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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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부조문화에 메스를 댄 한 연변대학교 교수 댓글:  조회:1632  추천:1  2016-12-13
       (흑룡강신문=하얼빈) 지난번에 김춘선 연변대학 교수(역사교수)가 연길시에서 환갑을 쇴다.     우리민족이 일생에서 가장 중히 쇠는 잔치가 있는데 바로 첫돌생일,결혼,환갑이다.그만큼 환갑을 인생에서 크게 경하해야 할 것으로 여겨 큰 잔치를 베풀어 경하를 받는다.오늘 이 잔치를 계기로 부조문화에 대해 말하려고한다.     김춘선 교수에 따르면 환갑에 100여명의 하객들을 초청했으나 150여명의 하객들이 참석했다.그런데 이날 하객들이 갖고간 부조는 일률로 백원으로 선을 딱 끊었다.아주 이례적이다. 한마디로 부조문화에 메스를 댄 것이다.     굳이 설명하고 싶은 것은 김춘선 교수는 “중국조선족사료전집” 100권의 주필이라는 점이다.그래서 김교수는 중국 조선족 역사계에서 명망이 높은 교수이기에 초청 외의 하객들도 대거 참석해 환갑을 경하한 것으로 풀이된다.     현재 조선족사회에서의 부조문화를 두루 살펴보면 최저로 2백원 선이다.특히 조선족사회에서 생일 쇠는 열풍이 거세차게 일어나고 있는데 좀 과장된 얘기를 하면은 어떤 사람은 거의 친구의 생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연길시의 박선생에 따르면 그는 한달에 평균 4차이상의 친구의 생일에 초대되며 그것도 친척의 생일은 제외란다.     현재 재한 조선족사회에서도 생일부조가 지속적인 상승선을 긋고 있다. 한 지인에 따르면 생일부조는 최저로 한화로 10만원(인민페로 약 600원)이란다.그럼 한국사회에서의 부조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한국에서는 생일에 거의 주위 사람을 초청하지 않고 집안에서 친지들이 모여 생일을 쇠고있으며 잔치,상사 등 행사에 초청시 일반적으로 한화로 3만에서 5만원 선(인민페로 약 180원내지 300원),가까우면 한화로 10원이상이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한국의 인당 국민소득은 2만8천여 달러, 중국의 인당 국민소득은 8천여 달러라는 점이다. 즉 중국의 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인당 국민소득의 3분의 1도 못 미친다.     물론 이런 부조문화를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문제는 이런 부조문화가 후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함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주위를 두루 살펴보면 조선족 소학생 지어는 중학생들에게도 이런 부조문화가 만연되어 어른들처럼 친구동창의 생일에 2백원 이하는 금물이란다.이런 부조문화가 젊은이들에게 만연되는 것은 바로 부모들에게서 물려받은 이른바 “유산”이라고 생각하니 입이 쓰거워 남을 주체하지 못하겠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이난다”라는 우리속담이 있듯이 자식이 어릴적부터 돈의 귀중함을 모르고 맹탕 써 버리고 지어는 생일잔치에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큰 소리로 식당의 분위기를 깨는가 하면 길에서도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행실을 보노라면 참으로 서글프기 그지없다.   흑룡강신문 2016-12-13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특파원=우선 이 글의 이해를 돕기위해 노불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를 설명한다.이 단어의 의미는 바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설명이다.   오늘날 연변축구는 지금 바야흐로 상승선을 긋고 있다.이 상승선을 긋는 데는 그 얼마나 많은 고통과 피눈물 그리고 뼈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왜 연변축구가 이런 피어린 역사가 있었겠는가?아마 어느 누구도,필자도 정확하게는 답복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 한가지 즉 연변축구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그 진정한 내함에는 망국의 설음을 안고 이 땅에 온 우리민족의 한을 달래는 일종 스포츠임이 분명하다.왜 그러냐하면 다른 체육운동은 일인 혹은 몇사람들이 경기장에서 치르는 경기이지만 축구만은 그 대항성이 어느 체육운동보다 강하고 또 집단적인 배합이 그 어느 체육운동보다 이른바 “처참”할 정도로 잘 되어야 할 경기인 것이다.즉 철저한 집단적인 융합의 합일체가 있어야만이 경기에서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료에 따르면 연변축구는 1908년부터 즉 명동학교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그럼 명동학교란 어떤 학교인가?명동학교는 1908년 김약연 주도로 북만주 화룡현 명동촌(지금의 용정시)에 세워진 민족교육기관이다.그래서 오늘의 용정시는 그젯날 우리민족 즉 중국 조선족의 교육,문화의 발상지었던 것이다.거기에서 반일저항시인 윤동주를 비롯한 수많은 반일지사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설명하고싶은 것은 일제의 철저한 통치와 감시하에 어느 한 민족의 집단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그래서 수많은 지성인들은 암암리에 이리저리 피해다니면서 반일사상을 고취한 것만 사실이다.   그러나 축구라 하게 되면 아무리 감시해봤자 운동이니 일본인들이 감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을 것이다.이런 집단적,대항성이 강한 축구를 통해 진정 조선인들은 민족의 한을 달래면서 구심점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만은 사료를 통해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연변에서 축구운동이 활발히 벌여지면서 그젯날 위만주시기에 아주 훌룡한 성적을 따낸 것만은 사실이고 또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면서 연변축구라 하면 길림성대표이고 또 전국 축구대회에서 수차 우승을 따내고 지어는 중국을 대표해 국외에까지 나가서 위용을 떨친 것만 사실이다.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국공산당 중앙서남국 제3서기,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임을 역임 했고1952년에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을 담임했던 하룡 원수(중국 10대 원수의 일원)가 중국축구는 연변축구를 따라배우라고 호소했단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연변축구가 이미 중국 축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임에 분명하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연변축구는 이렇게 파란만장의 곡절을 겪으면서도 오늘날 중국축구의 수림에서 홀시할 수 없는,아니 홀시하지 못할 집단으로 군림한데는 한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즉 “내가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부모를 존중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남을 생각할 수 있고, 내 민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타민족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어찌 국가를 사랑할 수 있으며 국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이 지구촌을 사랑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조선족은 그젯날 민족의 한을 달래려고 집단적이고 대항성이 강한 이 축구라는 매개물로 성장해 왔고 그 기저에 있는 정신력으로 오늘까지 지탱해 왔다고 분석해 본다.   알기로는 오늘날 연변부덕축구팀은 중국1부리그에서 월급도 최하위라고 하는데 그럼 왜 이렇게 중국조선족은 물론 타민족도 환호하는가?여기에서 한마디 “연변축구는 이미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언하고싶은 것은 중국땅에서의 조선민족 문인을 비롯한 반일계몽운동이 바야흐로 전개 된 사건들은 많이 발굴되었지만 축구를 포함한 기타 운동을 통한 반일계몽운동사에 대한 정리가 아직 부족하므로 이한 연구에 신경을 써 봄이 오늘날의 시점에서 바람직 하다고 본다. 흑룡강신문 2016-8-5
42    재론 “연변축구팀 정신력” 댓글:  조회:2607  추천:23  2015-07-09
  (흑룡강신문=하얼빈)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연변축구팀이라 하면 바로 중국 2백만 동포의 얼굴이요,연변의 브랜드라는 것은 이미 전 사회적으로 알려진바이다.그젯날 우리의 조상들은 축구로 한을 달랬고 또 축구로 이땅에 살고 있는 조선민족의 위상을 올리기에 충분했다.그래서 일찌기 50년대에 중앙 수장들로부터 조선족의 축구 정신을 반드시 따라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런데 80년대 이후부터 연변축구팀은 지속적으로 불온정한 상태에 처해 있으면서, 특히 중국에서 프로리그가 시작되면서 연변축구팀은 쇠퇴일로의 변두리에서 헤매다가 한국 한양대 최은택 교수가 안식년을 맞아 연변축구팀 사령탑을 잡고 난 뒤에 중국 축구 수퍼리그 즉 갑급1부리그에서 4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그 이후 1부리그에서 또 지속적인 하강선을 그어 2부리그에 머물다가 지어는 을급리그에 까지 탈락되는 운을 면치못해 절강성에 팔려가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 축구팬들은 그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탄했는가?제반 연변은 “슬픔의 바다”가 되면서 저 멀리 절강성에 가서도 “잘 자라라”고 진정어린 기원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연변축구팀의 굴곡적인 역사는 더 거론하지 않겠다.연변축구팀이 작년에 을급팀으로 강급되었다가 하늘이 도와서 그런지 어부지리로 2부리그에 다시 머물게 되었고 따라서 지난 14차 리그에까지 8승6무의 불패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되어 2부리그에서 사경에 헤매던 연변축구팀이 이렇게 연변은 물론 제반 중국축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겠는가?   한마디로 정신력을 한보한보 차분히 길렀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찍 1997년 중국축구 갑급1부리그 제12라운드 경기가 끝난 뒤에 당시 이 팀의 사령탑을 잡았던 최은택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그는 한마디로 “축구는 정신력이 원동력이다”라고 잘라 말했다.금방 연변축구팀을 맡아보니 선수들이 선배인지,후배인지,친구인지 뒤섞여 예의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고 지어는 감독을 우습게 보고 감독에게 인사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그래서 우선 예의 즉 감독과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정신력 기르기부터 시작했다.그러면서 전술에서 단결력을 강조하고 선수들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불러서 인사를 반드시 하겠금 “채찍질”했다.