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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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생애의 마지막 5년
2010년 01월 25일 11시 13분  조회:4800  추천:0  작성자: 人和

1997년 2월 19일, 등소평이 세상을 떴다. 등소평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어느새 12년이 된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은 탁월한 지도력 및 과인한 용기와 모략으로 중국을 이끌어 전세계를 진동시킨 전대미문의 변혁을 가동했다. 30여년간의 개혁과 개방을 경과하여 지금 중국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80고령에 다시 개혁을 호소


1992년 1월 2일, 등소평은 인민대회당 118대청에서 “계획과 건강”컵 로동지들의 브리지( 牌)시합에 참가했다. 이 시합은 등소평이 1984년에 발기하여 조직된것이다. 시합결과 등소평이 관군(6개 기술등급중 세번째 등급)을 획득했다. 대회에서는 등소평에게 “브리지대사”란 칭호를 수여했다. 등소평은 이때 88세였으나 몸은 여전히 건강했다.


반달이후 그는 남방으로 달리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 격정이 넘쳐흐르는 개인려행은 중국의 “활력”을 회복시켰다. 당시 등소평의 강렬한 개혁결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심수를 떠날 때 등소평은 심수시민들앞에서 심수시당위서기에게 “당신들은 다른 곳보다 좀 더 빨리 진행하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당시 등소평의 남방순방“목표”는 개혁을 가속화하는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개혁을 담보하는것이였다.


등소평의 과거 일화와 마찬가지로 이번 려행도 전기적색채를 띠였다. 심수 선호식물원에서 그는 처음으로 “발재수”를 보았다. 그는 이 나무를 보고 “전국인민들이 다 이 나무를 심으면 좋겠소. 전국인민들이 다 부자로 되게 말이요.”라고 말했다. 그는 심수의 고층건물우에 올라 향항을 바라보았다. 주해에서 등산할 때 경호원은 등소평에게 원래의 등산길을 따라 하산할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원래의 등산길을 선택한것이 아니라 새 길을 선택했다. 그는 “나는 되돌아가는 법이 없소”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경호원의 건의에 대답했다.


심수, 주해, 광주와 상해에서 그는 가는 곳마다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자본주의도 계획경제가 있고 사회주의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말을 여러번 강조했다.


이번 려행은 비밀리에 진행되였다. 향항의 매체에서 일정한 보도를 하긴 했지만 등소평 본인은 신화사에서 자기의 려행소식을 내는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3월상순에 중공중앙 정치국에서 련속 이틀간이나 회의를 개최하여 등소평의 남방순찰시의 담화를 학습했다. 그해 6월 9일에 국가주석 강택민이 내부회의연설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시장경제”란 개념을 제출했다. 등소평은 이 개념을 정식으로 사용할것을 동의했으며 그해에 소집하는 중공14차 대표대회에서 이 개념을 도입할것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4차 당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체제”란 제기법을 더 선명하게 개혁성을 띤 “사회주의시장경제”로 대체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등소평은 특수한 사명을 완수한후 점차 력사무대에서 물러났고 조용히 평범하게 인생의 마지막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 새로운 규칙과 질서 역시 점차 정식으로 가동되였다.


▶ “나는 이미 답장을 바쳤다”


“한 국가의 운명이 한두사람의 명망에 걸려있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것이며 아주 위험한것이다.” 등소평은 1989년 6월 16일에 담화중에 이 말을 했다.


14차 당대표대회를 마칠 때 등소평은 딸 등용의 부축을 받으며 인민대회당으로 와서 대표대회에서 새로 당선된 중앙정치국 위원들을 접견했다. 이것은 등소평의 일생중에서 마지막으로 공공장소에 나타난 중요한 한차례 행사였다. 이로써 그의 “계획”은 기본상 결속되였다.


그는 진정한 평민백성으로 돌아왔다. “남방순찰”시 상해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진정한 평민백성으로 돌아온것이다. 그날은 정월 대보름이였다. 그는 거리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려 했다. 신변일군이 그에게 상해제1백화상점을 선택해주었다. 그는 오방국한테서 10원을 꾸어 손자벌이 되는 맹맹과 양양에게 연필과 고무지우개를 사주었다. 그는 평민백성이 되여 매대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물건을 사는것이 아주 재미있다고 말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등림이 “오늘 상점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상점에 가지 말아야 하겠다. 괜히 백성들을 떠들썩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라고 대답했다.


그해 여름 그는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수영했다. 북대하에서 그는 8번이나 바다물에 들어가 번마다 45분가량 수영했다.


