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changhe 블로그홈 | 로그인
김장혁
<< 9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소설

장편실화소설 38선에서 싸우던 나날에(5)
2018년 11월 27일 09시 55분  조회:1087  추천:1  작성자: 김장혁






                 조국의 위문품
눈보라가 윙윙 휘몰아치는 어느날, 비서과 과장 리홍천이 리해식을 찾았다.
“리동무, 조국 인민들이 보낸 위문품을 몇백리 떨어진 후방역에까지 실어왔다오. 이 사업을 맡은 려지전이 일보러 귀국하고 없소. 리동무가 몇몇 전사들을 령솔해 자동차 네대에 실어오오.”
“예.”
리해식은 처음 이런 무거운 임무를 맡았기에 저으기 속이 두근거렸다.
리홍천 과장은 긴장한 빛이 흐르는 해식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거듭 당부하였다.
“적기가 우리 후방공급도로를 미친듯이 폭격봉쇄하고 있소. 꼭 공습에 주의를 돌려서 위문품을 안전하게 가져오오.”
“예, 꼭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해식은 무겁게 대답하면서 두발뒤꿈치를 척 붙이며 거수군례를 척 드렸다.
이윽하여 리해식은 네대의 자동차에 8명 전사들을 이끌고 밤도와 길을 떠났다.
그는 제일 앞의 자동차 운전실 조수석에 앉았다.
자동차 대오는 동북 쪽으로 눈덮인 산길을 누비면서 달렸다. 눈덮인 산들이 차창 밖으로 하여 뒤로 피끗피끗 지나갔다.
가는 길에서는 적기공습을 받지 않아 밤중에 순조롭게 목적지 역 부근에 이를 수 있었다.
창고 둘레에는 철조망을 늘였는데 보초병들이 총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것이 자동차 헤드라이트불빛에 보였다.
해식은 자동차 운전실에서 뛰여내렸다. 창고 책임자가 다가와 해식이 건넨 소개신을 받아 손전지불로 비춰보더니 창고로 통한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자동차에 위문품을 실을 때였다. 해식이 위문품 마대아구리를 풀어보니 안에 숱한 작은 위문품주머니가 가득 들어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사탕이랑 비누랑 필기장이랑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네대의 자동차에 위문품을 꽉 박아 싣고 적재함마다 방수포를 씌우고 굵다란 바줄로 꽉 조여동였다.
이윽고 창고대문을 나와 밤눈길을 누비며 서남 쪽으로 달렸다.
리해식은 제일 앞 자동차 운전실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의 밤하늘을 주시하였다.
띠띠-
자동차 경적소리가 나자 앞을 살펴보니 조선 백성들이 소수레를 몰고 지나가는 것이 차창 밖으로 피끗피끗 보였다.
(운전수들은 다 재간 있어 자동차 운전에는 문제 없을 거야. 적기 공습만 받지 않으면 되겠는데…)
해식은 차창유리를 다 내리우고 밤하늘과 뒤로 물러가는 눈덮인 고산준령을 살폈다.
차대는 어느덧 적기가 자주 폭격하는 따발령길에 들어섰다.
자동차들이 따발령길마루에 올라 내리막길을 달릴 때였다.
땅! 땅! 땅!
갑자기 먼 곳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산꼭대기와 산 아래에서도 총소리가 울렸다.
아군 초소에서 보내는 방공신호였다.
“헤드라이트를 끄시오!”
해식의 명령에 따라 해드라이트불빛은 몽땅 꺼졌다.
자동차가 멈춰선 곳은 양지쪽 비탈길이였다. 대낮 해볕에 눈이 다 녹아버려 미끄러운데다가 불빛이 없어 더 달리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굽인돌이 내리막길이여서 자칫하면 차가 골짜기에 처박힐 위험도 있었다.
이때 적기가 그들 머리 우에서 웅웅거리면서 맴돌았다. 분명 그들의 차대를 발견한 것이였다.
해식이 뒤의 차를 돌아보았다. 운전실에서 한사람씩 뛰여내려 흰천이나 흰수건을 흔들면서 차의 길잡이를 하였다. 운전수들은 그 흰천이나 흰수건을 보면서 차를 천천히 앞으로 내몰았다.
해식도 그들처럼 운전실에서 뛰여내려 허리춤에서 흰 세수수건을 쑥 뽑아쥐고 제일 앞차의 차길을 인도하였다.
찬바람이 윙- 윙- 휘몰아쳐 뼈 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들의 차대가 금방 멈춰섰던 곳에서 한백여메터 떠나 내리막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꽈르릉, 꽈르릉, 꽝, 꽝!
차대가 멈춰섰던 자리에 숱한 폭탄이 작렬하였다. 그 굉음은 귀청을 쨀듯하였다.
“허참, 다행이로군.”
“하마트면 폭탄에 맞아 콩가루가 될 번했군.”
차길을 인도하던 전사들이 떠들썩했다.
전사들과 운전수들은 자주 자동차로 군수품이랑 싣고 이 곳을 드나들었기에 아주 능란하게 적기의 공습을 대처했던 것이다.
이때 적기가 그들의 상공에 조명탄 두개를 떨구었다. 삽시에 온 산발이 달밤보다도 더 환해졌다.
“쳇, 우릴 살려주는군. 동무들, 고속도로 따발령을 벗어납시다!”
“옛!”
해식은 뒤에 선 차들에 소리치고 운전실에 올랐다.
운전수들은 헤드라이트를 끈 채 조명탄의 환한 불빛을 빌어 쏜살같이 달렸다. 순식간에 산비탈 굽이진 내리막따발길을 벗어났다.
적기는 저 뒤 멀리 따발령 상공에 떨어져 웅웅거렸다. 적기의 폭격봉새선을 벗어나자 해식은 안도의 숨을 후- 내쉬였다.
그들은 밤낮 적기의 폭격봉쇄선을 뚫고 달려 마침내 사단 전연진지에까지 이르렀다.
