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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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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과거를 재생하는 일 댓글:  조회:211  추천:0  2019-07-19
과거를 재생하는 일 조원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언제든, 어디든, 무작정.  멀리로 갈 수 없으면 동네 골목을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새벽녘에도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골목골목의 어둠의 표정들을 읽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낯선 이웃들의 철제 대문의 문고리를 눈여겨보고 구석진 어두운 곳에서 두눈 밝히고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도 만날 수 있었다. 마주보고 서있는 담벽 벽면들이 서로에게 던져주는 그림자와 희끄무레한 빛, 가로등 불빛에 처연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감나무 가지의 까치밥으로 걸려있는 감 한알, 몽달이 되여 서있는 은행나무, 벽면에 길이 따로 있 듯이 타고 오르는 담쟁이풀들, 전선주에 부착된 ‘세방 있음’의 딱지와 얼기설기 늘어져있는 전기줄이 땅에 던져놓은 그림자들 등등. 비좁은 골목들은 시간의 통로처럼 은근한 비밀이 되여서 내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슬픈 긴 시간의 리듬으로. 그 시간의 통로들은 나를 과거로 소환해갔으며 기억을 불러들이군 하였다. 애써 호명하고 싶지 않은 찌질한 기억들과 소중해서 잃어서는 안될 듯한 기억들이 재생되여갔다. 아픈 기억은 물론 아름다운 기억에서도 슬픔이 묻어났다. 어떤 기억이든지 기억 자체는 어떤 애잔함을 품고 있었다. 과거를 재생시키는 골목의 표정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고집할 수 없었다. 골목이 던지는 메시지들을 온전히 온 가슴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니까 번복되는 일상에서 홀연히 탈출하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은 과거를 만나러 가는 길이였을지도 몰랐다.   멀리로 려행을 떠나기도 했다. 허락되는 시간이면 배낭 하나 챙겨서는 가볍게 떠날 수 있었다. 행선지가 계획된 것이 아니였던 것 만큼 려행의 목적도 투명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물체, 그러니까 시외뻐스와 기차, 택시와 선체 등의 물체에 맡겨진 내 몸의 흔들림은 수많은 기억들을 불러냈다. 차창으로 흘러지나는 사소하면서도 거대한 물체들은 무작정 나에게로 덮쳐들었다가 순식간에 스쳐지나면서 클로즈업으로 아니면 아득히 멀어져가는 소실점으로 연출해갔다. 때로는 바다와 가까와지면서 택시 차창으로 불어들어오는 바다바람의 비릿한 냄새를 맡으면서 눈가가 젖어들기도 했다. 몰려드는 저릿함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번지기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정체 모를 눈물이 있다는 것도 려행 과정에서 알게 되였다. 낯선 타지의 고만고만한 익숙한 풍물들을 폰카에 담았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피사체가 눈에 안겨드는 첫 느낌이 사라질가 얼른 위챗 모멘트에 올리는 부산함도 있었다. 기억으로 기록되길 바라는 기억이 있다는 것도 려행길에서 배울 수 있었다.   몸이 흔들리면 머리 속의 기억들은 서서히 살아났다. 대개 이동하는 차체 내에 있으면 여태껏 무책임하게 세상에 내여놓은 적지 않은 소설 속의 캐릭터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미안해지고 있었다. 부끄러워 눈을 감기도 했다. 조금 애정을 두고 시간을 할애하여 그이들을 보듬고 어루만져주었다면 좋았을걸 하면서 뒤통수를 만지기도 하였다. 지금 쯤이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가고, 설익은 상태에서 얼떨하게 풍진 세상으로 불려나와서 고난을 어떻게 이겨나갈가고 말도 안될 억지근심을 보태군 하였다. 더불어 지금 쯤 그이들을 다시 불러들여 더 풍성하게 해주고 싶다는 간절함이 스몄다. 설익은 캐릭터와 설익었던 나의 만남은 이미 지울 수 없는 비망록처럼 돌이킬 수 없었기에 두고두고 새김질할 수 있는 반성문으로 될 수 있다는 위안을 주문처럼 외우기도 하였다. 지금 진행 중인 소설 쓰기도 시간이 흘러서 썩 후날에는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지금보다는 덜 후회되고  덜 부끄럽기를 바랄 뿐이다.  이 소설도 이런 맥락으로 시작되였을 것이다. 소설 (《장백산》 2016. 4)를 쓰고 나서 나는  도무지 다른 소설을 쓸 수 없었다. 그 소설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 속의 나분이와 강희경, 강희수, 강필두, 조순재, 왕얼과 쑈훙 그리고 연수와 연수의 안해 등등의 캐릭터들이 통근뻐스의 차창으로 문득문득 스쳐서 지나갔다. 차창으로 스러졌다 밝혀지는 고속도로 저편의 어둠 속 불빛처럼 때로는 생생하게, 때로는 희미하게, 잡힐 듯 말 듯이 스쳐서 지나갔다. 물론 소설 에서 모든 캐릭터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지만 소설 (《장백산》 2017. 1)과 소설 (《도라지》 2017. 2)의 련작으로 이어지면서 차츰차츰 자신들의 이름과 성씨를 가지는 구체적인 인물들로 재탄생되였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련작소설을 작정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캐릭터들의 삶의 하중을 스케치하는 식으로 내쳐버린다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옛 소설의 캐릭터들처럼 나를 끊임없이 찾아올 것 같은 불안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내 실수의 빚을 보상받으려고 기억의 문을 시도 때도 없이 노크할 것이 두려워졌다. 내가 저질러버린 그이들의 삶의 심연까지 파고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죄의식(?), 캐릭터들을 세상으로 끌어냈으면 일말의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서서히 두려움을 밀어갔다. 소설 의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 고인 침묵의 소리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보려고 애썼으며 캐릭터들과 함께 해야 할듯한 하찮고 사소한 존재들의 어떤 기척이나 목소리의 억양, 망설임, 아쉬움, 형언할 수 없는 초조와 분노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캐릭터들을 조금씩 채워가게 되다 보니 이번의 중편소설 에까지 오게 되였다. 또한 “이미 두 소설을 쓴 저자가 아직도 나머지 여백을 채워갈 충동을 느끼고 있는지?”(소설 에 대한 리태복평론가의 평론에서) 무심한듯 툭 던져진 이 한구절은 소설을 이어쓸 수 있도록 이끌어준 다독임이였다. 하지만 소설들의 전체 색갈은 어두웠으며 아픔의 장거리 릴레이의 지속으로 이어졌다. 물컹물컹하고 축축하고 무가내하고 어쩌면 자포자기의 어쩔 수 없는 캐릭터들이였다. 련작을 써나가면서도 캐릭터들을 아프게 하는 기억의 정체와 그 기억의 근원이 대체 무엇이여야만 하는지 나를 괴롭혀왔다. 지난 여름 개봉된 영화 《군함도를 관람하고 나서 소설 을 쓰고 싶다는 강한 압박감을 받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군함도의 력사를 깊이 있게 알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군함도 관련 지식들을 검색하다가 현재 페허로 남아있는 군함도의 이미지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건축이 기억하고 있는 아픔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개인의 아픔은 궁극적으로 력사와 시대가 남겨놓은 잔여물이라고, 시대가 어쩔 수 없이 떨구고 간 그 아픔의 잔여물을 껴안고 인간은 삶의 하중을 속수무책으로 버텨나가야 한다고, 어쩌면 그런 아픔은 세월과 더불어 희석되겠지만 깨끗이 지울 수는 없다고 생각을 했다. 아픔을 덜 아프게 오늘을 살면서 래일의 삶에는 그런 아픔이 이어지지 말기를 바랐다. 소설 의 인물군상들이 겪는 아픔, 그것은 개개인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질투의 감정들로 야기된 모순과 갈등, 그로 인한 아픔의 지속일 뿐만 아니라 시대가 떨구고 간 아픔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한다고, 모두가 당신들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왜 아파야만 하는가 하는 캐릭터들이 꾸준하게 던졌던 질문을 안고서 자신의 글수준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꾹꾹 써내려갔다. 그저 아직 살아남은 자들의 행운을 빌면서. 어쨌든 삶은 살아지게 되여있으니까. 떠날 때가 되였다. 빛 밝은 또 다른 소설을 찾아 떠날 때가 되였다. 부디 눈부시게 밝은 소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   출처:2017 제6호
10    [단편]세상처럼 느껴지는 것(1) 댓글:  조회:431  추천:0  2019-07-19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1) 조원   & 그 해 겨울의 밤은 추웠다. 강필두가 강림촌을 떠나던 1985년 겨울밤은 강림촌으로 왔던 20년 전인 1964년의 겨울밤보다 추웠다. 몸을 떨면서 이사 들었던 고장에서 강필두는 몸을 떨면서 떠났다. 겨울처럼 세상이 춥다고 느끼면서. 강필두가 잘살아보려던 욕망은 파멸되였다. 이루어진 욕망은 숨어있던 욕망을 드러내는 법, 하지만 강필두의 미완성된 욕망의 파멸은 숨겨둔 욕망마저 삼켜버렸다. 강필두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말년의 알콜성 치매로 오는 기억상실일 수도 있었다. 강필두가 죽은 곳은 30년을 살았지만 언젠가는 꼭 떠나야만 할 것만 같았던 D진의 료양원이였다. 강림촌에서 강필두는 10년 동란을 겪었다. 상종하기 싫었던 고향사람들을 등지고 처가마을 강림촌에서 익숙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우파모자를 쓰고 꿇고 앉았었다. 안해 조순재의 고향이였기에 강필두가 겪었던 수모보다 조순재의 모멸감이 진저리칠 정도였다. 자신이 겪고 있던 억울함과 수치, 분노와 고통의 무게가 역으로 고스란히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경계의 한끝으로 몰아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유죄감은 더 견딜 수 없었다. 1.5메터의 길이의 고깔모자의 추락을 막아내야 하는 인내, 증오로 휘갈긴 ‘반혁명 강필두’라는 먹물 붓글씨 우에 붉은 X의 부정표기가  덧대여진 가슴팍에 드리워진 패말, 패말 량단의 1키로그람의 쇠덩이 두개의 중력을 버텨야 하는 목덜미의 압박감 등등은 조순재에게로 향한 유죄의 대가로 역으로 생각하니 견딜 만도 하였다.  료양원 침대에 누워 죽어가면서 강필두는 시간의 흐름을 재고 있었다. 더딘 듯, 빠른 듯하였다. 아득한 저 끝의 어둠 속으로 밀려가는 시간은 살아온 생의 결들로 촘촘하게 엮여지면서 확실했다. 밀려간다 밀려간다 밀려간다∼ 그러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에 시간은 료양원 천정에 되돌아와서 고정되였다. 이러기를 반복하다가 강필두는 죽었다. 강필두의 죽은 몸에서 령혼은 한동안 머물러있었다. 령혼이 머물러있는 그 시간의 료양원 방은 강필두 홀로였기에 고요한 안식이였다. 령혼이 빠져나간 이튿날 아침, 료양원 원장님이 강필두를 안아 들어올릴 때 몸은 가벼웠다고 한다. 강희경은 아침 9시가 넘어서야 깨였다.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 3건이 떠있었다. 료양원 원장님의 전화였다. 긴급일듯 싶었다. 강희경은 침대에 걸터앉아 환자의 슬리퍼처럼 외로워보이는 자신의 실내화에 발을 끼워넣다가 원장님의 폰번호를 눌렀다. “아버님 운명하셨습니다.” 원장님은 왜 전화불통이더라 뭐 이런 전주를 삭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살아남은 자에게 어찌됐든 친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한 배려일듯 싶었다. 강희경은 잠간 언어기능을 상실한 채 침묵에 결박되였다. 혼자서 하는 침묵은 덜 외로울 수 있었지만 휴대전화를 사이두고 익숙하지 않은 상대와 함께 나누는 침묵은 견디기 어려웠다. 하물며 아버지의 죽음이 끼여있는 타인과의 침묵은 더 어려웠다. 강희경은 항공편을 알아보고 곧 출발하겠다고 답했다. 떠나면서 다시 련락드리겠다고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고 계십시오.” 강희경은 원장님께 인사를 끝내고 눈가로 번지는 눈물을 닦아냈다.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올 수 있는 휴대전화를 잡고 있던 오른손의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강필두는 강희경의 휴대전화로 련락하지 않았다. 치매증상이 거쳐가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강희경의 집으로 전화를 넣었다.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강필두는 휴대전화로 하라는 강희경의 구박에 ‘집에 없는 거 알고 전화했다.’고 일축해버렸다. 강희경이 기거하고 있는 공간에 울려퍼지는 전화벨 소리를 상상하며 강필두는 무슨 생각을 했을가? 강희경은 랭장고에서 랭수를 꺼내 목구멍으로 넘기다가 차오르는 슬픔으로 주저앉았다. 혼자 사는 집에서 한껏 통곡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강희경은 눈물을, 울분을, 슬픔을 삼키는 데 버릇되여 주저앉아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끼워넣고 들먹이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휴대전화를 다시 찾아들었다. 미국에 있는 강희수의 폰번호를 눌렀다. 강희수는 신호가 두번에서 세번으로 넘어갈 때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려온다는 신호였다. 강희경은 숨을 고르면서 긴 머리결에 손빗을 넣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강희경이 전화를 받자 강희수가 먼저 말했다. “어, 희경아.” 언제고 강희수는 말이 짧았다. “네. 돌아가셨대요.” 무심한 듯한 강희경의 역시 짧은 말은 더욱 비애가 섞여있었다. “어∼” 강희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 밤에 돌아가셨대요. 아버지가.” 강희경은 말과 말 사이에 끼여드는 적막이 싫어서 다시 말했다. “그래, 편하게 가셨겠지?” “아마도.” “니가 고생이 많다.” “못 오는 거지요? 안 오는 거지요? 오빠.” “니가 알아서 해라. 희경. 굳이 찾아간대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겠지?”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오빠도 내려놓을 때 안됐어요?” “이미 내려놓은 지 오래다.” “알았어요.” “근데 희경, 니 계좌번호 주라. 입금할게.” “썩 후에 리자 쳐서 받을게요.” “그러던지. 니만 고생이 많다.” 강희경은 강희수와 통화를 끝냈다. “미안해요. 오빠.” 하고 말하고 싶었다. 미안이라는 말 한마디로 속죄할 수 있을 정도의 미안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준비도 안된 상대에게 하는 사과는 사과도 아니다, 사과를 받아준대서 자신이 저지른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속죄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이다. 강희경은 이렇게 믿어왔고 자신을 괴롭혀왔다. 강희경은 원래 다니던 려행사에 전화해서 오후 티켓을 끊었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넣었다. 급한 사정으로 보험회사 방문을 일주일 뒤로 재예약하였다. 전남편이였던 대춘이 교통사고로 사망된 뒤에야 강희경은 대춘이 생명보험을 해두었으며 그 수혜자는 ‘강희경’이라는 걸 알게 되였다. 보험회사에서 다녀가라는 전갈이 왔었다. 강희경이 D진 료양원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무렵이였다. 료양원의 손님접대실을 조촐한 장례식장으로 꾸며놓았다. 강필두의 시신은 기거하던 방에서 강희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장님과의 간단한 인사를 끝냈다. 원장님의 안내에 따라 강필두의 방으로 강희경은 들어섰다. 원장님은 조용히 문을 닫아주고 물러갔다. 강필두는 이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져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깊은 잠 속에 빠져든 사람 같았다. 침대 밑이며 방 어디에도 슬리퍼며 신발도 보이지 않았다. 강필두는 이젠 걷는 존재가 아니였다. 신발이 놓여져있지 않는, 침대에 누워있는 죽음의 쓸쓸한 적막을 강희경은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강필두는 모든 기억의 끈을 놓아버리고 죽기 전, 밀려가던 시간의 저 끝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강희경은 강필두의 가난과 고뇌에 빨려서 홀쪽해진, 굴곡이 심해진 량볼을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그리고 입관되였다. 관뚜껑을 덮기 전 강희경은 나비머리핀을 강필두의 손에 쥐여주었다. 1985년 강림촌에서 강필두와 함께 야반도주하던 강희경의 손에 꼭 쥐여졌던 나비머리핀이였다. 강필두가 누워있는 관은 손님접대실의 벽면 쪽에 걸어놓은 영정사진 아래로 안치되였다. 료양원 동료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꺼벅꺼벅 졸다가  9시가 되기도 전에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갔다. 남은 사람은 강희경과 원장님 그리고 리태수였다. 한족인 원장님은 리태수와 강희경의 조선말 대화에 지장이 된다면서 먼저 자리를 떴다. 리태수할아버지가 그기 누기야, 그기 누기네 집 앞쪽, 그기 뒤집에 살던 뭐 이런 식으로 강희경에게 강림촌 어느 누군가를 소개하면서 강희경에게 자신의 신분을 확인시키기에 고심했지만 강희경으로서는 초하루날 장터에서도 본 적이 없는 듯한, 기억에 없는 할아버지에 불과했다. “그기 말이다. 필두 이 량반, 강림에 처음 왔을 때 말이다. 어디서 이런 골방샌님이 있었나 했더랬더. 우리 아버지, 저세상 갈 사램이 아버지하니까 우끕지. 우리 아버지 강림촌 지서였더랬더. 일자무식인 아버지가. 동네 글 깨친 사램 거의 없었더랬더. 우리 집 고간으로 필두량반과 니 엄마가 이사 들었지 머야. 공사에서 내려오는 문건들은 다 필두량반이 번역하고 써주고 그랬더랬더. 지금 말로 하면 비서 노릇이겠지무. 그란데 필두량반은 고집이 와늘 질기지. 까놓고 말하믄 머리가 돌이란게야. 그기 말이다. 죽은 사램 두고 하는 말 아니깅 한데. 오리부업 망했기로 인사 한마디 없이 밤중에 강림에서 도망치다니. 모르지. 강림이 이 갈렸을지도. 우파투쟁도 강림, 아들 억울한 강간범 엎어쓴 것도 강림, 순재 자살한 데도 강림∼ 강림이 필두량반께 좋은 추억이 될 고장은 아님메.” 강희경은 강필두의 영정사진과 리태수를 번갈았다. 강필두가 건강이 퍽 좋기 전에 미리 영정사진을 준비해두었던듯 사진  속의 강필두는 사진 바깥을 선량한 눈빛으로 굽어보고 있었다. 강필두가 갇혀있는 관속과 사진 속의 바깥은 정숙했다. “그기 말인데, 미친 세상이였더랬더. 그 때는. 미친 척함서 세상 살믄 될꺼정. 돌대가리 필두량반. 귀는 팔랭개비고 의욕은 하늘에 삿대질하고. 부자 된다꼬 오리부업은 쓰잘데기 없이 하고. 문화대혁명 때 혼난 거 봉창한다꼬. 돈, 돈, 돈. 세상이 좋아졌기로 골방샌님에게 돈따발 쏟아질리야.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니 귀신도 돈 좋아하는메. 넬 아침에 귀신돈 마이 불태워서 보내줄꺼정? 평생 써보지 못한 돈 다 태워줄꺼정?” 리태수의 푸념에 강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희경은 문득 전남편이였던 대춘의 말을 떠올렸다.  “남자들이 평생 동안 면도하는데 사용하는 시간은 3350시간!” 강희경은 강필두의 면도시간이 3350시간이 되였을가고 궁리했다. 남자들 평생의 나이 기준과 면도 차수가 모호한 시간 계산법이였지만 강필두의 면도시간은 평균치의 반에 반 정도나 될가고 강희경은 추정했다. 다행 입관이 될 때 강필두의 코 밑과 턱 밑은 면도가 되여 말끔했었다. 버리기 직전의 수세미 같은 귀털은 귀구멍을 덮은 채 제멋대로 피여있었다. 소음으로 시끄러운 세상을 무시해버리려는듯.   & 강필두는 ‘파란 돼지의 해’인 을해乙亥년 1935년생의 돼지띠로 태여났다. 하지만 복돼지로는 될 수 없었다. 강필두가 조순재를 따라 처가마을 강림촌에 이사오게 된 것도 강필두의 도피라면 도피인 셈이다. 조순재와 혼약이 있게 된 것도 삶이 신산하다고 느껴지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였다. 강필두는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N진의 조선족소학교에 배치되였다. 딱히 규정된 과목이 없이 닥치는 대로 수업을 하게 되였지만 학교내의 미술수업을 주로 맡아했다. 소학교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전업화가로의 신분 상승을 위한 과도기라고 강필두는 믿고 있었다. 화가지망생이였던 강필두는 자신의 그림 못지 않게 미술수업에도 열성을 쏟았다. 열혈문화청년의 개성을 불태웠다. 그것이 화근이 되여 학생들에게 ‘불건전한 사상을 주입하는 교육자’라는 감투를 쓰고 학교에서 쫓겨나서 N진 술공장으로 전근발령이 되였다. 술공장의 단순로동자로 좌천되였다. 자신의 미래를 박력 있는 붓질로 장식하던 강필두에게 술공장의 벼겨찌꺼기를 퍼담는 삽자루는 치욕이였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 암울한 현실에서 강필두가 가까이할 수 있었던 것은 술이였다. 강필두의 아버지는 강필두가 중등전문학교에 입학되던 해에 세상을 뜨면서 가세는 기울었으며 가장 노릇은 10세 이상인 형님 강필범이 형수님과 함께 이어갔기에 집으로 돌아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술에 빠져 세월을 허송하는 강필두가 딱해보였던지 함께 일하던 사람이 강필두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결혼이라며 녀자를 소개해주겠다고 나섰다. 술김에 맞선을 보겠다고 했던 호언이 있은 바로 이튿날, 조순재를 만났다. 조순재와 맞선을 보고 헤여지면서 한주 뒤의 일요일로 강필두와 조순재의 데이트는 약속되였다. 약속 전날 과음주와 더불어 신열로 강필두는 약속장소로 나가지 못했다. 강필두의 몸은 신열로 뜨거웠지만 바깥은 추웠다. 아무리 이불로 몸을 감싸도 오한으로 덜덜 떨렸다. 몸에 번진 땀들은 이불에 배여져 목덜미에 닿는 이불깃은 섬뜩했다. 이불 감싸기를 거듭하면서 외로워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되풀이하다가 강필두는 혼미에 빠져들었다. 언뜻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간감각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싸늘하게 식은 이마에 닿아진 사람의 살을 느꼈다. 포근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병든 사람은 이마에 얹혀지는 손이 청결한지를 묻지 않으며 죽어가는 사람은 이마에 입맞춤해오는 입술이 살인자의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몸은 피페해지고 정신은 병들어버린 강필두는 조순재의 손에 이마를 맡겼다. 소요가 밀려간 영원이라는 시간을 떠올리며 그 시간 속에서 홀로 울고 싶었다. 홀로움, 강필두는 사람의 냄새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온몸에 박혀있던 가시가 물러지면서 강필두는 선량해지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 시각, 강필두는 이미 평범한 삶이 되여버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저 하였다. 한 녀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사는 삶을 선택했다. 삶이 걸어온 제안을 강필두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지만 의무처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조순재는 석재공장의 돌까기 림시공으로 강필두는 술공장의 로동자로 가정이라는, 주거를 기반으로 의식주 생활을 공유하는 생활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사회집단이 구성되였다. 하나의 집단은 또 다른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함께 하는 공간 속에서 함께 하는 시간은 구성원들의 인고와 정열을 필요로 한다. 림시거처로 마련된 술공장 창고를 개조한 숙소방, 구들 우의 이불 속에는 강필두의 전신에 찌든 술찌꺼기의 시큼한 발효냄새와 땀냄새가 진동했으며 조순재의 닳고 찢기고 터진 손바닥과 손등에 말라붙었던 피딱지가 굴러다녔다. 비루하고 고단하고 치졸한 삶의 밤은 언제나 일찍 시작되였다. 일에 지친, 곤궁한 두 얼굴은 지척에 있어도 서로를 분간할 수 없었다. 신문지를 깔고 구들목에 일제히 입을 벌리고 누운 신발들의 검은 비명은 강필두의 이 가는 소리와 조순재의 코골이 소리에 먹혀버렸다. 살판이 난 쥐들이 방방 날뛰고 다녔다. 하지만 어떤 마음은 새벽마다 강필두와 조순재를 달구었다. 서로의 알람이 되여가는 서로의 몸이였다. 강필두는 쇠처럼 단단해졌다. 조순재는 용광로처럼 불탔다. 용광로 속에서 쇠는 철물로 용해되였다. 철물은 또 하나의 주물로 주조되였다. 강필두는 내면으로부터 괴여오르는, N진에 남아있음으로 떠오르는 자신을 향한 혐오를 지울 수 없었다. 조순재가 임신 4개월 무렵, 강필두는 조순재를 설득하여 강림촌으로 이사가서 농사짓기로 하였다. 처가마을의 도움으로 아예 호적도 처가마을로 옮겼다. 땅을 두고 하늘을 바라며 사는 온전한 농민이 되자면 호적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강필두의 고집에서였다. 강필두의 학력증명서처럼 농민이 되는 데도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강필두는 확신하고 있었다. 강필두는 자신의 음주병이 술공장의 탓인듯 술공장을 멀리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리유도 만들어냈다. 처가집 일가친척들의 썰렁한 환영식이 있었다. 조순재는 가족을 배신하고 한 남자에게로 가버린 죄의식을 치르듯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닫아버렸다. 강필두의 유식을 애써 물리치려고 하는 무식한 말들은 조순재의 엉덩이에 바늘방석으로 깔려갔다. 농민들을 무식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강필두의 편견은 오히려 뻔히 드러나게 된 꼴이였다. 호랑이 장인어른의 대통이 당장 날려들 직전이였으며 일가친척들은 비난의 쓴웃음을 보냈다. 어떤 무리에 끼여드는 전제는 존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강필두는 나중에야 깨치게 되였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겨울의 어느 저녁 무렵, 강필두는 조순재와 더불어 강림촌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차거운 혀의 핥음을 받으며 오래도록 서있었다. 이영을 얹고 납작 엎드린 초가집들, 가가호호의 굴뚝에서 토하는 연기들은 대기 속에서 제멋대로 풀어지면서 그림자를 만들어갔다. 무질서하게 흩어지고 뭉쳐지는, 뭉쳐져서는 다시 흩어지는 연기 그림자들의 흔들림은 헐벗은 백양나무 가지 끝에 처연히 내려앉았다. 강필두와 조순재는 이사짐에 눌리우고 처진 자신들의 불확실한 그림자를 밟으며 강림촌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들의 그림자에는 무서워하는 표정이 있었다. 포도동. 포도동. 후두둑. 후두둑. 저녁새들의 날개짓 소리가 들려왔다. 1964년 겨울밤은 추웠다. 강림촌에서의 첫날 겨울밤은. 강필두의 겨울밤은.   & 조순재가 14세 때 조순재의 엄마는 조순재를 남편 몰래 중학교시험장으로 보냈다가 남편의 손아귀에 머리채가 잡혀서 마당을 다섯바퀴 질질 끌려다녔단다. 마당에 널려진 조순재 엄마의 머리카락에 놀라서 눈치머리 없던 3년 묵은 거위들도 구석으로 피해 달아나서 피신을 했단다. 거위들의 주둥이 량옆으로 뚫린 코구멍으로 단김이 새여나갔고 눈알은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돌아버렸다고 한다. 옆집의 바람기 많던 수캐도 꼬리를 뒤다리 사이로 바싹 끼워넣고 경사진 골목길을 에돌아 줄행랑을 하다가 굴러떨어져 돼지똥물에 처박혔다고 한다.   호랭이 령감탱이 그바람으로 날 쫓아온기라. 순재가스나, 거 서지 몬해. 자꾸 뛰믄 다리갱이 뿐질러놀끼다. 할딱대며 뛰다가 호랭이 고함에 난 서버렸어야. 다리갱이 뿌라지는 게 무서븐 게 아이라 힘이 읎었지라. 호랭이 손바닥에 목덜미 잡히갖꼬 공중에서 바둥거렸제라. 숨이 칵 맥히고 하늘이 노래지는 게라. 정신 채리고 봉께 땅바닥에 꼬꾸라져있는 게라. 짝짝 갈라터진 호랭이 발뒤꿈치가 눈앞에 있어야. 와 눈물도 안 나데. 너무 무세븐 게라. 니 할배 얼맹키로 무서밨다는고 허믄, 밤중에 참외 훔칠라꼬 갔다가 참외밭에 앉아있는 니 할배 보고 호랭이 봤담서 지 자리서 오줌 갈기겠노. 성대가 그 날부터 자다가 이불에 오줌 싸재끼는 병 들어버린 게라. 그라게 내가 까박 정신줄 나버린가베. 날 내뿌이라고 혔던 사램도 니 외할배였제. 세살 때 조선땅서 건너올 때 말이제. 리질에 걸려 빼빼 마르꼬 머리르 들도 몬허는 내르 니 외할무이 등에 업었제라. 내뿌이라꼬 허는 니 할배 말도 무셉지도 안혔다제. 조선땅 어디멘고 하니 깅상도 대구 어디라꼬는 혔는데 내뚜 몰라야. 조선땅서 머 혀싸서 먹고 살았는지 잘살았던가베. 기생집 가스나 자건거 뒤에 태워갖꼬 여보라 험서 일부러 니 할무이 집 앞을 지났대나. 머리는 기생오라버니맹키로 기름 처발르꼬. 휘파람 쐑쐑 불민서. 그란데 세상일 누꼬 알겠노? 난리 났지라. 일본놈허꼬 쏘련마우재는 와 남 마당서 쌈허고 지럴혔쌌켔노? 그 지럴 난리에 니 할배랑 할무이랑 지 마당 쑥대밭으로 된 거 버리꼬 여로 온기라. 그 난리 읎었음 지 땅서 살았제라. 다 남자들, 남자들 지랄발광혀서 그리된겨. 뭐신고 카믄 쌈은 서나들이 허는 거사. 호랭이 니 할배 말이제, 기집들은 사람취급도 안허능기라. 중학교 시험서 자꾸 떨어지는 니 큰 외삼촌 공부시킨다꼬 온데루 끌고 다닝 게라. 가스나들 공부시켜바야 남 좋은 노릇 시킨다 싸메. 열네살에 논밭에 끌레나가 여태 이 모냥 이꼴이제. 하따, 공부만 쪼까 혔었더래도 니 아부지 만나 이 고상 안허고 살낀데. 니 외할무이 사는 꼴 보고 천하 어느 머슴아도 믿지 않코롬 혔제. 평생 시집 안 간다꼬. 하따, 긴데 땅에 코 처박고 십년 다되게 일허다 본께 억울헌기라. 그 때 딱 니 아부지 나타났제. 중매군이 공인이라꼬 헌께, 먼 빙신이래도 공인이면 된다꼬 덜커덕 만나서 결혼혀뿌였제. 땅에서 도망갈라꼬 결국에는 남자에게 시집가뿌인거제. 림시공 일년이나 혔나, 도로 여로 온기라. 휴∼ 그 후에 문화대혁명 란리에. 목숨 퍼렇게 살아있는 사램 말은 안혀기로 허고. 그 때는 당장 칵 죽고 싶었제라. 희수르 포대기에 싸서 강가에 몇번이고 댕겼어라. 그 때 칵 죽어버맀으믄 니뚜 읎었겠제. 그란데 요상헌 건 말이제. 니 할배는 사흘이 멀다꼬 니 할무이 머리채 끌고 댕김서도 울 칠남매는 어이 맹글어냈노 몰라야. 사능 게 그라고 그렇제. 오늘 내 말투 어색혀? 그랴, 오놀엔 니 외할무이 보구잡아 그러능겨. 깅상도 할무이. 깅상도 사투리 흉내낼라카이 잘 안되능겨. 깅상도 할무이 저세상 돌아가실 때 머리카락이 몇올 읎었제. 빠져서 없는 머리 꽁지서 비녀 겨우 끼워줬제. 거기 가서라도 온전한 머리 있어야 할긴데. 잘러도 잘러도 쑥쑥 올라오는 정구지맹키로 머리가 돋았으먼 싶어라. 집서 깅상도말 하능 그대로 핵교강께 다들 놀리더랑께. 핵교느 12리 떨어진 N진에 있었제. 놀린다능게, 그기 뭐신고 카니, 여그느 북쪽치들이 많은기라. 니 아부지도 황해도 어디라카더마 내사 모르제. 남의 땅에 와서 니쪽 내쪽 어딪 간노? 니편 내편이 어디 갖노? 다같이 못난 편이제. 그라고 지금 해쌌는 말들은 잡탕이제. 쭝국말 썪어가 함시로 오가잡탕 되뿌있제. 초우!     엎어놓은 공기 만큼 튀여져나온 세살의 강희경의 뒤통수를 만지며 조순재는 푸념질을 반복했다. 강희경은 사납게 울어대던 성미를 접고 손가락을 입에 물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강희경은 빨라지는 호흡과 더불어 오르락하는 조순재의 쌍봉 젖가슴 사이에 튀통수를 부비대며 히히 웃기도 하였다. 조순재의 날숨과 들숨의 리듬에 맞춰서 강희경은 손가락 빠는 속도를 조절했다. 조순재는 말하는 와중에도 강희경의 목덜미를 어루쓸어주었다. 태줄이 감겨져있던 그 자리는 조순재를 아프게 했다. 늘 강희경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조순재는 태줄을 감고 태여난 아기가 불운하다는 항간의 소문 때문만은 아니였다. 모든 걸 다 엄마로서의 자신의 책임으로 몰아갔다. 아기가 배 속에서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리고 엄마인 자신의 말을 들으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태줄을 목에 감았으랴. 갓 태여난 강희경은 어린 늙은이의 모습이였다. 모순된 어린 살점의 표정을 읽으면서 조순재는 굳이 자살기도라는 엄청난 공포스런 말까지 떠올렸었다.   & 강필두는 비스듬히 언덕을 이룬 늪가 쪽의 풀밭에 누워있었다. 광활한 대지의 숨결들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늪 음지 쪽 수면에 떠돌던 녹다 만 얼음덩이들은 박새들의 지저귐에 성급하게 깨여져갔고 밭갈이 소들의 영각소리는 정월 대보름에 대접했던 찰떡처럼 찰지게 들려왔다. 아이들 겨울 불장난으로 새까맣게 타다 만, 먹붓처럼 오롯이 서있던 갈대들은 밑둥으로부터 푸른 기운을 뽑아올리고 있었다. 해동의 환희에 찬 자연의 평화와 수런거림은 강필두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강필두는 엉덩이 골 사이로 눅눅하게 번지는 대지의 숨결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대지는 아리고 맵고 쓰고 떫은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여러개의 보조개로 웃고 있는 감자, 은밀한 비밀로 겹싸인 양파, 쪽으로 나뉘여지면서 기어이 한몸인 마늘, 한사코 몸통을 자랑하려는 무우 등등을 품속으로 넉넉히 받아들인다. 강필두는 자신도 대지의 너그러운 품에 안길 수 있기를 바랐으며 온전한 대지의 사람이 될 거라고 다짐했다. 강필두의 청춘의 얼굴에 내려앉은 노곤한 봄볕을 바람이 어루만져주었다. “어이, 강선생, 백일몽 강선생.” 강필두는 언덕 우에서 들려오는 중국말 소리에 몸을 일으켜앉으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언덕 우 버티고 서있는 둥글둥글한 사내는 왕얼이였다. 머리통, 다리통, 몸통, 어깨통, 팔통, 눈통. 어쨌든 왕얼의 몸의 각 부위마다의 이름 뒤에는 통이라는 어미가 붙여져야 근사할듯 싶었다. 우람된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도 웅글졌다. “어이, 강선생, 리서기 볼 일이 있다고 합니다.” 왕얼이 재차 고아대고 있었다. “알았습니다.” 강필두는 왕얼에게 어색하게 손을 저어보이면서 말했다. 리서기라면 리태수의 아버지였으며 강필두와 조순재가 곁방살이하는 집의 주인이기도 하였다. 리서기가 강필두를 ‘강선생님’이라며 깍듯이 올려붙여서 강림촌에서는 강선생으로 통하게 된 강필두였다. 일자무식인 리서기는 공사에서 내려오는 문건들이랑 있으면 강필두를 찾았고 번역일이며 가로수에랑 벽에랑 붙일 선전문구를 쓰는 일도 강필두에게 맡겼다. 강필두가 오기 전, 마을 회계와 출납을 겸한 왕얼이 리서기의 손발이 되여주었다. 왕얼의 고향은 산동성이였는데 퇴역군인의 신분으로 강림촌에 이사 들게 되였으며 퇴역군인의 배려정책으로 마을의 관직에 오르게 되였었다. 현성이나 공사에서의 회의 때면 언어소통이 원활치 못해서 애먹던 리서기는 왕얼을 앞세우고 다녔다. 강필두가 강림촌에 정착되면서 왕얼의 역할범위가 줄게 되였다. 강필두가 언덕에 거의 오르자 왕얼은 몸을 돌려 언덕길을 재촉했다. 거대한 산 하나가 강필두의 앞에서 움직여가고 있는 듯하였다. 한동안 말없이 터벅터벅 걷던 왕얼이 리서기의 총애를 받아서 좋겠다고, 농업기술원으로 발탁되여서 좋겠다고, 리서기의 비서 골방샌님 강필두씨가 좋겠다고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야유를 퍼부었다. 왕얼이 하는 중국말은 산동사투리의 억양이 남아있어서인지 뱉어내는 야유는 더욱 야유스럽게 들렸다. 이새로 찍찍 갈겨대는 왕얼의 침방울은 염소똥에 떨어져내렸다. 강필두는 입을 꾹 다물고 왕얼의 뒤를 따랐다. 강필두의 침묵은 왕얼의 숨소리를 더욱 거칠게 만들어갔다. 왕얼은 걷던 걸음을 탑하고 멈추었다. 강필두는 주춤하고 서버렸다. 왕얼은 다리를 엉거주춤 구부리고 두 손으로 두 무릎을 잡고 다리 사이로 얼굴을 거꾸로 내밀었다. 강필두도 몸의 자세를 낮추어 왕얼의 얼굴을 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에 왕얼은 뿡빵 하고 다리 사이로 방귀를 냅다 뀌였다. 초우! 강필두의 욕설이 쏟아졌다. 왕얼은 돌아서서 히히 웃었다. 강필두는 자세를 고정하고 “자네의 방귀소리가 산동방언의 극치로세. 어우, 그 냄새 또한 고약하기로.” 하면서 코끝을 쥐여보이는 액션을 했다. 왕얼의 주먹이 강필두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방어도 없었던 강필두의 왜소한 몸은 퇴역군인의 분노의 한방 펀치에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내렸다. 언덕 아래에서 볕쪼임을 즐기던 염소 한마리가 아코디언처럼 몸을 웅크린 강필두에게로 다가섰다. 염소의 흰 수염은 강필두의 얼굴을 감싼 손등을 간지럽혔다. 왕얼을 향한 염소의 항문에서는 환약 같은 똥덩어리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왔다. 따사로운 봄볕을 맞은 염소똥들은 흑진주마냥 까만 미소를 뱉어냈다. 염소똥덩어리들은 풀밭에 글자를 새겨갔다. -인간들아, 제발 개처럼 물고 뜯지 말거라.   & 조순재는 부어오른 만월 같은 배를 왼손으로 밀어올리며 쌀독 앞에 섰다. 배속의 아기는 쌀독에서 쌀을 퍼담으려고 버티고 서기만 하면 꿈틀댔다. 왼손으로 아기의 꿈틀이로 도드라진 배의 부분을 어루만졌다. 조순재는 굳이 그것이 아기의 주먹일 거라고 추측했다. 밥을 먹기 위해 움켜쥔 아기의 손, 밥을 달라고 펼쳐낸  아기의 손을 생각했다. 식성이 좋은 남자애일 거라 단정했다. 조순재는 허리에 힘을 주고 바가지가 들려진 오른손을 쌀독에 넣었다. 엄마가 아버지 몰래 날라온 쌀과 오빠들의 어깨에 들려져온 강냉이쌀이 바가지에 담겨졌다. 조순재는 병풍처럼 둘러친 왕꽃무늬 카텐식 칸막이용 천에 둘러싸여 서있었다. 조촐한 단칸방이라 없는 살림을 여보라 하면서 다 펼쳐놓고 전시하기가 부끄러워서 부엌 구석 쪽으로 천으로 둘러서 만든 헛간이라는 공간이였다. 조순재는 카텐 당기듯 칸막이를 걷고 필요한 걸 꺼내면 될 일도 굳이 그 공간에 발을 들이고 칸막이를 다시 닫아서 그 속에서 쌀도 퍼내고 장도 퍼담았다. 빛이 어중간히 차단된 그 공간의 고요를 조순재는 즐겼다. 호랑이 아버지가 들고 온 쌀독에 강필두는 풀을 먹여서 낡은 신문지를 몇겹으로 바르고 말렸다. 신문지의 풀 점액이 완전 건조되기 전에 강필두는 숯불다리미로 정성껏 밀어서 쌀독의 둥근 배에 널려있는 쭈글쭈글한 주름살을 펴주었다. 쌀독의 몸이 매끌매끌해지면 거기에 화책을 찢고 오려서 붙였다. 왼쪽 어깨에 물동이를 얹고 잠옷인 듯한 옷가지는 흘러내려 배꼽이며 젖가슴을 드러낸 고아한 외국 녀성의 석고상 그림이 쌀독을 장식하였다. 그림 속 녀성의 수줍음과 싱싱함은 흰빛으로 눈부셨다. 강필두는 조순재의 불룩배를 만지면서 완성품을 조순재에게 내밀었다. 삶이 제아무리 고단해도 샘물을 길어올리는 녀성인 조순재가 곁을 지켜주기에 든든하다는 고백을 강필두는 보탰다. 결혼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되는 강필두의 진중함에 조순재는 부끄러움과 당혹을 넘어서서 온전한 한 녀인으로서의 열락을 느꼈다. 쌀독 선물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카텐식 칸막이 공간이 필요했으며 조순재는 그 공간에 머물기를 즐겼다. ‘야가 인자 나올 때 된 거 같우란데. ’조순재는 달처럼 부어오른 배를 내려다보며 혼자말로 중얼대며 칸막이 천을 드르륵 옆으로 밀었다. “시간 다됐는데 안 나오고 뭐하십니까?” 낮은 출입문이 열리면서 사람 먼저 왕얼의 성난 목소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출입문을 들어서는 왕얼의 그림자는 집의 절반을 덮어버렸다. “아. 네.” 조순재는 왕얼의 그림자에 눌리워서 메새의 간덩이처럼 팔딱 놀랐다. 손에 들려진 쌀바가지의 쌀을 이남박에 쏟아부으면서 칸막이 천을 황급히 닫았다. 왕얼의 황소눈통은 조순재의 어깨 너머로 드리워진 천막을 향하여 아득히 열려져갔다. 작열하는 여름 오후의 해볕은 조순재의 머리 우에 얹혀진 떡함지에서 번들거렸다. 조순재의 머리와 떡함지 사이에 짓눌린 똬리가 땀에 젖어들고 있었다. 조순재는 허리의 부담을 줄이려고 두 팔을 뒤짐자세를 하고 위태롭게 들길을 걸었다. 아슬아슬하게 공중에 떠있는 바줄을 걷고 있는 곡예단의 배우처럼. 조순재의 뒤에는 왕얼이 따라오고 있었다. 왕얼의 두툼한 어깨 우에는 저울이 걸쳐져 있었다. 저울판은 게으른 몸짓으로 왕얼의 등허리께로 흘러내려있었으며 왕얼의 젖꼭지를 가리지 못한 런닝그 앞섶에는 저울대가 쥐여진 손이 있었다. 다른 손의 중지에는 저울추가 반지인양 끼워져있고. 조순재와 왕얼의 1소대 일군들의 오후 새참의 배달길이였다. 농약을 뿌리는 적절시기를 놓쳐버려서 벼밭이 돌피밭이 되여간다고 1소대 전원이 돌피와의 전쟁에 나섰다. 따가운 해볕은 돌피의 왕성한 자람새를 부추겨주었으며 1소대 남녀로소는 총동원되여 밤늦게까지 돌피를 뽑기에 전력을 다했다. 긴긴 여름날의 해는 농민들의 귀가를 일부러 지연시키려고 작정했듯이 늑장을 부리며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조순재는 임신중이라는 특혜로 취사반에 배치되였다. 임신중의 임산부가 1소대에 여섯명이나 되였지만 대대 리서기와 1소대 대장인 호랑이 아버지의 덕분이였다. 일터에 거의 도착되여갈 무렵, 조순재는 두 팔을 올려 떡함지를 붙들고 심호흡을 하면서 서있었다. 이마를 타고 내리는 땀방울은 속눈섭까지 적셔서 눈앞이 흐릿했다. 현기증이 났다. 눈꺼풀을 덮었다 치떴다 하면서도 눈동자는 똬리 우에 얹혀진 떡함지의 밑바닥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행히 떡함지가 조금의 그늘을 만들어준다는 위안을 하면서 힘을 얻기로 하였다. 떡함지가 갑자기 붕 공중으로 떠올랐다. 조순재는 헐거워지는 몸의 상태가 감지되면서도 한사코 떡함지를 붙들려고 발뒤축을 올려 까치발을 만들었다. 장화를 잘라 만든 고무신에서 조순재의 발뒤꿈치가 들려져 올라왔다. 무릎 우까지 오는 검정 장화를 신은 남자의 다리가 조순재의 발뒤꿈치를 막아주었다. 조순재가 머리를 돌렸다. 떡함지를 두 손으로 받쳐서 들고 있는 강필두가 뒤에 서있었다. 임신살이 오른 조순재의 얼굴은 함박꽃으로 환하게 피여올랐다. 강필두는 함박꽃에 매달려있는 땀이슬을 안스럽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그 물방울이 귀여워지면서 우산을 쓰고 땀이슬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왕얼이 강필두와 조순재를 스쳐지나며 휘파람을 불었다. 무섭게 일그러지는 강필두의 얼굴을 보면서 조순재는 강필두의 옷깃을 살며시 당겼다. 떡함지를 풀고 일군들에게 싸래기쌀로 만든 시루떡을 칼로 두부의 반 만큼의 크기로 잘라서는 저울판에 올렸다. 저울눈금을 밀고 당기면서, 떼여내고 보태면서 배식을 마치고 조순재는 일터로 흩어져가는 일군들의 뒤모습을 한숨으로 보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조순재는 배 아래 쪽으로부터 오는 통증을 느꼈다. 숨을 고르며 잠간 쉬는데 왕얼이 갈길을 재촉했다. 콰이! 콰이! 짐을 덜어버린 떡함지를 머리에 인 조순재의 움직임은 올 때보다 굼떴다. 돌아갈 때는 왕얼이 코치 노릇을 했다. 빈 떡함지에 저울을 마저 넣어버리고 뒤짐을 지고 왕얼이 앞장섰다. 왕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콰이 콰이만 노래처럼 불러대며 빠르게 걸었다. 10여분 쯤 걸었는데 왕얼의 뒤모습은 저 멀리로 멀어져갔으며 조순재의 복통은 기승을 부렸다. 조순재는 왕얼을 큰소리로 불렀다. 왕얼은 들리지 않는지 점점 그녀의 시야에서 소실점으로 되여갔다. 조순재의 다리 사이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조순재는 아아 하면서 길가에 쭈크리고 앉았다가 아예 뒹굴었다. 양수가 터지면서 배속의 아기가 좁은 문으로 나오려고 했다. 강필두가 달려왔다. “참소, 좀만 참소. 의사 부르러 가겠소.” 하고는 강필두는 마을 쪽으로 뛰여가려 했다. “안돼요. 가지 마요. 시간 없어요.” 조순재는 강필두의 발목을 잡았다. 강필두는 조순재가 시키는  대로 떡함지를 풀고 식칼을 찾아들고 성냥불로 식칼을 데웠다. 성냥불이 꺼지고 타오르기를 몇번을 반복하는 사이에 아기는 이미 머리를 비집고 나왔다. 귀가 빠지면서 미끌어지듯 물컹한 살덩이가 빠져나왔다. 강필두의 어떤 육욕의 충족과 어떤 결핍의 보상과 어떤 과잉의 배설과 어떤 억압의 분출로 무단출입도 서슴지 않았던 조순재의 좁고 축축한 문에서 생명의 기적이 탄생되는 순간을 강필두는 죽는 날까지 잊지 못했다. 강필두는 고개를 틀고 눈을 감고 아기의 배꼽과 조순재의 문을 이어놓은 끈을 식칼로 절단해버렸다. 조순재의 지시에 따라 미끌대는 양수가 덮인, 물컹물컹한 아기를 엎어서는 궁둥짝을 때렸다. 이윽고 아기는 아앙~ 하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으며 조순재는 다리를 벌린 채 여름하늘을 올려다보며 귀구멍이 먹먹할 정도로 귀 속으로 눈물을 채워갔다. 두세시간 푹 고운 백숙의 자세로 질벅한 양수와 비린 피 속에 누워있는 조순재를 내려다보면서 강필두는 강희수를 품에 안고 강희수처럼 앙앙 소리내여 울어버렸다. 강필두의 무릎이 꺾였다. 노을이 서녘 하늘을 피빛으로 물들였다. 저녁노을은 아침노을을 닮아있었다. 만나고 헤여지는 순간에 하는 안녕이라는 말처럼. 무언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어스름이 드는 이 불확실한 시간에 땅과 하늘의 그 경계를 강필두는 강희수를 누인 떡함지를 받쳐들고 걸었다. 조순재는 떡함지를 받쳐든 강필두의 손목을 잡고서 걸었다. 강필두와 조순재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걸었다. 강필두와 조순재의 얼굴 표정은 온화해졌다. 굉장한 일을 겪은 하루를 보내면서 두 사람은 너그러워졌다. 이런 불확실한 시간이면 서로의 얼굴은 더 잘 보일 수도 있었다.   출처:2017 제1호
