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소리를 들은지 오랜 안해를 보면서 가끔 흘러간 세월속에 우리에게도 그렇게 아름답고 랑만적인 청춘의 시절이 있었던가? 자문해 보게된다. 아물거리는 추억속에서 첫 만남의 이야기가 연기처럼 가물가물 떠 오른다.
내가 26살 되던 해 어느 날이였다. 고모가 전주김씨집안의 딸을 소개해주었다.
안도현 차조구에 있다는 23살난 이 처녀는 안도현고중을 다니다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공부를 그만두고 귀향하여 부모님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있었다. 형제 7남매중 그녀는 둘째였는데 큰 언니가 조선으로 갔으므로 그녀가 큰 언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먼저 만났다. 당신이 먼저 총각을 보고 마음에 들면 딸을 만나보도록 하겠다는 립장에 서였다.
보통키에 너부죽한 얼굴, 튼튼한 몸매를 가진 그분은 첫 인상이 인자해 보이였다. 나를 보고 마음에 들었던지 딸을 만나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자리를 떴다.
예비장모님이 돌아 간후 나는 (어떠 녀자일가? 어머니를 닮았으면 분명 예쁠텐데.) 하는 생각을 굴렸다. 그리고 만나면 할말을 굴려보았다.
반나절이 지나자 그녀가 나타났다. 문을 떼고 들어서는 그 녀를 보는 순간 “아! 정말 이쁘구나!” 하는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하였다. 그 녀는 어머니와 완전히 다른 모습의 미인이였다. 후에 보니 그녀는 멋쟁이 아버지를 쏙 떼 닮았던 것이였다.
보통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커다란 눈, 말쑥한 살결, 두 어깨에 달랑거리는 짧은 쌍태머리, 흰적삼에 초록색 바지를 입은 그 녀는 대번에 내 마음에 쏙 빼갔다. 경국지색의 미녀는 아니지만 누가 보아도 엄지손가락을 내밀 빼여난 미모였다. 한마디로 나는 첫눈에 그 녀한테 반해 버렸다.
나는 내 나름의 일생을 함께 할 동반자 기준을 정하고 있었다. 인물은 수수해도 괜찮지만 마음씨가 곱고 머리속에 지식이 들어있고 대화가 잘 되며 무었보다 나의 작가꿈을 리해해주는 사람이 되여야 했다.
대화를 해보니 그녀는 모든 면에서 내가 꿈꾸어 온 동반자 기준에 거의 맞먹었다. 고중생이니 학력도 마음에 들었고 게다가 인물까지 고우니 금상첨화였다. 분명 하늘이 내게 보내준 선물이였다.
우리는 악수를 나눈 다음 나란히 앉았다. 초면이라 처음엔 좀 서먹서먹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긴장하던 분위기는 누구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사회형세로부터 시작하여 친척 관계, 그리고 여짓껏 살아오면서 겪었던 지난 일들을 쭉 주고 받았다. 그리고 각자의 애정사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앗다. 여짓껏 두명의 녀성을 만나보았으나 모두 마음에 들지않았다고 솔직하게 얘기하고 그녀는 한 동창생이 죽자살자 따랐는데 키가 작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솔직한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였다. 그자리에서 내가 남자답게 청혼을 제기하자 그녀는 마음이 움직이는 눈치면서도 너무 이르다며 더 료해해 보자고 한걸음 물러섰다. 썩 원만한 대답은 아니 였지만 내가 검질기게 달라붙으면 처녀의 마음을 얻으수 있을것 같았다. 처녀가 마음에 쏙 들자 나의 정열도 북받쳤다.
당시 나는 로두구에 살고 그녀의 집은 우리 집과 70리 떨어진 안도현 석문진 차조촌에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택시가 없었고 뻐스도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렬차를 많이 리용했다. 로두구에서 차조구까지 갈려면 기차를 타야 하였다. 그러므로 렬차시간에 맞추어 떠나고 또 아쉬운대로 렬차시간에 맞추어 돌아와야 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부지런히 그녀를 찾아 갔다. 마침내 그 녀는 “동의한다”고 수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마치 하늘의 별을 딴것처럼 으쓱해났다
량가부모님들의 허락을 받은후 인츰 상견례가 있었고 결혼식날은 10월1일로 정하였다. 곡식과 과일이 무르익는 수확의 황금 계절인 첫날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니 매우 기뻤다. 또한 이날은 나라의 국경절이여서 더 의미가 있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나는 준비가 어떻게 됐는지 궁굼해서 왔다고 둘러대면서 그녀를 찾아 갔다. 사실 한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매일 볼수 있음에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자꾸 눈앞에서 얼른거려 보지않고는 참을수 없었다. 결혼식도 며칠 없으니 결혼식 전에 선을 벗어 나는 일을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남자의 도둑심보가 음찔하여서였다.
장인은 일하러 나가셨고 처제와 처남도 학교로 가고 집에는 장모와 그녀만 있었다. 장모님은 놀라며 인츰 자리를 떴다.
태여나 처음 이성의 향기를 느끼면서 대방의 체취에 취하여 피 끓는 청춘을 불태우려는 순간 “덜터덩” 하는 문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장모가 들어왔다. 달아오른 열기는 찬기를 만나 단박에 식어버렸다. 무얼 찾으려 들어오셨던 장모님은 대뜸 눈치를 채시고 급하게 집을 나가면서 의미있는 한마디를 남기였다.
“점심은 갗추어 놓았으니 둘이 같이 먹어라.”
결국 그날 나는 그녀의 순결함을 확인할수 있었다.
어느새 결혼 40년이 훌떡 지나버렸다. 지금도 가끔 그날에 있었던 일을 떠 올리면 절로 씩 웃음이 나온다.
듣건대 일본인들은 결혼식날에 록상을 찍는것은 물론 결혼한 날 밤생활도 록상하여 두었다가 몇십년이 지난 다음 로부부가 함께 감상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결혼하는 그 시절엔 록상이란 근본 없었기에 그런건 상상조차 못 했다. 장가갈 때 좋은 하이야가 아니라 소수레를 타고 장가 갔으니 구태여 그때 형편을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때의 첫 만남으로부터 고스란히 가정을 이루었고 자식을 키우면서 40여년 동고동락하며 살아왔다.
비록 남들처럼 화끈한 애정 표현도, 불꽃 튀는 다툼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그래서 더 좋은것 같다. 남다르게 부부간이 가까우면 한사람을 일찍 잃고 너무 멀면 갈라진다는것이 어쩌면 나의 론리이다.
검은머리 백발 되도록 함께 살자던 언약은 이미 이루었고 백년해로 하자는 념원은 아직 코스가 남아있는 우리 부부, 백년은 못살아도 이제20년만 더 함께 했으면 하는게 바람이다. 어느때까지 살지? 그것을 모르고 사는것이 인생사이다.
세월이 흘러 결혼한지가 40년이 넘었지만 변함없이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잊지않고 서로 참고 다독이며 두손 맞잡고 인생행로를 걷고있는 저녘 노을이 아릅답게 비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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