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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이 노래한
‘고성가도固城街道’
세계의 명작이라고 하는 문학작품은 거의가 작가 자신의 고향을 소재로 하여 소설이나 시의 형식으로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이나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헤르만 헤세의<수레바퀴 밑에서>,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도>등에서 보듯 실제로 그렇다.
그런 면에서 고찰해 보면 이 지구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백석만큼 자신의 고향을 노래한 시인도 드물다. 유년시절 저절로 듣고 익혔던 고향의 사투리로 고향의 맛깔스런 음식과 고향의 풍속과 고향의 산천을 시로 노래한 시인도 아마 백석을 따라올 시인은 드물 것이다.
시인이 사랑했던 여인들
백석의 유명한 시<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나오는 ‘나타샤’는 ‘자야’란 여인으로 알려져있다. 백석과 한때 동거했던 여인으로 2010년 3월 11일에 열반한 ‘무소유’의 법정스님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하여 길상사란 절을 짓게 한 김영한 여사가 바로 이 시에 나오는 ‘자야’다.
‘자야子夜’는 본래 중국의 진나라 여성의 이름인데 그녀가 만든 노래가 애조를 띠고 있었으므로 이런 형식의 노래를 ‘자야가’라고 했다. 자야는 당시 사랑했던 여인의 대명사였던 모양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야를 사랑해서
노늘밤은 폭폭 눈이나련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폭폭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사와 나는
눈이 폭폭 쌓이는밤 힌당나귀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마가리에살쟈
눈은 폭폭 날리고
나는 나탸사를 생각하고
나탸사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운 폭폭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알 응알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여성》3권 3호(1938.3)에 발표
(당시 표기한 그대로 게재)
‘자야’를 만나기 전에 백석이 운명적으로 만났던 또 다른 한 여인이 있었다. 통영의 ‘난’이란 여인이었다.
‘난’은 누구였기에 백석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난’은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다고 한다. 백석 자신도 새카만 머리털이 가늘고 부드러우면서 속눈썹이 길게 자란 큰 눈이 아름다우며 약간 높은 코가 잔등선이 부드럽게 내려와 보기가 좋고 키도 중키요 어깨며 다리며 균형 잡힌 체격으로 세종로를 걸라갈라치면 참 멋이 질질 흐르는 당대의 미청년이었다. 같은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던 여류시인 노천명이 백석에게 핑크빛 눈길을 주었던 것도 그만큼 백석이 잘났기 때문일 것이다.
백석은 북쪽 끄트머리 평북 정주 태생으로(본명은 백기행 1912∼1995) 남쪽 끄트머리인 고성과는 별스런 인연이 없었을 것인데도 백석은 그의 많지 않은 시 중에서 ‘남행시초’라는 부제로 <통영><고성가도><창원도><삼천포>란 흔치 않은 지명으로 된 시를 남겼다.
<고성가도>가 세상에 나온 것은 순전히 통영의 사랑했던 여인과 백석의 관계 때문이다. 백석의 통영에 얽힌 사연과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935년 6월 백석은 조선일보사 동료인 신현중의 여동생 신영순(당시 교사) 백석의 절친한 친구 허준(평북 용천 출신의 소설가)의 혼인 기념 축하모임에서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이화고녀 학생이었던 통영여자 난(본명은 박경련)을 만나 백석은 흡사 전기에 감전이라도 먹은 듯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다. 난은 신현중의 누나인 신순정이 통영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의 제자였으니 신현중과는 자연스레 잘 아는 사이였다. 신순정이 포천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 이화고녀를 다니던 난은 옛 스승 댁을 자주 드나들었고 허준과 결혼하는 신현중의 여동생과는 가족처럼 지내었기에 혼인 축하모임에 참석을 했던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면 용감해지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던가. 백석은 친구 허준 내외의 통영 신행길에 허준의 처남인 신현중과 함께 따라나선다. 친구도 친구지만 필시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된 여인(박경련)과 그 여인을 낳은 통영과 장차 처갓집이 될지도 모를 그 여인의 집을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는 첫 통영 나들이 길에서 시<통영>이란 시를 썼다.
넷날엔 統制使가이었다는 낡은港口의처녀들에겐 넷날이가지않은 千嬉라는이름이많다.
미억오리같이말라서 굴껍지처럼말없시 사랑하다가죽는다는
이千姬의하나를 나는어늬오랜客主집의 생선가시가있는 마루방에서맞났다.
저문六月의 바다가에선조개도울을저녁 소라방등이붉으레한마당에 김냄새나는비가날였다.
-<통영>《조광》1권 2호 (1935.12)에 발표
시에 나타낸 ‘천희’라는 이름이 통영 지역에는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통영에서 느낀 처녀의 이미지는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것인데, 겉으로는 통영 처녀들에 대해서 말하는 듯하나 사실은 난을 향한 백석 자신의 애틋한 사랑 그 자체라고 하겠다. 애틋한 가슴앓이로 그는 “천희의 하나”인 난을 통영에서 만났다. 백석의 나이 스물네살. 난은 봄꽃 같은 스무 살이었다.
1936년 1월 초순 백석은 신현중과 함께 난을 만나러 다시 통영으로 간다. 가기 전 전보를 쳤다. ‘만나러 간다. 조선일보 백석’ 난은 전보를 받고 처음에는 백석이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백석이 결혼 피로연에서 만난 사람인 것을 알고 난은 난처했다. 백석의 관심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기에 전보를 어머니 서말수에게 알렸더니 그녀는 “도적놈이 온다.”고 펄쩍 뛰었다고 한다. 난은 서둘러 상경을 하면서 사촌 오빠인 서병직에게 부탁을 한다. “오빠! 내다 가고 나면 시인 백석이란 분이 올낀데 잘 대접해 주이소.”
난은 통영에서 배를 타고 마산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고 백석은 대구, 삼량진을 경우해 마산에 이르고 마산서 배로 통영에 닿았다. 서로 길이 엇갈린다. 백석의 상실감이 어떠했을지 쉬이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 두 번째 통영 나들이에서 통영의 풍물과 난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과 절절한 사랑을 백성 특유의 긴 음색과 호흡으로 노래한 시가 지금 통영시 명정동 충렬사 앞에, 백석이 난을 만나보려고 서성거렸음직한 길모퉁이 여백에 시비로 서 있다.
...
▲ 백석 시비
舊馬山의 선창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잘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파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山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가웃하는 처녀는 錦이라든이 같고
내가 들은 馬山 客主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같고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 산다는데
明井공은 산을 넘어 冬柏나무 푸르른 甘露 같은 물이 솟는 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약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冬柏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冬柏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넷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統營>《조선일보》1936년 1월 23에 발표, ‘南行詩抄’라는 부재가 있음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배에서 내려 보고 싶은 사람을 빨리 만나려고 간창골을 지나 서문고개를 급히 넘어가는 백석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왔으나 떠나고 없고 대신 그녀의 체취가 남아 있을 것 같은 그녀의 집과 동네를 기웃거리며 충렬사 입구 돌층계 계단에 앉아서 시를 쓰고 있는 백석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럼 시<고성가도>는 어떤 사유로 세당 밖으로 나오게 됐을까? 먼저 <고성가도>란 시를 음미해 보자
고성固城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른하지 않는 마을은
해바른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였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운 건반밥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고성가도 - 백석
- <남행시초>《조선일보》(1936. 3. 7)
백석은 친구 허준의 통영 신행길에 따라갔다가 난을 만난 이후 1936년 1월에 다시 통영에 내려왔으나 서로 길이 어긋나 만나지 못했음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 후 백석은 다시 통영에 내려와 난의 어머니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게 된다. 아마 친구 신현중도 함께 동행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때가 1936년 봄이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고성가도>의 시에 “진달래 개나리 한창 퓌였구나”라는 구절에서 알 수가 있다. 이 구절을 또한 이 시의 압권이다. 백석은 통영에서 신현중의 친구인 서병직의 도움으로 청혼을 하게 되어 기분이 좋아 술을 마시고 통영 밤바다를 배를 타고 유람을 한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고성에서 삼천포를 거쳐 진주에서 기차를 타고 상경하는 코스를 택한 듯하다.