9    [단편]세상처럼 느껴지는 것(2) 댓글:  조회:355  추천:0  2019-07-19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2) 조원   & 열려진 창이다. 목화솜 구름이 밀려간 새파랗게 질려버린 하늘은 실크쪼각 같이 흐늘대고 있었다. 구들에 누워서 강희수는 가을하늘을 오래도록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책 없는 자유와 비여져있는 시간이 몰고 오는 외로움이라는 걸 강희수는 언뜻 느꼈다. 굳이 싫었던 공부는 아니였지만 굳이 공부를 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강희수의 자퇴의 의지였다. 그렇다고 꼭 뭔가를 하고 싶은 소원 같은 것도 없었다. 강희수는 어제부로 학생의 신분으로부터 사회인의 자유를 얻었다. “뭐가 어쩌고 저째? 공부 안한다고? 왜? 공부해야 이넘의 촌구석을 벗어나지. 니 외할아부이 때문에 열네살에 밭에 끌려나가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게 분한데 니까지 여그 산골짜기에 처박히겠다고? 되지도 않을 소리. 낼 당장 핵교 가야 한다. 내 죽는 거 볼라면 핵교 가지 말고. 핵교 안 가고 일한다고. 니 할일 집구석에 없다. 밥만 퍼멕여줄 거니까 차라리 놀아라. 놀리는 게 니한테 내리는 벌이다.” 강희수의 자퇴선언을 듣고 나서 조순재는 악을 쓰듯 웨쳤다. 조순재의 격한 반발을 예상치 못했던 강희수는 벽에 기대고 앉아 입을 대합조개처럼 닫아버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아부지는 공부 적게 해서 농촌에서 이러고 있담까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있었다. 그러면서 담배쌈지에서 초담배를 꺼내서 신문지에 말고 있는 강필두를 힐끔힐끔 곁눈질하였다. 어쩌면 강필두의 침묵은 폭풍전야의 무시무시한 공포일 거라고 강희수는 숨을 죽이고 고스란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조순재는 자기 분을 삭일 수 없없던지 바둥거리며 베개에 엎드려 울었다. 긴 시간을 들여서 눈물의 무게에 눌리워서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눈물이 거쳐간 마음은 씻겨서 안정을 찾았다. 조순재는 베개수건으로 코를 팽 풀면서 다시 일어나 앉았다. “어이구, 답답해라. 희수 아부지. 말 좀 해보시라구요.” 조순재는 강필두를 닥달했다. 조순재는 희미하게나마 강희수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예감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강희경은 앉은뱅이 걸음으로 엉덩이를 강희수 쪽으로 밀어붙이면서 강희수의 옷깃을 당겼다. 바깥으로부터 청량한 저녁 가을바람이 방안으로 불어들어왔다. 그러나 그 바람은 고열로 치닫고 있는 강씨네 식솔 사이에서 흐르는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강필두의 마른 입술 사이로 뿜어져나오는 매캐한 골초냄새가 흐를 뿐. “답답해라. 강씨네 이 고집을. 닮을 건 꼭 못된 것만 쪽집게로 집어서 옮긴다고 하더만. 에이구, 아들 애비 하는 꼴 보라구. 닮아서 불만 있나? 가타부타 지쪽 선언만 하고. 희수 아부지 속 터져요.” 조순재는 강씨네 두 남자에게로 엉거주춤 거리를 좁혀갔다. “차라리 잘됐다.” 강필두가 드디여 침묵을 무섭게 깼다. 재털이에 담배를 비틀어눌렀다. 힘껏. 조순재는 억장이 무너져내려 휘청하면서 뒤쪽으로 물러나앉았다. 강희수는 뒤통수 한방 얼벌하게 얻어맞은듯 강필두를 건너보면서 덜덜 떨리는 무릎을 가슴으로 껴안았다. 강희경은 더 무서운 벼락이 떨어질 것을 예감하고 가슴 쪽으로 두 손을 모아쥐였다. 강필두는 눈을 슴벅이였다. 천정을 바라며 한글자 한글자 뱉어냈다. 자신에게 홀로 하는 고해성사처럼, 일인분의 고통은 일인분의 고통으로 끊어야 한다는 선언을 하듯이.  “그래, 차라리 잘됐다. 하기 싫은 공부 해봤자고. 공부하고 대학 가고 취직하고 녀자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삶이란 게 별거더냐. 아예 끈을 끊어. 연을 끊으라. 머리 밀고 절에나 가라. 산에 들어가라.” “아부지.” 예상치 못했던 어이 없는 강필두의 제안에 강희수는 고함 질렀다. 무릎을 풀면서 두 주먹을 쥐고 바르르 떨었다. 가난으로 얽히고 설킨 강필두의 얼굴은 평온하였다. 걱정이나 불안을 부리우고 난 비여있는 얼굴이였다. 조순재의 통곡이 뽑아졌다. 온 집안이 들썩이였다. 조순재가 뽑는 통곡의 소리보다 곡과 곡 사이에 이어지는 추임새의 숨소리가 처량하게 밤공기를 타고 창밖으로 흘러나갔다. “지네 멋대로 혀바. 혀보랑께. 아그 적게 낳아 잘 키우자고 한 게 누긴데. 까까머리 중대가리 맹글라꼬 논길에서 희수 자를 내싸질렀노?” 조순재는 격한 발언을 하게 되면 억양이 변해졌다. 강희수와 강희경의 앞이 아니라면 강필두의 의식적인 체외사정까지 들먹일 태세였다. 이튿날 아침, 조순재는 식사준비는 물론 밥상에도 앉지 않고 반나절 앓아서 누워있었다. 오후가 되여서야 바람 쐬러 마실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강희수는 아침밥을 거르고 고방문을 걷어걸고 오후가 다 가도록 가을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강희경이 친구들과 떠들어대고 있었으며 할일 없는 거위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땅 따먹기 놀이를 하는 게 틀림없었다. 강희수는 일어나서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찌르는 가을해볕에 눈이 부셔서 어지러웠다. 강희경과 동네 소녀들이 마당에 쪼크리고 앉아있었다. 놀이판을 수양버들이 그늘로 대각선으로 덮고 있었다. 놀이판에는 들쑥날쑥의 금이 그어져있었다. 금이라는 선, 금이라는 경계를 만들고 있는 소녀들의 익은 얼굴들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이미 확보한 자기 쪽 령토에는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검정고무신의 코끝, 어른용 끌신, 비누물을 채 빼지 못한 누르께한 운동화가 놀이판의 세 방향을 고집스레 지키고 있었다. 넷이서 놀이하는 것 같았지만 신발 한컬레는 놓여있지 않았다. 어른용 끌신이 놓여진 쪽은 이미 저 앞으로 범위를 확장해가고 있어서 최다 령토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 령토는 강희경의 자존심이였다. 놀이에서는 목숨 걸고 덤벼드는 강희경은 무릎을 꿇고 병마개로 만든 공격무기를 조준하고 있었다. 얼굴은 거의 땅에 붙이고서. 문득 분홍색의 산다루 하나가 강희경의 막 튕기려 하는 손가락 옆에 다가섰다. 강희경은 이쁜 분홍색 산다루를 따라서 원피스자락을 따라서 웃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나분이였다. 넷중에서 유일하게 맨발을 거부한 나분, 유일하게 이쁜 신발로 발을 감싸고 유일하게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나분이였다. 나분의 얼굴은 우유빛갈로 빛났고 야물차게 다문 입가에는 불만이 비쳐있었다. 밀려서 거의 한뼘 정도 뿐인 자기가 따놓은 령토를 빤히 곁눈질하며 나분이 말했다. 그만 놀래. 강희경은 억울한듯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매차의 놀이에서 늘 그래왔다는 듯한 대책 없는 수긍을 하는 무가내한 표정이였다. 계급의 차이는 자세였던가. 서있음과 땅에 엎드림, 맨발과 산다루가 꿰여진 발, 굳이 신발로 자기 령토를 표기해두지 않아도 되는 여유, 반바지와 츄리닝과 원피스, 무작정 놀이를 끝낼 수 있는 ‘그만 놀래’로 패배를 패배로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강희수는 강희경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가슴 속으로 찔려오는 아픔의 그 정체를 시간이 썩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가난이 주는 패배. “희경아 오빠랑 저기 밭에 나가볼가?” 강희수는 강희경을 불렀다. 고방문을 열고 나오는 강희수를 보더니 강희경은 이내 평정을 회복하며 환하게 웃었다. 나머지 두 소녀는 나분과 함께 마당을 빠져나갔다. 대문 문고리를 잡고서 나분은 고개를 돌려 강희수와 강희경을 째려보고는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몸짓을 부러 지으며 대문을 나섰다. 강희경이 땅 따먹기 놀이판을 다 지우기를 기다렸다가 강희수는 강희경을 데리고  대문을 나섰다. 강희경은 강희수의 손에 슬그머니 감자가 섞인 누룽지를 쥐여주었다. “오빠, 먹어. 엄마 모르게 숨겨놨던 거야. 빨리 먹어.” 강희경은 애써 어른 티가 있어보이도록 강희수의 손을 다시 잡았다 놓았다. 강희수는 입에 누룽지를 넣었다. 서둘러 씹지 않고 침이 젖어들 때까지 누룽지를 입에 물었다. 입 안에서 곡식들이 구수하게 부풀어올랐다. 곡식들의 단물을 목구멍으로 빨아들이고는 씹기 시작했다. 바삭바삭 약간 타들어갔을 감자가 씹히고 밥알이 씹혔다. 누룽지를 고소하게 씹는 강희수의 입을 강희경은 으쓱해하면서 올려다봤다. 강희수는 칭찬을 애타게 구걸하는 강희경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강희경의 얼굴은 갓 구워낸 도자기의 미소가 어렸다. 강희수는 강희경의 한쪽 손에 들린 납제의 소래와 몽둥이를 나꿔채서 들었다. 논밭으로 새 쫓으러 가는 길이였다. 골목을 에돌아 왕얼네 집 대문과 가까워지면서 강희경은 강희수의 몸 뒤쪽으로 숨으면서 옷깃을 손아귀에 쥐였다. “무서워, 오빠.” 등뒤로 숨어버리는 강희경을 보면서 강희수는 허허 웃었다. “왜?” “쑈훙네 집 마당에 뱀들이 우글거려.” “왜?” “쑈훙 오빠 간질병 고쳐준다고 쑈훙 아부지 뱀잡이 다녀. 저번에 뱀들이 우글우글 초롱에서 빠져나와 란리났댔어.” “그래? 빨리 가자 그럼.” 강희수는 강희경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빨리했다. 왕얼네 대문을 스치면서 강희수는 호기심에 대문 너머로 앞마당을 목을 빼들고 기웃거렸다. 출입문 쪽에는 길죽한 막대기를 지붕 웃쪽으로 올려서 맨 끄트머리에는 강희경이 말하던 초롱이 묶여져있었다. 강희수는 멈칫 서버렸다. 파란 그물로 둘러싸인 초롱 속에는 뱀들이 징글징글 엉겨있었다. 학학 숨을 몰아쉬는듯 혀를 빼물고서 대가리를 빳빳이 곧추 세운 뱀들도 있었다. “오빠, 뭐해? 빨리 가잔데.” 강희경이 멈춰선 강희수를 앞으로 잡아당기더니 귀청을 찢는 비명을 질러댔다. 왕얼네 대문을 거의 지나는 골목에서 왕얼이 번들대는 웃통을 드러내고 나타났다. 왕얼의 손에는 파란 망태가 들려있었다. 그 속에는 뱀이 미끌대고 있었다. 혼비백산한 강희경을 보면서 왕얼이 파란 망태를 들어올리면서 “이놈이 이번 해의 마지막 놈이야.” 하면서 음흉한 웃음을 던지고는 대문 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미 혼이 반쯤 나간 강희경은 뱀의 혀바늘에 찔린듯이 몸을 떨었다. 강희수는 강희경을 둘쳐업고 골목길을 에돌아 마을 밖 들길로 나섰다. 강희수는 간간이 어른들 술자리에서 곁들었던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겨넣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왕얼이 강필두를 밀고한 자라고, 강필두의 교원시절의 과오를 파헤쳐서 반혁명으로 몰아갔던 자도 왕얼이라는 것을. 강희수의 기억에는 없었지만 조순재가 아끼고 쓰던 쌀독에 붙여놨던 황색 그림이 화근이 되였다고 한다. 강희수는 그 황색 그림의 정체가 무지 궁금했지만 어느 누구하고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마도 그렇고 그런 그림이겠지 하고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들길에 들어서면서 강희경은 신이 나서 나비처럼 팔랑팔랑 강희수의 앞에서 뛰여갔다. 단발의 새까만 머리는 튀여나온 뒤통수에서 찰지게 흔들렸으며 짱구머리에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긴 목은 코스모스처럼 뽑아져 올라가있었다. 도로 량옆으로 멀리로 아득하게 펼쳐진,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의 자람새는 가을의 풍요와 땅의 도고한 자태로 뽐내고 있었다. 강 너머로는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산의 릉선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유연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길섶의 가시를 품고 있는 짙은 밤색으로 반짝이는 도깨비풀, 탱글탱글한 작은 고슴도치를 품고 있는 도꼬마리, 강아지풀이 뽑아올린 개꼬리 등등은 환영받지 못했던 서글픔에서도 어엿하게 자랐다면서 곡식들에게 도전적인 표정을 보내고 있었다. 하찮은 것들의 만족은 들판의 곳곳에 널려있었다. 가을은 서로가 어우러지면서 너그러워지는 계절이랄가. 무르익고 있는 강희경의 기분에 전염되여 강희수는 비여가던 가슴이 메여지는 충만함을 느꼈다. 들길을 걸어 언덕에 올랐다. 언덕 양지 쪽으로 구절초가 하얀 얼굴을 곧추 들고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얼굴의 중심에는 노란 연지를 짙게 찍고. “우와, 저건 엄마꽃이야.” 강희경은 언덕 경사면을 따라 달려내려가 구절초를 꺾어서 오른쪽 귀바퀴에 끼우고는 강희수를 향하여 구절초의 소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음력 9월 9일이면 채집한대서 이름이 구절초라고 명명된 꽃이름 가을이면 강필두는 구절초의 풀 전체를 채취하여 엮어서 처마 밑에 매달았다. 겨울이면 건조된 구절초를 달여서 조순재의 산후병 약으로 썼으니 강희경이 엄마꽃이라고 떠들어대는 데는 그럴 만한 리유가 있었다. “곱지?” “엄마꽃 머리에 피니 디게 곱다.” “나분이보다 곱지?” “∼ 그럼. 나분이는 비교도 안될 정도지. 니가 세상서 젤 곱다.” “히히. 처마 밑에 걸어놓으면 그 냄새 디게 좋댔어.” “누가?” “그런 애 있어.” “누군데? 나분이?” “칫. 나분은 말라비틀어버렸다고 보기 싫대.” “그럼 누군데?” “그런 애 있다니까.” “보자. 누굴가? 내가 알고 있는 애?” “알 수도 있지.” “아하. 그 집에 애∼” “어찌 알어? 오빠. 방아간집 손자.” “흐흣. 그 애였구나.” “오빠, 미워.” “그 애가 겨울방학에 놀러 오면 냄새 맡게 해야지. 구절초 마른 냄새. 그 애가 말인데 구절초 자꾸 나보구 따오라고 그랬어.” “니가 좋아하는구나.” “좋아하긴. 그 애가 구절초 핑게로 나하고 말 걸어 그렇지. 칫.” “오. 갸가 우리 희경일 좋아하는구나.” 언덕을 따라 걷는 강희경과 강희수의 머리 우로는 나비 두마리가 가벼운 몸짓으로 선회하였다. 강 옆으로 펼쳐진 강필두네 논밭에 이르렀다. 강희수와 강필두의 기척에 놀라서 벼밭에 앉아있던 참새들이 일제히 깃을 치며 날았다. 새떼들이 새까맣게 무리를 지어 하늘을 낮게 날아서는 옆집 밭으로 옮겨서 자리를 잡았다. 타다당. 타당. 훠이. 훠이. 소래 두드리는 소리와 하늘을 찌르는 새 쫓는 소리가 숲 속에서 들려왔다. “누기얏.” 강희경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숲 저쪽에서 타다당, 타당 소래를 두드리며 왕얼네 쑈훙이 숲 속에서 일어섰다. “가스나, 벌써 왔네.” 강희경은 눈쌀을 찌프리더니 강희수의 손에서 소래와 방망이를 나꿔채서는 투다탕, 탕탕 미친듯이 두드려댔다.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새들의 무리는 량쪽 집 벼밭에 내려앉지도 못하고 벼밭 우를 낮게 날아옜다. 강희수가 논뚝에서 몽돌을 주어서 새떼들을 향하여 돌팔매질을 날렸다. 소래 두드리는 소리에 겁 먹지 않던 새떼들이 날아오는 돌멩이에 놀라서 멀리로 날아갔다. 강희경은 신이 나서 소래를 북 두드리듯이 세차게 두드렸다. 옆 밭의 쑈훙도 지지 않을세라 소래를 두드렸다. 논밭에 서있던 허수아비가 그 소리에 깨여지기라도 하듯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흐느적거렸다. 춤판에 끼여들고 싶으면서도 수줍게 먼발치에서 가벼운 몸짓으로 가락을 타는 춤사위로 허수아비는 손끝에 오리오리 드리워진 빨강 실가락으로 벼이삭들을 어루쓸었다. 소래 두리는 소리는 풍년의 축제의 메시지를 가을 창공으로 날려보냈다. 새들은 멀리로 날아가고 희경과 쑈훙의 소래 두드리는 소리도 수그러들었다. 갑자기 내려앉은 들녘의 정적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듯한 비밀스러운 데가 있었다. 쑈훙이 일어나서 이쪽으로 바라보는 듯하였다. 멀리에 있었지만 쑈훙의 눈길은 자기가 아닌 강희수에게로 향한다는 것을 강희경은 직감했다. “오빠, 저것들 우리 벼알 훔쳐먹었으니 겨울이면 저넘들 우리가 잡아먹자.” 강희경이 강희수에게 히쭉 웃으며 말했다. “가스나 못하는 말 없네. 가스나들 새고기 먹으면 공기 깨는 거 몰라.” “서나들만 입이게? 서나들 지네만 먹자고 만든 되지도 않는 소리. 엄마가 그랬어.” “가스나가 그렇게 영악하믄 못 써.” 강희수는 강희경의 뒤통수를 탁 때렸다. 강희수는 강희경과 가지런히 풀섶에 앉았다. 머리 속에서는 조순재의 엎드려 울던 등허리가 지워지지 않았다. “오빠, 뭐해?” 강희경이 옆구리를 쳐서야 강희수는 정신을 차렸다. 돌팔매질로 개운해지려던 몸이 끈적거렸다. “여기서 새들이나 열심히 쫓고 있어. 난 저기 강가에 가서 몸이나 씻고 올게.” 강희수는 강희경에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논뚝을 걸어갔다. “강물이 차. 조심해.” 강희수의 등뒤로 강희경의 소리가 들리더니 둥둥 소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희경은 강희수가 떠난 뒤, 논두렁에 앉아 볕조임을 하다 깜빡 잠들어버렸다. 새떼들의 소란스러움도 없었다. 왕얼네 논밭으로 새떼들이 몰려있었다. 쑈훙은 어디로 갔는지 소래도 두드리지 않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소래를 엎어놓고 그 우에 앉아서 하늘로 날아다니는 잠자리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강희경은 방아간집 외손자의 코끝을 떠올렸다. 마른 구절초를 대고 냄새를 맡던 그 아이의 코끝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방학이면 외할머니 집으로 놀러오군 하던 그 아이, 나분이와 함께 일부러 찾아가서 보았던 그 아이, 이야기에 능한 그 아이, 나분에게 은근히 마음이 쏠려있는 그 아이∼ 강희경은 그 아이만은 나분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지었다. 나분의 미모와 나분의 총명과 나분의 부유와 나분의 재능과 겨룰 자기의 빈약을 느꼈는지 모른다. 강희경은 쓸데없는 생각을 그만하자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목욕하러 간다던 강희수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건너쪽 쑈훙도 조용하였다. 강희경은 논두렁을 따라 쑈훙이 앉았던 자리로 걸어갔다. 소래와 방망이만 던져져있었고 쑈훙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강희경은 쑈훙네 벼끝에 매달려 배불리고 있는 참새들을 놀래우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논두렁길을 걸었다. 참새들이 까먹어서 비여진 벼이삭에는 벼알 속에서 흘려진 흰 진액이 말라서 붙어있었다. 강희경은 잘코사니를 부르며 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츄리닝자락으로는 도깨비 가시가 박혀왔고 도꼬마리가 말려왔다. 손목으로는 서걱대는 벼잎이 스쳐서 쓰렸다. 강가로 거의 다달을 무렵, 강희경은 논두렁에 납작 엎드린 어떤 사람의 뒤모습을 발견하고 살금살금 다가섰다. 격하게 몰아쉬는 숨 때문에 엎드린 쑈훙의 어깨는 들썩이고 있었고 머리는 빳빳이 세우고 있었다. 옆에 강희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가슴에는 뭔가를 품고 있는 듯하였다. 강희경은 숨을 죽이고 쑈훙의 시선을 따라 논두렁 아래로 눈길을 주었다. 어떤 남자의 웃통을 벗은 모습이 갈대잎 사이로 눈에 들어왔다. 아직 해빛에 그을리지 않은 새하얀 남자의 어깨와 팔뚝이 보였다. 강희경은 콩닥대는 가슴을 누르며 목을 빼들었다. 남자의 굽혀진 반들반들한 허리가 보였으며 아직 로동으로 단련되지 않은 엉덩이가 나타났다. 다리 사이와 엉덩이골 사이로는 강물에 닿을듯 말듯한 자두모양의 것이 떠있었다. 남자가 웃통을 씻는 몸짓에 따라서 몸의 근육들은 우아하게 움찔거렸다. 엉덩이골 사이의 자두는 어떤 리듬을 타며 강물에 떠서 숨쉬고 있었다. 남자가 손바닥으로 강물을 퍼담아서 등허리 우로 뿌렸다. 강물이 뿌려지면서 남자의 몸은 생생히 살아서 부풀어오르는 듯하였다. 남자가 몸을 틀어버리는 순간, 강희경과 쑈훙이는 폴짝 놀라서 엎드렸다. 강희경과 쑈훙은 전라의 남자의 몸을 보게 되였으며 강희경은 그가 강희수라는 것을 알아본 뒤였다. 땅에 엎드린 두 소녀의 시선이 부딪치면서 놀라버린 것은 쑈훙이였다. 언제 자기 곁에 와있었는지 모를 강희경을 보자마자 쑈훙은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을 내팽개치고 정신없이 논두렁을 따라 뛰여갔다. 벌떼들의 포위공격에 내빼는 미쳐가는 사람처럼. 새들이 놀라서 날개짓으로 날아올랐다. 앞으로 뛰던 쑈훙은 논두렁에서 떨어져내려 벼밭에 뒹굴었다. 그렇게 떨어지고 기여오르고 뛰기를 반복하며 쑈훙은 강희경과 멀어져갔다. 쑈훙이 버리고 간 것은 강희수의 운동화였다. 강희수의 운동화를 품에 안고 쭈크리고 앉은 강희경은 이를 뽀드득 갈았다. 가스나. 몹쓸 놈의 왕가네 가스나. 아주까리 가시에 칵 찔려버려라. 울타리 너머의 아주까리씨 몇개 뜯었다고 지랄발광하던 가스나. 똥구린내 나는 니 머리에 기름 칵 처발라라. 누길 넘바. 가스나. 돌아오는 길에 강희경은 강희수의 등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뒤에서 거리를 두고 걸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 한결 개운해진 강희수는 휘파람을 불었다. 모든 시름을 강에 부리고 와버린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강희수와 강희경이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조순재는 소쿠리에 담긴 깨잎을 손질하고 있었다. 강희수는 엊저녁 그 란리가 지나고 나서 처음으로 보게 되는 조순재였다. 강희수는 조순재에게로 다가갔다. “엄마, 뭐해?” 약삭바른 강희경이 먼저 끼여들었다. “어, 깨잎 절구려구.” 조순재는 고개도 들지 않고 소쿠리에 담긴 깨잎을 주어들었다. 깨잎을 탁탁 털어서는 안쪽으로 길게 뻗은 줄기를 손톱으로 똑 끊어냈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가지런히 포개여 얹은 깨잎 우에 얹었다. “희경아, 여그 실로 이거 묶어.” 조순재는 포갠 깨잎을 말아쥐면서 실을 강희경에게 넘겼다. 실을 건네받은 강희경은 조순재의 손 사이로 깨잎을 돌려 묶었다. 조순재는 이로 실을 물어서 끊고는 곁을 지켜주고 있는 오지독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깨잎을 또 쥐였다. “이거 돈이라면 좋겠다. 한잎 두잎 흔하게 주을 수 있고 포갤 수 있는 돈이라면 좋겠다.” 조순재는 깨잎을 한잎 한잎 포개면서 말했다. 저녁 무렵의 어스름 속에서 조순재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 때까지 조순재는 강희수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아, 돈. 오지독은 돈 담는 저금통이구.” 강희경은 물개박수를 쳤다. 강희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너네 입에 시퍼런 돈잎을 쑤셔넣고 싶구나.” 조순재는 한숨을 내쉬면서 반복되는 작업을 이어갔다. 강희수는 조순재에게로 다가섰다. 조순재는 깨잎을 부채살처럼 펼쳐서 자신의 시야를 차단하고 말했다. “어, 희수. 니능 동삼에 군대 가라 이. 이 땅서 살민서 가슴 한번 뻥 뚫리게 쭝국말 함서 살아야제?” 깨잎으로 가려진 조순재의 얼굴을 강희수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솜털이 덮여져있는 엽맥이 손금처럼 뻗어있는 깨잎, 곧고 바른 줄기와 톱날로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 듯한 깨잎, 그 깨잎들을 보면서 강희수는 자퇴의 합당한 리유를 만들었다. 돈을 벌자, 였다.   & 강희수는 열살 때 겨울밤의 어둠 속에서 번뜩이던 강필두의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살의에 찬 그 눈길을. 옆집에서 닭을 잡아먹는다고 우리도 닭고기 먹자고 찡찡대던 강희수를 데리고 강필두는 새잡이에 나섰다. 달도 없는 겨울밤의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개털모자를 눌러쓴 강필두의 머리 쪽에서는 흰김이 씩씩 뿜어져나왔다. 그 뒤쪽으로는 왕바신을 신고 솜옷과 솜바지를 꿍쳐입은 강희수가 플래쉬를 비췄다. 뒤뚱뒤뚱하는 강희수의 걸음에 따라서 플래쉬 빛도 어지럽게 흔들렸다. 집 뒤쪽으로 가서 사다리를 찾던 걸 포기하고 강필두가 흙벽을 짚고 쭈크리고 앉았다. “어깨를 밟고 올라탓.” 강희수는 플래쉬를 강필두에게 넘기고 강필두의 어깨에 한쪽 다리를 올렸다. 곰 같은 동복차림이라 한쪽 다리를 마저 올리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쭈크리고 앉은 강필두의 재촉은 연속 터져나왔다. 강희수는 겨우 두 다리를 어깨에 올리고 강필두의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우고 벽을 잡았다. 강필두가 벽을 잡고 허리를 펴면서 강희수의 머리가 처마 밑에 닿았다. “거기 보이는 구멍에 빛을 쬐고 손을 집어넣어.” 이영을 얹은 사이로 구멍이 나져있었다. 강희수가 구멍에 대고 플래쉬를 비추었다. 강희수의 눈동자와 참새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뙤록뙤록하는 참새의 눈알을 보고난 강희수는 플래쉬를 허망 떨궈버렸으며 참새가 후다닥 날아가버렸다. 구멍 바꾸기를 다섯번째에 이르러 강희수의 손에 참새가 쥐여졌다. 이미 강필두의 있는 욕설 없는 욕설 다 먹고 난 강희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이영 사이 구멍으로 손을 쑥쑥 들이밀었다. 그렇게 해서 잡은 참새는 다섯마리. 참새가 손에 쥐여지는 순간, 강희수는 참새의 몸에서 나는 온기를 느꼈으며 참새의 팔딱거리는 심장이 몸으로 퍼졌다. 몸의 피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피를 차겁게 식히는 것이 새들의 내한법이라고 강필두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그 새들의 몸에서 나는 온기와 새털이 주는 안온함을 느끼면서 강희수는 어떤 련민이 생겼다. 집 주위의 처마 밑을 한바퀴 샅샅이 뒤져도 겨우 다섯마리를 잡았다. “안되겠다. 따라와.” 강필두가 대나무 비자루를 들고 1소대 우사간 옆의 창고로 강희수를 데리고 갔다. 문을 열기 전 강필두가 강희수에게 단단히 그루를 박았다. 겁 먹지 말고 플래쉬를 창고 공간에 정신없이 휘두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불빛에 새들이 눈이 멀어 방향감을 잃고 날뛴다고, 그렇게만 플래쉬를 무질서하게 냅다 비추라고 했다. 문을 열고 창고에 들어섰다. 창고 안은 먹물 까막통이여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공동묘지의 적막이 흘렀다. 시작! 강필두의 신호가 떨어지자 강희수는 플래쉬를 켜고 휘둘렀다. 창고 공간에서 푸드득, 파닥 소리들이 살아서 일어났다. 굉장한 소란이 일어났다. 쥐들이 방방 사처로 날뛰였으며 참새들이 공중에서 파다닥 날개를 쳤다. 그 서슬에 거미줄이 먼지와 함께 천장에서 벽에서 떨어져내렸다. 언뜻거리는 플래쉬 빛에 만들어진 그림자들은 더욱 공포스러웠다. 차거운 공간에서 이어지는 소란에 질려버린 강희수는 무서워서 눈을 감아버리고 머리 우로 플래쉬를 강필두의 말대로 냅다 돌렸다. 강필두가 휘두르고 내리치는 대나무 비자루소리가 씨이익, 퍽퍽 하는 소리도 들렸다. 타다닥 새들이 벽에 머리를 찧는 소리, 투두둑 비자루에 맞아 떨어져내리는 새들의 소리에 강희수의 고막은 터져나갈 듯하였다. 강희수의 공포는 고조가 되였으며 선 자리서 빙글빙글 돌며 손에 들려진 플래쉬를 정신없이 휘둘러댔다. 플래쉬 빛이 번뜩이는 공간에서 미친듯이 대나무 비자루를 휘두르는 강필두의 몸짓, 먼지가 풀썩이고 거미줄이 얼굴로 떨어져내리는 장면을 후날이 되여서도 강희수의 기억에 살아남았었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한 어느 공포영화의 액션장면처럼 가슴이 벌렁거리기도 하였다. 어둠 속에서 뿐만 아니라 가끔씩 열어둔 창문으로 집안에 들어와서 들어온 곳을 찾지 못하고 유리며 벽에 좌충우돌하면서 머리를 쫓고 할딱거리는 참새들의 무지를 보면서 그 날의 공포를 강희수는 떠올렸다. 강희수는 무작정 뱅글뱅글 돌기만 하여 어지럼증을 느껴서 잠간 정지한 채로 간절히 감았던 두 눈을 뜰 수 밖에 없었다. 강필두의 눈빛이 부딪쳐오는 순간, 강희수는 플래쉬를 떨구고 말았다. 살의에 찬, 서슬이 퍼렇게 갈린 눈빛은 무엇을 베여내려고 낫날처럼 날이 서있었던가. 순수한 분노를 넘어선 증오의 그 눈빛, 세상을 향한 저주의 그 눈빛, 단순한 방어가 아닌 반격의 그 눈빛은 플래쉬 빛 속에서 강희수에게로 비수가 되여 날아들었다. 강희수는 어둠 속에서 복수의 화신으로 변해버린 강필두를 보고 있었다. 다른 집 아버지들보다 약질로만 보였던 강필두가 내밀하게 숨기고 있던 광폭스러움에 강희수는 얼어붙고 말았다. 강희수의 손에서 굴러떨어진 플래쉬는 바닥에서 흔들렸다. 빛의 묶음으로 만들어진 플래쉬의 빛기둥을 타고 바닥에 널려져있는 새의 주검들이 강희수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목이 꺾이고 머리가 터지고 부리가 빠지고 눈알이 터지고 날개죽지가 비틀린 새의 주검들이 지저분했다. 강필두는 강희수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강희수에게 그 웃음은 지금껏 강희수가 보아온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웃음으로 기억되였다. 강필두는 강희수의 손에 플래쉬를 쥐여주고는 새들을 비자루로 쓸어모았다. 먼지냄새에는 피냄새가 진동했으며 먼지빛에는 피빛이 어려 번뜩이였다. 강필두는 바닥에 있는 새끼줄을 집어들고는 새끼줄들의 틈 사이를 벌려서 새들의 목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새들의 목은 새끼줄의 틈사이로 끼워져갔다. 고추가 매달리듯 데룽데룽 주렁주렁.  한마리. 두마리. 세마리. 네마리. 다섯마리. 여섯마리. 일곱마리. ∼ ∼   & 1984년 봄, 강필두가 오리사양부업을 하게 된 것은 강희수가 무심히 던졌던 말 한마디로 비롯되였다. 그 전해의 봄, 옥수수밭이랑 싸움이 있고 나서 강필두는 농사가 아닌 다른 무엇을 해야 된다고 고심하고 있었다. 1983년 봄의 어느 아침이였다. 강필두는 밭갈이 농기구를 싣고 강희수와 대문을 나섰다. 땅이 집집마다 나뉘여지면서 대문이 있게 된 것이다. 길이 되여있던 이웃 사이의 마당은 울바자로 담장이 만들어지면서 대문이 생긴 것이였다. 담장은 한번 만들어지면 허물기 어려웠으며 그 담장에 자그마하게 구멍을 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로 되였다. 점심찬 보따리를 들고 집에서 나오던 조순재는 담 너머 이웃네의 밭일을 떠나는 소란스런 소리를 들었다. 대문을 나서는 부자의 뒤모습을 보면서 조순재는 말이 없는 3형제라는 말을 떠올리며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소와 강필두와 강희수. 점심찬 보따리를 소수레 우에 싣고 강희수와 나란히 소수레 뒤를 따랐다. 강필두와 강희수는 서로를 닮아있으면서도 서로를 너무 닮았다는 리유로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듯하였다. 간혹 거울 속에서 낯선 타인의 모습으로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매일 보게 된다는 부담이였을가. 하찮은 일에서 둘은 대적을 하였으며 큰일에서는 서로를 양보하는 타입들이였다. 식성에서는 한치의 에누리도 없이 대적하고 나섰다. 강필두는 진밥, 강희수는 된밥. 그래서 조순재는 언덕밥을 지었다. 솥 안에 쌀을 언덕지게 안쳐서는 손등으로 밥물의 물금을 잘 재면서 진밥과 된밥을 만들었다. 소수레 트럭 우에서 흔들리고 있는 도시락의 밥도 각자의 식성에 맞게 싸여져있다. 진밥, 된밥, 진된밥. 옥수수밭에 도착하여 보습과 농기구를 부리고 나서 밭을 한바퀴 둘러보고 온 강필두는 황소숨을 몰아쉬며 저 멀리 끝의 밭지경에 대고 소리질렀다. “왕얼, 이 새끼. 빨리 오지 않어. 쥐새끼 같은 넘. 밭이랑 반도 아니고 통채로 너거들 밭으로 댕겨가. 빨리 오지 못해.” 조순재는 왕얼네와 김씨네 사이에 끼여있는 밭고랑수를 세여보았다. 해마다 갈아엎는 규칙을 어기고 왕얼네가 밭고랑을 더 퍼갔던 것이다. 조순재도 주먹을 쥐며 한판 붙어볼 태세였다. 왕얼이 먼지바람을 일구며 밭고랑을 타고 강필두와 조순재와 가까워져왔다. “왕얼, 야, 니는 산 사람 코 베여갈라고 그러냐. 이게 뭐야?” 강필두는 다가선 왕얼에게 갈아서 엎어간 밭고랑을 가리켰다. “이상할 건 없는데. 난 규칙대로 했을 뿐이야.” “뭐야. 동네 사람 불러놓고 판단해보라 해라. 규칙이 뭔지.” “내 땅 내 갈아엎는데 뭐가 잘못됐는데. 자네가 흑심이면 다 까만가 하잖아. 강선생.” “야, 왕얼, 흑심? 내가 연필이게? 속 새까만 넘은 니다.”  왕얼은 강필두를 때릴 기세로 가까워져왔다. 옆에 섰던 강희수는 강필두를 뒤를 당겨서 물러세우고는 왕얼과 마주섰다. 조순재도 팔을 걷어올리며 합세해서 왕얼의 코밑으로 다가갔다. 너 죽고 내 죽고 하는 각오를 하고 나선 조순재였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했다.” 발톱을 세운 암코양이처럼 독을 쓰면서 조순재가 소리쳤다. “집에 불을 질러서라도 빈대를 없애야 한다.” 뒤로 밀려진 강필두가 기름에 불을 붙였다. 세 얼굴과 한 얼굴의 대결. 불이 당겨지려는 순간, 왕얼의 뒤쪽으로 쑈훙이 헐레벌떡 달려오면서 웨쳤다. “아버지, 오빠가 또 발작을∼” 왕얼네 아들이 밭갈이하다가 밭에서 간질병에 발작한 게 틀림없었다. 쑈훙은 왕얼의 손목을 끌고 가면서도 강희수를 힐끔 곁눈질을 하였다. 쑈훙의 눈빛에는 부끄러워서 죽겠다는 표정이 력력했다. “벌 받능 거여. 벌.” 멀어져가는 왕씨네 부녀간의 뒤모습을 보면서 조순재가 한마디 던졌다. “돈도 되지 않는 땅 갖고 씨름하지 말고 다른 부업 하면 안됩니까?” 보습날을 땅에 박으며 강희수는 벗어던지는 옷 같은 말을 강필두에게 툭 던졌다. 보습날에 땅이 갈아엎어지면서 입을 벌렸다. -무식하고 외롭고 볼품 없고 제멋대로이고 리기적인 인간들아, 하지만 너희들이 있음은 서로에게, 가족에게, 땅에게도 축복이니라.   & D진과 강림촌이 소속된 N 시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빈의관殡仪馆에서 강필두의 장례식은 끝났다. 강필두가 남긴 유언에 따라 강필두의 골회는 빈의관 굴뚝의 연기와 바람과 함께 허공으로 날려갔다. D진도 N 시에 있는 강림촌도 자신이 태여난 곳도 강필두는 고향이 아니라고 했다. 강필두에게는 고향이 없었기에 타향이라는 개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고향이 없다고 고집하는 자체가 고향 콤플렉스로 한생을 허비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몇 안되는 문상객들을 일일이 배웅해서 보내고 료양원 원장님과 리태수와 강희경이 국도변에 서있었다. 원장님은 D진행 뻐스를 기다렸으며 리태수는 반대쪽 N 시행 뻐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희경은 그 가운데 무력하게 서있었다. “희경씨, 이걸 받아요.” 원장님이 강희경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축의금과 그동안 미국에서 희경씨 오빠가 보내온 남은 생활비 그리고 장례비에서 남은 돈입니다. 내역서도 들어있습니다. 호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편하게 가셨다고 생각하십시오. 힘 내세요.” 강희경의 어깨를 다독이며 원장님이 말했다. D진행 뻐스가 왔고 원장님은 리태수와 악수를 나누고 강희경에게 손을 저어보이며 뻐스 안으로 들어갔다. “희경아, 왔던 김에 강림촌 들르지 않을 거니? 남방에서 한번 걸음하기도 쉽지 않을 건데.” 산길을 에돌아 사라져가는 D진행 뻐스를 멀거니 보면서 리태수가 강희경에게 말했다. 강희경은 묵묵부답이였다. 국도변 건너편의 미끈하게 뻗어올라간 봇나무의 꼭대기를 헤아리려고 머리를 들고 있었다. “하긴, 강림촌에 가도 반길 사람도 없겠는데.” 리태수는 괜한 말을 건네고 난 뒤의 어색함을 수습했다. “마음정리가 되면 그 때 강림촌으로 갈게요. 할아버지. 고마웠습니다.” 봇나무에서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강희경은 리태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드렸다. “그래, 한번 다시 꼭 보자.” N 시행 뻐스에 올라타면서 리태수는 강희경을 꼭 안아주었다. 강희경은 그동안 참고 있던 눈물을 N 시행 뻐스가 봇나무 숲길에서 소실점이 되여갈 즈음에 흘렸다. 강희경은 고개를 돌려 흐릿한 시선으로 빈의관의 굴뚝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생명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강희경은 D진의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걷고 싶었다. 혼자서 걷고 싶었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는 게 더 외로울 것 같았다. 친구도 필요없었다. 한 사람을 더 외롭게 하는 것은 적이 아니라 친구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의 상처는 개인의 상처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였다. 강희경은 흰 봇나무들을 한그루 한그루 세면서 걸었다. 20메터 족히 하늘로 솟구친 봇나무들의 흰 몸통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윤이 나게 건강했다. 건강한 봇나무 사이에는 간혹 허리가 꺾여진 채 삐죽삐죽 몸의 상처를 드러난 그대로 보여주는 애된 봇나무도 있었다. 허리 꺾인 봇나무의 마지막 비명이 지나가고 나서야 처연한 적막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강희경은 톱질에 잘려나간 봇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강희경은 고아라는 말을 얼핏 떠올려보았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고아로 남았다. 대춘을 만나서 가정이라는 걸 만들면서도 고아라는 고독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대춘과의 리혼과 더불어 대춘이 교통사고로 죽었고 강필두도 죽었기에 강희경은 이젠 온전한 고아로 남게 된 것이였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야 하는 삶의 하중,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서 어쩔 수 없이 흔들려야 하는 소외, 어디로 가든 속에 따라붙는 랭기로 얼어붙는 단절, 상실이 리득이 되여 풍요롭게 되는 기억의 아찔함 등등은 혼자의 몫이였다. 고아의 몫이였다. 어쩌면 살아가고 있는 모두가 고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강희경은 깔고 앉은 봇나무 그루터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루터기는 안쪽으로 썩어들어가서 하늘을 향하여 가운데가 구멍이 뚫려있었다. 강희경이 앉은 곳은 그루터기의 테두리였다. 발이 놓여진 밑둥에도 구멍이 나있었다. 강희경은 일어나서 다시 쪼그리고 앉았다. 그루터기에 뚫린 구멍 안을 한참을 굽어보다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려 그루터기를 껴안았다. 자신의 텅 빈 마음을 껴안듯이. 봇나무 그루터기가 속에서 뱉어낸 말이 메아리가 되여 울렸다. -말을 너무 삼키면 속이 썩는다. 속으로 뭉쳐 삼킨 말들이 몸을 썩게 하는구나.  강희경은 강희수가 파출소에 끌려가던 그 날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짓 안했습니다. 쑈훙을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새파랗게 질려 뒤쪽으로 물러서는 강희수, 차겁게 밀고 들어오는 공안일군의 모자채양의 번뜩임, 곧 쓰러져버리려는 몸을 지탱하면서 강희수를 몸 뒤에 숨기며 공안일군과 대적하는 조순재, 어쩌지도 못하고 기둥처럼 붙박혀 서있기만 하는 강필두, 집안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서 출입문과 창문으로 모여있는 동네 사람들의 얼굴들. 이 모든 걸 공포 속에서 두리번거리며 구석으로 뒤걸음치는 강희경. 열네살 강희경의 머리 속에는 강간이라는 알듯 말듯한 단어가 맴돌았다. 강간을 단지 남자의 몸이 녀자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적인 겁탈이라는 것 쯤의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 범죄일가 하는 호기심도 품고 있었다. 강희경의 머리 속에는 2년 전 논두렁에 옆드려 강희수의 전라의 몸을 훔쳐보며 들썩이던 쑈훙의 어깨가 스쳐갔다. “아니예요. 오빠가 한 짓이 아닙니다. 쑈훙이 오빠를 넘본 겁니다.”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미처 내뱉지 못한 채 마른침과 함께 삼켜져버렸다. 삼켰으나 넘어가지는 못하고 목구멍 안에 머물러있는 생선의 가시처럼 찌르는, 가시에 체한 아픔을 강희경은 감내해야 했다. 강희경은 무서웠다. 공안일군이 꺼내든 쑈훙의 나비머리핀, 강희수의 고기발 초막에서 수색된 나비머리핀을 보면서 강희경은 무서웠다. 그토록 아름답고 눈부신 조그마한 큐빅이 박힌 나비머리핀이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고 간다는 것에 강희경은 몸서리를 쳤다. 피해자 쑈훙은 인정을 했고 물증과 사건현장도 확보된 완벽한 범죄라고 공안일군이 말했다. 팽팽한 집안 분위기를 풀리게 한 것은 “불이야.” 하는 웨침이였다. 동네 누구네 집에 루전으로 불이 붙었단다. 마당과 집안에 몰려있던 동네사람들은 일제히 화재현장으로 뛰여갔다. 구경군들이 빠져나간 마당으로 강희수는 끌려 찌프차에 떠밀려 올라갔다. 파출소 찌프차의 배기구멍이 내뿜었던 그 기름냄새는 기억의 구석구석에 슴배여들어가 강희경의 기억들을 풍성하게 했다. 강희경에게 냄새가 주는 그 기억은 세련된 폭력이였으며 우아한 폭력이며 정의로울 정도의 뻔뻔한 폭력이였다. 구경에 바쁜 동네사람들의 관심은 화재현장으로 쏠렸으며 강희수의 사건은 화재사고로 덮어져버렸다. 때로 너무나 무거운 사건은 돌발사고 앞에서 뉴스가 될 수 없는 법이였다. 강희수가 파출소로 끌려간 이틀 후에 밝혀진 사실은 강희경을 더 큰 충격으로 내몰았다. 물증인 나비머리핀을 제공한 자는 나분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범죄 물증이 발견된 범죄현장을 제공한 자도 나분이라는 것을. 강희경은 충격으로 앓아누웠다. 강희경은 옷보따리 속에 숨겨둔 나비머리핀을 생각하고 있었다. 방아간집 소년이 나분에게 전해달라며 강희경에게 주었던 그 나비머리핀의 존재로 강희경은 오한으로 떨었다. 강희경은 그것을 갖고 싶었고 그것만은 나분에게 줄 수 없었다. 많을 걸 갖고 있는 나분에게는 그것의 있고 없음에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그것은 방아간집 소년이 자신 강희경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나분에게 자랑할 수 있었다. 비 내리는 고기발 초막에서 나분에게 자랑했던 그 뻔뻔함으로 진저리를 쳤다. 그러니까 강희경의 질투와 나분의 질투 사이에서 벌어진 억울한 강희수 사건, 이 모든 걸 강희경은 이날 이 때까지 스스로 가슴 속에 삼켜서 품고 있었다. 강희경은 봇나무 그루터기를 껴안고 얼굴을 그루터기 뚫려진 구멍에 들이밀었다. 좀 먹어가는 나무의 냄새와 축축하고 찌린 땅의 기운이 코구멍으로 몰입해들었다. 강희경은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어둠 속에서 수백마리의 오리들의 뻐드러진 랑자한 죽음의 현장과 조순재의 목을 졸랐던 바줄이 클로즈업으로 나타났다. 강희경은 눈을 감지 않았다. 떠오르는 대로, 보여지는 대로 모든 기억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30년 전, 그 나비머리핀을 나분에게 곧바로 전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것이다. 나분과 그 소년은 결혼을 했을 수도. 강희수는 감옥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며 원양어선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며 미국으로도 가지 않았을 수도. 조순재도 자살을 하지 않았을 수도. 강필두와 강희경은 강림촌에서 야반도주하지 않았을 수도. 강필두도 타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하지 않았을 수도. 강희경은 삶에 따르는 우연과 삶의 가능성을 재고 있었다. 우연이라는 사소하고 하찮은 존재들이 삶을 무자비하게 흔들어버렸으며 가능성이라는 일말의 기대조차도 매장해버렸다. 어쩌면 우연은 필연의 또 다른 형태의 존재였는지도 몰랐다. 휴대폰 벨소리가 가방에서 울렸다. 강희경은 땅에 주저앉은 채 휴대폰을 꺼냈다. 강희수의 미국의 전화번호가 떠있었다. “희경, 괜찮아?” 강희수는 강필두의 장례를 언급하지 않았다. “∼” “잊고 살어. 다 잊고 살자.” 강희수의 무가내하면서 짧고 낮은 목소리가 강희경의 귀전에서 울렸다. “오빠, 보구 싶어요.” 강희경은 끝내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강희수에게 나직이 말했다. “니 마음 다 알 수는 없지만 미안하구나. 희경.” 강희수의 목소리는 떨렸다. “용서라는 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겠지요? 오빠.” 강희경은 강희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용서. 용서라고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부터 용서는 용서로 남아있는 거겠지.” 강희수가 말했다. “그렇겠지요?” 강희경이 말했다. “하지만 용서는 개인의 것만은 아니기도 할 것 같아. 세월이 인간에게 해야 될 용서도 있지. 세월이 인간에게 구할 수 없는 용서의 그 아픔을 우리는 속수무책이 되여 어찌됐든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겠나? 쉽지 않은 세상은 버티라고 생겨난 것일지도 몰라.” 강희수의 말들은 오가는 뻐스와 트럭들이 무책임하게 만들어낸 소음과 먼지와 기름냄새에 실려 아득하게 봇나무 숲길로 멀어져갔다. 강희경은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면서 휴대용 스테인리스 보온물병을 보았다. 뚜껑을 돌려 열고 뚜껑에 더운 물을 따랐다. 뚜껑을 그루터기 우에 얹고는 커피봉투와 프림봉투를 꺼냈다. 커피봉투를 찢어서 더운물에 커피가루를 떨꾸어넣고 휘저었다. 커피 거품이 일었다. 커피 거품이 잔의 가운데로 올라왔다. 맑은 날씨를 기대할 수 있었다. 커피거품으로 날씨를 구별하는 지혜를 강희경은 알고 있었다. 프림을 타기 전 커피 거품이 잔 가장자리를 향해 떠오르면 저기압이 흘러서 흐린 날씨라는 것을. 강희경은 잔 가운데로 떠오르는 커피 거품에 프림을 뿌렸다.   & 강필두가 누워서 죽어간 침대 매트 밑에는 나무로 깎아만든 나비가 깔려있었다. 목제 나비는 날개를 부채처럼 펼쳤음에도 날 수 없었다. 날개에는 촘촘한 나비무늬까지 그려져있었다. 평면으로 책갈피에 끼워둔 나비표본처럼 얇고 가벼워보였다. 치매증상이 거쳐가고 나면 강필두는 료양원 뜰 안에서 볕쪼임을 하면서 목제 나비를 손바닥에 오래도록 받쳐들고 있군 하였다. 목제 나비의 환생을 바라는듯 강필두는 노곤한 오후 세시의 여름 해볕에 나비의 몸을 말려주었다. 강필두가 D진의 목공소에서 날품팔이하면서 깎아만든 나비는 강필두에게 할당된 짧고 구체적인 시간들을 고요하게 나누어가지고 있었다. 목제 나비는 이사 들게 될 침대의 새 주인을 외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강필두의 안부를 물으면서. 화를 막아준다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깎아만든 나비가. 출처:2017 제6호
