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청룡
http://www.zoglo.net/blog/f_zhuqinglong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

연변인민방송 공감40분
2020년 05월 06일 20시 10분  조회:3952  추천:0  작성자: 주청룡
연변인민방송 공감40분

ㅡ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방송일시: 2020년 5월 4일 

기획: 리은파        사회: 서태문        출연: 주청룡        제작: 원미란        

--- 개 시 곡 ---

사회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 프로진행을 맡은 서태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1년전인 1919년 5월 4일, 북경의 청년학생 5,000여명이 천안문앞에 모여 제국주의,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벌였습니다. 운동은 6월 3일 후 주력이 학생으로부터 로동계급으로 바뀌였으며 상해, 천진, 남경, 무한, 항주 등 전국의 많은 대도시에 파급되였습니다.

제1차세계대전기간 유럽렬강들이 동방을 돌볼새 없는 사이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했으며 중국의 주권을 엄중히 해쳤습니다. 중국인민의 반일정서는 날로 고조되였으며 1919년 이른바 “빠리평화회의”에서 무능한 정부 외교실패를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위대한 “5.4운동”이 촉발되였습니다.

 “5.4운동”은 중국공산당의 탄생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운동 발생 2년후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고고성을 울렸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들을 령도하여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라는 세 개의 큰산을 뒤엎는 위대한 장도에 올랐습니다. “5.4운동”은 반제반봉건운동으로 구민주주의 혁명과 신민주의 혁명의 분수령으로 되였으며 새중국에서는 매년 5월 4일을 “청년절”로 정하고 다양한 기념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M-

 
오늘 “공감 40분”에서는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같은 화제로 한 지식인의 체험과 감수로부터 “5.4운동”이 중국인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집중 알아보고 “5.4정신” 발양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관계에 대해 심층 담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스튜디오에는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께서 나와계십니다.

사회자: 어서 오십시오! 저희 “공감 40분”에 나오 신 것을 환영합니다. 좋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5.4애국운동”은 력사적배경과 의의에 대해 설명한 후 그 다음 순서로 넘은 가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먼저 간단히 설명주시겠습니까?


주청룡: 예, 오늘 방송국에서 우리 나라《5.4》청년절을 맞으며 아주 좋은 프로를 만들었다고 보는데 금년은 《5.4》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해 4월 30일에 북경인민대회당에서 《5.4》운동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었습니다. 대회에서 습근평총서기는 중요한 연설을 발표하였으며 새시대 중국청년들에게   여섯가지 요구를 제기했습니다.

그 여섯가지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원대한 리상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위대한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
세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시대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네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과감히 련마하고 분투해야 한다.
다섯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탄탄한 실력을 익혀야 한다.
여섯째, 새시대 중국 청년은 품성을 닦아야 한다.

저도 작년에 《5.4》운도 100주년을 맞으면서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란 칼럼을 써서 연변일보에 발표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게 어느때라고 100년전의 일을 말하는가 하는데 5.4운동은 이미 100 년이 지났지만 100년 전의 《5.4》정신과 현시대 《5.4》정신의 실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애국주의는 하나의 력사범주이며 사회발전의 부동한 단계, 부동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형식이 다를 뿐이다.

《5.4 》운동 력사배경: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 등 국가들의 실패로써 끝났습니다. 1919년 1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전승국 방면의 영국, 미국, 프랑스, 이딸리아, 일본 등 제국주의는 프랑스 빠리에서 소위 《평화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실제상에서 이는 제국주의 렬강들의 장물분배회의였습니다. 당시에 중국도 《전승국》의 하나로서 대표를 파견하여 이 회의에 참가하였습니다.

중국대표는 전국인민들의 압력하에 평화회의에 향하여 중국에서의 렬강들의 특권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또 일본제국주의가 원세개와 맺은 21개 조항의 불평등 조약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진술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대전때에 일본에 빼앗긴  산동에 있어서의 독일이 차지하였던 각종 권리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미, 영, 불 제국주의의 조정과 북경군벌정부와 친일파이며 대반역자 조여림, 장종상, 륙종여 등의 부패무능으로 말미암아 중국인민의 정의적 요구는 대회에서 부정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대회에서는 일본의 무리한 요구를 접수하고 정식으로 산동에서 차지하고 있던 독일의 권리를 일본에 양도하였습니다.