<고성가도>는 백석이 통영에서 청혼을 한 후 고성을 지나가면서 쓴 시다. 그날이 고성장날 이었던 같다. 봄날의 날씨가 너무나 화창하여 해고 하늘 높이 둥둥 떠 있는 마을에는 개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한적한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양지바른 마당에는 방석 위에 맷돌이 놓여있고 햇살에 눈이 부시도록 고운 건반乾飯밥(세반細飯-찐 찹쌀을 말리어 튀겨 대강 빻은 가루 또는 잔치에 쓰는 약밥)과 산과 마을에 지천으로 핀 빨간 진달래와 노란 개나리가 서로서로 색감을 뽐내고 있다. 건반밥이 빨갛고 노랗다기보다 지천으로 핀 진달래와 개나리로 인해 건반밥이 빨갛고 노랗게 보였을 것이다.
건반밥을 고성에서는 통칭 ‘꼬드밥’으로 불렀다. 꼬드밥은 찹쌀을 시루에서 찐 밥으로 술을 담기 위해 덕석에 말리는데 배고픈 아이들이 오다가다 이 꼬드밥을 주인 몰래 한주먹 먹다가 들켜 혼나기도 한 밥이다.
백석은 햇살에 건반밥울 말리는 것을 곧 있을 잔치를 위한 것이고 잔치하는 사람들의 신명과 흥을 돋우기에 즐거운 거이라 했다. 흐믓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건반밥을 말리는 그 마을에는 또 당홍唐紅(약간 자줏빛을 띈 붉은색)치마와 노란 저고리를 입은 갓 시집온 새아가씨들이 신혼의 즐거움에 흠뻑 젖어서 웃고 살고만 있을 것 간다고 했다. 참으로 멋진 전개다. 잘 그려진 한 폭의 봄날을 풍경을 보는 듯하다.
이 시를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백석의 일행이 차를(당시에는 목탄차였음)타지 않고 통영에서 걸어서 고성으로 왔다는 느낌이 든다. 차를 타고 왔다면 “개 하나 얼른하지 않는 마을은/해바른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와 같은 풍경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마을은 어디였을까? 아마도 월평리였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통영에서 고성으로 오자면 마을다운 마을은 월평리가 아니었을까. 1936년대의 월평리 마을 풍정을 마치 사진 찍듯이, 그러면서 그곳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긍정적이고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백석
난과 백석의 사랑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1936년 12월 백석은 친구 허준과 함께 통영을 방문하여 박경련과의 혼인할 뜻을 전한다. 백석이 다녀간 뒤 1937년 3월 중순경 난의 어머니는 서울에 살고 있는 통영의 거물급 인물인 친오라버니 죽사竹史 서상호를 만나 외동딸의 혼사 문제를 상의하려고 상경한다. 백석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서상호는 그가 아끼고 신임하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조선일보사 동료인 백석의 집안 내력이니 사람 됨됨이를 수소문한다.
그러나 믿는 도끼레 발등을 찍힌다고 했던가. 시현중은 친구 백석에 대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전함으로 인해 혼사는 깨어지게 된다.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말을.
백석의 친구 신현중은 그런 정보쯤은 숨겨줄 만도 했을 것이나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 자신이 난을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백석과 난의 혼사가 깨어진 그 자리에서 신현중이 대뜸 서상호에게 자신이 사윗감으로는 어떠냐고 묻는다. 서상호는 평소 신현중을 아껴왔기에 단박에 승낙을 하게 된다. 1937년 4월 7일에 결혼을 했으니까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월 먹듯한 결혼이었다.
백석은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훗날 그 소식을 접한 백석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때의 심경을 난(박경련)은, “워낙 급하게 치러진 결혼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 나는 그때 신현중 씨나 백석 씨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여기까지가 통영과 백석과 난과의 사이에 얽힌 사랑 이야기다.
우리나라 시문학사에 있어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백석은 훗날 못다 이룬 사랑과 믿었던 친구에 대한 배신과 아픔을<내가 생각하는 것은><흰 바람벽이 있어><남신의주유동박시붕방><남향>이란 시를 통해 더러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더러는 분노와 섭섭함으로, 더러는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으로 담담히 밝혀 놓았다.
[출처] 시인 백석이 노래한 ‘고성가도固城街道’ /고성여행/고성 가볼 만한 곳|작성자 쇳디
고향 백석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편지> 백석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귀신이 제 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옛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귀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괸 수선화 한 폭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 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냇내 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의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워놓아야 하겠습니다.
밤이 아직 샐 때가 멀고 또 복밥을 먹을 때도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바느질그릇이 있는 데로 가서 무새헝겊이나 얻어다가 알록달록한 각시나 만들면서 이 남은 밤을 당신께서 좋아하실 내 시골 육보름밤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육보름으로 넘어서는 밤은 집집이 안간으로 사랑으로 웃간에도 맏웃간에도 누방에도 허청에도 고방(광)에도 부엌에도 대문간에도 외양간에도 모두 째듯하니 불을 켜놓고 복을 맞이하는 밤입니다, 달 밝은 마을의 행길 어디로는 복덩이가 돌아다닐 것도 같은 밤입니다. 닭이 수잠을 자고 개가 밥물을 먹고 도야지 깃을 들썩이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새 옷을 입고 복물을 긷는다고 벌을 건너기도 하고 고개를 넘기도 하여 부잣집 우물로 가서 반동이에 옹패기에 찰락찰락 물을 길어오며 별 같은 이야기를 재깔재깔하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또 복을 가져오느라고 달을 보고 웃어가며 살기같이 여우같이 부잣집으로 가서는 날쌔기도 하게 기왓골의 기왓장을 벗겨오고 부엌의 솥뚜껑을 들어오고 곱새담의 짚날을 뽑아오고……. 이렇게 허물없는 즐거움 속에 끼득깨득하는 그들은 산에서 내린 무슨 암짐승들이 되어버리는 밤입니다.
그러다는 집으로 들어가서 마음 고요히 세 마디 달린 수숫대에 마디마다 콩 한 알씩을 박아 물독 안에 넣는 밤인데, 밝은 날 산 끝이라는 웃마디, 중산이라는 가운데 마디, 해변이라는 밑마디의 그 어느 마디의 콩이 붇는가를 보고 그 어느 고장에 풍년이 들 것을 점칠 것입니다.
그러다는 닭이 울어서 새날이 되면 아홉 가지 나물에 아홉 그릇 밥을 먹으며, 먹으면 몸 쏠쐐기가 쏜다는 김치와, 먹으면 김 맬 때 비가 온다는 물을 자꾸 먹고 싶어 하는 밤입니다.