8    [작가평]작은 풀의 숨소리를 듣다 댓글:  조회:269  추천:0  2019-07-18
작은 풀의 숨소리를 듣다 조원   그녀를 처음 만났던 건 2000년이였으니까 내 나이가 삼십의 문턱을 바라는 어중간한 때였다. 계절은 겨울도 봄도 아닌 스산한, 역시 어중간한 사이 봄이였다. 불확실한 계절에는 불안과 오기, 정열과 초조, 좌절과 반란이 엉겨있듯이 그녀의 글쓰기와 나의 글쓰기도 사이의 그런 지점에 있었다.  그녀는 조그마하게 웃으며 첫인사를 건넸다. 문학지 프로필 사진에서 보아왔던 당돌할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녀의 입가와 눈꼬리에 매달려있는 미소에는 서늘함을 감춘 수줍음이 있었다. 손바닥으로 드러난 이마를 쓸어올리면서 짐짓 어색함을 강조하는 그녀의 몸짓에서 문학지에서 읽은 그녀의 단편소설 에 비쳐진 도발, 예리하고 간결한 문체를 떠올릴 수 있어 다행이였다. 나는 북경의 모 생활정보지의 편집으로 취직되면서 그녀가 내 선배가 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터라 그녀에 대한 신상을 파악해두는 게 아무래도 좋을 듯해서 꼼꼼히 그녀의 소설들을 해독했었으니까.  편집실의 그녀의 컴퓨터 오른쪽 귀퉁이에는 쉘 실버스타인의 시 의 시구가 고집스런 필체로 꾹꾹 눌러쓴 메모지로 부착되여있었다.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 그래야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 만일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 하지만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   하지만 나는 새가 될 거냐고 벌레가 될 거냐고 물은 적은 없었다. 사무책상이 거의 붙을 정도의 협소한 편집실에 나란히 앉아 일을 하다 보면 곁눈으로 그녀가 일하는 도중에도 메모지를 뚫어져라 보는 모습이 들어오군 하였다. 그 때가 그녀의 첫 장편소설 를 쓰던 무렵이였다. 나는 그 때 장편이라면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던 때라 그녀의 용기와 무모함에 조금은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은근한 질투 섞인 부러움도 있었다. 이미 씌여진 소설부분을 프린트해서 뽑아낸 서류 같은 두툼한 A4용지는 그녀의 배낭 비슷한 가방에 넣어져 있었다. 출퇴근 시내뻐스 안에서도 가끔씩 꺼내서 보군 하였다. 그리고 노트에 뭔가를 자꾸 메모를 하였다. 그녀의 말로는 락서라고 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락서가 아닌 꼼꼼한 가계부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먼저 소설 의 초고를 보고 싶다고 졸랐는지 아니면 그녀가 봐달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어쨌든 나는 의 첫 독자였다. 프린트 용지들에는 간간이 삭제표시가 되여있었으며 보충될 부분은 잘 익은 검정 깨알 같은 아집스런 글체가 빼곡하게 적혀있어 전체 면의 여백을 다 채우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을 읽는 재미보다 그녀가 고민했던 흔적들을 추적해나가는 설레임이 더 큰 자리를 차지했다. 읽었으면 촌평이라도 있어야겠는데 맨정신으로는 말이 되지 않았다. 어찌어찌되다가 만들어진 술자리에서 문체가 서늘하다고 했던 것 같다. ‘듯’, ‘처럼’, ‘와 같이’ 등의 표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그 리유가 뭐냐고 따지고 물었다. 내가 묻는 말에 그녀는 오히려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세상이 다 그렇게 비슷비슷하게 생겨도 똑같지 않다, 이것이 저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이거 하나 뿐이다 등등의 말을 한 것 같았다. 그 날 나와 그녀는 독한 이과두二锅头술을 일인당 한병씩은 한 것 같았다. 블랙아웃이 될 정도였으니까. 사이사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기억의 필림을 재구성해본다면 그녀가 쓰기를 접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말했던 건 확실하다. 70후 작가 위혜卫慧의 를 봐버린 게 후회된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가 우연찮게도 와 겹치게 되는 부분이 있어서 모방작의 비난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였다. 소설 가 서서히 마무리가 될 무렵에 그녀가 를 읽게 되였으니. 그녀의 추천으로 를 그녀에게서 얻어 읽고는 괜찮다, 뭐 이름난 작가의 목소리만 목소리냐, 이름난 작가와 동일사유를 갖고 있다는 데 축하한다 등등의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 그대로 비슷비슷한 것은 있지만 같은 것은 없다고 내가 주장을 하게 된 꼴이였다.  그 뒤로 나는 항주로 직장을 바꾸면서 글과 멀어졌고 그녀와도 소식이 끊겼다. 문단소식도 거의 끊고 살았었는데 한번의 고향행에서 《연변문학》에서 그녀의 가 련재되는 것을 알게 되였다. 끝내는 해냈구나 하면서 기뻐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었다. 지인들을 동원하면 련락이 가능했지만 굳이 그러고는 싶지 않았다.  2007년 《도라지》 문학행사에서 그녀를 만났다. 반가웠고 또 반가웠다. 그 사이에 나와 그녀의 신상에는 소설에나 나올 법한 스토리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나는 상처丧萋의 상처를 이겨내려고 글을 쓰고 있었으며 그녀는 남편과 함께 산에 들어가 산다고 했다. 산, 너무 큰 이름이였다. 물욕에서 비켜서서 산에 있는 나물과 고양이, 쥐, 도토리, 뱀, 꽃 그리고 산사의 목탁소리와 향불의 연기, 호미와 흙, 차잔과 독서… 그녀의 일상이였다. ‘박초란답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박초란다운 게 뭐죠?” 그녀가 어둠 속에서 송화강 얼음물을 바라며 해맑은 웃음으로 되물었다. “아무도 아닌, 오직 박초란만 할 수 있는 일.” 나는 근사한 말을 골라보려고 뜸 들이다가 고작 이렇게 웅얼댈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북경 왕징에 있었던 단층의 그녀의 판자집 숙소의 방에 걸려있던 달마의 그림과 향로에서 피여오르는 파란 연기를 떠올렸다. 가끔씩 해질 무렵 어스름 속에서 흐르던 그녀가 불던 하모니카의 운률도. 그 뒤로 문학행사에서 자주 만나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였으며 문학지에서 그녀의 소설을 자주 접하게 되였다. 《연변문학》 목록에서 그녀의 소설 제목을 보고 나서 전화를 넣었었다. 이 제목 왜 뺏어가냐고? 내 거를. 하면서 유쾌한 실랑이도 있었다. 그때 막 제목으로 소설을 시작하려고 했던 중이였으니 뿔 난 건 사실이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려행중, 기차에서 배포되는 팜플렛에서 에 꽂혀버렸다고 했다. 물론 그녀 덕분에 나의 는 요절의 불운이 있었지만 그녀가 내 목소리를 대신해줬다면서 를 재독하는 희열이 있었다.  문학은 그녀의 전부가 아니였다. 문학은 그녀의 아집스런 사상체계중의 자그마한 뙤창일 뿐이였다. 문학이라는 자그마한 창으로 그녀의 몸 속에서 흐르는 청정한 고요의 의식은 숨소리처럼 나즈막하게 흘러나온다. 세상을 껴안는 그녀의 가슴에서 자라는 청초한 작은 풀잎에는 이슬이 눈물처럼 투명하게 맺혀있는 듯하다. 꾸준하게 좋은 소설들을 선보이면서 2011년에 그녀는 첫 소설집 《너구리를 조심해》를 출간하면서 장편을 기획중이라고 하였다. 2년뒤 《도라지》잡지에 장편 련재를 시작하게 된다는 희소식도 듣게 되였다. 나는 국외 체류중이여서 메일로 련재글을 읽어보는 특혜를 누려보기도 하였다. 동료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서 “잘 읽었습니다. 잘 썼습니다.” 간결한 인사말이 두려워져 련재중인 장편소설 파일도 고심 끝에 구독요청을 보냈다. 그녀도 그녀가 쓰는 소설의 제목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동료작가들의 시선을. 그러면서도 아무려나 소설마다 두려움 속에서 진행되고 아쉬움 속에서 끝을 내는 거니까 매일 먹는 밥 만큼이나 익숙한 존재로 생각하자고 그녀가 말했다. 두려움과 아쉬움의 그 사이에 놓여있는 즐거운 고독을 그녀는 요령껏 씹으면서 진행중이다.  그녀가 메모했던 노트장은 북경 어느 산 속의 부엌 아궁이에서 재가 되여 버려졌다. 지금의 그녀는 북경 교외의 아빠트 베란다에 보리수 한그루를 들여다놓고 보리수와 눈을 마추치면서 속삭인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어느 하나에도 련련하질 않는 게 아닐가”고.  작은 풀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출처:2017 제4호  
7    [단편]블랙 블랙 블랙아웃(1) 댓글:  조회:248  추천:0  2019-07-16
블랙 블랙 블랙아웃(1) 조원   &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녀는 강림촌 늪가의 갈대밭을 마주하고 서있다. 가는 가을비가 내리고있다. 새벽이라면 좀 늦은, 아침이라면 좀 이른 시간대의 비속의 늪은 적요하다. 늪은 그녀가 강림촌을 떠나서 보낸 오랜 세월에도 오로지 침묵만으로 버티고있었던듯 비소리와 갈대들의 술렁임을 삼키고있다. 조용하지만 울림이 있게. 아주 오래전의 일들은 안으로 안으로 삭혀서 떨쳐버리려 했던 그녀의 침묵처럼. 하지만 그 침묵은 시도때도 없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소리를 냈다. 때로는 졸졸. 때로는 철렁철렁. 30년만에 그녀를 강림촌으로 데리고 온것도 그 소리이다. 침묵에도 메아리가 있고 그 메아리는 다른 어떤 소리의 울림보다 더 공허하고 오래간다. 늪의 침묵처럼.  늪은 작아져버렸고 그녀는 커져버렸다. 변한것은 두가지라는 사실앞에 그녀는 시간속의 시간들의 불확실성을 느낀다. 여태껏 늪은 이렇듯 작고 피페하고 헐거운 존재가 아니였다. 늪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그녀는 비에 젖어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래로 처져내려진 갈대의 누런 잎사귀끝에서 떨어지는 비방울을 본다. 그 비방울들은 갈대와 갈대사이에 무늬도 그리지 못하고 늪의 일부가 되여갔다. 형태가 있는것은 언제든 사라지게 된다. 형태가 없는것도 사라지게 된다. 오직 기억만이 남는다. 기억은 생명체이다. 가을과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면 새순으로 돋아나는 진흙속에 뿌리를 내린 갈대처럼 기억은 되살아난다.    팔뚝에 남아있는 예방주사의 흔적.  메주콩 뜨는 냄새.  추녀끝 고드름을 깨물면 입안으로 퍼지는 비릿함. 웃으면 오히려 슬퍼보이게 하는 턱의 보조개.  삶은 계란의 따끈따끈한 미소.  볼펜으로 손목에 그렸던 손목시계.  바줄의 이질감.  나비머리핀. “희경아” 하고 불러놓고 “아니” 하던 어눌함.  해빛속으로 굴렁쇠가 굴러가면서 뿜어내는 아우라.            그녀가 N시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는 엊저녁 해질무렵이였다.  N시는 강림촌에서 고작 8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그녀는 어릴 때 시내나들이 나왔던적은 한번인가 두번 그 정도였다. 시내와 농촌이 뭐가 다르더냐는 어른들 질문에 “농촌에는 횡단보도가 없습니다. 가로등과 신호등도요.” 하고 말해버려서 “횡단보도”가 아주 잠간은 그녀의 별명이 되였던것만은 잘 알고있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길에는 횡단보도가 있다는 안전수칙을 가르쳐주었던 N시는 무수한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안전하지 못했던, 그녀가 그동안 떠돌아다녔던 여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도시에 불과했다.  낯선 도시, 낯선 려관, 낯선 방, 낯선 욕실, 낯선 거울앞. 그녀는 양치를 끝내고 머리에 두루고있던 흰 타올을 끌어내렸다. 치약거품이 오른쪽 입귀에 버짐처럼 붙어있는 얼굴이 거울속에 있었다. 엉켜있는 젖은 머리카락에 손빗질을 넣어 흐트러지게 한뒤 머리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머리카락들이 왼쪽 어깨의 예방주사자욱을 간지럽혔다. 아주 잠간, 어지러웠다.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이 젖꼭지를 쿡 찔렀다. 눈을 살며시 떴다. 이마로부터 타고 내려진 물방울이 눈초리에 떨어지면서 시선을 방애했다. 간질거리는 코안으로 눅눅한 허브샴푸향이 비릿한 냄새와 함께 섞여들어왔다. 눈을 다시 감았다 떴다. 거울속에서는 지극히 괴물스러워보이는 녀인이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공은 열려있었지만 비여있는듯하였다. 다행히 눈 흰자위에 아주 가는 망사무늬의 피줄기가 퍼져있어서 다소 헛것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진실이라고 믿고싶어하면서도 진실이길 두려워 반투명의 커튼뒤에서 망설이는 녀인이였다.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머리우로 빗어올리면서 그녀는 고개를 틀었다. 그 찰나의 순간, 그녀는 거울에서 눈이 없는 어떤 녀인의 옆얼굴을 보고야말았다.  모딜리아나의 녀인. 외롭게 목이 긴 녀인. 대춘大春이 닮았다던 모딜리아니의 녀인의 얼굴이 거울에 있었다. 대춘은 그녀에게는 딱히 뭐라고 할수 없는, 그래서 그저 신비로움이라는 말로 표현할수 밖에 없는 아우라가 있다고 했다. 대춘의 사랑고백이 그랬다. 그리스신화속의 녀인의 신비로운 아우라였는지는 몰라도 대춘은 그녀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환희가 넘실대는 마음의 바다를 깊숙한 다른 곳에 묻어둔 그녀의 눈길에 끌렸다고 했다. 거역할수 없는 주술적인 마법에 걸린듯이. 대춘은 어떤 신비로움을 향한 끈질긴 탐험에서 얻을수 있는 스릴을 그녀와의 련애에서 느끼는듯하였다. 결혼생활도 그 연장선우에서 진행되는 탐험의 길인듯하였다. 탐험과 결혼에는 모두 위험의 요소들이 포진되여있으며 극진한 인내심이 필요되는 법. 단지 결혼에는 권태기라는것이 있고 상대를 잘 알아가기도 전에 익숙해져서 멀어질수있는 치명적인 위험요소가 더 있다. 대춘은 무방비상태로 열려져있는 그녀의 몸속으로는 쉽게 들어갈수 있었지만 빗장을 단단히 걸어버린 그녀의 마음속으로 한걸음도 다가갈수 없었다. 그녀의 몸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대춘은 그녀의 눈을 보군 하였다. 신비로움과의 대결에는 승부욕이 따르게 되고 그 승부욕은 왕성한 성욕을 자극하게 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승부욕은 주눅이 들었다. 뭔가를 보는듯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 언제나처럼 비여있는 그녀의 눈을 보면서 벌거벗은 그녀의 몸우에서 헐떡이는 자신의 몸은 흥분과는 거리가 먼, 구걸에 가까운 애처로움이라는걸 대춘은 서서히 깨달아갔다. 언제고 그녀는 혼자이길 고집하고있었으며 대춘은 버려진 혼자였다. 그녀의 어둠을 대춘은 알수 없었다. 대춘의 어둠은 그녀의 관심밖이였다. 옅은 어둠은 짙은 어둠에 먹히우게 된다. 야금야금. 잘근잘근. 그러다 어느날 밤, 대춘은 눈이 없는 모딜리아나의 그림속의 녀인을 닮았어, 라고 그녀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저주받은 화가”라는 뜻으로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모디”,  모딜리아나와 잔느의 아픈 사랑이야기도 해주었다.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는 잔느의 물음에 내가 당신의 령혼을 알게 되면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게 될것이라고 련인이자 모델이였던 잔느에게 말했던 모딜리아나의 정직성, 나약함, 소극성도 곁들여 말해주었다. 드디여 대춘의 탐험은 답을 얻은 꼴이 되였으며 답이 나지면 게임은 끝나기마련.  낯선 침대, 낯선 추위, 낯선 커튼, 낯선 불빛, 낯선 이불, 낯선 습기. 그녀의 N시 낯선 밤은 가을 밤비가 내리는 소리가 지독하게 이어져갔다.    & 겨울이면 오빠는 희경의 손목에 볼펜으로 시계를 그려주었다. 추워서 바깥출입이 어려워지면 지루한 겨울시간을 소비하는 지혜였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뜨개질과 메주콩 삶기, 아빠의 장작패기와 새끼꼬기, 황둥개의 닭쫓기와 흘레질 등등과 함께 오빠의 시계 그리기에도 생산성, 소비성, 오락성을 두루 갖추고있었다.   이날도 희경은 오빠를 졸라서 시계를 그리기로 하였다.  오빠의 방에 희경은 오빠와 마주앉았다. 오빠의 볼펜끝이 희경의 손목 안쪽의 여린 살갗으로 굴러간다. 희경은 꼼지락대며 팔을 빼려고 한다. 오빠의 손아귀는 더욱 우악스러워진다. 오빠의 손등우에 어른스럽게도 파란 지렁이가 꿈틀대는것을 희경은 신기하게 보면서 손목 안쪽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태엽꼭지를 볼수 있었다. 시계테의 원을 그리기 시작하면 간지러움은 더해진다. 간지러움은 간혹씩 못견디게 오는 통증, 아니 즐거운 통증처럼 온몸을 관통하고 발끝까지 저릿저릿하게 한다. 오빠 살살. 살살 해줘. 살살 해란데. 급기야 희경은 참지 못하고 오빠의 손을 뿌리치고 발랑 구들에 누워버리고 왼손으로 배를 안고 오른손은 이미 그려진 부분이 지워지지 않게 허공에 쳐들고 깔깔댄다. 죽겠단 말이야. 간지러바서. 희경은 구실을 만들어야 한다. 관둬, 안하려면 말고. 오빠는 앉은뱅이걸음으로 엉뎅이를 움직인다. 누기 안하겠댔니? 살살 해라 했지. 희경은 발딱 일어나 앉으며 다시 손목을 오빠께 내민다. 도톰한 입술을 실룩이면서. 시계 그리기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손목 빼돌리기와 같은 돌발행위가 없어야 된다는 다짐을 받거나 말거나 희경과 오빠사이의 티격태격의 시나리오는 무한반복되기만 한다. 시계테의 원이 모양새를 갖추기까지의 짧은 시간을 희경은 가장 견디기 어려워했다. 팬티에 오줌방울 찔금 짜내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나면 둥근 시계테가 완성되여간다. 이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시계가 될거야. 니 맘대로 시간을 결정할수 있는 시계지. 너의 시간은 너의 손에 쥐여져있어. 근사하지 않니? 오빠는 희경의 숨 막히는 초조함과 발갛게 무르익는 수줍음을 달래려는듯 중얼댄다. 간지러움의 극치가 지나고 오빠가 시계안쪽의 시침, 분침, 초침과 열두등분으로 나뉘여지는 시계금들을 뜸 들이면서 그릴 때면 희경은 나분의 손목시계를 생각한다. 나분의 아빠가 생일선물로 사준 분홍빛 테를 가진 장난감시계를. 한번만이라도 그 시계를 차고 밤잠을 자보는게 소원이였다. 오빠가 손목 안쪽에 시계를 다 그려주고나면 기쁨보다도 가슴으로 한숨이 새여나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다 크고나서 희경은 그것이 구겨져가는 자존심이라는거, 감춰야만 하는 초라함이라는거, 가난을 뻔뻔스럽게 자랑하는거라는것을 알았다. 시계 그리기 작업이 끝나면 멋있다 하는 오빠의 자화자찬의 미소도 어색했다는것도. 오빠는 시계 그리는 그 과정이 좋았을것이며 희경은 오빠의 손에 잡혀있는 안전감이 좋았을지도 몰랐다. 희경은 오른쪽 손목 안쪽에 그려진 시계줄의 금을 하나 둘 세고 누웠다. 그러고있노라면 온몸의 감각기관들이 살아난다. 옷걸이로 박아놓은 대못에 걸려있는 메주떼들이 발효되는 냄새, 메주떼를 감싸고있는 짚들이 말라가는 소리, 바깥을 향한 고방문에 덧대여진 비닐에서 물방울이 올챙이떼처럼 굴러떨어지는 모습도 곁눈으로 보여진다. 이때가 되면 유난히 나분이의 손목시계도, 나분이의 오리털 노란 등산복도, 나분의 무릎께로 오는 부츠도, 나분이네 벽돌집이 생각난다. 그리고 여름옷 보따리에 숨겨둔 나비머리핀도. 몇번이고 나분에게 돌려주려고 꺼냈다가 다시 숨겨둔 나비머리핀이다. 한숨도 새여진다. 쳐들고있던 손목이 뻐근해질무렵, 니 또 쌌지? 희경의 발치께에 앉았던 오빠가 중얼댔다. 뭐? 또 쌌겠지. 두번째는 질문이 아닌 추정이다. 쌌지? 세번째도 질문이다. 쌌다. 마감에는 긍정적 판정. 희경은 발딱 일어나 오빠의 목덜미를 쥔다. 그러는 희경을 오빠는 뒤로 손을 뻗어 번쩍 안고서는 일어선다. 오빠에게 업힌 꼴이다. 오빠의 등에 매달려 오빠의 목을 두팔로 꼭 조이면서 얼굴을 등에 댄다. 오빠의 등은 따뜻하다.  글쎄, 말처럼 됐으면 부자 따로 있겠어요? 기회는 잡는거라 했소. 사람 잡지 말고. 소금 뿌리지 마오. 소금도 비싸우. 맛보기로 먼저 작게 해보고 잘되면 크게 벌이면 안될가요? 그때면 늦단 말이요. 얻어터져도 첫매가 훨씬 시원치. 몰라요. 알아서 해보시던지. 하고말고. 두고보란 말이요. 돈 세는 일만 남았소. 아래방에서 엄마와 아빠의 오가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잔뜩 부풀려진 풍선에 쉼없이 바람을 불어넣는 아빠, 긴가민가하면서 풍선이 터져버릴가봐 마음을 졸이고 숨 죽여가는 아이와 같은 엄마. 오리부업 하면 우리 부자 될거야.  오빠가 희경에게로 고개를 틀며 속삭이듯 말한다.  나분이네처럼.  등에 얼굴을 묻은채 희경이 날름 오빠 말을 받는다.  나분이네처럼이 아니라 나분이네보다.  오빠가 희경의 말을 시정한다.  그.래.  희경은 뾰족한 턱으로 오빠의 등을 콩콩 두번 찍는다.  잘할수 있어.  오빠의 팔뚝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 그때면 오빠 이쁜 색시 델꼬 온댔어. 아버지가.  희경은 키득한다.  오빠도 키득한다.    & 비가 멎었다. 어스름이 물러가면서 온전한 아침이 왔다. 늪 수면우로 물안개가 피여올랐다. 늪이 품고있는 눈물중에서 가장 맑은 방울들만이 공기속에서 흩어지고 잘게 잘게 부서져서 가볍게 가볍게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듯하였다. 늪은 고작 이렇게라도 눈물을 날숨처럼 보일듯말듯 그러나 아름답게 날릴수 있어서 다행이리라. 말라가면서 비틀려지고 누렇게 탈색되여가던 갈대밭이 비물이라는 물감이 올려져서 짙어지고 부풀려져서 늪은 더 중후한 무게에 눌리우는듯하였다. 그녀가 접어서 들고있는 검정우산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까만 구두우에. 갈대밭이 끝나가면서 뚝쪽으로 완만하게 이어진 비탈진 경사면으로는 코스모스가 외로운 사슴처럼 목을 길게 빼들고있었다.  강림촌을 지척에 두고도, 진짜 엎어지면 코 닿을 곳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늪가에 오래동안 서있었다. 모습을 완연 드러낸 강림촌은 그녀에게는 어느 작은 고독한 섬의 존재처럼 멀리에 있는듯하였다. 섬의 군데군데서 아침연기를 풀어올리고있었다. 점심 식후의 어느 회사원의 나른한 담배연기의 실루엣처럼 라태함이 묻어있었다. 간혹씩 라태함은 일상의 여유이며 평화이고 고요가 되기도 한다. 추수가 끝난 시골의 풍요로움에도 즐거운 라태함이 있으리라. 그녀는 자리를 떴다. 비탈길을 걸어서 천천히 뚝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이야기는 달라질것이다.  동네는 조용하였다. 몰라보게 변했을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되살아나는 기억으로 누구의 안내 없이도 옛집을 찾을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약간의 실망이 일었다. 초가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벽돌집을 지었고 집집을 이어주는 도로들이 아스팔트로 바뀌였을뿐 동네를 남북으로 가르마처럼 갈라놓은 동서로 뻗은 큰길이며 골목골목을 관통하는 옛길의 흐름은 영구적인 지도처럼 엄밀하고 단단했다. 물곬이 바뀌고 길이 새롭게 뚫리지 않는 이상 기억의 네비게이션은 완벽하게 작동할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커버렸고 엄마가 세상 뜰 때의 나이인 마흔셋이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다. 그녀는 소문으로 고향은 비여간다는 소식쯤은 알고있었다. 해외로, 대도시로의 인구이동으로 농촌학교들이 페교가 되였으며 조선족 동네들은 한족동네로 되여간다는것도. 30년이나 지났으니 떠나간 사람들의 빈자리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지켰을것이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들을 잊어갈것이다. 세월은 그녀를 포함한 그녀 가족들의 이야기를 묻어버린지 오래될것이다. 그녀를 알아볼 사람은 동네에 없을것이다. 그녀는 민속촌에 들린 관광객일뿐. 그녀는 관광객답게 발걸음이 가볍게 움직여졌다.   태양열 가로등을 하나 둘 셈하면서 동네 두번째 골목을 지날무렵, 그녀는 큰길가의 집문이 열리는 소리와 거위들의 날개짓과 함께 꽉꽉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에는 방아간집이 있었다. 굳이 숨거나 피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소리나는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잠에서 금방 깬듯 뒤통수가 납작하게 깔려있고 숫구멍쪽의 머리카락이 삐죽 솟아오른 어린 남자가 부랴부랴 벽돌로 쌓아올린 작은 집으로 들어가고있었다. 화장실이였구나. 그녀는 중얼댔다. 그러고보니 허물어버린 초가집의 잔해가 널려있는 길건너 집터에도 있는, 벽돌로 쌓아올리고 하늘색 양철지붕을 얹은 자그마한 집들은 촌민위원회에서 호당으로 한간씩 지어준 화장실임에 틀림없었다. 비여버린 집터를 지키고있는 신식 화장실을 보면서 그녀는 TV 뉴스에서 자꾸 떠들어대는 부패가 농촌에도 뿌리를 내리고있음을 알수 있었다. 우습게도 이 마당에 사회로 향한 눈길을 가지고있는 자신의 여유를 느끼면서 그녀는 피식 웃었다. 다시한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녀인이 나타났다. 보글보글한 갈색의 파마머리를 목이 덮이지 않게 커트해 올린 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잠간, 2초 3초간의 짧은 시선의 오감에서 두 녀인은 뭔가를 읽어냈다. 일방적이지 않고 나누어가지는 시선에는 사연이 있다. 그녀는 기억이 갖고있는 순발력에 몸서리쳐졌다. 놀란듯하지만 초점만은 콕 박혀있는 고양이의 눈, 나약함을 가장한 공격적인 고양이의 눈빛, 고양이의 오줌은 어둠속에서도 빛을 낸다고 했으니 그 눈빛인들 어떠하랴. 고양이 눈빛의 그 녀인이 누구라는걸 그녀는 알아버렸다. 그 녀인의 불에 데여 놀란듯한 눈빛도 그녀를 알아보았다는 증거다. 녀인은 쑈훙이였다. 그렇다면 좀전에 화장실로 들어간 어린 남자는 쑈훙의 아들일거고.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면서 앞으로 걸었다. 다행히 뒤에서는 아는체하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쑈훙도 놀랐을것이다. 공소부와 구락부가 있는 동네 중심부에까지 왔다. 동네를 떠날 때만 해도 동네 지표성 건물인 구락부, 지붕아래의 삼각벽면에는 세멘트로 양각된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为人民服务” 다섯글자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구락부옆의 빈집 공터를 허물고 축구장 반쯤 되는 광장도 만들어졌고 어느 서툰 도끼목수의 솜씨를 자랑하는 떡메가 광장 중심에 놓여져있었다. 옛집은 광장 뒤쪽의 골목에 있게 되였다. 광장을 스쳐지나는 그녀의 걸음은 단호해지기 시작했다.  30년전 아빠에게 끌려서 야반도주하던, 눈이 얼어붙었던 골목길에 그녀는 섰다.    & 희경아. 예. … … 희경아. 예? 아니. 희경아. … 아빠와 희경 사이에는 침묵이 끼여든다. 술을 먹고나면 아빠는 딸의 이름을 불러놓고는 아니 하고 입을 다문다. 희경은 굳이 리유를 따져 묻지 않는다. 희경은 누군가가 불러줘서 확인되는 존재감으로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오빠가 잡혀가고 엄마가 자살하고 떠난 집을 아빠와 희경이 지키고있다. 아빠와 희경은 언제나 서로에게 곁에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켜야만 한다. 아빠는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도 희경아, 화장실 문앞에 따라나와서 희경아, 어슴프레 잠에 빠져들 때에도 희경아… 아빠는 무시로 딸의 이름을 부른다. 조용하면 오히려 낮잠을 잘수 없게 된 아빠의 곁에서 희경은 소리를 내야 한다. 소리 내서 책을 읽는것이 지겨워지면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옷장속의 옷들을 끌어내서 개이기도 하고 쓸모없게 된 공책을 가위로 삭삭 자르기도 한다.  희경아...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던 아빠가 딸을 부르며 일어나 앉는다. 희경은 공책을 덮으면서 밥상너머에 앉아있는 아빠를 본다. 면도를 하지 않은 아빠의 얼굴에는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있다.  우리 이사 가자. 이사요? 그래… 어디로요? 그냥 아빠 따라가면 돼. 오빠를 기다리지 않고? 걱정말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거다.  언제요? 지금. 밤중에? 그래. 지금.  준비도 못했는데.  준비할게 뭐 있다고.  인사도 해야잖아요. 나중에… 인사는 후에라도 늦지 않으니. 그래도. 우리 새 출발을 하는거다.   새 출발. 지금 서둘러야 한다. 필요한것만 챙겨. 후에 다시 와서 가져가도 되니까. 밤 열시가 되여서 당나귀차가 왔고 희경이네는 이사짐을 싣는다. 뺄것도 더 보탤것도 없는 초라한 이사짐 덕분에 희경이 올라앉을데는 있다. 앞에는 당나귀차 몰이군 한족 할아버지가 서고 뒤에는 아버지가 따른다. 겨울밤이면 한층 꽁꽁 얼어붙는 눈길은 빙판의 랭혹한 한기와 견고함이 있다. 당나귀가 뚜걱뚜걱 한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발굽에 박힌 징이 눈얼음우에 미끌리면서 내리찍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린다. 끼이익 칙. 끽 치이익. 치지찍. 치찍. 물주전자 두껑으로 유리를 긁어대는 소리. 당나귀차는 위태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그 뒤쪽으로는 부서진 자잘한 눈얼음조각이 시린 달빛에 랭정하고도 예리한 빛을 쏜다. 충분히 눈을 멀게도 할수 있는 빛. 바늘에 찔리는듯한 열기가 희경의 목덜미에서부터 발끝으로 쑥 빠져나간다. 등이 젖어든다. 몸이 덜덜 떨린다. 희경은 벙어리장갑속에 넣은 손을 꼬부린다. 머리핀이 꼭 쥐여진다. 나분을 생각한다.  나비머리핀.    & 머리카락은 사람들마다 저마끔 움켜쥐고나온 지문과 같은 존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너가 될수 없는, 너가 내가 될수 없는, 나는 오로지 나이고 너는 오로지 너이고 또한 우리로 될수 있는 가능성의 식별능력을 머리카락이 가지고있다고 생각했다. 출생의 비밀이라던가 신데델라라던가 뭐 이런거 빼면 진행이 되지 않는 막장드라마에 등장되는 신비롭지만 엄연히 과학적 술어인 DNA라는 영어문자가 머리카락속에 들어있다는 증거는 그녀가 머리에 갖고있는 신뢰를 확고부동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타인의 머리를 만져주고 감겨주고 잘라주는 행위에 강박적인 즐거움을 느꼈다. 잘려져 바닥에 흩어져있는 머리를 쓸어담으면서 타인들이 버리고싶어하는 과거를 제멋대로 들춰내서 상상해서는 제멋대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해버렸다. 아주 가끔씩 세면대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물기가 있는 머리카락을 떼여내면서 쉽게 썩을수 없는 생명이라는것도, 죽음이라는것도, 령혼이라는것도 생각할수 있었다.  H시에서의 10년 관광가이드일을 접게 한것도 그녀의 타인의 머리에로 향한 무서운 집착이였다. 그것은 대춘大春을 만나게 된 계기가 되였으며 또한 30년전의 과거로 돌아갈수 있었던 구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미용실 영업을 시작한 2010년 봄에 한달에 한번꼴로 머리 자르러 오던 대춘은 여름의 폭염이 시작되면서 보름에 한번꼴, 추석의 명절머리를 자르고나서부터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머리 감으러 미용실을 들리군 하였다. 망설이면서 왔다가 아쉬워하면서 미용실 문을 나서는 대춘의 마음을 그녀는 부담없이 읽어냈다. 목을 세면대에 젖히고 느슨히 눈을 감고 머리를 그녀에게 맡기는 대춘의 얼굴에서 그녀는 폭신폭신한 솜 같은 행복을 보아내군 하였다. 어쩌면 잠 자는 아기의 얼굴인듯하기도 하였다. 미용사는 엄마 같고 아빠 같은 존재인가봐요. 머리는 타인에게 쉽게 내여줄수 없는 소중한것이 아닐가요? 가장 소중한것은 가장 소중한 사람의 손에 있어야 마땅한것이기도 하구요. 엄마들은 아이들의 머리를 감겨주잖아요. 싫다고 징징대는 아이를 달래기도 하고 협박을 하면서 말입니다. 아이들은 왜 머리 감기를 그토록 싫어할가요? 엄마가 머리를 감겨줄수 있는 어린 시절이 참 그립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엄마의 그 손길을 말입니다. 성인이 되고나서 그 시절이 그리워서 엄마에게 머리를 감아달라고 머리통을 들이밀 용기 있는 사람이 있을가 궁금하기도 하구요. 우리 인간은 늘 조물주에게 감사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되면 머리를 잘라야 하는 법을 만들어줬으니까요. 머리를 자르는것은 자기의 껍데기를 찾는 행위가 아닐가요? 그리고 미용실의 거울에서만 볼수 있는 진실된 자아를. 미용실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거울을 보면 또 다른 모습이거든요. 고작 한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제가 넘 오버하는거 아닌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미용사가 머리를 자르는 동안만은 고객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야 하지요. 머리 숙엿 하면 옛, 오른쪽으로 하면 옛, 움직이지맛 하면 옛, 눈 감앗 하면 옛. 눈 떳 하면 옛. 훗후후. 웃기잖아요. 이때는요, 미용사는 엄한 아빠 같은 존재라구요.  그해 겨울의 눈 내리는 밤, 대춘이 세면대에 머리를 젖히고 눈을 감은채 주절댔다. 샴푸물이 귀바퀴를 타고 세면대에 떨어졌다. 그녀의 그림자가 잠간씩 움직여져서 얼굴에 불빛이 내려지면 대춘은 감은 눈을 조금씩 쪼프리기도 하였다. 바르게 꽁꽁 조여져 박혀있는 흰 이 안쪽끝의 치석, 마른침 삼키는걸 들키지 않으려고 조신스레 움직이는 울대뼈, 잘 다음어진 코털사이로 새여나오는 술냄내… 대춘의 입에서 껍데기를 찾는 행위라는 말이 나오면서 그녀는 하던 작업을 멈추었다. 분사기의 물줄기가 세면대에 뿜겨지는 소리는 대춘의 독백에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그녀는 삼푸물을 손에 묻힌채 쇼윈도 유리창에 비껴있는 풍경을 보았다. 그녀의 유난히 긴 목만이 허옇게 드러나고 그녀의 몸과 벌려져있는 대춘의 다리와 발, 미용실 내부의 사물들은 실체가 아닌듯이 어렴풋이 비쳐진 스크린 뒤쪽으로는 자동차 불빛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그 덕분에 눈발이 실체를 드러냈다.    & 희경은 오리먹이풀이 반쯤 담긴 바구니를 팔에 낀채 풀밭에 앉는다. 나분도 희경의 옆에 앉는다. 풀밭에 손수건을 펴놓고 그우에. 미풍이 훈훈한 봄볕을 실어온다. 풀냄새와 흙냄새가 참 좋다. 희경과 나분은 카메라앞에 나란히 앉아서 샤타가 눌러지길 기다리는 예쁜 소녀들처럼 꼼짝않고 언덕아래를 내려다본다. 타래떡처럼 구불구불 갈려 엎어진 흙들이 펼쳐진 논밭들이 보인다. 아지랑이는 결과 결이 서로를 간지르며 먼 강건너에서 피여오른다.  곱니? 희경은 단발머리를 귀바퀴로 쓸어올린다. 희경은 고개를 살짝 틀어 얼굴을 나분에게 돌린다. 귀바퀴에는 노란 민들레꽃이 피여있다. 민들레꽃이 아름다운거 오늘 처음 알았어. 나분은 말솜씨를 은근 자랑하고싶어한다. 꽃병이 고우면 꽂혀지는 어떤 꽃이라도 곱겠지. 희경도 뽐낸다. 꽃은 다 아름다와. 못생긴 꽃 어디 있대? 나분은 벌침을 꽂는다.  있지. 왜 없는데. 희경은 나분과 마주앉는다.  거짓말. 나분의 벌침은 주춤한다. 오늘의 게임은 오래간다는 실패감. 쓴웃음꽃. 하핫하. 씀바퀴꽃은 아름다와. 여기에 있는. 나분은 희경의 귀에 피여난 민들레꽃을 똑 따서 코끝에 갖다댄다. 노오란 꽃잎 하나가 나분의 빨간 입술에 똘랑 떨어진다. 어울린다. 착착. 그래, 고운짓은 니 혼자 다 해라. 희경은 진짜 화가 나도록 토라졌지만 삐친척하느라 애쓴다.  희경은 다시 나란히 나분의 곁에 앉으며 팔을 뻗어 나분의 어깨를 안는다. 희경의 손목안쪽의 그림시계는 이미 희미해간다.  희경과 나분 사이에 은밀한 대화가 오간다. 그 애 말이, 그 애. 여름방학이면 또 오겠지? 그 애라니? 칫, 빼긴. 대체 누가 오고 가는데? 알아듣게 말해야지. 눈치박사 나분이 도끼등 락제생 됐니? 대체 뭔 말하는데. 몰라서 그래?  몰라. 방. 아. 간. 오, 그 애? 여시같다야. 속 보인다. 오든말든 뭔 상관이게? 말 한마디도 못해봤는데. 니 좋아하지?  아니. 싫어는 안하지. 좋다는거야? 몰라. 둘사이 대화가 잠간 끊긴다. 희경의 곁눈으로 뭔가를 생각하며 입가에 슬며시 웃음을 건 나분의 모습이 보인다. 나분에게 미안해지려 한다. 희경은 고개를 꺾는다. 여름옷 보따리에 숨겨둔 나비머리핀을 몇번이고 나분에게 돌려주려고 했지만 망설이기만 했을뿐 끝내는 미루게 되였다. 다가오게 될 여름까지. 지난 여름방학이 다 끝나갈무렵의 어느날, 외할머니 집으로 놀러 온 방아간집 소년이 문득 길가에서 희경을 불러세웠다. 소년의 목소리로 불려지는 “희경”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솜사탕 같았다. 희경은 처음으로 자기의 이름이 나분의 이름보다 이쁠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하마트면 울어버릴번했다. 머뭇머뭇하던 소년이 호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냈다. 반짝이가 박혀있는 나비모양의 머리핀을. 희경은 얼굴이 훅훅 달아오르면서 심장이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부탁 하나 들어줄래? 소년이 말했다. 응. 희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이거, 니 친구… 나분에게 전해줄래? 소년이 말을 더듬었다. 뭐라고? 희경은 고함을 질렀다. 소년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희경은 씩씩 숨을 고르다가 만화속의 주인공 머리우의 알전구에 불이 들어오듯이 좋은 궁리가 스쳤다. 전해줄수는 있어. 희경은 쌀쌀하게 말했다. 고마워. 소년은 덥석 희경의 손을 잡고는 머리핀을 쥐여주었다. 똑같은걸로 나한테도 줘야 해. 희경은 단호해졌다. 하나밖에 없는데. 소년은 쩔쩔 맸다. 그럼 다음에 올 때 또 하나 갖고오면 될거 아니야. 희경이 말했다. 그럼 그건… 먼저… 나분에게 줄수 있어? 다음에 올 때 니꺼 가져올게. 소년이 애원했다. 알았어. 희경은 소년과 거기서 바로 헤여졌다. 희경은 소년이 꼭같은걸로 가져오면 나분에게 전해주리라 생각했었는데 소년은 그 다음해 여름에 희경에게 머리핀을 주지 않았다.  출처:2017 제1호
