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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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설립은 그에게 숙명적인 과제였던가
2006년 04월 11일 00시 00분  조회:6274  추천:96  작성자: 황유복
학교설립은 그에게 숙명적인 과제였던가


황유복교수의 경력을 듣고나면 한생을 쭉 학교를 설립하는데에 바쳐온분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난다. 그만큼 그는 교육을 중시하고 교육사업을 열애하고있음을 알수 있다.

그의 첫 학교설립은 대학시절에 이미 완성되였다.

1961년 길림시 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며 전국대학통일시험에 합격한 황유복교수는 문과생으로는 유일하게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 민족사전공. 입학하고보니 소수민족학교졸업생이 대학입시에서 면제받은 고대한어와 외국어 과목이 문제로 제기되였다. 외국어란 별로 접촉 못해본 그를 외국어교원까지 다른 학과로 옮길것을 권고하는 상황에서 그는 반발심이 생겼다. 그는 첫 한달을 로어과 고비를 넘기는것에 투자하였다. 악을 물고 노력한 결과 한달만에 로어 6년과목을 끝내는 놀라운 기적을 창조하였으며 두 번째 달은 고한어과를 돌파하는데 매달려 기중시험에서 만점을 따내였다. 그것은 듣는것처럼 쉬운일이 아니였다. 소수민족학생으로서 그섯은 피타는 노력이 요청되는 일이다. 선생과 동학들을 깜작 놀래운후로 그의 외국어과성적은 줄곧 최우수점수를 지켰으며 고대한어에도 악착스런 집념을 보여 갑골문을 혼자 자습하고 전각(篆刻)에까지 재간을 피우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대학생활 몇 년간 그는 모든것에 열정적이고 진취적이며 적극적이였다. 일찍 받은 할머니의 바른 교육과 꿈을 키우고 문학에 가까이한 경력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눈을 가지게 하였고 바른 삶의 자세를 가지게 하였던것이다.

대학 4학년 황교수는 이족지구의 편벽한 산골에 사회주의교육공작대로 내려가게 되었다. 동하향 칙립사란 곳은 째지게 가난하고 환경이 험악한 곳이다. 이족자녀들이 학교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것을 보고 또 문화가 없어 사업에서 많은 난관에 부딪치는 이족간부들을 대하며 그는 꼭 이곳에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포부를 세웠다. 그는 상급에 청시하고 이족군중들을 동원하여 끝내 학생 20여명을 갖춘 학교를 세웠으며 사회주의교육공작대일을 해나가는 한편 솔선하여 이족말을 배워가며 그애들에게 문자를 가르치였다. 그가 학교를 세운 일은 실습내려간 전체 동학들중에서도 전형적인 사적으로 되었다.

대학에서 줄곧 우수한 성적을 따낸 황교수는 1966년 7월초 학생신분으로 학교에 남게 되었으며 1969년 중앙민족대학 당위판공실에 정식 배치를 받았다. 대학에서는 1970년부터 학생(공농병학원)을 모집하였다. 당시 민족출판사에 조선문조가 있는걸 감안하여 민족대학에도 조선어학과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황교수는 최재우선생님과 함께 학교지도부에 강력하게 신청하였다. 결과 1972년 9월 소수민족언어문학계에 조선어문학과가 정식 성립되고 학생을 받아들였다. 그는 1기생을 직접 가르치였으며 조선문학사에 최초로 《춘향전》등 작품을 강의하였다. 1기생을 졸업시키고 황교수는 자기 전공과 맞는 민족연구소롤 자리를 옮겼으며 그후 쭉 민족학계 교수로 지내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족을 연구하는 한편 조선어학과 학생들에게 줄곧 조선력사를 가르치였다.

1977년말부터 1979년 1월까지 황교수는 북경군구 공병련대에 내려가 《단련》하게 되었다. 그 기간 그는 영어를 자습하였으며 로어, 일어, 이족어, 한어, 조선어 등 다종 언어를 장악한 능수가 되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민족연구소 지도사업을 책임지면서 그는 행정보다는 학문적으로 일을 하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학술연구로 들어갔으며 북방민족연구에 진력하였다.

