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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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조화로운 중한관계에서의 조선족의 역할(윤운걸) 댓글:  조회:2874  추천:76  2008-10-16
조화로운 중한관계에서의 조선족의 역할윤운걸조화로운 중한관계가  국가 사이는 물론 중국에서 살고 있는 200만 조선족 그리고 중국에 진출한 59여만 명의 한국인으로 놓고 볼 때  더 말하지 않아도 굉장히 중요하다. 양국간에 불협화음이 생기면 양국의 이익에 큰 손해를 주는 것은 물론 조선족과 재중한국인 또한 재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큰 피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시점이다. 양국의 정상들이 올해 양국관계를 '전략적인 동반자'관계로 업그레이드 하고 있는 것은 양국정부는 물론 양국 국민들 사이에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데 그 의미가 굉장히 깊다. 그러나 요즘 이른바 혐한, 혐중 정서가 생기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래서 본사 미국LA지사와 길림성지사는 중국조선족이 대거 집거해 있고 또 조선족자치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연변에서 본사 연변지사의 주관하에 '조화로운 중한관계에서의 조선족 역할'이란 테마로 조선족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갖고 연변지역의 일부 학자, 교수, 언론인, 법률인, 문학인, 기업인 등 20명 인사들을 모시고 10월 6일에 연길시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혐한에서의 조선족사회가 갖추어야 할 자세 "중국 조선족사회는 그 누구보다 혐한현상의 심각성과 결과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박준덕 연변아리랑매체발전유한회사 이사장은 밝히고 나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혐한 현상이 발전하면 조선족사회의 경제, 생활, 사업 등 면에서 큰 영향을 초래하기 때문에 한국 혹은 한국인에 대한 비난과 불만만 토로할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문제와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선 쌍방의 도움은 상호간에 인식해야 한다. 즉 서로돕기 차원을 업그레이드 해야 한다. 사실 조선족은 한국에서 얻으려는 심리가 더욱 많다. 중한수교 16년래 조선족이 한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얻은 것도 많지만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들에게 진정한 인도와 봉사적인 도움이 결핍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정부는 외자유치에만 신경쓰고 또 민간단체에 후원자금에만 신경쓰고 한국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봉사와 봉착한 곤란을 해결해 주는데는 인색했다. 또 중국사회의 혐한 현상의 허와 실을 잘 파악하여 동민족이고 고국인 한국도 이해해주고 중국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절대 불붙는 데 키질하는 나쁜 행실을 자제하고 한국에서 생기는 일부 현상을 전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런 현상을 자제하자면 중국조선족들 사이에 화합이 잘 되어야 하며 조상 타령만 하지 말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질을 제고해야 한다. 조선족이 역할을 잘 하자면 중국 주류사회에 적극 진입해야 유연산 연변대학 교수는 "민간단체와 학자들이 구심점이 되어 주류사회 즉 한족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입해야 한다. 왜냐하면 조선족의 '친부모는 조선반도'이고 양부모는 '중국'이기에 한족사회와의 교류를 확대해 믿음을 가지게 해야 하며 또 한족들이 조선족사회를 알게하기 위해서는 전문 조선족사회를 반영하는 '중문 신문'을 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서봉학 연변중국생태문화발전추진회 부회장은 "민속발굴에서 보면 조선족의 뿌리는 조선반도에 있지만 여기의 민속자원을 개발하고 발전시키자면  한족간부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얼마 전에 연변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추진회를 설립했는데 한족인 중공연변주위서기 등개가 이 보고를 수렴한 후 이렇게 좋은 사업을 왜 지지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후에 곤란한 일이 있으면 제기하라고 하면서 자금도 지원해 주겠다고 선뜻 나섰다고 했다. 또 조선족 자원을 개발하는 텔레비전프로그램을 제작해 중문으로 번역해 중앙에 보내는 과정에서 자금문제가 봉착하니 바로 해결해 주었다고 했다. 조선족 민간외교역할을 잘하려면 우선 민간을 대표할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허명철 연변대학 교수는 "역사적으로 또 민족적 차원에서 중한관계를 진맥해 보아야 하는데 특히 간도문제, 고구려 문제, 문화재 등록 등 역사문제에 있어서 견해가 부동하다"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중한관계에서 조선족의 참여로 생기는 문제가 없는가 하는 것을 우선 잘 검토해야 할 것이다.중국의 차원에서 한국인과 중국조선족은 동일민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번 방문취업문제는 전적으로 중국 조선족을 위한데 있다. 한국 일부 브로커와 중국의 일부 조선족이 합작해 초청사기, 위장결혼 알선 법률위반 등 좋지 않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는 중한관계 더욱이는 한국과 조선족 사이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럼 중국 조선족은 중한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민간외교역할을 해야 한다.그러자면 힘을 단합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하고 뒷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부차원의 뒷심이 모자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은 힘이 미약하다. 문화적인 집단적인 작용이 적으면 민간외교작용도 활발하게 벌어질 수 없다. 현재 중국의 동북3성은 물론 산동, 베이징 등지에 각종 명목의 조선족 민간단체들이 아주 많지만 이런 민간단체들이 결집된 단체의 장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족사회가 풀어나가야 문제이다. 언론의 작용을 잘 발휘해야 장경률 연변일보 기자는 "중국에서 지금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데 이제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조화사회를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중한관계에서 잡음이 생길 수 있으며 앞으로도 또 새로운  정세하에서 다른 잡음이 생길 수 있는데 이는 필연적이다.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들이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한국문화를 중국에 적극 홍보하는 것은 조선족 언론의 책임이다. 서로간의 문화적인 이해는 조화로운 중한관계에서 아주 중요하다. 한국이 경제가 발달했기에 조선족의 위신도 높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은 진보적이고 선진적인 나라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덕분으로 조선족들이 잘 살게 된 것 만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개별적인 초청, 후에는 친척방문, 60세 이상 초청, 취업비자, 특종업초청발급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은 조선족들에게 편리를 도모해 주었다. 그러나 출국상황을 보면 지식층, 재력가, 권위층, 젊은이들은 한국에 간 비례가 적다. 돈 없고 살기 힘든 40대 안팎의 사람들이 대부분 출국한 것이 연변의 현실이다. 세계적인 구도로 볼 때 정치, 경제, 군사, 언론 이런 순이었는데 지금은 정치 다음으로 언론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언론을 몹시 중시하고 있어 언론의 힘이 커져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족언론에서는 정면적인 소식들을 많이 실어야 하고 또 언어문자면에서도 한국어를 빨리 보급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해야 할 것이다. 중한법률관계에서 조선족변호사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 허귀철 변호사는 "중국과 한국은 법률적인 차원이 많이 다르다"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중한관계를 법률로 보아도 많은 면에서 다르다. 조선족이 법률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들이 아주 많고 또 할 수 없는 역할도 많다. 한국은 국민을 위해 법률이 제정되었고 중국은 중국차원에서 법률을 제정했다. 중한수교가 이루어 진 뒤에 이른바 위장결혼이 급증해 법률사건으로 번져 불안정한 요소로 대두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한국인과의 결혼에서 절대 다수는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서 외국에 나가 돈을 벌려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모두 위장결혼이 아니다. 진짜결혼도 적지 않다. 중국인이 한국인과 결혼하자면 1차에 16가지, 2차에 19가지 증명서류가 넘어가야 하는데 모두 진짜 서류이다. 즉 모두 공증된 서류라 하겠다.  이른바 위장결혼이든 진짜결혼이든 마찬가지로 이같은 서류들을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혼인법률에 따라 되돌아오는 조선족도 적지 않다. 그래서 조선족변호사로서는 아주 안타깝기 그지없다. 비록 이런 법률조항으로 놓고 볼 때 조선족변호사로서 역할이 크지 못하고 있지만 향후 필연적으로 조선족 변호사들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이런 결혼사기 등을 갖고 여러번 한국에 가서 변호로 나서고 있는데 다행히도 이런 문제들을 받아들여 한국 경찰청에서 한국 위장결혼 브로커들을 600여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아주 고무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런 법률문제에서 국가 간의 공조체제가 잘 이루어 지지 못한 현실에서 민간적인 법률구조사업을 밀고 나가야 하기에 조선족 변호사들의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보아진다. 각종 사기 등에 대해 배동걸 씨는 "조선족과 한국과의 사이는 많이 교류해야만 교감이 생긴다"며 "취업비자문제에서 수두룩한 문제점이 생기고 있다. 향후 10만 명 선이 방취제 시험을 칠 것으로 보고 있는데 대부분이 비자를 받자면 몇 년은 걸려야 한다. 이들은 등록비 외에 외지에 시험치러가야 하기때문에 출장비도 적지 않게 들고 거기에 어떤 사람은 집 팔고 땅 팔고 하면서 한국행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런 문제들이 하루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불신의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어 한국에서 정책을 펴낼 때 조선족사회의 호소를 잘 들어야 사기행각 등 법률적인 문제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족지역 문화관광업 발전은 상호 이해에 큰 도움 김기호 연변해란강여행사 사장은 "지금 용정에 오는 한국관광객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며 "조선족지역의 관광업을 발전시키는 것은 한국과 조선족사회는 물론 중한관계발전에서 큰 도움이 된다"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중국에서의 관광업이 늦게 시작되었고 또 관광기초시설이 잘 되지 못하고 있다. 관광지를 잘 건설해야 한국.미국 혹은 일본손님이 많이 올 수 있으며 따라서 문화교류가 빈번해질 수 있다. 이렇게 자주 내왕하면 외국인들은 투자할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관광지의 기초시설은 물론 소프트웨어 환경이 좋으면 한국인들은 다투어 투자하려 한다. 연변주 기둥산업인 관광업이 발전하면 연변의 경제가 같이 발전한다. 연변에서 상품의 질을 꼭 보장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장백산 다음에는 유서깊은 용정을 꼽는다. 관광시설이 차하면 오려던 관광객도 잃는다.  정세봉 소설가는 "우리말과 글 얼이 살아 숨쉬는 이 땅에서 문화라는 이 테마로 서로 보슬비처럼 습윤하게 되면 서로의 접근이 스스로 되고 또 접근이 잦으면 스스로 문제들이 풀어질 수 있다"고 했다. 조선족 문화교류를 전제로 경제교류를 중심으로 원활한 역할을 해야 손동식 전 연변대학 교장은 "중한관계는 나라 차원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중국은 미국, 러시아, 일본과의 관계를 잘 해야만 주변국인 한국과의 관계도 반드시 잘 해야 한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베이징올림픽이 끝나자 바로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물론 중국이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적극 발전시키고 있지만 모순이 생기는 것은  정상적이다. 한국이 미국을 떠날 수 없는 것은 현실이고 또 중국을 떠날 수도 없다. 큰 모순은 국가차원에서 해결해야 하지만 중국 조선족은 문화교류를 전제로하는 경제교류를 중심으로, 양국 간의 관계에서  원활한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중국과 한국은 문화적으로 봐도 옛날부터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어 많은 동질성을 갖고 있다. 지금 연변대학은 한국의 도움이 크다. 연변대학생이 한국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사람이 백여명, 또 연대에 온 한국 유학생이 400여명 있다. 이들이 중한관계를 잘 알고 있으므로 후에 큰 자원이 된다. 또 조선족 사회가 한국과의 활발한 과학기술 교류도 조화로운 중한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란 개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정치적인 인재도 많아야 한다.그러나 지금 보면 국내 소수민족가운데 조선족이 정치적으로 아주 약한 민족이기에 조선족 정치인들을 많이 배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최민 미국 LA 특파원, 금성 특약기자
23    스스로 자기 수족을 얽매지 말자 (윤운걸) 댓글:  조회:2118  추천:103  2008-08-22
스스로 자기 수족을 얽매지 말자글에서 먼저 '38선'을 지워야조선어 교육 '실용'에 기반 두자 윤운걸언어란 의사소통의 주요 수단이라는 것은 더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의사소통"이란 이 개념을 아는 것 같지만 실지 모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조선족 사회 현실이다. 현재 조선반도를 비롯한 세계 한겨레는 7000여만 명인데 조선과 중국조선족을 제외하고는 세계 각지의 동포들은 모두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할 진대 중국조선족이 한국과의 교류는 물론 중국과 한국사이에서의 중개작용을 할 때에 반드시 한국어를 사용해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현재 수많은 조선족학생들이 조선어로 공부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조선족은 조선어로 된 신문, 방송을 접촉하고 있기에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해 거리감이 있으며, 의사소통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평소에 한국 드라마나 한국신문을 보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고 주위의 조선족들에게 문의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현재 연변대학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고 있고 길림대학 청도,상하이, 베이징 등지의 유수의 대학들에서는 모두 한국어과를 설치하고 한국어로 교육하고 있는데 그런 대학들에서 왜 조선어과를 설치하지 않고 한국어과를 설치했겠는가? 또 이런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다니는 학생은 절대대부분이 한족이다. 이는 장래에 조선족이 한국기업진출은 물론 제반 한국과의 문화교류에서 한족학생들에게 뒤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난날 중국조선족은 조선어를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배워왔기에 일상 의사소통에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실지 1992년도 중한 수교 후 한국과 중국조선족 사이에 빈번한 교류가 있으면서 한국인이 조선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조선족이 한국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언어생활에서 상대방의 얘기를 엉뚱하게 이해해 갈등이 생긴 것만은 기정 사실이다. 수많은 조선족 통.번역인원들이 한국기업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중국기업과의 합자, 합작 및 협의서 등 각종 법률문서 작성 과정에 중요한 대목에서 오역을 하는 등 실수를 빚어 법률적문제가 생긴 심각한 사례들도 있다. 또 현재 40여만 명 조선족이 한국에 나가 일하거나 공부하고, 또 방문취업제가 실시되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바야흐로 나가게 되는데 언어상의 소통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줄로 안다. 실지 필자가 수차 한국에 가서 취재해 보면 조선족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또 한국인이 조선족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것이 보편적인 지적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얘기를 엉뚱하게 이해하는 바람에 생기지 말아야 할 마찰이 생기고 있다. 물론 한국인들이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또 현재 재중 한국인이 70만을 넘어 향후 100만시대를 앞두고 있어 중국진출 한국인들이 필경 조선족 신문 방송을 통해 중국을 이해해야 하는데 조선어로 된 신문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방송을 알아듣지 못하면 이것이 더욱 큰 문제가 아닌가? 현재 조선어 규범화로 신문, 출판을 통제하고 있지만 스스로 자기 수족을 얽매 놓는 것은 개방된 오늘의 사회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조선족 신문, 잡지 혹은 방송사, 출판부문에서 한국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조선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국조선족의 제반 이익에서 또 중국진출 한국인들이 중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그저 흘려보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진 중요한 과제라 하겠다.  아직까지 남북언어가 통일되지 못한 현실에서 중국조선족은 언어생활에서 굉장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유럽과 미국 등 서양국가에서는 영어를 공통어로 하기 때문에 언어소통에서 큰 지장은 없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주중 영국대사관에서는 영국식 영어 즉 야스로 중국인들에 한해 시험을 치고 있으며 주중 미국대사관에서는 토플로 미국식 영어를 중국인들에 한해 시험을 치고 있다. 영국식 영어가 원조라 하게 되면 미국식 영어는 개량된 영어라 하겠다. 영어가 미국에서 주체어로 된 것은 바로 이전에 영국의 정치범 등 범인들이 아메리카에 정착해서 오늘날에 와서 발전한 영어인데 이는 개량 언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길에 오르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토플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중국 현실이다. 한마디로 공통어는 경제와 밀접히 관계된다.어느 나라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 나라의 언어를 우선 배우게 되기 마련이다.   /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13944391376@hanmail.net
22    관념전변 기술형 인재양성이 급선무 (윤운걸) 댓글:  조회:1864  추천:113  2008-08-19
관념전변 기술형 인재양성이 급선무  ——— 조선족 권위인사들의 견해를 들어본다 윤운걸조선족직업교육의 방향문제를 가지고 동북 3성과 북경시의  4명  교육계 조선족 권위인사들의 주장을 들어보았다.  새로운 관념수립이 소중한 첫 걸음이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교육국 성인직업교육처 장활처장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재까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직업학교에서 설치한 전업은 14가지 종류에 70여종에 달한다. 그러나 고중입학률이 부단히 높아지면서 직업교육의 비률이 고중단계 교육비률에 비해 30%밖에 안된다. 즉 많은 가정들이나 학생들은 직업교육에 대한 인식이 낮다는것을 설명해준다. 우리 학부모나 학생들의 관념에 문제가 있는것이다.  대학진학에 희망이 없는 학생들은 량호한 직업교육을 받아야 한다. 현재 기업들에서 기술형, 실전형 인재를 아주 중시하는 현실에서 말이다. 사회의 경제구조는 각종 차원의 인재를 수요한다.  우리 나라는 근 30년간 대외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많은 기술형 인재가 수요된다는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몇년전부터 우리 나라는 대학 본과층차의 인재양성을 중시하는 동시에서 대학에서도 고등직업기술학원을 세우고 고중에서는 중등직업기술학교를 꾸려 각종 기술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조선족직업교육의 밝은 미래를 구축하자면 반드시 교육부문과 학교에서 일반고중교육을 중시하는 동시에 적극 조건을 창조하여 취직에 적정한 직업학교를 꾸려 더 많은 조선족학생들이 사회에서 튼튼한 기반을 닦도록 해야 한다. 료녕성기초교육교연양성센터 조선족교육연훈부 강만석주임은 이같이 피력했다. 흑룡강성교육학원 민족교연부  최룡수 주임은 "무엇무엇해도 우리 조선족 학부모와 학생들이 오직 대학교에 가야만 출로가 있으며 앞으로 큰 출세를 할수 있다는 낡은 관념을 버리고 현 사회에서 직업기술교육도 대학교 교육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자기의 아름다운 인생을 창조할수 있는 기반으로 될수 있다는 새로운 관념을 수립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술형 인재육성이 '발등의 불' 중국 삼농교육전문가, 국가교육부 중앙과학기술교육연구소 리수산주임은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우리 조선족교육에서 가장 박약한 고리는 직업교육을 홀시하고있는 점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대학입시교육만 중시하다보니 직업교육은 한족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상황이다.  이중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방문취업제에서 나타난 문제이다. 비록 한국어시험에 합격되여 한국으로 인력송출을 갈수 있는 이것은 다른 형제민족들과 비하면 더없이 발전의 기회라고 할수 있겠지만 문제는 대부분이 직업기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들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이  한국이나 일본에 가서 힘든 육체로동이 아니면 기타 말을 꺼내기 싫은 업종에 종사하는 실정이며 한국에 계속 남아 취직하거나 창업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다.  만일 농업기술을 포함한 한두가지 경영기술을 가지고 해외에 진출했더라면 승승장구로 더 발빠른 성장과 발전을 가져왔을것이다. 국내 한족지역에서는 20여년전부터 도시진출지식과 기술연수교육 즉 농촌직업기술교육에 집착해서 지금은  한국의 LG, 삼성 등 회사에서  판매후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조선족기술공은 거의 찾아볼수 없다. 지어 기술경영 업종에 취직한 대졸생들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금도 늦지 않는만큼 민족사업의 중요한 일환으로 민족직업교육을 바싹 틀어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문문서나 번역 등 분야를 제외하고도 농촌경제중개인 등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한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과  겨룸할수  있는 직종에 종사할수 있는 기량을 닦으면 앞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서 한껏 헤염을 칠수 있는것이다. 기술형 인재양성에서 민족의 장래를 항상 관심하고 걱정하는 민족간부들의 솔선수범 역할도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정봉길 윤운걸 기자     fengji-zheng@hanmail.net 