리과장은 해식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임무를 잘 완수했소. 수고 많이 했소.”
그때 해식은 그저 뒤더수기만 긁적거렸다.
해식은 인차 위문품을 각 퇀에 나눠주었다. 위문품을 받아안은 전호 속의 전우들은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어쩔줄 몰라하면서 더욱 잘 싸우려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 정경을 바라보는 해식의 마음은 자그마한 일이라도 한 자부심으로 벅차기만 하였다.

                     피로 맺어진 친선

       북한강 동안의 산세가 가파로운 어음산고지, 문등도로로부터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상심령고지”에 이르기까지 산에 산마다, 들에 들마다 그 어디에나 중조 두 나라 형제부대에서 어깨겯고 싸운 친선의 노래와 이야기가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일찍 1951년 가을, 지원군 모 부대에서는 울긋불긋 단퐁이 든 산발을 타고 넘어 조선인민군 모군이 지키던 문등도로연선의 고지를 물려받으러 진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적들은 금성 남쪽에 대한 공세에 배합하려고 아군이 진지를 넘겨받기 이틀 전에 조선인민군 모 군단 진지에 미친듯이 덮쳐들었다.
      적들의 밀집포격에 진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적지 않은 진지는 개미떼처럼 갑자기 덮쳐드는 적들에게 점령당하였다. 인민군 장병들도 완강하게 저격하다가 수많이 피못 속에 쓰러졌다. 심지어 조선인민군의 한 련대는 에돌아 포위해 조여드는 적들로 하여 아슬아슬한 시각에 이르렀다.
이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자 지원군 모 퇀에서는 명령에 따라 앞당겨 전호 속에 뛰여들어 조선인민군 전사들과 어깨겯고 적들과 백병전을 벌렸다.
지원군 한개 패의 전사들은 직접 조선인민군 한 대대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싸웠다.
이 패의 8반 전사들은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적들과 육박전을 벌리다가 몽땅 장렬히 희생되였다.
부패장 리홍로는 진지에 혼자 남아 적들의 세차례 미친듯한 진공을 물리치고 80여명의 적을 진지 앞에 쓸어눕혔다.
이 패의 영용한 저격으로 하여 조선인민군 모 련대부 기관은 안전하게 앞당겨 후방에 전이하게 되였다.
조선인민군 모 군단 군단장은 이들을 높이 칭찬하면서 진지를 넘겨줄 때 이 지원군부대에 한폭의 축기를 기념으로 드렸다.
지원군 모부가 문등도로연선의 진지를 넘겨받아 지킬 때였다.
하루는 적들의 땅크(탱크) 40대나 무리를 지어 지심을 울리며 문등도로를 따라 기세사납게 덮쳐왔다.
그러나 땅크를 까부신 경험이 적은 지원군 모 퇀의 장병들은 5킬로메터 남짓이 쳐들어온 적 땅크를 노려볼뿐 속수무책이였다. 적들의 땅크는 각일각 우리 지원군 모 퇀부를 위협하며 박근하여왔다.
이 아슬아슬한 시각에 문등도로 동쪽에 있던 조선인민군부대에서 류탄포를 쏘았다.
꽝!꽝!
굉음과 함께 적 땅크 부근에서 버섯구름이 치솟아올랐다. 제일 앞에서 덮쳐오던 4대의 땅크가 자욱한 초연 속에서 무한궤도가 벗겨져 옴짝달싹하지 못하였다. 질겁한 적 땅크들은 그 자리에서 맴돌다가 대가리를 돌려 도망쳤다.
지원군 퇀부의 지휘원과 전사들은 식은땀을 그러쥐였던 손을 스르르 풀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윽고 조선인민군 부대에서는 7명으로 조직된 조선인민군 반땅크소조를 이 퇀에 파견하였다.
조선인민군 반땅크소조 전우들은 지원군 전호에 건거왔다.
“우린 지원군 수장의 지휘에 따라 적 땅크를 까부시러 왔습니다.”
“환영하오!”
퇀 수장은 그들의 손을 굳게 잡았다.
조선인민군 반땅크소조의 전사들은 지원군 전사들에게 금방 땅크를 까부신 경험교훈을 총화하면서 땅크격파기술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석달동안이나 지원군 전사들과 함께 한 전호 속에서 적 땅크와 싸웠다. 이리하여 수많은 반땅크 용사들을 육성해냈다. 그들은 적들의 이른바 “땅크개척전”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하고 진지가 공고해진 뒤에야 조선인민군 진지로 건너갔다.
떠나갈 때 두 나라 형제 전우들은 서로 붙안고 눈물로 두 볼을 적시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실로 피로 맺어진 중조 두 나라 친선의 정이 문등도로연선의 전호마다 산봉우리마다에 차고 넘쳤다.
1953년, 조선인민군 “2.8”건군절 전야에 사단 정치부 비서과 리홍천의 인솔하에 특등공신 팽복례 등 몇몇 영웅모범대표들이 조선인민군 친선사단을 방문하러 갔다. 그때 리해식도 번역원으로 함께 갔다.
그들 일행은 찌프에 앉아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헤가르면서 눈덮인 산길로 달렸다.
그들이 눈덮인 한 높은 산 기슭의 수림 속에 자리잡은 조선인민군 사단 지휘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리 길 옆에서 기다리던 친선사단의 정치위원과 부사단장이 정치부의 숱한 동지들과 함께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은채 그들한테로 몰려왔다.
“환영합니다! 전우들!”
“오느라고 수고했습니다.”
그들은 악수를 한다, 포옹한다 하면서 기뻐 어쩔줄 몰라하였다.
산기슭에서 열린 영웅모범좌담회의장에는 숱한 조선인민군 장병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리홍천 과장과 팽복례 등 영웅모범대표들과 리해식 등은 조선인민군 사단부 수장들과 함께 주석대에 올랐다. 우뢰 같은 박수소리가 눈덮인 산기슭 대회장에 울려퍼졌다.
