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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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일견
2015년 10월 02일 13시 17분  조회:2257  추천:0  작성자: 최상운
            화룡일견
 
 
        한로가 접어들자 제법 날씨가 쌀쌀해 나며 늦가을의 한기를 느끼게 하였다. 오늘 우리는 행선지를 화룡으로 정하였다.
    연길을 떠난 뻐스는 40분 달리여 화룡뻐스정류소에 도착하였다.
    화룡에 도착하였으니 화룡에대한 력사를 알아야 할것 같다. 지금의 화룡의 옛 이름은 삼도구였다. 1909년에 청조정부가 이 지방에 현정부를 설치하면서 현정부소재지는 허릉위에 두었다. 허릉위는 일면 따라즈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룡정시 지신진 소재지 지신이였다. 허릉이란 말은  만족어로 두 산이 한 골짜기를 끼고 있다고 하는 뜻이고 위 란 한어인데 골짜기란 뜻이다. 1940년 화룡현공서는 허릉위에서 삼도구로 옮기였는데 위자를 떼버리고 허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허릉이란 만족어의 원뚯과는 달리 오늘은 “평화화룡”로 되여 화룡시가 길이길이 잘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고 한다.
    화룡시에대한 관광일정에서 우리는 우선 선경대부터 돌아 보기로 하였다. 연변에서 유명한 유람구인 선경대는 화룡에서 남평으로 가는 로정에 있었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화룡뻐스정류소를 떠나 40분 달리자 성급풍격구인 선경대에 도착하였다. 나는 선경대(仙景台)란 이름만 들었지 집적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선경대라고 하니 이름만 들어도 신선들이 놀던 경치좋은 곳이라 여겨지면서 볼거리가 이만저만이 아닐것이라 생각되였다.
    차에서 내려 멀리보이는 선경대는 참으로 가관이였다. 하늘을 찌를듯 우뚝솟은 바위산들은 기암절벽을 이루었고 산등성이와 골짜기에는 푸르른 나무숲이 바위산과 잘 어룰렸다. 산중턱을 맴도는 실안개는 더더욱 선경대를 멋진 산으로 장식하여 주고 있었다. 선경대의 웅장하고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나는 홀딱 반하였다. 나는 어서 빠리 선경대를 보고싶은 충동을 느끼여 걸음을 재우쳤다.
    우리는 선경대 매표구에서 표를 산후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안내원으로 나선 택시기사 최씨는 선경대에 대하여 아는것도 많고 이야기도 구수하게 잘 하였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길을 걸으니 힘든줄 몰랐다.
   선경대의 등산로는 두 갈래길로 나뉘어졌다. 우리는  서쪽길을 택하였다.  등산길 첫 코스에  옛 칠성사 터가 있었다. 칠성사 터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고 단지 칠성사에서 사용하였다는 우물이 하나 있었을 뿐이였다. 우물은 룡드레 우물이였는데 그 물을 마시면 장수한다고 하여 모두다 그 우물을 장수우물이라 불렀다. 우물곁에는 칠성암으로 부터 훌러 나오는 샘물이 있었는데 감로천이되여 세월을 모르고 주야 장천 아래로 흐르고있었다..
     칠성사 터로부터 선경대의 정식 유람이 시작된다. 칠성사터를 벗어나면 산발이 강해지고 산길이 가파롭다. 서쪽에는 높은 산 봉우리들이 많고 볼거리가 많았다. 서쪽 등산로로 가려면 반드시 깊은 골짜기를 건너야 한다. 그 골짜기에는 쇠바줄다리가 안장되여 있었다. 흔들흔들하는 다리를 조심스레 건너고 보니 등골에 땀이 어느새 축축히 났다.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면서 깊은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보니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물은 바위에 부디치면서 물갈기를 이루고 있었다. 해빛에 반사된 은빛 물보라는 고운 칠색무지개를 이루어  이채를 돋구어 주었다.