이렇게 해서 육보름의 아침이 됩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해뜨기 전에 동리 국수당의 스무나무가지를 쪄오래서 가시가시에 하이얀 솜을 피우고, 그 솜밭 속에 며칠 앞서부터 스물이고 서른이고 만들어놓은 울긋불긋한 각시와 새하얀 할미를 세워서는 굴통담에 곱새담에 장독담에 꽂아놓는데, 이렇게 하면 이 해에는 하루같이 목화밭에서 천근 목화가 난다고 믿는 그들의 새 옷 스척이는 소리도 좋게 의좋은 짝패들끼리 끼리끼리 밀려다니며 담장마다 머물러서는 목화 따는 할미며 각시와 무슨 이야기나 하는 듯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닭이 우나?) 아 닭이 웁니다. 나는 이만 이야기를 그치고 복밥을 기다리는 얼마 아닌 동안 신선과 고사리와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이나 생각하겠습니다. <조선일보 1936. 2. 22>
*육보름날- 음력으로 매월 열엿새 날. (이 글에서는 정월 대보름 다음날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 *웃간- 윗방 *맏웃간- 가장 위쪽에 있는 방 *누방_ 다락방 *살기- 삵괭이 *곱새담- 풀, 짚으로 엮어서 만든 담 *솔쐐기-송충이 *스무나무-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굴통담- 굴뚝담 ********************************************************************************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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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子夜 김진향 여사의 회고
나는 시인 백석과 1936년 가을 함흥에서 만났다. 그의 나이 26세, 내가 스물 둘이었다. 어느 우연한 자리였었는데, 그는 첫 대면인 나를 대뜸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자기 술잔을 꼭 나에게 건네었다. 속으로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행동거지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그는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하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의식은 거의 아득해지면서 바닥 모를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했다.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애틋한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함흥 교사시절 그는 하숙을 했고, 나도 하숙생활을 했다. 영생학교는 반룡산 밑에 있었고, 그의 하숙은 학교에서 한 오 리쯤 떨어진 함흥 근교 중리(中里)라는 곳에 있었다. 그때 나는 함흥 히라다 백화점에 볼일이 있어서 갔었던 것이다. 그의 첫 인상은 외국 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 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 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뜨끔하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늦은 밤이면 반드시 내 하숙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때 하숙집 부근 길목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그곳 진열대에는 젊고 예쁜 여자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그 앞에만 오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다. 마치 '당신 밖의 아무 여자도 나는 싫소.'라는 뜻을 나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어느 날 내가 서점에 들렀다가『당시(唐詩)선집』하나를 사왔는데, 백석은 그 책을 한참 읽고 나더니 문득 나에게 '子夜(자야)'란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자야'란 물론 당나라 시인 이백의「자야오가(子夜吳歌)」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長安一片月 / 萬戶 衣聲 / 秋風吹不盡 / 總是玉關情 / 何日平胡虜 / 良人罷遠征"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 '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 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遠征)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937년 늦가을이었다. 그는 어느 날《여성》잡지 한 권을 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찾아왔다. 그는 책을 뒤적뒤적하더니 한 곳을 펼쳐 코밑에 쑥 들이밀었다. 보니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바다」라는 제목의 시였다. 작품 아래쪽에는 한 남자가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빈 백사장에서 우두커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그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를 읽다가 문득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 당신이 이야기를 귾는 것만 같구려" 란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는 대뜸 말꼬투리를 잡아 "내가 끊긴 무얼 끊어요?" 했더니 그는 "밤낮 날더러 장가들라고 했잖았소!" "당신 머릿속에서는 지금도 나를 떠나라 하고 있지?" "왜 내 말이 잘못되었소?"라며 연거푸 정색을 하고 빠른 말로 말했다. 사실 나로서도 그런 말 하는 것이 무척 싫었지만, 나는 그에게 장가들기를 권하곤 했다. 그럴 적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백석 어머니는 그때 쉰이 넘어서 손자 없는 것을 늘 허전하게 여겼다고 한다. 겨울방학이 되어 백석은 서울 그의 부모 슬하에 가서 여러 날 있다 오게 되었다. 불과 며칠을 서로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함흥으로 줄곧 편지를 써 보내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신문이 배달되어 오는 것처럼. 편지글은 다정다감한 문체였으며 '오늘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오….' 라는 식의 하루 일과를 모두 깨알같이 써서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편지가 뚝 끊어지더니 열흘 정도 소식이 없었다. 몹시 궁금히 여기고 있던 어느 날 그가 에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 부모가 하도 맞선을 보라 해서 맞선을 보았다는 것과 그게 가책이 되어 편지를 못 내었노라는 내력을 말했다. 그는 평소 부모 말씀을 퍽 두렵게 여기는 듯했다. 나와 함께 살면서도 부모가 새악시 선을 보라 하면, 그는 그것을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이런 성품을 알면서도 자꾸만 울화가 치밀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운했다. 나는 속으로 '흥, 그대가 총각이라지…. 야,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그래, 내가 피해줄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전한 마음이 못내 사라지지 않았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편지가 끊어진 그 열흘 동안 맞선만 본 게 아니라 초례(醮禮)까지 치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장가든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 나에게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시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행위가 너무도 야속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 길로 이불이랑 짐 보따리를 꾸려서 낮 11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아주 내려와 버렸다. 193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청진동에서 11칸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動)이 웬 쪽지를 들고 찾아왔다. 펴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 달 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 데로 속히 와 주시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내 가슴은 사뭇 그리움으로 두근거려 왔다. 부리나케 그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해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오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동안 쌓인 모든 含怨(함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출근하기 위해 밤차로 함흥으로 떠났고, 나는 서울에 남았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절대로 갈라설 수 없는 하나임을 새삼 느꼈다. 그해 초여름, 서울에서는 전선(全鮮)고교대항축구대회가 열렸는데, 백석은 함흥 영생고보 축구부 학생들을 인솔하고 서울에 나타났다. 약 한 주일가량 출장인 것 같았는데, 그는 오던 첫날만 학생들을 연습장에 데려다주고는 줄곧 나의 청진동 집에서 기거하다시피 했다. 내가 "학교 아이들은 안 돌보고 왜 자꾸 여기만 계셔요?"라고 재촉도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솔교사를 잃어버린 학생들은 모처럼 상경한 기분에 들떠 떼를 지어 유흥장으로 몰려다녔다. 이들 중 몇몇이 서울 학생지도 합동단속교사에 적발되었고, 교사는 학생들을 힐문하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 학생이야?" "함흥 영생고보입니다." "서울은 무슨 일로 왔지?" "축구시합에 출전하러 왔습니다" "인솔교사는 어디 갔어?" "몰라요, 저희들도 오던 날 운동장에서 한 번 뵌 후론 다시 못 만난걸요." 일이 이렇게 되자, 함흥 영생학교는 온통 벌집 쑤신 듯하였고, 특히 고참교사들 노여움은 대단하였다. 당시 영생학원 이사장으로 있던 이 모 씨는 평소 학교일에 매우 열성적이었던 백석을 퍽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은 다른 교사들 보기에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라 해서, 같은 영생학원 계열 여학교로 전보 발령을 했다. 그 난감한 경황을 무릅쓰고, 백석은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 영생 여고보에서 한 학기인가를 근무했다. 방학 때 다시 서울에 왔었는데, 그때 이미 함흥으로 돌아갈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그는 사표를 써서 우편으로 부쳤다. 그런 며칠 뒤에 조선일보 출판부 옛 직장에서 나와 달라는 연락이 왔고, 이로부터 백석의 서울 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함흥 영생학교시절 아동문학가 강소천과 목사 김관석이 백석에게 영어를 배웠다. 지난날 함흥에서 거주한 적이 있는 시인 이기형은 그 무렵 백석이 '함흥 최고 멋쟁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백석은 한 평범한 교사에 불과했지만, 이미 시집『사슴』을 내어 문학적 명성이 높았던 터라, 그는 함흥 문학 지망생들의 詩 뿐만 아니라, 습작소설까지도 자상하고 꼼꼼하게 지도해주었다고 한다.
