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5 말레아시아에 대한 유람 일정을 마치고 불교의 나라 태국으로 향하였다. 우리는10시30분에 말레아시아를 떠나 싱가포르로 돌아와 싱가포르 공항에서 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13시30분에 싱가포르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15시30분에 방코크 공항에 착륙하였다. 공항을 나오니 얼굴이 확근해 났다. 찜통 더위가 덮쳐왔다. 싱가포르와 말레아시아의 기온은 34도 였는데 방코크는 37도였다. 싱가포르와 말레아시아는 하루건너 비가 내려 무더위를 감소 하지만 태국은 5월부터 9월까지 비가 집중내리고 그외 달은 비가 적게 내린다 했다. 태국은 사계절이 없고 대신 “덮다, 무덮다, 찌는듯 덮다”는 세개 절기가 있을 뿐이라 했다. 4월은 찌는듯 더운달에 속한다.
방코크공항출구에서 태국의 한 녀성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태국국제려행사 엄무부 부경리인 손향이라는 40대녀성이였다. 그 녀성은 류창한 중국말로 자아 소개를 하였다. 자신은 중국산동 출신으로서 20년전에 태국국적을 가진 화인과 결혼하고 이곳에 정착하고 산다고 했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태국은 전형적인 불교국가이며 국민의 70프로가 불교를 믿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태국은 세계에서 제일 큰 천연고무생산기지이며 입쌀수출국이라 했다. 태국은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지 80년이 된다고 했다. 태국은 공업은 발달하지 못하였지만 관광산업이 발전하였다고 했다. 어떻게 말하면 태국은 소비국가라고 말하였다.
방코크시는 600만인구가 살고 있는데 300만대의 자동차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태국을 낙후한 나라라고 볼수 없었다.
손경리는 재미있는 우스개 말을 하였다. 중국의 동북사람은 성미가 급하다고 하면 남방사람은 좀 만만디이고 태국 사람은 만만디의 만만디라 했다. 그러니 절대로 태국에와서는 급해하지말고 만만디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겪어보니 그말이 일리가 있었다. 태국에서는 낮 기온의 무려 40도까지 오르므로 밖에서 일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태국 사람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 나와 활동한다고 했다. 길가의 상점들을 보면 10시전에는 기본상 문을 열지않고 있었다. 낮에는 잠잖고 있다가 밤이면 왕성하게 활동하는것이 태국 사람들의 생활 규률이였다. 태국사람들은 조만해서는 집에서 밥을 해 먹지 않고 매식하였다.
태국 시간은 북경시간보다 한시간 늦다. 저녘 10시가 되면 방코크시의 음식점들에는 초만원을 이룬다. 저녘10시면 우리는 잠드는데 방코크사람들은 한참 저녁을 먹는시간이였다.
방코크시의 거리는 넓지만 차량들이 너무많아 교차로에는 늘 차들이 막히였다. 중국에서 한시간 갈 로정을 타이에서는 두시간 거려야 한다. 그러니 인내력 있게 만만디로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공항을 떠나 호텔에 잠자리를 정하고 잠간 휴식한 후 불교사원을 유람하였다. 태국에는 4만개의 절이 있다고 한다. 집집마다, 상점마다, 대문가에 불상을 모셔놓은것을 볼수있다. 이런 불상을 이곳에서는 좋은일은 찾아오고 불길한일은 막아준다는 문신이라 부른다.
태국에 도착한 이튼날 황궁을 참관하였다. 황금, 보석, 거울로 장식돤 황궁은 마치 황금을 모아놓은듯 하였다. 강렬한 해빛에 번쩍이는 황궁은 마치 동화속의 황금의 세계로 온 듯 싶었다. 비 바람에도 끄덕없이 제모양을 변치않는 황금, 그 황금으로 색칠한 황궁은 그야말로 사치가 극치에 이르렀다. 북경의 고궁이 그러 할진대 고궁보다도 더 값지게 장식한 궁전이였다. 황궁에 쏟아부은 황금은 얼마나될가? 너무 엄청난 숫자여서 계산할수 없었다.
