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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
허무궁
우리를 부자간으로 하는 것은 혈육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서다
-프리드리히 실러
나의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잘 모른다. 그런데도 내 삶에 가장 많이 떠오르는 사람이 아버지다. 가족 중에서 가장 짧게 함께 살아왔는데도 가장 가까이에서 나와 만나는 사람이 아버지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들은 이야기에서 떠올린 아버지요, 꿈에서 본 아버지다.
‘문혁’이 끝난 어느 날 어머님을 모시고 룡정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를 만나는 사람마다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에구야, 순자가 걸어올 때면 꼭 뒤에서 싱글벙글 허근이 따라오는 것 같애. 그렇지? 언제나 한발 뒤에서 싱글벙글 웃으셨는데.”
이렇게 얻어들은 얘기로 아는 아버지는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뭇사람들이 다 반겨주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난 속으로 작심했다.
나도 아버지처럼 싱글벙글이 되자. 어머니 뒤에서 싱글벙글 웃어드리자.
… …
아버지의 얼굴을 제일 마지막에 본 것은 점심밥을 가져다 드리려고 형님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던 그 날이였다. 1968년의 한여름, 여덟살 때였다.
룡정 방역소, 옛날 우리는 방역참站이라 불렀다. 죄꼬만 방역소가 나한테 남긴 인상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경계가 엄한 감옥이다. 룡정시 중심거리에서 해란강으로 가는 방향으로 뻗은 길 곁에 자리를 잡은 방역소는 그 주위에서 제일 어두컴컴한 인상을 주는 그런 곳이였다고 기억된다. 길 곁에 작은 울타리가 있었고 대문으로부터 약 서너메터 들어간 곳에 낮은 건물 한채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위만국 시기에 지은 일본식 건물이라고 생각된다.
아버지가 나를 내다본 창이 얼굴 하나에 꽉 찰 정도의 크기 밖에 안되는 형편없이 작은 창문이였기 때문이다. 위만국 시기 일본식 건물을 보면 대개가 창이 작고 방안이 어두운 것이다. 방역소의 울타리 안에는 한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지만 울타리 안에 있는 건물은 어딘가 음침한 인상을 주었고 든든하게 만든 벽은 안팎을 격리하는 토성과도 같았다. 집이라기보다는 위만국 시기 여기저기에 세워놓은 또치까 같은 건물이였다.
집에서 방역소까지는 한참 걸어야 했는데 그까짓 거 무슨 대수랴. 오랜만에 아버지와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온 마음이 꽉 벅차있었던 것이다. 이제 형님께서 문지기들에게 밥곽을 건네주면 아버지가 다 잡수시고 빈 밥곽이 되돌려나온다. 그러면 우리는 그 밥곽을 가져다 외할머니한테 드리는데 외할머니는 매번 빈 밥곽을 받아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시군 했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름조차 모른다. 커서 어머님한테서 들은 바 있지만 할아버지는 항일하다가 사망하였는데 함께 있던 항일투사들 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살해당해서 증명할 사람이 없는 탓으로 렬사가족이 되지 못하고 있단다. 그 이상은 어머니도 모르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 할아버지나 할머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갇혀서부터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와계셨다. 보통 형님이나 누님께서 아버지께 밥을 날라다 드렸는데 이날 형님은 어찌하여 밖에서 세상 모르고 뛰노는 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떠난 것이다.
울타리 대문어구에서 총을 지닌 문지기들에게 형님이 아버지의 밥이라며 건네주자 나는 전번에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 창문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이제 내다보시며 웃으실 것이다. 아버지가 감옥생활을 한 후로부터 아버지와 만나는 방법이란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잠시 후 사변 변두리 대각선으로 사십센치나 될가말가 한 창문에 사진틀에 넣은 사진처럼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환등기 속의 화면처럼 나타난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이제 우리와 눈인사를 하고 밥을 드시는 시간이 될 것인데 왠지 아버지께서는 밥을 드실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우리만 내다보고 계셨다.
나 역시 눈길을 다른 데다 팔세라 그냥 아버지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문지기청년들이 뜰안의 똥개들마냥 여러명이 어슬렁거리며 겁을 주어서 그 분위기가 하도 삼엄하고 무서운지라 아버지를 소리 높여 부르지는 못하고 혼자소리로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불러댔다. 무표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냥 못 박은듯이 그대로 굳어져있었다.
