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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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수필]눈섭이 없는 녀자(외3편) 댓글:  조회:357  추천:1  2019-07-19
눈섭이 없는 녀자 허무궁   1. 눈섭이 없는 녀자애가 내 앞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다. 요즈음의 녀자애들은 괜히 있는 눈섭은 전용칼로 밀어버리고 거먼 펜으로 다시 그려놓는다. 무슨 취미가 이런지 모를 일이지만 내 앞의 이 녀자애는 아마도 밀어놓은 눈섭을 다시 그리는 작업을 잊은 모양이다. 눈섭이 없으니 눈두덩이가 두드러져서 자못 무서운 얼굴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옛날 그림에서 본 듯한 눈섭이다. 이 글에선 그게 누구이고 왜서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 없는 눈섭이 나를 묘하게도 물질과 의식의 미로에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원래 있던 눈섭도 이렇게 갑작스레 없어질 때가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는 중요한 것이다. 사실이란 있다는 리유로서 다시 말하면 존재를 의미한다. 눈섭이란 꼭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일반 물질로서는 인간의 눈 우에 붙어있는 것이 상례다. 그 모양에 따라서 인물이 평가되기까지 하는 것을 봐선 미크론물질(청화대학 생명과학 학자 시일공)의 세계에서는 한 물질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원래 있든 없든 존재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눈섭이라는 것은 말이다. 사용적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미학적으로는 사용적 가치가 심미적 가치보다 우선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에 있어서는 비가림도 먼지가림도 할 수 없는 눈섭은 다만 심미적 가치로서만 존재하고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매 력사적 시기마다 굵게 가늘게 길게 엇바꿔가면서 형태를 여러가지로 변화시킨 건 나도 어느 드라마나 그림 따위에서 본 것 같은 기억이 있지만 영 없어진 적은 아마도 있은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없는 눈섭이 놓여있다. 없는 모습으로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게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2. 나의 머리의 한복판에 구멍을 펑 뚫러놓고 아침이 스쳐지나간다. 요즈음엔 하루 하루가 그 구멍 속을 꿰질러 나든다. 우주공간의 블랙홀처럼 내 주위의 모든 것을 그 어떤 인력으로 끄집어다간 펑 뚫린 구멍 속으로 유인해 끌어들이는데 밑 빠진 독처럼 내 맘속엔 담겨지는 것이란 하나도 없다. 그릇의 아구리가 아니고 구멍 뿐이기 때문이다. 허무의 그릇이란 다 그런 것이다. 의식과 물질이 부딪치는 공간에서 공포와 허무와 용맹과 탐구와 함께 병존한다.   3. 저켠 나라의 총리가 국회를 해산한다고 세상에 선포하자 온 안팎이 들끓었고 세상사람들은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생긴 것처럼 흥분하고 있다. 권력을 갖고 싶어하는 자들이 일제히 움츠렸던 모습을 드러내며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서 물질로 리해를 해야만 하는 모든 의식들이 구름처럼 그 사회를 뒤덮었다. 매스컴이 돈을 벌 수 있는 최고의 챤스가 닥쳐왔다. 정치기자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정치가들의 냄새를 맡고 있을 무렵에 지구의 상대편에서는 큰일이 벌어졌다. 아니 또 벌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총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했던 것이다. 비참하기로 한심한 사건인 데도 그것은 구름처럼 온 사회를 뒤덮을 정도로 의논되지 않은 채 삽시간에 마비된 사람들의 머리통 속에서 구석에 팽개쳐버려진 채로 잊혀가고 있다. 한 어르신님이 어린애처럼 주절대는 말 한마디가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였다. 투윗이 매일 매스컴을 못살게 군다. 혹시 이 땅에 무서운 전쟁이 올지도 모르기때문이다. 없던 전쟁도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님을 어서 연변으로 되돌아가시라 시급히 타일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연변이라면 차라리 내가 있는 필리핀에 와서 대피하시라 했다. 결국 누나는 울산바위처럼 끄떡하지 않고 그냥 있던 곳에 눌러앉아계신다. 누님은 대개 없던 것이 있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결핍하다. 그리고 나는 연변에 계시는 형님네 일가는 어찌하나 근심을 하였다. 고래들이 치고 박고 하는 새에 노한 장백산 산신령님께서 그냥 화를 내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료를 본 기억에 의하면 장백산화산이 폭발하면 그 화산재가 지구에 한바퀴 허리띠를 둘러줄 것이며 사랑하는 고향 연변이나 그 산맥 아래의 모든 대지를 몽땅 덮어버릴 것이라고 한다. 신성한 산신령님께서 내키는 일이 아님은 번연하지만 우주의 일반 물질들의 자연적인 운동은 이렇게 인위적으로, 즉 인간들의 감각세계의 요소 때문에 크게 노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감각적인 요소라는 게 아주 작은 단위의 초월적인 물질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그 요소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지위나 리념에 따라서는 우주을 크게 노엽힐 수도 있는 것이다.   난 요즈음엔 가뜩이나 연변축구가 불쌍해서 못 견디겠는데 이렇게 여기 저기에서 새바람에 게 눈 감기듯 이 세상을 못살게 구는 인간들이 떠들어대니까 단단했던 내 마음의 성벽이 삽시에 무너질듯 아찔아찔해난다. 목구멍으로 밥이 잘 넘어가질 않고 머리통에 뚫린 구멍으로 바람만 세차다.   시월의 태풍이 줄지어서 닥쳐온다. 필리핀 동쪽에서 잉태하여 북으로 올라가며 성장한다. 태평양에 린접한 나라들에서 각기 제기한 이름을 엇갈아 가지고 태여나는 태풍이라고 한다. 나의 펑 뚫린 구멍 속에도 돌개바람이 세차다.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도 구멍이 뚫리고 그 속으로 돌개바람이 불어든다. 마귀처럼. 일반적 물질이 없는, 순 의식만으로 만들어진 초월적 물질로 이어지는 바람이다.   4. 초월적 미크론세계의 물질의 운동, 그것은 오로지 그 의미를 아는 자들만이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학자님도 모른다고 한다. 물질운동의 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의 질량은 우주에 있는 물질중의 4% 밖에 안된다고 한다. 꼭 거짓말 같은 얘기다. 96%를 모른다는 리유가 어떻게 성립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허나 확실한 것은 보이는 것만 있는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것도 확실한 존재로서 이 우주에는 있는 것이다. 모두가 미스터리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kazuo Ishiguro의 소설) 바라보는 ‘창백한 언덕 풍경’(kazuo Ishiguro의 소설). 그외에 뇌리에는 ‘기시단장 죽이기’(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가 맴돈다. 없는 눈섭처럼 이미 없어진 기억이 펑 뚫린 머리통의 구멍 속에서 홀로 남아돌고 있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요즈음 우리 회사에서는 녀직원들의 주인다운 의식이 늘어나서 온 회사가 무슨 녀자애들의 방처럼 꾸려지고 있다. 엄숙하지만 썰렁했던 공보파넬이 갑자기 알락달락 채색의 사진들로 꽉 채워졌고 복도나 화장실에는 향내로 충만되였다. 멀쩡한 사내 직원들도 몇몇 있지만 성세호대한 녀성직원들의 대렬 앞에서는 그 위엄이 오뉴월의 시든 가지처럼 바싹 시들어져 소리도 크게 지르지 못한다. 사내애들은 이래라 저래라 녀성들이 시키는 대로 굽석굽석 일만 하다가 나만 보면 하소연한다. -저 애들 무서워요. 웃음이 없다니까요. 저들끼리만 웃고. 이름을 대지 않아도 담당자 녀자애들을 가리킴을 나는 다 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괜히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린다. 영 귀여워서 못살겠다. 60여명 직원중에 남성이 오로지 다섯명 뿐이여서 기실 그들은 귀여운 ‘놀이감’처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운반, 기계수리 같은 것들을 도맡은 남성들이 크게 기대고 싶은 힘의 존재로 부각되여 녀직원들을 뒤받침하고 있어서 회사의 믿음직한 동량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언권은 조금만치도 없다. 절대적인 인수의 약세 때문일 것이다. 회사의 일을 상론할 때나 누구의 생일 파티를 상론할 때나 모두 녀성들이 결정을 하고 남성들은 꿔온 보리자루처럼 한구석에서 조용히 결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너희들이 결정하면 난 엉기적거리며 너희들 뒤를 쫓아가리다 하는 태도다. 그러던 와중에 약 두주일 전에 현장에서 책임성이 강한 녀자애 하나를 영업부 사무원으로 등용하였는데 이 아이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아서 회사가 한번 또 들끓었다. 민주적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벽보를 휴계실에 꾸려놓은 것이다. 옛날 OO에 ‘민주벽’이라는 게 있어서 귀찮게 떠들다가 과도하게 민감한 일들을 맹탕 끄집어낸 탓으로 큰 몽둥이에 단매를 맞아 박살이 난 적이 있는데 오늘 회사의 이 민주벽보를 보고 갑자기 옛날의 그 력사가 생각이 났다. 때는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장춘에 배치를 받았을 때의 이야기다. 장춘시조선족문화관에서 꾸리는 문학지 《북두성(그 때는 장춘문예)》잡지 편집으로 배치를 받았는데 서너달이 지나자 장춘시문화국의 청년학습반에 불리워가 두주일 동안 감금상태로 정치리론학습을 하게 되였다. 문화국 산하의 21개 직속부속, 비영리부문과 공기업(Basic unit.)에서 나젊은 청년들을 뽑아서 집중교육을 하였는데 후에 문화국 조직부에서 일하면서 알고 보니 그것은 계획적으로 간부를 배양하는 수단이였다. 이러한 육성반에 불리워가면 대개는 조직적인 인사변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였는데 그 때 함께 훈련반에 갔던 서른여명 되는 학급생들 중에서 나를 포함해서 셋이 문화국 조직부와 공청단 기관에 등용되였다. 그 때 학습반에서 “OO의 ‘민주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너는 OO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잘 알 것 아니냐?” 하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벽’이라는 개념이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인상이 깊게 남아있다. 그런데 오늘에 내가 운영하는 회사에 이렇게 버젓이 민주벽보가 생겨난 것이다. 큰일이 아닌가? CEO의 절대적인 권위와 무조건 복종을 원하는 나의 경영리념과 대치되는 행위로서 잘못 발전을 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이 생각되기도 했다. 민주라는 것은 우리 세대에게는 민감한 문제로 되며 또 오래동안 탐구하고서도 아직도 정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복잡한 문제이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대체 민주라는 것이 진정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일가? 이러한 테마를 두고 필자는 옛날에도 수필을 쓴 적이 있지만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의논하게 된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교육을 받고 터득해온 리론 대로 하면 민주란 집중을 위한 민주이며 집중은 민주를 토대로 한 집중이다. 즉 다시 말하면 민주집중제 리론이다. 민주를 토대로 한 집중이요, 집중이 없는 민주는 제창하지 않는다는 주장일 것이다. 나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흔히 민주라고 하면 미국의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오르군 하는데 미국의 민주를 몇십년간 쳐다봤지만 그게 대체 우리가 말하는 민주가 옳은지 의심이 된다. 세계 각국에서 마구 일으킨 전쟁과 인종차별, 언어의 자유로 민주를 대체하려는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자유만이 민주인 것이 아닌 줄로 안다. 오늘도 그냥 전쟁을 벌이고 있고 또 새로운 전쟁을 꼭 해야 되는 것처럼 그 나라의 어르신이 떠들고 있는데 폭력으로 민주를 불러올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폭력은 강제를 동반하며 강제는 민주를 앗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민주를 론의하기엔 너무나 숨에 부친 일이기에 여기서 그만두고 내 신변의 일이나 어서 걷어치워야 하겠다.   내가 무시되거나 혹은 나와 뜨개소처럼 걸구 드는 직원이 혹시 있지나 않은지 겁을 먹은 채 회사의 민주벽보에 실린 한장한장의 의견서들을 확인해보았다.   “무료로 탈 수 있는 뻐스를 마련해줬으면 너무 엄청난 수량을 추구하지 말아야 품질을 보장할 수가 있어 회사의 물맛이 영 말이 아니예요 회사에 직원전용식당이 있었으면 회사의 모든 것을 지지합니다 직장에 음악을 사랑하지만 그러면 안되는 것을 … …”   대개 이러한 내용들이였다.   생각보다 단순한 내용이여서 안도의 숨이 나온다. 엄숙한 이데올로기와는 관계가 없었고 어떤 리념적인 문제도 아니다. 괜히 겁을 더럭 먹고 민주가 어떠하니 떠들어댄 내가 우습게 된다. 그래 좋아. 민주가 있었으니 이번엔 집중을 내놓을 때가 아니더냐. “회사가 잘 나가면 다해주마. 그러니 회사가 잘 나갈 수 있도록 많이 노력을 해다우. 응!?” 이 한마디면 다 해결이 되는 민주적 의견이다. 래일 그렇게 회답을 주리라 굳게굳게 다짐을 하고 이 글도 마무리하련다.   집중은 고독이다. 민주를 집중시켜야 하는 행위는 홀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독단적으로 받아안아야 할 고독이다. 중국의 본사에서는 련휴를 쉬기에  매일 다 읽지도 못하는 수량의 메일이 그 민주성을 잃은 채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나의 컴도 고독에 허덕이고 있다.   고독할 때 생각한다. 고독할 때 랭정해진다. 고독할 때 성장한다. 고독을 터득하면 훌륭한 경영자로 될 수 있다. 거짓말 같지만.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   형용할 수 없는 아침이다. 풀냄새가 그윽한 맛 좋은 공기와 귀맛이 좋은 뭇새들의 하모니가 아름다운 노래소리, 커다란 남국의 나무가 가지를 무겁게 드리운 풀밭과 바다물처럼 검푸른 하늘이 한폭의 유화처럼 펼쳐진 대지의 지평선에 선명한 금을 긋고 있다. 잠에서 방금 깨여나도 잠기가 삽시간에 가뭇없이 사라지는 상큼한 아침이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페부에까지 닥치는 아침의 공기를 만긱하며 나는 출근길에 오른다. 아침해가 찬연히 비추는 차창유리를 활짝 내려놓고 부담스런 에어콘은 다 꺼버린다. 107.5에프앰 음악채널에서는 흥겨운 명가가 흘러나온다. 클락에 와서 아예 고정해놓고 듣는 라지오 방송이다. 짧은 출근길이지만 나는 매일 이렇게 출근을 즐긴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회사 사무실에 여섯시 반에 나와서 간밤새에 다닥다닥 컴퓨터에 붙어있는 메일들을 대충 훑어보며 회신이 필요한 건 간단히 회신을 발송하고 나서 나는 전번 날에 나카니시상이 일본에서 사가지고 온 수동 커피메이커로 커피콩을 간다. 사르륵- 사르륵- 나의 하루가 시작이 되는 서막 뮤직이다. 콜롬비아의 브랜드 커피콩에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그래도 브라질의 커피로서 상등 줄에 속하는 커피콩이여서 나는 자못 즐겨 마시군 한다. 넙죽하게 생긴 동남아의 커피와는 완전히 다르다. 향긋한 커피 향이 나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맞은켠의 하얀 벽은 나의 시선을 깨끗하게 세탁을 해준다. 화창한 자연의 아침과 그윽한 사무실의 커피 향과 깨끗한 하얀 벽, 이들은 매일 건강하게 진행되는 생리의 신진대사처럼 나의 정신도 함께 클리닉해준다. 정신상으로도 밤새 동안 루적된 오물들을 이렇게 배설시키고 나에게 거뿐한 하루를 마련해주고 있는 자연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아래층 창고에서는 엘씨디제품의 커버글라스를 포장하는지 테이프를 당겨 끊는 소리가 들린다. 꼭 마치 누군가 가래를 받는 것 같은 소리로 들려서 기분이 잡칠 때가 많지만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해주는 직원들이 고마워서 잔소리는 못하고 차라리 그 소리를 무슨 타악기 음악으로 간주하고저 노력을 해본다. 카-악 툭, 카-악 툭. 저 놈 테이프는 꼭 저런 소리만 내야 하나? 같은 값이면 물방울 소리라도 내주면 안되나. 나 원 참.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혼자서 중얼거리노라면 사무원 애들이 하나 둘 해쭉히쭉 웃으며 사무실 문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굿 모닝 써얼, 굿 모닝 써얼. 현장에서 일하는 애들보다 한시간 늦게 출근하는 사무원 애들이지만 활발함은 현장의 직원들보다 짝진다. 현장 애들은 멀리서 나를 봐도 높은 소리로 인사를 한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라서 내가 알아듣든 말든 자기들이 아는 언어를 다 동원시켜서 말을 건넬 때도 있다. “안녕하세요?” “니하오.” “콘니찌와.” 여럿이 한꺼번에 공격을 퍼부어서 하나하나 대꾸하기는 다 글렀다고 판단을 할 때에는 “마간당우마가”라고 응대를 해준다. 처음 클락에 왔을 때에는 직원 애들의 얼굴색이 검어서 컬쳐쇼크를 느낄 때가 많았는데 이젠 일년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이곳 애들도 많이 이뻐보인다. 언제나 상을 찡그릴 줄 모르는 필리핀의 젊은이들, 아침 일이 시작되기 전에는 휴계실이 마치도 참새들을 가둬놓은 공원처럼 재잘재잘 떠들썩하다. 뭐가 매일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뭐가 매일 그렇게 많이 말을 해도 끝이 없는지? 누구나 빠짐이 없이 지저귀다가도 함께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그럴 때면 나의 얼굴도 활짝 핀다. 이런 애들이 귀여워지지 않는 것이 차라리 이상한 일이 아닌가. 습관이 되여가는 과정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나도 이렇게 매일 차례지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맞으며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넷트나, 위챗의 닉네임으로는 백두곰이요, 필명으로는 무궁이요, 중국에서는 회사의 직무인 둥쓰짱으로 불리워지기에 내 이름을 우리말로 들어본 지가 아득하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더구나 그러하다. 부모님께서 계실 땐 자주 듣던 자기의 이름인데 이젠 나이가 오십을 넘어서서 나보다 이상인 사람이 나를 부를 때도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때가 많다. 흔하기로 지난 세기 80년대의 연길 택시 만큼이나 흔해빠진 사장님이란 칭호로 불러주어서 나는 가금씩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이 땅덩어리에서 사라지는 건 아닌가 하는 위구심이 울컥 치밀어올 때도 있다. 내가 사라지고 이 세상에는 다른 내가 남아서 나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생각하는 ‘나’, 행동하는 ‘나’, 있는 것을 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나’는 부모님이 불러주시던 어린 나의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여기에 버젓하게 남아있는 ‘나’는 나와는 다른, 나의 흉내를 내는 ‘내’가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내 이름이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대체될 때부터가 아니였던지 모르겠다. 아마 나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은 것은 매 4년 만에 어김없이 모이는 동창만회 때다. 동기모임이라고 점잖게 말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이름에 습관이 잘 안된다. 어렸을 적에는 그냥 동창만회라고 불렀다. 아마도 우리 학급에는 어마어마한 분들이 많아서 좀더 표준어에 가깝다고 생각이 되는 단어를 택해서 부르게 되였을 것이다. 나는 동기라면 사이가 멀어보이기 때문에 감정적 색채나 인정적인 립장으로 봐서 동창이란 말이 마음에 더 든다. 같은 창문을 가진 한칸의 교실에서 4년간 책상을 나란히 하고 오손도손 글을 읽던 사이를 동기라는 말로는 해석이 잘 안되는 것이다. 아무런 리해관계가 없이 오로지 정만을 굳혀온 사이여서 죽을 때까지 서로 허물이 없는 친구가 되는 게 동창이다. 동창모임은 직업과 나이와는 관계없이 학창시절의 이름과 별명이 불리워지는 모임으로 된다. 그럴 때면 나는 나의 이름을 자꾸 듣고 싶어서 앞에 나서서 납뜨기를 좋아하는데 그런 이 내 심정은 모르고 동창생들은 괘씸하게도 “야- 이 백두곰이 또 술 권하네.” 하면서 이름을 바꿔 부른다. 그럴 즈음이면 나는 곰처럼 뒤로 슬슬 기여서 물러난다. 내 이름이 불리워지지 않고 있음을 아둔한 곰의 판단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되불러올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여기 클락에 와서는 또 영어로 폴이라고 불리워 난 이젠 아예 자기가 대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얼렁뚱땅 얻어가진 영어 이름인데 일사천리로 성장하는 나의 인생의 궤도에 따라 이 폴이라는 이름도 하얀 셔츠에 잉크가 스며들듯이 쫙 퍼지기 시작한다. 나의 인생이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피여가는 것이다. 나의 새로운 하루하루가 시작이 되여가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렇게 영원히 매일 하루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다른 내가 존재를 약속하고 있는 하루도 있다. 그렇다. 나에게는 매일 아름다운 아침이 챙겨지고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그것을 운영해나간다. 나를 위하여, 그리고 또 다른 나를 위하여.     감지하는 가을   모두들 가을이 온다고 한다. 오는 것인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모두가 가을을 ‘온다’고 하면서 나름 대로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모두들 온다고 한다’라고 표현함은 ‘모두들’이라는 단어, 즉 나를 쏙 빼놓은 범위의 그룹을 내세워서 나는 그 속에 들어있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모두가 말하는 가을이 나한테는 차례지지 않고 있음을 하소연하고 그 아름찬 가을의 풍성함을 만긱하지 못하는 나의 피해의식을 널리 알림으로써 ‘모두들’의 동정을 사고 거기서 위안을 얻고 싶어서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일년 내내 령상 30도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남국 필리핀에 있어서 사계절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위챗에 사진들을 올리면서 찬사를 금하지 않는 가을을 느껴보고저 이렇게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야지 그런 자세로 나는 지금 가을을 찾아떠난다.   푸른 숲과 들에는 하냥 여름을 자랑하는 이름 모를 꽃들이 아름답다. 망고 같은 열매는 이미 시기가 지났고 거리에선 아직도 대롱대롱 달려있는 야자나 바나나가 눈에 뜨인다. 논밭에선 수확이 한창이고 모내기도 한창이다. 황금들판이란 말은 여기에선 아는 사람이 없다. 언제 봐도 이 빠진 것처럼 황금색 낟알이 더덕더덕 땅덩이에 붙어있다. 여기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슨 봄나비요, 황금 가을이요, 버들개지요, 가을 단풍이요 하는 이런 말들을 하면 나를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영어를 자습하고 있는 나로서는 애를 쓰고 이런 표현을 가진 영어단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영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영어 공부에서 꽤나 득을 본 셈이다.   어디서 가을을 찾아보랴. 언제나 무더기로 쌓여있는 과일들, 언제나 푸르기만 한 식물들, 언제나 반팔 옷만 입고 다니는 사람들, 봄에 나오는 고사리나 민들레가 보이지 않고 가을에 보이는 메마른 옥수수밭이 보이지 않으며 빨갛게 물든 단풍들이 무리를 지은 산들도 보이지 않는다. 온 대지가 가을을 완전히 배제하고 여름만을 보장하는 오로지 우기와 건기의 기후만을 맞고 사는 필리핀이다. 혹시 억지로라도 가을을 지적하자면 아마도 어김없이 여기를 거쳐가는 태풍계절을 들 수 있으렷다. 변화가 없는 계절에 자극이 좀 필요했던 것인지 오가는 태풍을 초대나 한 것처럼 다 불러들인다. 달력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고향에 가을이 자리를 찾을 즈음의 시기라고 하겠다.   요즈음엔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슈퍼마켓이 하나 새로 생겼다. 이름을 멋있게도 드림마켓이라고 달고 커다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영어와 한글, 그리고 중국어로 써붙인 간판은 명백하게 이 세가지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취지를 내세웠다고 생각한다. 대개 이곳에서는 이 세가지 언어를 내세우면 여기서 사는 모든 주민들의 언어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무슨 초청장이나 받은 것처럼 이 슈퍼마켓에 자주 들리군 하는데 요즈음에 가만히 보니 먹음직한 감이 나왔다.   가을을 갖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을이 있는 곳에 내가 찾아온 것이다. 바꿔말하면 내가 찾아간 곳에 가을이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자마자 군침부터 넘어가는 먹음직한 감무더기. 북방의 떫은 감이 아니고 달콤하고 사각사각하는 종류의 감이였다. 감쪽같이 둬개 사서 먹고 싶었지만 거래처 회사에 가던 중 생수를 한병 사려고 들렸던 걸음이라 그 날엔 사먹지 않고 손으로 만져만 보고 진렬대 앞을 지나쳐버렸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속담이 생각히워 키득 혼자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판매원도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벌쭉 웃는다.   이렇게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갖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 아니다, 올해의 가을은 우연히 만나게 된 것도 또한 나의 삶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기다리는 쓰라림보다는 찾아가는 시달림 켠이 차라리 더 받기 쉬운 시련임을 깊이깊이 감지하게 되고 기다림 속에서 우연히 닥치는 만남이 또한 무한히 즐거운 자극이다.   아, 고마운 가을이여, 아, 감지하는 가을이여. 출처:2017 제6호
45    [수필 마당]이름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인생길-허무궁 댓글:  조회:338  추천:1  2019-07-15
허무궁 이름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인생길     클락에 온지도 어느새 두주일이나 된다. 남해바다를 두고 세상이 시끄러운 이때에 기어이 여기로 오게 된것은 사업때문이지만 그외에도 나에게는 여기로 오게 된 리유가 또 있다. 두번에 걸쳐서 출장걸음으로 와본적이 있은 필리핀 클락은 나에게 마음이 끌리는데가 있었던것이다. 아직은 째지게 가난한 고장이지만 이곳 사람들이 소박하고 거짓이 없고 직통배기여서 이 나라를 리해하기에 힘이 들지 않고 락천적인 사람들의 성격과 환하게 웃는 얼굴이 정다웠던것이다. 80년대초반에 중국의 대문이 활짝 열어젖히자 밀려들어온 외국인들이 여기저기에서 관광도 하고 투자도 하였는데 적지않은 지성적인 외국인들이 중국인상을 말하면서 말했었다. 솔직해지고싶다 땅에 돈이 좍 깔렸다 소박한 어린 시절이 되살아난다 그때면 우리는 외국거라면 달도 외국것이 더 크다고 생각할 때였는데 그 말뜻을 리해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리해가 되지 않았다. 흙먼지밖에 없는 이 땅에서 저렇게 돈이 깔렸다, 솔직해지고싶어진다 하며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내가 여기 필리핀으로 와보니 불현듯 그때 외국사람들의 말씀에 오성이 트이게 된다. 총을 휴대하는것이 합법적이고 호텔마다 카지노와 술집, 뉴스엔 매일 살인과 마약 등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범죄가 방송이 되는 필리핀이지만 그러한것은 그래도 구석구석에서의 일이고 정의와 근면과 참다움이 쫙 갈려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길 가다가도 눈길만 마주치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다. 적도의 태양이 너무 강하게 얼굴을 비추어서 눈도 크게 뜨지 못하고 사는게 원인이 아닐가 하는 우스운 생각도 해보지만 여기서 나는 부릅뜬 눈은 보기가 힘들고 하냥 해쭉 웃는 반달 눈뿐이였다. 잔디밭과 수백년의 년륜을 헤아리는 장수 나무들, 자전거와 달리기로 주말을 빛나게 하는 클락. 그게 내 마음에 한결같이 비집고 들어와 나의 마음을 빼앗아간 원인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아름다운 영어와 아름다운 웃음과 맛 좋은 서양음식 등등 나에게는 다 고마운것뿐들이다. 이렇게 고마움때문에 다시 찾게 되는 필리핀에서 나는 이름을 하나 얻게 되였다. 두주일간 여기서 공장 임대건으로 동분서주하다가 적당한 곳을 찾아 문의하러 갔었는데 건물관리회사의 녀성매니저가 나의 명함장을 들여다보더니 당신 영어이름이 없네요 하며 아쉬워한다. 마치도 있어야 할것이 없어서 답답하다는 그런 태도였다. 그래서 내 이름은 쉬청하오(중국어)라고 했더니 영어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 하길래 그럼 너 하나 나에게 지어달라 했더니 직방 Mr paul 하고 부른다. 그게 내 이름이냐고 물었더니 온 얼굴에 활짝 꽃을 피우면서 그래요라고 한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내 이름을 고르시느라 무척이나 고민을 하셨을건데 이 녀성은 몇초사이에 내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다. 우리 부모님보다 이름을 짓는 재간이 있었던가보다. 어리벙벙한김에 나는 롱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그녀의 활짝 핀 얼굴을 보고 그만 나의 마음이 확 열리게 되였다. 그녀의 마음이 개운해지고 그러는 그녀와 상담을 하는 이 Paul도 마음이 개운해진지라 담판은 대개 내가 원하는대로 진행되여서 계약까지 맺게 되였다. 림시 숙소로 돌아온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맥주 한병을 마시며 그 이름이 무슨 뜻일가 궁금해서 인터넷 사전을 찾아봤더니 별뜻이란게 보이지 않고 한마디로 남성의 이름이라고 해석을 한것만 적혀있었다. 녀성이름이 아니여서 좋겠다. 뭐 이정도로 싱거운 마음 거두면서 다른 페지를 열어보았더니 타이의 인기 남성배우의 이름이 Paul라고 적혀있었다. 에라 아무튼 유명한 사람 하나 이 이름을 갖고있으니 이걸로 만족하리다. 새 이름에 휘황찬란한 뜻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미미한 결과에 다소 실망이 갈수도 있지만 요란한 뜻이 있으면 어떠랴, 재래로 우리 민족은 이름을 소박하게 짓는것을 미덕으로 삼아오지 않았더냐. 돌쇠요 개똥이요 먹쇠요 했거늘 내 오늘 양키이름 하나 얻어가진걸로 가히 복이 떨어진것이나 다름이 없어라. 그런데 곰곰히 다시 생각을 해보니 이름이 하나 새로 생겼다는게 참으로 아름찬 사건이 아닐수가 없었다. 태여나자마자 부모님이 우리 말의 이름을 달아주셨고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중국말 이름을 쓰게 되고 문학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필명과 자를 스스로 만들어쓰고 일본에 이주하고나서부터는 또 일본말 발음의 이름이 불리워지게 되였다. 되돌아보면 매번 이름이 새롭게 불리워진 때가 나의 인생에서는 모두 전환점으로 새로 출발이 된것이였다. 새로운 출발을 계기로 사회가 나를 불러주는 칭호가 서로 다르게 되였다는 점, 이름이 이렇게 나의 인생을 바꿔놓는 작용을 하게 되였다는 점을 념두에 두고보면 오늘 필리핀에서 영어이름을 가지게 된 이다음의 인생은 또한 어떠한 전환점으로 되고 어떠한 인생의 길이 주어지게 될가? 홀로 찾아온 나라 필리핀에서 나는 이렇게 Paul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시 출발한것이다. 이제부터 이 맑고맑은 청청 하늘과 푸르디푸른 시원한 수림과 융단 같은 잔디밭우에 Paul 하고 부르는 정다운 목소리들이 점점 많아질것이라는 뿌듯한 마음으로 나의 새로운 인생이 클락에서 시작이 된다.  