21    18.최은택 교수 "축구는 정신력이 원동력" (윤운걸) 댓글:  조회:2244  추천:125  2008-08-11
윤운걸기자문집최은택 교수 "축구는 정신력이 원동력"  --고 전 연변오동축구팀 감독 최은택교수님의 명복을 빌면서윤운걸기원 2007년 2월 5일 새벽 전 연변오동축구팀 감독이였던 한국 한양대 최은택교수가 66세를 일기로 너무나도 일찌감치 이 세상을 마감했다는 비운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연변은 물론 중국 각지의 수많은 축구팬들이 충격에 쌓여 분분히 애도의 뜻을 표하고있다. 기자도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비운에 쌓인 나머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그제날 최은택교수를 취재하면서 적어내려간 수첩을 뒤져보고 재정리한다. 1997년 중국축구 갑A련맹 제12륜경기가 끝난 7월 28일에 기자는 연변오동축구팀의 최은택감독이 심장병으로 한창 치료중이라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고훈씨(현 연변축구팀감독)에게 의뢰해 취재를 부탁했었다. 그랬더니 “금방 죽지 않는데 왜 취재를 접수 못하겠는가”며 바로 만나자는것이였다. 일단 만나고보니 죄송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한창 점적주사를 맞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띄우면서 인자하게 기자를 만나주었다. 당시 기자의 인상은 그가 호랑이같은 축구감독이 아니라 아주 선비다운 교수 그 자체였다그가 연변팀의 사령탑을 잡게 된 배경 1987년 중국 광주에서 아시아축구련맹회의가 있었다. 당시 한양대학교수로 있던 최교수도 회의에 참가했는데 연변에서 안내로 온 추명(당시 연변오동팀의 부감독)을 알게 되였다. 이를 계기로 1996년 여름에 연변을 방문, 그 기회에 연변축구관계자들의 요청에 의해 축구강습반을 조직했는데 그는 축구지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나면서 연변축구관계자들은 연변축구팀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청구를 했다. 당시 최교수는 한양대에서 학장을 4년간 련임했기에 97년도에 1년 안식년(휴식년)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안식년도 마다하고 휴식의 한때를 제쳐놓고 바로 이듬해인 97년도에 연변오동팀의 사령탑을 잡게 되였다.처음 연변오동팀을 맡았을 때 당시 최은택교수는 중국축구의 정황을 잘 몰랐고 더욱이 연변오동팀의 진짜 실력도  잘 몰랐으며 다만 이 팀이 중국축구팀에서 하위수준이라는것만 알았다. 그가 나중에 알게 되였지만 프로축구에서의 연변팀 선수들은 수준이 낮고 또 수자적으로 훌륭한 선수가 적고 쓸만한 선수들은 간염이 아니면 위염이 있었으며 당시 연변팀에서 주력으로 활약하던 리홍군선수가 북경국안팀으로 이적했다는것도 몰랐다. 소개를 통해 연변팀의 선수들의 능력수준은 괜찮은걸로 알았는데 접촉해보니 그가 생각한것보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굉장히 당황했단다. 실력도 실력이겠지만 연변팀의 정신력이 대단히 부족하다는것을 최교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에 따르면 축구는 11명이 치르는 단체경기로서 어느 개인이 설사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단합심이 없으면 경기는 엉망이 되고 감독의 전술배치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개개인의 수준이 낮은것을 단합심을 통해 강한 축구팀으로 키우는것이 가장 빠른 길일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 길을 걸어 정신력을 키워야 연변축구가 살아나갈수 있다는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팀을 틀어쥐자마자 정신력고취에 전력당시 연변팀을 맡고보니 선수들이 선배인지 후배인지 친구인지 뒤섞여 례의란 도무지 찾아볼 없었단다. 또 감독을 우습게 보고 감독에게 인사하는 기본적인 례의도 갖추지 못하고있었다. 그래서 우선 례의 즉 감독과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정신력부터 고취시켰다. 기술이나 체력이나 전술에서 단결력을 강조, 선수들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불러서 인사를 반드시 하게끔 “채찍질”했다. 결과 처음에는 인사성도 없고 말도 반말을 쓰던것이 점차적으로 나아지면서 인사례절도 밝아지게 되였고 후배들도 선배들의 말을 잘 듣는 기풍이 이 팀에 서서이 일어나게 되였다. 당시 주력선수로 있었던 고종훈선수에 따르면 최은택감독이 사령탑을 쥐면서 선수들은 조금도 숨돌릴 사이없이 훈련을 그렇게도 이른바 “악독”하게 시켰단다.하여 1996년도에 갑급팀에서 강급의 변두리를 헤매던 연변오동축구팀을 1997년도에 일약 4강에로 껑충 끌어올려 이 팀은 중국축구협회로부터 “진보가 가장 빠른 상”을 수여받았으며 따라서 연변축구팀이라 하면 모두 겁나하는 팀으로 부상했다. 당시 중국의 한 스포츠언론은 “연변축구팀 선수들은 마치도 들에서 줄기차게 달리는 야생말처럼 좀처럼 지칠줄 몰라 상대방팀이 기진맥진했을 때에는 어디서 오는 힘인지 더욱 기승스러웠고 강자와는 더욱 강해서 이른바 중국에서 강자라고 스스로 자랑하던 팀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했다”고 평했다. 바로 그 힘이 정신력이 아니겠는가.중국축구에 대해최은택교수는 당시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 한국, 일본은 동북아시아에 속하는데 축구의 기술적 능력이나 수준은 비슷하다. 중국선수들의 체력이나 기술이 한국에 떨어지는것은 없다. 중국이 자주 한국에 지는 주요원인은 주로 정신력이다. 중국선수들은 직업에 대한 근성이 몸에 배지 못했다. 축구경기에서 정신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은 일이고 이런 정신력을 키우자면 우선 “머리부터 씻어야 한다”. 그는 또 축구는 전쟁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전술을 알아야 할뿐만아니라 상대방의 력사, 문화, 풍속도 알아야 한다. 중국축구가 한국을 이기지 못하는것은 바로 한국의 축구를 모르기때문이라고 했다.당시 한동안 최은택교수는 연변팀의 사령탑을 내놓을 생각도 했다. 그 원인이 바로 중국축구 심판의 편파적인 추태였다. 당시 연변팀 대 북경팀과의 경기뿐만아니라 12륜경기에서도 심판의 불공정한 판결을 받았다. 최은택교수는 내가 몸도 좋지 않고 돈을 받자고 여기에 온것도 아닌데 연변팀이 손해를 보고있으니 괴롭고 굉장히 불쾌하다고 밝혔다.당시 슬라프나(중국국가팀 첫 감독)는 최교수에게 돈을 얼마나 받는가고 문의했단다. 다 아는바와 같이 그는 일전 한푼도 받지 않고 연변팀을 이끌어 왔던것이다. 황차 이런 판국에 중국땅에 와서 감독을 맡아나선 자신이 바보같다는 느낌이 들어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 가졌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변팀이 이기든 지든 자기가 선수들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지려는 각오는 돼있었다. 중국축구가 발전하자면 심판원이 심판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얘기했다.최은택교수가 1999년 3월에 중문으로 “축구와 예술”이라는 책을 청도에서 펼쳤는데 그는 이 책을 펴내면서 “1년 더 되는 시간에 중국에서 감독을 맡으면서 중국축구를 잘 알게 되였다. 여기에서 재삼 얘기하고 싶은것은 축구는 육체적인 대항성 운동일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정신력의 싸움이므로 중국축구가 발전하자면 반드시 심각하게 결핍한 정신력에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피력했다. 국가팀 감독설이 나왔을 때최은택교수가 연변팀 사령탑을 잡으면서 고종훈선수도 제2의 청춘이 꽃피기 시작했다. 한동안 소침하게 지냈던 고종훈선수가 당시 연변팀의 주력순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일찍 고종훈선수가 국가팀에 가담했을 때 최은택교수는 몇번이나 당시 국가팀을 맡았던 척무생감독에게 고종훈의 능력을 과시하게 하라고 얘기했지만 척무생은 시종 듣지 않고 국가팀이 국외의 몇차례 월드컵예선 경기에서 고종훈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이른바 “척가군단”이 “10강경기”에서 망신을 당하게 되자 중국본토 감독의 명성이 잇달아 일락천장이 되였고 따라서 중국본토에서 감독을 맡은 외국적 최은택교수에게 눈길이 돌려지기 시작했다. 연변구단의 4강신화, 축구팬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의 절박한 호소, 일부 축구관원들의 추천도 잇달았다. 그러나 최은택교수는 기자가 당시 취재시에 그럴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사실 그가 연변팀에 오게 된것은 한피줄이라는 단 한가지 리유에서였다. 연변팀을 잘 춰세웠다면 일개인으로서 죽어도 보람이 있다고 그는 당시에 호매롭게 얘기했다. 자기는 대학교수로 있기때문에 1년이란 안식년이 있어 여기에 왔지만 명년에는 올수 없다고 했다. 만년에 대학에서 조용히 정년퇴직하겠다고 그는 기자에게 얘기했다. 그는 또 세계적으로 보아도 스포츠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듯이 연변팀이 몇차례 이겼다해서 자기를 재차 초빙하려는것은 성급한 처사라고 했다.현시점에서 사색해볼 점한개 민족, 한개 국가의 정신력을 어떻게 보는가? 최은택교수가 연변팀을 떠나 1998년도에 귀국한 뒤 2002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창조했다. 최은택감독이 강조하던 정신력은 단순히 축구에만 귀속되는것이 아니라 제반 조선민족의 정체성구축에 굉장히 귀감이 되는 리론이라 하겠다.고 최은택교수의 명복을 빌면서 축구의 정신력과 민족의 정신력이 동심일체라는것을 심각하게 느낄 시기라고 본다. (본문은 흑룡강신문 2007년03월2자,5일자,9일자 3기에 나누어 발표) <<윤운걸기자문집>> 연재 완결
20    17.주인 잃은 연길인민체육장과 그 ‘파장’(윤운걸) 댓글:  조회:2383  추천:135  2008-08-08
윤운걸기자문집주인 잃은 연길인민체육장과 그 ‘파장’ 윤운걸축구로 울고 웃던 연변,그 축구경기?도가니속에서 희열과 유감을 느끼던 축구팬들,허나 연변은 올해부터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길림오동축구팀이 지난해에 갑A에서 갑B로 내려간 뒤에 돈 없어 기르지 못하는 자식처럼 저 멀리 절강성에 팔려갔다.팔려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얼마나 많은 축구팬들이 통탄했고 그 얼마나 많은 축구팬들이 가슴을 치며 슬픔의 눈물을 흘렸던가?수많은 축구팬들과 친지,가족들이 연변의 "자식"들을 공항에서 눈물로 보내며"남의집에 가서라도 잘 자라주기를 바랐다"전국축구갑급팀 A조련맹경기도 이미 15라운드가 지났지만 오늘의 연길시인민체육장은 한적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는 신세로 되였고 그 열광 띤 연변의 모습을 다시는 찾아 볼 길이 없게 되였다.그제날 수만명 축구팬들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것 같다.한적하고 쓸쓸하게 된 연길시인민경기장,그로 해서 그 주변에는 또 어떠한 엄청난 변화가 생기고있는가?   경기장주변 및 도로 량켠 맥주점 련이어 부도슬퍼도 술이고 기뻐도 술인것이 아마 축구팬들의 마음일것이다.조사에 의하면 이 몇해사이에 연길시인민체육장에서 도심으로 내려오는 주변과 길옆에는 100여개소의 맥주점이 앞다투어 일떠섰다.홈장경기가 있을 때마다 이 100여개의 맥주점은 경기를 관람하기전부터 초만원,경기를 관람한 후에도 초만원을 이루어 지어는 바깥에다 상을 림시로 차려놓고 맥주를 팔았는데 손님들의 주고받는 내용은 전부 길림오동팀의 이야기였다.기자가 한족이 경영하는 한 맥주점에서 주인에게 올해에는 장사가 어떻겠는가고 넌지시 물으니"진낸완러,건번메이유츌미"라고 대답했다.그 한족주인의 소개에 따르면 자기는 길림오동팀의 흥기로 1997년도에 작은 식당을 꾸렸는데 두해에 집값을 다 갚고 또 그자리에 새로 큰 맥주점을 앉혔다고 한다.일단 봄부터 초가을까지 연길에서 갑A경기가 시작되면 축구팬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그 수입이 가관이여서 겨울 한철은 그저 놀아도 별문제 없다고 했다.허나 인젠 덩그런 식탁에 먼지가 앉을 정도라고 한다.한 맥주도매상에게서 알아본데 의하면 홈장경기가 있을 때마다 경기장도로주변의 맥주점에 만여병의 빙천맥주를 공급했지만 지금은 찾는 집이 거의 없다고 한다.올해에 빙천맥주 판매량이 내려갈것이라는것이 축구팬들의 지적이다.연변축구의 저락으로 경기장 도로주변의 음식점은 물론 전반 연길시의 맥주퍈매도 저조기에 들어설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택시경영자 울상40만도 안되는 연길시에 근 4000대에 달하는 택시가 있다.100명당 택시 한대가 있는셈이다.하여 평소에는 손님을 끌기에 신경을 도사리고있다.허나 축구경기가 있을 때마다 택시운전수는 손님을 끌 필요없이 굉장히 분주히 돌아쳐야 한다.한 택시운전사와 문의하니 평소에는 하루에 150원도 벌기 힘들지만 일단경기가 있으면 라지오로 축구실황경기를 만끽하면서도 300원 지어는 400원을 쉽게 벌었다고 한다.비록 연길시는 이 몇년래에 기수,우수 택시제도 즉 기수날에는 우수번호택시가 다리를 건느지 못하지만 저 멀리 흥안향을 에돌아가는 축구팬들로 붐비여 우수번호택시도 10원 료금(연길시내는 보통 5원 택시값)으로 돈을 짭짤하게 벌었다고 한다.축구경기날이면 그만큼 택시타기 어렵다는 얘기이다.허나 올해부터는 그 모습을 찾을길 없어 택시운전수들은 울상을 하고있다.어떤 사람은 택시의 이런 호황세를 보고 작년에 돈을 빌려가면서 택시를 샀는데 올해에는 이런 꼴이 되였다고 한탄하고있다.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체육장운영 문제시상업화시대에서 연길시인민체육장도 자체의 운영길을 나가는 길밖에 없다.올해 축구불경기로 경기장 재보수도 어려워지게 될것이다.그제날 주석대 입장권은 50원,일반표는 20원이였지만 그 입장권이 열광기에는 표가 며칠전에 다 팔려 암거래 장사군들이 판을 치기도 했었다.지어는 표를 미처 사지 못했거나 돈없는 애들은 경기장바깥의 솔나무에 매달려 축구경기를 관람하여 솔나무에 마치도 "사람열매"가 달린듯 했다.그렇게도 관람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예 담장바깥에 앉아 귀로 "관람"했다.매번 평균 3만명(최고로 5만명)으로 추산해도 60만원,일년 입장권수입은 600만-700만원은 잘 되였을것이다.허나 올해부터는 그 수입이 딱 끊어졌다고 관계자는 한탄한다.쓸쓸하게 된 연길시인민체육장,이제는 잔디밭도 푸른 옷을 입은지가 오래다.그렇다고 해서 잔디밭에 염소를 풀어놓아 기를수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이밖에 돗자리장사군,광천수장사군,이이스크림장사군,해바라기장사군 등 떠돌이 장사군들도 이제는 부득불 축구경제권에서 퇴출하는수밖에 없었다...  강뚝축구팬연길시 시민들은 강뚝축구팬이라 하게 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없다.길림오동팀의 훈련평가는 강뚝축구팬들이 한다.이 훈련장소가 바로 연길 부르하통하 강뚝옆에 있기때문에 훈련때마다 수백명 지어는 수천명이 거기에 찾아가 축구평론을 하는데 축구전문가 못지 않다.허나 오늘에 와서는 강뚝은 쓸쓸하게 세월을 보내고있다.이 축구팬들이 지금은 무얼하고있는지 알길 없지만 그 마음들이야 오죽하겠는가?어떤 축구팬들은 올해에 절강록성팀이 연변에 와서 몇껨의 경기를 치를것을 간절히 바라고잇지만 다수 축구팬들은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것이다.또한 이제는 장춘,목단강 축구팬들도 연변축구 동산재기가 있기전까지는 연변을 찾지 않을것이다.축구팬들의 말에 의하면 남의 집에서 자라는 자식을 다시는 어루만질 신세가 못되였다는것이다.   던져주는 사색오늘날의 시장경제에서 축구는 바야흐로 시장화로 나가고있다.연변경제는 길림성에서 다섯번째 자리를 차지하고있지만 연변에는 재력으로 뒤심이 될 그런 기업은 없다.오직 연변경제가 춰서야만이 연변축구가 되살아날것이고 그에 따르는 일련의 상업도 활기를 띨것이며 연변사람들의 정신생활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을것이다.연변의 한 책임자는 "연변은 축구가 없으면 공허해지게 되고 연변의 축구는 우리의 이미지와도 밀접히 관계된다"고 했다.이제 연변의 축구는 새 일대들에게 희망을 두고 있다.그날이 언제 올지 기대해 본다. (본문은 2001년 7월12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19    16.연변축구팀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시절 댓글:  조회:2461  추천:112  2008-08-07
윤운걸기자문집연변축구팀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시절윤운걸   1989년 가을,필자가 연변방송국에 근무할 때였다.어느 날 보도부 체육기자인 김남룡(현 연변텔레비전 부주필)씨가 찾아와 길림축구팀이 갑급팀에서 탈락했는데 축구의 고향인 연변에서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90년도 전국축구시즌에 대비해 축구팬협회를 설립하고 조직적인 지원과 응원을 제안했다.이에 맞장구를 쳐 연변축구애호자협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회장단을 구성하다보니 회장을 필자가 맡게 됐고 상무비서장에 김남룡,상무부회장 겸 홍보담당에 남명철(현 도문시 부시장),상무부회장 겸 조직담당에 양동섭(전 연변텔레비전 기자)씨 그리고 상무부회장에 연변가무단 김동관 단장 모두 5명이 맡게 됐다.     자금 후원과 응원단 구성 회장단은 먼저 지역 언론이 앞장서 연변축구를 살려야 한다는 취지 아래 언론사를 찾아갔다.당시 길림신문사 이송영사장을 찾아가니 적극적인 보도협조와 함께 1천 위안의 지원금을 쾌척했으며 연변일보사,연변인민출판사,중국조선족소년보사,대중과학잡지사,동북과학기술신문사 등 각 언론사들이 경제적인 후원과 함께 인력 후원에 나서 연변팀을 지원하기 위한 준비가 빨리 진척되였다.한편 연변가무단악대와 연변라디오텔레비전악대가 잇따라 합세하였고 조선족 가수 유병걸씨가 악대를 지휘했다.또 응원단 수송을 위해 연길버스운수공사도 경기 때마다 버스를 무상지원하기로 했다.협회가 발족했다는 소식에 연변변경무역공사 ,연변건축공사 등 일반 기업들의 후원행렬도 이어졌다.    90년도부터 경기마다 인파몰이 초보적인 응원단을 구성한 협회는 북,괭가리,연변축구팀만세 등의 머리띠 등 각종 응원도구를 준비하는 가하면 붓글씨 솜씨에 뛰여난 박운학,허일춘 기자 등은 표어판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새는 등 준비작업이 시작됐다.특히 감동스러웠던 것은 전 연변텔레비전 주필 김희관(현 연변공공관계협회 회장),부주필 김영택씨 등 언론인들도 "축구팬"이란 머리띠를 매고 응원 대열에 합세해 질서유지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경기가 시작될 때마다 국가연주가 있었는데 협회 관악단이 유병걸씨의 지휘 아래 연주했고 연변축구팀이 승승장구를 이어갈 때는 <아리랑>,<나가자 나가자>등을 연주하면서 축구장 관람석에서는 자연스럽게 파도타기 인파물결이 일어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협회는 경기마다 득점 선수 또는 최고활약 선수들을 선정해 상금을 주는 등 선수들이 민족의사명감을 갖고 공을 찬다는 정신력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그래서 당시 최고 공격수였던 고종훈 선수는 "축구팬들의 사랑과 성원에 힘입어 민족 정신의 사명감을 갖고 푸른잔디위를 원 없이 달렸다"고 말하기도 했다.연변에는 지금도 "고종훈노래방"등 그의 이름을 딴 상점들이 많다.    가는 곳마다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   연변팀의 홈 경기는 가끔 용정,도문시에서 치르게 되었는데 92년 도문 경기 때였다.연길에서 3대의 버스로 출발한 응원단들이 도문시 경기장에 들어서자 도문시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영했고 열띤 응원을 벌이는 등 지역 응원단도 구성됐다. 이런 응원의 결과였을까,7월 삼복 더위에도 선수들은 3대0으로 대승을 거둬 관중들의 열띤 응원에 보답했다.경기가 끝나자 도문시 정부 차원에서 연길에서 온 200여명의 축구팬들을 위해 저녁식사를 마련하는 등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하지만 이날 저녁식사는 미리 연길에서 협회와의 예약이 돼 있어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축구팬으로서의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재미있는 뒷이야기   협회 회원은 반드시 축구장에 들어갈 때 머리띠를 착용해야 했다.당시 입장료가 비싸 입장권을 구입하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입장권이 모두 팔리는 바람에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관중들은 경기장 바깥에서"귀"로 관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무에 올라가 경기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아마도 이런 진풍경은 연길경기장에서만 있었을 것이다.당시 입장하지 못한 관중들가운데는 혹시 조직담당자 가운데 자신이 아는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하며 경기장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이런 사람들은 조직담당자와 눈길만 마주치면 입장이 어느 정도 가능했고 이런 일을 부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에는 없었다.   92년 8월,연길경기장에서 응원을 마친 뒤 응원단 만찬장에서였다.관악단을 온몸으로 지휘해온 유병걸씨가 단번에 냉면 두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었다.이를 옆에서 보던 나는 "형님 한 그릇 더 하시죠"라고 농담을 건네니"내가 쓩튀냐"(사투리로 게걸이라는 뜻)라고 받으면서도 또 한 그릇을 거뜬히 해치우던 그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지금도 추억으로 남는다.협회 회원이 늘어나면서 연변연극단 코미디 배우 이옥희(별명 쑤이러우)씨를 선두 지휘자로 선정했다.그가 응원단을 지휘하면서 관중들은 축구를 관람하면서도 중간 휴식 때는 재미있는 그의 연기를 즐길 수도 있었다.   경기에서 연변축구팀이 승전하면 회원 만찬에는 맥주가 동이날 정도였고 패하는 날이면 안타까운 탄식으로 다음 경기를 기약했다.그리고 회장단은 축구선수들을 찾아 축하와 함께 위로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수들은 감동을 금치 못했다.   이런 결과 연변축구애호자협회는 93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로부터 표창금기까지 받는 행운을 누렸다.그때 그 시절 축구팬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날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연길축구팬협회가 연변축구에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한 떨기의 꽃이 되길 기대한다.(본문은 2005년 3월13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18    15.범이 사람을 해쳤나 사람이 범을 해쳤나(윤운걸) 댓글:  조회:2029  추천:82  2008-08-06