사람을 찜쩌먹을 이런 더위에 태국사람들은 어떻게 살가? 의혹을 담고 알아보니 태국사람들은 부모가 없어도 살지만 랭각설비가 없이는 못 산다고 했다. 가가호호마다 랭동설비를 다 가추어 놓고 있었다. 상점, 마트, 식당, 백화점, 호텔, 공공기관들에는 다 랭각 설비들이 구전히 같추어 놓았다. 방코크 공항 려객접대 대청안에 들어서면 타이의 랭각설비에 찬사를 드리게 된다. 대청안은 대단히 웅장하고 넓지만 랭각설비를 어찌도 잘 설치 하였던지 어떤곳은 몸이 으쓸으쓸 할 정도로 서늘했다.
우리가 방코크에 도착한 사흘만에 손경리는 새로운 가이드를 데리고 와서 소개했다. 30대중반의 희멀쑥한 사나이였다. 그 가이드는 류창한 중국어로 자아소개를 했다. 자기이름은 아창이라 하며 태국에서 태여난 태국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아선 태국인으로 믿어지지않았다. 알고보니 그는 전형적인 태국사람들의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말할때 보면 태국사람들의 본성인 만만디 성격을 보여 주었다. 천천히 또박 또박 정확하게 말하는것이 진짜 만만디 태국사람임을 알수 있었다. 아창은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였고 려행사에서 가이드를 하는 한편 학원에서 중국어 강사로 있다고 했다.
아창이 인도를 받어 우리는 방코크시의 유명한 명소들을 돌아 보았다. 첫 시작은 방코크시 중심에잇는 남강에서 뽀트와 유람선을 타는 것이였다. 뽀트는 물우에서 물갈기을 일구며 날듯이 달리였다. 려객선은 천천히 달리였다. 려행객들은 선실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선실밖에 자연풍경을 감상할수 있었다.
이 려객선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것은 려객선에 오를때 태국의 한 녀인이 우리들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나는 무슨뜻으로 꽃다발을 걸어주는지 모르고 남들이 하는대로 꽃다발을 목에 걸었다. 작은 꽃이지만 향기를 풍기여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어저쩡해 있자 아창이 해석했다 꽃값은 내지않아도 되는데 자기 성의대로 “쇼페”를 주라고 했다. 둘러보니 모두 20원을 주었다. 나도 남들이 하는대로 20원을 주었다. 그녀는 감사하다고 련신 경례를 하였다. 배가 한참달리자 그녀가 가방을 열더니 빵을 꺼내 손님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무슨 낌샌지 몰라 어리둥절해 할때 아창이 먼저 빵을 끊어 물우에 던지는 것이였다. 그러자 어디에거 왔는지 팔뚝만한 큰 물고기떼들이 몰켜와 큰 입으로 넙적넙적 빵쪼각을 무는것이였다. 주먹만큼 큰 빵쪼각도 넘기는것이였다. 그때야 사람들은 왜 빵을 주었는지를 알게 되였다. 저마다 재미있다며 물고기에게 빵을 주었다.
배는 지류로 굽어 들어갔다. 강기슭을보니 강가에 기둥을 밖고 그우에 집을 지은 낮다란 집들이 촘촘들어 앉은 것이 보이였다. 아창은 그 집을 가리키면서 저 집은 빈민들이 사는 집이라 했다. 태국정부에서는 집없는 빈민들에게 이런 수상가옥을 지어주어 그들이 토지세를 내지않고 맘놓고 살수 있도록 마련하였다고 했다. 아창의 말에 의하면 태국에서는 정부는 가난해도 백성은 부유하다고 했다. 토지는 국유토지와 사유토지가 있는데 사유토지가 더 많다고 했다. 빈민들은 땅을 살 돈이 없으므로 이렇게 땅값을 내지않은 물우에 기둥을 밖고 그우에 집을 짓고 산다고 했다.
