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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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신화를 깬 림표의 죽음
2013년 12월 09일 19시 44분  조회:6343  추천:7  작성자: 김송죽
 

         에세이 신화를 깬 림표의 죽음 

 

림표의 죽음은 모택동의 형상리론을 짓부셧거니와 체면을 완전히 긁어버렸다. 그로써 모택동의 신화는 철저히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군사가 림표와 정치가 림표를 갈라놓고 좀 더 구체적으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림표의 정치행위만 보고 그의 군사업적을 부정해서는 안되거니와 마찬가지로 그의 군사업적을 가지고 그의 후생을 다 긍정해도 안되는 것이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행위는 련속된것인데 어떻게 “군사림표”와 “정치림표”로 갈라놓을 수 있느냐고 할 것이다. 피끗들어 그말에 도리가 있는것같지만 들어맞는건 아니다. 왜냐하면 성품이란건 불변하는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주동이였건 피동이였건간에 주위상황에 따라서 성품이 좋았던 사람도 나쁘게 돌변할수있기때문이다.

 

림표가 세운 전공(戰功)을 놓고 이러니 저러니 흠을 잡자고 할 필요는 전혀없다. 왜냐하면 그가 세운 전공이 아주 탁월하여 혁혁다는것은 력사가 이미 긍정했기때문이다. 국가에서는 1955년도에 해방군전체 장령에게 군함(軍銜)을 주었는데 림표는 그때 원수(元帥)로 되였다. 그같은 원수가 모두해서 10명인데 그 10대원수의 차례를 놓고 보면 주덕, 팽덕회, 림표, 류백승, 화룡, 진의, 라승환, 서향전, 섭영진, 엽검영순으로 되어있다. 그러니 림표는 보다싶히 전공이 혁혁한 류백승이나 속유보다도 더높이 올라 주덕, 팽덕회다음 세번째자리에 놓인 것이다. 한즉 그것은 사실상 그의 전공이 류백승이나 속유보다도 더 컷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군함을 정했어도 동급내에서 차례를 뽑자고 보니 수차나반복되면서 훨신 더 힘들었다고 한다. 림표의 원래의 자격을 놓고 따진다면 그가 그저 본래는 기껏해야 황포군관학교 4기졸업생이요 섭영진과 엽검영은 그의 선생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향전을 놓고 봐도 그는 황포군관학교 제1기 졸업생이였거니와 그의 학장(学长)이기도했다. 남창기의 때 림표가 패장이였지만 류백승과 화룡은 각각 참모장, 퇀장이여서 기의를 총휘한 것이다. 진의를 놓고봐도 그렇다.  그는 남창기의부대와 홍4군때 림표의 직접 상급이였던 것이다. 림표가 라영환보다는 자력(資歷)이 좀 나을뿐이였다. 그러나 그는 제 실력을 발휘함에서 우에 렬거한 교관과 상급들을 모두 릉가했다. 그 근거는 무엇이였는가? 림표는 그야말로 군사가다운 지혜와 담력으로 싸움마다 굳센것과 강경히 맛다들어 번번히 이겼다는 그것이였다.

 

원수들중에서 림표와 류백승 그 둘은 높은 군함을 받으면서도 태도가 그리 명랑하지 않았다고하니 여기에 바로 문장이 있는 것이다.

군사가였던 그 두사람은 다 머리가 아주맑았기에 정치의 험악함을 알고있은 것이다. 천하를 얻고나서 그냥 군사가로 지내려면 정치를 멀리하면서 아무거든 군사일이나 그냥보면 그로서 끝나는것이고, 그러지를 않고 만약 정치에  삐치고싶어서 개입하여 무대에 올라 표현하기시작한다면 그때는 이미 군인인것이 아니라 참정인원이 되어 정치가로 탈바꿈을 했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녕 그렇다면 처지는 아주 영 달라지고만다. 림표나 류백승이나 그들은 그 도리를 그 누구보다도 깨닫고있었던 것이다.   

