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여러가지 눈물이 있다지만 간추려보면 기쁨의 눈물과 슬픔이 눈물로 나눌수있다.
나는 가끔 수십년전 내가 흘렸던 거짓눈물을 떠올리면 얼굴이 뜨거워 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거짓으로 울었다. 곁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해서 나오지않은 눈물을 억지로 쥐여짰다. 그런데 반대로 어머님이 회갑날에는 웬일인지 눈물이 자꾸흘러 그 눈물을 감추느라고 무척 애를 썼다. 도리대로 말하면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고인을 추모하여 비애의 눈물을 흘려야 하고 어머님의 회갑날에는 웃어야 하는데 정반대였다.
아버님의 장례식날에 거짓으로 눈물흘린 이 용서못할 불효자식, 나는 정말로 부끄러운 불효자식, 지금생각해도 정말로 부끄럽고 죄송하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때 아버님은 이 자식에게 도움을 준것이 하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버님에 대한 존경은 커녕 오히려 내 앞길을 막는 걸림돌이라고 여기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쏟아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때까지 우리집은 열한명 식구가 모여사는 대 가정이였다. 비록 식솔은 많았지만 화기애애하게 살았다.
그런데 1967년 어느날 우리집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하루 아침에 아버지가 저주로운 “반역자”로 몰렸다. 일제가 동북을 강점했을 때 겨우 15세밖에 안되는 아버지는 지하당 조직에서 령도하는 항일조직인 “소년단”에 가입하였다가 얼마안되여 형세의 피박에 의하여 놈들에게 “귀순”하였다. 아버지의 이 “력사문제”를 어머니는 물론 자식들도 다 모르고 지나왔다. 우리집은 그야말로 초상맞은 집이 돼버렸다. 아버지가 붙들려 간후 집안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아버지에게 그처럼 중대한 “력사문제”가 있다는것을 알았을때 억장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정말 그런 사실이 있을가? 잘 믿어지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버지 “력사문제”가 나의 앞길과 우리집에 가져다줄 위험한 피해가 닦쳐오리라는 예감이 들어 몸을 흠칫 떨었다.
나의 숙부님은 혁명렬사였다. 할머니가 우리집에 계시므로 우리집은 혁명렬사 가족 대우를 받았다. 아버지는 “반역자”이고 삼촌은 혁명렬사였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못했다. 결국은 나는 아버지문제가 풀리기를 고스란이 기다리는 길밖에 없었다. 아버지 “력사문제”로 인하여 나는 정신상에서 심한 타격을 받았다.
그 세월에 아버지가 겪은 겪은 사회적환경 및 당시 아버님의 성인의 아닌 아직 소년이였다는 점을 감안 하지 못하였거니와 리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 머리속에는 혁명자에게는 “투항”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혁명의 의지를 꺽지말아야 한다는 관념이 꽉 박혀있었다. 그런 인식과 개념으로 문제를 보았으니 아버지가 혁명 영웅처럼 결백하지 못 한것이 정말로 가증스러울 정도로 미웠다. 후에 정책락실을 받어 “일반적력사문제”로 해결받긴 했지만 어쩐지 체증에 거리기라도 한것 처럼 아버지문제가 늘 마음에 남아있었고 꺼림직하였다.
