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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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20)
2014년 03월 22일 03시 17분  조회:3280  추천:2  작성자: 김송죽
 

20. 

휴전하면서도 원쑤를 징벌할 생각만은 항시 잊지 않은 김좌진장군은 신민부가 설립된 3월에 조선총독 사이또를 암살하려했다. 그런데 폭탄과 권총을 갖고갔던 암살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신민부탄생과 동시에 2천만 조선동포들에게 통쾌감을 안겨주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말았다.

김좌진이 이같이 적 암살을 꾀하게 된 주요원인의 하나는 두해전이였던 1923년 3월, 잊지 못할 혁명동지이자 옛 광복단성원이였던 서울청년 김상옥이 생을 장렬히 끝마친 사실을 <<동아일보>>호외에서 보고나서 결심이 더 세게 된 것이다.

김상옥은 그해 1월에 폭탄으로 종로경찰서를 폭파했다. 그는 의거 5일후 은신처인 삼판통(三坂通) 고봉근의 집에서 일본경찰에게 포위당했으나 종로경찰서 유도사범 다무라 형사부장 등을 사살한 뒤 포위망을 뚫고 피신하였다. 그후 김상옥은 효제동에서 일본경찰과 교전을 전개하여 서대문경찰서 경부 아와타 등 수명을 사살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 의거의 보도를 통제하였으므로 두달후에야 세상사람은 알수 있게 되었다.

<<용감한 사람이다! 남은 혼자서도 그같이 해제끼는데 나는 큰 싸움만 기다리고 앉아있어서야 되겠냐.>>

이러면서 김좌진은 사이또를 암살할 그번의 행동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것이 실패하자 김좌진은 달리 조선진출을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해림에서 요리간을 차린 염봉기란 작자가 어린 소녀들을 유괴하고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자는 이미 동포소녀 32명이나 유괴하여다 중국인의 유곽과 술집에다 팔아먹은바있는 패덕한이였다.

<<돈에 눈 어두워 아무런 막짓이나 다하는 망나니놈을 살려둬?>>

김장군은 격분했다. 여직 미처 시간이 돌지 못해 방관하고있었더니 독립군을 아주 무능하게 여기는것만같아서 참을수 없었다. 그따위 패덕한을, 제 민족도 모르고 량심을 파는 그따위 패덕한을, 나약한 동포소녀나 팔아서 제 향락을 채우는 그따위 인간망종을 그냥놔두고서야 신민부는 누구를 위해 필요하단말인가?

김좌진은 당장 염봉기와 그자의 패거리 둘을 잡아다 처단해버리고 팔려갔던 소녀들을 몽땅 해방시켰다.

이 일이 해림은 물론 온 북만을 들썽케했다.

이일이 있은지 얼마안되여 참의부(參議府)의 군간부 29명이 지나간 3월 16일 집안현 고마령(古馬嶺)산곡에서 국내잠입작전회의를 하다가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일본경찰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후 참의부는 의연히 마비상태에서 헤여나지 못하고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게 다 변절자 밀정놈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살려둘수없는 독충들!>>

김좌진은 이렇게 윽벼르면서 지난해, 즉 1924년겨울 참의부의 잠의장 겸 제1중대장이였던 채찬(백광운)이 살해되였던 일을 상기했다. 채찬은 함께 지낸적이 있었던 통의부의 유격대 문학빈 휘하 백병준, 백세우(별명 변만리, 통의부소대장) 등에게 목숨을 잃었다.

독립군내에서도 그같이 골육상잔이니 과연 한심한 일이였다.

<<왜놈손에 죽고 제 사람의 손에 죽고.... 왜 우리 독립군진영은 이리도 잔약문란하고 험상할가!>>

애초에 통의부내부에서의 불화와 대립은 광복후에 수립될 민족국가의 형태와 리념문제를 놓고 생겼다. 그래서 통의부는 의군부니 참의부니 해서 세 개 패로 갈라지고만것이다.