6    [단편]블랙 블랙 블랙아웃(2) 댓글:  조회:434  추천:0  2019-07-16
블랙 블랙 블랙아웃(2) 조원   & 그녀는 옛집의 터를 마주하고있다. 그곳에는 열매가 털려간 옥수수대들이 억울하게 서있었다. 옛집은 허물어지고 밀려가도 그녀의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자리만은 확실하다. 아빠와 함께 야반도주하던 겨울밤의 추위가 항상 그녀를 따라다녔듯이 이 골목의 흙 한줌, 지푸라기 한오리조차도 그녀에게는 지워지지 않았다. 가족다운 가족이 될수 없었던 그 중심에는 소녀 희경의 자그마한 질투가 있었다. 지금까지도 어마어마한 사건의 모든 시작은 그녀로부터 비롯된것임을 그녀만이 알고있을뿐. 오빠가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끌려가게 되고나서 한참뒤에 떠도는 소문은 소문만이 아니였다. 오빠의 고기발 초막에서 발견된 쑈훙의 머리핀을 증거물로 경찰에 넘긴 사람이 나분이였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분을 오빠의 고기발 초막에 데리고간것도 그녀였으며 비 내리는 초막안에서 소년이 선물한 머리핀이라고 나분에게 거짓말을 한것도 그녀였다. 그해 여름방학에 방아간집 소년이 똑같은 머리핀을 갖다주지 않았다는 리유로 소년과 나분에게로 향한 미움과 질투로 충만해있었던 그녀였다. 나분의 분노, 쑈훙의 거짓진술은 오빠를 빼도박도 못하게 강간범으로 만들어버렸다. 미성년자 강간범으로.  오빠가 출옥되여 불쑥 집에 찾아들었을 때 아빠는 목공일을 나가고 중학생으로 자란 희경이 홀로 오빠를 맞았다. 오빠는 단단해졌고 희경도 자랐다. 엄마의 턱아래 보조개를 물려받은 오빠의 턱아래는 웃고있어서 슬퍼보였다. 희경은 울었다. 막 봉긋하게 부풀어 솟아오른 가슴을 오르락하면서. 기쁨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후회인지, 자책인지 희경은 오래도록 울었다. 그리고 아빠가 그동안 면회도 다녀왔구나 하는 고마움을 느꼈다. 아빠와 도주해서 이사 든 루추한 이 집을 집이라고 다시 찾아온것에. 아빠께 감히 면회 가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고 설사 아빠가 면회 가자고 제안해올가봐 두렵기도 하였다. 옥중에 있는 오빠와 마주앉을수 있는 용기가 희경에게는 없었다. 오빠는 울고있는 희경을 품안에 넣었다. 희경은 손바닥을 펴서 오빠의 등을 만졌다. 턱으로 오빠의 등을 콩콩 쫏던 그 자리를 찾아헤맸다.  분명 그 등이였지만 그 자리를 찾을수 없었다. 흔적은 쉽게 사라질수 있으니까. 오빠의 등, 오빠의 가슴, 오빠의 손 등등의 오빠의 몸을 함부로 가까이 할수 없이 자라버렸다는것을 희경은 알아버렸다. 오빠의 세계와 희경의 세계가 그동안 구축되였으며 세계와 세계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있음을 알아버렸다. 희경은 기억해냈다. 아빠와 오빠는 닮아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서로에게 불만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쉽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것을. 아빠는 진밥타령이였으며 오빠는 된밥 투정이여서 난감해진 엄마는 언덕밥을 지었다. 엄마와 희경은 언덕의 그 가운데 있는 진밥과 된밥을 섞어서 먹었다. 그러니 가족의 평화는 엄마의 지혜가 지켜나갔다. 가족이 깨지기전까지는 그래도 화목한 가족이였음에 틀림없었다. 엄마의 부재를 채워나가는것은 희경의 몫이 되였다. 희경은 솥안에 쌀을 언덕지게 안쳐서 한쪽은 질게, 한쪽은 되게 하기로 하였다. 엄마가 하던대로. 그리고 계란 세알을 씻어서 쌀물이 많은 곳에 얹었다. 오빠는 쪽걸상에 쭈크리고 앉아서 부엌 아궁이에 토막나무와 대패질로 말려진 나무꺼풀들을 넣었다. 가끔씩 오빠께로 희경의 손끝에서 물이 떨어지면 희경은 오빠를 내려다보았고 오빠는 희경을 올려다보았다. 둘 다 웃었다. 오가는 웃음에는 다른 감정이 끼여들지 못했다. 오직 행복이라는 감정 말고는. 썰렁했던 비좁은 부엌은 김이 뽀얀 안개처럼 짙게 서려가면서 먼지가 일도록 말라가던 희경과 오빠의 가슴을 촉촉하게 젖어들게 하였다. 파리똥이 말라붙어있는 알전구는 김속에서 희뿌옇게 너울쳤다. 희경은 저녁준비를 하며 오빠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아궁이에서 비쳐지는 불빛으로 혈색이 회복된 오빠의 얼굴은 보기 좋았다. 김속에서도 얼굴선들은 군더더기 없이 선명하게 그어져있었다. 보조개가 패여있는 턱밑의 울대뼈가 만들어내는 그늘은 짙은 검은색이였다. 오빠의 인생에서 문신처럼 따라다닐, 지울수 없는 그늘. 희경은 오빠와 아빠와 함께 둘러앉은 밥상앞에서 낯선 냄새들의 흐름을 보았다. 오래된 창고를 열어젖히면 몰려오는 눅눅함을 오빠에게서. 텁텁한 나무냄새와 차거운 쇠냄새를 목공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에게서. 냄새들이 섞여지고 어울리면서 또 다른 냄새를 만들어갔다. 냄새라는것은 쉽게 슴배이고 약한것은 강한것에게 먹히우고 새로운 낯선 냄새로 재탄생된다. 그 과정을 오빠와 아빠는 굳이 밀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면 이미 지쳐버려서 될대로 되라는 무심함, 아니면 함께 하지 못한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간절함이였을가. 아빠는 단지 빚더미가 두려워 야반도주한것이 아니였다는 사실을 희경은 문득 깨달았다. 그때부터 오빠가 출옥할후의 생활을 차곡차곡 준비했었다는것을. 아빠와 오빠는 서로가 닮아있는 부분에 불만을 느끼는것 같지 않았다.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는것은 서로의 얼굴을 다시 확인할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입밖으로 새여져버리면 모든게 깨질수 있다는 념려로 희경은 생각했다.  진밥. 된밥. 된진밥. 삶은 계란의 따뜻한 미소.  진밥과 된밥은 서로를 리해하려고 리해해주려고 애썼지만 한 사람을 완전히 리해한다는것은 완전 불가능하다. 그러나 진밥과 된밥은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서로의 설익은 리해를 완전 리해로 착각하게 되다보니 불협화음을 만들수 밖에 없었다. 된진밥이 서뿔리 끼여들 문제가 아니였다. 삶은 계란은 다시 따뜻하게 웃어주지 않았다.  마침내, 오빠는 다시 물감옥을 선택했다. 바깥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누리고 사는 정상의 세상으로 돌아온 오빠는 예전의 그 세상을 예전 그대로 살수 없었다. 세상이 오빠를 버렸듯이 오빠도 낯선 세상을 버리고싶어했다. 결국에는, 결국에는 이미 익숙해진 단절된 세상을 선택했다. 바다물에 둘러싸인 그 감옥을. 원양어선으로 오빠가 떠날무렵 희경은 고중 2학년생이 되였다. 오빠는 타이티에서, 사모아에서 어선이 입항이 될 때면 희경에게 엽서를 보내왔다. 야자수, 파도, 푸른 물, 갈매기, 해안, 노을, 섬, 해변에 놓여있는 하얀 의자, 백사장, 바다를 끼고있는 릉선이 완만하게 굴곡져있는 산 등등 흔하지만은 모든 동경을 담은 풍경의 엽서들은 하나도 없었다. 한꺼번에 똑같은 엽서를 여러장 준비해두었던지 늘 무질서하게 널려있는 시계들을 담은 엽서를 보내왔다.  잘 있지?  잘 있겠지.  잘 있어야 돼. 엽서 뒤면에 지극히 짧게 단마디 문안을 적어서. 희경은 엽서를 꺼내서 보고 또 보았다. 사각의 금색 시계판, 나침판인듯 작은 화살표를 담고있는 둥근 시계판, 흰색 바탕에 까맣게 수자가 선명한 시계판, 시간금을 완전 배제해버린 분침과 시침만 있는 비여있는 시계판, 크고작은 치륜이 맞물려있는 해부학도와 같은 시계의 내부구조, 영어표기로 된 시간금의 시계판 등등이 엽서 앞면에 빼곡이 채워져있었다. 시계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희경은 비여있는 오른쪽 손목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시간들, 비껴간 시간들, 돌이킬수 없는 시간을 읽어갔다. 태엽으로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돌려서 일력과 달력을 무수히 번지고 되넘겨서 엄마와 아빠와 오빠가 함께 했던 그 시간으로 돌려놓고 그 시간을 그대로 고정해버리고싶었다. 사람은 떠나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그대로 남는다. 비록 기억이라는건 확실치 않지만은 기억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려준다. 불확실한 기억이라고 할지라도.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그냥 스쳐지나는 일과 사람들, 우연한 마주침에서 시작된 인연의 끈을 한올한올 엮어가는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는지. 먼 과거였었다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조차도 극력 머리를 쥐여짜내야 하는 기억, 자신을 구성해온 시간들의 각질층에 내려앉은, 입김으로 불어버리면 흔적도 없이 날려가버리게 될 과거의 존재들, 자신에게는 한낱 먼지같이 가벼운 우연이였지만  어느 누군가는 바위같은 침묵속에서 그 순간들, 그 날들을 가슴에 새겨둔채로 또 다른 누군가의 인연속에서 괴로와하며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살고있는것일가?   & 오빠, 나 거기 다녀오려 해요. 어디? … 거기… 거기? 거기에. … 거기에 가야겠어요. 그래, 함 가보라. 나도 가보고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그럴수도.  거기서 니 몫만 보고 오라. 내 몫의 기억에 오빠가 자리하고있는데도요? 기억은 오로지 자신의 전유물인것 같아. 타인이 기억해주는건 오류일지도 모르지. 내가 기억 못하는 내 기억이 있는데도요? 엄마 배속에 있었던 기억 같은, 니가 기억할수 없는 그런것도 니거겠지.    …내거겠지요. 견딜수 없어도 견뎌야 한다. 희경아. 나아갈수 없어도 나아가야 하는거겠지요.  리혼을 하고나서 정확히 일주일후, 대춘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부고를 받고나서 그녀는 강림촌으로 다녀오려고 생각했다. 강림촌으로 떠나기 이틀전 샌프랜스시코에서 살고있는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그리고 짧게 오빠와 대화를 나누었다. 미안했었다고 오빠에게 고백하려고 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위안을 얻은셈이다.  오빠, 잘 있어요? 오빠, 잘 있겠지요? 오빠, 잘 있어야 돼요. 오빠, 미안했어요. 그녀는 키 넘게 자란 누르께한 옥수수대를 바라면서 앞에 있지도 않는 오빠에게 혼자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빠 사고의 블랙박스는 그녀가 30년을 품고있다. 블랙박스의 테이프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자체적으로 기억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수 있다. 그러나 오빠는 블랙박스를 찾지 않는다. 사건의 기록들을 파헤쳐서 진실을 밝힌다고 한들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어차피 살아가고 살아지니까. 그녀는 옛집이 밀려가고 옥수수밭이 되여버린것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주인이 바뀌여 지금 이 자리에 옛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원 주인이였던 그녀 가족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을것이고 설령 지금 이 자리우에 누구넨가 새집을 지어올렸다 하더라도 그녀 가족들의 냄새를 지울수 없을게다. 집이 있던 자리에서 풀이 자라고 꽃이 피고 곡식이 여물고 짐승들이 드나드는 풍경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위로가 되였다. 땅이 기억해주면 그뿐이 아닌가.    & “어머머, 이게이게 희경이 아니냐?” 경악을 감추지 못한, 반가움이 묻어있는 한 녀인의 목소리가 그녀의 뒤쪽에서 들렸다. 그녀는 몸을 틀었다. “어머머, 맞네 맞어. 희경이.” 곱게 늙은 녀인은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 말고 어린애처럼 손벽까지 쳤다. 짝. 짝. 그녀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대체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은 짧게 목례를 올렸다.  “세상에… 그동안 어디서 지냈다냐? 날 몰라보는게구나. 그럴수도 있지. 어릴 때 여길 떠났으니. 니랑 니 아버지랑. 나 방아간집 며느리. 작은 며느리.” 녀인은 자신을 확인시키기에 바쁘다. “아, 네. 안녕하셨어요?” 그녀는 굽석 다시 인사를 드렸다. “참으로, 참으로 이게 얼마만이다냐? 30년이 지났지” “네, 꼭 30년만이네요.” 녀인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방아간집 아지미는 할머니로 늙어있었다. “아버지는 잘 계시고?” “돌아가셨어요. 2년전에.” “에고고. 수태 고생고생하더니만. 한 사람 한 사람 다 떠나고. 이 동네도 다 비였어. 나도 한국에서 3년만에 온거야. 그래 지금 어디 있어?” “H시에서 살아요” “잘됐다. 잘됐어. 이러쿵저러쿵 해도 나중에 보면 다 살게 되여있어. 니 엄마가 불쌍하지. 지금도 오리떼들을 보면 니네 생각나는거 있지. 오리부업 망했기로 그렇게 허망 목숨을 끊어버리다니. 니 엄마도 참, 지금쯤 니가 이렇게 살고있는것도 보면 좋기나 하지.” “…” “애는? 신랑은? 요즘은 다들 자식 둘 가지던데. 몇이냐?” “신랑은 죽었어요. 애는 없구요.” 그녀는 녀인이 놀라서 입을 닫기를 바랐다.  “뭐? 어쩌다가?” 녀인의 목소리가 너무 높게 올라가는바람에 물음표가 나올 부분에서는 목소리가 갈렸다.  “오빠는 샌프랜시스코에서 살고있어요. 미국에요.” 그녀는 뒤따를 지루한 질문이 예상되여 묻지도 않는 말을 하기로 했다.  “미국… 그래, 그래, 니 오빠 일도… 괜찮아, 다 괜찮아.” 충격을 회복한 녀인은 딱딱한 표현을 썼다. 그녀는 핸드빽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만지작했다. 급한 일이 있음을 알렸다. 빨리 이 자리를 뜨고싶었다. “어디 가서 좀 앉지? 나 지금 촌장네 집으로 가는데.” 그녀는 휴대폰을 흔들어보였다. “니 일 보라. 점심에 괜찮으면 우리 집에 들르고. 천천히 얘기하자.” 녀인은 다시한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그녀는 발걸음을 떼였다.  “아, 맞다. 희경아. 울 연수 니네 소식 묻던데. 깜빡했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녀인이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 “연수?” 그녀는 몸을 돌렸다. “연수 잊었어? 시내에 살던 우리 조카. 외조카. 지금은 R신문사 기자로 되였어. ” “연. 수. 잘되셨네요.” “자랄 때 연수 보러 울 집까지 막 찾아다녔잖니? 니가. 배포도 좋았지. 그때는. 혹시 련락하려면 R신문사로 알아보면 금방 찾을수 있을거야. 내께도 전화번호 있기도 하지만.”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녀는 다시 인사를 드렸다. 방아간집 소년의 이름이 연수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나분과 그녀 사이에서 연수는 “방아간”으로 은밀히 불려져서 자기의 정체성을 잃고 그들의 기억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분의 행방을 물어보려고 녀인을 다시 불러세우려다 관두었다. 나분이도 연수도 그때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을것이다. 상처가 깊은 사람만이 오래도록 과거를 잊지 못하는 법이니까.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바람과 머리카락 사이로 가을빛은, 시간은 흘러갔다.    & 돌고래라는 놈은 령리하기로 소문난 놈이지. 돌고래가 고기배에 따라붙는 날이면 우리 배놈들은 얼씨구지. 참치 한마리도 올라오지 않는거야. 낚시에 걸려 올라오는건 참치대가리뿐이야. 아가미쪽까지의 고기를 말끔하게 뜯어먹고 입에 물려진 낚시가 두려워 그대로 두는 돌고래이지. 고등어랑 정어리랑 미끼로 끼워둔 놈들도 대가리만 남겨져 올라오거든. 오징어는 돌고래의 식성에 맞지 않나보더라. 묵직한 오징어만 멀쩡하게 다시 낚시와 같이 올라오는거 있지. 돌고래란 놈은 참으로 대단해. 그렇게 이틀만 어선을 따라붙으면 선장은 지럴지럴 하면서 어장을 바꾸어야만 하거든. 삼일은 공탕을 치는거지. 어획량이 제로가 되는거지. 근데 말이지. 사람이란거 참 이상하지. 이렇게 한가하게 시간만 나면 옛일이 떠오르는거 있지. 나빴던 일만 생각되는거 있지. 휘청대는 선미(船尾)에 앉아서 부글부글 괴여져 올려와서는 뒤쪽으로 흰 물길이 이어지는 밤바다, 그런 바다를 멍청히 바라볼 때면 괴로웠어. 그리워서 괴로운거겠지. 희경이 니랑 아버지랑 그리웠지. 함께 하지 못하고 그리워하면서 살아야 하는 내가 어이없는거지. 엄마의 자살도 내탓일수도 있지. 다 털어버리고, 훌훌 털어버리고 함께 하면서 이길수 없어도 이겨내야 하는데… 그런것쯤은 다 알고있는 도리인데 안되는거 있지. 비겁한거지. 비겁했지. 별수 없지. 다들 바다는 푸른색이라고 하지만 나는 바다의 색갈을 굳이 말하라면 흰색 아니면 검은색이지. 처음으로 타이티 항구에서 배에 오르고나서 무슨 생각 했던지 알어? 비로소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왔다 하는 생각으로 힘이 나는거 있었지. 맞지 않는 세계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며 살기를 완전 포기하고나니 자신과 어울리는 세계가 눈앞에 나타났다고 해야 할가. 아무튼 그래. 배멀미로 선상 구석에 처박혀 배속의 신물까지 뽑아올리는게 몸에 남아있는, 머리에 찐득하게 달라붙어있는 찌꺼기들을 쓸어내는 기분이였다니까. 펄떡거리는 참치의 배속에 칼을 찔러넣고 내장을 끄집어낼 때면 신이 나는거지. 상어를 끌어올려서는 꼬리만 몽탕 잘라서는 챙기고는 몸뚱이채로 바다에 던져버리면 스윽 하고 배 뒤쪽으로 가뭇없이 사라져버리는 상어 몸체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지. 더욱 신기한건 말이지. 승선해서 8개월만에 상륙이 될 때였지. 어창에 참치 한가득 싣고 상륙하여 하역을 할 때 말이지. 말 그대로 망망대해에서 물밖에 보이지 않다가 륙지와 가까와지면서 섬 자체의 륜곽이 바다물우에 감도는 안개속으로 나타날 때는 신기루를 보는것만 같더라. 저게 뭐지? 저게 뭐지 하면서 눈을 부비부비했지. 어떤 슬픔이 몰려오는거 있지. 딱히 뭐라고 할수 없는 슬픔,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젖어드는거 있지. 그러고보니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닐가.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들. 작은 배들의 슬픔은 그리움이였겠지. 슬픔은 슬픔대로 잠간, 륙지와의 8개월만의 재회라는 설레임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어. 형님, 우리 술집 가서 한바탕 즐기자고. 인도네시아 선원이 섬이 뚜렷하게 형체를 드러낼 때 옆에서 환호하듯 소리쳤어. 상어꼬리 말린건 팔아서 뽀나스로 배분되거든. 그런데 상륙해서 첫발을 땅에 딛는 순간, 땅은 내가 살아갈 곳이 아니라는걸 알아버렸어. 글쎄 흔들리는 어선에 이미 익숙해져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휘청휘청하는거야. 휘청휘청. 나는 이미 휘청휘청 넘어질듯 흔들려야 살수 있다는것을. 밤중에 술집에 가서도 휘청휘청, 모처럼 반갑게 맞아준 한인교회의 교회당에 앉아서도 휘청휘청, 작은 섬나라에서 시간 맞춰 울리는 교회 종소리에는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묵도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침묵의 시간에도 휘청휘청. 이래서 배놈생활은 나에게 적격이라는 확신이 선거였지. 선상을 떠나면 내 존재감을 잃어버린다는것을. 나 지금 술 많이 먹었어. 만취라는것도 하는건데. 사실은 술을 필림이 끊기도록 먹어보는게 소원인데 근데 그게 잘 안돼. 아예 안돼. 아버지한테서 유일하게 닮고싶은게 있다면 바로 그거야. 블랙아웃. 술을 먹고 필림이 끊겨 기억을 하지 못하는 현상인 블랙아웃. 아버지는 그래도 기억을 잃어버리는 한 순간, 아니 하루밤이라도 있은거 아니냐. 불공평하지. 어찌 보면 아버지는 은근히 블랙아웃을 즐기고있고 또 그러길 바라고 술을 량껏 드시는지도 모르지. 아무리 술 많이 먹었기로 그 정도의 생각도 안 난다는게 본인이 저지른 실수가 실수였음을 술쪽으로 책임을 전가시키는 꼼수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이튿날아침이면 당황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직감적으로 진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 참 부러웠어. 그런 아버지가. 난 안돼. 아무리 먹어도 안돼. 술을 먹고나면 머리는 자꾸 과거로 돌아간단 말이야. 미래는 없고. 그것도 찌질한 과거로 말이지. 가끔씩 기억상실증에 걸려봤으면 하는 생각도 했었지. 어이없게서리. 그나저나 희경이 니는 령리한 돌고래처럼 생겼어. 이마가 차돌처럼 단단한게 딱 돌고래 같단 말이야. 돌고래 모형을 보면 괜히 니 생각나는거 있지. 우습지. 그래서 하나 사왔어. 그리고 내께 손목을 내밀고 시계를 그려달라던 너를 자꾸 생각하게 돼. 왜 시계는 꼭 여름이 아닌 겨울에만 그렸을가고 생각도 하고. 아마도 겨울이면 손목에 그려진 가짜시계를 감출수 있어서 그랬을지도 몰라. 여름에는 대충 티 하나 반바지 하나로도 거뜬히 날수 있기에 가난을 감추기에는 여름이 좋은데, 부유함을 가장하려는 가난을 감추기에는, 례를 들면 손목에 그려진 시계 정도는 겨울에 해야 하나봐. 기억나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내가 그려줬던 시계의 시간들은 다섯시였어. 아침 다섯시이든 저녁 다섯시이든 겨울의 아침과 겨울의 저녁 그 시간대가 나는 좋았거든. 그 시간대에 머물게 하고싶었어. 널. 그 시간대는 평화로운 시간일것 같았거든.  오빠는 어선에서의 첫 귀국후 어느날인가 술을 먹고 돌아와서는 희경을 앉혀놓고는 주절주절댔다. 아마 오빠의 생애에서 제일 길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아니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빠는 잠간 2년에 한번 꼴로 귀국했다가는 다시 어선으로 복귀되였다. 희경이 대학공부를 시작하고나서는 아빠가 있는 동네로 들리지도 않고 잠간 희경을 보러 왔다. 돌고래모양의 온도계도 선물했으며 학자금과 생활비를 듬뿍 얹어주고는 또다시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던 오빠는 어선에서 기름배로 갈아타더니 어느날엔가 미국에서 전화가 왔었다. 이젠 볼수 없을거라고. 불법체류로 미국에 정착하련다고 했다. 클대로 다 컸으니 혼자서도 자기 길을 걸을수 있을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미국이든 어디든 드디여 오빠는 땅에서 살겠다고 결심했다니 희경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가서 소식이 뜸해지더니 8년이 지나서 메일로 사진을 보내왔다. 결혼했다고, 와이프와 아이들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보내왔다. 사기단지와 같이 무척 단단하고 윤기가 도는, 톡 튀여난 이마를 한껏 자랑하며 구불구불한 머리를 뒤로 올빽으로 빗어넘겨 묶은 녀인이 두 아이를 앞에 세우고 오빠의 몸에 기대 서서 활짝 웃고있었다. 녀인의 섬세하고 조각 같은 얼굴, 갈매기의 날개처럼 각진 눈섭, 쌍거풀의 왕방울눈과 작고 곧은 코, 도톰한 입술, 윤이 흐르는 밤색 피부는 건강하고 활달한 돌고래를 닮아있었다. 녀인의 이름은 라헬, 인도녀인이라고 했다. 두 아들은 오빠를 빼여닮은듯하면서도 엄마 라헬의 이국적 냄새를 뿜고있었다. 파란 가을하늘과 파란 잔디, 흐르는 공기마저 파랗게 물들여져있을듯한 날씨에 공원에 소풍 나왔다가 어느 지나가는 소년에게 카메라를 부탁했던지 오빠와 라헬의 눈빛은 조금은 아래로 내려왔으며 두 아이의 눈망울은 약간 웃쪽 방향으로 반짝거렸다. 오빠의 턱아래 보조개는 라헬과 두 아이를 내려다보고 벙그레 웃고있었다. 희경은 오빠의 행복을 빌고 빌었다. 울면서 웃었다.  혼혈이라는것은 피와 눈물이 섞인것.   & 강림촌의 흙길은 아스팔트로 변해있었지만 횡단보도와 신호등은 없었다. 띄염띄염 가속방지턱은 설치되여있었다. 그녀의 별명이 아주 잠간  “횡단보도”였었기때문이였는지는 몰라도 우연히 옷깃을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 눈빛이 가게 되는것처럼 그녀는 신호등 대기시간에 횡단보도를 멀거니 바라보고있으면 즐겁지만 않은 어린 시절의 “횡단보도”를 떠올렸던적도 있다. 무수한 차량들의 바퀴회전과 바쁜 길손들의 발자욱에 희미해졌다가는 또다시 산뜻하게 색을 올려지는 횡단보도, 중국말 그대로 “줄말선斑马线”은 줄말 몸뚱이의 우아한 선의 흐름을 도로에 옮겨새겨 안전지대 혹은 금지의 또 다른 하나의 표기이도 하다. 뚫려만 있으면 길이 될수 없으며 그곳에 갖추어야 될 모든 요소를 담고있어야 도시에서는 길이라고 말할수 있으리라.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관심한듯, 초조한듯, 짜증난듯 횡단보도를 마주하고있다. 살면서 잠간씩 쉬여가라는데 쉬는걸 부담스러워한다. 불확실한 시대에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수 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삶은 또 가볍지만 않은 블랙유머들을 툭 던져준다.  길우에 선 모든것들에게는 늘 위험이 곁에 있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시골뻐스가 동네 광장앞에 정차했다. 뻐스에 오르는 사람은 그녀뿐이였다. 웃동네 한족마을에서 내려오는 뻐스였다. 뻐스안의 찐득한 공기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뻐스에는 그녀를 포함해서 승객이 셋만 달랑 올라타있었지만 꽉 차있었다. 시골과 시내의 물건을 실어나르는 짐차라 하는게 합당할듯하였다. 그녀는 환기가 되도록 차창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가느다란 한숨이 새여져나갔다. 간다, 간다. 입속으로 자그마하게 되뇌였다. 그녀의 입속에서 나온 소리는 차창너머의 허공으로 풀려나갔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를, 영원히 찾지 않을 고향. 알콜성치매로 한결 자유로와진 아빠가 양로원에서 당신의 고향친구들은 다 어디  갔냐고 투정부리면서 비여버렸다고 했던 고향.   뻐스는 조급하게 움직였다.  차창밖의 풍경은 바뀌여갔다. 가로등이 휙휙 지나고 파란 양철지붕의 화장실, 허물어진채 쌓여있는 초가집의 잔해, 그우에 웃자란 풀들이 지나갔다. 괜히 놀라서 파다닥 날개짓하는 오리무리들을 지나고. 담장밑 코스모스를 지나고. 잎과 잎, 대와 술을 서걱서걱 소리나게 비벼댈 옥수수대를 지나고. 비여버린 논밭을 지나고. 늪을 둘러싼 언덕을 지나고. 과속방지턱을 지나. 아래동네인 한족동네를 이어주는 다리를 지나. 한족동네 정거장에 잠간 멈춰서 승객 둘을 마저 태우고 한족동네의 집, 목재가공소, 작은 슈퍼, 병원, 길가에 나선 사람, 강아지를 지나. 레루우를 힘차게 달리는 기차를 지나.  뻐스는 N시에 들어서고있었다. 스쳐지나는 모든것들을 기억의 테이프에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두려는듯 흔들리는 몸을 가누면서 그녀는 피곤해서 풀려지는 눈을 안깐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크게 떴다. 눈뿌리가 아파났다. 애써 기억하려고 하는것들은 오히려 쉽게 지워지고 기억속에서 쫓아버리고싶은것들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잊고저 하는 욕망은 기억하고저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임에야.  대춘이 그녀와 갈라서면서 울었다.  마음을 열어요. 함께 하는거잖아요. 결혼을 한 이상 우리는 각자가 아니예요. 당신이 품고있는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구요. 슬픔은 나누면 절반으로 줄고 기쁨은 나누면 배로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곁에 있어줘도 늘 외로와하는 당신, 무엇이 당신을 외롭게 하는지, 무엇이 당신을 괴롭게 하는지 알고싶어서 미치겠다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늘 혼자였습니다. 늘. 언제나. 외로운 두 령혼은 서로 보듬어줄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지요. 하지만 나의 외로움은 당신의 외로움에 더욱 외로워져갔습니다. 외로움한테 외면당한 외로움, 그 괴로움은 당신은 잘 모를겁니다. 당신은 외로움을 작정했기에 덜 외로울수도 있겠지요. 그런가봐요. 사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거기서 멈춰야만 하나봅니다. 너무 사랑하지도 말고 너무 알려고도 하지 말아야 하지요. 너무 알려고 한다는것은 상대방의 정체성마저 요구하는 짓이 되겠지요. 너무 잘 알아서 상대방의 마음속에 들어왔다고 생각되는 순간 고개를 들어보면 상대방은 건너편에서 멀거니 나를 바라보고있다면 절망적이지요. 절망. 누군가를 완전히 알아버린다는건 불가능하지요. 설령 깊이 사랑한다고 해도. 그래서 사랑의 적정거리라는게 있다고 하는가봅니다.  대춘은 한음절 한음절 악을 쓰듯 뱉아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대춘의 머리를 만져주고싶었다. 대춘의 보드라운 머리를 올올이 쓰다듬어주고싶었다. 마음 먼저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손을 겨우 말렸다. 그러니까 미용원 손님때의 대춘의 머리를 감겨주고는 결혼하고나서 머리를 감겨주고 머리를 맡기고 하는 행위가 없었던것을 그녀는 기억해냈다. 한달에 한번 꼴로 머리를 자를 때를 제외하고는. 대춘과 그녀 사이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원인이 머리를 감겨주지 않았기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터무니없는 후회를 하고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게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일인지도 알게 되였다.  대춘은 그녀의 곁을 떠났고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무시한 차량의 사고로 죽었다. 짧은 인생을 마치고. 자기가 문득 어느날인가 사고를 당할수 있다고 예언을 했었던듯 생명보험을 해두었으며 그 수혜자는 “강희경”으로 되여있었다.  그녀는 N시에 도착되였다는 기사님의 웨침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뻐스에서 내리면서 그녀는 좁고도 깊은 블랙홀을 떠올렸다. 블랙홀.   & 해질무렵의 N시 기차역 광장. 그녀는 기차시간을 기다리고 서있었다.   입구쪽으로 밀치락닥치락하며 북적이는 사람들. 바쁘게 급하게 종종종 사고 팔고 짐 나르는 짐군. 호객을 하는 택시기사. 울려퍼지는 기차역 소음들. 리별의 시간이 가까와지면서 애처롭게 부둥켜안고있는 젊은 련인. 막대기사탕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 외설스러운 잡지를 매대에 눕혀놓고 끄덕끄덕 졸고있는 할아버지. 포장마차에서 몰려나오는 양꼬치 구워지는 누린내와 목탄연기. 기차역 불빛. 출장 나온 남자들에게 화끈하게 즐길수 있는 곳을 추천해주는 아줌마들의 억센 목소리.  카메라 샤타가 터지고 왁자지껄하는 무리의 소녀들. 눅눅한 습기. 차닭알 삶는 냄새.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길우에 선 그녀. 오빠가 그녀의 손목에 그려주었던 그 시간대인  다섯시가 되여간다. 8초 7초 6초 5초 4초 …… 출처:2017 제1호
5    [단편] 좌망,빛이 기다리는 곳으로 댓글:  조회:275  추천:0  2019-07-15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 조원   불타는 금요일 밤을 보내고 나면 토요일은 한가롭고 여유롭다. 또한 일요일 밤은 우울해지고 월요일 아침은 늘 난데없이 찾아오는듯하고.  샐러리맨은 아니지만 요즘 나는 샐러리맨의 절박한 주일감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알람이 울린 후 30분이나 지나서야 잠에서 깨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챙겨서 나는 작업실이자 거주공간인 집을 나섰다. 바깥은 짙은 안개가 서려있었다. 얼굴은 없지만 수많은 손가락을 갖고 있는 가을바람이 안개의 립자들을 밀어가면서 세집 너머의 가시거리를 확보해주고 있었다. 가로수들의 록음은 여름이 남긴 자취로 여직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경계가 흐릿하면 사물을 살피려는 시선은 오히려 살아난다. 내가 몰고 다니는 낡은 찌프차 한대는 집앞 골목길에 세워져있다. 어디든 빈자리를 찾아 주차하기에 자리는 일정하지 않다. 매일 일이 끝나고 차에 실었던 자재와 공구함과 연장들을 지하창고로 옮겨둔다. 차에 두면 도적맞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하창고로 내려가 공구함과 연장들을 차에 실어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웅이네 전원주택의 다락방과 아래층의 거주공간을 이어주는 계단을 들이는 날이다. 그 뜻인즉 웅이네 다락방 증축공사가 마무리가 되여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직원도 없고 사무실도 없는 단독작업의 인테리어사업자인 나에게 주어진 다락방 증축공사는 대공사임에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나에 대한 신뢰와 나의 출중한 기술이라고 자부했지만 마무리가 되여가면서 왜 꼭 나였을가 하고 반문을 하게 된다. 요즘 부쩍 떠오르게 되는 생각이다.  2개월 전, 함께 공사현장을 다니다가 작은 규모의 건축회사에 취직한 장위에게서 전원주택의 다락방 증축공사건을 소개받았다. 위치와 사전 검측을 거친 뒤 설계도면, 작업기획서, 견적서를 제출한 결과 오다가 떨어졌던 것이다. 최소한의 인력 동원이라는 주인집의 특별조건을 장위가 알아내고 귀띔해주어서 ‘콘크리트기초공사 2명, 전기공사 1명, 난방및단열공사 2명, 배수공사 1명, 페인트공사 1명, 보조 1명과 본인. 총 9명 인력 동원’이라고 견적서 하단에 상세한 인력배정계획을 첨가했던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근간에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지인들의 인사말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어서 좋다. 불평을 늘여놓지 않아도 좋다. 그들이 인사처럼 물어오는 말에는 어떤 부정적 의도가 들어있지 않지만 내게는 수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져다주군 하였다. 이번 공사가 끝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을듯 싶기도 하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에 들어섰다. 웅크리고 앉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짐승이 기습하듯 안개무리들이 재빠르게 덮쳐왔다. 바다바람을 타고 차창으로 날려드는 안개에는 날이 서있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이 시려왔다. 도어를 올리려다 말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두손은 내 나이와는 물론 내가 하는 일과 잘 어울린다. 큰 상처는 없지만 여기저기 다친 자국이 남아있다. 하지만 손가락은 열개 모두 성하다. 그 손이 바로 나, 인테리어업자의 손이다. 피부는 거칠고 두껍지만 굳은살은 없다. 손이 단단하면 리력은 두툼할 것이다. 다만 복잡한 과거가 아니라 파도를 넘어온 력사.  어쨌든 나는 가장 단순하게 살기로 했으며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 손으로 바다마을 좌망 뿐만 아니라 시내 여러 공사장에서 한몫을 했다. 얼핏 어떤 건물들을 스쳐지날 때면 살아있는 존재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손을 댄 건물은 잊는 법이 없으니까.  웅이네 집은 시내에서 동쪽으로 40키로메터 떨어진 도시 외곽의 바다마을 좌망에 위치하였다. 웅이네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지만 좌망이라는 마을 자체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휘여진 해안을 따라서 주택들이 산비탈에 제멋대로 앉아있기에 걸어서 가기에는 불편한 거리였다. 웅이네 집 경사진 옆골목에 차를 세우고 공구함과 연장을 부리우고 있는데 웅이가 엄마와 함께 대문에서 마침 나서고 있었다. 녀인과 아이가 서있는 뒤쪽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안개가 걷혀져가면서 바다가 어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목청껏 기분 좋게 인사를 보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녀인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어보였으며 웅이는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추스려 올리면서 “아저씨다, 엄마.” 하면서 환호에 가깝게 소리질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곧이어 웅이의 인사가 들려왔다. 나는 공구함과 연장을 들고 그들이 서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엄마, 오늘 유치원 가지 않으면 안돼요? 보고 싶어요. 신기하잖아요. 천정이 뚫리고 계단으로 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해요. 그 순간을 확인하고 싶단 말이예요.” 엄마에게서 웅이가 오늘의 공사일정을 들었던 모양이였다. “유치원 가야 한다.” 녀인은 아이의 말을 짧게 끊었다.  웅이는 애써 애원을 가장한 교활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나는 설핏 아이들의 어른스러움과 교활함은 어쩌면 어른들의 순탄치 않은 삶의 반영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였다.  “공사현장은 아이들이 함부로 들어서는 곳이 아니라고 몇번을 말했지. 어른들의 허락 없이는 한발작도 넘어서서는 안되는 금지구역이야. 오늘은 더욱 안돼. 위험해.” 나는 손의 들 것을 내려놓고 웅이의 뒤통수를 가볍게 다독이였다. 촉촉한 물기가 기분 좋게 손바닥에 닿았다. 녀인은 계단 제작의 하청업체가 열시 쯤에 도착할 것이며 오늘은 하루 집에 있을 것이며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올 것이라고 나에게 말하고는 아이를 데리고 옆골목에 주차된 차 쪽으로 옮겨갔다.  나는 웅이네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증축공사 계약서에 녀인은 공사중에서 류의해야 할 점을 세부적으로 명백하게 기재했었다. 작업시일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다락방의 공사는 완전 분리상태에서 진행, 다락방 진입은 뒤마당에 위치한 철제계단을 리용할 것, 다락방을 이어주는 계단은 작업완료 5일 전 장착, 주5일 근무에 작업시간은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 당일 발생되는 건축쓰레기는 당일로 처리할 것 등등의 작업규칙을.  나는 마당에서 집 출입문으로 향한 몽돌을 깔아놓은 좁은 길 따라 잔디밭을 지나고 화단을 에돌아 뒤마당의 철제계단 쪽으로 향했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외양의 흰색으로 매끈하게 페인트칠한 외벽을 따라 걸었다. 아주 오래전 파란 페인트칠을 했을 철제계단은 녹물로 번졌으며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떨어져나간 부위에는 녹쓸어있었다. 작업하는 사이에 오르내리면서 손길이 자주 닿았던 부위는 녹들이 밀려가고 더러는 철색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다소 가파른 계단을 타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유심히 계단을 보는 여유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다락방은 성인의 보통키 높이로 2인용 침대 세개 정도 들일 수 있는 공간이다. 앞마당을 향한 작고 낡은 창틀을 떼여내고 거의 벽면 전체를 통유리로 방의 채도를 넓혔으며 다락방에 서면 멀리 아래쪽으로 가물가물 바다가 보일 정도의 시야를 확보해주었다. 바닥은 쪽매널 대신 옅은 커피색의 원목마루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벽면은 오늘 계단이 들어서고 뒤마당으로 향한 문을 완전 봉합한 뒤 우유빛 벽지를 바르면 마루의 어두운 색상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좁은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이 날 것이다. 공구함에서 공구와 연장을 꺼내다 말고 나는 잠간 쉬기로 했다. 혼자 힘으로는 계단이 들어설 자리를 떼여낼 수도 없거니와 웅이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작업을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통풍구 창을 열어두고 창가에 앉았다. 눈을 뜬 채 들숨 한번 길게, 날숨 한번 길게 반복해서 쉬고 있으니 동공이 커다랗게 열려가면서 침침했던 눈은 다른 세상의 눈이 되여갔다.    마당 화단 곁, 똬리를 틀고 수도꼭지에 맞물려있는 호스. 담벼락 너머로부터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져있는 릉소화 몇송이의 잔해.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듯 대문 쪽으로 핸들을 틀고 있는 파란 어린이용 자전거와 빙하기의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건거 바구니에 꼬꾸라진 채 꼬리를 치켜든 공룡 장난감. 긴 밤의 외로움과 새벽 안개의 공포, 그 시간을 홀로가 아닌 셋이서 무난히 견뎌온 안도감으로  파라솔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진 둥근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와 쪽걸상 하나. 외출해서 밤새 귀가하지 않았는지 길 건너 이웃 울안의 빨래건조대에 걸쳐져있는 빨래들. 경사진 아래쪽으로 보이는 앞집의 지붕과 그 사이로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 내 시야로 들어오는 사물들은 낯설었다. 이 낯섬을 카메라 렌즈 속에 담으면 적격이겠다 싶었지만 바로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때로는 사물들의 적요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나는 낯설어지는 자신을 느껴가고 있었다. 증축 전 처음으로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들어섰을 때의 낯섬과 이질감과는 또 다른 낯섬이였다.  다락방에 널려있던 웅이네의 물건을 아래 마당으로 운반하던 날의 낯섬도 떠올랐다.  공사 시작과 함께 다락방의 물건들이 마당 주변에 흩어지면 집주인은 갑자기 바빠졌다. 내게 의미가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물건들이 갑자기 의미를 지니기라도 하는 걸가.  타인의 어둡고 내밀한 구석을 파헤치고 들추어내던 서걱거리던 감정과 설핏설핏 호기심이 발동되는 충동은 혼잡스러웠다. 매사에 서늘한 구석이 있던 웅이네도 마당의 해빛 속으로 다락방의 물건들이 하나 둘 널려져가면서 거만함이 숨겨져있는 오기도 허물어져갔다. 어쩌면 오래동안 쓸모없이 적치되여있던 물건들처럼 그녀도 초라하게 오그라져가는듯하였다. 