윤운걸기자문집범이 사람을 해쳤나 사람이 범을 해쳤나-악덕사냥군의 옹노에 걸린 동북호랑이 구급실기윤운걸2002년 1월 29일 훈춘시인민병원에서 호랑이한테 오른 팔을 물린 환자를 응급치료2002년 2월 2일 훈춘시자연보호구에서 호랑이가 한 녀성을 잡아먹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2002년 2월 3일 저녁 훈춘시인민병원 외과전문가 김수철 주임의사 등이 옹노에 걸려 생존력을 거의 상실한 동북호랑이를 수술치료2002년 2월 9일 12시 45분경 동북호랑이는 구급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끝내 숨졌다. 나이는 10-12살로 추정 왜 동북호랑이는 사람을 해치게 되었는가?중국내에서 보기 드문 사건인 동북호랑이가 선후로 사람을 물어놓았고 잡아먹기까지 한 끔찍한 사건이 훈춘시자연보호구에서 생겼다.그럼 이 사건은 우연한 사건인가?올해 연변에는 50여 년래 보기 드문 폭설이 내렸다. 이로 하여 한시기 동안 연변 각지는 교통이 마비되였고 부분적인 가옥과 대부분의 남새비닐하우스가 무너졌으며 수천마리의 소와 양이 잃어졌거나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한편 폭설에 의해 산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대량으로 하산했다.지난 1월 29일 오후,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춘화진의 농민 곡창희(47살)는 본촌에 거주하고 있는 흑룡강성 오상시의 농민 윤석종(34살)과 함께 다른 촌에 일보러 갔다가 오후 2시경에 스키타고 되돌아 오던 중 한 초막집(빈집)옆에서 범의 발자국과 큰 사슴()의 잔해를 발견했다.범이 금방 큰 사슴을 잡아먹고 자리를 떴던 것이다. 그들은 범이 먹다남은 큰 사슴의 다리와 고기를 주어 배낭에 넣고 계속 마을로 향하던 도중 약 2시간 후에 뒤에서 범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범이 뒤를 따랐던 것이다. 곡창희가 웃옷을 벗어 불을 달아 범을 쫓으려 했으나 라이타가 켜지지 않았다. 범은 곡창희의 뒤잔등에 덮치기 시작, 본능적으로 오른팔로 덮치는 범을 막으려는 순간 범은 오른팔을 물었다. 범은 뒤이어 넘어진 곡창희의 뒤잔등을 허비기 시작,윤석종은 급기야 스키를 벗어 범의 머리를 쳤으나 범은 끔쩍 안했다. 범을 당해 낼 길이 없게 된 윤석종은 동료를 구하지 못한 채 줄행랑을 놓았다. 팔을 물린 곡창희도 어쩌는 수가 없어 숨도 감히 쉬지 못한채 눈우에 죽은듯이 누워 있었다. 약 반시간 지나니 범은 웬 영문인지 그 자리를 떠났다.범이 떠나갔다는 것을 의식한 곡창희는 단숨에 집으로 달려왔고 당지 사람들이 곡창희를 훈춘시인민병원에 호송했으며 지금까지도 치료중에 있다.련달아 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2월2일 훈춘시 삼도구림산작업소에서 범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사연은 이러하다 훈춘시 삼도구림산작업소의 3명종업원이 산에 올라가 작업하고 돌아오던 도중 맨 앞에서 걷던 양모(34살,한족)녀인이 옹노에 걸린 범한테 물려 뜯기우기 시작햇다.기급해난 두 남성은 줄행랑을 놓아 훈춘시자연보호구 삼도구자연보호소에 가 신고했다.구급대원들 현장에 도착제보를 받은 훈춘시자연보호관리구와 훈춘시림업국에서는 즉시 구급대를 조직, 한편 이 사건을 길림성림업청에 보고, 길림성림업청에서도 즉각 국가림업부에 보고, 이번 돌발사건을 감안해 급기야 연길동물원의 마취수의사 김광수도 훈춘시에 도착했다. 양모의 시체는 찾았지만 이미 뜯어 먹히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구급대원들은 훈춘시 삼도구의 삼림에서 옹노에 걸린 범을 발견, 구급대원들이 3메터 가까이 접근했지만 사람에게 덮쳐들 맥을 잃은 상태였다.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범에게 마취총을 쏘았다.약 반시간 지나 범은 완전히 늘어졌다. 철옹에 범을 싣고 하산할 때는 이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때였다.이제 범을 장춘까지 호송하면 도중에 숨이 끊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긴급구급이 시간을 다투었다.그러나 그때까지 바라던 북경,할빈 등지의 수의전문의들이 훈춘시에 도착하지 못했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북경등지의 수의들이 긴급제보를 받았지만 북경-연길행 비행기표는 이미 매진되여 하는 수 없이 2월3일 북경-장춘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에 장춘-연길-훈춘행 코스를 잡게 되어 2월5일에야 훈춘시에 도착했던 것이다.외과전문의 범구급에 착수범의 상태는 점점 위급해졌다.지휘부에서는 즉시 춘춘시인민병원에 구급치료를 요청, 병원의 부원장이며 외과전문가인 김수철 주임의사가 이 중임을 떠메게 되였다.범이 훈춘시내에 도착한 시간은 2월3일 저녁 7시 30분경,호송차가 100여킬로메터를 달려서야 도착했던 것이다.김수철 의사는 25년간의 의사생애에서 수백명의 사경에 처한 환자들을 성공적으로 구급했지만 동물구급은 물론 범을 구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하기야 중국내에서도 이렇게 심하게 상처를 입은 범을 구해본 사례는 없다고 한다. 범에 대한 상관자료도 없는 상황이였다. 다급히 해당 부문에 동북범의 기본생활자료를 요청했다. 페스가 날아왔다.동북범의 기본생활에서 필수되는 실내온도는 5-6*C,체내온도는 38-38.8*C(사람은 36.5*C좌우)호흡은 8-16차/분,심장박동차수는 100-124차/분이였다.체중은 약 150킬로그람 좌우이고 10년내지 12년생으로 추정되였다.구급수술을 시작하자니 정규수술대처럼 네온등도 갖추어지지 못한 상황, 사람처럼 범을 반듯하게 눕히지도 못하게 된 처지였다.2월3일 즉 호송된 당날 저녁 8시 30분부터 수술이 시작되였다. 그날 수술기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범을 마취한 뒤 수술대에 좌측 모로 눕힘, 상처는 심하게 감염,상처를 탐사해보니 옹근 목이 둥그렇게 찢어져 있었고 목의 근육도 대부분 터지고 째여졌는데 깊이는 5센치메터,목의 경추뼈가 드러나 있었고 인두아래 기관(숨통)이 이미 3분의 2가 끊어졌음, 수술중, 수술후 호흡, 심장박동이 평온함.3시간반동안의 수술을 거쳐 기관과 식도 및 근육 등 봉합이 잘 되었고 상처처리도 깨끗이 되었다.2월 5일에 북경동물원 부원장 겸 고급목축사 장금국 등 2명, 할빈시해방군211병원(동물치료에 경험이 있는 병원임)의 2명 의사가 선후로 훈춘시에 도착했다.이들이 범의 수술정황을 검토하고 결과 수술이 아주 성공적이였다고 치하했다.한편 그들은 이렇게 상처를 심하게 입었고 피도 엄청나게 흘렸으며 상처입은 시간도 오랜 범을 구급하기는 국내에서 처음이라고 했다.범은 사람과 달리 기초대사률()이 높고 수분과 약물의 수요량은 사람의 킬로그람당 3배라고 한다. 이에 대비해 김수철의사는 소염제,영양제,비타민제 등을 정맥주사하면서 치료에 진력했다. 한편 그는 감염으로 인한 페,간,콩팥 기능마비가 올가봐 크게 우려했다.날이 감에 따라 감염증세가 심해졌고 콩팥 기능이 점차적으로 쇠퇴해지면서 오줌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끝내는 최악의 상태가 나타나고야 말았다.2월9일 12시 45분경,동북호랑이는 드디여 구급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피검사 결과 범은 불동간균()감염에 의한 패혈증이란 합병증이 왔던 것이다.사체해부에서 밝혀진데 의하면 량측 흉강내에는 농성()액체가 있었고 페에는 다발성 농양()이 있었으며 간은 충혈상태였고 콩팥에는 만성농양()이 있었다.범을 죽인 장본인은 누구?사건이 발생한 뒤 해당 부문에서는 즉각 수사에 달라붙었다.우선 1월 30일에 범에게 물린 곡창희와 윤석종을 혐의대상으로 짚었다.윤석종은 타고장으로 달아났다가 붙잡혔다.해당 부문에서 그의 집을 수색한 결과 범의 목에 걸렸던 옹노와 같은 강철쇠줄(직경이 약 손가략만큼 굵음)을 발견하고 전문기관에 의뢰하니 틀림없었다고 한다.그렇다면 곡창희의 팔을 물어놓은 범이 바로 2월2일에 재차 사람을 해친 범이 아니겠는가?첫 사건발생지는 훈춘시 춘화진의 한 산골,두번째 사건발생지는 훈춘시 삼도구의 한 산골,이 두곳의 거리는 수백킬로메터,그렇다면 범은 옹노에 걸렸다가 뛰쳐나와 첫 사건을 저지르고 몇백킬로메터를 헤매다가 두 번째 사건을 저질렀을가?혹은 첫 사건을 저지른 뒤에 옹노에 걸려다가 뛰쳐나와 두 번째 사건을 저질렀을가...지금 해당 부문에서는 계속 수사망을 조이고있다.악덕사냥군의 행실로 처녀도 숨지고 범도 숨져통계에 따르면 사육동북호랑이는 수십마리 되지만 중국내의 야생동북호랑이는 불과 몇 마리,그것도 훈춘시자연보호구에 4-5마리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있다.“자연재해는 바로 인재()”다 전문가들의 소개에 따르면 사람이 범을 해치지 않으면 범은 절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한다. 동북호랑이는 국가1급보호둥물이다.그래서 국가에서는 거액을 들여 훈춘시에 동북호랑이와 극동표범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보호구를 세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보호구안에다 몰래 옹노를 놓았으니 참으로 무지몽매한 행실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렇게 약손가락 굵기만한 옹노는 결코 토끼나 노루같은 것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메돼지나 호랑이를 잡으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한편 악덕사냥군은 분명히 범이 다니는 길을 아로 옹노를 놓는 것이라고 추정하고있다.이제 이 끔찍한 사건은 진상이 밝혀지면 악덕사냥군은 마땅히 엄한 법적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본문은 흑룡강신문 2002년 2월21자에 실렸음)
17    조선어서적 출판 '쌀에 뉘' (윤운걸) 댓글:  조회:2028  추천:96  2008-08-05
조선어서적 출판 '쌀에 뉘' 윤운걸책을 많이 읽었다 해서 반드시 인재가 되는 법은 없지만 책 안 읽은 인재는 없다. 한 민족의 흥망성쇠는 인재 수량과 밀접히 관계된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발전은 궁극적으로 수많은 인재가 있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구국 사상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한창 꽃피고 있음을 단적으로 설명한다.   사실 같은 연령대의 조선족학생과 한국학생들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얘기를 나누어 보면 보편적으로 지식수준 차이가 엄청나게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인재의 첫째 조건은 한 사람이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의 수업 외에도 얼마만큼 책을 많이 읽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특히 오늘날 글로벌 시대에 전문지식도 중요하겠지만 다방면의 지식을 소유한 사람만이 자신있게 또 떳떳하게 세계무대에서 활개치는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사실로 증명되었다. 이러할진대 오늘날 중국조선족사회의 서점가를 살펴보면 중문으로 된 서적, 이를테면 전문서적을 제쳐놓고도 고금동서의 정치,경제,문화 등 제반 요소들의 서적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조선어로 된 서적은 쌀에 뉘만큼이고 그것마저 초중학교학생 심지어는 청년들이 읽을 만한 책들이 아주 적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 그 자체이다. 조선어 서적은 출판량이 적고 또 청소년들의 지식갈증을 해소할 만한 서적들이 적으며 더욱이는 조선문 출판부문에서 자금난으로 각종 다양한 서적들을 출판하지 못하다보니 자연히 책 읽는 풍조가 이 사회에서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책 안 읽는다고만 탓하지 말고 과연 "오곡잡곡 즉 뇌수에 필요한 '영양분'"이 들어있는 책이 조선족사회에 얼마나 있는지, 실제적으로 따져봄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또 필자가 평소에 몇몇 조선족 학생 심지어는 젊은이들에게 한국어 서적을 본 일이 있는가 문의하니 읽어봤지만 적지 않은 단어들을 이해 못해 대충의미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문제 또한 심각한 문제다.   연변대학 유연산 교수는 "지금 조선어를 가르치는 대학은 연변대학밖에 없다"며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에서도 한족을 상대로 해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조선족학생을 상대로 조선어를 가르쳐 일원량제(一院两制)정책을 실시하고 있다"고 하고 일찍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대표대회 제12기 제5차회의에서 대표의 신분으로 "조선족의 언어환경을 한국어로 전환할 데 대한 의안"을 제기한 바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당면의 중요한 문제는 교육에서 조선어를 사용할 것인가? 한국어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초점인데 이는 바로  '조선문 조례'수정이다.   유연산 교수는 "1988년에 처음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어문조례를 제정하고 그후 2003년에 조선어문조례에 대한 수정을 했지만 시장경제체제가 초보적으로 건립되고 경제와 사회 각 방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진 상황에 계획경제체제에서 만들어진 조례의 여러  조목들은 이미 효율성을 잃었거나 현실에 부합되지 않고 있다”"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지금 독자들이 읽어야 할 우리 글 서적들이 적고 또 서적내원이 없다고 보는데 서적내원은 무진장하다. 필자가 한국에 다녀오면서 매번 서울교보문고 등 서점가를 찾아가고 있는데 한마디로 눈이 뒤집힐 질 지경이다. 즉 원하는 대로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의 또 다른 초점은 이런 서적들은 중국에 아직까지 수입금지되고 있는데 이는 중국출판총서에서의 정책적인 문제다. 깊이 얘기하면 소수민족 정책을 제대로 낙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수많은 지성인들이 중국조선족단체에 책을 무료로 기증하고 있고 또 기증하려고 하지만 세관통관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는 민족자치를 행사하는 조선족사회 더욱이는 정부차원에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조선어로 된 고금동서의 서적 더 나아가서는 청소년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서적들은 한국에서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금난, 출판난만 부르짖고 한탄하지 말고 이미 한국에서 출판된 서적들을 대량 수입하겠끔 수입에서의 문호를 개방하는 노력이 바로 조선족사회의 당면에 부딪친 문제이고 또 해결해야 할 중요한 도경이며 이것 또한 조선족사회가 사상해방에서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중국에서 소수민족문화사업을 밀어나가기 위해 정책적, 경제적 후원을 하고 있지만 중국은 아직까지 개발도상국으로서 소수민족에게 이른바 별도의 '가마밥'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국민의 일원인 조선족으로서도 나라의 걱정을 헤아려 '지리,천시,인화'인 한국과의 서적인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중국출판관련당국과의 조화사업을 힘있게 추진함이 가장 바람직한 사고방식이라 하겠다.이 또한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는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국가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도 국가에만 손을 내미는 것은 진정 주인의 행실이 아니다.   '갈증이 생기면서도 앉아서 메말라 죽기를 원하는 사고'방식을 고집한다면 결국 망하는 길이고, 결국  스스로 동화의 길을 택하는 행실이라 하겠다.
16    14.동북아 엘리트양성중심대학 꿈꾼다(윤운걸) 댓글:  조회:1732  추천:98  2008-08-04
윤운걸기자문집동북아 엘리트양성중심대학 꿈꾼다윤운걸 김진경,그는 중국에서 최초로 그것도 편벽한 지역으로 알려지는 국경도시 연길시에 대학을 세운 미국적 한국인이다.그럼 그는 어떻게 하여 이런 편벽한 지역에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시설이 구전하며 이미 중국국가교육부로부터 몇개 학과를 중점학과로 부상시킨 대학을 설립할수 있게 되였을가? 이 문제의 해답을 찾고저 기자는 얼마전 김진경총장(박사)을 찾았다.     중국에 대학 세울 꿈 어릴 적부터 싹트기 시작    김진경총장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반도를 강점한 시기에 태여났다.그가 어린 시절 때 아버지가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농업학교를 세우면서 중국 동북에 올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나이는 10여살이였다.그가 당시 어릴적에 받은것은 "일본천황의 은혜속에서야 생활이 윤택해질수 있고 일본이 불원한 장래에 미국과 영국을 전승하면 더욱 좋아진다"라는 교육 그 자체였다.이렇게 그는 어린 시절에 철저하게 일본군국주의교육을 받아왔던것이다.그러나 그가 받은 교육과 시대변화는 정반대였다.    소학교(당시 일본이 국민학교라고 호칭)2학년 시절,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일본이 전패하고 광복을 맞게 되자 드디여 자기는 일본천황의 아들이 아니고 일본국민도 아니며 조선반도의 아들이라는것을 알게 되였고 더 나아가서는 조선반도가 일본에 침략당해 경제적인 략탈을 당한것은 물론 민족의 언어,문자마저 박탈당하게 된 치욕을 알게 되였으며 따라서 어린 마음을 앗아갈번 했던 일본의 철저한 로화교육과 기편성 교육을 알게 되였다.광복후에 자기언어로 교육을 받으면서 또 일본이 어떻게 조선반도를 침략했다는 "반일교육"도 받으면서 중학교에 입학했다.그의 나이가 겨우 15살 되던 중학교 3학년때 그는 국가가 다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참군했는데 한국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군인이였다해도 과언은 아니다.그는 이 세상에는 전쟁이 없어져야 하고 평화가 와야 한다는것을 깨닫게되였다.동년시절의 이런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장차 커서 반드시 아버지가 밀고나갔던 교육사업을 계승하리라 결심했다.교육사업을 하려면 연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것을 피부로 느낀 그는 광복후에 영국류학의 길에 올라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다.그에게는 대학에서 첫 동양인 졸업생대표로서의 연설할 기회가 생겼다.그는 연설에서 자기는 금후 광활한 천지인 중국에 가서 교육사업으로 자기의 리상을 실천하겠다고 했다.그러자 많은 외국인들은 경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면서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없는 짓이라고 비꼬아 말하기도 했다.그럴수도 있었다.당시 중국대문은 굳게 닫겨져 있어 외국인의 출입은 금물이였다.하지만 불원한 쟁래에 중국대문이 열리리라는 신념을 굳게 믿으면서 그는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전공했고 또 수많은 돈을 벌어 재벌이 되였다.     중국대문이 열리자바람으로 중국 향발   1986년,그는 미국공민의 신분으로 중국에 왔다.그러나 미국공민으로 중국에 오고싶으면 오는것이 아니고 왔어도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고싶어도 마음대로 실현할수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이 당시 중국 현실 그 자체였다.이러저러한 조소와 비난과 각종 저애력이 그로 하여금 리상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느낌을 가지거게 했다.그러나 그는 이런 지역일수록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랭정한 시각으로 보게 되였고 아무리 험난하고 고생스럽더라도 애심으로 충만된 리상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것을 마음속으로 다지고 또 다졌다.당시의 중국은 대문이 열리면서 서양세계의 호감은 가지게 되였으나 어떤 대국은 비난의 목소리도 서슴치 않고 내뱉었다.즉 이런 대국은 자기의 자대로 중국을 재고 있었다는 점이다.당시의 중국은 후진국이였지만 이른바 문명선진국이라는 국가도 아주 락후한 력사와 후진국 경험을 했던것이?그래서 그는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중국을 모독,멸시하는것을 한 동양인으로서 그저 보고만 있을수 없어 중국을 변호하기 시작했다.첫 변호사건은 1989년에 일어난"천안문사건"이다.당시 그는 마침 북경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미국정부는 미국공민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그를 인차 떠날것을 권고했다.그러나 그는 떠날 대신 숙소를 천안문광장을 바로 바라볼수 있는 충문문호텔로 옮기고 력사적인 그 시각을 모두 바라보았다.중국을 변호하기 위해 그는 미국"뉴스저널"에 "미국공민이 본 천안문사태"라는 글까지 발표했다.글이 실리자 그를 중국에서 돈으로 매수했다는 등 이러저러한 여론들이 쇄도했다.그러나 그는 서양매체의 과분하고 편향적인 보도에 질책을 했을뿐이고 또 당시 외국인으로 변호에 나선것은 그가 혼자였다.그리하여 많은 중국인들은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그뿐이 아니다. 90년대 초반기에 미국은 계속 중국의 인권문제를 들먹거리면서 경제제재와 함께 련결시키려고 시도하는것을 보고 또 언론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미국 클린턴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그는 서한에서 "중국에서 력사상 처음으로 12억 인구의 먹는 문제를 해결한것은 절대 작은 성취가 아니다.중국은 아직 4억 문맹이 있고 서양식 민주주의를 실시하는데는 여러가지 한계가 있다.중국이 중국식 사회주의길을 걷는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므로 미국이 중국인권문제와 최혜국대우를 련계하는것은 옳지 않다."라고 했다.    클린턴대통령은 1994년 6월  그에게 답복편지를 보내와 "중국의 인권련계정책"을 다시 수정하겠다고 했다."인권은 정치사상도 아니고 인류생존의 목표도 아니며 근근히 인류존엄의 필요조건"이라고 그는 말하면?기본인권은 인민이 밥을 먹을수 있고 직장을 얻을수 있는것이라고 했다.개방이래 중국은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졌고 중국 동북3성은 곡물이 적치될 정도에 이르렀는데 미국같은 나라가 자기의 자대로 중국을 재면 안된다고 했다.     중국에 대학을 세우려는 꿈이 현실로    김진경총장은 중국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대학을 창설해 지금까지 18년 생활하면서 중국의 발전하는 모습을 피부로 느낀 산 증인인이다.그는 "중국이 그제날 5천년을 지내면서 왕권의 력사가 변하지 않았는데 모택동,등소평의 위대한 사상으로 왕권의 력사가 인민의 력사로 변한것은 천지개벽이다"라고 하고나서 궁극적으로 중국식 사회주의 개혁개방으로 즉 그제날의 투쟁방식이 아니라 인민의 복지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중국정부가 노력하고있는 점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현재 많은 나라들에서 큰 문제점들이 속출하고있지만 중국만은 안정과 번영으로 매년 8-9%의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다는것은 세계경제력사에서 희소한 일이고 또 모든 국가도 경의로운 눈길로 보고 있다는 점이 특히 주목할 일이라고 했다.또 중국에서 최초로 외국인을 고등교육에 참여할수 있게 한것은 바로 중국정신이라고 했다.현재 개교 불과 14년만에 연변과기대의 많은 학과들이 국가중점학과로 지명 되였고 중국속에서의 국제대학으로 13개 나라의 교수진들이 모여 전일제교육을 실시하게 된것은 중국정부의 관용과 갈라놓을수 없다고 했다.    현재 이 대학을 졸업한 학생 100%를 각 회사들에서 앞다투어 받아가고 있는데 그중 20%가 세계 각국에 류학을 가고있다.이런 교육이 실천에로 옮겨진데는 평화와 인애를 학생들에게 꾸준히 부여한데 있다고 그는 말하고있다.그것은 바로 그가 전쟁이란 동란시기엔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정처없이 떠돌았는가를 자기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기자가 몇번 이 대학식당에 가서 오찬을 한적이 있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교수진들은 학생들과 똑같이 식권을 내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경의스러운 마음이 생겼고 또 매번 대학을 다녀 갈 때마다 학생들은 무릇 어른을 만나면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못했다.이런 모습을 보면 이 대학은 교수와 학생사이는 물론 사회와도 평화 인애의 화기애애한 기분이 봄날처럼 감돈다는 느낌을 가졌다.    동포사회를 보는 시각과 대학생 양성목적   그는 중국조선족집거구가 해체되는것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있다.지금 중국 200만 조선족사회 특히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연변조선족사회의 조선족인구 감소,학생감소로 인한 학교감소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고있다.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해 소수민족들이 끼리끼리 모여 살고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소수민족 자치를 준것은 중국밖에 없다.미국도 다민족국가로서 민족자치를 실시하지 않았고 모두 섞여 살고있다.끼리끼리 모여사는것도 좋지만 경제,문화 등 요소로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것은 시대의 흐름이다.조선족의 이동을 퇴보라고 볼것이 아니고 또 끼리끼리 모여 사는것이 발전과 성공이 아니므로 다른 민족과 다같이 어울려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지는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국계가 불원한 장래에 없어지기 마련이므로 국제사회에서의 협소한 민족주의는 금물이다.유럽에서 독일이 전쟁치욕을 철저하게 반성한 결과 현재 유럽은 이미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가 작년 11월 26일에 일본 마쯔무라 외무상의 초청에 의해 도쿄에 갔을 때에도 그들에게 일본도 독일과 같이 철저히 반성하고 아시아의 일원으로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특히 아시아의 일원으로,친구로 될 때야만 아시아의 평화가 온다고 그는 역설했다고한다.전 세계적으로 일본제품은 선호하지만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반성해야 한다.중국 역시 불원한 장래에 국경이 없는 시대가 돌아온다.특히 중국 동북3성은 조선,한국,일본,러시아 등 나라와 잇대여 있는 삼각지역으로서 서로 협력하고 서로 부족점을 미봉하면서 공동번영의 길을 걷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동북아는 유럽보다 지하자원,인적자원,자연자원,기술자원이 매우 풍부하므로 모든 국가들의 상호 협력이 매우 필요하다.이런 절박한 필요성을 감안해 연변과기대를 동북아 평화와 공동변영의 길로나가는 엘리트들을 양성해 동북아련합을 구축하는 "산실"로,중국,한국,조선,일본 등 동북아 젊은 엘리트들이 모인 동북아 평화"산실"로 부상시키고 있다고 그는 설명하고있다.    (본문은 2005년 4월 6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15    13.가자,절승경개 칠보산으로...(윤운걸) 댓글:  조회:1785  추천:88  2008-07-31