44    [수필]아버지의 등 댓글:  조회:311  추천:0  2019-07-08
아버지의 등 허무궁     우리를 부자간으로 하는 것은 혈육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서다   -프리드리히 실러   나의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잘 모른다. 그런데도 내 삶에 가장 많이 떠오르는 사람이 아버지다. 가족 중에서 가장 짧게 함께 살아왔는데도 가장 가까이에서 나와 만나는 사람이 아버지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들은 이야기에서 떠올린 아버지요, 꿈에서 본 아버지다. ‘문혁’이 끝난 어느 날 어머님을 모시고 룡정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를 만나는 사람마다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에구야, 순자가 걸어올 때면 꼭 뒤에서 싱글벙글 허근이 따라오는 것 같애. 그렇지? 언제나 한발 뒤에서 싱글벙글 웃으셨는데.” 이렇게 얻어들은 얘기로 아는 아버지는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뭇사람들이 다 반겨주는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 때로부터 난 속으로 작심했다. 나도 아버지처럼 싱글벙글이 되자. 어머니 뒤에서 싱글벙글 웃어드리자. … …   아버지의 얼굴을 제일 마지막에 본 것은 점심밥을 가져다 드리려고 형님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던 그 날이였다. 1968년의 한여름, 여덟살 때였다. 룡정 방역소, 옛날 우리는 방역참站이라 불렀다. 죄꼬만 방역소가 나한테 남긴 인상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경계가 엄한 감옥이다. 룡정시 중심거리에서 해란강으로 가는 방향으로 뻗은 길 곁에 자리를 잡은 방역소는 그 주위에서 제일 어두컴컴한 인상을 주는 그런 곳이였다고 기억된다. 길 곁에 작은 울타리가 있었고 대문으로부터 약 서너메터 들어간 곳에 낮은 건물 한채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위만국 시기에 지은 일본식 건물이라고 생각된다. 아버지가 나를 내다본 창이 얼굴 하나에 꽉 찰 정도의 크기 밖에 안되는 형편없이 작은 창문이였기 때문이다. 위만국 시기 일본식 건물을 보면 대개가 창이 작고 방안이 어두운 것이다. 방역소의 울타리 안에는 한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지만 울타리 안에 있는 건물은 어딘가 음침한 인상을 주었고 든든하게 만든 벽은 안팎을 격리하는 토성과도 같았다. 집이라기보다는 위만국 시기 여기저기에 세워놓은 또치까 같은 건물이였다.   집에서 방역소까지는 한참 걸어야 했는데 그까짓 거 무슨 대수랴. 오랜만에 아버지와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온 마음이 꽉 벅차있었던 것이다. 이제 형님께서 문지기들에게 밥곽을 건네주면 아버지가 다 잡수시고 빈 밥곽이 되돌려나온다. 그러면 우리는 그 밥곽을 가져다 외할머니한테 드리는데 외할머니는 매번 빈 밥곽을 받아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기시군 했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름조차 모른다. 커서 어머님한테서 들은 바 있지만 할아버지는 항일하다가 사망하였는데 함께 있던 항일투사들 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다같이 살해당해서 증명할 사람이 없는 탓으로 렬사가족이 되지 못하고 있단다. 그 이상은 어머니도 모르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 할아버지나 할머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갇혀서부터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와계셨다. 보통 형님이나 누님께서 아버지께 밥을 날라다 드렸는데 이날 형님은 어찌하여 밖에서 세상 모르고 뛰노는 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떠난 것이다.     울타리 대문어구에서 총을 지닌 문지기들에게 형님이 아버지의 밥이라며 건네주자 나는 전번에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던 창문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이제 내다보시며 웃으실 것이다. 아버지가 감옥생활을 한 후로부터 아버지와 만나는 방법이란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잠시 후 사변 변두리 대각선으로 사십센치나 될가말가 한 창문에 사진틀에 넣은 사진처럼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환등기 속의 화면처럼 나타난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이제 우리와 눈인사를 하고 밥을 드시는 시간이 될 것인데 왠지 아버지께서는 밥을 드실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우리만 내다보고 계셨다. 나 역시 눈길을 다른 데다 팔세라 그냥 아버지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문지기청년들이 뜰안의 똥개들마냥 여러명이 어슬렁거리며 겁을 주어서 그 분위기가 하도 삼엄하고 무서운지라 아버지를 소리 높여 부르지는 못하고 혼자소리로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불러댔다. 무표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냥 못 박은듯이 그대로 굳어져있었다.   한참 이러고 있을라니 형님께서 “가자” 하며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부지 벌써 밥 잡샀나?” 하고 물으며 떠나길 싫어했더니 “오늘엔 안 먹는단다.” 하고 어느 문지기가 대신 대답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형님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뒤돌아 아버지만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모습은 아까 본 그대로였다. 네모난 사진틀에 넣은 사진과도 같이 굳어져있었다. 형님은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발길을 다그쳤다. 등에 아버지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며 부랴부랴 달아나듯 방역소를 멀리 떠나서야 형님이 련거퍼 “개새끼들 같은 게, 개새끼들이… 씨!” 하며 투덜댔다. 왜냐고 몇번 물었지만 형님은 대답은 않고 그저 다그쳐 집으로만 향했다… 그 다음의 일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고작 이런 토막적인 화면 뿐이였다. 토막토막 끊어진 필림마냥, 모두 합쳐도 열토막도 될가말가한 화면, 이러한 토막이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한 삶의 전부라면 여러분이 믿으실가?   무엇 때문에 아버지를 가두고 비판을 하는지 나는 영문을 잘 몰랐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군사훈장을 목에 걸고 우쭐거렸던 나다. 아버지는 뭇사람들이 떠받드는 의사였다는 것만은 어린 가슴에 언녕 깊이 새겨있었다. 아버지가 원장으로, 어머니가 간호장으로 일하던 현립병원에 가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는 사람마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나도 빠짐없이 둬마디 귀엽다는 칭찬을 받는 게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갇혀있다니. 나는 그 사연을 알 수가 없었고 알아야 된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나이가 그럴 나이가 아니였다.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는 무표정한, 초췌하게 여윈 얼굴모습, 멋진 아버지가 아니였다. 그 측은한 눈길도 이상하게 흐리멍텅하고 힘이 빠져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여윈 얼굴에 푹 꺼진 눈확, 입으론 뭔가 말씀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코 소리를 내진 않으셨다. 지난번 같으면  손으로 창을 더 활짝 열겠다는듯이 두 변두리를 잡고 당장이라도 머리를 밖으로 내밀며 내다보셨겠는데 오늘엔 두손도 보이질 않았다. 뭔가를 전달이라도 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말없이 덤덤히 두 아들만 내다보셨다. 그 때 아버지는 무엇을 나한테 전달하고저 하셨을가? 초점을 잃고 굳어진 시선, 달아나듯 떠나는 두 아들의 등에 무한한 한만을 실어주신 걸가? 그 어지러운 세상에 축복이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이제 특무가족이라고 끼칠 피해를 감안하시고 근심과 원한이 마구 뒤범벅이된 그러한 심정으로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랴. 힘이 없어서 이렇게 된 자기를 탓하면서 미안하다고 하셨을가? 시선은 그냥 우리한테만 쏟아부었지만 그렇게 애매하고 무표정하고 어수선한 눈길에서 그 의미를 터득하기엔 나의 나이가 너무나도 어렸다. 오십년이나 지난 오늘 이 때까지도 나는 그 날 아버지의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잊혀지지가 않아서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으로 간주하고 마음속 한가운데 간직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뜻을 헤아릴 바가 없고 난해한 추억의 한대목으로 남긴 채 오래동안 이렇게 괴롭기만 하다.   후에 다 커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때 아버지께서는 열흘 동안이나 잠을 못 자고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나흘만 자지 못하면 환각이 오는 등 여러가지 신체적 장애가 나타나게 된다는데 열흘 동안이나 잠을 못 자게 했단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이런 고문이 있었겠는가!   그 이튿날 아버지께서 목숨을 끊으셨다.   자결, 자결인가?  허근, 1929년생, 39세, 동북군의대학 졸업. 18세 참군, 제 4사 15퇀, 제12사 과장, 군공 3급 3차, 잔페 2급. 원 연길현위생국 부국장 겸 현립병원 원장. 일본특무, 조선특무, 가짜잔페, 가짜당원, 쏘련주자파, 당권파, 친일파. 이것이 아버지의 전부다. 참군한 경력과 군의대학 두곳을 다닌 학력 그리고 병원에서의 짧은 근무기간. 그가 걸어온 길의 전부는 고작 석줄 밖에 안되였다. 리력서보다 들씌워진 모자가 더 번다하고 어마어마했다. 특무모자만 해도 세가지, 알고 있는 외국어는 그 외국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특무로 되는 근거였다. 가짜잔페라는 근거가 바로 잔페군인증서이고 가짜당원이라는 근거가 수차례 받은 군공메달이였던가? 전쟁시기에 총알이 비발치는 속에서 간호사들을 거느리고 부상병들의 치료에 목숨을 내건 사람이 살아 돌아와 이제부터 평화로운 고향에서 의학에 몰두하자니 특무니 뭐니 하며 때리고 잠을 재우지 않는다. 별의별 해괴한 수단의 고문을 다 받던 끝에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한을 품고 세상을 버리는 길을 택하셨는데 고문을 피하는 방법이란 오로지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이였다. 하소연할 곳도 없는데 이대로 더러운 손들에 맞아죽을 바엔 스스로 가는 게 용감하고 깨끗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지몽매함에 대한 항의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커가면서 점점 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어릴 때는 사망하셨다고 하니 그런가 했지만 커가면서 사무치게 그리워나는 아버지가 어딘가 살아계시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군 했다. 대학을 다니던 북경에서, 또 북두성잡지사에서 일을 보던 장춘에서 그리고 일본에 이주를 한 후에도 나는 여러번 아버지와 꿈에 만났었다. 그중에서도 장춘에서 만난 꿈이 가장 진실했다. 나는 어쩌다가 잣나무가 수림을 이룬 심산으로 갔는데 거기서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중학교 때에 학교의 행사로 우리는 약 일주일간 심산 속 나무로 지은 집에서 생활하면서 잣나무를 식수한 적이 있었다. 지신 성남 6대에서 멀리 보이는 손가락산의 뒤골안이였는데 그 땐 곰이나 범이 드나든다는 골안이였다. 그런데 꿈에 그 산으로 가게 된 것이다. 거기서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원시인’처럼 변모한 사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눈에 아버지임을 알아보았다. 그 ‘원시인’의 눈과 마주쳤을 때 너무나도 익숙한 눈길이였기 때문이다. ‘원시인’은 나를 보자마자 달아났고 나는 아무리 봐도 아버지 같아서 그의 뒤를 정신없이 쫓아갔다. 자그마한 나무집 앞에 이르러 ‘원시인’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세요? 아버지가 맞지요? 나 승홈다. 승호라구요.!” 여러번 꼬치꼬치 캐여묻는 나를 바라보던 그의 두눈에서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아버지라 확신을 한 나는 달려가 한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아버지의 가슴을 때리며 여기서 뭘 했나, 왜서 우리를 버렸나,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하며 울고 또 울었다. 온 인생 동안의 눈물을 다 흘린 것 같았다. ‘문혁’을 피하여 멀리 타향에 피난했다가 ‘문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이렇게 계속 이 깊은 산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깨여보니 나의 베개는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 후부터 나는 아버지와 자주 만났었다. 만나서 나의 얘기도 하고 어머님의 얘기도 하고 형님과 누님의 얘기도 나눴다. 내가 이렇게 커가면서 아버지의 사망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은 그럴 만한 리유가 있다. ‘반란파造反派’들이 자결이라고 일러줘서 억지다짐으로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감히 질문, 조사, 기소 이런 건 엄두도 못 내는 세월이였기 때문이다. 계선을 분명히 해야 하는 세월에 우리 가족에는 나서서 시비를 따질 만한 친척도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알려주면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세월, 혈육이라도 계선을 나눠야 하는 비인간적인 세상, 피해를 받고 사망한 사람이 되려 죄가 되여 고개를 들지 못하는 세상이였다. 음침한 콩크리트바닥에서 잠을 자는 아버지를 위해서 누나가 가져다 드린 이불도 다 오리오리 찢어져있었다. 무엇을 감춰서 들여보냈는가 검사를 한 흔적이라 들었다. 그러한 비리가 당연한 사실로 굳어진 세월이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수십만 피해자들 중 그 피해를 재판에 내걸고 소송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존재할 수가 없고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결국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다. 고중을 졸업할 즈음에야 아버지가 루명을 벗게 되고 공무로 인한 사망이라고 ‘조직의 결론’이 새로 나왔는데 그 손해배상금은 썩 후에야 내려왔다. 손해배상금으로 대학을 가는 나의 손목에 어머님께서 끼워준 상해표 손목시계 하나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나에게 넘겨준 백원의 저금통장 하나로 나의 동년의 원한은 삭혀야 했었다.  그 손목시계는 1994년 내가 일본에 이주할 때에도 지니고 갔었고 지금도 나의 서재의 서랍에 정중하게 간직하고 있는데 나와 함께 있은 손목시계는 하나의 허술한 상해표 손목시계가 아니고 하냥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브릿지였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뉴대로 되는 귀중한 존재였다.    가평요贾平凹의 수필 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작가 가평요가 어느 한 작품으로 매스컴의 비판을 심하게 받았던 모양인데 그 때 아버지에게 무심한 한마디로 그런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는 삼십리 길 떨어진 현성에 가서 신문들을 다 뒤져보시고 와서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시면서 술 한병 내놓더라 한다. “얘야, 없는 일 만들지 말고 있는 일 무서워 말거라… 오늘 우리 부자간에 술이나 실컷 마시자.” 그 날 부자간은 배갈 한병을 다 마셨다고 한다. 아들의 고통을 나눠가지려는 아버지가 베푸신 사나이다운 은혜, 얼마나 부러운 이야기인가! 괴로울 때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술잔, 이것은 나의 인생에서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사치요 갈망이요 어리광이다! 요즈음 위챗에서 간혹 초라한 모습을 한 아버지들의 사진을 내놓고 효도해야 한다느니, 고생하시는 게 아버지라느니 불쌍하다느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나에겐 그런 초라한 아버지도 불쌍한 아버지도 효도를 드릴 아버지도 없다.    초라하든 불쌍하든 다 좋으니 나에게 아버지를 돌려다오! 잠 못 잔 아버지가 병신이 된 채로라도 좋다, 눈확이 꺼지거나 실명이 된 아버지라도 좋다, 옛날의 름름하고 인자하고 싱글싱벙글하는 아버지가 아니라도 다 좋으니 이젠 그만 나의 아버지를 돌려다오! 나도 가끔씩은 아버지와 술 한잔이라도 나눠보고 싶다. 그리고 나도 맥스 루케이도처럼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별다른 일을 한 것은 아니였다. 그저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하셨다. 즉 거기에 있어주었다.”  그렇다. 그저 있어만 주면 되는데… 나이가 반백을 넘어도 아버지를 그리는 이 마음만은 그냥 여덟살에 멈춘 채로 늙을 줄 모르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세월을 탓하리오, 하늘을 탓하리오까!    남의 아버지 인도의 힌두교에서 죽은 조상의 령혼을 ‘피트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피트리로 된 것인지 아니면 외간 계집 차고 도망을 간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운남의 촌광천은 아버지가 없는 게 죄였다. 내가 일본 동경경영시스템연구소에서 주임연구원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큰 사고가 생겼다. 운남대학교에서 온 촌광천이라는 청년이 동경 모 지하철 역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렬차에 몸을 던지고 세상을 떠나버렸던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온 지 3년째 되던 해일 것이니 그의 나이가 아마 25세 좌우라 생각된다.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뽑히워 일본의 모 소프트회사에 배치를 받은 우수한 인재였던 촌광천이 왜서 이렇게 가볍게 자기의 인생을 마치게 되였는가?   거기에는 자취를 감춘 아버지의 에피소드가 악운으로 등장한다.   나는 남경대학에서의 소프트시험만 마치고 서안교통대학과 운남대학에는 일정을 미룬다고 일방적인 련락을 해놓고 무작정 동경으로 돌아갔다. 촌광천의 후사처리가 더 급했기 때문이다. 낭아시마소장은 촌광천의 집에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몰라서 대사관에 맡기자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운남대학교에서 뽑아온 학생이였기에 내 손으로 가족에게 데려다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섰다. 나는 일본에 도착한 이튿날로 다시 곤명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인 과장 아마노를 데리고 함께 떠났지만 그 자식은 골회함의 곁에도 서려 하지 않아서 내가 골회함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여섯시간의 비행 끝에 곤명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하는데 안고 있는 단지가 뭐냐며 출입국 경관이 나를 불러세웠다. 단지 안에 금속이 들어있다는 것이였다. 유품에 돈지갑이 있었길래 그 지갑을 골회함 단지 속에 함께 넣어두었던 것이 기억나서 돈지갑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꺼내 보여달라고 한다. “아니, 그건 안됩니다. 남의 지갑을 함부로. 이 사람한테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뭘! 이 사람이라니? 사람 놀리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여기 안에 사람 하나 들어있어요. 이 사람의 유물이거든요. 정 보시려면 여기…” “아, 그런가. 아니, 아니. 그럼 그만.” 내가 내미는 골회함단지를 피해가면서 경관은 나를 놔주었다.  비행장에서 촌광천의 일가친척 십여명을 만나고 촌광천의 어머님한테 골회함을 넘겨드리고저 했더니 그 사람들의 풍속습관으로 객사한 사람은 이대로 받을 수 없다며 골회함을 안은 채로 차에 앉으라고 한다. 안내하는 대로 골회함을 안고 차에 몸을 실었더니 장장 세시간 달려서야 공동묘지에 도착하였는데 또 거기서 장장 세시간이나 불교식 장례를 지냈다. 경문을 한나절 읽고 나서 친척일가 모두가 밖에 나가서 골회단지를 안은 나의 뒤에 한일자로 줄을 서서 건물을 한바퀴 돌고 다시 절 안에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경 읽기가 노래처럼 시작이 되고 또다시 일어나 절을 하고 경을 읽는 녀승들의 목소리가 이딸리아 극장을 꽉 메우는 소프라노에 못지 않았다. 한참  있으니 드디여 촌광천의 혼을 불러왔다며 식이 끝났다. 그제야 촌광천의 어머니가 골회함을 내 손에서 받아들고 사전에 지정된 곳에 가서 골회를 묻었다. 행사가 다 끝난 다음 일가친척들이 휴식실에 다 모여 촌광천에 관한 일의 자초지종을 캐여물었다. 폭풍우 같은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을 하고 나서 촌광천의 우수한 상황, 일본의 공공시설에서 자결을 했을 때의 법적인 책임, 그 후과 그리고 동경경영시스템연구소에서 성의껏 치른 장례식 등에 대해서 자상히 설명하고 연구소의 위문금을 전달했더니 일가친척들의 격한 감정도 수그러들고 모두가 안정이 되였다. 산을 내려 곤명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서럽게 울고 있던 촌광천의 어머니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촌광천의 이야기를 하셨다. 광천이가 태여나서 얼마 안되여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섰는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단다. 어디로 도망을 간 것인지 어디서 죽어버린 것인지 누구도 모른단다. 어디서 장사를 하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계집한테 반해서 도망갔다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러나 어떤 소문이 돌든 촌광천의 어머니는 절대 찾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정이 있다면 제 발로 걸어들어오리라 믿었고 또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이미 이 가정을 버린 것이 틀림없으니 부디 억지로 잡아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단다. 결국 자취를 감춰버린 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의 성을 갈아서 엄마의 성씨를 따르게 하고 애기 때부터 엄하게 교육을 했었단다. 교원 출신인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하나 일등만이 목표라고 타일렀고 소학교 때나 중학교, 대학교 때나 쭉 이렇게 교육을 해와서 아들은 어려서부터 일등을 하지 못하면 밤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그게 죄였어요. 내가 아들을 이렇게 만든 거죠… 철이 들기 전에 아이를 낳아버렸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애를 키워야 하는지 몰랐어요. 의지할 애비도 없었고… 아니죠, 다 애비 탓이죠. 애비의 버림을 받은 애거든요. 애비가 버리고 간 아이를 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서 그저 큰 인재로 만들어서 애비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보란듯이. 아버지를 만나면 아들은 실컷 나무람도 하겠죠. 아들을 키우는 게 무슨 보복 같은 그런 심정이였거든요. 흑흑흑… 그런데 이런 불효자식이 될 줄이야… 흑흑흑… 애비만 있었더라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건데… 휴-” 촌광천의 어머니는 다시 눈물을 쏟으며 뒤말을 잇지 못한다. 다 아버지의 탓이다. 아버지가 없는데도 아버지의 탓이다. 촌광천은 소프트시험도 일어시험도 운남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뽑힌 인재였다. 그런데 소프트회사에 들어가서 언어와 생활습관, 기업경험 등으로 꼭 일등만을 념두에 둔 그에게는 너무나 큰 정신적 압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 적게 자고 노력하여 일본에 가서도 제일 빨리 승급하고 늘 칭찬만을 받아오던 그가 불시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입원을 해서 일주일 만에 나는 그를 찾아가서 위로를 하며 일등만이 인생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이등, 삼등들도 가득하다, 이등, 삼등이 있어야 일등도 있을 거 아니냐, 넌 이미 가장 우수한 청년으로 된 것이니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말고 적당하게 휴식을 하면서 일하라, 정신적 압력이 심할 땐 친구들과 같이 노래방이랑 가서 놀거라 하고 타일렀더니 거기서 힘을 얻었는지 이틀 후에 툭툭 털고 일어나 퇴원하게 되였다. 