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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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건강비결
2019년 07월 08일 13시 20분  조회:219  추천:1  작성자: 문학닷컴

건강비결

허무궁

 

 

무병장수한 사람만이 건강비결을 말하라는 법은 없다. 의사만이 건강비결을 말하라는 법도 세상에는 세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오늘엔 건강비결을 론하고저 하는데 그래도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무슨 자격 같은 것이 있어야 신빙성에 좀 도움이 되지 않을가 해서 말해두지만 이 허무궁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할아버지와 같은 성씨요 같은 본임을 가볍게 첨가해둔다.

… …

언제나 그러하듯이 청청하늘에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 클락의 하늘이다. 기온 27도인 더운 날씨인데도 겨울이 왔다고 억새가 무성하다. 라체로 되는 나무는 하나도 없고 퍼런 나무잎을 가진 채로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고 하는 클락의 계절은 하늘을 봐도 사계절 다름이 없고 땅을 봐도 사계절이 다름이 없다. 다른 것이란 오로지 계절에 충성을 다하는 식물들 뿐이다.

처음 계절을 알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풀들이다. 땅에 딱 달라붙은 풀이나 껑충 키가 큰 풀이나 다 꽃을 피운 다음 나름 대로 열매 지고 씨를 떨어뜨린다. 그걸 보고 아, 이젠 가을이 왔는가 보다 하고 사람들은 곧바로 알게 된다.

  이맘 때면 고향에서는 소매 긴 옷들이 냄새를 풍기며 옷장에서 잠을 깨는 하품을 하지만 여기서는 여전히 짧은 소매의 여름옷들로 가을을 맞는다. 들에는 사과나 감 같은 자연의 조화가 없고 다만 회색 털을 가진 소들만이 여유작작 풀을 뜯는다.

고마운 것은 나의 집 문앞의 허허벌판에는 무성한 억새밭이 펼쳐져있어서 나는 그 억새를 보면서 고향의 가을을 그려본다.

늦가을, 초겨울이라 할가. 고향은 이맘 때면 무르익은 사과배가 모아산으로부터 룡정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가관을 이루고 가을을 마친 밭뙈기는 이파리를 바람에 날려보낸 풀들로 대비를 이루어 바둑판을 그려놓았을 것이다. 청청 맑은 하늘엔 뭇새들이 재잘재잘 분주하고 산에서는 다람쥐가 개암이 익기를 안달복달 재촉할 것이다. 유화처럼 그려진 칼러의 산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김장배추나 무우나 빨간 고추가 시장을 메우고 찹쌀, 기장쌀, 찰옥수수가 패션업계의 녀왕처럼 장마당에서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마을에 있는 우물가에서 동네 아낙네들이 오손도손 김치를 담그었고 어린애들이 뛰여놀며 가끔씩 김장고추를 갓 바른 배추잎을 쭉 찢어 먹어보군 했다.

저눔이 손 씻지두 않구. 쯧쯧.

자기의 아들놈이든 남의 자식이든 누구나 다 이렇게 욕해도 어느 부모 하나 불만을 품지 않는다. 동네 애들이 다 자기 애들처럼 서로 너나없이 지내던 시절이였다. 좀 색다른 음식을 하면 이웃집에 가져다주고 옆집의 로인도 자기의 할아버지 같이 효도를 드리던 시절이다. 부부간을 제외하고는 온 마을이 다 네 해 내 해 없이 공유했던 시절이다.

이런 것들이 이젠 다 먼 옛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로 기억에 남았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계절은 누가 말해도 가을이라 하겠지만 여기서는 그게12월부터 3월 사이에 이루어진다. 늦겨울이라 할가 초봄이라 할가 그런 계절인데 늦겨울이요, 초봄이요 하는 것은 고향의 개념이지 여기서는 그런 말을 모른다.

다만 북방의 식물들이 모두 사계절에 충성하듯이 여기의 식물들도 어김없이 모두가 계절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신진대사가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충성을 파괴하면 자연의 건강이 해를 입는다. 

