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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궁 제2수필집평
장춘식
1. 허무궁, 누구인가?
허무궁은 룡정 출생이고 중앙민족대학(전 중앙민족학원) 조문학부를 나왔다. 80년대에는 장춘에서 북두성セ이라는 문예지를 주관하면서 문단에서 평론가로 활약한바 있으며 그후(1994) 일본에 건너가서 오늘까지 거주해오고있다. 일본에서 중국, 한국을 드나들며 사업을 해오는중에도 문학에 진 빚을 갚으려는것인지 근년에는 수필로 화려하게 데뷔하여 벌써 두번째 수필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2. 정체성 확인의 욕구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그의 수필에 이런 그의 행적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자주 등장한다. 수필이라는 쟝르가 원래 이런 특징을 가지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비오는_ 날의 그리움이라는_ 작품에서처럼 작가의 정체성 확인 욕구가 잘 드러나는 경우도 별로 많지 않다.
작품에서는 먼저 초가을 비내리는 풍경에 조금은 우울한 심정을 넋두리처럼 풀어나가다가행복의_ 나무라는_ 이름의 분재 식물을 들먹인다. 그리고는 이어 상해에서는 그 나무를 금전수(金錢樹)라 부른다고 하면서 돈에 대한 중국인의 집념을 조금은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에 대응되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더듬어본다. 장사군이 돈을 벌었을 때 가게 오픈 첫날의 수입으로 들어온 지페에 침을 뱉으라고 한다는것. 돈을 싫어하는척하면 더 많이 들어온다는 속설때문에 그렇게 한다는것인데 이는 사실 경제법칙에 어긋나며 재래로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돈이 간다고 했다. 그리고는아마_ 그래서 우리 민족이 가난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상의 대통에 정수리 맞을 소리 한마디 해놓고.하며_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변명한다. 곧 이어 화자는행복의_ 나무, 금전수. 이를 우리가 먼저 이름지었다면 과연 뭐라고 지었을가?라_ 고 자문하고는 뽕나무와 뽕에 깃든 애틋한 기억을 더듬는다. 특히 소시적 학교 뒤마당에 심은 뽕나무에서 뽕을 따먹던 기억은 아련한 아픔과 더불어 화자의 기억에서 행복한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거기에 비해 정력제라고 하여 기를 쓰고 은행열매를 먹어대는 일본 사내들의 행태는 부정적이다.
어느새_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뽕의 랑만도 모르고 행복의 나무를 금전수라고 하는것도 모르고 은행이 정력제인줄도 모르고 하늘은 그냥 비만을 쏟아붓고있다. 나와 같이 고독한 모양으로 눈물만 흘리고있는것이더냐.»
결국 화자는 억수로 내리는 비물을 보며 감상에 젖고만다. 그리고 그러한 감상은 일본이라는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족지식인의 슬픔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행복의 나무를금전수セ라고 하는 중국인이나 은행이 정력제라고 마구 먹어대는 일본인이나 그리고 돈을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싫어하는척하는 한국인이나 화자에게는 조금씩 부정적으로 비쳐진다. 다만 뽕나무와 뽕에 깃든 랑만만이 아련한 추억으로 살아난다. 여기서 뽕나무와 뽕에 관련된 추억은 화자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이라기보다는 조선족이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매개체로 등장한것이다. 일본땅에 거주하는 조선족지식인의 정체성 확인의 욕구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한 정체성 확인의 욕구는책セ이라는 작품에서도 비쳐진다. 책벌레를 넘어 책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책을 즐기는 화자의 책읽기 습관―차속에서, 비행기안에서 읽기를 자랑삼아 소개하고는 다시 인천공항에서의 의미있는 도서 구매체험을 렬거한다. 이어 장서를 잘 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독서습관때문에북오프セ라는 중고서적 판매체인이 호황을 이루는 일본의 상황을 소개한다. 이어지는 체험은 심양서점에서 고객들이 책을 사기보다는 도서관이 열람실인양 책을 읽고있는 장면이다. 이와 더불어 너무 두텁고 무겁고 커서 휴대가 불편한 중국책의 특징과 이렇게 책을 만든 출판사에 대한 불만을 자기 독서습관에 련결시켜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길서점에서의 체험이다.나는_ 올해 추석 이튿날 연길서점에 갔을 때 컴컴한 우리말 도서진렬대앞에 선 독자는 모두 세명밖에 없었던걸 다시 되새기게 된다. 진렬된 우리말 도서들이 한결같이 점심 못먹은 얼굴 하고있는듯끇
책읽기 습관도 그렇고 책의 크기나 무게 등에 대한 느낌에서도 그렇고 화자가 이제 일본식독서습관에 적응되였음을 확인할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화자의 마음은 여전히 한국과 조선족에게 있음을 드러낸것이 이 작품이다. 마포 홀리데인호텔 근처 책방주인에 대한 인상도 그렇거니와 연길서점의 우리말도서 코너에 책을 찾는 사람이 3명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의 표현은 동족,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걱정을 단적으로 드러낸것이라 할수 있는것이다.