퇴원하고 나서 감사하다면서 꼭 나에게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하길래 그가 들어있던 아빠트에 가봤더니 이미 자기 손으로 료리를 세접시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우리 둘은 이런저런 얘기로 재미나게 시간을 보냈었는데 그가 저세상을 가게 된 것은 바로 약 한달 후였다. … … 곤명에서 동경에 돌아온 나는 운남대학교에서 온 중국 직원들을 모여놓고 곤명에 가서 장례를 치른 정황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앞으로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생활을 함에 있어서 자체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오락활동을 많이 하면서 오늘을 즐기라, 일만이 인생이 아니다라는 따위의 말을 구구히 하였더니 함께 온 운남대학의 동기생들은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도 알아요. 근심 마세요. 걔는 학교서도 일등만 하려구 그랬어요. 특별했죠.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여서… 쯧쯧쯧.” 아버지가 없이 자라서 어쨌단 말인가? 누구도 그 말뜻을 캐여묻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그게 죄였다는듯이 수긍을 하고 있는데 대체 아버지가 없이 자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삶은 이미 이그러진 삶이였던가? 잘해도 아버지요, 잘못해도 아버지다. 있어도 없어도 다 아버지 탓이다. 불현듯 영국의 속담이 떠오른다. “백명의 스승보다 한명의 아버지가 낫다(One father is more than a hundred schoolmasters).” 아버지는 일당백이라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아버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니 혹시 피트리로서 지금 쯤은 저세상에서 뒤늦게나마 아들의 교육에 정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저세상에서도 자녀교육이 필요한 것인지는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버지 나의 아버지와 남의 아버지 얘기를 했으니 이제는 내 차례다. 내가 아버지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은 딸애가 처음으로 나를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다. 우리 내외간은 모두가 한창 일에 몰두할 나이였기에 갓난 딸애를 할머니께서 훌떡 안아가셨다. 연변의 뜨끈뜨끈한 구들에서 키워야지 장춘의 추운 집에서 아기 다 동태되겠다 하면서. 얼마나 지났을가. 어느 날 난 연변 출장길에 딸애를 보러 갔었는데 할머니의 등에 기대여 뭔가 손에 들고 장난질 하던 딸애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날 보고 어망결에 “아부지!” 하고 웨치며 구들에서 일어나 뛰여오려 하다가 다시 뭐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하는 표정으로 다시 할머니의 등뒤에 숨었다. 여러달 보지 못했던 아버지이지만 본능적으로는 아버지를 대뜸 알아보고 벌떡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그런데 인차 주춤하였다. 혹시 나와 비슷하게 생긴 큰아버지를 잘못 보고 부른 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두팔을 벌리고 효정아! 그래 아버지다! 하고 부르니 그제야 시름 놓였던지 달려와 품에 안겼다. 아부지야? 아부지야? 믿기 어려웠든지 아니면 너무 반가웠든지 반복해서 확인을 해보는 그 부름에 나는 처음으로 내가 아버지로 되였구나 하고 감개가 무량했다. 말을 하는 애가 이번이 처음이였던 것이다. “저런 년 봤나. 키워준 할머니한테는 저렇게 반긴 적이 없었어.”  어머니는 가마목으로 옮겨앉으시며 웃으셨다. 아버지로 불리우게 된 후로부터 딸에 대한 사랑이 시작이 된다. 그전에는 그저 아이가 귀엽다고만 생각했지 아버지로서의 자각은 꼬물 만치도 없었다. 그런데 딸애가 아버지라 부르며 따라다닐 때에는 그저 딸애가 손만 내밀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주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부풀었다. 어머니로 되는 기분도 그러한지 조건만 허락되면 한번 경험해보고 싶지만 아버지로 되는 기분은 틀림없이 그랬다. 안고 있어도 무거운 줄 몰랐고 업고 있을 때도 사내로서의 체면도 잊었고 자전거의 뒤좌석에 앉히면 벤츠를 몰고 다니는 기분이였다. 허나 한편 아버지로 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이 때에야 들게 되였다. 아버지로 되고 나서야 아버지를 하기로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는 자식의 자랑을 하는 부모는 바보라는 말이 있다. 자랑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식을 거론하는 자는 바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간단히 그치지만 이미 해놓은 말은 거둬들이지도 못하니 나도 바보를 면치 못한다.   끝나는 아버지 아버지로서의 짧은 인생도 이젠 거의 마무리하려고 한다. 고작 오십 후반에 사는 자가 왜서 인생을 다 산 것처럼 이런 말을 하는가 웃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이 끝이 나거나 내가 아버지로서의 자격이나 그 상대를 잃어서가 아니라 내 자식의 소속관계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소유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엊그저께 딸애의 약혼식을 마무리하고 이런 생각이 들어서 여기 몇글자 적어본다. 딸애를 시집보내는 일은 딸을 가진 부모로서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여서 거론할 것 없지만 보내는 켠의 아비로 된 처지에서 보면 뭔가 말 못할 심정에 사로잡힌다.  난 다행히 사위감이 이 글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본사람이여서 시름을 놓고 심정을 토로하지만 곱게 키운 딸애를 남에게 빼앗기는 그런 심정이다. 아마 이 글을 보고 있는 아버지들은 사위 앞에서는 입밖에 말을 내지 않지만 그 심정은 아마도 나와 비슷할 것이다.  일본식으로 아주 엄숙하고 째인 약혼식을 치뤘는데 식보다 사진을 찍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사진기를 든 사람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웃으라고 하건만 웃음이 나올 리가 있나, 어디? 당사자 둘이야 련애중이니까 행복에 푸욱 잠겨 웃지 말라 해도 웃음이 절로 흘러나오지만 나는 뒤통수에 구멍이 펑 뚫렸는지 아예 뒤통수와 이마 사이로 오봉산의 겨울바람이 윙윙 드나드는 것 같았다. 일본식에 따라 두 가문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고 정좌를 하고 마주앉아서 사전에 외워놓은 대본을 앵무새처럼 외우면서 시키는 서방질을 하노라면 식은 간단하게 끝이 난다. 불과 삼십분 밖에 안되는 그 시간에 수십년간 인생의 화면들이 주마등처럼 련결이 되여 펼쳐졌고 얼굴 한번 붉힌 적없이 키워온 딸애를 이렇게 가볍게 어서 데려갑소 하고 약속을 하면 이제 그 딸은 내 해가 아니고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며느리로 둔갑을 하게 된다는 생각에 그냥 뭐라 말 못할 심정이 가슴을 누른다. 한탄하오니 내 인생, 여태껏 그럴 줄 모른 건 아니였지만 일단 닥치고 보니 이렇게 주책이 없이 넉두리로 변해버린다. 내가 아비로 된 즐거움이란 오로지 딸애의 소학교 시절까지였다. 딸애가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해서 처녀로 성장하던 기간까지는 엄마한테 자리를 빼앗겼고 이제 결혼을 하면 아예 시집에 고스란히 양도를 해야 하는 신세가 아닌가. 그래도 애비는 애비인지라 너남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니 별수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최대한 너그러움의 얼굴을 만들어보이면서 화기애애하게 두 가정의 식사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여기 필리핀에 와서 남이 보지 않는 방 한구석에 점잖게 올방자를 틀고 앉아서 애비의 위엄과 자존을 한가득 과시하면서 딸애한테 정중하게 다음과 같이 분부를 남긴다.    딸애야, 넌 이젠 내 딸로서가 아니라 남편의 안해로 시부모님의 며느리로 어린애의 엄마로 살게 된다. 너의 소속관계가 허씨 가문으로부터 이시카와 가문으로 옮기게 되는 이 때, 너의 미래의 인생길은 이젠 너 스스로 걸어가야 함을 터득해야 하느니라.   예전 같으면 네가 혹시 걷다가 넘어져도 이 아버지가 손을 잡아줄 수 있었고 혹시 길을 잘못 들어서도 이 아비가 쫓아가서 바른 길로 데려다줄 수 있었고 혹시 가는 길이 너무 어두워도 이 아비가 손전등을 들고 비춰줄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일은 다 할 수가 없게 되였으니 너 홀로 앞을 향해서 걸어가야만 하느니라.  어리광을 부릴 상대도 없고 목마를 태워줄 사람도 없고 소비돈을 주는 이도 없을 것이니 너 스스로 어른이 되여 힘차게 걸어가야 하느니라.  이제부터 가야 할 길에는 인생의 로고도 많을 것이지만 인생의 쾌락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니 고통도 쾌락이라 생각하고 남의 손가락질도 갈채라 생각하고 네가 택한 그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거라. 인생에는 편안하게 고생을 하지 않는 인생도 있을 테지만 고생이 있건없건 그게 다 사는 재미인지라 남과 비교하지 말고 너의 앞에 주어진 조건으로 열심히 걷노라면 그게 재미요, 그게 행복임을 알게 되느니라 . 그리고 아버지가 늘 너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니 고독할 때엔 아버지라 불러보거라. 멀리 타향에 갈라져있어도 부녀간에게는 그 목소리가 다 들리는 법이다. 그리고 제발 명심하거라.  딸을 낳지 말거라 . 애비가 속상하리라.   아버지로 맺는 말 자식은 아버지의 등을 보며 큰다고 한다. 아이가 아버지의 등을 교과서로 삼고 아버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커다란 아버지의 등이 믿음직하고 그 등뒤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거룩함을 느껴보고 그 넓은 등에서 안정을 찾게 된다. 어린애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등은 어머니의 따스한 품과는 다른 그 어떤 힘을 얻게 되는 원천이기도 하다. 바라지든 구부정하든 관계없이 어린애는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자란다. 요즈음의 교육학술계에서도 어린애의 성장에 영향을 주는 데 있어서 학교의 선생님보다 아버지의 역할이 더 크다고 한다. 우리 말에 “그 애비에 그 아들”이란 말이 있듯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우에서 말씀드린 바로 나의 아버지도 짧은 인생 때문에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 영향만은 어머니를 통해서 이미 나에게 많이 전수된 셈이다. 대신 살아있으면서도 자기 구실을 포기하거나 역반응으로 자식에게 영향을 끼치는 아버지들도 이 세상에는 더러 존재하고 있으니 그런 아버지들은 자기의 등을 다시 챙겨 반성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등은 아버지의 마음을 비추는 도광판이며 아버지의 인생을 적어놓은 노트이며 아버지의 책임을 업은 파넬이다. 이것 역시 아버지로서의 자리매김의 중요함이라 하겠다. 그리고 나, 잠시 아버지로 되였다가 이제 막 아버지를 마감하는 나는 미처 아버지 구실을 어느 만큼이나 해왔는지 가늠하지도 못한 채 이렇게 어정쩡 아버지의 시기를 놓치고 마는 것 같아서 반성을 해본다.  깨닫게 될 때 끝나는 게 인생이랄가, 효도도 마찬가지고 자식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게 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섭리인지라 한탄할 일은 아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끔 회억이나 하면서 반성을 해보는 재미로 즐기는 삶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상기한 모든 것들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한모퉁이임을 터득하고 나는 후날에도 변함이 없이 그냥 ‘아버지’를 반성해볼 것이다.  력사로 된 아버지도, 남의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43    [수필]건강비결 댓글:  조회:218  추천:1  2019-07-08
건강비결 허무궁     무병장수한 사람만이 건강비결을 말하라는 법은 없다. 의사만이 건강비결을 말하라는 법도 세상에는 세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오늘엔 건강비결을 론하고저 하는데 그래도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무슨 자격 같은 것이 있어야 신빙성에 좀 도움이 되지 않을가 해서 말해두지만 이 허무궁은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할아버지와 같은 성씨요 같은 본임을 가볍게 첨가해둔다. … … 언제나 그러하듯이 청청하늘에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 클락의 하늘이다. 기온 27도인 더운 날씨인데도 겨울이 왔다고 억새가 무성하다. 라체로 되는 나무는 하나도 없고 퍼런 나무잎을 가진 채로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고 하는 클락의 계절은 하늘을 봐도 사계절 다름이 없고 땅을 봐도 사계절이 다름이 없다. 다른 것이란 오로지 계절에 충성을 다하는 식물들 뿐이다. 처음 계절을 알리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풀들이다. 땅에 딱 달라붙은 풀이나 껑충 키가 큰 풀이나 다 꽃을 피운 다음 나름 대로 열매 지고 씨를 떨어뜨린다. 그걸 보고 아, 이젠 가을이 왔는가 보다 하고 사람들은 곧바로 알게 된다.   이맘 때면 고향에서는 소매 긴 옷들이 냄새를 풍기며 옷장에서 잠을 깨는 하품을 하지만 여기서는 여전히 짧은 소매의 여름옷들로 가을을 맞는다. 들에는 사과나 감 같은 자연의 조화가 없고 다만 회색 털을 가진 소들만이 여유작작 풀을 뜯는다. 고마운 것은 나의 집 문앞의 허허벌판에는 무성한 억새밭이 펼쳐져있어서 나는 그 억새를 보면서 고향의 가을을 그려본다. 늦가을, 초겨울이라 할가. 고향은 이맘 때면 무르익은 사과배가 모아산으로부터 룡정에 이르기까지 줄지어 가관을 이루고 가을을 마친 밭뙈기는 이파리를 바람에 날려보낸 풀들로 대비를 이루어 바둑판을 그려놓았을 것이다. 청청 맑은 하늘엔 뭇새들이 재잘재잘 분주하고 산에서는 다람쥐가 개암이 익기를 안달복달 재촉할 것이다. 유화처럼 그려진 칼러의 산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김장배추나 무우나 빨간 고추가 시장을 메우고 찹쌀, 기장쌀, 찰옥수수가 패션업계의 녀왕처럼 장마당에서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마을에 있는 우물가에서 동네 아낙네들이 오손도손 김치를 담그었고 어린애들이 뛰여놀며 가끔씩 김장고추를 갓 바른 배추잎을 쭉 찢어 먹어보군 했다. 저눔이 손 씻지두 않구. 쯧쯧. 자기의 아들놈이든 남의 자식이든 누구나 다 이렇게 욕해도 어느 부모 하나 불만을 품지 않는다. 동네 애들이 다 자기 애들처럼 서로 너나없이 지내던 시절이였다. 좀 색다른 음식을 하면 이웃집에 가져다주고 옆집의 로인도 자기의 할아버지 같이 효도를 드리던 시절이다. 부부간을 제외하고는 온 마을이 다 네 해 내 해 없이 공유했던 시절이다. 이런 것들이 이젠 다 먼 옛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로 기억에 남았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계절은 누가 말해도 가을이라 하겠지만 여기서는 그게12월부터 3월 사이에 이루어진다. 늦겨울이라 할가 초봄이라 할가 그런 계절인데 늦겨울이요, 초봄이요 하는 것은 고향의 개념이지 여기서는 그런 말을 모른다. 다만 북방의 식물들이 모두 사계절에 충성하듯이 여기의 식물들도 어김없이 모두가 계절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신진대사가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충성을 파괴하면 자연의 건강이 해를 입는다.  강을 가로막고 산을 가르면 자연재해가 심하고 이산화탄소의 과도 방출에 지구의 오존층에 구멍이 나서 자외선 피해가 심하고 쓰레기가 지상 뿐만 아니라 깊은 바다 밑에까지 미쳐 비닐을 먹은 큰 고래까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미국의 모 연구기관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인간들에게도 이미 비닐성분이 체내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였다고 한다. 비닐주머니, 비닐포장, 비닐그릇들이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 어디라 없이 다 침입해온 사정에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비닐들이 체내에 흡수되여 자리를 잡는다고 하는데 주지하다 싶이 비닐은 썩지 않기에 체내에서도 산화되지 않고 악성 병균을 유발시키는 근원으로 된다고 한다.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꽉 찬 비닐 때문에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인간은 자연을 개조하고 자연을 새로 꾸미고 자연을 가공하여 인간에게 수요되는 물질들을 만들어 사치를 손아귀에 쥐였는데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 도를 넘으면 안된다. 승냥이나 사자들도 자기가 먹을 만치만 먹고 배가 부를 땐 양이 곁에서 잠을 자도 가만 놔둔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게 문제다.   인간은 욕망과 수요의 화신이며 무수한 욕구의 응결체다 -쇼펜하우어   이 욕망 때문에 인간은 자연계의 한 세포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건강비결의 첫째가 터득된다. 자연의 충성심을 배우고 자연에 효도하라. 자연의 질서에 인체의 질서를 맞추고 자연스런 삶을 살거라. 억지로 살을 빼자고 고생하지 말고 억지로 주름살 줄이자고 바르지 말고 억지로 거시기가 세지라고 정력제를 들지 말고 그저 몸이 편안한 대로 살면 그게 건강해지는 비법이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누고 싶을 때 누고 그렇게. 자기의 건강은 자기의 몸이 제일 잘 안다. 탈이 없이 건강할 때엔 찬물 한사발 마셔도 그 맛이 꿀맛이요, 탈이 났을 때엔 몸이 스스로 알아서 입맛이 있는 음식을 찾는다. 그게 탈에는 약이다. 몸이 다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첫 비결이다. … …   클락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필리핀 원주민들이 사는 생활구역이다. 비비고 들어갈 틈도 없이 빼곡하게 줄지은 주택, 색칠도 하지 않은 벽, 쇠창살 창문 쯤으로 거미줄 같은 전기선들이 들어갔다. 털이더러운 강아지들이 여기저기 산책을 하고 구멍가게의 창턱에는 이미 시들어서 당금이라도 말라버릴 것 같은 남새들이 몇가지가 놓여있다. 열살 정도나 될 소년들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좌충우돌하고 끌신을 신은 아낙네들이 어린애 둘, 셋씩 거느리고 느리게 길 걷는다. 물론 거기에는 닭다리튀김, 만두튀김, 소세지튀김 여러기지 간이음식들도 줄을 치고 있다.   어찌 맛도 보지 않고 평가를 하랴 싶어서 이것저것 먹어보군 하지만 그렇게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은 아니라도 그래도 먹을 만한 음식들이였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적군의 비행기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리님들이 내가 방금 먹은 음식 우에 편안하게 앉아서 볼일을 봤을지도 모를 환경이지만 그 내용물이 너무 미미해서인지 맛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웠으니 그런 일 없었던 걸로 한다. 나는 매일 먹는 남새를 여기서 사는데 아침 여섯시 반에 오면 생생한 남새를 살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였다. 여기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기에 아침이 이르다. 이른아침에 남새밭에서 날라오는 남새는 한두시간 사이에 거의다 팔리는데 나머지는 기온이 높아 점심이 되면 모두 시들어버린다. 중국에서는 뭔가 이상한 물을 뿜어서 며칠 동안이라도 생생하게 보존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는 아직 그런 잔손질 기술을 배우지 못하여 자연 그대로다. 남새 속에 벌레도 있고 키나 굵기도 제나름이고 곱게 생긴 거나 밉게 생긴 거나 다 같은 값이다. 생긴 그대로인 남새, 보기엔 못생겼지만 맛은 어릴 적에 먹던 그런 남새의 맛이고 간혹 보이는 벌레는 차라리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벌레도 먹기를 꺼려서 달라붙지 않는 남새를 여러해 동안 먹으며 살아온 나는 자연산 채소가 없어서 그런 걸 먹기는 하지만 우리는 벌레보다 자기를 챙길 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인간이란 이렇게 생존능력이 본능적으로도 벌레보다 못한 것이다. 의식구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의식구조가 생기면 본능이 약화된다. 의식이 앞서고 본능이 억제되기 때문이다. 유전자음식과 농약, 화학비료 식물이 범람한 시장에 쥐새끼도 독이 두려워 멀리 자리를 감추고 밭이 한자 깊이로 오염이 되여 돌처럼 굳어버린다고 한다. 유전자음식에 대한 연구가 이대로 발전을 하면 이제 곧 길게 생긴 바나나사과나 구린내 나지 않는 파인애플두리안이라는 게 과수원에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진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까투리인간이나 캉가루인간 같은 인종들이 생겨나서 올림픽위원회를 난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래의 올림픽을 생각해서라도 유전자 연구는 이제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먹는 음식을 부디 생김새를 꼭같게 한다든가 더 크게 한다든가 할 필요가 없이 원래의 종자 대로 키워서 고맙게 먹는 게 자연의 생리다. 식물을 가지고 교배를 시키지 말고 좁쌀은 좁쌀 대로 찰옥수수는 잔이삭 그대로 내버려두자. 귀여운 벌레를 생각해서라두 살충제나 농약은 그만두고 좀 고생스럽더라도 유기비료를 펴서 “발이 시도록 밟아보고 싶(리상화)”은 땅을 되찾자. 여기에 두번째 건강비결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벌레를 따라배우라는 이것이다. 벌레가 먹지 않는 음식은 만들지도 말고 벌레가 먹는 음식을 달게 먹어라. … …   언젠가 친구가 가발을 사서 썼다고 해서 한참 옳거니 아니거니 실랑이질 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반백을 넘으면 이런 화제가 많아진다. 틀이를 해넣었다, 머리에 물감 들였다, 가발을 썼다, 주름살 제거 수술을 했다, 뭐 이러루한 화제로 꽃을 피울 때가 있다. 나는 나쁜 머리를 빼놓고는 나쁜 데 없다고 자칭을 해왔는데 요즈음에는 왠지 눈두덩이가 처지고 볼이 아래로 축 늘어져서 매일 아침이면 “아하, 이런 몰골로 변해갈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하고 스스로 한탄하기도 한다. 나의 늙은 모습, 할아버지로 된 모습은 어려서부터 상상도 해보군 했지만 요즘 아침 거울에 비치는 이런 모습은 아니였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어느 날 슈퍼의 화장품 진렬대에 가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문의했다. “저어,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아저씨들의 눈언저리에 쓸 수 있는 화장품이 있습니까?” “어떤 화장품이 필요하세요? 남성 분들이 쓸 수 있는 화장품은 많아요.” 예쁘게 생긴 점원이 곱게 웃으면서 대답을 해주니 나의 부끄럼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담도 커졌다.   “요즈음 아침 세수를 하면서 나는 인생을 검토하게 됩니다. 몰골이 점점 찌그러져서 이젠 나를 편안하게 쳐다볼 녀성이 줄어들겠구나 하고 생각을 하면 영 사는 재미가 없어져요.” “호호호~ 그럼 이 세상 남성 분들은 다 어떻게 살아요? 하하하~” 주위의 점원 몇몇도 따라 웃어댔다. “보통인 것 같은데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 혹시 간밤에 술을 과도하게 마시거나 피로하시지 않았어요? 과음하시면 그럴 때가 많아요.” “아, 네 그렇습니까? 요즈음 술이야 좀 과하지만… 그래서 요즈음 피부를 잡아당겨 편다는 화장품 하나 써봤는데 잡아당겨서 그런지 더 늘어난 기분입니다. 허허허~” “호호호~ 그런 거 어디 있어요? 당겨서 펴진다면 그건 상당한 부작용이 있는 것일 겁니다. 이젠 아무 것도 바르지 말고 이렇게 하세요.” 그러면서 젊은 녀점원은 얼굴을 마사지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또 손바닥으로 가볍게 얼굴을 귀뺨 치듯 두드려보였다. “손벽 한번에 잠자던 세포 사천개나 잠을 깬다고 합니다. 얼굴의 피부도 이렇게 두드려주면 봄날의 이파리처럼 살아나요.” 옳거니 하고 크게 감동이 되여 집으로 돌아와 배워준 대로 열심히 습득을 했더니 아닌게 아니라 순식간에 부은 얼굴이 가라앉고 피부에 활력이 있어보였다. 원래는 이런 건 혼자 가만히 비밀로 간직하고 있어야 점잖은 행실이지만 내 오늘 뭇사내들이 애간장을 태우는 일을 어여삐 여겨 여기에 공개를 하나니,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서 얼굴을 문지르고 귀쌈을 때려라. 그러면 볼이 파릇파릇 되살아나 얼굴에 웃음꽃이 절로 피여난다. 저절로 귀쌈 하나 때려보는 것은 이 같이 피부에만 좋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아주 좋은 점이 있으니 귀쌈을 맞으며 인생을 반성하라. 여기서 세번째의 건강비결이 나온다. 스스로 귀쌈을 때리며 자기를 가꾸라. 뭘 바르거나 감추는 것도 건강미를 가지는 방법일 테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화분통의 화초를 키우듯이 자기의 몸도 가꿔야 한다. “식물도 사람의 발자취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법정스님)”고 하는데 자기의 몸도 애정을 가지고 가꾸면 곱게 늙어갈 것이다. … …   건강에 비결이 따로 있나? 마무리를 해보면 자연의 섭리에 맞춰서 몸이 필요하는 대로 살아가는 게 그게 건강의 표준이다. 남의 흉내를 내지 말고 남의 아름다움에 침을 흘리지 말고 자기 대로 가꾸자. “침은 삼켜(허준)”야 건강하다고 했느니라.   