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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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력사를 잊으면 배반이다
2013년 04월 12일 00시 18분  조회:3753  추천:4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력사를 잊으면 배반이다

 

연변동북아연구원은 대체 어느만큼 큰 뒷심을 업었길래 제3회 청마문학현상공모광고를 거두지 않으면서 “친일매국이나 한간”운운을 “썩은짓거리”라하는지?   

이 글은 내가 쓴 대하력사소설 “半島의 血”에 있는 우리민족의 수난의 력사 그대로 기록이니 독자들은 한번읽고 사색하기 바란다.. 

 

   때는 독립군이 청산리전투승첩을 올린 해인 1920년도 

 

   일제는 이해의 5월부터 만주에 군림히고있는 장작림(張作霖)과 수차 회합을 갖고 독립군토벌에 대한것을 협의한 뒤, 4개월간에 걸친 독립군수색작전을 벌렸던 것이다.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중일합동작전이였으나 실상은 각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앞세운 일군의 독립군학살 작전이였던 것이다.

   5월 13일부터 7월 3일사이에 흥경(興京), 유하(柳河), 해룡(海龍), 통화(通化) 등 각 현이, 5월 15일부터 8월 18일까지는 안동(安東), 관전(寬甸), 환인(桓仁), 통화(通化), 집안(輯安), 임강(臨江), 장백(長白) 등의 각 현이 일제의 토벌작전에 의하여 짓밟혀졌다. 하여 무수한 독립단체본거지가 분쇄되였거니와 독립운동인사와 무수한 동포들이 학살당한 것이다.

 

   일제의 야만적인 학살로 인한 참혹한 광경을 서양사람 스탠리 마아틴(Stanly Martin)은 자기의 수기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10월 31일, 우리들은 축성(築城)에서 12마일이나 되는 찬나파위촌(瓚拉巴威村)에 사실을 알려고 갔다.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27일 새벽부터 무장을 한 보병 1대가 이 예수교촌을 포위하고 산적한 밀짚위에 방화하고 남자라면 노유를 막론하고 옥외로 끌어내다가 사살하고 채 죽지 않은 자는 불속에 집어넣고 집안에서 울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보는 어머니와 처자의 가옥을 또 방화하여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이와 같이 몇 개 마을을 불태우고 병영에 돌아가서는 천황(天皇)의 탄생일을 경축하였다.

   우리 일행이 부근촌락에 이르렀을 때 끝으로 조선식 큰집을 보았는데 아직 연소중에 있었고 곁에는 불로 재가 된 거퇴(巨堆)가 있었는데 이것은 3년간 저장하여 두었던 식량의 잿더미라고 한다.... 잿더미중에는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어 우리들은 이 재를 헤치고 한 노인의 시체를 보았는데 시체 여러곳에는 총탄이 박혀있고 몸은 벌써 고스라지고 간신히 목만 붙어있었다.

   구리는 사진 몇장을 찍고 다른데로 갔는데 방화한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체가 타는 악취가 나고 지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길에서 네사람의 부인을 만났는데 각각 어린아이를 업고 무덤옆에 앉아 우는 소리가 처참하였다. 타다남은 19집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며느리가 통곡을 하면서 잿더미속에서 못다 탄 살덩어리와 부서진 뼈를 줍고있는 것을 보고 나는 동네 사람을 청하여 기도드리고 협조하여 잿더미속에서 시체 하나를 끌어내여 잘라진 팔, 다리를 제자리에 주어 모은 다음 사진을 찍었다. 이때 나는 어찌나 분했던지 사진기를 고정시킬 수 없어 네 번이나 다시찍었다. 내가 알고있는 36개촌에서만 피살자가 모두 1백 40명이나되였다.>>

 

   또한 당시 노루바위촌에서 한국인의 시체가 타는것을 3주야기도로써 지켜보았다는 선교사 푸우트(D.D. Foote)는 수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11월 4일에 노루바위촌(獐岩洞)에 갔더니 마을사람들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참상을 말하여 주었다. 즉 10월 30일에 일본군이 습격하여 3백 31인이 거주하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하였다고 했다. 나는 가옥 9간 및 교회당, 학교가 불탄것을 보고 그 사실이 진실임을 알았다. 또 2월 1일에는 일본군 17인과 경찰 2명이 이 촌에 와서 남자를 모조리 끌어다가 죽인 후 죽은자의 아내를 불러내여 그의 경력을 대라고 고문을 하였고, 그 다음 촌락의 주민 전체를 모아 일장 연설을 한 후 외국인선교사가 이곳에 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또 벌써 죽어버린 시체를 마을 사람들을 시켜 한곳에 모으고 그 시체에 연료를 덮어 불을 질러 재로 만들어 없애버리였다.>>

  

   1920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해서 쓴 박은식(朴殷植)의 “朝鮮獨立運動之血史”에 씌인 글은 이러했다.

