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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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필]눈섭이 없는 녀자(외3편) 댓글:  조회:357  추천:1  2019-07-19
눈섭이 없는 녀자 허무궁   1. 눈섭이 없는 녀자애가 내 앞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다. 요즈음의 녀자애들은 괜히 있는 눈섭은 전용칼로 밀어버리고 거먼 펜으로 다시 그려놓는다. 무슨 취미가 이런지 모를 일이지만 내 앞의 이 녀자애는 아마도 밀어놓은 눈섭을 다시 그리는 작업을 잊은 모양이다. 눈섭이 없으니 눈두덩이가 두드러져서 자못 무서운 얼굴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옛날 그림에서 본 듯한 눈섭이다. 이 글에선 그게 누구이고 왜서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 없는 눈섭이 나를 묘하게도 물질과 의식의 미로에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원래 있던 눈섭도 이렇게 갑작스레 없어질 때가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중요한 것이다. 사실이란 있다는 리유로서 다시 말하면 존재를 의미한다. 눈섭이란 꼭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일반 물질로서는 인간의 눈 우에 붙어있는 것이 상례다. 그 모양에 따라서 인물이 평가되기까지 하는 것을 봐선 미크론물질(청화대학 생명과학 학자 시일공)의 세계에서는 한 물질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원래 있든 없든 존재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눈섭이라는 것은 말이다. 사용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미학적으로는 사용적 가치가 심미적 가치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에 있어서는 비가림도 먼지가림도 할 수 없는 눈섭은 다만 심미적 가치로서만 존재하고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매 력사적 시기마다 굵게 가늘게 길게 엇바꿔가면서 형태를 여러가지로 변화시킨 건 나도 어느 드라마나 그림 따위에서 본 것 같은 기억이 있지만 영 없어진 적은 아마도 있은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없는 눈섭이 놓여있다. 없는 모습으로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게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2. 나의 머리의 한복판에 구멍을 펑 뚫러놓고 아침이 스쳐지나간다. 요즈음엔 하루 하루가 그 구멍 속을 꿰질러 나든다. 우주공간의 블랙홀처럼 내 주위의 모든 것을 그 어떤 인력으로 끄집어다간 펑 뚫린 구멍 속으로 유인해 끌어들이는데 밑 빠진 독처럼 내 맘속엔 담겨지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그릇의 아구리가 아니고 구멍 뿐이기 때문이다. 허무의 그릇이란 다 그런 것이다. 의식과 물질이 부딪치는 공간에서 공포와 허무와 용맹과 탐구와 함께 병존한다.   3. 저켠 나라의 총리가 국회를 해산한다고 세상에 선포하자 온 안팎이 들끓었고 세상사람들은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생긴 것처럼 흥분하고 있다. 권력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이 일제히 움츠렸던 모습을 드러내며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서 물질로 리해를 해야만 하는 모든 의식들이 구름처럼 그 사회를 뒤덮었다. 매스컴이 돈을 벌 수 있는 최고의 챤스가 닥쳐왔다. 정치기자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정치가들의 냄새를 맡고 있을 무렵에 지구의 상대편에서는 큰일이 벌어졌다. 아니 또 벌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총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했던 것이다. 비참하기로 한심한 사건인 데도 그것은 구름처럼 온 사회를 뒤덮을 정도로 의논되지 않은 채 삽시간에 마비된 사람들의 머리통 속에서 구석에 팽개쳐버려진 채로 잊혀가고 있다. 한 어르신님이 어린애처럼 주절대는 말 한마디가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였다. 투윗이 매일 매스컴을 못살게 군다. 혹시 이 땅에 무서운 전쟁이 올지도 모르기때문이다. 없던 전쟁도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님을 어서 연변으로 되돌아가시라 시급히 타일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연변이라면 차라리 내가 있는 필리핀에 와서 대피하시라 했다. 결국 누나는 울산바위처럼 끄떡하지 않고 그냥 있던 곳에 눌러앉아계신다. 누님은 대개 없던 것이 있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결핍하다. 그리고 나는 연변에 계시는 형님네 일가는 어찌하나 근심을 하였다. 고래들이 치고 박고 하는 새에 노한 장백산 산신령님께서 그냥 화를 내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료를 본 기억에 의하면 장백산화산이 폭발하면 그 화산재가 지구에 한바퀴 허리띠를 둘러줄 것이며 사랑하는 고향 연변이나 그 산맥 아래의 모든 대지를 몽땅 덮어버릴 것이라고 한다. 신성한 산신령님께서 내키는 일이 아님은 번연하지만 우주의 일반 물질들의 자연적인 운동은 이렇게 인위적으로, 즉 인간들의 감각세계의 요소 때문에 크게 노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감각적인 요소라는 게 아주 작은 단위의 초월적인 물질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그 요소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지위나 리념에 따라서는 우주을 크게 노엽힐 수도 있는 것이다.   난 요즈음엔 가뜩이나 연변축구가 불쌍해서 못 견디겠는데 이렇게 여기 저기에서 새바람에 게 눈 감기듯 이 세상을 못살게 구는 인간들이 떠들어대니까 단단했던 내 마음의 성벽이 삽시에 무너질듯 아찔아찔해난다. 목구멍으로 밥이 잘 넘어가질 않고 머리통에 뚫린 구멍으로 바람만 세차다.   시월의 태풍이 줄지어서 닥쳐온다. 필리핀 동쪽에서 잉태하여 북으로 올라가며 성장한다. 태평양에 린접한 나라들에서 각기 제기한 이름을 엇갈아 가지고 태여나는 태풍이라고 한다. 나의 펑 뚫린 구멍 속에도 돌개바람이 세차다.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도 구멍이 뚫리고 그 속으로 돌개바람이 불어든다. 마귀처럼. 일반적 물질이 없는, 순 의식만으로 만들어진 초월적 물질로 이어지는 바람이다.   4. 초월적 미크론세계의 물질의 운동, 그것은 오로지 그 의미를 아는 자들만이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학자님도 모른다고 한다. 물질운동의 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의 질량은 우주에 있는 물질중의 4% 밖에 안된다고 한다. 꼭 거짓말 같은 얘기다. 96%를 모른다는 리유가 어떻게 성립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허나 확실한 것은 보이는 것만 있는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것도 확실한 존재로서 이 우주에는 있는 것이다. 모두가 미스터리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kazuo Ishiguro의 소설) 바라보는 ‘창백한 언덕 풍경’(kazuo Ishiguro의 소설). 그외에 뇌리에는 ‘기시단장 죽이기’(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가 맴돈다. 없는 눈섭처럼 이미 없어진 기억이 펑 뚫린 머리통의 구멍 속에서 홀로 남아돌고 있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요즈음 우리 회사에서는 녀직원들의 주인다운 의식이 늘어나서 온 회사가 무슨 녀자애들의 방처럼 꾸려지고 있다. 엄숙하지만 썰렁했던 공보파넬이 갑자기 알락달락 채색의 사진들로 꽉 채워졌고 복도나 화장실에는 향내로 충만되였다. 멀쩡한 사내 직원들도 몇몇 있지만 성세호대한 녀성직원들의 대렬 앞에서는 그 위엄이 오뉴월의 시든 가지처럼 바싹 시들어져 소리도 크게 지르지 못한다. 사내애들은 이래라 저래라 녀성들이 시키는 대로 굽석굽석 일만 하다가 나만 보면 하소연한다. -저 애들 무서워요. 웃음이 없다니까요. 저들끼리만 웃고. 이름을 대지 않아도 담당자 녀자애들을 가리킴을 나는 다 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괜히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린다. 영 귀여워서 못살겠다. 60여명 직원중에 남성이 오로지 다섯명 뿐이여서 기실 그들은 귀여운 ‘놀이감’처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운반, 기계수리 같은 것들을 도맡은 남성들이 크게 기대고 싶은 힘의 존재로 부각되여 녀직원들을 뒤받침하고 있어서 회사의 믿음직한 동량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언권은 조금만치도 없다. 절대적인 인수의 약세 때문일 것이다. 회사의 일을 상론할 때나 누구의 생일 파티를 상론할 때나 모두 녀성들이 결정을 하고 남성들은 꿔온 보리자루처럼 한구석에서 조용히 결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너희들이 결정하면 난 엉기적거리며 너희들 뒤를 쫓아가리다 하는 태도다. 그러던 와중에 약 두주일 전에 현장에서 책임성이 강한 녀자애 하나를 영업부 사무원으로 등용하였는데 이 아이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아서 회사가 한번 또 들끓었다. 민주적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벽보를 휴계실에 꾸려놓은 것이다. 옛날 OO에 ‘민주벽’이라는 게 있어서 귀찮게 떠들다가 과도하게 민감한 일들을 맹탕 끄집어낸 탓으로 큰 몽둥이에 단매를 맞아 박살이 난 적이 있는데 오늘 회사의 이 민주벽보를 보고 갑자기 옛날의 그 력사가 생각이 났다. 때는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장춘에 배치를 받았을 때의 이야기다. 장춘시조선족문화관에서 꾸리는 문학지 《북두성(그 때는 장춘문예)》잡지 편집으로 배치를 받았는데 서너달이 지나자 장춘시문화국의 청년학습반에 불리워가 두주일 동안 감금상태로 정치리론학습을 하게 되였다. 문화국 산하의 21개 직속부속, 비영리부문과 공기업(Basic unit.)에서 나젊은 청년들을 뽑아서 집중교육을 하였는데 후에 문화국 조직부에서 일하면서 알고 보니 그것은 계획적으로 간부를 배양하는 수단이였다. 이러한 육성반에 불리워가면 대개는 조직적인 인사변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였는데 그 때 함께 훈련반에 갔던 서른여명 되는 학급생들 중에서 나를 포함해서 셋이 문화국 조직부와 공청단 기관에 등용되였다. 그 때 학습반에서 “OO의 ‘민주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너는 OO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잘 알 것 아니냐?” 하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벽’이라는 개념이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인상이 깊게 남아있다. 그런데 오늘에 내가 운영하는 회사에 이렇게 버젓이 민주벽보가 생겨난 것이다. 큰일이 아닌가? CEO의 절대적인 권위와 무조건 복종을 원하는 나의 경영리념과 대치되는 행위로서 잘못 발전을 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이 생각되기도 했다. 민주라는 것은 우리 세대에게는 민감한 문제로 되며 또 오래동안 탐구하고서도 아직도 정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복잡한 문제이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대체 민주라는 것이 진정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일가? 