조선인민군 친선사단 수장의 환영사에 뒤이어 지원군 특등공신 팽복례가 주석단 발언석에 나갔다. 회의장에는 또 우뢰 같은 박수갈채가 터졌다.
팽복례는 숨을 한껏 들이그어 들먹이는 가슴을 눅잦히고나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자기 전투사적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저는 1949년에 서안 남쪽의 소오대산전투에서 입대한 전사입니다. 지금 중국인민지원군 모 퇀 제2련 부지도원입이다. 저는 오늘 제5차 전역때 고대산진지를 어떻게 지켜 싸웠는가를 회보하겠습니다.”
회의장은 물뿌린듯 조용하였고 조선인민군 전우들은 팽복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고대산전투는 우리 사단이 출국한 후의 첫 전투였다. 고대산은 높이가 1,100여메터나 되였다. 서쪽으로 련천에 잇닿았고 북으로는 철원 평원을 내다볼 수 있어 사방 몇십킬로메터를 통제할 수있는 제일 높은 고지였다. 제5차 전역때에는 우리 군이 차지한 중요한 군사요새였다. 적들은 토이기려단의 다섯개 영을 긁어모아가지고 영국의 한 황가땅크영의 엄호하에 이 고지를 돌파구로 삼아 우리 지원군의 전진을 가로막아보려고 망녕되게 시도하였다.
1051년 4월 21일 오후, 2련에서는 고대산을 지킬 전투임무를 맡고 떠나게 되였다.
지도원은 전 련의 동지들에게 힘차게 전투동원을 하였다.
“동무들, 이번 전투는 우리 련이 조선에 온 후 첫 전투입니다. 우리는 꼭 나라와 군의 위력을 떨쳐야 합니다. 그 어떤 대가를 내서라도 고대산진지를 지켜 주력부대가 승리적으로 출격하게 해야 합니다!”
전 련 전사들은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견결히 나라와 모주석을 위해 우리 군의 영광을 떨치겠습니다!”
그날 밤으로 2련에서는 적들의 미친듯한 폭격과 포격을 무릅쓰고 아아한 고대산에 올라갔다.
팽복례는 한개 전투소조를 데리고 고대산의 맨 앞에 있는 전연진지에 배치되였다. 그들은 인차 밤도와 괭이와 공병삽으로 전호를 팠다.
타는듯한 침묵 속에서 새날이 밝아왔다.
그들은 전호 속에 엎디여 총을 겨누고 산 아래를 노려보았다.
오전 9시 쯤 되였을 때였다.
쌩- 쌩-
포탄이 날아와 진지에서 련이어 작렬하였다.
꽝! 꽈르릉 꽝! 꽝!
뒤이어 남쪽 하늘에서 적기가 편대를 지어 날아왔다. 적기는 기수를 낮추더니 산마루 진지를 스칠듯이 날아지나가면서 기총소사를 하고 소이탄을 내려뜨렸다. 적기는 쉼없이 겨끔내기로 폭격해댔다.
진지는 삽시에 불바다로 되였다. 파편과 흙모래, 돌과 끊어진 나무가지들이 사처로 날아났다. 전호 속에 엎딘 그들의 온몸은 흙모래에 뒤덮였다.
팽복례는 머리 우의 흙먼지를 도리머리질해 털고 산 아래 적들의 동정과 하늘을 번갈아 살폈다.
때마침 적기가 기수를 낮추고 앵-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면서 기총소사를 해댔다.
“그때 저는 압록강을 건는 이튿날에 본 비참한 정경이 떠올랐습니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의 폭격을 받아 재더미로 된 한 마을을 지날 때였습니다. 한 젊은 녀성이 피못 속에 쓰러졌는데 서너살 된 어린애가 고사리손으로 그 녀인의 얼굴을 쥐여 흔들면서 ‘어머니, 어머니.’ 하고 애처롭게 울지 않겠습니까. 그때 또 갑자기 적기가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폭탄을 떨궜습니다. 하마트면 그 어린애의 목숨마저 빼앗아갈 번했습니다.
미제 공중날강도들은 아름다운 조선의 그 얼마나 많은 도시와 마을을 재더미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 얼마나 많은 부녀들과 어린애들의 목숨을 빼앗아가갔는지 모릅니다. 그때부터 미제 공중날강도를 보면 저는 기관단총을 들어 미제 날강도놈들에게 한배짐씩 갈기군 했습니다.”
팽복례의 말을 리해식이 번역하자 제일 앞줄에 앉았던 조선인민군 고사포수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구호를 불렀다.
“미제 공중날강도를 타도하자!”
“타도하자!”
구호소리는 하늘땅을 뒤흔들었다.
또다시 조용해지자 팽복례는 계속 이야기했다.
폭격이 멎자 적들은 한개 련이나 되는 병력으로 그들 셋이 지키는 고지에로 개미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런데 왼쪽에 엎디여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기던 전우의 총소리가 뚝 끊었다. 피끗 머리를 돌려보니 그 전우의 귀언저리에서 선지피가 쿨쿨 쏟아져 흐르고 있지 않겠는가.
팽복례가 바삐 그 전우를 안아 전호 속에 내리워놓고 보니 이마로부터 귀 우에 관통상을 입어 피와 뇌장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피묻은 그 한쌍의 눈,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는 눈만은 부릅뜬 채 한 곳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전우의 시체를 내려놓은 팽복례는 적들에게 몰사격을 들이댔다.
“이 개놈들아! 오라! 다 죽여버리겠다!”
그는 성난 사자처럼 고함치면서 사격하였다.
적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산 아래로 물러내려갔던 적들은 군관이 권총으로 위협하자 또다시 고지에로 덮쳐왔다.
팽복례가 한창 사격하고 있을 때였다. 오른쪽에 있던 전우가 수류탄을 뿌리면서 일어섰다가 그만 오른 가슴을 붙안고 “억!” 하며 쓰러졌다.
