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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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평론]동방 삼국을 넘나드는환경주의자セ 댓글:  조회:678  추천:30  2009-02-11
―허무궁 제2수필집평 장춘식  1. 허무궁, 누구인가?     허무궁은 룡정 출생이고 중앙민족대학(전 중앙민족학원) 조문학부를 나왔다. 80년대에는 장춘에서 북두성セ이라는 문예지를 주관하면서 문단에서 평론가로 활약한바 있으며 그후(1994) 일본에 건너가서 오늘까지 거주해오고있다. 일본에서 중국, 한국을 드나들며 사업을 해오는중에도 문학에 진 빚을 갚으려는것인지 근년에는 수필로 화려하게 데뷔하여 벌써 두번째 수필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2. 정체성 확인의 욕구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그의 수필에 이런 그의 행적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자주 등장한다. 수필이라는 쟝르가 원래 이런 특징을 가지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비오는_ 날의 그리움이라는_ 작품에서처럼 작가의 정체성 확인 욕구가 잘 드러나는 경우도 별로 많지 않다.     작품에서는 먼저 초가을 비내리는 풍경에 조금은 우울한 심정을 넋두리처럼 풀어나가다가행복의_ 나무라는_ 이름의 분재 식물을 들먹인다. 그리고는 이어 상해에서는 그 나무를 금전수(金錢樹)라 부른다고 하면서 돈에 대한 중국인의 집념을 조금은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에 대응되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더듬어본다. 장사군이 돈을 벌었을 때 가게 오픈 첫날의 수입으로 들어온 지페에 침을 뱉으라고 한다는것. 돈을 싫어하는척하면 더 많이 들어온다는 속설때문에 그렇게 한다는것인데 이는 사실 경제법칙에 어긋나며 재래로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돈이 간다고 했다. 그리고는아마_ 그래서 우리 민족이 가난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상의 대통에 정수리 맞을 소리 한마디 해놓고.하며_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변명한다. 곧 이어 화자는행복의_ 나무, 금전수. 이를 우리가 먼저 이름지었다면 과연 뭐라고 지었을가?라_ 고 자문하고는 뽕나무와 뽕에 깃든 애틋한 기억을 더듬는다. 특히 소시적 학교 뒤마당에 심은 뽕나무에서 뽕을 따먹던 기억은 아련한 아픔과 더불어 화자의 기억에서 행복한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거기에 비해 정력제라고 하여 기를 쓰고 은행열매를 먹어대는 일본 사내들의 행태는 부정적이다.   어느새_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뽕의 랑만도 모르고 행복의 나무를 금전수라고 하는것도 모르고 은행이 정력제인줄도 모르고 하늘은 그냥 비만을 쏟아붓고있다. 나와 같이 고독한 모양으로 눈물만 흘리고있는것이더냐.»    결국 화자는 억수로 내리는 비물을 보며 감상에 젖고만다. 그리고 그러한 감상은 일본이라는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족지식인의 슬픔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행복의 나무를금전수セ라고 하는 중국인이나 은행이 정력제라고 마구 먹어대는 일본인이나 그리고 돈을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싫어하는척하는 한국인이나 화자에게는 조금씩 부정적으로 비쳐진다. 다만 뽕나무와 뽕에 깃든 랑만만이 아련한 추억으로 살아난다. 여기서 뽕나무와 뽕에 관련된 추억은 화자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이라기보다는 조선족이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매개체로 등장한것이다. 일본땅에 거주하는 조선족지식인의 정체성 확인의 욕구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한 정체성 확인의 욕구는책セ이라는 작품에서도 비쳐진다. 책벌레를 넘어 책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책을 즐기는 화자의 책읽기 습관―차속에서, 비행기안에서 읽기를 자랑삼아 소개하고는 다시 인천공항에서의 의미있는 도서 구매체험을 렬거한다. 이어 장서를 잘 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독서습관때문에북오프セ라는 중고서적 판매체인이 호황을 이루는 일본의 상황을 소개한다. 이어지는 체험은 심양서점에서 고객들이 책을 사기보다는 도서관이 열람실인양 책을 읽고있는 장면이다. 이와 더불어 너무 두텁고 무겁고 커서 휴대가 불편한 중국책의 특징과 이렇게 책을 만든 출판사에 대한 불만을 자기 독서습관에 련결시켜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길서점에서의 체험이다.나는_ 올해 추석 이튿날 연길서점에 갔을 때 컴컴한 우리말 도서진렬대앞에 선 독자는 모두 세명밖에 없었던걸 다시 되새기게 된다. 진렬된 우리말 도서들이 한결같이 점심 못먹은 얼굴 하고있는듯끇 책읽기 습관도 그렇고 책의 크기나 무게 등에 대한 느낌에서도 그렇고 화자가 이제 일본식독서습관에 적응되였음을 확인할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화자의 마음은 여전히 한국과 조선족에게 있음을 드러낸것이 이 작품이다. 마포 홀리데인호텔 근처 책방주인에 대한 인상도 그렇거니와 연길서점의 우리말도서 코너에 책을 찾는 사람이 3명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의 표현은 동족,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걱정을 단적으로 드러낸것이라 할수 있는것이다. 그밖에도 고무신에 깃든 소시적의 추억과 박물관에서 본 고무신에 대한 딸세대의 삶의 인식을 대조시킨신セ, 소시적의 아련한 추억을 닭똥거름_ 인정거름_, 소시적의 추억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가장_ 행복했던 날등에는_ 조선족이라는 공동체의 체험과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작가의 정체성 확인 욕구가 표현되여 주목되는 작품들이다. 즉 그만하면 조선족지식인으로서 일본이라는 선진국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할수 있는 립장이지만 작가에게는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의 확인 욕구가 좀더 강하게 작용한다고 할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가르침의_ 재미, 배움의 재미같은_ 경우 자칫 선진국 일본에서 성공한 지식인의 립장이 오만으로 비쳐질 념려가 있어 수필로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 이 작가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3. 환경주의자의 세계인식    환경주의자セ라고 했지만 사실 허무궁이 무슨 환경단체에서 활약한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수필에는 엄연히 환경단체 임원 못지 않게 환경에 대한 관심과 걱정 그리고 사명감이 짙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선지구에_ 구멍 뚫어야지를_ 들수 있다.     이 작품은 소아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밟고있는 땅밑을 파고들어가면 언젠가는 지구의 반대편에 구멍을 뚫고 나갈수 있을것이라는 발상이다. 그러나 이는 작가 자신마저 홀로 웃어버린 환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문장은 그 둥근 지구우에 만들어진 구조물에 대한 걱정과 비판이다.공업과_ 군사, 그리고 생활쓰레기, 콩크리트때문에 이 땅은 갈수록 어느 늙은 녀자의 얼굴화장처럼 두터워만 가는데 그 무게가 싫어서인가 지구는 그것을 털어버리는데 열중하게 된다.는것이다_. 그것이 지진과 같은 훼멸적인 자연재해로 표현된다는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여기서 작가의 시선은 갑자기 마이너스이온(음이온)이 몸에 좋다는 얘기로 돌려진다. 먼저 떠올린것은 비즈니스맨답게 이 음이온이 장사가 될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를 알려고 노력하던중 우연히 현대인은 흙을 밟지 않아 음이온이 결핍하다는 하다나까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것이구나 한다. 결국 도시의 구조가 현대인에게 음이온결핍증을 유발시키고있음을 알아버린것이다. 빌딩숲으로 덮여진 상해의 거리를 땅이 꺼질가봐 소림사의 경공(輕功)이나 하듯 사뿐사뿐 걸었다는 표현은 작품 시작부분의 유머의 련속이 될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지구에_ 구멍을 뚫고 나무 고챙이에 꿰고 지구의처럼 돌려보리라. 거치장스러운걸 내가 떨어뜨려주고싶어서이다.는_ 서두와 결말의 조응이라는 구성적인 완성으로서뿐만아니라 주제 해명을 위한 점안(點眼)의 의미로서도 높이 사줄만한 표현이 될것이다.     콩크리트구조물의 난립에 의한 지구생태의 파괴는 당연히 환경주의자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환경파괴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공업오염 역시 그러한 환경파괴의 원흉에 속한다.칼라의_ 가을엔 무궁화도 자리 양보하더라는_ 그러한 환경오염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무궁화 분재 얘기를 풀어내려가다가 무궁화의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 다음 먹이로 유인하여 새까지 회사 사무실 베란다에 불러왔다고 했다. 차거운 콩크리트세계속에서 사는 우리 인생의 서글픔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정작 작품의 주제를 풀기 위한 사전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남사군도_ 등 아세아의 소금과 물 문제를 해결하여다오.라고_ 한 아버지의 유언을 실현하고저 안깐힘을 쓰는 시마다 토시오(島田俊雄)라는 사람의 친환경 발명, 아세아 각국에 쏟는 그의 정성과 노력을 제시한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찬사의 밑바탕에는 작가의 환경주의적인 인식이 깔려있는것이다. 이는핫쵸보리사무실에서_ 회사일은 제쳐놓고라는_ 작품에서 보여준 무궁화에 대한 남다른 사랑속에 겨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담겨져있는것과 마찬가지 리치일것이다.    봄의_ 피가 흐르는 소리에서는_ 자연환경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좀더 직접적으로 그려지고있다. 지구가 뜨거워져서 여름이 며칠이나 길어졌다는 얘기로 시작하여 온실기체 방출제한을 골자로 한 쿄토의정서가 시동을 걸었다고 하고는 지구의 온난화가 모두 과학발전의 탓이라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과학연구와 경제발전에서 장족의 진보를 이룬 중국의 위상을 두고 자긍심보다는 걱정이 앞선다.자연을_ 괴롭히는 과학의 발전은 바람직하지 않다는것이다_.자연은_ 자연 그대로 보호해줘야 인간은 자연에 사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있는것이다.여기에_ 작가의 환경관이 표현되여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북경 북쪽에서 오는 황사의 횡행을 감안할 때 이점은 좀더 뚜렷해진다.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면 요즘 생태문학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으랴. 허무궁의 환경주의자적글쓰기는 이점에서 한몫을 단단히 한다고 할수 있다. 아쉬움은 이 계렬의 작품들이 체험을 통한 감수성보다는 주관적인 주장이 강하다는 점이다.  4.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여야 사람이지. 라는 말장난 같은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장난같은 말이 이제 현실로 되여가고있다. 특히 세계화라고 하는 경쟁사회에서 벌어진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작가의 환경주의자적 글쓰기와도 련관된다고 할수 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이에 대한 허무궁의 판단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현재 선진국에서 인정되는뇌사_(腦死)에_ 대해 허무궁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내장이식에_ 필요한 내장을 맥박이 있을 때 뜯어내려는 인위적인 판결이라_ 하여 비인간적인 판단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심장에서_ 만들어내고 몸의 구석구석까지 날라다주는 혈액때문에 인간은 살아있는것이다. 제아무리 활발한 사색을 할수 있는 대뇌일지라도, 제아무리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있을지라도 그것은 곧 이 가슴, 심장에서 공급하는 붉고 뜨거운 피가 있기에 존재하는것이다.라_ 삶의 징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펴낸다. 사실상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것이나, 뇌사상태나, 호흡이 정지된 상태나 죽음이라는 상태와 모두가 나름대로의 관련을 가진다. 작가는 뇌사상태를 장기이식을 위한 인위적인 사망판결이라 비난하고있으나 뇌사상태라면 심장이 고동을 친다고 해도 현대의학이 만들어낸 가상적인 생명상태이기때문에 실제로는 죽었다고 보는게 옳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것을 강력히 부정한데는 의학적인 판단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판단때문이다.느끼는_ 일이 적어지면 이 사회는 차갑게 된다.뺀  대뇌가 발달하면 똑똑하고 심장이 제구실 잘하면 정다워진다.이것이_ 작가의 인간적인 판단이 될것이다.하여간_ 느끼는 삶, 정다운 삶, 이웃을 사랑할수 있는 삶을 더 귀중히 여기고싶은 마음이다.핵심은_ 여기에 있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고 위대한 사상을 가진다 해도 그러한 삶은 의미가 없어진다는것이다. 갈수록 느낌이나 인정보다는 물욕의 만족을 삶의 의미라고 여기는 현대인의 삶의 태도를 비판한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이 되는것이다.    란자_, 정자의 핵전쟁은_ 또다른 시각에서 이러한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해 해부한다. 현대인의 녀성화현상에 대한 반성이다. 겉보기에는 란소와 란소의 핵만으로 새끼를 생산하였는데 그것마저 암컷만으로 태여난다고 하니 이야말로 수컷이 필요없는 세상이 되지나 않을가 걱정하며 거기에 전 사회적인 성격적 녀성화경향을 곁들여 제시한다. 그리고는 이제 정자와 정자의 핵만으로 수컷을 만드는 연구가 시작되면 그것이 곧란자와_ 정자의 핵전쟁이_ 될것이라고 섬뜩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의 내면을 따져보면 작가의 걱정은 앞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욕이란건_ 인간만의 특성일가?_,선량하지_ 못함은 후천적일가?_,책은_ 어떨 때 읽는가?등_ 제목에 물음표가 달린 세 작품은 이른바미니수필セ의 형태로 인간의 \"비인간화\"를 비판한다.와인_ 마시며 듣는 총소리또한_ 비슷한 경우이다. TV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드라마속 총소리, 이라크전 총소리)에서 문화대혁명때 아버지가특무セ로 몰려 투쟁받던 사정, 그리고 그후 어려운 식료사정을 담담하게 추억하는데 여기에는 항상 전쟁에 대한 분노가 뒤따름으로써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온 사회의 반성을 촉구한다 하겠다.     작가는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해 반성이나 비판만 한것이 아니다.반성하는_ 즐거움에서는_ 자신의 오해에 대해 반성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의 정이란 어떤것인지를 제시해보인다. 일본 북해도대학의 한 학생이 쓴 편지를 번역해달라는 안해의 부탁을 받았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내온다던 편지 원고가 오지 않고 오후에야 본인한테서 편지를 쓰고있는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어린 사람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화를 내고 심지어 버릇 가르친다고 래일 보낸다는 사람에게 래일은 시간이 없으니 모레오후나 돼야 시간이 난다고 했단다. 그런데 정작 편지를 받고나니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였음을 알게 된다. 말못하는 언어장애자 중국인처녀와의 사랑편지였는데 중국인처녀는 일본에 와서 살고싶다고 했으나 의과대학생인 일본청년은매일_ 붐비는 전차에서 밀치고 닥치고 하는 도꾜, 수림 같은 빌딩으로 비좁아진 도시는 인정도 없는 싸늘한 곳이라며아무래도_ 일본에서는 처녀를 행복하게 해줄만한 조건도 능력도 안된다고 생각되여 중국에 가서 자그마한 병원을 꾸려놓고 병자를 치료해주며 벙어리처녀와 행복하게 살고싶다는것이다. 이런 사정을 처녀에게 설득력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편지가 늦어졌다는것을 작가는 알게 되였단다. 오해를 일으킨 잠간의 리기심때문에 인간애를 잠시나마 잊게 되였던 자신을 반성하고있는 셈이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는 장애인 중국처녀를 사랑하며 중국에서 살려는 일본청년의 미담을 필리핀대통령의 자국 로동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오버랩시킴으로써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이처럼 항상 감동적이 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있다. 이는 앞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을 아직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성과 따뜻한 인정의 사례로 정면돌파한 셈이 된다. 대안이 없는 반성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따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추석날 술기운에 떠오른 인생살이의 서글픔이 묻어나는추석달을_ 서천에 바래줘야 하는데_, 늙는것에 대한 위기감, 늙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다가 결국 인정하고 체념하는 인간의 상정(常情)을 그린 돋보기부자セ, 이름과 필명에 관련된필화セ의 에피소드들을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문장으로 표현한_<망종>의 웃음거리등_ 작품은 수필의 가치와 매력을 잘 보여준 수작이였다.  5. 희망사항     허무궁의 수필은 작품의 구조나 표현의 생동성에서 상당히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장의 류창함 측면에서는 어딘가 어수선한데가 더러 엿보인다. 가끔 눈에 띄이는 어휘사용에서의 오류나 어색함은 아무래도 일본에 장기간 거주한 관계로 조금은 양보할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장의 호흡조절 문제는 조금만 류의하면 금방 극복될수 있는것이다. 그중에서도 토의 생략이 무리할 정도로 많다. 가령가끔씩은_ 걷던 길 뒤로 돌아보는것도 재미다.뺀나는 혼자서 투덜대며 번역해주기로 대답한 일 몹시 후회하였다._(이상반성하는_ 즐거움_)도시마다_ 서점에 발길 돌리고뺀여름에 딸 데리고 서울 갔을 때뺀여름에 심양서점 몇곳 돌아보았는데_(이상 책セ) 등의 문장에서 밑줄 그은 부분은 토를 생략함으로써 호흡의 불편함을 야기한다. 대화의 경우에는 허용되는것이지만 서면어로는 부적절한것이다. 이런 례는 꽤 많이 보인다. 아무리 운문이 아닌 산문이라도 호흡의 불편을 삼가해야 하는것이 독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한다.     허무궁의 립장을 우리는재일본조선족セ이라 부를수 있을것이다. 이 경우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정체성의 측면에서 어떤 포즈를 취하느냐이다. 작품의 독자가 기본적으로 조선족이라고 볼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표현이 이상해지면 독자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다. 일본이라는 한중일 삼국중 가장 잘사는 나라에 주로 거주하는 허무궁의 처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례문은 생략하겠거니와 앞에서 잠간 언급한가르침의_ 재미, 배움의 재미와_ 같이 일본이나 일본인의 장점을 중국이나 중국인(물론 조선족을 포함하여), 한국이나 한국인의 약점과 대조시킬 때 특히 이점을 조심해야 할줄 안다.     또 하나,미니수필セ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전에도 어느 글인가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이른바미니수필セ이라 불리는 2천자미만의 짧은 수필들은 뚜렷한 한계성을 지닌다. 작품의 의미가 조금만 드러난 상태에서 끝나기때문에 소재와 체험의 깊이에 비해 감동의 깊이나 주제 해명의 측면에서 많은 약점을 드러낸다. 일례로지진과_ 고향사진_,빠알간_ 고추 때문에_,추석달을_ 서천에 바래줘야 하는데등_ 작품은 체험의 깊이는 인정되지만 감동이 미미하다. 같은 체험이라도 좀 더 주제발굴에 공력을 기울이면 감동의 깊이가 달라질것이고 이때미니수필セ은 부적절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미니수필セ의 가치를 무조건 부정하는것은 아니다. 다만 소소설セ,미니소설セ의 소재가단편소설セ과 다른것처럼 적당한 소재의 경우에만미니수필セ의 형태를 취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한다.