결과 처음에는 인사성도 없고 말도 반말을 쓰던 것이 점차적으로 나아지면서 인사예절도 밝아지게 되었고 후배들도 선배들의 말을 잘 듣는 기풍이 이 팀에 서서히 일어서게 되었다.   당시 주력선수로 활약했던 고종훈 선수는 “최은택 감독이 사령탑을 잡으면서 선수들을 조금도 숨돌릴 사이없이 훈련을 그렇게도 이른바 ‘악독’하게 시켰다”고 했다   한마디로 전장에 나가서 “내가 살자면 반드시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로 평소훈련에 '채찍질' 하면서 체력보강에 전력을 몰부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도 연변축구팀 선수들 대부분은 그 축구실력이 중국축구에서 하위권이었지만 똘똘 뭉친 집단으로 정신력을 키웠기 때문에 4강까지의 진출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럼 올해 박태하 한국감독이 어떻게 되어 연변팀을 오늘까지 무패행진의 길을 열어 놓았겠는가?   그는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감독과 선수의 신임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내가 팀에 와서 제일 처음 추진한 일이 바로 선수들과 한덩어리가 되고 그들과 무슨 이야기나 스스럼없이 하는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라고 했다.그러면서 박감독은 “연변팀은 무슨 비밀이 없다.그저 그동한 쌓은 감독경험에 따라 선수들의 생활과 훈련량에 근거해 알맞는 방안을 짰다”고 했다.   특히 선수들의 일상을 살펴보면 식사시에 수걱수걱 밥만 먹고 인츰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식사시간도 서로간의 대화를 나누는 좋은 장소이므로 서로간의 소통에 신경을 쓰다보니 지금 선수들과 친구가 되어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이런 기초상에서 축구는 집단적인 대항성이 강한 경기이기에 혹여 심판원들의 편파적인 판정이 있어도 절때 감정으로 처리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하라고 일러주는 한편 지금 순위는 무의미하다고 선수들에게 특별히 강조했기에 선수들의 사기가 올라가게 되었고, 시시각각 사기진작을 고취하면서 완강한 태세로 시합에 임하라고 선수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던 것이다.선수들한테 우리는 언제든지 할 수 있고 또 최고의 무대에 오를 준비가 돼 있다는 인식고취에 게으르지 않았다.   선수들이 이미 박감독을 철저하게 믿고 훈련과 시합에 임한 모습을 보면 이것이 바로 박태하 감독의 정신력 고취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41    중국조선족사회의 '단군문학상'설립, 그 의미 댓글:  조회:2124  추천:2  2015-06-05
문학은 인간의 본연을 파헤치는 예술이다. 그래서 문학은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다. 민족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문학의 본연을 떠나면 그 민족,그 국가는 정신적으로 쇠퇴 할 수밖에 없다.즉 문학을 무시하면 최악의 경지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고금동서에서 엄연히 밝혀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백화만발, 백가쟁명이 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사회에서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얘기는 여기에서 더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다만 '단군문학상'이라는 이 문학상의 설립, 그 의미에 한마디 얘기하고 싶다. 필자가 연변과기대의 한 한국 유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조선족 대학생들을 많이 접촉했다는데 그들이 우리 민족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더냐 하는 질문에 “조선족 대학생들이 중국에서 살아 그런지는 모르지만 조선민족의 역사에 깜깜부지”란다.더우기는 “어릴적부터 한족학교를 다니던 조선족 젊은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역사를 문의하니 ‘먹고 사는데 그것이 뭘 필요하냐’”라고 대답하더란다. 이에 느낀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제목과 마찬가지로 왜 신봉철씨가 '단군문학상'을 설립하기에 노심초사했는가를 깊은 의미에서 분석하고 싶다. 신봉철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회장(길림공상학원 당서기)은 “명작(베스트셀러)을 창작하도록 격려해 조선족문학의 번영발전을 추동하며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학작품을 전국과 세계에 널리 알리자는 것이 바로 문학상 설립취지이다”고 설파했고 최국철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은 “어느때부터 불가항력적인 객관조건으로 문학이 쇠퇴일로에 들어서면서 존립위기를 맞았고 따라서 문학위상이 바야흐로 사양되고 민족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이런 적기에 고고성을 울린 ‘단군문학상’은 그 출범부터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고 역설했고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는 “우리민족의 조상인 단군의 이름으로 명명한 이 문학상의 의미는 굉장히 깊다”고 목소리 톤을 높인 자체가 그 의미가 굉장히 깊을 뿐만아니라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문학을 재탄생시키자는데 큰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노신은 왜 저명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가? 바로 중국사회의 역사에 문학이란 이 메스를 과감히 댔기때문이다.또 모옌이 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는가?그가 바로 중국이란 이 땅에서 성장하면서 역사제재를 문학으로 피력했기때문이다. 또 최근에 중국작가가 쓴 작품‘허삼관 매혈기’가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 때... 그러나 조선족사회에서 김학철이라는 항일투사이자 작가로서의 작품이 분명히 베스트셀러 작품이다.즉 김학철은 가열처절한 항일시기에 직접 항일투사로, 또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품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사회에서는 여직 뜻깊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의 뼈아픈 역사가 지금 후세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답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이런 와중에 근 30여년간 조선족문단에서'단군문학상'이란 최고의 문학상이 설치됐다는데는 그 의미가 굉장히 깊다고 볼 수밖에 없다.즉 조선민족이라는 이 유구한 역사문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문학이란 이 신성한 분야에서 꽃을 피우겠다는 그 자체가 돋보인다. 흑룡강신문 2015-6-2
40    새해에 붙이는 메시지 "귀맛 당기는 술자리에 앉아라" 댓글:  조회:2608  추천:1  2015-02-05
몇년 전의 일이다.한 교수 동료가 민속주 관련 세미나에서 한마디 충고했다. "잡사람하고 술 마시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즉 아무 사람하고 술을 마시지 말라는 뜻이다. 일찌기 연변의 한 고위급 간부도 당정대회에서 "아무 사람하고 술을 마시지 말라"고 권고했다. 실제로 현실에서 공중 술자리도 좋고 어떤 파티에서도 좋고 서로 대화가 안되는 사람과 술자리를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예전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 술자리야 말로 반가운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눈맛과 입맛이 돌아야 술좌석이 영글어간다는 것을 애주가들은 잘 알고 있다.술안주 즉 안주가 아주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우면 그 술좌석은 우선 눈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다음, 입맛이다.술좌석은 말그대로 술을 위주로 하는 좌석이기에 좋은 안주에 술을 곁들면 고도로 흥분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그런데 입은 두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즉 마시고 먹고 하는 기능을 갖고 있을 뿐만아니라 언어표출의 도구이기도 하다. 이 언어표출도구를 통해 서로 말이 오가는데 그 오가는 말이 조화롭지 못하면 큰 사달이 생긴다는 것은 고금동서로 이미 수없이 많았다.즉 귀맛이 당기겠끔 술자리가 영글어 가느냐, 아니면 귀맛을 잃게 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취중 진담", "벙어리도 술만 마시면 입을 연다"라는 말이있다.왜 그런가? 대뇌피질은 제반 인체에서 "사령부"작용을 한다.알콜은 중추신경계인 뇌간망양체에 직접 작용한다.이 속에 있는 상행성망양 억제계는 통상 대뇌피질의 작용을 억제하는데 알콜에 의해 그 작용이 마비되기 시작하면 기타 중추들 즉 언어중추,기억중추,성중추 등이 통제를 잃고 이른바 제멋대로 "행실"한다.그것이 바로 술을 많이 마시면 말이 많아지게 되는 생리적인 기초이다. 거두절미하고 그럼 왜 아무 사람하고 술 마시지 말아야 하는가 답은 하나다.귀맛을 당기지 못하는 사람하고 술 마시면 기분이 잡칠 뿐만아니라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술 관련 야사들이 많다.술자리에 오가는 말을 제 3자에 전하여 알륵이 생기게 하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는가 하면, 술자리에서 하찮은 일로 말다툼이 벌어져 지어는 손찌검까지 생기는 일,등등의 별아별 추태들이 우리 주변에서 밥먹듯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명지한 사람들은 술자리 요청이 있을 때 흔히 누가 참석하는가 하는 것을 묻고서야 참석한다. 술의 우점은 많다.슬플 때나,즐거울 때나, 술이 동반하게 되고 심리적인 고통이 있을 때 절친한 친구를 찾아 한잔 나누면서 친구의 조언을 들으면 그것처럼 기분이 상쾌한 일은 없을 것이다. 반면에 술을 잘 못마시면 육체(간 위주)를 망가뜨리는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 해이해 지면서 "사달"이 생기게 된다.바로 누구와 술을 마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애주가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월요일에는 원(월)래 술 마시고, 화요일에는 화가 나서 술마시고, 수요일에는 수가 좋아서 술마시고, 목요일에는 목이 컬컬해 술마시고, 금요일에는 금술이 좋아서 술마시고, 토요일에는 토했기에 해장하느라 술마시고, 일요일에는 일이 없어 술마시고,하여간 애주가들에게는 즐거운 변명의 "명언"이라 하겠다. 새해에 이런 이른바 변명의 '명언'은 삼가하는 것이 현명한 인생행로가 아니겠는가? 술좌석에서의 눈맛,입맛,귀맛에서 귀맛이 당기지 않으면 눈맛을 잃는 것은 물론 입맛도 없어지므로 귀맛의 중요성을 오늘날 재삼 거론하는 것은 어찌보면 건전한 사회생활의 필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직 진정한 술 친구 즉 서로 귀맛이 당기는 술자리를 택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출처 흑룡강신문
