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다가 북경 텔레비전 제3체널에서 방송되고있는 사랑에 대한 특별토론장면을 볼수 있었다.
미모의 녀성 사회자가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들먹이면서 중국남자들은 숙녀들에게 너무나 무뚝뚝하지 않느냐 라고 힌트를 주니까 토론에 참석한 20대 젊은 처녀로부터 60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너도나도 자신들의 남자 친구나 남편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아끼고 있다는 불만들을 늘어놓았다. 반론이 없이 일변도로 몰아가는 토론회는 중국 남자들에 대한 성토의 장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사랑이 모자라 《사랑실조(失調)》를 앓고 있다는 하소연도 아니고 남자들이 사랑한다는 말에 너무나 린색하여 달콤한 사랑의 표현에 굶주리고 있다는 그녀들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이제는 사랑도 어쩔수 없이 세계화되여가고 있구나》하는 기우지심(杞憂之心)이 짙어진다.
사실 중국어에도 영어 《아이 러브 유》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워 아이 니》라는 쉽게 련발할수 있는 사랑의 표준전달어가 있다. 다만 중국 남자들은 그 말을 별로 람용하지 않을 뿐이다. 그 대신 그들은 한번 결혼하게 되면 쉽게 리혼하지 않는다.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백년해로(百年偕老)》는 아직까지도 사랑의 보편적 가치로 중국의 기성세대들에게 인정되고 있다.
그에 비교했을 때, 《어쩌면 숙녀들에게 저토록 친절할수 있을까》라고 감탄할 정도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아이 러브 유》를 곱씹어 대는 미국남자들은 결혼후 쉽게 리혼한다. 미국인들의 리혼률은 1979년에 이미 3:1의 수준을 넘어섰다. 지난 80년대 나는 미국의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어느 정신의학자가 쓴 글을 읽은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이란 말을 값싸게 되풀이하지 않고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되풀이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랑하고 있지 않은 자기에게 자기 암시를 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의 지적은 《성실히 사랑하며 조용히 침묵하라. 성실한 사랑은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는다.》라고 한 프리드리히 제어라인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제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할리우드 문화에 중독되여 가고있는 중국의 녀성들은 미국 녀성들의 삶을 흉내내고 싶어하고 그들의 개방문화를 따르려고 한다. 그녀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중국의 남자들도 마음에 내키든 내키지 않든 《워 아이 니》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게 되고 그러한 반복이 잦아질수록 리혼률은 도리여 높아지고 있다.
사실 태고시대에서 오늘에 이르는 사랑의 력사는 자유를 지향해온 력사라 할수 있다. 인류가 선택한 일부일처제에서 결혼의 본질은 배우자 서로가 사랑을 약속하면서 성관계의 배타적인 독점을 표방하는 사회적 계약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결혼이라는것은 배우자 서로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족》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였다. 불과 백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일곱살이 되면 남녀가 자리를 함께 할수 없는》사회에서 자라나 《부모의 뜻에 따라, 중매군의 입놀림에 따라》사랑이 전무한 상태에서 결혼해 왔다. 서양인들이라 해서 더 나을것도 없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1837-1901)까지도 그들의 결혼은 쌍방의 가족 또는 중매인에 의해 계약되였고, 사랑은 일단 결혼이 성립된 다음에 전개되는것으로 인식되였었다.
그러한 혼인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인간사회는 여러 가지 법과 제도, 도덕과 여론, 종교 등 온갖 사회적 힘을 총동원하여 사랑을 억지로라도 붙들어 매려고 해왔다.
한편, 량산백과 축영대나 로미오와 쥴리엣 같은 동서방의 수많은 남녀들이 사랑의 자유를 위해 사랑을 구속해온 온갖 《사회적 힘》과 싸워왔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왔다.
사회의 진보와 함께 오늘날의 사랑은 선택에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전한 자유를 확보한셈이다. 요즘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주변의 눈들을 개의치 않고 포옹하고 싶으면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으면 뽀뽀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또한 그들을 보는 어른들의 시선도 예전보다 훨씬 관대해졌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이제는 혼전성관계나 동거도 사회적 간섭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며칠전 신문을 보다가 상해, 북경, 청도 등 대도시에서 《누드 신혼사진 붐》이 일고 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놀란나머지 이제는 누가 공공장소에서 《라체결혼식》을 치렀다해도 놀라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사랑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사랑의 안전성이 오히려 더 감소되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사랑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황에서 결혼했던 지나간 세대나 한정된 자유를 전제로 결혼한 우리 세대는 별로 리혼하지 않았다. 리혼은 마치 사랑의 자유를 충분히 맛본 세대들의 몫인것처럼 인식되여 가고 있다. 그들은 《위선적》인 부모세대를 비판하면서 자유롭게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찾아 로맨틱한 사랑을 하면서 결혼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커플들이 도리여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면서 헤어지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연변조선족의 리혼률은 1999년에 2:1에 도달함으로써 세계화의 진원지인 미국을 훨씬 초월하였다. (리혼이 한국인과의 《위장결혼》과 련계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때 흔히 사용되는 구실이 《가짜리혼》이란 말이다. 그러나 법(法)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리혼은 《진짜리혼》이다.) 이제 사랑의 불안전성에 따른 리혼에 한해서만은 중국조선족이 미국을 향해 세계화개방을 주장해야 하지 않나 싶다.
높은 리혼률로 아이들이 감수해야 할 상처는 어른들의 상처보다 훨씬 크다. 부모들의 사랑으로 커야 할 어린 시절, 가장 친밀했던 보호자들의 관계해체로부터 받은 상처는 평생을 두고 아픔을 줄수 있다.
사랑의 안전성이 감소되는 또 하나의 사례는 외도이다. 지난 80년대 중국의 민법이 《간통》을 형사범죄 범주에서 제외시키면서 혼외정사로 대표되는 불륜이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 외도가 당사자에게 새로운 로맨틱한 사랑이나 쾌락이 될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배우자에게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가장 아픈 마음의 상처로 될수 도 있다. 중국에서 지금 매년 30%이상의 증가률을 보이고 있는 성병환자나 50%의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에이즈 환자도 불륜과 무관할수는 없다.
그보다 더 큰 불행은 불륜이 사랑을 말초적이고 단순한 성 접촉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사랑은 없고 포르노만 남은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을 계속 희망할수 있을까.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자유는 점점 확대되여가고 있지만 사랑의 안전성은 반비례로 축소되기때문에 사랑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따라서 진실한 사랑은 더더욱 귀중해지고 있다. 리혼과 외도의 확산이 부추기는 가정의 해체와 사랑의 황폐화는 이제 우리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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