강을 가로막고 산을 가르면 자연재해가 심하고 이산화탄소의 과도 방출에 지구의 오존층에 구멍이 나서 자외선 피해가 심하고 쓰레기가 지상 뿐만 아니라 깊은 바다 밑에까지 미쳐 비닐을 먹은 큰 고래까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의 모 연구기관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인간들에게도 이미 비닐성분이 체내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였다고 한다. 비닐주머니, 비닐포장, 비닐그릇들이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 어디라 없이 다 침입해온 사정에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비닐들이 체내에 흡수되여 자리를 잡는다고 하는데 주지하다 싶이 비닐은 썩지 않기에 체내에서도 산화되지 않고 악성 병균을 유발시키는 근원으로 된다고 한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꽉 찬 비닐 때문에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인간은 자연을 개조하고 자연을 새로 꾸미고 자연을 가공하여 인간에게 수요되는 물질들을 만들어 사치를 손아귀에 쥐였는데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 도를 넘으면 안된다. 승냥이나 사자들도 자기가 먹을 만치만 먹고 배가 부를 땐 양이 곁에서 잠을 자도 가만 놔둔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게 문제다.

 

인간은 욕망과 수요의 화신이며 무수한 욕구의 응결체다

-쇼펜하우어

 

이 욕망 때문에 인간은 자연계의 한 세포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건강비결의 첫째가 터득된다.

자연의 충성심을 배우고 자연에 효도하라. 자연의 질서에 인체의 질서를 맞추고 자연스런 삶을 살거라.

억지로 살을 빼자고 고생하지 말고 억지로 주름살 줄이자고 바르지 말고 억지로 거시기가 세지라고 정력제를 들지 말고 그저 몸이 편안한 대로 살면 그게 건강해지는 비법이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누고 싶을 때 누고 그렇게. 자기의 건강은 자기의 몸이 제일 잘 안다. 탈이 없이 건강할 때엔 찬물 한사발 마셔도 그 맛이 꿀맛이요, 탈이 났을 때엔 몸이 스스로 알아서 입맛이 있는 음식을 찾는다. 그게 탈에는 약이다. 몸이 다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첫 비결이다.

… …

 

클락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필리핀 원주민들이 사는 생활구역이다. 비비고 들어갈 틈도 없이 빼곡하게 줄지은 주택, 색칠도 하지 않은 벽, 쇠창살 창문 쯤으로 거미줄 같은 전기선들이 들어갔다. 털이더러운 강아지들이 여기저기 산책을 하고 구멍가게의 창턱에는 이미 시들어서 당금이라도 말라버릴 것 같은 남새들이 몇가지가 놓여있다. 열살 정도나 될 소년들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좌충우돌하고 끌신을 신은 아낙네들이 어린애 둘, 셋씩 거느리고 느리게 길 걷는다. 물론 거기에는 닭다리튀김, 만두튀김, 소세지튀김 여러기지 간이음식들도 줄을 치고 있다.  

어찌 맛도 보지 않고 평가를 하랴 싶어서 이것저것 먹어보군 하지만 그렇게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은 아니라도 그래도 먹을 만한 음식들이였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적군의 비행기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리님들이 내가 방금 먹은 음식 우에 편안하게 앉아서 볼일을 봤을지도 모를 환경이지만 그 내용물이 너무 미미해서인지 맛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웠으니 그런 일 없었던 걸로 한다.

나는 매일 먹는 남새를 여기서 사는데 아침 여섯시 반에 오면 생생한 남새를 살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였다. 여기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기에 아침이 이르다. 이른아침에 남새밭에서 날라오는 남새는 한두시간 사이에 거의다 팔리는데 나머지는 기온이 높아 점심이 되면 모두 시들어버린다. 중국에서는 뭔가 이상한 물을 뿜어서 며칠 동안이라도 생생하게 보존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는 아직 그런 잔손질 기술을 배우지 못하여 자연 그대로다. 남새 속에 벌레도 있고 키나 굵기도 제나름이고 곱게 생긴 거나 밉게 생긴 거나 다 같은 값이다. 생긴 그대로인 남새, 보기엔 못생겼지만 맛은 어릴 적에 먹던 그런 남새의 맛이고 간혹 보이는 벌레는 차라리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벌레도 먹기를 꺼려서 달라붙지 않는 남새를 여러해 동안 먹으며 살아온 나는 자연산 채소가 없어서 그런 걸 먹기는 하지만 우리는 벌레보다 자기를 챙길 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인간이란 이렇게 생존능력이 본능적으로도 벌레보다 못한 것이다. 의식구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의식구조가 생기면 본능이 약화된다. 의식이 앞서고 본능이 억제되기 때문이다.