백석과 나는 앞서 말한 나의 청진동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함흥시절은 그가 교사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나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젠 아무데도 구애받지 않아서 좋았다. 마당 한 뼘 없는 작은 한옥이었지만 안방, 건넌방, 그리고 쪽마루에 딸린 작은 찬방(饌房)이 하나 있어서, 우리들에겐 그지없이 단란한 보금자리였다. 그의 詩「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친구와 이 집을 일부러 찾아가 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은 꼬리곰탕을 전문으로 한다는 식당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는 식당 안방에 들어가 음식을 시켜놓고 옛 청진동 시절 추억에 젖었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우리 둘은 참으로 행복하였다. 워낙 서로 만족하였고, 아무런 빈틈이 없었으며, 오직 서로에게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밖에 아무런 것에도 무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늘 나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려고 세심한 배려를 했던 것 같다. 그는 나의 어떤 일에도 절대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불편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단정한 젠틀맨이었고,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비록 밖에서 화난 일이 있었어도 혼자 가만히 참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언제 화를 내고 있었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았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말수도 적었고, 어떤 때에도 남의 결점을 화재로 떠올리는 법이 없었다. 이런 그의 성격을 까다로운 편이라고 할까.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조차 누구에게 신세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때 청진동 집에는 늘 와서 부엌일을 보고 잔심부름도 해주는 찬모가 있었는데, 나는 그가 찬모에게 무엇을 시키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처럼 말수가 적던 백석도 일단 시에 관한 화제로 옮겨지면 갑자기 눈빛을 반짝거리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요절한 일본작가 아꾸다까와(芥川龍之介)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고, 또 다른 일본 문인들 이야기도 재미있게 했던 것 같다. 내가 문학을 모르니 다만 웃기만 하고 들을 뿐,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그 무렵 《삼천리(三千里)》지에 두어 편의 수필을 필명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종로 네거리 한청빌딩 부근에서 과일 파는 상인들의 밤 풍경을 쓴 것인데, 나의 글이 실린 책이 나오던 그날은 하루 종일 함박눈이 펑펑 왔다.) 일본 문인들을 화제로 떠올리긴 했지만, 그는 일본말 쓰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일찍이 일본 유학도 다녀왔으니 일본말도 잘했을 것이나, 그는 일본말을 써야 할 때, 거기에 바꿔 쓸 수 있는 우리말을 애써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담화 때는 주로 표준말을 썼지만, 그의 억양은 짙은 평안도 말씨였다.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그는 야릇한 고향 사투리를 일부러 강하게 쓰는 습관이 있었다. 한 예를 들면 천정을 '턴정' 정거장을 '덩거장', 정주를 '덩주', 질겁을 '디겁', 아랫목을 구태여 '아르궅' 따위로 쓰는 식이었다. 그의 식사 공궤(供饋)는 매우 수월한 편이었다.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들었지만, 육류보다는 나물반찬을 비교적 더 좋아했다.
한번은 함께 시내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푸줏간 앞을 지나는데, 그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시뻘건 고깃덩어리를 어떻게 똑바로 쳐다볼 수 있어?"하고 말했다. 정말 그는 푸줏간을 제일 질색했다. 함께 살면서 보니 그에겐 이처럼 드러나 보이는 이상한 습관이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집 안방 창문을 여닫을 때도 그는 잠금쇠 만지기를 피하여 손이 잘 닿지 않는 창문틀 위쪽이나 아래쪽을 겨우 밀어서 여닫곤 했다. 한번은 함께 전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 길이었다. 전차가 길모퉁이를 돌 때 갑자기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 쏠렸다. 그때까지 머리 위 손잡이를 불결하다며 아무것도 잡지 않고 그냥 서 있던 그는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창유리에 갖다 대면서 몸의 중심을 유지했다. 또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와 악수하고 난 뒤에는 곧 그가 눈치 채지 않게 수도간으로 나와 꼭 비누로 손을 씻곤 했다. 보다 못한 내가 몇 차례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수건을 달랄 때 일부러 안 주곤 했더니, 그 뒤 그 습관만큼은 조금 고쳐진 것 같았다.
그는 각별히 즐기는 취미나 오락은 없었다. 술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경음가(鯨飮家)는 아니었고 오히려 애주형에 가까웠다. 책으로는 모리악의『예수전』, 중국작가 변윤(邊潤)의 『요불이전(了不以前)』을 즐겨 보았으며, 심심할 때면 잡지《문에춘추》를 보거나 일본시집을 뒤적거릴 정도였다. 그 목소리는 참 다정스럽고 부드러웠으며, 청으로서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내가 아는 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집에 빅터상표의 고급 유성기가 하나 있었지만 한 번도 거기에 손대는 걸 못 보았고, 가요 · 창극 같은 데도 무관심했다. 그 무렵《조광》지가 요청해온 설문란에 그가 자신의 취미를 '西道唱(서도창)'과 '타이프라이팅'이라 쓴 것을 보았는데, 이 '서도창'이 직접 부르는 걸 말하는 것인지 소리꾼 노래를 듣는 걸 말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다만 말없이 묵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그러다가는 잡지보고, 시집보고…. 하였을 뿐이다. 그의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무렵 청진동으로 그에게 부쳐져오던 편지 겉봉에는 '백기연(白基衍)'으로 씌어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가 몹시 기뻐하던 모습을 꼭 한번 본 적이 있다. 언젠가 내가 시내 본정(명동의 일제 때 이름) 부근엘 나갔다가 상점 쇼윈도에서 넥타이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옅은 검은색 바탕에 다홍빛 빗금 줄무늬가 잔잔하게 박힌 것이었다. 얼핏 그것이 백석에게 매우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심코 사와서 드렸더니 그 얼굴 표정에는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튿날 그는 내가 사온 넥타이를 매고 출근 했는데, 저녁때 와서는, "여보, 오늘 ××를 만났는데, 이 넥타이 참 좋데" 라고 했다. 그는 그 뒤 여러 날 동안 줄곧 그 넥타이만 매었고, 퇴근 후에는 예의 그 말을 꼭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제 그 소리 오늘 또 하네. 어쩌면 그게 그렇게도 좋을까' 했지만, 내심 그 말이 듣기에 즐거웠다. 이 넥타이 이야기는「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시에서 "언제나 똑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로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백석은 사람을 만나 그가 먼저 주도해서 교제를 이끌어간다거나, 누구를 새로 사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 백석이나 그의 시에 홀딱 반해버린 사람이 아주 그에게 제 스스로 엎어져오기 전에는 도무지 사교 능력이라곤 없는 사람이다. 얼른 보기에 무심한 편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한 중에서도 함대훈, 허준, 정근양, 그리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조○○는 비교적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다.