39    [수필]언어의 불가사의 댓글:  조회:734  추천:19  2009-02-11
언어를 잘 안다고하는것은 그 민족의 문화를 잘 안다는것과 통하는 말이다. 그 민족의 문화습관을 모르고서는 도무지 그 언어를 정통할수가 없는것이다.    난 아직도 언어때문에 당혹해질 때가 있다. 교류하는 도구로서의 언어이기때문에 들으면 그 뜻을 리해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뜻을 리해하는 행위는 반사적으로, 자동적으로 진행되는데 생소한 언어를 들었을 때 나의 대뇌는 인차 자기가 익숙한 언어에 맞춰 비슷한 어음현상만으로 뜻을 풀고저 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거부하면 되는데 나의 대뇌는 나앞에서 총명을 과시하고싶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 대뇌의  뜻풀이로 나는 언어의 불가사의적인 사건을 체험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난 한가지 철리를 생각해냈다. 말은 결코 소리뿐이 아니라는것이다.     불가사의 1.   일본에 온지 얼마 안될 때의 일이였다. 언젠가 나는 딸애를 데리고 맥도날드를 먹으러 갔었다. 아무리 일어를 모른다해도 뭘 사먹는거야 못할리 없으리라. 하물며 맥도날드는 메뉴가 카운터에 그림으로 그려있어서 그 그림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짚어보이면 되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나는 점잖게 카운터에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딸애가 알려준것을 짚었다.(더 묻지 말고 내가 짚은거나 빨리 가져와줘.) 이렇게 생각하며 애원비슷한 눈길로 판매원처녀애를 건너보았는데 애꿎게도 처녀애가 입을 열었다, 아, 이거 죽었구나 하고 난 아예 귀담아 듣지도 아니하고 딸애의 지원을 청하느라 뒤를 돌아보는데 귀에서는고치라데_ 메시아가리마쓰까?(여기서 드시겠습니까?)라는_ 말이 들려오고 눈치 빠른 딸애가 인차하이_._ 하고 대답해주어서 일은 끊났다. 사서 들고가는 사람들이 많기때문데 이렇게 꼭 물어보는것이다. 그런데 난 고기와 상추를 사이에 끼운 햄버그를 먹으면서 그냥 심사가 좋지 않았다. 방금 그 처녀애가 한 말이 우리 말 어음적으로는 기분 나쁘게 귀문어구에서 서성거리고있었기때문이다.   고치_(고추)라도 뭣이? 아가리, 맛있께?라는_ 말로 들리였던것이다.    아무렴 그 처녀애가 이 어른을 보고 상소릴 했을리는 만무한데 일어를 모르고 들으니 이렇게 어음으로만 듣게 되고 그 어음을 우리 말 뜻으로 리해를 하는 우스운 오해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소리만으로 뜻풀이를 한 불가사의이다.     불가사의 2.    언어의 불가사의한 사건은 20여년전 북경 의화원에서도 발생했었다.    대학시절의 이야기인데 학급활동으로 의화원에 견학갔었던 나는 사진을 찍느라고 주위경치에 정신 팔려 헤덤비다가 어떤 사람과 크게 부딪쳤다. 서로 뒤걸음 하였던지 엉뎅이를 마주 부딪쳤던것이다. 난 어망결에아_, 미안합니다.하고_ 사과하였더니 그 사람이 큰소리로아임쏘리セ 하고 말하였다. 순간 난 하마트면 당신_, 금방 뭐라했어?_ 하고 따질번했다 .그 말이 영어를 모르는 나의 귀에는 우리 말로 들렸고 또 그 말은 소리로는 아무소리セ나 한다고 들렸던것이다.뒤 돌아보니 서양녀자였다. 인차 대들지 아니한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하고 안도의 숨을 쉬였다. 학교숙소에서  영어방송강좌를 들으며 발음련습을 하던 재국씨(소설가)의 어설픈 발음을 나의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서 그런지 이 귀는 정확한 영어발음을 모르고있었기때문에 내가 이런 착각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재국씨는 그때 일어발음은 좋았지만 영어발음은 좀 그랬다. 이렇게 살짝 불쌍한 소설가 김재국씨에게 책임을 밀어놓고 혼자 웃어본다.    소리로만으로 뜻풀이하면 이런 불가사의도 있게 되는 모양이다.     불가사의 3.    일어로 작은 새를 ことり_(小鳥)라고_ 하는데 그것을 발음하지 못해 쩔쩔 매던 류학 온 연변처녀애들의 모습도 십년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거꾸로 우리 말도 외국사람들한테는 괴이한 뜻으로 들릴 때도 있으리라.    이를테면 우리끼리야_, 너 오너라하는_ 부름소리가 일본사람에겐 그 뒤말오너라セ가오나라_(おなら) 로_ 들릴수도 있을것이다.     하필이면 이런 말이냐 싶지만. 언어란 이렇게 불가사의한 일을 많이 만들어낸다.   대개 객관적인 언어의 탓은 아니고 주관적인 인간의 대뇌의 탓이리라. 이를테면 입의 탓도 귀의 탓도 아니고 다만 뇌의 탓이라는 말이다. 모어만을 알고있을 때에는 자연의 소리도 포함해서 모두 자기의 모어에 기준하여 뜻을 리해하려고 한다. 그만큼 여러가지 언어를 장악하면 사유의 범위도 넓어진다는 말이 되겠다.    우의 실례는 언어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재삼 느끼게 하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나의 마음에 남아있던 얘기다.                                        2004년 11월 9일
38    [수필]성인절에 해보는 시름 댓글:  조회:678  추천:32  2009-02-11
 원단이면 어린이들이 어른들께 세배하고 세배돈을 받으면서 축복을 받는다. 우리 부부도 1월 1일 아침에 돗자리방에 나란히 앉아서 딸애의 절을 받고 축복의 말 한마디 해주었다. 젊은 나이에 무슨 절을 다 받냐 하고 여태껏 절은 받아보지 않았지만 딸애의 20돐에 다가오는 성인절(일본에선 매년 1월 8일이 성인절이다. 만20세면 성인이 된다.)을 맞으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성인이 되는 딸애에게 우리 전통의 례의범절을 습관처럼 몸에 슴배이게 하려면 나 자신부터 받을건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되였던것이다.      딸애가 유치원 다니던 나날이 아직 기억에 생생한데 벌써 성인이란다.    일본으로 데려와 소학교에 부치던 일 어제 같은데 어느새 성인으로 자랐다.    스무살이면 일본에서는 성인이라고 한다. 그저 나이만 이렇게 규정된 나이가 차면 성인이라 할수 있는건지 모르겠다. 필자는 졸작에서 사람은 되는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차서 사람이 되는것이 아니다. 사람은 되는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라는 의미는 사람이 인생 전반을 걸쳐서 그냥. 사람을 하는것이라는것, 다시 말하면 인생은 스스로 사람을 하는 과정,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며 자기가 옳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사는 과정이라는것이다. 인생전반을 걸쳐서 해야 하는 사람이 어찌 나이 스물이면 될수가 있다는 말인가! 20세의 생일에 금을 그어놓고 자, 여기부터는 성인이다라고 말을 하는것은 눈감고 야옹하는 숨박꼭질에 지나지 않는 무책임한 짓이다.        그래서 나는 성인절날에 딸애를 앉혀놓고 이러한 얘기를 해주고싶었었다. 비록 아직 짧은 인생밖에 산 경험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여태껏 살아온 삶의 경험에 근거하여  삶을 알려주고싶었던것이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어린 녀자애이지만 딸애도 자기나름으로 사람을 하기에 열심해있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유치원때부터 나는 딸애에게 공부하라, 암송하라, 글을 쓰라 강요한적이 없었다. 스스로 잘도 해나아갔던것이다. 장춘시문화국유치원에 다닐 때에는 한자를 카드에 써달라고 해서 그것을 붓으로 정연히 써주었더니 매일 밤 글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유치원시합에서 우등을 한 모양인데 그날 퇴근하여 딸을 데리러 갔더니 다른집 애 엄마가 자기 아들을 욕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싸하이즈_, 니 랜 차오쌘주더 하이즈 더우 깐부궈야?»    바보야, 넌 조선족애도 당해내지 못하냐 라는 뜻인데 난 우리 딸 효정이를 두고 하는 얘기인줄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암 누구의 딸이라구!    그러던 딸애는 1994년 2월에 일본으로 왔다. 제 엄마가 쿄오릿츠녀자대학의 강사로 초청받아 일본에 와있었기에 나는 딸애를 엄마곁에 보내야겠다고 생각되여 1994년 2월에 딸애를 데리고 일본으로 왔었다. 그리고 딸애를 일본학교에 부친다음 다시 장춘으로 돌아왔다. 그때 효정이는 여섯살이였다.    혹시 업수임이나 받지 않을가 얼마나 근심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입학 그날 딸애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떠들썩하며 돌아왔었다. 일본말을 모르니 여섯 친구의 손을 쥐고 우리 집으로 이끌고 왔던것이다.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는 일본애들이 다짜고짜 효정이 엄마를 보고 이 아이가 왜서 이러느냐고 물었다. 놀자고 그런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들끼리 잘 논다고 말해주자 그들은야_- 좋아라_ 소리치며 너도나도 다투어 전화통에 매달려 집에 전화를 걸었다. 효정이네 집에서 놀고 간다고 집에 일러두는것이였다.    이렇게 딸애의 학창시절이 시작되였다. 딸애는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개근생상장을 들고왔다.중학교때부터는 매일 전차로 왕복 두시간씩이나 걸리는 등교길이였지만 감기 걸렸어도 쉬지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등교하였던것이다. 지금은 릿꾜대학 2학년생으로 성인절을 맞은것이다.    그러니 내가 구태여 무슨 설교를 다시 할 필요가 있을가. 그저 속으로 좋은 사람을 하기만 바랄뿐이다. 세상에는 프로이드처럼 그냥 우등생으로 학창시절을 마친 사람도 있지만 종래로 공부란 하지 않고 심지어 심리학, 비교심리학, 생물학, 사회학 등 많은 저서를 쓰면서도 남의 저서를 읽지 않은 스팬서(Herbrt Spencer) 같은 철학자도 있으니 부모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 무슨 훌륭한 삶을 사는것도 아닌줄로 안다.자기가 하고싶은 일이면 어련히 할것이다.부모로서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것이 백번의 설교보다 훨씬 좋은것이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도 맑다는 얘기가 어디 틀린데가 없다.       성인절을 맞은 딸애는 요즈음 학교에 바칠 레포트테마를 우리 력사에 나오는 량반에 대한것으로 잡았다고 한다. 이것도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한것이라 하니 일면 대견하면서도 이제부터 오염된 사회와 깨끗한 사회속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가면서 자기의 옳바른 삶을 마음껏 살아갈 딸애의 장래가 가슴 벅차기만 하다.    한편 그때문에 시름이 놓이지 않음도 어찌 달랠수가 없다.                                              2007년 1월 13일
37    [수필]사람은 되는것일수도 있는가보다 댓글:  조회:601  추천:12  2009-02-11
    올해 가을에 출판된 필자의 수필집락엽줏는_ 마음에_ 사람은_ 되는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다라는_ 졸작이 끼워있는데 서두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러나_ 내 나이 40을 넘게 되여 뒤늦게야 깨달았지만 사실 사람은 <되는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다.이를테면_ 인생은 자기의 뜻때로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환경의 지배에 좌우되여 되는セ사람으로 살지 말고 자기로서 하는セ 사람으로 살자, 어쩌구 저쩌구 하는 내용이였다. 완성날자를 보니 작년으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제목에서 보다싶이 나는 일년사이에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될 부끄러운 궁지에 처하고말았다.    이렇게 비참한 결과는 오늘의 이런 이야기에서 비롯하게 되였다.    엊저녁 10시경에 전화가 걸려와 나는  청도의 어느 정부관원들을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오전 10시 도꾜역 야에스출구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결국 17분 지각으로 약속지점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그 사람들도 길이 밀려서 늦어졌던것이다. 나는 그들을 부근의 커피점으로 안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당연히 청도의 수출가공구의 투자유치문제였다.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소개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무슨 전 일본기업의 대표자나 되는듯이 리해하고있어서 나는 그냥 그렇지 않다고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유명한 인물도 아니고 또 별로 능력도 없는 놈이라고 해석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눈에는 내가 겸손을 부리는것처럼 보여 우리의 이야기는 이상하게 번져나갔다. 일본기업을 그렇게 자기 부하를 다루듯 언제든지 대기시키는 일은 나의 능력으로서는 도무지 될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지만 그 국장님은 자꾸 수출가공구에 일본기업을 소개해달라며 열심히 우대정책들을 설명하여주었다. 그 간절한 말씀에 나는 더 어떻게 대답을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시간 남짓 이야기하다가 아예 이 자리를 어서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음의 약속때문에 이젠 가봐야 하겠다고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국장님이 제발 저희들 가공구를 널리 선전해달라고 또 다시 부탁하기에 나는알겠습니다_. 응당한 일이죠. 만나는 사람마다에 청도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_ 통쾌하게 대답하였다. 어서 그들과 갈라져야 한다는 생각뿐이였던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국장님은 나의 손을 잡고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에로 가더니 선전책자를 좀 가져가라고 하였다. 난 고맙다고 대답하고 넘겨주는 책자를 받아 들었는데 그 책자라는것이 저그만치 들가방에 한가방 가득 차있었다.    이렇게 헤여지고 그리고 다시 만날 약속도 하면서 서로 친구로 지내자고 수다도 떨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나의 비극은 이제부터였다.    도꾜역에서 나의 회사까지는 뻐스로 7분가량(교차로의 정차시간을 포함)의 거리인데 걸어가려면 15분 내지 20분이 걸린다. 전차나 지하철이면 갈아타는 시끄러움이 있어서 념두에 두지도 않았다. 손에 생각지도 못했던 무거운 책자를 들고있어서 당연히 뻐스를 타고 들어가려고 정거장에 가봤더니 14분후에 다음 차가  오게 되여있었다. 14분이면 걸어서도 거의 회사에 도착할수 있는 시간이니 나는 서슴치 않고 걸어가기로 작심하고 씨엉씨엉 걷기 시작하였다. 요즈음 보기 싫게 커진 배의 살을 빼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것도 내가 걸음을 택한 주요한 리유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나는 손에 든 책자의 무게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였고 나중엔 내가 왜서 이렇게 많은 책자들을 들고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자기를 바보라고 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책자가 든 비닐가방끈이 나의 손을 파고들어가 손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였다. 두권이면 충분할것을 이렇게 사오십권이나 받아가지고. 이렇게 고생하는 바보가 어디 또 있으랴싶었다. 그렇다고 어디다 던져버릴수도 없지 않은가? 그들의 성의를 버리는것으로 되니 인간으로서는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할 짓이고 나는 방법없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가방끈에 손수건을 감아서 쥐고 회사를 향해 계속해서 어정어정 걸어갔다.    그렇게도 진심으로 나에 대해 설명하였는데도 그들에게는 내가 아주 겸손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부각이 되였다는 사실. 이제 청도에 가거나 아니면 그들이 다시 도꾜에 올때 그들이 나한테 품을 크나큰 기대를 생각하니 나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착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기대를 저버리게 되는 마음. 도망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차 그들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할수도 없고, 더우기 그들은 나의 이런 난처한 처지에 대하여서는 아예 리해하려고도 하지 않으니 세상에 이런 딱한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싶었다.    한편 중국의 투자유치를 담당하고있는 정부관원들의 열정과 더불어 조급성도 엿보인다. 중국의 현실 그대로인것이다.    나의 의지대로하는セ삶이 아니고 남의 의지대로 되는セ그런 삶을 살게 된 지금 나의 마음은 손에 든 책자만큼 무거워졌다.                                           2004년 11월 25일
