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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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봉의 야심작 << <볼쉐위크>의 이미지>>에 대한 평評
2009년 07월 22일 14시 23분  조회:614  추천:32  작성자: 허무궁

  몇년전 길림에서 작가 정세봉선생님을 만난적 있다. 언젠가 그의 단편소설을 평론한적이 있어서 장춘에서 만나보았기에 초면은 아니였다. 그때 그가 들었던 호텔방에서 요즈음은 선생님의 작품을 볼수 없군요 하고 시탐해보았더니 그는 재우고있다고 대답했다.

 

 모두 늦게 접촉하게 된 현대 서방철학을 료해하던 때라 나는 그 대답을 그렇게 귀담아듣지 않았고 또 그후에도 그가 재워내놓은 소설을 보지 못했기에 그때의 만남이 거의 망각되는 지금이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간단히 평범하게 오고간 말이 소설 << <볼쉐위크>의 이미지>>를 읽고난후 새삼스럽게 기억된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과묵한 그의 심각한 얼굴표정 때문이였는지 아니면 그에 대한 나의 어떤 기대때문이였는지 모르겠다.

 

그 한마디 말이 어떻게 기억에 남아있든지 상관없이 오늘 그의 중편소설 << <볼쉐위크>의 이미지>>를 다 읽고서는 그때 그의 깊은 생각에 크게 감복되지 않을수 없다.


  << <볼쉐위크>의 이미지(이하 략칭 <<이미지>>)는 근 몇년래 보기 드문 문제작이였기때문이다.


  소설 <<이미지>>는 세대간의 모순갈등으로 흘러간 이 나라의 력사를 집약하여 부동한 력사시기에서의 인성발로를 센티멘털적으로 그려내여 새롭게 형성될 사회인간관계를 짚어보는데 모를 박았다. 그러나 전반 소설감정의 흐름이 센티멘털리즘에 가깝다고 한것은 어디까지나 그 정서적색채에 한해서 하는 말이고 좀 더 깊이 사색적으로 문제의 초점을 틀어쥐고보면 결국엔 그 센티멘털속에 지성적인 인간으로서 무언가 꼭은 짚어야 되겠다는 랭정성 내지 억압감이 뒤따른다.

 

그저 슬프니까 눈물을 흘려야 되겠고 비감하니까 동정을 표시해야 되겠고 그 세대간의 모순이 이로써 한단락 맺으니까 도의적으로 서로서로의 상대방을 꾸지람도 하고 위안도 해주어야 되겠다는 그런 단순한 결과에 그치지 않고 차라리 그런 드라마의 결말앞에서 한마디 말도 서뿔리 하기 힘든 침묵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것이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주는  심미적 효과이다.


  침묵은 랭정한 사고를 동반하고 또 모두의 랭정한 사고는 뒤의 분쟁점을 추려내게 되므로 이 소설은 문제작이요 작가주관적으로는 야심작이 아닐수 없다. 하물며 몇년전부터 재워온 소설임에랴.


  이러한 특점을 살리기 위하여 작가 정세봉은 우선 주인공형상을 특수한 인물로 택하지 않고 우리 신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범인을 선택하였고 또 스 성격의 형성을 제시함에 있어서 력사환경의 지배적작용을 잊지 않았다.


  주인공 윤태철은 한 소작농의 아들로서 이 땅의 해방전쟁에 나어린 몸으로 투신했다가 4야전군 12종대를 따라 중국국내전쟁의 관건전역인 장강도강전투에까지 참가하여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게 되였다. 그는 1949년 공화국성립을 앞두고 사시(沙市) 공략에 참가하여 화선입당을 한 아주 자격있는 청년혁명가로 소개된다. 이로부터 그의 장년기는 밀물마냥 밀려드는 정치운동에 담겨져 하냥 등을 미리우며 시작된다.

농업합작화운동, 고급사, 인민공사, 대약진, 반우파, 문화대혁명... 두루 이렇게 매 시기마다 계속 구룡촌지도자신분으로 20여년간 정치운동에 몸을 담근 그는 오늘 61세의 로인으로 되기까지 수립된 성격은 교조적이고 훈계적이고 고집스러운 타입으로 되였다.


