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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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전기 설한 (22)
2014년 03월 23일 22시 14분  조회:2280  추천:1  작성자: 김송죽
 

22.

신민부는 8월 1일, 해림에서 북만한인교육대회(北滿韓人敎育大會)를 열고 독립혁명사상을 제2의 국민인 초등학생들에게 주입하여 장래에 대기하도록 결의지었다. 그리고 그 실천적인 행동으로써 지역을 넓히여 주하, 요하, 목릉, 밀산, 돈화 등 15개의 지역에 적어도 50여개소의 학교를 세워서 잘 운영해나가도록 하였다.

한편 조국독립운동에 필요한 재만조선동포들의 모든 력량을 하나로 집결하여 일제와 항전하기 위해서는 남북만주에서 성립하여 활동하고있는 참의, 정의, 신민 3부의 통합이 조속히 이룩되여야만 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중국국민당정부의 무기력과 동삼성의 장작림군벌이 친일적경향을 가지고있는 틈을 타서 만주침략을 한걸음 더 다그치는 한편 조선사람에 대한 탄압에 전력을 기울이고있던 터이므로 3부통합은 더욱 절실한 문제로 나서고있었다.

이같은 형편에 정의부에서는 8월에 이르러 신민부와 참의부의 대표까지 참가한 제4회 중앙위원회를 열고는 전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의 유일당운동을 전개하며 이를 조속히 추진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결의를 채택했다.

 

1. 만주운동통일선을 위하여 신민부, 참의부와의 련합을 적극적으로 도모할것.

2. 전민족운동통일선을 위하여 유일당촉성을 준비할것.

 

만주에서 이같이 각 부(府)에서 자기 관할내에 들어있는 조선동포들의 자치와 계몽사업, 산업발전 등을 추진하는 한편 3부의 통합을 시도하는 유일당운동을 일으키고있을 때 관내에서는 여러 민족주의단체와 공산당계렬의 다른 한 형의 독립운동단체였던 무정부주의 그루빠가 자기식의 리론에 근거하여 활약하고있었다.

세해전이던 1924년 4월에 리회영, 리을규, 정형섭, 백정기 등은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정의공보(正義公報)>>를 간행하여 흥사단(興士團)과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를 비판하였으며 아울러 쏘련을 전제주의국가라고 강력히 비난한바있다. 그러다가 그들은 이해에 즉, 1927년에는 상해에서 로동대학을 설립하여 무정부주의본거지로 하면서 무려 500여명에 달하는 무정부주의운동가들을 양성하고있었다. 그리고 상해남쪽 복건성 천주(泉州)에다 민단훈련소까지 설립하여 역시 적잖은 무정부주의운동가들을 양성하고있었다. 민단훈련소의 중심인물은 천주일대의 실제적지배자였던 진망산이였으며 무정부자련맹의 골간이였던 리을규와 리정규도 거기에 참가하여 활동하고있었다.

9월의 어느날, 김좌진은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에서 간행하는 기관지 <<독립당촉성보>>를 받았다. 기사에는 올 4월달에 조직된 유일당상해촉성회가 청년운동을 통일할 사업들을 적극 추진하고있다는 내용의 글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만주에 있는 청년단체들도 이제 활동이 활발해질것만은 사실이다.

김좌진은 이 기회에 적기단을 비롯한 공산당계렬의 화요파와 엠엘파가 배타성을 버리고 좀 온화해져 독립운동진영의 대동단결을 도모해주기를 희망했다. 그는 독립군이 중동로일대에 와 자리잡고 북만을 근거지로 하는 신민부를 세우자 지반을 누가 차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상정시키면서 대립되고있는 그들에 대해서 인상이 그닥 좋지 않았다.

한데 이에는 김좌진도 찾아봐야 할바가 있는것이다. 신민부는 창립초부터 공산당계렬, 그중에서도 특히 적기단과 모순이 심했다. 그네들하고는 시종 어울리지 못하고 적대시하는데 이 점에서 신민부측의 책임이 더 있는 것이다. 신민부의 보안대를 놓고 보면 그것이 국가형태에서는 헌병과 경찰을 합친것으로서 기관을 호위하고 밀정을 취체하며 적의 기관을 파괴하거나 주구배를 응징하는것이 사명인데 그들은 그 사명을 벗어나 자기가 투신한 기관에 복종치 않거나 사상이 다르다해서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 살상까지 하는 불민한 짓을 했던것이다.

