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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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 (3)
2013년 07월 12일 11시 37분  조회:4282  추천:0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무지하면 야만이 된다 (3)

 

1991년에 창간된 <<炎黃春秋>>는 독자가 많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종지로 내세우고 실재한 력사사실들을 파헤치니 아마 볼멋이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요즘도 그 잡지에서 가슴을 전율케 하는 글 한편을 보았다. 지난 반우(反右)때 공군에서 우파로 몰린 몇몇 젊은 군관과 병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폭로한 것인데 읽노라니 눈물이 나면서 격분이 솟구쳤다. 일상을 벗어난 그같은 비극이 왜 우리 나라에서 생겼던가?..... 한번다시 숙고하면서 스스로를 심각히 반성해봐야 할 일이아니겠는가? 그 글을 쓴 사람은 양숭성(楊崇誠)인데 그는 언녕 사업터를 떠난 리직간부로서 본직은 공군제1사정치부선전간사(空軍第1師政治部宣傳幹事)였다.

 

다가 잘알다싶히 지난날 중국에서 벌어졌던 “반우파운동”은 한심하게도 잘못번져진 일장의 큰 재난성적인 정치운동이였다. 그 운동이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억울하게 만들었던가! 하기에 국가가 입은 손실은 이루말할 수 없는 것이요 전도는 암담해 그것을 깨달은 공산당은 뒤늦게나마 개정의 길로 나아갔으니 다행인 것이다. <<炎黃春秋>>에 실은 글을 보면 2000년도에 생존자몇이 한데모여 지난날을 회억하면서 간단히 통계를 내봤는데 필자인 양숭성(楊崇誠) 본인이 적을 두고 사업했던 공군 1사에서만도 10명은 박해를 받아 이미 죽었고 18명은 살아있다해도 잔페가 되었으며 20명은 도망친것이 행방불명이였다. 게다가 그외의 30명은 련계가 끊어져 찾을 방법도없었고한다. 살아 남은것은 70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다가 몸에 병이 있으니 페인이나답지  않는다고한다.

 

아래는 사망자 몇의 상황이다.

 

초방(肖方)의 죽음ㅡ 당적과 군적을 떼운 초방(肖方)은 로개농장으로 끌려가면서 너무도 원통해 울며 부르짖었던 것이다.

“참군할때부터 죽더라도 당의 생명을 보위하리라 맹세했던 내가 어쩌면 하루밤새에 인민의 적으로 된단말인가?! ”

농장에 간 그는 죽도록 일했다. 그리했기에 그는 표현이 좋다고 1962년에 우파를 면하게되였다. 했지만 그한테는 “우파분자모자를 벗은 사람”이라는 새딱지가 붙어있었다. 하여 그는 계속 고험을 겪어야 한다는 규정하에 그곳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문혁”이 왔고 1968년에 “계급대오정리”가 고조에 오르니 그는 다시끌려나와 투쟁받기 시작한 것이다. “모택동사상보위대”는 매일저녁 그를 끄집어내여서는 자기절로 “새반당죄행”을 교대하라고 족치였다.

 

그야말로 인간의 자비란 손톱만치도없는 무지한 자들의 집체적인 박해였다. 초방(肖方)은 사실 교대할것이란 없었다. 그럼에도 이듬해인 1969년 겨울의 어느날 밤에는 200여명이 모여 반당죄행을 고백하지 않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그를 몽둥이로 뚜드려팼던 것이다. 살가죽이 다 터져 붉은피가 전신에 랑자했다. 그는 아품을 이기지못해 땅바닥에서 디굴디굴 구을면서 통곡했다. 그랬음에도 리지를 잃은 자들은 죄를 뉘우치지 않고는 살려니말라면서 그를 두시간동안이나 모택동초상앞에 꿇어엎디여 빌게했던 것이다. 피를 많이 흘린 그는 목이 말라 죽을지경이여서 물을 달라했다. 그러니 그자들은 전정대상은 물먹을 자격도 없다면서 먹겠거든 오줌이나먹으라했거니와 똥을 누겠거든 바지에다 싸라했던 것이다.

