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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2
2015년 02월 09일 12시 56분  조회:2029  추천:0  작성자: 죽림

11□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이영진, 창비시선 129, 창작과비평사, 1995

  언어의 경제성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집이다. 자신이 나타내기 위한 정서보다 훨씬 더 많은 낱말들을 동원하고 문장을 동원하고 있다. 시가 길고 장황하다. 그래서 읽는 속도가 늦어지고, 그다지 분명하지 않은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많이 든다. 여기다가 이따금씩 등장하는 한자표기는 시간을 더 지체시킨다. 현실에 대한 인식도 너무 아득하다. 머릿속에만 들어있는 생각이어서 관념성을 벗기 힘들다. 그러한 관념성을 자신의 체험에서 찾아내는 훈련이 더 필요하고 말을 좀 더 아끼는 버릇이 필요하다.★★☆☆☆[4336. 10. 18]

 

12□봄의 설법□이동순, 창비시선 133, 창작과비평사, 1995

  선승의 깨달음이 법어가 되려면 인류 최고의 절정에 올라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들 말장난 같이 들린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을 전하는 시를 쓰려면 그 깨달음의 내용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고 복종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집 앞부분의 내용들은 모두 소품이다. 그런데 그런 소품들이 고승대덕의 입에서 나온다. 격이 안 맞는다는 얘기다. 그런 깨달음이 자신에게는 진실한 것이면서도 어설프게 들리는 것은 모든 깨달음의 언어가 대중 속으로 나올 때 갖는 울림 때문이다. 나 혼자만의 울림만 가지고는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뒷부분의 동네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정서 역시 이러한 어법으로 나오기 때문에 어색하다. 묘사와 서술을 통해서 시를 쓰려고 하면 그 대상에 대해서 자신이 완전한 일체감을 이루어야 한다. 즉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는 그들이 된 상태에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감정이 잘 전달된다. 그러나 이 시집 속에 들어있는 나는 카메라와 같아서 단순히 풍경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 풍경이 나의 내면 풍경으로 승화되려면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시집의 편찬 의도를 시가 따라가지 못한 경우다. 이것은 시인이 너무 의도된 시만을 쓴다는 얘기다. 시인의 의도는 하늘 높은 곳에서 구름처럼 떠있어야 한다. 그 구름이 가렸다 말았다 하는 햇빛을 받으며 현실의 땅에 뿌리박은 시들은 자란다. 그 구름이 너무 땅에 바짝 붙어있으면 시들이 시들시들하다.★★☆☆☆[4336. 10. 18]

 

13□벽 속의 편지□강은교, 창비시선 105, 창작과비평사, 1992

  감정 과잉과 선언식 자기 판결이 이 시집의 가장 큰 취약점이다. 판결은 남의 시선을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을 압도하면서 복종을 강요한다. 이 시집의 시들이 대부분 그렇다. 특정한 사실에 자신의 감정과잉을 싣고 그것을 남들이야 듣든 말든 선언하고 판결해버린다.

  체험의 특수성은 이따금 ‘그의 초상’ 같은 빼어난 작품을 낳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것이 정답이라고 선언해버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동감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다. 이것은 자기 인식의 특수성에 매달려서 개인의 특수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시라고 착각하는 데서 온다. 그것이 잘 되면 아주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루는 한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보편성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뜽금 없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 시집은 그러한 경계선에서 바깥쪽으로 쏠려있다. 그런 상황에서 골리앗 크레인, 노동 어쩌구 하는 제3부의 시들은 차라리 코미디라 할 만하다.★★☆☆☆[4336. 10. 18]

 

14□화개□김지하, 실천문학의 시집 141, 실천문학사, 2002

  시집 제목에 한자가 섞여 있으면 한 동안 당황스럽다. 굳이 한자로 적은 사람은 나름대로 그 의도가 있을 것인데 그런 의도가 한글 전용을 고집하는 나의 의도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한자 표기는 별로 존중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웬만하면 나는 무시하고 한글로 적는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에 따라 수준이 많이 차이 난다. 그래서 쪽수대로 읽어가다 보면 울퉁불퉁한 도로를 덜컹거리며 운전하는 느낌이다. 속도를 내면 낼수록 이건 더 심해진다. 그래서 혹시 차 밑바닥이 긁히지나 않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천천히 읽게 된다. 이런 거칢은 시인이 시의 완성도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아니면 그럴 여유가 없이 시집을 묶게 된 까닭일진대 그건 뿌리치기 어려운 현실의 유혹이다. 그러나 그런 유혹을 통제할 수 없으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이런 점은 시의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고민과 삶의 애잔함을 나이 먹은 자의 시각으로 나직하게 이야기하다가는 느닷없이 주장자로 맨바닥을 땅! 치며 우주 밖까지 뛰쳐나가는 상상력은 중간중간에 섞인 한자들만큼이나 읽기 불편하게 한다. 이것은 ‘늬들이 시를 알어?’ 하고는 독자들을 약간 내려다보는 오만한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 만큼 이루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포기하는 달관의 삶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런 오만은 그 만큼 조급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시집 한 권 속에 들어있는 시들의 키가 제 각각이라는 것은 아무리 합리화해도 성실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발을 안 하고 사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을 보기 안 좋다고 하는 사회를 나무라는 것은 자신에 대해 결코 정직한 행위가 아니다. 독자들 중에는 바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4336. 10. 19]

 

15□섬진강□김용택, 창비시선 46, 창작과비평사, 1985

  이 시들의 가장 큰 장점은 가락이 아주 잘 살아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남도의 냄새가 물씬 나는 가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느슨하고 장황한 줄거리를 갖고 있어도 읽는 사람이 그것을 참고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락이 농촌의 정서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이미 도시의 정서에 묻혀버린 사람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런 곳에서 그 정서는 가락을 타면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재주는 부족하지만 가슴속에 쌓여있는 분노와 열정이 시의 형식을 압도하면서 화산처럼 분출하여 뜻밖의 생기를 시에 불어넣고 있다. 말하자면 형식이 흘려 넘쳐버린 내용을 따라서 만들어진 경우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자신이 딛고 서있는 땅에서 올라오는 진솔한 정서를 떠나면 시는 공허한 느낌을 수반하게 된다.