윤운걸기자문집가자, 절승경개 칠보산으로...  윤운걸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 지리산, 한라산은 조선(한)반도의 6대 명산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은 조선에 위치해 있고 지리산, 한라산은 한국에 위치해 있다. “연변해란강여행사가 중국에서 유일하게 칠보산관광코스를 개발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길림성 용정시관광국 김기호 국장은 얘기하면서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칠보산을 가보지 않으면 한평생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럼 도대체 칠보산관광코스는 어떻게 그런 매력을 띠고 있는가? 이 궁금증을 풀려고 기자는 지난 7월7일부터 10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이 코스에 몸을 실었다. 기자가 택한 일정에는 바로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신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지 12주기가 되는 7월8일날이 겹쳤다. 이날 청진시의 각계 인민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김일성 주석의 동상을 찾아 추모를 했는데 아름다운 꽃송이와 꽃바구니를 든 추모행열은 구름바다를 이루었다. 조선의 북동부에 위치한 함경북도는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러시아와 인접해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함경북도는 3개시, 12개 군으로 이루어졌는데 함경북도는 지리상 산이 많고 벌이 적으며 바다(동해)를 가까이 하고 있는 특이한 자연조건으로 해산물이 풍부하고 공기가 깨끗하며 그 어디로 가나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어 관광자원은 말그대로 매우 풍부하고 다양해 관광객들을 매료하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중국 용정시 삼합통상구를 거치면 바로 조선 회령시 땅을 밟게 된다. 회령시로부터 칠보산으로 가는 코스인 청진시와의 거리는 거리는 90㎞, 청진시에서 칠보산까지의 거리는 130㎞, 청진시에서 경성군까지의 거리는 35㎞이다. 우리는 이번에 이 3개 시, 군과 칠보산코스를 택했다. 조선칠보산여행사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차창밖을 내다보니 길 양옆의 밭에서는 곡식들이 한창 무륵무륵 자라고 있었으며 열심히 기음을 매는 농부들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밭에 심은 곡식들은 옥수수와 콩이 주종을 이루었고 가끔 논밭과 감자밭들이 있었는데 감자수확철이라 수확에 열을 올리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했다. 소개에 따르면 올해에 농사가 풍년이 들 가능성이 있어 기자를 즐겁게 했다. 한창 자라?있는 옥수수와 콩은 그 자람새가 아주 좋았다. 어디를 살펴보나 밭에는 풀 한포기 없이 깨끗해 조선농민들의 밭을 다루는 모습을 한눈으로 읽을 수 있었다. 비록 고난의 행군을 지속하고 있는 조선이지만 도시들은 정결함을 잃지 않았고 길거리에는 종이 한나도 없이 깨끗해 마음을 상쾌하게 해 참으로 백의민족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되새기게 했다. 조선 회령시는 인구가 약 12만여명으로 조선의 북쪽지방에서 가장 오랜 도시이며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동북지방과 마주하고 있어 교통상 변경관광에 아주 유리한 지역이며 이곳에는 북부지대의 특유한 자연풍경과 김정숙(김일성 주석 부인)동지 혁명사적관을 비롯한 혁명사적지가 있어 일행이 찾아갔을 때에도 수많은 학생들과 현지인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었다. 청진시는 함경북도의 소재지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인구는 60만여명이며 아름다운 항구문화도시로 손색이 없었다. 경성은 함경북도에서 가장 오랜 군의 하나이고 조선의 이름난 도자기 산지이며 온천휴양지이다. 그리하여 경성자기, 경성온천, 경성구기자라 하게 되면 세계적으로도 알아 준다고 한다. 예로부터 “함북금강”으로 널리 알려진 칠보산은 특이한 자연풍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조선의 명산이다. 다른 명산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산악미, 계곡미, 바다경치 그리고 계절에 따라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칠보산은 지역별 특성과 참관코스에 따라 내칠보, 외칠보, 해칠보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내칠보는 칠보산의 내륙쪽에 전개되어 있는 명승구로서 수많은 봉우리들과 기묘한 바위들이 우뚝 솟아있어 그 장엄하면서 수려한 것이 특징이어서 신비의 세계에 들어온 미묘한 느낌을 주었고 외칠보는 높이 솟은 웅대하고 기묘한 봉우리들과 기암절벽,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가 많아 산악미와 계곡미를 이룬 것이 특징이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원 826년에 세운 개심사는 조선 함경북도의 건물중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이자 가장 큰 절. 개심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심검당, 음향각, 만세루 등 건물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해칠보는 바위우에 우뚝 솟은 크?작은 섬들과 각양각색의 기암들 그리고 기복을 이루면서 밀려오는 맑은 물결이 바위에 부딪쳐 물보라를 날리는 특이한 해안절경을 펼쳐보여 자연의 신비함을 더욱 짙게 했다. 지리적으로 칠보산은 함경북도 어랑군, 명간군, 화성군, 명천군에 위치해 있으며 상매봉이라는 봉이 최고봉으로서  그 높이는 1103미터에 달한다. 수많은 봉우리마다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고 있지만 그중 몇 개 봉만 소개한다. 외칠보의 노적봉은 일년 농사가 끝나서 양식가마니를 높이 쌓아놓고 농부가 흐뭇이 아래로 내려다본다 해서 조선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만물산은 어느 물건이나 생각나면 즉시 재생한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고 모성암이라는 바위에는 이런 전설이 깃들었다. 까마득한 옛날에 네 딸과 아들 하나를 둔 어머니가 너무 일찍 사망하게 되니 아이들은 어머니 무덤앞에서 밤낮으로 울어 이것이 재생 되어 돌로 굳어 졌다고 한다.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이 칠보산에 민박숙소를 짓고 관광객을 봉사하라는 지시하에 2004년에 칠보산맥 명천군에 20채의 민박숙소를 지었습니다”라고 설명한 조선칠보산여행사 관광안내원은 비교적 유창한 중국어로 중국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매년 1000여명의 중국관광객들이 이 지역을 찾고 있는데 조선족은 물론 베이징, 상하이, 천진, 남경, 신강 등지의 관광객들이 있는가 하면 만족, 요족, 묘족, 토가족 등 중국의 소수민족들도 이 지역을 관광했다.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코스의 하나가 또한 어린이들의 공연이다. 이 어린이공연팀은 청진제강소 유치원어린이공연팀인데 현재 이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는 250명이고 그중 노래와 춤 그리고 전통악기를 다루는 어린이가 70명이나 된다고 한다. 공연이 시작되자 두 어린이가 각기 중국어와 조선어로 인사말을 건네 관광객들의 박수세례를 받았다. 공연프로마다 동심에서 흘러나오는 모습들이 돋보여 너무나도 영특했고 그 어느 연기도 관광객들이 마음을 사로 잡기에는 충분했지만 특히 어린이들이 중국노래인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좋은 친구”를 불러 한족관광객들의 절찬을 받았다. 연변에서 간 한 한족관광객은 이 노래를 듣고 너무나도 기특해 자기 아이도 여기 유치원에 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취재팀은 이들 공연을 관람하면서 눈물이 젖어 수시로 눈을 찍으면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짜릿한 느낌이 생겨 마음을 심하게 설레이게 했다. 칠보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조선측에서 배치한 식사메뉴는 아주 깔끔하고 정결했으며 전통적인 맛이 났다. 특히 끼니마다 오르는 된장국, 미역국, 여러가지 전통김치는 그 맛이 진국이여서 한족 관광객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끼니마다 돼지고기반찬과 해산물반찬 그리고 나물반찬이 올랐지만 워낙 돼지고기를 잘 먹는 한족들도 돼지고기반찬에는 젓가락을 대지도 않고 조선전통음식에만 수시로 젓가락을 대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칠보산관광코스의 하나가 바로 해변가에서 “어죽”을 즐기는 식사다. 해산물로 정교하게 끓인 어죽에다, 현지인들이 직접 숫불에 구운 낙지를 곁들여 술 한잔 마시니 참으로 신선이 울고 갈 지경이라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참으로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명언을 이번 칠보산관광에서 느꼈습니다”라고 감탄을 금치못하는 연변과학기술대학 당위서기 임용세 교수는 이번에 오지 않았더라면 진정 한평생 후회 했을 것이라고 했다.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연변해란강여행사와 조선칠보산여행사는 이 관광코스를 개발하면서 조선과 중국인들의 우의증진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으며 더욱이 관광경제창출에도 많은 업적을 쌓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으며 용정의 경제발전에도 큰 목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취재에 도움을 준 연변해란강여행사와 조선칠보산여행사 그리고 칠보산 정상까지 굽이굽이 아찔한 산길을 너무나도  안전하게 운전해준 조선측 운전사에 심심한 사의를 드린다.  2006/07/19 흑룡강신문 /조선 칠보산 특별취재팀: 윤운걸 기자, 금성, 류연산, 윤완주
14    12.우리는 희망의 "까레이스키“(윤운걸) 댓글:  조회:2047  추천:99  2008-07-30
윤운걸기자문집우리는 희망의 "까레이스키“윤운걸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가 어떤 지역이고 그곳의 우리 동포들 즉 고려인들이 어떻게 정착했고 현재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연변대학 박창욱 역사교수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지난날부터 우리동포를 러시아어로 "까레이스키"즉 고려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곳 동포들도 그대로 자기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피눈물로 얼룩진 고려인의 과거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50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고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에는 약 5만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총 80여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블라디보스톡(일명 해삼위)는 울창한 삼림속을 방불케 하는 경치가 아름답고 자연이 잘 보존돼 있는 도시로 그야말로 한편의 산수화를 방불케하는 해변도시이다.    이런 해변도시에 50만 명 고려인의 근원지이며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신한촌이라는 마을이 100여년전에 형성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신한촌은 일제시대에 고향을 떠났거자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갔던 우리 선조들이 불라디보스톡에 만든 집단 거주지이다.이곳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무기와 탄약을 구할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권총도 바로 신한촌에서 구했고 동지들과 새끼손가락을 끊어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곳도 바로 신한촌이다.    블라디보스톡의 해변을 따라 걷노라면 고려인들의 집이 늘어선 번화가가 있는데 이 번화가의 이름이 "서울"이다.그러나 1937년에 러시아정부가 한국인의 모습이 일본인과 비슷해 일본과의 전쟁에서 구분이 안되고 또 일본의 간첩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해서 신한촌과 그 주변지역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켰다고 한다. 강제이주 한인들의 숫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6만 80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도중에 굶고 병들고 해서 5분의 1의 한인들이 처참하게 숨졌다.다섯 명 중의 한명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그 참경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강제이주로 기차에 실려진 역은 바로 블라디보스톡에서 자동차로 약 한시간종정도 가는 라즈돌로예역이다.이 역에서 한인들이 강제로 기차에 몸을 실어야만 했는데 그것도 객차가 아니라 화물차였다.정부의 명령에 의해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살던 집을 떠나야 했고  떠날 때 살림살이조차 챙기지도 못한 채 시베리아의 무서운 찬바람을 맞으며 화물차에 올랐다고 하니 그 얼마나 처참했겠는가.    신한촌 하면 또 이(리)상설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이상설선생은 한국 충천북도 진천에서 태어나 1917년에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독립운동가이다.1907년 7월에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이(리)준과 함께 불라디보스톡에 와서 헤이그밀사 파견에 깊이 관여해 헤이그망국평화회의에 파견돼 한국독립을 주장했고 이어 연해주에서 선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 순국했다.그의 유언에 따라 시체를 화장하고 뼈가루는 스이픈강물에 뿌렸다.이상설선생의 기념비는 우수리스크에서 외곽을 나가면 발해성터가 바로 보이는 수이픈강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고려인 이 베체슬라브(블라디보스톡 고려인문화자치주 회장,연해주고려인 문화재단 단장)은 처음에 신한촌에 기념탑을 세웠을 때 현지의 스킨헤드족들이 기념탑에 아주 나쁜 글을 자주 써 기념비가 자주 훼손되는 바람에 이렇게 작은 울타리를 만들고 지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말 글이 사라져가는 고려인사회    동북아평화연대 강경주 사무국장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 중에는 10대 후손들도 있고 4-5대 후손들이 많다.60-70살의 고려인들도 간단한 생활용어나 구사할 뿐이고 깊이 있는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다.그러다 보니 후손들도 우리말은 물론 우리 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뻔한 일이다. 더욱이 지난날 한글학교가 거의 없다싶이  해 우리말과 글의 정체성을 고려인들에게서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이베체슬라브 회장도 우리 말을 잘 하지 못해 통역의 도움을 받아서야 취재가 가능했다.고려인 4대로 1937년에 강제이주를 당했다가 돌아온 이베체슬라브 회장은 비록 우리말과 글은 잘 알지 못하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고 살아 숨쉬고 있는 고려인들의 삶의 현장을 현지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2년전에 "아침햇살"이란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해 현지방송국에 전달해 방송하고 있다고 한다.많은 러시아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지금도 불이익을 많이 당하고 있어 매주 두 차례씩 한시간의 방송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생활용어 정도의 우리말을 가르쳐주고 우리 민족노래와 고려인들의 생활사를 러시아어로 방송한다고 했다.그는 기자에게 미리 녹음한 "아침햇살"프로그램을 들려줬다.한 예까쩨리나라라고 하는 83살의 고려인할머니가 유창한 러시아어로 자기가 겪은 고려인 이민사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흘러간 옜노래 아리랑 등 애환이 담긴 우리 민족노래도 흘러나와 코끝이 찡했다.    경제적인 사정도 여의치 않아 초라한 방송 장비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겨울에는 난방시설도 제대로 되지 않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혼자서 열심히 방송을 견지해 나가면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 민족의 끈끈한 생명력을 재확인 했다.그에 따르면 현재 블라디보스톡에는 약 3천 5백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있는데 그들은 주로 교사,의사,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있다.정부 요직에는 고려인들이 중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특히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국록을 타던 수많은 지식인들이 졸지에 물가폭등으로 궁지에 몰린 것이 오늘의 고려인 실정이다.우리말에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공부는 시킨다"는 속담이 있듯이 고려인들도 공부만은 열심히 해서 지식계층에서 많이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그에 따르면 불라디보스톡 수산대학 학자인 김 게로르기니꼴라예비치도 러시아에서 유명한 수산학자라고 한다.    서울이라고 간판을 건 불라디보스톡의 한 식당에서 젊은 세대 고려인 남녀를 만났다.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이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쓰라와워와 (27살)는 스무살 즈음에야 자기가 조선인 후예라는것을 알게 되었고 스탈린 집정시대에 할아버지세대로부터 조선에서 건너왔다고 들었다고 한다.현재 어른들은 모두 우즈베크스탄에 살고 있고 생활이 너무 어려워 이렇게 식당에서 잡일을 한다는 그는 한국으로 가는 것이 꿈이라면서 이제부터라도 한글을 열심히 배우겠다고 했다.식당에서 함께 근무하는 유리아(허순희,23살)도 할아버지,할머니가 한국에서 건너와 지금 이렇게 살고있다면서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남자친구는 러시아인이라고 한다.    우리 말과 글 언어환경은 그토록 열악하고 또 생활용품은 비싸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고려인들의 현실이다.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물가는 걷잡을수 없이 폭등했다.게다가 연해주는 다른 지역보다도 경제가 낙후해 월급은 중국월급과 거의 맞먹지만 물가가 비싸서 구입은 상상초차 할 수 없었다.한 예로 돼지고기 1킬로그램에 인민폐로 80여위안이다.그래서 웬만해서는 돼지고기를 사먹기 힘들다고 한다.기자가 우수리스크의 한 슈퍼에 들어가니 소시지 1개가 인민폐로 40위안씩이나 했고 보드카 한병도 40-50위안이나 했다.    우수리스크에 한인마을 선다    제반 연해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는 바람에 우수리스크 고려인들도 강제이주를 갖다가 오고 왔다가 가기를 반복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삶의 현장은 지금도 기막힌 상황은 마찬가지다.그래서 한국의 동북아 평화연대 등 단체와 뜻 있는 민간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오는 고려인들의 삶의 현장을 개척하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다.이런 단체와 민간인들은 고려인들에게 우수리스크 외곽에 "우정마을"이라는 한인마을을 건설하고 있는데 러시아인들은 이 마을을 "고려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동북아평화연대 강경주 사무국장에 따르면 계획은 1000채의 집을 짓기로 되어 있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지원을 약속했던 사람들의 사정 때문에 지금까지 33채밖에 짓지 못했다.우수리스크 외곽은 넓은 땅들이 많은데 무공해 농사에는 적격이다.그래서 현지 정부도 고려인들이 우수리스크에 와서 농토를 개간하는 것을 적극 환영하고 해외에서도 농토를 개간하는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그러나 "우정마을"에 집 한 채를 짓는데 4만 달러나 든다고 하니 지원없이는 고려인들이 여기에 다시 돌아와 땅을 개간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 있다.    모스크바에서 장사를 하다가 이곳에 오게 된 리에우와안또노치(남,63살)는 현재 1500평방미터의 땅을 청부 말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토마토 ,고추,무,오이 등 채소를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지금 우수리스크에는 동북아평화연대를 비롯한 한국단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학교도 세우고 러시아한인아주 140주년 기념관도 세우기로 계획하고 있지만 자금난과 인력난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고려인 중 러시아 국적도 취업권도,사회보장도 없이 무국적자의 멍에를 안고 이국인의 지위에서 고통과 빈궁 속에서 시달리는 고려인들이 수없이 많지만 앞으로의 희망을 안고 열심히 뛰고있는 현실이 바로 연해주 고려인사회다.이들을 일어서게끔 하려면 고국은 물론 중국동포를 비롯한 전 세계 해외동포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하다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강경주 사무국장은 "고려인은 물론 중국동포들을 도와야 하는 것은 그들을 한국국적을 가지게끔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잘 살게끔 돕는 것이므로 고국에서 당연히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우수리스크의 한 재래시장은 연변 조선족들이 거의 독점 경영을 하고 있어 이제 고려인과 중국 조선족의 새로운 사회구도가 형성될 조짐도 보이고있다.연변 화룡시에서 간 한 조선족아주머니에 따르면 이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대부분이 중국조선족들이 차지하고 있고 구체적인 통계는 없지만 약 1000여명의 조선족이 중국의 의류,생활용품 등을 여기에서 팔고 있는데 한달수입은 최소 만여위안이라고 한다.이 재래시장은 마치 연길시 서시장을 방불케 했다.     취재를 마치면서 러시아의 고려인은 더 이상 역사의 수난 속의 고려인이 아니고 어둡고 낙후한 고려인이 아니며 살아있는 고려인,활기가 넘치는 고려인,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고려인,한겨레와 러시아인들과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고려인들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본문은 2005년 10월 23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13    11.한글발전에 공헌한 조선족학자 (윤운걸) 댓글:  조회:2442  추천:107  2008-07-29
