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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필 때까지(1)
편집자 주 : CK여성위원회 박옥선 회장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조선족 출신으로서 처음 한국 정당 비례대표 순번(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최종 35명에서 31번 배정 받았음) 안에 들어 1개월 동안 한국정치에 입문하여 좋은 경험과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아직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박옥선 회장과 같은 정치경험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금후 한국정치에 출마하려는 조선족들에게 타산지석이 되어 길라잡이 역할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돈 팔고도 살 수 없는 그 귀중한 경험을 재한조선족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본지는 이번호부터 박옥선 회장의 체험담을 연재하오니 독자들께서 적극 읽어보기 바란다.
1. 느닷없이 찾아온 기회
서울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하게 잘 닦여져 있다. 춘삼월 청정한 날씨에 봄기운마저 완연하다. 바깥 시원한 대지의 뻥 뚫린 우주의 세계와 달리 성냥갑처럼 답답한 자동차 안은 숨 막혀 온다. 차창을 열어 재꼈다. 아침 9시경이라 주야기온의 교차가 이뤄지는 시각, 조금 쌀쌀한 꽃샘추위가 살랑대지만 태양열의 발산에 힘 업은 양기에 실려 오는 훈훈한 봄바람이 얼굴을 매만지고 사라졌다 또 찾아오기를 반복한다. 기분이 더 없이 상쾌해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 년 사시절 매일 오늘처럼 날씨가 좋았으면······.
날씨가 좋으면 기분도 따라서 좋아진다. 기분이 좋으면 일도 잘 풀린다. 그래서 나는 유신론자는 아니지만 미리 며칠 전부터 날씨를 체크하고 날씨가 좋을 때 사업 건을 상담하고 추진하는 습관이 있다.
오전 10시, 6월에 있을 250명 단체 중국관광객 제주도 투어 건으로 중국00여행사에서 온 거래처 부장과 상담일정이 잡혔다. 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나는 거래처라 은근히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사업에 있어서 우리백의민족은 이것저것 세심하게 따지지 않고 대충대충 넘어가지만 깐깐하기로 소문난 중국 상인들과 사업담판을 한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상대는 나의 사업에 대한 진정성과 성실성을 믿어 거래가 쉽게 이뤄졌다.
한국생활 20여 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업상 나름대로 성취도 있었으나 서울의 쳇바퀴 같은 리듬에 지치고 찌들었던 나였다. 하지만 오늘 따라 예기치 못했던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설렌다.
“따르릉, 따르릉”
휴대폰이 울린다.
하루에도 수십 통 전화가 걸려오니 일일이 받는 것도 귀찮다. 그러나 기분이 좋을 때면 전화통화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오늘 따라 왠지 걸려온 전화마다 잘 받고 싶어진다.
기분이 꿀꿀할 때면 걸려온 전화번호를 체크하고 받을 지 안 받을 지를 결정하고 대충 응수할 때가 많다.
아침 해는 시간에 쫓기는 듯 어느새 11시 되었다. 정오를 향해 달리는 태양은 마음껏 양기를 발산하여 대지를 훈훈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창밖을 넌지시 바라보며 걸려온 전화번호도 보지 않고 대뜸 상투적으로
“네, 박옥선입니다.”라고 응수하였다.
“00의원입니다. 요즘 잘 지내시죠?”
야당 00중진의원님께서 걸려온 전화다.
정신을 가다듬고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날 00의원님과의 통화에서 내가 유일하게 길게 말한 대목이다.
나머지는
“아, 네.”
“아, 네.”
마지막엔
“알겠습니다.”는 단마디로 통화를 마쳤다.
한국생활 20여 년 통해 터득한 한 가지 사실은 한국사회에서 누가 누구를 추천할 때면 이력서를 보내라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느닷없이 나한테 이력서를 요구할 때면 다수의 경우 나를 어디에 추천하는 경우라는 것이다.