우선 해야 할 독립혁명부터 승리하게끔 하고 볼판이지 지금부터 뒤에 해도 될 일을 놓고 옥신각신 아귀다툼하고 지어는 류혈투쟁까지 하니 역겨운일이 아닌가. 김좌진은 실제일을 못해내면서 말공부질이나 하는 따위의 독립운동가들을 경멸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진영이 그런자들의 지배하에만 그냥 들어있다면 나중에는 무슨꼴이 되겠는가.)

김좌진은 걱정했다.

배두산(裵斗山)이 신민부의 실태에 대해 탐지한다는 반영이 들어왔다. 배두산역시 시초에는 독립운동자로 나타났건만 지금은 해림조선인회 회장으로 있는것이다. 해림에서 첩을 얻어 향락을 누리고있는데 그것이 죄될건 없지만 친일주구로 되었으니 문제였다. 이자는 아마 할빈의 왜놈령사관을 뒷심으로 믿고 독립군을 보고도 기가 죽지 않은 모양이였다.

신민부에서는 김규식에게 임무를 주어 반달동안 그에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하게끔 했다. 해림, 팔리강자, 고령자 등 곳에서 세차례나 그의 문제를 놓고 희의가 있었다. 될수있는 한 그의 립장을 돌려세워보자는 뜻도 있었건만 수차 사람을 띄워 불렀어도 배두산은 줄곧 응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신민부는 반복적인 조사와 연구 끝에 죄증이 충분하니 그를 공심하기로 결정했다.

김좌진은 문우천을 뒤이어서 별동대 대장이 된 황덕환에게 그를 체포하라 지시했다.

황덕환은 즉시 대원들을 거느리고 떠났다.

이때 배두산은 해림에 있지 않고 해림서남켠의 오두(敖頭)내가에서 낚시질을 하고있었다. 그의 가까이에 낚시군 몇이 더 있고 빨래하는 성이 남씨인 조선녀인과 며느리를 찾으러 나간 그녀의 시어머니가 있었다.

별동대원 여럿갔는데도 배두산은 태연스레 낙시질을 하고있었다.

<<이자식아, 나오라!>>

이켠에서 격하게 다시불렀건만 의연히 요지부동이였다.

그러자 화가 동한 젊은 별동대원이 그만 참지 못하고 총을 두방 갈겨 그자를 쓸어눕히고말았다. 배두산은 이렇게 처단되였다.

<<왜 거기서 죽여? 붙잡아다 반성시키고 죽여야지.>>

그때의 광경에 대하여 보고를 듣고난 김좌진은 그저 이 한마디로써 성급했던 별동대원을 꾸짓고말았다.

때는 1925년 9월이였다.

이 일이 있은후 신민부의 별동대는 역시 일제의 앞잡이로 동포들에게 많은 해독을 끼친 할빈조선인회 회장 정모를 축출코저 할빈에 출동하여 그자에게 반역자의 응징을 경고했다. 결과 정모 등은 겁을 집어먹고 서둘러 가족을 데리고 조선으로 내뺐다. 배두산의 죽음과 정모의 도주는 모든 친일파와 주구들의 가슴을 써늘케 해놓았다. 겁을 집어먹은 다른곳 조선인회의 책임자들은 그 어느때든 자기도 독립군손에 그같은 끝장을 볼것만같아 두려워하면서 책임을 그만두거나 아니면 슬그머니 솔가도주를 해버렸다. 한편 멋모르고 그런 조직에 들었던 사람들은 자기가 나쁜짓을 한적도 없지만 자기가 그런 조직에 가입한 자체가 곧바로 배족적인 행위였다는것을 깨닫고는 주동적으로 사죄하거나 뒷일이 무서워 나와버렸다. 그래서 여지껏 친일사상을 고취해왔고 항일구국사상을 마비시켰을분만아니라 무각성한 사람을 꼬드겨 독립군을 혐오하고 반대하게했던 조선인회들은 여기 중동로일대에서 차츰 좌취를 감추거나 실력을 잃었다.