36    [수필]미남이 되여보는 기분 댓글:  조회:672  추천:13  2009-02-11
 6월 5일이다. 기온 섭씨31도.    제2세대신분증이 부러워서 나도 오래간만에 장춘 푸양제 파출소로 갔다. 장춘시문화국의 집을 분배 받고 시정부숙소의 호구를 옮겨올 때  가본적이 있는 곳이였는데 그때는 내가 30살좌우였으니 그때로부터 벌써 십여년이 지난 셈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이 파출소는 옛집 그대로였다. 변한것이란 두눈을 부릅뜬 경관아저씨가 이제는 기분좋은 젊은 녀경관으로 자리바꿈하였다는것뿐이다.    줄 서지 않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꼭같은 장춘사람들. 그 역시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배반한 현상이였다. 붐비는 창구에 줄땀 날 정도로 밀고 다가갔다. 밖에서 밀든 닥치든 상관없이 바삐 돌아치던 녀경관이 해쭉 웃으며 반기는데 난 땀을 닦을새도 없이 낡은 신분증을 내밀었다.   새_ 신분증신청하러 왔습니다.»   신청서는요_? 사진 붙은 신청서를 안주던가요?»   네_? 누가요?»   아_, 요 옆에 가서 사진 찍으세요. 그러면 사진이 인쇄된 신청서를 줄겁니다.»   아_, 네 그래요. 알겠습니다.»    나는 이 붐비는 창까지 온갖 힘 다들이며 노력한것을 크게 후회하며 아쉬운 심정으로 밖을 나왔다. 옆의 사랑방 같은 집안에서 사진 찍는 작업이 진행되고있었는데 내가 들어가니 집안엔 모두 다섯사람. 경관 하나, 사진사 하나에 지금 사진 찍으려고 사진기앞에 앉은 녀성과 차례를 기다리는 처녀 한명과 그리고 땀투성인 나.    한주일전에 누님이 보내온 백가지꽃セ을 먹었더니 이렇게 조금만 움직여도, 아니 눈 껍적거려도 땀이 나군한다. 래일부터 절대 먹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하면서 나는 나의 차례를  기다렸다. 곱게 찍히려고 앞에 앉은 녀성은 몇번이고 빗질 하는데 나는 이러는 녀성들이 영 달통되지 않는다. 안해의 머리 빗는것도 무심히 건너보며 늘 생각했지만 아무리 빗어도 머리는 빗는켠으로 고정되지 않고 원모양대로 드리우는데 그래도 그냥 한곳을 같은 방향으로 빗고있으니 왜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남성들이야 그저 한곳을 한번씩 머리를 한바퀴 골고루 빗으면 끝인데 녀성들은 이 물리적현상에 대한 리해가 부족해서 그런지 언제 봐도 꼭같은 빗질이다.    나의 앞에 서서 순번을 기다리는 처녀는 그래도 다르다.준비가 있게 온듯, 이쁜 옷차림에 머리도 가쯘히 매고 왔다.그래서 그는 인상훈련을 하고있었다.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히쭉 해쭉, 방글 웃어보다가 입은 다문채 눈만 웃어보기도 했는데 원래 비좁은 방이라 꼭 그 거울속의 여러가지 얼굴표정이 그녀의 어깨너머로 보였다. 남의 녀자 쳐다보고있기가 쑥스러워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심양서 떠날 때 뻐스에서 보려고 넣었던 리상문학수상작품집을 꺼내들었다. 서울에서 출판된 이튿날로 사게된 기쁨을 읽을 때마다 향수하는 책이다. 두번째로 읽어보는 소설이지만 싫증이 나지 않는다.    나의 차례가 되여 사진기앞에 가서 앉았다.   머리_ 약간 숙이세요.»   오른쪽으로_ 조금 돌리세요.»   허리를_ 펴고.»   앞을_ 보세요.»    사진사의 명령에 따라 머리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는 사이에 사진 다 찍고 일어서니 컴퓨터에 나의 얼굴모양이 확대되여 나타났다.    이로부터 나의 미남경험이 시작이 된다.    사진사가 걸상에 앉더니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해서 얼마 안되여 나의 얼굴색이 희여지고 땀을 닦느라 문질러 놓아 벌겋게 된 번질번질한 얼굴도 희멀쑥하게 되였고 무슨 가죽같다며 딸애가 자꾸 골려주던 얼굴피부도 총각때처럼 반질반질해졌다. 대신 원래 너비가 너른 눈섭이 강조되여 작은 입이 섹시하고 벗어진 이마도 눈섭을 기준하여 생긴 공간으로 보이기에 비례적으론 퍼그나 작아진듯 했다.    참으로 신기하다. 내가 이렇게 멋진 남자였던가? 하며 속으로 좋아하고있는데 사진사녀성은 나의 오른쪽 이마우의 땀에 젖은채 내리드리운 머리카락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에 그 머리카락이 변해가는데 없어졌다가도 다시 나타난다. 원래 널직한 이마라 그녀는 아마도 그 머리카락 몇오리를 없애는것이 좋을지 그대로 두는것이 좋을지 망설이고있는듯 했다. 내가 볼바엔 그것도 정중한 얼굴인상에 자그마한 장난기 같은 미가 있어서 그대로 두면 좋을것 같지만 젊은 녀성앞에서 이렇게 해달라 말하기도 그렇고 하여 그저 참고 지켜보고있는데 그녀의 손은 자꾸만 그 머리카락의 존재를 가지고 시간을 끌었다.    커서의 움직임에 따라 나의 심정도 같이 움직여 (아, 그만 거기서 멈추라. 그렇지!  아니, 그럼 너무 하다. 이마가 두드러지지 않나? 그래 그렇게 다시. 그래 그대로 놔둬. 음, 아니아니. 아_ 아그대로_ 놔두면 좋을것 같은데, 씨.)    이렇게 정성들여 만들어진 얼굴이 한장의 종이에 프린트되여 나온걸 손에 쥐고 자못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파출소 창구로 갔다.어느새 사람들은 적어졌다. 이마우의 머리카락이 없어진것을 평생 한으로 간주하리라 굳게굳게 다짐하며 그 종이를 내밀었다.   가장_ 빠르게 해주세요.»   그러자면_ 성청(省廳-길림성공안청)에 가야 합니다.»   그래요_?»   네_. 이 신청표를 가지고 가서 사진값 물리고 거기 가서 다시 사진 찍으세요 .돈 백원 준비하시고.»   네_. 알겠습니다.»   아_, 호구부도 가지고 가세요.»   호구부_ 없는데_ »   그럼_ 인차 만들어드릴께요. 5원 내세요.»   네_.»    이렇게 효률이 높은데 대해 나는 정말 감격해하였다. 제일 시끄러운것이 중국에선 호구부인데 이렇게 간단하게 해준다니. 나의 옛 자료가 컴퓨터에 저장이 되여있어서 인차 새호구부를 가지게 되였다.나는 그걸 받아들고 부랴부랴 성청으로 향했다.    거기에 가서도 방금과 같은 사진 찍기 작업을 반복하였는데 나는 은근히 나의 이마에 다시 그 멋진 머리카락이 나타나주길 기대하면서, 그리고 좀더 이쁘고 멋있게 찍히려고 웃을가 말가 인상 조절하는데 찰칵 샤타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익! 다 틀렸군.)    이번엔 아마 그닥잖을것 같아서 기분이 잡쳤는데 아니나 다를가 컴퓨터에 나타난 내 몰골은 방금보다 훨신 주눅이 들어있었다. 오로지 다행으로 생각되는것이란 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이마엔 그 그리운 머리카락이 살며시 자리잡고있은것라 할가. 어찌됐든 이렇게 나는 미남도 되여보며 새 신분증을 가지게 되였다.    새 신분증을 받아들고 나는 정말 많은것을 생각했다.    신분증이란 그 사람모양 그대로 사진을 내야 하는데 사진사녀성의 손에서 얼굴에 박힌 까만 짐이 숨박곡질하듯 사라지고 늙은이의 동서로 깊이 패여있던 밭고랑주름이 서북동남방향으로 바뀌는가싶더니 사막의 바람이 불었는가 어디론지 아예 사라져버리고 나의 굵은 눈섭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춤추다 다시 가늘게 여위여 제자리에 정착해버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을 박고 어떻게 신분을 증명할것인가? 요즈음엔 지문, 눈, 생물세포로 본인검증을 한다는데 이렇게 마구 만들어진 사진이 진정 자기의 신분을 보장해줄수가 있는것이지 어지간히 근심이 되는것이 아니다.    아무튼 제2세대신분증을 포켓에 넣으며 나는 흐뭇해하였는데 새로운 호구부를 다시 보는 순간 어처구니없어서 입 딱 벌이고말았다. 딸애의 민족이 한족(漢族)으로 되였던것이다.내가 제정신이 들었을 땐 나의 몸은 이미 택시에 실려있었고 입으론 푸양제파이추숴(푸양거리 파출소)하고 지시했다.    결국 장춘시민족사무위원회와 원 사업기관과 가도판사처의 도장을 찍어오면 고쳐주마 라는 허락을 받고 그 파출소를 나왔다. 난 이젠 더 노력할 생각을 포기하고 그대로 심양행 뻐스정류소로 향했다. 일본에 두고 온 호구부를 다시 쓰면 될것이고 거기에는 분명히 조선족이라 밝혀있기때문에 이제 시간이 있을 때 다시 와서 고쳐도 괜찮으리라 생각되였지만 한편 새 호구부를 그 자리에서 만들어주는 자세와 잘못된 글자 두자만 고치는 번거로움의 차이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심사숙고하게 되는 과제를 강조하여 제기하지 않을수 없다고 심오하게 인식하게 되였다.    하루사이, 아니 꼭 네시간사이에 나는 이렇게 미남으로 되는 경험을 해보았고 또 하마트면 귀여운 딸애를 빼앗기는 체험까지도 해보고 혼줄이 났다. 한생을 더 산것 같은 기분이다.    아마도 미남이 아닌 놈은 미남꿈도 꾸지 않는게 좋을가 보다.                                            200년 6월 5일 저녁
35    [수필]무궁화 댓글:  조회:781  추천:21  2009-02-11
   몸을 비틀어 짜내도 이렇게까진 많은 땀이 나오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하루종일 밖에 다니면 이렇게도 많은 땀이 흘러내린다. 이 몸속에 얼마만큼이나 물이 들어찼길기에 이렇게도 많이 나올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기분이 아주 나쁜 불여름이다.    오늘엔 옛사무소를 실험실로 꾸려놓느라 땀도 많이 흘렸다. 오후 세시경까지 다 끝내고 나는 동료인 노구치와 함께 남은 시간을 리용하여 새로 이사간 사무소의 베란다에 놓을 화분통을 사러 갔다. 넓은 베란다가 너무 썰렁하여  큼직한 화분통을 몇개 사다놓으려고 며칠전부터 벼르고있던참이였다.    노구치와 나는 도이토라는 큰 홈센터에 가서 마음에 드는 화분을 골랐다. 노구치가 행복의 나무라는 좋은 이름을 가진 화분 하나 고르고 난 유달리 나의 눈을 끄는 무궁화를 골랐다. 가지 세개밖에 나지 않은 어린 나무인데 그 여린 가지에 꽃봉오리가 가득 매달려있었다. 파아란 잎에 분홍색꽃이파리가 속살을 드러낸 꽃봉오리가 귀엽다.    이튿날 베란다에서 무궁화는 꽃 두개를 피워주었다.사무실 동료들의 얼굴도 꽃과 함께 웃음꽃 활짝 피게 되였다.삼일째 되는날엔 아쉽게도 하나도 피여주지 않았다. 한송이는 오후에 피리라고 우리 모두가 서로 자기가 아는척 하면서 추측을 했는데 오후에도 피여주질 않았다. 필가말가 한것이 조금만 더 기다리면 피는 과정까지도 볼수 있을것만 같아서 자주 내다보았다. 어제 저녁 퇴근하고 베란다에서 중화료리를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며 베란다에 새식구들이 들어온 환영 파티セ를 열었었다. 콩크리트수림에 눌리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듯 갑갑한 대도시에서는 이렇게 푸름 한포기라도 모이면 감격에 목이 메일 정도다. 단 두송이의 무궁화였지만 장장 두시간동안의 화제를 만들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필가말가 하더니 끝내 피지 않았다. 금요일이고 또 다음주 월요일이 바다의 날이라 주말 삼련휴로 되였다. 나와 노구치는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낭아노켄에 있는 공장에 출장 가게 되였으나 그 출장준비보다 나는 그기간 고열의 베란다에서 고생할 무궁화가 근심되여 견딜수가 없었다. 작은 화분통에 부식토를 담아놓은것이 아마도 하루만 물을 주지 않으면 인차 말라버릴것 같아 나는 저녁에 물을 듬뿍 주고 인터넷으로 이틀후 비가 옴을 확인하고서야 조금은 안심되였다.    밤새 외롭게 홀로 필 꽃을 이쁘게 괴로워하며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    련휴가 끝나 부랴부랴 출근하니 사무원인 영선씨가 울상이 되여있었다.   다_ 말라버렸어요.»    묻지도 않은 말 꺼냈지만 난 무궁화를 말한다는것을 즉시 알았다.   그래요_? 어디 보자.»    베란다로 가보니 바싹 말라버린 잎들이 가지에 힘없이 매달려있었고 활짝 핀 꽃도 마른 이파리를 간신히 붙들고 달려있었다. 다행이라 할가 꽃망울만은 통통한대로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로 작은 화분통을 큰 화분통으로 바꾸어 부식토도 듬뿍듬뿍 담아놓고 허약해진 무궁화를 조심조심 옮겨놓고 물 가득 주었다. 그리고나서야 흐르는 땀을 훔치며 베란다의 걸상에 앉아서 불쌍한 무궁화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푸르싱싱하던 가지가 메말라 맨 끝머리는 시들어버린 머리를 떨어뜨렸다. 파아란 잎도 누렇게 늦가을 나무잎처럼 생기를 잃었다. 한참이나 태양의 불결에 타있는 꽃을 바라보다가 나는 가위를 집어들고 말라버린 가지를 끊어버리려고 했다. 시들어버린 가지를 되살리려고 하기보다는 시원히 잘라주면 식물은 용케도 새로 가지를 뽑아내는것이다. 그러나 나의 손은 인차 멎고말았다. 다치기만 해도 부시시 떨어질것만 같던 시든 꽃이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고 마른 잎만 맥없이 떨어졌던것이다. 순간 메마른 체구에 애써 피워온 꽃만을 지꿎게 붙들고 놓지 않는 무궁화의 굳은 마음이 전달되여 온다. 그 모습 름름하기까지 돋보여 가위를 든 나의 손이 다 떨리였다.    내 어찌 그러는 무궁화에게 함부로 가위질 할수 있단말인가! 수분이 모자라니 온 몸의 수분을 모두 집결하여 꽃망울에 공급을 한 모양이였다. 새 생명의 탄생만을 기원하며 말라든 이파리여! 가을에만 지는 락엽이지만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위하여서는 한여름이라도 선뜻이 헌신하는 이파리의 갸륵함이여! 이미 지워버린 꽃들도 새 생명을 위하여서 수분을 탐내지 않고 희생하였다. 아, 오로지 이제 곧 피여날 꽃망울만을 위한 무궁화의 가족들이여!    가지에서 용감하게 갈증과 싸우는 생의 부르짖음이 들려온다.    밑뿌리에서 생에 대한 의욕의 힘찬 맥동이 진동한다.     저녁 퇴근하며 다시 살펴보았더니 시든 잎과 가지사이로 새파아란 애어린 잎을 뾰족 내밀고있었다. 정말 거짓말 같이 시든 잎 모두가 떨어지고 그 시든 잎과 가지사이로 이렇게 합창이나 하듯 새이파리를 내밀고 캐득캐득 웃고있었다. 너무도 희한하고 감동이 되여 눈물이 찔끔 나왔다.   무궁화는 사랑만 있으면 얼마든지 억세게 살아갈수 있는법이라고 무슨 큰 철학 적오성이라도 얻은듯한 기분으로, 나의 가슴에도 무궁화 한송이 피여나고있었다.                                             2005년 7월 20일
34    [수필]망종セ의 웃음거리 댓글:  조회:561  추천:16  2009-02-11