       지난 6월17일,미국 엘에이에서 사업하고 있는 아들이 “일하다가 쉬면서 아이스크림 먹는데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할머니가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반가와 했는데 중국에 있을 때 아이스크림을 많이 사드릴 걸 그랬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왔다.   순간 가슴이 뭉클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다 나도 전번에 찰떡을 먹다가 할머니가 생전에 그렇게 즐겨 드시던 찰떡을 수시로 사 드리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 그 찰떡 한그릇에 반가와 하시던 모습이 떠오르니 차마 찰떡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더라,아들아 이젠 다 컸구나”라고 답복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아들이 “예 열심히 잘 살것입니다.저 구중천에 계시는 할머니도 그래길 바랄 겁니다”라는 메세지가 또 왔다..   어머니는 90세를 일기로 작년 6월에 하늘나라로 영원히 떠나갔다.   나는 결혼직전 부모를 시골에서 연길에 모셔왔다.목적은 단 하나, 농사일에 지친 부모를 이젠 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일념뿐이었다.   20제곱미터도 안되는 단칸방에서 오늘의 100여제곱미터되는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줄곧 부모를 모셨다.아버지는 그래도 아들.며느리를 경제상으로 조금이라도 도와주느라고 문지기 야근을 했고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차입쌀 가루를 쪄서 송편을 빚어 시장에 나가 팔았다.   80년도 초반이라고 기억된다.당시 조선무역이 열리면서 장사군들이 조선에서 일본제 히다찌,쏘니 등 24인치 칼라텔레비전을 수입해 팔았는데 당시 나같은 집들에서는 이런 2000여원 씩 하는 칼라텔레비전을 살 엄두도 못냈고 지어는 화면이 종이16절지 크기의 흑백텔레비전도 살 엄두를 못냈다.당시 나의 월급이 40여원이라 400여원에 달하는 흑백텔레비전도 사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그 시기에 칼라텔레비전은 집집마다 부러움의 상징적인 존재였다.아들,며느리의 속내를 꿰뚫은 어머니가 어느날 몰래 동네집에 가서 돈 400원을 꿔서 며느리 손에 쥐어주면서 흑백텔레비전이라도 사라고 했다.그러면서 어머니는 우리가 송편을 부지런히 빚어서 시장에 내다 팔고 또 아버지가 야근을 하니 인츰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이 세상 모든 부모들은 오직 자식이 잘 자라기를 바라고 자식이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부모에 대해 한마디 더 하겠다.아버지가 문화대혁명시기에 역사반혁명으로 취급되어 당시 고향에서 1호로, 매일 투쟁마당에서 매를 맞지 않으면 안되었다.그 세상을 지내온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른바 지주,자본가,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당권파,현행반혁명,역사반혁명 등 5류분자(당시는 분자라 했음)들은 마음은 물론 육체적으로도 매를 맞았다.   아버지가 매를 맞고 돌아온 날은 상가집이나 다름없었다.아버지는 워낙 술을 반가와 하는 지라 매를 맞고 돌아 온 뒤에는 동네 몰래 술로 마음을 달래고 이튿날에는 또 강제로 끌려나가 밭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당시에는 배갈이 금보다 귀하여 가문에서는 이리저리 수소문해 술을 마련하는 것이 거의 일과로 되었다. 그런데 술로서는 매맞은 육체적인 통증을 해결 하지 못했다.그래서 정통편(아스피린)을 밥먹다싶이 하면서 다소나마 통증을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이를 눈여겨 보던 나의 사촌 형수가 당시에 공사병원에 있다보니 챵퉁딩(强痛钉)이라는 통증제거 주사를 투여했다.그러자 통증은 간데온데 없어졌고 그 후부터는 챵퉁딩으로 아픈 육체를 달래면서 그 험악한 세월을 용케 지탱해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의 일이다.연길에 모셔 온 뒤에도 챵퉁딩에 인이 배겨 주사를 맞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마침 아내가 연변병원에 근무하면서 챵퉁딩을 구입해 투여했는데 그 챵퉁딩이 마약류로 분류되면서 엄하게 통제되는 바람에 챵퉁딩 공급은 끊어지고 대체 진통제를 대접했지만 인이 배긴 아버지의 육체를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러나 아버지는 챵퉁딩이라는 주사제가 마약류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며느리가 착오를 질 까봐 절때로 구입 못하게 딱 말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문화대혁명의 피해자로 후반생을 고통속에서 살다가 95년도에 75세를 일기로 저 하늘나라로 영원히 떠났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실 때 그 반가와 하던 챵퉁딩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 착오를 범할 각오로 구해 드렸더라면 그 얼마나 즐거워 했을까?하는 불효한 마음이 한구석을 늘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버지는 지금 저 세상에 있으면서도 아들,며느리가 착오를 범할 때까지 챵퉁딩을 공급하는 것을 절때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되돌아와 어머니 얘길 한마디 더 한다.어머니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그 혼란한 정국에 부모를 잃고 돐도 채 안되었을 때 성이 김씨라는 집에 안겨와 그 집에서 자라다가 쓰딸린 시기 고려인 강제이주(37년도)로 말미암아 중국으로 쫓기다 싶이 이주해 왔다.김씨가문의 소개에 따르면 어머니는 태어나자 얼마 안되어 부모가 세상을 떳는데 당시 어머니는 숨을 거둔 모친의 젖을 물고 있더란다.참으로 귀를 의심할 정도로 처참한 장면이라 하겠다. 고마운 것은 김씨 가문에서 어머니를 친 자식보다 더 애지중히 키우면서 소학교까지 졸업 시켰던 것이다.그래서 어머니는 50년대 문맹퇴치를 할 때 우리글을 가르치기도 했고 또 인민공사화 때 공공식당(당시는 온 마을이 함께 공공식당에서 끼니를 해결 했음)에서 경리 및 회계까지 맡아하는 등 당시 고향에서는.유식한 분으로 알려졌고 생전에 늘 책을 놓지 않았다.   내가 사업에 참가할 때부터 “니가 남을 도울 때는 백사장에 새겨라,남이 너를 도울 때는 돌에다 새겨라”( 백사장에 글을 쓰면 밀물에 의해 인차 흔적이 사라지기에 마음속에 두지 말라는 뜻)는 말씀을 늘 하셨다.당시에 그 의미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었으나 나이를 먹으면서 즉 50이 넘서야 그 의미에 대해,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삶의 도리를 깨닳게 된다.   오늘에 와서 어머니가 이 말씀을 나한테 늘 하게 된데는 김씨가문에서 애지중지 자랐다는 것을 잊지 않는 마음,또 잊을수도 없는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인간 삶의 철리의 말씀이라고 풀이된다. 부모를 비록 집에서 모시면서,또 집에서 운명을 시키면서 자식의 도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 불효한 마음이 늘 가슴을 치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살아 생전에 좀 더 편하게 해 드렸을 것을,살아 생전에 좀 더 용돈을 챙겨드렸을 것을,살아 생전에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을 것을,살아생전에 원하는 약을 챙겨드렸을 것을... ... 흑룡강신문  2014-7-14
38    타인에 대한 배려와 제도적인 장치 댓글:  조회:2142  추천:6  2014-06-06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 1989년도에 서울에 갔을 때 어느 방송국의 지인과 한자리에 앉았다.그 좌석에서 한 지인의 얘기가 떠오른다.   연변의 한 조선족이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1987년도에 한국에 정착을 했다는 것이다.그 친구가 하루는 자가용을 남의 집앞에 주차시켰다.주차가 문제시 되었다.주인은 다짜고짜로 신고해 당국에서는 그 승용차를 불법주차로 인정하고 대뜸 지게차로 끌어갔단다.그 조선족 친구는 이른바 어이가 없다는 사고로 그 집 주인하고 대판 싸움을 한 나머지 나중에는 도로교통조례에 따라 한화로 4만원의 과태료를 지불하고서야 이 사건이 마무리 되었단다. 굳이 설명하고 싶은 것은 당시 한화로 4만원을 중국돈으로 환산하면 4백원 가량(지금은 240원가량) 즉 당시의 중국인으로 놓고 볼 때 엄청난 돈이라 하겠다. 그 조선족 친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 사건을 하소연하더라는 것이였다.   지인은 “당연한 일이다.남의 공간을 무단적으로 침해 했으면 사과를 해야하고 과태료를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라고 자세하게 설명을 했단다.   요즘 연길시의 많은 가정들에서 애완견을 기르고 있다. 문제는 개의 주인이 어떻게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겠끔 애완견을 기르느냐 하는 것이다.즉 공중장소에서의 애완견 관리이다.   연변의 한 친구가 이런 하소연을 했다. 식당을 운영하는 한 사나이가 늘 장사 뒷끝에는 식당의 주변도 아니고 왕창같은 다른 세대가 살고 있는 아파트 정원에 개를 끌고 와서는 산책한다는 것이다.그런데 정원에 와서는 정자에 이른바 점잖게 앉아서 두시간 가량 개와 “한담을 하면서” 개의 털을 빗으로 자주 빗어준다는 것이다.   친구의 얘기에 따르면 손바닥에 올려놓고 재롱질 할 만한 애완견도 아니고 사자와 같은 서장의 장오와 비슷한 개를 아파트 정원에 끌고 와서 개의 털을 빗으로 싹싹 빗으니 그 개털이 어디로 날아가겠는가?고스란히 주민들의 창문으로 날려 들어온다는 것이다.그래서 한바탕 말다툼이 벌어졌단다.그러니 그 개 주인이 하는 말이 내가 여기 공간에 와서 개털을 빗어주는데 니가 뭐가 되어 나한테 걸고 드느냐 하면서 서로 삿대질 한 나머지 손찌검까지 벌어질 위험 수위에 놓였다.일이 이렇게 되다보니 아파트 노인들도 정자에 오길 꺼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정부차원의 아무런 제도적인 장치도 없어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이 주민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이렇게 어이가 없는 행실들이 지금 주변에서 매일마다 있고, 특히 요사이에는 날씨가 무더워 아파트 집들에서는 모두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는 터라 개털이 집에 날려 들 것이 뻔한 일이라면서 연변말로 “영 지금의 사람들은 별났습꾸마 남의 살피는 전혀 안봄다”라고 볼멘 소리로 하소연했다.   애완견 얘기가 나오니 한마디 더 한다.요사이 연길 부르하통하 유원지는 물론 공원 등에는 애완견을 끌고 산책하는 주민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물론 이런 곳에 애완견을 끌고 산책하면 안된다는 경고문이 버젓이 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로 되고 있다.지어 어떤 여인들은 애완견을 안고 식당 출입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한국은 벌써 30여년부터 유원지 혹은 공중장소에 애완견을 끌고 오지 못하겠끔 제도적인 장치가 완벽하게 되어있다.만약 이를 무시하면 과태료를 한화로 10만원을 내야 한다.   자가용도 마찬가지이다.요 몇년사이에 연길시에는 자가용이 부쩍 늘어나 도로를 꽉 메우고 있다.그러다 보니 주간도로는 물론 골목길마저 주차장으로 변해 길을 걷기가 상당히 불편하다.그럼에도 이렇게 불법 주차하는 행실에 대해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지 않다보니 행인은 물론 주민들도 속수무책이다 .