이러한 테마를 두고 필자는 옛날에도 수필을 쓴 적이 있지만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의논하게 된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교육을 받고 터득해온 리론 대로 하면 민주란 집중을 위한 민주이며 집중은 민주를 토대로 한 집중이다. 즉 다시 말하면 민주집중제 리론이다. 민주를 토대로 한 집중이요, 집중이 없는 민주는 제창하지 않는다는 주장일 것이다. 나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흔히 민주라고 하면 미국의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오르군 하는데 미국의 민주를 몇십년간 쳐다봤지만 그게 대체 우리가 말하는 민주가 옳은지 의심이 된다. 세계 각국에서 마구 일으킨 전쟁과 인종차별, 언어의 자유로 민주를 대체하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자유만이 민주인 것이 아닌 줄로 안다. 오늘도 그냥 전쟁을 벌이고 있고 또 새로운 전쟁을 꼭 해야 되는 것처럼 그 나라의 어르신이 떠들고 있는데 폭력으로 민주를 불러올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폭력은 강제를 동반하며 강제는 민주를 앗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민주를 론의하기엔 너무나 숨에 부친 일이기에 여기서 그만두고 내 신변의 일이나 어서 걷어치워야 하겠다.   내가 무시되거나 혹은 나와 뜨개소처럼 걸구 드는 직원이 혹시 있지나 않은지 겁을 먹은 채 회사의 민주벽보에 실린 한장한장의 의견서들을 확인해보았다.   “무료로 탈 수 있는 뻐스를 마련해줬으면 너무 엄청난 수량을 추구하지 말아야 품질을 보장할 수가 있어 회사의 물맛이 영 말이 아니예요 회사에 직원전용식당이 있었으면 회사의 모든 것을 지지합니다 직장에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러면 안되는 것을 … …”   대개 이러한 내용들이였다.   생각보다 단순한 내용이여서 안도의 숨이 나온다. 엄숙한 이데올로기와는 관계가 없었고 어떤 리념적인 문제도 아니다. 괜히 겁을 더럭 먹고 민주가 어떠하니 떠들어댄 내가 우습게 된다. 그래 좋아. 민주가 있었으니 이번엔 집중을 내놓을 때가 아니더냐. “회사가 잘 나가면 다해주마. 그러니 회사가 잘 나갈 수 있도록 많이 노력을 해다우. 응!?” 이 한마디면 다 해결이 되는 민주적 의견이다. 래일 그렇게 회답을 주리라 굳게굳게 다짐을 하고 이 글도 마무리하련다.   집중은 고독이다. 민주를 집중시켜야 하는 행위는 홀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독단적으로 받아안아야 할 고독이다. 중국의 본사에서는 련휴를 쉬기에  매일 다 읽지도 못하는 수량의 메일이 그 민주성을 잃은 채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나의 컴도 고독에 허덕이고 있다.   고독할 때 생각한다. 고독할 때 랭정해진다. 고독할 때 성장한다. 고독을 터득하면 훌륭한 경영자로 될 수 있다. 거짓말 같지만.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   형용할 수 없는 아침이다. 풀냄새가 그윽한 맛 좋은 공기와 귀맛이 좋은 뭇새들의 하모니가 아름다운 노래소리, 커다란 남국의 나무가 가지를 무겁게 드리운 풀밭과 바다물처럼 검푸른 하늘이 한폭의 유화처럼 펼쳐진 대지의 지평선에 선명한 금을 긋고 있다. 잠에서 방금 깨여나도 잠기가 삽시간에 가뭇없이 사라지는 상큼한 아침이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페부에까지 닥치는 아침의 공기를 만긱하며 나는 출근길에 오른다. 아침해가 찬연히 비추는 차창유리를 활짝 내려놓고 부담스런 에어콘은 다 꺼버린다. 107.5에프앰 음악채널에서는 흥겨운 명가가 흘러나온다. 클락에 와서 아예 고정해놓고 듣는 라지오 방송이다. 짧은 출근길이지만 나는 매일 이렇게 출근을 즐긴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회사 사무실에 여섯시 반에 나와서 간밤새에 다닥다닥 컴퓨터에 붙어있는 메일들을 대충 훑어보며 회신이 필요한 건 간단히 회신을 발송하고 나서 나는 전번 날에 나카니시상이 일본에서 사가지고 온 수동 커피메이커로 커피콩을 간다. 사르륵- 사르륵- 나의 하루가 시작이 되는 서막 뮤직이다. 콜롬비아의 브랜드 커피콩에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그래도 브라질의 커피로서 상등 줄에 속하는 커피콩이여서 나는 자못 즐겨 마시군 한다. 넙죽하게 생긴 동남아의 커피와는 완전히 다르다. 향긋한 커피 향이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맞은켠의 하얀 벽은 나의 시선을 깨끗하게 세탁을 해준다. 화창한 자연의 아침과 그윽한 사무실의 커피 향과 깨끗한 하얀 벽, 이들은 매일 건강하게 진행되는 생리의 신진대사처럼 나의 정신도 함께 클리닉해준다. 정신상으로도 밤새 동안 루적된 오물들을 이렇게 배설시키고 나에게 거뿐한 하루를 마련해주고 있는 자연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아래층 창고에서는 엘씨디제품의 커버글라스를 포장하는지 테이프를 당겨 끊는 소리가 들린다. 꼭 마치 누군가 가래를 받는 것 같은 소리로 들려서 기분이 잡칠 때가 많지만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해주는 직원들이 고마워서 잔소리는 못하고 차라리 그 소리를 무슨 타악기 음악으로 간주하고저 노력을 해본다. 카-악 툭, 카-악 툭. 저 놈 테이프는 꼭 저런 소리만 내야 하나? 같은 값이면 물방울 소리라도 내주면 안되나. 나 원 참.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서 중얼거리노라면 사무원 애들이 하나 둘 해쭉히쭉 웃으며 사무실 문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굿 모닝 써얼, 굿 모닝 써얼. 현장에서 일하는 애들보다 한시간 늦게 출근하는 사무원 애들이지만 활발함은 현장의 직원들보다 짝진다. 현장 애들은 멀리서 나를 봐도 높은 소리로 인사를 한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라서 내가 알아듣든 말든 자기들이 아는 언어를 다 동원시켜서 말을 건넬 때도 있다. “안녕하세요?” “니하오.” “콘니찌와.” 여럿이 한꺼번에 공격을 퍼부어서 하나하나 대꾸하기는 다 글렀다고 판단을 할 때에는 “마간당우마가”라고 응대를 해준다. 처음 클락에 왔을 때에는 직원 애들의 얼굴색이 검어서 컬쳐쇼크를 느낄 때가 많았는데 이젠 일년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이곳 애들도 많이 이뻐보인다. 언제나 상을 찡그릴 줄 모르는 필리핀의 젊은이들, 아침 일이 시작되기 전에는 휴계실이 마치도 참새들을 가둬놓은 공원처럼 재잘재잘 떠들썩하다. 뭐가 매일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뭐가 매일 그렇게 많이 말을 해도 끝이 없는지? 누구나 빠짐이 없이 지저귀다가도 함께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그럴 때면 나의 얼굴도 활짝 핀다. 이런 애들이 귀여워지지 않는 것이 차라리 이상한 일이 아닌가. 습관이 되여가는 과정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나도 이렇게 매일 차례지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맞으며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넷트나, 위챗의 닉네임으로는 백두곰이요, 필명으로는 무궁이요, 중국에서는 회사의 직무인 둥쓰짱으로 불리워지기에 내 이름을 우리말로 들어본 지가 아득하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더구나 그러하다. 부모님께서 계실 땐 자주 듣던 자기의 이름인데 이젠 나이가 오십을 넘어서서 나보다 이상인 사람이 나를 부를 때도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때가 많다. 흔하기로 지난 세기 80년대의 연길 택시 만큼이나 흔해빠진 사장님이란 칭호로 불러주어서 나는 가금씩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이 땅덩어리에서 사라지는 건 아닌가 하는 위구심이 울컥 치밀어올 때도 있다. 내가 사라지고 이 세상에는 다른 내가 남아서 나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하는 ‘나’, 행동하는 ‘나’, 있는 것을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나’는 부모님이 불러주시던 어린 나의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여기에 버젓하게 남아있는 ‘나’는 나와는 다른, 나의 흉내를 내는 ‘내’가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내 이름이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대체될 때부터가 아니였던지 모르겠다. 아마 나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은 것은 매 4년 만에 어김없이 모이는 동창만회 때다. 동기모임이라고 점잖게 말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이름에 습관이 잘 안된다. 어렸을 적에는 그냥 동창만회라고 불렀다. 아마도 우리 학급에는 어마어마한 분들이 많아서 좀더 표준어에 가깝다고 생각이 되는 단어를 택해서 부르게 되였을 것이다. 나는 동기라면 사이가 멀어보이기 때문에 감정적 색채나 인정적인 립장으로 봐서 동창이란 말이 마음에 더 든다. 같은 창문을 가진 한칸의 교실에서 4년간 책상을 나란히 하고 오손도손 글을 읽던 사이를 동기라는 말로는 해석이 잘 안되는 것이다. 아무런 리해관계가 없이 오로지 정만을 굳혀온 사이여서 죽을 때까지 서로 허물이 없는 친구가 되는 게 동창이다. 동창모임은 직업과 나이와는 관계없이 학창시절의 이름과 별명이 불리워지는 모임으로 된다. 그럴 때면 나는 나의 이름을 자꾸 듣고 싶어서 앞에 나서서 납뜨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이 내 심정은 모르고 동창생들은 괘씸하게도 “야- 이 백두곰이 또 술 권하네.” 하면서 이름을 바꿔 부른다. 그럴 즈음이면 나는 곰처럼 뒤로 슬슬 기여서 물러난다. 내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고 있음을 아둔한 곰의 판단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되불러올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여기 클락에 와서는 또 영어로 폴이라고 불리워 난 이젠 아예 자기가 대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얼렁뚱땅 얻어가진 영어 이름인데 일사천리로 성장하는 나의 인생의 궤도에 따라 이 폴이라는 이름도 하얀 셔츠에 잉크가 스며들듯이 쫙 퍼지기 시작한다. 나의 인생이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피여가는 것이다. 나의 새로운 하루하루가 시작이 되여가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렇게 영원히 매일 하루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다른 내가 존재를 약속하고 있는 하루도 있다. 그렇다. 나에게는 매일 아름다운 아침이 챙겨지고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그것을 운영해나간다. 나를 위하여, 그리고 또 다른 나를 위하여.     감지하는 가을   모두들 가을이 온다고 한다. 오는 것인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모두가 가을을 ‘온다’고 하면서 나름 대로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모두들 온다고 한다’라고 표현함은 ‘모두들’이라는 단어, 즉 나를 쏙 빼놓은 범위의 그룹을 내세워서 나는 그 속에 들어있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모두가 말하는 가을이 나한테는 차례지지 않고 있음을 하소연하고 그 아름찬 가을의 풍성함을 만긱하지 못하는 나의 피해의식을 널리 알림으로써 ‘모두들’의 동정을 사고 거기서 위안을 얻고 싶어서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일년 내내 령상 30도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남국 필리핀에 있어서 사계절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위챗에 사진들을 올리면서 찬사를 금하지 않는 가을을 느껴보고저 이렇게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야지 그런 자세로 나는 지금 가을을 찾아떠난다.   