  작가는 주인공성격에 시대적함의를 부어넣으면서 매 력사시기의 운동이 옳고그름을 따지지 않고 크게 전반 사회주요모순의 변화 과정을 객관적으로 그림으로써 거기서 인간성의 로출진가를 형상적으로 제기하였다. 당성원칙에서는 무조건 복종하고 앞서 실행하는 윤태철, 조금도 에누리없이 기층당세포의 작용을 남김없이 발휘하고 그러면서도 딸 정혜가 <<아부지, 당원 그만둬요! 그까짓 공산당원...>>하는 말에 <<한번 호강해봤으문 좋겠다! 나두...>>하고 대답하는 고달픔을 토로한다.

 

 당원의 의무가 호강이 아니고 헌신이라는 도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윤태철이였다. 인간은 호강을 위해 자연과 싸우고 있지만 그 호강을 누구에게 먼저 주느냐에 따라 부동한 제당파들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윤태철은 <<남에게 먼저, 전 인류에게>> 이런 당위성을 잊지 않고 있다. 이 점을 강조해 제기하기 위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글속에 담고있다.


  <<세상은 아직 <볼쉐위크 윤태철>이가 호강을 누려도 별일이 없게끔 되여있지 않았다.>>


  아주 짧은 글귀지만 현시대 당원의 역할을 충분히 긍정하고 당원의 의무를 형상화한  작가의 량심으로 표출된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각오를 형성시키게 된 성격적특징을 소설에서 빌어보면 다음과 같다.
  <<한시라도 일손을 찾아쥐지 않으면 무료보다는 그 어떤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 농사군의 타성>>, <<...그 본질이 타인에 대한 헌신성으로 파악되는 당성의 뿌리를-생명의 뿌리를-령혼의 토지에서 뽑아낼수 없을것임을 분명히 깨닫고있는 윤태철이였다.>>


  이러한 주인공이기에 자기의 생리적고달픔을 뒤로 팽개치고 시종 앞장에서 자기의 작용을 발휘하고저 노력해왔다. 그런데 그의 교조주의적과오라고 할가 아니면 당의 지시에 복종하는 그에게는 죄가 없고 틀리게 설정한 당의 과거착오때문이랄가, 좌우간 윤태철은 굽은 길을 적지 않게 걸었다.

 

엄동설한에 논답을 석자깊이를 심경하라는 <<당>>의 지시를 거역하여 철당, 철직당한 손왈세와는 달리 무조건성의 정신으로 일해나간 윤태철은 고충 있을때마다 손왈시네 집에 가서 실컷 술을 마시군 하면서도 계속 집행만 해나아가는데는 그 주인공의 탓보다 당의 과오를 따끔하게 지적해주는편이 차라리 옳은 선택일것이다. 애비가 계급투쟁대상이라고 그 후대까지 기를 펴지 못하게 한 력사였고 유일성분론으로 청년남녀의 순결한 사랑까지도 구룡천에 버려야 하는 력사이지 않았던가!


  이러한 주인공의 극단적인 성격과 새세대의 전형으로 등장한 아들 윤준호의 인간성은 전반 소설갈등의 주선으로 되고있다. 그 갈등의 계기는 바로 <<피독재자의 집>>으로부터 기인된다. 윤태철의 아버지가 허수빈의 아버지 허영세지주의 독재아래 우마생활을 해오던 집이 광복후 그 아들들의 독재적위치가 바뀌여 허영세의 아들 허수빈이 거기에 들게 된다. 이로써 계급투쟁이 주요모순이였던 당시에 그 일가가 받은 수난은 누구나 다 짐작할수 있는 사실이다.

 

결국 허수빈은 운명에 순종한 로보트식인간으로 전략되였다. 비극은 허수빈의 무남독녀 순정이가 미녀로 태여나 <<볼쉐위크>>의 아들인 윤준호의 가슴에 사랑의 씨를 뿌려놓은것으로 시작된다. 그 사랑이 어떻게 진지하고 순결하고간에 상관없이 그 사랑은 그 시대에 이루어질수 없었다.