     우리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주위의 풍경들을 감상하였다. 길옆에 있는 큰 바위마다에는 화룡시의 문인들이 지은 시를 바위에 새겨 놓은것이 보이였다. 나는 그 시들을 보면서 얼굴을 찌그렸다. 시를 잘못 지었다거나 잘못 새긴것도  아닌데 선경대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손상을 주는 감이 들어서였다. 바위에 시나 이름을 새겨놓는것은 오늘에 있는일이 아니고 옛적부터 있었다. 유람을 다니다 보면 명산마다 위인들이 지은 시거나 글발을  새겨놓은 것을 흔히 보게 된다. 아마 사람들은 명산을 리용하여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 의도 였을것이다. 옛날에는 위인들만 이렇게 할수 있었지만 하토 백성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과거와 달라 돈도있고 실권이 있으니 저마다 자기의 이름과 흔적을 남기려고 별별짓을 다하고 있다. 명산에 글을 새겨놓는 일은 우리 나라 뿐이 아니다. 몇 년전 나는 금강산 유람을 갔다. 금강산의 유명한 바위마다에는 한국유람객들이 돈주고 쪼아놓은 그들의 이름과 시가  있어 나는 얼굴을 찌그렸다. 세상만물은 적으면 귀하고 많으면 귀찬은 존재로 된다. 나는 금강산의 바위마다에 이름을 새겨 놓은것을 보면서 금강산의 아름다운 자연현상에 허물을 남기였다는 서운한 감이 들었다. 더 내눈에 거슬리게 보인것은 금강산 등산길 어느 한 바위에 문명치 못한 등산 객이 자기 이름을 새겨 놓았다. 그길을 다니는 사람마다 그 글자를 밣고 지나 가는것이였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그 글을 새긴사람을 한심한 바보짓을 했다고 보았다.? 여기 선경대의 바위에 글을 새계 놓은것을 보면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하턴 선경대의 자연미에 손상을 준다는것만은 지적해야 하겠다.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싶은 사람들은 더는 선경대에다 자기의 글발을 새기지 말았으면 하는 권고를 하고싶다.
    다리를 건너 산으로 오르고 보면 선경대에서 꽤나 높은봉 장수대에 이르게 된다. 장수대에서 한 쉼 쉬며 사방을 둘러 보면 장수대의 삼면에 있는 뭇 산들은  장수대를 둘러싸고 키돋음 하고있는 듯이 보이였다 장수대에서 아래로 조금 내려 왔다가 다시 왼쪽산으로 오르면 수보석이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수보석樹抱石이란 글자 그대로 나무가 바위를 안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 바위와 나무를 보면 그런 감이 든다. 나무가 신기하게 바위를 감싸고 자라고 있어 그 형상이 참으로 나무와 바위가 다정하게 사랑을 속사귀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은 그 바위를 수보석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수보석을 지나 더 올라가면 선경문에 이르게 된다. 산으로 오르는 길에 길을 막은 큰 바위가 있다. 바위틈 사이에 졻은 틈새가 있는데 그 졻은 틈새로 사람들은 조심스레 지나간다. 이곳을 선경문이라 하였다. 바위가 단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무시무시한 마음을 쥐여 잡고 이곳을 지나면 마음이 확 풀린다. 마치 지상에서 천상으로 오르는 감이든다. 그런 감정과 마음을 헤아려 사람들은 이곳을  선경문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선경문을 지나 더 올라가면 신선궁에 이르게 된다. 신선이 놀다 갔다는 신선궁, 이름 같아서는 굉장히 크고 멋지고 화려하리라 여길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이곳에 작은 동굴 하나 있는데 그 동굴을  가리켜 신선궁이라 불렀다. 동굴은 천년동굴인데 깊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인기를 끌만하였다. 신선궁을지나 더 올라가면 독수봉에 이르게 된다. 독수봉에 이르면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다. 멀리 동해가로 부터 떠 오르는 붉은 해는 찬란히 빛을 뿌리며 서서히 뭇 산위로 떠오르는것이 정말로 멋지다. 그 해빛을 동반하여 칠색구름들이 산을 감싸고 있다가 어느사이인가 살며시 사라진다. 자연이 준 황홀한 이 일출을 보면 더더욱 선경대의 아름다운 풍경에 경악해 한다. 독수봉에서 다시 위로 올리걸으면 주봉인 장군봉에 이르게 된다. 장군봉은 해발 923m이다. 장군봉에 이르면 선경대의 전반 전경을 한눈에 다 볼수있다. 아래에서 볼때에는 높게보이던 뭇 봉우리들은 장수봉의 기에 눌리여 낮은 산으로 보인다. 마치그 봉우리들은 장수봉 아래에서 출전명령을 기다리는 장병들 같아 보인다. 장수봉에 오르고 보니 내가 마치 천군만마를 거느린 장수가 된 감이 들었다. 그 기분을 이기지  못하여 시 한 수 지어 읇어보았다.