하늘이 높아지면 나는 그냥 이렇게 마음이 들끓는다. 가을 특유의 매혹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뜩 이름짓기란 얼마나 현명한 고안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은 가을이란 이름이 있고 봄은 봄아씨란 이쁜 이름이 있다. 먹쇠가 있는가 싶더니 돌쇠도 있고 서울이 있더니 너울도 있었다.    일본의 무라카미는 독자들과 함께 일본의 러브호텔이름을 모집해보았는데 그 이름들이 참으로 가관이였지만 오늘 난 사람들의 이름얘기를 하여 여러분들의  웃음주머니를 풀어드리고저한다.    이름으로 운명을 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옛날엔 천하게 이름 지으면 운이 좋다고도 하여 개똥애란 이름마저 생겨났고 다음에 태여날 자식의 성별도 이름으로 기대해보았다. 그리하여 동생때문에 엉성한 이름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불쌍하게 많이도 있었다.    련줄포로 딸만 낳은 집들에선 딸애들의 이름이 거의 모두가 사내이름으로 된 경우가 많다. 사내의 이름을 달면 다음에 사내가 태여난다며 기대해보는 부모들의 희망이였다.  그렇게 이름 달기에 정성을 들이고 다시 정성들여_ 노력?하다나면_ 바라던 막둥이아들을 안게 되는 기쁨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동네에선 칠보_ 일조라고_ 불리워도 악의가 없어 좋다. 이름 잘 달았기때문에 끝내 아들 봤다고 한다. 고추 달린 놈만 쑤욱쑤욱 뽑혀나온 집들에선 그 반대고_     다 자란 사람들도 자기의 이름 가지고 신경 쓴다.    작가들이 그렇다.    옛날엔 자_(字)_,호_(號)마_  저 있어서 복잡했지만 지금은 거의 쓰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필명마저 시끄러워 달지 않고 제이름으로 맹활약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 필명을 다느냐 달지 않느냐에 따라 자기나름대로의 편리와 불편이 있는가보다.    십여년전 정세봉님의 소설이 유명해져서 말썽도 많았었는데 장백산セ잡  지사의 요구에 의해 내가 평론을 써서 소설과 함께 발표되였던덕분에 자연히 말썽은 평론에도 따라와 나를 외국에_ 류학 간 지주놈의 사위라고_ 까지 무함한 편지를 잡지사에 보내온 실례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 상식없는 어느 연변의 한 간부가 책상을 탕탕 치면서이_ 무궁이란자를 여기 빨리 데려와!하고_ 호통쳤다는 말을 들었는데 난 그때 그 말 듣고 뭐라고 할 말을 잊었다.     기어이 따질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행정급으로 말하면 나도 현퇀급セ이고 소속관계, 이를테면 지도와 피지도의 관계로 봐도 장춘시에 있는 내가  연변에 있는 그 사람의 령에 따라야 한다는 도리가 없고 장춘시가 길림성의 소재지라는것을 감안하고보면 차라리 내쪽이 더 높은데 있지 않느냐 하고 어깨 으쓱해지는판이였는데. 에이씨_, 대체 누가 사또냐_ 하고 배짱을 부리고싶었지만 장백산セ잡  지사에서 그 편지를 나한테 다 보여주지 않아서 나의 유치한 배짱이 배속에서 가라앉고말았다.    한편 만약 내가 연변에 있었더라면 그 봉변 받아야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무서워나기도 하였다.문화대혁명セ때처럼 얻어맞고 온 세상에 소문이 쫙 퍼지고 나의 이름 알려지고 하면 난 어디 가 머리도 못쳐들것이 아닌가. 나이 20대후반에 일찍 락동강 오리알 신세로 되고마는가 싶었다. 필명을 달아놓은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나 절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싶도록 자기를 칭찬해주고싶은적도 있었다.    후에 소설과 평론이 다 우수하다는 길림성위선전부의 결론이 나온 다음 연변의 량심있는 분들이 나한테 사과도 하여 내켠에서 오히려 죄송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필명으로 욕먹은 작가도 있으니 그 불쌍한 사람이 바로 괴인 조광명이렷다.    언젠가 중편소설 한편 투고하며 장난끼로(문학이란 이런 장난끼가 필요하지만) 필명을 망종セ이라고 달아놓았단다. 농사일만 해온 집안에서 자라나서 농사계절의 망종(芒種)을 생각하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땐 무슨 영문이라고 나한테 들려줬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후에 무슨 문필회의에 참가하러 갔더니 그때 원고를 담당한 편집님이 아주 엄숙하고 정중하게 악수를 굳게 하시며아_, 망종동무, 반갑소.라고_ 인사하시더란다.    울며 겨자먹기라는 말이 있지만 이럴 때에는 웃으며 욕먹기라고 하는가? 정말 망종(亡種) 같은 얘기를 나한테 들려준 조광명은 지금쯤 이 글을 보며 크-게 후회할것이다. 청도앞바다에 세메터파도가 일지도 모른다. 그의 한숨에.    장춘지방의 어느 시골에 묻어둘 얘긴데 말이다. 아마도 자기가 지금 이렇게 문단에 이름이 쩡쩡 울릴줄은 예상 못했던모양이다.    그래도 우리 같은 무명졸들은 괜찮은 셈이다. 당한 봉변도 유명무명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    일본 헤이세이(平成)문학의 대표자인 무라카미 하루끼(村上春樹)의 경우는 영 기가 막힌다.    무라카미 하루끼는 필명 달기 시끄러워서 필명을 달지 않았다고 한다. 원명을 쓰고있는 작가인데 일본에서 련속 히트작을 써내여 헤이세이문학의 대표자로 등장하게 되였다. 언젠가 그는 얼굴에 두드러기가 나서 마을 아줌마의 소개로 피부과에 갔었다. 요꼬하마의 어느 병원이라는데 피부과와 성병과가 같이 있어 두 과의 환자가 소금과 후추처럼 섞이여 대합실에 대기하고있었다고 한다. 외모로서는 누가 어느 과에 속하는 환자인지 모르고 대합실앞에는 환자들을 부르는 창구가 있고 그안에 진찰실이 있는데 비밀적인 검사는 카텐 한장으로 가리워놓은 뒤에서 진행되고있었다. 간이벽이 없으니 의사의 말이 다 들려왔는데.   부인_, 이게 트리코모나스(Trcomonas)입니다. 집에 가서 남편 한방매 갈겨주세요.라든지뺀모모씨 당신 잘두 나았수. 이렇게 깨끗이 치료된건 희구한 일인데. 그런데 이것을 교훈으로 이제부터는 벌거벗은 녀자와 2메터이내로 접근하게 되면 콘돔부터 씌우도록!라든지_ 하는 말을 들으며 대합실에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는 그런 병원이였다고 한다. 그러던중 무라카미사_--아으_!하고_ 간호사의 높고 길게 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너무 높아  이 병원에서는 새 간호원 들여올 때 목소리 높은 간호원만 받아들이는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무라카미는 그 부르는 소리가 싫어졌다. 환자들로 붐비는 대합실 제일 뒤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이름이 불리워지니 앞으로 나가는데 환자들의 시선이 일시에 무라카미의 몸에 구멍이나 뚫을것 같이 집중되였다. 그만큼 유명해지니 아는 사람도 많았던가 본데 뒤에서 간신히 앞으로 나가고있지만 얼른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간호사는 더 큰소리로 자꾸 무라카미를 불러대였다.   무_-라-카-미-사-아-으--!»    외모로선 무라카미가 어느 과를 진찰하러 왔는지 모르니 사람들은 저 유명한 작가도 그런 병에 걸렸나 하고 희한한 눈길을 보내주고있었던것이다. 그 정경 나도 한번 보았더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가.    무라카미는 무라카미아사히도_(村上朝日堂)에_ 이 이야기를 썼는데 마지막에 그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자기가_ 이제 잘못하면 성병과에 가게 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지망을 하는 사람들은(많이 있을테지) 그래도 필명을 달아놓는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로파심일가?»    나는 필명 둘씩이나 있으니 근심이 없지만 필명이 없는 작가들은 얼마나 후회하고 고민할가?    이제 필명을 달지 않고 원명으로 맹활약하고있는 학자 장춘식이나 수필가 서영빈이 이런 봉변을 당할것을 깨고소-하게 기대해본다.                                    2004년 10월 28일                       핫쵸보리사무실에서 회사일은 제쳐놓고  
33    [수필]돋보기부자 댓글:  조회:615  추천:9  2009-02-11
나는 돋보기 세개나 있다. 갖고다니는것이 하나 있고 집에 하나 있고 회사에 하나 있다. 이만하면 뭘 보는데는 절대 불편이 없으리라고 나 스스로 마음이 든든하다. 이러는 내가 무슨 지독한 로안인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건 아니고 그저 나에게 돋보기 있다는 얘기다. 틀림없이 세 개다. 원래는 네개이던것을 세개로 줄였다. 처형에게 하나 주었던것이다.    3년전 나는 40여세되기까지의 기간 끈질기게,그리고 완고하게 견결하게 지켜왔던 1.5의 시력이 점점 부실해지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올빼미눈이라고까지 불리웠던 나였는데,사실 올빼미가 그렇게 시력이 좋은지도 모른채 나는 그냥 올뻬미로 불리우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살아왔다. 그러던 내 눈이, 어쩌면 나에겐 유일한 자랑거리인듯한 나의 시력이 점점 못해지다니!    너무나 겁이 나서 안경상점에 가서 사정을 구구히 얘기하고 안경을 사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게 잘못된 걸음이였다.안과병원에 가야하는데 말이다.    40대후반의 아줌마가 거짓말 보태서 한 한시간남짓 내 눈을 못살게 굴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로안이니_ 돋보기를 챙겨야하겠습니다.이_  다.    이런저런 유리를 번갈아 내 눈에 갖다 대보며 시끄럽게 이것저것 묻더니 사정없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당신은 늙었습니다라는 판결을 내린것이다.  아니_, 그럴수가? 저 이제 42인데요.»  빠른_ 사람 있어요. 손님은 조금은 빠른 축이네요.»    나의 심정따위엔 아무런 흥미가 없는듯 그녀는 계속 나에게 안경을 살것을 권고했다.   인차_ 안경을 걸지 않으면 더 나빠질수도 있어요. 로안에 근시까지 겹쳤습니다.»   네_? 근시? 그런거 어디 있습니까? 로안은 가까운걸 보지 못하는데 근시라니요?»   그러게_ 말입니다. 그러니 근시돋보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유도를 하다가 그녀가 내주는 안경이 유명한 브랜드로 6만엔짜리였기에 난 인차 그 상점을 나와버렸다. 결국엔 안경을 파는것이 목적이요 나의 눈을 근심하는건 아예 처음부터 거짓이였다고 생각되였다. 그렇다, 내 눈이 나빠야 안경장사 좋을수 있으니까.    그땐 나의 자존심이 시퍼렇게 살아있어 로안은 도무지 인정할수가 없었다.    그후 나는 곤명으로 출장갔다가 관광기념품매대에 진렬되여있는 수정돋보기에 마음이 끌려 200원 주고 하나 사고말았다. 내심으론 언녕 로안을 인정한 일이고 또 전번 일본에서 본 안경값 6만엔에 비하면 이는 수정인데도 퍽 싸니까 하나 갖추어놓자는 생각이 자존심과 부끄러움을 살며시 밀어놓았던것이다. 그날로 돋보기 걸고 품고 갔던 책 펼쳐드니 아, 잘 보이기로 정말 이 세상 다시 얻은것 같았다. 눈에 건 안경이 아까와 서라도 책 더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나의 로안에 대한 저항 혹은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던 마음의 도망이랄가 하는것은 슬며시 기척없이 사라지고 나의 생활에 돋보기가 뛰여들게 되였다.    그후 이렇게 저렇게 해서 몇개 더 사게 되였는데 그런데 이 돋보기란것이 대체 나의 인생에 무슨 보탬이 되느냐 싶어서 오늘 새삼스럽게 손에 들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생(生)이란 식물을 내놓고서는 일반적으로 눈이 펀들펀들 떠있는가에 따라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긴 숨을 쉬는것은 보이지 않으니 우선은 눈을 볼수 밖에 없는것이다. 죽는다는 말을 눈을 감는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에겐 눈이 중요한데 눈이 중요하게 되는것은 그 눈으로 사물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보는 행위, 식물과 동물을 보는 행위는 모두 이 눈으로 하게 된다. 도적놈도 이 눈으로 발견하고 비리, 부정부패도 이 눈으로 발견한다. 아름다운 녀성도 이 눈에 보여지고 신사다운 사내도 이 눈에 비친다. 호박꽃도 장미에 못지 않게 아름다와 보여지는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 눈으로 보고 제멋대로 생각하게 되는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했거늘 그 창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엿볼수 있다고 하니 정말 거짓말 같기도 하지만 남과 대화할 때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정말 그가 뭘 생각하고있는가를 알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중요한 눈에 돋보기를 건다하니 꼭 마치 유리창을 달아놓은듯 하다. 그러면  눈의 마음의_ 창(窓)노_  릇은 어찌될것인지? 닫혀진 마음으로 될것이나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많은 학자들의 안경을 떠올리고 보면 유리창속의 눈은 심오한 학술의 품위를 갖춰주는듯도 하다.    나도 회사에서 돋보기를 걸고 서류들을 볼 때 사무원아가씨에게 참_, 멋지네요라는_ 호평을 딱 한번 들어본적이 있다.    그러니 돋보기부자는 멋진セ부자다. 이렇게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며 자기위안을 한다.    한손에 가시 쥐고 또 한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몇백년전의 옛날 역동(易東)선생 우탁(遇倬)이 이런 시조를 지었다 한다.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 없지만…                                           2006년 6월 9일
32    [수필]추석달을 서천에 바래줘야 하는데 댓글:  조회:577  추천:8  2009-02-11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밤에 잠이 오지 않는것은.    태풍 21호가 중국 복건성을 향해 느릿느릿 가더니 27일엔 일본 오끼나와 남쪽에 멈추어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가을의 남해의 경치에 매료되여 구경에 정신을 파는것인가 했더니 대륙의 기운에 밀리워 더 전진하지 못하는거라고 TV에서 방송 한다.    이튿날엔 90도로 꺾어져 일본을 아래로부터 우로 휩쓸며 북상하더니 가는 곳마다 인간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듯, 허나 매스컴은 무슨 즐거운 일이나 전하듯 신나게 떠들어댄다.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하는 일이 발생되면 매스컴의 광고값이 올라가기때문에 어딘가 그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있는것이다. 몽땅 휩쓸며 북상하던 태풍은 동북지역에 가서 또 90도로 꺾어져 이번에는 다시 태평양에 들어섰다.    그놈 태풍의 심사 정말 모를 일이다.    인생도 꼭 이런 자연과 같이 분주하다. 짧은 인생이지만 뭔가 질풍처럼 달려온것 같은 생각때문에 추석의 밤이 더 애처롭다. 어쩌면 나의 체구도 태풍에 시달리는 한그루의 나무와도 같이 생각되였다.     추석밤. 퇴근하여 홀로 저녁 챙겨놓고  마신 외로운 술이 피곤과 함께 나를 괴롭혔다. 멍하니 밖의 밝은 달 쳐다보며 생각을 비워본다는것이 나의 마음은 그저 더 착잡해지기만 하였다.    살기를 40여년. 허둥지둥 달려와보니 지금이다. 고향을 떠난지도 이제 십여일만 지나면 10년을 넘게 된다. 부모님도 이젠 계시지 않아서 휘영청 밝은 달만 보면 괜히 이렇게 슬퍼진다. 내 인생이 슬퍼지고 이 세상이 슬퍼지고 그리고 남들까지도 슬퍼진다. 왜서 이렇게 아글타글 해야 하는지? 인생도 자연의 한가지 속성이라면 그다지도 슬플 일도 아닌데 사람은 자꾸 이렇게 슬퍼해 한다.    세상 떠난 부모님과 고향을 그리며 이 밤 새워야 하는데 밀려오는 피곤을 어찌할수가 없다. 마신 술탓으로 책임을 밀어놓고서도 그냥 마음 한구석은 무겁기만 하였다.    뭔가 해야 할 일이 뒤를 쫓는것 같다.    추석에 할 일이란 시간을 흘려보내며 저 중천의 달을 서천에 바래다주는 그것밖에 없음을 알고는 더 서글퍼진 내 마음이다.                                             2004년 10월 11일                                (제목과 첫줄은 추석날에 쓰고.)
