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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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잘못 채워진 첫 단추
2006년 02월 27일 00시 00분  조회:5947  추천:54  작성자: 황유복
잘못 채워진 첫 단추



이순의 나이에 수필쓰기를 배우다 보니 쓰고 있는 한글자한글자마다에 조심이 간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과연 수필인가 하는 의구심때문일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필가들이 쓴 글을 열심히 읽으면서 수필리론공부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수필쓰기 공부를 하다보면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많이 접하는 말이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는 것이다. 수필가들은 원고지를 앞에 놓고 필만 들면 저절로 글이 씌여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초보자여서 그런지 아무리 필을 들고 앉아있어도 붓이 가주지 않아 글이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나는 《붓 가는대로 쓸수 있는》경지에 이르는 첩경을 찾기 위해 《붓 가는대로 따라간》다고 풀이되고 있는 《수필(隨筆)》이라는 한자어 단어의 원류를 더듬어보기로 했다.

내가 쉽게 찾아 읽을수 있었던 수필리론가들의 글을 아래에 인용해본다.


《남송(南宋)시대의 홍매(洪邁:1123~1202)가 <수필(隨筆)>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다고 한다. 그의 저술<용재수필(容齋隨筆)>의 서문에서, 저술제목에 <수필>이란 말을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습성이 게을러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뜻하는 바를 따라 앞뒤를 가리지 않고 썼기 때문에 수필이라고 한다.>》

민병덕 등:《현대문학》, 제 384페지 (동아출판사)


《수필이란 명칭은 중국 남송대에 홍매가 쓴 용제수필(容齊隨筆)에서 비롯되였다. 그는 수필이란 명칭을 쓰게 된 연유를 <나는 게으른 탓으로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으나, 그때그때 뜻한바 있으면 앞뒤의 차례를 가려 챙길 것도 없이 바로바로 기록하여 놓은것이기에 수필이라 일컫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수필을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 풀이하는 것은 아직도 약 800년전 홍매에 머물러 있다 할것이다.》

(김형진: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생각하며, 《송화강》2003년 제5기)

앞의 두 인용문에서 홍매의 말에 대한 번역글의 차이는 있지만 《뜻하는 바를 앞뒤 가리지 않고 적었기》때문에 《수필》이라 한다는 기본 뜻은 거의 같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는 바를 기록》한다는 말과 《붓 가는대로 쓴》다는 말은 조금도 닮은곳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김형진의 글은 아무른 해석도 없이 《붓 가는대로 쓴 글》이란 말의 책임을 《800년전》의 홍매에게 전가시키고 있어 아둔한 나로서는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제는 뼈마저 진토(塵土)로 되어 있을 홍매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억울함을 호소할 것을 기다릴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도서관에 쫓아가 홍매의 《용재수필》원본을 찾아보았다.

우선 김형진의 글이 《용재(容齋)》를 《용제(容齊)》로 잘못 쓰고 있음이 확인되였다. 홍매의 수필론 원문은 아래와 같았다.

《予老去習懶, 讀書不多, 意之所之,
隨卽記彔, 因其先后, 無复詮次, 故目 之曰隨筆. 》
(《容齋隨筆》序)


《나는 늙어가면서 게을러지게 되여 책은 별로 읽지 않으나 생각이 닿는대로 곧바로 기록하게 되였다. 그 기록의 선후를 다시 가려내거나 목차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수필이라고 이름하게 되였다.》
(《용재수필》서문)


홍매가 주장한 수필론의 키워드가 《수즉기록(隨卽記錄)》임은 첫눈에 나타난다. 중국의 권위적 고대한어사전인 《사원(辭源)》에 따르면 《필(筆)》자는 ①붓 ②서사, 기록 ③산문(散文)등 3가지로 해석되기때문에 홍매가 사용한 《수필》의 《수》는 《수즉(隨卽)》의 《수》로, 《필》은 《기록》의 뜻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수필》은 《수즉기록》을 두글자로 줄여 표현한것이다. 《수필》에 대한 《홍매정의(洪邁定議)》는 단연코 《생각이 닿는대로 즉시 기록한 글》이다.

그렇다면 우리 수필문단에서는 왜 《수필》을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고 해석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조선문학사에서 수필문학이 본격화되던 시기(1930년대~1940년대)에 최초로 수필문학리론의 정립을 시도했던 사람은 김광섭일것이다. 그는 《수필문학소고》(《문학》19 34년 1기)라는 글에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대로 쓴 글이다.》라고 했는데 수필이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는 식 해석의 장본인은 홍매가 아닌 김광섭임이 틀림없다.《글자 그대로》라는 수식어를 보더라도 김광섭은 《隨筆》이라는 두 글자를 리해할 때 조선에서 사용하던 《옥편》을 참조한 것이 분명하다. 《옥편》에서 《隨》를 《따를 수》, 《筆》을 《붓 필》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수필》을 《붓에 따른 글》, 즉 《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르른것이다. 따라서 《김광섭정의》는 한어문단어에 대한 틀린 판독(判讀)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와전된 틀린 정의일 수밖에 없다.

김광섭이 잘못 채운 첫 단추 때문에 우리의 수필문학은 반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동안 비뚤어지게 옷을 입고있은 셈이다. 이제는 그 첫 단추부터 풀어서 바르게 채워야 하지 않나 싶다.

처음《붓 가는대로 쓴 글》이라는 말을 접했을 때 먼저 생각났던 일이 있다. 1950년대나 60년대 초기 중국영화에서 자주 볼수 있었던 장면이였는데 첫사랑에 빠진 남녀주인공중의 한사람이 저녁에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일기를 적으려고 일기책을 마주했다가 련인에 대한 달콤한 몽환경에 도취된 나머지 붓 가는대로 손을 놀리다보니 공책 한페지는 전부가 련인의 이름자로 메워진다. 사실 《붓 가는대로 쓴 글》이란 앞의 경우 외에도 더 있을수 있겠는지 의문스럽다. 《글 쓰기라는 업보가 원쑤 같다》(최인호),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김현호)라고 말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글쓰기란 결코 《붓 가는대로》 쓸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인간의 령혼으로 씌여지는 글이 아닌가 싶다.

200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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