              경치 좋아
               선경대라 하였더냐
               오르고 보니
               내 장수되여 
               장한 뜻  이룩하리
     장수봉에서 맘껏 소리치고 하산하였다. 등산을 하다보면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힘든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내리막길을 걸어 산기슭에 있는 칠성사 옛 터까지 내려왔다. 다리를 쉬울겸 칠성사 물을 마시고 싶어 휴식 하였다. 힘들게 걷고나니 목이 컬컬하던차에 시원한 장수우물 물을 마시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물을 마신 후 우물옆에 있는 칠성사터 비문을 보았다. 칠성사는 1835년경 하홍락, 리희준, 황정숙 주지가 삼대를 계승하여 꾸린절인데 그 당시 력사운동으로 인해 불교활동이 중단되여 지금 옛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사찰터에는 옛날 문물인 조선족 토기물동이, 구들돌, 일본돈, 김치용 유리병, 수정석 들을 발견하였다 한다. 나는 그 비문을 보면서 그 옛날 스님들이 두두리는 은은한 목탁소리가 력력히 들리는 듯 싶었다.
     두시간 넘게 선경대를 돌아 본 후 우리는 차를 돌려 남평으로 향하였다. 선경대에서 약 40분 달려 남평진에 도착하였다. 남평에 도착한 후 먼저 남평 통상구를 찾아갔다. 남평통상구는 그야말로 통상구 다웠다. 철광을 만재한 대형트럭들이 조선에서 수시로 건너오고 있었다. 철광무역으로 고요하던 남평통상구는 분주하고 복잡한 통상구로 되였다. 해관일군들은 바삐 보내고 있었다.
    남평은 예전에 남편이라고 했다. 남평을 왜서 예전에 남편이라고 부렀냐? 하는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다. 남평이 개척 될 초기 굶주림에 시달리던 조선의 농사군들은 땅이 비옥한 강건너로 건너다니며 주로 날 농사질을 했다고 한다. 어느핸가 장마가져서 강물이 불어 날 농질을 건너왔던 남편이 몇일을 두고 건너가지 못했단다. 어마어마한 강물을 사이두고 저편에는 이쪽을 걱정하고 이편에서는 저쪽을 념려하여 서로 강역에 나서서 부르며 찾았단다.
      “ 여보소, 우리남편이 편안합꾸마”
        강건에서 애타게 안부를 물으면
        “ 우리 로덕두 편안한가?”
        하면서 이쪽에서도 속을 태웠단다.
        이렇게 부르고 찾고 찾고 대답하고 그렇게 반복하는중에 그것이 마을이 이름으로 지어져 강건너는 “로덕”이요 강 이편은 “남편”이 되였다고 한다. 그러던것이 이곳 지명을 지으면서 “남편”을 “남평”이라고 고쳐 지었다고 한다.