셀로판지를 두르고 붉은색 비닐끈으로 십자모양으로 포장된 케이스일듯한 물건을 계단에서 들고 내려오는 나에게 그녀가 덮치기라도 하듯 나꿔채가면서 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아귀에 잠간 잡혔던 그 순간은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그 순간 뿐인 것처럼.  코팅장갑이 끼여진 나의 손이였지만 그녀의 길쭉한 손가락의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함부로 타인의 손에서 나돌게 해서는 안되는 방어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이 떠오르면 자꾸 셀로판지에 포장되였던 그 물건의 정체에 내 사유의 흐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아마도 웨딩사진일 것이다 라는 추측에까지 몰고 갔다.  대문이 열리면서 코마루가 유난히 날이 선 곽명이 마당에 들어섰다. 내 눈앞에 펼쳐졌던 풍경들은 편린처럼 쪼개지면서 허공으로 날려갔으며 나는 다시 익숙한 나로 돌아왔다.  곽명은 작업시간 외에 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고뭉치였지만 협동작업 중에는 상대의 몸의 리듬을 온몸으로 흡수해들이는 센스 있는 나의 파트너였다. 다락방에 들어온 곽명은 마루에 앉아있는 나와 마주앉았다. 오후에는 타업체의 창틀 바꾸는 일감이 있으니 계단 들이기를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형님, 집주인 말인데… 여기 좌망으로 이사든 지 일년도 안된답니다.” 곽명이 은밀한 화두를 꺼내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의 눈섭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밀려오고 밀려가는듯 움찔했다. “수상하단 말입니다. 떠도는 소문은 한두가지가 아니구요.” 곽명은 상대가 속이 간질거리게 하회를 기다리게 유도하는 짓거리로 말을 끝내고 잠간 입을 다물었다.  “소문이라는 건 그저 소문일 뿐. 우리 일군들은 집주인의 사생활과는 무관하게 할일만 하면 되는게 아닌가? 자, 일어서. 일이나 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나는 말했다. “칫, 30대 중반의 녀자가 아이 하나 데리고 시내도 아닌 바다마을로 이사든다는 자체가 사연이 있단 말입니다.” 곽명이 나를 붙잡아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 녀자, 남편이 바다에 빠져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남편이 어느 고위층 관리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 가서 고위층 관리가 대가로 녀자에게 좌망에 전원주택을 사줬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생각해봐요.  30대 중반의 녀자가 무슨 실력으로 좌망에 전원주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곽명의 바다눈섭은 파고의 떨림이 더 격렬해졌다. “유명인사의 부도덕한 성공에는 찬미를 보내면서 백성들의 하잘 것 없는 부도덕한 성공에는 도덕의 자대를 휘둘러서야 쓰겠냐? 조용히 하라.” 나의 랭소는 뜨거워지려고 하였다. “형님, 형님의 그런 지적인 표정이 싫단 말입니다. 뭔가를 자꾸 생각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가짜라니까요.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하는 게 진짜란 말씀입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에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냐고.” “상관이 없다고요? 맙시사 형님, 상관이 있고 없고는 천천히 들어주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한심한 건 고위층 관리가 이 집으로 드나든다는 소문도 있고 더 나아가서 고위층 관리가 탐오혐의로 조사받는 중인데 이 집이 압수당할지도 모른답니다.” “너 성깔머리와는 별개로 드라마 꽤나 봐왔네. 공사일 그만두고 드라마 극본이나 쓰지 그러게.” “아핫, 형님도 참. 그리 추측이 안된단 말입니까? 최소한 인력 투입도 사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란 말이구요. 고위층 관리와의 똥구린 내연관계를 은페하기 위해서는 형님이 필요하지 말입니다.” “뜬금없이 거기에 내가 왜 들어가냐구.” “잠간만, 이런 말 해도 될지는 몰라도 그 녀자… 형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도 있단 말입니다.” “뭐야?” 내가 내지르는 소리에 곽명이 주춤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녀자 대형 인테리어업체들의 견적서 다 패스해버리고 형님에게 일 맡긴 자체부터 의도적이라는 추측도 나돌구요.” “허참, 됐고. 나는 못 들은 걸로 한다.” 나는 다시 일어서면서 마당 쪽을 내려보았다. 웅이네가 들어서고 있었다. “자, 서두르자.” 나는 곽명을 재촉했다.  곽명과 나는 라지오를 틀어놓고 일하면서 가끔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흥겹게 몸을 흔들기도 했지만 오늘은 방금 전의 대화로 서로의 눈치가 겉돌기만 하고 손발이 엇나갔다. 게다가 아래층에 있을 웅이네가 괜히 신경쓰이였다. 다행 계단이 들어설 자리를 이미 먼저 사각으로 구멍을 내고 덮개식으로 막았던 것이여서 얼마 품을 들이지 않고 우리는 들어낼 수 있었다.  진공청소기로 다락방 구멍 주변을 청소하고 아래층 거실에 떨어진 먼지와 부스레기들도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아래층 청소를 곽명은 고약하게 나에게 떠밀어버렸다. 그리고는 짐짓 도와줄 것이라도 있는듯 다락방의 바닥에 엎드려 사각 구멍에 머리를 내밀고 짙은 파도눈섭을 움쭉대면서 아래층의 동향을 살폈다. 웅이네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든 벌어지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눈빛은 간절한 기다림으로 번뜩이였다. 하지만 웅이네는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래층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잠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족사진은 물론 내가 단정짓던 웨딩사진, 하다못해 촌스러운 유화를 담은 케이스 따위는 벽의 어디에도 걸려있지 않았다.   오늘은 두번째로 웅이네 살고 있는 공간에 들어선 것이다. 공사가 시작되여 며칠 후, 계단이 들어설 자리에 구멍을 내던 날을 제외하고는 다락방공사는 완전 분리상태에서 진행이 되였으며 그녀도 일절 다락방으로 올라오지 않아 그녀와는 스치는 일 따위 없었다. 아주 드물게 정원의 파라솔 아래에 등을 지고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다락방에서 볼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집에 사람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틀어놓았던 라지오의 볼륨을 낮추었다. 내가 흥얼거렸던 노래소리를 그녀가 들었다고 생각을 하니 심히 부끄러웠다.  열시 정각에 계단하청업체에서 도착, 두시간 남짓 시간을 들여서 계단이 장착되였다. 그 사이에 나와 곽명은 다락방 뒤마당으로 향한 문을 벽돌로 막았다. 그러니까 다락방과 아래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졌으며 다락방으로 올라서려면 아래층을 거쳐야만 했다. 계단하청업체 일군들이 물러나고 나와 곽명도 점심식사하러 나서려고 정원 쪽의 수도꼭지를 틀고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손을 씻을 무렵 그녀가 정원으로 나왔다.  그녀는 엷은 미색 코드로 치마를 입었을 몸을 가린 차림새였다. 덕분에 슬리퍼가 신겨진 맨발과 종아리가 오히려 시선 집중을 강요하는 꼴이였다. 간단한 점심을 준비했다면서 파라솔 아래 탁자 우에 토스트와 빈 유리컵 두개와 우유팩, 커피 두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더 꺼내서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웅이네 집의 창문을 등지고 앉아 양고기즈란토스트를 먹고 앉아있던 나는 야릇한 웃음을 입꼬리에 달고 토스트를 베여먹으며 이따금씩 내 어깨 너머로 집안 쪽을 힐끔대는 곽명을 의식하고 있었다. 파라솔 아래 음지 쪽에 앉아있는 나였지만 목덜미가 뻣뻣해지면서 뒤통수가 후끈거렸다. 점심식사를 후닥닥 끝내고 곽명은 서둘러 떠났고 나는 오후 작업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쟁반에 빈 그릇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부엌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잠간 멈추어섰을 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부엌이 그쪽에 있었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거실에서 은근히 부유하는 아로마향을 맡으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바닥에는 부엌 미닫이문의 마름무꼴 무늬의 뚜렷한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부엌문 쪽으로 가까워졌을 때, 짧은 실크 잠옷 치마자락에 감싸여진, 동그랗게 말려진 녀인의 엉덩이를 나는 보고 말았다.  앞쪽으로 허리가 굽혀진 채 파여진 엉덩이골의 륜곽까지 드러난 엉덩이는 찰랑찰랑 물결이 번지듯 좌우로 일렁이고 있었다. 내 눈길은 보라색 슬리퍼 사이로 꽃처럼 피여난 녀인의 발꿈치에서 하얀 종아리를 훑고 지나 탄력 있는 허벅지 우쪽으로 거침없이 기여올라갔다. 종당에는 살랑대는 실크 잠옷 치마자락 밑에서 숨쉬고 있는 팬티의 오목부분에서 멈추어버렸다.  황급히 돌아서려는 찰나, 녀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녀인의 손에 들려있는 매니큐어붓은 빨간 혀끝처럼 보였다. 녀인은 그 자세로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던 것이다.  녀인은 나를 등지고 선 채 고개만 내 쪽으로 틀었다. 녀인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정오의 해빛이 사정없이 부엌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녀인이 허리를 한껏 펴면서 가슴 쪽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를 어깨 뒤쪽으로 넘겼다. 훤히 드러난 오른쪽 어깨, 겨드랑이 사이의 접혀진 살, 쇄골의 굴곡과 실크 잠옷 속에서 갑자기 놀라서 튕겨올라온듯한 노브래지어의 젖가슴은 강렬한 해빛 아래에서 오히려 헛것처럼 보였다. 녀인의 몸에서 피여오르는 냄새는 아득하기만 하였다.  금방 잠에서 깨여나기라도 하듯 가늘게 치켜뜬 녀인의 눈과 나는 마주쳤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행위를 감추려고 숨을 잠간 멈추었던 것이 오히려 나의 머리 속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는 머뭇대다가 재빠르게 쟁반을 녀인에게 내밀었다. 녀인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쟁반을 받았고 나는 휘청대며 계단을 밟고 성급히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공간이라는 개념은 때로는 특이하다. 출입문만 닫으면 다락방은 독립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계단으로 이어졌다는 의미 하나로 다락방은 더 이상의 홀로가 아닌, 거실공간에 존속되여있는 부가공간으로 된듯 싶었다.  다락방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아래층 녀인의 시간을 함께 나누어쓰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일을 하면서 나는 자꾸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녀인의 발자국 소리를 환청으로 듣고 있었다. 쟁반을 받으면서 던졌던 녀인의 그 웃음, 차라리 위선남에게 일격을 가하는 모욕의 화살이였다면 속이 편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 웃음의 정체를 되새겨보면서 고양이처럼 달랑 의자에 올라앉아 엄지발톱에 톡톡 매니큐어를 바르는 녀인의 모습이 언뜻언뜻 떠올라서 진저리쳐질 정도였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혼이 빠져나간 몸은 무기력하였다. 마루에 주저앉아 멍청히 있다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네시가 되여가고 있었다. 도무지 손에 일이 잡히지 않던 터라 오늘 일은 이대로 마감하려고 공구들과 연장들을 정리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주인집 녀자의 폰번호가 액정에 떠있었다. 아주 잠간 망설이다가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말하는 쪽은 녀인이였으며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듣고 있는 쪽은 나였다. 불과 일분도 안되는 전화 속 녀인의 말을 듣고 있는 사이에 내 머리 속은 휙휙 거센 바람이 무질서하게 휘몰아치는듯하였다. 어떤 불미스러운 일에 서서히 발을 내디뎌간다는 불안, 그 불안 속으로는 기필코 빨려들지 않겠다는 다짐, 그러면서도 떨쳐낼 수 없는 유혹에 기댄 사소한 희망이 그 다짐을 쓸어갔다가 다시 밀려오면서 혼란스러웠다.  녀인은 언제 집을 나가고 없었다. 시내로 나갔다가 웅이의 하교시간을 맞추어 돌아온다는 게 교통체증으로 제시간에 웅이를 마중할 수 없는 사태이니 웅이를 집에 데려다줄 수 없겠냐는 간곡한 부탁이였다.   결국에는 그녀의 부탁을 수락하고 말았다. 어차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음에랴. 때로 선택은 머리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입이 먼저 주도권을 잡게 되며 머리가 뒤따라 나와서 선택의 당위성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한가 보다. 유치원을 향해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이미 후회를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무가내에 체념하는 낯선 자신을 다시 느껴갔다. 웅이를 유치원에서 마중해서 차에 태웠다. “아저씨, 계단 들어섰어요?” 웅이가 옆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면서 물었다. 엄마는? 하는 질문도 없었다. 가방을 무릎에 올려둔 채로. “응. 그래. 집에 가면 올라가볼 수 있을 거야. 계단을 타고 다락방을.” 나는 웅이 쪽으로 허리를 굽혀 안전벨트를 점검하였다. 웅이 몸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오늘 바다로 나갔댔어?” 고요한 저녁나절의 바다가 길을 따라 운전하면서 나는 웅이에게 물었다.  “어, 신기하다. 어찌 알아요? 아저씨. 오늘 생활체험 수업이 있었거든요. 바다가 쓰레기 수거 수업.” “아저씨 코는 개코다. 생선냄새에는 환장하거든.” “아, 그거요…” 하면서 웅이는 말을 흐리면서 옷깃을 당겨 코끝으로 냄새를 맡았다.  무릎에 놓여진 가방을 다시 한번 품에 꼭 안는 웅이의 곁모습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웅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웅이 쪽 차창 밖으로는 듬성듬성 앉은 주택들과 산비탈이 뒤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나와 웅이 사이에는 서걱거리는 침묵이 갑자기 끼여들었다. 내 쪽의 차창 밖으로는 썰물이 밀려가면서 시꺼먼 개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워져가는 바다가는 허무한 시간의 파편들이 널려있는듯하였다.  바다가 대로변에서 웅이네 집 쪽으로 올라가는 올리막길로 차의 방향을 틀려는 무렵이였다. “아저씨, 함께 바다 구경하고 집에 가면 안돼요?” 웅이가 가방을 꼭 그러안고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나는 차를 언덕길 옆에 주차시키고 내렸다. 뒤따라 웅이가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꽤나 무거워보였다. 내가 들어준대도 품에 꼭 안고 내 뒤를 따라 길 건너 바다가의 몽돌밭까지 따라왔다. 우리는 나란히 몽돌밭에 앉았다. 한낮의 따가운 해볕에 달구어졌던 몽돌은 온기가 여직 남아있었다. 가까운 포구 쪽에는 난파어선 한척이 거뭇거뭇해져가는 어스름 속에서 힘 빠져가는 마지막 몸부림인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갈매기들의 무질서한 비행은 노을을 준비하며 높아져가는 하늘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저씨, 비밀이 생겼다는 건 근심이 생겼다는 말이겠지요?” 웅이가 두팔로 무릎을 감싸고 머리를 떨구고 나직이 물어왔다. “근심이 생겼다는 건 어른이 되여간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나는 웅이의 조그만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혹시 가족이야기? 하면서 나는 다소 긴장해졌다. 어른들은 말이죠. 의심하면서도 믿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아요. 오른쪽 볼을 무릎에 대고 나른해진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리면서 웅이가 말했다. “어른들이라고 무조건 그런 건 아니야. 례를 들면 아저씨 같은 어른.” 가슴팍을 두드리며 사뭇 사내다운 티를 끌어올리면서 나는 말하고 있었지만 살짝 동요가 일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는 내 마음속에 현미경이라도 들이대려는듯 웅이의 깜박이는 두눈은 오래도록 나를 훑어내렸다. 이윽고 말이 없던 웅이가 몸을 돌려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앞의 몽돌밭에 내려놓았다. “그럼 아저씨를 무조건 믿겠습니다.” 그러면서 선언이라도 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많은 따개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배구공 만한 정체불명의 물건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따개비 사이에는 해파리들이 얼기설기 말라붙어있었다. “쓰레기 수거 수업중, 바다가에서 주은 건데요. 따개비 속에는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는 물건이 들어있어요. 혼자 따개비를 뜯어내다가 아무래도 무서워졌어요. 그렇다고 시시하게 선생님에게 바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죠.” 웅이는 좀전의 침울 속에서 빠져나와 활기를 띠며 당당해지고 있었다. “그래, 스타일 멋있지.” 나는 엄지척을 내보였다. “해적들이 탈취했던 보물섬 지도가 들어있을 수도 있어요.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 웅이의 얼굴은 은밀한 기색이 너울치다가 이내 비장함으로 바뀌여갔다.  나는 풉 하고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광풍이 휘몰아친다, 창대 같은 비줄기가 밤의 장막을 드리운다, 번쩍하는 번개에 그 장막은 찢어진다, 그 번개빛 속으로 한척의 배가 뒤엉켜 몸부림치는 검푸른 바다 속으로 서서히 침몰되여간다, 양피지 지도 한장이 선채 쪽에서 휘뿌려져나오고…  아이가 상상했을 머리 속 정경이 피끗 머리 속으로 스쳐지나면서 나는 차츰 재미있어지려고 하였다.     “무슨 근거로?” 나는 웅이에게 진진하게 따져묻기로 하였다. “봐요. 여기… 제가 따개비들을 떼여내다가 그만둔 곳에서 가죽이 만져진단 말이예요.” 나는 웅이가 가리키는 따개비가 떨어져나간 쪽으로 머리를 낮추어 살폈다. 그리고 식지와 중지를 넣어서 만져보았다. 과연 미끌미끌한 것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웅이의 말대로 가죽임에 틀림없었다. “오, 가능성은 있겠구나. 그럼 어쩌지?” “뜯어서 확인해봐야죠.” 단호하게 말하는 웅이였지만 분리작업은 은근히 나에게로 떠맡기는 얄팍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따개비들을 조심스레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오래동안 그 곳에 붙어있었는지 더러는 쉽게 뜯어지지 않았다. 웅이는 쪼크리고 앉아 떨어져나오는 따개비들을 부지런히 옆으로 밀어냈다. 따개비들이 거의 떨어져나가면서 물건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내 판단으로는 카메라 케이스였지만 서뿔리 입밖으로 번지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여넣고 쪼크리고 앉은 웅이는 어깨를 달싹거렸다. 케이스의 쪼르래기를 열었다. 카메라였다. 웅이의 반짝거리던 눈이 맥없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애끓이며 기다리던 항구에서 허술한 나무배 한척을 마중한 기분이였을가? EOS800D형 Canon카메라, 내가 쓰고 있는 카메라와 똑같은 것이였다. 축축한 습기가 번져왔지만 그렇다고 질퍽한 물기가 있는 것은 아니였다. 왼쪽 모서리는 케이스 바닥에 몰려있던 모래알갱이에 긁혀지고 닳아진 자국들이 살짝 남아있었다. 따개비들이 악착같이 붙어서 서식을 했을 정도이면 바다물 속에 잠겨있던 시간은 오래된듯 싶지만 카메라는 다소 멀쩡하다 싶을 정도로 보존이 잘되여있었다. 버튼을 눌러보았다. 깜박 불이 들어오는듯 싶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웅이는 이미 흥미를 잃고 나와 멀어져서 차가 세워진 방향으로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웅이의 뒤모습과 바다를 번갈아보았다. 시월 오후 다섯시의 빛은 너무 짧았다. 오늘의 빛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팔을 잡는 사람의 손 같았다. 차거워지는 팔뚝에 얹히는 무게감과 온기의 감촉이 닿았다. 빛이 산란되여가고 있었다. 웅이의 뒤모습은 불그스레한 노을빛 물감에 풀어져서 륜곽이 뚜렷하지 않았다. 자그마한 슬픔의 덩어리가 굴러가고 있었다. 상대의 슬픔에 적절한 거리를 지켜주는 례의를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슬픔의 원인을 추측하지 않고 위로의 형태로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저 바라보는 것. 웅이네 집에 들어섰지만 웅이네는 그 때까지 아직 돌아와있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면서 웅이는 다시 활기찬 아이로 돌아왔다. 문이 열려지면서 바로 거실로 뛰여들어가 전등을 밝히고는 곧바로 계단 쪽으로 뛰여갔다. 쿵쿵쿵 계단을 뛰여올라가는 소리가 내 앞에서 들렸다. 나는 웅이를 따라 캐논 카메라를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웅이는 다락방의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천정을 쳐다보다가 다시 쪼르르 달려가 다락방 계단 아래를 허리 굽혀 살피기도 하였다. 이 시각부터 다락방의 주인은 자신이며 엄마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아지트가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벽지가 도배되지 않은 뒤쪽 벽이 웅이에게는 커다란 캔버스처럼 보였던 모양이였다. “아저씨, 여기에다 그림을 그려도 되는 거죠?” 웅이의 물음은 언제나 간청이 아닌 허락을 강요하는 식이였다. 나는 공구함에서 목수용 사각형 연필심을 꺼내 웅이에게 넘겼다. 웅이에게 벽면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다시 아래로 급히 뛰여내려갔다. 차에 챙겨둔 내 캐논 카메라를 갖고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웅이는 이미 사다리에 올라서있었다. 아이가 올라서기에는 위험한 사다리였다. 웅이는 벽면에 분수를 뿜어대는 고래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조심해, 떨어지지 말고.” 나는 건성으로 웅이에게 주의를 주고 내 할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바다가에서 주어온 캐논 카메라를 마른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내고 카메라 청소용 붓으로 구석구석에 박혀있는 모래알들을 털어낸 뒤에 빠데리를 탈거했다. 내 손놀림은 바빠졌으며 호흡도 빨라졌다. 내 관심은 언녕 웅이에게서 멀어졌다. 내 캐논 카메라의 빠데리를 뽑아서 바다가에서 주어온 카메라에 끼워넣었다. 나는 심호흡을 길게 하고 전원버튼을 눌렀다. 성공이였다. 카메라는 거짓말처럼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였다.  앨범의 버튼을 눌러가면서 나는 위험하게 타인의 생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빨라지는 내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 속의 이미지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덧 나는 그 이미지들에 물음표를 슬쩍 걸어두었다가 느낌표를 떨구면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타인의 생활 속에서 나는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이야몬드빛이 마루바닥에서부터 내 눈을 찔러왔다. 뭐지? 하면서 카메라 화면에서 눈을 떼고 다시 마루바닥을 내려보았다. 빨간 발톱 우에 박혀있는 큐빅이였다.  뭐지? 하면서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빨간 발톱은 보라색 슬리퍼에서 삐죽 나와있었다.  보라색 슬리퍼? 빨간 매니큐어의 발톱! 웅이네가 언제 내 옆에 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함께 카메라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몸 뒤쪽으로 숨기면서 튀여올랐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코끝을 스쳤다. 입속이 바짝바짝 말라가면서 나는 현기증으로 어질거렸다. “뭔가에 그토록 집중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군요.” 그녀는 입가에 신비로운 웃음을 피워올리면서 말했다. 비난은 아니였다. 빌어먹을, 또 그 웃음. 내가 막 카메라 출처에 대해 설명하려고 입을 열려는데 웅이가 끼여들었다. “엄마, 멋지죠?” 웅이가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녀를 벽면 쪽으로 끌어갔다. 동시에 고개를 탈고 내 쪽으로 찡긋 눈짓을 보내왔다. 카메라 사건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나는 널려진 것들을 대충 정리하고 웅이네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먼저 샤워를 해야 했다. 먼지와 때는 땀구멍 속에 박혀있는듯 깨끗이 씻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문지르고 씻다 보니 곧 깨끗해졌다. 문제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제될 일이 많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떤 미묘한 일은 이미 진행되여 조여오는듯하였으며 웅이와는 웅이가 말했듯이 비밀을 공유한 공모자로 되여있었다. 그이들 모자 사이에 나는 엄연히 개입되고 있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먼지와 때처럼 시간을 들여 거뜬히 씻어낼 일이 아니였다.   나는 저녁식사도 뒤로 미루고 바다가에서 주어온 캐논 카메라의 사진을 컴퓨터로 옮겼다. 그리고 동영상도 있었다.  어느 해살 맑은 날이였을 것이다. 남자와 녀자의 무릎 아래 종아리와 발이 서로를 밀어내려는듯 서로를 끌어당기려는듯 엇갈리여 바다물 속에 잠겨있었다. 투명한 바다물은 깊이를 알 수 없게 아스라니 펼쳐져있었으며 해빛은 물 표면에서 자잘한 물고기 비늘로 반사되여 일렁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한장씩 반복 대조해보아야만 미세한 차이를 분별해낼 수 있는 발사진 스물세장이 카메라 앨범에 저장되여있었다.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놓으니 이미지들은 생생히 살아서 움직이였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어지럼증이 나는 수족관의 유리벽처럼 컴퓨터 창은 몽환의 세계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남자와 녀자가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시간들과 캐논 카메라가 바다물 속에 잠겨 따개비들이 들어붙고 해파리들이 감겨가고 있었을 그 시간들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와 녀자의 발은 카메라 속에서, 어쩌면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마지막 한순간까지 서로를 념려하면서도 서로에게 뛰여들지 않는 그 자세로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카메라가 바다가로 밀려온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을 주어온 웅이도 잘못한 것이고, 기어이 그것을 재생시킨 나도 잘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문득 카메라 주인을 찾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카메라에는 발사진을 제외하고는 얼굴사진은 없었다. 다만 일분 이십삼초의 동영상 하나가 있을 뿐이였다. 파란 물하늘이 흐르는 곳, 울긋불긋 피여난 산호초 사이로 까만 오리발이 신겨져있는 발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의 투영으로 한껏 길어진 까만 수영복 차림의 다리가 물을 휘젓고 있었다. 일분 이십삼초 동영상의 전부의 기록이였다. 내 인터넷 SNS에 동영상과 사진을 올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내 손에까지 들어온 경과를 생략하고 카메라가 발견된 좌망 바가가 위치를 밝히고 주인을 찾고 있다는 문구와 메일주소를 남겼다. 휴대폰 번호를 추가했다가 다시 삭제해버렸다. 별 볼일 없는 자들의 시끄러운 통화가 걱정되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리고 난 뒤에야 짧은 하루의 긴 이야기가 이미 과거형으로 나에게서 멀어져갔으며 나는 안온하게 맥주를 마시며 여유있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녀인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없을 것이다. 그 뒤로 나의 일상은 고요하게 흘러갔으며 마무리공사는 계획보다 이틀 먼저 끝나게 되였다.  공사가 끝나고 삼일 후, 나는 웅이네를 만나러 갔다. 정산과 함께 추후 발생될 공사 중의 실수건을 합의하러 웅이네 집으로 갔다.   녀인은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녀인이 부엌으로 커피 내리러 간 사이, 쏘파에 앉아있던 나는 탁자에 엎어져있는 책에 눈길을 주었다.  그저 눈으로 들어오게 된 걸 봤을 뿐, 부러 알고 싶은 마음은 아니지. 하면서 나는 책 제목을 훑었다. 《바다》였다. 작가는 존 밴빌, 아마도 외국소설인가 보다 하면서 손이 막 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정을 멀뚱히 올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내리고 있을 때 엎어진 《바다》 밑에는 메모지 한장이 깔려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 놓여진 무테안경도. 메모지에 한장 가득 메모글이 적혀있는듯하였다. 《바다》밖으로 로출된 부분에는 검정깨알 같은 글씨가 박혀있었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리듯이 허리를 굽혀 그 메모를 보았다.   시간은  바다,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 그는 철창 밖,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 그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바다, 그 어두운 방…   책 속의 구절은 아닐 것이다. 나는 허리를 펴고 눈을 지긋이 감고 메모지에 적혀있는 그 어두운 방을 생각했다. 숨을 고르면서.   녀인은 커피잔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녀인은 공사 시작 전 빈틈없이 계약서를 작성했듯이 추후 발생될 실수건들도 명료하게 작성해놓았었다. 인테리어 나머지 비용은 이미 계좌이체시킨 상태였다. 녀인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해주었다. 녀인과 커피를 마시며 간단히 공사건에 대해 말이 오가면서 나는 자꾸 《바다》에 깔려있는 메모지에 눈길이 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녀인도 내 의중을 눈치채는듯하면서도 굳이 메모지를 따로 치우지 않았다. 녀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웅이네 집에서 나왔다. 곽명을 불러서 저녁에는 근사한 축하파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차가 세워진 옆골목으로 걸어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메일 한통이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떠있었다.   오후 세시, 좌망 바가가 좌망커피숍에서 만납시다.  캐논 카메라 주인입니다.    들어가는 말, 나오는 말, 호칭도 모두 생락한 메일답지 않은 건조한 문자메시지였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심장이 뛰는 박동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나를 미행하고 있는듯하였다.  그동안 SNS에 올렸던 게시물은 조회수는 물론 공유수도 폭증했으며 마음을 보내주고 따뜻한 댓글이 끊이지 않고 갱신되여갔다. 가끔 오버 잘하는 네티즌이 보내오는 응원의 메일도 날아들었지만 만나자고, 그것도 주인이라며 사뭇 건방지게 날려온 메일은 처음이였다. 메일의 진가를 떠나서 고의적인 해프닝일지라도 나는 만나기로 하였다. 헛물을 켜도 별로 억울할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갑자기 백수가 된 상태가 아닌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세시까지는 넉넉히 세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차를 몰고 좌망커피숍으로 갔다. 커피와 양고기즈란토스트를 시켜놓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도 해결하고 그동안 미루었던 독서도 하면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멀리서 잘 보이도록 캐논 카메라를 테이블 오른쪽 모퉁이에 얹어놓았다. 그리고 앉아서 책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모범생 자세의 책읽기는 몸을 써서 하는 일에 익숙해진 나에게 자꾸 흡연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책을 읽다가 몇번을 커피숍 뒤마당의 지정된 흡연구역으로 들락거렸다.  두시 사십분이 되여서 나는 책을 가방에 넣어버리고 뒤마당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다시 커피숍에 들어갔다. 한 녀인이 내가 앉았던 자리의 맞은편에 와서 앉아있었다. 정물화 속의 사물처럼 보였다. 캐논 카메라 녀인. 나는 괜히 긴장해졌다. 까만 벨벳핀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어올린,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녀인의 뒤모습을 살피며 녀인에게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녀인이 머리를 돌렸다. 나는 그만 악하고 비명을 지를 번하였다. 오전에 금방 만났던 웅이네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나를 맞았다. 설마, 하면서 나는 어정쩡 그녀와 마주앉았다. 둘 사이에는 어색하면서 간단한 목례만 있었을 뿐이였다. 한동안 나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탁자 밑을 살폈다.  나는 곽명이 말하던 떠도는 소문을 곱씹으면서 설마 아니겠지, 말도 안되는 우연은 죽었다 다시 깨도 없다면서 그녀가 캐논 카메라의 주인이 아니라고 강한 부정을 보냈지만 오전에 훔쳐보았던 ‘바다, 그 어두운 방’ 메모를 떠올리면서 가능성에 대해서 류추해보았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네요. 소문을 믿어요?” 그녀가 침묵을 깼다. 나는 굳이 무슨 소문? 하면서 금시초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나의 대답하지 않음이 대답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우연을 믿고 있어요? 의심하면서 믿고 있어요?” 그녀가 또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이미 체념한 질문이였다. “편견과 맞서는 데는 오만 뿐만이 아니겠지요?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져서 나를 잊으면서 살 수 없을가요?” 그녀는 창밖으로 머리를 돌리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은 오후 세시의 해빛으로 나른해진 바다의 물결로 차있었다. 출처:2018 제6호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 조원   불타는 금요일 밤을 보내고 나면 토요일은 한가롭고 여유롭다. 또한 일요일 밤은 우울해지고 월요일 아침은 늘 난데없이 찾아오는듯하고.  샐러리맨은 아니지만 요즘 나는 샐러리맨의 절박한 주일감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알람이 울린 후 30분이나 지나서야 잠에서 깨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챙겨서 나는 작업실이자 거주공간인 집을 나섰다. 바깥은 짙은 안개가 서려있었다. 얼굴은 없지만 수많은 손가락을 갖고 있는 가을바람이 안개의 립자들을 밀어가면서 세집 너머의 가시거리를 확보해주고 있었다. 가로수들의 록음은 여름이 남긴 자취로 여직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경계가 흐릿하면 사물을 살피려는 시선은 오히려 살아난다. 내가 몰고 다니는 낡은 찌프차 한대는 집앞 골목길에 세워져있다. 어디든 빈자리를 찾아 주차하기에 자리는 일정하지 않다. 매일 일이 끝나고 차에 실었던 자재와 공구함과 연장들을 지하창고로 옮겨둔다. 차에 두면 도적맞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하창고로 내려가 공구함과 연장들을 차에 실어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웅이네 전원주택의 다락방과 아래층의 거주공간을 이어주는 계단을 들이는 날이다. 그 뜻인즉 웅이네 다락방 증축공사가 마무리가 되여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직원도 없고 사무실도 없는 단독작업의 인테리어사업자인 나에게 주어진 다락방 증축공사는 대공사임에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나에 대한 신뢰와 나의 출중한 기술이라고 자부했지만 마무리가 되여가면서 왜 꼭 나였을가 하고 반문을 하게 된다. 요즘 부쩍 떠오르게 되는 생각이다.  2개월 전, 함께 공사현장을 다니다가 작은 규모의 건축회사에 취직한 장위에게서 전원주택의 다락방 증축공사건을 소개받았다. 위치와 사전 검측을 거친 뒤 설계도면, 작업기획서, 견적서를 제출한 결과 오다가 떨어졌던 것이다. 최소한의 인력 동원이라는 주인집의 특별조건을 장위가 알아내고 귀띔해주어서 ‘콘크리트기초공사 2명, 전기공사 1명, 난방및단열공사 2명, 배수공사 1명, 페인트공사 1명, 보조 1명과 본인. 총 9명 인력 동원’이라고 견적서 하단에 상세한 인력배정계획을 첨가했던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근간에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지인들의 인사말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어서 좋다. 불평을 늘여놓지 않아도 좋다. 그들이 인사처럼 물어오는 말에는 어떤 부정적 의도가 들어있지 않지만 내게는 수많은 생각과 느낌을 가져다주군 하였다. 이번 공사가 끝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을듯 싶기도 하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에 들어섰다. 웅크리고 앉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짐승이 기습하듯 안개무리들이 재빠르게 덮쳐왔다. 바다바람을 타고 차창으로 날려드는 안개에는 날이 서있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이 시려왔다. 도어를 올리려다 말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두손은 내 나이와는 물론 내가 하는 일과 잘 어울린다. 큰 상처는 없지만 여기저기 다친 자국이 남아있다. 하지만 손가락은 열개 모두 성하다. 그 손이 바로 나, 인테리어업자의 손이다. 피부는 거칠고 두껍지만 굳은살은 없다. 손이 단단하면 리력은 두툼할 것이다. 다만 복잡한 과거가 아니라 파도를 넘어온 력사.  어쨌든 나는 가장 단순하게 살기로 했으며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 손으로 바다마을 좌망 뿐만 아니라 시내 여러 공사장에서 한몫을 했다. 얼핏 어떤 건물들을 스쳐지날 때면 살아있는 존재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손을 댄 건물은 잊는 법이 없으니까.  웅이네 집은 시내에서 동쪽으로 40키로메터 떨어진 도시 외곽의 바다마을 좌망에 위치하였다. 웅이네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지만 좌망이라는 마을 자체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휘여진 해안을 따라서 주택들이 산비탈에 제멋대로 앉아있기에 걸어서 가기에는 불편한 거리였다. 웅이네 집 경사진 옆골목에 차를 세우고 공구함과 연장을 부리우고 있는데 웅이가 엄마와 함께 대문에서 마침 나서고 있었다. 녀인과 아이가 서있는 뒤쪽 내리막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안개가 걷혀져가면서 바다가 어릿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목청껏 기분 좋게 인사를 보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녀인은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어보였으며 웅이는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추스려 올리면서 “아저씨다, 엄마.” 하면서 환호에 가깝게 소리질렀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곧이어 웅이의 인사가 들려왔다. 