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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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수필]와인 마시며 듣는 총소리 댓글:  조회:535  추천:13  2009-02-11
 총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글을 쓴다. 나의 뒤에선 포격소리, 총소리, 고함소리, 비명이 들려온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다. 함께 장엄한 음악소리도 들려온다. 다 부서진 땅크, 연기를 내뿜으며 곤두박질하는 비행기.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리고 초가을 굶은 모기 한마리는 이 가래 같은 손바닥도 두려워하지 않고 앵앵 나의 피를 노려본다.     즈붜의 금망대주점(金罔大酒店), 할인료금 90원짜리 싸구려호텔에 투숙하여 중국의 국경절을 하루 앞두고 호텔방에 홀로 앉아서 와인잔을 기우리고있는중이다.     땅콩 한봉지, 로신작품에 나오는 공을기처럼 나는 홀로 소라마메(蠶豆) 한알에 와인을 한모금 마시며 침대 하나로 꽉 찬 이 방에 앉아서 뒤에서 분주하게 울리는 총소리와 고함소리, 포격소리를 들으며, 손을 휘휘 저어 모기도 쫓으며 이렇게 흰 벽을 마주하고 앉아있다.     두터운 현정부의 토성, 룡정시내의 넓은 길은 온통 벽돌장과 돌멩이투성이다. 두사람이서 겨우 당겨쏘는 새총, 탄알은 벽돌장이였다. 그때도 이렇게 총성이 울렸었다. 이렇게 고함도 쳤었다 .그때란 바로 <<문화대혁명>>때다.해방되여 불과 20년만에 세상에서 명명할수도 없는 <<전쟁>>이 일어났던것이다.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セ이라 한다. 패를 갈라 사람죽이기를 해대는 일이 분명 전쟁인데도 문화セ이고 이혁명セ이라 하였었다. 전쟁이란 침략전쟁, 독립전쟁, 내전 등 이렇게 이름이 있는데 그때의 전쟁은 그 누구도 이름 지을수 없다. 오로지 <<혁명>>セ인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명을 자르는 바로 그런 직통배기름이 차라리 타당하였는지도 모른다.    철이 없었던 나는 어느 겨울날 아버지가 투쟁받으러 가는 그 행렬에 뛰여들어 사람들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다니며 희희닥거리며 놀았다. 내 어찌 나의 아버지가 매를 맞으러가는줄 알았으랴!     아우성소리, 비명, 다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볼륨을 조금 낮췄다. 진저리나도록 귀청을 때리는 그 소리가 싫어서. 그래도 나의 귀구멍엔 그 소리가 꽉차게 밀려들어온다. 아무리 낮은 소리라도 아우성, 비명, 흐느낌은 변함이 없다는듯 지꿎게도 나의 귀에만 찾아 들어온다.     왜서 그렇게 남을 때려야 했는지?    무슨 원한이 그렇게 많았길래 남을 그렇게 고문해야 했는지?    나의 아버지 허근은 연길현에서 유명한 의사였단다.    나의 아버지 허근은 벙글벙글 잘도 웃으셨단다.    나의 아버지 허근은 어머니를 도와 깨끗이 집도 잘 거두셨단다.    나의 아버지 허근은 어머니를 도와 밥도 잘 지으셨단다.    다 들은 말뿐이지만 나의 아버지는 우리 세 자식 매 한번 대지 않으신 상냥한 분이시란다. 그런데 왜서 그렇게 많이 맞아야 했던지? 왜서 밤잠도 자지 못한채 24시간 고문을 받아야 했던지? 이만하면 나도 꽤나 세상살이 알고있다고 자청하는 편인데도 46세나 되는 지금도 나는 그 일은 리해를 할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매를 댄 자들이 썩 나서서 말을 해보라! 내 다 용서할것이니 지금이라도 써억 나의 앞에 나서서 말해보라!     광고후에 다시 나온다고 한다. 요wm음의 CCTV는 드라마사이에 광고를 넣을 때 이런식으로 량해를 빈다. 지루한 광고이다. 음식광고, 화장품광고, 술광고_ 지금은 자랑할 물건도 많기도 하다.     형님이 언제 소고기를 사온다는것이 양고기를 사와서 온집안이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유치원때의 일 같다. 아버지가 특무セ로 되기전엔 우리는 고기를 먹을수 있었단다.    내가 언제 변비가 와서 어머니가 나의 항문에 시누런 빨래비누를 갉아서 넣어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쑥떡따위를 먹고 변비가 와서 무릎앉음 자세로 엉뎅이를 하늘로 높이 쳐들고 머리를 가랭이에 들이밀어 언제 나오나 자기 엉뎅이를 쳐다보면서 낑낑 거려도 대변이 나오지 않아서 그랬다.    언제 누나가 가만히 내민 구운 두병이 생각난다. 우사간에서 훔쳐왔는지 아니면 뭔가 일 도와주고 얻어온것인지 모르겠다. 소학생인 누나도 철 없었으련만 그래도 동생을 주려고 품에 감춰들고 왔었다. 따뜻했었다.    흰줄이 두줄이 그려있는 고무신이 차려져 신기는 했지만 그것은 여자신, 검은 고무신이 얼마나 신고싶었는지 모른다.    형님의 잠바 한벌 얻어가진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회색이였다. 목깃을 세울수 있는 옷이였다.    지금도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황하, 장강을 뛰여넘는다 하는 시기였지만 나의 마을은 초강모자_?를_ 벗지 못했다고 하던 시대의 일이다. 두병이나 쑥떡, 말린 고구마에 무우밥의 시대였다. 지금은 그것이 건강식품으로 될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보기도 싫었다.     회의, 작전계획을 짜며 나중에 만세를 부른다. 구호소리, 노래소리, 다시 구호소리가 요란하다. 무슨 큰 전역을 치루는 모양이다. 수천수만명의 목숨이 달려있는 싸움이니 회의를 잘해서 작전을 짜야겠지. 사기를 돋구기 위해서 구호도 웨쳐야겠지. 적을 죽여야 하니까. 텔레비의 구호소리에 밀려 주눅이 든 나의 몸이 마주한 흰 벽에 달라붙을것만 같다.     무슨 회의가 그렇게도 많았던지. 무슨 구호도 그리 많았던지. 그러나 속으로 우러나오는 구호는 한번도 불러본적이 없었다. 우리 소학생들, 중학생들도 거의 매일저녁 불리워나가 무슨 회의를 했다. 그때면 나는 들을 말도 없고 할 말도 없고 해서 제일 구석자리를 지키다가 오는데 영자의 오빠와 영철이는 그냥 나의 트집만 잡았었다.   임마_, 니 무슨 생각 그렇게 심각한척하니? 응!»   니_ 언제 한번 적극적일 때 없드라. 발언해라. 임마.»    그때면 난 들은척 못들은척. 꼭 내가 발언하지 않아서 화가 난것도 아니였다. 그자들이라구 뭐 그렇게 할말이 많았으랴.그 래서 할 말을 찾느라고 나를 시까스르는것임을 나는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대꾸하지 않아도 그자들은 열심이 나를 욕하다가에_- 오늘 회의는 이만 그치겠소.이런다_.        말의 울음소리, 포화소리속에 말발굽소리도 함께 들려온다.부르릉セ비행기소리도 들려온다. 사람들의 싸움에 불쌍한건 말이라 할가? 사람이야 어떻든 말 못하는 짐승은 언제나 다정하기만 하다.     둥글소의 영각소리만큼 정다운 노래는 다시 없을것이다. 나는 쩍 하면 우사간에 나가 놀았다. 소들이 먹이를 먹는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저 풀인데 그렇게 맛있을수가 있을가? 먹이를 먹다가도 엉뚱하게 음메-한다. 무슨 말 하는지 몰랐지만 그 소리가 정다웠다. 논두렁을 감을 때엔 소가 힘을 쓰지 못한다고 사람도 먹지 못하는 떡을 쳐서 먹였다. 떡 한움큼 뜯어내여 물에 적셔서 소의 입 벌리고 목구멍까지 밀어넣어준다. 소는 맛있게 넘긴다. 따라서 나의 목젖도 꿀꺽 소리 낸다. 가을이 되면 콩밭에 들어가 콩을 먹어 배가 불어난 소에게는 담배를 먹였다. 그러면 부은 배가 기적처럼 가라앉는다.    수레에 두엄을 싣고 다녀도 보고, 형과 같이 소수레 몰고 나무하러도 다녀 봤고 밭갈이나 논갈이도 따라다니며 조금 해보았다. 밭에서 돌아올 때는 소를 타고 집으로 간다. 말과 달라서 소는 소의 궁둥이켠에 앉아야 엉뎅이가 아프지 않다. 소는 저절로 집 찾아간다. 여윈 소를 한번만 타고나면 엉뎅이, 꼬리가 날듯말듯 한 곳이 아파서 온밤 자지 못한다. 잘못 앉으면 바지가랭이에 소털이 가득 붙어있을 때도 있다. 철 박은 소발자국소리, 모래를 다져 만든 국도를 밟는 소리, 수양버들이 우거진 길에서 저무는 해를 보고도 음메-하고 소리 뽑아보는 소에게도 랑만이 있었다.     뒤의 TV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옛날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중동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인간은 총소리가 이렇게도 좋을가?     텔레비는 국경절을 하루 앞둔 시기이고 나는 추석을 일곱날 앞둔 처지이다.                                              2006년 9월 30일                      옥수수대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한 즈붜에서
25    [수필]신사의 호주머니는 쓰레기통 댓글:  조회:634  추천:9  2009-02-11
  쓰레기통에 대해서 쓰고싶어서 쓰레기통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별로 참고될만한 자료가 없었다. 정보의 쓰레기시대라고 하더니 쓰레기정보는 하나도 없는게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럴 때는 내가 뭐라고 해도 누구나 반박을 하지 못할것이니 나름대로 쓰레기통에 대해서 피력하고저 한다.    쓰레기통이란 쓰레기를 담는 통이다. 쓰레기란 쓸모 없는 물건, 아니 버려진 물건을 쓰레기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쓸모있건 없건 관계없이 버린 물건은 다 쓰레기인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쓸모 있었던 물건이 이젠 쓸모가 없게 되여 버려진 물건이 쓰레기다. 이를테면 다 마사진 자동차를 버리면 그것은 쓰레기이고 머리카락 한오리라도 밥상우에 떨어지면 그것도 쓰레기다. 그것이 버려지기전까지는 자기에게 얼마나 중요한것이였던가 관계없이.    한편 원래부터 쓸모없던 물건도 사람의 손을 걸쳐서 버려지면 그것도 쓰레기가 된다. 산에 널려있던 마른 나무도 그대로 두면 쓰레기가 아닌데 그걸 가져다 길에 널어놓으면 쓰레기로 된다. 가을 락엽도 그대로 두면 쓰레기가 아닌데 사람이 쓸어모으면 쓰레기로 되는 일은 참 알고도 모를 일이다.그런 쓰레기가 좋은지 20세기초에 미국의 에이트_(The Eight; 8인조)그룹은뺀쓰레기통파(애시캔스쿨)예술까지_ 내왔으니 이 또한 더욱 모를 일이다.    쓰레기란 이렇게 인간이 만드는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담는 통을 만들었으니 바로 쓰레기통이렷다. 중국에선 과일껍질통(果皮箱)이라고 하는데 이는 쓰레기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였음을 말해준다. 아마 그래서 중국 여기저기 쓰레기가 널려있는지 모르겠다. 정확한 의미에서의 쓰레기통은 중국에 없는것이다. 대신 중국에선 과일껍질 널려있는걸 보지 못했다. 하필이면 과일껍질에 집착하는 그 원인을 모르겠다.     다음 호주머니에 대해서 쓰고싶어서 나는 호주머니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우리 말로 호주머니에 대한것은 없고 영어로 포켓에 대해 남겨둔 자료가 있었다.    앵글로노르망어의 pokete, 중세영어의 poket에서 비롯되였다고 야후사전에서 해석하고있었다.    거기의 해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포켓이_ 등장하기 전 서양에서는 소매, 두건, 목둘레 깃을 주머니 대신 사용하였으며 귀족은 오모니에르라는 실크제(製) 작은 주머니, 농민은 마제(麻製)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 포켓이 등장하기 시작한것은 16세기때 코드피스라는 주머니 모양의 장식을 남자바지에 달면서부터이다. 17세기에는 남자 웃옷의 몸판과 조끼에 달고, 19세기 중반부터는 바지에도 달기 시작하였다._ 녀성복 포켓은 18세기에 등장하여 주로 주머니를 허리에 차거나 안쪽에 다는 형태였으며, 핸드백이 필수품이 된 뒤로는 보급되지 않았다. 20세기부터 포켓은 의복에 완전히 정착, 오늘날에는 실용성, 유행, 디자인이 고려되어 형태가 매우 다양화되었다.»    호주머니는 물건을 넣기 위해서 생긴것임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제는 패션의 하나로 존재하게 되었다. 요즈음 한국배우들은 포즈를 취할 때 한쪽 손을 포켓에 찌르고 비스듬히 서는데 그럴 때도 호주머니의 역할이 발휘되고있다.    그러니 호주머닌 이렇게 멋 부리는데도 쓰이고있다. 기실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다니면 신사답지 못하다고 하여 매너를 지키는데서는 역작용을 하는 때도 있지만 잘 리용하면 호주머니도 매너지키는데 크게 도움을 줄때도 있는것이 다. 쓰레기통으로 쓰일망정 말이다.     다음, 나는 신사에 대해 쓰고싶어서 신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우리 말의 신사는 꼬부랑말로 젠틀맨이라고 하는가 보다. 15세기중엽 영국의 귀족의 수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이 줄어들었는데 그후 의회의 빈자리를 채운 젠틀이라는 신분집단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지주가 주축이였고 그후에는 여러 계층의 성공자들이 망라되여 녀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정중한 매너의 상징적인 칭호로 된것이다.  지금은 영국신사란말은 바람직한 남성상으로 통하며 녀성들의 리상형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엔 백봉신사상까지 있는지도 모르겠다.     2004년 8월의 어느날, 나는 방금 와세다대학교 육학부장으로 부임된 와라가이선생님과 함께 이딸리아료리점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독일류학생으로서 그는 우선 오랜 시간을 리용하여 붉은 포도주를 골라 주문하고 다음 료리를 시켰다. 오랜만의 만남으로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경제, 중국교육, 서양과 동양사람들의 의식차이 등등 그 화제도 넓었다. 그러다가 나는 테블우에서 길고 가는 머리카락 한오리를 발견하였다.   아_, 선생님 잠간만끇    내가 주으려고 하는데 어느새 와라가이선생님이 제꺽 주어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디서 생긴 머리카락인지도 묻지 않고 바닥에 버려도 아무런 불편이 없을 머리카락 한오리인데, 그것을 만약 내가 먼저 주었더라면 어김없이 바닥에 던져버렸을것인데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호주머니에 넣는 그 모습이 지금 새삼스레 떠올라 오늘 이 수필을 쓰고싶어졌던것이다.    쓰레기에 대해서, 호주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신사에 대해서 쓰고싶어졌던것이다.        일본에선 쇼와29년(1954년)에 청소법セ이 제정되였다고 한다. 국회 의원들이 할 일이 없어서 제정한 법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나 다 법으로 될수 있는것은 아닌줄로 안다 .그래도 혹시 일본의 청소법セ에 머리카락을 호주머니에 넣어야 된다고 규정하였는지는 이제부터 조목조목 찾아봐야 알것 같다.                      2006년 1월 26일 음력으로는 설3일전 날                                                    도꾜에서  
