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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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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1000권 읽기 56
2015년 02월 11일 15시 47분  조회:1629  추천:0  작성자: 죽림

551□아메리카 시편□오세영, 문학동네 시집 21, 문학동네, 1997

  강렬한 체험이 시의 주제가 되면 표현은 2선으로 후퇴한다. 그 체험의 내용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경우는 미국 체험이 시의 주제이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한 공간에서 얻은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해 시들이 혹사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시가 간결하면서도 내용을 전달하기 좋은 방향으로 초점이 움직이고 있다. 내용이 시를 이끌고 가는데도 그나마 늘어지지 않는 것은 간결하게 주제만을 취할 줄 아는 시인의 안목 때문이다. 수필로 써야 할 내용을 시로 씀으로 해서 초래된 희생이 적지 않다.★★☆☆☆[4337. 5. 25.]

 

552□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이윤학, 문학동네 시집 22, 문학동네, 1997

  냉정한 관찰과 인식의 승리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이미지를 처리하는 재주는 오랜 숙련 끝에 나오는 것이고,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은 오랜 사색의 끝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의 시인은 남들이 갖추기 힘든 두 가지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아쉬운 것은 인식은 그 자체로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방향을 갖지 않는 인식은 말장난으로 전락하기 쉬운데 그런 유혹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것은 인식과 의식의 방향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 시집의 인식도 그 방향성이 보이지만, 그것은 이미 있는 어떤 아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반의 성공에 머무르고 만다. 9부 능선에서 되돌아오고서 등산했다는 소리를 한다면 어쩐지 우습지 않겠는가?  시에서 9부 능선은 때로 아예 안 올라간 것과 같은 때가 있는 법이다. 한자는 옥에 티다. 시가 옥새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면 <璽印寺>라고 쓸 이유가 없다.★★★☆☆[4337. 5. 25.]

 

553□시간의 그물□이재무, 문학동네 시집 23, 문학동네, 1997

  자신이 발견한 참신한 이미지가 아까운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애써 찾았다고 거기에 집착하여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으면 이미지는 마치 푸대와도 같아서 찢어지기도 한다. 찢어질 정도는 아니지만 내용물이 너무 많아서 툭툭 불거지거나 조금씩 비지기 시작하는 그런 단계에 시들이 와있다. 시들이 짧고 선명한 것은 그런 탓이다.

  이렇듯 선명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너무 선명하면 울림이 없는 법이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기 힘든 것처럼. 그리고 내용이 거의 과거에 집중되어 있어서 정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현재를 노래할 때도 반드시 과거의 우울한 체험과 연결되어있어 그 정체감을 더한다. 이 정체감이 꼭 나이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4337. 5. 25.]

 

554□게임 테이블□윤효, 문학동네 시집 24, 문학동네, 1997

  이런 시집은 읽기가 부담스럽다. 개인의 체험과 시에서 묘사되는 사회의 실상이 어지럽게 뒤섞여 혼돈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 쪽으로 주제가 집중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내면을 노래하려는 것인지 사회와 문명의 질곡을 노래하고자 하는 것인지 언뜻 잡히지 않는다. 그것을 아울러 노래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미지들은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미지는 어떤 전체를 노래하기 위해 움직이는데, 곳곳에서 개인의 체험과 삶에 대한 결론을 증명하는 데 바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절실할 때가 많다. 그리고 시의 설정 상황과 구도가 복잡하고 규모가 큰 편이다. 이것은 시인이 무언가 큰 세계를 노래할 자질이 충분히 갖추어졌다는 점에서 큰 장점으로 보인다. 당연히 시는 복잡한 모양을 띠는데, 그 복잡성이 감당할 수 있는 세계가 뒤따르지 않으면 시는 허황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4337. 5. 27.]

 

555□아주 오래된 동네□이명찬, 문학동네 시집 26, 문학동네, 1997

  시가 군더더기 없이 아주 단단하다. 이것은 주제가 시를 이끌어가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현란한 이미지가 만드는 잔재미는 없다. 이 경우에는 주제가 시대의 문제 혹은 개인의 문제를 얼마만큼 많이 담아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라는 괴물의 손위에 답을 올려놓게 된다. 하지만 자괴감은 자신을 돌아보는 명징한 계기이기는 하지만, 전망의 부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쓰는 자도 읽는 자도 괴롭다.★★☆☆☆[4337. 5. 27.]

