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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섭이 없는 녀자
허무궁
1.
눈섭이 없는 녀자애가 내 앞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다. 요즈음의 녀자애들은 괜히 있는 눈섭은 전용칼로 밀어버리고 거먼 펜으로 다시 그려놓는다. 무슨 취미가 이런지 모를 일이지만 내 앞의 이 녀자애는 아마도 밀어놓은 눈섭을 다시 그리는 작업을 잊은 모양이다. 눈섭이 없으니 눈두덩이가 두드러져서 자못 무서운 얼굴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옛날 그림에서 본 듯한 눈섭이다.
이 글에선 그게 누구이고 왜서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 없는 눈섭이 나를 묘하게도 물질과 의식의 미로에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원래 있던 눈섭도 이렇게 갑작스레 없어질 때가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중요한 것이다.
사실이란 있다는 리유로서 다시 말하면 존재를 의미한다.
눈섭이란 꼭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일반 물질로서는 인간의 눈 우에 붙어있는 것이 상례다. 그 모양에 따라서 인물이 평가되기까지 하는 것을 봐선 미크론물질(청화대학 생명과학 학자 시일공)의 세계에서는 한 물질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원래 있든 없든 존재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눈섭이라는 것은 말이다.
사용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미학적으로는 사용적 가치가 심미적 가치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에 있어서는 비가림도 먼지가림도 할 수 없는 눈섭은 다만 심미적 가치로서만 존재하고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매 력사적 시기마다 굵게 가늘게 길게 엇바꿔가면서 형태를 여러가지로 변화시킨 건 나도 어느 드라마나 그림 따위에서 본 것 같은 기억이 있지만 영 없어진 적은 아마도 있은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없는 눈섭이 놓여있다.
없는 모습으로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게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2.
나의 머리의 한복판에 구멍을 펑 뚫러놓고 아침이 스쳐지나간다. 요즈음엔 하루 하루가 그 구멍 속을 꿰질러 나든다. 우주공간의 블랙홀처럼 내 주위의 모든 것을 그 어떤 인력으로 끄집어다간 펑 뚫린 구멍 속으로 유인해 끌어들이는데 밑 빠진 독처럼 내 맘속엔 담겨지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그릇의 아구리가 아니고 구멍 뿐이기 때문이다. 허무의 그릇이란 다 그런 것이다.
의식과 물질이 부딪치는 공간에서 공포와 허무와 용맹과 탐구와 함께 병존한다.
3.
저켠 나라의 총리가 국회를 해산한다고 세상에 선포하자 온 안팎이 들끓었고 세상사람들은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생긴 것처럼 흥분하고 있다. 권력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이 일제히 움츠렸던 모습을 드러내며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서 물질로 리해를 해야만 하는 모든 의식들이 구름처럼 그 사회를 뒤덮었다. 매스컴이 돈을 벌 수 있는 최고의 챤스가 닥쳐왔다. 정치기자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정치가들의 냄새를 맡고 있을 무렵에 지구의 상대편에서는 큰일이 벌어졌다.
아니 또 벌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총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했던 것이다. 비참하기로 한심한 사건인 데도 그것은 구름처럼 온 사회를 뒤덮을 정도로 의논되지 않은 채 삽시간에 마비된 사람들의 머리통 속에서 구석에 팽개쳐버려진 채로 잊혀가고 있다.
한 어르신님이 어린애처럼 주절대는 말 한마디가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였다.
투윗이 매일 매스컴을 못살게 군다. 혹시 이 땅에 무서운 전쟁이 올지도 모르기때문이다.
없던 전쟁도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님을 어서 연변으로 되돌아가시라 시급히 타일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연변이라면 차라리 내가 있는 필리핀에 와서 대피하시라 했다. 결국 누나는 울산바위처럼 끄떡하지 않고 그냥 있던 곳에 눌러앉아계신다. 누님은 대개 없던 것이 있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결핍하다.
그리고 나는 연변에 계시는 형님네 일가는 어찌하나 근심을 하였다.