31    [수필]빠알간 고추때문에 댓글:  조회:676  추천:12  2009-02-11
작년에 베란다에 심어놓은 남방고추(학명은 모르겠으나 아주 작고 매운 고추를 고향에서는 남방고추라고 불렀다.) 한포기를 거두어 이파리 떨어진 빨간 고추만을 출입구에 달아매놓았는데 오늘 나는 그 고추를 올해의 새고추로 갈아걸었다.     작년 수확을 거둔다음 고추대를 잘라버렸는데 올해 봄에 그 긁에서 새싹이 나오더니 이렇게 제법 다닥다닥 고추를 열렸던것이다. 겨울이라도 화분통이 마르지 않도록 나는 일요일마다 물을 주는데 고추대를 끊어낸 텅 빈 화분통에도 빠짐없이 물을 주었던것이다. 도꾜의 겨울이란 풀이 퍼렇게 살아있는 겨울이여서 이렇게 게으름없이 물을 주느라면 화분통에서 이름 모를 풀이 한포기이상은 자라나는데 이름모를 잡초면 어떠랴! 나의 정성은 에누리없었다.     그러한 요행을 바라며 고추긁만 남은 화분통에 그냥 물을 주었더니 기다리던 풀은 자라지 않았지만 대신 봄에 그 고추긁에서 싹이 나와주었다. 난 고추의 수명은 한해로서 다음해엔 두번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줄로만 알았었는데 이렇게 긁에서 새싹이 나오니 당혹하기까지 했다.     여름에도 게으름없이 물을 주었더니 이렇게 가슴이 벅찰정도로 열매가 많이도 열렸다. 늦가을, 아니 립동이 지났으니 초겨울이 되는 오늘에 해 따스한 베란다에서 빠알갛게 나를 반겨주고있지 않는가!     나는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득 안고 그 고추를 잘라서 묶었다. 고추대를 비틀어서 끈을 만든 다음 그것으로 고추를 묶었다. 옛날 싸리나무단을 묶던 기억이 생생해진다. 정성들여 묶은 고추를 나는 작년에 매달아놓은 고추와 갈아달았다. 출입구왼쪽벽, 사각형거울곁에 달아놓았는데 하얀 벽에 달려있는 빨간 고추는 한결 더 타오르고있었다.     곁에 걸어놓은 사각형거울속엔 향수의 얼굴 하나 담겨져있었는데 고추와 체경을 번갈아보는 나의 눈에는 바보처럼 눈물이 고인다.                                          2004년 11월 28일
30    [수필]지진과 고향사진 댓글:  조회:742  추천:15  2009-02-11
전번의 태풍의 피해로 숱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 매스컴에서 한창 중점적으로 보도하고있는데 이어서 니카다에서 7급 지진이 일어났다 .원래는 6급이상이라고 하더니 오늘 뉴스에 7급으로 정정했다.    나도 일본에 와서 체험한중 제일 무서운 흔들림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체험이란 무어나 다 좋은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까지 지진이 일어난지 한주일이 되는데 지진의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8만명이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 추운 밤에 소학교랑 피난소에서 집단생활을 하고있다. 일본 전국각지에서 동원하지도 않았는데 볼런티어가 달려가 고 기증금 모으고 원조물자가 실리워간다. 삽시간에 물건이 넘쳐났고 이젠 물질적생활보다 정신적생활이 더 문제로 되고있다.    자동차에서 지내던 사람이랑 집단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스트레스때문에 사망해가고있어 큰 문제로 되고있다.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여서 정말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으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오늘엔 집 떠난 사람들을 위하여 집에 가서 귀중한 물건들만 챙겨서 가져오는것을 허락한다는 발령이 내렸다. 태풍과 지진에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때문에 지금까지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던것이다. 일본자위대의 직승비 행기로 실어다주었다. 각기 자기의 집으로 가서 귀중한 물건들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딱 두시간만 허락하였다. 아직도 언제 또 지진이 와 흔들릴지 모르겠고 만약 또 흔들린다면 금이 난 벽이 무너질 위험도 있고 산이 흐트러져 내릴 위험성도 있기때문에 단독행동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여진이란것이 글쎄 5급, 6급이 되여 서너번씩이나 흔들어대니 이번 지진은 정말 가늠이 가지 않는다.    두시간후 모두 자기의 물건들을 챙겨가져왔는데 텔레비죤방송국기자가 취재하는걸 보고 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어린애의_ 책가방을 가져왔어요. 이젠 학교도 가야 하는데끇   내복과_ 양말 챙겼습니다.»   강아지를_ 데려왔어요. 한식구인데. 이 놈이 글쎄 텅빈 집앞에서 혼자서 집지켜섰지 뭐얘요. 에이구. 며칠동안이나.»    모두들 자기의 귀중한 필수품을 챙겨가지고 부랴부랴 모여왔던것이다. 단 두시간만 주어진 귀중한 기회였기에 사람들은 모두 정말 자기가 제일 필요로 하는것만을 손에 들고 왔던것이다.    그런데 그중 한 녀성은 손에 커다란 사진 한장을 쥐고있었다.   얼마나_ 아름다운 경치입니까? 우리 고향이 언제 다시 이렇게 회복이 되겠어요?눈굽을_ 찍으면서 말하고있는 그 녀성의 손에 쥐여있은것은 지진이 일어나기전에 찍은 고향의 사진이였다.    한장의 옛고향, 이제는 옛고향으로밖에 부를수 없게 된 고향, 적어도 일주일전까지 는  무던히도 아름다웠던 고향의 모습을 담은 한장의 사진뿐이였다.   …                                           2004년 10월 29일
29    [수필]자유의 공간, 누드신사 댓글:  조회:621  추천:13  2009-02-11
오늘은 청도에서 광명이란 작자가 오래간만에 메신저로 말 걸어와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나_ 지금 누드다._ 하고 알려주었더니 이 걸작 롱 잘하는 사람이ㅋㅋㅋ_ 누드신사.라고_ 날 골려주었다.    그래서 난누드로_ 있을 때 난 신사가 된다._ 하고 말했더니야_, 수필제목이다.라고_ 하기에 고정한 나는 정말 그게 수필제목으로 될것인가? 하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컴을 두드리게 되였다.    언제나 난 일방적으로 골려대는 판이라 번마다 대충대충 응대를 하고있는 나였지만 그래도 즐거운 대화가 잘 오가기에 난 광명이와 얘기나누기를 좋아하고있었지만 이렇게 알몸으로 대화하기란 처음이였다. 대방이야 날 볼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누가 엿보는것 같아서 처음엔 퍼그나 부끄러웠지만 그런 부끄러움도 몇분후엔 다 어디로 숨어버리고말았다. 혼자만이 만끽해보는 개운함, 부담없이 가지게되는 개운함, 이때까지 찾아보기 힘들어서 개운함은_ 비행기표 없어서 날 따라오지 못했는가_ 했더니 이렇게 그냥 나의 곁에 있은걸 모르고 내가 못본척했음을 뼈가 저리게 통탄하며 나는 이 하루를, 겨우  얻어온것 같은 하루를 아낌없이, 남김없이, 모조리, 깡그리 향수하리라 다짐하였다.    내가 오늘 누드로 된것은 내가 음탕해서가 아니고 또 무슨 변태성적인 무슨 습관이 있어서는 더구나 아님을 우선 정중하게 성명해둔다. 이게 다 이 몸을 통째로 찜하려는 이 날씨때문이였음을 두번 다시 정중히 밝혀둔다. 날마다 파괴해대니 이 자연이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온 지구를 불덩이로 태우고있으니 굳이 내가 누드로 된 원인을 누구의 탓이라고 하려면 난 날 포함한 인간의 탓이라고 말할것이다. 요즈음엔 사우나가 많기도 하던데 이대로 그냥 무더위가 지속되면 다 문 닫을짓이다.    휴일 아침이라 늦잠에서 깨여나 샤워하려고 알몸이 되였는데 방바닥이 어지러운것을 보고 집 청소하면서 땀 흘릴 일 생각하고 우선 바닥 닦고 그 땀을 시원한 샤워로 씻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렇게 행동을 하였다. 샤워실에서 나와 타올로 몸의 물기 씻으며 컴퓨터 켰다. 메일박스 들여다보고 메신저에 나온 사람들 살펴보고 그러다나니 우에서 말한 에피소드가 있게 되였다. 다음으로 난  누드-원인-무더위-여름 이런 순서로 생각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 바로 여름을 구가한 글을 읽어본적이 없다는것이다.    무더위를 구가한 글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다. 봄이나 가을이나 겨울에 대해서는 구가하고있지만 왜서 이 삼복의 무더위를 구가하는 사람은 없을가? 그런데 더운 여름에 랭정히 생각해보니까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죽도록 더운 이 삼복철을 구가 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워서 죽겠는데 뭐가 좋다고 쾌지나 칭칭나세를 부를소냐. 자기가 싫으면 객관대상도 주관의식에 의해 싫은것으로 되고만다.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옹졸하다. 꽃이 만발한다고 봄이 좋고 나무 이파리가 붉게 타오른다고 가을이 또한 좋고 순진하고 말끔하다고 눈덮인 겨울이 좋지만 몸을 비틀어 짜듯이 몸의 물기를 빠짐없이 짜내는 이 여름을 구가할 리유가 없다.    그래도 나처럼 한번 누드로 차리고(?) 무더위의 여름을 생각해보시라.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것이 아닐가?    우선 인간이 거짓을 벗어던지는 계절이다. 중년사나이의 웃팔에 큼직하게 남아있는 우두허물이 그대로 드러나고 보이기 싫어하는 녀성들의 웃팔밑살이 드리운채 드러난다. 울퉁불퉁 사나이의 근육이 드러나서 좋고 부드러운 곡선과 투명한 피부를 자랑하는 녀인의 드러난 몸매도 눈길 사로잡는다. 그래서 나는-해 비추이는 나무에 매달려 합창하는 매미의 노래소리 더 뜨겁고 푸른 이파리 시든 몸으로 간신히 가지에 매달려있는 한 여름의 더위라도 나는 싫어하지 않는다. 그렇게 잘 매달리던 감기도 한참은 멀리 가버리는 여름이다.    수림의 혜택을 제일 감명깊게 느낄수 있는것도 여름이요 바다의 품에 안겨보는것도 여름이요, 쳟 좋은 땀조차 흘리고(리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한구절)_ 싶어지는것도 기실은 이 여름이 아닌가!    홀로 방에 있을 땐 거치장스러운 옷따위들 다 벗어던지고 아예 알몸으로 책상을 마주하고 앉을 때의 거뿐함, 더울때 라체로 되여보는 쾌감은 형언할수 없이 상쾌하다. 시원한 샤워때와 꼭 같다. 스스로 자유를 만끽하는 기쁨이랄가.남의 눈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는 이렇게  한번쯤은 홀로 라체로 되여보는것도 오스스메(권고거리라는 말). 옷 입는다는것이 이처럼 거치장스런 일이였던가 싶을 정도로 홀가분해지는 기분이다. 땀이 흘러도 그대로 놔둘수 있는 자유도 그리 많지는 않을것이다.    자기 몸에서 나는 땀마저 자꾸 제한해야 하는 구속스런 삶,피부가 해빛 맞지도 못하게 옷으로 감아놓아야 하는 삶.자연의 섭리에 맞지도 않으면서 지켜가야 하는것은 오로지 남의 눈을 의식하기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남의 눈이 없을 때 한번이라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보는것이 옳지 아니한지?     그런데 대체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이 사회 살아갈수 있을소냐?     아, 무더위의 기습, 속박의 사슬! 누드신사의 할 일없는 날이여.                                            2006년 8월 12일                        심양의 소란스런 닝따쑈취의 숙소에서
 도꾜 무사시노시(武蔵野市)의 칸다(神田)씨(86세)부부는 매년 설이면 꼭 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가족사진을 찍는것이였다.    60년간 빠짐없이 견지해온 이 일은 생각하기엔 너무나 간단한것 같지만 일생동안 견지하려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것이다.    결혼때의 두명으로부터 지금은 손자손녀까지 13명의 대가족으로 번영하게 되였는데 꼭 설날에 다 모여 정복을 하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는것이다. 처음엔 둘째사위의 불만도 있었지만 결국엔 오늘에 이르기까지 딸이나 사위나 모두 한사람도 빠짐없이 사진에 생의 자취를 남겨놓고있다는것이다. 처음엔 정복을 하는것에도 의견이 있어서 세타의 모습으로 사진을 찍던 사위도 몇해후엔 정복을 하게 되였다고 한다.요미우리신붕セ톱기사로 수십장의 사진이 렬거되였다. 새해에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바로 이렇게 가족이란 쩨마가 첫 기사로 나오게 되는것을 세상이 알게 되여  한결 따뜻한 기분이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지난 한해는 정말 진저리나는 한해였다. 뉴스를 보아도 어디 밝은 소식이 없고 매일 어디에서 얼마 사망했다, 무슨 사고 났다 등등 내 얼굴이 환히 펴질새가 없었다. 거기에 보험금을 먹기 위해 남편을 죽인 일이나,부모를 죽인 일, 자식을 살해한 사건들로 꽉 찬 한해였다.가족의 반연(絆緣)이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80퍼센트나 되는 차디 찬 세상이였다.    겨우 그러한 한해를 견뎌냈다고 안도의 숨을 쉬는데 년말에도 불쾌한 대화가 오갔다. 내가 아는 젊은이인데 설날에도 어머니보러 가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가 하는 대답이 기가 막힌다.   멀지_, 시끄러워서요. 비행기를 타고 어쩌고 얼마나 시끄러워요?»    시마네켄에 부모가 계신다니 리해セ가 가는 일이다. 같은 시내에 살면서도 일년에 한두번밖에 부모한테 가지 않는 도꾜의 차거운 인정을 느끼고보면 말이다.    그런데 새해에 들어서서 이렇게 따뜻한 기사가 나오고 또 텔레비에서도 눈물 나는 장면을 띄워주어서 오래간만에 내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어머_, 새해에 들어서더니 얼굴이 넙죽해졌네.하고_ 안해가 호들갑을 떨 정도였으니까.넙죽해セ졌단다. 나 원참.    텔레비에 나온 장면이란 바로 아래와 같은 일이였다.       요즈음 일본의 개그맨으로 하나와라는 사람이 유명해졌는데 그는 가츠セ란 무식한 격투선수를 제재로 전설의_ 사내-가츠의_ 무식함을 밉지 않게 까밝히며 웃기는 능수였다.      한가지만 례를 들면 어느날 가츠セ에게오늘_ 해는 어느쪽에서 떴어요?하고_ 물었더니 머리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하더란다.   오른쪽_?»    이 무식한 가츠セ,전설의_ 사내가_ 눈물겨운 생활담을 하여 나의 눈시울을 적시였던것이다.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살면서 모든 수모를 받아오다가 가츠セ는 동네에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불량소년으로 되어버렸다. 그의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소년원(미성년범죄자를 가두어놓는 시설)의 자동문이 열렸다 닫겼다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 문어귀에서 살고있었다는 표현이다. 그러던 그가 도꾜에 가서 일본 제일의 격투선수로 되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고 농촌의 뻐스정류소까지 어머니가 바래주었는데 뻐스가 떠날 때 어머니가 허리춤에서 돈 천엔짜리 지페를 한장을 꺼내 가츠セ의 손에 쥐여주었다. 수년간 허리춤에 간주했던 어머니의 전부 재산이였다. 꾸겨진 천엔짜리지페 한장을 받아쥔 가츠セ가 눈을 적시고있는데 어머니께서 성공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하더란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기로 몇십년, 그는 성공하여 일본의 챔피언까지 되고 매스컴의 유명한 탤런트로도 되였지만 한생을 고생하신 어머니께서는 그의 이러한 화려한 삶을 다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가츠セ는 지금 반백이 넘어섰지만 아직도 어머니한테서 받은 그 천엔짜리 지페를 소중히 보관하고있다. 그 지페를 내보이며, 옛날 가난에 쪼들려 배를 곯아도 울어본적 없고 마을의 싸움대장으로 그렇게 얻어맞아도 한번 울어본적이 없고, 일본의 챔피언으로서 격투경기장에서 그렇게 피가 터져도 눈물 한번 흘리지 않던 그가 그 지페를 품에서 꺼내보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고있었다    옛날 어머니를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것은 가츠セ뿐만이 아니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족이란 이 평범한 테마에 집착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가.신쥬꾸의 이세탄백화점의 사진관에  가족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가족이 이십년동안에 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디지털시대의 컴퓨터와 디지털사진이 발전하여 사진업이 크게 영향을 받아 적지 않은 사진관이 문을 닫게 되였는데 유독 가족사진업만은 10억이나 매상고를 늘이고있다고 한다. 늦었지만 이제야 이 사회의 인간들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것을 찾게 된것인 모양이다.    바다밑의 천연가스발굴도 필요하겠지만, 달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연구도 항아(嫦娥)님을 생각해서라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자연을 파괴하기까지 하면서 담을 만들고 삼림을 베어내고 남의 나라에 폭탄을 떨어뜨려야 하는것도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리석은 나의 두뇌로서는 아직 모르겠지만, 따뜻한 가족애만은  시급히 꼭 필요한것이 틀림없을것이라고 생각하며 구경 무엇때문에  우리의 생이 이렇게 외롭게 되였을가 하고 머리를 갸웃해본다.아체의 남쪽바다에서 가족을 잃은 어린이들에게, 그리고 무의미하게 친인을 잃어가는 서쪽전쟁터의 모든 인간들에게 누가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되돌려줄수가 있을가!인간의_ 물음에 대답을 하는데는 철학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고_ 헤겔이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불안한 이 세상에 필요한것은 가족애라고 새벽 닭이 목청 돋군다..                                           2005년 1월 9일                                  양지 바른 자유각에서