푸른 숲과 들에는 하냥 여름을 자랑하는 이름 모를 꽃들이 아름답다. 망고 같은 열매는 이미 시기가 지났고 거리에선 아직도 대롱대롱 달려있는 야자나 바나나가 눈에 뜨인다. 논밭에선 수확이 한창이고 모내기도 한창이다. 황금들판이란 말은 여기에선 아는 사람이 없다. 언제 봐도 이 빠진 것처럼 황금색 낟알이 더덕더덕 땅덩이에 붙어있다. 여기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슨 봄나비요, 황금 가을이요, 버들개지요, 가을 단풍이요 하는 이런 말들을 하면 나를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영어를 자습하고 있는 나로서는 애를 쓰고 이런 표현을 가진 영어단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영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영어 공부에서 꽤나 득을 본 셈이다.   어디서 가을을 찾아보랴. 언제나 무더기로 쌓여있는 과일들, 언제나 푸르기만 한 식물들, 언제나 반팔 옷만 입고 다니는 사람들, 봄에 나오는 고사리나 민들레가 보이지 않고 가을에 보이는 메마른 옥수수밭이 보이지 않으며 빨갛게 물든 단풍들이 무리를 지은 산들도 보이지 않는다. 온 대지가 가을을 완전히 배제하고 여름만을 보장하는 오로지 우기와 건기의 기후만을 맞고 사는 필리핀이다. 혹시 억지로라도 가을을 지적하자면 아마도 어김없이 여기를 거쳐가는 태풍계절을 들 수 있으렷다. 변화가 없는 계절에 자극이 좀 필요했던 것인지 오가는 태풍을 초대나 한 것처럼 다 불러들인다. 달력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고향에 가을이 자리를 찾을 즈음의 시기라고 하겠다.   요즈음엔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슈퍼마켓이 하나 새로 생겼다. 이름을 멋있게도 드림마켓이라고 달고 커다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영어와 한글, 그리고 중국어로 써붙인 간판은 명백하게 이 세가지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취지를 내세웠다고 생각한다. 대개 이곳에서는 이 세가지 언어를 내세우면 여기서 사는 모든 주민들의 언어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무슨 초청장이나 받은 것처럼 이 슈퍼마켓에 자주 들리군 하는데 요즈음에 가만히 보니 먹음직한 감이 나왔다.   가을을 갖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을이 있는 곳에 내가 찾아온 것이다. 바꿔말하면 내가 찾아간 곳에 가을이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자마자 군침부터 넘어가는 먹음직한 감무더기. 북방의 떫은 감이 아니고 달콤하고 사각사각하는 종류의 감이였다. 감쪽같이 둬개 사서 먹고 싶었지만 거래처 회사에 가던 중 생수를 한병 사려고 들렸던 걸음이라 그 날엔 사먹지 않고 손으로 만져만 보고 진렬대 앞을 지나쳐버렸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속담이 생각히워 키득 혼자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판매원도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벌쭉 웃는다.   이렇게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갖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 아니다, 올해의 가을은 우연히 만나게 된 것도 또한 나의 삶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기다리는 쓰라림보다는 찾아가는 시달림 켠이 차라리 더 받기 쉬운 시련임을 깊이깊이 감지하게 되고 기다림 속에서 우연히 닥치는 만남이 또한 무한히 즐거운 자극이다.   아, 고마운 가을이여, 아, 감지하는 가을이여. 출처:2017 제6호
3    [수필 마당]이름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인생길-허무궁 댓글:  조회:338  추천:1  2019-07-15
허무궁 이름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인생길     클락에 온지도 어느새 두주일이나 된다. 남해바다를 두고 세상이 시끄러운 이때에 기어이 여기로 오게 된것은 사업때문이지만 그외에도 나에게는 여기로 오게 된 리유가 또 있다. 두번에 걸쳐서 출장걸음으로 와본적이 있은 필리핀 클락은 나에게 마음이 끌리는데가 있었던것이다. 아직은 째지게 가난한 고장이지만 이곳 사람들이 소박하고 거짓이 없고 직통배기여서 이 나라를 리해하기에 힘이 들지 않고 락천적인 사람들의 성격과 환하게 웃는 얼굴이 정다웠던것이다. 80년대초반에 중국의 대문이 활짝 열어젖히자 밀려들어온 외국인들이 여기저기에서 관광도 하고 투자도 하였는데 적지않은 지성적인 외국인들이 중국인상을 말하면서 말했었다. 솔직해지고싶다 땅에 돈이 좍 깔렸다 소박한 어린 시절이 되살아난다 그때면 우리는 외국거라면 달도 외국것이 더 크다고 생각할 때였는데 그 말뜻을 리해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리해가 되지 않았다. 흙먼지밖에 없는 이 땅에서 저렇게 돈이 깔렸다, 솔직해지고싶어진다 하며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내가 여기 필리핀으로 와보니 불현듯 그때 외국사람들의 말씀에 오성이 트이게 된다. 총을 휴대하는것이 합법적이고 호텔마다 카지노와 술집, 뉴스엔 매일 살인과 마약 등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범죄가 방송이 되는 필리핀이지만 그러한것은 그래도 구석구석에서의 일이고 정의와 근면과 참다움이 쫙 갈려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길 가다가도 눈길만 마주치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다. 적도의 태양이 너무 강하게 얼굴을 비추어서 눈도 크게 뜨지 못하고 사는게 원인이 아닐가 하는 우스운 생각도 해보지만 여기서 나는 부릅뜬 눈은 보기가 힘들고 하냥 해쭉 웃는 반달 눈뿐이였다. 잔디밭과 수백년의 년륜을 헤아리는 장수 나무들, 자전거와 달리기로 주말을 빛나게 하는 클락. 그게 내 마음에 한결같이 비집고 들어와 나의 마음을 빼앗아간 원인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다운 영어와 아름다운 웃음과 맛 좋은 서양음식 등등 나에게는 다 고마운것뿐들이다. 이렇게 고마움때문에 다시 찾게 되는 필리핀에서 나는 이름을 하나 얻게 되였다. 두주일간 여기서 공장 임대건으로 동분서주하다가 적당한 곳을 찾아 문의하러 갔었는데 건물관리회사의 녀성매니저가 나의 명함장을 들여다보더니 당신 영어이름이 없네요 하며 아쉬워한다. 마치도 있어야 할것이 없어서 답답하다는 그런 태도였다. 그래서 내 이름은 쉬청하오(중국어)라고 했더니 영어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 하길래 그럼 너 하나 나에게 지어달라 했더니 직방 Mr paul 하고 부른다. 그게 내 이름이냐고 물었더니 온 얼굴에 활짝 꽃을 피우면서 그래요라고 한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내 이름을 고르시느라 무척이나 고민을 하셨을건데 이 녀성은 몇초사이에 내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다. 우리 부모님보다 이름을 짓는 재간이 있었던가보다. 어리벙벙한김에 나는 롱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그녀의 활짝 핀 얼굴을 보고 그만 나의 마음이 확 열리게 되였다. 그녀의 마음이 개운해지고 그러는 그녀와 상담을 하는 이 Paul도 마음이 개운해진지라 담판은 대개 내가 원하는대로 진행되여서 계약까지 맺게 되였다. 림시 숙소로 돌아온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맥주 한병을 마시며 그 이름이 무슨 뜻일가 궁금해서 인터넷 사전을 찾아봤더니 별뜻이란게 보이지 않고 한마디로 남성의 이름이라고 해석을 한것만 적혀있었다. 녀성이름이 아니여서 좋겠다. 뭐 이정도로 싱거운 마음 거두면서 다른 페지를 열어보았더니 타이의 인기 남성배우의 이름이 Paul라고 적혀있었다. 에라 아무튼 유명한 사람 하나 이 이름을 갖고있으니 이걸로 만족하리다. 새 이름에 휘황찬란한 뜻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미미한 결과에 다소 실망이 갈수도 있지만 요란한 뜻이 있으면 어떠랴, 재래로 우리 민족은 이름을 소박하게 짓는것을 미덕으로 삼아오지 않았더냐. 돌쇠요 개똥이요 먹쇠요 했거늘 내 오늘 양키이름 하나 얻어가진걸로 가히 복이 떨어진것이나 다름이 없어라. 그런데 곰곰히 다시 생각을 해보니 이름이 하나 새로 생겼다는게 참으로 아름찬 사건이 아닐수가 없었다. 태여나자마자 부모님이 우리 말의 이름을 달아주셨고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중국말 이름을 쓰게 되고 문학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필명과 자를 스스로 만들어쓰고 일본에 이주하고나서부터는 또 일본말 발음의 이름이 불리워지게 되였다. 되돌아보면 매번 이름이 새롭게 불리워진 때가 나의 인생에서는 모두 전환점으로 새로 출발이 된것이였다. 새로운 출발을 계기로 사회가 나를 불러주는 칭호가 서로 다르게 되였다는 점, 이름이 이렇게 나의 인생을 바꿔놓는 작용을 하게 되였다는 점을 념두에 두고보면 오늘 필리핀에서 영어이름을 가지게 된 이다음의 인생은 또한 어떠한 전환점으로 되고 어떠한 인생의 길이 주어지게 될가? 홀로 찾아온 나라 필리핀에서 나는 이렇게 Paul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시 출발한것이다. 이제부터 이 맑고맑은 청청 하늘과 푸르디푸른 시원한 수림과 융단 같은 잔디밭우에 Paul 하고 부르는 정다운 목소리들이 점점 많아질것이라는 뿌듯한 마음으로 나의 새로운 인생이 클락에서 시작이 된다.  
2    [수필]아버지의 등 댓글:  조회:310  추천:0  2019-07-08
아버지의 등 허무궁     우리를 부자간으로 하는 것은 혈육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서다   -프리드리히 실러   나의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잘 모른다. 그런데도 내 삶에 가장 많이 떠오르는 사람이 아버지다. 가족 중에서 가장 짧게 함께 살아왔는데도 가장 가까이에서 나와 만나는 사람이 아버지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들은 이야기에서 떠올린 아버지요, 꿈에서 본 아버지다. ‘문혁’이 끝난 어느 날 어머님을 모시고 룡정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를 만나는 사람마다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에구야, 순자가 걸어올 때면 꼭 뒤에서 싱글벙글 허근이 따라오는 것 같애. 그렇지? 언제나 한발 뒤에서 싱글벙글 웃으셨는데.” 이렇게 얻어들은 얘기로 아는 아버지는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뭇사람들이 다 반겨주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난 속으로 작심했다. 나도 아버지처럼 싱글벙글이 되자. 어머니 뒤에서 싱글벙글 웃어드리자. … …   아버지의 얼굴을 제일 마지막에 본 것은 점심밥을 가져다 드리려고 형님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던 그 날이였다. 1968년의 한여름, 여덟살 때였다. 룡정 방역소, 옛날 우리는 방역참站이라 불렀다. 죄꼬만 방역소가 나한테 남긴 인상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경계가 엄한 감옥이다. 룡정시 중심거리에서 해란강으로 가는 방향으로 뻗은 길 곁에 자리를 잡은 방역소는 그 주위에서 제일 어두컴컴한 인상을 주는 그런 곳이였다고 기억된다. 길 곁에 작은 울타리가 있었고 대문으로부터 약 서너메터 들어간 곳에 낮은 건물 한채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위만국 시기에 지은 일본식 건물이라고 생각된다. 아버지가 나를 내다본 창이 얼굴 하나에 꽉 찰 정도의 크기 밖에 안되는 형편없이 작은 창문이였기 때문이다. 위만국 시기 일본식 건물을 보면 대개가 창이 작고 방안이 어두운 것이다. 방역소의 울타리 안에는 한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지만 울타리 안에 있는 건물은 어딘가 음침한 인상을 주었고 든든하게 만든 벽은 안팎을 격리하는 토성과도 같았다. 