고래들이 치고 박고 하는 새에 노한 장백산 산신령님께서 그냥 화를 내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료를 본 기억에 의하면 장백산화산이 폭발하면 그 화산재가 지구에 한바퀴 허리띠를 둘러줄 것이며 사랑하는 고향 연변이나 그 산맥 아래의 모든 대지를 몽땅 덮어버릴 것이라고 한다. 신성한 산신령님께서 내키는 일이 아님은 번연하지만 우주의 일반 물질들의 자연적인 운동은 이렇게 인위적으로, 즉 인간들의 감각세계의 요소 때문에 크게 노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감각적인 요소라는 게 아주 작은 단위의 초월적인 물질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그 요소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지위나 리념에 따라서는 우주을 크게 노엽힐 수도 있는 것이다.
난 요즈음엔 가뜩이나 연변축구가 불쌍해서 못 견디겠는데 이렇게 여기 저기에서 새바람에 게 눈 감기듯 이 세상을 못살게 구는 인간들이 떠들어대니까 단단했던 내 마음의 성벽이 삽시에 무너질듯 아찔아찔해난다. 목구멍으로 밥이 잘 넘어가질 않고 머리통에 뚫린 구멍으로 바람만 세차다.
시월의 태풍이 줄지어서 닥쳐온다. 필리핀 동쪽에서 잉태하여 북으로 올라가며 성장한다.
태평양에 린접한 나라들에서 각기 제기한 이름을 엇갈아 가지고 태여나는 태풍이라고 한다. 나의 펑 뚫린 구멍 속에도 돌개바람이 세차다.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도 구멍이 뚫리고 그 속으로 돌개바람이 불어든다. 마귀처럼.
일반적 물질이 없는, 순 의식만으로 만들어진 초월적 물질로 이어지는 바람이다.
4.
초월적 미크론세계의 물질의 운동, 그것은 오로지 그 의미를 아는 자들만이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학자님도 모른다고 한다.
물질운동의 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의 질량은 우주에 있는 물질중의 4% 밖에 안된다고 한다. 꼭 거짓말 같은 얘기다. 96%를 모른다는 리유가 어떻게 성립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허나 확실한 것은 보이는 것만 있는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것도 확실한 존재로서 이 우주에는 있는 것이다.
모두가 미스터리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kazuo Ishiguro의 소설) 바라보는 ‘창백한 언덕 풍경’(kazuo Ishiguro의 소설). 그외에 뇌리에는 ‘기시단장 죽이기’(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가 맴돈다. 없는 눈섭처럼 이미 없어진 기억이 펑 뚫린 머리통의 구멍 속에서 홀로 남아돌고 있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요즈음 우리 회사에서는 녀직원들의 주인다운 의식이 늘어나서 온 회사가 무슨 녀자애들의 방처럼 꾸려지고 있다. 엄숙하지만 썰렁했던 공보파넬이 갑자기 알락달락 채색의 사진들로 꽉 채워졌고 복도나 화장실에는 향내로 충만되였다. 멀쩡한 사내 직원들도 몇몇 있지만 성세호대한 녀성직원들의 대렬 앞에서는 그 위엄이 오뉴월의 시든 가지처럼 바싹 시들어져 소리도 크게 지르지 못한다. 사내애들은 이래라 저래라 녀성들이 시키는 대로 굽석굽석 일만 하다가 나만 보면 하소연한다.
-저 애들 무서워요. 웃음이 없다니까요. 저들끼리만 웃고.
이름을 대지 않아도 담당자 녀자애들을 가리킴을 나는 다 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괜히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린다. 영 귀여워서 못살겠다.
60여명 직원중에 남성이 오로지 다섯명 뿐이여서 기실 그들은 귀여운 ‘놀이감’처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운반, 기계수리 같은 것들을 도맡은 남성들이 크게 기대고 싶은 힘의 존재로 부각되여 녀직원들을 뒤받침하고 있어서 회사의 믿음직한 동량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언권은 조금만치도 없다. 절대적인 인수의 약세 때문일 것이다. 회사의 일을 상론할 때나 누구의 생일 파티를 상론할 때나 모두 녀성들이 결정을 하고 남성들은 꿔온 보리자루처럼 한구석에서 조용히 결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너희들이 결정하면 난 엉기적거리며 너희들 뒤를 쫓아가리다 하는 태도다.
그러던 와중에 약 두주일 전에 현장에서 책임성이 강한 녀자애 하나를 영업부 사무원으로 등용하였는데 이 아이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아서 회사가 한번 또 들끓었다. 민주적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벽보를 휴계실에 꾸려놓은 것이다.