그 장본인은 문우천(文于天)이와 같은 인간이다. 그자는 황지툰 등지에서 적기단(赤旗團)의 인원을 랍치해다가 반박, 욕질, 매질을 거리낌없이했다. 그런 악습이 신민부에서 의연히 고쳐지지 않고있었다. 그런데 그런자들이 김좌진의 사랑을 받았으니 양호유환(養虎遺患)이 될수밖에 없었다....

 

10월하순의 어느날.

긴좌진은 친히 목단강역에 가서 자기를 찾아 천만신고를 겪으면서 북만으로 들어온 재종제 시야 김종진(是也 金宗鎭)을 만났다.

당년 26살인 김종진은 무관다운 씩씩한 기백이 흐르고있었다. 1920년 4월에 서울을 탈출하여 만주로 들어왔던 그는 뜻은 있었으나 정처를 찾지 못해서 불게지주(不系之舟)의 몸으로 떠돌다가 마침내 1921년 4월에 운남으로 가 거기서 운남강무당(云南講武堂)에 입학하여 교도대 2년, 군관학교 2년 6개월의 교육과정을 밟고 1925년 4월에 졸업하였다.

김좌진은 재종제가 군사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온것이 반가왔다.

삼국지(三國志)에 보면 운남과 귀주는 남만맹획(南蠻猛獲)의 근거지라했다. 그러던것이 지금은 썩 변했다. 중국의 벽지에서도 벽지인 그곳은 옛날같이 소름끼치는 곳인것이 아니라 도리여 뜻있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끄는 곳이였다. 그것은 바로 운남성 소재지 곤명(昆明)에는 이름난 강무당이 있기때문이다. 조선인민들은 피의 교훈에서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는 길은 오로지 무장투쟁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뜻있고 포부있는 유망한 젊은이들은 마음이 그곳으로 쏠리였다. 불편한 교통, 가로놓인 천산만수, 게다가 살벌한 군벌혼전.... 난관은 첩첩했지만 일본침략자를 물리치고 민족해방을 기어히 쟁취하고야말리라는 일념을 품고 조선의 젊은이들은 만리길도 넘는 그곳으로 갔던것이다.

<<종진아, 네가 이렇게 찾아오니 반가웁구나. 그지간 너는 고생많이했을테지.>>

김좌진은 재종제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었다.

<<고생이야 형님께서 더많이 하셨지요. 만주의 독립군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혈전을 하고있다는것을 저도 들어 알았습니다만 불민한것이 인제야 이렇게 나타났으니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자기보다 13살이나 이상인 재종형의 근엄하고 축간 얼굴을 바라보고있는 김종진의 두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맺히였다. 이처럼 만나고보니 더없이 반가우면서도 모름지기 회심(悔心)도 생기였다.

운남에서 강무당을 나온지도 벌서 두해가 넘는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겪은 고생이야 이루다 말할수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늦어진 행차라 생각하니 더구나 그러했다.

김종진은 중국요로(中國要路)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있는 신규식(申圭植)의 소개로 운남에 갔었다. 신규식은 운남성독군(云南省督軍) 당계요(唐繼堯)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강무당에 받아줄것을 간원했던것이다.

워낙 중국말이 벙어리나 답지 않았던 김종진이였으니 배움에서의 고초야 더 말해 무엇하랴. 어쨌든 이젠 군사지식을 갖춘 사람이 되어왔으니 고마웠다.

김종진은 재종형의 앞에서 자기가 운남강무당을 졸업하자 그길로 인차 만주로 들어오자했으나 졸업후의 규정에 좇아 부득불 성내 각 부대에 가 3개월간 배치근무(配置勤務)를 했노라면서 자기가 운남강무당에서 사귀게 되었던 모 동창생과 함께 광주에 들려 그곳에 있는 의렬단원과 황포군관학교에서 공부하는 공산당계렬의 동포학생들을 만나보았던 일이며, 상해에 들려서는 림정의 요인들을 비롯한 여러방면의 인사들을 만나본 일이며, 남경에 들려서는 만주로 동행할 동지들을 규합하려 했으나 동조자를 겨우 한명밖에 얻지 못하면서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고 한구(漢口)로 향했던 일이며를 말했다. 종진은 그리고도 중국에서 일화배척이 심한때라 일본사람으로 오인되여 수색단에 잡히기도했고 북벌군에 들어 장교질도 했으며 혼전에 휘말려들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했다. 그러면서도 북만주의 독립운동에 참가하고저 끝끝내 찾아왔다니 과연 간단치않은 일이였다.

그래서 신민부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재종형을 만나 그간의 그리웠던 회포를 풀고는 여러날을 휴식한 김종진은 어느날 문득 찾아와 자기가 여직껏 맘먹고 설계한 것이라면서 종이 여섯장에 정성껏 꽈 박아 쓴 글을 내놓았다.

