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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운론 1
-‘하이퍼 시 14인집’(시문학 2010.11)을 중심으로
문덕수 (시인, 예술원 회원)
1.
심상운(沈相運)은 학업(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을 마친 후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1974). 대학 시절의 친구들인 신세훈, 배정웅과의 3인 시집인 <강과 바람과 산>(한겨레, 1978),<고향산천>(시문학사, 1981), <당신 또는 파란 풀잎>(시문학사, 2002)을 상재했는데, 초기 작품에는 역사의식이 담긴 관념이 짙은 편이었지만, 모더니즘의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새로운 전위시 운동에 눈 뜬 때는 2006년 무렵인 것 같다. 사실상 하이퍼 시 운동의 우리시단의 최초의 시론집으로 볼 수 있는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푸른사상, 2010)의 서문에 의하면, 오남구 주도의 <시류(時流)>의 동인지의 글 「디지털리즘」과 문덕수의 「사실, 생명, 현장」 등의 글에서 조금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 심상운은 하이퍼시 운동의 자리를 잡았다.
심상운(沈相運)의 초기시에는 “백두산이 보고 싶은 날은 술을 마신다⁄아무도 모르게 사발 가득⁄천지 맑은 물 떠올리며 혼자 마신다”(「고향산천 Ⅰ」)는 대목이 보인다. 또, ‘풀’을 보고 “낫질과 삽질⁄대학살이 지나간 뒤에도⁄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풀」)는 대목도 있다. 백두산 천지의 물을 술처럼(그는 술을 좋아하지만 폭주는 하지 않는다) 떠마시고 싶은 때가 있고, 지금까지 자신이 겪고 살아남은, 끔찍한 대학살의 지난 역사를 회상할 때도 있다. 이것은 모두 관념이다.
탈관념(脫觀念)을 가장 주창하는 그의 시에도 초기에는 이와 같이 벗어나야 할 관념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다른 시인의 경우도 대부분 그렇다) 이런 시에도 천지의 물을 “떠올리며 혼자 마신다”는 대목이 있고, 대학살의 역사를 회상하는 지난 현실과의 떨어진 “회상의 공간(거리)”이 있다. “천지의 물”이나 “학살의 역사공간”은 현재 실재하지 않는 시점에서 현실화 할 수 없고, 따라서 하이퍼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여기서 최근의 심상운의 하이퍼의 실험의 씨가 이미 그의 초기시에 배태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
인기척 없는 빈 집
금간 흙벽엔
금실같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잡풀 돋아난 마당 그늘진 습지에선
지렁이가 배를 깔고 누워서 꿈틀거리고
배 터진 베개, 부서진 거울조각
누렇게 빛바랜 신문지와 달력 종이들이
제멋대로 널려 있는 마루 아래 양지바른 구석엔
짹 짹 짹 짹
귀를 맑게 씻어주는 새들의 소리
헌 군화(軍靴) 한짝 속에 둥지를 튼 산새 가족
어미를 기다리고 있는지
벌건 몸털 보송보송한 새끼들이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 거린다
-「햇빛 속의 빈집」(<詩現場>제4호, 2008. 11)
2.
위의 시는 심상운이 하이퍼 시 운동을 시작할 무렵 전후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과 함께 발표한 「길」(<詩現場>4호, 2008. 11)에는 “길이 1cm쯤 될까 말까한⁄배추벌레 한 마리가 ”(4연)와, “마추피추의 무너진 벽돌 계단 위에⁄노란 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다”(5연)가 한 작품 속에서 연 단위로 대응하여 구성되어 있다. 이 시는 이 무렵 바로 하이퍼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말해준다. 참고로, 하이퍼 이외의 그의 시 몇 가지 특징을 요약해 보자.