배는 빈민구역을 벗어나 남강기슭을 따라 상류로 계속 달리였다. 한참 달리자 남강 기슭에는 흰색을 띤 호화로운 층집이 보이였다. 그집이 바로 유명한 황가병원이였다. 이 병원에는 태국 국왕이 입원 하고 있었다. 영광스럽게 우리가 그곳을 지날때 국왕이 베란다에서 손짓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였다. 국왕은 86세의 고령이여서 황궁에서 생활하지 않고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국왕은 아직도 세자를 책봉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국왕에게는 세자녀가 있는데 맏아들은 64세인데 폭군이여서 국민의 민심을 잃어 국왕은 세자로 책봉할수없고 큰 딸은 아버지뜻에 따라 결혼하지않고 자유 결혼을 했다하여 후계자로 내세울수없고 둘째 딸은 58살인데도 아직 결혼하지 않은 로처녀라한다. 이러 저러한 문제로하여 후계자를 정식으로 책봉 못하여 국왕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했다. 타이에서는 국왕을 높이 모신다. 공공장소마다 국왕과 황후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남강유람을 마치고 따빠(유람 전용뻐스)를 타고 해변가로 갔다. 태국에는 신기한 뻐스 “따빠”가 있다. 일반 뻐스와 다를바 없지만 2층으로 된 뻐스다. 아래층은 짐을 싣는 차고이자 가족의 사는 침실이기도 했다. 2층은 객실이다. 태국의 뻐스 기사들은 제집이 없이 뻐스를 제집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가족의 뻐스에서 먹고자며 생활한다고 했다. 인도영화에서 나오는 집시인들이 “대풍차”처럼 떠돌아 다니며 산다. 그들에게는 “따빠”가 집이자 직장이였다.
부두에서 작은 배를 타고 한참달려 바다가에 정박해 있는 “수상락원”이라 불리우는 큰 배에 오랐다. 선실에 들어서니 넓은 홀이있었다. 홀 중간에 둥글에 무대를 설치해놓았다. 유람객들은 그무대를 중심으로 빙둘러 앉아 음료나 술을 마이면서 무희들의 춤을 추는것을 구경한다. 또 맥주 마시기 시합도 하는 장소였다. 시간이 되면 타이이 일류 미녀라 불리우는 헌칠한키에 새하얀 얼굴 가진 10여명 무녀들이 반라체 옷을입고 허리와 엉덩이를 비꼬면서 쟈즈음악에 맞춰 춤을춘다. 처음으로 이런 반라체옷을 입고 성감적 동작을 하는 그들을보니 희한해 보이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것은 그들의 이상스러운 춤이 아니라 그들이 유머적인 행동이였다. 춤을 추어 사람들의 시력을 집중시킨후 무대중심에있는 미녀가 관중석을 향하여 자기 한테 오라고 유혹한다. 담량이 있는 남자들이 그녀한테로 간다. 때론 어리둥절하게 끌려 간 사람도 있다. 무대에 올라가 그녀가 시키는대로 한손은 그녀의 잘룩한 허리를 안고 다른한손으로 그녀의 팽팽하고 볼룩한 유방 우에 손을 언는다. 그런 장면을 짤깍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면 그 손님은 20원 타이돈을 무희에게 준다. 그 장면을 보고서 모두 와와하고 함성을 지른다. 내 옆에 앉은 우리려행단 요씨는 나갈가 말가 망서리며 몸둘봐를 못한다. 한번쯤 이국의 미녀와 사진 찍고 싶으나 갈범같은 안해의 눈길이 무서워 감히 못나선다. 무희들은 손님곁을 배회하면서 적임자를 골라 잡는다. 애인을 곁에두고도 끌리다싶이 붙잡혀 가는 남자도 있었다. 유머동작이 고조를 이루면 더 웃기는장면을 표현한다. 한 남자가 멋모르고 올라가 무녀들이 시키는대로 한다.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걸상에 앉으면 한무희가 궁둥이를 그 사람의 입가에댄다. 그때 그 남자뒤에 있는 무희가 남자의 머리를 녀자의 궁둥이에 살짝 밖는다. 아마 남자는 키스한줄로 여기였을것이다. 수건을 풀고보면 녀자 엉덩이가 보인다. 남자는 망신당한것처럼 거북스러워한다. 그장면을 보고 모두 허파가 터질듯 웃어됐다. 무대에서는 다시 맥주를 빨리 많이 마시는 시합을 하였다. 몇초사이에 맥주 한병을 마인사람이 영웅으로 된다. 상장과 상금을 탄다. 이렇게 웃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보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듯이 어느사이 돌아갈 시간이된다.