윤운걸기자문집한글발전에 공헌한 조선족학자  — '한글발전유공대상' 수상자 류은종교수 윤운걸 연변대학의 류은종교수(전임)가  한국정부로부터 “한글발전유공대상”의 영예를 안고 미국 하브드 대학 등 5개 나라의 한글발전에 공헌이 있는 학자 교수들과 나란히 로무현대통령의 포상을 수여(2006년10월)  받았다는 것은 실로 조선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하다면 그가 어떻게  이렇듯 훌륭한 한글학 교수, 그것도 중국에서 뛰여 난 한글학 교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였는가?“워낙 내가 한글과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에 입학해 조선 글을 익히게 되면서 그때로부터 우리 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위대성과 집현전 학자들의 꾸준한 노력의 열매가 얼마나 탐스럽고 알차고 우리 문화유산에 빛을 뿌렸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류은종교수는 한글공부와 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경위를 밝혔다.1966년 문화혁명시기에 류은종 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연변대학 교사들과 학생들의 추천을 받아 북경 민족출판사에 가서 자본론,반듀링론을 비롯한 6권의 번역과 모택동 저작 번역, 모택동 시사번역에 참가하게 되였다.당시 모든 학교가 문이 닫기고 연구기구마저 마비상태에 있는 조건에서 유일하게 모택동 저작 번역실 만이 활약적 이였단다.전국에서 이름있는 번역가들과 언어학자 10명이 모여 저작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연구기구가 없는 조건에서 모택동 저작 번역실에서는 언어 규범화가 절실 했다.모택동 저작에 실린 어휘들은 뽑아 규범화대상으로 선정하고 류은종 씨는 언어조사 팀과 함께 동북3성 조선족거주지구를 돌면서 언어조사를 했던 것이다.대중에게 쓰이는 언어가 어떤 것인가를 조사한 후 모택동 저작 번역에 반영했다.당시 언어 사용에서의 초점은 중국조선족들이 쓰는 말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아니면 조선의 평양 말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있었다.그때로 보면 당연히 한국어는 입밖에도 내놓지 못하는 현실이였다.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일찍 70년대부터 언어연구소에서 우리말 규범을 책임지고 우리말 서사규범과 원칙제정을 위해 류은종 씨는 중국 동북3성 조선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돌면서 대표적인 방언지역,조선어문사업기관,교육기관을 찾아 다니면서 우리말 사용 실태를 조사했다.이 기초에서 우리말 서사규범 팀을 구성하고 우리말 맞춤법,발음법,띄어쓰기,문장부호법 등 서사규범원칙을 제정함에 있어서 그는 맞춤법과 문장 부호법 등을 작성했다.1980년대부터 류은종 씨는 조선어사정위원회의 상무리사로 활약하면서 어휘규범원칙의 제정,어휘규범화사업의 선두에서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말을 살려쓰기 위한 사업을 이끌어나감과 아울러 신문,간행물,공개된 출판물들에서 어휘사용실태를 조사하고 한자어,외래어를 람용한 자료들을 수집 정리했다.지속적인 조사와 수집정리 끝에 그는 마침내 “조선말맞춤법사전”을 편찬하는데 성공했는데 이 사전은 후세에 “조선말규범집”을 묶어내는데 훌륭한 자료로 제공되기도 했다.1987년8월 류은종 씨는 조선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에 입학해 1990년4월까지 선후로 “조선어의미론연구”등 수 편의 박사론문을 펴냈다“중한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그젯날 한국과의 교류가 없었던 관계로 중국에서의 한글 연구와 보급은 거의 정지상태나 다름없었기에 하루속히 남북언어통일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한 조선족 언어학교수로서 미루지 못할 사업이였다”라고 류은종 씨는 설명했다.그는 우선 용어통일사전편찬에 참가해 컴퓨터 통일용어사전을 ISO국제 통일기준으로 나가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해 왔다.그는 체육용어통일 자료수집을 위해 여러 차례 평양을 오가면서 지속적인 연구를 해왔고 또 조선학자들을 연길에 초청해 서로간의 교류를 다그쳤다.그리하여 그는 기타 연구일군들과 함께 체육용어와 관련된 올림말 1만 2000여 개를 수집 정리하여 2008년 북경올림픽 “우리말 체육용어사전”편찬의 기초작업을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2005년은 류은종 씨에게 있어서 범상치 않은 해였다.절강성 소흥시 월수외국어대학 동방언어학원에서 그를 부원장으로 초빙했던 것이다.정다운 연변대학을 떠나서,또 사랑하는 친척 친인,벗들을 떠나 저 멀리 절강성으로 간다는 것 역시 이미 60에 나는 그로서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나 저 멀리 절강성에서 까지 우리말,우리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초빙했을 때에는 반드시 가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이 기간 그는  월수에서 “한국어 열독(상,하)을 편찬 출판했고 또 지금 한국어정독 교과서 (시리즈)와 한국력사,한국문화,영화로 배우는 한국어 등 교과서 편찬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류은종 교수는 지금까지 저서(공저포함)20여부,론문 80여 편을 펴냈으며 국가급,성급 이상의 우수성과상과 우수도서상을 여러 차레 수상했으며 특히 연변동서방문화연구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중국경내의 조선족 문화유산정리사업과 발굴,계승,발전,보존사업을 힘있게 추진하기 위해 무려 280여종의 책들을 무료로 펴내주는 쾌거를 지니게 되였다.“한국 로무현대통령의 상을 받고 월수에 돌아오니 저를 위해 굉장한 경축대회를 열어 참으로 감동되였다.특히 주한중국대사관과 한국문화위원장 박영대씨가 중국교육부 외사사에 축하신을 보내왔고 모처럼 경축대회에 상해,녕파,산동,항주 등 전국 각지의 150여명의 한글연구전문가 교수와 학생들이 참가해 선물하는 생화를 받았을 때 나의 일생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페부로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본문은 2007년9월24일자 흑룡강신문에 발표)  
12    10.한국초청사기 법률구조 대안은 없을가 댓글:  조회:2181  추천:90  2008-07-28
윤운걸기자문집한국초청사기 법률구조 대안은 없을가윤운걸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90년대 중반기로부터 불거진 한국초청사기를 당한 사람은 무려 1만8천여명이나 된다.사기행태가 탄로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항의하거나 여러 가지 경로를 거쳐 한국정부에 진정서를 보냈지만 그 보상은 아주 미미한 상태여서 가정이 해체되고 지어는 자살한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다. 이 사건 해결이 종말을 짓기도 전에 또 최근에는  한국방문제를 빙자한  여러가지 사기 사건들이 잇따라 속출해 사회의 불안정 요소로 대두되고 있다.한국초청사기로 인한 피해 류형은 어떠하며 어떤 형태로 사기 당했는가?  이에 관한 법률구조는 어떠한가? 등 문제를 갖고 길림연대변호사사무소 중한법률상담소 소장인 허귀철 변호사를 찾았다.피해 류형 및 사기 형태허귀철 변호사는 접수된 피해자들의 피해 류형은 네가지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첫째 류형은 로무사기 즉 연수생 사기로서 이런 사기는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창궐했다.두번째 류형은 친지초청사기와  류학생초청사기인데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벌어졌다. 세번째 류형은 혼인사기사건으로서 2003년부터 2006년사이이다.  네번째 류형은 오늘날 바야흐로 진행되고있는 한국방문취업제를 빙자로 생기는 사기인데 한국에 친척이 있는 연고자는 3월부터 방문취업제가 실시되면서 무연고자는 9월에 가서야,그것마저 한국어 시험을 치고 또  합격자를  무작위 추첨한다는 제도가 생기는 바람에 한국방문취업 학습반 개최,한국방문취업대행 등 명의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이 변호사사무실에 최근 접수된 피해사례를 살펴보면 로무사기 즉 연수생사기 피해자가 476명,일인당 평균 사기 금액은 인민페로 4만원,친지초청사기와 류학생사기 피해자가 305명, 일인당 평균사기금액은  5만5천원,혼인 사기로 인한 피해자가 1007명, 일인당 평균 사기금액은  5만원이였다.기자가 조사한데 의하면 실지 이런 사기 류형은 조선족사회에서 특정된 시기가 없이 기복을 이루면서 지속적으로 생겼는데 그 중에서도 혼인사기 즉 항간에서 말하는 위장결혼 사기는 극한치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허귀철변호사는 “초청사기를 분석해 보면 려권위조 즉 사진을 바꾸는 사기형태,가짜비자 려권사기,위조서류작성,한국호적등본위조 등이 있는데 그 사기형태는 매우 다종다양하다”고 하면서 주로 혼인사기 형태를 설명했다.혼인사기 사건은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이루어 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짜 결혼을 갈망하는 한국인들이 연변에 많이 왔는데 조사해 보니 절 때 대부분은 농민이거나 어부 그리고 도시의 영세민, 장애인들이였다. 이들 대부분은 진짜 결혼의 목적으로 중국에 와서 대상자를 찾았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그러나 이런 와중에 한국 브로커가 틈을 타 개입하게 되였고 따라서 중국현지 브로커와 맞장구를 치면서 혼인사기를 쳤던것이다. 조선족들의 코리안드림이 거세차게 일어나면서 녀성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혼인행렬에 가담하다 보니 사기행각은 공공연하게 일파만파로 번져지기 시작했다.비록 이른바 중개 혼인이라 하지만  5만원내지 6,7만원의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렇게 거액의 돈을 써가면서 또 외국인과 결혼하자면 반드시 현지에서 리혼수속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정이 파탄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였다.그러나 일단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도 한국에 나가지 못한 녀성들은 부지기수이다.국제혼인과 위장결혼은 엄격하게 구분된다. 혼인사기 단계를 살펴보면 우선 위장결혼 알선자들은 위장결혼 협의서 즉 한국 도착시 즉시 갈라지는 것을 전제로 일단 한국에 도착하면 나머지 금액 즉 5만원에서 6,7만원을 지불한다는 각서이다.다음 한국브로커는 결혼 당사자를 물색,이런 물색 대상자들로는 로숙자,신체가 허약한자,구제 대상자 등인데 브로커들은 이런 사람들에게 중국에 가서 한동안 푹 쉬면서 결혼 상대자를 물색하게 되는데 조건은 비행기표 값은 물론,주숙비 제공,돌아온 뒤에 한화 200만원(인민페 1만6천여원 ) 지급,현지에서 보약을 먹어가며 녀성들과 상담한다는 조건이다.또 중국에서 결혼 상대자가 선정되여 협의가 달성되면 2만5천원을 지불하게 되는데 1차,2차 서류가 완료되면 한국에서 혼인등기가 되고 따라서 한국에 입국한 뒤에 나머지 돈을 지급하는 사기도 있다.그러나 이렇게 2만5천원을 우선 지급해도 나가지 못한다.그 경우를 살펴보면 이미 한국측 결혼자와의 련락도 끊어진 상태이고 브로커도 언녕 자취를 감춘 뒤이다.한국측의 이른바 한 결혼자는 여기 현지에서 이런 형식으로 세 녀자와 결혼수속을 하고 사라졌던 것이다.또 한국에서 혼인등기가 됐지만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리유는  첫째 한국측 당사자가 위장결혼으로 체포돼서 중국의 누구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둘째는 당사자와 브로커사이에 돈 분배에서 분규가 생겨 브로커를 신고 한 경우,셋째는 주위사람들이 검거 할 경우,넷째는 주중한국 령사관의 추가심사다.즉 전화확인시 대답 불투명,중국측 상대자가 리혼신고 1년도 채 안되여 의심이 가고 한국측 재산담보도 허위일 경우 비자발급이 기각되기 때문이다. 허 변호사가 한 국에서 이런 사람들을 30여명이나 조사해 보니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었단다.이런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 구제대상, 로약자,최하층 빈곤층에서 사는 사람들이였다.브로커들은 이런 사람들한테 접근해 중국 녀성과 결혼하면 신체가 좋기에 여기와서 일하게 되면 빚도 갚을 수 있고 또 성실하게 생활한다고 여차여차하게 구슬려 그들이 중국행을 하겠끔 유도했단다.법률구조 방안국제결혼이란 민족계선,나이계선,빈부차이가  없는 것을 전제로 한다.실지 무릇 어떤 형태로 결혼이 시작되였던 지간에 당사자들끼리 만난 뒤에 감정에서 떨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한국법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법조계에서는 그들의 실제사실에 근거해 확실히 감정이 융합되였고 또 편지래왕 상황,몸소 래왕한 상황 등을 파악하여 정식결혼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허귀철 변호사는 주장하고 있다.이른바 결혼으로 한국에 간 녀성들이 리혼 소송을 제기하고 사기당한 피해를 보상하자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실지 한국 결혼자가 국제결혼이 허위로 탄로될 경우 한국법 공전자(허위서류작성,공무원기편 위조서류작성 등)위조법에 의해 벌금위주의 책임을 추궁하고 형사책임은 추궁하지 않는다.따라서 위장결혼사기를 친 사람은 형사책임을 추궁하는데 일단 판결이 나면 벌금액은 국고로 들어가고 피해 금액은 보상받지 못한다. 또 위장결혼 혐의가 있어 중국 녀성이 체포됐을 경우 50일간 구류하게 되는데 위장결혼 사실이 드러나면 즉시 강제 추방된다.그러므로 위장결혼이라 할지라로 이미 한국에 혼인등록이 되였으면 리혼소송을 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이런 리혼소송을 하지 않는 녀성들이 적지않다. 강제 추방되여 다른 경로를 거쳐 한국에 재입국하려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중국에서도 재리혼은 불가능하다.그러므로 중국의 위장결혼자들은 돈 떼우고 강제 출국 당하고 재결혼까지 불가능하게 되고 더욱이는 중국 측에서도 구제는 불가능하므로   불행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허 변호사가 조사한데 의하면 어떠 형태로의 섭외결혼이든지간 중국측 녀성은 인민페 5만원선에서 7,8만원,그중 중국측 브로커는 5천원-1만원을 착복하고 나머지는 한국 브로커가 몽땅 챙긴다.섭외혼인으로 사기친 한국의 '차차차'란 사람이 중국에서 200여명의 녀성들을 사기쳤는데 그 금액은 일인당 5만원, 모두 1천만원을 사기쳤다.그는 한국의 법률을 도 피해 지금 중국에 잠복해 있는데 계속 추종 중이라고 한다.중국 측 알선자가 섭외결혼을 성사시킬 경우 인당 5천원-1만원을 받게 되는데 중국측 결혼자가 한국에 입국하지 못 할 때에는 그 돈은 되돌려야 한다.그러나 알선자가 수십명 혹은 몇백명을 섭외결혼시켜 일단 사기가 구성되면 벌금은 물론 형사책임도 추궁할 수 있다. 이미 착복한 돈을 지불하지 못할 상황이면 가정도 패가망하게 되고 본인도 법률의 추궁을 면치못한다. 이미 사실이 들통나 외지에 도망간 브로커도 적지않다.이렇게 이른바 섭외결혼으로 인한 사건들이  악순환으로 번져져 가고 있다..어떠한 형태의 섭외결혼이든지 중국측 상대자 녀성은 거액의 돈을 고리대로 꾼다.그러므로 그 본인은 고리대 돈을 갚아야 하는 신세이고 따라서 사기피해 금액을 보상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한국 브로커가 소량의 금액을 사기쳤을 경우 벌금으로 대체하고 대량의 금액을 사기쳤을 경우에는 감옥살이를 면치 못하며 극소수는 국외로 도망갔는데 그중 반수이상은 중국에 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허 변호사는 설명했다.“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한국방문취업제는 조선족과 고려인 포용의 정책이기에 현재 동포사회에서 수요되는 것은 자유래왕이다.실지 수많은 중국현지 초청사기 피해자 그리고  섭외혼인사기로 피해를 받은 녀성들이 빚을 갚을 길 없는 상황에서 오직 유일한 길은 한국에 나가 로동으로 빚을 갚는 것이다”라고 허 변호사는 역설하면서 이는 국가공평성,사회공평성에도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본문은 흑룡강신문 2007년4월20자에 발표)
11    8.중국조선족과 한국인간의 갈등 ABC 댓글:  조회:2582  추천:95  2008-07-24
윤운걸기자문집중국조선족과 한국인간의 갈등 ABC윤운걸1992년도에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인과 조선족들 사이에 접촉이 빈번해 지기 시작했다. 서로간에 힌 피줄이였지만 처음에는 신비한 눈길로 조심스레 접촉하면서 상호간의 신뢰도를 쌓으려 노력했으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갈등씨앗이 점차적으로 자라 다른 민족들도 경멸의 눈길를 보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필자는 다년간 한국을 다녀 오면서 느낀 점과 조선족동포사회를 취재하면서 느낀 점을 요약해서 정리하오니 이 글이 한국인과 조선족동포사회의 갈등해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쁘게 생각한다.갈등A:고국인과 이주민으로서의 갈등씨앗조선족의 이민사를 간략해보면 1627년부터 1867년 사이에는 청나라가 봉금령을 실시하다보니 대량의 조선(한)인들은 “간도”땅에 오지 못했다. 하여 이 시기의 이민은 목숨을 걸고 들어온 시기라 볼 수 있다.1869년과 1870년의 대기황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에서 봉금령을 페지하는 바람에 1910년까지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기내기로 “간도”땅에 건너왔다.1910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망국의 설음을 안은 조선(한)이들이 또 수없이“간도”땅을 찾아왔고 일제와 싸우기 위해 많은 항일투사들도 “간도”땅을 찾아왔다.1945년도까지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지역(주로 동북3성)에 찾아온 조선(한)인은 216만여 명으로서 지금의 조선족인구보다 더 많았었다.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중국땅에 찾아온 절대다수의 조선(한)인은 기황과 일제의 침략에 견디지 못해 삶을 위해 찾아왔다는 점이다.1921년도에 중국공산당은 설립된 날부터 무산계급로고대중을 위하여 군벌과 싸우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기치를 내들었다. 이 기치가 중국땅에 이주한 조선(한)인들의 투쟁목표와 공통점이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수한 조선(한)인들은 중국공산당과 어깨겯고 전장에서 피를 흘렸고 또한 조선(한)인들은 해방전쟁시기에 국민당을 쳐부수는 전장에서도 혁혁한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팔로군은 동족으로서의 대립인 국민당의 간첩들이 요새에 잠복해 있을가봐 될 수만 있으면 조선(한)인 투사들을 요직에 두었다 한다.1945년도에 광복이 되면서 중국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실시하게 되었고 따라서 나라를 잃었던 조선(한)인들도 중국땅에서 토지를 분여받게 되었으니 이만큼 더 큰 희열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하여 조선(한)인 청장년들은 또 중국해방전쟁에도 용약 참가했다.통계에 따르면 중국해방전쟁시기에만 해도 조선(한)인들이 6만 3000여명이나 해방군에 가입했는데 이는 여기 조선(한)인 인구의 5%도 넘으며 목숨을 잃은 조선(한)인은 길림성 렬사의 93%를 차지했다.이로해 조선사람도 아니고 중국사람도 아니였던 조선(한)인들은 1953년도에야 비로소 연변조선족자치구(현재는 주)가 설립되면서 중국정부로부터 법적으로 승인받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명칭을 달게 되었다. 하여 조선족은 사회주의체제하에서의 사회주의 리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조선족은 점차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배타성을 갖게 되었는바 이것이 한국인과의 원천적인 갈등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런 원천적인 갈등으로 하여 조선족은 조선과는 친혈육처럼 지냈지만 한국과는 자본주의국가라는 시점에서 배타적으로 지내왔다.갈등B:문화적인 차이1989년도 최초로 한국에 다녀갔을 때 한국인들과의 접촉 중에서 공동점이라면 공산당은 “폭군”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였다. 이로 보아서 그제날 한국의 교육체제는 철저하게 사회주의배척체제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당시에 내가 접촉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하는데 정말인가”고 롱담절반, 진담절반으로 문의했다. 그리하여 중국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고 여차여차하게 설명해서야“그럼 그렇겠지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똑 같지 않는냐”라고 개탄했다. 따라서 조선족들도 그제날에는 “자본주의나라는 거지가 욱실거리는 나라,깡통을 차고 빌어먹다가 숨진 암흑사회”라는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왔다. 이러할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활해온 한국인들이 사회주의체제에서 생활해온 조선족을 불신할 수 있을 수 있고 또 조선족들이 한국인을 불신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사회체제교육시각의 엄청난 차이점으로 하여 한국인과 조선족사이에는 심리상의 갈등과 오해가 자연히 생겨난 것이다.다음 력사문화에 대한 인식차이를 살펴보자.지금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청소년들은 물론 50대 지어는 60대에 이른 사람들도 우리 민족의 력사를 거의 모르고있다. 지어는 우리 글을 창제한 사람(세종대왕)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않다. 이는 우리의 민족교육체제에서의 엄청난 비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자기 민족의 력사를 모른다면 고국인들과의 융합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여기 조선족들을 만나서 이러저러한 력사를 되풀이하면 모르고 모르다 보니 크게 관심을 돌리지 않고 또 이러저러한 력사를 알고 있느냐 하고 문의하면 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조선족이 많지 못하다. 이에 한국인들은 한탄을 금치 못할 수 밖에 없다. 지어는 자기 민족의 력사도 모르니 어찌 한피줄이겠는가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제날의 중국조선족은 망국의 설음을 안아오던 나머지 조선(한국)사람도 아니고 중국사람도 아닌 정체가 상당히 불투명해진 존재였다. 허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중국에 살고 있던 조선(한)인들은 자기의 피땀과 신근한 노력으로 떳떳하게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탈바꿈했다.그래도 조선족들에게 조상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조선 혹은 한국의 어느 도,어느 군 어느 면,어느 리라고 대답하지 중국의 어느 고장이라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허나 일부 조선족은 조상의 고향을 모르고 있고 지어는 자기의 성씨 족보관계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않다.한국에서는 자기의 족보를 모르는 사람을 “상놈”으로 취급한다.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학교시절에는 부친이 족보관계를 가르쳐주지않았고 (주;혹시 너무 어려서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다)중학교 1학년때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아버지가 력사반혁명으로 몰리고 어머니가 조교(조선교민)라는 리유로 집이 풍지박산 되다보니 집에  간직해 뒀던 족보마저 반란파들에 의해 불타버렸으니 어떻게 족보를 알겠는가? 다행히도 공부를 하면서 또 한국에 갔을 때 족보관계를 알게 되였기 때문이다. 