우리 시문학사에 쌍벽을 이루는 시인 김영랑(金永郞, 1903.1.16~1950.9.29). 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시는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 시린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고 있다. 영랑생가의 안채 오른 편에 딸린 자그마한 마당에 들어서자 영랑이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란 시를 쓴 장독대가 놓여 있다. 그 장독대 주변에 보란 듯이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시는 1930년 어느 날 영랑이 누이가 장독을 열 때 단풍 진 감나무 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오-메 단풍 들것네'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쓴 시다. 지금은 장독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가 되어버린 장독대 뒤편에는 몸뚱이를 이리저리 뒤틀어 꼰 동백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그 중 가운데, 가지를 비스듬하게 장독대 쪽으로 엎드리고 있는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동백나무가 영랑이 우리나라 최고 춤꾼이었던 최승희와의 사랑을 부모님 반대로 이루지 못해 목을 매달고 죽으려 했다는 나무다.  "첫 부인과 사별한 영랑은 2년 뒤 18세 때 이화여전을 나와 하숙하던 강진보통학교 여교사마재경과 열애에 빠진다. 하지만 그 사랑은 영랑이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서 끝을 맺는다. 그 뒤 귀국한 영랑은 22세 되던 해 정지용 등과 만나며 최승일의 누이동생인 숙명여학교 2학년 최승희(13세)와 약 1년 동안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다." 김선태 교수는 "영랑은 1년 중 6개월을 서울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최승희와의 사랑도 양가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실을 맺지 못했다"며 "영랑의 집안에서는 '그런 경성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는 이유로, 최승희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들어 각각 반대했다"고 설명한다.  김 교수는 "이때 영랑이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발각되어 목숨을 건진다"며 "영랑은 그 다음 해 숙부의 중매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와 교편생활을 하던 김귀연과 재혼해 슬하에 7남3녀(2남인 김현복은 생후 1년 뒤 사망)를 두게 된다. 김귀연이 호적상 본부인이 된 셈"이라고 밝힌다. 김 교수는 "영랑은 사실 일본 유학 때 음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딴따라' 운운하는 부모님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영문학을 했다. 그의 시에 음악성이 깔린 것도 이 때문"이라며, "부유한 지주집에서 태어난 영랑은 고향에서 친구들과 중등학교(금릉중학교)을 설립하기도 하고,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 사랑채로 가는 마당 한 귀퉁이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그 모란이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며 바싹 마른 열매를 을씨년스럽게 매달고 있다. 영랑의 시혼이 담긴 모란 열매를 오래 바라보며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읊다가 오른쪽에 있는 사랑채로 향한다. 사랑채 안에는 마네킹이 된 영랑이 지금도 시를 쓰고 있다.   (발췌)(이종찬/기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강 물                                                     잠 자리 서뤄서 일어났소 꿈이 고웁지 못해 눈을 떳소 벼개에 차단히 눈물은 젖었는듸 흐르다못해 한방울 애끈히 고이었소 꿈에 본 강물이 몹시 보고 싶었소 무럭무럭 김 오르며 내리는 강물 언덕을 혼자서 지니노라니 물오리 갈매기도 끼륵끼륵 강물은 철 철 흘러가면서 아심찬이 그꿈도 떠실고 갔소 꿈이 아닌 생시 가진 설움도 작고 강물은 떠실고 갔소.       5월 아침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즈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마는 이 아침 새 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을 흔드오 자랑찬 새 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버렸대서야 불혹이 자랑이 아니 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밀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인가 보오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이고 내사 불혹을 자랑턴 사람.       언덕에 바로 누워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습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질기운 맘 내 눈은 감이였데 감기였데.       지반추억(地畔追億)                                   깊은 겨울 햇빛이 따사한 날 큰 못가의 하마 잊었던 두던길을 사뿐 거닐어가다 무심코 주저앉다 구을다 남어 한 곳에 쏘복히 쌓인 낙엽 그 위에 주저앉다 살르 빠시식 어쩌면 내가 이리 짖궂은고 내 몸 푸를 내가 느끼거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앉어지다? 못물은 치위에도 달른다 얼지도 않는 날세 낙엽이 수없이 묻힌 검은 뻘 흙이랑 더러 들어나는 물부피도 많이 줄었다 흐르질 않더라도 가는 물결이 금 지거늘 이 못물 왜 이럴고 이게 바로 그 죽음의 물일가 그저 고요하다 뻘흙속엔 지렁이 하나도 꿈틀거리지않어? 뽀글하지도 않어 그저 고요하다 그 물 위에 떨어지는 마른 잎 하나도 없어? 햇빛이 따사롭기야 나는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꼈는데. 여나문해? 그때는 봄날이러라 바로 이 못가이러라 그이와 단 둘이 흰 모시 진설 두르고 푸르른 이끼도 행여 밟을세라 돌 위에 앉고 부풀은 봄물결 위에 떠노는 백조를 희롱하여 아즉 청춘을 서로 좋아하였었거니 아! 나는 이지음 서어하나마 인생을 느끼는데.       발 짓                                                     건아한 낮의 소란소리 풍겼는듸 금시 퇴락하는 양 묵은 벽지의 내음 그윽하고 저쯤에사 걸려 있을 희멀끔한 달 한자락 펴진 구름도 못 말어놓은 바람이어니 포근히 옮겨 딛는 밤의 검은 발짓만 고되인 넋을 짓밟누나 아! 몇날을 더 몇날을 뛰어본다리 날아본다리 허잔한 풍경을 안고 고요히 선다.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                                풀 위에 맺어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발표 당시의 제목은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오월(五月)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독(毒)을 차고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어도 머지 않아 너 나 마주 가버리면 억만 세대(億萬世代)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춘향(春香)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 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南原)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두견(杜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數千)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南)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千)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구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 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낱 시들피느니 짙은 붐 옥 속 춘향이 아니 죽었을라듸야 옛날 왕궁(王宮)을 나신 나이 어린 임금이 산골에 홀로 우시다 너를 따라 가시었느니 고금도(古今島) 마주 보이는 남쪽 바닷가 한 많은 귀향길 천리 망아지 얼렁 소리 쇤 듯 멈추고 선비 여윈 얼굴 푸른 물에 띄웠을 제 네 한된 울음 죽음을 호려 불렀으리라.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새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승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 너 몹시 안타까워 포실거리며 훗훗 목메었느니 아니 울고는 하마 지고 없으리, 오! 불행의 넋이여, 우거진 진달래 와직 지우는 이 삼경의 네 울음 희미한 줄 산(山)이 살풋 물러서고 조그만 시골이 흥청 깨어진다.       북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 - 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 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물소리                                                    바람따라 가지오고 멀어지는 물소리 아주 바람같이 쉬는 적도 있었으면 흐름도 가득 찰랑 흐르다가 더러는 그림같이 머물렀다 흘러보지 밤도 산골 쓸쓸하이 이 한밤 쉬어가지 어느 뉘 꿈에 든 셈 소리 없든 못할소냐   새벽 잠결에 언뜻 들리어 내 무건 머리 선뜻 씻기우느니 황금소반에 구슬이 굴렀다 오 그립고 향미론 소리야 물아 거기 좀 멈췄으라 나는 그윽히 저 창공의 銀河萬年을 헤아려보노니         수풀 아래 작은 샘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보는 수풀 속의 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을 쏟아져 동이 가를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얼켜져 잠긴 구름 손결이 온 별나라 휘흔들어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녁 그대 종종걸음 훤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워도 그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세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밤 내 혼자 나려가볼꺼나 나려가볼꺼나       사랑은 하늘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숲향기                                                      숲향기 숨길을 가로막았소  발끝에 구슬이 깨이어지고  달따라 들길을 걸어다니다  하룻밤 여름을 세워버렸소       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 내 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놓고 울들 못한다       미움이란 말                                             미움이란 말 속에 보기 싫은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씀 씹히고 씹힐 때 한 꺼풀 넘치어 흐르는 눈물              김영랑 金永郞 (1903. 1. 16 - 1950)                                                              본명은 윤식(允植)이다.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세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    [작품 및 경향]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이하윤(異河潤) 등과 창간한 동인지 [시문학]에 시 , 등 6편과 7수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시작활동 시작.  초기 -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 회의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도 비애의식(悲哀意識)은 영탄이나 감상(感傷)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 정감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1940년 전후 - , , , 등 일련의 시작품에서는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 의식이 나타남. 이러한 죽음의식은 초기시에서와 같이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 치하의 민족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해방 후- , 등은 일제 치하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강한 의욕으로 충만되어 있다.  시집으로는 과 자선시집 이 있다.     [김영랑論]   *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준 김영랑   김영랑(1903-1950)의 본명은 김윤식으로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강진 보통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휘문 의숙을 다니다가 3.1운동으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휘문 의숙을 중퇴한 김영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강진의 자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의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박용철은 오랜 숙의 끝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 창간호를 1930년에 발간하게 된다.   1930년은 김영랑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해 3월에 간행된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시단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20편이 넘는 작품을 1930년 두 달 동안에 한꺼번에 발표했던 것이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 의식을 주로 드러냈기 때문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변화하였고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적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경향시 위주였던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시에 대한 인식 변화시켜 김영랑의 시에는 '내 마음'이라는 어휘가 유달리 많이 보이는데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내면의 순결성을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그의 초기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은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것들이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에 제시된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은빛의 강물, [제야]에 제시된 맑은 샘물과 밤의 심상, [가늘한 내음]에 제시된 보랏빛 노을의 고요한 아름다움, [내 마음 아실 이]에 나오는 향맑은 옥돌의 심상 등은 모두 마음의 순결성을 나타내는 예들이다. 이렇게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자연의 정경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영랑 서정시의 출발은 바로 이 순결성에 있었다. 이 순결성이 그의 시를 아름다운 해조와 서정주의의 극치로 몰아간 것이다. 그 순결한 마음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대응되므로 분명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순결성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랑은 자연의 맑고 깨끗한 정경을 통해 마음의 순결성을 보여 주었는데, 자연의 정결한 모습에 집중하게 되면 자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황홀감을 갖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본래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의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의 많은 시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이 가져다주는 극치의 아름다움은 그의 정신을 몽롱케 할 정도로 황홀감을 안겨 준다. 저녁놀이 물드는 보랏빛 하늘, 밤 깊이 흐르는 물소리와 찬란한 별떨기, 은색으로 황홀히 빛나는 달빛, 맑은 가을날의 고요한 정경, 이 모든 것이 자연미의 한 정점을 보인 것이어서 시인은 그 황홀감에 가슴 설레며 몸둘 바 몰라 한다.   그런데 이 황홀한 순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모란이 한번 흐드러지게 피어 그 찬란한 빛을 불태웠다가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쉽게 소멸하는지 모른다. 자연의 순결성도 현실 세계의 혼탁함 때문에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으며, 자연의 황홀한 아름다움 또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면 영랑의 자연 인식은 비극적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 비극성이 그의 심혼을 긴장시키고 그의 서정시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모란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비탄과 상실의 감정이 남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뚝뚝'이라는 시어를 통해 모란이 무정히 사라져 버리는 정경을 소리로 나타내는가 하면, '떨어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버리고'라는 시행을 통해 처절한 상실의 순간과 상실 뒤에 오는 형언할 수 없는 비탄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삼백예순 날을 계속 울고 지낸다는 과정적 표현을 배치하여 그리움의 정도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한편으로 영랑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 시인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적 장단과 호응을 이루며 하나의 정경으로 표현될 때 그것은 오롯한 미의 원광을 두르게 된다. 가령 영랑의 [오월] 같은 시는 봄 들판의 약동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인데 시각적 이미지를 적절히 구사하여 심미감을 높이고 운율의 변화를 통하여 흥겨운 율동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서정적 표현의 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우리 시의 역사에서 귀중히 간직하고 전수해야 할 표현 상의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 맑고 깨끗한 자연의 정경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세계 표현   김영랑의 시에서 인생과 사회에 대한 발언이 중심을 이룬 작품은 아주 적다. 현실에 대한 반응을 보인 예로는 [거문고]라든가, [독을 차고], [우감(偶感)], [춘향] 등의 작품을 들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은 김영랑의 시가 우리에게 어떤 효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오월]처럼 자연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 작품은 그런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만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관련이 없는 듯한 자연에 대한 상상도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며, 새로운 비유와 표현의 구사도 언어사용의 폭을 넓힘으로써 실제의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와 절묘한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영랑의 시는 그 나름의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내 마음을 아실 이 1) 작품 선정의 취지와 지도 방법  이 시는 여성적인 어조로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여성적 어조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우리말 시어와 어우러지면서 섬세한 정서를 자아내는 한편 시의 음악성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부드럽고 다양한 어미와 압축된 시어를 사용하여 서정적 운율을 형성하고 있는 이 시를 학습함으로써 학생들은 운율을 형성하는 자질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를 지도할 때는. 학생들 스스로가 시의 운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낭송 테이프를 미리 준비하거나 시의 분위기에 맞는 배경 음악을 준비하고 학생들이 음악에 맞춰 시를 낭송하도록 하여 우리말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지도한다. 2) 작품 지도안 1. 내용 구성 제재 : 내 마음 주제 :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출전 : (1931)  1연 : ‘내 마음을 아실 이가 있다면'이라는 상황을 가정함.    -      가정제시  2연 : 내 마음을 아실 이에게 내 마음을 내어 드리겠다는 다짐.  -  다짐  3연 :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까 봐 두려움.         -                    회의적 물음 제기  4연 : 내 마음을 아실 이는 없다는 단정을 내림.       -                   그리움 2. 이해와 활동의 길잡이  이 시는 시인이 추구한 서정성과 음악성을 ‘그리움’이라는 전통적 정서와 결합시킴으로써 맑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우리말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은 여성적 정조(情調)와 어울려 임을 간절히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언어적 장치를 이루고 있다. 모음과 유음 계통의 시어가 음악성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으며,‘이슬 같은’의 영롱한 이미지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의 열정적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적 화자의 내적 독백으로 전개되는 이 시는 스스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면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1연에서는‘내 마음을 아실 이가 있다면’이라는 가정의 이면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임을 찾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2연에서는‘티끌’, '눈물', '보람' 등의 시어를 사용해 내 마음을 아실 이에게 내어 드릴 ‘내 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3연에서는 그러한 '내 마음'을 알아줄 임을 만나고 싶은 충동과 함께 그러한 임을 꿈에서나마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회의적 물음을 제기한다. 4연에서 '향 맑은 옥돌', ‘불'의 이미지는 다시 시적 화자의 사랑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요컨대 이 시는 꿈과 현실, 소망과 좌절의 갈등구조로 되어 있으며, 가정과 자문자답(自問自答)은 그러한 갈등 구조를 표현하는 시적 장치가 되고 있다. 어구풀이 : 날 같이 : ‘나 같이'의 방언.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 : 마음 속에 나타나 자신을 깨우치는 조그마한 잘못이나 가책.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뉘우침의 눈물.   푸른 밤 ~ 같은 보람 : 맑은 날 밤에 곱게 내려앉는 이슬처럼 아름다운 삶의 보람.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 맑고 순수한 사랑이 변함 없고 은근하게 타오름을 뜻한다. '내 마음을 아실 이' 3. 작가 사전 김영랑(金永郞, 1903~1950) : 시인. 전남 강진(康津) 출생. 부유한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다. 1930년 박용철·정지용 등과 함께 동인으로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섬세하면서도 깨끗한 언어 감각과 예민한 감수성, 잘 다듬어진 시어로 고독한 내면 세계를 노래한 그의 시는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집에 , 등이 있다. 3) 자료실 돋보기 1. 김영랑과 '시문학파'  김영랑은 1930년대 일제의 문화적 탄압이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모국어의 가치를 보존하고 다듬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인 1930년대의 시단은 많은 시인들이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찾아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던 시기로, 그는 섬세한 서정을 세련된 언어와 율동적인 음조로 표현하였다. 그는 전라도 지방의 서정을 수용하면서 토속어와 의성어, 의태어 및 부사어와 사투리를 사용함으로써 시어의 가능성을 넓혔다.  1930년 박용철에 의해 창간된 순수시 동인지 은 순수시 운동의 모태로, 3호까지 간행되었으며 , 으로 계승되었다. 김영랑은 이 에 시를 발표하면서 박용철, 정지용 등과 함께 ‘시문학파’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들은 우리말을 조탁(彫琢)하여 시어의 음악성을 살리고 시적 정서와 표현 기교를 섬세하게 가다듬어 시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시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와 사회 현실을 외면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2. 더 찾을 거리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작품 해제 : 이 시는 '봄' 과 그 봄의 막바지에 피어나는 '모란'을 결합시켜 모란이 피어 있는 시간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시인은 봄과 모란을 함께 잃게 되는 순간을 절정의 순간으로 포착하고 있으며, 따라서 봄은 찬란함의 세계인 동시에 슬픔의 세계가 된다. 이러한 역설적 인식이 '찬란한 슬픔의 봄'으로 축약되어 제시되어 있다.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작품 해제 : 시의 각 연 1행과 2행은 모두 '-같이'로, 마지막 행은 '-고 싶다'로 끝나고 있다. 이 시는 하늘을 우러르고 싶고 바라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소박한 소망은 역설적으로 시적 화자가 처해 있는 현실이 불행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4) 참고 자료  김영랑의 시가 발휘한 음악성의 탁월함은 다양한 사건의 반복 현상이 시의 음악성을 살리는데 얼마나 효과적인 것인지를 시인이 인식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리듬이란 본래 등시성을 가진 사건의 반복적 재현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영랑의 시에는 바로 이와 같은 사건의 반복이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김영랑의 시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 단위의 반복으로 말미암아 음악성이 고조된다. 첫째, 음소 단위의 반복적 재현, 둘째, 음절 단위의 반복적 재현, 셋째, 단어 혹은 어절 단위의 반복적 재현, 넷째, 문장 구조의 반복적 재현, 다섯째, 시행과 연 단위의 반복적 재현, 여섯째, 다양한 음수의 반복적 재현 등이 그것이다.  - 정효구, ‘1930년대 순수 서정시 운동의 시대적 의미’, 김은전 외, (시와 시학사, 1991) 참고문헌   김은전 외, (시와 시학사, 1991) 김학동, (민음사, 1977)
1620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김광균 - 外人村 댓글:  조회:3018  추천:0  2015-12-11
.서울 혜화역 대학로 흥사단 앞     @@시비에 오자가 보인다.ㅡ 시비의 마지막련 에서 이 아니라 원작의 으로 돼야... 시비를 세움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원작을 존중해야... ================================================= 김광균 시인. 개성(開城) 출생. 개성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무공장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시를 썼다. 1930년 《동아일보》에 시 《야경차(夜警車)》를 발표한 뒤 36년 <시인부락> 동인이 되었다. 다음해 <자오선(子午線)> 동인으로 시 《대화》를 발표하였으며,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金起林)의 영향을 받아 회화적 시론을 실천하였다. 39년에는 제 1 시집 《와사등(瓦斯燈)》을 펴냈고, 47년 제 2 시집으로 《기항지(寄港地)》를 출간하였다. 그의 시는 이미지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드물게 감상적 요소가 포함되어 소시민의 따뜻한 서정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도시적 소재와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이미지의 공간적인 조형(造形)을 시도한 점에서 주목받았다. 6·25발발 뒤 실업계에 투신, 문단과는 거의 인연을 끊었으며 제 2 시집 이후 문단 고별 시집 《황혼가(黃昏歌, 1969)》를 출간했다. 시집으로는 《추풍귀우(秋風鬼雨)》가 있고 문집(文集)으로는 《와우산(臥牛山)》 등이 있다.     은수저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 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김광균1946 (1) 주제 : 아이를 잃은 슬픔과 아버지의 정   (2) 김광균(1914-1993)경기 개성. 모더니즘 시인. 온건하고 차분한 회화적인 이미지에 치중함. 1930년대 한국시사에서 새로운 시의 전기였던 주지시 운동을 몸소 실천한 시인.‘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 ‘연금사와 같이 모든 무형적(無形的)인 것을 일정한 형태로 바꿔 놓고야 만족하는 시인’, ‘청각과 시각 그리고 직관의 마술적 배합을 꾀하는 시인’이라고 평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김광균은 회화적 수법을 매우 세련된 감각으로 작품에 구현해 모더니즘을 정착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시집으로 (1939), (1947) 등이 있다.   (3) 감정의 절제 : 한 행이 짧은 한 문장 형식으로 표현함. (4) 어조 : 냉정하고 차분한 어조 (5) ‘눈물’이라는 단어가 한 번 나오지만 나머지는 슬픔을 직접 지칭하는 말을 최대한 아낌으로써 슬픔을 객관화 (6) 은수저 - 죽은 아이 (7) 방속(현세, 이승의 공간, 삶) 먼 들길(저승, 죽음..)   (8) 주제상 유사한 작품 : 박목월‘하관’, 정지용‘유리창’, 김현승‘눈물’,   이광수‘비둘기’, 이성교 ‘밤비’, 유치환‘삼 년 후’   은 아우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나머지 작품은 죽은 자식에 대한 슬픔을 그리고 있다. 은 그리움이 가장 절실하게 표현 는 한 행이 한 문장의 호흡으로 이루어져 냉정하고 차분한 어조은 슬픔의 감정을 객관적인 어조로 침착하게 표현 은 슬픔을 종교적 차원에서 승화시키고 있어 네 작품 중 슬픔의 정조가 가장 약함.           ㉠와사등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1938) (1) 주제 :  현대인의 고독감과 우수, 불안 의식   (2) 김광균 : 김기림, 정지용과 더불어 30년대 모더니즘 시를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직접적으로는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시의 음악성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김기림의 말처럼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지고 회화적인 시를 즐겨쓴 이미지즘(imagism) 계열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는 도시적 소재를 바탕으로 공감각적 이미지나 강한 색채감, 이미지의 공간적 조형 등의 기법을 시에 차용(借用)했으며, 특히 사물의 한계를 넘어 관념이나 심리의 추상적 차원까지도 시각화하였다. 그의 시에는 기계 문명 속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감과 삶의 우수와 같은 소시민적 정서가 짙게 깃들여 있다. (3)*1930년대 주지시  [최재서(이론 도입) → 김기림(작품 창작) → 김광균(결실)]   (4) 주지시 심상 : 시각적, 촉각적, 공감각적 이미지(1연/시각적, 2연/시각적, 3연/공감각적) 어조 : 비정한 현대 도시 문명 속에서 방향 의식을 상실한 지식인의 고독한 어조 구성 :    1연   현대인의 무정향성(無定向性) - 방향 감각을 잃은 현대인    2연   무정향성의 근거 - 개체의 문제가 시대적 상황으로    3연   어둠의 정서 - 개체의 문제로 집약    4연   도시적 삶의 중압감과 비애    5연   현대인의 당면 문제   (5)  ㉠ 와사등 - '가스'의 일본식 음차표기입니다. ㉡ 차단한(차다+ㄴ) - 차디찬, 아련히 비치는 등불의 모습 ㉢ 등불 = 신호(은유),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사물이다. 등불을 보고 화자는 자신의 어두운 내면에서 떠나라는 신호로 보고 있다. ㉤ 슬픈 신호 - 그러나 갈 곳을 모르는 화자에게 떠나라는 그 신호는 슬플 뿐..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화자(지식인,현대인)의 슬픈 심정이 드러난다. ㉣ 호올로 - 고독감/ 어딜 가라는 - 방황, 지향점이 없음 ㉥ 해가 날개를 접고 --> 황혼(저녁 무렵), 도시에 어둠이 깔리는 것을 해가 날개를 접는다고 표현함, 감각적이고 회화적인 표현들... ㉦ 늘어선 고층 빌딩들(원)은 묘석(보조) 같고 - 직유법          현대 도시 문명----> 묘지의 비석, 죽음과 종말의 이미지 ㉧ 야경(원)은           잡초(보조)인 양 - 직유법   현대 도시 문명------> 무질서함과 헝클어진 이미지 ㉦㉧ 현대인의 고독감과 비애가 사회적인, 시대적인 문제임을 드러냄   ㉨ 어둠(시각)이 피부에 스미다(촉각) -공감각적 이미지(시각의 촉각화) ㉩ 눈물겹고나, 비애 - 삶의 비애감 ㉪ 그림자 - 고독하고 쓸쓸한 모습의 현대인 ㉫ 슬픈 신호기(보조관념) - 원관념(등불)   (6)현대문명에서 느끼는 화자의 심정을 나타낸 말-호올로(고독감), 비애 (7)‘떠남’의 의미는? 현대인의 불안 의식 (8) 수미쌍관         외인촌    하이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馬車)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電信柱)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花園地)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少女)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었다. 외인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1935)     (1) 주제 : 현대인(도시인)의 고독과 우수 제재 : 외인촌의 풍경 (2)주지시 성격 : 회화적. 감각적. 주지적. 이국적 표현 : 이국적 정서. 도시적 우수 심상 : 회화적. 시각적. 공감각적 구성 : 시간의 흐름(저녁→밤→아침)     1연 (저녁) 산협촌―원경(遠景)  2, 3연 (저녁)) 작은 집들과 시냇물, 화원지의 텅 빈 풍경―근경(近景)     4연 (밤) 외인 묘지의 밤 정경   5,6연 (아침) 성교당의 종 소리 (3) 주지주의 시로서 회화적 요소를 중시하였다. 수채로 된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에서 도시인의 고독과 우수를 느낄 수 있다. 외인촌의 이국적인 정취를 사실적으로 그려내 낯설고 쓸쓸한 세계를 홀로 떠도는 이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4)  외인촌 - 외국인이 사는 마을, 이국적인 정서, 화자는 외인촌의 풍경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5) 이국적인 시어들 파--란 역등, 마차, 전신주, 화원지, 꽃다발, 외인묘지, 시계, 고탑, 성교당, 종소리 (6) 시간의 흐름 : 저녁 무렵 --> 밤 --> 아침 (7) 저녁 풍경 : 마차 전신주 위엔 노을에 젖은 구름이 걸려 있다. 바람이 불고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다.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취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시든 꽃다발이 있다. (8) 밤 풍경 :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풀 뒤에 가느다란 별빛이 내린다. (9) 아침 풍경 :빈 하늘에 걸려 있는 마을의 시계가 10시를 가리키고 있고, 낡은 교회당 지붕 위에선 종소리가 울리고 있다. (10) 화의 심정은? 외인촌의 적막하고 이국적인 풍경을 보면서 고독감을 느낀다. 그 고독감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11) 소리마저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곳을 찾으면?(공감각적 심상) ①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 ② 분수처럼 흩어지는 종소리         ㉠추일서정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1940)   (1) 주제 : 가을날의 풍경과 서정 (2) 한시 형태인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조 ㉠추일서정 : 선경 - 가을날의 풍경(秋日)/후정 - 고독감(抒情) (3) 화자는 쓸쓸한 가을날의 풍경 속에 외로이 방황하는 어떤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4) 이 시의 지배적 정서와 그 정서가 행위로 구체화된 시어 - 고독한, 황량한 ---> 돌팔매 (5) ㉡ 낙엽(원관념)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보조관념) - 은유법 : 여름의 화려함과 활기를 잃어버리고 땅에 떨어진 낙엽의 쓸쓸한 모습을  망명 정부의 가치가 없어진 지폐 조각으로 비유   ㉢ 도룬 시(폴란드의 도시 이름)의 가을 하늘 - 황폐해진 도시의 가을같다는 표현   ㉣ 길(원)은 구겨진 넥타이(보조)처럼 - 직유법 : 구불구불한 시골길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넥타이의 형상을 빌어 멀어질수록 좁게 보이는 길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 일광(日光)(원)의 폭포(보조) - 은유 : 눈부시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에 어려 아득히 이어져 있는 시골길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 ㉥ ‘사라지고’의 주체는? 길. 길이 가을 햇살 속으로 사라지고(활유)   ㉦ 담배 연기(보조)를 내뿜으며 -(원관념)기차의 연기 - 은유 : '조그만 담배 연기'는 기관차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사물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재치와 감각이 돋보인 구절이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 근육과 뼈대)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의 모습 = 나목(裸木)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 공장 - 근대문명의 상징, 날카롭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냄.  '흰 이빨'의 이미지 때문에 공장 지붕은 평화로운 시골 마을을 위협하는 야수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철책(鐵柵 :쇠살로 만든 울타리) ㉪셀로판지 구름 - 옅은 구름 : 이국적(異國的)이고 근대적인 감수성을 자극하는 시어-불길한 분위기   ㉫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 공감각적 심상. (청각의 촉각화)   ㉬ 돌팔매 하나 :화자의 심경을 행위로 드러냄. 무기력하고 하릴없어 돌팔매나 던지는 자신을 그려내고 있다.   ㉭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 던진 돌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           설야(雪夜)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야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女人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1938) (1) 주제 : 눈 오는 밤의 정경과 그리움. 눈 내리는 밤의 애상 (2) 서정시 (김광균의 ‘주지시’와 구별하자) (3)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회화적. 애상적  심상 : 시각적. 공감각적  표현 : 현재법을 사용하여 시적 긴장감을 얻고 있음   (4) ‘눈’의 보조관념 :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잃어버린 한 조각, 차단한 의상   (5) ‘눈’의 의미는? 화자의 추억, 그리움의 매개체   (6) 화자의 심리 변화 : 그리움 -> 서글픔 -> 가슴이 메여 옴-> 추억, 설렘 ->슬픔   (7)  ㉠ 그리운 소식(보조)이 소리 없이 흩날리다...(원)-눈발:은유 ㉡ 호롱불이 꺼져가는 모습 -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 ㉢ 흰 눈(원)은 옛 자취(보조)인 양 : 직유 ㉣ 허공같은 빈 마음에 켜진 등불 - 추억을 회상, 그리움이 일어남 ㉤ 화자는 내리는 눈을 감상하며 추억에 잠기기 위해 뜰로 나감 ㉥ 머언 곳 - 추억의 여인은 화자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음... 실제의 거리보다 마음의 거리로 봄. 여인과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 ㉦ 여인의 옷 벗는 소리(보조) : 원관념은 ‘눈이 내리는 소리’ ㉧ 잃어진 추억의 조각(보조) : 원관념은 ‘눈’ ㉨ 추회, 설렘 - 지난 일에 대한 뉘우침, 안타까움으로 설렘 ㉩ 호올로 - 화자의 처지, 외로움 ㉪ 차단한 - 차디찬, 여인의 냉대 ‘눈’에서 느껴지는 차가움과 화자에 대한 여인의 냉대 ㉫ 내 슬픔 - 이루지 못한 사랑  
1619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李箱 - 오감도 / 거울 댓글:  조회:5416  추천:1  2015-12-11
      이상 (본명: 김해경) 1910~1937 대표작: 오감도, 날개, 거울 등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요절한 시인 겸 소설가 이상(김해경·1910~1937) 탄생 100주년을 기념,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전시회 마련.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은 ‘李箱의 房(이상의 방)’ 기념전을 열고 이상의 육필원고와 사진들을 전시. 이상 출생일인 9월23일에 맞췄다.  한글 원고인 ‘오감도’ 4·5·6호를 비롯해 ‘이상한 가역 반응’, ‘파편의 경치’, ‘모조진주제조법’ 등의 원고 27점과 가족사진 4매를 포함, 보성고 시절 사진 1매, 경성공고 시절 사진 31매 등 사진 56점을 전시한다. 보성고, 경성공고 때의 사진이 상당수이지만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 등 그 동안 보기 힘들었던 사진들도 눈에 띈다.  이 자료는 대부분 이어령(76) 전 문화부 장관이 수집한 것들이다. 이 전 장관은 1960년대 뒷골목 고물상까지 뒤져가며 이상의 자료를 찾아냈다고 한다. 전시를 여는 영인문학관 강인숙(77) 관장은 이 전 장관의 부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전시에는 생존 문인들과 화가가 그린 이상의 초상화와 후학들의 헌사를 모은 코너도 준비됐다.  특히, 이상의 문학비에 얽힌 부인 변동림(1916~2004·수필가 미술평론가)과의 사연을 소개해 주목된다. 불과 몇 달밖에 이상과 살지 못한 변동림은 이상의 사후 반세기가 지난 후 이상의 문학을 향한 오마주를 돌에 새겼다. 변동림은 이상의 아내였다가 나중에 화가 김환기(1913~1974)와 재혼한 이화여전 출신 자유 연애주의자다.  강 관장은 “한일합방이 된 후에 태어난 이상은 식민지 교육을 받고 자란 첫 세대”라며 “일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불령선인’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갇혔다 죽은 그의 삶은 1930년대 식민지 지식인의 비극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상이 상징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며 “이상은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고 평했다.  =========================================================   '천재 시인 이상, 그는 누구인가?'   27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 "한국 현대시 최고의 실험적 모더니스트이자 한국 시사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상은 어두운 식민지 시대에 돌출한 모던보이이며, 그의 등장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 사상 최고의 스캔들로 평가 받습니다. 알쏭달쏭한 아라비아숫자와 기하학 기호의 난무, 건축과 의학전문용어의 남용, 주문과도 같은 해독불능의 구문으로 이루어진 시들. 자의식 과잉의 인물, 도저한 퇴폐적 소재 차용, 띄어쓰기 거부, 위트와 패러독스로 점철된 국한문 혼용 소설들. 그의 모더니즘 문학과 비일상적 기행은 이 스캔들의 원소를 이룹니다.   생전의 이상에게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근대파 시인'이라고 갈채를 보낸 바 있는 김기림은 그의 죽음에 대해 "제 스스로 혈관을 따서 를 쓴 이상의 죽음이 한국문학을 50년 후퇴시켰다."며 크게 슬퍼하기도 했죠.   이상은 20세기 한국 문학사에서 명멸한 숱한 인물 가운데 가장 문제적 인물이며, 그의 연작시 는 한국 현대 문학사 1백년 동안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적 작품입니다.         그럼, 이상의 작품 중에서 그의 대표작이자 국어시간에 한번 쯤은 들어보셨을 오감도(시제1호)를 오랜만에 한번 보고 넘어갈게요. :)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이상 오감도 (시제1호)       烏瞰圖 詩第一號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혓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오감도 시제1호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人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는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30회를 예정으로 연재된 시인데요, 독자들의 강한 반발로 15회만에 중단되었습니다. 작품이 너무 이상하다는 이유로 '조선중앙일보 신문사를 폭탄테러 하겠다'는 항의까지 나왔다고 해요... =_=;;   그만큼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힘들고 난해한 시였던 는 현대인의 불안감,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의 암울함 등을 파격적으로 그려낸 초현실주의 시로, 위에서 소개한 역시 억눌린 실존적 불안을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위 시에서는 13이라는 숫자를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상이 생각했던 의미를 정확히 알긴 힘들지만     1) '13일의 금요일'과 같은 불길한 숫자의 상징   2) 당시 우리나라가 13도(十三道)였다는 것으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   3)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예수와 12인의 제자(1+12=13)를 상징   4) 시간적 개념에서 시계 시간(12시)의 부정, 시계 시간이 끝난 탈옥의 시간   등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이상의 친구 구본웅이 그려준 이상 초상화         김연수의 은 이상을 가장 심층적이면서 흥미롭게 다룬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헷갈리실 수도 있어요. (저도 그랬으니...-0-;) 이 부분은 책 마지막에 나오는 해설 '또다른 원본을 찾아서 - 김성수(문학평론가)'를 읽어보시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 까 싶습니다. :)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가'에 대한 기준은 이 소설에서 다루는 이야기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우연과 운명, 믿음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는 작품이었구요. :)           천재시인 족두리 쓰다...     천재 검색하기" style="color: rgb(51, 51, 51); text-decoration: none;" target="_blank" title="">시인 이상(1910∼1937)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를 한눈에 보여주는 다수의 미공개 사진이 공개됐다. 오는 10일 '2010 이상의 방(房)-육필원고·사진전'을 개막하는 검색하기">영인문학관(관장 강인숙)은 2일 문학평론가 검색하기">이어령씨가 평생 수집한 이상의 미공개 사진과 이상의 부인이었던 변동림 여사(1916∼2004)와 생전에 주고받은 편지 등 한국문학사의 공백을 메울 희귀 자료를 전격 공개했다. 강인숙 관장은 이어령씨의 부인이다.  공개된 사진들은 이상의 어머니 박세창 여사를 비롯, 보성고등학교와 경성공고 시절의 이상을 망라하고 있다. 촬영 장소도 파고다공원과 남산 약수터, 세검정 옛터 등으로 다양해 마치 이상의 감춰진 앨범을 보는 듯하다. 사진들 가운데는 이상이 1934년 친구 김해림의 혼인식에 들러리로 참석한 모습과 1924년 경성공고 2학년 때 남한산성으로 원족을 간 한국 학생들만의 야유회, 그리고 경성공고 교련 시간에 장총을 들고 있는 모습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경성공고 재학 당시 연극반으로 활동했던 이상은 족두리를 쓴 여인의 모습으로 동창생 오석환(한국희관사장)과 원용석(전 검색하기">경제기획원 장관) 사이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강 관장은 "이어령 선생은 1960년대부터 서지학자를 직접 고용해 뒷골목 고물상까지 뒤지게 해서 이상의 육필 원고들을 수집했으며 이번에 공개하는 사진들은 대부분 원용석씨의 앨범에서 찾아낸 것으로 이미 고증을 거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령씨는 수집 과정에서 이상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12월12일'을 발굴, 공개하기도 했다.  전시회에는 뉴욕에서 일시 귀국했던 이상의 전 부인 변동림 여사(후일 이름을 김향안으로 개명하고 검색하기">김환기 화백과 재혼)가 1987년 이어령에게 보낸 편지도 공개. 변 여사는 같은 해 11월 14일자 편지에서 "이어령 선생. 동봉하는 사진들 보시면 한용진 조각가의 작품을 짐작하실 줄 압니다. 그리고 에스키스를 보시면 문학비가 어떻게 조형될 것을 짐작하실 줄 믿습니다. 대석 사면 중 전면에 '문학비', 후면 또는 양 측면에 선생의 생각하시는 '이상' 글들을 넣어주십시오. 가벼운 마음으로 떠납니다"라고 적었다.  강 관장은 "이 편지는 향안 여사가 이어령 선생에게 이상의 문학비에 대한 것을 부탁하기 위해 쓴 것으로 디자인과 레이아웃에 대한 것까지 직접 챙겼으면서도 그녀는 문학비 제막식에 나타나지 않았다"면서 "(결혼 후 몇 달 만에 도쿄로 떠난) 이상에 대한 노여움과 그의 문학에 대한 평가를 구분할 줄 알았던 것처럼 환기의 아내로서의 설 자리도 깔끔하게 지키면서 이 일을 마무리 했다"고 말했다. 조각가 한용진씨는 1986년 6월 변 여사의 주문대로 문학비를 설계했으며 이에 따라 1987년 12월 높이 3m50㎝, 둘레 앞 1m, 둘레 옆 2m50㎝의 크기의 문학비가 서울 방이동 보성고교 교정에 세워졌다.  전시회에는 1980년대 뉴욕에서 2년 동안 체류했던 문정희 시인이 직접 김향안 여사를 만난 짧은 소회도 공개. 문씨는 "그해 여름, 뉴욕 소호에서 만난 그녀는 차갑고 도도했다. 그녀는 오래 전에 살았다는 시떼섬의 추억과 퐁피두의 전시를 꿰뚫고 있었다. '사람의 몸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있는 줄 몰랐어.' 영어와 프랑스어가 능한 그녀의 한국말은 더 아름다웠다"고 적었다.  강 관장은 "이상은 카프카처럼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 너무나 짧게 살다가 목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난해한 문학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아야만 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은 지금 한국문학사에서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정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출처] 의 천재시인 이상과 김연수 소설 ebook|작성자 리디북스         烏瞰圖 오감도 시제 1호 -   13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13인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第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의 아이가 무섭다고 그리오. 第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2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 아이가 무섭다고 그리오. 第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第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 아이도 무섭다고 그리오. 13人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13人의 아이는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中에1人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 1인의 아이가 무서운 아이라도 좋소 그中에2人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 2인의 아이가 무서운 아이라도 좋소. 그中에2人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 2인의 아이가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소. 그中에1人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 1人의 아이가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人의아해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13인의 아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오감도1" 해설      ///김영범  "오감도1"은 구어체시이다.  영국 시인들이 수백 년 전부터 시는 구어체로 써야 한다고 했는데, "오감도1" 바로 그런 구어체시란 말이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 교육에서는 추상적 상징적 시라 왜곡 하는가.  장르적 특성을 규명 할 줄 몰라서 그런 거라 사료 되다.  모든 문학 장르에는 장르 고유 특성이 있고, 시의 가장 두드러진 장르적 특성은 함축적 내포적 문장 속에 형상화 된 운율이 내재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시라는 문장에서는 반드시 운율의 정체가 확인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운율의 정체란?  현재 대한민국 교육에서는 운율과 음률(리듬)을 동일한 것이라 하나, 운율의 정체를 파악해 보면 운율과 음률(리듬)은 하등 연관성조차도 있을 수 없다.  운율의 정체는 함축적 내포적 문장 속에 형상화 된 운율이 내재되어 있어야 된다는 논리상, 시 문장 속에 형상화 되어 내재된 의미 이기 때문이다.  함축이란 이고,  내포란 이다.  그러므로 함축적 내포적 문장이란 [속에 지니어 드러나지 않는 한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성질이 전체가 되는 속성]이 되는 문장이라는 뜻이 된다.  유명 시로 예를 든다면 김영랑님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이라는 한 개념이 [속에 지니어 드러나지 않는 한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성질이 문장 전체의 통일성에 부합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쉽게 설명하면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은, 실제 모란과 상관없는 시어로, 주권이 매개물화 된 것이다.  즉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함축적 내포적 의미는 "주권을 찾을 때까지는"는 이란 말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 상황에 맞게 시인이 인위적으로 형상화해 내재 시킨 운율적 의미는 주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함축적 내포적 문장 속에 형상화된 운율이 내재 되어 있어야 한다는 장르적 특성을 충족시킨 문장으로, 진정 시인의 경지에 도달한 시임이 증명 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나의 봄을 기다릴 테요/주권을 찾을 때까지는 나는 나의 봄을 기다릴 테요/이와 같이 '모란'을 모두 '주권'을 바꾸어 보면 내재된 형상화 되어 내재된 운율적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모란이 피기까지는" 역시 영국 시인들이 말하는 구어체詩이다.  영국 시인들이 말하는 구어체시란 한자로 具語體詩이기 때문이다. 즉 영국 시인들이 말하는 구어체시란 뜻은, 시와 운율의 독특한 관계상 형상화 되어 내재된 운율적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뜻에서 시는 구어체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시와 운율의 관계는 서로 떨어져서는 존립조차 불가한 관계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학문적 요점을 정리하면  주제 : 조국의 해방(독립)을 갈구함.  내재율 : 존재의 괴리감을 형상화함.  율격 : 의식의 생리적 발현을 고찰.  성격 : 염원시류.  운율적 갈래 : 운율시.  "오감도1" 역시 구어체 시라 하는 이유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처럼 함축적 내포적 문장 속에 형상화 된 운율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장르적 특성을 충족시키고 있어서다.  "오감도1"을 정확히 분석하려면 먼저 '까마귀 오烏'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 시에서는 까마귀 오가 아니라 '탄식 할 오'자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오감도란 제목은 일제 감점기 시절의 살벌한 풍경을 토대로 탄생된 것이라서, 오감도란 곧 탄식을 굽어 본다는 의미란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시인의 눈에 비친 강점기 세상을 탄식하며 풍자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에 구어체시라는 것이다.  아해라는 한자 표기 역시 '아이 아'가 아니라 '굶주릴 아' '종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아해란 곧 굶주린 종을 뜻한다는 것이다.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13인의굶주린종들이도로를질주하오/가 된다는 것으로, 운율적 의미는 독립(해방)에 굶주린 조선의 13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나름의 생을 살아간다는 뜻이죠.  그러므로 학문적 요점을 정리해 보면  주제 : 주권의 부재에 대한 탄식.  내재율 : 내적 구속을 형상화함.  율격 : 존재감에 대한 생리적 고찰.  성격 : 풍자시류.  운율적 갈래 : 운율시.          이상(李箱)의 삶을 찾아서 이상(李箱)의 삶을 찾아서   큰아버지 집에서 양자 생활  이상은 한일합방이 되던 해 가을 서울 사직동에서 이발소를 경영하던 아버지와 일자무학의 고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 생가의 위치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 없으나 궁내부 활판소에 근무하다 활판 기계에 손가락을 잘린 뒤 차렸다는 아버지의 이발소는 운영이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은 두 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큰아버지에게 대이을 아들이 없어 통인동 154번지의 큰아버지 집으로 옮겨 살았던 것이다. 총독부의 기술 관리였던 큰아버지 집에서의 생활은 윤택했지만 고종 때 증조부가 정3품 벼슬을 지낸 강릉 김씨 문중의 증손이 된 사실은 이상에게 적잖은 갈등을 안겨 준 듯하다. "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와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제2호) 이상이 스물세 살 때까지 살았던 통인동 본가는 그가 에서 "10대조의 고성"이라고 한 것처럼 꽤나 큰 한옥이었던 모양이다. 본채에 행랑채와 사랑채까지 딸린 300여 평의 넓은 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의 옛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광화문에서 사직터널 쪽으로 꺾어 300미터쯤 가다 보면 길 왼편에 상업은행 지점이 있다. 은행 왼편 골목길로 20미터쯤 들어간 곳의 오른편이 바로 이상이 이십일 년 간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다. 이 집은 현재 십여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여러 채의 한옥들이 들어서 있고 길가 쪽으로는 인쇄소, 책 대여방, 열쇠 가게 등이 영업중이다. 이들 가게는 물론이고 골목안 복덕방에서도 이 일대가 일세를 풍미했던 천재 시인 이상의 옛 집터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제비' 다방 : 의 무대  각혈을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이상은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다. 그러나 이 곳 술집에서 기생 금홍을 만난 이상은 청진동 조선광무소 1층을 사글세로 얻어 '제비'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 다방 뒷골목에 금홍과 살림까지 차려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된 의 무대를 만들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는 이상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의 혹평과 비난 때문에 연재는 중단되었지만 열화 같은 찬반 양론이 일었고 '구인회' 가입 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제비' 다방은 경영난으로 폐업하여야 했고 인사동의 카페 '쓰루(학)' 광교다리 근처의 다방 '69'와 명동의 '무기(맥)'를 잇달아 개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상은 1936년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수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여사)과 결혼,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으나 건강 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암담한 현실을 뒤로 하고 혼자 동경으로 떠난다. 이듬해 2월 죽음 직전의 혼곤한 상태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일경에 체포된 이상은 신병 악화로 한 달여 만에 석방되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부인 변동림과 마지막 해후를 했다. 1937년 4월 17일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유골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보다 한 이십 일 정도 먼저 타계한 소설가 김유정과 함께 합동 영결식이 치러지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만 이십육 년 칠 개월의 삶이었다. "날개를 펴지 못한 천재 시인" 이상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송파구 방이동 보성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고 동문들과 부인 변동림 여사가 1990년 5월 건립한 이 문학비는 이상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 조각으로 만들었으며 문학비 앞에 이상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를 새긴 시비를 따로 마련했다.      글꼴조정 공유하기 북마크   인기 Q&A 질문목록 이전다음 현재페이지12345   오픈지식 목록 이전다음 현재페이지123456789 TOP           거울 / 李箱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요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요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 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해와 감상   *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 거울 밖의 세계의 소리가 거울 속에 들리지 않는다. 거울 속 세계는 밖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조용한 세상이다. *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 : 자기와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딱한 것은 거울 속의 귀만이 아니라 그와(자신의 자아와) 의사소통이 안되는 일상의 나도 될 수 있다. *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요 : 각각의 세계가 정반대로 뒤집혀 있다. 각각의 세계에서의 나는 서로 악수(화해와 통일)를 할 수 없다. * 외로된 사업 : 거울 속의 나는 현실의 나와 전혀 무관하게 참된 나를 찾는 사업을 하고 있다. 서로 단절과 고립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이상이 즐겨 사용한 거울 모티프가 그 중심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일상적 자아[현상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본질적 자아] 사이의 갈등, 즉 자의식(自意識)을 드러낸 대표적 작품이다. (거울 모티프가 중심 구조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 작품으로는 이 시 외에도「오감도 제15호」와 「명경」이 있다). 이 시에서는 자의식의 세계를 표상하는 거울을 매개로 하여 두 개의 ‘나’가 설정되었는데, 이에 따라 전체는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단락은 1~3연으로 거울 속의 자아를, 둘째 단락은 4~5연으로 거울 밖의 자아를 보여 주며,셋째 단락은 마지막 6연으로 거울 밖의 자아와 거울 안의 자아의 관계를 드러내 준다.   이에 따르면,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는 거울에 의해 비추고 비치는 관계에 있으나, ‘내말을알아듣지못하거나’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로 사사건건 반대며 서로 만나지 못한다. 모든 물체를 정반대로 비추는 거울의 본질상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는 두 자아의 공존과 함께 두 자아 사이의 단절과 분열, 갈등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자아분열(自我分裂)의 모습이다.     참된 자아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고 ‘거울 속의 나’가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아닌가 하지만,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악수도 받을 줄 모르는 자아임을 깨닫고 나서 그가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라 하며 두 자아 사이에 상대적 유사점을 발견하고나서 그 거울 속의 자아가 참된 자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자의식의 거울은 ‘거울 속의 나’를 만나 보게 해 주는 매체는 되지만, 참된 자아를 탐구하는 데에는 저해 요소임을 깨닫는다. 즉 자의식의 거울을 통해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했지만, 자의식의 거울 때문에 발견한 ‘나’가 참된 자아인지 아닌지를 알아내지 못하는 갈등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라 하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적으로 본다면, 일상적 자아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고 자아관을 확보한다. 이때 자아의 통일성은 거울에 비친 상을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비로소 구성된 것이다. 즉, 자아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동일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렇게 거울에 비친 상을 통해 구성된 동일성은 자기 소외적 성격을 지니게 마련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는, 현상적 자아인 ‘나’와 자의식에 존재하는 본질적 자아인 ‘또 다른 나’의 대립과 모순을 통하여 참된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비극적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 이상의 초현실주의 문학에 대하여 : 초현실주의란 이지에 의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현실을 초월한 잠재의식의 세계를 담는 것인데, 이것은 현대적 물질문명의 발달 속에서 진부한 일상적 자아와, 잠재의식 속의 본래적 자아가 서로 분열함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을 사회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자기 성찰의 방법으로 탐구하는 것이 초현실주의다. 1930년대는 일제 식민지하이지만, 도시 문명은 급속한 발달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로 말미암은 현대인의 자아분열을 李箱이 초현실주의로 그려낸 것이다.       ▶   * 이상 : 시인 소설가 본명은 金海卿 서울 출신...                            李箱의 마지막 행적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일본 도쿄 제국대 부속병원에서 이상(李箱)이 27세로 세상를 떴다. 그는 1936년 10월 새로운 문학을 모색하러 도쿄에 갔다가 죽기 두 달 전 '거동 수상자'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본명 김해경이 아닌 이름으로 '그리 온건하달 수 없는 글귀'를 적은 공책이 그의 하숙집에서 나왔다. 한 달 동안 조사를 받다가 추운 유치장에서 폐결핵이 악화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성에서 급히 달려온 아내 변동림에게 그는 "멜론이 먹고 싶다"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한 뒤 숨을 거뒀다. 한 때 '레몬'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멜론'이 맞다는 게 최근 연구 결과다.   올해는 이상 탄생 100주년이다. 1910년 9월 23일 경성에서 태어난 이상은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라는 시 '오감도'를 내 놓아 천재와 광인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이상과 절친했던 김기림은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라며 "상(箱)이 소속한 20세기 악마의 종족들은 번영하는 위선의 문명을 향해 메마른 찬 웃음을 토할 뿐"이라고 옹호했다.   '박재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묻는 소설 '날개'를 쓴 이상의 삶은 196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시대를 앞선 천재의 상징으로 꼽혔다. '구속이 없는 자유, 자유로운 감각, 질서에 대한 충동의 우위, 상상력의 해방, 이런것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상문학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권영민 서울대 교수)   도쿄 시절 이상은 서양을 흉내낸 일본의 '모조된 현대'를 비웃었고 하숙집에서 소설 '종생기'등 10편을 왕성하게 썼다. 곧 귀국하려던 참에 느닷없이 니시간다(西神田)경찰서에 끌려갔다. 이상은 병원에서 "예의 명문(名文)에 계원(係員)도 탄탄하더라"며 우스갯소리도 던졌지만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이 경찰서에서 쓴 수기를 포함한 일본 경찰 기록은 공개된 적이 없다. ...일본인들로 구성된 '시인 윤동주 시비 건립 위원회'가 옥사한 시인의 재판 기록을 찾아내기 위해 일본 검찰에 조사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상 탄생 100년을 맞아 우리 정부나 연구자들이 니시간다 경찰서에서 보낸 이상의 마지막 행적 자료도 일본 관계기관에 요청할 필요가 있다. ...4월17일, '박제가 된 천재' 이상 떠난 날.                                                                                                              ///백해현  논설위원 ==========================================================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로 시작해서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로 막을 내리는 소설 ‘날개’의 소설가이자  ‘권태’의 수필가, ‘오감도’와 ‘거울’의 시인 이상(李箱), 김해경이  1937년 오늘(4월 1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 도쿄의 한 병원에서 폐결핵  으로 콜록콜록 피를 토하고 숨졌습니다. 경찰에 의해 거동수상자로 체포돼  돌보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조선의 천재’는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李箱, 1910년 9월 14일 - 1937년 4월 17일)은 한국의 근대 작가이다.  강릉 김씨이고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12년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 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6년 동인지 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내고 그만두고,  에 ‘지주회시’, 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이해,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종생기' ,'권태', '환시기' 등을 쓰고,  '봉별기'가 에 발표되었다.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절벽- 이상(1910~37)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 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시인 이상. 그를 말할때는 항상 앞에 '천재'라는 단어가 붙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 부르는데는 대체로, 그의 파격적이며 난해한 시들과  괴짜에 가까운 삶(+요절)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하곤 한다.  그는 우리 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음력 8월 20일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한말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셋이 잘린 뒤 이발소를 차린 김연창(金演昌)씨였다. 해경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네 살이 되던 해 그는 총독부 상공과 기술관으로 있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렇게 백부의 양자가 된 것은 해경이 태어날 무렵부터 급격히 기운 가세 때문이었다. 백부는 어린 해경에게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부성애를  베풀지만, 백모는 이와 달리 증오와 소외를 맛보게 했다.  그는 권위적인 양부모와 무능력한 친부모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이 심했으며,  이런 체험이 그의 문학 저변에 나타나는 불안의식의 뿌리이다.  이상은 시대의 불행과 환멸을 자양분으로  초현실주의 문학을 키워나갔다.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技手가 되었다. 1931년 처녀작으로 시   를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고,  1932년 동지에 시를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근무시절,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표지도안 현상 공모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되는 등  그림과 도안에 재능을 보였다.    1933년 3월 결핵의 객혈로 건축技手직을 사임하고 백천온천에 들어가 요양했다. 이때부터 그는 결핵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1933년 늦여름 어둑어둑해질 무렵. 백단화(白短靴)에 평생 빗질 한 번 해본 적  없는듯한 봉두난발, 짙은 갈색 나비 넥타이, 구레나룻에 얼굴빛이 양인(洋人)처럼 창백한 사나이, 중산모를 쓴 키가 여느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꼽추,  키가 훌쩍 큰 또 다른 사나이, 이렇게 셋이서 종로를 걸어간다.  "어디 곡마단 패가 들어왔나 본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일행을 보고 한마디씩 던진다.  백구두의 사나이가 갖고 있던 스틱을 들어 공연히 휘휘 돌려대다가 느닷없이  "카카카.!"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스스로 생각해도 일행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운  까닭이다. 그들이 백천 온천에 갔을 때도 경성에서 곡마단 패가 왔다고 애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세 사람 가운데 백단화에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바로 이상(李箱.1910~1937)이고, 중산모를 쓴 꼽추는 화가 구본웅이다. 의탁하고 있던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이상은 학교에서 현미빵을 파는 고학을 하며 어렵게 보성고보를 졸업한다. 그가 식민지 건축 기술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경성고등공업학교 (서울공대의 전신)에 들어간 것은 백부의 소망 때문이다.      "해경아, 앞으로 너는 건축과를 가야 한다. 나도 병들고 네 아비도 늙고 가난하지 않느냐. 적선동(해경의 친가)은 식량이 떨어질 때도 많은 모양이 더라. 세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는 곯지 않는단다. 그러니 가난한 환쟁이는 안 돼"  백부는 그를 설득한다. 이상이 "오감도" "삼차각 설계도" "건축 무한 육면각체" 등 건축과 깊은 관련을 지닌 표제어를 자주 쓰고 아라비아숫자와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하고 수식(數式)보다 난해한 시들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 고등공업  시절의 영향이다.  1933년 이상은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 지 23년 만에 가족과 합치나 불과 보름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버린다. 이상은 폐결핵 요양 차 구본웅과 함께 백천온천으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술집 여급 금홍을 만난다.  "몇 살인구?" "스물 한 살이에요"  "그럼 내 나이는 몇 살이나 돼 뵈지?" "글세, 마흔? 서른 아홉?"  이때 금홍은 겨우 스물한 살이고, 금홍의 눈에 마흔이 넘은 것으로 비치던 이상은 알고 보면 스물세 살이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자 백부의 유산으로  청진동 조선광무소 건물 1층을 전세내어 "제비"다방을 개업한다.  금홍을 불러들여 마담으로 앉히고, 아울러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그는 실험정신이 강한 시를 써오다가 1936년 소설 〈날개〉를 발표하면서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이상은 "나는 추호의 틀림없는 만 25세 11개월의 홍안 미소년(紅顔美少年)이다. 그렇건만 나는 노옹(老翁)이다"라고 쓴다. 이상은 찰나적인 행복감에 젖었다.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금홍이와 나는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과거래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제비"는 당대의 일급 문인들인 이태준.  박태원. 김기림. 정인택. 윤태영. 조용만 등이 단골이었다.    친구 정인택과 권순옥의 결혼식에 사회자로 참석한 이상. (동그라미 아래)  이들 부부는 이상과 더불어 삼각관계의 주인공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방의 경영은 여의치 않고, 금홍은 외간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곤 한다.  이상은 금홍이의 "오락"을 돕기 위해 가끔 P군의 집에 가 잤다. P군은  소설가 박태원이다. 금홍의 문란한 남자 관계를 방임. 방조하던 이상은  때로 금홍의 난폭한 손찌검에 몸을 내맡긴 채 자학을 꾀한다.  "하루 나는 제목 없이 금홍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사흘을 돌아오지 못했다. 너무도 금홍이가 무서웠다"  그렇게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금홍이는 집에 없었다.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 팽개쳐놓고 나가버린 것이다. "제비"다방은 두 해 만인 1935년 9월 문을 닫았다.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 이상이 20년을 살았던 집.  4년 전에는  이 집이 헐릴 위기에 놓였으나 ‘김수근 문화재단’이 어렵게 매입했다.  김원 재단 이사장(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은  이 집을 원상 복원해서 ‘이상 기념관’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 유쾌하오"로  시작되는 소설 "날개"는 바로 금홍과의 동거 체험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가정(家庭)     문을 암만 잡아다녀도 안열리는 것은 안에 생활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졸른다. 나는 우리집 내문패 앞에서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나는 밤 속에 들어서서 제웅처럼 자꾸만 멸해간다.     식구야 봉한 창호 어데라도 한구석 터놓아다고 내가  수입되어 들어가야     하지않나. 지붕에 서리가 내리고 뾰족한 데는 침처럼 월광이 묻었다.     우리집이 앓나 보다. 그리고 누가 힘에 겨운 도장을 찍나 도다. 수명을     헐어서 전당  접히나 보다. 나는 그냥 문고리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어     달렸다.문을 열려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  1936년2월에 발표    1934년 시 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했다.  1936년 《조광(朝光)》지에 《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고  같은 해에 《동해(童骸)》《봉별기(逢別記)》등을 발표하고 폐결핵과  싸우다가 갱생(更生)할 뜻으로 도쿄행을 결행했다.  1937년 2월, 사상이 불온하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감했다.  그리고 그해 4월 17일 오전 4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26년 7개월...  아내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귀국했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돌보는 이 없어 훗날 유실되고 말았다.  “5월 돌아온 유해는 다시 한 달쯤 뒤에 미아리 공동 묘지에 묻혔고  그 뒤 어머니께서 이따금 다니며 술도 한잔씩 부어놓고 했던 것이, 지금은  온통 집이 들어서 버렸으니 한줌 뼈나마 안주할 곳이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생전에 ‘삼촌 석비 앞에 주과가 없는 석상이 보기에 한없이 쓸쓸하다’던  오빠 자신은 석비는커녕 무덤의 자취마저 없으니 남은 우리들의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습니다.”  (김옥희 ‘오빠 이상’-이상 전집에서)        서울 송파구 보성고교에 설치되어 있는 이상 문학비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이상의 마지막 말 한마디.    "날개를 펴지 못한 천재 시인" 이상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송파구 방이동 보성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고 동문들과 부인 변동림 (卞東琳) 여사(이상이 죽은 뒤 수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여사)가 1990년 5월 건립한 이 문학비는 이상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기 위해 추상 조각으로 만들었으며 문학비 앞에 이상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를 새긴 시비를 따로 마련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이상과 아내 변동림 즉 김향안(金鄕岸 1916~2004),  김환기 화백의 가계도를 발견하고 수수께끼 한가지를 풀었다.  오래전 김환기 화백의 부인이자, 환기 미술관을 설립한  김향안여사가 이상의 아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의 이복 이모인 김향안을   구본웅이 소개하여 이상의 부인이 되었다.  이상이 죽은 후 변동림은   화가 김환기와 재혼하였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구본웅의 외손녀이다.      구본웅이 그린,  친구이자 이모부인 이상의 초상화  이상의 아내였던 변동림이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金鄕岸 1916~2004)  구본웅은 2살 때 척추를 다치고 곱추가 된 화가로 별명은 한국의 로트렉으로  불렸다. 변동림(卞東琳)은 서양화가 具本雄의 계모 변동숙의 이복동생으로 그 시대에 경성여자보통고등학교(경기여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문학활동을 하기 시작하였고, 1936년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李箱)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3개월 만에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1937년 4월 도쿄[東京]에서 뇌출혈로 사망한 뒤, 1944년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와 재혼하였다. 그녀는 이상, 김환기라는 두 천재의 동반자였다. 1944년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와 결혼 하면서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1955년 김환기와 함께 불란서 유학길에 올라 파리에서 미술평론을 공부하였고, 1964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1974년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는 한편, 1978년에는 환기재단을 설립해 김환기의 예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付岩洞)에 자비로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저서로는 수필집 《파리》 《우리끼리의 얘기》 《카페와 참종이》와 김환기의 전기(傳記)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가 있다.*  김향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 지에서, 그녀가 변동림이었을 때 불과 4개월을 같이 산 첫 남편 李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또 그녀가 김향안으로서 30년을 함께 한 김환기의 아내였을 때에는,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가진 예술가의 동반자로 살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상·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이상(李箱)'이라는 필명 유래  이상에게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생인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이름은 구본웅(具本雄). 구본웅은 몸이 불구이고 약해서 학교에 꾸준히 나가지 못해 나이는 이상보다 4살이나 위지만 같은 학년 같은 반에 편성되었다. 꼽추이고 4살이나 나이가 많은 구본웅과 아무도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지만 이상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친구가 되었으며 이상은 구본웅을 4년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그렇게 그들은 특별하고도 아주 진지한 우정을 쌓아갔다.  동광학교를 거쳐 1927년 3월에 보성고보를 졸업한 김해경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했다. 그의 졸업과 대학입학의 축하선물로 구본웅은 사생상(寫生箱)을 선물했다. 사생상이란 스케치박스를 말한다. 그간 사생상을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했던 이상이 사생상을 선물 받고 날아갈 듯 기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구본웅에게 고마운 나머지 자신의 필명에 사생상의 '상자'를 의미하는 箱자를 넣겠다고 흥분했다. 김해경은 아호와 필명을 함께 쓸 수 있게 호의 첫 자는 흔한 성씨(姓氏)를 따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고 구본웅도 흔쾌히 동의하자 김해경은 사생상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니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성씨 중에서 그 성씨를 찾기로 했다. 두 사람은 권(權)씨, 박(朴)씨, 송(宋)씨, 양(楊)씨, 양(梁)씨, 유(柳)씨, 이(李)씨, 임(林)씨, 주(朱)씨 등을 검토했다. 김해경은 그 중에서 다양성과 함축성을 지닌 것이 이씨와 상자를 합친 '李箱'이라 생각했고 구본웅도 그 절묘한 배합에 감탄했다.  이상의 연애에 관해    그를 키워준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자 그는 적선동의 가난을 정리한 후 효자동으로 옮겨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았던 그는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 그러나 그의 한량기질이 가만히 잠들어 있을 리 없었다. 사흘을 못 참고 장고 소리 나는 곳으로 찾아간 그는 바로 이곳에서 운명의 여인인 금홍을 만났다. 그는 금홍에 대해 '보들레르의 흑인 혼혈 정부 잔느 뒤발을 닮은 데다가, 모든 남자들이 한 번 정도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여자'라 찬사를 늘어 놓았다. 여자에 대한 호평에 박한 그가 금홍에 대해 이 정도로 평한 것은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져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천성적으로 예쁜여자를 좋아하던 그는 그녀의 매력에 금새 도취되었다. 열렬히 사랑했던 금홍을 비롯해 이상은 전생애를 통해 여러 여급과 사랑을 나누었다. 금홍과 헤어진 다음 만났던 권순희 역시 미모를 자랑하는 여급이었고, 또 유일한 정식 아내였던 변동림도 이상의 묵인 하에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간통 사건을 일으켰고, 후에 여급으로 일했다. 이상은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이들은 그에게 잠시 동안 위안을 주는 여급일 뿐, 그를 오랫동안 지탱해주는 반려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여급하고만 사랑에 빠졌던 것일까? 또 애인과 다른 남자들과이 관계를 방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대한 답은 그가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다시말해 그는 여자를 가지려고도, 또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보통남자들이 바라는 열녀형의 양처를 가진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가 그녀들에게 바랬던 것은 생활의 안정이나, 안정된 사랑 따위가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여자들에게 문학 소재 혹은 아이디어를 원했다. 이들은 실행활에서 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문학적인 면에서는 그가 문학 속으로 침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그녀들과 나누었던 경험은 소설과 시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금홍은 '날개', '봉별기', '지주회시' 등에, 또 마지막 여자였던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비 정상적인 직업의 여성들을 택했고, 또 성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던 그는 그녀들의 외도를 묵인해주어야 했다. 더구나 이상의 여자들은 그의 특이한 습성을 이해할정도로 너그러웠고 그중에서도 금홍은 그와 이러한 성향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그의 사랑을 비교적 오랫동안 독차지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다방 뒷골방에 마련했던 조그만 살림방은 그의 대표작인  '날개'의 무대가 되었다.    한동안 금홍은 마담으로 '제비' 카운터에서 일하고, 이상은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밤에 밖으로 기어나오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그의 제비다방 시대는 1933년 7월 14일 개업으로부터 1935년 9일, 파산하기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가장  격렬한 사랑마저 이렇게 금방 끝나고 만 것은 폐병 때문에 성기능도, 보석을 사줄 만한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여자에게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 했던 그는 1933년 여름부터 1934년 여름까지 이상이외의 남자를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몰입했던 금홍에게조차 불성실하게 행동했다. 같이 산 지 1년이 지나자 금홍은 이상에 대해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이야. 게다가 돈도 벌어올 줄 모르고'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로 그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금홍에게 천대를 받던 1934년 그는 에 발표한 '오감도'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1933년과 1934년은 화려한 문단 등단뿐 아니라 파산, 금홍과의 파경으로 가득찬 해였다. 당시 그가 느꼈던 좌절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하루는 나는 이유없이 금홍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금홍이가 너무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금홍과 서먹해질 즈음 그는 동인들과의 만남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금홍이  나간 직후 그는 잠시 카페 '쓰루'에 있었던 여급 권순희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여복 없는 그에게 이도 오래갈 리 없었다. 그녀를 짝사랑 하다 자살소동까지 일으킨 친구 정인택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채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결혼식의 사회까지 맡아주었던 것. 그후 그는 박태원, 김유정과 어울려 다니면서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심신을 소모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그가 했던 한마디는 그의 생활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    '제비'다방과 금홍을 잃은 후 그는 아버지의 집을 저당잡혀 인사동에 카페  '쓰루'와 광교 근처에 다방 '69'를 개업했다가 곤 망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명동의 '무기'를 설계해 개업하려했으나 중도금이 없어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빈민촌으로 가족을 이사시킨 이상은 묵묵히 따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력 사이에서 방황했다. 금홍에 이어 권순희와도 실연하고만 그는 패배감에 젖어 잠시 시골로 잠적했다. 그곳에서 그는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듯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어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1936년, 이상은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해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다. 그녀는 단편과 수필을 몇편 발표했던 신인이자, 이상의 지기인 구본웅의 배다른 동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상이 가까이 했었던 여성 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여성인 셈이었지만,  이것도 이상의 운명이었을까? 간단한 결혼식을 거친 후 곧 동거에 들어간 그녀는 이상의 가족과 전혀 교류가 없었던 금홍과는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이상의 여자는 모두 여급이었다는 전설을 다시 확인 시켜주는 셈이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대로 가족과 변동림을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다. 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너무나도 동경하던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자마자 20대였던 조숙한 천재시인 이상은 스믈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종생기'를 끝으로 자신의 생을 마쳤다.    박제가 된 천재. 이상(李箱)  4월17일은 20세기 한국문학이 낳은 걸출한 모던 보이 이상(1910∼1937·사진)이 도쿄제대 부속병원에서 28세의 일기로 요절한 날이다. 이상의 기일에 즈음해 권영민 서울대교수가 '이상 전집'(전 4권·웅진문학에디션 뿔)을 출간했다. 10년 넘는 작업을 통해 난해하다는 이유로 방치됐거나 잘못 해석되어 온 텍스트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니가타대학 후지이시 다카요 교수의 자문을 구하러 수차례 일본을 방문했을 정도로 정성을 들인 결과물이다.  사람의 숙명적 발광은 곤봉을 내어미는 것이어라  사실 且8氏는 자발적으로 발광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듯  且8氏의 온실에는 은화식물이 꽃을 피워 가지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가 태양에 마주쳐서는  히스무레한 광을 내었다.  ('且8氏의 出發' 일부)  예컨대 이상의 시 가운데 '且8氏의 出發'(차8씨의 출발) 의 '且8'은 시 본문에  등장하는 '곤봉'이란 단어와 함께 남자의 성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권 교수는 "그 결과 이 시는 성애(性愛)를 다룬 작품으로 완전히 잘못 해석돼 왔다"  며 "且에 8의 한자'八'를 더하면 사람의 성인 구(具)가 되고, 따라서 이 시는  섹스 시가 아니라 이상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구본웅에게 바쳐진 작품"이라고  진단했다. 구본웅이 늘 쓰고 다녔다는 높은 중산모(具)와 마른 체구에 기형적인  곱사등이의 형상(8)을 형상적으로 암시하기 위한 게 '且8氏'라는 해석이다.  이상은 화가 구본웅의 예술적 감각에 대한 상찬과 함께 그 불구의 모습에 대한  연민의 정을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 '買春(매춘)'의 진짜 제목을 둘러싼 논란도 명쾌하게 정리했다.  시 '買春(매춘)'의 경우 기존의 전집에서 '賣春'으로 표기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해석으로 폐결핵으로 병약해진 이상이 '買春(매춘)', 즉  '젊음을 사다'라는 새로운 의미의 말을 만들어놓은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상 자신이 즐겨 사용한 파자(破字)의 방법을 그 제목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지요."  권 교수는 전집에 이어 '이상 텍스트 연구-이상을 다시 묻다'도 곧 발간할 예정이며 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는 내년 4월에 맞춰 이상 문학을 키워드로 정리한  문학사전도 준비하고 있다.  정철훈 기자 [출처] 박제가 된 천재 · 이상(李箱) · 김해경|작성자 나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 다시 날개를 달다  살아 생전 내내 폐결핵에 짓눌린 육신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소개로 알게 된 변동림(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의 이복 자매)과의 짧은 사랑도 끝나버렸지만 이상 문학의 정신세계는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박태원과 김기림 등이 쓴 13편의 주옥같은 추도문을 낳았다. “여보, 상(箱)-   당신이 가난과 병 속에서 끝끝내 죽고 말았다는 그 말이 정말이오? 부음을 받은 지 이미 사흘, 이제는 그것이 결코 물을 수 없는 사실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이 마음이 섧구료…이제 당신은 이미 없고 내 가슴에 빈 터전은 부질없이 넓어 이 글을 초(草)하면서도 붓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여러 차례요.”(박태원 ‘이상 애사’, 조선일보 1937. 4. 22)   “상(箱)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이 아니리라. 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길어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상은 오늘의 환경과 종족의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김기림 ‘고 이상의 추억’, 조광 1937. 