빠리평화회의에서 제국주의가 공공연하게 중국의 리익을 침범한 소식이 전파되자 중국인민들의 분노를 야기시켰습니다. 이래서 1919년 5월 4일에 북경의 5,000여명의 애국학생들이 천안문 앞에 모여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단행하여 “밖으로는 국권을 찾고 안으로는 매국적을 징벌하자!”, “21개 조약을 페지하라!”, “평화조약에 조인하지 말라”는 구호를 높이 웨치면서 친일파이며 매국역적인 조여림, 장종상, 륙종여를 처벌할 것을 일치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북양군벌정부는 많은 군대와 경찰을 풀어 학생들의 애국운동을 탄압하고 학생 30여명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북경의 항생들은 총동맹휴학을 단행하고 전국에 통전을 내여 항의를 표시하였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5월 6일에는 천진, 상해, 장사, 광주 등지의 학생들이 시위행진을 단행하여 북경학생들의 투쟁을 성원하였다.

6월3일과 4일에는 북양군벌정부는 북경의 학생 1,000여명을  체포하자 운동의 주력도 학생군중으로부터 로동계급으로 상해, 천진, 남경, 무한, 항주 등 전국의 많은 대도시들에로 파급되였습니다. 이러니 북양군벌정부는 할 수 없이 체포한 학생들을 석방하고 조여림, 장종상, 륙종여 세 매국역적을 철직시켰으며 회의 마지막날인 6월 28일에는 《빠리평화조약》에 조인하지 않습니다. 그리하 반제, 반봉건적 투쟁은 초보적인 승리를 달성하였습니다.

《5.4 》운동의 력사적 의의:
《5.4 》운동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동시에 본건주의를 반대하는 위대한 애국운동입니다. 모택동동지는 《5.4 》운동의 특출한 력사적 의의에 대하여 “그것이 신해혁명으로서는 가지지 못하였던 그러한 자태로서 나타나게 되였다. 즉 반제국주의 철저성, 비타협성 및 반봉건주의의 철저성, 비타협성에 있다.”고 말씀하였으며 습근평총서기는 지난해 5.4운동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5.4운동의 력사적의의에 대해 《5.4운동은 철저한 반제반봉건의 혁명성, 구국강국의 진리를 추구하는 진보성, 여러 민족 각계 군중들이 적극 참여하는 광범성으로 중국사회의 진보를 추동하고 중국에서의 맑스주의의 전파를 추진했으며 맑스주의와 중국 로동운동의 결합을 추진하여 중국공산당의 설립을 위해 사상상, 간부상의 준비를 하고 새 혁명력량, 혁명문화, 혁명투쟁이 력사무대에 오르는 데 조건을 창조했는 바 중국 구민주주의혁명이 신민주주의혁명으로 전환하는 전환점으로 되여 근대이래 중화민족이 민족독립과 발전진보를 추구하는 력사과정에서 리정표적 의의가 있다.》고 말씀하였다.

5.4운동이 폭발하여 2년만에 중국공산당이 탄생하였고 30년만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 지난해에는 5.4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사회자: 선생님께서는 다년간 학교에서 책임일군으로 계시다가 은퇴한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또 사업관계로 “5.4운동”이나 “1.29”행사를 많이 접하고 거기에 깃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5.4운동”에 대한 선생님의 처음 기억은 언제부터였습니까?

주청룡: 예, 《5.4 》운동에 대해서는 제가 초중을 다닐때부터 학교에서 해마다 《5.4》운동기념활동를 하였으니  초중시절부터 《5.4운동》에 대하여 초보적으로 알게 되였지요. 그리고 여기에 《12.9 》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으니 《12.9 》운동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 합시다.

《12.9 》운동은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규모가 큰 한차례의 학생운동입니다. 1935년 6월 국민당정부가 일본의 중국 화북에 대한 통치권요구를 접수한 《화북사변》이 일어난후 중국공산당은 “항일구국을 위하여 전체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 즉 《8.1 》선언을 발표하여 전국 인민들에게 일떠나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1935년 12월 9일에 북평의 학생 5,6천여 명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에서 시위행진을 하면서 “내전을 정지하고 일치하게 외적에 대항하자!”, “화북자치를 반대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높이 웨쳤습니다.