집이라기보다는 위만국 시기 여기저기에 세워놓은 또치까 같은 건물이였다.   집에서 방역소까지는 한참 걸어야 했는데 그까짓 거 무슨 대수랴. 오랜만에 아버지와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온 마음이 꽉 벅차있었던 것이다. 이제 형님께서 문지기들에게 밥곽을 건네주면 아버지가 다 잡수시고 빈 밥곽이 되돌려나온다. 그러면 우리는 그 밥곽을 가져다 외할머니한테 드리는데 외할머니는 매번 빈 밥곽을 받아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시군 했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름조차 모른다. 커서 어머님한테서 들은 바 있지만 할아버지는 항일하다가 사망하였는데 함께 있던 항일투사들 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살해당해서 증명할 사람이 없는 탓으로 렬사가족이 되지 못하고 있단다. 그 이상은 어머니도 모르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 할아버지나 할머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갇혀서부터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와계셨다. 보통 형님이나 누님께서 아버지께 밥을 날라다 드렸는데 이날 형님은 어찌하여 밖에서 세상 모르고 뛰노는 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떠난 것이다.     울타리 대문어구에서 총을 지닌 문지기들에게 형님이 아버지의 밥이라며 건네주자 나는 전번에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 창문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이제 내다보시며 웃으실 것이다. 아버지가 감옥생활을 한 후로부터 아버지와 만나는 방법이란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잠시 후 사변 변두리 대각선으로 사십센치나 될가말가 한 창문에 사진틀에 넣은 사진처럼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환등기 속의 화면처럼 나타난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이제 우리와 눈인사를 하고 밥을 드시는 시간이 될 것인데 왠지 아버지께서는 밥을 드실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우리만 내다보고 계셨다. 나 역시 눈길을 다른 데다 팔세라 그냥 아버지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문지기청년들이 뜰안의 똥개들마냥 여러명이 어슬렁거리며 겁을 주어서 그 분위기가 하도 삼엄하고 무서운지라 아버지를 소리 높여 부르지는 못하고 혼자소리로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불러댔다. 무표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냥 못 박은듯이 그대로 굳어져있었다.   한참 이러고 있을라니 형님께서 “가자” 하며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부지 벌써 밥 잡샀나?” 하고 물으며 떠나길 싫어했더니 “오늘엔 안 먹는단다.” 하고 어느 문지기가 대신 대답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형님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뒤돌아 아버지만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모습은 아까 본 그대로였다. 네모난 사진틀에 넣은 사진과도 같이 굳어져있었다. 형님은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발길을 다그쳤다. 등에 아버지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며 부랴부랴 달아나듯 방역소를 멀리 떠나서야 형님이 련거퍼 “개새끼들 같은 게, 개새끼들이… 씨!” 하며 투덜댔다. 왜냐고 몇번 물었지만 형님은 대답은 않고 그저 다그쳐 집으로만 향했다… 그 다음의 일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고작 이런 토막적인 화면 뿐이였다. 토막토막 끊어진 필림마냥, 모두 합쳐도 열토막도 될가말가한 화면, 이러한 토막이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한 삶의 전부라면 여러분이 믿으실가?   무엇 때문에 아버지를 가두고 비판을 하는지 나는 영문을 잘 몰랐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군사훈장을 목에 걸고 우쭐거렸던 나다. 아버지는 뭇사람들이 떠받드는 의사였다는 것만은 어린 가슴에 언녕 깊이 새겨있었다. 아버지가 원장으로, 어머니가 간호장으로 일하던 현립병원에 가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는 사람마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나도 빠짐없이 둬마디 귀엽다는 칭찬을 받는 게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갇혀있다니. 나는 그 사연을 알 수가 없었고 알아야 된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나이가 그럴 나이가 아니였다.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는 무표정한, 초췌하게 여윈 얼굴모습, 멋진 아버지가 아니였다. 그 측은한 눈길도 이상하게 흐리멍텅하고 힘이 빠져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여윈 얼굴에 푹 꺼진 눈확, 입으론 뭔가 말씀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코 소리를 내진 않으셨다. 지난번 같으면  손으로 창을 더 활짝 열겠다는듯이 두 변두리를 잡고 당장이라도 머리를 밖으로 내밀며 내다보셨겠는데 오늘엔 두손도 보이질 않았다. 뭔가를 전달이라도 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말없이 덤덤히 두 아들만 내다보셨다. 그 때 아버지는 무엇을 나한테 전달하고저 하셨을가? 초점을 잃고 굳어진 시선, 달아나듯 떠나는 두 아들의 등에 무한한 한만을 실어주신 걸가? 그 어지러운 세상에 축복이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이제 특무가족이라고 끼칠 피해를 감안하시고 근심과 원한이 마구 뒤범벅이된 그러한 심정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랴. 힘이 없어서 이렇게 된 자기를 탓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셨을가? 시선은 그냥 우리한테만 쏟아부었지만 그렇게 애매하고 무표정하고 어수선한 눈길에서 그 의미를 터득하기엔 나의 나이가 너무나도 어렸다. 오십년이나 지난 오늘 이 때까지도 나는 그 날 아버지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잊혀지지가 않아서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으로 간주하고 마음속 한가운데 간직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뜻을 헤아릴 바가 없고 난해한 추억의 한대목으로 남긴 채 오래동안 이렇게 괴롭기만 하다.   후에 다 커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때 아버지께서는 열흘 동안이나 잠을 못 자고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나흘만 자지 못하면 환각이 오는 등 여러가지 신체적 장애가 나타나게 된다는데 열흘 동안이나 잠을 못 자게 했단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이런 고문이 있었겠는가!   그 이튿날 아버지께서 목숨을 끊으셨다.   자결, 자결인가?  허근, 1929년생, 39세, 동북군의대학 졸업. 18세 참군, 제 4사 15퇀, 제12사 과장, 군공 3급 3차, 잔페 2급. 원 연길현위생국 부국장 겸 현립병원 원장. 일본특무, 조선특무, 가짜잔페, 가짜당원, 쏘련주자파, 당권파, 친일파. 이것이 아버지의 전부다. 참군한 경력과 군의대학 두곳을 다닌 학력 그리고 병원에서의 짧은 근무기간. 그가 걸어온 길의 전부는 고작 석줄 밖에 안되였다. 리력서보다 들씌워진 모자가 더 번다하고 어마어마했다. 특무모자만 해도 세가지, 알고 있는 외국어는 그 외국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특무로 되는 근거였다. 가짜잔페라는 근거가 바로 잔페군인증서이고 가짜당원이라는 근거가 수차례 받은 군공메달이였던가? 전쟁시기에 총알이 비발치는 속에서 간호사들을 거느리고 부상병들의 치료에 목숨을 내건 사람이 살아 돌아와 이제부터 평화로운 고향에서 의학에 몰두하자니 특무니 뭐니 하며 때리고 잠을 재우지 않는다. 별의별 해괴한 수단의 고문을 다 받던 끝에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한을 품고 세상을 버리는 길을 택하셨는데 고문을 피하는 방법이란 오로지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이였다. 하소연할 곳도 없는데 이대로 더러운 손들에 맞아죽을 바엔 스스로 가는 게 용감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지몽매함에 대한 항의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커가면서 점점 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어릴 때는 사망하셨다고 하니 그런가 했지만 커가면서 사무치게 그리워나는 아버지가 어딘가 살아계시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군 했다. 대학을 다니던 북경에서, 또 북두성잡지사에서 일을 보던 장춘에서 그리고 일본에 이주를 한 후에도 나는 여러번 아버지와 꿈에 만났었다. 그중에서도 장춘에서 만난 꿈이 가장 진실했다. 나는 어쩌다가 잣나무가 수림을 이룬 심산으로 갔는데 거기서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중학교 때에 학교의 행사로 우리는 약 일주일간 심산 속 나무로 지은 집에서 생활하면서 잣나무를 식수한 적이 있었다. 지신 성남 6대에서 멀리 보이는 손가락산의 뒤골안이였는데 그 땐 곰이나 범이 드나든다는 골안이였다. 그런데 꿈에 그 산으로 가게 된 것이다. 거기서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원시인’처럼 변모한 사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눈에 아버지임을 알아보았다. 그 ‘원시인’의 눈과 마주쳤을 때 너무나도 익숙한 눈길이였기 때문이다. ‘원시인’은 나를 보자마자 달아났고 나는 아무리 봐도 아버지 같아서 그의 뒤를 정신없이 쫓아갔다. 자그마한 나무집 앞에 이르러 ‘원시인’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세요? 아버지가 맞지요? 나 승홈다. 승호라구요.!” 여러번 꼬치꼬치 캐여묻는 나를 바라보던 그의 두눈에서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아버지라 확신을 한 나는 달려가 한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아버지의 가슴을 때리며 여기서 뭘 했나, 왜서 우리를 버렸나,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하며 울고 또 울었다. 온 인생 동안의 눈물을 다 흘린 것 같았다. ‘문혁’을 피하여 멀리 타향에 피난했다가 ‘문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이렇게 계속 이 깊은 산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깨여보니 나의 베개는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 후부터 나는 아버지와 자주 만났었다. 만나서 나의 얘기도 하고 어머님의 얘기도 하고 형님과 누님의 얘기도 나눴다. 내가 이렇게 커가면서 아버지의 사망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은 그럴 만한 리유가 있다. ‘반란파造反派’들이 자결이라고 일러줘서 억지다짐으로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감히 질문, 조사, 기소 이런 건 엄두도 못 내는 세월이였기 때문이다. 