24    [수필]사용가치가 심미가치보다 우선적이다 댓글:  조회:521  추천:11  2009-02-11
해빛에 눈이 새물거릴 때처럼 눈을 쪼프리고 새물새물거리는 복덕방녀인의 안내로 세집에 들게 되였다. 4분의 3은 중국말, 나머지만 우리 말로 련줄포를 놓듯 말을 주어넘기는 복덕방녀인의 말을 한참 듣노라면 그녀의 말을 다 믿게 되는데 손바닥에 장 지진다고 해도 다 옳거니 하고 수긍이 갈 정도였다. 석쉼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남편과는 나_ 서탑에서 짠지장사 하려고 이렇에 벼르고있는 처지이니 방값 조금 깎아달라고_ 사정해보았지만 복덕방녀인의 련줄포를 맞고서는 더 할 말이 없게 되였다.    이렇게 들게 된 집(회사 숙소)인데 며칠 살다보니 처음 집보러 왔을 때보다 불편한 점이 많음을 실감하게 되였다. 번뜩거리는 대리석바닥과 태양에네르기를 사용하여 더운물 나오게 하는 소라설비, 양식변기, 기윽자로 된 선진적セ인 주방 등등을 처음 보고 심양도 꽤나 고급스럽구나 하고 감탄했던것인데 그러한 심미적가치보다는 우선 사용가치를 모르고있음이 드러나 이젠 허구픈 웃음을 금할길 없다.     아래에 그 불편함을 라렬할것이니 마시던 커피잔을 잠시 내려놓으시라. 웃음에 커피 쏟칠라.    우선, 기윽자로 된 주방. 채를 볶는 곳과 그릇 씻는 곳이 구만팔천리라 중국료리 하나 볶고나서 그 뜨거운 프라이팬을 들고 상해곡예단 줄타기배우처럼 입을 오무리고 수도꼭지가 있는데로 조심스레 가야 하는데 매번 그렇게 료리를 볶을 때마다 그 일을 왕복하여야 할것을 생각하니 이제 친구들 가득 청해놓고 술채 마련하는 일은 아예 거둬치우자고 다짐하노라니 머리가 아찔해난다. 그런데 그 프라이팬을 씻으려 해도 그릇 씻는 곳이 너무 좁아서 프라이팬을 절반씩 가셔내야 하니 이것 또한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하는 작업이였다.    거기에다 바닥은 얇은 타일로 되여 겉보기엔 고급스럽지만 너무 반질반질 하여 빨리 달아다닐수도 없다. 샤워하고 방금 나와 빈손으로 다닐 때는 스케트를 타듯 한쪽 손을 허리에 걸치고 한손으로 중심을 잡으면 스케트를 탈 때 카브돌이 하듯 자못 재미까지 있지만  뜨거운 프라이팬을 들고서야 어찌 그 재미를 탐낼수 있으랴.    다음은 샤워이다. 샤워가 너무 높이 매달려있어서 매일 아침저녁 두번씩 나는 점프운동을 하였다. 그저 발뒤축 세우고 허리를 쭉 펴고 유치원 학생이 선생님의 물음에 대답할 때처럼 팔을 높이 들면 그 샤워를 쥘수도 있지만 난 그냥 올리뛰기운동을 하고있다. 혹시 46세에 키가 조금이라도 커져줄지 누가 아나? 요즈음 신경이 쓰이는 볼록한 아래배를 이런 행위로라도 제한이 될지도 모를 일이지 않은가.    이건 나의 건강문제이고 참지 못할것은 하수도이다. 하수도구멍이 작은데다가 구멍이 있는 쪽이 낮지 않아서 샤워가 끝나면 목욕실(화장실겸용)은 논밭에 댄 도랑처럼 물이 고인다. 그리하여 샤워가 끝나면 나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그 물을 쓸어서 몰골초원의 양몰이군처럼 물을 하수도에 몰아넣어야 하는데 그때문에 저녁 15분 허비하고 또 아침 15분은 먼저 일어나야 하는 고생을 하고있다. 아, 하느님 맙시사.    그다음으로는 변기이다. 변기는 양식인데 워슈레트가 달려있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나 높은지 앉으면 발이 들려 어느 재즈바의 높은 걸상에 앉은듯하고 수지는 몸뒤에 달려있어 일을 다 보고나면 그 휴지를 뜯어내는것이 나한테는 고중시절 배구칠 때보다 더 심한 몸돌리기체조를 해야 했다. 우선 종이가 몸뒤로 멀리 있어서 16세 체조선수 정도의 나른한 기교가 있어야 허리를 돌릴수 있고 또 손을 한참 뻗혀야 닿을수 있다. 봐라, 이 놈아, 그래도 아직은 문제없지 라고 혼자서 흐뭇해하였다. 그런데 손이 닿아봤댔자 한손뿐이니 그 종이를 끊어내려면 바이올린수만큼은 손가락놀림이 뛰여나야 그 수지를 손가락으로 조금식 뜯어낼수 있는것이다. 지금은 나른한 종이를 슈퍼에 가서 온하루 찾아 사와 괜찮지만 원래 그 집에 있던 종이는 비닐로 한것처럼 질긴것이였다. 허리를 뒤로 탈고 한 손 한껏 뻗쳐서 하는 체조이니 나처럼 허리가 듬직한セ놈은 다이어트에는 퍼그나 좋을듯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이어트와 뒤를 보는 일을 함께 하는건 어쩐지 좀 그렇다.    그래서 고안해낸것인데 나는 아예 변기를 가로타고 뒤로 향해 앉는다. 그러면 물통이 책상으로 되여 책을 올려놓고 볼수도 있고 가끔씩은 두 팔굽을 고이고 남은 인생에 대해 엄숙하게 생각하게 된다. 흰벽 마주하고 이렇게 일을 보면 종이가 가까와지고 또  인생까지 검토할수 있으니 참 여러가지로 편리하다. 이것이야 말로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했다는것일가. 그러나 그런 방법도 한번뿐이였다. 아래도리를 다 벗어야 하는 번거로움때문이 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러한 사용가치를 홀시한 경향은 나의 세집에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오성급호텔의 설비들도 일본보다 더 좋은 자료를 사용한데도 있는데 불편하기 그지 없고 중심거리에 맹인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를 자전거 세워두는 곳으로 쓰고있었고 경제개발구정부기관을 한곳에 모아놓고 일주일이면 외자기업 모든 수속을 끊낸다고 해놓고선 거기에 앉아있어야 할 직원이 자리를 비워서 기다리다보면 한주일이 어느결에 지나가버린다. 한곳에 모여두면 일이 쉽게 빨리 끝난다고 해놓은것 같은데 형식뿐이고 오히려 더 거치장스럽다. 일보러 오는 많은 사람들이 한 홀에 어정어정 사람을 기다리고있어서 얼마나 복잡한지 모른다. 일본도 정부 각 기관이 다 너른 마당 같은 방에서 오픈으로 사업하는데 정말 무슨 수속을 하자면 한곳에서 뱅뱅돌며 그 자리에서 할수 있다. 일 다보고 나올 때면 정부관원이 깍듯이 허리 굽혀 감사합니다セ라고 인사를 하는데 이는 우선 담배부터 내밀어야 하는 중국과는 오로지 문화적차이뿐일가?    경제생활이 높아짐에 따라 심미적가치를 추구하는것은 필연적이며 중국에도 그렇게 심미적인것을 추구하게 된데에 대해선 나도 얼씨구 기뻐하는데 다만 그 심미적가치란것이 사용가치를 우선으로 하여야만이 진정으로서의 가치를 가질수 있음을 제발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배 부를 때에만 맛있는것을 고르게 되는것과 같은 도리이다.     아무리 고급스런 재료로 집을 장식했다해도 점프운동이나 허리돌리기운동은 그래도 할 곳에서 해야 그럴듯하다고 말하고싶다. 스케트도 마찬가지이다!                                               2006년 4월 3일
23    [수필]봄의 피가 흐르는 소리 댓글:  조회:649  추천:11  2009-02-11
지구가 뜨거워나서 여름날이 며칠이나 늘어났다고 하더니 오늘에야 겨울의 추위가 썩 나섰다. 진작 추위가 닥쳐야 할 날인데. 씨비리아에서 꾸물거리다가 이렇게 뒤늦게야 찾아온 모양이다. 늦게 온 주제에 제법 위풍을 부리는데 낸들 어쩌랴. 몸을 웅크리고 걸을수밖에.    과학이 발전하면서부터 이렇게 짧은 인생에 자연의 변화를 골고루 다 당해보는 판이다. 환경보호를 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이 모은 교또협의가 미국이 응하지 않는것을 무시하고 시동을 한다고 하니 지구의 공기가 맑아지겠구나 하고 한시름 덜어보기도 하며 인간때문에 어지러워진 자연의 원모습을 위해서 내심으로 기뻐한다.    자연이 이 모양이 된것은 모두 과학이 발전한 탓이다.    인간은 이 자연속에서 자기가 제일 령장이라고 자처하며 과학을 발전시켜왔는데 거기엔 자연을 위한 발전도 조금은 있겠지만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것이 더 많았다. 정복이란 자기가 이기기 위하여 남을 해쳐야 하는법이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말은 자연을 지배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될말이냐. 자연에 몸을 담그고 자연에 고마웁게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에 언감생심 자연을 정복한단다.    난 그런 과학의 발전을 근심해본다.    2002년 중국을 방문했던 부쉬대통령에게 강택민주석은 중국산넥타이를 선물하였다고 한다. 어지러워지지 않는 넥타이라고 한다. 빛촉매작용으로 만들어낸 과학의 성과물인데 이는 일본에서 류학을 하고 귀국한 해귀파セ인 강뢰의 연구성과였던것이다. 중국에서 여러해전부터 인재를 모으기 위해 내세운 해귀파_(海龜派, 원래는 海歸파로서 해외로부터 귀국한 류학생이나 지식인을 일컫는 말인데 발음이 같기에 이렇게 해학적인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정책의_ 성과라고도 할수 있다. 지금은 그 기술을 도입하여 천안문광장곁에 건설하는 국가대극원의 천정을 어지러워지지 않는 유리로 장식한다고 한다.    옛날엔 선진국을 따라잡을것을 목표로 하던 중국의 과학자들이 이젠 자주창조セ를 구호로 제기하고있으니 모두 떠드는것처럼 정말 중국의 시대가 되는가싶다. 일본 매스컴에서도 매일 중국 관련기사가 나온다. 도꾜 23구의 절반이나 되는 북경의 쭝관춘에 백여개의 대학과 연구기관과 만오천여개의 첨단기술회사가 집결되여 북경의 산업발전에 대한 기여률을 60%나 올리고 있다고 하니 세상이 놀랄만도 하다.    금년 가을엔 또 두번째로 사람이 위성을 타고 우주로 간다고 하니 이시하라씨가 코웃음을 치든 말든 중국의 우주과학발전은 세계 선진행렬에 썩 나선다. 2016년에는 중국의 GDP가 미국 다음으로 둘째로 된다고 하니 1월에 중국을 방문한 일본 문부과학성의 과학기술단시찰단의 아리모도씨가 중국과학원비서장의원시적창신_(原始的創新)이란_ 말을 자기의 노트에 정중히 적어넣는 심정도 가히 리해할만하다.    그런데 중국의 이러한 발전을 보면서 나는 그냥 좋아만 할수가 없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환경보호를 매 기업의 의무로  만들고있는데 중국에서는 아직도 거기에 대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북경 북쪽의 모래바람때문에 동아세아의 천기에 엄중한 영향을 끼치고있는데도 중국에선 속수무책이다. 일본의 이온그룹에서 자원봉사로 식수를 동원하고있는데 그 식수장소가 바로 중국이다. 아인슈타인을 기념하여 올해에는 과학의 해라고 하고있지만 과학의 발전도 좋지만 자연을 괴롭히는 과학의 발전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보호해줘야 인간은 자연속에 사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있는것이다.    나는 약 7년전에 일본 도시바빌딩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크게 느낀바가 있었다. 화장실의 수지를 보니 이_ 종이는 본 빌딩에서 나온 쓰레기종이를 재가공하여 만든것입니다라는_ 글이 적혀있었던것이다. 그 출처를 보니 본 빌딩종이재가공 주식회사(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로 적혀있던것이다. 고층빌딩의 서류작성에 쓰다 버려지는 종이를 이렇게 모아서 다시 가공하여 쓰는 일도 놀라운 일이고 또 이 종이를 재가공함으로써 고용을 창출하고있으니 정말 이거야 말로 일거량득이다. 세계적차원의 대형회사는 생각하는것부터가 주도하구나 하고 크게 감격하다보니 그날 뒤를 보는 시간이 퍼그나 길어졌다.     한국에선 이쑤시개를 이젠 나무로 하지 않고 마른 랭면오리로 만든다고 하는데 이는 생쓰레기를 가축에게 먹일때 가축의 목에 걸리지 않게 배려한 일이라고 한다. 이 또한 인간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중국에서는 삼림의 파괴도 마다하지 않고 종래로 쓰지도 않던 와리바시(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저가락)를 쓰기 시작했고 무슨 선진 기술로 남새를 짓는다며 유전자조작기술을 도입하고있는것 같던데 나더러 말하라 하면 이는 결코 과학이 아니다.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렇고 자연의 생태를 고려해봐도 이는 량심적인 과학이라 할수 없는것이다.    이렇게 과학의 발전을 보면 즐겁고 흥이 나는 한편 근심 또한 뒤따르게 된다.    스위스의 과학가로서 1991년 노벨화학상을 수여받은 리차드 로버트(Richard Robert)는 도꾜에서 열린 국제학술포럼에서량심이_ 없는 과학은 령혼을 썩게 할뿐이다.라고_ 말했다. 천만번 지당한 말씀이다.    오늘의요미우리신붕セ의 편집수기セ엔 일기예보박사의 수필에 쓴 이야기를 인용하고있다. 쿠라시마박사는 겨울부터 봄까지 곧잘 청진기를 들고 산보를 한다고 한다. 청진기를 나무에 대고 들으면 무엇인가 들려온다고 한다. 수액(樹液)이 흐르는 소리라면 이는 봄의_ 혈조(血潮)의 메아리일것이라는것이다_.    좋은 얘기다. 정녕 봄의 피의 흐름까지 느낄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자연의 인간으로 되기를, 자연의 피의 흐름을 알수 있는 인간으로 되고 또 자연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자애로운 품으로 되여주길 바라며 금년엔 자연재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05년 초봄
22    [수필]가장 행복했던 날 댓글:  조회:517  추천:7  2009-02-11