 

거짓정보에 의해 싸움을 한면 실패해서 믿지기마련이다. 그러나 정치를 하자면 다르다. 림표가 생전에 제 부인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큰일을 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즉 지금보면 림표의 그 말이 과연 금언(金言)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림표의 전(傳)을 보면 1950년도에 림표는 서남을 평정하고나서 인차 남경군구에 가서 군사학원을 세웠던 것이다. 그때 림표는 몸이 좋지 않았거니와 정치에도 흥취가 없어서 간섭하지 않았다고했다. 그는 정치와는 되도록 멀리했던 것이다. 지어는 그가 먼 변강에 가서 성장노릇이나 할 생각이였다고 한다. 그는 그러면서 조선전쟁에 나가 지휘를 맡으라는것마저 핑계대고 회피한것이다. 팽덕회와 조선전쟁이라는 글에 보면 그갗이 밝혀져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이 말려든 고강사건에는 그가 참여했는가 안했는가? 그것이 의문이 되는데 그 의문만은 아직까지도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955년 9월 27일, 중남해의 회인당에서 원수군함을 수여할 할 때 생긴일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수로 인정된 10명중 두사람이나 수여식에 불참한 그것이였다. 그 두사람은 림표와 류백승이였다. 그때 림표가 병을 칭탈했지만 진정한 원인을 보면 그것이 아니였다. 원수가 되어 좋기는 한데 자기가 여러상급들을 밀어놓고 앞자리로 올라가면 어떻게 될가고 우려했다는 것이다. 류백승은 그때 한창 말성거리에 들어있었다. 팽덕회가 모택동의 뜻에 따라서 류백승이 창설한 “교도주의대본영(모택동의 말)”인 남경군사학원에 대해서 비판했길래 그는 모택동과 팽덕회를 보기싫어했거니와 지어는 군함을 화룡앞에다 세우는것마저도 반갑지 않아했던것이다. 한편 다른 한 사람 화룡은 원수의 순서를 놓는데 불만스러워했다. 그 리유라면 당군(黨軍)은 본체가 8.1남창기의에서 온 것이요 자기는 그때 총지휘였다는 것. 주덕, 류백승, 엽정, 섭영진은 다가 자기의 수하가 아니였느냐, 그런데 왜서? 림표는 더구나안되는데도 왜서 그를 앞에다 세우고 자기는 다섯번째로 밀어놓느냐 그것이였다. 그야말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모순은 왜서 생기는가?..... 림표에게는 마침내 이것이 곧바로 군대내의 정치운동으로 감지되였던 것이다. 하여 그역시 그 장소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것이다.

 

그런데 1956년 8대이후 8기1중전회에서 중앙위원을 선거할적에 선거표가 모자라는 림표에게 모택동이 한표를 던져주었다. 하였길래 림표는 중앙정치국상위, 중앙부주석이 된 것이니 이는 모택동이 그더러 너는 이제부터는 정치가놀음을 하라는 신호를 보냈음이 명백하다.   

한편 팽덕회는 림표처럼 되지 못했다. 팽덕회가 만약 정치가의 머리를 가졌더라면 대체 어떠했을가? 그가 정치가다운 예리한 촉각이 있었다면 의례 모택동의 암시와 경고를 알아차렸을것이다, 지금부터 군대의 첫인물은 림표이지 너 팽덕회가 아니다라는 것을!

중앙은 권력중심이라서 군권이 저쪽으로 넘어가게 되니 그때부터 팽덕회의 심기는 뒤틀어지기 시작했던것이다. 하여 1959년 로산회의에 이르러서는 그가 모택동과 공공연히 맏다드는 형국이 됐고 “만언의견서”요뭐요 써올렸지만 그건 다 허사로 되면서 점점 막다를 골목으로 몰려들기시작했던 것이다. 한즉 팽덕회쪽으로 놓고보면 과연 억울한 일이아닐 수 없다. 

                                           (자료래원 “華夏文摘增刊”)

 

철유형(铁流兄)이 1999년에 쓴 <<팽덕회의 비극탐원>>을 보면 다음과 같이 총괄했다.

“그본신의 개성부터 봐도 정객이 아니였다. 그런 기질이면 아예 정객과 손발을 맞추려하지 말아야했다! 몸이 강호에 있어도 자기것이 아니다했거늘 정객도아닌 팽덕회가 정객노릇을 했으니 비극일수밖에!” 라고했다.

팽덕회의 비극은 바로 로산회의때부터 시작되였던 것이다.

