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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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로 알게된 장개석
2015년 04월 21일 11시 16분  조회:4439  추천:3  작성자: 김송죽
 

                 일기로 알게된 장개석

 

 

   대륙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후퇴한 장개석은 늘 반공대륙을 꿈꾸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기간 미국이 세 번이나 원자탄을 쓰자는 제의만은 동의하지 않았거니와 견결히 반대한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에 나가자 트루먼이 원자탄을 쓰자고 했다. 이에대해서 장개석은 1950년12월1일자 일기에다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트루먼과 미국정부는 중국공산당에 원자폭탄을 던지자고 하는데 그 시도는 견결히 깨 버려야 한다.>>  

   1950년, 조선에 나간 중국인민지원군은 서부전선으로부터 공격을 발동하여 유엔군에 심중한 타격을 안기였던 것이다. 이에 미국군의 통수였던 맥아더는 “중국군대가 이미 북조선에 많이 들어왔는데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우리는 새 전쟁에 직면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해의 11월30일에 미국총통 트루먼은 기자초대회에서 “유엔군은 한국에서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군사상황에 근거하여 그 어떤 필요한 절차든지 취할것이다” 라고 덧붙이였다.

   이에 기자가 “그 어떤 필요한 절차란 원자탄을 포함한다”는 뜻이 아닌고 물으니 트루먼은 고개를 끄덕이고나서 “우리는 줄곧 그것을 쓸 생각을 하고있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장개석은 12월1일자 일기에다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적어놓았다.

   <<방법을 다해서 그의 그런 생각만은 깨버려야 한다.>>

   이로보아서 장개석은 미국이 원자탄을 쓰자는것을 동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막았음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 당시 장개석은 조선반도남측의 한국정부를 완전히 옹호하고 지지하는 태도였다. 하기에 그는 조선전쟁이 일어난 그 이틑날 즉 6월26일에 인차 회의를 열고는 한국에 출병 할 문제를 상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3개의 사(師)에 이르는 병력을 보내기로 하고는 3일만인 29일에는 웰링턴을 미국정부에 보내여 협상케 했던 것이다. 그는 그 후에도 여러차나 한국을 견결히 지지한다고 태도를 표시했다. 

    그해의 12월1일, 그는 인편에 맥아더에게 원자탄을 쓰는 문제를 다시금 고려하기를 바란다면서 만약 미국이 그것을 쓴다면 쏘련이 가만있지 않을것이니 처지가 더 불리하게 되리라는 자기의 판단을 알려준 것이다. 

 

   1954년, 북베트남이 싸움에서 이길것 같으니 미국군은 원자탄을 쓰자했다.

   이에 대해서도 장개석은 4월17일자 일기에 <<이번 주 예정 된 작업과목>>이라 해놓고는 그 세 번째 항목에다 “미국이 수소탄과 원자탄을 베트남과 중국대륙에다 절대로 쓰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밝혀놓았다. 그것을 보면 우리는 그당시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가 미국이 원자탄을 쓰자는 것만은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면서 막아나섯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장개석은 그 이틑날 일기에다 “미국 태평양총부 하워드참모장을 만나기로 약속 함”이라 써놓고는 이어서 “미국은 원자탄을 사용하지 마십시오."라고 적어놓았다. 장개석이 그를 만나자는 목적이 무엇이였음을 밝힌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결속직후에 호지명(胡志明)이 령도했던 월맹(越盟)은 하노이에서 월남민주공화국(간칭“북월”)을 세웠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의 전체 영토를 공제하려는 야심으로 1945년9월에 전쟁을 발동했던 것이다. 한편 중국은 1950년도에 월남공산당의 요구에 응하여 서남군구의 부사령원 진경작(陈庚作)을 중공중앙대표신분으로 베트남에 보냈거니와 라귀파(罗贵波)를 단장으로 한 정치고문단과 위국청(韦国清)을 단장으로 한 군사고문단이 베트남에 주둔하면서 사업하게끔 했던 것이다.

   한편 그해의 12월에 저쪽에서는 <<공동방어협정>>을 맺고는 미국이 대량의 프랑스군을 무장시키겼던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인민군은 1954년3월에 중국의 군사원조에 의하여 그들보다 더 우세한 병력으로 디엔비엔푸를 진공하여 프랑스 군을 1.6만이나 섬멸했거니와 프랑스 보병사령관 소장 드 틀 렘센을 포로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군은 베트남부에서 물러가려했다. 그런데 이때 미국이 개입한 것이다.

   이런상황에서 내내 본토를 탈환 할 궁리를 하고있었던 장개석은 이듬해의 2월에 부참모장 펭멩지(彭孟缉)에게 "레이저우반도계획(雷州半岛方案)"을 세우게끔했다. 그 목적인즉은 국민당군대는 광동의 레이저우반도에 등륙하여 그곳을 "첫번째 교두보"로 만들자는 타산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으로 광동, 광서를 진공하고 남녕을 위협하며 남쪽으로는 해남도를 진공함으로써 중국이 공산주의 베트남을 원조하는 채널을 차단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한데 그것이 미국의 허락과 지지를 받을지는 미지수였다.

   장개석은 그같이 반공대륙꿈을 하루도 끊지 않고 그냥 꾸면서도 미국이 원자탄사용하자는 것만은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1954년10월20일자 일기에 보면 “원자탄을 거부함”이라고 써놓았다.

