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글을 쓴다. 나의 뒤에선 포격소리, 총소리, 고함소리, 비명이 들려온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다. 함께 장엄한 음악소리도 들려온다. 다 부서진 땅크, 연기를 내뿜으며 곤두박질하는 비행기.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리고 초가을 굶은 모기 한마리는 이 가래 같은 손바닥도 두려워하지 않고 앵앵 나의 피를 노려본다.
즈붜의 금망대주점(金罔大酒店), 할인료금 90원짜리 싸구려호텔에 투숙하여 중국의 국경절을 하루 앞두고 호텔방에 홀로 앉아서 와인잔을 기우리고있는중이다. 땅콩 한봉지, 로신작품에 나오는 공을기처럼 나는 홀로 소라마메(蠶豆) 한알에 와인을 한모금 마시며 침대 하나로 꽉 찬 이 방에 앉아서 뒤에서 분주하게 울리는 총소리와 고함소리, 포격소리를 들으며, 손을 휘휘 저어 모기도 쫓으며 이렇게 흰 벽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두터운 현정부의 토성, 룡정시내의 넓은 길은 온통 벽돌장과 돌멩이투성이다. 두사람이서 겨우 당겨쏘는 새총, 탄알은 벽돌장이였다. 그때도 이렇게 총성이 울렸었다. 이렇게 고함도 쳤었다 .그때란 바로 <<문화대혁명>>때다.해방되여 불과 20년만에 세상에서 명명할수도 없는 <<전쟁>>이 일어났던것이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セ이라 한다. 패를 갈라 사람죽이기를 해대는 일이 분명 전쟁인데도 문화セ이고 이혁명セ이라 하였었다. 전쟁이란 침략전쟁, 독립전쟁, 내전 등 이렇게 이름이 있는데 그때의 전쟁은 그 누구도 이름 지을수 없다. 오로지 <<혁명>>セ인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명을 자르는 바로 그런 직통배기름이 차라리 타당하였는지도 모른다. 철이 없었던 나는 어느 겨울날 아버지가 투쟁받으러 가는 그 행렬에 뛰여들어 사람들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다니며 희희닥거리며 놀았다. 내 어찌 나의 아버지가 매를 맞으러가는줄 알았으랴!
아우성소리, 비명, 다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볼륨을 조금 낮췄다. 진저리나도록 귀청을 때리는 그 소리가 싫어서. 그래도 나의 귀구멍엔 그 소리가 꽉차게 밀려들어온다. 아무리 낮은 소리라도 아우성, 비명, 흐느낌은 변함이 없다는듯 지꿎게도 나의 귀에만 찾아 들어온다.
왜서 그렇게 남을 때려야 했는지? 무슨 원한이 그렇게 많았길래 남을 그렇게 고문해야 했는지? 나의 아버지 허근은 연길현에서 유명한 의사였단다. 나의 아버지 허근은 벙글벙글 잘도 웃으셨단다. 나의 아버지 허근은 어머니를 도와 깨끗이 집도 잘 거두셨단다. 나의 아버지 허근은 어머니를 도와 밥도 잘 지으셨단다. 다 들은 말뿐이지만 나의 아버지는 우리 세 자식 매 한번 대지 않으신 상냥한 분이시란다. 그런데 왜서 그렇게 많이 맞아야 했던지? 왜서 밤잠도 자지 못한채 24시간 고문을 받아야 했던지? 이만하면 나도 꽤나 세상살이 알고있다고 자청하는 편인데도 46세나 되는 지금도 나는 그 일은 리해를 할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매를 댄 자들이 썩 나서서 말을 해보라! 내 다 용서할것이니 지금이라도 써억 나의 앞에 나서서 말해보라!
광고후에 다시 나온다고 한다. 요wm음의 CCTV는 드라마사이에 광고를 넣을 때 이런식으로 량해를 빈다. 지루한 광고이다. 음식광고, 화장품광고, 술광고_ 지금은 자랑할 물건도 많기도 하다.