6)  그러나 장례식 이후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힌 이상을 찾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고개를 넘어 공동묘지에 묻히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므로 미아리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속설대로 이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죽어서까지 쓸쓸했던 그의 유골은 한국전쟁 이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없어지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내 변동림 역시 에세이집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비목(碑木)에 묘주(墓主) 변동림을 기입했을 뿐 웬일인지 나는 그 후 한번도 성묘하지 않았다.”   아내 변동림은 남편과 사별한 지 7년만인 1944년 5월 1일 화가 김환기와 재혼했다. 결혼식 주례는 화가 고희동, 사회는 시인 정지용과 화가 길진섭이 섰다. 이상과의 결혼생활 4개월 동안 낮과 밤이 없이 즐긴 밀월을 월광(月光)으로 기억할 뿐이라는 변동림은 재혼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김향안으로 고쳤다.  한국전쟁과 4·19, 5·16 등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이상은 잠시 잊혀진 시인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날개’ ‘오감도’ 등 작품이 중등 교과서에 실리고 문단과 학계 등에서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은 다시 날개를 달았다. 해마다 100편이 넘는 이상 관련 논문이 발표될 정도로 그는 한국문학의 중심이 됐다.   문학평론가 이어령과 김윤식이 각각 ‘이상론’과 ‘수심을 몰랐던 나비’를 내고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화가로서의 이상’, 수학자 김용운이 ‘이상 문학에 있어서의 수학’, 정신의학자 조두영이 ‘이상의 인간사와 정신 분석’, 권영민 서울대 교수가 ‘이상 텍스트 연구’를 발표하는 등 분야별로 이상의 생애와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가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이 가운데 고은 시인이 펴낸 ‘이상 평전’(민음사, 1974)은 이상의 고독과 사랑, 삶과 문학, 꿈과 파멸 등을 전방위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고은은 이 책에서 이상을 “자신의 고민을 시대에 만화처럼 투여한 행복한 파산자”라고 규정한 뒤 “이상 문학은 이 땅의 현대문학에 대한 음습한 주부(呪符)이며 한국 모더니티의 흑사병”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수많은 꿈이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의 난해   그 난해의 현대였다.   원(圓)보다   각도의 기수였다.   도시의 자식아   도시의 자식아.”(고은 ‘만인보’ 중에서)   혹한이 맹위를 떨친 14일 서울 방이동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이상 문학비를 찾았다. 1926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제17회 졸업생인 이상을 기리기 위해 보성고 동문들과 김향안 여사가 1990년 5월에 세운 문학비는 시인의 천재성과 파격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추상조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의 얼굴 그림과 연보, 대표시 ‘오감도’를 새긴 시비가 따로 마련됐다.   혼자 일본으로 떠나 유골이 되어 돌아온 이상을 용서할 수 없었던 김향안 여사는 반세기의 무관심 끝에 2004년 숨지기 전 ‘오감도’에 대해 글을 남겼다. “이상의 문학은 쉬르의 영향은 받았지만, 그리고 막 태동한 실존의식이 움트기도 했지만 ‘오감도’는 쉬르도, 다다도 아니다.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 구라파에 유행한 개념의 예술-시는 보고 그림은 읽는-을 시도한 것이다.”(김향안 ‘월하의 마음’, 환기미술관 )  사랑을 버리고 이상을 좇아 떠난 이도, 평생의 회한을 털고 화해의 손을 내민 이도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만 지금,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열세 명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오감도’가 유난히도 추운 겨울에 애달픈 추억을 많이 남긴 천재 시인의 넋을 달래고 있었다.   “13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適當)하오.)   제(第)1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第)2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중략)   제(第)13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人)의아해(兒孩)는무서운아해(兒孩)와무서워하는아해(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適當)하오.)   13인(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광형 선임기자        이상 문학비           이상의 생가 - 서울 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154-10 18통 9반       李箱의 여동생 김옥희氏의 회고   □ 오빠 이상(李箱) - 김옥희  '이상' 그러니까 큰오빠 해경의 생활을 말하라는 의 청을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이 었습니다. 그것은 문학인도 아닌 시중의 일개 주부가 할 구실이 못 된다는 것과 또 너무도 불행했던 오빠의 지난날의 생활을 들춘다는 것은 나에게 지나치게 벅찬 고역이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오빠 가신 지 이미 삼십 년의 세월이 갔고, 또 가히 천명을 안다는 내 연륜 으로 지나친 감상에만 젖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붓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혹 내 이 글이 오빠 이상의 생활과 문학을 알고자 하는 분들에게 티끌만큼의 도움이라도 되 었으면 하는 것이 내 염원입니다. 이제 이 땅에 무덤마저 없는 큰오빠가 이 일을 알면 어떤 표정을 할까? 회억(回憶)의 비감 속에서도 빙그레 웃음짓는 그 독특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빠의 문학은 감히 내가 말할 소임의 것이 아닐 것 같아 여기서는 주로 오빠의 생 활, 즉 그의 성장에서 운명까지 생활의 단편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오빠와 나의 연차는 6년, 어느 가정 같으면 사생활의 저변까지 샅샅이 알 수 있는 사이겠습 니다마는 우리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것은 작은오빠 운경도 아마 그러할 것입니다.(작은 오빠는 통신사 기자로 있다가 6·25때 납북됨) 왜냐하면 큰오빠는 세 살 적부터 우리 큰아버지 김연필 씨 댁에 가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큰오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큰댁 큰어머니나 또 우리 어머니(이상의 생모)께 들어서 알 뿐입니다. 오빠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에 손이 가시는 어머니-의지 없으시어 지금까지 내가 모시고 있는-께 들은 오빠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부터 적기로 하겠습니다.  오빠의 생활은 어쩌면 세 살 적 큰아버지 댁으로 간 일부터가 잘못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란 글에서 「그동안 나는 나의 성격의 서막을 닫아버렸다」고 말한 것처럼, 오 빠의 성격을 서막부터 어두운 것으로 채워 준 사람은 우리 큰어머니였다고 집안에서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 공업학교 계통의 교원으로 계시다가 나중에 총독부 기술직으로 계셨던 큰아버지 김연 필 씨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큰오빠를 양자 삼아 데려다 길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시던 큰어머니께 작은오빠가 생겼으니 큰오빠의 존재가 마땅치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두 돌 때부터 천자문을 놓고 '따, 지'자를 외며 가리키는 총명을 귀여워 못 배겨 하시는 큰 아버지, 그래서 모든 일을 어린 큰오빠와 상의하시는 큰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큰어 머니가 오빠를 어떻게 대했을까 하는 것은 능히 상상할 수가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도 총명하더니 재주 있어도 명 없으니......」  오빠의 지난날을 생각하는 어머님 말씀처럼 그의 총명과 재주가 명 때문에 발휘 못 된 그 먼 원인이 우리 가정적 비극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참 원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해경이 어디 갔느냐?」고 찾으시는 큰아버지의 끔찍한 사랑과 큰어 머니의 질시 속에서 자란 큰오빠, 무던히도 급한 성미에 이런 환경을 어떻게 참아냈는지 모 릅니다. 하기는 그랬기에 외부로 발산하지 못한 울분들이 그대로 내부로 스며들어 폐를 파 먹는 병균으로 번식해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런 가운데서도 공부는 무척 했었 나 봅니다.  한글을 하루 저녁에 모두 깨우쳐 버렸다는 수재형의 오빠는, 일곱 살 때에야 홍역을 치러서 아주 중병을 앓았는데, 그 고열에도 머리맡에 책을 두고 공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니 말입니다.  1926년, 그러니까 오빠가 열일곱 싸 때 보성고보(普成高普)를 졸업했습니다. 그사이의 고생 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점심시간에 현미빵을 교내에서 팔아 그것으로 학비를 댔다고 하는데, 후에 오빠가 다방 같은 장사를 시작한 것도 아마 이 때부터 싹튼 돈에 대한 집념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빠는 또 어릴 때부터 그림을 매우 잘 그렸습니다. 무엇이든지 예사로 보아 넘기는 일이 없는 그는, 밤을 새워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그것을 종이에 옮겨 써보고, 그려 보고 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더라고 합니다. 열 살 때인가 당시 '칼표'라는 담배가 있었는데, 그 껍질에 그려져 있는 도안을 어떻게나 잘 옮겨 그렸는지 오래도록 어머니가 간직해 주었다고 합니다. 보성고보 때 이미 유화를 그렸는데 어느 핸가는 이라는 그림을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된 일도 있었습니다.  고보를 나오자 그 해에 경성공고 건축과에 입학한 것은 아마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빠 아니 스무 살이 되던 1926년에 고공을 졸업하고 그 해 총독부 내 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갓나온 정열과 그 당시 큰아버지의 직장 이 또한 그곳이었기 때문에 처음은 일본인 과장들과도 그리 의가 틀리지 않게 일을 한 모양 입니다만 오빠성질에 봉급자 생활 그것도 일본 사람들과의 사이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을 리 가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오빠로서는 큰아버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오래 견디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해 12월인가 지의 표지 도안 현상에 일등과 삼등으로 당선된 것으로만 보 아도 그사이 큰오빠의 의욕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듬해인 1931년부터 시작(詩作)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또 그해에 오빠의 그림 가 선전에 입선되었습니다.  김해경이라는 본 이름이 이상으로 바뀐 것은 오빠가 스물세 살 적 그러니까 1932년의 일입 니다. 건축 공사장에서 있었던 일로 오빠가 김해경이고 보면 '긴상'이라야 되는 것을 인부들이 '이(李)상'으로 부른 데서 이상이라 자칭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깁니다. 그때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시가 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빠의 건축 기사로서의 면목은 발휘되었던 것으로 전매국 청사가 오빠의 설계에 의해서 건축되었고, 지금의 서울 문리대 교양학부로 생각되는 대학 건물도 오빠가 설계한 것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며칠씩이고 직장을 쉬고, 그런가 하면 나왔어도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서 해를 보내던 오빠 의 당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무슨 어려운 일을 맡기면 그 기한 안에 는 자동 계산기처럼 정확하게 해다 놓더라고 합니다. 꾸깃꾸깃한 종이 쪽지 하나를 꺼내 놓 으면 이미 일은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니,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것이었는지 알 길 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 과장 한 사람과는 아주 뜻이 통했는데 그 뒤에 온 후임인가 아니면 다른 과장인가, 어쨌든 다른 한 사람과는 몹시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매사에 서로 의견이 충돌되었다고 합니다.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답답한 정황이 아마 이러한 오빠의 직장 생활에서 얻어진 '이미지'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오빠의 불행한 생활이 표면화된 것은 1933년 3월 오빠가 직장을 버리던 날로부터 시작되었 습니다. 하기는 사표를 내던지고 억압된 직장을 떠난 일이 오빠로서는 시원하기까지 했을 것입니다마는 이해부터 각혈이 시작되었으니 불행의 시초로밖에 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흔히 각혈로 인한 건강을 오빠의 사직 이유로 말합니다마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본인 과 장의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박차고 나온 오빠였습니다.  오빠의 몸은 그때부터 극도로 쇠약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만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서양 사람 같은 흰 얼굴, 많은 수염, '보헤미안 넥타이', 겨울에도 흰 구두......」그런 모습으로 배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난 것은 이 무렵의 일입니다. 오빠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 났으니 말입니다마는 오빠만큼 몸단장에 무관심한 사람도 좀 드물 것입니다. 겨울에 흰 구두를 신고 멋으로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있는 대로 여름에 한 켤레 신었던 흰 구두를 겨울에, 다시 여름에 그렇게 신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빠는 집에 들어오면 항상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그 누워있 는 동안에 무엇을 생각하고 또 쓰곤 했습니다. 마침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나가게 되었습니 다. 오빠는 벽에 걸린 외투를 입었는데, 벗었을 때 상의를 외투와 함께 벗어 걸었던 것을 그냥 입었던 탓에 한쪽 상의 소매가 팔에 꿰어지지 않고 외투 소매만 꿰었으니 상의의 소매 하나가 외투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길 가는 여인들이 이것을 보고 크게 웃었는데도 오빠는 무관심했습니다. 친구가 그 모 양을 보고 고쳐 입으라고 해도 내처 가는 데까지 그대로 갔답니다.  이렇게 몸단장을 하지 않는 큰오빠는 머리도 항상 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오빠가 빗질하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오빠는 빗질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앉으 면 일부로 머리를 흐트려 놓곤 했습니다. 이발은 넉 달에 한 번 정도 하는 셈이었으나 그나 마도 친구가 억지로 데리고 가다시피 해야 따라가는 형편이었습니다. 까무잡잡하고 긴 수염 과 언제나 흐트러진 머리, 거기다가 허술한 옷차림이 오빠의 여윈 체구를 더욱 초라하게 만 들었습니다.  이렇듯 몸단장에 아주 관심이 없던 오빠가 배천 온천에 가서 우연히 알게 된 여자가 흔히 금홍이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병약한 몸에 밤새 술을 마시고 기생과 사귀었으니 그 건 강은 말이 아닐 정도였을 것입니다.  종로 2가에 '제비'라는 다방을 낸 것은 배천 여행에서 돌아온 그 해 6월의 일입니다. 금홍 언니와 동거하면서 집문서를 잡혀 시작한 것이 이 '제비'다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집 문서를 잡힐 때 집에서는 감쪽같이 몰랐다고 합니다. 도시 무슨 일이고 집안과는 의논이 없 던 오빠인지라, 집문서 잡힐 때라고 사전에 의논했을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만, 설령 오빠가 다방을 내겠다고 부모님께 미리 말했다고 하더라도 응하시진 않았을 것입니다.  오빠는 늘 돈을 벌어 보겠다고 마음먹은 모양이지만 막상 돈벌이에는 소질이 없었던 것 같 습니다. 더구나 장사, 그것도 다방 같은 물장사가 될 이치가 없습니다. 돈을 모르는 사람이 웬 물장사를 시작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일입니다만, 거기다가 밤낮으로 문학하는 친구들과 '홀' 안에 어울려 앉아서 무엇인가 소리 높이 지껄이고 있었으니 더구나 다방이 될 까닭이 없었습니다.  이 무렵 오빠와 자주 어울리던 문인들은 구보, 상허, 편석촌, 지용 등이었으며 이 밖에도 오빠가 속해 있던 구인회(九人會) 동인으로 이효석, 이무영, 조용만-이런 분들이 오빠와 가까이 지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다방에들 몰려 있다가 이내 어디론지 사라져 얼근히 취해 가지고는 여럿이서 저희 집에도 가끔 들르곤 했습니다.  친구분들 얘기로는 큰오빠가 밖에서 술을 마실 때면 노래도 곧잘 불렀다고 하며 더듬거리는 소리로 이야기도 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술 마시고 친구와 동행일 때말고는 집안 식구와 거의 말을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집에 오면 으레 이불을 둘러쓰고 엎드려서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기가 일쑤였습니다. 도 무지 집안 식구와는 상대도 않고 자기 일만 하고 있어도 부모님께서는 오빠 일에 아예 참견 하려 들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빠가 쓰던 방은 늘 지저분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나서 집안 식구가 별로 드나들지도 않았 는데, 오빠가 있을 때는 더욱 출입을 삼갔고 방을 비우면 그때서야 겨우 들어가 방을 치우 곤 했을 뿐입니다.  큰오빠가 다방을 경영할 즈음, 나는 이따금 우리 집 생활비를 얻으러 그곳에 간 일이 있습 니다. 오전 열한 시나 열두 시 그런 시간이었는데, 그때야 부시시 일어난 방안은 언제나 형 편없이 어지럽혀져 있었는데, 지금도 그 방안이 기억에 선한데 그것은 방이라기보다는 '우 리'라고나 할 정도로 그렇게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저게 너의 언니니라'고 눈짓으로만 일러 줄 뿐 오빠는 금홍이 언니를 한 번도 제게 인사 시켜 준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금홍이 언니와는 가까이서 말을 걸어 본 일이 없었 습니다.  그러나 금홍이 언니를 이렇게 소홀히 취급했던 오빠도 집안일에는 여간 애를 태우지 않았습 니다. 내가 돈을 타러 갈 때면 으레 주머니를 털어서 몇 푼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몽땅 제 손에 쥐어 주시곤 했으니 말입니다.  다방을 경영할 무렵에도 오빠는 를 발표했고 또 '하술'이란 이름으로 신문 소설에 삽화도 그리는 등 창작 활동을 하 는 한편, 돈벌이를 위해 그런 대로 힘을 다한 흔적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곤란했던 우 리 가정의 생활을 위해 장남으로서의 의무를 다해 보려고 그 앓는 몸으로 온갖 힘을 기울인 오빠를 생각할 때 그지없이 가엾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바깥일은 집에 와서 절대 이야기 않던 오빠도 부모에 대한 생각은 끔찍이 했던 것 같습니 다. 지금 살아 계신 어머니도 큰오빠가 어머니에게 늘 공손했고 뭘 못 해드려서 애태우곤 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편안히 모시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 던 큰오빠를 어머니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계십니다.  큰오빠는 어머니께뿐만 아니라 아버님이나 동생들에게도 퍽 잘했습니다. 세 살 아래인 작은 오빠 운경에게나 저에게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여느 집의 형, 오빠에 못지않았습니다. 별로 말이 없어도 언제나 다정하게 동생들을 보살펴 주었고 친절하고 너그러운 오빠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큰오빠는 정말 착하고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한 번도 동생들에게 매질을 한 일도 없고 호되게 꾸중을 한 일도 없습니다.  돈을 못 벌어 생활인으로는 부실했을지 몰라도 가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퍽 원만했던 큰오 빠는 또 친구들과의 우정 관계도 모범적이었다고 듣고 있습니다. 사리 판단도 퍽 정확했던 모양으로 친구들 사이에 무슨 시비가 벌어지면 큰오빠가 중재를 맡고 나서서 화해를 시키곤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오빠를 천재, 또는 기인 혹은 괴팍한 사람으로 이야기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가 그저 범상한 사람으로 가정과 친구들 사이에서 착하고 평범하게 살아보려고 애쓴 줄로 알고 있습니다.  1935년은 오빠에게 있어서 가장 불운한 해였습니다. 까먹어 들어가던 '제비' 다방은 그 해 9월경에 폐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인사동에 '학'이라는 카페를 인수했는데 이것도 곧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종로에서 다시 다방 '69'라는 것을 설계했으나 개업도 하기 전에 남의 손에 넘겨 주고 말았고 명치정에서 다시 시작한 다방 '맥(麥)' 또한 같은 운명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잖아도 돈이 있을 수 없던 오빠가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빠의 자학과 부전의 방랑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임이 언니와 처음 알게 된 것은 그 전이겠지만 오빠와 임이 언니와 동거를 하고 명색 결혼 식을 올렸던 것은 오빠가 스물일곱 살 때 일입니다. 아마 지금 내무부 건너편 청계천과 을 지로 중간쯤으로 생각되는 수하동 일본 집 '아파트'에 오빠는 우거하고 있었습니다.  창문사에서 구인회의 동인지 을 편집하고 있던 오빠는 그것이 1집만 나오고 그 만되자 황금정으로 이사를 하고 거기서 임이 언니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유월이었다 고 생각되는데 그때 칠팔 명 '구인회' 동인들이라고 생각되는 분들과 신흥사에서 형식만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작품 연보로 보아서 가장 많은 작품을 여러 가지 장르에 걸쳐 여러 곳에 발표한 것이 이 해 였다고 기억됩니다. '절름발이' 세월에 '절름발이'부부 생활이었으나마 오빠에게 그만큼 위 안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임이 언니는 사실 우리 가족과는 상당히 가까이 내왕이 있었습니다. 특히 운경 오빠와는 자 주 만나 친밀히 이야기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임이 언니의 사랑도 결코 오빠를 행복하고 안정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빠는 임 이 언니와 동거 생활을 하던 바로 그 해 동경으로 떠났습니다.  친정어머니 말씀을 들으면 오빠는 여느 때처럼 집에 들어와서는 이삼 일 동안 좀 다녀올 데 가 있노라고 그러고는 집을 나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머니에게는 이상한 예 감이 있어 골목까지 나갔는데 오빠도 자꾸만 돌아보곤 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세상에 서의 마지막 작별이라는 것을 혈맥끼리가 서로 통한 것인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그날부터 사나흘 동안을 온통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과 한시도 앉아 있 을 수 없는 안절부절못한 속에 날을 보냈다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자꾸만 되풀이하여 말 씀하십니다. 그때 이미 아버지도 사경에 계시었고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었는데 떠나는 오 빠의 심중은 가히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오빠는 이삼 일 갔다 온다는 동경에 갔 습니다.  극도로 쇠약한 몸에 그나마도 생리에 맞지 않는 도시 동경에 간 오빠는 10월에 건너가서 피 를 토하면서 한겨울을 나고, 그리고는 이듬해인 1937년 3월 '니시간다' 경찰서에 갇히는 몸 이 되고 말았습니다. 까치집같이 헝클어진 머리며 그 많은 수염을 달고 다녔으니 사상불온 의 혐의를 받음직도 한 일입니다.  심한 고문도 받았겠지만 워낙 뼈만 남은 오빠의 몸에 더 이상 손을 댔다가는 변을 당할 것 같아서인지 한 달 남짓 만에 병으로 보석이 되었습니다.  동경에 있는 친구들이 동경제대 부속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그때는 이미 회춘할 가망이 전 혀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진료를 맡았던 일본인 모 의학 박사는 「어쩌면 젊은 사람을 이 렇게까지 되도록 버려두었을까, 폐가 형체도 없으니......」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문 밖에 넘치도록 들어서는 동경 유학생들 틈에서 오빠의 임종은 그리 외로운 것은 아니었 나 봅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간호와 위문이 오빠가 세상에서 얻은 마지막 호강이 었습니다.  몸은 다 죽어 가면서도 정신은 말짱해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쉬지 않고 무슨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어떤 주사 하나에 힘을 얻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가는 곧 쓰러졌다는데, 아마 이 세상에 남겨 두고 가는 많은 할 일을 위한 최후의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임이 언니도 마지막 병상에 달려갔고 유골도 언니의 손으로 환국(還國)하게 되었습니다. 오 빠가 돌아가신 것은 1937년 4월 17일, 유해가 돌아온 것은 5월 4일의 일입니다. 그리하여 큰오빠의 스물여섯 해를 조금 더 산 파란 많은 일생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야릇한 것은 오빠가 죽기 하루 전날인 4월 16일 아버지와 큰아버지께서 한꺼번에 숨 을 거두어 우리 집안은 이틀 사이에 세 어른을 잃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빠는 아버지 와, 양부나 마찬가지인 큰아버지를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에 여읜 셈이지만 병이 하도 중태 라서 그 비보조차 듣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빠가 가신 지 서른 해가 된 오늘날 유물 중에서 가장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오빠의 미발 표 유고와 '데드 마스크'입니다. 오빠가 돌아가신 후 임이 언니는 오빠가 살던 방에서 장서 와 원고 뭉치, 그리고 그림 등을 손수레로 하나 가득 싣고 나갔다는데 그 행방이 아직도 묘 연하며, 오빠의 '데드 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 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니께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 쉽기 짝이 없습니다.  5월에 돌아온 유해는 다시 한 달쯤 뒤에 '미아리' 공동 묘지에 묻혔고 그 뒤 어머니께서 이 따금 다니며 술도 한 잔씩 부어 놓곤 했던 것이, 지금은 온통 집이 들어서 버렸으니 한줌 뼈나마 안주의 곳이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생전에 「삼촌석비(三寸石碑) 앞에 주과(酒果)가 없는 석상(石床)이 보기에 한없이 쓸쓸하다」던 오빠 자신은 석비는커녕 무덤의 자취마저 없으니 남은 우리들의 마음이 편할 까닭이 없습니다.  「망령이 있다치고」어디메쯤 오빠 시비 하나라도 세웠으면 하는 나의 의욕은, 그러나 하루 의 생활마저 다급한 지금의 처지로서는 한갓 부질없는 염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964.12)  ========================================================== 서울 통인동 이상 생가     ... ...       [출처] [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 이상(李箱)|작성자 꿈꾸는자 [출처] 李箱의 막 행적|작성자 무전여행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 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신석정(1939) (1) 주제 : 현실적 갈등과 고통이 없는 평화의 세계, 이상향을 지향   (2)신석정(1907-1974))  전라북도 부안. 1931년 3호부터 동인으로 참여.  목가적(牧歌的)인 서정시를 발표. (1939), (1947), , ,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다.   (3)  1-4연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망 (비둘기) 5-8연   순결한, 순수한 삶에 대한 갈망 ( 양 ) 9-11연  보람 있는 삶, 풍요로운 삶에 대한 동경 (능금)   (4) 중심 소재 셋의 의미 - (비둘기) - 평화로운 삶, (양) - 선량한 삶, - (능금) - 보람, 풍요로운 삶 -‘평화와 순수 속에서만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다.’는 뜻   (5)  '능금'의 상징적 의미 - 일차적으로는 풍요로운 가을을 뜻하며, - 상징적 의미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 평화와 안식이 있는 풍요한 삶   (6) 어머니 - 평화와 안식의 세계를 상징, 대지(大地)의 모성(母性)을 상징, - 시 전체에 안정감을 주는 효과,  '나'에게 '그 먼 나라'를 제시해 주는 존재이다.   (7)  '그 먼 나라'의 이미지 - 이상향, 고요하고 한가로운 곳,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곳, 넉넉하고도 안락한 곳, 소박한 곳 등의 이미지   *참고< 전원시, 목가시> 신석정은 김동명, 김상용 등과 함께 전원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초기작인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같은 시들은 이러한 전원시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본래 전원시란 목동들이 부르는 노래로, 전원의 아름다움이나 단순하고 소박한 전원 생활을 예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양의 경우 이러한 전원시의 작자는 목동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목가시라고도 한다. 그러나 동양의 전원 문학은 대부분 농업 활동이 그 배경이 되며, 낙향한 선비가 주된 창작자였다. 이러한 전원 문학의 효시로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들 수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1930년대에 이르러 신석정, 김상용, 김동명 등에 의해서 이런 전원시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이 시들은 주로 도시를 떠난 전원의 소박하고 순수한 삶을 동경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일제의 군국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낭만적인 이상향으로의 탈출을 기도한 것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꽃덤불   ㉠태양(太陽)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城)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 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내갔다.                                         (36년간의 식민지하 회상) 다시 우러러 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신석정(1946) (1) 주제 : 광복의 기쁨과 새로운 민족 국가 수립의 염원 (2) 참여시 성격 - 상징적, 서술적, 독백적 어조 - 감회에 젖은 회상적 어조, 기원의 어조. 비판적, 관조적 어조 (3) ㉠ 태양 - 광복, 해방 ㉡ 독립투쟁의 노력이 지하에서 이루어짐 ㉢ 달빛, 밤 - 암울한 식민지 상황 태양 ㉣ 식민지하의 조국, 민족의 피폐한 삶의 터전 ㉤ 애국지사의 죽음 ㉥ 탄압을 피하기 위한 도피와 유랑 ㉦,㉧ 회유와 압력에 굴복한 변절과 전향 ㉨ 이 하늘 - 불완전한 해방조국 ㉩ 겨울밤, 달은 아직 차고 -  좌·우의 이념적 대립(민족의 분열), 신탁통치(식민지 경영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바뀜) ㉪ 오는 봄 - 민족의 화해가 이루어질 것을 암시 ㉫ 꽃덤불 - 완전한 해방의 공간, 민족의 화합된 조국, 참된 자주국가     슬픈 구도(構圖)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 국권 상실의 절망적 현실 자각과 외로움     ㉡꽃 한 송이 피어 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 잃어버린 삶의 터전-불모성 강조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 국권 상실의 암담한 절망적 현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 하늘 별이드뇨.                       ▶ 절망적 상황에서의 별의 동경-구원의 염원   신석정(1939)   (1) 주제 : 참담한 조국의 현실과 독립에의 소망 절망감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함께 드러남. (2)‘슬픈 구도(構圖)’의 의미 -'슬픈 구도' = ‘슬픈 그림’ - 당시의 지구(인류) 현실은 제국주의를 부르짖는 강대국가들에 의해 약소국가, 민족들이 식민지화 되어 가고 있 던 불행하고 암울한 시대였다. - 시인은 식민지하의 조국의 현실, 인류의 현실을‘슬픈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3) 그림으로 표현된 지구의 모습은? - 화자‘나’, 어두운 밤하늘,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그 아래 푸른 산, 그 산은 꽃도, 새도, 노루도 없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불모의 땅이다.   (4)지구 -당시 전 세계가 제국주의에 의해 핍박받고 있음을 인식한 표현 (5) ㉠ 푸른 산 - 부정적인 이미지, 불모지의 땅. 죽은 자연의 모습이다. 식민지하의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삶의 터전   ㉡ 꽃 - 아름다운 세계 ㉢ 새 - 평화의 세계 ㉣ 노루 - 자유의 세계 --->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고, 노루가 뛰어노는 세계를 지향 ---> 화합과 평화와 자유가 있는 세계를 지향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 밤- 암담한 현실 ㉥ 무수한 별들 중에서 화자가 지향하는 별(광복,희망,이상세계)을 소망함 -->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함. 별에 대한 동경         신석정 辛夕汀 폰트확대| 폰트축소| 공유하기|   인쇄 미리보기| 문의   출생 1907. 7. 7, 전북 부안 사망 1974. 7. 6 국적 한국 요약 주로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시를 썼다.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불전을 공부했으며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5년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을 펴냈고, 1970년 마지막 시집으로 〈대바람 소리〉를 펴냈다.  그는 노장의 철학과 도연명에 경도돼 반세속적이며 자연성을 강조하는 시풍을 갖게 됐으며 특히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경어체를 많이 썼다. 김기림은 그를 '현대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흠모하는 목가적 시인'이라 평가하였다. 그의 시는 비참하고 암울한 시대상황에 대한 초월적 거부의 방향으로 나아가 목가적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목차 펼치기 신석정 신석정, 1934년 10월 김기림과 함께, 석정문학관 소장,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 개요 1930년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고, 주로 전원적인 시를 썼다. 특히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경어체를 많이 사용했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 釋靜·石汀), 필명은 소적(蘇笛)·서촌(曙村). 생애와 활동 원본사이즈보기 신석정 신석정 생가, 석정문학관 내,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1930년 서울로 올라와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박한영의 가르침을 받아 1년 동안 불전을 배웠으며, 이때 회람지 〈원선 圓線〉을 편집했다. 6·25전쟁 뒤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냈고, 1954년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5년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가르쳤다. 1961년 김제고등학교 교사, 1963년부터 정년퇴직할 때까지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문학세계 원본사이즈보기 신석정 신석정, 비사벌초사에서 부인 박소정여사와 단란하던 한 때(1970), 석정문학관 소장,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 1924년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시 〈기우는 해〉를 발표한 뒤, 〈선물〉(시문학, 1931.3)·〈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문예월간, 1932.1)·〈봄의 유혹〉(동방평론, 1932.7~8) 등 초기에는 목가적인 전원에 귀의하여 생(生)의 경건한 기쁨과 순수함을 노래했다. 그뒤 잡지 〈시원〉·〈조광〉 등에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을 펴냈고, 1947년 2번째 시집 〈슬픈 목가〉를 펴냈다. 시집 〈슬픈 목가〉는 1935~43년에 쓴 시 33편으로 꾸며졌다. 6·25전쟁 이후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밖에 시집으로 〈빙하 氷河〉(1956)·〈산의 서곡〉(1967)·〈대바람 소리〉(1970) 등을 펴냈는데, 이중 〈산의 서곡〉은 이전의 시풍과 달리 현실과의 갈등을 노래한 시들로 꾸며졌다. 저서로 〈중국시집〉(1954)·〈매창시집〉(1958)과, 이병기(李秉岐)와 함께 펴낸 〈명시조감상〉(1958) 등이 있다. 1958년 전라북도문화상, 1968년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원본사이즈보기 신석정 석정문학관,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  
1617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백석 - 고향 댓글:  조회:4557  추천:0  2015-12-11
  시인 백석이 노래한 ‘고성가도固城街道’     세계의 명작이라고 하는 문학작품은 거의가 작가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하여 소설이나 시의 형식으로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자크의 이나 스탕달의 이나 헤르만 헤세의, 예이츠의 등에서 보듯 실제로 그렇다. ​   ​ ​   그런 면에서 고찰해 보면 이 지구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백석만큼 자신의 고향을 노래한 시인도 드물다. 유년시절 저절로 듣고 익혔던 고향의 사투리로 고향의 맛깔스런 음식과 고향의 풍속과 고향의 산천을 시로 노래한 시인도 아마 백석을 따라올 시인은 드물 것이다. ​ 시인이 사랑했던 여인들 ​   백석의 유명한 시에 나오는 ‘나타샤’는 ‘자야’란 여인으로 알려져있다. 백석과 한때 동거했던 여인으로 2010년 3월 11일에 열반한 ‘무소유’의 법정스님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하여 길상사란 절을 짓게 한 김영한 여사가 바로 이 시에 나오는 ‘자야’다.   ‘자야子夜’는 본래 중국의 진나라 여성의 이름인데 그녀가 만든 노래가 애조를 띠고 있었으므로 이런 형식의 노래를 ‘자야가’라고 했다. 자야는 당시 사랑했던 여인의 대명사였던 모양이다.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야를 사랑해서     노늘밤은 폭폭 눈이나련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폭폭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사와 나는     눈이 폭폭 쌓이는밤 힌당나귀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마가리에살쟈     눈은 폭폭 날리고     나는 나탸사를 생각하고     나탸사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운 폭폭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알 응알 울을 것이다     - 《여성》3권 3호(1938.3)에 발표        (당시 표기한 그대로 게재) ​ ​ ​   ‘자야’를 만나기 전에 백석이 운명적으로 만났던 또 다른 한 여인이 있었다. 통영의 ‘난’이란 여인이었다.   ‘난’은 누구였기에 백석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난’은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다고 한다. 백석 자신도 새카만 머리털이 가늘고 부드러우면서 속눈썹이 길게 자란 큰 눈이 아름다우며 약간 높은 코가 잔등선이 부드럽게 내려와 보기가 좋고 키도 중키요 어깨며 다리며 균형 잡힌 체격으로 세종로를 걸라갈라치면 참 멋이 질질 흐르는 당대의 미청년이었다. 같은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던 여류시인 노천명이 백석에게 핑크빛 눈길을 주었던 것도 그만큼 백석이 잘났기 때문일 것이다.   백석은 북쪽 끄트머리 평북 정주 태생으로(본명은 백기행 1912∼1995) 남쪽 끄트머리인 고성과는 별스런 인연이 없었을 것인데도 백석은 그의 많지 않은 시 중에서 ‘남행시초’라는 부제로 란 흔치 않은 지명으로 된 시를 남겼다.   가 세상에 나온 것은 순전히 통영의 사랑했던 여인과 백석의 관계 때문이다. 백석의 통영에 얽힌 사연과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935년 6월 백석은 조선일보사 동료인 신현중의 여동생 신영순(당시 교사) 백석의 절친한 친구 허준(평북 용천 출신의 소설가)의 혼인 기념 축하모임에서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이화고녀 학생이었던 통영여자 난(본명은 박경련)을 만나 백석은 흡사 전기에 감전이라도 먹은 듯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다. 난은 신현중의 누나인 신순정이 통영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의 제자였으니 신현중과는 자연스레 잘 아는 사이였다. 신순정이 포천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이화고녀를 다니던 난은 옛 스승 댁을 자주 드나들었고 허준과 결혼하는 신현중의 여동생과는 가족처럼 지내었기에 혼인 축하모임에 참석을 했던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면 용감해지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던가. 백석은 친구 허준 내외의 통영 신행길에 허준의 처남인 신현중과 함께 따라나선다. 친구도 친구지만 필시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된 여인(박경련)과 그 여인을 낳은 통영과 장차 처갓집이 될지도 모를 그 여인의 집을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         그는 첫 통영 나들이 길에서 시이란 시를 썼다.   넷날엔 統制使가이었다는 낡은港口의처녀들에겐 넷날이가지않은 千嬉라는이름이많다.   미억오리같이말라서 굴껍지처럼말없시 사랑하다가죽는다는   이千姬의하나를 나는어늬오랜客主집의 생선가시가있는 마루방에서맞났다.   저문六月의 바다가에선조개도울을저녁 소라방등이붉으레한마당에 김냄새나는비가날였다.      -《조광》1권 2호 (1935.12)에 발표 ​   시에 나타낸 ‘천희’라는 이름이 통영 지역에는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통영에서 느낀 처녀의 이미지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것인데, 겉으로는 통영 처녀들에 대해서 말하는 듯하나 사실은 난을 향한 백석 자신의 애틋한 사랑 그 자체라고 하겠다. 애틋한 가슴앓이로 그는 “천희의 하나”인 난을 통영에서 만났다. 백석의 나이 스물네살. 난은 봄꽃 같은 스무 살이었다.   1936년 1월 초순 백석은 신현중과 함께 난을 만나러 다시 통영으로 간다. 가기 전 전보를 쳤다. ‘만나러 간다. 조선일보 백석’ 난은 전보를 받고 처음에는 백석이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백석이 결혼 피로연에서 만난 사람인 것을 알고 난은 난처했다. 백석의 관심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기에 전보를 어머니 서말수에게 알렸더니 그녀는 “도적놈이 온다.”고 펄쩍 뛰었다고 한다. 난은 서둘러 상경을 하면서 사촌 오빠인 서병직에게 부탁을 한다. “오빠! 내다 가고 나면 시인 백석이란 분이 올낀데 잘 대접해 주이소.”   난은 통영에서 배를 타고 마산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고 백석은 대구, 삼량진을 경우해 마산에 이르고 마산서 배로 통영에 닿았다. 서로 길이 엇갈린다. 백석의 상실감이 어떠했을지 쉬이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 두 번째 통영 나들이에서 통영의 풍물과 난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과 절절한 사랑을 백성 특유의 긴 음색과 호흡으로 노래한 시가 지금 통영시 명정동 충렬사 앞에, 백석이 난을 만나보려고 서성거렸음직한 길모퉁이 여백에 시비로 서 있다. ​ ... ▲ 백석 시비​ ​     舊馬山의 선창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잘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파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山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가웃하는 처녀는 錦이라든이 같고     내가 들은 馬山 客主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같고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 산다는데     明井공은 산을 넘어 冬柏나무 푸르른 甘露 같은 물이 솟는 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약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冬柏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冬柏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넷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조선일보》1936년 1월 23에 발표, ‘南行詩抄’라는 부재가 있음 ​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배에서 내려 보고 싶은 사람을 빨리 만나려고 간창골을 지나 서문고개를 급히 넘어가는 백석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왔으나 떠나고 없고 대신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을 것 같은 그녀의 집과 동네를 기웃거리며 충렬사 입구 돌층계 계단에 앉아서 시를 쓰고 있는 백석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럼 시는 어떤 사유로 세당 밖으로 나오게 됐을까? 먼저 란 시를 음미해 보자       고성固城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른하지 않는 마을은     해바른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였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운 건반밥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     고성가도 - 백석     - 《조선일보》(1936. 3. 7) ​ ​   ​   백석은 친구 허준의 통영 신행길에 따라갔다가 난을 만난 이후 1936년 1월에 다시 통영에 내려왔으나 서로 길이 어긋나 만나지 못했음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 후 백석은 다시 통영에 내려와 난의 어머니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게 된다. 아마 친구 신현중도 함께 동행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때가 1936년 봄이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의 시에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였구나”라는 구절에서 알 수가 있다. 이 구절을 또한 이 시의 압권이다. 백석은 통영에서 신현중의 친구인 서병직의 도움으로 청혼을 하게 되어 기분이 좋아 술을 마시고 통영 밤바다를 배를 타고 유람을 한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고성에서 삼천포를 거쳐 진주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하는 코스를 택한 듯하다.   는 백석이 통영에서 청혼을 한 후 고성을 지나가면서 쓴 시다. 그날이 고성장날 이었던 같다. 봄날의 날씨가 너무나 화창하여 해고 하늘 높이 둥둥 떠 있는 마을에는 개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한적한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양지바른 마당에는 방석 위에 맷돌이 놓여있고 햇살에 눈이 부시도록 고운 건반乾飯밥(세반細飯-찐 찹쌀을 말리어 튀겨 대강 빻은 가루 또는 잔치에 쓰는 약밥)과 산과 마을에 지천으로 핀 빨간 진달래와 노란 개나리가 서로서로 색감을 뽐내고 있다. 건반밥이 빨갛고 노랗다기보다 지천으로 핀 진달래와 개나리로 인해 건반밥이 빨갛고 노랗게 보였을 것이다.   건반밥을 고성에서는 통칭 ‘꼬드밥’으로 불렀다. 꼬드밥은 찹쌀을 시루에서 찐 밥으로 술을 담기 위해 덕석에 말리는데 배고픈 아이들이 오다가다 이 꼬드밥을 주인 몰래 한주먹 먹다가 들켜 혼나기도 한 밥이다.   백석은 햇살에 건반밥울 말리는 것을 곧 있을 잔치를 위한 것이고 잔치하는 사람들의 신명과 흥을 돋우기에 즐거운 거이라 했다. 흐믓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건반밥을 말리는 그 마을에는 또 당홍唐紅(약간 자줏빛을 띈 붉은색)치마와 노란 저고리를 입은 갓 시집온 새아가씨들이 신혼의 즐거움에 흠뻑 젖어서 웃고 살고만 있을 것 간다고 했다. 참으로 멋진 전개다. 잘 그려진 한 폭의 봄날을 풍경을 보는 듯하다. ​ ​ ​   이 시를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백석의 일행이 차를(당시에는 목탄차였음)타지 않고 통영에서 걸어서 고성으로 왔다는 느낌이 든다. 차를 타고 왔다면 “개 하나 얼른하지 않는 마을은/해바른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와 같은 풍경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을은 어디였을까? 아마도 월평리였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통영에서 고성으로 오자면 마을다운 마을은 월평리가 아니었을까. 1936년대의 월평리 마을 풍정을 마치 사진 찍듯이, 그러면서 그곳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긍정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백석 ​   난과 백석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1936년 12월 백석은 친구 허준과 함께 통영을 방문하여 박경련과의 혼인할 뜻을 전한다. 백석이 다녀간 뒤 1937년 3월 중순경 난의 어머니는 서울에 살고 있는 통영의 거물급 인물인 친오라버니 죽사竹史 서상호를 만나 외동딸의 혼사 문제를 상의하려고 상경한다. 백석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서상호는 그가 아끼고 신임하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조선일보사 동료인 백석의 집안 내력이니 사람 됨됨이를 수소문한다.   그러나 믿는 도끼레 발등을 찍힌다고 했던가. 시현중은 친구 백석에 대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전함으로 인해 혼사는 깨어지게 된다.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말을.   백석의 친구 신현중은 그런 정보쯤은 숨겨줄 만도 했을 것이나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 자신이 난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백석과 난의 혼사가 깨어진 그 자리에서 신현중이 대뜸 서상호에게 자신이 사윗감으로는 어떠냐고 묻는다. 서상호는 평소 신현중을 아껴왔기에 단박에 승낙을 하게 된다. 1937년 4월 7일에 결혼을 했으니까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월 먹듯한 결혼이었다.   백석은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훗날 그 소식을 접한 백석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때의 심경을 난(박경련)은, “워낙 급하게 치러진 결혼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나는 그때 신현중 씨나 백석 씨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여기까지가 통영과 백석과 난과의 사이에 얽힌 사랑 이야기다. ​ ​   ​   우리나라 시문학사에 있어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백석은 훗날 못다 이룬 사랑과 믿었던 친구에 대한 배신과 아픔을이란 시를 통해 더러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더러는 분노와 섭섭함으로, 더러는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으로 담담히 밝혀 놓았다. ​ [출처] 시인 백석이 노래한 ‘고성가도固城街道’ /고성여행/고성 가볼 만한 곳|작성자 쇳디   고향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귀신이 제 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옛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귀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괸 수선화 한 폭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 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냇내 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의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워놓아야 하겠습니다.   밤이 아직 샐 때가 멀고 또 복밥을 먹을 때도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바느질그릇이 있는 데로 가서 무새헝겊이나 얻어다가 알록달록한 각시나 만들면서 이 남은 밤을 당신께서 좋아하실 내 시골 육보름밤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육보름으로 넘어서는 밤은 집집이 안간으로 사랑으로 웃간에도 맏웃간에도 누방에도 허청에도 고방(광)에도 부엌에도 대문간에도 외양간에도 모두 째듯하니 불을 켜놓고 복을 맞이하는 밤입니다, 달 밝은 마을의 행길 어디로는 복덩이가 돌아다닐 것도 같은 밤입니다. 닭이 수잠을 자고 개가 밥물을 먹고 도야지 깃을 들썩이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새 옷을 입고 복물을 긷는다고 벌을 건너기도 하고 고개를 넘기도 하여 부잣집 우물로 가서 반동이에 옹패기에 찰락찰락 물을 길어오며 별 같은 이야기를 재깔재깔하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또 복을 가져오느라고 달을 보고 웃어가며 살기같이 여우같이 부잣집으로 가서는 날쌔기도 하게 기왓골의 기왓장을 벗겨오고 부엌의 솥뚜껑을 들어오고 곱새담의 짚날을 뽑아오고……. 이렇게 허물없는 즐거움 속에 끼득깨득하는 그들은 산에서 내린 무슨 암짐승들이 되어버리는 밤입니다.   그러다는 집으로 들어가서 마음 고요히 세 마디 달린 수숫대에 마디마다 콩 한 알씩을 박아 물독 안에 넣는 밤인데, 밝은 날 산 끝이라는 웃마디, 중산이라는 가운데 마디, 해변이라는 밑마디의 그 어느 마디의 콩이 붇는가를 보고 그 어느 고장에 풍년이 들 것을 점칠 것입니다.   그러다는 닭이 울어서 새날이 되면 아홉 가지 나물에 아홉 그릇 밥을 먹으며, 먹으면 몸 쏠쐐기가 쏜다는 김치와, 먹으면 김 맬 때 비가 온다는 물을 자꾸 먹고 싶어 하는 밤입니다.   이렇게 해서 육보름의 아침이 됩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해뜨기 전에 동리 국수당의 스무나무가지를 쪄오래서 가시가시에 하이얀 솜을 피우고, 그 솜밭 속에 며칠 앞서부터 스물이고 서른이고 만들어놓은 울긋불긋한 각시와 새하얀 할미를 세워서는 굴통담에 곱새담에 장독담에 꽂아놓는데, 이렇게 하면 이 해에는 하루같이 목화밭에서 천근 목화가 난다고 믿는 그들의 새 옷 스척이는 소리도 좋게 의좋은 짝패들끼리 끼리끼리 밀려다니며 담장마다 머물러서는 목화 따는 할미며 각시와 무슨 이야기나 하는 듯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닭이 우나?) 아 닭이 웁니다. 나는 이만 이야기를 그치고 복밥을 기다리는 얼마 아닌 동안 신선과 고사리와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이나 생각하겠습니다.     *육보름날- 음력으로 매월 열엿새 날. (이 글에서는 정월 대보름 다음날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 *웃간- 윗방  *맏웃간- 가장 위쪽에 있는 방 *누방_ 다락방 *살기- 삵괭이 *곱새담- 풀, 짚으로 엮어서 만든 담 *솔쐐기-송충이 *스무나무-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굴통담- 굴뚝담 ********************************************************************************   백석  1912∼1963. 시인. 본명은 기행(夔行).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 ‘白石(백석)’과 ‘白奭(백석)’이라는 아호(雅號)가 있었으나, 작품에서는 거의 ‘白石’을 쓰고 있다.  1929년 정주에 있는 오산 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8·15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함흥 소재)· 여성사 · 왕문사(旺文社, 일본 동경) 등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였다. 한때 그는 북한에 남아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치가 않다. 백석은 그 시대 어느 문학 동인이나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을의 유화(遺話)〉·〈닭을 채인 이야기〉등 몇 편의 산문과 번역소설 및 논문을 남기고 있으나, 그는 실지로 시작 활동에 주력하였다. 1936년 1월 33편 시작품을 4부로 나누어 편성한 시집 ≪사슴≫을 간행함으로써 그의 문단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기까지 60여 편 시작품을 그가 관여했던 ≪여성≫지를 위시하여 당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분단 이후 북한에서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한마디로 백석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그 마을에 전승되는 민속과 속신(俗信) 등을 소재로 그 지방 토착어(土着語)를 구사하여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과 철학의 단면을 제시한 것이다. 어린 시절로 회귀하여 바라다보는 고향은 대개 회상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상투이지만, 백석은 그 체험조직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그의 어린 눈에 비쳐진 고향의 원초적인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환기되는 정서의 순화를 의도하고 있다. 그는 마을의 민속이나 속신 같은 것을 재현시키면서도 자신의 감정이나 주관의 개입 없이 언제나 객관적인 입장에 섰다.  그 마을 자연과 소박한 주민들의 원초적인 ‘삶’의 리얼리티를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이룩한 이런 시적 성취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朝鮮新文學思潮史(現代篇)(白鐵, 白楊堂, 1949), 白石詩全集(李東洵 편, 創作社, 1987), 白石全集(김학동, 새문社, 199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子夜 김진향 여사의 회고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26세, 내가 스물 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 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함흥 교사시절 그는 하숙을 했고, 나도 하숙생활을 했다. 영생학교는 반룡산 밑에 있었고, 그의 하숙은 학교에서 한 오 리쯤 떨어진 함흥 근교 중리(中里)라는 곳에 있었다. 그때 나는 함흥 히라다 백화점에 볼일이 있어서 갔었던 것이다. 그의 첫 인상은 외국 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 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뜨끔하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늦은 밤이면 반드시 내 하숙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때 하숙집 부근 길목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곳 진열대에는 젊고 예쁜 여자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앞에만 오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마치 '당신 밖의 아무 여자도 나는 싫소.'라는 뜻을 나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어느 날 내가 서점에 들렀다가『당시(唐詩)선집』하나를 사왔는데, 백석은 그 책을 한참 읽고 나더니 문득 나에게 '子夜(자야)'란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자야'란 물론 당나라 시인 이백의「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는 중국 동진의 한 여인 '자야'라는 이가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간 남편과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 노래이다. "長安一片月 / 萬戶 衣聲 / 秋風吹不盡 / 總是玉關情 / 何日平胡虜 / 良人罷遠征"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37년 늦가을이었다. 그는 어느 날《여성》잡지 한 권을 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왔다. 그는 책을 뒤적뒤적하더니 한 곳을 펼쳐 코밑에 쑥 들이밀었다. 보니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바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작품 아래쪽에는 한 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빈 백사장에서 우두커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를 읽다가 문득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 당신이 이야기를 귾는 것만 같구려" 란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대뜸 말꼬투리를 잡아 "내가 끊긴 무얼 끊어요?" 했더니 그는 "밤낮 날더러 장가들라고 했잖았소!" "당신 머릿속에서는 지금도 나를 떠나라 하고 있지?" "왜 내 말이 잘못되었소?"라며 연거푸 정색을 하고 빠른 말로 말했다. 사실 나로서도 그런 말 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나는 그에게 장가들기를 권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백석 어머니는 그때 쉰이 넘어서 손자 없는 것을 늘 허전하게 여겼다고 한다. 겨울방학이 되어 백석은 서울 그의 부모 슬하에 가서 여러 날 있다 오게 되었다. 불과 며칠을 서로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함흥으로 줄곧 편지를 써 보내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배달되어 오는 것처럼. 편지글은 다정다감한 문체였으며 '오늘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오….' 라는 식의 하루 일과를 모두 깨알같이 써서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지가 뚝 끊어지더니 열흘 정도 소식이 없었다. 몹시 궁금히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에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부모가 하도 맞선을 보라 해서 맞선을 보았다는 것과 그게 가책이 되어 편지를 못 내었노라는 내력을 말했다. 그는 평소 부모 말씀을 퍽 두렵게 여기는 듯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도 부모가 새악시 선을 보라 하면, 그는 그것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런 성품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운했다. 나는 속으로 '흥, 그대가 총각이라지…. 야,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그래, 내가 피해줄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편지가 끊어진 그 열흘 동안 맞선만 본 게 아니라 초례(醮禮)까지 치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장가든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 나에게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시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위가 너무도 야속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이불이랑 짐 보따리를 꾸려서 낮 11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아주 내려와 버렸다. 193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청진동에서 11칸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動)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내 가슴은 사뭇 그리움으로 두근거려 왔다. 부리나케 그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해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오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含怨(함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출근하기 위해 밤차로 함흥으로 떠났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그해 초여름, 서울에서는 전선(全鮮)고교대항축구대회가 열렸는데,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하고 서울에 나타났다. 약 한 주일가량 출장인 것 같았는데, 그는 오던 첫날만 학생들을 연습장에 데려다주고는 줄곧 나의 청진동 집에서 기거하다시피 했다. 내가 "학교 아이들은 안 돌보고 왜 자꾸 여기만 계셔요?"라고 재촉도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떼를 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녔다. 이들 중 몇몇이 서울 학생지도 합동단속교사에 적발되었고, 교사는 학생들을 힐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 학생이야?" "함흥 영생고보입니다." "서울은 무슨 일로 왔지?" "축구시합에 출전하러 왔습니다" "인솔교사는 어디 갔어?" "몰라요, 저희들도 오던 날 운동장에서 한 번 뵌 후론 다시 못 만난걸요." 일이 이렇게 되자, 함흥 영생학교는 온통 벌집 쑤신 듯하였고, 특히 고참교사들 노여움은 대단하였다. 당시 영생학원 이사장으로 있던 이 모 씨는 평소 학교일에 매우 열성적이었던 백석을 퍽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다른 교사들 보기에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라 해서, 같은 영생학원 계열 여학교로 전보 발령을 했다. 그 난감한 경황을 무릅쓰고, 백석은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 영생 여고보에서 한 학기인가를 근무했다. 방학 때 다시 서울에 왔었는데, 그때 이미 함흥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그는 사표를 써서 우편으로 부쳤다. 그런 며칠 뒤에 조선일보 출판부 옛 직장에서 나와 달라는 연락이 왔고, 이로부터 백석의 서울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함흥 영생학교시절 아동문학가 강소천과 목사 김관석이 백석에게 영어를 배웠다. 지난날 함흥에서 거주한 적이 있는 시인 이기형은 그 무렵 백석이 '함흥 최고 멋쟁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백석은 한 평범한 교사에 불과했지만, 이미 시집『사슴』을 내어 문학적 명성이 높았던 터라, 그는 함흥 문학 지망생들의 詩 뿐만 아니라, 습작소설까지도 자상하고 꼼꼼하게 지도해주었다고 한다.   백석과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시절은 그가 교사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詩「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친구와 이 집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꼬리곰탕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식당 안방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옛 청진동 시절 추억에 젖었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우리 둘은 참으로 행복하였다. 워낙 서로 만족하였고, 아무런 빈틈이 없었으며, 오직 서로에게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밖에 아무런 것에도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늘 나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려고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어떤 일에도 절대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불편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단정한 젠틀맨이었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비록 밖에서 화난 일이 있었어도 혼자 가만히 참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언제 화를 내고 있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말수도 적었고, 어떤 때에도 남의 결점을 화재로 떠올리는 법이 없었다. 이런 그의 성격을 까다로운 편이라고 할까.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조차 누구에게 신세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때 청진동 집에는 늘 와서 부엌일을 보고 잔심부름도 해주는 찬모가 있었는데, 나는 그가 찬모에게 무엇을 시키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처럼 말수가 적던 백석도 일단 시에 관한 화제로 옮겨지면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요절한 일본작가 아꾸다까와(芥川龍之介)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또 다른 일본 문인들 이야기도 재미있게 했던 것 같다. 내가 문학을 모르니 다만 웃기만 하고 들을 뿐,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무렵 《삼천리(三千里)》지에 두어 편의 수필을 필명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종로 네거리 한청빌딩 부근에서 과일 파는 상인들의 밤 풍경을 쓴 것인데, 나의 글이 실린 책이 나오던 그날은 하루 종일 함박눈이 펑펑 왔다.) 일본 문인들을 화제로 떠올리긴 했지만, 그는 일본말 쓰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일찍이 일본 유학도 다녀왔으니 일본말도 잘했을 것이나, 그는 일본말을 써야 할 때, 거기에 바꿔 쓸 수 있는 우리말을 애써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담화 때는 주로 표준말을 썼지만, 그의 억양은 짙은 평안도 말씨였다.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그는 야릇한 고향 사투리를 일부러 강하게 쓰는 습관이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천정을 '턴정' 정거장을 '덩거장', 정주를 '덩주', 질겁을 '디겁', 아랫목을 구태여 '아르궅' 따위로 쓰는 식이었다. 그의 식사 공궤(供饋)는 매우 수월한 편이었다.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들었지만, 육류보다는 나물반찬을 비교적 더 좋아했다.   한번은 함께 시내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푸줏간 앞을 지나는데, 그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하고 말했다. 정말 그는 푸줏간을 제일 질색했다. 함께 살면서 보니 그에겐 이처럼 드러나 보이는 이상한 습관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집 안방 창문을 여닫을 때도 그는 잠금쇠 만지기를 피하여 손이 잘 닿지 않는 창문틀 위쪽이나 아래쪽을 겨우 밀어서 여닫곤 했다. 한번은 함께 전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길이었다. 전차가 길모퉁이를 돌 때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그때까지 머리 위 손잡이를 불결하다며 아무것도 잡지 않고 그냥 서 있던 그는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창유리에 갖다 대면서 몸의 중심을 유지했다. 또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와 악수하고 난 뒤에는 곧 그가 눈치 채지 않게 수도간으로 나와 꼭 비누로 손을 씻곤 했다. 보다 못한 내가 몇 차례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수건을 달랄 때 일부러 안 주곤 했더니, 그 뒤 그 습관만큼은 조금 고쳐진 것 같았다.   그는 각별히 즐기는 취미나 오락은 없었다. 술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경음가(鯨飮家)는 아니었고 오히려 애주형에 가까웠다. 책으로는 모리악의『예수전』, 중국작가 변윤(邊潤)의 『요불이전(了不以前)』을 즐겨 보았으며, 심심할 때면 잡지《문에춘추》를 보거나 일본시집을 뒤적거릴 정도였다. 그 목소리는 참 다정스럽고 부드러웠으며, 청으로서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내가 아는 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집에 빅터상표의 고급 유성기가 하나 있었지만 한 번도 거기에 손대는 걸 못 보았고, 가요 · 창극 같은 데도 무관심했다. 그 무렵《조광》지가 요청해온 설문란에 그가 자신의 취미를 '西道唱(서도창)'과 '타이프라이팅'이라 쓴 것을 보았는데, 이 '서도창'이 직접 부르는 걸 말하는 것인지 소리꾼 노래를 듣는 걸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다만 말없이 묵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러다가는 잡지보고, 시집보고…. 하였을 뿐이다. 그의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무렵 청진동으로 그에게 부쳐져오던 편지 겉봉에는 '백기연(白基衍)'으로 씌어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가 몹시 기뻐하던 모습을 꼭 한번 본 적이 있다. 언젠가 내가 시내 본정(명동의 일제 때 이름) 부근엘 나갔다가 상점 쇼윈도에서 넥타이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얼핏 그것이 백석에게 매우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사와서 드렸더니 그 얼굴 표정에는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튿날 그는 내가 사온 넥타이를 매고 출근 했는데, 저녁때 와서는, "여보, 오늘 ××를 만났는데, 이 넥타이 참 좋데" 라고 했다. 그는 그 뒤 여러 날 동안 줄곧 그 넥타이만 매었고, 퇴근 후에는 예의 그 말을 꼭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제 그 소리 오늘 또 하네. 어쩌면 그게 그렇게도 좋을까' 했지만, 내심 그 말이 듣기에 즐거웠다. 이 넥타이 이야기는「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시에서 "언제나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백석은 사람을 만나 그가 먼저 주도해서 교제를 이끌어간다거나, 누구를 새로 사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 백석이나 그의 시에 홀딱 반해버린 사람이 아주 그에게 제 스스로 엎어져오기 전에는 도무지 사교 능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얼른 보기에 무심한 편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중에서도 함대훈, 허준, 정근양, 그리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조○○는 비교적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다.   도쿄 외국어학교 노어과를 나온 일보(一步)함대훈은 황해도 풍천 출생 노문학자로서 소설도 몇 편 썼다. 그는 조선일보 출판부 주임으로 있었으며, 편집국장을 지낸 함상훈과 형제지간이었는데, 괄괄한 성격에다 대단한 호주(豪酒)였다. 당시 그는 청운동에 살았는데, 우리 청진동 집에 가장 자주 놀러왔던 백석 친구였다. 나중에는 그가 아무 때건 불쑥 찾아오는 것이 너무 싫어서, 내가 백석에게 "함대훈 씨가 싫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당신이 좋다고 하던걸" 하면서 꼭 친구와 나를 함께 두둔하곤 했다. 그래도 줄곧 내가 못마땅한 얼굴로 "함씨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에요?"하면 "아냐, 그는 정말 당신이 좋대"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함대훈은 그때 무슨 잡지를 만들던 최남주 여동생 최옥희와 열애에 빠져 있었다.   평안도 용천 출신 소설가 허준은 1935년 10월 조선일보에 시「모체(母體)」를 발표하면서 백석과 비슷한 시기에 문단에 나왔는데, 이듬해《조광》지에「탁류」란 단편소설을 쓴 뒤 아주 소설 쪽으로 돌아섰다. 백석과는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서로 심지(心志)가 꽤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그는 낙원동에 살면서 자주 왔었는데, 매우 큰 체격으로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으며, 술을 좋아했다. 백석이 허 씨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시까지 쓴 걸 보면, 그와 남다른 우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사로서 문필생활을 겸하던 정근양, 그는 앞서도 말한 바처럼 백석과 조선일보 장학생 동기였고 청진동 집에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났을 때, 정도 서울을 떠나 북지(北支)산서성 임분현이라는 곳에 가서 병원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한 사람 친구는 서울 어느 중학 영어선생을 하던 조○○였다. 그는 우리 집에서 놀다 밤이 늦어 돌아갈 때면, 그때마다 우리를 앞에 세워놓고 "그대들 둘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인고…." 하면서 부러운 듯 말했다. 사실 백석과 나는 서로 다른 기질 때문에 오히려 잘 맞았는지 모른다. 한쪽이 뾰족한 성품이면 다른 한쪽은 좀 둥글둥글한 것이 인간관계의 조화가 아닐까.   그밖에 백석과 평소 가까이 지냈던 이들은 문학평론가 백철이 있다. 그는 백석보다 네 살 위였지만 동향선배로서 친밀하게 지냈고, 함흥 영생학원에도 한때 같이 있었다. 1935년 시집『사슴』이 나온 직후, 서울 태서관에서 가진 출판기념회 발기인 명단 이름들은 몇몇을 빼곤 대부분 백석과 조선일보에 함께 몸을 담고 있던 문인, 화가들이었다. 또 그들은 대개 백석의 시를 남달리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안석영(安夕影)은 서울 토박이로 본명이 석주(碩柱)였다. 일찍이 1921년 나도향(羅稻香)의 동아일보 연재소설『환희』삽화를 그렸던 그는 한국 삽화계 선구자이다. 30년대 중반 안 씨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는데, 워낙 잘생긴 얼굴에 다재다능하여, 나중에는 언론계를 떠나 전적으로 영화에만 몰두하였다. 백석보다는 11년 위였는데, 서로 각별히 따르고 위하였다.   김규택(金圭澤)은 웅초(熊超)란 호를 가졌던 분으로,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나와 역시 조선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던 화가였다. 일본 호세이대학 불문과를 나온 여천(黎泉) 이원조(李源朝)는 경북 안동사람으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아우였는데, 그때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 언제나 한복차림이던 그는 늘 자신이 양반고장 사람임을 자랑삼아 말했고, 그것을 날마다 들어온 사람들은 "여보, 그 양반타령 좀 작작허우"하며 싫은 소리를 하였다. 깔깔한 샌님 같던 그도 일단 술이 취하면 주사(酒邪)가 대단해서 모두들 슬금슬금 뺑소니치는 모습이었다. 함경도 출신 시인 편석천(片石村) 김기림은 백석보다 4년 위였는데, 그도 일찍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사슴』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즉시 서평을 써줄 정도로 그는 백석 시를 좋아했다.   정현웅은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작품「여인상」이 특선으로 뽑힌 서양화가로서 당시 백석과 함께《여성》지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잡지 삽화로 백석 프로필을 그리면서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스케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얼굴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삽화 말을 썼다. 한편 백석이 평소에 문학적 재능을 자주 칭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동문학가 강소천이다. 용률(龍律)로 함남 고원 태생인 그는 백석보다 불과 3년 밑이었으나, 만학으로서 백석에게 직접 문학을 배운 제자였다.   1939년 서울 명동입구 미도파 건너편에 '제일다방'이라고 있었다. 이 다방은 당시 경성일보 학예부에 있던 일본인 기자 기쿠지(菊池)의 아내가 경영하던 곳으로, 이른바 재경(在京)문인 예술가들 아지트였다. 언제 어느 때건 가보면 낯익은 문인 몇몇은 꼭 눈에 띄었다. 공작새 꽁지깃으로 장식한 세련된 실내장식에다, 이름 있는 유화도 여러 점 운치 있게 걸려 있는 꽤 분위기 있는 다방이었다. 한 번은 그곳으로 오라는 전갈이 와서 가보니 백석은 함대훈, 백철 등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정쩡하게 합석이 되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양인은 번갈아가며 내 얼굴이 예쁘다느니 어떻다느니라는 말을 자꾸 거듭하여 면전에서 몹시 난처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백석은 혼자 웃고만 있었다.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난 뒤에 길에서 허준, 정근양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도 "김(金)은 어째 갈수록 예뻐져?" "백석이 장가를 두 번씩이나 들고도 곧장 도망 나온 까닭을 인제야 알겠구먼."이라고 큰소리로 떠들어 그때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 적이 있다.   1939년 유월 어느 아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석은 그날 충청도 진천으로 한 주일 가량 출장을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여자 육감으로 그가 먼젓번처럼 필시 장가들러 가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약속한 한 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번에도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틀림없이 돌아오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달갑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차디찬 성질, 그리고 나를 향한 열정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청진동 집에서 조선일보까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는 찾아가기는커녕 전화 한 번 조차 걸지 않았다. 점차 매섭게 타오르는 내 가슴속의 독(毒)과, 또한 내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내 성격을 백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또 몹시 초조하게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없는 빈방에 혼자 남아서 무척 공허한 심정이 들었고, 내 가슴 속의 공허감은 차츰 매몰찬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매몰찬 복수라는 게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기껏해야 연전에 내가 몰래 함흥을 빠져나오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서 한동안 멀리 떠나 있고자 했던 것뿐이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채로…. 웬만한 살림을 대충 챙겨서 나는 명륜동 언덕으로 숨어버렸다. 지금 성대 뒤쪽이었는데, 1930년대 후반 그곳 부근 앵두나무, 능금나무, 배나무 따위를 심어놓은 과수원이 많았고, 주택들도 드문드문 서 있는 변두리에 불과했다. 지난 날 부통령을 지냈던 장면(張勉)씨 집이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다.   어느 석양 무렵이었는데,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누가 "자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일일까? 그는 내가 잠적한 이곳을 모를 텐데….(그가 어떻게 내 거처를 찾아내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불가사의로 생각한다.) '자야'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백석뿐일 텐데…. 부르는 소리는 두 번 세 번 거듭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어찌 되었건 나가놓고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황급히 나갔더니, 그가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 달 만에 다시 만났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척 독이 나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는 순간 다시금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좋아서 마음이 시루리 풀리듯 스르르 풀려 버렸다. 그러나 나는 백석 부모가 못내 원망스러워졌고, 또 예의 그 독한 마음은 불쑥불쑥 치밀었다. 그는 본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족두리를 풀어 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색시를 내버려두고 집을 나온 것이다. 내가 알기로 백석이 사모관대하고 장가를 든 것은 두 번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마다하고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1939년 동짓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중국 북경, 소주(蘇州),항주(杭州) 상해 등지를 거쳐 한 달 만에야 돌아왔다. 떠날 때 내 행선을 백석에게 알리지 않았다. 다녀와서도 나는 그에게 여행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그 또한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알리지도 않고 중국을 다녀온 처사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앵돌아진 속으로 '당신께선 지금 저 때문에 화나시게 해서 송구스럽지만, 당신도 제가 겪은 고통을 한번쯤 겪어보셔야 해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그저 묵묵해지기만 했고, 서로 일과를 화제로 떠올리지도 않았으며, 이런 우리들 사이는 심상찮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하루는 그가 보낸 메시지가 왔다. 왕십리역 대합실 구내다방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때 왕십리란 보잘것없는 초가와 들판뿐인 아주 시골이었는데,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종점인 왕십리까지 가서 내리면 사방에서 거름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사람들 눈을 피하려고 그 변두리 먼 곳까지 나오라 했던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대뜸 자기와 함께 만주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이러한 권유는 함흥시절부터 심심찮게 들어오던 터라 조금도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 표정은 너무도 심각한 듯 여겨져서,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나는 그때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그는 만주 신경(新京)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나에게 단 한마디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돌이켜보면 그 만주행은 함흥에서부터 계획해오던 것이었고, 또 그가 재차 서울로 와서 옛 직장을 다시 나가고 한 해를 머무른 것도 결국은 나 때문에, 내가 마음에 걸러서였던 것 같다. 나 아니었으면, 그는 진작 함흥에서 만주로 곧장 떠나갔으리라. 그가 만주 땅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깊은 속뜻을 내 얕은 여자 소견으로 어찌 감히 짐작인들 했으랴만…. 그는 내가 자기 권유대로 쉽게 만주로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에서 이런 대목을 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만주 신경시절 백석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작가 송지영(宋志英)씨 술회로는 백석이 그때만큼은 고향 부모에게 매달 약간의 송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 무렵 항상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송씨가 "그 옷, 서울의 김이 보냈구려"하고 농을 걸면, 백석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이후 백석은 실직상태가 되어서 만주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되었던가보다. 그가 이렇게도 모진 고생을 했었다는 생각을 하면 온통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 시절 만주의 쓸쓸한 하숙방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그 詩「흰 바람벽이 있어」를 통해, 나는 필시 내 모습으로 짐작되는 부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있다. 깊은 밤에 그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이 시에서 그의 맑고 고결한 정신은 이미 세속을 훨씬 떠나 있는 듯하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 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흡사 그가 눈앞에 당장 되살아온 듯 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말 속에는 평소 그 성품, 현실에 임하던 그 모습 같은 것이 그대로 생생하게 스며 있다.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것도 헤아려보면 모두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 끓듯 끓어 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내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 텅 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사실 10여 년 전부터 나는 그 전집을 내 손으로 엮어보려고 틈날 때마다 흑석동 살던 백철 씨와 의논해왔었다. 그 무렵, 백철은 어느 신문칼럼에서 시인 백석을 일컬어 "한국시사에서 소월 다음가는 귀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뒤 병을 얻어 내 포부를 도와주지도 못하고 타계해버렸다. 이미 그의 전집이 세상에 나왔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백석의 여인1-자야의 사랑)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 있어 ' 기자는 또 한 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   자야子夜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간 기생이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며 몇 편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여성. 백석과는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교원으로 있던 시절에 만났으며, 그 뒤 두 사람은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우여곡절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백석,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 이동순'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백석의 많은 시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詩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백석白石   1912. 7. 1  평북 정주~1995 (사망한 것으로 전해짐) 본명은 기행(夔行)이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조선일보〉에〈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의〈고요한 돈 강〉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뒤 귀국하여 협동농장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에 시집〈사슴>〈여우 난 곬족(조광,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무술(巫術) 소재가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이용악 詩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서 해금 뒤 최초로 영남대 이동순 교수에 의해 시집〈백석 시전집.1987)〈흰 바람벽이 있어.1989)과 논문이 출간되고, 이후, 여러 작가들에 의해 많은 시선집 시 해설집 논문 등이 나왔다.   子夜는 백석의 여인 중에서 잘 알려진 분이다. 이동순 교수(영남대)가 백석 문학이 해금되던 해, 자야 여사를 직접 면답해 얻은 자료가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 담긴 '백석,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이동순과 자야여사가 구술하고 이동순 시인이 정리 조력한 자야여사의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이다.   백석의 女人에는 여러 여인이 등장한다, 한 분은 지금 옮기는 자야이고, 그리고 부모님이 정처해준 부인, 백석의 절친한 친구 신현중과 결혼해버린 통영의 란, 그리고 김진세 누이 등이다.   세월과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고 가난과 외로움과 쓸쓸함에 사랑의 처지가 눈물 앞에 뉘여 가며 흔들릴 때 그의 사랑도 定處도 그의 조국인 조선의 울도 변해간다.   함흥에서 서울에서 통영에서 의주에서 만주에서 북한에서 백석의 여인도 운명처럼 여러 여인이 등장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백석의 심중에 남은 여인이 란이라면, 여인의 심중에 남아 있게한 사랑이 자야의 백석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의 사랑, 아니 여인의 시인에 대한 사랑이야기 오늘은 이생진 시인님 시를 빌어 1편-자야의 사랑을 보낸다.   "천재시인 백석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사후,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은 같은 해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일하게 된다. 백석과 김영한의 극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이루어진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이러한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해준다. 신윤국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앉았다. 그는 여러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그 배경이 순진했다고 한다.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나갈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나게 되면 스승을 특별 면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지만, 함흥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우연히 함흥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함흥에서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사랑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의 外的인 도피 그때 백석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우곤 했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 여러 시인들이‘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 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비슷한 시기 천재작가 이상(李箱)은 황해도 배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잠시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살림을 차렸고, 현재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다방을 연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여성’에 발표한 ‘바다’와‘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백석은 어느 날 ‘바다’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 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 “이 詩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을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1937년, 여성)   두 사람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목 어느 신의주 변방에서 1948년 잡지 ‘학풍’에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이 작품이 서울로 보내져 학풍에 실리게 됨으로서 백석이 서울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 당시 백석의 단절한 심경이 절절히 배인 이 시는 지금 많은 시인들의 애송시가 되었다. 즉 남한에 알려진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백석이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 작품은 1987년까지 금지도서가 되었다. 까닭은 해방이후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함흥과 정주를 마음대로 오가며 문학 활동을 하던 백석은 한반도 허리가 잘리면서 북쪽을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월북 작가가 아닌 재북작가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자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고 자야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자야여사(김영한)는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이 많은 사랑의 지난날을 털어놓는다.   이동순 시인은 그 때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자야가 글 솜씨가 있는 데다 1953년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 학구파였기에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자야는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입원을 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백석은 1930년대 모더니즘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유일한 사례였다면서 백석의 작품이 수능시험에 까지 출제된다는 것은‘월북 시인’에서 ‘재북 시인’으로 완전한 복원을 의미한다”(이동순 교수)   생전의 자야 여사(김영한)는 백석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 詩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5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이시영. 