한참 이러고 있을라니 형님께서 “가자” 하며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부지 벌써 밥 잡샀나?” 하고 물으며 떠나길 싫어했더니 “오늘엔 안 먹는단다.” 하고 어느 문지기가 대신 대답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형님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뒤돌아 아버지만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모습은 아까 본 그대로였다. 네모난 사진틀에 넣은 사진과도 같이 굳어져있었다. 형님은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발길을 다그쳤다. 등에 아버지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며 부랴부랴 달아나듯 방역소를 멀리 떠나서야 형님이 련거퍼 “개새끼들 같은 게, 개새끼들이… 씨!” 하며 투덜댔다. 왜냐고 몇번 물었지만 형님은 대답은 않고 그저 다그쳐 집으로만 향했다…
그 다음의 일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고작 이런 토막적인 화면 뿐이였다. 토막토막 끊어진 필림마냥, 모두 합쳐도 열토막도 될가말가한 화면, 이러한 토막이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한 삶의 전부라면 여러분이 믿으실가?
무엇 때문에 아버지를 가두고 비판을 하는지 나는 영문을 잘 몰랐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군사훈장을 목에 걸고 우쭐거렸던 나다. 아버지는 뭇사람들이 떠받드는 의사였다는 것만은 어린 가슴에 언녕 깊이 새겨있었다. 아버지가 원장으로, 어머니가 간호장으로 일하던 현립병원에 가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는 사람마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나도 빠짐없이 둬마디 귀엽다는 칭찬을 받는 게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갇혀있다니. 나는 그 사연을 알 수가 없었고 알아야 된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나이가 그럴 나이가 아니였다.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는 무표정한, 초췌하게 여윈 얼굴모습, 멋진 아버지가 아니였다. 그 측은한 눈길도 이상하게 흐리멍텅하고 힘이 빠져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여윈 얼굴에 푹 꺼진 눈확, 입으론 뭔가 말씀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코 소리를 내진 않으셨다. 지난번 같으면 손으로 창을 더 활짝 열겠다는듯이 두 변두리를 잡고 당장이라도 머리를 밖으로 내밀며 내다보셨겠는데 오늘엔 두손도 보이질 않았다. 뭔가를 전달이라도 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말없이 덤덤히 두 아들만 내다보셨다.
그 때 아버지는 무엇을 나한테 전달하고저 하셨을가? 초점을 잃고 굳어진 시선, 달아나듯 떠나는 두 아들의 등에 무한한 한만을 실어주신 걸가? 그 어지러운 세상에 축복이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이제 특무가족이라고 끼칠 피해를 감안하시고 근심과 원한이 마구 뒤범벅이된 그러한 심정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랴. 힘이 없어서 이렇게 된 자기를 탓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셨을가? 시선은 그냥 우리한테만 쏟아부었지만 그렇게 애매하고 무표정하고 어수선한 눈길에서 그 의미를 터득하기엔 나의 나이가 너무나도 어렸다.
오십년이나 지난 오늘 이 때까지도 나는 그 날 아버지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잊혀지지가 않아서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으로 간주하고 마음속 한가운데 간직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뜻을 헤아릴 바가 없고 난해한 추억의 한대목으로 남긴 채 오래동안 이렇게 괴롭기만 하다.
후에 다 커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때 아버지께서는 열흘 동안이나 잠을 못 자고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나흘만 자지 못하면 환각이 오는 등 여러가지 신체적 장애가 나타나게 된다는데 열흘 동안이나 잠을 못 자게 했단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이런 고문이 있었겠는가!
그 이튿날 아버지께서 목숨을 끊으셨다.
자결, 자결인가?
허근, 1929년생, 39세, 동북군의대학 졸업. 18세 참군, 제 4사 15퇀, 제12사 과장, 군공 3급 3차, 잔페 2급. 원 연길현위생국 부국장 겸 현립병원 원장.
일본특무, 조선특무, 가짜잔페, 가짜당원, 쏘련주자파, 당권파, 친일파.