계선을 분명히 해야 하는 세월에 우리 가족에는 나서서 시비를 따질 만한 친척도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알려주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세월, 혈육이라도 계선을 나눠야 하는 비인간적인 세상, 피해를 받고 사망한 사람이 되려 죄가 되여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세상이였다. 음침한 콩크리트바닥에서 잠을 자는 아버지를 위해서 누나가 가져다 드린 이불도 다 오리오리 찢어져있었다. 무엇을 감춰서 들여보냈는가 검사를 한 흔적이라 들었다. 그러한 비리가 당연한 사실로 굳어진 세월이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수십만 피해자들 중 그 피해를 재판에 내걸고 소송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존재할 수가 없고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결국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다. 고중을 졸업할 즈음에야 아버지가 루명을 벗게 되고 공무로 인한 사망이라고 ‘조직의 결론’이 새로 나왔는데 그 손해배상금은 썩 후에야 내려왔다. 손해배상금으로 대학을 가는 나의 손목에 어머님께서 끼워준 상해표 손목시계 하나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나에게 넘겨준 백원의 저금통장 하나로 나의 동년의 원한은 삭혀야 했었다.  그 손목시계는 1994년 내가 일본에 이주할 때에도 지니고 갔었고 지금도 나의 서재의 서랍에 정중하게 간직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있은 손목시계는 하나의 허술한 상해표 손목시계가 아니고 하냥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브릿지였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뉴대로 되는 귀중한 존재였다.    가평요贾平凹의 수필 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작가 가평요가 어느 한 작품으로 매스컴의 비판을 심하게 받았던 모양인데 그 때 아버지에게 무심한 한마디로 그런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삼십리 길 떨어진 현성에 가서 신문들을 다 뒤져보시고 와서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시면서 술 한병 내놓더라 한다. “얘야, 없는 일 만들지 말고 있는 일 무서워 말거라… 오늘 우리 부자간에 술이나 실컷 마시자.” 그 날 부자간은 배갈 한병을 다 마셨다고 한다. 아들의 고통을 나눠가지려는 아버지가 베푸신 사나이다운 은혜, 얼마나 부러운 이야기인가! 괴로울 때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술잔, 이것은 나의 인생에서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사치요 갈망이요 어리광이다! 요즈음 위챗에서 간혹 초라한 모습을 한 아버지들의 사진을 내놓고 효도해야 한다느니, 고생하시는 게 아버지라느니 불쌍하다느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나에겐 그런 초라한 아버지도 불쌍한 아버지도 효도를 드릴 아버지도 없다.    초라하든 불쌍하든 다 좋으니 나에게 아버지를 돌려다오! 잠 못 잔 아버지가 병신이 된 채로라도 좋다, 눈확이 꺼지거나 실명이 된 아버지라도 좋다, 옛날의 름름하고 인자하고 싱글싱벙글하는 아버지가 아니라도 다 좋으니 이젠 그만 나의 아버지를 돌려다오! 나도 가끔씩은 아버지와 술 한잔이라도 나눠보고 싶다. 그리고 나도 맥스 루케이도처럼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별다른 일을 한 것은 아니였다. 그저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하셨다. 즉 거기에 있어주었다.”  그렇다. 그저 있어만 주면 되는데… 나이가 반백을 넘어도 아버지를 그리는 이 마음만은 그냥 여덟살에 멈춘 채로 늙을 줄 모르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세월을 탓하리오, 하늘을 탓하리오까!    남의 아버지 인도의 힌두교에서 죽은 조상의 령혼을 ‘피트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피트리로 된 것인지 아니면 외간 계집 차고 도망을 간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운남의 촌광천은 아버지가 없는 게 죄였다. 내가 일본 동경경영시스템연구소에서 주임연구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큰 사고가 생겼다. 운남대학교에서 온 촌광천이라는 청년이 동경 모 지하철 역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렬차에 몸을 던지고 세상을 떠나버렸던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온 지 3년째 되던 해일 것이니 그의 나이가 아마 25세 좌우라 생각된다.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뽑히워 일본의 모 소프트회사에 배치를 받은 우수한 인재였던 촌광천이 왜서 이렇게 가볍게 자기의 인생을 마치게 되였는가?   거기에는 자취를 감춘 아버지의 에피소드가 악운으로 등장한다.   나는 남경대학에서의 소프트시험만 마치고 서안교통대학과 운남대학에는 일정을 미룬다고 일방적인 련락을 해놓고 무작정 동경으로 돌아갔다. 촌광천의 후사처리가 더 급했기 때문이다. 낭아시마소장은 촌광천의 집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몰라서 대사관에 맡기자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운남대학교에서 뽑아온 학생이였기에 내 손으로 가족에게 데려다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섰다. 나는 일본에 도착한 이튿날로 다시 곤명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인 과장 아마노를 데리고 함께 떠났지만 그 자식은 골회함의 곁에도 서려 하지 않아서 내가 골회함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여섯시간의 비행 끝에 곤명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하는데 안고 있는 단지가 뭐냐며 출입국 경관이 나를 불러세웠다. 단지 안에 금속이 들어있다는 것이였다. 유품에 돈지갑이 있었길래 그 지갑을 골회함 단지 속에 함께 넣어두었던 것이 기억나서 돈지갑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꺼내 보여달라고 한다. “아니, 그건 안됩니다. 남의 지갑을 함부로. 이 사람한테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뭘! 이 사람이라니? 사람 놀리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여기 안에 사람 하나 들어있어요. 이 사람의 유물이거든요. 정 보시려면 여기…” “아, 그런가. 아니, 아니. 그럼 그만.” 내가 내미는 골회함단지를 피해가면서 경관은 나를 놔주었다.  비행장에서 촌광천의 일가친척 십여명을 만나고 촌광천의 어머님한테 골회함을 넘겨드리고저 했더니 그 사람들의 풍속습관으로 객사한 사람은 이대로 받을 수 없다며 골회함을 안은 채로 차에 앉으라고 한다. 안내하는 대로 골회함을 안고 차에 몸을 실었더니 장장 세시간 달려서야 공동묘지에 도착하였는데 또 거기서 장장 세시간이나 불교식 장례를 지냈다. 경문을 한나절 읽고 나서 친척일가 모두가 밖에 나가서 골회단지를 안은 나의 뒤에 한일자로 줄을 서서 건물을 한바퀴 돌고 다시 절 안에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경 읽기가 노래처럼 시작이 되고 또다시 일어나 절을 하고 경을 읽는 녀승들의 목소리가 이딸리아 극장을 꽉 메우는 소프라노에 못지 않았다. 한참  있으니 드디여 촌광천의 혼을 불러왔다며 식이 끝났다. 그제야 촌광천의 어머니가 골회함을 내 손에서 받아들고 사전에 지정된 곳에 가서 골회를 묻었다. 행사가 다 끝난 다음 일가친척들이 휴식실에 다 모여 촌광천에 관한 일의 자초지종을 캐여물었다. 폭풍우 같은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을 하고 나서 촌광천의 우수한 상황, 일본의 공공시설에서 자결을 했을 때의 법적인 책임, 그 후과 그리고 동경경영시스템연구소에서 성의껏 치른 장례식 등에 대해서 자상히 설명하고 연구소의 위문금을 전달했더니 일가친척들의 격한 감정도 수그러들고 모두가 안정이 되였다. 산을 내려 곤명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서럽게 울고 있던 촌광천의 어머니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촌광천의 이야기를 하셨다. 광천이가 태여나서 얼마 안되여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섰는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단다. 어디로 도망을 간 것인지 어디서 죽어버린 것인지 누구도 모른단다. 어디서 장사를 하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계집한테 반해서 도망갔다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러나 어떤 소문이 돌든 촌광천의 어머니는 절대 찾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정이 있다면 제 발로 걸어들어오리라 믿었고 또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이미 이 가정을 버린 것이 틀림없으니 부디 억지로 잡아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단다. 결국 자취를 감춰버린 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의 성을 갈아서 엄마의 성씨를 따르게 하고 애기 때부터 엄하게 교육을 했었단다. 교원 출신인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하나 일등만이 목표라고 타일렀고 소학교 때나 중학교, 대학교 때나 쭉 이렇게 교육을 해와서 아들은 어려서부터 일등을 하지 못하면 밤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게 죄였어요. 내가 아들을 이렇게 만든 거죠… 철이 들기 전에 아이를 낳아버렸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애를 키워야 하는지 몰랐어요. 의지할 애비도 없었고… 아니죠, 다 애비 탓이죠. 애비의 버림을 받은 애거든요. 애비가 버리고 간 아이를 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서 그저 큰 인재로 만들어서 애비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보란듯이. 아버지를 만나면 아들은 실컷 나무람도 하겠죠. 아들을 키우는 게 무슨 보복 같은 그런 심정이였거든요. 흑흑흑… 그런데 이런 불효자식이 될 줄이야… 흑흑흑… 애비만 있었더라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건데… 휴-” 촌광천의 어머니는 다시 눈물을 쏟으며 뒤말을 잇지 못한다. 다 아버지의 탓이다. 아버지가 없는데도 아버지의 탓이다. 촌광천은 소프트시험도 일어시험도 운남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뽑힌 인재였다. 그런데 소프트회사에 들어가서 언어와 생활습관, 기업경험 등으로 꼭 일등만을 념두에 둔 그에게는 너무나 큰 정신적 압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 적게 자고 노력하여 일본에 가서도 제일 빨리 승급하고 늘 칭찬만을 받아오던 그가 불시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입원을 해서 일주일 만에 나는 그를 찾아가서 위로를 하며 일등만이 인생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이등, 삼등들도 가득하다, 이등, 삼등이 있어야 일등도 있을 거 아니냐, 넌 이미 가장 우수한 청년으로 된 것이니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고 적당하게 휴식을 하면서 일하라, 정신적 압력이 심할 땐 친구들과 같이 노래방이랑 가서 놀거라 하고 타일렀더니 거기서 힘을 얻었는지 이틀 후에 툭툭 털고 일어나 퇴원하게 되였다. 