4월26일 우리는 방코크를 떠나 태국에서 볼거리와 명소들이 가장많은 도시 빠타야시로 향하였다. 방코크에서 3시간달리여 빠타야시에 도착하였다. 빠타야시는 신흥 도시였다. 20세기초 빠타야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고 했다. 한번은 미국군함이 이곳을 경유해 지나다가 하도 지리적 풍경이 좋아 여기에 정박하고 휴식 하였다 한다. 휴식하는사이 당지 주민과 정을 쌓았다고 했다. 이 일이 소문나 미국군함들은 자연스럽게 이곳에 정박하고 휴식이 한때를 보냈다고 했다. 이런 차수가 많아지면서 빠타야는 이름난 휴양지로 탈바꿈 하였다고 했다.
우리는 빠타야에 도착한후 먼저 빠타야시 호텔에 주숙을 정하고 잠간 휴식한후 빠타야시에 있는 악어양식장으로 찾아갔다. 양식장 어귀에 들어서자 누린내가 풍기였다. 악어에게서 풍기는 냄새였다.
먼저 열람실에서 악어 사양정황과 악어에 대한 유관자료들을 보게되였다. 악어는 파충류과에 속하는데 새끼를 낳지않고 알을 낳고있었다. 알은 게사니 알만큼 크며 백색이였다. 다 큰 악어는 무게는 150킬로그람되고 수명은 사람의 수명과 비슷하다고 했다. 작은 알속에서 손가락만한 새끼로 까나 수십년 자라 그렇게 엄청나게 큰 악어로 된다는것이 용이치 않았다.
열람실을 도아본 연후 사양장을 돌아보았다. 악어들은 맑은물에서 서식하지않고 어지러운 물에서 살고 있었다. 인공늪을 만들어 악어들을 키우는데 물은 시퍼런 색갈을 띠고 있었다. 사양실을 보니 악어들을 분류를 나누어 가두어 키웠다. 나이에 따라 어린것과 젊은것 늙은것을 구분하여 키우고 있었다. 작은 새끼들에는 옅은 물에서 자라게하고 큰놈들 깊은 물에서 자라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악어는 물속에 몸체를 담그고 코와 눈만 내놓고 있었다. 암컷들은 산란기가 되면 산란실에서 산란하도록 하였다. 내 짐작으로는 이 악어양식장에는 수천마리이 악어가 있는것으로 짐작되였다. 악어 양식장을 돌아보고 우리는 악어 훈련장소로 갔다. 느릿느릿한 악어지만 먹이감을 만나면 행동이 잽싸다. 말못하는 악어도 사람의 훈련을 어찌 많이 받었는지 사람이 시키는대로 했다. 어떤때에는 조련사 손이 악어 입으로 들어가며 머리도 아짜 아짜하게 악어 입으로 들어갔다가 나온다. 이럴때이면 유람객들이 돈을 던져 주었다.
악어훈련장을 돌아본 후 악어가죽 제품상점으로 찾아갔다. 2층으로 된 이상점은 손님들로 북적이였다. 나는 처음으로 악어가죽으로 만든 가방, 지갑, 혁띠를 보았다. 사실 나는 예전에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비싼 가방과 혁띠는 악어 가죽으로 만든것이다는 말은 들을적이 있었으나 실물을 보지못하였다. 오늘 집적 보니 눈이 번쩍 뜨이였다. 확실하게 진짜 악어가죽제품은 보기좋았다. 악어가죽 제품을 보면서 가짜악어가죽 제품과 진짜악어가죽 제품을 구분할수 있는 판단 능력을 가지였다.
악어는 보호 동물이여서 마음대로 잡지못한다. 악어는 아프리카주와 남아세아지구에 많이 서식하고 살았는데 악어 가죽이 비싸고 귀한줄을 알고 비법포획자들이 대량으로 잡아 지금 악어수는 많이 줄었다고 했다. 악어는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고 했다. 타이에서도 악어를 잡는것을 불법으로 취급한다.