37    사랑과 신앙 댓글:  조회:2251  추천:6  2014-04-09
대학교 교수로 사업하는 한 친구가 있다. 지기지우인 그는 어느 하루 밤 10시에 전화를 걸어와 맥주한잔 하자고 청을 들었다.   자리를 마주하니 한참 물끄럼히 나를 쳐다보다가 우선 맥주 한컵 굽내자고 제안했다.이윽고 그는 말문을 열었다.   “내가 내일 저녁 상해행 비행기 편으로 전처를 만나러 가는데 그가 간암에 걸려 가 보는 것이 인간도리이지 않겠는가”고 말꼭지를 떼고나서 “후처가 내 모르게 우선 상해에 돈 만원을 보냈고 왕복 비행기표도 끊어놓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전처와 갈라지게 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전처는 대학교 동문으로, 졸업후 둘다 선후로 같은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서로간의 사랑이 잉태되면서 결국은 결혼에 이르렀고 아들 둘을 보게 되었다.비록 보잘것 없는 20제곱미터도 안되는 단칸방, 거기에다 월급도 높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지만 아이만은 열심히 키우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전처가 어느덧 하느님을 믿기에 이르렀고 신앙생활을 생활의 전부로 일상화 하다보니 아이에 대한 보살핌이 점점 식어가기 시작했고 따라서 남편에게 신앙생활을 함께 하자고 청을 들기를 밥먹듯 했단다.   이렇게 전처는 광신도가 되어 즉 도를 넘어 이성을 잃을 정도로 지나치게 종교를 믿는 바람에 부부간에 금이 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정을 이루어 세월이 10여년 흘러가면서 전처가 광신도로 변하는 바람에 부부간의 이른바 공통분모라는 색갈이 퇴색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식에 대한 사랑 더 나아가서는 가정생활은 그 의미가 식어가기 시작했다.신앙의 차이로 티격태각하는 일들이 비일비재이다보니 피곤한 가정생활 연장선이 끝이 보이지 않았단다.나중에 큰애가 9살,작은애가 6살 무렵 즉 94년도에 이혼이라는 선택이 그들의 눈앞을 가리웠다. 전처는 상해 모대학으로 사업전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전처는 아이를 잘 키워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단다.   그후 지금의 후처(대학교 교사)를 맞아들였는데 후처가 두 아이를 키워나갔다. 후처는 그 기간 남편의 권유에도 마다하고 아이를 낳지 않았고 전처의 애를 잘 기르면 그것이 바로 “내자식이 아니냐”고 했단다. 오늘 큰 애는 국가공무원으로, 둘째는 일본에서 사업하고 있다.   후처는 큰 애가 결혼할 때 “자기는 예단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전처에게는 반드시 예단을 보내야 한다”면서 가격이 2만8천원되는 명품가방을 보내기도 했단다.   친구는 이같이 얘기를 늘여놓으면서 “자식을 둘까지 낳은 전처가 신앙의 차이로 갈라졌지만 아이를 낳는 그 순간의 고통은 여성으로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 아니냐”며 “이혼할 때는 그렇게도 미웠는데 오늘에 와서 암에 걸렸다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혹여 당시에 내가 나의 신앙을 버리고 전처의 신앙을 따랐다면 그가 오늘에 와서 간암에 걸리지 않았을런지?”하면서 자책감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알고 있었다. 광신도라 해서 암에 걸린다는 법은 없다는 것을 ...   그의 얘기를 듣고 나서 이것이 바로 인간 본연지성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참으로 인간 본연의 기본 룰을 이실직고 하는 그 친구가 더 돋보였다. 흑룡강신문 4월 9일자  
36    훈춘시 택시요금 1킬로미터 10원? 댓글:  조회:1719  추천:1  2014-02-18
15일 오후 4시30분경,훈춘시 버스역에서 택시에 탑승,훈춘영극원으로 가자고 하니 요금이 10원이란다.시비걸 생각도 없어 안 탄다고 내려 다른 택시를 잡았다.또 10원이란다.기분이 언짢아 버스역 대문으로 걸어나와 다시 택시를 불러 영극원으로 가자고 하니 10원 달라는 말이 없이 타라고 했다.훈춘시 택시 기본요금이 5원이라는 걸 필자는 안다.   훈춘 버스역부터 영극원까지의 거리는 1킬로미터도 안된다고 알려주고 있는 훈춘시 정선생은 “양력설,음력설 연휴, 훈춘시 택시운전수들이 무조건 10원을 요구하니 꼭 흥정하고 앉아야 한다”고 알려주면서 “이미 정월대보름도 지났는데 훈춘시 택시는 이렇게 특히 외지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자고 잔머리를 굴리니 현지인으로서 부끄럽다”고 했다.   훈춘시 택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터기를 사용하지 않는다.훈춘시교통부문에서 규정지었는지는 몰라도 택시가 훈춘시내를 주행할 때 기본요금은 5원이다.연길시택시요금은 현재 2.5킬로미터를 기본요금으로 5원이다.   지난 한시기 연길택시가 손님한테 마구요금을 올리고 특히 공항에서 외지손님이거나 국외손님한테서 마구 돈을 뜯어내 몇천원씩 벌금하거나 지어는 운전면허증을 취소당하는 일이 생기고 나서 작년부터는 이런 추한 행실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그런데 손님한테서 택시요금을 마구 요구하는 추태들이 국제합작시범구 라고 일컷는 훈춘시에서 버젓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 한심하기를 짝이 없다.   알아본데 의하면 현재 훈춘시내 인구는 약 15만여명, 택시는 800여대라고 한다.시내 10여갈래 주,차간도로는 포장이 잘 되어있고 도로 량켠도 가로수들이 잘 정비되어 있고 또 새로 건설된 도시여서 산뜻하다.   택시는 한 도시의 문명을 가늠하는 창구이고 또 얼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훈춘시교통부문의 엄한 관리가 요청된다. 흑룡강신문 2월 18일자
35    중국 관광객들의 추태...조선족사회 거울로 삼아야 댓글:  조회:5687  추천:18  2013-11-19
      사람 됨됨이 안되면 반사회적인 인간으로 전략할 수도 있어        최근에 중국관광객이 이집트에서 문화재에 낙서 하면서 세계여론의 말밥에 올라 화제로 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외교부는 “관광객들이 외국 여행을 할 시에 반드시 현지 법률이나 문화를 지키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이와 관련 관광객들의 예의도덕 등 문명 관련 여러가지 지침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런 개명치 못한 행실들이 실지 중국내에서도 하루 이틀사이가 아니고 고질화 되고 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들에 가도 샌다’는 속담이 있듯이 국내에서도 아무데나 낙서하고, 아무데나 가래와 침을 뱉고, 줄을 서지않고, 새치기 하고, 큰소리로 떠들고, 길을 갈 때에도 옆사람을 전혀 돌보지 않고, 스스럼 없이 길복판에서 활개치면서 걷는 등 추태들이 일상화 되어 인젠 그저 ‘만성화’되어 보는 사람들의 ‘신경세포도 무감각 상태’에 들어선 것같다. 연길공원에 세워진 윤동주시비 낙서흔적   81년도의 일이다.필자의 한 선배가 국비로 (개방후 첫 외국국비장학생) 일본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마침 북경대학 부속병원의 한 의사(여성)도 국비로 함께 일본땅을 밟게 되었다.일본 도꾜에서 공공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그 북경대학 부속병원의 국비생이 새치기로 먼저 버스에 올랐단다. 선배는 그래도 예의를 지키느라고 줄을 서서 차에 오르자 먼저 오른 동료가 중국어로 큰 소리치면서 자리를 마련해 놨으니 빨리 자기곁에 와 앉으라는 것이었다.   승객들의 눈총이 일제히 자기들한테 쏠리더라는 것이다.   선배는 귀국한 뒤 이 얘기를 들려주면서 당시 자기의 얼굴에 모닥불을 씌워놓는 창피감이 들어 차마 승객들을 마주 볼 수 없었단다.   필자가 2003년도에 취재차로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인들의 예의를 피부로 직접 느꼈다.일본인들에게 이런 예의범절이 이미 고착화 된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고 물어보니 일본은 어린이 시절부터 철저한 예의범절 교육을 교과서에 주과목으로 설정하고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으면 바로 엄한 벌을 준다고 했다.또 예의범절은 일본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기초교육이라고 덧붙히는 것이었다.일본에서 이런 예의범절은 남을 배려하는 기본이다. 2002년11월에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조선과학원 창립 50주년기념행사차로 조선 평양에 간 적이 있다.방문단이 반도의 12대 명산중의 하나인 묘향산을 관광하게 되었다.당시 중국관광객 30여명도 묘향산을 관광하고 있었다.문제는 그 관광객들의 매너였다.깡통맥주에 소시지를 가득 갖고 올라가면서 길에서 맥주를 마시고는 이리저리 던지는가 하면 소시지도 껍질을 볏겨서는 마구 던지는 것이었다.더욱이 꼴사나운 것은 조선인들이 보란듯이 큰소리치면서 떠들석하는 추태었다.일종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자존심이 울컥 하면서 그들한테 다가가 중국의 어디에서 왔는가고 하니 베이징에서 왔단다.내가 당신들이 이렇게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되겠는가?더우기 지금 한창 고난의 년대를 극복하기 위해 안깐힘을 다하는 조선에 와서 이래서야 되겠는가고 질타했다.그러자 그들은 나한테 걸고 들 자세로, 나보고 누구냐고 하기에 내가 기자증을 내놓으면서 이미 당신들이 버린 깡통 등 쓰레기를 모두 카메라에 담았으니 버린 쓰레기를 다시 주으라고 했다.그러자 그들은 수긍하면서 버린 쓰레기를 줏기 시작했다.   나의 한 친구가 지난해(2012년)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박사학위를 취득했기에 아들 박사학위 수여식에 초청받았다.한번은 길을 걷다가 친구의 부인이 한 흑인을 앞질러 가면서 그의 옆구리를 툭 다치게 되었다.그러자 되려 그 흑인이 미안하다고 연속 사과하더란다.그 광경을 뒤에서 본 아들이 조용히 길을 걸을 때 절때로 활개치면서 걷지말고 더욱이는 앞질러 갈 경우, 좌우를 잘 살펴가면서 뭇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어머니에게 엿주었다.그러자자 친구의 어머니는 대뜸 열받아 하는 말이 인젠 네가 다 컸으니 어머니를 훈계하느냐 하면서 옥신각신 다투는 일까지 벌어졌단다.   이러루한 추태들은 한국에서도 비일비재이다.   필자가 1989년과 1992년에 제주도에 갔을 때 중국관광객이 없었지만 93년도에 갔을 때는 중국관광객들이 쌀에 뉘만큼 (물론 지금은 대부분 중국관광객) 있었다. 제주도의 한림공원에서 중국의 몇몇 관광객들이 벤치에 앉아서 팥빙수를 먹으면서 한 관광객은 웃통을 벗은 채 발톱을 깎는 것이었다.너무나도 어이없어 뭐라고 말이 안나왔다.   그런데 이러루한 개명치 못한 행실이 조선족사회 특히 재한 조선족사회에서도 만연되어 현지인들의 따가운 눈총 세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이미 한국 언론은 물론 조선족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되고 있다.   필자가 수시로 한국을 나들면서,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살펴보면 재한 조선족들은 지하철을 이용할 시 누가 중국에서 오지 않았는가고 이른바 ‘의심’할까봐 중국어로,큰 소리로, 자리가 저기 있다고 웨쳐대는가 하면 노인석에까지 스스럼 없이 털석 주저앉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무릇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지하철이 아무리 붐벼도 중청년들은 노인석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럼 왜 중국에서, 더욱이는 조선족사회에서 예절이 무색해지고 언어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남을 배려하는 미풍량속이 사라지고 있는가?   가장 근본적인 것은 교육이다.즉 학교교육은 물론 가정교육에서 의식적인 중시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더욱이 이미 이러한 행실들이 몸에 배겨 무의식적으로 자녀앞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어린이를 이끌고 공공뻐스에 오를 때 적지않은 부모들은 자리만 있으면 아이를 재촉해 빨리 앉으라고, 주위의 어르신을 먼저 앉으라고 권고하지 않는다.한창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바로 잘못된 것을 무의식적으로 가르쳐 준 것이다.밥상에 앉아서도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후손들이 수저를 든다는 예의범절,맛나는 음식이 있으면 우선 이상 분에게 권해야 한다는 예의범절 등등은 현재 조선족사회에서 많이 사라지고 있다.   우리말에 ‘세살 때 버릇이 여든 하나까지 간다’는 얘기가 있다.   조선족사회에서 예의범절이 급속하게 사라지게 되어 우리의 후손들이 이른바 ‘양반’ 행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필자가 분석하건대 이는 50년대의 반우파투쟁 인민공사화 공산운동,민족정풍,더나아가서는 문화대혁명시기가 최절정이라고 못박고 싶다.지금의 20대 30대 40대는 문화대혁명시기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의 자녀들 즉 지금의 50대 60대 70대의 후손들일 것이다.이들 50대 60대 더나아가서는 70대는 당시 한창 문화대혁명시기에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는 현장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머리가 쇠뇌되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그 여독으로 인해 후대들에 대한 최저의 인성교육을 시키지 못한데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학교자체가 아예 이한 예절교육을 홀시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람의 됨됨이가 안되면 부모를 존중하기는 커녕 이상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더 나가서는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사회에 늘 불만이 생기면서, 자칫하면 반사회적인 인간으로 전략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의학상에서 긍정되었다.이런 반사회적인 인간을 의학에서 ‘인격장애’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예절교육,공중질서,배려문화 등등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기초교육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거론해야 할 시기가 절박하다. 흑룡강신문