1984년 황유복교수는 미국 코네티컷대학에 초청되여 처음으로 출국의 길에 올랐다. 그렇게 출국의 길이 열린 그는 선후로 미국, 일본, 한국, 카나다, 쏘련, 몽골, 홍콩 등 나라와 지구에 수십차 다녀오며 학술을 연구하고 강의를 하게 되었다. 특히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로 초빙되여있는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한차례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시야를 넓히고 학술적으로 자신을 풍부히 살찌운건 물론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 여러개 대학들에서 초청강의를 하는 한편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사회와 문화에 대한 비교연구(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황교수는 조선민족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을 위해 뭔가 실제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실제로 황교수는 그전에 이미 우리 조선족사회에 유익한 일을 많이 해오고있었다. 1984년 첫 출국에서 그는 외자를 인입하여 연변대학에 200만딸라를 지원해 공학계층사를 짓게 하였고 할빈조선족병원에 현대의료의기를, 길림시조선족예술관과 료녕민족출판사에 현대선진인쇄기를, 길림시 조선족중학교와 료녕성 조선족사범학교에 정밀선반기를 기증하였다. 당시로 놓고보면 이는 하나의 큰 움직임이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이런 물질적지원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수 없음을 보아냄과 동시에 조선족 전반 사회를 위해 뭔가 유익한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였다. 갈수록 동화되고있는 조선족사회를 살리고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의식을 강화해야함이 급선무로 제기된다는것을 그는 보아냈다.

당시 미국의 한인(韓人)은 모국어를 잊어가는데 비해 중국 조선족은 자기 언어를 보존하고있는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는 그. 그러나 중국에 들어와서 현실을 보는 순간 엄청난 변화가 안겨왔다고 한다. 대도시의 80%정도의 조선족 청소년들이 우리 말과 글을 모르고있는 엄연한 현실앞에서 그는 조선어학교를 세우기로 작심하였다. 미국에서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모은 1만달러를 그는 그대로 학교설립에 넣었다. 교실마련, 교재와 학용품 구입, 교원초빙 등 모든 절차를 위해 친히 뛰며 하나하나 해결한 황교수는 1989년 4월 북경조선어학교를 정식 성립, 어린 아이로부터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제한 없이 조선글을 배울수 있는 북경조선어 주말학교는 설립되자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교원이 성의껏 가르치고 학생들이 열심히 배운 보람으로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한국회사인, 대사관직원, 번역 등 여러 업종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황교수는 차츰 그 영향을 지방에까지 넓혀 심양, 장춘, 할빈, 길림, 목단강, 단동, 석가장, 위해, 해남도, 내몽고 등 전국 10개도시에 북경조선어학교 분교를 설립하였다. 지금껏 졸업해나간 학생은 2000여명, 그중 한국과 미국에 류학보낸 학생만 해도 130여명이다.

가나다라도 모르던데로부터 번역을 척척 해내고 민족감이라고는 모르던 그들이 조선족임을 자랑스레 여기는 제자들을 대하며 황교수는 삶의 보람을 느끼고 의욕을 키웠다.

이 기간 황교수는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에 민족반을 꾸려 조선족 후예들이 어릴때부터 우리 말, 우리 글을 익히며 민족정서를 키우게 하였다.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 머리에 흰 서리까지 내렸건만 황교수는 여전히 정력왕성하고 탄력있다. 그가 이렇게 나이보다 젊어보임은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부지런히 뛰며 의욕에 넘치게 인생을 엮어가는것에 그 비결이 있지 않을가. 그에게는 부단히 새로운 꿈이 만들어지고 그는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한생을 뛰고 있다. 지금 황교수의 앞에 가장 큰 꿈으로 제기되는건 벤처(風險)창업교육을 위한 사립대학을 설립하는것이다. 학교설립은 여전히 그의 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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