정양 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백석은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남겨지고 북한에서 죽었다. 그의 시(詩)와 비련(悲戀)의 사랑, 그리고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많은 독자 숨결이 되어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旻影 시인)   *참고인용-자야여사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1995) *참고인용-'수능 시인’백석과 기생 자야의 비련의 사랑/조성관 주간조선차장대우 *참고인용-"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여사의 회고/이동순" 에서   자야 김진향 선생님과 인연-국립국악원 정악단 문현(음악학.文學博士)   자야 선생님은 한때 가곡으로 인연을 가진 바 있다. 작고하시기 약 4-5개월 전부터인가-기억도 가물가물해졌지만-자야 선생의 가곡 스승이었던 하규일 명인으로부터 배운 가곡을 복구시키고 싶다며 제가 몸담고 있는 국립국악원에 문의를 해 오셨고, 이리해서 필자는 장구를 잡고 지금도 정악단 단원으로 있는 대금에 김상준씨와, 거문고에 윤성혜씨와 함께 작고하기 직전까지 그가 사시던 한강이 창문너머 보이던 동부이촌동 한 아파트를 일주일이면 1-2 회 정도씩 드나들며 선생이 부르는 여창가곡을 반주하곤 했었다. 연습할 때마다 그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직접 해 두셨고, 그가 작고하신 뒤 이를 CD 5-6장 분량으로 복각하여 반주했던 우리들이 나누어 가진 바 있다.   사실 선생은 이렇게 댁에서 연습하신 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을 때 녹음실 기자재로 정식으로 녹음 제작하여 보관해 놓으시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작고하시기 전날 밤, 이날도 우리 일행은 선생의 가곡 반주를 해 드렸던 날이었는데, 그날 새벽 갑자기 작고하셨던 것이다. 우리 일행이 가곡반주를 위해서 동부이촌동 댁을 드나들 때에도 이미 호흡기 계통에 문제가 있으셔서 예전의 낭랑했을 목소리는 빛을 잃어 가쁜 호흡을 뿜어내며 긴 노래를 힘겹게 하시곤 했었다.   선생이 기거하던 넓은 아파트에서 선생 뒷바라지를 위해 한 부부 내외와 함께 거처하면서, 특히 선생이 숨이 턱에 차서 호흡곤란이 발생할 때면 항상 남자로부터 응급치료를 받았던 선생이었다. 작고하시던 그날도 호흡곤란이 일어났을 때 빠른 응급처치를 받았더라면 더 사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날은 그 타이밍을 놓쳤던 것이다. 자야 선생은 위 소개 글에서도 적혀 있듯이 많은 이름을 가지고 계셨다. 한 가지 더 추가할 이름이 있으니 '김진향(金眞香)'이다. 그의 妓名이다. 이 기생 이름으로 (서울 : 도서출판 예음, 1993)이라는 책을 남기셨다. 국악계에서는 김진향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   註-이상 글은 국악원정악단(시조창 권위자). 흰 바람벽에 비취 본 그리움!   한때는 몹시 원망스럽기조차 했던 사무친 모정, 하늘이 내신 지극하던 효심! 도저히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조차 할 줄 모르던 순진 효심! 어찌타 우연히 당기어진 정열의 불길을 억누를 수 없어 본의 아니게 자기 양심을 속이고 부모님까지 배반하면서 사랑하는 조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등을 돌리고 마셨던 것일까 급기야 북풍한설 모진 겨울에 북만주 호지로 멀리 떨어져 외롭고 삭막한 도피성 이주를 겁없이 결행하시고 만 당신. 비단 부모님을 원망해서도 아니었으리라. 고루하고 암담한 구태속에 잠들어 있는 봉건사회를 당신은 피끓는 청춘의 벅찬 용맹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좌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개화의 길에서 온몸으로 봉건사회에 맞선 또다른 방식의 저항이요, 온건한 방식의 복수였다. 하지만 당신은 그 황막하고도 외로운 호지에서 생각하신 것이라곤 오직 부모님의 따스한 품속이었을 것이다. 고국의 산천, 서러워하던 사랑의 슬픔에 목메인 외침만 낭자한 선혈처럼 뿌리셨으리라. 나는 이처럼 갖가지 깊은 추억의 정념에 젖어서 애달픈 환상의 필름만 거꾸로 돌려보기 만 한다. 갑자기 모질게도 추운 날에 찬물에 담근 시어머님의 시퍼러둥둥하고도 앙상한 손마디가 비친다. 그 찬물과 굵은 손마디! 생각만 해도 가슴속이 꽁꽁 얼어들고 후들후들 뼈마디가 다 져려온다. 인생은 고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궂은 일, 슬픈 일, 한 세상 겪어오신 어머님의 거칠고 굵은 손마디는 순일무잡한 항심(恒心)을 그대로 보여주신다. 그 거칠어진 손길도 이제 그만 거두어들이시고, 지금쯤은 안방나님으로 고이 따스한 아랫목에 누워 계신다. 어머님께서는 누우신 채로 퇴침 돋우시고 우리 둘을 찾아서 부르신다. 우리는 쥐걸음으로 옴슬옴슬 조용히 가서 뵈오니 어머님께서는 몸이 불편하시다. 기침도 하시고 이마엔 열이 느껴진다. 우리는 공손히 어머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아서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들으며 나는 어머님의 팔다리를 가만가만 주물러 드린다. 진정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냉정한 세상이 말할 수 없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이제 와 뉘우치는 불효의 뜨거운 눈물, 다 무슨 소용 있으리.   다시 영상의 화면은 바뀌어진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과 소망하던 어린것을 옆에 끼고 저녁 밥상에 함께 둘러앉아 있는 한 가족이 있다. 그 집은 먼 앞대의 조용한 개포가에 있는 나지막한 집이다. 아내는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서 대구국을 끓여놓고 나누 먹으며, 하루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한다. 참으로 단란한 풍경이다. 꿈에서도 그리던 단란한 가정을 당신은 작품 속에서나마 하나의 영상으로 비치어 본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애달프고 얼룩진 환상이다. 어느틈에 당신의 눈매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다. 내 눈에도 뜨거운 피눈물이 줄줄이 흘러서 두 볼을 타고 마냥 흘러내린다. 불현듯 나는 당신의 어린 자식을 포대기로 들쳐업는다.그리고는 우르르 당신께로 달려가서 그 쓸쓸하고 허전한 무릎 위에 내려 놓는다. 당신은 흐뭇하면서도 측은한 표정으로 무릎 위의 아기를 본다. 당신의 코끝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아기의 이마에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다 나는 기어이 당신의 어깨에 매달려 흐느끼고야 만다.   지금 내 눈앞에는 이런 애절한 환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진실로 당신이 만주로 가자고 했울 때, 나는 이것저것 헤아리지 않고 내 낭군님을 따라가야 했었으리라. 그것이야말로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신 당신께 대한 진정한 내 보답의 길이 되었으리라. 당신은 부모님께서 지천명이 지나도록 손자를 안겨드리지 못하는 것을 늘 송구스러워하였다. 당신의 부모님께서도 아들이 이런 소망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한 것을 항상 한탄하신다고 말했다. 이대로 손자를 끝내 못 보게 되면 조상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신다고 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낯이 화끈거려서 둘아 앉았고,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나 자신의 처지가 몹시도 한스러웠다. 자식이야 당신보다 내가 사실은 더 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갈등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모르셨던 것같다. 그 시절 문외(門外)의 자손을 갖는다는 것은 실로 큰 비극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큰 소란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의 그 소망을 끝내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가슴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잠잠히 기라앉아 있던 슬픔과 아쉬움이 하염없이 솟구쳐오른다.   -- (문학동네, 1996) 에서     자야子夜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갔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된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며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여성. 백석과는 백석이 함흥의 영생고보 교원으로 있던 시절에 만났으며, 그 후 두 사람은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지다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는 우여곡절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백석,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와 1996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에서 '힌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백석의 많은 시]가 [자신-자야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詩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라는 詩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김영한이 창작과 비평사에 기증한 2억 원을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백석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백석이 분단 이후에 발표한 시의 의미   이승하     백석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쓸쓸해진다. 처연해지고, 서글퍼지고, 슬퍼진다. 왁자지껄한 잔칫집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시절 북방 오지의 궁핍함이 느껴져 처연해진다. 여승이 된 이와 북관 계집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인생이란 것이 뭔지, 문득 서글퍼진다. 남신의주 유동의 어느 목수네 집에서 손깍지베개를 하고 누워 있는 백석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그런데 그의 시편 가운데 가장 큰 쓸쓸함을 안겨주는 것은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후에 북한에서 쓴 10여 편의 시다. 『사슴』의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읽는 것 자체가 가슴 아프기 때문에 1988년 해금 조치 이후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백석론 가운데 1959~61년에 『조선문학』에 발표된 시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온전한 백석론을 쓰고자 할 때, 분단 이후의 백석 시를 논외로 쳐서는 안 된다. 이는 일제 강점기 말의 시 태반을 ‘암흑기의 시’ 혹은 ‘친일시’로 간주하여 논외로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연구자의 직무유기다. 시인의 고뇌를 생각하지 않고, 친일의 논리를 따지지 않고, 작품의 문학성을 논하지 않고 일괄하여 ‘구더기’ 취급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이다. ‘백석 대표시 해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간행된 고형진의 『백석 시 바로 읽기』(2006)와 ‘백석 시 전편 해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간행된 이숭원의 『백석을 만나다』(2008)는 모두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에서 끝난다. 이러면 독자들은 이 시가 백석의 마지막 작품인 줄 알게 된다. 그렇지 않다. 백석은 그 작품 발표 후에도 적지 않은 시를 썼다.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르는, 분단 이후에 북한에서 쓴 백석의 시에 대해서도 이제는 논의를 해야 한다. 설사 이 행위가 백석이 쌓아올린 높다란 탑을 금가게 하는 일이 될지라도 온전한 백석론 작성을 위해서는 분단 이후의 시가 제외되지 말아야 한다.     1996년에 발간된 정효구의 한국현대시인연구 제14권 『백석』편에는 작품연보가 부록으로 나와 있다. 거기에는 북한에서 간행되는 문예지 『조선문학』 142호에 5편이, 145호에 2편이, 151호에 2편이, 172호에 3편이 발표되었다고 제목까지 나와 있지만 작품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조선문학』은 142호가 1959년 6월에, 145호가 같은 해 9월에 나왔다. 151호가 1960년 3월에, 172호가 다음해 12월에 나왔다. 즉, 백석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는 작품 발표를 하고 있었다. 김재용은 1997년에 초판 간행한 『백석전집』의 증보판을 2003년에 내면서 제2부 ‘8․15 이후’에 동화시(童話詩) 12편, 시 13편, 평문 4편, 정론 3편을 발굴하여 수록하였다. 게재지면을 알 수 없는 제3부 ‘보유’편에는 시 2편, 산문 7편이 실려 있다. 2011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에는 시가 15편, 산문 4편이 추가된다. 15편은 주로 『아동문학』지에 실린 동시인데, 『새날의 노래』에 실린 시도 3편 수록되어 있다. 시 16편의 발표지면은 다음과 같다.     (중략) 『시와 표현』 2011년 가을호에 수록     1962년 10월 무렵,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백석의 창작활동이 중단된다.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작활동이 중단되는 것으로 보아 당은 백석에게서 펜을 빼앗은 것이 확실하다. 이때부터 북한에서 나오는 어느 문예지에서도 백석이라는 이름은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바로 그 전에 백석은 그 조합에서나마 목숨을 부지하자는 생각에서 공산당 혁명을 예찬하고 공산주의의 승리를 확신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일종의 아부를 한 것인데, 아무리 목숨이 소중하다고 해도 이런 시를 써야만 했던 것일까. 1995년에 사망할 때까지 백석은 시를 썼는지 안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에 발견된 시는 없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일본을 돌며 백석의 행적을 취재했던 소설가 송준은 백석의 미망인 리윤희와 장남 화제가 1999년 2월 중국 조선족을 통해 보내온 서신과 말년의 백석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김재용의 『백석전집』과 이숭원의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에도 실려 있다. 백석은 농사일을 하다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석의 두 번째 부인 리윤희 씨에 따르면 백석과는 1945년 말 북한에서 결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백석은 월북한 시인이 아니다. 임화, 설정식, 이태준, 김남천처럼 월북했다 숙청당한 문인이 아니라 북한에서 살던 재북 시인이다. 그래서 숙청을 당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33년을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이것 또한 분단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백석, 시(詩) 속에 맛을 담다]   백석은 1930년대 문단은 물론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매우 독특하고 유별난 존재다. 오래도록 잊혀졌던 시인인 그는 1988년 해금 이후 단박에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백석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음식을 소재로 한 시들이 많다는 점이다. 당대의 모던보이 중 하나로 손꼽히던 그가 토속적이고 평범한 음식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무엇인지, 또 그의 시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그의 시와 그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통해 소개한다.    - 연사: 소래섭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1강: 백석, 근대의 갈림길에 서다 백석의 이력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을 중심으로 백석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시인이었는지 살펴본다. 또 식민지와 서구화라는 이중의 과제 앞에 놓여 있었던 1930년대 문인들의 공통된 운명과, 그러한 운명에 맞선 백석의 행로는 어떠했는지 들여다본다. 다룰 작품은 , 등이다. ... ...   ==================================================== 시인약력    백석 시인의 본명은 기행(夔行).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펴냈다.  샛별같은 모국어에 실린 민족현실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 영역을 농촌 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 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민중들이 믿어왔던 지식인들은 참으로 그 모습이 말이 아니게 달라져서 소일본인화되어 버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이라곤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는 강연,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선무성 시국강연 따위로 분주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 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역시 동향인 시인 김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채로 소월이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소월의 문학에는 민요적 틀에 실어서 표현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 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닥불' 전문    이 시의 첫연에 나오는 사물들은 생물, 무생물의 구분을 따로 나눌 것 없이 우리들의 유년체험과 친숙하게 맞닿아 있는 모닥불의 재료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요긴하고 쓸모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거의 쓸모없게 되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거나 아예 버려진 하찮은 사물들끼리 모여서 이처럼 따뜻한 모닥불의 광휘와 온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1∼2연에 등장하는 각 낱말 끝에 '∼도'라는 특수조사가 낱낱이 붙어 있는 것은 모닥불이라는 공간이 애틋한 소외존재들이 서로 만나는 평등한 장소임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시적 장치로 여겨진다.    백석의 시세계에서 또하나 돋보이는 것은 농촌적 정서를 아주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는 관서지방 농촌공동체의 여름, 저녁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휑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 오는 저녁' 전문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료에서는 백석이 프로문인들의 몇 차 월북때 북으로 올라 갔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기록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이 맨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방 토호로서 대대로 살아오던 많은 주민들이 대량으로 집단 이주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함경도 주민과 평안도 주민을 서로 적절한 배수로 섞바꾸어 살게 하는 인위적 강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지역성을 가장 농도 짙게 포괄하고 있는 방언을 소멸시킴으로써 지역 감정을 무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 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이 발간된 이후 백석의 시는 문학인에 대한 금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조치인가를 그대로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백석의 문학에 대한 경탄과 더불어 백석처럼 그동안 금지라는 강제에 매몰되어 왔던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봇물 터지듯 일거에 터져나오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의 상당수는 백석을 비롯한 이찬, 오장환, 임화, 이용악, 설정식, 정지용, 김기림, 박아지, 여상현, 조벽암, 조영출, 권환 등 많은 금지 시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단시대 남한의 문학인들은 개별적인 작품 활동에 종사했다.(위의 시인들 가운데 권환 같은 시인은 고향인 마산에서 살다가 1950년대 초반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월북시인으로 간주해 버리는 넌센스까지 있었다) 그들의 학생 시절에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문인들이라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주된 모범적 교본이었고, 이들 작품의 상당수가 일제말의 황민문학 계열이나 순수문학 계열, 또는 분단 이후의 반공 이데올로기 계열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해금문인들의 작품을 대하는 전후 세대들의 정서적 충격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분단 이후 냉전시대의 남한 문학이 나타내 보여왔던 작품의 성향이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이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제 백석의 문학작품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문학사에 편입되고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신진 문학연구가들에 의해 백석의 작품은 주요 단골 연구 테마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집 발간 이후 가장 최근에 발간된『백석전집』(김재용 편)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편이 넘는 연구 논문, 학위 논문, 또는 평론들이 학계와 문단에 제출 발표되었다. 이와 동시에 문단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전후 세대 시인들에 의해 백석의 문학 작품과 시정신은 깊은 영향의 수수관계로 재창조되어서 계승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석 문학의 특징은 상실되어가는 고향의식의 회복, 이를 통한 제국주의 문화의 극복, 전통 문화유산에 대한 따뜻한 긍정,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북방정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백석의 시는 우선 문체상의 개성이 다른 시인들에 비해 매우 뚜렷하다. 그가 즐겨 쓰고 있는 방법들은 대개 회고체, 방언체, 구어체, 의고체, 연결체, 만연체, 아동 어투의 독백체 등이며, 이는 민중적 정서를 농도짙게 풍겨나게 하는 기대를 갖고서 구사된다. 시인 자신의 유소년 시절의 체험과 고향 정서로써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들이 어김없이 회고체를 채택하게 하는 것이며,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지역의 방언이 그의 시작품의 방언적 토대가 되고 있다. 특히 구개음화가 되지 않은 구어체를 그대로 표기하므로써 생생한 현장감을 드높이고 있다. '금덤판,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녕감, 니차떡, 석박디, 데석님, 디운구신, 녀귀' 따위가 그 사례이다. 더불어 작품의 서사적 구조로 독자들을 이끌어 들이는 하나의 장치로써 연결형이 구사되고 있는 듯하다. ∼고, ∼며, ∼는데, ∼도 등이 가장 빈도수가 높은 연결형 어미와 조사들이다. 백석의 시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표기형태는 '슳븐' '얹헜다' 등의 분철(分綴)과 '울ㄴ다' '알ㄴ다' '달ㄴ' 등에서 보여주는 ㄹ과 ㄴ의 자음겹침 형태이다. 이는 작중 화자가 사투리로 직접 말하는 듯한 생동감을 드높이기 위해 시도하는 형태로 여겨진다. 이러한 표기법들은 정서법의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 있지 못한 시기에서 의고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시인 자신의 의도와 배려가 강력히 담겨 있는 부분이다.    백석의 시는 형태면에서도 독특한 변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가 대체로 서사성을 담보하고 있는 사례가 많으므로 담시, 서술시, 이야기시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그 외적 양식이 줄글 형태의 산문적 성격으로 구현되는 것은 당연하다. 띄어쓰기도 시작품의 내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낭송하기에 편리하도록 한 차례의 낭송호흡에 필요한 일정한 어절을 서로 통합하여 띄어쓰기 규칙성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 백석 시의 원문을 주의해서 지켜보면 이런 점들이 당시 정서법 체계의 무질서가 아니라 시인 자신의 세심한 배려에 기인된 것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연(聯)에 관한 부분에서도 아예 연구분이 없는 비연시 형태와 분명하게 연 구분을 획정하고 있는 연시 형태가 거의 반반씩 균형을 이룬다. 비연시 형태에서는 시「비」의 경우처럼 단 2행으로 전체 형태가 완결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청시(靑枾)」「산비」처럼 3행 형태도 있다. 그런가 하면 4행형과 5행형 이상도 다수 있다. 연시 형태는 시「초동일(初冬日)」처럼 특이한 2연형이 있고, 기타 3연형에서 5연형 이상까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으나 이 가운데 단연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3연형이다. 줄글 형태는 행구분과 연구분을 모두 벗어난 산문시의 형태인데 백석은 이러한 형태도 더러 구사하고 있다. 백석의 시를 곰곰히 읽다 보면 그의 시가 조선 후기의 서정적 분위기가 감도는 사설시조의 형태를 방불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1) 황정을 캐어들고 집으로 돌아 들제 방경에 나는 꽃은 의건을 침노하고 벽수에 우는 새는 유수성을 화답한다 문앞에 다달아는 막대를 의지하여 사면을 살펴보니… 뜰 가운데 들어서니 섬돌밑에 어린 난초 옥로에 눌러 있고 울가에 성긴 꽃은 청풍에 나부낀다… 대수풀 우거진데 이슬바람 서늘하다.       -안민영의 사설시조 중 일부  2) 한 십리 더 가면 절간이 있을 듯한 마을이다 낮기울은 볕이 장글장글하니 따스하다… 뒤울안에 복사꽃 핀 집엔 아무도 없나보다 뷔인 집에 꿩이 날어와 다니나 보다 울밖 늙은 들매남ㄱ에 튀튀새 한불 앉었다 … 어데서 송아지 매--하고 운다 골갯논드렁에서 미나리 밟고 서서 운다   -백석, 「황일」 부분    장면을 따라서 포커스가 서서히 공간 이동을 해가는 관찰자의 시점도 그렇거니와 형태와 분위기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이 서로 많이 느껴진다. 백석이 사설시조에 평소 애착을 가졌다는 그 어떤 자료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만 전통적인 문학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체득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백석의 시를 율격면에서 고찰해보더라도 여러가지 흥미있는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전집을 두루 일별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행의 율격 형식들을 볼 수 있다.    1)장 ― 단 ― 장    2)단 ― 장    3)장 ― 단 ― 장 ― 단 ― 장 ― 단    4)장 ― 단 ― 단 ― 단 ― 장 ― 단 ― 단 ― 단     이러한 율격 형식들은 무작위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작품의 효과를 예견하고 있는 시인 자신의 치밀한 배려가 깃들어 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들은 나름대로의 어떤 질서를 갖고서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1)은 「산비」와 같은 전형성을 지닌다. 2)는 「청시」에서 그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다. 3)은 긴 행과 짧은 행을 규칙적으로 교체 반복해가는 방법이다. 4)는 한 줄의 긴 행 다음에 짧은 행을 세 줄 반복하고 나서 다시 긴 행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행 형식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고, 더불어 주제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적절한 형태를 선택하고 있다.    「연잣간」과 같은 시는 2행 반복율이 특징이고,「바다」는 3행 반복율로 보인다. 운율법으로는 일종의 각운 형식을 방불하게 하는 것이 가장 많다.「대산동(大山洞)」「물닭의 소리」「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안동」「목구(木具)」「수박씨 호박씨」「적막강산」등의 시작품에서 그러한 운율 형식을 느낄 수 있다. 또하나 특이한 점은 시「황일(黃日)」의 결말 부분처럼 줄글 형태의 끝에 부분적 정형율을 삽입하는 경우이다. 줄글을 곧장 읽어내려갈 때 발생될 수 있는 분위기의 따분함이나 단조로움을 극복시키려는 의도적 장치로 여겨진다. 이러한 계열의 한 갈래로서「오리 망아지 토끼」「오금덩이라는 곳」등의 시작품처럼 작중 화자나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삽입한 형태도 있다.    한편 백석 시의 특징적인 분위기 가운데는 이미지의 구사가 유난히 독특한 면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추억을 환기시키거나 토속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불러 일으킬 때 주로 사용하는 이미지는 회고적 상상적 이미지이다. 이와 더불어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다섯가지 감각 기관의 민감한 반응을 작용시켜 현장의 생동하는 느낌을 더욱 실감나게 고조시킨다. 시「동뇨부(童尿賦)」와 같은 경우는 1연의 '누어 싸는 오줌이 넓적다리를 흐르는 따끈따끈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으로 표현된 촉각적 이미지, 2연의 '첫    여름 이른 저녁 터앞에 밭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로 표현된 후각적 이미지, 3연의 '새끼오강에 한없이 누는 잘 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쪼로록 하는 소리'로 표현된 기발한 청각적 이미지, 4연의 '막내고무가 잘도 받어 세수를 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말갛기도 샛맑았다는' 색채 형용의 이미지가 한 편의 시작품속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져 기이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 「북관(北關)」에서 명태창란젓을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라는 후각적 이미지와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이라는 미각적 이미지로 연결 통합시키고 있는 부분들은 백석 시만의 독특한 방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석의 시작품 세계에 전반적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이미지는 고향과 관련된 이미지와 바다와 관련된 이미지이다. 이것은 시인 자신의 고향이 정주(定州)라는 작은 포구이기도 한 사실과 시인이 교사 생활을 하던 곳도 함흥 바닷가 연안 지역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관심이 바다쪽으로 쏠리게 되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 세계와 그 분위기가 가장 일치되는 공간에 있을 때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된다는 설명과도 관련된다.「가키사키(枾崎)의 바다」「이즈 코쿠슈(伊豆國湊) 가도」「통영」「바다」「삼천포」「함주시초(咸州詩抄)」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계절 이미지도 빈번히 등장하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은 시인 백석에게 있어서 그리움과 애틋함, 아름다움, 슬픔, 쓸쓸함 등으로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따라서 백석의 시는 어떤 고정된 계절 이미지에 구속되어 있질 않고 모든 것이 온유함과 쓸쓸한 분위기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의 시제들도 대다수가 과거 시간이거나 현재의 시점을 지키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특히 유소년 체험을 회상하는 과거 시제가 월등히 두드러진다. 현재 시제를 지키는 작품들은 대개 방황과 좌절을 표현하는 경우로 한정된다.  백석 시의 소재 제재적 측면    백석의 시에서 다른 소재들에 비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소재는 음식물과 관련된 사례들이다. 그의 시전집을 통틀어 음식물 소재는 대략 150여종이나 된다. 이 음식물들을 살펴 보면 별반 특이한 음식이 많은 것은 아니나 아무튼 우리의 토착적인 음식 문화를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외래 문화, 즉 제국주의적인 일본 문화의 침탈을 시인이 의식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민족적 분위기가 강렬히 풍겨나는 토속 음식들을 열거하고 집착을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주된 음식물이나 기호물, 또는 그 재료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막써레기, 돌나물김치, 백설기,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물구지 우림, 둥굴네 우림, 도토리묵, 도토리 범벅, 광살구, 찰복숭아, 반디젓,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 두부, 콩나물, 뽂운 잔디, 도야지 비게, 무이징게국, 찹쌀탁주, 왕밤, 두부산적, 소, 니차떡, 쇠든 밤, 은행여름, 곰국, 조개송편, 죈두기 송편, 밤소, 팥소, 설탕든 콩가루소, 내빌물, 무감자, 시라리타래, 개구리의 뒷다리, 날버들치,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 미역국, 술국, 추탕, 엿, 송이버섯, 옥수수, 노루고기, 산나물, 조개, 김, 소라, 굴, 미역, 참치회, 청배, 임금알, 벌배, 돌배, 띨배, 오리, 육미탕, 금귤, 전복회, 해삼, 도미, 가재미, 파래, 아개미젓, 호루기젓, 대구, 건반밥, 명태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 힌밥, 튀각, 자반, 머루, 꿀, 오가리, 석박디, 생강, 파, 청각, 마늘, 노루고기, 국수, 모밀가루, 떡, 모밀국수, 달재생선, 진장, 명태, 꽃조개, 물외, 꼴두기, 당콩밥, 가지냉국, 싱싱한 산꿩의 고기, 김치가재미, 동티미국, 밤참국수, 게산이알, 취향이돌배, 만두, 섭누에번디, 콩기름, 귀이리차, 칠성고기, 쏘가리, 35도 소주,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끓인 술국, 도야지 고기, 기장차떡, 기장쌀, 기장차랍, 기장감주, 기장쌀로 쑨 호박죽, 보탕, 식혜, 산적, 나물지짐, 반봉과일, 오두미, 수박씨, 호박씨, 멧돌,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 얼얼한 댕추가루,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감주, 대구국, 닭의 똥, 연소탕, 원소라는 중국떡, 고사리, 가지취, 뻑꾹채, 게루기, 약물, 깨죽, 문주, 송구떡, 백중물     도합 148종이 넘는다. 이 음식물들의 종류를 가려뽑아서 보면 백석의 시에서 동원된 음식들이 모두 일반 서민들이 먹는 생활 음식들의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는 시골 아이들이 어릴 적에 주워 먹던 길바닥의 닭똥도 있고, 젓갈에 가자미식혜 등의 지역 음식도 보인다. 거의 대다수가 민중적 향취가 느껴지는 음식물들이며, 동물성보다는 식물성 음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특징이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의 구체적인 명칭도 상당수인 바 야생 동물, 가축, 물고기, 곤충 따위의 동물적 소재와 과수, 야생초, 약초, 해초, 채소, 과일, 곡식 등의 식물적 소재를 모두 추출하여 대비해보면 식물성이 약간 많다. 동물적 소재는 모두 72종 가량이 된다.    지렝이, 박각시, 주락시, 개구리, 자벌기, 거미, 찰거머리, 버러지, 노랑나비, 벌, 딱장벌레, 파리떼, 노루(복작노루), 곰, 멧도야지, 승냥이, 배암, 산토끼, 잔나비, 여우, 쪽재피(복쪽제비), 다람쥐, 도적괭이, 땅괭이, 호랑이, 당나귀, 오리, 개(강아지), 도적개, 얼럭소새끼, 도야지, 닭, 말(망아지), 토끼, 노새, 게사니, 소(송아지), 멧새, 물총새, 짝새, 까치(까막까치), 꿩(덜걱이), 멧비둘기, 어치, 제비, 물닭, 뻐꾸기, 갈새, 뫼추리, 갈매기, 물총새, 백령조, 꼴두기, 붕어, 농다리, 게, 굴, 소라, 조개(가무락 조개), 참치, 꼴두기, 전복, 해삼, 명태, 호루기, 대구, 칠성고기(칠성장어), 가재미, 도미, 반디, 미꾸라지, 쏘가리    대부분의 동물들이 맹수류가 아니라 평화스러웁고 양순한 성질의 동물들이다. 이러한 동물들의 선택에서도 시인의 기질이나 품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기에 비해 식물적 소재들은 도합 79종이나 되는데 거의 모두가 시골 생활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돌나물,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도토리, 살구나무, 찰복숭아, 배나무, 무이, 찹쌀, 왕밤, 천도복숭아, 콩가루, 섭구슬, 박, 감나무, 산뽕, 땅버들, 석류, 수리취, 송이버섯, 도라지꽃, 옥수수, 아카시아, 미역, 수무나무, 아주까리, 밤나무, 머루넝쿨, 재래종의 임금나무, 돌배, 벌배, 다래나무, 갈부던, 복사꽃, 들매나무, 삼, 숙변, 목단, 백복령, 산약, 택사, 금귤, 파래, 동백나무, 진달래, 개나리, 당콩, 머루, 쑥국화꽃, 자작나무, 바구지꽃, 강낭, 귀리, 모밀, 피나무, 버드나무, 호박씨, 수박씨, 이깔나무, 바구지꽃, 오이, 마늘, 파, 감자, 쉬영꽃, 뻑꾹채, 게루기, 고사리, 갈매나무, 싸리, 이스라치, 가지, 함박꽃     이러한 식물들의 성격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물들의 이미지와 어울려서 작품 세계의 아늑하고 민중적인 삶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적어도 시작품속에서는 동물성과 식물성의 구별이 느껴지지 않는 합일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천부적으로 참된 슬픔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의 고귀함 등을 타고난 시인적 기질의 소유자이다. 백석이 자신의 문학적 아포리즘을 구체적으로 밝힌 글은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신경에서 거주하던 시절 {만선일보(滿鮮日報)}(1940.5.9∼10)에 발표한 하나의 짧은 시평은 그의 문학적 지향이나 기질을 짐작하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당시 시인 박팔양이 함께 신경에 와서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 발간된 박팔양의 시집 {여수시초(麗水詩抄)}에 대한 서평을 위의 신문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백석은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    진실로 높고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것이 마음을 제사들오어 이것이 아니면 안심하지 못하고 입명(立命)하지 못하고 이것이 아니면 즐겁지 않은 때에 밖으로 얼마나 큰 간난(艱難)과 고통이 오는 것입니까? 속된 세상에서 가난하고 핍박을 받어 처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은 복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서름차지 아니하겠습니까? 시인은 슬픈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안흔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魂)입니다. '외로운 것을 즐기는' 마음도, 세상 더러운 속중을 보고 '친구여!'하고 부르는 것도, '태양을 등진 거리를 다떨어진 병정 구두를 끌고 휘파람을 불며 지나가는' 마음도 다 슬픈 정신입니다. 이렇게 진실로 슬픈 정신에게야 속된 세상에 그득찬 근심과 수고가 그 무엇이겠습니까? 시인은 진실로 슬프고 근심스럽고, 괴로운 탓에 이 가운데서 즐거움이 그 마음을 왕래하는 것입니다.  -박팔양, 백석시 서평 "슬픔과 진실" 중    이 글속에서 백석이 말하는 '슬픈 정신'은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과 뭇사물에 대한 크나큰 연민이 아닐까 한다. 모든 것을 다 내 마음속에 애틋하게 수용하고, 특히 모든 소외된 사물들에 대하여 따뜻한 가슴으로 끌어안으려는 불교적 자비심, 혹은 기독교적인 긍휼이나 사랑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혼'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 '생명을 아끼는 마음' 등은 모름지기 시인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필수 덕목이자 품성인 것이다. 백석의 시가 유난히 작고 가냘프고 여린 것, 외롭고 못난 사물과 가여운 생명들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에 있을 것이다. 잘나고 거만하고 자신을 뻐기는 존재나 화려한 사물들은 적어도 백석의 문학적 관심에서 일단 벗어나 있다.    다음으로 백석의 시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아동 유희 및 무속적 의식이나 민속 행사, 민중 의약 등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백석의 시가 주로 농도짙은 설화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주로 이러한 소재들을 표현하고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분위기라 하겠다. 거의 25종이 훨씬 넘는 아동 유희와 의식, 의례, 행사들이 도입되어 있는 바 그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즘생을 쫓는 깽제미 소리  2)한 밤에 섬돌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3)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4)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어서 구신간 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5)자신을 신장님 딸년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6)뒤울안 살구나무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  7)밑구멍에 털이 멫자나 났나 보자고 한 가즈랑집 할머니  8)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신리고모  9)손자아이들이 파리떼같이 모이면 곰의 발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두르는 귀먹어리 할아버지  10)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력사  11)날기멍석을 저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가진 조마구, 조마구네 나라,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  12)이불우에서 하는 광대넘이  13)인두불에 구어먹는 은행여름  14)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다 물총새가 되어버린 산골아이들  15)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 그 상우에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술잔  16)달밤에 목매 죽은 수절과부  17)섣달 내빌날 밤에 내리는 눈을 정한 마음으로 받아서 눈세기물을 만들어 고뿔, 배앓이, 갑피기에 쓰는 내빌물  18)남편은 행방불명, 딸은 병으로 죽고, 혼자 남아 기어이 여승이 되고만 여인  19)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 제 병을 낫게 할 약을 알고 있는 소  20)어스름 저녁국수당 돌각담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어놓고 비난수하는 새악시  21)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례히 흉사가 있다는 무서운말  22)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  23)아홉명이 회를 쳐먹고도 남아서 한 깃씩 나눠가지고 갔다는 크디큰 꼴뚜기의  이야기  24)방안의 성주님, 토방의 디운구신, 부뜨막에 조앙님, 고방시렁에 데석님, 굴통의 굴대장군, 뒤울안 곱새녕아래 털능구신, 대문간의 수문장, 연잣간의 연자방구신, 발뒤축의 달걀구신  25)칠월백중, 쥐잡이, 숨굴막질, 꼬리잡이, 가마타고 시집가는 노름, 장가가는 노름, 조아질, 쌈방이, 바리깨돌림, 호박떼기, 제비손이 구손이    무속의식, 구비문학적 설화, 민간 요법, 생활 설화, 유희, 노동과 관련된 서사, 자녀 교육과 관련된 훈계, 식민지의 험한 세월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가정의 불행, 속담, 전설 등으로 구성된 이 소재들에는 모두 우리 민족의 삶에서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정서들이 짙게 배어 있다 하겠다. 그리하여 백석의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제는 잃어버린 옛 추억의 시간을 회상시키고, 동시에 현실의 각박한 세태로부터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묘한 작용력을 가졌다. 백석은 앞서의 아포리즘에서 '낮고 거즛되고 겸손할 줄 모르는' 세태를 비판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처럼 추억의 회상과 연민을 경험하고 나면 훨씬 맑고, 그윽하고, 슬퍼할 줄을 알며, 따스한 가슴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다음으로는 백석의 시에 나타나는 인물의 유형과 그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것은 백석의 문학이 지니고 있는 지향과 가치관을 보다 확연히 꿰뚫어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다. 앞의 소재 탐구에서도 알아본 바 있거니와 백석의 시는 민중적 삶의 정서와 그 분위기를 환기하는 일에 혼신의 문학적 정열을 기울였다. 그것은 인물 유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절대 다수가 낮고 평범한 민중적 신분들이며,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하며 가난한 서민들이다. 시인이 굳이 이러한 인물들과 그들의 구체적 생활을 담으려 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가장 다수의 사람들의 처지를 대변하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는 역할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갖고 있었던 듯하다. 친족 집단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방계 집단을 중심 인물로 등장시켜서 우리 모두가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던 민족이었음을 강력히 환기하고자 하는데도 그 목적이 있다. 특히 식민지 시대의 제국주의 침탈과 문화적 유린속에서 민족의 주체성이 완전히 말살되어가는 위기에 직면하여 시인의 자기인식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러한 관심을 극대화시키도록 추동했을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점에서 동시대의 비평가 박용철이 누구보다도 먼저 시인 백석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정확하게 했던 것 같다.    박용철은 백석의 시를 '전반적으로 침식받고 있는 조선어에 대한 혼혈 작용 앞에서 민족의 순수를 지키려는 의식적 반발의 표시'로 보았던 것이다. 최원식 교수는 백석의 시가 방언을 다루되 그 방언에 머물러 있질 않고 오히려 방언의 경계를 넘는 보편성을 지적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섣부른 관념이 좀체 투과하기 어려운 놀라운 개체성, 즉물적 육체성으로 견고하기 때문에 백석의 시가 들큼한 낭만주의의 고향 타령이 결코 아니라는 점. 둘째 모더니즘에 의거하면서도 그 모더니즘을 도리어 비판하는 특이한 방법으로 식민지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들을 침통히 응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백석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지방을 보는 눈], 실천문학 40호, 1995. 겨울호, 225면) 한편 백석의 시를 근대인으로서의 절실한 내면적 목소리로 해석한 김재용의 분석도 눈길을 끄는 해설로 평가된다.(「근대인의 고향상실과 유토피아의 염원」,『백석전집』, 실천문학사, 1997)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 유형들은 어림잡아 100여 사례가 훨씬 넘는데, 다음에 정리한 인물 유형들을 분석 정리하는 작업도 꽤 의미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1)쇠메든 도적  2)예순이 넘은 가즈랑집 할머니, 막써레기 피우는 무당, 구신의 딸      3)곰이 돌보는 산골 아이  4)진할머니 진할아버지  5)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곰보 말수  6)하루에 베 한 필 짠다는 신리 고모  7)신리 고모의 딸 李女, 작은 이녀  8)열여    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같은 입 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모  9)토산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10)육십리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떄가 많은 큰골 고모  11)큰골 고모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12)배나무접을 잘하는, 술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쑥 뽑아놓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13)삼춘엄매(숙모), 사촌누이, 사촌 동생들  14)밤늦도록 유희하고 노는 친척 아이들  15)이른 아침에 부엌에서 함께 의좋게 일하는 시누이 동세  16)한번 찾아와선 갈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 17)술을 밥보다 좋아하는 삼춘 18)귀먹어리 할아버지  19)재당  20)초시  21)문장 늙은이  22)더부살  이 아이 23)새사위, 갓사둔  24)나그네  25)주인 26)손자 27)붓장사 28)땜쟁이 (29)어려서부터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자라나 불쌍하게도 몽둥발이가 된 할아버지  30)먼 타관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배  31)산비탈 외딴 집에 사는 모자  32)소를 잡아먹는 노나리꾼, 소도적놈  33)닭보는 할미  34)밤오줌 마려워 잠깬 아이  35)시집갈 처녀, 막내 고모  36)마을의 소문을 퍼뜨리는 일가집 할머니  37)오리치를 놓으러 간 아배  38)물코를 흘리며 흙담벽에 붙어 서서 물감자를 먹는 아이들  39)논두렁에서 개구리 뒷다리를 구어먹는 아이들  40)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들어진 주막집 아들 아이 범이  41)말을 몰고 이 장 저 장을  옮겨다니는 장꾼들  42)첫아들을 낳은 나이 어린 산부  43)컴컴한 부엌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늙은 홀아비  44)새벽에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물지게꾼  45)도야지를 몰고 시장으로 가는 사람  46)떠돌아 다니는 순례중(객승)  47)벌판의 간이역에서 경편철도의 열차를 막 내려서는 젊은 새악시  47)달밤에 목매 죽은 수절 과부  48)거적장사  49)남편은 행방불명, 딸은 병사하고 혼자 남아 비구니가 되어버린 여인  50)방안으로 들어온 거미새끼를 바깥에 버리고 불쌍한 생각에 젖는 시인  51)집터 치고 달구질하고 달밤에 노루고기를 구어 먹는 산골사람들  52)산나물캐는 수양산의 늙은 노장스님  53)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  54)어스름 저녁 국수당 돌각담 수무나무 가지에 여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추고 비난수를 하는 새악시들  55)벌개늪 옆에서 바리깨를 두드리는 동네사람들  56)방뇨를 하는 잠없는 노친네들  57)물기에 젖은 왕구새 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 앓는 사람  58)얼굴이 핼쓱한 병든 처녀  59)메기수염을 한 청배장수 늙은이  60)머루넝쿨 속에서 키질하는 산골 여인  62)너무도 가난하여 열다섯 어린 나이에 늙은 말꾼에게 시집간 정문집 가난이  63)물에 빠져 죽은 건너마을 사람  64)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애기무당  65)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비에 젖어 약물을 받으러 오는 두메 아이  66)앓는 아비  67)무당의 딸  68)어장 주인  69)일본말에 능한 황화장사 영감  70)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  71)더꺼머리 총각  72)주막집 앞에서 품바타령 부르는 문둥이  74)당홍치마 노란 치마입은 새악시  75)시골마당에 볏짚같이 얼굴이 누우런 사람들  76)노루새끼를 팔러 장에 나온 산골 사람  77)자박수염난 공양주  78)저고리에 남색 깃동을 단 돌능와집의 안주인  79)산골여인숙에서 목침에 새까만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  80)석가여래같은 얼굴을 하고 관공(관우)의 수염을 드리운 북관의 늙은 의원  81)북관의 계집  82)봄날을 즐기려 길거리에 나온 사람들  83)맑고 가난한 친구  84)빚을 얻으러 온 사람  85)허리도리가 굵어가는 중년여인  86)꼴뚜기 회를 나누어 먹는 뱃사람들  87)여름밤 멍석자리에 나와 앉아 바람을 쐬는 사람들  88)밤참국수를 받으러 간 아배  89)플렛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귀이리차를 마시는 여행객들  90)옹기장사  91)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  92)털도 안뽑은 도야지 고기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꿀꺽 삼키는 사람들  93)닭의 똥을 먹을 것으로 알고 주워 먹는 산골 아이  94)목욕탕에 앉아서 혼자 소리를 꽥꽥 지르는 중국사람  95)마음씨 좋은 중국인 지주 노왕  96)적막강산을 느끼는 작중화자  97)아내와 집을 잃고 부모형제마저 모두 이별한 외로운 사람  98)소수림왕  99)광개토대왕  100)일본인 주재소장  101)일본인 주재소장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다가 손등이 갈라터진, 삼촌을 찾아가는 어린 소녀  102)제사를 지내는 늙은 제관  103)수박씨와 호박씨를 익숙하게 까먹는 중국인들  104)시인의 친구 정현웅, 허준  105)도스토옙스키, 죠이쓰  106)촌에서 온 아이 몇몇 역사적 인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농민들이거나 중심에서 비켜난 주변적 인물 유형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남에게 고통과 상처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호소하거나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자신의 일상적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민초들인 것이다.    시인 백석은 영문학을 공부한 일본유학생 출신이었지만 귀국후 그의 활동은 이처럼 민족언어를 통한 민족본체성의 유지와 확보를 위한 노력에 바쳤다. 그의 시는 단 한마디도 민족주체를 말하지지 않았으나 동시대 어느 누구의 시보다도 더욱 진한 민족주체의 정신적 토양을 확고히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시에서는 1930년대 중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까지의 황량한 시대를 배경으로 전형적인 한국인의 표상들이 그려져 있다. 메기수염을 한 늙은 과일장수, 앓는 아버지를 위하여 약물을 받으며 오는 갸륵한 산골소년, 굿판에서 날이 시퍼런 작두를 타는 애처러운 애기무당, 민물고기를 잘 잡는 뻐드렁니 소년, 주막집에서 왁자지껄한 떠돌이 장사꾼들, '여우난골'이라고 불리는 지역마을의 주민들, 객주집의 병들어 누운 창백한 소녀의 표정, 달밤에 고민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목매어 자결한 수절과부, 타관가서 돌아오지 않는 가장, 또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고향집의 아내와 아들, '가즈랑집'이라는 택호로 불리는 혼자 사는 할머니, 오리덫을 놓고 기다리는 아버지와 아들, 초겨울 양지바른 흙담벽에 붙어서 코를 흘리며 감자를 먹고 있는 산골 소년들, 논두렁 개구리를 잡아서 구어먹는 소년들, 평안도의 어느 금광 입구에서 옥수수를 파는 한 여인의 슬픈 생애와 그 내력, 산골 여인숙에서 반들반들하게 기름때가 오른 목침을 베고 하루밤을 자고간 한없이 마음이 참담했던 식민지의 백성들, 일본인 순사의 집에서 서름구덩이로 식모살이를 하면서 손들이 거북등처럼 얼어터진 불쌍한 소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사람들은 일제강점하를 살아갔던 민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요, 또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원초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백석이 처음 등단했을 때의 작품은 소설 이었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대감이라고 불리는 아들과 과부인 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과부가 온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미곡상을 하는 양고새의 아이를 배지만, 양고새가 바라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을 출산하므로서 끝내 버림받은 몸으로 마을에서 멀리 쫓겨가서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후에 발표한 소설 에 등장하는 다리를 못쓰는 지체장애자 덕항녕감과 앞을 못보는 소경 저척노파에 관한 이야기도, 그리고 그들을 버리고 달아난 양아들 부부도 시인의 말로 표현하자면 '낮고 거짓되고 겸손할 줄 모르는 우리 주위'에 대한 시인의 신랄한 비판의식의 표현이다. 닭을 매개물로 하여 욕심 많은 디평령감과 농촌 청년 시생이 사이에 벌어진 묘한 갈등과 암투, 그리고 어부지리로 닭을 얻은 걸인 노파 바발할망구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도 와 같은 계열로서 가난하고 못생긴 사물, 소외된 존재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자 하는 백석 문학의 기본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 백석은 항상 힘없고 사는 것이 어려우며 고통스러운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의 아픔과 애환을 생생하게 그리고 정감이 감도는 필치로 그리려 하였고, 또 그것을 정감이 담뿍 감도는 필치로 그려서 보여주었다.    요즘같이 말이 타락할대로 타락해서 말이 지닌 본래의 질서, 본래의 기품이 현저히 상실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지난 날 민족언어의 질서를 회복하려고 혼자서 안간힘을 쓰던 한 시인의 눈물겹고도 아름다웠던 시정신을 다시금 가슴으로 느끼며 오늘의 우리를 새로운 긴장으로 가다듬고 추스려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1616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정지용 - 향수 댓글:  조회:3752  추천:0  2015-12-10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요점 정리 주제: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 제재:고향의 정경 성격:향토적,감각적,회고적,시각적--자유시,서정시 출전:(1927.3) 표현상 특징: * 시각적 이미지 중시 -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의 대상이 주로 등장됨 * 참신하고 선명한 감각성 * 인간의 근원적 정서의 표출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회고적 기법으로 처리 * 서경과 서정의 교차를 통한 내적 리듬의 형성 * 후렴구를 통한 의미의 강조(주제를 부각시킴) 및 형태상의 균형  시의 구성 :  제 1 연 :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향 마을을 둘러싼 자연적인 공간을 제시, 넓은 들판과 실개천의 대조 -넓은 벌판과 그 벌판 동쪽 끝으로 흐르는 옛이야기가 얼켜 있는 실개천이 있는 곳이요, 실개천은 물장구치며 놀기도 하고, 고기잡이도 하던 곳이요, 그 곳은 또한 어린아이들이 잠자리와 메뚜기를 잡으려고 뛰어다닐 때, 얼룩백이 황소가 울음을 울며 지나던 곳이다. 시적 화자는 봄의 시골 모습인 벌판 실개천과 황소를 그리워하고 있다. 제 2 연 : 겨울밤 풍경과 아버지에 대한 회고 - 질화로의 재가 식어지면, 문틈으로 찬 바람소리가 들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던 방이다. 계절로 보면 겨울이다. 질화로가 있는 겨울은 여러 가지를 연상시켜 준다. 질화로에 밤을 구워 먹으면서, 옛날 이야기를 듣던 구수한 고향을 떠오르게 한다. 겨울에 즐기던 연날리기 불놀이 윷놀이 등을 그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며, 동시에 늙으신 아버지에 대한 관심과 걱정은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애정의 표시이기도 하다. 제 3 연 : 시적 화자의 유년기의 직접적인 경험 회고 - 고향의 흙 속에서 자란 온정이 감도는 마음, 그리운 파란 하늘, 화살놀이를 하면서 뛰놀던 풀섶 등을 그리워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다. 맑고 깨끗한 품성을 길러준 고향의 소박한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제 4 연 : 누이와 아내에 대한 회고 - 고향에 있는 어린 누이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시골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여인들의 모습이다. 궂은 일에 온갖 고생을 참고 지내던 조강지처의 모습과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함께 보낸 누이를 그리워하면서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도 그리워 하고 있다. 제 5 연 : 단란한 농가의 정경 - 하늘에 있는 별, 서리 까마귀 우짖고 지나가는 지붕과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 구수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은 가정의 단란함을 떠올리게 한다. 어휘와 구절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 : 옛마을이 유서깊은 전설의 터전임을 암시  황소 : '온순,평화,한가로움'의 이미지 해설피 : 소리가 느릿하고 길며 약간 슬픈 느낌이 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 금빛 게으른 울음 : 공감각적 표현(청각→시각) 해설피, 게으른 : 농촌의 한가함을 대변해 준다. 질화로, 짚벼개 : 전형적인 농가의 방안 환기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시간의 경과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활유(의인화), 바람이 분다(지나간다) 엷은 졸음 : 살풋 든 졸음을 감각화한 표현 아버지 : '자애'의 이미지 짚벼개 : '휴식'의 이미지 흙에서 자란 마음과 파란 하늘빛의 대조 :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그것과 조응 함부로 쏜 화살 : 上昇的 지향성과 함께 유년기의 순수 풀섶 : 풀이 많이 난 곳 이슬 : '청신함'의 이미지 함초롬 : 가지런하고 고운 모양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 역동적 심상 원관념 - 검은 귀밑머리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평범한 사철 발 벗은 아내 : 가난을 암시 누이 : '理想, 깨끗하고 때묻지 않은 순결'의 이미지 아내 : '현실, 생활과 속세'의 이미지 성긴 별 : 드문드문 돋아난 별 서리 까마귀 : 가을 까마귀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와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의 대조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 황량하고 싸늘한 초겨울의 분위기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 집안의 따뜻한 분위기 초라한 지붕 : 가난을 암시 이해와 감상 정지용의 초기시의 하나로서, 1930년대에 지니게 되는 이미지스트의 시풍과는 달리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주정적(主情的)으로 노래했다.  그는 충북 옥천(沃川)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도쿄에 유학하던 1923년 경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공간은 당시의 우리 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며,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보편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그런 뜻에서 이 작품은 특정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서서 한국인이 지닌 향수의 보편적 영상으로 수용될 만하다. 작품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각 부분마다 고향의 모습을 회상하는 연이 먼저 오고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독백이 이어짐으로써 간절한 그리움을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의 수법은 무척 단순한 것이지만, 그 어떤 복잡한 기교보다도 절실하게 시인의 심경을 나타내 준다. 다섯 부분의 구성은 순탄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교묘하다. 첫째, 셋째, 다섯째 부분은 포근함과 아름다운 꿈이 서려 있는 고향의 모습이다. 둘째, 넷째 부분은 가난하고 고단한 삶의 모습이 담긴 고향을 보여 준다. 작품 전체는 결국 이 두 가지 빛깔로 채색된 고향의 모습이 차례로 엇갈리면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두가 사랑스럽고 그리운 삶의 원천으로 절실하게 결합하는 데에 바로 시인이 노래하는 향수의 깊은 호소력이 있다. 참고 자료 정지용의 시 세계와 문학사적 의의 : 정지용은 휘문 고보 시절 박팔양 등과 함께 습작지 을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1920년대 중반부터 모더니즘 풍의 시를 써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이 무렵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향수'와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그린 '카페 프랑스'같은 작품이 주목된다. 그러나 정작 정지용의 시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1930년대 이후이다. 1930년대 첫머리부터 그는 의 동인으로 참여, 김영랑과 함께 순수 서정시의 개척에 힘을 썼다. 그러나 김영랑이 언어의 조탁과 시의 음악성을 고조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인 데 비해, 정지용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표현의 방법을 개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의 장기로 여겨지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의 구축, 간결하고 정확한 언어 구사가 바로 그것이거니와, 이를 통해 그는 한국 현대시의 초석을 놓은 시인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그는 사상적인 면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보여 주는데, 한때는 카톨릭 신앙에 기초한 신앙시를 쓰기도 했고, 1930년대 말에는 동양적 은일(隱逸)사상에 기대어 '장수산', '백록담' 같은 시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시적 변모를 보여 주면서도 그의 시는 줄곧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1930년대 말부터 지의 심사 위원으로 있으면서 정두진, 박목월, 조지훈, 김한직, 박남수 등 많은 시인들을 문단에 소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6 25를 전후하여 납북되어 현재 생사를 모른다. 한때 월북 시인으로 분류되어 문학사에서 다루어지지 않았으나 1988년에 해금되었다.    1927년 3월' 조선지광'에 실린 '향수' 정지용의 '향수'를 ​1930년에 채동선이 작곡하였고 1989년에는 김갑이 작곡하여 테너 박인수. 가수 이동원이 듀엣으로 불러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 잊고 있던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향수를 많은 가수. 배우.성악가들이 불렀지만 그래도  '박인수&이동원이 ​제일 좋다  
1615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한용운 - 님의 침묵 댓글:  조회:3172  추천:0  2015-12-10
  『한용운 선생 생가지 (韓龍雲 先生 生家址)』 종목; 충남 기념물 제 75호  |  분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탄생지  |  면적; 484㎡  |  지정일; 1989. 12. 29. 소재지;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  |  전화; 041) 642-6716  |  관리자; 홍성군 관람안내; 매주 월요일 휴관  |  답사일; 2014. 09. 30(火), 충남 홍성의 역사 인물답사     충남 홍성의 역사 인물 답사여행, 에 이어 두번째로 찾은 곳은 독립운동가요 승려이자 시인이셨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 「만해 한용운선생 생가」였습니다. 이곳에는 한용운 선생의 생가(生家), 사당인 만해사, 민족시비공원, 만해문학체험관 등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여유롭고 조용한 자연 속에서 만해 선생의 주옥같은 시편들과 함께 그의 애국정신도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한용운 선생 생가지 전경, 이곳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는 홍성8경 중 제 3경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 소개,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 75호로 지정된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 안내문,           ▲ 한용운 선생 생가지,     【한용운 선생 생가지】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 선생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호는 만해(萬海).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는데, 이 신간회는 후에 학생 의거와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전개되고 추진되었다. 저서로 『님의침묵』,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 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생가가 쓰러져 없어진 것을 1992년에 복원하였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으며 바깥에 흙벽돌로 화장실을 만들었다.            가장 먼저 한용운 선생 생가를 둘러보았습니다.       싸리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본채가 있고 바깥쪽에는 흙담 화장실,           문화재 표지석과 싸리나무 울타리 그리고 그 너머에는 만해 선생의 생가,         늙은 감나무 아래에서 본 생가 전경,       생가 가운데방 문에는 선생의 시 "님의 沈默"이 걸려 있고 방안에는 사진에 걸려있습니다.             가운데 방문 위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轉大法輪(전대법륜, 진리의 변화를 설명한 글)" 서각이 걸려 있습니다.         생가 후원에 있는 우물과 장독대,         초가의 양 옆에 1칸을 달아낸 모습,             한용운 선생 생가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ㄱ자 형태의 초가,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禁門(금문)" 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당 신문(神門),             금문 아래에서 본 만해사(卍海祠, 사당), 스님이셨던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당.         만해사 금문 앞에서 바라본 만해체험관,           민족시비공원에서 바라본 한용운 선생 생가와 사당, 이제 시비공원으로 민족시를 찾아 나섭니다.       한용운 선생의 '복종' 시비가 가장 먼저 반깁니다.     복종 服從  |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는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민족시비공원길은 아름다운 소나무 숲속 오솔길을 따라 약 3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새긴 시비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백석(白石 白奭, 1912~1996) 시인의 "모닥불"부터 하나 하나 음미해보며 걷는 길이 참 좋았습니다.         동문수학했던 김남주(金南柱, 1946~1994) 형의 시 "자유"도 읊어 보았습니다.     자유  |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 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민족시비공원 산책로와 만해정(卍海亭),             민족시비공원 앞 감나무에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감들이 붉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민족시비공원 앞에 세워진 한용운 시비(韓龍雲 詩碑, 왼쪽 사진)와 나손 김동욱 문학비(羅孫 金東旭 文學碑),     알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돍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自嘲 자조  |  나손(羅孫) 김동욱(金東旭, 1922~1990, 국문학자)   하늘 위에 구름이 떠가면 / 잠시 기다리자 새소리가 들리면 잠깐 멈춰서자 그리고 구름 위에 아무소리 없이 태양이 가는 굉음을 들어보자       만해 선생의 어록비와 "나룻배와 行人" 시비 ​ ​ 나루ㅅ배와 行人  |  한용운   나는 나루ㅅ배 /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루ㅅ배 / 당신은 行人       만해 한용운 선생이 기초한 3·1독립선언문의 공약삼장(公約三章),             한용운 선생 생가터에 있는 민족시비공원 전경,         한용운 선생 생가터에 있는 만해문학체험관,         만해문학체험관 옆에 세워진 선생의 흉상,         만해문학체험관 내부, 이곳에는 6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어린이 체험실에는 만해 탁본교실과 300여권의 책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초상화,   萬海堂龍雲大禪師之眞影(만해당용운대선사지진영)이라 쓰여 있고 그의 대표 시인 "님의 沈默"이 함께 쓰여 있습니다.             만해 연보와 님의 침묵 재간본,         만해 한용운 선생, ​ ​ ​   ​ [출처] [충남 홍성] 한용운 선생 생가지(韓龍雲 先生 生家址)_충남기념물 75호|작성자 엽토51       한용운 - 님의 침묵(沈默)               님의 침묵(沈默)                             한용운 /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이시고 시인이신 만해 한용운님의 시 님의 침묵.     이 시는 88편이 실린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가 된 작품. 님의 침묵은 제목이 말해 주듯이 `님이 침묵하는시대' 의 님을 잃은 슬픔과 새로운 신념을 노래한 서정시. 식민지의 조국, 그의 시대를 님이 침묵하는 시대로 보다.     [출처] 한용운 - 님의 침묵(沈默) [아름다운 시]|작성자 귀공자 ================================================== 만해 한용운님의 일화 모음   ▶城谷의 神童  선생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기억력과 이해력이 뛰어나 가끔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동(神童)이라고 불렀으며, 선생의 집은 신동집으로 통했다 한다.   어느날 선생이 서당에서 《대학 大學》을 읽으면서 책의 군데군데 시커멓게 먹칠을 하고 있었다. 이상이 생각한 훈장(訓長)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자(程子)의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아홉 살 때에 《서전 書傳》을 읽고 기삼백주(朞三百註)를 자해(自解) 통달했다고 하는 천재였지만, 훈장은 또 한번 놀랐다. ▶비녀가 소용없다  선생은 1912년을 전후하여 장단(長湍)의 화장사(華藏寺)에서 〈여자단발론 女子斷髮論〉을 썼다. 당시 남자들에 대한 〈단발론〉이 사회적 물의를 크게 자아내고 있을 때 감히 여자의 단발을 부르짖은 것은 선생의 선각적인 일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원고는 지금 전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런데 그 무렵 선생은 "앞으로 20년쯤 후가 되면 비녀가 소용없게 된다."고 예측하였으며 좋은 금비녀를 꽂고 있는 부인을 보면,  "앞으로 저런 것은 소용없게 될텐데......"하였다는 것이다.   ▶어서 덤벼 봐라  선생이 고성(高城) 건봉사(乾鳳寺)에 계실 때였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한 그 지방의 어떤 부자를 만났다. "이놈, 중놈이 감히 인사도 안 하고 가느냐? " 하고 지나쳐 가려는 선생을 가로막고 시비를 걸었다. 선생은 못 들은 척하고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자, 그 부자는 따라와서 덤벼들었다. 선생이 한번 세게 밀었더니 그는 뒤로 나동그라져 언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선생이 절로 돌아온 얼마 후 수십 명의 청년들이 몰려와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놈들 어서 덤벼 봐라.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하고 드디어 화가 난 선생은 장삼을 걷어붙이고 힘으로써 대결하였다. 치고 받고 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자그마한 체구였으나 어릴 때부터 남달리 힘이 세었던 선생을 당하는 사람이 없어 하나둘씩 꽁무니를 뺐다. 강석주(姜昔珠) 스님은 선학원(禪學院) 시절의 선생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선생은 기운이 참 좋으셨습니다. 소두(小斗) 말을 놓고 그 위를 가부좌(跏趺坐)를 한 채 뛰어넘을 정도였으니까요. 팔씨름을 하면 젊은 사람들도 당하지 못했지요." 선생은 심우장(尋牛莊)에서 종종 선학원을 찾아갔는데 혜화동을 거치는 평지길을 택하지 않고 삼청동 뒷산을 넘어다니셨다. 이때 선생을 따르던 저는 당시의 일이 이렇게 생각난다. "삼청동 뒷산을 넘을 때 선생은 어찌나 기운이 좋고 걸음이 빠른지 새파란 청년이었던 제가 혼이 났었지요. 그저 기운이 펄펄 넘쳤어요. 선생은 보통 걸음으로 가시는데 저는 달음박질을 해도 따라가지를 못했어요." 또 조명기(趙明基)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만해 선생은 힘이 셀 뿐 아니라 차력(借力)을 하신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요. 왜경이 뒤쫓을 때 어느 담모퉁이까지 가서는 어느 틈에 한길도 더 되는 담을 훌쩍 뛰어넘어 뒤쫓던 왜경을 당황케 했다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커다란 황소가 뿔을 마주대고 싸울 때 맨손으로 달려들어 두 소를 떼어놓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지요." 아무튼 선생은 남다른 역사(力士)이기도 했다. ▶痲醉하지 않은 채 받은 手術  선생이 만주 땅 간도(間島)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떤 고개를 넘다가 두서너 괴한(怪漢)들이 쏜 총탄을 목에 맞고 쓰러졌다. 피가 심하게 흘러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환상으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하얀 옷을 입고 꽃을 든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인의 모습인데, 미소를 던지면서 그 꽃을 선생에게 주면서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고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 중국 사람의 마을을 찾아가서 우선 응급치료를 받고 곧 한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의사는 큰 상처여서 매우 아플테니 마취를 하고 수술하자고 했으나 선생이 굳이 마다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마취를 하지 않았다. 생뼈를 깎아내는 소리가 빠각빠각 날 뿐 아니라 몹시 아플텐데도 까딱 않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견뎌냈다. 의사는 "그는 인간이 아니고 활불(活佛)이다"고 감탄하며 치료비도 받지 않았다 한다. ▶네 郡守지, 내 군수냐 선생이 백담사(百潭寺)에서 참선(參禪)에 깊이 잠겨 있을 때 군수가 이곳을 찾아왔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영접을 하였으나 선생만은 까딱 않고 앉아 있을 뿐 내다보지도 않았다. 군수는 매우 괘씸하게 생각하여, 저기 혼자 앉아 있는 놈은 도대체 뭐기에 저렇게 거만한가!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선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왜 욕을 하느냐?" 고 대들었다. 군수는 더 화가 나서,뭐라고 이놈! 넌 도대체 누구냐?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선생은 "난 한용운이다."하고 대답했다. 군수는 더욱 핏대를 올려 "한용운은 군수를 모르는가! "하고 말하자, 선생은 더욱 노하여 큰 목소리로, "군수는 네 군수지, 내 군수는 아니다."라고 외쳤다. 위엄 있는 이 말은 군수로 하여금 찍 소리도 못하게 하였다.   ▶僧侶娶妻論의 辯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발표했을 때 이중에 들어있는 승려취처론에 대한 시비가 벌어졌다. 이때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당면문제보다도 30년 이후를 예견한 주장이다. 앞으로 인류는 발전하고 세계는 변천하여 많은 종교가 혁신될텐데 우리의 불교가 구태의연(舊態依然)하면 그 서열에서 뒤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금제(禁制)를 할수록 승려의 파계(破戒)와 범죄는 속출하여 도리어 기강(紀綱)이 문란해질 것이 아닌가. 후세 사람들은 나의 말을 옳다고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나라로서 제대로 행세를 하려면 적어도 인구는 1억쯤은 되어야 한다. 인구가 많을수록 먹고 사는 방도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 인구가 일본보다 적은 것도 수모(受侮)의 하나이니 우리 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 ▶月南 李商在와의 訣別  3·1운동을 준비할 때, 선생은 이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호응을 가장 널리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종교단체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측의 이상재 선생을 만나서 대사(大事)를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월남은  "독립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고 무저항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오."라고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선생은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본위(他力本位)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하고 주장했다.  이같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선생은 월남과 정면 충돌하였기 때문에, 월남을 지지하는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선생의 의견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월남이 가담했더라면 3て1운동에 호응하여 서명하는 인사가 더욱 많았겠지만...... 죽음을 초월한 용맹이 극히 귀하다."고 한탄했다. 서명서에 기명 날인이 잘 되면 백명 이상은 되리라던 예측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죽기 참 힘든 게로군  선생은 3·1운동의 준비 공작을 서두르는 동안 여러 인사를 만났다. 박영효(朴泳孝)와 한규설(韓圭卨)과 윤용구(尹用求)들을 차례로 접촉해 보았다. 그러나 대개는 회피하고 적극적인 언질을 피하였다. 서울의 소위 양반과 귀족들은 모두가 개인주의자요, 국가와 민족을 도외시한다고 한탄하며  "죽기 참 힌든 게로군! "하고 말했다. ▶당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선생은 최린(崔麟)의 소개로 천도교 교주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의암은 조선 갑부 민영휘(閔泳徽)て백인기(白寅基), 그리고 고종(高宗)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조선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자가용 자동차까지 가지고 있었다. 선생이 3て1운동에 천도교측이 호응해 주기를 요구했더니 먼저 이상재는 승낙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손 선생께선 이상재 선생의 뜻으로만 움직입니까? 그러면 이 선생이 반대하니 선생도 그를 따르렵니까? 그러나 이미 대사(大事)가 모의되었으니 만일 호응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하고 힘의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말을 하였다. 이 말에 적이 놀란 의암은 자기를 총대표(總代表)로 내세우는 조건으로 서명을 승낙했다. 의암의 이 승낙으로 천도교의 여러 인사들은 의암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기미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김병조(金秉祚),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정춘수(鄭春洙) 네 사람을 제외한 29인이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너무 심하여 선언서를 낭독할 겨를조차 없었다. 부득이 선언서의 낭독을 생략하여 연설로 대신하고 축배를 들게 되었다.  최린의 권고로 만해 선생이 앞에 나서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 선언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  간단하고 짧은 연설이지만 선생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한 셈이었다. ▶가짜 권총   3·1운동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당대의 거부 민영휘(閔泳徽)를 찾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하므로 선생은 권총을 끄집어내었다. 민영휘는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돕겠노라고 맹세했다. 이때 선생은 힘있게 쥐었던 그 권총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 권총은 다름아닌 장난감 권총이었다. 탐정 소설에나 나오는 듯한 흥미있는 이야기지만 선생의 이런 수단은 오직 독립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취해진 비장한 행위였다.  민영휘는 맹세한 터라 "비밀리에 모든 협조를 하겠소. 그에 필요한 비용도 주겠소. 그러나 이후부터는 다시 나를 찾지 말고 내 아들 형식(衡植)과 상의하여 일을 추진시켜 주기 바라오. 부디 성공을 비오."라는 간곡한 뜻을 말했다.  민형휘는 이 일이 있은 후 선생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조선 독립을 도왔고, 선생이 별세하였을 때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 郭鍾錫과 萬海   만해 선생은 3·1운동을 계획하면서 독립선언 서명자 가운데에 유림(儒林) 출신의 인사가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는 것을 개탄했다. 서울에는 유림 지도자들이 있으나 거의 친일에 기울어져서 경남 거창(居昌)에 사는 대유학자 면우(면宇) 곽종석 선생을 찾아갔다.   만해 선생은 면우 선생에게 먼저 세계 정세를 알리고 독립운동의 참가 여부를 물으니 즉석에서 협조할 것을 쾌락하고 곧 가사(家事)를 정리한 뒤에 서울에 올라가 서명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면우 선생은 공교롭게도 독립 선언일을 몇일 앞두고 급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자기 인장을 갖고 만해 선생을 찾아 뵙게 하였다.   ▶獄中에서의 大喝  3·1운동으로 투옥되어 있을 때, 최린은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을 차별대우할 뿐만 아니라 압박하고 있다는 말들을 하며 총독 정치를 비판했다.  이때 묵묵히 듣고 있던 선생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니, 그럼 고우(古友)는 총독이 정치를 잘한다면 독립 운동을 안 하겠다는 말이오! "라고 하였다. ▶監房의 汚物  민족 대표들은 모두 감방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그대로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평생을 감옥 속에서 살게 되지나 않을까? "  그들이 속으로 이러한 불안을 안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극형에 처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선생은 태연자약하였으나 이런 얘기를 전해들은 몇몇 인사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 모스?? 지켜보던 선생은 격분하여 감방 안에 있는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취소해 버려라! "라고 호통을 치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日本은 敗亡한다  독립 선언 서명자들이 이 법정에서 차례로 신문(訊問)을 받을 때, 선생은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왜 말이 없는가? "라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재판관을 꾸짖었다.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 "  신문이 계속 되자, 선생은 "할 말이 많으니 차라리 서면으로 하겠다."고 지필(紙筆)을 달래서 옥중에서 장문의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의 書〉를 썼다.  여기에서 선생은 조선 독립의 이유, 독립의 자신, 독립의 동기, 민족의 자유 등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총독 정치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결심공판(結審公判)이 끝나고 절차에 따라 최후 진술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생은  "우리들은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정치란 것은 덕(德)에 있고 험(險)함에 있지 않다. 옛날 위(魏)나라의 무후(武侯)가 오기(吳起)란 명장(名將)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내려오는 중에 부국(富國)과 강병(强兵)을 자랑하다가 좌우 산천을 돌아보면서 "아름답다 산하의 견고함이여, 위국(魏國)의 보배로다"하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오기는 이 말을 듣고 "그대의 할 일은 덕에 있지,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적이 되리다"고 한 말과 같이, 너희들도 강병만을 자랑하고 수덕(修德)을 정치의 요체(要諦)로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고립하여 마침내는 패망할 것을 알려두노라."라고 말했다. 과연 선생의 말씀대로 일본은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쫓겨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예견했던 선생은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바로 그 전해에 별세하였다.   ▶ 마중받는 인간이 되라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간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출감하던 날, 많은 인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독립 선언 서명을 거부한 사람이요, 또 서명을 하고도 일제의 총칼이 무서워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었다. 선생은 이들이 내미는 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얼굴둘만을 뚫어지게 보다가 그들에게 침을 탁탁 뱉았다. 그리고는,  "그대들은 남을 마중할 줄은 아는 모양인데 왜 남에게 마중을 받을 줄은 모르는 인간들인가."라고 꾸짖었다. ▶鐵窓  哲學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약 1개월 뒤,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이때의 연제는 철창 철학이었는데 회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일제의 임검으로 온 경관은 미와(三輪)란 일본 형사였다. 연설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해산 명령은 물론이며, 현장에서 연사를 포박해가는 때였으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선생은 임검에 거슬리지 않게 하면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약 2시간 동안이나 연설을 하였는데 맨 마지막에는 비장한 어조로  "개성 송악산(松岳山)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滿月臺)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善竹橋)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矗石樓)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목 씻는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오래 계속되었으며, 이 일본 경찰관까지 박수를 쳤다고 한다.   ▶島山과 萬海  만해 선생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나라의 장래를 의논한 일이 있다.  이때 도산은 우리가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西北) 사람들이 맡아야 하며, 기호(畿湖)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만해 선생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도산 선생은 기호 사람들이 오백년 동안 정권을 잡고 일을 잘목했으니 그 죄가 크며, 서북 사람들은 오백년 동안 박대(薄待)를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다. 그후부터 만해 선생은 도산 선생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 인도에도 金允植이 있었구나  3·1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그전에 일제가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반납한 일이 있다. 이것은 독립 운동의 여운이 감도는 당시에 취해진 민족적인 반성이었다. 이 일이 있은 몇달 뒤 인도(印度)에서는 우발적인 일치랄까,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촉이라고 노래한 바 있는 시인 타고르가 영국에서 받았던 작위를 반납하였다. 이것은 간디의 무저항주의적인 반영(反英) 운동의 자극을 받은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인도에도 김윤식이 있었구나"하는 묘한 비판을 하였다. ▶神이여, 自由를 받아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저명 인사들의 강연회를 열었을 때, 선생은 마지막으로 자유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여러분, 만반진수(滿盤珍羞)를 잡수신 후에 비지찌개를 드시는 격으로 내 말을 들어 주십시오. ...... 아까 동대문 밖을 지날때 과수원을 보니 가지를 모두 가위로 잘라 넣았는데 아무리 무정물(無情物)이라도 대단히 보기 싫고 그 무엇이 그리웠습니다"하는 비유를 들어 부자유(不自由)의 뜻을 말하자, 청중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부자유를 과수원의 가지 잘린 나뭇가지에 비유한 것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자유를 빼앗긴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입회 형사는 그 뜻을 모르고 박수를 하는 청중들에게, 고작 과수원 전정(剪定) 이야기인데 박수를 하느냐고 청중의 한 사람에게 따졌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재치 있게도,  "낸들 알겠어요. 남들이 박수를 하니 나도 따라 쳤을 뿐이지요"라고 임기웅변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잠시 폭소가 터졌다고 한다. 선생은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하고 자유를 구걸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부자유할 때 신도 부자유하고 신이 부자유할 때 사람도 부자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가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고 열을 뿜었다.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 하는 이 말을 그때 참삭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自 助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의 선전 겅연회가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만원을 이룬 가운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로 유성준(兪星濬) 선생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 취지에 대하여라는 열변에 이어 만해 선생은 자조라는 연제로 불은 뿜는 듯한 열변을 토했다. 말끝마다 청중의 폐부를 찌르는 선생의 독특한 웅변은 청중들을 열광케 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  선생은 웅변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말이 유창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목소리 또한 맑고 힘찼다. 그리고 선생이 강연을 하게 되면 으레 일제의 형사들이 임석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청중들을 매혹시키는지 그들조차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고 한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소련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국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슬아슬한 자문자답식 강연에, 임석했던 형사들은 차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청중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일본일까요? 남들은 모두들 일본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고 합디다" 선생의 능수능란한 강연은 이렇게 발전해 갔다. 임석 형사가 눈에 쌍심지를 켠 것은 바로 이때다.  "중지! 연설 중지! "  그러나 선생은 아랑곳없이 어느새 말끝을 다른 각도로 돌려놓고 있었다.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소련도 아니요, 미국도 아닙니다. 물론 일본도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는 말입니다."  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청중들은 박수갈채를 했다. 이쯤 되니 일제 경찰들도 더 손을 못 대고 머리만 긁을 뿐이었다. ▶昭和를 燒火하다  선생이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으로 있을 때 공문을 전국에 돌려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해 온 봉투의 뒷면에는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날이란 글자가 찍혀있었다. 이것을 본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천여장이나 되는 그 봉투들을 아궁이 속에 처넣어 태워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생은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 " 하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훌훌 사무실을 떠나버렸다. ▶나를 埋藏시켜라   선생은 젊은이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모든 기대를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젊은 후진들이 선생 자신보다 한걸음 앞장서 전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공부도 더 많이 하고 일도 더 많이 하여 선생 자신과 같은 존재는 오히려 빛이 나지 않을 정도로 되기를 바랐었다. [출처] 만해 한용운님의 일화 모음|작성자 나무  
한국 대구 수성못가 세워진 리상화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리상화 그는 근대 시사에 큰 자취를 남긴 대구가 낳은 시인으로 폭풍처럼 살다 간 파란의 생애는 우리 근대사와 많이 닮아있다. 43년의 짧은 생을 살면서 조국의 참담한 현실에 울분과 통곡이 있었기에 시인에게, 통곡, 역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저항적 서정시를 우리에게 물려 준 게 아닐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잠시 감상해 본다...              
