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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시의 항등성 배제 및 전경과 배경의 전환기법 관찰 -김해빈 시 중심으로
이오장(시인)
1.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가 무엇이냐는 의문은 많은 시인으로부터 듣게 되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만큼 하이퍼시가 시인들의 관심과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이며 시문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새로운 시 연구에 있어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에 비하여 요즘 일부 젊은 시인들 주축으로 언어의 형식적인 서술과 비틀린 이미지의 조합으로 독자들이 외면하게 하는 부류가 있는데 바로 난해시파라고 불리는 시인들이다. 하이퍼시는 그러한 난해시 와는 확실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에 비하여 난해시는 관념과 허구를 결합하여 이미지의 이탈을 은연중 유도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미지 이탈이 목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서 발생한 상상은 독자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본질을 이탈해 언어의 폭력으로까지 번지기 때문이다.
하이퍼시를 처음 도입하고 하이퍼시의 새로운 연구에 적극적인 문덕수 시인은 하이퍼시를 한마디로 압축하여 설명한다.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룬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결된다." 즉 하이퍼시는 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을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물만을 가지고 시를 쓴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사물에 대하여 새로운 상상으로 몰입되기에는 자신만이 가진 사물의 본질적 이해가 필요하다.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감정적 변화의 그림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는 사물에서 얻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며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여 독자와 공유한다. 한마디로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고 이미지의 연상을 다른 사물과 대비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 모은다. 그것이 개개인의 능력이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빠트리기 쉬운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어 새롭고 진정한 하이퍼시가 완성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껴야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하이퍼시가 되는가, 시인과 독자가 같은 감동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문학의 발전만큼 독자들도 발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시를 써도 그 순간은 자신이 감동하게 되고 완성을 이뤘을 때는 독자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론에 맞는 하이퍼시를 쓰려면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2. 하이퍼와 항등성에 대하여
어떠한 대상을 보든 인간의 두뇌는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는 자신만이 가진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눈과 대상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00m 앞의 사물의 크기와100m 높이에서의 사물의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 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되지만, 수평으로 볼 때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등성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둥근 접시를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말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의 심리학적 구성 원리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른다면 시의 구성이 되지 않고 사물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져 시의 목적을 잃게 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양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모양에서 얻은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소나무를 봤을 때 소나무의 생태와 자연과의 동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눈으로 본 그대로의 모습을 그때의 상황과 연계하여 거기서 파생된 상상을 이어가는 것이 하이퍼시다. 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실제로 우리는 시를 그렇게 써왔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는 대상의 본질 보다는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멀리 떨어진 큰 고목이 작은 묘목으로 보일 수도 있는 허상도 그릴 수 있고, 위에서 보는 크기와 거리를 두고 보는 크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활은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은 대부분 항등성을 잊고 산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쓸 때 그러한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감동을 앞세워 본능적인 감각으로 씨를 쓰기 때문이다.이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은 양쪽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눈이 하나일 때만 가능했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것은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고 눈을 두뇌로부터 단절시켜 기계적인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시인들에서 먼저 나타났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기 전부터 시에서는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데로 느끼는 데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의 주류는 본질적 세상의 이상을 그려나가 인류는 객관적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람들은 기계문명에 완전히 길들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마트폰.컴퓨터 등의 화면 세상에 빠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카메라가 잡은 세상만을 믿고 산다. 본질의 통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르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하이퍼시는 시작됐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무시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그림 위에 새로운 상상을 결합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카메라가 잡은 객관적 정확성에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세 번째의 눈, 다시 말해 본능적인 감성이 있어야 이미지의 연속성으로 하이퍼시가 이어지는 것이다.