 

혹독한 학대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울분에 터져 나는 정말 죄없다 살려달라고 겁듭거듭 웨치였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마음이 선량한 사람들은 보다못해 “모택동사상보위대는 너무잔인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쓰러진 초방(肖方)은 결국 다시일어나지 못한채 그 자리에서 죽고말았으니 그때 나이가 43살이였다. 전정대(專政隊)는 그를 거적에다 말아 바다에 던져버렸다. 

 

왕경개(汪慶凱)의 죽음ㅡ 왕경개는 호북사람인데 1957년에 우파분자로 됐다. 그가 과수농장으로 옮겨온 첫날, 공농대장은 그를 세워놓고 한바탕 되게 욕했던 것이다.
“너의 그 껍질(군복)을 벗어버려, 꼴보기싫게놀지말구! 너희들은 다 죄인이지 복을 누리자고 온게 아니야!” 하면서 당장 오후부터는 물통을 산에 메여올리라고 명령했다. 한재(旱災)방지에 동원되던 때였는데 그날 오후 100여메터높은 산언덕으로 두지게를 져올리고 난 그는 맥이 지냈거니와 그보다도 심한 모욕과 학대를 차마 더는 받아낼 수 없어서 그만 나무에 목을 매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31살이였다.

농장의 령도는 회의를 소집해놓고 “그는 반동립장을 견지하느라 사상개조에 항거해나선것이니 차라리 잘죽었다!”고 선포했다.

 

류경요(劉庚堯), 하존국(夏存國), 우학항(于學航)의 죽음ㅡ 그들은 다가 육군사람이였는데 1950년에 부대에서 비행기수리기술을 장악하게 하느라 공군학교에 보낸것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부대의 골간이 되였다. 한데 반우(反右)때 우파분자로 몰리여 농장에 내려가 사상개조를 하게되였던것이다. 1970년도 “문혁”이 고조에 치달아오를 때 모택동사상전정대(毛澤東思想專政隊)는 너희들은 새죄악을 고백하라면서 그들을 핍박했다. 그러기를 끊지 않았다. 낮에는 산에 올라가 일을 하게했고 밤이 되면 회의를 열고 때렸다. 모진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지 못해 절망하고 만 그들은 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말았다.

 

류경요(劉庚堯)는 항일전쟁시기에 참군한 로간부다. 여러날 지속적으로 매를 맞은 그는 과수나무에 농약을 치러 갓다가 버려진 페갱(廢坑)에 들어가 농약을 먹고 그만 자살하고말았다. 그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썩기시작했는데 그를 파묻자고 파놓은 굴이 작으니 전정대(專政隊)는 그의 다리를 끊어서 파묻어버렸다.

 

하존국(夏存國)은 여러날 곱잡아 뚜드려패니 매를 더 이기지 못해 어느날 밤중에 물푸는 양수기방에 들어가 목매죽고말았다. 류경요(劉庚堯)와 하존국(夏存國) 그 두 친구가 죽는것을 본 우학항(于學航)은 다음은 자기차례라 여겨 밤중에 집에서 목을 매 죽고말았다. 이듬해 제전(梯田)을 수리하다가 웅덩이체 처넣고 덮어버렸던 우학항(于學航)의 썩은 시체가 나오니 사람들은 그것을 비료로 하고 계급의 적이라 하여 머리에다 “于學航”이란 피쪽을 달아 나무에 걸어놓았다.

 

공군병사 려명봉(黎明峰), 손창(孫昶), 진청악(陳淸萼)등은 무례하게 강요하는 로동형벌에다 기아를 이겨내지 못해 굶어죽고말았으니 그당시 나이가 각각 26, 25, 26살이였다. 

