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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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인민방송국---<희망클럽21> 기자와의 인터뷰
2012년 06월 29일 23시 59분  조회:4362  추천:12  작성자: 강순화

                                        <희망클럽21>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돐기념특별프로 (3)
                                                               --- 정판룡교수편

 

   기자: 선생님은 연변대학 조선한국연구중심에서 연구원으로 전직에 계실 때 정판룡교수님과 함께 사업해오신줄로 알고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위인이라고 할수 있는 정판룡교수님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습니까?          

   강: 예, 운명의 안배였을가요? 나는 행운스럽게도 12년간이나 저명하신 민족의 대가 정판룡교수님을 보좌하여 그 슬하에서 함께 사업할 수 있는 인복을 지니였습니다.
   1989년말, 연변대학 한어학부에서 사업하던 내가 정판룡교수님의 부름으로 성립주비중인 연변대학조선한국연구중심에 전근했을 때 선생님은 우리대학의 부총장이면서 또 우리 연구중심의 주임을 겸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벌써 선견지명을 가지시고 연변대학의 민족적 학과적 특성을 살려 중국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에 조선한국연구중심을 창립하심으로서 연변대학이 중국내에서의 조선한국학의 위상을 정립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을 이룩하셨습니다.

   그 이후 북경대학, 중앙민족대학, 상해복단대학, 산동대학, 절강대학 등등 전국의 50여개 대학에서 선후로 한국학연구중심을 설립하여 전국의 대학학계 방방곳곳에 한국학연구의 새로운 고조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해마다 북경, 상해, 연변, 제남, 항주 등지의 주요 대학에서 륙속 한국학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정판룡선생님이 연변대학에서 지피신 한점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되어 전국의 대학가에서 타오르게 된 것이지요. 
 
   어데 그뿐입니까? 민족문화의 거목이셨던 선생님은 저명한 학자로서 수많은 젊은 후학들을 양성하셨으며 우리민족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혼신의 정열과 지혜를 몰부은 훌륭한 문화지성인이시고 우리민족의 거두였습니다. 한 위인으로서는 너무나도 짧은 70세의 인생로정에서 선생님은 우리민족의 교육과 문화발전을 위하여 그야말로 많고 많은 업적을 쌓아 오셨습니다. 그 숭고한 정신, 그 드넓은 흉금, 그 자애로운 얼굴, 그 우렁진 목소리는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가슴속에 아로 새겨져 무시로 우리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과 12년을 함께 사업해오면서 그분에 대해 료해도 적지 않을줄로 압니다. 선생님의 인상속에 남아있는 정판룡교수님은 어떤분이였습니까? 

   강: 그 누구도 그러하였듯이 처음 교수님을 대할 땐 무척 존경하면서도 또 접촉하기 어려운 분으로 여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의 그 후더운 성격과 너그러운 인품은 언제나 친 부모와 같은 뜨거운 정을 느끼게 하였으며 령도이자 스승으로서의 아낌없는 지도와 친절한 가르침은 나로하여금 항상 신심 가득히 사업에 몰두할수 있게 하였습니다. 
  
   학부사무실에서 교무공작을 하다가 과학연구부문으로 옮겨오니 처음엔 어떻게 학술연구를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나에게 주저없이 임무를 맡기고 과감히 실천해 보도록 고무격려해 주셨습니다.  기억에도 새로운 1990년 10월 한국의 한 사회학회에서 우리 연구중심과 함께《중국조선족사회연구》학술토론회를 가졌는데 10여가지 연구항목중《중국조선족녀성의 사회적지위》라는 종목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이 문제는 강동무가 맡아해야 하겠소. 녀성문제가 아니요?》라고 하시며 대담히 연구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고무와 격려에 힘을 얻은 나는 열심히 뛰여다니며 사회조사를 하고 자료들을 찾고 정력을 몰부어 연구분석하고 집필한 끝에 훌륭한 론문 한편을 써낼 수 있었고 그번 학술회발표에서 국내외학자들의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게 되였습니다.  
  