1613    다시 대표작으로 보는 광복이전 시: 김동환 - 국경의 밤 댓글:  조회:2571  추천:0  2015-12-10
   김동환 시비 위치 : 경북 김천시 대항면 김천문화공원                산 너머 남촌에는 (1).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릿 내음새, 아~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 데나.   (2).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아~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 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아~어느 것 한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 나. ~ ~ ~ ~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릿 내음새, 아~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 데나.   (3).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은 타고서 고이 들리네.      김동환 (金東煥 1901∼?)단어장에 추가요약 시인. 호는 파인. 본관은 강릉. 설명 시인. 호는 파인(巴人). 본관은 강릉. 함경북도 경성(鏡城) 출생. 소설가 최정희(崔貞熙)의 부군(夫君).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를 거쳐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동양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1924)》로 추천받고 문단에 등장, 한국 최초의 서사시(敍事詩) 《국경의 밤》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신경향파에 속했으나 향토적이며 애국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민요적 색채가 짙은 서정시를 주로 썼다. 일제시대에 《삼천리(三干里)》지를 창간·주재한 것을 비롯해 1938년 순문예지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을 발간하였다. 작품으로는 시 《신랑신부(1925)》 《쫓겨가는 무리(1925)》 《파업(罷業)》, 희곡 《바지저고리(1927)》 《자장가 부르는 여성(1927)》, 소설 《전쟁과 연애》 등을 발표했고, 수필집 《나의 반도산하(半島山河, 1941)》 《꽃피는 한반도(1952)》, 시집 《승천(昇天)하는 청춘(1925)》,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과 합작한 《3인시가집(三人詩歌集, 1929)》 등이 있다. 6·25 때 납북되었고, 이후 평남일보교정원을 거쳐 1958년까지 재북(在北)평화통일위원회의 중앙위원으로 있었으나 현재는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 -김동환   제1부 < 1 >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巡査)가 왔다 - 갔다 -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 밤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北國)의 겨울 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 2 >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어이!"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處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재실이 벌부(筏夫) 떼 소리언만.   < 3 > 마지막 가는 병자(病者)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로운 바람 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變)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處女)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쓸어안고 흑흑 느껴 가며 운다. 겨울에도 한삼동(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끊는 소리언만.   < 4 > 불이 보인다. 새빨간 불빛이 저리 강 건너 대안(對岸) 벌에서는 순경들의 파수막(把守幕)에서 옥서(玉黍)장 태우는 빠알간 불빛이 보인다. 까아맣게 타오르는 모닥불 속에 호주(胡酒)에 취한 순경들이 월월월, 이태백을 부르면서.   < 5 >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 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 간다. 함박눈조차 다 내뿜은 맑은 하늘엔 별 두어 개 파래져 어미 잃은 소녀의 눈동자같이 깜박거리고, 눈보라 심한 강 벌에는 외아지 백양(白楊)이 혼자 서서 바람을 걷어 안고 춤을 춘다. 아지 부러지는 소리조차 이 처녀(處女)의 마음을 핫! 핫! 놀래 놓으면서.   ((작품 해설)) "국경의 밤"은 전체 3부 7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김동환의 장편 서사시이다. 국경 지대인 두만 강변의 작은 마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현재-과거-현재"의 시간 구조를 채택하여, 밀수꾼 병남(丙南)과 그의 아내 순이, 그리고 순이의 첫사랑이었던 청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북국의 겨울밤이 주는 암울한 이미지를 통해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고통과 불안을 형상화했다는 점에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일제 시대 많은 우리 백성들은 만주에 가서 살았다. 강제로 이주되어 간 사람도 있었고, 독립 투쟁을 하기 위해 간 사람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돌아갈 수 없는 조국을 그리워하였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참담한 현실과, 쫓기는 자, 소외된 자의 비극적 좌절 체험을, 국경 지방 한겨울밤의 삼엄하고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 극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의 전편에는 순이, 병남, 청년(옛 애인) 간, 또는 순이와 상황간의 갈등이 순이의 내부에서 관념적, 낭만적으로만 일어나고 있어, 서사시로서의 특징인 영웅화나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제재나 주제가 개인 단위의 정서 표출에 있지 않고 민족사와 그 운명에 대해 치열한 관심을 보여, 1920년대 감상적(感傷的)인 서정의 세계와 획을 긋는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느낌) 1장을 읽어보면 조국을 그리워하는 시. 이 시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 한번 읽어 볼만한 좋은 시.
          가는 길                                                  김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져 산(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김소월(1923) (1) 주제 : 이별의 아쉬움. 지난날에 대한 회상에 오는 그리움   (2)김소월(1902-1934) 본명 정식(廷湜). 평북 정주 출생 동인. 1920년 '낭인(浪人)의 봄'을 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고,‘진달래꽃’은 1922년 지에 실렸으며, 127편이 실린 시집 은 1925년에 나왔다. 1934년 12월 사업의 실패와 세상에 대한 실의로 고민하다가 음독 자살하였다. 통설에 따르면 민요시만 쓰다가 1926년부터 절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근에 짙은 저항성이 담긴 그의 말기 작품이 많이 발굴되었다. 대표작으로 ‘초혼’, ‘금잔디’, ‘가는 길’, ‘산유화’, ‘진달래꽃’, ‘접동새’, ‘예전엔 미쳐 몰랐어요’ 등이 있다.   (3) 서정시  율격 : 3음보. 7,5조의 변형  의의 : 우리 민족의 내면에 흐르는 보편적 정한(情恨)을 진솔하게 표현 (4) 까마귀, 강물 - 머뭇거리고 있는 화자를 재촉하는 객관적 상관물 (5) 화자의 내적 갈등(머무름떠남)이 해소되지는 않고 있다. (6) 김소월 시의 특징 ㉠향토성: 대체적으로 향토적인 풍물, 자연, 지명을 소재로 삼음 ㉡민요풍: 오랜 세월 동안 겨레의 정서 생활의 가락이 되어 온 민요조의 리듬으로 이루어졌다. ㉢민족 정서: 시의 주제와 심상은 민족의 설움과 한(恨)의 정서를 활용, 민족의 보편적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철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김소월(1922)   (1) 주제 : 떠난 임(만날 없는 임)에 대한 강한 그리움   (2) 반어적 표현 “ 잊었노라 ” - 절대 잊지 못하겠다는 표현   (3) 과거 시제와 미래 시제가 공존하는 시제상의 모순이 나타난다.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 25호(1922.7)   (1) 주제 : 이별의 정한(恨)   (2) 수미상관 - 1연과 4연, 기승전결의 구조 (3) 운율 : 7.5조의 변형, 3음보, -오리다 (각운) (4) ㉠ 역겨워-마음에 거슬리고 싫어서. ㉡ 유교적 전통 사회의 여성이 지닌 인종과 체념 ㉢ 향토성 ㉣ 진달래꽃 - 화자의 사랑, 정성 한국 꽃의 대유.  '헌화가', 정철의 '관동별곡'을 거쳐 한국 서정시의 소재적 전통을 형성한다. 애정시의 소재적 전통을 잇는다 ㉤ 아름-한 아름, 두 팔을 벌려 껴안은 둘레의 길이, 음악성 ㉥ 산화 공덕(散華功德), 임이 가시는 길에 축복이... ㉦사뿐히-발소리를 내지 않고 가볍게 살짝. ㉧즈려-눌러, 평안도 사투리. 가시는 임으로 하여금 진달래꽃을 밟게 하는 것은 가시는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과 축복의 표현이다. 이별의 한을 숭고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자기희생적 어조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 인고(忍苦)의 자세 반어법, 도치법 '속으로 몹시 울겠다.'는 뜻의 반어.     길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 현실적 상황     오늘은   또 몇 십 리(十里)   어디로 갈까.                         ▶ 떠돌이의 고달픈 신세     산(山)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 방향 상실감     말 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定州郭山)   차(車) 가고 배가는 곳이라오.               ▶ 자기 위안과 연민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 방향 상실의 비애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 방향 상실의 비애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 유랑인의 비애(현실적 상황) 김소월 (1925)   (1) 주제 : 유랑민의 비애와 정한 (2) 길 : 유랑인의 길(떠돌아다니는 삶의 여로) (3) 자문자답형식(문답법), (4)  ㉠가마귀 - 불안한 심리를 반영. 감정이입, 답답한· 우울한분위기 더함 ㉡기러기 - 선망의 대상. (정착할 곳을 향해 날아감, 방향이 있음) 화자와 공통점은 나그네, 차이점은 - 기러기(선망) ---목적지(정착)를 향해 날아감----- 공중(희망의 공간)  ↕                                               ↕ 나--------------목적지 없음, 방황-----㉢열십자 복판(운명의 기로)   (5) ㉣갈 곳 없는 떠돌이로서의 비애와 절망감을 단적으로 드러낸 시 전체의 결구로서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구절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1924)     (1) 주제: 인생과 자연의 근원적 고독,           고독하고 순수한 삶의 모습 (2) 어조 - 애상적, 영탄적 (3) 소재 - 꽃(고독감의 표상) (4)  ㉠ '갈'= 가을. 계절의 순서를 바꾼 의도 - 낯설게 함으로써 변화를 꾀하고, 율격의 흐름(음악성)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의도이다. ㉡ ‘저만치’- 작중 화자와 꽃 사이의 거리, 인간과 자연의 거리  '나'와 거리가 있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 꽃도 다른 꽃들과 떨어져 홀로 있음을 의미함.  '나'와 ‘꽃’- 외로운 존재 대상과의 거리를 설정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인 고독(외로움)을 형상화함 ㉢ 새 - 감정이입. 즉, 화자의 고독감과 외로움이 새에게 부여됨. 외롭고 쓸쓸한(고독한) 그 감정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 산 - 산(山)이라는 영원자에 포용되는 일체감 (4) 나, 꽃, 새 = 모두 외로움과 고독감을 지닌 존재---> 산에 포용됨 존재의 본질이 고독감임을 말함 (5) ㉤꽃이 지네 - 존재의 소멸 (6) 화자가 말하는 존재의 본질은? - 고독감 (7) 이 시의 주된 정서는? 고독감     산(山)   ㉠산새는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령 넘어 갈라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나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리   돌아서서 육십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년 정분은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우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김소월(1922.10)     (1) 주제 : 떠나야 하는 상황과 그 미련 (2) 화자의 위치          들(떠나온 방향)-----화자---->고개---> 삼수갑산 - 화자가 가려는 방향은 삼수갑산이다. - 그러나 그 전에 ‘고개(령)’를 넘어야 하는 길이다. - 화자는 떠나온 길에 미련(정)이 남아서 돌아서기도 한다.   (3) ㉠산새 - 감정이입. - 산새는 제 고향 깊은 산골로 돌아가려고 하지만‘령[고개]’을 넘어야 하는 힘든 상황 앞에서 울고 있다. - 화자 자신도 삼수갑산을 향해 길을 떠나고 있지만 앞에 놓인 눈 내리는 고개를 넘어야 하는 힘든 상황이다.   ㉡ 눈 - 화자의 힘든 상황에 더해지는 고난, 시련   (4) ‘삼수갑산’의 의미는? 이상향이 아니다. 떠나온 곳은 십오 년 정분이 있는, 따뜻한 사람냄새가 있는 공간이다. 하루 동안 팔십 리를 걸으면서 그 중 육십 리는 되돌아 간 거리이다. 즉, 화자는 어떤 외적인 상황에 의해서 떠나온 것이지 삼수갑산을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삼수갑산은 화자가 의지하려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 곳은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화자는 ‘불귀,불귀,불귀...다시 불귀...’라고 말한다.   (5) 눈이 녹는 들(떠나온 방향)눈이 내리는 산(떠날 길)       ===================================================== 1925년 발간 생전 유일 시집…시작가 9천만원 (서울=연합뉴스) = 김소월(1902∼1934)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 초판본이 경매에 나왔다. 경매사 '화봉' 등에 따르면 경매에 나온 '진달래꽃'은 1925년 12월 26일 매문사에서 간행한 시집으로, 책 제목과 같은 시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 후일',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초혼' 등 작품 127편이 16부로 나뉘어 수록돼 있다. '진달래꽃'은 총판매소에 따라 중앙서림 총판본과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으로 나뉘는데 이 책은 중앙서림 총판본이다.     현재 이 책과 같은 중앙서림 총판본 1책과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 3책 등 모두 4책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난 김소월은 오산학교 교사인 안서 김억의 지도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20년 '낭인' 등을 '창조'지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1922년 '개벽'지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원망하지 않고 진달래를 뿌리며 축복하는 내용의 '진달래꽃'을 발표하며 큰 주목을 받게 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하략)' 그러나 김소월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1923년 일본 동경상과대학에 입학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한 그는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1934년 12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불과 33살이었다. 경매는 오는 19일 진행된다. 시작가는 9천만원이며 평가액은 2억원이다. 국내 근현대 문학서적 경매 사상 최고가로 낙찰된 책은 2014년 11월 19일 팔린 백석의 시집 '사슴'으로 알려져 있다.   ====================================     ▶         [OSEN=] 한국의 20세기 최고시인으로 꼽히는 김소월(1902~1934년)의 생전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1925년 발행)이 한국현대문학 경매사상 최고액인 1억 3500만 원에 낙찰됐다.    19일 서울 종로구 회봉문고에서 열린 제35회 화봉현장경매에 출품된 『진달래꽃』은 시작가 9000만 원에 경매를 시작, 경합 끝에 한국현대문학 사상 단일 시집은 물론 단행본 통틀어 최고액에 팔렸다.    『진달래꽃』은 그동안 중앙서림(中央書林)과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 총판본 등 두 종류가 매문사(賣文社) 한 출판사에서 같은 날짜에 나온 동본이종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경매사 화봉의 현장경매에 출품된 작품은 중앙서림 총판본이다.   이번에 출품된 『진달래꽃』은 지난 2011년 2월22일 문화재청 고시 제 2011-61호로 고시된 등록문화재(제470-1~4호) 4책과 동일한 판본으로 국내에 5권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은 극희귀본이다. 화봉 측은 이 시집의 평가액을 2억 원으로 매겨놓았다. 낙찰가는 평가액에는 다소 못미치는 1억 3500만 원이었다.   매문사판 『진달래꽃』은 10.5×14.7cm 크기의 234쪽 분량이고, 저작 겸 발행인이 김소월의 본명인 김정식(金廷湜), 발행소는 매문사, 인쇄소는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매소는 중앙서림으로 돼 있다. 발행일은 1925년 12월 26일, 정가는 1원 20전이다.    『진달래꽃』에는 김소월의 대표작인 ‘진달래꽃’을 비롯해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초혼’, ‘먼 후일’ 등 주옥같은 작품 127편이 16부로 나뉘어 수록돼 있다.   여태껏 한국 시집 가운데 경매 시장에서 최고액으로 낙찰된 것은 백석(1912~1996년) 시집 사슴으로 2014년 11월 19일 경매사 ‘코베이’에서 7000만 원에 팔렸다. 그 시집은 저자인 백석 시인이 이육사 시인의 동생이자 평론가인 이원조에게 친필 서명, 기증한 것이다. 사슴 역시 국내에 열 권 남짓 남아 있는 희귀본이다.    2015년 1월 21일엔 경매사 ‘코베이’에 출품됐던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1948년 발행)이 1300만 원에 낙찰된 적도 있다. ======================================================= 진달래꽃/김소월    진달래꽃/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金素月]은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입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외 많은 명시를 남겼습니다.   이하는 시인 김소월[金素月]의 생애 및 활동사항.   김소월 연보 출생 1902.8.6~ 사망 1934.12.24 1902 음력 8월 6일 평북 구성에서 장남으로 출생. 본명 김정식. 1907 조부가 독서당을 개설하고 훈장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 시작. 1909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남산소학교에 입학. 1915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오산중학에 입학. 스승 김억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 수업 시작. 1916 홍실단과 결혼. 1920 에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22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 1923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길에 오름. 10월 관동대지진으로 귀국. 1924 귀향해서 조부의 광산일을 도움. 영변 여행을 다녀와서 김동인, 김찬영, 임장화 등과 함께 동인이 됨. 1925 시집 《진달래꽃》 발표. 시론 을 5호에 발표. 1926 7월 평안북도 구성군에 동아일보 구성지국 개설, 지국장 역임. 1927 3월 동아일보 지국 폐쇄. 발표. 1929 조선 시가협회 회원 가입. 1934 12월23일 장에서 아편을 사가지고 와 음독함. 다음날 아침 8시경 시체로 발견됨. 평북 구성에 안장됐다가 후에 서산면 평지동 왕릉산으로 이장.          
1611    윌리엄 불레이크, /// 칼 크롤로브 시해설 댓글:  조회:6706  추천:0  2015-12-10
옛 시인의 목소리    영국 랑만주의 시인 -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기쁨에 찬 젊은이여, 이리로 오라, 그리하여 열리는 아침을, 새로 태어난 진리의 이미지를 보라. 의심은 달아났고, 이성의 구름도 어두운 논쟁도 간계한 속임수도 달아났다. 어리석음이란 일종의 끊임없는 미로, 얽힌 뿌리들이 진리의 길을 어지럽힌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거기에 빠졌던가! DA 300 그들은 밤새 죽은 자들의 뼈 위에 걸려 넘어지고, 근심밖에 모른다고 느끼면서, 자신들이 인도를 받아야만 할 때, 다른 사람들을 이끌려고 한다. 영국 낭만주의 1세대 시인인 블레이크는 이 시에서 아마도 프랑스 대혁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모든 혁명은 아침으로 빛나지만, 늘 저녁을 맞이했다. 다만 다른 아침을 예비한다는 점에서 혁명은 “진리의 이미지”다. “논쟁”과 “속임수”와 “어리석음”의 “미로”를 뚫고 역사의 기차는 아주 천천히 달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푸르른것은 오직 저 생명의 나무이다.”(괴테)     윌리엄 블레이크 (1757 - 1827)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 시대를 연 시인. 14세부터 판화를 배웠고 문학서적을 탐독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순수의 노래 , 경험의 노래는 어린이의 관점에서 쓴 문명 비판적 시들로서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그는 창문 밖으로 천사를 보았다는 환상가였고 신비가였다.   종교적 명상이 담긴 천국과 지옥의 결혼, 밀튼, 예루살렘 등의 예언서들을 냈다.     그는 이성의 억압적 세력에 대항하는 사랑과 상상력의 싸움을 노래하였다.   작품집에 대부분 삽화를 그려 넣었는데 그 기법이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소재였다.     그는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인정받기 시작했고 오늘에는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쫓기는 토끼의 울음 소리는  우리의 머리를 찢는다. 종달새가 날개에 상처를 입으면 아기 천사는 노래를 멈추고....       모든 늑대와 사자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부터 건져 올린다.   여기저기를 헤매는 들사슴은 근심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준다.       학대받은 양은 전쟁을 낳지만,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기쁨과 비탄은 훌륭하게 직조되어   신성한 영혼에겐 안성맞춤의 옷, 모든 슬픔과 기쁨 밑으로는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아기는 강보 이상의 것, 이 모든 인간의 땅을 두루 통해서   도구는 만들어지고, 우리의 손은 태어나는 것임을 모든 농부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그대가 무엇을 하건, 그것을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해와 달이 의심을 한다면 그들은 곧 사라져 버릴 것이다.         열정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열정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국가의 면허를 받은 매음부와 도박꾼은 바로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들려오는 창부의 흐느낌은 늙은 영국의 수의를 짤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1757∼1827)         ---------------------------------------------------------------------- 시퍼런 급류                  /칼 크롤로브 시퍼런 급류, 이윽고 녹색빛이 눈을 뜬다. 하늘 거기 이른 봄맞이 노래하는 새들이 날고 있다. 음악적인 몸짓을 하는 빛이 한낮의 종달새 무리 속에서 떠돌고 있다. 어둠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긴긴 밤의 등불들이 꺼져버렸다. 수양버들이 색깔의 비 속에서 그 슬픈, 노란 머리칼을 내리고 있다. 말言語들 문 뒤에서 술렁대다가 꾸며진 말들의 소박성, 창문에서 벽에서 은근한 빛으로 석회칠해진다. 모음들의 현실, 둘 혹은 세 음절로 된. 하늘의 수수께끼로부터 잘려지고 돌의 현관에서 잘려진. 피부 속의 번개로서 그 속에 바람이 부는 수염으로서 속삭이는 소리를 통해 나타나는 낯선 얼굴의 解讀. 허지만 이름들은 귀 속에서 다만 윙윙거림으로만 남는다. 마치 매미나 벌꿀처럼. 그러다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모음들-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보잘것없는 벌레들, 재가 되어 떨어져 모과의 향기 되어 남는다. 세 개의 오렌지, 두 개의 레몬 세 개의 오렌지, 두 개의 레몬 : - 더 이상 숨은 평균율이 아니며, 대기에 사는 공식이다. 익은 과일들의 代數學이다! 빛은 호리병벌 속 색깔의 노란 대낮 속에 소리없이 모든 생물 둘레에 몰려 떠돈다. 메마른 꽃들은 똑같은 순간 메마른 바람 속에 쉬고 있다. 세 개의 오렌지, 두 개의 레몬 정적은 날개를 달고 온다. 느릅나무 冠을 통해 녹음이 정적을 흔든다. 행복한 배, 마도로스의 상쾌함. 그리고 하늘은 이제 가슴을 보고 눈감지 않는 눈 : 정확한 경이, 나뭇잎새 사이로 흔들린다. 세 개의 오렌지, 두 개의 레몬 : - 수학적인 황홀경, 가벼운 곳에서 쓰여진 한낮의 문서! 혀는 혀로서 침묵한다. 게다가 낡은 의미는 귀머거리처럼 꾸꾸 운다. 저녁의 상념 어둠 속에서 얼굴들 빛난다. 덩굴숲 뒤에 있는 등불. 복숭아의 뺨들이 밤의 그림자 속에서 행복하게 젖어든다. 펄펄 끓어오르던 한낮의 열기 식고 그 영상은 망막 위에서 쉰다. 다만 웅얼거리는 소리뿐, 그 영상은 곧 어두워질 푸른 자두나무에 매달려 있다. 창문을 통해 먼데서 오는 소리 비스듬히 들리고 바람결에 속삭인다. 대기의 고랑 틈에서 물고기처럼 저녁상념이 헤엄을 친다. -『현대대표시인선집』(중앙일보사, 1982)에서 칼 크롤로브『나를 위한 풍경』(청하, 1988) 나무밑의 식사 얼룩진 그림자 아래 앉아, 우유처럼 미지근한 공기가 불어온다. 요술처럼 원이 그려지고 더위는 물러갔다. 뱀처럼 쉭쉭 소리내는 낫에 부딪쳐 깜짝 놀라 튀는 돌 강렬한 녹색을 불붙듯 내뿜는 풀밭, 벗은 다리 위에 엉겅퀴의 가시 타오르는 카밀레꽃 사이로 맨발로 우리는 선회하며 라벤더와 제비꽃의 서늘한 그늘로 피했다. 풍뎅이 날개 속에 고요가 윙윙 소리내고 검은 단풍나무 울타리 쳐진 고요 풀먼지에 아픈 눈은 강렬한 햇빛 속에 떨린다 그리고 우리는 빵과 치즈를 자른다 흰 포도주가 턱밑으로 흐른다 우리는 용해된 자두술을 살 속 깊이 알게 된다 바구니 위로 손들이 오가고 단단한 입은 만족되었다 나른한 팔다리는 흔들리는 나뭇잎 속을 흘러간다 배 독이 섞인 바람, 해초나 썩어가는 상어의 독가스와 함께 배들은 소리없이 나아간다 바람이 달을 향해 지나가고 가끔 물고기들에게 침 같은 비를 뿌린다 꺼져가는 불빛 속에 웃음소리처럼 밤이 내리고 어둑 짙어지는 비, 뱃짐에서 나는 감초 향기, 땀흘리는 선판 위로 흔들리는 괴로운 감초의 운무, 개들이 짖는다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발자국은 공포를 띄어 개들을 바보처럼 우롱한다 들보와 밧줄 사이로 구부러진 돛, 배 뒤로부터 저 위에서 한숨이 들려온다 허무로 짜여진 비탄 그리고 무거운 얼굴들, 배의 깃대는 이미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간다 럼 술병 옆의 자화상 이 몇 해 동안 허위에 찬 모습 술벼엥 비치는 찌그러진 얼굴, 잿빛 머리칼과 검은 이, 깊고 놀라운 술에 파묻혀 달을 그리며 밤에 기댄 모습! 아, 이것이 바로 나다 나의 목구멍을 태우는 향기로운 불을 나는 삼킨다 눈주위는 수상한 푸른 멍이 들고, 턱은 벌써 새로 자란 수염으로 그늘졌다 수염에는 먼지며 누런 설탕이 묻어 있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쉬지 않고 달콤한 럼을 입안에서 씹는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은 내 눈썹과 함께 자랐다 그리고 털로 덮인 악마의 발톱-허무가 나의 목을 휘게 하고 등을 구부러지게 만든다 허위에 찬 모습! 검은 술병이 행복의 배처럼 내 머리 위로 흘러간다 내 손 밖으로 자라나 내가 사로잡혀 있는 내 꿈의 그물을 빠져나가 낯선 열대의 하늘을 헤매이다가 흑인의 입술, 자마이가, 나의 머리 그리고 피안에 가까운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 사라진다 적막한 해변         유심히 살펴보면 결국         도처에 난파선이 널려 있다         -페트로니우스 돛단배와, 수염으로 덮인 황금 같은 웃음소리들은 입에서 새어나오는 가쁜 숨처럼, 석회를 먼지로 부서뜨리는 담벼락의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녹지 않는 검은 꿀처럼 비애는 남아 있고, 새똥처럼 젖어, 향기롭게 빛 속에 걸리고 뜨거운 벽돌 기둥 위에 가벼운 죽음으로 착색된다 카드놀이하는 선원들은 그들의 육체 속에 홀로 있고 담배연기가 그들의 풀어진 눈까풀 사이로 그들 속으로 스며든다 그들이 밤의 푸른 장막을 향해 던졌던 그들의 칼날은 솟구치는 영원의 날카로운 바람 속에서 무뎌졌다 강가의 야상곡 내 목소리의 재를 강물에 뿌리고 검은 그을음자국처럼 나는 그것을 따라 헤엄쳐간다 달의 커다란 입 속에 쉬익 소리내며 지나가는 크고 더러운 검은 비늘의 물고기들 아래의 그늘 정령의 소리에 휘날리고 역리로 휩싸인 침묵의 넓은 천이 내 위에 덮였다 밤의 폐허 속에 숨어 있다가 내 핏속에 불을 찌르는 모기소리 내가 달아나 버린 내 몸의 검은 색이 천갈좌가 되어 내게 별빛을 던진다 물 속에 떨며 서 있는 오렌지, 빛살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달 아래 흔들리고 있다 고요와 회색 바람으로 만들어진 달콤한 과일, 내 눈동자 안으로 빛이 되어 스며든다 부드러운 해초의 정원에서 쉬고 있던 녹색 수염의 밀물이 어느새 올라왔다 그리고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은 부르는 소리로 가득찬 밤 속으로 기운다 물이 있는 풍경 물 속에 잠기는 뜨거운 담의 붉은 빛은 공기를 그의 불길로, 부드러운 빛으로 칠했다 포플라 그늘 아래서 검은 물고기인 나는 움츠리며 미나리 같은 입맞춤의 맛을 들이마신다 칠현금 같은 뿔이 달린 미노토루스, 더위의 황소는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리고 푸른 도랑에서 목욕한다 그가 성이 나 머리를 석회암의 가벼운 살 속에 파묻듯이 나는 나의 주위를 부르겁게 감싸는 서늘함에 팔을 휘감는다 갈대숲 뒤에 빛나는 물의 라빈린트 바깥, 아리아드네의 실을 눈먼 테세우스가 붙드는 것이 보인다 소금에 젖은 그의 하얀 양털 같은 머리칼이 바삭바삭 소리내고, 물결이 바위에 부딪쳐 소리친다 그것은 오보에의 탄식과도 같았다 나의 머리 위에 살아 있는 은화, 빛나는 무성한 나뭇잎 나귀가 끄는 짐수레가 푸른 들판에 짧은 틈새를 만든다 마르지 않은 라커처럼 빛나는 새털구름의 반사, 그리고 나는 낮은 소리로 우는 바람의 낭적과 이야기를 나눈다 낯선 병사들이 있는 밤풍경 나란히 누워 밤에 잠들어 있는 그대들, 엉덩이를 박하 속에 눌러 누이고 짓이겨진 살비아의 향기 속에, 시간의 잎사귀 아래, 괴물 같은 공기의 흐름 속에, 담 밖에서 춤추는-황혼이 흘러가고 보이지 않게 호두껍질 속에 숨어 있는 어둠의 요정이 예리한 정적 속으로 몰입하고, 내 가슴의 풀잎에 고통이, 고뇌가 입을 다물고 그리고 하늘은 베틀을 짜 검은 색의 천을 휘감을 때 나뭇잎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잿물에 타버린 병사들, 낯선, 납작한 기관총의 총구 冥府에서 잠자는 그대들, 목덜미엔 고요한 별 모래바람 속에 불타는 대기의 불, 그림자와 재로 된 길 위에, 달빛 아래 촘촘히, 그대들은 모여 있다 머리카락은 풀잎과 엉키고, 부드럽고 눈먼, 심연으로 흠뻑 젖고, 흑인처럼 부어오른 입술, 팔에는 낟알 같고,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기 같은 천상의 진리, 페르세포네의 사랑으로 따뜻하고 달콤한 꿈의 포옹에 묶여, 교살된 머리를 늘어뜨리고! 나뭇잎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잿물에 타버린 병사들, 회색의, 납작한 기관총의 총구 이제 소리없이 깨어난 그대들, 수염에는 나비들, 천천히 바람 속에서 노래하며, 늑골 위로 벗어부친 셔츠, 행복한 얼굴 위로, 모든 천공의 별과 시간의 지도처럼 깊어가는 침묵이 덮는다 북소리와 나팔소리에 그대들이 힘겹게 숨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어느 총탄도 뚫을 수 없는 공유하는 대기 속에, 입안에 남아 있는 남자들의 밀가루의 씨앗인, 동쪽으로 흘러가는 푸른 화약가루의 낟알들을 씹으며, 나뭇잎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잿물에 타버린 병사들, 머나먼, 납작한 기관총의 총구 남자들 우리들의 행동이란 결국 신랄한 공포로 온통 뒤섞인 꿈이 아니고 무엇인가 -안드레아스 스리피우스 그렇게 그들은 간다 목에 걸린 호탕한 웃음, 가지런한 치열과 잘 닦여진 잇몸을 보이며 튀어오르는 근육과, 엉덩이를 흔들며, 그들은 쉽게 침묵하고, 음흉하게 혈관을 타고 올라오는 탐욕스러운 입술을 한, 죽음의 바람 속에 소리없이 날아다니는 늙은 하이에나, 한 밤의 가죽을 뒤비어쓴 짐승을 잊어 버리고 석탄처럼 검은 험악한 눈 또는 삼월 하늘처럼 푸른 선량한 눈, 숨김없는 눈길로 그들은 씩씩하게 걸어간다 한낮의 햇빛의 긴 행렬 앞에, 행운의 태양 아래, 아무렇게나 어깨에 메고, 고요한 걸음걸이를 가볍게 하는 신식기관총이 이 시대의 빛속에 금속성의 잿빛으로 빛난다 형상없는 세계, 텅빈 막사 뒤에서의 잡담, 쟁취된 은신처에서 밤으로의 의식 없는 호흡 : 밤은 그들을 위해 가로등의 불꽃 타는 소리 t고에 다가오고 밤은 식사처럼 맛이 좋았다 구운 닭고기 포도주 쓰레기,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식탁에서 일어난다 희망은 비수처럼 벌써 살 속 깊이 꽂혔으므로 사냥꾼과 양치는 사람들의 서정적인 풍경 뒤에 무기의 수풀이 숨어 있다 프롬의 섬광, 짖어진 콘돔, 방어하지 못하는 세계 위에서, 燐 속에서 폭발하는 불의 신의 위력 그러나 그 힘은 맑은 물처럼 끊임없는 찬양에 대한 약속을 하고 있다 거짓 철자들로 된 더듬거리는 찬양 가냘픈, 가벼운 새들이 심연을 벗어난다 그리고 죽음이 쓰디쓴 술잔이라는 것을 아무도 그들에게 증명하지 않는다 저편으로부터의 기울어진 빛 속에 어깨의 뼈마디를 짓누르는 삶과 삶 사이에 허무의 쟁기의 보습 그림자처럼 낄낄 웃는 귀신들의 기쁨에 둘러싸여 안정장치 풀린 권총처럼 그들은 신랄하게 확신에 차 있다 그렇게 그들은 간다 죽음의 배가 천천히 명부로 저어갈 때, 갈색 머리, 금발 머리카락을 귀뒤의 허공에 날리며 순찰꾼의 외침 뒤에 남는 허공처럼 그들 뒤에 있는 캄캄한 허공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남자들, 웃음의 한가운데에서 비극의 가면으로 찢어지는 얼굴들 1950년 송시 슬픈 표제어는 이제는 충분하다 : 편안한 비유는 누런 빛으로 부서지는 가을 낙엽처럼 아무 의미없는 헛된 말 냉혹한 낱말은 마른 풀에 불을 당기는 것처럼 유령 같은 유행으로 입안에서 써서 닳고 닳아 결국 토비아스의 물고기보다도 놀랍지 않고, 또다시 송시라는 정신이 된다 그러나 존재의 태만한 폭력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교활하고 잡다하게 휴식하는 이외에 : 가벼운 신을 신고 우화의 인물 속으로 도망가거나 산 위에서 불어오는 휘감기는 바람의 입맞춤에 혼미한 채 재로 덮인 강 위에 천천히 표류하거나 열매으 공식 : 누가 그것을 그렇게 부르는가? 밤의 은빛 쟁반에 담아 날들의 소리나는 식탁 위에 펼쳐 놓은! 느낄 수 있고, 가깝고, 붙잡을 수 있는 나는 그 사이에 헛되이 사라지는 것들을 낱말들로 붙잡으려고 한다 섬세하게 고안해낸 숨쉬는 음절들과 떠오르는 반달 속의 미역감은 칠요성의 고리처럼 한 묶음의 생각들로 된 수학으로 그러나 요술의 이 이름들로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구구대는 비둘기 -무의식처럼 들리는- 달콤한 소음들은 사라진다 나는 그것들이 낱말들로 된, 표식으로 된, 어떤 의미인 것처럼 꾸며대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또다시 심연? -아니 심연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의 유혹 그리고 풀베는 사람들의 한낮에 또는 갈대로 뒤덮인 밤에 그 앞에 걸려들고마는 다정한 덫, 노래하듯 휘감기는 시적인 함정, 확실하고 명쾌하게 내버려둘 수 있는, 정신 가운데에서 정신을 끌어낼 수 있는, 그리고 저주가 숨어드는 역사의 구름 속을 휘몰아쳐 지나가는, 환상의 기사,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 능력 나는 낱말의 윙윙 소리나는 사슬, 공허하게 울리는 쇠창살을 존재의 바닥 위에 남긴다         그것은 빛나고 쓰디쓰다 한국 悲歌 강가의 푸른 석회의 집들이여! 침몰하는 아름다운 배처럼 그대들이 허공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나는 몬다 무릎까지 잠기는 침묵 속에 방금 그대들이 있었다 가시물고기의 솟구침에서 내가 다시 한 번 흙을 추측한다면  한낮의 땀냄새처럼, 팔월의 자갈돌과 나무들의 혼란으로 뒤덮인 접근은 약처럼 효험이 있었다 가상의 고향 : 나이팅게일과 바람 속의 귀뚜라미의 노란 날개로 주의깊게 만들어진 그리고 엄지손가락처럼 흰 하늘과 밤의 직물 속에 암의 맥관을 지닌 : 죽은 자들이 살찌는 한국의 비 속에 손풍금의 반복되는 울림, 오딧세우스 같은 그림자 한때 모두의 얼굴의 얼굴 위로 한 직선이 지나갔다 이제 그것은 우리의 꿈 없는 잠 속으로 석탄색으로 구부러져 들어간다 이 세상의 잠 속으로, 한국의 비 속으로, 사격의 암흑이 심장의 윤곽에 실체의 강렬한 냄새에, 더욱 깊이 처박힐 때, 눈동자, 약품을 잃어버릴 때의 숨김없는 공포의 눈길 진흙 속에, 풀밭 위에, 소녀들과 나귀들 사이에 누워 있는 이들, 죽은 병사들을 위하여 더 낮은 목소리로, 불타는 나뭇잎이 불 속에서 탄식하는 것처럼 아주 작게 나는 탄식한다 불 타고 있는 이 거대한 도화선, 이 緯度를 위하여, 야간보초들의 재가 된 이름없는 열매를 손에 들고 침묵 속으로 내민다 그 침묵으로부터 나는 달아난다 한때 그대들을 유혹했던 여자들은 편안히 주저앉고 그대들은 다시 한 번 눈썹을 찡긋 움직인다 가상의 고향! 그대들의 죔쇠는 더위에 또는 한국의 비에 알맞은 청동녹색의 열대를 고리로 채우고 그 비는 그대들을 돌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흙만이 그대들의 이름을 아직 간직할 것이다 혹은 우리들,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한 움큼의 일들, 밤의 논쟁을 지닌 채, 우리가 비겁하게 잠들려고 누울 때 그대들을 뒤좇던 독초의 맛을 지닌 그대들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본다 우리의 꿈 없는 잠에 의해 끝없이 작아지는, 우리의 꿈 없는 잠 속에 화석이 되는, 그대들 삶의 쓰디쓴 맛 평화를 위한 시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행복, 가느다란 성냥은 벌써 너의 두 눈 속에서 꺼져간다 포옹은 더욱 짧아지고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우리들의 호흡-이중의 밤의 소리-은 바닥에 흘린 술의 얼룩처럼 벌써 지워진다 너의 뺨 위에 오랫동안 새벽의 색바랜 그림자가 번민하는 운하 위에 걸린 적막한 달처럼 영원한 이별이 어려 있다 거듭 반복되는 이 어깨의 움츠림, 이 기다림 그리고 잠든 사람들 위로 일어나, 눈물을 씻는 바람에 귀 기울임, 애무의 바람 그리고 너, 결별의 바람, 결별이 침묵을 파묻기 전에 그 속에 옷처럼 주름 잡히는 목소리들, 종말없는 이별, 다시 한 번 신호등, 그리고 암흑, 흔들리는 촛불 아래 무기의 둔탁한 번득임 칼을 들고 하는 대화, 외마디 소리와 죽음의 냄새로 가득찬 막다른 길 위에서 백병전 장면이 서툴게 연출된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마련된다 불타는 여름 모기떼 속에, 이집트의 메뚜기떼, 좁은 선실에서 질식하거나, 제트기 폭음 아래 산화하거나 전쟁은 계속된다 나는 아직 한 순가, 너의 눈을, 피안에서 파괴되기 전에 망막 위에 가지고 있다 무상의 무게 앞에 그리고 준비하지 않은 죽음의 갑작스러운 뭐게 아래, 알 수 없는 하늘의 유령 같은 공포 아래, 죽음에서 소생시킴 앞에 이제는 아무 쓸모 없는 진정의 가벼운 그림들 천사의 그림자가 낯선 사람처럼 날아오르고 다시 가라앉았다 곧 허물어지는 환영 전쟁은 계속된다 -전쟁을 나는 느낀다 붉은 풀잎의 향기와 여자의 머리카락이 나부끼던 행복한 시절의 꿈, 그 꿈의 고요 속에서 숨쉴 때마다 움직이는 셔츠 아래 가슴의 마른 털처럼 그리고 나는 이 밤을 전쟁과 함께 보낸다 밤은 비수를 들고 일하고 내 핏속에 마녀를, 향락과 속죄를 쑤셔 넣는다 나는 떠도는 자들에게 손짓한다 벌써 영운으로 감싸인 눈이 패인, 느린 유령들에게 내게 덤벼 들라고 나는 그들에게 신호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망설인다 그들은 물러선다 그들은 내게 시간을 준다 나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은 작은 속삭임이 되리라 어둠을 벗어나 겨우 새너아가는 바스락거림과도 같은 한 마디, 상어의 아가리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희망, 평화, 방어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풀잎, 환한 얼굴들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기쁨, 삶에 두텁게 짜여지는 아름다움의 직물, 낱말들 문 뒤에서, 창 밖으로, 그리고 벽을 향하여 말하여지는 지어낸 말들의 소박함은 오랜 빛으로 석회로 된다 하늘의 수수께끼에서 잘라낸 돌 속의 혈관에서 잘려 나온 둘 또는 세 음절로 된 낱말들의 사실성 : 살갗 밑에 번개를 지닌 수염 속에 바람을 감춘 낯선 얼굴들을 속삭이는 한 음으로 해독한다 그러나 이름들은 다만 매미나 꿀벌의 윙윙거림으로만 귀 속에 남아 있다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모음들- 공기 중의 보이지 않는 보잘것없는 벌레들, 재가 되어 떨어져 모과의 향기로 남는다 연가 1.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녹색의 굵은 호두를 검은색으로 불들이는 밤에 껍질을 벗긴 듯 말간 풍경 속에 물고기와 나뭇잎의 향기나는 풍경 속에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푸른 우유 속의 두 개의 머루 같은 너의 눈이 성냥불빛 속에 비찬다 느릅나무 그림자 속의 둥근 달은 부르럽게 비추이지 않는다 달은 낡고, 닳았고, 바람에 부숴져 모래시계처럼 우울하게 흘러내린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침묵의 철자들을 나열해 본다 바람 없는 추위 속에 매운 상치냄새를, 너의 입을, 그리고 아이스크림 한 조각처럼 녹아드는 새벽 여명 속에 사실적으로 되어가는 밤을 철자로 읽어 본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를 볼 수 있다 2. 너는 가버리고.... 그리고 나는 방의 벽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벽 위에 너의 소년기의 얼굴을 그려 놓았기에, -엘제 라스카 쉴러 너는 갔다 너는 언제나 가버릴 것이다 날이 잿빛 비둘기들을 가슴에 안고 새벽 여명이 그 넓은 천을 우리 위에 펼칠 때 머리칼을 물들인 밤이 온다 밤은 복숭아씨의 냄새가 난다 달이 박하 향내나는 밭 그루터기에 서 있다 뱀장어가 자라고 있는 강 위에 이슬이 떨어진다 너는 갔다 엔찌안의 피리들의 푸른색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뒤에 남은 것은 방과 모직치마 위의 코르드자켓의 푸른색, 호기심 어린 모기 같았던, 지금은 없는 눈길, 불안과 청동의 목으로 벽지를 바른 벽들 너는 갔다 그리고 나는 이 방의 벽들을 사랑한다 너의 어린아이 적의 얼굴로 칠해 놓은.... 3 왼쪽으로 누워도 오른쪽으로 누워도 마찬가지다 멜론을 토막토막 자르거나 컵 속의 물을 빛나게 하거나, 그 뒤에 흔들리는 공기처럼 하찮은 촛불의 아아함 네가 없는 밤에 오후에 창문 앞에 공작이, 그늘진 꽃다발처럼 내려 앉았다 여섯 시의 햇빛 속에 빛나는 머루 한 접시를 놓고 너는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이제 나는 어둠을 견딘다 단단한 검은 먹으로 그려진 입안의 눈물의 맛과 꽃속의 매서운 바람을 지닌 네가 만들지 않은, 이 밤을 어둠으로 갈라진 기와 뒤에 매미는 조용해지고 나는 식탁 앞에서 고독의 향내를 맛보아야만 한다 침묵과 침묵 사이 네가 없는 밤에 왼쪽으로 눕든 오른쪽으로 눕든 마찬가지다 적막의 포옹 속에 팔목시계가 가볍게 시간을 재고 담배의 물부리가 재로 변하고.... 방금 전까지 내가 살고 있던 피안을 손가락으로 스쳐 본다 붉은 목도리도 갈색 구도도 없는 네가 없는 밤에 별빛 아래서 나는 너의 숨소리를 듣는다 4 너를 위해 나는 낮과 밤을 벽지 위에 모았다 옛날 그림들에 있는 것 같은 거리가 있는 풍경, 그 풍경 안에는 두 개의 오리나무 사이로 하늘이 졸졸 흐르고 붉은 열매의 향기가 난다 도시의 거리에서 나는 고요를 들었다 너를 위해 생각해낸 그 고요 속에 수풀 속에서 풀잎이 사각사각 소리내고 옥수수알이 터지고 시간의 돌이 오래된 샘물 속에 가라앉는다 나는 너를 위해 시간을 추방했다 쐐기풀 더미를 팔에 안은 마녀, 포플라 나무 뒤의 음흉한 얼굴, 시간은 전설의 오페라처럼 담 위의 비행기 그림자처럼 사라져갔다 너를 위해 나는 현재를 만들어냈다 순간의 심연 위로 어른거리는 정확한 알콜처럼 공기 속에미역 감는 살갗의 현재 도토리색의 목덜미의 현재, 육체의 단순한 선들의 현재 그리고 낮과 밤이 벽지 위에서 숨쉰다.... J. S를 위한 시 자정이 지난 첫시간에 12월의 기차역, 추위 속에 드러나는 너의 모습 엷은 색 외투, 머리 위에 덮인 수건 작별로 빛나는 얼굴 작별의 순간 나는 너를 다시 한번 만들어낸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 부드러움과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어둡고 사랑으로 고요한 목소리 나는 너를 다시 한번 만들어 본다 이제, 외투 깃을 올리고 장거리 열차의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드는, 다른 남자인 나와 함께 가기 위하여 너는 뒤에 남는다 몰아치는 잿빛 바람에 밀리며 포옹과 입맞춤과 너의 살갗의 냄새와 함께 뒤에 남는다 눈오는 밤에 검은색과 흰색의 체이스판이 너의 얼굴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네게 있는 그 어느 것도 내게 마련된 것이 아님을 마지막 밤 밤은 검고 희리라... -제드라 드 네르발 기다리지 마라! 밤은 검고 희리니, 눈썹을 그리려고 불에 그을린 코르크보다 더 검고, 열대의 천사들이 그 주위를 날던 일 드 프랑스에서 죽은 비르지니의 죽음보다 더 희리라 가로등 아래 비틀거리는 발자국으로 가득찬, 현관에 검은 입술로 가득찬, 부드럽게 공기에 의해 반복되는 입술 위에서 녹는 눈의 입술로 가득찬, 맞지 않는, 헛된 말로 가득찬, 검고 흰 밤 기다리지 마라 밤은 어릴 때 깨물던 분필 같고, 밤은 양초심지처럼 첫 번재 소각임에 흔들린다 검고 흰, 그리고 그 뒤의 너의 얼굴, 유리창에 기대어 눌린, 눈물의 작은 비, 자기를 떠나가는 남자아게 가슴을 보여주는 여자의 모습처럼 기다리지 마라! 바람 속에 늘어뜨린 머리칼과, 절망의 살균된 흰색과, 절대고요의 역청색으로 밤은 완전하리니 검고 흰... 그리고 별들이 총총히 비추어 주는 덤불처럼, 생각도 없는, 기억도 없는, 가벼운 한묶음인 나는 그 밤 속에 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마지막 밤! 기하학의 장소 기하학의 장소 : 한 그루씩 서 있는 포플라, 플라타너스, 그리고 그 뒤의 공기, 경쾌한 카누를 타고 쏴아 소리나는 고요 속을 지나갈 수도 있을 거품으로 된 하늘 속에 고독한 自足, 밝고 순수한 선들 모든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고 공식 같다 강물의 만곡, 나뭇잎 속에 도망가는 새들의 윤곽, 몽롱한 더위의 흔적, 입안 가득한 바람과 항구의 돛단배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는 육체의 그림자를 꿰뚫는 푸른 번개에 대한 느낌 병사의 시 장군들은 승리하고 병사들은 전사한다 -일본의 격언 1 그대들은 물론 다만 연기와 물뿐이다, 사람들이 그대들은 너무 오랫동안 그 낡은 죽ㅇ므을 취급핟록 한다면 그리고 어제, 오늘, 내일, 죽음은 그대들을 너무 좋아했다 어깨 위의 경금속, 눈은 언제나 벌써 바로 다음 사람에게 조준되어 있고 합설물질로 된 팔과 목 의치 그리고 그대들과 꼭같은 그대들이 막사 밖으로 검은 천을 흔들 때 연기와 물처럼 기묘하게 달아나는 존재 2 이럴 수도 있다 : 권총이나 무기들을 분해할 수 있다 전쟁와 곂와 또는 가슴 위의 증명사진처럼 그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천천히 그대들 앞에서 먼지가 되어 떨어지는 중립적 공기의 동작을 연습했다 방어라는 오래 전부터의 상상! 칼과 장미는 그대들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가 그대들보다 오래 살아 남을 것이다 정치적 1 안전 : 종이 위에 엄지손가락 지문, 그것은 맞는 말이고 모든 경찰서에서도 도움이 되리라! 벽을 쌓아 이랑을 고르면 밭은 불모지가 된다 신들의 무릎은 중요하지 않다 우연의 물리적 구조 정당의 강령은 그에 비해 이런 결백과 언제나 무관하다 누가 온통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우아한 속박, 씨르체의 머리카락에 대하여 이야기하는가? 꿈을 읽기보다 신분증명서 읽기가 더 쉬운 일 정치적 : 한때 소홀하게 다른 땅과 분리된 땅 밖으로 손 하나가 자라나온다 정치적 2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어둠의 거짓 감각마비는 잠과 같이 책임이 없다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밤은 호박처럼 모기를 숨기고 있다 너의 기억! 너의 양심!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국가는 철면피한 손님 모든 방어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그는 찾아온다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기록없는 시대는 여전히 시작되지도 않았다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벌써 발자국 소리가 너의 문에 다가온다 너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담요를 접고 램프를 꺼라 너의 시간은 아무튼 올테니 幻影 그녀의 얼굴은 강물의 은화처럼 가볍다 그것은 매우 멀리 있다 입술은 굳게 다물고 거리 위에 누워 있는 허공에 그녀의 얼굴을 보려면 그는 의자 위에 올라가야 한다 순간의 빛나는 천에 그는 사다리를 기대어 놓는다 그녀의 얼굴을 위하여 그는 검은 튤립을 한 송이 꺾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어둡게 하는 검은 새에게로 올라갈 때, 꽃잎은 그의 손에서 떨어진다 떨어지면서 그는 얼굴 없는, 소리 없는 유령, 그가 죽은 후의 시간을 본다 인식 그는 한 쪽으로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십오 분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향한 모든 눈초리를 즐긴다 그것은 얼마동안 잘 되어간다 그러나 그는 그 눈들이 자신을 꿰뚫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챘다 모르타르 밖으로 나오는 시선들, 줄기가 긴 꽃잎 밖으로 나오는 시선들, 그리고 말없는 시간의 반쯤 감은 속눈썹 뒤의 시선들, 그는 그 시선들로부터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음을 안다 그가 갑자기 허공의 검은 자리들, 부드러운 변화를 인식할 때까지 그때 그는 눈 멀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아침은 신을 믿는다 푸른 물고기가 아침의 눈앞에서 흔들리고, 팔과 관절들의 그림자는 힘차다 노래 부르기 시작하는 비둘기를 고요가 덮친다 여자들은 밤 동안 혼자 누워 있던 침대를 정돈한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던 성냥개비는 버려진다 공기의 목이 빛난다 한순간 동안 모두 손을 그 위에 가만히 내려놓고 있고 싶어한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신체에 나이가 들었음을 이야기한다 창문에서 한순간 누군가 창문 밖으로 빛을 쏟아낸다 공기의 장미꽃들이 피어나고 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눈을 위로 올린다 비둘기들이 그 빛의 모이를 주워먹는다 이 빛으로 소녀들은 아름다워지고 남자들은 다정해진다 그러나 그것을 그들에게 말하기도 전에 창문은 누군가에 의해 도로 닫혔다 목소리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갔다 저녁이 물처럼 솟아올라 그의 두 눈에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갔다 밤은 방울새의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는 밤을 그의 손바닥 위에 가늠하며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갔다 그녀가 죽은 깃털 아래 묻혀 있다는 것을 마침내 그가 알았을 때 그의 손가락들은 다시 한 번 그녀와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지저귀는 새소리의 메아리를 들려 주었다 검은 숲 위로 얼굴처럼 사라지는 그 오랜 추억을 위하여 천 년 너의 얼굴 옆에서 나의 얼굴은 천 살이 된다 너의 두 눈을 위하여 내가 샀던 달리아는 천 년 전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자신의 입술을 다물고 다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려면 너의 목덜미에 관해서라면 정감은 그렇게도 오래된 것이다 너의 목이 미역감는 푸른 물기 어린 대기 밤에 우리의 손은 나란히 누워 천 년 동안 잠잔다 누군가, 한 때 너의 이름이었던, 너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그기고 그것이 나와 함께 늙어가려 하기 전에..... 초조 자신의 참을성을 충분히 오랫동안 시험해 보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상상력의 도움으로 자기의 인생에 몇 가지 변화를 계획하고자 했다 그는 길가에 숨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모습을 매우 도움이 되는 허공에다 그려보났다 이런 방법으로 해서 그는 한 소녀의 목덜미를, 그리고 대략 나이가 비슷한 한 여자의 생각지도 못했던 웃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소유물들로 그는 아직 좀더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변화에 대한 충동이 일어나 다른 생각들을 품게 되었다 요새 그는 애인을 하나 만들어냈는데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시간 사이로 흘러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슬퍼한다 그의 초조함이 다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엿보고 싶어하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프리츠 우징거에게 너무 오랜 동안, 나의 오른손은 의무를 다해 왔다 며칠 전 나는 내 오른손을 머리를 뒤로 묶은 모르는 여자의 채소와 물고기를 담는 시장바구니에 넣어 주었다 나의 왼손은 내가 잠잘 때 내 얼굴 위에서 너무 오랜 동안 쉬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풍선에 묶여 이제는 풍선 속의 바람이 나의 왼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또 많은 다른 것들도 저녁에 옷을 벗듯이 나는 벗어버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주어버리고 났을 때 남는 그것을 위한 공기의 아늑함 전위선 끝에서 그를 찾으러 나는 이성을 보냈다 그가 전위선 끝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나이팅게일들을 그가 있는 곳으로 날려보냈다 그리고 그를 예감할 수 있는 쪽의 창문을 열어 놓았다 뒤쫓는 불빛과 함께 찾아나선 둥근 물 속에 나는 그의 이름을 적었다 나는 그의 길 앞에 여자의 조각들을 세워 놓고 그를 유혹한다 이따금 밤에 나는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목소리를 반복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전위선 끝에 서 있는다 그의 고집 센 뮤즈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그의 눈 위에 흘러내리게 했다 나는 그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그녀가 그에게 내리는 즉결재판만을 생각하므로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벽의 신화 여덟 살짜리 아이에 의해 또는 검은 시간의 손에 의해 그려진 벽의 신화 우리는 지나쳐 가며 우리들의 생각에게 인사한다 우리의 여자들이 구운 벽돌 속에 나타난다 벽 위의 우리들의 꿈은 우리보다 더 오래되었다 석회의 죽어가는 흰 빛은 표면에 우리의 꿈을 띄고 있다 우리는 지나간다 그리고 대개는 눈을 돌린다 등 뒤에서 벽에는 벌써 달과 개들에 의해 문신이 그려지고 있는데 시간은 변한다 읻제는 정든 기념비에 푸른색을 칠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금발머리를 쓰다듬던 손길도 밀짚모자도 잊혀졌다 지쳐 우는 새들을 어깨 위에 앉히고 공원을 거닐던 아이들은 이제 다 자라났다 시간은 변했다 시간은 이제 어린 손으로 어루만질 수 없다 가로등은 새 전구로 바뀌고 테니스 공은 허공에서 되돌아오지 않았다 노란 수영복은 나비처럼 죽어가고 그 모든 편지봉투들은 부드러운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다만 이제 거리는 주머니 속에 차표를 지닌 이방인들로 가득 차 있다 산책 플라타너스 사이에 가구들을 밀어놓았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의자 하나가 벌써 한 풍경을 이룬다 길가에는 석고의 흉상들이 오전의 퇴락을 지켜보고 있다 그래도 산책은 한동안 계속된다 모자들과, 커튼 뒤에서 엿보는 눈동자들 곧 피아니스트는 침묵할 것이다 그의 음악은 아스팔트 위에 푸른 동작으로 나타나는 한낮의 더위를 이기지 못한다 빛의 천사의 풍경 빛의 천사의 풍경 속에 나무마다 달이 자란다 사람들은 서로의 입에 손을 대고 칼에 찔려 죽은 어린 양의 눈을 감긴다 피흘림 없는 사랑은 푸른 날씨 속에 육체를 일광욕 시킨다 흑인소녀들은 그들의 검은색을 구름에게 선물한다 물고기들은 그들의 영혼을 강물에게 준다 강물은  빛나는 육체를 찾아 땅으로 올라간다 비오기 전 아스팔트 위에 분필로 그어놓은 선들이 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낮은 아직도 빛나는 어깨를 드러내고 있다 시간은 초록빛으로 이교도처럼 흘러간다 티불루스의 풀피치아가 몇 분 동안 단풍나무 길에 나타나고 여름날의 시간이 매미처럼 뜨거운 돌 위에 앉아 있다 팔 하나가 허공에 나타난다 그러자 공기는 구름으로 색이 변한다 첫 번째 물방울의 소리가 사방에서 나뭇잎의 기억들을 질식시킨다 오늘은 오늘 나는 너를 조용히 잠자러 가게 할 수 있다 나는 몇몇 남자들과 잠시 길거리에서 달을 바라보리라 우리의 눈 앞에서 달은 천천히 변하리라, 회오리바람이 다가오고 있으니 멀리서 첫 번째 죽은 자들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개들의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면! 개들의 짖은 소리는 벌써 목 쉰 금속성을 띄고, 그것은 우리의 목소리에도 있을 것이다 내일,  불에 탄 얼굴들이 창문 밖에 내걸리고 물의 푸른 음절이 붉은 알파벳으로 부서져 떨어질 때 바다에서 선풍기는 절대로 끄면 안 되었다 무더운 시간 동안 배의 고양이는 빈 탄산수 물병 사이에서 잠잔다 모든 해안은 연기 속에 사라져 버렸다 하늘의 푸른 막이 늘어난다 그것은 잠옷을 입은 사람들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찢어질 것이다 약쑥을 바른 불에 탄 상처는 오늘도 낫지 않았다 우리보다 먼저 배를 떠난 사람들이 세워놓은 선장, 어젯밤에도 그의 얼굴이 나침반에 반사되었다 아무도 통지해 주지 않는 다가오는 태풍에 나침반의 바늘은 이미 무뎌졌다 황혼 황혼은 여성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일찍이 그것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친다 황혼이 어깨를 드러내고 나타날 때 다른 이들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물고기들이 황혼을 향해 강 밖으로 뛰어오른고 함정에 빠진 새들은 황혼이 다가올 때 다시 한 번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첫 번째 불빛이 황혼의 가슴 사이로 비추인다 황혼의 입은 오후의 바람을 잠재우지만 상점의 여점원들은 황혼의 눈 앞에서 길을 잃는다 검은 나뭇잎으로 뒤덮인 곳에서 둘은 밤을 기다린다 정오의 싸움 하늘에서 두 가시가 싸우고 있다 그들의 휘어진 칼이 푸르름 속에 엇갈린다 그 아래 풍경은 포플라 나무와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 황금빛 수풀 속에서 내다보는 눈동자들 하나가 쓰러지기를 모두들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싸움은 계속된다 한 시의 빛이 두 시의 빛에 의해 꽃피는 숲속으로 밀려날 때까지 뜻밖에도 병사들과 말들은 햇빛 앞에 엎드린 그늘로 사라진다 정오는 지나갔다 꽃의 승리 그때 아이들에게 그들의 장난감이 싫증났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들은 야생 수선화 다발을 잡아뽑았다 고양이들이 낯선 식물을 쫓아간다 순간들은 서로 구별된다 붉은 제라늄과 흰 제라늄이 구별되듯이 삶은 자기 확신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개의 앞발의 상냥함과 같았다 브라우스 밑으로 기어가는 나뭇잎 속에 꽃은 이겼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꽃다발을 또는 고목의 그림자를 선물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긴 속눈썹 뒤로 사라져 갔다 꽃을 바라보는 것은 가슴과 허리를 소용없게 만들었다 죽은 계절 너무도 고요하기 때문에 조상의 사진이 벽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쪼개진 배 몇 개와 보룔레 술병이 정물 속에 합류했다 잉어와 죽어가는 파리의 시간이었다 오후는 무거운 눈까풀 아래에서 깜박였다 그러나 어제 여기에서 선원들의 명령을 주고받던 아이들의 돛단배가 떠 있는 연못가에서 심장의 소리를 한동안 들을 수 있었다 엊그제는 어쨌든 모든 것이 달랐었다 죽은 계절은 아직 엷은 풀잎의 냄새 속에 살아 있었다 이제는 바닥에 깨어진 그림들이 누군가 벽 밖으로 걸어나와 그 그림들을 웃으며 주워 올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잠을 깨어나며 장미, 라는 말을 처음 하는가? 이전에는 나는 맞지 않는 이름을 불렀었다 내 손가락을 에워싸고 있는 시간은 무게가 없다 만일 내가 그것을 느낀다면 이미 늦은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날은 눈을 치켜뜨고 있다 밤은 눈까풀 뒤로 물러난다 잠 내가 잠자는 동안 한 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장난감이 녹슬고 호흡과 호흡 사이에서 사랑이 색깔을 바꾼다 문설주의 칼은 지나가는 사람에 의해 내 가슴 속에 꽂히기를 헛되이 기다린다 살인자들도 지금 모자 아래에서 꿈꾸고 있다 고요한 시간 잠자는 시간 눈에 띄지 않으려는 자들의 맥박소리가 들린다 말하여지지 않은 말들의 지혜가 늘어난다 이제 꽃들이 조심스럽게 피어난다 놀라 바라보는 눈들이 없으므로 숨어 기다리는 금붕어 자신이 관찰되고 있다고 생각한 금붕어는 다른 어항을 찾았다 거기에서 금붕어는 어제 죽은 정원사의 푸른 그늘을 좀더 잘 엿볼 수 있었다 죽은 자는 서서히, 생전에 그가 바라보던 나무들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붕어는 정원사의 손의 무덤 밖으로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들을 부드러운 입술로 잡아당길 수 있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안의 바람 웃음소리와 문 닫히는 소리 속에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온다 몸을 구부리지도 않고 그는 램프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적의에 찬 형제들의 눈 속을 들여다본다 성냥불빛 속에서 그는 저녁인사도 하지 않는다 그는 조상들의 머리를 부서 버린다 그들의 흉상은 제비꽃다발과 함께 쓰레기 속에 던져진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그는 누군가의 어깨를 타고 벽을 따라 돌아다닌다 어둠 속에서 그를 붙드는 사람은 다음 날 아침 깨어나면 낯선 바람의 장미가 머리에 꽂혀 있을 것이다 역사 남자들이 광장으로 깃발을 들고 갔다 그때 수풀 속에서 반수신들이 뛰어나와 깃발을 밟아버렸다 그러면 역사는 시작될 수 있었다 우울한 국가들이 거리 모퉁이에 부서져 떨어졌다 연설가들은 불독을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젊은 여자들은 용감한 자들을 위해 단장을 했다 그 신화 속의 바눗신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는데도 끊임없이 허공에서 목소리들이 다투었다 결국 남는 것은 목 위에 놓이는 손 배척지 이제 방금도 젖은 판자지붕으로부터 물이 흘러내렸다 말탄 목동의 무리들이 빗속에 모자를 꼭 잡고 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들 뒤에 구름먼지조차 일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아직도 병든 짐승의 냄새가 난다 총소리의 메아리가 마굿간 벽에 환상처럼 잠든다 그러나 죽음 속에서는 어느 목소리도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 수탉은  오래 전에 도살되었다 그의 머리 없는 그림자가 아직도 가끔 비틀거리며 맴을 돈다 호숫가에서 1 차가운 얼굴의 돌들을 낚아올리러 호수로 갈까 그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향해 그 돌들을 던질까 호숫가는 가슴 속의 낚시바늘을 기억하기에 또는 죽은 송어들을 위해 꽃을 뿌리기에 좋지 않은가? 언덕에서 깜박이는 익사한 사람들의 눈을 찾으러 가자 그리고 푸른 물을 조금 이제 곧 물가에서 잠이 들 저녁에게 들고 가자 2 여기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니? 난파된 배의 그림자 아래 누우면 혀는 다정한 광물질의 맛으로 젖어 있다 미풍이 살그머니 일어나 속삭일 입도 없는 고요의 흉상을 두 손으로 들고 온다 너희들을 닮은 모습이 머리도 없는 밀물에 떠내려갈 때까지 그렇게 오래도록 너희들은 쉬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 쉬에 그려 놓았던 닻을 씻어 버렸다 파도의 가슴이 목 위에까지 올라오는 적은 없으므로 우리는 웃었다 우리는 이제는 메기들의 선장이 아니다 단물이 한참 동안 발바닥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밤이 검은 새의 몸을 한 세이레네스처럼 왔다 로빈슨 1 몇 번이고 또 다시 나는 한 척의 배를 향하여 손을 뻗는다 맨손으로 배의 돛을 잡으려고 해 본다 처음에 나는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배들을 모두 잡았었다 그렇게 나는 송어도 잡는다 그러나 계절풍은 나의 손가락을 눈여겨 보았다가 그것들을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달아나게 했다 혹은 노와 나침반을  부러뜨렸다 배들이란 부드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이름으로 불러 주었다 그러면 그것들은 언제나 마치 나의 이름처럼 울렸다 이제 나는 다만 복종할 줄 모르는 몇 마디 낱말들과 어울려 살고 있을 뿐이다 2 나는 셈하기를 단념했다 차라리 손가락을 짠 바닷물 속에 하나씩 담그어 볼 뿐 벌레들이나 담배 잎사귀들은 지난 날 내가 허비했던 시간을 알지 못한다 나의 마지막 이웃이던 그 피리 불던 사람은 (언젠가 민요를 익살맞게 불러보기도 했지만) 바다에서 죽었다 내가 그 아래로 발을 뻗고 앉아 있는 책상 위로 가끔 한 줌의 햇빛이 비추인다 나는 이제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도 가질 필요가 없다 3 어느 한 곳에서 의자 위에 아주 오랫동안 앉아 몸 속에 비가 오는지 또는 간 속에 아직 전갈이 움직이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는 이 습관 번개불을 세어보고 남아 있는 성냥개비도 모두 세어 놓았다 지칠 때까지 그리고 마지막 돛대 위의 깃발을 바다 속에 가라앉힐 때까지 일요일 피도 그을음도 없는 시간 일요일은 언제나 마른 꽃의 무덤으로부터 온다 일요일은 손 위에 자신의 과거를 들고 산책자들에게 브라보 라고 외친다 집안에는 목이 잘린 꽃들이 남아 있었다 사악한 눈길을 가진 시간! 파리와 함께 밀크 커피 속으로 빠지는 눈길 노란색의 커다란 문이 갑자기 열린다 천천히 배가 내리기 시작한다 죽어 잠들어 누워 있는 모두 위에 지나가는 여인에게 여자들의 거리로 초원은 너에게 라벤다를 들고 온다 강물은 거울을 바람에 기대어 세워 놓는다 그러나 너는 눈까풀을 꼭 감고 있다 그리고 실망한 지도는 네가 잊어버린 하늘 아래에 물고기와 포플라 나무를 펼친다 한 비행사가 네게 손을 흔든다 그의 무덤 밖으로 낡은 병의 밑바닥으로부터 포르투갈에서 수도사의 광야 수도사들의 죽음은 나무껍질을 뚫고 들어갔다 바람은 바다의 복수 잘 꾸며진 공기가 되어 바람은 잠자는 미모사나무 위에 앉는다 우울은 기나긴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 눈 위에 노래의 눈물이 솟는다 한 사랑의 시작 우선 아트로핀에 의해 커진 것 같은 눈동자 누가 푸른 샘물에 빠지는가? 누가 하늘을 덮는가? 누가 다른 손을 씻지 않는 손에 대해 말하는가? 그 다음 이와 혀의 근접 진실을 말하기는 쉽다 그 사이에 뻐꾹 하고 우는 새는 없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가오는 것들 누가 꿈을 펼치는가? 누가 작은 글씨로 밤은 검은 어깨를 가졌다 라고 쓰는가? 이렇게 깊이 잠들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차츰 사람들은 다시 배운다 샘물이 마른다는 것을 추위 얼어붙은 물고기 같은 추위 얼어붙은 바람 속에 얼어붙은 눈물 우군가의 어깨 위에 유리 한 조각 한 조각의 샘물 또는 실개천의 굽이 허공을 나르는 숯 소리없는 까마귀 유리 세공인들의 외침만이 거리에 남는다 하얀 하얀. 찢어진 식탁보. 누군가 그것을 흔든다 동풍의 하얀 손 누군가 말한다, 눈이 온다고 차츰 찢어진 공기가 추위에 눈을 뜨게 한다 눈은 묘사하기에 아름답다 시간은 하얀 편지 만큼 길어지고 녹을 때까지 서리와 사과 냄새가 난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를 위한 비문 허공의 모자는 자기의 이름을 찾는 새, 또는 피아노 없이 지상에 남겨진 모든 이들에 대한 가벼운 목례 모자- 손가락이 슬퍼 움직이기를 잊었을 때 소나타를 거두어 들이던 하늘에 대한 기별 모자- 그것은 밝은 깃털 밖으로 잠시 지저귄다 그리고 너의 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무엇인가 끝나고 무릎 위에 동화책을 하나 올려 놓아 물 속을 가르고 달려가는 것 말고 무엇이 있지? 