첫째, 대상의 실재성이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사물의 정확한 이미지 조형을 중시했다.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리”라는 주소는 이 시의 대상의 지리적 위치가 실재임을 증거한다. 둘째, 시의 대상이 상상세계가 아니라 현실적 존재의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햇빛 속의 빈 집”은 비현실적 가공(假空)의 이미지가 아니라 현실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제시한다. 셋째, 이 시에는 빈 집이 겪은 어떤 역사성도 보인다. 베개, 거울조각, 신문지, 달력종이, 마루 아래의 사물들 등은 이 집의 생활역사의 관념들 자취다. 최근에는 페가가 늘고 있다. 따라서 하이퍼시가 역사주의를 배제하지 않음도, 이 시는 암시하고 있다. 넷째, 이 시의 각 연 단위로 배열된 대상은 이 시인이 추구하는 하이퍼성의 특징을 암시한다. 햇빛 속의 빈 집이라고 제목을 확정한 윤곽 속에 편입될 수 있는 각 연의 이미지들은, 그렇게 하여 한 작품으로서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으나, 또 한편 코드가 같은 모듈(module)처럼 독립한 이미지의 구조임도 암시한다.
3.
시 「햇빛 속의 빈 집」이 지닌, 앞서 열거한 둘째 특질을 좀 더 설명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 특질이란 ‘현실적 가능성’이다. 하이퍼 성의 중심 특질로서 ‘상상적 가능’과 대응되는 개념은 바로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하이퍼의 논의에서 특히 중요시 되는 키워드다. 상상과 현실은 하이퍼와 하이퍼 아닌 세계와의 경계선이 된다.
길이 1cm쯤 될까 말까한
배추 벌레 한 마리가
퍼런 배추 잎 위로
배멀이하며 올라가고 있다……(1, 2연)
>
마추피추의 무너진 벽돌 계단 위에
노란 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다(6연, 종연)
—「길」에서
1연, 2연이 갖는 ‘현실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종연(6연)에 있다. 6연은 스페인이 침공하기 이전의, 마추피추(Machu Picchu) 성새(城塞)의 역사를 담고 있다. 배추벌레에 대한 체험도 한 시간 전인지, 하루 전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어쨌든 과거의 경험이고, 마추피추 성새의 역사는 직접 관광한 것인지 책에서 읽은 것인지, 어쨌든 배추벌레의 체험보다 훨씬 이전의 일인 듯하다. 여기서 시의 ‘이미지’란 “현전(現前)하는 실재성(實在性)이 아니라 지나간 과거의 심적(心的)인 이미지, 즉 부재(不在)의 대상에 대한 언어적 상상적 대리물”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르트르(1905~1980)의 견해다.
사르트르는 지각(知覺)과 상상(想像)을 구별해서 본다. 일반적으로, 지각은 감각기관에의 자극을 통하여 얻게 된 정보를 토대로 외계의 대상의 성질․형태․관계 및 신체 내부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작용이라고 하고, 상상은 현전의 지각에 나타나지 않는 부재의 사물을 마음에 떠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눈앞에 있는 장미를 육안(肉眼)으로 볼 때 그 장미를 지각한다고 할 수 있지만, 하루 쯤(또는 몇 시간 쯤) 지나거나 눈을 감고 그 장미를 마음속에 떠올려 지각할 때 ‘상상’이라고 한다. 도대체 현전(現前)의 지각이나 현전의 실재라고 할 때, 그 현전은 육안으로 관찰이 끝난 때부터 몇 분 몇 초 동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물을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보려고 눈을 뜨나 그 사물이 부재일 때의 사이의 시간은 얼마인가 하는 문제는 물리학만의 영역일까.
그런데 앞에 든 시에서 우리가 ‘상상’으로 간주한 “퍼런 배추 잎 위로⁄배밀이하여 올라가고 있다”의 대목을 보면 감각기관과는 관계없는 상상인 이 대목도 감각적임을 알 수 있다. 즉 상상 속에는 감각적 부분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퍼런 배추 잎”을 시각으로 보고 “배밀이하여 올라가고 있다”는 촉각 또는 운동감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언급은 상상에도 감각 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image와 imagination이 같은 어원이라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4.