유전자음식과 농약, 화학비료 식물이 범람한 시장에 쥐새끼도 독이 두려워 멀리 자리를 감추고 밭이 한자 깊이로 오염이 되여 돌처럼 굳어버린다고 한다. 유전자음식에 대한 연구가 이대로 발전을 하면 이제 곧 길게 생긴 바나나사과나 구린내 나지 않는 파인애플두리안이라는 게 과수원에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까투리인간이나 캉가루인간 같은 인종들이 생겨나서 올림픽위원회를 난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래의 올림픽을 생각해서라도 유전자 연구는 이제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먹는 음식을 부디 생김새를 꼭같게 한다든가 더 크게 한다든가 할 필요가 없이 원래의 종자 대로 키워서 고맙게 먹는 게 자연의 생리다. 식물을 가지고 교배를 시키지 말고 좁쌀은 좁쌀 대로 찰옥수수는 잔이삭 그대로 내버려두자. 귀여운 벌레를 생각해서라두 살충제나 농약은 그만두고 좀 고생스럽더라도 유기비료를 펴서 “발이 시도록 밟아보고 싶(리상화)”은 땅을 되찾자.

여기에 두번째 건강비결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벌레를 따라배우라는 이것이다. 벌레가 먹지 않는 음식은 만들지도 말고 벌레가 먹는 음식을 달게 먹어라.

… …

 

언젠가 친구가 가발을 사서 썼다고 해서 한참 옳거니 아니거니 실랑이질 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반백을 넘으면 이런 화제가 많아진다. 틀이를 해넣었다, 머리에 물감 들였다, 가발을 썼다, 주름살 제거 수술을 했다, 뭐 이러루한 화제로 꽃을 피울 때가 있다. 나는 나쁜 머리를 빼놓고는 나쁜 데 없다고 자칭을 해왔는데 요즈음에는 왠지 눈두덩이가 처지고 볼이 아래로 축 늘어져서 매일 아침이면 “아하, 이런 몰골로 변해갈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하고 스스로 한탄하기도 한다. 나의 늙은 모습, 할아버지로 된 모습은 어려서부터 상상도 해보군 했지만 요즘 아침 거울에 비치는 이런 모습은 아니였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어느 날 슈퍼의 화장품 진렬대에 가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문의했다.

“저어,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아저씨들의 눈언저리에 쓸 수 있는 화장품이 있습니까?”

“어떤 화장품이 필요하세요? 남성 분들이 쓸 수 있는 화장품은 많아요.”

예쁘게 생긴 점원이 곱게 웃으면서 대답을 해주니 나의 부끄럼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담도 커졌다. 

 “요즈음 아침 세수를 하면서 나는 인생을 검토하게 됩니다. 몰골이 점점 찌그러져서 이젠 나를 편안하게 쳐다볼 녀성이 줄어들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 영 사는 재미가 없어져요.”

“호호호~ 그럼 이 세상 남성 분들은 다 어떻게 살아요? 하하하~”

주위의 점원 몇몇도 따라 웃어댔다.

“보통인 것 같은데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 혹시 간밤에 술을 과도하게 마시거나 피로하시지 않았어요? 과음하시면 그럴 때가 많아요.”

“아, 네 그렇습니까? 요즈음 술이야 좀 과하지만… 그래서 요즈음 피부를 잡아당겨 편다는 화장품 하나 써봤는데 잡아당겨서 그런지 더 늘어난 기분입니다. 허허허~”

“호호호~ 그런 거 어디 있어요? 당겨서 펴진다면 그건 상당한 부작용이 있는 것일 겁니다. 이젠 아무 것도 바르지 말고 이렇게 하세요.”

그러면서 젊은 녀점원은 얼굴을 마사지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또 손바닥으로 가볍게 얼굴을 귀뺨 치듯 두드려보였다.

“손벽 한번에 잠자던 세포 사천개나 잠을 깬다고 합니다. 얼굴의 피부도 이렇게 두드려주면 봄날의 이파리처럼 살아나요.”