옛날 OO에 ‘민주벽’이라는 게 있어서 귀찮게 떠들다가 과도하게 민감한 일들을 맹탕 끄집어낸 탓으로 큰 몽둥이에 단매를 맞아 박살이 난 적이 있는데 오늘 회사의 이 민주벽보를 보고 갑자기 옛날의 그 력사가 생각이 났다.
때는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장춘에 배치를 받았을 때의 이야기다.
장춘시조선족문화관에서 꾸리는 문학지 《북두성(그 때는 장춘문예)》잡지 편집으로 배치를 받았는데 서너달이 지나자 장춘시문화국의 청년학습반에 불리워가 두주일 동안 감금상태로 정치리론학습을 하게 되였다. 문화국 산하의 21개 직속부속, 비영리부문과 공기업(Basic unit.)에서 나젊은 청년들을 뽑아서 집중교육을 하였는데 후에 문화국 조직부에서 일하면서 알고 보니 그것은 계획적으로 간부를 배양하는 수단이였다. 이러한 육성반에 불리워가면 대개는 조직적인 인사변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였는데 그 때 함께 훈련반에 갔던 서른여명 되는 학급생들 중에서 나를 포함해서 셋이 문화국 조직부와 공청단 기관에 등용되였다.
그 때 학습반에서 “OO의 ‘민주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너는 OO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잘 알 것 아니냐?” 하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벽’이라는 개념이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인상이 깊게 남아있다.
그런데 오늘에 내가 운영하는 회사에 이렇게 버젓이 민주벽보가 생겨난 것이다. 큰일이 아닌가? CEO의 절대적인 권위와 무조건 복종을 원하는 나의 경영리념과 대치되는 행위로서 잘못 발전을 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이 생각되기도 했다.
민주라는 것은 우리 세대에게는 민감한 문제로 되며 또 오래동안 탐구하고서도 아직도 정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복잡한 문제이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대체 민주라는 것이 진정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일가? 이러한 테마를 두고 필자는 옛날에도 수필을 쓴 적이 있지만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의논하게 된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교육을 받고 터득해온 리론 대로 하면 민주란 집중을 위한 민주이며 집중은 민주를 토대로 한 집중이다. 즉 다시 말하면 민주집중제 리론이다. 민주를 토대로 한 집중이요, 집중이 없는 민주는 제창하지 않는다는 주장일 것이다.
나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흔히 민주라고 하면 미국의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오르군 하는데 미국의 민주를 몇십년간 쳐다봤지만 그게 대체 우리가 말하는 민주가 옳은지 의심이 된다. 세계 각국에서 마구 일으킨 전쟁과 인종차별, 언어의 자유로 민주를 대체하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자유만이 민주인 것이 아닌 줄로 안다. 오늘도 그냥 전쟁을 벌이고 있고 또 새로운 전쟁을 꼭 해야 되는 것처럼 그 나라의 어르신이 떠들고 있는데 폭력으로 민주를 불러올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폭력은 강제를 동반하며 강제는 민주를 앗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민주를 론의하기엔 너무나 숨에 부친 일이기에 여기서 그만두고 내 신변의 일이나 어서 걷어치워야 하겠다.
내가 무시되거나 혹은 나와 뜨개소처럼 걸구 드는 직원이 혹시 있지나 않은지 겁을 먹은 채 회사의 민주벽보에 실린 한장한장의 의견서들을 확인해보았다.
“무료로 탈 수 있는 뻐스를 마련해줬으면
너무 엄청난 수량을 추구하지 말아야 품질을 보장할 수가 있어
회사의 물맛이 영 말이 아니예요
회사에 직원전용식당이 있었으면
회사의 모든 것을 지지합니다
직장에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러면 안되는 것을
… …”
대개 이러한 내용들이였다.
생각보다 단순한 내용이여서 안도의 숨이 나온다. 엄숙한 이데올로기와는 관계가 없었고 어떤 리념적인 문제도 아니다. 괜히 겁을 더럭 먹고 민주가 어떠하니 떠들어댄 내가 우습게 된다.
그래 좋아. 민주가 있었으니 이번엔 집중을 내놓을 때가 아니더냐.