이는 결코 조선족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력차의 중국의 정치운동 그리고 교육체제에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 밖에 없다.또 례를 들 수 있는 것은 조선족의 세시문화이다, 설명절이 돌아오면 차례를 지낸다든가, 아침에 일어나서 아들, 며느리가 부모에게 이침인사를 한다든가...등등의 세시문화는 지금 조선족동포사회에서 거의 사라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현재 의학계의 학자들은 한개민족이 이역에 50년이상 거주하게 되면 그 나라의 정치,교육,문화 등 제반 요소에 의해 유전인자까지 변이한다는 설을 제기하고있다.이 설이 성립되면 중국의 조선족은 분명히 한족들에게 상당한 면에서 동화되어있다는 것을 제기하고 싶다. 한족들의 “만만디”기질이 조선족의 심령에 싹트기 시작했고 어떤 부분들에서는 한족들보다 더 “만만디”기질로 발전하고있다. 허나 조선족의 정체적인 문화심리를 분석하면 조선(한)도는 분명히 “친부모”이고 중국은 분명히 “양부모”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망국의 설음을 안은 중국조선족은 그 어느 민족과 달리 이중성을 띤 민족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조선족은 언제나 “친부모”와 대화하려 하고 “친부모”에게 그제날의 설음을 토로하고 싶어한다.갈등C:시장경제에서의 갈등1953년도에 조선(한)반도에서 건너온 조선(한)인들이 조선족이라는 법적인 지위가 차례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양부모”의 집에 와서 이름을 새로 지었다는 얘기로 된다. 지위가 확정되면서 조선족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즉 계획경제속에서 세월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경제도약에 대한 개념도 점차적으로 희박해지게 되고 또 수십년 동안 언론매체에서도 한목소리로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게 사는 사회주의나라로 선전하다보니 자본주의 발전형태는 알 길이 없었다. 또 가만히 자본주의국가 방송을 듣거나 언론을 퍼뜨린다면 대뜸 “반혁명”이요,“반사회주의 분자”라는 모자를 들씌워 놓으니 워낙 민감해진 조선족들은 감히 자본주의경제를 연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헌데 서울에서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또 1992년도에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조선족은 두려움과 신비감으로 가득찬 눈길로 “쪽문”을 슬그머니 열고 바깥세상을 보기 시작했다.그제날 토막나무를 때면서 이밥을 먹으면 대만족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180도로 바뀌여지기 시작했다. 그제날에는 자전거도 없어 몇십리 지어는 몇백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고 시골에서는 지금도 소수레를 주요교통도구로 쓰고있는 조선족은 한국에서는 자전거를 보건체육용으로 리용하고 소는 식용으로 하기 위해 기르며 수레는 “골동품”으로 취급되여 박물관에서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우기 한국은 일인당 소득이 만딸라,중국의 일인당 소득이 몇백딸라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 조선족사회는 마른 장작개비에 불이 확 달린셈이 되었다.일확천금 “한국꿈”이 조선족사회에 온역처럼 퍼져나가면서 한국에 가면 길바닥에 딸라가 널려져있어 허리 아파 줏지 못할 정도라고 착각까지 했다. 그제날 교육에서 파생된 경제창조가치개념에 큰 오차가 생긴 것이다. 그제날 계획경제모식속에서 수십년동안 살아온 조선족은 로동재부창조성군단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의존성군단으로 자리매김을 했다.이런 와중에 한국초청사기,한국인랍치사건들도 빈번하게 생기고 있다.아직까지도 1만6000여 가구의 한국초청사기피해자들이 눈물을 휘뿌리며 떠돌이생활을 하고있다. 또한 한국에 간 조선족들도 불법체류란 딱지를 쓰고 어지럽고 힘들고 위험한 이른바 “3D업종”에서 일하면서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족들이 기수부지이고 사고로 사망하고 병들어 사망한 사람들의 골회함이 아직도 재대로 구중천에 가지 못하고 영안실에 그대로 방치돼있다고 한다.또한 불법체류라는 리유로 숱한 돈을 쓰고 한국에 갔다가 쫓기워 온 사람이 그 얼마인가?료해한데 의하면 일본은 자기 민족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관용정책을 실시하고 그제날 중국땅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을 몽땅 본국에 데려갔을 뿐만아니라 중국땅에 묻혔던 일본인들의 뼈까지도 파갔다고 한다.(필자의 대학 동창생 한 사람도 아버지가 일본인이여서 일본으로 귀화해 갔음)물론 나라와 나라와의 외교문제도 있겠지만...여기에서 조선족도 하루속히 경제의존성군단으로부터 로동재부창조성군단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어느 한 교육심리학자는 “조선족교육은 민족의 주인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인 것이 아니라 일군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다”라고 첨예하게 지적했다. 주인의식이 없다는 것은 창조성의식이 없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일군의식이라는 것은 의존성의식 즉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의식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해방된지 50여년이 흘러도 중국의 조선족은 노래나 잘 부르고 춤이나 잘 추는 민족으로 불리웠지 경제의식이 삐여진 민족으로는 인식되지 못했다. 물론 그제날 우리의 조상들은 근로하고 용감한 민족으로 각광받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 경제의식 정체가 상당히 희미해졌다. 이는 시장경제론리로 볼 때 아주 위험한 민족의식이라 하겠다.이런 의식으로 하여 조선족은 궁극적으로 다른 민족에게 업심을 당하게 될 것은 물론 동족인 한국인에게도 업심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오늘날 한국인과 조선족사이의 갈등이 생기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지나온 력사배경, 교육, 문화, 체제의 차이, 경제가치관념의 차이로 말미암아 오늘날 특정된 시기에서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그러므로 이런 갈등해소는 제반 조선족사회와 한국인사회에서 공동히 풀어나가야 할 중대한 과제도 되고 있다.(본문은 2000년 5월25일자 흑룡강신문에 게재됨)
10    7.민족교육의 허점은 어디에(윤운걸) 댓글:  조회:1744  추천:138  2008-07-23
윤운걸기자문집민족교육의 허점은 어디에-연변대학 교육심리학부 황형규박사 인터뷰윤운걸우리 민족의 희망은 우리 민족교육의 발전여하에 달렸다. 새로운 천년에 우리 교육의 줄기찬 발전을 시도해보자면 오늘을 열심히 진맥하는중에서 우선 허점과 부족점을 찾고 그것을 대담히 정시해야 할 것이다.이런 시대적인 감각을 느끼며 기자는 교육학을 깊이 전공한 연변대학 교육심리학부 황형규박사를 찾았다.문;조선족교육전망연구는 어느 정도인가?답:지금까지 중국 조선족교육에 대한 전망연구는 아주 빈약한 실정이다.그러므로 새 세기를 넘게 되는 오늘에 와서 반성해도 크게 반성해야 될 일이다.지금 교육계에서는 조선족교육의 구조,자금 등등의 현상만 거론할뿐 실질적으로 깊은 연구는 하지 못하고 있다..문:그럼 조선족학교 교육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다고 보는가?답:우선 조선족교육은 우리 민족의 주인을 양성하는것이 아니라 일군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라고 본다.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주인보다는 성실한 일군이 되기를 더 강조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뿐만아니라 교육방침은 교육방침대로 가고 교수일선에 선 학교들에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를 제시하고있다.우리 조선족학교 교육의 목적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살수 있을가?’하는 생존확보수단이였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이 교육목적은 어찌보면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교육목적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가장 원시적인 목적이 아닐수 없다.그동안 우리는 주인의 자질을 키우는 교육에는 등한시했고 그대신 충직하고 유능한 일군을 양성하는 교육에 정성을 다해왔다.다행스러운것은 그래도 일부학교들에서는 주인의식을 가진 학생양성에 눈길을 돌리고있다는 점이다.연변1중에서 제기한 교육목표는 우선 ‘수령품성을 가진 걸출한 민족인’이다. ‘걸출한 민족인’이란 현대화건설에 필요한 다방면의 자질을 겸비한 인간이며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력사적사명감을 안고 과감히 헌신할수 있는 인간이다.다음으로 우리 민족교육은 조선족의 진흥보다 사회정치형세에 따른 교육이라고 본다.중국 교육이 무산계급정치를 위하여 복무하고 사회주의건설에 이바지하며 사회정치형세의 변화에 따라 상응하게 변화되는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소수민족교육은 그 민족적특색이 짙어야 한다.특히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하에서 락후한 민족경제의 진흥을 위해서는 민족인재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조선족경제가 날따라 락후한 책임을 추궁한다면 우리의 교육이 제일 큰 책임을 져야 한다.문:조선족학교 교육의 체제면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답:우선 조선족학교 교육은 획일적이고 군사문화적이다.전반 나라의 교육체제가 획일적이고 군사문화적인것처럼 조선족교육도 집단적 획일성을 체제로 하고있기 때문에 상급자에 대한 무조건 존경의 권위주의를 요구하고 젊은 세대들의 개성과 다양한 생각을 길러주지 못하고있어 꼭같은 구호만 외우고 꼭같은 생각과 행동만 하도록 훈련시키고 경쟁시키는것을 사명감으로 삼게 한다.다음으로 조선족학교기관의 설치와 담당인원의 배치가 모두 사회체제를 심통히 닮았다.민족지역은 민족자치교육의 권리가 있으나 그 권리를 충분히 행사하지 않고 언제나 중앙과 성정부로부터의 어떤어떤.몇호몇호 정신에 의해 교육의 일체를 운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속에서 교원은 단순 지식전달자로서의 기능만 강요당하고 교유자로서의 자률성과 창조성은 억압당하고 학생들은 인간으로서의 전면적발달이 억제당하고있다.세번째로 우리의 교육은 제도권학교교육의 중심이였다. 지금까지 조선족교육은 학교교실안에서의 교과서내용중심의 지식습득과 기술훈련일뿐이다. 비록 유치원으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완정한 교육체제를 갖고 있지만 사회교육이나 산업교육,가정교육은 아주 미개발상태이다.문:교육내용면에서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가?답:조선족교육은 아주 페쇄적이다. 우리의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웃과 동포,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이나 친근감을 갖도로 가르치지 못하고있으며 교원과 학생사이, 반급과 반급사이, 학교와 학교사이에 페쇄적 장벽이 있다. 특히 각급 학교의 교육내용으로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도 리해할수 없다.그 결과 이질적인 대상과 타지방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배타적정서가 학생들 심리에 싹튼다. 다음으로 비민족의 교육이다.우리 교육은 단순한 지식전수의 응시교육에만 응부하고 있지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은 몹시 홀시하고있다. 학생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허다한 교원들까지도 민족 고유의 전통사상과 민족문화, 민족력사를 너무도 모르고있다. 한마디로 우리의 교육은 학생은 공부하는 기계이고 교원은 기계가 돌아가게 하는 기술자에 불과하다. 진학률이 높으면 우수학생, 우수교원으로 평가되여 공부는 좋고 나쁜 학생을 가르치는 유일한 기준으로 되고있다.문:세 세기를 맞는 오늘 조선족교육의 화제는 무엇인가?답:조선족교육은 민족화,주체화,민주화,인간화의 교육으로 나가야 한다.오직 이래야만이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않고 동화되지 않으면서도 타민족, 타문화와 더불어살 수 있고 더불어 사는 민족으로 발탁할수 있다고 본다.(본문은 1999년 12월24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9    6.재한 조선족사회 믿음과 갈등 엇갈려(윤운걸) 댓글:  조회:1677  추천:103  2008-07-22
윤운걸기자문집재한 조선족사회 믿음과 갈등 엇갈려  윤운걸현재 한국 체류조선족 16만명으로 추산 향후 최대 50만명으로 늘어날것으로 예상 중국 조선족 동포들은 90년대부터 친척방문, 연수, 위장결혼 등 다양한 경로를 거쳐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중국동포는 이제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문이 활짝 열리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16만여명으로 추산되는 한국 체류 중국 동포사회 규모가 일단 ‘방문취업비자 제도’가 도입되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 되여 최대 50만명의 동포사회 형성도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국정부에서 자진출국정책을 시행한 후 최근 중국 동포 재입국이 본격화 되고 있다.  년말까지 10만명 가량 입국할 전망이며 최대 50만명 이상의 중국 동포사회가 형성될 경우 다양한 현안들이 제기될 전망이다. 위장결혼과 불법체류 등은 사라지겠지만 중국 동포들 요구가 집단화될 경우 사회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건설현장 등 비숙련 로동시장에서  한국 로동자와 중국 동포 사이의 갈등도 부각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비숙련 로동현장 변화 시작   중국 조선족동포의 대규모 유입으로 건설현장 등 비숙련 로동시장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일용직 건설 로동자의 많은 수가 중국 동포들로 채워지고 있어 한 국내 건설 로동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가리봉 인력시장에서 만난 김성도(54살)씨는 “경기도 파주 LCD산업단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일용 로동자 대다수는 중국동포”라며 “일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들의 수자가 많아지면서 일당이 내려가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국 로동부 관계자도 “중국동포 입국 확대가 국내 로동시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내국인 고용기회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동포의 대규모 입국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1월부터 중국 동포들의 취업이 제한돼 왔던 제조업, 농축산업, 연근해어업 등에 대해 취업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바꿨지만 건설 로동현장으로 로동력 류입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국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리해춘 교수는 “건설 서비스업에서는 중국 동포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보다  커질  가능성이 높다”며 “제조업의 경우 내국인 로동자를 대체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보완적인 관계도 많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차별하는 사회풍토 개선돼야 지난날도 그랬지만 지금도 중국 동포를 하층 집단으로 생각하는 시선도 문제다. 중국 동포 상당수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사회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 룡정시에서 한국 전라북도 모 시에 들어와 8년째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박선화(40대,가명)씨는 “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를 불쌍한 사람쯤으로 보는 손님들이 있다”며 “새로 입국하는 사람들은 이런 시선에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토로 했지만 식당 사장은 재중 동포 아줌마가 잔 머리를 굴리지 않고 너무나 일을 열심히 하기에  보낼 수 없다고 정을 토로했다. 불법체류 신분일 경우에는 차별을 받더라도 참는 경우가 많지만 합법적 신분일 경우에는 항의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런 불만이 집단화 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국 명지대학교 박화서 교수는 “50만명 규모의 동포사회가 형성될 경우 집단적인 리해와 요구를 표출하는 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비합법적인 체류와 로동현장에서의 문제를 줄일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한국국내에 남아있는 불법체류자에 대한 조치도 필요하다. 중국 로동자센터 오천근 소장은 “수자가 많이 줄긴 했지만 위장결혼으로 입국했거나 정상적으로 결혼했지만 가정불화로 불법체류자 처지로 전락한 사람들도 아직 많다”며 “이들이 설 자리를 잃을 경우 범죄의 유혹에 빠질 우려도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상호보완은 물론 문화 동질성 회복 급물살 탈 듯 중국 조선족동포들이 이러저러한 경로를 거쳐 한국에 가서 엄청난 부를 창조한 것은 중국의 개방 덕분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만 보더라도 지난해에 한국 로무를 위주로  벌어들인 돈이 8억2000만 달러,이는 연변의 년간 재정 총수입의 2배 이상을 훨씬 웃돈다고 한다.한편 한국에서 만난 대부분 조선족동포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서울에서 만난 한 고향친구는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 돈도 많이 벌었고 그간  기술도 배웠으니 인젠 중국에 돌아가  번 돈으로 회사를 차리겠다”면서 “한국에 와서 몇 년간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전통 문화가 몸에 배게 되였고 따라서 민족문화 구축에서 앞길이 트이게 되였다”고  말했다.  재한 조선족동포들의 고국과의 문화 동질성은 지금 한창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꼈다. 특히 로인을 존중하고 불우이웃을 돕고 남을 사랑하는 한국사회의 풍토 인정은  조선족 동포들이 반드시 따라 배워야 한다고 기자를 만난 재한 조선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 중국의 “뢰봉이 지금 한국에 와 있다”고 익살스레 얘기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취재를 마치면서 이제 한국 방문취업제도가 도입되면 제반 동포사회에 주는 영향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르는 갈등의 장벽은 점차적으로 해소될 밝은 전망이 보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특히 한국방문 취업 동포들이 경제적인 토대를 만들고 돌아올 경우 문화적 동질성도 잇달아 회복되고 발전해 나가면서 현재보다 더 끈끈한 동포사회 네트워크가 형성될 가능성이 많다. 2006/04/10 흑룡강신문  
8    5.국외나들이로 진통겪는 연변조선족(윤운걸) 댓글:  조회:2683  추천:127  2008-07-21
윤운걸기자문집국외나들이로 진통겪는 연변조선족윤운걸통계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이 로무로 나간 나라들로는 한국,러시아,일본 등 23개 나라이다. 그중에서 한국으로 간 조선족은 80%이상에 달한다. 연변에서는 근 10만명이 한국 등 나라에 다녀왔는데 지난해에 해외에서 들어온 외화가 2억3500만딸라 (인민페로 약 19억4100여만원)로서 지방재정년간창출액 15억을 초과했다.국외에서 벌어온 돈 유흥업소에현재 연길시에는 노래방,사우나,다방 등 유흥업소가 수백개나 된다. 이런 유흥업소의 절대 대부분은 국외에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이 꾸려놓은 것이다.근간에 국외에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유흥업소경영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몇년동안 관찰한데 의하면 어떤 유흥업소는 괜찮게 되고 있지만 적지 않은 유흥업소는 불경기상태이다. 또한 이런 유흥업소에 드나드는 손님은 그 절대 대부분이 조선족들이다. 그럼 연변조선족들은 돈을 어디에 쓰고있는가?연변의 한 농민은 한국에 가서 6년간 뼈빠지게 벌어 20만원을 챙기고 돌아왔다. “한숨 푹 쉬여야겠다”는 것이 그의 입말로 되었다고 한다.하긴 그 힘든 3D업종(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에서 차별시와 천대를 받으며 피땀으로 벌었으니 한쉼 쉬는 것도 나무랄바 못된다. 헌데 농사는 짓기 싫고 잔돈은 벌어봤자 취미가 생기지 않아 마작판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원치기, 그것도 재미가 없자 수중에 돈이 있으니 크게 놀기 시작했다.5월,10원,100원까지 올라가면서 불과 1년사이에 20만원이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그 바람에 잘 살아보자던 안해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초중 다니던 아들애는 나쁜물에 물젖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또 “한쉼 쉬자”는 일부 귀향농촌 로무일군들은 거의 매일이다싶이 술과 고기로 허송세월을 보내고있으며 어떤 이는 증권투자에 망해 허탈감에 쌓여 있는 것도 오늘의 현실이다. 또 어떤 귀국로무일군들은 해외에서 벌어온 돈으로 집장만에 신경을 쓰다보니 생산 재투자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있다.연변의 모 현 농촌의 정모는 그래도 한국에 가서 벌어온 돈으로 현소재지에 노래방을 앉혔는데 소방시설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아 전기화재로 하루저녁에 “거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얼 노리고 있는가? 그들과 대화해 보면 이구동성으로 또 출국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국내에서 아무리 일해봤자 1년수입이 한국의 한달수입밖에 안된다는 것이다.일리가 있는상 싶다.한국행 이루기 위해 물불가리지 않아주심양한국령사사무소에 따르면 상업고찰 등 명목의 출국비자신청은 적지 않게는 위조,변조 비자신청서류이다.아울러 위조,변조 비자신청에 대비해 심양 서탑에는 이러저러한 민박집들이 촘촘히 늘어섰다.이런 민박집 아기씨들은 매일 주심양한국령사사무소 문어구에서 비자신청을 하러 온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꼬드긴다. 여차여차하게 심양령사사무소책임자를 알고 있으니 자기 민박집에 들라는 것이다.연변의 한 무던한 농촌남자가 한 민박집아가씨의 꼬임에 걸려 투숙했다. 민박집아가씨의 해사한 얼굴에다 꿀같은 감언리설에 우선 비자발급비로 2000원을 맡겼다. 헌데 오늘,래일,차이피일 미루면서 된다던 비자발급이 나무아비타불이 되었다. 택시비,접대비,1000원 령수증을 내놓으면서 나머지 1000원을 돌려주는 것이었다.그럴만도 했다.이른바 “노력하다 안됐으니...”그 시골남자도 리해가 갔던 모양이다.이럴바에는 어쩌다 심양에 왔는데 “즐기고 보자”고 맘먹은 그는 그 아가씨가 “수고”했다는 마음으로 함께 즐기기 시작했다. 돈 빌어 갖고 간 5000원을 며칠사이에 탕진해 버렸다. 헌데 어느하루 음경에 통증이 생겼다. 문제의 심각성을 뒤늦게야 느낀 그는 호주머니 돈을 긁어모아 겨우 차비를 해서 연길에 되돌아왔다. 소설에나 불 수 있는 이런 사건들이 현실로 되었는데 이 사실은 연변의 모 성병진료소의 의사가 기자에게 피로한 것이다.지난 6월말에 기자가 주심양한국령사사무소에서 목격한 일이다. 길림에서 왔다는 한 40대의 녀성은 비자신청을 했지만 또 퇴짜를 맞았다.허나 그는 락심할 대신 히쭉 웃으면서 “다음번에 또 와 봐야지”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한테 왜 퇴짜를 맞았느냐고 문의하니 초청서류가 완벽되지 않았다면서 이번까지 7차나 비자신청을 했다고 한다.참으로 “출국마라손선수”못지 않았다. 이렇게 7차나 비자신청을 하려고 이모저모 신경을 썼으니 가정은 언제 돌보고 아이는 어떻게 길렀겠는가? 