양정파(楊靜波)는 원 공군제5속성중학의 정치교원이였는데 1958년에 우파로 획분되여 농장에 내려가 사상개조를 했다. 그해의 년말에 우파들을 한데다 몰아넣고 저수지를 수건일을 시킬 때 그는 무너져내리는 언 흑덩이에 깔려죽었다.

 

리덕본(李德本)은 제8항공학교의 레이다교원이였다. 그는 우파가 되어 로동개조를 하면서 시력이 점점 못해져 병원에 가 의사를 보이겠다고 하니 생산대장은 그가 일하기 싫어서 꾀를 부린다면서 종시 청가를 해주지 않았다. 하여 병을 제때에 보일수 없었다. 그후 시력은 점점 더 못해졌거니와 몸을 평형잡기 어려웠다. 하여 그는 자주넘어졌다. 그제야 생산대장이 청가를 해서 병을 보이니 뇌에 류(瘤)가 생겨 신경을 압박해서 그렇다는 것이였다. 하여 리덕본(李德本)은 북경에 돌아와 협화병원(協和病院)에 가 보였더니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수술대에서 죽고말았다. 그때 나이 27살이였다.

 

인간에게 목숨보다 더 귀중한게 어디있으랴! 하건만 지난날 우리 나라는 백성의 생명을 너무도 귀중히 여길줄을 몰랐다. 도대체 왜서 젊은인재마저 아낄줄은 모르고 귀중한 생명을 그같이 억울하고도 값없이 잃게만들었던가? 그러고도 남한테 위대한 당, 위대한 사회주의국가라 자랑할 수 있단말인가?

 

중국의 <<무쇠사람>>하면 왕진희(王進喜)를 가리키는 것이요 그가 어떤사람이란건 세상이 다아는 일이다.

1960년말에 왕진희(王進喜)는 대경유전에서 시추대의 대장으로 되었고 1965년에는 시추대지휘부의 부지휘로 올리췃거니와 9계 당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던 것이다. 그는 령도강위에 있으면서 시종 기층에 심입했다. 문제가 생기면 제때에 발견하고 처리하면서 영웅의 본색을 지킨것이다. 그는 중국의 석유공업발전을 위해서라면 실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쳤으니 세상이 공인하는 공훈(功勳)인 것이다.

 

“어려운 생활과 고된 일을 겨디여 낸 왕진희동지는 끝내 심한 위병에 걸리였다. 하건만 그는 사업을 완강히 견지했던 것이다. 1970년에 그가 위암이라는것이 확진되여 치료를  받았건만 효험을 보지 못한채 47살나이에 우리곁을 일찍이 떠나고말았다.”
                              
<<여추리회억록>>, 인민출판사.
                                  

그런 왕진희(王進喜)가 “문화대혁명” 에 도대체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보라.

한패의 반란자들은 그의 목에다 커다란 물통을 걸어놓았거니와 머리를 수증기가마에 들이밀어 질식케했으며 불로 지지거나  벌겋게 단 쇠꼬챙이로 발등을 찔러놓았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그자들은 그를 어두운 방에 가두어놓고 혹독하게 뚜드려팼던 것이다. 그뿐아니였다. 그자들은 걸상여러개를 높다랗게 쌓아놓은 후 그 꼭대기에 올라가라해놓고는 그것을 발로 차 무너뜨렸다. 그래서는 거기에서 떨어져 딩구는것이 보기좋다고 손벽치며 깔깔거렸던 것이다. 그자들은 그같이 비인간적인 혹형(酷刑)으로 왕진희를 굴복시켜 대경에서 수립한붉은깃발은 붉은것이 아니라 검은 것이라  승인하게끔 만들려했던 것이다.

대경의 깃발은 당중앙과 모주석이 직접세운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부정한단말인가?
무지한것들이 무엇이나 때려엎으면 그것이 곧 신성한 “혁명”인줄로 알았으니 그같이 야만의 짓밖에 할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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