돌아간다는 의미 10월의 어느 날 함께 골프를 다녀온 일본사람들과 점심식사를 나누면서 다음 주에는 잠시 집에 다녀온다고 말했더니 “돌아가세요? 오래간만인 것 같은데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하였다. “네. 이번에 가서 스끼야끼すき焼き랑 다이후꾸大福랑 많이 먹고 오겠습니다. 너무 먹고 싶어요.” 하고 말했더니 한상에 앉았던 일본사람들이 다 놀라는듯했다. “일본에 가세요?”라고 되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중국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돌아간다’는 말을 썼기 때문이다.  ‘돌아가다’라는 말은 우리말과 일본말에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일본어로는 ‘모도루戻る’ 혹은 ‘가에루帰る’라고 하는데 그 뜻이 간단하면서도 견정하다. 즉 원래 대로 혹은 원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말의 ‘돌아가다’는 좀 복잡하다. 일본어의 뜻과 같은 의미가 있는 외에도 수두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원래 있던 곳에 다시 가다, 물체가 돌다, 이전의 상태로 되다, 굽이를 돌다, 멀리 에돌다, 순번으로 옮기다 등등 많은 해석들이 길게 씌여있는데 그중에 ‘끝난 상태로 되다’라는 뜻도 있다. 돌아가는 것이 왜서 끝난 상태로 되는가? 돌다 돌다 한바퀴를 돌면 끝이 나는 것일가? 이 끝난 상태가 싫어서 나는 일반적으로 이 말을 쓰기 꺼려했었다. 적어도 우리 말을 할 때는 될수록이면 다른 말로 대체를 한다. 이를테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집에 간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 때문에 안해의 노염을 여러번 샀다. “어디서 집에 가느냐? 그럼 집에 갔다간 어디로 또 돌아가느냐? 돌아갈 데 따로 있느냐?” 이러면서 쌍불을 켠다. 일본어를 전공한 안해와 우리말을 전공한 나의 모순은 이런 언어사용에서도 불꽃이 튕길 때가 있다. 일본어에서는 자기의 고향, 집, 나라에 갈 때에는 간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표현을 한다. 중국어에서도 돌아간다는 의미로 귀국, 귀향, 귀가라고 말하는데 일본어와 같은 것 같지만 기실은 그 목적지가 명백히 밝혀있기에 오해를 자아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일본어와 다르다. 일본어에서는 회사의 일로 다른 회사를 방문하고 나서 “이젠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면 자기의 회사로 돌아가는 줄로 안다. 다른 나라에서 자기의 나라에 귀국할 때에는 “다음 주에 갈가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주에 돌아갈가 합니다.”라고 말한다. 묻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언제 돌아가세요?”라고 하지, “언제 가세요?”라고 묻지는 않는다. 원래 우리말에서도 집으로 돌아간다, 고향으로 돌아간다 라는 말은 천만지당한 말이다. 원래 있던 곳, 오래 있었던 곳을 갈 때 그곳으로 ‘돌아가다’라고 말하는 데는 아무런 틀림이 없다. 난 중국에 본사를 두었으니 필리핀에서 중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가 없고 집이 있는 일본에 돌아간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해도 문제없다. 다만 중국어처럼 그 목적지를 밝혀야 오해를 사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어에서는 그것이 안된다. 일본어에서는 그 목적지를 밝혀서 “한 삼일 있다가 필리핀에 돌아갑니다.”라고 하면 대개 문제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익숙한 사이가 아닐 경우엔 혹시 저 사람은 필리핀 사람으로 되였는가 하고 오해를 할 가능성도 있게 된다. 그런데 왜서 우리 말에만 이 ‘끝난 상태로 되다’라는 뜻이 첨가되였을가?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곰곰히 생각해봤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종교가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연구를 하게 되는 것은 인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의 모든 종교가 죽음을 다루고 그 리론에서도 죽음을 전제로 삶의 교육을 하고 있다. 오로지 동양철학인 도교만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을 연구하는데 결국엔 죽음이 두려워서 오래 살자는 취지와 다름이 없다. 우리가 익숙한 관혼상제도 절반은 죽음에 대한 행사이고 우리의 언행지침으로 되는 리론에도 허다한 저생에 대한 갈망이 첨부된다. 이것은 다 사람이 죽음을 제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을 몰라서 증명할 바가 없지만 사람은 흙에서 태여나(만들어져)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누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론쟁을 벌이거나 하지 않는다. 일부 소수의 상제습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민족들은 죽으면 땅에 매장을 하는 것이 항례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로서 땅에 돌아감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례기제의礼记.祭义》에도 “중생필사, 사필귀토众生必死,死必归土”라고 적혀있다. 옛날부터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리해를 해왔기에 같은 동양권의 철학을 가진 우리도 땅으로 돌아간다는 데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접수된다. 그래서 우리말의 ‘돌아가다’는 ‘끝난 상태’로 리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어의 ‘가에루’나 ‘모도루’에도 우리말과 같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색채가 그렇게 농후하지 않고 또 발음은 같아도 한자를 쓸 때에는 다른 한자로 표기를 한다. 대신 죽음을 일반적으로는 ‘없어졌다なくなる’고 표현할 때가 많다. 이 점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인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으면 없어지는 것을 굳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추측이나 갈망이나 환상 같은 것들을 품고 있을 필요가 있을가? 없어진 사람은 없어진 것이고 다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추억으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닐가?  세상에는 령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몸은 죽어도 령혼은 그냥 하늘에 살아남아있다고 하지만 어느 사람이 죽은 다음 그 령혼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와 그런 말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말의 ‘돌아가다’에서처럼 ‘끝난 상태’라고 리해한다면 죽으면 끝이 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말하면 틀림이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돌아가다’라고 하면 ‘끝이 난 상태’보다는 어딘가 돌아가서 그냥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줌이니 우리는 끝장이라는 말을 따로 만들어서 끝을 표현하지 ‘돌아가다’로 끝장남을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도 우리 민족의 지혜라고 할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갔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의미, 그것이 중요한듯하다. 본적은 명천군 아감면, 고향은 룡정, 집은 동경, 사업터는 소주나 필리핀. 이런 나는 특히 ‘돌아가다’라는 말과 많이 부딪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괜히 신경이 쓰인다. 일년 내내 여기저기 출장 다니며 우리 민족 외에 중국어권, 일본어권, 영어권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는데 ‘돌아가다’라는 한마디의 간단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에게는 뜻이나 뉘앙스가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아직 퍼그나 짧게 살아와서 좀더 살아가야 되겠다는 책임감과 아직도 다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좀더 긴 시일이 필요하다는 인생계획도의 중요성과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한테 긴히 말씀드린 바 있는 나의 장수 신청에 근거하여 이제부터 ‘돌아가다’를 적게 사용하기로 작심을 하고  ‘돌아가다’를 대신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를 찾기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다짐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42    정세봉의 야심작 << <볼쉐위크>의 이미지>>에 대한 평評 댓글:  조회:614  추천:32  2009-07-22
  몇년전 길림에서 작가 정세봉선생님을 만난적 있다. 언젠가 그의 단편소설을 평론한적이 있어서 장춘에서 만나보았기에 초면은 아니였다. 그때 그가 들었던 호텔방에서 요즈음은 선생님의 작품을 볼수 없군요 하고 시탐해보았더니 그는 재우고있다고 대답했다.    모두 늦게 접촉하게 된 현대 서방철학을 료해하던 때라 나는 그 대답을 그렇게 귀담아듣지 않았고 또 그후에도 그가 재워내놓은 소설을 보지 못했기에 그때의 만남이 거의 망각되는 지금이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간단히 평범하게 오고간 말이 소설 << <볼쉐위크>의 이미지>>를 읽고난후 새삼스럽게 기억된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과묵한 그의 심각한 얼굴표정 때문이였는지 아니면 그에 대한 나의 어떤 기대때문이였는지 모르겠다.   그 한마디 말이 어떻게 기억에 남아있든지 상관없이 오늘 그의 중편소설 << <볼쉐위크>의 이미지>>를 다 읽고서는 그때 그의 깊은 생각에 크게 감복되지 않을수 없다.   << <볼쉐위크>의 이미지(이하 략칭 <<이미지>>)는 근 몇년래 보기 드문 문제작이였기때문이다.   소설 <<이미지>>는 세대간의 모순갈등으로 흘러간 이 나라의 력사를 집약하여 부동한 력사시기에서의 인성발로를 센티멘털적으로 그려내여 새롭게 형성될 사회인간관계를 짚어보는데 모를 박았다. 그러나 전반 소설감정의 흐름이 센티멘털리즘에 가깝다고 한것은 어디까지나 그 정서적색채에 한해서 하는 말이고 좀 더 깊이 사색적으로 문제의 초점을 틀어쥐고보면 결국엔 그 센티멘털속에 지성적인 인간으로서 무언가 꼭은 짚어야 되겠다는 랭정성 내지 억압감이 뒤따른다.   그저 슬프니까 눈물을 흘려야 되겠고 비감하니까 동정을 표시해야 되겠고 그 세대간의 모순이 이로써 한단락 맺으니까 도의적으로 서로서로의 상대방을 꾸지람도 하고 위안도 해주어야 되겠다는 그런 단순한 결과에 그치지 않고 차라리 그런 드라마의 결말앞에서 한마디 말도 서뿔리 하기 힘든 침묵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것이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주는  심미적 효과이다.   침묵은 랭정한 사고를 동반하고 또 모두의 랭정한 사고는 뒤의 분쟁점을 추려내게 되므로 이 소설은 문제작이요 작가주관적으로는 야심작이 아닐수 없다. 하물며 몇년전부터 재워온 소설임에랴.   이러한 특점을 살리기 위하여 작가 정세봉은 우선 주인공형상을 특수한 인물로 택하지 않고 우리 신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범인을 선택하였고 또 스 성격의 형성을 제시함에 있어서 력사환경의 지배적작용을 잊지 않았다.   주인공 윤태철은 한 소작농의 아들로서 이 땅의 해방전쟁에 나어린 몸으로 투신했다가 4야전군 12종대를 따라 중국국내전쟁의 관건전역인 장강도강전투에까지 참가하여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게 되였다. 그는 1949년 공화국성립을 앞두고 사시(沙市) 공략에 참가하여 화선입당을 한 아주 자격있는 청년혁명가로 소개된다. 이로부터 그의 장년기는 밀물마냥 밀려드는 정치운동에 담겨져 하냥 등을 미리우며 시작된다. 농업합작화운동, 고급사, 인민공사, 대약진, 반우파, 문화대혁명... 두루 이렇게 매 시기마다 계속 구룡촌지도자신분으로 20여년간 정치운동에 몸을 담근 그는 오늘 61세의 로인으로 되기까지 수립된 성격은 교조적이고 훈계적이고 고집스러운 타입으로 되였다.   작가는 주인공성격에 시대적함의를 부어넣으면서 매 력사시기의 운동이 옳고그름을 따지지 않고 크게 전반 사회주요모순의 변화 과정을 객관적으로 그림으로써 거기서 인간성의 로출진가를 형상적으로 제기하였다. 당성원칙에서는 무조건 복종하고 앞서 실행하는 윤태철, 조금도 에누리없이 기층당세포의 작용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그러면서도 딸 정혜가 <<아부지, 당원 그만둬요! 그까짓 공산당원...>>하는 말에 <<한번 호강해봤으문 좋겠다! 나두...>>하고 대답하는 고달픔을 토로한다.    당원의 의무가 호강이 아니고 헌신이라는 도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윤태철이였다. 인간은 호강을 위해 자연과 싸우고 있지만 그 호강을 누구에게 먼저 주느냐에 따라 부동한 제당파들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윤태철은 <<남에게 먼저, 전 인류에게>> 이런 당위성을 잊지 않고 있다. 이 점을 강조해 제기하기 위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글속에 담고있다.   <<세상은 아직 <볼쉐위크 윤태철>이가 호강을 누려도 별일이 없게끔 되여있지 않았다.>>   아주 짧은 글귀지만 현시대 당원의 역할을 충분히 긍정하고 당원의 의무를 형상화한  작가의 량심으로 표출된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각오를 형성시키게 된 성격적특징을 소설에서 빌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시라도 일손을 찾아쥐지 않으면 무료보다는 그 어떤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 농사군의 타성>>, <<...그 본질이 타인에 대한 헌신성으로 파악되는 당성의 뿌리를-생명의 뿌리를-령혼의 토지에서 뽑아낼수 없을것임을 분명히 깨닫고있는 윤태철이였다.>>   이러한 주인공이기에 자기의 생리적고달픔을 뒤로 팽개치고 시종 앞장에서 자기의 작용을 발휘하고저 노력해왔다. 그런데 그의 교조주의적과오라고 할가 아니면 당의 지시에 복종하는 그에게는 죄가 없고 틀리게 설정한 당의 과거착오때문이랄가, 좌우간 윤태철은 굽은 길을 적지 않게 걸었다.   엄동설한에 논답을 석자깊이를 심경하라는 <<당>>의 지시를 거역하여 철당, 철직당한 손왈세와는 달리 무조건성의 정신으로 일해나간 윤태철은 고충 있을때마다 손왈시네 집에 가서 실컷 술을 마시군 하면서도 계속 집행만 해나아가는데는 그 주인공의 탓보다 당의 과오를 따끔하게 지적해주는편이 차라리 옳은 선택일것이다. 애비가 계급투쟁대상이라고 그 후대까지 기를 펴지 못하게 한 력사였고 유일성분론으로 청년남녀의 순결한 사랑까지도 구룡천에 버려야 하는 력사이지 않았던가!   이러한 주인공의 극단적인 성격과 새세대의 전형으로 등장한 아들 윤준호의 인간성은 전반 소설갈등의 주선으로 되고있다. 그 갈등의 계기는 바로 <<피독재자의 집>>으로부터 기인된다. 윤태철의 아버지가 허수빈의 아버지 허영세지주의 독재아래 우마생활을 해오던 집이 광복후 그 아들들의 독재적위치가 바뀌여 허영세의 아들 허수빈이 거기에 들게 된다. 이로써 계급투쟁이 주요모순이였던 당시에 그 일가가 받은 수난은 누구나 다 짐작할수 있는 사실이다.   결국 허수빈은 운명에 순종한 로보트식인간으로 전략되였다. 비극은 허수빈의 무남독녀 순정이가 미녀로 태여나 <<볼쉐위크>>의 아들인 윤준호의 가슴에 사랑의 씨를 뿌려놓은것으로 시작된다. 그 사랑이 어떻게 진지하고 순결하고간에 상관없이 그 사랑은 그 시대에 이루어질수 없었다.   순정이가 잉태한 몸으로 구룡천에 몸을 던져야 했고 그 시체마저 한눈 볼수 없었던 윤준호에게는 사회가 원통했고 <<볼쉐위크>>가 미웠다. 아직 그러한 계급의식에 눈이 뜨지 못한 그로서는 순인간성의 바탕으로 사회를 리해하기엔 너무나 힘들었던것이다. 준호의 이러한 응어리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볼쉐위크>>에 대한 한으로 교차되여 시종 모순속에서 자기의 의지를 굳혀보려고 애쓴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죽은 순정이를 잊지 않고 계속 그 부모를 남몰래 도와나서는 일련의 행실과 당원만 만나면 볼부은 소리를 던지고하는 언사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준호의 당에 대한 불만은 당에 대한 기대가 내포된 다색적인 감정이였다.   <<당조직이 살아있다는 마을에서 꼴보기 좋아요? ... 부끄럽지들 않습니까!>>  <<당소조는 뭘해? 범 무서워 내놓았어?...>>  이러한 말뜻을 잘 음미해보면 당의 의무를 알고 그 의무를 인간적으로 실행해나아가지 못한데 대한 아타까운 부르집음과 질책으로 리해할수 있는것이다. 두번째 말, 당소조장 봉춘이에게 트럭문을 열고 내뱉은 두번째 말은 어찌보면 로쇠한 아버지에 대한 효성도 담겨있다.   우에서 제기하다싶이 작가 정세봉은 이러한 인물성격, 특히는 주인공 윤태철의 성격변화를 사회의 모순과 긴밀히 결합시켜 그 성격의 발전, 변화 과정을 합법화하고있다.   사회주의란 이 거창한 길을 더듬으며 걸어가야 할 나젊은 공화국은 사회의 주요모순을 계급투쟁에 귀결시켰기에 백성의 삶은 오직 그 극단적인 일면으로밖에 조직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한 력사적환경에서는 인간성이 무시되고 세대세대 계급관념이 전달되여 사랑마저 성분을 따지여 피독재계급의 자녀까지도 행복과는 인연을 끊어야 하였다. 그러나 당의 사업중심이 경제건설로 옮기면서부터는 사회주요모순도 변하게 되여 사회의 인간관계는 새롭게 형성된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주인공 윤태철은 아들 윤준호와의 모순과 자기 리념을 개변해야 할 자아모순, 이렇게 중첩된 모순속에서 헤매이게 되는데 소박하게 혹은 통속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고집과 굽어듦의 모순으로 귀결된다.   그러면서도 윤태철은 당의 지시에 복종해야 된다는 당성원칙만은 잊지 않고있어 당원련계호의 일에 또 솔선적으로 나서고있지만 옛날의 선동작용과는 달리 이젠 조금은 조심스럽게 앞뒤를 돌보게 되는 주저심을 갖게 되는것이다. 너무나 잘 복종해왔고 또 지금에 와서는 옛날의것이 거의 모두가 틀렸다고해서 이번에도 또 틀리지는 않을가 하는 정상적인 우려인것이다.   그전엔 쳐다보지도 않던 허수빈 일가인데 초시대적으로 그 가문에 발을 들여놓은 엄울순이가 공민으로서의 평등한 인권을 누릴수 있는 세월에 생의 의욕을 잃고 음독자결을 꾀하였을 때 윤태철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고 다시 가난한 호를 도와주라는 당의 지시를 명기하면서 말없이 허수빈 논답으로 나가는 장면은 차라리 울지도 웃지도 못할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이윽고 윤태철은 수레를 몰로 마을길에 나섰다. 허수빈은 암소뒤에서 수레를 따라 걷고있었다. 그들은 마치도 배다른 쌍둥이처럼 되여가지고 마침내 사람들앞에 등장이 된것이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이 특수한 환경에서의 전형인물을 함께 등장시켜 새로운 인성을 수립하게 된 사회환경을 해학적으로 그려놓았다. 이러한 그럼과 윤태철의 인성회복의 경과는 융합적인 주선을 이루며준호와의 모순이 해결에로 접근하게 된다.   아침에 그 <<피독재자의 집>>으로 처량하게 걸어가는 윤태철의 심정을 소설에서 찾아본다.  <<당은 결국 지난날의 오유를 검토하고 그들을 버리지 않았구나 했다. 자기 -<볼쉐위크 윤태철>은 지금 당의 마음을 지니고 그들을 포섭해죽 뜨겁게 포옹해주러 가고있는것이라 했다.>>   이렇게 깨달은 윤태철은 당소조회의에서 허수빈 일가를 다른 사람이 맡게 하자는 온 저녁의 토론결과를 무시하고 기어이 자기가 맡아야 한다고 우겨이기고 아울러 허수빈의 빚면제, 주택해결, 대부금을 대줄것까지 요구해나선다. 결국 허수빈의 논판에서 중풍맞고 6척체구를 무너뜨리게 되지만 이때는 아들 윤준호와 생각이 맞물림으로써 그 갈등이 해결을 고하게 된다. 남은것이란 오직 과거를 어떻게 검토하느냐 하는 문제뿐이다.   준호도 아버지에 대한 한이 사라져가고 아버지에 대한 리해와 련민, 효성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부성애의 옛추억이 떠오른다. 준호가 앓을 때 입쌀 한줌 얻어다 죽 끓여준 아버지, 밥 해주마고 대답하고선 죽밖에 해주지 못해 죽은 소화에 리롭다고 어줍게 변명하던 아버지, 자는 아들놈을 밤새껏 어루썰고 엉뎅이를 두드려준던 아버지.    작가는 이러한 잠재적인성의 회억으로 독자들에게 화목과 사랑과 행복의 순간을 마련해주어 전반 소설에서 받게 된 감상적 억압감을 느슨히 풀어주었다. 이로써 구독자는 랭정을 찾게 되는것이다.   다시 돌아온 장면은 <<... 저희들 아버지와 아들간에-...-무서운 갈들을 이루어가지고 무척 끈질기게 대결을 해왔던 그 한마당 드라마의 현장에서>> 계속되는 준호와 윤태철지간의 <<해탈되지 못한>> <<비장한 연기>>이다. 그러나 그 <<연기>>는 대결보다는 융합이요 갈등보다는 해결이다.   <<원과 한을 품고서 울분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있는 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전생이 죄로써 받아안고서 조용히 떠날>> 윤태철은 흘러간 격정의 력사를 회억하며 위안을 얻고 당의 오류로써 변명거리도 찾아본다. <<자기자신과 흘러간 력사와 당을 대신해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고자한 말이 <<얘야! ...그만 일어나거라!>>라는 한마디다. 계속 꿇어앉아있는 준호에게 뭔가 더 얘기해야겠다고 인식한 그는 용서를 빌고서 따끔한 타이름을 얹었다.   <<그리구... 우리 당원들을...리해해다구...력사를... 존중해다구! ... 세상일이란... 그렇게 ... 간단한게...아니니라.>>   작가는 여기서 소설의 주제를 심화시키면서 문제의 복잡성과 사명감을 제시하고있다.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아낌없는 객관적평가도잊지 않고 있다. <<... 죽어서도 <볼쉐위크화신>으로 굳어질것이라 했다. 그것이 곧 바고 그의 삶의 참모습이였고 생명의 본질이였으며 정신의 자아였던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에 대한 윤준호의 태도내지 자세에는 긴말이 필요없었다. <<구구한 언사로써가 아니고 인격적인 강개한 거동과 제몸의 고초로써 천금같은 효도를 보여주고>> <<적멸의 력사속에 밑창없는 망각의 심연에다 끝내는 순정이를 묻어놓으면서 울었고 그 모든 과거와 마음속으로 고별을 하면서 윤준호는 울고있었다.>>   이상과 같이 이 중편소설을 분석해보면 우리는 소설에서 느끼는 감정의 센티멘털에 잠겨 슬퍼지고 다시 그 센티멘털에서 벗어나고보면 모두가 자기의 과거를 검토하게 되는 지적인간의 량심을 느껴볼수 있다. 서로 부동한 력사적리념차원에서 초래된 인간성원리는 사회의 정치, 도덕의 제약으로 서로 부동한 양상으로 나타나며 그 부동한 양상의 리념끼리 충돌을 가져오게 되는 특수한 환경속에서 인간행위는 너무나 수동적임을 감안한다.    의식의 지배하에서 행위가 진행되는 인간으로서는 그럴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물질에서 의식이 온다는 철학적견지에서 보면 당시의 오유를 범했던 인간들은 분명 사회를 인식함에 있어서 그릇됨을 보여준것만 사실인데 지금 와서 그 문제를 밝히게 되는것은 단순히 불만이나 서러움이나 비애를 표달하고저 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이 나라, 이 사회의 만민이 마음 맞춰 함께 달리는 길을 좀 더 옳바르게 좀 더 빠르게 가고저 하는데 모를 박았기때문이다. 이러한 시도가 이 소설에서 보여지고있는 점으로 봐서는 분명히 작가 정세봉의 야심작이다.   다음으로, 이 소설이 가지는 가치는 그 주제사상에서의 특점과 인물성격발전의 합리성과 예술성외에 그 작품이 인상적으로 감동을 주고 랭정을 찾게 되고 뭇사람들의 사색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문제작에 있다.   우리 문학이 많이는 과분하게 센티멘털에 그치고말게 되는것이 적지 않음은 평단에서 감지하고있는바인데 고대로부터 형성된 비감적문화의 영향을 우선 그 원인으로 잡아본다. 지금까지 전해온 력사 긴 노래는 모두가 감상적인 노래인데 그에 따른 무용은 위안적으로 흥겨운것이 많다. 이러고보면 우리는 슬픈 노래를 웃으며 부른다는 얼핏 떠오르는 결론이 주어진다. 이러한 슬픈 락관에서 형성된 우리의 전통의식구조는 필경 문화에서 반영된다. 소설이 구전문화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는 자세에서 보면 그 감상적영향이 미치지 아니할수 없다.   이외 한가지 원인은 우리 인테리대오에 철학가가 없다는(혹은 적다는)데 귀결된다. 때문에 작가들의 철학적사고는 많이는 실용과 륜리에서 머무는데 이는 우리 문학의 결함이면서도 우점이다. 결함으로 말하면 상상력이 저애를 받고 너무 현지에 발을 붙이는것이고 우점이라면 세부적진실이 생활에 가까와 친근감을 주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 소설에서도 보여진다. 그전의 <<몽당치마>>, <<하고싶던 말>>, <<한 당원의 자살>>등 우수한 단편소설들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쉽사리 발견할수 있다.   소설 <<이미지>>는 그 상상력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분한 세티멘털에서 벗어났다고 함은 주로 그 소설이 담고있는 력사적사고에 대한 지성적자가의 량심때문이라 하겠다. 이 점은 소설 첫머리에 로씨야 3대평론가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벨린쓰끼의 언론을 인용한데서와 전반 소설에서 풍기는 로씨야문풍, 그리고 작자의 수필적감정토로에서 우리는 동감을 표시하게 되는것이다.   이상과 같이 필자의 장황설을 마치면서 문단에서 또 무언가를 기다려본다. 무언가가 중요하지 않고 기다린다가 중요한것이다. 사람은 기다림으로 살아가니까.                                                                                               1991. 1. 27   [<장백산> 1991년 2호 登載]  
41    허무궁 프로필 댓글:  조회:699  추천:41  2009-02-11
    허무궁    수필가 평론가     원명 허승호     필명 허무궁    허근     1960년 4월 23일 룡정 태생    1983년 중앙민족학원(지금의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 졸업    현재 수필창작과 문학평론에 과외로 종사    사전류와 교과서 등 공저저서 몇권외에 수필집 락엽줏는_ 마음이_ 있다.