(제가 앞에서 《5.4 》운동에 대해 말할 때에는 북경이라 하고 《12.9 》운동에 대해 말할 때에는 북평이라고 말했는데 북경이나 북평은 다 지금의 수도 북경을 말하는데 원래는 지금 북경의 이름이 북평이였습니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주태가 수도를 남경으로부터 북평으로 옮기면서 북경이라고 불렀고 불벌전쟁후 1928년 국민정부가 수도를 북경으로부터 남경으로 옮기면서 북경이 다시 북평으로 되였으며 1949년에 새중국이 탄생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수도를 북평으로 정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북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국민당반동파들은  많은  군대와 경찰들을 풀어 학생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00여명이 부상당하고 30여명이 체포되였습니다.
북평학생들의 영용한 투쟁은 재빨리 전국 인민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았습니다. 상해 남경, 항주, 무한, 광주, 서안, 천진, 성도 등 많은 도시들에서 선후하여 기세드높은 시위행진이 진행되였습니다. 북평과 천진의 학생들은  당의 호소를 받들고 《남하확대선전단》을 조직하여 더욱 광범위한 항일구국의 도리를 선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북평, 천진으로 돌아온후 《중화민족해방선봉대》를 조직해가지고 더욱 구국운동의 새 고조를일으켰습니다.

저도 교육사업을 하면서 젊었을 때에는 학교의 공천단 사업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년 5.4청년절이거나 12.9운동기념일이면 학생들을 조직하여 기념활동을 하였지요. 5.4청년절을 맞으면서는 해마다 전교적으로 입단의식을 하였는에 입단하는 학생들은 공청단휘장을 달고 붉은 주먹을 들고 단기앞에서 선서를 할때에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격동되고 기뻣지요. 그리고 입단을 요구하는 적극분자 학생들은 자기도 저 동학들을 따라 배워 빨리 입단을 쟁취하겠다는 심정이였지요.

12.9운동기념일을 맞으면서는 문예경연대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활동을 조직하게 되면 학생들이 열정이 매우 높습니다. 저도 반주임공작을 하면서 제가 맡은 반 학생간부들에게 기념행사 포치를 하면 그들이 자체로 공연절목을 짭니다. 그리고  1등을 쟁취하겠다고 열심히 련습을 합니다. 이리하여 몇번 전교 1등을 쟁취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기뻐 야단입니다. 그러니까 반주임으로서 저도 학생들과 같이 기뻐 춤도 추고 노래도 하군 하였습니다.

    사회자: “5.4정신”하면 “애국, 진보, 민주, 과학”으로 간단히 귀납할수 있지만 그 표현과 내포는 무궁무진하며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혁명전쟁년대에는 새중국의 창건을 위해 생명을 바친 혁명선렬들이야말로 진정한 “5.4정신”의 구현자들이 아닐가 생각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떤 혁명선렬을 가장 숭경하고 그들의 어떤 점을 따라배우고 본보기로 삼았습니까?

주청룡: 토지혁명전쟁시,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에 많은 혁명렬사들과 전투영웅들이 나왔지요.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소학교를 다닐때에 한어교과서에 《동존서》가 있었고 《소년아동보》에도 동존서사적이 실렸고 또 《동존서》란 책도 나왔습니다.

    동존서는 1945년에 팔로군에 참가하였고 이듬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1948년 5월 26일에 하북성의 륭화를 해방하는 전투에서 그가 소속된 련에 적의 토치까를 폭파하는 임무가 떨어졌습니다. 동존서는 폭파조 조장을 맏고 4채의 포루(炮楼)와 5개의 토치까를 폭파시켜 승리적으로 폭파임무를 완성하여 부대가 즉시 돌격을 시작할 때에 다리우의 음페된 토치까에서 맹렬히 불을 내쏘면서 아군의 전진을 가로 막았습니다. 이때 동존서는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련장에게 “나는 공산당원입니다. 저에게 저 폭파임주를 주십시오.” 라고 청원하였습니다. 련장이 그의 청원을 비준하자 그는 폭파약을 안고 토치까를 향해 기여가는 도중에 다리에 부상을 입고도 완강하게 견지하여 토치까 밑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폭파약을 놓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적들이 불을 내 뿜으면서 아군의 전진의 길을 가로 막는 것을 보고 더는 지체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그는 왼손에 폭파약을 받쳐들고 “새중국을 위하여 돌격”하면서 오른손으로 폭파약 도화선을 당겼습니다. 또치까는 폭파되고 아군의 전진의 길은 열어놓았지만 그는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그때 나이는 겨우 19살이였습니다.