옳거니 하고 크게 감동이 되여 집으로 돌아와 배워준 대로 열심히 습득을 했더니 아닌게 아니라 순식간에 부은 얼굴이 가라앉고 피부에 활력이 있어보였다. 원래는 이런 건 혼자 가만히 비밀로 간직하고 있어야 점잖은 행실이지만 내 오늘 뭇사내들이 애간장을 태우는 일을 어여삐 여겨 여기에 공개를 하나니,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서 얼굴을 문지르고 귀쌈을 때려라. 그러면 볼이 파릇파릇 되살아나 얼굴에 웃음꽃이 절로 피여난다. 저절로 귀쌈 하나 때려보는 것은 이 같이 피부에만 좋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아주 좋은 점이 있으니 귀쌈을 맞으며 인생을 반성하라.

여기서 세번째의 건강비결이 나온다.

스스로 귀쌈을 때리며 자기를 가꾸라. 뭘 바르거나 감추는 것도 건강미를 가지는 방법일 테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분통의 화초를 키우듯이 자기의 몸도 가꿔야 한다. “식물도 사람의 발자취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법정스님)”고 하는데 자기의 몸도 애정을 가지고 가꾸면 곱게 늙어갈 것이다.

… …

 

건강에 비결이 따로 있나? 마무리를 해보면 자연의 섭리에 맞춰서 몸이 필요하는 대로 살아가는 게 그게 건강의 표준이다. 남의 흉내를 내지 말고 남의 아름다움에 침을 흘리지 말고 자기 대로 가꾸자.

“침은 삼켜(허준)”야 건강하다고 했느니라.

 

돌아간다는 의미

10월의 어느 날 함께 골프를 다녀온 일본사람들과 점심식사를 나누면서 다음 주에는 잠시 집에 다녀온다고 말했더니 “돌아가세요? 오래간만인 것 같은데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하였다.

“네. 이번에 가서 스끼야끼すき焼き랑 다이후꾸大福랑 많이 먹고 오겠습니다. 너무 먹고 싶어요.” 하고 말했더니 한상에 앉았던 일본사람들이 다 놀라는듯했다. “일본에 가세요?”라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중국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돌아간다’는 말을 썼기 때문이다.

 ‘돌아가다’라는 말은 우리말과 일본말에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일본어로는 ‘모도루戻る’ 혹은 ‘가에루帰る’라고 하는데 그 뜻이 간단하면서도 견정하다. 즉 원래 대로 혹은 원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말의 ‘돌아가다’는 좀 복잡하다. 일본어의 뜻과 같은 의미가 있는 외에도 수두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원래 있던 곳에 다시 가다, 물체가 돌다, 이전의 상태로 되다, 굽이를 돌다, 멀리 에돌다, 순번으로 옮기다 등등 많은 해석들이 길게 씌여있는데 그중에 ‘끝난 상태로 되다’라는 뜻도 있다. 돌아가는 것이 왜서 끝난 상태로 되는가? 돌다 돌다 한바퀴를 돌면 끝이 나는 것일가?

이 끝난 상태가 싫어서 나는 일반적으로 이 말을 쓰기 꺼려했었다. 적어도 우리 말을 할 때는 될수록이면 다른 말로 대체를 한다. 이를테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집에 간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 때문에 안해의 노염을 여러번 샀다. “어디서 집에 가느냐? 그럼 집에 갔다간 어디로 또 돌아가느냐? 돌아갈 데 따로 있느냐?” 이러면서 쌍불을 켠다. 일본어를 전공한 안해와 우리말을 전공한 나의 모순은 이런 언어사용에서도 불꽃이 튕길 때가 있다. 일본어에서는 자기의 고향, 집, 나라에 갈 때에는 간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표현을 한다. 중국어에서도 돌아간다는 의미로 귀국, 귀향, 귀가라고 말하는데 일본어와 같은 것 같지만 기실은 그 목적지가 명백히 밝혀있기에 오해를 자아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일본어와 다르다. 일본어에서는 회사의 일로 다른 회사를 방문하고 나서 “이젠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면 자기의 회사로 돌아가는 줄로 안다. 다른 나라에서 자기의 나라에 귀국할 때에는 “다음 주에 갈가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주에 돌아갈가 합니다.”라고 말한다. 묻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언제 돌아가세요?”라고 하지, “언제 가세요?”라고 묻지는 않는다.