이렇게 거듭 비자신청퇴짜를 맞는 “마라손선수”가 연변에는 기수부지인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이런 “마라손선수”는 늘 요행을 바라는 것이 공동심리이며 또 쉽게 초청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다.1996년도에 연변에서 한국초청사기가 큰 이슈로 되었는데 그 피해자가 1만6000여명이나 되었다. 이직까지도 상당수의피해자들은 빛 때문에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있다.혼인문제심각 리혼사건 잇달아연변의 경우 한국 등 나라에 결혼,로무송출 등으로 나간 사람들 중 절대 대부분은 녀성이다. 룡정시 백금향만 보더라도 남녀 비례가 43:1이라는 통계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위장결혼이건 합법결혼이건 한국에 시집을 간 조선족녀성의 수는 1993년도에 1463명,1994년도에는 1995명.1995년도에는 7693명,1996년도에는 1만명선을 넘어섰다.현재 한국인과 결혼한 조선족녀성은 7만여명이나 된다.조사에 따르면 결혼적령기인 20-30세 중국조선족 녀성은 20만명으로 추계되고있는데 그 가운데 7만여명이 한국으로 시집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즉 중국에서 아들딸을 낳아 조선족공동체를 유지해야 할 조선족녀성 3명중 1명이 한국에 가 있다는 얘기이다. 자료에 따르면 중국조선족녀성과 결혼한 한국남성들의 경우 대부분은 시골농민,로동자로서 약84%를 차지하고 중국조선족녀성의 경우는 문예계,대학생,호텔직원,공무원 등이 대부분이다. 이밖에 연변의 경우 한국 등 나라에 나간 로무일군 중 대부분은 가정부녀이다. 연길시의 괜찮다는 모 기관에서 한자리를 하고있는 한 남성의 안해는 10여년전에 러시아로 갔는데 종무소식, 최근에 그 녀성은 아르헨띠나에 갔다는 얘기도 있다.일전에 KBS 텔레비죤에서도 방송했지만 룡정의 모 가정의 학생은 어릴적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선량한 사람들의 주선하에 어머니 찾으로 서울로 떠났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서러운 눈물로 인천공항을 떠나는 수 밖에 없었다.참으로 눈물 없이는 보지 못할 장면이다. 새로운 리산가족이 바야흐로 생기는 것이 현실이다.한편 적어서 5년, 길게는 10여년씩 한국에서 불법체류를 하고있는 사람들 중에서 리혼제출사건도 빈발하고있다. 연길시법원의 관계자의 소개에 따르면 한국불법첼자들이 리혼자문을 하러오는 사람들이 매일이다싶이 있다고한다. 그들이 리혼소송을 제기하는 리유는 한국에서 뼈빠지게 일해 송금한 돈을 남편(안해)이 공짜로 생긴 것처럼 탕진해 버린다는 것이고 또 출국 전에 이미 리혼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지난 7월, 서울 구로구 가리봉 1동 가리봉시장부근의 한 산적점에서 있은 일이다.40대의 두 남녀가 뀀을 구우면서 중국술을 마시고 있었다.중국 동포임이 틀림없어 신분을 밝히고 한자리에 않자고하니 그들은 상당히 반기는 기색으로 청했다. 남성은 흑룡강사람(원적은 전라도),녀성은 연변사람(원적은 함경북도)이었다 .참으로 “전라도 사람과 함경북도 사람이 함께 모인 격”이었다. 남성은 불법체류 8년, 녀성은 불법체류 6년이었다. 취중 한담중에 그 남성과 녀성은 한 전세집에서 살고있는데 전세값은 각각 얼마씩 지불하고 저녁에는 누가 먼저 오면 김치찌개라도 끓여놓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소개에 따르면 이런 일은 불법체류자들중에서 상당 수 차지한단다.불법체류자들 막일과 차별시에 한설음적지 않은 중국조선족동포들이 산업연수생 이름으로 한국에 갔다. 한국로동법에 따라 산업연수생은 한국로동자와 동일한 일을 하면서도 로임은 한화 30만-40만원이며 각종 인권유린을 당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직장을 리탈해 불법체류를 하고있는데 지난해말 한국SBS텔레비젼 보도에 따르면 중국동포 리모가 살고있는 집은 허름한 월세집,아빠트공사장에서 남자들도 어렵다는 천장공사일을 하면서 지내온지 이미 9년째,그동안 남동생의 장례식도 큰 딸 결혼식도 첨석하지 못한채 고된 일을 해야 하는 실정,하루 꼬박 일해야 일당 고작 한화로 4만원,그마저 두달 로임은 받지도 못한 실정이었다.7월달에 중국조선족동포 불법체류자들이 모여산다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 일대로 가보니 300여메터 시장길은 양고기뀀냄새가 코를 찔렀다.마치도 연길시의 어느 한 골목의 양고기 뀀거리를 방불케 했다.료해에 따르면 이 동네가 중국조선족 동포거리로 바뀌여진 것은 1998년도부터라고 한다. 저녁이면 막로동에 지친 조선족동포들이 이 거리에 몰려드는데 거기에는 중국산술까지도 있고 건두부도 있었다.조선족동포들은 이런 음식점에서 서로 설음과 한을 달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기에서 로임체불을 당한 조선족불법체류자도 수 없이 보았다.한 인사의 소개에 따르면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에 조선족불법체류자들이 수천명이 살고있고 대림동과 가산동까지 합하면 1만여명이 살고있다고 한다. 허나 이들은 불법체류라는 딱지가 붙어있기 때문에 늘 근심어린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말치 않아도 알 수 있다.통계에 따르면 한국내에 취업중인 중국조선족동포는 20만여명으로 추산하고있는데 이는 200만 조선족동포중에서 10명당 한명이 한국에 있다는 계산이다.이밖에 러시아,싸이판,미국,일본 등 나라에 나간 조선족을 합치면 그 수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창 일하는 나이인 20대부터 50대 사이의 청장년들이다.자녀교육 심각한 문제연길시 제13중에서 알아본데 이하면 2학년4반의 70명 재적학생중 부모와 함께 있는 학생은 근근히 32명, 그 나머지 학생들의 부모 혹은 일방은 모두 해외에 있지 않으면 외지에 있다고 한다. 연변 교육관계자의 소개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연변의 각지 조선족학교에서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이런 가정의 학생은 평소에 매우 우울해하고 또 자칫하면 기로에 빠지고있는데 소년범죄률중에서 이런 소년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있다고 한다.우리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산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는다”는 말이 있다.중국조선족의 대이동은 불가피한 현실이다.허나 어제날 시종 56개 민족중에서 앞선다고 자랑하던 중국조선족은 오늘에 와서 이런 상태에 처해있으니 그 수습대책을 어떻게 마련할 것일가? 심사숙고가 요청된다.(본문은 흑룡강신문 2001년 11월 15일자에 발표되였음)
7    4.조선족 이동원인 및 우리의 자세(윤운걸) 댓글:  조회:2622  추천:114  2008-07-17
윤운걸기자문집조선족 이동원인 및 우리의 자세윤운걸거의 매일 매시각 가슴아프게 하는 우리 겨레들의 소식, 밀입국시도자 조선족xxx,특대 살인사건 조작자 조선족xxx,중국의 12억 인구가운데서 208만을 헤아리는 우리 겨레들의 범죄률이 줄곧 상승선을 긋고 있다.그중 밀입국시도자는 아마 중국 해당 범죄률의 90%를 차지하는 것 같다.오죽하면 근간에 산동성 위해시에  전문 밀입국자를 수용심사하는 구류소를 앉혔겠는가.-1996년 2월 13일 7시 45분, 중앙텔레비죤“동방시간과 공간”프로에서 85명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산동성해안에서 배사고로 8박9일 표류하다가 잡힌 사건”을 방송.-1995년 9월 16일,흑룡강신문에서 “베일속에 싸인 위장결혼”이란 제목으로 조선족 처녀,과부 지어는 남편을 두고 이른바 가짜리혼을 하고“한국신랑”,“한국로인”과 위장결혼을 하고 떠나는 시실을 피력.-1995년  9월 20일,흑룡강신문에서 “서해안해상 밀입국현장”이란 표제로 조선족동포들의 한국밀입국경로를 피력. 지급까지의 불완전한 통계(한국언론매체)에 의하면 1994년부터 시작한 해상,항공편으로 밀입국하려던 사례는 근 100건,밀입국시도자는 2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이 현상을 두고 일부학자들은 역이민이라고도 하지만 실질은 정착을 목적에 두지 않고 돈벌이를 목적에 둔 이동형태로 필자는 본다.력사적으로 본 이민민족 중국조선족의 이민사를 간략해보면 1627년-1867년사이에 봉금령을 무릅쓰고 이민한 시기로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살길을 찾아 중국에 온 시기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1867년-1910년 사이에는 청정부에서 봉금령을 페지하고 개척시기를 마련했기에 살길을 찾아,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에 이민해왔다.1910년-1945년 사이에는 생존을 위한 자발적인 이민도 있었지만 정치적 즉 일제와 싸우기 위해  온 항일투사들도 있고 또 일제의 강제이민도 있었다.1945년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주로 중국의 동북지역에 216만3000명이 건너왔다.그중 강제이민,집단이민이 3분의 2를 차지했다.헌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시기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100여만명을 헤아렸다.절반 넘어되는 우리 민족은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다시 조선(한)반도로 역류한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이민민족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심리는 정착심리보다 이동심리가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중국조선족은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형제민족과 함께 공동히 적과 싸우며 중국을 조국처럼 지켜가면서 중화민족일원으로서의 역할도 남김없이 발휘했다.1943년의 통계를 보면 우리 민족이 동북지역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으로 만든 것이 31만6899헥타르로서 당시 전 동북지역 논면적의 90%를 차지했다.또 일례로 항일투쟁은 물론 중국해방전쟁시기에 각오가 높은 우리 민족은 새 중국 창건을 위해 6만3000여명 사나이들이 해방군에 용약 참가했는데 이는 조선족인구의 5%를 넘는다. 전쟁시기 목숨을 잃은 연변지구의 조선족렬사는 3550명으로 길림성렬사의 93%에 달한다. 때문에 이민민족으로서의 우리 조선족은 중화민족력사에 빛나는 편장을 엮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해방후에도 우리 민족은 당의 방침,로선에 따라 사회주의건설에서도 하냥 앞장서기만 했다.이런 민족의 일부가 왜 개혁개방시기에 들어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법을 무시하는 정도에 까지 이르게 되였는가?개혁개방의 물결이 일게 되면서 조선족은 엄청나게 변한 세상을 알게 되였다.이런 크나큰 충격속에서 일부 사람들은 가치관념이 따라서지 못해 국법을 무시하는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그제날 토막나무를 때면서 이밥을 먹으면 대만족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180도로 바뀌여졌다.그제날에는 자전거도 없이 몇십리 지어는 몇백리 길을 걸어야 했고 시골에서는 지금도 소수레를 주요교통도구로 쓰고있는 우리 조선족은 한국에서 자전거는 보건체육용으로 리용되고 소는 식용으로 하기 위해 기르며 수레는 력사사명을 완수하고 “골동품”으로 취급되여 박물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한국의 일인당 소득은 만딸라,중국의 일인당 소득은 겨우 350딸라라는 수자적대비도 알게 되었다.친지방문차로, 공무차로 한국나들이를 한 사람들에게서 조상의 나라가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이야기를 전설에서 나오는 신화처럼 들은 이웃과 동료들은 부럽기만 했다. 처음에는 약장사로, 다음에는 단기취업으로 부자가 된 조선족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직 우리 혈맥이 이어진 한국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부자로 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조선족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우리 조선족의 대부분은 시골에서 살고있다.동북3성의 통계에 따르면 60%이상이 농사에 종사하고있다. 도시와 농촌의 수입차이,로동강도차이,문화생활조건차이,자녀교양차이,..이 모든 것은 농촌에서 도시로,농업에서 다각경리에로,해외에로 진출하는 대이동을 초래했다. 례하면 얼마전 5000여명으로 통계수자가 나오던 북경의 조선족인구가 지금 5만여명으로 급증, 몇백명밖에 안되던 산동성의 조선족인구가 지금은 4만여명으로 급증하고 있다.따라서 출국열을 올리는 우리 민족의 사례는 천지개벽의 변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국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중국조선족의 한국방문인수는 12만 1049명,1992년까지 두만강통상구를 거쳐 조선을 방문한 인수(대부분 장사의 길)는 16만여명,1993년도에 러시아장시길에 오른 연변의 조선족만도 2만여명,이밖에 연수,로무송출로 미국,싸이판,아르헨띠나,리비아 등 나라에 나간 우리 민족은 중국의 그 어느 민족보다 인구당 비례가 높다.중국조선족의 대이동은 정상적인 현상으로 불 수 있다.한족들도 그제날 나라가 동아병부로 되니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미국 등 나라로 가지 않았는가?한국에서도 60년대에 살기 힘들어 많은 사람들이 구라파,중동으로 이동하지 않았는가?우리의 자세그제날 조선(한)반도가 망국의 설음으로 신음할 때 중국이란 나라는 그래도 우리 조상들을 한몸에 안아주었다. 그래서 조선족은 한족들과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고있다.특수한 지리,자연 환경으로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회고해볼 때 조선(한)반도는 “친부모”이고 중국은 “양부모”이다.중국조선족은 “친부모”를 잊지 말아야 하거니와 “양부모”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 잊지도 않을 것이다.시장경제의 거세찬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조선족들이 대도시로 대이동하고 한국 등 해외로 나가고 있지만 돈만 벌면 꼭 정든 고향을 찾아와 고향건설에 참가한다. 연길시만 보더라도 연길시의 문화생활이 이 몇 년래 몰라보게 변한 것도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의 공로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류학갔다가 돌아오는 중국의 한족류학생은 43.2%밖에 안되지만 조선족은 미국 류학을 하고도 대부분 돌아와 고향건설에 기여하고있다.우리 조선족의 집단구역인 농촌이 대이동으로 인하여 허물어지기 시작한다.이로 인해 자녀들의 교육난이 생기고 있다.큰 근심을 할 필요는 없다.워낙 중국교육체제에 허점이 있고 교원 특히 조선족교원 원천이 빈약하다.그래서 시골에서 억지로 “소학생이 소학생을 기르치고”,“중학생이 중학생을 가르치는 식으로”교육방침을 운영해나갈  것이 아니라 즉 분산된 교육사업을 집중적인 교육사업으로 벌려나가야 한다.그러면 엄청난 자금이 수요된다.이런 자금은 단지 정부에만 의거해서는 안될줄로 안다.바로 우리 조선족들의 대이동 속에서 나올 줄로 안다.현재 료녕성 심양시에 조선족으로 똘똘 뭉친 서탑거리가 새로운 면모로 나타났는데 이 거리의 부지값은 기타 구역의 3배라고 한다.그래도 이 거리에는 교육,상업이 일체화로 되어나가고있다.이 돈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바로 우리 민족이 번 돈이요,한국인들이 투자한 것이다.우리 조선족의 이렇듯 강한 삶의 의욕 속에서 어느 때부터인지 서로 헐뜯는 고약한 습관이 자라났다.한피줄로서 고난에 처해 있을 때 도와나설 대신 사기협잡으로 피를 빨아먹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권세깨나 쥐였다고 지기 민족의 리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 아부하는 인간도 있다.아직도 해외진출문이 활짝 열린 것이 아니다. 웬 영문인지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 해외진출을 하자해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외진출(문)이 좁으니 자연 담장을 뛰여 넘는다. 밀입국은 국법을 무시하고 도덕을 어긴 행실이지만 이런 사람들을 범죄의 길에 들어서게끔 올가미를 쳐놓은 자들이 있다.해외진출(문)이 좁은 기회를 리용해 해내외로 결탁하여 폭리를 얻은 고약한 자들이 있는가 하며 또 그들을 두둔해 비렬한 “정책”을 제정해 놓은 관리들도 있다. 이런 자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민족의 건전한 대이동이 있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백성들만 골탕을 먹게 된다.어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재일본 한국인이 일본국적을 얻기 위해 시종 한국인아라는 것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일본국적을 가진후에 한국인이라는 것이 발각되여 일본국적법에 의해 기소당했다.헌데 한고장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들이 이 한국인을 대신해서 “그 사람이 한국인이면 어떠냐?”며 데모로 정부의 행실을 질책했다.이 기사를 읽으며 코마루가 찡해났다. 제2차세계대전후에 일본에서는 중국땅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갈 수 있게끔(적지않은 일본인들이 중국국적에 가입한 것으로 알고있다)허용했을 뿐더러 중국땅에 묻혀있던 일본인 해골까지 다 파서 가져갔다.헌데...우리 자신도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을 때 왜 우산을 갖추지 못했는가?”고 후회하지 말고 평소 “일기예보”에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한다. 큰 사단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무단행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에서도 조선족들의 해외특수한 관계를 높은 차원에로 끌어올려 “우산”도 마련해 줘야 하거니와 탄탄대로를 질주하게끔 넓은 길을 마련해 줘야 하며 또 “도로표식”도 잘해 놓아야 할 것이다.우리는 한족들의 만만디성격도 일부 배우는 것이 좋을상 싶다.앞뒤를 챙겨가면서 “도로표식”도 잘 보고 빨리 뛸 때에는 빨리 뛰고 천천히 뛸 때에는 천천히 뛰여야 한다.개구리도 멀리 뛰기 위해서는 잠시 뒤걸음질하지 않는가?조선족의 호미와 한족의 호미를 비교해보아도 그 성격을 알 수 있다.조선족은 자루가 짧은 호미로 김을 매다보니 허리가 곱사등이 되어 밭 한고랑도 절반쯤 매고는 단김이 빠져 “에라 모르겠다”고 하고는 벌렁 앉아 휴식을 취한다.그쯤 한족은 우산같은 초모자를 쓰고 허리를 쭉 펴고 호미질하다 보니 힘도 크게 들이지 않고 서서히 따라잡는다.이런 리치에서 볼 때 우리 조선족은 기회가 왔다고 너무 성급해하지 말고 나라에서 제정한 각종 정책과 법규들을 잘 집행해나가야 한다. 오직 이래야만 우리 조선족들은 정든 땅을 영원히 고수할 수 있다.(본문은 연변일보 1996년9월30일자에 실린 뒤에 이어 연변라디오TV신문에 게재 되었음)
6    3.조선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윤운걸) 댓글:  조회:1625  추천:99  2008-07-16
윤운걸기자문집조선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연변대학 정판룡 교수 인터뷰윤운걸얼마 전 기자는 연변대학 정판룡 교수를 만나 조선족사회의 발전 및 진로에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현재 중국에서의 조선족의 위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총화적인 각도에서 법칙성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사실만을 가지고 론할 것이 아니라 리성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을 분석해야 만이 21세기에 새로운 도약을 할수 있을 것이다.20세기는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한 세기라고 할 수 있다.조선민족이 중국으로 대량 이민해오기는 19세기중엽부터라 하겠다. 물론 학술계에서는 19세기 20년대요,40년대요,60년대요 하지만 확정적으로 그 어느날부터 라고는 말하기 어렵다.19세기60년대에 조선북부지역에서 련속 재황이 일어나 리재민들이 월강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중국에 넘어온 초기 이주민들은 청나라의 민족차별시정책의 유린을 몹시 당했는데 청나라는 우리 민족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처럼 머리태를 땋고 호복을 입을 것을 강요하면서 “변발이복,귀화입적”의 동화정책을 썼다.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전후하여 많은 우국지사들도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므로 그때부터의 이민은 단순히 살기 위한 이민만이 아니라 상당수가 나라를 찾기 위한 정치망명이민이였다. 그리고 흑룡강지역은 일본이 만주땅을 침략한 뒤에 대량적인 이민이 생겼다.우리 민족의 이민은 1945년도까지였다고 할 수 있는데 50년 사이에 많이 류입되였다. 그러기에 20세기는 우리 민족이 이 땅에 들어와 정착한 시기라고 불수 있다.정착문제에서 거주국과의 관계문제가 제기된다. 거주국에서 신임하고 그 국가에서 뿌리를 박아야 하는 문제인데 이는 해외에 나간 우리 민족이 그 어느 곳에서도 부딪치게 되는 문제이다. 이민한 사람이 거주국의 말을 잘 듣고 거주국에 유리해야지 불리하면 배척을 당하게 된다. 우리 민족도 진통을 겪었다. 우에서도 얘기했지만 청나라 때에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기에 분규도 많았다. 그 뒤로는 봉계군벌 즉 동북군벌이 우리 민족을 배척하는 정책을 썼다. 왜나하면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에 조선사람은 자기 사람이라고 하고 동북을 칠 때 조선사람을 많이 리용했고 또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수법을 썼기 때문이다.그래서 장학량군벌은 당시 조선사람을 두 번째 일본사람으로 봤다.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도 우리 민족이 소수민족이라는 것을 워낙 승인하지 않았고 우리 민족을 다만 “한교 ‘대한민국교민’”라고 여겼다.허나 유일하게 중국공산당은 우리 민족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단합의 대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여기에 온 우리 민족은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이고 또 일제를 반대해 나섰고 지주,자본가를 반대해 나섰으니 이는 중국공산당의 주장과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 우리 민족은 20년대부터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제와 싸웠고 또 중국의 해방을 위해 국민당과 싸우면서 피를 많이 흘렸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그 어느 민족보다 적극적으로 시종 진두에서 싸우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에 기여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중국공산다의 신임을 얻고 중국인민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떳떳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주인공의 위치를 찾게 되었다. 이는 20세기 다른 국가에 이민 간 동포들과 비교해볼 때 아주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조선족이 중국이라는 이 큰 땅덩어리우에서 한족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자기의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우리가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국의 민족정책이 좋았기 때문이다.비로 소수민족이 자기의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킬수 있다는 정책이다.이 정책이 없다면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민족성을 보존할 수 없다.다른 하나는 집거구가 형성되였기 때문이다.집거구가 형성되였기에 조선족자치주도 세워졌고 언론매체도 세워졌다.그리하여 자기의 문화도 잊지 않고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러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은 거주국과의 마찰은 없는데 민족성을 보존하는 면에서 문제가 있다. 러시아의 경우 강제이민이다보니 집거구가 형성되지 못해서 민족성 보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는 많은 조선족집거구가 있는데 연변집거구,할빈을 중심으로 하는 송화강집거구,심양소가툰을 중심으로 하는 집거구, 목단강집거구 또 그 속에는 조선족향,촌이 있어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근거지가 있고 이것이 또 온상이 되었다. 