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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해설> 1941년에 창작되었고,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48)에 수록되어 있다.
윤동주의 「서시(序詩)」는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 중의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를 어렵지 않게 암송할 수 있을 것이고, 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이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 이 시를 읽으면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순수한 열정과 신념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시적 자아의 치열한 정신을 우리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고백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란 극히 미세한 도덕적 갈등을 가리킨다. 더구나 그것이 절대적 존재인 '하늘'을 기준으로 삼은 '부끄럼'과 연결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그의 고백은 지극히 사소한 도덕적 결점조차 스스로 용납지 않으려는 영혼의 소유자임을 증명해 준다. 그러한 삶의 연장선 위에서 자아는 미래에 대한 삶의 결의를 다진다. 확신과 의도를 나타내는 종결어미를 씀으로써 자아의 의지는 더욱 준열하기만 하다.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것,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자신이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라면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것, 이러한 의지가 미래지향적인 어조 속에서 시적 자아의 적극적인 실천 의지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한 행으로 처리된 제2연에 이르게 되면, 시적 자아의 관심은 다시 현실적 상황으로 돌아온다. 그는 지금 어둠(밤) 속에 서 있으며, 순수함의 표상인 '별'을 지켜나가기란 너무도 힘들어 보인다. 결국 이 작품은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는 젊은 지식인의 고뇌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표백(表白)한 시다. 그래서 더욱 진솔(眞率)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백적인 시가 감상에 흐르거나 관념에 빠지기 쉬운데, 이 시는 적절한 시각적 심상을 활용하여 서정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현대시목록, 인터넷) * 윤동주의 서시(序詩) 1941년 11월 20일. 그의 나이 24세 때 그날의 일기를 적듯 자아성찰로 쓴 시이다. 한마디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 같은 의문의 명제에 성스럽기까지 하는 텍스트(text)이다. 감상상 확연히 이처럼 세 연으로 나뉜다. 고백(과거) --- 괴로워했다. 맹세(미래) --- 걸어가야겠다. 성찰(현재) --- 스치운다. 인류의 역사는 특정의 그 어떤 빛깔을 거부한다. 그것만을 수용하기 보담 차라리 반사하는 흰 빛이다. 그것은 화합의 이데올로기이요, 또한 거부의 몸짓인 비둘기의 날개짓이다. 비상에는 자기 무게만큼 부담이 따르는 법이다. 권리 이전 개인에게 의무가 있듯이 행위 이전 속일 수 없는 자아(自我)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조상의 얼과 자취를 외면하지 않는 그것이 민족적 양심이라면 그 이전 올바르게 태어나겠다는 자궁 속 태아의 손짓 발짓이 바로 그것이다. 태아의 그 손짓 발짓은 원초적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모체의 유액 속에서 유영이 원초적 우주공간 속 개체적 실존을 잉태했으니, 그는 엄밀한 의미에선 서로가 하등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근본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노아의 방주시에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한 배를 탔듯이 인류의 항해 그 역시 거듭되는 방주인 것이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지성(知性)은 냉철하되 갑속에 든 칼이다"란 말이 있다. 이 말을 경구삼아 일반은 어떻게 풀이하는지 알 수 없으나, 나름대로 헤아린다면 `지성의 속성` 그 일단의 풍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도 지금 시적 자아인 `나`는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 그 시절 조선의 시인은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동족에게 강요하고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사지에다 조선의 젊은이를 몰아넣었으니, 역사의 참괴를 이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참으로 지성이란 동서(東西)가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어야만 하는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차마 부끄러움을 뛰어넘어 `진실`의 실체가 되던 시절, 사르트르와 앙드레 말로는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 프랑스를 위한 필사의 탈옥을 감행했으니 남이라 해서 무조건 깎아내리고 이편이라 하여 덮어버리고 맹신 복종하는 무리적 본성이 우리는 없었던가를 새삼 성찰해야 할 당위성을 지녀야 할 때이다. 그래서도 이 `서시(序詩)`는 앞으로 시인만의 프리루드(prelude: 서문)가 아닌 민족의 `서시(序詩)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어차피 또 한차례 거듭될 수밖에 없는, `노아의 방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환/기자, 오마이뉴스 '민족의 명시 45')
<윤동주 (尹東柱): 1917 - 1945>
* 1917년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출생. * 1931년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 1933년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 1941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 * 1943년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 1945년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 1948년 그의 자필 유작 시와 수필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집이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 유고집은 31편의 대표시가 3부로 구성되어있으며, 어두운 시대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 윤동주는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윤동주는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처녀작은 <삶과 죽음>, <초한대> 등이다.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194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해맑은 시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 연세대학교 교정 윤동주 시비, 시제는 '서시'>
<일본 교토 도시사대학(同志社大學) 교정 윤동주 시비, 시제는 '서시'>
<중국 용정시 대성중학교 윤동주 시비, 시제는 '서시'>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문학관>
<윤동주 문학관 뒤 '윤동주시인의 언덕'과 시비, 시제는 '서시'> ◇ 순결한 영혼의 시대적 고뇌
윤동주는 자선 원고를 묶은 후 6편의 시를 더 썼다. 「참회록」을 제외하면 도쿄의 릿쿄 대학 영문과를 다니면서 쓴 시들이다. 그는 유학 생활을 하며 퍽 고독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때 씌어진 시편들에는 이국 생활의 쓸쓸함과 함께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한 담담한 신념이 담겨 있다. "남의 나라"에서 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투명하게 비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사진 속의 온화하고 순한 시인의 얼굴이 그대로 연상된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윤동주의 시들처럼 시인의 내면을 맑고 선명하게 비춰 주는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
윤동주. 대한민국 시인.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항일운동 혐의로 인한 투옥과 이른 죽음은 그를 영원한 저항시인, 청년시인으로 남게 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4년간 다녔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정과 주변에서 지금도 시인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교정에 남아 있는 시인의 흔적, 윤동주기념관
연세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한창 공사 중인 백양로를 지나면 왼쪽 벤치 옆에 자그마한 시비(詩碑)가 보인다. 거기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짧은 시가 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시비 뒤로 보이는 핀슨홀(Pinson Hall)은 연희전문 시절 학생 기숙사로 쓰였던 건물이다. 이곳은 학생 윤동주가 1938년에 입학해 2년 동안 머문 공간이기도 하다. 1922년 준공되었다는 아담한 건물 안에는 시인의 그 시절 흔적을 모아놓은 윤동주기념실이 있다. 기념실 입구에서 낡은 사진 몇 장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인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선한 눈매. 그가 남긴 시를 닮은 모습이다.