부대당위에서는 그에게 《전투영웅》, 《모범공산당원》 칭호를 수여하였습니다. 19살의 꽃나이에 새중국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다는 것은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공산주의 전사들에게서만 있을 수 있는 자아희생정신이라고 봅니다.
야! 생각만 하여도 너무나 경탄할 일이지요. 한 손에 폭파약을 받쳐들고 “새중국을 위하여 돌격”하면서 오른손으로 폭파약 도화선을 당길때 그에게는 오직 혁명을 위하여 내 이 한 몸을 바친다는 정신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소설 《붉은 바위에》에 나오는 허운봉, 강설금과 같은 혁명렬사들이지요. 그들은 적들의 그 가혹한 고문에 정신을 잃고 쓸어지면서도 굴하지 않고 지하당의 비밀을 고수한 영웅적 행동도 참으로 경탄할 일이지요. 손가락에 참대꼬챙이를 들이 꽂을 때 얼마나 참기 바빴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지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솟으면서도 끝까지 비밀을 고수 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 놈들은 또 온 몸에 랭수를 퍼부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 또 다시 고문을 들이대며 이렇게 놈들은 이런 수단을 반복하면서 고문을 들이 댔지만 그들이 끝내 지하당의 비밀을 고수한 정신. 놈들은 그들의 입에서 조금한 비밀도 얻어내지 못하자 마지막에는 사형에 처하였지만 그들은  죽음을 앞둔 사형장에서도 끝까지 놈들에게 굴하지 않고 《국제가》를 높이 부르고 “국민당반동파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만세”를 높이 부른는 혁명정신. 이들의 이런 투쟁정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새중국을 맞이하였으며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에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지요.

양정우렬사는 적들의 포위속에서 일본놈들과 싸우가가1940년 2월 23일에 영용히 희생되였는데 일본놈들은 양정우가 2월 15일부터  자기들의 포위망에 들어 량식래원이 끊기였는데 2월 23일 희생될 때까지 8일동안 이 눈속에서 무었을 먹고 그렇게 완강히 싸웠는가고 너무도 의상하여 양정우의 배를 갈라보니 배안에는 채 소화되지 않은 나무껍질과 풀뿌리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방지민동지는 반역자의 밀고로 1935년 1월 29일에 국민당반동파들에게 체포되였는데 체포될 때에 국민당병사들이 방지민동지의 온 몸을 수색하였을 때 회중시계하나와 만년필 한대가 나왔을 뿐 돈은 이전한푼도 없었습니다.

놈들은 양정우동지나 방지민동지는 군대의 고위급 장령이니 자기들의 안위를 위한 그어떤 귀중한 물품이 있겠다고 생각하였는데 그러한 귀중한 물품들이 하나도 없었고 양정우동지에게는 배안에 나무껍질과 풀뿌리, 방지민동지에게는 회중시계와 만련필뿐이였습니다. 

옥중에서 놈들은 방지민동지에게 백방으로 혹독한 고문과 협박으로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방지민동지는 견정불굴하게 “정의를 위하여 깨끗이 죽을망정, 너절하게 살지는 않는다” “혁명을 위해 죽지만  그 죽음은 가치 있고 영광스럽다.”라며 놈들과 완강하게 투쟁하여 공산당원의 절개를 보여 주었습니다.