도쿄 외국어학교 노어과를 나온 일보(一步)함대훈은 황해도 풍천 출생 노문학자로서 소설도 몇 편 썼다. 그는 조선일보 출판부 주임으로 있었으며, 편집국장을 지낸 함상훈과 형제지간이었는데, 괄괄한 성격에다 대단한 호주(豪酒)였다. 당시 그는 청운동에 살았는데, 우리 청진동 집에 가장 자주 놀러왔던 백석 친구였다. 나중에는 그가 아무 때건 불쑥 찾아오는 것이 너무 싫어서, 내가 백석에게 "함대훈 씨가 싫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당신이 좋다고 하던걸" 하면서 꼭 친구와 나를 함께 두둔하곤 했다. 그래도 줄곧 내가 못마땅한 얼굴로 "함씨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에요?"하면 "아냐, 그는 정말 당신이 좋대"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함대훈은 그때 무슨 잡지를 만들던 최남주 여동생 최옥희와 열애에 빠져 있었다.
평안도 용천 출신 소설가 허준은 1935년 10월 조선일보에 시「모체(母體)」를 발표하면서 백석과 비슷한 시기에 문단에 나왔는데, 이듬해《조광》지에「탁류」란 단편소설을 쓴 뒤 아주 소설 쪽으로 돌아섰다. 백석과는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서로 심지(心志)가 꽤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그는 낙원동에 살면서 자주 왔었는데, 매우 큰 체격으로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으며, 술을 좋아했다. 백석이 허 씨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시까지 쓴 걸 보면, 그와 남다른 우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의사로서 문필생활을 겸하던 정근양, 그는 앞서도 말한 바처럼 백석과 조선일보 장학생 동기였고 청진동 집에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났을 때, 정도 서울을 떠나 북지(北支)산서성 임분현이라는 곳에 가서 병원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한 사람 친구는 서울 어느 중학 영어선생을 하던 조○○였다. 그는 우리 집에서 놀다 밤이 늦어 돌아갈 때면, 그때마다 우리를 앞에 세워놓고 "그대들 둘은 어찌 그리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인고…." 하면서 부러운 듯 말했다. 사실 백석과 나는 서로 다른 기질 때문에 오히려 잘 맞았는지 모른다. 한쪽이 뾰족한 성품이면 다른 한쪽은 좀 둥글둥글한 것이 인간관계의 조화가 아닐까.
그밖에 백석과 평소 가까이 지냈던 이들은 문학평론가 백철이 있다. 그는 백석보다 네 살 위였지만 동향선배로서 친밀하게 지냈고, 함흥 영생학원에도 한때 같이 있었다. 1935년 시집『사슴』이 나온 직후, 서울 태서관에서 가진 출판기념회 발기인 명단 이름들은 몇몇을 빼곤 대부분 백석과 조선일보에 함께 몸을 담고 있던 문인, 화가들이었다. 또 그들은 대개 백석의 시를 남달리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안석영(安夕影)은 서울 토박이로 본명이 석주(碩柱)였다. 일찍이 1921년 나도향(羅稻香)의 동아일보 연재소설『환희』삽화를 그렸던 그는 한국 삽화계 선구자이다. 30년대 중반 안 씨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냈는데, 워낙 잘생긴 얼굴에 다재다능하여, 나중에는 언론계를 떠나 전적으로 영화에만 몰두하였다. 백석보다는 11년 위였는데, 서로 각별히 따르고 위하였다.
김규택(金圭澤)은 웅초(熊超)란 호를 가졌던 분으로,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나와 역시 조선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던 화가였다. 일본 호세이대학 불문과를 나온 여천(黎泉) 이원조(李源朝)는 경북 안동사람으로 시인 이육사(李陸史)아우였는데, 그때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 언제나 한복차림이던 그는 늘 자신이 양반고장 사람임을 자랑삼아 말했고, 그것을 날마다 들어온 사람들은 "여보, 그 양반타령 좀 작작허우"하며 싫은 소리를 하였다. 깔깔한 샌님 같던 그도 일단 술이 취하면 주사(酒邪)가 대단해서 모두들 슬금슬금 뺑소니치는 모습이었다. 함경도 출신 시인 편석천(片石村) 김기림은 백석보다 4년 위였는데, 그도 일찍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다.『사슴』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즉시 서평을 써줄 정도로 그는 백석 시를 좋아했다.
정현웅은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작품「여인상」이 특선으로 뽑힌 서양화가로서 당시 백석과 함께《여성》지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 잡지 삽화로 백석 프로필을 그리면서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스케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낮 미스터 백석의 심각한 얼굴만 보게 된다. 미스터 백석은 서반아 사람도 같고 필리핀 사람도 같다. 미스터 백석에게 서반아 투우사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삽화 말을 썼다. 한편 백석이 평소에 문학적 재능을 자주 칭찬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동문학가 강소천이다. 용률(龍律)로 함남 고원 태생인 그는 백석보다 불과 3년 밑이었으나, 만학으로서 백석에게 직접 문학을 배운 제자였다.
1939년 서울 명동입구 미도파 건너편에 '제일다방'이라고 있었다. 이 다방은 당시 경성일보 학예부에 있던 일본인 기자 기쿠지(菊池)의 아내가 경영하던 곳으로, 이른바 재경(在京)문인 예술가들 아지트였다. 언제 어느 때건 가보면 낯익은 문인 몇몇은 꼭 눈에 띄었다. 공작새 꽁지깃으로 장식한 세련된 실내장식에다, 이름 있는 유화도 여러 점 운치 있게 걸려 있는 꽤 분위기 있는 다방이었다. 한 번은 그곳으로 오라는 전갈이 와서 가보니 백석은 함대훈, 백철 등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정쩡하게 합석이 되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양인은 번갈아가며 내 얼굴이 예쁘다느니 어떻다느니라는 말을 자꾸 거듭하여 면전에서 몹시 난처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백석은 혼자 웃고만 있었다. 나중에 백석이 만주로 떠난 뒤에 길에서 허준, 정근양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도 "김(金)은 어째 갈수록 예뻐져?" "백석이 장가를 두 번씩이나 들고도 곧장 도망 나온 까닭을 인제야 알겠구먼."이라고 큰소리로 떠들어 그때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 적이 있다.
1939년 유월 어느 아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백석은 그날 충청도 진천으로 한 주일 가량 출장을 다녀오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여자 육감으로 그가 먼젓번처럼 필시 장가들러 가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약속한 한 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번에도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틀림없이 돌아오리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에 달갑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차디찬 성질, 그리고 나를 향한 열정을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청진동 집에서 조선일보까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는 찾아가기는커녕 전화 한 번 조차 걸지 않았다. 점차 매섭게 타오르는 내 가슴속의 독(毒)과, 또한 내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내 성격을 백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또 몹시 초조하게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없는 빈방에 혼자 남아서 무척 공허한 심정이 들었고, 내 가슴 속의 공허감은 차츰 매몰찬 복수심으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매몰찬 복수라는 게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기껏해야 연전에 내가 몰래 함흥을 빠져나오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서 한동안 멀리 떠나 있고자 했던 것뿐이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채로…. 웬만한 살림을 대충 챙겨서 나는 명륜동 언덕으로 숨어버렸다. 지금 성대 뒤쪽이었는데, 1930년대 후반 그곳 부근 앵두나무, 능금나무, 배나무 따위를 심어놓은 과수원이 많았고, 주택들도 드문드문 서 있는 변두리에 불과했다. 지난 날 부통령을 지냈던 장면(張勉)씨 집이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다.
