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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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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10
2015년 02월 09일 13시 47분  조회:2190  추천:0  작성자: 죽림

 

91□나는 사랑한다□이승훈, 세계사시인선 76, 세계사, 1997

  뒤샹이 장르를 파괴했으면서도 미술가로 남아있는 것은, 그의 파괴가 미술의 관행이 연장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푸른 하늘이 정답이라고 적는 것은, 사실일지는 모르나 옳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언제부터인지 모를 기원을 갖고 있으며 그 기원으로부터 변혁을 거치면서 이른바 발전을 해왔다. 모든 예술행위는 그러한 발전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옳고 그름, 잘함과 못함은 어느 한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옳고 그름은 수시로 변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준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세월에 따라서 그 거점이 달라진 것일 뿐이다. 그런 차이를 무(無)로 간주하는 것은 비약이고 말장난이다. 언어는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한다. 시는 그러한 전달 양식 중의 하나이다. 뗏목을 버린다고 해서 뗏목이 가치 없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저쪽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뗏목이 정답은 아니지만 정답과 연관이 있다. 시는 그런 것이다. 쓰는 자와 읽는 자의 관계를 맺어주는 뗏목이니 그것을 탄 뒤에 버리든 금칠을 해두든 그건 그 시대 사람들의 몫이다. 어떤 자는 버리고, 어떤 자는 금칠을 한다고 해서 그 차이가 시가 될 수는 없다. 차이가 시가 아니라 버림당한 것과 금칠 당한 것이 시이다. 이런 종합의 근거가 시이다. 그 종합은 욕망에서 나온다. 욕망은 인간이다. 인간이 뗏목을 머리에 이고 있다. 색과 공은 같지 않다. 색은 곧 공이다.★★☆☆☆[4336. 11. 13.]

 

92□현미경으로 보는 하늘□이근호, 세계사시인선 75, 세계사, 1997

  시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고 높낮이가 다른 것이 흠이다. 사물을 관찰하는 눈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나름대로 일정한 시각을 갖추었지만,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절약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이 그어지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푸념이나 말들은 그런 까닭이다. 현미경으로 보려면 관찰에 머물러야 하는데, 관찰을 하다 말고 감정을 드러내면 현미경으로 보는 의미가 삭감된다. 게다가 한자는 현미경의 초점을 흐린다.★★☆☆☆[4336. 11. 13.]

 

93□유리에 가서 불탄다□노태맹, 세계사시인선 58, 세계사, 1995

  아주 독특한 상징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러나 독특함에 매달려서 허공 중에 떠버린다. 상징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건이 필요하다. 그래서 관념 속의 사건을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인과관계 설정은 문제가 없지만, 그 무리한 설정이 사막처럼 물기를 제거한다. 무문관이나 벽암록이 사건 당사자들의 대화로 이루어진 것은 깨달음을 상징으로 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과 말 사이로 건너뛰는 생각이 저절로 상징을 만들고 그것을 풀 기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로 꾸미면 장광설이 된다. 그 기백은 살 만하다. 그러나 한자표기에 기대는 사고는 해법을 더욱 어렵게 만들 뿐이다.★★☆☆☆[4336. 11. 13.]

 

94□내 몸이 동굴이다□박기동, 세계사시인선 83, 세계사, 1997

  특별한 지식이나 사실이 시로 들어올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것의 특수함으로 인해 주제를 전달하는 데 그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남들이 잘 모르는 지식이나 내가 발견한 특별한 사실들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하고픈 말이 그러한 사실들에 예속이 되면 시가 무거워진다. 이 무거움에는 설명하려는 의도도 들어있다. 간간이 빼어난 시들이 있지만 대체로 방법과 수단에 목적이 혹사당하고 있다. 이것을 역전시키려면 좀더 가혹한 긴장이 필요하다. 한자는 불필요한 긴장이다.★★☆☆☆[4336. 11. 13.]