 

순정이가 잉태한 몸으로 구룡천에 몸을 던져야 했고 그 시체마저 한눈 볼수 없었던 윤준호에게는 사회가 원통했고 <<볼쉐위크>>가 미웠다. 아직 그러한 계급의식에 눈이 뜨지 못한 그로서는 순인간성의 바탕으로 사회를 리해하기엔 너무나 힘들었던것이다. 준호의 이러한 응어리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볼쉐위크>>에 대한 한으로 교차되여 시종 모순속에서 자기의 의지를 굳혀보려고 애쓴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죽은 순정이를 잊지 않고 계속 그 부모를 남몰래 도와나서는 일련의 행실과 당원만 만나면 볼부은 소리를 던지고하는 언사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준호의 당에 대한 불만은 당에 대한 기대가 내포된 다색적인 감정이였다.


  <<당조직이 살아있다는 마을에서 꼴보기 좋아요? ... 부끄럽지들 않습니까!>>
  <<당소조는 뭘해? 범 무서워 내놓았어?...>>
  이러한 말뜻을 잘 음미해보면 당의 의무를 알고 그 의무를 인간적으로 실행해나아가지 못한데 대한 아타까운 부르집음과 질책으로 리해할수 있는것이다. 두번째 말, 당소조장 봉춘이에게 트럭문을 열고 내뱉은 두번째 말은 어찌보면 로쇠한 아버지에 대한 효성도 담겨있다.


  우에서 제기하다싶이 작가 정세봉은 이러한 인물성격, 특히는 주인공 윤태철의 성격변화를 사회의 모순과 긴밀히 결합시켜 그 성격의 발전, 변화 과정을 합법화하고있다.


  사회주의란 이 거창한 길을 더듬으며 걸어가야 할 나젊은 공화국은 사회의 주요모순을 계급투쟁에 귀결시켰기에 백성의 삶은 오직 그 극단적인 일면으로밖에 조직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한 력사적환경에서는 인간성이 무시되고 세대세대 계급관념이 전달되여 사랑마저 성분을 따지여 피독재계급의 자녀까지도 행복과는 인연을 끊어야 하였다.

그러나 당의 사업중심이 경제건설로 옮기면서부터는 사회주요모순도 변하게 되여 사회의 인간관계는 새롭게 형성된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주인공 윤태철은 아들 윤준호와의 모순과 자기 리념을 개변해야 할 자아모순, 이렇게 중첩된 모순속에서 헤매이게 되는데 소박하게 혹은 통속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고집과 굽어듦의 모순으로 귀결된다.

 

그러면서도 윤태철은 당의 지시에 복종해야 된다는 당성원칙만은 잊지 않고있어 당원련계호의 일에 또 솔선적으로 나서고있지만 옛날의 선동작용과는 달리 이젠 조금은 조심스럽게 앞뒤를 돌보게 되는 주저심을 갖게 되는것이다. 너무나 잘 복종해왔고 또 지금에 와서는 옛날의것이 거의 모두가 틀렸다고해서 이번에도 또 틀리지는 않을가 하는 정상적인 우려인것이다.


  그전엔 쳐다보지도 않던 허수빈 일가인데 초시대적으로 그 가문에 발을 들여놓은 엄울순이가 공민으로서의 평등한 인권을 누릴수 있는 세월에 생의 의욕을 잃고 음독자결을 꾀하였을 때 윤태철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고 다시 가난한 호를 도와주라는 당의 지시를 명기하면서 말없이 허수빈 논답으로 나가는 장면은 차라리 울지도 웃지도 못할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이윽고 윤태철은 수레를 몰로 마을길에 나섰다. 허수빈은 암소뒤에서 수레를 따라 걷고있었다. 그들은 마치도 배다른 쌍둥이처럼 되여가지고 마침내 사람들앞에 등장이 된것이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이 특수한 환경에서의 전형인물을 함께 등장시켜 새로운 인성을 수립하게 된 사회환경을 해학적으로 그려놓았다. 이러한 그럼과 윤태철의 인성회복의 경과는 융합적인 주선을 이루며준호와의 모순이 해결에로 접근하게 된다.