이것이 아버지의 전부다. 참군한 경력과 군의대학 두곳을 다닌 학력 그리고 병원에서의 짧은 근무기간. 그가 걸어온 길의 전부는 고작 석줄 밖에 안되였다. 리력서보다 들씌워진 모자가 더 번다하고 어마어마했다. 특무모자만 해도 세가지, 알고 있는 외국어는 그 외국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특무로 되는 근거였다. 가짜잔페라는 근거가 바로 잔페군인증서이고 가짜당원이라는 근거가 수차례 받은 군공메달이였던가? 전쟁시기에 총알이 비발치는 속에서 간호사들을 거느리고 부상병들의 치료에 목숨을 내건 사람이 살아 돌아와 이제부터 평화로운 고향에서 의학에 몰두하자니 특무니 뭐니 하며 때리고 잠을 재우지 않는다.
별의별 해괴한 수단의 고문을 다 받던 끝에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한을 품고 세상을 버리는 길을 택하셨는데 고문을 피하는 방법이란 오로지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이였다. 하소연할 곳도 없는데 이대로 더러운 손들에 맞아죽을 바엔 스스로 가는 게 용감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지몽매함에 대한 항의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커가면서 점점 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어릴 때는 사망하셨다고 하니 그런가 했지만 커가면서 사무치게 그리워나는 아버지가 어딘가 살아계시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군 했다. 대학을 다니던 북경에서, 또 북두성잡지사에서 일을 보던 장춘에서 그리고 일본에 이주를 한 후에도 나는 여러번 아버지와 꿈에 만났었다. 그중에서도 장춘에서 만난 꿈이 가장 진실했다.
나는 어쩌다가 잣나무가 수림을 이룬 심산으로 갔는데 거기서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중학교 때에 학교의 행사로 우리는 약 일주일간 심산 속 나무로 지은 집에서 생활하면서 잣나무를 식수한 적이 있었다. 지신 성남 6대에서 멀리 보이는 손가락산의 뒤골안이였는데 그 땐 곰이나 범이 드나든다는 골안이였다. 그런데 꿈에 그 산으로 가게 된 것이다. 거기서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원시인’처럼 변모한 사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눈에 아버지임을 알아보았다. 그 ‘원시인’의 눈과 마주쳤을 때 너무나도 익숙한 눈길이였기 때문이다. ‘원시인’은 나를 보자마자 달아났고 나는 아무리 봐도 아버지 같아서 그의 뒤를 정신없이 쫓아갔다. 자그마한 나무집 앞에 이르러 ‘원시인’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세요? 아버지가 맞지요? 나 승홈다. 승호라구요.!”
여러번 꼬치꼬치 캐여묻는 나를 바라보던 그의 두눈에서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아버지라 확신을 한 나는 달려가 한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아버지의 가슴을 때리며 여기서 뭘 했나, 왜서 우리를 버렸나,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하며 울고 또 울었다. 온 인생 동안의 눈물을 다 흘린 것 같았다. ‘문혁’을 피하여 멀리 타향에 피난했다가 ‘문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이렇게 계속 이 깊은 산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깨여보니 나의 베개는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 후부터 나는 아버지와 자주 만났었다. 만나서 나의 얘기도 하고 어머님의 얘기도 하고 형님과 누님의 얘기도 나눴다.
내가 이렇게 커가면서 아버지의 사망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은 그럴 만한 리유가 있다. ‘반란파造反派’들이 자결이라고 일러줘서 억지다짐으로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감히 질문, 조사, 기소 이런 건 엄두도 못 내는 세월이였기 때문이다. 계선을 분명히 해야 하는 세월에 우리 가족에는 나서서 시비를 따질 만한 친척도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알려주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세월, 혈육이라도 계선을 나눠야 하는 비인간적인 세상, 피해를 받고 사망한 사람이 되려 죄가 되여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세상이였다. 음침한 콩크리트바닥에서 잠을 자는 아버지를 위해서 누나가 가져다 드린 이불도 다 오리오리 찢어져있었다. 무엇을 감춰서 들여보냈는가 검사를 한 흔적이라 들었다. 그러한 비리가 당연한 사실로 굳어진 세월이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수십만 피해자들 중 그 피해를 재판에 내걸고 소송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존재할 수가 없고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결국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다. 고중을 졸업할 즈음에야 아버지가 루명을 벗게 되고 공무로 인한 사망이라고 ‘조직의 결론’이 새로 나왔는데 그 손해배상금은 썩 후에야 내려왔다. 손해배상금으로 대학을 가는 나의 손목에 어머님께서 끼워준 상해표 손목시계 하나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나에게 넘겨준 백원의 저금통장 하나로 나의 동년의 원한은 삭혀야 했었다.