기념실 내부는 건물만큼이나 아담하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증언을 통해 재현해놓은 시인의 책상이다. 낡은 책상 위에는 당시 시인이 즐겨 읽었다는 책 몇 권, 펜과 잉크, 그리고 시가 담긴 육필 원고가 있다. 그는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문예지 《새명동》을 만들 만큼 일찍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당시 최고의 국어학자였던 최현배와 역사학자 손진태의 강의를 들으며 민족에 눈을 떴다고 한다.
전시실 중앙에는 시인이 태어난 명동촌의 막새기와가 있고, 그 옆에는 최현배의 《우리말본》이 놓여 있다. 연희전문 기숙사에 머물던 시인은 고향과 민족을 생각하며 시를 써나갔을 것이다.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시인의 언덕
시인은 연희전문 입학 2년 만에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경복궁 서쪽 누상동은 지금 서촌이라 불리는 지역에 있다. 서촌에는 윤동주뿐 아니라 시인 이상과 화가 이중섭의 집도 있었다.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곳은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화가 박노수와 이상범의 집도 서촌이었다. 지금 서촌에 문화예술인들이 몰려들고 있는 게 어쩌면 이런 전통을 잇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머물던 시인은 종종 효자동길을 따라 인왕산에 올라 시상을 다듬곤 했다. 눈 아래 펼쳐지는 식민지 경성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와 민족의 앞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시인이 오르던 인왕산 자락에 ‘시인의 언덕’이 있다.
창의문 맞은편 길로 난 나무계단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서울성곽 앞으로 이곳이 윤동주 시인의 언덕임을 알리는 자그마한 표지석이 있다. 그 옆에는 <서시>를 새긴 시비가 있고, 아래로는 옛날 시인이 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서울의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바로 아래에는 윤동주문학관이 자리 잡았다. 인왕산 자락에 버려져 있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다. 느린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가압장처럼, 우리 영혼에 아름다운 자극을 주는 시인의 작품을 기념하는 공간을 만들었단다. 그의 시처럼 순백색 외관은 맑은 날이면 더욱 아름답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중앙의 낡은 우물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의 생가에 있던 우물을 옮겨온 것이란다. 이 우물 옆에 서면 그가 다니던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한다. 아마도 <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이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 홀로 찾아가선 /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 가을이 있습니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후략)”
전시실 우물 옆으로 시인의 일생이 담긴 사진 자료들과 친필 원고 영인본이 보인다. 그리고 그가 평소에 즐겨보던 책들의 표지가 한쪽 벽 가득 붙어 있다. 백석 시집과 정지용 시집, 영랑 시집… 이 시집들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갈고 닦았으리라.
시인의 우물은 제2전시실로 이어진다. 용도 폐기된 물탱크의 윗부분을 열어서 중정(中庭)을 만들고 ‘열린 우물’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에 저장되었던 물의 흔적이 벽체에 그대로 남아 있어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느끼도록 했다. 열린 우물은 제3전시실의 ‘닫힌 우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옛날 물탱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침묵하고 사색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시인의 일생과 시세계를 담은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1941년 11월, 졸업을 앞두고 있던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그때까지 써놓은 시 가운데 18편을 뽑고 거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그리고 3부를 필사해서 1부는 자신이 갖고, 다른 1부는 같이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고, 나머지 1부는 연희전문 은사인 이양하 교수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윤동주의 시가 일제의 검열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출판 보류를 권했다.
이듬해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 시인은 결국 자신의 시집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고 만다.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지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유고시집이 되어 시인 정지용의 발문을 달고 1948년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윤동주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남아 있다.
여행정보
윤동주기념관
주소 :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50
문의 : 02-2123-2253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주소 :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문의 : 02-2148-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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