팽복례가 달려가 그 전우를 안고 붕대뭉치를 가슴에 넣었지만 피는 쿨쿨 나오기만 하였다.
적들이 코 밑까지 덮쳐왔다. 그는 전우를 내려놓고 전우의 피묻은 기관단총을 들고 적들에게 맹렬히 사격하였다.
적들은 맹사격에 숱한 주검을 남긴 채 산 아래로 몰켜내려갔다. 그는 숨진 두 전우의 시체를 안아다가 제일 견고한 전호에 조용히 눕혀놓고 속궁리를 하였다.
(혼자서 어떻게 할가? 마구 해재껴볼가? 안돼! 내가 죽는 건 별문제다. 그러나 진지는 누가 지키겠는가? 이 진지를 빼앗긴다면 주력부대의 출격에 불리해.)
그는 연기가 군데군데 피여오르고 적들의 주검이 겹겹이 쌓인 상중턱에 눈길을 돌렸다.
(적들은 무리승냥이처럼 많고 나는 혼자다. 어떻게 하면 고지를 지켜낼가?)
그는 기관단총 탄창에 복수의 탄알을 한알한알 꽉 재워넣었다. 흙 속에 파묻힌 수류탄을 하나하나 파내 전호 앞에 쌓아놓았다. 그런데 위력이 센 수뢰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하게 전호 안을 쓸어보던 그의 눈길은 미시가루주머니에 가 멎었다.
(옳지!)
그는 무릎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는 미시가루주머니를 오리오리 찢어 수류탄을 서너개씩 한데 쥐여 묶었다. 그것을 수뢰대용으로 쓰려는 것이였다.
푱! 푱!
갑자기 산 아래에서 총알이 날아와 전호 앞 돌멩이에 부딪쳐 돌가루를 날렸다.
후닥닥 일어나보니 2개 중대나 되는 적들이 그가 혼자 지키는 고지에로 엉금엉금 기여오르고 있지 않겠는가!
이때 포탄이 날아와 진지의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포격이 멎자 적들은 주린 이리떼처럼 고함치면서 욱 덮쳐왔다.
“개놈들!”
팽복례는 적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하였다. 그는 여기저기 뛰여다니면서 가까이 다가드는 놈들부터 쏴눕혔다.
토이기 병사 두 놈이 전호 속에까지 뛰여들어왔다. 그 두 놈은 전호에 있는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아둔하게도 산꼭대기에 대고 헛총질하였다. 팽복례가 총을 쏴 죽이려는데 10여메터 되는 전호 앞에 또 한놈이 뛰여내렸다.
그 놈은 전호 굽인돌이에 착 붙어 선 팽복례를 발견하지 못하고 눈깔을 희번뜩거리면서 전호 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이쪽으로 다가들었다.
땅! 땅!
팽복례가 선손을 써 그 놈을 쓸어눕혔다.
뒤에서 나는 총소리에 몸을 돌린 두 토이기(터키) 병사가 영문을 차리기도 전에 팽복례가 수류탄을 날렸다.
꽝!
굉음과 함께 그 두 놈도 자욱이 일어나는 연기 속에 스러졌다.
이때 전호 밖에서 적들은 팽복례가 혼자인줄 발견하고 새까맣게 무리지어 미친듯이 덮쳐왔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팽복례는 미리 묶어놓은 수랴탄을 한묶음 한묶음 적들의 무리 속에 냅다 뿌렸다.
꽝, 꽈르릉 꽝! 꽝!
련속 일어나는 굉음과 함께 적들의 시체 우에 적들이 뻐드려져 겹겹이 쌓였다.
나머지 적들이 산 아래로 뒤걸음질치다가 줄행랑을 놓을 때까지 그는 수류탄을 뿌리고 또 뿌렸다.
팽복례는 용감하고 슬기롭게 혼자서 3개 중대나 되는 적들과 싸우면서 고대산고지를 굳게 지켜냈다.
장내에서는 우뢰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팽복례가 주석단에 돌아와 앉았는데도 박수소리는 오래도록 그칠줄 몰랐다. 인민군 장병들은 박수를 치며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조선인민군 한 군관은 팽복례의 두 손을 굳게 잡아흔들면서 찬탄하였다.
“당신은 참 대단합니다. 혼자서 3개 중대 놈들과 싸워 이겼으니깐. 당신은 실로 령활하구만. 미시라루주머니마저 놈들과 싸우게 했다니까. 허허허.”
“하하하.”
숱한 장병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계속하여 조선인민군 첫 녀고사포수 김창화동무가 자기 전투사적을 소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뒤이어 열렬한  박수소리 속에서 퇴색한 군복을 입은 수무나문살 되는 녀전사가 주석단 발언석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억대우 같은 그녀는 녀자 같지 않아 보였다. 그는 남자 목소리처럼 웅글진 목소리로 말하였다.
“저는 조선인민군 녀전사입니다. 미제 공중날강들이 우리 사랑스러운 조국의 하늘에서 마구 미쳐날뛰면서 숱한 형제자매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을 보았을 때 저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여 저는 남성동무들처럼 고사포수로 돼 미제 공중날강도들을 호되게 족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처음 제가 고사포수로 되려고 하자 수장들은 ‘고사포수는 녀자들이 할 일이 아니요.’ 하고 거절하였댔습니다. 제가 하도 졸라대니깐 수장들은 응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조수로 돼 남성동무들에게서 고사포 조종과 사격 기술을 까근하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은 순풍에 돛단듯이 쉬운 것이 아니였습니다. 처음 적기가 나타났을 때 제가 너무 긴장한데다가 적개심에만 불타다보니 고사포를 제대로 조종하지 못해 적기가 그만 꽁무니를 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락심하지 않고 고사포다루기를 계속 꾸준히 익혔습니다. 그후 적기 네대가 날아왔을 때 잘 묘준해 쏘았습니다. 한대가 떨어지고 세대는 격상되였습니다.”
