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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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2
2013년 10월 31일 13시 48분  조회:3924  추천:18  작성자: 강순화


                             (2)   리순신장군의 어머니
 

   리순신장군의 어머니 변씨부인은 각성이 높고 애국적 충성심이 강한 분이였다.
   리순신장군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달리 뛰여나 예닐곱살 때 벌써 아이들과 놀적에 언제나 진을 치고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그럴 때마다 항상 대장이 되여 다른 아이들을 지휘하는것이 아주 그럴듯 하였다고 한다.

   리순신장군이 처음 무예를 배울때만 하여도 힘에 있어서나 말타고 활쏘는데 있어서 친구들 중 당할 사람이 없었다 한다. 또 인품이 고상하여 친구들은 리순신장군에 대해서는 롱담도 함부로 하지 않고 존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질과 성품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 변씨부인의 올바른 교양의 힘이 컸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들중에서도 순신장군을 극히 사랑하였으며 그 이름대로 훌륭한 애국자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전쟁놀이며 무예학습을 도와 그에 필요한 책들도 구해주었으며 또 손수 군복을 지어 입혀보면서 름름한 아들의 차림에 대견해하기도 하였다.

   리순신장군이 후에 수군통사로 있을 때 어머니는 항상 아들에게 친필로 글월을 보내여 나라와 인민앞에 떳떳이 공을 세우라고 고무하였다.

   임진년(1592년)에 왜적이 침습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통분해하였다.
   왜적이 조선을 침습할때는 반드시 바다를 통하여 들어오게 되므로 당시 수군절도사의 직무를 맡은 아들을 가진 어머니의 마음인들 얼마나 통분하겠는가. 그때 어머니는 이미 80세나 되는 늙은 몸이였으나 친필로 장군에게 아래와 같은 글월을 써 보냈다.

  《순신아! 이 일이 웬일이냐? 우리나라가 천고에 흉악한 왜적들의 침노를 입어 흉흉한 마음으로 모두들 잠 못 이루고 있는바라 이러한 때 나라의 신하가 되어 어찌 싸우지 않으며 그 싸움에서 목숨을 아낄것이냐! 이 늙은 어미 너에게 부탁함은 바다싸움에 나가 목숨을 아끼지 말지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승전한 북소리 들려오기 바라며 네 전사했다할지라도 이 늙은 어미 눈물 흘리며 너희 승전을 더욱 기뻐하리라. 더욱 기뻐하리라! 》

   임진란초기 적이 일시적 우세를 리용하여 령남지방을 거쳐 서울로 밀고 올라가고 있을때 적개심에 불탄 리순신장군은 용감한 수군을 거느리고 옥포, 로량, 당포, 한산도 등 해전에서 무수한 적의 함선을 침몰시킴으로써 왜놈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조선인민의 반침략전쟁력사에 불후의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하는자들의 흉계에 의하여 리순신장군은 뜻밖에도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아들이 해상으로 쳐들어오는 왜장 가동청정을 공격하라는 왕의 명을 거역했다는 거짓소문을 들은 어머니는 어느날 아들을 찾아 한산도로 왔다. 어머니는 80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어려서 전쟁놀이를 즐기던 일을 회상하며 한산도의 난고불락의 요새며 거북선 등을 감회깊이 바라보고 만족해 하였다. 그리고 다시 아들이 몇해째 밤낮으로 거처하며 여러 장수들과 군사문제를 토의하는 운주당에 올라 심심히 아들을 살펴보고는 궁금하던 문제를 내 놓았다.

  《내 실은 너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 찾아왔다. 바다를 건너오는 왜장 가등청정을 나가 잡으라는 조정의 명이 계셨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 그런데 넌 왜 잡으러 나가지 않았느냐. 네 소견이 옳다기로서니 조정의 명을 거역할수 있단 말이냐? 무서운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나라와 인민의 운명을 념려하는 어머니의 말은 더없이 침통하였다.
   허나 장군은 진정 나라와 인민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실행하지 못했다고 할뿐 더 해석하지 않았다.

   얼마후 리순신 장군이 간신들의 흉계에 의하여 체포되여 갈 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였으랴만은 어머니는 오직 꿈으로 생각한다고 하며 아들이 떳떳이 갔다 떳떳이 돌아올줄 믿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만 한가지 섭섭한것은 그사이에 아들이 자기가 손수 지은 전복을 입고 싸움터로 달려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것이 가슴아프다고 하며 애통해 하였다. 그후 이것이 화가 되어 어머니는 리순신장군이 옥중에 있을때 아산에서 그만 세상을 뜨셨다.

   옥중에서 이 소식을 들은 리순신장군은 몹시 슬퍼하며《나는 평생에 충성과 효성에 전심하려 하였더니 지금에 와서 보면 두가지를 다 잃고 말았구나.》라고 하며 통절해 하였다.