 

   왕숙명(王叔铭1905-1998)은 산동 제성(诸城) 사람인데 중국공군의 창시자로서 1950년4월에 대만방공사령부사령이 되었다. 그는 미국공군과 관계가 좋았다. 하여 미국에서는 어떤일들은 그를 통하여 장개석에게 알리군했다.

   대만에 쫓겨간 장개석은 그곳에다 발을 튼튼히 붙이기 전에는 반공대륙조건이 안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하기에 그는 1951년 <<대사예정표>>에다 다음과 같이 강조한 것이다.

“준비가 되기전에는 반공을 절대안함;

자신이 충분하기전에는 반공을 절대안함;

시기가 성숙되기 전에 역시 반공을 절대안함” 

 

   장개석은 자기가 반공대륙(反攻大陆)을 하자면 우선 대만을 중립시키려고 시도하는 미국의 속박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조선전쟁이 폭발 한 직후에 트루먼은 제7함대에 명령을 내려 대만해협을 지키게 했다. 그 목적은 중국대륙의 해군과 공군의 활동을 공제함으로써 대만해협을 “중립화(中立化)”하자는 것이였다. 미국의 그같은 결정은 대륙의 해방군이 대만을 치지 못하게 만들거니와 국민당도 반공대륙을 못하게끔하자는 것이였다.

   그런데 1953년2월2일에 신임미국총통 아이젠 하워가 문득 제7함대는 대륙을 습격하는 장개석군대를 간섶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여 마치 초롱에 같힌 신세였던 장개석은 이제는 내뜻대로 되는가봐 하면서 기뻐했다.

   

   장개석이 반공대륙을 하자면 꼭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아야 했다. 하여 그는 1954년에 “K계획”이라는 것을 세웠는데 그것인즉은 미국으로부터 구축함6척, F86식 제트기 2대대, F84식 전투기 2대대, 여러가지 새로운 레이더 등을 얻어 자신을 튼튼히 무장하는 것이였다.

   미국에 요구한 것을 보면  

   1, 쏘련이 중국에다 도와준 무기수량만큼;

   2. 현금 5억 달러;

   3. 연간 운영자금 3억 달러;

   4. 경제지원 1억2만 달러;     

 

   한데 미국사람들이 기실은 장개석의 반공대륙에 그닥 흥취를 가지지 않았다. 외냐하면 그가 대륙을 되찾는다는건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대로 원조해줄리가 만무였다. 장개석의 일기를 보면 그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장개석은 1951년10월20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미국이 주기로 한 1951년도 군비 7만달러가 아직도 오지 않고있다.”

   12월31일자 일기에다는

   “미국이 준 무기는 이제겨우 32%밖에 안된다.”

   한편 미국은 미국대로 생각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인즉 장개석이 요구한 신식 제트전투기를 줫다가는 번거롭고도 시끄러움을 가져올것 같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장개석이 과연 대륙을 쳐 전쟁을 발동한다면 미국은 기필코 전쟁에 개입 해야 할터인데 미국은 그럴 형편이 못되였던 것이다. 하기에 미국의 태도는 좀 더 두고보자는 것이였다.

   1953년7월12일자 일기를 보면 장개석이 불만이 많아서 이를 악물고 썻다는 것을 알수있다.

   “미국의 정책과 약속은 절대 믿을바가 못된다. 내가 이제는 더 이상 미국의 원조를 바라고 반공复国하려는 환상을 말아야겠다. 너무나 유치한 충동이였다. 이는 교훈이다. 자기의 실력이 없이 남의 협력에 의지한다면 오로지 희생만을 가져 올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954년에 이르러 장개석의 반공대륙계획에 냉담했던 미국에서 점차 전환의 기미가 나타났다. 그해의 2월에 미국은 장개석과 “대만공동방위작전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4월에 장개석군과 미국군은 대만남쪽에서 “연합대연습”을 했다. 그런 돌연적인 행동이 있게 된 것은 14일날에 장개석이 차린 연회석에서 미국군의 고급장령 풀 육군 소장이 자기들은 장개석이 원하는 대로 “함께 어깨를 겯고 반공 대륙할 것이다”고 말했기 때문이였다.

   9월3일, 해협양안에서 포병전이 발생했다. 하문의 해방군은 금문을 향해 6천발의 포를 쏘아 그곳을 불바다로 만들었거니와 미국군 고문 2명을 죽이였다.

   이렇게 되자 7일에 대만의 장개석군은 보복을 하느라 해군과 공군을 출동하여 해방군포병진지를 훼멸했다.

   그래놓고서는 10월 11일 장개석은 아이젠하워에게 편지를 썻다.

   “만약 쏘련이 수소폭탄을 먼저쓴다면 그에 대처해 선제공격을 할 것인데  그러는 날이면 세상인심은 놀랄것이고 보복으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져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장개석은 자기의 행위로 원자탄전쟁이 일어날가봐 골머리를 않게되였다. 자기가 군대를 몰고 대륙에 오르는 날이면 쏘련에서 원자탄을 쓰자 할 것이고 그러게 되면 미국도 필경 쓸것이다. 장개석은 원자탄의 위력을 잘알고있었다. 원자탄을 쓰면서까지 대륙을 되찾아서는 뭘하는가? 자칫잘못하면 자기는 중화민족의 죄인으로 되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만고에 씻지 못할 죄인으로 되고 말게 아닌가.
    장개석은 인심을 잃고싶지 않았다. 반공대륙은 어리석은 몽상이였음을 깨달은 그는 후생을 회억속에 묻혀 자아반성으로 지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1887年10月31日-1975年4月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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