   이것이 나의 첫 론문이 되어 그후 수년간 많은 연구과제를 완성해 나갈 수 있었으며 이러한 실천 과정에서 학문의 법칙과 규범을 모색하고 연구방법을 찾아내여 몇년간 30여편의 중국조선족연구와 녀성연구 론문들을 국내외 학술간물에 발표함으로서 1997년 1월에는 파격적으로 부연구원(부교수급)이라는 고급직함까지 평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참다운 가르침과 지도가 오늘의 나를 이끌어주시고 키워주셨음을 저는 언제나 잊지 않고 있으며 조금만 밀어 주면 얼마든지 커갈수 있는 그 젊은 시절에 정판룡교수님 같은 참 스승을 만난 평생의 행운으로 하여 항상 자랑을 느끼군 합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흠모를 받으며 력사가 기리는 조선족의 우수한 인물로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있는데요. 교수님의 략력에 대해 먼저 소개를 주시겠습니까?

   강: 예, 정판룡교수님은 1931년 10월 2일, 한국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면 향교리에서 죽세공(竹细工)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습니다.
   1938년 7세때 부모형제와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여 흑룡강성 상지현 하동촌에 정착하였고 1949년 3월 연변대학에 입학하여 1952년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다가 1955년 9월 구쏘련 모스크바대학 어문학부 쏘련문학강좌 연구생으로 입학하여 1960년 2월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그곳에서 레닌사범대학의 중국류학생 왕유녀사와 결혼하였습니다.

   1960년 5월, 우리민족의 교육발전을 위하여 북경이나 상해의 사회과학연구부분에 얼마든지 남을수 있는 기회도 포기하고 연변대학으로 돌아와 어문학부 당총지서기 겸 부학부장으로 사업했으며 1962년부터 평론과 창작을 시작하였습니다. 문화혁명기간 <반동학술권위>, <수정주의분자>,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등등 루명을 쓰고 투쟁받고 격리당했으며 로동개조도 하였었습니다. 1968년 9월 그 모든<혐의>가 해소되여 중문학부 학부장으로 임명되였고 1979년 9월에는 중국작가협회에 가입하고 그해 12월 교수로 승급했으며 1980년 7월 연변대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되였습니다. 1983년 여름, 중국조선문학연구회를 성립하여 리사장으로 당선되였고 1986년 9월 국무원학위위원회에서 조선어문학박사생 지도교사로 임명되였습니다. 1988년 4월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9기인민대표대회 대표로, 1990년에는 연변주문련 부주석, 길림성문련 부주석으로 임명되였고, 1993년 1월에는 길림성영재(英才)훈장까지 수상하였습니다     

   1997년 3월에는 한국 KBS해외동포상 학술상을 수상하여 그 수상금중 10만원을 기부하여 <정판룡교육기금회>를 설립하였고 그 장학금이 10여년래 국내외 지성인들과 제자들의 후원으로 30여만원까지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100여명의 품질과 학업이 우수하지만 생활이 곤난한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하였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을 평가할 때 우리는 제일먼저 우수한 교육자의 한분이라고 얘기하는데 교육자로서의 정판룡교수님은 어떤분이였습니까?

   강: 정판룡교수님은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학자이며 교육가이시고 또 문학평론가이십니다. 그는 장장 40여년간의 학술 및 문필생애에서 실로 많은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중국조선족 지성인 사회에서는 정판룡교수님을 민족을 위한 학자, 쉴줄모르는 문필가. 전략가적인 교육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학자적인 삶을 생명의 선택으로 간주하였기에 번중한 행정직무를 떠멘 나날에도 학술연구와 문필활동을 한시도 놓치 않았고 지도직에서 나온 뒤에는 더욱더 왕성한 정력으로 학술연구와 문필활동에 전념하셨습니다. <정판룡문집 1,2>, <내가 살아온 중화인민공화국>,<세계속의 우리민족> 등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반영한 장편회고록과 학술저서들은 이미 우리민족 력사를 견증하는 소중한 문헌으로 되고 있으며 길이 전해갈 귀중한 자료로 되고있습니다.

   정판룡교수님은 연변대학의 첫 박사생지도교수로서 수십명의 문학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키워내여 중국의 조선문학연구와 외국문학연구의 기반을 이룩하였으며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종합대학으로 일떠세우는데 거대한 기여를 해 오셨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우수한 교육자이자 또한 학문을 연찬해온 학자였습니다. 학자로서의 정판룡교수님은 어떤 학문연구들을 해왔고 자랑할만한 학술성과들을 거두었습니까?