27    [수필]일본의 젊은 예술가들 댓글:  조회:534  추천:10  2009-02-11
전번주 금요일에 갤러리에 간적이 있다.    눈에 무슨 꼬리 달린것 같은 그림을 박은 엽서 한장이 나의 동료한테로 부쳐왔다. 청첩이란다. 젊은이들이 자기 작품 전시회를 여니까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하기에 얼씨구 좋아라 하고 나도 묻어나섰던것이다. 대학교때부터 난 미술, 사진, 서예에 흥미를 가지고있었던것이다. 일본에서도 여러번 전시회에 다녀봤지만 젊은이들만의 전시회는 가본적이 없었다.    친구를 따라 들어간 갤러리는 오못데산도오(表參道)에서 한참이나 골목으로 들어간 곳에 있었다. 아오야마대학회관옆이였는데 거기엔 이런 갤러리가 집중되여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5, 6층이나 될가 하는 작은 층집이였는데 출입구에 들어서니 오른켠에 웃층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올라가는 첫단계에 토족금지_(土足禁止)라고_ 씌여진 패쪽이 세워져있었다. 일본에선 신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곳엔 다 이런 글자로 주의를 주는데 우리 말로 하면 흙발금지라는 말이 된다. 흙이란 보고 죽자 해도 없을 정도인 도꾜에서도 아직 이 말 쓰고있는것이 신기하다.    신을 벗고 2층으로 올라가니 벌써 여라문명이 와있었다. 이름과 주소를 적고 전시장에 들어간 나는 아연해지고말았다.   아니_, 이건 장난이구나!!!»    일본식주택에 전시하고있었던것이다. 벽에 저마다 대여섯점씩 작품을 달랑 걸어놓고 그 앞에 작자가 서서 설명을 하고있었고 다다미방에는 맥주병과 쥬스, 그리고 마른 안주감 몇가지 놓여있었다.   자_, 여러분 파티 시작하겠습니다.하고_ 누군가 말하여 나도 그켠으로 돌아보았다. 누군가 건네주는 깡통맥주 하나 받아들고 나는 전시자의 소개와 그들의 테마소개들을 들었다.  작자가 여라문밖에 안되고 나처럼 구경 온 사람은 아주 적어 방에 모두 한 20명정도밖에 없는 간소하고 제멋대로인 전시회였고 리셉션이였다. 어느새 젊은 녀성 서넛은  키모노로 갈아입었고 키모노를 입지 않은 녀성들은 초현대파식복장이라고나 할가 하는 괴이하고 섹시한 옷차림이였다. 남성들의 복장은 캐주얼도 있고 양복차림도 있었다.    간단한 소개가 있은 다음 정식 관람이 시작되였는데 그 내용이 세상 예술체재를 거의 다 포함하여 나는 놀랐다. 사진, 미술, 공예, 영화, TV광고 등등. 마지막엔 콘서트까지 네곡으로 조직이 되여 정말 종합예술전시회였다.주제가 일본정신인화_(和)였다_. 그래서 전시회장을 전통      주택으로 장식된 곳을 고른것이였다. 비좁은 방 두칸에 다닥다닥 붙여놓은 매 작품마다엔 비록 TV작품이 손바닥만한 작품들뿐이였지만 모두 일본 전통이 다분히 슴배여있었다.    그중엔 전쟁반대의 테마도 있었다. 처음 난 그 작품을 주의해보지 않았다. 뭔가 투fp기 같은것으로 두루 붙여서 만든 지저분한  조각작품(?)이였는데 색깔이랑, 선이랑 여간 나의 눈을 끌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기엔 중국어, 우리 글을 포함하여 세계 각국의 글자로전쟁반대セ,부쉬는_ 전쟁광이다라_  는 내용의 글들이 가득 씌여있었다. 그림자체처럼 전쟁의 세상은 이같이 더러운 세상이라는 뜻이였다.    더러운 세상을 더럽게 표현한다는 작가의 주장이였던것이다.    그러고보니 몇달전의 쓰레기작품이 생각난다.    그날 안해와 같이 드라이브를 하다가 앞에서 달리는 차의 궁둥이를 보고 나는 웃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 차엔 슈퍼의 비닐봉투가 가득 붙어있어 어느 전쟁터의 타다만 기발인양 너펄거리고있었던것이다.    별 악취미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운전수를 뒤창넘어로 보았는데 어여쁜 처녀가 몰고있었다. 사실 그것은 악취미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일종의 항의였던것이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산더미로 쏟아져나오는 쓰레기를 근심하여 이렇게 쓰레기를 적게 만들자는 외침을 표달하고있는것이다. 지구의 환경을 근심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애탄 마음을 저 비닐쓰레기기발로  호소하고있는것이다.    후에 나는 일본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인 긴자에서도 이런 차를 보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것도 엄청난 수준의 예술이였다. 그만큼 훌륭한 예술작품이 어디 또 있으랴.                                           2004년 10월 28일
26    [수필]와인 마시며 듣는 총소리 댓글:  조회:535  추천:13  2009-02-11
 총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글을 쓴다. 나의 뒤에선 포격소리, 총소리, 고함소리, 비명이 들려온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다. 함께 장엄한 음악소리도 들려온다. 다 부서진 땅크, 연기를 내뿜으며 곤두박질하는 비행기.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리고 초가을 굶은 모기 한마리는 이 가래 같은 손바닥도 두려워하지 않고 앵앵 나의 피를 노려본다.     즈붜의 금망대주점(金罔大酒店), 할인료금 90원짜리 싸구려호텔에 투숙하여 중국의 국경절을 하루 앞두고 호텔방에 홀로 앉아서 와인잔을 기우리고있는중이다.     땅콩 한봉지, 로신작품에 나오는 공을기처럼 나는 홀로 소라마메(蠶豆) 한알에 와인을 한모금 마시며 침대 하나로 꽉 찬 이 방에 앉아서 뒤에서 분주하게 울리는 총소리와 고함소리, 포격소리를 들으며, 손을 휘휘 저어 모기도 쫓으며 이렇게 흰 벽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두터운 현정부의 토성, 룡정시내의 넓은 길은 온통 벽돌장과 돌멩이투성이다. 두사람이서 겨우 당겨쏘는 새총, 탄알은 벽돌장이였다. 그때도 이렇게 총성이 울렸었다. 이렇게 고함도 쳤었다 .그때란 바로 <<문화대혁명>>때다.해방되여 불과 20년만에 세상에서 명명할수도 없는 <<전쟁>>이 일어났던것이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セ이라 한다. 패를 갈라 사람죽이기를 해대는 일이 분명 전쟁인데도 문화セ이고 이혁명セ이라 하였었다. 전쟁이란 침략전쟁, 독립전쟁, 내전 등 이렇게 이름이 있는데 그때의 전쟁은 그 누구도 이름 지을수 없다. 오로지 <<혁명>>セ인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명을 자르는 바로 그런 직통배기름이 차라리 타당하였는지도 모른다.    철이 없었던 나는 어느 겨울날 아버지가 투쟁받으러 가는 그 행렬에 뛰여들어 사람들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다니며 희희닥거리며 놀았다. 내 어찌 나의 아버지가 매를 맞으러가는줄 알았으랴!     아우성소리, 비명, 다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볼륨을 조금 낮췄다. 진저리나도록 귀청을 때리는 그 소리가 싫어서. 그래도 나의 귀구멍엔 그 소리가 꽉차게 밀려들어온다. 아무리 낮은 소리라도 아우성, 비명, 흐느낌은 변함이 없다는듯 지꿎게도 나의 귀에만 찾아 들어온다.     왜서 그렇게 남을 때려야 했는지?    무슨 원한이 그렇게 많았길래 남을 그렇게 고문해야 했는지?    나의 아버지 허근은 연길현에서 유명한 의사였단다.    나의 아버지 허근은 벙글벙글 잘도 웃으셨단다.    나의 아버지 허근은 어머니를 도와 깨끗이 집도 잘 거두셨단다.    나의 아버지 허근은 어머니를 도와 밥도 잘 지으셨단다.    다 들은 말뿐이지만 나의 아버지는 우리 세 자식 매 한번 대지 않으신 상냥한 분이시란다. 그런데 왜서 그렇게 많이 맞아야 했던지? 왜서 밤잠도 자지 못한채 24시간 고문을 받아야 했던지? 이만하면 나도 꽤나 세상살이 알고있다고 자청하는 편인데도 46세나 되는 지금도 나는 그 일은 리해를 할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매를 댄 자들이 썩 나서서 말을 해보라! 내 다 용서할것이니 지금이라도 써억 나의 앞에 나서서 말해보라!     광고후에 다시 나온다고 한다. 요wm음의 CCTV는 드라마사이에 광고를 넣을 때 이런식으로 량해를 빈다. 지루한 광고이다. 음식광고, 화장품광고, 술광고_ 지금은 자랑할 물건도 많기도 하다.     형님이 언제 소고기를 사온다는것이 양고기를 사와서 온집안이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유치원때의 일 같다. 아버지가 특무セ로 되기전엔 우리는 고기를 먹을수 있었단다.    내가 언제 변비가 와서 어머니가 나의 항문에 시누런 빨래비누를 갉아서 넣어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쑥떡따위를 먹고 변비가 와서 무릎앉음 자세로 엉뎅이를 하늘로 높이 쳐들고 머리를 가랭이에 들이밀어 언제 나오나 자기 엉뎅이를 쳐다보면서 낑낑 거려도 대변이 나오지 않아서 그랬다.    언제 누나가 가만히 내민 구운 두병이 생각난다. 우사간에서 훔쳐왔는지 아니면 뭔가 일 도와주고 얻어온것인지 모르겠다. 소학생인 누나도 철 없었으련만 그래도 동생을 주려고 품에 감춰들고 왔었다. 따뜻했었다.    흰줄이 두줄이 그려있는 고무신이 차려져 신기는 했지만 그것은 여자신, 검은 고무신이 얼마나 신고싶었는지 모른다.    형님의 잠바 한벌 얻어가진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회색이였다. 목깃을 세울수 있는 옷이였다.    지금도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황하, 장강을 뛰여넘는다 하는 시기였지만 나의 마을은 초강모자_?를_ 벗지 못했다고 하던 시대의 일이다. 두병이나 쑥떡, 말린 고구마에 무우밥의 시대였다. 지금은 그것이 건강식품으로 될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보기도 싫었다.     회의, 작전계획을 짜며 나중에 만세를 부른다. 구호소리, 노래소리, 다시 구호소리가 요란하다. 무슨 큰 전역을 치루는 모양이다. 수천수만명의 목숨이 달려있는 싸움이니 회의를 잘해서 작전을 짜야겠지. 사기를 돋구기 위해서 구호도 웨쳐야겠지. 적을 죽여야 하니까. 텔레비의 구호소리에 밀려 주눅이 든 나의 몸이 마주한 흰 벽에 달라붙을것만 같다.     무슨 회의가 그렇게도 많았던지. 무슨 구호도 그리 많았던지. 그러나 속으로 우러나오는 구호는 한번도 불러본적이 없었다. 우리 소학생들, 중학생들도 거의 매일저녁 불리워나가 무슨 회의를 했다. 그때면 나는 들을 말도 없고 할 말도 없고 해서 제일 구석자리를 지키다가 오는데 영자의 오빠와 영철이는 그냥 나의 트집만 잡았었다.   임마_, 니 무슨 생각 그렇게 심각한척하니? 응!»   니_ 언제 한번 적극적일 때 없드라. 발언해라. 임마.»    그때면 난 들은척 못들은척. 꼭 내가 발언하지 않아서 화가 난것도 아니였다. 그자들이라구 뭐 그렇게 할말이 많았으랴.그 래서 할 말을 찾느라고 나를 시까스르는것임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대꾸하지 않아도 그자들은 열심이 나를 욕하다가에_- 오늘 회의는 이만 그치겠소.이런다_.        말의 울음소리, 포화소리속에 말발굽소리도 함께 들려온다.부르릉セ비행기소리도 들려온다. 사람들의 싸움에 불쌍한건 말이라 할가? 사람이야 어떻든 말 못하는 짐승은 언제나 다정하기만 하다.     둥글소의 영각소리만큼 정다운 노래는 다시 없을것이다. 나는 쩍 하면 우사간에 나가 놀았다. 소들이 먹이를 먹는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저 풀인데 그렇게 맛있을수가 있을가? 먹이를 먹다가도 엉뚱하게 음메-한다. 무슨 말 하는지 몰랐지만 그 소리가 정다웠다. 논두렁을 감을 때엔 소가 힘을 쓰지 못한다고 사람도 먹지 못하는 떡을 쳐서 먹였다. 떡 한움큼 뜯어내여 물에 적셔서 소의 입 벌리고 목구멍까지 밀어넣어준다. 소는 맛있게 넘긴다. 따라서 나의 목젖도 꿀꺽 소리 낸다. 가을이 되면 콩밭에 들어가 콩을 먹어 배가 불어난 소에게는 담배를 먹였다. 그러면 부은 배가 기적처럼 가라앉는다.    수레에 두엄을 싣고 다녀도 보고, 형과 같이 소수레 몰고 나무하러도 다녀 봤고 밭갈이나 논갈이도 따라다니며 조금 해보았다. 밭에서 돌아올 때는 소를 타고 집으로 간다. 말과 달라서 소는 소의 궁둥이켠에 앉아야 엉뎅이가 아프지 않다. 소는 저절로 집 찾아간다. 여윈 소를 한번만 타고나면 엉뎅이, 꼬리가 날듯말듯 한 곳이 아파서 온밤 자지 못한다. 잘못 앉으면 바지가랭이에 소털이 가득 붙어있을 때도 있다. 철 박은 소발자국소리, 모래를 다져 만든 국도를 밟는 소리, 수양버들이 우거진 길에서 저무는 해를 보고도 음메-하고 소리 뽑아보는 소에게도 랑만이 있었다.     뒤의 TV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옛날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중동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인간은 총소리가 이렇게도 좋을가?     텔레비는 국경절을 하루 앞둔 시기이고 나는 추석을 일곱날 앞둔 처지이다.                                              2006년 9월 30일                      옥수수대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한 즈붜에서
25    [수필]신사의 호주머니는 쓰레기통 댓글:  조회:633  추천:9  2009-02-11