40    [평론]동방 삼국을 넘나드는환경주의자セ 댓글:  조회:678  추천:30  2009-02-11
―허무궁 제2수필집평 장춘식  1. 허무궁, 누구인가?     허무궁은 룡정 출생이고 중앙민족대학(전 중앙민족학원) 조문학부를 나왔다. 80년대에는 장춘에서 북두성セ이라는 문예지를 주관하면서 문단에서 평론가로 활약한바 있으며 그후(1994) 일본에 건너가서 오늘까지 거주해오고있다. 일본에서 중국, 한국을 드나들며 사업을 해오는중에도 문학에 진 빚을 갚으려는것인지 근년에는 수필로 화려하게 데뷔하여 벌써 두번째 수필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2. 정체성 확인의 욕구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그의 수필에 이런 그의 행적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자주 등장한다. 수필이라는 쟝르가 원래 이런 특징을 가지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비오는_ 날의 그리움이라는_ 작품에서처럼 작가의 정체성 확인 욕구가 잘 드러나는 경우도 별로 많지 않다.     작품에서는 먼저 초가을 비내리는 풍경에 조금은 우울한 심정을 넋두리처럼 풀어나가다가행복의_ 나무라는_ 이름의 분재 식물을 들먹인다. 그리고는 이어 상해에서는 그 나무를 금전수(金錢樹)라 부른다고 하면서 돈에 대한 중국인의 집념을 조금은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에 대응되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더듬어본다. 장사군이 돈을 벌었을 때 가게 오픈 첫날의 수입으로 들어온 지페에 침을 뱉으라고 한다는것. 돈을 싫어하는척하면 더 많이 들어온다는 속설때문에 그렇게 한다는것인데 이는 사실 경제법칙에 어긋나며 재래로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돈이 간다고 했다. 그리고는아마_ 그래서 우리 민족이 가난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상의 대통에 정수리 맞을 소리 한마디 해놓고.하며_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변명한다. 곧 이어 화자는행복의_ 나무, 금전수. 이를 우리가 먼저 이름지었다면 과연 뭐라고 지었을가?라_ 고 자문하고는 뽕나무와 뽕에 깃든 애틋한 기억을 더듬는다. 특히 소시적 학교 뒤마당에 심은 뽕나무에서 뽕을 따먹던 기억은 아련한 아픔과 더불어 화자의 기억에서 행복한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거기에 비해 정력제라고 하여 기를 쓰고 은행열매를 먹어대는 일본 사내들의 행태는 부정적이다.   어느새_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뽕의 랑만도 모르고 행복의 나무를 금전수라고 하는것도 모르고 은행이 정력제인줄도 모르고 하늘은 그냥 비만을 쏟아붓고있다. 나와 같이 고독한 모양으로 눈물만 흘리고있는것이더냐.»    결국 화자는 억수로 내리는 비물을 보며 감상에 젖고만다. 그리고 그러한 감상은 일본이라는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족지식인의 슬픔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행복의 나무를금전수セ라고 하는 중국인이나 은행이 정력제라고 마구 먹어대는 일본인이나 그리고 돈을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싫어하는척하는 한국인이나 화자에게는 조금씩 부정적으로 비쳐진다. 다만 뽕나무와 뽕에 깃든 랑만만이 아련한 추억으로 살아난다. 여기서 뽕나무와 뽕에 관련된 추억은 화자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이라기보다는 조선족이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매개체로 등장한것이다. 일본땅에 거주하는 조선족지식인의 정체성 확인의 욕구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한 정체성 확인의 욕구는책セ이라는 작품에서도 비쳐진다. 책벌레를 넘어 책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책을 즐기는 화자의 책읽기 습관―차속에서, 비행기안에서 읽기를 자랑삼아 소개하고는 다시 인천공항에서의 의미있는 도서 구매체험을 렬거한다. 이어 장서를 잘 하지 않는 일본인들의 독서습관때문에북오프セ라는 중고서적 판매체인이 호황을 이루는 일본의 상황을 소개한다. 이어지는 체험은 심양서점에서 고객들이 책을 사기보다는 도서관이 열람실인양 책을 읽고있는 장면이다. 이와 더불어 너무 두텁고 무겁고 커서 휴대가 불편한 중국책의 특징과 이렇게 책을 만든 출판사에 대한 불만을 자기 독서습관에 련결시켜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길서점에서의 체험이다.나는_ 올해 추석 이튿날 연길서점에 갔을 때 컴컴한 우리말 도서진렬대앞에 선 독자는 모두 세명밖에 없었던걸 다시 되새기게 된다. 진렬된 우리말 도서들이 한결같이 점심 못먹은 얼굴 하고있는듯끇 책읽기 습관도 그렇고 책의 크기나 무게 등에 대한 느낌에서도 그렇고 화자가 이제 일본식독서습관에 적응되였음을 확인할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화자의 마음은 여전히 한국과 조선족에게 있음을 드러낸것이 이 작품이다. 마포 홀리데인호텔 근처 책방주인에 대한 인상도 그렇거니와 연길서점의 우리말도서 코너에 책을 찾는 사람이 3명밖에 없었다는 아쉬움의 표현은 동족,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걱정을 단적으로 드러낸것이라 할수 있는것이다. 그밖에도 고무신에 깃든 소시적의 추억과 박물관에서 본 고무신에 대한 딸세대의 삶의 인식을 대조시킨신セ, 소시적의 아련한 추억을 닭똥거름_ 인정거름_, 소시적의 추억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가장_ 행복했던 날등에는_ 조선족이라는 공동체의 체험과 이를 확인하고자 하는 작가의 정체성 확인 욕구가 표현되여 주목되는 작품들이다. 즉 그만하면 조선족지식인으로서 일본이라는 선진국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할수 있는 립장이지만 작가에게는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의 확인 욕구가 좀더 강하게 작용한다고 할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가르침의_ 재미, 배움의 재미같은_ 경우 자칫 선진국 일본에서 성공한 지식인의 립장이 오만으로 비쳐질 념려가 있어 수필로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 이 작가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3. 환경주의자의 세계인식    환경주의자セ라고 했지만 사실 허무궁이 무슨 환경단체에서 활약한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수필에는 엄연히 환경단체 임원 못지 않게 환경에 대한 관심과 걱정 그리고 사명감이 짙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선지구에_ 구멍 뚫어야지를_ 들수 있다.     이 작품은 소아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밟고있는 땅밑을 파고들어가면 언젠가는 지구의 반대편에 구멍을 뚫고 나갈수 있을것이라는 발상이다. 그러나 이는 작가 자신마저 홀로 웃어버린 환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문장은 그 둥근 지구우에 만들어진 구조물에 대한 걱정과 비판이다.공업과_ 군사, 그리고 생활쓰레기, 콩크리트때문에 이 땅은 갈수록 어느 늙은 녀자의 얼굴화장처럼 두터워만 가는데 그 무게가 싫어서인가 지구는 그것을 털어버리는데 열중하게 된다.는것이다_. 그것이 지진과 같은 훼멸적인 자연재해로 표현된다는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여기서 작가의 시선은 갑자기 마이너스이온(음이온)이 몸에 좋다는 얘기로 돌려진다. 먼저 떠올린것은 비즈니스맨답게 이 음이온이 장사가 될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를 알려고 노력하던중 우연히 현대인은 흙을 밟지 않아 음이온이 결핍하다는 하다나까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것이구나 한다. 결국 도시의 구조가 현대인에게 음이온결핍증을 유발시키고있음을 알아버린것이다. 빌딩숲으로 덮여진 상해의 거리를 땅이 꺼질가봐 소림사의 경공(輕功)이나 하듯 사뿐사뿐 걸었다는 표현은 작품 시작부분의 유머의 련속이 될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지구에_ 구멍을 뚫고 나무 고챙이에 꿰고 지구의처럼 돌려보리라. 거치장스러운걸 내가 떨어뜨려주고싶어서이다.는_ 서두와 결말의 조응이라는 구성적인 완성으로서뿐만아니라 주제 해명을 위한 점안(點眼)의 의미로서도 높이 사줄만한 표현이 될것이다.     콩크리트구조물의 난립에 의한 지구생태의 파괴는 당연히 환경주의자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환경파괴는 그에 그치지 않는다. 공업오염 역시 그러한 환경파괴의 원흉에 속한다.칼라의_ 가을엔 무궁화도 자리 양보하더라는_ 그러한 환경오염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무궁화 분재 얘기를 풀어내려가다가 무궁화의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 다음 먹이로 유인하여 새까지 회사 사무실 베란다에 불러왔다고 했다. 차거운 콩크리트세계속에서 사는 우리 인생의 서글픔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정작 작품의 주제를 풀기 위한 사전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남사군도_ 등 아세아의 소금과 물 문제를 해결하여다오.라고_ 한 아버지의 유언을 실현하고저 안깐힘을 쓰는 시마다 토시오(島田俊雄)라는 사람의 친환경 발명, 아세아 각국에 쏟는 그의 정성과 노력을 제시한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찬사의 밑바탕에는 작가의 환경주의적인 인식이 깔려있는것이다. 이는핫쵸보리사무실에서_ 회사일은 제쳐놓고라는_ 작품에서 보여준 무궁화에 대한 남다른 사랑속에 겨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담겨져있는것과 마찬가지 리치일것이다.    봄의_ 피가 흐르는 소리에서는_ 자연환경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좀더 직접적으로 그려지고있다. 지구가 뜨거워져서 여름이 며칠이나 길어졌다는 얘기로 시작하여 온실기체 방출제한을 골자로 한 쿄토의정서가 시동을 걸었다고 하고는 지구의 온난화가 모두 과학발전의 탓이라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과학연구와 경제발전에서 장족의 진보를 이룬 중국의 위상을 두고 자긍심보다는 걱정이 앞선다.자연을_ 괴롭히는 과학의 발전은 바람직하지 않다는것이다_.자연은_ 자연 그대로 보호해줘야 인간은 자연에 사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있는것이다.여기에_ 작가의 환경관이 표현되여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북경 북쪽에서 오는 황사의 횡행을 감안할 때 이점은 좀더 뚜렷해진다.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면 요즘 생태문학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으랴. 허무궁의 환경주의자적글쓰기는 이점에서 한몫을 단단히 한다고 할수 있다. 아쉬움은 이 계렬의 작품들이 체험을 통한 감수성보다는 주관적인 주장이 강하다는 점이다.  4.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여야 사람이지. 라는 말장난 같은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장난같은 말이 이제 현실로 되여가고있다. 특히 세계화라고 하는 경쟁사회에서 벌어진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작가의 환경주의자적 글쓰기와도 련관된다고 할수 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것인가? 이에 대한 허무궁의 판단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현재 선진국에서 인정되는뇌사_(腦死)에_ 대해 허무궁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내장이식에_ 필요한 내장을 맥박이 있을 때 뜯어내려는 인위적인 판결이라_ 하여 비인간적인 판단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심장에서_ 만들어내고 몸의 구석구석까지 날라다주는 혈액때문에 인간은 살아있는것이다. 제아무리 활발한 사색을 할수 있는 대뇌일지라도, 제아무리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있을지라도 그것은 곧 이 가슴, 심장에서 공급하는 붉고 뜨거운 피가 있기에 존재하는것이다.라_ 삶의 징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펴낸다. 사실상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것이나, 뇌사상태나, 호흡이 정지된 상태나 죽음이라는 상태와 모두가 나름대로의 관련을 가진다. 작가는 뇌사상태를 장기이식을 위한 인위적인 사망판결이라 비난하고있으나 뇌사상태라면 심장이 고동을 친다고 해도 현대의학이 만들어낸 가상적인 생명상태이기때문에 실제로는 죽었다고 보는게 옳을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것을 강력히 부정한데는 의학적인 판단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판단때문이다.느끼는_ 일이 적어지면 이 사회는 차갑게 된다.뺀  대뇌가 발달하면 똑똑하고 심장이 제구실 잘하면 정다워진다.이것이_ 작가의 인간적인 판단이 될것이다.하여간_ 느끼는 삶, 정다운 삶, 이웃을 사랑할수 있는 삶을 더 귀중히 여기고싶은 마음이다.핵심은_ 여기에 있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이 아무리 똑똑하고 위대한 사상을 가진다 해도 그러한 삶은 의미가 없어진다는것이다. 갈수록 느낌이나 인정보다는 물욕의 만족을 삶의 의미라고 여기는 현대인의 삶의 태도를 비판한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이 되는것이다.    란자_, 정자의 핵전쟁은_ 또다른 시각에서 이러한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해 해부한다. 현대인의 녀성화현상에 대한 반성이다. 겉보기에는 란소와 란소의 핵만으로 새끼를 생산하였는데 그것마저 암컷만으로 태여난다고 하니 이야말로 수컷이 필요없는 세상이 되지나 않을가 걱정하며 거기에 전 사회적인 성격적 녀성화경향을 곁들여 제시한다. 그리고는 이제 정자와 정자의 핵만으로 수컷을 만드는 연구가 시작되면 그것이 곧란자와_ 정자의 핵전쟁이_ 될것이라고 섬뜩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의 내면을 따져보면 작가의 걱정은 앞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욕이란건_ 인간만의 특성일가?_,선량하지_ 못함은 후천적일가?_,책은_ 어떨 때 읽는가?등_ 제목에 물음표가 달린 세 작품은 이른바미니수필セ의 형태로 인간의 \"비인간화\"를 비판한다.와인_ 마시며 듣는 총소리또한_ 비슷한 경우이다. TV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드라마속 총소리, 이라크전 총소리)에서 문화대혁명때 아버지가특무セ로 몰려 투쟁받던 사정, 그리고 그후 어려운 식료사정을 담담하게 추억하는데 여기에는 항상 전쟁에 대한 분노가 뒤따름으로써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온 사회의 반성을 촉구한다 하겠다.     작가는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해 반성이나 비판만 한것이 아니다.반성하는_ 즐거움에서는_ 자신의 오해에 대해 반성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의 정이란 어떤것인지를 제시해보인다. 일본 북해도대학의 한 학생이 쓴 편지를 번역해달라는 안해의 부탁을 받았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내온다던 편지 원고가 오지 않고 오후에야 본인한테서 편지를 쓰고있는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어린 사람이 무례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화를 내고 심지어 버릇 가르친다고 래일 보낸다는 사람에게 래일은 시간이 없으니 모레오후나 돼야 시간이 난다고 했단다. 그런데 정작 편지를 받고나니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였음을 알게 된다. 말못하는 언어장애자 중국인처녀와의 사랑편지였는데 중국인처녀는 일본에 와서 살고싶다고 했으나 의과대학생인 일본청년은매일_ 붐비는 전차에서 밀치고 닥치고 하는 도꾜, 수림 같은 빌딩으로 비좁아진 도시는 인정도 없는 싸늘한 곳이라며아무래도_ 일본에서는 처녀를 행복하게 해줄만한 조건도 능력도 안된다고 생각되여 중국에 가서 자그마한 병원을 꾸려놓고 병자를 치료해주며 벙어리처녀와 행복하게 살고싶다는것이다. 이런 사정을 처녀에게 설득력있게 이야기하기 위하여 편지가 늦어졌다는것을 작가는 알게 되였단다. 오해를 일으킨 잠간의 리기심때문에 인간애를 잠시나마 잊게 되였던 자신을 반성하고있는 셈이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는 장애인 중국처녀를 사랑하며 중국에서 살려는 일본청년의 미담을 필리핀대통령의 자국 로동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오버랩시킴으로써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란 이처럼 항상 감동적이 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있다. 이는 앞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인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성을 아직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성과 따뜻한 인정의 사례로 정면돌파한 셈이 된다. 대안이 없는 반성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따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추석날 술기운에 떠오른 인생살이의 서글픔이 묻어나는추석달을_ 서천에 바래줘야 하는데_, 늙는것에 대한 위기감, 늙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다가 결국 인정하고 체념하는 인간의 상정(常情)을 그린 돋보기부자セ, 이름과 필명에 관련된필화セ의 에피소드들을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문장으로 표현한_<망종>의 웃음거리등_ 작품은 수필의 가치와 매력을 잘 보여준 수작이였다.  5. 희망사항     허무궁의 수필은 작품의 구조나 표현의 생동성에서 상당히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장의 류창함 측면에서는 어딘가 어수선한데가 더러 엿보인다. 가끔 눈에 띄이는 어휘사용에서의 오류나 어색함은 아무래도 일본에 장기간 거주한 관계로 조금은 양보할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장의 호흡조절 문제는 조금만 류의하면 금방 극복될수 있는것이다. 그중에서도 토의 생략이 무리할 정도로 많다. 가령가끔씩은_ 걷던 길 뒤로 돌아보는것도 재미다.뺀나는 혼자서 투덜대며 번역해주기로 대답한 일 몹시 후회하였다._(이상반성하는_ 즐거움_)도시마다_ 서점에 발길 돌리고뺀여름에 딸 데리고 서울 갔을 때뺀여름에 심양서점 몇곳 돌아보았는데_(이상 책セ) 등의 문장에서 밑줄 그은 부분은 토를 생략함으로써 호흡의 불편함을 야기한다. 대화의 경우에는 허용되는것이지만 서면어로는 부적절한것이다. 이런 례는 꽤 많이 보인다. 아무리 운문이 아닌 산문이라도 호흡의 불편을 삼가해야 하는것이 독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한다.     허무궁의 립장을 우리는재일본조선족セ이라 부를수 있을것이다. 이 경우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정체성의 측면에서 어떤 포즈를 취하느냐이다. 작품의 독자가 기본적으로 조선족이라고 볼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표현이 이상해지면 독자의 반감을 살 우려가 있다. 일본이라는 한중일 삼국중 가장 잘사는 나라에 주로 거주하는 허무궁의 처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례문은 생략하겠거니와 앞에서 잠간 언급한가르침의_ 재미, 배움의 재미와_ 같이 일본이나 일본인의 장점을 중국이나 중국인(물론 조선족을 포함하여), 한국이나 한국인의 약점과 대조시킬 때 특히 이점을 조심해야 할줄 안다.     또 하나,미니수필セ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전에도 어느 글인가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이른바미니수필セ이라 불리는 2천자미만의 짧은 수필들은 뚜렷한 한계성을 지닌다. 작품의 의미가 조금만 드러난 상태에서 끝나기때문에 소재와 체험의 깊이에 비해 감동의 깊이나 주제 해명의 측면에서 많은 약점을 드러낸다. 일례로지진과_ 고향사진_,빠알간_ 고추 때문에_,추석달을_ 서천에 바래줘야 하는데등_ 작품은 체험의 깊이는 인정되지만 감동이 미미하다. 같은 체험이라도 좀 더 주제발굴에 공력을 기울이면 감동의 깊이가 달라질것이고 이때미니수필セ은 부적절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미니수필セ의 가치를 무조건 부정하는것은 아니다. 다만 소소설セ,미니소설セ의 소재가단편소설セ과 다른것처럼 적당한 소재의 경우에만미니수필セ의 형태를 취하는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가 한다.