할빈의 일본령사관에서 이제 다시 저희들 주구조직을 부활시킬것이다. 김좌진은 그런다해도 신민부의 통치권내에 있는 친일조직은 그 생존이 무의미해지게 만들고 친일분자는 깨끗이 숙청해버리리라 작심했다.

그런데 인제는 당지의 중국 군경이 독립운동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해 1925년 11월하순 어느날 밤, 신민부의 보안대숙소 겸 사무실로 사용되고있는 류운초(柳雲樵)의 집에서 보안대 대장 문동봉을 비롯한 림강(林崗), 리강훈(李康勛) 등 젊은대원 8명이 회의를 하다가 녕안군경 수십명의 돌연습격을 받아 모두 체포되여 녕안감옥에 갇히우고말았다. 다행히 권총 몇자루만 압수당하고 기밀문건들은 류운초부인이 감쪽같이 뒤문으로 빼돌리였다.

할빈일본령사관에서는 체포된 독립투사들을 매수하려고 온갖 책동을 다했다. 그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날이면 볼장은 다보는지라 신민부측에서는 자기의 사람을 빼내오기 위해서 박남파(朴南坡)와 조성환을 내놓아 주구배의 무고만 믿고 남의 나라 독립투사를 함부로 가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중국중앙정부에 항의를 제기하게했다. 했지만 허사였다.

어리석은 중국관료들은 언론계의 항의와 비난을 받고서야 6개월만에 강금했던 이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신갑수(申甲洙)와 박순보(朴順甫) 두 청년은 병에 걸려 억울하게 옥사하고말았다.

이무렵 김좌진의 가정은 녕안에 있었는데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있는 처 오씨의 궁색함은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남편이 근본 집살림을 돌볼 겨를이 없다보니 오씨는 헝겊신을 지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형편이였다. 너무도 곱게 자라난 량방의 딸이 그렇게 살아가노라니 오죽지겨웠으랴. 게다가 딸 옥남(玉南)이마저 불치의 병에 걸려 앓고잇으니 더욱 말이 아니였다. 그것이 보기가 너무도 안되여 그래도 권화산(權華山)로인이 가끔 들릴때마다 얼마간식 돈을 주어 돕군했다.

어느날 감옥을 나온 24살의 리강훈이 중국사람 4명을 고용하여 담가로 옥남이를 메여다 목단강역 부근 동포부락에 있는 김좌진한테로 가져와 로씨야인의 병원에서 병을 보게끔하려 했다. 그의 행실이 기특해서 모두 칭찬했고 오석 김혁은 그의 호를 청뢰(靑雷)라 지어주기까지 했다. 옥남이는 이틑날 죽고말았다....

 

한데 3부는 각기 자기 지반을 닦는데만 급급해한다. 자기 중심의 군웅할거, 배타심으로 남을 깔보고 소닭보듯함을 보자 김좌진은 독립운동진영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러던차 어느날 김혁(金赫)이 사관생들의 형편을 알아보러 십리평에 왔다가 거기에 있는 김좌진을 보고 조성환이 여러 독립단체의 단합을 목적해 신민부를 떠났느라면서 그의 처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김좌진은 같은 대종교도이며 일찍이 신민회의 창시자였고 일본총리대신 가쯔라 다로(桂太郞)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제주도에서 류배살이를 했으며 석방후에는 중국에 다시건너와 림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군무차장을 지내다 만주에 와 함께 손잡고 싸웠던 조성환을 퍽 신뢰하고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생께서 그일로 떠났다면 그건 잘하신거라고 봅니다. 단합해야지요. 단합은 약자의 무기이니까요.>>

김혁은 김좌진의 태도가 이러하니 자기와 뜻이 상통하다면서 기쁨을 표시했다. 그는 호가 오석(烏石)이고 룡인(룡仁)출생인데 독립운동에 대단한 열정가였고 북만에서 군중기초가 있어 밀산, 목릉, 동녕, 녕안일대에 흩어져있는 항일무장인원 360명을 새로 묶어냄으로하여 조직수완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신민부의 기관지 <<신민보>>는 멀지 않은 대안이 우리의 심령속에 있나니 성품을 수양하고 닦으라. 인간의 암흑을 깨뜨려버리고 리상의 경지에 이를것이니 단군의 후손들은 의지와 행동을 한데 이으라는 내용의 사설을 실어서 널리 배포했다.