그밖에도 고무신에 깃든 소시적의 추억과 박물관에서 본 고무신에 대한 딸세대의 삶의 인식을 대조시킨신セ, 소시적의 아련한 추억을 닭똥거름_ 인정거름_, 소시적의 추억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가장_ 행복했던 날등에는_ 조선족이라는 공동체의 체험과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작가의 정체성 확인 욕구가 표현되여 주목되는 작품들이다. 즉 그만하면 조선족지식인으로서 일본이라는 선진국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할수 있는 립장이지만 작가에게는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의 확인 욕구가 좀더 강하게 작용한다고 할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가르침의_ 재미, 배움의 재미같은_ 경우 자칫 선진국 일본에서 성공한 지식인의 립장이 오만으로 비쳐질 념려가 있어 수필로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 이 작가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3. 환경주의자의 세계인식
환경주의자セ라고 했지만 사실 허무궁이 무슨 환경단체에서 활약한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수필에는 엄연히 환경단체 임원 못지 않게 환경에 대한 관심과 걱정 그리고 사명감이 짙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선지구에_ 구멍 뚫어야지를_ 들수 있다.
이 작품은 소아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밟고있는 땅밑을 파고들어가면 언젠가는 지구의 반대편에 구멍을 뚫고 나갈수 있을것이라는 발상이다. 그러나 이는 작가 자신마저 홀로 웃어버린 환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문장은 그 둥근 지구우에 만들어진 구조물에 대한 걱정과 비판이다.공업과_ 군사, 그리고 생활쓰레기, 콩크리트때문에 이 땅은 갈수록 어느 늙은 녀자의 얼굴화장처럼 두터워만 가는데 그 무게가 싫어서인가 지구는 그것을 털어버리는데 열중하게 된다.는것이다_. 그것이 지진과 같은 훼멸적인 자연재해로 표현된다는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여기서 작가의 시선은 갑자기 마이너스이온(음이온)이 몸에 좋다는 얘기로 돌려진다. 먼저 떠올린것은 비즈니스맨답게 이 음이온이 장사가 될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를 알려고 노력하던중 우연히 현대인은 흙을 밟지 않아 음이온이 결핍하다는 하다나까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것이구나 한다. 결국 도시의 구조가 현대인에게 음이온결핍증을 유발시키고있음을 알아버린것이다. 빌딩숲으로 덮여진 상해의 거리를 땅이 꺼질가봐 소림사의 경공(輕功)이나 하듯 사뿐사뿐 걸었다는 표현은 작품 시작부분의 유머의 련속이 될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지구에_ 구멍을 뚫고 나무 고챙이에 꿰고 지구의처럼 돌려보리라. 거치장스러운걸 내가 떨어뜨려주고싶어서이다.는_ 서두와 결말의 조응이라는 구성적인 완성으로서뿐만아니라 주제 해명을 위한 점안(點眼)의 의미로서도 높이 사줄만한 표현이 될것이다.
콩크리트구조물의 난립에 의한 지구생태의 파괴는 당연히 환경주의자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환경파괴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공업오염 역시 그러한 환경파괴의 원흉에 속한다.칼라의_ 가을엔 무궁화도 자리 양보하더라는_ 그러한 환경오염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무궁화 분재 얘기를 풀어내려가다가 무궁화의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 다음 먹이로 유인하여 새까지 회사 사무실 베란다에 불러왔다고 했다. 차거운 콩크리트세계속에서 사는 우리 인생의 서글픔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정작 작품의 주제를 풀기 위한 사전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남사군도_ 등 아세아의 소금과 물 문제를 해결하여다오.라고_ 한 아버지의 유언을 실현하고저 안깐힘을 쓰는 시마다 토시오(島田俊雄)라는 사람의 친환경 발명, 아세아 각국에 쏟는 그의 정성과 노력을 제시한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찬사의 밑바탕에는 작가의 환경주의적인 인식이 깔려있는것이다. 이는핫쵸보리사무실에서_ 회사일은 제쳐놓고라는_ 작품에서 보여준 무궁화에 대한 남다른 사랑속에 겨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담겨져있는것과 마찬가지 리치일것이다.