그 손목시계는 1994년 내가 일본에 이주할 때에도 지니고 갔었고 지금도 나의 서재의 서랍에 정중하게 간직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있은 손목시계는 하나의 허술한 상해표 손목시계가 아니고 하냥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브릿지였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뉴대로 되는 귀중한 존재였다.
가평요贾平凹의 수필 <아버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작가 가평요가 어느 한 작품으로 매스컴의 비판을 심하게 받았던 모양인데 그 때 아버지에게 무심한 한마디로 그런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삼십리 길 떨어진 현성에 가서 신문들을 다 뒤져보시고 와서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시면서 술 한병 내놓더라 한다.
“얘야, 없는 일 만들지 말고 있는 일 무서워 말거라… 오늘 우리 부자간에 술이나 실컷 마시자.”
그 날 부자간은 배갈 한병을 다 마셨다고 한다. 아들의 고통을 나눠가지려는 아버지가 베푸신 사나이다운 은혜, 얼마나 부러운 이야기인가! 괴로울 때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술잔, 이것은 나의 인생에서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사치요 갈망이요 어리광이다! 요즈음 위챗에서 간혹 초라한 모습을 한 아버지들의 사진을 내놓고 효도해야 한다느니, 고생하시는 게 아버지라느니 불쌍하다느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나에겐 그런 초라한 아버지도 불쌍한 아버지도 효도를 드릴 아버지도 없다.
초라하든 불쌍하든 다 좋으니 나에게 아버지를 돌려다오! 잠 못 잔 아버지가 병신이 된 채로라도 좋다, 눈확이 꺼지거나 실명이 된 아버지라도 좋다, 옛날의 름름하고 인자하고 싱글싱벙글하는 아버지가 아니라도 다 좋으니 이젠 그만 나의 아버지를 돌려다오!
나도 가끔씩은 아버지와 술 한잔이라도 나눠보고 싶다. 그리고 나도 맥스 루케이도처럼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별다른 일을 한 것은 아니였다. 그저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하셨다. 즉 거기에 있어주었다.”
그렇다. 그저 있어만 주면 되는데…
나이가 반백을 넘어도 아버지를 그리는 이 마음만은 그냥 여덟살에 멈춘 채로 늙을 줄 모르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세월을 탓하리오, 하늘을 탓하리오까!
남의 아버지
인도의 힌두교에서 죽은 조상의 령혼을 ‘피트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피트리로 된 것인지 아니면 외간 계집 차고 도망을 간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운남의 촌광천은 아버지가 없는 게 죄였다.
내가 일본 동경경영시스템연구소에서 주임연구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큰 사고가 생겼다. 운남대학교에서 온 촌광천이라는 청년이 동경 모 지하철 역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렬차에 몸을 던지고 세상을 떠나버렸던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온 지 3년째 되던 해일 것이니 그의 나이가 아마 25세 좌우라 생각된다.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뽑히워 일본의 모 소프트회사에 배치를 받은 우수한 인재였던 촌광천이 왜서 이렇게 가볍게 자기의 인생을 마치게 되였는가?
거기에는 자취를 감춘 아버지의 에피소드가 악운으로 등장한다.