김좌진이 받아서 펼쳐보니 그것은 바로 <<만주를 근거로 한 한국독립군의 기본계획안>>이라는 제목으로 씌여진 그의 의견서였다. 백야장군은 그의 의견을 이제 세심히 읽고 검토하고 연구도 해보겠지만 우선 그가 이같이 관심하는 뜻에서 대담히 설계하는것이 대견해서 치하해주었다.

한편 조성환을 비롯하여 리범석 등 중견 몇이 빠져나감으로 해서 공백이 생긴 신민부의 지도적력량을 강화하자면 이같은 열성가를 써줘야겠다는 맘도 먹게됐다.

그때로부터 둬주일이 지난 11월중순의 어느날 저녁켠, 백야장군은 재종제 종진이와 다시만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종진이 물어왔다.

<<형님! 와보니 신민부는 활기로운것 같으면서 내부가 긴장한 감이 납니다. 어째 그렇습니까?>>

이에 김좌진은 량미간이 찌프려졌다. 온지 며칠안되는 사람이 내부의 분위기를 촉기빠르게 감촉하고있는데 대해서는 반갑지 않았다. 그래서 김좌진은 재종제보고 방금 온 주제에 이러니 저러니 간참말고 우선 푹 쉬면서 로독이나 풀라해놓고 화제를 돌려버렸다.

<<제수랑은 몸 성히 있는다냐? 장차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식솔을 여기 데려다 살림해야잖겠니.>>

<<그래얍지요.>>

종진은 대답하고나서 다시 한마디 물었다.

<<형님! 듣자니 림정은 재작년에 형님을 군무총장에 부르셨더군요. 그런데 왜 응하지 않으셨습니까?>>

<<거기보다 여기 만주가 나를 더 수요했기때문이였네라.>>

좌진은 원인을 구구히 말하고싶지 않아 그저 가볍게 한숨쉬였다.

<<혈전장인 만주를 버리고 내가 어디로 간단말인가.>>

<<형님말씀이 맞습니다. 실은 만주가 형님을 더 수요하고있지요. 실제적인 전쟁터를 놔두고 병사를 거느리는 장군이 유명무실한 정부기관에 들어앉아 자리나 지켜서야 무슨 작용있겠습니까. 그런걸 이 동생은 형님도 정치파쟁에 말려든줄로만 알았군요. 인식이 글렀댔으니 미안합니다.>>

종진의 뉘우침이였다. 사실 그는 여기로 오면서 만주의 무력투쟁을 지휘하는 이름난 장령마저 어쩌면 싸울 궁리는 하지 않고 정치와중에 몸을 잠그는걸가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좌진은 정치와중에 몸을 잠그려는 사람이 아니였다.

 

림시정부는 초창기에 련통제를 통하여 국내로부터 애국자금을 조달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하여지자 수금하는 일이 차차 어렵게 되어 재정난을 겪게되였다. 1920년에 들어 미주에 있던 리승만임시대통령은 미주지방의 자금징수를 점하고 극히 적은 액수만 상해의 림시정부에 보내게 되니 림시정부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였다. 대통령으로서 현지실정에 맞지 않는 지시를 하는 일이 많아 물의가 일고있는데다가 더욱이 1918년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한국(韓國)을 당분간 국제련맹의 위임통치하에 둘것을 청원한 사실이 있었음이 알려지자 림시정부는 물론 독립운동계에서 리승만의 지도권에 대하여 론쟁이 일기 시작하였다.

리승만대통령에 대한 이러한 불만은 마침내 1920년 5월 림시정부 차장회의(次長會議)에서의 림시대통령 불신임결의(不信任決議)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에 침체해가는 림시정부를 수합하기 위하여 림시의정원에서는 리승만에게 정부유지방안 제시와 상해로 돌아올것을 촉구하였다.

드디여 리승만이 1920년 12월 8일 상해에 도착하자 상해의 인사들은 큰 기대속에 리승만을 열열히 환영하였다. 그러나 리승만의 현상유지론 주장으로 정국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못하였다. 여기서 독립운동로선상의 문제와 국무총리 리동휘가 몰고온 사상상(思想上)의 문제까지 겹쳐 림시정부는 매우 혼란스런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원래 독립운동로선의 문제는 미주교포사회에서만도 이미 세 개파로 갈라져있었다. 외교로선을 중시하는 리승만로선과 무력에 의한 독립전쟁로선을 주장하는 박용만로선, 민족적자각에 의한 실력배양을 주장하는 안창호로선으로 갈라졌으며 특히 리승만과 박용만사이에는 미주에서 법정투쟁과 란투극까지 벌릴 정도로 감정대립이 깊었다.