 채팅하다가 상대가허선생님께선_ 어느때가 제일 행복했습니까? 결혼때였습니까?하고_ 물어서 난 정말 엄숙하게 이 문제를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어차피 이 글을 읽어볼 안해가 무서워서라도 인차네_, 아무렴 더 말할나위가 있겠습니까!하고_ 대답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옷깃을 여미고 오늘 이 집에서 쫓겨날 각오하면서도 굳이 말을 해야 된다면 나는아닙니다_. 그날이 아니구요, 다른 날로 꼭 두번이 있었습니다. 제일 행복할 때가.라고_ 말을 할것입니다.     첫번째.     아마도 내가 소학교 3, 4학년때의 일로 기억됩니다.     억수로 퍼붓던 눈이 멎자 대지는 인차 그 눈을 모두 굳히여 길은 온통 눈얼음으로 뒤덮이였습니다. 겨울방학이라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백부님네 집으로 놀러 갔었습니다. 용신이였는데 이틀인가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만 그날도 눈이 내렸습니다. 백부님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한참 걸어서 뻐스정류소까지 나와보니 퍼붓는 눈때문에 뻐스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병원의 일손이 딸리고 또 백부님가족과는 인사까지 하고 나왔던지라 어머니는 그날 꼭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너_ 걸을수 있니? 대신까지. 거기 가면 룡정에서 오는 뻐스를 탈수 있을거다.»     어머니의 물음에 나는 우쭐대며 대답하였습니다.    걸을수_ 있재이쿠. 집까지래두 걸을수 있슴다.»     이리하여 나는 어머니의 손을 쥐고 눈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눈뿐인 길인데 어머니와 함께 걷는 나는 그저 무작정 즐겁기만 했습니다. 길가의 앙상한 나무에 눈송이가 매달리는것도 신기하고 눈 오는 하늘도 재미있었습니다. 길엔 오직 우리 모자 둘뿐이여서 무지하게 조용하였고 모자의 웃음소리만이 길에 퍼졌습니다. 나는 저 앞에서 장난질하다가도 어머니를 마주향해 달려가보기도 하고 길가의 굳은 눈을 만나면 미끄럼질도 하였습니다. 한참 걷노라니 목마르게 되여 어머니더러 물 달라고 하였더니      너_ 개살구 먹어본적 있지?하고_ 어머니가 말씀하기에그까짓거_ 먹어보재이쿠. 산살구두 따먹었는데. 앞산에 있씀다. 근데 얼마나 시쿨다구.어머닌 못잡술검다.라고_ 대답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다나니 나의 입에 군침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걸어가는데 어머니께서 다시어떠냐_? 이젠 목 마르지 않지?라고_ 하였습니다.     그 말 듣고보니 정말 갈증은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걸어다니던 그때가 나한테는 제일 행복한 때였습니다. 이 일생에서 어머니와 제일 많이 이야기를 나눈게 아마도 이때라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     두번째,     소학교때의 어느 여름방학때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머닌 룡정으로 회의를 가게 되었습니다. 무슨 회의였는지는 모르나 꽤나 오래동안 룡정에 머물렀는데 집엔 형님과 누나 그리고 나 셋이서 누나가 한 밥을 먹으며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련 며칠이나 어머니를 보지 못하니 나는 어머니가 몹시 그리웠고 이제는 더 견디지 못할즈음에 마침 어머니께서 날 룡정에 보내라고 하여 나는 룡정으로 어머니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적적해서 널 오란다고 형님이 말하여 난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습니다. 룡정에서 어머니와 한방에서 자고 낮엔 어머니가 회의를 들어가기때문에 나혼자서 어머니가 준 돈으로 그림책이나 사서 읽어보면서 즐거운 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후 이번엔 지신의 집에서 누나의 발령이 내렸습니다.     형님과 누나 둘이서 마주앉아서 밥을 먹자니 밥맛이 없어서 못살겠다는것였습니다. 이를테면 그래도 내가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난 어머니한테 더 있고싶었지만 어머니가 하도 가보라고 하기에 하는수없이 지신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네가_ 없으니 못살것 같다는구나. 어서 가서 형님과 누나를 살게 해야지._ 하며 어머니께서 웃으시며 권고하여 나는 집에 가서 형과 누나앞에서 시뚝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유쾌히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 내가 이 가정을 위안하고 이끌어가야 하기나 한듯 며칠사이에 어른이 된 기분이였습니다. 마중 나온 누나앞에서 난 얼마나 우쭐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는 나에게 누나가 이마키스까지 하며 반겨주었던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이때 어린 나였지만 자기의 존재가 이 가족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여 그 행복감 그지 없었습니다.     이렇게 꼭 두번 행복감을 크게 맛보았는데 그후의 여러가지 행복도 모두 이 두가지와는 비할바가 못되였습니다. 만약 안해가 여기까지 참고 읽어보았으면 날 용서해주리라고 조심조심 믿어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안해도 결혼날보다 엄마와 같이 있던 때가 제일 행복했을것입니다. 내가 무섭지만 아니하면 아마도 그렇게 말할것이 틀림없을테지요.                                              2004년 11월 28일
21    [수필]칼라의 가을엔 무궁화도 자리 양보하더라 댓글:  조회:539  추천:6  2009-02-11
 봄에 회사를 갓 이사하여 베란다가 달린 곳에 오게 되였는데 그때 우리는 너른 베란다를 록화하려고 화분통 몇개를 사다놓았다.    그중에 무궁화도 한그루 있었다. 분홍빛 꽃을 환하게 피워주는 무궁화는 매일 출근 때 우리 직원들이 제일 처음으로 인사하는 대상으로까지 되여 마치도 우리 회사의 일원 같은 존재로 되었다.    5월에는 련휴가 생겨서 제때에 물을 주지 못한 탓으로 베란다에 고독하게 내버려둔 무궁화는 잎을 바싹 말리운채로 거의 죽어버릴번 한 사건도 있었다. 소중한 무궁화가 이렇게 되니 우리 모두 겁을 더럭 먹고 죄인처럼 무궁화앞에 서서 사죄하였다. 나어린 김양은 눈굽까지 찍으며. 그날 나는 화분통 갈아주고 부식토도 더 넣어준 다음 물을 듬뿍 주었다.두손 모아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이렇게 온 직원들이 정성을 들여 애지중지 보살펴주었더니 시름시름 앓던 무궁화도 툭툭 털고 일어나 마른 이파리를 제절로 떨어뜨리고 파아란 이파리를 다시 키워주더니 인차 커다란 꽃봉우리를 열어주었다. 그후로는 앓는 일 없이 매일 꽃피워 반겨주었다. 아기를 키우는 마음으로 보살피니 무궁화도 응석을 부리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던것이다. 그렇게 시들것만 같던 무궁화의 소생에 나는 강렬한 감동을 받았다.    일개 초목에서 인생을 배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는 자연과 오가는 사랑을 느끼며 매일 베란다에 나가는 일을 게으르지 아니하고있다. 약 석달전부터는 새도 불러오자는 제안에 사무원 김양이 매일 먹이를 뿌려주어 이제는 참새가 날아와서 노래도 불러준다. 많을 때는 16마리까지 왔고 매일 단골손님으로 두마리가 찾아오는데 나는 어쩐지 남이 준 먹이를 먹으면서도 이쪽을 너무 경계하는게 그놈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금은 가까이에 가서 구경하기도 싶은데, 아니, 내 어깨나 손에 와서 앉는것마저 나는 허용할 준비가 다 될 정도로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데 요놈들은 아예 나한테 마음 주려고 하지 않는다. 하는수 없이 새들이 올 때가 되면 창을 닫고 집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한때를 즐긴다.    단조롭고 긴장하고 따분한 회사일을 보다가도 이런 정경을 자리에서 일어나면 볼수 있다는것이 이 도꾜에서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이젠 여름과는 다른 색상의 옷을 갈아입는 자연이다. 현 대화도시에도 가을은 오는가? 먼곳에서 가을냄새가 은은히 풍겨오고 나무잎들도 열렬한 칼라로 단장 하고있다. 여름내내 피워주던 무궁화도 가을의 칼라앞에선 자리를 양보라도 하듯 푸른 잎들만 남긴채 꽃망울을 내밀려고 하지 않는다. 불타는 붉은 색갈이 열렬하고 자극적이고 또 이러한 열렬한 색상이 가을색이라는것을 알기라도 하듯 연분홍색을 접어두고있는것이다.    이렇게 요란하고 시끄러운 도시속에서도 자연이 주는 깨달음에 도취되여있노라니 일전에 텔레비에서 만난 시마다 토시오(島田俊雄)박사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림종시 한마디에 대형 복장회사엘리트자리를 때려치우고 나와서 박사공부에 정진했다는 시마다박사님이시다.   남사군도_ 등 아세아의 소금과 물 문제를 해결하여다오.»    옛날 일제침략때 군대로 남아세아에서 3년간 있었던 그의 아버지께서는 그때 어떤 사연이 있었던 모양으로 이렇게 한마디를 아들에게 남겨놓고 세상 떠나셨단다. 시마다박사는 그로부터 매일 흙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바이오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1982년에 말레시아에 환경비즈니스회사를 설립하고 물연구를 시작하였는데 회사가 점점 커져가는 사이에 문득 자기의 불찰을 깊이 깨닫고 다시 중국 상주에 가서 사회에 공헌을 할수 있는 일을 찾아하였다. 말레시아에선 사업만을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아세아 국민을 돕는 일이 완전히 비즈니스로 전락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상주에 가서 SMD생태화장실을 연구해내고 그것을 보급시키려 팔 걷고 나섰는데 마침 연구성과가 무르익어 중국사스때 북경에서 긴급주문까지 들어와 사스방지에 크게 공헌을 하였단다. 생태화장실, 이는 생쓰레기를 흙에 버무려 자취를 감추게 하는 무슨 마술 같은 기술을 도입한 화장실이다. 텔레비에선 흙에 생물고기랑 남새랑을 넣어서 몇번 버무리더니 흙만 남고 방금 넣은 쓰레기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자취도 보이지 않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자연생태가 볼품없이 파괴되는 이때 우리 모두가 이런 환경보호책을 연구해낸다면 이 몸 담고 사는 자연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울것이 아니겠는가.    백발을 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산으로 올라가는 시마다박사님의 모습이 정답게 텔레비죤화면에 담겨있다. 걷다가 너무 힘들어 그대로 돌층계에 앉아버린다. 뒤에서 상주회사의 장사장님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두 사람이 어깨에 메는 가마를 빌려왔다. 힘 좋은 젊은이 두명이 시마다박사님을 앉히고 산길을 톺고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가운데 박사님의 얼굴엔 흥분과 희열이 어려있었다. 고대극에서 본것처럼 저 가마에 관료나부랭이가 앉았다면 아주 꼴볼견이였겠지만 이렇게 훌륭한 박사님이라면 정말 한생을 가마에 앉혀 모시고싶은 마음이다.    매년 백만을 넘는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세계유산 황산의 산정으로 올라가는 길이였다. 72봉이 위용을 뽐내는 황산이 푸르른 하늘에 슬기를 자랑하고있는 가운데 멀리 생태화장실이 보인다. 박사님은 가마에서 내려 머리를 외면으로 돌리고 눈굽을 찍고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에 쓰레기가 있어서야 될 말인가. 세계유산에 대한 애정으로 불타는 시마다박사님의 마음이런듯 황산의 구름도 잠시 머물러있다. 그의 연구성과가 자연을 보호하고 이 나라 국민들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게 되여 그는 지금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있는것이다. 아버지가 말한 아세아_ 사람들에게 공헌하라는_ 절절한 부탁을 이제야 조금이라도 실현하게 되는 기쁨의 눈물이였다. 지금은 오대산, 북경고궁, 주은래기념관, 청도 5/4공원에도 이 생태화장실을 설치하고있단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가 상주에 가면서부터 상주의 복숭아상자엔 일본セ이라는 두 글자를 더 새겨넣게 되였다. 붉고 굵고 몽글몽글한 복숭아, 이것도 시마다박사님이 가져다 보급시킨것이라며 과수원 사람들은 온 얼굴에 꽃 피우며 자랑을 하고있다.    사랑하는 마음엔 국경도 없다. 아버지의 한마디의 말씀을 언제나 잊지 않고 아세아 사람들과 함께 살고 함께 가슴 아파하고 함께 웃는 시마다박사님, 이제부터 필리핀이랑 남아세아에도 가야하겠다며 무겁게 입을 뗀 시마다박사님의 머리엔 허연 서리가 내려있었다.    열렬한 색상으로 장식된 이 가을의 칼라에 곱게 핀 국화마냥 흰색 하나 더 해주려고 내려앉은 흰 구름 한점인가 아니면 자연의 사랑이 슴배인 가을기운이 어린것일가.     가을의 칼라엔 무궁화도 자리를 잠시 양보하더라.                                       2005년 9월 28일                     참새가 우는 베란다를 가진 회사에서  
20    [수필]책 댓글:  조회:474  추천:9  2009-02-11
    책벌레란 말이 있으니 책 중독이란 말도 있어야 할듯하다. 인터넷이 제아무리 발전을 해도 책에 대한 나의 집착은 중독자와도 같은것. 출장이 잦은 나로서는 어디에 도착하면 그곳의 서점에 발길 돌리고 매번 비행기가 뜨기전의 시간을 공항 책가게에서 서서읽기セ로 보내군 한다. 중국 어느 공항이나 거의 같은 얼굴을 하고있는 서적들인데도 말이다. 대개 경제관리서적들이 많고 다음으로는 력사 등에 관한것들이다.    서울인천공항의 책가게에는 베스트셀러도 나와 있고 인기작가들의 소설도 방긋 웃고있다.리상문학수상작품집セ도 거기에서 샀고 문학을_ 거닐며도_ 거기에서 샀다. 모던수필セ과 서른_, 잔치는 끝났다(최영미시집)는_ 마포의 홀리데인호텔 뒤골목에서 샀다. 비좁은 책가게가 있었는데 가게주인아저씨는 문학도 잘 아시는지 좋은 문학서적 찾는다고 하니 인츰 이런 책들을 골라주셨다. 두번 갔었는데 다 이렇게 좋은 만남을 할수 있었다. 모두 세번씩 읽어본 책들이다. 고맙기로 한이 없다.    여름에 딸을 데리고 서울에 갔을 때 또 좋은 책 한권이라도 사리라 마음먹고 그곳으로 갔는데 문이 꽁꽁 닫겨져있었다. 사흘동안 매일 한번씩 가보았는데도 서점문은 꾹 다문 입처럼 도무지 열리지 않아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련인한테 무시당한것과 같은 느낌이였다.    우리집 근처엔, 더 정확히 말씀 올리면 매일 출근하는 길가에 일본 제일의 고서점본부가 있다. 내가 지금 사는 고장-고부치(古淵)를 좋아하는 리유의 하나로도 된다. 유명한 칸다의 고서점이라면 진짜 옛날의 서적들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고서라 해도 일본에선 옛날 서적보다도 그저 낡은 서적이라 리해하면 된다. 일본사람들은 장서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고  읽은 책은 버리는 습관이 있다. 그걸 사들여서 다시 판매하는 장사가 잘되여 이렇게 전 일본각지에 가게를 널직하게 가질수 있은것이다.    주말에는 거기서 한시간가량 빈둥대다가 나올 땐 손에 한두권 사들고 코노래가 흥얼흥얼 절로 나오는 즐거움을 맞본다. 무라카미하루키도 거기서 시물거리고 요시모도 바나나도 거기서 해쭉 웃는다. 나쯔메 소세끼도 코수염을 자랑하고 가와바다 야스나리도 손가락사이에 담배를 끼워쥐고있다. 책들을 곱게 다루어서 모두 깨끗한 얼굴들이다.    키노구니야(紀伊國屋)서점이나   야에스(八重洲)북센터 같은 대형서점도 흥분되는 곳이다. 붐비는 인파속에서 보배를 찾는 기분이다.     여름에 심양에서 서점을 몇곳 돌아보았는데 서점마다 아예 열람실로 되여버려있었다. 책꽂이 사이사이에 기대여 책 읽는 사람, 층계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때문에 책꽂이의 책을 볼수가 없었고 2층, 3층을 가자면 요리조리 발길에 조심해야 했을 정도였다. 책을 좋아하는 그 마음이야 갸륵하다만 서점에서 물앉아서 읽는것은 사양함이 좋을듯하다. 읽고싶은 책이 있으면 사서 간직했다가 나무 그늘 아래서라든지, 풀밭에 앉아 읽거나 아니면 집구석 쪽걸상도 좋고 베개에 턱 고이고 읽어도 좋다. 책을 읽는것은 자기 마당에서 읽어야 제격이다.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지 맛보는 곳이 아니다. 파는 곳에서 맛보기는 시장의 순대만으로 충분하다. 책이란 고르는 재미, 사서 들고 나올 때의 흥분, 길을 다니며 손에 잡혀오는 책의 무게와 또 그 손을 통해 전달되여 오는 책의 촉감, 이 모든것이 다 독서의 쾌감에 내포되여야 충실한 독서중독자로 될수 있는것이다. 무엇을 사고나면 인차 가방속에 밀어넣는것이 상례지만 나는 어쩐지 책만은 가방에 넣지 않고 그냥 손에 들고다니고싶어진다.    그런데 중국책들은 너무 두텁고 무겁고 평면면적이 너무 크다. 휴대하기 불편하여 지정된 곳에서밖에 읽지를 못하게 만드는 출판사의 행실이 괘씸하다. 외지로 떠나거나 어느 커피점에서 잠간 들여다 볼수 있는 책을 고를 때는 어차피 일본의 분꼬본(文庫本) 이나 서울서 산 책들이 선택이 된다. 집에서나 심양회사 숙소에서 읽던 책들에겐 미안해_, 다음 와서 그때 다시 읽을게.하고_ 사과를 해야 하는 마음, 가장 고조를 이루는 곳에서 그 책과 리별해야 하는 아쉬움, 그 책을 놔두고 떠나는 아픔을 출판사 분들은 알기나 하고있는지?    그저께는 요미우리신붕セ에  나온 작가 시마다 마사히꼬(島田雅彦)와 신인 인기작가 카네하라 히토미(金原ひとみ)의 대담을 읽었다.독서의_ 매력을 전하는 시리즈ㅡ 제8회의_ 기록이였다. 두분의 고금서적에 대한 인식과 주인공의 말까지 기억하고있는 기억력에 여러번 감탄을 하면서 읽었다. 활자문화추진회의의 주최로 미나도구에서 열린것인데 시선을 한곳에 모은 청중들의 사진까지 게재되였다. 매주마다 이렇게 각 신문들에서는 독서활동이나 추천서적을 소개하고있고 TV에서도 주말엔 베스터셀러서적들을 소개하고있는 실정을 매번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나는 올해 추석 이튿날 연길서점에 갔을 때 컴컴한 우리말 도서진렬대앞에 선 독자는 모두 세명밖에 없었던것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진렬된 우리말 도서들이 한결 같이 점심 못 먹은 얼굴 하고있는듯…    때는 기원 2006년 10월 7일 오전 10시반부터 11시 10분까지였다.                                              2006년 10월 17일   은행나무를 사이두고 메이지자(明治座)가  만져질듯 보이는 오피스에서 사장님이 없는 틈을 타서 제꺽 쓴 글  