장내에서는 우뢰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김창화는 발언석에서 내려 지원군 수장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때 그녀는 리해식과도 악수를 나누었다. 그녀의 손아귀가 어찌나 센지 손이 시큰해났다.
뒤이어 김창화 등 녀고사포수들이 고사기관포 조종표현을 하였다. 억대우 같은 김창화는 고사기관포 각을 뜯자 그 무거운 포신을 혼자 척 둘러메고 내닫는 것이였다. 뒤이어 고사기관포 각을 번개같이 맞추고 빙글빙글 조종대를 돌려 목표를 겨누는 것이였다.
잇달아 박수갈채가 터졌다.
그날 해질 무렵에야 두 나라 군대 영웅모범좌담회의가 끝났다. 두 나라 장병들은 굳게 악수를 나누면서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갈라지기 아쉬운 마음으로 찌프에 앉아 눈길로 서서히 미끌어져나갔다.
그후부터 지원군 친선대표단이 조선인민군 그 사단으로 가기만 하면 꼭 녀고사포수 김창화를 의례히 찾아보았다. 조선인민군 그 사단의 친선대표단에서는 지원군 이 사단에 오기만 하면 꼭 팽복례를 만나보고서야 돌아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두 나라 두 사단의 형제부대가 전선에서 피로 맺은 전투적친선의 정은 날따라 깊어만 갔다
 
 
         5 개성에서의 나날

 
                     개성에로

      1953년 4월 말에 리해식은 사단 대적공작과로부터 군단 정치부 대적공작과에 전근해 사업하게 되였다.
       6월 초의 어느 하루, 리해식은 한 과에 있는 조리원 리묵과 함께 군단 포로수용소에서 방금 전선에서 압송해온 포로를 심문하여 적정자료를 정리하였다.
       대적공작과에서 새로운 임무가 있기에 해식더러 인차 돌아오라는 기별이 왔다.
       “리동무, 심문한 재료를 옛소. 마저 수고하오.”
        “다시 만나기요.”
        리해식은 리묵과 굳게 악수를 나누고는 이불짐을 꿍져메고 부랴부랴 군단 대적공작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벌써 해식의 로전우 조선어번역원 김진태, 강길하가 있었다. 이밖에도 여러 사단에서 선발한 사단 정치부 주임과 퇀 정치위원, 사단 보위과장, 영 교도원까지 하여 모두 23명이나 와 있었다.
        군단 참모장 등임준은 그들을 둘러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무들은 우리 군에서 여덟가지 조건에 따라 선발해온 간부들입니다. 동무들은 우리 군의 해석대표단 일원으로 되여 개성으로 가서 중조정전대표단의 사업을 한몫씩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
        모두들 뜻밖의 일이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어 개성정전담판 과정과 추세 및 우리 지원군 군단에 있다가 포로된 사람들의 기본정황을 소개하였다.
        조선전쟁의 특점은 미제 침략자들과 군사상에서 치렬한 투쟁을 할뿐만아니라 정치상에서도 치렬한 투쟁을 하는 것이였다. 때문에 조선전쟁은 군사와 정치 투쟁이 뒤얽힌 첨예하고도 복잡한 투쟁이였다.
       1951년 7월 10일에 조선군사정전담판이 시작된 이래 조선전쟁은 싸우다가  담판하고 담판하다가도 싸우는 국면으로 넘어갔다.
       1953년 3월 말, 중조 두 나라 정부에서는 또다시 전쟁포로를 교환할 문제를 공평하고도 합리하게 해결할 방안을 내놓았다. 중조측대표단의 노력으로 하여 4월 중순에 오래동안 끌어오던 전쟁포로송환문제에 대한 담판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교활한 적들은 조중측의 성의와 노력을 도외시하고 “전쟁포로를 되돌려보내는 문제”와 ‘정전감독문제” 담판을 질질 끌어대였다.
당시 우리 중조 두 나라 부대의 병력은 대단하였으며 군사물자공급이 충족하였고 싸울수록 강대해졌다. 정전담판에 배합하기 위해 5월 중순에 중조 두 나라 전선부대들에서는 금성 일대에서 제1차 진공을 들이대여 적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하여 정전담판석상에서 미국과 영국의 태도는 좀 누그러들었다. 그러나 리승만은 미군 호전집단의 지지 밑에 계속 담판에 참가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무력으로 북침하여 조선반도를 통일하려고 망상하면서 담판의 진전을 막아나섰다.
이런 정황에 근거하여 우리 중조 부대에서는 원래 서쪽의 미군을 위주로 치던 계획을 고쳐 동쪽의 괴뢰군을 위주로 족치고 적당히 미군을 치며 영군을 잠시 치지 않는 전술을 썼다. 하여 5월 중순부터 금성 남부계선에서 두번째 공격을 발동하였다.
이 공격전에서 아군은 세개 퇀의 우세한 병력으로 리승만 괴뢰군 제5사단 27련대를 돌연습격하여 한시간 10분 동안에 적들을 몽땅 섬멸해버렸다. 그리고 리승만 괴뢰군 제8사단을 포함하여 도합 4만 1천여명의 적을 살상, 포로하고 정면적진을 12킬로메터나 무찔러나갔으며 6킬로메터나 뚫고 들어갔다.
호된 타격을 받은 미제 침략군은 당황한 나머지 급급히 판문점담판석상에 나와 태도를 고쳤다. 하여 조선정전이 실현될 가능성이 어느때보다도 매우 커졌다. 판문점에서는 당금 실현될 정전을 위해 여러가지 준비사업을 바삐 서두르고 있었다.
이제 바야흐로 도장을 찍게 될 조선정전협정서의 포로송환에 관한 규정에 따라 참전쌍방에서는 규정된 수효의 해석대표단을 쌍방의 전쟁포로수용소에 보내 직접 되돌려보내지 않는 포로들을 설복하여 제 나라로 돌아가게 하여야 하였다.