한편 일제는 만주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일제는 전해(1925년)의 6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쯔야(三矢)를 시켜 봉청성 경찰청장 우진(于珍)을 매수해 이른바 <<미쯔야협정>>이라는것을 맺게 했다. 그것은 중국관헌이 조선반일운동자를 체포하여 일본경찰에 인도할것과 조선인반일단체의 해산, 무기몰수, 호상간의 정보교환 등을 규정한 비밀협정이였다.

이무렵 동삼성은 물론 중국전지역에 걸쳐 독립운동자에 대한 탄압이 심해가고있었다.

이런판에 1926년의 4월에 들어와서 항일단체인 신민부는 경을 치르었다. 일본의 할빈령사관에서 김일성(金一星)이와 강경애(姜敬愛)가 써서 <<신민보>>에 낸 글이 반일적이라고 트집잡고 흑륭진(黑隆鎭)에 있던 신민부의 기관보를 돌연습격하여 선전부위원장 허성묵(許聖黙)과 경사국장 리광진(李光鎭)을 체포해갔다. 그리하여 전해의 4월 1일에 창간호를 낸 이래 동포계몽과 구국교양을 활발히 해오던 이 신문은 창간 한돐만에 활동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강경애는 소설을 쓰는 녀 초학자로 알려지고있었다. 그리고 김일성(본명은 김봉환)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사람이였다. 그둘은 동거했다.

이때는 공산주의계렬의 내부도 자못 복잡했다.

1919년 9월 5일 연해주의 하바롭스크에서 김철훈을 의장으로 하는 전로한인공산당(全俄韓人共産黨ㅡ후에는 전로고려공산당으로 개칭)이 건립되였다. 이 당은 차츰 요하, 녕고탑, 돈화 등지에 당조직을 내오고 당원을 적극발전시키였다. 그러면서 연해주에서 <<선봉>>, <<동아공산신문>>, <<신세계>>, <<赤旗>>, <<로동세계>> 등의 신문, 잡지와 소책자들을 출판하여 만주각지에 광범히 전파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있었다.

한편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회는 1925년 4월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얻어 만주에다 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회만주총국을 설립하고 그 아래에다 북만, 동만, 남만 3개 구역국(局)을 두어 농민들을 조직하고 청년들을 령도하며 민주단체들을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해 싸울 임무를 주었다. 그해 조선공산당북만구역국(朝鮮共産黨北滿區域局)의 령도밑에 녕안일대에는 대진청년회(大震靑年會)와 중서청년련맹(中西靑年聯盟)이 결성되여 자체로 <<로력청년(勞力靑年)>>간물까지 꾸리였다.

단른 한편 1921년 1월에 조직되였던 서울청년계통의 한 종파집단으로서 주로 화요파와 대립되였던 서울파가 다시 신구 량파로 갈라진후 서울신파의 주동분자들은 이해(1926년)에 만주로 밀려들어와 그 전해에 일본 도꾜에서 조직된 초기 맑스ㅡ레닌주의사상단체였던 일월회파 및 만주총국과 결탁하여 4월에 레닌주의자련맹이라는 그루빠를 만들고 자칭 엠엘파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엠엘파를 반대하기 위하여 서울구파와 상해파가 협력하여 서상파를 만들어냈다.

한즉 만주의 공산진영역시 여러 종파집단으로 하여 사분오렬되여있었다.