어느 석양 무렵이었는데, 집 뒤로 난 골목길에서 누가 "자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일일까? 그는 내가 잠적한 이곳을 모를 텐데….(그가 어떻게 내 거처를 찾아내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것을 불가사의로 생각한다.) '자야'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백석뿐일 텐데…. 부르는 소리는 두 번 세 번 거듭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망설이다가 '에라, 어찌 되었건 나가놓고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황급히 나갔더니, 그가 석양을 등지고 퀭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두 달 만에 다시 만났다. 나는 그때까지도 무척 독이 나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는 순간 다시금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좋아서 마음이 시루리 풀리듯 스르르 풀려 버렸다. 그러나 나는 백석 부모가 못내 원망스러워졌고, 또 예의 그 독한 마음은 불쑥불쑥 치밀었다. 그는 본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족두리를 풀어 내린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색시를 내버려두고 집을 나온 것이다. 내가 알기로 백석이 사모관대하고 장가를 든 것은 두 번이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마다하고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1939년 동짓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중국 북경, 소주(蘇州),항주(杭州) 상해 등지를 거쳐 한 달 만에야 돌아왔다. 떠날 때 내 행선을 백석에게 알리지 않았다. 다녀와서도 나는 그에게 여행 이야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그 또한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알리지도 않고 중국을 다녀온 처사에 대해 상당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앵돌아진 속으로 '당신께선 지금 저 때문에 화나시게 해서 송구스럽지만, 당신도 제가 겪은 고통을 한번쯤 겪어보셔야 해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그저 묵묵해지기만 했고, 서로 일과를 화제로 떠올리지도 않았으며, 이런 우리들 사이는 심상찮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하루는 그가 보낸 메시지가 왔다. 왕십리역 대합실 구내다방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때 왕십리란 보잘것없는 초가와 들판뿐인 아주 시골이었는데,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종점인 왕십리까지 가서 내리면 사방에서 거름 썩는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사람들 눈을 피하려고 그 변두리 먼 곳까지 나오라 했던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대뜸 자기와 함께 만주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실 이러한 권유는 함흥시절부터 심심찮게 들어오던 터라 조금도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 표정은 너무도 심각한 듯 여겨져서,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나는 그때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그는 만주 신경(新京)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나에게 단 한마디 그 어떤 기별도 남겨두지 않은 채….
돌이켜보면 그 만주행은 함흥에서부터 계획해오던 것이었고, 또 그가 재차 서울로 와서 옛 직장을 다시 나가고 한 해를 머무른 것도 결국은 나 때문에, 내가 마음에 걸러서였던 것 같다. 나 아니었으면, 그는 진작 함흥에서 만주로 곧장 떠나갔으리라. 그가 만주 땅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깊은 속뜻을 내 얕은 여자 소견으로 어찌 감히 짐작인들 했으랴만…. 그는 내가 자기 권유대로 쉽게 만주로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에서 이런 대목을 본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그때 만주로 함께 갔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진작 그곳 생활이 지겨워진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를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하게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한 것도 나였고, 국토가 둘로 쪼개어져 그를 다시는 북에서 서울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도 모두 내가 미욱했던 탓이다.
만주 신경시절 백석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작가 송지영(宋志英)씨 술회로는 백석이 그때만큼은 고향 부모에게 매달 약간의 송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 무렵 항상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는데, 송씨가 "그 옷, 서울의 김이 보냈구려"하고 농을 걸면, 백석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 이후 백석은 실직상태가 되어서 만주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몹시도 고달픈 생활을 하게 되었던가보다. 그가 이렇게도 모진 고생을 했었다는 생각을 하면 온통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 시절 만주의 쓸쓸한 하숙방에서 쓴 것으로 보이는 그 詩「흰 바람벽이 있어」를 통해, 나는 필시 내 모습으로 짐작되는 부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때가 해방 직전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외로움과 고달픔은 그의 마지막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낱낱이 그렁그렁 박혀있다. 깊은 밤에 그 전집을 끌어안고 이 시를 혼자 목이 메어 읽어가노라면 주체할 길 없이 솟구쳐오는 뜨거운 눈물을 나는 참지 못한다. 이 시에서 그의 맑고 고결한 정신은 이미 세속을 훨씬 떠나 있는 듯하다.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 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흡사 그가 눈앞에 당장 되살아온 듯 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말 속에는 평소 그 성품, 현실에 임하던 그 모습 같은 것이 그대로 생생하게 스며 있다.
그와 헤어지고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이란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온갖 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것도 헤아려보면 모두 백석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고, 또 그를 향한 반발심이 물 끓듯 끓어 넘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내가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고, 나 또한 서럽게 살아왔다. 어찌 모든 것을 이대로 마감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내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 텅 빈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사실 10여 년 전부터 나는 그 전집을 내 손으로 엮어보려고 틈날 때마다 흑석동 살던 백철 씨와 의논해왔었다. 그 무렵, 백철은 어느 신문칼럼에서 시인 백석을 일컬어 "한국시사에서 소월 다음가는 귀재"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뒤 병을 얻어 내 포부를 도와주지도 못하고 타계해버렸다. 이미 그의 전집이 세상에 나왔으니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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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백석의 여인1-자야의 사랑)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 있어 '
다시 태어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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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子夜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간 기생이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며 몇 편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여성. 백석과는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 교원으로 있던 시절에 만났으며, 그 뒤 두 사람은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우여곡절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백석,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 이동순'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백석의 많은 시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詩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백석白石
1912. 7. 1 평북 정주~1995 (사망한 것으로 전해짐) 본명은 기행(夔行)이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조선일보〉에〈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의〈고요한 돈 강〉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뒤 귀국하여 협동농장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에 시집〈사슴>〈여우 난 곬족(조광,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무술(巫術) 소재가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이용악 詩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서 해금 뒤 최초로 영남대 이동순 교수에 의해 시집〈백석 시전집.1987)〈흰 바람벽이 있어.1989)과 논문이 출간되고, 이후, 여러 작가들에 의해 많은 시선집 시 해설집 논문 등이 나왔다.
子夜는 백석의 여인 중에서 잘 알려진 분이다. 이동순 교수(영남대)가 백석 문학이 해금되던 해, 자야 여사를 직접 면답해 얻은 자료가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 담긴 '백석,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 여사의 회고/이동순과 자야여사가 구술하고 이동순 시인이 정리 조력한 자야여사의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이다.
백석의 女人에는 여러 여인이 등장한다, 한 분은 지금 옮기는 자야이고, 그리고 부모님이 정처해준 부인, 백석의 절친한 친구 신현중과 결혼해버린 통영의 란, 그리고 김진세 누이 등이다.
세월과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고 가난과 외로움과 쓸쓸함에 사랑의 처지가 눈물 앞에 뉘여 가며 흔들릴 때 그의 사랑도 定處도 그의 조국인 조선의 울도 변해간다.
함흥에서 서울에서 통영에서 의주에서 만주에서 북한에서 백석의 여인도 운명처럼 여러 여인이 등장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백석의 심중에 남은 여인이 란이라면, 여인의 심중에 남아 있게한 사랑이 자야의 백석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의 사랑, 아니 여인의 시인에 대한 사랑이야기 오늘은 이생진 시인님 시를 빌어 1편-자야의 사랑을 보낸다.
