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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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녀성들의 전통미담-- 5
2013년 11월 16일 13시 45분  조회:4163  추천:14  작성자: 강순화

           
                   (8)  항일련군의《녀장군》허성숙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녀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 눞힌 한《녀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항일련군 제1로군 4사1퇀1련의 첫 녀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1915년 안도현 차조구 중안촌에서 태여난 허성숙은 열다섯살 때부터 항일지하공작원들과 접촉하였으며 그들의 교양과 방조하에 점차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에 그는 영광스럽게 소년선봉대에 가입하였다.
 
  《9.18》사변후 항일의 거세찬 물결이 동북 각지에 파급되였다. 이 거세찬 물결속에서 성숙이는 더욱 열성스럽게 혁명에 참가하였다.
  
   1933년 공청단에 가입한 성숙이는 그해 가을에 연길현 유격대의 영광스런 녀전사로 되어 남성들과 같이 전투에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전투마다에서 남다른 용감성을 발휘하였다. 부대는 거의 매일과 같이 전투를 하여야 했으며 어떤 때에는 하루에도 몇백리를 강행군하기도 하였다. 그때 겨우 17세밖에 안되는 녀자애 였지만 그는 남달리 숙성했고 용감했다.
   
   언제나 뜨거운 마음으로 허약한 전사들을 도와주었고 숙영할 때면 솔선적으로 화식반 동무들을 도와 나섰다. 밤이면 전사들의 옷을 기워주었고 행군할 때면 부상당한 전우들을 친 혈육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간고한 역경속에서도 성숙이가 있으면 전사들은 힘과 용기를 얻군 한다고 하였다.
  
   어느 하루 허성숙은 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는 도중 토벌대놈들과 맞띄우게 되었다. 그는 침착하게 다른 대원들을 수림속에 은페시키고 자기는 짐을 진채 전보대에 바라 올라갔다. 5-6명의 토벌대 놈들이 전보대 부근에 접근하자 허성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놈들에개 수류탄 불벼락을 들씌웠다. 이 일로 하여 부대의 전사들은 허성숙의 지혜와 용감성에 깊이 탄복하였다.
  
   1936년 허성숙은 친밀한 전우이며 상급인 박관규련장과 결혼하였으며 투쟁의 한길에서 어께곁고 싸웠다. 박관규련장의 따뜻한 방조와 당조직의 배양으로 허성숙은 재빨리 성장했으며 그해 영광스럽게 위대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7년 허성숙의 남편인 박관규련장은 반석전투에서 불행하게 희생되였다. 사랑하는 남편의 희생은 성숙에게 형언할수 없는 비통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명랑한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오직 철천지 원쑤 일제놈들에 대한 복수의 념원만이 불타올랐다.
 
  《저에게 기관총을 맡겨 주십시요!》
   허성숙은 상급에 간절히 요구하였다. 상급에서는 그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허성숙은 항일련군 제1로군 4사1퇀1련의 첫 녀성기관총사수로 되었다.

   1937년 6월 30일, 2000여명의 놈들이 짙은 안개를 리용하여 간삼봉을 둘러싸고 올라왔다. 기관총을 손에 잡고 적들을 노려보던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내리기 바쁘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놈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기세당당히 덮쳐들던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도망쳤다. 그러나 적들은 저들의 량적 우세를 믿고 재차 돌격해 왔다. 전연진지에서 놈들을 침착하게 접근시키고 있던 허성숙은 놈들이 턱밑까지 기여오르자 기관총을 안고 벌떡 일어섰다.
 
  《동무둘! 희생된 전우들의 원쑤를 갚읍시다!》《이 강도놈들아, 복수의 불벼락을 받아라!》성숙의 웨침소리와 함께 기관총은 노호하였다. 승냥이같은 놈들은 개바자 넘어지듯 나자빠졌다. 그의 용감한 행동에 고무된 전사들은 련이어 적들에게 복수의 명중탄을 안기였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간삼봉전투 후 전사들은 허성숙의 용감성에 감탄하여 그에게 《녀장군》이라는 영광스러운 별호를 달아주었다.