방지민동지는 감옥에 6개월 넘게 갇혀있는 동안 놈들이 그에게 자백서를 쓰라고 준 종이와 만년필로 《내가 혁명에 종사한 략술》, 《청빈》, 《사랑스러운 중국》, 《옥중실기》 등 10여편의 글을 써냄로서 공산당원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방지민동지와 양정우동지의 일생은 민족의 해방, 인민의 행복을 위한 일생이였으며 공산주의 사업을 위하여 영용히 분투한 일생이였습니다.

사회자: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인민의 생명안전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귀중한 생명을 선뜻히 내놓은 영웅인물들이 매 력사시기에 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2,3십대 젊은이들이였습니다! 선생님의 기억에 남는 인물은 어떤 인물이 있습니까? 

주청룡: 예, 여기에서 구양해를 들수 있는데 1963년 11월 18일 이른 아침 부대에서 야영훈련을 하면서 철길역을 따라 행군을 하였는데 려객을 가득 실은 렬차가 기적을 울리며 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잔등에 포를 실은 말이 놀라서 철길우에 뛰여 올랐습니다. 기차와 포를 실은 말이 마주 치려는 위기일발의 시각에 구양해는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철길에 올라 말을 있는 힘껏 밀어 냈습니다. 말을 철길에서 밀어내고 엄중한 사고는 피면하고 려객의 생명안전과 인민의 재산은 안전하게 지켜냈지만 구양해는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3살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왕걸을 들수 있는데 1965년 7월 14일 강소성 비현장루공사(邳县张楼公社)에 가서 민병훈련을 지도할 때에 이외로 폭파약이 폭발하려는 순간 왕걸은 12명의 민병과 무장부 간부의 생명안전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도 돌보지 않고 엎드려 목파약을 끌어 안고 자기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도 23살이였습니다. 

구양해와 왕걸은 뢰봉이 희생된다음 뢰봉정신을 이어받은 새시대의 첫영웅들이였습니다. 뢰봉정신의 실질과 핵심은 간고분투하고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며 사심없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런 나라와 집체를 위한 자아희생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고 뢰봉정신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1981년 일본에서 펼쳐진 제3차 녀자배구월드컵에서 중국녀자배구팀을 7전 7승의 성적으로 단연 우승을 따냈습니다. 그후 우리 나라 각 령역에서는 중국녀자배구팀을 따라배우는 열조가 일었으며 “녀자배구정신”이 지난 세기 80년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대명사로 됐습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완강히 분투하는 “녀자배구정신”은 “5.4정신”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녀자배구정신”이 “5.4정신”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까? 

주청룡: 예, 현시대 청년들이《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자면 개인의 리상과 추구를 전 민족의 공동한 리상과 한데 융합시켜 습근평총서기가 말씀 한바와 같이《당의 기대, 인민의 기대, 민족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리지 말며 이 위대한 시대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고》 실제 행동으로 조국에 보답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국가운동원들이 나라를 대표하여 국제적 경기에서 상대방 나라 선수들과 겨루는 것은 총을 들고 맞다들어 싸우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들이 금메달을 따올때까지는 피타는 노력이 들었지요.

중국 녀자배구팀이거나 세계급 운동대회에서 조국의 영예를 위하여 금메달을 따낸 운동원들의 전력을 다하여 싸워온 정신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나라를 대표로 한 운동원으로서 당의 기대, 나라의 기대, 인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상대와 결사적으로 싸워 조국의 영예를 위해 금메들을 따내는 것이 바로 현시대의 《5.4》정신이라고 봅니다.

중국 녀자배구팀의 주장 주정은 이름이 나고 명성수가 되였지만 자만하지 않고 근본을 잊지 않고 자기의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의 로인들을 잊지 않고 고향의 후대양성사업에 관심을 돌려  고향마을에 몇백만원을 의연하여 국도와 마을이 통하는 20여 km의 아스팔트길을 닦고 양로원을 짓고 희망소학교를 꾸리였는데 당지 정부에서 그 학교를 주정의 이름으로 명명하려고 하자 주정은 “왜 하필 내이름으로 명명하여야 하는가? 좋은 지방이름이 있는데.” 하며 견결히 반대를 하였지요.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있는 말입니까?