   그후 간신 원균의 흉계가 들어나고 모든 것이 해명되자 그는 옥에서 나와 다시 싸움터로 달려가는 길에 아산에 들려 성복을 하고 어머님께 맹세하였으며 그후 나라와 인민을 구원하기 위한 성전에서 왜적을 무찔러 크나큰 승리를 이룩하였다.

   력사에 길이 빛나는 애국명장 리순신장군의 심장속에는 항상 그 어머니의 슬기로운 애국정신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3)   홍석주의 어머니 서씨부인

 

    근세 조선의 대표적인 녀류시인이며 천문, 지리, 의학, 수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홍석주 어머니 서씨는 서형수의 딸이다.
   서씨는 풍산사람 홍인모에게 시집가서 석주, 길주, 현주, 세 형제를 낳았다.

   부인이 출생한 18세기는 조선의 봉건사회가 자체의 모순을 남김없이 들어내 놓은 시기이다.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 모순들을 해결하고 인민생활을 향상시키며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려는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조선문화사에서 거대한 역할을 한 학자들이 나오고 이들에 의하여 많은 업적들이 이루어졌다.

   서씨는 일찍 가정에서 글을 배울때 중국의 유교서적에만 머물지 않고 천문학, 의학 등 여러면으로 널리 공부하였다. 특히 리성호, 홍대용, 박지원 등 실학가들이 쓴 책을 많이 읽고 아들들에게도 읽게 하였다. 어머니의 이러한 감화를 받았기에 둘째아들 길주는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热河日记)》와 같은 내용과 형식으로《수여방필(睡余放笔)》등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부인은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는데 셋이 모두 그 재주가 뛰여나 하나를 가르치면 열가지를 능히 리해하였다 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글공부에 해의해 질가봐 항상 엄격히 요구하였다. 매일아침 공부를 할때는 그 전날 배운것만 보지 않고 지금까지 배운것을 전부 암송하게 하고 중요한 곳은 해석하게 하였다. 어제 물은것을 오늘도 묻고 또 그 다음날도 계속 물었다. 그래서 그 대답이 처음과 꼭 같으면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였고 물을때마다 전날보다 발전이 있으면 한가지 문제를 항상 깊이 연구한 것으로 칭찬하였다. 이러한 교육은 실학자들가운데서도 일찌기 볼수 없었던 새 방법이였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이러한 교육에 의하여 그 우수한 천품을 남김없이 발전시켰으며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앞서 나갔던 것이다.

   부인은 아들들에게 학문을 위한 글공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항상 주의를 주었고 학문이란 실지로 써먹지 못하면 아무 의의가 없다고 타일렀다. 특히 부인은 중국의 고대의 유명한 시인이며 공명을 탐내지 않고 담박하기로 소문난 도연명(陶渊明)과 그의 시《귀거래사(归去来辞)를 사랑하였다. 그것은 그의 남편과 아들들이 평생동안 공명과 물욕에 담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하는데 좋은 영향을 주었다.

   큰아들 석주는 179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판중추라는 높은 벼슬까지 하였는데 항상 바른 말로 임금을 충고하고 부정적인 일에 대해서는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싸웠다.

   1815년에는 전국 4개도에 재해가 들어 기근민이 5백만을 넘었다. 그때 석주는 충청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백성을 구원하고 또 지주들이 백성의 땅을 빼앗지 못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찬과 옹호를 받았다. 그가 이처럼 백성들의 질고를 해결하려 진지하게 노력하게 된 것은 모두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실학적인 교육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였다.

   셋째아들 현주도 문과에 급제하고 부마(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은 아들들에게 학문이 자기 몸과 마음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되게 해야지 벼슬을 높이고 권세를 잡는데 목적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만 뜻을 두어 문장에 힘쓰고 일단 벼슬길에 나서면 자기의 인격을 높이기 위한 수양에는 전혀 힘쓰지 않는 사실에 비추어 아들들을 경계한 말이였다.

   그때 마침 둘째아들 길주도 벼슬이 부러워 과거를 보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아들들을 모여놓고《우리 집이 이만하면 더 바랄것이 없다. 큰형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셋재 현주는 부마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이상 더 바랄것이 무었이겠느냐. 지금 이 형편에서 너희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오만해질수 있으니 나로서는 오히려 걱정이 된다. 그러니 길주는 과거를 보지 말고 공부에 열중하여 벼슬밖의 길에서 뜻을 이루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길주는 어머니 말대로 과거를 중지하고 벼슬도 사임하면서 수학연구에 힘써《기하신설》,《총비기》,《고각연필》등을 저술하여 홍대용의 학문을 계승하고 한층 더 발전시켰다.
   어머니는 죽기 얼마 전까지도 아들에게 시를 써서《본시 남이 부러워하는 자리는 남이 질투를 느끼는 자리니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겸손하며 조심하라.》고 간곡히 충고하였다.       

                                        (하회: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 의병장령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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