나는 공구함과 연장을 들고 그들이 서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엄마, 오늘 유치원 가지 않으면 안돼요? 보고 싶어요. 신기하잖아요. 천정이 뚫리고 계단으로 통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해요. 그 순간을 확인하고 싶단 말이예요.” 엄마에게서 웅이가 오늘의 공사일정을 들었던 모양이였다. “유치원 가야 한다.” 녀인은 아이의 말을 짧게 끊었다.  웅이는 애써 애원을 가장한 교활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나는 설핏 아이들의 어른스러움과 교활함은 어쩌면 어른들의 순탄치 않은 삶의 반영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였다.  “공사현장은 아이들이 함부로 들어서는 곳이 아니라고 몇번을 말했지. 어른들의 허락 없이는 한발작도 넘어서서는 안되는 금지구역이야. 오늘은 더욱 안돼. 위험해.” 나는 손의 들 것을 내려놓고 웅이의 뒤통수를 가볍게 다독이였다. 촉촉한 물기가 기분 좋게 손바닥에 닿았다. 녀인은 계단 제작의 하청업체가 열시 쯤에 도착할 것이며 오늘은 하루 집에 있을 것이며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올 것이라고 나에게 말하고는 아이를 데리고 옆골목에 주차된 차 쪽으로 옮겨갔다.  나는 웅이네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증축공사 계약서에 녀인은 공사중에서 류의해야 할 점을 세부적으로 명백하게 기재했었다. 작업시일에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다락방의 공사는 완전 분리상태에서 진행, 다락방 진입은 뒤마당에 위치한 철제계단을 리용할 것, 다락방을 이어주는 계단은 작업완료 5일 전 장착, 주5일 근무에 작업시간은 아침 9시에서 오후 5시, 당일 발생되는 건축쓰레기는 당일로 처리할 것 등등의 작업규칙을.  나는 마당에서 집 출입문으로 향한 몽돌을 깔아놓은 좁은 길 따라 잔디밭을 지나고 화단을 에돌아 뒤마당의 철제계단 쪽으로 향했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외양의 흰색으로 매끈하게 페인트칠한 외벽을 따라 걸었다. 아주 오래전 파란 페인트칠을 했을 철제계단은 녹물로 번졌으며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떨어져나간 부위에는 녹쓸어있었다. 작업하는 사이에 오르내리면서 손길이 자주 닿았던 부위는 녹들이 밀려가고 더러는 철색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다소 가파른 계단을 타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유심히 계단을 보는 여유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다락방은 성인의 보통키 높이로 2인용 침대 세개 정도 들일 수 있는 공간이다. 앞마당을 향한 작고 낡은 창틀을 떼여내고 거의 벽면 전체를 통유리로 방의 채도를 넓혔으며 다락방에 서면 멀리 아래쪽으로 가물가물 바다가 보일 정도의 시야를 확보해주었다. 바닥은 쪽매널 대신 옅은 커피색의 원목마루로 마무리를 해주었다. 벽면은 오늘 계단이 들어서고 뒤마당으로 향한 문을 완전 봉합한 뒤 우유빛 벽지를 바르면 마루의 어두운 색상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좁은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이 날 것이다. 공구함에서 공구와 연장을 꺼내다 말고 나는 잠간 쉬기로 했다. 혼자 힘으로는 계단이 들어설 자리를 떼여낼 수도 없거니와 웅이네가 집으로 돌아와야만 작업을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통풍구 창을 열어두고 창가에 앉았다. 눈을 뜬 채 들숨 한번 길게, 날숨 한번 길게 반복해서 쉬고 있으니 동공이 커다랗게 열려가면서 침침했던 눈은 다른 세상의 눈이 되여갔다.    마당 화단 곁, 똬리를 틀고 수도꼭지에 맞물려있는 호스. 담벼락 너머로부터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져있는 릉소화 몇송이의 잔해.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듯 대문 쪽으로 핸들을 틀고 있는 파란 어린이용 자전거와 빙하기의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건거 바구니에 꼬꾸라진 채 꼬리를 치켜든 공룡 장난감. 긴 밤의 외로움과 새벽 안개의 공포, 그 시간을 홀로가 아닌 셋이서 무난히 견뎌온 안도감으로  파라솔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진 둥근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와 쪽걸상 하나. 외출해서 밤새 귀가하지 않았는지 길 건너 이웃 울안의 빨래건조대에 걸쳐져있는 빨래들. 경사진 아래쪽으로 보이는 앞집의 지붕과 그 사이로 보이는 교회의 십자가. 내 시야로 들어오는 사물들은 낯설었다. 이 낯섬을 카메라 렌즈 속에 담으면 적격이겠다 싶었지만 바로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때로는 사물들의 적요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나는 낯설어지는 자신을 느껴가고 있었다. 증축 전 처음으로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들어섰을 때의 낯섬과 이질감과는 또 다른 낯섬이였다.  다락방에 널려있던 웅이네의 물건을 아래 마당으로 운반하던 날의 낯섬도 떠올랐다.  공사 시작과 함께 다락방의 물건들이 마당 주변에 흩어지면 집주인은 갑자기 바빠졌다. 내게 의미가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무의미하게 여겨졌던 물건들이 갑자기 의미를 지니기라도 하는 걸가.  타인의 어둡고 내밀한 구석을 파헤치고 들추어내던 서걱거리던 감정과 설핏설핏 호기심이 발동되는 충동은 혼잡스러웠다. 매사에 서늘한 구석이 있던 웅이네도 마당의 해빛 속으로 다락방의 물건들이 하나 둘 널려져가면서 거만함이 숨겨져있는 오기도 허물어져갔다. 어쩌면 오래동안 쓸모없이 적치되여있던 물건들처럼 그녀도 초라하게 오그라져가는듯하였다. 셀로판지를 두르고 붉은색 비닐끈으로 십자모양으로 포장된 케이스일듯한 물건을 계단에서 들고 내려오는 나에게 그녀가 덮치기라도 하듯 나꿔채가면서 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아귀에 잠간 잡혔던 그 순간은 시도 때도 없이 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그 순간 뿐인 것처럼.  코팅장갑이 끼여진 나의 손이였지만 그녀의 길쭉한 손가락의 단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함부로 타인의 손에서 나돌게 해서는 안되는 방어 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이 떠오르면 자꾸 셀로판지에 포장되였던 그 물건의 정체에 내 사유의 흐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아마도 웨딩사진일 것이다 라는 추측에까지 몰고 갔다.  대문이 열리면서 코마루가 유난히 날이 선 곽명이 마당에 들어섰다. 내 눈앞에 펼쳐졌던 풍경들은 편린처럼 쪼개지면서 허공으로 날려갔으며 나는 다시 익숙한 나로 돌아왔다.  곽명은 작업시간 외에 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고뭉치였지만 협동작업 중에는 상대의 몸의 리듬을 온몸으로 흡수해들이는 센스 있는 나의 파트너였다. 다락방에 들어온 곽명은 마루에 앉아있는 나와 마주앉았다. 오후에는 타업체의 창틀 바꾸는 일감이 있으니 계단 들이기를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형님, 집주인 말인데… 여기 좌망으로 이사든 지 일년도 안된답니다.” 곽명이 은밀한 화두를 꺼내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의 눈섭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밀려오고 밀려가는듯 움찔했다. “수상하단 말입니다. 떠도는 소문은 한두가지가 아니구요.” 곽명은 상대가 속이 간질거리게 하회를 기다리게 유도하는 짓거리로 말을 끝내고 잠간 입을 다물었다.  “소문이라는 건 그저 소문일 뿐. 우리 일군들은 집주인의 사생활과는 무관하게 할일만 하면 되는게 아닌가? 자, 일어서. 일이나 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나는 말했다. “칫, 30대 중반의 녀자가 아이 하나 데리고 시내도 아닌 바다마을로 이사든다는 자체가 사연이 있단 말입니다.” 곽명이 나를 붙잡아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 녀자, 남편이 바다에 빠져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남편이 어느 고위층 관리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 가서 고위층 관리가 대가로 녀자에게 좌망에 전원주택을 사줬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생각해봐요.  30대 중반의 녀자가 무슨 실력으로 좌망에 전원주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곽명의 바다눈섭은 파고의 떨림이 더 격렬해졌다. “유명인사의 부도덕한 성공에는 찬미를 보내면서 백성들의 하잘 것 없는 부도덕한 성공에는 도덕의 자대를 휘둘러서야 쓰겠냐? 조용히 하라.” 나의 랭소는 뜨거워지려고 하였다. “형님, 형님의 그런 지적인 표정이 싫단 말입니다. 뭔가를 자꾸 생각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가짜라니까요.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하는 게 진짜란 말씀입니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에 복잡하게 생각할 게 뭐 있냐고.” “상관이 없다고요? 맙시사 형님, 상관이 있고 없고는 천천히 들어주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한심한 건 고위층 관리가 이 집으로 드나든다는 소문도 있고 더 나아가서 고위층 관리가 탐오혐의로 조사받는 중인데 이 집이 압수당할지도 모른답니다.” “너 성깔머리와는 별개로 드라마 꽤나 봐왔네. 공사일 그만두고 드라마 극본이나 쓰지 그러게.” “아핫, 형님도 참. 그리 추측이 안된단 말입니까? 최소한 인력 투입도 사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란 말이구요. 고위층 관리와의 똥구린 내연관계를 은페하기 위해서는 형님이 필요하지 말입니다.” “뜬금없이 거기에 내가 왜 들어가냐구.” “잠간만, 이런 말 해도 될지는 몰라도 그 녀자… 형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도 있단 말입니다.” “뭐야?” 내가 내지르는 소리에 곽명이 주춤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녀자 대형 인테리어업체들의 견적서 다 패스해버리고 형님에게 일 맡긴 자체부터 의도적이라는 추측도 나돌구요.” “허참, 됐고. 나는 못 들은 걸로 한다.” 나는 다시 일어서면서 마당 쪽을 내려보았다. 웅이네가 들어서고 있었다. “자, 서두르자.” 나는 곽명을 재촉했다.  곽명과 나는 라지오를 틀어놓고 일하면서 가끔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흥겹게 몸을 흔들기도 했지만 오늘은 방금 전의 대화로 서로의 눈치가 겉돌기만 하고 손발이 엇나갔다. 게다가 아래층에 있을 웅이네가 괜히 신경쓰이였다. 다행 계단이 들어설 자리를 이미 먼저 사각으로 구멍을 내고 덮개식으로 막았던 것이여서 얼마 품을 들이지 않고 우리는 들어낼 수 있었다.  진공청소기로 다락방 구멍 주변을 청소하고 아래층 거실에 떨어진 먼지와 부스레기들도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아래층 청소를 곽명은 고약하게 나에게 떠밀어버렸다. 그리고는 짐짓 도와줄 것이라도 있는듯 다락방의 바닥에 엎드려 사각 구멍에 머리를 내밀고 짙은 파도눈섭을 움쭉대면서 아래층의 동향을 살폈다. 웅이네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든 벌어지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눈빛은 간절한 기다림으로 번뜩이였다. 하지만 웅이네는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래층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잠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족사진은 물론 내가 단정짓던 웨딩사진, 하다못해 촌스러운 유화를 담은 케이스 따위는 벽의 어디에도 걸려있지 않았다.   오늘은 두번째로 웅이네 살고 있는 공간에 들어선 것이다. 공사가 시작되여 며칠 후, 계단이 들어설 자리에 구멍을 내던 날을 제외하고는 다락방공사는 완전 분리상태에서 진행이 되였으며 그녀도 일절 다락방으로 올라오지 않아 그녀와는 스치는 일 따위 없었다. 아주 드물게 정원의 파라솔 아래에 등을 지고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을 다락방에서 볼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집에 사람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틀어놓았던 라지오의 볼륨을 낮추었다. 내가 흥얼거렸던 노래소리를 그녀가 들었다고 생각을 하니 심히 부끄러웠다.  열시 정각에 계단하청업체에서 도착, 두시간 남짓 시간을 들여서 계단이 장착되였다. 그 사이에 나와 곽명은 다락방 뒤마당으로 향한 문을 벽돌로 막았다. 그러니까 다락방과 아래층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졌으며 다락방으로 올라서려면 아래층을 거쳐야만 했다. 계단하청업체 일군들이 물러나고 나와 곽명도 점심식사하러 나서려고 정원 쪽의 수도꼭지를 틀고 호스에서 나오는 물로 손을 씻을 무렵 그녀가 정원으로 나왔다.  그녀는 엷은 미색 코드로 치마를 입었을 몸을 가린 차림새였다. 덕분에 슬리퍼가 신겨진 맨발과 종아리가 오히려 시선 집중을 강요하는 꼴이였다. 간단한 점심을 준비했다면서 파라솔 아래 탁자 우에 토스트와 빈 유리컵 두개와 우유팩, 커피 두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더 꺼내서 자리를 만들어주고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웅이네 집의 창문을 등지고 앉아 양고기즈란토스트를 먹고 앉아있던 나는 야릇한 웃음을 입꼬리에 달고 토스트를 베여먹으며 이따금씩 내 어깨 너머로 집안 쪽을 힐끔대는 곽명을 의식하고 있었다. 파라솔 아래 음지 쪽에 앉아있는 나였지만 목덜미가 뻣뻣해지면서 뒤통수가 후끈거렸다. 점심식사를 후닥닥 끝내고 곽명은 서둘러 떠났고 나는 오후 작업을 계속해야 했으므로 쟁반에 빈 그릇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부엌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잠간 멈추어섰을 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부엌이 그쪽에 있었다.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거실에서 은근히 부유하는 아로마향을 맡으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바닥에는 부엌 미닫이문의 마름무꼴 무늬의 뚜렷한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부엌문 쪽으로 가까워졌을 때, 짧은 실크 잠옷 치마자락에 감싸여진, 동그랗게 말려진 녀인의 엉덩이를 나는 보고 말았다.  앞쪽으로 허리가 굽혀진 채 파여진 엉덩이골의 륜곽까지 드러난 엉덩이는 찰랑찰랑 물결이 번지듯 좌우로 일렁이고 있었다. 내 눈길은 보라색 슬리퍼 사이로 꽃처럼 피여난 녀인의 발꿈치에서 하얀 종아리를 훑고 지나 탄력 있는 허벅지 우쪽으로 거침없이 기여올라갔다. 종당에는 살랑대는 실크 잠옷 치마자락 밑에서 숨쉬고 있는 팬티의 오목부분에서 멈추어버렸다.  황급히 돌아서려는 찰나, 녀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녀인의 손에 들려있는 매니큐어붓은 빨간 혀끝처럼 보였다. 녀인은 그 자세로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던 것이다.  녀인은 나를 등지고 선 채 고개만 내 쪽으로 틀었다. 녀인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정오의 해빛이 사정없이 부엌으로 비쳐들고 있었다. 녀인이 허리를 한껏 펴면서 가슴 쪽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를 어깨 뒤쪽으로 넘겼다. 훤히 드러난 오른쪽 어깨, 겨드랑이 사이의 접혀진 살, 쇄골의 굴곡과 실크 잠옷 속에서 갑자기 놀라서 튕겨올라온듯한 노브래지어의 젖가슴은 강렬한 해빛 아래에서 오히려 헛것처럼 보였다. 녀인의 몸에서 피여오르는 냄새는 아득하기만 하였다.  금방 잠에서 깨여나기라도 하듯 가늘게 치켜뜬 녀인의 눈과 나는 마주쳤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행위를 감추려고 숨을 잠간 멈추었던 것이 오히려 나의 머리 속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나는 머뭇대다가 재빠르게 쟁반을 녀인에게 내밀었다. 녀인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지으면서 쟁반을 받았고 나는 휘청대며 계단을 밟고 성급히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공간이라는 개념은 때로는 특이하다. 출입문만 닫으면 다락방은 독립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계단으로 이어졌다는 의미 하나로 다락방은 더 이상의 홀로가 아닌, 거실공간에 존속되여있는 부가공간으로 된듯 싶었다.  다락방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아래층 녀인의 시간을 함께 나누어쓰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일을 하면서 나는 자꾸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녀인의 발자국 소리를 환청으로 듣고 있었다. 쟁반을 받으면서 던졌던 녀인의 그 웃음, 차라리 위선남에게 일격을 가하는 모욕의 화살이였다면 속이 편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 웃음의 정체를 되새겨보면서 고양이처럼 달랑 의자에 올라앉아 엄지발톱에 톡톡 매니큐어를 바르는 녀인의 모습이 언뜻언뜻 떠올라서 진저리쳐질 정도였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혼이 빠져나간 몸은 무기력하였다. 마루에 주저앉아 멍청히 있다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네시가 되여가고 있었다. 도무지 손에 일이 잡히지 않던 터라 오늘 일은 이대로 마감하려고 공구들과 연장들을 정리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주인집 녀자의 폰번호가 액정에 떠있었다. 아주 잠간 망설이다가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말하는 쪽은 녀인이였으며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듣고 있는 쪽은 나였다. 불과 일분도 안되는 전화 속 녀인의 말을 듣고 있는 사이에 내 머리 속은 휙휙 거센 바람이 무질서하게 휘몰아치는듯하였다. 어떤 불미스러운 일에 서서히 발을 내디뎌간다는 불안, 그 불안 속으로는 기필코 빨려들지 않겠다는 다짐, 그러면서도 떨쳐낼 수 없는 유혹에 기댄 사소한 희망이 그 다짐을 쓸어갔다가 다시 밀려오면서 혼란스러웠다.  녀인은 언제 집을 나가고 없었다. 시내로 나갔다가 웅이의 하교시간을 맞추어 돌아온다는 게 교통체증으로 제시간에 웅이를 마중할 수 없는 사태이니 웅이를 집에 데려다줄 수 없겠냐는 간곡한 부탁이였다.   결국에는 그녀의 부탁을 수락하고 말았다. 어차피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음에랴. 때로 선택은 머리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입이 먼저 주도권을 잡게 되며 머리가 뒤따라 나와서 선택의 당위성을 강조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한가 보다. 유치원을 향해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이미 후회를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무가내에 체념하는 낯선 자신을 다시 느껴갔다. 웅이를 유치원에서 마중해서 차에 태웠다. “아저씨, 계단 들어섰어요?” 웅이가 옆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면서 물었다. 엄마는? 하는 질문도 없었다. 가방을 무릎에 올려둔 채로. “응. 그래. 집에 가면 올라가볼 수 있을 거야. 계단을 타고 다락방을.” 나는 웅이 쪽으로 허리를 굽혀 안전벨트를 점검하였다. 웅이 몸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오늘 바다로 나갔댔어?” 고요한 저녁나절의 바다가 길을 따라 운전하면서 나는 웅이에게 물었다.  “어, 신기하다. 어찌 알아요? 아저씨. 오늘 생활체험 수업이 있었거든요. 바다가 쓰레기 수거 수업.” “아저씨 코는 개코다. 생선냄새에는 환장하거든.” “아, 그거요…” 하면서 웅이는 말을 흐리면서 옷깃을 당겨 코끝으로 냄새를 맡았다.  무릎에 놓여진 가방을 다시 한번 품에 꼭 안는 웅이의 곁모습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웅이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웅이 쪽 차창 밖으로는 듬성듬성 앉은 주택들과 산비탈이 뒤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나와 웅이 사이에는 서걱거리는 침묵이 갑자기 끼여들었다. 내 쪽의 차창 밖으로는 썰물이 밀려가면서 시꺼먼 개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워져가는 바다가는 허무한 시간의 파편들이 널려있는듯하였다.  바다가 대로변에서 웅이네 집 쪽으로 올라가는 올리막길로 차의 방향을 틀려는 무렵이였다. “아저씨, 함께 바다 구경하고 집에 가면 안돼요?” 웅이가 가방을 꼭 그러안고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나는 차를 언덕길 옆에 주차시키고 내렸다. 뒤따라 웅이가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꽤나 무거워보였다. 내가 들어준대도 품에 꼭 안고 내 뒤를 따라 길 건너 바다가의 몽돌밭까지 따라왔다. 우리는 나란히 몽돌밭에 앉았다. 한낮의 따가운 해볕에 달구어졌던 몽돌은 온기가 여직 남아있었다. 가까운 포구 쪽에는 난파어선 한척이 거뭇거뭇해져가는 어스름 속에서 힘 빠져가는 마지막 몸부림인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갈매기들의 무질서한 비행은 노을을 준비하며 높아져가는 하늘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저씨, 비밀이 생겼다는 건 근심이 생겼다는 말이겠지요?” 웅이가 두팔로 무릎을 감싸고 머리를 떨구고 나직이 물어왔다. “근심이 생겼다는 건 어른이 되여간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나는 웅이의 조그만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혹시 가족이야기? 하면서 나는 다소 긴장해졌다. 어른들은 말이죠. 의심하면서도 믿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아요. 오른쪽 볼을 무릎에 대고 나른해진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리면서 웅이가 말했다. “어른들이라고 무조건 그런 건 아니야. 례를 들면 아저씨 같은 어른.” 가슴팍을 두드리며 사뭇 사내다운 티를 끌어올리면서 나는 말하고 있었지만 살짝 동요가 일었다. 머뭇거리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하는 내 마음속에 현미경이라도 들이대려는듯 웅이의 깜박이는 두눈은 오래도록 나를 훑어내렸다. 이윽고 말이 없던 웅이가 몸을 돌려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앞의 몽돌밭에 내려놓았다. “그럼 아저씨를 무조건 믿겠습니다.” 그러면서 선언이라도 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많은 따개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배구공 만한 정체불명의 물건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따개비 사이에는 해파리들이 얼기설기 말라붙어있었다. “쓰레기 수거 수업중, 바다가에서 주은 건데요. 따개비 속에는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는 물건이 들어있어요. 혼자 따개비를 뜯어내다가 아무래도 무서워졌어요. 그렇다고 시시하게 선생님에게 바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죠.” 웅이는 좀전의 침울 속에서 빠져나와 활기를 띠며 당당해지고 있었다. “그래, 스타일 멋있지.” 나는 엄지척을 내보였다. “해적들이 탈취했던 보물섬 지도가 들어있을 수도 있어요.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 웅이의 얼굴은 은밀한 기색이 너울치다가 이내 비장함으로 바뀌여갔다.  나는 풉 하고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광풍이 휘몰아친다, 창대 같은 비줄기가 밤의 장막을 드리운다, 번쩍하는 번개에 그 장막은 찢어진다, 그 번개빛 속으로 한척의 배가 뒤엉켜 몸부림치는 검푸른 바다 속으로 서서히 침몰되여간다, 양피지 지도 한장이 선채 쪽에서 휘뿌려져나오고…  아이가 상상했을 머리 속 정경이 피끗 머리 속으로 스쳐지나면서 나는 차츰 재미있어지려고 하였다.     “무슨 근거로?” 나는 웅이에게 진진하게 따져묻기로 하였다. “봐요. 여기… 제가 따개비들을 떼여내다가 그만둔 곳에서 가죽이 만져진단 말이예요.” 나는 웅이가 가리키는 따개비가 떨어져나간 쪽으로 머리를 낮추어 살폈다. 그리고 식지와 중지를 넣어서 만져보았다. 과연 미끌미끌한 것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웅이의 말대로 가죽임에 틀림없었다. “오, 가능성은 있겠구나. 그럼 어쩌지?” “뜯어서 확인해봐야죠.” 단호하게 말하는 웅이였지만 분리작업은 은근히 나에게로 떠맡기는 얄팍하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나는 따개비들을 조심스레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오래동안 그 곳에 붙어있었는지 더러는 쉽게 뜯어지지 않았다. 웅이는 쪼크리고 앉아 떨어져나오는 따개비들을 부지런히 옆으로 밀어냈다. 따개비들이 거의 떨어져나가면서 물건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내 판단으로는 카메라 케이스였지만 서뿔리 입밖으로 번지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여넣고 쪼크리고 앉은 웅이는 어깨를 달싹거렸다. 케이스의 쪼르래기를 열었다. 카메라였다. 웅이의 반짝거리던 눈이 맥없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애끓이며 기다리던 항구에서 허술한 나무배 한척을 마중한 기분이였을가? EOS800D형 Canon카메라, 내가 쓰고 있는 카메라와 똑같은 것이였다. 축축한 습기가 번져왔지만 그렇다고 질퍽한 물기가 있는 것은 아니였다. 왼쪽 모서리는 케이스 바닥에 몰려있던 모래알갱이에 긁혀지고 닳아진 자국들이 살짝 남아있었다. 따개비들이 악착같이 붙어서 서식을 했을 정도이면 바다물 속에 잠겨있던 시간은 오래된듯 싶지만 카메라는 다소 멀쩡하다 싶을 정도로 보존이 잘되여있었다. 버튼을 눌러보았다. 깜박 불이 들어오는듯 싶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웅이는 이미 흥미를 잃고 나와 멀어져서 차가 세워진 방향으로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웅이의 뒤모습과 바다를 번갈아보았다. 시월 오후 다섯시의 빛은 너무 짧았다. 오늘의 빛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팔을 잡는 사람의 손 같았다. 차거워지는 팔뚝에 얹히는 무게감과 온기의 감촉이 닿았다. 빛이 산란되여가고 있었다. 웅이의 뒤모습은 불그스레한 노을빛 물감에 풀어져서 륜곽이 뚜렷하지 않았다. 자그마한 슬픔의 덩어리가 굴러가고 있었다. 상대의 슬픔에 적절한 거리를 지켜주는 례의를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슬픔의 원인을 추측하지 않고 위로의 형태로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저 바라보는 것. 웅이네 집에 들어섰지만 웅이네는 그 때까지 아직 돌아와있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면서 웅이는 다시 활기찬 아이로 돌아왔다. 문이 열려지면서 바로 거실로 뛰여들어가 전등을 밝히고는 곧바로 계단 쪽으로 뛰여갔다. 쿵쿵쿵 계단을 뛰여올라가는 소리가 내 앞에서 들렸다. 나는 웅이를 따라 캐논 카메라를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웅이는 다락방의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천정을 쳐다보다가 다시 쪼르르 달려가 다락방 계단 아래를 허리 굽혀 살피기도 하였다. 이 시각부터 다락방의 주인은 자신이며 엄마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아지트가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벽지가 도배되지 않은 뒤쪽 벽이 웅이에게는 커다란 캔버스처럼 보였던 모양이였다. “아저씨, 여기에다 그림을 그려도 되는 거죠?” 웅이의 물음은 언제나 간청이 아닌 허락을 강요하는 식이였다. 나는 공구함에서 목수용 사각형 연필심을 꺼내 웅이에게 넘겼다. 웅이에게 벽면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다시 아래로 급히 뛰여내려갔다. 차에 챙겨둔 내 캐논 카메라를 갖고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웅이는 이미 사다리에 올라서있었다. 아이가 올라서기에는 위험한 사다리였다. 웅이는 벽면에 분수를 뿜어대는 고래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조심해, 떨어지지 말고.” 나는 건성으로 웅이에게 주의를 주고 내 할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바다가에서 주어온 캐논 카메라를 마른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내고 카메라 청소용 붓으로 구석구석에 박혀있는 모래알들을 털어낸 뒤에 빠데리를 탈거했다. 내 손놀림은 바빠졌으며 호흡도 빨라졌다. 내 관심은 언녕 웅이에게서 멀어졌다. 내 캐논 카메라의 빠데리를 뽑아서 바다가에서 주어온 카메라에 끼워넣었다. 나는 심호흡을 길게 하고 전원버튼을 눌렀다. 성공이였다. 카메라는 거짓말처럼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였다.  앨범의 버튼을 눌러가면서 나는 위험하게 타인의 생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빨라지는 내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카메라 속의 이미지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덧 나는 그 이미지들에 물음표를 슬쩍 걸어두었다가 느낌표를 떨구면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타인의 생활 속에서 나는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이야몬드빛이 마루바닥에서부터 내 눈을 찔러왔다. 뭐지? 하면서 카메라 화면에서 눈을 떼고 다시 마루바닥을 내려보았다. 빨간 발톱 우에 박혀있는 큐빅이였다.  뭐지? 하면서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니 빨간 발톱은 보라색 슬리퍼에서 삐죽 나와있었다.  보라색 슬리퍼? 빨간 매니큐어의 발톱! 웅이네가 언제 내 옆에 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함께 카메라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몸 뒤쪽으로 숨기면서 튀여올랐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코끝을 스쳤다. 입속이 바짝바짝 말라가면서 나는 현기증으로 어질거렸다. “뭔가에 그토록 집중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군요.” 그녀는 입가에 신비로운 웃음을 피워올리면서 말했다. 비난은 아니였다. 빌어먹을, 또 그 웃음. 내가 막 카메라 출처에 대해 설명하려고 입을 열려는데 웅이가 끼여들었다. “엄마, 멋지죠?” 웅이가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녀를 벽면 쪽으로 끌어갔다. 동시에 고개를 탈고 내 쪽으로 찡긋 눈짓을 보내왔다. 카메라 사건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나는 널려진 것들을 대충 정리하고 웅이네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먼저 샤워를 해야 했다. 먼지와 때는 땀구멍 속에 박혀있는듯 깨끗이 씻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문지르고 씻다 보니 곧 깨끗해졌다. 문제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제될 일이 많았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떤 미묘한 일은 이미 진행되여 조여오는듯하였으며 웅이와는 웅이가 말했듯이 비밀을 공유한 공모자로 되여있었다. 그이들 모자 사이에 나는 엄연히 개입되고 있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먼지와 때처럼 시간을 들여 거뜬히 씻어낼 일이 아니였다.   나는 저녁식사도 뒤로 미루고 바다가에서 주어온 캐논 카메라의 사진을 컴퓨터로 옮겼다. 그리고 동영상도 있었다.  어느 해살 맑은 날이였을 것이다. 남자와 녀자의 무릎 아래 종아리와 발이 서로를 밀어내려는듯 서로를 끌어당기려는듯 엇갈리여 바다물 속에 잠겨있었다. 투명한 바다물은 깊이를 알 수 없게 아스라니 펼쳐져있었으며 해빛은 물 표면에서 자잘한 물고기 비늘로 반사되여 일렁이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한장씩 반복 대조해보아야만 미세한 차이를 분별해낼 수 있는 발사진 스물세장이 카메라 앨범에 저장되여있었다.  컴퓨터 화면으로 옮겨놓으니 이미지들은 생생히 살아서 움직이였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어지럼증이 나는 수족관의 유리벽처럼 컴퓨터 창은 몽환의 세계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남자와 녀자가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시간들과 캐논 카메라가 바다물 속에 잠겨 따개비들이 들어붙고 해파리들이 감겨가고 있었을 그 시간들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와 녀자의 발은 카메라 속에서, 어쩌면 바다 속 깊은 곳에서 마지막 한순간까지 서로를 념려하면서도 서로에게 뛰여들지 않는 그 자세로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카메라가 바다가로 밀려온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을 주어온 웅이도 잘못한 것이고, 기어이 그것을 재생시킨 나도 잘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문득 카메라 주인을 찾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카메라에는 발사진을 제외하고는 얼굴사진은 없었다. 다만 일분 이십삼초의 동영상 하나가 있을 뿐이였다. 파란 물하늘이 흐르는 곳, 울긋불긋 피여난 산호초 사이로 까만 오리발이 신겨져있는 발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물의 투영으로 한껏 길어진 까만 수영복 차림의 다리가 물을 휘젓고 있었다. 일분 이십삼초 동영상의 전부의 기록이였다. 내 인터넷 SNS에 동영상과 사진을 올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내 손에까지 들어온 경과를 생략하고 카메라가 발견된 좌망 바가가 위치를 밝히고 주인을 찾고 있다는 문구와 메일주소를 남겼다. 휴대폰 번호를 추가했다가 다시 삭제해버렸다. 별 볼일 없는 자들의 시끄러운 통화가 걱정되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올리고 난 뒤에야 짧은 하루의 긴 이야기가 이미 과거형으로 나에게서 멀어져갔으며 나는 안온하게 맥주를 마시며 여유있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녀인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없을 것이다. 그 뒤로 나의 일상은 고요하게 흘러갔으며 마무리공사는 계획보다 이틀 먼저 끝나게 되였다.  공사가 끝나고 삼일 후, 나는 웅이네를 만나러 갔다. 정산과 함께 추후 발생될 공사 중의 실수건을 합의하러 웅이네 집으로 갔다.   녀인은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녀인이 부엌으로 커피 내리러 간 사이, 쏘파에 앉아있던 나는 탁자에 엎어져있는 책에 눈길을 주었다.  그저 눈으로 들어오게 된 걸 봤을 뿐, 부러 알고 싶은 마음은 아니지. 하면서 나는 책 제목을 훑었다. 《바다》였다. 작가는 존 밴빌, 아마도 외국소설인가 보다 하면서 손이 막 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정을 멀뚱히 올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머리를 내리고 있을 때 엎어진 《바다》 밑에는 메모지 한장이 깔려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 놓여진 무테안경도. 메모지에 한장 가득 메모글이 적혀있는듯하였다. 《바다》밖으로 로출된 부분에는 검정깨알 같은 글씨가 박혀있었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리듯이 허리를 굽혀 그 메모를 보았다.   시간은  바다,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 그는 철창 밖,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 그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바다, 그 어두운 방…   책 속의 구절은 아닐 것이다. 나는 허리를 펴고 눈을 지긋이 감고 메모지에 적혀있는 그 어두운 방을 생각했다. 숨을 고르면서.   녀인은 커피잔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녀인은 공사 시작 전 빈틈없이 계약서를 작성했듯이 추후 발생될 실수건들도 명료하게 작성해놓았었다. 인테리어 나머지 비용은 이미 계좌이체시킨 상태였다. 녀인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해주었다. 녀인과 커피를 마시며 간단히 공사건에 대해 말이 오가면서 나는 자꾸 《바다》에 깔려있는 메모지에 눈길이 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녀인도 내 의중을 눈치채는듯하면서도 굳이 메모지를 따로 치우지 않았다. 녀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웅이네 집에서 나왔다. 곽명을 불러서 저녁에는 근사한 축하파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차가 세워진 옆골목으로 걸어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메일 한통이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떠있었다.   오후 세시, 좌망 바가가 좌망커피숍에서 만납시다.  캐논 카메라 주인입니다.    들어가는 말, 나오는 말, 호칭도 모두 생락한 메일답지 않은 건조한 문자메시지였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심장이 뛰는 박동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나를 미행하고 있는듯하였다.  그동안 SNS에 올렸던 게시물은 조회수는 물론 공유수도 폭증했으며 마음을 보내주고 따뜻한 댓글이 끊이지 않고 갱신되여갔다. 가끔 오버 잘하는 네티즌이 보내오는 응원의 메일도 날아들었지만 만나자고, 그것도 주인이라며 사뭇 건방지게 날려온 메일은 처음이였다. 메일의 진가를 떠나서 고의적인 해프닝일지라도 나는 만나기로 하였다. 헛물을 켜도 별로 억울할 것 같지 않았다. 어차피 갑자기 백수가 된 상태가 아닌가.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세시까지는 넉넉히 세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차를 몰고 좌망커피숍으로 갔다. 커피와 양고기즈란토스트를 시켜놓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도 해결하고 그동안 미루었던 독서도 하면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멀리서 잘 보이도록 캐논 카메라를 테이블 오른쪽 모퉁이에 얹어놓았다. 그리고 앉아서 책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모범생 자세의 책읽기는 몸을 써서 하는 일에 익숙해진 나에게 자꾸 흡연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책을 읽다가 몇번을 커피숍 뒤마당의 지정된 흡연구역으로 들락거렸다.  두시 사십분이 되여서 나는 책을 가방에 넣어버리고 뒤마당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다시 커피숍에 들어갔다. 한 녀인이 내가 앉았던 자리의 맞은편에 와서 앉아있었다. 정물화 속의 사물처럼 보였다. 캐논 카메라 녀인. 나는 괜히 긴장해졌다. 까만 벨벳핀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어올린,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녀인의 뒤모습을 살피며 녀인에게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녀인이 머리를 돌렸다. 나는 그만 악하고 비명을 지를 번하였다. 오전에 금방 만났던 웅이네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나를 맞았다. 설마, 하면서 나는 어정쩡 그녀와 마주앉았다. 둘 사이에는 어색하면서 간단한 목례만 있었을 뿐이였다. 한동안 나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탁자 밑을 살폈다.  나는 곽명이 말하던 떠도는 소문을 곱씹으면서 설마 아니겠지, 말도 안되는 우연은 죽었다 다시 깨도 없다면서 그녀가 캐논 카메라의 주인이 아니라고 강한 부정을 보냈지만 오전에 훔쳐보았던 ‘바다, 그 어두운 방’ 메모를 떠올리면서 가능성에 대해서 류추해보았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네요. 소문을 믿어요?” 그녀가 침묵을 깼다. 나는 굳이 무슨 소문? 하면서 금시초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나의 대답하지 않음이 대답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우연을 믿고 있어요? 의심하면서 믿고 있어요?” 그녀가 또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이미 체념한 질문이였다. “편견과 맞서는 데는 오만 뿐만이 아니겠지요?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져서 나를 잊으면서 살 수 없을가요?” 그녀는 창밖으로 머리를 돌리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은 오후 세시의 해빛으로 나른해진 바다의 물결로 차있었다.