34    조선족전통문화 연변 기둥관광산업으로 부상해야 댓글:  조회:2058  추천:2  2012-08-09
        조선족전통문화 연변관광산업의 기둥산업으로 부상해야                윤운걸          관광산업은 제반 문화산업의 중요한 부분이다.   세계관광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관광산업의 경제적 규모는 이미 전 세계 GDP의 10%를 넘어서고 있으며 고용규모는 전 세계 고용규모의 8% 이상을 차지하고있다.   중국 관광산업의 부가가치는 GDP의 4%이고 관광산업에 직접 종사하는 인원은 1000만명이상에 달하고 간접 종사인원은 500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연변의 관광산업은 최근년간 급속도로 발전해 관광수입은 연변 GDP의 16.4%나 차지하고있다는 고무적인 수치가 나왔다.   조사한데 의하면 연변에 호텔이 41개, 려행사가 119개 있으며 작년에 연변을 다녀간 국내외 관광객은 연 858만여명으로서 관광수입은 109.1억원에 달했다. 특히 작년에 연 15만여명의 러시아관광객이 연변을 찾아 입국관광과 변경관광이 길림성에서 첫자리를 차지하고있다.   이는 1988년도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88년 통계에 따르면 연변에는 호텔이 불과 29개 있었고 총 침대수는 4244개였고 전부 3개 려행사가 있었을뿐이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4년사이에 연변에서는 국외관광객을 4996명을 접대했고 관광수입은 62만 9000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 오늘날 왜 연변에 이렇게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올수 있겠는가? 그것은 연변이 개방에 대한 인식이 차츰 높아진것이 주원인이라 하겠다. 연변관광국에 따르면 장백산이 바로 연변경내에 있고 중,조, 러 변경이 있으며 더우기는 연변에서 조선족전통문화를 잘 보존했기때문이다.   의심할바없이 연변의 조선족전통문화 숨결이 살아있지 못하면 관광객유치라는것은 한낱 종이장에서의 공론이 될수밖에 없다. 중국조선족 백년부락 도문시 월청진 백룡촌   연변은 중, 러, 조 변경과 린접해 있는 지역이다. 연변에서의 조선족전통문화의 생성과 보존은 이 땅에서 살고있는 조선족 선조들의 피땀으로 바꾸어온 결과라 하겠다. 그제날 망국의 설음을 안은 조선족은 두만강을 건너 이 땅에 정착했고 그들은 이 불모지 땅에 고유의 전통문화를 씨뿌려 놓았던것이다. 그것이 오늘에 와서는 관광산업에서의 밑거름으로 되였던것이다.   연변이 비록 오늘에 와서 관광산업이 연변경제의 주도산업으로 발돋음 하고있지만 문제점이 많다. 조선족전통문화의 진수를 맛보게 하려면 관광객들을 민속촌으로 안내해야 한다. 그런데 다년간 연변에서 민속촌 건설에 많은 자금을 투입하고있지만 조선족전통문화의 진수를 관광객들에게 알리기는 역부족이다.   이에 대해 리성남 연변 (B.O)환경예술미디어 유한회사 동사장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민속촌에 대한 이미지는 단지 조선민족 전통가옥에 조선민족 전통 한복을 입고 민족음식을 만들면 민속촌이 형성되였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아주 단순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다. 이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문화산업발전에 리롭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타민족, 타국민에게 진정한 조선민족전통의 진수를 보여주지 못하게 되여 그 의미가 날이 갈수록 빛바래지게 된다"고 일침을 가하고있다.   특히 연변의 전통문화의 진수를 관광객들에게 맛보게 하려면 연성환경에 문제점이 많다. 관광 가이드의 수준을 보면 대체로 조선족전통문화에 깊은 지식이 결핍하고 지어는 엉뚱하게 설명해 문제점을 양상하는 경우도 많다.   또 연변이 조선족집거구라 해서 한족에게 조선족전통복장을 입혀 안내를 하게 하는 해프닝도 있어 오히려 연변의 이미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므로 많은 관광객들은 연변에 와서 진정 조선족전통문화의 진수를 맛보지 못하고 그저 자연풍경이나 관광하고 저녁에는 노래방 등에 가서 여가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연성환경은 연변관광산업에서 큰 화제로 남고있어 절실한 대비책이 있어야 할것이다.   특히 연변을 다녀간 관광객 절대다수는 장백산관광을 주요 목적으로 했다는것을 명기해야 한다. 그런데 장백산 관할권을 이미 길림성에서 가져가다보니 장백산내 관광재정수입은 길림성재정에 흘러들어가는 상태이다. 따라서 과거 연변을 경유해야만 장백산을 관광할수 있는 기회는 이미 지나가고 지금은 연변을 경유하지 않고도 기타 다양한 코스로 장백산에 갈수 있기에 많은 관광객이 연변에 머무르지 않는것이 현실이다.   연변은 그제날의 이런 우세가 이미 렬세에 처해있으므로 연변의 관광산업흥기에 깊은 대책이 필수적일것이다.
33    민족간부, ‘이미지 정치’ 말아야 댓글:  조회:2685  추천:64  2011-03-24
민족간부, ‘이미지 정치’ 말아야  -윤운걸 론설원   3월16일자 중국신문사 보도에 따르면 습근평 국가부주석은 일부 지방 지도자들과 중앙 간부들의 “이미지 정치”행태를 비판하면서 일부 간부들이 당과 인민의 복지를 우선하는 대신 자기 이미지를 만들고 승진의 길을 확보하기 위해 업적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습 부주석은 또 문제의 간부들이 실제 효율 대신 겉으로 드러나는 공적과 화려함을 추구함으로써 인민들을 지치게 하고 재정을 축내는 “이미지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있다고 질책했다고 중국신문사는 보도했다. 습 부주석의 이 말은 허풍을 치고 업적을 부풀려 자기의 위상을 올리려는 조선족지도자에게도 일침을 가한 말이기도 하다.   아는 바와 같이 소수민족지도자는 그 소수민족지역의 경제발전을 리드하고 다그치는 선줄군이다. 그러나 현재 연변을 비롯한 소수민족지역의 경제발전은 중국내지의 경제발전에 비해 한창 뒤떨어져 있는데 이는 상급의 눈치나 슬슬보면서 부풀려 회보하는 추태들이 비일비재로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연변만 보더라도 지난 몇 년간 거액의 정부자금을 투입해 “이미지 프로젝트”로 각종 명목의 대형행사를 치렀는데 매번 취재해 보면 시민들의 참여도는 아주 저조하고 또 대량의 학생들과 시민들을 동원해 이른바 군무를 추면서 행사분위기를 돋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행사에는 이렇다 저렇다 할 실질적인 경제적인 효익은 없고 다만 정부에서 거둔 세금만 줄어들어 원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지 않는 현상”은 이미 오래되었고 조선족 인재는 “쌀에 뉘만하다” .민족의 지도자는 민족의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하는 “엄지손가락”이어야 한다.   우리 민족간부들은 한번쯤 가슴에 손을 얹고 습근평 국가부주석의 말을 잘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32    감사한 마음으로 현실에 임해야 댓글:  조회:3000  추천:37  2011-03-24
감사한 마음으로 현실에 임해야 윤운걸 조선족 한국행 잃은 것보다 얻은 것 많아 조국, 고국에 감사한 마음 가지는게 응당   의학상에서 한 민족이 어느 나라에서 50여년 이상 정착해 있으면 그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요소에 의해 유전자가 변이할 수 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설립된다면 조선민족은 중국 땅에서 유전인자가 변이할 수 있는 확률이 굉장히 높은 것이다.   실지 조선족 역사학자들이 몇백여년 전에 황하 유역에 이주한 조선민족을 고찰해 본 결과 그들의 언행은 기본상 주류 민족인 한족과 별반 다름없고 아주 미세한 생활상의 일부 이를테면 부엌이라든가 음식에서 조금 알수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개혁개방을 맞이하기 전 중국 조선족은 아주 폐쇄 된 공간에서 살아왔다. 이 폐쇄 된 공간이 그대로 100년 200여년을 이어져 갔다면 과연 조선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명한 일이 아닌가.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더욱이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 조선족은 한국으로의 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아주 감동스러운 역사적인 사변이라 하겠다. 이렇게 고국이라는 나라가 있기에 중국 조선족의 대한국 이동이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서 엄청난 부를 창조한 것은 물론 민족의 전통문화를 포함한 각종 문화를 재점검하게 되었고 따라서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청신한 공기'를 주입하게 되었다.   중국의 조선족은 한국 진출에서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다. 얻은 것이란 경제적 부를 제쳐놓고 역사 문화를 포함한 각종 문화를 많이 얻었거나 재삼 인식한 것. 그래서 일상을 살펴보면 한국에 가서 몇 년간 일하다 온 조선족은 비록 3D업종에서 일하다 고향에 왔다 하더라도 그들 몸에는 어느 새에 배었는지 일에 대한 집착, 언어 예절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회를 분석하는 모양새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참으로 역사적인 대이동에서 생긴 자랑스럽고 경의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잃은 것도 적지 않다. 즉 가정파괴, 자식교양문제 등등. 하지만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조선족이 역사발전 대이동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진통이라 하겠다. 단순히 대한국 이동으로 잃은 것만 거론하는 것은 너무나도 편면적인 견해라 하겠다. 바꾸어 한국이란 고국이 없이 중국 기타 지역에 진출하게 되면 이런 현상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고국이란 나라가 더 보살펴 주지 않는가 하는 원성이 높아간다는 것이다.   어느 국가든지 그 국가의 법이 있다. "동족이기에 보살펴야 한다"는 것은 민족차원에서 양심적으로는 통한다. 그러나 국가마다 그 국가의 법이 있으므로 양심으로 법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조선족은 분명히 한국인과는 동족이지만 중국 국민이기에 국제적인 법이 적용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엄연한 현실 앞에서 무턱대고 동족인 것만큼 반드시 보살펴야 한다는 것은 '어리광'행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 국가적인 규률을 무시하고 그 어떤 반한 감정을 갖고 한국을 빙자하거나 선량한 한국인을 비방한다면 기본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행실이라 하겠다.   감사한 마음가짐을 오늘에 와서 재삼 거론해야 할 것이다. 감사한 마음을 모르고 내가 응당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오늘의 글로벌 시대에 있어서 지극이 삐뚤어진 사고라 하겠다.   오직 감사한 마음 즉 고국 한국에도 감사하고 조국 중국에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현실에 임해야 조화로운 중한 관계에서 조선족은 자기의 위치를 제대로 찾을 것이다.