군참모장 등임준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무들은 이전에 해본적 없는 포로송환사업을 하게 되였습니다. 전 군단 동지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승리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후 돌아올 것을 축원합니다.”
6월 6일 밤, 리해식, 김진태 등 일행은 군부 주둔지 자제동에서 자동차에 앉아 개성을 바라고 밤길을 누비며 서쪽으로 달렸다.
달리는 차에서 저 멀리 뒤로 물러가는 주마등 같은 산등성이들을 바라보면서 리해식은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번에는 코를 맞대고 적들과 싸우게 됐구나. 적들은 우리 조선족번역일군들을 아니꼬와할텐데…”
리해식은 자동차에 앉아서 갈마드는 심정을 눅잦히려고 눈을 스르르 감고 잠을 청하였다.
그들이 탄 자동차는 8월 오전 7시 쯤에 길고도 긴 골짜기를 따라 굽이굽이 달리다가 당시 전 세계 인민들이 주목한 조선중립구 개성시에 들어섰다.
개성시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였다. 남쪽에는 진봉산이 우뚝 솟아 있고 북쪽에는 가파로운 송악산이 38선을 등제 진채 우뚝 서 있었다. 아아한 송악산 아래 자리잡은 개성시내에 은띠 같은 시내물이 울퉁불퉁한 언덕 사이로 흐르는 것이 자동차 우에서 완연히 내려다보였다. 시내물을 따라 언덕에 자리잡은 조선 옛식 기와집들이 거개가 그대로 풍치있게 서 있는 것이 한눈에 안겨왔다.
개성시의 큰길에 들어서니 거리는 숱한 행인들과 달리는 차들로 붐비였다. 먼 곳에서 들리는 포소리 외에 개성시 상공에는 적기의 아츠런 엔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선전쟁터에 나온 뒤 포화가 울부짖는 전선에서 밤을 대낮으로 삼던 우리는 처음으로 대낮에 차를 타고 조선 땅 우의 들끓는 사가지로 달렸다. 실로 딴 세상에 들어선듯하였다.
이때 한 동무는 기쁜 마음을 누를길없어 달리는 자동차 우에서 두팔을 쭉 벌리더니 시를 읊듯 말하였다.
“아, 끝내 평화로운 도시 개성에 오고야 말았구나!”
그들은 개성에 들어간 후 새 임무를 맡아 하게 되였다. 강길화와 리해식은 정전대표단 정치부 선전교육과에서 문화사업을 맡게 되였고 김진태는 대안감독소조에 갔으며 사단 보위과장 량자단은 경위처에 가 사업하게 되였다.
 
                  유서깊은 옛도시 개성


      개성은 조선 반도 중부에 있는 유서깊은 유명한 옛도시이다. 일찍 고려왕조의 시조 왕건이 918년에 개경(오늘의 개성)을 고려의 수도(서울)로 정해서부터 1392년에 고려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근 500년 동안의 력사를 가진 고려왕조의 수도(서울)이였다. 천여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옛도시 개성에는 아직도 고려 명승고적이 그대로 많이 남아 있었다.
      난생처음 개성에 온 리해식은 개성의 명승고적에 부쩍 호기심이 동하였다. 그와 김진태는 쉴짬이거나 저녁식시후면 좋다하는 이런 명승고적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보았다. 실로 백문불여일견이라고 직접 자기 눈으로 보니 현란할 정도로 황홀하였다.
     어느날, 그들은 송악산 남쪽에 있는 명승고적 “망월대”에 가 보았다.
송악산 남쪽 기슭으로 해서 한 50메터 올라가자 20메터쯤 되는 돌층계가 나타났다. 그 돌층계를 올라가니 승평문 유적이 나타났고 동서로 길이 450메터, 남북으로 너비 150메터나 되는 넓은 옛날 콩크리트바닥이 훤하게 한눈에 안겨왔다. 광장 같은 이 곳은 원래 고려왕조 궁전의 옛터로서 회경전을 중심으로 수많은 궁전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런데 1361년 홍두군이 쳐들어와 호화로운 고려왕궁전은 몽땅 재더미로 되였고 지금은 그 청석돌바닥이 광장처럼 훤하게 남아 있을뿐이였다.
력사기재에 따르면, 원래 “만월대”는 “망월대”였는데 후에 “만월대”라고 고쳤다 한다. 옛날에는 망월대의 궁전에서 회경전이 중심궁전이였고 그 남쪽 정면에는 승평문이 있었는데 어전의 주요출입문이였다. 회경전의 좌우에는 동락정이 대칭되게 세워져 있었는데 이름 그대로 궁전의 오락장소였다. 회경전의 남북에는 신풍문이 있었으며 동서에는 춘덕문이 있어 회경전으로부터 직접 왕후와 왕귀비의 진궁과 춘궁에 이를 수 있었다. 서쪽 정면 옆으로 하여 난 태초문은 임금의 침궁인 건덕전에 이르는 문이였다. 회경전의 기초돌은 아직도 군데군데 들쓱날쑥하여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회경전 뒤쪽에 있던 장화전, 원덕전과 자화전 등 적지 않은 궁전의 기초돌은 거개가 알아볼 수 없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정경을 둘러보자 해식은 가슴이 뭉클해났다.
 
                      망월대
 
             쓸쓸하고도 슬프도다
             하늘 찌르던 왕궁은 어디메뇨?
             썩고 만 망월대 맨 바닥만 남았구나
              처량하게도 잡초 속에
 
              묻노니, 천하를 호령하던 옛 임금 어데 가고
              너울너울 춤 추던 궁녀들은 어디에 갔노?
              양키놈들 철발굽에 조상들 산소 짓밟히거늘
              망월대 옛터는 비분에 몸소리치누나
 
정전 후 지원군담판대표단에서는 망월대의 빤빤한 맨 바닥 북쪽으로 하여 대단히 큰 무대형구락부를 지었다. 대표단에서는 여기에서 대형 집회, 구기시합, 연극과 영화관람 등 활동을 벌렸다.