주정은 올해 《5.4》청년절을 맞아 제24회 중국청년 5.4메달 획득자 30명가운데 한명으로 입선되였는데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랑평이 중국 로녀자배구팀의 대표자라고 한다면 주정은 신녀자배구팀의 선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정이는 중국녀자배구팀의 주장으로서 그 간고한 훈련도 이겨내고 나라의 영예를 위하여 강팀들과 맏다들어 세계급배구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으며 고향건설을 잊지 않은 정신이야말로 현시대의 《5.4》정신이고 뢰봉정신라고 봅니다.

사회자: 기원 2020년 신종코로나바이러스전염병이 무한을 비롯해 우리 나라 대지를 덮쳤습니다. 중국은 전례없는 자연재해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습근평총서기를 총지휘로 하는 당중앙의 령도하에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전염병예방통제 총체전, 저격전을 벌였습니다. 최전선에는 항상 의료일군들이 있었는데요! 이 가운데는 특히 젊은 녀간호사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선생님! 어떠합니까? 이들이야말로 우리 시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진정한 시대의 본보기가 아닐가 생각되는데요?

주청룡: 예, 붉은기가 나붓기고 격앙된 장엄한 《조국을 노래하자》 노래소리와 환영하러 나온 사회각계 군중들의 열정에 넘치는 환호소리 속에서 길림성 호북지원 백의전사들이 오성붉은기를 흔들며 장백산공항에 내리는 장면을 텔레비죤을 통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3월 24일에 25명, 28일에 4명 도합 29명의 연변의 무한지원 백의전사들도 있었다. 정말로 감동의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였습니다.

제가 지난해에 5.4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란 칼럼을 쓸때까지도 “5.4운동시기 청년들의 애국정신은 주로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피와 목숨으로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싸우는 시위행진으로 표현되였지만 현시대 5.4정신은 그런 시위행진 형식으로 애국열정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꼭 적들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것도 아니며 새로운 력사조건하에서 우리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완성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번 전염병에서 보면 평화시기라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이번에 호북지원 의무일군들은 정말 목숨을 내걸고 전쟁의 발원지이자  핵심지역인 무한으로 지원을 간 것입니다.  

당중앙의 호소와 성당위 성정부의 지시에 호응하여 우리 주에서도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예방, 통제의 수요로 무한에 의료지원팀을 파견하게 되자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선택의 여지도 없이 무한의료지원에 나섰던 것입니다.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의 위험과 곤난은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의 싸움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누군들 자기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전선지원이 생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무한 본지 병원의 의료일군들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감염이 되여 입원치료를 받다가 여러명이 사망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전선지원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오직 내 이 한 마음, 내 이 한몸을 당에 바치여 조국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인민이 가장 수요하는 곳으로 간다는 자아희생정신의 표현이였습니다. 그들가운데는 2,3살 되는 애를 둔 애기엄마도 있었고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한의료지원팀으로 전쟁의 발원지이자 핵심지역인 무한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사업터에 나설 때에는 우선 방호복으로 전신무장을 하여야 했습니다. 고대의 전쟁에서는 군사들이 쇠나 가죽으로 된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였다면 그들은 방호복이란 평화시기의 현대식 ‘갑옷’으로 전신무장을 하고 의료작업에 나섰습니다.

방호복을 착용한 다음부터는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6시간 동안 꼬박 쉴새없이 생명의 경각을 다투는 환자들을 위해 바이러스와 싸워야 했습니다. 방호복을 입은 다음부터는 위생실도 갈 수 없기에 최소한 식사량을 줄이고 음료수와 기타 수분흡수도 줄여야 했습니다. 만약의 경우 고려해 영아처럼 기저귀도 차야 했습니다.