3.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의 전환
시를 쓴다는 것은 창조적 행위다. 시인은 창조자로서의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 창조적 사고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인 월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시의 대상인 사물을 대했을 때 확연한 이미지가 이어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면 불현듯 어떠한 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상상의 존재란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의 각 부분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 즉 게슈탈트(독일어로써 심리현상은 어떠한 요소의 가산적 총화로는 설명할 수 없고 전체성을 갖는 동시에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성질)로 파악한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인물만 뚜렷하게 나오게 하는 아웃포커싱과 같은 원리다. 시에서 이와 같은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물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이렇게 게슈탈트의 끊임없는 형성과 해소, 이 과정이 사물의 서사 즉 이야기되는 것이고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묘미이며 진정한 하이퍼이다.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못하여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을 바꾸지 못하고 고정된 존재만 바라본다면 하이퍼의 구성이 한정되게 되어 형성이 뒤엉켜버리는 데 있다. 여기서 하이퍼시에서 잃게 되는 감동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이퍼시의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 기존의 고정 관념을 확실하게 버리는 것이다. 같은 하이퍼시에서도 똑같은 단어가 중복될 수 있는데 이것이 또 다른 관념이 되는 것이므로 유행 같은 언어의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둘째. 사물의 움직임과 동화된 주위 환경을 봐야 한다. 즉 새로운 사물을 찾아내어 그 움직임을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움직여 사물의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 셋째.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게슈탈트 전환이 가능해야 창조적인 발상으로 하이퍼시를 쓸 수 있다.
4. 김해빈 시에서 나타난 하이퍼시의 관찰
하이퍼시가 새로운 시문학으로 자리 잡아 시단의 큰 방향을 일으킨 후로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그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성향에 맞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그동안에 익혀왔던 사물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인들을 보면 문덕수 시인을 중심으로 심상운. 김규화. 조명제. 송시월. 안광태. 이춘하. 정연덕. 고종목. 이솔. 위상진. 김기덕. 이선. 김예태. 허순행. 김해빈 등 문단의 활동이 활발한 시인들이다. 나열된 이름에서 빠진 시인들도 상당수가 있어 새로운 시론으로 나타난 하이퍼시 운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이중 김해빈 시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이퍼시의 이론과 실제의 작품이 하이퍼답게 이해되고 부합되는 것에 대하여 관찰해보기로 한다.
김해빈은 초기 작품부터 전통 서정을 크게 벗어난 상태로 나타났다. 처음 작품집 "새에 갇히다"를 살펴본다면 그 제목부터 하이퍼 유형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 이론을 접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자신의 안목과 상상을 은연중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새에 갇힐 수는 없다. 그러나 김해빈은 스스로 새에 가두어 날개를 빌리고 새를 통하여 본 새로운 세상을 그린 것이다. 그 후의 작품집에서도 하이퍼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는 원래의 시적 감성이 일반 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감각을 타고난 듯하다.
시문학 5월호에 발표된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비 그친 자운서원 잔디마당 위로 눈알 굴리는 잠자리 떼 뇌관 푼 핵폭탄 물고 몰려간다
유럽을 평정한 히틀러 독일공군이 영국 본토를 향해 도버해협 상공을 날고 있다 우중충한 날씨에 내려다보는 도시는 무표정하고 괴링의 출격명령에 날개를 편 전투기 노선을 이탈해 런던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 *블리츠(Blitz)체험관 상공을 낮게 날고 있다
잠시 멈추었던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전투기는 급하강한다
빗금으로 치닫는 빗줄기에 야금야금 저려오는 날개 나치는 영국 상륙을 포기하고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보다 위에 있는 율곡무덤도 오만원권 오천원권 지폐도 아닌, 기념관 빛바랜 초충도에 앉은 고추잠자리
헤드라인 ‘오늘이 우리의 승전일입니다(TODAY IS V.E. DAY!)’