19    [수필]지구에 구멍 뚫어야지 댓글:  조회:469  추천:8  2009-02-11
 지구는 둥글다고 한다. 그 둥근 지구에 구멍을 뚫고 나무꼬챙이로 꿰서 지구의처럼 뱅뱅 돌려봤으면 좋겠다. 미친놈의 잠꼬대가 아니다.    나는 나의 발밑을 그냥 파보고싶어진다. 일생을 걸고 나의 발밑을 그냥 파들어가면 언젠가는 지구의 중심핵에 도달할것이고 또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느라면 반대편에 구멍 뚫고 나갈수 있을것이다.    지구의 직경이 엄청나게, 내가 한생을 다해서 파헤쳐도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크겠지만 나는 파낼수 있다고 스스로 믿어본적도 있다. 중국에는 우공이 산을 옮겼다는 옛말이 있다. 무서울것 뭐가 있겠냐 하고 스스로 나자신을 고무격려를 해보려고 애썼지만 우공이 옮기려던 산이 이 큰 지구에서는 사람얼굴의 여드름만큼밖에 안된다는것이 생각나서 홀로 피씩 웃어버린다.    콩크리트때문에 이 땅은 갈수록 어느 늙은 녀자의 얼굴화장처럼 두터워만 가는데 그 무게가 싫어서인가 지구는 그것을 털어버리는데 열중하게 된다. 당산에서 털어버리더니 신강과 운남에서도 털어버렸다. 한신(阪神)에서 그러더니 올해에는 니카다(新潟)에서 그랬다. 강아지도 얼굴에 뭐가 묻으면 머리를 흔들며 털어버리는데 지구라고 왜서 안그럴가. 인간에게는 크나큰 피해라고 생각되지만 이 자연 또한 우리 인간에 의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고 또 계속 입고있는지 모른다.     마이너스이온이 몸에 이렇게 저렇게 좋다고 하더니 건강식품장사가 디지털 관련 회사를 초과하여 일본에선 세금을 제일 많이 낸 사람의 명단에 건강식품업자의 사장님의 명함이 버젓이 첫줄에 올랐다. 그것이 궁금하여 난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고 인터넷을 찾아보고 하였는데 마이너스이온이란게 대체 어떤 물건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거 부자 되는 길인데 하고 생각도 해보고 또 대체 내 이 몸뚱아리가 필요로 한다는 물건이 어떤것인가 하는것쯤은 알아두고싶었던것이다.    어느날 근처의 하다나까댁에서 흙이 가득 붙은 무우 하나와 사탕감자 몇알을 가져왔다. 비여있는 땅을 어찌할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놔두면 고정재산세를 내야 하기때문에 그 세금을 피하려면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자기가 혼자서 하자니 너무 힘에 부치는 일이여서 일본의 도시근처의 지주들은 흔히 남에게 싼값으로 땅을 임대해준다. 몇평방메터를 임대하여 거기에 파도 심고 도마도도 심고 가지와 오이도 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다나까네도 그렇게 임대하여 해마다 재미로 남새농사를 하는 모양이였다. 고중교원을 정년퇴직한 후 그는 요미우리신붕セ에  가물에 콩나듯 일본전통시 하이수를 발표하면서 지내고있었는데 이렇게 짓는 농사도 그의 취미라고 한다.   아니_, 어디서 이렇게?»   아니_, 이렇게 크게 잘되였네요. 농약도 치지 않았다니 자연식품에 건강식품이네요.»    이렇게 안해가 수다 떨며 받았는데 난 흙을 좀 털어서 가져다주지 쯧쯧 하며 속으로 은근히 아니꼽게 생각했다.   마이너스이온이_ 결핍하다네. 지금 사람들.»   네_, 그래요?»   흙을_ 밟지 않으니까 그렇대요.»    나의 눈치를 알기나 한듯 이렇게 하다나까부인이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흙이 정말 귀중하게 보여졌다. 손으로 훑어서 볼에 비비고싶어질 정도로 그 검은 흙이 반가왔다. 옛날 맨발바람으로 논두렁을 달아다니며 개구리 잡던 일이 아득한 신화처럼 떠오른다. 폭신폭신한 흙의 감각이 따스하게 느껴온다.    한편 인간들의 시달림에 피해를 입고있는 땅의 신세도 측은하게 생각된다.     넓이나 두께나 길이나 볼품도 없이 쬐꼬만 중국 대만에서 세계 최고의 빌딩을 지었다며 자랑하는데 그 빌딩사진을 보니 밑땅이 바다에 금방이라도 꺼져들어갈것 같아보였다. 상해에 서는 운남성의 석림 같이 일어선 빌딩들을 보고 상해가 장강과 바다의 사이에서 자취를 감출것 같다는 근심도 하였다. 땅이 꺼질것 같아 걸음걸이도 살랑살랑 사뿐사뿐 걸어다녔다. 장모님께서는 나의 걸음을 뚱기적 황소걸음이라고 하였는데 상해에서만은 소림사의 경공(輕功)이나 하듯 사뿐사뿐 걸어다니려고 노력한적도 있었다. 한시름 놓을수 있는 곳은 운귀고원이나 서북고원뿐, 곤명과 서안에서 시름없이 향수한 뭇꽃과 황토가 정다웠다.    인간이 땅과 정답게 살아갈수 있을 때에야 인간도 자연속의 인간으로 인정을 받을것이다. 아니면 자연의 천벌을 받으리라.    지구에 구멍을 뚫고 나무꼬챙이를 꿰고 지구의처럼 돌려보리라. 거치장스러운걸 내가 떨어뜨려주고싶어서이다.                                              2004년 11월 3일
18    [수필]고공 만여메터의 높이를 날아보는 상상 댓글:  조회:446  추천:8  2009-02-11
   NHK TV의 일기예보에서는 구름 낀 날씨에 오후부터 개인다고 했는데 오후 세시가 되도록 비가 그냥 질적질적 내리고있는중 비행기 CA930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요즈음 텔레비는 거짓말 해도 되나 하고 생각할새에 CA930은 나의 몸을 뒤로 밀어붙치며 하늘로 정신없이 날아올라가고있었다. 나리타공항에서 상해로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다. 창으로 비물이 윙윙 총알처럼 박혔다가 미끌어져가 창에 매달리는 비물은 한방울도 없었다. 내리는 비줄기를 맞받아 날아오르는 비행기는 언제 어디서 비물이 생기는 지점으로 도달할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그 접점의 한순간을 나의 이 작은 눈으로 확인을 하고싶었다. 그러나 그런걸 언제 볼사이가 있더냐? 몹시 흔들리는 비행기의 몸뚱이는 어느새 구름 뚫고 청청한 하늘로 튕겨오르고 말았다. 비줄기의 제일 첫 끝을,그리고 그 비방울이 생겨나는 과정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내 인생에 그냥 남아있을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못견디겠다.    몇분 지나 비행기가 이젠 우로 오르기를 그만두고 평행을 잡았을무렵 나도 제정신이 들어 자리를 바로잡고 책을 꺼내들었다. 나쯔메소세끼라는 제목의 책을 며칠전에 사서 려행가방에 넣어두었던것이다. 이노우에 히사시랑 유명한 작가들이 나쯔메소 세끼를 평가한 책이였는데 공항에 나올 때부터 읽으면서 그속에 혼이 빠져있었던 나였다.    나쯔메소세끼가 영어공부를 그렇게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우등생이였다고 하며 어려서 벌써 한자를 즐겨 한자로 된 글을 썼다고 한다. 한참 책 읽다가 눈이 아파나서 무심히 창밖을 내다 보았다. 언어상으로 보면 로신처럼 새로운 언어사용으로 유명한 나쯔메소세끼다. 코수염도 로신이 나쯔메소세끼를 따랐는지 두 작가의 모색은 비슷하다. 이렇게 제나름의 생각에 잠겨있다가 확실한 경계선도 없이 나의 사색은 어느새 창밖의 세계로 날아가버렸다. 방금까지 생각했던 나쯔메소세끼와 아무런 관련도 없이.    나의 좌석은 비행기날개가 붙어있는 곳, 화창한 날씨의 창밖은 조용하고 맑고 아늑하였다. 시속  900여키로메터로 날아다니는 비행기도 내 보기에는 검푸른 하늘속에, 아니면 솜같은 구름우에 멈춰서있다. 나는 창을 살며시 열고 저 넓은 날개에 나가서서 허리운동 해보고싶어진다. 혹은 올방자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기거나 아니면 눈우에 손 얹고 손오공처럼 멀리 하늘아래의 세상을 굽어보고싶다. 어지러운 오염된 저 땅덩어리를 멸시하며 내려다보고 인생을 검토해보고 등등. 왜 하필이면 하늘 우에서 인생을 검토해보고싶어졌는지는 몰라도.    혹은 수영선수처럼 두팔 곧게 머리우로 올리고 두발로 날개를 구르다가 몸을 팽기처럼 돌리면서 아래로 뛰여내려보고싶어진다. 이 구름아래로부터 시작되는 비줄기가 생기는 곳을 확인하고 그 비줄기의 일원으로 나도 땅으로 내릴수는 없을가?    해님과의 거리를  만여메터 줄인때문인가? 비쳐드는 해빛이 자못 뜨겁고 찬연하다. 비행기에 앉아서 그 해빛에 감사하며 내 비로서 느끼는바가 있으니 그것인즉, 비행기라는 이름은 그다지 고명한 이름이 아니라는것이다. 사람이 타고다니는것은 다 차(車)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왜 비행기만은 베틀 기(機)라고 부르는것인가? 자동차, 기차, 자전거(車).그러니 비행기도 비행차라고 부르자. 아니 너무 속된 이름이라 차라리 까치차라 부르자. 재래로 까치가 울면 귀한 손님 오신다고 했거늘 까치차라고 불리우는것이 귀엽다. 둔중한 몸뚱이를 가진 물건엔 귀여운 이름으로 비례해주어야 유머가 있는것이다.거기에 리륙과 착류시의 요란한 엔진소리를 까치의 깍깍 하는 울음소리로 변화시키면 제격이다. 만약 우리 조선족중 누가 이런 대형소음을 새의 노래소리로 변화시키는 기술을 발명한다면 우리 조선족도 노벨상 받게 될것이고 그 특허의 권리금만 받아도 평생 다 쓰지 못할 재산을 가지게 될것이다. 상해나 서울이나 도꾜의 도시소음을 몽땅 새의 노래소리로 변화시키면 이런 대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 마을로 변모할것인가! 몇분에 한번씩 오르내리는 비행차, 아니다, 까치차가 있는 공항은 깍깍, 짹짹, 꾀꼴꾀꼴(아니다, 이는 꾀꼴새다. 암, 그저 그렇다는 뜻이려니) 온통 새들의 콘서트장으로 될것이니 나 정말 그런 날이 오는걸 볼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태여난것을 새롭게 감사해할것이며 이 생을 사는것에 대해 원이 없을것이거늘!!!    꼭 이렇게 맑고 푸른 하늘에 올라와야만 소음과 오물로 범벅이 된 땅덩어리의 오염이 보이는것일가?려산의_ 진면모란_ 말을 이럴 때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2006년 5월 23일                                            창공 만여메터를 날으며                                                  6월 8일 수정
17    [수필]닭똥거름 인정거름 댓글:  조회:698  추천:26  2009-02-11
 안해가 혹까이도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다음부터 나는 겸직으로 주부까지 되었다. 이렇게 보여도 나는 료리 한가지만은 기가 막히게 잘 하는지라 겸직주부가 된데 대해서는 그렇게 무서운것이 없었다. 다만 친구들이 웃을가봐 걱정일뿐이다.    나는 자주 슈퍼에 갈 시간이 없어서 매주 토요일이면 일주일동안의 남새들을 구입해놓는데 이젠 제법 시장정세를 잘 알아 슈퍼에서 싼것은 슈퍼에서 사고 로천시장에서 사야 할것은 차를 몰고 상아미하라(相模原)시장까지 가서 사온다.    그날도 일주일간의 남새구입때문에 슈퍼로 갔었는데 앵두나무의 하얀 꽃망울이 나의 눈길을 끌어서 나는 키가 한자나 될듯말듯한 앵두나무 한구루를 사고말았다. 일본에서는 사쿠람보오라고 한다.    그 다음주 안해가 마침 봄방학과 국제학회의가 있어서 도꾜로 나와있었는데 마침 토요일 휴식일이여서 난 안해의 뒤를 멋적게 따라 또 슈퍼에 갔었다. 이런 날엔 주인공이 안해로 바뀌고 난 어차피 짐군으로 되는 신세라 그날도 안해가 구입한 물건들중 무거운것들을 갈라들고 집으로 오다가 전번 날에 사다놓은 앵두나무를 샀던곳으로 가서 앵두나무에 줄 비료를 찾았다.   전번에_ 여기서 앵두나무를 한그루 사갔는데말입니다. 그거 비료 주지 않으면 잘 열리지 않지요?하고_ 점원한테 물어보니   예_, 화분통에서 자래운다면 비료를 잘 줘야 합니다.하고_ 대답했다.   어떤_ 비료가 좋은지 어디 소개해주십시오.»   이쪽으로_ 오세요.»    이렇게 점원이 소개해주는대로 잘 보지도 않고 건네주는것을 넙적 받아가지고는 돈을 물고 가게로 나왔다. 뒤따르며 내손에서 넘겨받은 비료를 비닐가방에 넣으려고 하던 안해가 까르르 웃어댔다.   호호호_, 사다사다 별거 다 사네.»   왜_ 또? 거름을 주지 않으면 열매가 잘 열리지 않는단말이야.»   호호호_, 하하하.»    안해는 아예 걸음을 멈추고 선자리에 서서 배를 안고 웃어대였다.   허허_, 뭐가 그리 좋아서끇    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것_ 봐요, 뭔가.»    안해가 넘겨주는 거름주머니를 다시 받아보니 거기엔 계분(鷄糞)이라고 씌여있었다.   하_, 내 원, 참. 정말 사다사다 이거 뭐야, 닭똥이 아니야!»   하하하_. 이런걸 다 사요? 호호호.»    안해는 아직도 웃음을 거두지 못한다.   글쎄_, 이건 처음인데_ 없잖아, 우린_ 살수밖에_ 그래두 이런걸 줘야 잘 열리거든.»    나도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돈을 썼다고 안해의 바가지를 긁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이때 닭똥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많이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것이다.     뭐_, 닭똥 하나 가지구 그리두 웃어? 처녀는 길바닥 말똥보고서도 웃는다더니끇   흥_, 처녀 좋아하네.»    이런 얘기 나누며 집까지 와서 나는 그 귀중한 닭똥을 앵두나무에 정중하게 묻어주었다.    하얀 꽃이 곱게도 피여있었다. 바람에 날릴가봐 집에 들여다놨는데 어느날 회사의 동료가 나의 자랑을 한참이나 들어주더니아니_ 이보게,그럼 온실과일이 되지 않겠나라고_ 하기에 그것도 그렇다싶어서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밖에 내놨더니 엊저녁 바람에 꽃이 여러개 떨어져버렸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닭똥거름을 줬으니 이젠 열매는 잘 맺을거다. 