     남평통상구를 돌아본 후 우리는 차를 몰아 두만강 강변길을 따라 숭선방향으로 달리였다. 남평에서 숭선까지는 40킬로메터라 한다. 우리는 남평ㅡ숭선 사이에 있는 조선의 철광도시 무산시를 볼 수 있는데까지 차를 몰고 가서  조선의 무산시 일각을 보았으며 멀리 보이는 무산철광을 보았다. 개혁개방 후 중국의 경제발전은 급성장하였으며 건설용 철강들이 대량 수요되였다. 자국의 철광으로는 수요를 만족 시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외국에서 대량의 철광을 수입하고 있었다. 중조 두 나라의 무역협정에 의하여 중국에서는 조선의 질좋은 철광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정부의 허락을 받어 월청으로 부터 시작하여 무산철광까지 두만강의 모래톱마다 모두 철광채집기를 안장하여 강물에 씻겨 내려 온 철광분을 회수하고 있었다.
    먼곳에서 무산시와 무산철광을 본 후 우리는 차를 되돌려 남평으로 돌아 왔다. 남평에서 유명하다는 국수를 먹었다. 점심을 자신후 우리는 청산리로 가기로 로선을 확정한 후 차를 타고 화룡으로 왔다가 다시 화룡시 서쪽에 있는 청산리를 향하여 달리였다.   
    화룡에서 한시간  달리여 청산리골 어귀에 도착하였다. 청산리 어귀에 들어 서자 나는 80여년전에 있었던 청산리전투가 생각났다. 그 때의 전투 장면은 보지는 못하였지만 청산리의 지형을 보고 그 때의 전투를 그려 보게되였다. 청산리의 지형을 둘러 보니 유격전을 하기에 좋은 곳이였다.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있어 매복하기 좋고 퇴각하기 좋은 곳이였다. 골 어귀만 차단하면 적들의 퇴각로가 막히고 손쉽게 적을 포위하고 섬멸하기 유리한 곳이였다고 느끼졌다.
    청산리곬으따라 한참 들어가면 청산리 마을이 있다. 청산리마을 서북쪽에 그리높지않은 언덕이 있다. 언덕우에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가 웅장하게 세워져 있었다. 3년간의 과정을 거쳐 지난 2001년에 완공된 이 기념비는 500평방메터의 부지에 높이가 17.60메터나되는 웅장한 기념가 우뚝서 있었다. 
    우리 일행은 기념비앞에서 묵례를 드리였다. 나는 기념비 비문을 보았다. 비문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해외를 진감한 청산리 항일 대첩은 투쟁사상 천고에 빛낼 력사적 전역이 있는<1920년10월21ㅡ26일 김좌진. 홍범도가 통솔하는 항일련합부대는 화룡시2ㅡ3도구에서 연변 각 민족 주민들의 대폭적인 지원하에 대소 수차 격전을 거쳐 천으로 헤아리는 일본침략군을 섬멸한 소수로 다수를 타승한 이 전과는 연변과 동북지역의 일군의 무패의 신화를 깨뜨리고 연변과 전국 각 민족 인민의 항일 투지를 고무하고 일본군국주의 위풍을 추풍락엽처럼 쓸었거늘, 그 실패를 달가와 하지 않는 일본침략군은 연변지역에서 무고한 백성에 대하여 선후 2600명을 참사한 보복의 경신년 대참안을 감행하여 그 죄 하늘에 사뭇치고 그 참상이 치가 떨리도다.청산리 항일 대첩 80주년 즈음하여 연변지역 각 민족 인민은 이 기념비를 세워 선렬들의 충을 기리고 그 위업 천추만대 전하노라. 경신년 대참안 중조의 난 당하신 동포 원혼들이여 고히 잠드시라. 청산리 전역중 피흘린 분적하신 항일 영렬들이여 영생불멸하리라.
           연변 각민족 삼가드림
                   2001년8월 30일 》
      라고 적여 있었다 이 비문과 같이 청산리 전역 승리는 연변 각 민족 인민의 항일 투쟁을 지대히 고무하였고 조선독림운동에 커다란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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