   1939년 8월, 항일련군 제1로군의 지휘부에서는 적들이 추격해 올 것을 예견하고 허성숙과 한 전사를 동양툰에 파견하여 보초를 책임지게 하였다. 그들이 임무를 맡고 동양툰에 도착하여보니 때는 이미 늦었다. 놈들이 여섯대의 트럭에 꽉 차게 앉아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 허성숙은 과단하게 같이 온 전사를 부대에 연락보내고 혼자 남아서 적들을 막기로 하였다.

   첫 트럭이 마을어구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그는 즉시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놈들은 차를 멈춰 세우고 어쩔바를 몰라 하였다. 한참후에야 대방이 한사람임을 알아차린 적들은 포대에 대고 집중사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치렬한 맞불질은 한참동안이나 지속되였다. 불현간 한발의 적탄이 성숙의 다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적들을 향한 복수의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견지하자, 단 몇분간이라도 더 ... ...》
   그렇지만 이미 목표가 드러난데다가 적들이 집중사격을 들이대는 바람에 얼마 후 그는 또 복부에 탄알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서야 혼수상태에서 깨여난 성숙이는 죽어도 적들의 포로가 되지말고 기어이 부대로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포대에서 기여내려 왔다.
   그러나 지나친 출혈로 하여 끝내는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4세 밖에 안되였다.

 
 

                          (9)  연안시절의 조선족녀성들
                                  -- 허정숙, 란영, 조명숙 등에 대하여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가는 곳마다 항적의 노래 울려퍼지고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끓는 피 네 가슴에서 용솟음친다
        ... ... ...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성벽은
        철같은 항적의 전선 이루었나니
        너의 그 이름 세월과 더불어
        력사에 찬란히 길이 빛나리.》

  
   이는 우리 민족의 천재적 성악가이며 작곡가인 정률성(1918.7--1976.12)이 스므살 때 창작한《연안송(가)》의 한 구절이다.

   1938년부터 항일근거지에서 가장 많이 불리웠던《연안송(가)》!  장개석통치구의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국민당의 봉쇄선을 목숨걸고 뚫고 넘어 만난을 무릅쓰며 혁명의 성지 -- 연안으로 찾아왔다. 그중에는 우리 조선족의 열혈청년들도 있었다.    

   연안성에서 동쪽으로 연하강을 따라 10여리 걷느라면 쵸얼거우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과 연하강을 사이둔 건너편엔 리가평이란 마을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교양하는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독립동맹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 있은 조선사람은 약 200명좌우였는데 그중에는 녀성들도 있었다.

   그 녀성들중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로는 허정숙(许贞淑)이였다.
   허정숙은 당시 연안군정학교의 조직교육과 교육방면을 책임진 부과장이였다.
   조선의 유명한 애국자 허현선생의 큰딸로 태여난 허정숙은 서울에서 소학과 중학을 마치고 일본에 가 대학문과를 공부하고 《동아일보》의 기자로도 활약하였고 후엔 잡지《신녀성》을 편집하며 사회활동에 투신하였다.

   1925년엔《서울녀자청년동맹》을 조직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1927년 5월엔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각 종교단체와 통일전선조직 --《근우회(槿友会)》를 창립하고 서울의 녀자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때엔 리화녀자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각 녀학교의 학생시위를 지도한 것으로 하여 일제에게 체포되여 투옥되였다. 2년만에 석방된 그녀는 다시 혁명활동을 하다가 재차 체포되여 1936년에야 석방되였다.

   출옥후 허정숙은 최창익, 한빈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조직하여 선후로《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조선청년전지(战地)복무단》을 건립하였으며 활발한 혁명활동을 진행하다가 1939년 6월 연안으로 들어갔다.
 
   연안에서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을 다녔고 졸업후에는 팔로군 120사에서 정치지도원 등 사업을 하다가 1944년 태항산조선혁명청년학교가 연안에 옮겨와 군정학교를 성립할 때 허정숙은 조직교육과 부과장으로 임명되였고 직접 정치과목 강의도 맡아하였다. 그의 리론수양이 높은 강의는 언제나 생동하고 실제적이여서 학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8.15후 허정숙은 연안에서 나와 심양을 거쳐 조선에 귀국했으며 그후 수차 조선당정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갔고 조선대표로 국제부녀회의에 출석하기도 했다.