31    그는 작가 교수로 되기전에 인간이었다 /윤운걸 댓글:  조회:2836  추천:54  2011-01-25
그는 작가 교수로 되기전에 인간이었다             -고 유연산 교수의 명복을 빌면서  (흑룡강신문=길림성) 윤운걸 특파원 = 중국조선족 문단에서 하나의 별이 졌습니다. 아니 그는 다시 샛별로 태어나서 지구촌을 멀리하고 있는 저 우주라는 하늘나라에 가서 지구촌이라는 이 동물세계의 사실들을 새로운 별로 낱낱이 밝히려고 일찌감치 갔던 것입니다. 작가이자 연변대학문학교수인 유연산 씨가 1월 22일 오후 3시 37분 병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55세를 일기로 지구촌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갔습니다. 구슬픕니다. 그래도 이 인간세상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는데 '복'을 누리려고 먼저 "나는 갑니다" 라고 미리 떠난 유연산 씨, 그래 먼저 가는 것도 낭패는 없을 것입니다. 유연산 씨, 암이라는 병에 걸렸을 때 저한테 메일이 온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제가 자네 한테 메일 보냈습니다. "자네 암하고 대화하라... 네가 만약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데 지속적으로 괴롭히면 나도 어쩔수 없다"고... 그래서인지 자네가 집필한 "최채 씨의 인물평전기념출간회 및 유연산 작품세미나"가 작년에 연변대학에서 있을 때 마지막 답사로 한마디 얘기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절때 나를 이렇게 보낼 것이 아니오니 이제 몇 년을 더 살겠다"고 얘기 했지. 그런데, 그런데 자네는 이미 이 세상의 부조리를 채 뽑지 못한채 떠나갔습니다. 이런 악마와 부조리가 이 세상에서 살판 치다 보니 자네는 암이란 악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구중천을 가지 않았겠습니까! 자네는 그젯날 , 1996년도에 한국의 초청사기 사건으로 중국동포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때 붓을 휘날리며 얼마나 호소적인 글들을 펴냈는지, 저 뿐만아니라 피해자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네가 사람이기 전에 인간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우광훈 작가가 한마디 들려준 얘기가 있습니다. 자네가 모 국가에서 온 한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현금을 지참해 갖고 오라고 했을 때 우광훈 작가는 이 사람은 바로 인간이구나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자네가 나와 함께 조선 칠보산을 동행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네는 소금을 엄청나게 갖고 갔습니다. 나는 자네의 행실에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상대방이 빛과 소금을 그 얼마나 바라겠는가를 ... 자넨 우리민족을 위해 이주, 황무지개간, 항일, 해방전쟁, 문혁전 및 개방시기의 피어린 발자취를 찾아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흑룡강지역을 중심으로 동북 각지의 수십개의 민족향촌을 답사하여 "혈연의 강들", "삼인삼색의 운명”등 민족역사 기록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작품을 펴냈으며 민족역사의 거목들인 심여추, 류자명, 최채 등 인사들의 전기를 집필하여 민족정체성 고양과 민족문화의 창고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을 뭇사람들이 이제야 알 것입니다. 자넨 또 연변인민대표대회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글지키기와 조선족문학지키기에 동분서주 심혈을 기울여 왔습니다. 특히 중국조선족 글 지키기에서 당면하에 한글을 빨리 습득해 고국과의 거리를 좁히라고 연변인민대표대회에 드린 제안은 중국조선족이 한국을 대함에 있어 얼마나 좋은 제안인지를 유지인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추모식에서 자네의 큰 아들이 가족을 대표해 답사를 잘 했습니다. "이제 다시 태어나서도 유연산 아버지에게서 태어나겠습니다"라고. 난 그 가족답사를 듣고 눈물이 앞을 가리워 그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애수에 잠겼습니다. 한 사람이 가정세대주로서 자식들한테서도 이렇게 존중과 사랑을 받는 인간이고 사회에서는 이렇게 불효와 비리 그리고 부조리에 목숨걸고 싸운 사람은 이 세상에 흔치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아닌 인간입니다. 자넨 생전에 나와 늘 얘기했습니다. 조선족에 도움이 되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은 게을리 하지 말자고... 고 유연산 씨, 천국에 먼저가세요, 거기에 가서 내 자리를 잘 마련해주세요. 고 유연산 씨 만약 내가 이 세상에서 불의에 물젖어 인생을 허무하게 지냈다면 자리를 마련해주지 말아야하고 또 자넨 마련해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고 유연산 씨 집에 두 아들을 잘 키웠습니다. 그 두 아들이 자네가 다하지 못한 일을 잘 마무리 할 것이오니 부디 저 하늘나라에서 다리를 쭉 펴고 이 세상을 굽어보세요. 당신이 한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도 살만하다"고. 고 유연산 씨, 지기지우로 이렇게 글을 보내옵니다. 부디 저 하늘나라에서 한글자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읽어주십시요. 2011년 1월24일 연길에서
30    새해에 재한 중국동포들에게 부치는 글 댓글:  조회:1968  추천:53  2011-01-17
새해를 맞이하면서 지난 22일 한국 법무부 출입국ㆍ외국인 정책본부에 따르면 단기, 장기, 불법 등을 모두 합한 중국인 체류자가 10월 말 59만7천여명에서 11월 말 60만6천408명으로서 그중 조선족중국동포 40만4천여명을 기록했다.   재한조선족동포 40여만이라는 숫자는 현재 중국의 200만 조선족동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는 얘기다. 이들 대부분은 빚지고 정든 땅과 그리운 고향 그리운 부모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피눈물을 흘리며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건너간 동포들이 아닌가?   그런데 요즘 언론에서 자주 좋지 않은 소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안타깝다. 공공연히 마작판을 벌리고 도박을 일삼는 조선족동포들이 있는가 하면 술마시고 싸움질 하는 동포들도 있고 심지어는 술김에 살인하는 조선족들도 있어 굉장히 충격적이다. 이런 사건들을 고향에 있는 부모 친척 자식들이 들으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고향에 있는 부모 친척들은 그래도 한국에 가서 열심히 돈을 벌어 송금을 학수고대할 것이다.   필자가 몇차례 한국취재를 가보니 최소한의 한국의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일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한국 영등포 대림동만 보더라도 조선족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다. 거기에 가면 좁은 거리마다 식품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있는데 간판은 중국어로 된 것은 물론 식품도 중국의 식품들 이를테면 중국산 술, 중국산 건두부, 중국산 오리구이 등등 마치 중국의 식품가게를 옮겨놓은 감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재한 중국조선족을 상대로 한 식품가게들이 틀림없다. 문제는 거기에 임시로 살고 있는 조선족들의 행실이다. 밤중이 되면 술마시고 마치 제 세상인듯 고성방가하고 아무데나 노상방뇨하고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는 현상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몸에 배인 아주 나쁜 습관이 한국에 가서도 그대로 재현되니 한국 현지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러할진대 현재 중국에서 살고 있는 부모, 친지, 배우자들은 얼마나 큰 근심을 하겠는가 하는 것을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차분히 생각하기를 바란다.   한번의 실수가 일생을 망치듯이 바라건대 저 멀리 타향에 갈지라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고맙겠다.   그리고 한국에 간 조선족동포들은 단순히 일에만 집착하지 말고 고국의 선진문화, 선진기술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아주 바람직한 행실일 것이다. 오직 그래야만 고향에 돌아와도 앞길이 확 트일 것이다.
29    인정과 사정에 대한 단상 (윤운걸) 댓글:  조회:3548  추천:64  2010-11-10
인정과 사정에 대한 단상 윤운걸 본사 연변특파원   "동족으로서의 인정은 통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사정도 이해해야"   인정이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온갖 감정"이고 사정이란 여러 가지 명사로 해석되지만 필자는 사정이란 단어를 "일의 형편"이란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 글을 전개하려고 한다.   조선반도의 동포들은 물론 중국조선족도 백의민족으로서, 온갖 감정을 갖고 있는 민족으로 남을 즐겨 돕는 민족으로 정평이 나 있다. 중국조선족은 망국의 설움을 지니고 이 땅에 와서 각종 어려움을 이겨내며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맑디 맑은 인정세태가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족내부는 물론 타민족이 아픔이 생겼을 때에도 가장 먼저 앞장서는 것이 바로 조선족이었다.   멀리 얘기하지 말고 필자가 연변에서 장기간 취재했을 때 매년 중국인민해방군 8.1건군절이면 각 가두의 조선족 아줌마들이 손수 부대를 찾아가 배추김치를 담아 준다든가, 위문품을 손수 가져다준다든가 하는 것은 그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족에게 있어서 이런 인정을 사정에까지 몰고가는 행실이 있어 안타깝다.   오늘날 중국조선족의 대이동에서 한국이라는 고국에로의 이동이 가장 많고 그에 따르는 부도 많이 쌓았다. 그것은 바로 중국조선족 조상의 고향이 바로 한국(조선)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물론 오늘날 글로벌 시대에서 무한한 욕구는 금물이다. 무한한 욕구가 생기면 남의 이익을 해치게 되는 것이고 남의 이익을 해치면 궁극적으로 자기를 망치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무한 욕구를 유한으로 절제하겠는가? 한마디로 '고마운 마음'가짐이라고 본다.   한국으로 놓고 볼 때 같은 민족으로서 인정은 통하지만 국가 대 국가, 국가 대 민족에 있어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재외동포, 특히는 재중동포들에게 있어서 정책이 많이 변하고 있는데 이것도 한국정부가 자체의 사정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니 이해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우리는 반드시 한국도 정책제정에서 기본 룰이 뒷받침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중국에는 주류민족인 한족을 제외하고 55개 소수민족이 있는데 국가적으로 볼 때 이런 소수민족을 배려하는 것은 인정에서도 있겠지만 더욱이는 사정에서 오는 배려로 봐야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960만평방킬로미터에서 40여%나 되는 땅을 8%로도 안되는 55개 소수민족이 차지하고 있으니 이런 사정에 의해 민족정책을 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민족분쟁이 생길 것은 불 보듯 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1989년도 즉 중한수교가 이루어지기 전 3년 전에 홍콩을 경유해 한국에 갔을 때 제주도에서 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중국에서 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도 반기면서 좋은 음식은 골라서 나한테 차려주고 심지어는 제주 앞바다를 직접 안내하면서 사진도 찍어주고 생선회도 사주어 너무나도 고마웠다. 당시 나는 같은 동포이고 또 중국에서 왔다고 하니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구나 하고 동족으로서의 감동을 금치 못했다.   2박3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 할머니는 손수 시장에 가서 해물을 사다가 해물 전골을 끓여놓고 나를 대접했다. 오가는 이야기 중 그 할머니는 자기의 남편이 '6.25'전쟁에서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가슴이 섬뜩했다. 그도 수많은 조선족들이 이 전쟁에 가담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은 중국조선족들의 문제가 아니니 우린 중국동포들을 다른 눈길로 봐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할머니의 얘기로는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이 중국의 그 당시 사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했으니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인정과 사정에 대해서 유식하게 설명하는지 참으로 송구스럽기만 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나가는 인정세태가 아니겠는가?   굳이 한마디 첨부하고 싶은 것은 중국정부는 대한국정책에 있어서 중국정부의 사정이 있고 한국은 대중국정책에 있어서 한국정부의 사정이 있기에 중국조선족은 이런 각자의 사정에서 중한관계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해야 함이 바람직하다.