어느날, 리해식과 김진태는 개성시 중심의 북안동 경내에 있는, 소문 높은 남대문을 퍽 인상깊게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벌써 여러 나라에서 온 여러가지 살색의 기자들이 노랗고 하얀 머리카락을 흩날리면서 사진을 찍는다, 구경한다 하면서 떠들썩하고 있었다.
소문과는 달리 남대문 성루는 미제 공중날강도들의 폭격에 은데간데 없고 다만 무지개식 돌문과 돌각담이 남아 있었고 그 우에 원래 성루에 걸렸던 커다날 종이 놓여 있었다.
이 종은 “선복사종”이였는데 창평의 “상원사종”, 경주의 “복덕사종”, 천안의 “성지사종”, 지평의 “상원사종”과 함께 조선의 5대 명종 가운데의 하나였다. 이 옛종은 청동으로 부어 만든 것이였다. 직경은 1,8메터, 높이는 2.12메터, 웃부분의 직경은 0.23메터, 무게는 14톤이나 되는 큰 종이였다. 주요 공예는 매우 독특하였는바 종의 겉면에는 우로부터 아래로 꽃무늬가 일곱줄로 새겨져 있었고 그 꽃무늬로 종을 아래우가 나뉘게 그려놓았다. 일곱줄의 꽃무늬 사이에 사자와 범, 말과 같은 여러가지 동물과 한자, 고조선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가석하게도 미제 날강도들의 폭탄파편에 맞아 종의 여기저기에 깊고 누런 생채기가 나 있었다. 심지어 어떤 곳은 구멍이 펑펑 뚫렸다. 리해식과 김진태는 종을 돌아가면서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세여보았다. 27곳이나 깊은 상처를 입지 않았겠는가.
력사기재에 따르면 이 옛종은 1336년 고려목왕 2년에 부어만든 것으로서 원래는 개성시의 선복사에 걸려 있었는데 1563년 리조 명종 18년에 선복사가 불에 타버리자 개성시 남대문 루각에 옮겨다 걸어놓았다고 한다.
남대문도 지금과는 달리 아주 장관이였다고 한다. 남대문은 원래 옛 고려 서울 개경 반월성의 남정문루각이였다. 고려왕조가 망한 해인 1391년에 짓기 시작하여 리씨왕조가 선 이듬해인 1393년 리씨왕조 태조 2년에 남대문루각을 다 지었고 한다.
당지 사람들의 소개에 따르면 남대문에는 미제 공중날강도들의 폭격을 맞기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무지개식돌대문 우에 30메터 길이나 되는 다섯칸의 목제루각이 있어 매우 웅위롭고 장관이였다고 한다.
비록 웅위로운 루각은 미제 날강도들의 폭격에 날아났지만 해식과 진태는 무지개식돌대문 우에 놓인 커다란 옛선복사종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찰칵 찍었다.
당시 개성 남대문이 숱한 유람객을 끈데는 그가 력사의 견증자라는데도 있었다.
1950년 4월 남조선 소장 김석원이 개성 남대문루각에서 기세흉흉하게 군대를 사열하였다.
그는 숱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떠들어댔다.
“이제 북진명령이 내리기만 하면 일거에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할 것이다. 38선을 돌파하는데는 오직 나 김석원만이 해낼 수 있다.”
김석원은 아마 1949년의 5월부터 10월 사이에 두번이나 있은 처참한 실패를 잊은 것 같았다. 당시 남조선 괴뢰군 제1사단 상좌사장 겸 38선지구전선 사령관으로 있은 김석원은 다섯달 사이에 두번이나 38선 이북을 들이쳤다. 그런데 번마다 조선인민군 경비대의 호된 타격을 받았다.
1949년 5월, 김석원은 직접 괴뢰군 제1사단 주력인 제11련대를 지휘하여 송악산으로부터 북반부를 쳐들어갔다. 그때 괴뢰군은 조선인민군에게 호되게 얻어맞아 볼꼴없이 송악산으로부터 개성 남대문 앞에까지 쫓기워 갔다.
1950년 6월 25일, 평양시간으로 6시에 미제와 리승만괴뢰군이 북침할 때도 조선 북반부를 진공하는 남조선 괴뢰군의 첫발의 포탄도 바로 당시 남조선 괴뢰군이 차지한 개성 남대문 앞에서 쏘았다.
북반부로 제일 먼저 쳐들어간 괴뢰군부대 역시 바로 두달 전에 남대문루각에서 우줄렁거리면서 떠들어대던 김석원이 지휘한 적이 있는 괴뢰군 제1사단이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오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품 속으로 돌아온 개성시 남대문은 제일 훌륭한 견증자가 아닌가.
적들은 졌고 인민은 이겼다.
후에 리해식이 개성을 떠난 1955년에 개성시 인민들은 남대문루각을 원 모양대로 수건하고 서녹사종을 남대문루각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개성의 선죽교는 고려왕조의 충신이며 저명한 학자 정몽주(1337년-1392년)가 리조 태조 리성계의 아들 리방원 일파에게 손죽교에서 피살된데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리해식과 김진태가 개성시 교외 선죽동 경내 우거진 나무숲 속에 자리잡은 선죽교로 갔을 때였다. 흐르는 강물은 없고 흙모래가 물곬을 꽉 메워 다리 웃면과 다리 란간, 쇠사슬만 지면에 드러나 있었다. 돌다리 웃면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을 보아 선죽교도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엿보였다.
원래 다리 밑으로 로계라는 강이 있어 강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의 철발굽이 조선의 땅을 짓밟을 때였다. 일본 놈들은 당지 백성들을 핍박하여 선죽교 밑으로 흐르던 로계강 물곬을 50메터 떨어진 곳에로 돌려놓게 강박하였다. 그때로부터 선죽교 아래에는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다. 하여 말을 타고 빠져나갈 수 있던 다리 구멍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흙모래에 막히웠고 나중에는 다리 웃면과 란간 밖에 남지 않았다.