태국에서는 악어가죽을 가공할 기술이 없어 프랑스에가 가공해 온다고 했다. 하기에 악어가죽 제품은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제일좋은 녀성용 가방하나의 값은 인민페로 4만원이라 했다. 혁띠도 제일좋은것은 2천원이였다. 나도 내 멋과 품위를 눞여줄 진짜 악어가죽 제품을 사고 싶은 호기심에 2천웥짜리 고급 혁띠를 삿다. 알고보면 태국에서 악어가죽제품이 비싼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다른나라에 비하면 싸다고 할수있다. 그리유는 악어를 타이에서 사양하기 때문이다. 악어 가죽제품이 귀중한 것으로 된것은 악어가죽이 수량이적어 시장수요를 따라가 지못하기 때문이다. 악어를 보면 악어 몸뚱에서 리용할수 있는 부분은 배 가죽뿐이다. 큰 몸뚱에서 얼마 안되는 부분이다. 그러니 귀중할수밖에 없다.
앞에서 말레아시아의 흑보석에 대하여 언급한바 있다. 태국에는 흑보석외 홍보석이 많이 산출된다. 보석은 태국에서 수출하는 주요한 제품이다. 보석상점에 가면 이름모를 아름다운 보석들이 눈부시다. 태국국민들은 보석을 아끼며 귀중한 장식품으로 여긴다.
아창의 말에 의하면 태국사람들을 보면 평시에는 누가 부자인지 모르다가 큰행사가 있을때에는 알린다고 했다. 태국사람들은 평시에 보통옷을 입고 다니지만 명절이나 큰 행사에는 화려한 복장에 귀중한 보석을 달고 참가한다고 했다. 이때면 진짜 비싼 옷과 보석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부자인줄 안다고 했다.
태국국민들은 불교에대한 신앙이 강하다. 빠타야시 교외에 있는 산 절벽에 무려 6톤이나 되는 황금으로 부처를 그려놓은것이 있었다. 이 금빛찰란한 부처 그림에 사용한 황금은 타이국민들의 자원 기부에서 모은것이라 했다.
황금으로 그려놓은 부처님 산에서 조금지나면 태국 왕실종묘가 있다. 종묘안에는 력대의 왕들의 동상이 있었다. 내가 아창에게 어째서 력대왕들은 다 스님의 옷을 입었는가고 물었더니 아창은 태국의 법에 의하면 성인 남자는 반드시 결혼전에는 참군 하거나 중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왕들도 마찬가지로 먼저 일정한 기간 중 생활을 하다가 다시 장가를 가고 왕으로 된다고 했다. 왕이 이러할진대 백성이야 더말하게 있으랴 싶었다.
왕의 동상은 어찌도 잘 만들었는지 산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아창의 해석에 의하면 국왕이 죽으면 화장하는데 화장한 그골분으로 동상을 만들었다 한다. 그러니 그동상이 그왕이 전신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종묘에서 한참 동쪽으로 달리면 낮으막한 산 자락에 그림처럼 가꾼 포도원이 있다. 이포도원에서는 유람객들에게 포도로 만든 음료를 무료로 제공한다. 또 자기들이 빚은 포도주를 팔고 있었다. 이 포도원은 포도생산의 위주가 아니라 외빈들의 즐길수있는 별장이라고 했다. 외국 대사들이 자주 이곳을 찾는다 했다. 외국대사들이 찾는곳이니 그만큼 이 포도원을 잘 꾸렸다고 상상할수 있다.
4월28일 우리는 해변가 유람을 떠났다. 빠타야에는 아름다운섬이 세개있다. 섬 마다 길다란 해수욕장이 있었다. 해수욕장은 인산이해를 이루고 있었다.
유람객 다수는 중국사람이다. 가이드의 말에의하면 작년에 태국을 찾은 중국관광객은 100만명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금년 4월까지 태국을 찾은 중국관광객수가 무려 40만명 된다고 한다. 간단한 수학공식으로 해석한다면 100만 승하기 10000원 하면 얼마겠는가? 정말 엄청난 숫자다. 인민페를 비행기로 태국에 실어가는 셈이다. “중국이 태국을 먹여 살린다” 고 태국사람은 말 했다. 태국을 찾은 유람객순위를 보면 중국 버금으로 인도, 로씨야, 미국, 한국 순위라 했다.
수영장에서는 갖가지 피부색을 가진 유람객들이 자유로이 노닐고 있었다. 나도 난생처음으로 해수욕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해변가에서 맘껏 논후 호텔에 돌아와 호텔 수영장에서 재미있게 수영하였다.