28    조선족 한국행 잃은 것보다 얻은 것 많아 댓글:  조회:2080  추천:60  2010-03-26
 의학상에서 한 민족이 어느 나라에서 50여년 이상 정착해 있으면 그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요소에 의해 유전자가 변이할 수 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설립된다면 조선민족은 중국 땅에서 유전인자가 변이할 수 있는 확률이 굉장히 높은 것이다. 실지 조선족 역사학자들이 몇백여년 전에 황하 유역에  이주한 조선민족을 고찰해 본 결과 그들의 언행은 기본상 주류 민족인 한족과 별반 다름없고 아주 미세한 생활상의 일부 이를테면 부엌이라든가 음식에서 조금 알수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개혁개방을 맞이하기 전 중국 조선족은 아주 폐쇄 된 공간에서 살아왔다. 이 폐쇄 된 공간이 그대로 100년 200여년을 이어져 갔다면 과연 조선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명한 일이 아닌가.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더욱이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 조선족은 한국으로의 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아주 감동스러운 역사적인 사변이라 하겠다. 이렇게 고국이라는 나라가 있기에 중국 조선족의 대한국 이동이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서 엄청난 부를 창조한 것은 물론 민족의 전통문화를 포함한 각종 문화를 재점검하게 되었고 따라서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청신한 공기'를 주입하게 되었다. 중국의 조선족은 한국 진출에서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다. 얻은 것이란 경제적 부를 제쳐놓고 역사 문화를 포함한 각종 문화를 많이 얻었거나 재삼 인식한 것. 그래서 일상을 살펴보면 한국에 가서 몇 년간 일하다 온 조선족은 비록 3D업종에서 일하다 고향에 왔다 하더라도 그들 몸에는 어느 새에 배었는지 일에 대한 집착,  언어 예절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회를 분석하는 모양새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참으로  역사적인 대이동에서 생긴 자랑스럽고 경의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잃은 것도 적지 않다. 즉 가정파괴, 자식교양문제 등등. 하지만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조선족이 역사발전 대이동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진통이라 하겠다. 단순히 대한국 이동으로 잃은 것만 거론하는 것은 너무나도 편면적인 견해라 하겠다. 바꾸어 한국이란 고국이 없이 중국 기타 지역에 진출하게 되면 이런 현상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고국이란 나라가 더 보살펴 주지 않는가 하는 원성이 높아간다는 것이다. 어느 국가든지 그 국가의 법이 있다. "동족이기에 보살펴야 한다"는 것은 민족차원에서 양심적으로는 통한다. 그러나 국가마다 그 국가의 법이 있으므로 양심으로 법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조선족은 분명히 한국인과는 동족이지만 중국 국민이기에 국제적인 법이 적용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엄연한 현실 앞에서 무턱대고 동족인 것만큼 반드시 보살펴야 한다는 것은 '어리광'행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런 국가적인 규률을 무시하고 그 어떤 반한 감정을 갖고 한국을 빙자하거나 선량한 한국인을 비방한다면 기본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행실이라 하겠다. 감사한 마음가짐을 오늘에 와서 재삼 거론해야 할 것이다. 감사한 마음을 모르고 내가 응당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오늘의 글로벌 시대에 있어서 지극이 삐뚤어진 사고라 하겠다. 오직 감사한 마음 즉 고국 한국에도 감사하고 조국 중국에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현실에 임해야 조화로운 중한 관계에서 조선족은 자기의 위치를 제대로 찾을 것이다.
27    두만강지역- 세기의 새로운 전성기 맞을것 댓글:  조회:2903  추천:73  2009-12-01
두만강지역 - 세기의 새로운 전성기 맞을것윤운걸 흑룡강신문 길림성특파원두만강지역개발 지방으로부터 국가차원 프로젝트로 승격각 국가간의 저차원 협력에서 고차원 협력으로 전환해야  2007년 9월, 길림성에서는 처음으로 장춘-길림-두만강개발개방 전략에 관한 전망계획 구상을 제기, 올해 11월 17일 국무원은 '장춘-길림-두만강지역을 개발개방선도구로 하는 중국두만강지역합작개발전망계획 요강'을 정식으로 비준하면서 장길도개발개방 선도구건설이 국가 전략프로젝트로 승격됐다. 두만강지역개발을 국가전략으로 승격시킨데는 어떤 력사적인 의미가 있고 그에 따르는 일련의 문제들이 어떻게 풀어지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기자는 지난 11월28일,두만강지역개발 프로젝트가 나오면서 시종 두만강지역개발 연구를 진행해온 연변대학경제관리학원 박승헌교수를 인터뷰했다. 두만강지역개발이 더딘 주원인은 국가간의 통로가 원활하지 못한것이다 1991년 10월15일부터 21일까지 조선 평양에서 유엔개발계획서(UNDP)주최로 두만강지역 개발회의를 개최하고 유엔 두만강지역개발서는 보고서를 발표, 이 보고서의 핵심은 두만강지역개발 계획은 중국 훈춘-조선 라진 선봉, 중국 훈춘-러시아 포시예트를 련결하는 소삼각지역의 1000평방킬로미터의 개발이다. 이로써 두만강지역개발이란 새로운 프로젝트가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6년도에 유엔개발계획서는 두만강지역개발의 주도적인 위치를 협조라는 위치로 자리를 바꾸었다. 즉 각 국은 각자가 자기개발을 한다는것이다. 훈춘은 중국에서 변경지역이고 라진 선봉은 조선에서 변경지역이며 또 중국 변경과 마주하고 있는 자르비노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지역도 러시아로 놓고보면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변두리 지역이다. 유엔개발계획서에서 이 프로젝트를 내오면서 중국의 지방 즉 연변을 위주로 하는 길림성에서 선도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연변지역에 인민페로 50억원을 투자해 기초시설개조에 들어갔으며 1991년도에 '항만을 건설해 출해'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항만이란 조선 라진항과 러시아 자르비노항이다. 그러나 항만은 바로 조선과 러시아에 속해 있으므로 중국측에서 항만건설은 운운할 여지가 못되였다. 1992년 길림성은 또 '항만을 빌어 출해'한다는 전략으로 바꾸게 되였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중국 훈춘- 조선 라진- 한국 부산을 잇는 륙해통로, 1998년에는 중국 훈춘-조선 라진-일본 아끼다를 잇는 륙해통로, 2000년에는 중국 훈춘- 러시아 자르비노-한국 속초를 잇는 륙해통로 개발이 시작되였던것이다. 이렇게 동해로의 진출은 초보적으로 실현했지만 각국간에 '통하지만 원활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국내적으로는 지방정부에서 이 프로젝트를 실시하려고 추진했지만 지방정부와 주변국가간의 문제 해결은 한계가 있게 되였다. 즉 통로문제에서의 허다한 문제들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해결하기 힘들게 되였다는것이다. 특히 문제시 되는것은 원활한 륙로통로이다. 즉 중국 훈춘 권하로부터 조선 라진으로 가는 륙로건설을 민간업체에서 주도하려고 했었지만 자금난,국제적인 대환경 등의 원인으로 그 건설 폭이 한계가 있게 되였다. 기업이란리익 창출을 주목적이기에 도로건설도 좋고 부동산건설 등은 모두 장래의 리익 창출을 꾀하는것이 기본이다. 또 러시아를 잇는 륙로 즉 훈춘으로부터 자르비노까지 통하는 륙로에서 통관문제가 원활하지 못했고 훈춘 장령자까지 러시아를 잇는 철도도 이미 부설된지 오래지만 아직까지도 통차하지 못하고 있다. 그 주원인은 훈춘 장령자 건너편 러시아의 통상구와 훈춘으로부터 자르비노까지 가는 건너편 통상구는 국가 1급 통상구가 아니고 모두 2급 통상구 즉 공무통로이기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륙로통로, 철도통로,통관 등 허다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굉장히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었다. 또 두만강지역개발에서 두만강하류에 항만을 건설함으로써 '동방의 로테르담으로 부상'시키려고 하는 전략도 수포로 돌아갈수밖에 없었다. 지리적으로 보면 중국 훈춘시 경신진부터 두만강하류에 위치해 있는 방천까지 15킬로미터인데 중국 측에서의 이 륙로 건설은 문제시 안되지만 두만강하류는 조선에 위치해 있기게 항만건설에서의 국제적인 대환경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 훈춘 권하통상구를 거쳐 조선 원정리부터 라진까지의 약 60킬로미터 도로건설에서 길림성은 그제날 400만원의 자금을 투입키로 했지만 이 구간의 도로를 건설하자면 억을 넘는 자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통로는 반드시 국가 대 국가 즉 중국정부와 조선정부, 중국정부와 러시아정부 간의 협력이 안받침되여야 한다는것을 오늘날에 와서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다. 그제날 길림성정부는 '도로,항만, 세관'일체화를 제시했지만 러시아측의 통상구는 1급 통상구가 아니고 2급통상구이므로 반드시 1급통상구로 격상되여야 두만강지역개발에서의 통로가 원활해 질수 있다. 2006년도에 길림성에서는 '도로,항만,구역'일체화란 프로젝트를 내왔다. 즉 도로란 훈춘의 권하통상구 건너편 조선의 원정리부터 라진까지의 도로이고 항만이란 조선 라진항을 말하고 구역이란 라진항 4호부두 주변의 중국 공업단지건설이다. 이렇듯 각국간은 고차원의 협력이 아니였고 아주 낮은 저차원의 협력이였기때문에 두만강지역 개발에서 각 국가간의 저차원 협력은 고차원의 협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 중국측에서는 장춘으로부터 훈춘까지의 고속도로 건설을 다그치고 있고 또 러시아와 린접해 있는 훈춘시 장령자까지 철도 부설을 완료한 상태인데 이는 두만강지역 개발에서의 중요한 대동맥의 하나이다. 이런 대동맥이 조선은 물론 러시아 더 나아가서는 일본까지의 원활한 해상 대동맥 즉 동해로의 원활한 흐름이 이어져야 두만강지역개발이 본격적으로 실시될수 있는것이다. 장길도 선도구 건설은 두만강지역 개발의 중요한 일환 이런 두만강지역개발의 원활한 대동맥의 흐름이 안받침되는 기초상에서 국내로는 폭넓은 지역건설이 안받침되여야 하는데 바로 장-길-도 선도구 건설이 중요한 일환이라는 인식이다. 연변은 두만강지역 개발에서의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연변의 경제 총량은 아주 적기에 투자유치에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로 보아 이번에 국무원의 장-길-도개발개방 선도구 프로젝트는 동북진흥의 아주 중요한 일환으로서 경제건설의 새로운 전성기가 다가옴은 확실시 되고 있다. 그제날 두만강지역개발의 진전이 빠르지 못한 다른 한가지 주원인은 바로 중국내로 보면 지역적인 경제발전이 한계가 있었기때문이다. 동북아경제협력의 중요한것의 하나는 중부지역 즉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인데 연변을 작은 지역이라면 장-길-도는 바로 중부지역이다. 이 중부지역의 건설을 선도구로 하게 되면 '플랫폼'이 형성되여 자연히 경제 총량이 늘어나고 경제 총량이 늘어나면 외자가 몰려들게 될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개발에서의 외자가 흘러들어오게 되면 종합협력 플랫폼이 형성된다는것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동북아지역 경제협력에서 훈춘은 창구이고 전초기지로는 바로 두만강지역이며 장-길-도 선도구 건설은 두만강지역 개발의 새로운 성장기회를 가져다주는 절호의 기회이다. 오직 장-길-도를 선도구로 발전을 가져와야 중국에서의 두만강지역개발에서 플랫폼을 마련할수 있다. 비록 그제날 두만강 지역개발은 그 진전이 느렸지만 혜택을 본 지역은 그래도 훈춘시라 할수 있다. 훈춘시는 이미 돈화시의 재정수입을 초월했고 앞으로 연길시를 초과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훈춘시 거리마다 간판은 많이는 러시아어를 병행했는데 매일 400여명의 러시아인이 훈춘시에 온다고 한다. 이들이 비록 대부분 소무역상들이지만 많은 돈을 훈춘에서 쓰고 있다. 또 훈춘시에 많은 외자가 속속 진입하고 있어 재정 총량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길림성은 이미 두만강 개발 선도구의 해상 관문인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에 100억원을 투자해 2016년까지 동북아변경무역센터를 세우는 한편 훈춘-길림 고속도로 등 기반시설 확충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 고속도로는 명년에 통차 예정이다. 또 장-길-도 선도구를 2020년까지 개발해 장춘과 길림, 두만강일대 3만평방미터를 동북아 물류의 전진 기지로 개발하게 되면 동북아개발에서의 플랫폼이 형성된다. 이번 취재를 마치면서 두만강지역 개발은 반드시 국가적인 국제정치외교 차원에서의 소프트웨어 환경개선을 가져와야 관련국의 소극적인 태도를 전환시킬수 있고 플랫폼인 장-길-도 선도구 건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두만강 지역을 개발로 조선의 라진항 항로건설이 본격화 될수 있으며 그러면 한국과 조선, 러시아, 일본 등과의 교역을 확대하는것은 시간상 문제이다.