한데 림표는 어떠했는가? 그는 정치란것은 등이 없고 날만있는 칼이라는것을 알았길래 모택동의 신호를 감히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실상 적극적이였던것도아니였다. 그는 중앙부주석이 되었어도 몸이 좋지 않다보니 료양이 위주였다. 중앙전회때도 정치국회의때도 그는 회의에 가지 않으려고 청가를 맡은 것이다. 그러나 1959년에 이르어 로산회의때는 료양할수 없었다. 모택동이 그를 꼭 참가하라고 급히불러다가는 군위제1부주석을 시켰거니와 국무원부총리겸 국방부장직무까지 주면서 그를 정치무대의 중심에다, 그것도 권력중심에다 정식으로 올려놓았던 것이다. 림표가 속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그런 권좌에 올라앉은건지 아니면 하는수없이 올라앉은건지는 그건 누구도 알아낼 방법이 없지만 한가지 긍정적인것은 군사가였던 림표가 그때로부터는 이미 “정치가 림표”로 변해버렸다는 그것이였다.

 

따지고 보면 림표의 비극은 바로 그때로부터 시작되였던 것이다.  

림표의 행실을 보면 그닥아름답지 않았다. 그는 로산회의에 참가하여 팽덕회를 비판했고 참모장이였던 라서경을 끌어내리웠거니와 북경에 돌아와서는 모택동이 시키는대로 군위확대회의를 열고는 팽덕회를 투쟁했거니와 조직상으로도 사상상으로도 “팽덕회를 숙청”했는데 그의 그러한 행실이 정치적각도에서 보면 아무런 흠잡을데도 없었던 것이다. 정치투쟁이란 피를 보자는게 목적이니 우선 마음이 독해야하거니와 손이 매워야 했다. 때로는 선한모양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악하게 보이기도해야 했다. 이럴때는 도덕표준이란건 아예없어지고마는 것이다. 

 

장국도(張國燾)의 <<나의회억>>에 보면 정곡을 찌른 묘한 말 한구절이 있다.
“정치란건 죄악으로 충만된 것, 세상에 성결한 혁명이란 없다”

 

이제는 림표 그 한 “정치가”에 대해서 정리를 내려보기로 하자. 나는 림표를 가엽게 여기면서 그의 생전의 언행들을 되새겨보게 된다. 그가 정치무대에 올랏다는건 몸이 강호에 있어도 이미 자기것이 아니여서 얼쩔수 없었다는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틀린 언행들을 용서해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어떤 언행들을 보면 력사의 정면적인 긍정을 받을 수 없는것들이기때문이다.  


모택동은 15년내에 영국을 초과하고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몽상에 잠겨 “대약진”을 설계하여 발동하고는 5억농민을 인민공사화하여 한데묶고 8천만인력을 강철생산에 내몰아 국민경제에 엄중한 실조를 빚어냈던 것이다. 그런데도 1957년 7월 로산(盧山)회의때 모택동은 국내형세를 성적은 위대하고 문제가 적지 않으며 전도는 광명하다고 개괄했다.

그러나 팽덕회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아래에 내려가 조사해본 결과 량식이 밭에서 썩고 토법으로 제련해낸 강철은 근본 쓰지도못할 페물이였기에 가슴아파난 그는 군사가다운 배짱과 패기로 “만언의견서”를 써 올렸던 것이다. 모택동은 응당 그의 그 “만언의견서”를 참답게 받아들여야 옳았건만 그러지를 않고 그의 의견서를 반당집단선언서라 하였고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달한 총참모장 황극성대장, 중앙서기처서기 장문천, 중앙위원 주소주 등을 역시 조직이 있고 계획이 있고 준비가 있으며 목적이 있는 반당구락부라고 몰았던 것이다.

팽덕회를 림표와 비교해보면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무엇인가? 바로 군인신분으로서 정치에 개입했으니 어설픈 그것이였다. 그는 정치가의 심기를 채 리해못한채 맞다들었던 것이다. 력사가 증명하다싶히 그가 그당시 중국의 진실한 정황에 대해서, 백성의 사정에 대해서, 당과 국가에 대해서, 군대에 대해서 반영한 것은 다가 옳았다. 그는 군인다운 옳곧고 강직한 직성으로 “만언의견서”를 써올렸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한다면 괴변많고 고집스러운 정치가의 심기를 맞춰주지 않아 되려 제가 불리하게된다는것을 잊었던 것이다.