00의원님의 “이력서를 보내주실래요.”라는 말에 나는 요즘이 20대 총선을 20여일 남겨둔 시점이라 무슨 뜻인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통화하면서 나의 가슴은 널뛰기를 하고 있었다. 준비가 덜 된 내가 느닷없이 비례대표 추천 소식을 접하게 되다니! 정말 내가 비례대표에 나설 자격이 있는지를 반문하니 마음이 평온치 못했다. 머리가 새하얘 난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생겨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긴 말을 못하고 짤막한 ‘아’와 ‘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나를 추천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전화통화하면서 순식간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굴리다 보니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중국에서 정치하는 사람은 탐오, 회뢰 등 착오를 지지 않고 맡은바 사업에서 성과가 있으면 평온하게 승진할 수 있고 탄탄대로를 걷게 되며 여생이 보장이 된다. 한국은 정치풍토가 중국과 전혀 다르다. 선거정치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에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에서 정치인은 세간의 욕을 먹는 직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잘해도 성과는 보이지 않고 나쁜 일 마이너스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씹히기 일쑤이다. 특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다면 온몸이 성할 데 없이 씹힐 것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듯이 세간의 눈총이 두려워 정치입문을 주저한다면 정의롭지 못한 선택이어서 평생 후회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학교 문을 나와 사회에 진출한 20대 초반 나이에 이미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니 심하게 말하면 동네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고 사랑하던 연인한테 버림당하는 아픔과 시련을 겼어보았다. 물론 내 딴에는 정의를 위해 한 일이었으나 세상사는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나는 ‘나쁜 년’이란 딱지를 달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고향은 흑룡강성 탕원이다. 평온하던 마을에 아이 셋(4살, 6살, 8살)이나 딸린 과부가 우리 마을 노총각한테 재가로 오게 되었다. 노총각은 심성이 착하나 조금 지력상수가 모자라 더하고 빼는 인생살이에 서투다. 하지만 노총각은 노모를 잘 모셔 효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그렇듯 평온하던 모자의 생활에 과부가 들어옴에 따라 풍파가 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동네 말썽꾸러기 가문이 되고 말았다.
시어머니인 노모는 예의범절이 무엇인지 모르는 막무가내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해 잔소리가 잦았다. 이에 위아래가 없는 철부지 막가파 며느리는 앙심을 품고 보복하기 시작하였다. 시어머니가 80세를 훌쩍 넘기자 거동이 불편해 자립이 곤란해졌다. 며느리는 시어머님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던 데로부터 손찌검을 자주 했다. 점점 폭력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어느 하루 며느리가 손가락으로 시어머니의 입을 짜개놓았다.
그때 중국마을들은 지금과 달리 법률의식이 형편없이 결핍하였고 가정폭력을 법에서 제재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아마 있었을 수는 있었어도 법에 신고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하고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불의를 목격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너무 분개하여 <그녀의 앙갚음>이란 제목으로 흑룡강신문에 시리즈로 막가파며느리 행위를 지탄하는 내용의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
신문 글이 나가자 여기저기서 나를 찬양하는 편지가 날아왔다. 불의를 과감하게 파헤치고 정의를 사회에 외치는 나의 행위에 감탄한다는 내용의 서신들이었다.
나는 처음 쓰는 소설이 신문에 연재로 게재되는 일만해도 성취감에 휩싸이게 되었던 데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정의 수호천사라는 명예를 받아 안아 한없이 기뻤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얼마가지 못하고 비극으로 번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마을 온역’ 취급까지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글 장르는 소설이었으나 남편을 ‘황00’, 부인을 ‘이00’라고 주인공들을 거의 실명에 가까운 실체를 밝힌 것이 문제였다. 남의 가정사를 함부로 사회에 터뜨리는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루건너 협박이 들어왔다. 당돌하기로 소문난 나였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처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짐이었다.