형님이 언제 소고기를 사온다는것이 양고기를 사와서 온집안이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유치원때의 일 같다. 아버지가 특무セ로 되기전엔 우리는 고기를 먹을수 있었단다. 내가 언제 변비가 와서 어머니가 나의 항문에 시누런 빨래비누를 갉아서 넣어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쑥떡따위를 먹고 변비가 와서 무릎앉음 자세로 엉뎅이를 하늘로 높이 쳐들고 머리를 가랭이에 들이밀어 언제 나오나 자기 엉뎅이를 쳐다보면서 낑낑 거려도 대변이 나오지 않아서 그랬다. 언제 누나가 가만히 내민 구운 두병이 생각난다. 우사간에서 훔쳐왔는지 아니면 뭔가 일 도와주고 얻어온것인지 모르겠다. 소학생인 누나도 철 없었으련만 그래도 동생을 주려고 품에 감춰들고 왔었다. 따뜻했었다. 흰줄이 두줄이 그려있는 고무신이 차려져 신기는 했지만 그것은 여자신, 검은 고무신이 얼마나 신고싶었는지 모른다. 형님의 잠바 한벌 얻어가진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회색이였다. 목깃을 세울수 있는 옷이였다. 지금도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황하, 장강을 뛰여넘는다 하는 시기였지만 나의 마을은 초강모자_?를_ 벗지 못했다고 하던 시대의 일이다. 두병이나 쑥떡, 말린 고구마에 무우밥의 시대였다. 지금은 그것이 건강식품으로 될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보기도 싫었다.
회의, 작전계획을 짜며 나중에 만세를 부른다. 구호소리, 노래소리, 다시 구호소리가 요란하다. 무슨 큰 전역을 치루는 모양이다. 수천수만명의 목숨이 달려있는 싸움이니 회의를 잘해서 작전을 짜야겠지. 사기를 돋구기 위해서 구호도 웨쳐야겠지. 적을 죽여야 하니까. 텔레비의 구호소리에 밀려 주눅이 든 나의 몸이 마주한 흰 벽에 달라붙을것만 같다.
무슨 회의가 그렇게도 많았던지. 무슨 구호도 그리 많았던지. 그러나 속으로 우러나오는 구호는 한번도 불러본적이 없었다. 우리 소학생들, 중학생들도 거의 매일저녁 불리워나가 무슨 회의를 했다. 그때면 나는 들을 말도 없고 할 말도 없고 해서 제일 구석자리를 지키다가 오는데 영자의 오빠와 영철이는 그냥 나의 트집만 잡았었다. 임마_, 니 무슨 생각 그렇게 심각한척하니? 응!» 니_ 언제 한번 적극적일 때 없드라. 발언해라. 임마.» 그때면 난 들은척 못들은척. 꼭 내가 발언하지 않아서 화가 난것도 아니였다. 그자들이라구 뭐 그렇게 할말이 많았으랴.그 래서 할 말을 찾느라고 나를 시까스르는것임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대꾸하지 않아도 그자들은 열심이 나를 욕하다가에_- 오늘 회의는 이만 그치겠소.이런다_. 말의 울음소리, 포화소리속에 말발굽소리도 함께 들려온다.부르릉セ비행기소리도 들려온다. 사람들의 싸움에 불쌍한건 말이라 할가? 사람이야 어떻든 말 못하는 짐승은 언제나 다정하기만 하다.
둥글소의 영각소리만큼 정다운 노래는 다시 없을것이다. 나는 쩍 하면 우사간에 나가 놀았다. 소들이 먹이를 먹는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저 풀인데 그렇게 맛있을수가 있을가? 먹이를 먹다가도 엉뚱하게 음메-한다. 무슨 말 하는지 몰랐지만 그 소리가 정다웠다. 논두렁을 감을 때엔 소가 힘을 쓰지 못한다고 사람도 먹지 못하는 떡을 쳐서 먹였다. 떡 한움큼 뜯어내여 물에 적셔서 소의 입 벌리고 목구멍까지 밀어넣어준다. 소는 맛있게 넘긴다. 따라서 나의 목젖도 꿀꺽 소리 낸다. 가을이 되면 콩밭에 들어가 콩을 먹어 배가 불어난 소에게는 담배를 먹였다. 그러면 부은 배가 기적처럼 가라앉는다. 수레에 두엄을 싣고 다녀도 보고, 형과 같이 소수레 몰고 나무하러도 다녀 봤고 밭갈이나 논갈이도 따라다니며 조금 해보았다. 밭에서 돌아올 때는 소를 타고 집으로 간다. 말과 달라서 소는 소의 궁둥이켠에 앉아야 엉뎅이가 아프지 않다. 소는 저절로 집 찾아간다. 여윈 소를 한번만 타고나면 엉뎅이, 꼬리가 날듯말듯 한 곳이 아파서 온밤 자지 못한다. 잘못 앉으면 바지가랭이에 소털이 가득 붙어있을 때도 있다. 철 박은 소발자국소리, 모래를 다져 만든 국도를 밟는 소리, 수양버들이 우거진 길에서 저무는 해를 보고도 음메-하고 소리 뽑아보는 소에게도 랑만이 있었다.
뒤의 TV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옛날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중동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인간은 총소리가 이렇게도 좋을가?
텔레비는 국경절을 하루 앞둔 시기이고 나는 추석을 일곱날 앞둔 처지이다.
2006년 9월 30일 옥수수대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한 즈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