이렇게 흐뭇하게 생각하며 나는 닭똥거름봉투를 여겨보았다. 발효시켰단다. 간단히 우리 말로는 썩였다는 말이다.    옛날 나도 거름 만드는것을 많이 봤다. 돼지똥이나 소똥을 풀과 함께 파묻어두었다가 거름으로 쓰면 최고의 거름으로 되는것이다.    우리는 돼지까지는 키우지 못하였지만 닭은 여라문마리 있었다. 주로 닭알 생산용이였는데 그래도 꽤나 있은셈이였다. 해마다 병아리를 깨워 조금 자라면 수컷은 볏이 크고 꽁지털이 멋있고 긴 놈으로 한마리만 남겨놓고 다른 수컷은 다 잡아먹어치우고 암탉만을 남긴다. 그중에는 어머니가 제일 아기던 까투리セ라는 별명을 가진 암탉도 있었는데 모양새나 크기가 정말 그대로 까투리였다. 알도 메추리알 같은것만 낳았다. 큰 눈이 내린 어느날, 그 까투리セ가 병원앞의 비슬나무우로 날아올라갔다가 혼쭐이 난적도 있었다.    닭 키우는데는 품이 들지 않았다. 아침엔 밖에 내놓고 밤엔 다시 울에 가둬넣어야 하는데 그놈들도 습관이 되면 어슬녘에 저절로 울안으로 들어간다. 먹이를 주지 않아도 잘도 크기만했고 알도 잘 낳았다. 이틀에 한번씩 낳은 닭알은 지금 슈퍼에서 파는 허여멀쑥한것과는 판판 달랐다. 정말 하나 먹어도 힘이 솟는 그런것이였다. 외할머니가 가만이 건네주는 생닭알을 나는 아래우로 구멍을 뚫고 후룩 들이마시군 했다. 그 맛 또한 죽여준다. 잃어졌던 닭이 얼마후엔 병아리 한무리를 거느리고 돌아온적도 있었다.    하늘나라의 전설 같은 얘기다.    그런데 그 놈 울안청소는 딱 질색이다. 이를테면 닭똥퍼내기였다. 주로는 누나가 도맡아 한것으로 기억나는데 나도 가끔씩은 누나한테 붙들려 청소를 하였다. 똥 냄새중에서도 제일 지독한것이 이놈의 냄새일것이다. 코구멍을 방치한대로는 도무지 근방에도 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우선 흙이나 나무재를 뿌려 냄새를 덮어놓은 다음에 삽으로 퍼낸다. 그것을 한쪽에 무져놓았다가 이듬해 봄에 마늘 심을 때 그것을 밑거름으로 펴고 마늘을 심는다.    어느해인가 어머니와 함께 마늘을 심던 일이 생각난다. 우물을 앞에 둔 집으로 이사간 이듬해 봄이라고 생각나는데 지금부터 약 삼십일이년전의 일이다.이렇게_ 지독한 닭똥을 먹고 자라서 마늘도 지독한가?라는_ 질문을 어머니에게 해서 어머니가 배를 끌어안고 웃으시던 기억이 난다. 그때 누나는 어디론가 뺑소니쳐 놀러가고 형님은 아예 이런 일 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탓으로 이 일은 내가 어머니를 돕게 되었다. 돕는다 하는건 내 생각뿐이고 그저 어머니의 말동무나 해주는 정도였다. 난 어머니와 함께 장난치는것이 즐거워 오히려 자진해서 나섰던것이다. 외할머니가 허리 꼬부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시고 어머니가 열심히 정성들여 마늘을 심으셨다. 난 슬거머니 마늘쪽에 가깝게 있는 닭똥을 나무꼬챙이로 슬슬쳐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닭똥마늘이 돼버릴것 같아 근심이 되었던것이다.    마늘을 다 심고나서 그 우에 싸리나무를 엷게 펴놓는다. 며칠후 싹이 나면 닭이 쪼아먹어버리는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정성들여 키운 마늘은 알도 굵고 맛도 좋다. 마늘잎을 된장에 찍어먹으면 통옥수수알밥도 목구멍을 술술 넘어 간다. 거기에 물기 오른 상추까지 있으면 진수성찬이다. 이렇게 자연재배음식을 먹어야 건강해지는 법인데 여기 일본에서는 무슨 유전자재배요 뭐요 하며 남새를 모두 망쳐버려 남새가 남새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 재래의 방식대로 돼지똥, 닭똥비료로 키워낸 남새야말로 남새다운 남새인것이다.    닭똥말이 나오니 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언젠가 장춘교구 신립성 조선족마을로 놀러간적이 있는데 주인집에선 파와 오이와 된장만을 내놓고 술을 붓기 시작했다. 원래 술이라곤 맥주나 샴페인이나 그저 알콜이 들어간 액체 한모금만 마시면 얼굴이 홍당무우로 되는 나였는데 안주 없는걸 보고 오늘 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술 한순배 돌자 그 다음으로 들어오는 료리가 삶은 닭알 한 대야였다. 우리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말을 잊고있었다.   오늘엔_ 이것뿐이유. 자, 한잔 들자. 씨»    주인어른은 어쩐지 마지막 꼬리에 씨セ를 붙이며 말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그래도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였다.    김이 문문 나는 닭알에선 깨끗이 씻지 않았던지 아니면 나의 선입견탓이이였던지 닭똥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 주인아줌마가 건네주는 큼직한 닭알 하나 까서 마늘간장 찍어 입에 넣었더니 그 맛 천하에 두번 다시 없을 맛이였다.    이렇게 닭알을 한복판에 놓고 우리는 웃음속에서 술을 마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비싼 닭알을 정신없이 먹어치워버렸던것이다. 그땐 닭알볶음이 도시락에 들어있으면 모두 정성들여 싼 도시락이라고 그 집 안주인을 칭찬할 정도로 닭알이 귀중할 때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닭똥냄새와 함께 그 고마운 주인집량반의 훤한 웃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푸짐한 우리 인정이였다.     나는 이번의 닭똥구입은 참 잘한 일이라 스스로 생각했다. 앵두가 익으면 닭똥덕에 익은 인정이라 하리라.                                                                                                 2004년 4월     ※ 주:    상아미하라시장.  일본 카나와켄 상아미하라시에 있는 장터인데 도매상을 걸치지 않고 농가에서 직접 실어와서 팔기에 신선하고 싼 남새들을 살수 있다. 가끔가다 조선고추, 열콩, 중국고수풀(香菜)이랑 나와서 잘 다니고있는 장터이다. 원래는 대량 구입하는 가게경영자들을 대상한 시장이였는데 요즈음엔 일본의 경제불경기때문에 일반 가정에서도 많이 리용하게 되여 인기를 끌고있다.
16    [수필]신 댓글:  조회:491  추천:7  2009-02-11
    딸애가 서울 가겠다고 했을 때 나는 흥분까지 했었다. 장춘에서 살았던 우리 부부는 딸 서너살때부터 우리 말 교육을 등한히 한적이 없었으나 그가 열아홉이 된 지금 처음 외국관광을 고국으로 선택해주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일본에 온 후로는 세계배구시합을 구경해도 중국이나 한국이 아니고 일본을 응원하던 딸애였던것이다. 일본에서 혜택을 받고있으니 나도 일본이 이기는데 의견이 없지만 그래도 한일전이라든지 중일전때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나다. 그리고 중학교때부터는 우리 말로 묻는 물음에 일본말로만 대답하는 딸이 더없이 근심되였던것이다.    나는 좋은 기회라 생각되여 중국에 출장갔다가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직접 서울에 들려 서울에서 딸애와 합류하였는데 인천공항에서 먼저 도착한 딸애의 마중을 받는 마음은 형용할수 없이 즐거운 일이였다. 우리는 마포에 있는 홀리데인서울호텔에 체크인하였다. 방에 짐을 집어던진채 그 자리로 우리 부녀의 관광이 시작되였다. 관광코스는 서울에 익숙한 내가 결정하기로 돼있어서 나는 심양에서 서울로 떠날때부터 이미 민족전통문화적인것을 원칙으로 코스를 짜기로 했다. 물론 딸애가 먹고싶다는 음식은 값과, 량과 종류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죄다 사준다는 원칙도 세웠다. 사흘동안 3_8군사경계선, 경복궁, 민속촌, 남산탑, 명동, 이태원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고 일산에 가서 쌈 먹고 춘천에 가서 닭갈비까지 먹을수 있었으니 나 스스로서는 아주 잘된 관광이였다고 생각하고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고장과 맛있는 음식과 함께 잊혀지지 않은것은 민속박물관에 가서 본 신이였다.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우리는 민속박물관에 들어갔는데 여러가지 민족력사가 자상히 그려져있는 가운데 신이 진렬되여있었던것이다. 나도 중국에서 박물관에 많이 들어가보았는데 아마 력사박물관에 시대에 따른 신이 진렬된것은 서울에서 처음 보는것 같다.그 진렬된 신을 순서대로 적으면 이러하다.    나막신, 눈신, 가죽미투리, 동구니신, 미투리, 짚신, 진신,지총미투리, 흑혜, 녹비해, 태사해, 수해, 복하, 고무신. 그러니 고대때 신부터 순서대로 배렬한것이였다.    그 신을  보며 무심하게 나는 고무신시대의 사람이라고 하니 딸은 신기한듯 나를 쳐다보았다.   응_? 파파두 저런 신 신었어요? 고무신? 고무? 우에랑 다 고무였어요?»   일본말로 아빠를 파파라고 부른다. 가만 내 머리 그래서 파파머리 된거 아닐가?   그럼_. 다 고무지. 남자들의 신은 검은 고무였고 녀자들 신은 파란 고무에 흰줄 두줄 박아넣었지. 그리고 할머니들이나 할아버지들의 신은 다 흰고무신이였다. 코신이라는것도 고무신이거든.»    대개 이러한 대화로 그날 구경을 마쳤던것 같은데 그 진렬대에 나란히 줄을 선 신들이 그냥 이렇게 나의 눈앞에 떠오르는것이 참으로 견딜수 없이 이상하다.   _      그때는 뽈 차는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우리 소학교는 바로 공사병원앞 큰길 사이두고 있었는데 운동장은 우리 조무래기들이 달아다니기엔 벅찰 정도로 넓었다. 책가방 팽개치고는 편을 짜서 축구를 하는데 잘 차는 애들은 그 위치가 매번 규정되여 있었지만 나는 매번 이 자리 저 자리로 배치되였다. 웃학년애들도 있어서 하라는대로 찍 소리도 못하고 그냥 열심히 뛰여다녔는데 다른 애들의 발밑에서 붙어다니던 뽈은 나의 발에만 마치면 저만치 튕겨나군 했다. 그런데 골문앞에서는 툭 터진 풍선처럼 아무리 힘있게 차도 몇메터밖에 뜨지 않았다. 어떤때는 나의 고무신이 뽈보다 더 멀리 뜰 때도 있었다.    해방신(중국군대들이 신던 신)을 신은 애들은 쇠망치로 쳐박듯 잘도 차버렸지만 고무신을 신은 애들은 거의 다 나와 같이 불발(不發)뿐이였다. 아예 신을 벗고 맨발로 차는 애들도 있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배구는 잘 쳐도 뽈은 잘 차지 못하는 원인이 아마도 이 고무신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 고무신을 닳아서 바닥으로 물이 들어올 때까지 신는다. 가을이 되면 콩긁을 잘못 디뎌 발바닥이 찔리는 때도 있었다. 이렇게 고무신의 시대가 지나자 다음에 온것이 천으로 만든 파란색운동화시대가 왔다. 몇해후에 도문고무공장에 가서 고무를 밀가루 이기듯 이겨대는 기계를 보고 이렇게 많은 고무를 어디다 다 쓰고 우린 고무신도 바로 신지 못했을가 하고 속으로 한탄한적이 있었다.     지금은 손가락 굽히며 세여보니 심양숙소에 세컬레 사두고 온것까지 합하면 나의 신도 열한컬레나 된다. 버버리(BURBERRY)와 같은 브랜드 신도 몇컬레 신고다니는 지금 어릴적 뽈 차던 기억이 새삼스러운것은 오로지 가난에 대한 저주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고무신을 신고다니면서 오늘과 같은 날이 래일이라도 당장 오는가 했다. 맨날 래일 공산주의 나라로 갈것처럼 떠들어댔고 중학생도 공부는 하지 않고 농건반, 기건반이요 하는 해괴망칙한 반을 만들어 매일 중로동만 했는데 그러면 당장 잘사는 세상이 온다고 믿었었다. 의심할바없이 굳게 믿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을 많이 가지려면 이십년, 삼십년씩이나 걸리는것을 오늘에야 터득했다!     아무튼 고무신은 나의 추억으로 조무래기일적에 멋도 모르고 뛰놀던 기억으로 남아있고 또 그것은 이미 옛날로 되여 박물관 제일 마지막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고무신은 후대들에게 신비한 존재로 알려지고 나의 딸 또한 아버지시대를 먼 옛날처럼 생각하게 될것이라는 점, 이젠 쓰라린 그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점, 이것이 지금 그냥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것이였다.     내가 체험했던 물건이 박물관에 들어갈 정도로 내가 뭐 오래 산것처럼 느껴지는데 우의 가난에 대한 저주를 털어버린 지금은 오히려 대체 박물관에 들어갈수 있는 물건들의 자격이 어떤 기준에 근거하여 설정한것인지 그게 조금 궁금해 서 못견디겠다.    서울관광중 딸 효정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우리 말 튕겨나왔고 또 그렇게 자연스럽게 할수 있었다는 기쁨이 있었을망정이지 그렇지만 않았더면 나는 나 자신을 지나간 력사적인간처럼 만들어놓은 사람을 가만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006년 10월 19일  
15    [수필]책은 어떨 때 읽는가? 댓글:  조회:531  추천:15  2009-02-11
미국사람들은 자꾸 우리가 리해할수 없는 일을 하여 웃기는데 독서에 대해서도 웃기는 조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무인도에서 읽는다면 어느 책이냐? 하는 앙케이트를 했다는것이다.카라마조프의_ 형제라_ 든가 잃어버린_ 때를 추구하며가_  뽑히는데 명작이라 해도 대개는 이렇게 평시에 홀시되는 대하작품이 선택된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무인도일가? 책 읽을 장소가 많고도 많은데..    일본의 감옥에서는 6법전서(六法全書)와국어사전セ이 제일 잘 읽히고있다고 한다. 죄수들은 법을 잘 연구하여 감형이 될수 없을가를 연구하고 그 나머지 시간은국어사전セ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있다고 한다. 요즈음 일본경제계와 정치계를 조롱한 젊은 사장 호리에(사회에선 호리에몬이라고 사랑스런 이름으로 불렀었다.)가 체포되였는데 그는 구치소에서 사마천의 사기_(史記)를_  읽고있는 모양이다. 벤쳐기업인으로서 한때는 일본야구팀을 꾸리겠다고 하여 일본야구협회수뇌들을 머리 아프게 하더니 어느땐 불시에 일본 사영텔레비 유명한 텔레비회사인 후지텔레비를 합병한다고 떠들어대더니 끝내 후지는 라이브도어의 주식 12퍼센트 이상 사들이는것으로 화해를 하게 되였다. 그런 라이브도어의 사장이 이번엔 국회의원선거에 나서서 국회의원자리를 호시탐탐 노렸는데 민주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일본 자민당의 간사장 타께베씨가 거리에 나서서 연설할 때 호리에씨는 저의_ 아들입니다! 저의 남동생입니다!고까지_ 웨쳐서 정계도 우습게 된 처지였다. 30여세의 사기군이 이렇게 일본을 우습게 만들어놓고 자기는 구치소에서 여유작작 사마천을 읽는다고 한다.     대학교때 모택동의 거처를 참관한적이 있는데 제일 인상이 깊은것은 화장실에 자그마한 책상이 있는것을 본것이다. 두툼한 고서가 놓여있었는데 모택동어르신은 화장실에서까지도 책을 읽었다고 한다. 나도 요즈음엔 화장실에서 잠간 책을 읽는 습관이 생기게 되였는데 그것이 뭐 모택동어르신을 따라배워서 그런건 아니고 또 건강식품 보급시키듯 화장실독서를 보급시키려는 뜻은 전혀 없다. 그저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도 제일 재미있게 책을 읽는것은 출퇴근길 전차속에서의 독서이다. 글줄속에서 나는 헤염치고 행과 행의 사이에서 여유작작 너펄거리며 활개를 쳐댄다. 붐비는 전차속의 오지상(아저씨)들의 입냄새도 잊고 옆에 서있는 이쁜 녀성도 의식하지 못하고 다만 나 홀로의 세계에 도취되여 책속의 세상에 살고있는듯.    코부치(古淵)부터 낭아츠타 (長津田)까지의 15분간은 대개 창밖을 내다보며 잡생각에 취해있고 낭아츠타부터 시부야(涉谷)를 경유하여 낭아다쵸(永田町)까지 근 40분은 톡톡히 나의 독서시간으로 된다. 드문드문 약 5분간 눈 감고 토끼잠 자는것도 독서중의 휴식으로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낭아츠타에서 전차를 갈아탈 때에는 무슨 흥분 같은것까지 느끼게 되는 내가 어찌보면 무슨 독서에 관련된 변태와도 같은 병에 걸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커피점에서 남을 기다리면서 잠간 들여보는 책도 심심치 않고 려행길 비행기속에서 몰두해 읽는 책도 재미있고 따분한 강의나 회의때의 도둑독서도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잠 들기전 몇줄 들여다보는 책 또한 얼마나 달콤한지 모른다.       그리고 미국의 그 앙케이트에 나도 참가한다면 나는 아마림꺽정セ아니면 삼국연의セ를 선택했을것이다.                                               2006년 3월 28일