이것은 상해의 림시정부로 확대되였다. 박용만은 리승만이 대통령의 지위에 그냥 앉아있거니와 림시정부내에서도 리승만파가 우세하자 외무총장취임을 거부해버리고 같은 무장투쟁로선을 주장하는 만주의 독립군단체들과 합세하여 반림시정부(反臨時政府)세력을 형성하였다. 신채호같은 민족주의자도 리승만의 위임통치건의에 반발하여 정부강화운동에서 탈퇴하였으며 리동휘 역시 국무총리취임을 한동안 거부했었다. 즉 완전독립과 절대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세력들은 왜교로선을 주장하던 세력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있었다.

물론 외교로선을 강조하는 인사들이 무장투쟁이나 실력배양을 무시하는것은 아니며 무장투쟁을 중시하는 인사들이 외교와 실력양성의 중요성을 간과하는것도 아니였다. 그리고 실력양성을 주장하던 인사들이 외교나 무장투쟁을 배척한것도 물론 아니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독립운동로선의 대립이 격화된데는 그 배후에 지방적 파벌중심의 붕당형성(朋黨形成)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평안도출신의 인사들은 대체로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을 지지하였으며 기호(機湖)지방출신의 인사들은 리승만의 외교론을 내세웠고 함경도출신의 인사들은 리동휘 무장투쟁론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국무총리 리동휘의 사상적동향이 문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1919년 11월에 국무총리에 취임한 리동휘는 쏘련정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으로 60만루불을 받고 그중 40만루불을 자기의 세력기반인 공산주의자구룹의 활동경비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리동휘의 위신도 크게 떨어지고 정국은 몹시 소란하게 되어버렸다. 나중에 리동휘는 스스로 국무총리직을 사퇴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리승만은 효과적조취를 취하지 않은채 자신도 사임의사를 표시했다가 번복하는 등 소란을 부채질했다. 한때 대통령에게 사퇴를 종용했던 안창호, 김규식(신민부 규식이 아님) 등이 내각에서 물러나자 림시정부의 혼란은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번져졌다.

정부에서 물러난 안창호가 려운형, 원세후, 김규식 등과 더불어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을 전개하여 림시정부에 대한 공격을 하고있을 때인 1921년 5월 20일 리승만은 태평양회의를 리유로 상해를 떠났다.

림시정부의 타도 혹은 개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북경과 만주에서 적극적으로 진행되자 중국본토의 독립운동계는 림시정부를 중심으로 대동단결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측과 림시정부의 개조 혹은 타도를 주장하는 측으로 분렬되여 상호비난을 일삼게 되었다.

림시정부는 이렇게 혼미가 계속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1925년 3월 13일 림시정원에서 리승만 림시대통령탄핵안을 상정하여 통과시키고 박은식을 후임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대한민국림시정부사>> 추헌수)

 

그러나 적잖은 혼란이 야기되였고 리동녕의 국무총리사임문제로 우여곡절의 풍파가 많았다. 이런것은 제도의 탓도 아니건만 림시정부의 대통령을 국무령이라 개정하고 리상룡을 국무령으로 선출하고 리척, 김동삼, 오동진, 윤세용과 더불어 김좌진을 국무위원으로 선출했던 것이다. 그랬다가 전체가 취임을 거부하니 리상룡 등을 해면하고 량기택을 국무령으로 선출하였는데 그도 역시 취임을 거부했다. 그러니 이때의 림시정부는 모양그대로 내부가 통일되지 않고 산산이 쪼각나서 빈껍데기뿐이였다.

그러다가 림시정부는 1926년에야 실질적인 체제정비를 이루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운동진영의 통일을 달성하고 떨어진 림정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민족련합전선론을 제기하였다. 이는 전민족일당조직운동으로 구체화되기에 이른것이다.

한편 중앙간부 다수를 잃은후에도 골간력량이 여럿이나 빠져나감으로하여 일시 큰 시련에 빠졌던 신민부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부서를 재정비하여 보다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활동을 전개코저하였다.

 

재정비된 부서임원은 다음과 같다.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 사 부 위 원 장:  김좌진

참 모 부 위 원 장:  황학수

경 리 부 위 원 장:  정  신

보 안 제1대 대 장:  백종렬

보 안 제2대 대 장:  오상세

보 안 제3대 대 장:  장종철

보 안 제4대 대 장:  주  혁

보 안 제5대 대 장:  김종진

구사부위원:  김종진,조각산,리종수, 민 무.       

