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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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억새가 포근하다
2009년 02월 11일 15시 16분  조회:521  추천:7  작성자: 허무궁

   가을을 음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라고 하면 나는 그냥 도리질 한다. 가을이란 원래 아름다운 계절이기때문이다.
    가을이면 어디선가 편지가 날아올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멀리 어디선가 나를 알고있는 사람이 살고있어서 푸른 하늘이 펼쳐지는 가을이 되니 갑자기 내가 그리워서 한통의 편지를 써서 가을의 락엽 한입 봉투에 넣어 가을바람에 실려보내올것 같은 랑만이 나의 가슴에 스며드는 계절이다, 가을은.
    그리고 가을이 되면 꼭 밤하늘의 뭇별들과 해맑은 달이 웃어주는 아늑하고 밝은 어둠이 련상된다. 장마철의 무거운 구름에 억눌린 침침한 하늘과는 달리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고 아득하다. 해빛 쨍쨍한 하늘에 불시에 당치도 않는 소나기를 불러와서 장난해버리는 여름의 하늘과는 달리 가을 하늘은 변함없이 충성하기만 하다.
    하늘 꼭대기까지 얼음으로 얼어붙은 겨울하늘과는 달리,공기가 그대로 얼음가루로 되여버린 겨울하늘과는 달리 가을하늘은 령롱하고 투명하고 포근할뿐이다.
    이 땅에 피여난 뭇꽃들의 어여쁨에 자기의 색갈마저 찾지 못하고 손색이 가는 멋없는 봄하늘과는 달리 가을하늘은 오로지 자기의 푸름으로 단풍을 물들이고 산과 들에 알록달록 칼라의 명화를 그려놓는다. 누구도 어길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이 자연을 모조리 빛나게 하는 가을 하늘이 언제나 고맙고 아름다울뿐이다. 그 자애로운 손으로 펼쳐진 억새밭 또한 겨울에 쫓기는 찬바람을 달래는 포근한 잠자리다.

    이런 가을이 음산할수가 어디 있으랴.
    일본의 가을은 우리 고향보다 늦게 찾아온다. 여기 가을은 우리 고향에 잠간 들렸다가 나한테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고향에선 10월이면 벌써 나무잎들이 얼굴색 바꾸며 땅으로 갈 차비를 하느라 부산 떨고있지만 여기선 11월이 되여야 그런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베란다에서 생활고있는 무궁화가 벌써 꽃피기를 거두어들인지 오랜데 가을은 그냥 저만큼 서서 다가오질 않는다. 오늘은 11월 8일인데도 기온이 섭씨 25도이니 가을과 겨울이 악수 나누며 서로의 계절 인계를 하며 주고받는 인사가 너무 길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만하고_ 웬간하면 얼른 성큼 다가와라.하고_ 여쭈고싶어진다.

    심양에서 남북간의 경제와 문화교류에 심혈을 기울이고있는 동창인 윤형이 모처럼 일본에 와서 일본에서도 첫손 꼽히는 쿠사츠온천에 가서 일본에서 네번째로 뽑힌 온천호텔--사쿠라이호텔에 투숙하다보니 도꾜보다는 며칠 일찍 가을을 맞이한셈이였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나는 가을을 선자리에서 맞이하였지만 이번엔 마중가서 맞이한 셈이다.
    찾아가보니 뜨거운 온천이 이 지구의 배속에서 넘쳐흘러나오고 그 온수에 몸을 담그고 온갖 병이 다 떨어지라고 사람들이 바보처럼 기원하고, 나도 빠질것 없이 그렇게 건강을 기원하였다. 펄펄 끓는 물 같이 김이 문문 나는 온천에 손 먼저 담그고 다음 발 담그고 그 다음 무릎가지 빠지고 결국 몸을 홀랑 다 넣어버리고 아-, 어- 하며 감탄을 하는 사람들. 그런 쾌감이 어디에 또 있는지 나는 모른다. 삽시간에 나의 피부가 젊어지는듯 미끌미끌해나고 그러면 나는 정말 소년으로 되였는가 착각을 하여 당장이라도 저 아래 돌밭에라도 내리 뛰여보고싶어진다. 그래서 알몸으로 로천온천으로 나가서 높은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며 감개가 무량해 있을무렵 같이 간 친구가 감기 들라 하고 주의를 주는데 그게 뭐 대수랴. 울바자가 있어서 알몸 들어내도 온천밖에선 누구도 볼수 없으니, 오로지 내 몸뚱이를 볼수 있는것은 가을 하늘뿐이니 저기 높이 있는 뭇별들앞에선 부끄럼이 없더라. 눈 덮힌 겨울엔 원숭이도 사람들속에 끼여 온천을 즐긴다고 하니 수염 기른 사내가 있으면 대체 누가 원숭이인지 알지도 못할것 같다.
    다시 얼어드는 몸뚱아리를 온천에 담그고 재삼 아-, 어- 하며 나는 어쩔줄 몰라한다.
    가을의 온천은 처음였다. 이런 자연의 혜택은 처음이였다.알몸으로 자연에 안긴 쾌감이란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설명해도 헛수고이니 더 말치 않으련다.
    도꾜로 돌아오는 길, 신간선(新幹線) 차창으로 내다 보이는 억새밭이 포근하였다. 그속에 만약 참새가 뛰놀고있다면 틀림없이 땀을 흘리고있을것이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속에 만약 내가 있다면 온천의 후더움과 억새의 포근함에 잠이 들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토색강아지가 나를 멀리 뒤떨구어놓은채 달아다니며 재롱부리던 고향의 억새밭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잠자는 친구들은 신간선의 재미도 모르고 행복한 꿈에 나동그라져있는데 나는 도무지 흥분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마음 전체가 가을바람에 설레는 억새밭이 되였나보다.
    이렇게 가을을 일별하고 도꾜로 돌아오니 가을은 아직 저만큼 떨어져 머물은채 오질 않았고 베란다의 무궁화나무만 홀로 잎을 노랗게 물들이며 가을 맞을 준비를 하고있었다.
사무원 녀자애가 정성들여 조이를 뿌려준 베란다에 재잘재잘거리며 찾아오는 참새도 통통하게 살이 쪄있어 가을이 다가옴을 직감할수 있는데 기온만은 아직 여름기온 그대로다.아니면 이번 가을은 난방설비을 지닌 가을일가? 지구덩어리가 공업의 오염으로 뜨거워진다고 하더니 이건 정말 가을도 감기 걸린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어제 저녁뉴스에선 때아닌 모래바람이 불어온다고 하던데 가을과 같이 오는걸 보면 아마도 가을이 재채기를 한게 틀림이 없으렷다.

    내가 제일 반기는 계절이 가을인데 올해의 가을은 이렇게 나를 근심만 시키는 가을이 되고마는것일가? 정말 음산하고 처량한 가을이 될가봐 두렵기도 하다. 만약 나의 기대를 어기고 아름답지 못한 가을이 찾아온다면 나는 성을 낼것이다. 쓰레기로, 몹쓸 가스로 오염에만 열중하는 인간들을 호되게 힐책할것이다.
    그래서인지 음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라고 하면 나는 그냥 도리질한다.
    가을이란 원래 아름다운 계절이기때문이다.
    그리고 억새가 포근한 계절이기때문이다.
                                       2005년 11월 8일  
                                               디제이빌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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