“회사가 잘 나가면 다해주마. 그러니 회사가 잘 나갈 수 있도록 많이 노력을 해다우. 응!?”
이 한마디면 다 해결이 되는 민주적 의견이다. 래일 그렇게 회답을 주리라 굳게굳게 다짐을 하고 이 글도 마무리하련다.
집중은 고독이다. 민주를 집중시켜야 하는 행위는 홀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독단적으로 받아안아야 할 고독이다. 중국의 본사에서는 련휴를 쉬기에 매일 다 읽지도 못하는 수량의 메일이 그 민주성을 잃은 채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나의 컴도 고독에 허덕이고 있다.
고독할 때 생각한다.
고독할 때 랭정해진다.
고독할 때 성장한다.
고독을 터득하면 훌륭한 경영자로 될 수 있다.
거짓말 같지만.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
형용할 수 없는 아침이다. 풀냄새가 그윽한 맛 좋은 공기와 귀맛이 좋은 뭇새들의 하모니가 아름다운 노래소리, 커다란 남국의 나무가 가지를 무겁게 드리운 풀밭과 바다물처럼 검푸른 하늘이 한폭의 유화처럼 펼쳐진 대지의 지평선에 선명한 금을 긋고 있다. 잠에서 방금 깨여나도 잠기가 삽시간에 가뭇없이 사라지는 상큼한 아침이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페부에까지 닥치는 아침의 공기를 만긱하며 나는 출근길에 오른다. 아침해가 찬연히 비추는 차창유리를 활짝 내려놓고 부담스런 에어콘은 다 꺼버린다. 107.5에프앰 음악채널에서는 흥겨운 명가가 흘러나온다. 클락에 와서 아예 고정해놓고 듣는 라지오 방송이다.
짧은 출근길이지만 나는 매일 이렇게 출근을 즐긴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회사 사무실에 여섯시 반에 나와서 간밤새에 다닥다닥 컴퓨터에 붙어있는 메일들을 대충 훑어보며 회신이 필요한 건 간단히 회신을 발송하고 나서 나는 전번 날에 나카니시상이 일본에서 사가지고 온 수동 커피메이커로 커피콩을 간다.
사르륵- 사르륵-
나의 하루가 시작이 되는 서막 뮤직이다. 콜롬비아의 브랜드 커피콩에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그래도 브라질의 커피로서 상등 줄에 속하는 커피콩이여서 나는 자못 즐겨 마시군 한다. 넙죽하게 생긴 동남아의 커피와는 완전히 다르다. 향긋한 커피 향이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맞은켠의 하얀 벽은 나의 시선을 깨끗하게 세탁을 해준다. 화창한 자연의 아침과 그윽한 사무실의 커피 향과 깨끗한 하얀 벽, 이들은 매일 건강하게 진행되는 생리의 신진대사처럼 나의 정신도 함께 클리닉해준다. 정신상으로도 밤새 동안 루적된 오물들을 이렇게 배설시키고 나에게 거뿐한 하루를 마련해주고 있는 자연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아래층 창고에서는 엘씨디제품의 커버글라스를 포장하는지 테이프를 당겨 끊는 소리가 들린다. 꼭 마치 누군가 가래를 받는 것 같은 소리로 들려서 기분이 잡칠 때가 많지만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해주는 직원들이 고마워서 잔소리는 못하고 차라리 그 소리를 무슨 타악기 음악으로 간주하고저 노력을 해본다.
카-악 툭, 카-악 툭.
저 놈 테이프는 꼭 저런 소리만 내야 하나?
같은 값이면 물방울 소리라도 내주면 안되나. 나 원 참.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서 중얼거리노라면 사무원 애들이 하나 둘 해쭉히쭉 웃으며 사무실 문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굿 모닝 써얼, 굿 모닝 써얼.
현장에서 일하는 애들보다 한시간 늦게 출근하는 사무원 애들이지만 활발함은 현장의 직원들보다 짝진다. 현장 애들은 멀리서 나를 봐도 높은 소리로 인사를 한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라서 내가 알아듣든 말든 자기들이 아는 언어를 다 동원시켜서 말을 건넬 때도 있다.
“안녕하세요?”
“니하오.”
“콘니찌와.”
여럿이 한꺼번에 공격을 퍼부어서 하나하나 대꾸하기는 다 글렀다고 판단을 할 때에는 “마간당우마가”라고 응대를 해준다.