무덤에서 무덤으로 가는 짧은 여로 지난날은 마치 풍경 같아 그 속에 곧 사라져가는 여인들 이제는 아무도 보려 하지 않는 그림책을 뒤적일 때 종말은 다가온다 유년시절 병 속의 촛불 유년시절 어둠의 심장이 목탄처럼 타고 있다 강목에서는 밤이 새도록 배들이 서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꿈 하나가 천장에서 뱃머리장식처럼 나타났다 나뭇잎, 녹색의 엷은 베일 나는 배저강 위를 날아 헤매이다 뛰어오르는 회색 넙치에게 호소하던 갈매기였다 겨울에 1 신뢰할 수 있는 어둠 이제는 한 손이 다른 손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추위의 눈 앞에서 불을 피운다 어제에 대한 기억은 내일의 이야기 단어들이 입안에서 얼어붙는다 언어는 입술 앞에서 연기처럼 죽는다 빛의 위기는 계속되고 서리는 노래하는 기계 그 음율은 멀리 들판까지 들린다 유리창 앞의 꽃에게 말해라 밖은 겨울이다 얼어붙은 강이 있는 풍경의 느낌은 관용이라고 할까 참된 삶은 흰색이고자 한다 다채로운 색깔의 어린이 놀이는 끝났다 걸어가는 동안 모든 것을 기억해 둬라 가는 길과 오는 길 사이에 눈이 내릴 것이니 거리에서 1 물구나무서기 내기를 하는 다리들이 허공에 기둥처럼 서 있다 손수건과 손으로 휘젓는 빛 속에 힘 있는 말들의 장소 시간계획 없는 사람들은 바람 속에 손가락을 내밀고 비 속에 그들의 영상을 다시 보게 되기를 기다린다 농사는 낡은 鋪道 사이의 풀처럼 죽어갔다 2 집안에서 펼쳐진 그림책 속안까지 회색, 사람들은 배를 타고 당황하여 말한다 아직도 비가 오네, 또는 나는 너무 큰 모자를 썼지 습관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사람들 틈에서 높은 바다에서 질식하여 죽을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3 폭포의 소음 아무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발끝으로 먼지구름 속을 걸어간다 그렇게 해서 발걸음을 셀 필요도 없이 나는 멀리 간다 주먹을 쥐고 위협하는 이들은 새로 붙인 포스터의 냄새처럼 뒤에 남는다 종이 파는 사람은 벽의 찌푸린 얼굴이 바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4 철자법에 맞지 않는 대로 한 지역을 말 타고, 자전거 타고 지나기 아침이 너무도 아름답기에 한 배우는 혼자 대사를 읊는다 창 밖으로 목소리와 동전들이 떨어진다 공기여, 아스팔트 위의 작은 누이여, 소음이 없는 저 높은 곳에 대한 그 많은 기억을 가지고 이리로 오라 나를 위한 풍경 1 그 속에 광물질과 형용사를 모을 것 나무 그림자들은 여러 가지로 묘사할 수 있다 한낮은 그 속에서 기하학적인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를 먹는다 나의 풍경은 바람처럼 배고프게 한다 팔이 긴 사람은 하늘을 만질 수 있으리라 지친 새들은 허공에서 잠을 잔다 습관적으로 색색가지 과일을 손에 들고 있다 기나긴 황혼의 전설 밤은 불탄다 : 쌓아 놓은 목탄 2 연기구름의 믿을 수 있는 아름다움 확신은 지평선에 메아리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버들가지의 사분의 일 박자의 멜로디 : 일어나는 소음들은 나방이의 날갯짓처럼 사라진다 어제 유클리드가 정돈해 놓은 검은 올리브의 들판 나는 그 들판이 내 눈 앞에서 마른 빛 속에 어른거리게 한다 3 소금기어린 바닷가에 비치는 작은 배 젖은 장미으 냄새가 난다 : 죽음의 통고 푸른 들판을 가로질러 가기 : 들판의 침묵은 옮겨 놓을 수 없다 내 눈까풀 위의 풀잎 가루 나뭇잎이 떨어지는 낮의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조심스럽게 그 위로 몸을 굽힌다 스스로 죽어가는 장미꽃들은 지나간 날의 詩들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시간 시간, 그것은 주머니를 피로 적시는 것 열린 몸뚱이로부터 목숨이 흘러나온다 날들, 그리고 그 날들이 벌이는 사라져가는 사람들과의 고요한 거래 한 달은 그 다은 달에게 다가오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모래 위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준다 아무리 좋은 날씨도 암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정돈된 종이들을 해마다 불태운다 늙어감 1 손톱으로 햇수를  긁어낸다 선잠, 짧은 문장들로 된 꿈 환상을 덮어주던 포도주 상점에 대한 기억과 함께 검은 샹베르탱 (그의 영상이 병 속에 가라앉는다) 한 방안에서 죽어가는 알파벳과 함께 살아가기 내게서 언어를 빼앗아가는 낯선 입 그 낯선 입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참을성 있게 듣는다 2 채색된 감정처럼 변해가는 육체 지친 목소리가 허공에 실려 지나가 버린다 흩어지는 명확성 이전에 있었던 것에 대한 혼동된 견해 분명히 살았던 죽음에 대한 예는 많이 있다 언어의 덮이 놓여져 있다 나는 신중하게 그 근처에서 움직인다 3 먼지 쌓인 여행 사진들 어제 우리는 숨죽이고 그곳들을 편답했다 땀흘린 사랑의 엷은 흔적 사람들은 나의 집 안으로 격언들을 가지고 온다 그것들은 조용히 나의 보호 아래 살게 된다 쏟아지는 빛 속에 한 풍경의 전망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내 이마 앞에 불꺼진 촛불의 밤 4 잊혀진 불길 오랫동안 나는 몇 개의 단어를 쫓는다 단어들의 눈[雪]을 나는 입안에 모은다 단어들 속의 겨울이 커진다 하얀, 이를 수 없는 숫자를 가진 한 삶의 수학적 면 나중의 것과의 등식 고독한 이름자 혀 밑에 차갑게 남아 있다 5 눈 뒤의 램프는 다 타올라 꺼져 버리고 이것, 저것을 위해 경험은 충분하다 땅밑을 흐르는 물의 졸졸거림 귀 안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낡은 회중시계에서 읽을 수 있는 지상의 시간 헤매이는 영혼은 손바닥 위에 멈춘다 눈으로 덮인 여전히 더 깊이 우리의 하얀 발자국은 잠든다 천천히 휘장이 녀려쳐진다 맥박은 손목에서 소리없이 뛴다 추위는 입앞에 서 있다 돌아보지 마라 아무도 우리 눈眼 위에 눈雪을 찾아내서는 안된다 확신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지금 있다는 것을 확신해보려고 한다 똑같은 순간에 내가 있다, 수염 없고, 입술 뒤에 창백한 잇몸과 바라보는 동안 사라지는 살갗과 머리카락이 아닌 다른 것을 너무 많이 볼까 두려워 반쯤 뜬 눈, 나는 여기 있다 나의 오른손은 호주머니 속에 넣지 못한다 나는 나의 오른손을 종이 위로 가져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쓰기 위하여 충분히 모든 것이 충분히 묘사되었다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남은 것은 너무 많이 써서 닳아버린 풍경, 공감, 감동,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값비싼 조언 모든 것이 충분히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종이로 잘라 벽에 붙여놓는 건전한 그림은 생기지 않는다 결점들은 특별한 장점으로 여겨진다 환상의 금이 길거리에 놓여 있다 사랑은 움켜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고 배경 없는 주위 모든 것을 제 때에  소유한 사람들에 의해 경계선이 표시된 지대를 사람들은 신중하게 올라간다 언제나 용감한 언제나 용감한 그 사나이는 확신에 찬 태도로 유명했는데 차츰 그는 그와 반대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어두워지는 것이라든가, 무도회장에서 발이 부러지는 것 따위의 불행한 일들을 허용했다 숲속에서 그는 진지한 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정원에서 그는 꽃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는 물질적인 것이 쌓이는 것을 경멸하고 격언대로 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굈다 마치 하고 물으려는 듯이 다감한 확신은 그에게서 사라졌다 그림자 1 가장 푸른 곳으로 소풍나갔던 지난 어느 날 아침의 행복감은 그렇게도 아름답고 헛되다 바깥 세상의 폐허는 천천히 무너지며 한쪽 구석에서 휘적이던 장난감들을 땅 속에 파묻는다 기나긴 그림자가 나의 두 손 위에 떨어진다 2 일찍이 사람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었다 영원의 얼굴은 선명하게 드러났고 지체없는 일, 소시민의 집에 열려진 창문으로 위안과 환상처럼 바람이 방을 스쳐 지나갔다 다가온 그것을 위하여 사람들은 급히 표현을 찾았다 그림자의 영역은 제한되어 있었다 3 이상한 사람처럼 낮의 햇빛에서 유리된 곳에 서 있기 그리고 정해진 기간을 괴로워하지 않고 그 어느 것에도 의무를지지 않기 육체란... 이제 진지한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자신의 이야기로 바라볼 것 공포도 회귀도 없이 진실을 지닌 평화 속에 가고 오는 것은 집안에서만 마침내 입을 열고 눕게 될 시간의 흐름 1 흑판 위의 분필로 끄적거려 놓은 이름들 시간의 흐름의 통고 눈은 늙고 고요한 산화물, 가을을 바라본다 통풍 앓는 손가락으로 안개 속을 움켜쥔다 남겨진 물건들이 빗속에 썩는다 종이들, 옷들, 음식물의 표면은 곰팡이 슬고 참을성 있게 허락한다 느려진 호흡으로 시간이 빛 속에서 지니고 있던 특성을 이제는 알아볼 수 없게 된 그 어둠 속에서 2 잠자면서 이상한 언어를 말한다 죽음이 귀기울인다 유리창에 부딪치는 벌레들 소리 한동한 허튼 소리로 살며 갖가지 옷을 입은 자신을 관찰한다 매일매일의 일어나고 잠드는 재주 잡다한 소유물 더미가 이리저리 널려 있다 사람들은 지나가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문을 열고, 여자들로 가득 찬 한 방을 지나간다 사람들은 언제나 똑같은 질문에 여러 가지 목소리로 대답한다 3 가구 사이를 산책하기 점점 나를 좁게 에워싸는 공간 속에서 나는 움직인다 더위 속에 視界는 사행선이 된다 과거처럼 떠오르는 호나상 지나가는 자동차가 내 옆에 먼지를 일으키는 동안 나는 내게 남겨진 것을 손으로 가리킨다 천천히 문장 속에 담긴 감정들이 사라져 간다 방의 벽이 껍질처럼 벗겨진다 나는 사물들이 그들의 이름을 그대로 갖고 있게 한다 4 마지막 문장의 여운 보답 없는 사랑 공기로 휩싸인 육체 모든 것은 사라진다 한 남자 옆에 한 여자의 움직임, 또는 겨울에도 푸른 나무들 사람들은 말없이 자기의 일을 한다 그림들은 설명으로 풀린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더욱 추워진다 나는 계절을 묘사하기를 단념한다 자장가 이제 잠들어라 아니면 적어도 잠드는 척이라도 해라 우리들의 세상으 방은 너의 손목처럼 차갑고, 또는 무어라 달리 표현하든, 허리 아래로 겨울처럼 다가오는 추위 속에 맞닿은 살갗처럼 차갑고 이제 잠들어라 내가 너를 춥게 해 줄 테니 그것이 달리 사랑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너의 손가락은 너의 겨드랑이 털 속에, 또는 이 차가운 노래 속 그 어디에 있든지 배가 있어야 할 곳 배는 물에 있거나 또는 가지런히 뻗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좌초하지 않고 떠오르는 판화로 벽에 걸리거나 물론 그것은 또한 해전에 대한 이야기가 씌어 있는 책에도 있을 수 있다 방안에서 낡은 전축에 귀 기울이며 종이봉지에서 과일을 꺼내 먹으며 키가 삐걱거리며 부러지는 것을 읽는다 간접적인 체험을 자기의 것으로 가다듬으며 어떻게 물 위에서도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목격할 수 있음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활동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며 나뭇잎 사이를 흘러가는 벽 위의 이 배처럼 모든 것이 행복한 날들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감한다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우선 모든 것이 예전대로 있다 기억의 구조학 유년기는 맥아커피의 냄새가 났다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현실로부터 달아난다 그 시절 나의 산수공책은 제비 그림으로 가득 찼었다 사람들은 시계 속에 죽음이 앉아 있다고 말한다 나는 눈을 씻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본 것을 기억해 두려고 했다 행복 갑자기 나는 혼자 말을 한다 어둠 속에서, 정말 아주 잘, 마치 방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문이 열리고 네가 나타난다 그것을 믿기에는 시간이 좀 걸린다 그것은 되풀이죄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진정이라는 느낌을 가지며 천천히 나는 너를 실제로 본다 그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거의 확신한다, 밤이 그렇게 시작된다고 어떤 이야기처럼 조용한 광경 지금 나의 감관은 어느 것도 증명할 수 없다 갑자기 나의 인생이 짧은 출현으로서의 이 행복을 지닌 새로운 사건으로 느껴진다 전혀 별다를 것도 없으나 그래도 내 마음에 드는 그 무엇인 이 짧은 출현 정말로 나와 단둘이서만 여러 가지에 대한 착각 속에, 작별하며, 내 옆에 누워, 밤새도록,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천국과 지옥 분필로 너는 땅 위에 이 쪽에는 천국 그리고 저 쪽에는 지옥이라고 써 놓았다 천국과 지옥 : 나는 너를 이쪽에서 또는 저쪽에서 사랑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길에서 하던 그 옛날의 놀이를 너는 다시 이 사이에서 혀끝으로 한다 천국과 지옥은 둘다 매우 중요하다 나는 그 어린애 같은 깡충거림을 바라본다 천국과 지옥은 멀다 네가 벌써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나는 안다 네가 내 손 밑에서 빠져 달아나는 것을 나는 느낀다. 실재의 비실재화  ///칼 크롤로브 시해 해설 칼 크롤로브에게 세계는 자연이다. 그 자연은 감각적 풍요와 마술적 초월성이라는 표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정한 자연과 불가해한 자연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는 다른 하나에 의해 예기치 않게 습격을 당하기도 하고 서로 상호관계를 가지기도 하며 때로는 이미 하나로 섞여 있어 구별할 수 없는 일체이기도 하다.  먼저, 가시적 자연은 파악되었다기보다 사진으로 찍듯 모사模寫되고 있다. 그는 자연을 언어로 인화印畵한다.  마르지 않는 라커처럼 빛나는  새털구름의 반사,  그리고 나는 낮은 소리로 우는  바람의 낭적과 이야기를 나눈다.  -「물이 있는 풍경」  그의 시의 울림은 피리소리 같은 바람소리, 새의 지저귐 같은 시냇물 소리, 그리고 그 질감은 과도 같다.  타오르는 카밀레꽃 사이로  [······]  라벤더와 제비꽃의  [······]  단풍나무로 울타리쳐진 고요.  [······]  흔들리는 나뭇잎 속을 흘러간다.  -「나무 밑의 식사」  그의 세계는 기지나 반어 없는, 음악으로 가득 찬 공간이며 그의 시간은 계절이며 나날의, 또는 인간에 대한 걱정은 유보되고 있다. 거기에는 대비나 긴장이 없고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결정이나 책임이 없는, 다만 울림과 메아리만이 있고 사물의 근원이 저절로 드러나며 언어의 표현이 밀도와 자유를 동시에 갖는, 무게 없이 흔들리는 절대음악의 공간이다. 자연이 그렇게도 많은 풀잎과 잎사귀, 물고기, 빛, 공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모티브는 끊임없이 변주와 반복이 가능하다. 매번의 시는 아직 다 쓰지 않은 재료가 남아 있고 미완이며 계속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적 모티브의 실현은 쉽게 사라져버리며 관념Idee으로 결정結晶되지 않는다. 후기로 갈수록 이 특징은 더욱 분명해지지만 크롤로브의 시는 확정된 결말이 아니며 잠정적이며 흰 여백을 가지고 있으며 투명하다.  한 편의 시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단자Monade처럼 완전히 폐쇄된, 따로 떼어낸 조형물이어야 한다는 벤Gottfried Benn의 이론에 대립하여 크롤로브가 기공氣孔이 있는 시, 숨을 쉬고, 잉태하며 계속 다시 낳는, 절節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고 시간이 드나드는 시를 표명했을 때 그의 이 요청은 자신의 시의 특징을 더없이 잘 말해 준다. 그의 시는 실제로 날개가 달린, 바람을 실은 유기체처럼 가볍고 새처럼 날고 때로는 호흡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벼움, 투명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라는 질문에 크롤로브는 무엇을 위하여 쓰는가? 로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시를 세상의 모든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에게 헌정하고 있다. 그는 바람, 빛, 물, 공기, 나뭇잎, 새의 깃털 등을 분명하게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해 보고자 시를 쓰는 것이다. 일견 목가적이며 쾌적한 휴식이었던 그의 풍경은 나와 자연 사이의 허무적 관계를 보여 주는 은유인 것이 드러난다. 흐르는 물처럼 순수하고 낭랑한 은유로 이해되었던 「적막한 해변」을 살펴보자. 본문에서는 역자가 번역의 한 방법으로 독일어 원문의 문법적 구조를 다소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낱말의 모음과 자음의 구조나 운율이 헝클어져 버렸지만 크롤로브의 원문은 아름답게 짜여져 있어 마치 노래가사와도 같이 울린다. 그러나 견고하게 틀에 짜여져 리듬,운율, 격格까지 맞춰진 이 시는 거듭 읽음에 따라 서술이 수상하게 여겨지기 시작한다. 노래처럼 박자가 맞던 문장들은 단순하고 우아하지 못하고 낮고 고요하다.  돛단배와  수염에 걸린 황금 같은  웃음소리는 사라졌다.  돛단배와 웃음소리는 사라졌다라는 첫 문장은 제목 「적막한 해변」에 부합된다. 그러나 는 곧 주문장의 나란히 걸린 두 개의 주어 중 하나에만 걸리는 관계문으로 단절되는데 이란 비유는 낯설다. 이란 비유는 웃음소리라는 청각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설명했다. 독자는 두 가지를 어떻게 비유해야 할까 망설이게 된다. 그 다음의 이란 배와 웃음소리가 방금 사라진 것처럼 아직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느낌을 연상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은 다시 라는 말과 문법적으로 병렬되는데 숨이나 그림자는 바로 곧 사라지는, 나아가 허무한 것에 대한 오래된 은유가 아닌가. 세 번째 관계문은 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맞지 않으나 가쁜 숨, 그림자, 석회는 먼지로 된다는 세 가지 요소는 덧없음, 버려짐, 고독, 비애의 상관개념을 찾는 시인의 의도를 담고 있는 상징이다. 그때 고 시인은 토로한다. 그 비애는 검은 꿀 같고, 새똥 같고, 죽음 같다. 뜨거운 벽돌 위에 들러붙는 비애는 아마도 시인이 고통으로 불타는 뺨 위에(「뺨위에 붉은 연지를 바르는 여자처럼」) 죽을 지경으로 비애를 덧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죽음은 왜 가? 그것은 꿈 또는 환각상태의 죽음을 뜻하는 것일까? 그때 카드놀이 하는 선원들이 나타난다. 적막한 해변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기억이다. 선원들의 실존 방식은 이것은 문득 성서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 육화Inkarnation된 존재, 그러나 그것은 성서와 무관하다. 유한한 시간 속에 있는, 살 속에 처박힌 존재에 대한 섬광 같은 통찰이다. 그들의 현실은 시인 속으로 스며들어가 표상과 상념은 허물어지고 실재의 상실은 끈적끈적한 비애를 남긴다. 이제 마지막 절은 비가Elegie처럼 된다.  그들이 밤의 푸른 장막을 향해  던졌던 그들의 칼은  솟구치는 영원의 날카로운  바람 속에서 무뎌졌다.  시인은 자신의 상상세계 속에 있다. 어느 선원도 칼을 에 던지지 않는다. 그가 보는 것은 상징이다. 칼은 밤과 영원을 부르는 상상의 칼이다. 그리고 영원이란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고 다만 이름할 수 없는 비시간의 팽팽한 저항, 주위에 빈틈없이 들씌워진 밤을 뜻한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영원 앞에 유한한 인간의 증언의 몸짓은 유약하고 사소하며 그 인간은 무지하고 조야하다(「칼을 던지는 선원」). 크롤로브의 문체는 같은 시대의 형이상학적 시인들에 비해 지적이지 않고 철학적이지 않으며 학문적 주제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시는 감각의 확실성과 대담한 상상력으로 더욱 인상적이다.  적막한 해변의 풍경 뒤에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성Dämonie, 그리고 자신을 감추고 있는 시인의 비애가 있다. 다시 이 시의 구조를 살펴보면 음절들은 분리되어 있고 문장은 시작부터 굳어 있으며, 관계문으로 흩어져 산란한 문장구조는 긴장과 불화의 장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음으로 밝혀진다.  여기에 이제는 시대 체험이 합쳐져 전원시인에게는 기대하지 않았던 은유적 굴절이 시작되는 것을 따라가 보자.  내 가슴의 풀잎에 고통이,  고뇌가 입을 다물고  하늘은 검은 색의 천을 휘감을 때,  -「낯선 병사들의 밤풍경」  재로 덮인 강  [······] 갈대로 뒤덮인 밤에  숨어 있는 다정한 함정  -「1950년 송시」  시인이 서 있는 땅이 시대의 사건으로 흔들려 자연은 더 이상 영혼의 안전한 피난처가 못 되고 여름의 아름다운 대지는 과격한 절망으로 변한다. 이때에 그의 시에는 낮의 풍경은 없고 밤의 풍경만이 있다.  황혼이 흘러가고··· 어둠의 요정이··· 하늘은 검은 색의··· 고요한 별(「낯선 병사들이 있는 밤풍경」), 한밤의 가죽을 쓴 짐승··· 밤으로의 의식 없는 호흡··· 순찰꾼의 외침 뒤에 캄캄한 허공(「남자들」), 밤의 은빛 쟁반··· 갈대로 뒤덮인 밤(「1950년 송시」), 밤의 직물··· 사격의 암흑··· 야간보초의··· 밤의 논쟁··· 꿈 없는 잠(「한국 비가」), 암흑··· 나는 이 밤을··· 밤은 비수를 들고(「평화를 위한 시」)  땅은 목가적 겸양의 제한된 구역이 아니라 우주를 떠도는 별이며 인류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이며, 인 시간은 영원한 회귀의 무시간성이다.  낯선 대지 위의 모든 존재의 의문점은 비존재의 깊은 인식을 낳고 익명의 위험 앞에 자아는 비육체화Entlebung되어   안전한 유클리드적 공간(어제 유클리드가 정돈해 놓은 검은 올리브의 들판-「나를 위한 풍경」)에서 벗어난 존재 체험은 새로운 시형식과 문체를 필요로 한다. 짧은 문장과 변화화음적인 운율을 버리고 기다란 문장과 힘을 가진 비가로 변하며 속도감을 갖기도 한다. 문체는 추상성을 띄어 전원시인이 아닌 의식서정 시인에게서 나타남직한 표현 공식이 빈번히 나타난다. 의식, 존재, 실존, 시간, 역사, 허무 등의 단어들이 그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대상이 그의 흥미를 끈 것은 시민사회의 잠과 실존을 언어로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고   이 빛과 맛의 가치는 최종적 본질의 최후의 특징이다. 이 본질적인 감관인상Sinneseindruck 빛나다와 쓰다라는 허무의 근거 없음 위에 비치는, 입김처럼 얇은 막과 같아 그의 허무 체험의 바로 이러한 본질이 그에게서, 다른 비가의 시인들에것 보이는 열정이나 정신적 확신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시대 체험이 깊은 애가적 우울과 전면적인 허무주의에 빠지게 했을 때에도 크롤로브는 종교, 철학 혹은 예언적인 열정이나 감동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크롤로브는 근본적으로 대지의 가설에 묶여 있다.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듯이 크롤로브의 자연은 경험 내에 있으며 초월적이다. 그는 자연 경험을 초월하려 하나 그가 가는 곳은 초자연적인 진리안이 아니라 그것은 다시 자연이라고 불리우는 진리이다. 비가의 주제를 다룰 때에도 그는 풍경 묘사의 전원시적 표본을 버리지 않으며 여전히 섬세하고 우아한 언어 구조를 잃지 않는데 그 버리지 못하는 망설임에서도 그의 주제에 대한 미결정을 엿볼 수 있다.  크롤로브가 운율과 잘 세어진 연을 버리고 묶임 없이 비가적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을 때에도 전원시의 표본을 버리지 않는 것을 특히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연가들이다.  인간의 같이 있음에서 흔들리는 현실감각을 떠받쳐 줄 새로운 이유를 만일 찾았다 해도 그는 사랑의 드라마를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운명적 긴장이 열기를 잃고 우울로 휘감겨 있을 뿐임을 독백한다. 이 연가들에는 처음부터 상대방이 부재한다. 상호관계의 대화Dialogue가 없다. 그저 있는 것 같은 뿐이다. 사랑의 긴장은 보편 세계에 대한 크롤로브의 정서 표현의 한 동기일 뿐이다.  너는 갔다. 엔찌안의 피리들의 푸른 색은 검은 색으로 변했다.  -「연가 2」  이 사랑의 시는 부분적으로 자연시의 변주로 보이기도 하다.  물들인 머리카락과 복숭아씨의 냄새를 가진 밤이 온다.  박하 향내나는 밭 그루터기에 달이 서 있다.  뱀장어가 자라고 있는 강 위에 이슬이 떨어진다.  -「연가 2」  여자 주인공은 전혀 타당성을 갖지 못하고 그녀의 모습은 구조나 조직이 해체되어 정물처럼 놓여 있는 옷조락이나 신체의 부분으로 재구성될 뿐이며 사랑하는 여자의 부재는 몇 개의 점을 이어놓은 별자리 표시처럼 된다.  뒤에 남은 것은 방과 모직치마 위에 코르드쟈켓의 푸른 색,  호기심 어린 모기 같았던, 지금은 없는 눈길.  -「연가 2」  크롤로브는 이 연가들에서 특히 아름답고 놀라운 환상적인 비유를 발견했다. 말하자면 은유적 간접성에서 비회화적인 표현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상상력으로 즉물적 상관개념들을 대비해 놓는 것이다. 그는 환영의 그림들을 예리한 사실적 초점으로 묘사한다.  오후에 창문 앞에 공작이,  그늘진 꽃다발처럼 내려앉았다.  여섯 시의 햇빛 속에  빛나는 머루 한 접시를 놓고  너는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연가 3」  또한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언어의 연금술에 의해 새로운, 틈없는 하나의 이미지로 집약된다.  벽들은 불안과 한 목의 청동으로 벽지를 발랐다.  -「연가 2」  크롤로브이 이 새로운 언어실험은 어디에서 왔을까?  독이 섞인 바람  [······] 배들은 소리없이 나아간다.  -「배」  위의 시에서 이미 랭보Arthur Rimbaud의 「술 취한 배」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고 그 자신 프랑스와 스페인의 시인들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한 크롤로부의 시는 그들,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의 방법과 원리를 매우 특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언어적 성과는 비유의 매개체(···처럼)를 통하지 않고 은유를 직접적이고 마술적인 사실로 전환시킨 데 있다. 그들과 유사하게 크롤로브는 공기 같은 장미가 아니라 또는 나무가 타듯 이라고 말하며 시간이 기도 한다.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연결되고 현상과 개념이 무심하게 서로 흘러들어가 우리의 경험세계의 일반적 구별을 파괴하여 현실의 부분 속에서 비현실이 나타난다. 완전히 범주가 다른 두 대상물의 대비는 두 대상 간의 현존하는 비슷한 점의 발견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유사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사물과 표상의 경계는 크롤로브의 은유 속에서 사라진다. 표상 자체가 사물이며 상징은 장식이나 수식어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의 주어이며 상징 같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며 실재한다.  언어 유희의 의미유추적 힘에 대한 크롤로브의 무한한 신뢰는 결코 은유에 주저하는 법 없이 이상한 것을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 우리의 순진한 의식의 구별이 통용되지 않는 연상을 계속해 간다. 구체적이지 않으면서도 감각적인 정감들이 서로 섞이기도 하고 비사실적이며 괴이한 사건, 사물이나 동물, 인간의 서로 연결지을 수 없는 관계들을 연관시킨다.  누군가 창문 밖으로  빛을 쏟아낸다.  공기의 장미꽃들이  피어난다.  -「창문에서의 한 순간」  이런 기이한 사건들은 후에 기이한 정물들에서 더욱 고조되는데   이제 이 정물, 고요는 여러 단계를 거쳐 지나온 크롤로브 시의 기본 주제가 된다. 고요 속에서 시인은 사물을 투시할 수 있고 비관습적 단어를 유도해 낸다. 즉 사물 자체를 비관습적으로 만들어 모든 묶임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때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사물에 개입하지 않는 시각과 대상과의 사이의 신중한 거리이다. 왜냐하면 때문이다. 크롤로브는 이 거리감이 사실 그 자체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거리를 통해 순수 형태의 구조적 파악이 가능하고 시적 변화를 준비할 수 있다. 열매를 열매라 부르지 않고 이라 부르는 것은 대상을 다만 대상의 가능성에 놓아두기 위함이다. 사물 안으로 끼어들지 않는 냉담한 거리는 사물에서 무게를 거두어 대상은 대상 없음이 되며 수학적 본질과도 같은 질서와 추상적 순수만이 남는다.  가느다란 윤곽만이 남은 크롤로브의 시적 장면은 이제 풍경 그림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없이 자기의 일을 한다.  그림들은  설명으로 풀린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더욱 추워진다.  나는 계절을 묘사하기를  단념한다.  -「시간의 흐름」  자연 찬미자였던 클로로브는 고 말하깅 이른다. 그와 함께 넘치고 풍요로운 운문이 아닌 가늘고 정확히 절단된 시형식을 갖게 되고 운율의 달콤한 성향도 사라지고 문체도 짧아지고 축소되며 표현도 간결해진다.  그는 마치 유리창 뒤에서 바라보듯 참가하지 않고 어떤 기억으로 억눌리지도 않으며 의지로 인해 초조하지도 않으며 그의 서정성은 파토스pathos나 쌍티망sentiment이 되기 전에 반영refleion이나 반어Ironie로 남는다.  이것은 마치 회화에서 조소로 옮겨간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색채가 아니라 밝기(명암)만이 남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초현실주의자들과 헤어진다. 초현실주의의 시에서처럼 언어가 암호로서 이미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엷고 섬세한 언어는 독자 자신 속에서 동음으로 울릴 때에 비로소 명백해진다.  크롤로브는 될 수 있는 대로 간결하게 시를 쓰려 한다. . 부문장에 오래 정체해 있지도 않으며 문장 사이를 어떤 접속사로 연결하지도 않고 암시만 준다.  장미, 라는 말을 처음 하는가?  이전에는 나는  맞지 않는 이름을 불렀었다.  내 손가락을 에워싸고 있는  시간은  무게가 없다.  만일 내가 그것을 느낀다면  이미 늦은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날은  눈을 치켜뜨고 있다.  밤은 눈꺼풀 뒤로  물러난다.  -「잠을 깨어나며」  이 시에는 다만 고요한 동작의 일관성 없는 표상을 건네 주는 문장의 단편, 연결 없는 배열만 있는데 그러나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시작, 전개, 그리고 끝이 있는 언어 진행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간결의 마지막 형태를 찾는 크롤로브의 문장은 끝내 동사 없이 축소되어, 그러나 완전한 문장을 능가하는 의미 함축을 가진 명사적 구조로 된다.  병 속의 촛불 :  유년시절  -「유년시절」  크롤로브는 유년기를 병 속의 촛불이다, 또는 같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존재의 상대성에서 볼 때 언어의 사실성은 잠정적 개념이며 사물의 적절한 은유를 발견하는 것은 관습적인 연습이므로 그에게 언어는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다. 사물이나 사실은 언어에 의해 의미 실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힘에 의해 사물과 사실은 새로 창조되는 것이다. 고 크롤로브는 말하고 있다. 그의 시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작은 부름이다.  돌아보지 마라.  아무도 우리 눈 위에  눈을  찾아내서는 안 된다.  -「눈으로 덮인」  그리고 나면 남는 것은 고요다. 이 고요 속에서 우리는 대상과의 거리, 방념 그리고 명백에 이른다.  크롤로브가 시에서 일체의 인공성을 거두어 사물은 있을 때 이 유령 같은 유희에 인간은 어디에 있나? 어느 한 곳에서  의자 위에 아주 오랫동안 앉아  몸 속에 비가 오는지  또는 간 속에  아직 전갈이 움직이고 있는지  귀를 움직이는 이 습관.  번개불을 세어보고  남아 있는 성냥개비도  모두 세어 놓았다.  지칠 때까지.  그리고 마지막 돛대 위의 깃발을  바다 속에 가라앉힐 때까지.  -「로빈슨 3」  이제 그의 시에는 화자話者 Ich가 없다. 분사나 부정사 속에 주어가 숨어 있거나 또는 있다고 해도 일반명사 사람man, 누군가jemand이거나 정관사, 부정관사, 지시대명사 등으로 대표된다. 화자는 누구나일 수 있고 나와 누구는 공동의 익명 속에, 공동의 단편성 속에서 구별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의 체험은 체험표본이 된다.  이 익명의 인간의 체험표본은 고독이다. 그는 더 이상 간결하고 더 이상 명백하게 표현할 수 없이 완벽한 무위의 자세에 놓여 있다.  내가 발을 뻗고 앉아 있는  책상 위로 가끔  한 줌의 햇빛이 비추인다.  [······]  성냥개비도 모두 세어 놓았다.  -「로빈슨 2, 3」  데포우Defoe의 로빈슨은 구조되어 다시 시민적 규범으로 돌아가지만 크롤로브의 로빈슨의 운명은 무엇일까?  는 가 그를 그 속에 남겨 놓은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정원사가 변한 식물에서 정원사를 찾으려 함에 죽은 자와의 반어적이며 결실 없는 관계만이 가능할 뿐이다. 존재의 배경으로서의 밤은 항상 거기에 있는데 이 밤은 날의 시작에도 천천히 있다. 죽음은 아무도 극복하지 못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잠시 더 남아 있는 동안 그저 바랄 뿐이다. 이로써 사라지는 삶의 시간이라는 테마는 더욱 강해진다. 모든 순간은 상실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크롤로브는 그의 오른손은 쓰기 위하여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나의 오른손을  호주머니에 넣지 못한다.  나는 나의 오른손을 종이 위로 가져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쓰기 위하여.  - 김현성 ( 칼 크롤로브 詩集『나를 위한 풍경』해설)   
1610    시지기는 시지기이다. 고로 시지기는 존재한다. 댓글:  조회:1446  추천:0  2015-12-10
詩지기는 詩지기이다.           고로 詩지기는 존재한다...   詩지기로서의 저는 시궁전에서  자기 피를 빨아 먹으며,  자기 살점을 뜯어 먹으며,  자기 뼈를 갉아 먹으며,  자기의 시공화국 방아확에 나만의 시를 찧고 빻고 하며,  시의 고행작업에서 항용 해산의 진통을 겪는다...     또한 詩지기로서의 저는 시의 징검다리우에서  지팽이며 우산이며 기름등잔이며 불씨이며를  정히 배낭속에 챙겨 짊어지고,  시의 "왼새끼 꼬기와 왼배지기와 왼발목치기"를  오늘도 열심히 배워간다... 그리고 래일도 영원히 배워 갈것이다...                    - 詩지기 竹林 김승종           아...    
1609    詩를 <<쉽게>> 짖자... /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자기 점검 댓글:  조회:4392  추천:0  2015-12-10
    시를 쉽게 지어야 하는 이유           시를 쉽게 지어야 하는 까닭                                                                         ///김재 황    모름지기 시(詩)는 쉽게 지어야 한다. 옛 시인들은, 자기 시의 초고를 촌부에게 보여주고 나서 그 뜻을 알겠다고 한 뒤에야 세상에 발표하였다고도 한다. 시도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알기 쉬운 언어로 지어야 한다.  그런데 왜 시를 어렵게 짓는가? 이른바 ‘난해시’(難解詩)는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권위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법률용어나 의학용어가 어려웠던 바와 마찬가지이다. 말하자면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를 생각하게 한다. 사실은 그게 아님을 알면서도 혹시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까 하여 동조하게 된다. 시인에게 독자는 참으로 고마운 손님이다. 그런데 시를 왜 어렵게 지어서 그 고마운 독자를 시(詩)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연과 행을 잘 나누어서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시인의 어진 마음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중국 고전인 ‘논어’(論語)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자 불어괴력난신’(子 不語怪力亂神). 이는, ‘공자께서 믿어지지 않는 것이나 힘으로 하는 것이나 어지러운 것이나 이상야릇한 것 등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라는 뜻이다. 이 중에서 어지럽거나 이상야릇한 것이 ‘어려운 시’에 해당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공자님의 손자인 ‘자사’가 기술하였다고 알려진 ‘중용’(中庸)에는 공자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들어 있다. ‘색은행괴 후세유술언 오불위지의’(索隱行怪 後世有述焉 吾弗爲之矣) 이는, ‘숨어 있는 것을 들쑤셔 내고 이상야릇하게 굴면 죽은 다음에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알려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리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그 옛적에도 난해하게 구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의 생명은 순수함에 있다. 모두 알고 있듯이, 시의 원류라면 ‘시경’(詩經)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논어에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도 들어 있다.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이는, ‘(시경의) 시 삼백 편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나타낸 생각에 바르지 아니함이 없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사’(邪)는 ‘고을에 간사한 무리들이 날뛰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난해시 안에는 ‘검은 음모’가 들어 있다. 순수하지 않다. 그러므로 ‘간사한 무리’나 좋아할 일이 분명하다.  화려한 꽃뿐만이 아니라 작고 볼품없는 꽃도 위대하다. 그러므로 잘 알려진 시(詩)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시(詩)도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에 전제조건이 있다. 반드시 꽃이라면 진짜여야 하고 시라면 순수해야 한다.      동방문학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자기 점검     윤성택        ◦ 톡특한 문체 ( ⇒ 내 시에 진정 독특한 그 무엇이 있는가 ) ◦ 원활한 이미지 전개 ( ⇒ 하나의 문제를 중심축(통일성)으로 이미지를 전개하였는가 ) ◦ 절실한 내용의 진실성 ( ⇒ 절실한 내용을 진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 ◦ 인식과 체험 중심 ( ⇒ 관념 대신 인식, 습관 대신 체험 중심 / 관념의 서술 지양 ) ◦ 정서와 인식의 조화 ( ⇒ 정서에 비해 의식이 너무 앞서지 않았는가 ) ◦ 시적 표현 ( ⇒ 산문(에세이)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는가 ) ◦ 시적 진실성 추구 ( ⇒ 재주를 경계한 채 하나의 진실을 의젓하게 이끌어가고 있는가 ) ◦ 선명한 주재의식 ( ⇒ 주재의식이 선명해야 거기에 걸맞는 표현상의 기교나 독자성이 나타남 ) ◦ 생략 + 상징어 + 은유법 = 좋은시 ( ⇒ 생략된 표현, 상징적인 언어, 은유법 = 좋은시 ) ◦ 적절한 묘사 ( ⇒ 시는 설명이 아니고 묘사임. 지나치게 설명적이지 않은가 ) ◦ 튼튼한 구조 ( ⇒ 표현 하나하나에 긴장관계를 유지하면 구조적으로 튼튼한 시가 형성됨 ) ◦ 관념어 남용 ( ⇒ 일상적인 관념어의 남용이 흠이 되지는 않는가 ) ◦ 소재의 승화 ․ 의미 확대 ( ⇒ 소재에 대한 승화(의미 확대)는 잘 되었는가 ) ◦ 상념 ․ 감상주의 ( ⇒ 포장된 상념, 자기 정서에 빠지지 않았는가 ) ◦ 군말 삭제 ( ⇒ 공연한 군말을 붙이지 않는가 ) ◦ 공적인 언어 승화 ( ⇒ 개인적인 체험을 공적인 언어구조로 승화시켰는가 ) ◦ 소재를 구체적이고 깊이 이해 ◦ 역동적 속도감 유지 ( ⇒ 알맞은 속도감, 역동적 이미지 처리 ) ◦ 무리한 비약 ․ 난해시 ( ⇒ 무리한 비약이 있거나 난해하지 않은가 ) ◦ 지나친 압축 ․ 생략 ( ⇒ 지나친 압축, 생략, 경한(가벼운) 시류는 없는가 ) ◦ 불필요한 표현 ( ⇒ 마음의 부피가 엷어 부질없는 포즈를 취하지는 않는가 ) ◦ 명료성 ( ⇒ 지나치게 서술하여 명료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 ◦ 불필요한 언어 ․ 한자 남용 ( ⇒ 불필요한 언어 반복과 한자 남용 지양 )             ◦ 나의 시에서 진정 독특한 그 무엇이 있는가? ◦ 하나의 문제를 중심축으로 통일성 있는 이미지를 전개하였는가? ◦ 절실한 내용을 진실성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 관념의 서술 대신 구체적인 인식을, 습관 대신 체험을 중심으로 적었는가? ◦ 정서에 비해 인식이 너무 앞서가지 않았는가? ◦ 산문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는가?(시적 표현 중심) ◦ 재주를 경계한 채 하나의 시적 진실성을 의젓하게 추구하고 있는가? ◦ 선명한 주재의식으로 거기에 걸 맞는 표현과 독창성이 있는가? ◦ 생략된 표현, 상징적인 언어, 은유법을 잘 구사하였는가? ◦ 시는 설명이 아니고 묘사임. 지나치게 설명적이지 않은가? ◦ 표현 하나하나에 긴장관계를 유지하면 구조적으로 튼튼한 시가 됨. ◦ 일상적인 관념어 남용이 흠이 되지는 않는가? ◦ 소재를 잘 승화시켜서 의미를 부드럽게 확대하였는가? ◦ 허위로 포장된 상념, 자기 주관적 감사에 빠지지 않았는가? ◦ 공연한 군말을 붙이지 않는가? ◦ 개인적인 체험을 공적인 언어로 승화시켰는가? ◦ 소재를 구체적이고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 ◦ 알맞은 속도감을 유지하며 역동적으로 이미지를 처리하였는가? ◦ 무리한 비약, 너무 난해하지는 않은가? ◦ 지나친 압축, 생략, 경한(가벼운) 시류는 없는가? ◦ 불필요한 표현(포즈)을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 지나치게 서술하여 주재의 명료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 불필요한 언어 반복, 한자 남용하지는 않은가?   ==================================================
1608    공부하기 싫어... 땡 !!! - 재미나는 글공부 댓글:  조회:6478  추천:0  2015-12-10
    알고 쓰는 우리말의 유래와 뜻        외래어가 물밀 듯 들어오면서 우리 고유의 말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게 사실이죠. 자신도 모르게 쓰고 있는 외래어와 우리말, 우리말이 생겨나게 된 배경은 어떤 게 있을까요? 그래서 어여쁜 우리말의 유래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해요.     고뿔 지금은 감기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모두 "고뿔"이라고 했죠. 고뿔의 숨은 뜻은 마치 코에 뿔이 난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테지만 사실 고뿔은 코에 불이 난 것을 의미합니다. 코를 뜻하던 옛 말인 고에 블이 붙어 이전엔 ‘곳블’이었으나 원순모음화와 된소리가 되어 고뿔이 되었답니다.       고주망태       술을 많이 마시어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취한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이는 고주와 망태의 합성어로 옛말로 고조였던 고주는 술을 거르거나 짜는 틀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술주’자라고 부릅니다. 망태는 망태기의 준말로 가는 새끼나 노로 엮어 만든 그릇을 이르는 말입니다. ‘술주’자 위에 술을 짜기 위해 올려놓은 망태이기에 언제나 술에 절어 있는 것은 당연할 터. 술을 많이 마시어 취한 상태인 고주망태란 말은 이에서 연유된 말입니다.     미리내        미리내는 은하수를 지칭하는 순 우리말입니다. 미리는 옛말 미르에서 온 말로 용이란 뜻입니다. 내는 개울이나 시내를 뜻하고, 미리내는 용이 사는 시내라는 뜻이 되겠지요. 옛날 사람들은 용이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습니다. 마치 강이나 시내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던 은하수는 하늘로 올라간 용이 살 만한 곳이라고 여긴 것이죠.       바보   자주 쓰이는 말인 바보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밥+보에서 자음ㅂ이 탈락된 형태로 바보란 말의 원래 의미는 밥만 먹고 하릴없이 노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런 사람을 경멸하여 현재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나 멍청이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같은 이치로 밥통이라는 속된 표현을 쓰기도 하지요.     안성맞춤   경기도 안성은 놋그릇이 튼튼하고 질이 좋기로 유명하여 장에 내다 파는 기성품 장내기와 주문에 의해 만드는 맞춤이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장에서 사다 사용했으나 서울 양반들은 직접 안성에 와서 식기나 제기를 맞추어 사용하였는데 맞춤 제작을 맡기면 그릇이 꼭 맘에 들었다고 해요. 이처럼 요구하거나 생각한 대로 아주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물건이나 조건, 상황이 어떤 경우에나 계제에 잘 들어맞아 잘된 일이란 뜻을 말합니다.       안절부절 못하다       마음이 썩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못하다가 덧붙어 안절부절한 것을 강조하는 뜻으로 쓰는 것이죠. 엄밀하게 보면 안절부절 못하다는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부정어의 강조 형태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 말이 불안하고 초조함을 극도로 강조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출처] 알고쓰는 우리말, 우리말의 유래와 뜻|작성자 행복한포스  
1607    땡! 땡!... 제2교시 - 재미있는 우리말 댓글:  조회:5272  추천:0  2015-12-09
      우리말 공부   헤살  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헤살을 부리다   옆에서 덕구가 헤살을 치는 바람에 다 성사된 일을 망쳐 버렸다.   우리가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헤살이나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나미  어떠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애착이 생기는 마음.   그는 처음 봤을 때부터 정나미가 생기지 않았다.   꿈같다 (1) (무엇이) 만족스러워 기쁘고 행복하다.   내가 일등을 하다니 이 모든 것이 꿈같아.   나는 꿈같은 신혼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2) (세월이) 덧없이 빠르다.   벌써 졸업이라니 정말 꿈같다.  (3) (무엇이) 부질없고 무의미하다.   재석이는 꿈같은 이야기만 해 댔다.   백일하 [白日下]  [주로 ‘백일하에’의 꼴로 쓰여]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분명한 상태.   그 사건을 통해 그들의 치밀한 속셈을 백일하에 드러낸 셈이 되었다.   범인이 잡히자 그 사건의 내막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틀린 말---> 맞는 말  갈래야 →   가려야(-려야)      덥밥 → 덮밥  덮혔다→ (눈으로)덮였다       갈런지 → 갈는지(-는지)     같애 → 같아                   두 살박이→ 두 살배기(-배기)     뒷쪽, 뒷풀이   → 뒤쪽, 뒤풀이  거에요  →  거예요          거칠은  →  거친(거칠다) 되/되요/되도/되서/됬다  → 돼/돼요/돼도/돼서/됐다                   
1606    땡! ㅡ 제1교시 - <<바람>> 댓글:  조회:6832  추천:0  2015-12-09
    ◆마파람 남쪽 또는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뱃사람의 말로 ‘마’는 남쪽이다. 그래서 마파람은 남풍이다. 보통 나아가는 방향에서 마주 불어오는 바람은 방위와 상관없이 ‘맞바람’이라 할 수 있다. 마파람은 ‘맞바람’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마’가 남쪽을 뜻하는 말로 굳어짐에 따라 맞바람과는 구별해서 쓰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보통 거슬러 불어오는 바람을 ‘앞바람’이라고도 하는데, 마파람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된바람 북풍 을 뱃사람들이 이르는 말. 빠르고 세게 부는 바람.   된바람은 뱃사람의 말로 센 북풍을 가리킨다. 그래서 뱃사람들은 북동풍을 ‘된새바람’ 또는 줄여서 ‘된새’라고 부른다. 또한 북서풍을 ‘된하늬바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방에 따라서는 ‘된’이 동쪽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동남풍을 ‘된마(된마파람)’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런 예이다. 일반적으로 된바람은 ‘빠르고 세게 부는 바람’을 뜻한다. ​예:눈보라와 함께 된바람이 몰아치는 능선을 따라 대원들은 한걸음씩 정상을 향하여 나아갔다.   ◆강바람 비는 내리지 않고 몹시 세게 부는 바람.   강(江)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강바람(江-)’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강바람은 ‘비는 내리지 않고 몹시 세게 부는 바람’을 일컫는 말이다. ‘회오리바람’이나 ‘소소리바람’도 세게 불어오는 바람이지만 강바람은 일종의 계절풍이다. 즉 비는 오지 않고 바람만 몹시 부는 태풍을 강바람이라 할 수 있다. 얘:이번 태풍의 중심부가 지나가는 곳에는 비를 동반하지 않는 강바람만 불어 닥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 ​◆꽃샘바람 봄철 꽃이 필 무렵에 부는 찬바람.   ‘꽃샘’에서 ‘샘’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아니다. ‘시샘’의 줄임말이다. 입춘도 지나고 봄이 시작되는 첫머리이지만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여 매우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이 분다는 것이다. 꽃샘바람은 말의 느낌과는 달리 실제로는 사람들의 몸을 으스스 떨게 하는 매서운 바람이다. 예:입춘도 지나 봄이라고는 하지만 드러난 살갗을 쓸고 가는 꽃샘바람의 냉기가 여간 매서운 것이 아니었다.   ◆높새바람 ‘북동풍’을 뱃사람들이 이르는 말.   ‘높’은 북쪽을 가리키는 말이고, ‘새’는 동쪽을 말한다. ‘높’과 ‘새’가 합쳐져서 ‘높새’가 된 것이므로 바람의 이름 자체가 ‘북동풍’이다. 같은 이치로 ‘높하늬’는 북쪽과 서쪽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북서풍’이 된다. 영서 지방에서는 초여름에 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고온 건조한 북동풍을 높새라 한다. 지리학 용어로 ‘푄’이라 하는 높새는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준다. 한편 뱃사람들이 방향을 가리키는 말로 ‘새’는 동쪽, ‘하늬’는 서쪽, ‘마’는 남쪽, ‘노’는 북쪽이다. 예:강원도 내륙에는 지금 가뭄이 심각합니다. 더구나 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높새 때문에 농작물 이파리들이 이렇게 말라 가고 있습니다.     ◆보라바람 높은 고원에서 갑자기 산 밑으로 불어내리는 차갑고 센 바람.   ‘보라’는 눈보라, 비보라 따위처럼 일정한 규칙이 없이 무언가가 흩뿌려지는 모양을 말한다. 바람은 보통 일정한 방향에 따라 불기 마련인데, 보라바람은 산 위에서 마구발방으로 이리저리 휘몰아치며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이다. 예:보라바람에 실린 눈발이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무서운 기세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 ​◆살바람 봄철에 부는 찬바람. 좁은 틈으로 새어드는 찬바람.   그리 세게 부는 바람은 아니지만 매우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이다. 겨울밤 문틈으로 살며시 스며드는 찬바람이나, 이른 봄날 살품으로 슬며시 파고드는 찬바람을 말한다. 모양으로 보면 된바람에 상대되는 바람이다. 이른바 ‘황소바람’도 살바람의 한 가지다. 예:문틈으로 불어오는 살바람에 으스스 몸을 떨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건만, 산장에서 맞이한 아침 풍경은 간밤의 고통을 말끔히 잊게 해주는 것이었다. ​ ​​◆소소리바람 이른 봄에 살 속을 기어드는 듯이 맵고 찬 바람.   흔히 이른 봄철에 부는 꽃샘바람을 ‘소소리바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소리’는 본래 ‘회오리’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가을이나 겨울철에도 회오리처럼 휘몰아 불어오는 바람은 소소리바람이라고 한다. 예:담머리 굴참나무 그늘도 짙을러니, 높은 가지 끝에 한두 잎 달려 있고, 소소리바람이 치는 벌써 가을이구려. ​ ​​​◆피죽바람 모낼 무렵 오랫동안 부는 아침 동풍과 저녁 북서풍.   이 바람이 불면 비가 내리지 않아서 큰 흉년이 들어 ‘피죽’도 먹기 어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여름에 부는 고온 건조한 높새바람을 지칭하는 듯하다. ‘피’는 곡식에 섞여 나는 잡풀의 한 가지다. 흉년이 들면 곡식이 자라지 않는 만큼 잡풀이 무성하게 논밭을 차지한다. 피는 언뜻 벼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가려내기가 쉽지 않으며 번식력이 강한 잡풀이다. 예:봄 가뭄은 계속되고 피죽바람만 불어오니 올해 농사도 다 틀린 모양이여. ​ ​​​◆하늬바람​ 농부나 뱃사람들이 ‘서풍’을 부르는 말.   ‘하늬’는 뱃사람의 말로 서쪽이다. 따라서 하늬바람은 맑은 날 서쪽에서 부는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을 말한다. 습하고 무더운 ‘된마(동남풍)’에 상대되는 바람이다. 무더운 여름철에 부는 하늬바람은 말의 느낌만큼이나 실제로도 상쾌한 느낌을 주는 바람이다. 예:후텁지근한 장마도 지나서 이파리 무성한 숲길에서는 매미 소리가 요란하고, 언덕배기로 서늘한 하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어느덧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황소바람​ 좁은 곳으로 가늘게 불어오지만 매우 춥게 느껴지는 바람.   옛날 서민들에게 가장 추운 바람은 황소바람이었다. 지금은 집에 난방이 잘 되어 한겨울에도 집 안에서 속옷 차림으로 지낼 수 있지만, 옛날 서민들은 한겨울날 문풍지 떠는 소리와 함께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바람에 오금이 저리도록 떨면서 밤을 보내야 했다. 특히 작은 창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바깥공기는 차라리 바깥에서 거세게 휘몰아치는 찬바람을 직접 맞는 것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이처럼 ‘좁은 곳으로 가늘게 불어오지만 매우 춥게 느껴지는 바람’을 황소바람이라 하는데, 역설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예:이번 겨울에 지리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산장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게 되었는데, 문틈으로 스며드는 황소바람에 밤새 덜덜 떨다가 한숨도 못 잤다.   [출처] 바람의종류-마파람/된바람/꽃샘바람/높새바람/보라바람/소소리바람/하늬바람/황소바람|작성자 좋은집알리미    
1605    쉼시간 - 땡 땡 땡... 조선방언세계 댓글:  조회:8023  추천:0  2015-12-08
  14추천자 목록 조선방언   꼬부랑국수 - 라면  /  가무이야기 - 뮤지컬  /  얼음보숭이 - 아이스크림  /  인민학교 - 초등학교  가시아버지 - 장인  /  가급금 - 보너스  /  휴식일 - 공휴일  /  머리 비누 - 샴푸  /  찬국수 - 냉면   안내강사 - 가이드  /  소젖 - 우유  /  튀긴고기떡 - 어묵  /  나리옷 - 원피스  /  가락지빵 - 도넛츠   애기차 - 유모차  /  기름사탕 - 캐러멜  /  곽밥 - 도시락  /  날맥주 - 생맥주  /  가세 - 가위  가배 - 갈비  /  우티 - 옷  /  고뿌 - 컵  /  색쌈 - 계란말이  /  뜨더국 - 수제비  /  문지기 - 골키퍼 군관 - 장교  /   설기과자 - 카스테라  /  색동다리 - 무지개  /  찔게 - 반찬  /  기름밥 - 볶음밥   단묵 - 젤리  /  도는네거리 - 로터리  /  가루젖 - 분유  /  목달이구두 - 부츠  /  몸틀 - 마네킹    가슴띠(부끄럼가리개) - 브래지어  /  으뜸부끄럼가리개 - 팬티  /  다리매 - 각선미  /  달린옷 - 원피스   볼웃음 - 미소  /  남새 - 나물  /  잠자리비행기 - 헬리콥터  /  구석차기 - 코너킥  /  문화어 - 표준어   던지기 - 드로우인  /  벌칙차기 - 페널티킥  /  통과암호 - 패스워드  /  자료기지 - 데이터베이스  알림판 - 게시판  /  나들문 - 출입문  /  예술헤엄 - 수중발레  /  차마당 - 주차장  /  건병 - 꾀병 직승비행기 - 헬리콥터  /  손가락말 - 수화  /  등불게임 - 야간경기  /  얼굴가리개 - 마스크-  갑작바람 - 돌풍  /  분간 휴식 - 작전 타임  /  사슬돈 - 잔돈  /  쪽무늬그림 - 모자이크  벌차기 - 프리킥  /  넣는 사람 - 투수  /  잊음증 - 건망증  /  내민대 - 베란다, 발코니  떼레비 통로 - 텔레비전 채널  /  헝겊신 - 운동화  /  뒤셈 - 검산  /  유람뻐스(유람차) - 관광버스   동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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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6. 위생실 - 화장실 17. 모서리주기 - 왕따 18. 계단 승강기 - 에스컬레이터 19. 법 공장 - 식당 20. 인민 소모품 - 생활 필수품 21. 살까기 - 다이어트 22. 공동 욕탕 - 대중 목욕탕 23. 빨래집 - 세탁소 24. 화학 세탁 - 드라이 클리닝 25. 사슬돈 - 잔돈 26. 차마당 - 주차장 27. 직승 비행기 -  헬리콥터 28. 거리나무 - 가로수 29. 가두 녀성 - 가정 주부 30. 발편잔 - 편안한 잠 31. 잠나라 - 꿈나라 32. 궁냥 -  궁리 33. 근터구 - 까닭,이유 34. 진소리 - 잔소리 35. 냉동기 - 냉장고 36. 전기 밥가마 - 전기 밥솥 37. 능쪽 - 그늘 38. 더운물 미역 - 온천 39. 바닷물 미역 - 해수욕 40. 바래움, 바램 - 배웅 41. 나들문 - 출입문 42. 어제날 - 지난날 43. 번대버리 - 대머리 44. 막머리 - 빡빡 깎은 머리 45. 다리매 - 각선미 46. 오목샘 - 보조개 47. 갑작부자-벼락부자 48. 딱친구-단짝친구 49. 사내번지기-말괄량이 50. 두벌자식-손자   51. 가시집-처갓집 52. 후어머니-계모 53. 어로공-어부 54. 문지기-골키퍼 55. 머리박아넣기-헤딩슛 56. 등불 게임-야간 경기 57. 기둥선수-주장 58. 예술 헤엄-수중발레 59. 교예-서커스 60. 녀성 고음-소프라노 61. 군중 가요-대중 가요 62. . 예술 체조-리듬체조 63. 가무 이야기-뮤지컬 64. 민간 오락-민속 놀이 65. 문화어-표준말 66. 곽밥-도시락 67. 닭알-달걀 68. 색쌈-계란말이 69. 딸기 단졸임-딸기 잼 70. 단묵-젤리 71. 기름사탕-캐러멜 72. 바삭 과자-비스킷 73. 설기 과자-카스테라 74. 가락지빵-도넛 75.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 76. 단물 -주스 77. 소젖-우유 78. 가루소젖-분유 79. 꼬부랑국수-라면 80. 밥감주-식혜 81. 지지개-찌개 82. 뜨더국-수제비 83. 녹두지짐-빈대떡 84. 가마치-누룽지 85. 이밥-쌀밥 86. 얼럭밥-잡곡밥 87. 기름밥-볶음밥 88. 지짐판-프라이팬 89. 남새-채소 90. 푸른차-녹차 91. 달린옷-원피스 92. 나뉜옷-투피스 93.나리옷-드레스 94. 양복 적삼-블라우스 95. 양말바지-팬티스타킹 96. 끌신-슬리퍼 97. 해돌이-나이테 98. 얼레달-반달 99. 갑작바람-돌풍 100. 곱등어-돌고래 101. 꿀비-단비 102. 별찌-유성(별똥) 103. 살별-혜성 104. 색동다리-무지개 105. 해가림-일식 106. 달가림-월식 108. 로동개미-일개미 109. 로동벌-일벌 110. 일없다-괜찮다 111. 배워주다-가르치다 112. 끌끌하다-깨끗하다 113. 궁겁다-궁금하다 114. 날래-빨리 115. 가담가담-가끔 116. 료해하다-이해하다 117. 가찹다-가깝다 119. 인차-곧,금방   답변추천해요3추천자 목록 2. 오림책 - 스크랩북 (or 발취집) 3. 그림분필 - 파스텔 (never, 크레용) 5. 주머니종 - 삐삐 (never, 호출기) 7. 이야기그림 - 만화 (never, 만화 or 그림책) 9. 불알 - 전구 (never, 전등알 or 전구) 10. 반딧빛등 - 형광등 (never, 형광등) 13. 놀음감 - 장난감 (never, 장난감) 14. 방 거두매 - 방 청소 (never, 방청소) 15. 인민학교 - 초등학교 (in the past it was, never,w 소학교) 17. 모서리주기 - 왕따 (hardly, 몰아주기) 19. 법 공장 - 식당 (never, 식당) 20. 인민 소모품 - 생활 필수품 (never, 생활필수품) 21. 살까기 - 다이어트 (never, 몸까기) 22. 공동 욕탕 - 대중 목욕탕 (never, 대중탕 or 대중목욕탕) 23. 빨래집 - 세탁소 (or 세탁소) 25. 사슬돈 - 잔돈 (never, 잔돈 or 쇠돈) 26. 차마당 - 주차장 (never, 주차장) 27. 직승 비행기 -  헬리콥터 (never, 직승기) 28. 거리나무 - 가로수 (never, 가로수) 29. 가두 녀성 - 가정 주부 (hardly, 가정주부) 30. 발편잔 - 편안한 잠 (never, 발편잠) 31. 잠나라 - 꿈나라 (never, 꿈나라) 32. 궁냥 -  궁리 (also 궁리) 33. 근터구 - 까닭,이유 (never, 까닭 or 리유 or 근거) 34. 진소리 - 잔소리 (never, 잔소리) 35. 냉동기 - 냉장고 (never, 랭동기) 37. 능쪽 - 그늘 (never, 그늘) 38. 더운물 미역 - 온천 (never, 온천 or 온천욕) 39. 바닷물 미역 - 해수욕(never, 해수욕) 40. 바래움, 바램 - 배웅 (never, 배웅) 41. 나들문 - 출입문 (hardly, 출입문) 42. 어제날 - 지난날 (different, 지난날) 43. 번대버리 - 대머리 (never, 번대머리 or 번대) 44. 막머리 - 빡빡 깎은 머리 (never, 번대 or 빤대) 45. 다리매 - 각선미 (never, 다리선) 46. 오목샘 - 보조개 (never, 보조개) 47. 갑작부자-벼락부자 (never, 벼락부자) 49. 사내번지기-말괄량이 (also 말괄랭이) 50. 두벌자식-손자 (different, 손자) 51. 가시집-처갓집 (also 처가집) 52. 후어머니-계모 (also 계모, 이붓어머니) 55. 머리박아넣기-헤딩슛 (never, 머리받기) 56. 등불 게임-야간 경기 (never, 야간경기) 57. 기둥선수-주장 (different, 주장) 58. 예술 헤엄-수중발레 (never, 수중발레) 63. 가무 이야기-뮤지컬 (never, 경가극) 64. 민간 오락-민속 놀이 (never, 민속놀이) 68. 색쌈-계란말이 (never, 계란말이) 69. 딸기 단졸임-딸기 잼 (or 딸기?) 73. 설기 과자-카스테라 (never, 카스테라 or 단설기빵) 75.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 (hardly, 아이스크림 or 에스키모) 77. 소젖-우유 (different, 우유) 78. 가루소젖-분유 (never, 우유가루) 79. 꼬부랑국수-라면 (slang, 라면) 80. 밥감주-식혜 (never, 식혜) 86. 얼럭밥-잡곡밥 (never, 잡곡밥) 87. 기름밥-볶음밥 (never, 비빕밥) 90. 푸른차-녹차 (never, 록차) 91. 달린옷-원피스 (also, 원피스) 92. 나뉜옷-투피스 (never, no correspondent) 93.나리옷-드레스 (never, 드레스 or 녀성례복) 94. 양복 적삼-블라우스 (never, 양복저고리 or 양복웃옷) 96. 끌신-슬리퍼 (or 실내화) 97. 해돌이-나이테 98. 얼레달-반달 (never, 반달) 99. 갑작바람-돌풍 (hardly, 돌풍 or 돌개바람(whirlwind) ) 101. 꿀비-단비 (metaphor, 단비) 103. 살별-혜성 (not often, 혜성) 104. 색동다리-무지개 (never, 무지개) 105. 해가림-일식 (antique, 일식) 106. 달가림-월식 (antique, 월식) 110. 일없다-괜찮다 (also 괜찮다) 111. 배워주다-가르치다 (also 가르치다) 112. 끌끌하다-깨끗하다 (different, 끌끌하다 is stout) 113. 궁겁다-궁금하다 (never, 궁금하다) 114. 날래-빨리 (slang, 빨리, 얼른) 115. 가담가담-가끔 (never, 이따금, 가끔씩) 116. 료해하다-이해하다 (different, 료해하다 is to get the information) 117. 가찹다-가깝다 (slang, 가깝다) 119. 인차-곧,금방 (also, 곧)   답변추천해요2추천자 목록   답변추천해요6추천자 목록 북한 방언 가루(갈구,갈기) 간장(지렁) 갈비(갈배) 감기(순감,윤감) 감자(갱기) 강아지(강생이) 개으름뱅이(누진뱅이) 개피떡(씀바람떡) 거짓말(거집뿌리,도삽,부끼,얼레뿌리) 거품(버큼) 걸핏하면(자삣하문) 검부레기(거부제기) 겁쟁이(겁재이 겹제기) 겨드랑이(겨댕이,자개미,자대,재개미) 겨우(재우) 계약체결(합동체결) 고추(댕추) 고드름(고조리,고주럼,고즈래미) 고등어(고마이,고마에,고망어) 고양이(고애,고앵이) 곰보(얼구뱅이,얼그뱅이) 곱슬머리(고수락머리,양머리) 공것(공째,공게) 광대뼈(볼뼈) 괜찮습니다(일없수구마) 괭이(곽지) 교환하는것(바꿈질,바꾸각질) 구두쇠(구데손이) 구멍(궁개,궁기,구먹) 구하기 어렵다,귀하다(긴장하다) 국수(국시) 굳은살(썩살) 굴뚝(구새통) 귀먹어리(구먹댕이,먹보) 귀찮다(영사하다,영상스럽다) 그러므로(그러니깐드루) 그림자(그럼지) 기웃거리다(찌웃거리다) 기저귀 (기상기) 깍쟁이(깍재,따꼽쟁이) 꽈배기(타래턱) 꿩(산닭)  감자(갱이) 댕추-고추 나무-낭그 누에-누베 조-조이 조밭-조이밭 꿩(산닭)   아버지의 외할아버지 : 진할아버지 아버지의 외할머니 : 진할머니 할아버지 : 큰아배 할머니 : 할만, 할만님- 큰마니   아버지 : 아반 어머니 : 오마니,어마이,오마이 장인 : 가시애비 장모 : 가시애미   남편 : 나그네 아내 : 안까이(암개란 말에서 유래)   며느리 : 미느리 아주머니 : 넹바리 아저씨 : 아재비 아주머니 : 아주마이   오빠 : 오라바니,오라바이,오라브지 누이 : 누부,누비,누애,누의,느비 동생 : 애끼 막내 : 막뒤   사위 : 싸웨 올케 : 오리미,오레미,올찌세미 시누이 : 스느비 시동생 : 스애끼   늙은남자(아바이,노털) 늙은여자(아매) 남자 : 스나이 아낙네 : 안까이,에미네 어른 : 자라이 어린아이 : 어르나,간나 떡거머리 총각 : 덜머리총각 여자아이 : 간나   ◐  북한의 평안도 방언.   꼬치꼬치(오지오지) 꿩(산닭) 꽈배기(타래떡) 나 스스로(나절로) 나물(남새) 나비(나붕이) 남(냄) 남방셔츠(적삼, 퉁중이,잠배이) 남자(스나이) 남편(나그네) 내버려두다(내싸두다) 내장,속(벨,베리,배애리) 냉이(나상구,나숭개,나시) 너무,지니치게(진해) 넙적다리(신다리) 노란자위(노란자시,노랑젖) 노루(놀가지,놀기,놀갱이) 노을(나부리,나불,나오리,노부리,느블) 노하다(노바하다) 녹두나물(녹디질금) 뇌물(콧밑씻게) 누구세요(뉘기야,니기가) 누이(누부,누비,누애,누의,느비) 눈까풀(눈까줄,눈깝지) 눈보라(눈바라) 느슨하다(허슨하다) 늙은남자(아바이,노털) 늙은여자(아매) 다구치다(족치다,족대기다) 다듬다(검줄하다) 다시하다(되비하다) 단추(눈마구) 달무리(달머리) 닭(달기) 닭알(게랄,달기알) 담요(탄재,탄자) 대담하다(어버리크다) 대머리(번대머리,뻔들머리,) 대판싸움(대드리싸움) 더덕(더데기) 더부룩하다(듬뿌룩하다) 더위(더비,더우) 데굴데굴(두굴두굴) 도리어(데비) 도시락 그릇(밥곽) 도시락(곽밥) 독수리(닥수리,독소리,독술) 동그라미(동그랑이) 동생(애끼) 동침하다(동품하다) 돼지(뒈지,도티) 된장(떼장, ) 두루마기(두루메기,둘메기,제마기) 두부(드비) 들락날락하다(풍개치다) 들리다(듣기다) 들석거리다(들멍하다) 등골뼈(염주뼈) 등마루(등말기) 등허리(등떼기) 딩굴다(궁글다) 딱따구리(가막두거리,가막조가리,닥닥새,뚝뚝새) 딸꾹질 때문에(까타나) 땔나무(부수께나무,땔낭기) 떠벌이(말단지) 떡거머리 총각(덜머리총각) 뚜껑(다께,덕개,두벙) 뚜껑(뚜배) 마른오징어(낙지) 마른오징어(낙지) 마사다(마이다) 마음(맘세,맴,마암) 막내(막뒤) 만두(벤세)   ◐  북한의  함경도방언 -음식.   간장(지렁) 갈비(갈배) 감자(갱기) 개피떡(씀바람떡) 고드름(고조리,고주럼,고즈래미) 고등어(고마이,고마에,고망어)  국수(국시) 꽈배기(타래떡) 나물(남새) 냉이(나상구,나숭개,나시) 녹두나물(녹디질금) 닭알(게랄,달기알) 도시락(곽밥) 된장(떼장, )  두부(드비) 마른오징어(낙지)  마사다(마이다) 메주(메지)  멥쌀(닙쌀) 무(노배,무꾸) 물어징어(오중어) 반찬(질게,찬새,해미,햄,햄새) 배추(배차,배채) 봉숭아(봉새) 부추(염지) 상추(불구) 송편(조개떡) 수수(고량,밥수끼,밥쉬) 쌀밥(이팝) 옥수수(옥시기,강내) 칡(츨기) 콩나물(질금) ◐  북한의  함경도 방언-일반 언어.   가새비 : 장인 가세 : 가위 가자미식혜 : 소금에 절인 가자미로 만드는 발효 음식 가시나.: 여자 아이 갓주지 : 갓을 쓴 젊은 주지. 아이들에게 무서운 대상의 상징 개당이 없다 : 깔끔하지 못하다 갯돌 : 배를 육지로 올리거나 바다로 내릴 때 끌고 갈 방향 앞쪽에 받치는 나무토막 건치 : 멍석. 거적 구름깔개 : 참나무를 엷게 밀어서 결은 자리 귀성스럽다 : 귀인(貴人)성스럽다 그기 : 그것이 글거리 : 그루터기. 풀이나 나무 또는 곡식 따위를 베고 남은 밑동 글거리 : 줄거리. 줄기. 그루터기 까막조개 : 바지락 깡태밭 : 갯벌 껍지 : 껍질 꼬마. 꾸마. 구마 : -입니다. -습니다. -어요. 명, 형, 동사의 뒤에 붙어 존칭으로 대답하는 데 쓰는 토 나무리다 : 나무라다 날래 : 빨리 낭 : 낭떠러지 낭그 : 나무 내내로 : 늘. 항상 녹마 : 녹말 녹마국수 : 녹말국수 누데기 : 포대기 누베 : 누에 눈포래 : 눈보라 늠 : 놈 다쪼매 : 대님 피께데기,패기,패끼딸각질 - 딸꾹질 돌대구리 : 돌대가리. 두렝이 : 두루마기 두루. 두뤄 : 들. 들판 두주리 : 둥우리 둔대 : 큰배를 움직이게 할 때 일종의 지렛대로 쓰는 나무토막 둥글소 : 황소 뒤울안 : 뒤란 뒤잽이줄 : 배를 선창에 묶어두는 밧줄 들뿌리 : 팬티 따발 : 똬리 ◐  북한의 함경도 방언 - 동물.   강아지(강생이) 고양이(고애,고앵이) 꿩(산닭) 나비(나붕이) 노루(놀가지,놀기,놀갱이)  닭(달기) 독수리(닥수리,독소리,독술) 돼지(뒈지,도티) 딱따구리(가막두거리,가막조가리,닥닥새,뚝뚝새) 망아지(매지,메아지) 메기(메사구)  메추리(모치래기) 물오징어(오중어)   송사리(눈젱이,뾰돌치) 송아지(쇄지,새지) 암말(피매,피매말) 암소(암세) 암캐(앙캐) 암코양이(암쾌) 암퇘지(피게) 염소(넘소,맴소,염쇠,염세) 올챙이(올채)  제비(지비) 종달새(종지리,예조리) 진드기(진둥개) 표범(아롱범)  황소(둥글쇠) ...       답변추천해요1추천자 목록 컴퓨터는 슬기틀, 도넛은 가락지빵, 바쁘다는 힘들다, 계란말이는 닭알말이 등이 있어요.  
1604    쉼시간 - 땡 땡 땡... 통일되여야 할 우리 말들 댓글:  조회:5210  추천:0  2015-12-07
방부제.....냄새 막이약        계모.....후 어머니 캠페인.....깜빠니아             가발.....덧 머리 단비.........꿀비                  레코드...소리판 볼펜.........원 주필               오리발...발가락 사이막 분유.........가루 젖                이혼모...해방 처녀 주부.........가부너 성             도넛.......가락지 빵 거짓말.....꽝 포                     아이스크림.....얼음 보숭이 변소.........위생실                  건달.......날 총각 생리통....달거리 아픔              서랍......빼랍 사망율......죽는율                    사팔눈.....삘눈 수제비.....뜨더국                     부동액....겨울 기름 고철......헌쇠                           장인.....가시 아버지 부래지어...젖싸게.가슴띠.   남한말 북한말 마네킹 마스카라 마스크 만장일치 만화 말다툼 맞벌이 세대 매우 다급하다 맷돌 메어꽂다 멜빵 멜빵바지 명란젓 멸균 명암 모눈종이 몸틀 눈썹먹 얼굴가리개 전원일치 이야기그림 입다툼 직장세대 급해맞다 망돌 메여꼰지다 멜바,질바 멜끈바지 알밥젓 균깡그리죽이기 검밝기 채눈종이   남한말 북한말 마네킹 마스카라 마스크 만장일치 만화 말다툼 맞벌이 세대 매우 다급하다 맷돌 메어꽂다 멜빵 멜빵바지 명란젓 멸균 명암 모눈종이 몸틀 눈썹먹 얼굴가리개 전원일치 이야기그림 입다툼 직장세대 급해맞다 망돌 메여꼰지다 멜바,질바 멜끈바지 알밥젓 균깡그리죽이기 검밝기 채눈종이   남한말 북한말 모자이크 목돈 묘책 무대 막 무상 교육 무선 호출기 무심결 무안을 당하다 문맹자 문장 무지개 오리발 물개 물에 만 밥 뭉게구름 뮤지컬 쪽무늬그림 주먹돈 묘득 주름막 면비교육 주머니종 무중 꼴(을) 먹다 글장님 글토막 색동다리 발가락사이막 바다개 무랍 더미구름 가무이야기     남한말 북한말 미숙아 미역국을 먹다 미풍 미혼모 민간인 민속 놀이 밑줄 달못찬아이 락제국을 먹다 가능바람 해방처녀 사회사람 민간오락 아래줄       남한말 북한말 바로 정면으로 박살나다 반격 반딧불이 반죽음 반찬 반환점 방부제 방음벽 방직공장 방화벽 배낭 배드민턴 배수 배웅하다 들창코 면바로 박산나다 반타격 불벌레 얼죽음 찔게 돌아오는점 냄새막이약 소리막이벽 직포공장 불막이벽 멜가방 바드민톤 곱절수 냄내다 발딱코     남한말 북한말 벌집 베란다 베어링 벼락부자  벼 타작 변태 보름달 보온성 보온재 보조개 보증 수표 보트 복어 볶음밥 볼펜  (눈을)부릅뜨다 벌둥지 내민층대 축받치개 갑작부자 벼바심 모습갈이 동근달 따슴성 열막이감 오목샘 지불행표 젓기배 보가지 기름밥 원주필 흡뜨다     남한말 북한말 부산을 피우다 분유 불도저 브래지어 블라우스 비석 비염 비중 빙설 빨리 빼아닮다 호출기 설레발을 치다 가루젖 평토기 젖싸개,가슴띠 양복적삼 비돌 코염 견줌무게 얼음눈 날래 먹고닮다 주머니종     남한말 북한말 사과 잼 사과 주스 사망률 사팔눈 사실혼 사탕수수 산란기 산란율 산책로 살균 살금살금 걷다 삼복철 삼투압 삿대질 상여금 상이 군인 상추 (밤을)새우다 색다르다 생리통 생맥주 생활 필수품 샹들리에 서랍 서명하다 서커스 선수촌 사과단졸임 사과단물 죽는률 삘눈 뜨게부부 단수수 알낳이철 알낳이률 거님길 균죽이기 발면발면걷다 복거리 스밈압력 손가락총질 가급금 영예군인 부루 패다 맛다르다 달거리아픔 날맥주 인민소모품 무리등 빼람 수표하다 교예 체육촌     남한말 북한말 선잠 세배 세탁소 센터링 셋방살이 소꿉친구 소라 소매치기 소장 소풍 소프라노 소형 택시 속눈썹 속셈 속임수 손도장 손짓 솜털 수력 수면제 수상 스키 수신호 수영복 수유실 수중 발레 수학여행 수화 숙면 숫잠 설인사 빨래집 중앙으로꺽어차기 동거살이 송아지동무 바다골뱅이 따기군 가는밸 들모임 녀성고음 발바리차 살눈섭 속구구 흐림수 수장 손세 보슴털 물힘 잠약 물스키 손신호 헤염옷 젖먹임칸 예술헤염 배움나들이 손가락말 속잠       남한말 북한말 숙소 순환도로 숨바꼭질 스카이 라운지 스카프 스커트 스크랩북 스킨 로션 스타킹 스타 플레이어 스튜어디스 스파이크 슬리퍼 승려 승무 시동생 시디 플레이어 시럽 시집간 딸 식혜 신기록 보유자 실격 실내화 싱크대 잔돈 쓸개 초대소 륜환도로 숨기내기 전망식당 목수건 양복치마 오림책 살물결 하루살이 양말 기둥선수 비행안내원 순간타격 끌신 중선생 중춤 적은이 레이자전축 단물약,진단물 집난이 밥감주 체육명수 자격잃기 방안신 가시대 부스럭돈 열주머니                 남한말 북한말 모자이크 목돈 묘책 무대 막 무상 교육 무선 호출기 무심결 무안을 당하다 문맹자 문장 무지개 오리발 물개 물에 만 밥 뭉게구름 뮤지컬 쪽무늬그림 주먹돈 묘득 주름막 면비교육 주머니종 무중 꼴(을) 먹다 글장님 글토막 색동다리 발가락사이막 바다개 무랍 더미구름 가무이야기     남한말 북한말 미숙아 미역국을 먹다 미풍 미혼모 민간인 민속 놀이 밑줄 달못찬아이 락제국을 먹다 가능바람 해방처녀 사회사람 민간오락 아래줄       남한말 북한말 바로 정면으로 박살나다 반격 반딧불이 반죽음 반찬 반환점 방부제 방음벽 방직공장 방화벽 배낭 배드민턴 배수 배웅하다 들창코 면바로 박산나다 반타격 불벌레 얼죽음 찔게 돌아오는점 냄새막이약 소리막이벽 직포공장 불막이벽 멜가방 바드민톤 곱절수 냄내다 발딱코     남한말 북한말 벌집 베란다 베어링 벼락부자  벼 타작 변태 보름달 보온성 보온재 보조개 보증 수표 보트 복어 볶음밥 볼펜  (눈을)부릅뜨다 벌둥지 내민층대 축받치개 갑작부자 벼바심 모습갈이 동근달 따슴성 열막이감 오목샘 지불행표 젓기배 보가지 기름밥 원주필 흡뜨다     남한말 북한말 부산을 피우다 분유 불도저 브래지어 블라우스 비석 비염 비중 빙설 빨리 빼아닮다 호출기 설레발을 치다 가루젖 평토기 젖싸개,가슴띠 양복적삼 비돌 코염 견줌무게 얼음눈 날래 먹고닮다 주머니종     남한말 북한말 사과 잼 사과 주스 사망률 사팔눈 사실혼 사탕수수 산란기 산란율 산책로 살균 살금살금 걷다 삼복철 삼투압 삿대질 상여금 상이 군인 상추 (밤을)새우다 색다르다 생리통 생맥주 생활 필수품 샹들리에 서랍 서명하다 서커스 선수촌 사과단졸임 사과단물 죽는률 삘눈 뜨게부부 단수수 알낳이철 알낳이률 거님길 균죽이기 발면발면걷다 복거리 스밈압력 손가락총질 가급금 영예군인 부루 패다 맛다르다 달거리아픔 날맥주 인민소모품 무리등 빼람 수표하다 교예 체육촌     남한말 북한말 선잠 세배 세탁소 센터링 셋방살이 소꿉친구 소라 소매치기 소장 소풍 소프라노 소형 택시 속눈썹 속셈 속임수 손도장 손짓 솜털 수력 수면제 수상 스키 수신호 수영복 수유실 수중 발레 수학여행 수화 숙면 숫잠 설인사 빨래집 중앙으로꺽어차기 동거살이 송아지동무 바다골뱅이 따기군 가는밸 들모임 녀성고음 발바리차 살눈섭 속구구 흐림수 수장 손세 보슴털 물힘 잠약 물스키 손신호 헤염옷 젖먹임칸 예술헤염 배움나들이 손가락말 속잠       남한말 북한말 숙소 순환도로 숨바꼭질 스카이 라운지 스카프 스커트 스크랩북 스킨 로션 스타킹 스타 플레이어 스튜어디스 스파이크 슬리퍼 승려 승무 시동생 시디 플레이어 시럽 시집간 딸 식혜 신기록 보유자 실격 실내화 싱크대 잔돈 쓸개 초대소 륜환도로 숨기내기 전망식당 목수건 양복치마 오림책 살물결 하루살이 양말 기둥선수 비행안내원 순간타격 끌신 중선생 중춤 적은이 레이자전축 단물약,진단물 집난이 밥감주 체육명수 자격잃기 방안신 가시대 부스럭돈 열주머니                
1603    쉼시간 - 땡 땡 땡...무게 17톤짜리 탱크로 학교 등교 댓글:  조회:5654  추천:0  2015-12-07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  =   한 영국인 아버지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두 아들을 학교에 늦지 않게 바래다주기 위해 무게 17톤의 탱크를 제작했다. 밀리터리 마니아 닉 미드(Nick Mead) 씨는 200만 파운드 상당의 합법적으로 주행 가능한 탱크 130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두 아들은 매일 탱크로 등교가 가능하다. 이들의 ‘승용차’, 즉 탱크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폭설에도 끄떡없다. 닉은 “아들의 친구들이 탱크를 볼 때마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고 본인도 다른 부모의 그런 놀란 반응을 즐긴다”라고 말했다.        