   강: 정판룡교수님은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학자이고 교육자였습니다. 일찍 국비류학생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정판룡교수님은 <겨레의 부름>을 받들어 모교에 돌아와 교편을 잡고 장장 40여년간 외국문학연구가로서 우수한 업적을 남기였습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업적이 외국문학연구에서의 <서방주의>의 탈피를 꼽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정판룡교수님은 시대선행적인 학술적 안목으로 일찍 60년대초부터 외국문학연구에 있어서의 <서방중심주의>의 편향을 지적하였고 동서방문학을 아우르는 중문판 <외국문학사>(총4권)을 편찬하여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하였고 중국학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대학에 조선한국연구중심을 설립하고 조선한국학연구의 학제적연구를 추진하여 중국의 한국학연구를 선도하는 연구기관으로 성장시켰으며 중국 최초의 <한국백과전서>를 편찬, 출판하여 우리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문헌적으로 규명함으로서 교수님의 뛰여난 학술적 안목과 리더십을 훌륭히 보여주셨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20세기 중국 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학자, 교육자일뿐만아니라 또한 우수한 작가, 평론가로도 널리 알려져왔습니다. 교수님이 남긴 작품들도 적지 않은줄로 알고있는데요?

   강: 정판룡교수님은 걸출한 학자, 교육자일뿐만아니라 또한 우수한 작가, 평론가였습니다. 그는 풍부한 인생경력과 탁월한 식견으로 수백만자의 기행문, 회고록, 수필, 평론 등 주옥같은 글들을 남겼습니다. 우리민족의 우수한 지성인으로서의 정판룡교수님은 시종 민족의 현황과 미래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특히 개혁개방이후의 격변기에 있어서 민족의 운명에 대한 깊은 사고와 통찰을 실천하였는바 그이께서 제기한 <며느리>론은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성격을 규명하는 명쾌한 론리를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사색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기자: <정판룡문학비>의 정립은 조선족문단에서 대서특필할 사건이라고 지적하는분들도 있는데요. 정판룡문학비는 어떻게 세워지게 된겁니까?

   강: 2004년 10월7일, 정판룡교수님의 서거 3주기를 기념하면서 교수님의 제자와 중국조선족문화단체의 유지인사들이 성의껏 후원한 3만여원의 헌금으로 연변대학 북쪽 와룡산 기슭에 <정판룡문학비>를 세웠습니다. 문학비에는 정판룡교수가 장편회고록 <고향떠나 50년>에 쓰셨던 글 한 단락을 새겨 넣었는데 그 글에서 정교수님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의 전도를 위해 동포들의 부름을 거절할 용기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1960년 5월초 연길에 살구꽃, 배꽃이 필 무렵 나는 연변대학을 잘  꾸려 보려는 꿈을 안고 북경을 떠나 북으로 가는 렬차에 앉았다》라고 하셨는데
   이 글귀의 마디마디에서 우리는 정교수님의 우리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민족교육에 대한 철저한 사명감, 우수한 학자로서의 유족한 삶을 버리고 자신을 키워준 조선족 동포와 연변대학에 대한 사랑을 안고 이 변강땅에 달려 온 교수님의 인격적 매력을 극명하게 보여 준 한 대목이라 할수 있습니다. 
   <정판룡문학비>는 연변대학캠퍼스에 영원히 뿌리밖고 후손만대에게 민족의 얼과 혼을 길이길이 전할 것입니다.
   그날 또 하나의 주요행사로 <제7차 정판룡교육기금회 장학금시상식>을 거행하여 6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시상하였습니다. 타계하시기 직전까지도 병상에서 손수 장학금을 발급하시던 교수님의 모습이 떠 올라 모두들 숙연한 마음으로 문학비를 향해 경의를 드렸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원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임직해오면서 현대대학경영의 리념과 체계를 본격적으로 연변대학에 접목시켜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종합대학으로 일떠세우고 연변대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열과 빛, 슬기와 지혜를 다 바쳐온 우리 민족의 걸출한 교육자이자 행정가라고 할수 있는데요. 연변대학교의 성장과 발전에서 교수님은 어떤 실제적인 일들을 해오셨습니까?

   강: 교육가로서의 정판룡교수님은 현대대학의 정신과 사명을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 등 대학의 역할을 확실하게 추진한 우리 대학의 우수한 교육행정인이였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연변대학에서 학장, 부총장으로 일하면서 정판룡교수님은 <교수를 건학의 주체로, 학생을 건학의 근본>으로하는 건학리념을 명확히 추진하였고 연변대학의 특성과 우세를 확립하기에 노력하였으며 자신의 개인적 영향력을 충분히 활용하여 연변대학의 국제화를 실현하는데 크나큰 공적을 이룩하였습니다.