  “섬진강” 연작은 기교가 부족한 점을 이 같은 열정으로 극복했는데, 그 나머지 부분의 많은 시에서 실패를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주제로 나가는 순간 시에는 공허함이 밀려든다. 형식에 사상을 담은 것이 아니라 내용에 밀려 형식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 늘 경계하지 않으면 이 시집에서 이루어놓은 공을 아주 쉽게 까먹게 된다.★★★☆☆[4336. 10. 19]

 

16□바닷가 사람들□강세환, 창비시선 124, 창작과비평사, 1994

  이 시집의 시들은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의 애환을 다룬 시인데, 시가 그들의 현실에 바짝 밀착해있질 못하고 기름처럼 둥둥 떠있다. 이것은 시인이 그들의 삶 어느 곳에 자신의 시각이 위치해야 할지를 터득하지 못한 것에서 온다. 그들의 삶을 묘사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어진 내 삶을, 내 생활의 느낌과 정서를 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안 되고 있어서 느낌이 자꾸 겉도는 것이다. 소재는 참 잘 잡았다. 그렇지만 그 소재를 잡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시의 묘사는 소설의 묘사와 달라서 시의 묘사에는 정서가 담겨야 한다. 그냥 카메라 비추듯이 해 갖고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시가 대체로 어둡다. 어두운 것은 전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눈에 보이는 그들의 삶이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그들은 산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 절망의 순간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더 깊이 찾아서 그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그것을 노래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지금까지 보여준 그런 오류와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시는 시체를 묘사해도 맥박이 뛰어야 한다.★★☆☆☆[4336. 10. 20.]

 

17□너는 꽃이다□이도윤, 창비시선 113, 창작과비평사, 1993

  무엇보다도 사물을 보는 시각이 나름대로 잡혀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시인의 첫 조건이라면 이 시집의 주인공은 그런 자질을 이미 갖추었다. 그런 시인이 실수를 할 때는 감정을 절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괴성처럼 시를 내지르는 것이다. 이 시집의 4할 가량을 차지하는 그런 시들이 단점으로 작용하지만, 그래도 무작정 고함치는 것은 아니라서, 그 정도라면 시대 탓으로 돌려도 무방할 것이다. 감정을 절제할 수 없을 때 절제 할 줄 아는 것이 대가의 능력이다.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것은 어차피 시간이 걸릴 일이다.★★★☆☆[4336. 10. 20.]

 

18□아이들의 풀잎노래□양정자, 창비시선 114, 창작과비평사, 1993

  시집을 읽고 나서도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그런 시집들이 있다. 이 시집이 그런 경우이다. 소품들로 가득 차서 그 소품 가지고는 뭘 만들어내기 어려운 시들. 혼자서 읽어보고 빙그레 웃으면 되는 그런 시집. 이건 잘 쓰고 못 쓰고 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시집을 창작과비평사에서 창비시선으로 냈다는 것이 놀랍다. 창비시선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건 것이 더 큰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의미 없음을 추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일지 모르니까.★☆☆☆☆[4336. 10. 20.]

 

19□작은 새□김경희, 창비시선 118, 창작과비평사, 1994

  우아함, 고결함, 아름다움 같은 것이 아니라면 시로 다룰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따금 있어서 똥 싸고 토하며 거칠게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시들이 있다. 이 시집도 대개 이 영역에 속한다. 재주 있는 것이 오히려 화근이어서 재주를 부리면 부릴수록 더욱 경망스러워진다. 말을 아껴야 한다는 믿음이 문장을 잘라먹는 것으로 나타나고, 시는 아무나 알아보지 못하도록 적당히 어려워야 한다는 믿음이 상상의 고리를 끊어버린다. 현실의 진흙탕 속에서 진주를 캐던 창비시선이 갑자기 향기로운 촛불이 켜진 여신의 신전에 올라앉았으니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꼬?

  시에서 한자가 가장 잘못 쓰이는 것은 한자의 형상성을 이용해서 이미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소리글자인 우리말의 표기 원리를 정통으로 부인하는 아주 고약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리글자는 소리 이미지를 통해서 그림을 전달한다. 이 시집의 곳곳에 쓰인 한자는 죄질이 가장 나쁘게 쓰였다.★☆☆☆☆[4336. 10. 20.]

 

20□말똥 굴러가는 날□이재금, 창비시선 119, 창작과비평사, 1994

  언어를 잘 갈무리하여 시를 만드는 것보다 때로 더 중요한 것이, 과연 이 잡다한 삶의 체험 속에서 어떤 것을 시의 광장으로 끌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고민이 별로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일상의 삶에 나름대로 충실한 묘사를 해보지만 그것이 울림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일상이 울림을 가지려면 남들의 성찰을 일깨우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이 시집에는 그것이 별로 없다. 시가 담아야 할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한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 점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433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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