하루의 간고한 의료작업을 마치고 근무교대를 한 다음 번거로운 소독작업을 거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통기가 되지 않는 방호복 착용으로 하여 온몸이 땀벌창이 되고 방호용구의 압착으로 하여 얼굴에 패인 주름과 땀에 절어 몸, 얼굴, 손에는 두드러기가 가득 돋은 것을 우리는 텔레비죤을 통하여 가슴 아프게 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인민군중의 생명안전을 위해 실제행동으로 ‘생명은 태산보다 무거우며 전염병 발생상황은 곧 명령이고 예방, 통제는 곧 책임이다.’는 습근평 총서기의 중요정신을 실천하고 전염병 예방, 통제 저격전에서 용감히 싸워 승리하고 오늘 영광의 꽃다발을 안고 개선가를 부르며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습니다. 연변의 29명 무한지원 백의전사들은 우리 연변을 위해 영예를 떨치였으며 이들이야말로 현시대의 《5.4》정신을 발휘한 영웅들이며 뢰봉정신을 발휘한 영웅들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목전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향해 순항하고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5.4정신”은 영원히 퇴색하지 않을 것이며 그 외연과 내포가 날로 풍부해지면서 후대의 거울로 계승, 발양되고있습니다.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주청룡: 예,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크게 말하면 당을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사랑하는것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집체를 사랑하고 일터를 사랑하고 본직사업을 사랑하고 인민군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사업을 하여야 만이《5.4》정신을 계승하고 발양하다는 것이 아니며 습금평총서기가 5.4운동 100돐 기념대회에서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대로 하는 것이 바로 현시대에 5.4정신을 발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발전중에 있고 국제정세가 급격하고도 복잡하게 변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과 등소평리론을 지도로 리상신념을 견정히 하고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두리에 더욱 굳게 뭉치여 19차 당대회 정신과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사상을 깊이 학습하고 터득하며 정확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수립하고 습근평총서기가 새시대 중국 청년들에게 제기한 6가지 요구에 따라 《5.4》운동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하여 력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중화민족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지금까지 퇴직간부이고 칼럼니스트인 주청룡선생님을 모시고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같은 화제로 얘기나눠보았습니다. 저희 스튜디오를 찾아주신 주청룡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M-

 
맺음말: “5.4운동”은 한부의 사시이고 력사극이고 교양악입니다. 그속에서 그리고 그후 수많은 지사들이 새중국창건을 위해 눈물겹고도 비장한 이야기들을 엮었습니다. 그중의 백미는 제1차국내혁명전쟁, 제2차국내혁명전쟁, 항일전쟁, 해방전쟁가운데서 민족독립과 인민해방을 위해 희생된 혁명선렬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희생 당시 2,3십대 젊은이였습니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매 력사시기마다 시대정신을 체현한 선진인물들이 용솟음쳐왔으며 이들은 “5.4정신”의 구현자, 시대의 본보기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이라는 선인들이 해보지 못한 위대한 장정에 나섰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5.4운동”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계승, 발양하고 “5.4정신”을 널리 고양하는 것은 시대를 뛰여넘어 우리들에게 계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것으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 시간 프로기획에 리은파, 제작에 원미란이였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8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80 아리랑방송 《좋은 세상》 2021-05-25 0 2614
179 교원의 사표(师表) 2020-09-10 0 3697
178 인생관에 따른 행복관 2020-07-31 0 4376
177 표준어와 방언 및 언어생활 2020-07-27 2 3888
176 방언은 발굴하고 보존해야 2020-07-05 0 3858
175 연변인민방송 공감40분 2020-05-06 0 3952
174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영욕(荣辱) 2020-04-09 0 4767
173 뢰봉정신은 영원히 빛뿌릴 것이다 2020-03-05 0 4413
172 5.4정신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2019-05-16 0 5995
171 성 쌓고 남은 돌이라 하여 쓸모 없는것이 아니다 2018-12-24 1 7777
170 ‘향촌진흥 전략’과 우리의 자세 2018-11-25 1 4650
169 하늘 나라에서라도 이런 복을 누렸으면 2018-10-29 0 7095
168 우리의 고향 우리가 보듬고 가꿔야 2018-06-09 0 5522
167 곡초는 생태순환을 거쳐 경작지에로 2018-04-16 0 5542
166 설날 아침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2018-03-06 0 5418
165 우리의 영농실력 남보다 못해 2018-01-29 0 7927
164 남명학 부주장과 같이 일하던 하루 2018-01-02 0 7671
163 외국로무는 우리의 영원한 터전이 아니다(주청룡, 홍천룡) 2017-12-25 0 6148
162 ‘학생들’과 ‘애들’ 어떻게 불러야 할가? 2017-09-29 0 5296
161 생방송: 이밤을 함께 합시다 2017-08-27 0 6242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