나는 남경대학에서의 소프트시험만 마치고 서안교통대학과 운남대학에는 일정을 미룬다고 일방적인 련락을 해놓고 무작정 동경으로 돌아갔다. 촌광천의 후사처리가 더 급했기 때문이다. 낭아시마소장은 촌광천의 집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몰라서 대사관에 맡기자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운남대학교에서 뽑아온 학생이였기에 내 손으로 가족에게 데려다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섰다. 나는 일본에 도착한 이튿날로 다시 곤명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인 과장 아마노를 데리고 함께 떠났지만 그 자식은 골회함의 곁에도 서려 하지 않아서 내가 골회함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여섯시간의 비행 끝에 곤명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하는데 안고 있는 단지가 뭐냐며 출입국 경관이 나를 불러세웠다. 단지 안에 금속이 들어있다는 것이였다. 유품에 돈지갑이 있었길래 그 지갑을 골회함 단지 속에 함께 넣어두었던 것이 기억나서 돈지갑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꺼내 보여달라고 한다.
“아니, 그건 안됩니다. 남의 지갑을 함부로. 이 사람한테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뭘! 이 사람이라니? 사람 놀리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여기 안에 사람 하나 들어있어요. 이 사람의 유물이거든요. 정 보시려면 여기…”
“아, 그런가. 아니, 아니. 그럼 그만.”
내가 내미는 골회함단지를 피해가면서 경관은 나를 놔주었다.
비행장에서 촌광천의 일가친척 십여명을 만나고 촌광천의 어머님한테 골회함을 넘겨드리고저 했더니 그 사람들의 풍속습관으로 객사한 사람은 이대로 받을 수 없다며 골회함을 안은 채로 차에 앉으라고 한다. 안내하는 대로 골회함을 안고 차에 몸을 실었더니 장장 세시간 달려서야 공동묘지에 도착하였는데 또 거기서 장장 세시간이나 불교식 장례를 지냈다. 경문을 한나절 읽고 나서 친척일가 모두가 밖에 나가서 골회단지를 안은 나의 뒤에 한일자로 줄을 서서 건물을 한바퀴 돌고 다시 절 안에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경 읽기가 노래처럼 시작이 되고 또다시 일어나 절을 하고 경을 읽는 녀승들의 목소리가 이딸리아 극장을 꽉 메우는 소프라노에 못지 않았다. 한참 있으니 드디여 촌광천의 혼을 불러왔다며 식이 끝났다. 그제야 촌광천의 어머니가 골회함을 내 손에서 받아들고 사전에 지정된 곳에 가서 골회를 묻었다.
행사가 다 끝난 다음 일가친척들이 휴식실에 다 모여 촌광천에 관한 일의 자초지종을 캐여물었다. 폭풍우 같은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을 하고 나서 촌광천의 우수한 상황, 일본의 공공시설에서 자결을 했을 때의 법적인 책임, 그 후과 그리고 동경경영시스템연구소에서 성의껏 치른 장례식 등에 대해서 자상히 설명하고 연구소의 위문금을 전달했더니 일가친척들의 격한 감정도 수그러들고 모두가 안정이 되였다.
산을 내려 곤명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서럽게 울고 있던 촌광천의 어머니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촌광천의 이야기를 하셨다.
광천이가 태여나서 얼마 안되여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섰는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단다. 어디로 도망을 간 것인지 어디서 죽어버린 것인지 누구도 모른단다. 어디서 장사를 하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계집한테 반해서 도망갔다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러나 어떤 소문이 돌든 촌광천의 어머니는 절대 찾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정이 있다면 제 발로 걸어들어오리라 믿었고 또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이미 이 가정을 버린 것이 틀림없으니 부디 억지로 잡아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단다. 결국 자취를 감춰버린 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의 성을 갈아서 엄마의 성씨를 따르게 하고 애기 때부터 엄하게 교육을 했었단다. 교원 출신인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하나 일등만이 목표라고 타일렀고 소학교 때나 중학교, 대학교 때나 쭉 이렇게 교육을 해와서 아들은 어려서부터 일등을 하지 못하면 밤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게 죄였어요. 내가 아들을 이렇게 만든 거죠… 철이 들기 전에 아이를 낳아버렸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애를 키워야 하는지 몰랐어요. 의지할 애비도 없었고… 아니죠, 다 애비 탓이죠. 애비의 버림을 받은 애거든요. 애비가 버리고 간 아이를 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서 그저 큰 인재로 만들어서 애비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보란듯이. 아버지를 만나면 아들은 실컷 나무람도 하겠죠. 아들을 키우는 게 무슨 보복 같은 그런 심정이였거든요. 흑흑흑… 그런데 이런 불효자식이 될 줄이야… 흑흑흑… 애비만 있었더라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건데… 휴-”
촌광천의 어머니는 다시 눈물을 쏟으며 뒤말을 잇지 못한다.