*블리츠Blitz 체험관: 유대인 학살 기록관과 런던 대공습 당시 일반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꾸며 놓은 곳
<고추잠자리 전문>
이 작품은 하이퍼적인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은 전형적인 하이퍼를 보여주고 있다. 고추잠자리는 평화의 상징이며 한가롭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자연의 개체이다. 누구나 비 그친 뒤에 잔디밭 상공을 바람 없이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대하면 내면에 감춰진 그 어떤 고민과 울화도 잊게 된다. 어린아이가 고추잠자리를 잡겠다고 뛰어다니는 모습에 함께 동조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평화의 상징이라 아니할 수 없는 곤충이 고추잠자리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겉모양뿐이다. 잠자리의 생태를 보면 곤충 중에서도 상위급인 포식자이다. 잠자리 유충이 물속에서 자랄 때 장구벌레 등 작은 애벌레나 심지어 개구리의 올챙이까지 잡아먹으며 사는데 애벌레의 시기를 보내며 먹는 먹이의 수효가 몇 만 마리가 된다는 학계의 발표도 있다. 또한, 땅 위에서 유충으로 지내는 명주잠자리는 일명 개미귀신이라 불리며 함정을 파 수많은 개미를 잡아먹는 포식자이다. 이것이 잠자리의 생태이며 본질이다. 사물의 본질을 보고 시를 구상하지 않고 사물의 현재 보습을 보고 시를 쓴 것이지만, 전투기와 히틀러를 잠자리에 대입시킨 것을 보면 김해빈은 사물의 본질까지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운서원은 율곡 이이의 위패를 봉안한 사원이며 율곡의 가족묘를 조성한 곳이다. 알다시피 율곡 이이는 성리학자로 알려진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또한, 평화를 지키는 데는 힘이 있어야 한다며 10만 군병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힘을 앞세운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잠자리가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는 데는 힘을 기르는 포식자의 시기가 있다는 것을 자운서원과 잠자리를 대비하여 나타낸 것으로 사물의 실체를 연결 인식하는 항등성을 벗어버리고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대비시킨다.
히틀러는 근대의 몇 안 되는 독재자의 대명사이다. 힘을 내세워 유럽과 전 세계를 점령할 목적으로 폭격기를 동원하여 이웃 나라를 폭격한다. 김해빈 시인의 상상은 사물의 현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유럽까지 날아가 히틀러의 폭격기를 불러낸다. 도버해협을 날아가는 폭격기가 자운서원 앞마당을 날고 있는 잠자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사물에서 파생된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이다. 고추잠자리는 전경으로, 자운서원은 배경으로 나타나다가 폭격기의 등장으로 자운서원이 전경이 되고 잠자리는 배경으로 물러나는 전환의 기교와 이율곡의 사당과 가족이 배경이 되어 그려지다가 다시 고추잠자리가 전경이 되는 하이퍼적인 기법은 게슈탈트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운서원의 유래와 형성. 잠자리의 생태와 실태, 히틀러의 폭격기와 폭탄의 파열음을 하나의 장면에 대비시켜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하이퍼의 퍼즐을 무리 없이 그려냈다. 사물의 과거가 현재의 평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현재 보이는 모습의 잠자리가 그대로의 움직임으로 평화를 만들어 모두가 승리한 승전 일을 만든 것으로 복합된 이미지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하이퍼에서 빠지기 쉬운 감동까지 만든 것이다.