저녘이 되자 우리 일행은 빠타야에서 유명하다는 홍등거리를 돌아보났다. 홍등거리에는 낮에는 쥐 죽은듯이 조용한 거리이지만 밤이면 오색찬란한 네온등 등불이 반짝이고 귀청을 째는듯한 쟈즈음악소리가 거리를 들성거린다. 거리에는 술집, 노래방, 당구실, 커피숍, 유희장들이 촘촘이 들어앉아 있었다. 짓튼 화장을한 아가씨들이 미니스카트를 입고서 손님들을 유혹한다. 슬쩍보니 술집과 당구실에는 녀인들과 함께 즐기는 외국인들이 보이였다. 중국의 려행단은 그런 곳을 볼뿐 그곳에서 놀지못한다. 려행 일정이 짜이여 그런데서 놀 여지가 없었다. 우리의 말대로 하면 홍등거리를 기생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홍등거리를 돌아본후 해변가를 돌아보았다. 낯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해수욕장이 잠잠해 졌다. 가로등이 히미하게 빛추는 가로수 아래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타이의 밤아가씨들이 있었다. 아창의 말에 의하면 거기에 서있는 아가씨들중 어떤아가씨는 남자가 성형수술을 하여 녀자로 변신한것이 있다고 했다. 잘못하다간 그런 아가씨를 만날수 있다고 했다. 녀자로 변신한 아기씨는 극 소수라했다. 타이에는 녀자가 많고 남자가 적다고 한다. 남자들은 젊은 시절에 군대에 가거나 중생활을 하므로 좋은때를 놓치기도한다고 했다.
홍등거리를 지나 한참 달리다보면 외국인이 집결해 사는 s 거리가 있다. 이거리에는 이마가 벗겨진 미국 로인네가 타이의 젊은 아가씨들이 손을 잡고 다니는것을 흔히 보게된다. 이 거리에는대부분 미국의 로병사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젊었을때 군인생활을 하면서 이곳에와서 휴식의 한때를 보냈던 로병사들이 퇴역한후 로후생활 보장이 있게되자 옛일을 잊지못하여 다시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했다. 그들은 이곳의 젊은 아가씨들과 짝을 묻고 동거 생활을 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3개월 동거 생활을 한다고 했다. 3개월이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위자로로 4천딸라좌우를 준다고 했다.
태국을 유람할 마지막날인 29일 오전에 우리는 코끼리 훈련장에갔다. 융중하게 생긴 코끼리는 영리한 동물이였다. 50여마리이 코기리가 있었는데 코끼리마다 두명의 유람객들을 등에 태우고 운동장을 한바퀴 돈다. 그러면 유람객은 코끼리 한마리당 20원 타이돈을 낸다. 코끼리가 표현 했다. 코기리들이 뽈도차고 물을 뿌리기도 했다.
코끼리 훈련장 옆에는 원숭이 훈련학교가 있었다. 원숭이들도 갖은 재주를 피웠다.
동물훈련원을 지나면 과수원이 있다. 나무슾인지 과수원인지 분명치 않느곳에서 빠나나, 파이내풀, 망과,수박 등등의 열대과일들을 생산하는데 과일 판매실에서을 무료로 맘껏 자실수 있었다.
저녘에는 안마원에가서 안마를 받었다. 태국의 안마원은 고급 안마실과 보통 안마실이 있었다. 고급 안마는 2시간당 가격은 태국돈 100원이고 일반 안마는 시간당 가격이 20원이였다. 암마를 하는 방법은 중국에서 하는 방법과 기본상 같았다. 만약 손님이 경하게 안마를 해줄것을 요구할때는 “뽀뽀니”라하고 강하게 할것을 요구할때는 “닌 니”라고 하면 안마사들은 알아서 했다.
안마가 끝나자 대극장으로 갔다. 수천명을 용납할수 있는 극장홀에는 만원이였다. 타이의 예술인들이 높은 예술기교를 보여주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무용 “도라지”를 추는것이였다. 그리고 미국 국적을가진 한국인 가수 싸이가 창작한 “강남스타일”을 타이 가수들의 열성껏 부른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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