셋째로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문화의 선진성에 있다.우리 문화가 한족문화보다 높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와 정착해보니 다른 동네의 한족보다 문화자질이 높았고 또 벼농사도 잘 했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애들의 공부만은 등한시하지 않았다.-해외동포와 조선족은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세가지면에서 그 차이를 보아낼 수 있다.첫째로는 주인공위치이고 둘째로는 민족성보존이고 셋째로는 생활수준이다. 이 세가지면에서 볼 때 미국의 동포들은 거주국과의 관계는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주인공위치도 큰 문제가 안되고 잘 살기도 하지만 민족성보존과 발전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우리 말을 잘 모르고 민족문화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동포들은 정치적문제가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공위치,민족성보존이 큰 문제로 되고 있다.허나 살기는 잘살고 있다.러시아의 동포들은 강제이민이다보니 주인공위치,민족성보존에 큰 문제로 될 뿐만 아니라 잘 살지도 못하고 있다.-조선족이 잘 살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조선족이 여기로 이주한 목적은 잘 살기 위해서였다. 못살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법은 없다. 헌데 우리는 지금 세계 어느 나라의 동포들보다도 못살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중국이 아직 발전도상의 나라(실지 워낙 락후하다)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한)인은 중국의 땅만 보았지 “집형편”은 보지 못했고 또 건너오기 쉬웠기 때문이다.다른 하나의 중요한 장기적인 전쟁과 정치투쟁이였다. 조선족은 이민온 날부터 즉 19세기말부터 20세기 50년대까지 싸웠다.의병투쟁,독립운동,항일투쟁,해방전쟁,조선전쟁 또 이어서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등 정치운동만 하다보니 언제 경제건설을 할 기회가 있었는가?연변은 또 구쏘련과 국경을 사이둔 곳이기에 극히 페쇄되였으며 공업기초란 운운할 수 없는 지역이였다.개방이 되면서 우리 조선족은 생활향상을 위한 조급성이 생기였다.조급성이 생기니 맹목성도 생기게 되었다.이에 따른 집거구인구감소로 연변만 해도 400여개소 중소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 물론 생활의 질은 어느 정도 향상되였으나 자녀교양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고 문화교육질이 낮아지면서 민조선진성도 낮아지고 있다.그제날 모택동시대에는 조선전우들과 함께 싸웠기 때문에 우리 민족과의 감정이 깊었다.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상태에 있을 때 우리 민족은 국민당과 별로 거래하지 않고 무산계급감정으로 공산당에 의거해 잘 싸웠기 때문에 전쟁시기 중요한 경비는 다 조선족전사들이 맡을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허나 지금은 달라졌다. 특히 조선(한)반도가 분단된 상태에서 한국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또 구쏘련이 민족분렬로 해체되면서 정부는 민족문제에서 그 어느 때보다 경각성을 높이고 있는네 이는 우리가 응당 리해해야 한다.-그러고 보면 주인공위치를 확고히 해야 하는 문제도 제기되는것이 아닌가?그렇다.우리는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이다. 그제날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공동히 나라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제일 말을 잘 듣는 민족이였는데 지금은 법을 잘 지키지 않고 말을 잘 듣지 않는 민족으로 되었다.그래서 주체민족의 눈에는 정치상의 불신임,도덕상의 불신임이 생겼다.또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연변 땅은 한반도 땅이요, 하는 바람에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우리가 100여년 동안 중국에서 힘들게 쌓은 신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위치도 확고히 하고 민족성도 발전시켜야 한다.특히 경제발전을 다그쳐야 하지만 너무 성급해서는 안된다.중국의 특성에 맞게 실제에 근거해서 처사해야지 맹동해서는 안된다. 주인공의 자세를 잃고 있는데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국외나들이,도시진출로 조선족거주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는데 조선족의 대량 이동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대이동은 불가피적이다.꼭 벼농사만 지어야 하고 농촌을 고수해야 할 필요성은 없다.그제날 어디에 정착했으면 거기를 고수하라는것은 틀린 틀린 생각이다.우리가 대대손손 몇천년 살아오던 고향도 떠나올라니 왜 더 살기좋은 고장으로 이동하지 않겠는가?척박한 두메산골에서만 살지 말고 우리도 발달한 지역으로,바다가의 해변도시에도 나가 살아야 한다.지금 리론적으로는 농촌집거구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왜 그럼 당신은 거기에 가서 살지 않고 남만 거기서 살라고 하는가?”럭ㅎ 반문하고 싶다.미국에 가보니 동포가 많이 살고있는 곳이 첫째로 로스안젤스이도 둘째로 뉴욕이고 셋째로 시카고이다.일본도 동포가 제일 많이 살고있는 곳이 대도시인 오사까와 도꾜이다.헌데 우리가 왜 멍청이라고 산골만 차지하고 대도시에 이동해서 살지 말아야 하는가,지금 학교가 줄어 드는것은 이동과도 관계되잠ㄴ 관건적인 문제는 아이를 하나만 낳기 때문이다.교육,문화가 발달한 연길시의 조선족인구는 불어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좋은 일이다.교육,문화를 발전시키려면 애들이 발달한 지역에서 교육을 받아야 되지 않겟는가.이는 일존 진보로 봐야 한다.우리는 개혁개방의 기회에 우리의 거주분포를 조정해야 한한다.흑룡강은 할빈을 중심으로 하는 큰 집거구를 새로 형성하고 료녕은 심양을 중심으로 하는 큰 집거구를 형성해야 한다.교통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달한 지역에 집거구를 형성하고 열심히 돈을 벌게 되면 거기에 자연히 학교가 서게 될것이고 교육,문화기과도 발전하게 될것이다.현재 북경에도 우리 학교가 서고있고 산동에도 우리 학교가서고있지 않는가.물론 새로 일떠선 집거구에 우리 학교가 세워지자면 수속 때문에 애로가 많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반드시 국영학교만 세워야 한다는 도리는 없기에 민영학교도 설수 잇으니 우리가 가서 배워주면 되지 않는가? 여기서 더 언급할 것은 전망없는 두메산골은 내버려두고 전망있는 농촌은 교통을 하루속히 발전시켜 도시화로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 연변도 돈을 번 사람들이 조선족이 많이 모여사는 연길,룡정 등 도시에 투자해 민족경제를 하루 빨리 춰세워야 한다.취재를 마친 기자는 조선족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지성인들이 거시적인 안목으로 조선족의 실태를 분석하고 진로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본문은 흑룡강신문 1998년6월6일자 1면에 실렸음, 원문 제목은 “21세기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5    2.중한관계에서 중요작용을 하고 있는 중국조선족 댓글:  조회:1738  추천:104  2008-07-15
윤운걸기자문집중한관계에서 중요작용을 하고 있는 중국조선족--동아시아 경제공동체형성에서 중추작용을 할 중국 조선족 윤운걸 -언어 문화적 우세 그 어느 민족도 대체할 수 없어 머리말 중국조선족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정의를 내렸지만 그중에서 가장 권위성과 설복력이 있는 정의는  즉 중국조선족은 한(조선)반도서 이미 형성된 후에 다시 중국으로 이주해 와 중국의 일원으로 되였기에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재중 한(조선)인이다. 또 민족이라는 개념이 수천년간 형성되었기에 중국에서 재중 한(조선,다만 중국국적을 취득한 자,신분증에도 명확이 민족은 조선으로) 중국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부친 것도 정확하다. 왜냐하면 중국조선족은 고국이라는 한(조선)반도가 있기에 정체성 혼란이 생기는 와중에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이 정의와 이해는 중국조선족의 역사 사실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글로벌시대에서 중국조선족의 역사사명을 연구하는 것은 향후한국이 중국과의 지속적인 공존,공생에서 중요한 사항이며 또 중국 국무원에서 2007년 8월2일에 중국 동북지역 진흥 현황과 향후발전 프로젝트를 비준하고 본격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현황에서, 중한관계발전에서 중국 조선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고 또 이미 자의든 타의든 중국조선족은 중한관계발전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특히 앞으로 중국과 한국이 전략적인 동반자 관계로 부상하자면 중국 조선족은 자의적인 사명감이 앞서게 된다는 것을 념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따라서 불원한 장래에 남북이 통일되고 동아시아가 경제공동협력체로 이행할 때에 중국조선족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    1.중국조선족이 중한관계에서의 중요작용과 동아시아 경제공동체형성에서 중추작용을 논다는 이론적 근거 중국은 1972년도에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이루었고 한국과는 1992년도에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한국이 비록 중국과 일본보다 20년이나 늦게 국교정상화를 이루었고 한국기업의 중국진출도 일본기업들보다 20년이나 늦었지만 중국진출에서의 성공률은 한국기업이 일본기업에 비해 배나 높다는 통계가 나왔다. 목전까지 중한간의 무역규모는 1300억 달러를 넘었으며 대 중국투자액은 350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2005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대중무역에서 211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일본은 대중무역에서 도리어 256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다. 이는 한국기업들의 중국진출 성공에서 200만 중국조선족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필자(윤운걸)가 일본에 취재 갔을 때 한 일본인 대중국 무역상과 만나 식사하게 되었는데 그는 한국기업의 중국진출성공은 중국에 조선족이라는 특수군체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며 자기네 일본은 중국에 이런 혈연적인 민족이 없기에 무역은 물론 기업진출도 힘에 부친다고 아쉬움 반, 부러움 반으로 얘기했다. 이렇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선족은 중한관계발전에서 큰 작용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한관계의 불이해 해소차이에서도 조선족 지성인들과 민간단체 그리고 연변대학 등 대학들에서 각종 명목의 세미나를 주도적으로 조직하는 것으로 중한관계에서의 중개작용을 놀고 있다는 것 또한 조선족이 조화로운 중한관계처리에서 큰 작용을 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되어 조선족이 이렇듯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는가? 바로 조선족은 독특한 언어우세와 문화적인 우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1945년까지 중국에 한(조)인이 216만 3000여명이 건너왔는데 그중 강제이민,집단이민이 3분의 2를 차지했다. 헌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시에 절반 넘어되는 한(조선))인들이 한(조선))반도로 건너가고 절반이 중국에 남아 있었는데 그 군체(群体)가 불어나서 오늘의 200만으로 되였다.여기에서 200만 인구를 가진 연변으로 놓고 볼 때 그 젯날에는 조선족이 70%이상 이였지만 오늘에 와서는 38%(80여만)가량 줄어 들었다.그러나 이 지역은 그 젯날 한(조)반도의 반일의 장이요,교육,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되새길 필요성이 있다. 이런 역사,교육,문화가 대대손손 이어지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특히 지정학적으로 볼 때 한(조)반도와 마주하고 있어 그 의미가 굉장히 깊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될 사항이다.중한관계에서 조선족이 이렇듯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된 원인은 바로 언어적인 우세와 문화적인 우세가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로 볼 때 중국,한국,조선,일본 극동러시아,몽골은 장래에 필연코 동아시아경제공동체로 나간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이에 대비해 중국조선족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절실히 인식할 필요성을 느낄 때가 왔다고 볼 수 있다.동아시아경제공동체가 형성되자면 언어적, 문화적인 것이 반드시 뒷바침 되여야 한다. 유럽으로 놓고 볼 때에 영어를 중심으로 프랑스어, 독일어를  각자 나라에서 국어로 사용했다.특히 프랑스인들은  그 젯날  영어로 대화하려면 말도 하지 않고 자기나라 언어만 고집했단다.그러나 유럽공동체가 형성되자면 반드시 영어가 중심으로 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닳은 프랑스는 영어열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이런 객관 현실로 볼 때 동아시아공동체가 형성되자면 처음에는 중국어,한국(조선)어,일본어 등 언어를 각자의 국가들에서 사용하게 되고 또 한시기 중국어,한국어,일본어로 많은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유럽의 상황을 볼 때 언어권 형성은 40년대부터 시작하기 시작했는데  60,70년이란 세월이 흘러서야 드디어 오늘에 와서 완전한 영어권시대가 들어서면서 공동어로 되였다.그래서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에서 초기에는 세가지 언어 즉 중국어,한국어,일본어가 병존하기 마련이다.이런 현실적인 의미에서 볼 때 동아시아경제공동체 형성에서 언어의 큰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이 유독 중국 조선족이다. 우에서 언급했지만 실지 중국조선족은 한국기업의 중국진출은 물론 각종 세미나와 중대한 통역에서 이런 우세를 이미 발휘하고 있다.예하면 2006년 9월에 천진시에서 제7회 중,일,한 3국 텔레비죤방송 제작자포럼이 있었는데 중국의 한족,일본인,한국인 중에는 두 나라 언어를 아는 통역을 찾을 수는 있었지만 중,일,한 3국 언어를 동시에 통역할 수 있는 번역원은 유독 조선족출신들이라는 점은 언어상의 우세가 독특하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다.중국조선족은 150여 년의 이주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고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어도 구사하고 있고 또 일부는 러시아어도 잘 구사한다. 이는 바로 조선족이 언어에서의 최대 장점이고 아울러 그 어느 민족도 이렇게 조선족처럼 다국어 언어를 소유한 민족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 그 자체이다. 또 조선족은 문화기반 구축에서 중국문화도 알고 있고 한(조)반도 문화도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 젯날 일본이 한(조선))반도는 물론 중국을 침략했기에 일본문화도 알고 있다.그러므로 조선족은 아시아인으로서, 동아시아경제공동체형성에서 이미 준비된 우수한 민족이라 할 수 있다.이런 엄청난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 중국은 지금 자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아울러 한(조선))반도도 반드시 자호감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 또 주변국가는 조선족은 조상의 나라가 한(조선))반도 즉 고국이지만 중국이 흡수한다는 개념을 중한동반자 관계라는 시점에서, 동아시아경제공동체형성이란 거대한 프로젝트 차원으로 분석해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즉 조선족은 중한관계와 동아시아경제공동체형성에서  큰 도구와 자산으로,글로벌 시대의 민족이라는 것을 절실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유럽의 벨쥼이라는 지역은 그젯날 주변대국의 침략을 당했지만 그 나라는 유럽공동체의 완충지대여서 오늘에 와서는 유럽공동체의 중심지로 발돋음 했다. 그 젯날 유럽국가들 사이에 엄청난 앙금이 있었지만 정치통일, 경제통일이 되면서 벨쥼,네델란드와 같은 국가들의 완충역할로 완전히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특히 지적해야 할 것은 남북이 통일되면 조선족이 대거 집거해 있는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이렇게 벨쥼과 같은 지정학적인 우세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보귀한 자산이라 하겠다. 그럼  중국과 한국이 조선족의 외교작용을 통해 전략적인 동반자 관계로 거듭나고 따라서 동아시아경제공동체가 형성되면 어떤 거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우선 극동러시아,시베리아 그리고 중국은 많은 천연 지하자원이 있다. 동아시아경제공동체가 형성되면 일본의 기술과 한국의 개발경험, 극동러시아의 천연자원, 중국의 인력과 자원이 합해지게 되는데 일단 합해질 때 무진장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런 각 국의 보물이 한 덩어리로 되면 결국 동아시아경제공동체가 “세계대국”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으로 될 것이다.공동체의 형성은 필연적인 추세인 것만큼 이로 인해 문화와 생활이 공동화로 될 것이며 따라서 공동부유의 시대가 오게 되면서 함께 공동번영의 시대가 오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자멸의 길로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유럽공동체형성에서 보여주었다.더욱이 오늘날의 정보기술산업화가 바야흐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침략,정복이라는 것은 흘러간 옛 노래로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에서 알려주고 있다. 2,중국조선족 인재 양성 급선무 중국조선족이 이같이 중한관계에서의 중요한 작용과 동아시아경제협력시대에서 중추역할을 할 것이라는 인식만 앞서서는 안 되는 줄로 생각한다.즉 비록 이런 자연적인 기초가 마련되었지만 어떻게 진정 중요작용과 중추작용을 잘 하겠는가 하는 것이 오늘의 중요한 과제이다.이 중요한 과제에서 우선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요한다.도산 안창호선생의 "교육구국"사상을 오늘에 와서 더 잘 리드해 나가는 것이야 말로 중국조선족의 진로를 개척하는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현재 중국조선족의 현실을 보면 "그 젯날 중국에서 교육에서 앞자리를 섰다"것은 까마득한 옛말로 될 수 밖에 없다.실지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조선족은 한국인 중국진출에 큰 작용을 놀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그러나 그 젯날 계획경제시대의 교육사상으로 학생들을 양성하면 글로벌 시대에서 이른바 "도태 품"으로 될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새로 자라는 세대에 글로벌시대에 걸 맞는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문제다. 중국은 아직 개발도상국 나라로서 교육투자는 발달한 국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 또한 오늘의 현실이다.비록 조선족 고중생이 대학에 입학할 경우 10점을 첨가하는 우혜정책을 취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또 아직까지 조선족학생들에게 이른바 “가마밥”을 따로 챙겨주는 제도적인 교육정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볼 때 한국정부는 중국조선족은 중한관계에서의 중요작용과 동아시아경제협력시대에서의 중추작용을 절실히 인식하고 해외동포들 특히 중국조선족후대 양성관련 프로젝트를 마련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어떻게 하면 고국에서 중국조선족의 많은 기술인재를 양성하는 프로젝트를 마련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는 반드시 한국정부의 차원에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이런 프로젝트를 마련해 중국조선족의 젊은 층들을 많이 양성하면 그것은 향후 엄청난 자산으로 될 것이다.이제 중국조선족이 동아시아경제협력에서 중추작용을 할 것이라는 인식이 통일되면 다음은 고급인재 양성문제이다.한국 교육부 차원에서는 중,장기 프로젝트를 마련해 중국조선족들 중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뽑아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여기에는 별도의 정책을 요하고 있다.즉 그들에게 정부차원의 등록금 지원,생활자금의 지원이 안받침 돼야 한다.실지 지금 적지않은 중국조선족학생들이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중국의 현실로 볼 때에는 그들에게 등록금을 마련해 준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름찬 일이다.그러니 학생들은 부득이 공부를 제쳐놓고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게 된다. 또 한국교육당국에서는 중국조선족 현지 중학교와 소학교 교사들의 양성에도 홀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왜냐하면 우에서 언급했지만 중국조선족은 한국 문화에 대해 알고 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점차적으로 미약해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이것이 바로 현재 중국조선족 중,소학교 교사들의 교육문제이다. 그러므로 중, 장기 프로젝트로 조선족교사양성에 대한 제도를 마련해 이들이 한국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연대과학기술대학은 바로 이런 향후의 동아시아경제공동체 형성을 대비해 15년 전에 중국에서 최초로 중외합작 대학을 세워 조선족들에게 교육의 장을 마련했는데 13개 국가의 교수들이 대학에서 중어, 영어, 한국어를 공통언어로 학생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또 일본어도 사용하고 있는데 15년간의 성공된 대학운영으로 볼 때 이 대학은 이미 동아시아경제공동체형성의 묘판이 되었고 실험기지로 되었다는 것이  증실 되었다. 한국 교육당국에서는 반드시 이런 우수한 경험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그래서 수많은 현지 조선족학생들이 이 대학에 오고 싶어하고 졸업생들은 중국전역은 물론 각국에서 쟁탈하는 즐거운 비명을 하고 있다.연대과학기술대학 설립총장인 김진경박사의 말에 따르면 “지난 15년을 실험해 학생들을 양성해 보니 학생들이 민족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어느 대학생들보다 철저한 애국자로 거듭나고 있다”고 했다.이렇게 연대과기대의 성공 노하우를 바탕으로 김진경박사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설립하게 되였던 것이다. 또 한국방문취업제는 중국조선족이 단순 돈벌이 인 것이 아니라  고국의 문화를 직, 간접적으로 재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족의 뿌리를 되찾는데 결정적인 효과를 거둔다는 것 또한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맺는말 본 문은 중국조선족의 역사적 존재와 그에 따르는 우월점 및 우수성,향후 우세를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끔 대책을 마련할 필요성을 중점으로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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