웃음보에 헛바람 들었는지 멸치같이 깡마른 남자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시청 앞 건널목 횡간막 사이를 비집고 히죽히죽거리며 다가온다
가을걷이 끝날 무렵 볼썽사납게 조무라든 꽈리를 보았을까 소피 마려운 여자의 뒤태를 보았을까 2시간 전 언양불고기 먹고 ktx 타고 올라온 여자의 하프코트에 묻은 쇠똥 굴러가는 소리를 들은 게야
설익은 시에 짓눌려 내 흉강에 덧쌓인 말씨들이 폐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혹시 눈치챘는지 남자는 이내 뒤따라오던 스키니 차림에 킬힐 신은 여자의 꽁무니에 눈길 꽂힌다
거미줄 같은 거리를 기웃거리며 권력을 찾던 남자는 몇몇 조무래기들의 웃음과 교회 전도사로부터 받은 일회용 휴지를 주머니에 우겨넣고 도마뱀처럼 꼬리 자르고 건물 안 으로 들어 가버린다
성형외과에서 나온 얼굴 퉁퉁 부은 여자, 공터를 지나다 울타리 넘어온 축구공에 뒤 통수 맡고 미간을 찌푸리려 하자 완충지대 튤립나무에 앉았던 까치가 깔깔거리며 날아 간다
주유소 화장실에 뛰어든 여자의 스커트자락 놓지 못한 남자 여자의 핸드백 들고 휘파람 부는 듯 볼을 잔뜩 오므렸다 부풀리며 달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정지신호 무시한 채 응급처치하고 나오는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 <기흉 전문>
앞의 작품이 사물의 모양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를 엮어낸데 비하여 이 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사물화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적절히 이뤄낸 데 있다. 남녀의 생태적인 일상을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바라보고 남자의 히히낙낙 거리는 실태와 여자의 팽팽해진 감정을 하나의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하여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여기에는 남자를 전경으로 하고 그 뒤의 배경에는 여자의 감정이 언제나 받혀주는 형태로 사물의 표현보다 사람의 감정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자신의 소유라고 믿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후손 번식이라는 지대한 자연의 섭리가 남자들을 착각하게 하였을 것이다. 작품 속의 남자는 여자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을 꽂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여자는 뒤에서 살펴본다. 현시대의 새로운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으로 있는 여자의 감정 기복은 폭발 직전이다. 그런데도 남자의 눈길은 또 다른 여자의 모습에 현혹되어 뒤따라가는 실태를 보인다. 이때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자는 남자의 기본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권력과 금전을 얻기도 전에 섭리적 욕망만을 풀어내려는 남자는 여자의 표적이 된다. 대부분 여자는 표적의 남자를 향해 창을 던지는 게 아니라 다른 출구를 찾게 되고 그 출구로 성형외과를 들락거린다. 그것이 실패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남자에 대한 분노를 그렇게 푸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해빈 시인의 고민은 시작이다. 남자와 여자의 생태적인 모습을 버리고 현실에 맞는 모습을 그려야 할지. 남자의 비뚤어진 욕망의 발산을 원칙적으로 그려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 결과로 달이라는 위성을 찾았다. 해결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아 원색적인 남자의 욕망을 잡은 것이다.
기흉은 결핵성 파괴 등의 원인으로 폐의 표면에 구멍이 생겨 흉막강 안에 공기 또는 가스가 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자꾸만 헛바람이 빠져나와 남들이 보기에는 실없이 웃는 모습으로 보이는 병이다. 김해빈의 기흉은 그러한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남녀관계에서 시적 모티뷰를 찾아낸 것이지만 사물의 모습이나 움직임에서 이미지를 찾지 않고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사물화하여 원리적인 항등성을 배제하고 전경과 배경을 적절하게 전환하여 한 편의 하이퍼시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사물에서 찾은 이미지보다 쉽게 그려질 것 같아도 사람의 변화가 짐작하지 못할 이변의 연속인 것을 고려할 때 훨씬 더 어려운 작업이다.
마지막 연에서 "여자의 오줌보가 조무라 들자 주유하고 있던 남자의 자동차 바퀴에 짓눌린 꽈리 터질 듯 팽팽해진다"는 남녀의 생리적인 차이는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남녀관계는 이율배반적으로 동등하다는 항변으로 보인다.