   교수님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여 일찍 석사학위, 박사학위 수여권을 쟁취하고 20여명의 박사들을 친히 배양했으며 연변대학의 조선언어문학학과를 국가급중점학과로 육성하는데 초석을 마련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외사를 주관하는 부총장으로 미국, 한국, 일본 등 나라의 정계와 학계의 거물들과 손잡고 김병민, 리암, 김관웅, 김호웅, 채미화 등등 40여명의 젊은학자들을 선진국의 대학들에 보내여 학문을 연찬하게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정판룡 선생님은 연변대학이 산해관을 끼고 세계로 나갈수 있는 큰 문을 열어 준 분입니다.

   이 외에도 학교의 실험대로, 구락부 등 여러 건물을 짓는데도 친히 국외의 자금을 들여오고 끝까지 일을 성사하는데 큰 공헌을 하여오신 연변대학의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선생님은 소탈한 성품에 드넓은 흉금을 지니셨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뛰여난 창의력을 소유함과 동시에 번뜩이는 재치와 유머감을 가진 천재적인 지성인이였습니다. 교수님은 평생의 교육실천, 학문연구, 사회활동을 통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전과 창달에 크나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그이께서 이러한 업적을 이룩할수 있는데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 열렬한 인도주의 정신, 학문과 진리에 대한 끈질긴 추구 등이 핵심적인 동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또 사회적인 직무도 많이 동반하면서 사회활동가로도 활약해오셨는데 사회활동가로의 교수님에 대해서도 말씀 주시겠습니까?

   강: 민족문화의 태두이셨던 선생님은 저명한 학자로서 수많은 젊은 후학들을 양성하셨으며 우리민족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혼신의 정열과 지혜를 몰부은 훌륭한 문화지성인이시고 우리민족의 수령같은 인물이였습니다. 한 위인으로서는 너무나도 짧은 70세의 인생 로정에서 선생님은 우리민족의 교육과 문화발전을 위하여 그야말로 많고 많은 업적을 쌓아 오셨습니다. 그 숭고한 정신, 그 드넓은 흉금, 그 자애로운 얼굴, 그 우렁진 목소리는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마음속에 아로 새겨지고 우리의 귀전을 종종 울리군 합니다.

   선생님은 민족의 전당인 연변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뛰여난 행정력을 과시함과 동시에《연변대학의 특색은 조선한국학연구》라고 하시면서 반드시 이 유리한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고 발전 제고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친히 연구중심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교내의 각 사회학과 연구기구들을 단합하여 20여차의 국제학술회와 국내외 학술활동들을 활발히 조직 지도함으로써 수많은 학술성과로 연변대학을 정상에로 끌어 올렸습니다.  
 
   1999년 5월, 청천벽력으로 불치병 진단을 받으신 후에도 선생님은 의연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완강한 의력과 투지로 병마와 싸우셨고 한두번도 견디여 내기 어렵다는 항암화료를 열두차례나 기적같이 견디여 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보고《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죽지 못하는가 보오》라고 하시며 조금만 정신이 들면 필을 들어 글을 쓰시군 셨습니다. 아마도 생명에 대한 굳은 신념, 불타는 삶의 정열이 선생님을 그렇게도 용히 버티게 하였는가 싶습니다.  
 
   2년 반이라는 기나긴 투병생활, 전후 무려 열네차례나 병원에 입원하시면서도 선생님은 항상 후학들에게 조선족사회 문제들을 피력하셨고 또《내가 알고 있는 일들은 내가 죽으면 다 파뭍혀 버리게 되니 살아 있을때 내가 다 써 놓아야하오.》라고 하시면서 우리문단의 우수한 작가, 평론가들의 일화 30여편을 매일 만여자씩 쓰시여《장백산》잡지에 련재해 주시면서 인생철리가 빛발치는 감격적인 글들로 많은 문화인들과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어데 그뿐입니까? 중국 조선족의 문화교육사업을 자신의 평생사명으로 간주하시고 투병중에도 그 힘든 몸으로 사회의 각종 지성인활동에 참가하시여 보귀한 지도와 연설을 하셨고 또 친히 한국 우리은행 비지니스클럽의 자금을 쟁취하여《중국조선족아동장학회》를 설립하시여 금년에 이르기까지 이미 10년간이나 이 기금으로 만여명의 실학아동을 구하고 극빈학생들을 도와 공부할 수 있게끔 이끌어 주셨습니다. 
 