  아침에 그 <<피독재자의 집>>으로 처량하게 걸어가는 윤태철의 심정을 소설에서 찾아본다.
  <<당은 결국 지난날의 오유를 검토하고 그들을 버리지 않았구나 했다. 자기 -<볼쉐위크 윤태철>은 지금 당의 마음을 지니고 그들을 포섭해죽 뜨겁게 포옹해주러 가고있는것이라 했다.>>


  이렇게 깨달은 윤태철은 당소조회의에서 허수빈 일가를 다른 사람이 맡게 하자는 온 저녁의 토론결과를 무시하고 기어이 자기가 맡아야 한다고 우겨이기고 아울러 허수빈의 빚면제, 주택해결, 대부금을 대줄것까지 요구해나선다. 결국 허수빈의 논판에서 중풍맞고 6척체구를 무너뜨리게 되지만 이때는 아들 윤준호와 생각이 맞물림으로써 그 갈등이 해결을 고하게 된다. 남은것이란 오직 과거를 어떻게 검토하느냐 하는 문제뿐이다.


  준호도 아버지에 대한 한이 사라져가고 아버지에 대한 리해와 련민, 효성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부성애의 옛추억이 떠오른다. 준호가 앓을 때 입쌀 한줌 얻어다 죽 끓여준 아버지, 밥 해주마고 대답하고선 죽밖에 해주지 못해 죽은 소화에 리롭다고 어줍게 변명하던 아버지, 자는 아들놈을 밤새껏 어루썰고 엉뎅이를 두드려준던 아버지. 


  작가는 이러한 잠재적인성의 회억으로 독자들에게 화목과 사랑과 행복의 순간을 마련해주어 전반 소설에서 받게 된 감상적 억압감을 느슨히 풀어주었다. 이로써 구독자는 랭정을 찾게 되는것이다.


  다시 돌아온 장면은 <<... 저희들 아버지와 아들간에-...-무서운 갈들을 이루어가지고 무척 끈질기게 대결을 해왔던 그 한마당 드라마의 현장에서>> 계속되는 준호와 윤태철지간의 <<해탈되지 못한>> <<비장한 연기>>이다. 그러나 그 <<연기>>는 대결보다는 융합이요 갈등보다는 해결이다.


  <<원과 한을 품고서 울분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있는 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전생이 죄로써 받아안고서 조용히 떠날>> 윤태철은 흘러간 격정의 력사를 회억하며 위안을 얻고 당의 오류로써 변명거리도 찾아본다. <<자기자신과 흘러간 력사와 당을 대신해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고자한 말이 <<얘야! ...그만 일어나거라!>>라는 한마디다. 계속 꿇어앉아있는 준호에게 뭔가 더 얘기해야겠다고 인식한 그는 용서를 빌고서 따끔한 타이름을 얹었다.


  <<그리구... 우리 당원들을...리해해다구...력사를... 존중해다구! ... 세상일이란... 그렇게 ... 간단한게...아니니라.>>


  작가는 여기서 소설의 주제를 심화시키면서 문제의 복잡성과 사명감을 제시하고있다.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아낌없는 객관적평가도잊지 않고 있다. <<... 죽어서도 <볼쉐위크화신>으로 굳어질것이라 했다. 그것이 곧 바고 그의 삶의 참모습이였고 생명의 본질이였으며 정신의 자아였던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에 대한 윤준호의 태도내지 자세에는 긴말이 필요없었다.