 

그러나 림표를 보면 그렇지 않았다. 림표에 관해서 쓴 책들을 보면 그가 대약진이나 총로선에 대해서 이렇쿵저렇쿵 운운한게 거의없다. 로산회의 때 팽덕회, 류소기, 하경시, 라서경, 리청천 등이 이러니저러니 반영했어도 림표는 시종 입을 다물고 제속맘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팽덕회를 향해서 위대한 모택동을 공격하지 말라고 반격하면서도 그들의 반영이 틀린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양심에 없는 거짓말은 하지않는다는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점은 또한 그가 정치에 관한것이면 위험성이 크다는것을 명백히 깨닫고있었음을 보인것이기도했다. 림표는 민간의 진면모를 모택동에게 알려준적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군사면에 들어가서는 모택동앞에서 과감히 맛설것은 맛섯던 것이다.

“그런게 아니지. 그대가 잘아는가, 아니면 내가 잘아는가? 그대는 들어서 알지만 나는 전선에서 집접겪어본거니야.” 하면서 그는 모택동의 의사에 따라 팽덕회를 미워하고 증오했으며 지어는 죽이기싶어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같은 군인이였지만 허세우(许世友)같은 사람을 보면 어떠했는가? 그는 팽덕회가 세폭의 붉은기가 잘못된것이라고 하니 팽덕회더러 입을 다물라고 욕지걸이를 했다. 그는 그러는것으로 모택동에 대한 자기의 충성심을 보여준것이다. 어쨌든 나야 배를 곯지 않으니 됐어, 백성이야 굶든 죽든 내알배가아니야식이였다. 그러나 림표는 그정도로 우매하게 노는 사람이 아니였던 것이다. 

만약 림표가 진정으로 “정치가”였다면 팽덕회가 력사상에서 모택동을 반대한 가지가지를 내놓고 라렬하면서 그것을 악행이라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림표는 그번회의때 팽덕회를 반격했길래 모택동의 눈에 들어 환심을 산 것이다. 이로보아 정치가와 맛서서는 리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있은 림표의 처세술이 팽덕회를 초과했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는 모택동에게 잘못보였다가는 자기도 팽덕회모양이 된다는것을 잘알고있었다. 그래서 정치에서 발을 빼지 못한게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어쩌면 진퇴량난이였을 수도있겠다.

림표의 정치행위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을 보면 학자마다 연구가마다 다 다르다. 어떤 학자들은 그가 문화혁명기간에 전국인민이 모택동을 신처럼 숭배하면서 하늘높이 떠받들게 만든것은 모택동이 지극히 바라는것이였길래 그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한 소행이였지 진심에서 우러난건 아니였다고 분석한다. “오칠일공정기요(五七一工程紀要)”는 모택동의 폭정(暴政)을 반대한, 문화대혁명의 반인류적인 반동성과 파궤성을 깨우쳐준 력사적인 문건이였다고 정리하면서 그것이 절대 림표의 죄로는 될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않다. 그 근거라면 지금까지도 림표가 모택동을 살해하려한 그 공정(工程)에 가담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모택동의 후계자라고 당장에까지 박아놓은 사람이 도망치다니?!

스스로 죽을 길을 걷다니?!

어떤 사람은 1971년9월13일새벽에 그의 식솔을 포함한 9명을 태운 트라이던트 항공기가 몽골의 Ondor칸에 떨어져 회멸된 이른바의 “반역사건”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모택동이 림표를 때리자고 하니 몸을 피한것이지 조국을 배반하자고한건 아니라고 분석한다. 의례 비행기안에 있어야 할 블랙박스(黑匣子)가 없어졌다. 그것이 있으면 비행기안에서 발생되였던 수수께기를 다소라도 풀수도 있으련만.  쏘련에서 가져갔다 하기도 하고, 이미 중국에 돌려주었다고도하는데 그에 대해서 답복하는 사람은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아무튼 원자탄보다 더 큰 진동을 일으킨 림표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그 가치와 의의를 다시금 규명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은 곧 모택동에 대한 신화를 여지없이 깨놓았길래 우상화가 골수에 박힌 둔감한 무지한을 내놓고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깨우치게끔 만들었다는 그것이다.
그렇고보면 림표의 죽음은 력사적인 공적으로 되지 않겠는가?!
근년에 보면 학계가 림표에 대해서 다시금 평하는 추세다. 림표에게는  죄가 없다는 글들이 적지않게 나오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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