대동단결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5월에 중동로연선의 여러 청년단체들은 대표를 아성현(阿城縣)에 보내여 그곳에서 대표련석회의를 열어 북만조선인청년총련맹(北滿朝鮮人靑年總聯盟)을 설립하고 <<農軍>>이란 간행물을 꾸리여 각지의 청년들에게 무산계급리익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라고 호소했다.

이들도 자기의 조직을 적극 발전시키는 한편 청년들을 조직하여 야학교를 꾸리고 운동회를 열고 문예공연을 하는 등 형식으로 군중들에게 반제, 반봉건의 혁명사상을 선전하고 청년과 군중들을 동원해서 혁명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즈음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끌려갔던 김봉환이 얼마지나지 않아 무사히 풀려나온것이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여 류치장에 갇혔던 독립군이 그가 할빈일본령사관의 고등경찰 마쯔시마와 조용히 마주앉아 담화하는것을 보고 소식을 밖에 내보내여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자식이 왜 무사히나왔어?>>

<<그자식이 자수하고 풀려나온거나 아니여?>>

모두들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김좌진역시 그에 대해 의문을 품고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 김혁, 정신 등을 비옷한 여러 수뇌들과 함께 신민부의 사업을 계속 한걸음도 처지지 않게끔 하려했다.

본래의 계획은 제1단계로 녕안지방을 비롯한 주하, 목릉, 밀산, 요하 등 지역에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각 지방마다 총판을 두어 동포의 자치를 실시하는것이고 제2단계는 액목, 돈화, 안도 등 지방의 행정조직을 정비하는 것이였다.

그런데 신민부는 제1단계의 사업부터 뜻대로되지 않았다. 기대와는 달리 목릉과 밀산이 신민부에 가담하려하지 않았다. 목릉의 실업가인 황공삼(黃公三 )이나 밀산지방에서는 소위 백통사라 불리는 백상준(白尙準)같은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민중은 위협에 눌려 민족진영기관에 복종할 뿐 민심은 벌써 재래와같은 방법의 운동에는 내심 반발을 하고있다는것이였다. 한즉 그것은 차라리 신민부같은 조직을 해산하라는 뜻이였다. 목릉은 사실상 신민부를 배출시킨 곳이건만 이같이 경원하는 태도를 보일때는 민족진영자체에 치명적인 결함과 이률배반적 모순이 내포되여있음을 설명하는것이였다.

신민부의 수령들은 그것의 후과에 대해 미처 감각못했다.

그럼에도 신민부는 총판소재지가 15개소, 자체의 행정관내를 중동선을 중심으로 길이가 장춘에서 구참(九站)까지, 넓이는 백두산에서 흑룡강까지 미치는 지역에로 확대시켰다. 신민부는 장백산삼림지대를 후보기지로 결정하고 리광훈을 비서로, 보신용 권총 등으로 경무장을 한 수십명의 부대를 개척대로 보내였다. 녕고탑을 떠난 그들은 토비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면하기 위해 각별히 조심하면서 행군하여 700리 머나먼 백두산밑 산악지대이며 목적지인 안도현 등지에 이르러 그곳에다 마침내 신민부산하조직을 세웠다.

김좌진은 동포들이 갈망하는 교육사업을 무장투쟁과 마찬가지로 몹시 중히 여기였다. 그것은 그역시 다른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방법으로써만이 동포들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얻을수 있다고 여기고있기 때문이였다. 교육활동은 동포들, 특히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주고 민족주의사상을 심어주는 좋은 기회였다.

 

1910년좌우부터 벌써 여기 중동로일대의 석두하자, 녕고탑, 목릉의 소석두하자, 일면파, 해림, 마도석, 팔리강자, 목단강, 밀산, 소수분하, 수분하, 한홀하 등지에는 명칭이 같지 않은 동포학교들이 서고 반일사상이 있는 애국지사들이 학생들에게 글을 배워주면서 반일민족주의정신을 키워왔다.