   학자와 교수를 떠나 한 사회활동가로서의 교수님의 공적은 실로 몇마디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수 없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우리민족문화의 태두였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의 생애와 해온 일들에 대해 얘기 나눠봤는데요. 선생님은 교수님과 함께 사업해오던 시절 기억에 남는 일들은 없었습니까?

   강: 기억에 남는 일들이 너무도 많지요. 1992년의 어느하루 학교 교장직을 마치시고 연구중심 주임으로 돌아 오실때 선생님은 교장실 책장의 책을 한아름 안고 웃으시며 우리 사무실에 들어오셨습니다. 나는 얼른 책을 받아 안으면서 선생님의 자리를 어데다할가 고민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소탈하게 웃으시면서 아무자리도 괜찮으니 책상하나만 놓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일개 대학의 총장이 보통 교직원과 스스럼없이 한 사무실에서 어울리려는 그 모습을 볼때 나는 저도모르게 코등이 찡해 났습니다. 그일에 너무도 감동되여 교수님이 더 존경스러웠고 더욱더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권리라도 가지면 곧바로 거들먹거리는 현실의 일부 인간들에 비해 선생님은 정녕 어른이시고 거인이였습니다.

   선생님은 또 매년 3.8절을 꼭 기억하시고 연구실 선생님들의 가족들까지 일일이 불러서 장미꽃을 선사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서 대접하며 서로의 마음을 교류할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여 우리 연구원들로하여금 저마다 조직의 관심과 따사로움을 친히 느끼게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선생님이 일일이 건네주시던 향기 그윽한 장미꽃 한송이와 그 자애로운 모습이 무시로 눈앞에서 얼른 거립니다.

   제일 가슴 아팠던 일은 1999년 봄 불치병 진단을 받았을때 일입니다. 청천병력이라 우리는 너무도 놀랍고 황당하여 연구실에 있는 돈을 다 긁어서 만원의 현금을 모아 병원에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인차 그 돈을 봉투채로 돌리면서 선생님들의 <한국백과전서>편집 원고비도 아직 주지 못했는데 내가 이 돈을 쓰면 절때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일주일 전에도 선생님은 우리대학의 곤난한 학생들을 념려하시면서 병상에서 6명의 학생들에게《정판룡교육기금 장학금》을 친히 내주셨습니다.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려운 생의 마지막 시각에도 선생님의 그 뜨거운 마음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힘들게 장학생들의 손을 일일이 굳게 잡아 주시던 그 모습은 차마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감동의 화면이였습니다.

   더욱더 사람들을 경탄케 하는것은 선생님의 유언이였습니다. 평시 장학금의 운영을 걱정하시더니 세상을 떠나시면서 안해인 왕유교수님께 부탁하여 당신이 치료비로 남은 돈을 몽땅 장학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왕유교수님은 학교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중히 글을 올려 정교수님의 유지대로 집에 남은 11만원의 저금통장을 몽땅《정판룡교육기금장학회》에 바쳤습니다. 참으로 후세에 길이 빛날 거동이요, 이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천사의 마음이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또 당신이 수십년간 수장하시고 아껴 보시던 도서 2000여권을 몽땅 연구중심에 기증하시여 학자들의 연구사업에 쓰이도록 하셨습니다. 선생님 댁의 서가에서 한권 한권의 책들을 뽑아 등기하고 정리하면서 우리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을 그렸습니다.

  《아, 가물가물 꺼져 가면서도 유난히 밝게만 빛나던 한대의 굴직한 초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몽땅 불태우던 그 맑은 령혼, 추호의 사심도 없이 민족교육사업에 혼신을 바쳐온 거룩한 그 모습 그 덕성에 만민은 우러러 보며 높은 산도 머리숙였습니다.                       (당년 정판룡교수님 추모문에서--강순화)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어떤 삶의 신조를 가지고 살아온분이였다고 할수 있을가요? 교수님의 인생철학과 인간적인 모습은요?

   강: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교육가, 문학가, 사회활동가로 정평이 난 교수님이지만 그의 인간적인 모습인 소탈한 미소와 걸걸한 목소리, 정녕 산이면서도, 우람한 산이면서도 한뉘 민초들과 이웃하여 내물처럼 살으신 교수님의 인생철학에는 그의 신념과 사상, 사랑과 지혜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판룡교수님을 회억하고 그분이 남기신 막대한 정신적 유산을 되새겨 볼때, 우리는 한 위인의 빛발치는 인생진리를 느낄수 있습니다.