퇴원하고 나서 감사하다면서 꼭 나에게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하길래 그가 들어있던 아빠트에 가봤더니 이미 자기 손으로 료리를 세접시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우리 둘은 이런저런 얘기로 재미나게 시간을 보냈었는데 그가 저세상을 가게 된 것은 바로 약 한달 후였다. … … 곤명에서 동경에 돌아온 나는 운남대학교에서 온 중국 직원들을 모여놓고 곤명에 가서 장례를 치른 정황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앞으로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생활을 함에 있어서 자체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오락활동을 많이 하면서 오늘을 즐기라, 일만이 인생이 아니다라는 따위의 말을 구구히 하였더니 함께 온 운남대학의 동기생들은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도 알아요. 근심 마세요. 걔는 학교서도 일등만 하려구 그랬어요. 특별했죠.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여서… 쯧쯧쯧.” 아버지가 없이 자라서 어쨌단 말인가? 누구도 그 말뜻을 캐여묻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그게 죄였다는듯이 수긍을 하고 있는데 대체 아버지가 없이 자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삶은 이미 이그러진 삶이였던가? 잘해도 아버지요, 잘못해도 아버지다. 있어도 없어도 다 아버지 탓이다. 불현듯 영국의 속담이 떠오른다. “백명의 스승보다 한명의 아버지가 낫다(One father is more than a hundred schoolmasters).” 아버지는 일당백이라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아버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니 혹시 피트리로서 지금 쯤은 저세상에서 뒤늦게나마 아들의 교육에 정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저세상에서도 자녀교육이 필요한 것인지는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버지 나의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 얘기를 했으니 이제는 내 차례다. 내가 아버지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은 딸애가 처음으로 나를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다. 우리 내외간은 모두가 한창 일에 몰두할 나이였기에 갓난 딸애를 할머니께서 훌떡 안아가셨다. 연변의 뜨끈뜨끈한 구들에서 키워야지 장춘의 추운 집에서 아기 다 동태되겠다 하면서. 얼마나 지났을가. 어느 날 난 연변 출장길에 딸애를 보러 갔었는데 할머니의 등에 기대여 뭔가 손에 들고 장난질 하던 딸애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날 보고 어망결에 “아부지!” 하고 웨치며 구들에서 일어나 뛰여오려 하다가 다시 뭐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하는 표정으로 다시 할머니의 등뒤에 숨었다. 여러달 보지 못했던 아버지이지만 본능적으로는 아버지를 대뜸 알아보고 벌떡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그런데 인차 주춤하였다. 혹시 나와 비슷하게 생긴 큰아버지를 잘못 보고 부른 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두팔을 벌리고 효정아! 그래 아버지다! 하고 부르니 그제야 시름 놓였던지 달려와 품에 안겼다. 아부지야? 아부지야? 믿기 어려웠든지 아니면 너무 반가웠든지 반복해서 확인을 해보는 그 부름에 나는 처음으로 내가 아버지로 되였구나 하고 감개가 무량했다. 말을 하는 애가 이번이 처음이였던 것이다. “저런 년 봤나. 키워준 할머니한테는 저렇게 반긴 적이 없었어.”  어머니는 가마목으로 옮겨앉으시며 웃으셨다. 아버지로 불리우게 된 후로부터 딸에 대한 사랑이 시작이 된다. 그전에는 그저 아이가 귀엽다고만 생각했지 아버지로서의 자각은 꼬물 만치도 없었다. 그런데 딸애가 아버지라 부르며 따라다닐 때에는 그저 딸애가 손만 내밀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주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부풀었다. 어머니로 되는 기분도 그러한지 조건만 허락되면 한번 경험해보고 싶지만 아버지로 되는 기분은 틀림없이 그랬다. 안고 있어도 무거운 줄 몰랐고 업고 있을 때도 사내로서의 체면도 잊었고 자전거의 뒤좌석에 앉히면 벤츠를 몰고 다니는 기분이였다. 허나 한편 아버지로 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이 때에야 들게 되였다. 아버지로 되고 나서야 아버지를 하기로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는 자식의 자랑을 하는 부모는 바보라는 말이 있다. 자랑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을 거론하는 자는 바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간단히 그치지만 이미 해놓은 말은 거둬들이지도 못하니 나도 바보를 면치 못한다.   끝나는 아버지 아버지로서의 짧은 인생도 이젠 거의 마무리하려고 한다. 고작 오십 후반에 사는 자가 왜서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이런 말을 하는가 웃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이 끝이 나거나 내가 아버지로서의 자격이나 그 상대를 잃어서가 아니라 내 자식의 소속관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소유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엊그저께 딸애의 약혼식을 마무리하고 이런 생각이 들어서 여기 몇글자 적어본다. 딸애를 시집보내는 일은 딸을 가진 부모로서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여서 거론할 것 없지만 보내는 켠의 아비로 된 처지에서 보면 뭔가 말 못할 심정에 사로잡힌다.  난 다행히 사위감이 이 글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본사람이여서 시름을 놓고 심정을 토로하지만 곱게 키운 딸애를 남에게 빼앗기는 그런 심정이다. 아마 이 글을 보고 있는 아버지들은 사위 앞에서는 입밖에 말을 내지 않지만 그 심정은 아마도 나와 비슷할 것이다.  일본식으로 아주 엄숙하고 째인 약혼식을 치뤘는데 식보다 사진을 찍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사진기를 든 사람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웃으라고 하건만 웃음이 나올 리가 있나, 어디? 당사자 둘이야 련애중이니까 행복에 푸욱 잠겨 웃지 말라 해도 웃음이 절로 흘러나오지만 나는 뒤통수에 구멍이 펑 뚫렸는지 아예 뒤통수와 이마 사이로 오봉산의 겨울바람이 윙윙 드나드는 것 같았다. 일본식에 따라 두 가문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고 정좌를 하고 마주앉아서 사전에 외워놓은 대본을 앵무새처럼 외우면서 시키는 서방질을 하노라면 식은 간단하게 끝이 난다. 불과 삼십분 밖에 안되는 그 시간에 수십년간 인생의 화면들이 주마등처럼 련결이 되여 펼쳐졌고 얼굴 한번 붉힌 적없이 키워온 딸애를 이렇게 가볍게 어서 데려갑소 하고 약속을 하면 이제 그 딸은 내 해가 아니고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며느리로 둔갑을 하게 된다는 생각에 그냥 뭐라 말 못할 심정이 가슴을 누른다. 한탄하오니 내 인생, 여태껏 그럴 줄 모른 건 아니였지만 일단 닥치고 보니 이렇게 주책이 없이 넉두리로 변해버린다. 내가 아비로 된 즐거움이란 오로지 딸애의 소학교 시절까지였다. 딸애가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처녀로 성장하던 기간까지는 엄마한테 자리를 빼앗겼고 이제 결혼을 하면 아예 시집에 고스란히 양도를 해야 하는 신세가 아닌가. 그래도 애비는 애비인지라 너남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니 별수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최대한 너그러움의 얼굴을 만들어보이면서 화기애애하게 두 가정의 식사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여기 필리핀에 와서 남이 보지 않는 방 한구석에 점잖게 올방자를 틀고 앉아서 애비의 위엄과 자존을 한가득 과시하면서 딸애한테 정중하게 다음과 같이 분부를 남긴다.    딸애야, 넌 이젠 내 딸로서가 아니라 남편의 안해로 시부모님의 며느리로 어린애의 엄마로 살게 된다. 너의 소속관계가 허씨 가문으로부터 이시카와 가문으로 옮기게 되는 이 때, 너의 미래의 인생길은 이젠 너 스스로 걸어가야 함을 터득해야 하느니라.   예전 같으면 네가 혹시 걷다가 넘어져도 이 아버지가 손을 잡아줄 수 있었고 혹시 길을 잘못 들어서도 이 아비가 쫓아가서 바른 길로 데려다줄 수 있었고 혹시 가는 길이 너무 어두워도 이 아비가 손전등을 들고 비춰줄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일은 다 할 수가 없게 되였으니 너 홀로 앞을 향해서 걸어가야만 하느니라.  어리광을 부릴 상대도 없고 목마를 태워줄 사람도 없고 소비돈을 주는 이도 없을 것이니 너 스스로 어른이 되여 힘차게 걸어가야 하느니라.  이제부터 가야 할 길에는 인생의 로고도 많을 것이지만 인생의 쾌락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고통도 쾌락이라 생각하고 남의 손가락질도 갈채라 생각하고 네가 택한 그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거라. 인생에는 편안하게 고생을 하지 않는 인생도 있을 테지만 고생이 있건없건 그게 다 사는 재미인지라 남과 비교하지 말고 너의 앞에 주어진 조건으로 열심히 걷노라면 그게 재미요, 그게 행복임을 알게 되느니라 . 그리고 아버지가 늘 너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니 고독할 때엔 아버지라 불러보거라. 멀리 타향에 갈라져있어도 부녀간에게는 그 목소리가 다 들리는 법이다. 그리고 제발 명심하거라.  딸을 낳지 말거라 . 애비가 속상하리라.   아버지로 맺는 말 자식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큰다고 한다. 아이가 아버지의 등을 교과서로 삼고 아버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커다란 아버지의 등이 믿음직하고 그 등뒤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거룩함을 느껴보고 그 넓은 등에서 안정을 찾게 된다. 어린애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등은 어머니의 따스한 품과는 다른 그 어떤 힘을 얻게 되는 원천이기도 하다. 바라지든 구부정하든 관계없이 어린애는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자란다. 요즈음의 교육학술계에서도 어린애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데 있어서 학교의 선생님보다 아버지의 역할이 더 크다고 한다. 우리 말에 “그 애비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듯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우에서 말씀드린 바로 나의 아버지도 짧은 인생 때문에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 영향만은 어머니를 통해서 이미 나에게 많이 전수된 셈이다. 대신 살아있으면서도 자기 구실을 포기하거나 역반응으로 자식에게 영향을 끼치는 아버지들도 이 세상에는 더러 존재하고 있으니 그런 아버지들은 자기의 등을 다시 챙겨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등은 아버지의 마음을 비추는 도광판이며 아버지의 인생을 적어놓은 노트이며 아버지의 책임을 업은 파넬이다. 이것 역시 아버지로서의 자리매김의 중요함이라 하겠다. 그리고 나, 잠시 아버지로 되였다가 이제 막 아버지를 마감하는 나는 미처 아버지 구실을 어느 만큼이나 해왔는지 가늠하지도 못한 채 이렇게 어정쩡 아버지의 시기를 놓치고 마는 것 같아서 반성을 해본다.  깨닫게 될 때 끝나는 게 인생이랄가, 효도도 마찬가지고 자식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게 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섭리인지라 한탄할 일은 아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끔 회억이나 하면서 반성을 해보는 재미로 즐기는 삶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상기한 모든 것들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한모퉁이임을 터득하고 나는 후날에도 변함이 없이 그냥 ‘아버지’를 반성해볼 것이다.  력사로 된 아버지도, 남의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1    [수필]건강비결 댓글:  조회:218  추천:1  2019-07-08