날카롭게 솟은 뿔 동그란 눈 지그시 감은 타르보사우루스 알을 낳는다 간척지 모래 위로 퍼져가는 억새를 스쳐온 바람이 알을 날름 삼켜버린다
화성, 개미섬 기슭 따라 풀잎까지 벌떡 일어서서 조이는 팽팽한 호흡 바위를 핥아대던 기다란 혀들이 용암에 젖은 이빨, 발톱, 눈빛들이 번뜩인다
알을 깨트리며 주먹을 휘두르던 주몽이 활을 만들고 당긴 시위를 놓는다 경주로를 이탈한 말의 울부짖음 벌판을 가르는 선이 무너져 뚜렷하게 찍히는 발자국 부러진 청동검 반쪽을 주몽이 알 속에 감춘다 뺏고 빼앗기는 칼 유리가 알 속에서 청동검을 찾는다 얼었던 송화강이 녹는다
철거덕 철컥 철거덕 철컥 고개 쳐들고 들판을 달리는 점박이 또다시 커다란 알을 쏟아낸다 논바닥에 뒹구는 알 사육장 소가 침 흘리며 되새김질한다
돌알을 품고 있던 메갈로사우루스 시화방조재를 바라보며 푸른 눈 껌벅거리고 삭아버린 티라노의 하얀 숨결 솟아오르는 공단 굴뚝 안킬로사우루스의 잿빛 눈물이 하수구를 따라 흘러내린다 고삐 묶인 폐선 허리께서 삐거덕삐거덕 막대뼈 조이는 소리 몸 사르며 찢어진 풍어 깃발마다 익룡 발가락 펄럭인다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덮인 갯벌 알을 낳은 타르보사우루스 위턱을 치켜들고 슬금슬금 바닷가 암벽 속으로 사라진다 억새의 손짓을 기억하는 코리아케라톱스 알이 입 쫙쫙 벌린다 <코리아케라톱스 전문>
첫 번째 작품이 사물의 형태와 움직임을 그려 새로운 이미지의 연결을 이뤄낸 것이라면 두 번째의 작품은 사람의 심리 상태를 사물화하여 사물과 똑같은 상태로 전경과 배경을 전환하여 하이퍼적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세 번째 작품인 코리아케라톱스는 과거와 현재를 합하여 미래로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김해빈 시인의 시각과 감각이 사물과 사람의 연결된 상상의 고리를 한 차원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코리아케라톱스는 5천만 년 전 이 땅을 지배했던 공룡의 이름이다. 시화간척지가 생긴 후에 드러난 갯벌 개발 중 우연히 발견된 공룡알 화석에서 그 이름을 얻은 우리의 토속 공룡으로 그 흔적을 다 찾지 못하여 아직도 발굴 중이다. 그곳에 가면 금방이라도 공룡들이 포효하며 뛰어나올 것 같은 환상에 쌓이고 알 화석을 마주한 순간은 누구나 과거의 자연 상태를 떠올리며 현실을 잊게 만드는 곳이다. 김해빈이 본 것은 누구나 똑같이 보는 사물이다. 각자의 상상과 현재 보이는 현실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상상으로 몰입되어 각종 공룡을 만난다. 그러나 김해빈이 본 것은 남과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알을 떠올리게 되면 그 크기를 재어보고 부화될 새끼의 크기와 성장한 크기를 상상한다. 김해빈은 초기 삼국시대의 전설인 주몽을 불렀다. 건국에 필요한 힘과 힘을 받쳐줄 각종 무기와 활, 불타는 듯한 눈빛을 공룡의 힘과 대비하여 나라를 세운 주몽의 활약을 그려냈다. 거기에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떠올리고 주몽과 유리와의 관계를 설정하여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이뤄낸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돌아와 농기구인 트랙터가 뱉어내는 하얀 덩이(소를 먹이려고 볏짚을 효소와 섞어 단단하게 굴리는 일종의 싸이로 방법)를 알과 전설에 혼합하여 인간이 자연과 싸워 만든 거대한 방조제를 향해 생태파괴의 폭력을 항의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산조. 칠면초. 갈대가 뒤엉켜 펄럭이는 갯벌의 평화에서 쫓겨 가는 공룡의 마지막 장면으로 한 편의 희극과 같은 연출기법을 보여줘 하이퍼적시에서 빠트릴 수 있는 서정의 감동을 이끌어내었다. 항등성을 배제하고 사물의 모양과 움직임만으로 전경과 배경의 전환을 그려낸 것이다.