   허정숙과 때를 전후하여 연안에 들어선 다른 한 녀성으로는 란영(김영숙)이였다.
   조선 함경북도의 한 지주집 딸로 태여 난 그는 망명한 련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본어에 능숙하여 중경에 있을때엔 일어방송 아나운서까지 담당하였다.
  
   후에 연안에 들어간 그녀는 태항산 129사에 배치되여 사업하였다. 당시 팔로군 115사가 산동성 량산에서 평형관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들을 포로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동경대학출신인 고급군의가 있었다.
 
   팔로군전선총사령부에서는 그 고급군의를 태항산에 호송하여 란영에게 교육임무를 주었다. 란영이는 통역신분으로 그와 접촉하면서 공산주의사상을 주입하였다. 란영의 도움밑에 그 고급군의는 《일본인반전동맹》의 중요한 간부로 성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동지가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창설할 때 란영이는 129사의 조선사람대표로 회의에 출석하였고 그후 조선혁명청년학교와 독립동맹의 도서관관리원 겸 무정장군의 비서로 있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활약적인 란영이는 문예에서도 장끼를 보여주었다. 학교에서 신입생환영식이나 기념일 문예연출에는 그가 당연히 주역이 되었으며 김창만 편극으로 된 대형화극《조국의 딸》의 녀주인공 역도 그녀가 맡았고 의용군이 화북에서 처음 겪은 호가장전투를 반영한 극《태항산우에서》의 녀병 역도 그녀가 맡았다.
  
   1944년 음력설 직전 란영(김영숙)은 조선독립동맹 조직부 조직과장으로 제발되였고 8.15후 조선에 귀국하여 무정동지와 결혼하였다. 조선전쟁이 끝난후 그녀는 북경대학 류학생으로 파견되여 전문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문화교류력사를 연구하였다 한다.
  
   조명숙(赵英)은 현처량모형의 녀인으로서 비행사출신인 윤공흠(尹公钦)의 부인이다. 항전 전에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는데 1941년 조선청년련합회 창립활동에 참가하였고 그후 줄곧 태항산에 있다가 1944년초에 연안에 들어가 독립동맹의 간부로 되었다.
   8.15후에는 조선으로 귀국하여 어느 도의 당책임일군으로 있었다.
  
   이 외에도 연안에 들어가 항일전쟁에 참가한 조선족녀성들이 적지 않았다.
   미인으로 불리우던 석영(石英,조직교육과 주춘길과장의 부인), 그리고 1938년 10월10일 한구(汉口)에서 조선의용대의 유일한 녀성으로 참가했던 김위나(金威娜)는 중국영화계의 황제로 불리우는 김염동지의 누이동생이였다.

   그리고 독립동맹의 간부였던 최의(崔毅,연안군정학교 부교장이며 조선의용군 부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박일우의 부인)도 있었는데 8.15후 연변에 왔다가 남편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다.

   이 외에도 《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의 한 지도자인 한빈동지의 부인 문정원(文贞元), 민족주의자 김두봉선생의 딸 김귀숙(金贵淑, 녀성대대 부대장)과 김해엽(金海烨)이 있었고 태항산《3.1병원》에서 간호부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의과대학공부까지 한 당대 중국조선족녀걸 리화림 등 20여명의 조선족 녀성들이 있었다.  

   일제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단연 혁명의 길에 나선 겨레의 녀성들, 그 가열처절한 전쟁의 년대에 그들은 남성들과 어께곁고 국경을 넘나들며 이국땅에서 청춘을 바쳤다. 그녀들의 장거는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것이며 우리민족 인민들의 심령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원문저자  류 동 호>

 
             (하회 : 한 혁명가의 발자취
                     -- 원 연변조선족자치주부련회 제1임주임 김찬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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