심상운 시에서 사물의 객관적 묘사 즉 사생(寫生)을 볼 수 있다. 사물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실재하는 것 같은 생동감을 준다면, 이는 실재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하이퍼시와는 거리가 멀다. “말(馬)이 하늘을 날아간다”든지, “삼각형(三角形)이 분노의 불을 뿜고 있다”와 같은 하이퍼적 시행에는 현실성이 없고, 현실과 비교해서 보면 오히려 허위성(虛僞性)이 두드러진다. 하이퍼적 기호시에는 이러한 허구나 허상(虛像)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이런 점에서 하이퍼성은 진리나 진실 탐구의 역효(逆効)를 강조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우리가 하이퍼 시를 긍정하고 현대시의 전위적 실험을 긍정하는 이유는, 하이퍼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떠받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이퍼와 실재(實在)를 대비하고, 그 역설을 강조하며, 그러한 파라독스를 통해서 진실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기호는 거짓말하는 능력 외에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있다. 기호는 진실과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이중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기호는 저주이자 축복이다. 기호가 갖는 이 역설(paradox)은 중요한 이원론적 진리(binarism)를 내포하고 있다.”(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2007, 37쪽) 이런 점을 이해한다면, 심상운이 사물의 사생의 정확성을 중시하는 그 이유도 진실 인식의 한 방법임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사생이 느슨해져 구조의 견고성을 도리어 조금 연약하게 만드는 불가피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이 점은 심상운시의 약점이다) 사생 부분을 늘어뜨려 편입하는 것은 하이퍼시가 갖는 ‘역설’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런데, 배추벌레의 배밀이와 마추피추 성새는 연(聯)을 달리하여 대응하고 있으나,(이것을 모듈이니 리좀이니 말하나 이러한 단위는 센텐스와 센텐스 사이에도 대응할 수 있고, 한 센텐스 안에서 주부와 술부로서도 대응하여, 구성될 수 있다. ) 이와 같이 시의 하이퍼 성은 작품의 요소요소에서 잠복하여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상상’의 두 다른 세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면서 공존한다.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꿈 속에서 가지고 나온 듯한 빨간 공을 길바닥에 굴리며 놀고 있다. 공은 반짝이며 굴러가고 아이는 공을 쫓아 소리지르며 뛰어간다.
……………………
긴 사다리를 허공에 설치하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TV 속 사내가 당신을 유혹한다고요? 그래서 당신도 파란 옷의 아이처럼 빌딩과 빌딩을 휙휙 건너뛰고 싶을 때가 있다고요? 오늘도 꿈 속에서 본 “빨간 공을 찾아서 뛰어다니다가 빌딩 옥상 구석에 누워서 10월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요?………
-「공과 아이」(<시문학> 2010. 11)에서
이 작품과 함께 발표한 「구멍 탐색」(<시문학> 2010. 11)도 비슷한 구조의 하이퍼시다. “꿈 속에서 가지고 나온 듯한 빨간 공”이나 “꿈 속에서 본 빨간 공” 등, ‘공’이라는 이미지가 1연과 2연에 배치되어 연결하고 있으나, 1연은 천진난만한 공놀이 장면이고, 2연은 순수한 인간의 정서들이 점철(點綴)되어 있어서, 두 연 사이엔 그다지 먼 거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이퍼시로서는 좀 어떨까 하는 기우도 없지 않다. 배추벌레의 배밀이와 마추피추 사이의 거리가 훨씬 하이퍼성을 더 강화하지 않는가 생각된다.(이 거리는 하이퍼 시의 결정적 열쇠가 된다.)
이 작품과 함께 발표한 「구멍 탐색」은 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쓰러진 나무의 구멍 속에서 떠오른 물방울(1연), 맥주 마시기의 황홀한 탐색과 존재의 근원인 구멍(2연), 산의 토굴인 구멍 속의 탐험(3연), 연통청소와 아내에의 메시지(4연)로 구성된 이 시의 각 연은, ‘구멍’이라는 상징 이미지가 연결과 통일감을 주는 열쇠 역할을 하고 있다.(물론 이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각 연의 단위끼리가 멀고 그 사이에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사이의 연결을 암시하는 어떤 이미지 같은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런 필요성에 몰려 어떤 사물 이미지를 내세우면 도리어 연 단위와 연 단위 사이의 긴장이나 이질적 적대적 갈등이나 통합감을 줄이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이러한 고리 역할을 하는 이미지가 강화되면 하이퍼시의 실험은 효과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어쨌든, 이러한 단위를 module이라고도 하고 rhizome이라고도 하는 이가 있으나 모두 이러한 단위(unite)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단위는 연, 센텐스 등에 두루 보인다.)
그런데 배추벌레의 배밀이와 마추피추의 병치에서 보는 이 하이퍼성의 극대화 조치는 다른 하이퍼성을 지향하는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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