 

   <<왜적들은 교포가 사는 각 촌락을 습격하여 가옥, 교회, 학교 및 곡식 등을 닥치는대로 불질러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그 살해방법을 보면 총으로 쏘아 죽이고 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끈으로 묶어죽이고, 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발로 걷어차서 죽이고, 돌로 찍어죽이고, 생매장하고, 화장을 하고, 솥에 삶아죽이고, 해부하여 죽이고, 코를 꾀어 죽이고, 배를 가르고 머리를 베여 죽이고, 눈을 뽑아 가죽을 벗겨 죽이고, 허리를 잘라죽이고, 사지에 못을 박고 손발을 토막내여 죽이는 등 인간으로서는 참아 볼 수 없는 일을 일본군은 장난삼아 행하였다.

     우리 동포들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또는 부자가 함께 죽었으며, 남편을 죽이고 그것을 아내에게 보이거나 아우를 죽여서 형에게 보였으며, 상주가 신주를 가지고 도망하다가 형제가 함께 피살 당하였으며, 산모가 갖난이를 안고 달아나다가 모자가 함께 학살당하는 등 일들이 허다하였다.>>

 

   당시 상해임정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또, 군정서 사관학교의 소재지인 왕청현 서대파도 이보다 더할지언정 못하지는 않았다합니다. 화룡현장암동(和龍縣獐岩洞)에서는 28명의 기독교인을 한 곳에 정열하고 병졸들의 사적(射的)을 삼아 소총사격을 연습하였으며, 연길현의란구(延吉縣依蘭溝) 남쪽 마을은 전체 30여호되는 이씨(李氏)촌락인데 3인만이 간신히 성명을 바꾸어 모면하고 그 나머지 전부가 학살되였으며, 어떤 4형제는 불타는 가옥속에 던져 넣어 태워 죽였다합니다.

   그 외에 3명 혹은 수 10명의 학살은 없는데가 없습니다. 방화도 그러합니다. 이는 간도(間島)전체입니다. 아! 잔인과 포악의 화신인 일병이며 2,3세 되는 소아를 창 끝에 꾀어들고 그 앞에서 울부짓는 것을 보고 손벽을 치고 즐겁게 여겼습니다. 제조가 방정한 수저와 부녀자의 반지와 노인이 입는 털옷 등 어느것이나 다 략탈되지 않은 것 없었고, 소녀를 학살 할 때에는 반드시 강간하였소. 사람을 학살할 때에 일시에 총살하는 것보다 창으로 찔러 견디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고 고민하다가 죽는 것을 즐겨하였소. 수10일전만 하여도 간도 어디를 가던지 죽은 시체가 쌓여 있지 않은 곳이 없었소. 그러나 그 시체는 반드시 면피(面皮)를 벗겨내어 누가 누구인지 판명치 못하게 만들었다 합니다.

   예수교신자를 학살한 곳에는 서양 선교사의 조사가 심함을 증오하며 땅에 파묻고 썩은 시체를 다시발굴하여 유해 하나 없이 태워버렸다 합니다....

   그러나 그 무참하고 잔인한 총창의 제물이 된 남녀는 이미 수만에 달하였다 합니다. 소화된 가옥도 그러합니다. 또 그 창검에 팔과 다리가 끊기고 혹은 눈을 혹은 옆꾸리를 찔러 끝내 불구자가 된것도 수천이로소이다. 이는 속일 수 없는 사실이외이다.>>   

                (“독립신문” 1920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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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애족
날자:2013-04-13 19:39:42
연변에서 청마문학상은 안 되는 일이다. 김송죽선생님이 알려주는 력사를 알고도 그냥 이어 간다면 이는 큰 수치이고 목욕이다. 민족을 무참히 짓밟은 원쑤를 구가하는 한간의 제를 지낼 리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문학 발전에 무슨 도움이란 말인가? 령혼을이 없는 문학은 또 다시 민족의 수난 또는 패망을 초래한다. 략사를 잊으면 배반이라 하셨는데 십분 지당할 말씀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 밈족배신도 서슴치 않는 짓거리를 동북아문화원은 당장 멈추어야 한다.
1   작성자 : 변절자는
날자:2013-04-12 08:05:38
친일매국이나 한간운운을 썩은짓거리라는 인간은 분명 과거 일본앞잡이조직 보민회아니면 협화회의 후손 그 종자같아보인다. 아니그렇구야 력사사실을 썩은짓거리라느니뭐니 그런소리맹탕할가? 물에빠진개는 잡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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