눈 쌓이는 모스크 앞에서 기도하는 무슬림들, 눈밭에 앉아 있는 낙타, 피라미드 앞 스핑크스는 미소를 잃었다. 사람들 호기심이 파라오의 역사를 뒤집어놓고 말았다
대립이 가득한 지붕을 하얗게 덮은 눈은 주도권 싸움에 뜨겁고 치열했던 여의도 십자가를 잠재울 수 있을까 <폭설 부분>
압축된 삶은 의미가 없다며 하루하루를 느슨하게 흘려보내던 여자는 접시에 채소셀러드와 과일을 듬뿍 담아 테 이블 아래 주름진 의자에 앉는다
1월을 지나 2월이 오면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젖은 쭉정이도 제 몸 부풀리며 이벤트의 계절을 또 기다리겠지
12월 어느 날 베고니아 뷔페 시인의 접시 위에 퉁퉁 불어 튼 강남콩 한 알 덩그러니 남았다 <배부른 콩 부분>
위에 부분적으로 나열한 두 편의 시에서도 김해빈의 시는 시종일관 하이퍼적인 기법을 유지하며 시의 방향을 잡아 나간다. 폭설에서 100년 만에 이집트를 덮은 눈에 사막의 피라미드는 하얗게 덥히고 스핑크스가 미소를 잃은 상황에서 군중은 자유를 외치며 혁명가를 부른다. 개인의 염원이 하나로 뭉쳐 짓눌린 자유를 찾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되찾은 자유는 폭설에 갇혀 다른 고난을 불러내는 피의 역사, 한 송이의 눈이 뭉치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보여주지만 웃음을 잃어버린 승리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다시 일으킨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의 의사당인 여의도를 등장시켜 대립과 설전이 난무한 상황을 꼬집고 그 옆에 위치한 높다란 십자가의 건물에서 일어난 분쟁을 종교적인 문제 즉 폭설로 불러낸 전환의 기법이다.
배부른 콩에서는 자유분방하고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리낌이 없는 행동을 보이는 남자와 여자를 대비시켜 인간의 추악함이 얼마나 높아야 무너질 수 있는지를 쭉정이 콩에 비유하였다. 완성된 인간은 없으나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려는 과욕에 대한 행동을 꼬집어 통통하게 영걸은 콩과 익지 않아 쭉정이가 된 콩으로 그려낸 기법은 김해빈의 특유한 하이퍼적 시의 기교다. 어느 작품에서든 사물과 사물의 연관을 찾아내고 사물의 움직임과 멈춰진 정서를 끄집어내는 김해빈의 하이퍼시에 대한 연구와 몰두는 앞으로 한 발짝 더 나갈 것이 분명하다. 이는 시의 실제가 이론을 앞질러 가기 때문이다.
5. 하이퍼시의 방향
시 자체가 원래 하이퍼라고 주장하는 시인도 있다. 일상의 용어에서 벗어나 그 위의 가상 현실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는 언제나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의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가 지금껏 사용한 관념과 묶인 상상을 벗어버리자는 하이퍼시 운동은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하이퍼시는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물에서 나온 가닥의 실을 한곳에 모아 하나의 실타래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 결코,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사물을 볼 때 이미 머릿속에 박혀있는 고정된 환경과 형태를 벗어버리고 사물마다 가진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어 하나의 특출한 이미지를 만들자는 것은 난해한 시를 쓰자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발달에 맞춰 자연적인 정서에 기계적인 정서를 도입하고 발달에 따라 변해가는 인간의 정서도 바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옳다. 하지만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의 연결을 위하여 여러 갈래의 사물이 등장하고 조합된 이미지가 매끄럽지 못하여 시적 감동이 적다는 지적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개개인이 극복하여 풀어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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