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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시사론평
모택동이 생전에 흠정한 원쑤가 넷이였는데 그중에서 둘은 일본사람이였다.
1966년7월, 모택동은 한차례의 담화에서 자기가 밉게보는 원쑤 넷을 말했는데 첫째원쑤는 현대수정주의 쏘련이고 둘째원쑤는 제국주의며 셋째와 넷째원쑤는 일본공산당 켄지 미야모토 수정주의집단과 에이 사쿠사토 반동내각이라하였다.
1972년2월, 미국총통 닉슨이 중국에 방문을 와갖고는 모택동을 만나 악수하면서 웃으니 증오가 풀리여 원래 원쑤가 넷이던것이 하나 적어진것이다. 1972년6월17일에 일본에서는 에이 사쿠사토 내각이 물러나고 7월7일에 다나카내각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해의 8월에 다나카내각이 중국을 방문하여 두 나라는 외교관계가 정상화되였다. 그리고 1975년6월3일에 일본반동내각의 두목이였던 에이 사쿠사토는 병으로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랬으니 네원쑤중에 또 하나가 저절로 줄어든 것이다. 하여 네원쑤중에서 이제남은건 쏘련수정주의와 일본공산당이였던 것이다.
어떻게 할것인가, 저 빌어먹을 녀석들을!
에이 사쿠사토는 생전에 미국을 따라 중국을 반대했거니와 대만의 장개석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원쑤였다. 한데 켄지 미야모토는 공산당사람인데 왜서 원쑤가 되였던가? 그 원인을 캐보면 간단했다. 1966년3월에 일본공산당의장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왓던 그 켄지 미야모토의장님은 상해에서 일본공산당은 중쏘량당지간의 론전에서 중국켠에 서서 중국공산당을 지지해달라고 부탁한 모택동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거니와 돌아가서는 아예 거래마저 끊어버렸기 때문이였던 것이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 켄지 미야모토는 중국의 계급투쟁을 되게 비난하면서 프롤레타리아독재라하여 그래 아무런 법도 없이 나라건설마저도 하지 않고 내쳐서야 어디되느냐하면서 모택동의 작법을 비웃고 질타했던 것이다.
2007년7월18일에 켄지 미야모토는 98세 나이에 사망했다. 중국에서는 그저 신화사가 그의 리력을 간단히 보도하는데 그쳤을 뿐 오랜 공산당원이였던 그의 공적에 대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것이다.
켄지 미야모토를 보면 근 반세기나 일본공산당을 령도했는데 그 기간에 그는 공산당의 폭력혁명을 줄곧 반대했거니와 무산계급전정을 취소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그 리론을 발벗고 나서서 먼저집행했으니 실천자이기도했던 것이다. 하기에 그는 지난세기 6, 70년대에 줄곧 중공의 비판대상으로되였던 것이다.
<<인민일보>>와 <<붉은기>>잡지 <<해방군보>>들에서는 일본의 켄지 미야모토수정주의집단은 정력을 다해 폭력혁명을 반대하고 무산계급전정을 반대하면서 의회주의길을 철저히 걸어야한다고 고취하였다면서 그들은 폭력이라는 단어를 조폭하다느니 무법이라느니 해석하면서 일본인민들이 일떠나 혁명하자는것을 막고있으니 수정주의가아니고뭔가 하면서 그것이 어느정도에 이르었는가를 좀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쓰기를 어떤사람은 무산계급전정을 “불안‘한 것으로 보고있는데 그래서는 절대안된다고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 켄지 미야모토그룹은 제국주의와 일본군국주의의 폭력을 감싸주었다고했던 것이다.
중공과 일본공산당간의 관계가 그같이 긴장해져서 얼마지나지 않아 일본공산당에서는 좌파세력의 인물인 후쿠다가 주석이 되었다. 후쿠다는 당주석이 되자 “문혁”직후에 뻔질나게 중국을 방문했다. 그러던 그는 나이 90살을 먹던해인 2001년에 심장병으로 죽고말았는데 그는 죽기전에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 반성해보고는 자기와 교분이 두터웠던 한 친구와 “내가 형님한테 미안한 짓을한거야.”하고 뉘우쳤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형님”이란 다른사람이 아니라 바로 모택동이 생전에 죽도록 미워했던 수정주의자 켄지 미야모토였던 것이다.
과연 음미해볼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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