4    [단편소설] 잃어버린 순간들의 모자이크-조원 댓글:  조회:284  추천:0  2019-07-15
 조원 잃어버린 순간들의 모자이크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혼자말을 하면서 창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달이 창에 걸리겠지 하면서 그녀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반쯤 기대였다. 묵직한 어둠에 눌리운 창 밖의 고요. 겹겹이 주름을 잡은 카텐의 우울. 반쯤 읽다가 엎어둔 뮤지션 지미 헨드릭스의 자서전의 책등이 밝히는 흰색. 소리를 죽이고 무심히 뼈가루의 빛만큼이나 강렬한 책등의 흰빛을 내려다보는 축음기의 나팔. 덮고 있는 담요가 만들어내는 밤바다 파도의 물결. 편안한 어둠을 보면서 그녀는 잠에 굴복하고 말았다. 안온한 잠 속으로 빠져 들면서 행복하게 죽어가는 생의 종말이 바로 이런 거야 하고 잠의 서곡에 리듬을 덧붙이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꿈 속에서 보기 위한 시도를 자꾸 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든 꿈이 현실이 될 필요는 없다, 가끔 꿈이라는 태양을 현실로 캄캄하게 가리고 만다는 생각을 하면서 싱거우리만치 자기 위안을 한다. 그녀는 떨어지는 꽃잎을 본다. 한잎, 두잎 떨어지다가 무더기로 휘날리며 꽃비로 내리는 꽃잎을 본다. 아프다, 가슴이 아파. 꽃잎이 내리누르는 무거운 중력에 심장의 주름살이 깊어진다. 꽃잎은 분명 죽은자의 몸우에 내려앉는다. 대체 누구지? 죽은 자가? 그러다가 팔을 관통하는 통증에 소스라쳐 놀라 깨였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대체한다. 오래동안 머리에 눌리운 오른쪽 팔을 주물렀다. 팔의 저림이 풀려가는 열락을 느끼며 유리창 근처에서 번쩍이는 번개를 보았다. 이윽고 묵직한 천둥소리가 나고 무섭게 비가 쏟아졌다. 그냥 폭우일 뿐이야.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녀는 요즘 혼자하는 중얼거림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는 습관이 있다는 걸 느낀다. 오래동안 폭우소리를 듣고 그녀는 누워있었다. 그녀의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을 거쳐 주방의 랭장고 문을 열고 차거운 물병을 손에 쥐였다. 유리컵에 찬물을 잔뜩 부어서는 꿀럭꿀럭 마셨다. 랭장고 문을 열어둔 채로. 랭장고 안쪽의 불그스럼한 불빛은 한기를 싣고 너울쳤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다. 혜인의 방문은 굳게 닫겨있다. 서재의 문도 닫겨있다. 거실 티비다이의 서랍들도 닫겨있다. 현관의 신발장 문도 닫겨있다. 피아노도 커퍼에 덮여있다. 세자루의 우산은 묶여진 채 항아리속에 있다. 모든 문은 깨닫는 자에게 열려지게 되여 있다. 또 문득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폭우는 지나갔지만 비바람에 제멋대로 주방창 유리에 흩뿌려지는 가는 비줄기를 보면서 홍수 재해지역으로 취재차 출타중인 남편이 오늘이면 돌아온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침대로 가서 이미 깨여진 잠에 굳이 다시 요청장을 보낸다는 것은 괴로운 선택이라는 것을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에 엎어진 지미 헨드릭스의 자서전에 엄지손가락을 끼워넣어서 두손으로 받쳐들고 서재로 향했다. 잠들기 전보다 옅어진 어둠을 밟으면서. 서재라는 공간은 가족에게 외딴섬의 존재처럼 거기에 있다고 그녀도 남편의 생각을 인정해주기로 하였다. 혜인도 그녀도 그 외딴섬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 녀자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는 남자가 자신의 서재는 ‘경건하고 고요한 외도를 하는 외딴섬’이라고 꽤나 길게 이름을 지어버린 까닭일 수도 있었다. 남편은 새집으로 이사를 하기 전에 집안 벽면의 벽지와 타일, 쏘파의 사이즈와 질감, 티비가 걸리는 벽면쪽의 조명, 현관에 놓이게 될 우산꽂이 항아리, 주방과 거실의 경계를 이루는 마름모꼴의 미닫이문, 베란다의 연두색 빨래건조대와 화분통 등등의 사소하지만 지극히 중요한것들의 맞춤은 전적으로 그녀의 선택에 맡겼다. 단 서재를 꾸미는데는 고집스러울만치의 열정을 쏟았다. 외딴섬의 분위기를 맞추려고 그랬었는지는 몰라도, 아니면 인테리어를 끝내고 나서 서재의 냄새가 외딴섬 같아 보여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그 선후관계를 그녀로서는 알길이 없었다. 오른쪽 벽면 통째로 서점에서나 볼 수 있는 붙박이 책장을 천장높이까지 만들어올렸고 옻칠을 올린 용도가 불분명한 나무사다리를 비스듬히 기대여 놓았다. 이 두가지를 제외하고는 테이블과 의자 두개 모두 벼룩시장에서 헐값으로 얻어온 사냥물이였다. 폭이 삼메터 되는, 서랍이 달리지 않은 철제다리에 투박한 원목의 나무판이 올려진 길다란 테이블,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은 의자 두개, 바닥을 장식하는 검정색의 타일, 그 타일 사이를 이어주는 백색의 넓은 금들, 언제고 테이블 우에 놓여져 있는 은색빛의 노트북과 초록색 갓을 쓴 전등 등등의 장식은 너무 정직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서랍이 달리지 않은 테이블을 가리키며 “비밀은 없다”고 말하면서 남편은 퍼그나 자족적인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러던 남편이 거의 테이블 높이의 목제 수납장을 테이블 밑에 추가로 끼워넣었다. 딱히 언제 그랬는지 시간적으로 모르겠지만 그녀로써는 별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니였다. 봄철에, 아직 봄이라 하기에 애매한 겨울 끝자락에 묻어있는 올해 봄에 서재의 창을 열고 환풍을 시키며 먼지털이를 하다가 수납장 서랍에서 발견된 일기장은 그녀를 남편의 서재로 자꾸 끌고 갔다. 죽은 자의 몸우로 떨어지는 꽃잎에 눌리워 깬 새벽에 책을 들고 서재로 그녀는 발길을 옮긴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녀의 손에는 서재로 들어가는 구실로 ‘지미 헨드릭스’가 쥐여져 있다. 손엔 껄렁하게 담배를 끼고 위스키를 홀짝거리는 지미 헨드릭스에게 욕을 보일 일이다. 그녀는 남편이 늘 앉는 의자 맞은편에 놓여져 있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의자에 앉아 전등의 불을 밝혔다. 나방이라도 초록색 스탠드 갓 주위에서 날아다녔으면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도유망한 기자이며 소설가라고 소개받은 청년을 만났던 그때 그 순간, 차잔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을 넋을 잃어버리고 쳐다보던 청년의 우울할 듯하면서도 예지력으로 빛나는 눈빛을 보면서 청년에게 이미 결박되였다고 생각했다. 세계문학의 고전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핫한 현시대 외국 소설가들의 엄밀하고 질긴 마음의 소리를 담고 있는 책들을 설렵하고 있던 그녀, 국내문학의 소박함을 가장한 촌스러움과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항변하는 소설들에 랭소를 보내고 있던 그녀, 조선어로 된 신문이나 잡지가 있기나 한가고 의심을 갖고 있던 그녀는 소설가라는 단순한 호기심에 소개팅을 덜컥 수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위 소설가라고 자칭하는 무리들 중의 한 개체의 쇼중의 쇼를 재미있게 볼 수 있겠다는 기대로 말이다. “손가락이 이쁘네요. 그 손가락과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개팅이 끝나고 차집에서 헤여지면서 등을 돌려서 다섯번째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청년이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에 그녀는 그만 주저앉아 울어버릴 번했다. 고작 열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그녀와 청년, 휴대폰에서 울려오는 소리와 생목소리가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섞여서 들려오는, 간절함이 묻어있는 청년의 중저음에 그녀는 폭삭하고 꺼져버릴 것만 같았다. 돌아보면 안돼, 몸을 돌려서는 안돼, 고개를 돌리지 말자. 그녀는 손아귀에서 빠져버릴 것 같은 휴대폰을 꼭 붙들고 서서 마음 속으로 웨쳤다. 괜히 어떤 비밀이 공유된다는 수치를 넘어선, 누군가에 의해 밝혀지길 바랐던 비밀이 뜻하지 않게 드러난 안전감으로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이 보고 싶어졌다. 차집의 유리창에 비낀 희끄무레한 그녀의 실루엣이 반사되는 해빛 속에서 그녀의 머뭇거림을 단정하게 교정해주었다. 그녀는 수납장 서랍을 열고 활달한 필체로 “나비의 춤사위”라고 첫장을 장식한 일기장을 펼쳤다. 주저없이. 뻔뻔스럽게. 한올의 부끄러움도 없이. 초기에 느꼈던 남편에게로 향한 무모한 불신뢰와 미안함이라던가,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행위에 대한 유죄감이라던가, 자책감도 없이. 그녀는 일기장을 넘겼다. 낯선 이질감은 손끝에서 묻어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책의 페지들이 기분 좋게 넘겨지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녀의 눈길은 무의식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길에 따라 펼쳐진 그 페지에 머물게 된다.       좁다란 골목과 골목을 에돌고 에돌아가야만 하는 동네 공원, 시소와 미끄럼틀과 녹쓴 운동기구가 자리잡은 구석자리에서 작은 숲이 시작되는 입구에 공중전화부스의 크기의 삼면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집 하나가 있다. 고마운 어떤 사람의 창의적인 사랑의 집이다. 길고양이 급식소. 배란기만 되면 악을 쓰고 울어대는 밤중의 고양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실면을 호소하는, 고양이의 배설물의 악취와 고양이의 몸털의 무자비한 침입으로 창문을 열 수 없다는 주변 거주자들의 항의 전화로 철거 위기에 있는 급식소. 대낮에는 감히 이웃들이 감시하는 눈길이 두려워 어스름히 끼는 저녁이면 공원을 산책하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급식소에 고양이 먹이를 작은 그릇에 소복히 담아준다. 고맙게도 나 먼저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을 고양이를 떠올리며 재빠르게 급식소를 빠져나온다. 급식소에 다녀와서야 잠을 이룰 수 있다. 내 속죄의 길은 초라하다.   처음으로 그 일기장을 펼쳤을 때, 그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남편의 숨겨둔 일기장은 절대 아니였으며 누군가에게서 부탁 받은 앞으로 쓸 소설의 소재임을 그녀는 어림짐작했다. 신문사 사회부 기자인 남편에게는 넘쳐나는 타인의 이야기가 공짜로 제공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취재를 다녀와서 남편은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아름답지만 않은 슬픈 사연들에 막무가내의 분노를 섞으면서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얼마 뒤, 그녀는 사회면을 도배하는 남편의 기사를 읽으며 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기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묘하게도 그녀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잡초를 뽑아내 듯 솎아내서 진정성이 배제되여 있었다. 기차역에서 팔고 있는 삼류 잡지들의 살인과 외도, 복수와 강간, 단순한 탐욕의 파멸, 눅거리 동정을 살 수 있는 련민, 사회의 부패와 사랑의 호소 등을 뻔하게 기술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들려준 부분적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의 제재로 리용되고 있음을 그녀는 눈치챘다. 치사하게. 정말로 치사하게. 그 뒤로 그녀는 남편의 치사한 소설을 읽지 않았다. 책으로 묶여나와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남편도 의외로 다행으로 여기는 듯하였다. 자신의 머리 속을 해체하려고 덤벼들지 않는 그녀에 대한 고마움이였는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상대의 공간으로 무단적인 침입을 하지 않는다는, 부부 사이에도 그런 간극 쯤은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의 합일이였을 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일기장의 래력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음은 분명히 남편만이 소유하고 싶은 비밀의 구석이겠지 하면서도, 우연히 참으로 우연하게 펼쳐든 일기장은 그녀를 주체할길 없게 만들었다. 여섯권의 일기장, 어떤 소녀의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섬뜩한 이야기에 홀려서 읽어내리면서 어데서 들어봤음직한 이야기였었다는 추론이 생기면서 그녀는 어떤 단서라도 알아내려고 소녀가 쓴, 환희라고 부르는 청년의 엄마로 된 녀인의 일기를 또박또박 한글자 한글자 고심해서 읽었다. 희경이라고 부르는 소녀에 대한 분노와 그녀에게로 향한 질투, 방아간집 소년에게 향한 련모의 정과 미움, 방아간집 소년이 희경에게 선물한 나비머리삔은 소녀의 분노를 펄펄 끓게 하며 나중에는 희경의 오빠 초막의 담요 밑에서 획득한 또 하나의 나비머리삔으로 복수를 하는 소녀, 종당에는 희경의 오빠를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몰아가는 소녀, 희경이라는 소녀에게 퍼부은 저주는 신통방통하게 주술적인 힘을 입어 희경네 가족의 오리부업은 망하고 희경의 엄마는 자살로 끝나면서 한 가족은 파멸한다. 난해한 부호학처럼 일기장 페지의 뒤면의 여백에 붙여져 있는 식물의 표본들은 생생한 삶의 기록들을 오히려 허구로 꾸며진 소설적 이야기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어떤 인기척이 느껴져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창밖의 아침해가 서재 창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틀어 문쪽을 보니 거기에는 혜인이 서있었다. 거실에 깔려있는 옅은 어둠을 뒤로하고. 엄마가 낯설어져서 못견디겠다는, 서재의 문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머뭇대는 혜인이, 당금 울음이라도 터뜨리겠다고 고집하고 있는 혜인이. 그녀가 까닭없이 치밀어오르는 수치를 안깐힘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떨쳐내며 혜인에게 말을 건네려고 할 무렵, 혜인은 벌써 문에서 사라져버렸다. 아침 식사는 불길한 음모가 발각되여버린 엄마의 창피함과 아무 것도 본 것 없음 하고 시치미 떼는 딸의 침묵 속에서 진행되였다. 혜인은 방학이였지만 영어학원의 수업시간을 핑게로 부리나케 집을 빠져나갔고 그녀도 출발을 다그쳤다. 굳이 빨리 움직여야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녀는 허둥댔다. 얼굴 화장을 잊은채 옷장에서 짙은 수박색의 바탕에 안개꽃이 다다닥 박혀있는, 무릎이 겨우 덮이는 원피스를 골랐다가 관두고 물감이 빠진 엷은 청바지에 다리를 엇바꾸어서 끼여넣었다. 살짝 겹쳐지려고 하는 배살을 누르며 단추를 채웠다. 아무래도 수면부족인 까칠할 피부의 로출을 막기 위해서는 청바지가 좋을 듯하였다. 우에는 팔꿈치를 드러낼 수 있는, 옆구리에 주름을 넣어 허리의 라인을 살려주는 흰색 적삼을 입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묶으려고 벨벳 머리끈을 찾아보았지만 화장대 서랍안에도 침대가 수납장 우에도 보이지 않았다. 잠간 망설이다가 미색의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고 천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집에 와서 가방을 뒤적였던 기억이 없다. 매일 같은 궤적을 반복하는 일상이기에 가방에 보태고 빼고 할 번거로움이 없다는걸 깨닫는다. 폭우가 쓸고 지난 아침의 거리다. 식당의 환풍기에서 뿜겨져 나오는 기름냄새. 하늘. 가지 꺾인 나무. 말끔하게 씻겨진 배수구.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 아크릴 간판의 윤나는 빛. 가로등 기둥에 부착되였던 무단광고지들의 물먹은 좌절. 빨래집게에 물려진 채로 쓰레기통 아구리에 반쯤 걸려있는, 뒤집혀진 축축한 남자 팬티에 찍힌 오줌의 흔적. 촐싹대는 애완견의 목에서 울리는 방울소리 딸랑딸랑. 번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천지개벽이 일어날 듯, 온갖 재앙이 닥쳐 지구를, 사람사는 세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릴 듯한 폭우였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면 멀쩡한 그대로이다. 누가 뭐래도 삶은 끈질기게 자기 방식대로 움직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운전을 포기하고 학원으로 가는 509번 뻐스를 기다리면서. 로씨야가 지난 시간대라 뻐스안은 띄염띄염 빈 좌석이 있었다. 그녀가 오르자 뻐스는 성급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하차문과 제일 가까운 좌석의 창가에 앉았다. 열려진 차창으로 비온 뒤의 깨끗해진 공기가 뻐스의 이동에 따라 이는 바람으로 그녀의 야구모자에 눌리운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쓸어갔다. 좁은 어깨와 얄팍한 등이 기분좋게 간질거렸다. 해빛은 투명하게 빛났다. 저런 해빛 아래로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리라. 그녀는 해빛 속에 오른손의 손가락 다섯개를 쫙 펼쳤다. 손가락들 사이에는 바람이 있고, 해빛이 있고, 평화가 있고, 생명이 있고, 음악이 있고, 사랑이 있고, 모든 아름다움은 그 사이에서 너울치는 듯하였다. “손가락은 나의 생명이다. 나의 음악이다. 나의 전부다” 그녀는 어떤 환청을 듣는다. 어떤 환청이 아니고 절친이였던 정아의 부르짖음이였다. “뒈지려고 환장했나? 저 아줌마. 손 빼들지 말라니까.” 뒈지긴, 환장하긴 하면서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화뜰 놀라 손을 거두어들였다. 정아의 부르짖음, 그 환청은 기사님의 욕하는 소리를 잠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사님의 욕설도 정아가 보내오는 그 환청의 연장선 우의 음성으로 착각되면서 뒈지긴, 환장하긴 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뱉어낸 그녀의 혼자말은 또렷하게 울려퍼졌다. 뻐스안의 승객 모두가 그녀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정말로 미쳤군, 미친 녀자군 하는 당혹스럽다는, 경멸스럽다는, 안스럽다는 눈동자들이 쏘아대는 눈빛은 그녀의 억울한 몸으로 가시가 되여 박혀왔다. 그녀는 채양을 끌어내리며 모자를 한껏 눌러썼다. 목적지까지 두 정거장 남겨두고 그녀는 끝내는 뻐스에서 내려버렸다. 쿡쿡 찔러대는 가시를 뽑아버려야 했다. 뻐스는 그녀를 헌 짐짝 버리듯 내려놓고 꽁무늬 뺀다. 그녀는 뻐스의 바퀴를 향하여 뽑아낸 가시로 사격을 가한다. 쓩쓩. 뻐스의 바퀴가 바람이 빠지면서 납작해진다. 쉬이익. 픽. 덜커덕. 모든 승객이 내린다. 미치겠네. 승객들이 투덜댄다. 그녀 입가에 웃음이 대롱대롱 걸린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미쳤나? 정말로. 하늘을 우러른다. 폭염이 이어질 징조다. 길가의 우거진 오동나무에 숨어있는 매미들이 맴맴 웃기 시작한다. 그녀도 그냥 웃자고 했을 뿐. ‘푸른숲피아노’ 간판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녀는 오전의 교습이 비여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고 생각한다. 방학이면 한가한 토요일과 일요일이다. 그녀의 학원은 동네 피아노학원과는 다른 한 차원 높은 고급학원이라고 부근에서 소문났다. 일대일의 레슨 과정을 밟는데 제한된 학원수에 질높은 수업을 보장하기 위함이였다. 또한 까페 같은 피아노학원이였다. 일층은 책과 음악, 커피와 차,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곁들인 까페이고 이층은 레슨 교실이 두개가 있었다. 낮에는 학생 레슨의 교실이며 밤에는 성인 피아노 련습실로 리용되게 되여 있었다. 비좁은 공간이여서 일층 까페에는 피아노를 두지 못했다. 대신 책으로 벽면을 도배했다. 까페의 운영에 그녀는 거의 가담하지 않았다. 성실한 음대 아르바이트생 두명이 관리해주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이 출근하자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네일샾으로 가서 손톱정리를 해볼가고 했다가 그녀는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녀는 앙증스런 청자기 주전자안의 보리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렸다. 까페의 출입문에 ‘Open’ 패말을 뒤집어 걸어놓고 안쪽으로 문을 잠갔다. 남향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여 있어 채광은 충족했기에 조명을 밝히지 않았다. 의자가 주는 안락함을 느끼며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숨소리에 집중하면서 눈을 잠간 감고 앉았다. 꿈에 나타났던 꽃잎을 다시 떠올려본다. 배꽃, 복숭아꽃, 살구꽃, 벚꽃, 별꽃, 팝콘, 불꽃… 꽃이라는 온갖 이미지와 꽃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사물들이 어지럽게 머리 속에서 란무했다. 더불어 뻐스에서 환청으로 들려왔던 정아의 부르짖음도 되새기고 있었다. 정아, 정아에게는 예쁜 손가락이 있었다. 피아노는 정아의 손가락을 위하여 만들어진 악기라고 하면 다소 과장된 표현인 듯 싶지만, 어쨌든 피아노에 어울리는 손가락으로 바이올린을 다루었다. 약간 앞쪽으로 동그라니 튀여나온 이마가 환히 보이게 머리를 올백으로 뒤로 빗어 묶은 정아, 쌍거풀의 커다란 놀란 듯한 두눈에는 늘 미소가 헤프게 피여났던 정아,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보이게 턱선은 다부지게 각을 이루었던 정아, 단단하고 반들반들하고 맵짠 양파 같았던 정아. 그런 정아에 비하면 그녀는 키가 멀쩡하게 큰것 빼고는 몸의 구석구석마다에는 딱히 뭐라고 콕 짚어서 말할 수 없는, 뭔가가 결여되여 있다는 애매한 인상을 주는 소녀였다. 두 소녀는 어릴 때부터 각종 문예공연에서 자주 만났으며 나중에는 같은 중학교를 다니고 함께 또 같은 성소재지 음악중등전문학교로 가게 되였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가장 리상적인 궁합이였던 정아와 그녀였다. “내 손가락이 내 눈을 찔러. 푹. 푹. 찌른단 말이야.” 처절하게 울부짖던 정아를 떠올리며 그녀는 명치 끝으로 몰려오는 먹먹함에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가까스로 청자기 주전자를 들고 차잔에 보리차를 부었다. 차물로 말라버린 입술을 적셨다. 차향이 코 끝에서 맴돌았다. 고개를 들어서 차창 밖을 보았다.       길 건너편 정육점의 불빛이 보인다.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쇼윈도의 가시가 좋은 정육점이다. 10개월 전 떠들썩한 오픈식도 없이 조용하게 입주되던 정육점은 삼일후 하늘이 준 선물로 신고식을 올렸었다. 번개의 번쩍 한번에 가게 앞의 오동나무가 쪼개져버렸고 정육점은 유명세를 탔다. 때로는 고요한 침묵의 폭력은 치명적일 수도 있었다. 그 침묵은 또한 례의 바른 폭력이기도 하였다. 무뚝뚝할 주인집 남자를 닮은 정육점 간판에는 주홍색의 해서체 ‘정육점(肉店)’이 아크릴판에 불친절하게 적혀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레슨 받는 학원생의 손가락 놀림을 지켜보다가 간혹씩 맞은편 정육점을 내려다보군 하였다. 불그스름한 조명등 아래로는 내장을 빼고 반으로 가른 돼지의 몸체가 갈비뼈를 보여주면서 유리창쪽으로 갈구리에 걸려있었다. 정육점다운 쇼윈도였다. 수술복 같이 흰 유니폼을 입고 있는 주인 남자는 하루종일 바쁜 듯하였다. 아침에 걸렸던 반토막의 돼지 몸체는 오후가 되면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그 남자의 날렵한 칼솜씨에 등심, 목살, 갈매기살, 삼겹살, 갈비 뭐 이런 식으로 해체가 되여 동네 아줌마들의 시장바구니에 담겨져 나가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잠간 쇼윈도는 비워지고 그 뒤로는 고기를 발라낸 소의 다리뼈랑, 돼지족발을 차곡차곡 철사에 포개서 매달아놓기도 하였다. 그녀는 맞은편 정육점에 한번도 들린 적 없다. 굳이 뭐 육식이냐 채식이냐 하면서 주의라는 거창한 말까지 동원하여 유난을 떠는 식습성은 아니였지만 정육점 남자와 상대하기 싫었다. 만난 적은 있지만 정육점 남자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였다. 솔직히 그녀는 정육점 남자와의 조우를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면서도 금기가 주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숨어서 은밀하게 관찰하였다. 가파로운 절벽 언저리에 통행이 금지된 협곡으로 위태롭게 향하면서 위험하지만 숨막히게 아름다운 절경이 있을 거라는 기대 비슷한것도 있었다. 번개사건이 있은 후부터 정육점 남자에 대한 소문은 가게들 사이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거의 신비로움을 넘어선 신화적으로 말이다. 정육점 남자의 절단된 새끼손가락과 오동나무의 벼락사건은 묘하게 겹쳐지면서. 처음에는 작업오류로 절육기에 새끼손가락이 절단되였다는 단순 작업상해라는 소문이 떠돌더니 어느날부터는 암으로 돌아간 안해를 잊기 위해 스스로 잘라냈다고 했으며 언제부터는 또 길고양이의 꼬리를 내리찍는다는게 자기 새끼손가락을 자르게 되였으며 그 이야기는 살에 살이 붙으면서 정육점 남자가 잘려나간 새끼손가락을 아예 지나가는 길고양이의 먹이로 던져주었다는데 까지 이어갔다. 그리스신화도 아니고. 번개가 하필이면 정육점 앞의 오동나무를 목표물로 했겠는가 하는 치밀한 련관성을 련상시키게 하였다. 소문은 소문대로 정육점은 호황이다. 올해 봄 혜인의 생일 그 다음날에 그녀는 문득 남편에게 여기가 아닌 다른 데로 가서 살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변덕 많은 중년녀인의 정서파동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리유가 뭐냐고도 묻지 않았다. 교실에서 정육점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알 수 없는 어떤 소용돌이가 서서히 번진다는 불안을 느껴던가 보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남편이였다. “그쪽은 괜찮아?” “뭐가요?” “물.” “당신도 알면서도 칫. 여기야 괜찮지요. 어때요? 그쪽은?” “란리도 이런 란리 어딨다냐? 집에 다 갔어. 산물이 터져 내려오면서 다리를 밀어버렸어” “허억.” “그 다리 말이지. 2년전 완공된 거란 말이야. 부실공사로 또 시끄러워질 거야.” “사회부 기자가 아니랄가봐. 물란리에 부실공사에 대한 걱정이라니. 예민한 렵견의 후각.” “집에도 갈수 없는 불쌍한 내 처지가 개코 같은 거지” “쉿. 목소리 낮춰요. 누가 들을라.” “집에도 돌아갈 수 없겠다… 여기서 강림촌까지 가까워. 거기나 들려봐야겠어” “강림촌?” “외가집이 있었던 동네.” “방아간집 외가집요?” “… 응. 그래.” “…” “길이 뚫리면 다시 련락할게. 잘 있고.” 남편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방. 아. 간. 집.” 음절 하나씩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음계는 미세한 떨림으로부터 단호한 웨침으로 치솟았다. 자신의 입에서 부지불식간 튀여져 나온 방아간집에 그녀 스스로 놀래버렸다. 꼬불꼬불 돌아가던 그녀의 정신회로는 갑자기 일직선으로 느슨하게 풀려지다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지더니 거침없이 질주를 했다. 일기장의 주인은 나분이다. 방아간집 소년은 연수다. 연수를 사이에 둔 나분과 희경의 질투가 한 가족을 파멸로 이끈다. 연수는 남편이다. 남편이 떠들어댔던 첫사랑의 소녀가 나분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온 지극히 사소한 나비머리삔의 음영의 농도와 자신이 잃어버리려고 했던 순간들의 재생과 그 외의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무게의 질감에 휘청했다. 분홍빛 하늘을 혈관처럼 쩍쩍 가르던 가을날의 번개를 떠올렸다. 오동나무를 쓰러뜨리던 그 번개를. 휴대폰의 벨이 또 울렸다. 우뢰의 괴성에 질겁이라도 하 듯 그녀는 흠칫 놀랐다. 압도적인 정적으로 자신으로 매몰차게 몰아갔기 때문이였다.    “영하야.” 그녀는 모든 힘을 부리우고 난 목소리로 휴대폰에 응답했다. 휴대폰 그쪽은 쉭쉭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릴 뿐 소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알지? 오후 한시에 교습 있는 거.” 그녀는 재차 통화를 시도했다. 그래도 휴대폰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럼 오후에 만나.” 하고 그녀가 통화종료를 누르려는데 휴대폰 저쪽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오랜만의 우유부단을 거친 단호한 소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어. 그래. 영하야.” 별일 아닌 듯하지만 상대의 이름을 자꾸 불러주는 것도 소통을 이어가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금.” 소년다운 당돌함을 찾아갔다. “도움? 뭔지 말해봐, 영하야.”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일단은 오셔야 돼요, 저에게로.” 흔들리는 기색이 있었다. “오후에 만나서…” 그녀가 말을 이어려는데 휴대폰 저쪽에서는 겁에 질려서 아악 악 하는 소년의 비명이 들렸다. “영하야, 영하야.” 소년에게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어찌나 다급하고 크게 웨쳤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갈렸다. 일초, 이초, 단 오초간의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에 그녀가 서있는 까페라는 무대의 소도구들이 슬로모션으로 그녀의 눈앞을 스쳤다. 시침이 빠져나간 벽시계, 고집스런 라침판, 한국 려행길에서 사온 포항 호미곶의 해돋이손, 패티 스미스의 초상화, 박제비둘기의 유리알 눈알. “저에게로 와주실 수 없어요?“ 소년의 애원이 드디여 들려왔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덴지만 말해, 빨리.” 그녀의 긴장은 고조되였다. “학원의 뒤쪽… 아빠트단지 뒤쪽… 건축현장…” 그러더니 휴대폰이 끊겼다. 통화버튼을 다시 눌러도 휴대폰은 이미 정지상태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이 상황을 침착하게 대체할 수 없어서 까페내에서 맴돌았다. 소년의 위치를 파악해야 되는데 방향감각이 둔한 그녀로서는 도무지 알수 없었다. 일단은 학원 뒤쪽 방향이라고 했으니 나가야 한다는 생각 뿐. 그녀는 천가방을 들고 까페를 나섰다. 소년이 그녀의 ‘푸른숲’으로 들어선것은 지난해 초겨울의 푸근한 날이였다. 썩 어렸을 때는 굉장한 짱구였었을 것 같은, 전체 몸의 균형을 깨는, 머리가 좀 큰 소년이였다. 그녀에게로 레슨을 받으러 오는 학생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질 피아니스트로 키워내겠다는 부모님들의 욕망에 끌려오는 아이들, 피아노가 괜히 좋아지는 아이들, 돈 꽤나 있는 집안의 있어 보이려는 허영심에 떠밀려 오는 아이들, 대충 이런저런 부류였다. ‘푸른숲’은 동네 피아노학원의 떠들썩한 학생떼를 볼수 없었다. 다들 조용하게 왔다가 조용히 나갔다. 정숙 그 자체였다. 피아노를 배우는 동기야 어찌되였든 학원생들은 이 도시의 중산층 이상의 가족의 아이들이였다. 초겨울이였지만 이 겨울이 다 갈 때면 지퍼 잠그기가 힘들어질 것 같은 검정색 등산복을 입고 있던 소년에게는 따뜻한 배려가 빠져있었다. 처음으로 소년을 보면서 그녀는 ‘푸른숲’속의 외로운 새 한마리를 피끗 떠올려보았었다. 소년을 데리고 들어선 남자도 저녁이면 피곤을 끌며 세상을 향한 불만을 빈 호주머니, 빈 지갑에 채워넣으며 억센 척하며 집으로 들어서는 아빠들 중의 한 아빠일 것 같았다. 자식의 미래에 불투명하지만 한번쯤은 자기의 꿈을 기대봐야 되겠다는 절박함도 없어보였다. 그 남자는 무뚝뚝했고 그녀에게 요소요소 따져묻지도 않았으며 알아서 맡아달라는 막무가내가 있었을 뿐이였다. 피아노를 배웠다기에 일단은 소년을 피아노 앞에 앉혔다. 소년은 피아노의 까만 건반을 만지작거리더니 베토벤 버창 2악장을 연주했다. 소년이 들려주는 정확한 음정과 박자는 피아노와 함께 한시간이 오래되였으면 알려주었다. 그녀는 소년보다 소년의 아빠에게 신경이 쓰였다. 소년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에도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하다못해 소년의 뒤통수라도 쳐다봐야 되는데 남자는 줄곧 레슨 교실의 벽면에 걸려있는 노트북 크기의 까만색 흑판에 락서된 분필의 흔적을 무심하게 보고있을 뿐이였다. 이렇게 정육점 남자는 소년의 아빠로 불친절하게 그녀에게 왔다. 썩 후에야 소년은 아빠가 맞은편의 정육점 주인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딱 한번 그녀는 정육점 남자를 만났었다. 오른손을 바지주머니에 찌르고 왼손으로 소년의 손을 잡고 레슨 교실을 빠져나가던 남자는 잠간 복도에서 주춤하고 섰었다. “아빠, 여기가 거대한 피아노 같습니다. 그렇지요?” 소년이 복도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빠에게 말했다. 이층 복도의 벽면과 문들은 새하얀 색상을 올렸으며 천장은 검정색의 피아노 건반 모양으로 굴곡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는 납작한 달모양의 전등을 맞추었기 때문이였다. “음”하고 남자는 신음 비슷한 음성으로 소년에게 화답하고는 학원을 떠났다. 그뒤로 정육점 남자는 다시 오지 않았으며 소년은 성실하게 꼬박꼬박 레슨 받으러 왔으며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소년의 연주는 단순하게 손가락으로 완성되였다. 소리에는 생명이 없었다. 그녀는 가끔씩 소년에게 이렇게 속삭이 듯 말했다. 과학적이고 수학적으로 만들어진 기계를 보면 우리 사람들의 머리에 탄복하게 되는 거지. 그것의 정밀함, 확실성, 론리성에 말이지. 하지만 머리로 만들어진걸 손으로 머리로 계산해서 다루어서는 안되지. 이 피아노라는 기계를 말이다. 다시말해서 소리에는 령혼이 있으며 생명이 있다는 거야. 딱딱한 수학을 해서는 안되지. 손가락만이 아닌 온몸으로, 모든 령혼을 담아 피아노를 다루어야 해. 감성이 중요하지. 그리고 니가 좋아하는 음악을 휴대폰 벨소리로 하지 마. 더우기 알람 음악으로는 절대 금지야. 생각해봐. 그 곡이 아침의 팡파르가 된다고 생각해봐. 기분 좋아? 더러워, 시켜서 하는 기분이란. 한없이 미워지던 기억이 그 음악의 전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샤와를 하면서 노래를 불러봐. 라지오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어봐. 예술은 수학이 아니며 과학도 아니야. 그러면 소년은 억울하다는 까만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봄이 되여 겨울 동안 레슨교실은 효과 좋은 스팀의 열기로 공기가 내내 건조해져서 피아노는 조률을 해야만 했다. 조률사가 방문할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조률사가 와서 피아노를 해체하는 과정을 소년은 유심히 관찰하였다. 피아노의 내부를 보면서 소년은 우와 우와 하며 감탄을 련발했다. 조률사 총각이 소년을 향하여 혀 끝으로 천장을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뜨락뜨락. 소년의 이마는 웃음 때문에 윤이 났다. 반짝반짝. 그런 소년을 보면서 그녀는 소년에게 피아노 조률사가 되여 보는게 어떠냐고 물을 번하였다. 황급히 학원을 나오면서 그녀는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피끗 정육점 유리창에서 정육점 남자의 작업복이 언뜻하는 모습이 스치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녀는 주춤하고 섰다가 발길을 재촉했다. 소년의 말대로 그녀는 학원 뒤쪽의 아빠트 단지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의 이 발길이 없었다면 그녀는 가능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범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소년이 전화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배터리가 빠져버렸다면 그녀는 가능하게 자신의 아픔을 품고 때로는 꺼내보고는 다시 깊숙이 감추고 별일 없었던 듯 살아갔을 것이다. 그녀가 매몰차게 소년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가능하게 그녀의 삶은 또다른 행로를 타고 전진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 살면서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그때 그 순간을 후회하면서 가능성이 있었을 오늘을 생각하게 된다. 가능하게. 하지만 미래의 가능성에는 두려워하며 그것의 존재에도 의심을 가지게도 된다. 가능하게. 폭우 뒤의 폭염은 무자비했다. 그녀는 연신 등줄기로 배여져 나오는 땀 때문에 자꾸 손 끝으로 등쪽의 흰 적삼을 들어다 놓았다 했다. 거치적거리기는 청바지 자락도 마찬가지였다. 아빠트 단지내의 나무숲과 화단을 에돌며 후문쪽으로 향하면서 터질 것만 같은 젖가슴을 감싼 브래지어가 짜증스러웠다. 고인물을 피하려다가 그녀는 화단밖으로 목이 꺾어져 떨어진 접시꽃을 밟았다. 그녀의 운동화 밑에 깔려 짓뭉겨진 자주빛 접시꽃잎, 적라라하게 하얗게 돌출되였던 접시꽃의 꽃술을 보면서 그녀는 어슴푸레 폭염 뒤에 따를 폭우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아빠트 단지 뒤쪽에 건축현장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일단은 뒤쪽이라고 했으니 후문으로 일단 가보아야 했다. 후문쪽으로 가까워지면서 그녀는 그쪽에는 람루한 단층집들이 모여있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화려한 도시에 가려진 그늘, 나름대로 그 그늘의 빈곤과 맞서며 어쩔수없이 즐거운 듯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기에도 딱하게 누데기처럼 덕지덕지 달고있던 단층집들은 밀려가버렸었다. 그 자리에는 새 아빠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었다. 공사현장을 에워싼 파란색 양철판에 붙여진 새 아빠트의 효과도가 그것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공사현장으로 진입할 입구를 찾아헤맸다. 길은 언제나 있는 법이였으며 그녀가 다른 삶으로 걸어갈 입구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어진 양철판 사이로 충분하게 어른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한 공간이 열려 있었다. 그 공간으로 발을 내딛고 거침없이 몸까지 건늘 찰나까지는 두려움이란 걸 아예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는 다른 행성에라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후회하였다. 때는 이미 늦었으며 그녀는 다시 소년의 안전이 걱정스러웠다. 조각난 벽돌과 돌멩이와 모래언덕. 썩어가는 나무토막과 잡초. 건축자재와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 들끓는 파리떼들의 축제. 그녀는 한낮의 해볕 아래에서 돋는 소름을 느끼며 공사중인 3층의 엉성한 골격을 갖춘 건물로 접근하였다. 무덤과도 같은 적요에는 그녀의 발걸음소리만 들릴 뿐이다. “묘우”하는 소리에 그녀는 휘청하며 넘어질 듯하였다. 그녀의 몸 뒤로부터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바람처럼 스치더니 건물 우쪽으로 빠르게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몸 깊숙한 데서부터 일순간 치밀어오르는 공포는 온몸에 한기로 치직 퍼져나갔다. 머리속은 오히려 청량해지는 듯하였다. 고양이가 사라지는 쪽에서 그녀는 피끗 사람의 형체를 보았다. 조그마한, 직감은 그녀에게 그것은 소년이라고 말해주었다. 안전그물망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간 그녀는 건물의 입구로 들어갔다. 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란간이 미완성인 세멘트 계단을 조심스레 타고 올랐다. 미완의 건축은 그 자체의 예술적 매력이 있었다. 그녀는 이층의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잠간 호흡을 가다듬고 뚫려진 입구에 들어섰다.     소년은 벽 쪽의 짙은 그늘 쪽에 쪼크리고 앉아있었다. 상자종이를 깔고서. “영하야.” 하면서 그녀는 소년 쪽으로 뛰여가려고 하다가 뚝 멈추어버렸다. 소년의 옆에는 검은 고양이가 두눈을 밝히고 그녀를 당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에게도 고양이에게도 함부로 가까이해서는 안되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뭔가는 말을 해야 되는데 혀 끝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바닥에는 창 바깥의 안전그물망이 만드는 빗사각형의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세사람, 세사람은 그렇게 그 도안을 묵묵히 보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도 분명히 사람으로 보였다. “영하야, 일어서. 일단은 여기서 먼저 나가자.” 그녀는 소년에게로 다가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거기에 있어도 소리는 들려요.” 소년이 말했다. 고양이가 몸을 게으르게 일으켰다. 고양이는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창으로 느릿하게 걸어갔다. 가볍게 몸을 날려 창턱으로 뛰여오르더니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는 꼬리가 잘려간 고양이의 엉덩이를 보고야 말았다. 흡. “사람이 싫어졌어요.” 소년은 거의 절망적으로 신음 비슷하게 뱉어냈다. “싫어? 싫어질 때도 가끔 있게 되는거야. 잠깐일 뿐이야.” 그녀는 소년의 기분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목소리의 파렬음은 온전치 못했다. “그 잠깐이 수시로 나를 따를 거예요.” 소년이 말했다. “이겨내면서 버티면서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녀는 소년의 조숙한 사춘기의 징조를 보고있었다. 소년은 고집스럽게 지켜내려고 했던 남자라는 자존심을 허물면서 머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워넣고는 울기 시작했다. 소리 내서 큭흑, 자그마한 슬픔의 덩어리는 격렬하게 떨었다. 그녀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쪼크리고 소년과 마주 앉았다. 누군가에 기대고 싶었던 자신의 어떤 밤을 떠올리면서. 슬픔은 만져주어서 위안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치유가 필요하다. 한참을 기다려 주니 소년은 머리를 들고 고개를 구석 쪽으로 틀었다. “조률사 삼촌이 금방 떠났어요, 여기서.” “그래? 그 조률사 삼촌이랑 만났어?” 그녀는 학원으로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조률사 청년의 우유빛갈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삼촌,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 나를? … 조률사가?” 그녀는 그녀를 빼돌리고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의 전개에 긴장되였다. “삼촌이 묻더군요. 선생님을 좋아하냐구. 아니라고 했는데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절 좋아한다고 그랬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떨어지라고 삼촌이 그랬어요.” 소년은 되찾은 안전감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타인을 통해서 얻어듣는 거랑과는 다른, 직접 이렇게 면전을 하고 듣는 불편함으로 그녀는 말을 잃고 소년을 직시할 수 없었다. 다리가 저려왔다. 뭔가를 해야만 그 불편함을 이겨낼 것 같았다. 그녀는 상자종이를 끌어다 소년과 한메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그늘 밖으로 부질없이 두 손으로 다리를 주물었다. “삼촌… 그 개자식이 절 여기 나오라고 했어요.” 소년이 악다구니를 쓰 듯 웨쳐대면서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주체할 길 없는 분노로 맹렬하게 어깨를 다시 들썩거렸다. 그녀는 소년과의 간격을 좁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을려고 하다가 그만뒀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소년이 허공에 대고 목청껏 웨치다보니 갈 수록 목소리는 갈려갔다. 그렇게 소년의 저주는 반복되여 갔으며 그 저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빠져갔다. 봄에 학원으로 방문한 조률사 청년을 소년은 피아노 레슨 교실에서 한번 만나고부터 청년과 자주 만났다고 한다. 청년의 악기점으로 가서 악기들을 맘껏 구경하였으며 청년이 사주는 음료수도 라툐우(辣条)도 맛있게 먹었단다. 초기의 악기들에 대한 호기심이 시들어갈 즈음에 소년에게 악기점으로 가야만 하는 리유가 또 있었단다. 마음껏 컴퓨터 게임을 놀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청년의 무릎 우에 걸터앉아 게임을 함께 하기도 하였단다. 소년의 엉덩이로 청년의 바지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성기의 튕김이 전해졌으며 청년의 왼손은 소년의 바지를 쓸었다고 한다. 컴퓨터 게임의 스릴과 창피하면서도 빳빳하게 일어서는 욕망, 그 욕망을 차마 밀어낼 수 없었으며 은밀히 즐기면서 놀랍게도 기대되였단다. 소년은 청년과 친구처럼 PC방에도 다녔단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오늘은 여기로 불러내서 협박을 하더란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떨어지라고. 그리고 청년은 소년을 범했단다. 그녀는 소년의 흩어져버린 옷매무시를 그제야 발견했다. 연두색 반팔 티에 쌓인 저 가냘픈 소년의 몸, 미색의 반바지 속에 숨어있는 저 순수한 소년의 하체… 그녀는 소년을 대신하여 울어주고 싶었다. 죄여 드는 심장의 파장으로 전신이 몸서리가 쳐졌다. 어서 빨리 이 죄악의 장소를 떠나서 소년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영하야, 일어나. 가자, 우리.” 그녀는 소년의 손을 잡았다. 소년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다시 잡아서 끌었다. 다시 매몰차게 내뿌리쳤다. 소년과 그녀 사이에 끼여든 긴장된 침묵은 거친 벽면을 타고 내려오다가 응고된 세멘트 줄기처럼 완강하게 멈추었다. 상처 입은 푸른 숲속의 외로운 새 한마리를 그녀는 대책 없는 근심과 유죄감으로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소년은 날숨과 들숨의 강약의 차이를 조절하면서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숨소리는 차츰 고르롭게 되였으며 소년도 유순해지는 듯하였다. 소년은 반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언제 다시 소년의 휴대폰은 켜져 있는 듯하였다. 광폭했던 금방과는 다르게 아주 침착하게 뭔가를 휴대폰에서 찾고 있었다. 격렬했던 분노가 없었던 듯. 소년은 말똥히 그녀를 쳐다보며 휴대폰을 넘겼다. 그녀는 소년의 돌발행위에 거의 공황에 빠져갔다. 그녀에게로 향한 휴대폰의 액정화면의 불빛이 꺼져갔다. 땀과 눈물이 번진 휴대폰을 그녀는 공황에 빠져버린 채 넘겨받았다. 식지로 액정화면을 눌렀다. 톡톡. 밤바다를 배경으로 한 포항 호미곶의 해돋이손 사진이 펼쳐졌다. 미끌어 떨어질 것 같은 휴대폰을 잡으려고 그녀는 가까스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한장 더 넘겨요.” 소년이 명령이라도 하 듯 말했다. 그녀는 화면을 왼쪽으로 밀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일층 까페에 놓여져 있는 해돋이손 모형의 사진이였다. 그녀는 또 어떤 함정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패배감 비슷한 무력감에 눌리워갔다. “이 사진들이 왜 너에게 있는 거지?” 지나가는 소리인듯 무심하게 들리게끔 온갖 노력을 해보려 했지만 그녀의 입술 밖으로 튀여져 나간 말의 속도는 터무니없이 빠르게 흘렀다. “제가 묻고 싶은 말이예요. 그 두 사진이 왜 저의 아빠의 휴대폰에 있는가고.” 소년은 쌀쌀했다. “네 아빠? 정육점…” “옙. 정육점의 우리 아빠에게요.” 그녀는 어리둥절 그 자체였으며 소년의 하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이 상황에서 꼬리가 잘라져 나간 검은 고양이가 떠오를가? “우리 아빠의 소문 잘 알고 계시지요?” 취조하 듯 소년이 밀어붙였다. “소문?” 그녀는 혀끝소리를 냈다. “알면서도. 어른들은 원래부터 거짓말을 참말처럼 잘하는 거죠. 우리 아빠의 잘라져 나간 손가락을 잘 아시잖아요. 어른들은 다들 무서워요. 웃고 있지만 무섭다니까요. 검은 고양이 보셨지요. 우리 집 고양이였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다시 우리 집으로 오지 않아요. 아빠에게 꼬리가 잘린 다음부터요. 제가 좋아하는 고양임에도 불구하고. 잘려진 아빠의 손가락을 검은 고양이가 물고 도망갈수야 없었지요. 정육점에 그 많은 고기 덩이를 냅두고 하필이면 아빠의 손가락이였겠어요? 그래도 굳이 아빠는 자기의 손가락을 검은 고양이가 물고 갔다가 그랬어요. 그날 고양이를 안고 정육점으로 찾아간 저의 실수였다면 실수였겠지요.” 소년의 입가로 쓴웃음이 걸려갔다. “영하야, 어디 아파?” 그녀는 소년의 이마에 손바닥을 조심히 갖다댔다. 조률사 청년에게서 받은 충격으로 소년은 횡설수설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손바닥을 이마에 닿아야 된다는 것, 그러면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고 그녀는 고집했던 터였다. 그녀의 손바닥은 소년의 이마보다 컸다. 소년의 이마는 그녀의 손바닥을 밀어냈다. “신들의 손. 잘 아시지요?” 소년은 골려주겠다는 심보였었는 지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들었다. 마치 그 손이 신의 손이기라도 하 듯. 하지만 그녀는 지금 밉상스러운 소년의 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니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 그녀는 소년이 두려웠다. 물어보는것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신들의 손”은 그녀가 우연히 가입된 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인터넷 블로그의 방 이름이였다. 손에 관하여, 손가락에 관하여 짤막한 글을 운영자의 메일에 넣어서 그녀는 합격되였고 정식회원으로 그 블로그방을 드나들 수 있었다. 모든 글과 사진들은 비공개되였으며 회원들끼리만 공유하는 공간이였다. 한국 려행길에 호미곶 해돋이손의 밤바다를 찍은 사진을 블로그방에 올렸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포항의 숲속 길을 따라 항공 력사 박물관을 지나고 공항길을 지나고 바다와 가까워지면서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다바람의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그녀는 까닭없이 눈가가 젖어들었었다. 영문을 모르게 몰려드는 저릿함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을 흘렀었다. 때로는 문득 생각없이 흐르게 되는 눈물이 있었다. 눈물. 옆에 앉았던 남편이 피씩 웃고있었다. 그날 찍은 사진 한장, 블로그에 올린 그 사진에 대글 하나, “아팠었네요.”였다. “아팠었네요. 그게 우리 아빠가 남긴겁니다.” 소년은 학생이 선생님께 의례 갖추어야 되는 존중의 도리를 깨달았다는 듯 정중하게 말했다. 차라리 조롱이였으면 싶었다. 그녀는. “허거걱. 헉. 네 아빠가…” 그녀는 심연 깊숙이 찔러오는 소년의 눈길을 피하며 경악을 감추려고 버벅거렸다. “아빠는 짬만 있으면 그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저녁 잠들기 전에도, 세수를 마치고 밥 먹기 전에도, 고기를 자르다 말고 피묻은 손가락으로 그 사진을 터치한단 말이지요. 어느날엔가 저에게 부탁을 하더라구요. 까페에 있는 그 모형을 찍어올 수 없냐구요. 그때까진 전 몰랐지요. 알았다면 사진을 찍어 아빠께 넘기지 않았을 건데. 후에야 우연히 아빠의 휴대폰을 보고 알았지요. 해돋이손을 사진 찍어오라고 했던 리유를요. 우리 아빠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다구요. 그래서 절 푸른숲으로 보냈더라구요.” 소년의 얼굴에는 분명히 배신감이라고 씌여있었다. “그러니까, 저는 학원에 못 가겠습니다. 선생님이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절 학원에 오지 못하게요. 조률사 그 개××도 그렇고. 아빠께 제가 그러더라고 말씀하신다면 아빠가 저의 손가락을 잘라버릴 지도 몰라요.” 소년의 가슴 속에 묻어둔 괴물이 대신 말하는 듯하였다. 질투가 낳은 비극의 비극. 그녀의 의식 속에는 이미 소년이 옆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지쳐있었으며 그녀는 홀로 지금의 이 미완성의 건축현장이라는 무대에 끌려서 올라온 배우에 불과했다. 관객이 없는 무대 우에서 그녀는 어떤 거치장스러운 가식도 불필요했다. 그녀는 세멘트벽의 무대 중앙에서 주섬주섬 일어섰다. 그리고 아직 창틀도 끼워지지 않은 사각으로 뚫린 창이여만 하는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바깥의 안전그물망으로 시야가 막혀왔다. 그래도 너무 한낮의 여름해의 강렬한 빛은 있었다. 그리고 무대는 바뀌여간다. 그녀와 정아가 등장한다. 그녀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정아는 바이올린을 활을 다룬다. 정아의 오른쪽 손가락은 바이올린의 현줄 우에서 춤을 춘다. 퐁당퐁당. 즐겁게. 무대의 조명은 찬란하다. 그러다가 그녀의 버벅대는 손가락의 놀림때문에 정아의 손가락의 률동은 멈추었다 다시 움직인다. 음악이 멈추게 되면 정아는 계속 이어가자며 바이올린 턱받이에 올려진 각진 턱을 살짝 들었다 놓는다. 다시 피아노 건반을 누르지만 그녀는 곁눈으로 보이게 되는 정아의 손가락에 신경 쓰인다. 참으로 욕심나는 정아의 손가락, 그리고 그 손가락의 움직임. 그녀는 뻣뻣해지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면서 정아의 그 손가락이 없어졌으면 하는 질투를 느낀다. 그녀는 아니, 아니 하면서 까만 건반을 누른다. 다시 무대는 바뀐다. 중앙과 량옆 모두가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불필요한 온갖 소도구를 배제해버린 간결해서 섬뜩한 결백의 공간 속에서 정아가 울부짖는다. 내 손가락이 내 눈을 찌른단 말이야. 푹. 푹. 찌른단 말이야. 무대의 모든 조명이 꺼지고 잠간 깜깜해진다. 다시 원통형의 밝은 조명빛이 정아에게로 집중된다. 정아는 식지가 잘려져 나간 네개의 손가락이 남아있는 오른손을 얼굴에 대고서 울부짖는다. 자꾸 찌른단 말이야. 식지가 내 손가락을 찌른단 말이야.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휘청하며 감히 정아에게로 접근하지 못하고 서있다. 그리고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조명빛은 그녀에게로 이동한다. 그녀의 독백이 시작된다. 없잖아. 너의 식지가. 너의 식지는 이미 절단되고 없다니까. 없어진 걸, 사라진 걸, 절단된 걸 인젠 받아들여야 해. 인정을 해야만 돼. 다른 삶을 살아야 돼. 정아야. 충분히 다른 일도 할수 있잖아. 바이올린말고도 할 일은 많지 않니? 너가 이럴수록 난 괴로워 죽겠단 말이야. 내가 품고 있던 질투가 너의 손가락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처럼 말이야. 정아야. 날 살려줘. 그녀는 휘청휘청 몸을 가누며 정아에게로 몸을 돌린다. 드디여 무대의 모든 조명이 밝혀지고 정아가 말한다. 손가락은 나의 생명이다, 나의 음악이다, 나의 전부다. 전부를 잃는다는 게 뭔 지 알 것 같냐? 넌 모르겠지. 그녀가 답한다. 알 만해. 알 만해. 알 만하다고. 그만해. 제발. 정아가 그녀의 말을 자른다. 아니, 절대 몰라. 몰라도 괜찮아. 언젠가 너도 어떤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겠지. 하지만 넌 말이지. 다른 거 다 빼고 너의 손가락을 자신의 목숨처럼 아껴줄 남자를 찾아야 해. 너의 손가락은 신이 준 선물이야. 너의 손가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니? 너의 지성, 너의 얼굴, 너의 가슴, 너의 샘을 아무리 좋아해도 너의 손가락의 아름다움을 알아볼수 없는 남자랑은 결혼해서는 안돼. 행복해야 돼. 너는. 네가 날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넌 날 잊을수 있겠니? 나도 잊지 못하는데. 잊을 수만 있다면 너에게도 나에게도 다 좋겠지만. 무대는 사라져버린다. 그녀는 뒤에 앉았던 소년이 일어서는 기척을 들었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소년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쿵쿵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일기장의 주인인 나분을 만나고 싶었다.   해볕 아래 로출된 영하가 태양을 향하여 두팔을 벌린다. 열두살의 영하의 그림자는 잛다. 영하는 구십도 각으로 몸을 돌려 쭈크리고 앉는다. 태양빛 속으로 자신의 두 손을 내민다. 움켜잡았던 손가락들을 펴면서 땅 우에 공작 한마리를 완벽한 그림자로 남긴다. 까만색 공작이 볏을 움직인다. 까닥까닥. 소년은 건물 우쪽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린다. 어른들은 유치해. 거짓말을 잘하면서 아이들이 하는 거짓말은 참말로 믿는거지. 난 단지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싫었을 뿐이였지.    