그런데 그런 학교들은 규모가 아주 작거니와 학생수도 얼마안되였다.

신민부는 1925년도 10월총회의 결의대로 100호이상의 마을은 물론 30호동네까지도 사립학교를 세우기 위해서 분투했다. 그러면서 성인교육을 위한 로동강습반과 보통강습반도 조직했다. 교육부위원장의 책임하에 설립된 교재편찬위원회에서는 그사이 다그쳐 각종 교재를 편찬, 사용케했다.

채택된 교재로는 韓文(국어), 歷史(조선력사), 地誌(세계지리), 大한地誌(조선지리), 算術, 作文, 聖書, 漢文, 理科, 論理, 化學, 物理, 圖畵, 體育, 音樂이였는데 여기서 聖書는 대종교의 경전으로서 修身課를 대체하는, 민족의 넋을 심어주고 애국사상을 길러주는 중요한 과목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관리방법이 제정되여 각 학교에서는 건립되는 족족 기틀이 잡혀가게되였다.

이해의 10월 16일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가 창립되여 그 소식이 북만주에까지 날아왔다.

유일당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움직임은 그 전해인 1925년부터 있었다. 림시정부는 리승만대통령의 전횡을 탄핵하고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였는데 이때의 개헌에서는 헌법의 전문(前文)을 생략하였으며 제2조 단서에서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에는 최고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미 림시정부는 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고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정당의 필요성은 1926년 7월에 발표된 림정의 시정방침에서도 잘 나타났다.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洪震)은 세가지 내용의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첫째, 비타협적인 자주독립운동을 진작(振作)할것. 둘째, 전민족대당체(全民族大黨體)를 건립할것, 셋째, 각 피압박민족과 대련맹을 체결할것. 그중에서도 두 번째로 전민족대당체의 건립을 제창한것이 바로 민족유일당운동의 효시였다. 홍진은 이같이 민족의 대단결을 재차호소하고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의 발기를 위해 국무령을 사퇴했던 것이다.

한편 림시정부에서의 정당조직의 움직임과는 달리 1926년 8,9월경 북경의 독립운동계에서는 분렬되여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대동단결시키기 위한 새로운 방략이 모색되였으니 즉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원세훈과 함께 대독립당(大獨立黨)을 결성하고저 하였던 것이다. 당시 원세훈은 서울에서 리조헌으로부터 250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송금받아 송호, 황일사 등과 함께 로씨야로 들어가려하였는데 그러할 경우 독립당을 조직하여 독립당의 명의로서 로씨야에 가면 유리할것이라는 판단하에 안창호와 원세훈 등은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를 창립한 것이다.

이 촉성회의 선언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있었다.

 

<<동일한 목적과 동일한 성공을 위해 운동하고 투쟁하는 혁명자들은 반드시 하나의 기치아래 모여 하나의 호령아래 단결해야만 비로서 상당한 효과를 거둘수있다는 것은 말할필요도 없다. 보라! 귀족의 특권과 부자의 전횡을 전복하고 천자와 빈자의 복리를 도모하는 로씨야의 무산혁명자는 계급적으로 유일한 공산당의 기치아래 모여 밖으로는 침략렬강의 세력을 구축하고 안으로는 봉건의 유습을 타파한다. 4억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고하는 중국의 국민혁명자는 국민적으로 국민당의 기치아래 모여 밖으로는 이민족의 주구와 안으로는 적의 매와 개같은 자치파와 함께 혈투한다. 아일랜드의혁명자는 민족적으로 주의, 강령에 기초하여 유일한 시시리당에 모였다. 1계급, 1국민, 1민족의 행복과 자유를 생각하는 동서의 혁명자들이 각각 일정한 주의, 강령과 훈련규률의 아래 1당으로 합한것이다. 일층 전세계인류의 행복을 위해 세계적혁명을 완성하려는것 또한 같은 뜻으로 세계1당의 원칙의 밑에서 그의 총참모부이며 대본영인 제3국제당의 붉은기발아래 모여든것은 누구나 잘아는바가 아닌가. 그러므로 어느 혁명에 있어서도 이 사상의 필연적과정과 원칙에 위배하여 성공을 희망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기관없이 운전할수 없는것이며 건축의 도안과 지도 없이 대형건물을 지을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생략)

청한다! 일반동지는 깊이 량해하라.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라.