  쓰레기통에 대해서 쓰고싶어서 쓰레기통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별로 참고될만한 자료가 없었다. 정보의 쓰레기시대라고 하더니 쓰레기정보는 하나도 없는게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럴 때는 내가 뭐라고 해도 누구나 반박을 하지 못할것이니 나름대로 쓰레기통에 대해서 피력하고저 한다.    쓰레기통이란 쓰레기를 담는 통이다. 쓰레기란 쓸모 없는 물건, 아니 버려진 물건을 쓰레기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쓸모있건 없건 관계없이 버린 물건은 다 쓰레기인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쓸모 있었던 물건이 이젠 쓸모가 없게 되여 버려진 물건이 쓰레기다. 이를테면 다 마사진 자동차를 버리면 그것은 쓰레기이고 머리카락 한오리라도 밥상우에 떨어지면 그것도 쓰레기다. 그것이 버려지기전까지는 자기에게 얼마나 중요한것이였던가 관계없이.    한편 원래부터 쓸모없던 물건도 사람의 손을 걸쳐서 버려지면 그것도 쓰레기가 된다. 산에 널려있던 마른 나무도 그대로 두면 쓰레기가 아닌데 그걸 가져다 길에 널어놓으면 쓰레기로 된다. 가을 락엽도 그대로 두면 쓰레기가 아닌데 사람이 쓸어모으면 쓰레기로 되는 일은 참 알고도 모를 일이다.그런 쓰레기가 좋은지 20세기초에 미국의 에이트_(The Eight; 8인조)그룹은뺀쓰레기통파(애시캔스쿨)예술까지_ 내왔으니 이 또한 더욱 모를 일이다.    쓰레기란 이렇게 인간이 만드는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담는 통을 만들었으니 바로 쓰레기통이렷다. 중국에선 과일껍질통(果皮箱)이라고 하는데 이는 쓰레기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였음을 말해준다. 아마 그래서 중국 여기저기 쓰레기가 널려있는지 모르겠다. 정확한 의미에서의 쓰레기통은 중국에 없는것이다. 대신 중국에선 과일껍질 널려있는걸 보지 못했다. 하필이면 과일껍질에 집착하는 그 원인을 모르겠다.     다음 호주머니에 대해서 쓰고싶어서 나는 호주머니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우리 말로 호주머니에 대한것은 없고 영어로 포켓에 대해 남겨둔 자료가 있었다.    앵글로노르망어의 pokete, 중세영어의 poket에서 비롯되였다고 야후사전에서 해석하고있었다.    거기의 해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포켓이_ 등장하기 전 서양에서는 소매, 두건, 목둘레 깃을 주머니 대신 사용하였으며 귀족은 오모니에르라는 실크제(製) 작은 주머니, 농민은 마제(麻製)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포켓이 등장하기 시작한것은 16세기때 코드피스라는 주머니 모양의 장식을 남자바지에 달면서부터이다. 17세기에는 남자 웃옷의 몸판과 조끼에 달고, 19세기 중반부터는 바지에도 달기 시작하였다._ 녀성복 포켓은 18세기에 등장하여 주로 주머니를 허리에 차거나 안쪽에 다는 형태였으며, 핸드백이 필수품이 된 뒤로는 보급되지 않았다. 20세기부터 포켓은 의복에 완전히 정착, 오늘날에는 실용성, 유행, 디자인이 고려되어 형태가 매우 다양화되었다.»    호주머니는 물건을 넣기 위해서 생긴것임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제는 패션의 하나로 존재하게 되었다. 요즈음 한국배우들은 포즈를 취할 때 한쪽 손을 포켓에 찌르고 비스듬히 서는데 그럴 때도 호주머니의 역할이 발휘되고있다.    그러니 호주머닌 이렇게 멋 부리는데도 쓰이고있다. 기실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다니면 신사답지 못하다고 하여 매너를 지키는데서는 역작용을 하는 때도 있지만 잘 리용하면 호주머니도 매너지키는데 크게 도움을 줄때도 있는것이 다. 쓰레기통으로 쓰일망정 말이다.     다음, 나는 신사에 대해 쓰고싶어서 신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우리 말의 신사는 꼬부랑말로 젠틀맨이라고 하는가 보다. 15세기중엽 영국의 귀족의 수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이 줄어들었는데 그후 의회의 빈자리를 채운 젠틀이라는 신분집단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지주가 주축이였고 그후에는 여러 계층의 성공자들이 망라되여 녀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중한 매너의 상징적인 칭호로 된것이다.  지금은 영국신사란말은 바람직한 남성상으로 통하며 녀성들의 리상형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엔 백봉신사상까지 있는지도 모르겠다.     2004년 8월의 어느날, 나는 방금 와세다대학교 육학부장으로 부임된 와라가이선생님과 함께 이딸리아료리점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독일류학생으로서 그는 우선 오랜 시간을 리용하여 붉은 포도주를 골라 주문하고 다음 료리를 시켰다. 오랜만의 만남으로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경제, 중국교육, 서양과 동양사람들의 의식차이 등등 그 화제도 넓었다. 그러다가 나는 테블우에서 길고 가는 머리카락 한오리를 발견하였다.   아_, 선생님 잠간만끇    내가 주으려고 하는데 어느새 와라가이선생님이 제꺽 주어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디서 생긴 머리카락인지도 묻지 않고 바닥에 버려도 아무런 불편이 없을 머리카락 한오리인데, 그것을 만약 내가 먼저 주었더라면 어김없이 바닥에 던져버렸을것인데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호주머니에 넣는 그 모습이 지금 새삼스레 떠올라 오늘 이 수필을 쓰고싶어졌던것이다.    쓰레기에 대해서, 호주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신사에 대해서 쓰고싶어졌던것이다.        일본에선 쇼와29년(1954년)에 청소법セ이 제정되였다고 한다. 국회 의원들이 할 일이 없어서 제정한 법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나 다 법으로 될수 있는것은 아닌줄로 안다 .그래도 혹시 일본의 청소법セ에 머리카락을 호주머니에 넣어야 된다고 규정하였는지는 이제부터 조목조목 찾아봐야 알것 같다.                      2006년 1월 26일 음력으로는 설3일전 날                                                    도꾜에서  
24    [수필]사용가치가 심미가치보다 우선적이다 댓글:  조회:521  추천:11  2009-02-11
해빛에 눈이 새물거릴 때처럼 눈을 쪼프리고 새물새물거리는 복덕방녀인의 안내로 세집에 들게 되였다. 4분의 3은 중국말, 나머지만 우리 말로 련줄포를 놓듯 말을 주어넘기는 복덕방녀인의 말을 한참 듣노라면 그녀의 말을 다 믿게 되는데 손바닥에 장 지진다고 해도 다 옳거니 하고 수긍이 갈 정도였다. 석쉼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남편과는 나_ 서탑에서 짠지장사 하려고 이렇에 벼르고있는 처지이니 방값 조금 깎아달라고_ 사정해보았지만 복덕방녀인의 련줄포를 맞고서는 더 할 말이 없게 되였다.    이렇게 들게 된 집(회사 숙소)인데 며칠 살다보니 처음 집보러 왔을 때보다 불편한 점이 많음을 실감하게 되였다. 번뜩거리는 대리석바닥과 태양에네르기를 사용하여 더운물 나오게 하는 소라설비, 양식변기, 기윽자로 된 선진적セ인 주방 등등을 처음 보고 심양도 꽤나 고급스럽구나 하고 감탄했던것인데 그러한 심미적가치보다는 우선 사용가치를 모르고있음이 드러나 이젠 허구픈 웃음을 금할길 없다.     아래에 그 불편함을 라렬할것이니 마시던 커피잔을 잠시 내려놓으시라. 웃음에 커피 쏟칠라.    우선, 기윽자로 된 주방. 채를 볶는 곳과 그릇 씻는 곳이 구만팔천리라 중국료리 하나 볶고나서 그 뜨거운 프라이팬을 들고 상해곡예단 줄타기배우처럼 입을 오무리고 수도꼭지가 있는데로 조심스레 가야 하는데 매번 그렇게 료리를 볶을 때마다 그 일을 왕복하여야 할것을 생각하니 이제 친구들 가득 청해놓고 술채 마련하는 일은 아예 거둬치우자고 다짐하노라니 머리가 아찔해난다. 그런데 그 프라이팬을 씻으려 해도 그릇 씻는 곳이 너무 좁아서 프라이팬을 절반씩 가셔내야 하니 이것 또한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하는 작업이였다.    거기에다 바닥은 얇은 타일로 되여 겉보기엔 고급스럽지만 너무 반질반질 하여 빨리 달아다닐수도 없다. 샤워하고 방금 나와 빈손으로 다닐 때는 스케트를 타듯 한쪽 손을 허리에 걸치고 한손으로 중심을 잡으면 스케트를 탈 때 카브돌이 하듯 자못 재미까지 있지만  뜨거운 프라이팬을 들고서야 어찌 그 재미를 탐낼수 있으랴.    다음은 샤워이다. 샤워가 너무 높이 매달려있어서 매일 아침저녁 두번씩 나는 점프운동을 하였다. 그저 발뒤축 세우고 허리를 쭉 펴고 유치원 학생이 선생님의 물음에 대답할 때처럼 팔을 높이 들면 그 샤워를 쥘수도 있지만 난 그냥 올리뛰기운동을 하고있다. 혹시 46세에 키가 조금이라도 커져줄지 누가 아나? 요즈음 신경이 쓰이는 볼록한 아래배를 이런 행위로라도 제한이 될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이건 나의 건강문제이고 참지 못할것은 하수도이다. 하수도구멍이 작은데다가 구멍이 있는 쪽이 낮지 않아서 샤워가 끝나면 목욕실(화장실겸용)은 논밭에 댄 도랑처럼 물이 고인다. 그리하여 샤워가 끝나면 나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그 물을 쓸어서 몰골초원의 양몰이군처럼 물을 하수도에 몰아넣어야 하는데 그때문에 저녁 15분 허비하고 또 아침 15분은 먼저 일어나야 하는 고생을 하고있다. 아, 하느님 맙시사.    그다음으로는 변기이다. 변기는 양식인데 워슈레트가 달려있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나 높은지 앉으면 발이 들려 어느 재즈바의 높은 걸상에 앉은듯하고 수지는 몸뒤에 달려있어 일을 다 보고나면 그 휴지를 뜯어내는것이 나한테는 고중시절 배구칠 때보다 더 심한 몸돌리기체조를 해야 했다. 우선 종이가 몸뒤로 멀리 있어서 16세 체조선수 정도의 나른한 기교가 있어야 허리를 돌릴수 있고 또 손을 한참 뻗혀야 닿을수 있다. 봐라, 이 놈아, 그래도 아직은 문제없지 라고 혼자서 흐뭇해하였다. 그런데 손이 닿아봤댔자 한손뿐이니 그 종이를 끊어내려면 바이올린수만큼은 손가락놀림이 뛰여나야 그 수지를 손가락으로 조금식 뜯어낼수 있는것이다. 지금은 나른한 종이를 슈퍼에 가서 온하루 찾아 사와 괜찮지만 원래 그 집에 있던 종이는 비닐로 한것처럼 질긴것이였다. 허리를 뒤로 탈고 한 손 한껏 뻗쳐서 하는 체조이니 나처럼 허리가 듬직한セ놈은 다이어트에는 퍼그나 좋을듯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이어트와 뒤를 보는 일을 함께 하는건 어쩐지 좀 그렇다.    그래서 고안해낸것인데 나는 아예 변기를 가로타고 뒤로 향해 앉는다. 그러면 물통이 책상으로 되여 책을 올려놓고 볼수도 있고 가끔씩은 두 팔굽을 고이고 남은 인생에 대해 엄숙하게 생각하게 된다. 흰벽 마주하고 이렇게 일을 보면 종이가 가까와지고 또  인생까지 검토할수 있으니 참 여러가지로 편리하다. 이것이야 말로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했다는것일가. 그러나 그런 방법도 한번뿐이였다. 아래도리를 다 벗어야 하는 번거로움때문이 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러한 사용가치를 홀시한 경향은 나의 세집에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오성급호텔의 설비들도 일본보다 더 좋은 자료를 사용한데도 있는데 불편하기 그지 없고 중심거리에 맹인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를 자전거 세워두는 곳으로 쓰고있었고 경제개발구정부기관을 한곳에 모아놓고 일주일이면 외자기업 모든 수속을 끊낸다고 해놓고선 거기에 앉아있어야 할 직원이 자리를 비워서 기다리다보면 한주일이 어느결에 지나가버린다. 한곳에 모여두면 일이 쉽게 빨리 끝난다고 해놓은것 같은데 형식뿐이고 오히려 더 거치장스럽다. 일보러 오는 많은 사람들이 한 홀에 어정어정 사람을 기다리고있어서 얼마나 복잡한지 모른다. 일본도 정부 각 기관이 다 너른 마당 같은 방에서 오픈으로 사업하는데 정말 무슨 수속을 하자면 한곳에서 뱅뱅돌며 그 자리에서 할수 있다. 일 다보고 나올 때면 정부관원이 깍듯이 허리 굽혀 감사합니다セ라고 인사를 하는데 이는 우선 담배부터 내밀어야 하는 중국과는 오로지 문화적차이뿐일가?    경제생활이 높아짐에 따라 심미적가치를 추구하는것은 필연적이며 중국에도 그렇게 심미적인것을 추구하게 된데에 대해선 나도 얼씨구 기뻐하는데 다만 그 심미적가치란것이 사용가치를 우선으로 하여야만이 진정으로서의 가치를 가질수 있음을 제발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배 부를 때에만 맛있는것을 고르게 되는것과 같은 도리이다.     아무리 고급스런 재료로 집을 장식했다해도 점프운동이나 허리돌리기운동은 그래도 할 곳에서 해야 그럴듯하다고 말하고싶다. 스케트도 마찬가지이다!                                               2006년 4월 3일
23    [수필]봄의 피가 흐르는 소리 댓글:  조회:649  추천:11  2009-02-11
지구가 뜨거워나서 여름날이 며칠이나 늘어났다고 하더니 오늘에야 겨울의 추위가 썩 나섰다. 진작 추위가 닥쳐야 할 날인데. 씨비리아에서 꾸물거리다가 이렇게 뒤늦게야 찾아온 모양이다. 늦게 온 주제에 제법 위풍을 부리는데 낸들 어쩌랴. 몸을 웅크리고 걸을수밖에.    과학이 발전하면서부터 이렇게 짧은 인생에 자연의 변화를 골고루 다 당해보는 판이다. 환경보호를 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이 모은 교또협의가 미국이 응하지 않는것을 무시하고 시동을 한다고 하니 지구의 공기가 맑아지겠구나 하고 한시름 덜어보기도 하며 인간때문에 어지러워진 자연의 원모습을 위해서 내심으로 기뻐한다.    자연이 이 모양이 된것은 모두 과학이 발전한 탓이다.    인간은 이 자연속에서 자기가 제일 령장이라고 자처하며 과학을 발전시켜왔는데 거기엔 자연을 위한 발전도 조금은 있겠지만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것이 더 많았다. 정복이란 자기가 이기기 위하여 남을 해쳐야 하는법이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말은 자연을 지배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될말이냐. 자연에 몸을 담그고 자연에 고마웁게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에 언감생심 자연을 정복한단다.    난 그런 과학의 발전을 근심해본다.    2002년 중국을 방문했던 부쉬대통령에게 강택민주석은 중국산넥타이를 선물하였다고 한다. 어지러워지지 않는 넥타이라고 한다. 빛촉매작용으로 만들어낸 과학의 성과물인데 이는 일본에서 류학을 하고 귀국한 해귀파セ인 강뢰의 연구성과였던것이다. 중국에서 여러해전부터 인재를 모으기 위해 내세운 해귀파_(海龜派, 원래는 海歸파로서 해외로부터 귀국한 류학생이나 지식인을 일컫는 말인데 발음이 같기에 이렇게 해학적인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정책의_ 성과라고도 할수 있다. 지금은 그 기술을 도입하여 천안문광장곁에 건설하는 국가대극원의 천정을 어지러워지지 않는 유리로 장식한다고 한다.    옛날엔 선진국을 따라잡을것을 목표로 하던 중국의 과학자들이 이젠 자주창조セ를 구호로 제기하고있으니 모두 떠드는것처럼 정말 중국의 시대가 되는가싶다. 일본 매스컴에서도 매일 중국 관련기사가 나온다. 도꾜 23구의 절반이나 되는 북경의 쭝관춘에 백여개의 대학과 연구기관과 만오천여개의 첨단기술회사가 집결되여 북경의 산업발전에 대한 기여률을 60%나 올리고 있다고 하니 세상이 놀랄만도 하다.    금년 가을엔 또 두번째로 사람이 위성을 타고 우주로 간다고 하니 이시하라씨가 코웃음을 치든 말든 중국의 우주과학발전은 세계 선진행렬에 썩 나선다. 2016년에는 중국의 GDP가 미국 다음으로 둘째로 된다고 하니 1월에 중국을 방문한 일본 문부과학성의 과학기술단시찰단의 아리모도씨가 중국과학원비서장의원시적창신_(原始的創新)이란_ 말을 자기의 노트에 정중히 적어넣는 심정도 가히 리해할만하다.    그런데 중국의 이러한 발전을 보면서 나는 그냥 좋아만 할수가 없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환경보호를 매 기업의 의무로  만들고있는데 중국에서는 아직도 거기에 대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북경 북쪽의 모래바람때문에 동아세아의 천기에 엄중한 영향을 끼치고있는데도 중국에선 속수무책이다. 일본의 이온그룹에서 자원봉사로 식수를 동원하고있는데 그 식수장소가 바로 중국이다. 아인슈타인을 기념하여 올해에는 과학의 해라고 하고있지만 과학의 발전도 좋지만 자연을 괴롭히는 과학의 발전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보호해줘야 인간은 자연속에 사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있는것이다.    나는 약 7년전에 일본 도시바빌딩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크게 느낀바가 있었다. 화장실의 수지를 보니 이_ 종이는 본 빌딩에서 나온 쓰레기종이를 재가공하여 만든것입니다라는_ 글이 적혀있었던것이다. 그 출처를 보니 본 빌딩종이재가공 주식회사(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로 적혀있던것이다. 고층빌딩의 서류작성에 쓰다 버려지는 종이를 이렇게 모아서 다시 가공하여 쓰는 일도 놀라운 일이고 또 이 종이를 재가공함으로써 고용을 창출하고있으니 정말 이거야 말로 일거량득이다. 세계적차원의 대형회사는 생각하는것부터가 주도하구나 하고 크게 감격하다보니 그날 뒤를 보는 시간이 퍼그나 길어졌다.     한국에선 이쑤시개를 이젠 나무로 하지 않고 마른 랭면오리로 만든다고 하는데 이는 생쓰레기를 가축에게 먹일때 가축의 목에 걸리지 않게 배려한 일이라고 한다. 이 또한 인간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중국에서는 삼림의 파괴도 마다하지 않고 종래로 쓰지도 않던 와리바시(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저가락)를 쓰기 시작했고 무슨 선진 기술로 남새를 짓는다며 유전자조작기술을 도입하고있는것 같던데 나더러 말하라 하면 이는 결코 과학이 아니다.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렇고 자연의 생태를 고려해봐도 이는 량심적인 과학이라 할수 없는것이다.    이렇게 과학의 발전을 보면 즐겁고 흥이 나는 한편 근심 또한 뒤따르게 된다.    스위스의 과학가로서 1991년 노벨화학상을 수여받은 리차드 로버트(Richard Robert)는 도꾜에서 열린 국제학술포럼에서량심이_ 없는 과학은 령혼을 썩게 할뿐이다.라고_ 말했다. 천만번 지당한 말씀이다.    오늘의요미우리신붕セ의 편집수기セ엔 일기예보박사의 수필에 쓴 이야기를 인용하고있다. 쿠라시마박사는 겨울부터 봄까지 곧잘 청진기를 들고 산보를 한다고 한다. 청진기를 나무에 대고 들으면 무엇인가 들려온다고 한다. 수액(樹液)이 흐르는 소리라면 이는 봄의_ 혈조(血潮)의 메아리일것이라는것이다_.    좋은 얘기다. 정녕 봄의 피의 흐름까지 느낄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자연의 인간으로 되기를, 자연의 피의 흐름을 알수 있는 인간으로 되고 또 자연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자애로운 품으로 되여주길 바라며 금년엔 자연재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05년 초봄