다 아버지의 탓이다. 아버지가 없는데도 아버지의 탓이다. 촌광천은 소프트시험도 일어시험도 운남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뽑힌 인재였다. 그런데 소프트회사에 들어가서 언어와 생활습관, 기업경험 등으로 꼭 일등만을 념두에 둔 그에게는 너무나 큰 정신적 압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 적게 자고 노력하여 일본에 가서도 제일 빨리 승급하고 늘 칭찬만을 받아오던 그가 불시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입원을 해서 일주일 만에 나는 그를 찾아가서 위로를 하며 일등만이 인생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이등, 삼등들도 가득하다, 이등, 삼등이 있어야 일등도 있을 거 아니냐, 넌 이미 가장 우수한 청년으로 된 것이니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고 적당하게 휴식을 하면서 일하라, 정신적 압력이 심할 땐 친구들과 같이 노래방이랑 가서 놀거라 하고 타일렀더니 거기서 힘을 얻었는지 이틀 후에 툭툭 털고 일어나 퇴원하게 되였다. 퇴원하고 나서 감사하다면서 꼭 나에게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하길래 그가 들어있던 아빠트에 가봤더니 이미 자기 손으로 료리를 세접시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우리 둘은 이런저런 얘기로 재미나게 시간을 보냈었는데 그가 저세상을 가게 된 것은 바로 약 한달 후였다.
… …
곤명에서 동경에 돌아온 나는 운남대학교에서 온 중국 직원들을 모여놓고 곤명에 가서 장례를 치른 정황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앞으로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생활을 함에 있어서 자체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오락활동을 많이 하면서 오늘을 즐기라, 일만이 인생이 아니다라는 따위의 말을 구구히 하였더니 함께 온 운남대학의 동기생들은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도 알아요. 근심 마세요. 걔는 학교서도 일등만 하려구 그랬어요. 특별했죠.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여서… 쯧쯧쯧.”
아버지가 없이 자라서 어쨌단 말인가? 누구도 그 말뜻을 캐여묻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그게 죄였다는듯이 수긍을 하고 있는데 대체 아버지가 없이 자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삶은 이미 이그러진 삶이였던가?
잘해도 아버지요, 잘못해도 아버지다. 있어도 없어도 다 아버지 탓이다.
불현듯 영국의 속담이 떠오른다.
“백명의 스승보다 한명의 아버지가 낫다(One father is more than a hundred schoolmasters).”
아버지는 일당백이라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아버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니 혹시 피트리로서 지금 쯤은 저세상에서 뒤늦게나마 아들의 교육에 정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저세상에서도 자녀교육이 필요한 것인지는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버지
나의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 얘기를 했으니 이제는 내 차례다.
내가 아버지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은 딸애가 처음으로 나를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다. 우리 내외간은 모두가 한창 일에 몰두할 나이였기에 갓난 딸애를 할머니께서 훌떡 안아가셨다. 연변의 뜨끈뜨끈한 구들에서 키워야지 장춘의 추운 집에서 아기 다 동태되겠다 하면서.
얼마나 지났을가.
어느 날 난 연변 출장길에 딸애를 보러 갔었는데 할머니의 등에 기대여 뭔가 손에 들고 장난질 하던 딸애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날 보고 어망결에 “아부지!” 하고 웨치며 구들에서 일어나 뛰여오려 하다가 다시 뭐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하는 표정으로 다시 할머니의 등뒤에 숨었다. 여러달 보지 못했던 아버지이지만 본능적으로는 아버지를 대뜸 알아보고 벌떡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그런데 인차 주춤하였다. 혹시 나와 비슷하게 생긴 큰아버지를 잘못 보고 부른 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두팔을 벌리고 효정아! 그래 아버지다! 하고 부르니 그제야 시름 놓였던지 달려와 품에 안겼다.
아부지야? 아부지야?