1602    각 나라별 = 감사합니다는?!... 댓글:  조회:6687  추천:0  2015-12-07
단동(丹東)역앞에서... ========================= 심양에서... ---------------------------------------------------------------- 河南省 通許縣 주스강 논밭 한가운데 세우던 중의 毛澤東 동상 철거 하기에 이르러... 2016 01 09. ----------------------------------------------- 감사합니다 영/떙큐-Thank you 독일/ 단케 Danke 불/감사합니다 Merci 불/메르시 Merci 이탈리아/ 그라트에 Grazie 서/그라시아스 Gracias 서/그라시아스 Gracias 라/베네・파키스 bene facis 희/에우카리스트ευχαριστω 희/에프 탄력 파업ευχαριστω 희/사스에후하리스트파라포리(정중) 러/ 스파스바 러/ 스파시보 러/ 시파시바 네델란드어/ 덩크-웰 DANKUEWL 中 쎄쎄~ 謝謝 広 응코이 唔該 広 토-체 多謝 타이/코브쿤 타이/코브쿤 타이/코브쿤마크(정중) 말레이어/ 테리마카세이 Terima kasih 인드네시아/테리마카시 Terima kasih 스와히리어/ 아산테 Asante 덴마크어/ 만게탁크 Mange Tak (많은 감사) 덴마크어/ 만게타크 Mange tak 스웨덴/쿠소문케 스웨덴어/ 탁 Tack 노르웨이어/ 만게탁크 Mangetakk 노르웨이어/ 트센탁크 tusen takk (천의 감사) 노르웨이어/ 탁 Takk 핀란드/트크시아파르욘/키 토스 핀란드어/ 키 토스 Kiitos 아라비아/쇼코란 아라비아/쇼크란 shokran 아라비아/슈크란 베트남어/ 슨크란 아라비아/슨크란쟈지란(정중) 아라비아/무타산킬 mu tashakkir(남성이 말한다) 아라비아/무타산키라 mu tashakkira(여성이 말한다) 페르시아어/ 모타산케람 터키어/ 테시엑큐르에데림 tesekkur ederim 터키어/ 테시큐르에데림 tesekkur ederim 터키어/ 테시크큐르에데림 tesekkur ederim 베트남어 /캠 온 Cam o'n 베트남어/ 잣트캄온 Ra't cam on(정중) 헤브라이/트다 헤브라이/트다라바(정중) 헤브라이/트다・러버 몬골/야르라라 BAYARLALAA 불가리아어/ 브라고다랴 불가리아어/ 무노고브라고랴(정중) 불가리아어 /즈드라베이이테 알바니아어/ 파레민데리트 에스토니아어/ 아이타 크로아티아어 /후바라 슬로바키아어/ 잭 M 슬로베니아어/ 후아라 세르비아어/ 드후바라 체코어/ 제크이 헝가리어(마쟈르어)/ 쿠스눔 폴란드어/ 젠크이 보스니아어 /후바라 마케도니아어/ 브라고다람 몬테네그로어 /후바라 라트비아어/ 파르디에스 리투아니아어/ 아츄 루마니아어/ 무룻메이스크 multumesc 루마니아어 /무르트메스크 multumesc 한/감사합니다 포르트갈/오브리가드 Obrigado 스와히리어/ 아산테 asante 하와이어/ 마하로 mahalo 하와이어/ 마하로・누이・로아 mahalo nui loa (정중하게)  
1601    띠? ... 댓글:  조회:4633  추천:0  2015-12-06
  띠해(生肖年)는 12개 띠(十二生肖)에 12개 지지(十二地支)를 결합해 년대를 기재하는 방법이다. 띠와 지지의 짝관계는 늦어도 중국 동한시기 왕충(东汉王充)의 "론형(论衡)"이란 저작에서 최종 확정되였고 지지로 년대를 기재하는 통속적인 표현으로 되였다. 띠의 시작점은 결국 지지로 년대를 기재할 때의 시작점이며 두가지 계산법이 존재한다. 한가지 방법은 음력설을 시작으로 하는 계산법이다. 중국전통력법에서는 "정월삭(正月朔)"을 적용, 즉 음력 정월 초하루를 띠해의 시작점으로 했다. 이는 력대 정사와 공식력서, 그리고 현대의 신문과 종이달력에서 많이 찾아볼수있다. 다른 한가지 방법은 립춘을 시작으로 하는 계산법이다. 사실상 중국달력간지[干支,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시간기재체계는 중국만의 독특한 양력력법체계이며 간지력(혹은 절기력, 중국의 양력)이라고 말한다. 간지력은 립춘을 시작으로 해서 대한으로 끝나는 24절기는 정확히 양력날자와 일치하게 된다. 태양의 1년 변화중에 가장 먼저 드는 절기가 립춘이다. 립춘은 봄에 해당한다. 봄은 1년 춘하추동 사계절중 첫번째 계절로 음력 1월, 2월, 3월에 해당한다. 봄에 해당되는 절기는 립춘, 우수, 경칩, 춘분이다. 이중 정월에 드는 절기가 립춘과 우수이다. 종합하면 1년은 봄에서 시작되고 봄은 정월에서 시작되고 24절기는 정월의 립춘절기에서 시작된다. 이런 리유로 립춘일시가 띠를 구별하는 기준점이 된다. 음력설이 지난 뒤에 립춘이 들어오면 새해가 되여도 띠는 아직 바뀌지 않게 된다. 반대로 음력설이 되기전에 립춘이 들어오는 경우에는 띠는 이미 바뀐 상태가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결론: 띠의 시작점을 음력설로 기준하거나 립춘으로 기준하거나 대부분 사람들에 대해서는 큰 영향이 없다. 하지만 출생일이 음력설과 립춘 두가지 기준사이에 놓인 사람들이라면 가문과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1600    쉬여가는 페이지 - "독일축구의 고향 = 라이프찌히" 댓글:  조회:4890  추천:0  2015-12-06
. ------------------------------- ‘독일축구의 고향’ 라이프찌히 라이프찌히는 과거 동독에 속한 유서깊은 도시로 역사와 음악, 학문의 중심지. 독일축구협회가 1900년 이곳 라이프찌히에서 창립되었으니 이곳은 독일 축구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1903년에 첫 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라이프찌히 팀이 우승을 했다. 라이프찌히 팀은 독일 분데스리가에 속한 유일한 옛 동독 지역의 팀,  ===================================================== 라이프찌히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는 1990년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  이곳에서는 1989년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촛불집회가 열렸는데 이것이 독일 통일의 출발점이 되었다. 1년간의 촛불집회로 민주화 열기가 결집되어 결국에는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통일이 된 것이다. 라이프찌히에는 성 니콜라스 교회와 함께 성 토마스 교회가 유명하다. 성 토마스 교회는 바하와 인연이 깊다. 바하는 이 교회에서 27년간 칸토르(음악 감독)로서 성가대를 지휘하며 수많은 오라토리오와 칸타타를 작곡했다. 이 당시만 해도 바하는 유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하가 죽은 100년 후 멘델스존이 바하 음악의 위대함을 ‘발굴’해냄으로써 비로소 바하의 천재성이 인정되어, 오늘날 바하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하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20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9명만 생존하고 나머지는 일찍 죽었다. 바하의 두 번째 부인은 말년에 극빈의 생활을 했는데 위대한 음악가 가족들의 비참한 생활은 가슴 아픈 일이다. 역사상 제일 위대했던 음악가가 그토록 비참한 생활을 한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바하의 무덤은 성 토마스 교회 안에 있다. 성직자가 아닌데도 교회 제단(altar room)에 묻혀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라이프찌히 시내에 있는 바하 박물관은 너무 소박(humble)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라이프찌히와 인연이 깊다. 그는 1519년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한달이 넘게 로마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학자들과 신앙 논쟁을 펼침으로써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루터는 성 토마스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철학자 니체는 1844년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슈바이처는 25세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2년간 성 니콜라스 교회의 목사로 일했다. 29세 때에는 성 토마스 교회에 딸린 신학교의 기숙사 사감을 1년간 하다가 아프리카 선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종교와 예술의 향기가 짙은 도시 라이프찌히.  
1599    쉬여가는 페이지 - 세계일주... 댓글:  조회:5136  추천:0  2015-12-06
[ 2015년 12월 09일 08시 33분   조회:900 ]     북경 공기 그야말로 "살인적". 사진은 북경의 스모그 전과 후 대비한 사진. ======================================================= 아시아 1. 대한민국 : 교육열 세계1위 2. 조선 : 사상유래없는 => (49년독재) 3. 그루지야 : 그루지야내 남오세티야 분쟁발발 4. 네팔 : 세계에서 가장높은 산을 보유한 나라 에베레스트(8848m) 5. 라오스 : 이웃 베트남과 운명을 같이하는 나라 (프랑스식민지, 공산화가 베트남과 같이 이루어짐) 6. 레바논 : 서남아시아 회교권 국가중 유일하게 기독교 비율이 높은 지역(38%) 7. 말레이시아 : 자존심이 강한 나라(한때 제일높은 건물인 페트로나스 타워가 있었음) 8. 몰디브 : 아시아에서 인구가 제일 적고 땅이 제일 작은 나라(면적 : 300km2 / 인구 : 27만3천명) 9. 몽골 : 인구밀도가 가장 희박한 나라 ( km2 당 1명 반면에 대한민국은472명 ) 10. 미얀마 : 민족분쟁과 이념분쟁으로 인권이 억압받는 곳 11. 바레인 : 작은 나라지만 축구 잘하는 나라 12. 방글라데시 : 풍수해로 많이 죽는 나라 (1970년 태풍으로 100만명 사망) 13. 베트남 : 강대국을 이긴 나라 (1946~1954년 프랑스, 1960~1975년 미국, 1979년 중국과의 전쟁) 14. 부탄 : 평등주의가 가장 강한 나라  15. 브루나이 : 석유로 잘사는 나라 세금이 없는 나라 16. 사우디 아라비아 : 가장 많이 석유를 수출하는 나라 17. 스리랑카 : 타종교 탄압이 심한 불교국가 18. 시리아 : 과거에는 대단했던 나라(앗시리아) 지금은 허접한 나라 19. 싱가포르 : 중국인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77.5%) 20. 아랍에미리트 : 한때 국민소득이 세계에서 제일 높았던 석유부국(한때 1인당 소득이 4만불 이었음) 21. 아르메니아 : 중앙아시아 유일의 기독교국 22. 아제르바이잔 : 289명이 사망한 지하철 사고가 있었음 23. 아프가니스탄 : 국민소득이 제일 적은 나라 (1989년 200$) 24. 예멘 : 남예멘 북예멘이 통일 했지만 시끄러웠던 나라 25. 오만 : 중동국 중에서 관광할만한 나라 26. 요르단 : 유일하게 이라크와 친했던 나라(그나라 국왕 이름도 후세인)  27. 우즈베키스탄 : 강제이주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198,000명) 28. 이라크 : 잘못된 객기를 부리다 쪽박찬 나라( 이란- 이라크전, 걸프전 ) 29. 이란 : 중동국중 반미정서가 가장 심했던 나라 30. 이스라엘 : 오랜 기간 동안 없었다가 생긴 나라(2000년 동안), 가장 시끄러운 나라 31. 인도 : 힌두교국가 32. 인도네시아 : 가장 섬이 많은 나라 33. 일본 : 경제력이 많은 것에 비해 권한 및 인지도가 적은 나라(경제동물) 34. 중국 : 가장 많은 나라와 국경을 접한 나라(16개국), 가장 많은 인구(13억) 35. 카자흐스탄 : 구 소련 독립국 중 가장 큰 나라(2725000km2) 36. 카타르 : 국토 면적에 비해 석유 가스가 많은 나라 37. 캄보디아 : 킬링필드 학살이 있었던 나라(700만 인구중 1/3이 희생) 38. 쿠웨이트 : 국민들에게 세금 걷는건 고사하고 교육비까지 주는 나라 39. 키르키스스탄 : 고대 북방에 세워진 배달국 조선과 관련이 높은 나라(출토 유물이 유사함) 40. 키프로스 : 차기 중동 분쟁의 씨앗 (키프로스 분쟁) 41. 타이 : 귀여운 코끼리가 많은 나라 42. 터키 : 아시아이면서 유럽이 되기 위해 안달인 나라 43. 투르크 메니스탄 : 자원이 많아서 서방 여러 국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나라 44. 타지키스탄 : 험한 산이 대부분인 국가 45. 파키스탄 : 핵개발을 하면서 대테러전 때 미국과 협력하여 별로 욕을 안먹은 국가 46. 필리핀 : 대통령선거 할 때 가장 오래하는 국가(1달 걸린적도 있음) 47. 동티모르 : 정식국가는 아니지만 이미 인도네시아와 떨어져 딴 살림을 차림 아프리카 48. 가나 : 초콜렛으로 유명한 나라(가나 쵸콜렛) 49. 가봉 : 아프리카에서 정확하게 적도에 위치한 나라 50. 감비아 : 아프리카 어디에 있는지 찾기 힘든 나라 51. 기니 : 알루미늄의 원료인 보크사이트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 (세계산출량의19%) 52. 기니비사우 : 기니위에 작은 나라 53. 나미비아 : 가장 오랬동안 UN 신탁통치를 받은 나라(45년) 54. 나이지리아 : 아프리카 최대 석유 생산국 그러나 가난한 나라 55. 남아프리카 공화국 : 흑백갈등의 최전선 56. 니제르 : 인도 깃발과 비슷한 나라 57. 라이베리아 : 상선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 58. 레소토 : 하나의 큰 나라안에 둘러싸인 나라(지도보면 알수있음) 59. 르완다 : 종족갈등으로 100만이상의 주민이 학살된 나라 60. 리비아 : 동아건설을 일거리를 준 나라(세계최대 대수로 공사) 61. 마다가스카르 : 아프리카의 큰 섬나라로 히틀러가 유대인국가 설립을 추진하려 했던 곳 62. 말라위 : 수도이름이 특이한 나라(릴롱궤) 63. 말리 : 사막이 대부분 이어서 썰렁한 나라 64. 모로코 : 인접국인 서사하라를 먹고도 욕을 덜먹은 나라 65. 모리셔스 : 관광가서 재미있게 놀수 있는 나라 66. 모리타니 : 아프리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적은 나라(km2 당 2명) 67. 모잠비크 : 독일이 지배했던 나라 68. 베냉 : 유럽인이 아프리카 황금을 수탈했던 해안 국가 69. 보츠와나 : 부시맨 거주지 70. 부룬디 : 기근이 심했던 지역 71. 부르키나파소 : 사하라 사막의 경계 72. 상투메프린시폐 : 작은 섬나라 73. 세네갈 : 프랑스 프로축구 구단에 많이 진출해 있던 나라 74. 세일셸 : 아프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 (지도에서 못찾겠음) 75. 소말리아 : 수많은 아프리카 내전중에 미국이 개입했던 나라 76. 수단 : 아프리카에서 제일 큰 나라 77. 스와질란드 : 아프리카에서 제일 평화로운 나라 78. 시에라리온 : 반란이 잦은 나라 79. 알제리 : 아프리카중 프랑스와 가까웠던 나라 80. 앙골라 : 1976년 내전 81. 에리트레아 : 에티오피아와 떨어져서 딴 살림 차린 나라 82. 에티오피아 : 한국전쟁때 대한민국을 도와준 나라 83. 우간다 : 이나라 이름을 들으면 소가 걸어가는 것이 생각남 84. 이집트 :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곳 85. 잠비아 : 아프리카국중 인구 증가율이 낮은 나라(연0.7%) 86. 적도기니 : 적도에 있는 기니 87. 중앙아프리카공화국 : 진짜 아프리카 중앙에 있는 나라 88. 지부티 :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음 89. 짐바브웨 : 깃발이 특이한 나라 90. 차드 :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가장눈에 먼저 들어오는 나라(왜그럴까?) 91. 카메룬 : 축구 잘하는 나라 92. 카보베르데 : 난생처 음 들어본 나라 93. 케냐 : 동물의 왕국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라 94. 코모로 : 모로코와 헷갈릴 뻔했던 나라 95. 코티드부아르 : 한때 상아를 반출을 많이 한 나라 96. 콩고 : 자이르라는 다른 이름이 있는 나라, 콩고분쟁(후투족 VS 투치족) 97. 콩고민주공화국 : 아프리카에서 국민소득이 제일 낮은 나라 (110$) 98. 탄자니아 : 세계적으로 깊은 호수인 탕가니카호(수심:1470m)가 있는 나라 99. 토고 : 처절하게 독립운동을 한 나라 100. 튀니지 : 박쥐국민(2차대전때 프랑스편 들었다가 독일편 들고 다시 미국편 들고) 유럽 101. 그리스 : 유럽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국가 102. 네델란드 : 유럽인중 유명한 장사꾼, 외국어 잘하는 나라(토플, 토익1등) 103. 노르웨이 : 노르만해적국가 104. 덴마크 : 안데르센이라는 동화작가를 탄생시킨 나라 105. 독일 : 유럽에서 가장 경제력이 있는 나라 106.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와 더블어 인간띠로 소련이 대항했던 나라 107. 러시아 :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17075000km2) 108. 루마니아 : 드라큘라백작 109. 룩셈부르크 : 1인당 국민소득 세계1위(1996년 45360$) 110. 리투아니아 : 왕년에 잘나갔던 나라(15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 111. 리히텐슈타인 :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작지만 잘 사는 나라 112. 마케도니아 : 유고내전의 피해가 적었던 유고연방국 113. 모나코 : 세금이 없어서 부유층 사람들이 도피처가 되는 지중해 휴양지 114. 몰도바 : 루마니아계주민과 러시아계주민간의 불화로 조만간 분리될듯 115. 몰타 : 가장 낮은 섬 (1m) 116. 바티칸 : 가장 작지만 인지도가 높은 나라 117. 벨기에 : 스머프만화의 고향, 동화 플란다스개의 고장 118. 벨로루시 : 드 넓은 평원의 나라 119.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 유고내전의 진원지 120. 불가리아 : 웰빙국가, 장수국가 121. 산마리도 : 이탈리아내의 작은 소왕국 122. 스웨덴 : 자동차공업국(볼보, 사브) 123. 스위스 : 영구중립국 124. 슬로바키아 : 체코로 부터 평화롭게 독립한 나라 125. 슬로베니아 : 슬로베니아인이 역사적으로 처음 세운 나라 126. 아이슬란드 : 북극의 어업국가 127. 아일랜드 : 미국이민 비율이 높았던 나라 128. 안도라 : 프랑스, 스페인국경의 작은 산골 왕국 129. 알바니아 : 테레사 수녀의 고향 130. 에스토니아 : 2차대전때 독일과 협력함 131. 에스파냐 : 재미있게 놀줄아는 나라 132. 영국 : 유럽의 해양강국이었던 나라 133. 오스트리아(오지리) : 유명한 음악가의 나라(요한 슈트라우스, 모짜르트) 134. 우크라이나 : 곡창지대, 체르노빌 핵발전소 135. 유고슬라비아 : 세르비아라고 불리우며 유고연방의 실세 136. 이탈리아 : 로마 문명의 나라, 장화같은 나라 137. 체코 : 과거 공산국들중 공업이 잘 발달한 지역 138. 크로아티아 : 유고내전에서 활약한 나라 139. 포르투칼 : 최초의 식민지 개척 140. 폴란드 : 포도가 생각나게 하는나라 141. 프랑스 : 에펠탑, 해외 망명인사의 도피처 142. 핀란드 : 추위에 가장 강한 사람 143. 헝가리 : 소련의 위성국 중 대소항쟁을 강하게 했던 나라 아메리카 144. 미국 : 제일 쎈 나라이자 제일 욕 많이 먹는 나라 145. 캐나다 : 많은 공기, 시원한 계절 146. 가이아나 : 기묘한 바위산(로라이마산) 147. 과테말라 : ...(과태료 물지 말라... ㅋ) 148. 그레나다 : 미국의 침공을 받은 나라 149. 니카라과 : 미국 다음으로 야구를 잘 하는 나라 150. 도미니카 공화국 : 1965년 도미니카 내란 151. 도미니카 연방 : 프랑스로 부터 독립한 작은 나라 152. 멕시코 : 엄청 큰 밀집모자 쓰는 나라 153. 바베이도스 : 베네수엘라 위의 섬 나라 154. 바하마 : 버뮤다 삼각지역의 나라 155. 볼리바르베네수엘라 : 보통 베네수엘라라고 부르며 미국이 석유를 많이 수입 하는 곳 156. 벨리즈 : 맥시코 끝에 붙은 나라 157. 볼리비아 : 세계에서 제일 높은 호수 티티카카호가 있는나라 158. 브라질 : 삼바, 축구, 제일 넓은 정글 159. 세인트 루시아, 160. 세인빈센트그레나딘, 161. 세인트 크리스토퍼 네비슨 : 사람이름의 섬  162. 수리남 : 과거 미스월드 대회때 꼭 빠지지 않았던 나라 163. 아르헨티나 :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한 나라 164. 아이티 : 흑인 노예가 세운 국가 165. 엔티가바부다 : 섬 나라 166. 에콰도르 : 한국인이 중앙아메리카에서 많이 사는 곳 167. 엘살바도르 : 1979년 엘살바도르 내전(로메르신부의 활약) 168. 온두라스 : 마야문명 169. 우루과이 : 우루과이 라운드 170. 자메이카 : 육상 잘하는 나라 171. 칠레 : 제일긴 나라 172. 코스타리카 : 축구 때문에 싸운 나라 173. 콜롬비아 : 콜롬비아 화산으로 많이죽음 174. 쿠바 : 미국과 제일 가까운 사회주의 나라 175. 트리니다드토바고 : 서인도제도의 남쪽끝섬 176. 파나마 : 두개 대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 177. 파라과이 : 세계에서 가장 수량이 많은 이구아수 폭포 178. 페루 : 잉카 원주민들이 많이 사는 나라 오세아니아 179. 나우루 : 산도 없는 작은 섬 하나 달랑 180. 뉴질랜드 : 반지의 제왕 촬영현장 181. 마셜 : 2차대전 미국장군이름 182. 미크로네시아 : 작은 섬으로만 무진장 넓게 퍼진 나라 183. 바누아투 : 교통수단이 카누인 나라 184. 사모아 : 하루가 늦게 끝나는 곳 185. 솔로몬 : 아름다운 산호초 186. 오스트레일리아 : 백인우월주의  187. 키리비시 : 원양어장 188. 통가 : 바로옆에 무진장 깊은 바다(-10800m) 189. 투발루 : 지구온난화로 가장 긴장하는 나라 190. 파푸아뉴기니 : 2차대전때 일본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이 격전하던 곳 191. 팔라우 : 2차대전때 레이터 해전이 일어난 곳 192. 피지 : 태평양섬들 중에 높은 산을 가진나라(빅토리아산)
  아랍어 : الجمهورية الإسلامية الموريتانية(al-Jumhūriyyah al-ʾIslāmiyyah al-Mūrītāniyyah) 프랑스어 : République Islamique de Mauritanie 공식명칭 모리타니 이슬람 공화국 면적 1,030,700km² 인구 3,596,702명 (2015년 통계) 수도 누악쇼트(نواكشوط) 공용어 아랍어 통화 모리타니 우기야 1인당 GDP 명목 1,157$, PPP 2,121$ (2012년 통계) 민족구성 아랍계 30%, 혼혈 40%, 흑인 30% 종교구성 대부분 이슬람 아프리카 국가 모리타니의 대통령이 축구경기를 강제로 중단시켰다.[사진=Guardian]   [아시아경제 온라인이슈팀];  아프리카 모리타니 대통령이 축구 경기를 관람하던 중 경기가 지루하다며 승부차기로 경기를 끝내도록 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2015년 12월 2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무함마드 압델 아지즈 대통령은 지난 주말 축구 슈퍼컵 테이라크-제이나팀과 크사르팀간 결승전이 1대1로 비긴 상태에서 지루하게 계속되자 후반 17분경 경기를 중단시키고 승부차기를 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판이 돌연 승부차기를 하기로 하자, 선수와 팬들 모두 어리둥절했고 압델 아지즈 대통령의 지시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분노 여론이 확산됐다.  이에 모리타니 축구협회는 대통령과는 무관하며 두 팀의 합의로 이뤄진 결정이기 때문에 축구 규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나섰다. 또한 모리타니 축구협회 회장은 2011년부터 계속되어온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경기이며 공식 경기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 [골닷컴] = 아프리카 모리타니에서 후반 20분 만에 경기가 종료되고 승부차기가 진행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타파로그 제이나와 라크스르의 모리타니 슈퍼컵 경기. 많은 기대를 모은 만큼 압델 아지즈 대통령까지 직접 경기장을 찾았다. 전반이 끝난 뒤에야 도착한 아지즈 대통령은 경기가 지루했는지 자신의 일정이 바쁘다며 후반 20분 만에 경기 종료를 요청했다. 1:1 상황이던 경기는 대통령의 요청대로 곧바로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바쁘다던 아지즈 대통령은 결국 우승을 차지한 타파로그 선수들에게 우승 트로피까지 수여하고 나서 경기장을 떠났다. 경기 후 모리타니 축구협회 회장은 "경기를 일찍 끝내는 건 규정 위반이 아니다. 어차피 단판 경기였고 다른 대회와 연관이 있지도 않았다. 축구는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한 유연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경기"라고 밝혔다.  
1597    (자료) 중국 연변작가협회 歷史沿革 / 단군문학상 댓글:  조회:13055  추천:0  2015-12-05
      地址: 吉林省延吉市公園路653號  Tel: 0433-2733347         组织机构: 办公室、创作联络部、创作研究部、文学创作室、延边民族文学院。  小说创作委员会、诗歌创作委员会、散文创作委员会、儿童文学创作委员会、评论创作委员会、翻译创作委员会、汉文创作委员会、北京地区创作委员会、辽宁地区创作委员会、山东地区创作委员会、哈尔滨地区创作委员会、牡丹江地区创作委员会、长春地区创作委员会、吉林地区创作委员会、通化地区创作委员会、南方地区创作委员会 等 16个专门创作委员会。   历史沿革: 1956年8月15日,在吉林省延吉市创立。是中国作家协会的直属分会,全称为中国作家协会延边分 会。1996年8月15日,根据有关社团管理的规定,更名为延边作家协会。  1956年第一届主席:崔采 1959年第二届主席:李羲一  1961年第三届主席:曾延淑 1978年第四任主席:任晓远 1982年第四届主席:金哲 1985年第五届主席:李根全  1993年第六届主席:赵成日 1998年第七届主席:金学泉 2007年第八届主席:许龙锡   现任主席:崔国哲(主持工作) 本会创立59年来共召开了九次代表大会。现有会员675名,朝鲜族581名,非朝鲜族94名,理事94名,中国作家协会总会会员54名。   延边作家协会 主席、副主席           主席:崔国哲      专职副主席:于曜东(满族)    兼职副主席(按得票先后顺序为序): ...   办公室主任:卜美兰   文学创作室主任:孙文赫   创联部副主任:尹玉柱(主持工作)   创联部干事:郑升权   创研部主任:张春男   主办报刊:《延边文学》(朝鲜文)月刊社,1951年创刊,2010年吉新出【2010】85号文件精神,与作协脱钩,整合到延边人民出版社。 《天池小小说》(汉文)杂志社,1986年创刊。16开,64页。累计101期。2010年吉新出【2010】85号文件精神,与作协脱钩,整合到延边人民出版社。   《创作生活》(汉文,内部报刊),1986年2月创刊。 《文坛动态》(朝鲜文,内部刊物),1997年4月成立。   主办网站:2003年开办了《中国延边作家协会网站》(朝鲜文)。   2010年开办了延边作家协会机关党建网站(汉文)。 延边作家协会是中共延边州委、州政府领导下的延边各民族作家以及其它地区朝鲜族作家自愿组成的专业性人民团体,是党和政府联系广大朝鲜族作家和文学工作者的桥梁和纽带,是繁荣中国朝鲜族文学事业,加强社会主义精神文明建设的重要力量。延边作家协会系州委直属党群机关,正县级建制。 延边作家协会的历史沿革  延边作家协会的前身是中国作家协会延边分会,是经中宣部批准,由中国作家协会理事会议审议通过,于1956年8月15日在吉林省延吉市成立的。在全国地区(州)级行政区域中,延边作家协会是惟一享有省级作家协会资格的中国作家协会直属团体会员单位。延边作家协会已经走过了近60年的光辉历程,经历了八次代表大会。1996年8月15日,中国作协延边分会根据国家民政部的有关全国各省、市、自治区作协名称前面不再冠以“中国”的规定,按照中国作协的统一要求,正式更名为延边作家协会。 延边作家协会的最高权力机构是会员代表大会。根据延边作家协会的章程,延边作家协会会员代表大会每5年举行一次,选举产生同一届理事会。在延边作家协会会员代表大会闭会期间,由延边作家协会理事会负责执行本会代表大会的决议。在理事会闭会期间,由理事会选举产生的主席团负责执行延边作家协会代表大会和理事会的决议。作协的日常工作由专职主席和副主席、秘书长负责,作协设有相应的工作机构及专门委员会。 延边作家协会现有会员675人,占会员总数的85%以上是用母语创作的朝鲜族会员。延边作协会员中有中国作家协会会员54名、中国作家协会全国委员(理事)2名,荟萃了延边地区各民族以及其它省市和地区朝鲜族文学界的优秀人才。在党的民族政策光辉照耀下,经过几代人的努力,延边作协已建设成为多门类、多语种、多民族而且功能完善、门类齐全的作家协会。   延边作家协会的主要任务是:执行党对文学界的领导,组织广大的文学工作者学习马列主义、毛泽东思想、邓小平理论和“三个代表”重要思想,学习和贯彻落实党的各项文艺方针政策;组织各类文学评奖,对优秀的创作成果和创作人才,给予表彰和奖励;进行文学理论研究,开展健康的、民主的、说理的文学评论和实事求是的文学批评;发现和培养各民族文学创作、评论、编辑、翻译等多方面的新生力量,促进各民族文学的发展繁荣;增进同国内外作家的联系,推进中外文学交流,代表延边作家以及中国朝鲜族文学界参加国际文学活动;向州委和州政府反映作家的意见和要求,依据宪法和法律以及《延边作家协会章程》的规定和赋予的权利,维护会员的合法权益,为会员提供服务,为之创造宽松、自由、和谐的创作环境。 延边作家协会的职能,总体上概括起来就是:组织、联络、协调、服务。为此,延边作家协会提出了“团结、民主、鼓劲、繁荣”的奋斗目标。 延边作家协会在历史上曾经出现过像金昌杰、金学铁、李旭、金哲、李根全、金成辉、林元春, 鄭世峰等这样优秀的坚持用母语创作的朝鲜族作家,也出现过像何鸣雁、张笑天等用汉文创作的著名作家。 ===================================== (자료) 제1회 “단군문학상”평의회에 참석한 평심위원들 2015년 12월 10일 첫기 “단군문학상” 평의회가 연길에서 있었다. “단군문학상”은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와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리사회가 공동 주최한 문학상이다. 소수민족 문학 내실을 풍부히 하고 조선족 문학의 발전을 추진하는 한편 조선족 문화를 계승발양하려는데 취지를 둔 “단군문학상”은 2015년에 가동되여 2년에 한차례씩 심사평의 한다. 심사위원들은 평의 취지를 토대로 전문적 학술정신과 개인적 재능을 평가 기준으로 삼고 신중하고도 세밀하며 구체적인 심사와 토론을 거친 뒤 실명투표를 통해 9편의 수상작을 선정했다. 그중 단군문학상 대상은 결원 처리되고 소설과 산문, 시가, 보고문학, 론평, 아동문학 부문 각기 1편, 한문창작상 2편, 문학신인상 1편이 수상작 명단에 올랐다. 중국조선족 첫기 “단군문학상” 시상식은 2015년 12월 26일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에서 열린다. 수상작: 奖项수상종목 作者 작가 作品 작품 大 奖 대상 空缺 결원 小说奖 소설상 허련순 许莲顺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谁见过蝴蝶的巢 散文奖 산문상 장정일 张正一 세모의 설레임 岁暮随想 诗歌奖 시가상 김영건 金荣健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晨山问候 报告文学奖 보고문학상 리혜선 李惠善 정률성평전 郑律成评传 评论奖 론평상 장춘식 张春植 일제시기조선족이민작가연구 日据时期朝鲜族移民作家研究 儿童文学奖 아동문학상 김철호 金哲镐 작은 하늘 小小天空 汉文创作奖 한문창작상 南永前 남영전 我们从哪里来?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전용선 全勇先 소화18년 昭和18年 新人奖 신인상 구호준 具豪俊 사랑의 류통기간 爱的流通期         第一届中国朝鲜族“檀君文学奖”评委会   组 长: 崔国哲 延边作家协会主席(主持) 副组长:禹尚烈 延边大学教授、文学评论家 评 委: 崔红一  原延边作家协会副主席、小说家 崔三龙  原延边文学与艺术研究所所长 权赫律  吉林大学外国语学院副院长、文学评论家 李太福  黑龙江大学教授、文学评论家 金京勋  延边大学教授、文学评论家 金 革  延边作家协会副主席、小说家 徐振清  原延边作家协会副主席、小说家 韩锡润  原延边作家协会副主席、作家 吴相顺  中央民族大学教授、文学评论家   首届檀君文学奖评委会 2015年12月10日 ========================================= ---------- [길림신문] 2015-12-17  중국조선족문학의 최고수준을 대표하는 우수문학작품들을 엄선해 평의하는 “단군문학상(檀君文学奖)”수상자 결과가 12월 10일 평심회를 거쳐 밝혀졌다. “단군문학상”은 통일적이고 권위있고 력사에 남을 최고의 조선족문학상을 만들어 우리 작가들이 명작을 창작하도록 격려하며 조선족문학의 번영발전을 추동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학작품을 전국과 세계에 널리 알리는것을 취지로 했다. 조선민족의 시조인“단군”(檀君)으로 명명한 이 문학상은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와 단군문학상리사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중국작가협회“민족문학”잡지사, “단군문학상”기금회, 연변작가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하고있다. 단군문학상리사회는 “단군문학상” 제1회 평심범위를 새 세기가 시작된 2000년부터 2014년말까지 15년간 조선어와 한어로 창작한 우리 민족 작가들의 각 장르별 작품집을 대상했다. “단군문학상”평심조직위원회 오장권부회장에따르면 “단군문학상”은 문학상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특별히“단군문학상”리사회를 설립하고 “단군문학상조례”를 통과했으며 단군문학상 평심위원회 및 평심전문가데이터베스를 만들었다. 12월 10일 연길시에서 있은 “단군문학상”평심모임에서는 “단군문학상평심조례”의 기초우에서 “단군문학상” 평심방법을 작성하고 평심전문가데이터베스에서 선정된 11명의 평심권위들로 참다운 평심을 진행, 무기명투표가 아닌 실명제투표의 방식으로 사상 가장 엄밀하고 규범적이며 공정한 문학상평선결과를 산생시켰다. 료해에 따르면 제1회 “단군문학상”은 대다수 평심위원들이 대상으로 선정할만한 평심작품범위내 작품이 없다는데 의견을 모으면서 공백으로 남겨졌다. 대망의 제1회 “단군문학상”시상식은 오는2015년 12월 26일 룡정시 해란강극장에서 펼쳐진다. 부록: 제1회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 평심위원 명단 조장-  최국철: 연변작가협회 주석, 소설가  부조장-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 평론가 위원- 최홍일 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최삼룡: 원 연변문화예술연구소 소장 권혁률: 길림대학 외국어학원 부원장 리태복: 흑룡강대학 교수 김경훈: 연변대학 교수, 박사생도사, 교수, 평론가 김혁: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소설가 한석윤: 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아동문학가 오상순: 중앙민족대학 박사생도사, 교수, 평론가 서진청(한족): 원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 [연변일보] 2015-12-17 제1회 “단군문학상”시상식 26일 개최 예정 제1회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 시상식이 오는 26일, 룡정시 해란강대극장에서 펼쳐지게 된다.  이에 앞서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중국조선족단군문학상리사회에서 주최한 평심회의가 지난 10일, 연길시 백산호텔에서 진행됐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주석이 조장을 맡고 연변대학 박사지도교수 우상렬이 부조장을 맡았으며 연변작가협회 최홍일 부주석을 비롯한 9명이 평심위원을 맡아 공평, 공정의 원칙하에 제1회 중국조선족 “단군문학상”을 선정했다. 평의 결과 소설상에 허련순의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시가상에 김영건의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산문상에 장정일의 《세모의 설레임》, 보고문학상에 리혜선의 《정률성평전》, 평론상에 장춘식의 《일제시기조선족이민작가연구》, 아동문학상에 김철호의 《작은 하늘》, 한문상(汉文奖)에 남영전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我们从哪里来?)》와 전용선의 《소화18년(昭和18年)》, 신인상에 구호준의 《사랑의 류통기간》이 선정됐다. 이상 쟝르별상은 5만원의 상금이, 신인상은 3만원의 상금이 차례질 예정이다. 대상은 공백으로 남겨두었다.  이번 단군문학상은 평심회의기간 철저한 보안과 더불어 평심위원 실명추천을 실시하는 등 공평, 공정한 평의를 진행했다. 단군문학상은 앞으로 2년에 1회 개최될 예정이다.  리련화 기자 ---------- [흑룡강신문]2015.06.05 중국 조선족사회의 '단군문학상' 설립, 그 의미                                                          윤운걸 / 길림성 특파원                   문학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파헤치는 예술이다. 그래서 문학은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다.  민족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학의 본연을 떠나면 그 민족,  그 국가는 정신적으로 쇠퇴 할 수밖에 없다.  즉 문학을 무시하면 최악의 경지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동서고금에 엄연히 밝혀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이 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사회에서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얘기는 여기에서 더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다만 '단군문학상'이라는 이 문학상의 설립, 그 의미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필자가 연변과기대의 한 한국 유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조선족 대학생들을 많이 접촉했다는데 그들이 우리 민족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더냐 하는 질문에 “조선족 대학생들이 중국에서 살아 그런지는 모르지만 조선민족의 역사에 깜깜부지”란다. 더욱이 “어릴 적부터 한족학교를 다닌 조선족 젊은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역사를 물어보니 ‘먹고 사는데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냐’”라고 대답하더란다. 이에 느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제목과 마찬가지로 왜 신봉철씨가 '단군문학상'을 설립하기위해 노심초사했는가를 깊은 의미에서 분석하고 싶다. 신봉철 길림성 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회장(길림공상학원 당서기)은 “명작(베스트셀러)을 창작하도록 격려해 조선족 문학의 번영 발전을 추동하며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학작품을 전국은 물론 세계에 널리 알리자는 것이 바로 문학상의 설립취지이다”고 설파했고, 최국철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은 “어느 때부터 불가항력적인 객관조건으로 문학이 쇠퇴일로에 들어서면서 존립위기를 맞았고 따라서 문학위상이 바야흐로 사양되고 민족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이런 적기에 고고성을 울린 ‘단군문학상’은 그 출범부터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고 역설했고,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는 “우리민족의 조상인 단군의 이름으로 명명한 이 문학상의 의미는 굉장히 깊다”고 목소리 톤을 높인 자체가 그 의미가 굉장히 깊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문학을 재탄생시키자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신은 왜 저명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가? 바로 중국사회의 역사에 문학이란 이 메스를 과감히 댔기 때문이다. 또 모옌이 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는가? 그가 바로 중국이란 이 땅에서 성장하면서 역사제재를 문학으로 피력했기 때문이다. 또 최근에 중국작가가 쓴 작품 ‘허삼관 매혈기’가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사회에서 김학철이라는 항일투사이자 작가로서의 작품은 분명 베스트셀러이다. 즉 김학철은 가장 처절한 항일시기에 직접 항일투사로, 또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품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사회에서는 아직도 뜻 깊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의 뼈아픈 역사가 지금 후세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답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근 30여 년간 조선족 문단에서 '단군문학상'이란 최고의 문학상이 설치됐다는 것은 그 의미가 굉장히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조선민족이라는 이 유구한 역사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문학이란 이 신성한 분야에서 꽃을 피우겠다는 그 자체가 돋보인다. ==========================================================  
네,안녕하세요? 훈민정음을 정확히 알아보는 시간ㅡ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찰흙과 같다.   찰흙은 무엇이든 원하는 데로 만들기 쉽다. 기본 형태도 그렇고, 세밀한 다듬기도 그렇다. 그래서 미술가들의 기본 소재가 찰흙이다. 훈민정음은 글을 짓는데 있어서 기본 형태를 잡기도 그렇고, 세밀히 다듬는 데도 더 이상 없다. 조각이나 글이나, 다듬질 하는 만큼 정교해진다.   알파벳도 소리기호이지만, 훈민정음만큼 정확하고 자유자제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소리를 감각적으로 정확하게 표기하는 효과만큼은 훈민정음이 우수하다 할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 바탕은 중국어, 즉 한문이다. 훈민정음 이전에는 이두 라고 하는 음기호도 쓰였다.   훈민정음의 목적 중의 하나가 중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는 데 있다. 조선어와 중국어는 직접 연결되지 않고, 이두 라고 하는 표기를 통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그런 중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사라진 4개 음소를 찾아내어 사용해야 한다.   한국어 단어의 80% 정도가 중국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어를 알면 어휘력이 풍부해지는 것이다. 1000단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10000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정보력의 차이가 있듯이 중국어-한자를 바탕으로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정보력 차이는 크다.   한글을 처음 배울 때는 한자를 모르고 배우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한자와 훈민정음을 함께 가르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무엇이든 연관된 짝이 있어야 안정되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은 중국어 라는 거대하고 오랜 문명의 바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바탕을 모르고 무언가를 세운다는 것은 사상누각처럼 빈약하게 된다. 중국어와 조선어를 둘 다 잘 하는 중국-조선족의 경우 자기들끼리 말 할 때 중국어와 조선어를 반씩 섞어 쓴다. 이것은 어떤 규칙이 아니라 편리와 효과를 따르는 것이다.   한자는 말과 글이 동시적인 만들어진 것이며, 전 세계의 모든 언어에 영향을 미쳤다. 한자는 복잡하지만 중국 언어는 간결하다. 한자의 근간은 상형문자이며, 문학적 상징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한자와 훈민정음은 서로에게 필연적인 요건을 가진 관계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알파벳과 훈민정음 중에 어느 것이 ‘소리기호’로써 더 우수할까? 영어에는 발음기호가 별도로 있어야 할 정도로 미비하다. 그런데도 중국은 70년대에 알파벳을 발음기호로 채택하였다. 왜 그럴까? 훈민정음을 채택하였을 경우, 한자를 써야 할 필연성이 매우 적어지게 된다는 것…. 해석하자면, '나라의 말이 중국과는 달라 (중국의) 문자와 서로 맞지 아니하므로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펼쳐보지 못할 사람이 많다. 내 이를 위하여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들마다 쉽게 익혀 날로 쓰는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결과 유생들의 반대를 얻었지만 평민들도 쉽게 글자를 깨우치고 알게 되었습니다. 후에 평민들의 문학으로 등장한 사설시조도 이런 일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총 획득메 달   채택된 답변답변추천해요0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유ㅡ 훈민정음 창제 1. 창제 동기 우리말과 한자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글자가 필요하였습니다. 한자는 익히기 어려워서 일반 백성이 사용하기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2. 창제 원리 사람의 몸 중에서 소리를 내는 기관(입, 혀, 입안, 목구멍)과 하늘, 땅, 사람의 모양을 본 떠 자음17자와 모음 11자, 총 28자를 만들었습니다. 3. 의미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라는 뜻입니다. 4. 우수성 한자에 비해 배우기 쉽고,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5. 창제 의의 양반이 아닌 백성도 글을 쓸 수있게 되었습니다. 훈민정음의 특징 *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누구나 쉽게 읽고 쓸 수 있음. * 표현할 수 있는 소리 영역이 세계 어느 문자보다 넓고 다양함. * 발음 기관을 본떠 만든 과학적인 글자임. 훈민정음 해례본 1446년(세종 28년)에 정인지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에 따라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설명한 한문 해설서임,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음.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 1. 자음 * 기본 글자는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자임. * ㄱ은 혀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가 입천장에 붙는 모양, ㅁ은 입모양, ㅅ은 이의 모양,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음. *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해 만든 글자 가 ㅋ(ㄱ), ㄷ·ㅌ(ㄴ), ㅂ·ㅍ(ㅁ), ㅈ·ㅊ(ㅅ), ㆆ·ㅎ(ㅇ)이고, ㄹ, △, ㆁ을 더해 17자가 되었음. 2. 모음 * 기본 글자는 ·, ㅡ, ㅣ로 하늘과 땅, 사람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임. * 기본 글자에 획을 덧붙여 만든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를 합쳐 11자가 됨. 3. 사용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모두 28자였으며 현재는 ·, △, ㆁ, ㆆ이 없어지고 24자만 사용하고 있음.     총 획득메 달   답변추천해요0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유는 훈민정음 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로 서로 통하지 못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익혀  널리 사용케 한다 라는 것입니다 총 획득메 달   답변추천해요0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찰흙과 같다 찰흙은 무엇이든 원하는 데로 만들기 쉽다. 기본 형태도 그렇고, 세밀한 다듬기도 그렇다. 그래서 미술가들의 기본 소재가 찰흙이다. 훈민정음은 글을 짓는데 있어서 기본 형태를 잡기도 그렇고, 세밀히 다듬는 데도 더 이상 없다. 조각이나 글이나, 다듬질 하는 만큼 정교해진다 알파벳도 소리기호이지만, 훈민정음만큼 정확하고 자유자제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소리를 감각적으로 정확하게 표기하는 효과만큼은 훈민정음이 우수하다 할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 바탕은 중국어, 즉 한문이다. 훈민정음 이전에는 이두 라고 하는 음기호도 쓰였다. 훈민정음의 목적 중의 하나가 중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는 데 있다. 조선어와 중국어는 직접 연결되지 않고, 이두 라고 하는 표기를 통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그런 중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사라진 4개 음소를 찾아내어 사용해야 한다. 한국어 단어의 80% 정도가 중국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어를 알면 어휘력이 풍부해지는 것이다. 1000단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10000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정보력의 차이가 있듯이 중국어-한자를 바탕으로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정보력 차이는 크다. 한글을 처음 배울 때는 한자를 모르고 배우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한자와 훈민정음을 함께 가르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무엇이든 연관된 짝이 있어야 안정되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은 중국어 라는 거대하고 오랜 문명의 바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바탕을 모르고 무언가를 세운다는 것은 사상누각처럼 빈약하게 된다. 중국어와 조선어를 둘 다 잘 하는 중국-조선족의 경우 자기들끼리 말 할 때 중국어와 조선어를 반씩 섞어 쓴다. 이것은 어떤 규칙이 아니라 편리와 효과를 따르는 것이다. 한자는 말과 글이 동시적인 만들어진 것이며, 전 세계의 모든 언어에 영향을 미쳤다. 한자는 복잡하지만 중국 언어는 간결하다. 한자의 근간은 상형문자이며, 문학적 상징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한자와 훈민정음은 서로에게 필연적인 요건을 가진 관계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알파벳과 훈민정음 중에 어느 것이 ‘소리기호’로써 더 우수할까? 영어에는 발음기호가 별도로 있어야 할 정도로 미비하다. 그런데도 중국은 70년대에 알파벳을 발음기호로 채택하였다. 왜 그럴까? 훈민정음을 채택하였을 경우, 한자를 써야 할 필연성이 매우 적어지게 된다는 것…. 총 획득메달   답변추천해요0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유   한국인이 한자로 말을 적으려면 소리를 한자로 바꾸어 적어야만 했는데, 이 때문에 의사소통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한자로 의사소통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이두(吏讀)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두는 조정의 관리와 평범한 백성이 한자를 이용하여 한국말을 기록하는 문자 체계였다. 한자로써 한국말을 순서대로 적고, 심지어 한국말의 조사와 어미까지도 적었다. 그러나 이두는 한자를 사용하여 표기하는 것이므로 한국말의 소리를 특징적으로 나타낼 수 없을뿐더러 조사와 어미의 미묘한 차이를 반영할 수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세종대왕이 한국말의 음운체계를 반영하는 문자를 창제하였고, 이로써 한국인은 말을 글로 온전히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이 혁신의 두 번째 측면은 한국인이 글자를 아주 쉽게 배우고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표의문자(表意文字)인 한자는 각각의 개념을 나타내는 문자를 일일이 배워야 했기에 매우 어려웠다. 또한 글자의 획이 복잡하여 쓰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한자를 배운다는 것이 한국인과 같은 외국인에게는 매우 어려워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자를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문자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는 단 28자이며 그 획도 단순했기 때문에 배우고 사용하기가 쉬웠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   세종의 훈민정음 제정이 언제부터 구상되었고 착수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세종 25년 12월조에 "이달에 상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제정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 기록했을 뿐, 그 경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처음에는 세종 단독으로 구상하였다 하더라도 여러 신하의 중지(衆智)를 모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추진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이리하여 훈민정음이 제정되자 문자 창제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집현전과는 별도로 궁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의 보급과 이에 부수되는 문헌의 간행 등을 추진하는 한편, 해례와 같은 원리면의 연구도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이후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사는 1444년 2월 《운회(韻會)》를 언해하고 같은 달에 최만리(崔萬理) 일파의 반대 상소에 부닥친다. 반대의 골자는 한자를 버리고 새 문자를 만듦이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날 뿐 아니라 선인이 만들어 놓은 운서를 뜯어 고치고 언문을 다는 것이 모두 무계(無稽)한 짓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445년 4월 《용비어천가》가 완성되고, 이듬해 3월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언해를 명하였으며, 그 해 9월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이 이루어져 반포되고, 1447년 9월 《동국정운》의 완성 및 《용비어천가》의 반포, 1448년(세종 30) 11월 《동국정운》 반포, 1455년(단종 3) 봄에 《홍무정운》 역훈(譯訓) 완성 등, 사업은 매우 의욕적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운회》를 번역한 것은 곧 《동국정운》의 편찬을 뜻하므로 그 사업은 이 무렵부터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훈민정음 해례의 작성은 아마도 1444년 최만리 일파의 반대 상소가 있은 직후부터 착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동안에 중국 운학(韻學)의 이론을 연구하고, 한편으로는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등의 찬정(撰定)을 통하여 그 실제적 효용성을 실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 본문에 나타나는 모든 자류(字類)를 추려 보면 처음 1443년에 제정하였던 28자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것은 그 동안 운서 편찬과정에서, 또는 국어 표기를 통해서 거기에 필요한 자류가 더 요청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글자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강구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훈민정음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으며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흠이 없는 것이 되었다고 믿기에 이르러 언문청에서 곧 간행에 착수, 46년(세종 28) 9월에 완성·반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훈민정음(Hunminjeongum, 訓民正音)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훈민정음의 배경과 경과  총 획득메달 전문 분야   답변추천해요0   1.2.3. 해례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이름 《훈민정음》 해례본 Hunminjeongeum Manuscript /  Hunminjeongeum 국가·소장 대한민국 서울 간송미술관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1997년 제작시기 1443년 한글, 즉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의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책의 제목. 국보 제70호이며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참고로 해례본 책이 등재된 것이지, 무형의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체계 자체가 등재된 것이 아니다. 1.2.3.1. 어떤 책인가? 1940년에 와서야 비로소 다시 발견된,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는 책. 말하자면 한글의 설계도가 실려있는 책이다. 한글의 제작 원리에 대해서 밝혀져 있는 책은 이것이 유일하다. 현재 지구상에서 쓰이고 있는 모든 문자 가운데 창제 원리가 기록된 문서[5]가 있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바로 이 때문. 언해본에는 제작원리 내용이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의 창제에 대한 여러 가지 구구한 억측이 존재했다. 심지어는 창문살을 보고 본따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까지 있었다.[6] 한글이 이런 얼토당토 않은 폄하를 겪던 와중에, 해례본이 발견되었기에 엄청나게 독창적이고, 매우 높은 수준의 언어학, 음성학적 지식과 철학적인 이론이 한글에 적용되어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확인된 것이다. 해례본의 발견으로 인해 한글 창제의 원리에 대해 많은 것들이 확인되고 알려지긴 했는데, 사실 그 내용이 꽤 어려워서 아직도 대해 학자들 사이에 한글 원리에 대한 해석에 분명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특히 모음자와 관련된 부분. 2014년 현재 알려져 있는 판본은 간송본과 상주본 단 둘뿐이다. 그나마도 소재가 알려져 있는 것은 간송본뿐이다. 다행히 간송본을 토대로 영인본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열람이나 유실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2014년에 제3의 판본의 파편(...)이 궁중에서 쓰던 모자 속에서 발견되었다. 아래 항목 참고. 1.2.3.2. 해례본의 구성 임금의 글 어제 서문 본문(예의): 세종이 간략히 해설한, 글자의 운용 방법 신하의 글 해례(다섯 '해설'과 한 '예시'가 실렸기에 '해례'이다) 제자해: 글자 창제에 관한 해설 초성해: 초성 글자에 관한 해설 중성해: 중성 글자에 관한 해설 종성해: 종성 글자에 관한 해설 합자해: 초중종 글자를 합한 글자에 관한 해설 용자례: 글자를 활용한 예시 정인지 서문 - 정인지 서문의 위치를 따지면 '서문'이 아닌 '발문'[7]이 되겠으나, 세종이 서문을 쓰기 전에 정인지가 이미 썼던, 굳이 말하자면 원조 서문이 정인지 서문이며, 세종의 서문이 추가되면서 이것이 뒤로 밀려났을 뿐이기에 편집상의 위치와 무관하게 '서문'으로 불린다. '정인지 후서'라는 표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후서는 보통 책이 쓰이고 나서 한참 훗날에 추가적으로 쓰인 글을 의미하는바, 정인지는 창제와 거의 동시에 이 글을 썼으므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다. 《훈민정음》의 후서에 해당하는 것은 이하에서 설명할 숙종의 글. 그리고 한문으로 쓰여 있다. 흔히 말하는 '나랏말싸미…'는 언해본의 서문이고, 《훈민정음》의 서문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한다. 당대의 문자 언어는 한문이었고, 새로 만든 문자를 설명하는 문자언어가 한문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초로 발견된 《훈민정음》은 맨 앞 부분 두 장이 고의적으로 찢긴 상태였다. 이 낙장 두 장은 실록본을 베낀 가짜 페이지로 메꿔져 있었다[8]. 찢긴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 책을 감추기 위해서 표지를 뜯어 내고 다른 표지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문에 표지를 뜯은 게 아니라는 정황적 근거가 있다. 최초 발견된 《훈민정음》의 종이 뒷면에는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 기존의 책을 재활용했을 한 선비가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십구사략언해》가 있었는데[9], 이 내용 역시 초반부가 등장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책을 필사할 때 처음부터 쓴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지를 뜯어낼 때 이 필사 내용 역시 같이 뜯겨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십구사략언해》는 내용상 약 18세기 후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니, 결국 책 표지를 뜯어낸 것은 18세기 이후라는 얘기가 된다. 16세기의 연산군 한글 탄압과 연관지을 수 없다.                     1.3. 조선시대 훈민정음 취급에 관하여 1.3.1.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국문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이다. 한 예로 한글 창제 이후로는 양반들이 한문을 공부할 때, 우리말과는 체계가 애초에 다른 한문글의 구절마다 한글로 된 토를 달아서(현토) 훨씬 배우기 쉽게 하는 등 양반들에게도 무척 유용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양반은 한문을 모르는 부녀자[16] 및 평민들[17]과 글로 소통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 소양으로 한글을 모두 알고는 있었다. 물론 연암 박지원처럼 끝내 한글을 배우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실제 조선시대에 쓰인 한글은, 글 읽기보다 생계에 바빴던 평민층에 비해 오히려 양반 부녀자층이나 중인층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며, 특히 실질적인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중인층에게 유용했다는 점에서 통치 체제 강화에 적지 않게 일조하였음이 눈에 띈다. 세종이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지었다면, 정작 그의 치세에 한글로 번역되거나 반포된 책들이 《월인천강지곡》 같은 불교언해나, 아니면 이성계의 역성혁명[18]을 정당화하는 《용비어천가》 등의 책들 말고는 왜 그다지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고려해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훈민정음》의 주된 창제 이유를 지배 체제 강화에서만 찾는 것은 성급한 오류이다. 애초에 양반들을 비롯한 지배층의 편의성이 주된 이유였다면 만들 때 반포 이유로도 그것을 내세우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고 반대에 부딪힐 이유도 훨씬 줄어든다. 더욱이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후 양반 지배층 이외의 계층들 사이에서도 문화를 꽃피우는 근본이 되었다는 점에서, 단지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세종의 근본적인 의도가 관철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는 저서 《한글의 탄생》에서, 당대 조선에서 사용되던 기록은 모두 붓을 사용하여 한자로 쓰여진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붓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붓으로 글씨를 쓸 때에 생기는 획의 삐침이나 획 사이의 여백, 그리고 글씨를 이어서 쓰는 연서 등은 필연적인 것이자, 동시에 글씨의 형태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자는 연필 등의 다른 필기구로 쓰여지지만 이러한 삐침은 사라지지 않고 획 자체에 포함되어 유지되고 있다. 만일 사대부들의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글씨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필기구인 붓을 사용할 것을 전제로 자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훈민정음》 책 자체는 붓으로 쓰여졌지만) 훈민정음의 자모만큼은 그러한 삐침 등이 완전히 생략된, 다시 말해 나뭇가지와 같은 원시적 도구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간결함의 극치를 보인다.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붓을 쓰던 시대에, 훈민정음은 자형을 만드는 단계에서 이미 붓을 쓰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졌다. 노마 히데키는 훈민정음의 극도로 단순한 모양은 붓과 먹, 종이 같은 필기 도구를 살 형편이 안되는 백성들까지도 문자를 쓰게 될 것을 배려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자의 말을 덧붙이면... '훈민정음은 어리석은 백성이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낙서하듯 그리기에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훈민정음에 연서와 삐침이 등장한 것은 창제 후 수 세기가 지나고 궁체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와 비슷하게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많은 문자들이 대개 복잡하면서 장식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실용성만을 고려하여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한 초창기 훈민정음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당대의 서체 미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전위적인 형태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거의 근대 모더니즘을 연상케 한다. 즉, 세종이 한글을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도 잘 나와 있듯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펼칠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해서였다.[19] 다른 이유가 섞여 있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목적을 덮을 수는 없다. 세종대왕이 공들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덕분에 당대의 많은 백성들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우리들까지도 한글을 잘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세종대왕이 뭔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한글을 만들었다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1.3.2. 왕실 입장에서의 훈민정음 '언문'이나 '암클'은 구한말에 살았던 한글 학자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하어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조선시대 내내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글 비하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조선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하늘이 내린 위대한 성인(聖人)이신 세종대왕이 범인(凡人)을 초월한 성지(聖知)로서 지어낸 글자이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게 함정 거의 최상급의 극찬을 바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이 극찬은 '하늘→성인=세종대왕→지혜→훈민정음'이라는 도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연히 세종대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드높이려는 의도가 있다. 바로 지금 이순간에 모든 사람들이 널리 쓰고 있는 문자보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알기 쉽게 드러내는 업적은 없다. 심지어 현대에 조선왕조를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에서도 세종대왕과 한글을 부정하는 사례는 거의 없으며, 조선왕조에 대해서 과도하게 비하, 부정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너 조선 깔려면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쓰지 마라."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올 정도. 민주화된 현대에도 이 같은 상황이니 왕조 시대의 프로파간다 효과는 짐작할만하다. 한글로 쓰인 문장은 속된 것이며 낮은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문자 자체는 왕조의 위업으로 여겨져 조선시대 내내 극한 칭송의 대상이었다는 점은은 분명하다. 왕족들도 훈민정음을 서슴없이 사용했음은 아래 사진들을 보자. 여덟 살 정조가 원손이던 시절에 쓴 편지. 언문으로 되어 있다. "상풍(가을 바람)에 건강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외숙모를) 뵌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립습니다. 어제 (보내주신) 편지보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니 기쁩니다. -원손(元孫)" 악필이다. 여덟 살 어린애가 써봤자 얼마나 잘 쓰겠어 그래도 여덟 살 치고는 잘 쓴 편 아닌가? 게다가 붓과 먹인데 이외에 다른 왕이나 왕족도 한글로 편지를 보낸 것이 많다. 더 보려면 여기 클릭. 네이버에서 언해본과 같이 공개했다.   총 획득메달 전문 분야  
1595    로신과 한국 댓글:  조회:5184  추천:0  2015-12-05
  루쉰과 한국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청년 학생 여러분, 그리고 노신 애독자 여러분과 이렇게 노신을 통해 만나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저는 오늘 한국의 외교관으로서가 아니라 노신 애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기에 나왔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제목이「노신과 한국」입니다만 저는 학자도 전문가도 아니기 때문에 그저「수이비엔(마음 내킨대로)」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옆 길로 나가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노신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노신과 한국 또는 한국인과의 관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신 애독자들에게도 전문가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출판된 노신관계 서적들을 상당히 많이 떠들어 보았습니다만, 단 한 줄이라도 노신과 한국관계를 언급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엇습니다. 노신과 한국인은 무관계일까요?   노신의 작품을 세계에서 최초로 외국어로 번역한 외국인은 바로 한국인 이었습니다.  1927년 8월「東光」이란 조선어 잡지에 실린「광인일기가 그것입니다. 그 후 2개월이 지나서야 일본에서 최초로 노신의「고향」이 번역되어 나옵니다. 물론, 이보다 몇 년 앞서 노신의「쿵이지」가 베이징 거주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주간지에 일본어로 번역되어 나옵니다만, 그것은 노신의 동생인 周作人이 번역한 것입니다. 외국인으로서는 조선인에 의해 노신의 작품이 세계 최초로 번역 소개되었는 것은 당시 나라 잃은 조선인들이 세계의 어느 사람들보다도 노신에게서 희망과 길을 찾으려 했음을 말해줍니다.   요즈음은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노신을 즐겨 읽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할 일입니다.  암울한 시대의 괴로운 이야기를 누가 즐기려 하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여러분에게 노신의 대표작 몇 편과 약간의 잡문들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노신의 유명한 소설들 광인일기, 고향, 쿵이지, 아큐정전을 처음으로 펼쳐 본 사람들은 좀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아큐정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고작 다섯장내외 정도 분량이니까요.  짧지만 여운은 길게 남고 뇌리에 오랫동안 남는 것이 노신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노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아마 중학교 아니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중국 현대문학의 개척자이고 대표작은 아큐정전이라는 것.  「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려 패라고 그가 말했다는 것 정도가 노신에 대한 전부였습니다. 아큐정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바 없었던 저는 그것이 아편전쟁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노신 선생이 말했다는「물에 빠진 미친 개는 두들겨 패라」는 말도 당시 저에게는 좀 기괴하게 들렸습니다. 물론 여기서 개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민중을 속이고 지배하는 권력자, 위선적인 지식인 등을 상징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걸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실제로 노신 선생이 싫어한 동물은 개가 아니라 고양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최근이었습니다. 좀 옆길이지만 그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얼마나 싫어했든지, 한때 북경에서는 노신 선생이 고양이를 학대하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노신 선생은 그 소문에 퍽이나 시달린 나머지 그에 대한 변명을 긴 글로 써서 남깁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거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노신의 유년시절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뱀에 물려 숨이 할딱거리는 생쥐 한 마리를 노신이 구해 줍니다. 그 후 생쥐는 노신의 친구이자 가족이 됩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언제나 생쥐는 노신의 주변을 맴돕니다.  특히 밥을 먹고 나면 언제나 생쥐는 식탁 위에 올라가 흘린 음식 찌꺼기들을 깨끗이 청소해 줍니다.  어린 노신이 먹물을 갈아 글씨를 쓰고 나면 쪼르르 책상으로 생쥐가 올라와 남은 먹물을 깨끗이 먹어 치워 줍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생쥐가 안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밥을 먹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상심한 어린 노신을 보다 못해 보모 키다리 아줌마 阿長이 노신에게 동정어린 표정으로 조용히 말해줍니다.   「고양이가 생쥐를 먹어버렸다」   그때부터 노신의 가슴에 고양이에 대한 증오감이 깊히 자리잡습니다. 한번 각인된 그 증오감은, 나중에 노신이 사실은 생쥐를 죽인 것은 고양이가 아니었고 바로 그 키다리 보모였다는 진실을 알게된 뒤에까지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노신은 그래서 오랫동안 고양이만 보면 돌을 던졌다 합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가고 있습니다만, 간 김에 조금 더 가자면 노신이 아주   싫어한 곤충이 하나 있습니다.  모기 입니다.  벼룩이나 파리보다 모기를 특히 싫어한 노신의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피가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모기의 장광설, 그 연설 때문입니다.   모기는 사람을 물기 전에 에엥하고 길게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그 소리가「왜 내가 당신의 피를 요구하는가」하는 이유를 길게 연설하는 소리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빨아먹고 싶으면 그냥 조용히 빨아먹을 일이지 왜 그렇게 변명이 많고 장광설을 늘어놓느냐는 것이죠.  민중을 착취하고 속이는 지배자들은 항용 자신의 탐욕을 숨기기 위해 많은  이유와 논리를 만들어 떠들어대지 않습니까? 노신의 귀에는 모기의 에엥 소리가 그렇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아까 노신 작품의 번역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일제시대때 조선의 여러 지식인, 지사들이 노신에 주목하고 공감했던 것은 노신이 그만큼 시대의 어둠과 절망속에서 지식인으로서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신은 자신을 문사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싸우기 위해, 마비된 민중의 정신을 뜯어고치기 위해 문예를 택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노신은 자신의 글을「비수와 투창」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전사,투사로 묘사했으며 자기 몸에 난 상처를 자기 혀로 핥으며 황야를 헤메는 한 마리 하이에나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상처 입은 황야의 하이에나의 절규, 허위와 위선의 심장을 겨냥하는「비수와 투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들이 나라 잃은 조선의 지사들, 문인들에게 메아리쳤을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시인 김광균은「노신」이라는 시를 지어 이렇게 읋기도 하였습니다.   「魯迅」    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 氣笛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 것의 베개 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無數한 손에 빰을 얻어맞으며  恒時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날을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五臟을 씻어 내린다.    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 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한국의 식민지 시인이 절망의 시대에 중국의 위대한 작가 루쉰의 용기를 추모하여 스스로를 다짐하는 시입니다.   광인일기를 최초로 번역했던 柳樹人 이라는 분은 항일애국지사였습니다. 본명이 유석기인 그는 얼마나 노신을 좋아했던지 자신의 이름조차도 노신의 본명인 樹人을 따서 유수인 이라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름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납니다만 여러분 김염, 중국 발음으로 진이엔   쇠금에 불꽃염자 진이엔을 혹시 들어본 적 있습니까? 13억 중국인들이 '영화황제'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1932년 영화 전문지 [電聲]이 1년여에 걸쳐 인기투표를 한 결과 김염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배우', '가장 잘 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가 되고싶은 남자배우'등 전분야에 걸쳐 1위를 차지,「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의 나이 24세 때입니다.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한국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님 웨일즈는 '나는 그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본명이 김덕린인 그는 1910년 서울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 김필순(金弼淳)은 세브란스 의대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였습니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김염은 그 당시 좌파 시나리오 작가인 田漢과 노신의 반봉건, 반억압 진보사상에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김염은 소년시절부터 노신의 사상에 깊은 감화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가 10대  였을 때 장래 굉장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영화배우면 멋진 이름을 써야되지 않습니까.  소년 김염은 미리서 이름을 하나 지어 놓습니다. 노신을 존경했던 그는 노신에서 신을 따서 金迅이라고 지어 놓습니다.  그러나 영화배우의 꿈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무작정 상하이에 오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냉대와 가난이었습니다. 「상하이의 어느 골목 조그마한 음식점, 이미 몇 끼를 굶은 한 젊은이가 식사를 하고 돈이 없어서 섣달그믐까지도 돈을 갚지 못해 입고 있던 웃옷을 저당 잡혀 식대를 갚아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더 강력하게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전에 지어 놓았던 金迅 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불꽃처럼 타오리라는 열망을 담아 불꽃 염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김신이 될 뻔한 영화황제가 김염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김염의 솔녀가 얼마전에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추적하여 쓴 「상하이 올드데이스」라는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노신의 영향은 10대의 조선 소년의 가슴에까지 파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염은 자신의 연기를 민중의 오락거리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화에 나타나는 정신은 반봉건, 반억압, 반일정신이었다 합니다. 「大路」「壯志凌云」으로 대표되는 항일영화의 제작에 앞장섰던 김염을 통해, 중국인들은 외세를 배척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진보적인 젊은이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보고 따라 했으며, 청소년과 대학생들은 그의 동작과 말투까지 따라 했다고 합니다.  저는 며칠 전 김염의 미망인 친이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사는 노신의 미망인 쉬광핑 여사와 교류하면서 같이 활동하였다고 들려 주었습니다. 「상하이 올드데이스」는 내년쯤 중국어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김염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한 비판적 지식인의 선각자적 정신이 얼마나 깊고 넓게 공명되는 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김염은 한류의 원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참 묘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중국인이 더 이쁜데 그들은 한국인이 더 예쁘다고 합니다.  요즈음 한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리 보아도 중국 배우나 탈렌트가 더 예쁩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한류배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일부러 짐짓,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어떨땐 의심이 납니다.   김염이 영화계의 한류원조였다면 당시 음악계에서는 鄭律成이라는 음악가가 또한 한류원조였습니다.  나이든 중국인들은 그가 지은「연안송」을 다 안다고 합니다. 1990년 북경에서 개최된 아세안게임 개막식에서 울려 퍼진 노래「중국인민해방군가」를 지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도 당시 나라 잃은 조선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곳 상해에서 음악공부를 하였고 연안의 노신 예술학교에서 음악을 연마하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고향 전남 광주에서 오는 11.12일 제1회 정율성 국제음악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저는 김염과 정율성이 모두 노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느끼지만 중국인의 포용성에 대하여 경이에 가까운 느낌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민족의 배우를「영화황제」로서 받아들이며, 어떻게 이방인에게 자국의 군가를 짖게 하느냐는 것이지요.  아마 우리 한국에서였더라면 상상도 못할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인의 이런 포용성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포용하는 자가 결국 크게 되고 승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중국이 땅 덩어리가 커서 큰 것이 아니고 중국인들의 이러한 포용성 때문에 크게 보입니다.     노신에 대한 묘사와 비유는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표현은 아무리 보아도 일품입니다.   '메스를 손에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마취약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환부를 도려내고 마는 기이한 의사'   딱 노신의 모습이 앞에 나타나지 않나요? 이것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노신을 방문취재 했던 언론인 신언준의 묘사 입니다. 그가 노신을 인터뷰한 것은 1933년 5월이었습니다.  기사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34년 4월 신동아에 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국민당정부의 要注意 인물로 반은 숨어살다시피 하고 있던 노신을 몰래 탐방하여 인터뷰한 노신방문기는 희귀한 자료에 속합니다.  그를 만나게 된 과정부터 그의 수입에 비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상과 세계혁명이 완성되어야 약소 민족도 해방될 것이라는 노신의 육성을 전한 것은 상해 거주시기의 노신을 이해하는 데 간명하면서도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노신은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문학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예를 여기에서 다 열거할 수 없고 또 제가 자세히 알지도 못합니다. 단지, 노신과 관련해서 꼭 알아야 될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학생 여러분이 다 아는 이육사입니다. 「청포도」,「광야」의 시가 지금도 교과서에 나오죠? 그는 노신에게서  영혼의 감화를 받았고 노신을 찾아가 만났으며 노신이 죽자 장문의 추도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7차례나 옥고를 치른 끝에 북경의 일본 감옥에서 40세의 젊은 생을 슬쓸히 마감합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 항일 독립 운동을 하다가 최초로 옥사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이육사라는 이름은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할 때 죄수번호 264에서 음을 따온 것입니다 . 노신과 한국관계를 탐색하던 중 내가 다시 만나게 된 이육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청포도에 투영된 그런 서정시인만은 아니었습니다.  백마를 탄 채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런 세속을 초월한 초인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암흑 속에서 온 몸을 불살랐던 더 없이 순결하나 더 없이 뜨겁게 타올랐던 불꽃같은 영혼이었습니다.  시대의 어둠과 격량을 온 몸으로 부딛치며 고뇌하며 행동 했던 지식인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노신을 길잡이 삼은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노신을 찾아가 만난 것은 1932년 6월 국민당에 의해 암살 당한 혁명원로 양싱푸(楊杏佛)의 장례식에서였습니다. 노신이 죽기 3년전의 일입니다. 이육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932년 6월초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식관에서 나온 나와 M은 네거리의 담배가게에서  조간신문을 사서 들고 근육신경이 떨리도록 굵은 활자를 한숨에 내려 읽은 것은 당시 중국과학원 부주석이요 민국역명의 원로이던 양행불(楊杏佛)이 남의사원(藍衣社員)에게 암살을 당하였다는 기사이였다. (중략) 그리고 그 뒤 3일이 지난 후 R씨와 내가 탄 자동차는 만국빈의사 앞에 다았다. 간단한 소향의 예가 끝나고 돌아설 때 젊은 두 여자의 수원과 함께 들어오는 송경령 여사의 일행과 같이 연회색 두루막에 검은「마괘아(馬掛兒)」을 입은 중년 늙은이 생화에 싸인 관을 붙들고 통곡을 하던 그를 나는 문득 노신인 것을 알았으며 옆에 섰던 R씨도 그가 노신이라고 말하고난 십분쯤 뒤에 R씨는 나를 노신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그때 노신은 R씨로부터 내가 조선 청년이란 것과 늘 한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앞이며 처소가 처소인만치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한번 잡아줄 때는 그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상해시 고탑 9호에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써 이붓을 잡는 나뿐이랴.」     자 이제 우리의 시선을 노신에게로 돌려봅시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이렇듯 큰 영향을 미쳤던 노신 자신은 조선을, 조선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노신의 글 속에는 조선이 어떻게 언급되어 있을까요? 노신의 글 어디에도 조선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고작, 한 두 마디가 전부이며, 그것도 조선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인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부차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노신 자신이 번역한 어느책 서문에 이런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이 글에서 조선을 언급한 것도 중국인을 비판하기 위한, 또는 계몽하기 위한 맥락에서  '조선'을 언급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한국인 학자가 쓴 책을 보니까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그렇다면 노신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을까 라며 스스로 곤혹스러운 의문을 제기한 것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가 과민반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민족감정에 이르면 누구라도 병적인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신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태도랄까.  견해 같은 것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단지 노신과 이육사가 만났을 때 노신이 이육사를 친근하게 대한 정황을 통해 노신의 대조선 정서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또한 조선인으로서 그를 최초로 방문 취재했던 신언준과 나누었던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속에서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노신은 신언준과의 대화에서 조선의 문학계와 교류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  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 아쉽게도 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신언준이 노신의 바램대로 노신과 조선 문학계를 연결해 주었더라면 노신과 조선인간에는 의미있는 교류가 이루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노신 선생이 상해에서 서거한지 약 10년후 한국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 1992년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길고 긴 냉전, 동면상태를 거쳐야 했습니다. 모택동 주석이 찬양한 바 있었던 노신이 당시 한국에서 읽히지 않았던 것은 한국이 반공이데올로기에 결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택동 주석의 책이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소지하고만 있어도 끌려가 조사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는 1952년생으로 한국전쟁중에 태어난 세대인데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2-3학년때부터 였을 것입니다.  어느날 학교에 갔더니 모두 모여 놓고 뭘 강제로 외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소위「혁명 公約」을 만들어 전국 국민학생들에게까지 외우게 한 것입니다.  날마다 그것을 선생님들과 함께 복창하며 외웠습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제1조는 기억이 뚜렷합니다. '반공을 國是의 제1義로 삼고…' 뭐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마다 외웠습니다.  반공이란 말은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거니까 알겠는데 국시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 말로 전혀 모르겠고 제1까지는 알겠는데 제1義 라는 말 같은 것은 무슨 뜻인지 통 몰랐습니다. 선생님들도 무조건 외우라고만 하지 무슨 뜻인지 안가르쳐 줍니다. 그래도 선생님을 따라 열정적으로 외웠습니다.  그때 노신선생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묘한 것은 그래도 일부 한국의 지식인에게 노신이 읽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유별난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리영희, 박영복, 전우익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그런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지식인, 청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신을 좋아했던 그들의 인생역정에 재미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뭘까요? 모두가 감옥에 갔다는 사실입니다.  죄명도 같았습니다. 좀 색깔이 붉다는 것이었지요.   노신의 비수와 같은 단문의 일부가 한국 일반에게 소개된 것은 리영희에 의해서였습니다. 리영희는 독학으로 습득한 중국어로 사전을 들쳐가며 노신을 읽었습니다. 리영희는 죽은 노신이 무덤속에서 소리쳐 자기를 불러 일으켰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는 노신을 삶의 지표로 삼은 지식인이었습니다.  노신은 리영희를 통해 한국에서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한국의 현대 지성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잠깐 보겠습니다. 한 예로서 1999년 말 연세대학원신문이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는 특집으로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하면서 '현재 우리 학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을 국내와 외국으로 나누어 조사했는데 국외 학자로는 프로이드가 1위, 국내학자로는 리 영희가 1위로 나타났습니다.   리영희에 대한 일치된 의견은 '1970-80년대 한국 변혁 운동의 중심이었고, 폭압적인 시대 상황에 맞서 싸웠으며, 70년대 냉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은 학자'라는 평가였습니다.   그의 글은 노신이 자기글을 비유했던 바로 비수와 투창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노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여러 책에 수록된 노신에관한 글들에서 자주 언급하였지만 나의 글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노신의 그것이에요.  글의 기법,문장미,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유.은유.풍자.해학.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 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그의 글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덕분에 그는 수차례 감옥을 가고 해직되고 고문당하고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고통과 절망과 씨름하고 있을 때 그의 정신을 버텨 준 것도 노신 이었습니다.   그는 '노신과 나'라를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누구나 그렇듯이 정신적·사상적 모색으로 고민하던 나는, 노신의 많은 저서를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다.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기술자나 문예인이 아니라, 부정한 인위적·사회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고난 받는 이웃과 고난을 바꾸어 보려는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소명감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싹튼 것임은 물론이다. 1950년대 말에 중국어 저서(작품)를 사전을 찾아가며 힘겹게 읽어가던 어느 날 가슴에 와 닿는 한 구절에 마주쳤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자, 창문은 하나도 없고 여간해서 부술 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많은 사람이 숨이 막힌 채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수상태이기 때문에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느끼지 못한다.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불행한 이 몇 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 몇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모든 면에서 군벌지배와 장개석 치하 중국을 방불케 했던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고민하던 나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그 구절은 무덤에서 노신이 나에게 타이르는 소리같이 들렸다.  나는 눈을 뜨고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나는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이성적인 극우, 반공주의에 마취되어 있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의식을 바로 잡아주는 일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내가 몇 사람의 잠을 깨우고 몇 사람의 의식을 깨우쳤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노신처럼 '역사'를 밀고 갈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한 '시대'와 함께 살아왔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30년전 나의 의식의 눈을 뜨게 해 준 노신에 대한 조그마한 답례를 한 셈이다.」     노신을 일러 많은 중국 사람들이 민족혼이라 하는 거 같습니다. 지금부터 69년전인 1936년 10.19일 노신이 서거했을 때 그의 유해 위에는 민족혼이라고 크게 쓴 銘旌이 덮힙니다. 북경의 노신 박물관 사이트르 열면 거기에도 크고 굵은 글씨로 써진 민족혼이라는 제목아래 노신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방의 한 노신 애독자로서 관위에 민족혼이라는 글자가 쓰인 사진을 볼 때 마치 노신 선생의 혼이 민족혼이라는 굴레속에 유폐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이방인으로서 소통하는 노신은 어느 한곳에 딱 규정하여 넣기 힘든 그런 자유스러운 존재입니다.   노신 선생의 삶과 글, 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예화에 대한 분노어린 외침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그 외침은 물론 보편적 인간애에 굳건히 바탕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의 심안에 비친 중국의 역사는 황금빛 찬란한 역사가 아니라 노예의 역사  였습니다.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시대와 잠시 노예로 안정되었던 시대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처음 대할 때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예화는 중국의 현상만이 아니고 바로 나의 문제이고 인류  역사의 문제임을 말입니다.   노신이 한국에 지금 나타난다면 우리에게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모습을 볼까요?  5살쯤이면 여러 학원으로 끌려 다니는 어린이의 모습에서 노예화의 모습을 볼지도 모릅니다.  끊임 없이 맹목적인 경쟁속에서 삶을 소진하고 있는 청소년들, 소비와 생산의 객체로 전락한 인간군상에서도 그는 노예의 모습을 볼지 모르겠습니다.   루쉰은 언제 읽어도 지금을 살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값싼 희망을 팔지는 않습니다.   참, 묘합니다.  희망을 파는 사람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들리는데 희망을 말하지 않는 노신의 저음속에서는 웬지 모를 희망이 느껴집니다.   노신은 그의 작품 [고향]의 말미에서 희망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나와 윤토사이는 마침내 이렇게 멀어지고 말았구나. 그러나 우리의 후대들은  여전히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닮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들 사이에 장벽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는 마땅히 우리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생활이 있어야 한다........ 희망이란 본래부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은 길이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이렇듯 노신이 꿈꾸었던, 사람 사이에 장벽이 없고 나라 사이에도 장벽이 없는, 아직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상, 그것은 여전히 21세기 동아시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꿈이기도 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노신이 고뇌속에 살다간  지난 20세기는 야만이었습니다. 한 중 일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같은 전쟁터에서 만나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만 했던, 그런 야만과 악몽은 이제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노신의 다음과 같은 말로 제 이야기를 끝마칠까 합니다.   「현재에 불만을 품은 자는 그러나 복고적이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우리 눈앞에 또한 갈 길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미증유의 제3의시대를 창조하는 일.  바로 이것이 오늘날 청년들의 사명이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coindian (상하이 화동사대 강연고)      