 

95□모든 하루는 낯설다□김추인, 세계사시인선 82, 세계사, 1997

  무기력한 일상과 큰 변화 없는 따분한 세상을 아주 꼼꼼하게 잘 그렸다. 그러나 일상을 꼼꼼하게 해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해부 당하는 것들 중에는 일상의 문제가 아닌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해부해야 할 것이며, 해부해도 소용없는 것인지, 나아가 해부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큰 효과를 내는지에 대한 고민을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다. 새로운 세계는 성실함 위에서 열리지만, 성실함만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이 아니다.★★☆☆☆[4336. 11. 13.]

 

96□무지개가 되기까지는□박정만, 문학사상한국시선 18, 문학사상사, 1987

  시가 노래라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거의 잊고 산다. 아니, 아예 잊고 산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노래였고, 지금도 노래이다. 이 사실을 박정만보다 더 정확히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그의 시는 완전히 노래이다. 노래는 중간의 어느 한 구절이 애매모호해도 그 가락으로 인해 저절로 와 닿는 성질이 있다. 박정만의 시가 바로 그러하다. 중간에 나타나는 구절들의 애매함은 소리내어 읽으면 저절로 흡수된다. 김소월 이후로는 이런 시인이 없다. 이런 노래를 부르도록 영혼의 내면에서 닦달한 것이 허무와 죽음이었으니, 그런 노래의 주인공이 평탄한 삶을 산다면 그 시는 사기꾼의 말장난일 것이다. 김소월이 오래 살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4336. 11. 13.]

 

97□단편들□박정대, 세계사시인선 81, 세계사, 1997

  형식에 대한 파괴나 집착은 갈래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분히 의미의 관점이고 역사의 관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가나인, 황지우, 박남철 같은 시인들이 그런 쪽에서 카메라를 받았다. 아마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 시집도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형식에 대한 문제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여주기가 되어야 한다. 앞의 시인들이 보여주기로 성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는 형식이 허물어지고는 있지만 이야기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의 정서에 대한 어떤 발언이다. 즉 보여주기보다는 말하기를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이 시를 형식의 문제보다는 다분히 서정의 영역으로 붙잡아 놓는다. 사진과 만화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단순한 서정시라는 얘기다. 형식에 대한 집착이었다면 심각하게 방법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4336. 11. 14.]

 

98□황금 가지□이중수, 세계사시인선 79, 세계사, 1997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재주는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무엇을 쓰면 시가 되고 무엇을 쓰면 시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시는 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들려면 개인 속에 숨어있는 어떤 공공의 인식을 다루어야 한다. 내 이야기가 그냥 내 이야기로 그쳐서는 시가 되기 어렵다. 그런 내용을 다룬 작품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이미 학계에서 설명이 끝난 개념을 시속으로 끌어들일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 개념은 이미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난 후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 삶 속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독자들이 감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시는 개념이 아니라 느낌이다.★☆☆☆☆[4336. 11. 14.]

 

99□따뜻한 길 위의 편지□박용재, 세계사시인선 11, 세계사, 1990

  시가 거칠다. 그 거칢은 시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시대의 분위기 때문인 듯하지만, 사실은 시가 삶의 어느 곳에 뿌리내려야 할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시대의 고통은 시인의 삶 어느 곳에서 피어나야 하는데, 이 시들에서는 너무 광범위한 분위기로만 잡혀있어서 허황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대를 이야기할 때 자신의 어느 부위에 닿아있는 시대를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할 일이다. 한자는 그런 허황함을 더욱 크게 만든다.★☆☆☆☆[4336. 11. 14.]

 

100□숲 속에서 묻는다□이사라, 세계사시인선 74, 세계사, 1997

  내용도 괜찮고 표현도 적절한데, 무언가 그럴듯한 비유나 표현을 하지 않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는 강박관념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그것 때문에 표현에 무리가 생기고 생소함이 서린다. 더 큰 문제는 절망도 우아하게 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다. 문명의 황폐함과 그 안의 절망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맞서자는 것인지, 즐기자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싸움이라면 싸움의 대상과 전략과 방법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흉내내기나 비꼬기 가지고는 싸움이 안 된다. 웃통 벗어부치고 칼로 내 배를 째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것이 문명이고 삶이다. 내 몸을 망가뜨리거나 문명을 망가뜨리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한자는 이 싸움에 커다란 장애일 뿐이다.★★☆☆☆[4336.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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