원래 우리말에서도 집으로 돌아간다, 고향으로 돌아간다 라는 말은 천만지당한 말이다. 원래 있던 곳, 오래 있었던 곳을 갈 때 그곳으로 ‘돌아가다’라고 말하는 데는 아무런 틀림이 없다. 난 중국에 본사를 두었으니 필리핀에서 중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가 없고 집이 있는 일본에 돌아간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해도 문제없다. 다만 중국어처럼 그 목적지를 밝혀야 오해를 사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어에서는 그것이 안된다. 일본어에서는 그 목적지를 밝혀서 “한 삼일 있다가 필리핀에 돌아갑니다.”라고 하면 대개 문제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익숙한 사이가 아닐 경우엔 혹시 저 사람은 필리핀 사람으로 되였는가 하고 오해를 할 가능성도 있게 된다.

그런데 왜서 우리 말에만 이 ‘끝난 상태로 되다’라는 뜻이 첨가되였을가?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곰곰히 생각해봤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종교가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연구를 하게 되는 것은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의 모든 종교가 죽음을 다루고 그 리론에서도 죽음을 전제로 삶의 교육을 하고 있다. 오로지 동양철학인 도교만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을 연구하는데 결국엔 죽음이 두려워서 오래 살자는 취지와 다름이 없다. 우리가 익숙한 관혼상제도 절반은 죽음에 대한 행사이고 우리의 언행지침으로 되는 리론에도 허다한 저생에 대한 갈망이 첨부된다. 이것은 다 사람이 죽음을 제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을 몰라서 증명할 바가 없지만 사람은 흙에서 태여나(만들어져)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누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론쟁을 벌이거나 하지 않는다. 일부 소수의 상제습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민족들은 죽으면 땅에 매장을 하는 것이 항례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로서 땅에 돌아감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례기제의礼记.祭义》에도 “중생필사, 사필귀토众生必死,死必归土”라고 적혀있다. 옛날부터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리해를 해왔기에 같은 동양권의 철학을 가진 우리도 땅으로 돌아간다는 데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접수된다. 그래서 우리말의 ‘돌아가다’는 ‘끝난 상태’로 리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어의 ‘가에루’나 ‘모도루’에도 우리말과 같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색채가 그렇게 농후하지 않고 또 발음은 같아도 한자를 쓸 때에는 다른 한자로 표기를 한다. 대신 죽음을 일반적으로는 ‘없어졌다なくなる’고 표현할 때가 많다. 이 점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인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으면 없어지는 것을 굳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추측이나 갈망이나 환상 같은 것들을 품고 있을 필요가 있을가? 없어진 사람은 없어진 것이고 다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추억으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닐가? 

세상에는 령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몸은 죽어도 령혼은 그냥 하늘에 살아남아있다고 하지만 어느 사람이 죽은 다음 그 령혼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와 그런 말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말의 ‘돌아가다’에서처럼 ‘끝난 상태’라고 리해한다면 죽으면 끝이 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말하면 틀림이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돌아가다’라고 하면 ‘끝이 난 상태’보다는 어딘가 돌아가서 그냥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줌이니 우리는 끝장이라는 말을 따로 만들어서 끝을 표현하지 ‘돌아가다’로 끝장남을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도 우리 민족의 지혜라고 할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갔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의미, 그것이 중요한듯하다.

본적은 명천군 아감면, 고향은 룡정, 집은 동경, 사업터는 소주나 필리핀. 이런 나는 특히 ‘돌아가다’라는 말과 많이 부딪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괜히 신경이 쓰인다. 일년 내내 여기저기 출장 다니며 우리 민족 외에 중국어권, 일본어권, 영어권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는데 ‘돌아가다’라는 한마디의 간단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에게는 뜻이나 뉘앙스가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아직 퍼그나 짧게 살아와서 좀더 살아가야 되겠다는 책임감과 아직도 다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좀더 긴 시일이 필요하다는 인생계획도의 중요성과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한테 긴히 말씀드린 바 있는 나의 장수 신청에 근거하여 이제부터 ‘돌아가다’를 적게 사용하기로 작심을 하고  ‘돌아가다’를 대신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를 찾기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다짐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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