"천재시인 백석은 1935년 詩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사후,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은 같은 해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일하게 된다. 백석과 김영한의 극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이루어진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이러한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해준다. 신윤국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앉았다. 그는 여러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그 배경이 순진했다고 한다.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나갈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나게 되면 스승을 특별 면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지만, 함흥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우연히 함흥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함흥에서 운명적 만남…. 그리고 사랑, 사랑과 해후의 반복, 사랑을 위한 현실의 外的인 도피 그때 백석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우곤 했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 여러 시인들이‘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 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비슷한 시기 천재작가 이상(李箱)은 황해도 배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잠시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살림을 차렸고, 현재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다방을 연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여성’에 발표한 ‘바다’와‘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백석은 어느 날 ‘바다’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 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 “이 詩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을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1937년, 여성)
두 사람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목 어느 신의주 변방에서 1948년 잡지 ‘학풍’에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이 작품이 서울로 보내져 학풍에 실리게 됨으로서 백석이 서울에 발표한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 당시 백석의 단절한 심경이 절절히 배인 이 시는 지금 많은 시인들의 애송시가 되었다. 즉 남한에 알려진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백석이 월북한 적이 없었음에도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그 작품은 1987년까지 금지도서가 되었다. 까닭은 해방이후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함흥과 정주를 마음대로 오가며 문학 활동을 하던 백석은 한반도 허리가 잘리면서 북쪽을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월북 작가가 아닌 재북작가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자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고 자야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자야여사(김영한)는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이 많은 사랑의 지난날을 털어놓는다.
이동순 시인은 그 때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자야가 글 솜씨가 있는 데다 1953년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 학구파였기에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자야는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입원을 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백석은 1930년대 모더니즘과 민족주의를 결합한 유일한 사례였다면서 백석의 작품이 수능시험에 까지 출제된다는 것은‘월북 시인’에서 ‘재북 시인’으로 완전한 복원을 의미한다”(이동순 교수)
생전의 자야 여사(김영한)는 백석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 詩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김영한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5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이시영. 정양 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백석은 이 세상에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한 시인으로 남겨지고 북한에서 죽었다. 그의 시(詩)와 비련(悲戀)의 사랑, 그리고 자야의 고결한 사랑은 많은 독자 숨결이 되어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旻影 시인)
*참고인용-자야여사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1995) *참고인용-'수능 시인’백석과 기생 자야의 비련의 사랑/조성관 주간조선차장대우 *참고인용-"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자야여사의 회고/이동순" 에서
자야 김진향 선생님과 인연-국립국악원 정악단 문현(음악학.文學博士)
자야 선생님은 한때 가곡으로 인연을 가진 바 있다. 작고하시기 약 4-5개월 전부터인가-기억도 가물가물해졌지만-자야 선생의 가곡 스승이었던 하규일 명인으로부터 배운 가곡을 복구시키고 싶다며 제가 몸담고 있는 국립국악원에 문의를 해 오셨고, 이리해서 필자는 장구를 잡고 지금도 정악단 단원으로 있는 대금에 김상준씨와, 거문고에 윤성혜씨와 함께 작고하기 직전까지 그가 사시던 한강이 창문너머 보이던 동부이촌동 한 아파트를 일주일이면 1-2 회 정도씩 드나들며 선생이 부르는 여창가곡을 반주하곤 했었다. 연습할 때마다 그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직접 해 두셨고, 그가 작고하신 뒤 이를 CD 5-6장 분량으로 복각하여 반주했던 우리들이 나누어 가진 바 있다.
사실 선생은 이렇게 댁에서 연습하신 뒤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을 때 녹음실 기자재로 정식으로 녹음 제작하여 보관해 놓으시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작고하시기 전날 밤, 이날도 우리 일행은 선생의 가곡 반주를 해 드렸던 날이었는데, 그날 새벽 갑자기 작고하셨던 것이다. 우리 일행이 가곡반주를 위해서 동부이촌동 댁을 드나들 때에도 이미 호흡기 계통에 문제가 있으셔서 예전의 낭랑했을 목소리는 빛을 잃어 가쁜 호흡을 뿜어내며 긴 노래를 힘겹게 하시곤 했었다.
선생이 기거하던 넓은 아파트에서 선생 뒷바라지를 위해 한 부부 내외와 함께 거처하면서, 특히 선생이 숨이 턱에 차서 호흡곤란이 발생할 때면 항상 남자로부터 응급치료를 받았던 선생이었다. 작고하시던 그날도 호흡곤란이 일어났을 때 빠른 응급처치를 받았더라면 더 사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날은 그 타이밍을 놓쳤던 것이다. 자야 선생은 위 소개 글에서도 적혀 있듯이 많은 이름을 가지고 계셨다. 한 가지 더 추가할 이름이 있으니 '김진향(金眞香)'이다. 그의 妓名이다. 이 기생 이름으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서울 : 도서출판 예음, 1993)이라는 책을 남기셨다. 국악계에서는 김진향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
註-이상 글은 국악원정악단(시조창 권위자). |
흰 바람벽에 비취 본 그리움!
한때는 몹시 원망스럽기조차 했던 사무친 모정, 하늘이 내신 지극하던 효심! 도저히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조차 할 줄 모르던 순진 효심! 어찌타 우연히 당기어진 정열의 불길을 억누를 수 없어 본의 아니게 자기 양심을 속이고 부모님까지 배반하면서 사랑하는 조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등을 돌리고 마셨던 것일까 급기야 북풍한설 모진 겨울에 북만주 호지로 멀리 떨어져 외롭고 삭막한 도피성 이주를 겁없이 결행하시고 만 당신. 비단 부모님을 원망해서도 아니었으리라. 고루하고 암담한 구태속에 잠들어 있는 봉건사회를 당신은 피끓는 청춘의 벅찬 용맹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좌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개화의 길에서 온몸으로 봉건사회에 맞선 또다른 방식의 저항이요, 온건한 방식의 복수였다. 하지만 당신은 그 황막하고도 외로운 호지에서 생각하신 것이라곤 오직 부모님의 따스한 품속이었을 것이다. 고국의 산천, 서러워하던 사랑의 슬픔에 목메인 외침만 낭자한 선혈처럼 뿌리셨으리라. 나는 이처럼 갖가지 깊은 추억의 정념에 젖어서 애달픈 환상의 필름만 거꾸로 돌려보기 만 한다. 갑자기 모질게도 추운 날에 찬물에 담근 시어머님의 시퍼러둥둥하고도 앙상한 손마디가 비친다. 그 찬물과 굵은 손마디! 생각만 해도 가슴속이 꽁꽁 얼어들고 후들후들 뼈마디가 다 져려온다. 인생은 고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궂은 일, 슬픈 일, 한 세상 겪어오신 어머님의 거칠고 굵은 손마디는 순일무잡한 항심(恒心)을 그대로 보여주신다. 그 거칠어진 손길도 이제 그만 거두어들이시고, 지금쯤은 안방나님으로 고이 따스한 아랫목에 누워 계신다. 어머님께서는 누우신 채로 퇴침 돋우시고 우리 둘을 찾아서 부르신다. 우리는 쥐걸음으로 옴슬옴슬 조용히 가서 뵈오니 어머님께서는 몸이 불편하시다. 기침도 하시고 이마엔 열이 느껴진다. 우리는 공손히 어머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아서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들으며 나는 어머님의 팔다리를 가만가만 주물러 드린다. 진정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냉정한 세상이 말할 수 없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이제 와 뉘우치는 불효의 뜨거운 눈물, 다 무슨 소용 있으리.