26    조선족 여성들의 혼인관 변화 댓글:  조회:2834  추천:61  2009-08-10
30년내 조선족 여성들 혼인관 변화 기형적 기형적 혼인관, 민족사회발전에 부작용 (흑룡강신문=하얼빈) = 조선족 여성들의 혼인관 즉 배우자 선택이 특정된 시기에 따라 완연히 다르게 나오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회고 할 때가 왔다고 본다. 필자는 중국에서 가장 특정된 정치운동 즉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청춘기에 들어서기 시작했기에 그 이후부터의 조선족 여성들의 배우자 선택에서의 경향성을 돌이켜 보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유치함을 느끼게 된다. 문화대혁명이란  이 정치운동시기 제반 중국사회는 물론 조선족 젊은이들의 혼인관에 엄청난 기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이른바 지주, 역사 반혁명, 위만간첩(당시 특무라 했음)혹은 위만경찰,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당권파, 현행 반혁명, 고린내 나는 아홉째(지식인) 등을 통 털어 "오류분자"라 했다. 즉  잡귀신이라고 딱지가 붙혀 졌는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취급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자녀들도  무릇 그 총명과 재질 여하를 불문하고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다. 하여 이런 부류 가정의 아들은 아예 장가를 갈 엄두도 못냈고 또 빈하중농 집의 딸들은 그런 집을 왼눈으로도 보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이른바 "잡귀신 가문"에 시집 갈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성이 짙었다 .아울러 이른바 “잡귀신 가문”의 딸들도 시집이란 것은 엄두도 못냈다. 그러나 시집은 가야 할 것이어서 일부 처녀들은 한평생 장가가지 못한 한족에게 시집가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의 조선족 여성들의 혼인관은 대체로 가정배경 즉 무산계급 가정이냐, 자산계급 가정이냐 하는 이 정치적 시금석에 의해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대혁명이란 이 정치운동이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조선족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상은 바로 군인이었는데 군인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 주요 배경은 군인은 무산계급정권 수호자라는 데서이고 또 일단 제대되면 국가적으로 직업 배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째 순위고 버금으로는 노동자(당시는 공인이라 했음)였다. 일단 노동자에게 시집가는 것을 군인 외의 최고 선택으로 여기는 경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이 지난 뒤에 얼마 되지 않아 공농병대학생 모집에 이어 77년도부터 본격적인 대학생 모집이 있었는데 그 시기의 조선족여성들은 점차적으로 군인 혹은 노동자를 제쳐놓고 대학졸업생들에게 시집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조선족 여성들에게 또 다른 혼인 가치관이 생겼다. 즉 돈을 많이 버는 총각 혹은 많이 벌수 있다고 판단되는 총각을 선택하는 경향성이 짙었다. 특히 중한수교가 이루어 지면서 수많은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인을 선호하는 경향성이 매우 짙었는데 그 내면에는 한국인은 모두 잘 사는 사람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인에게 시집가면 길바닥에 달러가 깔려있어 허리아파 줏지 못할 정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성으로 인해 조선족 여성들이 대거 이른바 위장결혼이라는 결혼을 선택해 한국행을 택하기에 서슴치 않았는데 이로 인해 오늘까지 각종 사건들이 비일비재로 터져 나오고 있는 것 또한 오늘의 현실이다. 한국행을 위해 남편과 이른바 가짜이혼(법률상에서는 사실상 이혼)이 조선족사회에서 성행했고 그에 따라 가정이 파탄되고 또 자식의 미래가 암담한 등 불안정 요소가 오늘날까지 대두되고 있다. 물론 이는 부동한 역사시기에 있어서의 경향성이지 결코 모든 조선족여성들의 사고방식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런 조선족혼인 경향성을 결코 나무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역사가 이렇게 조선족 여성들의 혼인관에 먹구름을 던져 줬기 때문이다. 조선족 여성들의 혼인관 경향성을 세심하게 관찰하면 궁극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싶다. 즉 그젯날 계획경제시대에서 자란 조선족 여성들은 경제적 면역력과 성 면역력이 결핍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다. 이런 사랑이 경제적 가치관과 성 가치관의 혼돈으로 기형적으로 나간다면 과연 조선족사회의 건전한 가정관이 어떻게, 또 고유의 민족전통이 어떻게 세세대대로 이어나가겠는가? 심히 우려된다.
25    한 한국인 기자의 프로정신 댓글:  조회:3026  추천:84  2008-12-11
한 한국인 기자의 프로정신 —고 조계창 연합뉴스 심양 특파원의 명복을 빌면서 윤운걸 흑룡강신문 기자고 조계창 기자와의 최후 만찬 언론인의 가치중립적인 프로정신은 이 세상을 정화하는데 막강한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중국조선족 사회 더 나아 가 한(조선)반도를 비롯한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진 반일투사이며 예리한 붓으로 이 세상의 부조리를 파헤치고 또 “감히 황제를 말에서 끌어 내린다”고 “20세기 신화”라는 작품을 펴낸 고 김학철 선생은 임종 시에 "편안하게 살려거든 不義에 외면을 하라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조계창(72년생, 36살) 기자가 바로 사람답게 살기위해 不義에 도전한 한 한국인 프로기자이다.이런 에피소트가 있다.지난 9월달에 있은 일이다.중국개혁개방30년 성과보도 취재차로 훈춘시를 방문하게 된 조계창 기자는 연길에 도착한 뒤 나하고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제의했다.마침 필자도 훈춘시의 개혁개방 된 모습을 취재하려던 차 함께 동행했다. 훈춘시 선전부의 깔끔한 안내로 취재를 마친 뒤 훈춘시선전부에서는 되려 개혁개방의 변모된 훈춘시를 소개해준다고 고마워 오찬을 마련했다. 그런데 조계창 기자는 “이들의 시간을 허비했는데 반드시 오찬은 내가 마련해야 한다”며 굳이 만류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선전부측은 오찬이지만 성의오니 받아달라고 극구 청하기에 오찬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연길에 오면서 내내 훈춘시 관계부문에서도 참으로 외국인 기자의 취재를 열성껏 도와 나서고 홍보 관련 당국에서도 지방 이미지 제고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소프트웨어환경이 많이 좋아진다고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이번 12월2일 교통사고 전 조계창 기자는 필자에게 연길에서의 취재일정을 마무리 짓고 2일 저녁 항공편으로 심양에 가오니 1일 저녁에 함께 식사하자는 제안을 했다.뭘 먹고 싶으냐고 하니 “오늘 조선산 대게가 연길시에서 헐 값으로 팔리고 있는 취재를 했으니 대게를 먹자”고 했다.동행한 필자도 기자의 안광으로 분명히 지금 연길시에서 대량 팔리고 있는 조선산 대게의 신선도를 알려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대게로 만찬을 했다.식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그는 오늘 저녁에 본부에 송고해야 함으로 미안하다면서 우리 일행에게 천천히 식사하라면서 자리를 떴다.그 기사가 바로 그가 숨지기 전인 (중국시간으로 8시30분경)12월2일(한국시간으로 8시9분자로 “수출길 막힌 북한산 대게…中서 헐값 세일”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고 그 기사 또한 그의 마지막 중국에서의 소식이었으며 또한 그가 숨지기 전 필자와의 최후의 만찬이었다.고 조계창 기자의 “철저한 프로정신”에 내가 한창 선배이지만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해 본다.조계창 기자가 비록 중국땅에서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가 2년반(3년 근무,명년 5월 소환 될 예정) 중국 동북3성에 남긴 발자취는 실로 10여년 아니 20여년 발자취보다 더 값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하루가 일사천리로 변모되고 있는 중국 동북3성의 모습,중국사회 특히는 재중한국인과 조선족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연합뉴스라는 이 매체를 통해 신속히 전 세계에 알린다는 것은 사실 조계창 기자와 같은 프로정신이 없으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재삼 느끼고 있다.홍제성 연합뉴스 북경 특파원 12월5일자 보도에 따르면 중국 외교부는 12월 5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한 조계창 기자에게 애도의 뜻을 공식적으로 표시했고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대변인실 실장은 이날 조전을 통해 "우리는 조계창 심양 특파원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에 대해 깊은 비통함과 애석함을 표시한다"며 "조계창 기자는 중국 주재 기간에 사람에 대한 우의, 투철한 직업정신과 근면성, 객관적인 기사, 중국에 관한 공정 보도를 통해 중-한 양국 국민의 상호이해 증진과 중-한관계 발전을 위해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고 "조 기자의 가족에게 위로와 애도의 뜻을 전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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