39    [수필]언어의 불가사의 댓글:  조회:734  추천:19  2009-02-11
언어를 잘 안다고하는것은 그 민족의 문화를 잘 안다는것과 통하는 말이다. 그 민족의 문화습관을 모르고서는 도무지 그 언어를 정통할수가 없는것이다.    난 아직도 언어때문에 당혹해질 때가 있다. 교류하는 도구로서의 언어이기때문에 들으면 그 뜻을 리해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뜻을 리해하는 행위는 반사적으로, 자동적으로 진행되는데 생소한 언어를 들었을 때 나의 대뇌는 인차 자기가 익숙한 언어에 맞춰 비슷한 어음현상만으로 뜻을 풀고저 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거부하면 되는데 나의 대뇌는 나앞에서 총명을 과시하고싶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 대뇌의  뜻풀이로 나는 언어의 불가사의적인 사건을 체험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난 한가지 철리를 생각해냈다. 말은 결코 소리뿐이 아니라는것이다.     불가사의 1.   일본에 온지 얼마 안될 때의 일이였다. 언젠가 나는 딸애를 데리고 맥도날드를 먹으러 갔었다. 아무리 일어를 모른다해도 뭘 사먹는거야 못할리 없으리라. 하물며 맥도날드는 메뉴가 카운터에 그림으로 그려있어서 그 그림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짚어보이면 되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나는 점잖게 카운터에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딸애가 알려준것을 짚었다.(더 묻지 말고 내가 짚은거나 빨리 가져와줘.) 이렇게 생각하며 애원비슷한 눈길로 판매원처녀애를 건너보았는데 애꿎게도 처녀애가 입을 열었다, 아, 이거 죽었구나 하고 난 아예 귀담아 듣지도 아니하고 딸애의 지원을 청하느라 뒤를 돌아보는데 귀에서는고치라데_ 메시아가리마쓰까?(여기서 드시겠습니까?)라는_ 말이 들려오고 눈치 빠른 딸애가 인차하이_._ 하고 대답해주어서 일은 끊났다. 사서 들고가는 사람들이 많기때문데 이렇게 꼭 물어보는것이다. 그런데 난 고기와 상추를 사이에 끼운 햄버그를 먹으면서 그냥 심사가 좋지 않았다. 방금 그 처녀애가 한 말이 우리 말 어음적으로는 기분 나쁘게 귀문어구에서 서성거리고있었기때문이다.   고치_(고추)라도 뭣이? 아가리, 맛있께?라는_ 말로 들리였던것이다.    아무렴 그 처녀애가 이 어른을 보고 상소릴 했을리는 만무한데 일어를 모르고 들으니 이렇게 어음으로만 듣게 되고 그 어음을 우리 말 뜻으로 리해를 하는 우스운 오해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소리만으로 뜻풀이를 한 불가사의이다.     불가사의 2.    언어의 불가사의한 사건은 20여년전 북경 의화원에서도 발생했었다.    대학시절의 이야기인데 학급활동으로 의화원에 견학갔었던 나는 사진을 찍느라고 주위경치에 정신 팔려 헤덤비다가 어떤 사람과 크게 부딪쳤다. 서로 뒤걸음 하였던지 엉뎅이를 마주 부딪쳤던것이다. 난 어망결에아_, 미안합니다.하고_ 사과하였더니 그 사람이 큰소리로아임쏘리セ 하고 말하였다. 순간 난 하마트면 당신_, 금방 뭐라했어?_ 하고 따질번했다 .그 말이 영어를 모르는 나의 귀에는 우리 말로 들렸고 또 그 말은 소리로는 아무소리セ나 한다고 들렸던것이다.뒤 돌아보니 서양녀자였다. 인차 대들지 아니한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하고 안도의 숨을 쉬였다. 학교숙소에서  영어방송강좌를 들으며 발음련습을 하던 재국씨(소설가)의 어설픈 발음을 나의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서 그런지 이 귀는 정확한 영어발음을 모르고있었기때문에 내가 이런 착각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재국씨는 그때 일어발음은 좋았지만 영어발음은 좀 그랬다. 이렇게 살짝 불쌍한 소설가 김재국씨에게 책임을 밀어놓고 혼자 웃어본다.    소리로만으로 뜻풀이하면 이런 불가사의도 있게 되는 모양이다.     불가사의 3.    일어로 작은 새를 ことり_(小鳥)라고_ 하는데 그것을 발음하지 못해 쩔쩔 매던 류학 온 연변처녀애들의 모습도 십년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거꾸로 우리 말도 외국사람들한테는 괴이한 뜻으로 들릴 때도 있으리라.    이를테면 우리끼리야_, 너 오너라하는_ 부름소리가 일본사람에겐 그 뒤말오너라セ가오나라_(おなら) 로_ 들릴수도 있을것이다.     하필이면 이런 말이냐 싶지만. 언어란 이렇게 불가사의한 일을 많이 만들어낸다.   대개 객관적인 언어의 탓은 아니고 주관적인 인간의 대뇌의 탓이리라. 이를테면 입의 탓도 귀의 탓도 아니고 다만 뇌의 탓이라는 말이다. 모어만을 알고있을 때에는 자연의 소리도 포함해서 모두 자기의 모어에 기준하여 뜻을 리해하려고 한다. 그만큼 여러가지 언어를 장악하면 사유의 범위도 넓어진다는 말이 되겠다.    우의 실례는 언어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재삼 느끼게 하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나의 마음에 남아있던 얘기다.                                        2004년 11월 9일
38    [수필]성인절에 해보는 시름 댓글:  조회:678  추천:32  2009-02-11
 원단이면 어린이들이 어른들께 세배하고 세배돈을 받으면서 축복을 받는다. 우리 부부도 1월 1일 아침에 돗자리방에 나란히 앉아서 딸애의 절을 받고 축복의 말 한마디 해주었다. 젊은 나이에 무슨 절을 다 받냐 하고 여태껏 절은 받아보지 않았지만 딸애의 20돐에 다가오는 성인절(일본에선 매년 1월 8일이 성인절이다. 만20세면 성인이 된다.)을 맞으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성인이 되는 딸애에게 우리 전통의 례의범절을 습관처럼 몸에 슴배이게 하려면 나 자신부터 받을건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되였던것이다.      딸애가 유치원 다니던 나날이 아직 기억에 생생한데 벌써 성인이란다.    일본으로 데려와 소학교에 부치던 일 어제 같은데 어느새 성인으로 자랐다.    스무살이면 일본에서는 성인이라고 한다. 그저 나이만 이렇게 규정된 나이가 차면 성인이라 할수 있는건지 모르겠다. 필자는 졸작에서 사람은 되는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차서 사람이 되는것이 아니다. 사람은 되는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라는 의미는 사람이 인생 전반을 걸쳐서 그냥. 사람을 하는것이라는것, 다시 말하면 인생은 스스로 사람을 하는 과정,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며 자기가 옳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사는 과정이라는것이다. 인생전반을 걸쳐서 해야 하는 사람이 어찌 나이 스물이면 될수가 있다는 말인가! 20세의 생일에 금을 그어놓고 자, 여기부터는 성인이다라고 말을 하는것은 눈감고 야옹하는 숨박꼭질에 지나지 않는 무책임한 짓이다.        그래서 나는 성인절날에 딸애를 앉혀놓고 이러한 얘기를 해주고싶었었다. 비록 아직 짧은 인생밖에 산 경험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여태껏 살아온 삶의 경험에 근거하여  삶을 알려주고싶었던것이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어린 녀자애이지만 딸애도 자기나름으로 사람을 하기에 열심해있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이다. 유치원때부터 나는 딸애에게 공부하라, 암송하라, 글을 쓰라 강요한적이 없었다. 스스로 잘도 해나아갔던것이다. 장춘시문화국유치원에 다닐 때에는 한자를 카드에 써달라고 해서 그것을 붓으로 정연히 써주었더니 매일 밤 글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유치원시합에서 우등을 한 모양인데 그날 퇴근하여 딸을 데리러 갔더니 다른집 애 엄마가 자기 아들을 욕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싸하이즈_, 니 랜 차오쌘주더 하이즈 더우 깐부궈야?»    바보야, 넌 조선족애도 당해내지 못하냐 라는 뜻인데 난 우리 딸 효정이를 두고 하는 얘기인줄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암 누구의 딸이라구!    그러던 딸애는 1994년 2월에 일본으로 왔다. 제 엄마가 쿄오릿츠녀자대학의 강사로 초청받아 일본에 와있었기에 나는 딸애를 엄마곁에 보내야겠다고 생각되여 1994년 2월에 딸애를 데리고 일본으로 왔었다. 그리고 딸애를 일본학교에 부친다음 다시 장춘으로 돌아왔다. 그때 효정이는 여섯살이였다.    혹시 업수임이나 받지 않을가 얼마나 근심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입학 그날 딸애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떠들썩하며 돌아왔었다. 일본말을 모르니 여섯 친구의 손을 쥐고 우리 집으로 이끌고 왔던것이다.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는 일본애들이 다짜고짜 효정이 엄마를 보고 이 아이가 왜서 이러느냐고 물었다. 놀자고 그런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들끼리 잘 논다고 말해주자 그들은야_- 좋아라_ 소리치며 너도나도 다투어 전화통에 매달려 집에 전화를 걸었다. 효정이네 집에서 놀고 간다고 집에 일러두는것이였다.    이렇게 딸애의 학창시절이 시작되였다. 딸애는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개근생상장을 들고왔다.중학교때부터는 매일 전차로 왕복 두시간씩이나 걸리는 등교길이였지만 감기 걸렸어도 쉬지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등교하였던것이다. 지금은 릿꾜대학 2학년생으로 성인절을 맞은것이다.    그러니 내가 구태여 무슨 설교를 다시 할 필요가 있을가. 그저 속으로 좋은 사람을 하기만 바랄뿐이다. 세상에는 프로이드처럼 그냥 우등생으로 학창시절을 마친 사람도 있지만 종래로 공부란 하지 않고 심지어 심리학, 비교심리학, 생물학, 사회학 등 많은 저서를 쓰면서도 남의 저서를 읽지 않은 스팬서(Herbrt Spencer) 같은 철학자도 있으니 부모가 이래라 저래라 해서 무슨 훌륭한 삶을 사는것도 아닌줄로 안다.자기가 하고싶은 일이면 어련히 할것이다.부모로서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것이 백번의 설교보다 훨씬 좋은것이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도 맑다는 얘기가 어디 틀린데가 없다.       성인절을 맞은 딸애는 요즈음 학교에 바칠 레포트테마를 우리 력사에 나오는 량반에 대한것으로 잡았다고 한다. 이것도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한것이라 하니 일면 대견하면서도 이제부터 오염된 사회와 깨끗한 사회속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가면서 자기의 옳바른 삶을 마음껏 살아갈 딸애의 장래가 가슴 벅차기만 하다.    한편 그때문에 시름이 놓이지 않음도 어찌 달랠수가 없다.                                              2007년 1월 13일
37    [수필]사람은 되는것일수도 있는가보다 댓글:  조회:601  추천:12  2009-02-11
    올해 가을에 출판된 필자의 수필집락엽줏는_ 마음에_ 사람은_ 되는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다라는_ 졸작이 끼워있는데 서두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러나_ 내 나이 40을 넘게 되여 뒤늦게야 깨달았지만 사실 사람은 <되는것⟩이 아니라 <하는것⟩이다.이를테면_ 인생은 자기의 뜻때로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환경의 지배에 좌우되여 되는セ사람으로 살지 말고 자기로서 하는セ 사람으로 살자, 어쩌구 저쩌구 하는 내용이였다. 완성날자를 보니 작년으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제목에서 보다싶이 나는 일년사이에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될 부끄러운 궁지에 처하고말았다.    이렇게 비참한 결과는 오늘의 이런 이야기에서 비롯하게 되였다.    엊저녁 10시경에 전화가 걸려와 나는  청도의 어느 정부관원들을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오전 10시 도꾜역 야에스출구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결국 17분 지각으로 약속지점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그 사람들도 길이 밀려서 늦어졌던것이다. 나는 그들을 부근의 커피점으로 안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당연히 청도의 수출가공구의 투자유치문제였다.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소개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무슨 전 일본기업의 대표자나 되는듯이 리해하고있어서 나는 그냥 그렇지 않다고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유명한 인물도 아니고 또 별로 능력도 없는 놈이라고 해석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눈에는 내가 겸손을 부리는것처럼 보여 우리의 이야기는 이상하게 번져나갔다. 일본기업을 그렇게 자기 부하를 다루듯 언제든지 대기시키는 일은 나의 능력으로서는 도무지 될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지만 그 국장님은 자꾸 수출가공구에 일본기업을 소개해달라며 열심히 우대정책들을 설명하여주었다. 그 간절한 말씀에 나는 더 어떻게 대답을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시간 남짓 이야기하다가 아예 이 자리를 어서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음의 약속때문에 이젠 가봐야 하겠다고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국장님이 제발 저희들 가공구를 널리 선전해달라고 또 다시 부탁하기에 나는알겠습니다_. 응당한 일이죠. 만나는 사람마다에 청도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_ 통쾌하게 대답하였다. 어서 그들과 갈라져야 한다는 생각뿐이였던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국장님은 나의 손을 잡고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에로 가더니 선전책자를 좀 가져가라고 하였다. 난 고맙다고 대답하고 넘겨주는 책자를 받아 들었는데 그 책자라는것이 저그만치 들가방에 한가방 가득 차있었다.    이렇게 헤여지고 그리고 다시 만날 약속도 하면서 서로 친구로 지내자고 수다도 떨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나의 비극은 이제부터였다.    도꾜역에서 나의 회사까지는 뻐스로 7분가량(교차로의 정차시간을 포함)의 거리인데 걸어가려면 15분 내지 20분이 걸린다. 전차나 지하철이면 갈아타는 시끄러움이 있어서 념두에 두지도 않았다. 손에 생각지도 못했던 무거운 책자를 들고있어서 당연히 뻐스를 타고 들어가려고 정거장에 가봤더니 14분후에 다음 차가  오게 되여있었다. 14분이면 걸어서도 거의 회사에 도착할수 있는 시간이니 나는 서슴치 않고 걸어가기로 작심하고 씨엉씨엉 걷기 시작하였다. 요즈음 보기 싫게 커진 배의 살을 빼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것도 내가 걸음을 택한 주요한 리유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나는 손에 든 책자의 무게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였고 나중엔 내가 왜서 이렇게 많은 책자들을 들고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자기를 바보라고 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책자가 든 비닐가방끈이 나의 손을 파고들어가 손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였다. 두권이면 충분할것을 이렇게 사오십권이나 받아가지고. 이렇게 고생하는 바보가 어디 또 있으랴싶었다. 그렇다고 어디다 던져버릴수도 없지 않은가? 그들의 성의를 버리는것으로 되니 인간으로서는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할 짓이고 나는 방법없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가방끈에 손수건을 감아서 쥐고 회사를 향해 계속해서 어정어정 걸어갔다.    그렇게도 진심으로 나에 대해 설명하였는데도 그들에게는 내가 아주 겸손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부각이 되였다는 사실. 이제 청도에 가거나 아니면 그들이 다시 도꾜에 올때 그들이 나한테 품을 크나큰 기대를 생각하니 나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착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기대를 저버리게 되는 마음. 도망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차 그들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할수도 없고, 더우기 그들은 나의 이런 난처한 처지에 대하여서는 아예 리해하려고도 하지 않으니 세상에 이런 딱한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싶었다.    한편 중국의 투자유치를 담당하고있는 정부관원들의 열정과 더불어 조급성도 엿보인다. 중국의 현실 그대로인것이다.    나의 의지대로하는セ삶이 아니고 남의 의지대로 되는セ그런 삶을 살게 된 지금 나의 마음은 손에 든 책자만큼 무거워졌다.                                           2004년 11월 25일
36    [수필]미남이 되여보는 기분 댓글:  조회:672  추천:13  2009-02-11
 6월 5일이다. 기온 섭씨31도.    제2세대신분증이 부러워서 나도 오래간만에 장춘 푸양제 파출소로 갔다. 장춘시문화국의 집을 분배 받고 시정부숙소의 호구를 옮겨올 때  가본적이 있는 곳이였는데 그때는 내가 30살좌우였으니 그때로부터 벌써 십여년이 지난 셈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이 파출소는 옛집 그대로였다. 변한것이란 두눈을 부릅뜬 경관아저씨가 이제는 기분좋은 젊은 녀경관으로 자리바꿈하였다는것뿐이다.    줄 서지 않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꼭같은 장춘사람들. 그 역시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배반한 현상이였다. 붐비는 창구에 줄땀 날 정도로 밀고 다가갔다. 밖에서 밀든 닥치든 상관없이 바삐 돌아치던 녀경관이 해쭉 웃으며 반기는데 난 땀을 닦을새도 없이 낡은 신분증을 내밀었다.   새_ 신분증신청하러 왔습니다.»   신청서는요_? 사진 붙은 신청서를 안주던가요?»   네_? 누가요?»   아_, 요 옆에 가서 사진 찍으세요. 그러면 사진이 인쇄된 신청서를 줄겁니다.»   아_, 네 그래요. 알겠습니다.»    나는 이 붐비는 창까지 온갖 힘 다들이며 노력한것을 크게 후회하며 아쉬운 심정으로 밖을 나왔다. 옆의 사랑방 같은 집안에서 사진 찍는 작업이 진행되고있었는데 내가 들어가니 집안엔 모두 다섯사람. 경관 하나, 사진사 하나에 지금 사진 찍으려고 사진기앞에 앉은 녀성과 차례를 기다리는 처녀 한명과 그리고 땀투성인 나.    한주일전에 누님이 보내온 백가지꽃セ을 먹었더니 이렇게 조금만 움직여도, 아니 눈 껍적거려도 땀이 나군한다. 래일부터 절대 먹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하면서 나는 나의 차례를  기다렸다. 곱게 찍히려고 앞에 앉은 녀성은 몇번이고 빗질 하는데 나는 이러는 녀성들이 영 달통되지 않는다. 안해의 머리 빗는것도 무심히 건너보며 늘 생각했지만 아무리 빗어도 머리는 빗는켠으로 고정되지 않고 원모양대로 드리우는데 그래도 그냥 한곳을 같은 방향으로 빗고있으니 왜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남성들이야 그저 한곳을 한번씩 머리를 한바퀴 골고루 빗으면 끝인데 녀성들은 이 물리적현상에 대한 리해가 부족해서 그런지 언제 봐도 꼭같은 빗질이다.    나의 앞에 서서 순번을 기다리는 처녀는 그래도 다르다.준비가 있게 온듯, 이쁜 옷차림에 머리도 가쯘히 매고 왔다.그래서 그는 인상훈련을 하고있었다.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히쭉 해쭉, 방글 웃어보다가 입은 다문채 눈만 웃어보기도 했는데 원래 비좁은 방이라 꼭 그 거울속의 여러가지 얼굴표정이 그녀의 어깨너머로 보였다. 남의 녀자 쳐다보고있기가 쑥스러워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심양서 떠날 때 뻐스에서 보려고 넣었던 리상문학수상작품집을 꺼내들었다. 서울에서 출판된 이튿날로 사게된 기쁨을 읽을 때마다 향수하는 책이다. 두번째로 읽어보는 소설이지만 싫증이 나지 않는다.    나의 차례가 되여 사진기앞에 가서 앉았다.   머리_ 약간 숙이세요.»   오른쪽으로_ 조금 돌리세요.»   허리를_ 펴고.»   앞을_ 보세요.»    사진사의 명령에 따라 머리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는 사이에 사진 다 찍고 일어서니 컴퓨터에 나의 얼굴모양이 확대되여 나타났다.    이로부터 나의 미남경험이 시작이 된다.    사진사가 걸상에 앉더니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해서 얼마 안되여 나의 얼굴색이 희여지고 땀을 닦느라 문질러 놓아 벌겋게 된 번질번질한 얼굴도 희멀쑥하게 되였고 무슨 가죽같다며 딸애가 자꾸 골려주던 얼굴피부도 총각때처럼 반질반질해졌다. 대신 원래 너비가 너른 눈섭이 강조되여 작은 입이 섹시하고 벗어진 이마도 눈섭을 기준하여 생긴 공간으로 보이기에 비례적으론 퍼그나 작아진듯 했다.    참으로 신기하다. 내가 이렇게 멋진 남자였던가? 하며 속으로 좋아하고있는데 사진사녀성은 나의 오른쪽 이마우의 땀에 젖은채 내리드리운 머리카락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에 그 머리카락이 변해가는데 없어졌다가도 다시 나타난다. 원래 널직한 이마라 그녀는 아마도 그 머리카락 몇오리를 없애는것이 좋을지 그대로 두는것이 좋을지 망설이고있는듯 했다. 내가 볼바엔 그것도 정중한 얼굴인상에 자그마한 장난기 같은 미가 있어서 그대로 두면 좋을것 같지만 젊은 녀성앞에서 이렇게 해달라 말하기도 그렇고 하여 그저 참고 지켜보고있는데 그녀의 손은 자꾸만 그 머리카락의 존재를 가지고 시간을 끌었다.    커서의 움직임에 따라 나의 심정도 같이 움직여 (아, 그만 거기서 멈추라. 그렇지!  아니, 그럼 너무 하다. 이마가 두드러지지 않나? 그래 그렇게 다시. 그래 그대로 놔둬. 음, 아니아니. 아_ 아그대로_ 놔두면 좋을것 같은데, 씨.)    이렇게 정성들여 만들어진 얼굴이 한장의 종이에 프린트되여 나온걸 손에 쥐고 자못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파출소 창구로 갔다.어느새 사람들은 적어졌다. 이마우의 머리카락이 없어진것을 평생 한으로 간주하리라 굳게굳게 다짐하며 그 종이를 내밀었다.   가장_ 빠르게 해주세요.»   그러자면_ 성청(省廳-길림성공안청)에 가야 합니다.»   그래요_?»   네_. 이 신청표를 가지고 가서 사진값 물리고 거기 가서 다시 사진 찍으세요 .돈 백원 준비하시고.»   네_. 알겠습니다.»   아_, 호구부도 가지고 가세요.»   호구부_ 없는데_ »   그럼_ 인차 만들어드릴께요. 5원 내세요.»   네_.»    이렇게 효률이 높은데 대해 나는 정말 감격해하였다. 제일 시끄러운것이 중국에선 호구부인데 이렇게 간단하게 해준다니. 나의 옛 자료가 컴퓨터에 저장이 되여있어서 인차 새호구부를 가지게 되였다.나는 그걸 받아들고 부랴부랴 성청으로 향했다.    거기에 가서도 방금과 같은 사진 찍기 작업을 반복하였는데 나는 은근히 나의 이마에 다시 그 멋진 머리카락이 나타나주길 기대하면서, 그리고 좀더 이쁘고 멋있게 찍히려고 웃을가 말가 인상 조절하는데 찰칵 샤타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익! 다 틀렸군.)    이번엔 아마 그닥잖을것 같아서 기분이 잡쳤는데 아니나 다를가 컴퓨터에 나타난 내 몰골은 방금보다 훨신 주눅이 들어있었다. 오로지 다행으로 생각되는것이란 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이마엔 그 그리운 머리카락이 살며시 자리잡고있은것라 할가. 어찌됐든 이렇게 나는 미남도 되여보며 새 신분증을 가지게 되였다.    새 신분증을 받아들고 나는 정말 많은것을 생각했다.    신분증이란 그 사람모양 그대로 사진을 내야 하는데 사진사녀성의 손에서 얼굴에 박힌 까만 짐이 숨박곡질하듯 사라지고 늙은이의 동서로 깊이 패여있던 밭고랑주름이 서북동남방향으로 바뀌는가싶더니 사막의 바람이 불었는가 어디론지 아예 사라져버리고 나의 굵은 눈섭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춤추다 다시 가늘게 여위여 제자리에 정착해버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을 박고 어떻게 신분을 증명할것인가? 요즈음엔 지문, 눈, 생물세포로 본인검증을 한다는데 이렇게 마구 만들어진 사진이 진정 자기의 신분을 보장해줄수가 있는것이지 어지간히 근심이 되는것이 아니다.    아무튼 제2세대신분증을 포켓에 넣으며 나는 흐뭇해하였는데 새로운 호구부를 다시 보는 순간 어처구니없어서 입 딱 벌이고말았다. 딸애의 민족이 한족(漢族)으로 되였던것이다.내가 제정신이 들었을 땐 나의 몸은 이미 택시에 실려있었고 입으론 푸양제파이추숴(푸양거리 파출소)하고 지시했다.    결국 장춘시민족사무위원회와 원 사업기관과 가도판사처의 도장을 찍어오면 고쳐주마 라는 허락을 받고 그 파출소를 나왔다. 난 이젠 더 노력할 생각을 포기하고 그대로 심양행 뻐스정류소로 향했다. 일본에 두고 온 호구부를 다시 쓰면 될것이고 거기에는 분명히 조선족이라 밝혀있기때문에 이제 시간이 있을 때 다시 와서 고쳐도 괜찮으리라 생각되였지만 한편 새 호구부를 그 자리에서 만들어주는 자세와 잘못된 글자 두자만 고치는 번거로움의 차이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심사숙고하게 되는 과제를 강조하여 제기하지 않을수 없다고 심오하게 인식하게 되였다.    하루사이, 아니 꼭 네시간사이에 나는 이렇게 미남으로 되는 경험을 해보았고 또 하마트면 귀여운 딸애를 빼앗기는 체험까지도 해보고 혼줄이 났다. 한생을 더 산것 같은 기분이다.    아마도 미남이 아닌 놈은 미남꿈도 꾸지 않는게 좋을가 보다.                                            200년 6월 5일 저녁