22    [수필]가장 행복했던 날 댓글:  조회:517  추천:7  2009-02-11
 채팅하다가 상대가허선생님께선_ 어느때가 제일 행복했습니까? 결혼때였습니까?하고_ 물어서 난 정말 엄숙하게 이 문제를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어차피 이 글을 읽어볼 안해가 무서워서라도 인차네_, 아무렴 더 말할나위가 있겠습니까!하고_ 대답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옷깃을 여미고 오늘 이 집에서 쫓겨날 각오하면서도 굳이 말을 해야 된다면 나는아닙니다_. 그날이 아니구요, 다른 날로 꼭 두번이 있었습니다. 제일 행복할 때가.라고_ 말을 할것입니다.     첫번째.     아마도 내가 소학교 3, 4학년때의 일로 기억됩니다.     억수로 퍼붓던 눈이 멎자 대지는 인차 그 눈을 모두 굳히여 길은 온통 눈얼음으로 뒤덮이였습니다. 겨울방학이라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백부님네 집으로 놀러 갔었습니다. 용신이였는데 이틀인가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만 그날도 눈이 내렸습니다. 백부님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한참 걸어서 뻐스정류소까지 나와보니 퍼붓는 눈때문에 뻐스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병원의 일손이 딸리고 또 백부님가족과는 인사까지 하고 나왔던지라 어머니는 그날 꼭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너_ 걸을수 있니? 대신까지. 거기 가면 룡정에서 오는 뻐스를 탈수 있을거다.»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우쭐대며 대답하였습니다.    걸을수_ 있재이쿠. 집까지래두 걸을수 있슴다.»     이리하여 나는 어머니의 손을 쥐고 눈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눈뿐인 길인데 어머니와 함께 걷는 나는 그저 무작정 즐겁기만 했습니다. 길가의 앙상한 나무에 눈송이가 매달리는것도 신기하고 눈 오는 하늘도 재미있었습니다. 길엔 오직 우리 모자 둘뿐이여서 무지하게 조용하였고 모자의 웃음소리만이 길에 퍼졌습니다. 나는 저 앞에서 장난질하다가도 어머니를 마주향해 달려가보기도 하고 길가의 굳은 눈을 만나면 미끄럼질도 하였습니다. 한참 걷노라니 목마르게 되여 어머니더러 물 달라고 하였더니      너_ 개살구 먹어본적 있지?하고_ 어머니가 말씀하기에그까짓거_ 먹어보재이쿠. 산살구두 따먹었는데. 앞산에 있씀다. 근데 얼마나 시쿨다구.어머닌 못잡술검다.라고_ 대답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다나니 나의 입에 군침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걸어가는데 어머니께서 다시어떠냐_? 이젠 목 마르지 않지?라고_ 하였습니다.     그 말 듣고보니 정말 갈증은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걸어다니던 그때가 나한테는 제일 행복한 때였습니다. 이 일생에서 어머니와 제일 많이 이야기를 나눈게 아마도 이때라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     두번째,     소학교때의 어느 여름방학때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머닌 룡정으로 회의를 가게 되었습니다. 무슨 회의였는지는 모르나 꽤나 오래동안 룡정에 머물렀는데 집엔 형님과 누나 그리고 나 셋이서 누나가 한 밥을 먹으며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련 며칠이나 어머니를 보지 못하니 나는 어머니가 몹시 그리웠고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할즈음에 마침 어머니께서 날 룡정에 보내라고 하여 나는 룡정으로 어머니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적적해서 널 오란다고 형님이 말하여 난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습니다. 룡정에서 어머니와 한방에서 자고 낮엔 어머니가 회의를 들어가기때문에 나혼자서 어머니가 준 돈으로 그림책이나 사서 읽어보면서 즐거운 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후 이번엔 지신의 집에서 누나의 발령이 내렸습니다.     형님과 누나 둘이서 마주앉아서 밥을 먹자니 밥맛이 없어서 못살겠다는것였습니다. 이를테면 그래도 내가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난 어머니한테 더 있고싶었지만 어머니가 하도 가보라고 하기에 하는수없이 지신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네가_ 없으니 못살것 같다는구나. 어서 가서 형님과 누나를 살게 해야지._ 하며 어머니께서 웃으시며 권고하여 나는 집에 가서 형과 누나앞에서 시뚝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유쾌히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 내가 이 가정을 위안하고 이끌어가야 하기나 한듯 며칠사이에 어른이 된 기분이였습니다. 마중 나온 누나앞에서 난 얼마나 우쭐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는 나에게 누나가 이마키스까지 하며 반겨주었던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이때 어린 나였지만 자기의 존재가 이 가족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여 그 행복감 그지 없었습니다.     이렇게 꼭 두번 행복감을 크게 맛보았는데 그후의 여러가지 행복도 모두 이 두가지와는 비할바가 못되였습니다. 만약 안해가 여기까지 참고 읽어보았으면 날 용서해주리라고 조심조심 믿어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안해도 결혼날보다 엄마와 같이 있던 때가 제일 행복했을것입니다. 내가 무섭지만 아니하면 아마도 그렇게 말할것이 틀림없을테지요.                                              2004년 11월 28일
21    [수필]칼라의 가을엔 무궁화도 자리 양보하더라 댓글:  조회:539  추천:6  2009-02-11
 봄에 회사를 갓 이사하여 베란다가 달린 곳에 오게 되였는데 그때 우리는 너른 베란다를 록화하려고 화분통 몇개를 사다놓았다.    그중에 무궁화도 한그루 있었다. 분홍빛 꽃을 환하게 피워주는 무궁화는 매일 출근 때 우리 직원들이 제일 처음으로 인사하는 대상으로까지 되여 마치도 우리 회사의 일원 같은 존재로 되었다.    5월에는 련휴가 생겨서 제때에 물을 주지 못한 탓으로 베란다에 고독하게 내버려둔 무궁화는 잎을 바싹 말리운채로 거의 죽어버릴번 한 사건도 있었다. 소중한 무궁화가 이렇게 되니 우리 모두 겁을 더럭 먹고 죄인처럼 무궁화앞에 서서 사죄하였다. 나어린 김양은 눈굽까지 찍으며. 그날 나는 화분통 갈아주고 부식토도 더 넣어준 다음 물을 듬뿍 주었다.두손 모아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이렇게 온 직원들이 정성을 들여 애지중지 보살펴주었더니 시름시름 앓던 무궁화도 툭툭 털고 일어나 마른 이파리를 제절로 떨어뜨리고 파아란 이파리를 다시 키워주더니 인차 커다란 꽃봉우리를 열어주었다. 그후로는 앓는 일 없이 매일 꽃피워 반겨주었다. 아기를 키우는 마음으로 보살피니 무궁화도 응석을 부리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던것이다. 그렇게 시들것만 같던 무궁화의 소생에 나는 강렬한 감동을 받았다.    일개 초목에서 인생을 배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는 자연과 오가는 사랑을 느끼며 매일 베란다에 나가는 일을 게으르지 아니하고있다. 약 석달전부터는 새도 불러오자는 제안에 사무원 김양이 매일 먹이를 뿌려주어 이제는 참새가 날아와서 노래도 불러준다. 많을 때는 16마리까지 왔고 매일 단골손님으로 두마리가 찾아오는데 나는 어쩐지 남이 준 먹이를 먹으면서도 이쪽을 너무 경계하는게 그놈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금은 가까이에 가서 구경하기도 싶은데, 아니, 내 어깨나 손에 와서 앉는것마저 나는 허용할 준비가 다 될 정도로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데 요놈들은 아예 나한테 마음 주려고 하지 않는다. 하는수 없이 새들이 올 때가 되면 창을 닫고 집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한때를 즐긴다.    단조롭고 긴장하고 따분한 회사일을 보다가도 이런 정경을 자리에서 일어나면 볼수 있다는것이 이 도꾜에서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이젠 여름과는 다른 색상의 옷을 갈아입는 자연이다. 현 대화도시에도 가을은 오는가? 먼곳에서 가을냄새가 은은히 풍겨오고 나무잎들도 열렬한 칼라로 단장 하고있다. 여름내내 피워주던 무궁화도 가을의 칼라앞에선 자리를 양보라도 하듯 푸른 잎들만 남긴채 꽃망울을 내밀려고 하지 않는다. 불타는 붉은 색갈이 열렬하고 자극적이고 또 이러한 열렬한 색상이 가을색이라는것을 알기라도 하듯 연분홍색을 접어두고있는것이다.    이렇게 요란하고 시끄러운 도시속에서도 자연이 주는 깨달음에 도취되여있노라니 일전에 텔레비에서 만난 시마다 토시오(島田俊雄)박사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림종시 한마디에 대형 복장회사엘리트자리를 때려치우고 나와서 박사공부에 정진했다는 시마다박사님이시다.   남사군도_ 등 아세아의 소금과 물 문제를 해결하여다오.»    옛날 일제침략때 군대로 남아세아에서 3년간 있었던 그의 아버지께서는 그때 어떤 사연이 있었던 모양으로 이렇게 한마디를 아들에게 남겨놓고 세상 떠나셨단다. 시마다박사는 그로부터 매일 흙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바이오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1982년에 말레시아에 환경비즈니스회사를 설립하고 물연구를 시작하였는데 회사가 점점 커져가는 사이에 문득 자기의 불찰을 깊이 깨닫고 다시 중국 상주에 가서 사회에 공헌을 할수 있는 일을 찾아하였다. 말레시아에선 사업만을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아세아 국민을 돕는 일이 완전히 비즈니스로 전락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상주에 가서 SMD생태화장실을 연구해내고 그것을 보급시키려 팔 걷고 나섰는데 마침 연구성과가 무르익어 중국사스때 북경에서 긴급주문까지 들어와 사스방지에 크게 공헌을 하였단다. 생태화장실, 이는 생쓰레기를 흙에 버무려 자취를 감추게 하는 무슨 마술 같은 기술을 도입한 화장실이다. 텔레비에선 흙에 생물고기랑 남새랑을 넣어서 몇번 버무리더니 흙만 남고 방금 넣은 쓰레기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자취도 보이지 않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자연생태가 볼품없이 파괴되는 이때 우리 모두가 이런 환경보호책을 연구해낸다면 이 몸 담고 사는 자연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울것이 아니겠는가.    백발을 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산으로 올라가는 시마다박사님의 모습이 정답게 텔레비죤화면에 담겨있다. 걷다가 너무 힘들어 그대로 돌층계에 앉아버린다. 뒤에서 상주회사의 장사장님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두 사람이 어깨에 메는 가마를 빌려왔다. 힘 좋은 젊은이 두명이 시마다박사님을 앉히고 산길을 톺고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가운데 박사님의 얼굴엔 흥분과 희열이 어려있었다. 고대극에서 본것처럼 저 가마에 관료나부랭이가 앉았다면 아주 꼴볼견이였겠지만 이렇게 훌륭한 박사님이라면 정말 한생을 가마에 앉혀 모시고싶은 마음이다.    매년 백만을 넘는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세계유산 황산의 산정으로 올라가는 길이였다. 72봉이 위용을 뽐내는 황산이 푸르른 하늘에 슬기를 자랑하고있는 가운데 멀리 생태화장실이 보인다. 박사님은 가마에서 내려 머리를 외면으로 돌리고 눈굽을 찍고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에 쓰레기가 있어서야 될 말인가. 세계유산에 대한 애정으로 불타는 시마다박사님의 마음이런듯 황산의 구름도 잠시 머물러있다. 그의 연구성과가 자연을 보호하고 이 나라 국민들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게 되여 그는 지금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있는것이다. 아버지가 말한 아세아_ 사람들에게 공헌하라는_ 절절한 부탁을 이제야 조금이라도 실현하게 되는 기쁨의 눈물이였다. 지금은 오대산, 북경고궁, 주은래기념관, 청도 5/4공원에도 이 생태화장실을 설치하고있단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가 상주에 가면서부터 상주의 복숭아상자엔 일본セ이라는 두 글자를 더 새겨넣게 되였다. 붉고 굵고 몽글몽글한 복숭아, 이것도 시마다박사님이 가져다 보급시킨것이라며 과수원 사람들은 온 얼굴에 꽃 피우며 자랑을 하고있다.    사랑하는 마음엔 국경도 없다. 아버지의 한마디의 말씀을 언제나 잊지 않고 아세아 사람들과 함께 살고 함께 가슴 아파하고 함께 웃는 시마다박사님, 이제부터 필리핀이랑 남아세아에도 가야하겠다며 무겁게 입을 뗀 시마다박사님의 머리엔 허연 서리가 내려있었다.    열렬한 색상으로 장식된 이 가을의 칼라에 곱게 핀 국화마냥 흰색 하나 더 해주려고 내려앉은 흰 구름 한점인가 아니면 자연의 사랑이 슴배인 가을기운이 어린것일가.     가을의 칼라엔 무궁화도 자리를 잠시 양보하더라.                                       2005년 9월 28일                     참새가 우는 베란다를 가진 회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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