한국의 절대독립을 주장하라.

한국혁명동지는 당적으로 결합하라.

민족혁명의 유일전선을 만들어라.

전세계 피압박민중은 단결하라.  ....

 

북경촉성회의 성원은 모두 23명이고 집행위원은 7명인데 그가운데 신민부를 떠나간 조성환도 들어있었다.

그들은 이같이 대독립당북경촉성회를 발기하고 각지에 상호련락하여 속히 유일당을 조직하여 민족의 총력량을 발휘하자고 제의하고있었다.

이같이 형세는 좋아지는듯한데 이해의 12월에 이르러 신민부의 모연대장(募捐隊長) 황일초를 비롯해 그의 대원 최진만, 채모우, 리영초, 박병찬 등이 할빈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여 황일초는 사형당하였고 그 나머지 인원은 7~20년의 장기복역을 언도받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큰 불안에 잡기였는데 설상가상으로 새해인 1927년 2월에는 석두하자에 옮겨와있는 신민부의 정부가 일본경찰과 동북군벌 한 개 중대의 돌연습격을 받았다. 그래서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비롯하여 경리부위원장 유정근, 본부직원 김윤희, 박경순, 한경춘, 남충희, 리종순, 리정화, 남극 등 중앙간부 다수가 체포되여 조선으로 송치되였다.

너무나도 혹독한 타격이였다!

간악한 일제는 조선의 독립혁명을 압살하려고 날뛰였고 주대없는 동북군벌은 그자들의 사촉을 받고 독립군을 계속 위협하고있었다.

김좌진은 그냥 참을수 없어서 즉시 교제능력있고 구변좋은 황학수(黃學秀)를 중국도대 왕상덕(王相德)에게 보내였다.

황학수는 왕상덕을 만나 인사를 차리고나서 질문을 들이댔다.

<<우리는 힘을 길러 본국으로 쳐들어갈 준비를 하고있을 뿐 당신네 나라에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는데 왜 독립군을 잡으려하오?>>

이에 왕상덕은 일본의 압력이 심함을 속이지 않았다. 이에 황학수는 예로부터 중국과 조선은 순치의 관계라고 손중산선생도 여러번이나 강조해 말했다는것을 이야기하고는 일본의 침략본성을 조리있게 말해서 그를 깨닫게 했다. 그리고는 나중에 모르는체 눈을 감아달라고 부탁을 남기고 돌아왔다.

김좌진은 석두하자사건이 있은 2월에 장차 국내로 진입하여 왜놈과 한바탕 싸워보려는 생각에서 작전지도를 작성하고 민중공작을 하며 일본부대와 경찰의 주둔, 배치 등을 조사하려고했다. 그는 즉시 트수공작대를 조직했다. 이 특수공작대는 3개로선을 따라서 파견되였다.

제1로선은 압록강을 건너서 강계를 경유하여 평양까지. 제2로선은 백두산록으로부터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3도의 산맥을 타고 전라도의 지리산까지. 제3로선은 두만강을 건너 경성을 경유하여 북청까지 가도록 하였다.

특수공작대는 자원한 장교중에서 특별히 선정된 리동삼외의 3명이였는데 그들은 자기 로선에 따라 각각 출동하여 중도에 갖은 고통과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완수하고는 훗날 무사히 귀대했다. 한데 신민부의 수령급인물들은 의연히 위협을 받고있었다. 1927년 10월 30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哈爾賓 日本警察官 新民府員 다수검거. 首領 金佐鎭 등 搜索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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