35    [수필]무궁화 댓글:  조회:782  추천:21  2009-02-11
   몸을 비틀어 짜내도 이렇게까진 많은 땀이 나오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하루종일 밖에 다니면 이렇게도 많은 땀이 흘러내린다. 이 몸속에 얼마만큼이나 물이 들어찼길기에 이렇게도 많이 나올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기분이 아주 나쁜 불여름이다.    오늘엔 옛사무소를 실험실로 꾸려놓느라 땀도 많이 흘렸다. 오후 세시경까지 다 끝내고 나는 동료인 노구치와 함께 남은 시간을 리용하여 새로 이사간 사무소의 베란다에 놓을 화분통을 사러 갔다. 넓은 베란다가 너무 썰렁하여  큼직한 화분통을 몇개 사다놓으려고 며칠전부터 벼르고있던참이였다.    노구치와 나는 도이토라는 큰 홈센터에 가서 마음에 드는 화분을 골랐다. 노구치가 행복의 나무라는 좋은 이름을 가진 화분 하나 고르고 난 유달리 나의 눈을 끄는 무궁화를 골랐다. 가지 세개밖에 나지 않은 어린 나무인데 그 여린 가지에 꽃봉오리가 가득 매달려있었다. 파아란 잎에 분홍색꽃이파리가 속살을 드러낸 꽃봉오리가 귀엽다.    이튿날 베란다에서 무궁화는 꽃 두개를 피워주었다.사무실 동료들의 얼굴도 꽃과 함께 웃음꽃 활짝 피게 되였다.삼일째 되는날엔 아쉽게도 하나도 피여주지 않았다. 한송이는 오후에 피리라고 우리 모두가 서로 자기가 아는척 하면서 추측을 했는데 오후에도 피여주질 않았다. 필가말가 한것이 조금만 더 기다리면 피는 과정까지도 볼수 있을것만 같아서 자주 내다보았다. 어제 저녁 퇴근하고 베란다에서 중화료리를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며 베란다에 새식구들이 들어온 환영 파티セ를 열었었다. 콩크리트수림에 눌리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듯 갑갑한 대도시에서는 이렇게 푸름 한포기라도 모이면 감격에 목이 메일 정도다. 단 두송이의 무궁화였지만 장장 두시간동안의 화제를 만들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필가말가 하더니 끝내 피지 않았다. 금요일이고 또 다음주 월요일이 바다의 날이라 주말 삼련휴로 되였다. 나와 노구치는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낭아노켄에 있는 공장에 출장 가게 되였으나 그 출장준비보다 나는 그기간 고열의 베란다에서 고생할 무궁화가 근심되여 견딜수가 없었다. 작은 화분통에 부식토를 담아놓은것이 아마도 하루만 물을 주지 않으면 인차 말라버릴것 같아 나는 저녁에 물을 듬뿍 주고 인터넷으로 이틀후 비가 옴을 확인하고서야 조금은 안심되였다.    밤새 외롭게 홀로 필 꽃을 이쁘게 괴로워하며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    련휴가 끝나 부랴부랴 출근하니 사무원인 영선씨가 울상이 되여있었다.   다_ 말라버렸어요.»    묻지도 않은 말 꺼냈지만 난 무궁화를 말한다는것을 즉시 알았다.   그래요_? 어디 보자.»    베란다로 가보니 바싹 말라버린 잎들이 가지에 힘없이 매달려있었고 활짝 핀 꽃도 마른 이파리를 간신히 붙들고 달려있었다. 다행이라 할가 꽃망울만은 통통한대로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로 작은 화분통을 큰 화분통으로 바꾸어 부식토도 듬뿍듬뿍 담아놓고 허약해진 무궁화를 조심조심 옮겨놓고 물 가득 주었다. 그리고나서야 흐르는 땀을 훔치며 베란다의 걸상에 앉아서 불쌍한 무궁화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푸르싱싱하던 가지가 메말라 맨 끝머리는 시들어버린 머리를 떨어뜨렸다. 파아란 잎도 누렇게 늦가을 나무잎처럼 생기를 잃었다. 한참이나 태양의 불결에 타있는 꽃을 바라보다가 나는 가위를 집어들고 말라버린 가지를 끊어버리려고 했다. 시들어버린 가지를 되살리려고 하기보다는 시원히 잘라주면 식물은 용케도 새로 가지를 뽑아내는것이다. 그러나 나의 손은 인차 멎고말았다. 다치기만 해도 부시시 떨어질것만 같던 시든 꽃이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고 마른 잎만 맥없이 떨어졌던것이다. 순간 메마른 체구에 애써 피워온 꽃만을 지꿎게 붙들고 놓지 않는 무궁화의 굳은 마음이 전달되여 온다. 그 모습 름름하기까지 돋보여 가위를 든 나의 손이 다 떨리였다.    내 어찌 그러는 무궁화에게 함부로 가위질 할수 있단말인가! 수분이 모자라니 온 몸의 수분을 모두 집결하여 꽃망울에 공급을 한 모양이였다. 새 생명의 탄생만을 기원하며 말라든 이파리여! 가을에만 지는 락엽이지만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위하여서는 한여름이라도 선뜻이 헌신하는 이파리의 갸륵함이여! 이미 지워버린 꽃들도 새 생명을 위하여서 수분을 탐내지 않고 희생하였다. 아, 오로지 이제 곧 피여날 꽃망울만을 위한 무궁화의 가족들이여!    가지에서 용감하게 갈증과 싸우는 생의 부르짖음이 들려온다.    밑뿌리에서 생에 대한 의욕의 힘찬 맥동이 진동한다.     저녁 퇴근하며 다시 살펴보았더니 시든 잎과 가지사이로 새파아란 애어린 잎을 뾰족 내밀고있었다. 정말 거짓말 같이 시든 잎 모두가 떨어지고 그 시든 잎과 가지사이로 이렇게 합창이나 하듯 새이파리를 내밀고 캐득캐득 웃고있었다. 너무도 희한하고 감동이 되여 눈물이 찔끔 나왔다.   무궁화는 사랑만 있으면 얼마든지 억세게 살아갈수 있는법이라고 무슨 큰 철학 적오성이라도 얻은듯한 기분으로, 나의 가슴에도 무궁화 한송이 피여나고있었다.                                             2005년 7월 20일
34    [수필]망종セ의 웃음거리 댓글:  조회:561  추천:16  2009-02-11
하늘이 높아지면 나는 그냥 이렇게 마음이 들끓는다. 가을 특유의 매혹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뜩 이름짓기란 얼마나 현명한 고안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은 가을이란 이름이 있고 봄은 봄아씨란 이쁜 이름이 있다. 먹쇠가 있는가 싶더니 돌쇠도 있고 서울이 있더니 너울도 있었다.    일본의 무라카미는 독자들과 함께 일본의 러브호텔이름을 모집해보았는데 그 이름들이 참으로 가관이였지만 오늘 난 사람들의 이름얘기를 하여 여러분들의  웃음주머니를 풀어드리고저한다.    이름으로 운명을 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옛날엔 천하게 이름 지으면 운이 좋다고도 하여 개똥애란 이름마저 생겨났고 다음에 태여날 자식의 성별도 이름으로 기대해보았다. 그리하여 동생때문에 엉성한 이름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불쌍하게 많이도 있었다.    련줄포로 딸만 낳은 집들에선 딸애들의 이름이 거의 모두가 사내이름으로 된 경우가 많다. 사내의 이름을 달면 다음에 사내가 태여난다며 기대해보는 부모들의 희망이였다.  그렇게 이름 달기에 정성을 들이고 다시 정성들여_ 노력?하다나면_ 바라던 막둥이아들을 안게 되는 기쁨이 오는 경우가 있는데. 동네에선 칠보_ 일조라고_ 불리워도 악의가 없어 좋다. 이름 잘 달았기때문에 끝내 아들 봤다고 한다. 고추 달린 놈만 쑤욱쑤욱 뽑혀나온 집들에선 그 반대고_     다 자란 사람들도 자기의 이름 가지고 신경 쓴다.    작가들이 그렇다.    옛날엔 자_(字)_,호_(號)마_  저 있어서 복잡했지만 지금은 거의 쓰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필명마저 시끄러워 달지 않고 제이름으로 맹활약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 필명을 다느냐 달지 않느냐에 따라 자기나름대로의 편리와 불편이 있는가보다.    십여년전 정세봉님의 소설이 유명해져서 말썽도 많았었는데 장백산セ잡  지사의 요구에 의해 내가 평론을 써서 소설과 함께 발표되였던덕분에 자연히 말썽은 평론에도 따라와 나를 외국에_ 류학 간 지주놈의 사위라고_ 까지 무함한 편지를 잡지사에 보내온 실례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 상식없는 어느 연변의 한 간부가 책상을 탕탕 치면서이_ 무궁이란자를 여기 빨리 데려와!하고_ 호통쳤다는 말을 들었는데 난 그때 그 말 듣고 뭐라고 할 말을 잊었다.     기어이 따질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행정급으로 말하면 나도 현퇀급セ이고 소속관계, 이를테면 지도와 피지도의 관계로 봐도 장춘시에 있는 내가  연변에 있는 그 사람의 령에 따라야 한다는 도리가 없고 장춘시가 길림성의 소재지라는것을 감안하고보면 차라리 내쪽이 더 높은데 있지 않느냐 하고 어깨 으쓱해지는판이였는데. 에이씨_, 대체 누가 사또냐_ 하고 배짱을 부리고싶었지만 장백산セ잡  지사에서 그 편지를 나한테 다 보여주지 않아서 나의 유치한 배짱이 배속에서 가라앉고말았다.    한편 만약 내가 연변에 있었더라면 그 봉변 받아야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무서워나기도 하였다.문화대혁명セ때처럼 얻어맞고 온 세상에 소문이 쫙 퍼지고 나의 이름 알려지고 하면 난 어디 가 머리도 못쳐들것이 아닌가. 나이 20대후반에 일찍 락동강 오리알 신세로 되고마는가 싶었다. 필명을 달아놓은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나 절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싶도록 자기를 칭찬해주고싶은적도 있었다.    후에 소설과 평론이 다 우수하다는 길림성위선전부의 결론이 나온 다음 연변의 량심있는 분들이 나한테 사과도 하여 내켠에서 오히려 죄송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필명으로 욕먹은 작가도 있으니 그 불쌍한 사람이 바로 괴인 조광명이렷다.    언젠가 중편소설 한편 투고하며 장난끼로(문학이란 이런 장난끼가 필요하지만) 필명을 망종セ이라고 달아놓았단다. 농사일만 해온 집안에서 자라나서 농사계절의 망종(芒種)을 생각하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땐 무슨 영문이라고 나한테 들려줬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후에 무슨 문필회의에 참가하러 갔더니 그때 원고를 담당한 편집님이 아주 엄숙하고 정중하게 악수를 굳게 하시며아_, 망종동무, 반갑소.라고_ 인사하시더란다.    울며 겨자먹기라는 말이 있지만 이럴 때에는 웃으며 욕먹기라고 하는가? 정말 망종(亡種) 같은 얘기를 나한테 들려준 조광명은 지금쯤 이 글을 보며 크-게 후회할것이다. 청도앞바다에 세메터파도가 일지도 모른다. 그의 한숨에.    장춘지방의 어느 시골에 묻어둘 얘긴데 말이다. 아마도 자기가 지금 이렇게 문단에 이름이 쩡쩡 울릴줄은 예상 못했던모양이다.    그래도 우리 같은 무명졸들은 괜찮은 셈이다. 당한 봉변도 유명무명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    일본 헤이세이(平成)문학의 대표자인 무라카미 하루끼(村上春樹)의 경우는 영 기가 막힌다.    무라카미 하루끼는 필명 달기 시끄러워서 필명을 달지 않았다고 한다. 원명을 쓰고있는 작가인데 일본에서 련속 히트작을 써내여 헤이세이문학의 대표자로 등장하게 되였다. 언젠가 그는 얼굴에 두드러기가 나서 마을 아줌마의 소개로 피부과에 갔었다. 요꼬하마의 어느 병원이라는데 피부과와 성병과가 같이 있어 두 과의 환자가 소금과 후추처럼 섞이여 대합실에 대기하고있었다고 한다. 외모로서는 누가 어느 과에 속하는 환자인지 모르고 대합실앞에는 환자들을 부르는 창구가 있고 그안에 진찰실이 있는데 비밀적인 검사는 카텐 한장으로 가리워놓은 뒤에서 진행되고있었다. 간이벽이 없으니 의사의 말이 다 들려왔는데.   부인_, 이게 트리코모나스(Trcomonas)입니다. 집에 가서 남편 한방매 갈겨주세요.라든지뺀모모씨 당신 잘두 나았수. 이렇게 깨끗이 치료된건 희구한 일인데. 그런데 이것을 교훈으로 이제부터는 벌거벗은 녀자와 2메터이내로 접근하게 되면 콘돔부터 씌우도록!라든지_ 하는 말을 들으며 대합실에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는 그런 병원이였다고 한다. 그러던중 무라카미사_--아으_!하고_ 간호사의 높고 길게 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너무 높아  이 병원에서는 새 간호원 들여올 때 목소리 높은 간호원만 받아들이는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무라카미는 그 부르는 소리가 싫어졌다. 환자들로 붐비는 대합실 제일 뒤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이름이 불리워지니 앞으로 나가는데 환자들의 시선이 일시에 무라카미의 몸에 구멍이나 뚫을것 같이 집중되였다. 그만큼 유명해지니 아는 사람도 많았던가 본데 뒤에서 간신히 앞으로 나가고있지만 얼른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간호사는 더 큰소리로 자꾸 무라카미를 불러대였다.   무_-라-카-미-사-아-으--!»    외모로선 무라카미가 어느 과를 진찰하러 왔는지 모르니 사람들은 저 유명한 작가도 그런 병에 걸렸나 하고 희한한 눈길을 보내주고있었던것이다. 그 정경 나도 한번 보았더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가.    무라카미는 무라카미아사히도_(村上朝日堂)에_ 이 이야기를 썼는데 마지막에 그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자기가_ 이제 잘못하면 성병과에 가게 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지망을 하는 사람들은(많이 있을테지) 그래도 필명을 달아놓는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로파심일가?»    나는 필명 둘씩이나 있으니 근심이 없지만 필명이 없는 작가들은 얼마나 후회하고 고민할가?    이제 필명을 달지 않고 원명으로 맹활약하고있는 학자 장춘식이나 수필가 서영빈이 이런 봉변을 당할것을 깨고소-하게 기대해본다.                                    2004년 10월 28일                       핫쵸보리사무실에서 회사일은 제쳐놓고  
33    [수필]돋보기부자 댓글:  조회:615  추천:9  2009-02-11
나는 돋보기 세개나 있다. 갖고다니는것이 하나 있고 집에 하나 있고 회사에 하나 있다. 이만하면 뭘 보는데는 절대 불편이 없으리라고 나 스스로 마음이 든든하다. 이러는 내가 무슨 지독한 로안인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건 아니고 그저 나에게 돋보기 있다는 얘기다. 틀림없이 세 개다. 원래는 네개이던것을 세개로 줄였다. 처형에게 하나 주었던것이다.    3년전 나는 40여세되기까지의 기간 끈질기게,그리고 완고하게 견결하게 지켜왔던 1.5의 시력이 점점 부실해지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올빼미눈이라고까지 불리웠던 나였는데,사실 올빼미가 그렇게 시력이 좋은지도 모른채 나는 그냥 올뻬미로 불리우는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살아왔다. 그러던 내 눈이, 어쩌면 나에겐 유일한 자랑거리인듯한 나의 시력이 점점 못해지다니!    너무나 겁이 나서 안경상점에 가서 사정을 구구히 얘기하고 안경을 사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게 잘못된 걸음이였다.안과병원에 가야하는데 말이다.    40대후반의 아줌마가 거짓말 보태서 한 한시간남짓 내 눈을 못살게 굴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로안이니_ 돋보기를 챙겨야하겠습니다.이_  다.    이런저런 유리를 번갈아 내 눈에 갖다 대보며 시끄럽게 이것저것 묻더니 사정없이,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당신은 늙었습니다라는 판결을 내린것이다.  아니_, 그럴수가? 저 이제 42인데요.»  빠른_ 사람 있어요. 손님은 조금은 빠른 축이네요.»    나의 심정따위엔 아무런 흥미가 없는듯 그녀는 계속 나에게 안경을 살것을 권고했다.   인차_ 안경을 걸지 않으면 더 나빠질수도 있어요. 로안에 근시까지 겹쳤습니다.»   네_? 근시? 그런거 어디 있습니까? 로안은 가까운걸 보지 못하는데 근시라니요?»   그러게_ 말입니다. 그러니 근시돋보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유도를 하다가 그녀가 내주는 안경이 유명한 브랜드로 6만엔짜리였기에 난 인차 그 상점을 나와버렸다. 결국엔 안경을 파는것이 목적이요 나의 눈을 근심하는건 아예 처음부터 거짓이였다고 생각되였다. 그렇다, 내 눈이 나빠야 안경장사 좋을수 있으니까.    그땐 나의 자존심이 시퍼렇게 살아있어 로안은 도무지 인정할수가 없었다.    그후 나는 곤명으로 출장갔다가 관광기념품매대에 진렬되여있는 수정돋보기에 마음이 끌려 200원 주고 하나 사고말았다. 내심으론 언녕 로안을 인정한 일이고 또 전번 일본에서 본 안경값 6만엔에 비하면 이는 수정인데도 퍽 싸니까 하나 갖추어놓자는 생각이 자존심과 부끄러움을 살며시 밀어놓았던것이다. 그날로 돋보기 걸고 품고 갔던 책 펼쳐드니 아, 잘 보이기로 정말 이 세상 다시 얻은것 같았다. 눈에 건 안경이 아까와 서라도 책 더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나의 로안에 대한 저항 혹은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던 마음의 도망이랄가 하는것은 슬며시 기척없이 사라지고 나의 생활에 돋보기가 뛰여들게 되였다.    그후 이렇게 저렇게 해서 몇개 더 사게 되였는데 그런데 이 돋보기란것이 대체 나의 인생에 무슨 보탬이 되느냐 싶어서 오늘 새삼스럽게 손에 들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생(生)이란 식물을 내놓고서는 일반적으로 눈이 펀들펀들 떠있는가에 따라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긴 숨을 쉬는것은 보이지 않으니 우선은 눈을 볼수 밖에 없는것이다. 죽는다는 말을 눈을 감는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에겐 눈이 중요한데 눈이 중요하게 되는것은 그 눈으로 사물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보는 행위, 식물과 동물을 보는 행위는 모두 이 눈으로 하게 된다. 도적놈도 이 눈으로 발견하고 비리, 부정부패도 이 눈으로 발견한다. 아름다운 녀성도 이 눈에 보여지고 신사다운 사내도 이 눈에 비친다. 호박꽃도 장미에 못지 않게 아름다와 보여지는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 눈으로 보고 제멋대로 생각하게 되는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했거늘 그 창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엿볼수 있다고 하니 정말 거짓말 같기도 하지만 남과 대화할 때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정말 그가 뭘 생각하고있는가를 알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중요한 눈에 돋보기를 건다하니 꼭 마치 유리창을 달아놓은듯 하다. 그러면  눈의 마음의_ 창(窓)노_  릇은 어찌될것인지? 닫혀진 마음으로 될것이나 아닐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많은 학자들의 안경을 떠올리고 보면 유리창속의 눈은 심오한 학술의 품위를 갖춰주는듯도 하다.    나도 회사에서 돋보기를 걸고 서류들을 볼 때 사무원아가씨에게 참_, 멋지네요라는_ 호평을 딱 한번 들어본적이 있다.    그러니 돋보기부자는 멋진セ부자다. 이렇게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며 자기위안을 한다.    한손에 가시 쥐고 또 한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몇백년전의 옛날 역동(易東)선생 우탁(遇倬)이 이런 시조를 지었다 한다.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 없지만…                                           2006년 6월 9일
32    [수필]추석달을 서천에 바래줘야 하는데 댓글:  조회:577  추천:8  2009-02-11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밤에 잠이 오지 않는것은.    태풍 21호가 중국 복건성을 향해 느릿느릿 가더니 27일엔 일본 오끼나와 남쪽에 멈추어서서 움직이질 않았다. 가을의 남해의 경치에 매료되여 구경에 정신을 파는것인가 했더니 대륙의 기운에 밀리워 더 전진하지 못하는거라고 TV에서 방송 한다.    이튿날엔 90도로 꺾어져 일본을 아래로부터 우로 휩쓸며 북상하더니 가는 곳마다 인간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듯, 허나 매스컴은 무슨 즐거운 일이나 전하듯 신나게 떠들어댄다.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하는 일이 발생되면 매스컴의 광고값이 올라가기때문에 어딘가 그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있는것이다. 몽땅 휩쓸며 북상하던 태풍은 동북지역에 가서 또 90도로 꺾어져 이번에는 다시 태평양에 들어섰다.    그놈 태풍의 심사 정말 모를 일이다.    인생도 꼭 이런 자연과 같이 분주하다. 짧은 인생이지만 뭔가 질풍처럼 달려온것 같은 생각때문에 추석의 밤이 더 애처롭다. 어쩌면 나의 체구도 태풍에 시달리는 한그루의 나무와도 같이 생각되였다.     추석밤. 퇴근하여 홀로 저녁 챙겨놓고  마신 외로운 술이 피곤과 함께 나를 괴롭혔다. 멍하니 밖의 밝은 달 쳐다보며 생각을 비워본다는것이 나의 마음은 그저 더 착잡해지기만 하였다.    살기를 40여년. 허둥지둥 달려와보니 지금이다. 고향을 떠난지도 이제 십여일만 지나면 10년을 넘게 된다. 부모님도 이젠 계시지 않아서 휘영청 밝은 달만 보면 괜히 이렇게 슬퍼진다. 내 인생이 슬퍼지고 이 세상이 슬퍼지고 그리고 남들까지도 슬퍼진다. 왜서 이렇게 아글타글 해야 하는지? 인생도 자연의 한가지 속성이라면 그다지도 슬플 일도 아닌데 사람은 자꾸 이렇게 슬퍼해 한다.    세상 떠난 부모님과 고향을 그리며 이 밤 새워야 하는데 밀려오는 피곤을 어찌할수가 없다. 마신 술탓으로 책임을 밀어놓고서도 그냥 마음 한구석은 무겁기만 하였다.    뭔가 해야 할 일이 뒤를 쫓는것 같다.    추석에 할 일이란 시간을 흘려보내며 저 중천의 달을 서천에 바래다주는 그것밖에 없음을 알고는 더 서글퍼진 내 마음이다.                                             2004년 10월 11일                                (제목과 첫줄은 추석날에 쓰고.)