1594    천재시인 - 李白의 음주시 연구 /// 술과 시인 댓글:  조회:5552  추천:0  2015-12-05
  이백의 음주시 연구   려원                             초 록      세인들이 다 알다시피,당시(唐诗)는 중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이백의 시작품들은 당시에서 한마디로 평판할 수 없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걸작들은 현재 약900여수가 유전되고 있다. 이런 시 들은 이백의 평생의 포부와 미학사상을 표현하였으며 성당시기 사회 현실 과 정신 생활을 예술적으로 집중화하고 있다.    “성당지음”의 걸출한 대표로 되어 있는 그의 시작품들은 독특한 낭만 적 풍격으로 하여 천고절창이 되었고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다.그는 초당이래 시가 혁신의 역사적인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는데 중국 고전시가의 혁신과 중국고전문학의 발전에 크게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이백의 시창작 풍격을 연구하는 것은 당조시기 시가의 기본면모를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뿐만 아니라 중국고대 시가들을 한걸음 더 이해할 수 있고 미래 시가의 발전을 위한 방향을 가일층 모색할 수 있다. 이백의 시가들은 이미지가 아주 많은데 본고는 이백의 음주시 중의 낭만주의와 호방표일한 풍격을 재조명하려 한다. 키워드: 이백 시풍격 음주시 호방표일 낭만주의   차 례 논문초록…………………………………………………………………………1~2 제1장  서론……………………………………………………………………4~5 제2장  본론……………………………………………………………………6~10 2.1이백의 생애…………………………………………………………………6~8 2.2대표적인 음주시의 분석…………………………………………………8~10 2.2.1 장진주(将进酒)의 분석 2.2.2 월하독조(月下独钓)의 분석 제3장 결론………………………………………………………………… 12~13 감사의 말………………………………………………………………………14 참고문헌………………………………………………………………………15                                        제1장 서 론       본 고는 이백의 생애와 그를 대표하는 음주시를 둘러싸고 이백의 창작 사상과 그의 문학관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백은 중국 시가사에서 대표적 시인이다. 흔히 당시를 중국 문학의 꽃으로 비유하는데 이백이야말로 당시 가운데 꽃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이다. 또한 이백의 시는 다른 시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한 위치에 있으며 현전하는 이백의 시는 약 천 수에 달한다. 이백의 시는 당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백은 천재시인이라 불린다. 그는 시를 지을 때 퇴고 없이 일필 휘지로 써 내려간다. 이백은 호방하며 자유로운 분위기의 시를 썼으며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이백하면 음주 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의 시가들 중에서 많은 것이 정치서경시이다, 이것들은 시인의 비범 한 포부,분방한 격정, 호쾌한 기개를 충분히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당 (盛唐)시가 앙양되고 분발한 전형적인 음조를 집중으로 대표하였다. 이백 의 시가 제재는 아주 다양한데 7언절구,5언절구와 고체시등 있다. 이백은 술의 친구이어서 음주시는 대표적이고 유명하다.     이백은 성당문화 속에서 배출된 천재적 시인이어서 성당시가의 기(气)와 정이 이백의 시가들에서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그의 시가창작은 열정 으로 넘치고 있으며 기특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다. 장쾌한 경치 도 있고 자연스러럽고 명쾌한 경지도 있어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래서 이백의 매력은 바로 성당의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이백의 강렬한 감정의 분출에 의해 과장된 비유,풍부한 상상 등 낭만주의 표현 기법과 신화전설을 능란하게 운용해서 호방한 기개, 앙양된 정조, 기특한 형상과 비범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어서 강렬한 예술감화력을 발산한다. 게다가 생생하고 명랑하고 우미하고 청신 한 언어를 구사하였기에 아름답고 눈부시여 이목을 끌며 천고에 길이 이름 을 남기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이백의 많은 작품중에서 음주시를 위주로 고찰하고 있다. 이백의 시의 제재는 어느 누구보다도 다양하지만, 그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백은 직감적으로 술고래를 떠올리 게 된다. 그것은 이백은 시선인 동시에 주선이라는 두 이미지가 결부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부는 이백을 평하여 ‘술 한 말에 시 백 편(李白斗酒詩百篇)이라 하였다. 이렇듯 이백과 술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이백시에서 음주시가 차지하는 영역은 초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본 고에서는 이백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이백의 음주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본 론   2.1 이백의 생애   술과 달의 시인 이백은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이며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로 당대 가장 뛰어난 시인이자 중국 문학사상 굴원 을 잇는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위대한 시인으로 ‘시선(詩仙)’ 이라고 불린다.(이백은 시선, 두보는 시성, 왕유는 시불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조상이 농서 성기(현재 감숙성 천수현 부근)사람, 조상이 수나라 말엽에 서역으로 흘러들어감, 이백은 중앙아시아 쇄엽에서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면주(지금의 사천 면양지방)에 거주하여서, 어릴 때부터 촉나라에서 수학,유람함. 25세 때에 혼자 몸으로 촉나라를 나와서 임협방도(의협을 신뢰하고 도리를 찾는것)와 교유간알(신분이 높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통해 벼슬의 고위직에 올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 들을 평안하게 하는" 큰 뜻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동정, 금릉, 양주 등지를 유람했으며 수년후, 전 재상이었던 허어사 의 손녀와 결혼을 하여 안륙(지금의 호북 안륙)에 머물러 살았으며,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양양,낙양,태원 등지를 유람했다. 후에 또한 공소   부등 "죽계육일"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람과 함께 동노에서 은거하였다.    천보 초기에 오균이라는 도사의 추천으로 임금의 부름에 장안으로 들어가, 한림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귀족들로 여러 차례 비방을 받아, 천보 34년 관직을 버리고 장안을 떠나와 개봉을 중심으로 제, 노, 회, 사, 강동사이 북으로는 유연 일대까지 왕래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이백은 노산에 은거하였으며 계속해서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면밀히 주시하였고 후에 영왕 인의 막부에 참가하게 되었다. 숙종 지덕 2년 영왕 인은 패배하고 이백은 연루되어 욕양에서 옥살이를 하게되고 이듬해 야랑으로 유배가는 도중에 사면을 받고 무창, 욕양, 의성 각지를 전전했다. 대종 보응 원년에 친척 아저씨인 당도(지금의 안휘성 당도현)현령인 이양빙의 집에서 병사했다.     그는 불운을 겪었고 복잡한 사상을 가진 천재적인 시인이며 또한 자객, 은사, 도인 등과 같은 기질을 지니기도 했다. 유가, 도가 그리고 협객 등 세 가지 사상을 몸소 실천했는데, ‘공성신퇴 (功成身退:공을 세운 후 물러 나자)’ 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주도적 사상이었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이백은 그의 천거로  43세 때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 [남릉 별아 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 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 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장안을 떠났다. 현종 의 마음에 들어 호탕하고 방탕한 생활을 3년간 지속하며 당시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에게 신을 벗기도록 하였으며, 현종의 애첩 양귀비 (楊貴妃)에게 벼루를 들고 서있게 했던 기인이다.      장안에서 보낸 3년의 정치 생활은 이백의 창작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정치적 이상과 암울한 현실은 첨예한 갈등을 보였으며, 가슴 속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과 불만이 쌓였다. 분노는 훌륭한 시를 낳았고, 그래서 , 등의 시에는 옛 선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으 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훌륭한 명작들을 써나갔다.    이백은 후세 사람들에게 9백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렇게 빛나는 작품 들은 그 일생의 마음 역정을 표현한 것으로, 성당(盛唐)시기 사회의 현실과 정신생활 모습의 예술적인 묘사이다. 이백은 일생동안 원대한 포부를 품고 한치의 속임도 없이 업적을 쌓으려는 바램을 표현했다. 어려서부터 협객 을 좋아해서 그에 대한 많은 시를 썼는데, 이 그중 대표작이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 (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 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 (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 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 (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2.2 대표적인 음주시    이백이 술을 좋아하였다는 사실은 그를 주선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에서 충분이 증명된다. 그의 벗 두보가 “이백은 술 한 되에 시를 백 편이나 쓴다”고 읊은 사실과 이백 자신이 “백년은 삼만 육천일, 하루에 삼백 잔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사실에서도 음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음주는 삶의 충족을 위해 마신 것만은 아니였다. 영원한 것으로의 지향, 유한한 인생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마셨다. 이백은 술을 마시 면 마음이 쾌활하고 호방해졌다. 취중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고 도취 속에서도 각성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술에 대한 시를 볼 때 잠꼬대 같은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표현 속에 엄연한 객관화 정신이 있었으며 동시에 정확한 작시 기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2.2.1 “장진주(将进酒)”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그대 보지 않았는가 황하수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奔流到海不復回               기운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그대 보지 않았는가 고당의 밝은 거울에 비친              백발의 슬픔을 朝如靑絲暮成雪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이 뜻을 얻었을 때엔 모름지기 환락을 다해야 하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에게 재능을 주었으니 반드시 쓸데 있을 것이다. 千金散盡還復來 천금 다 써버려도 다시 손에 돌아올 날 있으리 烹羔宰牛且爲樂 양고기를 삶고 쇠고기를 저며서 술 잔치를 즐겨보자 會須一飮三百杯 모름지기 술은 한 번에 3백잔은 마셔야지 岑夫子         잠부자여 丹邱生         당구생이여 進酒君莫停        지금 곧 술을 권하여 하니 잔을 멈추지 말아요 與君歌一曲        그대 위해 한 곡조 시를 읊으리니 請君謂我傾耳聽 청컨대 그대는 나를 위해 귀 기울여주오 鏡鼓饌玉不足貴 아름다운 음악 맛 좋은 음식은 귀한 것이 못된다 但願長醉不用醒 다만 소원은 오래 취하여 깨지 말기를 古來聖賢皆寂寞 옛 성현들은 죽으면 그뿐 잊혀지지만 惟有飮者留其名 술 잘 마시는 사람만이 그 이름을 남겼다 陳王昔時宴平樂 옛날 진왕은 그의 평락관에서 주연을 베풀고 斗酒十千愁換謔 두주를 만금에 사서 마음껏 즐기고 노닥거렸다. 主人何爲言少錢 집주인인 내가 어찌 돈이 적다 말하겠는가 徑須沽取對君酌 모름지기 술을 사서 그대에게 권하겠노라 五花馬                 다섯가지 꽃 무늬의 말 千金衣                 천금의 모피 呼兒將出換美酒 아이 불러 끌어내어 맛 좋은 술과 바꾸어 與爾同銷萬古愁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우수를 쫓아 버리자       이 시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개탄하고 술을 마셔야만 우수를 잊을 수 있다는 이백 특유의 술철학이 담겨있다. 황하가 분류하는 것 같은 웅대한 시, 자유분방, 종횡무진으로 구사한 화려한 시구에는 억제하기 어려운 인생의 비애가 넘쳐 흐른다.     이 시와 비교하여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내용상 이질적인 면이 보이고 있 는데 예하여“조여청실막성설(朝如靑絲暮成雪)”에서‘아침에 푸른 실같은 머리 저녁에는 눈같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對酒》에서는 어제의 홍안 소년 오늘은 백발(昨日 失顔子 今日白髮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용 상에 있어서도 대조를 보이고 있는 곳이 있는데 (莫使金樽空對月) 황금 술단지 공연히 달빛 아래 버려두지 말아라 하고 《把酒問月》에서는 바라 는 것은 노래 부르고 술 마실때 달빛이여 깊이 비쳐다오 금술독 속 (唯願當歌對酒時 月光長照金樽裏 ) 까지 라고 표현하고 있다.       달과 술은 서로 이질적인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한 데 묶어서 다루어 보려는 의도는 그만큼 이백의 시의 특수성 때문이다. 한 편의 시 속에서 그는 달과 술을 동시에 소재로 활용하는 경우가 다른 시인에 비하여 많을 뿐만 아니라 이 계열의 시가 유명하다. 이백의 시에는 달과 술이 동시에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시 제목에서도 이러한 현상 이 나타나고 있는데 月下獨酌등이 바로 그런한 예이다.   2.2.2                   달 아래에서 혼자 마시다     花問一壺酒 꽃나무 사이에 놓인 한 단지 술은 獨酌無相親 서로 친한 벗도 없이 혼자 마신다 擧杯邀明月 술잔을 들고 밝은 달 맞으니 對影成三人 내 그림자까지 모두 셋이 되었다 月旣不解飮 달은 이미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그림자는 부질없이 내 하는 대로 따른다 塹伴月將影 얼마 동안 달과 그림자를 벗으로 行樂須及春 행락은 오로지 봄이 가기 전에 즐기는 것 我歌月徘徊 내가 노래하니 달은 바장이고 我舞影凌亂 내가 춤추니 그림자 어지럽게 흔들린다 醒時同交歡 술이 깨어서는 함께 즐기고 醉後各分散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진다 氷結無情遊 길이 무정한 놀이를 그들과 맺어서 相期邈雲漢 아득한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기약한다.       밝은 달 아래 꽃나무 사이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달과 그림자를 벗 삼아 마음이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며 즐기는 심경을 독특한 기법으로 노 래하고 있다. 전부 4수로 되어있는 이 시들은 각각 착상이 다르다.    중국문화는 장르중에 시는 역사적으로 주총을 이루었고 특히 당대에 있어서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당대에서도 성당이 당시의 절정기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은 이백이다. 이백은 진보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그는 진보적인 낭만주의를 굴원 이래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렇기 때문에 당조때 두보가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어 기봉을 이루었다면 이백은 진보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다.     이백은 반평생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했는데 전국 수많은 명산과 대천을 다니며 조국의 자연을 찬미하는 많은 분량의 우수한 시들을 썼고, 시를 통해 자유를     사랑하고 해방을 갈망하는 심정을 표현했다. 이러한 작품 속에 기묘한 산천은 거스르고 머무르지 않으려는 그의 성격과 완벽 하게 맞아떨어졌다.     이백은 조국을 매우 사랑하고 백성을 보살폈으며 현실을 인식했던 위대한 시인이였으며, 전쟁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에게는 열정을 담아 보내는 노래를, 통치자들의 불쌍한 병사 들에 대한 무정한 채찍질을 담은 시들을 썼다. 이백은 또한 많은 악부시를 지어, 노동자들의 힘든 생활을 묘사하고 그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을 표현 했다. 이백의 시는 ‘붓이 떨어져 비와 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되어 혼을 울리는’ 예술적 매력을 담고 있는데, 이것도 이백 시의 가장 뚜렷한 예술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풍부한 자아실현의 주관적 정서의 색채가 매우 강하고, 감정표현에 있어 위세당당하고 일사천리한 기세를 담고 있다.     시는 항상 상상, 과장, 비유, 의인 등의 기법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신기하며 사람을 감동시키는 경지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이백의 낭만주의 시가 사람들에게 자유분방함과 신선같이 뛰어난 운치를 주는 원인이다.     이백의 시는 이전 낭만주의 창작의 성과를 이어받아 반역사상과 호방한 풍격으로 성당시대의 낙관적이고 진보적인 창조정신 및 봉건질서에 만족 하지 못한 잠재된 역량을 반영하며, 낭만주의 표현영역을 넓히고 기법을 풍부하게 하는 동시에 상당한 수준까지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결합을 실현시켰다. 이런 한 성과로 인해 그의 시는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의 새로운 절정이 되었다. 이백은 당대 시가의 혁신에 대해서 뛰어난 공헌을 했다. 그는 진자앙 시가의 혁신적인 주장을 계승하여 이론과 실천에서 시가혁신의 최후 성공을 거두었다.                                                       3. 결 론       이백의 위대한 시편들은 성당시대의 상승발전하는 기백을 반영하였다.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그는 극대한 용기로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항에 몰두하였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책과 열려있는 밝은 정치를 하고자 이에 투쟁하였다. 이러한 완강한 투쟁정신과 자유해방의 열정에 대한 추구는 그의 시가에서 적극적인 낭만주의 정신의 핵심이었다.   ‘성당 (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 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짧은 일생에 천만고의 시름을 안고 있는 인생, 무엇으로 그 시름을 잊고 이 인생의 무상을 극복할수 있을가 술이 야말로 바로 그 시름을 녹여 없애는 것이며 선물이라는 대 전제하에 과연 이백다운 종횡무진의 낭만과 과장으로 호기로운 음주예찬을 펼쳐가는 작품이다. 취중인 만큼 과장도 호기도 백배로 부풀어 있는 가운데 또한 은근히 때를 얻지 못한 자신의 불우의 분한을 시종 그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백의 음주시에서는 자연과 인생은 하나의 사랑으로 귀의가 되어있다. 산천초목이며 일월신성이다. 그러한 중에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달과 꽃과 새와 바람과 구름은 그의 술자리에 동참하여 항상 이백과 함께 하였다. 이백에게 있어서 자연은 적극적 능동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시대에 있어서 이백의 음주시는 그저 단순한 작시하는 그러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천인하일의 경지로 들어가는 입장에서 파악 될 수 있다고 보며 이러한 면에서 새로운 각도로 해석을 시도해 보아야 하며 이백의 음주시를 더욱 더 음미해보아야 한다.   감사의 말 논문집필 과정에서 최균선선생님의 사심없는 지도를 받아 순리롭게 완성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참고 문헌   1. 孫宗燮, 『李杜詩新評』, 정신세계사, 1996 2. 郭沫若, 『李百과 杜甫』, 까치, 1996 3. 張基槿, 『李太白評傳』, 乙西文化社, 1987 4. 金學主, 『中國文學史』, 新雅社, 1993 5. 丁範鎭, 『中國文學史』, 學硏社, 1993 6.《李白诗歌鉴赏集》,巴蜀书社 1998年2月 7. 《李白集》山西古籍出版社,2004年6月 8. 安旗:《李白全集编年注释(上、下)》巴蜀书社,2000年4月第1版 9. 王寅明著:《李白全传》长春出版社,2002年7月第一版 10. 霍松林、尚永亮:《李白诗歌鉴赏》,上海教育出版社,1989年 11.《李白诗》,人民文学出版社,2005年5月 12. 王步高:《唐诗鉴赏》,南京大学出版社,2006年7月 13.  박충룩저, 북경민족출판사, 2003년10월제1판 14. 이창룡, 『李百』, 건국대학교출판부, 1994     =======================================================   편집자   고전 시가와 현대시를 망라하여 술은 시의 중요한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변주되어 왔다. 술은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혹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중압감을 풀어주는 매개인 동시에, 비극적인 현실이나 시대적 상황을 타파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매개로 등장하고 있다. 시인과 술 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술이 제의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처 텅(A. Tongue)에 의하면 술은 석기시대부터 제조되었으며, 최초의 술은 꿀로 빛은 하이드로멜(hydromel)이라는 발효주라고 추측되고 있다. 제의의식이 민중의 생활 속으로 확산하기 이전, 술은 종교의식을 관장하던 제사장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제의의식에 받쳐지는 제물이 사람이었다가 동물로 대체되었고 이때 동물의 피는 신성함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후 동물의 피 대신 술로 대신하면서, 신에게 바쳐지는 술은 신에게 의탁하여 신의 힘으로 세상을 관장하는 기원을 담은 매개였기에 신성한 기운을 지닌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와 같이 술은 조상과 신의 은덕에 예를 갖추어 보답하는 종교적 의미로 다루어져 왔고, 사회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화해의 수단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일용할 양식으로, 때로 치료약으로 활용되면서 술은 인간의 삶에 다양한 역할과 기능으로 작용해왔다. 중요한 기호식품의 하나인 술은 그 어원도 주목을 요한다. 고유 우리말인 ‘술’은 예전부터 ‘수블’ 혹은 ‘수불’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술을 빚는 과정에서 누룩의 효모 때문에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양새를 물에 불이 붙은 것으로 보아 ‘수불’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술을 ‘수울’ ‘수을’로 기록하고 있으며, 학자들은 ‘수블→수울→수을→술’로 변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학 특히 시와 술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시에서 술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성으로 지칭되는 이태백과 두보를 떠올릴 때도 시와 함께 연결되는 것이 바로 술이다. 이태백은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석 잔을 마시니 도를 통한 듯하고 한 말을 마시니 자연과 합치된다.(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라고 했으며, 〈장진주(將進酒)〉에서는 “양고기 삶고 소 잡아 즐기려 하나니 모름지기 한 번 술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라며 술 마시기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시문학에서도 술은 단골 소재이다.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술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우리 술 문화를 살펴보면, 삼국시대가 우리 술의 발아기라고 한다면, 고려시대는 성장기, 조선시대는 전성기, 일제강점기는 쇠퇴기, 그리고 현대는 부흥기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면, 한국 술의 변천사는 7단계로 나누어 삼국시대 이전의 형성기, 삼국시대를 맹아기, 통일신라시대를 정착기, 고려시대를 개발기, 조선시대를 전성기, 일제강점기를 침몰기, 그리고 해방 후부터 근대를 표류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술 빚기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일본의 《고사기》에 “응신천왕(應神天王), 270~312년) 때 백제의 수수보리라는 사람이 누룩을 사용하여 술을 빚는 신법을 일본에 전래하였다”는 기록에서, 삼국시대의 술 빚기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술에 관련한 기록이 처음 발견되는 문헌은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 건국담의 술에 얽힌 고사가 《고삼국사》에 인용되어 있다. 비단 자리를 눈부시도록 깔고 금 술잔에 향기로운 술을 차렸네. 세 처녀 스스로 거기 들어와 마주 앉아 술 마시고 크게 취했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비단 자리가 눈이 부시도록 깔린 곳에, 향기로운 술과 금 술잔이 준비된 곳에 세 처녀가 마주 앉아서 술에 취한 흥겨운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 세 처녀가 바로 하백의 세 딸인 유화, 훤화, 위화이다. 그리고 이들을 초청하여 술을 대접한 이는 해모수이다. 하백의 딸 유화, 훤화, 위화가 더위를 피해 압록강의 웅심연서 놀고 있는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세 처녀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신하를 시켜 가까이하려 했으나 그들이 응하지를 않았다. 뒤에 해모수는 신하의 조언을 구하여 웅장한 궁실을 지어 그들을 초청하였는데 초대에 응한 세 처녀가 술대접을 받고 만취한다. 해모수는 세 여자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방문을 막고 닫자 놀란 세 여인이 달아났는데, 그 중의 큰딸 유화가 해모수에 잡혀 궁전에서 잠을 자게 되고 해모수와 정이 들게 된다. 해모수는 유화와 함께 오룡거를 타고 수궁으로 가서 유하의 아버지인 하백을 만나러 가게 된다. 결국 하백과 해모수가 서로 동물로 변신하며 재주를 겨룬 끝에 승리한 해모수와 유화는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유하의 아버지인 하백이 해모수가 자신의 딸을 버릴까 하는 걱정 끝에 술을 잔뜩 먹여 두 사람을 가죽 부대 속에 가두어 오룡거를 태워서 내보냈다. 오룡거가 궁중을 빠져나오기 전에 해모수는 이레 만에 술이 깨어 유화의 금비녀로 가죽 부대를 뚫고 나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후 유화가 수궁으로 되돌아갔지만, 화가 난 하백이 유화에게 입술이 석 자나 되게 늘어지는 벌을 주어 결국 우발수라는 곳으로 쫓겨났다. 혼자가 된 유화는 해모수와 술에 얽힌 하룻밤의 인연으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이가 바로 주몽이다. 이상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나오는 고구려 건국 신화 속이 술 이야기이다. 고구려 주몽의 건국 신화에 기록된 고구려의 술 문화는 이후 통일신라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일반인들이 체를 통해 막 거른 막걸리를 음용한 반면, 상류사회에서는 맑게 거른 술인 청주를 음용하는 일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도경》 《제민요술》 등의 문헌의 술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우리 술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술 문화가 이어져 내려옴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이규보의 〈명일우작(明日又作)〉 고려시대에 들어서 송나라와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술 문화는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에 송나라 사신(국신사)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살펴보면 고려인의 술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묘사한 그림. 《고려도경》은 고려 인종 원년(1123년 5월 8일)에 송나라 사신인 서긍(1091~1153년)이 국신사로 1개월 동안 고려 수도 개성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문물을 기록한 자료이다. “고려 초에 술은 미곡(米穀)으로 빚었는데 찹쌀 술이 없고 모두 멥쌀에 누룩을 넣어 술을 빚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색깔이 짙어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하였으며,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良醞)이라고 하는데 술을 질항아리에 넣어 황견으로 봉하여 저장하여 걸러서 맑은 술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발아했던 술 문화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 더욱 성행하여 술의 종류가 늘고 주조 기술법 또한 번창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소주에 대한 내용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소주가 고려에 유입된 것은, 고종 6년(高宗 6년, 1219년)이다. 이 시기에 원나라와 국교를 맺게 되고, 약 90여 년의 원나라 간섭기에 원의 음식문화 전래로 채식문화가 육식문화로 변모하게 되고 더불어 소주와 같은 증류주 문화가 유입된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우왕(禑王) 원년(1375년)의 기록에서 소주 음용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마침내 우리나라는 곡주 위주의 탁주류, 청주류, 증류주의 3대 주종문화(酒種文化)를 고려시대에 완결하는 한편 북방유목민족의 유주문화권(乳酒文化圈), 남방민족의 열대과실주문화권에서 화주(花酒, 과실주의 일종), 서역사회(西域社會)의 포도주문화권에서 포도주 등이 유입됨으로써 범세계적인 주류 문화권과 교류가 고려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국 술의 개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술 문화의 배경 속에서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고려의 이규보(1168~1241)는 술을 애용하고 술에 관한 시를 쓴 인물이다. 이규보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여 삼혹호(三惑好)라 스스로 호를 붙이기도 하였다. 이규보는 이미 15세 때 술의 맛을 통달할 정도로 애주가였다. 그의 술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친상(親喪)을 당한 와중에도 술을 마셨고, 심지어 병석에 누워서도 술을 끊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하루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희롱 삼아 짓다〉라는 시에서 “일만 팔십 일 만에 오늘 다행히 술을 깼다”라는 내용을 통해 그의 음주벽을 알 수 있다. 그는 시 〈명일우작(明日又作)〉과 〈화유(花柳)〉를 통해서도 술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하늘이 나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않게 하려면/ 꽃과 버들이 피지 말도록 하여라/ 화유가 꽃다울 때 마시지 못하면/ 봄은 나를 버릴지언정/ 나는 못 버리겠네”(이규보 〈화유花柳〉)라고 적고 있으며, “생강이나 계피를 섞어 말린 육포나, 절인 생선 담은 접시와 뜸 잘 들인 밥이 든 솥이나, 식혜 한 단지나 좋은 술 한 병을 스승에게 바쳐 속수의 의식을 행하려고 오는 사람이 있거든 너는 짖지 말라”(이규보 〈명반오문(命斑獒文)〉고 적고 있다. 病時猶味剛辭酒   병중에도 오히려 술을 사양 못하니 死日方知始放觴   죽는 날에 가서야 술잔을 놓으리라 醒在人間何有味   깨어서 살아간들 무슨 재미 있으랴 醉歸天上信爲良   취하여 죽는 것이 진실로 좋을씨고 — 이규보(李奎報) 〈명일우작(明日又作)〉 그의 술 예찬은 수필 〈사륜정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시와 거문고와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라 붙인 자호와 어울리게, 이규보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정자를 만들려고 하였다. 사륜정이란 정자에 4개의 바퀴를 달아 수시로 장소를 옮겨가며 자연과 친구와 술을 벗 삼아 술과 시의 멋을 즐길 수 있는 이동식 정자인 셈이다. 잠시 〈사륜정기((四輪亭記)〉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다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혹은 앉아서 술잔을 돌리며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고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피하니,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을 찾아 옮기느라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게 되므로 그때마다 거문고, 책, 베개, 대자리, 술병, 바둑판이 사람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중략) 바퀴를 넷으로 하고 정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정자의 사방이 6척이고 들보가 둘, 기둥이 넷, 대나무로 연목을 하고, 대자리를 그 위에 덮으니 이는 가벼움을 취한 것이다. — 이규보 〈사륜정기((四輪亭記)〉 중에서 이 정자의 면적은 모두 36평방척(平方尺)이며, 소위 이동식 정자로 정자 위에 거문고, 술 단지, 술병, 소반, 기명 바둑판 등을 갖추고 여섯 사람(거문고 타는 자, 노래하는 자, 詩僧, 바둑 두는 자 두 사람, 그리고 주인)이 앉게 되어 있다. 바퀴가 있어 하인들이 밀고 끌어서 경치 좋은 곳에 세워두고 즐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쯤 되면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자연을 벗하려는 풍류의 절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 조선시대에 들어와 술 문화는 조선 초기와 후기에 다소 변화가 생긴다. 조선 초기에 지배층에 의해 음주문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면 후기에는 일반인들에게도 술 문화가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술 문화가 일반 서민층에게도 확대된 것은 농업기술의 발달과 쌀의 생산량 증대와 연관이 있다. 이러한 기반에 힘입어 원나라에서 유입된 증류주인 소주류 제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탁주, 청주, 소주가 우리나라 술로 자리매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중종(中宗, 1506~1544) 때 원(元)에서 유입된 소주가 널리 전파되었는데 후기에 들어와 농업기술의 발달로 증류주인 소주류가 일반인들도 즐겨 이용하여, 몽골이 일본 점령을 위해 만든 전초기지가 있던 안동, 개성과 제주가 오늘날에도 소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에 들어 고려시대와 비교하면 술의 제조법도 한층 활발해졌으며, 일반인들도 술을 즐겨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부녀필지(婦女必知)》의 음식총론(飮食總論)에서도 음식과 술의 관계를 소개하고 있으며, 《수운잡방(需雲雜方)》에는 막걸리, 맑은술, 소주, 절기주 등 특히 술의 종류와 술 빚는 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시성으로 이규보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송강 정철이 있었다. 당쟁에 의한 좌천과 유배와 은둔 시절에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의 걸작을 남긴 송강 정철 역시 대표작 〈장진주사(將進酒辭)〉란 권주시에서 술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장진주사(將進酒辭)〉는 자연과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풍류와 함께 생의 유한함과 당쟁으로 부귀와 명예의 허명과 생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을 꺽어 셈하며/ 무진 먹세그려/ 이 몸이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졸라서 매어가나? ……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들이 휘파람 불며 돌 때 가서야/ 뉘우친들 어찌할 것인가!       — 송강 〈장진주사(將進酒辭)〉 송강 정철의 권주시편을 감상하다 보면 옛 선비들의 은은하면서 여유 있는 기개와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송순의 〈면앙정가〉에도 술에 관련된 구절이 있다. “술이 익었거니 벗이야 없을소냐 (중략) 온 가지소리로 주흥(醉興)을 배야거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야 붙었이랴”(송순 〈면앙정가〉) 조선의 술 문화는 시 이외에도 음식에 관련한 고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술의 제조법에 관련한 대표적인 서적으로는 조선시대 후기인 1670년경에 쓰인 한글 전문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꼽을 수 있다. 《음식디미방》의 경우, 총 132조목 중 51조목이 술에 관한 것이다. 더불어 술 제조법을 책의 제일 앞에 기록한 것만 보아도 제사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다. 《음식디미방》 이외에도 술에 관한 기록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말엽의 《주방문(酒方文)》(1600년대 말엽)에는 12조목이, 《산림경제(山林經濟)》(1715년경)에는 61조목의 전통주 제법이 기록되어 있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15년경),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50년경) 등에도 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처럼 조선시대는 한국 술 문화의 전성기로 200여 종의 다양한 술이 생산되었고, 양조주(釀造酒)와 증류주는 물론 각종 약초를 가미한 약용주(藥用酒), 그리고 수차례 증류방법으로 제조된 홍로(紅露)와 감홍로(甘紅露)와 같은 고급술이 생산되었으며, 한국 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주세법, 주세령과 전통 민속주 쇠퇴 그러나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던 일제강점기에 들어 화려했던 우리의 전통 술 문화는 몰락하여 쇠퇴기로 전환된다. 조선시대에는 양조장이 12만 개나 있었으나, 조선 말기인 1883년에는 일본의 후쿠다(福田)가 부산에 일본식 청주공장을 세운다. 조선총독부는 주세법과 더불어 문화말살정책의 하나로 융희(隆熙) 3년(1909) 7월 ‘주세령’을 공포한다. 그리고 그 해 9월 주세령이 강제 집행되었는데, 일본은 보다 효율적으로 주세를 걷어 들이기 위하여 한국 술 제조를 탁주, 약주, 소주의 세 종류로 규격화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주세법과 주세령은 우리 전통주인 각 지역의 특산주(特産酒)와 가양주(家釀酒) 등의 민속주 제조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사라지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한국의 주조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몇 차례의 제도가 공포되었으나 일제강점기는 한국 술의 침몰기이며 이들 법안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일제의 주세법과 주세령 이후 급속하게 우리의 민속 전통주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 시기에 일본식 청주(淸酒), 맥주, 양주 등의 외국 술이 유입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상당기간 일본식 제도가 남아 있어 민간에서는 제사나 혼사나 회갑연 등을 치르기 위해 가정에서 술을 밀조하였으며 이러한 밀조가 곧 토속주의 맥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정부의 금지정책이 풀리면서 안동소주, 문배주 등의 증류식 소주와 각종 가양주가 제조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술 권하는 사회와 조지훈의 주도(酒道) 18단계   일제강점기의 조제 금지령과 1965년의 소주 금지령 등을 거치면서 희석식 소주가 유행하여 일반인들도 값싸게 소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소주나 맥주는 주로 일반인들이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이었으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동료나 문인들과 술자리를 갖는 시간은 삶의 여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소주나 맥주 등이 일반화하면서, 현대시에도 술과 관련된 작품이 많이 등장하였다. 1920~30년대에 식민지 시기의 김기림, 이상, 정지용 시인의 작품에서도 술에 관련된 내용을 많이 볼 수 있다. 더불어 1950년대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을 비롯한 김수영, 신동엽, 박봉우, 김종삼, 서정주, 조지훈, 박목월, 천상병 등의 시인과 김관식, 정호승, 박정만, 김영승 시인 등 2000년대 이르기까지 술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개성적으로 변주되어 오고 있다. 특히 1960~70년대에는 문단과 술, 특히 시인과 술은 무척이나 친밀한 단어였다. 60~70년대는 만취의 시대, 술 권하는 사회였다. 우선 술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막걸리 양조장이 마을마다 널려 있었고, 희석식 소주는 텔레비전 메인 시간대 광고에 흘러넘쳤다. 농촌에서 되로, 공장에서 공단으로 수많은 근로자가 끼리끼리 어울리며 노동의 고통을 술로 잊었고, 개발독재에 저항하던 인사들 역시 그 좌절과 절망을 술로 달랬다. 80년대는 야간통행금지 해제에 따른 폭음의 시대, 밤의 문화의 시대였다. 성공한 쿠데타 시대는 수단과 방법을 묻지 않았다. 돈! 돈! 돈! 돈만 벌어라. 막걸리, 소주가 맥주로. 맥주가 어느새 코냑, 위스키로 바뀌었다. 당시에 문인들이 많이 출입했던 술집으로는 ‘은성’ ‘대머리집’ ‘낭만’ ‘흑산도’ 등이 있었다. 이 중 1970년대 종로 청진동에 있었던 ‘흑산도’란 술집 주인은 시인 권일송(1933~1995)이었다. 그의 시는 제목마저도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한빛사, 1966)라고 붙여 당시 시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술을 통해 토로하고 있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떠오르는 천년의 햇빛/ 지는 노을의 징검다리 위에서/ 독한 어둠을 불사르는/ 밋밋한 깃발이 있다/ 하나같이 열병을 앓는 사람들/ 포탄처럼 터지는 혁명의 석간 위엔/ 노상 술과 여자와 노래가 넘친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 권일송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또한 술에 얽힌 시인들의 주벽과 기행의 일화는 시보다 더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문인과 술에 관한 저서로는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간행된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과 1960년 신태양사(新太陽社)에서 발간한 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가 있다. 그리고 한국평론가협회 부회장을 지낸 신동한 선생이 1991년 해돋이에서 출간한 《문단주유기》가 있다. 술로써 세상에 싸움을 거는 시인들의 일화는 곧 세계에 대한 시인의 고민과 투쟁을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시인들에게 술이란 곧 내면의 고통을 달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종삼 시인의 술과 관련된 작품은 시를 읽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술에 중독된 시인의 글에서 서글픔과 가족의 애환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전집에는 술에 관련한 작품이 약 20여 편이 있다. 손민달은 “김종삼의 시 세계에서 파편화된 현실은 ‘술’을 통해 오히려 비극화되었고 동일시된 타인과 교유하며 환상의 세계에서 원형의 복원을 꿈꾸”었다고 평했다. 김종삼은 시 〈장편〉에서 “쉬르레알리즘의 시를 쓰던/ 나의 형/ 宗文은 내가 여러 번 입원하였던 병원에서/ 심장경색증으로 몇 해 전에 죽었다./ (중략) / 아우는 스물두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나는 그 때부터 술꾼이 되었다.”라며 술을 마시게 된 이유를 형의 죽음과 폐병으로 사망한 동생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산문에서도 “살아가노라면 어디서나 굴욕 따위를 맛볼 때가 있다. 화가 나서 마시고 어째서 마시고 했지만 한 마디로 절제를 못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비극적인 가족사와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현실에 대한 비극적 정황 인식을 술로 달래었다. ‘술병’이 도지면 눈에 술밖에 보이는 게 없다. 아내는 환자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돈은 물론 토큰까지 뺏어가지만 그는 무작정 나선다. 동네 가게에서 외상으로라도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미리 당부를 받은 가게 주인은 가라고 소리친다. 그는 쫓겨나듯 아내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윗동네 가게로 가서 무작정 소주를 딴다. ‘돈은 나중에’라고 말하게 되면 상대 쪽에선 당연히 욕설이 튀어 나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계속 소주를 마시며 폭음을 하여, 결국 술 때문에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그의 비극적 삶의 면면이 몇 편의 시에 그려지고 있다. 빗방울이 제법 굵어진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먼 산 너머 솟아오르는 나의 永園을 바라보다가 구멍가게에 기어들어가 소주 한 병을 도둑질했다 마누라한테 덜미를 잡혔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토큰 몇 개와 반쯤 남은 술병도 몰수당했다 비는 왕창 쏟아지고 몇 줄기 光彩와 함께 벼락이 친다 强打 連打 — 김종삼 〈극형〉 또 죽음의 발동이 걸렸다 술 먹으면 죽는다는 지병이 악화되었다 날짜 가는 줄 모르고 폭주를 계속 하다가 중환자실에 幽閉되었다 무시무시한 육신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린 다 고통스러워 한시바삐 죽기를 바랄 뿐이다. 희미한 전깃불도 자꾸만 고통스럽게 보이곤 했다 해괴한 팔자이다 또 죽지 않았다 뭔가 끄적거려 보았자 아무 이치도 없는  —김종삼 〈죽음을 향하여〉 위의 시를 보면 술 때문에 겪는 고초가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의 신상에 관련한 체험적 내용을 과감하게 시적 소재로 차용하는 시인의 솔직함이 더욱 시를 감동적으로 읽히게 한다. 술은 이처럼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이나 기질적 우울을 달래주는 역할도 하지만, 반면에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어 일찍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다. 김종삼 시인 이외에도 술에 관련한 일화를 꼽으라면 술성이라 불렸던 〈승무(僧舞)〉의 시인 조지훈을 빼놓을 수 없다. 조지훈의 술에 관한 일화와 사람에 대한 정이 넘치는 일화는 〈술은 인정이라〉는 수필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수필에서 그는 술을 마시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 오도(吾道)의 자랑이거니와 그 많은 인정 속에 술로 해서 잊지 못하는 인정가화(人情佳話)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라고 자신의 주도를 술회하고 있다. 또한 〈주객이 아니라는 성명〉에서 조지훈은 “나는 폭주 20년의 주력은 있지만 그동안 1만여 번의 술좌석에서 일어난 일을 거의 잊은 적이 없고 혼자서 술을 마신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다만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신 흥취를 좋아하는 것이다”라며 애주가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조지훈 시인은 술에 대한 여러 가지 단계를 설명한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음주에는 무릇 열여덟의 계단이 있다.”라고 했다. 더불어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段)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조지훈 못지않게 잘 알려진 애주가로는 미당 서정주(徐廷柱)가 있다. 1990년대만 하여도 당시 문단에선 새해가 되면 선배 문인들에게 세배를 가는 풍습이 있었다. ‘소설가들은 동리 선생의 댁으로, 시인들은 미당 선생의 댁으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문단의 선후배 사이가 돈독했으며, 그런 자리에는 으레 술이 함께 하기 마련이었다. 미당은 특히 말년에 맥주를 좋아하였는데, 맥주 중에서도 카스라는 상표의 맥주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제자들은 세배를 갈 때면 선생이 좋아하는 맥주를 들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미당은 제자나 후배 문인들을 위해 맥주뿐만 아니라 각종 술을 담아 후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미당은 술을 마시다 술이 떨어지면, 무릎 근처쯤에 놓아둔 목탁을 두드리거나 차임벨을 눌러 술을 내오게 했다고 한다. 1963년에 쓴 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에도 술 이야기가 나온다. 〈선운사 동구〉는 1968년 출간된 제5시집 《동천》에 실린 작품으로, 선운사에 시비로 세워진 작품이기도 하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 서정주 〈선운사 동구〉 이 시를 보면 능란하게 넘어가는 육자배기와 칼칼한 막걸리가 절로 떠오른다. 지금은 특산물인 풍천장어집이 즐비한 선운사 입구이지만, 예전에는 절 입구 삼거리에 막걸릿집이 하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해 초가을, 미당이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선운사 버스정류장에서 우산도 없이 이슬비를 맞고 서 있다가 선운사 동구 주막집에 들어섰다. 비를 맞아 추운 몸에 뜨끈한 구들방과 잘 익은 신김치에 막걸리를 마셨는데, 마침 40대 중반의 주막집 여인이 있어 미당이 육자배기를 청하자 막걸릿집 주인 여자가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그런 일 있었던 이후 여주인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편에 의탁하다 끝내 아랫동네 감나무 밑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고 한다. 미당은 그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전해 듣고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천상병 시인(1930~1993). 술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는 시인을 또 꼽으라면 천상병 시인을 들 수 있다. 천상병 시인은 1967년 동백림사건 연루와 전기고문, 그리고 살아 있는 시인으로는 처음으로 유고 시집이 출간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시인이기도 하다. 1971년도 초 5개월여 동안 천 시인이 보이지 않고, 가깝게 지내던 주변 문단 지인들과 연락이 두절되자 천상병 시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들이 애석해하며 시 원고를 모아 유고시집 《새》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술에 만취하여 쓰러진 천상병 시인이 행려병자로 오해받아 응암동의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유고 시집이 출간된 후 천상병 시인이 예의 그 천진스러운 얼굴로 다시 술자리에 나타났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죽어서까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장에서 몇백만 원의 조의금이 걷혔는데, 그들 가족에게는 큰돈이라 장모가 애써 숨긴다고 부엌의 아궁이에 숨겨 놓았는데, 이를 알지 못한 시인의 아내가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는 사연 역시 그를 더욱 기인처럼 만들고 있다. 술과 관련된 그의 일화 역시 독특하다. 그는 술 중에서도 특히 막걸리를 좋아했었는데, 전기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달래기 위해 매일 막걸리 두 되로 세 끼 식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인사동이나 종로 일대를 떠돌며 동료 문인들에게 돈을 꾸어 막걸리와 술과 담배를 사서 피웠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는 결혼 후에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의 담장도 대문도 없는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아내 목순옥 여사에게 하루 이천 원의 용돈을 받으면 맥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사는데, 그 일이 그의 삶에 커다란 행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아래 두 편의 시는 천진무구한 천 시인의 삶과 순수함을 엿보게 한다.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원 훔쳐/ 아침 해장으로 간다/ 막걸리 한 잔에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나! — 천상병 〈비오는 날〉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가는데 할머니 등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천상병 〈주막(酒幕)〉 소주 수백 병을 마시고 수백 편의 시를 토한 박정만 시인 《시인세계》에서 2005년 봄호에 기획한 〈시인과 술〉에 기고한 장석주와 정규홍의 글에 따르면 “시인 박정만은 죽기 서너 달 전부터 곡기를 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그가 한 달 동안 마신 소주병이 삼천 병에 달한다고 하여, 술병을 모아 마당에 줄지어 세워놓으니 그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고도 한다. 이렇듯 그가 스무 해 동안 썼던 시보다 죽기 직전의 두세 달 동안 소주를 마시고 쏟아낸 수백 편의 시의 양이 더 많았다. 박정만은 시의 끝머리에 시를 쓴 날짜와 시간을 적어 넣었는데, 어떤 시들은 불과 일이 분의 간격을 두고 쓰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우리 시문학에 나타난 술을 살펴보았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키며 일찍 죽음으로 몰아넣는 양면성을 지닌 음식으로, 술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되어 우리 삶 깊숙하게 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전 시가와 현대시를 망라하여 술은 시의 중요한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변주되어 왔다. 술은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혹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중압감을 풀어주는 매개인 동시에, 비극적인 현실이나 시대적 상황을 타파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매개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에 나타난 술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곧 술을 통해 세계와 몸으로 부딪치려는 시인의 눈과 펜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서투른 글을 쓰면서 문득 대학가 주점 벽면에 거친 붓글씨로 휘갈긴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날씨야 아무리 네가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사먹지” 가난하고 추웠을 시인은 아마도 배고픔과 추운 시절을 소박한 한 잔 술로 데웠음이 분명하리라.    서안나 / 시인. 1990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와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가 있다. 한양대. 추계예대 출강.
1593    남영전의 토템시 연구 댓글:  조회:5704  추천:0  2015-12-05
  남영전의 토템시 연구   김 관 웅 (연변대학 교수)   시인 남영전   목록:  1. 들어가는 말  2. 토템의 개념과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에서 표현된 이미지들  3.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들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속성  4.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남영전선생은 자기만 시의 령토를 개척하고 자기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자기만의 창작개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토템시를 들고 우리 시단에 나타났다. 이에 우리 중국조선족 평론가들만이 아니라 한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의 평론가들도 남영전 선생이 이룩한 창작성취에 대해 충분하게 긍정하여 주었는데 본인도 이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토템시》라는 이 명칭에 대해 이의(異議)를 품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작년 연변대학에 있었던 국제학술토론회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 열띤 쟁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를 테면 남영전교수의 토템시의 개념과 명칭에 대해 임윤덕교수가 이의(異議)를 편데 대해 일부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하여 갑론을박으로 쟁론을 했지만 쟁명을 한 쌍방은 공동한 인식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남영전 선생은 중국조선족시단의 비중 있는 시인으로서 중국조선족의 시문학발전사에 반드시 기록되여야 할 분이며 불원간에 이 문제가 중국조선족문학사 저술에서의 문제로 제기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남영전 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에 대한 정명(正名)은 반드시 조속히 진행되여야 한다.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의 명칭과 그 개념을 어떻게 정립하고 그 명칭을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한가? 필자도 이 문제에 대해 오래 동안 사고를 거듭해왔다. 이 글에서는 주로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라는 개념과 그 명칭에 대한 필자 개인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2. 토템과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에서 표현된 이미지들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의 본질을 알자면 우선 토템에 대한 개념을 똑똑히 알고 넘어가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성 있는 백과전서 《브리태니카》에서는 토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토테미즘은 인간과 동식물 등 천연물 사이에 친연관계 혹은 신비한 관계가 있다고 믿는 신앙에 의해 형성된 복잡한 사상과 습속이다. 토템(totem)이라는 낱말은 오지브와어(아르강곤족 인디안인)의 오토테만(ototeman)에서 유래되였는데, 그 뜻은 형제자매사이의 혈친(血親)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류학가들의 사용법에 따르면 터테미즘이라는 이 단어는 최초에는 한 공동체와 토템의 관계만을 가리켰다. 동물이 한 사람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호우령(護佑靈), 친구 혹은 초자연적 힘의 원천으로 간주되지만 이런 것들은 토템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우연한 관계(례컨대 사람이 〈승냥이사람〉등으로 변형된다든가, 샤만의 몸에 동물의 령혼이 부착되여 동물의 초자연체를 가지게 되였다든가 등)도 토템이라고 할수 없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르러 〈개별적 토템〉이라는 이 낱말은 흔히 이러한 류형의 현상을 지칭하게 되였다. 뚜렷한 특점과 규정된 수량을 갖고 있는 씨족으로 획분되는 여러 씨족들은 각각 생명이 있거나 생명이 없는 하나의 종(種, 즉 토템)과 특수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씨족성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성원으로서의 신분을 개변하지 못하며 동일한 지역의 주민들은 각각 부동한 토템씨족에 속하게 되였는바, 이러한 사회가 바로 토테미즘이 실행되는 사회이다. 토템은 무섭고 다루기 어려운 야수거나 식용식물 혹은 주요 식물인 경우가 많다. 토템은 흔히 원시적인 전설과 도덕규범과 련관성이 있으며 기본상에서는 반드시 기피하고 멀리해야 했다. 만일 접근하려면 반드시 엄격한 의식를 치러야했다. 한 토템공동체의 성원들의 신분은 세습되여 종신적이였으며 성원 자녀들 사이의 혈친으로 결합하거나 선택하여 통혼하거나 모두 특수한 규정이 있었다. 토템, 금기와 외혼제  이 삼자는 서로 혼합되여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목전까지는 그 어느 사회도 완전히 토테미즘에 부합되는 리상적인 토템제도를 구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지 않은 공동체는 많은토템제도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不列顚百科全書》, 17권, 154쪽, 〈圖騰制度〉,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99년판.      여기에서 우리는 토템은 원시시대의 씨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자연대상물 혹은 인공대상물임을 알 수 있다.    첫째, 토템은 그 종류는 아주 많다. 이를테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란다족은 400종이 넘는 동식물을 토템으로 삼지만, 아프리카의 뇨로족이나 바히마족은 소만을 토템으로 삼는데, 각 씨족은 붉은 소, 젖소 등 소의 특정형이나 소 몸의 부분 즉 혀, 창자, 심장, 등을 토템으로 삼는다. 또 각 씨족이 한 토템 또는 여러 토템을 갖는 경우가 있다. 멜라네시아 에서는 각 씨족이 새, 나무, 포유동물, 물고기의 일종을 토템으로 삼는다. 동식물외에 해, 달, 구름, 눈, 비, 불, 물, 계절 등 자연물이나 자연현상도 토템이 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토템으로 삼는 곳도 많다. 이를테면 인도 비엘족의 토템은 식물이 19종, 동물이 17종, 물건(단도, 깨진 병, 촌락, 가시 붙은 막대, 팔찌, 발고리, 빵조각 등)이다. 그 밖에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에서는 잠, 설사, 구터, 성교, 여러 가지정신상태 등도 토템으로 삼는 례가 있다.    둘째, 토템은 원시단계에 처해있는 씨족공동체 등 인간공동체와 결부된다. 개인토템도 있지만 그것은 수호령이라고 하고 토템은 일반적으로 원시적 인간공동체로서의 씨족이나 부족 등과 관련된다.    셋째, 집단의 이름을 그 토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를 테면 오지브와 족에는학, 곰, 담비, 메기, 아비(새의 일종) 등으로 부르는 다섯 개의 주요 씨족이 있다. 그러나 토템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다.    넷째, 집단토템의 경우 같은 토템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결혼하지 않는데, 토템집단이 외혼단위가 된다.    다섯째, 흔히 토템과 인간 집단이 맺어진 유래가 담긴 신화를 가지는데 토템은 그 집단의 조상이라든가, 토템과 집단이 공통조상으로 친족관계를 가진다던가, 집단의 조상과 토템이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 등이다.    여섯째, 토템과 집단의 강한 결부는 신앙과 의례에 의해 정서적, 신비적으로 나타난다.    일곱째, 자기의 토템을 표시하는 표지, 또는 도안이나 조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테면 인디안 원시씨족이나 부족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템폴(totem pole, 圖騰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면 조선민족에게도 토템이 있었을까? 대답은 긍정적이다. 남영전 선생은 긍정파일 뿐더러 조선민족의 42개의 토템을 詩化하였다. 남영전의 시집《원융(圓融)》에 수록된 순서대로 라렬하면 다음과 같다.    달, 곰, 단수, 학, 흙, 물, 사슴, 범, 백마, 숫사자, 황소, 양, 백조, 수리개, 뻐꾹새, 수탉, 까마귀, 까치, 거북, 고래, 개구리, 산, 불, 태양, 별, 구름, 번개, 비, 바다, 산호, 돌, 개, 돼지, 두꺼비, 흰 토끼, 제비, 나비, 대, 룡, 봉황새, 흰 비둘기 등이다.    상술한 《토템》은 대부분 조선민족의 신화, 전설, 민담 등에서 나타난 자연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런 것들을 토템이라고 단정하려면 많은 문헌자료나 고고학적인 자료를 동원하여 증명해야 한다. 신화, 전설, 민담 등에 나타나는 자연대상이나 자연현상이라고 해서 모두 토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민족도 원시시대의 씨족, 부족, 부족련맹 사회 등 원시공동체사회를 거쳐 왔던것만은 분명하며 필연적으로 수많은 토템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민족은 적어도 2천여 년 전에 원시시대에서 문명사회로 들어선 민족이기에 2천여 년 전의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신앙했던 토템들이 구경 어떤 것들이였겠는가에 대해서는 후세의 문헌자료거나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의해서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흔히 토템과 인간 집단이 맺어진 유래가 담긴 신화를 가지는데 토템은 그 집단의 조상이라든가, 토템과 집단이 공통조상으로 친족관계를 가진다던가, 집단의 조상과 토템이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인정했기에 문헌신화를 통해 조선민족의 선민들의 토템을 추축해낼 수 있다. 이를 테면 단군신화에서 나오는 곰과 범은 곰 토템씨족이나 부족 혹은 범 토템씨족이나 부족일 가능성이 아주 많다. 물론 이것을 확증할 자료는 크게 없으나, 특히 동북아세아와 시베리아 등지에 널리 분포되여 있는 곰 토템 숭배와 결부시켜 볼 때, 적어도 곰을 조선민족 력사 중의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부족의 토템으로 보아도 별로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옛 문헌들에 조선민족의 선민(先民)중의 한 갈래였던 예(濊)족이 범을 숭배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범도 역시 조선민족 력사 중의 어느 한 시기, 어느 한  부족의 토템으로 보아도 별로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동명왕 전설에서 나오는 해나 백조나 신라의 박혁거세전설에서 나오는 닭이나 백마나 석탈해의 전설에서 나오는 까치나 가야국 수로왕 전설에서 나오는 거북 등도 토템일 가능이 있으나 확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이를 테면 현존하고 있는 조선민족의 가장 오랜 문헌신화는 단군신화이다. 이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하늘을 표상하는 인격화된 천신(天神)-제석(帝釋), 제석(帝釋)의 아들 환인(桓因), 하백, 수사, 운사(雲師) 등 세 신(神)그리고 이 신들이 하늘에 내린 아사달이라는 산, 그 산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그 밑에서 살고 있는 곰과 범 등이다. 그러면 이상의 이미지들이 다 토템인가? 다 토템일 수도 있고 다 토템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곰을 포함한 이상의 이미지들이 다 토템일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할 뿐이지 꼭 찍어서 단정할 수는 없다. 또 다 아니라고 가정할 수는 있지만 또 꼭 찍어서 다 아니라고 단정할 수 도 없다.    이런 론리는 김수로왕 전설에서도 통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섯 부락의 부락장과 부락민들 그리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신, 그 신의 말대로 올랐다는 구지봉(龜旨峯), 신(神)을 맞이하느라고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에서 나오는 거북,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여섯 상자에 담긴 알 등이다. 남영전 선생은 거북을 가야 여섯 부락의 토템 혹은 그중 어느 부락의 토템으로 추정한 것 같은데, 그럴 가능도 있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한마디로 토템이라고 확정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오히려 후자의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북은 옛날 조선을 포함한 동북아세아 여러 원시부족들 사이에서 귀복점(龜卜占)을 칠 때 사용하는 도구로 사용되였지 꼭 토템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귀복점을 치면서 그 점괘를 거북의 껍데기에 부호를 새겨놓은 갑골문(甲骨文)으로부터 한자(漢字)가 생겨났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조선족이나 중국한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의 선민 혹은 기타 세계 각지의 많은 민족들의 선민들이나 지금도 원시적 단계에 처해있는 원시씨족이나 부족들 중에 거북이 토템으로 숭앙을 받았거나 받고 있을 가능성도 절대 부정할수는 없다.    돼지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돼지는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 꼭 올렸던 가장 중요한 제물로서 고구려 유리왕시대의 완도산성과 결부된 전설에 의하면 제물로 쓰려던 돼지가 도망쳐서 쫓아간 곳이 지금의 완도산성 터였고 그 돼지 인해 유리왕이 완도산성에 도읍을 옮기게 되였다고 전한다. 이와 류사한 전설은 고려궁성의 택지전설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아서는 돼지는 분명히 고대 조선민족의 신화나 전설 속에서 중요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돼지가 꼭 고구려인들이나 고려인들의 토템이였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숫사자, 양, 두꺼비, 매, 흰 비둘기, 흰 토끼, 고래 같은 동물이나 불, 구름, 비, 바다, 산호 등 자연대상이나 자연현상을 조선민족의 토템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더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흰 토끼나 두꺼비는 고구려시대의 우화 《거북과 토끼의 이야기》(일명 구토(龜兎)설화라고도 함)나 조선왕조시대의 《토끼전》,《두껍전》같은 소설에 등장하기는 해도 그것이 조선민족의 토템이였다고 증명할 만 한 자료는 없다. 주지하다시피 이 두 이야기는 모두 불경설화의 영향 하에 산생된 조선고대설화나 소설로서 자연생태적인 부동한 특점 때문에 불경(佛經)이야기 중의 동물주인공들이 바뀐데 불과하지 토끼, 두꺼비 이 두 동물이 토템이여서 우화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니며 문헌상에서도 토끼, 두꺼비 같은 동물이 일찍 토템이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다. 숫사자, 양 같은 동물은 조선민족의 선민들이 일찍 삶을 영위했던 조선반도나 동부아세아의 자연생태의 특점으로 보아서 더욱조선민족선민들의 토템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점에 대해 남영전선생도 많은 고민을 했음은 많은 사고를 거듭했음은 본인의 다음과  같은 술회에서 나타난다.    《나는 조선족시인으로 이전에는 토템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아주 적었다. 다만 조선민족의 토템물은 곰 하나뿐인가 여겼었다. 그러나 여려해 동안 조선민족 신화 등 상관 자료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가운데서 조선민족은 여러 부동한 토템씨족이나 가족이 장구한 력사과정에서 융합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므로 력사의 각도에서 볼 때 토템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었을 것이다.》 남영전 《원융(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 년, 2쪽.      맞는 말이다. 조선민족의 장구한 력사과정에서 조선민족의 원시 선민들이 숭배했던 토템은 아주 많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느 것은 토템이고 어느 것은 토템이 아니라고 오늘날에는 누구도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남영전선생은 자기의 이른바 《토템시》들에 등장한 《토템》들을 조선민족에게만 속하는 토템이 아니라 중화민족의 토템물과 불가분리적인 혈연적관계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내가 쓴 이러한 토템시들은 조선민족에게 속할 뿐만 아니라 역시 중화민족에게 속하며 또한 세계 기타 민족에게 속한다.》 남영전《원융(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2-3 쪽.      역시 일부는 맞는 말이다. 그것은 토템은 조선민족과 중화민족 그리고 세계의 기타 여러민족들과도 중복성, 공통성을 보일 가능성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선민족의 건국신화들에서 보면 건국주(建國主)들은 대부분 자기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자칭하였으니 태양은 조선민족의 토템이였을 가능성이 아주 많다. 그러나 이러한 태양숭배는 세계적으로 아주 광범위하게 분포되여 있다. 태양만이 아니라 달, 땅, 물, 산, 구름바람, 비, 자연대상이나 자연현상에서 추출된 토템만이 아니라 단수, 대, 풀, 꽃 등 식물토템이나 곰, 범, 말, 소, 양, 새, 개 등 동물 토템도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토템일 가능성이 십분 많다.    그러나 부동한 씨족이나 부족들이 동일한 토템을 선정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부여한 의미, 즉 상징적 의미는 같거나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다를 가능성이 더욱 많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를테면 남영전 선생이 《개》에 대해 부여한 상징적 의미는 적어도 조선민족과 아주 가깝게 살아온 만족(滿族)에게서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승냥이에 대해 조선민족들은 흔히 나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나 원고(遠古)시대의 흉노족은 자기의 조상으로까지 생각하였다. 그리고 조선민족의 선민들은 곰을 시조모로 인정하기까지 하였으나 곰을 숭상하지 않는 부족들이나 민족들에서는 곰을 미련하고 우둔한 대상으로 폄하하였다. 지금도 조선민족은 아직도 곰이라면 우직하지만 사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중국의 한족들의 욕설에서 구웅(狗熊)이라면 아주 비겁하고 더러운 폄의(貶義)를 갖는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매 하나의 토템이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에는 전 인류적인 보편성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민족적, 지역적 특수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토템의 상징적 의미는 부동한 력사발전단계에서 부동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토템시에서의 의미부여가 민족을 초월하여 전 인류적인 공동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템은 문화부호로서 흔히 강렬한 민족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남영전선생이 선택하여 시창작의 재료로 삼은 곰, 범, 백학, 닭, 황소, 제비, 개, 두꺼비, 거북, 룡, 흰 비둘기 등 동물들과 신단수, 대 같은 식물들, 그리고 태양, 달, 바다, 구름, 번개, 불, 물, 흙, 돌, 산호 등 자연대상들이 모두 조선민족의 토템이였다, 혹은 모두 아니였다고 증명할 방도가 없다. 그것은 영화나 드라마는 다시 재연될 수 있지만  력사는 다시 재연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토템인지 토템이 아닌지를 명징(明徵)하게 증명할 수 없는 대상들을 시적 소재로 한 42수의 시를 몽땅 토템시라고 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토템과 비토템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하에서 주관적으로 토템이라고 단정하여 쓴 시들을 토템시라고 타이틀을 단다는 것은 과학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남영전선생의 토템시를 영물시(詠物詩)라고 인정한 임윤덕 교수의 견해는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통 시문학에서의 영물시는 대개 하나의 자연물상(自然物象)을 이미지화 하는데, 이 점은 남영전의 토템시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영물시는 바로 이미지시이며 영물시 창작은 각종 물상들에 시인의 정감과 사상을 부여하는 이미지화 작업이다.      3.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들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속성    그러면 남영전선생이 조선민족의 《토템》들을 시로 만든 이른바 《토템시》들에서의 이미지에는 어떤 상징적 의미들이 부여되여 있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의 저명한 시론가 문덕수선생은 상징을 《개인(個人) 상징》, 《전래(傳來) 상징》《문화권(文化圈) 상징》, 《원형(原型) 상징》으로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 《개인 상징》은 한편의 시작품에 있는 상징이나 또는 한 특정한 시인 시인에게 있어서 계속적으로 쓰이고 있는 상징 또는 사인 상징이다 문덕수 《시론》, 시문학사, 2002년 195쪽.  .  둘째, 《전래 상징》이란 시인이나 작가가 어떤 고전문헌에서 찾아 내여 창작활동에 차용한 상징이다. 문덕수 《시론》, 시문학사, 2002년 198쪽.    셋째, 《문화권 상징》이란 어떤 공동체나 종교 단체 혹은 기타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상징이다 문덕수 《시론》, 시문학사, 2002년 198쪽.  .  《원형상징》이란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아무런 교류관계가 없어도 인류 전체나 대부분에게 어떤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의미를 가진 이미지가 원형상징이다》 문덕수 《시론》, 시문학사, 2002년 200쪽.    문덕수선생의 이 이미지가 가지는 상징성의 네가지 류형에 관한 분류에 좇아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를 살펴볼 것 같으면 가장 많은 것이 《전래의 상징》,《문화권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들을 소재로 한 것이며 일부 《문화권(文化圈)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들이다. 물론 남영전의 《개인 상징》은 흔히《전래의 상징》이나《문화권 상징》속에 용해되여 있는 경우가 많다.    첫째, 《전래의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를 시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을 보기로 하자. 례컨대 《곰》,《신단수(神檀樹》,《사슴(鹿)》,《범》,《백마》,《백조》,《뻐꾸기》,《수탉》,《거북》,《개구리》,《흰 토끼》,《흰 비둘기》등 시들이 담고 있는 《전래의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볼 수 있다. 특히 《곰》,《신단수(神檀樹》에서 보여 지는 상징적 의미는 기본상 조선민족의 시조로 불리는 단군을 기술한 일연의 《삼국유사》중에서 온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두 수의 시가 담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짙은 민족적 특색을 띠고 있다.    둘째, 《문화권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를 시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을 보기로하자. 이를테면 《황소》, 《까마귀》,《룡》등 을 그 실례로들 수 있다. 룡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보편성을 띤 상징부호로서 그 의미도 비슷하다. 물론 조선민족의 신화나 전설,민담에서도 룡은 중요한 이미지로서 등장하기는 하지만 중국의 한족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룡의 후손이라고 한다. 까마귀도 마찬가지인데, 신라의 고대설화에서 까마귀는 하늘의 뜻을 지상에 전달해 주는 령특한 새로 등장하고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도 태양의 복판에 세발 달린 까마귀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서 역시 천상계(天上界)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새임이 분명하다. 까마귀는 중국 동북부 만족(滿族)의 설화에서도 까마귀는 흉조가 아닌 길조로 등장한다.    셋째, 전 인류적인 《원형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미지를 시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을 보기로 하자. 이를테면《흙(土)》,《물(水》, 《태양》, 《구름》, 《별》등을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土爲孕育萬物負載萬物之神靈    土可松可硬  有形也無形  土以自身無邊無際之軀  以石爲骨  以水爲脉  于冥冥的天宇下  壘起床丘嶺與山脈  營造湖泊與大海  孕育生靈  孕育萬物  孕育一切人間之夢  孕育一切家園    對待生靈  對待萬物  土最沈黙  沈黙得沒有任何聲響  沈黙得只愿聽  -남영전《흙(土)》앞부분    모든 사물의 아래에 있는 땅과 흙은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생령을 낳아 기르고,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받쳐주고, 균형을 잡아주고 뿌리를 내린 식물은 뿌리를 만들어주고, 새는 공중에서 날게 해주고 대지에 닿은 자동차는 달리게 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몸이 쭈그러지면 그것을 받아들여 묻어주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땅은 유기물이건 무기물이건, 그 우에 있는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 에너지다. 그러면서도 흘과 대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루루 수십 억년 마냥 침묵으로 일관한다. 남영전의 죽음과 삶을 다 받들어주는 땅은 위대한 사랑을 가진 어머니인 대지라는 원형적 상징의 발견이요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형적 상징은 전 인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영전의 《토(土)》과 똑 같은 땅과 흙이라는 이 원시적 이미지를 시적인 소재로 삼은 경우는 아주 많다. 이를테면 한국 황송문의 수필 《흙의 침묵》이나 조정권 시《땅의 고마움》역시 원시적 이미지를 소재로 하여 창작한 문학작품들이다.    숲속에 나무나 풀, 또는 징그러운 짐승  심지어는 공중의 새와 빌딩  자동차조차도  땅이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내가 달고 다니는 무거운 머리통이나  장딴지의 힘줄도 실은 땅이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다.  땅이 인간의 사지에 균형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이 평범한 사실을 나는 너무나도 오래 잊고 살았다.  내가 죽어 부끄러운 알몸과 쭈그러진 가죽과 상처자국이 드러날 때  그것들을 안 보이게 가려줄 저 땅의 고마움  - 조정권 《땅의 고마움》    흙과 대지라는 이 원시적 이미지와 늘 대응을 이루는 다른 한 원시적 이미지는 하늘이다. 땅과 하늘의 상호 련관, 상호 교감, 상호 작용을 소재로 한 시들속에는 연변의 녀류시인 천애옥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대지가  하늘 품에  새로이 태여나다    축축한 이슬 향기로  선경(仙境)의  꿈을 열어    상사의  은하수를 건너  운우 속을 거닐다.    아프도록 눈부신  분홍빛  미소(微小)로 태여나다    대지가  하늘 품에  새로이 죽어가다    내리 쏟는  창살 끝에  나스스르르  녹아내려    슬프도록 아름다운  무아몽중  까만 재로  죽어가다  -천애옥 《도(道)》    서로 대응되고 서로 련관되고 상호 작용하는 하늘과 땅은 원시적 이미지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아버지(혹은 남자)인 하늘, 어머니(혹은 녀자) 땅 그리고 양과 음의 결합으로 인한 생과 사, 죽음과 재생 등 보편적인 인간 상황에 대한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의 집적(集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집단 무의식속에서 형성된 원시적 이미지인 하늘과 대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지상의 생명계통의 생성과 사멸의 운동과정을 보여준 시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생명의 창조자인 아버지 하늘과 위대한 사랑을 가진 어머니 땅이라는 원시적 이미지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천부지모(天父地母)의 관념은 원시적 이미지의 원형상징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세계의 부동한 문화권에서도 동일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 인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는 다중(多重)적 상징의미를 가졌으니 다른 뜻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아주 많으나, 이는 본론과 관계가 별로 없으니 략한다.    남영전의 《물》도 민족이나 문화권을 초월하는 전 인류적인 원시적 이미지를 소재로 한 시로서 원형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다가도 안 보이고 크다가도 작은 신령    물은 어디라 없이 다 있어도  날개 없고 발이 없고  형색조차 없습니다.  없는 날개 가장 큰 날개이고  없는 발이 가장 큰 발입니다.  없는 형상 가장 자유로운 형상이고  없는 빛갈 가장 현란한 빛깔입니다.  대지 우에 모래밭에 크나큰 사막에  하늘 우에 산마루에 깊다란 협곡에  안개 되고 구름 되고  내 물 되고 강이 되고  호수 되고 바다 되고  뿌리에 줄기에 입속에  꽃과 열매에 파고들어  인간과 자연을 낳아 기르는  인간의 시원입니다.  만상의 시원입니다.  -남영전 《물》앞부분    남영전의 《물》은 흙과 대지와 함께 모든 생령의 시원이고 모든 것을 창조하는 《모든 생명 모든 령혼의 온갖 문을 여닫는 신령》이라는 이 원형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시이다. 남영전의 시에서 《태양》역시 원시적 이미지인 태양을 소재로 하여 거기에다 문화권상징과 원형상징의 의미를 유기적으로 융합시켰다.    祖先的白色之門鑲在遙遠的太陽上    祖先的白色靈光  正悄悄捕捉黑色的鬼魅黑色的邪惡  祖先的白色溫馨  正緩緩融化重疊的雪山堆積的怨恨  祖先的白色慈祥  正輕輕撫摸可愛的子孫寂寞的心靈  于時于曠野于莽林  冥冥里复蘇暈厥的精靈  冥冥里誕生吉祥的部落  -남영전 《태양》앞부분    태양은 대지와 마찬가지로 원시적 이미지들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태양에 대한 숭배는 곧 광명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인 갈망과 그로 인한 광명숭배와 통하는바 태양숭배는 범세계적 것이고 전 인류적인 것이다. 그러나 태양의 빛갈을 흰 빛으로 감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선민족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색숭배는 고대 동이족(東夷族)의 보편적인 색상(色尙)심리임을 감안할 때 이 시는 조선민족의 전래상징의 의미도 포함되여 있지만 동시에 문화권상징과 원형상징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는 비교인류학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신화원형비평에서 원형(archetypes) 또는 원형 상징(archetypal sybols)이라고도 한다. 신화원형비평의 개척자 칼 융은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원형(archetypes)이라고 고쳐 불렀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계속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image)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중국에서는 칼 융의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라는 용어를 원시의상(原始意象)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카를 융의 견해를 중심으로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의 특성을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는 인류조상들의 장구한 반복적인 생활경험에서 형성된 원초적 이미지 또는 심리적 잔존물이다. 원시 조상들은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반복하고, 그러한 반복으로 그 경험은 류형이된다. 그 류형이 갖는 원초적 이미지 또는 심리적 잔존물이 원형(archetypes, 한어에서는 原型이라고 번역했음)이 된다.    둘째,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 즉 원형은 집단무의식 속의 실제적인 내용을 구성한다. 융은 프로이트의 개인무의식(personal unconscious) 외에 집단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의 정신분석학의 한 특성을 부여해 준다. 개인 무의식은 개인의 생활에서 잊혀지고 억눌리고 잠재의식으로 지각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나, 집단무의식은 개인의 생활을 초월한 보편적인 상황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다. 즉 《집단 무의식은 력사적 시기, 혹은 사회적 혹은 종족적인 집단에 관계없이 원형 시대 이후, 초월적인 어떤 힘에 대한 공포와 위협, 그리고 갈등, 남녀 관계, 어린이들과 부모와의 관계, 애증, 생과 사, 명암의 원초적인 힘, 기타 등등과 같은 보편적인 인간상황에 대한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의 집적(集積)이다.》    원시적 이미지는 이러한 집단무의식속에서 형성될 뿐만 아니라 집단무의식을 통해서 계승발전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형은 개인이나 어떤 집단 그리고 력사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원초적 심상이다.    셋째, 원형은 본능적이며 선험적인 이미지다. 융은 《원형 또는 원초적 이미지는 아마도 그 자체의 본능적 표상 혹은 본능의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본능은 개인의 특유한 본능이라기보다 집단적 무의식 속의 본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형은 집단적 무의식 속에 본래부터 천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의경험이전부터 선재하는 것이고 개인의 삶과 죽음에 영향 받지 않는 것이다. 원형이 본능적이고 선험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원형이 창조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형이상학적 문제이다. 원형은 창조되지 않고 처음부터 영원한 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원형의 계승은 새가 둥우리를 짓고, 뱀장어가 버뮤다 가는 길을 발견하며, 연어가 자기의 태여난 곳을 되돌아오는 길을 아는, 선천적 습관이 유전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유전되는 것이다.    넷째, 원형은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어서 지각할 수 없는 것이고, 의식의 령역 속으로 들어와 지각될 수 있는 것도 있다. 지각될 수 있는 원형은 이미지나 관념으로서 신화, 꿈, 은유나 상징의 형태로 시에 표현되였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란 원형 상징이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아무런 교류관계가 없어도 인류 전체나 대부분에게 어떤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의미를 가진 이미지가 원형상징이다. 휠라이트는 원형상징으로 아버지인 하늘, 어머니인 대지 그리고 광명, 피, 상하, 바퀴축 등을 들고, 이것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것들에 대한 반응과 사고가 다양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갖는 육체적 유사성, 심리적 구조가 갖는 유사성 때문에 보편적  공통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들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어떤 이미지들인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남영전선생은 《나는 18년 동안 42수의 조선민족토템시들을 썼다》 남영전 《원융(圓融)》, 고 했는데, 이 이른바 《토템》이라고 하는 이미지들의 속성을 아래의 도표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민족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문화권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원형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곰  룡  흙  신단수  봉황  물  학  나비  태양  사슴  대  산  범  개  돌  백마  제비  구름  까마귀  황소  비  거북  양  별  까치  숫사자  번개  개구리  수리개  바다  백조  뻐꾹새  불  돼지  수탉        이상의 도표를 통해 남영전선생의 이른바 《토템시》들에서 민족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문화권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원형상징에 속하는 이미지 이 류형이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민족상징에 속하는 이미지와 문화권상징에 속하는 이미지들은 원형상징에 속하는 카를 융의 정의한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들이라고 할 수 없으나 많은 부분은 신화나 전설 같은 조선민족의 가장 오랜 문학장르들에서 나타났던 이미지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 셋은 흔히 상호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서로 교차되고 서로 융합되여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남영전 선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나는 18년 동안의 시간을 들여 42수의 조선민족의 토템시를 썼는데, 그러는 중에서 조선민족의 토템물과 중화민족의 토템물은 불가분리적인 친근한 혈연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세계 기타 민족의 토템물과도 혈연관계가 없는 것이 아님을 놀랍고도 기쁘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남영전 《원융(圓融》,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2쪽.      남영전선생의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 원인은 조선민족의 형성도 단순히 현재의 조선반도와만 관련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넓은 지역과 관계되며 따라서 민족형성의 장구한 력사적 행정속에서 중화민족에 속하는 많은 민족들과 많은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룡(龍)이라는 이 중화민족의 상징적 이미지는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동명왕전설에서부터는 등장하며 삼국시기를 거쳐 조선시기에 걸쳐 조선민족의 많은 신화와 전설에서 나타나는 이는 문화적 교류로 인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토템속에는 당연히 원시적 이미지가 포함되여 있기 마련이며, 그런 원시적 이미지들은 전 인류적인 공동성을 띠는 것이 때문일 것이다.    카를 융의 신화원형리론에 따르면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라고 할 수 있는 것들로는 아마 해, 달, 흙, 물, 나무, 산 같은 것뿐이다. 이런 자연대상들은 민족을 초월해서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속에 침전되여 있는 남아있는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인지도 모른다. 물론 카를 융의 집단무의식에 바탕을 둔 신화원형리론도 불가험증(不可驗證)이라는 맹점을 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카를 융의 리론은 그런대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실정을 부인해서도 안 된다.    카를 융의 리론에 따르면 원형(原型)은 《원고시대로부터 이미 존재해온 보편적 이미지》 주립원 주편 《당대 서방 문예리론》, 화동사범대학출판사, 1997년, 167쪽. 로서 인류의 최원시 단계에 형성된 것이다. 원형은 일종 《종족의 기억》으로서 보존되여 매개 개체로서의 인간들이 선천적으로 획득하게 된 이미지와 패턴이라는 것이다. 동상서,  167쪽.      《원형은 인류의 장기적인 심리 침전(沈澱)중에서 직접 감지되지 못하는 집단무의식이 드러난 것이다. 잠재적인 무의식이 창작과정에 진입하지만 그것들은 또 외부화(外化)해야 하는 까닭에 최초에는 〈원시적 이미지〉로 드러나게 되며 원고(遠古)시대에는 신화적 형상으로 표현되고 그 다음에는 부동한 시대에 예술을 통하여 무의식가운데서 살아나서 예술적 형상으로 전변되였다.》 동상서, 168쪽.      우에서 언급했지만 남영전 선생이 시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은 대부분 조선민족의 신화에서 추출한 이미지로서 똑 부러지게 몽땅 《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라고 하기는어려우나 그것에 가까운 것이 아주 많다. 때문에 필자는 남영전선생의 시들을 대체적으로원시적 이미지(primordial image) 혹은 가장 원초적인 신화나 전설 같은 조선민족문화의 원형에서 추출한 이미지를 소재로 하여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기 노력한 이미지시라고 본다.  이런 리유로 필자는 남영전선생의 근 20년간의 시적인 추구를 토템시라고 이름지어줄 것이 아니라 원형시 혹은 적지 않게 원시적 이미지를 소재로 한 시라고 부르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총적으로 남영전의 시는 이미지시다. 그런데 남영전선생은 의식적으로 원시적 이미지를 선택하여 민족정신의 원형을 표현하기 위해 힘을 쓴 시인이라고 평가를 하고 싶다. 물론 남영전 선생이 선택한 42개의 이미지들이 모두 원시적 이미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중 일부는 분명히 원시적 이미지리고 단정할 수 있다.      4. 결론    결론을 내린다면 남영전선생의 시는 이미지시다. 그런데 남영전선생은 동양 고대의 영물시나 서양 현대의 이미지즘시들과는 달리 의식적으로 조선민족의 신화전설이나 고전문헌에서 추출한, 카를 융의 정의한 원시적 이미지나 또는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를 선택하여 조선민족정신의 원형(原型)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미지시다.    물론 남영전 선생이 선택한 42개의 이미지들이 모두 카를 융의 정의한 원시적 이미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중 일부는 분명히 원시적 이미지라고 단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또 룡 같은 문화권상징에 속하는 이미지도 원시적 이미지(原始意象)라고 부른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감안하여 카를 융의 원시적 이미지의 외연을 좀 더 넓혀 편의적으로 남영전선생의 오히려 원시이미지(한어로는 原始意象詩)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 같다. 이는적어도 토템시라고 하기 보다는 리론적 맹점이 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시이미지(한어로는 原始意象詩)라고 고친다고 하여 완전히 명(名)과 실(實)이 부합되는 것은 아님을 부언해 둔다.     