믿기 어려웠든지 아니면 너무 반가웠든지 반복해서 확인을 해보는 그 부름에 나는 처음으로 내가 아버지로 되였구나 하고 감개가 무량했다. 말을 하는 애가 이번이 처음이였던 것이다.
“저런 년 봤나. 키워준 할머니한테는 저렇게 반긴 적이 없었어.”
어머니는 가마목으로 옮겨앉으시며 웃으셨다.
아버지로 불리우게 된 후로부터 딸에 대한 사랑이 시작이 된다. 그전에는 그저 아이가 귀엽다고만 생각했지 아버지로서의 자각은 꼬물 만치도 없었다. 그런데 딸애가 아버지라 부르며 따라다닐 때에는 그저 딸애가 손만 내밀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주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부풀었다. 어머니로 되는 기분도 그러한지 조건만 허락되면 한번 경험해보고 싶지만 아버지로 되는 기분은 틀림없이 그랬다.
안고 있어도 무거운 줄 몰랐고 업고 있을 때도 사내로서의 체면도 잊었고 자전거의 뒤좌석에 앉히면 벤츠를 몰고 다니는 기분이였다.
허나 한편 아버지로 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이 때에야 들게 되였다.
아버지로 되고 나서야 아버지를 하기로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는 자식의 자랑을 하는 부모는 바보라는 말이 있다. 자랑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을 거론하는 자는 바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간단히 그치지만 이미 해놓은 말은 거둬들이지도 못하니 나도 바보를 면치 못한다.
끝나는 아버지
아버지로서의 짧은 인생도 이젠 거의 마무리하려고 한다. 고작 오십 후반에 사는 자가 왜서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이런 말을 하는가 웃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이 끝이 나거나 내가 아버지로서의 자격이나 그 상대를 잃어서가 아니라 내 자식의 소속관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소유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엊그저께 딸애의 약혼식을 마무리하고 이런 생각이 들어서 여기 몇글자 적어본다.
딸애를 시집보내는 일은 딸을 가진 부모로서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여서 거론할 것 없지만 보내는 켠의 아비로 된 처지에서 보면 뭔가 말 못할 심정에 사로잡힌다.
난 다행히 사위감이 이 글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본사람이여서 시름을 놓고 심정을 토로하지만 곱게 키운 딸애를 남에게 빼앗기는 그런 심정이다. 아마 이 글을 보고 있는 아버지들은 사위 앞에서는 입밖에 말을 내지 않지만 그 심정은 아마도 나와 비슷할 것이다.
일본식으로 아주 엄숙하고 째인 약혼식을 치뤘는데 식보다 사진을 찍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사진기를 든 사람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웃으라고 하건만 웃음이 나올 리가 있나, 어디? 당사자 둘이야 련애중이니까 행복에 푸욱 잠겨 웃지 말라 해도 웃음이 절로 흘러나오지만 나는 뒤통수에 구멍이 펑 뚫렸는지 아예 뒤통수와 이마 사이로 오봉산의 겨울바람이 윙윙 드나드는 것 같았다.
일본식에 따라 두 가문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고 정좌를 하고 마주앉아서 사전에 외워놓은 대본을 앵무새처럼 외우면서 시키는 서방질을 하노라면 식은 간단하게 끝이 난다. 불과 삼십분 밖에 안되는 그 시간에 수십년간 인생의 화면들이 주마등처럼 련결이 되여 펼쳐졌고 얼굴 한번 붉힌 적없이 키워온 딸애를 이렇게 가볍게 어서 데려갑소 하고 약속을 하면 이제 그 딸은 내 해가 아니고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며느리로 둔갑을 하게 된다는 생각에 그냥 뭐라 말 못할 심정이 가슴을 누른다.
한탄하오니 내 인생, 여태껏 그럴 줄 모른 건 아니였지만 일단 닥치고 보니 이렇게 주책이 없이 넉두리로 변해버린다. 내가 아비로 된 즐거움이란 오로지 딸애의 소학교 시절까지였다. 딸애가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처녀로 성장하던 기간까지는 엄마한테 자리를 빼앗겼고 이제 결혼을 하면 아예 시집에 고스란히 양도를 해야 하는 신세가 아닌가.