다리 웃면에 둘러세운 란간과 쇠사슬은 듣는 말에 의하면 정몽주의 후예들이 1780년 리씨왕조 정조 4년에 이 다리를 보존하려고 세운 것이라고 한다. 선죽교 옆에는 돌다리 하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 다리 역시 그때 정몽주 후예들이 선죽교를 보존하려고 인도교를 따로 놓은 것이라고 한다.
선죽교는 지금으로부터 1천여년 전인 919년에 고려왕조 태조 왕건이 서울 개경(오늘의 개성) 성곽에 짓기 시작하여 놓은 것이다. 당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돌로 쌓아놓은 이 선죽교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흙모래에 묻히기 전에는 아주 장관이였다고 한다.
리해식과 김진태는 장관을 이루었던 선죽교를 눈 앞에 그려보면서 선죽교를 둘러싼 돌란간을 이어놓은 쇠사슬에 걸터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선죽동 경내에는 또 정몽주가 공부를 한 적이 있는 “송양서원”이 있었다. 아늑하게 자리잡은 송양서원의 푸른 기와, 건뜻 쳐들린 처마, 참말로 조선민족의 건축특색이 짙게 안겨왔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송양서원”은 개성에 남아 있는 력사고적 중에서 력사가 제일 유구하다고 한다. 옛날 정몽주는 리성계의 아들 리방원 일파에게 피살되기 전에 이 곳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후에 1573년 리조 선조 6년에 개성의 유생들이 정몽주의 자에 따라 이 서원을 “문충당”이라고 이름을 달아 선배문학가이며 고려왕조의 마지막충신 정몽주를 기리였다. 1575년 리씨왕조 선조 8년에 조정에서는 이 서원에 “송양서원”이라는 편액을 내려서 걸게 하였다. 지금 볼 수 있는 “송양서원”이란 편액은 바로 그때 건 조정의 편액이라고 한다.
개성시 인민들은 정몽주에 관한 일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리해식 등에게 개성시 운학동 경내에 목청전이 있다면서 그 곳에 유관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목청전은 리씨왕조 시조 리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들어 있던 집이였다. 정몽주는 리성계 아들 리방원 일파에게 살해되기 전에 목청전에서 일찍 리성계가 베푼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고 한다. 리성계가 리씨왕조 시조로 된 후 1410년 태종 18년에 목청전을 궁전으로 고쳤으며 후에 리씨왕조가 한양(지금의 서울)에 궁전을 옮긴 후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절당으로 되였다.
1950년 12월, 미제와 리승만괴뢰군이 개성에서 철퇴할 때 불을 질러 목청전의 수많은 건축물이 불타버렸고 그 나머지는 적기의 수차 폭격에 재더미로 되였으며 비바람에 씻기워 흙무지로 돼버렸다. 듣는 말에 의하면, 정전 후 조선정부에서는 목청전이 있던 곳에 이전 모습대로 목청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개성은 또 세계에 이름난 인삼의 고향이였다.
개성시의 여기저기에는 인삼장이 많기도 하였다. 우리 중조 두나라 정전담판대표단 정치부 주둔지인 만월대 밖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 인삼장의 가공공장이 있었다. 원래 가공공장건물은 다 적기의 폭격에 무너져 로동자들은 림시로 지은 간이설비로 인삼을 가공하여 밖에 내다가 말리우고 있었다.
리해식과 김진태는 늘 밥술이 떨어지기 바쁘게 인삼장에 가서 거닐면서 인삼을 말리우는  공예과정을 돌아보군 하였다.
시간이 오래되자 처녀로동자들과 낯이 익게 되였다.
처녀들은 그들이 나타나자 생글방글 웃으면서 인삼뿌리를 한줌 쥐여주었다.
“가져다가 뜨거운 물에 불궈 마시라요.”
리해식이 부드럽게 사양하자 처녀들은 까르르 웃어댔다.
“지원군동지들은 실로 기률이 너무나도 많죠. 인삼뿌리를 몇뿌리 맛보는데요. 큰 일 나겠어요? 돈 내라는 것도 아닌데요. 호호호.”
리해식도 웃으면서 처녀들에게 한미디 하였다.
       “바로 동무들이 돈을 안 받기에 감히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러자 처녀들은 또 깔깔 웃어댔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449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409 장편소설 황혼(4) 나영이 김장혁 2024-07-10 0 341
408 장편소설 황혼(3) 한족본처 김장혁 2024-07-09 0 418
407 장편소설 황혼(2) 유언 김장혁 2024-07-09 0 450
406 장편소설 황혼 제1권(1) 나의 장례식 김장혁 2024-07-09 0 680
40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60) 뜻밖의 상봉 김장혁 2024-07-07 0 424
40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9) 어린 장사군과 부자 김장혁 2024-07-07 0 299
40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8) 머슴 김장혁 2024-07-07 0 295
40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7) 암범과 늑대 김장혁 2024-06-28 0 387
40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6) 사내 자존심 김장혁 2024-06-28 0 417
40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5) 뿌리 김장혁 2024-06-28 0 369
399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4) 어미 없는 설음 김장혁 2024-06-28 0 360
398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3) 무당의 굿 김장혁 2024-06-05 1 1021
397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2) 오누이 김장혁 2024-06-05 1 573
396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1) 운주동서당방 김장혁 2024-06-05 0 374
395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50) 수림 속 바위돌밭 김장혁 2024-06-05 0 413
394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9) 힘장사 삼형제 2024-05-27 0 428
393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8) 성동격서 2024-05-27 0 439
392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7) 끼무라 국장 2024-05-27 0 350
391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6) 저목장을 습격 2024-05-19 0 420
390 대하소설 울고 웃는 고향(45) 사냥군 2024-05-19 0 399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