 

556□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정우영, 문학동네 시집 28, 문학동네, 1998

  실천을 지향하는 시들은 시인의 인식이 건드릴 수 있는 공감의 영역이 두터울수록 감동을 준다. 그런데 이미 자명한 사실인데도 독자가 거기에 대해 감동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 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 시인을 포함하여 그런 관행을 만든 세력과 그 세력이 노래했던 역사를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만들어버린 어떤 힘들의 합작이다. 그렇다고 하여 변화된 세계 속에서 그런 관행 속에 그대로 앉아있는 사람을 탓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많은 오류를 갖고 있다. 그러한 오류를 공격하는 일이 더 이상 감동의 영역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공격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변화된 어떤 감각 속에서 새로운 타격법을 찾는 것이 좌절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갈수록 더할 것이다.★★☆☆☆[4337. 5. 27.]

 

557□강릉, 프라하, 함흥□이홍섭, 문학동네 시집 29, 문학동네, 1998

  군더더기를 남기지 않고 이미지로 말하는 방법을 잘 터득한 시인이다. 주어진 상을 최대한 요약하여 그 뒤의 세계를 비추는 능력을 갖추었다. 다만,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미지를 마련하는 것은, 나의 결론이 나왔더라도 그것을 확정하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드러내주기만 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일이다. 무엇이든 결론을 먼저 맺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성급한 결론은 오류로 가는 지름길이다.★★★☆☆[4337. 5. 27.]

 

558□천국의 난민□윤의섭, 문학동네 시집 49, 문학동네, 2000

  시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현상에서 자신만의 상상이 빚은 광경을 보고 그것을 아닌 척하고 능청스럽게 묘사해버리면 거기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상상력의 빛깔이 나타난다. 그러한 상상력에 자신을 갖기까지는 꽤 오랜 숙련이 필요하다.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법이 상상력이어서 다른 어떤 시들보다도 시간에 대한 고민을 한 흔적이 많다. 인간은 결국 시간 속에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 같지만, 그 시간의 색깔을 자신의 기억과 상상력으로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평범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다만, 그런 것들이 미리 설정된 단순한 결론을 향해 가거나, 그런 상상력에만 재미를 느껴서 진지성이 결여되면 치기가 되기 쉽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듯하다. 그런 치기가 세상을 초월한 듯한 태도로 비약하면 그때는 역겨워진다. 그러므로 계속된 긴장이 필요한 세계이다. 한자는 뜻하지 않은 치기로 작동하기 쉽다.★★★☆☆[4337. 5. 28.]

 

559□개리 카를 들으며□박몽구, 문학동네 시집 52, 문학동네, 2001

  무언가 강한 주제를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시 전체를 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시에서 이미지들이 말에 떠다밀려 표류하고 있다.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기 일쑤고, 자신만의 주장에 취하기 쉽다. 말이 시의 전면으로 나서면 이미지는 그 말을 위해서 동원된 일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때 이미지는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말의 광채 뒤에 가려있기 때문에 대부분 생기를 잃는다. 주제가 이렇게 강할 경우에는 이미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냥 말로 직접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이 시집은 말과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고 있어서 이 둘을 갈라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4337. 5. 28.]

 

560□피보다 붉은 오후□조창환, 문학동네 시집 55, 문학동네, 2001

  말을 최대한 아끼고 묘사로 말을 대신하려고 하는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났고, 이런 태도는 시집 전체에 일관되고 있어서 이미 시인의 창작방법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묘사는 단순한 묘사로 그쳐서는 안 되고, 거기에 감정이나 의미가 말없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앞부분에서는 많은 시들이 단순히 묘사로 그치는 수가 많고 뒷부분에서는 묘사를 참지 못하여 말을 해버리는 수가 많았다. 이 점은 시집 전체로 볼 때 큰 결점이다.

  묘사의 시는 선택되는 낱말들이 시인의 의식을 반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낱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해서 독자의 시선이 그 말을 따라가면서 느낌이 함께 일어나도록 배치해야 한다. 내가 본 것이 신기하다고 거기에 집착하면 그 이미지는 어떤 의미나 느낌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가지를 못하고 이미지나 묘사 그 자체로 남고 만다. 그런 곳들이 많다. 한자는 불필요한 이미지이다.★★☆☆☆[4337.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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