처음 클락에 왔을 때에는 직원 애들의 얼굴색이 검어서 컬쳐쇼크를 느낄 때가 많았는데 이젠 일년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이곳 애들도 많이 이뻐보인다. 언제나 상을 찡그릴 줄 모르는 필리핀의 젊은이들, 아침 일이 시작되기 전에는 휴계실이 마치도 참새들을 가둬놓은 공원처럼 재잘재잘 떠들썩하다. 뭐가 매일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뭐가 매일 그렇게 많이 말을 해도 끝이 없는지? 누구나 빠짐이 없이 지저귀다가도 함께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그럴 때면 나의 얼굴도 활짝 핀다. 이런 애들이 귀여워지지 않는 것이 차라리 이상한 일이 아닌가. 습관이 되여가는 과정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나도 이렇게 매일 차례지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맞으며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넷트나, 위챗의 닉네임으로는 백두곰이요, 필명으로는 무궁이요, 중국에서는 회사의 직무인 둥쓰짱으로 불리워지기에 내 이름을 우리말로 들어본 지가 아득하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더구나 그러하다. 부모님께서 계실 땐 자주 듣던 자기의 이름인데 이젠 나이가 오십을 넘어서서 나보다 이상인 사람이 나를 부를 때도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때가 많다. 흔하기로 지난 세기 80년대의 연길 택시 만큼이나 흔해빠진 사장님이란 칭호로 불러주어서 나는 가금씩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이 땅덩어리에서 사라지는 건 아닌가 하는 위구심이 울컥 치밀어올 때도 있다. 내가 사라지고 이 세상에는 다른 내가 남아서 나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하는 ‘나’, 행동하는 ‘나’, 있는 것을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나’는 부모님이 불러주시던 어린 나의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여기에 버젓하게 남아있는 ‘나’는 나와는 다른, 나의 흉내를 내는 ‘내’가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내 이름이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대체될 때부터가 아니였던지 모르겠다.
아마 나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은 것은 매 4년 만에 어김없이 모이는 동창만회 때다. 동기모임이라고 점잖게 말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이름에 습관이 잘 안된다. 어렸을 적에는 그냥 동창만회라고 불렀다. 아마도 우리 학급에는 어마어마한 분들이 많아서 좀더 표준어에 가깝다고 생각이 되는 단어를 택해서 부르게 되였을 것이다. 나는 동기라면 사이가 멀어보이기 때문에 감정적 색채나 인정적인 립장으로 봐서 동창이란 말이 마음에 더 든다. 같은 창문을 가진 한칸의 교실에서 4년간 책상을 나란히 하고 오손도손 글을 읽던 사이를 동기라는 말로는 해석이 잘 안되는 것이다. 아무런 리해관계가 없이 오로지 정만을 굳혀온 사이여서 죽을 때까지 서로 허물이 없는 친구가 되는 게 동창이다. 동창모임은 직업과 나이와는 관계없이 학창시절의 이름과 별명이 불리워지는 모임으로 된다. 그럴 때면 나는 나의 이름을 자꾸 듣고 싶어서 앞에 나서서 납뜨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이 내 심정은 모르고 동창생들은 괘씸하게도 “야- 이 백두곰이 또 술 권하네.” 하면서 이름을 바꿔 부른다.
그럴 즈음이면 나는 곰처럼 뒤로 슬슬 기여서 물러난다. 내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고 있음을 아둔한 곰의 판단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되불러올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여기 클락에 와서는 또 영어로 폴이라고 불리워 난 이젠 아예 자기가 대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얼렁뚱땅 얻어가진 영어 이름인데 일사천리로 성장하는 나의 인생의 궤도에 따라 이 폴이라는 이름도 하얀 셔츠에 잉크가 스며들듯이 쫙 퍼지기 시작한다.
나의 인생이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피여가는 것이다.
나의 새로운 하루하루가 시작이 되여가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렇게 영원히 매일 하루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다른 내가 존재를 약속하고 있는 하루도 있다.
그렇다.
나에게는 매일 아름다운 아침이 챙겨지고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그것을 운영해나간다. 나를 위하여, 그리고 또 다른 나를 위하여.