봄의_ 피가 흐르는 소리에서는_ 자연환경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좀더 직접적으로 그려지고있다. 지구가 뜨거워져서 여름이 며칠이나 길어졌다는 얘기로 시작하여 온실기체 방출제한을 골자로 한 쿄토의정서가 시동을 걸었다고 하고는 지구의 온난화가 모두 과학발전의 탓이라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과학연구와 경제발전에서 장족의 진보를 이룬 중국의 위상을 두고 자긍심보다는 걱정이 앞선다.자연을_ 괴롭히는 과학의 발전은 바람직하지 않다는것이다_.자연은_ 자연 그대로 보호해줘야 인간은 자연에 사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있는것이다.여기에_ 작가의 환경관이 표현되여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북경 북쪽에서 오는 황사의 횡행을 감안할 때 이점은 좀더 뚜렷해진다.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면 요즘 생태문학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으랴. 허무궁의 환경주의자적글쓰기는 이점에서 한몫을 단단히 한다고 할수 있다. 아쉬움은 이 계렬의 작품들이 체험을 통한 감수성보다는 주관적인 주장이 강하다는 점이다.
4.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여야 사람이지. 라는 말장난 같은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장난같은 말이 이제 현실로 되여가고있다. 특히 세계화라고 하는 경쟁사회에서 벌어진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작가의 환경주의자적 글쓰기와도 련관된다고 할수 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이에 대한 허무궁의 판단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현재 선진국에서 인정되는뇌사_(腦死)에_ 대해 허무궁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내장이식에_ 필요한 내장을 맥박이 있을 때 뜯어내려는 인위적인 판결이라_ 하여 비인간적인 판단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심장에서_ 만들어내고 몸의 구석구석까지 날라다주는 혈액때문에 인간은 살아있는것이다. 제아무리 활발한 사색을 할수 있는 대뇌일지라도, 제아무리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있을지라도 그것은 곧 이 가슴, 심장에서 공급하는 붉고 뜨거운 피가 있기에 존재하는것이다.라_ 삶의 징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펴낸다. 사실상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것이나, 뇌사상태나, 호흡이 정지된 상태나 죽음이라는 상태와 모두가 나름대로의 관련을 가진다. 작가는 뇌사상태를 장기이식을 위한 인위적인 사망판결이라 비난하고있으나 뇌사상태라면 심장이 고동을 친다고 해도 현대의학이 만들어낸 가상적인 생명상태이기때문에 실제로는 죽었다고 보는게 옳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것을 강력히 부정한데는 의학적인 판단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판단때문이다.느끼는_ 일이 적어지면 이 사회는 차갑게 된다.뺀 대뇌가 발달하면 똑똑하고 심장이 제구실 잘하면 정다워진다.이것이_ 작가의 인간적인 판단이 될것이다.하여간_ 느끼는 삶, 정다운 삶, 이웃을 사랑할수 있는 삶을 더 귀중히 여기고싶은 마음이다.핵심은_ 여기에 있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고 위대한 사상을 가진다 해도 그러한 삶은 의미가 없어진다는것이다. 갈수록 느낌이나 인정보다는 물욕의 만족을 삶의 의미라고 여기는 현대인의 삶의 태도를 비판한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이 되는것이다.
란자_, 정자의 핵전쟁은_ 또다른 시각에서 이러한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해 해부한다. 현대인의 녀성화현상에 대한 반성이다. 겉보기에는 란소와 란소의 핵만으로 새끼를 생산하였는데 그것마저 암컷만으로 태여난다고 하니 이야말로 수컷이 필요없는 세상이 되지나 않을가 걱정하며 거기에 전 사회적인 성격적 녀성화경향을 곁들여 제시한다. 그리고는 이제 정자와 정자의 핵만으로 수컷을 만드는 연구가 시작되면 그것이 곧란자와_ 정자의 핵전쟁이_ 될것이라고 섬뜩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의 내면을 따져보면 작가의 걱정은 앞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욕이란건_ 인간만의 특성일가?_,선량하지_ 못함은 후천적일가?_,책은_ 어떨 때 읽는가?등_ 제목에 물음표가 달린 세 작품은 이른바미니수필セ의 형태로 인간의 "비인간화"를 비판한다.와인_ 마시며 듣는 총소리또한_ 비슷한 경우이다. TV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드라마속 총소리, 이라크전 총소리)에서 문화대혁명때 아버지가특무セ로 몰려 투쟁받던 사정, 그리고 그후 어려운 식료사정을 담담하게 추억하는데 여기에는 항상 전쟁에 대한 분노가 뒤따름으로써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온 사회의 반성을 촉구한다 하겠다.