   타계하기 닷새전 정판룡교수님은 우리에게《사람은 살아서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여야 하오. 나의 제자들도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할수 있기를 바라오.》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좋은 일을 많이 하라》는 이 짧은 말씀에는 타인을 위하여, 연변대학을 위하여, 지역사회를 위하여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수많은《좋은 일》을 하신 정판룡교수님의 인생체험이 녹아있는바 가히 득도와 달관의 경지에 이른, 거인이 남긴 금언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고인은 갔어도 넋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그 넋은 영원히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로 될것입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생전에 우리에게 많은것을 남겨놓고 가신분입니다. 정판룡장학기금도 그중의 한가지라고 할수 있는데요. 기금을 세우고 운영해오기 위해 교수님은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신줄로 알고있습니다. 정판룡장학기금은 지금도 그 맥을 이어가고있겠지요?

   강: 예, 선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1997년 3월, 한국 서울에서
학술상으로 탄 기금중 10만원을 기초로 <정판룡교육기금>을 설립하고 해마다 6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하였는데 2001년 서거 후 정판룡교수님 부인 왕유교수는 교수님 치료금액의 여액 11만원을 몽땅 기금회에 지원하였고 또 10여년간 해내외 유지인사들과 제자들의 후원으로 30여만원이 모여져서 이미 100여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이 지불되였고 지금도 계속 그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는 연구중심이 아닌 학교기금회에서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며 전교사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발급하고 있습니다. 

   기자: 정판룡교수님은 자신의 평생 교육실천, 학문연구, 사회활동을 통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전과 창달에 큰 기여를 해왔고 또한 자신의 인생가치를 빛내였습니까?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우수한 별인 고 정판룡선생님을 기리며 그의 생애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눠봤는데요. 정판룡교수님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말씀 주시겠습니까?

   강: 마지막으로 2001년 8월 31일《정판룡 문학편》출간기념모임에서 발표했던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한석윤 선생님의 시를 재삼 읊어 보면서 정판룡교수님에 대한 추모의 글을 마치려 합니다. 한석윤선생님의 이 시는 정판룡교수님이 서거하기 일개월 전, 선생님의 저작 출판기념회에서 읊으셨고 선생님은 그 저작을 병상에서 받으셨습니다. 저는 이 시가 정교수님을 너무도 정확히 그렸고 또 우리문화인들의 마음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였다고 생각하며 항시 다시 읊어보군 합니다. 한석윤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이 자리에서 읊어 보겠습니다.   

                                                                                                                                                          

    스승님께 올리는 시                                                 

                    한 석 윤


                  
      멀리서 바라보면 산이였습니다                  
      하얀 구름 서리서리 허리에 감고                  
      하늘을 떠받치고 선  
      아아한 산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보면 내물이였습니다                  
      키작은 풀들과 눈맞춤하며                   
      도란도란 정다운 이야기 끝이 없는                  
      살가운 내물이였습니다.

                                                  
      민족문화산맥의 제일봉에 오르시여                  
      세기의 아침해 남먼저 마중하며                  
      민족의 앞날에 채운을 뿌려주시면서도                   
      만인의 입에 도인으로 칭송받으면서도                  
      언제나 언제나                   
      맨발바람으로 고학의 길 떠나시던                  
      그날 그 농부의 아들로 살아오신 스승님

      스승님의 그 거룩한 모습에서 저희는                  
      잘 익은 이삭일수록 머리 숙이고                  
      물이 찬 병일수록 소리가 작다는                  
      참인간의 정도를 깨칠 수 있었고
      스승님의 그 거룩한 행실에서 저희는                   
      싱싱하게 피여야 할 우리 민족의 길에                  
      내가 설 자리, 내가 해야 할 일                  
      불씨로 받아 가슴에 피울 수 있었으니

                                                   
      아, 정녕 산이면서도, 우람한 산이면서도                  
      한뉘 민초들과 이웃하여 내물처럼 살으신 스승님                   
      스승님은 언제나                  
      민족의 산으로 우뚝 솟아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좌표로 영원할 것입니다.                                       

                                                                                                       (연변인민방송국<희망클럽21> 2012.6.24,
                                                       3차례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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