  문학유산   심련수 유작의 정리와 출판을 두고   권 철       중국조선족문학자료를 발굴하고 정리 , 출판하는 것은 겨레의 문화유산을 참답게 계승, 발양 하는데 있어서 자못 중요한 의의가 있는 사업이며 또한 본민족의 문학연구에 있어서도 가장 필수적이고 기초적인 작업이다. 다년래 중국조선족문학자료의 발굴과 정리사업은 우리 문학연구자들의 고심한 노력에 의하여 가시적인 성과들을 거두었다 . 그리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일제 《암흑기》에 시단에 나섰던 우리의 시인 심련수의 유작을 발굴하여 해빛을 보게 하였는데 이는 중국조선족문학자료건설에서 이룩한 또 하나의 성과로 된다.   이번 발굴된 시인 심련수의 유작은 그 분량이 많고 그 보존상태가 완정하기로 특징적이다. 관계연구자의 소개에 따르면 발굴된 시인의 유작에는 《시 300여수 , 만필과 소설 7편 평론1편 ,기행문 1편,일기 300여편 ,편지 200여통》이 포괄되어있다.이제 이 발굴된 유작들은 다시 소생되여 우리 시단의 이목을 끌게 될것이며 중국조선족문학발전사에도 한페지를 장식하게  될것이다. 시인 심련수의 유작이 발굴되자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그같이 경제적여건이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자금을 조달하고 거기에 《한국중국조선족문화예술인후원회》의 도움까지 받아가면서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 제1집으로 《심련수문학편》을 간행하였다.그러나 이 《심련수문학편》은 그토록 각광을 한몸에 안으며 출간되였지만 정리자들의 시인에 대한 불경과 주관의지의 개입으로하여 구경에는 시인 심련수를 여지없이 모독하고 그 유작을 마구 짓밟아 놓는 결과를 빚어내게 되었다.하여 이 《심련수문학편》은 문학사료집으로서의 신빙성을  잃었으며 또한 문학자료정리에서 그 류례를 볼수 없는 사례를  조성하기까지 하였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문학사료의 발굴과 정리,출판은 서로 유기적으로 련관되고있다.비록 발굴의 환절에서는 더없이 잘하였었어도 그 발굴한 원전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다면 곧 허황한 것으로 되고 말며,원전의 의의를 말살하는 결과를 빚어내게 된다.《심련수문학편》은 이를 단적으로 실증하여주고 있다. 우선 문학자료의 정리자는 무엇보다 먼저 원작자를 존중하고 원작에 충실하는 자세로 그 작업에 림하여야한다. 그런데 이번 심련수 유작 정리자들은 말로는 시인 심련수를 《문단에 솟아난 또 하나의 혜성》이며 《시인 윤동주와 쌍벽을 이룰수 있다》고까지 높이 추대하였으나 실제 작업에 들어가서는 시인 심련수를 시단에 갖 들어선 초학자보다도 못하게 여겼으며 그 유작을 마치도 소학생의 작문을 다루듯 마구 고쳐놓았다. 아래에 그 구체적 사례를 간추려 들어본다.   우선 《문학자료의 정리사업은 마땅히 충실한 기록과 신빙성있는 판본을 그 기초로하여 작품의 원래의 모양과 생동한 언어,서술방식,결구와 예술적풍격을 보지하기에 힘써야한다.》 이것은 문학자료정리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 원칙이며 요구이다.여기서 가장 본질적으로되는 것은 반드시 객관기록에 충실하여야하며 정리자의 주관의지가 개입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것은 정리자는 어디까지나 정리자이지 창작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련수 유작의 정리자들은 상기 기본적 원칙을 무시하고 시인의 유작에 기탄없이 손을 대였다.근간 필자가 시인의 유작(원전 복제본) 60여편을 얻어가지고 《심련수문학편》에 수록된 시와 대조하여 본데 의하면 그 원시들을  거개 다 자기 생각대로 첨삭증보하여 놓았었다.그중 시 《로인공동묘지》,《길》,《숲속에서 나는 음악소리》,《우정》,《폭상》,《행복》,《잊지 못할 그 눈》등은 어떻게 모질게 란도질을 하여놓았는지,실로 이럴수가 !하고 아연함을 금할수 없게 하였다. 이제 더 그 실상에 대한 서술을 략하고 그 진상의 실제를 보기위하여 우에서 례를 든 시편중에서 지면의 제한도 있고 하여,보다 짧게 씌여진 시 《로인공동묘지》와 《숲속에서 나는 음악소리》를 택하여 서로 대조하여 본다.   露人共同墓地 (유고)   하루빈 온 사람은 이곧을 와 본다니 바쓰에 몸을 싣고 墓地를 찾아갓오 入口에 많은 거지 머리숙겨 경예하더라   異域에 □인 무덤 외롤손 그靈이  파란과 싸호다가 죽은이 이 세상을  남은일 다 못하고 異域에 □ 어지다.                        1940년 5월 20일        로천공원묘지(露天共園墓地)(문집 300쪽)   하르빈사람들 이곳을 다 본다니  뻐스에 몸을 싣고 묘지를 찾아갔소  많은 거지 입구에서 머리숙여 경례했소.   이역에 묻힌 무덤 외롤선 그 령(靈)이 파란과 싸우다가 죽은이라오  가엾어라 남은일 다 못하고 이역에  묻히였구나           1940년 5월 20일    숲속에서 나는 음악소리(유고)   맑은 하늘 밑 욱은 숲속에서 들려오는 싱싱한 소리 무장야 한쪽에서 울고있는 꾀꼬리떼 네 울음은 울어도 웃는 소리요 틀림없는 天使들의 부름같이  넋을 찾어 헤매는 귀에 울려주더라.   10.1.5江古田武藏野音樂學校앞에서        숲속에서 나는 음악소리(문집176쪽)   맑은 하늘 밑 묵은 숲속에서 들려오는 심심한 소리 무장야 한쪽에서 들려오는  꾀꼬리 울음소리 네 울음은 울어도 웃음소리요 틀림없는 천사들의 웃음이라 넋을 찾아 헤매는 귀에 들려주려무나    소화 17년 10월 15일     강룡전무영(江龍田武永)에서   실로 유작을 정리한다는 이들이 이렇게까지 마구 손을 댈수 있는가! 이는 시인에 대한 더없는 불경과 무례를 단적으로 보여준 례증으로 된다. 다음 ,《심련수문학편》의 작품선록에서도 그들은 마구 주관의지를 개입하였었다.그들은 마음대로 ,거기에 하등의 주명도 없이 발굴한 유작중에서 시 60여편을 마구 빼버리었다.살펴보면 편폭의 제한을 받아 그런것도 아니다.그것은 《부록》150여쪽중에서 그 일부를 할애하면 발굴한 시작을 다 수록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선록에서도 주관의지가 개입되여서는 결코 안된다.그 유작을 넣고 싶으면 넣고 빼고 싶으면 빼버리는 소위를 절대 용허할수 없다. 그러면 그들은 선록시 어떤 시편을 골라 빼버렸는가? 필자가 그 시인의 유작원전을 다 소지하지 못한 상황하에서 빼버린 시를 다 렬거할수는 없다. 다만 그 중의  일부를 살펴본데 의하면 동흥중학 재학시절에 지은 시와 일본에 갖 이르렀을 때 읊조린 《리상의 나라》와 같은 시들이 빠져있다.이제 그 추려버린 례로 《리상의 나라》를 들어본다.   해돋는 아츰바다 맑고 깨끗한 섬땅 섬은 섬이나 섬아닌나라 맑은 내 흐른곧에 대숲이 있고 논 밭이있는 곧에 사람이 산다. 車中의 사람 車外의 自然 모다가 처음보다는 珍景 朝靄에 싸인데는 마을이 있고 마을있는데는 생기가 있다. 瀨戶海 고흔물에  松島가 띄여있고 白帆이 움직이는데는  하늘이 맑게 개였다. 自然도 그렇고 人力도 그렇다 人力이 빛나는곧에 理想鄕있나니                       沿線에 일하는 모든 哲士는   理想鄕을 建設하는  鬪士들이니 나도내려가 팔을 걷고 땅을 파고싶다.                         二月九日 車中에서   무슨 연유로 이런 시를 뺐을까. 일본을 理想의 나라라고 찬미하였다는데서일까? 이 시를 솎아버린 그 의도를 딱히는 알수는 없으나,정리자가 만일 이 시를 그 어떤 문제를 안고있는 시로 간주하였더라도 유작의 전모를 연구가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서는 다 수록하여야하지 마음대로 빼버려서는 안된다. 만일 부득이 하여 그 작품을 추릴 경우 그 빼는 리유를 명백히 하는 주석을 가첨하였어야 할것이다.   그 다음,문학자료의 정리,출판작업은 한낱 엄숙하고도 세심한 작업이기에 정리자는 이에 충분한 주의를 돌리고 참답게 소임을 다하기에 진력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심련수문학편》의 정리자들은 아주 무책임한 태도로 정리작업에 림하다보니 그 유작을 깨끗하게 제대로 옮겨 놓지조차 못하였다.이를테면 문학사료는 반드시 그 원작에 좇아 그 표기거나 행,련 등을 원모대로 복원하여야 하였으나 그들은 임의로 현재 통용하는 표기법을 채용하였고,또한 정리중 그 루락과 오기는 너무 많아 그 정오표를 만들기도 힘들정도이다. 아래에 그 일반을 보기 위하여 《심련수문학편》을 보면서 대강 주어낸 오기 중의 일부분을 그 례로 들어본다.           이를 테면 《심련수문학편》에서는 《破響》을《破鄕》으로 《佩物》을 《敗物》로 (이는 시제를 오기한 례임),《逐神》을 《遂神》으로, 《貝殼》을 《具殼》으로 《大膽》을 《大瞻》으로 《淚腺》을 《漏腺》으로  《旅愁》을 《旅悉》으로 《祀願》을 《所願》으로  《銳利》를 《脫離》로 《塵境》을  《塵世》로 《暮巷》을 《暮蒼》으로 《玉璽》를 옥패로 《武藏野》를《무사시》로  적었다.     그리고 유작중의 방언 ,력사사실 , 난해한 언어나 사실등에 대하여도 주해를 다는 것은 정리작업에서 하여야 할 필수 사항의 하나다 .그런데 《심련수문학편》에서는 주해를 달아야 할 곳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 외면하여 버렸는데 이에서도 정리자들의 성심의 부족과 무책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부록》에 넣은 《문단에 솟아난 또 하나의 혜성》은 시인 심련수와 그의 유작을 소개한 론문인데 이에서도 시인 심련수에 대한 불경과 더불어 그의 시작의 소개에서도 착실하지 못한 소위를 보아낼수 있다. 글세 이 글에서는 시인의 시 19수(시조 포함)를  인용하였는데 그중 17수에서 임의로 첨삭하였거나 ,소홀로하여 일부 단어를 루락,오기하고있다.좀치라도 시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고 그의 유작을 우리 겨레의 소중한 유산으로 간주하였다면 이런 착오는 피면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록》에 실린 글에서의 시인 심련수의 사인 (死因)에 대한 진술도 명석하지 못하다.론문 들에서는 《도보로 룡정으로 오던중 왕청현 춘향진에서 일본놈들에게 피살되였다.》(624쪽)라고 하였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광복전 집으로 돌아오던중 살해된다》라고 쓰고 있다.시인 심련수는 애석하게도 그렇게 고대하던 광복의 날을 눈앞에 두고 불행하게도 자기의 일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이 론문들에서는  그 구체적 사인에 대한 그 서술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바 마땅히 세밀한 조사를 거쳐 그 사인을 명백히 밝혔어야 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바와같이 오랫동안 파묻혀있던 시인 심련수의 유작을 보다 완정한 상태로 발굴해낸 것은 중국조선족문학자료건설에서 한낱 기여이나 그 정리작업의 한 고리마디에서 엄수하여야 할 객관성원칙을 무시하고 기탄없이 주관의지를 개입함으로써 시인 심련수와 그의 유작을 여지없이 모독하고 외곡하는 악과를 조성하였다.그리하여 출간된《심련수문학편》은 문학사료집으로서 가치를 상실하였을 뿐만아니라 일반 문학독물로도 제공할수 없는 악과를 조성하였다.   이에 우리들은 시인 심련수의 유작 정리작업에서 빚어낸 요류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그 교훈을 참답게 흡취하여 우리의 문학자료건설의 수준을 높이기에 진력하여야 할것이다. 그리고 출간된 《심련수문학편》이 국내국제학술계와 사회에 끼친 영향을 홀시하지 말아야 한다.이미 시인 심련수와 그의 문학을 론한 글들이 적지 않게 나갔는데, 이 론문의 작자들은 기간 《심련수문학편》을 텍스트로 간주하고 그에 의지하여 연구한 성과물들을 내고있다.필자는 이미 간행한 《심련수문학편》이 학계와 사회에 끼친 악영향을 보다 빨리 제거하기 위하여서는 시인 심련수에 대한 경의를 지니고 무엇보다 먼저 그의 유작을 객관성원칙에 쫓아 참답게 기록한 신빙성있는 신간 《심련수문학편》을 하루 속히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밖에 이번 시인 심련수유작의 정리작업에서 요류를 빚어낸 그 칙임을 정리자에게 다 돌려서는 안된다.그것은 문학자료건설사업에서 출판도 한낱 중요한 고리마디가 되기 때문이다.이번 비록 출판사에서 《심련수문학편》의 출판을 위해 그같이 중시를 돌린 것은 그 의의가 크지만 인식과 준비사업이 따라가지 못하여, 가히 피면할수 있는 오류를 피면치 못하였음을 교훈으로 받아 들이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편집위원회의 구성,감수조치의 강구 등 면에서 허점을 안고있음을 자인하여야 할것이다.이 밖에 어떻게 되어 《심련수문학편》을 제1집으로 내게 되었는가,사료전집 50권의 총적 편찬기획,《서문》에서 피력한 작가작품의 수록범위와 기준 등에 대하여도 필자나름의 이견을 갖고있는바 이에 대하여서는 일후 기회에 토론하기로하고 여기서는 이만 끝인다.                                                                                                                                                          2004년 2월   민족시인 심련수의 대표시 해설  - 일제 암흑기와 심련수 문학의 개요 -    이 재 호(시인 . 한국언어철학연구회장)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 제1권으로 심련수문학전집이 발간되었다는 것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일제 시대를 조명할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라 할수 있을 것이다.  비록 뒤늦긴 했지만 국내에서도 주요 일간지와 방송 등에 소개된 암흑기의 시인 심련수는  한국문학사를 다시 정리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가혹하기만 했던 일제의 폭압은 친일문학을 양산케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 친일 문학은 문학이라 할수 없을만큼 질량적으로 함량미달이었다.      우리 국내와는 다르게 비교적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던 당시 간도지역에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순수한 한글 문학 세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리 언어연구에 있어 새로운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심련수는 재학중 문예반장이었다는 것이고 그 당시 중학생 신분으로 만선일보에 이러한 작품을 발표한다.        시 : 대지의 봄      봄을 잊은듯하던 이 땅에도/소생의 봄이 찾아오고/  녹음을 버린듯이 얼었던 강에도/얼음장 내리는 봄이 왔대요.  눈 위의 마른풀 뜯던/불쌍한 양의 무리/새 풀 먹을 즐거운 날/  멀지 않았네/넓은 황무지에단/신기루 궁을 짓고/  새로 오신 봄님 맞이/잔치놀이 한다옵네  옛 봄이 가신 곳/내 일 바빠 못 왔길레/  올해 오신 이 봄님은/ 누구더러 보라 할꼬     시 : 여창의 밤      길손이 잠못 이루는/이 한밤/  호창의 희미한 등불/더욱이나 서글퍼요  갈자리 튼 눈에는/뭇손의 여진이 절어 있고/  칼자리 난 목침에는/여수가 몇천번 베어졌댔나  지난 손 홧김에/ 애꿎이 태운 담배 꽁다리/  구석에 타고 있어/마음 더욱 설레인다  어두운 이 밤길에 달리는 여차/왈그럭 덜그럭/  호마의 발굽과 무거운 바퀴/이 마음 밟고 넘어 가누나        여기 이 시를 발표한 만선일보란 우리 민족의 서러운 역사가 스며있던 치욕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신문은 원래 용정에서 나왔고 간도일보와 신경에서 나왔던 만몽일보를 합쳐 중국어와 한국어로 낸 신문이었다.  일제가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1907년 만주철도 주식회사를 설립, 1931년 만주사변을 유발 시키고 괴뢰 만주국을 세워 꼭두각시 부의를 황제로 삼아 길림성 장춘을 수도로 정해 신경이라 개칭한 것이다.  이때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해 각 지역에 살고 있는 민족어로 된 신문을 일제 기관지로 내게 되는데 이것이 한글판 만선일보였다.  모든 실권을 일본놈이 잡았으며 신문사 고문에는 최남선, 편집국장은 소설가 염상섭,  사회 학예부장에 시인 박팔양 등이 몸담기도 했다.      후일 해방이 되고 작가 안수길,홍양명,이갑기,손소희 등 여러 문인들이 인연을 맺은 신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국내보다 이곳 문학이 더 왕성하고 자유로웠다 할수도 있다.  이것은 심련수문학이 발굴되지 않았다면 확인되지 못하였을 것이다.(자료:연세대학 도서관)  심련수의 조부 심대규는 강릉 일대 호남으로 술을 즐긴 의리파였다고 한다.  삼촌 심우택은 독립운동가로 이동휘 등과 함께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련수 아버지는 심운택이며 심련수시인의 남동생 심학수는 당시 흑롱강성 벌리현으로 가서  북한 김일성 이종사촌 항일투사 박관순과 친하면서 동서지간이 되었으며 큰 누나는 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항상 1등을 했으며 심련수시인 막내 동생 심해수는 해방 후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문학활동을 한 것도 밝혀졌다.  심련수가 동흥중학 재학시 여류작가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 동흥중학 교무주임이었다는 것도,  또 심련수시인과 가까웠다는 것도 확인이 되었다. 심련수의 일기는 1년분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소중한 자료는 수학여행 일정과 당시 풍물을 담은 사료적 가치가 충분한 기행시 뿐 아니라  용정에서 도문-원산-금강산-서울-개성-평양-신의주-봉천-대련-신경-하얼빈-목단강 등을 돌아본  수학여행 일정 등 조국순례 대행진을 할 수 있는 민족애를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 가운데 윤동주는 무엇을 했느냐이다.  윤동주 동생 윤광주와 심련수 동생 심해수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자료에 따르면 윤동주 동생은 심해수에게 윤동주가 보고 읽었던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이라  여겨지는 자료들을 전해 주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자료들 속에는 윤동주가 스스로 스크랩해서 만든 일제 당시 우리 국내주요 일간지에 실린  각종 문학기사와 저명한 문인들의 글이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윤동주 스스로가 부농의 아들이었기에 문학을 하는 가난한 심련수를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멀리했다는 것이 자료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이다.      윤동주는 당시 용정 광명학원을 졸업하고 1938년 연희전문(현 연세대학)을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면서 1942년 일본으로 가서 릿교대와 동지사대를 다녔다.  일본에서도 윤동주와 심련수는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들은 단 한번도 만났다고 하는 기록이 없는지 필자로서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던 것이다.        l. 심련수 시인을 중심으로        1936년 일본은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앞세워 이라는 통치방침을 표방한다.    보다 철저한 우리 민족말살과 황민화 정책을 강행하는데 면 단위마다 신사 설치를 하게 하고 l937년부터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강요할 뿐 아니라 이듬해에는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의 강령에 따라 한국 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조선과 만주의 교육령을 개정, 학교의 명칭, 교육 내용을 일본 학교와 동일하게 했다.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했으며 l939년, 창씨개명 제도를 실시 우리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칠 것을 강요하면서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용 전쟁터와 탄광 등지로 끌고 갔다.  l940년부터 일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말 신문을 폐간시키고 조선어학회, 진단학회 등을 강제 해산시켜 민족문화의 말살을 꾀했다.      심련수 시인은 이러한 시기에 우리말 우리의 정신인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동흥중학을 2l살의 나이에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발굴된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의 작품들은 l939년부터 l943년까지 5년 동안의 미발표작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일제는 l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만들었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했으며 l94l년 3월, 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 언제라도 감금이 가능한 체체를 갖추였으며, l942년 학도동원체제, 국민근무체체 등 징용의 강제력을 비상수단화했다.  l943년과 l944년에는 징병제와 학병제를 실시, 대학생들도 강제 소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심련수 선생이 l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용정에 돌아오면서부터 일제의 학도병 강제소집을 피해 신안진으로 가  초등학교에서의 교원생활을 통해 반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고취한 사실과 이로 인해 두 번이나 유치장에 갇힌 것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사실을 알고 신안지에서 용정까지 걸어서 오던 중 l945년 8월8일 일본군에 의해 마침내 확인 사살된 근거가 학병제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고 당시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일본정부에 요청했으나 묵살된 바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따라서 필자는 l944년 일제가 아베 노부유키 총독으로 하여금 전쟁 지속을 위해 비협조적인 한국 지식인들에 대한 대규모의 가혹과 탄압과 검거에 이어 1945년부터 발견 즉시 확인사살을 명령한 바 있음을 문제로 제기하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의 제기는 l944년 8월 여자정신대 근로령과 l945년 애국반, 경방단 등의 조직적인 한국인 통제가 주 원인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계속된 만행임을 심연수 시인의 발굴 과정에서 밝혀냄으로 민족 시인의 자리매김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다.      2. 심련수 시문학의 특징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어휘력은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 시적 주제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자적 언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시기에 흔히 나타나기 쉬운 무슨 애련이나 자연을 감상하는 감각적 시풍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서 문학혼을 불태울 삶의 결연한 사실주의적 경향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      또한 강인하고 비타협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정의와 신념, 그리고 남성적 삶의 지조를 견지하는 서정적 자아의 지사의식과 주의시적(主意詩的) 기법이 모던하고 비장하다.  심련수 시인의 시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현상은 약소 민족에 의한 현실적 고민을 문학을 통해 초월하는 진실과 자유와 생명력의 서정적 자아의지 극복이라 할 것이다.      이는 적극적 정서의 측면이 강렬한 만큼 선생의 시가 르포르타주한 기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리적 리얼리즘을 시의 한 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문학을 통한 투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적 언어의 리얼한 비유와 은유의 씀씀이가 모던하게 내면의 주제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한계의식에 의한 초월조건을 차용하는 것인데 아러한 정신적인 힘이나 시적 경향은 내적 관조보다는 능동적인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는 데 중심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거창성과 모호성을 유발하기도 한다.        심련수 시인의 시적 자아가 비교적 직설적이며 작품이 생경하기도 하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그 예술성에 있어서는 감칠맛이 덜 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시어의 선택과 배열, 배합을 보면 단순미와 함께 절대생활용 어미의 변용을 보편적인 일상용어로 다스려나가고 있다. 사물에 대한 내적 의지를 본질로 하는 순수함이나 긴요한 정직성과 그 독창적인 시작법은 시적 공감에 따른 윤리적 교훈뿐 아니라 고귀한 의지의 언어 경험을 감득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심련수 시인의 문학적 특징 가운데 또 다른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을 통한 근대정신이라 할 휴머니즘의 시적 주제의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련수 시인의 문학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사상이나  그 의식구조가 인간 중심적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로서 자립해야 한다는 민족의 중심성을 실현코자 하는 시적 휴머니티가 돋보인다.      시대적 피지배 현상에 따른 합리적 휴머니스트로 민족 구성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음을 선생의 문학은 웅변한다.  그러므로 20세기 중국 조선족 문학사료전집에 수록된 선생의 시와 시조가 보고 읽는 이에 따라 다소 편차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이유를 큰 관점에서 볼 때 심련수 문학의 초기시와 후기시의 영향 때문이리라.        또한 일본 유학 시기와 유학 후에 창작된 시편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문학 공부를 하던 것과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서 공부한 문학의 정보 역량에 따른 차이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문학에의 변화는 일본에서 친구 이기형(생존) 선생과 함께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고 나서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 주된 원인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심연수 시인의 지사적 열정이 때로는 강인한 신념에 의한 시적 체험으로 다소 엇갈리게 우리와 만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을 위한 문학적 정의가 아름다운 것은 심연수 시인이 사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발굴되어 우리들에게 그 책임을 되묻고 있다는 것이다.      3. 심련수 시인의 시적 언어        민족시인 심연수 선생은 시의 종결어미에 있어 남다른 언어 씀씀이를 보이고 있다.    들으라, 부르라, 보라 할꼬. 배였구나, 설레인다, 가누나, 가버린다, 주려무나, 스며든다, 찾더라오,   어찌한담, 왠일인고, 나이다, 주었소, 으리니, 오리다, 얻노라, 쉬다니, 소이다, 오지요, 자란다, 큰다, 굶어라, 네것이다, 로다, 납소, 소서, 는고, 세라, 으리라, 더이다, 졌구나, 일이냐, 맞노라, 스럽다, 것이다, 봐라, 하여라, 들이다, 었다, 알리라, 다녔다, 하구나, 였구나, 싶구나, 좋겠소, 하나니, 이냐, 하라, 한다, 간다, 썼다, 란다        이러한 언어의 씀씀이는 주의시적 의지의 시풍을 형성하는 데 있어 사용되는 시적 용어임을 알 수가 있다.  선구자적 언어의 배열을 몸에 익힌 듯한 이 종결어미의 사용은 심연수 시인의 시 도처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왜 이러한 주의시적 시관을 통해 역사적 격변과 충격을 시적 위안으로 삼았는지 그 심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관조일 것이다.      시인은 그의 시적 대상으로 민족의 생활양식을 가장 먼저 꼽고 있다. 우리 민족이 늘 꿈꾸는 지평선이며, 대지며, 나무며, 들이며, 바다와 강, 그리고 아침과 낮과 밤이며, 새벽을 주제로 노래했다.  ‘나와 너’와 ‘우리들’과 ‘나그네’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일깨우고자 하는 한편  ‘소년’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민족해방 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심련수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특징은 시의 직설적 표현 기법을 쓰고 있음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시풍이 주의시적 경향과 맞물리면서 나타나는 시어의 선택이란 목적시의 유형을 벗어나기 어려운데도 블구하고 서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그 문학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선생의 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등을 내용으로 한 시적 언어 구성은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데 있어 바로미터가 된다.      여기에서 필자는 l943년 당시 일제의 탄압과 우리 언어말살정책에 의한 검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심연수 선생의 시 대부분이 직설적이며 주의시적(主意詩的)임으로 목숨을 건 시작 행위를 서슴치 않았던 이 위대한 민족시인을 일본이 몰랐다는 것은 이해 밖의 일이었다. 일제의 확인된 학살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민족시인들에 대한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필자의 심연수 시인에 대한 애착은 시인이 자신의 민족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문학이라는 정신적인 무장으로 일본에 저항한 그 숭고함 때문이다.      4. 대표시의 감상과 이해    주의시적 표상과 끈질긴 서장적 자아        ..........이 재 호시인 선정 심련수 대표작............        소년아 봄은 오려니            봄은 가까이에 왔다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으리니  너의 조상은 농부였다  너의 아버지도 농부였다  전지는 남의 것이 되었으나  씨앗은 너의 집에 있을 게다  가산은 팔렸으나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갔지만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 보아라  너의 집이 가난해도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  서투른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너는 농부의 아들  대장의 아들은 아니래도…  겨울은 가고야 만다  계절은 순차를 명심하자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시가 별로 없었던 시기에 와 같은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불태운 청년 심련수 시인의 짧고 위대한 영혼이 문학을 통해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저항 시인이었음도 그의 시 도처에서 밝혀지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일제에 아부하지 않을 수 없는 길을 선택받아야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학을 일제로부터 저항의 탈출구로 삼았던 심련수 선생은 오히려 일본을 알기 위해 유학길에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는 한편, 선생의 수많은 유작 가운데 와 , , 등 이미 앞에서 열거한 시작들이 가장 극명하게 선생의 저항정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듯이 소년과 봄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시구 풀이는 민족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리얼하게 암묵적 은유기법을 이용하여 명시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봄은 가까이에 왔다(=일제로부터 민족 해방)”는 전제를 통해 “말랐던 풀에 새움이 돋”는다고 예견하는 자연의 이치를 시적 바탕에 내재하고 있으므로 그 이미지의 대상을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너의 조상은 농부”였고, “너의 아버지도 농부”라 말하는 시적 언어 속성에서 보듯이, 일제에 강점당한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비유할 뿐 아니라 농부가 뜻하는 경작의 형상화를 교훈조로 통찰케 한다.      제5행에 이르러 시인은 봄과 소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은유하면서 직관을 차용한 극복의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농사를 지을 “전지(땅)는 남의 것(=일제에 빼앗김)이 되었으나 / 씨앗(=민족해방을 위한 국권 회복)은 / 너의 집에 있을”  것이라며 예언자적 저항성을 표현하고 있음이 실로 놀랍기만 하다.        이 시에서 백미를 장식하는 6행에서 16행까지의 시적 긴장감은 투사적 언어 씀씀이가 그 위대성을 발휘하고 있다.  “가산은 팔렸으나 / 나무는 그대로 자라더라”에서 가산과 나무의 역할 분담을 이중화시킨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목숨을 내건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저 밑의 대장간 집 멀리 떠나 갔다"는 시적 진술은 선생 자신의 고백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끝 풍구는 그대로 놓여 있더구나(=민족의 구성원은 빼앗긴 땅에서 그대로 살고 있구나) / 화덕에 숯 놓고 불씨 붙여  옛소리를 다시 내어보아라(=여기에서 화덕과 숯의 역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뿐 아니라  3·l 독립 징신을 시적 내용의 화두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너의 집이 가난해도 / 그만한 불은 있을게다(=이 지사적 통찰력은 민족 해방의 깨달음을 염두에 둔 선생  특유의 시적 기법으로 다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 서툰 대장장이의 땀방울이 / 무딘 연장을 들게 한다더라  (=선생의 시적 정서와 의지적 언어관은 보편적 민족성을 획득하고 있다. 모국어에 담겨 있는 문학의 전통성을  선생께서 후세에까지 교감케 한 그 민족적 체취는 경건한 것이기도 하다) / 너는 농부의 아들 / … / 겨울은 가고야 만다  (= 일제 시대는 겨울과 같아서 패망할 것이다) / 계절의 순차를 명심하자 / 봄이 오면 해마다 생명의 환희가 / 생기로운 신비의 씨앗을 받더라 (=자연의 이치를 이 시 속에 도입한 선생의 내적 고백성은 역동성을 갖기에 더욱 선명하다. 선생의 내적 의지의 발현 또한 민족의 자아를 찾는 데 목숨 건 비장함을 동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에서 비타협적이며 시적 생명의 의지를 민족애 하나로 견지하다 일본 헌병의 조준된 흉탄에 젊은 청춘을 버린 민족시인의 숭고한 시정신을 우리는 다시 찾아 기려야 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민족시인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전망한다.  심련수 시인이 이육사 선생과 이상화 시인과 같은 분들에 비해 한치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이 작품 이외에도 선생께서 남기신 수많은 유작들이 증명하고 있다.        고집        고집을 써라 끝까지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고  타고난 엇장을 굽히지 말라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우기고 뻗치다 꺾어지건 통쾌해도  뉘게다 굽석거리는 꼴은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선쟁의 의도는 절개와 같은 것이다.  일제의 수탈이 극심한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시 이 뜻하는 민족정신의 뚜렷한 목적이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하고 있다.  선생은 이 시를 통해 “티끌만한 순종도 보이지 말” 것을 강변하면서, 우리의 “타고난 엇장(비분, 기개, 고집불통, 비타협)”과 같은 절개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벽을 문이라고 우기고(=절망을 희망이라 하고) /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우기고(=일제의 거짓말을 비유하고 있음)”에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선생은 이라는 이 시에서 그 저항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금이 쉬여 곰팡이 낀다고 뻗치라” 즉 사랑이 썩어 냄새난다고 뻗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뻗치다의 말뜻이 갖는 시적 의미는 위에서 말한 절개의 정신과 맥을 잇고 있다.    그러면서 차라리 꺾어질지라도 타협하거나 일제에 순종하지 말 것을 고집이라는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뉘게다(누구에게) 굽석(굽신)거리는 꼴은 / 보기 싫도록 역겨웁더라” 하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죽음을 뜻하는 일이었다.      턴넬        길다란 턴넬  감캄한 굴 속  자연이 가진 신비를  뚫어놓은 미약한 힘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찾아도  밟히우는 송장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아, 빛이 없어 죽었나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레루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또 어찌하리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  우를 우러러도  아래를 굽어보아도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시의 본성, 곧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떤 예술인가? 시는 어떤 언어인가?    시는 어떤 역사와 사회적 문화 현상인가? 시는 어떤 심혼의 소산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선생으로 하여금 일제의 흉탄에 돌아가시기까지 계속된 과제였을 터이다.  시가 당시의 현실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던 선생으로서는 민족문학을 위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1943년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오던 해에 창작된 것으로 알려진 시 은 선생의 문학적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이 시를 읽지 않으면 심연수 선생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겠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터넬과 선생의 시 터넬이 뜻하는 의미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길다란 턴넬(=일제의 오랜 억압) / 캄캄한 굴 속(=일제 식민 치하에서의 생활) / 자연이 가진 신비를 / 뚫어 놓은 미약한 힘(=일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희망)       / 눈을 감고 걸어도 / 눈을 뜨고 걸어도 / 밟히우는 송장(=일제 식민 치하에서 죽어간 백성들의 시체) / 바닥 가득 늘어자빠진 꼴 / 아, 빛이 없어 죽었나 / 빛이 싫어 죽었나(=자포자기한 상태의 암울한 현실을 비유) / 그러나 또 무수한 생명이 / 레루(레일)를 베고 침목을 베고 누워 / 지나갈 바퀴를 기다리고 있음을 / 또 어찌하리”        일제는 그들의 야욕을 위해 철도를 건설했으나 철로에 놓인 침목의 수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는 것은  이 시는 확실한 증언처럼 증명하고 있음이다.        “싸늘한 송장의 입김에서 들려오는 / 울부짖는 소리”  선생께서 턴넬을 바라볼 때마다 일제가 학살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목숨들과 그 영혼의 처절한 울음 소리를 귀에 쟁쟁 듣지 않았으랴. “우를 우러러도 / 아래를 굽어보아도 / 캄캄한 굴 속, 캄캄한 굴 속”      이 시의 자아의지가 턴넬이라는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턴넬 속에 갇혀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적극적인 의지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데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문학은세계를 지성적으로 갈파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의 뜻        읽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보고서 알았쇠다  님마음 알았쇠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더이다    ─ 원문(당시 사용되는 언어)      읽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보고서 알았습니다  님 마음 알았습니다  글자마다 살았고  구절마다 뛰고 있습니다    ─ 수정(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즉, 봄을 뜻으로 풀이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전체 6행의 시적 언어 의미가 ‘알았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을 읽고 알았다는 것은 님이라고 하는 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님은 봄이 뜻하는 개화와 해방의 님인 것이다. 보다 더 의미심장한 싯구는 “글자마다 살”아 있다는 것과 그 “구절마다 마음이 뛰고 있”더라고 하는 내적 의미의 완결성이다.  봄의 뜻이 담고 있는 독창성은 개성이다. 이러한 개성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적 언어의 주제의식이 참신해야 한다. 따라서 심연수 시인의 문학적 이원성은 봄이라고 하는 의미를 뜻으로 파악하고 있는 데서 이 작품의 독창성과 함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짧은 시이긴 하지만 작품의 완성도 또한 충족하고 있다. 봄의 뜻이 말하고자 하는 심미성, 대중성, 상징성이 시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서 살아 있는 정서를 경험케 한다.  따라서 원문과 수정된 시를 함께 싣는 것은 1940년대 당시에 사용된 우리말의 씀씀이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참고되어야 한다는 뜻에서이다.      새벽        미명의 광야를  달리는 자 누구냐  동 터올 새벽을 기뻐 맞을 젊은이냐  짧아진 희대에 활활 붙는 불  새빨간 불길이 춤을 춘다  푹푹 우그러든 자국마다  땀이 고였고  대기를 몰입한 듯한 호흡의 율동  지심을 놀랠 만한 그 무보(武步)는  피 묻은 싸움의 여세(餘勞)의 연장  암흑을 익힌 개선장병아  분투의 앞에 굴복한 과거는  캄캄한 어둠 속에 쓰러졌다  승리자여,  만난을 극복한 투사여  오래지 않아 서광이  그의 얼굴을  그의 몸을 비치리니  속으로 웃어 마음에 간직하라  잡고 있는 횃불 아래  따라오는 무리의 갈 길을  가르쳐주라  해 돋는 동쪽 하늘가  넓고 넓은 그곳으로      심련수 시인의 일반적인 시들의 주제가 주의시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어두운 시대에 대한 고뇌와 자아 성찰이 비교적 쉽고 상징적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회의와 번민, 처절한 고독 속에서의 희망을 잃지 않는 새벽을 꿈꾸는 자세는 예언자적 미명을 기다리고 있다.  지성의 면모를 보는 듯하지 않는가? 시대의 현실을 통찰하는 이 역사적 자아의 승화는 심연수 시인의 정신적 지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벽이라는 이 시의 주제의식은 우리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간절함을 비유와 은유기법을 이용해서 작품화했다.  시인의 시적 소재는 실제의 사건과 그 일어날 것에 대한 개연성과 필연성을 동시에 갖는다.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보편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편성이란 우리 민족의 미명인 해방이라는    현실적인 명제가 내재되어 있으므로 이 가능성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암흑을 익힌 개선장병아 / 분투의 앞에 굴복한 과거는 / 캄캄한 어둠 속에 쓰러졌다 / 승리자여, / 만난을 극복한 투사여”    오래지 않아 서광이 비칠 것이니, 이때 마음 속으로 웃고 그 섭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필자의 견해는 심연수 시인의 시적 의지가 불가능을 가능한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의 가능성은 믿을 수 없지만 일어날 것에 대한 가능성이 있음을 필자는 믿고 있다.  심연수 시인의 시 은 민족의 숙원인 해방을 일어날 것에 대한 가능성의 새벽으로 본 것이라는  점에서 예지적인 시인의 통찰력을 놓이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다.      등불        존엄의 거룩한 등불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다가  한줄기 폭풍에 꺼져버렸습니다  그 옛날 조상께서  처음 켠 그 불이  그동안 한 번도 꺼짐이 없이  이 안을 밝혀 왔습니다.  그들은 그 빛을 보면서  옛일을 생각하였고  하고 싶은 말을 하였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는 이 있으니  또 다시 밝아질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그 등잔에는 기름도 많이 있고  심지도 퍽으나 기오니  다시 불만 켜진다면  이 집은 오래 오래 밝아질 것입니다.        이 시의 시적 언어의 특성은 함축적인 의미의 서정을 예언자적 목소리로 표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정적  자아는 민족의 역사적 숨결을 느끼게 한다.      등불을 일컬어 ‘존엄’이라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민족애의 이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줄기 폭풍’에 비유되는 일제치하를 시인은 집 안의 촛불이 꺼진 것으로 바라볼 만큼 비범하기까지 하다.  내면의 토로가 이러할 만큼 내적 의지의 시적 구현이 분노보다 저항보다 더 이상적이다.  배경지식 없이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 같지는 않다.      들불        임자 모를 불  거침없이 타는 천리 저쪽 녘  누가 놓은 블씨이기에  저토록 꺼짐 없이  밤하늘을 붉히느뇨  사정없이 타오르는  불길! 불길! 불길!  끌래야 끌 수 없는 위대한 작탄!    언제까지 이 들판에 살아 있을지  어두운 저녁 혼자 보는 들불  그 불똥이 이 가슴에 튀어오기를  삼가 경건히 머리 숙이고  말없이 숭엄히 바라보노라.        l945년 2월 16일, 이 날은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날이다.  1945년 8월 8일, 이 날은 심연수 시인이 학살된 날이다.  여기에서 윤동주와 심련수라는 두 시인 가운데 왜 윤동주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졌으며 심연수 시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이토록 뒤늦게 발굴되어야 했는지 그것이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윤동주 시인은 비록 고향이 중국 용정이라 하더라도 당시  서울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심련수 시인은 고향이 강릉일지라도  중국 용정 동흥중학을 마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일제가 패망한 후 심연수 시인을 알고 있는 문학인이나 연고자가 안타깝게도 서울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윤동주의 동생과 심련수의 동생은 서로 친구 사이였고 그렇다면 윤동주의 집안에서라도 심련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윤동주의 집안으로 하여금 심연수라는 시인의 이야기가 50년이란 세월 동안 묻혀 있도록 했을까? 시 을 감상하면서 이러한 의문들을 생각해보자.    지사적 시인의 면모가 잘 드러나 보이는 이 이라는 시에서 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은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사상과 시적 호흡의 긴장감이다.  민족의 들불, 조국 해방을 위한 들불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위대한 작탄(炸彈)을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  그 불길을 가슴에 안고 삼가 경건히 머리 숙이고 숭엄하게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은 이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분노인 것이다.        
1591    중국 조선족 문학의 흐름과 전개과정 댓글:  조회:4537  추천:0  2015-12-05
  중국 조선족 문학의 흐름과 전개과정   조선족과 조선족문학의 일반     현 중국에는 약 200만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성급 작가협회인 [연변작가협회]는 중국 정부공설의 작가협회로서 약 500여명 정도의 작가회원이 있다. 지금 중국에는 우리글로 출간되는  문학잡지가 3개 있으며, 이 외에 ‘흑룡강신문’, ‘연변일보’, ‘길림신문’, ‘료녕조선문보’ 등 신문들에도 문학부간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족출판사 3개와 연변대학출판사, 료령민족출판사, 중앙민족출판사들에서 조선족도서들을 출판하고 있으며, 흑룡강조선말방송국, 연변인민방송국, 연변TV방송국 등 방송사들에서도 조선족문학작품들을 취급하고 있으며, 흑룡강작가협회에는 조선족전문창작위원회를 두고 있으며, 이 외에 료녕성, 길림시, 청도시, 절강성 등 성, 시들에도 조선족문학인 단체들이 있다.   중국 조선족문학개념에 대한 몇 가지 의문   중국 조선족문학이라 함은 물론 한반도가 아닌 중국지역에서 진행되어온 조선족들의 문학을 말한다. 역시 조선족들이 중국에서 진행한 문학활동의 진실한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우선 조선족문학의 시점을 어디에 두느냐는 아직도 정론이 나있지 않은 상황이다. 보편적으로 접수되고 있는 관점에 따른다면 조선족문학의 년대기를 대체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반도의 한민족이 중국경내로 대거 천입한 시기, 즉 독립운동시기로부터 보고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점들이 적지 않다. 길림시의 기록에 따르면 1670년대부터 조선족들이 길림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사의 연구나 조선족문학의 연구는 19세기 말 이전에는 거의 공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족문학의 시점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아직 의문부호로 던져두는 방법밖에 없다. 다음, 중국 조선족문학을 국적으로 구분할 것인가, 아니면 국경으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면 구한 말, 중국에서 활동한 문학인들이 적지 않은 바, 이는 실학파 학자들까지 그 발자국을 추적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라든가, 유린석,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학자와 작가, 정치인들이 중국에서 활약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신채호의 경우, 현 한국 국적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면 이를 우리의 문학에서 배제해야 할 것인지.] 하다면 이들의 문학창작활동이나 작품을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있느냐가 문제로 되고 있으며, 광복 전에는 중국에서 문학 활동을 했었지만 광복이 난 다음 한국이나 북한으로 이주한 작가들도 많다. 그러면 이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시 정론이 나있지 않은 상황이다. 국적에 따라 분류한다면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창작이나 문학활동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없다. 세 번째로 조선족문학을 언어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문학활동을 했던 많은 작가나 학자들은 한글뿐이 아닌 한문으로도 많은 창작을 해왔었다. 그러면 이들의 창작활동이나 작품을 중국문학에 귀속시키느냐, 한국문학에 귀속시키느냐, 아니면 조선족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느냐 하는 것 역시 아직도 공론이 나있지 않은 상황이다. 언어에 따라 분류한다면 한문으로 창작된 작품이나 한문문학활동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없다. 네 번째로 조선족문학을 민족의 호칭으로 획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상 조선족이라는 공식호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얻어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 많은 조선족들은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혹은 중국국적, 혹은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전에 중국에서는 조선족이나 한반도에서 이주해온 민족을 조선인, 한국인, 고려인, 지어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신라인,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중국 불교 4대명산 중 하나인 보타산에는 신라초라는 섬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한국인들이 창작한 작품들도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하다면 이 부분의 문학은 중국문학, 혹은 한국문학, 혹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켜야 하는지. 조선족이라는 공식호칭에 따라 분류한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 중국에서 진행된 문학 활동과 창작은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한반도역사시기에 따른 학자나 작가들의 중국에서의 문학활동을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멀리 신라시대, 왕자 김교각스님은 중국에서 불법을 구하면서 열반하실 때까지 많은 창작을 해왔으며, 또 그의 설교와 작품들은 중국인, 특히는 불교신앙인들에세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 중국불교계에서는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을 불교의 지장왕보살로 인정하고 있을 뿐이 아니라, 현재까지 구화산에는 신라왕자 김교각스님의 육신보살이 보존되어 있다. 김교각스님뿐이 아니라 설총대사의 작품도 중국에 많이 유전되고 있다. 이 외에도 전당시[당나라 시대의 모든 시 총 집합시집]에는 수만 수에 달하는 고구려, 신라, 백제 문인들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5등회원이라는 불교고승대덕 행적실록에도 신라, 백제, 고구려와 고려의 수십 명 대사들의 작품이나 어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대가 최치원도 중국에서 문학창작을 했을 뿐이 아니라 적지 않은 작품들이 중국 고전들에 수록되어 있다. 하다면 이런 문학작품들이나 이들의 문학활동을 중국문학, 한국문학, 아니면 조선족문학, 어디에 귀속시켜야 할지가 문제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공백 상태로 되어 있으며,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나 학자들이 적은 관계로 아직 연구가 깊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현실로 보았을 때, 현 중국조선족들의 문학을 어떻게 한 마디로 금을 긋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실정에서 오늘 필자 말씀 드리려고 하는 중국 조선족문학의 흐름과 전개과정은 대체로 현, 상식적으로 알려진 광복전후로 시작해서 중국에서 진행된 조선족문학창작활동을 기본으로 잡고 전개한다.   조선족문학발전의 연대 획분에 대한 견해   연대기로 획분했을 때 조선족문학은 대체로 1] 광복 전, 2] 광복부터 1967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3] 1967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기간,  4]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어서부터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 5] 1992년 한중수교로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대체로 5개의 큰 시기로 획분할 수 있다고 본다. 조선족문학이라 함은 중국에서 거주하고 있고, 또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들의 문학창작활동과 그 작품으로 중국현실 사회구조와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를 수 밖에 없으며. 또 중국 국정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되기 마련이다. 위에서 획분하다시피 중국조선족들의 문학의 발전과 시대적 맥락은 자연 중국의 현 상황에 따른 것이다.   1] 광복 전 문학 광복 전 문학은 대체로 한반도 문학과 연결되어 있고, 어떤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한국문학의 구성부분이라고 할 수 도 있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국과 중국을 드나들면서 창작활동을 했고, 또 발표매체들도 한국과 중국에 걸쳐 별로 구애를 받지 않고, 그때그때 편리에 따라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시기의 문학은 잘 아시다시피 친일문학과 반일독립문학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본다. 윤동주와 강경애, 심연수를 비롯한 저항문학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체 나름대로의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했다. 이들은 대체로 중국, 일본과 한국을 두루 섭렵하면서 창작활동을 벌렸던 반면, 김창걸[대표작 암야]과 같은 작가들은 대부분의 창작활동을 중국에서 진행하면서 끈질긴 저항의 정신을 보였으며 김학철과 같은 항일투사들은 중국항일연군에서 창작활동을 해오다가 광복이 나면서 서울, 평양을 전전하며 창작을 해왔고, 나중에는 중국에 다시 들어와 문화대혁명이라는 어려운 고비까지 넘기면서 창작의 신화를 낳기도 했다. 이와 반면, 일부 친일경향의 작가들도 중국 동북지역에서 창작활동을 해왔었다. 최근 들어 좀은 화제가 되고 있는 친일경향의 안수길과 같은 작가들도 중국에서 많은 창작활동을 해왔으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항일투사로 추대 받다가 최근 들어 친일작가로 알려진 [선구자]노래의 작사, 작곡가들 역시 중국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다. 총체적으로 광복 전 조선족문학이란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따르면서 한국문학과 맥을 같이해오고, 한국문학의 한 구성부분으로 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광복부터 1967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광복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토지개혁까지 중국 조선족들의 문학은 대체로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된 기쁨을 노래한 작품들로 주를 이루고 있으며 작가들 역시 광복 전부터 중국에서 창작활동을 해오다가 한국이나 북한으로 나가지 않은 작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의 영향으로 성장한 청년작가들이었다. 이시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5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토지개혁으로 없고 굶주리던 사람들이 땅을 분배받고, 나라의 주인이 되어 사회주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송한 작품들이었으며, 이시기 토지개혁이 한창인 가운데 6.25가 터지면서 ‘항미원조, 보가위국[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하며 나라와 집을 보위하자]’에 대한 내용들이 한시기 많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중국공산당과 새중국의 창건, 노동과 건설, 인민공사와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과 이상 등 내용이 위주로 문학활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문화대혁명처럼 순 이데올로기의 지배에 따른 창작이 아니라, 나름대로 문학의 원리에 따른, 비교적 자유롭고 온화한 문학창작의 환경이 마련된 시기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청년/ 중견작가들인 김학철, 김철, 리욱, 김창걸, 이근전 등이 새 중국이 성립된 후 중국조선족문학을 이끌어 갔다고 할 수 있으며 중국 조선족문학의 기틀을 잡았다고 할 수도 있다.   3] 1967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기간,    문화대혁명기간의 조선족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아직도 많은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교적 대표적인 관점들로는 상반되는 관점으로 하나는 문화대혁명기간의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는 주장, 즉 문화대혁명시기의 문학들은 정치의 부산물로 몰락하면서 문학 구실을 하지 못했고, 또 예술성의 극한 저락으로 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어찌되었건 간에 문화대혁명시기도 나름대로 문학은 [문학]으로 존속했던 만큼 오늘의 시각으로 그때의 현상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입장에서 시대에 따른 평가를 해주어 여전히 문학의 범주에 넣고, 평가를 하자는 주장이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인들은 물론, 그 중에서도 지식인들에게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창작의 자유가 없은 것이 아니라 틀에 넣은 [자유], 즉 오로지의 찬송과 비판, 투쟁과 사상교육, 즉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창작이었고, 정치운동의 도구라고 할 정도로 틀에 매워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 조선족문인들 가운데서 문화대혁명과 당시 정치운동을 노래하는 작품을 쓰지 않은 작가는 거의 없다. 문화대혁명가운데 피해를 받은 문학인들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문화대혁명에 반기를 들었다고 떳떳이 가슴을 치며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중국조선족문학의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김학철 옹 뿐이다. 그만큼 문학인들[원로문인들]을 포함해서 모두 문화대혁명에 종속된 창작을 했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또 문화대혁명기간 비판투쟁과 개조를 받으면서 피해를 입지 않은 작가들은 또 거의 없는 게 문화대혁명기간 중국조선족문인들의 상황이었다. 고로, 많은 작가들은 문화대혁명기간의 작품들을 자기의 창작에서 배제하고 있으며, 문화대혁명기간의 창작과 문학 활동, 문학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물론, 말까지 꺼내려고 하지 않는 것 역시 현 상황이다. 그러나 어쨌건 같, 어떤 형식으로, 어떤 도구로, 지어는 어떤 필요로 존재든지를 막론하고 문화대혁명기간 조선족사회에서 시가 존재했었고, 소설이나 산문[수필, 에세이]가 존재했던 것만은 사실이며 적지 않은 문인들은 문화대혁명기간 어떤 목적이었던 지를 막론하고 창작활동을 해왔고, 창작을 해왔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만큼 문화대혁명기간 문학작품들과 문학 활동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기간, 현 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들이 배양되었던 것 역시 사실이며, 지금의 4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는 모두 문화대혁명시기 문학창작을 시작했던 것이며, 문화대혁명시기 바로 문화대혁명결속 후의 조선족문단의 흥기를 위한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개인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문화대혁명시기 역시 조선족문학에서 배제할 수 없는 문학발전  한 단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어서부터 1992년 한중수교 이전까지,   문화대혁명이 결속되면서 조선족문단 역시 중국전체 문단과 마찬가지로 문학창작의 새로운 발전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연변일보”, “흑룡강신문”, 료녕조선문보 등 신문사들에서 본격적인 문학원지가 생겨나게 되고, 연변작가협회기관지 “연변문학[천지]”의 부흥과 함께 많은 작가들이 다시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시대와 공조하여 “도라지”, “장백산”, “북두성”, “갈매기” 등 문학지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고, 흑룡강조선말방송국, 연변인민방송국 등 방송사들에서도 문학작품을 대거 발표하면서 작가대오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시기는 주로 중국 문단의 주류를 따라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고소하는 “상처문학”,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뿌리를 발굴하는 “뿌리 찾기 문학” “현대시” 등 거창한 문학현상은 형성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과정은 다 겪었다. 이시기 바로 중국 조선족 현 문학의 중견들이 새로운 돌파와 파격적인 창작방법, 그리고 새로운 사상으로 안받침 된 작품들로 문단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원로작가들보다 이데올로기에 덜 구애되고 덜 집착했던 관계로 외려 원로작가들보다 문단에 더 활약하면서 조선족문단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견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창작실천과 10년 문화대혁명동란을 겪으면서 문학의 사막을 지나온 사람들이 문학에 대한 갈구로 문단은 화려하게 장식되기 시작하면서 후기 조선족문학의 황금시기를 맞이하는 데 좋은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5] 1992년 한중수교로부터 지금까지   한중수교는 중국조선족문단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중수교 전 중국조선족문단과 한국문학의 접촉은 민간적인 차원에서 약간한 접촉이 있었을 뿐이며, 조선족작가들 역시 어쩌다 구해볼 수 있는 한국도서들을 통해 한국문학을 조금씩이나마 엿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문단과 한국문학의 본격적인 교류는 물고를 트이기 시작했으며, 연변자치주를 중심으로, 또 연변을 통해 조선족들은 한국문학작품들을 대폭 접촉할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조선족문단은 단일한 중국문단-전 소련-조선[북한]이라는 접촉방식에서 한국문학이라는 새로운 선을 하나 더 긋게 되었다. 한국작품들과 한국작가들은 중국조선족작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또 상호의 교류로 조선족작가들은 문학과 문학창작의 새로운 세계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문학의 맥에 따른 변화와 양상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문학의 바탕에 뿌리를 두고, 중국문학에서 주로 영양을 섭렵하면서 전 소련, 조선[북한]의 창작방식이나 문학이론을 많이 배워왔었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끝나기 전, 외국문학은 주로 전 소련문학과 북한문학과 접촉을 했으며, 그만큼 그 양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 조선족문학은 더 다양한 문학과 접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단순히 중국도서들을 통해 외국문학이나 문학사조를 접촉하던 한계를 벗어나, 한국문학이나 한국도서들을 통해 우리글로 외국문학과 문학사조를 직접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족문학은 고유의 틀에서 벗어나 창작형식과 방법, 그리고 발전모드 등 여러 면에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잇게 되었으며, 개혁개방과 그에 따른 문학창작에서의 퍽 자유로운 환경과 함께 한중수교라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으면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었다.   조선족문학의 지역적 분포현황   중국 조선족작가들은 대체로 연변지역에 많이 집중되어 있으며, 국가공설의 조선족 작가협회도 연길에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 전역의 조선족창작활동에 대한 관리와 조직, 양성을 연변자치주의 관계기관, 즉 연변작가협회에서 총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중국에 4개밖에 없는 조선족문학잡지가운데 “연변문학”만 연변지구에 있고, “도라지”잡지는 길림지구에, “장백산”잡지는 장춘시에, “송화강”은 할빈에 있으며, 중국에서 출판되는 우리글 신문이 모두 4개 되는데 그 중 “연변일보”만 연변에 있고, “흑룡강신문”은 할빈에, “길림신문”은 장춘에, “료령조선문보”는 심양에 있다. 우리글 출판사로 놓고 말하면 연변인민출판사, 동북조선족출판사, 연변대학출판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3개는 산재지역, 즉 흑룡강조선족출판사는 목단강시에, 료령민족출판사는 심양에, 민족출판사[중앙]는 북경에 있다. 다시 말하면 작가와 기관은 연변에 있지만, 작품의 발표 지면은 산재지구에서 퍽 많이 있다는 말이 되며, 문학작품의 편집진은 산재지구에 퍽 많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현 공식으로 출판되고 있는 신문이나 잡지 밖에 비공식간행물로 출간되고 있는 내부간행물로 된 문학지들도 산재지구에 더 많은 것이다. 이를테면 통화지구, 절강성, 대련, 심양 등지의 조선족창작단체들에서도 자체 내무간물을 발행하고 있으며 그 발행부수와 편폭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조선족문학의 한계와 전망 현 조선족문학은 자체의 한계에 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창작대오의 한계, 중견작가들을 뒷받침 해주어야할 후진작가들이 결여, 다음은 독자대오의 축소, 도시와 외국진출, 그리고 신세대의 한문접촉은 거의 장애가 없는 것으로 우리말 잡지나 신문을 필수로 하지 않음으로 독자대오는 대폭 축소되고 있는 게 현실이며, 세 번째로 이론과 철학사상의 한계이다. 문학이 어느 정도 발전한 다음, 문학이론과 철학사상이 안받침 되지 않는다면 발전이 더디거나 발전할 수 없게 된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조선족문단은 활기를 띠면서 황금기를 맞이하다가 90년대 초반에 와서 주춤하게 되었다. 사상과 창작방법, 소재가 고갈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행히 한중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작가들은 문학 언어와 창작방법에서 새로운 길을 열수 있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한계에 와 닿은 것이다. 언어와 방법만으로는 되지 않는 시기에 접한 것이다. 이론과 철학사상의 결여로 새로운 돌파와 더 깊은 접수와 이해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한중 문화경제교류가 더 활발하고 심도있게 진행되면서 차후, 중국 조선족문단에 더 많은 한국문인들이 뛰어들 것으로 전망되면서 이들이 중국에 진출하여 조선족문단에서 활발한 문학활동을 하면서 조선족들이 중국문학을 이해하고 배우는데 새로운 사유방식과 방법을 제시해주리라 전망된다. 지금도 적지 않은 한국의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중국작가,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면서 조선족작가들에서 새로운 영역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그 과정에 교량작용을 하는 조선족작가들은 이를 통해 또 새로운 도약의 토대를 마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선족문학이라고 함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작가들이 중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중국문화와 어울리면서 문학 활동과 창작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문학이 중국의 문학을 떠난다거나 한국이나 북한문학을 떠난다면 조선족문학으로서의 존재가지가 없다. 그만큼 조선족문학은 중국조선족들이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진행하는 문학창작활동이면서 기록이며, 또 조선족생존상태에 대한 문학적인 관조와 문학생존현상태인 것이다. 차후 조선족문학은 계속 중국문학과 한국문학의 과도적인 문학으로 자체의 생명력을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 200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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