14    [수필]선량하지 못함은 후천적일가? 댓글:  조회:489  추천:10  2009-02-11
  3월 5일은 뢰봉을 따라배우는 날이였다.    십여년만에 맞아보는 날이여서 나는 은근히 기대가 컸었는데 심양에선 아주 잠잠하였다. 옛날 뢰봉이 너무 빨리 사망된것을 한탄하며 수필 쓴적이 있는데 이젠 뢰봉을 따라배우기운동도 하지 않는단다.    뢰봉은 정말 중국에 필요없는 존재로 되였을가?     마니라소식에 의하면 열두살 나는 소녀가 길에서 주은 돈 30만피소(인민페로 약 4만 2천원좌우)를 주인에게 돌려주어 사회에 미담을 남겨놓고있다. 아로요대통령까지 접견하여 자랑으로_ 생각합니다!라고_ 칭찬을 해주었단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돈을 주은 다음 어른들이 취한 태도였다. 주위의 모두가 우리끼리 나누어가지자고 그 어린 소녀를 구슬렸다는것이다. 다행이라 할가 소녀는 어른들의 더러움에 물 젖지 않은 깨끗한 량심을 그대로 간직하고있었기에 어른들의 주장따위는 일체 무시하고 기어이 주인에게 돌려주었단다. 그 덕분에 무직업이였던 그 소녀의 아버지도 취직을 하게 되였고 소녀는 교육부의 스타모델로 되였다고 한다. 옛날 소녀는 몇피소를 훔쳤다고 의심받은적이 있어서 몹시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중국엔 이러한 일이 없을가? 하고 생각해본다.    어른들의 더러운 심보와 너무나 대비가 되는 이 일은 나더러 고대 중국의 기서(奇書) 삼자경セ의 첫구절에 나오는 명구를 생각하게 한다.인지초_ 성본선(人之初 性本善)_,  사람은 원래 선량했으니 선량했던 인간이 어른이 되면서 선량함을 잃어가고있음을 말해준다. 전쟁을 일으킨 자도 자기의 자존심때문에 죄를 승인하지 않고있으니 차라리 돈 몇푼 나눠가지자는 인간쪽이 조금은 용서해줘도 괜찮을듯도 하지만 그래도 선량함이란 자대로 대고보면 선량하지 못하기로는 바늘도둑이나 석유가 탐나서 이웃집을 들이친 강도나 다를바 없다.    어린 소녀한테서 인생을 다시 배워야 하는 세상에 진정 우리에게 뢰봉은 이젠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일가?                                                   2006년 3월  
13    [수필]욕이란건 인간만의 특성일가? 댓글:  조회:465  추천:12  2009-02-11
심양 서탑에서 식사하고 나올 때마다 보아왔지만 윤형은 언제나 그 가게에 있는 신문들을 들고나오는 습관이 있었다.흑룡강신문이나 료녕신문들이 꽂혀있는 가게가 많았는데 거기엔 광고지들도 두루 있었다.    어느날 나도 윤형처럼 손에 잡히는대로 료녕조선문보 등 세가지를 들고나와 숙소에서 읽어보았는데 특별히 오늘 이 글에 올리고 싶은것이라면 심양벼룩시장_(제59호)지에_ 게재된 한국소식란의 기지이다.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 최전방지역의 한 군부대가 내무반에서 양파를 키우며 욕과 칭찬의 차이를 실험해보았다는것이였다.    거기엔 다음과 같이 씌여있었다.   육군_ 3사단 포병련대는 작년 12월 2일부터 각 내부반별로 한쌍의 양파를 똑같은 장소에 놓고 병영생활에서 칭찬과 폭언, 사랑과 미움이 생물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에 장병들은 3개월동안 한쪽의 양파에는 좋은 말을 하고 관심을 표시하고 다른 양파는 병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해소할겸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 또 칭찬을 해주는 양파는 마치 애완견을 다루듯이 잎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거나 정성스럽게 물을 갈아주었으며 욕설을 하는 대조군 양파는 손가락으로 슬쩍 찌르는 행동을 병행했다.    그 결과 장병들의 사랑과 칭찬을 받는 양파는 뿌리를 내리고 풍성하게 성장한 반면 폭언을 들은 양파는 덜 자라거나 가늘고 심지어 구불어지는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동물이 음악 들으며 잘 자란다는 얘기는 옛적부터 들어왔지만 식물도 칭찬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동식물마저 이러할진대 하물며 인간이야 오죽하랴.    매일 욕만 밥 먹듯 하는 샐러리맨들의 모습들이 퇴근전차속의 분위기를 흐리고있는 일본 도꾜. 조용한 전차속엔 온통 찌그러진 상들뿐이니 묵묵히 차창을 내다보지 않으면 눈 감고 토끼잠 자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도꾜의 모습을 생각하며 딸애에게 이 양파실험얘기를 해주었더니그렇지_ 않구.하며_ 진작부터 식물의 이런 실험을 알고있었다. 나만이 시대에 뒤떨어진것 같아서 처음 딸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욕설은 오직 상급만의 특권이요, 돈과 권리를 가진 자만의 특권이라고나 할가. 도리보다는 자기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성을 낼수 있는건 누구나 다 할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욕하는 사장앞이서개자식_ 그럼 네가 해봐라! 누구덕분에 밥 먹는데!라고_ 말해보고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가? 두목원숭이가 무리속에서 소리지르며 싸우는건 보았지만 다른 식물이나 동물들이 욕하는건 내 눈에 돋보기 걸기까지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욕이라는게 민족과 나라에 따라서도 다르다. 중국의 국(國)욕은타마디セ이고 일본의 국욕은바까セ이고 우리의 습관된 욕은개자식セ이라고 할가. 서방에서는 돼지나 당나귀를 많이 입에 담는것 같고. 이렇게 민족과 나라 관계없이 오직 인간만이 어디서 배운건지 남을 욕하고 욱박지르고 하는데 인류학자들이 인간의 개념을 다만도구를_ 쓸줄 아는데만_ 그치지 말고 한마디 더 보태여 욕할줄_ 아는 동물이라_ 해야 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욕이란 왜서 인간들에게 필요되는건지 모르겠다. 꼭 남을 구박주어야 할 도리가 동물이나 식물들에게는 없고 오로지 인간들에게만 생기는 그 까닭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적대간의 사이에도 서로 욕하는건 바보 같은 짓이여서 로신선생도 일찍 욕설과_ 공갈은 결코 투쟁이 아니다.라고_ 했었다. 요즈음엔 _3_8선에서도_ 욕하는 방송 싹 거두어드렸다고 하니 그래도 우리 민족이 제일 먼저 욕과 절연하겠는 모양이다.  아무렴 양파실험까지도 서슴치 않고 한다고 하니 이 아니 얼씨구 좋은 일 아닌가?이제 나도 집에 돌아가면 베란다에 뇌둔 화분통꽃들을 어루만져줘야 되겠다고 굳게 굳게 다짐한다.                                                 2006년  3월초  
12    [수필]억새가 포근하다 댓글:  조회:520  추천:7  2009-02-11
   가을을 음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라고 하면 나는 그냥 도리질 한다. 가을이란 원래 아름다운 계절이기때문이다.    가을이면 어디선가 편지가 날아올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멀리 어디선가 나를 알고있는 사람이 살고있어서 푸른 하늘이 펼쳐지는 가을이 되니 갑자기 내가 그리워서 한통의 편지를 써서 가을의 락엽 한입 봉투에 넣어 가을바람에 실려보내올것 같은 랑만이 나의 가슴에 스며드는 계절이다, 가을은.    그리고 가을이 되면 꼭 밤하늘의 뭇별들과 해맑은 달이 웃어주는 아늑하고 밝은 어둠이 련상된다. 장마철의 무거운 구름에 억눌린 침침한 하늘과는 달리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고 아득하다. 해빛 쨍쨍한 하늘에 불시에 당치도 않는 소나기를 불러와서 장난해버리는 여름의 하늘과는 달리 가을 하늘은 변함없이 충성하기만 하다.    하늘 꼭대기까지 얼음으로 얼어붙은 겨울하늘과는 달리,공기가 그대로 얼음가루로 되여버린 겨울하늘과는 달리 가을하늘은 령롱하고 투명하고 포근할뿐이다.    이 땅에 피여난 뭇꽃들의 어여쁨에 자기의 색갈마저 찾지 못하고 손색이 가는 멋없는 봄하늘과는 달리 가을하늘은 오로지 자기의 푸름으로 단풍을 물들이고 산과 들에 알록달록 칼라의 명화를 그려놓는다. 누구도 어길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이 자연을 모조리 빛나게 하는 가을 하늘이 언제나 고맙고 아름다울뿐이다. 그 자애로운 손으로 펼쳐진 억새밭 또한 겨울에 쫓기는 찬바람을 달래는 포근한 잠자리다.     이런 가을이 음산할수가 어디 있으랴.    일본의 가을은 우리 고향보다 늦게 찾아온다. 여기 가을은 우리 고향에 잠간 들렸다가 나한테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고향에선 10월이면 벌써 나무잎들이 얼굴색 바꾸며 땅으로 갈 차비를 하느라 부산 떨고있지만 여기선 11월이 되여야 그런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베란다에서 생활고있는 무궁화가 벌써 꽃피기를 거두어들인지 오랜데 가을은 그냥 저만큼 서서 다가오질 않는다. 오늘은 11월 8일인데도 기온이 섭씨 25도이니 가을과 겨울이 악수 나누며 서로의 계절 인계를 하며 주고받는 인사가 너무 길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만하고_ 웬간하면 얼른 성큼 다가와라.하고_ 여쭈고싶어진다.     심양에서 남북간의 경제와 문화교류에 심혈을 기울이고있는 동창인 윤형이 모처럼 일본에 와서 일본에서도 첫손 꼽히는 쿠사츠온천에 가서 일본에서 네번째로 뽑힌 온천호텔--사쿠라이호텔에 투숙하다보니 도꾜보다는 며칠 일찍 가을을 맞이한셈이였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나는 가을을 선자리에서 맞이하였지만 이번엔 마중가서 맞이한 셈이다.     찾아가보니 뜨거운 온천이 이 지구의 배속에서 넘쳐흘러나오고 그 온수에 몸을 담그고 온갖 병이 다 떨어지라고 사람들이 바보처럼 기원하고, 나도 빠질것 없이 그렇게 건강을 기원하였다. 펄펄 끓는 물 같이 김이 문문 나는 온천에 손 먼저 담그고 다음 발 담그고 그 다음 무릎가지 빠지고 결국 몸을 홀랑 다 넣어버리고 아-, 어- 하며 감탄을 하는 사람들. 그런 쾌감이 어디에 또 있는지 나는 모른다. 삽시간에 나의 피부가 젊어지는듯 미끌미끌해나고 그러면 나는 정말 소년으로 되였는가 착각을 하여 당장이라도 저 아래 돌밭에라도 내리 뛰여보고싶어진다. 그래서 알몸으로 로천온천으로 나가서 높은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며 감개가 무량해 있을무렵 같이 간 친구가 감기 들라 하고 주의를 주는데 그게 뭐 대수랴. 울바자가 있어서 알몸 들어내도 온천밖에선 누구도 볼수 없으니, 오로지 내 몸뚱이를 볼수 있는것은 가을 하늘뿐이니 저기 높이 있는 뭇별들앞에선 부끄럼이 없더라. 눈 덮힌 겨울엔 원숭이도 사람들속에 끼여 온천을 즐긴다고 하니 수염 기른 사내가 있으면 대체 누가 원숭이인지 알지도 못할것 같다.    다시 얼어드는 몸뚱아리를 온천에 담그고 재삼 아-, 어- 하며 나는 어쩔줄 몰라한다.    가을의 온천은 처음였다. 이런 자연의 혜택은 처음이였다.알몸으로 자연에 안긴 쾌감이란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명해도 헛수고이니 더 말치 않으련다.    도꾜로 돌아오는 길, 신간선(新幹線) 차창으로 내다 보이는 억새밭이 포근하였다. 그속에 만약 참새가 뛰놀고있다면 틀림없이 땀을 흘리고있을것이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속에 만약 내가 있다면 온천의 후더움과 억새의 포근함에 잠이 들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토색강아지가 나를 멀리 뒤떨구어놓은채 달아다니며 재롱부리던 고향의 억새밭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잠자는 친구들은 신간선의 재미도 모르고 행복한 꿈에 나동그라져있는데 나는 도무지 흥분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마음 전체가 가을바람에 설레는 억새밭이 되였나보다.    이렇게 가을을 일별하고 도꾜로 돌아오니 가을은 아직 저만큼 떨어져 머물은채 오질 않았고 베란다의 무궁화나무만 홀로 잎을 노랗게 물들이며 가을 맞을 준비를 하고있었다.사무원 녀자애가 정성들여 조이를 뿌려준 베란다에 재잘재잘거리며 찾아오는 참새도 통통하게 살이 쪄있어 가을이 다가옴을 직감할수 있는데 기온만은 아직 여름기온 그대로다.아니면 이번 가을은 난방설비을 지닌 가을일가? 지구덩어리가 공업의 오염으로 뜨거워진다고 하더니 이건 정말 가을도 감기 걸린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어제 저녁뉴스에선 때아닌 모래바람이 불어온다고 하던데 가을과 같이 오는걸 보면 아마도 가을이 재채기를 한게 틀림이 없으렷다.     내가 제일 반기는 계절이 가을인데 올해의 가을은 이렇게 나를 근심만 시키는 가을이 되고마는것일가? 정말 음산하고 처량한 가을이 될가봐 두렵기도 하다. 만약 나의 기대를 어기고 아름답지 못한 가을이 찾아온다면 나는 성을 낼것이다. 쓰레기로, 몹쓸 가스로 오염에만 열중하는 인간들을 호되게 힐책할것이다.    그래서인지 음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라고 하면 나는 그냥 도리질한다.    가을이란 원래 아름다운 계절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억새가 포근한 계절이기때문이다.                                       2005년 11월 8일                                                  디제이빌딩에서
11    [수필]아침의 반달 댓글:  조회:493  추천:7  2009-02-11