건강비결 허무궁     무병장수한 사람만이 건강비결을 말하라는 법은 없다. 의사만이 건강비결을 말하라는 법도 세상에는 세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오늘엔 건강비결을 론하고저 하는데 그래도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무슨 자격 같은 것이 있어야 신빙성에 좀 도움이 되지 않을가 해서 말해두지만 이 허무궁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할아버지와 같은 성씨요 같은 본임을 가볍게 첨가해둔다. … … 언제나 그러하듯이 청청하늘에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 클락의 하늘이다. 기온 27도인 더운 날씨인데도 겨울이 왔다고 억새가 무성하다. 라체로 되는 나무는 하나도 없고 퍼런 나무잎을 가진 채로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고 하는 클락의 계절은 하늘을 봐도 사계절 다름이 없고 땅을 봐도 사계절이 다름이 없다. 다른 것이란 오로지 계절에 충성을 다하는 식물들 뿐이다. 처음 계절을 알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풀들이다. 땅에 딱 달라붙은 풀이나 껑충 키가 큰 풀이나 다 꽃을 피운 다음 나름 대로 열매 지고 씨를 떨어뜨린다. 그걸 보고 아, 이젠 가을이 왔는가 보다 하고 사람들은 곧바로 알게 된다.   이맘 때면 고향에서는 소매 긴 옷들이 냄새를 풍기며 옷장에서 잠을 깨는 하품을 하지만 여기서는 여전히 짧은 소매의 여름옷들로 가을을 맞는다. 들에는 사과나 감 같은 자연의 조화가 없고 다만 회색 털을 가진 소들만이 여유작작 풀을 뜯는다. 고마운 것은 나의 집 문앞의 허허벌판에는 무성한 억새밭이 펼쳐져있어서 나는 그 억새를 보면서 고향의 가을을 그려본다. 늦가을, 초겨울이라 할가. 고향은 이맘 때면 무르익은 사과배가 모아산으로부터 룡정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가관을 이루고 가을을 마친 밭뙈기는 이파리를 바람에 날려보낸 풀들로 대비를 이루어 바둑판을 그려놓았을 것이다. 청청 맑은 하늘엔 뭇새들이 재잘재잘 분주하고 산에서는 다람쥐가 개암이 익기를 안달복달 재촉할 것이다. 유화처럼 그려진 칼러의 산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김장배추나 무우나 빨간 고추가 시장을 메우고 찹쌀, 기장쌀, 찰옥수수가 패션업계의 녀왕처럼 장마당에서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마을에 있는 우물가에서 동네 아낙네들이 오손도손 김치를 담그었고 어린애들이 뛰여놀며 가끔씩 김장고추를 갓 바른 배추잎을 쭉 찢어 먹어보군 했다. 저눔이 손 씻지두 않구. 쯧쯧. 자기의 아들놈이든 남의 자식이든 누구나 다 이렇게 욕해도 어느 부모 하나 불만을 품지 않는다. 동네 애들이 다 자기 애들처럼 서로 너나없이 지내던 시절이였다. 좀 색다른 음식을 하면 이웃집에 가져다주고 옆집의 로인도 자기의 할아버지 같이 효도를 드리던 시절이다. 부부간을 제외하고는 온 마을이 다 네 해 내 해 없이 공유했던 시절이다. 이런 것들이 이젠 다 먼 옛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로 기억에 남았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계절은 누가 말해도 가을이라 하겠지만 여기서는 그게12월부터 3월 사이에 이루어진다. 늦겨울이라 할가 초봄이라 할가 그런 계절인데 늦겨울이요, 초봄이요 하는 것은 고향의 개념이지 여기서는 그런 말을 모른다. 다만 북방의 식물들이 모두 사계절에 충성하듯이 여기의 식물들도 어김없이 모두가 계절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신진대사가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충성을 파괴하면 자연의 건강이 해를 입는다.  강을 가로막고 산을 가르면 자연재해가 심하고 이산화탄소의 과도 방출에 지구의 오존층에 구멍이 나서 자외선 피해가 심하고 쓰레기가 지상 뿐만 아니라 깊은 바다 밑에까지 미쳐 비닐을 먹은 큰 고래까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의 모 연구기관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인간들에게도 이미 비닐성분이 체내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였다고 한다. 비닐주머니, 비닐포장, 비닐그릇들이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 어디라 없이 다 침입해온 사정에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비닐들이 체내에 흡수되여 자리를 잡는다고 하는데 주지하다 싶이 비닐은 썩지 않기에 체내에서도 산화되지 않고 악성 병균을 유발시키는 근원으로 된다고 한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꽉 찬 비닐 때문에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인간은 자연을 개조하고 자연을 새로 꾸미고 자연을 가공하여 인간에게 수요되는 물질들을 만들어 사치를 손아귀에 쥐였는데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 도를 넘으면 안된다. 승냥이나 사자들도 자기가 먹을 만치만 먹고 배가 부를 땐 양이 곁에서 잠을 자도 가만 놔둔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게 문제다.   인간은 욕망과 수요의 화신이며 무수한 욕구의 응결체다 -쇼펜하우어   이 욕망 때문에 인간은 자연계의 한 세포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건강비결의 첫째가 터득된다. 자연의 충성심을 배우고 자연에 효도하라. 자연의 질서에 인체의 질서를 맞추고 자연스런 삶을 살거라. 억지로 살을 빼자고 고생하지 말고 억지로 주름살 줄이자고 바르지 말고 억지로 거시기가 세지라고 정력제를 들지 말고 그저 몸이 편안한 대로 살면 그게 건강해지는 비법이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누고 싶을 때 누고 그렇게. 자기의 건강은 자기의 몸이 제일 잘 안다. 탈이 없이 건강할 때엔 찬물 한사발 마셔도 그 맛이 꿀맛이요, 탈이 났을 때엔 몸이 스스로 알아서 입맛이 있는 음식을 찾는다. 그게 탈에는 약이다. 몸이 다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첫 비결이다. … …   클락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필리핀 원주민들이 사는 생활구역이다. 비비고 들어갈 틈도 없이 빼곡하게 줄지은 주택, 색칠도 하지 않은 벽, 쇠창살 창문 쯤으로 거미줄 같은 전기선들이 들어갔다. 털이더러운 강아지들이 여기저기 산책을 하고 구멍가게의 창턱에는 이미 시들어서 당금이라도 말라버릴 것 같은 남새들이 몇가지가 놓여있다. 열살 정도나 될 소년들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좌충우돌하고 끌신을 신은 아낙네들이 어린애 둘, 셋씩 거느리고 느리게 길 걷는다. 물론 거기에는 닭다리튀김, 만두튀김, 소세지튀김 여러기지 간이음식들도 줄을 치고 있다.   어찌 맛도 보지 않고 평가를 하랴 싶어서 이것저것 먹어보군 하지만 그렇게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은 아니라도 그래도 먹을 만한 음식들이였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적군의 비행기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리님들이 내가 방금 먹은 음식 우에 편안하게 앉아서 볼일을 봤을지도 모를 환경이지만 그 내용물이 너무 미미해서인지 맛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웠으니 그런 일 없었던 걸로 한다. 나는 매일 먹는 남새를 여기서 사는데 아침 여섯시 반에 오면 생생한 남새를 살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였다. 여기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기에 아침이 이르다. 이른아침에 남새밭에서 날라오는 남새는 한두시간 사이에 거의다 팔리는데 나머지는 기온이 높아 점심이 되면 모두 시들어버린다. 중국에서는 뭔가 이상한 물을 뿜어서 며칠 동안이라도 생생하게 보존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는 아직 그런 잔손질 기술을 배우지 못하여 자연 그대로다. 남새 속에 벌레도 있고 키나 굵기도 제나름이고 곱게 생긴 거나 밉게 생긴 거나 다 같은 값이다. 생긴 그대로인 남새, 보기엔 못생겼지만 맛은 어릴 적에 먹던 그런 남새의 맛이고 간혹 보이는 벌레는 차라리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벌레도 먹기를 꺼려서 달라붙지 않는 남새를 여러해 동안 먹으며 살아온 나는 자연산 채소가 없어서 그런 걸 먹기는 하지만 우리는 벌레보다 자기를 챙길 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인간이란 이렇게 생존능력이 본능적으로도 벌레보다 못한 것이다. 의식구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의식구조가 생기면 본능이 약화된다. 의식이 앞서고 본능이 억제되기 때문이다. 유전자음식과 농약, 화학비료 식물이 범람한 시장에 쥐새끼도 독이 두려워 멀리 자리를 감추고 밭이 한자 깊이로 오염이 되여 돌처럼 굳어버린다고 한다. 유전자음식에 대한 연구가 이대로 발전을 하면 이제 곧 길게 생긴 바나나사과나 구린내 나지 않는 파인애플두리안이라는 게 과수원에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까투리인간이나 캉가루인간 같은 인종들이 생겨나서 올림픽위원회를 난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래의 올림픽을 생각해서라도 유전자 연구는 이제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먹는 음식을 부디 생김새를 꼭같게 한다든가 더 크게 한다든가 할 필요가 없이 원래의 종자 대로 키워서 고맙게 먹는 게 자연의 생리다. 식물을 가지고 교배를 시키지 말고 좁쌀은 좁쌀 대로 찰옥수수는 잔이삭 그대로 내버려두자. 귀여운 벌레를 생각해서라두 살충제나 농약은 그만두고 좀 고생스럽더라도 유기비료를 펴서 “발이 시도록 밟아보고 싶(리상화)”은 땅을 되찾자. 여기에 두번째 건강비결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벌레를 따라배우라는 이것이다. 벌레가 먹지 않는 음식은 만들지도 말고 벌레가 먹는 음식을 달게 먹어라. … …   언젠가 친구가 가발을 사서 썼다고 해서 한참 옳거니 아니거니 실랑이질 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반백을 넘으면 이런 화제가 많아진다. 틀이를 해넣었다, 머리에 물감 들였다, 가발을 썼다, 주름살 제거 수술을 했다, 뭐 이러루한 화제로 꽃을 피울 때가 있다. 나는 나쁜 머리를 빼놓고는 나쁜 데 없다고 자칭을 해왔는데 요즈음에는 왠지 눈두덩이가 처지고 볼이 아래로 축 늘어져서 매일 아침이면 “아하, 이런 몰골로 변해갈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하고 스스로 한탄하기도 한다. 나의 늙은 모습, 할아버지로 된 모습은 어려서부터 상상도 해보군 했지만 요즘 아침 거울에 비치는 이런 모습은 아니였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어느 날 슈퍼의 화장품 진렬대에 가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문의했다. “저어,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아저씨들의 눈언저리에 쓸 수 있는 화장품이 있습니까?” “어떤 화장품이 필요하세요? 남성 분들이 쓸 수 있는 화장품은 많아요.” 예쁘게 생긴 점원이 곱게 웃으면서 대답을 해주니 나의 부끄럼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담도 커졌다.   “요즈음 아침 세수를 하면서 나는 인생을 검토하게 됩니다. 몰골이 점점 찌그러져서 이젠 나를 편안하게 쳐다볼 녀성이 줄어들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 영 사는 재미가 없어져요.” “호호호~ 그럼 이 세상 남성 분들은 다 어떻게 살아요? 하하하~” 주위의 점원 몇몇도 따라 웃어댔다. “보통인 것 같은데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 혹시 간밤에 술을 과도하게 마시거나 피로하시지 않았어요? 과음하시면 그럴 때가 많아요.” “아, 네 그렇습니까? 요즈음 술이야 좀 과하지만… 그래서 요즈음 피부를 잡아당겨 편다는 화장품 하나 써봤는데 잡아당겨서 그런지 더 늘어난 기분입니다. 허허허~” “호호호~ 그런 거 어디 있어요? 당겨서 펴진다면 그건 상당한 부작용이 있는 것일 겁니다. 이젠 아무 것도 바르지 말고 이렇게 하세요.” 그러면서 젊은 녀점원은 얼굴을 마사지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또 손바닥으로 가볍게 얼굴을 귀뺨 치듯 두드려보였다. “손벽 한번에 잠자던 세포 사천개나 잠을 깬다고 합니다. 얼굴의 피부도 이렇게 두드려주면 봄날의 이파리처럼 살아나요.” 옳거니 하고 크게 감동이 되여 집으로 돌아와 배워준 대로 열심히 습득을 했더니 아닌게 아니라 순식간에 부은 얼굴이 가라앉고 피부에 활력이 있어보였다. 원래는 이런 건 혼자 가만히 비밀로 간직하고 있어야 점잖은 행실이지만 내 오늘 뭇사내들이 애간장을 태우는 일을 어여삐 여겨 여기에 공개를 하나니,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서 얼굴을 문지르고 귀쌈을 때려라. 그러면 볼이 파릇파릇 되살아나 얼굴에 웃음꽃이 절로 피여난다. 저절로 귀쌈 하나 때려보는 것은 이 같이 피부에만 좋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아주 좋은 점이 있으니 귀쌈을 맞으며 인생을 반성하라. 여기서 세번째의 건강비결이 나온다. 스스로 귀쌈을 때리며 자기를 가꾸라. 뭘 바르거나 감추는 것도 건강미를 가지는 방법일 테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분통의 화초를 키우듯이 자기의 몸도 가꿔야 한다. “식물도 사람의 발자취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법정스님)”고 하는데 자기의 몸도 애정을 가지고 가꾸면 곱게 늙어갈 것이다. … …   건강에 비결이 따로 있나? 마무리를 해보면 자연의 섭리에 맞춰서 몸이 필요하는 대로 살아가는 게 그게 건강의 표준이다. 남의 흉내를 내지 말고 남의 아름다움에 침을 흘리지 말고 자기 대로 가꾸자. “침은 삼켜(허준)”야 건강하다고 했느니라.   돌아간다는 의미 10월의 어느 날 함께 골프를 다녀온 일본사람들과 점심식사를 나누면서 다음 주에는 잠시 집에 다녀온다고 말했더니 “돌아가세요? 오래간만인 것 같은데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하였다. “네. 이번에 가서 스끼야끼すき焼き랑 다이후꾸大福랑 많이 먹고 오겠습니다. 너무 먹고 싶어요.” 하고 말했더니 한상에 앉았던 일본사람들이 다 놀라는듯했다. “일본에 가세요?”라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중국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돌아간다’는 말을 썼기 때문이다.  ‘돌아가다’라는 말은 우리말과 일본말에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일본어로는 ‘모도루戻る’ 혹은 ‘가에루帰る’라고 하는데 그 뜻이 간단하면서도 견정하다. 즉 원래 대로 혹은 원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말의 ‘돌아가다’는 좀 복잡하다. 일본어의 뜻과 같은 의미가 있는 외에도 수두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원래 있던 곳에 다시 가다, 물체가 돌다, 이전의 상태로 되다, 굽이를 돌다, 멀리 에돌다, 순번으로 옮기다 등등 많은 해석들이 길게 씌여있는데 그중에 ‘끝난 상태로 되다’라는 뜻도 있다. 돌아가는 것이 왜서 끝난 상태로 되는가? 돌다 돌다 한바퀴를 돌면 끝이 나는 것일가? 이 끝난 상태가 싫어서 나는 일반적으로 이 말을 쓰기 꺼려했었다. 적어도 우리 말을 할 때는 될수록이면 다른 말로 대체를 한다. 이를테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집에 간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 때문에 안해의 노염을 여러번 샀다. “어디서 집에 가느냐? 그럼 집에 갔다간 어디로 또 돌아가느냐? 돌아갈 데 따로 있느냐?” 이러면서 쌍불을 켠다. 일본어를 전공한 안해와 우리말을 전공한 나의 모순은 이런 언어사용에서도 불꽃이 튕길 때가 있다. 일본어에서는 자기의 고향, 집, 나라에 갈 때에는 간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표현을 한다. 중국어에서도 돌아간다는 의미로 귀국, 귀향, 귀가라고 말하는데 일본어와 같은 것 같지만 기실은 그 목적지가 명백히 밝혀있기에 오해를 자아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일본어와 다르다. 일본어에서는 회사의 일로 다른 회사를 방문하고 나서 “이젠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면 자기의 회사로 돌아가는 줄로 안다. 다른 나라에서 자기의 나라에 귀국할 때에는 “다음 주에 갈가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주에 돌아갈가 합니다.”라고 말한다. 묻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언제 돌아가세요?”라고 하지, “언제 가세요?”라고 묻지는 않는다. 원래 우리말에서도 집으로 돌아간다, 고향으로 돌아간다 라는 말은 천만지당한 말이다. 원래 있던 곳, 오래 있었던 곳을 갈 때 그곳으로 ‘돌아가다’라고 말하는 데는 아무런 틀림이 없다. 난 중국에 본사를 두었으니 필리핀에서 중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가 없고 집이 있는 일본에 돌아간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해도 문제없다. 다만 중국어처럼 그 목적지를 밝혀야 오해를 사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어에서는 그것이 안된다. 일본어에서는 그 목적지를 밝혀서 “한 삼일 있다가 필리핀에 돌아갑니다.”라고 하면 대개 문제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익숙한 사이가 아닐 경우엔 혹시 저 사람은 필리핀 사람으로 되였는가 하고 오해를 할 가능성도 있게 된다. 그런데 왜서 우리 말에만 이 ‘끝난 상태로 되다’라는 뜻이 첨가되였을가?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곰곰히 생각해봤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종교가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연구를 하게 되는 것은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의 모든 종교가 죽음을 다루고 그 리론에서도 죽음을 전제로 삶의 교육을 하고 있다. 오로지 동양철학인 도교만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을 연구하는데 결국엔 죽음이 두려워서 오래 살자는 취지와 다름이 없다. 우리가 익숙한 관혼상제도 절반은 죽음에 대한 행사이고 우리의 언행지침으로 되는 리론에도 허다한 저생에 대한 갈망이 첨부된다. 이것은 다 사람이 죽음을 제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을 몰라서 증명할 바가 없지만 사람은 흙에서 태여나(만들어져)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누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론쟁을 벌이거나 하지 않는다. 일부 소수의 상제습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민족들은 죽으면 땅에 매장을 하는 것이 항례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로서 땅에 돌아감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례기제의礼记.祭义》에도 “중생필사, 사필귀토众生必死,死必归土”라고 적혀있다. 옛날부터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리해를 해왔기에 같은 동양권의 철학을 가진 우리도 땅으로 돌아간다는 데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접수된다. 그래서 우리말의 ‘돌아가다’는 ‘끝난 상태’로 리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어의 ‘가에루’나 ‘모도루’에도 우리말과 같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색채가 그렇게 농후하지 않고 또 발음은 같아도 한자를 쓸 때에는 다른 한자로 표기를 한다. 대신 죽음을 일반적으로는 ‘없어졌다なくなる’고 표현할 때가 많다. 이 점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인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으면 없어지는 것을 굳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추측이나 갈망이나 환상 같은 것들을 품고 있을 필요가 있을가? 없어진 사람은 없어진 것이고 다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추억으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닐가?  세상에는 령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몸은 죽어도 령혼은 그냥 하늘에 살아남아있다고 하지만 어느 사람이 죽은 다음 그 령혼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와 그런 말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말의 ‘돌아가다’에서처럼 ‘끝난 상태’라고 리해한다면 죽으면 끝이 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말하면 틀림이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돌아가다’라고 하면 ‘끝이 난 상태’보다는 어딘가 돌아가서 그냥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줌이니 우리는 끝장이라는 말을 따로 만들어서 끝을 표현하지 ‘돌아가다’로 끝장남을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도 우리 민족의 지혜라고 할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갔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의미, 그것이 중요한듯하다. 본적은 명천군 아감면, 고향은 룡정, 집은 동경, 사업터는 소주나 필리핀. 이런 나는 특히 ‘돌아가다’라는 말과 많이 부딪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괜히 신경이 쓰인다. 일년 내내 여기저기 출장 다니며 우리 민족 외에 중국어권, 일본어권, 영어권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는데 ‘돌아가다’라는 한마디의 간단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에게는 뜻이나 뉘앙스가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아직 퍼그나 짧게 살아와서 좀더 살아가야 되겠다는 책임감과 아직도 다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좀더 긴 시일이 필요하다는 인생계획도의 중요성과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한테 긴히 말씀드린 바 있는 나의 장수 신청에 근거하여 이제부터 ‘돌아가다’를 적게 사용하기로 작심을 하고  ‘돌아가다’를 대신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를 찾기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다짐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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