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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본 석희만 선생
2014년 11월 28일 13시 11분  조회:2287  추천:0  작성자: 최상운
내가 본 석희만 선생



내가 화가 석희만선생을 알게된 것은 1974년도였다. 당시 농촌의 면모를 개변시키기 위해 많은 간부들이 가족과 함께 농촌으로 내려 왔는데 석희만선생도 우리생산대에 내려 왔다. 석희만선생은 연변예술학교 부교장 겸 연변미술가협회 주석으로 사업하다가 내려 왔다. 그는 학자다운 풍채를 다분히 풍기는 한편 무던한 인상이였고 마음씨가 좋아 보였다.
석선생의 부인은 일본녀성이였는데 (명함 소선자행자) 마음씨가 곱고 착하였다. 작식도 뛰여나서 일본식으로 만든 료리는 우리 농민들의 구미를 무척이나 돋구어 주었다. 
석선생은 성격이 콸콸하고 활달한분이였다. 지식분자라는 틀이 조금도 없었고 유모아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7년사이 그의 호칭도 석교장으로 부터 석선생님 석아바이로 변하였다. 우리는 석교장이라 부르기보다 석아바이로 부르는것이 더 좋았고 석선생님도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를 원하셨다.
석선생님은 농촌에 온 후 짬짬이 나무 뿌리를 주어다가 멋진 예술조각품들을 만들었고 가끔 야외를 배경으로 풍경속사도 했다. 선생님의 미술수준은 전 향에서 소문이 났고 모두들 그의 작품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한번은 향(당시는 인민공사)에서 회의실에 공산당 7 명령수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걸기로 하였다. 당연히 석선생이 맡아 그리게 되었다.
석선생은 일주일간의 시간을 들여 7명의 초상화를 그려 내셨다. 첫날에는 흰색으로 다음날에는 노란색으로 또 그다음 날에는 다른 색으로 매일매일 색상을 바꿔 가면서 그렸다. 그렇게 7일째 되던 날에 초상화가 완성되였다. 
석선생님의 그림을 본 향간부들은 그림이 어찌나 생동하였는지 모두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로 뛰여난 미술가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으며 연변 미술가협회 주석으로서 추호의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미술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이였지만 석선생과 사귀면서 유화, 수분화, 국화, 파스톌화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였고 그 덕에 지금은 웬만한 미술작품을 나름대로 볼 줄 알게 되였다. 
석선생님의 미술특점은 파스톌화였다. 이는 연변의 미술가중 석선생만이 유일하게 사용하는 화법이였다. 파스텔화란 흰천에 색분필로 그림을 그린 후 그 위에 아마 기름을 뿌려 유화처럼 보이게 하는 그림이였다.
석선생은 아주 정직한 분이엿다. 그 험난한 시기에도 아첨이나 허위를 모르고 자기의 주장을 세우며 살아 온 분이였다. 남이야 어떻든 그는 상관없이 꾸준히 그림을 그리셨다.
생일날 철봉대에서 떨어져 오른손이 상했지만 그는 락심하지 않고 창작에 더욱 열중하면서 미술을 자기의 유일한 천직으로 삼고 일하시였다. 청년시절 일본에서 고학으로 도꾜일본미술학교 서양학과를 마쳤고 재학시절에 그의 작품은  프랑스미술박람회에 입선되여 우수상을 받았는데 그 소식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그는 일생동안 소중히 보관하고 계시였다. 그것은 석선생님 일생에서의 최고의 영예였던것이다.
석선생은 솔직하고 유모아적인 분이셨다. 한번은 로두구 공소합작사에서 매대 뒤면에 장식용 그림을 그리게 되였다. 우리생산대에서는 목수일을 맡고 석선생은 그림을 맡았는데  그림을 어찌도 잘 그리셨던지 진짜 물건을 붙혀 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림속에 그려져 있는 판매원 아가씨들은 수수하게 그려져 있었다. 내가 석선생한테 왜 그림속이 녀인들을 예쁘게 그리지 않았는가고 물었더니 석선생은 《매대에서 일하는 판매원들이 예쁘지 않는데 그림을 곱게 그리면 상대적으로 현실사람이 미워 보이지요. 그래서 대칭되게 그린것이오.》 라고 말씀하시였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석선생은 농촌에 온 후 불구의 몸이지만 로동현장에 절대 빠지지를 않았다. 힘든 일은 할 수 없어도 경한 일이지만 열성껏 하였고 석선생 부인은 탁아소를 꾸려 애들을 잘 보살피셨다.
석선생은 우리 생산대에 57세에 내려 왔다가 64세 되던 해,내려 온지 7년만에 드디어 연길로 돌아 갔으며 그 후 학교에서 퇴직하셨다.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마을에서는 석선생을 위한 송별회가 있었다. 송별회 에서 석선생님은 간단한 작별 인사를 했다. 농촌에 내려온7년간에 세가지가 불었습니다. 첫째는 나이가 불었고 둘째는 주량이 불었으며 세째는 사원들간의 정이 두터워 졌습니다. 한편 석선생님은 일생에서 제일좋은 황금시기를 놓치였 다며 유감스러워 하시였다.
그렇기도 하였다. 매번 있은 정치운동 때마다 석선생은 곤혹을 치르시군 하였다. 억울한 루명들이 선생에게 들씨워 졌다. 철부지 학생들이 선생을 일본 특무, 조선특무, 국민당특무로 몰았다. 해방전에 석선생은 장춘에서 미술사를 꾸린 적이 있었는데 당시 국민당 군대의 협박에 의하여 장개석의 초상화를 그린것이 죄가 되여 국민당특무로 된것이다. 그 후 정책시달로 선생에게 들씨웠던 억울한 루명들은 다 벗겨졌지만 선생이 다시 미술에 정력을 몰부우려 할 때 공교롭게도 농촌으로 내려오게 되였던것이다. 하여 석선생은 정치소용 돌이 속에서 미술의 황금시기를 놓치게 되였다.
은퇴 후 석선생은 잃어버린 황금시기를 되찾기 위해 여생을 시간과 다투면서 살아 오시었다. 90고령에도 화구를 메고 연변의 곳곳을 전전하면서 자연과 산천경개를 그렸으며 농민들의 생활과 얼굴을 그리시였다.
석선생님은 늘 우리 마을 사람들을 잊지 않고 종종 찾아 오셔서 농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셨다. 또 거리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 나면 반가이 집으로 청하시군 하였다. 후에 선생은 농촌에서 잃은것 보다 얻은것이 더 많다고 말씀 하시었다. 비록 미술의 황금시기를 놓쳤지만 농민들과의 우정이 깊어진것이 더욱 소중하다 고 늘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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