그래서 공안국에도 찾아다니고 정부도 찾아다녔다. 내 딴에는 정의를 위해 한 일인데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또 호소하였다. 결국 경찰들이 나서서 ‘소설 속’ 주인공들을 찾아 협박행위를 멈추라고 명령하였다. 만약 협박을 멈추지 않으면 법에 따라 엄벌하겠다고 하니 그들 부부는 협박을 멈췄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는데 이번에는 엉뚱하게 생각지 못한데서 일이 크게 터지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이 나를 세상천지에 ‘동네 망신시킨 나쁜 년’으로 취급하고 길거리에서 나를 만나면 사람들은 마치 온역이나 만난 것처럼 슬슬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당시 학교교사였던 나는 교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고 친구나 동창생들 중에 고무격려의 편지를 보내오는 자도 있었으나 나를 나무라는 자도 적지 않았다. 더 슬프고 참기 어려운 것은 ‘나쁜 딸’을 둔 나의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당당히 쳐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장 슬프고 비극의 늪에 빠진 사건은 바로 사랑하던 연인이 나를 버리고 떠난 것이었다.
나는 정의를 위해 한 일이었는데 ‘나쁜 년’이 되어 일락천장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정말 죽고 싶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은 초췌하고 창백해져 백골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지옥을 헤매고 있던 와중에 어느 하루 짜개바지 친구가 찾아왔다. 죽도록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눈물이 말라 더 흘릴 눈물이 없었던 것이다.
“난 죽고 싶어. 지금 어떻게 하면 고통을 적게 겪고 죽을 것인가를 매일 연구하고 있단 말이야.”
친구 왈, “죽는 사람은 남에게 죽겠다는 말 안 하고 죽는단 말이야, 너 내 앞에서 죽겠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아 너 진짜 죽지는 않을 것 같아 시름 놓인다.”
나는 슬퍼서 죽겠는데 친구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얄미웠다. 그러나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친구의 말이 맞았다.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은 오로지 하나, 바로 정든 고향이지만 그 고향을 떠나는 길밖에 없었다. 달리 살아가야 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때는 봄이 시작되는 계절이었다. 마지막으로 고별사라도 읊고 싶은 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옛사람들은 산을 찾아 고백을 잘했건만 나의 고향은 허허벌판이라 산이 없다. 해가 지고 인가가 드문 초저녁 고향 오솔길을 걷고 또 걸었다. 숨을 길게 들이 쉬고 한바탕 하소연 하려는데 코를 간질이는 무엇이 날아들었다. 길가에 듬성듬성 피고 있는 진달래가 있었다. 처량해 보였다. 나의 처지처럼 가련해보였다. 그러나 자연은 누가 뭐래도 섭리대로 돌아간다. 꽃망울을 깨고 만개를 준비하는 진달래꽃에서 향기를 뿜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자연의 계절이 어떻게 가고 오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내 속이 재가 되니 모든 게 귀찮아서였다. 진달래꽃 향기는 고목이 물을 만나 살아나듯 순간 나를 힘차게 자극하고 있었다. 나의 오장육부를 비롯한 장기가 꿈틀거리고 말초신경 감각이 돌아섰다.
아~ 인간세상이 나를 버려도 자연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지옥을 헤매던 나를 인간으로 그 기능을 회복시켜 준 것은 진달래꽃향기였다.
나는 나를 인간으로 회복시켜준 고향의 진달래꽃이 활짝 피면 다시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한다고 약속하고는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그 후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너무 일찍 나이에 너무 심한 풍파를 겪고 나서 불의를 목격하면 참견하지 말자고 골백번 결심하고 또 했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은 고치지 못하는 법. 그 후 나의 인생에서 산전수전 다 겪는 과정에 매번 또 불의를 만나면 참지 못하고 까밝힌다.
인간세상의 옳지 못한 것을 바로 세우는 것이 정의이다. 정치란 바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어찌 보면 정치가 나의 체질에 맞는 것 같다.
그래서 20대 총선 비례대표 추천에 응했던 것이다.
다음호 계속
중국동포타운신문 3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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