그후 나는 백배의 노력을 가하여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입당후에도 아버지 “력사문제”가 여전히 내 머리속을 맨돌면서 나를 괴롭혔다. 향에서 조직한 “당조직을 정돈하고 당의 기풍을 바로잡는”운동을 전개할 때였다. 향당위원회에서는 봄과 가을 두계단을 나누어 농촌당원들을 집중하여 “당조직을 정돈하고 당의 기풍을 바로잡는” 강습반을 꾸리였다. 나는 강습반에 참가할 때마다 아버지의 “력사문제”가 부담이 되여 당당하지 못하였다. 강습반에서는 마지막에 당원들을 평가를 할 때 나는 “투쟁성이 약하다.”는 귀에 거슬리는 지적을 받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3년후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차려드렸다. 어머님께 술을 부어 올리고 엎드려 큰 절을 할 때 느닷없이 가슴이 뭉클해 지고 코등이 저려나며 눈시울이 뜨거워 났다. 눈에선 눈물이 저절로 주루룩 흘러 내리였다. 아무리 눈물을 훔치고 닦아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수 없었다. 그 눈물은 어머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눈물이였고 행복을 못 누려보시고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가슴아픈 추억의 눈물이였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꿋꿋하고 멋진 체격이 멋졌다. 아버지는 겨우 소학교 4학년 까지 공부했지만 기억력이 밝고 열심히 자습하여 한자풀이를 잘한데서 마을사람들로부터 “대학생” 생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아버님은 꾸준히 책을 일고 일기를 쓰시였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늘 침묵을 지키였고 자식들께 해가 미칠가 전전긍긍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써놓았던 일기를 정리하여 책 한권이라도 묶어내는게 소망이녔는데 고 그러지 못하여 아쉬워하시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앞으로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써서 아버님의 소망을 이루어 달라고 부탁 하였더니 아버지는 만면에는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앞에 술잔을 부어올리면서 나는 속으로 웨쳤다.
“아! 이자리에 정말로 아버지도 함께 앉으셔서 내가 부어올리는 술잔을 받으시고 내가 올리는 큰절을 받으신다면 얼마나 좋을가?”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을 더 그리게 되고 부모님들이 베푼 사랑이 떠오른다.
나는 아버님 생전에 따뜻한 물 한모금 밥한그릇이라도 더 드리지 못한것이 가슴저리게 아프다. 아버님께 조금이라도 더 효성하였더라면 더 오래 앉으셨으리라고 뼈저리게 느낀다.
아버님은 생전에 술을 반가워하시였다. 어려운 세월이여서 술을 사먹기도 어려웠다. 하기에 어쩌다 술자리를 만나면 아버지는 취하도록 마시였다. 그때 나는 취하신 아버지를 아니꼽게만 생각했지 리해하지 못하였다. 나이를 먹고보니 아버지가 그 술을 즐겨 마신것이 아니라 그 술에 말못할 마음속의 고통을 담고 자식과 가정에 미친 한과 자신의 과오를 달래시기 위하여 취하도록 마시였을 것이다.
아버님은 뒤 늦게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지하당조직에서는 혁명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귀순” 하도록 암시하였다는게 력사의 증언이다. 비록 후에 밝혀져서 다행이였지만 아버지는 억울함을 속으로 묵묵히 삭힐뿐 아무 변명도 늘여놓지않았다.
세월은 약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에게 쌓였던 오해와 원망이 풀리면서 오히려 죄송해나가는걸 어쩔수 없었다.
아버님께 효도못한 것을 어머님께 효도하고 싶었지만 정작 마음뿐 생활난에 모대기다나니 효도를 많이 하지 못하였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부모님의 산소를 찾아 갈 때마다 흙 한삽이라도 더 올리고 풀 한포기라도 더 베서 죄송한 마음을 사과하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고맙고 존경스러운 사람은 바로 나의 부모님들이시다. 부모되여야 부모님의 마음을 리해하게 된다는 말의 함의를 실제로 체험하고 있다.
오늘날 내 신체가 건강하고 먹을걱정 입을걱정 없이 행복하게 잘 살게된것은 정부의 올바른 시책과 부모님들의 하늘같은 은혜이다. 부모님께 못 다한 효심을 오늘은 자식들에게 몰붓는다. 우리 부모님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랬을것이다.
가짜로 흘렸던 내 눈물도 결국은 참회의 눈물이였다. 인생을 도리켜 보면 사람마다 웃음으로 눈물로 희노애락을 맞보며 산다.
아버지, 어머니, 미안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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