3    [수필] 모멘트 댓글:  조회:193  추천:0  2019-07-12
모멘트 조원   세렌디피티 련휴는 늘 다짐으로 시작된다. 먼 려행은 삼간다, 밀린 책을 읽는다, 매일 운동을 한다, 맛집을 찾아 즐긴다, 예쁜 말 세마디씩 한다, 음주는 하되 과음은 금한다… 쉬울듯한 작고 사소한 다짐을 노트에 적어둔다. 몸에 배이지 않은 새로울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지만 몸으로 불러들이기에는 정열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다짐 중에서 한가지 다짐만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 먹는다고 마음대로 될 수 없는 인생처럼. 음주 과음으로 밤새워 빈 속 앓음을 하면서 마음 앓음보다는 덜해서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빨간 날자가 이틀을 나란히, 퐁당 하루를 건너뛰여 또 사흘을 사이 좋게 자리한 덕분에 지난 추석 련휴는 느긋이 한주로 잡혔다. 사람 만나는 일이며 술 먹을 일이며 책 읽을 일이며 넉넉한 시간이였다. 낮이면 사람 만나서 좋았겠지만 술이 더 반가웠다. 안주는 과했고 술은 더 과했다. 밤이면 그래도 책을 들 수 있었다. 조금은 어려울듯 싶은 책을 골랐다. 자잘한 글자꼴로 494페지 책의 두께와 무게에 망설이다가 읽기로 했다. 책가위를 펼치고 첫페지의 여백에 적혀있는 낯선 문자를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1991. 9. 27. 용인 동아서점에서. 남편이 사줬음.                             -최   친구의 손때 묻은 책인데 최씨와는 가닥이 닿지 않았다. 책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경로를 제멋대로 상상하였다. 내 친구가 자신의 지인에게서 받은 책은 아닐 것이며 굳이 친구를 최씨로 가정한다면 친구는 동성애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이 책은 친구가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것이 명백해진다. 타인의 밑줄, 타인이 흘린 머리카락, 타인이 떨군 커피자욱, 이런 타인의 흔적을 찾아보아도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친구도 최씨 녀자도 이 책을 읽지 않았다고 추정을 할 수 있겠다. 헌 책방에서 나에게로 온 책이여서 괜히 들뜨는 마음이다. 헌 책방으로 애지중지했을 책을 보내게 되였던 그 리유를 나름대로 만들어보며 나는 최씨 녀자에게로 걸어들어갔다. 날자를 보면 발렌타인데이는 결코 아니였으며 생일 아니면 결혼기념일과 같은 특수날일 수도 있겠다. 련인 사이도 아닌 부부 사이의 책 선물이라는 게 참 좋아졌다.  설핏 발렌타인데이에 선물하면 좋은 책인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 더불어 영화 《세렌디피티(우연, 인연, 운명적인 사랑)》를 떠올렸다. 헌 책방에서 돌고 돌아 내 손에까지 오게 된 책이 아닌가. 《세렌디피티》의 줄거리를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뉴욕의 한 남자와 한 녀자가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반한다. 남자는 녀자에게 다시 만날 수 있는 련락주소와 전화번호를 묻는다. 녀자는 남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백에 넣었던 책의 첫페지에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어서 헌 책방에 넘긴다. 인연이 될 수 있다면 그 책이 남자에게로 가게 되리라. 거기에 남겨진 주소와 전화번호에 따라서 남자에게서 련락이 오리라. 그 때 되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녀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7년이란 시간이 지나서 남자와 녀자는 서로를 찾아떠난다. 남자가 녀자에게 건네려고 했지만 바람에 날려간, 전화번호가 적힌 5딸라짜리 지페는 이 사람 저 사람들 손에서 떠돌게 되고. 녀자가 헌 책방에 넘겼던 책은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다. 내 인생의 책을 굳이 한권으로 좁히라고 한다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꼽을 수 있다. 마르케스의 광팬이면서도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마르케스답지 않을 소설일 거라는 편견으로 외면을 했었는데 영화 《세렌디피티》에 이끌려 찾아 읽고는 사랑의 순애보를 생각하며 사랑의 미리보기를 하게 되였다. 더불어 마르케스를 더 사랑하게 되였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최씨 녀자도 어쩌면 남편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을지도, 아니면 어떤 인연을 확인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어찌 어찌 되다가 잘못된 우연으로 내 손에까지 들어오게 되였고.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급했다. 속독을 해서 속히 중고서점으로 넘겨야 한다고, 내가 소장하고 있을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최씨 녀자가 어떤 좋지 않은 일로 남편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던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길 바라면서.  련휴의 책으로 내가 골랐던 책이름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래요. 이 한권의 책으로 부부의 어떤 인연을 확인하시고 부디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조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꼬마와 놀다가 다투게 되였단다. 돌멩이로 상대 꼬마의 이마를 때렸지. 아빠는 선생님께 호출당했어. 꼬마의 할머니께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할 수 밖에. 짱구머리가 더 짱구가 되여버린 꼬마의 머리를 보면서. 뻐스에서, 화단을 에돌면서, 엘레베터에서 아빠는 아이를 무시했단다. 아이를 바짝 끌어붙이면서. 갸 이마 엄마달처럼 부어버렸어. 엄마 없는 빈 집에 들어서면서 아이는 중얼. 아이의 눈에 달은 부어있었던가봐. 달도 아프면 울고, 울어서 얼굴이 부어버린 줄로 알았겠지. 다섯살은.   열네살의 작은 남자가 어릴 적 이야기를 해달라기에 아직은 젊은 사내가 말했다. 작은 남자와 아직은 늙지 않은 사내는 아핫핫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나니 웃음은 작아졌으며 헐겁게 늙어갔다. 둘 사이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고요한 침묵은 약속처럼 둘을 둘러쌌다. 침묵은 둘 사이를 떼여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겨운 거리감이였다. 둘은 고요를 더듬으며 서로를 사랑하기로 했다.   웃음소리가 손가락말을 닮을 때 그냥 좋아지는 말이 있다. ‘어스름’이라는 불확실한 시간대의 소리와 빛갈을 한몸에 품고 있는 말이며 ‘다만’ 하면서 간절해지는 마음을 조심스레 열어보이는 말이며 바깥과 안쪽의 경계를 허물려는듯 이으려는듯 주춤의 표정인 ‘창窗’이라는 말이며, ‘순간’이라는 말이며. 한동안은 좋아지는 특정된 말 하나 둘로 여러날을 먹고 살 수 있을듯하다. 그냥 밥처럼, 그냥 떠올리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을 그리워하듯. 요즘 자꾸 새김질하는 말은 ‘사이’이다. 시간과 공간의 틈을 뜻하는 ‘사이’를 생각하다 보니 홀로써는 불가능한, 상대적인 관계라는 말에까지 걸어들어간다. 사이봄, 사이여름, 섬과 섬 사이, 눈 깜짝할 사이, 너와 나와 우리 사이, 덩굴식물과 담벽의 사이, 동경 116도와 동경 126도의 사이, 물 끓는 사이, 거미줄에 걸려있는 해빛과 날벌레 그림자와의 사이, 해와 달의 사이, 울고 있는 사이, 잘려진 나무 단면에 박혀있는 나이테들의 사이, 이런 사이와 사이를 연缘이라는 끈으로 이어주게 된다면 무수한 별자리가 만들어지겠다. 별자리들 사이의 마음의 결도 보기 좋겠다. 몰라도 만나야 하는 사람,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나는 한때, 아니 지금도 가끔 힘들어한다. 어쩔 수 없음이 속보일 것 같아 애써 낯가림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느라면 홀로 하는 시간, 늦은 밤이면 몸을 뒤집는다. 난 몰라 하면서 돌아누우면 진짜 모를 것 같지만 다시 진짜 몰라 하면서 몸을 뒤척이면 얼마간 더 알 것 같아서 몸 밑에 깔려있는 침대의 관절은 소리를 거듭한다. 타인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누군가에게 함부로 던졌던 롱담이 두께로, 무게로, 색갈로 남지 말기를 감히 롱담처럼 거두어들일 수 없다. 오른쪽 식지를 만져본다. 아직 지문이 닳지 않아 다행이다. 근간에는 부쩍 입말보다 손가락말을 수없이 한 것 같다. 내 손가락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였을지 모르겠다. 추카추카, 켁, 넵, 얍, 짜잔, 께임, 이빠이, 감솨, 홧팅… 자주 애용된 내 손가락말을 라렬해본다. 이런 말들은 대개 쌍으로 덤벼드는 된발음으며 부드러움이 거세당한 거센소리이다. 병영이나 어느 훈련소의 구령 만큼이나 언어의 온도는 랭각되였으며 과열되였다. 사람이 살기 좋은 온도는 18도에서 20도라고 한다면 언어의 온도 적정치도 이쯤 되지 않을가 생각한다. 언어의 온도가 최상의 온도일 19도로 맞출 수는 없어도 랭각과 과열은 아니지 싶다. 또한 언어의 질감도 서걱거린다. 이런 손가락말들은 자신의 강한 의지의 표명은 물론, 상대에게로 향한 방어 혹은 공격의 함의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한듯하다. 관계의 외연을 넓히다 보면 낯설어지는 자신을 만난다. 대인관계는 보다 채워지는듯하지만 마음의 가난은 가난으로 남는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을 채 알아가기도 전에 멀리에 있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더 궁금해진다. 잘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는 리해를 앞세우다 보면 오해의 오해로 깊어지겠고 오해된 사이는 사이가 아닌 다른 것으로 되여버리겠다. 기묘하고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오르간을 타듯 타인의 마음을 타다 보면 앓음이 시작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피로를 느끼면서 얼마 만이라도 말을 적게 하자면서 마음을 다독이고 다독인다. 이미 경험한 바를 잘 건사하기 위해서는 세련된 절제가 필요하다면서 휴대폰을 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빼돌리고 나 없는 사이에 뭔 일이라도 생길지 몰라. 모임의 자리를 졸면서라도 끝까지 버텨야 돼.” 하던 친구의 헐거운 말처럼 휴대폰 세상 속이 궁금해져 슬그머니 또 손길이 간다. 멈춰있는 관계는 없으며 관계는 움직이려 하는 것이므로 가까워지든 멀어지든 단단한 자신을 키워야겠다. 뭐가 어긋났는지 살피고 아귀를 잘 맞추어 거침없이 달려야 할 뿐.  “사타구니께가 간지럽다 / 죽은 형제 옆에서 / 풀피리처럼 울던 아기 고양이 / 잠결에 밑을 파고 든다”로 시작을 해서 “우리는 타인이라는 빈 곳을 더듬다가 지문이 다 닳는다” 로  끝나는 시 (허은실 시집 《나는 잠간 서럽다》에서)의 시귀로 글을 마감한다.    사이여름, 하풍夏风에 실려오는 것들을 적어본다. 라인, 모기와 파리, 볼륨, 자두빛, 저녁노을, 감기, 나른함, 선글라스로 보는 태양, 들려주는, 옮는다, 설핏, 부산, 거부할 수도 있는 거야, 해직자, 읽는, 쉽게, 새 소년, 묘비명은 ‘다시 돌아올 겁니다’, 감정, 유일한 방법, 인간은, 흔히, 맛이 변한다, 음지식물, 할머니는 웃고 있다, 보관 중, 겸손, 오로지 나만, 조금 달라지겠지, 일년에 천사백륙십번 이상 꿈을 꾼다, 책을 써라는 말, 깜깜한, 듬직하고 다정한, 해녀, 이끼, 핑크빛 사랑, 쉽게, 의지와 운동 사이에는, 빵, 자신과의 관계, 죽음에 너무 깊게, 치자나무꽃 흔적, 참 놀랍다, 느끼는 척, 내 말은, 그렇게까지, 아리다, 공복에, 돈의 참다운 용도, 뚝뚝, 연약한 한줄기의 갈대, 감실거린다.   하지 내 출퇴근길의 코스는 정해져있지 않다. 출근의 대기장소와 퇴근의 도착장소는 길 하나를 사이두고 마주보고 있어서 통근차는 변함없이 정차되지만 나는 번마다 다른 길을 고른다. 골목과 골목들이 이어주는 좁은 길을 에돌아다닌다. 골목에서 진행되는 여러 사연들을 스쳐지나면서 간혹은 발걸음을 멈추고 폰카에 담아보기도 한다. 골목의 표정은 여러날이 지나게 되면 모양새를 바꾸기도 한다. 그 변화되는 모습을 보려고 출퇴근 코스를 자주 바꾸게 되였을지 모른다. 내 출퇴근길의 코스 중에는 고물상네 울안을 스쳐지나는 골목길이 있다. 다른 골목길보다 유난히 좁고 휘여져있으며 음지도 짙다. 고물상네라면 대개는 고단하고 비루하고 루추한, 별로 썩 밝지 못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지만 내가 지나다니는 골목길에 있는 고물상네 울안은 늘 산뜻했다. 연두색의 격자무늬 철제대문은 마냥 반 쯤 열려져있다. 울안의 대부분 공간에는 여기저기에서 실려온 재활용 페기물들이 높다라니 질서정연 적치되여있다. 입구 쪽의 작은 공간에는 안성맞춤하게 받침대를 놓아두었는데 그 우에는 역시 어디에서 주어온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화분들이 대부분이다. 여러 집들에서 버려진 화분들이다 보니 모양새는 참 다양하다. 허리가 불룩 튀여나온 백자항아리며 플라스틱의 소박한 그릇이며 새노란 옴팡진 질그릇이며 낮고 엷은 거의 접시모양의 화분도 있다. 키높이도 들쑥날쑥이고 몸통도 제가끔이라 여러 주인집 사람들의 취향과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보기 좋다. 화분들에는 꽃나무들이 심어져있고 더러는 꽃을 피워올리고 있다. 화분들의 뒤배경이 되여주는 것은 우아한 분위기를 즐겼을 어느 젊은 싱글 남자의 방에 걸려있었을 법한, 남자에게 키스하는 녀자의 반쪽 옆 얼굴이 클로즈업되여있는 흑백의 예술사진을 품고 있는 액자이다. 과장되게 넓은 진붉은 색의 액자는 에로틱한 사진과 멋스럽게 어울린다. 받침대 아래로는 언제나 분사기가 놓여져있고 그 옆에는 잘 닦여진 장독, 그 장독의 아구리를 덮어주는 접시 우에는 다육식물이 심어져서 얹혀져있다. 그 곁에 있는 허리께까지 오는 높이의 큼직한 항아리는 반 정도는 깨여져나가 속을 보이는데 그 안쪽을 흙으로 채워 덩굴식물을 심었다. 덩굴식물의 줄기는 받침대 우로 높게 솟은 파이프를 타고 오르고 있다.  이렇게 세세히 고물상네 울안의 입구 정경을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곳에 대한 내 애정하는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휴대폰 앨범에 남겨진 덕분이기도 하다. 그 울안의 아늑한 정취에 홀려서 몇번을 폰카에 담아보았지만 시야가 막혀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락 없는 촬영은 범죄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최상의 이미지를 담으려고 고물상네 울안으로 고심 끝에 선뜻 들어갔다. “핫따, 별 꼴 다 보겠어야.” 하는 성난 남자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피사체를 세번째로 폰카에 담을 무렵이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할아버지였었겠는데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울안을 뛰쳐나왔다. “함부로 그리 하능 거 아니여.” 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철제대문이 닫기는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골목길로 냅다 뛰였다. 숨이 차올라 더 뛸 수 없을 때까지. 두근두근의 가슴을 누르면서 휴대폰 앨범을 확인하였다. 사진은 생각 대로 잘 나왔지만 죄송합니다 하고 할아버지께 사죄라도 했을걸 하면서 마음을 쓸었다.  무단침입 사건이 있고 나서 그 골목을 한동안은 걸을 수 없었다. 두려움도 두려움이였겠지만 다른 골목에서 터지는 개나리, 벚꽃, 목련, 철쭉, 튤립의 봄의 환호며 감, 대추, 석류, 포도들의 여름의 얼굴을 만나고 다니느라 그 골목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  계절의 흔적을 몸에 기록해두려는듯 계절마다 자잘한 병이 내 몸에 들어섰다. 불볕더위에는 바깥 온도와 실내 온도의 격차로 여름감기는 어김없었다. 지난 여름의 어느 점심나절, 밤새 차올랐던 신열로 앓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약국을 찾아나섰다. 몸이 아프면 반드시 지름길을 선택하게 되여있으며 주위 사물들에 관심을 가져볼 수 없다. 오직 자신의 아픈 내면으로 향해지는 법이니까. 집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약국으로 향한 최단의 거리는 고물상네를 지나는 골목길이였다.  참 오랜만이다 하며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고물상네 울안 앞에 다달아서 나는 걸음을 한참 멈추었다. 늘 산뜻했던 고물상네 울안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가전전자제품 싸게 드립니다”. 입구 웃쪽 전자전광판에는 이런 문구가 궁서체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성들여 꾸며졌던 작은 정원의 자리에는 낡은 에어콘과 선풍기가 놓여져있었다. 그 앞에는 어느 옷가게 쇼윈도에서 옷이 벗겨진 채로 옮겨져와서 앉아있는 마네킹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왼쪽 손목 아래 부분이 잘려져나간 전라全裸의 남성 마네킹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여 까만 몸통에 정오의 해빛을 한껏 받아들이고 있었다. 적치되였던 고물들은 어딘론가 다 실려가고 울안은 거의 비여있었다. 좀 지나면 이 집 저 집에서 쓰던 가전제품들이 자리를 채워갈 것이리라. 고물상네 할아버지의 행운을 빌어보았다. 누군가의 기억의 손때 묻은 것들이 모여있는, 버려져서 쓸모 있게 된 것들이 대화하는, 버려져서 버려지지 않은 것들을 구원하는 곳인 고물상네 울안, 그 울안을 보면서 “여름에도 감기 들 수 있잖어유. 개않아유, 아저씨. 아지도 여름 감기 들었어라.” 하고 고물상 할아버지께 말을 걸고 싶었다.  이날은 하지였다. 고물상네 할아버지의 설치예술은 일년 중에서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의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었다. 가장 짧은 하지날의 밤을 기다리면서.  출처:2018 제3호
2    [작가평] 청산리 적마 댓글:  조회:237  추천:0  2019-07-09
청산리 적마 조원     지난 여름, 10년의 한국생활을 접고 그는 귀국했다. 짧지 않았던 소설창작의 슬럼프를 깨뜨릴 수 있을지의 고민을 여름의 무더위와 함께 안고서 그는 귀국했다. 그를 자유롭지 못하게 했던 책들을 한짐 지고 한국을 떠났다. 더 들고 갈 수 없는 무게의 책들은 아쉬운 대로 나에게 택배 선물박스로 떨구고 그는 한국을 떠났다. 수고했다는 말, 고마웠다는 말, 소설을 써야 된다는 말. 작별을 하면서 그와 나는 닮을 수 밖에 없는 이 세마디의 말을 서로에게 힘차게 해주었다. 어쩌면 이 말들은 각자 스스로에게 던졌던 위안이였을지도, 다짐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그가 귀국 후 여러 대표 문학지마다에 짱짱한 소설로 화려하게 복귀하고 있다. 질주하는 말에 채찍을 날리며 질풍노도의 기세로. 때로는 서리 찬 가을 아침 돌연 몰려오는 안개로, 때로는 경쾌하고도 가벼운 리듬으로, 때로는 랭소를 잔뜩 물고 있다가 터져나오는 재채기로, 때로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듯이 그의 소설은 소설을 쓸 수 없었던 나날들을 향하여 아름다운 복수로 펼쳐진다. 그의 소설을 숨 죽여 읽어가면서 나는 한참 멍때리고 있다가 다시 읽었다. 읽는다는 것, 글을 읽으며 사람을 읽는다는 것은 괜히 기분 좋은 일이다. 글 읽기가 사람 읽기에 비하면 누워서 떡 먹기라 할 수 있겠지만 글을 읽으며 사람을 온전히 읽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전우씨, 멋져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나는 속으로 조용히 응원을 보냈다. 소설가 김경화와 나, 우리 사이의 접점은 한국생활과 문학이였을 것이다. 한국생활과 문학, 이 두가지를 가지런히 자리에 앉히고 보니 닮은 데가 있음을 놀랍게 발견한다. 고단할듯하지만 해낼 수 있는 자기긍정의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싫어도 해야만 하는, 지루할듯하지만 정작 몰입하면 즐거워지는… 이 두가지는 대체로 이런 류의 공동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억지만은 아닌, 확고한 속성을 느끼면서 그와 나는 전우이며 문우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사뭇 투쟁적이고 치렬한 전战과 짐짓 점잖고 우아한 문文, 전과 문은 상호대립으로 맞서면서 어울리지 않을듯 싶지만 막상 고리로 이어놓으면 의외의 에너지 방출을 하는 희열의 순간들이 있었다. 전과 문의 성씨하에 우友라는 이름으로 겹쳐지면서 그와 나는 돈독한 친구의 관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싸우듯이 일하고 싸우듯이 책을 읽고 싸우듯이 웃고 싸우듯이 배려해주는 그런 관계로 말이다. 그래서 소설가 김경화의 작가평은 내가 써야만 한다는 고집이 설 수 있었다. 서로를 미화하고 찬송하는, 오가는 작가평이라는 밉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작가평의 인칭도 ‘그녀’가 아닌 ‘그’가 내게는 입말처럼 착착 붙어서 중성적 이미지인 ‘그’로 생략해버린다. 우리의 만남의 장소는 서로에 대한 배려로 평택과 대구의 어느 중간 지점의 낯선 도시의 기차역이였다. 늘 길 우에서 걷고 있는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만나고 헤여지는 여러 곳의 역에서 다섯시간 이상을 초과하지 않는 짧은 려행이 가끔 시작되였다. 려행이라고 부를 만큼의 여유의 시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만남을 그는 문학기행이라든지 문학세미나라든지 이런 거창한 행사 이름을 불러들여 부르길 즐겼다. 시시해지고 싶지 않은 오기라 해도 좋고 자칫하면 멀어질 수 있는 문학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무튼 그를 따라서 어느덧 나도 허락되는 시간이 나면 문학기행을 자연스럽게 약속해보군 하였다. 한끼의 점심밥을 해결하는 면집과 국밥집, 떠날 시간을 기다리는 기차역 간이커피숍이 우리가 마주앉을 수 있는 시간이였으며 대체로 마냥 길을 걸으며 대화를 하였다. 맛집 찾아다니는 데는 고수인 나였지만 조금은 린색하다 싶을 정도로 격식을 갖추지 않는 그의 소박함에 불만은 불만 대로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를 받기 위한 소비는 하지 않겠다는 은근히 내비쳐지는 그의 주장을 공감하게 되는 자신을 보게 되였다. 3년간 6차의 문학기행이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제2차의 가을 문학기행과 제3차의 여름 문학기행에서 우리는 중국에서 출장차로 한국에 오신 문학선배님 두분을 각기 모시는 영광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선배님들이 원했든 안했든 그는 지극히 일상적인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문학의 옷을 입혀야 한다는 지론이 있었다. 허투루 식당에서 만나 밥 먹고 헤여지는 모임이길 거부했다. 그래서 리상고택과 빨간 책방 방문, 수원 화성과 벽화마을 탐방으로 정해졌다. 선배님들을 모시고 하는 모임이라 국내 문단에 목말라 있던 우리는 쉴새없이 선배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분도 기분이려니와 술이 반가워서 이런 모임이 되면 그가 정해놓은 시간은 늘 초월되여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다음날 출근이 걱정되여 초조해하는 그의 마음을 엿보면서도 나는 블랙아웃이 될 때까지 선배님들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한번은 집으로 돌아온다는 게 대구 너머 밀양까지 가버렸다가 다시 대구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대구에 도착되여 티켓을 보고 나서야 나는 깜깜하게 끊어져있는 기억의 그 시간이 두려워졌다.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는 그 시간대에 대체 내가 뭔 짓을 했을지, 어떤 실수를 했을지 자괴감으로 불안해졌다. 나는 기계치여서 티켓자동판매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런데 티켓이 자동판매기에서 뽑아져나온 것이면 그가 해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대구에 도착되는 기차시간에 맞추어서 그의 문안 메시지를 받고는 아무일도 없었음 하면서 네 도착 하고 뻔뻔스럽게 짧게 답해버렸다. 나로서는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으며 그도 굳이 그걸 들추어내지 않았다. 티켓 끊어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미스터리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와 함께 했던 문학기행은 힐링캠프에 다녀왔다고나 할가 뭐 그런 데가 있었다. 반복의 반복, 또 반복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생활은 때로는 무기력해질 수 있었지만 다행 긍적에너지 아이콘 김경화를 만나고 돌아오면 충전되였다. 한국생활을 낯설어했던 왕초보 시절에는 그는 선배답게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사내 식당 이모님들을 개여올려 빠삭한 누룽지 챙겨먹는 비법 같은 것을 말이다. 제6차 문학기행 때에는 2년 련속 다니는 직장의 최우수 사원으로 선정되여 포상금 두둑하게 받았다면서 그답지 못하게 럭셔리한 분위기 있는 일식집으로 나를 끌고 가 내가 좋아하는 술을 주문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성인이 장난감 사는 것,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비싼 밥을 먹거나 사치품을 사는 것, 월세를 내면서 해외려행을 가는 것, 누군가에게는 그런 행위들이 생명유지 장치라는 소비관념을 역설로 풀기도 하였다. 술만 들어가면 나는 오래동안 죽치고 앉아 제 말만 떠들어댔으며 대체로 그는 경청자의 역할을 분담하였다. 그는 소설을 생활처럼, 생활을 소설처럼 믿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황페하고 구석진 삶의 현장을 서럽고도 치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자칫 작가 개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들어있지 않을가 하는 걱정되는 위태로운 마음으로 간혹 읽혀지기도 한다. 실화체 소설 (《도라지》 2011. 5기)는 그가 취재하고 다녔던 생활 그대로 펼쳐진다. “8년간 한국의 어느 식당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기본적인 인간대우는커녕 식당 사장의 폭행, 월급 한푼 받지 못하면서 현대판 노예생활(2011년  한국 KBS방송국에서 보도된 바 있음) ”을 한 흑룡강성 녕안시 와룡조선족향의 리영준씨의 불행을 동족으로서의 아픔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면서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면서 사회에 호소하고저 소설화시켰으며 직접 중국대사관이랑 관련부문들을 두발로 뛰여다니며 인간적 존엄을 돌려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의로운 사람이였다. 페미니즘소설 에 등장되는 ‘춘자’의 고달픈 한국에서의 위장결혼생활, 이주로동자의 삶을 리얼하게 그려내는 소설 등 소설들은 경험하지 않고는 써낼 수 없는 깊은 슬픔과 삶의 질곡들이 질펀하게 깔려있다. 그러면서도 줄곧 따라붙는 따뜻한 시선과 애정의 어루만짐, 종당에는 해피엔딩으로 갈 수 있길 바라는 희미한 희망들이 소설의 주선을 이루고 있다. 작년 가을의 어느 하루는 나에게 문득 법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지인이 없느냐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괜히 본인 아니면 친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나 싶어서 바로 전화를 넣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직장에 다니는 조선족 두분이 전세집 계약금을 사기당했단다. 십여년 한국에서 모아둔 재산의 전부에 해당되는 액수의 돈이였다. 듣고 보니 해결책이 거의 없어보이는 사기행각이였지만 함께 아파하는 그의 마음을 읽으면서 자기 내면으로만 집중하는 부끄러운 나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였다. 언젠가는 전세계약금 사기사건을 그는 소설로 녹여낼 거라고 감히 단정해보기도 한다. 소설가 박경리의 토지문학관 울안에 옹기종기 놓여져있는 장독들 앞에 쪼크리고 앉아있던 그, 안경알 너머 새까만 눈동자로 장독들과 눈을 맞추고 있던 그, 새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고향 청산리 하늘과 산을 닮았어요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알찬 씨를 이발처럼 앙다물어서 품고 있는, 유쾌하게 견고해보이는 석류 같은 모양으로 쪼크려 앉아있던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썩 후날에는 돈 벌어서 청산리에 김경화문학관을 설립하여 작가들의 창작기지를 만들 거예요 하던 롱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적마가 아닌 78년 생 말띠인 그가 결코 적마이길 고집하는 리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1    [소설] 우리들의 섬 댓글:  조회:424  추천:1  2013-12-27
  1 안개와 함께 그녀는 새벽이 끝나며 아침이 시작되는 경계에 내앞에 나타났다. 안쪽으로 걸어두었던 사슬키를 풀고 문을 땄을 때 그녀는 문앞에 서있었다. 땅속의 물을 빨아올릴 힘이 없어서 안개를 먹고 지탱해가는 문앞의 비틀어져가는 버드나무처럼 그녀는 말라버린 몸을 한껏 안개속에 내맡기고있었던듯싶었다. 농밀한 안개무리가 집안으로 날아들면서 그녀도 함께 떠밀려 들어왔다. 벼룩시장에서 맞춰온 깜장 쏘파만 달랑 있는 비좁은 대기실은 금방 휩쓸고 지나간 안개의 잔상으로 더욱 눅눅해졌다. 《선생님, 저 성형하고싶어요.》 그녀의 입에서 중국말이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어두운 구석에 옹크린 고양이의 가릉거림을 듣고있었다. 두눈을 파랗게 켰을것 같은 고양이. 《선생님?》 녀자는 분명 나를 알고있는게 틀림없다. 끈적하게 나를 추적하고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각 나는 그녀가 찾아온 리유보다도 그녀가 부른 호칭으로 잔등이 서늘해졌다. 《저 얼굴 바꾸고싶다구요.》 당장이라도 고양이가 발톱을 내밀어올듯 목소리는 아주 작지만 앙탈스럽다. 《얼굴?…》 그때까지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매미 한마리가 그대로 붙어있는듯했다. 매미날개의 미세한 전률과 함께 맴맴 노래소리도 들려오는듯했다. 그녀가 매미날개처럼 엷은 눈까풀을 파들거릴 때, 나는 내 하체를 의식하게 되였다. 끌신에 신겨진 발가락이 꿈질거렸다. 왼쪽다리는 쌀알만큼의 구멍이 퐁 뚫린 내의에 감싸져있었고 오른쪽다리는 정갱이까지 내의가 건성으로 말려있었다. 하체의 핵심부위는 치사하게 내의속에서 륜곽을 드러냈다. 치부(置簿)의 발악은 뻔뻔함이리라. 나는 빈 가슴을 내밀며 그녀의 오기를 비틀어버리기로 했다. 《성형이라 변형(变形)이라? 여기는 변형이 아니고 변어(变语)하는 곳인데 말입니다. 얼굴 변형 먼저 의식 변형을 해야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곤두선 매미의 촉각을 따버리고싶었다. 도드라진 그녀의 코끝이 움씰거렸다. 《의식 변형 먼저 변어부터 할려고요. 한국어 배워주세요.》 매미가 맴맴 애처롭게 애원을 해왔다. 2 《마라탕》간판을 건 내가 꾸린 한국어학원은 소학교 정문 맞은편 왼쪽으로 꺾어드는 골목, 난전이 시작되는 머리에 있었다. 《마라탕》한국어학원, 썰렁해보이지만 중국과 한국의 묘한 문화접목으로 근사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돈도 없는 마당에 허가증 등록이 까다롭거니와 비용도 만만치 않았고 간판을 새로 만들어 올리는 유난을 떨지 않아서 좋았으며 똥파리떼같은 조사들도 무난히 피해갈수 있는 방패라도 될수 있어서 원 식당의 간판을 리용하기로 했다. 《마라탕》한국어학원은 은밀한 아지트 아니면 위험한 섬같은 존재로 서있었다. 나른해지는 오후 1시경에야 피곤해보이는 아줌마 셋, 짜증 캐릭터(성격)의 아가씨 하나가 총총 다녀갈뿐 망해버린 식당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보인다. 그날 아침, 안개를 몰고 온 매미 녀자는 안개에 젖어 날개를 더 펼수 없다는 식으로 《마라탕》학원에 들어붙었다. 매미 녀자는 시간이 없다는 리유로 오후 수강은 불가능하고 오전 수강 그러니까 단독 수강을 요청해왔다. 물론 수강료는 더 얹어주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매미 녀자는 단독수강으로 한국어를 배워갔다. ㅏ, ㅑ, ㅓ, ㅕ… ㄱ, ㄴ, ㄷ, ㄹ… 여름이면 나무꼭대기에서 시끄럽고도 귀찮게 낮잠을 설치게 하는 매미처럼 맴맴하면서 극성스레 그녀는 한국어를 배웠다. 청강을 마치고 나서는 매일마다 학원 대기실의 깜장 쏘파의 먼지도 털어내고 수강실에도 물질을 했다. 그리고 가끔 수강실 옆방에 있는 내 침실을 정리해주었다. 《고기, 두부, 하모니카, 미래, 기차, 차표, 시소, 어머니, 지도…》 하품과 함께 맥없이 길게 새버리는 내 낱말들은 매미 녀자의 청각으로 빨려들어가서는 신들린 매미의 노래소리로 울려왔다. 맴맴. 《매―미―》 하고 염소울음같이 내 입에서 흘러나가는 순간,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매미.》 하고 짧게 따라 소리냈지만 분명 나에게는 《맴맴》으로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고 매미를 보고있었다. 어미 매미는 연필보다 좀 가는 마른나무가지에 구멍 몇개를 뚫고 400여개의 알을 낳는다. 이 구멍에 매미알좀벌은 자신의 알을 하나씩 낳아 매미알들을 먹어치운다. 매미알좀벌이 자기가 알을 낳은 구멍에 또 알을 낳는것도 모른채 어미 매미는 있는 힘껏 알을 낳은후 그대로 땅에 떨어져 목숨을 다한다. 한살이 된 맴맴이는 땅으로 떨어진다. 천적인 개미를 피해 좋은 땅을 골라 흙을 파헤쳐 그곳에 멋진 집을 짓고 땅속에서 살아간다. 맴맴이는 마른 흙을 오줌에 버무려 찰기가 있는 진흙으로 집을 짓고는 나무뿌리에서 나무즙을 빨아먹으며 오래동안 지낸다. 맴맴이는 4년 사이에 허물을 네번이나 벗은후 한번 더 벗기 위해 나무줄기로 올라가 사력을 다해 마지막 허물을 벗는다. 드디여 매미가 된 맴맴이. 맴맴맴 맴맴맴맴맴맴맴맴. 《매미, 매미, 매미, 매미, 매미.》 하는 그녀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에 나는 눈을 떠버렸다. 기름때 자욱으로 얼룩진 벽에 붙여진 《가갸》표가 코앞에 걸려있었다. 때마침 밖에서 《김장배추 사세요.》를 피대 세워 웨치는 장사군의 스피커 사구려소리가 들려왔다. 《배추.》 나는 경직된 몸을 틀며 따라읽기를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앵무새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빤히 나를 쳐다보고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책상에 턱을 고이고 의자를 뒤로 젖히고 발로 땅을 짚고서 간들거렸다. 해일을 고스란히 기다리고있는 섬같이. 《선생님, 지퍼가 열렸네요.》 그녀는 오른손에 쥐여진 펜으로 내 하체쪽을 가리켰다. 나의 얼굴 전체에 불이 당겼다. 나는 하체를 움켜잡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지퍼는 멀쩡한 그대로였고 너무 꽉 틀어잡았던 탓에 내 하체만이 얼얼해났다. 3 매미 녀자는 파랗게 질려버린 가을하늘을 우러른다. 이마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가을바람이 쓸어간다. 그녀의 옆에 수탉 한마리가 목을 길게 빼들고 껑충하니 서있다가 팥알만한 눈알을 되록거리며 빨갛게 익어버린 볏을 출렁이면서 멀어져간다. 그녀의 백일수강이 끝나는 날, 나는 그녀를 따라 시골로 내려왔다. 《외도》라는 동네 이름이 그녀의 입을 비집고 나왔을 때 사람마다 품고있을 외로움과 고독, 서로에게로 다가가고싶지만 다가서면 되지 않기에 바라만 보고있어야 하는 섬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가 《외도》라고 불렀던 동네는 내가 살던 동네였다. 내가 살던 동네가 《외도》라면 《내도》는 어디에 있을가? 외로운 섬, 아니면 바람났다는 외도? 나는 그녀의 코트자락을 스쳐서 내게로 오는 가을바람을 손가락사이로 흘려보냈다. 내 손가락사이로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엉키고 설키고 나중에는 실타래가 풀려나가듯 빠져나갔다. 손가락 매듭이 시리고 아파났고 그 통증은 내 몸의 어둡고 깊숙한 곳으로까지 포진되여갔다. 나는 페교가 된 학교앞에 서있었다. 운동장은 잡풀들로 무성했고 언제나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쑥들이 키돋움하고있었다. 그 쑥들사이로 가을 잠자리들이 부지런히 날아다녔다. 학교는 《식용균버섯기지》라는 패말과 함께 무덤의 적막으로 영원히 깨여나지 않을 잠속에 빠져있었다. 내가 가르쳤던 애들은 밀려가버리고 쓰다버린 균재배 쓰레기들이 나뒹굴고있었다. 페교와 함께 실업, 안해의 한국위장결혼과 함께 리혼, 이 모든것이 긴가민가 하는 새에 쓰나미로 닥쳐들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 나는 섬에 버려져서 흰배를 번뜩이며 발악하는 생선이 되여버렸다. 그러나 우아하게 말해서는 섭외결혼 대비 초스피드 어학원 강사이다. 매미 녀자는 발부리의 돌을 주어 운동장의 우거진 잡초속에 던졌다. 그러자 잡초속에서 우글거리던 닭무리들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멀리 흩어져갔다. 《선생님, 우리 애도 여기 다녔댔어요. 그래서 선생님도 알고있구요.》 그녀가 강아지풀을 쏙 뽑는다. 《그런데 왜?》 하는것 같은 나의 의아한 눈길에 그녀는 상처처럼 난 보조개를 보여주며 말한다. 《잠간 통학을 했으니까요. 제가 매일마다 데려다주었구요. 저기 철길너머가 우리 동네였거든요.》 그녀는 긍정에너지의 눈빛을 나한테 쏜다. 《한족녀자한테 애 맡기면 한족애 된다고 기어코 애까지 한국으로 데려가더니만 소식 없잖아요. 저는 죽었다 깨여나도 조선족 얼굴이 아니라나요. 웃겨. 좋다고 결혼할 때는 내가 조선족으로 보였는지.》 그녀의 입가로 때아닌 씀바귀꽃이 피여갔다. 《한국 가서 성형할거예요.》 그녀의 입에서 씀바귀꽃잎처럼 무심히 떨어진 말은 메스가 되여 내 가슴을 슥― 그어버렸다. 메스가 지나면서 베여진 내 몸속에서는 매미 한마리가 맴맴 울고있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매미처럼 생긴 녀자를 미녀라고 생각했다는데 그녀는 아마 세월탓을 해야 할가부다. 《외도》에는 나만 외롭게 남았고 그녀는 졸업선물로 《마라탕》섬을 청소해준다며 떠났다. 4 《외도》의 빈 고향집에서 하루 묵고 오후의 강의시간을 맞춰 나는 다시 《마라탕》학원으로 향했다. 눈을 뜨고나면 생은 언제나 스스로 시작되고 이어지게 되여있는 법이니까. 《마라탕》학원앞에서 배추 장사하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손에 쥐고있던 배추를 땅에 떨어뜨렸다. 사스감염환자 피하듯 때가 덕지덕지 앉은 손으로 입가림을 하더니 침을 찔― 갈기는것도 잊지 않았다. 학원내는 테러공습뒤의 페허 같았다. 모든것들이 나뒹굴고 떨어져서 부서져있었다. 침입자들의 무서운 광기와 파괴의 스릴, 그 잔해속에서 나는 높은 벼랑에서 지옥의 나락을 향해 단숨에 추락해버리는것 같았다. 귀가로 스쳐가는 바람은 마귀들의 함성으로 들끓었고 입을 벌려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는데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온갖 아픔들은 머리속으로 집약되였다가는 하얗게 부서져가면서 해저로 가라앉았다. 이명이 들리는가싶더니 사이렌소리가 학원앞에서 멈췄고 매미 녀자가 한 남자와 함께 경찰에 끌려나왔다. 나는 한눈에 매미 녀자옆에 있는 남자가 전화로 통역을 해주었던 매미 녀자가 사귀고있다던 한국 남자임을 알아보았다. 경찰들이 지어준 새 이름인 《마라탕》매음소굴에서 나는 끌려나와 매미 녀자와 그 남자와 함께 파출소로 실려갔다. 그때 나는 학원생인 짜증 캐릭터 아가씨가 한국 가려면 한마디는 배워야 되지 않겠냐 하면서 단즙이 다 빨려간 껌딱지를 찍― 내뱉으며 했던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쮸우밍아!(사람 살려요.)》 /(목단강) 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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