그래도 애비는 애비인지라 너남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니 별수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최대한 너그러움의 얼굴을 만들어보이면서 화기애애하게 두 가정의 식사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여기 필리핀에 와서 남이 보지 않는 방 한구석에 점잖게 올방자를 틀고 앉아서 애비의 위엄과 자존을 한가득 과시하면서 딸애한테 정중하게 다음과 같이 분부를 남긴다.
딸애야,
넌 이젠 내 딸로서가 아니라 남편의 안해로 시부모님의 며느리로 어린애의 엄마로 살게 된다. 너의 소속관계가 허씨 가문으로부터 이시카와 가문으로 옮기게 되는 이 때, 너의 미래의 인생길은 이젠 너 스스로 걸어가야 함을 터득해야 하느니라.
예전 같으면 네가 혹시 걷다가 넘어져도 이 아버지가 손을 잡아줄 수 있었고 혹시 길을 잘못 들어서도 이 아비가 쫓아가서 바른 길로 데려다줄 수 있었고 혹시 가는 길이 너무 어두워도 이 아비가 손전등을 들고 비춰줄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일은 다 할 수가 없게 되였으니 너 홀로 앞을 향해서 걸어가야만 하느니라.
어리광을 부릴 상대도 없고 목마를 태워줄 사람도 없고 소비돈을 주는 이도 없을 것이니 너 스스로 어른이 되여 힘차게 걸어가야 하느니라.
이제부터 가야 할 길에는 인생의 로고도 많을 것이지만 인생의 쾌락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고통도 쾌락이라 생각하고 남의 손가락질도 갈채라 생각하고 네가 택한 그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거라.
인생에는 편안하게 고생을 하지 않는 인생도 있을 테지만 고생이 있건없건 그게 다 사는 재미인지라 남과 비교하지 말고 너의 앞에 주어진 조건으로 열심히 걷노라면 그게 재미요, 그게 행복임을 알게 되느니라 .
그리고 아버지가 늘 너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니 고독할 때엔 아버지라 불러보거라. 멀리 타향에 갈라져있어도 부녀간에게는 그 목소리가 다 들리는 법이다.
그리고 제발 명심하거라.
딸을 낳지 말거라 .
애비가 속상하리라.
아버지로 맺는 말
자식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큰다고 한다. 아이가 아버지의 등을 교과서로 삼고 아버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커다란 아버지의 등이 믿음직하고 그 등뒤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거룩함을 느껴보고 그 넓은 등에서 안정을 찾게 된다. 어린애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등은 어머니의 따스한 품과는 다른 그 어떤 힘을 얻게 되는 원천이기도 하다. 바라지든 구부정하든 관계없이 어린애는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자란다. 요즈음의 교육학술계에서도 어린애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데 있어서 학교의 선생님보다 아버지의 역할이 더 크다고 한다. 우리 말에 “그 애비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듯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우에서 말씀드린 바로 나의 아버지도 짧은 인생 때문에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 영향만은 어머니를 통해서 이미 나에게 많이 전수된 셈이다.
대신 살아있으면서도 자기 구실을 포기하거나 역반응으로 자식에게 영향을 끼치는 아버지들도 이 세상에는 더러 존재하고 있으니 그런 아버지들은 자기의 등을 다시 챙겨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등은 아버지의 마음을 비추는 도광판이며 아버지의 인생을 적어놓은 노트이며 아버지의 책임을 업은 파넬이다. 이것 역시 아버지로서의 자리매김의 중요함이라 하겠다.
그리고 나, 잠시 아버지로 되였다가 이제 막 아버지를 마감하는 나는 미처 아버지 구실을 어느 만큼이나 해왔는지 가늠하지도 못한 채 이렇게 어정쩡 아버지의 시기를 놓치고 마는 것 같아서 반성을 해본다.
깨닫게 될 때 끝나는 게 인생이랄가, 효도도 마찬가지고 자식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게 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섭리인지라 한탄할 일은 아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끔 회억이나 하면서 반성을 해보는 재미로 즐기는 삶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상기한 모든 것들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한모퉁이임을 터득하고 나는 후날에도 변함이 없이 그냥 ‘아버지’를 반성해볼 것이다.
력사로 된 아버지도, 남의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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