 아침도 한참 지난 지금에 저 하늘에 달이 이상한 얼굴로 떠있다.     수심에 잠긴 그 얼굴표정은 인간들로서는 리해를 도무지 할수도 없는, 표상적으로는 우주의 섭리를 이야기하는듯 랭정하고 그 달의 내심엔 어두운 그늘을 지니고있다. 언제부터 땅우의 생물들은 저렇게 어지럽고 어두워졌는가 하고 무척이나 근심하고있는듯했다.     어제 오후 내가 만난 디자이너를 련상시키는 달아침이였다.     너비 3메터에 길이가 4메터나 되는 사무실이 바로 모모시스템주식회사이다. 입구에 들어가기전에 시야에 안겨오는것이 바지가랭이만 씌워놓은 인형발목에 양말 신긴 모습이고 다음 머리를 우주의 태양이 지는 방향으로 조금 돌리면 옷 샘플 서너개, 그리고 19세기 문물 같은 책상 하나가 사무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었는데 그 우엔 천의 샘플과 종이곽 등 물건들이 질서없이 널려있었다. 이젠 30메터의 길이나 되는 복도를 겨우 다 걸어서 사무실에 들어갔다. 발을 내디딜 자리가 없어서 좁은 복도를 한참이나 걸어들어온 기분이다. 들어가서 인사로 명함을 꺼내며 인사하여야 했다.     손에 든 가방을 어디에다 놓아야 포켓속의 명함을 꺼낼수 있는데 그 가방을 놓을 곳이 없어서 나는 사타구니에 가방을 끼워놓고 해방된 손으로 간신히 명함을 꺼냈다. 명함 주고받고 인사하노라니 나의 사타구니에선 가방이 서안교외의 황토처럼 보오얀 먼지가 낀 바닥에 락루를 하고 나는 그러는 가방을 돌볼새도 없이 수다스런 디자이너의 인사를 받아야 했었다.     주위의 환경에 눈이 팔려 은근이 세계환경보호단체가 항의문을 써보내지나 않을가 하고 근심까지 하며 디자이너의 인사를 받고있노라니_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라_ 는 생각이 들었지만 디자이너쪽에선 그런 거치장스러운건 다 치우고 내말만 들으라는듯이 혼자서 그냥 이야기하고있었다.     나는 다시어쩌면_ 저렇게 끊임없이 그 다음말이 구사될수 있을가 _  하고 생각 했다. 그러면서 그를 살피고 그의 주위를 살피였는데 허연 머리는 뒤로 가쯘하게 빗어넘기고 하얀 와이셔츠에 파란 점이 박힌 까만 바탕의 넥타이를 아주 단정하게 매고있었다. 그 우엔 가로세로 무늬가 있는 조끼를 바쳐입어 한결 신사다운 옷차림이였다. 허연 턱수염이 한결 그의 사람좋게 웃는 얼굴을 멋지게 장식하여 주고있었다. 그러나 그 옷차림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그의 주위는 무질서하고 란잡하였다.     오른켠엔 가짜 나무가 한대 세워져있었고 상우 오른켠엔 이름 모를 인형이 두개가 보초병처럼 지켜서있었다. 지저분하게 널린 종이장 책자들사이에 마시고 남은 쥬스병이 어느 나라 미사일처럼 우뚝우뚝 서있었고 그의 뒤엔 책장 하나가 무거운 짐이나 지고있는듯 겨우 지탱해 서있었다.     디자이너는 가금씩 디자인자료를 찾으며 말을 하고있었는데 그 자료를 찾는것이 거짓말 보태서 한시간씩 뒤의 책장을 뒤져야 했고 어떤 자료는 그 책장의 물건을 다 상우에 내려놓고서야 겨우 찾을수 있었다. 그럴때마다 쥬스병미사일의 내용물이 나와 책상우의 서류와 책들에게 핵피해를 입힐번하여 나는 가슴을 조였다.     수십년간 줄기차게 미국의 로렌스헬즈의 삽도만을 연구하고 패션에 도입하고있은 디자이너였기에 그 패션의 정황을 알아보려고 방문한 나였지만 상담은 같이 간 노구찌씨한테 맡기고 나는 그의 예술관념을 정탐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이렇게 지저분한 사무소에서 구상하고 설계하고있지만 그의 디자인은 패션계를 뒤흔든 L헬즈의_ 정신을 완고히 고집하며 인간의 체형에 알맞게 매 골격과 근육의 형태를 섬세하게 소수점달린 미리단위로 재여서 완성한것이여서 그가 만든 옷을 입으면 정말 저도 몰래 정신이 바짝 든다.     디자이너는 중국에 세번 국제패션쇼를 구경하러 갔었는데 중국의 디자이너들의 옷차림만을 보고 그는 중국의 디자이너사정을 다 알겠더라고 하였다. 중국에서 찍은 사진을 내보이며 어두운 색을 위주로 한 디자이너들의 옷차림은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들뿐이고 또 넥타이, 셔츠와 양복, 아래와 우의 색갈배합에서 도무지 예술적재질을 엿볼수가 없더라고 한다.    밖의_ 세상 근심하지 말고 이 사무실부터 환하게 하시죠.하고_ 말씀드려주고싶었으나 감히 초면에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였다.     나의 마음을 알아보기라도 한듯 그는 사람 웃으며 말하였다.    신사들이_ 깨끗하고 환하게 차려입어야 세상이 환해집니다. 이 어지러운 디자인실에서도 제가 이렇게 신사복 입고있으면 이곳도 환해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 같이 중국의 신사복을 일신시킵시다.»     어젠 무슨 보탕타운(옷깃끝에 단추가 달린 셔츠)맨이 미국 아이비리그에 류행이 되여 아이비스타일과 함께 인기를 끌어 일본에 전해왔다는 패션이야기를 정치 연설처럼 따분하게 들었지만 오늘 아침 이렇게 저기 뜬 달을 바라보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천만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디자이너의 말대로 중국의 신사복을 일신시켜야겠다고 엄숙하게 다짐했다. 자기도 별로 멋지게 입는축은 못되면서 말이다. 자기의 예술에 미쳐있는 그 디자이너에게 감염이 된것이 틀림없었다.     저 하늘엔 태양이 비쳐주는데도 한낮의 찬란한 해빛이 나타나기전까지 그 부족한 광명을 근심하여 엊저녁 달이 자기몸 절반을 남겨놓고간것이 아닌가.     자기는 빛을 내지도 못하면서도 말이다.                                             2004년 11월 4일
10    [수필]신년사 댓글:  조회:478  추천:9  2009-02-11
  해마다 나라의 수뇌들은 신년사를 발표한다. 국민들의 복을 빌고 나라의 복을 빌고 정부가 해야 할 일들을 개괄하여 국민들앞에서 결심발표도 하고 또 정부차원에서 착실하게 해나가겠으니 국민여러분 잘 협조해주십시오 라고 호소도 하는 내용이다.    해마다 오늘까지 쭉 신년사를 읽어왔던 나다. 중국의 신년사, 한국의 신년사, 일본의 신년사. 새해를 맞으며올해엔_ 나의 신변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가?하고_ 가슴 두근거리며 읽어왔었다.    그런데 금년 설에는 나도 신년사 하나 발표하고싶어졌다. 나야 무슨 정일품따위의 딱지를 가진것도 없고하니 어느 나라의 국민들을 위해 발표할수는 없지만 이 땅에 살고있는 인류의 한 일원으로서 함께 살고있는 이웃을 위하여 나도 정중히 신년사를 한편 발표할수는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어린애 같은 생각이지만, 그리고 수필가 영빈씨는 나를 가녀리다고 평가를 하고있지만 허나 나는 이 가녀린 동년의 심정으로 언제나 동년에 산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의 리론을 빌어서 이 신년사를 쓰려고 한다.    우주의 운동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진행되고 지구도 팽글팽글 안전속도를 유지하면서 돌고있어서 이렇게 365일마다 설이 돌아온다. 나이 든 사람들은 이 새해를 그렇게 달가와 하지 않고 자기의 인생이 점점 짧아짐을 안타까와 하고 젊은이들은 희망찬 래일을 그려보며 가슴을 들먹이고 어린애들은 눈사람놀이에 여념이 없어지는 설이다. 이러한 설에 나는 문뜩 이 지구가, 이 땅떵어리가 무척이나 늙었다거나 혹은 초췌해졌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을 위하여 한마디 하고저 한다.    생존경쟁은 어디서나 볼수 있다. 그러나 특히 격렬한것은 동일한 물종속의 부동한 개체지간 및 변종과 변종지간 그리고 그와 관련된 동류지간의 경쟁이 으뜸이다. 이는 다윈이 종의_ 기원이란_ 저서에서 한 말이다. 경쟁에서 적응되는 자가 생존하고 적응되지 못한자가 도태된다는 진화론의 핵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 삶의 지침으로 되기까지 한 이 진화론이 정녕 어디까지 정확한것이냐? 지금은 그 누구나 의심하는 사람 없으리라. 텔레비에서 보는 동물의 세계,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동물의 세계에서 우리는 강자든 약자든 누구에게나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엔 선과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 우리 인간들의 철학으로 리해해서는 안되는듯한 순 자연의 세계로만 보여지고있다. 진화론의 생존경쟁리론인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어떻게 경쟁을 할것인가 하는 인간교육을 받아왔다. 지금도 그렇다. 나라간의 경쟁, 기업간의 경쟁, 가족간의 경쟁, 개인들간의 경쟁. 이런것들을 모두 에누리없이 인식하고 인지하고나서 거기에 대처할 준비를 어려서부터 해야하는게 우리 인생의 전부인것처럼 느껴진다. 이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죽도록 노력을 해야 도태되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냥 남한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있지만 진정 이러한 경쟁술이 인생을 위한 공부였을가? 언젠가 자기의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살아온 인생을 반성해보면 그 철두철미한 경쟁의 회억은 아름다움으로 남아있지 않는다.보이는건_ 죄다 돌아앉았네(노래<고래사냥⟩에서)이다_. 그러한 치렬한 경쟁의 회억보다는 누구를 도와주었거나 누구의 도움을 받았거나 서로 신세를 입히고 지고 한 일들만이 감동으로 남아 회억이 된다. 이는 무엇때문인가? 인간은 꼭 생존경쟁만이 사람다운 삶의 전부가 되는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중요한것이 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그것은 다윈이 언급하지 않은 바로 감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존경쟁이 인류와 자연의 어느 한 대상물과의 경쟁으로 될 때에는 심사숙고해야 할만한 일들이 많다.    다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생물의_ 종류는 부단히 증가되며 그것은 또 매년 증가되는 추세이다. 넓은 의미로 말하면 이는 생존경쟁의 출현을 유발하는 필연적인 요소이다.그리고나서_ 만약 인간들의 간섭이 없으면 어느 한 생물이 아주 짧은 시간내에 아주 많은 후대를 번식시켜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한쌍이 번식시킨 후대가 세계 각지에 분포될것이라고 말하고있다. 이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인간이 크게 간섭하라는 얘기는 아닌것으로 안다. 중국의 베스트셀러소설 승냥이의_ 도템에서_ 이 점을 잘 얘기 해주고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간섭이 너무 과하다. 다윈의 이 리론을 잘못 리해하면 생물의 멸종을 초래한다. 사실 우리 인류는 자연속의 허다한 동식물들을 멸종시키고있다. 공업발전때문이다. 땜건설로 인한 자연의 파괴! 공업발전으로 인한 환경오염!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중에서 우리 인류만큼 자연과 생태평형을 파괴하는 생물은 없다. 우리 인류는 전기를 얻기 위하여 대하를 가로막아 땜을 만들수 있고 심지어 조그마한 와리바시(일회요젓가락)를 만들기 위하여 삼림까지 파괴할수 있다. 이러한 인간들의 행위때문에 이 자연은 얼마나 빈약해졌는가! 자연속에서 살고있는 인류인만큼 그 자연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생존경쟁에 참여해야 하겠지만 생태평형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남을 멸종시키는 잔혹한 행위로서 자기만 살아남자는 욕심은 절대 틀린 생각인줄 안다.    태평양의 작은 섬들이 바다에 잠기고 강물의 물고기가 병들어있다. 북극곰이 하염없이 녹아없어지는 얼음에 처량하게 눈길을 박고 래일 있을 곳을 근심한다. 차거운 달이 어지러운 지구를 내려다보며 이제 막 자기한테 이사해올 인류의 사태를 상상하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다. 인간에게 뜯기울 피부의 아픔을 알고있는듯. 저 멀리서 태양도 자기가 발산하는 빛이 지구의 오염된 대기층에 떠도는 검은 기체에 가로막힌것을 알고는 자기의 무능함에 한탄을 하고있다. 우주만물의 구성자리가 인류에 의해 박탈당하기나 할듯한 억울함일가!    자연에 안겨 사는 우리 인류는 반드시 자연앞에서 반성하고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에 감사하고 자연에 보답해야 할것이다. 벌레 먹은 남새를 먹더라도 다른 생물의 생명을 빼앗는 농약을 삼가하고 조금 더 걸어다니더라도 공기를 오염시키는 자동차를 삼가하고 초불 켜더라도 강을 막아 담을 만드는 둔한 짓 삼가하고 또 정 싸워야 한다면 그저 맨주먹으로 치고 박고 싸워도 될것이니 핵무기는 삼가하자. 매사에 자연을 념려하는 마음, 부모에게 효도하듯 언제나 이 마음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것이 올해의 가장 주요한 과제이다.    다윈은 옛날에 벌써 오늘의 이러한 인류의 행위를 알고나 있은듯이 다음과 같은 주옥 같은 말씀을 남기고 있다.   비록_ 인류와 자연이 다 선택을 하고있지만 그들의 목적은 서로 다르다. 인류의 선택의 목적은 자기의 발전에 더욱 유리하게 하기 위함이나 대자연의 선택은 세계상의 모든 생명의 개체를 위함이다.»   자연은_ 극히 쇠약한것이다. 체재 혹은 구조상에 존재하는 극히 미묘한 차이라도 자연계의 평형을 파괴할수 있어  끇_     그래서 자연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축원하는바이다.자연을 아끼지 않는 자에게는 복이 깃들지 말라.                                              2007년 원단  