다시 영상의 화면은 바뀌어진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과 소망하던 어린것을 옆에 끼고 저녁 밥상에 함께 둘러앉아 있는 한 가족이 있다. 그 집은 먼 앞대의 조용한 개포가에 있는 나지막한 집이다. 아내는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서 대구국을 끓여놓고 나누 먹으며, 하루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한다. 참으로 단란한 풍경이다. 꿈에서도 그리던 단란한 가정을 당신은 작품 속에서나마 하나의 영상으로 비치어 본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애달프고 얼룩진 환상이다. 어느틈에 당신의 눈매에는 눈물이 가득 고인다. 내 눈에도 뜨거운 피눈물이 줄줄이 흘러서 두 볼을 타고 마냥 흘러내린다. 불현듯 나는 당신의 어린 자식을 포대기로 들쳐업는다.그리고는 우르르 당신께로 달려가서 그 쓸쓸하고 허전한 무릎 위에 내려 놓는다. 당신은 흐뭇하면서도 측은한 표정으로 무릎 위의 아기를 본다. 당신의 코끝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아기의 이마에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다 나는 기어이 당신의 어깨에 매달려 흐느끼고야 만다.
지금 내 눈앞에는 이런 애절한 환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진실로 당신이 만주로 가자고 했울 때, 나는 이것저것 헤아리지 않고 내 낭군님을 따라가야 했었으리라. 그것이야말로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신 당신께 대한 진정한 내 보답의 길이 되었으리라. 당신은 부모님께서 지천명이 지나도록 손자를 안겨드리지 못하는 것을 늘 송구스러워하였다. 당신의 부모님께서도 아들이 이런 소망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한 것을 항상 한탄하신다고 말했다. 이대로 손자를 끝내 못 보게 되면 조상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신다고 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낯이 화끈거려서 둘아 앉았고,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나 자신의 처지가 몹시도 한스러웠다. 자식이야 당신보다 내가 사실은 더 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갈등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모르셨던 것같다. 그 시절 문외(門外)의 자손을 갖는다는 것은 실로 큰 비극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큰 소란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의 그 소망을 끝내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생각을 하면 가슴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잠잠히 기라앉아 있던 슬픔과 아쉬움이 하염없이 솟구쳐오른다.
-- <내 사랑 백석 /김자야 에세이> (문학동네, 1996) 에서
자야子夜
김영한이 창작과 비평사에 기증한 2억 원을 기금으로 1997년 10월에 '백석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백석이 분단 이후에 발표한 시의 의미
이승하
백석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쓸쓸해진다. 처연해지고, 서글퍼지고, 슬퍼진다. 왁자지껄한 잔칫집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시절 북방 오지의 궁핍함이 느껴져 처연해진다. 여승이 된 이와 북관 계집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인생이란 것이 뭔지, 문득 서글퍼진다. 남신의주 유동의 어느 목수네 집에서 손깍지베개를 하고 누워 있는 백석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그런데 그의 시편 가운데 가장 큰 쓸쓸함을 안겨주는 것은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후에 북한에서 쓴 10여 편의 시다. 『사슴』의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읽는 것 자체가 가슴 아프기 때문에 1988년 해금 조치 이후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백석론 가운데 1959~61년에 『조선문학』에 발표된 시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이 논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온전한 백석론을 쓰고자 할 때, 분단 이후의 백석 시를 논외로 쳐서는 안 된다. 이는 일제 강점기 말의 시 태반을 ‘암흑기의 시’ 혹은 ‘친일시’로 간주하여 논외로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연구자의 직무유기다. 시인의 고뇌를 생각하지 않고, 친일의 논리를 따지지 않고, 작품의 문학성을 논하지 않고 일괄하여 ‘구더기’ 취급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이다. ‘백석 대표시 해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간행된 고형진의 『백석 시 바로 읽기』(2006)와 ‘백석 시 전편 해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간행된 이숭원의 『백석을 만나다』(2008)는 모두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에서 끝난다. 이러면 독자들은 이 시가 백석의 마지막 작품인 줄 알게 된다. 그렇지 않다. 백석은 그 작품 발표 후에도 적지 않은 시를 썼다. 일반 독자들은 잘 모르는, 분단 이후에 북한에서 쓴 백석의 시에 대해서도 이제는 논의를 해야 한다. 설사 이 행위가 백석이 쌓아올린 높다란 탑을 금가게 하는 일이 될지라도 온전한 백석론 작성을 위해서는 분단 이후의 시가 제외되지 말아야 한다.
1996년에 발간된 정효구의 한국현대시인연구 제14권 『백석』편에는 작품연보가 부록으로 나와 있다. 거기에는 북한에서 간행되는 문예지 『조선문학』 142호에 5편이, 145호에 2편이, 151호에 2편이, 172호에 3편이 발표되었다고 제목까지 나와 있지만 작품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조선문학』은 142호가 1959년 6월에, 145호가 같은 해 9월에 나왔다. 151호가 1960년 3월에, 172호가 다음해 12월에 나왔다. 즉, 백석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는 작품 발표를 하고 있었다. 김재용은 1997년에 초판 간행한 『백석전집』의 증보판을 2003년에 내면서 제2부 ‘8․15 이후’에 동화시(童話詩) 12편, 시 13편, 평문 4편, 정론 3편을 발굴하여 수록하였다. 게재지면을 알 수 없는 제3부 ‘보유’편에는 시 2편, 산문 7편이 실려 있다. 2011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에는 시가 15편, 산문 4편이 추가된다. 15편은 주로 『아동문학』지에 실린 동시인데, 『새날의 노래』에 실린 시도 3편 수록되어 있다. 시 16편의 발표지면은 다음과 같다.
(중략) 『시와 표현』 2011년 가을호에 수록
1962년 10월 무렵,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백석의 창작활동이 중단된다.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작활동이 중단되는 것으로 보아 당은 백석에게서 펜을 빼앗은 것이 확실하다. 이때부터 북한에서 나오는 어느 문예지에서도 백석이라는 이름은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바로 그 전에 백석은 그 조합에서나마 목숨을 부지하자는 생각에서 공산당 혁명을 예찬하고 공산주의의 승리를 확신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일종의 아부를 한 것인데, 아무리 목숨이 소중하다고 해도 이런 시를 써야만 했던 것일까. 1995년에 사망할 때까지 백석은 시를 썼는지 안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에 발견된 시는 없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과 일본을 돌며 백석의 행적을 취재했던 소설가 송준은 백석의 미망인 리윤희와 장남 화제가 1999년 2월 중국 조선족을 통해 보내온 서신과 말년의 백석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은 김재용의 『백석전집』과 이숭원의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에도 실려 있다. 백석은 농사일을 하다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석의 두 번째 부인 리윤희 씨에 따르면 백석과는 1945년 말 북한에서 결혼했으며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백석은 월북한 시인이 아니다. 임화, 설정식, 이태준, 김남천처럼 월북했다 숙청당한 문인이 아니라 북한에서 살던 재북 시인이다. 그래서 숙청을 당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33년을 시인이 아닌 농민으로 살아간 백석― 이것 또한 분단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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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은 1930년대 문단은 물론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 매우 독특하고 유별난 존재다. 오래도록 잊혀졌던 시인인 그는 1988년 해금 이후 단박에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백석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음식을 소재로 한 시들이 많다는 점이다. 당대의 모던보이 중 하나로 손꼽히던 그가 토속적이고 평범한 음식에 관심을 가진 까닭은 무엇인지, 또 그의 시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그의 시와 그 속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통해 소개한다.
- 연사: 소래섭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1강: 백석, 근대의 갈림길에 서다
백석의 이력과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을 중심으로 백석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시인이었는지 살펴본다. 또 식민지와 서구화라는 이중의 과제 앞에 놓여 있었던 1930년대 문인들의 공통된 운명과, 그러한 운명에 맞선 백석의 행로는 어떠했는지 들여다본다. 다룰 작품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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