<<구구한 언사로써가 아니고 인격적인 강개한 거동과 제몸의 고초로써 천금같은 효도를 보여주고>> <<적멸의 력사속에 밑창없는 망각의 심연에다 끝내는 순정이를 묻어놓으면서 울었고 그 모든 과거와 마음속으로 고별을 하면서 윤준호는 울고있었다.>>


  이상과 같이 이 중편소설을 분석해보면 우리는 소설에서 느끼는 감정의 센티멘털에 잠겨 슬퍼지고 다시 그 센티멘털에서 벗어나고보면 모두가 자기의 과거를 검토하게 되는 지적인간의 량심을 느껴볼수 있다. 서로 부동한 력사적리념차원에서 초래된 인간성원리는 사회의 정치, 도덕의 제약으로 서로 부동한 양상으로 나타나며 그 부동한 양상의 리념끼리 충돌을 가져오게 되는 특수한 환경속에서 인간행위는 너무나 수동적임을 감안한다.

 

 의식의 지배하에서 행위가 진행되는 인간으로서는 그럴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물질에서 의식이 온다는 철학적견지에서 보면 당시의 오유를 범했던 인간들은 분명 사회를 인식함에 있어서 그릇됨을 보여준것만 사실인데 지금 와서 그 문제를 밝히게 되는것은 단순히 불만이나 서러움이나 비애를 표달하고저 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이 나라, 이 사회의 만민이 마음 맞춰 함께 달리는 길을 좀 더 옳바르게 좀 더 빠르게 가고저 하는데 모를 박았기때문이다. 이러한 시도가 이 소설에서 보여지고있는 점으로 봐서는 분명히 작가 정세봉의 야심작이다.


  다음으로, 이 소설이 가지는 가치는 그 주제사상에서의 특점과 인물성격발전의 합리성과 예술성외에 그 작품이 인상적으로 감동을 주고 랭정을 찾게 되고 뭇사람들의 사색을 불러일으킬수 있는 문제작에 있다.


  우리 문학이 많이는 과분하게 센티멘털에 그치고말게 되는것이 적지 않음은 평단에서 감지하고있는바인데 고대로부터 형성된 비감적문화의 영향을 우선 그 원인으로 잡아본다. 지금까지 전해온 력사 긴 노래는 모두가 감상적인 노래인데 그에 따른 무용은 위안적으로 흥겨운것이 많다. 이러고보면 우리는 슬픈 노래를 웃으며 부른다는 얼핏 떠오르는 결론이 주어진다. 이러한 슬픈 락관에서 형성된 우리의 전통의식구조는 필경 문화에서 반영된다. 소설이 구전문화보다 영향력이 더 크다는 자세에서 보면 그 감상적영향이 미치지 아니할수 없다.


  이외 한가지 원인은 우리 인테리대오에 철학가가 없다는(혹은 적다는)데 귀결된다. 때문에 작가들의 철학적사고는 많이는 실용과 륜리에서 머무는데 이는 우리 문학의 결함이면서도 우점이다. 결함으로 말하면 상상력이 저애를 받고 너무 현지에 발을 붙이는것이고 우점이라면 세부적진실이 생활에 가까와 친근감을 주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 소설에서도 보여진다. 그전의 <<몽당치마>>, <<하고싶던 말>>, <<한 당원의 자살>>등 우수한 단편소설들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쉽사리 발견할수 있다.


  소설 <<이미지>>는 그 상상력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분한 세티멘털에서 벗어났다고 함은 주로 그 소설이 담고있는 력사적사고에 대한 지성적자가의 량심때문이라 하겠다. 이 점은 소설 첫머리에 로씨야 3대평론가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벨린쓰끼의 언론을 인용한데서와 전반 소설에서 풍기는 로씨야문풍, 그리고 작자의 수필적감정토로에서 우리는 동감을 표시하게 되는것이다.


  이상과 같이 필자의 장황설을 마치면서 문단에서 또 무언가를 기다려본다. 무언가가 중요하지 않고 기다린다가 중요한것이다. 사람은 기다림으로 살아가니까.
                
                                                                              1991. 1. 27

 

[<장백산> 1991년 2호 登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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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성자 : 애독자
날자:2009-07-23 03:05:23
열개중 아홉개는 상을 받은 정작가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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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세봉의 야심작 << <볼쉐위크>의 이미지>>에 대한 평評 2009-07-22 32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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