별동대부관:  림  강

  

이럴즈음에 북경에서 활동하고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제의에 의하여 중국각지의 유일당대표들이 모이는 련석회의가 대표들의 참석이 늦어지고 또한 민족, 공산 두파의 대립으로 한달이나 연기되였다가 11월 7일에야 준비회의를 개최하고 22일에 본회의를 열어 선언서를 내왔다.

 

<<전민족의 생사를 가늠하는 우리의 독립운동은 지금 어떠한 현실에 놓여있는가. 2000년래의 입구(入寇)와 300년전의 원쑤와 18년간의 치욕은 말할것도 없고 현재 및 장래에 있어 우리들의 생존조건을 아무나 없이 박탈하는 저 왜적에 대하여 사활(死活)을 결단하는 이 독립운동이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말할수 없는 전율속에 떨고있다는 사실은 위미부진(萎靡不振)한 상태에 있다고 말할수 있다.>>

 

이상은 선언서의 서두였다. 선언서는 고대와 중세의 왜구(倭寇), 조선시대의 임란(壬亂),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910년의 한국(韓國)강점 등 일제의 만행을 시대순으로 라렬한 뒤 현재 독립운동계가 당면해있는 현상을 지적하고 앞으로 독립운동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민족유일당이 당면 과제로서 실천해야 할것을 천명하였는데 첫째, 조선의 유일한 독립당성립을 촉성할 각지의 촉성회조직준비회 성립에 노력할것. 둘째, 조선독립에 필요한 전민족적 일체혁명력량을 총집중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할것. 셋째, 현재의 상황과 세계정세를 감안한 독립당조직계획과 이에 따른 연구를 하여 강령을 결의하고 만주지역의 유일당촉성을 위해 대표를 상해와 북경에서 각각 1명씩 파견할것 등이였다.

이러한 결의에 근거하여 만주지역과 조선국내지역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였다.

12월에 들어서자 정의부의 김동삼의 주장으로 되어있는 시사연구회는 반석에서 남만혁명동지련석회의를 열었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해 즉 1928년 3월 1일에 유일당촉성회의를 개회하고저 재만 37개 독립운동단체에 대표를 파견하라는 통지서를 보냈다.

김좌진은 그 통지서를 받고 말했다.

<<잘하는군! 주의여하를 막론하고 단합된 통일로선을 결정해야지!>>

 

그런데 신민부는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성원들이 군정파와 민정파로 분렬되고말았다. 군정파는 북로군정서에서 백야장군과 함께 무력투쟁을 해왔던 무관학교출신들이였고 민정파는 최호(崔灝)를 중심으로해서 민중을 위한 자치활동에 주로 관여해오던 인물들이였다. 알륵의 시발점은 신민부가 무력투쟁을 우선해야하는가 아니면 교육, 산업을 우선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을 놓고 생긴건데 대립이 첨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만 나간다면 이 집단은 약화될 뿐 아무런 좋은 점도 없을것이다.

김좌진은 골치를 앓았다. 그는 교육과 산업을 절대로 홀시해온건 아니였다. 그것을 홀시하고서야 독립군의 기지를 어떻게 건설하는가. 김좌진은 민정파가 자기를 싸움만하려하고 민중의 형편을 도외시하고있다는데 대해서는 접수할수 없었다.

김좌진은 신민부를 소원(疏遠)하고 혐의하는 동포들을 설득하고 정세변화에 따르는 실태를 조사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돌아다닐형편은 못되였다. 그래서 생각하던 끝에 그간 사업지점을 해림에 정하고있는 재종제 김종진을 단련도 시킬겸 한번 자기의 대변자로 삼아서 지방순회를 내보내기로 맘먹었다.

백야는 그가 떠나면 련게하게 될 각지 중심인물들을 일일이 알려주는 한편 각 지방의 지리와 기타 실정을 예비적으로 알아두게끔 하기 위해서 그 방면에 익숙한 오지영(吳智泳), 권화산(權華山)과 리붕해(李鵬海) 등 로장들에게 위탁하여 매일 그를 가르치도록했다.

그렇게 해서 준비가 비슷하게 되었다고 느껴지자 김종진을 심웅(沈雄), 승규(勝圭)라 이름을 고쳐쓰기로하고 양역설이 지나자 출발시켰다. 로정이 길었다. 북만주는 물론이고 멀리 백두산기슭의 안도, 장백, 무송을 돌고 몽강, 화전을 거쳐 북간도인 화룡, 연길, 왕청까지 방문하자면 적어도 반년세월은 착실히 걸려야할 것이다.

일제의 령사관경찰들이 혁명자들을 체포하고 독립운동진영들에서도 반간첩투쟁을 하고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했다.

김좌진은 재종제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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