미국의 어느 한 정치학교수는 근대중국을 총화하면서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 그리고 손중산을 포함한 중국 지도자들은 다 중국에서 현대화를 실현하여 외래 제국주의의 통제에서 해방되려 했다”고 서술했다. 등소평은 주은래와 함께 “네가지 현대화”원칙을 기획하여 중국을 강대한 공업화국가로 건설할것을 추구하여왔다. 그후 개혁개방이후 그는 목표를 조절하여 아주 실제적인 “초요사회”를 건설하는것으로 항선을 바꾸었다. 1993년초 그는 중국공산당의 차기 령도집체에 “중국에 대한 책임문제에 한해 나는 이미 답장을 다 바친 사람이다. 이제부터 당신들이 잘해야 한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1994년 10월 1일, 북경 조어대 국빈관에서 등소평은 부축을 받으며 승용차에서 내린 다음 다시 밀차에 앉았다. 그는 국경불꽃을 관람한 다음 생전에 마지막 공개발표한 사진을 남겼다. 당시 그는 이미 90세고령이였다. 그날 밤, 등소평은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영향력이 아주 큰 문장을 발표했다. 그는 국경만찬회에 출석한 박일파에게 위탁하여 축사를 대독하게 했다. 축사중 중앙정치국 성원과 전체 중국공산당 당원에게 “강택민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주위에 긴밀하게 단합하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후부터 등소평은 공개장소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국가책임을 새로운 령도층에 인수인계하는 작업은 끝났다. 국경불꽃이 북경의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었다. 등소평은 중국개혁개방에 새로운 유전자요소를 주입했다. 차후에 중국에서 발생한 모든 변화에는 그의 영향이 깃들어있다.

▶생애 마지막의 청정함


북경 경산후가의 미량고 골목거리 3호에 검은 벽돌에 회색기와를 이은 집에 록음이 흘러넘치는 뜨락이 있다. 이곳에서 살고있는 등소평은 국가를 위한 일에 더는 참여하지 않고 만년을 보냈다.
신화사 보도중에 이 뜨락은 자연계의 생기가 넘치는 곳이라고 쓰고있다. “석류과일이 주렁주렁 달렸고 맑고 밝은 록음이 2층집을 가리고있다. 뜨락 복판에 작은 련꽃못이 있다. 여름의 련꽃이 찬란하게 피였다. 못 중앙의 태호석을 타고 물이 졸졸 흐르고있었으며 반공중에 흐느적이는 나무가지에는 간혹 매미가 울고있었다.”


만년의 등소평은 취침전에 꼭 무협소설을 읽는것으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의 인상과는 상반되게 평가했다. “무협소설의 가장 좋은 점은 다음에 또 읽을수 있게 쓴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읽을 필요가 없다.” 이는 등소평이 등용에게 한 무협소설에 관한 평가다.


등소평생애의 마지막 3년간의 내용은 “등소평년보”중 얼마 안된다. 국가를 위해 일을 하지 않기로 한이상 등소평의 생활은 아주 평범하고 별로 기이한 내용이 없다. 등림은 텔레비죤기록편으로 “등소평의 하루”라는 내용을 찍으려고 했는데 몇번이나 시도해보았지만 끝내 실패하고말았다고 소개했다. 등소평의 일상생활이 너무 규칙적이며 평범해서 별로 남길만한 장면이 없었다는것이다.

 

“희극적인 장면을 찾고 아주 재미가 있는 장면을 고르려고 했지만 그만 실패하고말았다.”이렇게 말하는 그는 “몇번이나 시험해보았지만 종내 성사하지 못했다”고 이실직고했다.


등소평은 여전히 담배를 피웠다. 그해 12월 22일, 페부가 감염되여 중국인민해방군 총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7일에 퇴원했다.


미국 한 방송회사의 주최자 메크 화래이스가 발견한것과 마찬가지로 등소평은 담배려과부분이 담배부분보다 긴 특제담배를 피웠다.


1996년 12월 22일, 등소평은 병이 도져 또다시 해방군 총병원에 입원했다. 이때 그의 생명은 최후의 두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다 하지 못한 사업은 아직도 많고 많았다. 작은것은 중국의 축구문제이고 큰것은 정체체제개혁이였다.


등소평은 입원했을 때 텔레비죤에서 “등소평”이란 기록편을 보았다. 간호원들은 후에 등소평이 자기에 관한 기록편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고 피로했다.


두달후 등소평은 서거했다.
그해 여름 중국정부는 향항의 주권을 행사하는것을 회복했다.
많은 사람들은 텔레비죤에 나오는 등소평의 거처에 있는 울창한 록음을 자랑하는 청송, 해당화와 앵두의 싱싱함을 잊지 않을것이다. 여기서 위대하면서도 평범한 한 로인이 일생의 마지막 5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연변라지오TV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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