작가는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해 반성이나 비판만 한것이 아니다.반성하는_ 즐거움에서는_ 자신의 오해에 대해 반성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의 정이란 어떤것인지를 제시해보인다. 일본 북해도대학의 한 학생이 쓴 편지를 번역해달라는 안해의 부탁을 받았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내온다던 편지 원고가 오지 않고 오후에야 본인한테서 편지를 쓰고있는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어린 사람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화를 내고 심지어 버릇 가르친다고 래일 보낸다는 사람에게 래일은 시간이 없으니 모레오후나 돼야 시간이 난다고 했단다. 그런데 정작 편지를 받고나니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였음을 알게 된다. 말못하는 언어장애자 중국인처녀와의 사랑편지였는데 중국인처녀는 일본에 와서 살고싶다고 했으나 의과대학생인 일본청년은매일_ 붐비는 전차에서 밀치고 닥치고 하는 도꾜, 수림 같은 빌딩으로 비좁아진 도시는 인정도 없는 싸늘한 곳이라며아무래도_ 일본에서는 처녀를 행복하게 해줄만한 조건도 능력도 안된다고 생각되여 중국에 가서 자그마한 병원을 꾸려놓고 병자를 치료해주며 벙어리처녀와 행복하게 살고싶다는것이다. 이런 사정을 처녀에게 설득력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편지가 늦어졌다는것을 작가는 알게 되였단다. 오해를 일으킨 잠간의 리기심때문에 인간애를 잠시나마 잊게 되였던 자신을 반성하고있는 셈이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는 장애인 중국처녀를 사랑하며 중국에서 살려는 일본청년의 미담을 필리핀대통령의 자국 로동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오버랩시킴으로써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이처럼 항상 감동적이 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있다. 이는 앞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을 아직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성과 따뜻한 인정의 사례로 정면돌파한 셈이 된다. 대안이 없는 반성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따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추석날 술기운에 떠오른 인생살이의 서글픔이 묻어나는추석달을_ 서천에 바래줘야 하는데_, 늙는것에 대한 위기감, 늙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다가 결국 인정하고 체념하는 인간의 상정(常情)을 그린 돋보기부자セ, 이름과 필명에 관련된필화セ의 에피소드들을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문장으로 표현한_<망종>의 웃음거리등_ 작품은 수필의 가치와 매력을 잘 보여준 수작이였다.
5. 희망사항
허무궁의 수필은 작품의 구조나 표현의 생동성에서 상당히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장의 류창함 측면에서는 어딘가 어수선한데가 더러 엿보인다. 가끔 눈에 띄이는 어휘사용에서의 오류나 어색함은 아무래도 일본에 장기간 거주한 관계로 조금은 양보할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장의 호흡조절 문제는 조금만 류의하면 금방 극복될수 있는것이다. 그중에서도 토의 생략이 무리할 정도로 많다. 가령가끔씩은_ 걷던 길 뒤로 돌아보는것도 재미다.뺀나는 혼자서 투덜대며 번역해주기로 대답한 일 몹시 후회하였다._(이상반성하는_ 즐거움_)도시마다_ 서점에 발길 돌리고뺀여름에 딸 데리고 서울 갔을 때뺀여름에 심양서점 몇곳 돌아보았는데_(이상 책セ) 등의 문장에서 밑줄 그은 부분은 토를 생략함으로써 호흡의 불편함을 야기한다. 대화의 경우에는 허용되는것이지만 서면어로는 부적절한것이다. 이런 례는 꽤 많이 보인다. 아무리 운문이 아닌 산문이라도 호흡의 불편을 삼가해야 하는것이 독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한다.
허무궁의 립장을 우리는재일본조선족セ이라 부를수 있을것이다. 이 경우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정체성의 측면에서 어떤 포즈를 취하느냐이다. 작품의 독자가 기본적으로 조선족이라고 볼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표현이 이상해지면 독자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다. 일본이라는 한중일 삼국중 가장 잘사는 나라에 주로 거주하는 허무궁의 처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례문은 생략하겠거니와 앞에서 잠간 언급한가르침의_ 재미, 배움의 재미와_ 같이 일본이나 일본인의 장점을 중국이나 중국인(물론 조선족을 포함하여), 한국이나 한국인의 약점과 대조시킬 때 특히 이점을 조심해야 할줄 안다.
또 하나,미니수필セ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전에도 어느 글인가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이른바미니수필セ이라 불리는 2천자미만의 짧은 수필들은 뚜렷한 한계성을 지닌다. 작품의 의미가 조금만 드러난 상태에서 끝나기때문에 소재와 체험의 깊이에 비해 감동의 깊이나 주제 해명의 측면에서 많은 약점을 드러낸다. 일례로지진과_ 고향사진_,빠알간_ 고추 때문에_,추석달을_ 서천에 바래줘야 하는데등_ 작품은 체험의 깊이는 인정되지만 감동이 미미하다. 같은 체험이라도 좀 더 주제발굴에 공력을 기울이면 감동의 깊이가 달라질것이고 이때미니수필セ은 부적절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미니수필セ의 가치를 무조건 부정하는것은 아니다. 다만 소소설セ,미니소설セ의 소재가단편소설セ과 다른것처럼 적당한 소재의 경우에만미니수필セ의 형태를 취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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