31    [수필]빠알간 고추때문에 댓글:  조회:676  추천:12  2009-02-11
작년에 베란다에 심어놓은 남방고추(학명은 모르겠으나 아주 작고 매운 고추를 고향에서는 남방고추라고 불렀다.) 한포기를 거두어 이파리 떨어진 빨간 고추만을 출입구에 달아매놓았는데 오늘 나는 그 고추를 올해의 새고추로 갈아걸었다.     작년 수확을 거둔다음 고추대를 잘라버렸는데 올해 봄에 그 긁에서 새싹이 나오더니 이렇게 제법 다닥다닥 고추를 열렸던것이다. 겨울이라도 화분통이 마르지 않도록 나는 일요일마다 물을 주는데 고추대를 끊어낸 텅 빈 화분통에도 빠짐없이 물을 주었던것이다. 도꾜의 겨울이란 풀이 퍼렇게 살아있는 겨울이여서 이렇게 게으름없이 물을 주느라면 화분통에서 이름 모를 풀이 한포기이상은 자라나는데 이름모를 잡초면 어떠랴! 나의 정성은 에누리없었다.     그러한 요행을 바라며 고추긁만 남은 화분통에 그냥 물을 주었더니 기다리던 풀은 자라지 않았지만 대신 봄에 그 고추긁에서 싹이 나와주었다. 난 고추의 수명은 한해로서 다음해엔 두번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줄로만 알았었는데 이렇게 긁에서 새싹이 나오니 당혹하기까지 했다.     여름에도 게으름없이 물을 주었더니 이렇게 가슴이 벅찰정도로 열매가 많이도 열렸다. 늦가을, 아니 립동이 지났으니 초겨울이 되는 오늘에 해 따스한 베란다에서 빠알갛게 나를 반겨주고있지 않는가!     나는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득 안고 그 고추를 잘라서 묶었다. 고추대를 비틀어서 끈을 만든 다음 그것으로 고추를 묶었다. 옛날 싸리나무단을 묶던 기억이 생생해진다. 정성들여 묶은 고추를 나는 작년에 매달아놓은 고추와 갈아달았다. 출입구왼쪽벽, 사각형거울곁에 달아놓았는데 하얀 벽에 달려있는 빨간 고추는 한결 더 타오르고있었다.     곁에 걸어놓은 사각형거울속엔 향수의 얼굴 하나 담겨져있었는데 고추와 체경을 번갈아보는 나의 눈에는 바보처럼 눈물이 고인다.                                          2004년 11월 28일
30    [수필]지진과 고향사진 댓글:  조회:742  추천:15  2009-02-11
전번의 태풍의 피해로 숱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 매스컴에서 한창 중점적으로 보도하고있는데 이어서 니카다에서 7급 지진이 일어났다 .원래는 6급이상이라고 하더니 오늘 뉴스에 7급으로 정정했다.    나도 일본에 와서 체험한중 제일 무서운 흔들림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체험이란 무어나 다 좋은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늘까지 지진이 일어난지 한주일이 되는데 지진의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8만명이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 추운 밤에 소학교랑 피난소에서 집단생활을 하고있다. 일본 전국각지에서 동원하지도 않았는데 볼런티어가 달려가 고 기증금 모으고 원조물자가 실리워간다. 삽시간에 물건이 넘쳐났고 이젠 물질적생활보다 정신적생활이 더 문제로 되고있다.    자동차에서 지내던 사람이랑 집단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스트레스때문에 사망해가고있어 큰 문제로 되고있다. 아직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여서 정말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으로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오늘엔 집 떠난 사람들을 위하여 집에 가서 귀중한 물건들만 챙겨서 가져오는것을 허락한다는 발령이 내렸다. 태풍과 지진에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때문에 지금까지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던것이다. 일본자위대의 직승비 행기로 실어다주었다. 각기 자기의 집으로 가서 귀중한 물건들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딱 두시간만 허락하였다. 아직도 언제 또 지진이 와 흔들릴지 모르겠고 만약 또 흔들린다면 금이 난 벽이 무너질 위험도 있고 산이 흐트러져 내릴 위험성도 있기때문에 단독행동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여진이란것이 글쎄 5급, 6급이 되여 서너번씩이나 흔들어대니 이번 지진은 정말 가늠이 가지 않는다.    두시간후 모두 자기의 물건들을 챙겨가져왔는데 텔레비죤방송국기자가 취재하는걸 보고 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어린애의_ 책가방을 가져왔어요. 이젠 학교도 가야 하는데끇   내복과_ 양말 챙겼습니다.»   강아지를_ 데려왔어요. 한식구인데. 이 놈이 글쎄 텅빈 집앞에서 혼자서 집지켜섰지 뭐얘요. 에이구. 며칠동안이나.»    모두들 자기의 귀중한 필수품을 챙겨가지고 부랴부랴 모여왔던것이다. 단 두시간만 주어진 귀중한 기회였기에 사람들은 모두 정말 자기가 제일 필요로 하는것만을 손에 들고 왔던것이다.    그런데 그중 한 녀성은 손에 커다란 사진 한장을 쥐고있었다.   얼마나_ 아름다운 경치입니까? 우리 고향이 언제 다시 이렇게 회복이 되겠어요?눈굽을_ 찍으면서 말하고있는 그 녀성의 손에 쥐여있은것은 지진이 일어나기전에 찍은 고향의 사진이였다.    한장의 옛고향, 이제는 옛고향으로밖에 부를수 없게 된 고향, 적어도 일주일전까지 는  무던히도 아름다웠던 고향의 모습을 담은 한장의 사진뿐이였다.   …                                           2004년 10월 29일
29    [수필]자유의 공간, 누드신사 댓글:  조회:621  추천:13  2009-02-11
오늘은 청도에서 광명이란 작자가 오래간만에 메신저로 말 걸어와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나_ 지금 누드다._ 하고 알려주었더니 이 걸작 롱 잘하는 사람이ㅋㅋㅋ_ 누드신사.라고_ 날 골려주었다.    그래서 난누드로_ 있을 때 난 신사가 된다._ 하고 말했더니야_, 수필제목이다.라고_ 하기에 고정한 나는 정말 그게 수필제목으로 될것인가? 하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컴을 두드리게 되였다.    언제나 난 일방적으로 골려대는 판이라 번마다 대충대충 응대를 하고있는 나였지만 그래도 즐거운 대화가 잘 오가기에 난 광명이와 얘기나누기를 좋아하고있었지만 이렇게 알몸으로 대화하기란 처음이였다. 대방이야 날 볼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누가 엿보는것 같아서 처음엔 퍼그나 부끄러웠지만 그런 부끄러움도 몇분후엔 다 어디로 숨어버리고말았다. 혼자만이 만끽해보는 개운함, 부담없이 가지게되는 개운함, 이때까지 찾아보기 힘들어서 개운함은_ 비행기표 없어서 날 따라오지 못했는가_ 했더니 이렇게 그냥 나의 곁에 있은걸 모르고 내가 못본척했음을 뼈가 저리게 통탄하며 나는 이 하루를, 겨우  얻어온것 같은 하루를 아낌없이, 남김없이, 모조리, 깡그리 향수하리라 다짐하였다.    내가 오늘 누드로 된것은 내가 음탕해서가 아니고 또 무슨 변태성적인 무슨 습관이 있어서는 더구나 아님을 우선 정중하게 성명해둔다. 이게 다 이 몸을 통째로 찜하려는 이 날씨때문이였음을 두번 다시 정중히 밝혀둔다. 날마다 파괴해대니 이 자연이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온 지구를 불덩이로 태우고있으니 굳이 내가 누드로 된 원인을 누구의 탓이라고 하려면 난 날 포함한 인간의 탓이라고 말할것이다. 요즈음엔 사우나가 많기도 하던데 이대로 그냥 무더위가 지속되면 다 문 닫을짓이다.    휴일 아침이라 늦잠에서 깨여나 샤워하려고 알몸이 되였는데 방바닥이 어지러운것을 보고 집 청소하면서 땀 흘릴 일 생각하고 우선 바닥 닦고 그 땀을 시원한 샤워로 씻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그렇게 행동을 하였다. 샤워실에서 나와 타올로 몸의 물기 씻으며 컴퓨터 켰다. 메일박스 들여다보고 메신저에 나온 사람들 살펴보고 그러다나니 우에서 말한 에피소드가 있게 되였다. 다음으로 난  누드-원인-무더위-여름 이런 순서로 생각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 바로 여름을 구가한 글을 읽어본적이 없다는것이다.    무더위를 구가한 글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다. 봄이나 가을이나 겨울에 대해서는 구가하고있지만 왜서 이 삼복의 무더위를 구가하는 사람은 없을가? 그런데 더운 여름에 랭정히 생각해보니까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죽도록 더운 이 삼복철을 구가 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워서 죽겠는데 뭐가 좋다고 쾌지나 칭칭나세를 부를소냐. 자기가 싫으면 객관대상도 주관의식에 의해 싫은것으로 되고만다.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옹졸하다. 꽃이 만발한다고 봄이 좋고 나무 이파리가 붉게 타오른다고 가을이 또한 좋고 순진하고 말끔하다고 눈덮인 겨울이 좋지만 몸을 비틀어 짜듯이 몸의 물기를 빠짐없이 짜내는 이 여름을 구가할 리유가 없다.    그래도 나처럼 한번 누드로 차리고(?) 무더위의 여름을 생각해보시라.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것이 아닐가?    우선 인간이 거짓을 벗어던지는 계절이다. 중년사나이의 웃팔에 큼직하게 남아있는 우두허물이 그대로 드러나고 보이기 싫어하는 녀성들의 웃팔밑살이 드리운채 드러난다. 울퉁불퉁 사나이의 근육이 드러나서 좋고 부드러운 곡선과 투명한 피부를 자랑하는 녀인의 드러난 몸매도 눈길 사로잡는다. 그래서 나는-해 비추이는 나무에 매달려 합창하는 매미의 노래소리 더 뜨겁고 푸른 이파리 시든 몸으로 간신히 가지에 매달려있는 한 여름의 더위라도 나는 싫어하지 않는다. 그렇게 잘 매달리던 감기도 한참은 멀리 가버리는 여름이다.    수림의 혜택을 제일 감명깊게 느낄수 있는것도 여름이요 바다의 품에 안겨보는것도 여름이요, 쳟 좋은 땀조차 흘리고(리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한구절)_ 싶어지는것도 기실은 이 여름이 아닌가!    홀로 방에 있을 땐 거치장스러운 옷따위들 다 벗어던지고 아예 알몸으로 책상을 마주하고 앉을 때의 거뿐함, 더울때 라체로 되여보는 쾌감은 형언할수 없이 상쾌하다. 시원한 샤워때와 꼭 같다. 스스로 자유를 만끽하는 기쁨이랄가.남의 눈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는 이렇게  한번쯤은 홀로 라체로 되여보는것도 오스스메(권고거리라는 말). 옷 입는다는것이 이처럼 거치장스런 일이였던가 싶을 정도로 홀가분해지는 기분이다. 땀이 흘러도 그대로 놔둘수 있는 자유도 그리 많지는 않을것이다.    자기 몸에서 나는 땀마저 자꾸 제한해야 하는 구속스런 삶,피부가 해빛 맞지도 못하게 옷으로 감아놓아야 하는 삶.자연의 섭리에 맞지도 않으면서 지켜가야 하는것은 오로지 남의 눈을 의식하기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남의 눈이 없을 때 한번이라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보는것이 옳지 아니한지?     그런데 대체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이 사회 살아갈수 있을소냐?     아, 무더위의 기습, 속박의 사슬! 누드신사의 할 일없는 날이여.                                            2006년 8월 12일                        심양의 소란스런 닝따쑈취의 숙소에서
 도꾜 무사시노시(武蔵野市)의 칸다(神田)씨(86세)부부는 매년 설이면 꼭 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가족사진을 찍는것이였다.    60년간 빠짐없이 견지해온 이 일은 생각하기엔 너무나 간단한것 같지만 일생동안 견지하려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것이다.    결혼때의 두명으로부터 지금은 손자손녀까지 13명의 대가족으로 번영하게 되였는데 꼭 설날에 다 모여 정복을 하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는것이다. 처음엔 둘째사위의 불만도 있었지만 결국엔 오늘에 이르기까지 딸이나 사위나 모두 한사람도 빠짐없이 사진에 생의 자취를 남겨놓고있다는것이다. 처음엔 정복을 하는것에도 의견이 있어서 세타의 모습으로 사진을 찍던 사위도 몇해후엔 정복을 하게 되였다고 한다.요미우리신붕セ톱기사로 수십장의 사진이 렬거되였다. 새해에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바로 이렇게 가족이란 쩨마가 첫 기사로 나오게 되는것을 세상이 알게 되여  한결 따뜻한 기분이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지난 한해는 정말 진저리나는 한해였다. 뉴스를 보아도 어디 밝은 소식이 없고 매일 어디에서 얼마 사망했다, 무슨 사고 났다 등등 내 얼굴이 환히 펴질새가 없었다. 거기에 보험금을 먹기 위해 남편을 죽인 일이나,부모를 죽인 일, 자식을 살해한 사건들로 꽉 찬 한해였다.가족의 반연(絆緣)이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80퍼센트나 되는 차디 찬 세상이였다.    겨우 그러한 한해를 견뎌냈다고 안도의 숨을 쉬는데 년말에도 불쾌한 대화가 오갔다. 내가 아는 젊은이인데 설날에도 어머니보러 가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가 하는 대답이 기가 막힌다.   멀지_, 시끄러워서요. 비행기를 타고 어쩌고 얼마나 시끄러워요?»    시마네켄에 부모가 계신다니 리해セ가 가는 일이다. 같은 시내에 살면서도 일년에 한두번밖에 부모한테 가지 않는 도꾜의 차거운 인정을 느끼고보면 말이다.    그런데 새해에 들어서서 이렇게 따뜻한 기사가 나오고 또 텔레비에서도 눈물 나는 장면을 띄워주어서 오래간만에 내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어머_, 새해에 들어서더니 얼굴이 넙죽해졌네.하고_ 안해가 호들갑을 떨 정도였으니까.넙죽해セ졌단다. 나 원참.    텔레비에 나온 장면이란 바로 아래와 같은 일이였다.       요즈음 일본의 개그맨으로 하나와라는 사람이 유명해졌는데 그는 가츠セ란 무식한 격투선수를 제재로 전설의_ 사내-가츠의_ 무식함을 밉지 않게 까밝히며 웃기는 능수였다.      한가지만 례를 들면 어느날 가츠セ에게오늘_ 해는 어느쪽에서 떴어요?하고_ 물었더니 머리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하더란다.   오른쪽_?»    이 무식한 가츠セ,전설의_ 사내가_ 눈물겨운 생활담을 하여 나의 눈시울을 적시였던것이다.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살면서 모든 수모를 받아오다가 가츠セ는 동네에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불량소년으로 되어버렸다. 그의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소년원(미성년범죄자를 가두어놓는 시설)의 자동문이 열렸다 닫겼다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 문어귀에서 살고있었다는 표현이다. 그러던 그가 도꾜에 가서 일본 제일의 격투선수로 되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고 농촌의 뻐스정류소까지 어머니가 바래주었는데 뻐스가 떠날 때 어머니가 허리춤에서 돈 천엔짜리 지페를 한장을 꺼내 가츠セ의 손에 쥐여주었다. 수년간 허리춤에 간주했던 어머니의 전부 재산이였다. 꾸겨진 천엔짜리지페 한장을 받아쥔 가츠セ가 눈을 적시고있는데 어머니께서 성공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하더란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기로 몇십년, 그는 성공하여 일본의 챔피언까지 되고 매스컴의 유명한 탤런트로도 되였지만 한생을 고생하신 어머니께서는 그의 이러한 화려한 삶을 다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가츠セ는 지금 반백이 넘어섰지만 아직도 어머니한테서 받은 그 천엔짜리 지페를 소중히 보관하고있다. 그 지페를 내보이며, 옛날 가난에 쪼들려 배를 곯아도 울어본적 없고 마을의 싸움대장으로 그렇게 얻어맞아도 한번 울어본적이 없고, 일본의 챔피언으로서 격투경기장에서 그렇게 피가 터져도 눈물 한번 흘리지 않던 그가 그 지페를 품에서 꺼내보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고있었다    옛날 어머니를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것은 가츠セ뿐만이 아니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족이란 이 평범한 테마에 집착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가.신쥬꾸의 이세탄백화점의 사진관에  가족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가족이 이십년동안에 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디지털시대의 컴퓨터와 디지털사진이 발전하여 사진업이 크게 영향을 받아 적지 않은 사진관이 문을 닫게 되였는데 유독 가족사진업만은 10억이나 매상고를 늘이고있다고 한다. 늦었지만 이제야 이 사회의 인간들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것을 찾게 된것인 모양이다.    바다밑의 천연가스발굴도 필요하겠지만, 달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연구도 항아(嫦娥)님을 생각해서라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자연을 파괴하기까지 하면서 담을 만들고 삼림을 베어내고 남의 나라에 폭탄을 떨어뜨려야 하는것도 꼭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리석은 나의 두뇌로서는 아직 모르겠지만, 따뜻한 가족애만은  시급히 꼭 필요한것이 틀림없을것이라고 생각하며 구경 무엇때문에  우리의 생이 이렇게 외롭게 되였을가 하고 머리를 갸웃해본다.아체의 남쪽바다에서 가족을 잃은 어린이들에게, 그리고 무의미하게 친인을 잃어가는 서쪽전쟁터의 모든 인간들에게 누가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되돌려줄수가 있을가!인간의_ 물음에 대답을 하는데는 철학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고_ 헤겔이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불안한 이 세상에 필요한것은 가족애라고 새벽 닭이 목청 돋군다..                                           2005년 1월 9일                                  양지 바른 자유각에서
27    [수필]일본의 젊은 예술가들 댓글:  조회:534  추천:10  2009-02-11
전번주 금요일에 갤러리에 간적이 있다.    눈에 무슨 꼬리 달린것 같은 그림을 박은 엽서 한장이 나의 동료한테로 부쳐왔다. 청첩이란다. 젊은이들이 자기 작품 전시회를 여니까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하기에 얼씨구 좋아라 하고 나도 묻어나섰던것이다. 대학교때부터 난 미술, 사진, 서예에 흥미를 가지고있었던것이다. 일본에서도 여러번 전시회에 다녀봤지만 젊은이들만의 전시회는 가본적이 없었다.    친구를 따라 들어간 갤러리는 오못데산도오(表參道)에서 한참이나 골목으로 들어간 곳에 있었다. 아오야마대학회관옆이였는데 거기엔 이런 갤러리가 집중되여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5, 6층이나 될가 하는 작은 층집이였는데 출입구에 들어서니 오른켠에 웃층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올라가는 첫단계에 토족금지_(土足禁止)라고_ 씌여진 패쪽이 세워져있었다. 일본에선 신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곳엔 다 이런 글자로 주의를 주는데 우리 말로 하면 흙발금지라는 말이 된다. 흙이란 보고 죽자 해도 없을 정도인 도꾜에서도 아직 이 말 쓰고있는것이 신기하다.    신을 벗고 2층으로 올라가니 벌써 여라문명이 와있었다. 이름과 주소를 적고 전시장에 들어간 나는 아연해지고말았다.   아니_, 이건 장난이구나!!!»    일본식주택에 전시하고있었던것이다. 벽에 저마다 대여섯점씩 작품을 달랑 걸어놓고 그 앞에 작자가 서서 설명을 하고있었고 다다미방에는 맥주병과 쥬스, 그리고 마른 안주감 몇가지 놓여있었다.   자_, 여러분 파티 시작하겠습니다.하고_ 누군가 말하여 나도 그켠으로 돌아보았다. 누군가 건네주는 깡통맥주 하나 받아들고 나는 전시자의 소개와 그들의 테마소개들을 들었다.  작자가 여라문밖에 안되고 나처럼 구경 온 사람은 아주 적어 방에 모두 한 20명정도밖에 없는 간소하고 제멋대로인 전시회였고 리셉션이였다. 어느새 젊은 녀성 서넛은  키모노로 갈아입었고 키모노를 입지 않은 녀성들은 초현대파식복장이라고나 할가 하는 괴이하고 섹시한 옷차림이였다. 남성들의 복장은 캐주얼도 있고 양복차림도 있었다.    간단한 소개가 있은 다음 정식 관람이 시작되였는데 그 내용이 세상 예술체재를 거의 다 포함하여 나는 놀랐다. 사진, 미술, 공예, 영화, TV광고 등등. 마지막엔 콘서트까지 네곡으로 조직이 되여 정말 종합예술전시회였다.주제가 일본정신인화_(和)였다_. 그래서 전시회장을 전통      주택으로 장식된 곳을 고른것이였다. 비좁은 방 두칸에 다닥다닥 붙여놓은 매 작품마다엔 비록 TV작품이 손바닥만한 작품들뿐이였지만 모두 일본 전통이 다분히 슴배여있었다.    그중엔 전쟁반대의 테마도 있었다. 처음 난 그 작품을 주의해보지 않았다. 뭔가 투fp기 같은것으로 두루 붙여서 만든 지저분한  조각작품(?)이였는데 색깔이랑, 선이랑 여간 나의 눈을 끌지 않았던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기엔 중국어, 우리 글을 포함하여 세계 각국의 글자로전쟁반대セ,부쉬는_ 전쟁광이다라_  는 내용의 글들이 가득 씌여있었다. 그림자체처럼 전쟁의 세상은 이같이 더러운 세상이라는 뜻이였다.    더러운 세상을 더럽게 표현한다는 작가의 주장이였던것이다.    그러고보니 몇달전의 쓰레기작품이 생각난다.    그날 안해와 같이 드라이브를 하다가 앞에서 달리는 차의 궁둥이를 보고 나는 웃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 차엔 슈퍼의 비닐봉투가 가득 붙어있어 어느 전쟁터의 타다만 기발인양 너펄거리고있었던것이다.    별 악취미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운전수를 뒤창넘어로 보았는데 어여쁜 처녀가 몰고있었다. 사실 그것은 악취미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일종의 항의였던것이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산더미로 쏟아져나오는 쓰레기를 근심하여 이렇게 쓰레기를 적게 만들자는 외침을 표달하고있는것이다. 지구의 환경을 근심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애탄 마음을 저 비닐쓰레기기발로  호소하고있는것이다.    후에 나는 일본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인 긴자에서도 이런 차를 보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것도 엄청난 수준의 예술이였다. 그만큼 훌륭한 예술작품이 어디 또 있으랴.                                           2004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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