감지하는 가을
모두들 가을이 온다고 한다.
오는 것인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모두가 가을을 ‘온다’고 하면서 나름 대로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모두들 온다고 한다’라고 표현함은 ‘모두들’이라는 단어, 즉 나를 쏙 빼놓은 범위의 그룹을 내세워서 나는 그 속에 들어있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모두가 말하는 가을이 나한테는 차례지지 않고 있음을 하소연하고 그 아름찬 가을의 풍성함을 만긱하지 못하는 나의 피해의식을 널리 알림으로써 ‘모두들’의 동정을 사고 거기서 위안을 얻고 싶어서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일년 내내 령상 30도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남국 필리핀에 있어서 사계절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위챗에 사진들을 올리면서 찬사를 금하지 않는 가을을 느껴보고저 이렇게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야지 그런 자세로 나는 지금 가을을 찾아떠난다.
푸른 숲과 들에는 하냥 여름을 자랑하는 이름 모를 꽃들이 아름답다. 망고 같은 열매는 이미 시기가 지났고 거리에선 아직도 대롱대롱 달려있는 야자나 바나나가 눈에 뜨인다. 논밭에선 수확이 한창이고 모내기도 한창이다. 황금들판이란 말은 여기에선 아는 사람이 없다. 언제 봐도 이 빠진 것처럼 황금색 낟알이 더덕더덕 땅덩이에 붙어있다. 여기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슨 봄나비요, 황금 가을이요, 버들개지요, 가을 단풍이요 하는 이런 말들을 하면 나를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영어를 자습하고 있는 나로서는 애를 쓰고 이런 표현을 가진 영어단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영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영어 공부에서 꽤나 득을 본 셈이다.
어디서 가을을 찾아보랴.
언제나 무더기로 쌓여있는 과일들, 언제나 푸르기만 한 식물들, 언제나 반팔 옷만 입고 다니는 사람들, 봄에 나오는 고사리나 민들레가 보이지 않고 가을에 보이는 메마른 옥수수밭이 보이지 않으며 빨갛게 물든 단풍들이 무리를 지은 산들도 보이지 않는다. 온 대지가 가을을 완전히 배제하고 여름만을 보장하는 오로지 우기와 건기의 기후만을 맞고 사는 필리핀이다. 혹시 억지로라도 가을을 지적하자면 아마도 어김없이 여기를 거쳐가는 태풍계절을 들 수 있으렷다. 변화가 없는 계절에 자극이 좀 필요했던 것인지 오가는 태풍을 초대나 한 것처럼 다 불러들인다. 달력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고향에 가을이 자리를 찾을 즈음의 시기라고 하겠다.
요즈음엔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슈퍼마켓이 하나 새로 생겼다. 이름을 멋있게도 드림마켓이라고 달고 커다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영어와 한글, 그리고 중국어로 써붙인 간판은 명백하게 이 세가지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취지를 내세웠다고 생각한다. 대개 이곳에서는 이 세가지 언어를 내세우면 여기서 사는 모든 주민들의 언어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무슨 초청장이나 받은 것처럼 이 슈퍼마켓에 자주 들리군 하는데 요즈음에 가만히 보니 먹음직한 감이 나왔다.
가을을 갖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을이 있는 곳에 내가 찾아온 것이다.
바꿔말하면 내가 찾아간 곳에 가을이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자마자 군침부터 넘어가는 먹음직한 감무더기. 북방의 떫은 감이 아니고 달콤하고 사각사각하는 종류의 감이였다. 감쪽같이 둬개 사서 먹고 싶었지만 거래처 회사에 가던 중 생수를 한병 사려고 들렸던 걸음이라 그 날엔 사먹지 않고 손으로 만져만 보고 진렬대 앞을 지나쳐버렸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속담이 생각히워 키득 혼자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판매원도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벌쭉 웃는다.
이렇게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갖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 아니다, 올해의 가을은 우연히 만나게 된 것도 또한 나의 삶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기다리는 쓰라림보다는 찾아가는 시달림 켠이 차라리 더 받기 쉬운 시련임을 깊이깊이 감지하게 되고 기다림 속에서 우연히 닥치는 만남이 또한 무한히 즐거운 자극이다.
아, 고마운 가을이여,
아, 감지하는 가을이여.
출처:<장백산>2017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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