9    [수필]선입견 댓글:  조회:485  추천:7  2009-02-11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선입견이란것이 얼마나 편면적이면서도 중요한것인가! 이렇게.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거리에서나 공항에서 멋진 서양신사를 보면 그가 나보다 지식이 더 많고 더 문명하고 더 수양있다고 생각히운단말입니다. 아, 글쎄 그 근본적인 원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됩니다.    저는 국내외출장이 잦은 탓으로 공항에서 외국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서양사람만 저의 눈앞에 나타나면 그가 어쩌면 당금이라도 가방에서 컴퓨터를 꺼낼것 같고 어쩌면 당금이라도 포켓에서 노트를 꺼내 뭔가 적을것 같고 어쩌면 급기야 웃옷 벗어 오른쪽 어깨에 둘러메고 뭔가 잊었다는듯 줄달음 쳐갈것 같고 어쩌면 당금이라도 휴대폰 꺼내 들고 왼손으로 허공을 휘-휘-저으며 꼬부랑말 굴러낼듯하고 어쩌면 저 어깨에 멘 가방이 땅에 떨어지면서 그 속에서 화학원소가 가득 적힌 서류들이 큰 비속의 산길 흙사태처럼 쏟아져 나올것 같은 그런 기분에 휩싸여버리고마는것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들의 일거일동이 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여지는것은 내가 무슨 외국생활하고있으면서 외국숭배에 아주 장밑에 넣은 오이처럼 절어들어서가 아닙니다. 나는 이래보아도 자존심만은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남을  존중하고는 있을수 있어도 남을 그렇게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일본의 타까쿠라 켄을 멋있는 사나이라고 좋아하지만 숭배까지는 해본적이 없거든요.    그러면 나에겐 무슨 동양사람들에 대한 비감 같은 정신장애증상이나 있는것이나 아닐가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철저한 동양주의자로서 언제나 서방철학보다는 동양철학을 더 즐기고있습니다. 장춘에 있는 선배가 종교처에서 근무했었는데 그 선배가 한 말이 그냥 잊어지지 않습니다.종교연구는_ 흔히 사람이 죽은 후의 일을 연구하는데 유독 도교만은 어떻게 오래 살것인가를 연구한다.도꾜란_ 순 동양철학이고 또 같은 값이면 이 세상에 테여난 삶인데 만년장수하는 문제를 연구하는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저는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왜서 이렇게 서양사람만 보면 상술한 기분에 잡혀버리는지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중국 개혁개방후 서방의 선진적인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하여 서방의 문명한 사회를 알게 되였고 중국의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중국에도 새로운 문명이 자리잡고있는 현실속에서 간단하게 툭 하고 말해버리면 우리보다 서양사람들이 더 발전하고 더 문명했으리라 하는 보편적인 인상이 나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틀고 앉아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무슨 고질 같은것으로 굳어버린채 나의 마음 어느 한구석에 가만히 숨어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이 외국사람에 대한 선입견으로  불쑥불쑥 튕겨나오는 모양입니다.    선입견, 모든 경험과 교훈에서 오는 이 인식론적인 관점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 제일 처음으로 나서는 판단기준으로 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옳고 그른 관점인지 아닌지 하는것은 나름대로의 인생데이터에 다라서 다르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있는것인가는 누구나 다 부인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외국사람이 나의 눈앞에 나타날 때에 나는 좀 더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글 더 읽는다든지, 언행에 좀 더 신경 써본다든지, 옷차림에 더 주의한다든지 이렇게 생활을 더 멋있게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겠다는 조바심마저 생기게 되는것은 어찌보면 허영 같고 어찌보면 분투정신 같고 또 어찌보면 후진자의 반발심과도 같습니다.    서양사람들도 동양사람 보면 저처럼 이런 생각이 드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2006년 6월 12일
8    [수필]선글라스 낀 사나이 댓글:  조회:527  추천:9  2009-02-11
 어느 오랜흘러간_ 옛노래나_ 엔까(演歌)에서나 있을듯한 가사와도 같은 제목을 달아놓고 어쩐지 흐뭇해진다.    겨울 중국에 출장가서 10여일씩 있다나면 3일이나 4일째쯤이 되면 목이 아파난다. 건조한데다가 오염된 공기를 마시게 되여 그렇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환경오염이란것이 이렇게 나의 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구나 하고 겁을 먹게 되였다,    그후부턴 될수 있으면 밖에서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꾀를 부리게 되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올 때 마스크를 열개 사들고 왔다.    그와 동시에 한가지 더 고안해낸것이 바로 우습게 달아놓은 제목에 등장한 선글라스다. 휘날리는 먼지에 눈을 뜰수가 없었던것이다. 난 원래 눈이 작아서 먼지라곤 들어갈 쯤도 없다고 장담까지 할수 있었는데 요즈음 자꾸자꾸만 이 비좁은 틈새로 기어이 들어오는 먼지가 있으니 그 심사 참으로 모를 일이다. 추위때문에 마스크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는다. 감기 아니면 추위때문에 마스크를 사용할것이라는 생각들을 할것이다. 그런데 선글라스는 남의 눈길을 끈다. 건달이 아닌지? 머리 희긋희긋한 놈이 시커먼 선글라스를 걸고 거들먹거린다는 눈길들이 나의 얼굴에 소리나게 찍혀온다.    혹 어떤 친구들은 멋있다고 말을 해주는데 그때면 난 은근히 기분 좋아진다. 어려선 생김생김에 대해서 평가 받은적이 없는데 요즈음엔 자꾸 귀에 들린다. 대개 머리가 희여서 기품이 좋다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늙어보인다라는 따위들인데 그중 주석님 같다는 얘기가 그냥 습관이 안된다. 내까짓게 어찌 그렇게 어마어마한 분을 닮을수가 있을가? 당치도 않은 말씀이다 라는 생각도 있으나 그보다도 닮았다는 원인이 나의 벗어진 이마에 있다고 하니 그게 더 마음에 걸리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나의 이마가 점점 넓어지고있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것과 다를바가 없으리라. 나는 그래도 40여년 살아오면서 이마보다 마음을 넓히는데 더 신경을 써왔는데도 말이다.    이마에도 마스크나 선글라스 같이 뭐로 가릴수 있는 물건은 없는지? 랄프로렌이 POLO양복디자인하듯 허무궁이 이마가리개 하나 디자인 해볼가 보다.    나의 생김이 어찌 됐건 이미 40여년이나 여기저기 너펄거리며 살아왔으니 이 또한 나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다시 되돌아와 선글라스를 얘기하자.    선글라스를 제일 즐겨 낀것이 아마도 어렸을 때 미국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 마이커를 본 다음부터라고 생각된다. 그땐 마이커징(鏡)이라고 했는데 아래로 쳐진 역삼각형의 선글라스가 류행되였었다. 그후부터 나는 여름과 겨울엔 눈이 부신다고 걸고 봄엔 먼지 막는다고 끼고하다나니 선글라스를 사용하지 않은 계절은 가을뿐이였다. 동북의 가을은 조용하고 하늘 높고 맑으니 먼지가 없다.이외 내가 가을만은 선글라스를 사용하지 않게 된 까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을의 칼라를 만끽하기 위함이였다.    나는 어쩐지 녀성들 가슴 설레이게 하는 봄보다는, 라체되기 싶어 하는 여름보다는, 그리고 옥수수이삭처럼 겹쳐겹쳐 몸 감싸는 겨울보다는 팔소매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드나드는 가을이 더 좋다. 봄의 여러가지 꽃의 칼라도 좋지만 가을의 나무잎의 변화가 더 철학적이여서 좋다. 그래서 가을만은 선글라스를 잘 걸고다니지 않는다.    선글라스의 필요성은 눈에 있지만 사실 나에게는 마음의 지향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가 가을을 좋하는것은 쥐띠이기때문이라 하며 잘 살 인생이라 했다. 하필이면 가을농사에 겨울장만 하는 쥐에 비길것 뭐 있냐고, 불만도 많지만 그 뜻인즉 가을의 수확으로 먹을 근심 없는 쥐 같은 운수라는 얘기라고 하니 그저 속임수에 넘어간다. 그런데 내가 아직 그렇게 흔전만전 살지 못함은 필경 내가 4월의 쥐띠이기때문이 아닐가 생각한다. 4월 제일 먹을것 없는 계절이다. 아마도 그래서 또 선글라스를 벗어버리는 가을을 동경하는것이 아닐가 생각한다. 나도 잘 살아보자고, 가을의 쥐처럼 배부르게 먹으며…    잘 살아보자고 마음먹는데는 부끄러움이 없다. 선글라스 쓴 사내든 4월의 쥐든 아니면 이마가리기 디자이너든 관계없이 다 잘 살고픈 욕망으로 분투하는것이거늘 거기엔 부끄러운 사연이 있을수가 없다.    소리치며 잘 살아갈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2006년 6월 2일
7    [수필]비오는 날의 그리움 댓글:  조회:490  추천:6  2009-02-11
 오래간만에 만나는 비다.    비오는 침침한 초가을날.    말만 들어도 마음이 우울해지는데 홀로 밖을 바라보며 앉아있노라니 나의 마음은 처량하기로 한량없어졌다.    옛날엔 비가 오면 개를 엎어놓고 이웃들과 술 나눈다고 잘들 말했다. 밖의 일을 할수도 없고 하니 로동의 피로나 푼다는 얘긴데 왜서 하필이면 개추렴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것을 따질것없이 친구들이 그리운 이런 곳에서는 비가 오는 이런 날이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메일 보내고 전화해보고 채팅도 열어보고 하지만 응대해주는 이는 없다. 컴퓨터의 화면만이 눈이 부시게 나를 쳐다보고있는데 노트북과 술잔을 기울일수도 없지 않는가.    별수없어서 나는 음악 틀어놓고 혼자서 안주도 없이 깡통맥주 하나 집어든다. 아침에 깨끗이 물걸레질해놓은 마루바닥에 엉뎅이를 붙이고 비가 힘없이 내리는 밖을 내다보며 나는 맥주잔을 기울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미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듯 이름모를 새가 애처롭게 울어대고 가끔씩 시끄럽게 자동차가 집 옆길로 달려간다. 비오는 날엔 좀 조용히 집에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가.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이 비오는 날에도 소음 내며 시끄럽게 구냐. 모두가 내 말처럼 될수도 없는 일 가지고 괜히 신경질도 부려보지만 생각보다는 난 그렇게 성나 있지는 않았다.    비물에 차분히 젖은 화분통이 그래도 나의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파란 잎이 길게 드리운 화분, 살 때 행복의 나무라고 써놓아서 행복 하나 사는셈치고 사다놓은것인데 토요일 물주는것만 받아먹고 잘도 커준다. 내가 행복한지 네가 행복한지 모르게 정말 아무런 근심도 없이 커주었다. 전번에 상해로 갔을 때 이 나무의 이름이 금전수(金錢樹)라고 배웠다. 너무나 속된 이름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거부감이 들었다. 무슨 옛날 전설에 나오는 나무처럼 흔들면 돈이 나오기나 할듯 이름을 요란하게 지어놓았는데 그것이 우리 인간들의 가냘픈 마음의 기대와도 같은 갈망이였다고 생각하며 요란한 이름에 대한 불만을 참아버렸다.    중국사람과 우리 민족의 다른점이 이런데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은 원하는것을 감추는것에 미덕이 있다.자식의 이름을 개똥애라 부름은 귀엽게 자라라고 지은것이요, 돌쇠라고 지음은 똑똑해지라고 지은것이다. 장사군이 돈 벌었을 때 오픈 첫날의 수입으로 들어온 지페에 침 뱉으라 한다. 돈이 싫어서도 아니고 돈이 더러워서도 아니고 이렇게 돈을 싫어하는척 하면 더 많이 들어온단다. 나 원 우스워서. 사실 이는 경제법칙에 어긋나도 웬간히 어근난게 아니다. 재래로 돈을 잘 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돈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로 간다고 한다. 사람 많은 곳으로 돈이 흐르고 돈이 많은 곳에 사람이 가게 된다. 아마 그래서 우리 민족이 가난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상의 대통에 정수리 맞을 소리 한마디 해놓고.    행복의 나무, 금전수. 이를 우리가 먼저 이름 지었다면 과연 뭐라고 지었을가? 이런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앉은 문밖으로 베란다의 문쯤새로 저 아래 뽕나무가 정답게 보인다. 다행이라 할가 우리집앞에도 고맙게도 뽕나무가 어깨 나란히 서있다. 해마다 어김없이 까만 열매를 가득 열어주어 나는 그걸 고맙게 뜯어다가 먹군한다. 일본사람들은 먹지 않기에 저기 있는 뽕은 다 내거다. 뽕도 따고 님도 볼겸 하면서 따야 원래는 제격인데 그런 랑만은 이젠 가버리고 나는 뽕도 딸겸 옛고향도 그려볼겸 하면서 그 자연의 세례에 감사하고있었다. 나는 우리 말중에, 아니, 우리 이름으로 불리우는 나무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이름이 뽕나무이다. 뽕하고 나무라 이름 지은것이다. 얼마나 해학적이고 사랑스럽고 귀한가.     내가 소학교 3학년때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지신소학교의 뒤마당에 무릎까지밖에 자라지 못한 뽕나무 몇대가 있었다. 그때 나는 학교마당에서 한참 뛰놀다가 까만 열매가 달린 이 나무를 발견하고 무엇인지 몰라 한나절이나 쳐다봤다. 누군가가 이거 뽕이다. 하고 알려줘서 나는 뽕을 처음 알았다. 그해 여름 나는 짬만 있으면 뽕나무를 찾아갔다. 내가 가면 뽕나무는 꼭 까만 열매를 풀잎에 숨겨둔채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나는 헤헤 입이 함박만해서 그걸 조심스레 뜯어서는 입안에 넣고 그 맛을 오래오래 음미하였다. 쑥떡보다 구운 두병보다 얼마나 맛좋은 음식인지 몰랐다. 그 이듬해도 그랬고 그 다음해도 그랬다. 박해받던 시절, 가난의 시절을 지내온  지신이여서 불행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지만 거기엔 이렇게 나의 자그마한, 정말로 가냘플 정도로 가는 나의 랑만의 기억의 실오리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뽕나무란 이름이 얼마나 다정하게 들려오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는 유일한 랑만이였는지도 모른다.    썩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뽕나무는 꽃을 피워도 암꽃과 수꽃을 피운단다. 다른 꽃은 꽃 하나에 수꽃술과 암꽃술을 달고있는데 뽕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암꽃에 여름이면 포도처럼 차례로 열매를 맺는다. 달콤하고 시큼한 맛이 먹는 사람의 얼굴을 벙긋 웃겨준다. 음양의 철리가 뽕에도 있을줄이야.    그러고 보면 일본에 와서야 알았지만 은행나무는 아예 숫나무와 암나무로 따로 자라고있다고 한다. 암나무에만 은행이 열매 맺어 가을이면 암은행밑에 무릎꿇은 사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정력제라고 하면서 기를 쓰고 먹고있는 일본의 사내들이다.    이런 생각하고있노라니 어느새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있었다. 뽕의 랑만도 모르고 행복의 나무를 금전수라고 하는것도 모르고 은행이 정력제인줄도 모르고 하늘은 그냥 비만을 쏟아붓고있다. 나와 같이 고독한 모양으로 눈물만 흘리고있는것이더냐? 나의 처량한 마음을 알기나 한듯, 나의 고독을 알기나 한듯. 내가 누구를 그리워하는줄 알기나 한듯 제멋대로 비만을 나한테 쏟아붓고있다.    나의 발등에, 나의 어깨에, 나의 머리에 비물이 퍼부어졌다. 뽕이 그리워 행복의 나무와 함께 베란다에 나가섰더니 이렇게 비가 나의 고독을 씻어주고있었다.    동년의 랑만이 찾아올것 같은 기분에 나의 그리움이 새롭게 시작된다.                                 2005년 9월 24일 태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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